>1596306068> 자유 상황극 스레 3 :: 275

이름 없음

2021-09-13 08:11:25 - 2022-01-18 00:54:40

0 이름 없음 (wSjOpuFcMU)

2021-09-13 (모두 수고..) 08:11:25

이 상황극은 5분만에 개그로 끝날수도 있고, 또다른 장편이야기가 될수도 있습니다.(물론 그때는 다른 스레를 만들어주세요.)

아니면 다른 스레의 자캐가 쉬어가는 공간이 될수도 있습니다. 크로스 오버도 상관없습니다.

자유 상황극 스레에 오신걸 환영합니다.

1 이름 없음 (gQY8EWkymA)

2021-09-13 (모두 수고..) 17:34:28

situplay>1596243924>876

돌아서기 전, 그냥 인사치레로 했을지도 모르는 말이 조금은 그녀의 마음을 편하게 만들었다. 자신으로 인해 시간낭비가 되지 않았구나 하고. 그렇게 생각하고 보니 그녀 역시 약간의 동질감 비슷한 것이 속내 한켠에 잔잔하게 들었다. 하지만 그 뿐이다. 아무런 연고도 없는 곳으로 무작정 도망쳐 온 그녀와 친지가 그래도 살았던 곳으로 온 사내와 겹쳐보기엔 그 정도가 고작이었다. 돌아가는 길을 천천히 걸어가며 그녀는 조용히 생각했다. 내일부터는 산책 경로를 바꾸자고.

파문이 일었던 하루가 조용히 지나고 다음 날 아침이 되었을 때, 전날과 다름없는 시작에 그럼 그렇지 라며 또다시 느즈막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흐트러진 채 앉아있으니 이웃집 할머니가 마당에 물을 뿌리는지 시원한 물줄기 소리가 살짝 연 창문 사이로 들려온다. 잠시 그 소리를 들으며 잠의 여운을 물리치고, 느릿하게 움직여 남들보다 늦은 하루를 보내기 시작했다. 씻고, 밥을 먹고, 약간의 일을 하고. 그러고나니 다시 산책을 나갈 시간이 되었다. 챗바퀴처럼 일정하게 돌아가는 하루. 그래도 오늘은 다른 길을 산책할테니 조금은 다른 기분이 들려나 하며 집을 나섰을 때였다.

"...네, 네..? 제가요..?"

문 밖에는 누가 이미 있었는데, 전날 반찬을 가져다 준 이웃집 할머니였다. 어디 나가시는지 외출할 차림을 한 이웃집 할머니가 찬합을 들고와 그 집 사내에게 가져다줬으면 한다고 부탁해왔다. 원래는 본인이 가시려고 했지만 급히 나가봐야 할 일이 생겼다며, 산책 가는 길에 잠깐 들러주지 않겠느냐고. 당황해 어물어물하며 오늘은 그쪽으로 안 갈거라고 말하려던 그녀는 여기 온 뒤로 살뜰히 챙겨주신 것에 보답은 해야 하지 않겠는가 싶었다. 그냥 가져다 주기만 하는 거면 어렵지 않으니까. 어제랑 다를 거 없으니까. 그렇게 속으로 자기합리화를 한 그녀가 작게 고개를 끄덕이자 할머니는 매우 기뻐하시며 그녀에게 찬합을 맡기고 가셨다. 저멀리 가시는 할머니를 잠시 바라보다가, 그녀도 그녀의 일을 위해 걸음을 옮겼다. 전날과 같은 산책로였다.

가지런히 모은 손에 찬합이 든 종이봉투를 들고 걷다보니 어느새 사내의 집 근처까지 다다라있었다. 늘 이런 산책이었기에 별 생각이 없었는데, 오늘은 용건이 있어서 그런지 조금 느낌이 달랐다. 불안, 비슷한 무언가일까. 괜한 생각은 말자며 고개를 작게 젓곤 앞을 보며 천천히 걸어갔다. 길 너머 보이는 그 집을 보고 오늘도 사내가 나와있지는 않을까 싶어 집 쪽을 바라보며 가까이 가고 있었다. 밖에 있다면 얼른 전해주고 가야지, 하고 생각하면서.

/터져있어서 당황스러웠는데 새로 세워져있었네. 일단 이어둘게.

2 이름 없음 (wSjOpuFcMU)

2021-09-13 (모두 수고..) 19:22:38

>>1

하루동안 열심히 집을 청소하고 정돈해서 겨우 사람 사는 분위기로 만들어놓은 사내는 많이 지쳤는지 마루에 누워있었다. 집 안에 누워있어도 되겠지만 그래도 여기까지 왔으니 집 안보다는 마루가 시원하고 경치 보기도 좋겠지 싶어 한 시간 이상 자세를 유지하며 사내는 근처 경치를 구경했다. 도시에서는 전혀 볼 수 없는 푸른 풍경이 절로 눈을 편안하게 했고, 시끄러운 소음이 들리지 않는 한적한 분위기는 마음을 편안하게 했다.

솔솔 불어오는 바람은 몸에 쌓여있는 피로를 풀게 하기 딱 좋았고, 시골 특유의 맑은 공기는 지친 정신을 맑게 했다. 조금만 더 이대로 쉬었다가 방 안에 만들어둔 아틀리에 정리를 마저해야겠다고 생각하는 찰나 발소리가 들려왔다. 그러고 보니 어제 집안 정리를 한다고 피곤해서 바로 잠들어버린 바람에 마을 사람들에게 인사를 전혀 못 했다는 것을 떠올린 사내는 오늘이야말로 꼭 마을을 돌아다니며 제대로 인사해야겠다고 다짐하며 누운 몸을 일으켜세워 마루에 똑바로 앉았다.

곧 보이는 얼굴은 어제 집 앞에서 만난 여성의 모습이었다. 옆집이 아니고서야 이틀 연속 얼굴을 마주하는 것은 도시에선 꽤 힘든 일이었던만큼 사내는 괜히 신기함을 느끼며 벗어둔 신발을 신고 기지개를 쭈욱 켜며 마루에서 내려왔다.

"안녕하세요. 이렇게 또 보네요. 오늘도 산책 가는 길이세요?"

자신이 앞으로 살 집의 앞 길이 누군가의 산책길이라는 것은 역시 신기한 일이라고 생각하며 사내는 미소를 작게 짓고 그녀를 똑바로 바라봤다. 허나 남의 산책길을 방해하는 것은 역시 미안한 일이었기에 그녀가 얼마든지 지나갈 수 있도록 몸을 살며시 옆으로 치워 그녀가 앞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했다.

/나도 아침에 보고 깜짝 놀랐지 뭐야. 나 역시 이어둘게!

3 이름 없음 (gQY8EWkymA)

2021-09-13 (모두 수고..) 21:19:10

>>2

천천히, 조금씩 가까워지는 집은 어제보다 좀더 정돈되어보였다. 극적인 변화는 아니지만 전날과의 차이 정도는 그녀의 눈에도 보였다. 집 안도 정리하느라 바빴을텐데, 라고 생각하며 가던 중에 누가 마루에서 일어나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흩날리는 회색머리가 인상적이라 잠시 눈길을 빼앗겼다가 사내의 말에 퍼뜩 정신을 차렸다.

"앗, 아, 네, 안녕하세요..."

약간의 놀람을 담은 자색 눈동자가 사내를 한번 보고 슬쩍 옆으로 피했다. 시선을 마주하는 것이 부담스러운 것처럼. 종이봉투의 끈을 쥔 손도 알게 모르게 힘이 들어가, 안 그래도 흰 손의 손등이 투명해질 것만 같다. 어영부영 인사를 하고 잠시 입을 다물고 있던 그녀는 조금 늦게 사내의 물음에 대답을 했다.

"저, 오늘...은, 그쪽, 한테, 용건이 있어서요..."

산책이 맞긴 했지만 용건이 아니라면 이 길로 오지 않았을테니까. 그러니 오늘은 사내에게 용건이 있어서 온 거라 말하고 들고 온 종이봉투를 사내에게 내밀었다. 종이봉투 안에는 딱 봐도 직접 만든 건가 싶은 5단짜리 검은색 찬합과 작은 보온병이 가지런하게 들어있었다. 사내에게 그것을 받으라는 듯 든 채로 마저 얘기했다.

"옆집, 사시는 할머니가, 여기 사시던 분하고... 친분이 있었어서.. 그래서 그쪽 주려고 챙긴건데, 일이 생기시는, 바람에, 제가..대신..."

띄엄띄엄에 말끝을 흐리긴 했지만, 할머니에게 들었던 말과 왜 그녀가 이걸 가져왔는지 정도는 이해가 될 만큼은 얘기를 하고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도 어찌저찌 말은 했다는 약간의 안도감에서 나온 한숨이랄까. 이제 사내가 이걸 받기만 하면 그녀의 용건은 끝나고 각자 집으로 돌아가면 그만일거라 생각했다. 그리고 내일부터는 산책로를 바꾸면 될 거라고.

4 이름 없음 (wSjOpuFcMU)

2021-09-13 (모두 수고..) 21:52:17

>>3

자신에게 용건이 있다는 말에 사내는 단 하루만에 무슨 용건이 생겼을지 의문을 품었다. 눈을 피하는 그녀의 모습에 뭔가 안 좋은 말이라도 하려고 온 것일까 싶어 약간의 불안감이 사내의 마음을 채웠다. 아무리 그래도 이사 온지 이제 하루가 지났는데 누군가에게 부정적인 느낌으로 있는 것은 사내로서는 원하지 않는 일이었다. 허나 그 또한 자신의 추측일 뿐이었기에 우선 용건이 무엇인지에 대해 사내는 생각을 돌렸다.

손에 쥐고 있는 종이봉투를 내미는 그녀의 행동에 사내는 얼떨결에 종이봉투를 받았다. 안을 들여다보니 검은색 찬합과 작은 보온병이 들어있었고 자연히 사내는 왜 이것을 자신에게? 라는 표정을 지으면서 다시 그녀를 바라봤다. 일단 확실한건 이 종이봉투 안에 들어있는 내용물이 자신에게 찾아온 용건임은 분명하다고 사내는 생각했다.

"옆집 사는 할머니요? 이걸 저에게?"

자신의 할머니 혹은 할아버지와 친분이 있다는 말에 사내는 어떤 사람일지를 떠올렸다. 그러고 보니 어린 시절, 시골집에 왔을 때 여러 어르신들이 할머니와 할아버지를 찾아왔던 것 같은데. 그 중 한 분이실까? 정말로 하루빨리 인사를 해야겠다고 생각하며 사내는 미소지으며 우선 종이가방을 내려놓았다.

"아직 제대로 인사도 못 드렸는데 이렇게 뭔가를 주는 어르신이 계실 줄은 몰랐어요. 꼭 찾아가서 감사 인사를 해야겠네요. 괜찮다면 어느 곳에 사는 분인지 물어도 될까요? 아. 그리고 이렇게 전해주러 와서 고마워요."

찬합이 들어있는 것으로 보아 아마 먹을 것이 들어있을 것 같다고 추측하며 나중에 식사를 할 때 먹으면 되겠다고 결론을 지은 사내는 잠시 뭔가를 생각하는 듯 하다 말을 이었다.

"혹시 산책을 자주 즐기신다면 괜찮은 풍경이 있는지 물어도 될까요? 아. 별 건 아니고 그림을 그리러 내려왔거든요. 그래서 혹시 좋은 풍경이 있으면 소재로 쓸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요."

5 이름 없음 (gQY8EWkymA)

2021-09-13 (모두 수고..) 22:57:35

>>4 좀 피곤해서 그런가 답레가 안 써지네. 내일 들고올게.

6 이름 없음 (wSjOpuFcMU)

2021-09-13 (모두 수고..) 23:06:40

>>5 빨리 빨리 이어야하거나 그럴 필요는 없으니까 그냥 편하게 해줘도 괜찮아! 물론 이야기의 끝을 맺고 싶다면 그것도 괜찮으니 정말로 편하게 해줘!

7 이름 없음 (KLx1EPiy5I)

2021-09-14 (FIRE!) 00:52:24

(길가 중간에서 히치하이킹을 하는 당신을 발견하고는, 천천히 속도를 줄인다. 손은 조수석에 놓여져있는 샷건 쪽을 향해 뻗으면서 당신 앞에 세우고는 차 창문을 스르륵 내린다. 까만 미러 선글라스를 슬쩍 아래로 흘려 당신을 바라보다, 씩 웃는다.) 이런 곳에 손님이라니 드문데. 어디까지 가십니까?

/좀아포! 급작스런 전개나 맥커터만 아니면 괜찮아~

8 이름 없음 (3GPpEJWZ8w)

2021-09-14 (FIRE!) 02:49:09

>>7 모든것이 시작되고 모든것이 끝날지 모르는 곳으로 (처량한 얼굴에 눈물,먼지 범벅이된 하얀 가운의 여자가 무거운 서류가방을 든채 샷건의 등장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피우던 시가를 더 깊게 들이마시며 읖조린다. 옆구리에 낀 철로된 서류가방을 보여준다. 그 위로 유명 메이커가 선명하게 빛난다.)어때, 같이 가볼래? (같은 시각 그녀의 뒤에서 커다란 폭발이 터지면서 막무가내로 차에 타려든다. 그리고 큰 폭발 소리에 좀비들이 점점 모여든다.) 일단 가면서 이야기 하지 문좀 열어!

9 이름 없음 (SHdse3byhc)

2021-09-14 (FIRE!) 05:07:19

>>4

사내에게 종이봉투를 넘겨주고나자 빈 손이 새삼 가볍게 느껴졌다. 그녀의 집에서 여기까지라고 해도 고작 십여분에 불과한 거리를 들은게 전부인데. 그녀는 어쩐지 허전함이 느껴지는 손을 가지런히 모아 쥐고, 사내의 되물음에 고개를 끄덕였다. 자세한 자초지종까지는 몰라도 할머니가 그리 말하셨으니 들은 대로 전할 뿐이었다.

그녀는 사내가 종이가방 내려 놓는 모습을 힐끗 시선으로만 쫓다가, 이어진 물음에 시선을 돌려 사내를 보았다. 타인의 주소를 멋대로 알려줘도 괜찮을까 하는 생각이 앞섰다. 아무 연관도 없다면 알려주지 않겠지만, 나중에 빈 찬합을 돌려드리려면 미리 알고 있어야 하지 않을까. 가만히 혼자 생각을 해보고 괜찮겠다 싶어서 다시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대로 그녀가 왔던 길을 보며 간단히 길 설명을 해주었다.

"여기서, 쭉 간 다음.. 갈림길에서 왼쪽으로, 10분 정도 걸어가면, 마당에 감나무가 있는 집이 있어요. 거기..에요."

혹시 모르니 명패에 써있을 할머니의 성씨도 같이 알려주고 그럼 이만, 을 말하려 했다. 하지만 사내의 다음 물음이 그녀의 말보다 빨랐다. 미처 끊지 못한 말을 그대로 들은 그녀는 풍경과 그림이란 말에 살짝 흥미가 도는 눈빛을 보였다. 아주 잠깐이었지만.

"그림...인가요. 괜찮은 풍경, 이라면..."

대답하기에 앞서 또 잠시간 시간을 들여 생각에 빠졌다. 근 1년간, 마을 밖으로 나가진 않아도 걸어갈만한 곳은 여럿 가보았다. 딱히 좋은 풍경을 찾기 위한 것도, 그만큼 산책을 즐겨서인 것도 아니었지만. 몇 군데 인상에 남는 장소는 있었다. 그곳들을 떠올린 그녀는 못다한 대답을 마저 이었다.

"일출이 잘 보이는, 절벽 같은 곳이나, 저기, 안개가 낀 늪이나... 노을이 잘 드는 곳, 정도는, 알고 있어요.."

기억나는대로 몇군데를 말하고 보니 별로 좋은 곳들은 아닌거 같아서, 그냥 흔한 곳이라고 작은 소리로 덧붙였다. 시골 풍경이 다 거기서 거기 아니겠냐고.

10 이름 없음 (Bg1UuNSkIk)

2021-09-14 (FIRE!) 19:27:17

>>9

여기서 쭉 간 다음 갈림길에서 왼쪽으로 시작되는 말을 들으며 사내의 눈동자는 그녀가 설명하는 길이 있는 방향으로 향했다. 마당에 감나무가 있는 집이라고 하는 것도 그렇고, 명패의 이름까지 알려줬으니 찾는 것은 상당히 쉬울 거라고 사내는 판단했다. 적어도 길치는 아니었기에 길을 잃는 일은 없을 거라고 사내는 확신하며 이내 다시 한 번 그녀에게 고맙다고 말을 전했다.

이어 자신의 질문의 답이 들려오자 사내는 자연히 그 풍경을 머릿속으로 상상했다. 안개가 낀 늪이 있다는 말에 늪도 있구나라며 신기해하며 다른 곳은 몰라도 거긴 꼭 가봐야겠다고 사내는 다짐했다. 물론 출발한다고 해도 지금 당장은 아니었다. 아직 마을 사람들에게 제대로 인사도 못했고 집 정비도 다 끝나지 않았으니까. 겉은 어떻게든 정비했다고 해도 비가 새는 곳이 없을지, 혹여나 문제가 되는 곳은 없을지 등등 확인해야 할 곳이 많았고 아직 아틀리에 정비도 마치지 못했으니 해야 할 것은 많았다.

"이곳에선 흔할지도 모르지만 막 여기로 온 저에겐 흔한 곳이 아닌걸요. 어릴 때 여기에 여러 번 오긴 했지만 사실 이 시골집 근처에서 멀리 벗어나본 적은 없어서요. 아무튼 알려줘서 고마워요."

계속 고맙다는 인사만 한다고 생각하며 사내는 괜히 소리를 작게 내서 웃었다. 허나 그 웃음소리를 어떻게든 잠재우며 고개를 돌려 어디에 있을지 알 수 없지만 그 늪이나 노을이 잘 드는 곳 등의 위치를 상상해서 있을법한 장소로 고개를 돌리다 아래로 내리며 다시 그녀를 바라봤다.

"그림 좋아하시나요? 만약 좋아한다면, 일단 정리가 다 끝나고 마을 어르신들에게 인사가 다 끝나면 추천해준 장소 같은 곳에 혹시 가게 된다면 풍경화 한 장 받아보실래요? 저도 손을 풀고 싶고, 삽화가를 꿈꾸고 있거든요. 그래서 어떤 느낌으로 사람들에게 보일지도 궁금해서요."

물론 좋아하지 않는다면 거절해도 상관없다고 이야기를 하며 사내는 두 손을 가볍게 휘저었다.

11 이름 없음 (SHdse3byhc)

2021-09-14 (FIRE!) 20:35:13

>>10 제대로 마무리짓고 싶었는데 생각보다 너무 안 써져서 이쯤해야 할거같아. 미안.

12 이름 없음 (Bg1UuNSkIk)

2021-09-14 (FIRE!) 20:53:42

>>11 아니야! 괜찮아! 짧지만 그래도 잇는다고 수고했고 재밌었어!

13 이름 없음 (IjxXO5lTew)

2021-09-16 (거의 끝나감) 02:01:29

" …내 이름이요? "

술기운이 오른 듯 붉어진 얼굴로 여자가 되물었다. 영 탐탁치 않아하는 어투였다. 게슴츠레 뜨인 눈으로 당신을 서너번 훑어보던 그녀는, 이내 싸구려 양주가 찰랑이는 유리잔을 기울인다.

" 제냐, 제냐예요. …그렇게 쳐다보지 마요. 가명이 아니라 진짜 이름 맞으니까. 정확히는 애칭이지만. 워낙 특이한 이름이라 알려주기 싫었는데. "

여자가 미간을 찌푸렸다. 마지막 잔이라 그런지 술이 유난히 쓰다. 말을 멈춘 채 몇 번 숨을 들이키던 여자는 한참이 지나서야 말을 잇기 시작했다.

" 뭐, 처음 본 사람 치고는 내 이야기도 잘 들어주고... 재미있었으니까 알려주는거예요. 풀네임은 안 알려줄거니까 그렇게 알고. "

이국적인 이름 치곤, 전형적인 한국인의 외모를 가진 여자였다. 검은 머리칼과 적당히 흰 피부. 짙은 갈색빛 눈동자에 특유의 분위기가 담긴 홑꺼풀 눈매. 평균을 겨우 웃도는 키와 여느 대한민국 20대들이 좋아할 법한, 짧은 유행을 함축한 옷가지. 여자가 자세를 고쳐잡았다. 지갑을 챙겨드는 눈치다.

" …집 가기 전에 담배 한 대 필건데, 그 쪽도 펴요? "

여자가 나른히 물었다. 희미하게 알싸한 술냄새가 풍겨온다.

14 이름 없음 (OnJloPxmc6)

2021-09-16 (거의 끝나감) 03:07:31

>>13

"응, 당신 이름이요."

눈가에 발그레하게 열이 오른 여자는 푸슬거리며 헤프게 웃는다. 그러다 동그란 눈으로 당신 얼굴을 살핀다. 시선에 몸을 조금 움츠린다. 우물쭈물거리면서도 그 말을 철회할 생각은 없는 듯하다. 이상한 구석에서 묘하게 고집이 있기라도 한가 보다.

제냐, 제-냐. 그 이름을 입 속에서 둥글둥글 굴려보던 여자는 당신의 말에 화들짝 놀라 고개를 젓는다. 그렇게 안 봤어요! 하고 변명하는 말이 귓가에 들리는 것만 같다. 커다란 두 눈을 두어번 꿈뻑거린다. 테이블 아래로 손가락을 꼼질거리다,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이야기한다.

"싫었다면 미안해요...그래도, 들으니까 기쁘네요."

그리곤 예의 그 헤프고 무른 웃음을 지어보인다. 꼭 그 기쁘다는 말이 온전한 진심인 것처럼. 여자는 손을 팔락거려 옷소매를 조금 아래로 한다. 양 손으로 잔을 잡고 홀짝이며 남은 술을 마신다. 그러다 당신을 말을 하노라면 술을 내려놓고 가만히 듣다가, 한참을 고민하듯 있는다.

"그, 예쁜 이름이라고 생각했어요. 아까 전에요...이상하게 본 게 아니라."

그 고민 끝에 나온 말은 실없는 종류다. 그리고, 라며 여자는 말을 잇는다.

"제 이름은 비예요. 비 온다, 할 때 그 비요. 따지자면 애칭이에요."

제냐처럼요. 짧게 덧붙인다. 여자가 작게 웃자 갈색 머리카락이 그에 맞춰 흔들린다. 촘촘한 속눈썹 사이로 빛이 닿자, 호박색에 가까운 색채로 눈동자가 반짝인다. 나잇대에 비해 상당히 작은 체구다. 그래서인지 작은 웃음에도 쉽게 흔들려 보인다.

"음, 네. 가끔요."

조막만한 입술을 오물거리며 답한다. 눈동자를 데굴 굴린다.

"괜찮다면, 불만 조금 빌려주지 않을래요?"

그러다 변명조로 중얼거린다.

"...라이터를 두고 와서요."


#이런 것도 괜찮을까?

15 이름 없음 (dJDNk9i6tI)

2021-09-17 (불탄다..!) 01:16:39

>>14

" 뭐, 미안해 할 필요는 없고. "

여자가 힐긋 당신을 바라보다 오묘히 입꼬리를 접어 올렸다. 여자는 차가운 인상이었지만 제법 따스히 웃을 줄도 아는가보다. 그녀는 다시 시선을 거두어 정면을 바라보았다. 텅 빈 술잔이 어딘가 아쉽다. 기껏 오른 취기가 곧장 사그라질 듯한 그 감각이 싫었다. 여자가 천천히 고개를 기울여 턱을 괴었다. 별안간 들려온 당신의 목소리 때문이다.

" 그래요? 고마워라. "

여자가 비스듬히 입꼬리를 올리며 웃었다. 술기운이 가득한 웃음이다. 제정신이라면 결코 그런 미소를 보이지 않았겠지. 평소의 여자는 웃는 것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비—. 여자가 길게 입술을 늘려 당신의 이름을 중얼였다. 가볍게 입술이 붙었다 떨어지며, 당신의 이름이 톡 터져나온다.

" 좋은 이름이네. 내가 비오는 날을 좋아하거든. "

여자가 호박색 눈동자를 보며 말했다. 여자의 눈동자는 칠흑처럼 검었다. 그래서 꼭, 그녀의 눈을 볼 때면 깊이 모를 심해에 빠져드는 기분인지라, 그녀와 눈 맞추길 피하는 이들이 많았다. 그 새카만 어둠 속에 제 속내를 읽히는 기분이 썩 유쾌하진 않을테니. 눈은 마음의 창문이라 했던가. 인간은 눈과 눈을 통해 서로의 마음을 읽는다던데, 그녀의 눈은 아무리 들여다본들 그 무엇도 읽히질 않았다. 모든 불을 끄고 달빛 들어올세라 창문까지 닫고, 속마음이 적힌 공책을 꽁꽁 숨겨놓기라도 한 것처럼 말이다. 그래서, 여자는 그리도 투명한 눈빛을 좋아했다.

" …따라와요. "

여자가 한참을 침묵하다 대답했다. 의자에서 몸을 일으키니 세상이 어지럽다. 세상이 붉은건지, 가게의 조명이 붉은건지, 그녀의 눈동자가 붉은건지. 알 길이 없다. 여자는 비틀이는 걸음으로 뒷쪽 출입구의 문을 밀었다. 곧장 서늘한 공기가 들이치며 세상의 소음이 밀려들었다. 쇠어가는 가로등의 불빛이나, 낡은 자동차의 모터음이나, 뭐 그러한 것들.

여자가 품에서 담배갑을 꺼낸 뒤 담배 한 대를 입에 물었다. 살며시 깔린 시선 사이로는 거친 아스팔트 바닥이 보였다. 라이터를 몇 번 달칵대며 담배에 불을 붙인 여자가 그대로 첫 숨을 길게 내뿜어낸다. 그리곤 잠시 당신을 보고서는, 제 담배갑을 기울이며 한 대 가져가라는 듯 흔들대는 것이다.

" …솔직하게, 담배 피는 거 맞아요? "

여자가 다시 한 번 연기를 뿜어낸 뒤 물었다. 여자는 불안정한 자세로 딱딱한 벽에 몸을 기대고 있었다. 멍하니 울려오는 머리에 여자가 잠시 몸을 비틀였다. 글쎄, 그정도로 취한 건 아닌데…

" 아니 뭐, 꼭 한 번도 안 펴본 사람 같아서. "

입술을 오물대며 대답하는 그 모습이 마음에 걸린 모양이다.

# 괜찮아!

16 이름 없음 (07R./bVFm6)

2021-09-18 (파란날) 00:45:18

14살. 살던 마을을 떠난 소년은 10년이 지나 24살의 청년이 되어 다시 마을로 돌아왔다. 검술과 마법을 제대로 공부하기 위해 전문 아카데미에 들어간 그는 아카데미를 정식으로 졸업했다는 제국의 사자 문양이 그려진 붉은색 완장을 왼팔에 차고 있었다. 제국에서 청년의 검술과 마법 실력을 인정했다는 그 증표는 제국 어디에서나 인정받는 자격 그 자체였다.

아카데미에 입학한 이들 중에서도 극소수만이 받을 수 있는 그 증표만 있으면 제국의 유력 가문을 지키는 기사가 될 수도 있었고, 제국 그 자체를 지키는 기사단에 들어가서 활동할 수도 있었다. 허나 사내는 아카데미에서 들어온 모든 권유를 거절하고 자신이 살던 마을, 즉 고향으로 되돌아왔다.

"10년만이지만 옛 모습 그대로네."

14살 때의 기억을 어렴풋이 떠올리며 사내는 미소를 작게 지으며 거리를 천천히 걸었다. 나름 귀족의 신분을 가지고 있었으나 그렇게 유력한 가문도 아니었던만큼 사내를 알아보는 이는 적어보였다. 마을 북쪽에 위치한, 귀족들이 살고 있는 거주구에 사는 작은 여러 가문 중 하나였을 뿐이었으니 어지간하면 이런 반응일수밖에 없다고 생각하며 사내는 우선 마을 북쪽으로 향하려 했다.

"앞으로 뭘할지는 일단 집에 돌아가면 생각해볼까. 오랜만에 인사를 드려야 할 곳도 많으니 말이야."

/뜬금없는 맥커터만 아니면 어떤 상황으로 이어도 오케이야! 10년 전에 친하게 지냈던 귀족 친구중 하나가 나와도 상관없고, 어떻게든 영입하려고 제국에서 몰래 미행해서 따라온 이로 이어도 별 상관없어!

17 이름 없음 (KcVvObqu.w)

2021-09-20 (모두 수고..) 01:17:17

>>15

당신의 말에 뒤늦게 따라 웃는다. 약간의 안도가 담긴 미소는 무해해 보인다. 꼭 누군가를 기분 좋게 하기 위해서만 존재하는 달달한 디저트처럼, 해치는 법은 모르고 사는 이같다.

"진심이에요."

기어들어가듯 작은 목소리로 말하는 지금도 그렇다. 자신의 감정을 죄 꺼내 늘어놓는 모습이 무해하다 못해 순진해 보인다. 사랑 받고 자라 환히 웃는 법과 사랑 주는 법을 자연스레 익힌 사람처럼, 웃는 모습이 자연스럽다.

"비오는 날의 어떤 부분을 좋아해요, 제냐는?"

투명한 눈동자가 당돌하게도 당신을 마주본다. 제가 빛이니 어둠이 두렵지 않다는 양 군다. 얼마든지 읽혀도 상관 없다는 것처럼 바라본다. 당신과는 정반대의 사람 같아 보인다. 어두운 길 가는 사람 길 잃지 말라 창문가에 불을 환히 밝혀놓았다. 어두운 밤 헤매지 말라 하늘에 별 총총 띄워놓았다. 꼭, 그런 사람 같다.

한참을 당신의 답 기다린다. 재촉하거나 말을 덧붙이지도 않고 당신의 선택을 기다린다. 그러다 목소리가 들려오노라면, 그제서야 종종걸음으로 당신의 뒤를 따라가며 "같이 가요!"하고는 종알거린다. 띔박질에 가까운 걸음으로 뒤따라가자면, 어느새 도시의 냄새가 훅 끼쳐온다. 저물어가는 몇몇 것들의 소리가 거리를 잔잔히 채운다. 여자는 서느다란 고요에 제 입을 꾹 다물어버린다.

그러던 여자는 제 시야에서 흔들리는 것을 보고서야 정신을 되찾는다. 내밀어진 담뱃갑의 로고를 유심히 바라본다. 하나 꺼내가려던 찰나, 저를 향한 질문에 고개를 들어 당신을 올려다 본다.

"그런 소리 자주 들어요. 잘 안 피게 생겼다고들 하더라고요."

옅게 웃는다. 빛을 등지고 있어서인지, 표정이 흐릿하다. 확실히 여자는 담배와 친하게 생긴 인상은 아니었다. 입에 무는 것은 달달한 막대사탕이 전부일 것만 같아 보였다. 그렇 것 치곤 담배를 꺼내들어 입에 무는 일련의 동작이 매끄럽다.

"가끔 피곤 해요."

여자는 불 좀 빌려달라 말하듯 턱을 살짝 치켜든다. 그제야 얼굴에 빛이 닿는다. 조금 지친 낯이다.


#말도 없이 늦어서 미안...추석이라고 내려갔다 올라갔다 하니까 정신이 하나도 없었지 뭐야. 너참치는 즐거운 연휴 보내고 있길 바라!

18 이름 없음 (sdN5hN8djo)

2021-09-20 (모두 수고..) 22:22:43

히어로의 삶도 만만치 않네. 힘내라, 힘내. 일단 마시고, (자연스럽게 술을 따라주고 턱을 괸 채 웃는다.) 빌런 협회는 언제든지 열려있다, 친구야. 적어도 지랄맞은 위계사회는 없더라고. (불판 위의 고기를 구워 당신의 접시에 올려주고는 자신은 집게로 집어든 고기를 입에 넣는다. 중간에 느껴지는 시선에 후드를 뒤집어쓴다.) 유명인이랑 고기 먹기 힘드네 거 참.

/ 히빌!! 맥커터 자제~

19 이름 없음 (UT1lB8JGUk)

2021-09-20 (모두 수고..) 23:20:06

>>18

아니, 저기… (두 눈을 깜빡이며 상대를 살핀다. 다소 당황스러워하는 얼굴.) 일단 따라주니까 마시긴 하는데요. (확신 없는 얼굴로 잔을 매만지다 단숨에 들이킨다.) …건물에 감시 카메라라도 달아놨나? 오늘 뒤지게 깨진 건 어떻게 알았대. (딱히 놀란 기색 없이, 태연히 말을 받아치며 대답한다. 그러다 제 고기를 집어먹는 당신을 얼빠진 얼굴로 응시한다.) 그거 내 고기인데? 고기값 줄거예요? 뼈 빠지게 번 돈으로 산 건데? (다소 인색하다... 주변에서 느껴지는 시선에 다시 한 번 볼캡을 눌러쓰며 젓가락으로 고기를 집어든다.) 내가 아니라, 그 쪽 문제인 거 같은데. 얼마 전에 얼굴 팔리지 않았나? (웅얼거리는 히어로) 근데 담력 대단하다. 어떻게 대놓고 찾아올 생각을 다 해요? 민간인 많아서 내가 깽판 못 칠 줄 알고 그러나? (불판에 시선을 고정한 채 다시 고기를 집어먹는다.)

#이렇게 받아도 괜찮을까...!

20 이름 없음 (Oa6/ev./m6)

2021-09-21 (FIRE!) 10:56:11

>>19
/너참치 미안! 빌런을 아무 생각없고 뻔뻔하고 염치없는 캐릭터로 짠 건 아니었거든~ 찐친 사이를 바랬던 거라서 다른 참치랑 이어보도록 할게! 이어줘서 고마워~

21 이름 없음 (VVfVlMh9Cg)

2021-09-21 (FIRE!) 13:12:41

>>18

(소주를 한 번에 쭉 털어 삼킨다. 쓴 액체가 식도를 태운다. 걸어온 길에 대한 회의감과 함께.) 내 신념이 잘못된 건가? (자유로워 보이는 친구를 바라보다 모자를 눌러 쓰고 왔음에도 느껴지는 시선들에 쓰게 미소짓는다.) 너 여기 있는 거 알려지면 안되는데. 룸으로 갈 걸 그랬나. (후드를 더 푹 눌러 씌워주며 얼굴을 찌푸린다.) 내 방 갈래?

22 이름 없음 (2dS/EdO/ew)

2021-09-21 (FIRE!) 14:23:15

﹘뭐야. 너 누구야.

바다를 닮은 푸른 빛이 맴돌기는 하지만 평범한 검은 머리카락과 평범한 검은 눈, 그리고 평범한 학교의 교복이다. 검은 머리카락이 물 속에서 나풀거리며 명찰이 있을 가슴팍을 가리고 있어 이름은 확인하기 힘들었다. 평범치 않은 부분이야 이따금씩 느적거리는 꼬리 지느러미가 있는 치마 아래 부분이다. 투명하고 맑게 비치는 물 속에서 훤히 보이는 지느러미는 아마도 파랑색인 것 같았다. 빛이 비추거든 비늘이 반짝거렸다. 물 속에 있던 인어는 당신과 눈이 마주쳤고, 그때 당신에게 들린 목소리는 울먹거리는 것 같기야 했다지만 예쁜 목소리임이 확실했다. 신기한 일이다. 인어는 입을 움직이지도 않았는데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인어는 곧 수면 위로 고개를 내밀었다.

“인어 처음 봐? 대답 안 해?”

물 속에서 흩날리던 머리카락이 착 내려 앉는다. 아무도 없는 줄 알고 대낮임에도 이런 모습으로 무방비하게 꼬리를 내놓았는데 난데없이 누군지도 모르는 자의 등장이라니 달갑지 않았다. 경계심이 말투와 목소리에 뚜렷히 드러났고, 그리고 차마 숨기지 못한 불안도 함께했다. 겁을 내고 있는지 가시를 돋친 고슴도치가 벌벌 떨고 있기라도 하는 것마냥 말투와 목소리만이 날서있었다. 주먹을 꼭 쥐고 있는 두 손이 그 증거였다.

23 이름 없음 (cfiavu88qo)

2021-09-21 (FIRE!) 15:11:55

>>22

하늘은 맑고, 바람 한 점 없는 이런 날씨엔 산책을 하지 않으면 역시나 곤란하단 말이지. 하지만 아무런 의미없이 그저 한가한 시간을 때우려고 여기까지 걸어온 것은 아니다. 애초에, 여기 산책 코스가 아닌걸? 그렇게 얼핏봐도 낡아보이는 책을 들고 바닷가에 온 내게 놀랍게도 첫 시도만에 좋은 기회가 주어졌다.

" 도감번호 22번, 인어. 인외의 존재이지만 인간들 사이에 섞여 생활하기에 그 존재를 쉬이 눈치채기 어렵다. 가끔 인적이 드문 바닷가에서 그 존재를 확인할 수 있는데, 상당히 아름답다고 한다. "

바닷가의 인어가 내게 뭐라뭐라 말하는 것 같았지만 잘 들리지 않아 조금 가까이 다가간다. 확실히 아름다운 외모라 사람들이 인어에 왜 홀린다고하는지도 알 것 같았고. 그리고 인어들은 대게 자신들의 정체를 들키는 것을 두려워한다, 라고 여기 적혀있네.

" 안녕. 혹시 실례지만 네 그림을 여기에 좀 그려도 될까? "

증조할아버지부터 내려오던 이 책은 여러 인외의 존재들의 정보와 그림이 실려있다. 그냥 간단하게 도감이라곤 하지만 요괴라는 말은 쓰지 않는다. 의미가 안좋잖아, 대부분 인간한테 무해한데. 하지만 역시 인외의 존재를 만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라 많은 그림들이 비어있다. 그렇기에 나는 이 그림들을 채우기 위해서 이리저리 돌아다니고 있는 것이다. 물론 학생이라 이 근처가 전부지만.

" 너무 경계하지 않아도 돼. 나는 조금 특별한 인간이고 특이한 사람일뿐이니까. 여기에 그림만 그리고 갈께. "

어떻게, 안될까?

24 이름 없음 (fgwbm1mVF6)

2021-09-21 (FIRE!) 15:36:08

>>23

“뭐?”

도감번호 22번. 순간 심장이 쿵 내려앉는 기분이 들었다. 예로부터 인간에게 정체를 들켜서, 인간과 얽혀서 좋은 끝을 본 인어는 드물었다. 들려오는 이야기만 해도 그렇다. 육지에, 인간 사회에 인권이라는 개념이 생기기 전에는 같은 인간조차 구경거리와 희롱거리로 삼아 유희를 즐기던 동물에게 좋은 감정은 없다. 수면 위로 고개를 내밀었던 인어의 몸이 뒤로 물러난다. 수면에 이는 파동은 작은 파도 뿐만이 아니라 몸의 떨림도 그 원인이었다. 저 인간의 손에 붙잡히면 해부당하고 마리라. 눈꼬리에 금방 굵은 물방울이 맺히더니, 아룽거리다 바다 위로 데굴 굴러 떨어진다.

“그림만 그린다는 걸 어떻게 믿어. 어린 인간은 더 잔인해.”

이제는 아예 겁을 먹어 움츠린 인어는 날이 선 목소리조차 내지 못 했다. 눈물 방울은 계속해서 맺히고 떨어지고를 반복하였으며, 인어는 도망칠 방법을 강구 중이었다. 바닷속으로 도망쳤다가는 바닷속 저 깊이 원래 인어들이 나고 사는 곳을 들켜버릴까 걱정되었고, 육지 위로 올라 달려보자니 자신의 인간 다리를 다루는게 서툴었다. 어설픈 뜀박질로는 금방 잡히고 말텐데, 아무리 생각해도 뾰족한 방도가 생각나지 않아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인간 앞에서 눈물을 보이는 것조차 수치스러운데 울음 소리까지 내기 싫었다.

“이러니까 계속 바다에 살고 싶었던건데….”

이것은 인어의 목소리가 당신을 만나기 전부터 목소리가 울먹거리던 이유였을테다. 조그맣게 울먹거린 인어는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는 채로 푸른 하늘 아래서 눈물 방울을 반짝거렸다.

25 이름 없음 (ir04qPY3N2)

2021-09-21 (FIRE!) 16:06:53

>>24

어, 우는거야? 우는거야?! 정말 단순하게 그림만 그리러 왔는데, 말 몇마디 걸었을뿐인데 갑자기 울어버린다. 아직 아무런 짓도 안했는데 울어버리면 나도 당황할 수 밖에 없다. 펜을 들고 있던 손이 너를 향해 있다가 당황해 펜 끝이 살짝 떨린다.

" 너도 어리잖아! 너 교복이 근처 고등학교 교복인데, 나는 바로 옆학교에 다니고 있거든. "

어린 인간이 더 잔인하단 말에는 동의하는 편이고 지금도 인어가 있다는 말이 들려오면 잡아가려고 난리가 나겠지. 하지만 나는 누구에게도 이 사실을 말할 생각이 없었다. 증조할아버지부터 내려오는, 도감을 채워넣는 사람들이 무조건 지켜야하는 것이 있기 때문이다.

'그들을 무조건 지켜줄 것'

아버지가 불의의 사고로 돌아가시고 내 앞으로 떨어진 막대한 유산은 그저 내가 놀고먹으라고 주어진 것이 아니다. 모든건 목적을 갖고 있으니 나는 그것을 지켜야한다. 그게 할아버지가 어떤 것과 한 약속이라고 했으니까. 그 댓가로 막대한 부를 약속 받았고 아버지까지도 그 의무를 성실히 하고 계셨다.

" 정말 그림만 그릴께. 정 못믿겠으면 어떤 방식으로 약속을 해도 좋아. 인어는 인어만의 방식이 있을테니까. "

증조할아버지의 단순한 호기심에서 시작된 도감은 이제 그것들을 지키기 위한 서적으로 그 목적이 변했고 아직도 채워지지 못한 많은 그림들을 채워넣어야할 의무가 있다. 내가 채워넣을 수 있는 첫번째 페이지를 이렇게 쉽게 날려보낼 수 없지.

" 약속을 어긴다면 어떤 저주라도 달게 받을께. "

진지하게 너에게 말해본다. 그래도 여기서 도망간다면 기회는 아예 날려버리는 것이겠지만.

26 이름 없음 (fgwbm1mVF6)

2021-09-21 (FIRE!) 16:44:00

>>25

“인어 나이로는 성년 지났어!”

이제는 학교까지 들켜버렸어. 학교를 뒤져서 학생 하나 찾아내는게 어려운 일도 아닐테고, 이제 어딘가로 끌려가서 연구 대상이 되는 건 시간문제야. 몸이 차갑게 식는 기분이 들었다. 인어가 바닷속에서 저체온증으로 죽었다는 웃긴 이야기가 생기겠다고 생각될 정도였다. 인어는 하염없이 눈물만 흘리나 싶더니, 손을 들어 눈가를 훔쳐냈다. 눈가는 금방 빨갛게 올라왔다. 인어의 눈물은 진주가 된다는 허무맹랑한 이야기 때문에 잡혀가 죽은 인어도 있는데, 인간이 바다를 오염시켜서 인간들과 섞여 살아야한다고 했다. 바다에는 쓰레기가 넘실거리기 시작했고 아무리 깊고 머나먼 바다로 떠나봤자여서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그래서 인어는 성년이 되면 육지로 올라온다.

“저주같은 거….”

그런 거 할 줄 알 리가 없잖아. 옛날에야 인어로서 계속 바다에 살아가니까 다들 배우고 알아뒀겠지만, 지금은 다들 성년이 되면 육지로 올라오는데 저주같은게 계속 이어진다고 해도 알고 있지는 않았다. 인어는 훌쩍거리는 소리를 내다가 당신을 올려다보았다. 내가 죽음을 감수하고 너를 믿어야한다면, 너도 죽음을 감수하고 나를 믿어줘. 물기어린 손이 당신을 향해 뻗었다.

“너도 들어와서 약속해. 숨 모자르면 내 숨 나눠줄게.”

인간도 바닷속에서 숨 쉴 수 있는 방법. 인어의 숨을 나누면 된다. 이 방법으로 여러 인어들이 여러 인간을 살렸다. 단순히 손가락만 걸고 약속하겠지만, 바닷속에서는 쉽사리 죽음에 이를 수 있는 인간에 불과한 당신이 바닷속까지 따라 들어와준다면 그림만 그리겠다는 말에 대한 믿음은 가질 수 있을 것 같았다.

27 이름 없음 (ZcNQ6BSMpo)

2021-09-21 (FIRE!) 17:29:16

>>26

아, 나랑 비슷해보이는데 나보다 나이가 많다던가 .. 아니면 인어는 인간보다 성년이 되는 시간이 짧은건가? 뭐가 됐던간에 내가 잘못한 것도 없는데 저렇게 울어버리는게 어이가 없으면서도 좀 마음이 아프다. 인간은 자신과 다른 것들을 배척해오곤 했으니까. 호기심이던, 악의던간에. 목숨을 걸어야하는 일이라고 도감 가장 첫 페이지에 써있는 할아버지의 메모처럼 인간에 대해 무한한 적대감을 가진 것들도 존재하곤 했다. 기본적으론 무해하다고해도 적대감을 가지는 것은 별개의 일이다.

" 물 안에 들어오라고? "

흠칫한다. 육지는 나의 영역이지만 물 안쪽부턴 인어의 영역, 상대가 적의를 품으면 그대로 목숨을 잃을수도 있다. 거기에 어릴때 강에 빠져서 거의 죽기 직전까지 갔던 기억이 스멀스멀 올라온다. 바다는 서서히 얕아진다곤 하지만 아직까지도 물이 허리 위로 올라오면 숨이 막히는 기분이 드는 나에겐 너무나도 나쁜 제안이다.

" 아니, 정말 나는 나쁜 짓을 할 마음이 없는데. "

라곤 말해도 나도 상대방의 마음을 알 수가 없어서 방어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는 주제에 이런 말을 하는게 설득력이 없다. 상대방이 하는건 뭐든 하겠다고 해놓고 물이 무서워서, 인어가 무서워서 이러고 있는게 어이가 없기도 하다. 물에 젖은 손이 나를 향해 뻗어왔고 흔들리는 눈으로 그 손을 바라보던 나는 숨을 크게 들이쉬고 서서히 인어에게 다가가기 시작했다. 자갈이 널린 해변을 지나서 신발에 파도가 스친다. 찰박, 찰박하던 소리는 발가락 사이사이로 물이 들어차는 느낌과 함께 사라지고 차가운 느낌이 발목부터 서서히 올라온다. 인어가 있는 곳은 더 깊은 곳이라 금방 허리까지 차오른 바닷물에 잠시 걸음을 멈춘다.

" 나 정말 물이 무섭거든? 지금도 심장이 쿵쾅쿵쾅거려. "

여러번 심호흡을 해도 심장박동이 가라앉을 생각이 없어보인다. 몇발자국을 더 가야하는데 한발자국도 내딛을 수가 없어서 그저 너를 바라보고만 있다. 아빠, 어쩌면 생각보다 아빠를 일찍 보러갈 것 같아요. 주먹을 불끈 쥐고 눈을 질끈 감고, 나는 천천히 한발자국을 내딛는다. 차가운 감촉이 서서히 상반신을 덮어가고 있는 것을 느꼈지만 보지 않으면 조금은 괜찮은 것 같다. 그렇게 눈을 감고 손을 뻗은채 네가 있을 것 같은 방향으로 조금씩 나아갔다.

28 이름 없음 (rH8IoGd9Yk)

2021-09-21 (FIRE!) 23:40:23

그녀는 추위로 얼어붙은 나무 사이를 다람쥐마냥 돌아다니며 습기를 머금은 것 사이에서 능숙하게 크기가 있고 상태 좋은 나뭇가지들을 골라내더니, 짧은 시간에 제법 많은 양을 품에 안아 들고서 작게 중얼거렸다.

" 이 정도면 되려나? "

꼼꼼하게 골랐지만 그럼에도 성이 안 차는지 여자는 나뭇가지의 이곳저곳을 돌려보며 한참을 확인하고 나서야 지금까지 향하던 방향과는 정 반대 방향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발목까지 -사실 발목보다 조금 더 높게 쌓인 눈 위를 한 걸음 한 걸음 내딛으며 앞으로 나아갔다. 세상은 온통 눈으로 덮여 새하얗고, 비슷한 생김새의 나무로 들어차 있었다. 이처럼 사방이 똑같은 풍경 속에서도 그녀의 발걸음에는 망설임이 없었다. 오히려 지도를 꺼내지도 않고 주변 한 번 둘러보지 않는 그녀는 마치 이곳의 지리를 전부 꿰고 있는 것 같아 보였다. 그렇게 한참을 걸어가던 그녀는 저 멀리 작은 빛이 보이기 시작하자 슬며시 미소를 지었다.

" 나 왔어요-."

그녀가 도착한 곳은 나무로 지어진 -그러나 정교하고 튼튼하게 지어진 듯 보이는 집의 문 앞이었다. 창문 밖으로는 모닥불의 밝은 빛이 새어 나와 바닥에 쌓인 눈을 주홍색으로 물들이고 있었고, 작은 틈으로는 따뜻한 코코아 향기도 조금씩 새어 나오고 있었다.
그녀는 서둘러 어깨로 문을 밀고 안으로 들어갔다.


/ 너무 뜬금없거나 이상한 상황만 아니면 괜찮으니까 자유롭게 이어줘!

29 이름 없음 (sxXMQq3UZ2)

2021-09-22 (水) 00:16:10

>>28

산에도 겨울이 찾아왔다. 마을 뒷편에 있는 야트막한 산이지만 숲이 우거지고 생각보다 위험한 동물들이 많아 이곳의 산장은 없어서는 안될 중요한 곳이면서도 위험하다. 마을 대대로 산장지기를 맡아온 그의 집안이었고 그도 산장지기가 된지 많은 시간이 흘렀지만 위험할 때가 종종 있었기에 겨울에는 입산을 금한다. 하지만 그런 그에게도 말릴 수 없는 사람이 한명 있었으니.

" 겨울에는 위험하니까 오지 말라고 했잖아. "

눈이 오지 않아도 위험한 겨울산에 눈이 이렇게나 잔뜩 왔는데도 올라오다니. 정말 산신령님이 지켜주기라도 하는 것인지 그에겐 항상 큰 의문이었다. 자신도 돌아다니면서 곰을 종종 만나는데 어떻게 그녀는 한번도 그럴때가 없는지. 그리고 그녀는 항상 땔감이 다 떨어져갈때쯔음 땔감을 한가득 들고 오곤 했다. 마치 여기 사정을 속속들이 다 알고 있는 것처럼. 이것도 그에게는 더할 나위 없이 궁금증이 생겨가는 항목이다.

" 곰이라도 만나면 어떡하려고 그래. "

이렇게 말한 것도 수십수백번이라 톳씨도 안먹힐 것을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할 말은 해야하는 그였다. 자연스럽게 의자를 내어주면서 그녀에게 권유한 그는 코코아 가루를 컵에 넣고선 난로 위의 주전자를 들어 붓는다. 은은하게 퍼지던 코코아 향기가 더욱 진해지고 여자에게 코코아를 건네준 산장지기는 다시 본래 앉아있던 곳에 등을 깊숙하게 묻는다.

" 여기 올라오는 것도 만만치 않을텐데 안힘들어? "

물론 야트막한 산이라 산세가 험하지는 않고 산장까지 오는 길도 잘 닦여있어서 평소엔 괜찮지만 지금은 눈이 잔뜩 와있을때다. 산장까지 올라오는 길은 대충 눈을 치워두긴 했지만 그래도 올라오는게 힘들었을텐데 항상 가벼운 몸놀림으로 슉슉 올라오는 것이 여간 신기한게 아니라는 생각을 항상 하고 있었다.

30 이름 없음 (9Xy1OOj/xU)

2021-09-22 (水) 02:07:10

>>29

" 괜찮아요. 여길 누가 지켜주는데 제가 위험할까요. "

그녀는 마치 영역을 과시하는 고양이처럼 뿌듯한 표정과 당당한 말투로 말했다. 그리고 저가 없었으면 그가 귀찮게 나무를 구하러 나가야 했을 거라면서 뻔뻔스럽게 칭찬까지 요구했다.

" 그리고, 이렇게 혼자 있으면 심심하니까요. "

상대는 심심하다는 말이나 의견을 내비치지도 않았는데 잘도 혼자 그렇게 이야기하더니 그에게 물어보지도 않고 곧바로 자연스럽게 모닥불 앞으로 향했다. 곧 불에서 얼마의 거리를 두고 천을 깔더니 모아 온 나뭇가지를 말리려는 듯 그 위에 가지런히 내려놓았다.

" 지금까지 잘 피해왔으니까 괜찮아요. 전 여기서 곰의 'ㄱ'자도 본 적 없는걸요? 그리고... "

가져온 땔감의 정리를 마친 그녀는 그가 권해준 의자에 앉으며 수십수백 번이나 들어온 그의 말을 수십수백 번째 자연스럽게 넘겨버렸다. 곧 고맙다 말하며 코코아를 받아들고는 오히려 중요한 비밀이라도 이야기하려는지 한껏 목소리를 낮추고 몸을 조금 숙이며 당신에게도 몸을 낮추라 팔랑팔랑 손짓을 해 보였다. 이 날씨에 이곳에 올 사람도 거의 없고 집에도 이들 이외의 외부인은 없을 테지만, 그녀의 행동은 마치 근처의 누군가가 듣는걸 경계하는 것처럼 보였다. 곧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그녀가 그에게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 사실 전 눈의 요정이라서요. 곰이랑 만나도 제가 이겨요. "

어른이 되어서는 한참 작은 어린아이들이나 할법한 -심지어 이젠 어린아이들도 하지 않는 농담을 진지하게 말하더니 결국 본인도 우습게 느껴졌는지 얼굴에 숨길 수 없는 웃음기가 묻어났다.

" 전혀요-. 음, 사실 힘들지 않은 건 아니지만, 이 코코아만 마시면 전부 사라져서 괜찮아요. "

바로 여기 앉아서요.
자신의 지정석이라도 되는 것 마냥 앉은 자리에서 발을 톡톡 구르며 장난스레 웃었다. 눈을 좋아하는 성격 탓에 어렸을 적부터 겨울만 다가오면 항상 이리저리 쏘다니며 눈을 헤치고 다녔던 탓인지 이런 날씨는 그녀에겐 놀이터나 다름없었다. 사실 이곳에 찾아오기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는 딱 한 번, 눈에 빠져 넘어질 뻔했던 날이 있었지만 이것도 하루가 지난 후에는 언제 그랬냐는 듯 이전보다 더욱 자유롭게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어쩌면 이런 면에서는 눈의 요정이라는 말도 틀리지는 않는 듯 싶었다.

31 이름 없음 (sxXMQq3UZ2)

2021-09-22 (水) 02:38:31

>>30

말해도 듣지를 않으니 포기를 할법도 한데 산장지기는 그럴 생각이 없어보인다. 보통의 산장지기의 이미지와는 다르게 많이 젊어보이는 그는 이 눈 앞의 여자가 겨울에는 안전하게 따뜻한 집안에 있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겨울엔 산장에서 지내야하는 그도 내심 그녀가 올라오는 것을 바라고 있었지만 철저하게 숨기고 있을 뿐이다.

" 그래도 다음부턴 올라오지마. "

항상 이런식으로 잔소리가 끝이 나지만 또 다음에 올라올테고 같은 내용이 반복된다. 그렇게 깊은 한숨을 내쉰 그는 여자가 늘어놓은 나뭇가지들을 솜씨 좋게 다시 놓는다. 조금 두께가 있는 것들은 앞쪽으로, 얇은 것들은 뒤쪽으로. 빠르게 일을 마친 산장지기는 여자가 늘어놓는 말에 헛웃음을 지어버린다. 눈의 요정이라니 정말 어이가 없다는 생각을 한다.

" 그래도 한번도 곰을 안만나는 것을 보면 정말 뭐가 있나봐. "

물론 곰을 만나는게 쉬운 일은 아니고 주기적으로 총성을 내서 곰의 접근을 막곤 하지만 겨울이라 먹잇감이 부족한 곰이라 겨울에 몇번은 마주치곤했다. 산장지기도 약간의 긴장을 하고 지내는 곳에서 저렇게 천진난만한 태도라니 본인은 아니더라도 정말 눈의 요정이 지켜주는거 아닐까, 하고 산장지기는 생각한다. 그래도 곰이랑 만나는 일은 없게 해야하니까 내려가는 길엔 산장지기 본인이 동행할 생각이다.

" 나도 어릴때 아버지를 따라서 산장을 올라와서 마시는 코코아가 제일 맛있었어. "

산장을 물려받기엔 이른 나이였지만 전 산장지기, 그러니까 남자의 아버지는 산속의 조난자를 구하러 갔다가 곰에게 습격 당해 명을 달리했다. 산에 가까운 마을은 산장을 지키는 자가 없으면 겨울산의 곰이 마을로 내려오는 일도 있었기에 누군가는 산장을 지켜야했고 결국 대를 이어서 그가 선택된 것이다. 물론 언젠간 자신이 맡아야하는 산장이었기에 불만은 없었지만 그도 긴 겨울을 혼자서 보내야한다는 사실에 간혹 외로움을 느끼곤 했다.

" 이장님은 잘 계시니? 듣자하니 몸이 안좋으시다고 하던데. "

마을 소식은 주기적으로 올라와서 식량을 내려놓고 가는 마을 사람들에게 들을 수 있다. 곰의 습격에 대비해서 여러명이 우르르 몰려와 짐을 내려놓고 안부를 주고 받곤 하는데 산장지기는 그때를 가장 좋아했다. 음식이 생기는게 아니라 사람들이 잔뜩 있어서. 하지만 이렇게 혼자 올라오는 것은 위험하다는 것 또한 그가 갖고 있는 생각이다. 거실 겸 부엌과 방 두개로 이루어져있는 작은 산장에서 그는 말린 육포를 가져와 뜨거운 물에 불린다. 산속이라 혹여 불이 날까 난방을 제외하고서 불은 최소한으로 쓰고 있었기에 주로 먹는 것도 이런 육포 같은 저장식들 뿐이다. 그러다 여자를 바라본 산장지기는 찬장에서 작은 과자를 꺼내서 건네준다.

" 너가 좋아하는 과자지? "

저번에 마을 사람들이 가져왔던 것이다. 최근에 눈이 많이 와서 식량을 가져다주는 횟수가 줄어서 이런 간식거리는 아끼고 있었지만 여자에게도 육포를 줄수는 없었으니까.

32 이름 없음 (mL4eO9bFNU)

2021-09-22 (水) 08:49:43

>>31

" 음-. 생각해 볼게요. "

진지한 척 잠깐 고민하는 모습을 보이더니 곧바로 가볍게 대답을 내놓았다. 그러곤 장난스레 거만한 표정을 보이면서 코코아를 한 모금 마신다. 지금 무슨 말을 하든 그녀는 기어코 다시 이곳까지 올라올 테니 사실상 어떤 대답이 나오든 무의미한 일이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그의 한숨에 숨죽여 웃더니 더이상 말도 않은 채로 마치 한 폭의 아름다운 명화를 눈앞에 둔 사람처럼 눈을 빛내며, 나뭇가지를 정리하는 그의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크기별로 착착 정리되는 나뭇가지들을 바라보는 건 언제나 신기하고 즐거웠다.

그녀는 뭐가 있나보다는 그의 말에도 그저 조용히 미소 짓기만 했다. 사실, 뭐라 말해주고 싶어도 그녀 역시 자신이 곰을 만나지 않을 수 있었던 정확한 이유는 알지 못했다. 어느 날은 혹여 이곳으로 올 때 가지고 있던 무언가가 곰을 쫓아내기라도 하는 건가 싶어 산장으로 향할 때 들고 갔던 물건들을 전부 떠올려보았지만, 그녀가 가지고 있던 물건이라곤 애초에 마을 사람들도 가지고 있을 것들 뿐이었다.

" 어쨌든, 덕분에 이렇게 만날 수 있잖아요? "

결국 그녀가 내놓은 건 그의 말에 대한 대답이 되어주지 못했다.

" 그럼 이건 대대로 내려오는, 산장지기의 특별한 코코아네요? "

그녀는 그를 바라보며 손에 들린 코코아잔을 조금 들어보였다. 자신이 지금보다 훨씬 어렸을 적에는 곰으로 인한 사람들의 죽음을 겪고, 또 겨울이 오면 산으로 올라가는 그들을 보며 산에서 떨어진 곳으로 마을을 옮기면 곰으로 사람이 죽는 일도 없고 누군가가 외롭게 산으로 올라가지 않아도 될 거라는 생각을 했었다. 그리고 이장님에게 찾아가 철없이 마을을 옮기자 울며 떼를 쓰기도 했었다. 물론 어느 정도 나이가 차고 나서는 그런 말을 꺼내지 않게 되었지만, 오히려 지금은 겨울이 되면 직접 산장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 약을 드시고, 지금은 조금 나아지셨어요. 별다른 일만 없다면 이제 괜찮을 거라곤 했지만... "

그녀도 이장님의 상태가 쉽게 나아지지 않을 거라는 것은 직접 두 눈으로 보았기에 알고 있었다. 마을 사람들이 하는 괜찮다는 말의 대부분이 사실은 희망 사항에 가깝다는 것 역시 모르지 않았다. 다른 계절 -이를테면 여름이나 가을보다 유독 겨울에 앓는 병들이 더 지독하고 끈질겼다. 이장님이 앓고 계신 병도 원래는 그리 위험한 것이 아니었지만 나이 때문인지 계절 때문인지 약을 먹어도 큰 효과를 보이지는 못하고 있었다.

" 아, 맞아요! 좋아해요! "

그녀는 컵을 내려다보며 잠시 조용히 있다가, 그가 과자를 건네자 반가운 걸 본 것처럼 좋아하며 말했다. 하지만 말과 다르게 그녀의 손은 그가 준 것을 받을 생각이 없어 보였다. 오히려 본인이 들고 온 가방을 집어 그곳에 손을 넣고 무언가를 꺼내려했다.

" 하지만 오늘은 괜찮아요. "

" 바로, 이게 있으니까요. "

그녀는 가방 안에서 와인병과 주머니를 꺼냈다. 그녀가 꺼낸 주머니 안에는 사탕 조금과 비스킷, 아몬드와 호두, 작게 잘려 포장된 치즈 조각 따위가 가득 들어있었다. 그러면서 안주가 되려면 과자도 좋지만 육포가 더 좋지 않겠냐며 웃었다. 가져온 와인은 아직 손대지 않은 새것인지, 살짝만 흔들어도 제법 묵직한 찰랑거림이 느껴졌다. 내려갈 생각을 하고는 있는 것인지 아주 작정을 하고 가져온 듯 보였다.

33 이름 없음 (sxXMQq3UZ2)

2021-09-22 (水) 13:15:16

>>32

어차피 그도 여자가 말을 들을거란 생각은 안하고 있었다. 이런 말을 한다고 올라오지 않을 사람이라면 진즉에 올라오지 않았을 것이다. 저 장난스럽게 보여주는 표정만 보아도 그녀가 앞으로도 쭉 산을 오를 것이라는걸 누구나가 알 수 있을테니까. 그리고 산장지기는 그녀의 말에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긍정한다. 아무리 홀로 지내는데 익숙해졌다고해도 사람인 이상 외로움을 느낄 수 밖에 없으니까. 내심 그녀가 올라오지 않으면 어떡하지, 하고 남모를 걱정을 하기도 했다.

" 아버지도 할아버지와 함께 마셨을테니 정말 그 말이 맞을지도. "

물론 들어가는건 평범한 코코아에 불과하지만 이곳에서 마시는 코코아는 특별하니까. 어릴땐 산장에 올라가는게 무섭기도 했고 힘들어서 가기 싫다고 칭얼대곤 했지만 산장에 올라와서 마시는 코코아와 아버지가 내어주시던 간식들을 먹으면서 힘들었던 것들은 금방 잊어버리곤 했다. 간혹 곰을 마주치면 정말 무섭기도 했지만, 그때마다 지켜주시던 아버지가 지금도 생생히 기억난다. 그러다 여자의 말에 산장지기의 얼굴이 조금 어두워진다.

" 이장님도 나이가 많으시니까, 슬슬 아들에게 자리를 물려주시면 될텐데. "

이장님은 마을에서 가장 나이가 많으신 분이었지만 나이에 비해서 상당히 정정하신 편이었다. 하지만 최근에는 기력이 쇠하셔서 한번 아프시기 시작하시더니 좀처럼 나을 기미가 보이지 않아 비록 산장에 올라와있었지만 그에게도 꽤나 걱정거리다. 마을 일은 아들에게 맡기고 편히 쉬셔도 괜찮을텐데 고집만큼은 나이가 들어도 수그러들 기미가 보이질 않는다.

" 그건 또 어디서 가져왔어? "

요즘 같은 세상에 와인 구하는게 어려운 일은 아니지만 그래도 저렇게 묵직한걸 보면 무거울텐데 저런걸 들고 여기까지 잘 올라오다니. 산을 매일같이 오르락내리락하는 산장지기에게도 그것은 미스테리한 일이었다. 그가 창 밖을 바라보니 눈이 조금씩 다시 내리고 있었고 바깥 기온을 보여주는 온도계가 조금씩 내려가고 있었다. 다시 추워지려는걸까, 산장지기는 그렇게 생각하며 새 컵을 두개 가져오며 말했다.

" 조금만 마시는거야. "

그녀가 가져온 여러 안주거리들은 여기선 꽤 먹기 힘든 것들이라 맛있어보이긴 했지만 산장을 지키는데 술에 취해버리면 곤란하다. 무엇보다 하산할때 산 입구까진 같이 내려가줄 생각이라, 적어도 제 정신을 붙잡을 정도까지만 먹어야했다. 하지만 산장에서도 혼자 술을 홀짝대며 마시는 산장지기에게 이 정도 술은 음료수에 불과한 것이긴 하다. 하지만 여자가 몸을 못가누면 산에서 위험해질수도 있으니까, 적당히 먹이곤 내려보낼 생각이었다. 그녀에게 술을 받아서 코르크를 딴 그는 잔에 반 정도 채워서 여자에게 건네주고 자신의 몫도 따라서 와인병을 바닥에 내려놓는다. 흘리지 않게 마개를 다시 꼭 닫은채로.

" 여긴 왜 자꾸 올라오는거야, 심심해서? "

마을이 좀 더 놀기 좋지 않나, 하고 생각해본다. 그의 친구들도 마을에 있고 그녀의 친구들도 마을에 있다. 그리고 음식점이나 술집 같이 놀기 좋은 공간이 마을에도 있는데 어째서 여기까지 힘들게 올라오는지 예전부터 궁금하긴 했다.

34 이름 없음 (qbY3nsMYTA)

2021-09-22 (水) 17:46:25

>>33

" 그럼 나중엔 당신의 아들도 코코아를 마시러 오려나요? "

혼자서 멋대로 당신과 작은 -그리고 당신의 머리카락이나 눈 색을 똑 닮은 어린아이가 그와 함께 산장에서 코코아를 마시는 모습을 상상해 보는지 코코아가 담긴 자신의 잔을 눈높이까지 들어 올렸다가, 대충 아이의 키 높이 즈음까지 내려보며 웃었다. 그녀는 조용함이 아니라 사람의 말소리로 가득 찬 산장을 떠올리며 컵의 마지막 남은 코코아를 쭉 마셨다.

" 마을에 대한 애정이 남다르셨던 분이니까요. 아마, 쉽게 놓고 싶지 않으신 거겠죠. "

그녀의 눈동자가 슬픔으로 가라앉았다. 자리를 물려주면 된다는 그의 말에, 일은 자신에게 맡기고 쉬시라며 이장님과 그 아들이 실랑이하던 모습을 떠올렸다. 양쪽 모두 양보할 수 없는 것이 있었던 탓에 생기던 그 작은 다툼마저 이제 볼 수 없게 되었다는 사실은, 그녀에게 이장님의 병이 깊어지고 있다는 것을 자꾸만 일깨우게 만들었다. 그녀는 먹먹해진 기분으로 조용히 컵의 손잡이만 만지작거렸다.

" 당연히 집에 있는걸 가져왔죠. "

그녀의 부모님이 와인을 좋아했던 탓에 집에는 온갖 종류의 와인들이 보관되어 -정확히는 수집되어 있었다. 어렸을 적 자신과 동생에게 나이가 차면 조금은 꺼내 마셔도 된다고 했으니 한 병 정도는 가져와도 상관없을 것이었다. 그녀는 당신을 따라 고개를 들고 창밖에 내리는 눈을 바라보다가 자연스럽게 그가 가져오는 컵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그녀는 그가 잔에 술을 따르는 동안 작은 허밍과 함께 주머니를 펼쳐 안에 있는 것들을 골라먹기 좋게 분류해 두었다. 장작 타는 소리와 함께 들려오는 작은 노래가, 그녀가 지금 즐거워하고 있음을 드러내 주었다.

" 정말 조금만 마실게요. 걱정 마요-. "

잔을 건네받자마자 벌써 한 모금 마셔버린 그녀는 그에게 한 말과 다르게 혼자 병을 전부 비워버리기라도 할 것처럼 신난 듯 보였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마시는 술의 양이 많지도, 속도가 빠르거나 하지도 않았다.

" 음, 이유는 없어요. 그냥 보러 오는 거죠. "

보려는 것이 겨울 산의 풍경인지 하늘에서 내리는 눈인지 모를 애매한 말을 하면서도 그녀는 그 대상이 당신이라는 듯 분명하게 그를 보고 웃었다. 그녀의 친구는 분명 마을에도 있었지만 지금 이곳에도 있었다. 그녀는 항상 마주치는 마을의 친구들도 좋았지만, 좀 더 자주 -특히 겨울이 오면 보기 어려운 친구를 보러 오는 것도 좋았다. 그리고 그녀에게 친구란 이유가 없어도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고, 함께 맛있는 것을 먹는 그런 사이였다. 그렇게 그녀는 자기 좋을 대로 그를 친구라 정의하며 계속 그를 만나러 이곳에 왔다.

" 사실 이 귀한 것도 놓칠 수 없긴 하고요. "

그녀는 술 보다는 달콤한 것을 조금 -아주 조금 더 좋아했다. 그런 그녀에게 이곳의 코코아만큼 훌륭하고 완벽한 것은 없었다.

" 왜요? 설마... 내가 오는게 싫은 건 아니죠? "

그의 질문에 잘 대답하더니, 이번에는 그녀가 눈을 가늘게 뜨며 짓궂게 그를 향해 불쑥 질문했다. 말투는 마치 그를 추궁하는 듯 보였지만 목소리는 평소처럼 가볍고 약간 장난스러웠다. 이번에도 그녀는 무슨 대답을 듣더라도 -설령 정말로 싫다는 대답이 들려오더라도 웃어넘기고 말 것이다. 그리고 그의 예상처럼 언제나 그랬듯 자연스럽게 다음에도 이곳에 올 터였다.

35 이름 없음 (sxXMQq3UZ2)

2021-09-22 (水) 21:13:19

>>34

" 아들이 생기면 그렇겠지? "

하지만 그는 자신에게 아들이 생길거라곤 생각하지 않고 있었다. 지금까지 사귀어본 여자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마지막으로 사귄 여자가 벌써 1년여전이고, 그렇게까지 오래 사귀어본 기억도 없다. 어쩌면 인생에 여자라고는 연이 없는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최근에서야 하고 있는 그였다. 하지만 이렇게 외로운 산장지기라는 일을 대물려주고 싶은 생각도 없었다.

여자의 말에 산장지기는 그저 컵만 만지작거릴뿐이었다. 이장님의 아들은 남자의 아버지의 친구였다. 이장 자리 때문에 이장님과 실랑이를 벌이는 장면을 여러번 보곤 했다. 큰소리가 나거나 하지는 않았지만 아들분도 이장님을 닮아 한 고집하셨기에 그런 자잘한 다툼은 계속해서 이어오고 있었다. 이제 이장님의 병이 깊어지시고 언젠간 이장 자리를 물려받으시지 않을까, 산장지기는 말없이 생각한다.

" 그 집에는 술이 많았으니까. "

아버지가 가끔 그 집에서 와인을 얻어오곤 했던 사실을 남자는 알고 있었다. 이 술도 대충 집에서 가져왔을 것이라 짐작은 하고 있었지만 정말 거기서 가져왔다니. 그래도 술을 좋아하시는만큼 보는 안목도 좋다는 것을 그는 알고 있었기에 조금 기대에 찬 눈빛으로 와인을 바라본다. 그렇게 와인을 따라서 건네주자 말과는 다르게 신나보여서 빠르게 다 마셔버리는게 아닐까 싶어 걱정스런 눈빛으로 바라보지만 다행스럽게도 그럴 생각은 없어보여 남자도 와인을 한모금 마신다.

" 보러오면 나야 좋지만. "

산장에서의 삶은 외롭기에 여자가 온다면 그에게는 좋겠지만 그렇다고 위험한 겨울 산길을 계속 오르게 할 수는 없었다. 단호하게 다음부터는 올라오지말라고 하고 싶어도 외로움에 이미 지쳐버린 그가 그렇게 모진 말을 내뱉을 수 있을리가 없었다. 그래서 산장 밖의 눈을 밟는 소리가 들려오면 느껴지는 설렘도 더이상 막을 방도가 없었다.

" 싫은건 아니지만. "

벽난로의 불빛 때문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 때문인지 남자의 얼굴이 살짝 붉어진다. 자신이 하는 말이 부끄러워서일까.

" 싫다고 해도 어차피 올라올거잖아. "

그가 아는 여자는 그런 사람이었다. 지금도 저런 장난스러운 목소리로, 내가 싫다고해도 올라올께 뻔했다. 그만큼 뻔뻔스러웠지만 그만큼 능글맞은 사람이라 산장지기가 항상 말려들어가는 그런 사람이다.

36 이름 없음 (Yvdwalg5uE)

2021-09-22 (水) 23:33:53

고등학교 1학년 시절, 외국으로 떠나 바이올린 쪽으로 유학을 간 소년은 24살이 되어 7년만에 다시 돌아왔다. 어렸던 소년은 늠름한 청년이 되어 조국의 땅을 밟았다. 유학을 간 동안에는 단 한번도 한국으로 돌아오지 않았으나, 그래도 가족이나 친척, 친구들과는 나름대로 메일이나 전화를 통해 연락을 나눠 최소한의 교류는 유지했다. 그 덕분인지, 오늘 귀국할 때 마중 나온다는 친구가 있었고 사내는 정말로 나와줄지 나름대로 기대를 하며 소속을 밟고 자신의 짐이 들어있는 캐리어와 바이올린 케이스를 챙기고 공항을 걸었다.

"정말로 있을까."

최소한의 교류가 있었다고는 하나, 다시 만나는 것은 칠년만이었다. 과연 제대로 알아볼 수 있을지 조금 걱정을 하며, 혹은 그냥 말로만 그런 것이고 아무도 나온 것은 아닐까 생각을 하며 사내는 게이트 밖으로 나온 후 잠시 주변을 둘러봤다.

바로 얼굴이 눈에 보이진 않았는지 사내는 계속 고개를 두리번거릴 뿐, 좀처럼 발을 옮기지 못하고 있었다. 만약 있다면 인사를 하겠으나, 보이지 않는다면 한숨을 쉬고 밖으로 나갔을 것이다.

"역시 한두번은 돌아올걸 그랬나. 공부의 흐름이 끊어지면 안 될 것 같아서 쭉 있긴 했는데."

/뜬끔없이 쫓아내는 전개나 맥커터만 아니면 누가 나오더라도 환영!

37 이름 없음 (oT.DHfURi.)

2021-09-23 (거의 끝나감) 06:14:15

>>36 그런 친구가 있었다. 얼굴을 보지 않은지 7년은 넘었지만 이상하게도 자주 전화하고 톡을 주고 받아 고등학교 동창이라기보단 지인에 가까워진. 그렇다고 해도 공항 마중까진 좀 과하지 않아? 라고 생각했지만 의미없는 일이었다. 하필이면 그 친구가 귀국하는 날 모두들 기상천외한 일정들이 있어 마침 연주회를 마치고 쉬고 있던 수연에게 바톤이 돌아가고 말았던 것이다.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일지도 몰랐다. 오늘은 평일이고 전공을 살려 음악가가 된 친구들 말고도 졸업이며 회사에 일정이 잡힌 친구들도 않았으니까.

얘는 왜 하필 애들 졸업시즌에 귀국했담. 뭐 내 알바는 아니지만. 드뷔시의 달빛을 작게 허밍하며 버릇처럼 유리로 된 펜스를 손끝으로 두드리고 있던 그는, 게이트에서 하나 둘 사람이 빠져나오자 준비해둔 이름 석자가 적힌 피켓을 들었다. 사람이 어느정도 빠지고, 사람들 사이에 아직 두리번거리며 서 있는, 아마도 나와 동년배인 것같은 동양인 남성이 보였다. ...걘가? 마중은 나가겠다고 톡방에는 알렸지만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고 그냥 나왔을 가능성이 보다 컸기에 확신할 수는 없었다. 에라, 모르겠다. 아직 사람이 남아있긴 하니 이상해보이지는 않겠지.

"여...여기."

아, 이거 진짜 어색해. 집에 가고 싶다.

38 이름 없음 (WFD45kwC4Q)

2021-09-23 (거의 끝나감) 07:16:07

>>37 누가 나와도 환영이라고 했지만 마중 나오는 것 자체를 어색해하고 불편해하고 어쩔 수 없이 나왔다는 전개는 조금 애매하네. 일단 흔쾌히 나왔다는 것을 가정해서 써서 말이야. 그러니까 이 답레는 미안하지만 패스할게.

39 이름 없음 (7EILlj9wo.)

2021-09-23 (거의 끝나감) 10:30:09

코 안쪽에서부터 무언가 따뜻한 것이 흐르는 느낌이 들었다. 잠결에 무심코 콧물이겠거니 코 밑을 훑었고, 제대로 닦아내 손에 그 무언가 묻는 느낌이 들었다. 그런데도 다시금 코에서 무언가 흘렀고, 훌쩍거려도 계속 흐르는게 콧물이 아닌 것 같다 생각하자니 퍼뜩 깨달았다. 코피다!

"우와...?"

손으로 코를 막고, 고개를 뒤로 젖혔다가는 피로 기도가 막혀 질식사할 수도 있다나 뭐라나. 그래서 고개를 숙이고서 다급하게 휴지가 될만한 걸 찾아보려니, 내가 있는 곳은 계단이었다. 무릎에는 내가 필기한 노트와 문제집이 놓여있었고, 옆에는 교과서 두세 권과 다른 문제집 한 권, 또 다른 노트 하나. 맨 위에는 열려있는 필통이 놓여있었는데, 어째 배가 불렀어야 하는게 텅 비어 있었다. 밑에서부터 세칸 위쯤의 계단에 앉아있던 나는 그 아래를 살펴 보았다. 필통에 담겨 있어야할 펜들을 비롯한 필기구들이 죄 쏟아져있었다. 아직 취해있는 잠을 떨쳐내려 하며 생각해보니 도서관에서 시험공부를 하다가 졸려서 계단으로 나왔돈 기억이 났다. 그리고 여기에 앉아 차가운 계단 바닥에서부터 올라오는 냉기와 해가 뉘엿뉘엿 떨어짐에 따라 식고 있는 공기에 서늘함을 느끼면서, 잠이 깨는 것 같다며 공부를 이어하던 것 같은데... 깜빡 잠들며 필통을 엎고, 그것도 모르고 계속 졸다가 코피가 나서 깬 상황이라 추측한다. 그래, 지금 나는 코피가 나는 와중에 계단에다 내 짐을 어질러 놓았고 휴지가 없는 노답 상황이구나!

"오. 어. 아. 조, 좀비 아니에요!"

어이없는 상황에 실성이라도 한 것마냥 웃음이 새었다. 이걸 어쩌면 좋지, 노답이네! 코피 그치면 친구들한테 얘기해줘야겠다, 근데 일단 어쩌면 좋지. 화장실 갔다오는 사이에 누가 계단에 오면 이걸 치우려나. 으악, 이제 코피난 거 손에서 넘치겠는데! 얼 빠진 채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 하고 손으로 그칠 생각 없는 코피만 바치고 있었다. 정말 어쩌면 좋나, 주변에 휴지, 아니 그 대신할만 한 것이라도 없나 두리번거리다 누군가를 발견한다. 계단에 뻗어 있다가 코피 흘리며 일어나 웃음 소리를 흘린 사람이, 모르는 사람 눈에는 미친 사람으로 보일 것만 같아 다급하게 외쳤다. 좀비 아니라고. 근데 나 너무 쪽팔려! 차라리 좀비할래!

40 이름 없음 (ncngc5gXqQ)

2021-09-23 (거의 끝나감) 12:27:18

>>39

도서관보다는 창고에서 신나게 기타나 치고 싶었지만 이번 시험을 망쳐버리면 내 기타의 넥이 분질러지게 생겼기에, 억지로 도서실에 나와 공부를 하다가 오래간만에 가물가물한 내용들을 붙잡고 씨름을 하자니, 적응을 하지 못한 머리가 아파 도서실을 잠깐 빠져나와서 편의점에 들러 두통약과 에너지드링크를 마시고 다시 도서관으로 돌아오는 길이었다. 바깥 공기를 조금 쐬니 그래도 정신이 조금 돌아오는 느낌이 든다. 꼭대기층에 멈춰있는 엘리베이터를 부르기 귀찮아 층계참을 돌아 계단을 오르고 있자니, 문득 계단에 서서 어쩔 줄 몰라하고 있는 사람이 보인다. 무슨 일이야? 싶어서 후다닥 발걸음을 서두르는 찰나... 층계를 내딛은 발이 노트인지 코팅된 인쇄물인지 모를 뭔가를 밟고 쭐쩍 미끄러졌다. 그대로 세상이 한 바퀴 휘릭 돈다 싶더니 눈앞에 별이 번쩍했다.

"아이고......"

다행히 뒤로 나자빠져서 계단 아래로 굴러떨어진 건 아니었지만, 앞으로 고꾸라져서 책이며 노트들이 엎질러진 층계참에 헤딩을 박은 상황. 난간을 잡고 일어서도 시야가 흐릿하다. 제삼자가 보기에는 슬랩스틱 코미디겠지만 1인칭으로 보면 코앞에서 폭탄이라도 하나 터진 느낌이다. 놀라운 사실은 생각보다 그렇게 아프지는 않다는 점이다. 놀랍도다, 아세트아미노펜. 그 덕분에 생각보다는 별일 없었다는 듯이 난간을 붙들고 일어설 수 있었다(내가 느끼기에는). 오히려 나보다도 지금 어쩔 줄 몰라하는 저 사람이 좀더 곤경에 처한 것 같아 바라보면 온통 피에 절어있는 손이며 얼굴이.

내가 쪽팔린데다 무엇보다 엄청 실례되는 일이지만, 진심으로 깜짝 놀랐다. 난간을 붙들고 있어서 망정이지 이번엔 진짜 뒤로 나자빠질 뻔했다.

"우와악."

하고 놀라서 보면, 지금 귀신이나 헛걸 보는 건 아니고.. 코피를 흘리고 있을 뿐인 그냥 사람이다. 띵한 머리로도 매우 실례했다는 자각이 들어 반사적으로 사과가 나갔다. "어... 아니 그... 죄송..." 한꺼번에 여러 일이 벌어진데다 물리적 충격까지 받아 아직 멍한 뇌를 붙잡고 생각해본다. 내가 지금 휴지가 있던가? 하고 주머니를 뒤적뒤적거려 보면 잡히는 거라곤 손수건밖에. 오. 이 상황에서 쓸모있는 물건이잖아.

"저기요, 이거라도."

띵한 머리를 붙잡고, 손수건을 내민다. 그제서야 뭘 밟고 미끄러졌는지 발밑으로 시선을 돌릴 만한 정신이 든다. 노트니 참고서니 교과서니 하는 것들이 땅바닥에 쏟아져 있었다. 이것도 주워줘야겠네.

41 이름 없음 (8TY5.RrNDM)

2021-09-23 (거의 끝나감) 14:42:48

>>40

뭐, 뭐야. 좀비 아니라니까 왜 급해져? 사실 이쪽으로 발을 재촉하는 저 사람이 좀비라서, 내 피 냄새를 맡고서 여기로 오고 있던 거야? 내가 방금 소리 내서 위치 확인하고 오는 거야? 아니, 그럴 리가 없지. 좀비가 어딨겠어. 그렇지만, 지금 나와 가까워지고 있는 저 누군가 사람이든 좀비든 당황스럽기는 했다. 모르는 사람이 여기로 갑자기 왜 오는지, 뒤로 물러나고 싶었는데 그럴 수가 없었다. 책이고 펜이고 다 어질러놨으며, 자리를 피하려 했다가는 분명 코피가 발자국으로 남을 것이다. 옷이나 책에 묻으면 곤란하기 그지없다.

"힉?!"

여러모로 잠이 다 달아나버렸다. 계단에서 꾸벅꾸벅 졸다가 코피 흘리면서 깬 상황도 충분히 잠이 달아날 만 했지만, 내 바로 앞에서 넘어지며 엄청난 소리를 이 사람도 그렇다. 손이 모자라서 넘어지려는 모양새를 봤음에도 잡아주지도 못하고, 크게 넘어지는 소리에는 되레 흠칫 놀라버렸다. 놀라서 크게 떠진 눈으로 보았던 것을 되새겨보자면, 저 사람 분명 계단에 머리 박았다. 으, 아프겠다. 놀랐던 표정은 머리가 띵할 고통이 상상되어 찌푸려졌다. 어, 잠깐만. 다시 되새겨보자. 내 책인지 뭔지 밟고 넘어진 거 아냐? 어?!

"저, 괜찮..."

우와악. 괜찮냐고 물어보려던 나의 친절은 우와악, 하고 싹둑 잘려 나갔다. 좀비 아니라고 그랬는데! 사람이라고 외칠 걸 후회막심이었지만, 이미 지나버린 시간에서 엎어버린 말은 되 담을 수 없다. 예를 들면 저 사람을 놀라게 만들어버린, 지금 내 손에 뚝뚝 떨어지는 코피처럼. 하지 않아도 상관없는 사과를 받고 나니 고갯짓이라고 세차게 해주고 싶었지만, 코피 때문에 그냥 입꼬리만 끌어올리고 대답했다. "아니, 아녜요! 놀라실 만 한걸요..." 제가 좀 사연이 있거든요. 사람 놀라게 하려고 여기서 코피 흘리고 있던 것도 아니고, 누구 한번 계단에서 굴러보라고 책을 여기까지 가져온 것도 아닌데 어쩌다 이렇게 상황이 꼬여버렸네요. 구구절절하고 싶은 말은 많았지만, 사과가 먼저니 저 머릿속 어두컴컴한 구석에 던져 놓았다.

"어. 괜찮...... 고맙습니다."

휴지도 아니고 물티슈도 아니고 손수건의 등장에 한사코 거절하고 싶었다. 저 손수건이 소중한 물건이면 어쩌나 싶어서 이를 악물고 거절하고 싶었는데 그럴 처지가 아니었다. 기필코 언제 피를 닦았냐는 듯 깨끗하게 빨아서, 정 안 되면 새것이라도 사서 돌려드리고 말겠다 다짐했다. 그나마 다행인 건 코피가 그쳤다는 점이다. 손과 얼굴에 있던 핏자국은 손수건으로 옮겨갔고, 여전히 난 쪽팔려서 죽을 것 같다! 그렇지만 할 일은 해야 했다. 손수건으로 닦았다고 해도 화장실은 한 번 가야 할 거 같고, 계단을 난장판으로 만든 저것들도 치워야 하고, 손수건 주인 되시는 분께 감사 인사도 드려야 하고, 죄송하다는 사과도 드려야 하는데.

"저기. 제가 정말 죄송하고 정말 감사해서요... 1번, 여기서 기다리신다! 2번, 연락처를 넘기신다! 둘 중의 하나 골라주세요!"

42 이름 없음 (sacPqPwCKA)

2021-09-23 (거의 끝나감) 15:03:07

>>35

"음-. 그럼 다음에 올 때는 선물을 가져와야겠네요. 나중에 아이가 이곳에 왔을 때 보고 귀엽다고 할 만큼 아-주 귀여운 인형으로 말이에요. "

그렇게 말하며 그녀는 커다란 인형을 가져올 거라는 터무니없는 말을 덧붙이고 웃었다. 그리고 동생에게 줄 선물을 고를 때처럼 이것저것 다양한 디자인들을 떠올리며 그에게 이야기했다. 사실, 그녀의 진심은 인형을 선물하는 것보다 앞으로 겪게 될 외로움이 -누군가는 끝없이 이어가게 될 산장지기의 고독함이 사라지는 것이었지만, 문제에 대한 마땅한 해결책 없이 하는 말은 그저 떼쓰는 것밖에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기에 그녀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일 중에서 조금이라도 이곳이 즐거움으로 채워질 방법들을 이야기하려 했다.

" 이장님은 괜찮으실 거예요, 분명. 지금까지 그래 왔던 것처럼요. "

나지막이 흘러나온 말은 그에게 하는 이야기보다는 혼잣말에 가까워 보였다. 저도 모르게 힘이 들어갔는지 빈 컵을 쥔 그녀의 손끝은 희게 질려있었다. 곧 애써 불안을 떨쳐내려는 듯 눈을 꾹 감았다 뜬 그녀는 컵을 내려놓고 밝은 목소리로 이야기하려 했다. 붙잡고 있던 컵을 손에서 놓았음에도 금방 돌아오지 않는 손가락의 색깔은, 그녀가 가진 간절한 마음을 대신하고 있는 듯 보였다.

" 마셔보길 잘했다고 생각할 정도로 맛있을 거예요. "

그녀는 마을 사람들도 알아주는 부모님의 와인 컬렉션에 나름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 처음에는 부모님이 왜 이렇게 술을 모으는지 이해할 수 없었지만, 어른이 된 후 와인의 맛을 알게 된 뒤에는 그녀도 비로소 부모님의 마음을 이해하게 되었다. 그래서인지 기대가 담긴 듯 보이는 그의 눈빛에 당당하고도 확신 있는 말투로 맛있을 거라며 이야기했다.

"그렇죠? 좋죠? "

놀리듯 말꼬리를 물고 늘어지다가 싫은건 아니라는 그의 말을 듣자, 그녀는 마치 이보다 더 좋은 일은 없을 거라는 듯 환하게 미소 지었다. 그리고 살짝 붉어진 것 같은 그의 얼굴과 함께 들려오는 -그녀가 올 것이 분명하다는 확신이 담긴 그의 말을 듣고 그대로 소리 내어 웃음을 터뜨렸다.

" 그럼요, 당연하죠. 내가 누군데요. "

그녀는 도도한 표정을 지으며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기고 우아한 -그러나 과장된 몸짓으로 와인을 한 모금 마셨다. 그러곤 당신을 바라보며 장난스레 웃었다.

" 마을에서 올라오는게 싫으면, 차라리 나도 이 산에 집 짓고 살까요? "

여기에 집을 더 짓지 말라는 법은 없으니까요.
그녀는 농담 같지 않은 농담을 던지고 미소를 지으며 당신을 바라보았다. 그 모습이 마치 오늘 저녁은 뭘 먹을 것인지 물어보는 사람 같기도 했다. 이처럼 그녀의 태연한 말투와 모습들은 방금 꺼낸 말이 진심이 아닐까 생각될 정도로 아주 자연스러웠다.

43 이름 없음 (ncngc5gXqQ)

2021-09-23 (거의 끝나감) 17:41:20

>>41

그러니까, 실수의 발단은 어쩔 줄 몰라 허둥지둥하는 모습에 그만 쓸모없는 오지랖이 발동해 발을 서둘러 놀린 것이고, 실수의 결정적 원인은 좀비 아니에요, 라는 말에 그게 무슨 소린가 싶어 뭐라고 되물어보려다가 발밑을 미처 주시하지 못한 것이었다. 일순간 천지가 뒤집히는 바람에 자신이 무슨 말을 들었었는지 잠깐 잊었고, 그 좀비 아니라는 말이 무슨 뜻으로 꺼낸 말인지 깨달은 것은 이미 피범벅이 된 얼굴에 괴성을 질러버린 후였다. 아, 이 무안하고 어색한 공기...

사실 이런 상황에선 휴지나 물티슈를 내미는 게 맞는 일이었다. 가방 안에 여행용 티슈와 물티슈가 한 팩씩 있기도 했고. 다만 문제는 내 가방이 도서실에 있다는 거였고, 무안한 나머지 일단 뭐라도 해야겠다 싶어서 손수건부터 내민 거였다. 마침 어제 세탁하고 나서 안 쓰고 넣어만 뒀던 거라 천만다행이다.

"이러려고 들고 다니는 물건인데요 뭘."

손수건을 건네주고 나서, 손을 들어서 층계참에 들이박은 이마를 만져본다. 아야야 소리가 나올 뻔한 걸 눌러참는다. 아세트아미노펜의 진통효과는 위대했지만 고통을 전부 다 없애주는 정도는 당연히 아니다. 아무래도 혹이 날 것 같다. 그래도 혹으로 끝났으니 다행이지 이빨이나 콧대를 들이박았으면... 끔찍한 상상을 잠깐 하다가, 얼굴의 피를 다 닦아낸 듯한 네가 건네어오는 말에 다시 시선을 돌린다. 잠깐 어딜 갔다오려는 것 같다. 아까 성대하게 자빠링한 게 어떻게 보였을지 마음에 걸려서, 나는 괜찮다는 의사표현도 할 겸 미소를 지으며(고통 때문에 좀 찌그러진 미소가 되긴 했다만) 선택지 1번을 의미하듯 손가락 하나를 들어보였다.

"기다리고 있을 테니 충분히 지혈하고 오세요!"

그 동안 이 계단에 한가득 엎질러진 이것들을 정리해두면 될 것 같다. 그 정도야 해줄 수 있는 일이고, 혹시나 나같은 칠푼이가 또 자빠질 수 있는 거고. 들이박은 데를 더 만지면 덧날까 봐서 손을 내리고, 차곡차곡 계단에 엎질러져 있는 책이며 노트들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44 이름 없음 (1kkkxSUQfo)

2021-09-23 (거의 끝나감) 17:45:38

>>42

" 인형 같은게 있으면 밤에 더 무서울지도 모르겠는데. "

등반객들이 묵어가는 산장보다는 조난자들을 대피시키고 곰이 마을로 내려가는 길목에 위치해서 곰들을 막아내는 역할을 하는 곳이다. 그래서 그저 소수의 사람들만이 지낼 수 있는 정도만 유지하고 있었다. 그런 곳에 인형이라니 별로 어울리지도 않을뿐더러 밤에는 정말 조용해 벽난로만 타닥거리는 소리가 들리는 이곳에선 그마저도 무서운 사람이 있을지도 모른다. 물론 산장지기에게는 그 인형이 있던 없던 관심도 없을게 분명하겠지만 말이다.

" 이번에 병이 다 나으시면 진지하게 이장 일을 그만두라고 하시는게 좋겠어. "

마을 사람들이 그렇게 얘기해도 듣지를 않으시다 이렇게까지 와버렸다. 이젠 본인도 아프셨으니까 깨달으시는게 있을거라 생각하고 산장지기는 달력을 바라본다. 벌써 아프셔서 병상에 누우신지 한달 정도의 시간이 지났는데 나을 기미가 안보인다는 것을 오고가는 마을 사람들에게 들어서 알고 있었다. 그나마 다행인건 악화는 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거기서 악화 되시면 분명 돌아가실 것이 분명했다.

" 원래 그 집의 와인 셀러에 들어가있는 것들은 고르고 고른 것들이라는걸 잘 알고 있는걸. "

그가 성인이 되고나서 와인을 처음 마셨을때는 그 맛이 너무 역해서 안좋은 기억만을 심어줬지만 그것을 송두리채 바꾼게 저 집의 와인이었다. 싼 와인이 안좋은 것도, 비싼 와인이 좋은 것도 아니라는 말을 하시면서 건네준 와인 한잔의 맛은 아직도 뇌리에 남아있을 정도다. 그에겐 그때 마신 와인만큼이나 지금의 것도 마음에 들었다.

" 그래도 너무 자주는 오지마. 진짜 네 생각보다 위험한 곳이니까.

그녀의 자신만만한 표정과 과장된 몸짓을 보고 살며시 미소를 지어보인다. 그러나 이어진 말에 와인을 마시다가 사레가 들렸는지 켁켁거리며 잔을 황급히 내려놓는다. 휴지로 입을 닦은 산장지기는 여자의 말에 어이가 없다는듯한 말투로 얘기했다.

" 그게 무슨 말이야, 여기기 뭐가 좋다고 집을 하나 더 지어. 할 것도 없는데. "

물론 둘이 지낸다면 덜 외롭기는 하겠지만 애초에 산속에 있고 전기도 발전기로 돌리는 곳이다. 대부분을 벽난로의 불빛을 의지해서 살아야하는 곳에 온다니 그의 생각에서는 좋지 않은 짓이었다. 무엇보다 그는 이제 산장지기를 자신의 대에서 그만두고 싶어했다. 대대로 내려오고 있고 중요한 역할이지만 조금씩 지쳐가고 있었다. 아버지에 비해선 한참이나 짧은 시간을 산장에서 보낸 산장지기였지만 새삼 아버지가 어떤 삶을 살아오셨는지 예상조차 가지 않았다.

" 마을엔 재밌는 것도 많고 친구들도 많고. 무엇보다 안전하니까. 위험한건 나 혼자로 충분해. "

마을 사람들도 그렇기에 그에게 잘해주는 것이다. 그리고 지금 여자의 호의도 산장지기는 마을 사람들의 호의의 연장선으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45 이름 없음 (/P0NEjDf/U)

2021-09-23 (거의 끝나감) 18:52:42

>>43

"진짜 정말 여기서 기다리고 계셔야 해요!"

당부에 당부를 하고서 자리를 비웠다. 도움만 주고서 홀랑 사라져 버릴까, 발걸음이 바빴다. 화장실에 가서 꼼꼼히 얼굴과 손을 다시 한번 닦아야 했고, 도서관에 가방만 두고서 나온 자리에 돌아가야 했다. 가방에 죄송하고 고마운 마음을 표현할 만한 무언가 있지 않을까 당신을 붙잡아 두었다. 그런고로 뭐가 있으려나 가방을 털어보면 죄 주전부리뿐이다. 과일 맛 젤리, 한입 크기 초콜릿, 이런저런 맛이 다 있는 사탕... 그리고 내가 제일 좋아하는 에그타르트, 제이 좋아하는 코코넛 휘낭시에, 제삼 좋아하는 크렘 브륄레 마들렌... 공부한답시고 저녁에 집을 안 들어가니 저녁 대신으로 집에서 들고나온 것이다. 집이 베이커리라는 이점은 이런 데 있는 거고, 아무튼 저녁을 때우려고 가져온 거라지만 지금은 그게 문제가 아니다. 호불호를 알 수 없으니 일단 전부 다 챙겼다. 알레르기가 있을 수도 있잖아! 죄송하고 고맙다며 받은 걸 먹고 알레르기로 응급실 가면 저주받는다! 어쨌든 우리 집 베이커리 종이봉투에 담긴 구움 과자들과 각각의 젤리, 초콜릿, 사탕 봉지들을 품에 다 챙기니 과자로 만들어진 마녀의 집을 발견한 헨젤과 그레텔이라도 된 기분이다. 그리고 다쳤을지도 모르니까 반창고랑... 반창고밖에 없네! 반창고라도 챙긴다.

"다녀왔, 으악!"

이걸 치우고 계시면 어떡해요! 소리치고 싶은 걸 으악, 하고 참아냈다. 이걸 먼저 치우고 갔어야 했나 싶지만, 혹시라도 미처 닦이지 못한 피가 묻는 게 싫다는 생각에 그러지 않았다. 무엇보다 노트 중 한 권은 공부하기 위한 필기 노트라거나 오답 노트, 정리 노트가 아니라 그림 노트여서 더욱 그랬다.

"저 드릴 수 있는 게 이런 거밖에 없는데..."

그리고 다시 한번 생각해본다. 사례를, 보답을 할 수 있는 방법. 곰곰 생각해보니 아차 싶어진다. 2번, 연락처를 남기신다! 이 말이 틀렸음을 이제야 알았다. 연락처를 드리는 게 맞았다.

"3번은 어떠세요...? 제 연락처 드리기... 저 때문에 놀라시고, 저 때문에 다치시고, 저 때문에 손수건도 엉망진창에......"

나 엄청나게 사고 쳤잖아...? 새삼 저지른 잘못들을 나열해보니 쪽팔려서 좀비가 되겠다 할 때가 아니었다. 엄청 아프신 거 아냐? 아까도 말 그대로 웃는 게 웃는 게 아니셨고, 어디 더 안 다치신 건 맞을까? 근데 어른이면 어떡하지. 내 또래면 몰라, 어른이면 학생이 해주는 답례 같은 게 성에 찰까. 나는 드라마에 나오는 것처럼 세탁비랑 진료비로 쓰라면서 카드로 해결할 수가 없잖아! 자연스레 표정이 울상이 되어간다.

46 이름 없음 (ncngc5gXqQ)

2021-09-23 (거의 끝나감) 23:06:47

>>45

으악! 하는 비명소리에 온 몸의 털이 다 곤두서는 기분이다. 내 기타에 걸고 맹세컨대 방금 뒷목 털꼬랑지까지 다 곤두서면서 움찔하는 게 보였을 거야. 놀란 가슴을 가라앉히며 뒤를 돌아본다.

"어.. 나도 피 나요?"

무안해할까 봐 농담 한 스푼 얹어서. 근데 진짜로 피 안 나는 거 맞나? 하고 손을 들어서 어루만져본다. 찍은 데가 붓긴 했지만 그래도 상처는 확실히 안 난 모양. 다만.. 혹은 실시간으로 부어오르고 있다. 만지니까 아파서 후다닥 손을 뗐다. 으악 소리가 따라서 나올 뻔했다. 아직 못 주운 노트가 몇 권인가 있어서 시선을 돌리려는데, 네 품에 안겨있는 익숙한 봉투가 보인다. 그리고 그게 답례라나. 어라.

"이런 걸 받자고 한 게 아닌데..."

그런데 하필이면...

"내 원픽 단골 빵집.........이잖아..."
─꼬르르르륵.

나에게 있어 식사시간을 알리는 것이나 다름없는 그 로고를 보고 훈련받은 파블로프의 개마냥 배꼽시계가 운다. 으악. 이럴 줄 알았으면 아까 편의점에서 약이랑 함께 주먹밥 같은 거라도 먹는 건데 그랬어. 당황스럽게 아래로 고개를 숙이니, 교복 셔츠 웃도리의 단추가 하나 나간 것까지 보인다. 안에 티셔츠야 입고 있다만, 이럴 줄 알았으면 학교 끝나고 집에 들러서 편한 옷으로 갈아입고 나올걸! 으악! 만약 내가 지금까지 매일 일기를 쓰고 있었다면 오늘 일기로는 두 글자만 적을 거야. 으악!!!

"아니, 그 연락처라뇨, 굳이 그러지 않으셔도 되는데... 놀라거나 다친 거야 일부러 그러신 것도 아니고, 그렇게 크게 다친 것도 아니고 손수건이야 다시 세탁하면 그만인걸요..."

그렇잖아도 무안해져서 빨개져 있는데 연락처를 주겠다는 말에 붉은 얼굴을 하고 있으니 그림이 어째 이상한 것도 같다. 나는 손부채질을 하며 정신을 가다듬고, 위기를 모면하기 위해 손가락 4개를 쫙 폈다.

"4번!"

그래서 난 위기를 기회로 만들기로 했다.

"나 그 빵집 아는데 거기서 만나요. 지금 가도 괜찮고? 아니 괜찮나?"

...정말로 이런 대응으로 괜찮은가? 나? 월 수 금마다 부원들이랑 거기 들리긴 하는데, 그런 주제에 거기 언제 닫는지 모르잖아?


# 묘사를 미처 못했지만 이 캐릭터는 갈색 단발의 활기찬 밴드부 메인보컬+리드기타 고교생이며 현재 넥타이만 없는 교복 차림입니다v.v

47 이름 없음 (eFgN0RFsUA)

2021-09-24 (불탄다..!) 00:16:47

>>46

"피 나요?! 반창고를 가져오기는 했는, 아. 그전에 지혈부터, 휴지가... 가방을 가져올걸!"

이것저것 품에 죄다 끌어안은 채로 허둥거렸다. 손을 잘못 풀었다가는 분명히 이 봉지들도 계단에 미끄러질 테니 반창고를 건네지도 못하고, 휴지를 찾자니 그걸 미처 생각하지 못해 가져오지도 않았고. 뒤늦게 걱정스러운 시선에 죄송한 마음까지 덧끼워서 상처 부위를 향해 시선을 옮긴다. 어. 어... 피 안 나는 거 같은데. 그것 보다 만지지 마세요! 덧나면 어떡하려고! 흉 지면 어떡하려고! 소리치기 전에 당신의 손이 먼저 아래로 향한다. 그럼 다시 생각한다. 피 정말 안 나는 거 맞지? 여간 안절부절못해 보이는 눈치다.

"그래도, 이런 거라도...... '원픽 단골 빵집'이요?"

우리 집? 우리 집 베이커리 말하는 거지? 어, 어라. 당신을 쳐다보았다가 끌어안고 있는 종이봉투를 보았다가, 얼빠진 것처럼 눈을 동그랗게 뜨고서 깜빡거린다. 배꼽시계 소리가 울릴 때야 정신을 차린 듯하다. 곰곰 생각해보자니 단골손님 중에 학생 손님들도 있는데, 교복을 보자니 너와 같은 학교 같더라 하고 부모님이 말해주신 기억이 난다. 그 학생 손님 중에 같은 학교인 사람이, 혹시 지금 눈앞에 이 사람인가 싶어졌다. 이제 다시 보니, 진짜 우리 학교 교복이잖아! 지금 나 교복 입고서 자기 학교 교복 못 알아본 거야? 지금 나 지금 부모님 가게 단골손님한테 민폐 3 스택 쌓은 거야?!

"이거, 이거 다 드셔도 돼요! 제 물건들은 제가 치울 테니까 이거 드세요!"

고작 그것 갖고 배 차겠냐고, 겨우 그 양으로 무슨 저녁이냐며 간식에 불과하다 가방에 더 챙겨 넣으시려던 부모님 손길을 만류한 게 후회스러웠다. 오늘 이런 일이 일어날 줄 알았다면 절대 만류하지 않았을 것이고, 오히려 직접 집어넣었을 것이다. 이 사람한테는 우리 집이 당신의 원픽 단골 빵집이라는 사실을 영영 비밀로 묻고자 마음먹었다. 민폐만 끼친 자신이 싫어져서, 자신의 부모님이 하는 베이커리까지 안 가겠다고 해버리면 부모님은 난데없이 단골을 잃게 된다.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뻗어 나가 도달한 결론이다.

"4, 4번?"

없던 선택지의 등장에 다시 눈을 동그랗게 떴다. 당신과 만나고서 몇 분 안에 얼이 몇 번이나 빠지는지 셀 수 없을 것 같다. 게다가 새로운 선택지의 내용은 얼빠지게 하기 좋은 내용이었다. 방금 자신과 베이커리의 관계를 당신에게는 절대 비밀로 하겠다고 다짐했는데, 거기서 만나자는 말이 나왔다. 심지어는 지금 가도 괜찮다는 말까지! 이게 바로 혼비백산인가. 지금 시간쯤이면 가게에 누가 있는가 머리를 굴려야 한다. 부모님이 있으면 낭패요, 자신을 잘 알고 있는 다른 누군가 와 있어도 낭패요. 그렇게 되니 지금 상황 자체가 낭패였다. 가게 주인이 가게에 없을 리가 있냐고! 나 또 노답 상황이네!

"가, 가도는 되는데요..."

대답을 안 하고 있으면 더 수상해 보일 거 같고, 4번을 거절한 마땅한 이유를 찾지 못했다. 5번을 만들어보자니 4번보다 더 나은 선택지를 구상하지도 못했다. 원픽 단골 빵집에서 만나자는데, 심지어 지금 가도 괜찮다는데, 내가 을인 입장인데 어떻게 거절이 나오겠어요. 아빠엄마, 정말 미안. 나 단골손님 한 명 없애버릴 거 같아.


/ 교복 묘사가 없다고 사복이구나 생각해버린 채 어른이면 어쩌지 하는 걸 서술했구나 죄송합니다!!!

48 이름 없음 (O4dCYJephw)

2021-09-27 (모두 수고..) 19:31:27

안녕하세요, 저는 이 마을의 유일한 시계공입니다! 제가 사는 마을은, 마을 중앙에 위치한 시계탑 위에서 한 눈에 다 내려다 보일 정도로 엄청 작기는 하지만요. 시계탑 위에서 마을을 내려다본 적이 있냐고요? 당연히요! 시계탑이 고장날지도 모른다, 탑에 오르다 다치면 위험하다, 그런 이유들로 시계탑에 오르는 걸 금지해두었는데 어떻게 올라가봤느냐고요? 제가 거기에, 이곳에 사는걸요. 그 이유들은 다 거짓말은 아니지만 진짜 이유는 따로 있어요. 제가 사람을 무서워해서가 진짜 이유에요. 아무도 모르는 비밀이에요, 쉿. 사람들은 제가 시계를 너무 좋아하는 괴짜라서 혼자 시계탑 위에 박혀서 시계만 만드는 줄 알아요. 이것도 완전히 틀렸다고는 못 하겠지만... 어쨌든! 그래서 저는 시계탑에서 혼자 살고 있고, 그건 조금 쓸쓸하긴 하지만 나름 즐거워요. 저 아래에서 다들 바쁘게 하루를 살아가는 모습을 자세히 살펴보면 다들 제가 만든 시계를 갖고 있거든요. 회중시계, 뻐꾸기시계, 탁상시계, 자명종시계, 째깍째깍 바쁜 초침들에게 숨을 불어넣어준 건 저에요. 시계들의 주인은 저를 못 알아보지만요. 사람들과 만나야할 때에는 남자인 척 변장을 하거든요. 머리카락을 숨기기 위해 꼭 모자를 쓰고, 안경도 쓰고, 망토를 둘러서 체구도 감춰요. 그리고 말을 하지 못하는 척 메모를 들고 다닙니다. 시계를 가져오지 못하는 손님들 위해서 가끔 정기적으로 시계를 가지러 가고, 돌려드리러 갈 때도 이 모습으로 다녀요.

...그런데 어쩌면 좋아요. 정체를 들킨 것 같아요. 일단 아닌 척 무작정 잡아떼볼게요.

'무슨 일이라도 있나요?'

나는 당신에게 서둘러 적은 쪽지를 건넸습니다.

49 이름 없음 (aHPA5I61nc)

2021-09-28 (FIRE!) 21:20:11

붉은 사자는 그가 몸을 담고 있는 가문의 문장이었다. 오랫동안 가문을 모시고 있던 집사의 아들로 태어난 사내는 6년의 시간이 흘러, 스무살이 되어 다시 자신이 태어날때부터 충성을 다 해야한다고 교육받은 가문의 문을 열고 들어왔다. 집사는 아버지가 하고 있으며, 자신의 동생이 좀 더 적성에 맞을 듯 하니, 자신은 그 가문을 지키는 검이 되고 방패가 되고자 하였고 가문을 이끄는 당주에게 허락을 받아 사내는 교육시설에 들어가 검을 배우며 자신의 실력을 갈고 닦았다.

길다면 긴 시간, 오로지 누구보다 강한 검이 되어 돌아가겠다는 일념 하에, 연락 한 번 하지 않고 찾아오는 이도 잠깐 얼굴만 볼 정도로 독하게 마음을 먹으며 단련에 힘 쓴 사내는 늠름한 자태를 보였다. 차분한 밤색 어두운 머리카락을 손으로 정리하며, 입고 있는 옷의 옷깃을 정리하며 문에 들어선 그는 머지 않아 당주를 마주했다. 한쪽 무릎을 꿇고 돌아온 것을 보고하며, 지금까지 고생했다는 말을 들으며 앞으로 그 실력을 가문을 위해 사용하라는 말을 전해들으며 오늘은 피곤할테니 들어가서 쉬라는 말을 다 들으며 사내는 꿇었던 한쪽 무릎을 펼치며 예를 갖췄다.

당주의 방 밖으로 나와 6년 전, 자신이 기억하던 풍경을 떠올리며 저택을 돌아다니던 사내는 자신이 옛날에 쓰던 방을 향해 천천히 걸었다.

"6년이 지나도, 이 풍경만큼은 변하지 않는구나."

변한 것이 없는 것은 아니었으나, 변하지 않은 것도 있었다. 그 모든 것을 느끼며 사내는 계단을 막 내려 1층 사용인들이 쓰는 방이 있는 곳으로 향하려고 했다.

/진짜 뜬금없는 전개나 갑자기 내쫓는 그런 것이 아니면 어떤 상황으로 이어도 괜찮아!

50 이름 없음 (puQbxTE9Y.)

2021-09-29 (水) 01:46:13

>>49
슬슬 피아노 레슨 시간이려나. 그렇게 생각하며 찻잔을 내려놓기가 무섭게 직속 하녀인 샐리가 다가와 다음 일정을 알렸다. 예상과 다르지 않은 결과에, 마르그리트는 미련없이 찻잔을 내려놓고 일어섰다. "그래요, 가죠." 차를 즐기고 난 흔적을 치우는 하녀들을 뒤로 하고, 단정한 걸음걸이로 레슨 룸을 향해 걸었다.

문득, 부진한 학문에 시간을 할애하느라 피아노에는 상대적으로 신경을 덜 쓰고 말았던 것이 떠올라, 마르그리트는 희미하게 콧숨을 쉬었다. 한 소리를 들을 각오는 해두는 편이 좋겠다는 생각을 담담한 표정 너머로 감추며 걷고 있자니, 건너편에서 걸어오는 낯익은 듯 낯선 사내가 보였다. 누구더라? 분명 어딘가 낯익은데. 가만히 바라보고 있자니, 옆에서 샐리가 말했다.

-"집사장의 맏아들이 새로 호위로 왔다는데, 지금 도착한 모양이네요."
"아..."

그제야 기억이 났다. 몇년 전에 호위가 되기 위해서 수련을 떠난다고 했었지. 인정받았다니 실력은 그만큼 출중하면 좋겠네. 집사장도, 그 둘째 아들도 성실한 사람들이고, 저 사람도 몇년이나 성실히 수련해서 돌아왔으니, 후하게 대접한다면 그만큼 충성하겠지. 새로 들어온 사용인에게는 동기부여가 될 만한 덕담을 건네는 것이 좋다는 것을 떠올리고, 마르그리트는 집사의 맏이를 향해 낯빛을 부드럽게 하고 나직이 말을 건넸다.

"능력을 인정받아 돌아왔으니, 앞으로 잘 일해주리라 믿어요. 좋은 성과를 보여준다면 섭섭지 않을 정도의 대우를 약속하죠. 앞으로 잘 부탁해요. 자세한 업무는 시녀장이 전달해줄 거예요. 그 전까지는 쉬고 있어도 좋습니다."

51 이름 없음 (puQbxTE9Y.)

2021-09-29 (水) 01:50:43

>>50 >>49 아차차 혹시 동생도 아들이 맞을까? 무심코 아들이라고 써버렸는데 멋대로 설정에 손댄 것 같아서 좀 그러네;w;

52 이름 없음 (Ks/fepqXnI)

2021-09-29 (水) 01:54:41

>>51 딱히 설정은 안 정했으니까 아들로 해도 상관은 없어! 일단 지금은 내가 슬슬 자러 가야해서 내일 이을 것 같긴 한데 이은 캐릭터가 가문의 딸인걸까? 그러니까 집안 아가씨? 혹시 내가 착각했을까 싶어서 물을게!

53 이름 없음 (puQbxTE9Y.)

2021-09-29 (水) 02:05:31

>>52 그렇구나, 답변 고마워! 그리고 맞아, 가문 당주의 딸(영애)이라는 설정으로 이어봤어:)

54 이름 없음 (Ks/fepqXnI)

2021-09-29 (水) 02:07:43

>>53 그렇구나! 오케이! 그럼 답레는 내일 올릴게!

55 이름 없음 (puQbxTE9Y.)

2021-09-29 (水) 02:08:54

>>54 알겠어, 내일 보자!:)

56 이름 없음 (Ks/fepqXnI)

2021-09-29 (水) 08:00:24

>>50
건너편에서 걸어오는 여성이 자연히 사내의 눈에 들어왔다. 그녀가 낯이 익다고 생각한 것처럼, 사내 역시 그녀의 존재가 낯이 익다고 생각했다. 허나 낯이 익다고 해서 바로 그 정체를 알 수 있었던 간 아니었기에 사내는 발걸음을 멈추고 그녀를 가만히 바라봤다. 보면 볼수록 어디선가 본 것 같은 느낌 속에서 들려오는 것은 그녀와 함께 있는 이의 목소리였다. 그 목소리를 들으며 사내는 상대가 누군지 짐작할 수 있었다.

자신의 기억이 맞다면 당주에게는 딸이 있었다. 6년 전, 저택을 떠나기 전에도 몇 번은 스쳐 지나갔을지도 모르는 존재를 곧 어렴풋이 떠올리며 사내는 너무나 당연하다는 듯이 자연스럽게 한쪽 무릎을 꿇고 그녀에게 예를 갖췄다.

"6년 만입니다. 아가씨. 말씀하신대로 제 모든 것을 바쳐 열심히 일하겠습니다. 제 아버지가 그랬고, 제 동생이 그러고 있는 것처럼."

미사어구를 붙이는 대신, 정말로 깔끔하고 담백하게 열심히 일하겠다는 마음과 충성을 다하겠다는 포부를 밝힌 후, 숙인 고개를 들어올리며, 꿇었던 무릎을 다시 펼쳐 그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허리춤에 차고 있는 검을 다시 한 번 자신의 허리춤에 밀착시킨 후, 사내는 제대로 그녀를 마주했다.

"그간 별 탈 없이 평안하셨습니까?"

아랫사람이 윗사람에게 묻는, 말 그대로 큰 의미가 없는 안부인사를 하며 사내는 미소를 지으며 살며시 다시 고개를 살며시 아래로 숙였다.

"말씀하신대로 시녀장이나 집사장인 제 아버님이 지시한 일에 충실할 생각입니다만, 혹여나 따로 제 힘이 필요하다면 얼마든지 얘기해주셨으면 합니다. 제가 검을 배우러 긴 시간 동안 자리를 비운 건 모두 이 가문의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고자 함이니까요."

/이렇게 이어두고 나는 다시 가볼게! 아마 다음에 잇는 것은 저녁 시간일 것 같아! 그때부턴 자유로우니 텀이 짧을거야!

57 이름 없음 (GaarwqdIiQ)

2021-09-29 (水) 10:40:07

왼쪽 귀, 피어싱 5개.

"진짜. 제발. 무릎 꿇으라면 꿇겠습니다."

오른쪽 귀, 피어싱 6개.

"손만 잡아주면 된다니까?"

타투, 3개.

"진짜 주사 맞으러 가기 싫다고오! 무섭다고!"

곧 눈물이라도 흘릴 듯 애처롭게 당신을 붙잡고 있는 이 사람, 귀에 구멍만 10개 넘게 뚫려있다.

58 이름 없음 (TPUSrHjOL2)

2021-09-29 (水) 11:12:04

" 정말... 어쩔 수 없네. "

귀에 구멍 뚫는 것보단 덜 아플텐데. 주사 맞으러 가기 싫다며 손만 잡아달라는 당신의 어깨에 손을 올린다. 토닥토닥 가볍게 두드린다. 칭얼거리는 게 조금은 귀엽다고 생각했으니까.

" 내가 같이 가주는 수밖에 없나. 밥 한 번 사렴. "

당신과 같이 병원에 가주고, 손도 잡아주겠지만, 밥도 얻어먹을 요량이다.

" 주사보다 귀 뚫는 게 더 아프지 않니? "

59 이름 없음 (GaarwqdIiQ)

2021-09-29 (水) 11:40:58

"오케, 접수."

"말 바꾸면 3대가 탈모."

태도가 돌변한다. 당신의 팔에 자신의 팔을 얽어 붙들어 매려 한다.

"밥 까잇거... 편의점?"

씩 웃나 싶더니 이어진 질문을 듣고서는 어째 다시 울상이다.

"나도 몰라. 귀에 구멍을 11개 내고 타투를 3번이나 해도 주사는 진짜 세상에서 제일 끔찍하고 무섭고 싫고 인생에서 만나고 싶지 않고 다음생에도 보고 싶지 않다."

60 이름 없음 (vqTU038XyM)

2021-09-29 (水) 12:37:44

>>59

" 그런 저주 안 해도 같이 갈 생각이거든?! "

당신의 돌변한 태도에 당황한다. 얼결에 팔을 붙들어 매져서 눈을 깜빡인다.

" 최소 분식집이지. 그리고 요즘엔 편의점이 더 비싸. "

울상으로 하는 이야기를 듣고 픽 웃는다.

" 이번 주사가 올해 마지막으로 맞는 주사도 아니잖아. "

아프거나 피검사할 일 생기면 또 맞아야겠지, 덧붙인다.

" 다음에는 혼자갈 수 있지? "

61 이름 없음 (puQbxTE9Y.)

2021-09-29 (水) 13:02:03

퍽 의욕적인 모양이다. 저만큼 의욕을 보인다면 호위든, 혹시 생길지 모를 자잘한 전투든, 성과를 기대해도 좋으리라. 기대하겠다는 말은 자칫 부담을 줄 수 있으니 높은 의욕을 보임에 치하하는 정도가 적절하겠지... 그 때 샐리가 조금 초조한 낯으로 시계를 힐끔 살피는 것이 보였다. 더 지체하면 안되겠구나. 꼭 레슨이 아니더라도, 귀족으로서 부리는 이를 오래 잡아두는 것은 도리가 아니지. 집사장의 맏이의 말을 끝까지 들은 마르그리트는 차분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열심히 일해주겠다니 고마워요. 그럼, 수업을 들으러 가던 길이니, 이만 지나갈게요. 돌아온 걸 환영해요."

어린 시절이야 신분에 관계 없이 또래라면 함께 놀 수 있었다지만, 아무것도 모르던 시절이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지금에 와서 똑같이 행동하는 것은 상대를 불편하게 만드는 일이 될 테지. 고용주의 딸이고, 그 이전에 귀족이니. 집사장의 맏이가 비켜서기를 기다리며, 마르그리트는 문득 루로르 가의 영애와 추문이 돌던 그의 호위의 소문을 떠올렸다. 결국 해고당했다지. 우리 가문은 이 자의 일가를 고용하고 있으니, 불미스러운 건으로 이 자가 해고되면 나머지가 처신에 불편을 겪을 수 있다. 나 역시 어린 아이가 아니니, 그에 맞는 처신을 해야지. 경거망동하여 구설수에 올라 앞으로의 일들을 그르치는 것은 안 될 일이다.

62 이름 없음 (puQbxTE9Y.)

2021-09-29 (水) 13:02:29

>>61 >>56

63 이름 없음 (Ks/fepqXnI)

2021-09-29 (水) 19:59:42

>>61

사내의 눈에 자신이 방금 인사를 올린 여성의 옆에 서 있는 이가 초조한 표정을 짓는 모습이 들어왔다. 아무래도 자신이 여기서 인사를 하는 것이 그녀의 입장에선 그리 좋지 못한 것일까 추측하는 와중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수업을 들으러 간다는 그 말에 사내는 고개를 끄덕이며 살며시 몸을 옆으로 치웠다.

"시간을 뺏은 것 같아서 죄송합니다. 부디 수업 힘내시길 바랍니다."

초조한 표정을 짓는 이유를 알게 되니 절로 사내의 입에서 사과가 나왔다. 귀족에게 있어서 시간이란 때로는 상당히 중요한 것이라는 것을 사내 역시 알고 있었다. 시녀가 옆에 있으니 따로 동행할 필요는 없을테고, 설사 없다고 하더라도 동행하라는 지시가 없는만큼 자신이 멋대로 움직일 순 없다고 생각하며 사내는 고개를 살며시 숙인 다음 인사를 한 번 더 올렸다. 뒤이어 사내의 시선이 시녀 쪽으로 향했다.

"당신도 앞으로 잘 부탁하겠습니다."

하는 일은 다르다고 하나, 어쨌든 한 가문을 위해서 일을 하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때로는 같은 장소에서 일을 할지도 모르는만큼 기본적인 인사를 한 후, 사내는 자신이 어릴 적 쓰던 방을 향해 천천히 나아갔다. 오늘은 어느 정도 휴식을 취하며 지시를 기다릴 생각이었다.

64 이름 없음 (PKbrUERYyQ)

2021-09-29 (水) 20:45:43

>>63 너참치 답레를 마지막으로 마무리지으면 될 것 같네. 수고 많았어! :)

65 이름 없음 (Ks/fepqXnI)

2021-09-29 (水) 20:56:02

>>64 사실상 그렇게 되겠네. 수고했어!

66 이름 없음 (Ks/fepqXnI)

2021-09-29 (水) 21:07:34

음. 그래도 너무 짧게 끝나버린 것 같네. 혹시 >>49에 새롭게 잇고 싶은 이는 이어줘도 괜찮아!

67 이름 없음 (BSnquSO5H6)

2021-09-30 (거의 끝나감) 00:02:16

>>47

"넹."

원픽 단골 빵집인지 되묻는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긍정한다. 그야 부정할 이유도 없으니까. 개인적으로도 많이 들리기도 했고, 월요일 목요일마다 밴드부가 단체로 가서 그 집 봉지빵 재고 3분의 1을 주기적으로 박살내고 있으니까 그 집 내외분도 나까지는 기억 못하더라도 우리 밴드부는 기억하실걸?

"어-" 잠깐 생각하다가, 아무리 생각해도 이 정도로 권하는데 거절하면 그것도 상대방 무안하게 만드는 일인 것 같다. 왠지 네가 엄청 안절부절못하고 있기에 뭔가 고집부리기 애매한 상황이 되기도 했고. "이거 원래 저녁으로 드시려던 거 아니에요? 나눠 먹어요, 저녁은 적게 먹는 편이라." 정확히는 적게 먹으려고 노력하는 편이지만 뭐 어때.

"네, 지금도 갈 수 있다는 말이지 지금 말고 나중이라도 좋아요─ 아 그러려면 역시 연락처 교환해야 되나?"

나는 일단 내가 간추려놓았던 노트들이며 학용품들을 내밀었다. 이것들을 정리하려면 빵봉투는 잠깐 어디 한켠에 내려놓아야 될 것 같은데. 일단 정리된 것들을 내밀고, 빵봉투를 받아든 뒤 사라져주는 게 네가 바라는 거겠지만, 나는 쓸데없이 오지랖이 넓은 사람이고, 일단 이 현장을 깔끔히 정리하고 나야 마음편하게 자리를 뜰 수 있을 것 같아서.

"일단은 이것들 정리 끝내고 나서 마저 이야기해요! 혹시 또 누군가 올라오다 저처럼 자빠질지도 모르고."

# 늦어져서 미안해 8ㅁ8

68 이름 없음 (dbM3CPURus)

2021-09-30 (거의 끝나감) 00:27:38

>>48
먼지투성이 각반을 두르고 있는 그 여행객은 먼 길을 가로질러왔으며, 이 마을에 도착한 지 얼마 되지 않는 것 같습니다. 당신과 비슷하게 후드를 푹 눌러쓰고 망토를 뒤집어쓰고 있어서 후드의 그늘에 어떤 얼굴이 숨겨져있는지는 잘 보이지 않네요. 다만 망토자락 사이로 엿보이는 가볍고 튼튼한 징박힌 가죽갑옷이나, 허리춤에 권총이 그것도 세 자루나 줄줄이 매달려 있는 것을 볼 때 단순한 상인이나 여행자는 아닌 모양입니다. 마찬가지로 두건을 머리에 덮어씌운 노새를 끌고, 그 여행객은 멀리서부터 확고히 당신에게 시선을 둔 채로 당신 방향으로 걸어왔습니다.

그러나 다행히도 정체를 들킨 건 아닌 모양입니다. 당신에게 다가와서 그 사람이 묻기를,

"안녕하세요, 저기 길 좀 물어볼게요."

하고 물어보았으니까요. 아마 당신이 시계공인 줄은 모르고 그냥 평범히 길을 지나가는 사람인 줄로 아는 모양입니다. 당신이 내밀어오는 쪽지를 받고 읽더니, 후드를 눌러쓴 사람은 당신을 바라보며 마저 말을 이어갑니다.

"이 마을에 있는 시계공을 찾아왔는데 혹시 그 시계공이 어디 사는지 여쭈어봐도 될까요? 그 시계공에게 꼭 물어봐야 될 게 있어서."

그렇지만 결과적으로 시계공을 찾아온 사람은 맞나 보네요.

"모르신다면 적어도 시계공이 있는 곳을 알 만한 사람이라도 가르쳐주세요. 사례는 해드릴 테니까."

거기다가 시계공을 찾아가겠다는 의지가 아주 분명합니다. 시계공에게 뭘 물어보려고 시계공을 이렇게 찾고 있는 걸까요? 후드 차림의 여행자는 주머니에서 은화 몇 닢을 짤랑짤랑 꺼내보입니다.

69 이름 없음 (N002B.amkM)

2021-09-30 (거의 끝나감) 10:07:02

>>68

히끅. 어떡하면 좋아요, 딸꾹질 소리가 나기 시작했어요. 정체를 들킨 것 같다고 생각해서만이 아니에요. 저는 보고 말았습니다. 허리춤에 달린 권총 세 자루를요. 징이 박힌 가죽 갑옷도 입고 계시다고요! 여행을 하시는 것도, 저희 마을에 방문한 상인 같지도 않으세요. 아무래도 제게 무슨 원한이 있는 것 같아요. 잘못 대처하면 저 권총이 제 머리에 들이밀어 지는 건 아닌지 불길한 상상이 떠올라요. 이 작고 평화로운 마을에서 저런 위험한 물건은, 특히나 시계탑 꼭대기에서 숨어 사는 제가 볼 일은 드물단 말이에요. 권총이라는 건 어떻게 생긴 건지 해체해보고 싶기는 하지만... 엄청 무서워요. 무섭다고요! 시계공의 정체는 비밀이었지만, 여전히 비밀이고, 비밀일 예정이에요.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드니 깜짝 놀라버려서 딸꾹질이 멈출 줄을 몰라요.

그런데 조금 이상해요. 제가 시계공이라고는 생각 못 하시는 것 같아요. 아주 먼 타지에서 오신 것 같은데, 왜 저를 찾는 걸까요? 처음 보는 분께 제가 무슨 원한을 맺었을까요. 사실은 어느 작은 마을의 시계공이 그 실력이 아주 훌륭하더라는 소문이라도 난 거면 좋을 텐데요. 아니면 역시, 이미 제가 시계공인 걸 알고 계시는데 절 떠보는 건 아닐까요? 그렇게 생각하면 눈물이 날 것 같아요.

'이 마을의 시계공은 시계탑 꼭대기에 살아요. 그런데 심부름꾼인 저를 제외하고는 아무도 만나지 않으십니다. 물어볼 말씀은 제가 꼭 전달해드릴게요. 사례는 괜찮아요.'

괜히 무서운 상상을 해버려서 손이 떨렸어요. 하지만 최대한 티 내지 않고 침착하게 새로 메모를 적은 것 같아요! 새로운 메모를 드리면서 상냥한 미소를 지어 보였어요. 딸꾹질 소리는 여전히 멈추지 않아서 곤란하기 그지없었지만요.

70 이름 없음 (Owgf3lIZ8.)

2021-09-30 (거의 끝나감) 15:32:19

>>69
"이게 질문이 꽤 복잡한데다 되도록이면 남들 눈에 띄지 않게 하는 일이라서요..."

당신이 불안감을 드러낸 걸 눈치챈 건지, 여행자는 은근슬쩍 벨트를 매만져 권총들을 감추려 합니다. 두 자루는 고급스럽긴 하지만 여느 곳에서 찾아볼 수 있는 리볼버인데, 한 자루는 탄창이 달린 복잡한 기계식 자동권총이네요. 벨트를 돌려서 권총을 망토 안으로 감추고 나서야 여행자는 말을 이어갑니다.

"그러면 엄청 복잡한 회중시계 하나를 고쳐달라고 온 사람이 있지 않았냐고 여쭤봐 주실래요?"

다행히 시계공을 해꼬지하러 온 건 아닌 모양입니다! 그리고 그 말대로입니다. 며칠 전 복잡하고 비싼 손목시계 여섯 개를 회중시계 하나에 다 구겨넣은 것만큼 복잡한 회중시계 하나를 여관 할아버지가 맡긴 적이 있었죠. 자신도 다른 사람에게서 맡은 것이라고 하면서요.

대단히 아름다운 뚜껑에, 내부 부품도 고급이고 톱니바퀴를 고정하는 나사못 머리 하나마다 예쁜 보석이 박혀있는 아름다운 예술품같은 물건이었지만 왜인지 거의 모든 부품들이 잘못 맞춰져 있다는 이상한 느낌이었는데, 여관 할아버지는 그 시계를 맡긴 사람의 말에 따르면 금으로 된 큰 톱니바퀴 하나만 뒤집어 끼우면 된다고 했었습니다. 그 사람은 톱니바퀴를 뽑을 만한 도구도 없고 뽑는 방법도 몰라서 여관 할아버지를 통해 그것을 시계공에게 맡겼다네요.

다행히 그 톱니바퀴를 뒤집어 끼워주는 일은 간단했고, 그러니 잘못 맞춰진 것 같은 부품들이 그게 올바른 조립법이라는 듯이 그 모양대로 돌아가기 시작했었습니다.

"마을에 있는 여관 선술집에서 기다리고 있을게요."

그런데 왜인지 그렇게 말하는 목소리가 많이 익숙하게 들리는 것도 같습니다...?

# 익숙하게 들리는 목소리를 기분 탓이겠지! 하고 넘기면 계속 여행자와 아무런 관계도 아닌 남남으로 플레이하게 됩니다.
# 익숙하게 들리는 목소리를 친구의 목소리로 받아들인다면, 여행자는 사실 시계공의 어릴 적 소꿉친구들 중 한 명이었다는 전개가 됩니다.
# 직접 캐릭터의 입이나 행동으로 표현하지 않으셔도 원하시는 전개 방향에 대해 아래쪽에 #을 붙이고 덧붙여 의견 내어주셔도 좋아요.

71 이름 없음 (Owgf3lIZ8.)

2021-09-30 (거의 끝나감) 15:33:26

>>70 추가

"아, 그리고 이것 좀 드세요."

딸꾹질이 멈추지 않는 게 마음에 걸렸던 건지, 여행자는 허리춤 뒤로 손을 찔러넣더니 큼지막한 물병을 건네어 당신에게 내밀어줍니다.

72 이름 없음 (uZ125v8mVQ)

2021-09-30 (거의 끝나감) 19:39:34

>>70

남들 눈에 띄지 않게 하는 일이라니까 나쁜 생각밖에 들지 않아요... 되도록이면 남들 눈에 띄지 않게 하는 일은 선행보다 악행이라고 생각된단 말이에요. 당신의 행동 하나에 신경이 곤두서서, 작은 소리에도 귀를 쫑긋 이며 반응하는 토끼가 된 것 같아요. 권총들을 망토 안으로 감추신 건 제가 방심하기를 바라고 하신 행동일까요, 아니면 제 딸꾹질 소리의 원인이 그것인 거 같아 저를 배려했을 뿐일까요? 후자이길 간곡히 바라보겠습니다. 권총을 구경하고 싶지만, 특히 유달리 다르게 생긴 편인 복잡한 권총 한 자루가 눈에 밟혀서 자세히 보고는 싶지만 제 급소를 겨눠진 채로 보고 싶지는 않거든요.

'여관 할아버지께서 맡기신 회중시계를 말씀하시는 건가요? 돌려받으러 오신 거라면 시계 주인 되시는 분인지 확인이 필요합니다!'

엄청 복잡한 회중시계 하나. 똑똑히 기억하고 있어요! 시계보다는 꼭 보석 같았거든요. 실제로 보석이 박혀있기도 했고, 시계 6개는 나올 것 같은 양의 부품들이 오밀조밀 얽혀있는 것도 신기했고요. 여관 할아버지께 시계를 맡겼다는 분이 수리 방법을 알고 있던 것도 신기했어요! 톱니바퀴를 뒤집어 끼우면 된다는 것을 아는데, 그걸 직접 할 수는 없다니 마치 시계를 다룰 줄은 모르는데 고치는 방법은 안다는 것 같아서요. 심지어 그 방법이 맞았어요! 잘못 맞춰져 있는 것만 같았던 부품들이 째깍째깍 돌아가기 시작했으니까요. 그래서 그 시계 주인에게도 호기심이 동해서, 주인께서 직접 찾으러 오셨으면 좋겠다고 바라보았는데 정말 이분이 주인 되시는 분일까요? 그 회중시계의 주인이라고 생각하면 아까까지는 조금, 음, 아주 무서웠는데, 지금은 아닌 것 같아요. 만나보고 싶다고 생각했으니까요, 편하게 웃을 수 있습니다! 나는 당신에게 방긋 웃으면서 새롭게 메모를 건넬 수 있었어요. 안타깝게도 딸꾹질 소리는 여전했지만요.

여관 할아버지께서 시계를 대신 맡기신 것도 그렇고, 여관 선술집에서 기다리시겠다는 것도 그렇고 마을에 이제 막 도착하신 건 아닌 것 같아요! 시계탑 위에서 마을을 구경하는 건 제 일과 중 하나이니까, 당신에게서 이유 모를 익숙함을 느끼는 건 그것 때문일까요? 언뜻 당신을 보았던 기억이 나는 걸지도 몰라요. 당신과 아는 사이였을 지도 모른다기에는, 저는 계속 혼자 살았으니까요. 어릴 때는 누군가와 함께 있었던 것 같기도 하지만요.

나는 당신이 건네준 물병을 두 손으로 쥐었습니다. 딸꾹거릴 때마다 몸은 작게 들썩거렸고, 당신이 나를 죽일 수도 있는 사람이든 시계 주인이든 그건 여간 민망한 게 아니었기에 감사할 따름이었습니다! 물을 마시기 전에 허리를 숙여 인사를 건넵니다. 이렇게 친절한 사람인데 아무래도 제가 단단히 오해했던 모양이에요. 당신이 건넨 물을 한 모금 두 모금 들이켰고, 오해가 풀려서인지 물 덕분인지는 몰라도 딸꾹질은 멈추었습니다. 나는 다시 당신에게 물병을 건넵니다.


# 이왕 익숙하게 들리는 것도 같다는 서술이 나왔고 하니 소꿉친구 쪽으로 받을게요!
# 근데 시계공이 사람 무서워하다보니 친구가 있어도 몇 없을 거 같은데... 몇 없는 친구도 제대로 못 알아볼 거 같지는 않고 해서요! 많아도 10대 초반쯤에 헤어졌다구 해두 될까요? :3

73 이름 없음 (Owgf3lIZ8.)

2021-09-30 (거의 끝나감) 21:51:58

>>72

"돌려받...?"

낮게 깔려있던 목소리 톤이 확 올라가며, 좀더 당신이 알던 것에 가까운 목소리가 됩니다...

"코스─아니, 그 회중시계가 아직 시계공의 집에 있나요?"

톤이 올라간 목소리에 화색이 돕니다. 후드 그늘에 가려 얼굴표정이 보이지 않는데도, 왜인지 그 후드 아래의 얼굴이 마치 오늘은 점심 먹고 퇴근해도 좋다는 말을 들은 점원 같은 기쁜 기색이 역력한 게 보이는 것 같습니다. 노새가 투레질하는 소리를 뒤로하고, 그 사람은 당신에게서 손을 내밀어 물병을 받아듭니다. 바로 그 순간, 한 움큼 돌풍이 불어젖힙니다. 그리고 생각지도 못하게 여행자의 후드의 끈이 풀리면서 후드가 뒤로 젖혀져 버립니다.

"아차."

하고 후드 자락을 붙잡아보지만, 높이 묶어 나부끼는 상아색 금발과 괄괄한 얼굴, 가을 하늘을 한 숟갈 퍼다가 담아놓은 듯한 푸르른 눈동자가 여실히 드러납니다... 옛날, 꼭 저런 상아색 금발과 푸른 눈동자를 하고 있는 친구, '아티' 라는 이름을 가진 친구가 당신에게 있었습니다. 그 친구는 어느 날 마을에 대상단의 행렬이 잠깐 들렸을 때, 자신은 이 마을을 떠나야 한다고 당신에게 울며 말하고는, 작별을 고하고 다음 날 사라졌었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점이 하나... 그 친구는 소년이었습니다. 그렇지만 지금 앞에 있는 이 여행자는, 단단한 가죽갑옷을 입고 있는데다 잘 발달된 다부진 체격이긴 하지만 여자입니다.

한바탕 돌풍이 지나고, 다시 후드를 덮어쓰고 망토 자락을 여민 여행자는 말을 이어갑니다. 당신을 의심하지 않습니다. 그 시계공이 낯을 굉장히 심하게 가린다는 사실을 잘 알고, 그래서 따로 심부름꾼을 두었다는 것을 납득하는 것처럼요.

"제가 그 시계 주인은 아니지만, 시계의 주인을 대신해서 왔어요."

다시 후드 자락을 여민 여행자는 노새의 고삐를 다시 잡으며 당신에게 아까 대답의 사례로 보여주었던 은화를 내밉니다.

"시계탑까지 같이 가주실 수 있나요? 그 시계, 잘은 모르지만 아마 상당히 수리가 필요할 거라서 시계공이랑 직접 이야기해 봐야 할 것 같아요. 아마 저라면 만나줄지도 몰라요."

이상한 것이 조금 있습니다... 이 여행자는 조금 전에 노새를 끌고 마을로 들어오는 언덕을 넘어온데다, 아직 각반이 먼지투성이라 마을 여관에 들렀다 나왔음직한 차림은 아닙니다. 그렇지만 마을 여관에 선술집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물론 그건 여관에 선술집이 딸려있는 경우가 흔하니까 그렇다 쳐도, 시계에 대한 이야기는, 시계 부품들이 좀 이상하게 짜맞춰져 있긴 했지만 그래도 톱니바퀴 하나를 뒤집어 끼워주는 것만으로 제법 잘 돌아갔었는데요... 왜 시계에 '상당한 수리'가 필요할 거라고 단정하고 있는 걸까요?

# 좋아요! ^.^ 시계공의 몇 안 되는 친구였다고 해도 좋아요. 시계공이 내성적인 만큼 받아주시기 힘든 이야기였을 법도 한데 받아주셔서 감사해요!
# 언젠가 상황극판에서 어렸을 때는 소년인 줄 알았는데 나중에 장성하고 나서 재회했더니 여자더라, 하는 클리셰를 본 적이 있어서.. 못 알아본 상황에 개연성을 더하기 위해 써봤습니다

# 그런데 시계공이 아티와 함께 지냈을 때도 시계공이 시계를 좋아했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x.x 옛날에도 시계공이 시계를 좋아하는 모습을 보였다고 한다면, 다시 돌아온 아티가 이 마을의 시계공이 그렇게 신통하다더라 하는 말을 들었을 때 '네가 정말로 시계공이 됐구나!' 하고 짐작할 수 있을 텐데, 이 부분과 아티의 성별에 대해 조정이 필요하시다고 하면 말씀해주세요. 다시 써오겠습니다...!

74 이름 없음 (W.So/OXMHQ)

2021-09-30 (거의 끝나감) 22:12:03

>>73
# 지금 확인했습니다! 오늘 안에 답레를 써올 수 있을 지는 몰라서 말씀하신 부분만 우선 답해드릴게요 :3
# 시계공이 어릴 적 남자아이(사실은 여자아이지만)랑 친구를 할 수 있을지 의문이라 소년인 줄 알았다 부분이 조금 걸리네요... 시계공이 사람을 무서워하는 것에 근본적 원인에 아버지가 있다는 느낌을 생각했어서요!
# 시계는 예전부터 좋아했습니다! 시계 뿐만 아니라 기계나 장치류는 전부 다라고 생각합니다.

75 이름 없음 (Owgf3lIZ8.)

2021-09-30 (거의 끝나감) 22:16:09

>>74
# o.O ?! 그 부분이 곤란하다고 하시면 '그런데 이상한 점이 하나... 그 친구는 소년이었습니다' 로 시작하는 단락은 빼버리고 답레를 써주셔도 되어요! 원하시면 그 부분을 빼고 답레를 새로 올릴게요.
# 옛날부터 기계류를 좋아했다는 설정 확인했습니다 u.u 감사합니다!
# 답레는 원하시는 시간에 천천히 써주세요!

76 이름 없음 (6jCgXtKcW.)

2021-09-30 (거의 끝나감) 22:57:41

>>75
# 답레를 새로 올리는 수고를 하실 필요는 없어요! 그럼 '여자아이인 줄 알았고 여자아이가 맞았다'로 괜찮을까요? 시계공이 아티를 곧 알아볼 거 같은데 혹시 알아보기를 원치 않으신가 해서요 :3c
# 감사합니다! 못해도 내일 오전 중에는 올라올 거 같아요 :D

77 이름 없음 (Owgf3lIZ8.)

2021-09-30 (거의 끝나감) 23:09:57

>>76 물론 알아보기를 바라고 있어요! ^ᗜ^ 다만 그 전개에 약간 로망이 있었을 뿐... 어렸을 적부터 여자라는 걸 알고 있었던 걸로 해요. 네 느긋하게 기다릴게요~ 안녕히 주무세요!

78 이름 없음 (hg5z56b8Yk)

2021-09-30 (거의 끝나감) 23:50:52

>>73

이상한 일이에요. 계속 익숙한 느낌이 들어요. 이 목소리를 언제 들어본 적이 있었을까요? 마을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면서 들어본 목소리 중에 닮은 목소리가 있는가 봐요. 어릴 때는 누군가와 함께 있었던 것 같다는 기억을 끄집어내야 하는 걸까요? 기억하고 싶지 않아 묻어놓은 어릴 적은 달갑지는 않아요. 우연이겠거니, 기분 탓이겠거니 치부하고 싶지만 그러기도 쉽지가 않네요. 누군가와 대화를 하는 도중에 다른 생각을 하는 건 예의가 아니니까 고개를 저어서 다른 생각들을 떨쳐내요. 당신의 말에 나는 새로운 메모를 위해 펜을 듭니다. 기쁘게 들리는 목소리에 의아함을 담아 펜을 움직이려고 할 때, 바람이 불어왔습니다. 쓰고 있던 모자가 벗겨질까 봐 모자를 붙잡았어요. 모자를 붙잡으며 당신의 목소리에 고개가 움직입니다.

"..."

눈이 동그랗게 떠질 수밖에 없었어요. 애써 떨쳐낸 기억이 떠오릅니다. 사라져버린 유일한 친구가 분명하니까요. 네 머리카락 색은 내 눈 색이랑 닮았다고 웃었던 기억이 나요. 아티, 그 이름을 기억합니다. 기억하고 싶지 않는다면서도 잊지는 못하고 있던 어릴 적, 그 이유입니다. 이름을 부를 뻔하다가, 소리 내서는 안 되는 연기를 하고 있었기 때문에 입만 벙긋거리고 목소리는 나오지 않았어요. 또, 친구라고는 하지만 나는 그때 남겨졌습니다. 또 훌쩍 떠나가 버릴까 무서운 건 기분 탓이 아니겠지요. 나는 네가 울면서 떠난다고 말했을 때 울지 않았습니다. 네가 떠난다는 것에 대해 정확히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었어요. 그다음 날 네가 사라져버리고, 마을 어디를 가도 네가 없었을 때, 그다음 날, 또 그다음 날, 아무리 찾아도 너를 볼 수 없었을 때에야 눈물이 났습니다. 다시 만났다며 마냥 기뻐하기에는 나는 너무나도 겁쟁이예요.

'시계는 아직 시계공에게 있습니다. 그리고 시계탑은 잠겨 있지만, 열어 드릴게요. 사례는 정말 괜찮아요.'

이제는 생각할 힘이 없다고 하는 게 맞을 것 같아요. 시계공이 자신을 만나줄지도 모른다고 말하는 것을 보면, 그 시계공이 저일 것으로 생각하는 게 분명해요. 기억하고 있는 것 같아요. 그렇게 생각하면 다시 눈물이 쏟아질 것만 같은 기분이 들어요. 아까는 그저 오해에서 비롯되어 죽을지도 모른다며 겁먹은 것뿐이었는데, 지금은 말로 다 설명할 수조차 없어요. 엄청 많이 서운하다고 하면 될까요? 나는 내밀어진 은화를 받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따라오라는 듯이 발을 옮겼어요. 시계탑으로 향하는 동안 아무런 생각도 하지 않으려고 부단히 노력했습니다.

# >>77 자러간 건 아니었어요! 일이 있었거든요 :3
# 시계공 이름은 아티와 연관있게 짓고 싶다는 바람이 있는데 괜찮을까요?

79 이름 없음 (NS8sePuKNw)

2021-10-01 (불탄다..!) 00:34:18

# 앗.. 쓰... 쓰고 계셨어 8-8 미리 말씀드리자면 아티는 베아트리체의 애칭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어요...!

80 이름 없음 (NS8sePuKNw)

2021-10-01 (불탄다..!) 00:57:21

>>78

"─고마워요."

후드를 꾹 눌러쓴 채로, 그 키큰 여행자는 고개를 들어 마을을 바라봅니다. 징 박힌 장화가 자박자박, 당신을 따라 나무 그림자가 드리운 길을 걷는 소리가 납니다. 노새를 끌고 마을 어귀에 들어서면서, 마을을 이리저리 둘러보는 고갯짓이 감개무량해 보인다면 기분 탓일까요? 그렇게 과묵하지는 않아 보이지만, 애써 말을 아끼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듭니다. 그리고 마침내 시계탑에 도달했을 때... 여행자는 노새의 고삐를 시계탑 옆의 울타리에 매어두면서 시계탑을 올려다봅니다. 그러나 잠시 후 고개를 빼고 시계탑을 찬찬히 살피듯 들여다보더니, 고개를 갸우뚱하고는 고개를 돌려 당신을 내려다봅니다. 시계탑에 지금 아무도 없다는 것을 눈치챈 것이겠지요. 질문하려는 듯한 태도. 그러나 질문은 꺼내어지지 않고, 여행자는 잠깐 가만히 있습니다...

여행자는 약간 떨리는 손길을 조심스레 들어서, 자신의 얼굴을 여미고 있던 두건의 끈을 풀어젖히고는 두건을 벗어버립니다. 그리고 옅은 금발 머리카락과, 푸르스름한 눈동자를 드러낸 채로 말도 안 된다는 듯이 당신을 가만히 바라봅니다.

"..."

그러나 뭐라 말은 못 하고 당신을 바라보고 있을 뿐입니다. 마치 하고 싶은 말 수백만 마디가 한꺼번에 치솟아올라 오히려 목구멍이 틀어막혀 버린 듯이.

81 이름 없음 (UtEpT84SUM)

2021-10-01 (불탄다..!) 10:00:31

>>80

말 백 마디보다 행동 한 번이 나을 때가 있습니다. 나는 당신의 시선이 시계탑을 향한 후에는 내게 머물고 있다는 것을 눈치챘어요. 주머니에서 잘그락거리는 소리를 내며 열쇠 꾸러미를 꺼냈습니다. 시계탑의 1층 열쇠를 찾기는 쉬워요. 유난히 오래되어 보이는 열쇠를 찾아내면 되거든요. 잠긴 시계탑의 1층 문에 열쇠가 꽂히고, 찰칵 돌아가면 문이 열립니다. 나는 당신을 응시하다가 시계탑 안으로 들어가 버렸어요. 따라오라는 의미였어요. 시계탑이 아닌 곳에서 내 정체를 밝힐 수는 없으니까요. 마을 사람들이 알아보는 것도 큰일이지만, 여태 정체를 숨기면서 거짓말한 게 들키는 것도 무서우니까요... 사람을 무서워하는 전 남장을 하고서야 겨우 최소한의 외출을 하는데, 거짓말은 나쁜 거니까요. 제게 안 좋은 감정을 갖게 된 사람들을 마주할 자신은 없어요.

시계탑의 1층에는 제가 만든 도르래 장치가 있어요! 마을에서 가져온 시계들을 공방에 올리거나, 다시 1층으로 내릴 때 쓰기 위해 만들었어요! 마침 마을에 시계를 고쳐달라는 분에게 시계를 받으러 갔었기 때문에, 나무함에 시계를 담아 도르래를 작동시킵니다. 시계는 저보다 훨씬 빨리 위로 올라갑니다. 시계가 무사히 올라가는 것을 보고 도르래를 정지시켜요. 그리고 안경을 벗어요. 다음에는 망토의 후드를 벗고, 그 아래 쓰고 있던 모자도 벗습니다. 분홍빛 머리카락이 아래로 흘러내려요. 구불구불 휘어져 있는 머리카락이 목덜미를 간지럽히면, 저는 이제부터 시계공입니다.

당신이 안쪽으로 들어오는 인기척을 느끼면, 눈을 바로 마주칠 수 없어 고개를 들지 못했습니다. 시선 또한 아래를 향했어요. 무슨 말을 해야 할까요? 오랜만에 만난 네게 그때 왜 그렇게 사라져버렸느냐고 원망할 수는 없겠지요. 그때 얼마나 슬펐는지 말하는 것도 첫마디로 내기에는 부적절해 보여요. 하지만 엄청 서운한데 어쩌면 좋을까요. 하고 싶은 말을 목소리로 내지 못하게 되니 다른 방법으로 새어버리고 말아요.

"안녕."

인사가 제일 무난할 것 같았어요. 그래서 인사말을 건넸는데, 타이밍 나쁘게도 눈물이 뚝뚝 떨어져요. 아티에게 하고 싶은 말은 '안녕'이 아니니까요. 어디 갔었는지, 편지라도 쓸 수는 없었는지, 그런 말들이 하고 싶어요. 제일 하고 싶은 말은 '보고 싶었다'일까요?

# 시계공의 이름은 로빈(Robyn)입니다 :3 베아트리체의 어원을 살펴보니 나그네라는 의미가 있던데, 로빈(Robin)은 울새의 이명이에요. 울새는 나그네새(철새)이구요. 발음은 같지만 철자가 다른 이유는 여성형 이름으로 쓸 때는 Robyn 쪽을 쓰는 거 같더라구요.
# 애칭은 생각해두질 않아서 아티가 로빈에게 애칭을 썼다면 맘대로 지으셔도 됩니다 :3

82 이름 없음 (8jko9u3I2A)

2021-10-01 (불탄다..!) 11:41:48

>>81

여행자는 당신의 의중이 무엇인지 알겠다는 듯이 기꺼이 당신을 따라옵니다. 아까까지 흙바닥 위에서도 뚜벅뚜벅 하고 뻐기듯이 큰 소리를 내던 징박힌 장화가 시계탑 안의 마루로 올라올 때에는 괜히 그 소리를 죽이고 맙니다. 마루에 올라서자, 여행자는 이젠 더 거리낄 것도 없다는 듯 먼지투성이 망토를 끌러내렸습니다. 움직이기 편한 바지에 각반, 징 박힌 가죽갑옷에 두꺼운 장갑, 허리춤에 권총 세 자루와 총알주머니를 주렁주렁 매달고 있는 차림새. 갑옷 여밈에는 조그맣지만 정교하고 섬세한 인장이 박혀 있습니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머리 셋 달린 사자와, 교차된 두 자루 검 위에 놓인 말발굽... 황실 기병대의 인장이네요.

그런데, 분명 자신은 황실 근위기병대로서 임무를 받아 도난당한 코스모드롬 열쇠를 찾으러 왔을 텐데... 자신의 용건은 그뿐이었을 테고, 이 곳은 고향 땅 이전에 임무 지역인데... 분홍빛 머리카락을 풀어내린 당신 앞에서, 직함과 임무는 망토와 함께 벗겨져 버리고 여행자는 그만 아티가 되어버리고 맙니다. 그때와 똑같은 밀색의 금발을, 그때와 똑같이 머리 뒤쪽 높은 곳에 질끈 동여매고, 그때와 똑같은 활기찬 미소가 어울리는 선머슴애 같은 얼굴이 감정을 있는 힘껏 붙들어매려 용을 쓰는 표정으로 일그러져서는, 그때와 똑같은 파르스름한 눈동자를 당신에게 마주한 채로요.

"로비."

그때보다 다부지게 성장한 어깨며 크게 웃자란 키며 실용적으로 차려입은 갑옷이며 다 소용없습니다. 각오도 했는데, 마음의 준비도 했는데, 당신이 그때도 흘리지 않았던 눈물을 흘리는 모습에, 자기가 자기 스스로 입에 올린 당신의 호칭 두 음절에 그게 그만 와르르 무너져버리고 맙니다.

분명 그때는 울며불며 이별을 고하는 자신을 멍하니 바라보던 당신에게, 자신마저도 그렇게 소중한 친구가 되지는 못했었던가 하고 더 서럽게 울었었는데. 자신에게 선택권이 없었던 여행길을 섭섭함에 눈물로 물들였었는데. 지금 눈물을 툭툭 떨어뜨리는 당신의 모습에 그만 이제서야 아티는 왜 당신이 미처 눈물을 흘리지 못했었던가 깨달아버렸습니다.

그래서 더 눈물이 나오는데, 도무지 그때처럼 울어버릴 염치가 없어서. 혼자서 울어버리느라 정신이 없어서 "떠나버린다" 라는 말이 어떤 의미인지 당신에게 채 못다 전하고 떠나버려서. 아티의 눈시울도 뜨거워 옵니다. 그러나 아티는 떨리는 손으로 장갑을 조심스레 벗고는, 갑옷의 주머니에 손을 찔러넣어서 손수건 한 장을 꺼내서 당신의 눈물을 먼저 닦아주려고 합니다.

"...보, 고 싶었어..."

아티는 뭔가 말했습니다. 울음소리와 섞여서 어금니 사이로 뭉개져 나온 소리라 잘 들릴지는 의문이지만요. 이런 일이 일어날 수도 있지 않을까 하고 어림짐작은 했지만 정말로 일어날 줄은 몰랐고, 결국 전혀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재회해 버리고 말았습니다.

83 이름 없음 (XhfRc35nDo)

2021-10-01 (불탄다..!) 15:30:14

>>82

마을 밖으로 한 발자국도 나간 적이 없고, 혼자가 된 이후로는 시계탑에 숨어지냈어요. 그런 내가 알아볼 수 있는 인장이라면, 분명 황실의 것이겠지요. 나는 그날로부터 무언가 성장한 게 없는 것만 같은데, 아티는 아닙니다. 황실의 명을 받을 정도로 멋지게 나아간 모양이에요. 저는 여전히 사람을 무서워하고, 시계를 비롯한 기계와 장치들을 좋아할 뿐이라 초라해지는 기분이 들어요. 그래서 제게 연락을 하지 않았던 걸지도 몰라요. 분명 지금 아티의 옆에는 같은 인장을 새기고 다니는 동료들이 있을 테고, 당연히 저보다 더 멋진 사람들이겠지요. 저는 마음을 굳게 먹기로 했습니다. 오늘 하루, 이 순간만 지나가면 수많은 어제와 같은 내일이 찾아올 테니까요.

로비, 제 애칭입니다. 아티가 떠난 이후로 단 한 번도 들은 적 없는 이름이지요. 분명 마음을 굳게 먹기로 했는데, 잊고 있던 애칭으로 한 번 불렸다고 흔들리고 맙니다. 사람과 워낙 거리를 두고 지내서 그런 걸까요, 아티이기 때문에 그런 걸까요? 혹은 둘 다 일지도 몰라요. 속이 울렁거리고, 눈물은 뚝뚝 떨어지고, 울음소리를 내지 않기 위해 이를 꼭 물었습니다. 나는 네가 우는 이유를 모르겠어요.

"시계는 위에 있어."

여전히 제 시야에 담기는 풍경은 시계탑의 1층 바닥입니다. 그마저도 눈물방울에 일렁거리고 있어 본다고 말하기도 민망해요. 눈물을 훔쳐내려고 했어요. 아티는 그 회중시계를 주인에게 가져다주러 온 것이겠지요. 아티가 왔다는 건 아마도, 황실의 사람 중 하나가 그 시계의 주인일 거예요. 그러니 시계를 돌려주면 이 만남은 끝이 날 거로 생각해요. 더 아프기 싫다면 지금 아픈 선택을 하는 게 맞을 거예요. 그런데 내 눈물이 내 손에 닿지 않았습니다. 아티의 손수건이에요.

그런데도 나는 할 수 있는 말이 없어요. 쓴 것을 먹기 전에 단 것을 한 입이라도 먹었다면, 더욱 쓰게 느껴지는 걸 아니까요. 울먹이는 목소리가 떨리면서 담은 말은 시계에 관한 이야기뿐입니다. 제 행동도 그러합니다. 손수건이 눈가에 닿았을 때는 놀라서 아티를 바라보았지만, 다시 시선을 바닥으로 내렸어요. 그리고 아티의 손을 밀어내려고 했습니다. 추운 것도 아닌데 손에 힘이 들어가지를 않고 오히려 떨리는 것까지 보여요. 그래도, 난 손등으로밖에 눈물을 훔치지 못하겠지만 아티의 상냥함을 받을 자신이 없어요.

# https://picrew.me/share?cd=ki9EKU6mZN
# https://picrew.me/share?cd=gWqh19pD3w
# 로빈은 이런 느낌이라고 생각해주시면 될 거 같아요! 아래는 남장하고 다닐때구요 :3

84 이름 없음 (4/aAKXPO1M)

2021-10-01 (불탄다..!) 18:28:10

>>83

계획에 없던 재회인 것은 맞습니다. 임무를 다 끝마치고 나서 번듯한 모습으로, 빳빳하게 다린 제복에 반짝반짝한 인장을 차고, 로비가 잘 기억하고 있을 아티의 웃는 얼굴을 보여주는 재회를 하고 싶었죠. 이번 임무만 끝나면 수도 의무복무기간이 끝나고, 그러면 파견근무를 신청해 보안관 직책으로 다시 고향으로 돌아올 수 있으니까요. 대상단을 따라 나선 방랑길 위의 기구한 운명 사이에서 마침내 자신의 삶에 대한 제어권을 되찾은 시점에서, 아티가 고향으로 돌아올 수 있는 가장 빠른 방법이었습니다.

그러나 아티가 정확히 바라고 있던 것은 재회 그 자체였습니다. 고향 땅으로 돌아와서, 아직도 당신이 자신을 소중한 친구로 여겨주고 있는지 묻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만일 소중한 친구였다고 한다면 관계를 복원하고 싶었고, 소중한 친구가 아니었다고 한다면... 그러면 거기서부터 다시 시작하고 싶었죠. 고향 땅을 떠나간 이후 이런저런 괴로운 일도 많았고 즐거운 일도 종종 있었습니다만, 그 가운데에 반짝반짝 남아있는 행복했던 날들을 꼭 쥐고 버틸 수 있었기에.

누가 뭐래도 아티의 어린 시절에 행복한 기억으로 남겨져 있는 순간들에는 모두 당신의 모습이 한가운데에 빠짐없이 아로새겨져 있었거든요.

"시계 이야긴 좀 있다가 해."

자신의 손을 밀어내는 당신의 손길에 실린 떨림이 옮겨붙은 걸까, 자신을 밀어낸다는 사실이 자신이 생각했던 것보다 충격이었는지 아티의 손이 움찔합니다. 그렇지만 물러서지는 않습니다. 물러설 거였다면 애초에 후드를 벗지도 않았겠죠. 지금 이 순간만큼은 기병대원 베아트리체가 아니라 아티이기로 결정했습니다.

"편지, 두 번 보냈는데... 못 받아봤어?"

당신이 모르는 사실과 아티가 모르는 사실이 하나씩 있었습니다.

당신이 모르는 사실은 아티가 당신에게 편지를 쓴 적이 두 번 있다는 것이고, 아티가 모르는 사실은 자신이 쓴 편지가 불행한 우연으로 두 장 모두 다 당신에게 닿지 못했다는 사실이었죠.

그래서 고향에 돌아올 때는 조금 체념을 했었습니다. 아마 로빈은 자신을 그렇게 친하게 생각하지 않았던 모양이라고. 오히려 홀가분하게 서로 사무적으로 코스모드롬 열쇠의 행방에 대해서 묻고 그걸 계속 쫓아갈 수 있었을 것이라고. 그런데 왜 지금 당신은 이렇게 터져나올 것 같은 눈물을 붙들고 있는 걸까요. 당신이 자신에게 매어놓고 있던 감정의 무게가 얼마나 되는 걸까요. 자신이 당신에게 갖고 있던 감정의 무게는 얼마나 되는 걸까요. 모르겠습니다.

"왜 우는 거야."

결국 먼저 눈물을 쏟은 쪽은 아티였습니다.

"로비."

내가 돌아왔다고, 보고 싶었다고, 여기까지 돌아오느라 나 정말로 고생 많이 했다고-솔직히 그 고생 아직 안 끝났다고, 너는 내가 보고 싶지 않았냐고, 울지 말라고, 아니 울고 싶으면 울어도 좋다고, 날 밀어내지 말아달라고... 모든 말들이 눈물로 뭉뚱그려져, 결국 입에 올리는 것은 눈물에 떨며 당신을 부르는 말뿐입니다.

# 이것은 여신님같이 예쁜 로비의 픽크루를 보고 산화해버린 참치의 흔적......

# https://picrew.me/image_maker/1256467/complete?cd=EoIqyodsz2
# https://picrew.me/image_maker/43267/complete?cd=ica8gn6Lhn
# 답레를 다 써놓고 픽크루를 뒤지고 다니느라 시간을 엄청 허비했어요 8.8
# 베아트리체의 모습으로 생각하고 만든 픽크루에요. 위와 아래 픽크루가 상이한데, 전체적인 색상이나 조형은 위쪽이 조금 더 비슷하다고 생각해주시면 좋을 것 같아요...! 아래쪽은 색상이 아쉽지만 아티의 평소 복장이나 표정이 잘 살아있어서 가져왔어요.

85 이름 없음 (faI3PHUMuo)

2021-10-01 (불탄다..!) 20:07:06

>>84

"시계 때문에 온 거잖아."

모나게 구는 데는 자신이 없어요. 특히 친구에게는 더욱더 그렇고, 오랜만에 만난 친구한테는 더더욱 그렇습니다. 갑자기 떠났다가 갑자기 돌아와서는 눈물짓는 친구에게 쌀쌀맞게 굴면, 친구라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오해를 살지도 몰라요. 네가 내게 너무 큰 자리를 차지하고 있고, 그래서 네 빈 자리가 너무 아파서 그렇다고 하면 이해해줄까요? 나는 다시 그런 아픔을 겪고 싶지 않아요. 처음부터 끝까지 혼자이길 바라요. 누군가 함께하는 시간에 익숙해지면 다시 혼자가 된 나는, 아마도 두 번은 이겨내지 못할 거 같아요. 떨려오는 두 손을 서로 맞잡았어요. 손이 차갑습니다. 손 위로 떨어지는 눈물이 따뜻하다 못해 뜨겁게 느껴지는 것 같았어요.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네가 보낸 편지가 있었다면, 시계공이라는 내 책임도 뒤로 하고 답장을 썼을지도 몰라요. 초침이 째깍거리는 시간이 1초 느려지고, 2초 느려져도 모르고 네게 보낼 편지를 썼을 거예요. 내가 너에게 편지를 쓸 수 있도록, 연락할 방법이라도 알려주었으면 좋았을 거라는 생각이 드니 작은 원망이 솟았어요. 눈을 깜빡일 때마다 눈물은 새로 맺혀 데구룩 떨어지고, 너를 잠깐 밉다는 듯이 쳐다보았습니다.

"...안 알려줄 거야."

정말 네게 못되게 굴려면 울어서는 안 되는데, 마음대로 되질 않습니다. 네가 눈물을 쏟는 걸 보니 참으려고 해도 잘되지 않았어요. 울음을 너무 참아서 머리가 아픈 것 같은 기분까지 들어요.

"또 떠날 거면서."

생각하는 것과 말로 담는 것은 달라요. 네가 떠날 거라고 생각만 하는 것과 내가 스스로 소리를 내 그 사실을 확정 지어버리는 것은 다릅니다. 네가 이렇게 왔다가 떠나리라 생각하면, 입술을 최대한 꼭 깨무는 수밖에는 없습니다. 시계탑에서 엉엉 우는 소리가 난다면 다들 이상하게 생각할 거예요. 시계탑은 언제나 예쁜 종소리만 내었으니까요.

# 아티가 더 예쁘다고 생각합니다!
# 괜찮으시면 로빈이 앞머리 가르마를 탄게, 아티를 따라한 거라고 해도 괜찮을까요? 아티가 떠난 후부터요 :3

86 이름 없음 (4/aAKXPO1M)

2021-10-01 (불탄다..!) 21:32:03

>>85

"...맞아, 그 시계 일을 마치면 정말로 여기 돌아올 수 있으니까."

어렸던 시절, 어머니는 항상 자신에게 자신의 아버지는 대상단 소속의 상인이라는 말을 해주곤 했습니다. 그리고 그건 거짓말이 아니었죠. 친아버지를 따라 상단 행렬과 함께 떠나기로 아티의 어머니가 결정했을 때, 어린아이일 뿐이었던 아티에게는 선택권이 없었습니다.

대상단에 편지를 보내는 방법이야, 상인 길드에 문의해서 해당 상단의 중간 기착지에 미리 편지를 보내두면 나중에 기착지에 도착한 캐러밴 행렬이 편지를 받아볼 수 있는 방법이 있었지만... 그 대상단의 이름을 모르는데야 어쩔 수 없죠. 거기다 그 당시에는 아티도 당신도 그런 방법이 있다는 것을 몰랐습니다. 뒤늦게나마 그런 방법이 있다는 것을 안 아티가 당신에게 편지를 보냈지만, 상인 길드의 물류창고에서 분주히 오가는 사람들 사이에 그 편지는 그만 사라져 버리고 말았습니다.

"한 통도?"

당신이 눈물을 뚝뚝 흘리며 고개를 끄덕이자, 아티는 억장이 무너지는 표정으로 반문했습니다. 왈칵 눈물이 새어나갑니다. 당신과 자신의 눈에서 왜 이렇게 뜨거운 눈물이 치솟는지 모르겠습니다. 자신도 모르겠고 당신도 알려주지 않습니다. 친구끼리 만난 거라면 너 왜 이렇게 변했어- 이건 그대로네- 하고 시시콜콜한 이야기나 터놓고 잡담이나 하게 될 줄 알았는데, 가슴 한가운데 맺혀 있던 응어리가 녹아내리고 있는 것 같은 이 고통은 뭘까요. '둘도 없는 친구' 라는 꼬리표를 달고 마음 가운데에 모셔둔 당신에 대한 기억이, 자신이 생각하던 것보다, 어쩌면 친구간에 가질 수 있는 마음보다 더 무겁게 더 깊이 마음 속에 자리잡고 있었나 봅니다.

아티는 당신의 손에 붙들린 손 대신에 다른 손을 뻗어 당신의 눈물을 어떻게든 닦아주려 합니다. 막지 못할지언정 닦아주고라도 싶어서요. 내가 돌아오기를 바라지 않는 거야? 하는 반문이 턱끝까지 차오릅니다. 그렇지만 그런 불확실한 말을 입에 올리고 싶지 않아서 삼킵니다. 자신은 돌아왔고, 이제 다시 계속 돌아올 셈이니까요. 자신이 돌아오는 의미가 당신에게 남아있다면.

"나 돌아왔어."

만남이 있으면 헤어짐이 있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렇지만 헤어짐이 있으면 재회가 있습니다. 이제 자신은 열 살 조금 넘은 꼬맹이가 아니라, 스스로의 운명을 결정할 권리를 가진 한 명의 당당한 성인입니다. 이젠 기약없이 사라지지 않아도 됩니다. 돌아올 방법도 권리도 있습니다. 어디로 편지를 보내면 되는지, 어떻게 연락하면 되는지, 언제 돌아오는지 모두 이야기해줄 수 있습니다.

"내가,"

그리고 다시 돌아올 거야. 이번엔 오래 기다리게 하지 않을 거야. 와글와글, 당신의 눈에 흐르는 눈물을 막고 싶어하는 말들이 혀끝에서 들끓습니다. 그렇지만 아티의 입에서 나온 말은, 조금 다른 말이었습니다.

"내가 너무 오래 기다리게 했지."

아티는 눈물을 뚝뚝 떨어뜨리고 있습니다.

"미안해."

# '어릴 적 친분' 한 마디로 이런 관계성이 뚝뚝 떨어질줄은 몰랐어요...................(무한점)
# 과찬의 말씀을... 8-8 로빈이 너무 예뻐서 아티도 어떻게든 로빈과 어울리게 해주려고 노력했어요.. 앞머리 가르마라, 두 사람 눈물이 그치면 아티 입으로 한번 언급해봐야겠네요 uu 좋아요!

87 이름 없음 (SuIiylNlM2)

2021-10-01 (불탄다..!) 22:29:02

하늘 위에서 은은하게 비치는 달빛은 스포트라이트. 그리고 조용한 공터는 그를 위한 무대였다. 낮엔 아이들이 놀이터로 사용하는 그 공터 부근엔 민가가 전혀 존재하지 않았다. 민가와는 조금 떨어진 곳에 위치한 곳이었기에 소년은 마음껏 자신이 들고 있는 바이올린을 아무에게도 피해를 주지 않고 연주할 수 있었다.

고요한 바이올린 속에 달빛이 녹아내려 은은한 분위기를 풍겼다. 과하지도 않고, 덜하지도 않은 은은한 밤풍경을 연주하듯 소년의 손이 느긋하고 천천히 움직였다. 한치의 흔들림 없이 잔잔하게 울리는 것이 그야말로 '밤'이었다. 음악에 관심이 있는 이라면 누군가가 연주해서 이미 존재하는 곡이 아님을 짐작할 수 있을리라. 그저 부드럽게 자연스럽게 멜로디를 이어나가며 소년은 조금은 서늘한 밤공기 속에서 투명한 입김을 약하게 내뱉었다.

그 입김소리조차 연주에 방해되지 않게 조절하며 소년은 몸을 뒤로 돌려 달빛을 뒤로 했다. 날개뼈까지 내려올 정도로 묶어내린 머리카락이 달빛에 살며시 비쳐졌고 바람의 움직임에 천천히 흔들렸다. 연주하는 손과 비슷한 템포로 천천히 흔들리는 가운데, 멜로디는 조금 크게 바뀌어가며, 마치 구름이 달을 가리듯 조금 어두운 느낌으로 바뀌었다. 어두컴컴한 밤을 연상하듯 침울한 멜로디가 울리는 듯 했으나, 그것도 잠시. 구름은 지나가고 달이 다시 세상을 비추듯 멜로디가 다시 고요하고 잔잔하게, 밝은 어조로 바뀌었다.

멜로디를 자유롭게 바꿔가며 연주하는 것에 너무 집중한 탓인지, 누군가가 근처를 지나가는 것조차 소년은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저 연주에 녹아내려, 그것에만 집중할 뿐이었다.

#너무 뜬금없는 전개라던가, 민가가 주변에 없다고 한만큼 밤에 잠 못자게 왜 연주하냐고 화내는 그런 것만 아니면 어떤 전개로 이어줘도 괜찮아! 꼽주는 것만 아니면 진짜 오케이!

88 이름 없음 (mWeVaVU15o)

2021-10-01 (불탄다..!) 22:51:18

>>86

"...돌아와?"

나의 유년 시절은 아티를 제외하면 기억하고 싶지 않은 것투성이였어요. 그마저도 아티가 홀연히 사라져버려서, 좋은 기억조차 떠올리고 난 후에는 아프기만 할 뿐이라 빛이 바래어도 다시 꺼내 보지 않았어요. 아버지는 좋은 사람이 아니었어요. 어머니가 말도 없이 떠나갈 정도로요. 아티가 떠나가고서 슬픔에 빠져 울고 있던 나를 돈이 궁해서 팔아넘기려고 했던 사람이었습니다. 다행히 밤늦게까지 작업을 하시느라 깨어 계셨던 시계공 할아버지가 팔려 가던 상황을 발견해서 다행이었어요. 시계공 할아버지는 제 값을 치러주었고, 나는 그 빚을 갚기 위해 할아버지의 조수가 되었어요. 하지만 할아버지를 제외한 마을 사람들은 그때의 어린 나, 로빈은 그대로 팔려 간 줄로만 알고 있어요. 마을 사람들에게 들키면 아버지에게도 들키게 됩니다. 나는 그래서 시계탑에 숨어들었어요. 할아버지는 가족보다 따스했고, 시계는 언제나 좋아하는 것이었으니 괜찮아요. ...그렇다고 생각하는데, 어째서 네 목소리가 돌아온다고 말하니 서러움이 넘쳐흐를까요? 너와 행복했던 순간을 다시 한번 느껴보고 싶은 걸까요.

네 이름을 불러도 괜찮을지 계속해서 고민하고 있어요. 분명 소리를 내 버리면 돌이킬 수 없을 거예요. 억지로 메꾸었던 네 자리를, 다시 네가 들어올 수 있도록 비워도 괜찮을지 모르겠어요.

"편지 안 써도 돼."

눈가에 네 손이 다시 닿았습니다. 나는 이번에 다가온 네 손길은 밀어내지 않았어요. 이제는 모난 소리를 할 수 없어요. 널 밀어내는 것도 너무 아파서 생각하지 않기로 했어요. 마음이 시키는 대로 해보자고요.

"편지 쓰지 않아도 괜찮도록 떠나지 마."

말도 안 되는 응석이라는 것을 나도 잘 알고 있어요. 하지만 이제 지금 아티에게 하고 싶은 말이에요. 아티가 들어주지 않아도 괜찮아요. 투정이라도 부리고 싶을 뿐입니다. 다만 울음소리가 새어 나올 것 같으면 참아내면서 목소리를 내느라 온전히 전해지고 있는지도 모르겠어요. 아티가 다시 떠나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이런 말밖에 할 수 없는 내가, 좀 더 의젓하고 멋진 사람이었다면 떠나도 괜찮다고 말해줄 수 있었을 텐데요.

"...보고 싶었어. 많이 보고 싶었어."

"다시 로비라고 불러줘서 기뻐."

"널 다시 부를 수 있어서 기뻐,"

엉망진창, 두서없는 문장들의 나열입니다. 내가 지금 엉망진창이기 때문일 거예요.

"아티."

웃어버렸어요. 눈물을 뚝뚝 흘리면서, 여전히 눈물이 눈가에 맺히고 있으면서도 웃는 것 또한 엉망진창에 포함되겠지요.

# 저도 생각보다 엄청 깊은 관계성이 나와서 얼떨떨해요... 시계탑에서 히키코모리처럼 지내는 시계공 설정이 생각났던 것 뿐이라 :3
# 너무 멋진 황실 기병대원인데 지당한 말 아닐까요...
# 로빈 묘사가 적어서 픽크루라도 가져온 건데 외형적인 부분에서 답레에 필요한게 있으시면 편히 물어봐주세요!

89 이름 없음 (4/aAKXPO1M)

2021-10-01 (불탄다..!) 23:01:16

>>89
# (로빈의 아버지 설정에 분노와 슬픔과 안타까움이 뒤범벅되어 눈물을 쏟아낸 나머지 빼빼 말라버린 채로 자기 눈물에 휩쓸려가는 멸치)
# ...사실 처음에 답레 쓰기 시작할 때는 모험과 악당세력과 퍼즐과 보스전이 마련되어 있는 코스모드롬 레이드를 구상하고 있었는데 전개가 달콤쌉싸름해져버렸어요... 오히려.. 오히려 좋아

90 이름 없음 (4/aAKXPO1M)

2021-10-01 (불탄다..!) 23:48:03

>>88

"응."

당신의 말에, 베아트리체는 고개를 힘있게 끄덕입니다. 아직 돌아오기 위해 건너야 할 단계가 조금 남았지만, 원래는 그 모든 단계를 다 건너고 나서야 당신에게 돌아오려고 했지만, 그들이 코스모드롬 열쇠를 맡긴 게 하필이면 이 주에서 가장 솜씨좋은 시계공으로 소문난 당신이었기에. 베아트리체는 손을 내밀어 당신의 눈가에 맺힌 눈물을 닦아내려 해봅니다. 어릴 적부터 이것저것 뚝딱뚝딱대며 장난치는 걸 좋아해 손끝이 곱지는 않았지만 못본 새 더 거칠어졌네요. 베아트리체는 당신의 손에 꼭 쥐여있는 다른 손에서 손수건을 받아들어 그것으로 눈물을 닦아주려 합니다. 눈가가 쓸리면 아플 테니까요.

"응, 응."

"나 다녀왔어, 로비."

"나도, 정말로 보고 싶었어."

해야 하는 말이 남아있지만, 베아트리체는 당신의 말에 아니라고 대답하지 않습니다. 당신이 욕심껏 말하는 것처럼, 그녀 역시도 욕심껏 대답하고 싶었으니까요. 더 이상 돌아갈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던 선명하게 행복한 나날들이 당신의 얼굴에서 빛나고 있었기에. 과거로 돌아갈 수는 없겠지만, 다시 함께하는 나날을 보낼 수 있다는 희망이 너무도 눈앞에 가까이 다가와 있었기에.

베아트리체는 손을 들어서 가죽갑옷의 앞섶을 툭툭 끌렀습니다. 가죽갑옷에 징이 박혀있는 이유는 가죽 아래에 쇳조각을 고정시켜두기 위해 박아둔 거라서, 그 갑옷을 입고 있으면 누군가를 안아주기엔 너무 차갑고 딱딱한 품이 되니까요. 갑옷 아래에 받쳐입는 누비옷도 썩 부드러운 재질은 아니지만, 그래도 갑옷보단 나을 것 같아서.

"응."

아티. 하고 당신이 부르는 소리에 베아트리체는, 아티는 양 팔을 활짝 펼쳐보였습니다. 그렇게 편한 품은 아니지만, 이나마 당신이 눈물젖은 얼굴을 마음껏 기댈 수 있도록요.

황실 기병대원 베아트리체 중위가 있던 자리에는, 벅찬 감정에 웃는 얼굴로 울면서 눈물을 뚝뚝 흘리고 있는 아티만이 남아 있었습니다.

# 외형 묘사는 픽크루만으로 충분해요! 오히려 픽크루 가져와주셔서 고마워요... 아티에 대해서도 답레를 쓰실 때 필요하거나 궁금한 내용이 있으시다면 마음껏 질문해주세요.

91 이름 없음 (/jytqmL.Kg)

2021-10-02 (파란날) 00:30:26

>>88-90

# 12시 이후에 주시는 답레에 대해서는 제가 답레를 쓰지 못하고 잠들어버릴 수 있다는 점 미리 말씀드릴게요 @ᗜ@

92 이름 없음 (r/K2sEWxto)

2021-10-02 (파란날) 09:44:34

>>90

감정을 쏟아내는 건 오랜만에요. 받아줄 사람도 없었고, 꺼내려고 하지도 않았으니까요. 그래서 어설픕니다. 누군가 눈물을 닦아준 적이 손에 꼽을 거라고 생각해요. 여전히 울음소리를 내지 않으려 입술을 깨물고 있다 보니 히끅거리는 소리만 납니다. 그만 울어야 하는데, 아티도 울고 있는데도 내 눈물을 닦아주고 있는데, 아무리 차분하게 생각해보아도 쉽지 않아요. 둑이 무너지면서 쏟아지는 물살은 너무나도 거센 모양이에요. 이대로라면 손수건이 내 눈물로 다 축축해질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요.

"상단이 마을에 올 때마다 널 찾았어."

네가 작별을 고한 날은 대상단의 행렬이 마을에 찾아온 날이었으니까요. 마을에 상단이 온다고 하면 혹시나 하는 마음에 시계탑 밖으로 한달음에 달려 나갔습니다. 상단뿐만이 아닙니다. 시계탑 위에서 마을 어귀를 바라보고 있자니, 외부인이 오는 것 같다 하면 작은 기대를 품고는 했습니다. 너를 지금에서야 만났다는 건, 여러 번이나 품고 말았던 크고 작은 기대들이 다 무너졌다는 뜻이지요. 이제는 기대조차 하지 못할 때 네가 돌아왔어요.

분명 네 편지를 받지 못한 이유는, 네가 떠나고 얼마 안 되어서 내가 시계탑으로 숨어버렸기 때문이겠지요. 아버지를 다시 마주할 용기가 있어서, 원래 살았던 그 집에서 너를 기다렸다면 우리는 편지를 주고받을 수 있었을지도 모르겠어요. 아티에게 이 말은 하지 않기로 해요. 오랜만에 만난 옛 친구에게 좋지도 않은 이야기를 들려줄 필요는 없겠지요. 마을 사람들이 아티를 알아본다면, 그리고 어린 로빈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면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너도 알게 되겠지만요. 그러니까 굳이 앞당기지 않기로 해요.

"...?"

나는 아티가 팔을 벌리는 것을 바라보았습니다. 언제부터 그랬는지, 앞섶이 풀려있습니다. 갑옷이 불편해서 그런 걸까요, 아니면 더워서일까요. 그것도 아니라면 옷이 혼자 풀린 걸까요? 깜빡거릴 때 떨어지는 눈물을 훔치고, 아티를 바라보았어요. 그리고 그때 아티가 무슨 이유로 팔을 벌리고서 있는지 깨달았어요. 나를 안아주려고 한 것 같다고 생각해요! ...아닐 수도 있지만요. 내가 아티한테 안겨도 괜찮은 걸까요? 누군가를 안고, 안아주고 했던 것도 오래된 것 같아요. 나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다가가지를 못합니다.

# >>89 아버지는 마을에서 추방당했으니 괜찮아요! 시계공 할아버지가 로빈 몰래 해결해버렸어요.
# 모험과 악당세력과 퍼즐과 보스전이 하고 싶으시면 하셔도 괜찮아요 :3
# >>91 저는 텀이 널뛰기를 해서... 그래도 밤 늦게는 아마 자고 있을 거 같네요.
# 어렸을 때는 아티랑 로빈 키가 엇비슷했을까요? 지금 아티는 키가 크다고 해서 로빈보다 크다고 생각하는데, 만약 엇비슷했었다 하면 안게 됐을 때 키 차이에 로빈이 놀랄 것 같아서요.

93 이름 없음 (/jytqmL.Kg)

2021-10-02 (파란날) 12:18:15

>>92

"내가 열여덟 살이 되는 해쯤에 내가 살던 마을에 방문할 예정이었어. 그런데 상단이 좀... 잘 안 풀렸어."

아티를 데려간 그 상단은 정말로 커다란 상단이었습니다- 3개 대륙과 2개 대양을 오가는 기나긴 상로를 갖고 있었기에, 한 번 상로를 일주하는 데에 6년에서 8년이 걸리는 상단이었죠. 그렇지만 당신이 그 대상단의 상호를 알았더라면 오히려 그 기대가 더 아프게 무너졌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아티를 데려간 대상단은 몇 년쯤 뒤에, 다시 이 마을로 돌아올 수 있게 되기 전에 이런저런 비리 사건과 불행과 도적떼의 습격에 휘말려 많은 것들을 잃은 나머지 해산했거든요.

"그래서 그냥 내 발로 왔어."

그렇지만 이제 지나간 일들에 매달려 과거의 고통을 붙들고 있지 않아도 될 것 같습니다. 비록 너무 늦어 당신의 기대가 다 무너지고 난 뒤에야 뜻밖의 재회를 하긴 했지만, 그 모든 역경과 희박한 가능성을 딛고, 아티는 그때 그 시절의 금발과 푸른 눈을 간직한 채로 당신에게로 돌아왔으니까요. 아티도 자신이 늦었다는 것을 알기에, 자신이 낯선 이국의 하늘 아래에서 당신이 있는 고향을 애타게 그리고 있었던 만큼이나 당신 역시도 자신을 애타게 기다렸다는 것을 이제는 알기에, 아티는 자신의 눈에서 흐르는 눈물은 생각지도 않고 당신의 눈물을 닦아주고 있습니다.

"..."

정말 왜 그래, 안아주는 법도 잊어버린 것처럼. 당신이 어쩔 줄 모르고 바라보고 있자, 아티는 갑옷을 아예 훌렁 벗어버리고 갑옷 아래 받쳐입는 누비옷까지 벗어서 한구석에 철걱 부려놓습니다. 밖에 나다니고 있는 다른 사람들과 별다를 바 없어보이는 튜닉 차림이 되어서야 아티는 다시 양 팔을 벌리고 당신을 끌어안아줍니다. 옛날에는 키가 엇비슷했는데, 이젠 키차이가 꽤 나서 당신이 푹 안기는 모습이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옛날보다도 더 탄탄해지고 단단해진 품이지만, 따뜻한 건 변하지 않았네요.

생각해보면 항상 먼저 다가가서 끌어안는 쪽은 자신이었지, 하고 아티는 생각했습니다. 당신이 뭔가 우울해하거나 외로워하는 것 같을 때마다 이렇게 당신을 안아주곤 했었죠. 이번에도 우는 당신을 달래주고 싶어서 안아주려고 했는데 왜인지 이번에는 자신이 응석부리는 모습이 된 것 같습니다.

# (아티가 로빈네 아버지에게 수정펀치를 날리는 장면을 머릿속에서 급히 지운다)
# 본격적으로 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로빈주가 원하시면... uu 지금은 조미료 느낌으로, 필요한 곳에 조금씩만 덧붙여볼게요.
# 어렸을 적에는 두 사람의 키가 엇비슷했거나 아티가 조금 더 작았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지금의 아티는 약 182센티미터 정도에요. 상당한 장신이죠...

94 이름 없음 (IKmnsJTDfw)

2021-10-02 (파란날) 23:12:39

>>93

"와줘서 고마워."

"잊지 않아 줘서, 보고 싶어 해줘서 고마워."

투정 부리고, 욕심부린 다음은 고마움을 표현했어요. 나는 이 작은 마을이 내 세상의 전부지만, 네가 아는 세상은 더 커다랗고 반짝반짝 빛날 거에요. 그런데도 아티는 작은 마을과 마을보다 더 작은 어릴 때의 나를 기억해준 거예요. 지금의 나도 마찬가지로 작은 것 같지만요. 몸도, 마음도 전부 다요. 아티는 쑥쑥 많이 자랐어요. 내가 너무 작아서 기억나지 않을 수도 있었을 텐데, 아까까지만 해도 일부러 못되게 굴던 나인데도요. 내가 아픈 게 무서워서 네게 상처 주기를 선택해버렸는데... 아티를 바라볼 염치가 없어요. 아티의 눈을 몇 번이나 바라보았을까요? 분명 아티의 눈보다, 떨어진 아티의 눈물이 만든 자국을 더 많이 보았을 거에요.

나도 아티의 눈물을 닦아주고 싶어요. 하지만 난 손수건도 없고 고작해야 옷소매뿐이에요. 어떻게 하면 좋을지 고민하고 있자니, 아티가 옷을 벗어버리고 있어요. ... 아티가 나를 안아주려고 했단 건 착각이었나 봐요. 아무래도 아티는 그저 더웠을 뿐인 거 같아요! 나는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한 걸까요, 민망해서 얼굴이 화끈거려요. 안 그래도 많이 울어버려서 눈가에 열이 오른 게 느껴지는데 더 심해졌어요. 어릴 때는 아티카 안아주고는 했지만, 지금은 다 컸으니까요. 그때처럼 아티가 안아주려고 한 거라고 혼자 착각이나 하고, 정말 바보 같아요.

"?"

그런데 아티가 안아주었어요! 나는 내가 어디서부터 잘못 생각한 건지 알 수 없어서, 아티를 바라보았습니다.

"...?!"

그리고 또 놀라버리고 말았어요. 고개를 들었는데 아티의 얼굴이 보이질 않았어요. 아티인 줄 몰랐을 때도, 키가 크신 분이라고 생각은 했지만 이렇게 큰 줄은 몰랐어요! 좀 더 고개를 뒤로 젖히고 나니 아티의 얼굴이 보여요. 아티가, 정말 쑥쑥 많이 자랐어요! 이래서야는 손을 뻗어도 아티의 눈가까지 닿을지 모르겠네요. 무엇으로 아티의 눈물을 닦아줄 수 있는지 고민한 게 헛수고였어요. 나는 작게 웃음소리를 냈습니다.

"아티, 내가 눈물을 닦아줄 수 있을까?"

# 로빈의 키는 정확히 생각해두질 않았지만 단신인 편이라고 생각해요. :3
# 로빈이 느끼기에 아티는 머리카락 색깔도 그렇고, 태양같아요... 그래서 아티는 과분한 친구라며 자기가 못났다 하는 부분들이 나오고 있는데 불편하면 말씀해주세요.

95 이름 없음 (l1lufNxZR.)

2021-10-03 (내일 월요일) 01:44:33

>>94

당신의 말에 머릿속이 복잡합니다─ 당신 역시도 자신을 잊지 않았을 뿐더러 자신을 애타게 기다렸다는 사실이, 애타게 기다리다 못해 자신 모양의 그을음이 당신에게 남아있었다는 사실이, 자신이 이국의 하늘을 바라보며 별들 위로 그려보던 당신의 모습과 겹쳐보여서. 그렇게도 밤하늘에 그리던 그리운 모습이 아직도 이렇게 곱고 예쁘게 남아서 옛날처럼 바라봐주는 모습이. 시점은 조금 바뀌었지만, 그 예쁘고 상냥한 금빛의 눈동자는 여전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은 아직 자신의 일을 다 끝마치지도 못하고, 당신에게 정말로 나 돌아왔어, 라고 말하기에는 너무 이른데 돌아왔다는 말을 해버려서. 눈물자국이 남은 뺨을 하고 당신을 내려다보다가 아티는 천천히 입을 뗍니다.

"─많은 것을 봤어! 나쁜 일들도 많이 있었지만, 좋은 일들도 많이 있었어."

"그렇지만, 여기서 너와 함께 있었던 시간을 잊게 하는 일은 없었어."

잊을 수 없었어. 보고 싶었어. 아티는 자신만의 방식으로 자신이 당신을 잊지 않았다는 것을 표현했습니다. 옛날처럼 당신을 푹 끌어안는 것으로요. 그러고 싶어서, 당신을 그 무엇보다도 선명히 기억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려주고 싶어서, 아티는 임무 도중에 어지간해선 벗어서는 안 되는 갑옷도 벗어버리고 말았습니다. 당신을 안고 아티는 눈을 꾹 감습니다. 가슴팍 너머에서 옅게 전해져오는 아티의 심장박동은 아직 그 옛날처럼 따뜻합니다.

당신의 웃음소리에 아티는 당신을 안은 채로 당신을 내려다보았습니다. 그리고 당신의 요청에 아티는 조금 자세를 바꿉니다. "으응." 하는 콧소리 섞인 대답과 함께, 당신을 끌어안고 있던 팔을 약간 푼 다음 상반신을 숙여서, 당신과 눈높이를 맞추고 다시 느슨하게 당신을 끌어안습니다. 당신이 손을 들어서 자신의 얼굴을 닦아주기 좋도록. 그리고 눈을 꼭 감습니다.

# 그것도 로비의 개성이고, 로비가 그렇게 생각할수록 아티가 더 전력으로 안아주고 좋아하는 마음을 표현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 물론 로비가 자존감낮은 모습을 보이는 건 안타깝지만, 제가 그것에 대해 안타까워하기보다는 아티를 통해서 많이 안아주고 보듬어주는 게 더 나은 것 같아요.
# *.* 지금은 주무시고 계실 테니 답레만 남겨둘게요..

96 이름 없음 (tl8g0hiIWY)

2021-10-03 (내일 월요일) 20:47:23

>>95

"아티."

반짝반짝한 내 친구. 상냥하게도 내 손이 닿을 수 있도록 자세를 고쳐주었어요. 나는 나지막이 아티의 이름을 부르고, 손을 들었어요. 아티의 얼굴에 닿으면. 손끝에 남는 감각이 낯설어요. 내 손에 제일 많이 닿은 것은 역시 시계 부품이니까요. 시계가 작을수록 조그마해지는 부품, 시계가 클수록 커지는 부품. 그 크기가 어떠하든 차가운 것은 똑같습니다. 아티는 따뜻해요. 아주 작은 회중시계의 부품을 다룰 때보다도 조심스러웠다고 하면 과장일까요. 나는 아티의 눈물 자국을 지웁니다.

"다음번에 돌아오면, 그때 이야기해 줘."

알고 있습니다. 아티가 오늘 마을에 온 이유는 저 시계탑 위에 있는 회중시계 때문이라는 걸요. 시계를 돌려받은 아티는 아마 마을을 다시 떠날 거예요. 하지만 이번에는 다시 기대하려고 합니다. 아티가 곧 돌아오리라고 믿을 거예요. 그래서 나는 조금 용기 내서 다음을 기약했습니다. 마을을 떠나고서 있었던 일들, 나쁜 일도 좋은 일도 전부 듣고 싶어요. 시계탑 위에서 마을을 내려다보면서 들어도 좋을 것 같고, 언덕 위에 올라가 산들바람과 함께하는 것도 좋을 것 같아요. 아니면 어릴 때 자주 놀러 가던 곳을 되짚어 보아도 좋을 것 같아요. 시계공 로빈의 모습으로 마을에 나갈 수 있을지는 아직 모르겠지만, 그 모습으로 상상해보았어요. 어릴 때 그랬던 것처럼 분홍빛 머리카락을 햇빛 아래 드러내고, 의미 없는 안경도 벗어버린 그런 모습이요. 거추장스러운 망토도 벗어버리고, 옷은 아티가 골라준 것으로 입으면 즐거울 것 같아요.

그리고는, 음, 어떻게 해야 할지 잠깐 고민했어요. 나도 똑같이 아티를 안아주면 되는 걸까요. 누군가 안아주는 것도 어색하지만, 누군가를 안아주는 건 더 어색해요. 아티인데도요. 그렇지만 아티니까 할 수 있어요! 친구를 안아주지 못할 리가 없어요. 어색하지만 한 번 노력해봅니다. 두 팔로 아티를 안으면서, 아티의 품에 기대보았어요. 생각보다도 엄청 따뜻해서, 꼭 다시 어려진 것 같아요.

# 불편하지 않으시다면 다행이에요 :3

97 이름 없음 (bcmxtRUYJs)

2021-10-04 (모두 수고..) 01:53:53

"하하하하하! 유쾌한 인간이로구나! 아니. 당돌하다고 해야할까!"

유쾌한 목소리가 숲속을 가득 채웠다. 용을 만나러 간다는 그 말이 상당히 웃긴 것인지, 은발의 긴 머리카락을 자랑하는 사내가 정말로 크게 웃었다. 분명히 그 역시 인간의 모습이었으나 마치 말하는 것을 들어보면 인간이 아니라는 것마냥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과연 용을 만나러 간다는 상대에겐 어떻게 들렸을까?

터져나오는 경쾌한 웃음소리를 겨우겨우 멈추며 눈에 맺힌 눈물마저 닦아내며 사내는 눈앞의 존재를 가만히 주시하면서 바라보다 다시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 들려오는 말대로 이 숲을 너머 쭉 가면 용이 사는 굴이 나오지! 허나 인간이여! 그 용을 만나서 뭘 하려는거냐? 용의 재보가 탐이 나는 것이냐? 아니면 용맹을 자랑하기 위해 용의 목을 원하는 것이냐?"

말이 끝난 사내의 주변에서 하얀색 연기가 솔솔 올라왔고, 곧 펑 터지는 소리가 들렸다. 연기 속에 보이는 실루엣은 상당히 거대한 몸의 형태였다. 온 몸이 은색으로 빛나고 있으며 그 덩치는 어지간한 건물 못지 않게 큰 용은 고개를 숙여 눈앞의 존재를 바라봤다.

"나를 찾는 모양이니 직접 나에게 말해보거라. 내 근처 마을이나 이 나라의 왕실에는 딱히 피해를 주지 않은 것 같다만, 내가 이 근처에 사는 것이 두려운 것이더냐. 아니면 목숨을 걸고 나의 재보를 노리는 것이더냐. 그것도 아니면, 내 목을 가지고 싶은 것이더냐?"

/맥커터질만 아니면 뭐든 오케이! 그냥 자신을 만나려고 하는 것을 인간 형태에서 들은 용이 웃으면서 정체를 밝힌 장면이야.

98 이름 없음 (Xd8e/sjuCQ)

2021-10-04 (모두 수고..) 02:09:13

>>96

당신의 손길이 아티의 뺨에 닿을 때, 아티는 히히히 하는 작은 웃음소리를 흘리며 천진하게 미소짓습니다. 누군가의 따스한 살갖을 만져보는 것도 오랜만인 것 같습니다... 아티는 마치 오래전 잊어버린 습관과 온기를 떠올리려는 것처럼 당신의 손길에 자신의 뺨을 부드럽게 치대어옵니다. 얼굴에 남아있는 물기며 눈물자국들이 당신의 손길에 조금씩 닦여나갑니다. 눈물이 다 닦여나가고도, 당신이 손을 떼지 않았다면 아티는 한참이나 더 당신의 손에 기대어있었을 것입니다. 후드를 벗어던진 그 순간부터 이 모든 일들이 하나같이 충동적으로 벌어진 일이지만─ 그래서 일이 조금 번거롭게 될지도 모르고, 어쩌면 남은 일을 하는 내내 시계탑 안에서 재회한 당신 생각이 불러오는 선명한 그리움이 조금 아플지도 모르겠지만─ 이렇게 된 것을 아티는 후회하지 않기로 했습니다.

"네가 듣고 싶으면 얼마든지."

아티는 가지런하고 뾰죽한 이빨을 드러내며 온 얼굴에 개구쟁이같은 미소를 짓습니다. 그 눈빛만큼이나 그 미소도 변하지 않았네요. 당신이 알면 부끄러워할지도 모르겠지만, 자신이 지나온 여행길에서, 이따금 꽤 친해진 사람이 있으면 아티는 자신의 고향 마을에서 헤어진 상냥하고 똑똑한 아이에 대한 이야기를 이따금 하곤 했습니다. 의도치 않게 끊어져버리고 말았던 그 이야기를 다시 이어나갈 수 있게 되는 날이 가깝습니다.

조그만 장난꾸러기 꼬맹이라기엔 너무 크고 탄탄해진 아티의 품에 기대면, 옅은 흙먼지 냄새와 함께 희미하게 구운 빵 같은 냄새가 납니다. 문득 무언가가 당신의 머리를 부드럽게 쓸어내리는 게 느껴져 고개를 들어보면 아티가 맨손으로 당신의 머리를 다독여주듯 쓰다듬어주고 있습니다. 서투르지만 부드러운 손길. 예전에는 당신이 쓰다듬어주는 쪽이었는데요. "이거 해보고 싶었어." 하고 아티는 키득거립니다. 그러다 말고 아티는 "임무만 아니었더라도..." 하고 아쉬운 듯이 뇌까립니다. 그러다 아티는 문득,

"같이 갈래?"

하고 질문을 꺼냈습니다.

99 이름 없음 (BKnmjGCA1A)

2021-10-10 (내일 월요일) 00:58:06

갱신!

100 이름 없음 (YUIndFcQDI)

2021-10-10 (내일 월요일) 01:00:41

# 꼬맹이 여기 등장!
# 어떤 형식으로 돌릴까? 가볍게 해보고 싶으면 상L? 아니면 일반? 원하는 걸로 말해줘~

101 이름 없음 (BKnmjGCA1A)

2021-10-10 (내일 월요일) 01:01:27

# 일반이 괜찮을 것 같아! 상L 은 눈에 잘 안들어와서 ... 배려해줘서 고마워!

102 이름 없음 (CpZqa3y/8s)

2021-10-10 (내일 월요일) 01:11:15

>>101
# 고맙긴! 나도 일반 쪽이 익숙한걸~ 그럼 일반으로 하자!
# 사실 내가 참치에 오래 안 왔어서 재활겸 편지로 시작 해본거라 조금 못 쓸수도 있어...! 미리 미안! ㅜㅜ
# 장면은 카페 앞에서 바로 만난 부분부터 시작하면 좋으려나?
# 내가 지금 바로 레스를 쓰고 싶은데 오늘은 가봐야 할 시간이라... 내 레스 올리려면 내일 점심 조금 넘어서 가능할 것 같아 ㅜㅜ 이것도 많이 미안해 ㅜㅜ

103 이름 없음 (BKnmjGCA1A)

2021-10-10 (내일 월요일) 01:18:45

>>102
# 괜찮아 잘쓰고 못쓰고가 어디있어 그런걸로 부담갖지 않기! 다들 놀려고 온거니까 한줄 띡 써줘도 좋아.
# 아무래도 그게 좋을 것 같아. 그리고 여유롭게 줘도 좋으니까 천천히 써줘!

104 이름 없음 (laW4Tc/P4c)

2021-10-10 (내일 월요일) 01:23:57

>>103
# 고마워 ㅜㅜ 그럼 내가 내일 안으로 꼭 레스 가져올게!
# 자유상황극 해보자고 먼저 말해줘서 정말 고마워! 오늘 하루 수고 많았고, 밤에 잘자! 좋은 꿈 꾸기를 바라!

105 이름 없음 (f2pNoYgWrc)

2021-10-10 (내일 월요일) 14:09:04

>>104

카페 바깥. 왼쪽 손에 그가 마실 음료와 작은 검은색 종이백을 든 여자가 핸드폰을 하고 있다.
손에 들린 핸드폰을 보며 작게 웃거나, 때로는 살짝 울상이 되는 등 조금이지만 다양한 표정으로 휙, 휙 바뀌던 그녀는, 그렇게 한참을 조용히 그와의 연락에만 집중하는 듯 하더니 지금 나오라는 문자가 도착하자마자 곧바로 답장을 보내며 고개를 들어 도로를 바라보았다.

' 아, 저기 있다. '

그녀는 도로에 가득한 차들 중 저 너머에서 한 번에 익숙한 차를 발견하고는, 반가운 마음을 표현하듯 핸드폰을 들고 있던 손을 그대로 올려 그의 차를 향해 짧게 흔들었다.
비슷한 차일 뿐 다른 사람이 타고 있을 수 있음에도 망설임 없이 아는 척을 하는 모습이, 마치 그를 단번에 알아볼 수 있다는 그녀의 확신을 보여주는 듯 했다.

" 아저씨~ "

차에 타고 있어 그에게는 들리지도 않겠지만 그저 반가움을 표현하려는 생각인 듯, 적당한 목소리로 그를 부르는 그녀의 얼굴엔 장난스럽기도 하고 즐거워 보이기도 하는 특유의 미소가 평소처럼 스며들어 있었다.

106 이름 없음 (BKnmjGCA1A)

2021-10-10 (내일 월요일) 14:25:45

>>105

역시 출근 시간과 퇴근 시간이 아니라면 도로는 한적하다. 사실 오늘이 쉬는 날이라 사람들이 집에서 쉰다고 밖으로 안나오는 이유도 있을 것이다. 휴일이 아니었다면 어제 늦게까지 회식 자리가 이어지지도 않았겠지만, 오늘 이렇게 약속을 잡지도 못했겠지. 살짝 걷어둔 셔츠 아래로 보이는 손목시계에 시선을 돌리니 약속했던 시간보다 조금 많이 지나있었다. 계속 문자를 해주긴 했지만 내가 늦은건 사실이니까 최대한 빨리 가자는 생각으로 엑셀을 밟는다.

그렇게 카페 간판이 눈에 보일때쯤 카페 앞쪽에 앉아있는 익숙한 모습이 보인다. 양 손에 뭘 들고 있는데 저 종이백이 나에게 줄 물건인가? 천천히 카페 앞으로 차를 운전해가자 이쪽을 보고서 손을 흔드는 모습이 보인다. 기뻐하는 표정에 역시 늦으면 안됐다는 죄책감이 몰려온다.

" 꼬맹이, 얼른 타. "

창문을 내리고 웃으면서 말한 나는 손수건으로 조수석 시트를 간단히 닦아준다. 출발하기전에 가볍게 청소는 했지만 그래도 한번쯤 더 하는게 어려운 일은 아니니까. 그녀가 탈때까지 기다렸다가 나는 뒷쪽을 가리키며 말했다.

" 저번에 두고간거 뒤에 있어. 지금 들고 있는 것도 뒷좌석에 던져놔. "

그렇게 얘기하고 오늘 갈 장소를 네비게이션에 찍는다. 어디 갈지는 저번에 들어서 알고 있었으니까.

107 이름 없음 (eF9HgOb8cE)

2021-10-10 (내일 월요일) 15:42:24

>>106

" 네~ 꼬맹이 탑니다~ "

약속 시간 이상을 밖에서 기다렸어도 그닥 기분이 상하지는 않았는지, 오히려 꼬맹이라 부르는 그의 말에 장난스럽게 대답하면서 익숙하게 그가 닦아준 조수석에 오르며 차 문을 닫았다. 그렇게 바람이 불지 않는 곳에 들어오자 그녀는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대충 쓸어 넘기며 편하게 시트에 몸을 기댔다.
카페에서부터 차에 타기까지 이어지는 그녀의 모든 행동이 마치 흐르는 물처럼 자연스러웠다.

" 아, 고마워요. 이따가 챙길게요. "

안전벨트를 하며 고개를 돌려 뒷좌석을 확인한 그녀는 고맙다고 대답했지만, 이번 선물 만큼은 직접 그의 손에 쥐어줄 생각이었던 그녀는 지금 들고 있는 것도 던져놓으라는 그의 말에는 대답 없이 미소만 지었다.
그렇게 마지막 말을 무시해버린 그녀는 네비게이션을 하고 있는 그가 귀찮지 않도록 종이백을 반대쪽 손으로 옮기더니 음료가 담긴 컵만 당신 쪽으로 내밀어 빨대를 입가 근처에 가져다주려 했다.

" 여기요, 마실거. 급하게 준비하느라 바빴을 텐데 일단 한 모금 마셔요. "
" 그리고, 이건 뒤에 직접 던져서 놔요. "
" ..그때 못 줬던 생일 선물이에요. "

그가 네비게이션에 목적지를 전부 입력했을 즈음에 가지고 있던 종이백을 그에게 내밀었다. 크기가 크지도 않고, 검은색으로만 이루어진 선물용 가방은 별다른 장식이 없었지만 안에 들어있는 물건 역시 가격이 있겠다 예상될 만큼은 고급스러워 보였다.
하필 그의 생일날에 출장을 가는 바람에 챙기지 못했던 것이 마음에 걸렸던 그녀는, 가져온 선물의 정체를 말하는 목소리에 어렴풋이 미안함이 담겨있었다.

" 늦었지만 축하해요. "

108 이름 없음 (BKnmjGCA1A)

2021-10-10 (내일 월요일) 16:50:03

>>107

문자를 하면서도 느꼈지만 약속에 늦은 것에 대해서 그렇게까지 화가 나보이지는 않았다. 평소엔 약속시간보다 먼저 나와서 기다리곤 했으니 하루 정도는 봐준다는 의미일지도. 이래서 사람의 평소 행실이 중요한거다. 조수석에 탄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미처 정리하지 못한 머리카락 가닥가닥을 떼어주며 말했다.

" 밖에 바람이 좀 부나보네. "

지하주차장에서 차를 끌고 나왔으니 바깥의 바람을 느낄새가 없었다. 잠깐 창문을 열었을때 바람이 조금 불긴했는데, 이렇게 계속 불고 있었나보다. 꽤 차가웠는데 이런 날씨에 바깥에 나와있으면 분명 감기 걸린다니까. 그렇게 네비게이션을 조작하며 입가에 가져다주는 음료를 자연스럽게 빨아먹다 종이백의 정체에 눈을 크게 뜨며 바라보았다.

" 생일 선물이라고? "

분명 저번 달에 생일이긴 했었다. 그때 너는 분명 출장을 가있기는 했었지. 하지만 조금 아쉬웠다뿐이지 출장 가있는 사람에게 생일 선물 내놓아라 할 수는 없으니까 그냥 생일 축하한다는 말만 듣고 말았다. 그때 다른 사람들에게도 받은게 꽤나 있었지만 이렇게 뒤늦게 챙겨주는 선물이라니, 그 누구에게 받은 것보다 값진 것이었다.

" 월급이 왜 없나 싶었는데 이것 때문이었구나? "

딱 보기에도 고급져보이는 것이라 출발하기전에 종이백에서 선물을 꺼내본다. 고급 브랜드 로고가 박힌 상자를 열어보자 보이는 것은 지갑이었다. 고급 가죽으로 마감되어있는 지갑은 영수증을 보지 않아도 그 값어치가 얼마나 될지 대충 짐작이 가서 놀란 눈으로 너를 바라보며 말했다.

" 너무 무리한거 아니야? 그냥 안주고 넘어가도 괜찮았는데. 그래도 고마워. 잘 쓸께. "

물론 똑똑한 그녀인만큼 다 계산하고 소비했겠지만 그럼에도 평소에 버는 것을 생각해봤을때 내 입장에선 좀 무리가 아닌가 싶었다. 주는 마음은 감사하지만 본인이 부담될만큼의 선물을 받는 것은 받는 사람도 부담이 가기 마련이다. 그래도 신경 써서 선물을 줬다는 것에 감사를 표하면서 조심스럽게 뒷좌석에 가져다 놓은 나는 부드럽게 차를 출발 시켰다.

" 이렇게 큰걸 받아버렸으니 내가 줄 생일선물도 스케일을 좀 늘려야겠는데? "

고개는 전방을 주시한 상태로 너를 흘끗 쳐다봐가며 웃는다. 차도에는 생각보다 차가 없었고 신호도 빨간불에 거의 걸리지 않고 스무스하게 도시를 빠져나가고 있었다.

109 이름 없음 (jFnuKr3lCE)

2021-10-10 (내일 월요일) 17:36:09

자기가 하는 일이 올바르지 않고 비난받을 행동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으나 비정한 표정을 짓고 있는 그에게 있어선 그런 것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일이었다. 가문계승 후보자 중 하나의 목숨을 끊고 불행한 사고로 위장한 후 그는 검에 묻어있는 검붉은 얼룩을 닦아냈다. 활활 타오르는 불꽃은 다음 날, 정말 불행하고 운이 없게도 오두막에 불이 붙어 그 안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던 이가 목숨을 잃은 것으로 진상을 감출 것이 분명했다.

혹여나 불꽃이 중간에 꺼질까 싶어 어둠 속에서 불꽃이 사그라드는 것까지 확인하고 난 이후에야 그는 어둠 속으로 모습을 감췄다. 참으로 비정하기 짝이 없는 권력 싸움 속 암투였으나 갑작스럽게 유력 가문을 이어가던 가주와 그 아내가 오랜 지병으로 목숨을 잃은 이후의 혼란 속에선 그 비정함마저 집어삼켜야 살아남을 수 있었다. 자신이 모시고 있는 이도 그렇게 생각할지는 알 수 없었으나 그는 그렇게 생각했다.

윤리, 도덕. 그런 것을 따졌다간 이 상황에서 살아남을 수 없었다. 자신의 손에 피를 묻혀서라도 지킬 이는 지키리라. 그리고 수행할 것은 수행하리라. 인간의 마음을 애써 잠재우며 지시에 충실하며 비정한 마음을 먹은 사내는 아무의 눈에도 띄지 않고 한 처소로 들어섰다.

그 안에 있는 이는 사내가 모시는 이였다. 무릎을 꿇고 머리를 숙이며 입을 열어 그는 상황을 보고했다.

"지시한대로 처리했습니다. 상황이 상황이니 의혹은 생길지도 모르나 암살했다는 사실은 아무도 모를 겁니다."

/난 그런 지시 내린 적 없어! 라는 식으로 사내가 멋대로 한 행동으로 처리하는 것은 조금 곤란할 것 같아. 그 외엔 어떻게 이어도 오케이.

110 이름 없음 (75gxEpABMA)

2021-10-10 (내일 월요일) 17:50:29

>>108
# 내가 지금 좀 큰 일이 생겨서 답레가 많이 늦을 것 같아... ㅜㅜㅜ 미안해..!

111 이름 없음 (jn265EYOsE)

2021-10-10 (내일 월요일) 17:56:50

>>110
# 괜찮아~ 천천히 줘.

112 이름 없음 (AerEHsKkLk)

2021-10-11 (모두 수고..) 19:03:09

>>109
불을 밝히지 않은 어둑한 처소에 가득한 침묵을 깨고, 차분하고 위엄이 서린 목소리가 조용히 울렸다. 그러나, 그 목소리는 그의 주인의 것이 아니었다.

"유감이군, 상황이 상황이라 의혹만으로는 끝나지 못할 성 싶은데."

목소리가 들림과 동시에, 방 안이 달빛으로 은은하게 밝아졌다. 침대 위에는 그의 주인이 재갈이 물린 채 포박당해 있었고, 그 옆에는 길고 굽슬굽슬한 붉은 머리카락을 높이 묶어올리고, 낡았지만 잘 손질된 은빛 갑옷을 입은 기사가 검을 뽑아든 채 그의 주인을 겨누고 서 있었다. 뿐만 아니라, 어둠 속에 몸을 숨기고 있던 여섯명 정도의 병사들이 그의 주변을 둘러싸고 있었다.

"국왕 폐하의 명을 받들어, 자네를 이번 귀족 연쇄 살인 사건의 범인으로서 체포하겠네. 자세한 이야기는 심문 때 듣도록 하지."

말을 마친 기사는 병사들을 향해 지시했다.

"포박해라!"

지시가 떨어지자, 곧 병사들이 그를 향해 성큼성큼 다가오기 시작했다.

113 이름 없음 (dHPE1aa3qU)

2021-10-11 (모두 수고..) 19:12:24

>>112 사내가 모시는 이가 있는 것을 확인하고 보고를 한건데 사실 얼굴도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어둠이 깔려있었고 주인은 포박당해있었고, 얼굴도 확인하지 않고 보고를 하고 그 안에 병사들이 이미 있었다라는 전개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네. 이 전개로 잇는 것은 조금 애매할 것 같아. 기껏 이어줬는데 미안하다. 너참치.

114 이름 없음 (MK.lQbtPBY)

2021-10-13 (水) 20:08:08

“배고파!”

불쑥 외마디를 읊조리면서 나타나더니, 당신의 앞에서 눈을 깜빡인다. 새카만 머리카락과, 새하얀 피부, 그리고 또 새카만 눈동자…가 아니다. 분명 눈동자가 까맣고 동그랗게 맺혀있었는데, 빨갛게 빛나고 있다. 석류알, 루비, 장미꽃잎, 선명하고 예쁜 붉은 빛으로 물든 눈동자가 샐쭉 감겨 사라진다. 눈웃음 짓고 있는 모양이다. 자, 다시 이 오밀조밀한 얼굴을 뜯어보면, 연하게 꽃가루를 덧대어 분칠한 것 같은 뺨과 입술 색, 히히 웃으며 드러난 이는 또 새하얗고, 송곳니는 유달리 뾰족하고… 뾰족하다. 송곳니가 왜 저렇게 뾰족하다 못해 날카로운가, 의문이 절로 생길 만큼이나 뾰족한 이를 가지고 있었다. 눈웃음지으며 생글생글, 밝고 당차게도 배고프다 하는 것과는 반대로 무서울 정도의 송곳니다.

“한 입만 물어도 돼?”

성장기 청소년은 잘 먹어야 한다고 그러잖아! 나도 한 입만 잘 먹어보자아아!

“약도 발라주고 밴드도 붙여줄게.”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가 빼더니, 당신에게 손을 활짝 펼쳐 보여준다. 캐릭터 반창고 뭉치와 연고가 손바닥 위에 덩그러니 놓여 있다.


맥커터 사절!

115 이름 없음 (Do2rtZbj4w)

2021-10-13 (水) 22:58:30

>>114

멘솔향이 나는 담배를 물고 있던, 보통 체격의 팔다리가 길쭉길쭉한 여성이 한밤 속에 더욱 도드라지는 허연 연기를 내뱉는다. 그 연기가 풀어져 밤하늘로 사라질 때 즈음 갑작스럽게 낭창한 외침이 여성의 귀를 자극한다. 분명 적잖이 놀랐을텐데 여성은 어깨를 가볍게 움츠렸다간 또 무기력한 평소의 눈빛으로 상대를 누르듯 응시했다. 날카로워 보이는 이와 환상처럼 붉은 눈동자는 여성의 무덬함을 뚫지 못했다.

" 뭐를?"

다짜고짜 물어도 되냐는 질문에 이미 반박자도, 한박자도 아닌 박차를 놓친 물음이 짓씹혀져 나갔다. 입에 물린 담배도 바스라진다. 이미 구겨지고 짧아진 몽당 담배를 바닥에 던지고 밟는 여성의 태도는 무심하고 또 거칠었다. 뜨거운 불똥이 사방으로 튀어나간다.

달빛 아래로 희미하게 드러난 반창고를 보는 건지 모를 여성의 시선이 서서히 당신을 또 누르듯 응시한다. 그리고 인위적인 미소가 여성의 입가를 비튼다. 무얼 하려는 건지도, 누군지도 모르겠지만 어찌됐든 잠깐이나마 현실을 잊을 수 있다면. 설령 미친 사람일지라도 지금은 놀아주고 싶었다. 여성은 순순히 골목벽에 기대며 항복한 포로와도 같이 순응적이고 공허한 표정을 짓는다.

" 마음대로 해봐."

116 이름 없음 (Do2rtZbj4w)

2021-10-13 (水) 23:01:21

오타났다.. 무덬함이 아니라 무던함이야!

117 이름 없음 (MK.lQbtPBY)

2021-10-13 (水) 23:38:55

>>115

“왜 안 놀라! 놀라야지!”

깜짝 놀라서 도망가려 하거나, 깜짝 놀라서 굳어버리거나, 깜짝 놀라서 당황하거나, 깜짝 놀라서…. 아무튼지 간에 깜짝 놀라는 당신의 반응을 상상하고 있던 탓에 되려 실망해서 물어본다. 조금 삐죽거리기는 했지만, 배고프다는 말을 대뜸 내뱉을 정도로 허기짐을 느끼고 있었으니까 자리를 떠나지는 않았다. 허락해줄지 안 해줄지는 아직 모르니 인내를 가져보기로 했다. 무미건조한 당신과 시선을 맞추려고 들었다. 반짝반짝, 물게 허락해야 할 것이라는 부담감을 최대한 잔뜩 실어서!

“손가락! 목은 밴드 잘 떨어져.”

느린 답에도 재촉 없이 고분고분 기다린 이유도 허락 안 해줄까 봐서라는 이유가 컸다. 세상 어느 짐승이든 먹을 것으로 교육하고 조련하는 방법이 대다수인데, 소설 속에나 나올법한 존재라고 무엇이 다르지는 않은가보다. 바닥에서 밟히고 있는 담배꽁초에 시선이 톡 떨어진다.

“잘 먹겠습니다아!”

이윽고 다시 시선은 당신에게로 올라왔고, 방긋 웃으면서 당신의 손을 잡더니 입가로 가져간다. 그중에서도 마지막 손가락을 입에 물었다. 다섯 손가락 중에 제일 작고, 약하고, 존재감 없는 그런 손가락. 날카로운 송곳니가 쿡 찌른다. 깊게 박아넣지도 않고, 핏방울이 맺히기는 할 정도의 얕은 상처를 내었다. 손가락에서 피가 나오는 것이 느껴지면 송곳니를 빼내고 손가락을 물고서 피를 빨아들인다. 배고프다니 먹고 있기는 한데, 맛있는 표정은 아니다.

118 이름 없음 (AuAcdFP1TY)

2021-10-14 (거의 끝나감) 23:31:04

>>109 아직 있을 지 모르지만 >>112랑 잇지 않기로 했으면 내가 >>109에 이어도 될까?

119 이름 없음 (MvuHTlMNK.)

2021-10-14 (거의 끝나감) 23:34:00

>>118 응? 물론 이어도 괜찮아! >>112는 이전 상황을 무시하고 새로 상황을 작성해서 잇기 조금 애매하니 말이야.

120 이름 없음 (gT2vy.anxI)

2021-10-15 (불탄다..!) 04:27:59

>>119 알겠어 그럼 오늘중으로 이을게:)

121 이름 없음 (gT2vy.anxI)

2021-10-15 (불탄다..!) 08:46:53

>>109
무릎을 꿇고 고개를 조아린 채 보고를 올리는 종을 가만히 바라보던 사내의 주인은, 이내 들려오는 흡족스러운 결과에 가늘고 나직한 목소리로 후후 웃었다. 높이 묶어올려 흰 리본으로 장식한 길고 부드러운 밝은 금발에, 서글서글한 눈매와 물빛 눈동자를 지닌, 여느 영애처럼 간소하지만 산뜻한 드레스를 차려입은 그의 주인은, 혈육을 살해하도록 지시한, 피도 눈물도 없는 가주 후보라는 타이틀이 지독히도 어울리지 않는 여인이었다.

"아주 잘해주었어요. 역시나 절 실망시키지 않네요."

차라리 마음에 든 과자를 구워낸 제과제빵사를 칭찬하는 것이 더 어울릴 법한 밝은 목소리와 구김살 없는 목소리로, 비록 완벽히 용의선상을 벗어나지는 못했을 지언정 방해물을 훌륭히 치워낸 수족을 칭찬한 영애는, 이내 평소처럼 발랄하지만 조금은 무게를 머금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마지막 명령을 내리겠어요."

저 사내의 충정은 이제껏 겪어왔기에 잘 알고 있다. 나를 위하여 수도 없이 손에 피를 묻히고 타인의 생명을 바쳐온 자이니, 스스로의 목숨 쯤이야 기꺼이 내어주겠지. 그리 생각하며 영애는 허리춤에 차고 있던 검을 뽑아, 사내를 겨누며 여전히 해사한 미소를 머금고 가볍고 발랄한 목소리로 명을 내렸다.

"영원히 침묵해주세요. 이것이 내가 그대에게 내리는 마지막 명령이랍니다."

그 말을 끝으로, 영애의 손에 들린 날카로운 칼날이 사내의 목을 향해 매섭게 날아들었다.

122 이름 없음 (ZIoHzGEbmA)

2021-10-15 (불탄다..!) 19:18:47

>>121

누군가는 물을 것이다. 무슨 이득이 있어서 굳이 그렇게 피를 묻히는 잔혹한 짓을 하는 거냐고. 사내에게 이유 따윈 존재하지 않았다. 그저 자신이 충성을 바치기로 한 이가 그것을 바랬기 때문이었다. 이른 시기부터 자신의 주인 되는 이를 모셨고, 혼란의 시기가 온 순간부터 반드시 가주로 만들겠다고 다짐한 것에 망설임은 없었다. 자신의 검은 오로지 그것만을 위해서 존재했으니까.

그렇기에 지금 내리는 명령. 곧 죽음을 지시하는 것에 대해서 사내는 아무런 저항도 보이지 않았다. 이제는 자신이 필요없는 것이리라. 그렇다면 그걸로 좋은 일이었다. 그것이 자신의 주인이 내리는 명이라고 한다면. 그렇기에 사내는 조금도 저항하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서 그녀의 행동을 기다렸다.

"그것을 바라신다면야. 허나 아직 일이 완전히 끝난 것은 아니니, 부디 검을 들 수 없는 이 시간 이후에도 조심하셔서 이루고자 하는 것을 이루시길 바랄 뿐입니다."

칼날이 자신의 목을 찌르는 것을 기다리며, 혹은 다른 곳을 찔러넣는 것을 기다리며 사내는 마지막으로 볼 풍경으로 그녀의 모습을 담은 후, 조용히 눈을 감았다. 그 눈을 뜬 이후에 보이는 풍경은 여기와는 다른 지옥불구덩이속일지. 아니면...

"......"

아마도 지옥불구덩이 속이라고 생각을 하나 사내의 마음에는 후회란 없었다.

123 이름 없음 (KwQRhA/rSU)

2021-10-16 (파란날) 09:50:53

>>122 사내가 자리에서 일어서기가 무섭게 곧장 뾰족한 구둣발이 그의 정강이를 향해 날아들었다. 영애는 해사하게 웃으며 가볍고 발랄한 목소리로 말했다.

"어머나, 일어서라 명한 적은 없는데. 빨리 신의 품으로 보내달란 뜻인가요?"

고운 목소리에 어울리지 않는 매도를 내뱉고, 영애는 후후 웃었다. 이내 사내가 입을 열자, 영애는 잠자코 그의 말을 들으며 만족스러운 듯 미소지었다. 역시 말이 좀 많은 건 흠이지만, 좋은 장기 말이긴 했어. 더는 필요 없을 뿐이지. 사내의 말이 끝나자, 영애는 다음에 또 보자며 친구와 작별하듯 낭랑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요. 그동안 수고 많았어요. 잘 가요."

서걱. 영애의 목소리 뒤에 이어진 것은, 묵직한 고깃덩이를 절단하는 듯한 섬뜩한 소리였다. 쿵, 소리와 함께 영애의 방안이 순식간에 피비린내로 가득 찼다. 화사한 드레스와 희고 깨끗한 얼굴에 피가 묻었지만, 영애는 아랑곳하지 않고 생긋 미소지었다. 피를 나눴을 뿐인 경쟁자들은 모두 죽었고, 그 범인 또한 죽었다. 세상 사람들은 이 연쇄살인 사건의 범인이 그의 마지막 타깃의 손에 죽은 것으로 알게 될 테고, 이걸로 완벽하게 용의 선상에서 벗어날 수 있겠지... 진동하는 피비린내를 맡았는지, 하인들이 급하게 달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거의 다 왔지만, 마지막까지 긴장을 놓으면 안 되겠지. 영애는 콧노래를 부르고 싶은 걸 꼭 참고 검을 쥔 채 자세를 잡았다. 이후, 다급히 달려온 하인들이 문을 박차고 열었을 때 본 것은, 피투성이가 되어 쓰러진 괴한과, 피 묻은 검을 쥔 채 겁에 질린 얼굴로 파르르 떠는 영애의 모습이었다.

124 이름 없음 (vtz9guR9vI)

2021-10-16 (파란날) 14:36:58

>>123 이미 캐릭터가 죽어버렸으니 더 이을 건수는 없을 것 같네. 이렇게 끝을 낼게.

125 이름 없음 (C6rO8ptV7w)

2021-10-16 (파란날) 15:39:49

>>124 이미 끝난 상황극에 자꾸 말을 얹어서 미안해. 혹시 괜찮다면 >>109에서 한 번만 더 이어볼 수 있을까? 참고로 난 >>112와 >>121과는 다른 참치야. 사실 굉장히 잇고 싶은 상황이 떠올랐었는데 두 번 모두 타이밍을 놓친 걸 아쉽게 생각하고 있었거든. 생각보다 핑퐁이 짧게 끝난 것 같아서 기회가 된다면 나도 한번 이어보고 싶은 마음이 들었어. 물론 거절해도 얼마든지 상관없고, 이전에 이었던 참치들을 비난하거나 비하하려는 의도도 전혀 없어. 문제가 된다면 자유 상극을 세운 참치는 주저없이 이 레스를 하이드해 주길 바래.

126 이름 없음 (vtz9guR9vI)

2021-10-16 (파란날) 15:41:57

>>125 어. 나는 상관없긴 한데 이거 같은 상황으로 다른 사람과 잇게 해도 되는건가? 그게 좀 애매하네. 룰로서 문제가 된다거나 그런 게 아니면 나는 괜찮을 것 같아. 사실 나도 전개가 이렇게 되니 조금 아쉽기도 하고 말이야.

127 이름 없음 (C6rO8ptV7w)

2021-10-16 (파란날) 15:44:16

>>126 나는 상황극이 현재진행형으로 이어지는 것도 아니고, 일대일로 넘어가지도 않은 채로 종결되었으니 괜찮다고 생각했어. 만약 문제가 된다면 나중에 이 레스를 포함해서 내가 쓴 레스를 전부 하이드하면 되지 않을까?

128 이름 없음 (vtz9guR9vI)

2021-10-16 (파란날) 15:45:29

>>127 그럴려나? 하긴 이미 끝이 났으니 괜찮겠지? 그렇다면 나도 괜찮을 것 같아!

129 이름 없음 (C6rO8ptV7w)

2021-10-16 (파란날) 15:48:13

>>128 고마워. 그럼 바로 이어오도록 할게:>

130 이름 없음 (C6rO8ptV7w)

2021-10-16 (파란날) 16:26:37

>>109

방의 주인은 화려한 것을 좋아했다. 대륙에서 제일가는 장인이 반 년 동안 공을 들여 세공한 보석, 바다 건너 이국의 상인이 들고 온 집 한 채 각겨의 비단으로 지은 옷, 어둠 속에서도 빛을 발하는 순금으로 장식한 가구. 루비와 다이아몬드로 장식된 침대에는 두터운 휘장이 드리워져 안을 들여다볼 수 없었다. 다만 어렴풋이 보이는 형체를 통해 누가 안에 있을 것이라고 짐작할 뿐이었다.

"잘했어."

사내의 말이 끝나자 휘장 사이로 흰 손이 나왔다. 가느다란 손가락은 말 잘 듣는 강아지를 칭찬하듯이 사내의 뺨을 가볍게 두드렸다. 완전히 틀린 말은 아니었다. 아, 나의 강아지, 말 잘 듣는 충견. 훈련이 아주 잘 되어서 일처리도 확실할 뿐더러 배신도 하지 않지. 세상에 둘도 없는 맹견이었다.

"목격자 같은 건 남기지 않았을 거라 믿어."

휘장 안으로 다시 들어간 손은 이내 작게 접힌 쪽지 하나를 들고 모습을 드러냈다.

"둘째 형님이 날 의심하고 있어. 아직은 심증뿐이겠지만, 혹시 모르니 행적은 정리해 둬. 아침이 되면 이걸 조리실로 가져가."

엠마라는 하녀를 찾으면 될 거야. 그 말로 미루어 보아 그 하녀가 이 밤 사내의 행적을 정리해 줄 것이라는 사실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131 이름 없음 (vtz9guR9vI)

2021-10-16 (파란날) 16:55:33

>>130

"그런 걱정은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아무도 없다는 것을 몇 번이고 확인했습니다."

정말 운이 나빠서 사내가 확인하지 못한 범위 내에 누군가가 있었을지도 모르나, 그 정도로 먼 거리라면 무슨 일이 있었는지 파악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사람의 시야라는 것은 생각보다 그렇게까지 넓은 것은 아니었고 설사 뭔가가 보인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무엇인지를 파악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그 내용이 무엇인지 확인할 정도의 거리라면 이미 그 자도 사내의 검에 목숨을 잃었으리라. 그런 어설픈 실수 따윈 하지 않는다는 듯, 사내는 자신의 뺨을 두들기는 것을 받아들였다.

"오히려 그 의심하는 것을 이용해서 가문 내의 영향력을 뺏을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쉽진 않겠지만, 결국 모두 생각하는 것은 똑같을겁니다. 병으로 인해 가문을 이어가던 두 분이 돌아가시고 난 이후로 다들 권력을 얻기 위해 필사적일테니 말입니다."

권력을 얻기 위해, 가문의 주인이 되기 위해 피를 묻히고 상대를 제거하는 행위는 보통 비정한게 아니었다. 허나 귀족으로 태어난 이상 결국 그 운명에서 벗어나긴 힘들었다. 사이좋게 지내는 곳이 있을지도 모르나, 그렇지 않은 곳도 분명히 존재했기에.

쪽지를 받아든 사내는 그 내용물을 굳이 확인하지 않았다. 엠마라는 하녀를 찾으라는 그 말에 사내는 고개를 끄덕였다.

"분부하신 대로 하겠습니다. 더 필요하신 사항은 없으십니까? 저는 당신을 위해서 존재하는 자. 필요한 일이 있다면 얼마든지 명을 내려주십시오."

132 이름 없음 (XpmatWz9XQ)

2021-10-16 (파란날) 17:45:33

>>131

"믿을게."

짤막한 대답은 남자를 향한 신뢰를 담고 있었다. 그가 누군가에게 믿음을 주는 경우가 드물다는 점을 생각하면 이례적인 일이었다. 아니,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밑바닥보다 더 아래에 있는 진창에서 이 자리까지 올라오는 동안 그의 곁을 지킨 건 다른 누구도 아닌 바로 사내였으니. 설령 사내가 실수를 저지르더라도 한 번 정도는 얼마든지 용서할 수 있었다. 그리고 사내는 이제껏 단 한 번도 실패한 적이 없었다.

"그래야지. 둘째 형님은 가문 안에서 입지도 좁으니 더 수월할 거야."

이제 와서 세력 다툼에서 밀려날까 애간장을 태워도 여태까지의 망나니짓은 사라지지 않는다. 그런 주제에 눈치는 빨라서 의심 따위나 하다니, 대체 자기가 뭐라고 생각하는 건지. 이 저택에는 이제 제 사람보다 그토록 깔보던 사생아의 사람이 더 많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면 과연 어떤 표정을 지을까?

"지금은 그걸로 됐어."

손을 가볍게 내젓던 그는 아, 하고 탄성을 내뱉었다. 휘장 너머에서 천이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리는 것이, 아무래도 사내를 향해 상체를 가까이 기울인 듯했다.

"그러고 보니 상을 줘야겠네. 원하는 걸 말해."

133 이름 없음 (vtz9guR9vI)

2021-10-16 (파란날) 18:11:05

>>132

"말씀하신대로 내세울 수 있는 것은 그다지 없을테니 너무 급하게만 가지 않으면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급한 쪽은 그 사람일테니 말이죠."

가문 안에 입지가 적은만큼 혹시나 자신이 밀려날까 싶어 움직임을 보일 수도 있었고, 그렇게 되면 오히려 상황은 이쪽에게 유리해질수밖에 없었다. 의심을 한다고 한들 무엇이 달라질까. 사내는 누구에게도 목격당하지 않게 움직였고, 자신이 행한 일은 모조리 불행한 사고로 조작했다. 그리고 아직까지는 그 꼬리가 잡히지 않았다. 허나 방심할 순 없었기에 급하게만 가지 않으면 될 것 같다는 의견을 내비추며 곧 들려오는 그걸로 됐다는 말에 수긍하며 입을 꾹 다물었다.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려오고 상으로 원하는 것이 있으면 말하라는 그 말에 사내는 잠시 생각했다. 자신이 원하는 것은 무엇이 있을까. 막상 바로 떠오르는 것이 없다는게 자신의 생각이었다. 딱히 포상을 바라고 이렇게 모시는 것이 아니었기에 더더욱. 그저 이것이 자신이 해야하는 일이라는... 마치 맹목적인 사명같은 느낌을 가슴에 품은 사내는 좀처럼 쉽게 답을 하지 못하고 눈동자를 잠시 굴리다 입을 열었다.

"지금 당장 떠오르는 것은 솔직히 없습니다. 허나, 그럼에도 뭔가를 받아야 한다면... 언제가 이 가문의 모든 것을 가지게 되었을 때도 당신의 그림자로서 지금처럼 일하게 해줬으면 합니다. 물론 모든 것이 끝난 직후에는 저는 필요없는 존재일지도 모르나... 제가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당신의 검이 되는 것 뿐입니다."

맹목적인 추종에 이유는 없었다. 상대는 자신의 손을 더럽혀서라도 지키고 가주로서 올리고 싶은 자였다. 자신이 바라는 것은 오직 그것뿐이라고 생각하며 그는 다시 말을 조용히 이어나갔다.

"만일 그게 힘들다면, 언젠가 가주로 오르셨을때 천천히 생각할 시간을 주셨으면 합니다. 그때라면 지금과는 상황이 다를테니 저도 다른 무언가를 바라게 될지도 모르니까요."

134 이름 없음 (130yYPA1zs)

2021-10-16 (파란날) 18:13:47

적당히 쓰라니깐, 바보야. 이번 달 들어서 벌써 몇 번째야? (전류가 파직, 하고 튀는 당신의 기계팔을 손가락으로 톡톡 두들기며 언짢은 얼굴로 바라보다 피식 웃는다.) 그래서, 이놈 성능은 어땠어? 이 정도의 화력을 감당할 수 있는 신경회로를 가진 건 너 뿐일걸.

135 이름 없음 (XpmatWz9XQ)

2021-10-16 (파란날) 18:38:44

>>133

"성급히 날뛰다 실수라도 저지르면 이쪽에선 고맙지."

안타깝게도 그의 둘째 형님은 그리 머리가 좋은 편이 아니었다. 사실 전 가주의 자식들은 대부분 물려받은 재산만 믿고 기세등등한 머저리들이었다. 적자들의 머리를 모두 모아도 사생아 하나만 못 하다니, 타계한 가주가 저승에서 땅을 치며 통곡할 노릇이었다. 물론, 그들에게는 사내처럼 충직한 사냥개가 없다는 점을 고려해야겠지만.

"그건 상이 아니야. 당연한 거지. 내가 가주가 되면 날 떠날 생각이었어?"

대답해. 그렇게 말하는 목소리가 일순 싸늘해졌다. 따뜻하다 못해 다소 덥기까지 하던 방 안의 온도가 순식간에 떨어지는 듯했다. 침대에 반쯤 엎드려 있던 형체가 허리를 곧게 세웠다. 휘장 너머로도 날카로운 눈빛이 느껴질 정도였다.

실수는 용서할 수 있다. 하지만 배신은 용서할 수 없다. 무슨 일이 있어도.

"내가 물은 건 그렇게 거창한 게 아니야. 물론 거창한 걸 바라도 상관은 없지만... 돈을 원한다면 줄게. 보석도 얼마든지 있어."

사람의 가장 큰 원동력은 욕망이었다. 심장이 뛰고 숨을 쉬는 이상 욕망이 없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사내 역시 무언가 원하는 것이, 욕망하는 것이 분명 있을 것이다. 적어도 그는 그렇게 확신했다. 그러니 그 욕망을 충족시켜 주고자 하는 것이었다. 그게 무엇이 되었든.

136 이름 없음 (vtz9guR9vI)

2021-10-16 (파란날) 19:06:17

>>135

"만일 당신의 앞으로의 길에 방해가 되는 일이 있다고 한다면 그럴 생각이었습니다."

날카로운 분위기에 크게 반응하는 일 없이 사내는 마치 당연한 사실인양 자신의 생각을 이야기했다. 물론 자신이 모시는 이가 그렇다는 것은 아니었으나 경우에 따라선 자신의 앞길을 위해 주변의 측근을 내치는 일도 이런 귀족들 사이에선 흔하다면 흔한 일이었다. 자신이 그 대상이 된다고 할지라도 사내는 조금도 원망하거나 할 생각은 없었다. 오히려 자신의 존재로 인해 그가 피해를 본다면 자신이 먼저 부탁할 생각이었으니까. 다른 것은 몰라도 자신이 모시는 존재가 피해를 입는 것은 그로서도 그저 두고만 볼 수는 없는 사실이었다.

돈과 보석. 그런 것을 자신이 바랬던가. 지금 이 삶에 크게 불만은 없고 인간의 마음을 버리며 악귀처럼 짙고 비정한 마음을 품은 자신이 그런 것을 바래도 되는 것인가. 자신에게 그럴 자격이 있는 것인가. 거창한 것이 아니라고 해도 좋으나 결국 어느 것도 자신에겐 거창하게만 느껴졌다. 그렇기에 답에는 조금 시간이 걸렸을지도 모른다. 허나 그렇다고 해서 너무 많은 시간을 두진 않았다. 기다리는 시간조차 길게 이어지면 자신이 모시는 이에 대한 실례였기에.

"그렇다면 보석 하나를 얻고 싶습니다. 제가 쓸 것은 아니긴 하나, 근처에 있는 고아원을 조금 지원해주고 싶습니다. 손에 피를 묻힌 제가 할 말은 아닐지도 모르나, 저처럼 뒷골목을 헤메면서 배를 굶주리는 아이들이 가능하면 없었으면 합니다."

뒷골목을 헤집으며 돌아다니면서 배를 곪던 시절. 가족없이 홀로 외롭게 지내던 시절을 떠올리며 그는 쓴 표정을 지었다. 명을 받들어 손에 피를 묻히던 자신이 할 소리는 아니었으나, 정말로 모든 것을 배제하고 바라는 것을 떠올리다면 역시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바로 그것이었다.

"그렇게 함으로서, 앞으로 더더욱 영향력을 키울 수 있고 좋은 이미지도 세울 수 있지 않을까하기에 청하겠습니다."

137 이름 없음 (C6rO8ptV7w)

2021-10-16 (파란날) 19:48:25

>>136

"널 내치고 말고는 내가 결정할 일이야. 그때까지 넌 그냥 자리를 지키면 돼."

놀랍도록 오만한 말이었으나, 그 목소리는 안심했다는 듯이 한풀 꺾여 있었다. 그의 몸이 다시 침대 위로 풀썩 쓰러졌다. 그럼 그렇지. 설령 사내가 그의 앞길에 방해가 된다고 해도, 그건 온전히 그가 다뤄야 할 문제였다. 감히 사내가 멋대로 떠나겠다 말겠다 할 문제가 아니란 말이다. 그렇게 생각하자 약간의 짜증이 치밀어 올랐다. 흡사 어린아이가 심통을 부리는 모습과도 같았다. 그는 유달리 사내의 앞에서만 다섯 살배기처럼 구는 경향이 있었다.

"뭐야, 고작 그런 거?"

김이 빠졌다는 듯이 한숨이 새어나왔다. 뭘 요구하려나 했는데 고작 뒷골목 고아들을 먹여살릴 보석 하나라니. 자신의 사냥개는 묘한 부분에서 유한 구석이 있었다. 이것이 방금 전 사람을 죽이고 사고로 위장한 이의 대사라고 그 누가 상상이나 할 수 있을까. 새삼 느끼는 바이지만, 어째서 그가 자신과 같은 길을 걷기로 했는지 모를 일이었다. 자신은 얼굴도 모르는 아이들을 위한 동정심 따위 이미 버린지 오래였기에.

"그러지 않아도 이미 몇 군데 지원하고 있잖아. 그걸로는 부족했던 거야? ―하아."

당연히 부족했으리라. 그 지원마저도 철저히 득과 실을 따져 '선발된' 고아원들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었으니까. 사내의 성에 차지 않는 것도 당연했다. 다시 휘장 밖으로 나온 손에는 브로치 하나가 들려 있었다. 작은 달걀만한 크기의 루비가 박혀 있는 황금 브로치는 척 보기에도 굉장히 값비싼 물건이었다. 이건 내 사냥개의 눈에 차야 할 텐데 말이지.

"가져가. ...굳이 내 이름을 댈 필요는 없어."

138 이름 없음 (vtz9guR9vI)

2021-10-16 (파란날) 20:23:31

>>137

누군가에게는 고작 그것이라고 할지도 모르나 사내에게 있어선 소중한 것이었다. 뒷골목을 돌아다니며 배를 굶주리고 때로는 추악한 짓까지 하면서 어떻게든 살아남으려고 발버둥쳤던 사내에게 있어선 자신이 살았던 삶을 또 다시 사는 이는 없었으면 하고 바랬으니까. 물론 사내는 자신의 삶을 저주하지 않았다. 비정한 마음을 먹으며 손에 진득한 피냄새를 남기는 건 자신이 모시는 이가 바라는 것. 그리고 자신이 모시는 이의 바램을 충족시키는 것이 바로 자신이 원하는 것이었으니까.

브로치 하나를 받으며 사내는 다시 머리를 조아리며 감사 인사를 휘장 너머의 이. 어쩌면 자신보다 더 비정할지도 모르는 그 존재에게 바쳤다.

"허락해주심을 감사드립니다."

이것을 팔면 얼마나 돈이 나오게 될까. 그럼 충분한 지원이 되리라. 그렇게 만족하며 그는 자신의 주머니 속에 브로치를 집어넣었다. 내일 별 일이 없으면 잠시 외출해서 한 곳을 지원해주면서, 정말로 어울리지 않는 것을 알고 있으나 그럼에도 따뜻한 온정을 비추는 시간을 가지리라. 그렇게 다짐하는 사내의 입가에 작은 미소가 흘렀다.

"내일 '사고' 소식이 들려오면 반드시 이런저런 말이 나올지도 모르지만 아마 큰 영향이 가는 일은 없을 겁니다. 아무도 당신에게는 손을 댈 수 없을 겁니다. 제가 있는 한. 그리고 당신을 따르는 이들이 있는 한."

그 목소리에는 강한 확신이 들어있었다. 의심은 할 수 있을지도 모르나 그 누구도 명확하게 확신을 할 순 없었다. 그건 그저 불행한 사고에 지나지 않았으니까. 허나 한 가지 궁금한 것이 조금 있는지 그는 살며시 물음을 조심스럽게 던졌다.

"만약 가주가 되신다면, 무엇을 꿈꾸고 계신지 여쭤도 되겠습니까? 물음이 기분을 상하게 했다면 사죄드리겠습니다."

139 이름 없음 (C6rO8ptV7w)

2021-10-16 (파란날) 21:13:29

>>138

감사 인사에 그는 대답 대신 손을 내저어 보였다. 이깟 브로치 하나는 그에게 푼돈이나 다름없었다. 만약 사내가 더한 것을 원했다 하더라도, 그는 얼마든지 줄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고아원 꼬마들을 먹이는 데에는 이걸로 충분할 것이다. 물론, 중간에서 누가 횡령을 하려 든다면 상황은 달라지겠지만.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사내가 해결해야 할 문제지, 그가 상관할 바는 아니었다.

그는 사내의 입에서 나오는 말을 그저 듣고만 있었다. 그래, 분명히 그럴 것이다. 그의 형제랍시고 있는 자들은 아직 그의 세력이 어느 정도인지 모르고 있었다. 가주 자리를 놓고 개떼처럼 싸워 대느라 뒤에 서 있는 사자도 보지 못하는 꼴이라니. 그나마 한 놈이 슬슬 눈치를 채기 시작한 것 같긴 했지만, 그자 혼자서 대체 뭘 할 수 있겠는가? 이건 이미 승패가 정해져 있는 싸움이었다. 그 사실을 모르는 건 그의 형제들뿐이었다.

내가 뭘 꿈꾸고 있냐고?

그의 사냥개가 뭔가에 의문을 가지는 것은 이례적인 일이었다. 사내에게는 다행히도 모욕적인 질문은 아니었으나, 그는 바로 대답하는 대신 생각에 잠겼다.

나는 뭘 꿈꾸고 있지?

아니, 이 질문은 틀렸다. 전제부터 완전히 틀린 질문이었다.

"난 뭔가를 원하기 때문에 가주가 되고 싶은 게 아니야. 내가 원하는 건 가주 자리 그 자체니까."

그래, 바로 이거다. 그는 부드러운 침구에 얼굴을 푹 파묻었다. 오리 깃털을 넣은 베개, 비단처럼 부드러운 이불, 황금으로 장식한 기둥.

이걸론 부족해.

"...권력이 필요해. 그 누구도 다신 날 무시하지 못하고... 인정받을 만한 권력이."

목적을 이룰 때까지 그는 그만둘 수 없었다. 자비니 동정심이니 하는 마음은 이미 옛날 옛적에 지워 버렸다. 설령 그 끝에 기다리고 있는 것이 까마득한 낭떠러지라 하더라도, 그는 그만둘 수 없었다. 그는 권력을, 힘을 원했다. 고개를 들고 있었다고 죽도록 얻어맞지 않을 힘과, 버르장머리 없는 눈을 했다고 물 한 모금 없이 사흘을 갇혀있지 않을 힘과, 채찍에 맞은 자리가 곪아 터져도 약을 구하지 못해 혼자 앓지 않을 힘을.

그걸 위해서라면 그는 악마에게 영혼이라도 팔 수 있었다.

140 이름 없음 (vtz9guR9vI)

2021-10-16 (파란날) 21:39:13

>>139

누구도 무시하지 못하고 인정받을만한 권력이 필요하다는 그 말을 들으며 사내는 입에 담진 않았으나 공감하는 마음을 가졌다. 자고로 높은 자리에 앉아 아래를 보지 못하는 이들은 그 밑바닥이 얼마나 치열한지 알 수 없었다. 누군가에게는 너무나 평화로운 일상이, 누군가에게는 당장 내일을 살아갈 수 있을지도 알 수 없어 너무나 바라는 것이기도 했다.

"제가 반드시 그 바라는 것을 얻을 수 있도록 도움이 되도록 하겠습니다. 주제넘을지도 모르나 그런 당신이기에 저는 그 누구보다 당신을 모실 수 있습니다."

말만 번지르르한 이들보다 차라리 저렇게 갈구하는 마음을 보이는 이에게 사내는 충성을 바칠 가치가 있다고 생각했다. 완전히 같진 않더라도 비슷한 부분이 있기에 움직이는 마음 또한 있었으니까. 물론 상대의 삶을 온전히 알 방도는 없었으나 그럼에도 추측할 수 있는 부분이 있었기에 더더욱.

이어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서며 사내는 꾸벅 인사를 바쳐 상대에게 말을 전달했다.

"그렇다면 자리를 비워보겠습니다. 부디 편안한 휴식 시간이 되길 바라겠습니다."

너무 오랜 시간동안 이 시간에 접촉한 것을 누군가가 알게 되어서 좋을 것은 없었다. 자신이 모시는 이가 누군가에게 의심을 사는 것은 무조건적으로 피해야만 했기에.

"오늘 밤은 좋은 꿈을 꾸길 빌겠습니다. 저의 주여."

141 이름 없음 (C6rO8ptV7w)

2021-10-16 (파란날) 22:08:14

>>140

"...그래."

확신이 담긴 목소리를 듣자 거짓말처럼 온몸에 힘이 풀렸다. 자신이 원하는 게 나락으로 떨어지는 것이라 한다면, 막는 대신 그 길을 닦아 놓을 사내였다. 긴장이 풀리자 피로감이 순식간에 몰려왔다. 그 역시 사내 못지않게 바쁜 하루를 보낸 참이었다. 방해되는 사람을 사고사로 위장해 죽이는 것도 중요하지만, 계승을 위해서 필요한 건 그게 다가 아닌 탓이었다. 피곤했다.

"......가지 마."

그는 휘장 너머로 손을 뻗어 사내의 옷자락을 붙들었다. 정말로 원한다면, 주저할 것 없이 명령을 내리면 될 일이었다. 그렇게 하면 사내는 군말없이 따를 것이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이불에 얼굴을 묻은 채 작게 웅얼거렸다.

"하루 정도는 괜찮아. 그냥... 거기 있어."

142 이름 없음 (vtz9guR9vI)

2021-10-16 (파란날) 22:17:56

>>141

자신의 옷자락을 붙드는 행동에 사내는 발을 멈췄다. 하루 정도는 괜찮으니 거기에 있으라는 그 말은 명령인 것일까. 아니면 다른 어조의 부탁일까. 어느 쪽이나 사내에게 있어선 크게 다를 것이 없는 말이었다. 자신이 모시는 이가 어쨌든 자신에게 이곳에 남아있으라고 말을 했으니 그저 따를 뿐이었다.

"그렇게 말씀하신다면. 오늘은 여기에 있겠습니다."

작게 웅얼거리는 목소리라고 해도 하루이틀 보는 것이 아니었다. 그 정도 목소리는 충분히 알아들을 수 있었기에 사내는 손길이 닿는 곳. 즉 상대의 침대의 기둥에 조심스럽게 걸터앉았다. 휘장 너머의 모습은 눈에 보이지 않았으나 그 표정이 어느정도 예상이 간다고 생각하며 사내는 휘장을 잠시 바라보다 다시 문쪽을 바라봤다. 누군가 들어오지 않을까, 혹여나 갑자기 이상사태가 일어나지 않을까 약간의 경계심을 가진 탓이었다.

"저는 여기에 있을테니 안심하시고 쉬셔도 됩니다. 오늘은 외로움이라도 느끼시는 겁니까?"

물론 아닐 수도 있었으나 그래도 최소한의 물음을 조심히 내비치며 사내는 계속해서 시선을 문 쪽에 두었다.

143 이름 없음 (C6rO8ptV7w)

2021-10-16 (파란날) 23:15:25

>>142

상대가 침대에 걸터앉는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그는 손을 거두었다. 휘장 너머로 어렴풋이 비치는 사내의 실루엣은 또 하나의 기둥 같았다. 그의 침대를 굳건하게 받치고 있는 두터운 기둥.

"...오늘따라 궁금한 게 많네."

그는 대답하는 대신 혼잣말처럼 내뱉었다. 메시지는 단호했다. 더이상 아무런 질문도 하지 말 것. 그는 넓은 침대에 드러누운 채로 사내의 말을 곱씹었다. 외롭다고? 내가?

이제 와서 회한을 느끼는 것은 결단코 아니었다. 그저, 하루 정도는 타인의 기척을 느끼며 잠에 드는 것도 괜찮지 않나 싶었다. 그저 그뿐이었다. 사내는 그가 믿는 몇 안 되는 사람 중 아니었다. 그가 달리 누굴 침대맡에 앉혀 놓고 잠을 청하겠는가? 자다가 칼침을 맞고 싶지 않다면야.
정 말로 그 것 뿐?
"쪽지, 전하는 거... 잊지 마. 누가 물어보면 넌 그냥... 그 하녀랑 같이 있었다고 하면 돼."

손쓸 틈 없이 수마가 몰려드는 와중에도 그는 더듬거리며 지시를 끝마쳤다. 몸을 돌려 사내가 있는 방향을 등지고 누운 그는 작게 속삭였다.

"......수고했어."

그 말을 끝으로 사내의 주인은 꿈 하나 없는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144 이름 없음 (vtz9guR9vI)

2021-10-16 (파란날) 23:37:53

>>143

오늘따라 궁금한 것이 많다는 그 말에 사내는 더 이상 아무런 질문도 던지지 않았다. 그것이 곧 대답일테고, 자신은 그에 따라서 더 이상 의문을 가지지 않을 생각이었다. 누가 보면 사내의 그런 사고방식은 어쩌면 정말로 비정상적일지도 모를 일이었으나 설사 자신이 비정상적이라고 하더라도 사내에게 있어선 아무래도 좋은 일이요, 정말 관심 밖의 일이었다. 애초에 이런 일을 하는 시점에서, 인간의 마음을 포기하고 비정한 마음을 머금은 시점에서 그 누구의 이해를 받을 생각도 없었으니까.

"아마 저에게 직접 물을 이는 없을 거라고 생각합니다만, 누군가 묻는다면 그렇게 말하겠습니다."

그 하녀가 부정하지 않는 한 특별히 의심을 받을 일은 없을 것이고, 설사 부정한다고 해도 자신은 자신 나름대로 변명거리를 생각했기에 문제가 될 건 없었다. 오로지 부정하는 하녀만이 곤란한 상황에 처할 뿐이었다. 절대 자신이 모시는 이에게 피해는 가게 하지 않을 자신이 있었기에 사내는 조금도 후일을 걱정하지 않았다. 최악의 경우엔... 자신이 멋대로 한 것으로 처리하면 될 일이었다. 자신의 주인도 모를 정도로 자신이 행한 일. 허나 그 변명거리는 어디까지나 최악의 경우를 대비한 것이기에 사내는 그런 일이 없기를 바랄 뿐이었다.

"감사합니다. 부디 내일은 평안한 하루가 될 수 있기를. 나의 주여."

잠들어버리는 숨소리를 귀담으며 사내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혹시나 모를, 그리 달갑지 않을 방문객의 발소리를 놓치지 않기 위해 귀는 활짝 열어놓으며. 지금 이 시간. 이곳이야말로 자신의 주인에게 있어 가장 안전한 곳이 되게 하리라는 마음가짐을 꽉 잡으며.

/상황상 막레가 되려나? 혹시 더 잇고 싶다면 이어도 되겠지만 막레 분위기인 듯 하니 일단 막레로서도 마무리를 지을 수 있게 쓸게!

145 이름 없음 (C6rO8ptV7w)

2021-10-16 (파란날) 23:47:33

>>144 막레로 받으면 될 것 같아. 즐거웠어! 너참치도 돌리면서 즐거웠으려나 모르겠네.

146 이름 없음 (vtz9guR9vI)

2021-10-16 (파란날) 23:48:10

>>145 나 역시도 즐거웠어!! 핑퐁이 있었기에 더 재밌기도 했고!! 아무튼 마찬가지로 즐겁게 즐겼다면 다행이야!

147 이름 없음 (C6rO8ptV7w)

2021-10-16 (파란날) 23:49:15

>>146 즐거웠다니 나도 다행이야. 그럼 좋은 밤 되길 바래:>

148 이름 없음 (vtz9guR9vI)

2021-10-16 (파란날) 23:54:55

>>147 마찬가지로 너참치도 좋은 밤 되길 바랄게!

149 이름 없음 (NKl1TaMz6Q)

2021-10-18 (모두 수고..) 20:39:33

새벽 2시, 그리고 또 38분. 하루가 시작된 지도 벌써 3시간 째를 향해 시계바늘은 흘러간다. 자동 결제 알람을 알리는 소리가 나면 나는 몸을 움직인다. 따뜻한 택시 안에서 잠깐 눈을 붙였다가 일어나니 안 그래도 야근에 지친 몸이 굳어 있다. 무거운 몸을 끌고서 택시 기사에게 인사를 건네고, 차문을 열고나와 마주친 밤공기. 제법 추워진 날씨에 몸을 잘게 떨었다. '아침에 외투 좀 챙겨서 나올걸. 내일, 아니지. 오늘은 꼭 챙기자.' 그런 생각을 하다가 문득 시야에 들어온 것이 있다. '와, 입김.' 뽀얗게 흩어지는 숨을 보고서 눈을 깜빡인다. 가을 다 지나고 벌써 겨울이 왔나보다.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맑고 높은 하늘에 구름 한 점 없다. 그리고 바람이 불어온다. 코끝이 시리니 청승맞다는 생각을 하면서 하늘에서부터 고개를 내렸다. 집이나 가야겠다고 다시 앞을 바라보는데-

"......?"

시야에 없었던 것이 있다. 하늘을 보기 전까지 저런 것은 없었다. 나는 당신이 누구인지 알아보기 위해서 가까이 다가간다...

#가족, 친구, 귀신, 길냥댕이, 살인마, 판타지적 존재 뭐든지 다 괜찮습니당 <:3c

150 이름 없음 (9W2heZ4C7s)

2021-10-18 (모두 수고..) 21:21:33

>>149 잇기 전에 질문이야! 혹시 그 하늘에 있던 존재가 다른 세계에서 온 이라거나 그런 이도 괜찮아? 이를테면 이세계에서 누군가와 싸우는데 뭔가에 휘말려서 차원의 벽을 뚫고 와버렸습니다 같은 느낌으로!

151 이름 없음 (NKl1TaMz6Q)

2021-10-18 (모두 수고..) 21:25:21

>>150 넹 괜찮아요! 여쭤봐주셔서 감사합니당 <:3

152 이름 없음 (9W2heZ4C7s)

2021-10-18 (모두 수고..) 21:36:33

>>149

"아파라아아..!"

땅바닥에 앉아있던 이는 표정을 찡그리고 상대가 알아들을 수 있는 말소리를 내고 있었다. 생김새로는 막 성인이 된 것 같은 엣된 분위기가 풍기고 있었고, 키는 170을 조금 넘은 듯한 사람과 비슷한 존재였다. 허나 등 뒤에 붉은색 빛이 뭉쳐서 만들어진 것으로 보이는 날개 한 쌍이 있다는게 평범한 인간과는 다른 점이었다. 그 이질적인 존재는 자리에서 일어나 허리를 손으로 천천히 문질렀다.

표정을 찡그린 탓에 제대로 뜨지 않은 눈이 표정이 펼쳐지며 환하게 뜨였고 그 이질적인 존재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주변을 두리번두리번거렸다. 그리고 잔뜩 당황해서 더욱 빠르게 주변을 둘러보다 뒤로 살짝 물러나며 잔뜩 긴장한 목소리를 냈다.

"여긴 어디? 천국? 지옥? 어두우니까 지옥인가?! 안돼! 아직 하고 싶은 일이 많았는데!!"

이어 그 이질적인 존재는 털썩 주저앉으며 절망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러다 문뜩 인기척을 느꼈는지 고개를 살짝 자신에게 다가오는 이 쪽으로 돌렸다.

"누, 누구야?!"

153 이름 없음 (NKl1TaMz6Q)

2021-10-18 (모두 수고..) 21:54:15

>>152

"......천사 짭?"

누가 이 날씨에 땅바닥에 앉아있는가 싶어서 가까이 갔다가, 실루엣이 정확히 보일 때 바로 걸음을 우뚝 세웠다. 천사 날개는 분명 하얗고 깃털 있는 그런건데 저 날개는 그렇게 보이지 않았다. 무심코 중얼거리며 소리냈다는 것을 인지하지 못했다. 그저 난 꿈인지 구분하는 방법 중 흔하디 흔한 뺨 꼬집기를 해야하나 고민했다. 그리고 정말로 하려다가 관두었다. 저 앳된 분위기를 보자니 어린 애들 장난이라 생각하기로 했다. 다른 가능성이라고 해봤자 영화나 소설 같은 망상 뿐인데, 그런 쪽의 가능성은 상상하기 정-말 귀찮았다.

"지옥... 비슷하지."

헬조선. 그 단어가 떠올랐다. 다시 걸음을 옮긴다. 평범한 회사에서 평범하게 월급 받아타먹는 소시민이다. 그래서 내 양심도 평범하다. 추운 날씨에, 밤에, 길바닥에 혼자 있는 앳된 애를 모른 척 지나치기에는 애매한 양심이라는 뜻이다. '요즘은 이러고 노나. 중2병? ...좀 꼰대 같나.' 털썩 주저앉아있는 그 앞에 무릎을 모으고 쭈그려 앉았다.

"집 어디에요?"

'아.' 뒤늦게 입꼬리를 올렸다. 피곤에 찌들어 얼마나 상냥히 보일지는 미지수지만, 그래도 나보다야 어려보이는데 웃으면서 말 걸어야 덜 무섭지 않으려나 싶었다. 이미 겁 먹어 있는 것 같기도 했다.

154 이름 없음 (9W2heZ4C7s)

2021-10-18 (모두 수고..) 22:12:42

>>153

"정말로 지옥이야?! 어째서! 왜! 어째서! 왜!"

지옥이라는 말에 다시 절망하는 분위기를 보이며 이질적인 그 존재는 고개를 아래로 푹 숙였다. 난 그저 평화를 지키기 위해서 싸웠을 뿐인데. 빛이 번쩍해서 놀라서 넘어진 것 뿐인데 그걸로 죽은거야? 지옥으로 떨어질 정도로 나쁘게 산거야? 하는 중얼중얼거리는 목소리를 내는 모습이 정말 제대로 절망한 모습이었다.

집이 어디냐고 묻는 물음이 들려오자 이질적인 그 존재는 고개를 들어 자신에게 말을 거는 이를 바라봤다.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우물우물거리던 그 존재는 퉁명스런 목소리로 그 물음에 대답했다.

"지옥 같은 곳에 내 집은 없어. 그러는 당신은 누구야? 왜 날개가 없는거야? 아. 지옥이니까 페어리얼은 아니겠구나. 그렇다면 당신은 무슨 종족이야? 뭐라고 부르면 돼?"

명백하게 이질적인 용어를 사용하면서 이질적인 존재는 제대로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다시 주변을 바라보면서 의외라는 듯이 눈썹을 쫑긋했다.

"하지만 지옥치고는 뭔가 무섭진 않네. 엄청 무서운 불구덩이가 있고 그렇다고 들었는데."

155 이름 없음 (NKl1TaMz6Q)

2021-10-18 (모두 수고..) 22:26:35

>>154

"아우, 골이야......"

웃는 건 포기했다. 오전 9시부터 오전 2시까지 일한 낡고 지친 현대 사회의 톱니바퀴는가 이 골 울림을 인내하고 웃기는 힘들다. 답해줄 수 없는 물음에 난들 알겠냐고 말하고 싶었지만 어린 아이라고 생각하니 참아졌다. 지끈거리는 머리를 짚고서 고개를 숙였다. 잠시 그러고 있으면 살만 해진다. 지옥이라는 말을 정말 믿는게 무슨 놀이인지는 몰라도 정말 재밌어서 열심히 하나보다 싶었다.

"나도 내 집은 없는데...... 전 회사원이고... 네, 그냥 인간이에요."

대한민국에서 내 집 마련하기가 쉬울 리도 없고, 나도 없는 내 집이 이 장난에 심취한 어린 애한테 있을 리야 당연히 없다. '...그러니까, 살고 있는 집의 위치를 물어본 거였는데.' 아무래도 생각보다 훨씬 더 심도 있는 장난질이구나 생각한다. 쏟아지는 물음에 찬찬히 답을 해주었다. 물음 중에는 제 스스로 답하는 것도 있어 가만히 듣고 있는 시간도 있었는데, 듣고 있는 시간조차 기가 빨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다 뭐라고 부르면 되냐는 말에 입을 다물었다. 이러다 끝도 없이 여기서 날을 지샐지도 모르겠단 예감.

"몇살이에요? 집 안 알려주면 경찰 부를 수 밖에 없어요."

이 정도면 충분히 선의를 베풀었다고 생각했고, 자고 싶었다. 경찰 부른다는데도 시침떼지는 않을 거라 기대한다.

"무서운 건 돈이에요."

대충 대꾸하며 자리에 일어나니 따라 일어선다. 그리고 주머니에서 스마트폰을 꺼내 들었다. 무슨 답이 돌아오냐에 따라 112가 눌릴지 말지 정해질테다.

156 이름 없음 (9W2heZ4C7s)

2021-10-18 (모두 수고..) 22:47:53

>>155

"인간? 처음 들어보는 종족이야. 하기사 지옥에 사는 종족을 내가 어떻게 들을 수 있겠냐만. 그보다 회사? 지옥에서도 일을 해야하는구나. 뭔가 내가 생각하던 지옥의 이미지와 완전 달라서 혼란스러워."

대체 무슨 이미지를 생각한건지 이질적인 존재는 손으로 미간을 잡으면서 두 눈만 깜빡였다. 그리고 눈앞에 있는 상대를 가만히 살펴보더니 살며시 상대의 뒤로 향한 후에 등을 바라봤다. 날개가 없다는 것에 역시 신기함을 느끼는 와중 그 존재의 등 뒤에 붙어있는 날개가 살며시 팔락였다.

"나이는 63. 그러고 보니 당신은? 경찰? 우와. 지옥에도 있을 것은 다 있구나. 점점 내가 생각하는 지옥의 이미지와 멀어지고 있어. 아무튼 인간은 날개가 없는 종족이야? 그럼 이렇게 날아다니지 못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이질적인 존재의 날개가 더욱 빠르게 펄럭였고 그 존재의 두 발이 땅에서 떨어졌고 몸이 공중으로 붕 떠올랐다. 가볍게 높이 솟아올랐다가 다시 낙하하는 그 모습은 누가 봐도 하늘을 날아다니는 모습 그 자체였다. 날개를 빠르게 퍼덕이며 자신의 몸을 공중에 띄운 상태에서 그 존재는 상대를 가만히 바라봤다.

"아니면 마법을 쓴다거나 해서 날아다닐 수 있어? 만약 못 난다면 조금 불편하겠네. 하기사 지옥이 편할 순 없을테니까."

조금 안타깝다는 듯이 이야기를 하나 이내 자신이 그 지옥에 있다는 것을 다시 인지하며 그 존재는 고개를 아래로 푹 숙였다.

"하기사 지금 가장 불쌍하고 동정받을 건 나겠네. 도대체 얼마나 더 착하게 살아야 천국에 갈 수 있는거야? 죽어서 지옥이라니. 너무하잖아!"

157 이름 없음 (NKl1TaMz6Q)

2021-10-18 (모두 수고..) 23:04:41

>>156

"........."

인간이 무엇인지 설명해봤자 듣지 않거나, 인간이라는 것을 모르는 것처럼 반응하거나 둘 중 하나이겠다는 예상. 그래서 난 더 대꾸하지 않기로 했다. 1초라도 빨리 이 아이를 귀가 조치시키고, 나 스스로도 귀가 조치한다. 그게 목표였다. 나이가 63이라니, 아무래도 집에 대해서 말해줄 생각은 없어보인다. 저 능청스러운 장난질이 언제까지 이어질까 싶어지면 스마트폰의 잠금을 풀었다. 네네, 건성으로 답하며 손을 놀리니 스마트폰 화면이 켜진다. '으, 눈 부셔.' 화면이 너무 밝아 잠시 표정을 찡그렸다가, 이제 경찰에 연락할 거라는 말을 하기 위해 스마트폰 화면에서부터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곧 밝게 빛나던 화면이 사라졌다.

"......맥주 두 캔으로 취할리가 없는데."

이실직고한다. 야근하다 너무 지쳐 캔맥주 2캔을 까기는 했다. 그 정도로 취할리도 없고, 저 날개가 퍼덕거리며 날아다닐 일도 없다. 그런데 둘 다 일어난 모양이다. 나는 고개를 푹 숙여 마른 세수를 한 번 하고, 지친 몸 만큼이나 굳어버린 머리를 굴려보았다. 우선, 저 모습을 다른 누군가 봐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단 내려오실래요..."

얼굴을 덮고 있는 손 틈새로 바닥이 보였고, 떨어진 내 스마트폰도 보였다. 약정 아직 1년은 넘게 남았는데, 박살나진 않았기를 짧게 기도했다. 딱히 믿는 신이 있지는 않았지만 저 존재를 보니 있을 법도 싶었다. 그러니 모든 신이라는 존재에게 통틀어 빌어보았다.

"그쪽 사람 아니에요? 아니면 꿈... 아니면 진짜 취했나..."

물음은 점점 혼잣말, 중얼거림이 되어 간다.

158 이름 없음 (9W2heZ4C7s)

2021-10-18 (모두 수고..) 23:21:56

>>157

내려오라고 이야기를 하는 그 말에 이질적인 존재는 고개를 끄덕이며 아래로 착지했다. 빛이 뭉쳐서 만들어진 것처럼 보이는 붉은 날개는 조금 전과는 다르게 아래로 살며시 쳐졌고 이질적인 존재의 시선은 손으로 얼굴을 덮고 있는 상대를 바라보며 이해한다는 듯이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하늘을 날 수 없나보구나. 마법으로도. 하기사 내가 살던 곳이 아니라 지옥이니까 그럴 수도 있겠네. 나는 에어리얼. 여기가 지옥이니까 아마 죽어서 여기에 온 걸거야. 그러니까 사람? 라는 건 잘 모르겠지만 당신이 사람이라는 이라면..아. 잠깐만. 아깐 인간이라며!"

자신을 속였냐는 듯이 정말 뚫어져라 바라보던 이질적인 존재는 입술을 삐죽 내밀다가 다시 안으로 집어넣었다. 그리고 무언가를 생각하듯 팔짱을 끼고 눈을 감으면서 작은 숨소리만 냈다. 그러다 다시 눈을 뜨더니 상대에게 질문을 던졌다.

"있잖아. 죽어서 지옥에 온 이는 여기서 어떻게 살아가? 그러니까 죄값을 치룬다거나, 재판을 받는다거나 그런 거 없이 그냥 여기서 살아가면 되는거야? 자유롭게? 아니. 정말로 내가 아는 지옥과는 완전 다른 이미지라서. 잠깐?! 설마 나를 고통으로 끌고가기 위해서 날 속이기 위해 방금 사람인데 인간이라고 거짓말을 한거야?!"

아뿔싸! 하는 표정으로 자신을 에어리얼이라고 칭한 그 이질적인 존재는 정말로 쨉싸게 상대와 거리를 두었고 금방이라도 도망칠것처럼 날개를 쫑긋 세웠다.

"유감이구나! 나는 그렇게 쉽게 속지 않아!"

159 이름 없음 (LFTUKFO1JQ)

2021-10-18 (모두 수고..) 23:36:16

>>158

"저기요, 저 그렇게 한가한 사람 아니거든요..."

대꾸할 기운이 없다. 아무리 봐도 저 존재는 사람은 아니고, 인간이랑 사람이 거의 같은 의미를 가진다는 것도 모르는데다 여기가 지옥이라고 철썩같이 믿고 있다. 대화가 가능하지가 않다. 지옥이라고 누가 말했나 하면 내 입에서 나온 말이라 그저 자업자득이다. 정말 피곤한 일에 엮인게 분명하다고 확신한다.

"그쪽 숨 쉬잖아요. 정말 죽었다고 생각해요...?"

마른 세수를 그만 끝내고 저쯤 벌어진 거리를 좁힌다. 일단 지옥이라는 오해부터 벗겨야했고, 그렇기 위해서는 살아있는 존재라는 어필이 필요하겠다. 심장 박동 소리와 체온, 숨소리 정도면 되지 않을까 싶어서 가까이 다가간다. 들려줄 수 있다면 그만큼 빠르고 확실한 방법이 없을 것이다.

"저도 살아있고요...... 여기 진짜 지옥 아니에요, 별명이 지옥이지."

그리고 고민했다. 에어리얼이라고 자신을 소개한 저 자를 어떻게 해야할 지에 대한 고민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지구의 존재는 아닌 것 같고, 외계인이라고 생각하는 편이 좋을 듯 싶다. 혼자 버려진 외계인은 어떻게 되나 고민해보니, 부정적인 생각만 들었다. 지구 침략, 실험 대상, 지구 멸망, 동물원, 긍정적인 고려는 하나도 되지 않았다.

"......그, 고향으로 돌아가는 방법 모르세요?"

160 이름 없음 (9W2heZ4C7s)

2021-10-18 (모두 수고..) 23:56:07

>>159

"숨은 쉬고 있지만, 지옥에서도 쉴 수 있는 거 아니야? 그런데 지옥 아니야?"

철썩같이 지옥이라고 믿고 있었는데 지옥이 아니라고 말하는 것에 이질적인 존재는 멍한 표정을 지으며 눈을 깜빡였다. 또 속았구나! 녀석아! 라는 느낌이 정말로 잘 어울리는 분위기가 흐르다가 이질적인 존재는 다시 털썩 무릎을 꿇고 두 손으로 자신의 몸을 지탱하며 절망하는 자세를 보였다.

"또 속았어. 또 속았어. 지옥 아닌데 지옥이라고 하는거에 속았어. 당연히 죽은 줄... 어? 그러면 나 살아있는 거잖아!!"

그 사실이 너무나 기뻤는지 만세 자세를 취하던 그 존재는 입을 꾹 다물고 이어 두 손으로 머리를 쥐어짰다. 여기는 지옥이 아니다. 그렇다면 대체 여기는 어디인가? 자연스럽게 그 의문이 떠오를 수밖에 없었고 으으- 소리를 내며 은색 머리를 북북 긁던 사내는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그럼 대체 여긴 어디야? 왜 난 여기에 왔어? 등등. 한탄하는 목소리가 조용히 울렸다.

"애초에 여기에 왜 왔는지도 몰라. 난 분명히 도시에 나타난 부의 결정체를 쓰러뜨리기 위해서 싸우고 있었는데, 갑자기 빛이 번쩍해서 나도 모르게 놀라서 넘어졌고 눈을 감았어. 그런데 눈을 뜨니까 여기였어. 있잖아. 여긴 어디야? 에어리즈는 맞는거야? 그러니까 여기 나라 이름!"

일단 그것부터 확인해보려는 듯이 이질적인 존재는 다급한 목소리를 내며 답을 기다렸다.

161 이름 없음 (1RSNtf1p0s)

2021-10-19 (FIRE!) 00:22:27

>>160

"지옥에서 숨을 왜... 쉬어요...?"

죽은 사람들이 벌 받는 곳인데, 죽은 사람들이 숨을 쉴 리가 없다. 저 존재가 말하는 지옥이 뭔지는 몰라도 한참은 다른 곳인가보다. 그리고 그 지옥이고 나발이고 하는 곳에 내가 곧 갈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사인은 분명 과로사. 피곤하고 졸린 기운을 떨쳐낼 수가 없다. 자신은 에어리얼이라며 붉은 날개를 가지고 하늘을 날아다니는 상황을 목격했음에도 밤은 깊었고 잠은 깨지 않는다.

"네, 살아계셔서 축하드립니다..."

갈고 닦아진 사회생활 실력에 감탄하는 순간이다. 이런 때에서도 영혼없는 텅 빈 소리를 할 수 있다. 정말 영혼 실린 생각은 좀 더 바빴다. '...은색 머리, 저 이상한 날개, 에어리얼, 63세......' 애를 써서 납득해보려는 중이기 때문이다. 에어리얼이라는 단어는 들어본 적도 없다. 63세와 은색 머리는 얼추 맞는 것 같다. 어린 애인 줄 알았더니 엄청 동안의 할아버지인 모양이다. 날개는 여전히 모르겠다... 답이 없다.

"쉿, 제발요. 사람들 자는 시간이고, 여긴 주택가에요."

경찰이 떴다가는 같이 끌려갈게 뻔하다. 얄팍한 양심을 본심 위에 덮었다.

"대한민국이에요. 남한이라고도 하고... 한국이라고도 하는데......"

세 이름 다 못 들어봤을 것만 같다.

162 이름 없음 (9tKLs7fe/c)

2021-10-19 (FIRE!) 00:34:25

>>161

"아. 미안해. 너무 기뻐서. 죽지 않았다고 생각하니 나도 모르게 그만."

괜히 키득거리면서 이질적인 존재는 알겠다는 의미를 담았으나 그래도 기쁜 마음은 완전히 감추지 못하고 싱글벙글 웃었다. 죽지 않고 살아있다는 것이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다시 주변을 두리번 두리번 바라보았으나 역시 그 존재에게도 이질적인 풍경이었는지 곧 표정이 시무룩한 느낌으로 바뀌었다.

"하지만 역시 처음 보는 곳이야. 내가 사는 곳보다 자연이 훨씬 적은 느낌이야. 아무튼 대한민국? 남한? 한국? 미안해. 어딘지 모르겠어. 내가 사는 곳은 에어리즈라는 나라야. 아무래도 내가 사는 곳이 아닌 것은 분명한데. 그렇다면 나는 왜 여기에 있는거지?"

자신이 사는 곳이 아니라 생판 다른 곳임을 분명하게 인지하며 이질적인 존재는 자신과 대화를 나누는 이를 빤히 바라보다 미안하다는 듯이 나름 무게를 담아 사과를 전달했다.

"미안해. 아무래도 나, 부의 결정체와 싸우다가 무슨 이변에 휘말린 모양이야. 워낙 이현상을 많이 일으키는 이라서. 아무래도 먼 곳으로 워프했다던가 그런 것 같은데. 적어도 내가 아는 바 대한민국, 남한, 한국이라는 나라는 들어본적이 없거든. 사실 내가 사는 곳에선 그러니까 저거. 저걸 여기선 뭐라고 불러? 아무튼 3개가 있거든."

이어 그 존재는 하늘 위에 떠 있을 달을 손으로 가리켰다. 당연하지만 여기서는 하나밖에 없었으니 이질적인 존재의 입장에선 그 풍경조차도 신기하다는 듯 시선을 그 곳에 완전히 고정시키다가 다시 고개를 노렸다.

"어떻게 돌아가면 되는걸까. 혹시 여기는 마법이라던가 그런 거 없어?"

163 이름 없음 (WJAJyzHGJU)

2021-10-19 (FIRE!) 11:34:03

>>162

그러니까 나는 평범한 양심의 소유자다. 집에 가서 발라당 눕고 싶은 욕구가 저 발끝에서부터 머리 꼭대기까지 지배하고 싶다 외치고 있는 와중에, 이 정체 모를 할아버지를 어떻게 해드려야할 지 고민한다. 아무런 연고도 없이 낯선 곳에 뚝 떨어졌다는데, 내버려두고 가자니 내일 뉴스에서 다시 볼 수 있을 것만 같다. 하지만 고양이 줍는 것 하나에도 인간은 많은 고민을 하는데, 하다못해 성인으로 예상되는 인격체를 주워야 한다니 머리가 복잡할 수 밖에 없다. 그렇지만 의외로 결론은 간단하게 났다.

"사과는 한 번이면 됐고요... 제가 지금 엄청 졸리거든요."

달이 3개나 떠있는 에어리즈에서 부의 결정체와 싸웠고, 그러다 여기에 뚝 떨어졌다는 이야기를 이해하기 몹시 어렵다는 뜻이다.

"마법같은 거 없고...... 또 전 여기가 너무 춥고 집에 가고 싶어요."

그리고 다시 마른 세수를 했다. 이게 잘 하는 선택인지는 모르겠고, 80% 이상의 확률로 후회할 것 같았지만 나는 입을 열었다.

"괜찮으시면 저희 집으로 가시면 안 될까요..."

시간을 확인하려 주머니를 뒤적거리다 방금 있었던 일을 떠올린다. '맞다, 휴대폰.' 하늘을 날아다니는 할아버지를 보고서는 놀라 떨어트렸던 스마트폰. 바닥에 나뒹굴고 있던 걸 이제서야 주워든다. 액정에 금이 간 것 같지만 정상적으로 작동하기는 한다.

164 이름 없음 (9tKLs7fe/c)

2021-10-19 (FIRE!) 20:13:51

>>163

"마법조차 없어? 많이 곤란하네."

자신이 돌아갈 수 있는 방법은 아예 없어진 것이 아닌가 생각을 하며 이질적인 존재는 곤란한 표정을 지었고 등 뒤의 날개 역시 아래로 축 쳐졌다. 이 알지도 못하는 세계에서 계속 살아야하는 것일까. 아니면 어떻게 해서 돌아갈 방법이 있는 것일까. 고민을 하는 와중 자신의 집으로 가는건 어떻냐고 이야기를 하는 상대의 말에 이질적인 존재는 의외라는 듯이 의구심을 보였다.

"졸리니까 집에 가겠다는 것은 그렇다고 쳐도 나까지? 이 세계의 이들은 처음 보는이도 집으로 부르는데 경계심이나 그런 것을 못 느끼는거야?"

자신이 살던 세계라면 생각도 못할 일이라고 이야기를 하며 이질적인 존재는 잠시 답을 고민했다. 허나 이대로 있는다고 해서 달라질 건 없었고 우선 날이 밝은 후에 이것저것 시도를 해야겠다고 생각을 정리한 후, 이질적인 존재는 상대를 바라보며 대답했다.

"그럼 날이 밝을 때까지만 신세를 져도 괜찮을까? 나쁜 짓은 안할테니까. 아. 그러고 보니 몇살이야? 나보다 조금 나이 있어보이니가.. 75살쯤 되려나? 아무리 그래도 90까진 아닌 것 같은데. 여기서는 다르게 셀 수도 있겠구나. 여기는 한 살을 먹으려면 얼마나 시간이 걸려?"

나름의 호기심을 품으며 이질적인 존재는 날개를 살며시 퍼덕이며 땅에서 살며시 발을 떼어냈다. 그리고 상대를 바라보며 다시 말을 이었다.

"날아서 데려다줄까? 땅을 걷는 것보다 훨씬 빠를텐데."

165 이름 없음 (KHG/3DqIKM)

2021-10-20 (水) 23:25:44

>>164

"......초면에 집으로 데려가겠다는 거나, 따라가겠다는 거나 도긴개긴이라고 생각하는데요."

나쁜 짓이라고 해봤자 죽기밖에 더하겠나 싶다. 여기 계속 서있으면 곧 과로사든 동사든 할 것 같으니 거기서 거기인 선택지라고 생각했다. 내일 날이 밝고 나면 무슨 후회를 할 지는 그때의 몫이다. 무엇보다 오늘 아침이 되어 다시 출근을 하기 위해서는 집에 들러야 한다. 최소한 씻고 옷이라도 갈아입어야할테고, 쌓인 집안일도 있다. 청소는 둘째치고, 빨래도 밀린지가 까마득하다. 야근이 잦다보니 집안을 챙길 새가 없다.

"저 25살이에요. 여기서는 한 살을 먹으려면… 1년인데... 365일이요. 24 곱하기 365가...... 8760시간 정도......"

1년의 단위조차 없을 것 같아 안 굴러가는 머리를 붙잡고 계산을 한다. 생각해보니 8760시간이라고 한들, 시간의 단위조차 다르면 어떡하나 싶었지만 시간을 분, 분을 초 단위로 쪼개기에는 그 계산은 너무 컸다. 3자리수 곱셈 암산은 해도 그 이상은 안 되겠다. 나는 이 정도 물음에 답변을 했으면 만족스러울까 싶어 잠시 바라보다가 그만두었다. 이 비현실같은 현실을 받아들이고 있는게 좀 어이가 없었다. 한편으로는 내일 일어나면 꿈이겠지 생각하고, 정말 현실일 지도 모른다는 기대감도 품고 있다. 늘 같은 하루의 반복 속의 이런 일에 소소하게 재미를 느낄 깜냥은 있었다. 물론 휘말리고 만다면 달갑지만은 않을 일이다.

"날......... 저 들 수 있어요?"

키는 내 쪽이 작아보였지만, 키랑은 별개의 문제다. 성인치고 제 몸무게의 반절 가량의 무게를 들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되나 싶다. 운동을 하는 사람이 주변에 없는 것도 그렇지만, 본인부터가 심각한 저질 체력이라 그런 의문이 들기도 하였다. 운동할 시간은 커녕 끼니도 늘 인스턴트로 처리하거나 굶기가 부지기수인 야근쟁이에게 힘은 둘째치고 건강부터 챙기고 봐야 한다. ...건강조차도 챙기고 있지 않기는 하다.

#갑자기 바빠져서 텀이 길어졌습니당... 끊고 싶으시면 끊어도 됩니당 <:3c

166 이름 없음 (A1JKpnlgHI)

2021-10-20 (水) 23:49:54

>>165

"365일이나 필요해?! 잠깐만. 잠깐만."

계산법이 크게 다른지 이질적인 존재는 두 손을 올린 후에 손가락을 접어가며 잠시 계산하는 모습을 보였다. 허나 그렇게 오래 걸리진 않았고 곧 두 손을 아래로 내렸다. 그리고 난감한 표정으로 골치가 아프다는 듯이 미간을 잡고 고개를 휘저었다.

"365로 계산하기가 힘들어서 대충 300으로 계산했어. 인간? 사람? 아무튼 여기의 계산법으로 하면 난 대충 21세. 내가 사는 곳은 120일이 지나면 한 살을 먹으니까. 여기선 나이를 먹으려면 시간이 많이 필요하구나. 365면 세살이나 먹을 시기야."

세상이 달라지면 자연히 문화도 그 이의외 것도 달라지는 법이었다. 지금만 해도 나이를 계산하는 법이 다르지 않던가. 아무튼 기억해두겠다는 듯이 365, 365, 365를 작게 중얼거리면서 이질적인 존재는 상대를 바라보며 문제없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래 보여도 힘에는 자신이 있어! 내가 사는 세계에는 부의 결정체라는 게 있어. 세계를 침식하면서 이변을 일으키는 이들인데 그런 이와 싸우려면 힘이 많이 필요하거든. 그러니까 문제 없을거야! 네가 겁 먹어서 바둥거리는 것만 아니라면 말이야!"

이어 이질적인 존재는 자신의 손을 잡으라는 듯 오른손을 내밀었다. 만약 잡는다면 정말로 문제없이 몸을 붕 띄워서 공중 높이 떠올랐을 것이다. 그리고 집이 있는 곳을 알려달라고 하면서 조금 빠르게 하늘 위 어둠을 가르며, 그 방향을 향해 날아갔을 것이다. 잡지 않았다면, 그대로 걸어서 상대를 따라가려고 했겠지만.

/앗! 텀은 괜찮아! 일단 내 쪽에서 끊기는 조금 애매한 것 같아서 일단 한턴만 더 이어봤어! 여기서 집으로 안내하면서 끊어도 좋을 것 같아!

167 이름 없음 (7KH.PAo066)

2021-10-24 (내일 월요일) 13:01:11

마왕이 이끄는 마족과의 오랜 전쟁이 마침내 끝나고 세상엔 평화가 다시 찾아왔다. 마왕을 무찌른 용사와 그 일행은 영웅으로서 환대받았고 현재 왕국에선 그들이 세운 공을 치하하고 기념하기 위해 아주 큰 축제를 열어 사람들은 평화로운 분위기를 즐기며 술을 마시고 노래를 부르며 춤을 추면서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일행 중 리더를 맡은 용사를 보고자 줄을 선 사람들이 많았고 그 끝은 도저히 보이지 않을 정도로 계속 이어졌다. 그들을 무시할 순 없다고 이야기하며 용사는 사람들을 만나며 악수를 하고 가벼운 대화를 하거나 그들이 보내는 선물을 받으며 나름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다른 일행들 역시 용사만큼은 아니긴 하나 만나고자 하는 사람들, 혹은 각자의 고향에서 고생했다는 인사를 전하기 위해서 찾아오는 이들이 있었고, 감사를 표하는 이들이 있었다. 그야말로 그들은 이 세상을 구한 영웅으로서 많은 사람들의 환영을 받는 존재였다.

용사의 오랜 동료이자 전설의 활을 얻어 많은 도움을 주었던 사내는 슬며시 그 자리에서 빠져나와 조금 조용한 장소로 향한 후, 나무에 등을 기대 한적한 분위기를 감상했다. 처음엔 그저 마을을 위협하던 마족을 퇴치해준 용사에게 은혜를 갚고자 따라간 것이었는데 설마 전설의 활을 얻고 마왕을 무찌르는데 일조할 거라고는 사내도 상상치 못한 일이었다.

"진짜 많은 일들이 있었구나. 정말."

이 축제가 끝나면 이제 어떻게 될까? 용사는 왕국의 왕이 사위로 삼는다는 말이 있었으니 여기에 남게 될 것 같으니 자신은 다시 고향으로 돌아가는게 좋을까. 그렇게 생각하며 자신의 뒷일을 사내는 조용히 생각했다. 고향으로 돌아간 후, 다시 이전처럼 사냥을 하면서 먹고 사는 것도 좋을테고 활을 가르치면서 사는 것도 나쁘지 않은 일이었다. 태어날때부터 마족의 위협에 시달리면서 살았던게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기에 이렇게 찾아온 평화는 오히려 그에게 있어서 낯선 일이었는지 그는 괜히 웃음을 터트렸다.

"그래도 이제는 다들 평화롭게 살 수 있겠지. 마을 사람들도 말이야. 아무튼 정말 끝은 끝이구나."

지금 이 순간이 믿기지 않는지 사내는 자신의 뺨을 가볍게 꼬집었다. 당연히 통증이 느껴졌고 그 통증으로 이게 꿈이 아니라는 것을 느끼면서 사내는 괜히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정말로 이런 날이 오고야 말았다는 감격과 기쁨. 그 모든 것이 한번에 터진 탓이었다. 그곳으로 다가오는 발소리가 웃음소리에 묻히고 있다는 것을 사내는 미처 알지 못했다.

/간단하게 전통 판타지 RPG 느낌의 배경에서 마왕을 무찌르고 평화가 찾아왔고 엔딩 씬 느낌에서 나올법한 축제 같은 장면이야. 같은 용사 일행으로 이어도 되고 사내의 고향 사람으로 이어도 되고 그냥 왕국 사람으로 이어도 상관없어. 다만 맥커터 전개는 사절이고 스루할 생각이야.

168 이름 없음 (3Fwk.qpCVk)

2021-10-26 (FIRE!) 22:31:06

아웅... 애우우웅...... (이런 **! 빌어먹은 신 같으니라고. 로또 당첨 시켜달란 소원이나 들어줄 것이지, 감히 고양이 되고 싶다는 소원을 들어줘?!) (간단하게 군것질가리 장을 보고서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한숨과 함께 길고양이를 보며 부럽다고, 고양이가 되고 싶다고 바라고 보니 정말 고양이가 되고 말았다.) 아아웅! (제발 누가 좀 도와줘!)

169 이름 없음 (ew9eiBz8y6)

2021-10-26 (FIRE!) 23:09:42

>>168 (건너편에서 볼살이 통통하니 풍채가 좋은 노란 줄무늬 고양이가 사뿐사뿐 걸어오다 멈춰서서 호박빛 눈동자로 당신을 빤히 바라본다. 못보던 고양이가 자기 영역에 나타나 신경이 날카로운지, 복슬복슬한 꼬리 끝이 바닥을 탁탁 때리고 귀가 마징가마냥 뒤로 젖혀있다.)

170 이름 없음 (2Fkx8xfNI.)

2021-10-26 (FIRE!) 23:32:58

당신, 악명이 높아도 너무 높아. 공작 머리채는 어쩌다 쥐어뜯은 거에요? 왕가의 보물은 또 왜 부셨고… (모험가로써 의뢰를 찾으러 왔지만 다들 쉬쉬하는 지라 허탕을 치고는, 나지막히 한숨을 내쉰다. ) 이러다 신전에서도 내쫓기게 생겼어요. 나 성직자인데…… (어떻게든 해보라는 눈빛.)

171 이름 없음 (DDlK7TTB6g)

2021-10-27 (水) 12:01:26

>>169 와오오옹...... (뭔지 잘 몰라도 저 고양이 개빡친 거잖아! 대화로 해결하면 안 될까 야옹아......) (난데없이 고양이가 된 것도 서러워죽겠는데, 이제는 화내는 고양이까지 마주했다. 집에 들어가서 핫바와 컵라면을 먹을 생각이었는데, 어째 개싸움, 아니, 고양이싸움을 할 것만 같다. 최대한 적의가 없다는 의미로 꼬리를 내리고 귀를 뒤로 젖혔다. 고양이들의 세계에서 이게 무슨 뜻으로 통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그렇게 했다.)

172 이름 없음 (Mw4XGjh.Yg)

2021-10-30 (파란날) 20:41:01

소년은 생각했다. 과연 이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하고. 그냥 그렇게 주변을 둘러보았고, 집이라는게 갖고싶어졌다. 그래서 그렇게 행동하기로 했다.
소년은 갑작스럽게 종적을 감추었다. 2000년대의 어느 날, 여름이었다.


비상식적이었다. 그 학생을 본 교사들은 모두 입을 모아 그렇게 말했다.

' 애가 참... 유별나요. 도무지 일반 상식을 모른다니까요? 한번은 점심시간때 애들끼리 소란이 일어나서 다가가보니까, 걔가 아무것도 모르겠다는 얼굴로 가만히 맞고있더라구요. 그래서 자초지종을 들어보니, 글쎄 옆 자리 애 도시락을 뺏어먹었다나? 여학생은 울었고, 뭐하는거냐고 남자애들이 물어보니까 배가 고파서 밥을 먹었다고 대답했다는거에요. 그럼 니 도시락을 먹지 왜 뺏었느냐고 물어보니까, 자긴 도시락이 없어서 뺏었다나? 참, 어이가 없어서. 그래서 화가 난 남자애들이 걔를 때리기 시작했는데, 아무렇지도 않다는듯 계속 밥을 먹었다는거에요. 그거에 애들이 이상한걸 느끼고 거칠게 욕하는데... 간신히 말렸죠. '

' 음, 솔직히 말하면. 어디 경찰서에라도 신고해야지 싶습니다. 국어 수업 시간때에 애가 수업은 듣는데 무슨 소린지 전혀 못알아듣겠다는 표정인거에요. 그건 늘 있는 일이니까 딱히 신경 안썼는데, 어느날 걔한테 지문을 읽어보라고 시키니까 고개를 갸웃거리더라구요. 그래서 왜 안읽느냐고 물었죠. 불량학생도 아니었고, 공부머리는 없는것같지만 수업을 듣는 애였으니까요. 그런데 대답이 가관이야. 글을 못 읽는답니다. 아니, 글은 유치원생도 어느정도 읽을수 있잖아요? 고등학생이나 되었는데 글을 못읽는다? 놀리는줄 알고 버럭 화를 냈는데, 진짜 아무것도 모르겠다는 표정을 보고 짐작했죠. 이거 뭔가 이상하다. 그래서 말은 어떻게 하느냐고 물었더니, 세계를 돌아다니면서 배웠다. 영어, 불어, 일본어, 중국어... 오만가지 말을 다 할수 있다고 줄줄 불더군요. 그래서 시켜봤는데, 네. 다 할줄 압디다. 농담이 아니었어요. 저는 외국어는 영어밖에 못한다지만, 아무 말이나 뱉는게 아니었어요. 대체 어떤 애가 글은 못읽는데 외국어를 너댓개씩 막 하죠? 뭔가 이상해요. '

소년은 수업을 듣다가 문득 지루해졌다. 알 만한 내용이 하나도 없어. 그렇게 생각하곤 조용히 교실을 빠져나왔다. 수업중이었지만 개의치 않았다. 그리고는 옥상으로 향했다. 옥상에서 바닥에 털썩 주저앉아, 푸른 하늘과 드넓게 뻗어있는 건물들을 바라보았다.

" 재미없네. "

집도 가졌고, 학교도 가졌지만. 뭔가 본질적인게 부족했다. 총명한 소년은 곧 그걸 눈치챘다. 제 손에 쥐어진건 신식 무기였고, 자긴 그걸 다루는 방법을 모르는거였다. 이 무기를 다룰줄만 알면 될텐데, 그런건 누가 안 가르쳐주나. 소년은 길게 하품했다. 눈가에 눈물이 가볍게 고였다.

173 이름 없음 (nGFldO3QPU)

2021-11-03 (水) 21:56:34

(낙엽이 발에 채이는 계절이 왔다. 학교가 히터를 틀어주지는 않지만 복도가 냉기에 어리는 계절이 왔다. 자신을 폭 감춰버릴 수 있는 얇은 담요를 유령마냥 머리 위에 쓰고서 복도로 나왔다. 그리고 시야에서 선생님을 발견했고 황급히 방향을 틀었다. 그러다 발이 꼬였는지, 담요를 밟고 미끄러졌는지, 누군가와 부딪쳤는지, 몸의 균형이 기울었다.) 어어? (넘어지겠다는 확신이 점점 선명해지며 표정이 동그랗게 변한다.)

174 이름 없음 (8MUqmGMQ96)

2021-11-03 (水) 22:43:03

>>173
(뒤돌아설 때, 발밑이 마찰력을 잃고 미끄러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대로 몸의 균형이 앞으로 기울어지면서 갑자기 뒤집어지는 세상. 돌바닥이 코앞에 닥쳐올 상황. 그러나 코앞에 닥쳐온 것은 돌바닥이 아니라 웬 셔츠 차림의 품이었다. 결국 그 품에 퍽 들이박긴 했는데, 그나마 돌바닥에 들이박는 것보다는 덜 아플지도 모르겠다. 제대로 충돌하기 전에 무언가 단단한 게 어깨를 턱 거머쥐고 앞으로 고꾸라지던 몸의 가속도를 최대한 받아내주었기 때문이다. 고개를 들어보면, 반의 운동부 아이가 무뚝뚝한 얼굴로 당신을 바라보고 있다.) 괜찮냐? (그러면서 당신을 훑어보고, 어디 다친 데는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는 딱딱한 얼굴로 한 마디 한다.) 조심 좀 해라.

175 이름 없음 (IReMn9WF8I)

2021-11-03 (水) 23:13:02

>>174
어, (이름을 고민하는 시간이었다. 같은 반에 운동을 하는 이름을 떠올리려고 했는데, 담요가 훌렁 벗겨졌다는 걸 인지했다.) 안 괜찮아질 지도 몰라! (목소리를 낮췄지만 속도는 빨랐다. 표정도 다급했다. 왜 그런가하니, 귀에 그 원인이 있었다. 한쪽 귀에 피어싱이 3개 뚫려있었고, 붉은 기가 맴도는게 뚫은지 얼마 안 되었거나 괜히 만지작거려 덧나든가 한 모양새다. 큐빅이 복도 전등에 비춰 반짝거린다.) 고마워, 고마운데, 한 번만 더 빚지자! (그러더니 담요를 움켜쥐고서 당신의 뒤로 숨어들려 한다. 등 너머로 숨어들어가면 고개만 슬쩍 내밀 것이다. 아까의 그 선생님이 어디로 갔는가 찾기 위하여.)

176 이름 없음 (8MUqmGMQ96)

2021-11-03 (水) 23:44:15

>>175
(데오드란트 냄새.)
...수그려. (운동부는 미간에 주름을 그으면서 입고 있던 트랙탑을 지익 벗어서 넓게 펼친 뒤 조금 낮게 들고는 이리저리 살피는 시늉을 했다. 멀리서 국어 선생님의 너 뭐하냐, 하는 소리가 들린다.) 옷 안에 벌레 들어간 거 같아서요. (하면서 운동부는 트랙탑을 넓게 펼친 채로 툭툭 터는 시늉을 한다. 다행히 거기에 시선이 쏠렸는지 국어 선생님은 뭐라 별 말 하지 않고 돌아서 가는 것 같다. 특유의 가죽 슬리퍼가 바닥을 딱딱 때리는 소리가 멀어져간다. 국어 선생님이 근시라 다행인지도...) 이게 되네. (위기가 멀어지자, 운동부는 다시 트랙탑에 팔을 꿰어 걸치고는 당신을 힐난하는 눈빛으로 돌아다본다.) 그럴 거면 교내에선 빼.

177 이름 없음 (AXiEyLE2Do)

2021-11-03 (水) 23:58:44

>>176
(답하는 소리가 없다. 다만 숨을 합, 하고 죽이는 소리는 들렸을 지도 모르겠다. 선생님의 목소리가 가까워졌을 때는 심장 박동 소리가 숨소리보다 컸겠다. 발자국 소리가 멀어져가는 것에 최대한 귀 기울여 보았고, 펼치고 있던 트랙탑이 팔에 걸쳐지면 그제야 등 뒤에서 나왔다.) 안 돼, 뚫은지 얼마 안 된데다 혼자 다시 못껴. (귀에 손을 올려 피어싱을 만지작거리더니, 이내 잘못 건들여 고통을 느낀다. 표정을 찡글이며 손을 떼어낸다.) ...그래도 다음주에 투명으로 바꿀거야! (볼멘소리. 크기도한 담요가 이제보니 바닥에 질질 끌리고 있었다. 쭉 펼치니 긴쪽의 길이는 키를 웃돌고도 남을 성 깊다. 차곡차곡 개어서 팔에 걸어둔다. 팔락거리는 담요에서 가볍게 파우더리 향이 난다.) 맞다. 고마워! 거짓말 잘 하네! (방글 웃으며 당신을 돌아본다. 돌아볼때 뒷꿈치가 살짝 들썩거린다.)

178 이름 없음 (bwbHdG7pvQ)

2021-11-04 (거의 끝나감) 00:20:21

>>177
손대지 ㅁ... (손이 귓가로 올라가는 걸 보고 미간에 내천자를 그리며 만류하려 손을 뻗었으나, 이미 피어싱에 손이 닿았다가 우그러지는 표정을 보고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조그만 한숨을 쉰다.) 피어싱 샵에 가서 소독약 하나 사. 약국 가서 식염수를 사다 바르던가. (하면서 운동부는 주머니를 뒤적인다. 그러다 건네어져온 말에, 운동부는 무뚝뚝하고 가무잡잡한 얼굴로 당신을 가만히 보다가 시선을 피하며 한마디 퉁명스레 한다.) 그런 칭찬 필요없어. (그러면서 운동부는 주머니를 더 뒤적여본다. 찾는 게 없는 모양. 그는 다시 이쪽을 바라보며 말을 꺼내온다.) 너 여기서 잠깐만 있어.

179 이름 없음 (TtA2MFEF8k)

2021-11-04 (거의 끝나감) 08:12:00

>>178
(입을 꼭 닫고서 입꼬리를 아래로 동그랗게 말았다. 하지 말란 짓 했다가 아파하고 나니 할 말이 없다. 한숨 소리는 듣지 못했지만 저 입 모양, 분명 한숨 쉰 거라는 추측이다.) 별로 안 아파! ... 안 건들이면. (곧게 당신을 쳐다보고 있었는데, 자기가 생각하기에도 한숨을 한 번 더 쉬게 할 것 같은 말인지라 느릿느릿 시선이 다른 방향으로 향한다. 점점 아래로.) 샵에서 올때마다 소독해준다 그래서 안 샀지이. (목소리 크기가 살짝 줄었고 어미가 늘어졌다.) 어... 그럼 친절하다? 상냥하다? 배려심이 깊다? 마음씀씀이가 넓다? 과장 쪼금해서 생명의 은인이다? (갈수록 화려해지는 칭찬 리스트를 늘어놓는게, 마음에 드는 걸로 고르라는 것 같다. 그새 시선이 위로 올라오더니 눈만큼은 아까와 같이 당신을 바라본다. 입꼬리는 여전했지만.) 네엥.

180 이름 없음 (cm2DLF.Rf.)

2021-11-04 (거의 끝나감) 09:10:11

>>179
그래, 건드리지 마. 샵을 매일 가는 것도 아닐 거 아냐. (곧게 운동부를 쳐다볼 때에는 운동부의 귀에도 아웃컨츠를 따라 줄줄이 나 있는 피어싱 자국이 보인다- 무언가 끼워져있진 않지만.) 금방 올게. (어째 운동부가 건네어온 잠깐만 있어, 하는 말이 그 무뚝뚝한 얼굴로는 도저히 감당이 안 될 만한 칭찬 리스트가 입에서 줄줄이 쏟아져나오는 걸 틀어막으려는 의도도 없잖이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운동부는 부리나케 반 쪽으로 발을 틀어 총총 갔다가, 1분 남짓한 시간만에 되돌아왔다.) 자. (운동부가 손을 내민다. 소염진통제 알약 곽이 놓여 있다.) 네 알인가밖에 없긴 한데, 그거라도 먹어. (당장 이 자리에서 먹으라는 말은 아니다. 물도 없잖은가. 운동부도 그게 마음에 걸렸던지, 정수기는 1층에 가야 있다는 걸 알면서도 공연히 복도를 한 번 둘러본다.) 매점이라도 갈까.

181 이름 없음 (m1qfNEUV4M)

2021-11-04 (거의 끝나감) 10:06:18

>>181
매일도 갈 수는 있지! 근데 그러면 진상이잖아. (대답을 하면서 고개를 다시 들어올렸을 때, 한 번 흘깃 당신의 귀를 쳐다보았다. 피어싱을 했던 자국이 맞는 것 같았고, 피어싱 이야기가 막힘없이 흐르는 것도 그렇고. 이따 돌아오면 물어봐야지 생각한다.) 아. 어. (피어싱 이야기부터 하려고 했는데, 당신이 곧 돌아와서는 손을 내밀어 보여준 것은 약이다. 숨을 깊게 들이마시고, 내쉬면서 말을 쏟아낸다.) 친절하고 상냥하고 배려심 깊고 마음씀씀이 넓은 생명의 은인이네! (아까 늘어놓았던 칭찬 리스트를 한 숨에 다 말하더니 그러고서 숨을 다시 쉰다. 한 숨에, 빠르게, 정확한 발음으로 말해낸게 뿌듯한듯 웃었다.) 매점? 그래! 은혜 갚아야지. (돌아다니다 선생님을 마주칠까, 팔에 걸어둔 담요를 펼친다. 다시 유령처럼 뒤집어쓰기라도 할 모양이다.) 근데 넌 왜 안 하고 다녀? 안 막혀? 아니면 벌써 막혔나... 아, 학교니까 빼는게 맞지. (피어싱이라고는 말하지 않았지만 아무래도 피어싱 이야기다.)

182 이름 없음 (CtJ4Ip6LuU)

2021-11-04 (거의 끝나감) 19:35:23

>>181
조용히 해. (와르르 쏟아지는 칭찬세례에 운동부는 온 얼굴을 구겼다. 가무잡잡한 뺨에 핏기가 올라오는 것도 같다. 운동부는 화제를 돌린다.) 아무튼 네 말처럼 매일은 못 가는데 소독은 매일 해야지. 약국에서 소독제 스프레이 사둬... 은혜는 안 갚아도 되니까, 매점에서 음료수라도 사다가 소염제도 먹으라고. (담요를 유령처럼 뒤집어쓰는 것에는 별 말을 하지 않는다. 계단을 내려와서 복도를 가로질러 가면 저만치에 열려 있는 매점이 보인다. 매점으로 다가가다가, 재재 쏟아내는 질문에 운동부는 당신을 힐끔 바라보다가 앞으로 시선을 돌렸다.) 어. 학교에선 안 해. 또 귀 찢어먹긴 싫어서.

183 이름 없음 (V.YvoOhXfs)

2021-11-04 (거의 끝나감) 19:58:39

>>182
왜? 다 마음에 안 들어? (화제를 돌려도 꿋꿋하게 물어보고는, 바뀐 화제를 쫓아간다.) 소독약이 스프레이로도 있어? 똑똑이네! (앞선 칭찬들은 조용히 하라는 말을 들어버렸으니, 다른 방향의 칭찬을 덧붙이고 이번에는 어떻냐는 기대에 어린 웃음을 보인다.) 은혜도 갚을거고 약도 먹을 거야. (담요자락을 팔락거리면서 당신과 함께 매점으로 향한다. 이번에는 실수로라도 밟고 넘어지지 않게, 발치까지 내려오지 않도록 잘 붙들고 있다.) 으, 아팠겠다. 운동하다가? 아니면 선생님들이? 선생님들이 그런거면 많이 무서운데. (무의식적으로 피어싱을 뚫은 쪽의 귀를 감쌀 뻔하다가, 직전에 브레이크를 걸어 멈췄다. 그리고 가까워진 매점에 눈에 들어오면 당신의 앞으로 질러가더니 마주보고서 선다.) 뭐 사줄까!

184 이름 없음 (CtJ4Ip6LuU)

2021-11-04 (거의 끝나감) 20:26:47

>>183
마음에 들고 말고가 아니라... 아냐 됐다. (또다른 칭찬에 운동부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하고 시선을 돌려버린다. 핏기가 조금 더 선명해진 것도 같다. 화나거나 한 게 아니라 쑥스러워하는 걸까? 다행히 새로운 질문이 꺼내져 화제가 환기된 덕분에 운동부는 다시 시선을 돌려왔다. 질문에 조금 고민하다가) 운동하다가 그랬어. 그나마 연골이 아니라 귓불이라 다행이지. (아웃컨트에 구멍이 주르르 난 귀의 반대쪽 귀를 바라보면 귓불에 흡사 종이를 한 번 접었다 폈을 때 생기는 것과 비슷한 모양의 흔적이 있다. 그쪽 귀는 귓바퀴를 따라 구멍이 나 있다. 갑자기 발걸음을 툭 앞세워서 마주보고 가로막으면, 운동부는 물끄러미 바라봐온다.) 이런 걸 바란 건 아니긴 한데, 이온음료 캔이나 하나 사줘.

185 이름 없음 (giGSvFBO66)

2021-11-04 (거의 끝나감) 20:41:04

>>184
(말을 잇지 못할 때, 다시 말을 이어주기라도 할까 기다렸다. 다시 말해도 괜찮다는 듯 작은 미소를 입가에 남기고, 당신의 목소리에 귀 기울였다. 언제 입이 열릴까, 당신을 바라보았지만 이 주제로 이야기가 이어지지는 않았다. 그래도 한 가지를 알게 된 것 같다. 당신이 조금 부끄러워하는 것 같다고. 소리죽여서 쿡쿡 웃었다.) 으악. (웃다가도 금방 당신의 말을 듣고서 표정이 찡그려진다. 귓바퀴를 따라 피어싱 자국이 난 쪽의 귀를 보고서, 귀가 찢어졌을 때의 상황을 상상해버린게 분명하다.) 진짜 그거 하나? 많이 먹고 많이 크고 많이 힘내야지! (운동을 한다고 하면 생각되는 그런 이미지. 우선은 물과 이온음료 한 캔을 찾아온다. 그리고서 정말 이걸로 끝이냐는 듯 당신을 바라본다.)

186 이름 없음 (CtJ4Ip6LuU)

2021-11-04 (거의 끝나감) 21:04:19

>>185
으악이지. (운동부는 고개를 끄덕였다. 반문이 돌아오자 다시 한 번 더 고개를 끄덕인다.) 너무 많이 먹어도 곤란해서. (정확히는 축구부라고 했던가? 운동부의 체격은 탄탄하면서도 날렵해서, 제법 신경써서 관리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정 아니다 싶으면 나중에 다른 걸로 해주던가. (이 녀석, 자연스럽게 애프터신청을 해왔다.)

187 이름 없음 (Il4swrYfFE)

2021-11-04 (거의 끝나감) 21:19:04

>>186
운동이랑은 거리가 이~만큼 떨어져 있어서 잘 몰라. (팔을 넓게 양쪽으로 쭉 펼쳤다. 곰곰 생각해보면, 체육 시간에 곧잘 쉬고 있고는 했다. 특별히 몸이 안 좋아 보이지도 않는데도. 체육 선생님이 별 다른 말을 하지도 않았다.) 다른 거 먹고 싶으면 말하지! (나중을 기약할 듯하니, 물과 이온음료 캔을 구매하고서 다시 온다. 캔을 당신에게로 건넨다.) 아니면 아예 다른 거야? 공부 도와주는 거도 자신 있어!

188 이름 없음 (CtJ4Ip6LuU)

2021-11-04 (거의 끝나감) 21:43:19

>>187
많이 먹어서 살 찌면 곤란하다는 소리야. (생각보다 간단한 핑계였다. 거절의 의사를 표한 운동부는, 내밀어진 음료수 캔을 받아든다.) 잘 마실게. (하다가, 공부를 도와주겠다는 말에 공부? 하고 입 안으로 되뇌어보고는 곰곰이 생각해본다. 본인 성적을 생각해보는 듯하다. 중위권이긴 했지만 그렇게 좋은 성적은 아니다. 딱 '공부에 손을 놓지는 않았다' 정도일까. 어떤 이유로 인해 성적을 올릴 필요가 있는 건지, 공부를 도와주겠다는 제안이 꽤 유효하게 먹힌 것 같다.) 공부 잘하냐?

189 이름 없음 (5suOgg6xtA)

2021-11-04 (거의 끝나감) 22:01:14

>>188
운동 많~이 하먼 많이 먹어도 괜찮은 줄 알았지. (간단한 논리다. 먹은 만큼 움직이고, 움직인 만큼 먹고. 당신이 캔을 받아들면 방긋 웃었다. 이제 물뚜껑을 열면 약을 먹을 수 있을텐데, 물병을 그냥 달랑달랑 들고만 있다. 약 먹기 싫어서 두는 얕은 수다.) 자신있어! (두 손가락이 곧게 펼쳐진다. 브이 자를 그리고서 웃는 모습이 기세등등하다.) 내가 바로 전교 1등... 까지는 아니지만. (목소리를 낮추고서 소곤이는 듯 하더니 웃음섞어 말을 바꾼다.)

190 이름 없음 (CtJ4Ip6LuU)

2021-11-04 (거의 끝나감) 22:14:57

>>189
먹은 만큼 더 운동해야 되잖아. (간단한 논리를 뒤집으면 간단한 논리가 나온다. 캔을 받아들고 툭 따서 몇 모금 시원하게 넘긴다. 그런데 몇 모금을 마시고 나서도 손에 물병이 달랑달랑 들려만 있자, 운동부는 그걸 빤히 바라본다.) ... (전교 1등-까지는 아니지만, 하는 짓궂은 말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운동부는 병과 이쪽을 번갈아 보다가 한 마디 한다.) 뚜껑 따줘?

191 이름 없음 (mcshVy1r9c)

2021-11-04 (거의 끝나감) 22:25:53

>>190
난 먹은 만큼도 운동 안 하는데. (자랑스레 말할 내용은 아니지만, 그리 우스운지 키득 웃고 있다.) 전교 1등 정도는 아니면 모자라? (최상위권이 아니기는 해도, 상위권은 상위권에 속하고 있는 성적이었다.) 응? (공부 이야기를 하고 있었는데 뚜껑 이야기가 나왔다. 눈을 느릿하게 깜빡거리고, 당신을 쳐다보았다가 물병을 쳐다보았다. 입을 꾹 닫고 있더니, 뚜껑을 손으로 잡고 힘을 준다.) 못 여는 거 아냐! 약 먹기 싫어서 그런건데. (약은 거의 대부분이 맛없으니까.)

.dice 1 2. = 1
1. 열었다.
2. 못 열었다.

192 이름 없음 (qgrdYg45go)

2021-11-04 (거의 끝나감) 22:38:32

>>191
과식하지만 않으면 돼. (운동부는 무덤덤하게 대답했다. 자신은 운동을 하니 신경써서 관리하는 거고, 일반인이라면 균형잡힌 식사로 충분하니까. 전교 1등 급이 아니면 모자라냐고 묻자 운동부는 고개를 휘휘 젓는다.) 아니, 네가 자신있다면 자신있는 거겠지. (물병이 까드득 하고 열리는 걸 보며, 운동부는 타이르듯이 덧붙인다.) 먹기 싫어도 먹어둬. 귀 아픈 게 확연히 나아지니까. 가루약도 아니고 알약이잖아.

193 이름 없음 (fwxiCENk0E)

2021-11-04 (거의 끝나감) 22:42:25

# >>192인데 나 곧 잠들지도 몰라

194 이름 없음 (tGYmyLDggU)

2021-11-04 (거의 끝나감) 22:47:04

>>192
소아과 의사선생님 같아. (귀 만지지 말라고 했고, 소독하라고 조언도 해줬고, 약도 챙겨줬고, 운동에 먹는 얘기까지. 굳이 소아과가 붙은 이유는 상냥하고 친절하다는 말을 돌려 돌려 표현한 것이었다.) 그래도 앞자리는 1이야. (물병이 열리고 나면 정말 먹기 싫어하는 표정이 된다.) 가루약이든 알약이든 맛없는 건 똑같지이. (말 끝을 늘이며 싫은 티를 팍팍 내지만 손바닥을 내밀었다. 약을 먹기는 먹겠다는 거겠지.)

195 이름 없음 (XmtsBWMZm6)

2021-11-04 (거의 끝나감) 22:57:03

>>194
어쩌다 보니 이렇게 됐네. (운동부는 잠깐 시선을 피하면서 머쓱하게 대답했다. 정말이지 처음에는 귀 팅팅 부은 게 보기 좀 그래서, 저게 얼마나 짜증나게 아픈지 아니까 성격에 안 맞는 오지랖 잠깐 부려보려고 한 것뿐인데- 어째 생각하던 것보가 해프닝이 길어진 것 같다.) (아주 싫지는 않을지도, 하고 운동부는 무심코 생각했다.) 조금만 도와주면 되니까 그걸로도 충분해. (그는 약갑에서 알약을 톡 꺼내 손 위에 얹어준다. 연질캡슐로 되어 있다.) 알약은 혀 위에 올려도 별맛 안 나잖아. 입 안에서 터지는 게 아니고서야..

196 이름 없음 (tGYmyLDggU)

2021-11-04 (거의 끝나감) 22:58:31

# >>193 졸리면 무리하지 말고 자러가! 말해줘서 고마워 ~.~

197 이름 없음 (kGTtpKVkUs)

2021-11-04 (거의 끝나감) 23:21:06

>>195
아까 내가 했던 말들이 다 정답이라서 그런 거 아냐? (놀리고 있다. 이를 하얗게 언뜻 보이며 웃는 입꼬리 모양하며, 샐쭉 감기며 휘어진 눈매 모양하며 장난스럽기 그지 없다. '아까 내가 했던 말들'이 가리키는 것은 분명, 그 칭찬 리스트다.) 나 필요해지면 말해! 나 집 늦게 가니까 난 아무때나 괜찮고. (방긋 웃고나서, 이후에는 손 위에 올려진 알약과 눈싸움이 잠시 있었다.) 녹잖아! 잘 녹는 건 물 마시기도 전에 녹아버리고. (투덜거려봤자다. 먹어야할 약이고, 먹으라고 선뜻 주기까지 했는데 안 먹겠다고 투정부리기에는 당신이 정말 소아과 의사 선생님도 아니다. 약을 입에 넣고 나서 눈 질끈 감더니, 물을 세번이나 마셨다. 처음은 물만 삼켜버렸고, 두번째에서 제대로 약도 같이 삼켰고, 세번째는 혀끝에 약맛이 남지 말라고.) ... 이제 귀 안 뚫고 싶어졌어.

198 이름 없음 (xYbFjFVU0g)

2021-11-05 (불탄다..!) 19:43:45

>>197
같은 소리 하고 있네... (시선을 돌리지도 못한 채로 운동부는 얼굴을 구겼다. 뺨의 혈색이 좀더 선명해진 것도 같다.) 복도 반대편에서도 다 보일 정도로 귀가 팅팅 부은 게 보기 안쓰러워서 도와준 것뿐이니까. (이런 상황 자체가 익숙하지 않은 걸까 틱틱거리는 것도 퍽 서투르다. 알약을 내어줄 때가 돼서야 운동부는 다시 이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얼마나 혀 위에서 굴리면 그게 녹냐? 후딱 삼켜. (알약을 삼키자, 그제사 한시름 놨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다. 반나절쯤 지나면 통증과 부기가 확연히 가라앉을 것이다. 투덜대는 소리에, 운동부는 고개를 끄덕인다.) 뚫기 싫으면 안 뚫는 거지.

199 이름 없음 (YYWdgD0GaY)

2021-11-05 (불탄다..!) 20:15:07

>>198
오, 너 지금 그거 닮았다. 이모티콘 중에 도깨비처럼 생긴 거 알아? (👹) (소리죽여서 웃으며 말을 이어 나간다.) 나는 그걸 친절하다고 불러. (당신이 부끄러워할 것이라고 생각하고서 한 말이라, 웃음이 쉽게 그치지는 않는다.) 안 녹았거든! 약 먹으면 기분이 별로야. 목에 남아있는 것 같아. (이물감이 싫다는 듯 표정을 찌푸리도 고개를 작게나마 절레절레 저었다.) 응! 대신 타투할 거야. 어른 되면! (열었던 물뚜껑을 잠그면서 샐쭉 웃는다. 집게 손가락 하나만을 피고서, 손가락 끝으로 피어싱이 있는 쪽 귀의 귓바퀴를 따라 내린다.) 여기에 하면 너랑 똑같겠다.

200 이름 없음 (xYbFjFVU0g)

2021-11-05 (불탄다..!) 21:01:13

>>199
(운동부는 뭐라 할 수 있는 말이 없어진 건지, 아니면 자기도 얼굴이 발개진 걸 눈치채고 숨기고 싶어진 건지 손바닥으로 얼굴 반쯤을 턱 짚었다. 그리곤 한숨을 푹 쉬었다.) 에휴. (이마를 짚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다, 어른이 되면 타투를 하겠다며 귀의 연골 쪽을 쭉 훑어내리는 손가락을 보고 눈을 조금 치뜬다.) 바늘구멍 하나 뚫는 것도 죽을 맛인데 타투를 거기다가? (운동부가 먼저 주목한 쪽은 그쪽이었다. 귀 연골을 건드리는 건 십중팔구 대단히 아픈 일이기 때문이다.) 귓바퀴도 귓볼도 있는데 왜 거기... (하다가, 자기랑 똑같겠다는 말을 상기하고는 말을 하다 말고 입을 다문다. 시선이 흔들리는 걸 다잡으며 미간을 구긴다. 얼굴이 더 빨개졌다.) .........너 나한테 작업 거냐.

201 이름 없음 (LCPgYyGQKc)

2021-11-05 (불탄다..!) 21:29:17

>>200
(얼굴 반쯤이 손에 가려 사라지고, 한숨을 쉬는 것까지 별 다른 장난을 이어 치지 않고서 보고 있었다.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면은 그때즘 입을 열었다.) 침묵은 긍정인데. 격한 부정도 긍정이고. (말을 끝내면서 입매가 둥그렇게 휘는 건 장난치는 것이기도 했고, 약올리는 것이기도 했다.) 응! 꽃이 한 송이씩 나란히 있다거나. 찾아보니까 마취 크림 발라준대. (피어싱이 있는 쪽은 귓볼이다. 귓바퀴만 만지작거리다가 손을 내린다.) 귓바퀴 바깥 쪽은 내가 보기 힘들고, 귓볼은 이미 충분- (눈이 동그래진다. 당신의 얼굴 색을 잘못 본게 아닌지, 목소리를 잘못 들은게 아닌지 되새겼다. 그리고 자신이 한 말도 곱씹었다. 이내 별 친하지도 않은 사이에 민망한 소리를 해버렸다고 생각했다. 얼굴에 열이 올랐다. 무슨 말을 해야할지 갈피를 못 잡다가.) 걸렸으면 죄송합니다아! (냅다 소리질렀다.)

202 이름 없음 (xYbFjFVU0g)

2021-11-05 (불탄다..!) 21:46:54

>>201
날조하지 마. (약올리기의 효과는 굉장했다. 운동부는 이 악무는 소리를 내면서 부들거렸지만, 다시 말해 약올리기가 아주 고약하게 잘 먹혔다는 뜻일 것이다. 입술을 깨물고 쓰-읍 하며 애꿎은 숨만 고르다가, 자신이 무슨 말을 했는지 당황하고 있는 틈을 타서 운동부는 대뜸 손을 내밀어, 에라 모르겠다 하는 식으로 당신의 손 하나를 덥석 쥔다. 그리곤 여름에 탄 색이 아직 안 빠진 피부에 핏기가 올라 보기 좋은 감색이 된 얼굴로 당신을 뚜렷이 바라보며, 이를 꽉 물고 눈을 치뜬 채로 또렷하게 발음한다.) 알면 앞으로 자-알 부탁합니다. (그리고, 2~3초 정도 침묵했다가 한 마디 덧붙인다.) 공부. (이 공백, 아마 제딴에는 소소한 복수인 모양이다.) ......그리고 마취크림 발라봤자 아플 건 다 아파. 사후관리도 더럽게 귀찮고.

203 이름 없음 (z/nZwyq/Lc)

2021-11-05 (불탄다..!) 22:06:10

>>202
날조 아닌데. 진짜잖아. (이때까지는 여유로웠다. 다시 장난으로 맞받아칠 수 있었는데, 당신을 약올리려 할 수 있었다. 손이 잡히고서는 그러지 못 했다. 방금 상황에 이어서 손을 잡는다니. 눈이 동그랗게 뜨이는건 물론, 몸이 굳기까지 했다. 긴장해서 몸에 힘이 바짝 들어간다. 오해라고 설명해야 하는데, 뚜렷이 바라보는 시선에 말을 어떻게 꺼내야 하나 고민했다. 그래도 곧 긴장이 풀릴 수 있었다.) 놀랐잖아아! (탁 하고서 몸에서 힘이 빠진다. 힘이 들어가고 빠지는 건 당신에게도 분명 느껴졌을만큼 확연한 차이가 있었다.) 그래도 할거야. 이미 진작에 하기로 결정했거든! (손 빼도 되는건가, 당신이 덥석 잡아버린 손과 당신을 번갈아보았다.)

204 이름 없음 (xYbFjFVU0g)

2021-11-05 (불탄다..!) 22:28:42

>>203
(운동부는 한숨을 쉬며 손을 놓아준다. 자신의 혼신을 아끼지 않은 회심의 역습이 유효타였다는 것을 알아챘는지, 아까까지와는 달리 이번의 한숨에는 후련한 기색이 가득하다. 한결 여유로워진 태도.) 뭐, 그러면 더 말리진 않을게. (그러다 문득 손을 들어서 자신의 귀를, 구멍이 줄줄이 나 있는 연골 쪽을 매만져본다. 그리곤 한박자 늦게 맞장구친다.) ...아파도 예쁘긴 하겠다. (그러다가 캔을 들어서 안에 남아있던 것을 마저 다 마셔버리고는) 그래서 시간은 언제 괜찮아? 조만간 모의고사 있지 않던가.

205 이름 없음 (zRXT9ASRsM)

2021-11-05 (불탄다..!) 22:58:09

>>204
(손이 놓이면 괜히 한 번 쥐었다 펼쳐보았다. 붙잡혀 있던 것도, 그랬던 손도 얼떨떨했다. 티내려고 하지는 않았다.) 나중에 하게 되면 보여줄게. 어른될 때까지 기다려. (마땅히 어떤 타투를 해야겠다는 도안이 있는 것도 아니었지만. 당신이 시간 이야기를 하면 고개를 조금 갸웃거렸다.) 집 늦게 가니까, 언제든지 괜찮다니까. 당장 오늘도 상관 없어, 난. (시간을 맞춰야하는 건 당신 쪽이 아닐까, 고개를 조금 기울이더니 시선이 당신을 향한다. 그렇게 말하는 쪽이야말로 시간이 언제 괜찮냐는 듯.)

206 이름 없음 (xYbFjFVU0g)

2021-11-05 (불탄다..!) 23:24:56

>>205
(코에 낯선 향기가 뒤늦게 걸리는 것을 운동부는 느꼈다.)
(덥석 쥐어놓고 너무 무리수를 둔 것 같다고 운동부 본인도 후회하고 있었다. 손을 잡은 것에 대해 당신이 뭐라 말을 꺼내지 않는 것도 그랬고. 그래서 운동부는 조금 멋적게, 자신의 귀를 만져보던 손을 떼어내리며 한번 흘끗 쳐다보았다. 그리곤 시선을 다시 들었다.) 어른 될 때까지 같이 놀아주게? (운동부는 잠깐 뜸을 들인다.) ......아니 방금 취소. (기껏 열이 내렸던 뺨에 다시 열이 오르는 기분이다. 그래서 운동부는 당신의 말에 필사적으로 시간을 되새겨보았다.) 이번주는 목요일이랑 금요일이 괜찮겠네. 주말에는 밴ㄷ- 아니, 연습 있어서.

207 이름 없음 (IJvBGQAJ9o)

2021-11-05 (불탄다..!) 23:42:06

>>206
(그런 말을 쉽게 하는 편이었다. 다음에 보자는 기약없는 약속처럼, 보여준다고 말했지만 당신이 기다려준다면의 가정이 붙은 약속이었다. 이런 반응은 예상치 못한 것이었다. 그 사이 당신은 말을 번복했다.) 뭐야, 왜 취소야. (무뚝뚝한 듯 상냥하고, 부끄러움도 타고, 그렇다고 장난에 계속 당하지도 않는다. 오히려 한 번은 크게 당했다. 그런 당신과 친구하기 좋냐, 싫냐 가르면 좋다는 쪽이라고 생각했다.) 그럼 어른될 때까지 같이 놀진 말고- 공부 도와줄게. (웃었고, 이어 스케줄이 나오면 고개를 끄덕인다.) 도서관에 있을게.

208 이름 없음 (bJVWyUoYs.)

2021-11-06 (파란날) 00:08:02

>>207
...... (대답이 금방 나오지는 않는다. 운동부는 대답 대신 손부채질로 반문을 넘겼다. 이렇게 어떤 풋풋한 정이 담긴 이야기에는 별로 익숙하지 않았고, 누구라도 쉽게 알 만큼 그는 부끄러움이 많았으며, 그걸 숨기려 애써 틱틱대는 태도로 나오곤 했다. 다만... 숨기는 솜씨도 어설펐고, 뭔가 숨기기에는 그 본인이 무의식적으로 감정에 솔직하기도 했다. 같이 놀진 말고, 하는 말이 꺼내지자 운동부는 뜻밖의 소리를 들었다는 듯이 눈을 치떴으나, 이내 시선을 천천히 비스듬히 아래로 내리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속으로 '오늘 나 좀 이상한데.' 하고 애꿎은 자책을 하는 것은 덤이다.) 뭐, 그러던가. (운동부는 가만히 시선을 비스듬히 돌리고 있다가, 다시 시선을 들어 이쪽을 바라봐온다.) 그럼 반으로 돌아갈까.

# 아 달아. 아 달아......

209 이름 없음 (W3l7uoXdqY)

2021-11-06 (파란날) 00:22:37

>>208
(고개를 끄덕이면, 취소한 이유에 대해서 듣지 않아도 괜찮았다. 취소가 취소되어 버렸으니까.) 이제 너 큰일났다. (반으로 돌아가자는 말에 주섬주섬 다시 담요를 제대로 뒤집어 쓴다.) 성적 갑자기 올라서 컨닝한 거 아니냐고 선생님들이 괴롭힐지도 몰라. (자신만만하고 당찬게 담요를 폭 뒤집어쓰고 있는 아래에서 새다 못해 뿜어지듯 하다. 그리고 매점에 있던 시계를 확인하고는 걸음을 재촉한다.) 야야, 곧 쉬는 시간 끝나겠다. 가자! (먼저 매점에서 반으로 발을 옮겼다.)

#이걸 막레로 할게 ~.~ 귀엽고 즐겁고 달았다!

210 이름 없음 (bJVWyUoYs.)

2021-11-06 (파란날) 00:33:20

>>209
# 밤이 늦은 지금에 생뚱맞은 느낌도 있지만 용기내서 말씀 올려봅니다
# 다른 이야기들 더 보고 싶은데 일대일 괜찮을까?

211 이름 없음 (D9sLUFeoLU)

2021-11-06 (파란날) 00:39:06

# >>210 우선은 오키 ㅎ.ㅎ! 캐에 설정이 좀 붙어서 아깝단 생각이 들기도 했고.

212 ◆rzhGzKKFLk (bJVWyUoYs.)

2021-11-06 (파란날) 00:42:44

>>211
# 설정... (짤)
# 우선은 불금이라지만 시간도 늦었고 너참치도 자러 가야 될 테고 나도 조금 졸려 +.+
# 자고 일어나서 한가로울까~ 싶은 시간에 일댈 갱신해둘게 아마 오후나 저녁
# 인증코드 남겨둘게

213 ◆76oY4.po8o (MAHCDemDi.)

2021-11-06 (파란날) 00:51:56

# >>212 내일 일정이 있어서 늦게 확인할 수도 있어 ㅇ.ㅇ 저녁에는 오겠지만 무튼 나도 인코 남겨둘게! 잘자~

214 ◆rzhGzKKFLk (W4J61025tY)

2021-11-06 (파란날) 01:01:28

# >>213 확인했어, 잘 자 u.u

215 이름 없음 (LwZRkZ6ZCc)

2021-11-06 (파란날) 04:28:00

선장, 당신이 수다 즐기는 성격이 아님은 내 자알 안다만은. 이제 도무지 어디로 가는지만이라도 알려주면 안 되겠소? 이 남쪽에는 아무것도 없다오. 오직 바다, 바다, 끝없는 바다 밖에는 아무것도!
나침반은 북에서 남으로, 동에서 서로 제멋대로 돌기 일쑤인데 당신은 어찌 키를 돌리라는 지시를 내리는 것이며, 어째서 바다의 여신은 이상할 정도로 오래 이 배에 관대함을 보여주시는 것이오? 수수께끼 같은 말은 그만두고 이제 정말 입을 열 때가 됐소이다, 선장. 속내가 뭐요?
선원이라곤 둘밖에 없고 배라고는 썩은 나뭇조각밖에 없던 시절부터 우리는 온갖 기상천외한 항해를 함께 겪지 않았소. 당신이 마음에 들지 않은 적은 수없이 많았지만, 지시를 의심한 적은 여신께 맹세코 단 한 번도 없소! 그러나 지금이 바로 그 때라는 생각이 드는군.
...안개 때문에 코앞에 있는 사람도 보이지 않는데 대체 어디를 그리 쳐다보고 있는 거요, 제기랄.

216 이름 없음 (03IwWNvWRk)

2021-11-10 (水) 23:58:16

맞아, 여긴 네 악몽이야. 너, 또 공포영화 보고 잤더라? (단조로운 별장 같은 공간 속, 모닥불이 타들어가는 소리만이 울려퍼진다. 의자에 앉아있는 인영은 당신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다. …혼내는 걸까?)

217 이름 없음 (HL5Pw1cZE.)

2021-11-11 (거의 끝나감) 00:39:08

>>216
(방금 전까지 형언하기 어려운 꿈을 꾸고 있었는데, 눈을 깜빡하자 배경이 바뀌었다. 바뀐 배경보다 들려오는 목소리에 신경이 먼저 반응했다.) ....신경 꺼. (상대의 말이 꾸중처럼 들려서 미간을 찡그리고 투덜댔다. 또라니 누가 들으면 내가 만날 공포영화만 보는 줄 알겠다.) 쓸데없는 참견을... 그래서 여긴 또 뭐야. (퉁명스럽게 말하고 앉을 곳을 찾아 두리번거렸다.)

218 이름 없음 (opzjo/z7/g)

2021-11-11 (거의 끝나감) 00:47:07

>>217
신경이 예민한 건 알겠지만, 도와준 사람한테 그런……아니다. 뭐라 해봤자 무슨 소용이람. 어차피 또 잠에서 깨면 다 잊어버릴텐데. (나지막히 한숨을 내쉬고는, 앉을 곳을 찾는 당신의 주변에 눈길을 준다. 원래 저곳에 의자가 있었던가? 시선이 닿지 않는 모든 구석구석이 흐릿하다.) 네 말이 맞아. 매번 악몽꾸고 아침에 머리 붙잡는 건 내가 아닌 너니까. 다시 보내줘?

219 이름 없음 (HL5Pw1cZE.)

2021-11-11 (거의 끝나감) 01:05:54

>>218
(상대의 반응에 내가 너무 날이 서 있었다는 걸 자각했다. 그야 누구나 험한 상황을 겪다 넘어오면 그렇지 않냐는 생각이 들면서도, 상대의 말대로 도와준 사람에게 예의가 아니라는 생각도 동시에 들었다. 나는 괜히 서서 볼을 긁적이다가 상대의 시선이 닿는 곳을 돌아보았다. 거기엔 의자가 있었고, 앉을 자리를 찾던 나에게는 반가운 자리였다. 의자를 향해 돌아서며 겨우 들릴 정도로 툭 내뱉었다.) 미안하게 됐네. 매번 도움만 받는 주제에 말이 심했다. (사과인지 불만인지 모를 말이지만 내 성격상 어렵게 꺼낸 사과라는 걸 상대는 알고 있을거다. 나는 의자로 다가가 털석 앉았다. 푹신했는지 딱딱했는지는 모르겠다. 앉아서 그제야 제대로 상대를 보며 대화를 할 수 있게 되었다. 오늘은 또 어떤 모습이었을까.) 사과 했으니까 돌려보내는 건 좀 봐줘. 그런데 왠일이야. 한동안 안 보였잖아.

220 이름 없음 (cUyYHlvTRU)

2021-11-12 (불탄다..!) 08:44:57

/하현주가 먼저 갱신해둘게

221 이름 없음 (/eUcYvVs/c)

2021-11-12 (불탄다..!) 20:00:00

안녕하세요! 저는 오늘 첫 출근입니다. 사실 이 회사에 다닌지는 근 천년가량 되었지만요. 근데 어떻게 첫 출근이냐구요? 그야 오늘은, 제가 마계지부에 발을 내딛는 첫날이거든요. 하하, X발. 니체의 말이 맞았나봐요.

천계지부에선 그야말로 꽃과같은 생활! 이라기보단 응? 사실 내가 천사가 아니라, 지옥에 수감된 불쌍한 필멸자였던가? 같은 수준으로 혹사당했답니다. 기근, 재앙, 천재지변, 전쟁, 나날이 줄어드는 신도들의 숫자... 그렇기에 제가 생각했던 하하호호 깔끔한 사무직이 아니라, 이리 뛰고 저리 뛰는 파견직이었어요. 전쟁을 일으킬것같은 사람들에게 최대한 무의식에 닿게끔 전쟁은 안돼요... 불쌍한 아이들에게 기부해주세요... 교회를 지원해주세요... 같은걸 하루종일 속삭이고, 악인들에게 더이상 범죄는 안돼요... 신께선 당신을 사랑하세요... 으악, 이렇게 속삭여온지만 천년! 그러나, 개심 시킨 사람의 숫자는 한 손으로도 셀수 있을정도로 적은 나! 무능이라는 딱지가 단단히 박혔는지, 네. 마계지부로 좌천당했습니다. 사실 좌천이란것도 아니긴 해요, 명목은 승진으로 인한 파견이니... 그건 그래도 전 천사인데, 마계지부에대한 인식이 어떻게 좋겠어요! 안그래요? 사실 빛이 있으면 어둠이 있고, 어둠이 있으면 빛이 있어서 우리는 균형이라곤 하지만... 아는 것과 마음이 동하는건 꽤 차이가 크죠.

게다가 전 사실 첫 출근인데 5분이나 늦었답니다. 네. 긴장해서 길을 잘못 들은게 죄는 아니지만 늦은건 죄가 되고, 그 탓에 더욱 들어가기가 망설여지네요. 마계, 으리으리한 저 건물에 위압당했지만... 용기내어 문을 두드릴 때가 되었겠죠.

" 실, 실례...합니다아...? "

222 이름 없음 (m.ggh/m4tE)

2021-11-15 (모두 수고..) 21:59:12

>>221
혹시 아직 흥미 있으면 이어봐도 될까? 시간이 좀 지나서 먼저 물어봐!

223 이름 없음 (T4XIDF0GU2)

2021-11-16 (FIRE!) 22:36:06

저택은 단정한 회색이다. 도회지라면 심심찮게 볼 법한 것으로, 눈에 띄지 않아 무심코 놓쳤을 수는 있어도 지나가는 눈에 한번만 깊이 담겼다면 와, 나도 이런 집에 살았으면- 따위의 선망 정도는 자리에 우뚝 버티는 것만으로 누차 들었을 것이다. 저택만큼이나 단정한 담장과 나란히 걸으면 빈틈없이 닫힌 검은 대문이 있다. 창살조차 없어 답답하기까지 한 문은 말끔한 초인종만 덩그러니 두었을 뿐이라, 새벽 5시 하물며 0분도 30분도 아닌 40분에 만나자고 통보나 다름없는 약속을 잡은 센티넬은 너무도 깨끗해 지문의 흔적도 느껴지지 않는 이 종鐘을 건드려야만 대면할 수 있을 것처럼 보였다.




여자는 창 너머 어두운 하늘을 보며 머그잔을 입가에 가져갔다. 따뜻하게 데운 우유를 아삼 홍차에 섞은 밀크티다. 탁자엔 비벼 끄지 않은 연초가 자연紫煙을 풍겨 올리고, 여자는 밀크티를 한 모금 마셔 삼키며 상념에 잠긴 듯이 아무 말도 행동도 뱉지 않았다. 하늘 갑갑한 것을 보니 아침때 비가 내릴 징조다. 여자는 약속 시간이 가까워지자 빈 머그잔을 내려두며 소파에서 등을 뗐다. 인공품처럼 하얀 손가락이 연초를 재떨이에 눌러 껐다.

/지원주야! 선레 어떻게 할지 고민하다가 본의 아니게 시간을 더 끌어버린 거 같아ㅠ_ㅠ 너무 기다리게 해서 정말 미안해...ㅠ_ㅠ

224 이름 없음 (g1g15SyClM)

2021-11-17 (水) 00:02:36

>>223

현은 새벽 일찍 일어났다. 의뢰인이 5시 40분이라는 애매한 시간대에 만나자고 말을 했기 때문이었다. 과연 그 시간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일까.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는 사람이다, 라는 답이 가장 좋겠지만(그런 경우가 좀 상태가 정상적인 사람이기 때문에) 자신이 일을 하러 가는 것인 만큼 그렇지는 않을 것이라고 자신할 수 있었다. 그러니까, 가이딩이 빨리 필요하며 능력을 개화함으로 얻게 된 불안, 초조, 우울 뭐, 그런 부정적인 감정들을 견디기 어렵다는 뜻이겠지. 그 애매한 시간이란 불면을 뜻하는 것일까.

현은 검은 머리카락을 대충 빗어넘기고 검은 마스크를 낀 채 밖으로 나왔다. 옷은 무난한 셔츠와 검은 바지이다. 밖은 우중충한 회색이다. 비가 올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며 현은 우산을 챙겼다. 여차하면 호신용으로도 쓸 수 있겠다. 첫 만남을 새벽 다섯시에 그것도 집으로 부른다니 의뢰인은 타인을 생각할 줄 아는 사람은 아니겠거니 생각한다. 아니면 야밤에 사람을 부르기는 어려우니 최대한 배려를 한 것이 다섯시 사십분이라는 그 시간일지도 모른다.

허나 현은 돈이 매우 필요했으므로 군말하지 않고 나가기로 했다. 꽤나 범죄에도 시달렸기 때문에 -그를 지켜주는 센티넬이 더이상 없기 때문에- 늘 부정적인 생각을 하게 된다. 이번 의뢰인이 그런 사람이 아니기를 깊이 바랄 뿐이다. 아니라면 우산으로 후려치고 도망가는 것도 좋겠지.

저택에 도착했다. 우중충한 하늘 빛과 같은 회색이다. 단정한 겉모습이 나빠 보이지는 않는다. 계약이 잘 성사된다면 이 근처에 살게 되는 건가. 주변의 집을 눈동자로만 슬쩍 봤다가 초인종 앞에 섰다. 깨끗한 것이 마음에 들었다. 지저분한 것보다야 깨끗한 것이 낫다.

손목시계를 내려다본다. 딱 5시 40분. 벨을 누른다.

현은 답을 기다렸다. 새파란 눈동자가 검은 대문과 단정한 담벼락을 눈에 담으며 우산으로 바닥을 툭툭 두드렸다.


/지원주 안녕! 느긋하게 기다리고 있었으니 괜찮아~ 계절적 배경이 언제인지 궁금하네. 비라고 하니 여름이려나? 겨울은 아닌 느낌이고. 가을비일수도 있겠다. 현재 배경이 가을(이라고 생각하고 싶은 겨울)이니까 지금같은 날씨일지도 모르겠네. 그렇다면 검정 코트를 걸쳤으려나.

225 이름 없음 (JmLS9bedDw)

2021-11-18 (거의 끝나감) 02:00:08

갱신!

226 이름 없음 (b4898wJybY)

2021-11-18 (거의 끝나감) 02:08:43

>>224
/어...? 답레 올려뒀는데 어디 간 거지??? ....??? 헐...먹혔거나 내가 착각했나 봐... 내일 중에 어서 다시 써서 올릴게. 매번 기다리게 해 미안해ㅠ_ㅠ 좋은 밤 보내~
P.S. 계절은 가을이라 생각했어~

227 이름 없음 (JmLS9bedDw)

2021-11-18 (거의 끝나감) 09:15:33

>>226
아이고 날렸다니 맘아프다 ㅠㅠ 천천히 편하게 이어줘~~ 가을느낌 좋지~

228 이름 없음 (tZxY2phYIw)

2021-11-18 (거의 끝나감) 18:24:56

>>224

문은 곧바로 열렸다. 소리조차 없이. 잔디 심긴 탁 트인 마당이 낯선 객을 반긴다. 다른 집과 차이가 있다 하면 사람의 조그만 소리도 기척마저도 풍겨오지 않는 것. 다만 공기다. 오직 공기. 나란히 잿빛으로 통한 좁은 길을 따라 걸으면 언제부턴가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딱딱한 문이 반쯤 내부를 보이며 열려 있다. 그러고 보니 이 저택은 창문 수가 적거니와 있더라도 그 건너편은 좀체 보이지 않는다. 꼭 무언가 꽁꽁 감출 것이 있는 것마냥 말이다.

"-들어오시죠."

반쯤 닫힌 문 너머에서 심해에 잠긴 것을 닮은 목소리가 들렸을 것이다. 하지만 동시에 연한 목소리기도 하다. 침침한 조명. 깨끗하고 넓은 거실 가운데 소파에 느긋이 기댄 여자는 언제부턴가 당신을 기다리고 있었다. 170은 가당치도 않을 체구, 푼 흑발에 금을 박은 양 소슬한 눈동자. 큰 후드티 차림은 그렇다 쳐도 소파에 의지한 육체와 배려라곤 느껴지지 않는 시선은 결코 손님을 집안에 들이는 올바른 주인의 자세가 아니다. 소파 바로 앞 탁자의 재떨이가 근원으로 사료되는 실내 전체에 은은하게 퍼진 담배 향은 더군다나 그렇고. 여자는 허리를 펴며 건너편 소파에 앉으라는 듯 무심하게 손짓했다.

"이름, 나이, 성별, 직업."

229 이름 없음 (cEYjY270/g)

2021-11-18 (거의 끝나감) 21:02:13

>>228

현은 조금 긴장하면서 열린 대문을 넘었다. 까만 대문 너머로 보이는 풍경은 왠지 모르게 삭막한 느낌을 주었다. 여차하면 도망가야 할 수도 있기 때문에 국가가 지급한 비상용 스마트워치(누르면 위치 정보와 함께 국가 인력인 가이드를 구출하기 위해 센티넬이 출동함) 주머니 속에서 만지작거리다가 용기를 내어 그 안을 걸어 들어간다. 센티넬들은 가이드들이 얼마나 개인적인 공간을 싫어하는지 알아야 했다. 대체로 그렇듯 이 사람도 모르는 듯 했지만.

매번 처음 센티넬들을 만날 때면 긴장이 된다. 가이드들이 그들을 통제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라고들 하지만 생각해보면 사실 맹수와 맹수 조련사와 같은 관계가 아닐까. 맹수 조련사... 라기에는 맹수에게 밥을 주는 그런 사람들이랄까. 그러니까 맹수에 비하면 자신을 방어할 수단이란 전혀 없는 일반적인 사람이라는 뜻이다. 보통 첫 만남 때 긴장을 하는 쪽은 맹수가 아니라 맹수 조련사이다.

특히 이 집은 창문도 적고 뭔가 꽁꽁 감쳐둔 느낌이 나는 것이 영 불안한 기분을 감출 수 없다. 물론 내가 연락이 되지 않으면 나를 찾아달라고 아는 가이드에게 부탁해놓기는 했지만서도... 그저 이 불안감이 이전의 트라우마 때문이기를 간절히 바랄 뿐.

반쯤 열린 집 문 안에서 낮은 여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조용한 적막감에 이 저택에는 이 사람 혼자 있는 것일까 생각하며 "실례하겠습니다."라고 말을 하며 안으로 들어섰다. 어두운 조명 사이, 황량할 정도로 넓은 거실 사이에 소파에 앉아 있는 여자를 보며 현은 생각했다.

아, 역시 센티넬들이란.

편견 어린 시선으로 큰 후드티를 편하게 입고 소파에 늘어지듯 앉아있는 그 모습은 썩 좋아보이진 않았다. 첫인상으로 치면 마이너스라고 해야 할까. 하지만 센티넬들이란 원래 오만한 족속들이므로, 그리고 그가 고용된 철저한 을의 입장이라는 것도 그 생각을 겉으로 들어나지 않게 했다.

담배 연기에 마스크를 쓰고 오길 잘했다고 생각하며 소파에 앉았다. 그리고 들려오는 소리에 깊은 빡침이 올라왔지만 그저 참았다. 돈이 필요하니까.

"그건 이전에 다 설명한 것 같지만, 다시 설명하자면 하현, 26세, 남자고 지금은 임시 가이딩 일을 하고 있는데 오늘 계약이 어떻게 될 지 모르니 아직 계약을 다 끊진 않았습니다. 오늘 계약 사항을 보고 차차 정리를 할지 안 할지는 생각해 보도록 하죠. 물론 갑자기 다 정리 하기는 어렵고 2주일 정도는 시간을 주셔야 합니다. 그 센티넬들도 다른 가이드를 찾아봐야 하니까요."

현은 사안을 설명하며 가방에서 계약서를 꺼내 테이블 위에 올려두었다.

"안내 드렸다시피 계약서를 적어 왔고 추가적인 부분은 아래에 더 적을 수 있게 해두었습니다. 일단 읽기 전에 가이딩 테스트부터 해보죠. 테스트가 잘 되지 않으면 어차피 계약은 할 수 없을 테니까."

현은 지원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녀가 손을 잡는다면 현이 가이딩을 시도해볼 것이고 서로 파장이 잘 맞는다면 미약하게나마 능력을 사용한 이후 올라오는 불쾌한 감정들이 조금은 사라질 것이었다. 물론 현도 그것을 미약한 피로감과 함께 같이 느낄 것이고. 일일 뿐이지만 가끔 왜 스킨쉽일까, 하는 생각이 들기는 한다. 그게 꽤나 번거롭다는 생각과 함께.

230 이름 없음 (WU.YkNd2lg)

2021-11-19 (불탄다..!) 08:48:14

갱신

231 이름 없음 (5NtriZggck)

2021-11-19 (불탄다..!) 21:31:28

" 오늘은 정말, 정말이지 긴— 하루였어. "

서늘한 지하실에 한 여자의 목소리가 크게 울려퍼졌다. 습하고 축축한 그곳이 과연 인간의 거처로서 기능할 수 있을까 싶지만, 무던한 여자는 그런 조건을 신경 쓰는 타입이 아닌 듯 싶었다. 날카로운 굽소리가 정적을 찌른다. 여자는 발걸음에 맞추어 천천히 가죽 장갑을 벗어던졌다. 이내 여자는 느릿히 껌뻑대는 먼지 쌓인 형광등 아래로 몸을 굽혔고, 의자에 단단히 묶인 상대를 똑똑히 바라보며 마치 연극같은 과장된 손짓으로 제 미간을 짚어냈다. 허니, 조용히 좀 해봐. 여자가 신경질적인 목소리로 웅얼였다.

" 허니, 자기야, 나 오늘 몹시 피곤해. "

피유, 여자가 입술을 삐죽이며 말했다. 몹시라는 단어를 힘주어 발음하며 힐긋 고개를 돌리니 헐거워진 밧줄이 그녀의 눈에 들어온다. 자기도 참, 말썽쟁이야. 여자는 항상 당신을 자기, 혹은 허니라는 애칭으로 불렀다. 그저 단어만을 빌려오는 것이 아닌 꽤 무거운 사랑이 실린 호칭이었다. 아마 지나친 장난에 불과했을테지만. 그녀의 속을 누가 알까. 여자가 몸을 일으켰다. 제 왼뺨에 튀어 굳어버린 핏자국이 거슬렸던 것일지, 한참이나 왼뺨을 긁적이던 여자는 이내 손을 털고선 새로운 밧줄을 찾아 당신을 더욱 단단히 묶어둔다.

" 조금만 참아. 나도 자기를 풀어주고 싶어. "

여자가 다정한 어투로 말했다. 허나 목소리와는 대조되게 다소 거친 손길이다. 피가 통하지 않을 정도로 단단히 밧줄을 묶던 여자는 무언가 부족함을 느낀 것일지 한참이나 결박된 당신의 두 팔을 내려다 본다. 아무래도 이정도 결박은 또 하루이틀 집을 비운 사이 난장판을
피워 끊어버릴 거 같고. 한참을 고민하던 여자가 이내 당신이 앉은 의자를 끌어 햇볓이 들지 않는 작은 창문 아래로 끌기 시작했다. 당신의 무게가 실린 의자가 무겁지도 않은지 가뿐한 얼굴과 몸짓이다. 벽면으로 의자를 밀어낸 여자는 근처에 있던 쇠사슬을 들어 창문 창살에 묶었고, 사슬의 끝머리를 의자 다리와 묶어 연결한다. 흠. 여자가 이리저리 고개를 돌려대며 의자를 살폈다. 그리곤 이내 만족한 듯 맑은 웃음을 짓는다.

" 그치만, 이 밧줄을 풀자마자 날 찢어죽일 거잖아! 안 그래? "

사랑스러워라. 여자가 당신의 어깨를 톡톡 두들겼다.

" 당신 동료들이 모두 머저리인 건 아니더라고. "

여자가 멀지 않은 곳에서 의자를 끌어왔다. 철제 의자와 더러운 시멘트 바닥이 맞물리며 시끄러운 금속음을 내질렀다. 여자는 의자에 앉아 당신의 눈을 똑똑히 마주한다.

" 한 놈이 좀, 애를 먹였지. 그 놈 죽이느라 내 네일이 부러졌어. 볼래? "

손마디를 만지작대며 슬픈 어투로 말하던 여자가 대뜸 제 오른손을 들이민다. 검은색과 붉은색이 교차된 네일팁 사이로, 반쯤 뜯긴 검지 손톱이 눈길을 끈다. 나참, 이게 얼마 짜린데. 여자가 말 끝을 흐렸다. 시선 역시 그 손톱에 꽂혀내리고 만다.

" 뭐랬더라, 맞아. 케이시랬나? 케이시? 케이틀린? 아무렴. 뭐 그런 이름이었는데. 자기가 아는 사람이야? "

본인 입으로는 자기랑 아주 친한 동료랬는데 말야—. 난 자기가 다른 여자랑 어울리는 게 싫어. 여자가 천진만난히 웃으며 물었다. 형광등 아래 반짝이는 머리칼 사이로 검붉은 핏자국이 또 다시 눈에 띈다.

# 히어로를 납치한 미친 빌런 느낌! 어떻게 받아주던 상관X!

232 이름 없음 (hXoqYBhQ3g)

2021-11-19 (불탄다..!) 23:22:24

>>229

반쯤 소매 덮인 양손을 넓적다리에 모아 걸쳐 놓은 자세로 여자가 비교적 바쁘게 움직이는 당신을 하나의 뻔한 운동 경기라도 관람하듯 바라본다. 단정히 빗어진 흑발, 더러더러 필요가 있을 때 이쪽을 보는 푸른 눈동자, 열리는 가방과 탁자에 더해지는 얇디얇은 종잇조각...... "그렇게 하죠." 본인이 요구한 두 번째 소개임에도 자칫 말하는 자 무안할 만큼 무념하며 또 서늘한 낯으로 듣던 여자가 당신이 제시하는 2주일에 그제야 고개를 끄덕였다. 임시 가이딩이라 해도 그 명수가 설마 열 손가락이나 넘어갈 것인가 하는 판단에. 더구나 2주 정도면 잠깐 눈 감고 잊으면 그만인 짧은 시간일 것이다. 물론 이쪽에 일체의 지장만 가지 않는다면의 이야기다. 그래서 여자는 이윽고 덧붙였을 따름이다. "단 이쪽 일엔 방해가 없도록 하시고요." 하고 말이다. 처음부터 그랬듯 성의라곤 느껴지지 않는 어투였다. 그리고 그 뒤로도 그랬다.

"계약을 할 수 없다라..."

무릎에 팔을 얹으며 여자가 허리를 숙였다. 닿으면 차가울 손이 당신이 내민 손 위에 무게 없이 얹혔다. 그러나 금안이다. 금안이 또렷하게 당신을 쳐다본다. 정확히는 기억의 원천이 담긴 머리털 너머를. 그 다음으로는 점차 각도를 낮춰 사람의 숨의 원천. 숨이 지나치는 통로를 눈에 담으며 생각에 잠긴 양 입맛을 다셨다...... 파장 일치의 신호는 제법 조속히 찾아왔다. 여자는 눈을 내리감으며 먼저 손을 치우려 했다. 검은 머리를 빗어 불안하게 어깨에 걸린 한 움큼을 제대로 앞으로 넘겼다.

"네, 이제 계약서 내용 알려주세요."

233 이름 없음 (q9Hll4RUvE)

2021-11-20 (파란날) 13:16:18

>>232
현은 제 손을 잡은 뒤 입맛을 다시며 자신을 쳐다보는 시선이 슬쩍 눈을 피했다. 제 손이 따뜻한 편이라서 그런지 지원의 손이 더 차갑게 느껴졌다. 그리고...

맹수. 이 여자는 맹수였다. 자신은 피식자이고. 맹수 조련사는 무슨. 현은 파장을 확인하고 조금의 피로감을 느끼며 지원이 빼는 손을 붙잡지 않았다. 속으로 의아함을 느끼기는 했다. 보통 가이딩이 급한 센티넬은 테스팅 때도 질척거리는 경향이 있으니까. 지금 상태는 꽤 괜찮은 편인가?

"계약 사항은..."

현은 찬찬히 계약서에 적힌 내용을 설명했다. 처음 지원이 제시한 거주지 제공부터해서(거주지가 마음에 들지 않을 경우 거부할수 있음을 넣는 것도 잊지 않았다) 계약 위반시의 위약금 등 문의로 나눴던 대화 내용이 다 꼼꼼히 담겨있었다. 또한 키스 이상 스킨쉽 금지도 적혀있었다.

간략히 설명을 마치고 현이 말했다.

"일단 계약서를 작성하기 전에 국가가이드가 아닌 임시가이드를 이용하는 이유에 대한 설명을 해주세요. 불법적인 일을 하시는 분이라고 해도 비밀은 지켜드립니다."

필요하시면 비밀유지각서도 써드린다며 현이 비밀유지각서를 꺼내서 테이블 위에 올렸다.

234 이름 없음 (5aOdxq6ieE)

2021-11-20 (파란날) 14:45:34

>>231

" 또 너였나. 아니, 이런 짓을 벌일 대책 없는 년은 너밖에 없겠지. "

정신을 차리고 상황을 파악할 때까지 얼마나 시간이 걸렸던가. 주절주절 말을 늘어놓는 것을 듣긴 했지만 그다지 신경을 쓰진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이런 일이 한두번 있던 것은 아니었으니까 그다지 놀랍지도 않은 편이었다. 한가지 의외인 점이라면 예상했던 것보다는 늦게 일을 벌였다는 점이었을까. 아무튼 현재는 어디인지도 모를 곳에 단단히 결박되어 미친 빌런을 눈 앞에 두고 앉아있게 된 상황이라는 것이겠지.

두려움, 애초에 이쪽일을 하기 시작하면서 그런 것은 잊은지 오래였다. 그런 것을 품고 있어봐야 죽을 시기를 앞당길 뿐이니까. 세간에서 말하는 히어로의 고귀한 정신 같은 것도 마찬가지다. 영웅심에 취해 움직여봐야 개죽음 당할 뿐이지.

" 케이시, 최근 주목 받기 시작한 히어로 중 한명이지. 꽤나 능력이 있긴 한 녀석이라 친하게 지내긴 했어. 근데 그녀석 죽었구나. 그래도 쓸만한 녀석인 줄 알았는데. 뒤에서 추잡한 짓거리를 하고 있는 걸 알아도 아직 쓸모가 있는 줄 알고 데리고 다녔는데 계획했던 처리시기랑은 어긋났지만 너라는 말이 끼어들어줘서 탈 없이 처리하긴 했네. "

입술을 모아 후- 하고 바람을 뱉어내 흘러내린 앞머리를 넘기곤 입꼬리를 살짝 비틀어 웃어보여. 어차피 처리하려고 했던 말이 죽어버렸다는 사실은 내게 아무런 감흥이 없으니까. 그걸로 흔들어 보려고 했던 네 계획이 깨져서 꽤나 기분이 상했을지도 모르겠다. 히어로란 이름을 달고 더러운 짓거리나 하는 녀석 따윈 내 알바 아니다. 아니 오히려 내가 '처리' 하려고 했으니까.

" 그래서 이렇게 멋진 곳에 또 데려와준 이유가 뭐야? 아, 사업 이야기라면 들어줄게. 너랑 뭔가 해보는 것도 덜떨어진 쓰레기들을 청소하는데에 도움이 될지도 모르니까. "

반쯤은 도박이다. 확실히 눈 앞의 이 미친 여자는 한순간 기분이 엇나가면 내 목을 꺾어버릴지도 모르니까. 싸우는 능력으로만 따지면 비슷할지도 모르지만 분명 죽이는 방법에 있어선 내 위의 존재인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리스크를 걸지 않으면 돌아오는 것도 없는 법이다. 몇년간의 삶으로 그것은 뼈저리게 느끼고 있었으니까.

" 아, 어쩌면 네가 내 마음을 얻을지도 모르지. 내 이야기를 듣고, 내 손을 잡고, 네 성질머리를 죽이고 나와 일을 해본다면 말이야. "

그러니까 쫄아서 비 맞은 강아지처럼 굴지 않는다. 더 당당하게, 잃을 것이 앖는 사람처럼 나가는거다. 어쩌면 고스란히 그것이 내게 돌아와 목을 꺾고 숨을 앗아갈지도 모르지만. 그건 자업자득이지.

누군가의 목숨을 앗아가려는 것은 그런 것도 감수해야 하는 법이니까.

" 어때, 이야기 해볼 생각이 들었어? 자기야? "

의자에 묶인 검정색 단발을 한 적안의 여자가 곱게 미소를 지어보였다. 머리가 이리저리 헝클어져 엉망이었음에도 아리따운 얼굴을 한 체.

235 이름 없음 (7I0J4jhPKU)

2021-11-21 (내일 월요일) 21:20:26

ㄱㅅ

236 이름 없음 (HTA4Bg/wFI)

2021-11-23 (FIRE!) 21:51:57

>>233

/안녕, 지원주야. 많이 기다렸지ㅠ_ㅠ 다름이 아니라 개인사정 때문에 빨리 잇기가 어려워졌는데 어떻게 하는 게 현주한테 편할지 묻고자 지금이라도 급하게 갱신하게 됐어. 1. 여기서 마무리하거나(+현주가 새로운 상대 구해도 물론 가능) 2. 기간은 장담 못하지만 반드시 돌아오는 조건으로 상극을 동결해놓거나 둘 중 하나로 해야할 것 같은데 현주는 어떻게 생각해? 어느 쪽이든 편할 쪽으로 부담없이 이야기해줘. 이런 소식 들고 와 정말 미안해ㅠ_ㅠ

237 이름 없음 (OlDz7JtQzk)

2021-11-23 (FIRE!) 22:32:48

>>236

/아이고 ㅠㅠㅠㅠ 개인 사정이 있었구나. 현생이 바쁘면 어쩔 수 없지. 원래 상판은 취미생활이니까 느긋하게 하거나 편할 때 하는 것이 맞다고 생각해. 그래도 이렇게 이야기를 해줘서 너무너무 정말정말 고마워! 이야기하기 힘들었을텐데 말이야.
아마 새로운 상대는 안 구할 것 같아. 그리고 지원이의 이야기가 너무 궁금하기도 하고! 그러니 2번 안으로 가는 것이 좋을 것 같아. 동결은 어느정도로 생각하고 있어? 나에게 기다리는 것은 쉬운 일이지만 혹시나 내가 갱신을 놓치면 어떡하나 걱정이 되네 ㅠㅠ 여기는 공동 스레라서 갱신했는데 못 보고 넘어갈 수도 있으니까 말이야. 새로 스레를 세워두는 것이 좋으려나?
이부분에 대해서는 지원주가 편한 대로 해줘! 이곳에서 기다릴지 아니면 새로 스레만 세워두고 동결할지 말이야!

238 이름 없음 (HTA4Bg/wFI)

2021-11-23 (FIRE!) 23:17:01

>>237

/아이고 나야말로 너무 고맙지ㅠ_ㅠ... 뭐가 고맙냐면 그냥 다...(?)
나도 현이의 이야기가 정말 궁금했던지라 현주가 나중에라도 이어가자고 말해주니까 내심 기쁘기도 하네. 동결은 일단 3개월...을 바라보고 있긴 한데 이건 혹시 몰라 넉넉히 잡은 거고 그보다 일찍 돌아올 수도 있어. 솔직히 말하자면 기간이 예상이 안 가네ㅠ_ㅠ 그래도 가끔 들러 생존신고하거나 가볍게 잡담할 시간은 낼 수 있을 거 같아. 퀼트처럼 답레 조금씩 이어맞춰서 느린 텀이나마 나중에 이을 수도 있을 것 같고. 그런 의미에서 생존신고용 임시 스레라도 파두는 것이 서로에게 심적으로 편하려나 하는 생각이 들기는 하네. 만약 현주도 같은 생각이라면 스레를 세우는 건 혹시 부탁해도 괜찮을까? (염치없음...) 제목이나 그런 건 현주 임의로 해도 정말정말 좋지만 혹시라도 상의가 필요하면 말해줘.

239 이름 없음 (gOL743NOOI)

2021-11-23 (FIRE!) 23:40:53

>>238
/얍! 임시스레 팠어. 제목은 임시로 정했어~ 나중에 정식 오픈하면 바뀔수도 있구. 현생 힘내구 늘 편하게 갱신해줘!
>1596377096>

240 이름 없음 (DBAXlru2.U)

2021-11-24 (水) 00:30:58

>>239

/응응, 고마워. 제목 진짜 멋지다! U_U* 현주도 좋은 나날 보내고 갱신은 모쪼록 편하게 해줘~

241 이름 없음 (wJQsnbys5s)

2021-11-28 (내일 월요일) 02:15:26

흰 구름과 그 사이로 서서히 저물어가는 저녁 노을, 코 끝과 귀가 붉어질 정도로 차가운 겨울 바람, 그르륵거리는 좀비들의 울음소리, 사방에서 진동하는 시체 썩은내. 아, 오늘도 참 평화로운 하루다.

입구가 핏자국으로 난도질된 아파트 단지, 거기서 조금 더 깊숙히 들어간, 창문의 모든 면에 신문지를 붙이고 청테이프를 덕지덕지 도배해둔 401호에서는 오늘 평소와 다르게 분주한 소리가 났다. 어디 여행이라도 떠나는 듯 책가방 같은 배낭을 이리저리 뒤적이며 제 봇짐을 점검하는 소리였다. 후드를 깊게 눌러쓴 누군가가 배낭에서 먹다 남은 감자칩을 빼내며 쳇, 혀를 차냈다. 그리고는 다시 한 번 손을 넣어 뒤적이다, 제 무릎 옆에 놓여있던 소꿉놀이 세트의 냄비 하나를 신경질적으로 집어넣는다. 이정도면 됐겠지. 후드를 눌러쓴 누군가가 깊게 한숨을 내쉬며 몸을 일으켰다. 배낭정리에 신경을 쏟은 탓에 어느덧 저녁 노을이 겨울바람에 밀려 땅 아래로 몸을 숨기고야 말았다. 잠시 신문지를 들쳐올려 시꺼면 밤거리를 바라보던 누군가가 작게 욕설을 중얼인다. 아무래도 제가 훼까닥 미쳐버린 게 분명한 것 같다. 이 시간에 안전지대를 벗어날 생각을 하다니. 하지만 이미 오늘 저녁, 편지 속에 네놈을 찾아가겠노라 선전포고를 날려버렸으니 어쩔 수 없을 일이 아니겠는가. 하여튼간 쓸데없는 자존심이 문제지. 창 밖 세상에서 눈을 떼낸 누군가가 새하얀 볼캡을 고쳐쓰며 배낭을 들쳐맸다. 하여간, 만나기만 해봐 새끼 염소. 볼캡을 눌러쓰고 그 위로 후드 모자까지 뒤집어써 도통 누군질 알 수 없을 인상착의였다만, 다소 거친 욕설이 익숙한 인간이라는 것은 알아챌 수 있었다.

좀비들의 시간을 빼앗아쓰려는 인간에게는 제법 많은 제약이 걸렸다. 첫 째, 숨소리도 들키지 말 것. 둘 째, 불빛을 사용하지 말 것, 셋 째, 달리기를 뒤지게 잘 할 것. 물론 순전히 볼캡을 눌러쓴 그 '누군가'가 지어낸 공식일 뿐이었다. 제약을 어기면 어떻게 되냐고? 사람 고기를 좋아하는 시쳇덩어리가 되는 수 밖에.

좀비떼를 피해 자세를 낮추어 걸음을 옮기던 누군가가 잠시 멈칫였다. 그리곤 길목의 끝머리에서, 슬며시 고개를 빼 주변을 두리번거리다 이내 재빠르게 발을 굴러 한 낡은 마트의 광고판 앞으로 숨어든다. 마트는 제법 규모가 컸으나 관리를 멈춘지 오래된 듯 낡고 지저분했다. 게다가 과거에는 밤낮을 가리지 않고 반짝였을 전광판이 반파되어 이름조차 잃어버렸으니, 지금은 그저 초라한 폐건물일 뿐이다. 누군가가 휴, 작게 숨을 들이켰다. 야구 방망이를 쥔 오른손에 절로 힘이 들어간다. 길게 뻗은 자태가 아름다운 방망이에는, 누구의 것일지 모를 지저분한 핏자국이 흉측히 튀어있다.

" 어디있냐, 새끼 염소... "

야구방망이를 쥔 누군가가 작은 보폭으로 고장난 자동문을 향해 몸을 옮겼다. 전기가 끊긴 탓에 커다란 자동문은 손님을 보고도 굳건히 제 입을 걸어잠구고 있다. 누군가가 몸을 일으켰다. 시커먼 마트 내부에는 그 무엇도 보이질 않는다. 허탕인가? 마트의 외벽에 몸을 붙인 채, 마트의 내외부를 모두 경계하며 인기척을 살피던 누군가가 작게 인상을 찌푸렸다. 아닌데, 분명 여기 있을텐…

" 여깄냐?! "

이 갑오징어놈아! 큼지막한 야구방망이가 또 다른 누군가의 몸을 막아섰다. 볼캡을 푹 눌러 써 보이진 않았으나, 방망이의 주인은 제법 의기양양한 눈빛이었다. 조금 마른 듯한 체구에, 혼자 신이 나 무어라 중얼거리는 그 사람의 정체는…

" 어린이 공원은 개뿔. 너 내가 여기 있을 줄 알았지. "

푹 눌러 쓴 후드 모자를 걷고, 볼캡을 조금 들어올리자 '누군가'의 얼굴이 환히 드러난다. 신이 난 듯, 혹은 신경질이 난 듯, 화난 고양이처럼 사나운 눈매를 가진 여자였다. 여자가 한 발짝 한 발짝 당신에게 다가가며 야구방망이를 건들댔다. 한가운데가 움푹 파여 불길한 분위기를 뽐내는 방망이가 당신의 몸에 닿을 듯 말 듯, 얼쩡거린다.

" 마지막으로 하실 말은? 새끼 염소씨. "

여자가 당신을 향해 성큼 다가서며 물었다. 살긋 지어내는 미소가 당신에게 자애롭게 비쳐보였길 바란다.

#편지 스레에서 넘어온 상황극입니다! U.U

242 이름 없음 (29/.b2D0Vg)

2021-11-28 (내일 월요일) 22:52:12

볶음밥은 맛있었다. 심하게 짜지도 않고 적당히 단 맛. 냉장고에 굴러다니던 김밥햄을 썰어 넣은 게 신의 한 수였던 것 같다. 아침에 안 깎았다고 수염이 꺼슬하게 나는 자신과는 달리 아직 어린 당신한테는 싱거울지도 모르겠지만.

포슬포슬한 달걀볶음을 고봉밥 위에 얹어 식탁에 올린다. 그리고는 당신을 부른다. 먹어. 적당히 먹을 만치는 될 거다. 볶음밥의 맞은편 의자에 비뚜름하니 앉는다. 삐그덕대는 허리 탓에 절로 신음소리가 나온다.

"나이가 죄지. 나이가 죄야."

혼잣말 또한 시간을 맞이한 사람만의 특권일 터다. 지그시 눈을 감고 세월을 음미하려니 쌉싸름한 담뱃내가 곁들임에 제격이다. 손떼 묻은 케이스에서 한 개피를 꺼내본다. 입술 새로 담배를 끼운다. 그제야 저가 방금 전 어린 아이한테 밥상을 차려줬다는 것을 깨닫는다.

긍정적으로 보자면, 그는 담배가 대중적으로 호불호가 갈리는 기호품이고 따라서 담배를 피우기 위해서는 때와 상황을 가려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안타깝게도, 그는 어린아이 앞에서 담배를 자제할 정도로 배려심이 깊지는 않았다.

"한 대 피워도 되지? 그러니까... 흠, 꼬마야."

입술을 움직임에 따라 담배 끝이 위아래로 움직인다. 그는 이미 손에 낡은 라이터를 쥐고 있다. 허락이 떨어지기만 한다면, 의자 등받이에 걸치고 있는 팔뚝을 당장 옮겨 벌건 불을 피워낼 것이다. 그것이 행복이라 믿어 의심치 않고 있으니까.

"어떻게 불러야 할지 모르겠군."

제 집에 함께 있는 어린아이가 전생에 가진 이름이 무언지는 안다. 당연히 알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건 어디까지나 전생에 지녔던 이름이고, 지금 저 아이가 그 때의 기억을 가지고 있을지도 확실치 않은 상황이니, 어쩌면 저 아이를 부르기에 더 적합한 호칭이 있을지도 모를 노릇이다.

만약 저 아이가 제 기억과 다른 이름으로 자신을 불러주길 원한다면 남자는 거기에 맞추어줄 의향이 있었다. 새로운 인연을 쌓아가는 것도 뭐, 그렇게까지 나쁜 일은 아닐지도 모른다.



//나이먹은 아저씨캐가 환생한 과거의 인연(아이)을 만났다는 상황이야! 과거에 어떤 관계였는지/너참치의 캐가 전생 기억을 가지고 있는지 여부는 생각해둔 게 없으니 자유롭게 이어주면 고맙겠어. 물론 맥커터는 사절!

243 이름 없음 (29/.b2D0Vg)

2021-11-28 (내일 월요일) 22:59:27

>>242 // 추가) 아이라고 서술하긴 했지만 내 캐가 보기에 어려보여서 아이라고 했을 뿐이지 사실 더 나이들었다고 해도 좋고... 아무튼 자유롭게 이어줘!

244 이름 없음 (usmIn/tky6)

2021-11-29 (모두 수고..) 11:42:59

>>242 체격에 들어맞지 않는 의자 위에 덩그러니 던져지듯 앉은 모습이 퍽 우스웠다. 잘 관리된 머리카락과 그 위로 매듭지어진 벨벳리본, 인근 사립 학교의 학생복에 새하얀 레이스 양말까지 척 봐도 값나가는 차림을 하고 있었음에도 그 꼬마 애의 모습은 영 궁상스럽기 짝이 없었다. 지저분한 상처와 흙먼지까지 갈 것도 없이 당장 바닥에 닿지 않아 덜렁거리는 다리만 봐도 볼품없는 꼴이지 않은가. 꼬마 애는 뜨거운 김이 뭉근하게 피어오르는 밥과 달걀을 두고 빤히 쳐다봤다가는, 이내 그 커다란 눈을 데록 굴려 남자를 바라봤다. 처한 상황이 무색하게 제법 어린애다운 맑은 눈동자였다.

“아저씨. 여기 어디예요? 집에 가고 싶어요.”

이마에서 눈으로, 그 다음은 코. 바로 밑에 위치한 인중에서 입술로 이어지는 선까지 차례대로 천진하게 훑던 시선이 손에 쥐어진 물체들 앞에서 멈춰섰다. 담배와 라이터였다. 별다른 감흥 없이-조금은 신기하다는 듯-그것들을 물끄러미 쳐다보기만 하던 꼬마 애는 곧 한 대 해도 되겠냐는 물음에도 대수롭지 않게 고개를 끄덕였다. 대체로 매운 연기를 싫어하는 그 나이대 꼬맹이임을 감안하면 참 희한한 반응이었다. 담배의 지독함에 익숙했다기보다는 차라리 한 번도 그 냄새를 맡아본 적 없어 무지한 사람의 태도에 가까웠다. 꼬마 애는 그보다도 다른 데 관심을 더 많이 보이는 듯했다. 앉은 채로 집 안의 곳곳과 가구들을 훽훽 살펴보며 그 애가 말을 이었다.

“혹시 여기 우리 집이에요? 아저씨 우리 아빠예요?”

뜻밖에도 제 집 살림은커녕 본인의 아비도 못 알아보는 황당한 발언이었다. 자신의 말이 얼마나 기가 막혔건 간에 그 애의 얼굴은 사뭇 진지해 어설픈 장난이나 치려는 투는 결코 아니었다. 의심할 틈도 없이, 바로 다음 던져진 남자의 말에 꼬마 애는 고개를 설레설레 가로저어버리기까지 하는 게 아닌가.

“제가, 사실은 아까 전에요. 아저씨랑 오는 길부터 이름이랑 학교랑, 엄마 아빠 이름이랑 다 생각해보려고 그랬는데요, 자꾸 생각이 안 나요.”

그 애의 말로는 사고를 포함한 그 이전의 일들은 까만 잉크라도 엎지른 듯 하나도 기억나지 않는다고 했다. 집 주소나 부모의 번호는 고사하고 제 이름까지 모른댄다.
톡톡, 손끝으로 테이블 위를 두드리는 소리가 귓가를 건드린다.
어느덧 김이 멎어들었을 즈음이 됐음에도 볶음밥은 그대로였다. 꼬마 애는 아무런 기억도 나지 않는다는 주제에 뭐가 그리 마음에 안 드는지 테이블 위의 식사 자리를 영 불편해하는 듯했다. 불편함보다는 불안함에 가까워 보이기도 했고. 기억은 잃었다 하니 꼭 본능적으로 거부감을 느끼기라도 하는 것처럼 행동했다.

//두 캐릭터 다 환생한 상태에서 아저씨만 기억을 가지고 있는 건지, 내 캐릭터만 (아저씨 기준) 이번 생에서 죽고 환생한 상태인 건지 애매해서 일단 후자로 잡고 초등학생쯤 되는 캐릭터를 들고 와봤는데 나이는 좀 더 올려서 상상해도 괜찮아! 아무 이유 없이 남의 집에 왔을 것 같진 않아서 대충 내 캐릭터가 모종의 사건(범죄든 사고든)에 휘말린 상황에서 아저씨랑 조우하고 따라오게 됐다는 배경을 상정했는데, 뭣하면 스루해도 좋아 ^-ㅠ

245 이름 없음 (dTU5tk4EcQ)

2021-11-29 (모두 수고..) 20:38:00

>>244

"아빠라니."

라이터에 불이 붙지 않았다. 천부당만부당한 단어가 생소하고 낯설어 부싯돌에 신경을 쓸 수가 없었던 탓이다. 아빠라니? 우리 집이라니? 하늘과 과거와 자신의 여성 편력에 맹세코 절대 그럴 리 없었고 그러고 싶은 마음도 일절 존재하지 않는다. 부러 강하게 담배의 첫 숨을 내뱉어본다. (다행히, 라이터에 불을 붙이려는 두 번째 시도는 성공했었다.) 식탁에 뿌연 연기 가득 메우는 이유는 좋게 표현해 검소하고 나쁘게 말해 궁상맞은 제 집 가구에서 아이의 관심을 불러오려는 것이었고, 또 다른 이유는 네 말에 나는 하나도 동요하지 않았음을 알리기 위함이었다. 다시 말해, 그는 내심 당황스러웠다.

"너, 어디 가서 그 말 하지 마. 알겠니 꼬맹아? 너는 길바닥에서 상처투성이로 구르고 있었고, 나는 그런 가-엾-은- 아이를 불쌍히 여겨 경찰이 데리러 올 때까지 잠시 집으로 데려와 따뜻한 밥과 아늑한 쉴자리를 제공해줬을 뿐. 그 뿐인 관계야, 알았어?"

아빠라니 무슨... 중얼거리다가.

"그리고 납치당했다고도 하지 마."

제 발 저려 그리 덧붙인다. 툴툴거린다. "안 그래도 벽 얇은 싸구려 아파트라 방음의 ㅂ도 없단 말이다." 옷차림을 보아하니 이 근처 사립 학교에 다니는 모양인데 그런 비싼 학교에 아이를 보낼 작자가 이런 다 허물어지는 건물에 세 들어 살 리가 없지. 아이의 행색을 보며 그가 차분히 생각했다.

기실 남자의 말에는 어폐가 있었다. 아이를 불쌍히 여겨 데려왔다기에는 상처에 연고 하나 발라주지도 않고 하물며 흙먼지조차 털어주지 않고 있지 않은가. 경찰을 운운하긴 하였으나 남자는 아이를 만난 뒤로 핸드폰에는 손도 대지 않았다. 신고하지 않았다. 무얼 하고 싶은지 잘 모르겠다. 과거의 인연이 있다 하여─그저 닮았을 뿐이란 가능성은 생각하지 않았다─데려오긴 하였으나, 아이를 데리고 할 수 있는 일이 얼마나 많겠는가? 남자는 혼란스러웠다.

"뭐야?"

그리고 그 혼란은 아이의 황당한 기억상실 선언 때문에 곱절은 증폭되었다.

"얌마, 그걸 나더러 믿으라는 거냐으아...거니?"

기가 막히다 못 해 머리카락 꽉 막힌 배수구처럼 되는 바람에 원래 쓰는 말투가 나와버린다. 중간에 정신 차려 급하게 상냥한 말투로 선회하긴 하였으나 겁을 주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참자. 참아. 잘생기고 착한 내가 참자. 제 이름까지 모른다는 아이의 말을 끝까지 다 듣고 답답한 마음에 담배를 깊이 빨아들인다. 아, 이제야 뇌가 맑아진다. 니코틴의 힘을 받아 팽팽 돌아가는 생각세포가 말한다,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지는 않아. 그러나 싸구려 소설이나 삼류 영화도 아니고 그저 상처 조금 생겼을 뿐인 아이한테 갑자기 기억상실이라니? 차라리 어제 긁은 복권이 1등 당첨인 게 훨씬 현실성이 있겠다. 먼 치에서 눈으로 살피기에 머리 쪽에 심각한 부상을 입은 것 같지도 않았기에 더더욱.

얘가 뭔 이유로 저런 말을 한담. 정말로 기억상실이기 때문에? 아니면 다른 이유로? 남자는 아이가 손도 대지 않은 볶음밥을 내려다본다. 검지손가락은 남자의 의식과는 상관 없이 식탁 위를 두드린다. 톡톡. 아이와 남자의 어울리는 듯 어울리지 않는 합주가 남자의 신경을 건드렸다. 젠장, 몇십 년도 더 된 옛날 일이 전두엽을 괴롭힌다. 토할지 말지를 결정 못한 옛 추억을 목구멍 뒤로 삼키기 위해 남자는 대신 담배 연기를 토하기로 했다.

"꼬맹아. 집에 가기 싫다고 그런 거짓말 하는 거 아니예요."

식탁 위 재떨이에 담뱃재를 털어버린다. 뭉툭해진 담배 끝을 아이한테로 향한다. 삿대질한다.
저 징글맞은 놈이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 순진한 어린아이인지 아니면 모르는 척을 할 뿐인 속 시꺼먼 놈인지는 모른다. 그러니, 지금은 자신도 모르는 척을 한다. 모르는 척을 하며 살살 긁어보다가 수상한 정황이 나오면 덥썩 물어 캐물어야지. 콱 이빨로 물어버리는 것도 좋겠고.

남자는 자신의 계획이 퍽 만족스럽다.

"학생복 입은 걸 보아하니 요 근처 초등학교에 다니는 모양인데... 거기 가면 너 누군지 바로 알 수 있거든? 아저씨 놀리려고 하면 안 된다."

자, 이제 어쩔 테냐. 한쪽 입꼬리를 올려 웃는다.



// 앗앗 나도 후자로 생각하고 상황 제시했었어! 설명이 애매했던 것 같은데 잘 들어맞아서 다행이다 ^ㅁ^) 흥미진진하게 상황 받아줘서 고마워.......!!!

246 이름 없음 (Y8F8Q8bo6I)

2021-11-30 (FIRE!) 23:01:29

(장갑 낀 양 손으로 화단에 쌓인 눈을 퍼올리고 책상에 엎드려 자고 있는 듯한 당신에게로 다가간다. 음흉한 미소를 한껏 지으며.) 손님, 주문하신 설빙 아이스 나왔습니다.

247 이름 없음 (jU0tpr./NM)

2021-12-05 (내일 월요일) 19:03:08

새벽 세 시가 넘어가는 야릿한 새벽의 어느 감성주점이었다. 우당탕탕 들이닥친 경찰에 의해 시비가 붙은 취객들이 벌여놓은 한바탕 소란이 잦아들고, 쯧쯧 혀를 차며 거들먹거리는듯한 걸음으로 당연스레 그 곁을 지나오던 이가, 얌전히 테이블에 앉아있는 당신 앞에 문득 멈춰선다.

"술을 처 자실거면 곱게 마셔야지, 저게 뭐야. 그치요?"

너저분해 보이는 묶음머리를 한 그 또한 적잖이 술이 들어간 것 같아뵈지만, 그는 당신이 제지하기도 전에 자연히 몸을 뉘듯 당신의 앞자리에 앉아온다.
그리고, 그의 눈동자는 이 소란에도 아랑곳 않는 당신을 한 번 훑고 지나간다.

"... 아! 너... 그. 뭐야. ... 그래. 배신자!"

곧, 말까지 더듬으며 황급히 당신을 떠올려낸 그는, 반가운 목소리로 당신을 배신자라 부르며 눈을 동그랗게 뜨고서 뾰족 든 검지로 당신의 얼굴을 찌를 듯이 가리켰다.

"아니아니. 싸우잔 게 아니라. ... 벌써 몇 년도 더 된 이야기잖냐."

그는 당신이 무어라 대꾸하기도 전에 먼저 손사래를 치며 당신에게 악감정이 없음을 피력했다.
그래. 벌써 몇 년도 더 전의 일이다.

십수 년 전, 몇몇 인간들에겐 자연의 섭리와 물리법칙을 한참 벗어난 기이한 능력이 발현되었고, 그들은 한때 인류의 희망이라 추앙받기도 했었고, 사상 최악의 악당이라며 비난받기도 했었다.
지금은 인류의 기술이 발전하여 법적으로 능력 사용이 금지시 됐을뿐더러 당시 인류를 위해 제 몸을 불살랐던 이들은 약간의 보조금이나 받으며 유흥거리나 찾아다니는 백수 한량이 되어버렸으니. 선이고 악이고 모두 인위적인 흐름으로 빚어 만들어진, 인류의 화합을 위해 이용당했을 뿐인 기구한 인생들일 뿐이었다.


"하... 시발거. 인생에 낙이 없어, 낙이."

한 잔 빌리자며 당연하단 듯이 당신의 술병으로 손을 뻗는 그의 추레한 모습은, 한때 당신이 가장 존경하고 시기하고 증오하고 남몰래 연모했던 것과는 이미 한참이나 동떨어져 버린 것이었다.
그는, 너는 어떻게 그때 그대로냐. 내 머리가 많이 길어서 못 알아보겠지? 하고 시답잖은 농을 던지며 털레털레 웃어버리고 만다.

248 이름 없음 (oF6AZmsyT6)

2021-12-05 (내일 월요일) 21:36:01

>>247
온갖 소란이 지나가는 동안에도 여자는 주점 한 구석을 고요히 지킬 뿐이었다. 아주 한참 전에는 저런 작은 일에도 나서 사람들을 말리고 했다만...지금과는 영 상관 없는 이야기다. 여자는 남은 술을 입에 털어넣고 자리에서 일어서려 했다. 갑작스레 다가온 이만 아니었더라면 그랬을 것이다.

길게 드리운 앞머리 사이로 얼핏 보이는, 푸른 눈동자가 당신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그녀는 이미 당신이 누군지 기억한 모양이다. 배신자라 소리치는 말에도, 찌를 듯 다가온 손가락에도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으니.

"그렇다는 사람이 삿대질부터 하시나요."

조금 쉬고 갈라진 목소리기는 해도 어투는 또렷하고 정중하다. 비록 그에 담긴 내용이 그렇지 않더라도. 비꼬듯 이야기했어도 사감이 남지 않은 것이 이쪽도 매한가지인지, 별다른 행동을 취하지는 않는다. 다만 머무름이 길어질 것이라고 직감하기라도 했는지 몸을 등받이에 편히 기대앉는다.

그녀는 당신의 한탄에 답하지 않고, 당신의 모습을 관찰이라도 하듯 샅샅이 훑는다. 과거와는 달리 추레한 모습이다. 외려 당신이 아니라 그녀가 과거의 모습을 지니고 있다는 건 꽤나 웃긴 일이다. 선의 편이었던 당신이 아니라 악에 가까웠던, 배신자니 악당이니 불리었던 그녀가 겉모습으로나마 그 당당하고 꼿꼿한하던 태도를 간직하고 있다는 것이....

"못 알아볼 정도는 아니던데, 그래도 많이 변하긴 했네요."

겉모습도 그렇지마는 그 속 또한.
과거 치열하게도 싸웠던 당신과 여자가 이리 마주보고 대화라는 걸 하고 있다는 점만 해도 그렇지 않나. 그녀는 비웠던 잔에 다시 술을 따를 요량인지, 손을 까닥이며 쓰고 돌려달라는 제스쳐를 취한다.

249 이름 없음 (1MG403nWmQ)

2021-12-06 (모두 수고..) 00:40:33

>>248
당신이 훑는 시선을 한껏 즐기며 입에 머금은 술을 곧바로 삼키지 않고 느긋하게 입안에서 혀를 굴리던 그는, 당신의 손짓에 목구멍으로 닁큼 술을 넘기고서 들고 있던 술병을 내밀었다.

"이야... 독하네."

그는 혼잣말처럼 감탄을 내뱉으며 손등으로 입술을 가볍게 훔쳐내는 것으로 안주를 대신한다. 독하다고 할 적에 당신의 푸른 눈동자를 흘금 바라보는 것이, 당신을 겨냥한듯싶기도 하다.

"이리 마주 보는 게 대체 얼마 만이냐."

측은하게 빛나는 초록 눈동자는 당신을 또렷이 응시하고 있지만 그 시선의 끝은 과거의 한때를 가리키고 있다.

"차라리 그때, 네 손에 죽었다면 이따위로 살고 있진 않았을 텐데."

조금 분하긴 했겠지만, 이제 와 생각해 보면 그 시절에 순직한 놈들이 참 부럽단 말이지. 죽는 순간까지도 자신이 옳다고 믿고 믿었을 테니까.
평화를 위한답시고 정부에 헌신하며 꾸역꾸역 살아남은 대가로 이런 짐덩이 취급을 받을 거라곤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겠지.
손등에 턱을 괴고 나지막한 목소리로 그런 이야길 중얼거리던 그는, 느른하게 손을 뻗어 빈 잔을 흔들어 보였다.

250 이름 없음 (XCdoGZ7vEU)

2021-12-06 (모두 수고..) 10:24:10

지금은 2X세기, 21세기의 누군가들이 많이도 예측했던 캡슐 형식의 가상현실게임 기기가 출시된 시대.
다른 콘솔 게임은 오래된 게임 매니아들의 유산이자 무덤이 된 지 오래됐다. 이미 수많은 가상현실 게임들이 게임계에 혜성처럼 튀어나오고 있었다.
그 중에는 외계인을 고문했다는 소문이 도는 뛰어난 기술력을 자랑하는 게임도 있었다.
수많은 직장인들이 휴양 대신 선택한다는 자연스러운 그래픽과 감성적인 디자인이 유명한 작품도 있었다.
그리고, 맨 처음 등장했을 땐 수많은 겜덕후와 민간인들의 돈을 빨아먹었지만 지금은 고인물만 남아서 썩어들어가는, 한 져가는 별도 있었다.
<슈팅 스타 온라인>.
커뮤니티 내 별명은 '노인정'과 '별'을 합쳐서, '별인정'.

[특별]약초줍는노인 : 도라지 도라지 백도라지
[특별]약초줍는노인 : 심심 산천에 백도라지
[특별]약초줍는노인 : 한두 뿌리만 캐어도
[특별]약초줍는노인 : 대바구니 철철철 다넘는다

이 플레이어, 약초줍는노인도 같은 처지였다.
쓸모없는 고인물이라는 뜻이었다.
흔히 노인들이 쓰곤 하는 오색찬란한 꽃무늬 두건을 써 머리카락을 완전히 가렸다. 체구는 작지만 부푼 천옷으로 몸을 완전히 가려, 정말 등 굽고 작은 노인 커스텀 캐릭터인지 어린아이 커스텀 캐릭터인지 알 도리가 없다. 손잡이를 두 개 엮어 등에 맨 망태기에 1골드짜리 약초가 가득 담겨 있다. 그야말로 '약초 줍는 노인'이라는 닉네임에 걸맞는 컨셉질이다.

[확성]혜진아칭칭나 : 약초 또 난동이네 예쁜아기가
[확성]꾸워어꾸우워 : 니 산삼 캔 거 안궁금ㅗ

여느 고인물이 그렇든 약초줍는노인도 트롤링을 했다.
게임사가 손 놓아버린 이 게임은 심각한 수준의 버그가 아니면 패치되지 않았다. 수많은 버그를 줄줄 꿰는 고인물이 갖고 놀기 딱 좋았다.
그 수단은 히든 플래그. 게임 판타지 소설이 그러했듯 이 게임에도 히든 플래그가 있었다. 무협의 기연처럼 영약을 얻거나 히든 클래스를 계승하는 이벤트가 발생하는 것.
하지만 악랄한 이 게임은 기연도 거저 주지 않았다. '히든 플래그 발생권'을 구매해야 했다.
가격은 게임 내 화폐가 아닌 결제 화폐인 크레딧으로 200,000크레딧.
일반인이 사기엔 크게 부담스러운 가격이다.
게다가, 히든 플래그가 무조건 구매자에게 발생하는 것은 아니다. 히든 플래그를 바로 발생시키는 게 아니라 조건이 랜덤하게 정해진 히든 플래그가 새로이 생성된다.
재수 없으면 발생권을 사 놓고도 히든 플래그를 놓칠 수도 있단 거였다.
발생권으로 생성된 히든 플래그의 조건은 최대한 구매자한테 맞춰진다고 하지만, 확률도 나와 있지 않은 불확실한 확률놀음을 누가 믿을까.

[히든 플래그 발생권 x1 구매완료.]
[히든 플래그 발생권 x1 사용합니다.]

하지만 약초줍는노인에게는 자신이 원하는 이벤트를 '100%' 발생시킬 자신이 있었다.

[약초줍는노인 님이 '만년설삼'을 획득했습니다!]
[특별]약초줍는노인 : 뿡
[확성]혜진아칭칭나 : 아 냄새 火'口'

약초줍는노인이 얼마전에 발견한 오류.
발생권으로만 발생하는 히든 플래그 중 오직 약초줍는노인과 같은 채집 특화 캐릭터에게만 출현하는 '영약재 발견 이벤트', 속된 말로 '심봐'다.
완성품 영약이 출현하는 기연 이벤트와 달리, 비교적 다른 방식으로도 수급하기 쉬운 영약의 원재료가 정해진 장소에 나오는 히든 플래그. 거의 꽝 취급받는 이벤트.
하지만 이 이벤트에는 '히든 플래그 발생권을 사용할 경우 다른 이벤트와 함께 무조건 다시 리젠된다'는 오류가 있었다.
다른 히든 플래그가 얼마나 생기든 무조건 심봐도 같이 생긴다는 것이다.
그리고 히든 플래그는 종류 불문하고 누군가 습득하면 전 월드에 요란한 이펙트로 축하 메세지가 뜨며, 획득자가 전 월드를 대상으로 하는 특별 확성기를 1회 사용할 수 있게 된다.
원래 자랑용으로 쓰였어야 할 이 확성기는 히든 플래그 발생권을 무더기로 쓰는 약초줍는노인에 의해 전 월드 대상 테러수단이 되었다. 심지어 '특별'하기 때문인지 신고나 차단도 먹히지 않는다.
그리하여 약초줍는노인은 전 월드에 명성과 악명을 떨치는 유쾌하고 불쾌한 어그로 네임드 고인물로 자리잡게 되었다.

[약초줍는노인 님이 '인형설삼'을 획득했습니다!]
[특별]약초줍는노인 : 허허허... 유교 국가에서 감히 노인한테 대들다니 요즘 것들은 버르장머리가 없구료...
[확성]메리볼셰비키 : 약노제발죽어약노제발죽어약노제발죽어약노제발죽어약노제발죽어약노제발죽어약노제발죽어약노제발죽어약노

'음?'
그런 약초줍는노인의 눈에 누군가 들어왔다.
이곳은 '만년설삼'과 '인형설삼'의 고정 출현 장소인 예티 설산. 약초줍는노인 같은 괴짜가 아니면 올라올 일이 없다.
혹시 뉴비? ...일 리가 없다. 온갖 공략과 정보가 넘치는 썩은물 게임에, 이 가혹한 환경 근처에 위치한 유일한 스타팅 포인트인 레멘세 마을에서 시작할 플레이어가 얼마나 될까? (그 전에 이 게임에 들어오는 뉴비는 없다.)

[일반]약초줍는노인 : 에베레스트 등반 컨셉충인가?

혼잣말도 마이크 안 켜고 채팅으로 하는 게임 과몰입충 그 자체인 약초줍는노인이었다.

'이벤트인 척하고 놀려야겠다.'
약초줍는노인은 머리에 쓰고 있던 꽃무늬 두건을 벗고 복면을 얼굴에 뒤집어썼다.

['추위 면역'효과가 사라졌습니다.]
['물리 면역'효과가 사라졌습니다.]
['현혹하는 환상'효과가...]
[인간의 능력으로 저항할 수 없는 겨울신의 분노가 몰아치고 있습니다. 능력치가 99% 감소...]
[현인신만렙 칭호의 효과로 상태이상에 저항합니다.]
['돜키돜키 산돜키 가면'의 효과로 '현혹하는 환상'효과를 얻습니다.]
['돜키돜키 산돜키 가면'의 효과로 닉네임, 길드명, 레벨 효과가 가려집니다. 장비를 해제할 때까지 일반 채팅, 길드 채팅, 비밀 채팅이 불가능합니다.]
[마이크를 활성화했습니다.]

'유령이니까 하얀색으로 할까? 아니다, 눈이 하도 많아서 안 보이겠지. 머리카락과 눈색은 검은색으로 해야지. 둥둥 떠다니는 것처럼 보이겠다.'
어느새 눈밭과 구분이 안 될 만큼 새하얀 피부에 새까만 흑발, 흑안 청년 모습으로 변하고 다리가 투명해진 약초줍는노인, 아니, '유령'은 스킬 '제 3의 손'의 효과로 살짝 떠서 날아가듯 눈 속의 형체를 향했다.

251 이름 없음 (zw286CnU1E)

2021-12-07 (FIRE!) 20:57:17

>>249
술병을 건네받은 여자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잔이 끝까지 차도록 술을 붓는다. 자신을 겨냥하는 것인지, 술을 향한 것인지 모를 감탄사에 한쪽 눈썹만 쓱 올렸다. 마치 무슨 소리냐 묻는 듯 말이다.

여자는 당신의 말에 곧바로 답하는 대신, 술잔을 기울였다. 모순적이나, 폭력이 만연하던 과거를 영광의 때라 회상하는 이는 많았다. 영웅이니 대악당이니 하고 추앙받던 그 시절에는 영광이나 두려움을 손에 쥔 자가 많았다. 그러나 지금은 어떠한가. 그 모든 전설들은 한낱 과거의 산물이 되었으며, 더 나아가 '아무것도 아닌' 자들이 되었다. 정의는 부정당하였으며 악은 그 근간을 잃은 지 오래다. 당신이 빈 잔을 흔들어 보이자, 여자는 당신 앞에 술병을 밀어주며 말한다.

"그리 후회한대도 과거는 돌아오지 않습니다."

그리고 난 당신 죽일 생각 없어요, 여자는 짧게 덧붙인다. 모호한 어투다. 지금 죽일 생각이 없다는 것인지, 혹은....그 과거에 죽일 생각이 없었다는 것인지. 혹은 아무것도 아닌 농인지. 여자는 당신을 바라보다, 작게 혀를 찼다.

"...그러게 내가 경고하지 않았나요, 맹신하지 말라고."

언젠가는, 그래. 그런 말도 했더랬다. 한낱 배신자의 말을 듣고자 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지만.

252 이름 없음 (GpaEsLtKWU)

2021-12-10 (불탄다..!) 00:54:01

그가 죽던 날에는 세찬 눈보라가 내리쳤다. 항상 —올해 겨울에는, 눈이 많이 내렸으면 좋겠어—라는 말을 달고 살던 사람이었다. 그의 바람대로 그날 밤에는 아주 많은 눈이 내렸다. 그는 새하얀 눈밭 위로 새빨간 피를 흘리며 천천히 식어갔다. 나는 그 옆에서 시체처럼 눈밭에 파묻혀 영원히 돌아오지 않을 이름을 움켜쥐고 있었다.

*

" 어디… "

[기억소생프로그램]에 대해 알고 있었던 것은 그녀에게 있어 엄청난 행운이었다. 그리고, 다행히도 그는 [기억소생프로그램]에 대해 별다른 거부감이 없었다. —미리 보험이라도 들어두면 어때? —그래, 나쁠 건 없지. 그 뒤로 모든 것은 재빠르게 진행 되었다. 복잡한 장치를 쓰고 한숨 자고 일어나니, 보험사의 직원은 컴퓨터 화면에 떠오른 보라색 구체를 가리키며 이것이 우리의 기억이라고 했다. 주기적으로 업데이트를 해주셔야해요. 그때 그가 내뱉었던 감탄사가 아직도 기억이 난다. —현대 과학이란. 메리가 나직히 중얼였다. 꺼림칙하고도 사랑스러운, 현대 과학이란.

메리는 제 몸집보다도 커다란 상자를 끌어안았다. 바깥이 제법 추워 상자를 빠르게 옮겨야할 것 같았다. 혹시라도 그가 춥진 않을까 걱정이 되었다. 그이는 추위를 잘 타는 사람이었으니까. 초겨울에도 꼭 회색 머플러를 두르던 사람이었다. 회색 머플러에서는 항상 그의 향기가 났다. 서랍장 안 쪽에 모셔둔 머플러에서는, 더이상 그의 향기가 나질 않았다. 그 위로 그가 아끼던 향수를 제아무리 뿌려본들 품에 안겼을 때 코끝에 닿았던 그 향은 나지 않았다. 그의 향기를 잃고 난 무렵부터 메리는 머플러를 찾지 않았다. 이제는 그의 향기보다도 메리의 향이 더욱 짙게 나는 것만 같았다.

메리는 한참의 시간을 들여 상자를 집 안으로 들이는 것에 성공했다. 바깥에 조금씩 날리는 눈발 덕에 상자가 조금 축축했다. 메리는 가볍게 상자 위의 물기를 털어낸 뒤, [Remember-Reunion] 이라는 로고를 유심히 바라보았다. 보험회사를 찾아가기까지 꼬박 석 달이 걸렸었다. 그마저도 그를 떠나보내고 나서 집안에 틀어박혀 꼼짝않던 두 달을 제외한 시간이었다. 보험회사의 직원들은 메리를 다정하게 대해주었다. —그러니까, 다행히도 사망 1주 전까지의 기억이 업데이트 되어 있으시네요. 직원이 작게 미소 지으며 건넨 말에 메리는 쉽게 미소를 지을 수 없었다.

소생 프로그램을 신청하고 약 세 달이 지났을 무렵, 아무도 찾지 않는 메리의 휴대전화로 한 통의 문자가 들었다. <벤자민 포트만 님의 안드로이드가 제작 완료 되었습니다. 원하시는 배송 장소를 말씀해주세요.> 메리는 둘만이 알고 있던 설원 속 별장의 주소를 적어보냈다.

메리는 조심스러운 손길로 박스를 열었다. 한 겹의 박스를 열자 새하얀 플라스틱 완충제가 와락 쏟아져나왔다. 두 번째 박스를 열자 고운 천으로 마감된 고급 상자가 보인다. 메리의 손이 잘게 떨리기 시작했다. 두 눈가는 붉게 물들었을 것이 분명했다. —메리, 당신은 감정이 너무 잘 들어나 탈이라니까. 어렴풋 그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아, 메리는 두어번이나 얼굴을 감싸쥐고 가쁜 숨을 몰아쉬어야 했다. 메리가 숨을 들이켰다. 바깥에는 하얀 눈이 내리고 있었다.

마지막 상자를 열자, 그의 얼굴이 보였다. 그녀의 기억에 오롯이 살아있던 그 모습이었다. 그녀를 향해 환히 웃어주던, 입을 맞추어주던, 부드럽게 안아주던 그의 모습이었다. 메리는 조심스럽게 안드로이드의 얼굴 위로 손을 댔다. 인간의 것이라 해도 믿을 정도의 감촉이었다. 그러나 너무도 차가웠다. 눈보라 아래로 식어가던 그의 손처럼 차가웠다. 메리의 손가락이 굳게 감겨진 눈꺼풀 위로 향했다. 그는 곤히 잠을 자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문득 메리는, 관자놀이쪽의 작은 스위치 버튼을 눌러도, 그가 미동 없이 누워있을 것만 같아 두려웠다.

" …벤자민, 베니… "

메리가 황급히 제 두 손을 감싼 채 두 눈을 감아내렸다. 간절하게 부르는 그 이름이 낯설다. 그러면 안되는데. 적막이 감도는 별장 속에서 작게 기계가 가동되는 소리가 들려왔다. 메리는 숨을 죽여, 그의 모습을 본딴 안드로이드가 작동되기를 기다렸다. 그의 모든 기억을 가진 안드로이드, 그의 성격과, 취향과, 사랑을 모두 이어 받은 그 꺼림칙한 안드로이드가 다정히 그녀의 이름을 불러주길.

253 이름 없음 (/q8rQw7cII)

2021-12-10 (불탄다..!) 00:57:58

>>252
# 들어나 -> 드러나... (머리탁)

254 이름 없음 (TnRNR2tfks)

2021-12-20 (모두 수고..) 19:09:17

>>252 상황 너무 취향인데 지금이라도 이어봐도 될까? 시간이 많이 지나서 혹시 몰라 물어볼게 ㅠ_ㅠ

255 이름 없음 (czdbZ.uNuM)

2021-12-20 (모두 수고..) 20:23:38

>>254 헉 나 >>252 야! 이어주면 나야 넘 고맙지! >_< 아무도 안 이어줘서 흑흑 별로인가... 하고 슬퍼했어... ㅎ.ㅎ 대환영대환영!!

256 이름 없음 (kRv3oWI7TE)

2021-12-20 (모두 수고..) 20:28:12

>>255 아직 있었구나! 답해줘서 고마워~ 손 가는대로 이어오도록 할게 +_+

257 이름 없음 (34HTvcCJxQ)

2021-12-20 (모두 수고..) 23:42:29

>>252

그는 안드로이드였다. 뼈 대신 고철이, 혈관 대신 전선이 있는 기계, 인간에 의해 창조된 생명이었다. 아니, 사실 '생명'이라고 하기엔 어려웠다. 안드로이드는 살아있는 것이 아니다. 그보다는 '물건'이라는 말이 더 어울릴 것이다. 인간의 입맛에 따라 만들어지고 버려지는.
그 또한 평범한 안드로이드 중 하나였다. 같은 기계, 혹은 인간의 손을 거쳐 탄생한 고철 덩어리라는 말이다. 그 또한 여타 안드로이드들과 같은 제조 공정을 거쳤었다. 그래서 막 만들어졌을 때의 그에겐 의식과 감정을 만들 프로그램도 탑재되어 있지 않았다. 갓 태어난 아기보다도 더 못한, 아무것도 없는 무無와 같이. 그렇게 그는 초라한 외골격을 덮을 피부조차도 가지지 못한 채─제조 공장의 창고에 넣어졌었다.
그가 처음 만들어지고 몇 달간은 별다른 일이 없었다. 늘 그렇듯 창고의 완제품─이자 미완성인─안드로이드들이 저마다의 주인을 찾아가고, 또 새로운 것들이 들어오고의 반복이었다.
적어도 삼개월 전까지는 그랬었다.

공장의 육중한 철문은 며칠에 한 번 꼴로 열렸었다. 그날도 평소와 같이 인부 몇이 철문을 열었다. 차갑고 삭막한 밀실 안으로 그들이 거침없이 들어왔다. 그리고 인부들은 그의 몸체를 꺼내 수레에 실었다. 마침내 그의 차례가 왔다는 걸 알리는 것처럼.
그를 실은 수레가 공장 바깥까지 끌려나왔다. 인부들은 넓직한 트럭에 그를 비롯한 여러 안드로이드들을 집어넣고 단단히 고정시켰다. 곧 트럭이 출발했다. 쉼없이 달린 트럭은 또 다른 공장에 멈춰섰다.

그곳에서 그는 제대로 된 '안드로이드'의 모습을 갖출 수 있었다. 외피에 정교한 피부가 입혀지고, 머릿속 회로에 프로그램이 설치되었다. 동시에 이미 만들어진, 어떤 인간의 기억 또한 주입받았다. 생생하면서도 사뭇 이질적인 무언가였다.
인간에게서 비롯된 기억을 가지고, 그 기억의 주인과 완벽히 닮은 안드로이드. 그렇게 그는 인간이면서도 인간이 아닌 존재가 되었다.

'벤자민 포트만'.
그것이 그의 이름이었다.

*

'벤자민'의 의식이 부팅된다. 몸체 내부의 복잡한 기계가 바쁘게 돌아간다. 자세히 들어도 들리지 않을 소음이 그 속에서 고요히 울린다. 그리고 누군가의 기억, 성격, 취향, 감정…. 그 모든 것도 회로 속에서 로드된다. 그의 의식 속에 기억들이 온전히 정착된다. 마치 원래부터 제 것이었던 것처럼─그건 남의 것이면서도 동시에 그 자신의 일부였다.
고즈넉한 적막이 그의 몸체를 휘감는다. 마침내 가동 준비를 마친 안드로이드─벤자민은 눈꺼풀을 연다. 관자놀이의 스위치에 은은한 녹빛이 돈다. 정상 작동됨을 알리는 신호이자, 그가 명백한 안드로이드임을 알리는 증표였다.
눈을 뜨자, 늘 기억 속에 있었던 천장이 보인다. 항상 '당신'과 함께 했었던 별장. 창가에 앉아 눈발 흩날리는 풍경을 곧잘 보곤 했었던 장소. 그의 회로가 남아있던 기억들을 불러온다. 인간의 두뇌가 하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는 행위였다.
줄곧 상자 속에 누워있었던 벤자민이 몸을 일으킨다. 끼어있었던 완충재가 사르륵─ 흩어진다. 그는 눈을 두어 번 깜빡인다. 그 일련의 행동이, 묘하게 기계적이다. 그러나 동시에 인간적이다.

그, 벤자민의 시각 센서에─'당신'의 모습이 뚜렷이 들어온다. 누구보다 좋아하는 당신, 아름답고 찬란한 나의 빛, 나의 사랑─사고가 전부 돌아가기도 전에 그가 입을 열었다.

"메리."

완벽히 조형된 목소리로 당신의 이름을 부른다. 그리고, 벤자민은 짐짓 기쁜 표정을 해보인다. 눈은 곱게 접혀 휘어있고, 입가에 작은 미소가 선명히 떠오른다. 당신을 보게 되어 기쁘다는 감정이 든다. 만들어진 감정임에도 그는 그것을 충실히 따랐다.
상자를 빠져나오는 벤자민의 발걸음이 꽤나 조심스럽다. 곧 그는 당신 앞에 무릎꿇고 앉아, 당신을 살핀다. 자신이 사랑하던 그 모습, 기억 속의 그 모습 그대로였다. 벤자민이 다시금 미소짓는다. 그리고, 당신의 뺨을 향해 그가 오른손을 뻗는다. 부드러운 살갗을 가진, 그러나 쇳덩이처럼 차가운 손을.

"나 왔어."

그의 목소리가 아릿하게 떨려왔다.


//고민하면서 쓰느라 늦어졌어... 기다렸을까봐 미안해지네 ㅠ_ㅠ

258 이름 없음 (kKbFJ6fNOg)

2021-12-21 (FIRE!) 00:53:28

>>257

" 베니, 베니… "

그의 목소리가 들렸다. 다신은 들을 수 없을 거라 생각했던 목소리였다. 메리는 목이 메여오는 통에 한동안 입을 열 수 없었다. 그나마 그 오랜 시간동안 소중히 품어왔던, 당신의 이름만을 겨우 옹알이처럼 떼어낼 뿐이었다. 메리의 눈망울이 떨려왔다. 머리카락 끄트머리부터 훑어내리는 눈길이 조심스러웠다. 행여 닿기만해도 바스라질까 두려웠던 탓이다.

그가 웃었다. 메리는 달라진 것 없는 그 미소에 울음을 터트리고야 말았다. —이 감정을 무어라 형용해야할까? 안도, 그리움, 반가움, 사랑…오로지 그것들만이 메리의 머릿 속을 가득 채웠다. 이성적인 사고가 끼어들 틈 따위는 없었다. 또한 그런 쓸모없는 생각으로 낭비할 시간 조차 없었다. 벤자민, 그가 돌아왔다. 메리는 어린 아이처럼 목놓아 울며 벤자민을 끌어안았다. 아니, 정확히는 벤자민의 형체를 띤 기곗덩이를 끌어안았다. 허나 메리는 느낄 수 있었다. 일정하게 뛰어오르던 그의 심장박동과, 고요한 호흡과, 미세한 근육의 움직임을. 두 팔 가득 끌어안았을 때 느껴지던 부드러운 살갛을, 또 항상 그랬듯 먼저 뻗어내는 오른손과, 당연스레 제 뺨에 닿는 큼지막한 손을.

벤자민의 손이 닿은 뺨이 차가웠다. 허나 그녀는 그 손길에서 벤자민의 온기를 느꼈다. 메리가 붉어진 눈으로 벤자민을 바라보았다. 항상 흔들림 없이 자신을 붙잡아주던 그 눈이었다. 벤자민의 눈동자 속에서 그녀가 보인다. 벤자민이 바라보고 있을 메리가 보였다. 벤자민의 손은 차가웠다. 갓 가동된, 그리고 몇 십분간 바깥 기온에 노출된 안드로이드가 내뿜는 한기였다. 그럼에도 메리는 벤자민의 품과 손길이 따스하다고 느꼈다. 너무도 따뜻한 것들은, 이따금 차갑게 느껴지기도 하는 것이다.

메리가 벤자민의 손등 위로 제 손을 겹쳐 올렸다. 제 손바닥 안에서 한 없이 부서져내리던 그의 손이, 단단히 느껴진다. 항상 꿈길에서만 쫓던 그 감촉이었다. 메리는 눈물을 멈추고 무어라 말을 건네고 싶었지만, 그의 존재를 조건으로 흘러내리는 눈물을 참아낼 방도는 없었다. 그의 목소리에 대답 해야하는데.

" 어서와, 벤자민. 보고 싶었어. 정말 많이… "

메리는 늘상 건네왔던 평범한 인사를 했다. 벤자민이 지친 기색으로 현관문을 열면, 메리는 웃는 얼굴로 그에게 안기며 그리 인사했다. —어서와, 벤자민. 보고 싶었어. 그러고 나면 항상 벤자민은 메리의 이마에 입을 맞추고, 커피 머신을 가동시켰다. 메리는 늘 코코아를 준비했다. 둘은 소파에 앉아 시시껄렁한 코미디를 보기도 했고, 심야 토크쇼를 보며 몇몇 유명인들에 대한 쓸모없는 토론을 펼치기도 했다. 또 가끔은 TV를 끈 채 얄팍한 조명에만 의지하며, 우연이 만들어낸 그들의 아름다운 사랑에 대한 찬사를 보내기도 했다. 짧은 기다림 끝에 당연히 찾아오던 아늑한 저녁. 그것이 그들의 당연한 하루였다.

제법 오랜 기다림 끝에 내뱉은 그 인사가 너무도 애틋하다. 메리가 벤자민의 품에서 벗어나 지그시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벤자민, 나의 벤자민이었다. —너무도 완벽한 나의 벤자민이었다. 메리가 잠시 눈꺼풀을 깜빡였다. 뒷목을 타고 흐르는 이 적막한 한기는, 아마도 문틈을 비집고 들어온 겨울바람의 탓이리라.

" 벤자민, 당신이지. 당신이 맞지? "

메리가 간절한 목소리로 내뱉었다. 말끝이 흐릿하게 내려앉아, 갈라진 목소리가 두드러진다. 그녀는 정답을 알고 있었다. 사실은 반점짜리 정답이었다. 알면서도 문제 위로 동그라미를 그려내야하는 그 심정이 어딘가 따끔하다. 하지만 메리는, 벤자민—그 이름을 잃고 싶지 않았다.

// 나도 늦어서 미안...ㅠㅡㅠ 나도 어떻게 하면 잘 이을 수 있을까 고민하다보니 늦었네... 마지막까지도 걱정에 걱정을 이어가면서 썼어 ㅎㅡㅎ...!

259 이름 없음 (ol3DUUeCjQ)

2021-12-21 (FIRE!) 12:34:41

>>258

당신의 목소리가 애틋하게 다가왔다. 그 울음 섞인 몇 마디를 들으며 그는 어느새 슬퍼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당신이 사랑하는 그의 미소는 좀처럼 사라질 줄을 모른다. 재회가 너무나도 기뻤던 탓에. 슬픔, 애환, 기쁨. 모두 기계적인 분석으로 도출해낸 인간적인 감정이다. 그러나 그건 그에게 심어진 '벤자민'의 조각들을 기워 만든 모조품에 불과했다. 진짜이되 진짜가 아닌 것. 그렇지만 벤자민—의 모습을 한 안드로이드의 행동은 거짓이 아니었다. 진실로 당신만을 아끼고, 사랑하는 남자의 태도였다. 평범한 기계가 보여줄 수 없는 인간의 모습이었다.

그래서 그는 당신이 흐느끼며 얼굴을 묻어올 때도, 당연하다는 듯 당신을 품에 안았다. 부드럽고 다정하게, 예전과 같은 몸짓으로. 늘상 당신에게 하던 따스한—그러나 아직은 차가운—포옹이었다. 한편으로는 당신의 북받친 감정을 달래려는 듯이, 규칙적으로 그 등을 두드려주기도 했다. 당신의 식지 않은 눈물이 앞섶을 느리게 적셔간다.
손을 뻗어 닿은 당신의 뺨이 발갛고 뜨겁다. 벤자민은 천천히 시간을 들여 그 뺨을 어루만진다. 애정이 담뿍 어린 손길이다. 그러면서 벤자민은 당신을 바라보았다. 위화감 없이 만들어진 눈동자에 당신이 비친다. 그가 살풋 웃었다.
당신은 그 여린 손을 들어 그의 손을 포갠다. 마주 닿은 피부로 당신의 온기가 전해져 온다. 그게 너무나도 포근해서—이 차가운 쇳덩이와는 어울리지 않을 것 같았다. 그렇지만 벤자민은 손을 떼지 않는다. 가늘게 조각된 손가락이 당신의 눈꺼풀을 훑고 지나간다. 당신의 눈가에 맺혔던 눈물이 그의 손 끝에 선명히 번져갔다.

당신이 입을 연다. 매일마다 들었던 인사말이지만, 평범하지만, 그만큼 의미있는 말이었다. 기억 속 '그'의 감정이 고스란히 느껴진다. 속살대는 목소리가 벤자민의 성대—음성 모듈을 타고 당신에게 가 닿는다.

"응, 다녀왔어. 나도 많이 보고 싶었어."

항상 당신의 이마에 키스하며 다정히 건네던 말이었다. 그리곤 따뜻한 걸 마시고, 둘만의 소중한 시간을 보냈었다. 당연한 일상이면서 동시에 특별한 순간이었다. 당신과 보냈던 순간 모두가 아름다운 추억이었다.

당신이 자못 진지한 목소리로 물어왔다. 다 갈라진 목소리에 간절함이 짙게 묻어나온다. 그—안드로이드가 희미하게 미소지었다. 그는 벤자민이다. 누가 뭐래도, 그는 벤자민이다. 그는 당신이 사랑하는 벤자민이다.
벤자민은 일말의 고민도 없이 당신에게 대답했다.

"응. 나야, 벤자민."
"세상에 둘도 없는, 너만의 베니."

라고.

//괜찮아~ 걱정할거 없는걸! 충분히 잘 이어주고 있으니까 ^_^

260 이름 없음 (lmYM2B62g.)

2021-12-26 (내일 월요일) 23:54:21

(책상에 엎드려 자던 와중, 목덜미에 느껴지는 차가운 감촉에 벌떡 상체를 일으켜 당신을 올려다본다.) ...너 싸움 잘해? (물론 죽일 듯한 눈빛으로.)

261 이름 없음 (iBPhOXbQRs)

2021-12-27 (모두 수고..) 00:06:41

>>260 (전혀 당황하지 않았다는 듯 눈웃음 친다. (진실이 어떠할지는 모르나.) 차가운 감촉의 주인인 사이다캔을 당신 앞 책상에 내려놓는다.) 못 해. 그렇지만 너는 이길 수 있어. (검지로 캔 끝을 죽 민다. 알루미늄 캔 안의 음료도 손끝 따라 이리 찰랑 저리 찰랑 흔들리고 있을 터다.) 안 마실 거야?

262 이름 없음 (JXmF9GN5GQ)

2021-12-27 (모두 수고..) 00:14:17

>>261
허, 말은 잘하지. 그놈의 입이 문제야, 입이. (뒷목을 문지르며 당신을 쏘아보던 눈빛은 사이다캔을 보고 살짝 유순해졌다. 손가락에 밀려온 사이다캔과 당신의 눈웃음을 번갈아 쳐다보다, 손을 뻗어 캔을 집는다.) 내가 봐주는 거야, 너. 앗, 차가. (집어들었다가 놓쳐서 떨어뜨릴 뻔 했다.) 근데 왠 일이야, 착한 일을 다 하고? 네 거는?

263 이름 없음 (iBPhOXbQRs)

2021-12-27 (모두 수고..) 00:24:31

>>262 입만 문제야? 오, 웬일이래. 그렇게 후한 평가를 다 해주고. (천덕꾸러기 특유의 웃음소리 내며 당신 앞자리에 털썩 앉는다.) 그래그래. 자판기 온도에도 져버리는 사람한테 들으니까 무섭다, 무서워. (하마터면 탄산 폭탄이 될 뻔한 캔을 가리키며 웃었다. 갈색 눈만은 당신을 향하였지만.) 내 거? 없어. (사이다캔이 주인한테 돌아가자 텅 비어버린 제 두 손을 활짝 펼쳐 보여준다.) 너 그 사이다캔 분명히 받은 거다? 어떻게 생각해, 내가 내 음료수를 안 들고 귀엽지도 않은 친구한테 사이다를 사준 이유가 뭐일 것 같아?

264 이름 없음 (uWfaCx4Iu.)

2022-01-14 (불탄다..!) 11:43:34

“히어로고 빌런이고 짜증나 죽겠어.” 서로 이름 다른 회사들이 층마다 호마다 들어찬 아파트형 공장 옥상. 옥상 정원이랍시고 꾸며두었지만 실상은 폐암행 급행열차가 출발하는 곳이라고, 방금 중얼거린 화자는 생각했다. 파란 밤하늘 아래, 담배 꽁초가 그득 들어찬 쓰레기통 옆에서 막대 사탕이나 물고 있는 신세. 그래, 야근 중인 신세다. 떡진 머리를 감추기 위해 푹 눌러쓴 볼캡 위로 후드까지 뒤집어쓰며 완벽 봉인, 퀭한 눈 밑 다크서클, 렌즈고 화장이고 신경쓸 겨를 없는 안경과 턱 밑에 걸쳐진 마스크. 누가 보아도 완벽하게 퇴근없이 며칠 연달아 일한 차림새다. 푹 쉬질 못해 연신 잠이 쏟아지니 사탕이라도 물고 밤공기 좀 쐬러 올라왔다. 그랬더니 타이밍도 좋지, 저기 높은 전광판에서 뉴스가 나왔다. 참고로 화자는 며칠 전 히어로와 빌런이 치고박고 싸우던 현장에 하필이면 출장가던 사수와 부사수가 있었고, 당연히 휘말렸다. 죽지는 않았다만 병원에 실려갔고 일은 고스란히 화자에게 몰렸다. 그러니 냉큼 궁시렁거리고 말았다.

“아... 돛대였네.”

담배 한 개비를 뜻하는 말이지만, 화자에게는 막대 사탕 하나를 뜻한다. 내려가서 먹을 사탕이 남았나 주머니를 뒤졌는데 안쪽에 박힌 먼지나 털었다. 뉴스는 계속 무슨 빌런이 나타나서 무슨 히어로가 어쩌고 저쩌고 떠들고 있다.

“그렇게 개박살을 내고 다닐거면 우리 회사나 개박살내주지.”

누구는 갖고 싶어도 못 갖는 잘난 초능력 가지고 범죄를 저지른 놈은 빌런, 초능력이랄게 없는 경찰을 도와 정의감 투철하게 빌런을 잡으러 다니는 초능력 보유자는 히어로. 빌런이 나쁜 놈은 맞는데, 둘이 투닥대며 개박살내는 꼬라지를 보니 평범한 소시민 월급쟁이에 불과한 화자는 둘다 아니꼬워 죽겠는 것이다. 정말 회사가 개박살나면 무직백수가 되겠다만, 당장 집에는 갈 수 있겠구나 싶은 생각 짧은 바람이 새어나왔다.

265 이름 없음 (mjxsIW6Q6Q)

2022-01-14 (불탄다..!) 19:09:09

>>264
도시의 불빛은 사람의 아주 오래전에 회자되었던 이야기도 거부하고, 이제는 아무것도 살지 않음이 명백한 암석덩어리의 불빛만을 아주 조금 허용했다. 화자와는 다른 회사에 다니고 있지만 같은 건물의 이용자였으며, 당신을 꼬박꼬박 선배라고 부르던 이는 당신이 오기 전부터 옥상에 나와 담배를 한 대 물고있었다. 히어로와 빌런에 대한 이야기도 조용히 듣고 있던 이는 가벼운 미소를 지어주었으나 그것이 쓴웃음일지 예의상 지어준 미소일지는 받아들이기 나름일 것이었다.

" 저도 선배 말에 동감해요. "

담배불을 지져 양철 쓰레기통에 지져서 끈 이후에 기지개를 폈다. 끄으응-! 하는 힘겨운 소리. 정장을 말끔하게 빼입고, 광택이 나는 구두를 신고, 척 보아도 비싸보일법한 시계에 깔끔하게 정돈된 긴 머리카락을 보면, 아무리 보아도 둘의 관계상 선후배는 성립할 수 없었겠지만 하여튼 그 호칭은 한 사람의 억지로 줄곳 유지되었다.

" 하지만 선배. 혹시 정말로. 간절하게 초능력자가 내 삶에 엮였으면 좋겠어요? "

잔잔한 미소에 깜빡이지 않는 동공이 당신을 직시했다. 밤바람이 머리카락을 살짝 스치고 속눈썹을 건드릴지언정 눈동자는 흔들리지 않은체 당신을 보았고 눈꺼풀은 아주 미세한 떨림조차 보이지 않았다.

266 이름 없음 (69X.VZZWHU)

2022-01-15 (파란날) 22:09:56

(심한 인체연구와 고문을 당한 듯 보이는 당신이 있는 곳으로 천천히 다가간다. 아무것도 없는 벽 쪽을 흘긋 살펴보고 차트를 향해 시선을 내린다.) 실험체. 깨어있는 것 알고 있어. (다짜고짜 당신의 볼을 후려친 뒤, 제 손을 털며 자리에 앉는다.) 새로 배정된 연구원인 오르카다. 오늘 기분이 어떻지?

267 이름 없음 (ugW2HBlVxU)

2022-01-15 (파란날) 23:00:17

>>266

(덜컥 날아오는 손찌검에 실험체의 고개가 크게 흔들린다. 고개가 돌려진 채 잠시 당신을 노려보던 실험체가 퉤, 하고 바닥에 침을 뱉어낸다.) 내 기분 따위 언제부터 신경 썼다고. (힘 없이 너덜대며 웃는다.) 혀 깨물고 뒤지고 싶은 거 간신히 참는 정도. 됐냐? (거칠게 비아냥댄다. 허나 심한 고문으로 기력이 부족한 듯 그다지 위협적으로 느껴지진 않는다.) 오르카고 나발이고. 시X. 전에 있던 놈은 내 팔 조져놓고 어디로 간거야? (작게 무어라 중얼거리는 실험체. 아마 전임 연구원에 대한 욕설인 듯 하다.)

268 이름 없음 (69X.VZZWHU)

2022-01-15 (파란날) 23:08:35

>>267
(침을 뱉는 모습에도 무심히 바라본다. 기분을 물어보는 것은 언제나와 같은 질문임을 잘 알고있지 않냐는 듯이.) 어차피 되살아날텐데 뭐하러. 쓸데없는 말은 줄이고 일과에 집중해. (당신의 앞에 놓여있는 흰 의자 위에 앉아 차트를 몇 장 넘기며 안의 내용을 훝어본다.) 새뮤얼은. (말이 잠시 끊긴다. 귓가에 꽂힌 무선 이어폰에서 상부의 명령을 듣는 듯, 잠시 미간을 찌푸린다.) ...작별 인사를 남기진 않았더군. 무슨 작품을 남겼는 지 볼까. 왼팔을 내밀어.

269 이름 없음 (4feLUdCJ9I)

2022-01-15 (파란날) 23:45:12

>>268

(당신을 경멸에 찬 눈빛으로 바라본다.) 아주 별 것도 아니라는 듯이 말하는군. 그래, 영원히 죽지 않는 허수아비를 만들어냈으니 인간 위에 군림하는 신이라도 된 듯 하겠지. (실험체가 비웃으며 어깨를 들썩였다.) … (가만히 당신의 표정을 살피던 실험체가 고개를 까딱인다.) 새뮤얼, 그 인간이 도망치기라도 했나봐? 오, 아니면 내 평생의 바람대로 나가 뒈져준걸까? (묘하게 두 눈에 생기가 돈다.) 그래, 내가 항상 말해줬지. (별안간 목을 가다듬는 실험체.) " 새뮤얼. 네가 이 세상에게 해줄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은, 지금 당장 이 실험실을 뛰쳐나가 대가리에 총알을 박아넣는 것 뿐이야! " (연극을 하듯 과장된 목소리와 말투. 낄낄대며 웃고 있다. 전임 연구원을 심히 저주한 듯 하다. 그에게 어떤 일이 일어난 것일지, 진실에는 크게 관심이 없는 듯 하다. 그저 제 상상 속에서 싸늘한 시체가 되었을 새뮤얼을 떠올리는 데 열중하는 실험체.) …뭐, 왼팔? (갑작스레 예민한 목소리로 대꾸하는 실험체.) 네 전임 연구원이 아작을 내버린 내 왼팔 말이지. 그래. (당신의 명령에 불복할 생각은 없는 듯, 적의에 찬 목소리와는 상반되게 순순히 팔을 걷어 보여준다. 학습된 복종인 듯 하다.)

270 이름 없음 (VzQ.FnvRt.)

2022-01-16 (내일 월요일) 22:53:05

>>269
듣다 보니 이상한걸. 영원히 죽지 않는 존재가 어떻게 인간이지? 그건 아마도. (잠시 침묵. 그리곤 비릿한 미소를 짓는다.) 헛소리 할 정신력이 남아있어서 다행이야. 스스로를 허수아비라 생각할 줄도 알고. (생기가 도는 눈빛과 연극조의 말투는 무시한 채, 차트 속에 가려져있던 작은 주사기를 꺼내서 당신의 왼손목의 혈관에 주사한다. 그리고 말끔해보이는 당신의 왼손을 들어올렸다, 내렸다 하며 이리저리 살펴본다.) 상부의 명령이 있었다. 연구 결과는 충분히 나왔으니, 이제 자유롭게 풀어주라고 말야. 그래서 너의 꿈과 관련된 이야기를 해볼까 해. 여기서 나가면 뭘 하고 싶지? (희망을 주고, 부수는 행위는 몇 번이나 당했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의중을 파악하기 힘든, 평탄한 어조의 목소리다.)

271 이름 없음 (jMjYzBrXus)

2022-01-16 (내일 월요일) 23:44:47

>>270

잊었나? 네놈들이 자르고 붙이고를 몇 번이나 반복하기 전까진 나도 인간이었다는 걸. 내 태생은 평범한 인간이었다고! 신이 내려준 운명은 저주 받은 불사의 시쳇덩이가 아니라— (점점 격양되는 어조. 버럭 소리를 내지르려다 이내 갑작스레 말을 멈추고 만다. 그리곤 한참이나 침묵하며 무표정히 앉아있는 실험체.) 또 뭘 꽂아넣는거야. 지긋지긋해. (평온히 가라앉은 얼굴로 작게 욕설을 중얼인다. 반항의 기미는 보이지 않는다.) …뭐? 지금 장난하냐? (실험체의 눈빛이 떨린다. 내색하지 않으려 노력하는 듯 하나 효과가 있어보이진 않는다.) 나를, 내 몸을, 이따위로 만들어놓고, 지금 자유라는 말이 담겨? (별안간 헛웃음을 터트린다.) 니들 속이야 뻔하지. 또 이딴 말로 사람을 꼬드기고, 처참히 조져놓는 거. 뻔한 수법이지. (중얼이듯 말하는 실험체. 허나 동요된 것이 뻔히 보인다. 잠깐의 침묵 속, 무언가를 갈등하는 듯 불안한 낌새로 아랫입술을 잘근이던 실험체가 입을 연다.) 이 연구소에 불부터 질러버릴테야. (눈동자를 굴리며 주변을 살핀다.) 그리곤 고향에 가야지… (혼잣말로 작게 중얼인다.)

272 이름 없음 (0K5a8oHMMs)

2022-01-17 (모두 수고..) 00:28:57

>>271
그럼 우리가 신이 내린 운명을 거역하기라도 했단건가? 그럴리가, 우린 한낱 인간이야. 너와 같은 인간. 그러니 편하게 생각해. 지금 이 상황, 대화조차 운명이었다고 말야. 그럼 이 운명 끝에 있는 것은 뭘까? (뭘 꽂아넣었냐는 질문은 무시한 채, 주사기 끝은 탁탁 털어 주머니에 넣었다. 당신의 감정이 쉴 새 없이 변해갈 때에도, 전임 연구원과는 다르게 표정 하나 바뀌지 않는다. 분노 하나하나를 실감하면서도, 안경알 너머로 당신을 바라보고 있다. 대답이 나올 때까지.) 이 연구소를 불지르는 정도는 새발의 피야. 포워드 코퍼레이션은 도시 전체를 장악 중이니까. 넌 또다시 금새 잡혀오겠지. (손목 시계를 흘끗 확인하고, 뒤이은 말에 피식 웃는다.) 네 말대로 사람을 꼬드기고 처참히 조져놓는 게 특기라고 하자. 왜 네 고향 사람들을 데려오지 않았을까? 윗분들에게는, 아주 재밌는 소재거리일텐데. (손목 시계를 톡톡 두드리며 작은 목소리로 속삭인다.) 1분 남았어. 꿈 이야기 좀 더 해봐.

273 이름 없음 (O0u4EXpToU)

2022-01-17 (모두 수고..) 23:38:19

>>272

입은 더럽게도 잘 놀리는구나. (쯧, 혀를 차내며 목소리를 내리깐다.) 오, 분명한 거역이지. 너희들은 엄청난 천벌을 받을거야. 한낱 인간 주제에 새장을 탈출하고자 한 죄. 교만의 댓가… (주사기를 정리하는 당신의 얼굴을 보며 말하는 실험체. 흡사 저주를 퍼붓는 것 같기도 하다. 제 몸에 주입된 약물이 무엇인지엔 관심 조차 없는 듯 하다. 실험체에겐 그닥 가치 없는 정보였던 걸 수도.) 뭐 어때? 난 세상의 악을 심판하겠다는, 그딴 원대한 계획을 세우는 게 아냐. 그저 내 인생을 난도질한 너희들에게 복수하고 싶을 뿐이지. 포워드 코퍼레이션이고 나발이고 상관 없어. 난 니들이 고통스럽게 죽기만 하면 돼. (힘없이 웃으며 당신을 응시한다. 곧게 꽂혀드는 시선에 앙심이 가득하다.) …알게 뭐야. (미간을 구기는 실험체. 잠시 침묵을 유지한다. '1분이 남았다.' 라는 말의 뜻을 생각하는 듯 하다.) 난 선생님이 되고 싶었지. 이 실험실에 들어오고, 아마도, 몇 달 후까지는 그 꿈을 가지고 있었을거야. 풀려나면 고향에 내려가 아이들을 가르치겠다는— (다시 입술을 잘근인다.) 내 꿈 얘기 따위 뭐가 중요하다고. (고개를 뒤로 젖히며 길게 숨을 내뱉는 실험체.) 내 꿈은 이미 산산조각 나 썩어버렸어. 니들 덕분에. (당신의 안경알에 비친 제 모습을 바라보는 실험체.) 그니까 엿이나 먹어. 그리고 고통스럽게 뒈지길. 죽어서도 망령으로 남아 저주해줄테니까. (킥킥대며 웃어대는 실험체. 허나 역시나 기력이 부족해보인다.)

274 이름 없음 (mnIEA8/auE)

2022-01-18 (FIRE!) 00:14:36

>>273
(당신의 저주를 들으면서도 새삼 표정의 변화 하나 없다. 되려 그것은 관찰하고 있다는 생각까지 들 정도로. 주사를 놓고 난 다음에는 그저 하염없이 무표정한 얼굴로 당신의 이야기를 듣거나, 이따금씩 시계를 들여다볼 뿐이다.) 선생이셨네. 꿈 치고는 포기가 빠른 편이란말야. 그런데도 아직까지 욕을 할 기운은 남아있고. (차트에 꽂혀있던 펜을 들어 당신을 향해 겨눈다.) 넌 안죽어. 대신 노선은 확실히 해줬으면 해. 고통스런 운명을 받아들이고 꿈을 좇아 살아나갈건지, 그저 한톨의 먼지처럼 높으신 분들의 비웃음이나 사며 화장당할건지. (펜을 돌리며, 슬며시 웃는다.) 뭘 선택하든 운명은 하나 뿐이지만 말야. 1분 지났어. (순간, 온몸의 혈관이 끓어오르는 극한의 고통과 함께 당신의 눈과 귀, 입에서 피가 뿜어져나온다. 그리고 시야가 꺼매진다. 단지 한계를 넘어선 격통 때문이 아닌, 실험실 내부 전체적으로 불이 나간 듯 금새 붉은 비상전등이 켜진다. 사이렌이 울리고, 벽 너머에서 희미하게 소란스런 소음이 들려온다. 당신의 눈 앞에 있던 연구원은 어느새 연구복과 안경을 벗어던지고 검은 작전복 차림을 하고서 권총을 꺼내들었다.) 네 혈관에 있는 추적 나노봇을 배제하는 과정이야. 시간이 많은 편은 아니니 잘 들어. 모든 보안 프로토콜은 약 45초간 정지 상태일거야. 내 뒷편의 문을 열고, 보안 게이트 3개와 스무명 남짓의 무장병력을 뚫어내야해. 우리의 투자가 틀리지 않았다는걸 보여줘. 선생. (당신의 뒷편으로 돌아가 수갑에 권총을 발포해 당신의 팔을 자유롭게 해준다.) 정문으로 나오면 데리러 갈테니까 얌전히 기다리고 있어. (천장 구석에 붙어있는 환풍구에 뛰어들어가기 직전, 당신을 돌아본다.) 선생 고향, 데려다주지. 살아서 나오면.

275 이름 없음 (4UWr6cnJc2)

2022-01-18 (FIRE!) 00:54:40

>>274

그래, 어려서부터 물에 빠져도 주둥아리는 동동 뜨겠다는 말을 자주 들었지.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건 입을 나불거리는 것 밖에 없기도 하고 말야. (무표정한 당신의 반응이 웃기다는 듯 피식댄다.) 도통 알 수 없는 소리만 해대는구나. (당신의 말이 이해되지 않는 듯 다시금 미간을 찌푸리는 실험체. 허나 곧 극심한 고통에 몸을 크게 덜썩대기 시작한다. 단말마조차 내지를 수 없을 정도로 전신을 죄여오는 고통. 실험체가 크게 몸부림 쳤지만, 단단히 구속된 탓에 오히려 묶인 신체 부위의 피부만 긁히고 파일 뿐이었다.) …뭐야? 너, 연구원이 아니었구나? 이건 또 무슨… (아직 고통이 다 가시지 않은 듯, 한 마디 한 마디가 뚝뚝 끊긴다. 호흡 사이사이로 드나드는 숨소리가 터질듯 위태롭다.) …시X, 그냥 연구원의 장난감으로 뒈지는 게 편할 뻔했군. (어이가 없다는 듯 웃어대다 총소리에 크게 몸을 움찔이는 실험체. 저도 모르게 놀라 두 팔을 움찔이자, 자유롭게 허공을 휘젓는 감각이 낯설게 몰려든다. 멍하게 제 두 손과 발을 바라보던 실험체가 퍼득 정신을 차리며 당신을 바라본다.) 다시 만나면, 다 설명해야할 거야. 왜 나를 구해준건지, 니들은 또 뭔지! (혼비백산한 상황. 사이렌 사이로 실험체가 크게 소리쳤다.) 젠장, 젠장, 젠장. 45초는 너무 짧잖아... (약간 패닉한 듯 제 머리칼을 쥐뜯는 실험체. 그러나 곧 결심한 듯 잠시 심호흡을 하더니 곧장 당신을 지나쳐 뛰어든다.) 뭘 믿고 투자를 한건진 모르겠지만, 대박 한 번 보여주지. 난 고향에서도 제법 알아주는 승부사였거든. (당신이 환풍구에 들어가기 직전, 실험체가 장난스레 대꾸하며 실험실 문고리를 쥐었다. 고통에 의한 발작으로 너덜너덜해진 피부가죽이 눈에 띈다.) 에이 시X, 모르겠다. 그쪽이나 뒤지지 말아. (시끄러운 사이렌 아래, 실험체가 문을 열어제끼며 몸을 웅크렸다. 그가 새하얀 실험실을 탈출하는 경이로운 순간. 제대로 기능한 지 오래되어 비틀거리는 두 다리로, 실험체는 자유를 향하며 죽을 힘을 다해 뛰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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