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아서기 전, 그냥 인사치레로 했을지도 모르는 말이 조금은 그녀의 마음을 편하게 만들었다. 자신으로 인해 시간낭비가 되지 않았구나 하고. 그렇게 생각하고 보니 그녀 역시 약간의 동질감 비슷한 것이 속내 한켠에 잔잔하게 들었다. 하지만 그 뿐이다. 아무런 연고도 없는 곳으로 무작정 도망쳐 온 그녀와 친지가 그래도 살았던 곳으로 온 사내와 겹쳐보기엔 그 정도가 고작이었다. 돌아가는 길을 천천히 걸어가며 그녀는 조용히 생각했다. 내일부터는 산책 경로를 바꾸자고.
파문이 일었던 하루가 조용히 지나고 다음 날 아침이 되었을 때, 전날과 다름없는 시작에 그럼 그렇지 라며 또다시 느즈막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흐트러진 채 앉아있으니 이웃집 할머니가 마당에 물을 뿌리는지 시원한 물줄기 소리가 살짝 연 창문 사이로 들려온다. 잠시 그 소리를 들으며 잠의 여운을 물리치고, 느릿하게 움직여 남들보다 늦은 하루를 보내기 시작했다. 씻고, 밥을 먹고, 약간의 일을 하고. 그러고나니 다시 산책을 나갈 시간이 되었다. 챗바퀴처럼 일정하게 돌아가는 하루. 그래도 오늘은 다른 길을 산책할테니 조금은 다른 기분이 들려나 하며 집을 나섰을 때였다.
"...네, 네..? 제가요..?"
문 밖에는 누가 이미 있었는데, 전날 반찬을 가져다 준 이웃집 할머니였다. 어디 나가시는지 외출할 차림을 한 이웃집 할머니가 찬합을 들고와 그 집 사내에게 가져다줬으면 한다고 부탁해왔다. 원래는 본인이 가시려고 했지만 급히 나가봐야 할 일이 생겼다며, 산책 가는 길에 잠깐 들러주지 않겠느냐고. 당황해 어물어물하며 오늘은 그쪽으로 안 갈거라고 말하려던 그녀는 여기 온 뒤로 살뜰히 챙겨주신 것에 보답은 해야 하지 않겠는가 싶었다. 그냥 가져다 주기만 하는 거면 어렵지 않으니까. 어제랑 다를 거 없으니까. 그렇게 속으로 자기합리화를 한 그녀가 작게 고개를 끄덕이자 할머니는 매우 기뻐하시며 그녀에게 찬합을 맡기고 가셨다. 저멀리 가시는 할머니를 잠시 바라보다가, 그녀도 그녀의 일을 위해 걸음을 옮겼다. 전날과 같은 산책로였다.
가지런히 모은 손에 찬합이 든 종이봉투를 들고 걷다보니 어느새 사내의 집 근처까지 다다라있었다. 늘 이런 산책이었기에 별 생각이 없었는데, 오늘은 용건이 있어서 그런지 조금 느낌이 달랐다. 불안, 비슷한 무언가일까. 괜한 생각은 말자며 고개를 작게 젓곤 앞을 보며 천천히 걸어갔다. 길 너머 보이는 그 집을 보고 오늘도 사내가 나와있지는 않을까 싶어 집 쪽을 바라보며 가까이 가고 있었다. 밖에 있다면 얼른 전해주고 가야지, 하고 생각하면서.
하루동안 열심히 집을 청소하고 정돈해서 겨우 사람 사는 분위기로 만들어놓은 사내는 많이 지쳤는지 마루에 누워있었다. 집 안에 누워있어도 되겠지만 그래도 여기까지 왔으니 집 안보다는 마루가 시원하고 경치 보기도 좋겠지 싶어 한 시간 이상 자세를 유지하며 사내는 근처 경치를 구경했다. 도시에서는 전혀 볼 수 없는 푸른 풍경이 절로 눈을 편안하게 했고, 시끄러운 소음이 들리지 않는 한적한 분위기는 마음을 편안하게 했다.
솔솔 불어오는 바람은 몸에 쌓여있는 피로를 풀게 하기 딱 좋았고, 시골 특유의 맑은 공기는 지친 정신을 맑게 했다. 조금만 더 이대로 쉬었다가 방 안에 만들어둔 아틀리에 정리를 마저해야겠다고 생각하는 찰나 발소리가 들려왔다. 그러고 보니 어제 집안 정리를 한다고 피곤해서 바로 잠들어버린 바람에 마을 사람들에게 인사를 전혀 못 했다는 것을 떠올린 사내는 오늘이야말로 꼭 마을을 돌아다니며 제대로 인사해야겠다고 다짐하며 누운 몸을 일으켜세워 마루에 똑바로 앉았다.
곧 보이는 얼굴은 어제 집 앞에서 만난 여성의 모습이었다. 옆집이 아니고서야 이틀 연속 얼굴을 마주하는 것은 도시에선 꽤 힘든 일이었던만큼 사내는 괜히 신기함을 느끼며 벗어둔 신발을 신고 기지개를 쭈욱 켜며 마루에서 내려왔다.
"안녕하세요. 이렇게 또 보네요. 오늘도 산책 가는 길이세요?"
자신이 앞으로 살 집의 앞 길이 누군가의 산책길이라는 것은 역시 신기한 일이라고 생각하며 사내는 미소를 작게 짓고 그녀를 똑바로 바라봤다. 허나 남의 산책길을 방해하는 것은 역시 미안한 일이었기에 그녀가 얼마든지 지나갈 수 있도록 몸을 살며시 옆으로 치워 그녀가 앞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했다.
천천히, 조금씩 가까워지는 집은 어제보다 좀더 정돈되어보였다. 극적인 변화는 아니지만 전날과의 차이 정도는 그녀의 눈에도 보였다. 집 안도 정리하느라 바빴을텐데, 라고 생각하며 가던 중에 누가 마루에서 일어나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흩날리는 회색머리가 인상적이라 잠시 눈길을 빼앗겼다가 사내의 말에 퍼뜩 정신을 차렸다.
"앗, 아, 네, 안녕하세요..."
약간의 놀람을 담은 자색 눈동자가 사내를 한번 보고 슬쩍 옆으로 피했다. 시선을 마주하는 것이 부담스러운 것처럼. 종이봉투의 끈을 쥔 손도 알게 모르게 힘이 들어가, 안 그래도 흰 손의 손등이 투명해질 것만 같다. 어영부영 인사를 하고 잠시 입을 다물고 있던 그녀는 조금 늦게 사내의 물음에 대답을 했다.
"저, 오늘...은, 그쪽, 한테, 용건이 있어서요..."
산책이 맞긴 했지만 용건이 아니라면 이 길로 오지 않았을테니까. 그러니 오늘은 사내에게 용건이 있어서 온 거라 말하고 들고 온 종이봉투를 사내에게 내밀었다. 종이봉투 안에는 딱 봐도 직접 만든 건가 싶은 5단짜리 검은색 찬합과 작은 보온병이 가지런하게 들어있었다. 사내에게 그것을 받으라는 듯 든 채로 마저 얘기했다.
"옆집, 사시는 할머니가, 여기 사시던 분하고... 친분이 있었어서.. 그래서 그쪽 주려고 챙긴건데, 일이 생기시는, 바람에, 제가..대신..."
띄엄띄엄에 말끝을 흐리긴 했지만, 할머니에게 들었던 말과 왜 그녀가 이걸 가져왔는지 정도는 이해가 될 만큼은 얘기를 하고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도 어찌저찌 말은 했다는 약간의 안도감에서 나온 한숨이랄까. 이제 사내가 이걸 받기만 하면 그녀의 용건은 끝나고 각자 집으로 돌아가면 그만일거라 생각했다. 그리고 내일부터는 산책로를 바꾸면 될 거라고.
자신에게 용건이 있다는 말에 사내는 단 하루만에 무슨 용건이 생겼을지 의문을 품었다. 눈을 피하는 그녀의 모습에 뭔가 안 좋은 말이라도 하려고 온 것일까 싶어 약간의 불안감이 사내의 마음을 채웠다. 아무리 그래도 이사 온지 이제 하루가 지났는데 누군가에게 부정적인 느낌으로 있는 것은 사내로서는 원하지 않는 일이었다. 허나 그 또한 자신의 추측일 뿐이었기에 우선 용건이 무엇인지에 대해 사내는 생각을 돌렸다.
손에 쥐고 있는 종이봉투를 내미는 그녀의 행동에 사내는 얼떨결에 종이봉투를 받았다. 안을 들여다보니 검은색 찬합과 작은 보온병이 들어있었고 자연히 사내는 왜 이것을 자신에게? 라는 표정을 지으면서 다시 그녀를 바라봤다. 일단 확실한건 이 종이봉투 안에 들어있는 내용물이 자신에게 찾아온 용건임은 분명하다고 사내는 생각했다.
"옆집 사는 할머니요? 이걸 저에게?"
자신의 할머니 혹은 할아버지와 친분이 있다는 말에 사내는 어떤 사람일지를 떠올렸다. 그러고 보니 어린 시절, 시골집에 왔을 때 여러 어르신들이 할머니와 할아버지를 찾아왔던 것 같은데. 그 중 한 분이실까? 정말로 하루빨리 인사를 해야겠다고 생각하며 사내는 미소지으며 우선 종이가방을 내려놓았다.
"아직 제대로 인사도 못 드렸는데 이렇게 뭔가를 주는 어르신이 계실 줄은 몰랐어요. 꼭 찾아가서 감사 인사를 해야겠네요. 괜찮다면 어느 곳에 사는 분인지 물어도 될까요? 아. 그리고 이렇게 전해주러 와서 고마워요."
찬합이 들어있는 것으로 보아 아마 먹을 것이 들어있을 것 같다고 추측하며 나중에 식사를 할 때 먹으면 되겠다고 결론을 지은 사내는 잠시 뭔가를 생각하는 듯 하다 말을 이었다.
"혹시 산책을 자주 즐기신다면 괜찮은 풍경이 있는지 물어도 될까요? 아. 별 건 아니고 그림을 그리러 내려왔거든요. 그래서 혹시 좋은 풍경이 있으면 소재로 쓸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요."
(길가 중간에서 히치하이킹을 하는 당신을 발견하고는, 천천히 속도를 줄인다. 손은 조수석에 놓여져있는 샷건 쪽을 향해 뻗으면서 당신 앞에 세우고는 차 창문을 스르륵 내린다. 까만 미러 선글라스를 슬쩍 아래로 흘려 당신을 바라보다, 씩 웃는다.) 이런 곳에 손님이라니 드문데. 어디까지 가십니까?
>>7 모든것이 시작되고 모든것이 끝날지 모르는 곳으로 (처량한 얼굴에 눈물,먼지 범벅이된 하얀 가운의 여자가 무거운 서류가방을 든채 샷건의 등장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피우던 시가를 더 깊게 들이마시며 읖조린다. 옆구리에 낀 철로된 서류가방을 보여준다. 그 위로 유명 메이커가 선명하게 빛난다.)어때, 같이 가볼래? (같은 시각 그녀의 뒤에서 커다란 폭발이 터지면서 막무가내로 차에 타려든다. 그리고 큰 폭발 소리에 좀비들이 점점 모여든다.) 일단 가면서 이야기 하지 문좀 열어!
사내에게 종이봉투를 넘겨주고나자 빈 손이 새삼 가볍게 느껴졌다. 그녀의 집에서 여기까지라고 해도 고작 십여분에 불과한 거리를 들은게 전부인데. 그녀는 어쩐지 허전함이 느껴지는 손을 가지런히 모아 쥐고, 사내의 되물음에 고개를 끄덕였다. 자세한 자초지종까지는 몰라도 할머니가 그리 말하셨으니 들은 대로 전할 뿐이었다.
그녀는 사내가 종이가방 내려 놓는 모습을 힐끗 시선으로만 쫓다가, 이어진 물음에 시선을 돌려 사내를 보았다. 타인의 주소를 멋대로 알려줘도 괜찮을까 하는 생각이 앞섰다. 아무 연관도 없다면 알려주지 않겠지만, 나중에 빈 찬합을 돌려드리려면 미리 알고 있어야 하지 않을까. 가만히 혼자 생각을 해보고 괜찮겠다 싶어서 다시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대로 그녀가 왔던 길을 보며 간단히 길 설명을 해주었다.
"여기서, 쭉 간 다음.. 갈림길에서 왼쪽으로, 10분 정도 걸어가면, 마당에 감나무가 있는 집이 있어요. 거기..에요."
혹시 모르니 명패에 써있을 할머니의 성씨도 같이 알려주고 그럼 이만, 을 말하려 했다. 하지만 사내의 다음 물음이 그녀의 말보다 빨랐다. 미처 끊지 못한 말을 그대로 들은 그녀는 풍경과 그림이란 말에 살짝 흥미가 도는 눈빛을 보였다. 아주 잠깐이었지만.
"그림...인가요. 괜찮은 풍경, 이라면..."
대답하기에 앞서 또 잠시간 시간을 들여 생각에 빠졌다. 근 1년간, 마을 밖으로 나가진 않아도 걸어갈만한 곳은 여럿 가보았다. 딱히 좋은 풍경을 찾기 위한 것도, 그만큼 산책을 즐겨서인 것도 아니었지만. 몇 군데 인상에 남는 장소는 있었다. 그곳들을 떠올린 그녀는 못다한 대답을 마저 이었다.
"일출이 잘 보이는, 절벽 같은 곳이나, 저기, 안개가 낀 늪이나... 노을이 잘 드는 곳, 정도는, 알고 있어요.."
기억나는대로 몇군데를 말하고 보니 별로 좋은 곳들은 아닌거 같아서, 그냥 흔한 곳이라고 작은 소리로 덧붙였다. 시골 풍경이 다 거기서 거기 아니겠냐고.
여기서 쭉 간 다음 갈림길에서 왼쪽으로 시작되는 말을 들으며 사내의 눈동자는 그녀가 설명하는 길이 있는 방향으로 향했다. 마당에 감나무가 있는 집이라고 하는 것도 그렇고, 명패의 이름까지 알려줬으니 찾는 것은 상당히 쉬울 거라고 사내는 판단했다. 적어도 길치는 아니었기에 길을 잃는 일은 없을 거라고 사내는 확신하며 이내 다시 한 번 그녀에게 고맙다고 말을 전했다.
이어 자신의 질문의 답이 들려오자 사내는 자연히 그 풍경을 머릿속으로 상상했다. 안개가 낀 늪이 있다는 말에 늪도 있구나라며 신기해하며 다른 곳은 몰라도 거긴 꼭 가봐야겠다고 사내는 다짐했다. 물론 출발한다고 해도 지금 당장은 아니었다. 아직 마을 사람들에게 제대로 인사도 못했고 집 정비도 다 끝나지 않았으니까. 겉은 어떻게든 정비했다고 해도 비가 새는 곳이 없을지, 혹여나 문제가 되는 곳은 없을지 등등 확인해야 할 곳이 많았고 아직 아틀리에 정비도 마치지 못했으니 해야 할 것은 많았다.
"이곳에선 흔할지도 모르지만 막 여기로 온 저에겐 흔한 곳이 아닌걸요. 어릴 때 여기에 여러 번 오긴 했지만 사실 이 시골집 근처에서 멀리 벗어나본 적은 없어서요. 아무튼 알려줘서 고마워요."
계속 고맙다는 인사만 한다고 생각하며 사내는 괜히 소리를 작게 내서 웃었다. 허나 그 웃음소리를 어떻게든 잠재우며 고개를 돌려 어디에 있을지 알 수 없지만 그 늪이나 노을이 잘 드는 곳 등의 위치를 상상해서 있을법한 장소로 고개를 돌리다 아래로 내리며 다시 그녀를 바라봤다.
"그림 좋아하시나요? 만약 좋아한다면, 일단 정리가 다 끝나고 마을 어르신들에게 인사가 다 끝나면 추천해준 장소 같은 곳에 혹시 가게 된다면 풍경화 한 장 받아보실래요? 저도 손을 풀고 싶고, 삽화가를 꿈꾸고 있거든요. 그래서 어떤 느낌으로 사람들에게 보일지도 궁금해서요."
물론 좋아하지 않는다면 거절해도 상관없다고 이야기를 하며 사내는 두 손을 가볍게 휘저었다.
술기운이 오른 듯 붉어진 얼굴로 여자가 되물었다. 영 탐탁치 않아하는 어투였다. 게슴츠레 뜨인 눈으로 당신을 서너번 훑어보던 그녀는, 이내 싸구려 양주가 찰랑이는 유리잔을 기울인다.
" 제냐, 제냐예요. …그렇게 쳐다보지 마요. 가명이 아니라 진짜 이름 맞으니까. 정확히는 애칭이지만. 워낙 특이한 이름이라 알려주기 싫었는데. "
여자가 미간을 찌푸렸다. 마지막 잔이라 그런지 술이 유난히 쓰다. 말을 멈춘 채 몇 번 숨을 들이키던 여자는 한참이 지나서야 말을 잇기 시작했다.
" 뭐, 처음 본 사람 치고는 내 이야기도 잘 들어주고... 재미있었으니까 알려주는거예요. 풀네임은 안 알려줄거니까 그렇게 알고. "
이국적인 이름 치곤, 전형적인 한국인의 외모를 가진 여자였다. 검은 머리칼과 적당히 흰 피부. 짙은 갈색빛 눈동자에 특유의 분위기가 담긴 홑꺼풀 눈매. 평균을 겨우 웃도는 키와 여느 대한민국 20대들이 좋아할 법한, 짧은 유행을 함축한 옷가지. 여자가 자세를 고쳐잡았다. 지갑을 챙겨드는 눈치다.
눈가에 발그레하게 열이 오른 여자는 푸슬거리며 헤프게 웃는다. 그러다 동그란 눈으로 당신 얼굴을 살핀다. 시선에 몸을 조금 움츠린다. 우물쭈물거리면서도 그 말을 철회할 생각은 없는 듯하다. 이상한 구석에서 묘하게 고집이 있기라도 한가 보다.
제냐, 제-냐. 그 이름을 입 속에서 둥글둥글 굴려보던 여자는 당신의 말에 화들짝 놀라 고개를 젓는다. 그렇게 안 봤어요! 하고 변명하는 말이 귓가에 들리는 것만 같다. 커다란 두 눈을 두어번 꿈뻑거린다. 테이블 아래로 손가락을 꼼질거리다,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이야기한다.
"싫었다면 미안해요...그래도, 들으니까 기쁘네요."
그리곤 예의 그 헤프고 무른 웃음을 지어보인다. 꼭 그 기쁘다는 말이 온전한 진심인 것처럼. 여자는 손을 팔락거려 옷소매를 조금 아래로 한다. 양 손으로 잔을 잡고 홀짝이며 남은 술을 마신다. 그러다 당신을 말을 하노라면 술을 내려놓고 가만히 듣다가, 한참을 고민하듯 있는다.
"그, 예쁜 이름이라고 생각했어요. 아까 전에요...이상하게 본 게 아니라."
그 고민 끝에 나온 말은 실없는 종류다. 그리고, 라며 여자는 말을 잇는다.
"제 이름은 비예요. 비 온다, 할 때 그 비요. 따지자면 애칭이에요."
제냐처럼요. 짧게 덧붙인다. 여자가 작게 웃자 갈색 머리카락이 그에 맞춰 흔들린다. 촘촘한 속눈썹 사이로 빛이 닿자, 호박색에 가까운 색채로 눈동자가 반짝인다. 나잇대에 비해 상당히 작은 체구다. 그래서인지 작은 웃음에도 쉽게 흔들려 보인다.
여자가 힐긋 당신을 바라보다 오묘히 입꼬리를 접어 올렸다. 여자는 차가운 인상이었지만 제법 따스히 웃을 줄도 아는가보다. 그녀는 다시 시선을 거두어 정면을 바라보았다. 텅 빈 술잔이 어딘가 아쉽다. 기껏 오른 취기가 곧장 사그라질 듯한 그 감각이 싫었다. 여자가 천천히 고개를 기울여 턱을 괴었다. 별안간 들려온 당신의 목소리 때문이다.
" 그래요? 고마워라. "
여자가 비스듬히 입꼬리를 올리며 웃었다. 술기운이 가득한 웃음이다. 제정신이라면 결코 그런 미소를 보이지 않았겠지. 평소의 여자는 웃는 것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비—. 여자가 길게 입술을 늘려 당신의 이름을 중얼였다. 가볍게 입술이 붙었다 떨어지며, 당신의 이름이 톡 터져나온다.
" 좋은 이름이네. 내가 비오는 날을 좋아하거든. "
여자가 호박색 눈동자를 보며 말했다. 여자의 눈동자는 칠흑처럼 검었다. 그래서 꼭, 그녀의 눈을 볼 때면 깊이 모를 심해에 빠져드는 기분인지라, 그녀와 눈 맞추길 피하는 이들이 많았다. 그 새카만 어둠 속에 제 속내를 읽히는 기분이 썩 유쾌하진 않을테니. 눈은 마음의 창문이라 했던가. 인간은 눈과 눈을 통해 서로의 마음을 읽는다던데, 그녀의 눈은 아무리 들여다본들 그 무엇도 읽히질 않았다. 모든 불을 끄고 달빛 들어올세라 창문까지 닫고, 속마음이 적힌 공책을 꽁꽁 숨겨놓기라도 한 것처럼 말이다. 그래서, 여자는 그리도 투명한 눈빛을 좋아했다.
" …따라와요. "
여자가 한참을 침묵하다 대답했다. 의자에서 몸을 일으키니 세상이 어지럽다. 세상이 붉은건지, 가게의 조명이 붉은건지, 그녀의 눈동자가 붉은건지. 알 길이 없다. 여자는 비틀이는 걸음으로 뒷쪽 출입구의 문을 밀었다. 곧장 서늘한 공기가 들이치며 세상의 소음이 밀려들었다. 쇠어가는 가로등의 불빛이나, 낡은 자동차의 모터음이나, 뭐 그러한 것들.
여자가 품에서 담배갑을 꺼낸 뒤 담배 한 대를 입에 물었다. 살며시 깔린 시선 사이로는 거친 아스팔트 바닥이 보였다. 라이터를 몇 번 달칵대며 담배에 불을 붙인 여자가 그대로 첫 숨을 길게 내뿜어낸다. 그리곤 잠시 당신을 보고서는, 제 담배갑을 기울이며 한 대 가져가라는 듯 흔들대는 것이다.
" …솔직하게, 담배 피는 거 맞아요? "
여자가 다시 한 번 연기를 뿜어낸 뒤 물었다. 여자는 불안정한 자세로 딱딱한 벽에 몸을 기대고 있었다. 멍하니 울려오는 머리에 여자가 잠시 몸을 비틀였다. 글쎄, 그정도로 취한 건 아닌데…
14살. 살던 마을을 떠난 소년은 10년이 지나 24살의 청년이 되어 다시 마을로 돌아왔다. 검술과 마법을 제대로 공부하기 위해 전문 아카데미에 들어간 그는 아카데미를 정식으로 졸업했다는 제국의 사자 문양이 그려진 붉은색 완장을 왼팔에 차고 있었다. 제국에서 청년의 검술과 마법 실력을 인정했다는 그 증표는 제국 어디에서나 인정받는 자격 그 자체였다.
아카데미에 입학한 이들 중에서도 극소수만이 받을 수 있는 그 증표만 있으면 제국의 유력 가문을 지키는 기사가 될 수도 있었고, 제국 그 자체를 지키는 기사단에 들어가서 활동할 수도 있었다. 허나 사내는 아카데미에서 들어온 모든 권유를 거절하고 자신이 살던 마을, 즉 고향으로 되돌아왔다.
"10년만이지만 옛 모습 그대로네."
14살 때의 기억을 어렴풋이 떠올리며 사내는 미소를 작게 지으며 거리를 천천히 걸었다. 나름 귀족의 신분을 가지고 있었으나 그렇게 유력한 가문도 아니었던만큼 사내를 알아보는 이는 적어보였다. 마을 북쪽에 위치한, 귀족들이 살고 있는 거주구에 사는 작은 여러 가문 중 하나였을 뿐이었으니 어지간하면 이런 반응일수밖에 없다고 생각하며 사내는 우선 마을 북쪽으로 향하려 했다.
"앞으로 뭘할지는 일단 집에 돌아가면 생각해볼까. 오랜만에 인사를 드려야 할 곳도 많으니 말이야."
/뜬금없는 맥커터만 아니면 어떤 상황으로 이어도 오케이야! 10년 전에 친하게 지냈던 귀족 친구중 하나가 나와도 상관없고, 어떻게든 영입하려고 제국에서 몰래 미행해서 따라온 이로 이어도 별 상관없어!
당신의 말에 뒤늦게 따라 웃는다. 약간의 안도가 담긴 미소는 무해해 보인다. 꼭 누군가를 기분 좋게 하기 위해서만 존재하는 달달한 디저트처럼, 해치는 법은 모르고 사는 이같다.
"진심이에요."
기어들어가듯 작은 목소리로 말하는 지금도 그렇다. 자신의 감정을 죄 꺼내 늘어놓는 모습이 무해하다 못해 순진해 보인다. 사랑 받고 자라 환히 웃는 법과 사랑 주는 법을 자연스레 익힌 사람처럼, 웃는 모습이 자연스럽다.
"비오는 날의 어떤 부분을 좋아해요, 제냐는?"
투명한 눈동자가 당돌하게도 당신을 마주본다. 제가 빛이니 어둠이 두렵지 않다는 양 군다. 얼마든지 읽혀도 상관 없다는 것처럼 바라본다. 당신과는 정반대의 사람 같아 보인다. 어두운 길 가는 사람 길 잃지 말라 창문가에 불을 환히 밝혀놓았다. 어두운 밤 헤매지 말라 하늘에 별 총총 띄워놓았다. 꼭, 그런 사람 같다.
한참을 당신의 답 기다린다. 재촉하거나 말을 덧붙이지도 않고 당신의 선택을 기다린다. 그러다 목소리가 들려오노라면, 그제서야 종종걸음으로 당신의 뒤를 따라가며 "같이 가요!"하고는 종알거린다. 띔박질에 가까운 걸음으로 뒤따라가자면, 어느새 도시의 냄새가 훅 끼쳐온다. 저물어가는 몇몇 것들의 소리가 거리를 잔잔히 채운다. 여자는 서느다란 고요에 제 입을 꾹 다물어버린다.
그러던 여자는 제 시야에서 흔들리는 것을 보고서야 정신을 되찾는다. 내밀어진 담뱃갑의 로고를 유심히 바라본다. 하나 꺼내가려던 찰나, 저를 향한 질문에 고개를 들어 당신을 올려다 본다.
"그런 소리 자주 들어요. 잘 안 피게 생겼다고들 하더라고요."
옅게 웃는다. 빛을 등지고 있어서인지, 표정이 흐릿하다. 확실히 여자는 담배와 친하게 생긴 인상은 아니었다. 입에 무는 것은 달달한 막대사탕이 전부일 것만 같아 보였다. 그렇 것 치곤 담배를 꺼내들어 입에 무는 일련의 동작이 매끄럽다.
"가끔 피곤 해요."
여자는 불 좀 빌려달라 말하듯 턱을 살짝 치켜든다. 그제야 얼굴에 빛이 닿는다. 조금 지친 낯이다.
#말도 없이 늦어서 미안...추석이라고 내려갔다 올라갔다 하니까 정신이 하나도 없었지 뭐야. 너참치는 즐거운 연휴 보내고 있길 바라!
히어로의 삶도 만만치 않네. 힘내라, 힘내. 일단 마시고, (자연스럽게 술을 따라주고 턱을 괸 채 웃는다.) 빌런 협회는 언제든지 열려있다, 친구야. 적어도 지랄맞은 위계사회는 없더라고. (불판 위의 고기를 구워 당신의 접시에 올려주고는 자신은 집게로 집어든 고기를 입에 넣는다. 중간에 느껴지는 시선에 후드를 뒤집어쓴다.) 유명인이랑 고기 먹기 힘드네 거 참.
아니, 저기… (두 눈을 깜빡이며 상대를 살핀다. 다소 당황스러워하는 얼굴.) 일단 따라주니까 마시긴 하는데요. (확신 없는 얼굴로 잔을 매만지다 단숨에 들이킨다.) …건물에 감시 카메라라도 달아놨나? 오늘 뒤지게 깨진 건 어떻게 알았대. (딱히 놀란 기색 없이, 태연히 말을 받아치며 대답한다. 그러다 제 고기를 집어먹는 당신을 얼빠진 얼굴로 응시한다.) 그거 내 고기인데? 고기값 줄거예요? 뼈 빠지게 번 돈으로 산 건데? (다소 인색하다... 주변에서 느껴지는 시선에 다시 한 번 볼캡을 눌러쓰며 젓가락으로 고기를 집어든다.) 내가 아니라, 그 쪽 문제인 거 같은데. 얼마 전에 얼굴 팔리지 않았나? (웅얼거리는 히어로) 근데 담력 대단하다. 어떻게 대놓고 찾아올 생각을 다 해요? 민간인 많아서 내가 깽판 못 칠 줄 알고 그러나? (불판에 시선을 고정한 채 다시 고기를 집어먹는다.)
(소주를 한 번에 쭉 털어 삼킨다. 쓴 액체가 식도를 태운다. 걸어온 길에 대한 회의감과 함께.) 내 신념이 잘못된 건가? (자유로워 보이는 친구를 바라보다 모자를 눌러 쓰고 왔음에도 느껴지는 시선들에 쓰게 미소짓는다.) 너 여기 있는 거 알려지면 안되는데. 룸으로 갈 걸 그랬나. (후드를 더 푹 눌러 씌워주며 얼굴을 찌푸린다.) 내 방 갈래?
바다를 닮은 푸른 빛이 맴돌기는 하지만 평범한 검은 머리카락과 평범한 검은 눈, 그리고 평범한 학교의 교복이다. 검은 머리카락이 물 속에서 나풀거리며 명찰이 있을 가슴팍을 가리고 있어 이름은 확인하기 힘들었다. 평범치 않은 부분이야 이따금씩 느적거리는 꼬리 지느러미가 있는 치마 아래 부분이다. 투명하고 맑게 비치는 물 속에서 훤히 보이는 지느러미는 아마도 파랑색인 것 같았다. 빛이 비추거든 비늘이 반짝거렸다. 물 속에 있던 인어는 당신과 눈이 마주쳤고, 그때 당신에게 들린 목소리는 울먹거리는 것 같기야 했다지만 예쁜 목소리임이 확실했다. 신기한 일이다. 인어는 입을 움직이지도 않았는데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인어는 곧 수면 위로 고개를 내밀었다.
“인어 처음 봐? 대답 안 해?”
물 속에서 흩날리던 머리카락이 착 내려 앉는다. 아무도 없는 줄 알고 대낮임에도 이런 모습으로 무방비하게 꼬리를 내놓았는데 난데없이 누군지도 모르는 자의 등장이라니 달갑지 않았다. 경계심이 말투와 목소리에 뚜렷히 드러났고, 그리고 차마 숨기지 못한 불안도 함께했다. 겁을 내고 있는지 가시를 돋친 고슴도치가 벌벌 떨고 있기라도 하는 것마냥 말투와 목소리만이 날서있었다. 주먹을 꼭 쥐고 있는 두 손이 그 증거였다.
하늘은 맑고, 바람 한 점 없는 이런 날씨엔 산책을 하지 않으면 역시나 곤란하단 말이지. 하지만 아무런 의미없이 그저 한가한 시간을 때우려고 여기까지 걸어온 것은 아니다. 애초에, 여기 산책 코스가 아닌걸? 그렇게 얼핏봐도 낡아보이는 책을 들고 바닷가에 온 내게 놀랍게도 첫 시도만에 좋은 기회가 주어졌다.
" 도감번호 22번, 인어. 인외의 존재이지만 인간들 사이에 섞여 생활하기에 그 존재를 쉬이 눈치채기 어렵다. 가끔 인적이 드문 바닷가에서 그 존재를 확인할 수 있는데, 상당히 아름답다고 한다. "
바닷가의 인어가 내게 뭐라뭐라 말하는 것 같았지만 잘 들리지 않아 조금 가까이 다가간다. 확실히 아름다운 외모라 사람들이 인어에 왜 홀린다고하는지도 알 것 같았고. 그리고 인어들은 대게 자신들의 정체를 들키는 것을 두려워한다, 라고 여기 적혀있네.
" 안녕. 혹시 실례지만 네 그림을 여기에 좀 그려도 될까? "
증조할아버지부터 내려오던 이 책은 여러 인외의 존재들의 정보와 그림이 실려있다. 그냥 간단하게 도감이라곤 하지만 요괴라는 말은 쓰지 않는다. 의미가 안좋잖아, 대부분 인간한테 무해한데. 하지만 역시 인외의 존재를 만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라 많은 그림들이 비어있다. 그렇기에 나는 이 그림들을 채우기 위해서 이리저리 돌아다니고 있는 것이다. 물론 학생이라 이 근처가 전부지만.
" 너무 경계하지 않아도 돼. 나는 조금 특별한 인간이고 특이한 사람일뿐이니까. 여기에 그림만 그리고 갈께. "
도감번호 22번. 순간 심장이 쿵 내려앉는 기분이 들었다. 예로부터 인간에게 정체를 들켜서, 인간과 얽혀서 좋은 끝을 본 인어는 드물었다. 들려오는 이야기만 해도 그렇다. 육지에, 인간 사회에 인권이라는 개념이 생기기 전에는 같은 인간조차 구경거리와 희롱거리로 삼아 유희를 즐기던 동물에게 좋은 감정은 없다. 수면 위로 고개를 내밀었던 인어의 몸이 뒤로 물러난다. 수면에 이는 파동은 작은 파도 뿐만이 아니라 몸의 떨림도 그 원인이었다. 저 인간의 손에 붙잡히면 해부당하고 마리라. 눈꼬리에 금방 굵은 물방울이 맺히더니, 아룽거리다 바다 위로 데굴 굴러 떨어진다.
“그림만 그린다는 걸 어떻게 믿어. 어린 인간은 더 잔인해.”
이제는 아예 겁을 먹어 움츠린 인어는 날이 선 목소리조차 내지 못 했다. 눈물 방울은 계속해서 맺히고 떨어지고를 반복하였으며, 인어는 도망칠 방법을 강구 중이었다. 바닷속으로 도망쳤다가는 바닷속 저 깊이 원래 인어들이 나고 사는 곳을 들켜버릴까 걱정되었고, 육지 위로 올라 달려보자니 자신의 인간 다리를 다루는게 서툴었다. 어설픈 뜀박질로는 금방 잡히고 말텐데, 아무리 생각해도 뾰족한 방도가 생각나지 않아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인간 앞에서 눈물을 보이는 것조차 수치스러운데 울음 소리까지 내기 싫었다.
“이러니까 계속 바다에 살고 싶었던건데….”
이것은 인어의 목소리가 당신을 만나기 전부터 목소리가 울먹거리던 이유였을테다. 조그맣게 울먹거린 인어는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는 채로 푸른 하늘 아래서 눈물 방울을 반짝거렸다.
어, 우는거야? 우는거야?! 정말 단순하게 그림만 그리러 왔는데, 말 몇마디 걸었을뿐인데 갑자기 울어버린다. 아직 아무런 짓도 안했는데 울어버리면 나도 당황할 수 밖에 없다. 펜을 들고 있던 손이 너를 향해 있다가 당황해 펜 끝이 살짝 떨린다.
" 너도 어리잖아! 너 교복이 근처 고등학교 교복인데, 나는 바로 옆학교에 다니고 있거든. "
어린 인간이 더 잔인하단 말에는 동의하는 편이고 지금도 인어가 있다는 말이 들려오면 잡아가려고 난리가 나겠지. 하지만 나는 누구에게도 이 사실을 말할 생각이 없었다. 증조할아버지부터 내려오는, 도감을 채워넣는 사람들이 무조건 지켜야하는 것이 있기 때문이다.
'그들을 무조건 지켜줄 것'
아버지가 불의의 사고로 돌아가시고 내 앞으로 떨어진 막대한 유산은 그저 내가 놀고먹으라고 주어진 것이 아니다. 모든건 목적을 갖고 있으니 나는 그것을 지켜야한다. 그게 할아버지가 어떤 것과 한 약속이라고 했으니까. 그 댓가로 막대한 부를 약속 받았고 아버지까지도 그 의무를 성실히 하고 계셨다.
" 정말 그림만 그릴께. 정 못믿겠으면 어떤 방식으로 약속을 해도 좋아. 인어는 인어만의 방식이 있을테니까. "
증조할아버지의 단순한 호기심에서 시작된 도감은 이제 그것들을 지키기 위한 서적으로 그 목적이 변했고 아직도 채워지지 못한 많은 그림들을 채워넣어야할 의무가 있다. 내가 채워넣을 수 있는 첫번째 페이지를 이렇게 쉽게 날려보낼 수 없지.
이제는 학교까지 들켜버렸어. 학교를 뒤져서 학생 하나 찾아내는게 어려운 일도 아닐테고, 이제 어딘가로 끌려가서 연구 대상이 되는 건 시간문제야. 몸이 차갑게 식는 기분이 들었다. 인어가 바닷속에서 저체온증으로 죽었다는 웃긴 이야기가 생기겠다고 생각될 정도였다. 인어는 하염없이 눈물만 흘리나 싶더니, 손을 들어 눈가를 훔쳐냈다. 눈가는 금방 빨갛게 올라왔다. 인어의 눈물은 진주가 된다는 허무맹랑한 이야기 때문에 잡혀가 죽은 인어도 있는데, 인간이 바다를 오염시켜서 인간들과 섞여 살아야한다고 했다. 바다에는 쓰레기가 넘실거리기 시작했고 아무리 깊고 머나먼 바다로 떠나봤자여서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그래서 인어는 성년이 되면 육지로 올라온다.
“저주같은 거….”
그런 거 할 줄 알 리가 없잖아. 옛날에야 인어로서 계속 바다에 살아가니까 다들 배우고 알아뒀겠지만, 지금은 다들 성년이 되면 육지로 올라오는데 저주같은게 계속 이어진다고 해도 알고 있지는 않았다. 인어는 훌쩍거리는 소리를 내다가 당신을 올려다보았다. 내가 죽음을 감수하고 너를 믿어야한다면, 너도 죽음을 감수하고 나를 믿어줘. 물기어린 손이 당신을 향해 뻗었다.
“너도 들어와서 약속해. 숨 모자르면 내 숨 나눠줄게.”
인간도 바닷속에서 숨 쉴 수 있는 방법. 인어의 숨을 나누면 된다. 이 방법으로 여러 인어들이 여러 인간을 살렸다. 단순히 손가락만 걸고 약속하겠지만, 바닷속에서는 쉽사리 죽음에 이를 수 있는 인간에 불과한 당신이 바닷속까지 따라 들어와준다면 그림만 그리겠다는 말에 대한 믿음은 가질 수 있을 것 같았다.
아, 나랑 비슷해보이는데 나보다 나이가 많다던가 .. 아니면 인어는 인간보다 성년이 되는 시간이 짧은건가? 뭐가 됐던간에 내가 잘못한 것도 없는데 저렇게 울어버리는게 어이가 없으면서도 좀 마음이 아프다. 인간은 자신과 다른 것들을 배척해오곤 했으니까. 호기심이던, 악의던간에. 목숨을 걸어야하는 일이라고 도감 가장 첫 페이지에 써있는 할아버지의 메모처럼 인간에 대해 무한한 적대감을 가진 것들도 존재하곤 했다. 기본적으론 무해하다고해도 적대감을 가지는 것은 별개의 일이다.
" 물 안에 들어오라고? "
흠칫한다. 육지는 나의 영역이지만 물 안쪽부턴 인어의 영역, 상대가 적의를 품으면 그대로 목숨을 잃을수도 있다. 거기에 어릴때 강에 빠져서 거의 죽기 직전까지 갔던 기억이 스멀스멀 올라온다. 바다는 서서히 얕아진다곤 하지만 아직까지도 물이 허리 위로 올라오면 숨이 막히는 기분이 드는 나에겐 너무나도 나쁜 제안이다.
" 아니, 정말 나는 나쁜 짓을 할 마음이 없는데. "
라곤 말해도 나도 상대방의 마음을 알 수가 없어서 방어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는 주제에 이런 말을 하는게 설득력이 없다. 상대방이 하는건 뭐든 하겠다고 해놓고 물이 무서워서, 인어가 무서워서 이러고 있는게 어이가 없기도 하다. 물에 젖은 손이 나를 향해 뻗어왔고 흔들리는 눈으로 그 손을 바라보던 나는 숨을 크게 들이쉬고 서서히 인어에게 다가가기 시작했다. 자갈이 널린 해변을 지나서 신발에 파도가 스친다. 찰박, 찰박하던 소리는 발가락 사이사이로 물이 들어차는 느낌과 함께 사라지고 차가운 느낌이 발목부터 서서히 올라온다. 인어가 있는 곳은 더 깊은 곳이라 금방 허리까지 차오른 바닷물에 잠시 걸음을 멈춘다.
" 나 정말 물이 무섭거든? 지금도 심장이 쿵쾅쿵쾅거려. "
여러번 심호흡을 해도 심장박동이 가라앉을 생각이 없어보인다. 몇발자국을 더 가야하는데 한발자국도 내딛을 수가 없어서 그저 너를 바라보고만 있다. 아빠, 어쩌면 생각보다 아빠를 일찍 보러갈 것 같아요. 주먹을 불끈 쥐고 눈을 질끈 감고, 나는 천천히 한발자국을 내딛는다. 차가운 감촉이 서서히 상반신을 덮어가고 있는 것을 느꼈지만 보지 않으면 조금은 괜찮은 것 같다. 그렇게 눈을 감고 손을 뻗은채 네가 있을 것 같은 방향으로 조금씩 나아갔다.
그녀는 추위로 얼어붙은 나무 사이를 다람쥐마냥 돌아다니며 습기를 머금은 것 사이에서 능숙하게 크기가 있고 상태 좋은 나뭇가지들을 골라내더니, 짧은 시간에 제법 많은 양을 품에 안아 들고서 작게 중얼거렸다.
" 이 정도면 되려나? "
꼼꼼하게 골랐지만 그럼에도 성이 안 차는지 여자는 나뭇가지의 이곳저곳을 돌려보며 한참을 확인하고 나서야 지금까지 향하던 방향과는 정 반대 방향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발목까지 -사실 발목보다 조금 더 높게 쌓인 눈 위를 한 걸음 한 걸음 내딛으며 앞으로 나아갔다. 세상은 온통 눈으로 덮여 새하얗고, 비슷한 생김새의 나무로 들어차 있었다. 이처럼 사방이 똑같은 풍경 속에서도 그녀의 발걸음에는 망설임이 없었다. 오히려 지도를 꺼내지도 않고 주변 한 번 둘러보지 않는 그녀는 마치 이곳의 지리를 전부 꿰고 있는 것 같아 보였다. 그렇게 한참을 걸어가던 그녀는 저 멀리 작은 빛이 보이기 시작하자 슬며시 미소를 지었다.
" 나 왔어요-."
그녀가 도착한 곳은 나무로 지어진 -그러나 정교하고 튼튼하게 지어진 듯 보이는 집의 문 앞이었다. 창문 밖으로는 모닥불의 밝은 빛이 새어 나와 바닥에 쌓인 눈을 주홍색으로 물들이고 있었고, 작은 틈으로는 따뜻한 코코아 향기도 조금씩 새어 나오고 있었다. 그녀는 서둘러 어깨로 문을 밀고 안으로 들어갔다.
산에도 겨울이 찾아왔다. 마을 뒷편에 있는 야트막한 산이지만 숲이 우거지고 생각보다 위험한 동물들이 많아 이곳의 산장은 없어서는 안될 중요한 곳이면서도 위험하다. 마을 대대로 산장지기를 맡아온 그의 집안이었고 그도 산장지기가 된지 많은 시간이 흘렀지만 위험할 때가 종종 있었기에 겨울에는 입산을 금한다. 하지만 그런 그에게도 말릴 수 없는 사람이 한명 있었으니.
" 겨울에는 위험하니까 오지 말라고 했잖아. "
눈이 오지 않아도 위험한 겨울산에 눈이 이렇게나 잔뜩 왔는데도 올라오다니. 정말 산신령님이 지켜주기라도 하는 것인지 그에겐 항상 큰 의문이었다. 자신도 돌아다니면서 곰을 종종 만나는데 어떻게 그녀는 한번도 그럴때가 없는지. 그리고 그녀는 항상 땔감이 다 떨어져갈때쯔음 땔감을 한가득 들고 오곤 했다. 마치 여기 사정을 속속들이 다 알고 있는 것처럼. 이것도 그에게는 더할 나위 없이 궁금증이 생겨가는 항목이다.
" 곰이라도 만나면 어떡하려고 그래. "
이렇게 말한 것도 수십수백번이라 톳씨도 안먹힐 것을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할 말은 해야하는 그였다. 자연스럽게 의자를 내어주면서 그녀에게 권유한 그는 코코아 가루를 컵에 넣고선 난로 위의 주전자를 들어 붓는다. 은은하게 퍼지던 코코아 향기가 더욱 진해지고 여자에게 코코아를 건네준 산장지기는 다시 본래 앉아있던 곳에 등을 깊숙하게 묻는다.
" 여기 올라오는 것도 만만치 않을텐데 안힘들어? "
물론 야트막한 산이라 산세가 험하지는 않고 산장까지 오는 길도 잘 닦여있어서 평소엔 괜찮지만 지금은 눈이 잔뜩 와있을때다. 산장까지 올라오는 길은 대충 눈을 치워두긴 했지만 그래도 올라오는게 힘들었을텐데 항상 가벼운 몸놀림으로 슉슉 올라오는 것이 여간 신기한게 아니라는 생각을 항상 하고 있었다.
그녀는 마치 영역을 과시하는 고양이처럼 뿌듯한 표정과 당당한 말투로 말했다. 그리고 저가 없었으면 그가 귀찮게 나무를 구하러 나가야 했을 거라면서 뻔뻔스럽게 칭찬까지 요구했다.
" 그리고, 이렇게 혼자 있으면 심심하니까요. "
상대는 심심하다는 말이나 의견을 내비치지도 않았는데 잘도 혼자 그렇게 이야기하더니 그에게 물어보지도 않고 곧바로 자연스럽게 모닥불 앞으로 향했다. 곧 불에서 얼마의 거리를 두고 천을 깔더니 모아 온 나뭇가지를 말리려는 듯 그 위에 가지런히 내려놓았다.
" 지금까지 잘 피해왔으니까 괜찮아요. 전 여기서 곰의 'ㄱ'자도 본 적 없는걸요? 그리고... "
가져온 땔감의 정리를 마친 그녀는 그가 권해준 의자에 앉으며 수십수백 번이나 들어온 그의 말을 수십수백 번째 자연스럽게 넘겨버렸다. 곧 고맙다 말하며 코코아를 받아들고는 오히려 중요한 비밀이라도 이야기하려는지 한껏 목소리를 낮추고 몸을 조금 숙이며 당신에게도 몸을 낮추라 팔랑팔랑 손짓을 해 보였다. 이 날씨에 이곳에 올 사람도 거의 없고 집에도 이들 이외의 외부인은 없을 테지만, 그녀의 행동은 마치 근처의 누군가가 듣는걸 경계하는 것처럼 보였다. 곧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그녀가 그에게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 사실 전 눈의 요정이라서요. 곰이랑 만나도 제가 이겨요. "
어른이 되어서는 한참 작은 어린아이들이나 할법한 -심지어 이젠 어린아이들도 하지 않는 농담을 진지하게 말하더니 결국 본인도 우습게 느껴졌는지 얼굴에 숨길 수 없는 웃음기가 묻어났다.
" 전혀요-. 음, 사실 힘들지 않은 건 아니지만, 이 코코아만 마시면 전부 사라져서 괜찮아요. "
바로 여기 앉아서요. 자신의 지정석이라도 되는 것 마냥 앉은 자리에서 발을 톡톡 구르며 장난스레 웃었다. 눈을 좋아하는 성격 탓에 어렸을 적부터 겨울만 다가오면 항상 이리저리 쏘다니며 눈을 헤치고 다녔던 탓인지 이런 날씨는 그녀에겐 놀이터나 다름없었다. 사실 이곳에 찾아오기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는 딱 한 번, 눈에 빠져 넘어질 뻔했던 날이 있었지만 이것도 하루가 지난 후에는 언제 그랬냐는 듯 이전보다 더욱 자유롭게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어쩌면 이런 면에서는 눈의 요정이라는 말도 틀리지는 않는 듯 싶었다.
말해도 듣지를 않으니 포기를 할법도 한데 산장지기는 그럴 생각이 없어보인다. 보통의 산장지기의 이미지와는 다르게 많이 젊어보이는 그는 이 눈 앞의 여자가 겨울에는 안전하게 따뜻한 집안에 있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겨울엔 산장에서 지내야하는 그도 내심 그녀가 올라오는 것을 바라고 있었지만 철저하게 숨기고 있을 뿐이다.
" 그래도 다음부턴 올라오지마. "
항상 이런식으로 잔소리가 끝이 나지만 또 다음에 올라올테고 같은 내용이 반복된다. 그렇게 깊은 한숨을 내쉰 그는 여자가 늘어놓은 나뭇가지들을 솜씨 좋게 다시 놓는다. 조금 두께가 있는 것들은 앞쪽으로, 얇은 것들은 뒤쪽으로. 빠르게 일을 마친 산장지기는 여자가 늘어놓는 말에 헛웃음을 지어버린다. 눈의 요정이라니 정말 어이가 없다는 생각을 한다.
" 그래도 한번도 곰을 안만나는 것을 보면 정말 뭐가 있나봐. "
물론 곰을 만나는게 쉬운 일은 아니고 주기적으로 총성을 내서 곰의 접근을 막곤 하지만 겨울이라 먹잇감이 부족한 곰이라 겨울에 몇번은 마주치곤했다. 산장지기도 약간의 긴장을 하고 지내는 곳에서 저렇게 천진난만한 태도라니 본인은 아니더라도 정말 눈의 요정이 지켜주는거 아닐까, 하고 산장지기는 생각한다. 그래도 곰이랑 만나는 일은 없게 해야하니까 내려가는 길엔 산장지기 본인이 동행할 생각이다.
" 나도 어릴때 아버지를 따라서 산장을 올라와서 마시는 코코아가 제일 맛있었어. "
산장을 물려받기엔 이른 나이였지만 전 산장지기, 그러니까 남자의 아버지는 산속의 조난자를 구하러 갔다가 곰에게 습격 당해 명을 달리했다. 산에 가까운 마을은 산장을 지키는 자가 없으면 겨울산의 곰이 마을로 내려오는 일도 있었기에 누군가는 산장을 지켜야했고 결국 대를 이어서 그가 선택된 것이다. 물론 언젠간 자신이 맡아야하는 산장이었기에 불만은 없었지만 그도 긴 겨울을 혼자서 보내야한다는 사실에 간혹 외로움을 느끼곤 했다.
" 이장님은 잘 계시니? 듣자하니 몸이 안좋으시다고 하던데. "
마을 소식은 주기적으로 올라와서 식량을 내려놓고 가는 마을 사람들에게 들을 수 있다. 곰의 습격에 대비해서 여러명이 우르르 몰려와 짐을 내려놓고 안부를 주고 받곤 하는데 산장지기는 그때를 가장 좋아했다. 음식이 생기는게 아니라 사람들이 잔뜩 있어서. 하지만 이렇게 혼자 올라오는 것은 위험하다는 것 또한 그가 갖고 있는 생각이다. 거실 겸 부엌과 방 두개로 이루어져있는 작은 산장에서 그는 말린 육포를 가져와 뜨거운 물에 불린다. 산속이라 혹여 불이 날까 난방을 제외하고서 불은 최소한으로 쓰고 있었기에 주로 먹는 것도 이런 육포 같은 저장식들 뿐이다. 그러다 여자를 바라본 산장지기는 찬장에서 작은 과자를 꺼내서 건네준다.
" 너가 좋아하는 과자지? "
저번에 마을 사람들이 가져왔던 것이다. 최근에 눈이 많이 와서 식량을 가져다주는 횟수가 줄어서 이런 간식거리는 아끼고 있었지만 여자에게도 육포를 줄수는 없었으니까.
진지한 척 잠깐 고민하는 모습을 보이더니 곧바로 가볍게 대답을 내놓았다. 그러곤 장난스레 거만한 표정을 보이면서 코코아를 한 모금 마신다. 지금 무슨 말을 하든 그녀는 기어코 다시 이곳까지 올라올 테니 사실상 어떤 대답이 나오든 무의미한 일이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그의 한숨에 숨죽여 웃더니 더이상 말도 않은 채로 마치 한 폭의 아름다운 명화를 눈앞에 둔 사람처럼 눈을 빛내며, 나뭇가지를 정리하는 그의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크기별로 착착 정리되는 나뭇가지들을 바라보는 건 언제나 신기하고 즐거웠다.
그녀는 뭐가 있나보다는 그의 말에도 그저 조용히 미소 짓기만 했다. 사실, 뭐라 말해주고 싶어도 그녀 역시 자신이 곰을 만나지 않을 수 있었던 정확한 이유는 알지 못했다. 어느 날은 혹여 이곳으로 올 때 가지고 있던 무언가가 곰을 쫓아내기라도 하는 건가 싶어 산장으로 향할 때 들고 갔던 물건들을 전부 떠올려보았지만, 그녀가 가지고 있던 물건이라곤 애초에 마을 사람들도 가지고 있을 것들 뿐이었다.
" 어쨌든, 덕분에 이렇게 만날 수 있잖아요? "
결국 그녀가 내놓은 건 그의 말에 대한 대답이 되어주지 못했다.
" 그럼 이건 대대로 내려오는, 산장지기의 특별한 코코아네요? "
그녀는 그를 바라보며 손에 들린 코코아잔을 조금 들어보였다. 자신이 지금보다 훨씬 어렸을 적에는 곰으로 인한 사람들의 죽음을 겪고, 또 겨울이 오면 산으로 올라가는 그들을 보며 산에서 떨어진 곳으로 마을을 옮기면 곰으로 사람이 죽는 일도 없고 누군가가 외롭게 산으로 올라가지 않아도 될 거라는 생각을 했었다. 그리고 이장님에게 찾아가 철없이 마을을 옮기자 울며 떼를 쓰기도 했었다. 물론 어느 정도 나이가 차고 나서는 그런 말을 꺼내지 않게 되었지만, 오히려 지금은 겨울이 되면 직접 산장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 약을 드시고, 지금은 조금 나아지셨어요. 별다른 일만 없다면 이제 괜찮을 거라곤 했지만... "
그녀도 이장님의 상태가 쉽게 나아지지 않을 거라는 것은 직접 두 눈으로 보았기에 알고 있었다. 마을 사람들이 하는 괜찮다는 말의 대부분이 사실은 희망 사항에 가깝다는 것 역시 모르지 않았다. 다른 계절 -이를테면 여름이나 가을보다 유독 겨울에 앓는 병들이 더 지독하고 끈질겼다. 이장님이 앓고 계신 병도 원래는 그리 위험한 것이 아니었지만 나이 때문인지 계절 때문인지 약을 먹어도 큰 효과를 보이지는 못하고 있었다.
" 아, 맞아요! 좋아해요! "
그녀는 컵을 내려다보며 잠시 조용히 있다가, 그가 과자를 건네자 반가운 걸 본 것처럼 좋아하며 말했다. 하지만 말과 다르게 그녀의 손은 그가 준 것을 받을 생각이 없어 보였다. 오히려 본인이 들고 온 가방을 집어 그곳에 손을 넣고 무언가를 꺼내려했다.
" 하지만 오늘은 괜찮아요. "
" 바로, 이게 있으니까요. "
그녀는 가방 안에서 와인병과 주머니를 꺼냈다. 그녀가 꺼낸 주머니 안에는 사탕 조금과 비스킷, 아몬드와 호두, 작게 잘려 포장된 치즈 조각 따위가 가득 들어있었다. 그러면서 안주가 되려면 과자도 좋지만 육포가 더 좋지 않겠냐며 웃었다. 가져온 와인은 아직 손대지 않은 새것인지, 살짝만 흔들어도 제법 묵직한 찰랑거림이 느껴졌다. 내려갈 생각을 하고는 있는 것인지 아주 작정을 하고 가져온 듯 보였다.
어차피 그도 여자가 말을 들을거란 생각은 안하고 있었다. 이런 말을 한다고 올라오지 않을 사람이라면 진즉에 올라오지 않았을 것이다. 저 장난스럽게 보여주는 표정만 보아도 그녀가 앞으로도 쭉 산을 오를 것이라는걸 누구나가 알 수 있을테니까. 그리고 산장지기는 그녀의 말에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긍정한다. 아무리 홀로 지내는데 익숙해졌다고해도 사람인 이상 외로움을 느낄 수 밖에 없으니까. 내심 그녀가 올라오지 않으면 어떡하지, 하고 남모를 걱정을 하기도 했다.
" 아버지도 할아버지와 함께 마셨을테니 정말 그 말이 맞을지도. "
물론 들어가는건 평범한 코코아에 불과하지만 이곳에서 마시는 코코아는 특별하니까. 어릴땐 산장에 올라가는게 무섭기도 했고 힘들어서 가기 싫다고 칭얼대곤 했지만 산장에 올라와서 마시는 코코아와 아버지가 내어주시던 간식들을 먹으면서 힘들었던 것들은 금방 잊어버리곤 했다. 간혹 곰을 마주치면 정말 무섭기도 했지만, 그때마다 지켜주시던 아버지가 지금도 생생히 기억난다. 그러다 여자의 말에 산장지기의 얼굴이 조금 어두워진다.
" 이장님도 나이가 많으시니까, 슬슬 아들에게 자리를 물려주시면 될텐데. "
이장님은 마을에서 가장 나이가 많으신 분이었지만 나이에 비해서 상당히 정정하신 편이었다. 하지만 최근에는 기력이 쇠하셔서 한번 아프시기 시작하시더니 좀처럼 나을 기미가 보이지 않아 비록 산장에 올라와있었지만 그에게도 꽤나 걱정거리다. 마을 일은 아들에게 맡기고 편히 쉬셔도 괜찮을텐데 고집만큼은 나이가 들어도 수그러들 기미가 보이질 않는다.
" 그건 또 어디서 가져왔어? "
요즘 같은 세상에 와인 구하는게 어려운 일은 아니지만 그래도 저렇게 묵직한걸 보면 무거울텐데 저런걸 들고 여기까지 잘 올라오다니. 산을 매일같이 오르락내리락하는 산장지기에게도 그것은 미스테리한 일이었다. 그가 창 밖을 바라보니 눈이 조금씩 다시 내리고 있었고 바깥 기온을 보여주는 온도계가 조금씩 내려가고 있었다. 다시 추워지려는걸까, 산장지기는 그렇게 생각하며 새 컵을 두개 가져오며 말했다.
" 조금만 마시는거야. "
그녀가 가져온 여러 안주거리들은 여기선 꽤 먹기 힘든 것들이라 맛있어보이긴 했지만 산장을 지키는데 술에 취해버리면 곤란하다. 무엇보다 하산할때 산 입구까진 같이 내려가줄 생각이라, 적어도 제 정신을 붙잡을 정도까지만 먹어야했다. 하지만 산장에서도 혼자 술을 홀짝대며 마시는 산장지기에게 이 정도 술은 음료수에 불과한 것이긴 하다. 하지만 여자가 몸을 못가누면 산에서 위험해질수도 있으니까, 적당히 먹이곤 내려보낼 생각이었다. 그녀에게 술을 받아서 코르크를 딴 그는 잔에 반 정도 채워서 여자에게 건네주고 자신의 몫도 따라서 와인병을 바닥에 내려놓는다. 흘리지 않게 마개를 다시 꼭 닫은채로.
" 여긴 왜 자꾸 올라오는거야, 심심해서? "
마을이 좀 더 놀기 좋지 않나, 하고 생각해본다. 그의 친구들도 마을에 있고 그녀의 친구들도 마을에 있다. 그리고 음식점이나 술집 같이 놀기 좋은 공간이 마을에도 있는데 어째서 여기까지 힘들게 올라오는지 예전부터 궁금하긴 했다.
혼자서 멋대로 당신과 작은 -그리고 당신의 머리카락이나 눈 색을 똑 닮은 어린아이가 그와 함께 산장에서 코코아를 마시는 모습을 상상해 보는지 코코아가 담긴 자신의 잔을 눈높이까지 들어 올렸다가, 대충 아이의 키 높이 즈음까지 내려보며 웃었다. 그녀는 조용함이 아니라 사람의 말소리로 가득 찬 산장을 떠올리며 컵의 마지막 남은 코코아를 쭉 마셨다.
" 마을에 대한 애정이 남다르셨던 분이니까요. 아마, 쉽게 놓고 싶지 않으신 거겠죠. "
그녀의 눈동자가 슬픔으로 가라앉았다. 자리를 물려주면 된다는 그의 말에, 일은 자신에게 맡기고 쉬시라며 이장님과 그 아들이 실랑이하던 모습을 떠올렸다. 양쪽 모두 양보할 수 없는 것이 있었던 탓에 생기던 그 작은 다툼마저 이제 볼 수 없게 되었다는 사실은, 그녀에게 이장님의 병이 깊어지고 있다는 것을 자꾸만 일깨우게 만들었다. 그녀는 먹먹해진 기분으로 조용히 컵의 손잡이만 만지작거렸다.
" 당연히 집에 있는걸 가져왔죠. "
그녀의 부모님이 와인을 좋아했던 탓에 집에는 온갖 종류의 와인들이 보관되어 -정확히는 수집되어 있었다. 어렸을 적 자신과 동생에게 나이가 차면 조금은 꺼내 마셔도 된다고 했으니 한 병 정도는 가져와도 상관없을 것이었다. 그녀는 당신을 따라 고개를 들고 창밖에 내리는 눈을 바라보다가 자연스럽게 그가 가져오는 컵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그녀는 그가 잔에 술을 따르는 동안 작은 허밍과 함께 주머니를 펼쳐 안에 있는 것들을 골라먹기 좋게 분류해 두었다. 장작 타는 소리와 함께 들려오는 작은 노래가, 그녀가 지금 즐거워하고 있음을 드러내 주었다.
" 정말 조금만 마실게요. 걱정 마요-. "
잔을 건네받자마자 벌써 한 모금 마셔버린 그녀는 그에게 한 말과 다르게 혼자 병을 전부 비워버리기라도 할 것처럼 신난 듯 보였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마시는 술의 양이 많지도, 속도가 빠르거나 하지도 않았다.
" 음, 이유는 없어요. 그냥 보러 오는 거죠. "
보려는 것이 겨울 산의 풍경인지 하늘에서 내리는 눈인지 모를 애매한 말을 하면서도 그녀는 그 대상이 당신이라는 듯 분명하게 그를 보고 웃었다. 그녀의 친구는 분명 마을에도 있었지만 지금 이곳에도 있었다. 그녀는 항상 마주치는 마을의 친구들도 좋았지만, 좀 더 자주 -특히 겨울이 오면 보기 어려운 친구를 보러 오는 것도 좋았다. 그리고 그녀에게 친구란 이유가 없어도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고, 함께 맛있는 것을 먹는 그런 사이였다. 그렇게 그녀는 자기 좋을 대로 그를 친구라 정의하며 계속 그를 만나러 이곳에 왔다.
" 사실 이 귀한 것도 놓칠 수 없긴 하고요. "
그녀는 술 보다는 달콤한 것을 조금 -아주 조금 더 좋아했다. 그런 그녀에게 이곳의 코코아만큼 훌륭하고 완벽한 것은 없었다.
" 왜요? 설마... 내가 오는게 싫은 건 아니죠? "
그의 질문에 잘 대답하더니, 이번에는 그녀가 눈을 가늘게 뜨며 짓궂게 그를 향해 불쑥 질문했다. 말투는 마치 그를 추궁하는 듯 보였지만 목소리는 평소처럼 가볍고 약간 장난스러웠다. 이번에도 그녀는 무슨 대답을 듣더라도 -설령 정말로 싫다는 대답이 들려오더라도 웃어넘기고 말 것이다. 그리고 그의 예상처럼 언제나 그랬듯 자연스럽게 다음에도 이곳에 올 터였다.
하지만 그는 자신에게 아들이 생길거라곤 생각하지 않고 있었다. 지금까지 사귀어본 여자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마지막으로 사귄 여자가 벌써 1년여전이고, 그렇게까지 오래 사귀어본 기억도 없다. 어쩌면 인생에 여자라고는 연이 없는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최근에서야 하고 있는 그였다. 하지만 이렇게 외로운 산장지기라는 일을 대물려주고 싶은 생각도 없었다.
여자의 말에 산장지기는 그저 컵만 만지작거릴뿐이었다. 이장님의 아들은 남자의 아버지의 친구였다. 이장 자리 때문에 이장님과 실랑이를 벌이는 장면을 여러번 보곤 했다. 큰소리가 나거나 하지는 않았지만 아들분도 이장님을 닮아 한 고집하셨기에 그런 자잘한 다툼은 계속해서 이어오고 있었다. 이제 이장님의 병이 깊어지시고 언젠간 이장 자리를 물려받으시지 않을까, 산장지기는 말없이 생각한다.
" 그 집에는 술이 많았으니까. "
아버지가 가끔 그 집에서 와인을 얻어오곤 했던 사실을 남자는 알고 있었다. 이 술도 대충 집에서 가져왔을 것이라 짐작은 하고 있었지만 정말 거기서 가져왔다니. 그래도 술을 좋아하시는만큼 보는 안목도 좋다는 것을 그는 알고 있었기에 조금 기대에 찬 눈빛으로 와인을 바라본다. 그렇게 와인을 따라서 건네주자 말과는 다르게 신나보여서 빠르게 다 마셔버리는게 아닐까 싶어 걱정스런 눈빛으로 바라보지만 다행스럽게도 그럴 생각은 없어보여 남자도 와인을 한모금 마신다.
" 보러오면 나야 좋지만. "
산장에서의 삶은 외롭기에 여자가 온다면 그에게는 좋겠지만 그렇다고 위험한 겨울 산길을 계속 오르게 할 수는 없었다. 단호하게 다음부터는 올라오지말라고 하고 싶어도 외로움에 이미 지쳐버린 그가 그렇게 모진 말을 내뱉을 수 있을리가 없었다. 그래서 산장 밖의 눈을 밟는 소리가 들려오면 느껴지는 설렘도 더이상 막을 방도가 없었다.
" 싫은건 아니지만. "
벽난로의 불빛 때문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 때문인지 남자의 얼굴이 살짝 붉어진다. 자신이 하는 말이 부끄러워서일까.
" 싫다고 해도 어차피 올라올거잖아. "
그가 아는 여자는 그런 사람이었다. 지금도 저런 장난스러운 목소리로, 내가 싫다고해도 올라올께 뻔했다. 그만큼 뻔뻔스러웠지만 그만큼 능글맞은 사람이라 산장지기가 항상 말려들어가는 그런 사람이다.
고등학교 1학년 시절, 외국으로 떠나 바이올린 쪽으로 유학을 간 소년은 24살이 되어 7년만에 다시 돌아왔다. 어렸던 소년은 늠름한 청년이 되어 조국의 땅을 밟았다. 유학을 간 동안에는 단 한번도 한국으로 돌아오지 않았으나, 그래도 가족이나 친척, 친구들과는 나름대로 메일이나 전화를 통해 연락을 나눠 최소한의 교류는 유지했다. 그 덕분인지, 오늘 귀국할 때 마중 나온다는 친구가 있었고 사내는 정말로 나와줄지 나름대로 기대를 하며 소속을 밟고 자신의 짐이 들어있는 캐리어와 바이올린 케이스를 챙기고 공항을 걸었다.
"정말로 있을까."
최소한의 교류가 있었다고는 하나, 다시 만나는 것은 칠년만이었다. 과연 제대로 알아볼 수 있을지 조금 걱정을 하며, 혹은 그냥 말로만 그런 것이고 아무도 나온 것은 아닐까 생각을 하며 사내는 게이트 밖으로 나온 후 잠시 주변을 둘러봤다.
바로 얼굴이 눈에 보이진 않았는지 사내는 계속 고개를 두리번거릴 뿐, 좀처럼 발을 옮기지 못하고 있었다. 만약 있다면 인사를 하겠으나, 보이지 않는다면 한숨을 쉬고 밖으로 나갔을 것이다.
"역시 한두번은 돌아올걸 그랬나. 공부의 흐름이 끊어지면 안 될 것 같아서 쭉 있긴 했는데."
>>36 그런 친구가 있었다. 얼굴을 보지 않은지 7년은 넘었지만 이상하게도 자주 전화하고 톡을 주고 받아 고등학교 동창이라기보단 지인에 가까워진. 그렇다고 해도 공항 마중까진 좀 과하지 않아? 라고 생각했지만 의미없는 일이었다. 하필이면 그 친구가 귀국하는 날 모두들 기상천외한 일정들이 있어 마침 연주회를 마치고 쉬고 있던 수연에게 바톤이 돌아가고 말았던 것이다.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일지도 몰랐다. 오늘은 평일이고 전공을 살려 음악가가 된 친구들 말고도 졸업이며 회사에 일정이 잡힌 친구들도 않았으니까.
얘는 왜 하필 애들 졸업시즌에 귀국했담. 뭐 내 알바는 아니지만. 드뷔시의 달빛을 작게 허밍하며 버릇처럼 유리로 된 펜스를 손끝으로 두드리고 있던 그는, 게이트에서 하나 둘 사람이 빠져나오자 준비해둔 이름 석자가 적힌 피켓을 들었다. 사람이 어느정도 빠지고, 사람들 사이에 아직 두리번거리며 서 있는, 아마도 나와 동년배인 것같은 동양인 남성이 보였다. ...걘가? 마중은 나가겠다고 톡방에는 알렸지만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고 그냥 나왔을 가능성이 보다 컸기에 확신할 수는 없었다. 에라, 모르겠다. 아직 사람이 남아있긴 하니 이상해보이지는 않겠지.
코 안쪽에서부터 무언가 따뜻한 것이 흐르는 느낌이 들었다. 잠결에 무심코 콧물이겠거니 코 밑을 훑었고, 제대로 닦아내 손에 그 무언가 묻는 느낌이 들었다. 그런데도 다시금 코에서 무언가 흘렀고, 훌쩍거려도 계속 흐르는게 콧물이 아닌 것 같다 생각하자니 퍼뜩 깨달았다. 코피다!
"우와...?"
손으로 코를 막고, 고개를 뒤로 젖혔다가는 피로 기도가 막혀 질식사할 수도 있다나 뭐라나. 그래서 고개를 숙이고서 다급하게 휴지가 될만한 걸 찾아보려니, 내가 있는 곳은 계단이었다. 무릎에는 내가 필기한 노트와 문제집이 놓여있었고, 옆에는 교과서 두세 권과 다른 문제집 한 권, 또 다른 노트 하나. 맨 위에는 열려있는 필통이 놓여있었는데, 어째 배가 불렀어야 하는게 텅 비어 있었다. 밑에서부터 세칸 위쯤의 계단에 앉아있던 나는 그 아래를 살펴 보았다. 필통에 담겨 있어야할 펜들을 비롯한 필기구들이 죄 쏟아져있었다. 아직 취해있는 잠을 떨쳐내려 하며 생각해보니 도서관에서 시험공부를 하다가 졸려서 계단으로 나왔돈 기억이 났다. 그리고 여기에 앉아 차가운 계단 바닥에서부터 올라오는 냉기와 해가 뉘엿뉘엿 떨어짐에 따라 식고 있는 공기에 서늘함을 느끼면서, 잠이 깨는 것 같다며 공부를 이어하던 것 같은데... 깜빡 잠들며 필통을 엎고, 그것도 모르고 계속 졸다가 코피가 나서 깬 상황이라 추측한다. 그래, 지금 나는 코피가 나는 와중에 계단에다 내 짐을 어질러 놓았고 휴지가 없는 노답 상황이구나!
"오. 어. 아. 조, 좀비 아니에요!"
어이없는 상황에 실성이라도 한 것마냥 웃음이 새었다. 이걸 어쩌면 좋지, 노답이네! 코피 그치면 친구들한테 얘기해줘야겠다, 근데 일단 어쩌면 좋지. 화장실 갔다오는 사이에 누가 계단에 오면 이걸 치우려나. 으악, 이제 코피난 거 손에서 넘치겠는데! 얼 빠진 채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 하고 손으로 그칠 생각 없는 코피만 바치고 있었다. 정말 어쩌면 좋나, 주변에 휴지, 아니 그 대신할만 한 것이라도 없나 두리번거리다 누군가를 발견한다. 계단에 뻗어 있다가 코피 흘리며 일어나 웃음 소리를 흘린 사람이, 모르는 사람 눈에는 미친 사람으로 보일 것만 같아 다급하게 외쳤다. 좀비 아니라고. 근데 나 너무 쪽팔려! 차라리 좀비할래!
도서관보다는 창고에서 신나게 기타나 치고 싶었지만 이번 시험을 망쳐버리면 내 기타의 넥이 분질러지게 생겼기에, 억지로 도서실에 나와 공부를 하다가 오래간만에 가물가물한 내용들을 붙잡고 씨름을 하자니, 적응을 하지 못한 머리가 아파 도서실을 잠깐 빠져나와서 편의점에 들러 두통약과 에너지드링크를 마시고 다시 도서관으로 돌아오는 길이었다. 바깥 공기를 조금 쐬니 그래도 정신이 조금 돌아오는 느낌이 든다. 꼭대기층에 멈춰있는 엘리베이터를 부르기 귀찮아 층계참을 돌아 계단을 오르고 있자니, 문득 계단에 서서 어쩔 줄 몰라하고 있는 사람이 보인다. 무슨 일이야? 싶어서 후다닥 발걸음을 서두르는 찰나... 층계를 내딛은 발이 노트인지 코팅된 인쇄물인지 모를 뭔가를 밟고 쭐쩍 미끄러졌다. 그대로 세상이 한 바퀴 휘릭 돈다 싶더니 눈앞에 별이 번쩍했다.
"아이고......"
다행히 뒤로 나자빠져서 계단 아래로 굴러떨어진 건 아니었지만, 앞으로 고꾸라져서 책이며 노트들이 엎질러진 층계참에 헤딩을 박은 상황. 난간을 잡고 일어서도 시야가 흐릿하다. 제삼자가 보기에는 슬랩스틱 코미디겠지만 1인칭으로 보면 코앞에서 폭탄이라도 하나 터진 느낌이다. 놀라운 사실은 생각보다 그렇게 아프지는 않다는 점이다. 놀랍도다, 아세트아미노펜. 그 덕분에 생각보다는 별일 없었다는 듯이 난간을 붙들고 일어설 수 있었다(내가 느끼기에는). 오히려 나보다도 지금 어쩔 줄 몰라하는 저 사람이 좀더 곤경에 처한 것 같아 바라보면 온통 피에 절어있는 손이며 얼굴이.
내가 쪽팔린데다 무엇보다 엄청 실례되는 일이지만, 진심으로 깜짝 놀랐다. 난간을 붙들고 있어서 망정이지 이번엔 진짜 뒤로 나자빠질 뻔했다.
"우와악."
하고 놀라서 보면, 지금 귀신이나 헛걸 보는 건 아니고.. 코피를 흘리고 있을 뿐인 그냥 사람이다. 띵한 머리로도 매우 실례했다는 자각이 들어 반사적으로 사과가 나갔다. "어... 아니 그... 죄송..." 한꺼번에 여러 일이 벌어진데다 물리적 충격까지 받아 아직 멍한 뇌를 붙잡고 생각해본다. 내가 지금 휴지가 있던가? 하고 주머니를 뒤적뒤적거려 보면 잡히는 거라곤 손수건밖에. 오. 이 상황에서 쓸모있는 물건이잖아.
"저기요, 이거라도."
띵한 머리를 붙잡고, 손수건을 내민다. 그제서야 뭘 밟고 미끄러졌는지 발밑으로 시선을 돌릴 만한 정신이 든다. 노트니 참고서니 교과서니 하는 것들이 땅바닥에 쏟아져 있었다. 이것도 주워줘야겠네.
뭐, 뭐야. 좀비 아니라니까 왜 급해져? 사실 이쪽으로 발을 재촉하는 저 사람이 좀비라서, 내 피 냄새를 맡고서 여기로 오고 있던 거야? 내가 방금 소리 내서 위치 확인하고 오는 거야? 아니, 그럴 리가 없지. 좀비가 어딨겠어. 그렇지만, 지금 나와 가까워지고 있는 저 누군가 사람이든 좀비든 당황스럽기는 했다. 모르는 사람이 여기로 갑자기 왜 오는지, 뒤로 물러나고 싶었는데 그럴 수가 없었다. 책이고 펜이고 다 어질러놨으며, 자리를 피하려 했다가는 분명 코피가 발자국으로 남을 것이다. 옷이나 책에 묻으면 곤란하기 그지없다.
"힉?!"
여러모로 잠이 다 달아나버렸다. 계단에서 꾸벅꾸벅 졸다가 코피 흘리면서 깬 상황도 충분히 잠이 달아날 만 했지만, 내 바로 앞에서 넘어지며 엄청난 소리를 이 사람도 그렇다. 손이 모자라서 넘어지려는 모양새를 봤음에도 잡아주지도 못하고, 크게 넘어지는 소리에는 되레 흠칫 놀라버렸다. 놀라서 크게 떠진 눈으로 보았던 것을 되새겨보자면, 저 사람 분명 계단에 머리 박았다. 으, 아프겠다. 놀랐던 표정은 머리가 띵할 고통이 상상되어 찌푸려졌다. 어, 잠깐만. 다시 되새겨보자. 내 책인지 뭔지 밟고 넘어진 거 아냐? 어?!
"저, 괜찮..."
우와악. 괜찮냐고 물어보려던 나의 친절은 우와악, 하고 싹둑 잘려 나갔다. 좀비 아니라고 그랬는데! 사람이라고 외칠 걸 후회막심이었지만, 이미 지나버린 시간에서 엎어버린 말은 되 담을 수 없다. 예를 들면 저 사람을 놀라게 만들어버린, 지금 내 손에 뚝뚝 떨어지는 코피처럼. 하지 않아도 상관없는 사과를 받고 나니 고갯짓이라고 세차게 해주고 싶었지만, 코피 때문에 그냥 입꼬리만 끌어올리고 대답했다. "아니, 아녜요! 놀라실 만 한걸요..." 제가 좀 사연이 있거든요. 사람 놀라게 하려고 여기서 코피 흘리고 있던 것도 아니고, 누구 한번 계단에서 굴러보라고 책을 여기까지 가져온 것도 아닌데 어쩌다 이렇게 상황이 꼬여버렸네요. 구구절절하고 싶은 말은 많았지만, 사과가 먼저니 저 머릿속 어두컴컴한 구석에 던져 놓았다.
"어. 괜찮...... 고맙습니다."
휴지도 아니고 물티슈도 아니고 손수건의 등장에 한사코 거절하고 싶었다. 저 손수건이 소중한 물건이면 어쩌나 싶어서 이를 악물고 거절하고 싶었는데 그럴 처지가 아니었다. 기필코 언제 피를 닦았냐는 듯 깨끗하게 빨아서, 정 안 되면 새것이라도 사서 돌려드리고 말겠다 다짐했다. 그나마 다행인 건 코피가 그쳤다는 점이다. 손과 얼굴에 있던 핏자국은 손수건으로 옮겨갔고, 여전히 난 쪽팔려서 죽을 것 같다! 그렇지만 할 일은 해야 했다. 손수건으로 닦았다고 해도 화장실은 한 번 가야 할 거 같고, 계단을 난장판으로 만든 저것들도 치워야 하고, 손수건 주인 되시는 분께 감사 인사도 드려야 하고, 죄송하다는 사과도 드려야 하는데.
"저기. 제가 정말 죄송하고 정말 감사해서요... 1번, 여기서 기다리신다! 2번, 연락처를 넘기신다! 둘 중의 하나 골라주세요!"
"음-. 그럼 다음에 올 때는 선물을 가져와야겠네요. 나중에 아이가 이곳에 왔을 때 보고 귀엽다고 할 만큼 아-주 귀여운 인형으로 말이에요. "
그렇게 말하며 그녀는 커다란 인형을 가져올 거라는 터무니없는 말을 덧붙이고 웃었다. 그리고 동생에게 줄 선물을 고를 때처럼 이것저것 다양한 디자인들을 떠올리며 그에게 이야기했다. 사실, 그녀의 진심은 인형을 선물하는 것보다 앞으로 겪게 될 외로움이 -누군가는 끝없이 이어가게 될 산장지기의 고독함이 사라지는 것이었지만, 문제에 대한 마땅한 해결책 없이 하는 말은 그저 떼쓰는 것밖에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기에 그녀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일 중에서 조금이라도 이곳이 즐거움으로 채워질 방법들을 이야기하려 했다.
" 이장님은 괜찮으실 거예요, 분명. 지금까지 그래 왔던 것처럼요. "
나지막이 흘러나온 말은 그에게 하는 이야기보다는 혼잣말에 가까워 보였다. 저도 모르게 힘이 들어갔는지 빈 컵을 쥔 그녀의 손끝은 희게 질려있었다. 곧 애써 불안을 떨쳐내려는 듯 눈을 꾹 감았다 뜬 그녀는 컵을 내려놓고 밝은 목소리로 이야기하려 했다. 붙잡고 있던 컵을 손에서 놓았음에도 금방 돌아오지 않는 손가락의 색깔은, 그녀가 가진 간절한 마음을 대신하고 있는 듯 보였다.
" 마셔보길 잘했다고 생각할 정도로 맛있을 거예요. "
그녀는 마을 사람들도 알아주는 부모님의 와인 컬렉션에 나름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 처음에는 부모님이 왜 이렇게 술을 모으는지 이해할 수 없었지만, 어른이 된 후 와인의 맛을 알게 된 뒤에는 그녀도 비로소 부모님의 마음을 이해하게 되었다. 그래서인지 기대가 담긴 듯 보이는 그의 눈빛에 당당하고도 확신 있는 말투로 맛있을 거라며 이야기했다.
"그렇죠? 좋죠? "
놀리듯 말꼬리를 물고 늘어지다가 싫은건 아니라는 그의 말을 듣자, 그녀는 마치 이보다 더 좋은 일은 없을 거라는 듯 환하게 미소 지었다. 그리고 살짝 붉어진 것 같은 그의 얼굴과 함께 들려오는 -그녀가 올 것이 분명하다는 확신이 담긴 그의 말을 듣고 그대로 소리 내어 웃음을 터뜨렸다.
" 그럼요, 당연하죠. 내가 누군데요. "
그녀는 도도한 표정을 지으며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기고 우아한 -그러나 과장된 몸짓으로 와인을 한 모금 마셨다. 그러곤 당신을 바라보며 장난스레 웃었다.
" 마을에서 올라오는게 싫으면, 차라리 나도 이 산에 집 짓고 살까요? "
여기에 집을 더 짓지 말라는 법은 없으니까요. 그녀는 농담 같지 않은 농담을 던지고 미소를 지으며 당신을 바라보았다. 그 모습이 마치 오늘 저녁은 뭘 먹을 것인지 물어보는 사람 같기도 했다. 이처럼 그녀의 태연한 말투와 모습들은 방금 꺼낸 말이 진심이 아닐까 생각될 정도로 아주 자연스러웠다.
그러니까, 실수의 발단은 어쩔 줄 몰라 허둥지둥하는 모습에 그만 쓸모없는 오지랖이 발동해 발을 서둘러 놀린 것이고, 실수의 결정적 원인은 좀비 아니에요, 라는 말에 그게 무슨 소린가 싶어 뭐라고 되물어보려다가 발밑을 미처 주시하지 못한 것이었다. 일순간 천지가 뒤집히는 바람에 자신이 무슨 말을 들었었는지 잠깐 잊었고, 그 좀비 아니라는 말이 무슨 뜻으로 꺼낸 말인지 깨달은 것은 이미 피범벅이 된 얼굴에 괴성을 질러버린 후였다. 아, 이 무안하고 어색한 공기...
사실 이런 상황에선 휴지나 물티슈를 내미는 게 맞는 일이었다. 가방 안에 여행용 티슈와 물티슈가 한 팩씩 있기도 했고. 다만 문제는 내 가방이 도서실에 있다는 거였고, 무안한 나머지 일단 뭐라도 해야겠다 싶어서 손수건부터 내민 거였다. 마침 어제 세탁하고 나서 안 쓰고 넣어만 뒀던 거라 천만다행이다.
"이러려고 들고 다니는 물건인데요 뭘."
손수건을 건네주고 나서, 손을 들어서 층계참에 들이박은 이마를 만져본다. 아야야 소리가 나올 뻔한 걸 눌러참는다. 아세트아미노펜의 진통효과는 위대했지만 고통을 전부 다 없애주는 정도는 당연히 아니다. 아무래도 혹이 날 것 같다. 그래도 혹으로 끝났으니 다행이지 이빨이나 콧대를 들이박았으면... 끔찍한 상상을 잠깐 하다가, 얼굴의 피를 다 닦아낸 듯한 네가 건네어오는 말에 다시 시선을 돌린다. 잠깐 어딜 갔다오려는 것 같다. 아까 성대하게 자빠링한 게 어떻게 보였을지 마음에 걸려서, 나는 괜찮다는 의사표현도 할 겸 미소를 지으며(고통 때문에 좀 찌그러진 미소가 되긴 했다만) 선택지 1번을 의미하듯 손가락 하나를 들어보였다.
"기다리고 있을 테니 충분히 지혈하고 오세요!"
그 동안 이 계단에 한가득 엎질러진 이것들을 정리해두면 될 것 같다. 그 정도야 해줄 수 있는 일이고, 혹시나 나같은 칠푼이가 또 자빠질 수 있는 거고. 들이박은 데를 더 만지면 덧날까 봐서 손을 내리고, 차곡차곡 계단에 엎질러져 있는 책이며 노트들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등반객들이 묵어가는 산장보다는 조난자들을 대피시키고 곰이 마을로 내려가는 길목에 위치해서 곰들을 막아내는 역할을 하는 곳이다. 그래서 그저 소수의 사람들만이 지낼 수 있는 정도만 유지하고 있었다. 그런 곳에 인형이라니 별로 어울리지도 않을뿐더러 밤에는 정말 조용해 벽난로만 타닥거리는 소리가 들리는 이곳에선 그마저도 무서운 사람이 있을지도 모른다. 물론 산장지기에게는 그 인형이 있던 없던 관심도 없을게 분명하겠지만 말이다.
" 이번에 병이 다 나으시면 진지하게 이장 일을 그만두라고 하시는게 좋겠어. "
마을 사람들이 그렇게 얘기해도 듣지를 않으시다 이렇게까지 와버렸다. 이젠 본인도 아프셨으니까 깨달으시는게 있을거라 생각하고 산장지기는 달력을 바라본다. 벌써 아프셔서 병상에 누우신지 한달 정도의 시간이 지났는데 나을 기미가 안보인다는 것을 오고가는 마을 사람들에게 들어서 알고 있었다. 그나마 다행인건 악화는 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거기서 악화 되시면 분명 돌아가실 것이 분명했다.
" 원래 그 집의 와인 셀러에 들어가있는 것들은 고르고 고른 것들이라는걸 잘 알고 있는걸. "
그가 성인이 되고나서 와인을 처음 마셨을때는 그 맛이 너무 역해서 안좋은 기억만을 심어줬지만 그것을 송두리채 바꾼게 저 집의 와인이었다. 싼 와인이 안좋은 것도, 비싼 와인이 좋은 것도 아니라는 말을 하시면서 건네준 와인 한잔의 맛은 아직도 뇌리에 남아있을 정도다. 그에겐 그때 마신 와인만큼이나 지금의 것도 마음에 들었다.
" 그래도 너무 자주는 오지마. 진짜 네 생각보다 위험한 곳이니까.
그녀의 자신만만한 표정과 과장된 몸짓을 보고 살며시 미소를 지어보인다. 그러나 이어진 말에 와인을 마시다가 사레가 들렸는지 켁켁거리며 잔을 황급히 내려놓는다. 휴지로 입을 닦은 산장지기는 여자의 말에 어이가 없다는듯한 말투로 얘기했다.
" 그게 무슨 말이야, 여기기 뭐가 좋다고 집을 하나 더 지어. 할 것도 없는데. "
물론 둘이 지낸다면 덜 외롭기는 하겠지만 애초에 산속에 있고 전기도 발전기로 돌리는 곳이다. 대부분을 벽난로의 불빛을 의지해서 살아야하는 곳에 온다니 그의 생각에서는 좋지 않은 짓이었다. 무엇보다 그는 이제 산장지기를 자신의 대에서 그만두고 싶어했다. 대대로 내려오고 있고 중요한 역할이지만 조금씩 지쳐가고 있었다. 아버지에 비해선 한참이나 짧은 시간을 산장에서 보낸 산장지기였지만 새삼 아버지가 어떤 삶을 살아오셨는지 예상조차 가지 않았다.
" 마을엔 재밌는 것도 많고 친구들도 많고. 무엇보다 안전하니까. 위험한건 나 혼자로 충분해. "
마을 사람들도 그렇기에 그에게 잘해주는 것이다. 그리고 지금 여자의 호의도 산장지기는 마을 사람들의 호의의 연장선으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당부에 당부를 하고서 자리를 비웠다. 도움만 주고서 홀랑 사라져 버릴까, 발걸음이 바빴다. 화장실에 가서 꼼꼼히 얼굴과 손을 다시 한번 닦아야 했고, 도서관에 가방만 두고서 나온 자리에 돌아가야 했다. 가방에 죄송하고 고마운 마음을 표현할 만한 무언가 있지 않을까 당신을 붙잡아 두었다. 그런고로 뭐가 있으려나 가방을 털어보면 죄 주전부리뿐이다. 과일 맛 젤리, 한입 크기 초콜릿, 이런저런 맛이 다 있는 사탕... 그리고 내가 제일 좋아하는 에그타르트, 제이 좋아하는 코코넛 휘낭시에, 제삼 좋아하는 크렘 브륄레 마들렌... 공부한답시고 저녁에 집을 안 들어가니 저녁 대신으로 집에서 들고나온 것이다. 집이 베이커리라는 이점은 이런 데 있는 거고, 아무튼 저녁을 때우려고 가져온 거라지만 지금은 그게 문제가 아니다. 호불호를 알 수 없으니 일단 전부 다 챙겼다. 알레르기가 있을 수도 있잖아! 죄송하고 고맙다며 받은 걸 먹고 알레르기로 응급실 가면 저주받는다! 어쨌든 우리 집 베이커리 종이봉투에 담긴 구움 과자들과 각각의 젤리, 초콜릿, 사탕 봉지들을 품에 다 챙기니 과자로 만들어진 마녀의 집을 발견한 헨젤과 그레텔이라도 된 기분이다. 그리고 다쳤을지도 모르니까 반창고랑... 반창고밖에 없네! 반창고라도 챙긴다.
"다녀왔, 으악!"
이걸 치우고 계시면 어떡해요! 소리치고 싶은 걸 으악, 하고 참아냈다. 이걸 먼저 치우고 갔어야 했나 싶지만, 혹시라도 미처 닦이지 못한 피가 묻는 게 싫다는 생각에 그러지 않았다. 무엇보다 노트 중 한 권은 공부하기 위한 필기 노트라거나 오답 노트, 정리 노트가 아니라 그림 노트여서 더욱 그랬다.
"저 드릴 수 있는 게 이런 거밖에 없는데..."
그리고 다시 한번 생각해본다. 사례를, 보답을 할 수 있는 방법. 곰곰 생각해보니 아차 싶어진다. 2번, 연락처를 남기신다! 이 말이 틀렸음을 이제야 알았다. 연락처를 드리는 게 맞았다.
"3번은 어떠세요...? 제 연락처 드리기... 저 때문에 놀라시고, 저 때문에 다치시고, 저 때문에 손수건도 엉망진창에......"
나 엄청나게 사고 쳤잖아...? 새삼 저지른 잘못들을 나열해보니 쪽팔려서 좀비가 되겠다 할 때가 아니었다. 엄청 아프신 거 아냐? 아까도 말 그대로 웃는 게 웃는 게 아니셨고, 어디 더 안 다치신 건 맞을까? 근데 어른이면 어떡하지. 내 또래면 몰라, 어른이면 학생이 해주는 답례 같은 게 성에 찰까. 나는 드라마에 나오는 것처럼 세탁비랑 진료비로 쓰라면서 카드로 해결할 수가 없잖아! 자연스레 표정이 울상이 되어간다.
으악! 하는 비명소리에 온 몸의 털이 다 곤두서는 기분이다. 내 기타에 걸고 맹세컨대 방금 뒷목 털꼬랑지까지 다 곤두서면서 움찔하는 게 보였을 거야. 놀란 가슴을 가라앉히며 뒤를 돌아본다.
"어.. 나도 피 나요?"
무안해할까 봐 농담 한 스푼 얹어서. 근데 진짜로 피 안 나는 거 맞나? 하고 손을 들어서 어루만져본다. 찍은 데가 붓긴 했지만 그래도 상처는 확실히 안 난 모양. 다만.. 혹은 실시간으로 부어오르고 있다. 만지니까 아파서 후다닥 손을 뗐다. 으악 소리가 따라서 나올 뻔했다. 아직 못 주운 노트가 몇 권인가 있어서 시선을 돌리려는데, 네 품에 안겨있는 익숙한 봉투가 보인다. 그리고 그게 답례라나. 어라.
"이런 걸 받자고 한 게 아닌데..."
그런데 하필이면...
"내 원픽 단골 빵집.........이잖아..." ─꼬르르르륵.
나에게 있어 식사시간을 알리는 것이나 다름없는 그 로고를 보고 훈련받은 파블로프의 개마냥 배꼽시계가 운다. 으악. 이럴 줄 알았으면 아까 편의점에서 약이랑 함께 주먹밥 같은 거라도 먹는 건데 그랬어. 당황스럽게 아래로 고개를 숙이니, 교복 셔츠 웃도리의 단추가 하나 나간 것까지 보인다. 안에 티셔츠야 입고 있다만, 이럴 줄 알았으면 학교 끝나고 집에 들러서 편한 옷으로 갈아입고 나올걸! 으악! 만약 내가 지금까지 매일 일기를 쓰고 있었다면 오늘 일기로는 두 글자만 적을 거야. 으악!!!
"아니, 그 연락처라뇨, 굳이 그러지 않으셔도 되는데... 놀라거나 다친 거야 일부러 그러신 것도 아니고, 그렇게 크게 다친 것도 아니고 손수건이야 다시 세탁하면 그만인걸요..."
그렇잖아도 무안해져서 빨개져 있는데 연락처를 주겠다는 말에 붉은 얼굴을 하고 있으니 그림이 어째 이상한 것도 같다. 나는 손부채질을 하며 정신을 가다듬고, 위기를 모면하기 위해 손가락 4개를 쫙 폈다.
"4번!"
그래서 난 위기를 기회로 만들기로 했다.
"나 그 빵집 아는데 거기서 만나요. 지금 가도 괜찮고? 아니 괜찮나?"
...정말로 이런 대응으로 괜찮은가? 나? 월 수 금마다 부원들이랑 거기 들리긴 하는데, 그런 주제에 거기 언제 닫는지 모르잖아?
# 묘사를 미처 못했지만 이 캐릭터는 갈색 단발의 활기찬 밴드부 메인보컬+리드기타 고교생이며 현재 넥타이만 없는 교복 차림입니다v.v
이것저것 품에 죄다 끌어안은 채로 허둥거렸다. 손을 잘못 풀었다가는 분명히 이 봉지들도 계단에 미끄러질 테니 반창고를 건네지도 못하고, 휴지를 찾자니 그걸 미처 생각하지 못해 가져오지도 않았고. 뒤늦게 걱정스러운 시선에 죄송한 마음까지 덧끼워서 상처 부위를 향해 시선을 옮긴다. 어. 어... 피 안 나는 거 같은데. 그것 보다 만지지 마세요! 덧나면 어떡하려고! 흉 지면 어떡하려고! 소리치기 전에 당신의 손이 먼저 아래로 향한다. 그럼 다시 생각한다. 피 정말 안 나는 거 맞지? 여간 안절부절못해 보이는 눈치다.
"그래도, 이런 거라도...... '원픽 단골 빵집'이요?"
우리 집? 우리 집 베이커리 말하는 거지? 어, 어라. 당신을 쳐다보았다가 끌어안고 있는 종이봉투를 보았다가, 얼빠진 것처럼 눈을 동그랗게 뜨고서 깜빡거린다. 배꼽시계 소리가 울릴 때야 정신을 차린 듯하다. 곰곰 생각해보자니 단골손님 중에 학생 손님들도 있는데, 교복을 보자니 너와 같은 학교 같더라 하고 부모님이 말해주신 기억이 난다. 그 학생 손님 중에 같은 학교인 사람이, 혹시 지금 눈앞에 이 사람인가 싶어졌다. 이제 다시 보니, 진짜 우리 학교 교복이잖아! 지금 나 교복 입고서 자기 학교 교복 못 알아본 거야? 지금 나 지금 부모님 가게 단골손님한테 민폐 3 스택 쌓은 거야?!
"이거, 이거 다 드셔도 돼요! 제 물건들은 제가 치울 테니까 이거 드세요!"
고작 그것 갖고 배 차겠냐고, 겨우 그 양으로 무슨 저녁이냐며 간식에 불과하다 가방에 더 챙겨 넣으시려던 부모님 손길을 만류한 게 후회스러웠다. 오늘 이런 일이 일어날 줄 알았다면 절대 만류하지 않았을 것이고, 오히려 직접 집어넣었을 것이다. 이 사람한테는 우리 집이 당신의 원픽 단골 빵집이라는 사실을 영영 비밀로 묻고자 마음먹었다. 민폐만 끼친 자신이 싫어져서, 자신의 부모님이 하는 베이커리까지 안 가겠다고 해버리면 부모님은 난데없이 단골을 잃게 된다.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뻗어 나가 도달한 결론이다.
"4, 4번?"
없던 선택지의 등장에 다시 눈을 동그랗게 떴다. 당신과 만나고서 몇 분 안에 얼이 몇 번이나 빠지는지 셀 수 없을 것 같다. 게다가 새로운 선택지의 내용은 얼빠지게 하기 좋은 내용이었다. 방금 자신과 베이커리의 관계를 당신에게는 절대 비밀로 하겠다고 다짐했는데, 거기서 만나자는 말이 나왔다. 심지어는 지금 가도 괜찮다는 말까지! 이게 바로 혼비백산인가. 지금 시간쯤이면 가게에 누가 있는가 머리를 굴려야 한다. 부모님이 있으면 낭패요, 자신을 잘 알고 있는 다른 누군가 와 있어도 낭패요. 그렇게 되니 지금 상황 자체가 낭패였다. 가게 주인이 가게에 없을 리가 있냐고! 나 또 노답 상황이네!
"가, 가도는 되는데요..."
대답을 안 하고 있으면 더 수상해 보일 거 같고, 4번을 거절한 마땅한 이유를 찾지 못했다. 5번을 만들어보자니 4번보다 더 나은 선택지를 구상하지도 못했다. 원픽 단골 빵집에서 만나자는데, 심지어 지금 가도 괜찮다는데, 내가 을인 입장인데 어떻게 거절이 나오겠어요. 아빠엄마, 정말 미안. 나 단골손님 한 명 없애버릴 거 같아.
/ 교복 묘사가 없다고 사복이구나 생각해버린 채 어른이면 어쩌지 하는 걸 서술했구나 죄송합니다!!!
안녕하세요, 저는 이 마을의 유일한 시계공입니다! 제가 사는 마을은, 마을 중앙에 위치한 시계탑 위에서 한 눈에 다 내려다 보일 정도로 엄청 작기는 하지만요. 시계탑 위에서 마을을 내려다본 적이 있냐고요? 당연히요! 시계탑이 고장날지도 모른다, 탑에 오르다 다치면 위험하다, 그런 이유들로 시계탑에 오르는 걸 금지해두었는데 어떻게 올라가봤느냐고요? 제가 거기에, 이곳에 사는걸요. 그 이유들은 다 거짓말은 아니지만 진짜 이유는 따로 있어요. 제가 사람을 무서워해서가 진짜 이유에요. 아무도 모르는 비밀이에요, 쉿. 사람들은 제가 시계를 너무 좋아하는 괴짜라서 혼자 시계탑 위에 박혀서 시계만 만드는 줄 알아요. 이것도 완전히 틀렸다고는 못 하겠지만... 어쨌든! 그래서 저는 시계탑에서 혼자 살고 있고, 그건 조금 쓸쓸하긴 하지만 나름 즐거워요. 저 아래에서 다들 바쁘게 하루를 살아가는 모습을 자세히 살펴보면 다들 제가 만든 시계를 갖고 있거든요. 회중시계, 뻐꾸기시계, 탁상시계, 자명종시계, 째깍째깍 바쁜 초침들에게 숨을 불어넣어준 건 저에요. 시계들의 주인은 저를 못 알아보지만요. 사람들과 만나야할 때에는 남자인 척 변장을 하거든요. 머리카락을 숨기기 위해 꼭 모자를 쓰고, 안경도 쓰고, 망토를 둘러서 체구도 감춰요. 그리고 말을 하지 못하는 척 메모를 들고 다닙니다. 시계를 가져오지 못하는 손님들 위해서 가끔 정기적으로 시계를 가지러 가고, 돌려드리러 갈 때도 이 모습으로 다녀요.
붉은 사자는 그가 몸을 담고 있는 가문의 문장이었다. 오랫동안 가문을 모시고 있던 집사의 아들로 태어난 사내는 6년의 시간이 흘러, 스무살이 되어 다시 자신이 태어날때부터 충성을 다 해야한다고 교육받은 가문의 문을 열고 들어왔다. 집사는 아버지가 하고 있으며, 자신의 동생이 좀 더 적성에 맞을 듯 하니, 자신은 그 가문을 지키는 검이 되고 방패가 되고자 하였고 가문을 이끄는 당주에게 허락을 받아 사내는 교육시설에 들어가 검을 배우며 자신의 실력을 갈고 닦았다.
길다면 긴 시간, 오로지 누구보다 강한 검이 되어 돌아가겠다는 일념 하에, 연락 한 번 하지 않고 찾아오는 이도 잠깐 얼굴만 볼 정도로 독하게 마음을 먹으며 단련에 힘 쓴 사내는 늠름한 자태를 보였다. 차분한 밤색 어두운 머리카락을 손으로 정리하며, 입고 있는 옷의 옷깃을 정리하며 문에 들어선 그는 머지 않아 당주를 마주했다. 한쪽 무릎을 꿇고 돌아온 것을 보고하며, 지금까지 고생했다는 말을 들으며 앞으로 그 실력을 가문을 위해 사용하라는 말을 전해들으며 오늘은 피곤할테니 들어가서 쉬라는 말을 다 들으며 사내는 꿇었던 한쪽 무릎을 펼치며 예를 갖췄다.
당주의 방 밖으로 나와 6년 전, 자신이 기억하던 풍경을 떠올리며 저택을 돌아다니던 사내는 자신이 옛날에 쓰던 방을 향해 천천히 걸었다.
"6년이 지나도, 이 풍경만큼은 변하지 않는구나."
변한 것이 없는 것은 아니었으나, 변하지 않은 것도 있었다. 그 모든 것을 느끼며 사내는 계단을 막 내려 1층 사용인들이 쓰는 방이 있는 곳으로 향하려고 했다.
>>49 슬슬 피아노 레슨 시간이려나. 그렇게 생각하며 찻잔을 내려놓기가 무섭게 직속 하녀인 샐리가 다가와 다음 일정을 알렸다. 예상과 다르지 않은 결과에, 마르그리트는 미련없이 찻잔을 내려놓고 일어섰다. "그래요, 가죠." 차를 즐기고 난 흔적을 치우는 하녀들을 뒤로 하고, 단정한 걸음걸이로 레슨 룸을 향해 걸었다.
문득, 부진한 학문에 시간을 할애하느라 피아노에는 상대적으로 신경을 덜 쓰고 말았던 것이 떠올라, 마르그리트는 희미하게 콧숨을 쉬었다. 한 소리를 들을 각오는 해두는 편이 좋겠다는 생각을 담담한 표정 너머로 감추며 걷고 있자니, 건너편에서 걸어오는 낯익은 듯 낯선 사내가 보였다. 누구더라? 분명 어딘가 낯익은데. 가만히 바라보고 있자니, 옆에서 샐리가 말했다.
-"집사장의 맏아들이 새로 호위로 왔다는데, 지금 도착한 모양이네요." "아..."
그제야 기억이 났다. 몇년 전에 호위가 되기 위해서 수련을 떠난다고 했었지. 인정받았다니 실력은 그만큼 출중하면 좋겠네. 집사장도, 그 둘째 아들도 성실한 사람들이고, 저 사람도 몇년이나 성실히 수련해서 돌아왔으니, 후하게 대접한다면 그만큼 충성하겠지. 새로 들어온 사용인에게는 동기부여가 될 만한 덕담을 건네는 것이 좋다는 것을 떠올리고, 마르그리트는 집사의 맏이를 향해 낯빛을 부드럽게 하고 나직이 말을 건넸다.
"능력을 인정받아 돌아왔으니, 앞으로 잘 일해주리라 믿어요. 좋은 성과를 보여준다면 섭섭지 않을 정도의 대우를 약속하죠. 앞으로 잘 부탁해요. 자세한 업무는 시녀장이 전달해줄 거예요. 그 전까지는 쉬고 있어도 좋습니다."
>>50 건너편에서 걸어오는 여성이 자연히 사내의 눈에 들어왔다. 그녀가 낯이 익다고 생각한 것처럼, 사내 역시 그녀의 존재가 낯이 익다고 생각했다. 허나 낯이 익다고 해서 바로 그 정체를 알 수 있었던 간 아니었기에 사내는 발걸음을 멈추고 그녀를 가만히 바라봤다. 보면 볼수록 어디선가 본 것 같은 느낌 속에서 들려오는 것은 그녀와 함께 있는 이의 목소리였다. 그 목소리를 들으며 사내는 상대가 누군지 짐작할 수 있었다.
자신의 기억이 맞다면 당주에게는 딸이 있었다. 6년 전, 저택을 떠나기 전에도 몇 번은 스쳐 지나갔을지도 모르는 존재를 곧 어렴풋이 떠올리며 사내는 너무나 당연하다는 듯이 자연스럽게 한쪽 무릎을 꿇고 그녀에게 예를 갖췄다.
"6년 만입니다. 아가씨. 말씀하신대로 제 모든 것을 바쳐 열심히 일하겠습니다. 제 아버지가 그랬고, 제 동생이 그러고 있는 것처럼."
미사어구를 붙이는 대신, 정말로 깔끔하고 담백하게 열심히 일하겠다는 마음과 충성을 다하겠다는 포부를 밝힌 후, 숙인 고개를 들어올리며, 꿇었던 무릎을 다시 펼쳐 그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허리춤에 차고 있는 검을 다시 한 번 자신의 허리춤에 밀착시킨 후, 사내는 제대로 그녀를 마주했다.
"그간 별 탈 없이 평안하셨습니까?"
아랫사람이 윗사람에게 묻는, 말 그대로 큰 의미가 없는 안부인사를 하며 사내는 미소를 지으며 살며시 다시 고개를 살며시 아래로 숙였다.
"말씀하신대로 시녀장이나 집사장인 제 아버님이 지시한 일에 충실할 생각입니다만, 혹여나 따로 제 힘이 필요하다면 얼마든지 얘기해주셨으면 합니다. 제가 검을 배우러 긴 시간 동안 자리를 비운 건 모두 이 가문의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고자 함이니까요."
/이렇게 이어두고 나는 다시 가볼게! 아마 다음에 잇는 것은 저녁 시간일 것 같아! 그때부턴 자유로우니 텀이 짧을거야!
퍽 의욕적인 모양이다. 저만큼 의욕을 보인다면 호위든, 혹시 생길지 모를 자잘한 전투든, 성과를 기대해도 좋으리라. 기대하겠다는 말은 자칫 부담을 줄 수 있으니 높은 의욕을 보임에 치하하는 정도가 적절하겠지... 그 때 샐리가 조금 초조한 낯으로 시계를 힐끔 살피는 것이 보였다. 더 지체하면 안되겠구나. 꼭 레슨이 아니더라도, 귀족으로서 부리는 이를 오래 잡아두는 것은 도리가 아니지. 집사장의 맏이의 말을 끝까지 들은 마르그리트는 차분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열심히 일해주겠다니 고마워요. 그럼, 수업을 들으러 가던 길이니, 이만 지나갈게요. 돌아온 걸 환영해요."
어린 시절이야 신분에 관계 없이 또래라면 함께 놀 수 있었다지만, 아무것도 모르던 시절이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지금에 와서 똑같이 행동하는 것은 상대를 불편하게 만드는 일이 될 테지. 고용주의 딸이고, 그 이전에 귀족이니. 집사장의 맏이가 비켜서기를 기다리며, 마르그리트는 문득 루로르 가의 영애와 추문이 돌던 그의 호위의 소문을 떠올렸다. 결국 해고당했다지. 우리 가문은 이 자의 일가를 고용하고 있으니, 불미스러운 건으로 이 자가 해고되면 나머지가 처신에 불편을 겪을 수 있다. 나 역시 어린 아이가 아니니, 그에 맞는 처신을 해야지. 경거망동하여 구설수에 올라 앞으로의 일들을 그르치는 것은 안 될 일이다.
사내의 눈에 자신이 방금 인사를 올린 여성의 옆에 서 있는 이가 초조한 표정을 짓는 모습이 들어왔다. 아무래도 자신이 여기서 인사를 하는 것이 그녀의 입장에선 그리 좋지 못한 것일까 추측하는 와중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수업을 들으러 간다는 그 말에 사내는 고개를 끄덕이며 살며시 몸을 옆으로 치웠다.
"시간을 뺏은 것 같아서 죄송합니다. 부디 수업 힘내시길 바랍니다."
초조한 표정을 짓는 이유를 알게 되니 절로 사내의 입에서 사과가 나왔다. 귀족에게 있어서 시간이란 때로는 상당히 중요한 것이라는 것을 사내 역시 알고 있었다. 시녀가 옆에 있으니 따로 동행할 필요는 없을테고, 설사 없다고 하더라도 동행하라는 지시가 없는만큼 자신이 멋대로 움직일 순 없다고 생각하며 사내는 고개를 살며시 숙인 다음 인사를 한 번 더 올렸다. 뒤이어 사내의 시선이 시녀 쪽으로 향했다.
"당신도 앞으로 잘 부탁하겠습니다."
하는 일은 다르다고 하나, 어쨌든 한 가문을 위해서 일을 하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때로는 같은 장소에서 일을 할지도 모르는만큼 기본적인 인사를 한 후, 사내는 자신이 어릴 적 쓰던 방을 향해 천천히 나아갔다. 오늘은 어느 정도 휴식을 취하며 지시를 기다릴 생각이었다.
원픽 단골 빵집인지 되묻는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긍정한다. 그야 부정할 이유도 없으니까. 개인적으로도 많이 들리기도 했고, 월요일 목요일마다 밴드부가 단체로 가서 그 집 봉지빵 재고 3분의 1을 주기적으로 박살내고 있으니까 그 집 내외분도 나까지는 기억 못하더라도 우리 밴드부는 기억하실걸?
"어-" 잠깐 생각하다가, 아무리 생각해도 이 정도로 권하는데 거절하면 그것도 상대방 무안하게 만드는 일인 것 같다. 왠지 네가 엄청 안절부절못하고 있기에 뭔가 고집부리기 애매한 상황이 되기도 했고. "이거 원래 저녁으로 드시려던 거 아니에요? 나눠 먹어요, 저녁은 적게 먹는 편이라." 정확히는 적게 먹으려고 노력하는 편이지만 뭐 어때.
"네, 지금도 갈 수 있다는 말이지 지금 말고 나중이라도 좋아요─ 아 그러려면 역시 연락처 교환해야 되나?"
나는 일단 내가 간추려놓았던 노트들이며 학용품들을 내밀었다. 이것들을 정리하려면 빵봉투는 잠깐 어디 한켠에 내려놓아야 될 것 같은데. 일단 정리된 것들을 내밀고, 빵봉투를 받아든 뒤 사라져주는 게 네가 바라는 거겠지만, 나는 쓸데없이 오지랖이 넓은 사람이고, 일단 이 현장을 깔끔히 정리하고 나야 마음편하게 자리를 뜰 수 있을 것 같아서.
"일단은 이것들 정리 끝내고 나서 마저 이야기해요! 혹시 또 누군가 올라오다 저처럼 자빠질지도 모르고."
>>48 먼지투성이 각반을 두르고 있는 그 여행객은 먼 길을 가로질러왔으며, 이 마을에 도착한 지 얼마 되지 않는 것 같습니다. 당신과 비슷하게 후드를 푹 눌러쓰고 망토를 뒤집어쓰고 있어서 후드의 그늘에 어떤 얼굴이 숨겨져있는지는 잘 보이지 않네요. 다만 망토자락 사이로 엿보이는 가볍고 튼튼한 징박힌 가죽갑옷이나, 허리춤에 권총이 그것도 세 자루나 줄줄이 매달려 있는 것을 볼 때 단순한 상인이나 여행자는 아닌 모양입니다. 마찬가지로 두건을 머리에 덮어씌운 노새를 끌고, 그 여행객은 멀리서부터 확고히 당신에게 시선을 둔 채로 당신 방향으로 걸어왔습니다.
그러나 다행히도 정체를 들킨 건 아닌 모양입니다. 당신에게 다가와서 그 사람이 묻기를,
"안녕하세요, 저기 길 좀 물어볼게요."
하고 물어보았으니까요. 아마 당신이 시계공인 줄은 모르고 그냥 평범히 길을 지나가는 사람인 줄로 아는 모양입니다. 당신이 내밀어오는 쪽지를 받고 읽더니, 후드를 눌러쓴 사람은 당신을 바라보며 마저 말을 이어갑니다.
"이 마을에 있는 시계공을 찾아왔는데 혹시 그 시계공이 어디 사는지 여쭈어봐도 될까요? 그 시계공에게 꼭 물어봐야 될 게 있어서."
그렇지만 결과적으로 시계공을 찾아온 사람은 맞나 보네요.
"모르신다면 적어도 시계공이 있는 곳을 알 만한 사람이라도 가르쳐주세요. 사례는 해드릴 테니까."
거기다가 시계공을 찾아가겠다는 의지가 아주 분명합니다. 시계공에게 뭘 물어보려고 시계공을 이렇게 찾고 있는 걸까요? 후드 차림의 여행자는 주머니에서 은화 몇 닢을 짤랑짤랑 꺼내보입니다.
히끅. 어떡하면 좋아요, 딸꾹질 소리가 나기 시작했어요. 정체를 들킨 것 같다고 생각해서만이 아니에요. 저는 보고 말았습니다. 허리춤에 달린 권총 세 자루를요. 징이 박힌 가죽 갑옷도 입고 계시다고요! 여행을 하시는 것도, 저희 마을에 방문한 상인 같지도 않으세요. 아무래도 제게 무슨 원한이 있는 것 같아요. 잘못 대처하면 저 권총이 제 머리에 들이밀어 지는 건 아닌지 불길한 상상이 떠올라요. 이 작고 평화로운 마을에서 저런 위험한 물건은, 특히나 시계탑 꼭대기에서 숨어 사는 제가 볼 일은 드물단 말이에요. 권총이라는 건 어떻게 생긴 건지 해체해보고 싶기는 하지만... 엄청 무서워요. 무섭다고요! 시계공의 정체는 비밀이었지만, 여전히 비밀이고, 비밀일 예정이에요.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드니 깜짝 놀라버려서 딸꾹질이 멈출 줄을 몰라요.
그런데 조금 이상해요. 제가 시계공이라고는 생각 못 하시는 것 같아요. 아주 먼 타지에서 오신 것 같은데, 왜 저를 찾는 걸까요? 처음 보는 분께 제가 무슨 원한을 맺었을까요. 사실은 어느 작은 마을의 시계공이 그 실력이 아주 훌륭하더라는 소문이라도 난 거면 좋을 텐데요. 아니면 역시, 이미 제가 시계공인 걸 알고 계시는데 절 떠보는 건 아닐까요? 그렇게 생각하면 눈물이 날 것 같아요.
'이 마을의 시계공은 시계탑 꼭대기에 살아요. 그런데 심부름꾼인 저를 제외하고는 아무도 만나지 않으십니다. 물어볼 말씀은 제가 꼭 전달해드릴게요. 사례는 괜찮아요.'
괜히 무서운 상상을 해버려서 손이 떨렸어요. 하지만 최대한 티 내지 않고 침착하게 새로 메모를 적은 것 같아요! 새로운 메모를 드리면서 상냥한 미소를 지어 보였어요. 딸꾹질 소리는 여전히 멈추지 않아서 곤란하기 그지없었지만요.
>>69 "이게 질문이 꽤 복잡한데다 되도록이면 남들 눈에 띄지 않게 하는 일이라서요..."
당신이 불안감을 드러낸 걸 눈치챈 건지, 여행자는 은근슬쩍 벨트를 매만져 권총들을 감추려 합니다. 두 자루는 고급스럽긴 하지만 여느 곳에서 찾아볼 수 있는 리볼버인데, 한 자루는 탄창이 달린 복잡한 기계식 자동권총이네요. 벨트를 돌려서 권총을 망토 안으로 감추고 나서야 여행자는 말을 이어갑니다.
"그러면 엄청 복잡한 회중시계 하나를 고쳐달라고 온 사람이 있지 않았냐고 여쭤봐 주실래요?"
다행히 시계공을 해꼬지하러 온 건 아닌 모양입니다! 그리고 그 말대로입니다. 며칠 전 복잡하고 비싼 손목시계 여섯 개를 회중시계 하나에 다 구겨넣은 것만큼 복잡한 회중시계 하나를 여관 할아버지가 맡긴 적이 있었죠. 자신도 다른 사람에게서 맡은 것이라고 하면서요.
대단히 아름다운 뚜껑에, 내부 부품도 고급이고 톱니바퀴를 고정하는 나사못 머리 하나마다 예쁜 보석이 박혀있는 아름다운 예술품같은 물건이었지만 왜인지 거의 모든 부품들이 잘못 맞춰져 있다는 이상한 느낌이었는데, 여관 할아버지는 그 시계를 맡긴 사람의 말에 따르면 금으로 된 큰 톱니바퀴 하나만 뒤집어 끼우면 된다고 했었습니다. 그 사람은 톱니바퀴를 뽑을 만한 도구도 없고 뽑는 방법도 몰라서 여관 할아버지를 통해 그것을 시계공에게 맡겼다네요.
다행히 그 톱니바퀴를 뒤집어 끼워주는 일은 간단했고, 그러니 잘못 맞춰진 것 같은 부품들이 그게 올바른 조립법이라는 듯이 그 모양대로 돌아가기 시작했었습니다.
"마을에 있는 여관 선술집에서 기다리고 있을게요."
그런데 왜인지 그렇게 말하는 목소리가 많이 익숙하게 들리는 것도 같습니다...?
# 익숙하게 들리는 목소리를 기분 탓이겠지! 하고 넘기면 계속 여행자와 아무런 관계도 아닌 남남으로 플레이하게 됩니다. # 익숙하게 들리는 목소리를 친구의 목소리로 받아들인다면, 여행자는 사실 시계공의 어릴 적 소꿉친구들 중 한 명이었다는 전개가 됩니다. # 직접 캐릭터의 입이나 행동으로 표현하지 않으셔도 원하시는 전개 방향에 대해 아래쪽에 #을 붙이고 덧붙여 의견 내어주셔도 좋아요.
남들 눈에 띄지 않게 하는 일이라니까 나쁜 생각밖에 들지 않아요... 되도록이면 남들 눈에 띄지 않게 하는 일은 선행보다 악행이라고 생각된단 말이에요. 당신의 행동 하나에 신경이 곤두서서, 작은 소리에도 귀를 쫑긋 이며 반응하는 토끼가 된 것 같아요. 권총들을 망토 안으로 감추신 건 제가 방심하기를 바라고 하신 행동일까요, 아니면 제 딸꾹질 소리의 원인이 그것인 거 같아 저를 배려했을 뿐일까요? 후자이길 간곡히 바라보겠습니다. 권총을 구경하고 싶지만, 특히 유달리 다르게 생긴 편인 복잡한 권총 한 자루가 눈에 밟혀서 자세히 보고는 싶지만 제 급소를 겨눠진 채로 보고 싶지는 않거든요.
엄청 복잡한 회중시계 하나. 똑똑히 기억하고 있어요! 시계보다는 꼭 보석 같았거든요. 실제로 보석이 박혀있기도 했고, 시계 6개는 나올 것 같은 양의 부품들이 오밀조밀 얽혀있는 것도 신기했고요. 여관 할아버지께 시계를 맡겼다는 분이 수리 방법을 알고 있던 것도 신기했어요! 톱니바퀴를 뒤집어 끼우면 된다는 것을 아는데, 그걸 직접 할 수는 없다니 마치 시계를 다룰 줄은 모르는데 고치는 방법은 안다는 것 같아서요. 심지어 그 방법이 맞았어요! 잘못 맞춰져 있는 것만 같았던 부품들이 째깍째깍 돌아가기 시작했으니까요. 그래서 그 시계 주인에게도 호기심이 동해서, 주인께서 직접 찾으러 오셨으면 좋겠다고 바라보았는데 정말 이분이 주인 되시는 분일까요? 그 회중시계의 주인이라고 생각하면 아까까지는 조금, 음, 아주 무서웠는데, 지금은 아닌 것 같아요. 만나보고 싶다고 생각했으니까요, 편하게 웃을 수 있습니다! 나는 당신에게 방긋 웃으면서 새롭게 메모를 건넬 수 있었어요. 안타깝게도 딸꾹질 소리는 여전했지만요.
여관 할아버지께서 시계를 대신 맡기신 것도 그렇고, 여관 선술집에서 기다리시겠다는 것도 그렇고 마을에 이제 막 도착하신 건 아닌 것 같아요! 시계탑 위에서 마을을 구경하는 건 제 일과 중 하나이니까, 당신에게서 이유 모를 익숙함을 느끼는 건 그것 때문일까요? 언뜻 당신을 보았던 기억이 나는 걸지도 몰라요. 당신과 아는 사이였을 지도 모른다기에는, 저는 계속 혼자 살았으니까요. 어릴 때는 누군가와 함께 있었던 것 같기도 하지만요.
나는 당신이 건네준 물병을 두 손으로 쥐었습니다. 딸꾹거릴 때마다 몸은 작게 들썩거렸고, 당신이 나를 죽일 수도 있는 사람이든 시계 주인이든 그건 여간 민망한 게 아니었기에 감사할 따름이었습니다! 물을 마시기 전에 허리를 숙여 인사를 건넵니다. 이렇게 친절한 사람인데 아무래도 제가 단단히 오해했던 모양이에요. 당신이 건넨 물을 한 모금 두 모금 들이켰고, 오해가 풀려서인지 물 덕분인지는 몰라도 딸꾹질은 멈추었습니다. 나는 다시 당신에게 물병을 건넵니다.
# 이왕 익숙하게 들리는 것도 같다는 서술이 나왔고 하니 소꿉친구 쪽으로 받을게요! # 근데 시계공이 사람 무서워하다보니 친구가 있어도 몇 없을 거 같은데... 몇 없는 친구도 제대로 못 알아볼 거 같지는 않고 해서요! 많아도 10대 초반쯤에 헤어졌다구 해두 될까요? :3
낮게 깔려있던 목소리 톤이 확 올라가며, 좀더 당신이 알던 것에 가까운 목소리가 됩니다...
"코스─아니, 그 회중시계가 아직 시계공의 집에 있나요?"
톤이 올라간 목소리에 화색이 돕니다. 후드 그늘에 가려 얼굴표정이 보이지 않는데도, 왜인지 그 후드 아래의 얼굴이 마치 오늘은 점심 먹고 퇴근해도 좋다는 말을 들은 점원 같은 기쁜 기색이 역력한 게 보이는 것 같습니다. 노새가 투레질하는 소리를 뒤로하고, 그 사람은 당신에게서 손을 내밀어 물병을 받아듭니다. 바로 그 순간, 한 움큼 돌풍이 불어젖힙니다. 그리고 생각지도 못하게 여행자의 후드의 끈이 풀리면서 후드가 뒤로 젖혀져 버립니다.
"아차."
하고 후드 자락을 붙잡아보지만, 높이 묶어 나부끼는 상아색 금발과 괄괄한 얼굴, 가을 하늘을 한 숟갈 퍼다가 담아놓은 듯한 푸르른 눈동자가 여실히 드러납니다... 옛날, 꼭 저런 상아색 금발과 푸른 눈동자를 하고 있는 친구, '아티' 라는 이름을 가진 친구가 당신에게 있었습니다. 그 친구는 어느 날 마을에 대상단의 행렬이 잠깐 들렸을 때, 자신은 이 마을을 떠나야 한다고 당신에게 울며 말하고는, 작별을 고하고 다음 날 사라졌었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점이 하나... 그 친구는 소년이었습니다. 그렇지만 지금 앞에 있는 이 여행자는, 단단한 가죽갑옷을 입고 있는데다 잘 발달된 다부진 체격이긴 하지만 여자입니다.
한바탕 돌풍이 지나고, 다시 후드를 덮어쓰고 망토 자락을 여민 여행자는 말을 이어갑니다. 당신을 의심하지 않습니다. 그 시계공이 낯을 굉장히 심하게 가린다는 사실을 잘 알고, 그래서 따로 심부름꾼을 두었다는 것을 납득하는 것처럼요.
"제가 그 시계 주인은 아니지만, 시계의 주인을 대신해서 왔어요."
다시 후드 자락을 여민 여행자는 노새의 고삐를 다시 잡으며 당신에게 아까 대답의 사례로 보여주었던 은화를 내밉니다.
"시계탑까지 같이 가주실 수 있나요? 그 시계, 잘은 모르지만 아마 상당히 수리가 필요할 거라서 시계공이랑 직접 이야기해 봐야 할 것 같아요. 아마 저라면 만나줄지도 몰라요."
이상한 것이 조금 있습니다... 이 여행자는 조금 전에 노새를 끌고 마을로 들어오는 언덕을 넘어온데다, 아직 각반이 먼지투성이라 마을 여관에 들렀다 나왔음직한 차림은 아닙니다. 그렇지만 마을 여관에 선술집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물론 그건 여관에 선술집이 딸려있는 경우가 흔하니까 그렇다 쳐도, 시계에 대한 이야기는, 시계 부품들이 좀 이상하게 짜맞춰져 있긴 했지만 그래도 톱니바퀴 하나를 뒤집어 끼워주는 것만으로 제법 잘 돌아갔었는데요... 왜 시계에 '상당한 수리'가 필요할 거라고 단정하고 있는 걸까요?
# 좋아요! ^.^ 시계공의 몇 안 되는 친구였다고 해도 좋아요. 시계공이 내성적인 만큼 받아주시기 힘든 이야기였을 법도 한데 받아주셔서 감사해요! # 언젠가 상황극판에서 어렸을 때는 소년인 줄 알았는데 나중에 장성하고 나서 재회했더니 여자더라, 하는 클리셰를 본 적이 있어서.. 못 알아본 상황에 개연성을 더하기 위해 써봤습니다
# 그런데 시계공이 아티와 함께 지냈을 때도 시계공이 시계를 좋아했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x.x 옛날에도 시계공이 시계를 좋아하는 모습을 보였다고 한다면, 다시 돌아온 아티가 이 마을의 시계공이 그렇게 신통하다더라 하는 말을 들었을 때 '네가 정말로 시계공이 됐구나!' 하고 짐작할 수 있을 텐데, 이 부분과 아티의 성별에 대해 조정이 필요하시다고 하면 말씀해주세요. 다시 써오겠습니다...!
>>73 # 지금 확인했습니다! 오늘 안에 답레를 써올 수 있을 지는 몰라서 말씀하신 부분만 우선 답해드릴게요 :3 # 시계공이 어릴 적 남자아이(사실은 여자아이지만)랑 친구를 할 수 있을지 의문이라 소년인 줄 알았다 부분이 조금 걸리네요... 시계공이 사람을 무서워하는 것에 근본적 원인에 아버지가 있다는 느낌을 생각했어서요! # 시계는 예전부터 좋아했습니다! 시계 뿐만 아니라 기계나 장치류는 전부 다라고 생각합니다.
>>74 # o.O ?! 그 부분이 곤란하다고 하시면 '그런데 이상한 점이 하나... 그 친구는 소년이었습니다' 로 시작하는 단락은 빼버리고 답레를 써주셔도 되어요! 원하시면 그 부분을 빼고 답레를 새로 올릴게요. # 옛날부터 기계류를 좋아했다는 설정 확인했습니다 u.u 감사합니다! # 답레는 원하시는 시간에 천천히 써주세요!
이상한 일이에요. 계속 익숙한 느낌이 들어요. 이 목소리를 언제 들어본 적이 있었을까요? 마을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면서 들어본 목소리 중에 닮은 목소리가 있는가 봐요. 어릴 때는 누군가와 함께 있었던 것 같다는 기억을 끄집어내야 하는 걸까요? 기억하고 싶지 않아 묻어놓은 어릴 적은 달갑지는 않아요. 우연이겠거니, 기분 탓이겠거니 치부하고 싶지만 그러기도 쉽지가 않네요. 누군가와 대화를 하는 도중에 다른 생각을 하는 건 예의가 아니니까 고개를 저어서 다른 생각들을 떨쳐내요. 당신의 말에 나는 새로운 메모를 위해 펜을 듭니다. 기쁘게 들리는 목소리에 의아함을 담아 펜을 움직이려고 할 때, 바람이 불어왔습니다. 쓰고 있던 모자가 벗겨질까 봐 모자를 붙잡았어요. 모자를 붙잡으며 당신의 목소리에 고개가 움직입니다.
"..."
눈이 동그랗게 떠질 수밖에 없었어요. 애써 떨쳐낸 기억이 떠오릅니다. 사라져버린 유일한 친구가 분명하니까요. 네 머리카락 색은 내 눈 색이랑 닮았다고 웃었던 기억이 나요. 아티, 그 이름을 기억합니다. 기억하고 싶지 않는다면서도 잊지는 못하고 있던 어릴 적, 그 이유입니다. 이름을 부를 뻔하다가, 소리 내서는 안 되는 연기를 하고 있었기 때문에 입만 벙긋거리고 목소리는 나오지 않았어요. 또, 친구라고는 하지만 나는 그때 남겨졌습니다. 또 훌쩍 떠나가 버릴까 무서운 건 기분 탓이 아니겠지요. 나는 네가 울면서 떠난다고 말했을 때 울지 않았습니다. 네가 떠난다는 것에 대해 정확히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었어요. 그다음 날 네가 사라져버리고, 마을 어디를 가도 네가 없었을 때, 그다음 날, 또 그다음 날, 아무리 찾아도 너를 볼 수 없었을 때에야 눈물이 났습니다. 다시 만났다며 마냥 기뻐하기에는 나는 너무나도 겁쟁이예요.
'시계는 아직 시계공에게 있습니다. 그리고 시계탑은 잠겨 있지만, 열어 드릴게요. 사례는 정말 괜찮아요.'
이제는 생각할 힘이 없다고 하는 게 맞을 것 같아요. 시계공이 자신을 만나줄지도 모른다고 말하는 것을 보면, 그 시계공이 저일 것으로 생각하는 게 분명해요. 기억하고 있는 것 같아요. 그렇게 생각하면 다시 눈물이 쏟아질 것만 같은 기분이 들어요. 아까는 그저 오해에서 비롯되어 죽을지도 모른다며 겁먹은 것뿐이었는데, 지금은 말로 다 설명할 수조차 없어요. 엄청 많이 서운하다고 하면 될까요? 나는 내밀어진 은화를 받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따라오라는 듯이 발을 옮겼어요. 시계탑으로 향하는 동안 아무런 생각도 하지 않으려고 부단히 노력했습니다.
# >>77 자러간 건 아니었어요! 일이 있었거든요 :3 # 시계공 이름은 아티와 연관있게 짓고 싶다는 바람이 있는데 괜찮을까요?
후드를 꾹 눌러쓴 채로, 그 키큰 여행자는 고개를 들어 마을을 바라봅니다. 징 박힌 장화가 자박자박, 당신을 따라 나무 그림자가 드리운 길을 걷는 소리가 납니다. 노새를 끌고 마을 어귀에 들어서면서, 마을을 이리저리 둘러보는 고갯짓이 감개무량해 보인다면 기분 탓일까요? 그렇게 과묵하지는 않아 보이지만, 애써 말을 아끼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듭니다. 그리고 마침내 시계탑에 도달했을 때... 여행자는 노새의 고삐를 시계탑 옆의 울타리에 매어두면서 시계탑을 올려다봅니다. 그러나 잠시 후 고개를 빼고 시계탑을 찬찬히 살피듯 들여다보더니, 고개를 갸우뚱하고는 고개를 돌려 당신을 내려다봅니다. 시계탑에 지금 아무도 없다는 것을 눈치챈 것이겠지요. 질문하려는 듯한 태도. 그러나 질문은 꺼내어지지 않고, 여행자는 잠깐 가만히 있습니다...
여행자는 약간 떨리는 손길을 조심스레 들어서, 자신의 얼굴을 여미고 있던 두건의 끈을 풀어젖히고는 두건을 벗어버립니다. 그리고 옅은 금발 머리카락과, 푸르스름한 눈동자를 드러낸 채로 말도 안 된다는 듯이 당신을 가만히 바라봅니다.
"..."
그러나 뭐라 말은 못 하고 당신을 바라보고 있을 뿐입니다. 마치 하고 싶은 말 수백만 마디가 한꺼번에 치솟아올라 오히려 목구멍이 틀어막혀 버린 듯이.
말 백 마디보다 행동 한 번이 나을 때가 있습니다. 나는 당신의 시선이 시계탑을 향한 후에는 내게 머물고 있다는 것을 눈치챘어요. 주머니에서 잘그락거리는 소리를 내며 열쇠 꾸러미를 꺼냈습니다. 시계탑의 1층 열쇠를 찾기는 쉬워요. 유난히 오래되어 보이는 열쇠를 찾아내면 되거든요. 잠긴 시계탑의 1층 문에 열쇠가 꽂히고, 찰칵 돌아가면 문이 열립니다. 나는 당신을 응시하다가 시계탑 안으로 들어가 버렸어요. 따라오라는 의미였어요. 시계탑이 아닌 곳에서 내 정체를 밝힐 수는 없으니까요. 마을 사람들이 알아보는 것도 큰일이지만, 여태 정체를 숨기면서 거짓말한 게 들키는 것도 무서우니까요... 사람을 무서워하는 전 남장을 하고서야 겨우 최소한의 외출을 하는데, 거짓말은 나쁜 거니까요. 제게 안 좋은 감정을 갖게 된 사람들을 마주할 자신은 없어요.
시계탑의 1층에는 제가 만든 도르래 장치가 있어요! 마을에서 가져온 시계들을 공방에 올리거나, 다시 1층으로 내릴 때 쓰기 위해 만들었어요! 마침 마을에 시계를 고쳐달라는 분에게 시계를 받으러 갔었기 때문에, 나무함에 시계를 담아 도르래를 작동시킵니다. 시계는 저보다 훨씬 빨리 위로 올라갑니다. 시계가 무사히 올라가는 것을 보고 도르래를 정지시켜요. 그리고 안경을 벗어요. 다음에는 망토의 후드를 벗고, 그 아래 쓰고 있던 모자도 벗습니다. 분홍빛 머리카락이 아래로 흘러내려요. 구불구불 휘어져 있는 머리카락이 목덜미를 간지럽히면, 저는 이제부터 시계공입니다.
당신이 안쪽으로 들어오는 인기척을 느끼면, 눈을 바로 마주칠 수 없어 고개를 들지 못했습니다. 시선 또한 아래를 향했어요. 무슨 말을 해야 할까요? 오랜만에 만난 네게 그때 왜 그렇게 사라져버렸느냐고 원망할 수는 없겠지요. 그때 얼마나 슬펐는지 말하는 것도 첫마디로 내기에는 부적절해 보여요. 하지만 엄청 서운한데 어쩌면 좋을까요. 하고 싶은 말을 목소리로 내지 못하게 되니 다른 방법으로 새어버리고 말아요.
"안녕."
인사가 제일 무난할 것 같았어요. 그래서 인사말을 건넸는데, 타이밍 나쁘게도 눈물이 뚝뚝 떨어져요. 아티에게 하고 싶은 말은 '안녕'이 아니니까요. 어디 갔었는지, 편지라도 쓸 수는 없었는지, 그런 말들이 하고 싶어요. 제일 하고 싶은 말은 '보고 싶었다'일까요?
# 시계공의 이름은 로빈(Robyn)입니다 :3 베아트리체의 어원을 살펴보니 나그네라는 의미가 있던데, 로빈(Robin)은 울새의 이명이에요. 울새는 나그네새(철새)이구요. 발음은 같지만 철자가 다른 이유는 여성형 이름으로 쓸 때는 Robyn 쪽을 쓰는 거 같더라구요. # 애칭은 생각해두질 않아서 아티가 로빈에게 애칭을 썼다면 맘대로 지으셔도 됩니다 :3
여행자는 당신의 의중이 무엇인지 알겠다는 듯이 기꺼이 당신을 따라옵니다. 아까까지 흙바닥 위에서도 뚜벅뚜벅 하고 뻐기듯이 큰 소리를 내던 징박힌 장화가 시계탑 안의 마루로 올라올 때에는 괜히 그 소리를 죽이고 맙니다. 마루에 올라서자, 여행자는 이젠 더 거리낄 것도 없다는 듯 먼지투성이 망토를 끌러내렸습니다. 움직이기 편한 바지에 각반, 징 박힌 가죽갑옷에 두꺼운 장갑, 허리춤에 권총 세 자루와 총알주머니를 주렁주렁 매달고 있는 차림새. 갑옷 여밈에는 조그맣지만 정교하고 섬세한 인장이 박혀 있습니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머리 셋 달린 사자와, 교차된 두 자루 검 위에 놓인 말발굽... 황실 기병대의 인장이네요.
그런데, 분명 자신은 황실 근위기병대로서 임무를 받아 도난당한 코스모드롬 열쇠를 찾으러 왔을 텐데... 자신의 용건은 그뿐이었을 테고, 이 곳은 고향 땅 이전에 임무 지역인데... 분홍빛 머리카락을 풀어내린 당신 앞에서, 직함과 임무는 망토와 함께 벗겨져 버리고 여행자는 그만 아티가 되어버리고 맙니다. 그때와 똑같은 밀색의 금발을, 그때와 똑같이 머리 뒤쪽 높은 곳에 질끈 동여매고, 그때와 똑같은 활기찬 미소가 어울리는 선머슴애 같은 얼굴이 감정을 있는 힘껏 붙들어매려 용을 쓰는 표정으로 일그러져서는, 그때와 똑같은 파르스름한 눈동자를 당신에게 마주한 채로요.
"로비."
그때보다 다부지게 성장한 어깨며 크게 웃자란 키며 실용적으로 차려입은 갑옷이며 다 소용없습니다. 각오도 했는데, 마음의 준비도 했는데, 당신이 그때도 흘리지 않았던 눈물을 흘리는 모습에, 자기가 자기 스스로 입에 올린 당신의 호칭 두 음절에 그게 그만 와르르 무너져버리고 맙니다.
분명 그때는 울며불며 이별을 고하는 자신을 멍하니 바라보던 당신에게, 자신마저도 그렇게 소중한 친구가 되지는 못했었던가 하고 더 서럽게 울었었는데. 자신에게 선택권이 없었던 여행길을 섭섭함에 눈물로 물들였었는데. 지금 눈물을 툭툭 떨어뜨리는 당신의 모습에 그만 이제서야 아티는 왜 당신이 미처 눈물을 흘리지 못했었던가 깨달아버렸습니다.
그래서 더 눈물이 나오는데, 도무지 그때처럼 울어버릴 염치가 없어서. 혼자서 울어버리느라 정신이 없어서 "떠나버린다" 라는 말이 어떤 의미인지 당신에게 채 못다 전하고 떠나버려서. 아티의 눈시울도 뜨거워 옵니다. 그러나 아티는 떨리는 손으로 장갑을 조심스레 벗고는, 갑옷의 주머니에 손을 찔러넣어서 손수건 한 장을 꺼내서 당신의 눈물을 먼저 닦아주려고 합니다.
"...보, 고 싶었어..."
아티는 뭔가 말했습니다. 울음소리와 섞여서 어금니 사이로 뭉개져 나온 소리라 잘 들릴지는 의문이지만요. 이런 일이 일어날 수도 있지 않을까 하고 어림짐작은 했지만 정말로 일어날 줄은 몰랐고, 결국 전혀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재회해 버리고 말았습니다.
마을 밖으로 한 발자국도 나간 적이 없고, 혼자가 된 이후로는 시계탑에 숨어지냈어요. 그런 내가 알아볼 수 있는 인장이라면, 분명 황실의 것이겠지요. 나는 그날로부터 무언가 성장한 게 없는 것만 같은데, 아티는 아닙니다. 황실의 명을 받을 정도로 멋지게 나아간 모양이에요. 저는 여전히 사람을 무서워하고, 시계를 비롯한 기계와 장치들을 좋아할 뿐이라 초라해지는 기분이 들어요. 그래서 제게 연락을 하지 않았던 걸지도 몰라요. 분명 지금 아티의 옆에는 같은 인장을 새기고 다니는 동료들이 있을 테고, 당연히 저보다 더 멋진 사람들이겠지요. 저는 마음을 굳게 먹기로 했습니다. 오늘 하루, 이 순간만 지나가면 수많은 어제와 같은 내일이 찾아올 테니까요.
로비, 제 애칭입니다. 아티가 떠난 이후로 단 한 번도 들은 적 없는 이름이지요. 분명 마음을 굳게 먹기로 했는데, 잊고 있던 애칭으로 한 번 불렸다고 흔들리고 맙니다. 사람과 워낙 거리를 두고 지내서 그런 걸까요, 아티이기 때문에 그런 걸까요? 혹은 둘 다 일지도 몰라요. 속이 울렁거리고, 눈물은 뚝뚝 떨어지고, 울음소리를 내지 않기 위해 이를 꼭 물었습니다. 나는 네가 우는 이유를 모르겠어요.
"시계는 위에 있어."
여전히 제 시야에 담기는 풍경은 시계탑의 1층 바닥입니다. 그마저도 눈물방울에 일렁거리고 있어 본다고 말하기도 민망해요. 눈물을 훔쳐내려고 했어요. 아티는 그 회중시계를 주인에게 가져다주러 온 것이겠지요. 아티가 왔다는 건 아마도, 황실의 사람 중 하나가 그 시계의 주인일 거예요. 그러니 시계를 돌려주면 이 만남은 끝이 날 거로 생각해요. 더 아프기 싫다면 지금 아픈 선택을 하는 게 맞을 거예요. 그런데 내 눈물이 내 손에 닿지 않았습니다. 아티의 손수건이에요.
그런데도 나는 할 수 있는 말이 없어요. 쓴 것을 먹기 전에 단 것을 한 입이라도 먹었다면, 더욱 쓰게 느껴지는 걸 아니까요. 울먹이는 목소리가 떨리면서 담은 말은 시계에 관한 이야기뿐입니다. 제 행동도 그러합니다. 손수건이 눈가에 닿았을 때는 놀라서 아티를 바라보았지만, 다시 시선을 바닥으로 내렸어요. 그리고 아티의 손을 밀어내려고 했습니다. 추운 것도 아닌데 손에 힘이 들어가지를 않고 오히려 떨리는 것까지 보여요. 그래도, 난 손등으로밖에 눈물을 훔치지 못하겠지만 아티의 상냥함을 받을 자신이 없어요.
계획에 없던 재회인 것은 맞습니다. 임무를 다 끝마치고 나서 번듯한 모습으로, 빳빳하게 다린 제복에 반짝반짝한 인장을 차고, 로비가 잘 기억하고 있을 아티의 웃는 얼굴을 보여주는 재회를 하고 싶었죠. 이번 임무만 끝나면 수도 의무복무기간이 끝나고, 그러면 파견근무를 신청해 보안관 직책으로 다시 고향으로 돌아올 수 있으니까요. 대상단을 따라 나선 방랑길 위의 기구한 운명 사이에서 마침내 자신의 삶에 대한 제어권을 되찾은 시점에서, 아티가 고향으로 돌아올 수 있는 가장 빠른 방법이었습니다.
그러나 아티가 정확히 바라고 있던 것은 재회 그 자체였습니다. 고향 땅으로 돌아와서, 아직도 당신이 자신을 소중한 친구로 여겨주고 있는지 묻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만일 소중한 친구였다고 한다면 관계를 복원하고 싶었고, 소중한 친구가 아니었다고 한다면... 그러면 거기서부터 다시 시작하고 싶었죠. 고향 땅을 떠나간 이후 이런저런 괴로운 일도 많았고 즐거운 일도 종종 있었습니다만, 그 가운데에 반짝반짝 남아있는 행복했던 날들을 꼭 쥐고 버틸 수 있었기에.
누가 뭐래도 아티의 어린 시절에 행복한 기억으로 남겨져 있는 순간들에는 모두 당신의 모습이 한가운데에 빠짐없이 아로새겨져 있었거든요.
"시계 이야긴 좀 있다가 해."
자신의 손을 밀어내는 당신의 손길에 실린 떨림이 옮겨붙은 걸까, 자신을 밀어낸다는 사실이 자신이 생각했던 것보다 충격이었는지 아티의 손이 움찔합니다. 그렇지만 물러서지는 않습니다. 물러설 거였다면 애초에 후드를 벗지도 않았겠죠. 지금 이 순간만큼은 기병대원 베아트리체가 아니라 아티이기로 결정했습니다.
"편지, 두 번 보냈는데... 못 받아봤어?"
당신이 모르는 사실과 아티가 모르는 사실이 하나씩 있었습니다.
당신이 모르는 사실은 아티가 당신에게 편지를 쓴 적이 두 번 있다는 것이고, 아티가 모르는 사실은 자신이 쓴 편지가 불행한 우연으로 두 장 모두 다 당신에게 닿지 못했다는 사실이었죠.
그래서 고향에 돌아올 때는 조금 체념을 했었습니다. 아마 로빈은 자신을 그렇게 친하게 생각하지 않았던 모양이라고. 오히려 홀가분하게 서로 사무적으로 코스모드롬 열쇠의 행방에 대해서 묻고 그걸 계속 쫓아갈 수 있었을 것이라고. 그런데 왜 지금 당신은 이렇게 터져나올 것 같은 눈물을 붙들고 있는 걸까요. 당신이 자신에게 매어놓고 있던 감정의 무게가 얼마나 되는 걸까요. 자신이 당신에게 갖고 있던 감정의 무게는 얼마나 되는 걸까요. 모르겠습니다.
"왜 우는 거야."
결국 먼저 눈물을 쏟은 쪽은 아티였습니다.
"로비."
내가 돌아왔다고, 보고 싶었다고, 여기까지 돌아오느라 나 정말로 고생 많이 했다고-솔직히 그 고생 아직 안 끝났다고, 너는 내가 보고 싶지 않았냐고, 울지 말라고, 아니 울고 싶으면 울어도 좋다고, 날 밀어내지 말아달라고... 모든 말들이 눈물로 뭉뚱그려져, 결국 입에 올리는 것은 눈물에 떨며 당신을 부르는 말뿐입니다.
모나게 구는 데는 자신이 없어요. 특히 친구에게는 더욱더 그렇고, 오랜만에 만난 친구한테는 더더욱 그렇습니다. 갑자기 떠났다가 갑자기 돌아와서는 눈물짓는 친구에게 쌀쌀맞게 굴면, 친구라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오해를 살지도 몰라요. 네가 내게 너무 큰 자리를 차지하고 있고, 그래서 네 빈 자리가 너무 아파서 그렇다고 하면 이해해줄까요? 나는 다시 그런 아픔을 겪고 싶지 않아요. 처음부터 끝까지 혼자이길 바라요. 누군가 함께하는 시간에 익숙해지면 다시 혼자가 된 나는, 아마도 두 번은 이겨내지 못할 거 같아요. 떨려오는 두 손을 서로 맞잡았어요. 손이 차갑습니다. 손 위로 떨어지는 눈물이 따뜻하다 못해 뜨겁게 느껴지는 것 같았어요.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네가 보낸 편지가 있었다면, 시계공이라는 내 책임도 뒤로 하고 답장을 썼을지도 몰라요. 초침이 째깍거리는 시간이 1초 느려지고, 2초 느려져도 모르고 네게 보낼 편지를 썼을 거예요. 내가 너에게 편지를 쓸 수 있도록, 연락할 방법이라도 알려주었으면 좋았을 거라는 생각이 드니 작은 원망이 솟았어요. 눈을 깜빡일 때마다 눈물은 새로 맺혀 데구룩 떨어지고, 너를 잠깐 밉다는 듯이 쳐다보았습니다.
"...안 알려줄 거야."
정말 네게 못되게 굴려면 울어서는 안 되는데, 마음대로 되질 않습니다. 네가 눈물을 쏟는 걸 보니 참으려고 해도 잘되지 않았어요. 울음을 너무 참아서 머리가 아픈 것 같은 기분까지 들어요.
"또 떠날 거면서."
생각하는 것과 말로 담는 것은 달라요. 네가 떠날 거라고 생각만 하는 것과 내가 스스로 소리를 내 그 사실을 확정 지어버리는 것은 다릅니다. 네가 이렇게 왔다가 떠나리라 생각하면, 입술을 최대한 꼭 깨무는 수밖에는 없습니다. 시계탑에서 엉엉 우는 소리가 난다면 다들 이상하게 생각할 거예요. 시계탑은 언제나 예쁜 종소리만 내었으니까요.
# 아티가 더 예쁘다고 생각합니다! # 괜찮으시면 로빈이 앞머리 가르마를 탄게, 아티를 따라한 거라고 해도 괜찮을까요? 아티가 떠난 후부터요 :3
어렸던 시절, 어머니는 항상 자신에게 자신의 아버지는 대상단 소속의 상인이라는 말을 해주곤 했습니다. 그리고 그건 거짓말이 아니었죠. 친아버지를 따라 상단 행렬과 함께 떠나기로 아티의 어머니가 결정했을 때, 어린아이일 뿐이었던 아티에게는 선택권이 없었습니다.
대상단에 편지를 보내는 방법이야, 상인 길드에 문의해서 해당 상단의 중간 기착지에 미리 편지를 보내두면 나중에 기착지에 도착한 캐러밴 행렬이 편지를 받아볼 수 있는 방법이 있었지만... 그 대상단의 이름을 모르는데야 어쩔 수 없죠. 거기다 그 당시에는 아티도 당신도 그런 방법이 있다는 것을 몰랐습니다. 뒤늦게나마 그런 방법이 있다는 것을 안 아티가 당신에게 편지를 보냈지만, 상인 길드의 물류창고에서 분주히 오가는 사람들 사이에 그 편지는 그만 사라져 버리고 말았습니다.
"한 통도?"
당신이 눈물을 뚝뚝 흘리며 고개를 끄덕이자, 아티는 억장이 무너지는 표정으로 반문했습니다. 왈칵 눈물이 새어나갑니다. 당신과 자신의 눈에서 왜 이렇게 뜨거운 눈물이 치솟는지 모르겠습니다. 자신도 모르겠고 당신도 알려주지 않습니다. 친구끼리 만난 거라면 너 왜 이렇게 변했어- 이건 그대로네- 하고 시시콜콜한 이야기나 터놓고 잡담이나 하게 될 줄 알았는데, 가슴 한가운데 맺혀 있던 응어리가 녹아내리고 있는 것 같은 이 고통은 뭘까요. '둘도 없는 친구' 라는 꼬리표를 달고 마음 가운데에 모셔둔 당신에 대한 기억이, 자신이 생각하던 것보다, 어쩌면 친구간에 가질 수 있는 마음보다 더 무겁게 더 깊이 마음 속에 자리잡고 있었나 봅니다.
아티는 당신의 손에 붙들린 손 대신에 다른 손을 뻗어 당신의 눈물을 어떻게든 닦아주려 합니다. 막지 못할지언정 닦아주고라도 싶어서요. 내가 돌아오기를 바라지 않는 거야? 하는 반문이 턱끝까지 차오릅니다. 그렇지만 그런 불확실한 말을 입에 올리고 싶지 않아서 삼킵니다. 자신은 돌아왔고, 이제 다시 계속 돌아올 셈이니까요. 자신이 돌아오는 의미가 당신에게 남아있다면.
"나 돌아왔어."
만남이 있으면 헤어짐이 있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렇지만 헤어짐이 있으면 재회가 있습니다. 이제 자신은 열 살 조금 넘은 꼬맹이가 아니라, 스스로의 운명을 결정할 권리를 가진 한 명의 당당한 성인입니다. 이젠 기약없이 사라지지 않아도 됩니다. 돌아올 방법도 권리도 있습니다. 어디로 편지를 보내면 되는지, 어떻게 연락하면 되는지, 언제 돌아오는지 모두 이야기해줄 수 있습니다.
"내가,"
그리고 다시 돌아올 거야. 이번엔 오래 기다리게 하지 않을 거야. 와글와글, 당신의 눈에 흐르는 눈물을 막고 싶어하는 말들이 혀끝에서 들끓습니다. 그렇지만 아티의 입에서 나온 말은, 조금 다른 말이었습니다.
"내가 너무 오래 기다리게 했지."
아티는 눈물을 뚝뚝 떨어뜨리고 있습니다.
"미안해."
# '어릴 적 친분' 한 마디로 이런 관계성이 뚝뚝 떨어질줄은 몰랐어요...................(무한점) # 과찬의 말씀을... 8-8 로빈이 너무 예뻐서 아티도 어떻게든 로빈과 어울리게 해주려고 노력했어요.. 앞머리 가르마라, 두 사람 눈물이 그치면 아티 입으로 한번 언급해봐야겠네요 uu 좋아요!
하늘 위에서 은은하게 비치는 달빛은 스포트라이트. 그리고 조용한 공터는 그를 위한 무대였다. 낮엔 아이들이 놀이터로 사용하는 그 공터 부근엔 민가가 전혀 존재하지 않았다. 민가와는 조금 떨어진 곳에 위치한 곳이었기에 소년은 마음껏 자신이 들고 있는 바이올린을 아무에게도 피해를 주지 않고 연주할 수 있었다.
고요한 바이올린 속에 달빛이 녹아내려 은은한 분위기를 풍겼다. 과하지도 않고, 덜하지도 않은 은은한 밤풍경을 연주하듯 소년의 손이 느긋하고 천천히 움직였다. 한치의 흔들림 없이 잔잔하게 울리는 것이 그야말로 '밤'이었다. 음악에 관심이 있는 이라면 누군가가 연주해서 이미 존재하는 곡이 아님을 짐작할 수 있을리라. 그저 부드럽게 자연스럽게 멜로디를 이어나가며 소년은 조금은 서늘한 밤공기 속에서 투명한 입김을 약하게 내뱉었다.
그 입김소리조차 연주에 방해되지 않게 조절하며 소년은 몸을 뒤로 돌려 달빛을 뒤로 했다. 날개뼈까지 내려올 정도로 묶어내린 머리카락이 달빛에 살며시 비쳐졌고 바람의 움직임에 천천히 흔들렸다. 연주하는 손과 비슷한 템포로 천천히 흔들리는 가운데, 멜로디는 조금 크게 바뀌어가며, 마치 구름이 달을 가리듯 조금 어두운 느낌으로 바뀌었다. 어두컴컴한 밤을 연상하듯 침울한 멜로디가 울리는 듯 했으나, 그것도 잠시. 구름은 지나가고 달이 다시 세상을 비추듯 멜로디가 다시 고요하고 잔잔하게, 밝은 어조로 바뀌었다.
멜로디를 자유롭게 바꿔가며 연주하는 것에 너무 집중한 탓인지, 누군가가 근처를 지나가는 것조차 소년은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저 연주에 녹아내려, 그것에만 집중할 뿐이었다.
#너무 뜬금없는 전개라던가, 민가가 주변에 없다고 한만큼 밤에 잠 못자게 왜 연주하냐고 화내는 그런 것만 아니면 어떤 전개로 이어줘도 괜찮아! 꼽주는 것만 아니면 진짜 오케이!
나의 유년 시절은 아티를 제외하면 기억하고 싶지 않은 것투성이였어요. 그마저도 아티가 홀연히 사라져버려서, 좋은 기억조차 떠올리고 난 후에는 아프기만 할 뿐이라 빛이 바래어도 다시 꺼내 보지 않았어요. 아버지는 좋은 사람이 아니었어요. 어머니가 말도 없이 떠나갈 정도로요. 아티가 떠나가고서 슬픔에 빠져 울고 있던 나를 돈이 궁해서 팔아넘기려고 했던 사람이었습니다. 다행히 밤늦게까지 작업을 하시느라 깨어 계셨던 시계공 할아버지가 팔려 가던 상황을 발견해서 다행이었어요. 시계공 할아버지는 제 값을 치러주었고, 나는 그 빚을 갚기 위해 할아버지의 조수가 되었어요. 하지만 할아버지를 제외한 마을 사람들은 그때의 어린 나, 로빈은 그대로 팔려 간 줄로만 알고 있어요. 마을 사람들에게 들키면 아버지에게도 들키게 됩니다. 나는 그래서 시계탑에 숨어들었어요. 할아버지는 가족보다 따스했고, 시계는 언제나 좋아하는 것이었으니 괜찮아요. ...그렇다고 생각하는데, 어째서 네 목소리가 돌아온다고 말하니 서러움이 넘쳐흐를까요? 너와 행복했던 순간을 다시 한번 느껴보고 싶은 걸까요.
네 이름을 불러도 괜찮을지 계속해서 고민하고 있어요. 분명 소리를 내 버리면 돌이킬 수 없을 거예요. 억지로 메꾸었던 네 자리를, 다시 네가 들어올 수 있도록 비워도 괜찮을지 모르겠어요.
"편지 안 써도 돼."
눈가에 네 손이 다시 닿았습니다. 나는 이번에 다가온 네 손길은 밀어내지 않았어요. 이제는 모난 소리를 할 수 없어요. 널 밀어내는 것도 너무 아파서 생각하지 않기로 했어요. 마음이 시키는 대로 해보자고요.
"편지 쓰지 않아도 괜찮도록 떠나지 마."
말도 안 되는 응석이라는 것을 나도 잘 알고 있어요. 하지만 이제 지금 아티에게 하고 싶은 말이에요. 아티가 들어주지 않아도 괜찮아요. 투정이라도 부리고 싶을 뿐입니다. 다만 울음소리가 새어 나올 것 같으면 참아내면서 목소리를 내느라 온전히 전해지고 있는지도 모르겠어요. 아티가 다시 떠나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이런 말밖에 할 수 없는 내가, 좀 더 의젓하고 멋진 사람이었다면 떠나도 괜찮다고 말해줄 수 있었을 텐데요.
"...보고 싶었어. 많이 보고 싶었어."
"다시 로비라고 불러줘서 기뻐."
"널 다시 부를 수 있어서 기뻐,"
엉망진창, 두서없는 문장들의 나열입니다. 내가 지금 엉망진창이기 때문일 거예요.
"아티."
웃어버렸어요. 눈물을 뚝뚝 흘리면서, 여전히 눈물이 눈가에 맺히고 있으면서도 웃는 것 또한 엉망진창에 포함되겠지요.
# 저도 생각보다 엄청 깊은 관계성이 나와서 얼떨떨해요... 시계탑에서 히키코모리처럼 지내는 시계공 설정이 생각났던 것 뿐이라 :3 # 너무 멋진 황실 기병대원인데 지당한 말 아닐까요... # 로빈 묘사가 적어서 픽크루라도 가져온 건데 외형적인 부분에서 답레에 필요한게 있으시면 편히 물어봐주세요!
>>89 # (로빈의 아버지 설정에 분노와 슬픔과 안타까움이 뒤범벅되어 눈물을 쏟아낸 나머지 빼빼 말라버린 채로 자기 눈물에 휩쓸려가는 멸치) # ...사실 처음에 답레 쓰기 시작할 때는 모험과 악당세력과 퍼즐과 보스전이 마련되어 있는 코스모드롬 레이드를 구상하고 있었는데 전개가 달콤쌉싸름해져버렸어요... 오히려.. 오히려 좋아
당신의 말에, 베아트리체는 고개를 힘있게 끄덕입니다. 아직 돌아오기 위해 건너야 할 단계가 조금 남았지만, 원래는 그 모든 단계를 다 건너고 나서야 당신에게 돌아오려고 했지만, 그들이 코스모드롬 열쇠를 맡긴 게 하필이면 이 주에서 가장 솜씨좋은 시계공으로 소문난 당신이었기에. 베아트리체는 손을 내밀어 당신의 눈가에 맺힌 눈물을 닦아내려 해봅니다. 어릴 적부터 이것저것 뚝딱뚝딱대며 장난치는 걸 좋아해 손끝이 곱지는 않았지만 못본 새 더 거칠어졌네요. 베아트리체는 당신의 손에 꼭 쥐여있는 다른 손에서 손수건을 받아들어 그것으로 눈물을 닦아주려 합니다. 눈가가 쓸리면 아플 테니까요.
"응, 응."
"나 다녀왔어, 로비."
"나도, 정말로 보고 싶었어."
해야 하는 말이 남아있지만, 베아트리체는 당신의 말에 아니라고 대답하지 않습니다. 당신이 욕심껏 말하는 것처럼, 그녀 역시도 욕심껏 대답하고 싶었으니까요. 더 이상 돌아갈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던 선명하게 행복한 나날들이 당신의 얼굴에서 빛나고 있었기에. 과거로 돌아갈 수는 없겠지만, 다시 함께하는 나날을 보낼 수 있다는 희망이 너무도 눈앞에 가까이 다가와 있었기에.
베아트리체는 손을 들어서 가죽갑옷의 앞섶을 툭툭 끌렀습니다. 가죽갑옷에 징이 박혀있는 이유는 가죽 아래에 쇳조각을 고정시켜두기 위해 박아둔 거라서, 그 갑옷을 입고 있으면 누군가를 안아주기엔 너무 차갑고 딱딱한 품이 되니까요. 갑옷 아래에 받쳐입는 누비옷도 썩 부드러운 재질은 아니지만, 그래도 갑옷보단 나을 것 같아서.
"응."
아티. 하고 당신이 부르는 소리에 베아트리체는, 아티는 양 팔을 활짝 펼쳐보였습니다. 그렇게 편한 품은 아니지만, 이나마 당신이 눈물젖은 얼굴을 마음껏 기댈 수 있도록요.
황실 기병대원 베아트리체 중위가 있던 자리에는, 벅찬 감정에 웃는 얼굴로 울면서 눈물을 뚝뚝 흘리고 있는 아티만이 남아 있었습니다.
# 외형 묘사는 픽크루만으로 충분해요! 오히려 픽크루 가져와주셔서 고마워요... 아티에 대해서도 답레를 쓰실 때 필요하거나 궁금한 내용이 있으시다면 마음껏 질문해주세요.
감정을 쏟아내는 건 오랜만에요. 받아줄 사람도 없었고, 꺼내려고 하지도 않았으니까요. 그래서 어설픕니다. 누군가 눈물을 닦아준 적이 손에 꼽을 거라고 생각해요. 여전히 울음소리를 내지 않으려 입술을 깨물고 있다 보니 히끅거리는 소리만 납니다. 그만 울어야 하는데, 아티도 울고 있는데도 내 눈물을 닦아주고 있는데, 아무리 차분하게 생각해보아도 쉽지 않아요. 둑이 무너지면서 쏟아지는 물살은 너무나도 거센 모양이에요. 이대로라면 손수건이 내 눈물로 다 축축해질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요.
"상단이 마을에 올 때마다 널 찾았어."
네가 작별을 고한 날은 대상단의 행렬이 마을에 찾아온 날이었으니까요. 마을에 상단이 온다고 하면 혹시나 하는 마음에 시계탑 밖으로 한달음에 달려 나갔습니다. 상단뿐만이 아닙니다. 시계탑 위에서 마을 어귀를 바라보고 있자니, 외부인이 오는 것 같다 하면 작은 기대를 품고는 했습니다. 너를 지금에서야 만났다는 건, 여러 번이나 품고 말았던 크고 작은 기대들이 다 무너졌다는 뜻이지요. 이제는 기대조차 하지 못할 때 네가 돌아왔어요.
분명 네 편지를 받지 못한 이유는, 네가 떠나고 얼마 안 되어서 내가 시계탑으로 숨어버렸기 때문이겠지요. 아버지를 다시 마주할 용기가 있어서, 원래 살았던 그 집에서 너를 기다렸다면 우리는 편지를 주고받을 수 있었을지도 모르겠어요. 아티에게 이 말은 하지 않기로 해요. 오랜만에 만난 옛 친구에게 좋지도 않은 이야기를 들려줄 필요는 없겠지요. 마을 사람들이 아티를 알아본다면, 그리고 어린 로빈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면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너도 알게 되겠지만요. 그러니까 굳이 앞당기지 않기로 해요.
"...?"
나는 아티가 팔을 벌리는 것을 바라보았습니다. 언제부터 그랬는지, 앞섶이 풀려있습니다. 갑옷이 불편해서 그런 걸까요, 아니면 더워서일까요. 그것도 아니라면 옷이 혼자 풀린 걸까요? 깜빡거릴 때 떨어지는 눈물을 훔치고, 아티를 바라보았어요. 그리고 그때 아티가 무슨 이유로 팔을 벌리고서 있는지 깨달았어요. 나를 안아주려고 한 것 같다고 생각해요! ...아닐 수도 있지만요. 내가 아티한테 안겨도 괜찮은 걸까요? 누군가를 안고, 안아주고 했던 것도 오래된 것 같아요. 나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다가가지를 못합니다.
# >>89 아버지는 마을에서 추방당했으니 괜찮아요! 시계공 할아버지가 로빈 몰래 해결해버렸어요. # 모험과 악당세력과 퍼즐과 보스전이 하고 싶으시면 하셔도 괜찮아요 :3 # >>91 저는 텀이 널뛰기를 해서... 그래도 밤 늦게는 아마 자고 있을 거 같네요. # 어렸을 때는 아티랑 로빈 키가 엇비슷했을까요? 지금 아티는 키가 크다고 해서 로빈보다 크다고 생각하는데, 만약 엇비슷했었다 하면 안게 됐을 때 키 차이에 로빈이 놀랄 것 같아서요.
"내가 열여덟 살이 되는 해쯤에 내가 살던 마을에 방문할 예정이었어. 그런데 상단이 좀... 잘 안 풀렸어."
아티를 데려간 그 상단은 정말로 커다란 상단이었습니다- 3개 대륙과 2개 대양을 오가는 기나긴 상로를 갖고 있었기에, 한 번 상로를 일주하는 데에 6년에서 8년이 걸리는 상단이었죠. 그렇지만 당신이 그 대상단의 상호를 알았더라면 오히려 그 기대가 더 아프게 무너졌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아티를 데려간 대상단은 몇 년쯤 뒤에, 다시 이 마을로 돌아올 수 있게 되기 전에 이런저런 비리 사건과 불행과 도적떼의 습격에 휘말려 많은 것들을 잃은 나머지 해산했거든요.
"그래서 그냥 내 발로 왔어."
그렇지만 이제 지나간 일들에 매달려 과거의 고통을 붙들고 있지 않아도 될 것 같습니다. 비록 너무 늦어 당신의 기대가 다 무너지고 난 뒤에야 뜻밖의 재회를 하긴 했지만, 그 모든 역경과 희박한 가능성을 딛고, 아티는 그때 그 시절의 금발과 푸른 눈을 간직한 채로 당신에게로 돌아왔으니까요. 아티도 자신이 늦었다는 것을 알기에, 자신이 낯선 이국의 하늘 아래에서 당신이 있는 고향을 애타게 그리고 있었던 만큼이나 당신 역시도 자신을 애타게 기다렸다는 것을 이제는 알기에, 아티는 자신의 눈에서 흐르는 눈물은 생각지도 않고 당신의 눈물을 닦아주고 있습니다.
"..."
정말 왜 그래, 안아주는 법도 잊어버린 것처럼. 당신이 어쩔 줄 모르고 바라보고 있자, 아티는 갑옷을 아예 훌렁 벗어버리고 갑옷 아래 받쳐입는 누비옷까지 벗어서 한구석에 철걱 부려놓습니다. 밖에 나다니고 있는 다른 사람들과 별다를 바 없어보이는 튜닉 차림이 되어서야 아티는 다시 양 팔을 벌리고 당신을 끌어안아줍니다. 옛날에는 키가 엇비슷했는데, 이젠 키차이가 꽤 나서 당신이 푹 안기는 모습이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옛날보다도 더 탄탄해지고 단단해진 품이지만, 따뜻한 건 변하지 않았네요.
생각해보면 항상 먼저 다가가서 끌어안는 쪽은 자신이었지, 하고 아티는 생각했습니다. 당신이 뭔가 우울해하거나 외로워하는 것 같을 때마다 이렇게 당신을 안아주곤 했었죠. 이번에도 우는 당신을 달래주고 싶어서 안아주려고 했는데 왜인지 이번에는 자신이 응석부리는 모습이 된 것 같습니다.
# (아티가 로빈네 아버지에게 수정펀치를 날리는 장면을 머릿속에서 급히 지운다) # 본격적으로 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로빈주가 원하시면... uu 지금은 조미료 느낌으로, 필요한 곳에 조금씩만 덧붙여볼게요. # 어렸을 적에는 두 사람의 키가 엇비슷했거나 아티가 조금 더 작았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지금의 아티는 약 182센티미터 정도에요. 상당한 장신이죠...
투정 부리고, 욕심부린 다음은 고마움을 표현했어요. 나는 이 작은 마을이 내 세상의 전부지만, 네가 아는 세상은 더 커다랗고 반짝반짝 빛날 거에요. 그런데도 아티는 작은 마을과 마을보다 더 작은 어릴 때의 나를 기억해준 거예요. 지금의 나도 마찬가지로 작은 것 같지만요. 몸도, 마음도 전부 다요. 아티는 쑥쑥 많이 자랐어요. 내가 너무 작아서 기억나지 않을 수도 있었을 텐데, 아까까지만 해도 일부러 못되게 굴던 나인데도요. 내가 아픈 게 무서워서 네게 상처 주기를 선택해버렸는데... 아티를 바라볼 염치가 없어요. 아티의 눈을 몇 번이나 바라보았을까요? 분명 아티의 눈보다, 떨어진 아티의 눈물이 만든 자국을 더 많이 보았을 거에요.
나도 아티의 눈물을 닦아주고 싶어요. 하지만 난 손수건도 없고 고작해야 옷소매뿐이에요. 어떻게 하면 좋을지 고민하고 있자니, 아티가 옷을 벗어버리고 있어요. ... 아티가 나를 안아주려고 했단 건 착각이었나 봐요. 아무래도 아티는 그저 더웠을 뿐인 거 같아요! 나는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한 걸까요, 민망해서 얼굴이 화끈거려요. 안 그래도 많이 울어버려서 눈가에 열이 오른 게 느껴지는데 더 심해졌어요. 어릴 때는 아티카 안아주고는 했지만, 지금은 다 컸으니까요. 그때처럼 아티가 안아주려고 한 거라고 혼자 착각이나 하고, 정말 바보 같아요.
"?"
그런데 아티가 안아주었어요! 나는 내가 어디서부터 잘못 생각한 건지 알 수 없어서, 아티를 바라보았습니다.
"...?!"
그리고 또 놀라버리고 말았어요. 고개를 들었는데 아티의 얼굴이 보이질 않았어요. 아티인 줄 몰랐을 때도, 키가 크신 분이라고 생각은 했지만 이렇게 큰 줄은 몰랐어요! 좀 더 고개를 뒤로 젖히고 나니 아티의 얼굴이 보여요. 아티가, 정말 쑥쑥 많이 자랐어요! 이래서야는 손을 뻗어도 아티의 눈가까지 닿을지 모르겠네요. 무엇으로 아티의 눈물을 닦아줄 수 있는지 고민한 게 헛수고였어요. 나는 작게 웃음소리를 냈습니다.
"아티, 내가 눈물을 닦아줄 수 있을까?"
# 로빈의 키는 정확히 생각해두질 않았지만 단신인 편이라고 생각해요. :3 # 로빈이 느끼기에 아티는 머리카락 색깔도 그렇고, 태양같아요... 그래서 아티는 과분한 친구라며 자기가 못났다 하는 부분들이 나오고 있는데 불편하면 말씀해주세요.
당신의 말에 머릿속이 복잡합니다─ 당신 역시도 자신을 잊지 않았을 뿐더러 자신을 애타게 기다렸다는 사실이, 애타게 기다리다 못해 자신 모양의 그을음이 당신에게 남아있었다는 사실이, 자신이 이국의 하늘을 바라보며 별들 위로 그려보던 당신의 모습과 겹쳐보여서. 그렇게도 밤하늘에 그리던 그리운 모습이 아직도 이렇게 곱고 예쁘게 남아서 옛날처럼 바라봐주는 모습이. 시점은 조금 바뀌었지만, 그 예쁘고 상냥한 금빛의 눈동자는 여전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은 아직 자신의 일을 다 끝마치지도 못하고, 당신에게 정말로 나 돌아왔어, 라고 말하기에는 너무 이른데 돌아왔다는 말을 해버려서. 눈물자국이 남은 뺨을 하고 당신을 내려다보다가 아티는 천천히 입을 뗍니다.
"─많은 것을 봤어! 나쁜 일들도 많이 있었지만, 좋은 일들도 많이 있었어."
"그렇지만, 여기서 너와 함께 있었던 시간을 잊게 하는 일은 없었어."
잊을 수 없었어. 보고 싶었어. 아티는 자신만의 방식으로 자신이 당신을 잊지 않았다는 것을 표현했습니다. 옛날처럼 당신을 푹 끌어안는 것으로요. 그러고 싶어서, 당신을 그 무엇보다도 선명히 기억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려주고 싶어서, 아티는 임무 도중에 어지간해선 벗어서는 안 되는 갑옷도 벗어버리고 말았습니다. 당신을 안고 아티는 눈을 꾹 감습니다. 가슴팍 너머에서 옅게 전해져오는 아티의 심장박동은 아직 그 옛날처럼 따뜻합니다.
당신의 웃음소리에 아티는 당신을 안은 채로 당신을 내려다보았습니다. 그리고 당신의 요청에 아티는 조금 자세를 바꿉니다. "으응." 하는 콧소리 섞인 대답과 함께, 당신을 끌어안고 있던 팔을 약간 푼 다음 상반신을 숙여서, 당신과 눈높이를 맞추고 다시 느슨하게 당신을 끌어안습니다. 당신이 손을 들어서 자신의 얼굴을 닦아주기 좋도록. 그리고 눈을 꼭 감습니다.
# 그것도 로비의 개성이고, 로비가 그렇게 생각할수록 아티가 더 전력으로 안아주고 좋아하는 마음을 표현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 물론 로비가 자존감낮은 모습을 보이는 건 안타깝지만, 제가 그것에 대해 안타까워하기보다는 아티를 통해서 많이 안아주고 보듬어주는 게 더 나은 것 같아요. # *.* 지금은 주무시고 계실 테니 답레만 남겨둘게요..
반짝반짝한 내 친구. 상냥하게도 내 손이 닿을 수 있도록 자세를 고쳐주었어요. 나는 나지막이 아티의 이름을 부르고, 손을 들었어요. 아티의 얼굴에 닿으면. 손끝에 남는 감각이 낯설어요. 내 손에 제일 많이 닿은 것은 역시 시계 부품이니까요. 시계가 작을수록 조그마해지는 부품, 시계가 클수록 커지는 부품. 그 크기가 어떠하든 차가운 것은 똑같습니다. 아티는 따뜻해요. 아주 작은 회중시계의 부품을 다룰 때보다도 조심스러웠다고 하면 과장일까요. 나는 아티의 눈물 자국을 지웁니다.
"다음번에 돌아오면, 그때 이야기해 줘."
알고 있습니다. 아티가 오늘 마을에 온 이유는 저 시계탑 위에 있는 회중시계 때문이라는 걸요. 시계를 돌려받은 아티는 아마 마을을 다시 떠날 거예요. 하지만 이번에는 다시 기대하려고 합니다. 아티가 곧 돌아오리라고 믿을 거예요. 그래서 나는 조금 용기 내서 다음을 기약했습니다. 마을을 떠나고서 있었던 일들, 나쁜 일도 좋은 일도 전부 듣고 싶어요. 시계탑 위에서 마을을 내려다보면서 들어도 좋을 것 같고, 언덕 위에 올라가 산들바람과 함께하는 것도 좋을 것 같아요. 아니면 어릴 때 자주 놀러 가던 곳을 되짚어 보아도 좋을 것 같아요. 시계공 로빈의 모습으로 마을에 나갈 수 있을지는 아직 모르겠지만, 그 모습으로 상상해보았어요. 어릴 때 그랬던 것처럼 분홍빛 머리카락을 햇빛 아래 드러내고, 의미 없는 안경도 벗어버린 그런 모습이요. 거추장스러운 망토도 벗어버리고, 옷은 아티가 골라준 것으로 입으면 즐거울 것 같아요.
그리고는, 음, 어떻게 해야 할지 잠깐 고민했어요. 나도 똑같이 아티를 안아주면 되는 걸까요. 누군가 안아주는 것도 어색하지만, 누군가를 안아주는 건 더 어색해요. 아티인데도요. 그렇지만 아티니까 할 수 있어요! 친구를 안아주지 못할 리가 없어요. 어색하지만 한 번 노력해봅니다. 두 팔로 아티를 안으면서, 아티의 품에 기대보았어요. 생각보다도 엄청 따뜻해서, 꼭 다시 어려진 것 같아요.
유쾌한 목소리가 숲속을 가득 채웠다. 용을 만나러 간다는 그 말이 상당히 웃긴 것인지, 은발의 긴 머리카락을 자랑하는 사내가 정말로 크게 웃었다. 분명히 그 역시 인간의 모습이었으나 마치 말하는 것을 들어보면 인간이 아니라는 것마냥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과연 용을 만나러 간다는 상대에겐 어떻게 들렸을까?
터져나오는 경쾌한 웃음소리를 겨우겨우 멈추며 눈에 맺힌 눈물마저 닦아내며 사내는 눈앞의 존재를 가만히 주시하면서 바라보다 다시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 들려오는 말대로 이 숲을 너머 쭉 가면 용이 사는 굴이 나오지! 허나 인간이여! 그 용을 만나서 뭘 하려는거냐? 용의 재보가 탐이 나는 것이냐? 아니면 용맹을 자랑하기 위해 용의 목을 원하는 것이냐?"
말이 끝난 사내의 주변에서 하얀색 연기가 솔솔 올라왔고, 곧 펑 터지는 소리가 들렸다. 연기 속에 보이는 실루엣은 상당히 거대한 몸의 형태였다. 온 몸이 은색으로 빛나고 있으며 그 덩치는 어지간한 건물 못지 않게 큰 용은 고개를 숙여 눈앞의 존재를 바라봤다.
"나를 찾는 모양이니 직접 나에게 말해보거라. 내 근처 마을이나 이 나라의 왕실에는 딱히 피해를 주지 않은 것 같다만, 내가 이 근처에 사는 것이 두려운 것이더냐. 아니면 목숨을 걸고 나의 재보를 노리는 것이더냐. 그것도 아니면, 내 목을 가지고 싶은 것이더냐?"
/맥커터질만 아니면 뭐든 오케이! 그냥 자신을 만나려고 하는 것을 인간 형태에서 들은 용이 웃으면서 정체를 밝힌 장면이야.
당신의 손길이 아티의 뺨에 닿을 때, 아티는 히히히 하는 작은 웃음소리를 흘리며 천진하게 미소짓습니다. 누군가의 따스한 살갖을 만져보는 것도 오랜만인 것 같습니다... 아티는 마치 오래전 잊어버린 습관과 온기를 떠올리려는 것처럼 당신의 손길에 자신의 뺨을 부드럽게 치대어옵니다. 얼굴에 남아있는 물기며 눈물자국들이 당신의 손길에 조금씩 닦여나갑니다. 눈물이 다 닦여나가고도, 당신이 손을 떼지 않았다면 아티는 한참이나 더 당신의 손에 기대어있었을 것입니다. 후드를 벗어던진 그 순간부터 이 모든 일들이 하나같이 충동적으로 벌어진 일이지만─ 그래서 일이 조금 번거롭게 될지도 모르고, 어쩌면 남은 일을 하는 내내 시계탑 안에서 재회한 당신 생각이 불러오는 선명한 그리움이 조금 아플지도 모르겠지만─ 이렇게 된 것을 아티는 후회하지 않기로 했습니다.
"네가 듣고 싶으면 얼마든지."
아티는 가지런하고 뾰죽한 이빨을 드러내며 온 얼굴에 개구쟁이같은 미소를 짓습니다. 그 눈빛만큼이나 그 미소도 변하지 않았네요. 당신이 알면 부끄러워할지도 모르겠지만, 자신이 지나온 여행길에서, 이따금 꽤 친해진 사람이 있으면 아티는 자신의 고향 마을에서 헤어진 상냥하고 똑똑한 아이에 대한 이야기를 이따금 하곤 했습니다. 의도치 않게 끊어져버리고 말았던 그 이야기를 다시 이어나갈 수 있게 되는 날이 가깝습니다.
조그만 장난꾸러기 꼬맹이라기엔 너무 크고 탄탄해진 아티의 품에 기대면, 옅은 흙먼지 냄새와 함께 희미하게 구운 빵 같은 냄새가 납니다. 문득 무언가가 당신의 머리를 부드럽게 쓸어내리는 게 느껴져 고개를 들어보면 아티가 맨손으로 당신의 머리를 다독여주듯 쓰다듬어주고 있습니다. 서투르지만 부드러운 손길. 예전에는 당신이 쓰다듬어주는 쪽이었는데요. "이거 해보고 싶었어." 하고 아티는 키득거립니다. 그러다 말고 아티는 "임무만 아니었더라도..." 하고 아쉬운 듯이 뇌까립니다. 그러다 아티는 문득,
>>101 # 고맙긴! 나도 일반 쪽이 익숙한걸~ 그럼 일반으로 하자! # 사실 내가 참치에 오래 안 왔어서 재활겸 편지로 시작 해본거라 조금 못 쓸수도 있어...! 미리 미안! ㅜㅜ # 장면은 카페 앞에서 바로 만난 부분부터 시작하면 좋으려나? # 내가 지금 바로 레스를 쓰고 싶은데 오늘은 가봐야 할 시간이라... 내 레스 올리려면 내일 점심 조금 넘어서 가능할 것 같아 ㅜㅜ 이것도 많이 미안해 ㅜㅜ
카페 바깥. 왼쪽 손에 그가 마실 음료와 작은 검은색 종이백을 든 여자가 핸드폰을 하고 있다. 손에 들린 핸드폰을 보며 작게 웃거나, 때로는 살짝 울상이 되는 등 조금이지만 다양한 표정으로 휙, 휙 바뀌던 그녀는, 그렇게 한참을 조용히 그와의 연락에만 집중하는 듯 하더니 지금 나오라는 문자가 도착하자마자 곧바로 답장을 보내며 고개를 들어 도로를 바라보았다.
' 아, 저기 있다. '
그녀는 도로에 가득한 차들 중 저 너머에서 한 번에 익숙한 차를 발견하고는, 반가운 마음을 표현하듯 핸드폰을 들고 있던 손을 그대로 올려 그의 차를 향해 짧게 흔들었다. 비슷한 차일 뿐 다른 사람이 타고 있을 수 있음에도 망설임 없이 아는 척을 하는 모습이, 마치 그를 단번에 알아볼 수 있다는 그녀의 확신을 보여주는 듯 했다.
" 아저씨~ "
차에 타고 있어 그에게는 들리지도 않겠지만 그저 반가움을 표현하려는 생각인 듯, 적당한 목소리로 그를 부르는 그녀의 얼굴엔 장난스럽기도 하고 즐거워 보이기도 하는 특유의 미소가 평소처럼 스며들어 있었다.
역시 출근 시간과 퇴근 시간이 아니라면 도로는 한적하다. 사실 오늘이 쉬는 날이라 사람들이 집에서 쉰다고 밖으로 안나오는 이유도 있을 것이다. 휴일이 아니었다면 어제 늦게까지 회식 자리가 이어지지도 않았겠지만, 오늘 이렇게 약속을 잡지도 못했겠지. 살짝 걷어둔 셔츠 아래로 보이는 손목시계에 시선을 돌리니 약속했던 시간보다 조금 많이 지나있었다. 계속 문자를 해주긴 했지만 내가 늦은건 사실이니까 최대한 빨리 가자는 생각으로 엑셀을 밟는다.
그렇게 카페 간판이 눈에 보일때쯤 카페 앞쪽에 앉아있는 익숙한 모습이 보인다. 양 손에 뭘 들고 있는데 저 종이백이 나에게 줄 물건인가? 천천히 카페 앞으로 차를 운전해가자 이쪽을 보고서 손을 흔드는 모습이 보인다. 기뻐하는 표정에 역시 늦으면 안됐다는 죄책감이 몰려온다.
" 꼬맹이, 얼른 타. "
창문을 내리고 웃으면서 말한 나는 손수건으로 조수석 시트를 간단히 닦아준다. 출발하기전에 가볍게 청소는 했지만 그래도 한번쯤 더 하는게 어려운 일은 아니니까. 그녀가 탈때까지 기다렸다가 나는 뒷쪽을 가리키며 말했다.
" 저번에 두고간거 뒤에 있어. 지금 들고 있는 것도 뒷좌석에 던져놔. "
그렇게 얘기하고 오늘 갈 장소를 네비게이션에 찍는다. 어디 갈지는 저번에 들어서 알고 있었으니까.
약속 시간 이상을 밖에서 기다렸어도 그닥 기분이 상하지는 않았는지, 오히려 꼬맹이라 부르는 그의 말에 장난스럽게 대답하면서 익숙하게 그가 닦아준 조수석에 오르며 차 문을 닫았다. 그렇게 바람이 불지 않는 곳에 들어오자 그녀는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대충 쓸어 넘기며 편하게 시트에 몸을 기댔다. 카페에서부터 차에 타기까지 이어지는 그녀의 모든 행동이 마치 흐르는 물처럼 자연스러웠다.
" 아, 고마워요. 이따가 챙길게요. "
안전벨트를 하며 고개를 돌려 뒷좌석을 확인한 그녀는 고맙다고 대답했지만, 이번 선물 만큼은 직접 그의 손에 쥐어줄 생각이었던 그녀는 지금 들고 있는 것도 던져놓으라는 그의 말에는 대답 없이 미소만 지었다. 그렇게 마지막 말을 무시해버린 그녀는 네비게이션을 하고 있는 그가 귀찮지 않도록 종이백을 반대쪽 손으로 옮기더니 음료가 담긴 컵만 당신 쪽으로 내밀어 빨대를 입가 근처에 가져다주려 했다.
" 여기요, 마실거. 급하게 준비하느라 바빴을 텐데 일단 한 모금 마셔요. " " 그리고, 이건 뒤에 직접 던져서 놔요. " " ..그때 못 줬던 생일 선물이에요. "
그가 네비게이션에 목적지를 전부 입력했을 즈음에 가지고 있던 종이백을 그에게 내밀었다. 크기가 크지도 않고, 검은색으로만 이루어진 선물용 가방은 별다른 장식이 없었지만 안에 들어있는 물건 역시 가격이 있겠다 예상될 만큼은 고급스러워 보였다. 하필 그의 생일날에 출장을 가는 바람에 챙기지 못했던 것이 마음에 걸렸던 그녀는, 가져온 선물의 정체를 말하는 목소리에 어렴풋이 미안함이 담겨있었다.
문자를 하면서도 느꼈지만 약속에 늦은 것에 대해서 그렇게까지 화가 나보이지는 않았다. 평소엔 약속시간보다 먼저 나와서 기다리곤 했으니 하루 정도는 봐준다는 의미일지도. 이래서 사람의 평소 행실이 중요한거다. 조수석에 탄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미처 정리하지 못한 머리카락 가닥가닥을 떼어주며 말했다.
" 밖에 바람이 좀 부나보네. "
지하주차장에서 차를 끌고 나왔으니 바깥의 바람을 느낄새가 없었다. 잠깐 창문을 열었을때 바람이 조금 불긴했는데, 이렇게 계속 불고 있었나보다. 꽤 차가웠는데 이런 날씨에 바깥에 나와있으면 분명 감기 걸린다니까. 그렇게 네비게이션을 조작하며 입가에 가져다주는 음료를 자연스럽게 빨아먹다 종이백의 정체에 눈을 크게 뜨며 바라보았다.
" 생일 선물이라고? "
분명 저번 달에 생일이긴 했었다. 그때 너는 분명 출장을 가있기는 했었지. 하지만 조금 아쉬웠다뿐이지 출장 가있는 사람에게 생일 선물 내놓아라 할 수는 없으니까 그냥 생일 축하한다는 말만 듣고 말았다. 그때 다른 사람들에게도 받은게 꽤나 있었지만 이렇게 뒤늦게 챙겨주는 선물이라니, 그 누구에게 받은 것보다 값진 것이었다.
" 월급이 왜 없나 싶었는데 이것 때문이었구나? "
딱 보기에도 고급져보이는 것이라 출발하기전에 종이백에서 선물을 꺼내본다. 고급 브랜드 로고가 박힌 상자를 열어보자 보이는 것은 지갑이었다. 고급 가죽으로 마감되어있는 지갑은 영수증을 보지 않아도 그 값어치가 얼마나 될지 대충 짐작이 가서 놀란 눈으로 너를 바라보며 말했다.
" 너무 무리한거 아니야? 그냥 안주고 넘어가도 괜찮았는데. 그래도 고마워. 잘 쓸께. "
물론 똑똑한 그녀인만큼 다 계산하고 소비했겠지만 그럼에도 평소에 버는 것을 생각해봤을때 내 입장에선 좀 무리가 아닌가 싶었다. 주는 마음은 감사하지만 본인이 부담될만큼의 선물을 받는 것은 받는 사람도 부담이 가기 마련이다. 그래도 신경 써서 선물을 줬다는 것에 감사를 표하면서 조심스럽게 뒷좌석에 가져다 놓은 나는 부드럽게 차를 출발 시켰다.
" 이렇게 큰걸 받아버렸으니 내가 줄 생일선물도 스케일을 좀 늘려야겠는데? "
고개는 전방을 주시한 상태로 너를 흘끗 쳐다봐가며 웃는다. 차도에는 생각보다 차가 없었고 신호도 빨간불에 거의 걸리지 않고 스무스하게 도시를 빠져나가고 있었다.
자기가 하는 일이 올바르지 않고 비난받을 행동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으나 비정한 표정을 짓고 있는 그에게 있어선 그런 것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일이었다. 가문계승 후보자 중 하나의 목숨을 끊고 불행한 사고로 위장한 후 그는 검에 묻어있는 검붉은 얼룩을 닦아냈다. 활활 타오르는 불꽃은 다음 날, 정말 불행하고 운이 없게도 오두막에 불이 붙어 그 안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던 이가 목숨을 잃은 것으로 진상을 감출 것이 분명했다.
혹여나 불꽃이 중간에 꺼질까 싶어 어둠 속에서 불꽃이 사그라드는 것까지 확인하고 난 이후에야 그는 어둠 속으로 모습을 감췄다. 참으로 비정하기 짝이 없는 권력 싸움 속 암투였으나 갑작스럽게 유력 가문을 이어가던 가주와 그 아내가 오랜 지병으로 목숨을 잃은 이후의 혼란 속에선 그 비정함마저 집어삼켜야 살아남을 수 있었다. 자신이 모시고 있는 이도 그렇게 생각할지는 알 수 없었으나 그는 그렇게 생각했다.
윤리, 도덕. 그런 것을 따졌다간 이 상황에서 살아남을 수 없었다. 자신의 손에 피를 묻혀서라도 지킬 이는 지키리라. 그리고 수행할 것은 수행하리라. 인간의 마음을 애써 잠재우며 지시에 충실하며 비정한 마음을 먹은 사내는 아무의 눈에도 띄지 않고 한 처소로 들어섰다.
그 안에 있는 이는 사내가 모시는 이였다. 무릎을 꿇고 머리를 숙이며 입을 열어 그는 상황을 보고했다.
"지시한대로 처리했습니다. 상황이 상황이니 의혹은 생길지도 모르나 암살했다는 사실은 아무도 모를 겁니다."
/난 그런 지시 내린 적 없어! 라는 식으로 사내가 멋대로 한 행동으로 처리하는 것은 조금 곤란할 것 같아. 그 외엔 어떻게 이어도 오케이.
>>109 불을 밝히지 않은 어둑한 처소에 가득한 침묵을 깨고, 차분하고 위엄이 서린 목소리가 조용히 울렸다. 그러나, 그 목소리는 그의 주인의 것이 아니었다.
"유감이군, 상황이 상황이라 의혹만으로는 끝나지 못할 성 싶은데."
목소리가 들림과 동시에, 방 안이 달빛으로 은은하게 밝아졌다. 침대 위에는 그의 주인이 재갈이 물린 채 포박당해 있었고, 그 옆에는 길고 굽슬굽슬한 붉은 머리카락을 높이 묶어올리고, 낡았지만 잘 손질된 은빛 갑옷을 입은 기사가 검을 뽑아든 채 그의 주인을 겨누고 서 있었다. 뿐만 아니라, 어둠 속에 몸을 숨기고 있던 여섯명 정도의 병사들이 그의 주변을 둘러싸고 있었다.
"국왕 폐하의 명을 받들어, 자네를 이번 귀족 연쇄 살인 사건의 범인으로서 체포하겠네. 자세한 이야기는 심문 때 듣도록 하지."
>>112 사내가 모시는 이가 있는 것을 확인하고 보고를 한건데 사실 얼굴도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어둠이 깔려있었고 주인은 포박당해있었고, 얼굴도 확인하지 않고 보고를 하고 그 안에 병사들이 이미 있었다라는 전개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네. 이 전개로 잇는 것은 조금 애매할 것 같아. 기껏 이어줬는데 미안하다. 너참치.
불쑥 외마디를 읊조리면서 나타나더니, 당신의 앞에서 눈을 깜빡인다. 새카만 머리카락과, 새하얀 피부, 그리고 또 새카만 눈동자…가 아니다. 분명 눈동자가 까맣고 동그랗게 맺혀있었는데, 빨갛게 빛나고 있다. 석류알, 루비, 장미꽃잎, 선명하고 예쁜 붉은 빛으로 물든 눈동자가 샐쭉 감겨 사라진다. 눈웃음 짓고 있는 모양이다. 자, 다시 이 오밀조밀한 얼굴을 뜯어보면, 연하게 꽃가루를 덧대어 분칠한 것 같은 뺨과 입술 색, 히히 웃으며 드러난 이는 또 새하얗고, 송곳니는 유달리 뾰족하고… 뾰족하다. 송곳니가 왜 저렇게 뾰족하다 못해 날카로운가, 의문이 절로 생길 만큼이나 뾰족한 이를 가지고 있었다. 눈웃음지으며 생글생글, 밝고 당차게도 배고프다 하는 것과는 반대로 무서울 정도의 송곳니다.
“한 입만 물어도 돼?”
성장기 청소년은 잘 먹어야 한다고 그러잖아! 나도 한 입만 잘 먹어보자아아!
“약도 발라주고 밴드도 붙여줄게.”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가 빼더니, 당신에게 손을 활짝 펼쳐 보여준다. 캐릭터 반창고 뭉치와 연고가 손바닥 위에 덩그러니 놓여 있다.
멘솔향이 나는 담배를 물고 있던, 보통 체격의 팔다리가 길쭉길쭉한 여성이 한밤 속에 더욱 도드라지는 허연 연기를 내뱉는다. 그 연기가 풀어져 밤하늘로 사라질 때 즈음 갑작스럽게 낭창한 외침이 여성의 귀를 자극한다. 분명 적잖이 놀랐을텐데 여성은 어깨를 가볍게 움츠렸다간 또 무기력한 평소의 눈빛으로 상대를 누르듯 응시했다. 날카로워 보이는 이와 환상처럼 붉은 눈동자는 여성의 무덬함을 뚫지 못했다.
" 뭐를?"
다짜고짜 물어도 되냐는 질문에 이미 반박자도, 한박자도 아닌 박차를 놓친 물음이 짓씹혀져 나갔다. 입에 물린 담배도 바스라진다. 이미 구겨지고 짧아진 몽당 담배를 바닥에 던지고 밟는 여성의 태도는 무심하고 또 거칠었다. 뜨거운 불똥이 사방으로 튀어나간다.
달빛 아래로 희미하게 드러난 반창고를 보는 건지 모를 여성의 시선이 서서히 당신을 또 누르듯 응시한다. 그리고 인위적인 미소가 여성의 입가를 비튼다. 무얼 하려는 건지도, 누군지도 모르겠지만 어찌됐든 잠깐이나마 현실을 잊을 수 있다면. 설령 미친 사람일지라도 지금은 놀아주고 싶었다. 여성은 순순히 골목벽에 기대며 항복한 포로와도 같이 순응적이고 공허한 표정을 짓는다.
깜짝 놀라서 도망가려 하거나, 깜짝 놀라서 굳어버리거나, 깜짝 놀라서 당황하거나, 깜짝 놀라서…. 아무튼지 간에 깜짝 놀라는 당신의 반응을 상상하고 있던 탓에 되려 실망해서 물어본다. 조금 삐죽거리기는 했지만, 배고프다는 말을 대뜸 내뱉을 정도로 허기짐을 느끼고 있었으니까 자리를 떠나지는 않았다. 허락해줄지 안 해줄지는 아직 모르니 인내를 가져보기로 했다. 무미건조한 당신과 시선을 맞추려고 들었다. 반짝반짝, 물게 허락해야 할 것이라는 부담감을 최대한 잔뜩 실어서!
“손가락! 목은 밴드 잘 떨어져.”
느린 답에도 재촉 없이 고분고분 기다린 이유도 허락 안 해줄까 봐서라는 이유가 컸다. 세상 어느 짐승이든 먹을 것으로 교육하고 조련하는 방법이 대다수인데, 소설 속에나 나올법한 존재라고 무엇이 다르지는 않은가보다. 바닥에서 밟히고 있는 담배꽁초에 시선이 톡 떨어진다.
“잘 먹겠습니다아!”
이윽고 다시 시선은 당신에게로 올라왔고, 방긋 웃으면서 당신의 손을 잡더니 입가로 가져간다. 그중에서도 마지막 손가락을 입에 물었다. 다섯 손가락 중에 제일 작고, 약하고, 존재감 없는 그런 손가락. 날카로운 송곳니가 쿡 찌른다. 깊게 박아넣지도 않고, 핏방울이 맺히기는 할 정도의 얕은 상처를 내었다. 손가락에서 피가 나오는 것이 느껴지면 송곳니를 빼내고 손가락을 물고서 피를 빨아들인다. 배고프다니 먹고 있기는 한데, 맛있는 표정은 아니다.
>>109 무릎을 꿇고 고개를 조아린 채 보고를 올리는 종을 가만히 바라보던 사내의 주인은, 이내 들려오는 흡족스러운 결과에 가늘고 나직한 목소리로 후후 웃었다. 높이 묶어올려 흰 리본으로 장식한 길고 부드러운 밝은 금발에, 서글서글한 눈매와 물빛 눈동자를 지닌, 여느 영애처럼 간소하지만 산뜻한 드레스를 차려입은 그의 주인은, 혈육을 살해하도록 지시한, 피도 눈물도 없는 가주 후보라는 타이틀이 지독히도 어울리지 않는 여인이었다.
"아주 잘해주었어요. 역시나 절 실망시키지 않네요."
차라리 마음에 든 과자를 구워낸 제과제빵사를 칭찬하는 것이 더 어울릴 법한 밝은 목소리와 구김살 없는 목소리로, 비록 완벽히 용의선상을 벗어나지는 못했을 지언정 방해물을 훌륭히 치워낸 수족을 칭찬한 영애는, 이내 평소처럼 발랄하지만 조금은 무게를 머금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마지막 명령을 내리겠어요."
저 사내의 충정은 이제껏 겪어왔기에 잘 알고 있다. 나를 위하여 수도 없이 손에 피를 묻히고 타인의 생명을 바쳐온 자이니, 스스로의 목숨 쯤이야 기꺼이 내어주겠지. 그리 생각하며 영애는 허리춤에 차고 있던 검을 뽑아, 사내를 겨누며 여전히 해사한 미소를 머금고 가볍고 발랄한 목소리로 명을 내렸다.
누군가는 물을 것이다. 무슨 이득이 있어서 굳이 그렇게 피를 묻히는 잔혹한 짓을 하는 거냐고. 사내에게 이유 따윈 존재하지 않았다. 그저 자신이 충성을 바치기로 한 이가 그것을 바랬기 때문이었다. 이른 시기부터 자신의 주인 되는 이를 모셨고, 혼란의 시기가 온 순간부터 반드시 가주로 만들겠다고 다짐한 것에 망설임은 없었다. 자신의 검은 오로지 그것만을 위해서 존재했으니까.
그렇기에 지금 내리는 명령. 곧 죽음을 지시하는 것에 대해서 사내는 아무런 저항도 보이지 않았다. 이제는 자신이 필요없는 것이리라. 그렇다면 그걸로 좋은 일이었다. 그것이 자신의 주인이 내리는 명이라고 한다면. 그렇기에 사내는 조금도 저항하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서 그녀의 행동을 기다렸다.
"그것을 바라신다면야. 허나 아직 일이 완전히 끝난 것은 아니니, 부디 검을 들 수 없는 이 시간 이후에도 조심하셔서 이루고자 하는 것을 이루시길 바랄 뿐입니다."
칼날이 자신의 목을 찌르는 것을 기다리며, 혹은 다른 곳을 찔러넣는 것을 기다리며 사내는 마지막으로 볼 풍경으로 그녀의 모습을 담은 후, 조용히 눈을 감았다. 그 눈을 뜬 이후에 보이는 풍경은 여기와는 다른 지옥불구덩이속일지. 아니면...
>>122 사내가 자리에서 일어서기가 무섭게 곧장 뾰족한 구둣발이 그의 정강이를 향해 날아들었다. 영애는 해사하게 웃으며 가볍고 발랄한 목소리로 말했다.
"어머나, 일어서라 명한 적은 없는데. 빨리 신의 품으로 보내달란 뜻인가요?"
고운 목소리에 어울리지 않는 매도를 내뱉고, 영애는 후후 웃었다. 이내 사내가 입을 열자, 영애는 잠자코 그의 말을 들으며 만족스러운 듯 미소지었다. 역시 말이 좀 많은 건 흠이지만, 좋은 장기 말이긴 했어. 더는 필요 없을 뿐이지. 사내의 말이 끝나자, 영애는 다음에 또 보자며 친구와 작별하듯 낭랑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요. 그동안 수고 많았어요. 잘 가요."
서걱. 영애의 목소리 뒤에 이어진 것은, 묵직한 고깃덩이를 절단하는 듯한 섬뜩한 소리였다. 쿵, 소리와 함께 영애의 방안이 순식간에 피비린내로 가득 찼다. 화사한 드레스와 희고 깨끗한 얼굴에 피가 묻었지만, 영애는 아랑곳하지 않고 생긋 미소지었다. 피를 나눴을 뿐인 경쟁자들은 모두 죽었고, 그 범인 또한 죽었다. 세상 사람들은 이 연쇄살인 사건의 범인이 그의 마지막 타깃의 손에 죽은 것으로 알게 될 테고, 이걸로 완벽하게 용의 선상에서 벗어날 수 있겠지... 진동하는 피비린내를 맡았는지, 하인들이 급하게 달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거의 다 왔지만, 마지막까지 긴장을 놓으면 안 되겠지. 영애는 콧노래를 부르고 싶은 걸 꼭 참고 검을 쥔 채 자세를 잡았다. 이후, 다급히 달려온 하인들이 문을 박차고 열었을 때 본 것은, 피투성이가 되어 쓰러진 괴한과, 피 묻은 검을 쥔 채 겁에 질린 얼굴로 파르르 떠는 영애의 모습이었다.
>>124 이미 끝난 상황극에 자꾸 말을 얹어서 미안해. 혹시 괜찮다면 >>109에서 한 번만 더 이어볼 수 있을까? 참고로 난 >>112와 >>121과는 다른 참치야. 사실 굉장히 잇고 싶은 상황이 떠올랐었는데 두 번 모두 타이밍을 놓친 걸 아쉽게 생각하고 있었거든. 생각보다 핑퐁이 짧게 끝난 것 같아서 기회가 된다면 나도 한번 이어보고 싶은 마음이 들었어. 물론 거절해도 얼마든지 상관없고, 이전에 이었던 참치들을 비난하거나 비하하려는 의도도 전혀 없어. 문제가 된다면 자유 상극을 세운 참치는 주저없이 이 레스를 하이드해 주길 바래.
방의 주인은 화려한 것을 좋아했다. 대륙에서 제일가는 장인이 반 년 동안 공을 들여 세공한 보석, 바다 건너 이국의 상인이 들고 온 집 한 채 각겨의 비단으로 지은 옷, 어둠 속에서도 빛을 발하는 순금으로 장식한 가구. 루비와 다이아몬드로 장식된 침대에는 두터운 휘장이 드리워져 안을 들여다볼 수 없었다. 다만 어렴풋이 보이는 형체를 통해 누가 안에 있을 것이라고 짐작할 뿐이었다.
"잘했어."
사내의 말이 끝나자 휘장 사이로 흰 손이 나왔다. 가느다란 손가락은 말 잘 듣는 강아지를 칭찬하듯이 사내의 뺨을 가볍게 두드렸다. 완전히 틀린 말은 아니었다. 아, 나의 강아지, 말 잘 듣는 충견. 훈련이 아주 잘 되어서 일처리도 확실할 뿐더러 배신도 하지 않지. 세상에 둘도 없는 맹견이었다.
"목격자 같은 건 남기지 않았을 거라 믿어."
휘장 안으로 다시 들어간 손은 이내 작게 접힌 쪽지 하나를 들고 모습을 드러냈다.
"둘째 형님이 날 의심하고 있어. 아직은 심증뿐이겠지만, 혹시 모르니 행적은 정리해 둬. 아침이 되면 이걸 조리실로 가져가."
엠마라는 하녀를 찾으면 될 거야. 그 말로 미루어 보아 그 하녀가 이 밤 사내의 행적을 정리해 줄 것이라는 사실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정말 운이 나빠서 사내가 확인하지 못한 범위 내에 누군가가 있었을지도 모르나, 그 정도로 먼 거리라면 무슨 일이 있었는지 파악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사람의 시야라는 것은 생각보다 그렇게까지 넓은 것은 아니었고 설사 뭔가가 보인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무엇인지를 파악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그 내용이 무엇인지 확인할 정도의 거리라면 이미 그 자도 사내의 검에 목숨을 잃었으리라. 그런 어설픈 실수 따윈 하지 않는다는 듯, 사내는 자신의 뺨을 두들기는 것을 받아들였다.
"오히려 그 의심하는 것을 이용해서 가문 내의 영향력을 뺏을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쉽진 않겠지만, 결국 모두 생각하는 것은 똑같을겁니다. 병으로 인해 가문을 이어가던 두 분이 돌아가시고 난 이후로 다들 권력을 얻기 위해 필사적일테니 말입니다."
권력을 얻기 위해, 가문의 주인이 되기 위해 피를 묻히고 상대를 제거하는 행위는 보통 비정한게 아니었다. 허나 귀족으로 태어난 이상 결국 그 운명에서 벗어나긴 힘들었다. 사이좋게 지내는 곳이 있을지도 모르나, 그렇지 않은 곳도 분명히 존재했기에.
쪽지를 받아든 사내는 그 내용물을 굳이 확인하지 않았다. 엠마라는 하녀를 찾으라는 그 말에 사내는 고개를 끄덕였다.
"분부하신 대로 하겠습니다. 더 필요하신 사항은 없으십니까? 저는 당신을 위해서 존재하는 자. 필요한 일이 있다면 얼마든지 명을 내려주십시오."
짤막한 대답은 남자를 향한 신뢰를 담고 있었다. 그가 누군가에게 믿음을 주는 경우가 드물다는 점을 생각하면 이례적인 일이었다. 아니,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밑바닥보다 더 아래에 있는 진창에서 이 자리까지 올라오는 동안 그의 곁을 지킨 건 다른 누구도 아닌 바로 사내였으니. 설령 사내가 실수를 저지르더라도 한 번 정도는 얼마든지 용서할 수 있었다. 그리고 사내는 이제껏 단 한 번도 실패한 적이 없었다.
"그래야지. 둘째 형님은 가문 안에서 입지도 좁으니 더 수월할 거야."
이제 와서 세력 다툼에서 밀려날까 애간장을 태워도 여태까지의 망나니짓은 사라지지 않는다. 그런 주제에 눈치는 빨라서 의심 따위나 하다니, 대체 자기가 뭐라고 생각하는 건지. 이 저택에는 이제 제 사람보다 그토록 깔보던 사생아의 사람이 더 많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면 과연 어떤 표정을 지을까?
"지금은 그걸로 됐어."
손을 가볍게 내젓던 그는 아, 하고 탄성을 내뱉었다. 휘장 너머에서 천이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리는 것이, 아무래도 사내를 향해 상체를 가까이 기울인 듯했다.
"말씀하신대로 내세울 수 있는 것은 그다지 없을테니 너무 급하게만 가지 않으면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급한 쪽은 그 사람일테니 말이죠."
가문 안에 입지가 적은만큼 혹시나 자신이 밀려날까 싶어 움직임을 보일 수도 있었고, 그렇게 되면 오히려 상황은 이쪽에게 유리해질수밖에 없었다. 의심을 한다고 한들 무엇이 달라질까. 사내는 누구에게도 목격당하지 않게 움직였고, 자신이 행한 일은 모조리 불행한 사고로 조작했다. 그리고 아직까지는 그 꼬리가 잡히지 않았다. 허나 방심할 순 없었기에 급하게만 가지 않으면 될 것 같다는 의견을 내비추며 곧 들려오는 그걸로 됐다는 말에 수긍하며 입을 꾹 다물었다.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려오고 상으로 원하는 것이 있으면 말하라는 그 말에 사내는 잠시 생각했다. 자신이 원하는 것은 무엇이 있을까. 막상 바로 떠오르는 것이 없다는게 자신의 생각이었다. 딱히 포상을 바라고 이렇게 모시는 것이 아니었기에 더더욱. 그저 이것이 자신이 해야하는 일이라는... 마치 맹목적인 사명같은 느낌을 가슴에 품은 사내는 좀처럼 쉽게 답을 하지 못하고 눈동자를 잠시 굴리다 입을 열었다.
"지금 당장 떠오르는 것은 솔직히 없습니다. 허나, 그럼에도 뭔가를 받아야 한다면... 언제가 이 가문의 모든 것을 가지게 되었을 때도 당신의 그림자로서 지금처럼 일하게 해줬으면 합니다. 물론 모든 것이 끝난 직후에는 저는 필요없는 존재일지도 모르나... 제가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당신의 검이 되는 것 뿐입니다."
맹목적인 추종에 이유는 없었다. 상대는 자신의 손을 더럽혀서라도 지키고 가주로서 올리고 싶은 자였다. 자신이 바라는 것은 오직 그것뿐이라고 생각하며 그는 다시 말을 조용히 이어나갔다.
"만일 그게 힘들다면, 언젠가 가주로 오르셨을때 천천히 생각할 시간을 주셨으면 합니다. 그때라면 지금과는 상황이 다를테니 저도 다른 무언가를 바라게 될지도 모르니까요."
안타깝게도 그의 둘째 형님은 그리 머리가 좋은 편이 아니었다. 사실 전 가주의 자식들은 대부분 물려받은 재산만 믿고 기세등등한 머저리들이었다. 적자들의 머리를 모두 모아도 사생아 하나만 못 하다니, 타계한 가주가 저승에서 땅을 치며 통곡할 노릇이었다. 물론, 그들에게는 사내처럼 충직한 사냥개가 없다는 점을 고려해야겠지만.
"그건 상이 아니야. 당연한 거지. 내가 가주가 되면 날 떠날 생각이었어?"
대답해. 그렇게 말하는 목소리가 일순 싸늘해졌다. 따뜻하다 못해 다소 덥기까지 하던 방 안의 온도가 순식간에 떨어지는 듯했다. 침대에 반쯤 엎드려 있던 형체가 허리를 곧게 세웠다. 휘장 너머로도 날카로운 눈빛이 느껴질 정도였다.
실수는 용서할 수 있다. 하지만 배신은 용서할 수 없다. 무슨 일이 있어도.
"내가 물은 건 그렇게 거창한 게 아니야. 물론 거창한 걸 바라도 상관은 없지만... 돈을 원한다면 줄게. 보석도 얼마든지 있어."
사람의 가장 큰 원동력은 욕망이었다. 심장이 뛰고 숨을 쉬는 이상 욕망이 없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사내 역시 무언가 원하는 것이, 욕망하는 것이 분명 있을 것이다. 적어도 그는 그렇게 확신했다. 그러니 그 욕망을 충족시켜 주고자 하는 것이었다. 그게 무엇이 되었든.
날카로운 분위기에 크게 반응하는 일 없이 사내는 마치 당연한 사실인양 자신의 생각을 이야기했다. 물론 자신이 모시는 이가 그렇다는 것은 아니었으나 경우에 따라선 자신의 앞길을 위해 주변의 측근을 내치는 일도 이런 귀족들 사이에선 흔하다면 흔한 일이었다. 자신이 그 대상이 된다고 할지라도 사내는 조금도 원망하거나 할 생각은 없었다. 오히려 자신의 존재로 인해 그가 피해를 본다면 자신이 먼저 부탁할 생각이었으니까. 다른 것은 몰라도 자신이 모시는 존재가 피해를 입는 것은 그로서도 그저 두고만 볼 수는 없는 사실이었다.
돈과 보석. 그런 것을 자신이 바랬던가. 지금 이 삶에 크게 불만은 없고 인간의 마음을 버리며 악귀처럼 짙고 비정한 마음을 품은 자신이 그런 것을 바래도 되는 것인가. 자신에게 그럴 자격이 있는 것인가. 거창한 것이 아니라고 해도 좋으나 결국 어느 것도 자신에겐 거창하게만 느껴졌다. 그렇기에 답에는 조금 시간이 걸렸을지도 모른다. 허나 그렇다고 해서 너무 많은 시간을 두진 않았다. 기다리는 시간조차 길게 이어지면 자신이 모시는 이에 대한 실례였기에.
"그렇다면 보석 하나를 얻고 싶습니다. 제가 쓸 것은 아니긴 하나, 근처에 있는 고아원을 조금 지원해주고 싶습니다. 손에 피를 묻힌 제가 할 말은 아닐지도 모르나, 저처럼 뒷골목을 헤메면서 배를 굶주리는 아이들이 가능하면 없었으면 합니다."
뒷골목을 헤집으며 돌아다니면서 배를 곪던 시절. 가족없이 홀로 외롭게 지내던 시절을 떠올리며 그는 쓴 표정을 지었다. 명을 받들어 손에 피를 묻히던 자신이 할 소리는 아니었으나, 정말로 모든 것을 배제하고 바라는 것을 떠올리다면 역시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바로 그것이었다.
"그렇게 함으로서, 앞으로 더더욱 영향력을 키울 수 있고 좋은 이미지도 세울 수 있지 않을까하기에 청하겠습니다."
놀랍도록 오만한 말이었으나, 그 목소리는 안심했다는 듯이 한풀 꺾여 있었다. 그의 몸이 다시 침대 위로 풀썩 쓰러졌다. 그럼 그렇지. 설령 사내가 그의 앞길에 방해가 된다고 해도, 그건 온전히 그가 다뤄야 할 문제였다. 감히 사내가 멋대로 떠나겠다 말겠다 할 문제가 아니란 말이다. 그렇게 생각하자 약간의 짜증이 치밀어 올랐다. 흡사 어린아이가 심통을 부리는 모습과도 같았다. 그는 유달리 사내의 앞에서만 다섯 살배기처럼 구는 경향이 있었다.
"뭐야, 고작 그런 거?"
김이 빠졌다는 듯이 한숨이 새어나왔다. 뭘 요구하려나 했는데 고작 뒷골목 고아들을 먹여살릴 보석 하나라니. 자신의 사냥개는 묘한 부분에서 유한 구석이 있었다. 이것이 방금 전 사람을 죽이고 사고로 위장한 이의 대사라고 그 누가 상상이나 할 수 있을까. 새삼 느끼는 바이지만, 어째서 그가 자신과 같은 길을 걷기로 했는지 모를 일이었다. 자신은 얼굴도 모르는 아이들을 위한 동정심 따위 이미 버린지 오래였기에.
"그러지 않아도 이미 몇 군데 지원하고 있잖아. 그걸로는 부족했던 거야? ―하아."
당연히 부족했으리라. 그 지원마저도 철저히 득과 실을 따져 '선발된' 고아원들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었으니까. 사내의 성에 차지 않는 것도 당연했다. 다시 휘장 밖으로 나온 손에는 브로치 하나가 들려 있었다. 작은 달걀만한 크기의 루비가 박혀 있는 황금 브로치는 척 보기에도 굉장히 값비싼 물건이었다. 이건 내 사냥개의 눈에 차야 할 텐데 말이지.
누군가에게는 고작 그것이라고 할지도 모르나 사내에게 있어선 소중한 것이었다. 뒷골목을 돌아다니며 배를 굶주리고 때로는 추악한 짓까지 하면서 어떻게든 살아남으려고 발버둥쳤던 사내에게 있어선 자신이 살았던 삶을 또 다시 사는 이는 없었으면 하고 바랬으니까. 물론 사내는 자신의 삶을 저주하지 않았다. 비정한 마음을 먹으며 손에 진득한 피냄새를 남기는 건 자신이 모시는 이가 바라는 것. 그리고 자신이 모시는 이의 바램을 충족시키는 것이 바로 자신이 원하는 것이었으니까.
브로치 하나를 받으며 사내는 다시 머리를 조아리며 감사 인사를 휘장 너머의 이. 어쩌면 자신보다 더 비정할지도 모르는 그 존재에게 바쳤다.
"허락해주심을 감사드립니다."
이것을 팔면 얼마나 돈이 나오게 될까. 그럼 충분한 지원이 되리라. 그렇게 만족하며 그는 자신의 주머니 속에 브로치를 집어넣었다. 내일 별 일이 없으면 잠시 외출해서 한 곳을 지원해주면서, 정말로 어울리지 않는 것을 알고 있으나 그럼에도 따뜻한 온정을 비추는 시간을 가지리라. 그렇게 다짐하는 사내의 입가에 작은 미소가 흘렀다.
"내일 '사고' 소식이 들려오면 반드시 이런저런 말이 나올지도 모르지만 아마 큰 영향이 가는 일은 없을 겁니다. 아무도 당신에게는 손을 댈 수 없을 겁니다. 제가 있는 한. 그리고 당신을 따르는 이들이 있는 한."
그 목소리에는 강한 확신이 들어있었다. 의심은 할 수 있을지도 모르나 그 누구도 명확하게 확신을 할 순 없었다. 그건 그저 불행한 사고에 지나지 않았으니까. 허나 한 가지 궁금한 것이 조금 있는지 그는 살며시 물음을 조심스럽게 던졌다.
감사 인사에 그는 대답 대신 손을 내저어 보였다. 이깟 브로치 하나는 그에게 푼돈이나 다름없었다. 만약 사내가 더한 것을 원했다 하더라도, 그는 얼마든지 줄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고아원 꼬마들을 먹이는 데에는 이걸로 충분할 것이다. 물론, 중간에서 누가 횡령을 하려 든다면 상황은 달라지겠지만.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사내가 해결해야 할 문제지, 그가 상관할 바는 아니었다.
그는 사내의 입에서 나오는 말을 그저 듣고만 있었다. 그래, 분명히 그럴 것이다. 그의 형제랍시고 있는 자들은 아직 그의 세력이 어느 정도인지 모르고 있었다. 가주 자리를 놓고 개떼처럼 싸워 대느라 뒤에 서 있는 사자도 보지 못하는 꼴이라니. 그나마 한 놈이 슬슬 눈치를 채기 시작한 것 같긴 했지만, 그자 혼자서 대체 뭘 할 수 있겠는가? 이건 이미 승패가 정해져 있는 싸움이었다. 그 사실을 모르는 건 그의 형제들뿐이었다.
내가 뭘 꿈꾸고 있냐고?
그의 사냥개가 뭔가에 의문을 가지는 것은 이례적인 일이었다. 사내에게는 다행히도 모욕적인 질문은 아니었으나, 그는 바로 대답하는 대신 생각에 잠겼다.
나는 뭘 꿈꾸고 있지?
아니, 이 질문은 틀렸다. 전제부터 완전히 틀린 질문이었다.
"난 뭔가를 원하기 때문에 가주가 되고 싶은 게 아니야. 내가 원하는 건 가주 자리 그 자체니까."
그래, 바로 이거다. 그는 부드러운 침구에 얼굴을 푹 파묻었다. 오리 깃털을 넣은 베개, 비단처럼 부드러운 이불, 황금으로 장식한 기둥.
이걸론 부족해.
"...권력이 필요해. 그 누구도 다신 날 무시하지 못하고... 인정받을 만한 권력이."
목적을 이룰 때까지 그는 그만둘 수 없었다. 자비니 동정심이니 하는 마음은 이미 옛날 옛적에 지워 버렸다. 설령 그 끝에 기다리고 있는 것이 까마득한 낭떠러지라 하더라도, 그는 그만둘 수 없었다. 그는 권력을, 힘을 원했다. 고개를 들고 있었다고 죽도록 얻어맞지 않을 힘과, 버르장머리 없는 눈을 했다고 물 한 모금 없이 사흘을 갇혀있지 않을 힘과, 채찍에 맞은 자리가 곪아 터져도 약을 구하지 못해 혼자 앓지 않을 힘을.
누구도 무시하지 못하고 인정받을만한 권력이 필요하다는 그 말을 들으며 사내는 입에 담진 않았으나 공감하는 마음을 가졌다. 자고로 높은 자리에 앉아 아래를 보지 못하는 이들은 그 밑바닥이 얼마나 치열한지 알 수 없었다. 누군가에게는 너무나 평화로운 일상이, 누군가에게는 당장 내일을 살아갈 수 있을지도 알 수 없어 너무나 바라는 것이기도 했다.
"제가 반드시 그 바라는 것을 얻을 수 있도록 도움이 되도록 하겠습니다. 주제넘을지도 모르나 그런 당신이기에 저는 그 누구보다 당신을 모실 수 있습니다."
말만 번지르르한 이들보다 차라리 저렇게 갈구하는 마음을 보이는 이에게 사내는 충성을 바칠 가치가 있다고 생각했다. 완전히 같진 않더라도 비슷한 부분이 있기에 움직이는 마음 또한 있었으니까. 물론 상대의 삶을 온전히 알 방도는 없었으나 그럼에도 추측할 수 있는 부분이 있었기에 더더욱.
이어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서며 사내는 꾸벅 인사를 바쳐 상대에게 말을 전달했다.
"그렇다면 자리를 비워보겠습니다. 부디 편안한 휴식 시간이 되길 바라겠습니다."
너무 오랜 시간동안 이 시간에 접촉한 것을 누군가가 알게 되어서 좋을 것은 없었다. 자신이 모시는 이가 누군가에게 의심을 사는 것은 무조건적으로 피해야만 했기에.
확신이 담긴 목소리를 듣자 거짓말처럼 온몸에 힘이 풀렸다. 자신이 원하는 게 나락으로 떨어지는 것이라 한다면, 막는 대신 그 길을 닦아 놓을 사내였다. 긴장이 풀리자 피로감이 순식간에 몰려왔다. 그 역시 사내 못지않게 바쁜 하루를 보낸 참이었다. 방해되는 사람을 사고사로 위장해 죽이는 것도 중요하지만, 계승을 위해서 필요한 건 그게 다가 아닌 탓이었다. 피곤했다.
"......가지 마."
그는 휘장 너머로 손을 뻗어 사내의 옷자락을 붙들었다. 정말로 원한다면, 주저할 것 없이 명령을 내리면 될 일이었다. 그렇게 하면 사내는 군말없이 따를 것이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이불에 얼굴을 묻은 채 작게 웅얼거렸다.
자신의 옷자락을 붙드는 행동에 사내는 발을 멈췄다. 하루 정도는 괜찮으니 거기에 있으라는 그 말은 명령인 것일까. 아니면 다른 어조의 부탁일까. 어느 쪽이나 사내에게 있어선 크게 다를 것이 없는 말이었다. 자신이 모시는 이가 어쨌든 자신에게 이곳에 남아있으라고 말을 했으니 그저 따를 뿐이었다.
"그렇게 말씀하신다면. 오늘은 여기에 있겠습니다."
작게 웅얼거리는 목소리라고 해도 하루이틀 보는 것이 아니었다. 그 정도 목소리는 충분히 알아들을 수 있었기에 사내는 손길이 닿는 곳. 즉 상대의 침대의 기둥에 조심스럽게 걸터앉았다. 휘장 너머의 모습은 눈에 보이지 않았으나 그 표정이 어느정도 예상이 간다고 생각하며 사내는 휘장을 잠시 바라보다 다시 문쪽을 바라봤다. 누군가 들어오지 않을까, 혹여나 갑자기 이상사태가 일어나지 않을까 약간의 경계심을 가진 탓이었다.
"저는 여기에 있을테니 안심하시고 쉬셔도 됩니다. 오늘은 외로움이라도 느끼시는 겁니까?"
물론 아닐 수도 있었으나 그래도 최소한의 물음을 조심히 내비치며 사내는 계속해서 시선을 문 쪽에 두었다.
상대가 침대에 걸터앉는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그는 손을 거두었다. 휘장 너머로 어렴풋이 비치는 사내의 실루엣은 또 하나의 기둥 같았다. 그의 침대를 굳건하게 받치고 있는 두터운 기둥.
"...오늘따라 궁금한 게 많네."
그는 대답하는 대신 혼잣말처럼 내뱉었다. 메시지는 단호했다. 더이상 아무런 질문도 하지 말 것. 그는 넓은 침대에 드러누운 채로 사내의 말을 곱씹었다. 외롭다고? 내가?
이제 와서 회한을 느끼는 것은 결단코 아니었다. 그저, 하루 정도는 타인의 기척을 느끼며 잠에 드는 것도 괜찮지 않나 싶었다. 그저 그뿐이었다. 사내는 그가 믿는 몇 안 되는 사람 중 아니었다. 그가 달리 누굴 침대맡에 앉혀 놓고 잠을 청하겠는가? 자다가 칼침을 맞고 싶지 않다면야. 정 말로 그 것 뿐? "쪽지, 전하는 거... 잊지 마. 누가 물어보면 넌 그냥... 그 하녀랑 같이 있었다고 하면 돼."
손쓸 틈 없이 수마가 몰려드는 와중에도 그는 더듬거리며 지시를 끝마쳤다. 몸을 돌려 사내가 있는 방향을 등지고 누운 그는 작게 속삭였다.
오늘따라 궁금한 것이 많다는 그 말에 사내는 더 이상 아무런 질문도 던지지 않았다. 그것이 곧 대답일테고, 자신은 그에 따라서 더 이상 의문을 가지지 않을 생각이었다. 누가 보면 사내의 그런 사고방식은 어쩌면 정말로 비정상적일지도 모를 일이었으나 설사 자신이 비정상적이라고 하더라도 사내에게 있어선 아무래도 좋은 일이요, 정말 관심 밖의 일이었다. 애초에 이런 일을 하는 시점에서, 인간의 마음을 포기하고 비정한 마음을 머금은 시점에서 그 누구의 이해를 받을 생각도 없었으니까.
"아마 저에게 직접 물을 이는 없을 거라고 생각합니다만, 누군가 묻는다면 그렇게 말하겠습니다."
그 하녀가 부정하지 않는 한 특별히 의심을 받을 일은 없을 것이고, 설사 부정한다고 해도 자신은 자신 나름대로 변명거리를 생각했기에 문제가 될 건 없었다. 오로지 부정하는 하녀만이 곤란한 상황에 처할 뿐이었다. 절대 자신이 모시는 이에게 피해는 가게 하지 않을 자신이 있었기에 사내는 조금도 후일을 걱정하지 않았다. 최악의 경우엔... 자신이 멋대로 한 것으로 처리하면 될 일이었다. 자신의 주인도 모를 정도로 자신이 행한 일. 허나 그 변명거리는 어디까지나 최악의 경우를 대비한 것이기에 사내는 그런 일이 없기를 바랄 뿐이었다.
"감사합니다. 부디 내일은 평안한 하루가 될 수 있기를. 나의 주여."
잠들어버리는 숨소리를 귀담으며 사내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혹시나 모를, 그리 달갑지 않을 방문객의 발소리를 놓치지 않기 위해 귀는 활짝 열어놓으며. 지금 이 시간. 이곳이야말로 자신의 주인에게 있어 가장 안전한 곳이 되게 하리라는 마음가짐을 꽉 잡으며.
/상황상 막레가 되려나? 혹시 더 잇고 싶다면 이어도 되겠지만 막레 분위기인 듯 하니 일단 막레로서도 마무리를 지을 수 있게 쓸게!
새벽 2시, 그리고 또 38분. 하루가 시작된 지도 벌써 3시간 째를 향해 시계바늘은 흘러간다. 자동 결제 알람을 알리는 소리가 나면 나는 몸을 움직인다. 따뜻한 택시 안에서 잠깐 눈을 붙였다가 일어나니 안 그래도 야근에 지친 몸이 굳어 있다. 무거운 몸을 끌고서 택시 기사에게 인사를 건네고, 차문을 열고나와 마주친 밤공기. 제법 추워진 날씨에 몸을 잘게 떨었다. '아침에 외투 좀 챙겨서 나올걸. 내일, 아니지. 오늘은 꼭 챙기자.' 그런 생각을 하다가 문득 시야에 들어온 것이 있다. '와, 입김.' 뽀얗게 흩어지는 숨을 보고서 눈을 깜빡인다. 가을 다 지나고 벌써 겨울이 왔나보다.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맑고 높은 하늘에 구름 한 점 없다. 그리고 바람이 불어온다. 코끝이 시리니 청승맞다는 생각을 하면서 하늘에서부터 고개를 내렸다. 집이나 가야겠다고 다시 앞을 바라보는데-
"......?"
시야에 없었던 것이 있다. 하늘을 보기 전까지 저런 것은 없었다. 나는 당신이 누구인지 알아보기 위해서 가까이 다가간다...
땅바닥에 앉아있던 이는 표정을 찡그리고 상대가 알아들을 수 있는 말소리를 내고 있었다. 생김새로는 막 성인이 된 것 같은 엣된 분위기가 풍기고 있었고, 키는 170을 조금 넘은 듯한 사람과 비슷한 존재였다. 허나 등 뒤에 붉은색 빛이 뭉쳐서 만들어진 것으로 보이는 날개 한 쌍이 있다는게 평범한 인간과는 다른 점이었다. 그 이질적인 존재는 자리에서 일어나 허리를 손으로 천천히 문질렀다.
표정을 찡그린 탓에 제대로 뜨지 않은 눈이 표정이 펼쳐지며 환하게 뜨였고 그 이질적인 존재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주변을 두리번두리번거렸다. 그리고 잔뜩 당황해서 더욱 빠르게 주변을 둘러보다 뒤로 살짝 물러나며 잔뜩 긴장한 목소리를 냈다.
"여긴 어디? 천국? 지옥? 어두우니까 지옥인가?! 안돼! 아직 하고 싶은 일이 많았는데!!"
이어 그 이질적인 존재는 털썩 주저앉으며 절망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러다 문뜩 인기척을 느꼈는지 고개를 살짝 자신에게 다가오는 이 쪽으로 돌렸다.
누가 이 날씨에 땅바닥에 앉아있는가 싶어서 가까이 갔다가, 실루엣이 정확히 보일 때 바로 걸음을 우뚝 세웠다. 천사 날개는 분명 하얗고 깃털 있는 그런건데 저 날개는 그렇게 보이지 않았다. 무심코 중얼거리며 소리냈다는 것을 인지하지 못했다. 그저 난 꿈인지 구분하는 방법 중 흔하디 흔한 뺨 꼬집기를 해야하나 고민했다. 그리고 정말로 하려다가 관두었다. 저 앳된 분위기를 보자니 어린 애들 장난이라 생각하기로 했다. 다른 가능성이라고 해봤자 영화나 소설 같은 망상 뿐인데, 그런 쪽의 가능성은 상상하기 정-말 귀찮았다.
"지옥... 비슷하지."
헬조선. 그 단어가 떠올랐다. 다시 걸음을 옮긴다. 평범한 회사에서 평범하게 월급 받아타먹는 소시민이다. 그래서 내 양심도 평범하다. 추운 날씨에, 밤에, 길바닥에 혼자 있는 앳된 애를 모른 척 지나치기에는 애매한 양심이라는 뜻이다. '요즘은 이러고 노나. 중2병? ...좀 꼰대 같나.' 털썩 주저앉아있는 그 앞에 무릎을 모으고 쭈그려 앉았다.
"집 어디에요?"
'아.' 뒤늦게 입꼬리를 올렸다. 피곤에 찌들어 얼마나 상냥히 보일지는 미지수지만, 그래도 나보다야 어려보이는데 웃으면서 말 걸어야 덜 무섭지 않으려나 싶었다. 이미 겁 먹어 있는 것 같기도 했다.
지옥이라는 말에 다시 절망하는 분위기를 보이며 이질적인 그 존재는 고개를 아래로 푹 숙였다. 난 그저 평화를 지키기 위해서 싸웠을 뿐인데. 빛이 번쩍해서 놀라서 넘어진 것 뿐인데 그걸로 죽은거야? 지옥으로 떨어질 정도로 나쁘게 산거야? 하는 중얼중얼거리는 목소리를 내는 모습이 정말 제대로 절망한 모습이었다.
집이 어디냐고 묻는 물음이 들려오자 이질적인 그 존재는 고개를 들어 자신에게 말을 거는 이를 바라봤다.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우물우물거리던 그 존재는 퉁명스런 목소리로 그 물음에 대답했다.
"지옥 같은 곳에 내 집은 없어. 그러는 당신은 누구야? 왜 날개가 없는거야? 아. 지옥이니까 페어리얼은 아니겠구나. 그렇다면 당신은 무슨 종족이야? 뭐라고 부르면 돼?"
명백하게 이질적인 용어를 사용하면서 이질적인 존재는 제대로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다시 주변을 바라보면서 의외라는 듯이 눈썹을 쫑긋했다.
웃는 건 포기했다. 오전 9시부터 오전 2시까지 일한 낡고 지친 현대 사회의 톱니바퀴는가 이 골 울림을 인내하고 웃기는 힘들다. 답해줄 수 없는 물음에 난들 알겠냐고 말하고 싶었지만 어린 아이라고 생각하니 참아졌다. 지끈거리는 머리를 짚고서 고개를 숙였다. 잠시 그러고 있으면 살만 해진다. 지옥이라는 말을 정말 믿는게 무슨 놀이인지는 몰라도 정말 재밌어서 열심히 하나보다 싶었다.
"나도 내 집은 없는데...... 전 회사원이고... 네, 그냥 인간이에요."
대한민국에서 내 집 마련하기가 쉬울 리도 없고, 나도 없는 내 집이 이 장난에 심취한 어린 애한테 있을 리야 당연히 없다. '...그러니까, 살고 있는 집의 위치를 물어본 거였는데.' 아무래도 생각보다 훨씬 더 심도 있는 장난질이구나 생각한다. 쏟아지는 물음에 찬찬히 답을 해주었다. 물음 중에는 제 스스로 답하는 것도 있어 가만히 듣고 있는 시간도 있었는데, 듣고 있는 시간조차 기가 빨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다 뭐라고 부르면 되냐는 말에 입을 다물었다. 이러다 끝도 없이 여기서 날을 지샐지도 모르겠단 예감.
"몇살이에요? 집 안 알려주면 경찰 부를 수 밖에 없어요."
이 정도면 충분히 선의를 베풀었다고 생각했고, 자고 싶었다. 경찰 부른다는데도 시침떼지는 않을 거라 기대한다.
"무서운 건 돈이에요."
대충 대꾸하며 자리에 일어나니 따라 일어선다. 그리고 주머니에서 스마트폰을 꺼내 들었다. 무슨 답이 돌아오냐에 따라 112가 눌릴지 말지 정해질테다.
"인간? 처음 들어보는 종족이야. 하기사 지옥에 사는 종족을 내가 어떻게 들을 수 있겠냐만. 그보다 회사? 지옥에서도 일을 해야하는구나. 뭔가 내가 생각하던 지옥의 이미지와 완전 달라서 혼란스러워."
대체 무슨 이미지를 생각한건지 이질적인 존재는 손으로 미간을 잡으면서 두 눈만 깜빡였다. 그리고 눈앞에 있는 상대를 가만히 살펴보더니 살며시 상대의 뒤로 향한 후에 등을 바라봤다. 날개가 없다는 것에 역시 신기함을 느끼는 와중 그 존재의 등 뒤에 붙어있는 날개가 살며시 팔락였다.
"나이는 63. 그러고 보니 당신은? 경찰? 우와. 지옥에도 있을 것은 다 있구나. 점점 내가 생각하는 지옥의 이미지와 멀어지고 있어. 아무튼 인간은 날개가 없는 종족이야? 그럼 이렇게 날아다니지 못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이질적인 존재의 날개가 더욱 빠르게 펄럭였고 그 존재의 두 발이 땅에서 떨어졌고 몸이 공중으로 붕 떠올랐다. 가볍게 높이 솟아올랐다가 다시 낙하하는 그 모습은 누가 봐도 하늘을 날아다니는 모습 그 자체였다. 날개를 빠르게 퍼덕이며 자신의 몸을 공중에 띄운 상태에서 그 존재는 상대를 가만히 바라봤다.
"아니면 마법을 쓴다거나 해서 날아다닐 수 있어? 만약 못 난다면 조금 불편하겠네. 하기사 지옥이 편할 순 없을테니까."
조금 안타깝다는 듯이 이야기를 하나 이내 자신이 그 지옥에 있다는 것을 다시 인지하며 그 존재는 고개를 아래로 푹 숙였다.
"하기사 지금 가장 불쌍하고 동정받을 건 나겠네. 도대체 얼마나 더 착하게 살아야 천국에 갈 수 있는거야? 죽어서 지옥이라니. 너무하잖아!"
인간이 무엇인지 설명해봤자 듣지 않거나, 인간이라는 것을 모르는 것처럼 반응하거나 둘 중 하나이겠다는 예상. 그래서 난 더 대꾸하지 않기로 했다. 1초라도 빨리 이 아이를 귀가 조치시키고, 나 스스로도 귀가 조치한다. 그게 목표였다. 나이가 63이라니, 아무래도 집에 대해서 말해줄 생각은 없어보인다. 저 능청스러운 장난질이 언제까지 이어질까 싶어지면 스마트폰의 잠금을 풀었다. 네네, 건성으로 답하며 손을 놀리니 스마트폰 화면이 켜진다. '으, 눈 부셔.' 화면이 너무 밝아 잠시 표정을 찡그렸다가, 이제 경찰에 연락할 거라는 말을 하기 위해 스마트폰 화면에서부터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곧 밝게 빛나던 화면이 사라졌다.
"......맥주 두 캔으로 취할리가 없는데."
이실직고한다. 야근하다 너무 지쳐 캔맥주 2캔을 까기는 했다. 그 정도로 취할리도 없고, 저 날개가 퍼덕거리며 날아다닐 일도 없다. 그런데 둘 다 일어난 모양이다. 나는 고개를 푹 숙여 마른 세수를 한 번 하고, 지친 몸 만큼이나 굳어버린 머리를 굴려보았다. 우선, 저 모습을 다른 누군가 봐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단 내려오실래요..."
얼굴을 덮고 있는 손 틈새로 바닥이 보였고, 떨어진 내 스마트폰도 보였다. 약정 아직 1년은 넘게 남았는데, 박살나진 않았기를 짧게 기도했다. 딱히 믿는 신이 있지는 않았지만 저 존재를 보니 있을 법도 싶었다. 그러니 모든 신이라는 존재에게 통틀어 빌어보았다.
내려오라고 이야기를 하는 그 말에 이질적인 존재는 고개를 끄덕이며 아래로 착지했다. 빛이 뭉쳐서 만들어진 것처럼 보이는 붉은 날개는 조금 전과는 다르게 아래로 살며시 쳐졌고 이질적인 존재의 시선은 손으로 얼굴을 덮고 있는 상대를 바라보며 이해한다는 듯이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하늘을 날 수 없나보구나. 마법으로도. 하기사 내가 살던 곳이 아니라 지옥이니까 그럴 수도 있겠네. 나는 에어리얼. 여기가 지옥이니까 아마 죽어서 여기에 온 걸거야. 그러니까 사람? 라는 건 잘 모르겠지만 당신이 사람이라는 이라면..아. 잠깐만. 아깐 인간이라며!"
자신을 속였냐는 듯이 정말 뚫어져라 바라보던 이질적인 존재는 입술을 삐죽 내밀다가 다시 안으로 집어넣었다. 그리고 무언가를 생각하듯 팔짱을 끼고 눈을 감으면서 작은 숨소리만 냈다. 그러다 다시 눈을 뜨더니 상대에게 질문을 던졌다.
"있잖아. 죽어서 지옥에 온 이는 여기서 어떻게 살아가? 그러니까 죄값을 치룬다거나, 재판을 받는다거나 그런 거 없이 그냥 여기서 살아가면 되는거야? 자유롭게? 아니. 정말로 내가 아는 지옥과는 완전 다른 이미지라서. 잠깐?! 설마 나를 고통으로 끌고가기 위해서 날 속이기 위해 방금 사람인데 인간이라고 거짓말을 한거야?!"
아뿔싸! 하는 표정으로 자신을 에어리얼이라고 칭한 그 이질적인 존재는 정말로 쨉싸게 상대와 거리를 두었고 금방이라도 도망칠것처럼 날개를 쫑긋 세웠다.
대꾸할 기운이 없다. 아무리 봐도 저 존재는 사람은 아니고, 인간이랑 사람이 거의 같은 의미를 가진다는 것도 모르는데다 여기가 지옥이라고 철썩같이 믿고 있다. 대화가 가능하지가 않다. 지옥이라고 누가 말했나 하면 내 입에서 나온 말이라 그저 자업자득이다. 정말 피곤한 일에 엮인게 분명하다고 확신한다.
"그쪽 숨 쉬잖아요. 정말 죽었다고 생각해요...?"
마른 세수를 그만 끝내고 저쯤 벌어진 거리를 좁힌다. 일단 지옥이라는 오해부터 벗겨야했고, 그렇기 위해서는 살아있는 존재라는 어필이 필요하겠다. 심장 박동 소리와 체온, 숨소리 정도면 되지 않을까 싶어서 가까이 다가간다. 들려줄 수 있다면 그만큼 빠르고 확실한 방법이 없을 것이다.
"저도 살아있고요...... 여기 진짜 지옥 아니에요, 별명이 지옥이지."
그리고 고민했다. 에어리얼이라고 자신을 소개한 저 자를 어떻게 해야할 지에 대한 고민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지구의 존재는 아닌 것 같고, 외계인이라고 생각하는 편이 좋을 듯 싶다. 혼자 버려진 외계인은 어떻게 되나 고민해보니, 부정적인 생각만 들었다. 지구 침략, 실험 대상, 지구 멸망, 동물원, 긍정적인 고려는 하나도 되지 않았다.
철썩같이 지옥이라고 믿고 있었는데 지옥이 아니라고 말하는 것에 이질적인 존재는 멍한 표정을 지으며 눈을 깜빡였다. 또 속았구나! 녀석아! 라는 느낌이 정말로 잘 어울리는 분위기가 흐르다가 이질적인 존재는 다시 털썩 무릎을 꿇고 두 손으로 자신의 몸을 지탱하며 절망하는 자세를 보였다.
"또 속았어. 또 속았어. 지옥 아닌데 지옥이라고 하는거에 속았어. 당연히 죽은 줄... 어? 그러면 나 살아있는 거잖아!!"
그 사실이 너무나 기뻤는지 만세 자세를 취하던 그 존재는 입을 꾹 다물고 이어 두 손으로 머리를 쥐어짰다. 여기는 지옥이 아니다. 그렇다면 대체 여기는 어디인가? 자연스럽게 그 의문이 떠오를 수밖에 없었고 으으- 소리를 내며 은색 머리를 북북 긁던 사내는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그럼 대체 여긴 어디야? 왜 난 여기에 왔어? 등등. 한탄하는 목소리가 조용히 울렸다.
"애초에 여기에 왜 왔는지도 몰라. 난 분명히 도시에 나타난 부의 결정체를 쓰러뜨리기 위해서 싸우고 있었는데, 갑자기 빛이 번쩍해서 나도 모르게 놀라서 넘어졌고 눈을 감았어. 그런데 눈을 뜨니까 여기였어. 있잖아. 여긴 어디야? 에어리즈는 맞는거야? 그러니까 여기 나라 이름!"
죽은 사람들이 벌 받는 곳인데, 죽은 사람들이 숨을 쉴 리가 없다. 저 존재가 말하는 지옥이 뭔지는 몰라도 한참은 다른 곳인가보다. 그리고 그 지옥이고 나발이고 하는 곳에 내가 곧 갈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사인은 분명 과로사. 피곤하고 졸린 기운을 떨쳐낼 수가 없다. 자신은 에어리얼이라며 붉은 날개를 가지고 하늘을 날아다니는 상황을 목격했음에도 밤은 깊었고 잠은 깨지 않는다.
"네, 살아계셔서 축하드립니다..."
갈고 닦아진 사회생활 실력에 감탄하는 순간이다. 이런 때에서도 영혼없는 텅 빈 소리를 할 수 있다. 정말 영혼 실린 생각은 좀 더 바빴다. '...은색 머리, 저 이상한 날개, 에어리얼, 63세......' 애를 써서 납득해보려는 중이기 때문이다. 에어리얼이라는 단어는 들어본 적도 없다. 63세와 은색 머리는 얼추 맞는 것 같다. 어린 애인 줄 알았더니 엄청 동안의 할아버지인 모양이다. 날개는 여전히 모르겠다... 답이 없다.
괜히 키득거리면서 이질적인 존재는 알겠다는 의미를 담았으나 그래도 기쁜 마음은 완전히 감추지 못하고 싱글벙글 웃었다. 죽지 않고 살아있다는 것이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다시 주변을 두리번 두리번 바라보았으나 역시 그 존재에게도 이질적인 풍경이었는지 곧 표정이 시무룩한 느낌으로 바뀌었다.
"하지만 역시 처음 보는 곳이야. 내가 사는 곳보다 자연이 훨씬 적은 느낌이야. 아무튼 대한민국? 남한? 한국? 미안해. 어딘지 모르겠어. 내가 사는 곳은 에어리즈라는 나라야. 아무래도 내가 사는 곳이 아닌 것은 분명한데. 그렇다면 나는 왜 여기에 있는거지?"
자신이 사는 곳이 아니라 생판 다른 곳임을 분명하게 인지하며 이질적인 존재는 자신과 대화를 나누는 이를 빤히 바라보다 미안하다는 듯이 나름 무게를 담아 사과를 전달했다.
"미안해. 아무래도 나, 부의 결정체와 싸우다가 무슨 이변에 휘말린 모양이야. 워낙 이현상을 많이 일으키는 이라서. 아무래도 먼 곳으로 워프했다던가 그런 것 같은데. 적어도 내가 아는 바 대한민국, 남한, 한국이라는 나라는 들어본적이 없거든. 사실 내가 사는 곳에선 그러니까 저거. 저걸 여기선 뭐라고 불러? 아무튼 3개가 있거든."
이어 그 존재는 하늘 위에 떠 있을 달을 손으로 가리켰다. 당연하지만 여기서는 하나밖에 없었으니 이질적인 존재의 입장에선 그 풍경조차도 신기하다는 듯 시선을 그 곳에 완전히 고정시키다가 다시 고개를 노렸다.
그러니까 나는 평범한 양심의 소유자다. 집에 가서 발라당 눕고 싶은 욕구가 저 발끝에서부터 머리 꼭대기까지 지배하고 싶다 외치고 있는 와중에, 이 정체 모를 할아버지를 어떻게 해드려야할 지 고민한다. 아무런 연고도 없이 낯선 곳에 뚝 떨어졌다는데, 내버려두고 가자니 내일 뉴스에서 다시 볼 수 있을 것만 같다. 하지만 고양이 줍는 것 하나에도 인간은 많은 고민을 하는데, 하다못해 성인으로 예상되는 인격체를 주워야 한다니 머리가 복잡할 수 밖에 없다. 그렇지만 의외로 결론은 간단하게 났다.
"사과는 한 번이면 됐고요... 제가 지금 엄청 졸리거든요."
달이 3개나 떠있는 에어리즈에서 부의 결정체와 싸웠고, 그러다 여기에 뚝 떨어졌다는 이야기를 이해하기 몹시 어렵다는 뜻이다.
"마법같은 거 없고...... 또 전 여기가 너무 춥고 집에 가고 싶어요."
그리고 다시 마른 세수를 했다. 이게 잘 하는 선택인지는 모르겠고, 80% 이상의 확률로 후회할 것 같았지만 나는 입을 열었다.
"괜찮으시면 저희 집으로 가시면 안 될까요..."
시간을 확인하려 주머니를 뒤적거리다 방금 있었던 일을 떠올린다. '맞다, 휴대폰.' 하늘을 날아다니는 할아버지를 보고서는 놀라 떨어트렸던 스마트폰. 바닥에 나뒹굴고 있던 걸 이제서야 주워든다. 액정에 금이 간 것 같지만 정상적으로 작동하기는 한다.
자신이 돌아갈 수 있는 방법은 아예 없어진 것이 아닌가 생각을 하며 이질적인 존재는 곤란한 표정을 지었고 등 뒤의 날개 역시 아래로 축 쳐졌다. 이 알지도 못하는 세계에서 계속 살아야하는 것일까. 아니면 어떻게 해서 돌아갈 방법이 있는 것일까. 고민을 하는 와중 자신의 집으로 가는건 어떻냐고 이야기를 하는 상대의 말에 이질적인 존재는 의외라는 듯이 의구심을 보였다.
"졸리니까 집에 가겠다는 것은 그렇다고 쳐도 나까지? 이 세계의 이들은 처음 보는이도 집으로 부르는데 경계심이나 그런 것을 못 느끼는거야?"
자신이 살던 세계라면 생각도 못할 일이라고 이야기를 하며 이질적인 존재는 잠시 답을 고민했다. 허나 이대로 있는다고 해서 달라질 건 없었고 우선 날이 밝은 후에 이것저것 시도를 해야겠다고 생각을 정리한 후, 이질적인 존재는 상대를 바라보며 대답했다.
"그럼 날이 밝을 때까지만 신세를 져도 괜찮을까? 나쁜 짓은 안할테니까. 아. 그러고 보니 몇살이야? 나보다 조금 나이 있어보이니가.. 75살쯤 되려나? 아무리 그래도 90까진 아닌 것 같은데. 여기서는 다르게 셀 수도 있겠구나. 여기는 한 살을 먹으려면 얼마나 시간이 걸려?"
나름의 호기심을 품으며 이질적인 존재는 날개를 살며시 퍼덕이며 땅에서 살며시 발을 떼어냈다. 그리고 상대를 바라보며 다시 말을 이었다.
"......초면에 집으로 데려가겠다는 거나, 따라가겠다는 거나 도긴개긴이라고 생각하는데요."
나쁜 짓이라고 해봤자 죽기밖에 더하겠나 싶다. 여기 계속 서있으면 곧 과로사든 동사든 할 것 같으니 거기서 거기인 선택지라고 생각했다. 내일 날이 밝고 나면 무슨 후회를 할 지는 그때의 몫이다. 무엇보다 오늘 아침이 되어 다시 출근을 하기 위해서는 집에 들러야 한다. 최소한 씻고 옷이라도 갈아입어야할테고, 쌓인 집안일도 있다. 청소는 둘째치고, 빨래도 밀린지가 까마득하다. 야근이 잦다보니 집안을 챙길 새가 없다.
"저 25살이에요. 여기서는 한 살을 먹으려면… 1년인데... 365일이요. 24 곱하기 365가...... 8760시간 정도......"
1년의 단위조차 없을 것 같아 안 굴러가는 머리를 붙잡고 계산을 한다. 생각해보니 8760시간이라고 한들, 시간의 단위조차 다르면 어떡하나 싶었지만 시간을 분, 분을 초 단위로 쪼개기에는 그 계산은 너무 컸다. 3자리수 곱셈 암산은 해도 그 이상은 안 되겠다. 나는 이 정도 물음에 답변을 했으면 만족스러울까 싶어 잠시 바라보다가 그만두었다. 이 비현실같은 현실을 받아들이고 있는게 좀 어이가 없었다. 한편으로는 내일 일어나면 꿈이겠지 생각하고, 정말 현실일 지도 모른다는 기대감도 품고 있다. 늘 같은 하루의 반복 속의 이런 일에 소소하게 재미를 느낄 깜냥은 있었다. 물론 휘말리고 만다면 달갑지만은 않을 일이다.
"날......... 저 들 수 있어요?"
키는 내 쪽이 작아보였지만, 키랑은 별개의 문제다. 성인치고 제 몸무게의 반절 가량의 무게를 들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되나 싶다. 운동을 하는 사람이 주변에 없는 것도 그렇지만, 본인부터가 심각한 저질 체력이라 그런 의문이 들기도 하였다. 운동할 시간은 커녕 끼니도 늘 인스턴트로 처리하거나 굶기가 부지기수인 야근쟁이에게 힘은 둘째치고 건강부터 챙기고 봐야 한다. ...건강조차도 챙기고 있지 않기는 하다.
계산법이 크게 다른지 이질적인 존재는 두 손을 올린 후에 손가락을 접어가며 잠시 계산하는 모습을 보였다. 허나 그렇게 오래 걸리진 않았고 곧 두 손을 아래로 내렸다. 그리고 난감한 표정으로 골치가 아프다는 듯이 미간을 잡고 고개를 휘저었다.
"365로 계산하기가 힘들어서 대충 300으로 계산했어. 인간? 사람? 아무튼 여기의 계산법으로 하면 난 대충 21세. 내가 사는 곳은 120일이 지나면 한 살을 먹으니까. 여기선 나이를 먹으려면 시간이 많이 필요하구나. 365면 세살이나 먹을 시기야."
세상이 달라지면 자연히 문화도 그 이의외 것도 달라지는 법이었다. 지금만 해도 나이를 계산하는 법이 다르지 않던가. 아무튼 기억해두겠다는 듯이 365, 365, 365를 작게 중얼거리면서 이질적인 존재는 상대를 바라보며 문제없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래 보여도 힘에는 자신이 있어! 내가 사는 세계에는 부의 결정체라는 게 있어. 세계를 침식하면서 이변을 일으키는 이들인데 그런 이와 싸우려면 힘이 많이 필요하거든. 그러니까 문제 없을거야! 네가 겁 먹어서 바둥거리는 것만 아니라면 말이야!"
이어 이질적인 존재는 자신의 손을 잡으라는 듯 오른손을 내밀었다. 만약 잡는다면 정말로 문제없이 몸을 붕 띄워서 공중 높이 떠올랐을 것이다. 그리고 집이 있는 곳을 알려달라고 하면서 조금 빠르게 하늘 위 어둠을 가르며, 그 방향을 향해 날아갔을 것이다. 잡지 않았다면, 그대로 걸어서 상대를 따라가려고 했겠지만.
/앗! 텀은 괜찮아! 일단 내 쪽에서 끊기는 조금 애매한 것 같아서 일단 한턴만 더 이어봤어! 여기서 집으로 안내하면서 끊어도 좋을 것 같아!
마왕이 이끄는 마족과의 오랜 전쟁이 마침내 끝나고 세상엔 평화가 다시 찾아왔다. 마왕을 무찌른 용사와 그 일행은 영웅으로서 환대받았고 현재 왕국에선 그들이 세운 공을 치하하고 기념하기 위해 아주 큰 축제를 열어 사람들은 평화로운 분위기를 즐기며 술을 마시고 노래를 부르며 춤을 추면서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일행 중 리더를 맡은 용사를 보고자 줄을 선 사람들이 많았고 그 끝은 도저히 보이지 않을 정도로 계속 이어졌다. 그들을 무시할 순 없다고 이야기하며 용사는 사람들을 만나며 악수를 하고 가벼운 대화를 하거나 그들이 보내는 선물을 받으며 나름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다른 일행들 역시 용사만큼은 아니긴 하나 만나고자 하는 사람들, 혹은 각자의 고향에서 고생했다는 인사를 전하기 위해서 찾아오는 이들이 있었고, 감사를 표하는 이들이 있었다. 그야말로 그들은 이 세상을 구한 영웅으로서 많은 사람들의 환영을 받는 존재였다.
용사의 오랜 동료이자 전설의 활을 얻어 많은 도움을 주었던 사내는 슬며시 그 자리에서 빠져나와 조금 조용한 장소로 향한 후, 나무에 등을 기대 한적한 분위기를 감상했다. 처음엔 그저 마을을 위협하던 마족을 퇴치해준 용사에게 은혜를 갚고자 따라간 것이었는데 설마 전설의 활을 얻고 마왕을 무찌르는데 일조할 거라고는 사내도 상상치 못한 일이었다.
"진짜 많은 일들이 있었구나. 정말."
이 축제가 끝나면 이제 어떻게 될까? 용사는 왕국의 왕이 사위로 삼는다는 말이 있었으니 여기에 남게 될 것 같으니 자신은 다시 고향으로 돌아가는게 좋을까. 그렇게 생각하며 자신의 뒷일을 사내는 조용히 생각했다. 고향으로 돌아간 후, 다시 이전처럼 사냥을 하면서 먹고 사는 것도 좋을테고 활을 가르치면서 사는 것도 나쁘지 않은 일이었다. 태어날때부터 마족의 위협에 시달리면서 살았던게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기에 이렇게 찾아온 평화는 오히려 그에게 있어서 낯선 일이었는지 그는 괜히 웃음을 터트렸다.
"그래도 이제는 다들 평화롭게 살 수 있겠지. 마을 사람들도 말이야. 아무튼 정말 끝은 끝이구나."
지금 이 순간이 믿기지 않는지 사내는 자신의 뺨을 가볍게 꼬집었다. 당연히 통증이 느껴졌고 그 통증으로 이게 꿈이 아니라는 것을 느끼면서 사내는 괜히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정말로 이런 날이 오고야 말았다는 감격과 기쁨. 그 모든 것이 한번에 터진 탓이었다. 그곳으로 다가오는 발소리가 웃음소리에 묻히고 있다는 것을 사내는 미처 알지 못했다.
/간단하게 전통 판타지 RPG 느낌의 배경에서 마왕을 무찌르고 평화가 찾아왔고 엔딩 씬 느낌에서 나올법한 축제 같은 장면이야. 같은 용사 일행으로 이어도 되고 사내의 고향 사람으로 이어도 되고 그냥 왕국 사람으로 이어도 상관없어. 다만 맥커터 전개는 사절이고 스루할 생각이야.
아웅... 애우우웅...... (이런 **! 빌어먹은 신 같으니라고. 로또 당첨 시켜달란 소원이나 들어줄 것이지, 감히 고양이 되고 싶다는 소원을 들어줘?!) (간단하게 군것질가리 장을 보고서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한숨과 함께 길고양이를 보며 부럽다고, 고양이가 되고 싶다고 바라고 보니 정말 고양이가 되고 말았다.) 아아웅! (제발 누가 좀 도와줘!)
>>169 와오오옹...... (뭔지 잘 몰라도 저 고양이 개빡친 거잖아! 대화로 해결하면 안 될까 야옹아......) (난데없이 고양이가 된 것도 서러워죽겠는데, 이제는 화내는 고양이까지 마주했다. 집에 들어가서 핫바와 컵라면을 먹을 생각이었는데, 어째 개싸움, 아니, 고양이싸움을 할 것만 같다. 최대한 적의가 없다는 의미로 꼬리를 내리고 귀를 뒤로 젖혔다. 고양이들의 세계에서 이게 무슨 뜻으로 통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그렇게 했다.)
소년은 생각했다. 과연 이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하고. 그냥 그렇게 주변을 둘러보았고, 집이라는게 갖고싶어졌다. 그래서 그렇게 행동하기로 했다. 소년은 갑작스럽게 종적을 감추었다. 2000년대의 어느 날, 여름이었다.
비상식적이었다. 그 학생을 본 교사들은 모두 입을 모아 그렇게 말했다.
' 애가 참... 유별나요. 도무지 일반 상식을 모른다니까요? 한번은 점심시간때 애들끼리 소란이 일어나서 다가가보니까, 걔가 아무것도 모르겠다는 얼굴로 가만히 맞고있더라구요. 그래서 자초지종을 들어보니, 글쎄 옆 자리 애 도시락을 뺏어먹었다나? 여학생은 울었고, 뭐하는거냐고 남자애들이 물어보니까 배가 고파서 밥을 먹었다고 대답했다는거에요. 그럼 니 도시락을 먹지 왜 뺏었느냐고 물어보니까, 자긴 도시락이 없어서 뺏었다나? 참, 어이가 없어서. 그래서 화가 난 남자애들이 걔를 때리기 시작했는데, 아무렇지도 않다는듯 계속 밥을 먹었다는거에요. 그거에 애들이 이상한걸 느끼고 거칠게 욕하는데... 간신히 말렸죠. '
' 음, 솔직히 말하면. 어디 경찰서에라도 신고해야지 싶습니다. 국어 수업 시간때에 애가 수업은 듣는데 무슨 소린지 전혀 못알아듣겠다는 표정인거에요. 그건 늘 있는 일이니까 딱히 신경 안썼는데, 어느날 걔한테 지문을 읽어보라고 시키니까 고개를 갸웃거리더라구요. 그래서 왜 안읽느냐고 물었죠. 불량학생도 아니었고, 공부머리는 없는것같지만 수업을 듣는 애였으니까요. 그런데 대답이 가관이야. 글을 못 읽는답니다. 아니, 글은 유치원생도 어느정도 읽을수 있잖아요? 고등학생이나 되었는데 글을 못읽는다? 놀리는줄 알고 버럭 화를 냈는데, 진짜 아무것도 모르겠다는 표정을 보고 짐작했죠. 이거 뭔가 이상하다. 그래서 말은 어떻게 하느냐고 물었더니, 세계를 돌아다니면서 배웠다. 영어, 불어, 일본어, 중국어... 오만가지 말을 다 할수 있다고 줄줄 불더군요. 그래서 시켜봤는데, 네. 다 할줄 압디다. 농담이 아니었어요. 저는 외국어는 영어밖에 못한다지만, 아무 말이나 뱉는게 아니었어요. 대체 어떤 애가 글은 못읽는데 외국어를 너댓개씩 막 하죠? 뭔가 이상해요. '
소년은 수업을 듣다가 문득 지루해졌다. 알 만한 내용이 하나도 없어. 그렇게 생각하곤 조용히 교실을 빠져나왔다. 수업중이었지만 개의치 않았다. 그리고는 옥상으로 향했다. 옥상에서 바닥에 털썩 주저앉아, 푸른 하늘과 드넓게 뻗어있는 건물들을 바라보았다.
" 재미없네. "
집도 가졌고, 학교도 가졌지만. 뭔가 본질적인게 부족했다. 총명한 소년은 곧 그걸 눈치챘다. 제 손에 쥐어진건 신식 무기였고, 자긴 그걸 다루는 방법을 모르는거였다. 이 무기를 다룰줄만 알면 될텐데, 그런건 누가 안 가르쳐주나. 소년은 길게 하품했다. 눈가에 눈물이 가볍게 고였다.
(낙엽이 발에 채이는 계절이 왔다. 학교가 히터를 틀어주지는 않지만 복도가 냉기에 어리는 계절이 왔다. 자신을 폭 감춰버릴 수 있는 얇은 담요를 유령마냥 머리 위에 쓰고서 복도로 나왔다. 그리고 시야에서 선생님을 발견했고 황급히 방향을 틀었다. 그러다 발이 꼬였는지, 담요를 밟고 미끄러졌는지, 누군가와 부딪쳤는지, 몸의 균형이 기울었다.) 어어? (넘어지겠다는 확신이 점점 선명해지며 표정이 동그랗게 변한다.)
>>173 (뒤돌아설 때, 발밑이 마찰력을 잃고 미끄러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대로 몸의 균형이 앞으로 기울어지면서 갑자기 뒤집어지는 세상. 돌바닥이 코앞에 닥쳐올 상황. 그러나 코앞에 닥쳐온 것은 돌바닥이 아니라 웬 셔츠 차림의 품이었다. 결국 그 품에 퍽 들이박긴 했는데, 그나마 돌바닥에 들이박는 것보다는 덜 아플지도 모르겠다. 제대로 충돌하기 전에 무언가 단단한 게 어깨를 턱 거머쥐고 앞으로 고꾸라지던 몸의 가속도를 최대한 받아내주었기 때문이다. 고개를 들어보면, 반의 운동부 아이가 무뚝뚝한 얼굴로 당신을 바라보고 있다.) 괜찮냐? (그러면서 당신을 훑어보고, 어디 다친 데는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는 딱딱한 얼굴로 한 마디 한다.) 조심 좀 해라.
>>174 어, (이름을 고민하는 시간이었다. 같은 반에 운동을 하는 이름을 떠올리려고 했는데, 담요가 훌렁 벗겨졌다는 걸 인지했다.) 안 괜찮아질 지도 몰라! (목소리를 낮췄지만 속도는 빨랐다. 표정도 다급했다. 왜 그런가하니, 귀에 그 원인이 있었다. 한쪽 귀에 피어싱이 3개 뚫려있었고, 붉은 기가 맴도는게 뚫은지 얼마 안 되었거나 괜히 만지작거려 덧나든가 한 모양새다. 큐빅이 복도 전등에 비춰 반짝거린다.) 고마워, 고마운데, 한 번만 더 빚지자! (그러더니 담요를 움켜쥐고서 당신의 뒤로 숨어들려 한다. 등 너머로 숨어들어가면 고개만 슬쩍 내밀 것이다. 아까의 그 선생님이 어디로 갔는가 찾기 위하여.)
>>175 (데오드란트 냄새.) ...수그려. (운동부는 미간에 주름을 그으면서 입고 있던 트랙탑을 지익 벗어서 넓게 펼친 뒤 조금 낮게 들고는 이리저리 살피는 시늉을 했다. 멀리서 국어 선생님의 너 뭐하냐, 하는 소리가 들린다.) 옷 안에 벌레 들어간 거 같아서요. (하면서 운동부는 트랙탑을 넓게 펼친 채로 툭툭 터는 시늉을 한다. 다행히 거기에 시선이 쏠렸는지 국어 선생님은 뭐라 별 말 하지 않고 돌아서 가는 것 같다. 특유의 가죽 슬리퍼가 바닥을 딱딱 때리는 소리가 멀어져간다. 국어 선생님이 근시라 다행인지도...) 이게 되네. (위기가 멀어지자, 운동부는 다시 트랙탑에 팔을 꿰어 걸치고는 당신을 힐난하는 눈빛으로 돌아다본다.) 그럴 거면 교내에선 빼.
>>176 (답하는 소리가 없다. 다만 숨을 합, 하고 죽이는 소리는 들렸을 지도 모르겠다. 선생님의 목소리가 가까워졌을 때는 심장 박동 소리가 숨소리보다 컸겠다. 발자국 소리가 멀어져가는 것에 최대한 귀 기울여 보았고, 펼치고 있던 트랙탑이 팔에 걸쳐지면 그제야 등 뒤에서 나왔다.) 안 돼, 뚫은지 얼마 안 된데다 혼자 다시 못껴. (귀에 손을 올려 피어싱을 만지작거리더니, 이내 잘못 건들여 고통을 느낀다. 표정을 찡글이며 손을 떼어낸다.) ...그래도 다음주에 투명으로 바꿀거야! (볼멘소리. 크기도한 담요가 이제보니 바닥에 질질 끌리고 있었다. 쭉 펼치니 긴쪽의 길이는 키를 웃돌고도 남을 성 깊다. 차곡차곡 개어서 팔에 걸어둔다. 팔락거리는 담요에서 가볍게 파우더리 향이 난다.) 맞다. 고마워! 거짓말 잘 하네! (방글 웃으며 당신을 돌아본다. 돌아볼때 뒷꿈치가 살짝 들썩거린다.)
>>177 손대지 ㅁ... (손이 귓가로 올라가는 걸 보고 미간에 내천자를 그리며 만류하려 손을 뻗었으나, 이미 피어싱에 손이 닿았다가 우그러지는 표정을 보고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조그만 한숨을 쉰다.) 피어싱 샵에 가서 소독약 하나 사. 약국 가서 식염수를 사다 바르던가. (하면서 운동부는 주머니를 뒤적인다. 그러다 건네어져온 말에, 운동부는 무뚝뚝하고 가무잡잡한 얼굴로 당신을 가만히 보다가 시선을 피하며 한마디 퉁명스레 한다.) 그런 칭찬 필요없어. (그러면서 운동부는 주머니를 더 뒤적여본다. 찾는 게 없는 모양. 그는 다시 이쪽을 바라보며 말을 꺼내온다.) 너 여기서 잠깐만 있어.
>>178 (입을 꼭 닫고서 입꼬리를 아래로 동그랗게 말았다. 하지 말란 짓 했다가 아파하고 나니 할 말이 없다. 한숨 소리는 듣지 못했지만 저 입 모양, 분명 한숨 쉰 거라는 추측이다.) 별로 안 아파! ... 안 건들이면. (곧게 당신을 쳐다보고 있었는데, 자기가 생각하기에도 한숨을 한 번 더 쉬게 할 것 같은 말인지라 느릿느릿 시선이 다른 방향으로 향한다. 점점 아래로.) 샵에서 올때마다 소독해준다 그래서 안 샀지이. (목소리 크기가 살짝 줄었고 어미가 늘어졌다.) 어... 그럼 친절하다? 상냥하다? 배려심이 깊다? 마음씀씀이가 넓다? 과장 쪼금해서 생명의 은인이다? (갈수록 화려해지는 칭찬 리스트를 늘어놓는게, 마음에 드는 걸로 고르라는 것 같다. 그새 시선이 위로 올라오더니 눈만큼은 아까와 같이 당신을 바라본다. 입꼬리는 여전했지만.) 네엥.
>>179 그래, 건드리지 마. 샵을 매일 가는 것도 아닐 거 아냐. (곧게 운동부를 쳐다볼 때에는 운동부의 귀에도 아웃컨츠를 따라 줄줄이 나 있는 피어싱 자국이 보인다- 무언가 끼워져있진 않지만.) 금방 올게. (어째 운동부가 건네어온 잠깐만 있어, 하는 말이 그 무뚝뚝한 얼굴로는 도저히 감당이 안 될 만한 칭찬 리스트가 입에서 줄줄이 쏟아져나오는 걸 틀어막으려는 의도도 없잖이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운동부는 부리나케 반 쪽으로 발을 틀어 총총 갔다가, 1분 남짓한 시간만에 되돌아왔다.) 자. (운동부가 손을 내민다. 소염진통제 알약 곽이 놓여 있다.) 네 알인가밖에 없긴 한데, 그거라도 먹어. (당장 이 자리에서 먹으라는 말은 아니다. 물도 없잖은가. 운동부도 그게 마음에 걸렸던지, 정수기는 1층에 가야 있다는 걸 알면서도 공연히 복도를 한 번 둘러본다.) 매점이라도 갈까.
>>181 매일도 갈 수는 있지! 근데 그러면 진상이잖아. (대답을 하면서 고개를 다시 들어올렸을 때, 한 번 흘깃 당신의 귀를 쳐다보았다. 피어싱을 했던 자국이 맞는 것 같았고, 피어싱 이야기가 막힘없이 흐르는 것도 그렇고. 이따 돌아오면 물어봐야지 생각한다.) 아. 어. (피어싱 이야기부터 하려고 했는데, 당신이 곧 돌아와서는 손을 내밀어 보여준 것은 약이다. 숨을 깊게 들이마시고, 내쉬면서 말을 쏟아낸다.) 친절하고 상냥하고 배려심 깊고 마음씀씀이 넓은 생명의 은인이네! (아까 늘어놓았던 칭찬 리스트를 한 숨에 다 말하더니 그러고서 숨을 다시 쉰다. 한 숨에, 빠르게, 정확한 발음으로 말해낸게 뿌듯한듯 웃었다.) 매점? 그래! 은혜 갚아야지. (돌아다니다 선생님을 마주칠까, 팔에 걸어둔 담요를 펼친다. 다시 유령처럼 뒤집어쓰기라도 할 모양이다.) 근데 넌 왜 안 하고 다녀? 안 막혀? 아니면 벌써 막혔나... 아, 학교니까 빼는게 맞지. (피어싱이라고는 말하지 않았지만 아무래도 피어싱 이야기다.)
>>181 조용히 해. (와르르 쏟아지는 칭찬세례에 운동부는 온 얼굴을 구겼다. 가무잡잡한 뺨에 핏기가 올라오는 것도 같다. 운동부는 화제를 돌린다.) 아무튼 네 말처럼 매일은 못 가는데 소독은 매일 해야지. 약국에서 소독제 스프레이 사둬... 은혜는 안 갚아도 되니까, 매점에서 음료수라도 사다가 소염제도 먹으라고. (담요를 유령처럼 뒤집어쓰는 것에는 별 말을 하지 않는다. 계단을 내려와서 복도를 가로질러 가면 저만치에 열려 있는 매점이 보인다. 매점으로 다가가다가, 재재 쏟아내는 질문에 운동부는 당신을 힐끔 바라보다가 앞으로 시선을 돌렸다.) 어. 학교에선 안 해. 또 귀 찢어먹긴 싫어서.
>>182 왜? 다 마음에 안 들어? (화제를 돌려도 꿋꿋하게 물어보고는, 바뀐 화제를 쫓아간다.) 소독약이 스프레이로도 있어? 똑똑이네! (앞선 칭찬들은 조용히 하라는 말을 들어버렸으니, 다른 방향의 칭찬을 덧붙이고 이번에는 어떻냐는 기대에 어린 웃음을 보인다.) 은혜도 갚을거고 약도 먹을 거야. (담요자락을 팔락거리면서 당신과 함께 매점으로 향한다. 이번에는 실수로라도 밟고 넘어지지 않게, 발치까지 내려오지 않도록 잘 붙들고 있다.) 으, 아팠겠다. 운동하다가? 아니면 선생님들이? 선생님들이 그런거면 많이 무서운데. (무의식적으로 피어싱을 뚫은 쪽의 귀를 감쌀 뻔하다가, 직전에 브레이크를 걸어 멈췄다. 그리고 가까워진 매점에 눈에 들어오면 당신의 앞으로 질러가더니 마주보고서 선다.) 뭐 사줄까!
>>183 마음에 들고 말고가 아니라... 아냐 됐다. (또다른 칭찬에 운동부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하고 시선을 돌려버린다. 핏기가 조금 더 선명해진 것도 같다. 화나거나 한 게 아니라 쑥스러워하는 걸까? 다행히 새로운 질문이 꺼내져 화제가 환기된 덕분에 운동부는 다시 시선을 돌려왔다. 질문에 조금 고민하다가) 운동하다가 그랬어. 그나마 연골이 아니라 귓불이라 다행이지. (아웃컨트에 구멍이 주르르 난 귀의 반대쪽 귀를 바라보면 귓불에 흡사 종이를 한 번 접었다 폈을 때 생기는 것과 비슷한 모양의 흔적이 있다. 그쪽 귀는 귓바퀴를 따라 구멍이 나 있다. 갑자기 발걸음을 툭 앞세워서 마주보고 가로막으면, 운동부는 물끄러미 바라봐온다.) 이런 걸 바란 건 아니긴 한데, 이온음료 캔이나 하나 사줘.
>>184 (말을 잇지 못할 때, 다시 말을 이어주기라도 할까 기다렸다. 다시 말해도 괜찮다는 듯 작은 미소를 입가에 남기고, 당신의 목소리에 귀 기울였다. 언제 입이 열릴까, 당신을 바라보았지만 이 주제로 이야기가 이어지지는 않았다. 그래도 한 가지를 알게 된 것 같다. 당신이 조금 부끄러워하는 것 같다고. 소리죽여서 쿡쿡 웃었다.) 으악. (웃다가도 금방 당신의 말을 듣고서 표정이 찡그려진다. 귓바퀴를 따라 피어싱 자국이 난 쪽의 귀를 보고서, 귀가 찢어졌을 때의 상황을 상상해버린게 분명하다.) 진짜 그거 하나? 많이 먹고 많이 크고 많이 힘내야지! (운동을 한다고 하면 생각되는 그런 이미지. 우선은 물과 이온음료 한 캔을 찾아온다. 그리고서 정말 이걸로 끝이냐는 듯 당신을 바라본다.)
>>185 으악이지. (운동부는 고개를 끄덕였다. 반문이 돌아오자 다시 한 번 더 고개를 끄덕인다.) 너무 많이 먹어도 곤란해서. (정확히는 축구부라고 했던가? 운동부의 체격은 탄탄하면서도 날렵해서, 제법 신경써서 관리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정 아니다 싶으면 나중에 다른 걸로 해주던가. (이 녀석, 자연스럽게 애프터신청을 해왔다.)
>>186 운동이랑은 거리가 이~만큼 떨어져 있어서 잘 몰라. (팔을 넓게 양쪽으로 쭉 펼쳤다. 곰곰 생각해보면, 체육 시간에 곧잘 쉬고 있고는 했다. 특별히 몸이 안 좋아 보이지도 않는데도. 체육 선생님이 별 다른 말을 하지도 않았다.) 다른 거 먹고 싶으면 말하지! (나중을 기약할 듯하니, 물과 이온음료 캔을 구매하고서 다시 온다. 캔을 당신에게로 건넨다.) 아니면 아예 다른 거야? 공부 도와주는 거도 자신 있어!
>>187 많이 먹어서 살 찌면 곤란하다는 소리야. (생각보다 간단한 핑계였다. 거절의 의사를 표한 운동부는, 내밀어진 음료수 캔을 받아든다.) 잘 마실게. (하다가, 공부를 도와주겠다는 말에 공부? 하고 입 안으로 되뇌어보고는 곰곰이 생각해본다. 본인 성적을 생각해보는 듯하다. 중위권이긴 했지만 그렇게 좋은 성적은 아니다. 딱 '공부에 손을 놓지는 않았다' 정도일까. 어떤 이유로 인해 성적을 올릴 필요가 있는 건지, 공부를 도와주겠다는 제안이 꽤 유효하게 먹힌 것 같다.) 공부 잘하냐?
>>188 운동 많~이 하먼 많이 먹어도 괜찮은 줄 알았지. (간단한 논리다. 먹은 만큼 움직이고, 움직인 만큼 먹고. 당신이 캔을 받아들면 방긋 웃었다. 이제 물뚜껑을 열면 약을 먹을 수 있을텐데, 물병을 그냥 달랑달랑 들고만 있다. 약 먹기 싫어서 두는 얕은 수다.) 자신있어! (두 손가락이 곧게 펼쳐진다. 브이 자를 그리고서 웃는 모습이 기세등등하다.) 내가 바로 전교 1등... 까지는 아니지만. (목소리를 낮추고서 소곤이는 듯 하더니 웃음섞어 말을 바꾼다.)
>>189 먹은 만큼 더 운동해야 되잖아. (간단한 논리를 뒤집으면 간단한 논리가 나온다. 캔을 받아들고 툭 따서 몇 모금 시원하게 넘긴다. 그런데 몇 모금을 마시고 나서도 손에 물병이 달랑달랑 들려만 있자, 운동부는 그걸 빤히 바라본다.) ... (전교 1등-까지는 아니지만, 하는 짓궂은 말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운동부는 병과 이쪽을 번갈아 보다가 한 마디 한다.) 뚜껑 따줘?
>>190 난 먹은 만큼도 운동 안 하는데. (자랑스레 말할 내용은 아니지만, 그리 우스운지 키득 웃고 있다.) 전교 1등 정도는 아니면 모자라? (최상위권이 아니기는 해도, 상위권은 상위권에 속하고 있는 성적이었다.) 응? (공부 이야기를 하고 있었는데 뚜껑 이야기가 나왔다. 눈을 느릿하게 깜빡거리고, 당신을 쳐다보았다가 물병을 쳐다보았다. 입을 꾹 닫고 있더니, 뚜껑을 손으로 잡고 힘을 준다.) 못 여는 거 아냐! 약 먹기 싫어서 그런건데. (약은 거의 대부분이 맛없으니까.)
>>192 소아과 의사선생님 같아. (귀 만지지 말라고 했고, 소독하라고 조언도 해줬고, 약도 챙겨줬고, 운동에 먹는 얘기까지. 굳이 소아과가 붙은 이유는 상냥하고 친절하다는 말을 돌려 돌려 표현한 것이었다.) 그래도 앞자리는 1이야. (물병이 열리고 나면 정말 먹기 싫어하는 표정이 된다.) 가루약이든 알약이든 맛없는 건 똑같지이. (말 끝을 늘이며 싫은 티를 팍팍 내지만 손바닥을 내밀었다. 약을 먹기는 먹겠다는 거겠지.)
>>194 어쩌다 보니 이렇게 됐네. (운동부는 잠깐 시선을 피하면서 머쓱하게 대답했다. 정말이지 처음에는 귀 팅팅 부은 게 보기 좀 그래서, 저게 얼마나 짜증나게 아픈지 아니까 성격에 안 맞는 오지랖 잠깐 부려보려고 한 것뿐인데- 어째 생각하던 것보가 해프닝이 길어진 것 같다.) (아주 싫지는 않을지도, 하고 운동부는 무심코 생각했다.) 조금만 도와주면 되니까 그걸로도 충분해. (그는 약갑에서 알약을 톡 꺼내 손 위에 얹어준다. 연질캡슐로 되어 있다.) 알약은 혀 위에 올려도 별맛 안 나잖아. 입 안에서 터지는 게 아니고서야..
>>195 아까 내가 했던 말들이 다 정답이라서 그런 거 아냐? (놀리고 있다. 이를 하얗게 언뜻 보이며 웃는 입꼬리 모양하며, 샐쭉 감기며 휘어진 눈매 모양하며 장난스럽기 그지 없다. '아까 내가 했던 말들'이 가리키는 것은 분명, 그 칭찬 리스트다.) 나 필요해지면 말해! 나 집 늦게 가니까 난 아무때나 괜찮고. (방긋 웃고나서, 이후에는 손 위에 올려진 알약과 눈싸움이 잠시 있었다.) 녹잖아! 잘 녹는 건 물 마시기도 전에 녹아버리고. (투덜거려봤자다. 먹어야할 약이고, 먹으라고 선뜻 주기까지 했는데 안 먹겠다고 투정부리기에는 당신이 정말 소아과 의사 선생님도 아니다. 약을 입에 넣고 나서 눈 질끈 감더니, 물을 세번이나 마셨다. 처음은 물만 삼켜버렸고, 두번째에서 제대로 약도 같이 삼켰고, 세번째는 혀끝에 약맛이 남지 말라고.) ... 이제 귀 안 뚫고 싶어졌어.
>>197 같은 소리 하고 있네... (시선을 돌리지도 못한 채로 운동부는 얼굴을 구겼다. 뺨의 혈색이 좀더 선명해진 것도 같다.) 복도 반대편에서도 다 보일 정도로 귀가 팅팅 부은 게 보기 안쓰러워서 도와준 것뿐이니까. (이런 상황 자체가 익숙하지 않은 걸까 틱틱거리는 것도 퍽 서투르다. 알약을 내어줄 때가 돼서야 운동부는 다시 이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얼마나 혀 위에서 굴리면 그게 녹냐? 후딱 삼켜. (알약을 삼키자, 그제사 한시름 놨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다. 반나절쯤 지나면 통증과 부기가 확연히 가라앉을 것이다. 투덜대는 소리에, 운동부는 고개를 끄덕인다.) 뚫기 싫으면 안 뚫는 거지.
>>198 오, 너 지금 그거 닮았다. 이모티콘 중에 도깨비처럼 생긴 거 알아? (👹) (소리죽여서 웃으며 말을 이어 나간다.) 나는 그걸 친절하다고 불러. (당신이 부끄러워할 것이라고 생각하고서 한 말이라, 웃음이 쉽게 그치지는 않는다.) 안 녹았거든! 약 먹으면 기분이 별로야. 목에 남아있는 것 같아. (이물감이 싫다는 듯 표정을 찌푸리도 고개를 작게나마 절레절레 저었다.) 응! 대신 타투할 거야. 어른 되면! (열었던 물뚜껑을 잠그면서 샐쭉 웃는다. 집게 손가락 하나만을 피고서, 손가락 끝으로 피어싱이 있는 쪽 귀의 귓바퀴를 따라 내린다.) 여기에 하면 너랑 똑같겠다.
>>199 (운동부는 뭐라 할 수 있는 말이 없어진 건지, 아니면 자기도 얼굴이 발개진 걸 눈치채고 숨기고 싶어진 건지 손바닥으로 얼굴 반쯤을 턱 짚었다. 그리곤 한숨을 푹 쉬었다.) 에휴. (이마를 짚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다, 어른이 되면 타투를 하겠다며 귀의 연골 쪽을 쭉 훑어내리는 손가락을 보고 눈을 조금 치뜬다.) 바늘구멍 하나 뚫는 것도 죽을 맛인데 타투를 거기다가? (운동부가 먼저 주목한 쪽은 그쪽이었다. 귀 연골을 건드리는 건 십중팔구 대단히 아픈 일이기 때문이다.) 귓바퀴도 귓볼도 있는데 왜 거기... (하다가, 자기랑 똑같겠다는 말을 상기하고는 말을 하다 말고 입을 다문다. 시선이 흔들리는 걸 다잡으며 미간을 구긴다. 얼굴이 더 빨개졌다.) .........너 나한테 작업 거냐.
>>200 (얼굴 반쯤이 손에 가려 사라지고, 한숨을 쉬는 것까지 별 다른 장난을 이어 치지 않고서 보고 있었다.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면은 그때즘 입을 열었다.) 침묵은 긍정인데. 격한 부정도 긍정이고. (말을 끝내면서 입매가 둥그렇게 휘는 건 장난치는 것이기도 했고, 약올리는 것이기도 했다.) 응! 꽃이 한 송이씩 나란히 있다거나. 찾아보니까 마취 크림 발라준대. (피어싱이 있는 쪽은 귓볼이다. 귓바퀴만 만지작거리다가 손을 내린다.) 귓바퀴 바깥 쪽은 내가 보기 힘들고, 귓볼은 이미 충분- (눈이 동그래진다. 당신의 얼굴 색을 잘못 본게 아닌지, 목소리를 잘못 들은게 아닌지 되새겼다. 그리고 자신이 한 말도 곱씹었다. 이내 별 친하지도 않은 사이에 민망한 소리를 해버렸다고 생각했다. 얼굴에 열이 올랐다. 무슨 말을 해야할지 갈피를 못 잡다가.) 걸렸으면 죄송합니다아! (냅다 소리질렀다.)
>>201 날조하지 마. (약올리기의 효과는 굉장했다. 운동부는 이 악무는 소리를 내면서 부들거렸지만, 다시 말해 약올리기가 아주 고약하게 잘 먹혔다는 뜻일 것이다. 입술을 깨물고 쓰-읍 하며 애꿎은 숨만 고르다가, 자신이 무슨 말을 했는지 당황하고 있는 틈을 타서 운동부는 대뜸 손을 내밀어, 에라 모르겠다 하는 식으로 당신의 손 하나를 덥석 쥔다. 그리곤 여름에 탄 색이 아직 안 빠진 피부에 핏기가 올라 보기 좋은 감색이 된 얼굴로 당신을 뚜렷이 바라보며, 이를 꽉 물고 눈을 치뜬 채로 또렷하게 발음한다.) 알면 앞으로 자-알 부탁합니다. (그리고, 2~3초 정도 침묵했다가 한 마디 덧붙인다.) 공부. (이 공백, 아마 제딴에는 소소한 복수인 모양이다.) ......그리고 마취크림 발라봤자 아플 건 다 아파. 사후관리도 더럽게 귀찮고.
>>202 날조 아닌데. 진짜잖아. (이때까지는 여유로웠다. 다시 장난으로 맞받아칠 수 있었는데, 당신을 약올리려 할 수 있었다. 손이 잡히고서는 그러지 못 했다. 방금 상황에 이어서 손을 잡는다니. 눈이 동그랗게 뜨이는건 물론, 몸이 굳기까지 했다. 긴장해서 몸에 힘이 바짝 들어간다. 오해라고 설명해야 하는데, 뚜렷이 바라보는 시선에 말을 어떻게 꺼내야 하나 고민했다. 그래도 곧 긴장이 풀릴 수 있었다.) 놀랐잖아아! (탁 하고서 몸에서 힘이 빠진다. 힘이 들어가고 빠지는 건 당신에게도 분명 느껴졌을만큼 확연한 차이가 있었다.) 그래도 할거야. 이미 진작에 하기로 결정했거든! (손 빼도 되는건가, 당신이 덥석 잡아버린 손과 당신을 번갈아보았다.)
>>203 (운동부는 한숨을 쉬며 손을 놓아준다. 자신의 혼신을 아끼지 않은 회심의 역습이 유효타였다는 것을 알아챘는지, 아까까지와는 달리 이번의 한숨에는 후련한 기색이 가득하다. 한결 여유로워진 태도.) 뭐, 그러면 더 말리진 않을게. (그러다 문득 손을 들어서 자신의 귀를, 구멍이 줄줄이 나 있는 연골 쪽을 매만져본다. 그리곤 한박자 늦게 맞장구친다.) ...아파도 예쁘긴 하겠다. (그러다가 캔을 들어서 안에 남아있던 것을 마저 다 마셔버리고는) 그래서 시간은 언제 괜찮아? 조만간 모의고사 있지 않던가.
>>204 (손이 놓이면 괜히 한 번 쥐었다 펼쳐보았다. 붙잡혀 있던 것도, 그랬던 손도 얼떨떨했다. 티내려고 하지는 않았다.) 나중에 하게 되면 보여줄게. 어른될 때까지 기다려. (마땅히 어떤 타투를 해야겠다는 도안이 있는 것도 아니었지만. 당신이 시간 이야기를 하면 고개를 조금 갸웃거렸다.) 집 늦게 가니까, 언제든지 괜찮다니까. 당장 오늘도 상관 없어, 난. (시간을 맞춰야하는 건 당신 쪽이 아닐까, 고개를 조금 기울이더니 시선이 당신을 향한다. 그렇게 말하는 쪽이야말로 시간이 언제 괜찮냐는 듯.)
>>205 (코에 낯선 향기가 뒤늦게 걸리는 것을 운동부는 느꼈다.) (덥석 쥐어놓고 너무 무리수를 둔 것 같다고 운동부 본인도 후회하고 있었다. 손을 잡은 것에 대해 당신이 뭐라 말을 꺼내지 않는 것도 그랬고. 그래서 운동부는 조금 멋적게, 자신의 귀를 만져보던 손을 떼어내리며 한번 흘끗 쳐다보았다. 그리곤 시선을 다시 들었다.) 어른 될 때까지 같이 놀아주게? (운동부는 잠깐 뜸을 들인다.) ......아니 방금 취소. (기껏 열이 내렸던 뺨에 다시 열이 오르는 기분이다. 그래서 운동부는 당신의 말에 필사적으로 시간을 되새겨보았다.) 이번주는 목요일이랑 금요일이 괜찮겠네. 주말에는 밴ㄷ- 아니, 연습 있어서.
>>206 (그런 말을 쉽게 하는 편이었다. 다음에 보자는 기약없는 약속처럼, 보여준다고 말했지만 당신이 기다려준다면의 가정이 붙은 약속이었다. 이런 반응은 예상치 못한 것이었다. 그 사이 당신은 말을 번복했다.) 뭐야, 왜 취소야. (무뚝뚝한 듯 상냥하고, 부끄러움도 타고, 그렇다고 장난에 계속 당하지도 않는다. 오히려 한 번은 크게 당했다. 그런 당신과 친구하기 좋냐, 싫냐 가르면 좋다는 쪽이라고 생각했다.) 그럼 어른될 때까지 같이 놀진 말고- 공부 도와줄게. (웃었고, 이어 스케줄이 나오면 고개를 끄덕인다.) 도서관에 있을게.
>>207 ...... (대답이 금방 나오지는 않는다. 운동부는 대답 대신 손부채질로 반문을 넘겼다. 이렇게 어떤 풋풋한 정이 담긴 이야기에는 별로 익숙하지 않았고, 누구라도 쉽게 알 만큼 그는 부끄러움이 많았으며, 그걸 숨기려 애써 틱틱대는 태도로 나오곤 했다. 다만... 숨기는 솜씨도 어설펐고, 뭔가 숨기기에는 그 본인이 무의식적으로 감정에 솔직하기도 했다. 같이 놀진 말고, 하는 말이 꺼내지자 운동부는 뜻밖의 소리를 들었다는 듯이 눈을 치떴으나, 이내 시선을 천천히 비스듬히 아래로 내리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속으로 '오늘 나 좀 이상한데.' 하고 애꿎은 자책을 하는 것은 덤이다.) 뭐, 그러던가. (운동부는 가만히 시선을 비스듬히 돌리고 있다가, 다시 시선을 들어 이쪽을 바라봐온다.) 그럼 반으로 돌아갈까.
>>208 (고개를 끄덕이면, 취소한 이유에 대해서 듣지 않아도 괜찮았다. 취소가 취소되어 버렸으니까.) 이제 너 큰일났다. (반으로 돌아가자는 말에 주섬주섬 다시 담요를 제대로 뒤집어 쓴다.) 성적 갑자기 올라서 컨닝한 거 아니냐고 선생님들이 괴롭힐지도 몰라. (자신만만하고 당찬게 담요를 폭 뒤집어쓰고 있는 아래에서 새다 못해 뿜어지듯 하다. 그리고 매점에 있던 시계를 확인하고는 걸음을 재촉한다.) 야야, 곧 쉬는 시간 끝나겠다. 가자! (먼저 매점에서 반으로 발을 옮겼다.)
선장, 당신이 수다 즐기는 성격이 아님은 내 자알 안다만은. 이제 도무지 어디로 가는지만이라도 알려주면 안 되겠소? 이 남쪽에는 아무것도 없다오. 오직 바다, 바다, 끝없는 바다 밖에는 아무것도! 나침반은 북에서 남으로, 동에서 서로 제멋대로 돌기 일쑤인데 당신은 어찌 키를 돌리라는 지시를 내리는 것이며, 어째서 바다의 여신은 이상할 정도로 오래 이 배에 관대함을 보여주시는 것이오? 수수께끼 같은 말은 그만두고 이제 정말 입을 열 때가 됐소이다, 선장. 속내가 뭐요? 선원이라곤 둘밖에 없고 배라고는 썩은 나뭇조각밖에 없던 시절부터 우리는 온갖 기상천외한 항해를 함께 겪지 않았소. 당신이 마음에 들지 않은 적은 수없이 많았지만, 지시를 의심한 적은 여신께 맹세코 단 한 번도 없소! 그러나 지금이 바로 그 때라는 생각이 드는군. ...안개 때문에 코앞에 있는 사람도 보이지 않는데 대체 어디를 그리 쳐다보고 있는 거요, 제기랄.
>>216 (방금 전까지 형언하기 어려운 꿈을 꾸고 있었는데, 눈을 깜빡하자 배경이 바뀌었다. 바뀐 배경보다 들려오는 목소리에 신경이 먼저 반응했다.) ....신경 꺼. (상대의 말이 꾸중처럼 들려서 미간을 찡그리고 투덜댔다. 또라니 누가 들으면 내가 만날 공포영화만 보는 줄 알겠다.) 쓸데없는 참견을... 그래서 여긴 또 뭐야. (퉁명스럽게 말하고 앉을 곳을 찾아 두리번거렸다.)
>>217 신경이 예민한 건 알겠지만, 도와준 사람한테 그런……아니다. 뭐라 해봤자 무슨 소용이람. 어차피 또 잠에서 깨면 다 잊어버릴텐데. (나지막히 한숨을 내쉬고는, 앉을 곳을 찾는 당신의 주변에 눈길을 준다. 원래 저곳에 의자가 있었던가? 시선이 닿지 않는 모든 구석구석이 흐릿하다.) 네 말이 맞아. 매번 악몽꾸고 아침에 머리 붙잡는 건 내가 아닌 너니까. 다시 보내줘?
>>218 (상대의 반응에 내가 너무 날이 서 있었다는 걸 자각했다. 그야 누구나 험한 상황을 겪다 넘어오면 그렇지 않냐는 생각이 들면서도, 상대의 말대로 도와준 사람에게 예의가 아니라는 생각도 동시에 들었다. 나는 괜히 서서 볼을 긁적이다가 상대의 시선이 닿는 곳을 돌아보았다. 거기엔 의자가 있었고, 앉을 자리를 찾던 나에게는 반가운 자리였다. 의자를 향해 돌아서며 겨우 들릴 정도로 툭 내뱉었다.) 미안하게 됐네. 매번 도움만 받는 주제에 말이 심했다. (사과인지 불만인지 모를 말이지만 내 성격상 어렵게 꺼낸 사과라는 걸 상대는 알고 있을거다. 나는 의자로 다가가 털석 앉았다. 푹신했는지 딱딱했는지는 모르겠다. 앉아서 그제야 제대로 상대를 보며 대화를 할 수 있게 되었다. 오늘은 또 어떤 모습이었을까.) 사과 했으니까 돌려보내는 건 좀 봐줘. 그런데 왠일이야. 한동안 안 보였잖아.
안녕하세요! 저는 오늘 첫 출근입니다. 사실 이 회사에 다닌지는 근 천년가량 되었지만요. 근데 어떻게 첫 출근이냐구요? 그야 오늘은, 제가 마계지부에 발을 내딛는 첫날이거든요. 하하, X발. 니체의 말이 맞았나봐요.
천계지부에선 그야말로 꽃과같은 생활! 이라기보단 응? 사실 내가 천사가 아니라, 지옥에 수감된 불쌍한 필멸자였던가? 같은 수준으로 혹사당했답니다. 기근, 재앙, 천재지변, 전쟁, 나날이 줄어드는 신도들의 숫자... 그렇기에 제가 생각했던 하하호호 깔끔한 사무직이 아니라, 이리 뛰고 저리 뛰는 파견직이었어요. 전쟁을 일으킬것같은 사람들에게 최대한 무의식에 닿게끔 전쟁은 안돼요... 불쌍한 아이들에게 기부해주세요... 교회를 지원해주세요... 같은걸 하루종일 속삭이고, 악인들에게 더이상 범죄는 안돼요... 신께선 당신을 사랑하세요... 으악, 이렇게 속삭여온지만 천년! 그러나, 개심 시킨 사람의 숫자는 한 손으로도 셀수 있을정도로 적은 나! 무능이라는 딱지가 단단히 박혔는지, 네. 마계지부로 좌천당했습니다. 사실 좌천이란것도 아니긴 해요, 명목은 승진으로 인한 파견이니... 그건 그래도 전 천사인데, 마계지부에대한 인식이 어떻게 좋겠어요! 안그래요? 사실 빛이 있으면 어둠이 있고, 어둠이 있으면 빛이 있어서 우리는 균형이라곤 하지만... 아는 것과 마음이 동하는건 꽤 차이가 크죠.
게다가 전 사실 첫 출근인데 5분이나 늦었답니다. 네. 긴장해서 길을 잘못 들은게 죄는 아니지만 늦은건 죄가 되고, 그 탓에 더욱 들어가기가 망설여지네요. 마계, 으리으리한 저 건물에 위압당했지만... 용기내어 문을 두드릴 때가 되었겠죠.
저택은 단정한 회색이다. 도회지라면 심심찮게 볼 법한 것으로, 눈에 띄지 않아 무심코 놓쳤을 수는 있어도 지나가는 눈에 한번만 깊이 담겼다면 와, 나도 이런 집에 살았으면- 따위의 선망 정도는 자리에 우뚝 버티는 것만으로 누차 들었을 것이다. 저택만큼이나 단정한 담장과 나란히 걸으면 빈틈없이 닫힌 검은 대문이 있다. 창살조차 없어 답답하기까지 한 문은 말끔한 초인종만 덩그러니 두었을 뿐이라, 새벽 5시 하물며 0분도 30분도 아닌 40분에 만나자고 통보나 다름없는 약속을 잡은 센티넬은 너무도 깨끗해 지문의 흔적도 느껴지지 않는 이 종鐘을 건드려야만 대면할 수 있을 것처럼 보였다.
여자는 창 너머 어두운 하늘을 보며 머그잔을 입가에 가져갔다. 따뜻하게 데운 우유를 아삼 홍차에 섞은 밀크티다. 탁자엔 비벼 끄지 않은 연초가 자연紫煙을 풍겨 올리고, 여자는 밀크티를 한 모금 마셔 삼키며 상념에 잠긴 듯이 아무 말도 행동도 뱉지 않았다. 하늘 갑갑한 것을 보니 아침때 비가 내릴 징조다. 여자는 약속 시간이 가까워지자 빈 머그잔을 내려두며 소파에서 등을 뗐다. 인공품처럼 하얀 손가락이 연초를 재떨이에 눌러 껐다.
/지원주야! 선레 어떻게 할지 고민하다가 본의 아니게 시간을 더 끌어버린 거 같아ㅠ_ㅠ 너무 기다리게 해서 정말 미안해...ㅠ_ㅠ
현은 새벽 일찍 일어났다. 의뢰인이 5시 40분이라는 애매한 시간대에 만나자고 말을 했기 때문이었다. 과연 그 시간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일까.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는 사람이다, 라는 답이 가장 좋겠지만(그런 경우가 좀 상태가 정상적인 사람이기 때문에) 자신이 일을 하러 가는 것인 만큼 그렇지는 않을 것이라고 자신할 수 있었다. 그러니까, 가이딩이 빨리 필요하며 능력을 개화함으로 얻게 된 불안, 초조, 우울 뭐, 그런 부정적인 감정들을 견디기 어렵다는 뜻이겠지. 그 애매한 시간이란 불면을 뜻하는 것일까.
현은 검은 머리카락을 대충 빗어넘기고 검은 마스크를 낀 채 밖으로 나왔다. 옷은 무난한 셔츠와 검은 바지이다. 밖은 우중충한 회색이다. 비가 올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며 현은 우산을 챙겼다. 여차하면 호신용으로도 쓸 수 있겠다. 첫 만남을 새벽 다섯시에 그것도 집으로 부른다니 의뢰인은 타인을 생각할 줄 아는 사람은 아니겠거니 생각한다. 아니면 야밤에 사람을 부르기는 어려우니 최대한 배려를 한 것이 다섯시 사십분이라는 그 시간일지도 모른다.
허나 현은 돈이 매우 필요했으므로 군말하지 않고 나가기로 했다. 꽤나 범죄에도 시달렸기 때문에 -그를 지켜주는 센티넬이 더이상 없기 때문에- 늘 부정적인 생각을 하게 된다. 이번 의뢰인이 그런 사람이 아니기를 깊이 바랄 뿐이다. 아니라면 우산으로 후려치고 도망가는 것도 좋겠지.
저택에 도착했다. 우중충한 하늘 빛과 같은 회색이다. 단정한 겉모습이 나빠 보이지는 않는다. 계약이 잘 성사된다면 이 근처에 살게 되는 건가. 주변의 집을 눈동자로만 슬쩍 봤다가 초인종 앞에 섰다. 깨끗한 것이 마음에 들었다. 지저분한 것보다야 깨끗한 것이 낫다.
손목시계를 내려다본다. 딱 5시 40분. 벨을 누른다.
현은 답을 기다렸다. 새파란 눈동자가 검은 대문과 단정한 담벼락을 눈에 담으며 우산으로 바닥을 툭툭 두드렸다.
/지원주 안녕! 느긋하게 기다리고 있었으니 괜찮아~ 계절적 배경이 언제인지 궁금하네. 비라고 하니 여름이려나? 겨울은 아닌 느낌이고. 가을비일수도 있겠다. 현재 배경이 가을(이라고 생각하고 싶은 겨울)이니까 지금같은 날씨일지도 모르겠네. 그렇다면 검정 코트를 걸쳤으려나.
문은 곧바로 열렸다. 소리조차 없이. 잔디 심긴 탁 트인 마당이 낯선 객을 반긴다. 다른 집과 차이가 있다 하면 사람의 조그만 소리도 기척마저도 풍겨오지 않는 것. 다만 공기다. 오직 공기. 나란히 잿빛으로 통한 좁은 길을 따라 걸으면 언제부턴가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딱딱한 문이 반쯤 내부를 보이며 열려 있다. 그러고 보니 이 저택은 창문 수가 적거니와 있더라도 그 건너편은 좀체 보이지 않는다. 꼭 무언가 꽁꽁 감출 것이 있는 것마냥 말이다.
"-들어오시죠."
반쯤 닫힌 문 너머에서 심해에 잠긴 것을 닮은 목소리가 들렸을 것이다. 하지만 동시에 연한 목소리기도 하다. 침침한 조명. 깨끗하고 넓은 거실 가운데 소파에 느긋이 기댄 여자는 언제부턴가 당신을 기다리고 있었다. 170은 가당치도 않을 체구, 푼 흑발에 금을 박은 양 소슬한 눈동자. 큰 후드티 차림은 그렇다 쳐도 소파에 의지한 육체와 배려라곤 느껴지지 않는 시선은 결코 손님을 집안에 들이는 올바른 주인의 자세가 아니다. 소파 바로 앞 탁자의 재떨이가 근원으로 사료되는 실내 전체에 은은하게 퍼진 담배 향은 더군다나 그렇고. 여자는 허리를 펴며 건너편 소파에 앉으라는 듯 무심하게 손짓했다.
현은 조금 긴장하면서 열린 대문을 넘었다. 까만 대문 너머로 보이는 풍경은 왠지 모르게 삭막한 느낌을 주었다. 여차하면 도망가야 할 수도 있기 때문에 국가가 지급한 비상용 스마트워치(누르면 위치 정보와 함께 국가 인력인 가이드를 구출하기 위해 센티넬이 출동함) 주머니 속에서 만지작거리다가 용기를 내어 그 안을 걸어 들어간다. 센티넬들은 가이드들이 얼마나 개인적인 공간을 싫어하는지 알아야 했다. 대체로 그렇듯 이 사람도 모르는 듯 했지만.
매번 처음 센티넬들을 만날 때면 긴장이 된다. 가이드들이 그들을 통제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라고들 하지만 생각해보면 사실 맹수와 맹수 조련사와 같은 관계가 아닐까. 맹수 조련사... 라기에는 맹수에게 밥을 주는 그런 사람들이랄까. 그러니까 맹수에 비하면 자신을 방어할 수단이란 전혀 없는 일반적인 사람이라는 뜻이다. 보통 첫 만남 때 긴장을 하는 쪽은 맹수가 아니라 맹수 조련사이다.
특히 이 집은 창문도 적고 뭔가 꽁꽁 감쳐둔 느낌이 나는 것이 영 불안한 기분을 감출 수 없다. 물론 내가 연락이 되지 않으면 나를 찾아달라고 아는 가이드에게 부탁해놓기는 했지만서도... 그저 이 불안감이 이전의 트라우마 때문이기를 간절히 바랄 뿐.
반쯤 열린 집 문 안에서 낮은 여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조용한 적막감에 이 저택에는 이 사람 혼자 있는 것일까 생각하며 "실례하겠습니다."라고 말을 하며 안으로 들어섰다. 어두운 조명 사이, 황량할 정도로 넓은 거실 사이에 소파에 앉아 있는 여자를 보며 현은 생각했다.
아, 역시 센티넬들이란.
편견 어린 시선으로 큰 후드티를 편하게 입고 소파에 늘어지듯 앉아있는 그 모습은 썩 좋아보이진 않았다. 첫인상으로 치면 마이너스라고 해야 할까. 하지만 센티넬들이란 원래 오만한 족속들이므로, 그리고 그가 고용된 철저한 을의 입장이라는 것도 그 생각을 겉으로 들어나지 않게 했다.
담배 연기에 마스크를 쓰고 오길 잘했다고 생각하며 소파에 앉았다. 그리고 들려오는 소리에 깊은 빡침이 올라왔지만 그저 참았다. 돈이 필요하니까.
"그건 이전에 다 설명한 것 같지만, 다시 설명하자면 하현, 26세, 남자고 지금은 임시 가이딩 일을 하고 있는데 오늘 계약이 어떻게 될 지 모르니 아직 계약을 다 끊진 않았습니다. 오늘 계약 사항을 보고 차차 정리를 할지 안 할지는 생각해 보도록 하죠. 물론 갑자기 다 정리 하기는 어렵고 2주일 정도는 시간을 주셔야 합니다. 그 센티넬들도 다른 가이드를 찾아봐야 하니까요."
현은 사안을 설명하며 가방에서 계약서를 꺼내 테이블 위에 올려두었다.
"안내 드렸다시피 계약서를 적어 왔고 추가적인 부분은 아래에 더 적을 수 있게 해두었습니다. 일단 읽기 전에 가이딩 테스트부터 해보죠. 테스트가 잘 되지 않으면 어차피 계약은 할 수 없을 테니까."
현은 지원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녀가 손을 잡는다면 현이 가이딩을 시도해볼 것이고 서로 파장이 잘 맞는다면 미약하게나마 능력을 사용한 이후 올라오는 불쾌한 감정들이 조금은 사라질 것이었다. 물론 현도 그것을 미약한 피로감과 함께 같이 느낄 것이고. 일일 뿐이지만 가끔 왜 스킨쉽일까, 하는 생각이 들기는 한다. 그게 꽤나 번거롭다는 생각과 함께.
서늘한 지하실에 한 여자의 목소리가 크게 울려퍼졌다. 습하고 축축한 그곳이 과연 인간의 거처로서 기능할 수 있을까 싶지만, 무던한 여자는 그런 조건을 신경 쓰는 타입이 아닌 듯 싶었다. 날카로운 굽소리가 정적을 찌른다. 여자는 발걸음에 맞추어 천천히 가죽 장갑을 벗어던졌다. 이내 여자는 느릿히 껌뻑대는 먼지 쌓인 형광등 아래로 몸을 굽혔고, 의자에 단단히 묶인 상대를 똑똑히 바라보며 마치 연극같은 과장된 손짓으로 제 미간을 짚어냈다. 허니, 조용히 좀 해봐. 여자가 신경질적인 목소리로 웅얼였다.
" 허니, 자기야, 나 오늘 몹시 피곤해. "
피유, 여자가 입술을 삐죽이며 말했다. 몹시라는 단어를 힘주어 발음하며 힐긋 고개를 돌리니 헐거워진 밧줄이 그녀의 눈에 들어온다. 자기도 참, 말썽쟁이야. 여자는 항상 당신을 자기, 혹은 허니라는 애칭으로 불렀다. 그저 단어만을 빌려오는 것이 아닌 꽤 무거운 사랑이 실린 호칭이었다. 아마 지나친 장난에 불과했을테지만. 그녀의 속을 누가 알까. 여자가 몸을 일으켰다. 제 왼뺨에 튀어 굳어버린 핏자국이 거슬렸던 것일지, 한참이나 왼뺨을 긁적이던 여자는 이내 손을 털고선 새로운 밧줄을 찾아 당신을 더욱 단단히 묶어둔다.
" 조금만 참아. 나도 자기를 풀어주고 싶어. "
여자가 다정한 어투로 말했다. 허나 목소리와는 대조되게 다소 거친 손길이다. 피가 통하지 않을 정도로 단단히 밧줄을 묶던 여자는 무언가 부족함을 느낀 것일지 한참이나 결박된 당신의 두 팔을 내려다 본다. 아무래도 이정도 결박은 또 하루이틀 집을 비운 사이 난장판을 피워 끊어버릴 거 같고. 한참을 고민하던 여자가 이내 당신이 앉은 의자를 끌어 햇볓이 들지 않는 작은 창문 아래로 끌기 시작했다. 당신의 무게가 실린 의자가 무겁지도 않은지 가뿐한 얼굴과 몸짓이다. 벽면으로 의자를 밀어낸 여자는 근처에 있던 쇠사슬을 들어 창문 창살에 묶었고, 사슬의 끝머리를 의자 다리와 묶어 연결한다. 흠. 여자가 이리저리 고개를 돌려대며 의자를 살폈다. 그리곤 이내 만족한 듯 맑은 웃음을 짓는다.
" 그치만, 이 밧줄을 풀자마자 날 찢어죽일 거잖아! 안 그래? "
사랑스러워라. 여자가 당신의 어깨를 톡톡 두들겼다.
" 당신 동료들이 모두 머저리인 건 아니더라고. "
여자가 멀지 않은 곳에서 의자를 끌어왔다. 철제 의자와 더러운 시멘트 바닥이 맞물리며 시끄러운 금속음을 내질렀다. 여자는 의자에 앉아 당신의 눈을 똑똑히 마주한다.
" 한 놈이 좀, 애를 먹였지. 그 놈 죽이느라 내 네일이 부러졌어. 볼래? "
손마디를 만지작대며 슬픈 어투로 말하던 여자가 대뜸 제 오른손을 들이민다. 검은색과 붉은색이 교차된 네일팁 사이로, 반쯤 뜯긴 검지 손톱이 눈길을 끈다. 나참, 이게 얼마 짜린데. 여자가 말 끝을 흐렸다. 시선 역시 그 손톱에 꽂혀내리고 만다.
" 뭐랬더라, 맞아. 케이시랬나? 케이시? 케이틀린? 아무렴. 뭐 그런 이름이었는데. 자기가 아는 사람이야? "
본인 입으로는 자기랑 아주 친한 동료랬는데 말야—. 난 자기가 다른 여자랑 어울리는 게 싫어. 여자가 천진만난히 웃으며 물었다. 형광등 아래 반짝이는 머리칼 사이로 검붉은 핏자국이 또 다시 눈에 띈다.
반쯤 소매 덮인 양손을 넓적다리에 모아 걸쳐 놓은 자세로 여자가 비교적 바쁘게 움직이는 당신을 하나의 뻔한 운동 경기라도 관람하듯 바라본다. 단정히 빗어진 흑발, 더러더러 필요가 있을 때 이쪽을 보는 푸른 눈동자, 열리는 가방과 탁자에 더해지는 얇디얇은 종잇조각...... "그렇게 하죠." 본인이 요구한 두 번째 소개임에도 자칫 말하는 자 무안할 만큼 무념하며 또 서늘한 낯으로 듣던 여자가 당신이 제시하는 2주일에 그제야 고개를 끄덕였다. 임시 가이딩이라 해도 그 명수가 설마 열 손가락이나 넘어갈 것인가 하는 판단에. 더구나 2주 정도면 잠깐 눈 감고 잊으면 그만인 짧은 시간일 것이다. 물론 이쪽에 일체의 지장만 가지 않는다면의 이야기다. 그래서 여자는 이윽고 덧붙였을 따름이다. "단 이쪽 일엔 방해가 없도록 하시고요." 하고 말이다. 처음부터 그랬듯 성의라곤 느껴지지 않는 어투였다. 그리고 그 뒤로도 그랬다.
"계약을 할 수 없다라..."
무릎에 팔을 얹으며 여자가 허리를 숙였다. 닿으면 차가울 손이 당신이 내민 손 위에 무게 없이 얹혔다. 그러나 금안이다. 금안이 또렷하게 당신을 쳐다본다. 정확히는 기억의 원천이 담긴 머리털 너머를. 그 다음으로는 점차 각도를 낮춰 사람의 숨의 원천. 숨이 지나치는 통로를 눈에 담으며 생각에 잠긴 양 입맛을 다셨다...... 파장 일치의 신호는 제법 조속히 찾아왔다. 여자는 눈을 내리감으며 먼저 손을 치우려 했다. 검은 머리를 빗어 불안하게 어깨에 걸린 한 움큼을 제대로 앞으로 넘겼다.
>>232 현은 제 손을 잡은 뒤 입맛을 다시며 자신을 쳐다보는 시선이 슬쩍 눈을 피했다. 제 손이 따뜻한 편이라서 그런지 지원의 손이 더 차갑게 느껴졌다. 그리고...
맹수. 이 여자는 맹수였다. 자신은 피식자이고. 맹수 조련사는 무슨. 현은 파장을 확인하고 조금의 피로감을 느끼며 지원이 빼는 손을 붙잡지 않았다. 속으로 의아함을 느끼기는 했다. 보통 가이딩이 급한 센티넬은 테스팅 때도 질척거리는 경향이 있으니까. 지금 상태는 꽤 괜찮은 편인가?
"계약 사항은..."
현은 찬찬히 계약서에 적힌 내용을 설명했다. 처음 지원이 제시한 거주지 제공부터해서(거주지가 마음에 들지 않을 경우 거부할수 있음을 넣는 것도 잊지 않았다) 계약 위반시의 위약금 등 문의로 나눴던 대화 내용이 다 꼼꼼히 담겨있었다. 또한 키스 이상 스킨쉽 금지도 적혀있었다.
간략히 설명을 마치고 현이 말했다.
"일단 계약서를 작성하기 전에 국가가이드가 아닌 임시가이드를 이용하는 이유에 대한 설명을 해주세요. 불법적인 일을 하시는 분이라고 해도 비밀은 지켜드립니다."
정신을 차리고 상황을 파악할 때까지 얼마나 시간이 걸렸던가. 주절주절 말을 늘어놓는 것을 듣긴 했지만 그다지 신경을 쓰진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이런 일이 한두번 있던 것은 아니었으니까 그다지 놀랍지도 않은 편이었다. 한가지 의외인 점이라면 예상했던 것보다는 늦게 일을 벌였다는 점이었을까. 아무튼 현재는 어디인지도 모를 곳에 단단히 결박되어 미친 빌런을 눈 앞에 두고 앉아있게 된 상황이라는 것이겠지.
두려움, 애초에 이쪽일을 하기 시작하면서 그런 것은 잊은지 오래였다. 그런 것을 품고 있어봐야 죽을 시기를 앞당길 뿐이니까. 세간에서 말하는 히어로의 고귀한 정신 같은 것도 마찬가지다. 영웅심에 취해 움직여봐야 개죽음 당할 뿐이지.
" 케이시, 최근 주목 받기 시작한 히어로 중 한명이지. 꽤나 능력이 있긴 한 녀석이라 친하게 지내긴 했어. 근데 그녀석 죽었구나. 그래도 쓸만한 녀석인 줄 알았는데. 뒤에서 추잡한 짓거리를 하고 있는 걸 알아도 아직 쓸모가 있는 줄 알고 데리고 다녔는데 계획했던 처리시기랑은 어긋났지만 너라는 말이 끼어들어줘서 탈 없이 처리하긴 했네. "
입술을 모아 후- 하고 바람을 뱉어내 흘러내린 앞머리를 넘기곤 입꼬리를 살짝 비틀어 웃어보여. 어차피 처리하려고 했던 말이 죽어버렸다는 사실은 내게 아무런 감흥이 없으니까. 그걸로 흔들어 보려고 했던 네 계획이 깨져서 꽤나 기분이 상했을지도 모르겠다. 히어로란 이름을 달고 더러운 짓거리나 하는 녀석 따윈 내 알바 아니다. 아니 오히려 내가 '처리' 하려고 했으니까.
" 그래서 이렇게 멋진 곳에 또 데려와준 이유가 뭐야? 아, 사업 이야기라면 들어줄게. 너랑 뭔가 해보는 것도 덜떨어진 쓰레기들을 청소하는데에 도움이 될지도 모르니까. "
반쯤은 도박이다. 확실히 눈 앞의 이 미친 여자는 한순간 기분이 엇나가면 내 목을 꺾어버릴지도 모르니까. 싸우는 능력으로만 따지면 비슷할지도 모르지만 분명 죽이는 방법에 있어선 내 위의 존재인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리스크를 걸지 않으면 돌아오는 것도 없는 법이다. 몇년간의 삶으로 그것은 뼈저리게 느끼고 있었으니까.
" 아, 어쩌면 네가 내 마음을 얻을지도 모르지. 내 이야기를 듣고, 내 손을 잡고, 네 성질머리를 죽이고 나와 일을 해본다면 말이야. "
그러니까 쫄아서 비 맞은 강아지처럼 굴지 않는다. 더 당당하게, 잃을 것이 앖는 사람처럼 나가는거다. 어쩌면 고스란히 그것이 내게 돌아와 목을 꺾고 숨을 앗아갈지도 모르지만. 그건 자업자득이지.
누군가의 목숨을 앗아가려는 것은 그런 것도 감수해야 하는 법이니까.
" 어때, 이야기 해볼 생각이 들었어? 자기야? "
의자에 묶인 검정색 단발을 한 적안의 여자가 곱게 미소를 지어보였다. 머리가 이리저리 헝클어져 엉망이었음에도 아리따운 얼굴을 한 체.
/안녕, 지원주야. 많이 기다렸지ㅠ_ㅠ 다름이 아니라 개인사정 때문에 빨리 잇기가 어려워졌는데 어떻게 하는 게 현주한테 편할지 묻고자 지금이라도 급하게 갱신하게 됐어. 1. 여기서 마무리하거나(+현주가 새로운 상대 구해도 물론 가능) 2. 기간은 장담 못하지만 반드시 돌아오는 조건으로 상극을 동결해놓거나 둘 중 하나로 해야할 것 같은데 현주는 어떻게 생각해? 어느 쪽이든 편할 쪽으로 부담없이 이야기해줘. 이런 소식 들고 와 정말 미안해ㅠ_ㅠ
/아이고 ㅠㅠㅠㅠ 개인 사정이 있었구나. 현생이 바쁘면 어쩔 수 없지. 원래 상판은 취미생활이니까 느긋하게 하거나 편할 때 하는 것이 맞다고 생각해. 그래도 이렇게 이야기를 해줘서 너무너무 정말정말 고마워! 이야기하기 힘들었을텐데 말이야. 아마 새로운 상대는 안 구할 것 같아. 그리고 지원이의 이야기가 너무 궁금하기도 하고! 그러니 2번 안으로 가는 것이 좋을 것 같아. 동결은 어느정도로 생각하고 있어? 나에게 기다리는 것은 쉬운 일이지만 혹시나 내가 갱신을 놓치면 어떡하나 걱정이 되네 ㅠㅠ 여기는 공동 스레라서 갱신했는데 못 보고 넘어갈 수도 있으니까 말이야. 새로 스레를 세워두는 것이 좋으려나? 이부분에 대해서는 지원주가 편한 대로 해줘! 이곳에서 기다릴지 아니면 새로 스레만 세워두고 동결할지 말이야!
/아이고 나야말로 너무 고맙지ㅠ_ㅠ... 뭐가 고맙냐면 그냥 다...(?) 나도 현이의 이야기가 정말 궁금했던지라 현주가 나중에라도 이어가자고 말해주니까 내심 기쁘기도 하네. 동결은 일단 3개월...을 바라보고 있긴 한데 이건 혹시 몰라 넉넉히 잡은 거고 그보다 일찍 돌아올 수도 있어. 솔직히 말하자면 기간이 예상이 안 가네ㅠ_ㅠ 그래도 가끔 들러 생존신고하거나 가볍게 잡담할 시간은 낼 수 있을 거 같아. 퀼트처럼 답레 조금씩 이어맞춰서 느린 텀이나마 나중에 이을 수도 있을 것 같고. 그런 의미에서 생존신고용 임시 스레라도 파두는 것이 서로에게 심적으로 편하려나 하는 생각이 들기는 하네. 만약 현주도 같은 생각이라면 스레를 세우는 건 혹시 부탁해도 괜찮을까? (염치없음...) 제목이나 그런 건 현주 임의로 해도 정말정말 좋지만 혹시라도 상의가 필요하면 말해줘.
흰 구름과 그 사이로 서서히 저물어가는 저녁 노을, 코 끝과 귀가 붉어질 정도로 차가운 겨울 바람, 그르륵거리는 좀비들의 울음소리, 사방에서 진동하는 시체 썩은내. 아, 오늘도 참 평화로운 하루다.
입구가 핏자국으로 난도질된 아파트 단지, 거기서 조금 더 깊숙히 들어간, 창문의 모든 면에 신문지를 붙이고 청테이프를 덕지덕지 도배해둔 401호에서는 오늘 평소와 다르게 분주한 소리가 났다. 어디 여행이라도 떠나는 듯 책가방 같은 배낭을 이리저리 뒤적이며 제 봇짐을 점검하는 소리였다. 후드를 깊게 눌러쓴 누군가가 배낭에서 먹다 남은 감자칩을 빼내며 쳇, 혀를 차냈다. 그리고는 다시 한 번 손을 넣어 뒤적이다, 제 무릎 옆에 놓여있던 소꿉놀이 세트의 냄비 하나를 신경질적으로 집어넣는다. 이정도면 됐겠지. 후드를 눌러쓴 누군가가 깊게 한숨을 내쉬며 몸을 일으켰다. 배낭정리에 신경을 쏟은 탓에 어느덧 저녁 노을이 겨울바람에 밀려 땅 아래로 몸을 숨기고야 말았다. 잠시 신문지를 들쳐올려 시꺼면 밤거리를 바라보던 누군가가 작게 욕설을 중얼인다. 아무래도 제가 훼까닥 미쳐버린 게 분명한 것 같다. 이 시간에 안전지대를 벗어날 생각을 하다니. 하지만 이미 오늘 저녁, 편지 속에 네놈을 찾아가겠노라 선전포고를 날려버렸으니 어쩔 수 없을 일이 아니겠는가. 하여튼간 쓸데없는 자존심이 문제지. 창 밖 세상에서 눈을 떼낸 누군가가 새하얀 볼캡을 고쳐쓰며 배낭을 들쳐맸다. 하여간, 만나기만 해봐 새끼 염소. 볼캡을 눌러쓰고 그 위로 후드 모자까지 뒤집어써 도통 누군질 알 수 없을 인상착의였다만, 다소 거친 욕설이 익숙한 인간이라는 것은 알아챌 수 있었다.
좀비들의 시간을 빼앗아쓰려는 인간에게는 제법 많은 제약이 걸렸다. 첫 째, 숨소리도 들키지 말 것. 둘 째, 불빛을 사용하지 말 것, 셋 째, 달리기를 뒤지게 잘 할 것. 물론 순전히 볼캡을 눌러쓴 그 '누군가'가 지어낸 공식일 뿐이었다. 제약을 어기면 어떻게 되냐고? 사람 고기를 좋아하는 시쳇덩어리가 되는 수 밖에.
좀비떼를 피해 자세를 낮추어 걸음을 옮기던 누군가가 잠시 멈칫였다. 그리곤 길목의 끝머리에서, 슬며시 고개를 빼 주변을 두리번거리다 이내 재빠르게 발을 굴러 한 낡은 마트의 광고판 앞으로 숨어든다. 마트는 제법 규모가 컸으나 관리를 멈춘지 오래된 듯 낡고 지저분했다. 게다가 과거에는 밤낮을 가리지 않고 반짝였을 전광판이 반파되어 이름조차 잃어버렸으니, 지금은 그저 초라한 폐건물일 뿐이다. 누군가가 휴, 작게 숨을 들이켰다. 야구 방망이를 쥔 오른손에 절로 힘이 들어간다. 길게 뻗은 자태가 아름다운 방망이에는, 누구의 것일지 모를 지저분한 핏자국이 흉측히 튀어있다.
" 어디있냐, 새끼 염소... "
야구방망이를 쥔 누군가가 작은 보폭으로 고장난 자동문을 향해 몸을 옮겼다. 전기가 끊긴 탓에 커다란 자동문은 손님을 보고도 굳건히 제 입을 걸어잠구고 있다. 누군가가 몸을 일으켰다. 시커먼 마트 내부에는 그 무엇도 보이질 않는다. 허탕인가? 마트의 외벽에 몸을 붙인 채, 마트의 내외부를 모두 경계하며 인기척을 살피던 누군가가 작게 인상을 찌푸렸다. 아닌데, 분명 여기 있을텐…
" 여깄냐?! "
이 갑오징어놈아! 큼지막한 야구방망이가 또 다른 누군가의 몸을 막아섰다. 볼캡을 푹 눌러 써 보이진 않았으나, 방망이의 주인은 제법 의기양양한 눈빛이었다. 조금 마른 듯한 체구에, 혼자 신이 나 무어라 중얼거리는 그 사람의 정체는…
" 어린이 공원은 개뿔. 너 내가 여기 있을 줄 알았지. "
푹 눌러 쓴 후드 모자를 걷고, 볼캡을 조금 들어올리자 '누군가'의 얼굴이 환히 드러난다. 신이 난 듯, 혹은 신경질이 난 듯, 화난 고양이처럼 사나운 눈매를 가진 여자였다. 여자가 한 발짝 한 발짝 당신에게 다가가며 야구방망이를 건들댔다. 한가운데가 움푹 파여 불길한 분위기를 뽐내는 방망이가 당신의 몸에 닿을 듯 말 듯, 얼쩡거린다.
" 마지막으로 하실 말은? 새끼 염소씨. "
여자가 당신을 향해 성큼 다가서며 물었다. 살긋 지어내는 미소가 당신에게 자애롭게 비쳐보였길 바란다.
볶음밥은 맛있었다. 심하게 짜지도 않고 적당히 단 맛. 냉장고에 굴러다니던 김밥햄을 썰어 넣은 게 신의 한 수였던 것 같다. 아침에 안 깎았다고 수염이 꺼슬하게 나는 자신과는 달리 아직 어린 당신한테는 싱거울지도 모르겠지만.
포슬포슬한 달걀볶음을 고봉밥 위에 얹어 식탁에 올린다. 그리고는 당신을 부른다. 먹어. 적당히 먹을 만치는 될 거다. 볶음밥의 맞은편 의자에 비뚜름하니 앉는다. 삐그덕대는 허리 탓에 절로 신음소리가 나온다.
"나이가 죄지. 나이가 죄야."
혼잣말 또한 시간을 맞이한 사람만의 특권일 터다. 지그시 눈을 감고 세월을 음미하려니 쌉싸름한 담뱃내가 곁들임에 제격이다. 손떼 묻은 케이스에서 한 개피를 꺼내본다. 입술 새로 담배를 끼운다. 그제야 저가 방금 전 어린 아이한테 밥상을 차려줬다는 것을 깨닫는다.
긍정적으로 보자면, 그는 담배가 대중적으로 호불호가 갈리는 기호품이고 따라서 담배를 피우기 위해서는 때와 상황을 가려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안타깝게도, 그는 어린아이 앞에서 담배를 자제할 정도로 배려심이 깊지는 않았다.
"한 대 피워도 되지? 그러니까... 흠, 꼬마야."
입술을 움직임에 따라 담배 끝이 위아래로 움직인다. 그는 이미 손에 낡은 라이터를 쥐고 있다. 허락이 떨어지기만 한다면, 의자 등받이에 걸치고 있는 팔뚝을 당장 옮겨 벌건 불을 피워낼 것이다. 그것이 행복이라 믿어 의심치 않고 있으니까.
"어떻게 불러야 할지 모르겠군."
제 집에 함께 있는 어린아이가 전생에 가진 이름이 무언지는 안다. 당연히 알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건 어디까지나 전생에 지녔던 이름이고, 지금 저 아이가 그 때의 기억을 가지고 있을지도 확실치 않은 상황이니, 어쩌면 저 아이를 부르기에 더 적합한 호칭이 있을지도 모를 노릇이다.
만약 저 아이가 제 기억과 다른 이름으로 자신을 불러주길 원한다면 남자는 거기에 맞추어줄 의향이 있었다. 새로운 인연을 쌓아가는 것도 뭐, 그렇게까지 나쁜 일은 아닐지도 모른다.
//나이먹은 아저씨캐가 환생한 과거의 인연(아이)을 만났다는 상황이야! 과거에 어떤 관계였는지/너참치의 캐가 전생 기억을 가지고 있는지 여부는 생각해둔 게 없으니 자유롭게 이어주면 고맙겠어. 물론 맥커터는 사절!
>>242 체격에 들어맞지 않는 의자 위에 덩그러니 던져지듯 앉은 모습이 퍽 우스웠다. 잘 관리된 머리카락과 그 위로 매듭지어진 벨벳리본, 인근 사립 학교의 학생복에 새하얀 레이스 양말까지 척 봐도 값나가는 차림을 하고 있었음에도 그 꼬마 애의 모습은 영 궁상스럽기 짝이 없었다. 지저분한 상처와 흙먼지까지 갈 것도 없이 당장 바닥에 닿지 않아 덜렁거리는 다리만 봐도 볼품없는 꼴이지 않은가. 꼬마 애는 뜨거운 김이 뭉근하게 피어오르는 밥과 달걀을 두고 빤히 쳐다봤다가는, 이내 그 커다란 눈을 데록 굴려 남자를 바라봤다. 처한 상황이 무색하게 제법 어린애다운 맑은 눈동자였다.
“아저씨. 여기 어디예요? 집에 가고 싶어요.”
이마에서 눈으로, 그 다음은 코. 바로 밑에 위치한 인중에서 입술로 이어지는 선까지 차례대로 천진하게 훑던 시선이 손에 쥐어진 물체들 앞에서 멈춰섰다. 담배와 라이터였다. 별다른 감흥 없이-조금은 신기하다는 듯-그것들을 물끄러미 쳐다보기만 하던 꼬마 애는 곧 한 대 해도 되겠냐는 물음에도 대수롭지 않게 고개를 끄덕였다. 대체로 매운 연기를 싫어하는 그 나이대 꼬맹이임을 감안하면 참 희한한 반응이었다. 담배의 지독함에 익숙했다기보다는 차라리 한 번도 그 냄새를 맡아본 적 없어 무지한 사람의 태도에 가까웠다. 꼬마 애는 그보다도 다른 데 관심을 더 많이 보이는 듯했다. 앉은 채로 집 안의 곳곳과 가구들을 훽훽 살펴보며 그 애가 말을 이었다.
“혹시 여기 우리 집이에요? 아저씨 우리 아빠예요?”
뜻밖에도 제 집 살림은커녕 본인의 아비도 못 알아보는 황당한 발언이었다. 자신의 말이 얼마나 기가 막혔건 간에 그 애의 얼굴은 사뭇 진지해 어설픈 장난이나 치려는 투는 결코 아니었다. 의심할 틈도 없이, 바로 다음 던져진 남자의 말에 꼬마 애는 고개를 설레설레 가로저어버리기까지 하는 게 아닌가.
“제가, 사실은 아까 전에요. 아저씨랑 오는 길부터 이름이랑 학교랑, 엄마 아빠 이름이랑 다 생각해보려고 그랬는데요, 자꾸 생각이 안 나요.”
그 애의 말로는 사고를 포함한 그 이전의 일들은 까만 잉크라도 엎지른 듯 하나도 기억나지 않는다고 했다. 집 주소나 부모의 번호는 고사하고 제 이름까지 모른댄다. 톡톡, 손끝으로 테이블 위를 두드리는 소리가 귓가를 건드린다. 어느덧 김이 멎어들었을 즈음이 됐음에도 볶음밥은 그대로였다. 꼬마 애는 아무런 기억도 나지 않는다는 주제에 뭐가 그리 마음에 안 드는지 테이블 위의 식사 자리를 영 불편해하는 듯했다. 불편함보다는 불안함에 가까워 보이기도 했고. 기억은 잃었다 하니 꼭 본능적으로 거부감을 느끼기라도 하는 것처럼 행동했다.
//두 캐릭터 다 환생한 상태에서 아저씨만 기억을 가지고 있는 건지, 내 캐릭터만 (아저씨 기준) 이번 생에서 죽고 환생한 상태인 건지 애매해서 일단 후자로 잡고 초등학생쯤 되는 캐릭터를 들고 와봤는데 나이는 좀 더 올려서 상상해도 괜찮아! 아무 이유 없이 남의 집에 왔을 것 같진 않아서 대충 내 캐릭터가 모종의 사건(범죄든 사고든)에 휘말린 상황에서 아저씨랑 조우하고 따라오게 됐다는 배경을 상정했는데, 뭣하면 스루해도 좋아 ^-ㅠ
라이터에 불이 붙지 않았다. 천부당만부당한 단어가 생소하고 낯설어 부싯돌에 신경을 쓸 수가 없었던 탓이다. 아빠라니? 우리 집이라니? 하늘과 과거와 자신의 여성 편력에 맹세코 절대 그럴 리 없었고 그러고 싶은 마음도 일절 존재하지 않는다. 부러 강하게 담배의 첫 숨을 내뱉어본다. (다행히, 라이터에 불을 붙이려는 두 번째 시도는 성공했었다.) 식탁에 뿌연 연기 가득 메우는 이유는 좋게 표현해 검소하고 나쁘게 말해 궁상맞은 제 집 가구에서 아이의 관심을 불러오려는 것이었고, 또 다른 이유는 네 말에 나는 하나도 동요하지 않았음을 알리기 위함이었다. 다시 말해, 그는 내심 당황스러웠다.
"너, 어디 가서 그 말 하지 마. 알겠니 꼬맹아? 너는 길바닥에서 상처투성이로 구르고 있었고, 나는 그런 가-엾-은- 아이를 불쌍히 여겨 경찰이 데리러 올 때까지 잠시 집으로 데려와 따뜻한 밥과 아늑한 쉴자리를 제공해줬을 뿐. 그 뿐인 관계야, 알았어?"
아빠라니 무슨... 중얼거리다가.
"그리고 납치당했다고도 하지 마."
제 발 저려 그리 덧붙인다. 툴툴거린다. "안 그래도 벽 얇은 싸구려 아파트라 방음의 ㅂ도 없단 말이다." 옷차림을 보아하니 이 근처 사립 학교에 다니는 모양인데 그런 비싼 학교에 아이를 보낼 작자가 이런 다 허물어지는 건물에 세 들어 살 리가 없지. 아이의 행색을 보며 그가 차분히 생각했다.
기실 남자의 말에는 어폐가 있었다. 아이를 불쌍히 여겨 데려왔다기에는 상처에 연고 하나 발라주지도 않고 하물며 흙먼지조차 털어주지 않고 있지 않은가. 경찰을 운운하긴 하였으나 남자는 아이를 만난 뒤로 핸드폰에는 손도 대지 않았다. 신고하지 않았다. 무얼 하고 싶은지 잘 모르겠다. 과거의 인연이 있다 하여─그저 닮았을 뿐이란 가능성은 생각하지 않았다─데려오긴 하였으나, 아이를 데리고 할 수 있는 일이 얼마나 많겠는가? 남자는 혼란스러웠다.
"뭐야?"
그리고 그 혼란은 아이의 황당한 기억상실 선언 때문에 곱절은 증폭되었다.
"얌마, 그걸 나더러 믿으라는 거냐으아...거니?"
기가 막히다 못 해 머리카락 꽉 막힌 배수구처럼 되는 바람에 원래 쓰는 말투가 나와버린다. 중간에 정신 차려 급하게 상냥한 말투로 선회하긴 하였으나 겁을 주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참자. 참아. 잘생기고 착한 내가 참자. 제 이름까지 모른다는 아이의 말을 끝까지 다 듣고 답답한 마음에 담배를 깊이 빨아들인다. 아, 이제야 뇌가 맑아진다. 니코틴의 힘을 받아 팽팽 돌아가는 생각세포가 말한다,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지는 않아. 그러나 싸구려 소설이나 삼류 영화도 아니고 그저 상처 조금 생겼을 뿐인 아이한테 갑자기 기억상실이라니? 차라리 어제 긁은 복권이 1등 당첨인 게 훨씬 현실성이 있겠다. 먼 치에서 눈으로 살피기에 머리 쪽에 심각한 부상을 입은 것 같지도 않았기에 더더욱.
얘가 뭔 이유로 저런 말을 한담. 정말로 기억상실이기 때문에? 아니면 다른 이유로? 남자는 아이가 손도 대지 않은 볶음밥을 내려다본다. 검지손가락은 남자의 의식과는 상관 없이 식탁 위를 두드린다. 톡톡. 아이와 남자의 어울리는 듯 어울리지 않는 합주가 남자의 신경을 건드렸다. 젠장, 몇십 년도 더 된 옛날 일이 전두엽을 괴롭힌다. 토할지 말지를 결정 못한 옛 추억을 목구멍 뒤로 삼키기 위해 남자는 대신 담배 연기를 토하기로 했다.
"꼬맹아. 집에 가기 싫다고 그런 거짓말 하는 거 아니예요."
식탁 위 재떨이에 담뱃재를 털어버린다. 뭉툭해진 담배 끝을 아이한테로 향한다. 삿대질한다. 저 징글맞은 놈이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 순진한 어린아이인지 아니면 모르는 척을 할 뿐인 속 시꺼먼 놈인지는 모른다. 그러니, 지금은 자신도 모르는 척을 한다. 모르는 척을 하며 살살 긁어보다가 수상한 정황이 나오면 덥썩 물어 캐물어야지. 콱 이빨로 물어버리는 것도 좋겠고.
남자는 자신의 계획이 퍽 만족스럽다.
"학생복 입은 걸 보아하니 요 근처 초등학교에 다니는 모양인데... 거기 가면 너 누군지 바로 알 수 있거든? 아저씨 놀리려고 하면 안 된다."
자, 이제 어쩔 테냐. 한쪽 입꼬리를 올려 웃는다.
// 앗앗 나도 후자로 생각하고 상황 제시했었어! 설명이 애매했던 것 같은데 잘 들어맞아서 다행이다 ^ㅁ^) 흥미진진하게 상황 받아줘서 고마워.......!!!
새벽 세 시가 넘어가는 야릿한 새벽의 어느 감성주점이었다. 우당탕탕 들이닥친 경찰에 의해 시비가 붙은 취객들이 벌여놓은 한바탕 소란이 잦아들고, 쯧쯧 혀를 차며 거들먹거리는듯한 걸음으로 당연스레 그 곁을 지나오던 이가, 얌전히 테이블에 앉아있는 당신 앞에 문득 멈춰선다.
"술을 처 자실거면 곱게 마셔야지, 저게 뭐야. 그치요?"
너저분해 보이는 묶음머리를 한 그 또한 적잖이 술이 들어간 것 같아뵈지만, 그는 당신이 제지하기도 전에 자연히 몸을 뉘듯 당신의 앞자리에 앉아온다. 그리고, 그의 눈동자는 이 소란에도 아랑곳 않는 당신을 한 번 훑고 지나간다.
"... 아! 너... 그. 뭐야. ... 그래. 배신자!"
곧, 말까지 더듬으며 황급히 당신을 떠올려낸 그는, 반가운 목소리로 당신을 배신자라 부르며 눈을 동그랗게 뜨고서 뾰족 든 검지로 당신의 얼굴을 찌를 듯이 가리켰다.
"아니아니. 싸우잔 게 아니라. ... 벌써 몇 년도 더 된 이야기잖냐."
그는 당신이 무어라 대꾸하기도 전에 먼저 손사래를 치며 당신에게 악감정이 없음을 피력했다. 그래. 벌써 몇 년도 더 전의 일이다.
십수 년 전, 몇몇 인간들에겐 자연의 섭리와 물리법칙을 한참 벗어난 기이한 능력이 발현되었고, 그들은 한때 인류의 희망이라 추앙받기도 했었고, 사상 최악의 악당이라며 비난받기도 했었다. 지금은 인류의 기술이 발전하여 법적으로 능력 사용이 금지시 됐을뿐더러 당시 인류를 위해 제 몸을 불살랐던 이들은 약간의 보조금이나 받으며 유흥거리나 찾아다니는 백수 한량이 되어버렸으니. 선이고 악이고 모두 인위적인 흐름으로 빚어 만들어진, 인류의 화합을 위해 이용당했을 뿐인 기구한 인생들일 뿐이었다.
"하... 시발거. 인생에 낙이 없어, 낙이."
한 잔 빌리자며 당연하단 듯이 당신의 술병으로 손을 뻗는 그의 추레한 모습은, 한때 당신이 가장 존경하고 시기하고 증오하고 남몰래 연모했던 것과는 이미 한참이나 동떨어져 버린 것이었다. 그는, 너는 어떻게 그때 그대로냐. 내 머리가 많이 길어서 못 알아보겠지? 하고 시답잖은 농을 던지며 털레털레 웃어버리고 만다.
>>247 온갖 소란이 지나가는 동안에도 여자는 주점 한 구석을 고요히 지킬 뿐이었다. 아주 한참 전에는 저런 작은 일에도 나서 사람들을 말리고 했다만...지금과는 영 상관 없는 이야기다. 여자는 남은 술을 입에 털어넣고 자리에서 일어서려 했다. 갑작스레 다가온 이만 아니었더라면 그랬을 것이다.
길게 드리운 앞머리 사이로 얼핏 보이는, 푸른 눈동자가 당신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그녀는 이미 당신이 누군지 기억한 모양이다. 배신자라 소리치는 말에도, 찌를 듯 다가온 손가락에도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으니.
"그렇다는 사람이 삿대질부터 하시나요."
조금 쉬고 갈라진 목소리기는 해도 어투는 또렷하고 정중하다. 비록 그에 담긴 내용이 그렇지 않더라도. 비꼬듯 이야기했어도 사감이 남지 않은 것이 이쪽도 매한가지인지, 별다른 행동을 취하지는 않는다. 다만 머무름이 길어질 것이라고 직감하기라도 했는지 몸을 등받이에 편히 기대앉는다.
그녀는 당신의 한탄에 답하지 않고, 당신의 모습을 관찰이라도 하듯 샅샅이 훑는다. 과거와는 달리 추레한 모습이다. 외려 당신이 아니라 그녀가 과거의 모습을 지니고 있다는 건 꽤나 웃긴 일이다. 선의 편이었던 당신이 아니라 악에 가까웠던, 배신자니 악당이니 불리었던 그녀가 겉모습으로나마 그 당당하고 꼿꼿한하던 태도를 간직하고 있다는 것이....
"못 알아볼 정도는 아니던데, 그래도 많이 변하긴 했네요."
겉모습도 그렇지마는 그 속 또한. 과거 치열하게도 싸웠던 당신과 여자가 이리 마주보고 대화라는 걸 하고 있다는 점만 해도 그렇지 않나. 그녀는 비웠던 잔에 다시 술을 따를 요량인지, 손을 까닥이며 쓰고 돌려달라는 제스쳐를 취한다.
>>248 당신이 훑는 시선을 한껏 즐기며 입에 머금은 술을 곧바로 삼키지 않고 느긋하게 입안에서 혀를 굴리던 그는, 당신의 손짓에 목구멍으로 닁큼 술을 넘기고서 들고 있던 술병을 내밀었다.
"이야... 독하네."
그는 혼잣말처럼 감탄을 내뱉으며 손등으로 입술을 가볍게 훔쳐내는 것으로 안주를 대신한다. 독하다고 할 적에 당신의 푸른 눈동자를 흘금 바라보는 것이, 당신을 겨냥한듯싶기도 하다.
"이리 마주 보는 게 대체 얼마 만이냐."
측은하게 빛나는 초록 눈동자는 당신을 또렷이 응시하고 있지만 그 시선의 끝은 과거의 한때를 가리키고 있다.
"차라리 그때, 네 손에 죽었다면 이따위로 살고 있진 않았을 텐데."
조금 분하긴 했겠지만, 이제 와 생각해 보면 그 시절에 순직한 놈들이 참 부럽단 말이지. 죽는 순간까지도 자신이 옳다고 믿고 믿었을 테니까. 평화를 위한답시고 정부에 헌신하며 꾸역꾸역 살아남은 대가로 이런 짐덩이 취급을 받을 거라곤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겠지. 손등에 턱을 괴고 나지막한 목소리로 그런 이야길 중얼거리던 그는, 느른하게 손을 뻗어 빈 잔을 흔들어 보였다.
지금은 2X세기, 21세기의 누군가들이 많이도 예측했던 캡슐 형식의 가상현실게임 기기가 출시된 시대. 다른 콘솔 게임은 오래된 게임 매니아들의 유산이자 무덤이 된 지 오래됐다. 이미 수많은 가상현실 게임들이 게임계에 혜성처럼 튀어나오고 있었다. 그 중에는 외계인을 고문했다는 소문이 도는 뛰어난 기술력을 자랑하는 게임도 있었다. 수많은 직장인들이 휴양 대신 선택한다는 자연스러운 그래픽과 감성적인 디자인이 유명한 작품도 있었다. 그리고, 맨 처음 등장했을 땐 수많은 겜덕후와 민간인들의 돈을 빨아먹었지만 지금은 고인물만 남아서 썩어들어가는, 한 져가는 별도 있었다. <슈팅 스타 온라인>. 커뮤니티 내 별명은 '노인정'과 '별'을 합쳐서, '별인정'.
이 플레이어, 약초줍는노인도 같은 처지였다. 쓸모없는 고인물이라는 뜻이었다. 흔히 노인들이 쓰곤 하는 오색찬란한 꽃무늬 두건을 써 머리카락을 완전히 가렸다. 체구는 작지만 부푼 천옷으로 몸을 완전히 가려, 정말 등 굽고 작은 노인 커스텀 캐릭터인지 어린아이 커스텀 캐릭터인지 알 도리가 없다. 손잡이를 두 개 엮어 등에 맨 망태기에 1골드짜리 약초가 가득 담겨 있다. 그야말로 '약초 줍는 노인'이라는 닉네임에 걸맞는 컨셉질이다.
여느 고인물이 그렇든 약초줍는노인도 트롤링을 했다. 게임사가 손 놓아버린 이 게임은 심각한 수준의 버그가 아니면 패치되지 않았다. 수많은 버그를 줄줄 꿰는 고인물이 갖고 놀기 딱 좋았다. 그 수단은 히든 플래그. 게임 판타지 소설이 그러했듯 이 게임에도 히든 플래그가 있었다. 무협의 기연처럼 영약을 얻거나 히든 클래스를 계승하는 이벤트가 발생하는 것. 하지만 악랄한 이 게임은 기연도 거저 주지 않았다. '히든 플래그 발생권'을 구매해야 했다. 가격은 게임 내 화폐가 아닌 결제 화폐인 크레딧으로 200,000크레딧. 일반인이 사기엔 크게 부담스러운 가격이다. 게다가, 히든 플래그가 무조건 구매자에게 발생하는 것은 아니다. 히든 플래그를 바로 발생시키는 게 아니라 조건이 랜덤하게 정해진 히든 플래그가 새로이 생성된다. 재수 없으면 발생권을 사 놓고도 히든 플래그를 놓칠 수도 있단 거였다. 발생권으로 생성된 히든 플래그의 조건은 최대한 구매자한테 맞춰진다고 하지만, 확률도 나와 있지 않은 불확실한 확률놀음을 누가 믿을까.
약초줍는노인이 얼마전에 발견한 오류. 발생권으로만 발생하는 히든 플래그 중 오직 약초줍는노인과 같은 채집 특화 캐릭터에게만 출현하는 '영약재 발견 이벤트', 속된 말로 '심봐'다. 완성품 영약이 출현하는 기연 이벤트와 달리, 비교적 다른 방식으로도 수급하기 쉬운 영약의 원재료가 정해진 장소에 나오는 히든 플래그. 거의 꽝 취급받는 이벤트. 하지만 이 이벤트에는 '히든 플래그 발생권을 사용할 경우 다른 이벤트와 함께 무조건 다시 리젠된다'는 오류가 있었다. 다른 히든 플래그가 얼마나 생기든 무조건 심봐도 같이 생긴다는 것이다. 그리고 히든 플래그는 종류 불문하고 누군가 습득하면 전 월드에 요란한 이펙트로 축하 메세지가 뜨며, 획득자가 전 월드를 대상으로 하는 특별 확성기를 1회 사용할 수 있게 된다. 원래 자랑용으로 쓰였어야 할 이 확성기는 히든 플래그 발생권을 무더기로 쓰는 약초줍는노인에 의해 전 월드 대상 테러수단이 되었다. 심지어 '특별'하기 때문인지 신고나 차단도 먹히지 않는다. 그리하여 약초줍는노인은 전 월드에 명성과 악명을 떨치는 유쾌하고 불쾌한 어그로 네임드 고인물로 자리잡게 되었다.
[약초줍는노인 님이 '인형설삼'을 획득했습니다!] [특별]약초줍는노인 : 허허허... 유교 국가에서 감히 노인한테 대들다니 요즘 것들은 버르장머리가 없구료... [확성]메리볼셰비키 : 약노제발죽어약노제발죽어약노제발죽어약노제발죽어약노제발죽어약노제발죽어약노제발죽어약노제발죽어약노
'음?' 그런 약초줍는노인의 눈에 누군가 들어왔다. 이곳은 '만년설삼'과 '인형설삼'의 고정 출현 장소인 예티 설산. 약초줍는노인 같은 괴짜가 아니면 올라올 일이 없다. 혹시 뉴비? ...일 리가 없다. 온갖 공략과 정보가 넘치는 썩은물 게임에, 이 가혹한 환경 근처에 위치한 유일한 스타팅 포인트인 레멘세 마을에서 시작할 플레이어가 얼마나 될까? (그 전에 이 게임에 들어오는 뉴비는 없다.)
[일반]약초줍는노인 : 에베레스트 등반 컨셉충인가?
혼잣말도 마이크 안 켜고 채팅으로 하는 게임 과몰입충 그 자체인 약초줍는노인이었다.
'이벤트인 척하고 놀려야겠다.' 약초줍는노인은 머리에 쓰고 있던 꽃무늬 두건을 벗고 복면을 얼굴에 뒤집어썼다.
['추위 면역'효과가 사라졌습니다.] ['물리 면역'효과가 사라졌습니다.] ['현혹하는 환상'효과가...] [인간의 능력으로 저항할 수 없는 겨울신의 분노가 몰아치고 있습니다. 능력치가 99% 감소...] [현인신 칭호의 효과로 상태이상에 저항합니다.] ['돜키돜키 산돜키 가면'의 효과로 '현혹하는 환상'효과를 얻습니다.] ['돜키돜키 산돜키 가면'의 효과로 닉네임, 길드명, 레벨 효과가 가려집니다. 장비를 해제할 때까지 일반 채팅, 길드 채팅, 비밀 채팅이 불가능합니다.] [마이크를 활성화했습니다.]
'유령이니까 하얀색으로 할까? 아니다, 눈이 하도 많아서 안 보이겠지. 머리카락과 눈색은 검은색으로 해야지. 둥둥 떠다니는 것처럼 보이겠다.' 어느새 눈밭과 구분이 안 될 만큼 새하얀 피부에 새까만 흑발, 흑안 청년 모습으로 변하고 다리가 투명해진 약초줍는노인, 아니, '유령'은 스킬 '제 3의 손'의 효과로 살짝 떠서 날아가듯 눈 속의 형체를 향했다.
>>249 술병을 건네받은 여자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잔이 끝까지 차도록 술을 붓는다. 자신을 겨냥하는 것인지, 술을 향한 것인지 모를 감탄사에 한쪽 눈썹만 쓱 올렸다. 마치 무슨 소리냐 묻는 듯 말이다.
여자는 당신의 말에 곧바로 답하는 대신, 술잔을 기울였다. 모순적이나, 폭력이 만연하던 과거를 영광의 때라 회상하는 이는 많았다. 영웅이니 대악당이니 하고 추앙받던 그 시절에는 영광이나 두려움을 손에 쥔 자가 많았다. 그러나 지금은 어떠한가. 그 모든 전설들은 한낱 과거의 산물이 되었으며, 더 나아가 '아무것도 아닌' 자들이 되었다. 정의는 부정당하였으며 악은 그 근간을 잃은 지 오래다. 당신이 빈 잔을 흔들어 보이자, 여자는 당신 앞에 술병을 밀어주며 말한다.
"그리 후회한대도 과거는 돌아오지 않습니다."
그리고 난 당신 죽일 생각 없어요, 여자는 짧게 덧붙인다. 모호한 어투다. 지금 죽일 생각이 없다는 것인지, 혹은....그 과거에 죽일 생각이 없었다는 것인지. 혹은 아무것도 아닌 농인지. 여자는 당신을 바라보다, 작게 혀를 찼다.
"...그러게 내가 경고하지 않았나요, 맹신하지 말라고."
언젠가는, 그래. 그런 말도 했더랬다. 한낱 배신자의 말을 듣고자 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지만.
그가 죽던 날에는 세찬 눈보라가 내리쳤다. 항상 —올해 겨울에는, 눈이 많이 내렸으면 좋겠어—라는 말을 달고 살던 사람이었다. 그의 바람대로 그날 밤에는 아주 많은 눈이 내렸다. 그는 새하얀 눈밭 위로 새빨간 피를 흘리며 천천히 식어갔다. 나는 그 옆에서 시체처럼 눈밭에 파묻혀 영원히 돌아오지 않을 이름을 움켜쥐고 있었다.
*
" 어디… "
[기억소생프로그램]에 대해 알고 있었던 것은 그녀에게 있어 엄청난 행운이었다. 그리고, 다행히도 그는 [기억소생프로그램]에 대해 별다른 거부감이 없었다. —미리 보험이라도 들어두면 어때? —그래, 나쁠 건 없지. 그 뒤로 모든 것은 재빠르게 진행 되었다. 복잡한 장치를 쓰고 한숨 자고 일어나니, 보험사의 직원은 컴퓨터 화면에 떠오른 보라색 구체를 가리키며 이것이 우리의 기억이라고 했다. 주기적으로 업데이트를 해주셔야해요. 그때 그가 내뱉었던 감탄사가 아직도 기억이 난다. —현대 과학이란. 메리가 나직히 중얼였다. 꺼림칙하고도 사랑스러운, 현대 과학이란.
메리는 제 몸집보다도 커다란 상자를 끌어안았다. 바깥이 제법 추워 상자를 빠르게 옮겨야할 것 같았다. 혹시라도 그가 춥진 않을까 걱정이 되었다. 그이는 추위를 잘 타는 사람이었으니까. 초겨울에도 꼭 회색 머플러를 두르던 사람이었다. 회색 머플러에서는 항상 그의 향기가 났다. 서랍장 안 쪽에 모셔둔 머플러에서는, 더이상 그의 향기가 나질 않았다. 그 위로 그가 아끼던 향수를 제아무리 뿌려본들 품에 안겼을 때 코끝에 닿았던 그 향은 나지 않았다. 그의 향기를 잃고 난 무렵부터 메리는 머플러를 찾지 않았다. 이제는 그의 향기보다도 메리의 향이 더욱 짙게 나는 것만 같았다.
메리는 한참의 시간을 들여 상자를 집 안으로 들이는 것에 성공했다. 바깥에 조금씩 날리는 눈발 덕에 상자가 조금 축축했다. 메리는 가볍게 상자 위의 물기를 털어낸 뒤, [Remember-Reunion] 이라는 로고를 유심히 바라보았다. 보험회사를 찾아가기까지 꼬박 석 달이 걸렸었다. 그마저도 그를 떠나보내고 나서 집안에 틀어박혀 꼼짝않던 두 달을 제외한 시간이었다. 보험회사의 직원들은 메리를 다정하게 대해주었다. —그러니까, 다행히도 사망 1주 전까지의 기억이 업데이트 되어 있으시네요. 직원이 작게 미소 지으며 건넨 말에 메리는 쉽게 미소를 지을 수 없었다.
소생 프로그램을 신청하고 약 세 달이 지났을 무렵, 아무도 찾지 않는 메리의 휴대전화로 한 통의 문자가 들었다. <벤자민 포트만 님의 안드로이드가 제작 완료 되었습니다. 원하시는 배송 장소를 말씀해주세요.> 메리는 둘만이 알고 있던 설원 속 별장의 주소를 적어보냈다.
메리는 조심스러운 손길로 박스를 열었다. 한 겹의 박스를 열자 새하얀 플라스틱 완충제가 와락 쏟아져나왔다. 두 번째 박스를 열자 고운 천으로 마감된 고급 상자가 보인다. 메리의 손이 잘게 떨리기 시작했다. 두 눈가는 붉게 물들었을 것이 분명했다. —메리, 당신은 감정이 너무 잘 들어나 탈이라니까. 어렴풋 그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아, 메리는 두어번이나 얼굴을 감싸쥐고 가쁜 숨을 몰아쉬어야 했다. 메리가 숨을 들이켰다. 바깥에는 하얀 눈이 내리고 있었다.
마지막 상자를 열자, 그의 얼굴이 보였다. 그녀의 기억에 오롯이 살아있던 그 모습이었다. 그녀를 향해 환히 웃어주던, 입을 맞추어주던, 부드럽게 안아주던 그의 모습이었다. 메리는 조심스럽게 안드로이드의 얼굴 위로 손을 댔다. 인간의 것이라 해도 믿을 정도의 감촉이었다. 그러나 너무도 차가웠다. 눈보라 아래로 식어가던 그의 손처럼 차가웠다. 메리의 손가락이 굳게 감겨진 눈꺼풀 위로 향했다. 그는 곤히 잠을 자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문득 메리는, 관자놀이쪽의 작은 스위치 버튼을 눌러도, 그가 미동 없이 누워있을 것만 같아 두려웠다.
" …벤자민, 베니… "
메리가 황급히 제 두 손을 감싼 채 두 눈을 감아내렸다. 간절하게 부르는 그 이름이 낯설다. 그러면 안되는데. 적막이 감도는 별장 속에서 작게 기계가 가동되는 소리가 들려왔다. 메리는 숨을 죽여, 그의 모습을 본딴 안드로이드가 작동되기를 기다렸다. 그의 모든 기억을 가진 안드로이드, 그의 성격과, 취향과, 사랑을 모두 이어 받은 그 꺼림칙한 안드로이드가 다정히 그녀의 이름을 불러주길.
그는 안드로이드였다. 뼈 대신 고철이, 혈관 대신 전선이 있는 기계, 인간에 의해 창조된 생명이었다. 아니, 사실 '생명'이라고 하기엔 어려웠다. 안드로이드는 살아있는 것이 아니다. 그보다는 '물건'이라는 말이 더 어울릴 것이다. 인간의 입맛에 따라 만들어지고 버려지는. 그 또한 평범한 안드로이드 중 하나였다. 같은 기계, 혹은 인간의 손을 거쳐 탄생한 고철 덩어리라는 말이다. 그 또한 여타 안드로이드들과 같은 제조 공정을 거쳤었다. 그래서 막 만들어졌을 때의 그에겐 의식과 감정을 만들 프로그램도 탑재되어 있지 않았다. 갓 태어난 아기보다도 더 못한, 아무것도 없는 무無와 같이. 그렇게 그는 초라한 외골격을 덮을 피부조차도 가지지 못한 채─제조 공장의 창고에 넣어졌었다. 그가 처음 만들어지고 몇 달간은 별다른 일이 없었다. 늘 그렇듯 창고의 완제품─이자 미완성인─안드로이드들이 저마다의 주인을 찾아가고, 또 새로운 것들이 들어오고의 반복이었다. 적어도 삼개월 전까지는 그랬었다.
공장의 육중한 철문은 며칠에 한 번 꼴로 열렸었다. 그날도 평소와 같이 인부 몇이 철문을 열었다. 차갑고 삭막한 밀실 안으로 그들이 거침없이 들어왔다. 그리고 인부들은 그의 몸체를 꺼내 수레에 실었다. 마침내 그의 차례가 왔다는 걸 알리는 것처럼. 그를 실은 수레가 공장 바깥까지 끌려나왔다. 인부들은 넓직한 트럭에 그를 비롯한 여러 안드로이드들을 집어넣고 단단히 고정시켰다. 곧 트럭이 출발했다. 쉼없이 달린 트럭은 또 다른 공장에 멈춰섰다.
그곳에서 그는 제대로 된 '안드로이드'의 모습을 갖출 수 있었다. 외피에 정교한 피부가 입혀지고, 머릿속 회로에 프로그램이 설치되었다. 동시에 이미 만들어진, 어떤 인간의 기억 또한 주입받았다. 생생하면서도 사뭇 이질적인 무언가였다. 인간에게서 비롯된 기억을 가지고, 그 기억의 주인과 완벽히 닮은 안드로이드. 그렇게 그는 인간이면서도 인간이 아닌 존재가 되었다.
'벤자민 포트만'. 그것이 그의 이름이었다.
*
'벤자민'의 의식이 부팅된다. 몸체 내부의 복잡한 기계가 바쁘게 돌아간다. 자세히 들어도 들리지 않을 소음이 그 속에서 고요히 울린다. 그리고 누군가의 기억, 성격, 취향, 감정…. 그 모든 것도 회로 속에서 로드된다. 그의 의식 속에 기억들이 온전히 정착된다. 마치 원래부터 제 것이었던 것처럼─그건 남의 것이면서도 동시에 그 자신의 일부였다. 고즈넉한 적막이 그의 몸체를 휘감는다. 마침내 가동 준비를 마친 안드로이드─벤자민은 눈꺼풀을 연다. 관자놀이의 스위치에 은은한 녹빛이 돈다. 정상 작동됨을 알리는 신호이자, 그가 명백한 안드로이드임을 알리는 증표였다. 눈을 뜨자, 늘 기억 속에 있었던 천장이 보인다. 항상 '당신'과 함께 했었던 별장. 창가에 앉아 눈발 흩날리는 풍경을 곧잘 보곤 했었던 장소. 그의 회로가 남아있던 기억들을 불러온다. 인간의 두뇌가 하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는 행위였다. 줄곧 상자 속에 누워있었던 벤자민이 몸을 일으킨다. 끼어있었던 완충재가 사르륵─ 흩어진다. 그는 눈을 두어 번 깜빡인다. 그 일련의 행동이, 묘하게 기계적이다. 그러나 동시에 인간적이다.
그, 벤자민의 시각 센서에─'당신'의 모습이 뚜렷이 들어온다. 누구보다 좋아하는 당신, 아름답고 찬란한 나의 빛, 나의 사랑─사고가 전부 돌아가기도 전에 그가 입을 열었다.
"메리."
완벽히 조형된 목소리로 당신의 이름을 부른다. 그리고, 벤자민은 짐짓 기쁜 표정을 해보인다. 눈은 곱게 접혀 휘어있고, 입가에 작은 미소가 선명히 떠오른다. 당신을 보게 되어 기쁘다는 감정이 든다. 만들어진 감정임에도 그는 그것을 충실히 따랐다. 상자를 빠져나오는 벤자민의 발걸음이 꽤나 조심스럽다. 곧 그는 당신 앞에 무릎꿇고 앉아, 당신을 살핀다. 자신이 사랑하던 그 모습, 기억 속의 그 모습 그대로였다. 벤자민이 다시금 미소짓는다. 그리고, 당신의 뺨을 향해 그가 오른손을 뻗는다. 부드러운 살갗을 가진, 그러나 쇳덩이처럼 차가운 손을.
그의 목소리가 들렸다. 다신은 들을 수 없을 거라 생각했던 목소리였다. 메리는 목이 메여오는 통에 한동안 입을 열 수 없었다. 그나마 그 오랜 시간동안 소중히 품어왔던, 당신의 이름만을 겨우 옹알이처럼 떼어낼 뿐이었다. 메리의 눈망울이 떨려왔다. 머리카락 끄트머리부터 훑어내리는 눈길이 조심스러웠다. 행여 닿기만해도 바스라질까 두려웠던 탓이다.
그가 웃었다. 메리는 달라진 것 없는 그 미소에 울음을 터트리고야 말았다. —이 감정을 무어라 형용해야할까? 안도, 그리움, 반가움, 사랑…오로지 그것들만이 메리의 머릿 속을 가득 채웠다. 이성적인 사고가 끼어들 틈 따위는 없었다. 또한 그런 쓸모없는 생각으로 낭비할 시간 조차 없었다. 벤자민, 그가 돌아왔다. 메리는 어린 아이처럼 목놓아 울며 벤자민을 끌어안았다. 아니, 정확히는 벤자민의 형체를 띤 기곗덩이를 끌어안았다. 허나 메리는 느낄 수 있었다. 일정하게 뛰어오르던 그의 심장박동과, 고요한 호흡과, 미세한 근육의 움직임을. 두 팔 가득 끌어안았을 때 느껴지던 부드러운 살갛을, 또 항상 그랬듯 먼저 뻗어내는 오른손과, 당연스레 제 뺨에 닿는 큼지막한 손을.
벤자민의 손이 닿은 뺨이 차가웠다. 허나 그녀는 그 손길에서 벤자민의 온기를 느꼈다. 메리가 붉어진 눈으로 벤자민을 바라보았다. 항상 흔들림 없이 자신을 붙잡아주던 그 눈이었다. 벤자민의 눈동자 속에서 그녀가 보인다. 벤자민이 바라보고 있을 메리가 보였다. 벤자민의 손은 차가웠다. 갓 가동된, 그리고 몇 십분간 바깥 기온에 노출된 안드로이드가 내뿜는 한기였다. 그럼에도 메리는 벤자민의 품과 손길이 따스하다고 느꼈다. 너무도 따뜻한 것들은, 이따금 차갑게 느껴지기도 하는 것이다.
메리가 벤자민의 손등 위로 제 손을 겹쳐 올렸다. 제 손바닥 안에서 한 없이 부서져내리던 그의 손이, 단단히 느껴진다. 항상 꿈길에서만 쫓던 그 감촉이었다. 메리는 눈물을 멈추고 무어라 말을 건네고 싶었지만, 그의 존재를 조건으로 흘러내리는 눈물을 참아낼 방도는 없었다. 그의 목소리에 대답 해야하는데.
" 어서와, 벤자민. 보고 싶었어. 정말 많이… "
메리는 늘상 건네왔던 평범한 인사를 했다. 벤자민이 지친 기색으로 현관문을 열면, 메리는 웃는 얼굴로 그에게 안기며 그리 인사했다. —어서와, 벤자민. 보고 싶었어. 그러고 나면 항상 벤자민은 메리의 이마에 입을 맞추고, 커피 머신을 가동시켰다. 메리는 늘 코코아를 준비했다. 둘은 소파에 앉아 시시껄렁한 코미디를 보기도 했고, 심야 토크쇼를 보며 몇몇 유명인들에 대한 쓸모없는 토론을 펼치기도 했다. 또 가끔은 TV를 끈 채 얄팍한 조명에만 의지하며, 우연이 만들어낸 그들의 아름다운 사랑에 대한 찬사를 보내기도 했다. 짧은 기다림 끝에 당연히 찾아오던 아늑한 저녁. 그것이 그들의 당연한 하루였다.
제법 오랜 기다림 끝에 내뱉은 그 인사가 너무도 애틋하다. 메리가 벤자민의 품에서 벗어나 지그시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벤자민, 나의 벤자민이었다. —너무도 완벽한 나의 벤자민이었다. 메리가 잠시 눈꺼풀을 깜빡였다. 뒷목을 타고 흐르는 이 적막한 한기는, 아마도 문틈을 비집고 들어온 겨울바람의 탓이리라.
" 벤자민, 당신이지. 당신이 맞지? "
메리가 간절한 목소리로 내뱉었다. 말끝이 흐릿하게 내려앉아, 갈라진 목소리가 두드러진다. 그녀는 정답을 알고 있었다. 사실은 반점짜리 정답이었다. 알면서도 문제 위로 동그라미를 그려내야하는 그 심정이 어딘가 따끔하다. 하지만 메리는, 벤자민—그 이름을 잃고 싶지 않았다.
// 나도 늦어서 미안...ㅠㅡㅠ 나도 어떻게 하면 잘 이을 수 있을까 고민하다보니 늦었네... 마지막까지도 걱정에 걱정을 이어가면서 썼어 ㅎㅡㅎ...!
당신의 목소리가 애틋하게 다가왔다. 그 울음 섞인 몇 마디를 들으며 그는 어느새 슬퍼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당신이 사랑하는 그의 미소는 좀처럼 사라질 줄을 모른다. 재회가 너무나도 기뻤던 탓에. 슬픔, 애환, 기쁨. 모두 기계적인 분석으로 도출해낸 인간적인 감정이다. 그러나 그건 그에게 심어진 '벤자민'의 조각들을 기워 만든 모조품에 불과했다. 진짜이되 진짜가 아닌 것. 그렇지만 벤자민—의 모습을 한 안드로이드의 행동은 거짓이 아니었다. 진실로 당신만을 아끼고, 사랑하는 남자의 태도였다. 평범한 기계가 보여줄 수 없는 인간의 모습이었다.
그래서 그는 당신이 흐느끼며 얼굴을 묻어올 때도, 당연하다는 듯 당신을 품에 안았다. 부드럽고 다정하게, 예전과 같은 몸짓으로. 늘상 당신에게 하던 따스한—그러나 아직은 차가운—포옹이었다. 한편으로는 당신의 북받친 감정을 달래려는 듯이, 규칙적으로 그 등을 두드려주기도 했다. 당신의 식지 않은 눈물이 앞섶을 느리게 적셔간다. 손을 뻗어 닿은 당신의 뺨이 발갛고 뜨겁다. 벤자민은 천천히 시간을 들여 그 뺨을 어루만진다. 애정이 담뿍 어린 손길이다. 그러면서 벤자민은 당신을 바라보았다. 위화감 없이 만들어진 눈동자에 당신이 비친다. 그가 살풋 웃었다. 당신은 그 여린 손을 들어 그의 손을 포갠다. 마주 닿은 피부로 당신의 온기가 전해져 온다. 그게 너무나도 포근해서—이 차가운 쇳덩이와는 어울리지 않을 것 같았다. 그렇지만 벤자민은 손을 떼지 않는다. 가늘게 조각된 손가락이 당신의 눈꺼풀을 훑고 지나간다. 당신의 눈가에 맺혔던 눈물이 그의 손 끝에 선명히 번져갔다.
당신이 입을 연다. 매일마다 들었던 인사말이지만, 평범하지만, 그만큼 의미있는 말이었다. 기억 속 '그'의 감정이 고스란히 느껴진다. 속살대는 목소리가 벤자민의 성대—음성 모듈을 타고 당신에게 가 닿는다.
"응, 다녀왔어. 나도 많이 보고 싶었어."
항상 당신의 이마에 키스하며 다정히 건네던 말이었다. 그리곤 따뜻한 걸 마시고, 둘만의 소중한 시간을 보냈었다. 당연한 일상이면서 동시에 특별한 순간이었다. 당신과 보냈던 순간 모두가 아름다운 추억이었다.
당신이 자못 진지한 목소리로 물어왔다. 다 갈라진 목소리에 간절함이 짙게 묻어나온다. 그—안드로이드가 희미하게 미소지었다. 그는 벤자민이다. 누가 뭐래도, 그는 벤자민이다. 그는 당신이 사랑하는 벤자민이다. 벤자민은 일말의 고민도 없이 당신에게 대답했다.
>>260 (전혀 당황하지 않았다는 듯 눈웃음 친다. (진실이 어떠할지는 모르나.) 차가운 감촉의 주인인 사이다캔을 당신 앞 책상에 내려놓는다.) 못 해. 그렇지만 너는 이길 수 있어. (검지로 캔 끝을 죽 민다. 알루미늄 캔 안의 음료도 손끝 따라 이리 찰랑 저리 찰랑 흔들리고 있을 터다.) 안 마실 거야?
>>262 입만 문제야? 오, 웬일이래. 그렇게 후한 평가를 다 해주고. (천덕꾸러기 특유의 웃음소리 내며 당신 앞자리에 털썩 앉는다.) 그래그래. 자판기 온도에도 져버리는 사람한테 들으니까 무섭다, 무서워. (하마터면 탄산 폭탄이 될 뻔한 캔을 가리키며 웃었다. 갈색 눈만은 당신을 향하였지만.) 내 거? 없어. (사이다캔이 주인한테 돌아가자 텅 비어버린 제 두 손을 활짝 펼쳐 보여준다.) 너 그 사이다캔 분명히 받은 거다? 어떻게 생각해, 내가 내 음료수를 안 들고 귀엽지도 않은 친구한테 사이다를 사준 이유가 뭐일 것 같아?
“히어로고 빌런이고 짜증나 죽겠어.” 서로 이름 다른 회사들이 층마다 호마다 들어찬 아파트형 공장 옥상. 옥상 정원이랍시고 꾸며두었지만 실상은 폐암행 급행열차가 출발하는 곳이라고, 방금 중얼거린 화자는 생각했다. 파란 밤하늘 아래, 담배 꽁초가 그득 들어찬 쓰레기통 옆에서 막대 사탕이나 물고 있는 신세. 그래, 야근 중인 신세다. 떡진 머리를 감추기 위해 푹 눌러쓴 볼캡 위로 후드까지 뒤집어쓰며 완벽 봉인, 퀭한 눈 밑 다크서클, 렌즈고 화장이고 신경쓸 겨를 없는 안경과 턱 밑에 걸쳐진 마스크. 누가 보아도 완벽하게 퇴근없이 며칠 연달아 일한 차림새다. 푹 쉬질 못해 연신 잠이 쏟아지니 사탕이라도 물고 밤공기 좀 쐬러 올라왔다. 그랬더니 타이밍도 좋지, 저기 높은 전광판에서 뉴스가 나왔다. 참고로 화자는 며칠 전 히어로와 빌런이 치고박고 싸우던 현장에 하필이면 출장가던 사수와 부사수가 있었고, 당연히 휘말렸다. 죽지는 않았다만 병원에 실려갔고 일은 고스란히 화자에게 몰렸다. 그러니 냉큼 궁시렁거리고 말았다.
“아... 돛대였네.”
담배 한 개비를 뜻하는 말이지만, 화자에게는 막대 사탕 하나를 뜻한다. 내려가서 먹을 사탕이 남았나 주머니를 뒤졌는데 안쪽에 박힌 먼지나 털었다. 뉴스는 계속 무슨 빌런이 나타나서 무슨 히어로가 어쩌고 저쩌고 떠들고 있다.
“그렇게 개박살을 내고 다닐거면 우리 회사나 개박살내주지.”
누구는 갖고 싶어도 못 갖는 잘난 초능력 가지고 범죄를 저지른 놈은 빌런, 초능력이랄게 없는 경찰을 도와 정의감 투철하게 빌런을 잡으러 다니는 초능력 보유자는 히어로. 빌런이 나쁜 놈은 맞는데, 둘이 투닥대며 개박살내는 꼬라지를 보니 평범한 소시민 월급쟁이에 불과한 화자는 둘다 아니꼬워 죽겠는 것이다. 정말 회사가 개박살나면 무직백수가 되겠다만, 당장 집에는 갈 수 있겠구나 싶은 생각 짧은 바람이 새어나왔다.
>>264 도시의 불빛은 사람의 아주 오래전에 회자되었던 이야기도 거부하고, 이제는 아무것도 살지 않음이 명백한 암석덩어리의 불빛만을 아주 조금 허용했다. 화자와는 다른 회사에 다니고 있지만 같은 건물의 이용자였으며, 당신을 꼬박꼬박 선배라고 부르던 이는 당신이 오기 전부터 옥상에 나와 담배를 한 대 물고있었다. 히어로와 빌런에 대한 이야기도 조용히 듣고 있던 이는 가벼운 미소를 지어주었으나 그것이 쓴웃음일지 예의상 지어준 미소일지는 받아들이기 나름일 것이었다.
" 저도 선배 말에 동감해요. "
담배불을 지져 양철 쓰레기통에 지져서 끈 이후에 기지개를 폈다. 끄으응-! 하는 힘겨운 소리. 정장을 말끔하게 빼입고, 광택이 나는 구두를 신고, 척 보아도 비싸보일법한 시계에 깔끔하게 정돈된 긴 머리카락을 보면, 아무리 보아도 둘의 관계상 선후배는 성립할 수 없었겠지만 하여튼 그 호칭은 한 사람의 억지로 줄곳 유지되었다.
" 하지만 선배. 혹시 정말로. 간절하게 초능력자가 내 삶에 엮였으면 좋겠어요? "
잔잔한 미소에 깜빡이지 않는 동공이 당신을 직시했다. 밤바람이 머리카락을 살짝 스치고 속눈썹을 건드릴지언정 눈동자는 흔들리지 않은체 당신을 보았고 눈꺼풀은 아주 미세한 떨림조차 보이지 않았다.
(심한 인체연구와 고문을 당한 듯 보이는 당신이 있는 곳으로 천천히 다가간다. 아무것도 없는 벽 쪽을 흘긋 살펴보고 차트를 향해 시선을 내린다.) 실험체. 깨어있는 것 알고 있어. (다짜고짜 당신의 볼을 후려친 뒤, 제 손을 털며 자리에 앉는다.) 새로 배정된 연구원인 오르카다. 오늘 기분이 어떻지?
(덜컥 날아오는 손찌검에 실험체의 고개가 크게 흔들린다. 고개가 돌려진 채 잠시 당신을 노려보던 실험체가 퉤, 하고 바닥에 침을 뱉어낸다.) 내 기분 따위 언제부터 신경 썼다고. (힘 없이 너덜대며 웃는다.) 혀 깨물고 뒤지고 싶은 거 간신히 참는 정도. 됐냐? (거칠게 비아냥댄다. 허나 심한 고문으로 기력이 부족한 듯 그다지 위협적으로 느껴지진 않는다.) 오르카고 나발이고. 시X. 전에 있던 놈은 내 팔 조져놓고 어디로 간거야? (작게 무어라 중얼거리는 실험체. 아마 전임 연구원에 대한 욕설인 듯 하다.)
>>267 (침을 뱉는 모습에도 무심히 바라본다. 기분을 물어보는 것은 언제나와 같은 질문임을 잘 알고있지 않냐는 듯이.) 어차피 되살아날텐데 뭐하러. 쓸데없는 말은 줄이고 일과에 집중해. (당신의 앞에 놓여있는 흰 의자 위에 앉아 차트를 몇 장 넘기며 안의 내용을 훝어본다.) 새뮤얼은. (말이 잠시 끊긴다. 귓가에 꽂힌 무선 이어폰에서 상부의 명령을 듣는 듯, 잠시 미간을 찌푸린다.) ...작별 인사를 남기진 않았더군. 무슨 작품을 남겼는 지 볼까. 왼팔을 내밀어.
(당신을 경멸에 찬 눈빛으로 바라본다.) 아주 별 것도 아니라는 듯이 말하는군. 그래, 영원히 죽지 않는 허수아비를 만들어냈으니 인간 위에 군림하는 신이라도 된 듯 하겠지. (실험체가 비웃으며 어깨를 들썩였다.) … (가만히 당신의 표정을 살피던 실험체가 고개를 까딱인다.) 새뮤얼, 그 인간이 도망치기라도 했나봐? 오, 아니면 내 평생의 바람대로 나가 뒈져준걸까? (묘하게 두 눈에 생기가 돈다.) 그래, 내가 항상 말해줬지. (별안간 목을 가다듬는 실험체.) " 새뮤얼. 네가 이 세상에게 해줄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은, 지금 당장 이 실험실을 뛰쳐나가 대가리에 총알을 박아넣는 것 뿐이야! " (연극을 하듯 과장된 목소리와 말투. 낄낄대며 웃고 있다. 전임 연구원을 심히 저주한 듯 하다. 그에게 어떤 일이 일어난 것일지, 진실에는 크게 관심이 없는 듯 하다. 그저 제 상상 속에서 싸늘한 시체가 되었을 새뮤얼을 떠올리는 데 열중하는 실험체.) …뭐, 왼팔? (갑작스레 예민한 목소리로 대꾸하는 실험체.) 네 전임 연구원이 아작을 내버린 내 왼팔 말이지. 그래. (당신의 명령에 불복할 생각은 없는 듯, 적의에 찬 목소리와는 상반되게 순순히 팔을 걷어 보여준다. 학습된 복종인 듯 하다.)
>>269 듣다 보니 이상한걸. 영원히 죽지 않는 존재가 어떻게 인간이지? 그건 아마도. (잠시 침묵. 그리곤 비릿한 미소를 짓는다.) 헛소리 할 정신력이 남아있어서 다행이야. 스스로를 허수아비라 생각할 줄도 알고. (생기가 도는 눈빛과 연극조의 말투는 무시한 채, 차트 속에 가려져있던 작은 주사기를 꺼내서 당신의 왼손목의 혈관에 주사한다. 그리고 말끔해보이는 당신의 왼손을 들어올렸다, 내렸다 하며 이리저리 살펴본다.) 상부의 명령이 있었다. 연구 결과는 충분히 나왔으니, 이제 자유롭게 풀어주라고 말야. 그래서 너의 꿈과 관련된 이야기를 해볼까 해. 여기서 나가면 뭘 하고 싶지? (희망을 주고, 부수는 행위는 몇 번이나 당했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의중을 파악하기 힘든, 평탄한 어조의 목소리다.)
잊었나? 네놈들이 자르고 붙이고를 몇 번이나 반복하기 전까진 나도 인간이었다는 걸. 내 태생은 평범한 인간이었다고! 신이 내려준 운명은 저주 받은 불사의 시쳇덩이가 아니라— (점점 격양되는 어조. 버럭 소리를 내지르려다 이내 갑작스레 말을 멈추고 만다. 그리곤 한참이나 침묵하며 무표정히 앉아있는 실험체.) 또 뭘 꽂아넣는거야. 지긋지긋해. (평온히 가라앉은 얼굴로 작게 욕설을 중얼인다. 반항의 기미는 보이지 않는다.) …뭐? 지금 장난하냐? (실험체의 눈빛이 떨린다. 내색하지 않으려 노력하는 듯 하나 효과가 있어보이진 않는다.) 나를, 내 몸을, 이따위로 만들어놓고, 지금 자유라는 말이 담겨? (별안간 헛웃음을 터트린다.) 니들 속이야 뻔하지. 또 이딴 말로 사람을 꼬드기고, 처참히 조져놓는 거. 뻔한 수법이지. (중얼이듯 말하는 실험체. 허나 동요된 것이 뻔히 보인다. 잠깐의 침묵 속, 무언가를 갈등하는 듯 불안한 낌새로 아랫입술을 잘근이던 실험체가 입을 연다.) 이 연구소에 불부터 질러버릴테야. (눈동자를 굴리며 주변을 살핀다.) 그리곤 고향에 가야지… (혼잣말로 작게 중얼인다.)
>>271 그럼 우리가 신이 내린 운명을 거역하기라도 했단건가? 그럴리가, 우린 한낱 인간이야. 너와 같은 인간. 그러니 편하게 생각해. 지금 이 상황, 대화조차 운명이었다고 말야. 그럼 이 운명 끝에 있는 것은 뭘까? (뭘 꽂아넣었냐는 질문은 무시한 채, 주사기 끝은 탁탁 털어 주머니에 넣었다. 당신의 감정이 쉴 새 없이 변해갈 때에도, 전임 연구원과는 다르게 표정 하나 바뀌지 않는다. 분노 하나하나를 실감하면서도, 안경알 너머로 당신을 바라보고 있다. 대답이 나올 때까지.) 이 연구소를 불지르는 정도는 새발의 피야. 포워드 코퍼레이션은 도시 전체를 장악 중이니까. 넌 또다시 금새 잡혀오겠지. (손목 시계를 흘끗 확인하고, 뒤이은 말에 피식 웃는다.) 네 말대로 사람을 꼬드기고 처참히 조져놓는 게 특기라고 하자. 왜 네 고향 사람들을 데려오지 않았을까? 윗분들에게는, 아주 재밌는 소재거리일텐데. (손목 시계를 톡톡 두드리며 작은 목소리로 속삭인다.) 1분 남았어. 꿈 이야기 좀 더 해봐.
입은 더럽게도 잘 놀리는구나. (쯧, 혀를 차내며 목소리를 내리깐다.) 오, 분명한 거역이지. 너희들은 엄청난 천벌을 받을거야. 한낱 인간 주제에 새장을 탈출하고자 한 죄. 교만의 댓가… (주사기를 정리하는 당신의 얼굴을 보며 말하는 실험체. 흡사 저주를 퍼붓는 것 같기도 하다. 제 몸에 주입된 약물이 무엇인지엔 관심 조차 없는 듯 하다. 실험체에겐 그닥 가치 없는 정보였던 걸 수도.) 뭐 어때? 난 세상의 악을 심판하겠다는, 그딴 원대한 계획을 세우는 게 아냐. 그저 내 인생을 난도질한 너희들에게 복수하고 싶을 뿐이지. 포워드 코퍼레이션이고 나발이고 상관 없어. 난 니들이 고통스럽게 죽기만 하면 돼. (힘없이 웃으며 당신을 응시한다. 곧게 꽂혀드는 시선에 앙심이 가득하다.) …알게 뭐야. (미간을 구기는 실험체. 잠시 침묵을 유지한다. '1분이 남았다.' 라는 말의 뜻을 생각하는 듯 하다.) 난 선생님이 되고 싶었지. 이 실험실에 들어오고, 아마도, 몇 달 후까지는 그 꿈을 가지고 있었을거야. 풀려나면 고향에 내려가 아이들을 가르치겠다는— (다시 입술을 잘근인다.) 내 꿈 얘기 따위 뭐가 중요하다고. (고개를 뒤로 젖히며 길게 숨을 내뱉는 실험체.) 내 꿈은 이미 산산조각 나 썩어버렸어. 니들 덕분에. (당신의 안경알에 비친 제 모습을 바라보는 실험체.) 그니까 엿이나 먹어. 그리고 고통스럽게 뒈지길. 죽어서도 망령으로 남아 저주해줄테니까. (킥킥대며 웃어대는 실험체. 허나 역시나 기력이 부족해보인다.)
>>273 (당신의 저주를 들으면서도 새삼 표정의 변화 하나 없다. 되려 그것은 관찰하고 있다는 생각까지 들 정도로. 주사를 놓고 난 다음에는 그저 하염없이 무표정한 얼굴로 당신의 이야기를 듣거나, 이따금씩 시계를 들여다볼 뿐이다.) 선생이셨네. 꿈 치고는 포기가 빠른 편이란말야. 그런데도 아직까지 욕을 할 기운은 남아있고. (차트에 꽂혀있던 펜을 들어 당신을 향해 겨눈다.) 넌 안죽어. 대신 노선은 확실히 해줬으면 해. 고통스런 운명을 받아들이고 꿈을 좇아 살아나갈건지, 그저 한톨의 먼지처럼 높으신 분들의 비웃음이나 사며 화장당할건지. (펜을 돌리며, 슬며시 웃는다.) 뭘 선택하든 운명은 하나 뿐이지만 말야. 1분 지났어. (순간, 온몸의 혈관이 끓어오르는 극한의 고통과 함께 당신의 눈과 귀, 입에서 피가 뿜어져나온다. 그리고 시야가 꺼매진다. 단지 한계를 넘어선 격통 때문이 아닌, 실험실 내부 전체적으로 불이 나간 듯 금새 붉은 비상전등이 켜진다. 사이렌이 울리고, 벽 너머에서 희미하게 소란스런 소음이 들려온다. 당신의 눈 앞에 있던 연구원은 어느새 연구복과 안경을 벗어던지고 검은 작전복 차림을 하고서 권총을 꺼내들었다.) 네 혈관에 있는 추적 나노봇을 배제하는 과정이야. 시간이 많은 편은 아니니 잘 들어. 모든 보안 프로토콜은 약 45초간 정지 상태일거야. 내 뒷편의 문을 열고, 보안 게이트 3개와 스무명 남짓의 무장병력을 뚫어내야해. 우리의 투자가 틀리지 않았다는걸 보여줘. 선생. (당신의 뒷편으로 돌아가 수갑에 권총을 발포해 당신의 팔을 자유롭게 해준다.) 정문으로 나오면 데리러 갈테니까 얌전히 기다리고 있어. (천장 구석에 붙어있는 환풍구에 뛰어들어가기 직전, 당신을 돌아본다.) 선생 고향, 데려다주지. 살아서 나오면.
그래, 어려서부터 물에 빠져도 주둥아리는 동동 뜨겠다는 말을 자주 들었지.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건 입을 나불거리는 것 밖에 없기도 하고 말야. (무표정한 당신의 반응이 웃기다는 듯 피식댄다.) 도통 알 수 없는 소리만 해대는구나. (당신의 말이 이해되지 않는 듯 다시금 미간을 찌푸리는 실험체. 허나 곧 극심한 고통에 몸을 크게 덜썩대기 시작한다. 단말마조차 내지를 수 없을 정도로 전신을 죄여오는 고통. 실험체가 크게 몸부림 쳤지만, 단단히 구속된 탓에 오히려 묶인 신체 부위의 피부만 긁히고 파일 뿐이었다.) …뭐야? 너, 연구원이 아니었구나? 이건 또 무슨… (아직 고통이 다 가시지 않은 듯, 한 마디 한 마디가 뚝뚝 끊긴다. 호흡 사이사이로 드나드는 숨소리가 터질듯 위태롭다.) …시X, 그냥 연구원의 장난감으로 뒈지는 게 편할 뻔했군. (어이가 없다는 듯 웃어대다 총소리에 크게 몸을 움찔이는 실험체. 저도 모르게 놀라 두 팔을 움찔이자, 자유롭게 허공을 휘젓는 감각이 낯설게 몰려든다. 멍하게 제 두 손과 발을 바라보던 실험체가 퍼득 정신을 차리며 당신을 바라본다.) 다시 만나면, 다 설명해야할 거야. 왜 나를 구해준건지, 니들은 또 뭔지! (혼비백산한 상황. 사이렌 사이로 실험체가 크게 소리쳤다.) 젠장, 젠장, 젠장. 45초는 너무 짧잖아... (약간 패닉한 듯 제 머리칼을 쥐뜯는 실험체. 그러나 곧 결심한 듯 잠시 심호흡을 하더니 곧장 당신을 지나쳐 뛰어든다.) 뭘 믿고 투자를 한건진 모르겠지만, 대박 한 번 보여주지. 난 고향에서도 제법 알아주는 승부사였거든. (당신이 환풍구에 들어가기 직전, 실험체가 장난스레 대꾸하며 실험실 문고리를 쥐었다. 고통에 의한 발작으로 너덜너덜해진 피부가죽이 눈에 띈다.) 에이 시X, 모르겠다. 그쪽이나 뒤지지 말아. (시끄러운 사이렌 아래, 실험체가 문을 열어제끼며 몸을 웅크렸다. 그가 새하얀 실험실을 탈출하는 경이로운 순간. 제대로 기능한 지 오래되어 비틀거리는 두 다리로, 실험체는 자유를 향하며 죽을 힘을 다해 뛰기 시작한다.)
아무도 믿지 않고 그저 옛 이야기로 치부되었던 전설은 사실이었다. 세계를 멸망시킬 거대한 파멸 앞에서 왕국은 물론이며 세계가 위기에 처했을 때, 예언을 떠올린 현자는 대대로 왕국에 전해지는 주술을 사용했고 이세계에서 온 존재를 왕국에 소환했다. 그 후 수많은 이들이 있었고 마침내 세계를 멸망시킬 거대한 파멸은 소멸했고 세계에 평화가 돌아왔다.
왕국은 물론이며 전 세계의 사람들이 평화가 되찾아온 것을 기념해서 긴 축제를 열었고 울음소리와 비명소리, 공포와 절망이 아니라 기쁨과 행복. 환호성과 웃음소리가 전 세계에 가득 퍼졌다.
허나 모든 사람들이 다 기쁨과 행복을 느끼는 것은 절대 아니었다. 이를테면...
"다 끝났잖아. 그런데 왜 우릴 돌려보내지 않는거야?"
이세계에서 온 존재 중 하나인 소년은 불만 가득한 표정으로 한숨을 크게 내쉬었다. 벌써 소환되고 2년이나 시간이 흘렀다. 17살의 나이에 이곳에 온 소년은 이젠 19살이 되어 성인을 앞두고 있었다. 2년이나 되는 긴 시간동안 열심히 여행을 하고 세계를 파멸시키려는 존재와 목숨 걸고 싸워서 세계를 구했건만 막상 원래 살던 세계로 돌아가지 못하고 있었다.
몇 번이나 원래 세계로 돌아가게 해달라고 했지만 마치 그럴 생각이 없다는 듯 슬그머니 회피하는 왕국 사람들을 떠올리며 소년은 괜히 더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물론 소년에게는 딱히 어머니나 아버지가 있는 것이 아니었다. 애초에 소환 마법으로 소환된 이들은 모두 부모가 없는, 어떻게 보면 현 세계에서 사라져도 크게 영향이 없을 이들이었다. 세계의 균형을 맞추기 위해 그런 이들로 선발되는 마법이라고 설명을 듣긴 했으나 그럼에도 사내는 전혀 납득할 수 없었다.
"대체 어떻게 해야 원래 세계로 돌아갈 수 있는거지."
작게 중얼거리며 소년은 왕국 도서관에서 이런저런 자료를 찾고 있었으나 아직 성과는 내지 못하고 있었다. 이대로 여기서 계속 살아야만 하는 것일까 크게 한숨을 내쉬면서 소년은 눈을 감았다.
/이세계에 소환되었고 세계를 구했으나 다시 원래 세계로 가지 못하고 이세계에 남아 원래 세계로 돌아가기 위해 자료를 찾고 있는 용사 일행 중 한명이라는 설정이야. 왕국 사람으로 이어도 되고, 혹은 이 소년처럼 똑같이 소환된 누군가여도 상관없어. 너무 뜬금없는 전개만 아니라면 어떻게 이어줘도 괜찮아! 맥커터는 사절이야.
소녀는 보드라운 두 손으로 둥근 입을 꼬옥 틀어 막고 미로 같은 도서관 책장 뒤에 숨어 숨을 죽이고 있었다. 시종들의 발걸음이 쿵쿵 거리는 요란한 울림에서, 토끼같이 작은 울림으로 멀어졌을 때. 그제서야 소녀는 달띤 숨을 작달만하게 헉, 토해내었다. 그저 조금 뛰었을 뿐인데. 소녀는 열이 오른 붉은 얼굴로 가쁜 숨을 작게 몰아내쉬며 진정시켰다. 휴--. 약을 먹은지 얼마 되지 않았으니 몇시간 정도는 괜찮을 거야. 도서관이라는 미로 속, 제 키보다 한참 높은 책장을 올려다보며 소녀는 말간 웃음꽃을 피운다. 신나라! 하지만 이곳에서도 감시중인 관리인이 존재하니 소리는 내면 안돼. 소녀는 한껏 들뜬 얼굴로 히죽 웃으며 까치발로 살금살금 관리인의 눈을 피해 옷자락을 살랑거렸다.
이 칸은 이미 다 읽었고, 여기는 시종들이 잔뜩 쌓아주던 지루한 책들이다. 이쪽도 모두 정독했고.. 한 손엔 보석이 박힌 구두도 쥐어들고 프릴삭스만 신은 채 살금살금 제가 좋아하는 구간으로 가는 일은 여간 어려운 게 아니다. 그것은 어린아이는 쉽게 다가갈 수 없게 저 안쪽, 저 안---쪽 구석 깊이 위치해 있기 때문에. 결코 아무나 할 수 없는 대단한 일이지만 어린아이가 아닌 곧 성인이 가까워져 가는 이 소녀에겐 크나큰 일도 아니지! 그래도 아직 2년은 남았던가? 파파랑 마마는 성장기인 소녀가 성장은 그대론데 해만 가는 게 골치인 듯 했으나 소녀는 그 재수없는 금발 머저리랑은 죽어도 혼약하고 싶지 않았으니 차라리 잘 된 일이라 생각했다. 그래도 키가 더 이상 자라지 않아 높은 책들을 읽고 싶다면 낡은 사다리 위로 가야하는 게 조금 무섭지만. 그리고 늘어나는 약들이랑... ...
"대체 어떻게 해야 원래 세계로 돌아갈 수 있는거지."
구석에 위치한 코너로 거의 다다랐을 때. 잡념에 빠져 손에 턱을 괴고 걷던 소녀가 코너를 돌자, 좁아졌던 시야를 갑작스레 꽉 채운 인물의 등장에 화들짝 놀라 소리없이 허둥거렸다. 간신히 구두를 떨어뜨리지 않고 품에 안으니 다행히 상대는 눈을 감아 소녀의 등장을 보지 못한 것 같았다. 가슴에 손을 얹고 한숨을 돌리던 소녀는 바닥에 구두를 가지런히 놔두고 경계의 눈초리로 소년을 빤히 관찰했다. 아무리보아도 제 또래 쯤으로 보이는 이목구비에, 근래 들어 자주 보이던 차림세. 그리고 무척 가느다란.. 속눈썹. 음. 이 속눈썹 본적 있어. 그것을 알아차렸을 때 소녀의 입꼬리는 조금 호선을 그렸을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아까, 뭐라고...
소녀는 소년이 눈을 뜨길 얌전히 기다렸으나. 잠시 뒤 궁금증을 참을 수 없었는지 앉아있는 소년의 맞은편에 서서 허리를 굽히고 소년의 얼굴 앞으로 손을 휘휘 흔들었다. 소년이 눈을 뜬다면 어느새 호기심으로 잔뜩 가까워진 서로의 얼굴 사이 거리에 깜짝 놀라려나. 그렇다면 소녀는 눈을 활짝 휘어 웃으며 검지를 입술에 가져다 대고 쉿, 하는 제스처를 취했을 터다. 소녀는 소년을 기억하고 있다. 호위 기사 같은 건 필요 없다고 여러차 말했지만 무참히 묵살 당하고 뒤를 좇으며 소녀를 지키던 그 소년을.
"돌아가요? 어딜?"
제대로 못 들었어. 소녀는 한껏 낮춘 사근사근한 목소리로 상냥히 물으며 무해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왕국의 공주인 소녀가 대대로 물려받는 마력으로 파멸의 봉인을 위해 같이 여행을 다녔다는 설정! 아니면 용사가 모험을 다닐 땐 제외하고 가끔 결정적인 순간에 구해주었다는 설정! 정도로 썼는데.. 마음에 들 지 모르겠네 🥺..
잠시 고뇌하던 찰나 인기척이 정말로 가깝게 느껴졌다. 물론 여긴 도서관이니 사람이 오가는 것은 전혀 이상할 게 없었다. 허나 그 인기척이 정말로 가까운 곳에서 느껴졌기에 소년은 의문을 가지고 눈을 떴다. 그러자 보이는 것은 낯익은 소녀의 모습이었다. 깜짝 놀라 자신도 모르게 입을 열려는 순간, 소녀가 쉿 하는 제스쳐를 취하자 소년은 얼떨결에 입을 꾹 다물었다. 이 왕국의 공주인 그녀가 대체 왜 여기에 있는지 영문을 알 수 없어 소년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두 눈을 깜빡이다 들려온 물음에 대답했다.
"그거야 원래 살던 세계죠. 알다시피 저는 이 세계 출신이 아니니까요."
함께 세계를 구하는 여정을 떠난 일행인만큼 자신이 다른 세계에서 왔다는 것을 그녀가 모를 턱이 없었기에 소년은 굳이 부연설명을 하지 않았다. 무엇보다 소년이 들고 있는 책은 이동 마법에 대한 책이었으니 그 책을 보면 더더욱 상황을 이해하기 쉬웠을지도 모른다. 아무튼 자신과 비슷한 나이로 보이긴 하나 일단 공주인만큼 소년은 나름대로의 예를 갖춰 이야기했다. 왕국에 처음 소환되었을 때 아무 것도 모르고 바로 반말을 한 시절과 비교하면 크게 발전한 모습이었다.
"물론 제가 없어져도 제가 살던 세계에는 크게 영향이 끼치지 않을 거라고 했지만... 그래도 저는 여기 사람이 아니니까요."
결론은 돌아가고 싶다는 말이었다. 눈을 감고 원래 살던 세계를 가만히 떠올리던 그는 한숨을 약하게 내쉬다 다시 눈을 뜨고 그녀를 주시하며 이번엔 자신 쪽에서 물었다.
"그러는 공주님은 여기서 뭐하고 계시나요? 찾는 자료라도 있으신가요? 이곳의 자료는 잘 모르지만 찾는 것이 있으면 같이 찾아볼게요. 김에 원래 세계로 돌아갈 수 있는 단서가 발견되면 좋기도 하고요."
그래도 왕국에서 관리하고 있는 도서관이니 뭔가 단서는 있을 거라고 굳게 믿으며 소년은 밝은 표정을 보였다. 반드시 자료를 찾아서 원래 세계로 돌아가겠다는 듯이.
/일단 전자를 가장 먼저 생각한 것 같아서 그 설정의 여캐라고 생각하고 이어봤어! 나는 막 갑자기 뜬금없는 느낌..그러니까 소년이 알고 보니 망상에 빠져있는 환자였다. 같은 느낌의 맥커터만 아니면 얼마든지 오케이야!
남자는 신을 믿지 않았다. 모든 어른이 입에 올려 간절히 부르짖는, 신—그 짧은 단어가 얼마나 복잡하고 안쓰러운 마음들을 담고 있는지 이해하기 시작했을 무렵부터, 사실 남자는 거짓으로 손을 모아쥐곤 존재하지 않는 그 존재를 남몰래 비웃었다. 그 어린 눈은 이해하기 어려웠던 것이다. 불가능하리라 믿는 일들을 이루어달라 빌고 또 비는 그 모습들이. 죽음이 선명한 인간들 두고서 동정심을 팔아 실체 모를 누군가에게 바짝 엎드리는 모습이. —신은 없어. 그러니 그렇게 기도해봐야 그 누구도 듣지 않을거야. 병들어 죽어가는 여자의 옆을 지키던 남자의 아버지는 묵묵한 눈동자로 그리 말하던 어린 남자를 바라보았다. 샤오첸, 너는 아마 지옥에 갈테다. 아버지는 묵묵한 눈동자로 그리 말했다.
사후 지옥에 떨어지길 간곡하며 죄악을 저지르는 악취미는 없다. 그렇다고 무고한 자들의 고통을 간식 삼는 고약한 성향을 타고난 것도 아니다. 그런 거창한 명분 따위는 없었다. 일종의 숙명인 것이다. 천재 음악가들이 미친듯이 악보를 써내려가며 손가락이 부서질 듯 건반을 내치는 것처럼. 운명이 내린 숭고한 마음을 하사받아 온 세상의 불쌍한 이들을 굽어살핀 세기의 성인들처럼. 모든 것이 완벽했던 하루, 한 순간의 발걸음으로 트럭에 치여 생명이 식어버린 이름 모를 누군가처럼. 그것이 그의 운명이었고 숙명이었으며 거부할 수 없는 순리였다. 도시에 혼란을 내지르고 핏물을 뒤집어쓰는— 그리고 언젠가 선의 발길에 짓밟혀 목숨줄이 끊기고 말—
그것이 그가 생각한 자신의 운명이었다.
" 저번에도 말했지. 총은 그렇게 쥐는 게 아니라고. "
검붉은 피냄새가 났다. 한 번 스며들어 쉽사리 빠지지 않을 듯한 죄악의 냄새였다. 낙인처럼 뒤따라 자취를 남길 듯한 그 냄새가, 당신의 머릿 속을 아찔하게 주무른다. 남자는 그런 당신을 물그럼 바라보았다. 진득한 핏물이 묻은 둔기를 거칠게 바닥으로 내던지며, 남자가 천천히 당신을 향해 걸어가기 시작했다. 잔뜩 상처가 난 구두와, 구겨진 정장 바지, 말려 올라간 소매와, 핏물과 흙먼지로 더러워진 셔츠. 어딘가 피곤한 기색의 남자가 나직히 중얼이며 제 머리칼을 쓸어올렸다. 손바닥에 묻어있던 옅은 핏물은 머리칼과 엉켜 굳어버리고야 만다.
남자가 당신의 손을 덮어쥐었다. 결코 거친 행동은 아니었다. 당신은 어찌 느꼈을지 모르겠다만. 당신의 손등 위로 손을 포갠 남자가 천천히, 방아쇠에 올려진 손가락을 느릿히 밀고 힘을 주며 손바닥을 긴장 시켰다. 그리곤 상처난 왼손으로 총을 받쳐, 천천히 들어올리기 시작한다.
" 머리를, 조준해야지. "
남자가 천천히 상체를 기울였다. 꼿꼿이 당신의 눈을 마주하며. 한 번도 발포된 적 없는 차가운 총구가 남자의 이마에 닿았다. 남자가 왼손을 조금 움직여 방아쇠에 닿은 당신의 손가락 위로 제 엄지를 포갰다. 금방이라도 힘을 주어 방아쇠를 눌러버릴 듯, 그의 손에는 가볍게 힘이 들어가있다. 시커먼 눈빛이 당신을 주시한다. 방아쇠가 눌려 목숨이 터져버릴 그 순간에도 당신을 바라볼 듯 그 눈빛이 형형하다.
" 아직도 어려운가? "
남자의 목소리는 항상 낮고도 조용했다. 그리고 높낮이가 없이 단조로웠다. 때문에 그가 어떤 감정을 가지고 있는지, 무엇을 느끼고 있는지, 알아채기가 무척이나 어려웠다. 항상 자신의 의도를 꽁꽁 숨겨 내주지 않는 인간이었다. 마치 선글라스를 낀 인간의 눈을 마주하는 것과 같았다. 그의 말이 분명 자신을 향하고 있음은 알았지만, 도통 그것이 내 마음의 어디를 겨냥하고 있는 지는 알 수가 없었다. 남자가 느릿히 시선을 깔아 당신의 손을, 천천히 움직여 목선을, 그리고 다시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왼손을 내리고 오른손으로 다시 한 번 당신의 손을 포개어 쥔다. 살며시 힘을 주어 총구를 떼내었다— 남자는 작게 차가운 금속과 인간의 살이 맞부딪히는 소리를 내며 느릿히 입술을 떼낸다.
>>281 다시 한 번, 원수의 앞에 섰다. 그토록 굳게 다짐하고 수도 없이 연습했음에도 그 머리통을 꿰뚫기 위해 총구를 겨눈 순간, 덜컥 겁이 나서 자세가 흐트러지고 몸이 굳어버렸던 첫 대면이 떠올랐다. 그 날도, 저 남자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모를 얼굴을 하고서 스승이라도 되는 양 훈수를 뒀었다. 원수가 더러운 손을 뻗어 내 손을 더듬는다. 벌레가 몸을 타고 기어오르듯 불쾌했다. 금방이라도 방아쇠를 당겨버리고 싶었지만 몸이 말을 듣질 않았고, 욕이라도 하고 싶었지만 목소리도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숨이 막히는 듯 했다. 내가 하려는 일은 복수라고, 사람을 죽이는 일이라고 몇번이고 되뇌고 마음을 굳게 먹었다고 생각했는데도, 여전히 두려웠다. 이깟 쇳덩이 때문에 한 순간 명을 달리해버린 선생님의 모습이 자꾸만 눈앞에 선해서, 제 정신을 유지하는 게 고작이었다. 그런데, 남자가 느닷없이 상체를 숙이더니, 총을 쥔 내 손을 자기 머리로 가져갔다. 그러더니 총구를 이마에 대는 것이었다. 너무나도 뜬금없고, 또 멍청한 행동에 숨통까지 옥죄어오던 긴장이 탁 풀렸다. 남자가 무어라 말하고 있다는 것은 인식했으나, 그 내용이 머리에 들어오지 않았고, 원수에게 붙들린 손도, 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눈빛도 전혀 신경쓰이지 않았다. 방금 전까지도 한껏 민감해져있던 신경으로부터 자유로워진 것처럼. 비록 상대의 멍청한 행동으로 인한 것이라 해도, 모처럼 찾아온 기회를 놓칠 수는 없었다. 깊이 숨을 들이마시니 그 어느때보다도 머리가 맑아졌고, 터질 듯하던 심장의 고동도 진정되었다. 총구는 남자의 이마로부터 멀어졌으나. 아주 가까웠다. 그런 상태에서, 남자가 입을 열었다. 아직도 어려운가. 대답 대신, 총을 거머쥔 손에 힘을 주고, 정확하게 남자의 이마를 겨누었다. 그러고는, 과녁을 상대로 연습했을 때보다도 거침없이 방아쇠를 당기고, 놓았다. 그제서야, 그 어느 때보다도 또렷한 목소리를 낼 수 있었다.
"아니, 쉽네."
나의 목소리는 소음기를 장착했음에도 모든 청각을 마비시키는 듯한 총성에 묻히고 말았고, 이런 멍청한 놈 때문에 선생님이 돌아가시고 내가 그렇게 애를 먹었다는 것에 화가 났지만, 드디어 해냈다는 고양감이 모든 복잡한 감정을 압도했다.
>>284 응 >>281 맞아! 불사신 설정이라도 넣어서 이어야하나~ 싶었는데 아무래도 >>282가 다시 살아나는 전개를 원할 거 같진 않고...😂 >>282에게는 조금 미안하지만 너레더가 원한다면 >>281에 이어줘도 괜찮아! 나야 고마운걸!
>>282도 분위기 있게 이어줬지만 아무래도 내 캐릭터를 확정형으로 죽여버려서...😅 어떻게 받아주던 상관 없다고 하긴 했지만 그 상황에 어떻게 더 이어갈 방법이 없을 거 같아ㅠ 이미 죽이고 후련해하는 결말로 써줘서 내가 다시 살린다 한들 >>282한테는 맥빠지는 레스일 거 같기도 하고... 미안해!ㅠㅠ
함박눈이 쏟아지는 하늘을 바라보며 여자는 느릿히 담배연기를 내뿜었다. 약간의 사과맛, 그리고 매캐하게 몰려드는 텁텁함. 화한 연기가 목구멍을 쓸고 지나갈 때마다 턱 막힌 속에 조금씩 숨통이 트이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새하얀 눈길 위로 잿가루가 떨어지고, 이내 필터 근처까지 타들어간 담배가 그 위로 지저분한 발자국을 남긴다.
" 어, 왔어? "
여자가 양주머니로 손을 넣으며 인사를 건넸다. 너무도 익숙한, 때문에 지루하리라 느껴질 수 있을 정도로 형식적인 인사였다.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는 보다 설레고 행복한 마음으로 인사를 건넸지. 여자가 눈 쌓인 지붕 밖으로 걸음을 내딛으며 생각했다. 처음 만나던 그 날엔 똑같이 하얀 함박눈이 내렸고 바람이 뼛 속에 스밀듯 차가웠다. 옛날의 그녀는 추위를 많이 타던 여자는 오늘보단 옷을 단단히 껴입었고 담배를 무는 대신 새하얀 입김을 바라보며 남자를 기다렸다.
" 좀 늦었네. "
둘은 항상 그러했듯 동네의 작은 카페를 향해 걸었다. 둘 사이의 암묵적인 약속과 같았다. 그들은 늘 그랬듯 카페에 갔다가 저녁을 먹고 공원을 산책할 것이다. 어쩌면 눈에 보이는대로 가볍게 술을 마시거나 영화를 보거나, 조금 질색하며 노래방을 찾을지도 모른다. 매일 아침 울리는 알람을 맞이하듯 지겨움을 참고 여자는 걷는다. 어쩌면 남자도 같은 생각을 하고 있을지 모른다. 여자는 어느순간부터 남자에게 설렘을 느낄 수 없었고 사랑이라 믿어왔던 감정에 의심이 들기 시작했다. 그언젠가 인생에 단 하나 뿐인 사랑이라 믿었던 과거를 생각한다면 우습기 짝이 없는 일이었다. 너같은 사람은 없을거야. 여자는 문득 어느날 밤 남자가 속삭였던 말이 떠올랐다. 그래 맞다. 아마 남자에게 그녀와 같은 여자는 다신 없을 것이다. 그 날의 그녀와 같은 여자는 말이다. 지금의 여자는 그날의 그녀가 아니었다. 남자도 마찬가지였다.
어느순간부터 여자는 남자가 약속 시간에 늦는 것에 화를 내지 않았다. 대신 휴대전화를 보고 있는 시간이 많아졌고 남자 앞에선 잘 물지 않던 담배를 피며 남자를 기다렸다. 어찌되었던 그것은 여자에게 있어, 더이상 남자가 필요 이상으로 감정을 낭비할 수준의 대상이 아니게 되었다라는 뜻이었지만, 아마도 남자는 그 의미를 알지 못했을 것이다. 여자는 남자를 사랑했다. 사랑이란 단어에 본질적인 의문이 들기는 했지만 어찌되었건 사랑하긴 했다. 다만 불 같이 타오르던 그것이 조금 식은, 혹은 시들어버린 기분이었다. 밤마다 그가 떠오르긴 했으나 설레고 행복한 감정보다는 어딘가 불안하고 초조한 마음이 불쑥 튀어나올 때가 많았다. 그 감정의 근원이 어디인지 알지 못해 가슴이 답답할 때도 있었다. 그저 그와 내가 오래 사랑했으니, 조금 서로에게 편안해진 것일 거라고. 다음 날 눈을 떴을 때 그 사랑이 조금 더 불타길 염원하며 잠들었고 눈을 뜬 아침 휴대전화 액정 속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 남자의 이름에 여자는 차갑게 식은 한숨을 내쉬어야 했다.
여자는 점점 남자가 없는 미래를 상상하기 시작했다. 그저 어느순간부터 여자의 주변에 안개가 끼어 그 누구도 보이지 않는 기분이었다. 그렇게 혼자가 된 자신이 자연스레 상상갈 즈음 여자는 멀리서 나타나는 남자의 얼굴을 보아도 아무런 감흥을 느낄 수 없게 되었다.
" 몇 달 뒤면 우리 5주년이더라. "
여자가 무심히 말했다. 아직 여자의 휴대전화 한 켠을 차지하는 디데이 어플 위젯에서는 그들의 사랑이 선명한 붉은 빛을 띠고 있었다. 어차피 관심도 없었을테지만. 여자가 속으로 말을 삼켜내며 살며시 남자의 얼굴을 살폈다. 결코 기대를 거는 눈빛은 아니었다. 여자가 양주머니 속으로 더욱 손을 깊게 찔러넣으며 아주 조용히 한숨을 내뱉었다. 단단히 엉킨 실을 곧장 잘라버리고 싶은데, 손잡이가 딱딱한 가위를 쥘 용기는 나질 않았다. 남자와 여자는 계속해서 걸었다. 대략 10cm 정도 떨어진 거리를 유지하며, 이제는 익숙하게 맞추어진 서로의 보폭으로 걸었다. 그러나 그들이 바라보는 시선의 보폭은 달랐다.
" 오늘은 좀, 춥네. "
어릴 적의 여자는 추위를 많이 탔다. 때문에 여러겹 옷을 껴입고도 두툼한 목도리나 모자를 쓰곤 했다. 약 오 년의 세월이 흐르며 여자는 더이상 목도리는 매지 않아도 될 만큼 추위를 느끼지 못하게 되었으나, 남자는 매년 겨울마다 두툼한 목도리를 선물로 주었다. 그 때마다 여자는, 늘 그렇듯 따뜻한 미소를 지으며 목도리를 받았다. 여자가 허전한 목덜미를 더듬으며 말했다. 버티지 못할 추위는 아니었다.
# 권태기가 온 커플 느낌! 여자는 헤어짐을 생각하고 있으나 직접 뱉을 용기는 아직 없는 상태. 너무 무맥락만 아니면 다 좋으니 편하게 이어줘.
더이상 인생에서 보고싶지 않은 기후 중 하나였던 함박눈은, 로맨틱이란 단어를 뇌에서 슬슬 지워버리기 시작한 남자에게는 그저 기분나쁜 진눈깨비랑 별 다를 바 없었다. 가까워진 그녀 곁에서 언제 맡아도 익숙치 않은 담배 냄새가 나도 얼굴을 잠시 찡그릴 뿐 더 이상의 언급은 없었다. 아무래도 상관 없지 않나, 하는 생각 뿐이었다.
"미안. 길이 좀 막혀서."
거짓말에 가깝다. 약속은 했으니 가겠다만 그에겐 슬슬 사랑하는, 아니 어쩌면 사랑했던 여자보단 아침의 잠이 더 달콤하게 느껴졌으니까.
왔냐는 말에도 그저 고개만 끄덕인 뒤에 슬슬 신물이 나는 그 카페로 가게 될 것 같다. 저 카페의 아르바이트생이 몇 번 바뀌었는지도 이제 알 것만 같은 남자는 오늘도 결국 여자를 데리고 카페 쪽으로 향했다. 너무도 당연하고 기계적으로.
별 다른 안부도 묻지 않았다. 그걸 묻는 것으로 여자가 기분나빠할것이라는 생각도 들었고, 이젠 그녀에 대해서 그다지 궁금한 것도 없었기에 묻지 않았다. 전날 밤에도, 아마 몇년 전의 그들이었다면 밤새 서로가 얼마나 소중한지 이야기하고 감정을 확인했을 것이다. 서로에 대해서 모르는게 많았고 알고싶은 마음도 많았었다.
하지만 남자는 이제 그렇지 않았다. 알아서 잘 살겠지. 그래, 그녀는 그럴 것이다. 객관적으로 봐도 그녀는 퍽 예쁜 편이었다. 그런 여자가 나를 사랑한다는 사실 자체가 너무나도 벅차, 남자는 해본적도 없는 일을 다양하게 도전해봤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부족함이 없도록 모든 일에 최선을 다했다.
"오래도 사귀었네."
5주년. 서로가 서로를 사랑하고 애인이 되기로 선언하고서부터 5년. 10년이면 강산이 변하는데 5년. 강산이 둘다 변하진 않아도 어느 한쪽 정도는 변하는 시간이었다. 그런 와중에 얄팍한 사람의 감정과 심리가 변하는 것은 그리 놀랄 일도 아니었다. 남자는 그 5년의 시간을 살아가면서도 잊고 있었다. 디데이 위젯도 예저녁에 지워버렸으니까.
"좀 따뜻하게 입고 오지 그랬냐."
마치 동성 친구에게 막 대하듯 나오는 어투는 5년 전의 남자에게선 상상도 못할 언동이었다. 여자가 조금이라도 춥다고 하면 금세 호들갑을 떨고, 손재주 하나 없던 남자가 뜨개질까지 하며 손수 짠 목도리를 자랑스레 그녀의 목에 걸어주던 지난날들은 이제 남자에게서 자취조차 찾아볼 수 없었다. 뜨거운 도파민의 작용은 날씨만큼이나 차갑게 식어버린 듯 했다.
남자는 외투 주머니 안에 든 뭔가를 꽉 붙잡았다. 겉으로는 냉정함을 가장하고 있었고, 스스로에게 이미 사랑따위 다 식지 않았냐며 다그쳤다. 그러나 불이 꺼지고 잿더미 속에 빨갛게 빛나는 잔불처럼 무엇인가가 남았는지, 남자는 그것을 놓지 못했다. 남자는 자기 자신이 생각해도 참 간사하고 한심했다. 그런 남자에게, 5년 가까운 세월간 함께한 여자는 지나치게 완벽했다.
아니, 세상에 죽일 사람이 그렇게 많아요? 어째 하루가 멀다하시고 송장들을 가져오시는 것 같네요. 워커홀릭이신가보다. 아, 허브티 마실래요? (환히 웃으며 화분들을 정리하느라 흙이 묻은 목장갑을 벗는다. 찻주전자를 찾으러 꽃집 안쪽에 잠시 들어갔다 나왔다.) 시체는 거기 두세요.
>>290 요새 미팅이 좀 잦네……. (남자가 캡모자를 벗어 꽃화분이 여러 개 놓인 트롤리에 올렸다. 유리온실에 얼굴을 비춰 보며 눈가에 튄 피를 닦아낸다.) 어, 고마워. 따뜻한 걸로. (찻주전자를 가져오는 그를 바라보며 날서있던 눈빛을 가라앉힌다.) 오늘은 여기 그냥 둬? 영업 끝났어?
여자는 남자의 대답에 굳이 대꾸를 하지 않았다. 오늘 날씨가 이런데 좀 더 빨리 나올 수 있었잖아, 또는 너 그 말만 몇 번째인지 알아? 울컥이며 올라오는 말들은 많았고 머릿 속은 소리 없이 돌아가는 중이었지만 여자는 늘 그랬듯 입을 닫는 것을 선택했다. 과거에는 올라오는 생각들을 전부 뱉어내고 불만을 드러내기도 했다. 혹은 거짓이 아니냐 의심하기도 했다. 상대의 말이 거짓일 것이라 단정한 채 날카로운 말을 내뱉기도 했다. 사실 그것은 상대의 잘못에 대한 분노보다는, 이만큼이나 서운하니 나를 봐달라는 신호의 일종이었을 것이다. 상대에게는 그저 귀찮고 지긋지긋한 언쟁으로 보일테지만. 조금만 더 이렇게 해줬더라면— 그 행복한 상상 속에서라면 둘은 영원토록 행복하게 사랑했겠지. 현실은 결코 꽃밭이 아니었다.
카페로 향하는 길의 정적이 무거웠다. 오늘 아침은 어땠는지, 오는 길에 별 탈은 없었는지. 먼저 꺼내기도 혹은 묻기도 하던 그 질문들이 전부 부질없게 느껴졌다. 남자도 그랬겠지. 약간 느린 걸음으로 침묵하는 남자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채 말하지 못한 질문들과 궁금증이 남자의 발자국 위로 살포시 내려앉았다. 여자는 천천히 남자의 발자국에 맞춰 그것을 밟아내리며, 꺾어진 기대를 시든 꽃 송이처럼 쥘 뿐이다. 남자는 오늘도 여자에게 궁금한 것이 없었다. 그녀에 대해 알고 싶은 것이 없었다.
" 그러게. 어릴 때부터 사귀었으니까. "
그 시절의 사랑을 한순간의 불장난이라 치부하진 않는다. 그녀에게는 진심으로 느껴진 사랑이었다. 서로를 알아가고, 종종 상대를 생각하며 무엇을 하고 있을지 궁금해하고, 잠이 오지 않는 날 지나간 그 사람과의 추억을 되짚으며 웃고, 그러다 사랑임을 깨닫고. 평범하나 특별한 추억들이 결코 가벼운 순간의 감정일 리 없다. 하지만 인간의 무서운 점은 그리 특별하고 애틋한 감정도 언젠가는 사라져버린다는 점이었다. 10년이면 강산이 변한다지만 외향이 깎이고 닳을 뿐 그 본질은 영원하다. 그러나 그들의 사랑은 깎이고, 닳다가, 결국에는 버티지 못하고 자멸한 것이다. 여자가 작게 뜸을 들이며 대답했다. 첫만남의 강렬한 기억 따위 남자에게 남아있을 리 만무했다.
" …그러게. 깜빡했네. "
여자가 목덜미를 매만지던 손을 움츠리며 대답했다. 무언이 잠깐 지나간 늦은 대답이었다. 남자는 자신이 선물한 목도리가 어느순간 눈에 보이지 않아도 그것에 대해 궁금해하지 않았다. 언제부턴가는 단 한 번도, 그가 선물한 목도리를 두르지 않고 나타나기 시작했으나 그 뿐이었다. 변화를 알아달라는 작은 외침은 그렇게 끝이 났다. 여자는 꺼져가는 잔불을 바라볼 수 있었으나 어떠한 행동도 취하지 않았다. 장작을 더 가져오지도, 불씨를 피우지도 않았다. 그저 제 손이 더러워지기 전에 먼저 불길이 꺼지기를. 그리고 무시히 그 위를 새하얀 눈더미로 덮을 수 있기를. 잿가루가 날려 애써 덮은 눈길 위를 더럽히지 않길 바랬으나 그것은 여자가 어찌할 수 없는 영역이었다. 그저 새하얗게 잊을 수 있길 기도할 수 밖에.
" 너 그 날 생각 나? "
여자가 걸음을 조금 높여 남자의 곁으로 다가가며 말했다.
" 우리 처음 학교에서, 마니또 하는데 너가 내 사물함에 사탕 넣다가 걸렸잖아. 근데 또 하필 화이트데이라 애들이 이상하게 몰아가고. 맞아, 동호였지. 너 친구. 그 애가 그렇게 바람을 잡는 바람에. "
고등학교 2학년 때의 추억, 그게 우리의 첫 만남이었는데. 여자가 넌지시 남자를 바라보며 물었다. 여자에게는 잊기 아까울 애틋한 추억이었기에. 그 불씨가 완전히 꺼지기 전 다시 한 번 되새기고파 답지 않게 수다스러운 말투로 묻는다.
# 아냐 이런 분위기를 원했어!! 이어줘서 고마워!! 나이대를 어떻게 잡을까 하다가 대충 20대 초반에 사귀어서 20대 중후반이 된 나이라고 생각하고 적었는데 괜찮지...?🥺 친구로 지내다가 연인으로 발전한 케이스겠네.
서로는 지쳐갔다. 열렬한 사랑에 완전히 불타버려, 이제는 한 팔을 들어올리면 잿가루가 되어 무너질 상태가 되어버린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남자는 그것을 다시 한번 실감했다. 그녀는 서운함조차 이제 내비치지 않았다. 물론 그렇겠지. 좋아하지도 않는 인물에게 '더 일찍 못 봐서 너무 서운해' 하진 않을테니까.
오랫동안 사귄 연인들은 어느새 두 가지로 나뉜다. 정말로 가족처럼, 부부가 그러하듯 서로가 있는 것이 너무도 편하여 그런 하나가 된 사랑을 이어가거나. 아니면 그 사랑의 방식을 변화시키는 시련을 이겨내지 못하여 천천히 멀어져가거나. 우리는 후자에 가까울것이다. 남자는 생각했다.
언제부터인가 여자는 남자가 직접 짠 목도리를 하고 나오지 않게 되었다. 그런 적은 사랑이란 감정이 아직 서로에게 남아있던 시절에는 상상도 못했던 일이었으나 지금에 와선 한없이 평범하게만 받아들여진다. 아마 이젠 자신이 선물해준 물건마저도 거추장스럽고 부끄럽겠지. 내가 짜준 넝마같은 목도리에서 콩깍지가 벗겨질 때도 되었지. 남자는 그런 생각을 했다.
"무슨 날?"
그렇게 행동하려는 의식 없이, 자연스레 남자는 다가오는 여자의 몸동작에 맞춰 자신도 슬쩍 다가서서 눈을 맞췄다. 이제는 이 버릇을 버려야겠다고 생각한 남자지만, 그 오랫동안 몸에 새겨진 버릇은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아, 그때... 맞아. 동호였어. 난리도 아니었지... 한동안은 우리 둘이 말만 섞어도 애들이 막 사귄다느니 어쩌느니 그랬고. 그 이후로 오히려 서로 말도 많이 섞고 그랬었지. 마니또가 효과가 있긴 있던거 같더라."
덩달아 나도 말이 많아졌다. 옛날 생각은 사람의 입을 더 가볍게 만들어주나보다. 그때. 서로에 대한 존재에 관심도 딱히 없었을 때였다. 마니또인지 뭔지 잘 모르겠고 화이트데이도 의식하지 않던 그 때. 남자는 그냥 지나가다 들은 말로 '여자가 이런이런 사탕을 좋아한다' 정도만 기억하고 있었을 뿐이었다. 그러나 그 타이밍과 선택은 남들의 눈에, 특히 날 놀리는걸 좋아하던 그 친구 눈에는 전혀 다른 뜻으로 보였을 것이다. 그렇게 얽히기 시작한 두 사람에게 그 사건은 어쩌면 자기 실현적 예언처럼 움직였었다.
"아, 그래. 나중에 동호 그 놈, 술마시다가 나한테 그러더라. 사실 걔가 널 좋아했었다고. 그 녀석 입에서 나온 말이라 그렇게까지 말의 무게가 있진 않았지만. 그때도 여친이 있던 놈이 무슨... 쯧."
그리고 남자는 문득 생각했다. 이 오랜 시간을 함께한 연인의 옆자리에 있던 남자가, 자신이 아니라 자신의 친구였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 지금의 나처럼 식어버린 사랑을 질질 끌어버리진 않았을거라고, 그리고 그걸로 여자를 더 괴롭히진 않았을거라고 생각했다.
무어라 계속 이야기를 하는 동안, 남자는 자신의 손이 여자의 손에 닿아 있었다는 것도 모르고 있었다. 그 촉감을 의식한 남자는 슬그머니 다시 손을 빼 자기 주머니에 넣었다. 버릇. 둘의 사이는 버릇이 되어버릴 정도였다. 이 버릇을 과연 씻어낼 수 있을까. 남자는 썩 자신이 있는 편은 아니었다.
# 마음에 들었다니 다행이네. 나잇대도 딱 적당하고, 나도 대충 그 언저리로 생각했어. 그리고 친구에서 연인이라니 이거 참 풋풋... 했던 이야기구만(코쓱
길고 긴 전쟁이 끝이 났고 세계엔 평화가 찾아왔다. 전쟁을 싫어하던 마족은 물론이요, 평화를 사랑하던 인간들도 모두가 두 팔 크게 벌려 만세를 외쳤고 대륙 전체에서 축제의 장이 열렸다. 목숨을 걸고 평화를 가져온 이들을 주변에선 영웅이라고 불렀으며 하나같이 감사의 인사를 올리며 눈물을 흘렸다. 그저 평화롭게 마을에서 살고 싶어 전쟁에 뛰어들었던 사내는 그 모습에 두 손을 휘저었으나 찬양하는 분위기는 도저히 막을 수 없었다. 며칠이나 낮밤 할 거 없이 축제의 음악소리가 들리고 술잔치가 열렸으며 하루하루 언제 죽을까 불안해서 살지 못했던 분위기는 이젠 너무나 평화로워 매일 밤 신나게 놀고 먹으며 편안하게 잘 수 있는 분위기로 바뀌었다.
그리고 그로부터 다섯 달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영웅이라고 불리던 이 중 가장 필두에 섰던 사내는 성의 복도를 정말 조용히 걷고 있었다. 주변 병사들에게 걸리지 않게, 그리고 주변 사람들에게 들키지 않게. 나라의 왕이 마땅히 대접과 보상을 해야한다고 성으로 들어오게 한 지 어연 다섯 달. 몇 번이나 이제 충분하니 성 밖으로 나가고 싶다고 이야기를 했으나 정치적 이유인지, 아니면 인재를 놓치기 싫어서인지, 그것도 아니면 정말로 이 정도 대접을 해야 마땅하다고 여겼는지 왕은 그 부탁을 허하지 않았다. 그저 이 성에서 앞으로 평생을 행복하고 편안하게 살면 되지 않겠냐는 말만 할 뿐, 수도를 떠나 원래 살던 고향으로 가는 것은 허하지 않았기에 결국 사내는 탈출을 감행했다.
'물론 여기에 있으면 확실히 맛있는 것도 많고, 삶도 평화롭고 대우 자체도 상당히 좋긴 하지만...'
그야말로 왕족 수준은 아니어도 준 왕족 수준으로 살아갈 수 있었으니 아마 동료들 중에선 이 삶을 택한 이도 있겠으나 애초에 마을에서 평화롭게 살고 싶어 전쟁에 뛰어들었던 이였다. 역시 그때의 그 삶이 더 좋다고 생각하며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게 복도를 살금살금 걷던 그는 인기척이 느껴지면 재빠르게 다른 방에 들어가고, 인기척이 사라지면 다시 나와서 살금살금 걸어가는 것을 반복했다. 당연하지만 정문으로는 나갈 수 없었다. 당연히 그쪽에는 경비병들이 있었으니까. 그렇기에 세 달 전부터 조용히 만든 정원의 비밀통로를 통해 성에서 빠져나갈 생각이었다. 정원이 바로 코앞이었고 정말 운이 좋게도 사내는 경비병들에게 걸리지 않고 정원에 도달할 수 있었다.
정원의 가장 가장자리 벽면의 벽돌을 빼내고 꾹 누르면 그 부분이 무너지며 밖으로 빠져나갈 수 있는 통로로 들어갈 수 있었다. 그 벽에만 도달하면 이제 이 성에서 탈출할 수 있으리라. 그 희망을 가지며 사내는 정원을 살금살금 걸었다.
/탈출을 감행하는 영웅이라는 설정이야! 동료도 좋고 성 사람도 좋고, 탈출을 도와줘도 좋고 방해해도 괜찮아! 맥커터만 아니면 뭐든 오케이!
겨울내음이 채 익숙해지기도 전에 봄이 왔다. 오랫동안 맡아 체향같았던 병원내음도 사랑스럽게 만들던 그 사람이 잊히기도 전에 다시 봄이 온 것이다. 아직 남아있는 겨울의 흔적을 더듬어 팔을 쓸어내렸다. 피부 위를 덮은 옷의 한기가 손끝을 타고 온몸에 내려앉았다. 후. 숨 하나에 그리움 하나. 오래 전 타계한 시인은 별 하나에 추억과 사랑을 세었으나 별이 저문 세상을 사는 여자는 숨결 하나에 추억과 그리움을 셌다.
머리를 가리는 니트 모자를 더욱 당겨 눌러쓰곤 품에 안은 흰국화 꽃을 세었다. 오늘도 주지 못했다는 이유가 내일도 볼 수 있는 이유가 되길 바랐다. 아직 차가 오기까지 한참 남은 버스정류장에 앉아 꽃다발을 껴안고 숨을 뱉었다. 희미한 꽃향기와 꽃잎이 숨결을 따라 코를 간질였다.
여자의 상념을 깨운건 전화소리였다. 전화벨이 울리는 걸 빤히 보기만 하다 화면은 배경화면으로 바뀌었다. 그러나 전화는 끈질기게 다시 울렸다. 갑작스러운 충동이 명치를 타고 올라왔다. 며칠째 무시하던 전화를 받은 것은 그 이유였다.
전쟁이 시작된지 사십 년이 지났다. 처음에는 마족과 인간이 각기 자신의 긍지를 지키기 위해 시작한 전쟁이었으나 지금은 그 어떤 명목도 명분도 없다. 끝이 보이지 않는 전쟁 속에서 이유도 망각한 채 서로를 해할 뿐이다. 본래 열 명의 대마법사가 존재하던 제국에는 현재 단 한 명의 대마법사만이 남아 전장을 지키고 있다. 이제 갓 스무살을 넘긴, 샤를로테 로즈. 대마법사로 임명되기 전부터 전쟁에 숱한 공을 쌓아올리던 천재 마법사. 지독한 전쟁 끝에 남은 수식어는 오직 그 뿐이었다.
" ...그러니 이제, 계획이 있으십니까? "
목소리가 들린 곳은 어두운 동굴이다. 그곳에 대마법사 샤를로테가 있었다. 밑둥이 조금 부서진 거대한 스탬프를 끌어안은 샤를로테에겐 지친 듯한 기색이 역력하다. 지저분한 옷가지와 크고 작은 상처들. 전투의 열세에 후퇴를 결정한지 십 분, 선두에 서있던 대마법사 샤를로테와 기사단장인 당신은 남은 전투인력들과 분산되어 외딴 산맥의 동굴로 숨어들게 되었다. 쫓아오는 마족 무리를 제압하고 사람들이 도망갈 시간을 벌어주기 위하여. 샤를로테와 당신은 감탄스러울 실력으로 훌륭히 마족들을 무찔러주었다. 하지만 단 두 명의 전세는 금방 뒤집히고 말았으니 급히 도망치며 발견한 곳이 바로 이 동굴인 것이었다. 아마 지금 밖은 대마법사와 기사단장을 죽이기 위해 혈안이 된 마족들이 어슬렁대고 있을테다. 잡히는 것은 시간문제. 그리고 그 동물 속에는 지쳐 기력이 떨어진 대마법사와 부상 당한 기사단장이 숨어있다. 그것이 이야기의 전부일 뿐이다. 샤를로테의 목소리가 다소 까칠하다. 오늘 처음 얼굴을 마주한 기사단장에게 어떠한 개인적인 감정이 있는 것은 아닐테다. 그저 오늘 너무 많은 마법을 사용하였고, 마법사의 체력을 고려하지 못한 당신의 페이스에 맞추어 도망을 다니다보니 지쳤을 뿐이다. 샤를로테는 낮게 한숨을 내쉬며 동굴 내벽에 몸을 기대었다. 시커먼 먼지들이 들러붙을 게 뻔하지만 그런 걱정은 안중에도 없다. 살아나갈 방법을 찾아야한다. 샤를로테의 머릿 속에는 오직 그 생각만이 절실했다.
" 팔다리 하나쯤은 날아가도 괜찮습니다. 괜찮은 수가 있다면 말해보십시오. "
섬뜩한 이야기를 눈 깜짝 하지 않고 내뱉는 샤를로테. 눈빛을 보아하니 진지한 모양이다. 여태 제국에서 대마법사들의 이미지라 함은, 잘난 척 심하고 엄살 심한 샌님. 그 한 마디로 정리될 수 있었다. 샤를로테는 그런 부류와는 조금 다른 모양이었으나...
" 아니면 여기서 명예롭게 죽는 게 나으시겠습니까? 그렇다면 괜찮은 주문들을 좀 외우고 있습니다. "
살아나갈 방법 따위 진작에 포기하고 만 것일까. 샤를로테가 머리칼을 쓸어넘기며 나지막히 말했다. 역시 눈빛을 보아하니 진지한 모양이다. 동굴 밖에서 무언가 시끄러운 소리가 들려온다. 마족이 포위망을 가까히 좁혀온 것일까. 샤를로테의 경계가 예민해진다. 스탬프를 쥔 손이 잘게 떨려오는 것 같기도 하다. 역시나 말은 담담하게 던졌으나, 아직은 죽는 게 무서운 모양이다.
# 대충 판타지 컨셉! 꼭 시리어스 하지 않아도 된다! 너무 성의 없이 이어주는 것만 아니면 뭐든 좋아~
기사단장은 이번이야말로 자신의 마지막이 되리라는 것을 직감했다. 그간 수도 없이 많은 그러한 직감이 그의 신경 구석구석을 간지럽혔고, 다행스럽게도 여태 전부 빗나갔었다. 이번에도 부디 그 직감이 빗나가기를 단장도 내심 바라고 있었다. 무가의 자제로써 전쟁이 한창때인 변방에서 태어나고 자라, 제 이름을 쓸 수 있을 시절부터 사관학교로 보내졌다. 졸업하여 성인이 되고 나서 얼마 지나지 않아 최전방의 기사로써 임관했고, 대부분의 초임 '기사'들이 전장에서 무의미하게 죽어나가는 것 대신 그는 몇 년이나 더 살아남았다. 그게 그가 기사단장이라는, 치열한 전쟁 탓에 공석일 때가 더 많은 자리에 앉은 이유 중 하나다.
솔직히 말해서 촉망받는 기사단장은 인근의 하급 기사에게도 팔씨름으로 질 자신이 있었다. 그를 살아남게 만든 것은 직감, 눈치, 교활함이나 마찬가지였다. 전장에선 결국 그게 힘보다 중요했었다. 그렇다 하더라도 평범한 이들에 비하면 괴물같은 힘에는 다를 바 없었지만.
광택따위 내지 않은 갑옷에는 피칠갑이 되어있었다. 그게 몽땅 마족들의 피였음에 둘 모두 감사해도 될 것이다. 타는 듯한 목을 축이지도 못한 채 겨우 목구멍 너머에서 긁어내는 목소리는 높지 않았다.
"어느 쪽이든 내 취향의 이야기는 아닌데."
명망높고 높은 신분에 인간병기로 일컬어지던 기사란 직위는 어느새 장교나 동급의 이야기가 되었다. 더 심하면 부사관 수준으로 떨어졌고. 그런 이들 몇 명과 무기보다 농기구가 더 익숙한 민병들 대다수와 약간의 상비군들 정도를 이끌고 마족의 군대를 상대해야 했다. 희망이 없었다. 대부분의 기사단이 이 모양이었을 것이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샤를로테의 존재였다. 장래가 촉망받는 희대의 천재 마법사라. 그런 귀하신 분께서 굳이 이런 곳에 행차를 하셨다는 것은 여러모로 아주 큰 의미였다. 피할 수 없는 파멸이 이곳에 도달해 있다는 의미 말이다.
건틀릿을 낀 손으로 샤를로테의 하얀 손을 감싸 잡는다. 두려움에서 잠시 시선을 돌릴 수 있기를 바랬다.
"대마법사께선 운이 좀 나쁜거 같군. 이것보다 더 거지같은 상황에서도 극적으로 살아남았고, 이번에는 그때보단 좀 덜 재밌는 광경이 될 테니까."
뭇 병사들이 그러듯, 두려움을 떨쳐내기 위한 약간의 허세를 섞어 내뱉는다. 하지만 온전히 허세인것만도 아니다. 그에겐 계책이 있다. 그게 지금까지 이 남자를 살아남게 만든 귀중한 자질이었다. 이 동굴의 이 구석으로 들어온 것도 그 중 하나였다.
"우선 기력을 좀 보충하는게 좋겠어. 그 동안 우리는 여기서 몸을 좀 숨기지. 아예 이쪽 가지의 입구에다 동굴 벽을 감쪽같이 만들 수 있으면 최선이겠고."
미안한 이야기지만 샤를로테에게 좀더 고생을 시켜야만 할 것 같다. 그래도 최소한 마족들이 현재 그들에게 혈안이 되어 다른 생각을 할 겨를도 없다는 점이 다행이었다.
미안해...내, 내가 그래서 공포 영화 보지 말자 했잖아... (불 꺼진 방, 티비엔 여전히 주인공이 도망치는 장면이 나오고 있고, 두 사람 사이엔 비명과 악력으로 인해 반으로 갈라진 리모컨이 싸늘하게 죽어있다. 민망함과 서러움, 부끄러움으로 새빨개진 얼굴을 필사적으로 가린다. 분명 조금 전까지는 당신의 팔을 잡고 있었을 테지만 일말의 이성을 잘 조절해 타겟을 바꾼 모양이다.)
자명종이 활기차게 울린다. 안녕, 자명종아! 그리고 따듯한 햇님아! 예쁜 우리 고양이 민트초코도, 어제도 오늘도 한 자리에 있어주는 선인장 제임스도! 창문을 활짝 열어젖히고는 숨을 있는 힘껏 들이마시고, 내뱉는다. 신선한 공기도 좋지만, 음, 역시 아침공기엔 빠질수 없는게 있지. 주머니에서 폰을 꺼내 번호를 몇개 누르고 전화를 건다. 귀여운 음악소리가 상큼하게 들려오고, 곧이어.
쾅!
순식간에 부숴지는 몇백개의 유리창 소리. 산산조각나며 떨어지고, 비명소리가 들린다. 매캐한 화약냄새가 섞인, 아직은 조금 차가운 아침공기를 다시 있는 힘껏 들이킨다. 아, 화약냄새 없는 아침공기를 상상할수 있을까? 아니, 나는 못해. 어느새 입가엔 예쁜 미소가 걸린다. 좋아, 오늘도 나는 최고로 예뻐.
" 좋은 아침이야!!! "
씩 웃으며 크게 소리친다. 아, 그러고보니 자기소개를 안했네. 내 이름은 벌룬, 더 해피 걸. 해피벌룬, 해피, 뭐가 됐든간에 네가 생각하는 최고로 예쁜 이름으로 불러줘. 그야 나는 이 도시의 빌런이니까.
사람들은 왜 그리도 슬픈 얼굴을 하고, 사소한 것에도 짜증을 내고, 알수없는 미래에 대해 걱정을 할까? 나는 이해가 되지 않는다. 가장 중요한건 바로 지금 이 순간! 오늘은 앞으로 남은 날 중 내가 가장 어린 때잖아! 이 순간을 즐기지 않으면 섭하지. 그러니까 나는 사람들을 웃게 만들어주기로 했다. 너무 귀여운 스미스 앤 웨슨 모델 500 권총(이름은 깜찍이), 사랑스러운 BOPE에서도 사용하는 세열 수류탄(이름은 반짝이), 그리고 내가 제일 좋아하는 특제 가스. 한 모금만 마시면 모든 걱정도, 슬픔도, 불행도 잊어버릴수 있는, 해피 시리즈의 3번째 자신작 ' 핑크 다이아몬드 ' . 화창한 햇빛 아래, 오늘도 가장 높은 꼭대기에 서서 내가 사랑하는 이 도시에 선물을 주기로 했다. 뭐, 개중에는 날 좋아하지 않는 사람들도 있는 것 같지만... 그래도 괜찮아, 세상에 사람이 이렇게 많은데, 누군가는 날 좋아하는 법이고, 누군가는 그렇지 않을 수도 있는 법이니까. 낙하산 가방을 메고 그대로 떨어진다. 빠른 속도감이 나를 덮쳐오고, 크게 웃고, 소리지르다가, 은행 건물이 보이자 반짝이를 몇개 안전장치 째로 뽑아 던진다. 우직, 하고 뽑은 뒤 슉, 펑! 그리고 생긴 구멍에 아름답고, 사랑스럽게 착지하며 깜찍이를 몇 발 쏴준다.
" 아헤, 모두 왜 그렇게 겁에 질린 표정을 하고 있어? 괜찮아, 괜찮아. 오늘도 내가 너희를 행복하게 만들어줄게. "
핑크 다이아몬드 몇개를 바닥에 던지고, 나는 깜찍한 방독면을 착용한다. 음, 어찌 저렇게 행복해보이는 표정일까. 내가 준 선물을 좋아해주는걸 보니까 나까지 기분이 좋아보이는걸. 폴짝거리며 뛰어서 그대로 은행의 금고까지 도착했다. 한 눈에 봐도 보안이 어마무시해보이지만, 반짝이 몇개면 다 해결 돼. 순식간에 그 철통같던 금고 문이 열리고, 안에 쌓인 수많은 돈다발을 본다. 세상에, 이게 다 얼마야? 이정도면 사람들을 충분히 행복하게 해줄 수 있겠어. 물론 나도 좀 써야지! 반짝이 몇개, 핑크 다이아몬드 몇개를 더 만들 정도의 재료들, 그리고 달콤하고 사랑스런 팬케이크, 파르페, 크레이프, 파운드 케이크... 물론 예쁜 옷도 빼 놓을 수 없겠지. 나머지는 광장에서 뿌리는거야. 다들 좋아해주겠지? 아아, 행복해. 그녀는 도취된 미소를 지었다.
자명종이 귀를 찢어놓을 기세로 울린다. 제발, 죽어. 죽어, 죽어, 죽어. 암막 커튼 틈 사이로 들어오는 햇빛도 죽어. 시끄럽게 다투는 고양이들도...너흰 좀 가라. 귀를 꾹 막고서, 폐에서부터 끌어올린 고통에 찬 긴 한숨을 내뱉는다. 정말, 당연하게도, 그리고, 끔찍하게도, 절망스럽게도, 일하기, 너무, 싫다. 밍기적밍기적. 액체화 된 수은 마냥 스르륵 몸을 침대 바깥으로 꺼내고나서는, 손가락을 일정 방향으로 휘두른다. 그 즉시, 몸이 일으켜지고 방의 불이 켜지며 온갖 손질도구가 주변에 날아든다. 거의 반쯤 수면 상태로 둥둥 떠다니는 몸은 자연스레 화장실로 들어가 살아남기 위한 최소한의 몸치장을 시작한다.
“하아……쓰레기 요일. 쓰레기 출근.”
어느새 말끔히 투 버튼 브랜드 정장을 차려입은 모습은 아까 전 날백수 같은 모습과 완전 딴판이다. 다만, 심히 기분이 편찮아보이는 표정만큼은 다르지 않다. 여전히 손가락질을 할 때마다 보온병에 커피가 담기고, TV에 전원을 켜 뉴스를 튼다. 흘러나오는 뉴스에 나오는 은행 지점 빌런 습격 뉴스를 지켜보며 질렸다는 표정을 지어보인다.
“정말 대단해. 경이로울 정도야. 월요일 아침부터 저렇게 활기가 넘치다니.”
그런 비아냥을 담은 중얼거림을 하자마자, 핫라인 전용 무전기가 울린다. 손가락을 까닥해 그것을 귓가에 가까이 가져와 연락을 받는다. 들려오는 다급한 목소리에 대답하는 목소리에는 사회성 1%, 탄식 49%, 아무 생각 없음 50%에 가깝다. 아침 식사는 거른다. 체질이 안받아서. 싸우기 전에 뭔갈 먹으면 소화 안되거든. 싸워야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말단 히어로, 즉, 빌어먹을 공무원이기 때문이다.
시간이 조금 흘러, 은행. 안에 가스가 가득 차있어 억지로 답답한 방독면을 차고 왔다. 어떻게 하면 이렇게 깔끔하게 부술 수가 있지, 싶을 정도로 깔끔한 구멍을 슥 보고는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쉰다. 이번 빌런도 분명 제정신 아닐걸. 이번달 월급을 걸어도 좋다. ……그렇게 말하니 갑자기 초조해진다. 제정신 박힌 빌런이면 어쩌지? 여전히 걷는 것은 싫어하기에, 염동력으로 몸만 옮겨 둥둥 떠다닌다. 굳이 은행을 털었다면 이곳 말고 목적지는 없겠지. 독가스를 헤치고 나아가가며 중간중간 손가락질로 독가스를 마신 시민들을 건물 밖으로 내던진다. 배려가 부족하지만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함이다. 그리고 마침내 금고 앞에 도달해, 그곳에서 돈을 챙기다 말고 빙글빙글 돌고있는 인영을 발견한다. 방독면이 개성적이네. 그리고 기묘한 행동을 일삼고있고. +2점. 조금 더 지켜보자 싶어 근처 부서진 기둥 위에 앉아 뻐근한 허리를 두드린다. 바닥 파편에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당신에게 들린 것 같아, 일부러 먼저 말을 꺼낸다.
“아, 괜찮아 괜찮아, 아가씨. 하던거 마저 해. 일단은 지금도 근무 시간인지라 뺄 수 있을 때 빼둬야하거든. 챙기던거 마저 다 챙기면 말해주고. 참고로 물어보는건데, 그 돈들 어디다 쓸 거야? 그리고 왜 하필 월요일일까?”
야, 난 네가 공포 영화는 위험하다는 게 이런 '물리'적인 위험인줄은 몰랐지..힘이 세다는 건 알고있었다만... (싸늘하게 죽은 리모컨을 허망하게 내려다보다가 허탈함과 어이없음, 당황스러움을 숨기지 못한 웃음소리와 함께 중얼거린다. 그래도 새빨개진 얼굴을 필사적으로 가리는 네 모습하며, 만약 네가 이성을 조절하지 않았다면 조금 전까지 잡혀있던 팔이 저 리모컨 대신 박살났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더 뭐라고는 못하겠다고 생각한다.) 아무튼 리모컨 값은 네가 물어내라? (죽은 리모컨을 수습하면서 영화에서 잠깐 시선을 떼지만 그것은 큰 실수였다. 도망쳐서 잘 숨었다고 생각하던 주인공이 안심하는 순간 방금보다 더 무서운 장면이 나오기 직전, 네 눈을 가려주거나 널 붙잡았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했으니.)
그나저나, 돈을 어떻게 챙기지? 고민하던 그녀는 우선 주머니에 돈다발을 대충 집어넣기 시작했다. 아, 그러고보니 낙하산 가방이 있었지. 거기에 잔뜩 집어넣고, 그리고 근처에 있는 가방들에도 집어넣어서 가면 되겠다. 그러던 중, 낯선 목소리가 들려 휙 하고 고개를 돌려서 바라보던 그녀는 해맑게 인사하기 시작했다.
" 안녕, 안녕! 내 이름은 해피, 네 이름은 뭐야? "
딱 봐도 피곤해보이는 목소리, 그리고 졸린 목소리네. 정말, 사람들은 왜 저리도 피곤해보이고, 또 졸려보일까? 주말이 다 지나간건 나름대로 아쉬운 일이지만, 그래도, 오늘은 어제보다 나은 날이잖아! 새로운 태양, 새로운 공기, 그리고 무엇보다 오늘도 살아있는 나. 아름답잖아? 그녀는 등과 목을 뒤로 쭉 피며 스트레칭하는 당신을 바라보았다.
" 근무시간이면, 친구, 너는 히어로야? 이번엔 드디어 나를 칭찬해줄 사람인걸까? 정말이지, 전의 히어로들은 정말 무례했거든. 난 그냥 사람들을 행복하게 해 줬을 뿐인데, 다짜고짜 욕을 하지 않나, 때리려고 하질 않나... 뭐라뭐라 소리를 지르기까지! 아, 너무 무서웠어. 다행스럽게도 이 깜찍이를 몇 번 쏴줬더니 도망칠수 있었지만. 아, 맞아. 물어보는거에 대답을 해 줘야지. 이 돈은~ 음... 파운드 케이크, 크레이프, 그런 사랑스러운것들을 사는데에 좀 쓰고, 깜찍이에 넣을 탄약, 그리고 행복해지는 해피 시리즈를 더 만드는데 조금. 그리고 나머지는! 광장의 높은곳에서 휙 뿌려줄거야. 그러면 다들 좋아할테니까! 내 친구인 너도 돈 좋아하지? 자, 원하는 만큼 챙겨가! 아, 그래도 다 챙겨가는건 안된다? 이런건 같이 나눠써야하니까. "
긴 말을 마치고 쌓여있는 돈다발을 한아름 끌어안아, 네 쪽으로 던진다. 힘이 부족해서일까, 그리 멀리 가지는 못하고 맥없이 툭 떨어졌지만. 그녀는 쑥스러운듯 웃었다.
" 좋아좋아, 친구에게 선물을 주는 나. 최고로 사랑스러워. 음, 그리고 또 질문이 뭐였지? 아, 맞아. 왜 하필 월요일이냐고? 그야 오늘이 내게 남은 날 중 가장 어리고, 최고로 귀엽고 사랑스러운 날이잖아? 매일을 전력으로 즐기지 않으면 손해야~ 그렇지, 친구? 참, 이름도 물어보질 않았네. 우리 친구는 이름이 뭘까? 잠깐만, 내가 맞춰볼게. 음... 민트초코? 맞지? 응? "
분명 이름을 맞췄을거야! 얼마나 놀라줄까? 그녀는 흥분을 주체하지 못하고, 한껏 행복한 미소를 지으며 제자리에서 방방 뛰기 시작했다.
" 아헤, 행복해. 이것도 인연인데, 우리 크레이프나 먹으러 가지 않을래? 돈은 신경 쓸 필요 없어, 내가 최근에 돈 안내고 먹을 수 있는 방법을 배웠거든. 이 깜찍이를 한번 슬쩍 보여주기만 하면 다들 어찌나 좋아하는지 나한테 전부 공짜로 준다니까? 그래서 전엔 케이크를 한가득 받아서, 배가 터지게 먹어버렸어. "
>>305 이름이 무엇이냐는 질문에도 대답하지 않았는데, 금새 본인의 이야기로 넘어가버린 당신을 지켜보며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인 채로 귀를 기울인다. 정확히는 건물 바깥에서 들려오는 희미한 진동소리에. 기동대가 도착하는 소리다. 이놈들이나 저놈들이나 움직이는 것 하나는 빨라가지고는, 그렇게 열심히 일하고싶나? 월요일 아침 댓바람부터? 노동하지 않는 자, 먹지도 말라. 응응, 전통적인 문구에 부정할 생각은 없다. 다만 인륜적으로 좀 심하지않아? 좀 적당히 노동해서 적당히 먹고 살고 싶은게 죄야? 본질적인 문제는 그곳에 있다. 히어로라는 직업을 선택한 자신에게 있어 일을 늘리는 것은 오직 빌런들 뿐. 기동대가 투입되기 전에는 일을 마무리해야한다.
“……그렇구마안~. 빌런치고는 제법 알차게 쓰는데. 나라면 우선 노후를 위해 저축하겠지만, 뭐, 지금 이 사단을 보자니 아가씨가 존재하는 이상 어떤 은행에 저축해도 의미가 없어보이네.”
해피, 라는 이름 +1. 월요일인데 지나치게 활기찬 목소리 +1. 도덕성 및 사회성 결여 +1. 지독한 네이밍 센스 +1. 불법 폭탄 개조 및 사용 +1. 친구에게 훔친 돈을 나눠주는 상냥한 마음 +1. 이 이상 점수를 매기는 건 무의미하다. 자신의 월급은 안전하게 지켜졌고, 명분도 충분히 세워졌다. 맥없이 툭 떨어진 돈다발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머리를 긁적거린다.
“민트초코는 맛있긴 하지만 사람 이름으로는 좀 그렇지. 뮬렌 맥워커라고 한다, 해피 아가씨. 재미없는 이름이라서 미안하네.”
아무런 감흥도, 미안함도 느껴지지 않는 목소리는 평이하다. 이 사람, 정말 민트초코를 좋아하는 건 맞는건가? 이를 아득 갈고있다. 금고의 구석에 달린 통로 CCTV를 확인하자 무장한 병력들이 들이닥치고 있다. 시간을 버는 건 여기까지. 어기적어기적 자리서 일어나 상체를 좌우로 짧게 기울여가며 뻐근한 허리를 풀어준다.
“오, 정말? 나도 크레이프 좋아해. 근데 아가씨랑 같이 먹으러 가기엔 아저씨는 좀 부끄러울 나이기도 하고……─쑥쓰럽다는 듯이 턱을 긁적거려보였다.─자고로 디저트는 끔찍한 하루하루를 버텨내고 버텨내서 갓 받은 월급을 ATM에서 인출해 내 땀과 피, 종이 냄새가 나는 뻣뻣한 지폐로 사먹는 게 제일 맛있거든. 돈 다 챙겼지? 이야기 나눠서 즐거웠어. 다음엔 꼭 화요일…아니, 수……음, 그냥 제압할테니 돌아오지 않았으면 해.”
팔을 앞으로 쭉 뻗어서, 펼친 검지 손가락을 아래서 위로 슥 들어올린다. 그러자 당신이 서있는 바닥이 들썩거리더니 그대로 떠올라 천장에 충돌할 기세로 솟구친다. 범상치 않은 당신이 이정도 공격은 대처할 것을 알고있기에, 주변의 잔해들을 전부 떠오르게 해, 일제히 당신에게 맹렬한 속도로 날려보낸다. 이것 또한 시선을 분산시키기 위함이다. 힘을 모아 천장에 바깥과 이어지는 커다란 구멍을 내려 하고있다. 먼저 이 끔찍한 가스를 빼내는 것이 먼저다.
“그리고 정정하지. 월요일은 저주받은 요일이다. 내게 남은 날 중 유급 휴가를 적용하지 않은 매 월요일은 가장 괴롭고, 최고로 끔찍하며 주말과 동떨어진 최악의 날이다. 그러니 그 정신머리를 개조시켜주지. 난 다른 히어로들 처럼 무자비하지 않아. 재판에 언질을 넣어둘테니 아가씨는 실력 좋은 빌런교화센터에 들어가게 될테고, 완치될 즘이면 같이 내 단골 디저트 가게에 갈 수도 있겠지. 그러니 저항은 포기하도록.”
" 칭찬해주니까 부끄러워지는걸~ 그래도 날 다른 사람이랑 똑같이 보지는 말아줘! 다른 빌런들은 그야, 온통 재미없는 일에만 쓰잖아? 세계정복이니, 모두를 노예로 만든다느니, 죽고 죽이고... 그런건 전혀 재미없어! 기쁘지도 않고, 재미있지도 않고, 가장 중요한건.. 사랑스럽지 않다는거겠지. 그렇지 않아, 내 소중한 친구? 응? "
그녀는 머리를 긁적이며 배시시 짧게 웃었다. 그야 다른 사람들은 전부 멍청해보여, 왜 그리도 재미없는 일에 이를 물고 덤벼드는걸까? 우리가 사는 삶은 언제나 짧잖아? 지금 당장 죽을지도 모르는데, 늘 전력으로, 즐겁게 살지 않으면 손해야. 내 깜찍이, 반짝이에 죽은 사람들도, 오늘 내가 이렇게 죽을거라곤 생각지도 못했겠지. 나도 그런거야. 언제, 어디서, 어떻게 죽을지 누가 알겠어? 그러니까 나는 즐길래, 한 점의 후회도 없이, 최고로 아름답게 죽을 수 있도록!
" 노후를 위해 저축해? 그거 진짜 재미없다. 친구, 내가 충고 하나 하자면, 오늘이 너의 가장 젊은 날이잖아! 언제 죽을지도 모르는데 그런 짓을 하면서 시간을 허비하고, 싫어하는 일만 하면, 사는건 재미없잖아? 으에, 끔찍해. 나같으면 그런 삶을 살 바엔 차라리 죽어버리겠어. "
키득거리면서 웃었다. 그러다 그가 맥없이 떨어진 돈다발을 바라보며 머리를 긁적거리는거에 응? 돈 안가져가? 내가 주는 선물인데! 하고 얘기했다가.
" 쿠궁, 느낌표 느낌표 느낌표. 완전 충격이야, 그런 재미없는 이름이라니. 게다가 맥워커? 성에서부터 일복을 타고났잖아. 안되겠어, 전혀 사랑스럽지 않은 이름이야. 그냥 민트초코가 되는건 어때? 무려 우리 집 고양이랑 똑같은 이름이라구. 응! 아주 귀여워. 어라, 허리아파? 마사지라도 해줄까? 이렇게 귀여운 여자애가 허리를 주물러주면 순식간에 나을거야. 장담은 못 하겠지만~ "
다시 짧게 웃던 그녀는, 그가 손을 뻗어 자신이 밟고있는 땅을 그대로 들어올리자 길게 한숨쉬었다. 그리고 쪼그려앉으며, 자신을 향해 맹렬한 속도로 날아오는 파편들을 바라보았다.
" 아아, 정말. 나랑 같이 크레이프 먹으러 가는건 부끄럽고, 나처럼 예쁘고, 최고로 사랑스럽고, 가련한 여자애를 공격하는건 부끄럽지 않은거야? 정말, 최악이야. 전혀 사랑스럽지 않아. 친구라고 믿었는데, 나를 배신하다니. "
정말 슬퍼. 그녀는 빠른 속도로 주머니에서 반짝이들을 꺼내 그대로 마구 흩뿌렸다. BOPE에서도 사용하는 특제 고폭 수류탄. 그리고 그대로 공중에서, 뒤로 한바퀴 돌며 뛰어내렸고, 큰 폭압에 휘말린듯 옷은 이리저리 헤지고 찢겨나가며, 만신창이가 되었지만, 깔깔거리며 웃는 큰 목소리로 보아 그녀는 나름대로 무사한듯 싶었다.
" 정말, 너무해. 여자의 마음에 상처를 주고선, 나중엔 데이트하자며 꼬드기는거야? 미안, 난 나쁜 남자는 취향이 아니라서, 이미 질릴대로 봤거든. 으응, 근데, 아저씨 친구들은 괜찮을까~? 저 위에 있는 수많은 사람들은? 봐, 천장에 구멍이 생긴 탓에 핑크 다이아몬드가 뭉게뭉게, 하늘의 구름이 되어가고 있다고? 저기 경찰? 인가? 저 친구들도 위험해보이는데~ "
그리고 그녀는 주머니에서 찰랑거리는, 분홍색 액체를 꺼내 흔들어보였다. 겉엔 요란하고 화려한 분홍색 스티커, 반짝이 가루까지...
" 이거 던져서 깨지면, 구름이 잔뜩! 응? 근데, 지금이라면 되돌릴수 있어, 아저씨. 아직까진 수습이 가능한 단계야. "
근데 내가, 그렇게 가만히 두진 않을거야. 그녀는 바닥에 핑크 다이아몬드를 던져버렸다. 그리고는 다시 미친듯이 웃기 시작했다.
" 아아, 아저씨... 일하기 싫다고 했지? 월요일을 싫어하는것도 출근때문이고? 괜찮아, 괜찮아, 민트초코. 설령 날 배신했더라도, 최고로 사랑스럽게 만들어줄게. 일 따윈 안나가도 되는, 그런 세상으로 만들어줄테니까. "
그럼 우리, 지금부터 다시 친구하는거다? 응? 그녀는 해맑게 웃으며 깜찍이를 쏘기 시작했다. 쾅, 하는 미친것처럼 시끄러운 폭약음이 귀를 때렸고, 뒤이어 큰 폭발이 금고 내부에서 일어나기 시작했다. 핑크 다이아몬드에 몇개 인화성 가스가 섞였던걸까. 그리고 그녀는 믿기지 않는 속도로 빠르게, 자기가 부쉈던 금고의 문쪽으로 뛰기 시작했다.
>>307 감히, 내 원칙을 비웃다니. 거기다 이름에 일복을 타고났다고 말해?! 머릿속에서 벌레들이 우글거리는 느낌이 든다. 누가 일복을 타고나, 누구 이름이 재미없어! 우리 부모님이 지어주신 자랑스런 이름이다! 민트초코 따위 될까 보냐. 되다 못한 그런 디저트의 이름을 갖는 순간 자신은 평생 뇌가 세척당한 상태로 살아야할 것이다. 푸, 한숨을 쉬며 감정을 진정시키고 날아오는 수류탄들을 시야에 들인다. 성가신 무기를 쓰는데, 본인까지 휘말려도 상관 없다 이거야? 열기와 긴장감에 식은땀 한 줄기를 흘리며 근처의 벽을 염동력으로 뜯어내 폭압을 막아낸다. 그리고 가스병을 던져 깨뜨리는 모습을 지켜보며 먼지와 땀이 섞인 머리카락을 거칠게 쓸어넘긴다.
“내가 살아온 31년 간, 스스로를 예쁘고, 사랑스럽고, 가련하다고 하는 여자애들 중에서 실제로 그런 애들은 없었거든. 그래도, 뭐, 친구끼리 다투곤 하잖아. 안 그래? 그런거라 보자고.”
그래, 이놈의 가스가 문제였지. 천장에 구멍을 뚫어서 분산시키는 방법도 있었지만, 확산될 가능성도 높다. 그 위험성을 알고있음에도 불구하고 일부러 구멍을 낸 이유는, 그의 능력의 본질에 있다. 평범한 염동력이라면 그 세기에 따라 능력자에게 매겨지는 강함의 척도가 달라지곤 한다. 맥워커는 그런 강함만으로 따진다면 분명 상위권에 위치하진 못하리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상위권의 염동력자들과 호각을 다투고, 심지어 한 수 접어주는 이유는, 누구보다 섬세하게 다룰 수 있다. 그 이유 하나뿐이다.
“미안하지만 죽어도 일하기 싫어도, 끔찍하게 출근하기 싫어도 아가씨 같은 녀석들이 설치고 다녀서 이 일을 그만둘 수가 없어. 내가 이짓거리를 그만두는건 빌런놈들이 세상에서 자취를 감추었을 때 뿐이거든. 그러니까 아저씨의 퇴근 시간과 허리를 생각한다면, 얼른 잡혀줬으면 좋겠어. 그리고 민트초코라 부르지마라. 분명히 말했어. 진짜로.”
의외로 속이 좁다. 그러곤 손가락이 아닌 손바닥 전체를 움직인다. 그러자 천장에 난 구멍 주변에 날아다니던 먼지가 떨어지는 것이 멈춘다. 흙먼지들이 만들어낸 윤곽은 마치 투명하고 길다란 원통이 박혀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내, 반대편 손으로 꾸욱 잡아당기듯이 허공을 긁자, 핑크 다이아몬드의 분홍색 연기들이 염동력으로 만들어낸 원통형으로 빨려들어가기 시작한다. 이내 금고 안을 가득 메웠던 연기를 전부 빨아들여 순수한 분홍색 연기만이 가득 찬 것을 보고는, 압축된 연기를 한번에 힘을 주어 발사한다. 좁은 구멍으로 빠져나온 길다란 1자형의 연기는 그대로 하늘 저멀리까지 깔끔하게 날아간다.
“아이고, 힘들어 죽겠네, 진짜로. 뛰는 것도 못하는데, 하아.”
이미 당신이 도망가는 모습을 지켜보며 길게 한숨을 짓고는 인화성 가스로 인한 폭발로 날아온 파편들을 염동력으로 쳐냈다. 그 중 몇개는 머리나 어깨에 맞아 피가 조금 흘러내리지만, 개의치 않는다. 걷는 것보단 염동력으로 날아가는 것을 택해, 빠르게 뒤쫓는다.
“저기, 월요일 아침부터 새파랗게 어린 아가씨랑 술래잡기 하고있는 아저씨 체면 좀 세워줘. 응? 그 센터에 친구들도 분명 많을걸. 근데 뭘 먹고 그렇게 빠른거야, 대체.”
아무리봐도 신속한 제압이 필요하다. 방독면도 벗어제끼고 신체 주변을 감싼 염동력에 힘을 줘 벽을 부셔가며 빠르게 쫓아간다. 중간에, 당신이 지나갈 법한 골목의 좌우 벽을 뜯어 길을 막아가며 진로를 방해한다. 무작정 길을 막는 것이 아닌, 최대한 구석으로 몰아가기 위함이다. 그래봤자 당신이 벽을 부수고 빠져나가면 그만이지만 바깥으로 나갈 경우, 이쪽이 좀 더 유리해진다. 어떻게 할 테냐, 깜찍한 아가씨.
독한 담배연기가 어두운 밀실을 가득 채운다. 천장에 조악하게 달린 낡은 조명과 정가운데 펼쳐진 철제 책상, 반듯한 의자 하나와 대조되는 비뚤게 기운 의자 하나. 50년대 턴테이블에서 흐를 법한 재즈 음악을 깔아준다면 더할 나위 없이 만족스러우리라. 그중 남자는 아니꼽게 비뚠 자리에 앉아 상대를 응시하고 있다. 잠시의 침묵. 남자는 다시 밋밋한 금반지를 낀 손가락을 까딱이며 깊게 담배 연기를 들이마신다.
" 그런데 그쪽 같은 사람은 또 처음이네…… "
겨울날 피어오르는 입김처럼 쏟아지는 연기들. 이미 냉랭해진 공기 속 이것과 그것은 별반 다를 게 없다. 남자가 가벼운 비소를 흘리며 재떨이 위로 담뱃재를 털어낸다. 번듯한 양복에 듬직한 몸뚱이. 제 능력껏 머리를 단정히 만져본 듯 싶으나 삐죽 튀어나와 흐트러진 머리칼 한두 개는 어딘가 모난 그의 성격을 그대로 내비치는 성 싶다. 남자의 미간 사이에 깊은 주름이 새겨진다. 항상 인상을 찌푸리는 습관 탓이다. 결코 만만한 모습을 보여선 안되는 자리지. 남자는 누군가에게 자신의 지위를 설명하거든 늘 그리 중얼였다. 짙은 이목구비와, 상반되게 가벼운 푸른 눈동자. 홀로 무언가를 몰골하듯 눈동자를 움직이던 남자가 다시금 피식 웃음을 터트린다.
" 아, 죄송합니다. "
남자의 태도가 양껏 거만해진다. 가볍게 뒤로 젖힌 상체와 불규칙적으로 까딱대는 구둣발. 상대의 머릿속을 열심히 읽어내려는 건방진 눈빛. 그리고 당신의 의사 따위는 고려치 않고 끊임없이 내뿜는 독한 담배 연기. 늙은 조명 아래로 연기가 희뿌옇게 들이차고 남자의 손에 들린 담배 한 대는 목구멍 곧 아래까지 몸을 태워낸 채 위태로운 호흡을 이어간다. 조용히 담배를 물고, 마지막으로 마시는 한 모금. 남자가 지독한 안개같은 연기를 삼켜내며 철제 책상 위로 담뱃머리를 짓눌러 문지른다.
" 뭐, 까짓거 하죠. 물어보고 싶은 게 뭐라고… 하셨더라? "
슬며시 올라가는 입꼬리 아래로 희끄무레한 담배연기가 뿜어져나온다. 그 사이로 형형히 빛나는 눈동자가 결코 선한 자의 것은 아니었으니, 어쩌면 악마의 유혹일지 모르리라. 붉은 벽지와 오렌지빛 조명, 여건만 된다면 남자는 흔쾌히 데킬라 한 병을 주문했을테다.
# 남자는 거대 마피아 조직의 고위인사, 상대는 마피아와 연루된 범죄를 수사하기 위해 찾아온 경찰, 기자, 혹은 피해자의 가족...? 아마도 그런 쪽! 유서 깊은 마피아 조직은 현대화를 거치며 이미지를 세탁해 평판 좋은 대기업을 운영하고 있어 범죄의 증거를 찾기 어려운 상황! 이곳은 어쩌면 취재하러온 당신의 목숨마저 위태로울지도! 편하게 이어줘!
그래서, 이게 네가 바라던 히어로의 모습이야? (불타고 있는 건물, 비명을 지르는 사람들, 울고 있는 아이. 하지만 경찰 따위는 보이지 않는다. 보이는 것은 분주히 움직이고 있는 검은 정장을 입은 사람들과 참혹한 풍경, 그리고 당신과 나뿐.) 지금이라도 멈춰. 아직 늦지 않았어. 네가 원하던 히어로는 이게 아니잖아. (슬픈 표정을 지은 흑발 금안의 남자는, 당신에게 총을 겨누고 있다.)
너무나 평화로워보이는 황실의 모습은 그저 겉보기에 불과했다. 그 일면에선 권력을 잡기 위해 치열한 암투가 있었고 그건 다음 황제의 자리에 오르게 될 황태자도 예외는 아니었다. 너무나 자비롭고 인자하며 두뇌도 명석한, 정말 너무나 뛰어난 자질을 지닌 황태자였으나 건강이 약하고 체력이 좋지 못하다는 치명적인 문제가 있었다. 황실의 대신들은 황자의 재능이 뛰어난 것은 사실이나 지금 저대로는 황제의 자리에 올라도 건강상 업무를 보지 못할테니 폐위하고 다른 이를 그 자리에 올려야한다는 이들이 있었으며, 그런 질서가 어지럽혀지는 말 따윈 절대로 하면 안된다는 이들끼리의 치열한 싸움이 있었다. 아직 피는 튀지 않았으나 언제 피향기가 튈지도 모르는 환경 속에서 황태자는 자신의 최측근과 황제, 그리고 일부 황족 이외에는 아무도 모르게 몰래 건강을 회복하기 위한 요양길에 올랐다. 서쪽에 있는 실력 좋은 마법사에게 가면 방법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실낱같은 희망을 품고서.
"황태자님! 건강이 나쁜게 아니었습니까?!"
"언제까지 제 건강이 나쁠 거라고 생각했습니까? 이제는 이런 일도 쉽사리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지금 여기에 있는 황태자는 누구인가. 그는 황태자의 최측근 중에서도 최측근이였다. 황태자의 바로 옆에서 황태자를 지키던 검이요 방패인 사내였다. 마법의 힘을 빌려 얼굴을 황태자와 똑같이 만들어낸 그는 황태자인 척, 대신들의 앞에 서 있었다. 길게 한줄기로 묶어내린 은빛 머리카락과 푸른색 눈동자. 그리고 갸름하고 기품이 흐르는 얼굴까지. 그야말로 똑같다 못해 본인 그 자체의 모습이었다. 그럼 어째서 사내가 이렇게 연기를 하고 있는가? 그에 대한 진실은 이러했다. 황태자가 요양길에 나섰다는 것이 알려지면 누군가는 시꺼먼 속을 품고 황자를 해하려 할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렇기에 황자는 자신의 목숨을 지키기 위해서, 그리고 자신의 입지를 지키기 위해 최측근인 사내에게 부탁해서 자신인양 행동하고 있어달라고 부탁했다. 어린 시절, 부모에게 버림받고 길거리를 떠돌며 굶주리고 살아갔으나, 우연히 거리로 온 황태자의 자비로 황궁에 들어와 교육을 받고, 밥을 먹으며 무술을 익힌 사내는 황태자의 명이라면 목숨도 끊을 자신이 있었다. 한가지 마음에 걸리는 것은 자신이 황태자의 흉내를 내고 있어야하니 황태자의 곁을 지킬 수 없다는 점이었다. 그나마 자신의 존재는 그렇게 알려진 것이 아니었다는 것이 천만다행이었다. 만약 자신이 알려졌다면 황태자가 있는데 그 옆을 지키는 이가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 이상하게 보이고 의심을 살테니까. 일단 사내는 어떻게든 황태자가 건강을 회복하고 돌아올 때까지 버티리라. 그렇게 다짐했다.
"손님이 찾아오셨습니다."
"들라고 해주세요."
그리고 지금까지 그는 그 누구의 의심도 사지 않고 연기를 성공적으로 해냈다. 물론 지금 황태자를 찾아온 이에게도 그게 통할진 알 수 없었지만. 아니. 어쩌면 이미 알고 있는 누군가가 찾아왔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냥 말 그대로 황자는 건강상 문제로 남들 몰래 다른 곳으로 요양을 갔고 황자에게 충성을 다하고 있는 20대 정도의 최측근이 마법의 힘을 빌려 황자인척 대리로 행동하고 있는 상황 속에서 누군가가 찾아온거야. 찾아온 이는 아무나 좋아. 다만 너무 말도 안되는 맥끊기는 아니었으면 해. 이를테면 컷!! 영화 촬영 끝났습니다라던가 그런 거 있잖아? 그런 건 사절이야. 잇지도 않을거고. 일단 이렇게 써두고 자러갈 생각이니까 혹시 이 새벽에 잇더라도 기다리지 말길 바랄게! 정말 편하게 이어도 상관없어! 아. 배경은 서양이야.
>>310 쏠 거야? (그리 말하는 자는 여상히 웃습니다. 슬픔도, 기쁨도, 후회도 희열도 그 무엇 하나 드러내지 않는. 그저 얼굴거죽 위로 잡아 당기니 웃는 체 할 뿐입니다.) 쏠 거니? 그 총으로 나를 공격해, 내 심장을 꿰뚫어 이 모든 참상을 멈출 테야? 난 네가 그러지 못 하리라는 데에 걸겠어. 그렇지만, (발 내딛습니다, 여전히 바뀌지 못 한 당신을 향해.) 여기서 멈추는 것도, 그것대로 의미가 있겠네.
>>312 ...이미 알고 있잖아. 내가 못 쏜다는 건. (당신을 바라보는 그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깊은 슬픔과, 후회, 그리고 약간의 죄책감. 당신을 보는 감정이었다.) 난 네가 늦지 않았다고 생각해. 아직은 어딘가에 내가 기억하는 네가 남아있을 테니까. 그걸 알면서도 널 죽일 수는 없어. (그저 혼자 중얼거렸다. 어느샌가 너무나 바뀐 당신을 향해서.) 하지만 네가 멈추지 않는다면, 난 너를 막을 거야. 죽일 수는 없지만, 제압할 수는 있으니까. (당신이 다가오지만 총은 거두지 않는다. 오히려 당신을 단호한 표정으로 노려보고 있다.)
>>313 (그제야 이 자의 표정에 무언가 감정이 드러납니다. 안타까워라. 가엾이 여기는 대상만이 오리무중일 뿐.) 나는 알아. 네 태도 또한, 아주 굳센 다짐의 결과물일 테야. 극악무도한 악인마저 죽이려 들지 않는 정의의 히어로. 멋지네, 이상적이야. (나는 그러지 못 했지만. 대중은 비명 소리로 코러스를 넣어준다. 네가 이걸 아름답다고 느끼지 않았으면 좋겠어.) 그렇지만 가끔은... 더이상 돌이킬 수 없는 게 있어. 그걸 빨리 깨달아. 그리고, 강해져! 방아쇠를 당겨! 무얼 하고 있니? 제압 안 할 거야?! (호통칩니다. 내딛는 발걸음마다 바람이 머릿결 사이를 파고들어 이리저리 흐트러뜨립니다. 어느샌가 양손에는 단검이 들립니다. 주무기지요.) 나는 멈추지 않아! 모든 걸 뒤엎어버리기 전까지... 히어로는 멈춰서는 안 된다고! 애초에, 너같은 애송이가 날 막을 수 있을 것 같지도 않네! (값싼 도발입니다. 어서 빨리 죽여달라는 바람의 발현.)
>>314 (감정이 드리운 당신의 표정에, 그의 눈빛에 잠시 의문이 스친다. 왜, 그리고 누구에게.) 나는... 내가 아니라, 네가 이렇게 되길 바랬어. 이상 속에 있는 정의의 히어로. (사람들의 비명 소리, 아이들이 우는 소리, 죽어가며 내는 단말마. 그런 상황에서도 자신은 할 수 있는게 고작 이것 뿐이라. 엄습하는 죄책감과 무력감에, 그의 목소리가 떨렸다.) 닥쳐. 네가 뭐라 하든 날 널 예전의 너로 돌아오게 만들 거야. (강해져라. 당신이 언제나 하던 말이다. 우스울 뿐이다. 돌이킬 수 없다면 어째서 예전처럼. 망설이던 내게 마음을 굳히게 만드는 건지. 그의 왼손에는 여전히 자동권총이, 오른손에는 리볼버가 자리잡는다.) 하지만 정말로 그렇다 해도 널 막을 거야. 히어로는 물러서지 않으니까. 그러니까 덤벼! 죽지 않을 정도로만 죽여줄 테니까! (쌓였던 분노섞인 말을 내뱉었다. 죽여달라는 당신도, 불타고 있는 주변도 전부 그의 신경을 자극했다. 그는 다가오는 당신에게 달려가며 자동권총을 여러발 쏘며 탄막을 형성했다. 급소를 일부러 피한건지, 총알은 팔다리 쪽으로 향한다.)
>>315 응. 실패했네. (당신의 바람 듣고 그리 단언합니다. 양측의 이상상 산산히 부수어버린 게 자신임을 알고나 있을까요? 다만 당당할 뿐입니다.) 이상은 그저 하룻밤 꿈이야... 꿈을 좇아 현실을 외면할지, 현실을 직시하고 환상에서 깨어날지. 난 그 중 후자를 택한 거야... (나를 무위의 무대 위로 다시 올리려 하네요.) 그런데도 나한테 다시 안대 씌울 속셈이야? 아무리 너라도 그건 못 봐줘!! (실실 웃던 웃음 어디로 가고 호승심과 전투 향한 집념이 그 자를 집어삼킵니다. 당신한텐 오히려 이 모습이 더 익숙할지도 모르겠네요. 당신의 옆에 있던 이 사람은 언제나 이랬잖아요?) 그래, 이렇게 나와야지!! (몇 발의 탄환을 튕겨냅니다. 몇 발의 탄환이 기다란 붉은 족적을 남깁니다. 일반인이라면 - 전투에 능하지 않은 여타 빌런이었다면 통증에 주저앉았을 상처 달고도 당신 향해 휘두르는 팔은 멈추지 않습니다. 절대 그만두지 않으리란 선언을 끝까지 지키려는지.) 뭐 하니? 사지는 급소가 아니야. 머리. 심장. 하다못해 폐 정도는 노려. (제 말 지키려는 듯 오른손에 쥔 단도는 정직하게도 당신의 목을 노리며 달려듭니다.) 네가 날 죽이지 않는다면, 내가 널 죽일 테야. 차라리 그게 우리한테 행복할 테니까...
>>316 모를 일이지. (현실을 부정하는 건지. 아니면 정말 확신하는 건지. 당신이 이상을 산산히 부수어도, 그것에 당당하더라도, 그는 일말의 희망을 갖고 있었다.) 사람들을 죽이고, 건물을 불태우는게 현실을 직시한 거야? 정말, 이게 히어로일까? (이상은 꿈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당신 또한 꿈을 꾸고 있잖아.) 그만 정신 차리라고! 네가 하고있는 짓이 뭔지, 똑똑히 바라봐!! (당신은 여전히 내가 알고 있던 당신이었다. 호승심 가득한 모습도, 아까의 호탕치는 모습도. 그런데 왜 지금의 당신은 그때와는 너무나 다른 건지 모를 일이다.) 이 미친놈..! 그 통증을 무시하고..! (그러고보니 잊고 있었다. 당신은 원래 그런 사람이라는 것을. 탄막이 아닌, 저격을 했어야 했는데. 이미 늦었다.) 닥쳐. 난 아무도 죽이지 않을 거야. 이 싸움에서, 둘 모두 죽지 못 하게 할 거라고. (단호하게 말했지만 당신의 말마따나, 쉽지 않아보였다. 정직하게 날아오는 단도를 고개와 상반신만 비트는, 최소한의 움직임으로 피해낸다. 단도가 목을 스치고 지나가며 붉은 실선을 목에 남긴다. 급소를 정확히 노리는걸 피해야 하면서, 상대방의 급소도 맞추면 안 되는 싸움이라니.) 네가 죽으면, 나는 행복할까? 내가 죽으면, 너는 행복하니? (당신의 말에 울컥했는지 총을 든 손과 당신을 바라보는 눈빛이 크게 떨린다.) 알지도 못하면서 급소를 노리니 어쩌니, 집어 치워!!! (결국 쌓아두었던 것이 폭발하고, 자동권총이 아닌 리볼버의 총구가 당신을 향한다. 대구경 리볼버의 탄환 두 발이 각각 당신의 허벅지와 팔목으로 향했다.)
깨끗한 은빛 머리카락을 낮게 틀어 고정하고 앞머리는 뒤로 깔끔히 넘긴, 서늘한 눈매와 푸른 눈동자를 지닌 냉철한 인상의 중년 여인이, 절도 있는 걸음으로 방 안으로 들어섰다. 어진 성품을 지녔던 황태자와는 인상이 퍽 다르지만 뜯어보면 닮은 구석이 있는 그는, 황태자의 어미이자 제국의 황제인 루도비카 알브레히트였다. 황제는 황태자로 변장한 사내를 보자마자, 경악한 듯이 얼굴을 와락 일그러뜨렸다. 일국의 황제임에도 감정이 다잡아지지 않는지 마른 세수를 하던 그는, 애써 냉엄하게 가다듬은 얼굴로, 그러나 다부지게 그러쥔 주먹을 희미하게 떨면서 입을 열어 진노가 서린 목소리로 물었다.
"오늘 아침 황태자의 부고가 전해졌거늘, 네 놈은 누구이기에 여기서 내 아들의 행세를 하고 있느냐!"
마치 황태자의 대역을 하고 있는 사내를 모르는 듯, 냉정하려 애쓰면서도 충격과 진노를 다 감추지 못한 듯한 기색의 황제였지만, 그는 이 사내를 잘 알고 있었다. 죽은 아들이 가장 신임하던 측근이라는 것도, 그가 비밀리에 요양을 떠난 스스로의 공석을 메우기 위해 대역을 맡긴 이라는 것도. 그런 이를 이런 식으로 처분하게 된 것은, 황태자의 어머니이지 한 개인으로서는 내키지 않는 일이었지만, 그는 개인이기 이전에 황제였다. 그렇기에, 아들의 죽음에 슬퍼하기 전에 그 이후의 일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황태자가 죽은 지금 제국에는 새로운 황위 계승자가 필요했고, 그를 옹립하기 위해서는 이전까지 황태자를 따랐던 이들을 정리해야만 했다. 그들을 가장 깔끔하게 정리할 수 있는 방법은, 바로 눈 앞의 사내를 황태자 사칭범이자 시해 사주범으로 몰아, 본보기로서 처형하는 것이었다. 안타까움을 느낀다 해서 무를 수 있는 일도 아니었기에, 황제는 마음을 단단히 다잡고, 근위대를 불러 명을 내렸다.
"뭣들 하느냐! 당장 이 자를 포박하라!"
그러자,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근위병들이 일제히 황태자의 모습을 한 사내를 에워싸며 창을 겨눴고, 그중 몇이 앞으로 나와 그를 포박하고자 덤벼들었다.
>>317 미안하지만 이을 수는 없을 것 같네. 일단 손님이 찾아왔다는 보고가 왔는데 그 찾아온 이가 황제다? 그런 판국에 역적으로 몰아서 죽이러 왔다? 근데 그걸 최측근되는 이는 황자가 죽었다는 것도 몰랐다? 너무 말도 안된다고 생각해. 어지간한건 다 이으려 했는데 이건 상황 자체도 정말 당황스럽네. 고로 이건 패스하도록 할게.
>>319 아이고, 황제가 시종에게 손님이 왔다고 이르라고 하고 보냈다는 서술을 하려고 했는데 깜빡했네... 그렇지만 황태자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는건 황제나 측근이나 마찬가진데 당연히 황제이자 황태자 엄마인 루도비카한테 먼저 알리지 않을까? 아침에 들어온 부고고 말이야.
자기에게 절대적인 존재가 하루아침에 사라졌다고 하면 어떤 심경일지, 그런 마음으로 어떤 대처를 할지 되게 기대했는데, 원하지 않는 상황이라니 아쉽네... 미안하기도 하고. 그래도 좋은 하루 되길 바라
' 오늘의 날씨입니다. 봄이 찾아오며 따스하고 화창한 날들이 이어지고 있는데요. 오늘 역시 어제와 마찬가지로 일교차는 조금 크겠으나 오후에는 최대 21도까지 기온이 오르며 완연한 봄날씨를 만끽할 수 있겠습니다— '
세상은 평화롭다. 하루하루를 어렵게 버텨가는 이들에게는 야속하게도 말이다. 해가 뜨고 해가 지면 내일이 오는 것이 당연하고 또 당연한 이 세상. 당신은 아마 스물 둘셋을 먹은 창창한 청년이었던가. 벚꽃의 꽃말은 중간고사— 라는 우스갯 소리를 중얼이며 얼마 남지 않은 시험을 위해 도서관으로 향하고 있었을지도, 휴대전화를 만지작대며 아르바이트의 따분함을 죽이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잔뜩 몰려온 피로감에 에너지 드링크를 연달아 마셔대고 있었을지도. 요컨대 당신은 지루하고 따분하나 변함없는 일상을 살고 있었으리란 뜻이다.
" 저, 저기! "
그런 평범한 당신에게, 누군가 말을 건다. 당신과 마찬가지로 앳되어보이는 젊은 여자다. 숫기가 없게 생긴, 묘하게 색채가 옅은 여인은 무언가를 우물쭈물 망설이며 당신의 옷깃을 당겼다. 그리 대담하게 낯선 이의 옷깃을 끈 여자는 한참, 아주 한참이나 뱉을 말을 고민하다 겨우내 제 입을 열어냈다.
님, 맨날 여기서 뭐 합성하고 계시네요? 뭐 만들고 계세요? (당신의 곁으로 다가온 유저는 철갑옷을 입은 기사 클래스로 보이지만, 당신의 대답이 돌아오기도 전에 인벤토리에서 피리를 꺼내든다. 그리고 익살맞은 리듬의 연주를 하다, 당신의 합성이 언제나처럼 실패하자 삐루루루룩, 하고 처지는 음악소리를 낸다.) 아깝당.
떠올릴 수 있는 기억 중, 가장 오래 된 것은 텅 빈 폐허의 풍경이다. 그곳엔 아무도 없었다. 나는 그것이 당연한 줄 알았고, 그곳은 내게 이 세상의 전부였다. 그러나 그것은 당연한 것이 아니었다. 그 사실을 알아챘을때엔, 내가 가진거라곤 오직 끝없는 공허뿐이었다. 그동안 내가 알던 당연한것은 당연한 것이 아니었다. 마땅히 있어야 할 부모도 내겐 없고, 추위와 비, 벌레 따위를 피할 수 있는 아늑한 집도 없었으며, 당장 끼니를 해결할 수단조차 내겐 없었다. 공허함, 무력감, 그리고 이어지는 표독스러운 절망. 울어도 상황이 달라지는건 없었기에 나는 울지 않았다. 그리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내가 무엇을 할 수 있지? 시야에 들어온 것은 내 두 주먹이었다. 믿을 수 있는건 내 두 주먹 뿐이었다. 이 두 주먹으로 모든것을 쟁취하리라. 내가 가지지 못한 모든 것들을. 이것은 하나의 신념이 되었고, 나는 그대로 행동하기 시작했다. 어떤 수단을 쓰든간에 반드시 이뤄내리라. 살아남아서 내가 가지지 못한 모든 것들을 강탈하리라.
처음엔 소매치기로 시작했다. 물론 그 때엔 기술이 좋지 않아 쉽게 걸리기 일쑤였다. 그 때마다 두 주먹으로 해결하려고 덤벼들었다. 절대로 물러서지 않았다. 뭐하는 짓이냐며 덤벼오는 멍청이들에게 주먹을 날리고, 잡아 던지고. 꺾고, 조르고, 급소를 찔렀다. 그러나 그 마저도 잘 되지 않는 날이 많았다. 나는 어린 아이였고, 체격은 왜소했으니. 그렇게 한참을 두드려맞으면 분노가 들끓었다. 무력한 내 자신에게, 아직 한참 미숙한 내 두 손에. 그리고 나는 바로 다음 타겟을 찾아 나섰다. 그리고 또 싸우고, 두드려맞고, 그렇게 기절하며 차가운 돌바닥에 쓰러져 체력이 돌아올때까지 선잠을 잤다. 지갑을 훔치는데 성공한 날은 우선 배가 터지게 밥을 먹고, 그렇지 않는 날에는 차갑고 새카만 벽돌같은 빵이라도 훔치며 어떻게든 연명했다. 이걸 훔치는 이유는, 가장 싼 빵이기에 죽어라고 도망치면 포기하는 녀석들이 많았기 때문이었고, 무엇보다 나 자신을 채찍질하는 좋은 수단이 되었기 때문이다. 소매치기에 성공하고 남은 돈으로는 마약을 샀다. 비싼 가격으로 호구잡혀도, 닥치는대로 긁어모았다. 그리고 하수도 근처에 사는, 중독자 중에서도 밑바닥으로 떨어진 놈들에게 가져다 팔았다. 가격은 무조건 내가 산 금액의 두배였다. 그리고 많은 것을 깨달았다. 사람은 희망을 가지면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 설사 그것이 지옥으로 굴러떨어지는 낭떠러지라고 하더라도. 그들에겐 아무도 마약을 팔지 않았다. 왜? 돈을 구할 방법이 없는 쓰레기같은 족속들이니까. 그들은 마약굴 근처에서 남은 쓰레기봉투를 뒤지며 어떻게든 마약 부스러기를 찾아내어 몇분 단위로 연명하는 그런 인간들이었다. 그러니 내가 마약을 보여주며 가격을 제시하고, 서비스라며 살짝 뿌려주자, 어떻게든 돈을 구해왔다. 감옥으로 직행했는지, 계획이 잘 풀리지 않아 죽었는지, 보이지 않게 된 녀석들도 더럿 있었지만 그건 내 알 바가 아니었다. 나는 틈새시장을 이용해 고객을 찾아냈고, 돈으로 돈을 벌 수 있다는걸 깨달았다. 그러나 이것도 성에 차지 않는 금액이었다. 그들은 수가 한정되어 있고, 가져다 바칠 수 있는 금액도 한정되어 있었다. 고작 이런것에 만족하려고 여태까지 발버둥치며 살아온게 아니란 말이다. 쯧, 하고 혀를 차고, 손톱을 조금 깨무는 버릇. 그래, 조금은 신경질적이게 된 것이 이때부터겠지. 우선은 이 방법이 내가 제일 많은 돈을 벌 수 있는 방법이었다. 여유자금이 생길때까지 돈으로 돈을 벌고, 소매치기를 해서 또 다시 돈을 번다. 체력을 위해 배가 터질때까지 밥을 먹고, 훈련을 반복한다. 그렇게 나이가 드는걸 기다려야 했다. 돌이켜보면 지루하고, 초조한 시기였다.
마침내 시간이 흘러 조금 더 나이를 먹었을때. 키가 훌쩍 컸고 주변의 어른들과 비슷한 키를 가졌을때. 이젠 소매치기정도는 걸리는 일이 없었다. 지갑을 훔치는것 정도는 너무도 간단한 일이 되었다. 쓰레기들에게 계속해서 마약을 팔며 제법 자금을 모아두었다. 물론, 위험한 순간이 없던 건 아니다. 쓰레기들에게 마약을 갈취당할뻔 하고, 완전히 얕잡아보인적도 있었다. 그래서 난 이른 새벽을 노려 제정신이 아닌 놈들을 완전히 뭉개놓았다. 그 과정에서 몇번이나 찔리고, 물리고, 많은 상처를 입었지만, 날 감히 얕잡아 보던 놈들을 전부 때려죽였다. 그나마 상황판단이 조금 될 정도의 지성이 남은 놈들는 내게 두번다신 대들 수 없게끔, 상하관계를 확실히 주입시켜주었다. 또 한번은 내가 마음에 안들었는지, 어떤 조직의 말단으로 추정되는 놈이 덤벼온 적도 있었다. 마약을 팔고, 뒷골목을 헤집던 난 당연히 골칫거리였겠지. 그녀석은 날 만만히 보고 덤벼왔던 모양이지만, 쉽게 당해줄 생각은 없었다. 여전히 내가 믿는건 오직 내 두 주먹 뿐이었고, 하루도 훈련을 게을리 한 날이 없었다. 완전히 때려죽이고 난 다음, 난 이것이 기회라고 생각해 그 자리에서 녀석의 적대 조직에게 찾아갔다. 그리고 그에게 큰 돈을 벌어다주겠다며 내 계획을 말해주었다. 전쟁, 전쟁이었다. 이권다툼을 하던 조직이니 언제 전쟁을 시작해도 이상하지 않았다. 내가 조직원이라면, 습격을 받았으니 명분은 충분히 된다. 내가 네 적들을 전부 죽여주겠다. 그러면 크나큰 돈이 네게 굴러들어온다. 설령 내가 죽더라도, 전쟁의 주도자는 나라고 하면 되지 않겠나. 네게 손해가 될 것은 단 한푼도 없다. 지금 생각해보면 엉망진창인 말이었다. 하지만 운 좋게도 그들은 내 계획에 찬동했다. 그리고 이것은 기회였다. 크나큰 기회. 나는 그 길로 놈들의 아지트로 찾아가 전부 때려죽였다. 꽉 쥔 주먹으로 턱을 으깨고, 팔을 부러트리고, 눈을 찔러대며 그대로 괴멸시켰다. 고작 9명밖에 상주하지 않는 작은 지부였기에, 어떻게든 성공할수 있었다. 피를 잔뜩 뒤집어 쓴 채로 조직의 보스와 대면한 난, 그 자리에서 행동대장이라는 중견 간부의 위치를 부여받았다. 이것으로 나는 기회를 내것으로 만들었다. 고작 9명이다. 겨우 그것만으로 나는 조직에 들어감과 동시에 내 몸을 지킬 수 있게 되었다. 세상에 슈퍼히어로는 더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고작 9명을 때려죽였다고 무엇이 변하겠는가? 마피아의 가장 위험한 점은 압도적인 그 숫자에서 나온다. 개개인이 전부 저명한 싸움꾼 급의 실력을 가지고 있진 않다. 그러나 그들은 수백명씩 존재하고, 언제 어디에서나 내 목숨을 노릴 수 있다. 정신 차려라, 네가 9명을 이긴다고 해서 조직 하나에 맞설 순 없다. 그러나 이젠 상황이 다르다. 나 또한 조직을 등에 업었으니, 남은건 내 기량을 전부 펼쳐보이는것. 이 남자의 탐욕스러운 아가리에 이득을 쑤셔넣어보이겠다. 그리고 그 배를 갈라서, 모조리 다 내것으로 만들것이다. 겨우 중견 보스 자리를 하나 얻자고 여태까지 발버둥쳤을리가 없잖느냐.
또 다시 시간이 흘렀다. 어느덧 키는 192cm를 훌쩍 넘었고, 몸무게는 90kg가 넘어갔다. 근육도 단단하게 붙었으며, 난 이 조직의 보스가 되었다. 그래, 이전에 얘기했던 그 전쟁에서 나는 계속해서 승리를 거두었다. 몇번이고, 몇번이고 칼에 찔리고, 놈들의 턱을 깨부수면서, 내 몸에서 흐른건지, 뒤집어쓴건지 알 수가 없는 피로 점철된 내 모습을 보고 사냥개라는 이명을 받았을 정도로. 그렇게 난 내게 충성하는 부하들을 모으며 내 입지를 다졌고, 조직 내부의 불만과 권력다툼을 교묘히 이용해 내전을 일으켜, 모조리 독식하는데에 성공했다. 그레이 하운드 컴퍼니. 나는 여전히 돈으로 돈을 불리며, 그토록 바라던 안정된 생활을 손에 넣었다. 회사의 경영 방침은 단 하나, 프리미엄. 겉으로는 무역회사기에, 싸게 원자재들을 구매하여 품질좋게 가공한 뒤 비싼 값으로 판매한다. 그레이 하운드의 무기들과 경호 업무, 중금속과 하다못해 식자재까지. 어느 것 하나 돈벌이가 되지 않는게 없었다. 그리고 뒤로는 어떤 의뢰든 반드시 수행해내는 킬러집단으로써 자리잡게 되었다. 그리고 그토록 바라던, 내게 존재하지 않는 가족들도 손에 넣었다. 사랑스런 아내, 보물과도 같은 딸. 그러나 내 마음 속 깊은곳의 공허함은 여전히 채워지지 않은 기분이 들었다. 자꾸만 뭔가를 놓치고 있는 그런 기분이었다. 그래, 어쩌면 그 일이 일어나고야 말 것이라는 하나의 흉조였을지도 모른다.
" 다녀왔어. "
이상하다. 유달리 집이 어둡고, 말소리도 들려오지 않는다. 하다못해 인기척도 느껴지지 않는다. 의아한 마음에 향초를 들고 집 안쪽으로 들어섰더니, 그곳엔 무참하게 찢겨진 가족의 시체가 있었다. 큰 충격을 받았고, 가슴은 도륙이 나 찢어지는것처럼 아파오는데, 어느 순간부터 아픈 느낌이 들지 않았다. 그리고 여전히 눈물은 한 방울 조차 흘러내리지 않았다. 울더라도 바뀌는게 없다는걸 잘 알기 때문일까? 아니, 그게 아니다. 이 과분한 행복이 내게 어울리지 않는다는걸 처음부터 알고있었기 때문이다.새로운 목표를 세우고 빨리 다음으로 넘어가야 한다. 우선 누가 이랬는지를 찾아내어, 그와 관련된 인물들을 모조리 죽인다. 머리를 한쪽으로 쓸어넘기며 생각했다. 그러나, 그런다고 뭔가 달라질까? 지금, 이 순간에. 새로운 목표를 세우는게 정말로 의미가 있을까? 태어날때부터 가진거라곤 두 주먹밖에 없었고, 이게 내가 믿을 수 있는 유일한 것이었다. 수 많은 피를 이 손에 묻혔으나, 정작 가족조차 지키지 못했던, 드디어 쟁취한 이 행복도 지키지 못했던 이 두 손을 어떻게 계속해서 믿을 수 있겠나. 내게 남은건 이제 아무것도 없다. 살려고, 조금은 행복해 지려고 발버둥쳐왔는데, 더이상 그 어떤것도 의미가 없잖은가. 공허함. 세상이 내가 알던 당연함과 다르다는걸 깨달았던 순간부터. 이건 예견된 수순일지도 모른다. 공허함만이 내가 유일하게 가질 수 있었던 것이다. 나는 이 참사를 뒤로 하고, 집 밖으로 나가 경찰서로 향했다. 도착해서는 이미 늦은 한밤중이었지만, 한명이 눈에 띄었고, 다가가서 말을 걸었다.
" 나다. 전할 말이 있어서 찾아왔다. "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어 불을 붙였다. 매캐한 연기를 자욱하게 내뿜으며, 나는 머리를 한쪽으로 쓸어넘겼다. 아직 해야 할 일이 있다.
>>325 외신 뉴스나 위키피디아 같은 잡다한 것들. 우리에 대해서 말하는 것은 인터넷 논객이나 격식있는 외교관이나 도긴개긴이다. 무능한 중앙정부, 군벌화하는 마약 카르텔들-아니면 마피아던지-, 피로 피를 씻는 조직간 항쟁, 신체 일부가 사라진 채 고가도로에 매달린 시신들, 정의로운 시장과 경찰관은 가족까지 무참하게 살해당한다. 살아남은 사람들은 마피아와 유착하고, 묵인하고, 쥐꼬리만한 월급에 플러스를 얹기 위하여 뇌물을 받고 또 뜯어낸다. 우리가 사는 이야기는 저 먼나라 사람들에 의하여 건조한 문장과 문단으로 정제된다.
한때 강한 정의감을 가지고 경찰을 꿈꾸던 소녀. 유학까지 다녀온 나름 엘리트였지만, 결국 현실에 굴복하여 부패경찰이 되었다는 이야기는 흔하다 못해 공기와도 같은 이야기라 누구도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바로 내 이야기다. 정의롭고 선하게 사는 것은 높은 계단을 오르는 것처럼 힘들고 지치는 일. 하지만 난간을 타고 미끄러져 내려가는 것은 너무나 즐겁고 짜릿했다. 자칭 정의의 사도들이 손가락질한다면 내게도 항변할 거리는 차고 넘쳤다.
마피아 간부와의 식사 자리에서 웃으며 했던 '잘 부탁드립니다' 한 마디는 황금 열쇠나 다름없었으니. 나는 마침내 저축이라는 걸 할 수 있게 되었다. 돈이 없어 죽어가던 언니는 마피아들이 세운 병원에서 싼 값에 치료받게 되었다. 한번 신념을 버린 대가로 나는 모든 결핍을 해소했다. 두번째부터 죄책감이란 남아있지 않았다. 그날로 길거리의 시체나 정체불명의 하얀 가루들, 인신매매의 타겟이 된 여자들은 내 관심사가 아니게 되었다. 그리고 열정이 넘치던 시절 밤잠을 줄이며 작성하던 수사 자료들을 모조리 드럼통에 넣고 불살라버렸다. 그들이 그러기를 원했기에.
우리 경찰 사이에서 일명 킹핀이라 불리는 남자는 모르는 사람이 없는 그레이 하운드 컴퍼니의 보스 되시는 분이다. 내가 접촉할 수 있는 마피아들 중에서 가장 높은 선의 사람이기도 했다. 그리고 내가 고개를 젖혀야 눈을 마주칠 수 있는 무시무시한 거한인데, 권총에 야경봉에 테이저까지 휘둘러도 내가 싸워서 이길 수 있을까- 하는 헛생각이 떠오르곤 했다.
"킹핀."
하던 전화를 마무리하고 안경을 고쳐쓴다. 테가 크고 동그란 안경은 경찰서 앞 가로등 불빛을 받아서 윤이 났다.
"흔히 있는 일은 아니군요. 여기까지 직접 행차하실줄은."
나는 두 손을 모으고 친절한 민중의 지팡이같은 미소를 지어보인다. 실상은 권력에 복종하고 기생하는 샤일록의 웃음이나 다름없는 것이었지만. 이 남자는 날 어떻게 생각할까. 도도한 척은 다 하더니 뼈다귀를 물려주자 금세 엎드려서 꼬리를 치는 계집? 정말 그렇다 해도 나는 할 말이 없었다.
(노움으로 여겨질 법한 뾰족 솟은 귀와 작은 키, 그리고 부스스한 흰색 머리칼. 앳되고 차가워보이는 인상 덕분에 소년인지 소녀인지 분간하기가 쉽지 않다. 여행자 술집에 있는 이들과 다른 점이라고 한다면, 조금 펑퍼짐한 사제복을 입고있다는 점일까. 잠시동안 당신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다 가볍게 목례를 해보였다.) 갑작스럽게 말을 걸어 죄송합니다. 실은 같이 의뢰를 맡아줄 호위를 구하고 있어요. (왜 당신인지는 굳이 말을 꺼내지 않는다. 단지 묵묵히 대답을 기다리며 부담스러울 정도로 바라볼 뿐이다.)
사방이 사이렌의 불빛과 굉음으로 소란스럽다. 높디 높은 고층 빌딩의 아랫편은 분주하게 대피하는 사람들과 그들을 통제하려는 이들이 뒤섞여 아수라장이 된 지 오래. 도시의 불빛은 꺼지지 않는다고 한다만 이건 꺼지지 못한 게 아니라 불장난이 일어난 정도가 아닐지— 싶은 마음이다. 바닥부터 터져오르는 카메라 플래쉬와 무어라 외치는건지 알 수 없을 인간들의 목소리. 저 거리에서 형체는 제대로 보이는걸까. 특종을 놓치고 싶지 않은 거대 언론사들의 발악이라고 생각해야할 것이다. 달빛이 스포트라이트처럼 쏟아지는 이 빌딩 옥상에서 마주한 당신과 여자. 그냥 여자는 아니고, 아마도 미친 여자.
" 있잖아, 나, 히어로가 하고 싶어! "
제 뺨에 튄 핏자국을 문질러 닦아내며 그 미친 여자가 해맑게 외쳤다.
*
혼란과 공포의 2031년을 기점으로, 세상은 [이능력]의 출현 이전과 이후로 나뉘어졌다. 출현 전의 세상은 당신 모두들이 알고 있는 그 평범하고 따분한 세상. 출현 이후의 세상은, 수 천년에 걸쳐 배출된 현자들의 귀중한 도덕적 가르침들이 개거품으로 사라져버린 절망의 시대라 할 수 있겠다. 정확히 2021년 12월 31일 정각 12시. 전세계 20%의 인구가 이유를 모를 발작을 일으키며 폭주했다. 폭주를 겪고도 사망하지 않은 인원들에게는 똑같은 후유증이 남게 되었는데, 그게 바로 전세계적 뜨거운 감자로 떠오르게된 [이능력]의 등장인 것이다. 인간의 과학력과 논리로는 설명할 수 없는 능력. 누군가는 불을 뿜고, 누군가는 물을 만들어냈으며, 누군가는 중력의 법칙 따위는 개무시한 채 하늘을 떠다닐 수 없었다. 인류를 지배하던 법칙이 무너지던 순간. 인류가 세운 법칙 역시 연쇄적으로 붕괴하기 시작했다. 쉴 새 없이 터져나오는 이능력을 이용한 범죄 보도, 이능력자들에 대한 차별과 차별 범죄, 한순간 인류에게서 '다른 낯선 존재'가 되어버린 그들은 혼란에 빠지고야 말았다. 기존의 인류도 마찬가지. 그들을 현존해오던 인류와 동족으로 취급해도 되는가? 라는 논제까지 불거졌을 수준이니 할 말이 더 있겠는가. 아무튼, 따분한 이야기는 그만 멈추고. 그렇게 이능력이 등장하고 십오년 뒤, 세상은 드디어 정비되어 안정을 찾기 시작했으니 이능력 범죄자를 빌런(villain), 그들을 전문적으로 수사/체포하며 치안을 수호하는 이들을 히어로(hero)라 부르게 되었다.
눈 앞의 여자는 수 백건의 범죄를 저지른 분류 등급 S급의 빌런. 살인과 테러가 심심치 않게 섞여있으니 당장 체포한다면 세 달도 채 지나지 않아 사형이 내려질 운명 . 세 달도 적게 쳐준 것이다. 그녀의 체포는 모든 언론사가 개 떼처럼 달려들 특종 중 특종이니 이런저런 취재 요청으로 이능력특별재판이 차일피일 미뤄질 게 뻔했다. 본래 특별재판은 대개 한 달 내외로 결판이 난다는 사실을 생각한다면 '그녀'가 얼마나 사회적으로 시끄럽고, 공포스러우며, 집중된 존재인지 알 수 있으리라. 아니, 그럼 저 여자 하나가 수 백건의 범죄를 저지를 동안 히어로들은 뭐했냐고? 한 사람당 하나의 이능력을 가지는 것이 레귤러, 두 개를 이레귤러로 취급하는 이 시대에 확인 된 것만 무려 다섯 개의 이능력을 가진 저 괴물을 어떻게 잡아쳐넣는단 말인가.
" 힘들까? "
여자가 해맑게 웃었다. 히어로가 되고 싶다는 그 가증스러운 말이, 장난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히어로 당신이라면 무어라 말하겠는가? 물론 죽어간 동료들을 생각해 분노를 담아 그녀를 '즉결심판' 하려 해도 좋을 것이다. 어차피 여자에 대한 사형 선고는 뻔하디 뻔한 결말. 사회적으로 조금 논란은 될지 몰라도 국민 대다수는 그녀를 당장 죽어야할 인간 폐기물쯤으로 여기고 있었으니 오히려 당신을 옹호하는 여론이 더 거셀지도. 뭐, 모든 이야기는 당신의 시도가 성공한 뒤의 이야기지만. 재차 말하지만 여자는 확인된 것만 다섯 개의 능력을 가지고 있다. 즉 확인되지 않은 능력이 더 있을 수도 있다는 이야기. 아마 하나, 내지는 두 개의 능력을 가지고 있을 당신이 덤빈다면... 그래, 여기까지. 당신은 아마 히어로 기관의 간부까지는 아니겠지만— 어느정도 촉망받는 인재일 것이다. 이 나라를 넘어 외신들도 주목하고 있는 '그 여자'와의 협상 자리에 파견된 게 당신이니까! 웬만히 믿음이 가는 인간이 아니고선 보내기 힘든 자리일 것이다. 그러니 당신은 히어로로서 어느정도 출세가 보장된, 윗분들의 귀여움을 받는 실력 있는 사람이겠지. 뭐, 아닐 수도 있겠지만. 희생 당할 게 뻔하다는 이유로 총알받이처럼 내던져진 애물단지일 수도, 독불장군처럼 막나가는 성격에 의해 갑작스레 끼어들어 난입하게 된 열혈 히어로일 수도 있다. 아니면... 오늘 순찰 당번에 걸려서 재수없게 끌려왔을 수도? 아무튼 당신은 그런 사람이다. 당장 "히어로 시켜줘!" 라는 생떼 같은 요구를 함부로 응할 수 있거나 응하지 못할, 히어로 아무개씨. 당신은 이 상황을 어떻게 타파할 것인가?
" 내가 여태 잘못 살아온 건 알아. 회개 하고 싶다는 그런 이기적인 생각은 아니고— "
여자가 한참이나 머리를 굴린다. 적절한 단어가 생각나질 않았다. 이거, 면접이라도 보는 기분인데! 여자는 해맑게 생각했다.
" 한 번쯤은 정의의 히어로로 살고 싶달까... "
멋지잖아? 정의를 위해 싸우는. 사랑을 모르는 당신이 불쌍해요! 따위의 대사를 던지는 히어로 말야! 아무래도 여자는 마법소녀 놀이가 하고 싶었던 모양이다.
굳이 그녀를 만나기 위해 경찰서로 찾아간건 아니었지만, 그녀가 눈에 띄었다. 언젠가의 식사자리에서 잘부탁드립니다, 라고 말 하던 그 부패경찰이던가? 그게 아니라면, 단순한 연락책 인부에 적혀있던 여자던가? 기억이 꽤 혼탁하다. 언제라도 냉철한 판단력을 잃지 않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지만, 지금은 그렇지 못하다. 흐릿한 시야가 눈에 들어온다. 매캐한 담배연기가 자욱하게, 그러면서도 한 송이의 꽃처럼 피어오른다. 기분이 별로 좋진 않았다. 하지만 계속해서 생각해야했다. 중요한 것, 그리고 중요하지 않은 것을 구분해내야했다. 지금 내게 가장 중요한건 무엇이지? 그래, 복수다. 철저하게, 그리고 파괴적으로. 이 도시를 전부 부숴버리는것. 그것 하나만을 바라볼 수 있다면, 그리고 그 끝에서 새빨갛게 불타오르던 태양이 지평선 너머로 추락하는것처럼, 내가 저 절망 아래로 끝없이 빠져들어간다고 하더라도. 어차피 내게 남은 것은 지독한 공허뿐이다. 그 무엇도 이젠 내 손아귀에 남아있지 않아. 나 자신의 마음마저도. 길게 담배연기를 내뱉었다. 그러면 그 다음으로 중요한것은? 그녀가 나를 부른다. 그녀는 나를 알고 있다. 나 또한 그녀를 알고 있다. 그녀의 테가 큰 안경은 윤이 났고, 친절해보이는 미소를 짓고 있었다. 메마른 입술을 떼자 찌직, 하는 거슬리는 소리가 귓가에 들려오고, 선홍빛 핏방울이 입새에 방울졌다.
" 제안을, 하나 하지. "
입가에서 나오는 내 목소리는 지극히 메마르고, 건조했다. 늘 듣던 계산적인 목소리였다. 자그마한 체구의 그녀를 내려다보며 눈을 몇번 깜빡였다. 그리고 가만히 쳐다보고, 입새 사이로 흐릿한 담배연기를 내뱉으며 뜸을 들였다. 네 동그란 안경테가 빛을 받아, 붉은빛 자욱이 번져왔다. 그녀는 그렇게 높은 위치의 인물이 아니고, 나는 그녀보단 높은 인물이다. 그레이 하운드 컴퍼니의 보스니까. 내 쪽에서 매달리는듯한 태도를 취하는건 금물이다. 얕보이면 물어뜯긴다. 실제로 나는 지금 목덜미를 물린것과 다를 바가 없는, 상처입은 짐승이니까. 내 쪽에서 얘기하는 제안은 분명히 네게 자극적이겠지. 생명의 위협을 느낄수도 있을것이고, 권력욕에 취해 야망을 불태울수도 있다. 그도 아니라면 어떤 일거리인지 생각해볼법 하겠지. 다양한 생각은 곧 혼란으로 이어지고, 그때에 꺼내는 달콤한 제안. 오히려 너무 깔끔해서 찝찝할정도의 제안. 거기서 신뢰를 사면 된다.
" 2억 달러를 가지고 싶지 않나? "
2억 달러. 그 누구도 꿈꿔보지 못했을, 가히 천문학적이라고 할 수 있는 금액. 이 돈이 있으면 말 그대로 무엇이든 할 수 있다. 개인이 꿈꾸는 선에서는. 아픈 가족에게 최상의 의료 서비스를 제공하면서, 돈 걱정이라곤 없이 지낼 수 있다. 커다란 집, 스포츠카, 화려한 옷, 무엇보다, 하루하루 배 곯지 않고 죽을때까지,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살아갈 수 있다. 이걸 어떻게 제공하냐고? 간단하다. 내 회사의 주가 총액이 2억이니까. 회사를 경매로 팔기만 하면 된다. 내 입지를, 내 회사를. 아니, 내가 키운 내 조직을 원하는 녀석들은 굳이 이 도시가 아니더라도 가득하니까. 이 빌어먹을, 쓰레기 같은 도시가 아니더라도. 경매로 들어가기만 하면 경쟁이 붙어 그 두배, 잘하면 세배까지 얻을 수 있다. 뭣하면 지금의 내 자리를 그녀에게 주어도 괜찮겠지. 그녀가 사업에 능력만 있다면, 범죄와는 완전히 손을 떼고 다른 지부를 차린 뒤, 그곳을 본부로 해 양지에 발을 들일 수도 있다. 그게 아니라면 돈만 챙긴 뒤 하와이같은곳에서 대부호의 삶을 사는것도 좋겠지. 그러나, 오히려 너무 조건이 좋기에 무슨 일을 하자고 할 지 감이 잡히지 않을 수도 있다. 뒤끝이 좋지 않은걸 경계하거나, 이용당하는걸 꺼릴수도 있겠지. 나는 천천히 다 피운 담배꽁초를 바닥에 던지며, 부드럽게 장갑을 벗었다. 흉터와 굳은 살 투성이인 손. 그것을 물끄러미 보았다. 이것 만이 내 전부였고, 오롯이 내가 믿을 수 있는 것이었는데. 입에 머금은 담배연기를 뱉었다. 감상에 빠질 시간은 없다. 오른손에서 반지를 빼내어 그녀에게 건네었다.
" 내 도장이다. 통장에 7천만 달러가 있다. 그걸 가지고 스위스로 향하면 꺼내줄거야, 물론 전부 현금으로. "
눈을 몇번 깜빡였다. 이제 더 뜸을 들이는건 오히려 독이다. 미끼는 그녀의 손에 쥐어졌고, 이건 현실로 다가왔다. 이제 물고기를 낚을 차례다.
" 날 도와주면 마저 2억 달러를 주겠다. 그건 선금으로 네게 주는거고. 자네의 대답을... 듣고싶군. "
가만히 그녀를 바라보며, 새로운 담배를 꺼내어 입가에 물었다. 그리고 그녀에게 성냥곽을 건네었다. 이것으로 난 그녀에게 모든 선택권을 주었다. 결정은 오롯이 그녀만이 할 수 있겠지.
표정은 웃되, 안색이 창백해진다. 거울을 보지 않아도 알 수 있다. 킹핀의 얼굴이 나의 얼굴을 비추는 거울과도 같았다. 몸에 힘이 풀려 서로 맞잡은 두 손이 가슴께까지 슬금히 내려갔다.
2억 달러. 내가 알기론 그레이하운드 컴퍼니를 매각하면 그 정도의 값이 나온다. 도와주면 회사를 주시겠다구요. 예. 퍽이나 그러시겠습니다. 이건 돈을 주겠다는 말이 아니다. 조금 귀찮은 일을 할 건데 네가 전부 책임을 떠안고 죽어라. 뭐 이런 뜻일게 분명하다. 거절하면 병원에 있는 네 언니가 어떻게 될지 모른다는 말은 할 필요도 없었다.
어디서부터 무엇이 잘못된거지? 지나간 반 년어치의 시간을 되돌려보았다. 컴퍼니의 사업장을 건드린 적은 없었다. 컴퍼니의 직원을 체포하거나 귀찮게 굴지도 않았었다. 병원비가 밀린 적도 없었다고! 이용가치가 떨어졌다는건가? 다른 패밀리에 제물로 넘겨? 불길한 생각은 들불처럼 번져갔다. 수습할 수가 없었다. 2억 달러라는 불씨는 수소폭탄만큼의 위력을 가지고 있었다.
"킹...핀..."
"혹시 제가 뭐라도 잘못한 게 있다면...."
내 인생 여기서 허무하게 종치나? 수많은 죽음을 보았고, 죽음은 공평하지도 합리적이지도 않다는 사실 정도는 이미 알고 있다. 하지만 주님. 왜 하필 지금이란 말입니까? 제가 앞으로 살아갈 많고 많은 날 중에 하필 지금! 눈을 떠보니 나도 모르게 다리를 굽혀 무릎을 꿇고 있었다. 동그란 거랑 네모난 거를 받은 것 같은데, 그게 뭔지 눈에 들어오지도 않고 날벼락 앞에서 중요한 것도 아니었다.
"뭐든지 할게요. 살려만 주시면 시키는 일은 다 할게요! 저 아직 죽고 싶지 않아요!"
죽음 앞에서 애걸하는 사람은 다 똑같더라. 그들의 진부함을 비웃던 때가 나에게도 있었다. 그런데 그 상황을 직접 맞닥뜨리지 정말 판에 박은 것처럼 이런 말 밖에 나오지 않았다. 비굴하다. 하지만 그게 무슨 대수냐.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낫다고 했다. 살아남을 수 있다면 킹핀의 발도 햝을 각오가 내게는 있었다. 이 빌어먹을 도시에선 그 정도 각오 없이는 하루도 살 수 없었다. 특히 나같은 소시민에게는 더더욱 말이다.
무슨 제안을 하려고 2억 달러라는 폭탄을 던졌는지 짐작조차 할 수 없었지만, 나는 한다고 해야 했다. 당장 킹핀의 심기를 거스른다면 허리가 거꾸로 접혀 죽지 않겠는가?
"저희...저희 잘 지내고 있었잖아요..."
"저번 컨테이너에 사람 실어왔을 때 섞여있던 기자 나부랭이도 제가 찾아드렸었고 또...."
뭐, 킹핀에 대한 세간의 인식은 이 정도였다. 피도 눈물도 없는 사냥개. 사람들이 내면을 들여다보기에 그는 너무 높은 곳에 있었으니까. 그가 가진 마음 속의 공허란 아무래도 좋은 일이었다.
그녀의 표정은 웃고 있었지만, 안색은 창백해졌다. 애석하게도, 그녀는 패닉에 빠진 모양이었다. 보수로 제안한 2억달러는 그녀의 의욕을 불러일으킨게 아닌, 생존 욕구를 불러일으킨것같다. 혹시 뭐라도 자신이 잘못한게 있다면, 그리고 다리를 굽혀 무릎을 꿇고. 뭐든지 하겠다며, 아직 죽고싶지 않다는 말을 하기 시작했다. 뻔했다. 늘상 봐오던 목숨을 구걸하는 행동들.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을 전부 내어줄테니 제발 살려만 달라며. 합리적으로 보면 그것이 맞았다. 살아 있어야 돈을 쓰든, 가족과 시간을 보내든, 밥을 먹든, 하다못해 가는 길 마지막으로 담배라도 한 대 피울수 있지 않겠는가? 머리가 지끈거려온다. 가족의 얼굴이 떠오른다. 무참하게 찢겨, 시체가 되어버린 그녀들이. 그건 더이상 내 가족이 아니었다. 한 덩이의 고깃덩이에 불과할 뿐이었지. 그녀들도 살려달라고 이렇게 애원했을까? 사냥개가 당신을 가만히 두지 않을것이라고 엄포를 놓았을까? 아니, 아니지. 내가 유일하게 사랑했던 여자는 내 딸의 눈과 귀를 막았을거다. 그리고는 담담하게 기도했겠지. 적어도 이 아이 만큼은 살아남길, 그리고 내 행복과 안위를 기도했겠지. 나는 죽어도 그들과 함께 하지 못할것이다. 소원이 있다면 그녀들이 천국에서 행복하는 것 뿐. 내겐 지옥이 기다리고 있다는것 쯤은 나도 알고있다. 우리 잘 지내고 있었다고, 자신의 우수함을 어필하는 그녀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리고 조용히 오른손 검지를 입가에 가져다대며 쉿, 하고 자그마한 소리를 내었다.
" 진정하게. "
짤막하게 한 마디를 내뱉었다. 그녀는 우수했다. 그것이 내가 그녀에게 바라는 전부였다. 내가 그녀에게, 내 마음속의 공허를 없애달라고, 위안을 바라겠는가? 그녀로썬 할 수 없는 일이고, 또한 그녀도 바라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결국 타인에 불과하니까. 내가 그런 것을 바라지도 않지만, 바란다면 그건 멍청한 일에 불과할 뿐이겠지. 머리에 쓰고 있던 모자를 벗고, 왼쪽 무릎을 꿇으며 그녀와 시선을 맞추었다. 그리고 가볍게 눈을 깜빡였다. 흘러내린 흑색 머리칼을 가벼이 쓸어넘기며, 무의식적으로 불이 붙지 않은 담배를 몇번 빨았다. 우선은 그녀가 진정해야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제대로 된 대화를 나눌 수 없겠으니. 약점을 바탕으로 계약을 맺어야 한다. 그래야 같이 행동할 수 있다. 전적인 믿음, 호의, 친밀감. 그런것들은 너와 내가 아무리 해도 맺을 수 없다는건 알고 있었다. 굳이 네가 아니더라도, 타인과는 맺기 어려웠으니. 가만히 그녀를 바라보았고, 오래 물고 있던 필터는 어느새 입가에 맺힌 핏방울에 젖어 조금 붉게 물들었다.
" 돌려 말하는게 아니야. 자네가 큰 건의 책임자로써 죽어주길 바라는건 더욱이 아니지.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는 대충 감이 잡히네. 2억 달러, 손에 한번도 쥐어보지 못한 금액을, 그것도 내 회사를 팔아야 손에 쥘 수 있는 금액을 공짜로 주겠다는 멍청이가. 이 도시에 어디 있겠나? 그건 나도, 자네도 확실히 알고 있는 사실이지. 그러나, 나는 자네의 능력을 높이 사고 있네. 그러니 2억 달러를 주겠다는 뜻이야. 실제로도 이미 자네의 손엔 7천만 달러가 쥐어져있지 않은가? "
무미건조하게 보인다는건 알고 있다. 그러나 나는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조금쯤은 네가 진정하길 바라면서. 길게 말했더니 목이 타온다. 몇번 기침을 뱉으면서 나는 다시 말을 이었다.
" 잘 듣게. 자네가 나를 도와주면 내 모든걸 주겠네. 그리고 나는 홀연히 사라질거야. 왜냐고? 이 도시의 권력자인 내가, 이런 얘기를 하는게 믿겨지지 않겠지. 이유를 말해주겠네. 살해 협박 편지가 내 집으로 도착했고, 아내가 다쳤네. 딸 아이도 겁에 질려 울고있어. 내가 뭘 하려는지 알겠지? 그래, 복수다. 어떤 녀석이 그랬는지 모르니, 이 도시의 모든 쓰레기들을 전부 죽여버릴걸세. 그러고 나면? 자네, 나는 합리적인 사람이야. 난, 내가 이 위치에 있는 한 이런 삶이 계속된다는 결론에 다다랐지. 그렇기에 모든걸 처리하고 떠날거야. 첫번째로, 복수를 할 거고. 두번째로, 내가 가진 자산을 전부 매각하고. 세번째로, 해외로 떠난다. 그러나, 이 모든 과정들이 성공적으로 이루어진다고 하더라도, 내가 가진 재산, 내가 가진 인맥, 나의 입지. 그것들이 내게 조금이라도 남아 있는 한, 부스러기를 주워 먹기 위해 쥐새끼들이 끊임없이 덤벼들겠지. 그러니까 난 그 모든걸 털어내고, 다른 차명 계좌에 있는 돈으로 유유자적하게 살아갈거다. 어차피 돈은 많으니까. 여기까지, 이해했나? "
가만히 그녀를 바라보았다. 설득력 있는 얘기를 꾸며냈는지, 스스로도 잘 판단이 서지 않았다. 여전히 시야가 흐릿하다. 허나, 제법 들어줄법한 이야기였다고 생각한다. 가족이 다쳤으니 복수를 하는것은 이상하지 않고, 또 다시 이런 일에 휘말리지 않기 위해 모두 죽인 뒤 떠나는것도 이상하지 않다. 후환을 남기지 않기 위해 재물을 털어내는 과정도 합리적이고. 그렇다면? 왜 하필 나인가. 그리고, 이 과정에서 자신이 후환에 포함되지 않는다는 증거는 있는가? 라는 생각을 할 수도 있겠지.
" 왜 자네냐고 생각하고 있나? 딱 자네 정도가 좋아. 나를 배신하면 언제든지 내 손으로 죽일 수 있는 사람이 자네니까. 또, 그 많은 돈을 추적하면 결과적으로 자네를 쫓을 법 하니, 자네가 살아있는 편이 나로써도 도움이 되지. 그러면 너무 자네에게 리스크가 큰 것은 아닌가? 꼭 그렇지만도 않아. 막대한 부로 호위를 사면 되지 않겠는가. 혹은, 이 쓰레기같은 도시를 떠나 제대로 치안을 유지하고 있는 도시의 경찰이 되어 그곳에서 살아가도 되고. 어때, 자네도 이 제안이 왜 합리적인지 이제 이해가 가나? "
맞는 말이었다. 내가 판단했을때엔 그녀에게 일종의 리스크가 있는것은 사실이었지만, 현상을 유지하는 것. 그리고 막대한 재산을 손에 넣는 것. 그 둘을 저울에 달아보았을땐, 충분히 그녀가 제안을 받아들일만 하지 않겠는가.
" 한번 더 묻겠네. 불을 붙여줄텐가? "
그녀에게 건넸던 성냥곽과, 입가에 물고있어 선홍빛으로 물든 담배를 가리키며, 가만히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러고보니 킹핀과 이토록 가까이서 독대했던 적이 전에 있었나? 없었다. 만약 있었다면 내가 기억했겠지. 오늘같은 날은 수메르의 쐐기문자처럼 나의 영원 속에 새겨질 테니까. 뼛조각으로 눌러 쓴 점토판 위의 이야기는 희극인가 비극인가. 승리한다면 영광스러운 승리인가 피로스의 승리인가, 패배한다면 영웅적인 패배인가 비참한 도축인가.
눈에 눈물이 매달린다. 이내 아랫 속눈썹을 타고 몇 방울이 떨어진다. 흑, 끅, 격한 호흡이 강제로 멈추는 반동으로 어깨가 들썩인다. 킹핀은 내 앞에 함께 무릎꿇어 시선을 맞추고, 심지어 옅은 미소를 지어주기까지 한다. 놀라서 눈물이 뚝 그쳤다. 죽을 때가 되니 영안이 트였나, 신묘한 것들이 보였다. 겁대가리를 상실한 누군가가 킹핀의 가족을 건드렸다. 일단 죽이면 신께서 구별하실테니 의심가는 놈들은 모두 주물러버리겠다. 그리고 회삿돈은 세탁이 덜 된 블랙머니라 계속 가지기가 찜찜한데, 날 도와주면 전부 네게 줄 테니 뒷일은 네가 알아서 처리해라.
대강 이런 이야기였다. 복수하려면 컴퍼니에 존 윅같은 킬러가 한 트럭일텐데 왜 고기 썩은내나 풍기는 경찰에게 와서..... 아, 누구도 믿을 상황이 아니고 부하 짓일지도 모르니까? 그렇게 사방이 도산검림인데 가장 먼저 생각하고 찾아온 사람이 나. 이렇게 되면 기분이 묘해진다. 사적인 대화 한 번 제대로 하지 않은 사람인데. 킹핀은 오래도록 나를 보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서장도 내게 이렇게 하진 않을 것이다. 돈의 액수를 고려하면 여러 사람에게 제안을 하여 돈이 나뉘지도 않았다. 나 혼자인게 분명하다.
"어.. 어어.."
고개를 들어도 눈을 맞추지 못하고 자꾸 떨구었다. 손 안에서 7천만 달러와 성냥갑이 바스락거렸다. 확증 편향일지도 모른다. 내 영혼, 내 몸, 나의 재산. 그리고 내가 가진 모든 가치있는 지식과 능력, 경험들. 모두 합쳐서 돈으로 환산해도 2억 달러의 발끝에 미치지 못한다. 확증 편향일지도 모른다. 나는 사량발천근을 일삼는 무술 고수가 아니다. 2억 달러를 옮기다 사지가 부러지는 미래가 가장 합리적인 예측이다. 하지만 괜찮지 않을까. 그레이 하운드의 킹핀 정도의 사람이라면 간악한 협잡꾼처럼 굴지 않을 것이다. 확증 편향일지도 모른다. 킹핀의 부하 중엔 협잡꾼이 많겠지만, 본인은 기품있는 콜리오네에 가까우리라. 희망사항이었다. 그래야 내가 2억 달러를 받는다. 확증 편향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런 곳에서 살다보면 사람이 좀 망가지기 마련이다. 확증 편향 X까라.
왠진 몰라도 킹핀은 나를 신뢰하고 있다. 제안도 어디서 물건을 전달하라는 식의 모호하고 불길한 예의 것이 아니다. 복수와 단절은 강력하고도 명징한 키워드였다. 그리고 2억 달러가 있으면... 언니도 멀쩡하게 돌려놓고, 이 지긋지긋한 도시도 더럽혀진 신념도 모두 던져버리고... 돈을 어디에 얼마나 쓸지 상상조차 못 할 지경이었다. 막말로 퇴역 항공모함을 사서 평생 바다 위에서 살 수도 있을 것이다.
- 따닥, 딱
- 치이이-
성냥을 키자 밝은 미래가 어른거렸다. 성냥팔이 소녀는 이 짓을 하다가 죽었다. 그러나 나는 저항하지 못했다. 어차피, 어차피 이런 식으로는 오래 살지 못한다. 재수없어 눈먼 총알에 맞아죽으면 다행이고, 외줄타기에서 한번만 삐끗해도 성난 조직원에게 잡혀가 차마 못 볼 꼴을 볼 가능성이 크니까. 이 도시에서 호상은 예수의 구원보다 얻기가 어려웠다. 이러나 저러나 그렇게 죽을거면 승부수라도 띄워봐야 않겠는가.
"천인공노할 일이네요. 어느 주제모르는 인간이 감히 그러고 다니는지. 후회하지 않으실겁니다. 저, 이래보여도 FBI 아카데미에 다녀온 사람이거든요. FBI! Open up! 하고 쾅 들어가는 그거 아시죠.....헤헤. "
그 능력들을 기자 색출에나 쓰고 있긴 하지만. 아무튼 입장을 정했으면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안경을 벗고 눈물을 닦았다. 약자의 처제술에는 쓸개가 없었다. 담배 끝이 달아오른다. 이건 내가 사건을 맡은 거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어라, 그러고보니 이 사람. 입에 피 난다.
"피해자 조사부터 시작할까요? 아니면 남들 모르게 과학수사대를 보내드릴까요?"
일단 경찰스러운 선택지를 제시해보았다. 협박 편지. 사모님과 따님이 보고 들은 것. 모두 증거 아닌가. 나는 다시 웃는 표정이 되었다. 눈이 발갛게 되어서 웃고 있으니 퍽이나 야릇한 기분이 들었다.
승리는 내게 언제나 달콤했다. 지갑을 훔치는데 마침내 성공하여, 몇 푼 안되는 돈으로 쓰레기같은 음식을 사 입에 쑤셔넣었을때의 그 기쁨. 딱딱한 빵, 비계뿐이면서도 무엇으로 만들었는지 알 수 없는 마른 고깃조각, 탁한 물 한컵. 고작 그 따위 음식임에도 너무나 달콤했다. 단신으로 적대 조직의 지부에 쳐들어가 모조리 때려 죽이고, 사냥개라는 이명을 획득하고, 중견 보스의 자리를 차지했을때의 그 기쁨. 적대 조직과의 전쟁 끝에, 조직의 보스로 자리잡았을때의 기쁨. 그러나, 이젠 승리도, 패배도 남지 않았다. 이 도시 위 모든 생명을 거두더라도. 승리한다고 하더라도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 패배한다고 하더라도, 비통하게 죽을 뿐이다. 복수조차 이루지 못한 채, 다시 한번 실패를 겪으며 처참하게 죽는 것. 오장육부가 뒤틀리는것같은 격통을 품에 안고 죽어버리는것 뿐. 그럼에도 나는 나서야 한다. 그것이 의미가 없는걸 알더라도, 스스로 목에 맨 줄을 잡고 발버둥치는 비참한 말로임에도. 죽음은 아무것도 아니다. 그러나 승리하지 못한 삶을 살 바엔 죽는게 낫다고 하던가. 우스운 일이다. 그리고 아이러닉한 일이다. 그녀의 눈에 눈물이 매달린다. 몇 방울씩 떨어지는 눈물을 가만히 보았다. 울어 본 적이 언제였던가. 격한 호흡으로 어깨가 들썩거리는 그녀의 어깨에 차분히 손을 올리려 뻗었다. 조금은 위안이 되길 바라며. 위협으로 보인다면- 그건 어쩔 수 없는 일이지 않겠는가. 무표정한 채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여전히 시선을 맞추지 못한 채로 자꾸 눈을 떨구었다. 그녀의 손 안에서는 내 반지와, 성냥갑이 바스락거린다. 그리고, 그녀는 성냥을 켰다. 붉은 빛이 아른거린다. 어스름한 불빛이, 그녀의 둥근 안경 테에 일렁였고, 나 또한 그것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녀도 분명히 알고 있을 테다. 머리로는 이해가 되고, 또한 기회라고 생각하겠지만, 쉽지가 않은 일일테지. 선악과를 먹으라며 이브에게 뱀이 속삭였듯, 나 또한 파멸로 내닫는 길에 그녀라는 동반자를 만들었다. 순전히 내 계획을 위해. 허나 죽으면 그녀도 결국 거기까지였던 운명이겠지. 이 빌어먹을 도시에서 사는 우리는, 모두 알고 있는 사실이지 않은가.
" 그래, 자네의 그 우수한 능력. 기대하고 있다네. "
입가에 자그마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희미하긴 했지만, 그녀의 실없는 이야기를 들어서일까. 선홍빛으로 젖었던 담배가 붉게 타오른다. 입 안쪽으로 부드럽게 연기가 넘어들어오니 이제서야 조금 머리가 맑아지는 느낌이 들었다. 한 대로는 부족했던 모양이군. 매캐한 연기를 뱉어내며, 예의 무미건조한 표정으로 돌아왔다. 그녀는 내 제안을 받아들였고, 내게 불을 붙였다. 이제 우리는 돌이킬 수 없는 한 배를 탄 몸이 되었다. 언제나 서로가 서로를 배신할 수 있는 관계. 나로써는 그녀를 죽이면 되는 일이고, 그녀는 정보를 흘리면 된다. 킹핀의 가족이 다쳤다. 그는 복수를 계획하고 있다. 그 한마디의 정보가 새어나가면, 내 성격을 아는 이들은 모조리 경계할것이다. 그러면 난 복수를 이루지 못하고 그대로 죽어버리겠지. 그렇기에 우리는 같은 목적을 가지고 행동할 수 있다. 더없이 완벽한, 이상적이고 실용적인 관계다.
" ...정보부터 취합해볼까. 인물들 리스트는 전부 가지고 있겠지? 보고를 좀 듣고 싶은데. 한 명도 빠짐없이 말일세. 우선 적대 조직인 스마일 컴퍼니부터 쳐야겠어. 한 놈도 빠트리지 말고, 전부 내 손으로 찢어죽일거니까. ...이대로 경찰서 앞에서 이야기를 계속 나누는것도, 상황이 그래보이니. 근처의 커피숍으로 자리를 옮기지. "
가슴 안쪽까지 깊게, 담배를 빨아들인다. 타닥거리는 소리가 경쾌하게 귀를 타고 울려 퍼진다. 몇번 눈을 깜빡이다가, 쓰린 입가를 엄지손가락으로 닦아내고는 천천히 벗었던 가죽장갑을 꼈다. 그리고 모자를 머리에 깊게 눌러쓰며, 꿇었던 무릎을 피고 일어섰다. 담배가 좀 젖었군. 작게 중얼거린 뒤에, 길게 담배연기를 뱉었다. 그녀의 말대로 피해자 조사를 시작하는것도, 과학 수사대를 부르는것도. 내 거짓말이 실제였다면 합당한 방법이었겠지만, 정보가 새어나가는것을 원치 않았다. 어느 누구도 믿을 수 없었다. 내 조직 안에 있는 녀석이 벌인 일일수도 있으니. 그렇기에 다른 방법으로 나아가야 했다. 나는 적대 조직 전원의 얼굴과 이름, 자세한 정보를 알고 있지 않다. 허나 경찰의 막대한 데이터베이스라면 내게 그것을 알려주리라. 부패경찰로 가득한 이 도시의 경찰청이라고 하더라도, 그 정도 쯤의 정보는 기록되어 있겠지. 누가 누군지를 알아야 건드리지 않기도 할 테니까. 그런 자세한 정보를 알고, 단 한 마리의 쥐새끼도 놓치지 않고 모조리 찢어죽여야 했다. 적대 조직인 스마일 컴퍼니는 그런 점에서 첫번째 타깃으로 적합했다. 일대에 마약을 판매하며 빠른 속도로 성장한 조직이며, 점 조직 형태를 갖추고 있어 격파하기도 편했다. 그리고, 내게 원한을 가지고 있는 놈이 이 도시에 얼마나 없겠냐만은, 유달리 큰 원한을 가지고 있는 녀석도 그곳에 간부로 몸을 담고 있었다. 마약에 취해 충동적으로 일을 저질렀을 가능성도 분명히 배제할수는 없겠지.
" 특히 그에 대해서 알아봤으면 좋겠군. 벌룬이라고 하면 알겠지? 마약 제조상. "
합법과 비합법의 사이를 오가는, 풍선 형태의 마약 제조 전문가. 인상을 찌푸렸다. 그리고 관자놀이를 신경질적으로 매만졌다. 어디가 시발점인지 기억조차 나지 않는 질긴 악연이었다. ...시선을 그녀에게로 돌렸다. 조금 성급했나. 긴 얘기를 주절거리며 늘어놓는건 좋아하는 스타일이 아니었다. 조금은 늦었지만, 그녀에게로 손을 뻗으며 악수를 청했다.
" ...아직 통성명도 제대로 안했군. 언제까지 자네라고 부를 순 없으니, 이름을 묻고 싶은데. "
그녀는 이제 나의 파트너였다. 그러나 우리는 서로에 대해서 제대로 알지 못했다. 고작 허울뿐인 관계라면 계약에 금이 가기 쉽다. 조금 더 서로에 대해서 알 필요가 있었다. 그 편이 합리적이겠지. 반쯤 타들어간 담배를 마지막으로 깊게 태우고선, 저 멀리 던져버렸다. 커피는 좋아하나? 짧은 질문과 함께.
>>326 (그 시선에 눈싸움으로 응한 사람은 꽁지머리로 묶은 짧은 금발에, 살구색 피부, 서늘한 눈매와 창백한 벽안을 가진 여성이었다. 그는 자신을 쳐다보던 이가 목례를 하더니 느닷없이 같이 의뢰를 맡을 호위를 구하고 있다고 말을 걸어오자, 덤덤한 투로 대꾸했다.) 제가 생업이 있어서요. 어떤 의뢰인지, 기간은 얼마나 걸리고, 보수는 얼마인지 말씀해주시면 수락 여부를 말씀드리죠. (이 근처 용병 길드에 가면 좀더 쉽게 인력을 구할 수 있을텐데, 왜 번거롭게 주점에서 구인을 한담? 의아함이 앞섰지만, 일단 들어나보고 영 쎄하면 거절하자는 생각에 그는 맥주를 한모금 넘기며 대답을 기다렸다.)
그것은 울거나 웃을 줄 알았지만 그럴 때 그것의 목에서는 아무런 심지어 바스락거림마저도 올라오지 않고는 했다. 당신은 그 이유를 알지 못했다. 처음부터 성대를 제거했다고 하던가? 어쩌면 그것을 넘겨받을 때 들었지만 잊어버렸을지도 모른다. 그것은 그러나 숨소리를 낼 줄 알았다. 그것이 내는 숨소리는 규칙적이고 유기체적이었다. 언젠가부터 비어있던 집은 그것과 당신의 숨소리로 차기 시작했는데 그래서인지 당신은 오랜 숙적인 불면증을 뒤로하고 그것의 숨소리를 자장가삼아 잠의 여정을 떠날 수 있게 되었다.
가끔은 모든 것이 그것의 탓이고, 그것의 덕인 것만 같다.
오늘도 당신은 집에 들어왔다. 그것은 거실 바닥 위에서 웅크리고 졸고 있었다. 당신은 초인종 소리를 내지 않았는데 초인종 소리를 내었다면 그것은 화들짝 놀라 고개를 쳐들고서 여기가 어딘지, 자기가 누군지,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차례차례 알아내고서 틀림없이 현관으로 달려와 당신의 구두를 짓밟기까지 하며 무척 반겼으리라.
당신은 조용히 현관에서 신발을 벗으며 그것이 조그마한 머리통을 미세한 움직임으로 까닥거리는 모습을 관찰할 수 있었다. 이대로 있으면 그것의 머리는 곧 바닥과 밀착하리라.
>>335 스마일컴퍼니는 겉으로는 코미디 계열 연예 그룹사고, 연극소품이라던지 무대세트라던지 이런걸 담당하고 있지만 실상은 거대마약조직으로 생각하고 있어~ 벌룬은 풍선 관련 마약(해피벌룬 등) 제조에 일가견이 있는 사람 정도? 원하면 좀 더 상세하게 살 붙여볼건데, 아니라면 주도적으로 착착 진행해도 좋아! 언제나 재밌게 이어나가려고 노력중이라서,,, 매번 재밌게 이어줘서 고마워!!!
제복 명찰에 박힌 이름이기도 했다. 그리고 커피를 좋아하냐는 질문의 답은 '잘 모르겠다'. 사람이 물 없이 하루도 살 수 없다고 해서 물을 좋아한다고 할 수 있을까? 그건 호불호의 영역을 벗어난 광기와 비스무리한 개념이었다. 오오, 초과근무와 카페인. 나의 오랜 벗이여. 마피아와 결탁했다고 업무량이 딱히 줄어들진 않더라. 썩는 것도 성심껏 열심히 썩어야 하고, 그렇다고 대놓고 썩으면 해고에 징역살이까지 따라오니 대외적인 업무도 보아야 했다. 내가 이 시간에 경찰서에 있던게 바로 그래서였다.
나는 무릎을 털고 일어나서 쭈뼛대는 기색으로 그의 손을 맞잡았다. 킹핀의 손은 크고, 거칠며, 단단했다. 남성적이라는 뜻에 이토록 걸맞는 손이 또 있을지. 이로써 우리는 한 배를 탄 선장과 일등항해사로 임명되었다. 서로가 서로에게 두려움을 가진 기기묘묘한 관계성. 복수와 2억이라는 판돈을 걸고 밤중에 암살자가 찾아올까, 도시 한복판에 호외를 뿌려버릴까 불안해하겠지. 그러나 두려움이란 뾰족한 발언은 배 밑바닥에 구멍을 내는 법. 한 배를 탄 마당에 다같이 빠져죽기 싫으면 그 두려움을 조용히 감춰야 하지 않겠는가. 내가 이 일을 하기로 정한 이상 이전에 했던 생각은 모든 의미를 상실한다. 이제 갈 길은 두 곳뿐이다. 성공하던가, 몰락이 배제된 실패를 받아들이던가. 실패해도 곱게 목을 빼진 않으리라. 꺼져가는 빛을 향해 분노하고 분노할 것이다.
심야의 카페는 당연히 한적했다. 졸려보이는 알바생은 뚱한 표정으로 스마트폰을 주시한다. 놀랍게도 또 다른 손이 있었는데, 창작의 고통에 빠진 예술가라도 되시나. 아메리카노 빨대를 잘근거리면서 텅 빈 수첩을 긁어대고 있었다. 저거 샷을 몇 번이나 들이부은거야? 색깔이 심상찮았다. 예술가의 영혼이라도 지녔는지 마피아도 부패경찰도 죽음도 무시하고 한 차원을 초월해 혼자만의 세계로 진입하였다는 인상을 주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내 영혼은 그렇게 고결하지 못하니까. 숭고한 고뇌를 하는 대신 비상 출구의 위치를 눈으로 훑었다.
"스마일 컴퍼니랑 벌룬이라면. 아하, 웃음풍선 팔아먹는 놈들 말씀이신거죠?"
킹핀은 어울리게도 범인을 특정하는 외과적 폭격에 관심이 없어보인다. 좀 전에도 말했듯, 그의 스타일은 하늘에서 내리는 죽음의 소나기. 융단폭격이다. 커피를 받아 자리에 앉았다. 천장을 본다. 감시카메라가 하나, 둘, 셋. 사각은 없다. 하지만 몸을 조금만 틀어도? 몸의 많은 부분이 가려진다. 끼이익. 끼이익.
"정확한 인텔은 DB를 확인해서 알려드리겠지만, 음..."
스마트폰을 상 위에 놓으며 쇼윈도 밖을 본다. 지나가는 사람은 없다. 하지만 인도 옆에 대놓은 차량이 있다. 선팅이 있어 내부가 보이지 않았다. 쇼윈도 사이 기둥이 차량 운전석으로부터 나를 가리도록. 다시 위치를 보정한다.
"단순히 얼굴과 이름이라면 대부분 있을거에요. 대부분이 뭐냐. 전국민이 다 있죠. 문제는 스마일 컴퍼니로 키워드를 넣고 검색했을 때 안 나오는 놈들이거든요? 실제론 그쪽 사람인데 말이죠.''
''그거는 둘 중 하나에요. 사실을 숨기고 있어서 그 놈이 그쪽 놈인걸 경찰에서 모르거나? 아니면 위장신분, 기록말소 식으로 신원 자체가 오염되었거나? 그런거에요. 최대한 정보를 교차검증해서 허수를 줄여야 해요."
경찰이 대 범죄조직 업무를 열심히 했다면 정보에 빈틈이 없었겠지만 말이다. 웃기는 일이다. 목소리를 낮춘 채 계속 말했다.
나는 쉼없이 나불거렸다. 경험상 신고자에게는 입을 많이 놀려줘야 했다. 많이 말해주는만큼 그들은 편안해했다. 말을 안 해주면? 불안해하다가 제 풀에 삽질을 해버린다. 킹핀의 삽은 내 머리통으로 떨어질 것이다.
"스마일은 대외적으로 엔터테인먼트 회사니까 공개정보가 많아요. 유명한 놈은 사이트에 바로 면상이 박혀있구요. 덜 유명한 놈은 TV프로 찾아보면 나와요. 예능에 피디랑 매니저같은 사람 나오잖아요. 마지막에 스탭롤도 올라가고."
"음지에 있는 안 유명한 애들은 스마일한테 돈 받아먹는 우리 경찰 친구들이 잘 알지요. 경찰 DB란게 까고말하면 경찰 전용 위키피디아라서, 스마일쪽 통들도 부패 여하 관계없이 '문서' 편집을 자주 한다는 말이죠? 부패란건 마피아랑 유착했다는 뜻이지, 완전무장해제에 항복을 했다는 말이 아니니까.''
점조직 인원들이 풍선을 파는 핫플레이스도 파악이 되어있을 것이다. 다음 문제는 쉐프이다.
"그건 스마일한테 상납하는 치과나 카페를 털어보면 나오는게 있을겁니다."
치과와 카페. 나는 말을 멈추고 한 모금 마셨다.
"아시겠지만 풍선 안에 들어가는 기본 재료가 아산화질소잖아요? 젠켐은 또 다른 이야기지만 차차하고. 그거의 본래 합법적인 사용처이자 음지로 삥땅치기 가장 좋은 명목이...''
입술에 묻은 휘핑크림을 햝아먹었다.
"치과 마취용, 그리고 카페 휘핑크림 제조용. 그쪽 라인으로 가스를 공급받는 선이 분명히 있을거에요."
>>336 (당신이 눈싸움으로 응하자, 차가운 인상과는 달리 살짝 움찔한 듯 보였지만 이내 차분함을 가장하고 눈에 힘을 주는 것이 어딘가 어색해보인다. 그러나 이내 당신이 돌려준 말에 티는 나지 않게 화색했다. 당신이 수락할거라곤 생각 못한 듯이.) 잠깐 앞에 앉아도 괜찮을까요? (라고 공손하게 허락을 구하곤, 앉기 전에 사제복 안에서 붉은 보석이 박힌 금색 십자가를 꺼내들었다. 술집이 위치해있는 왕국보다 옆 공화국의 유명한 종교적 심볼이다.) 저는 생프텐 교의 순례자입니다. 자매님의 영혼에 고결한 의지가 깃들기를. (기도하는 제스쳐를 취하자 미세한 축복이 당신의 신체에 흘러들어온다.)
>>340 ...? (느닷없이 제 몸에 종교 의식을 행하려는 듯한 사제의 행동에 그는 반사적으로 회피하며 의자째로 물러났다. 그러다, 사제의 손에 들린 십자가를 보고는 인내심을 끌어모아 정중히 말했다.) 외람되지만 사제님, 저는 아직 수락한다고 말씀드린 적이 없습니다. 그리고 저는 해로운 것이 아니라 해도 제 몸에 갑자기 주술을 거는 행위를 그렇게 좋아하지 않습니다. 호의는 감사하지만 저와 대화를 하고자 하신다면 이런 행동은 삼가주셨으면 합니다.
>>341 (사제는 깜짝 놀란 듯한 행동을 취하고, 그 뒤 테이블 주변에서는 웃음소리가 터져나왔다. 아무것도 모르는 얼라사제한테 망신주지말라는 무책임한 말과, 신성 사기가 일어난 지 얼마 안됐다며 핀잔주는 이야깃소리도 있었다. 이질적인 존재는 시선을 끌기 마련. 사제는 급히 태세를 추스르고 공손히 손을 모아 사죄를 건넸다.) 죄송합니다. 공화국에서는 사제가 맡은 역할 중 하나였기에 타국의 문화를 학습치 못하여 경솔한 행동을 취하고 말았습니다. 근데 주변분들은 어째서 웃으시는 건가요...?
>>342 (그는 사제의 질문에 약간 당황했다. 좀 전에 주변에서 웃는 소리가 높아지긴 했지만, 그걸 왜 나한테 물어? 자기랑 대화하는 중에도 다른 손님들의 일거수일투족에 신경을 기울이고 있는 줄 아나? 알 게 뭐야, 그런 것보다는 빨리 조건이나 듣고 싶네. 크리스는 여상한 투로 대답했다.) 글쎄요, 주점에서 식사하며 웃는 일이 그리 드문 일도 아니지요. 그보다는 의뢰 내용과 기간, 보수에 대해서 말씀해주시겠습니까? 듣기 전까지는 답을 드릴 수 없겠네요.
>>343 (타이밍이나 시선이나, 이쪽을 보고 웃는 것 같이 보였는데 자신의 착각이고 보지는 못한건가? 바깥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날 지 모르니 항상 주변을 의식하고 움직이라고 들었는데. 통용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에 조금 의아한 시선을 던지다가 당신의 앞자리에 앉았다.) 의뢰 내용은 대륙에 흩어져있는 성유물의 회수입니다. 기간은 무기한. 원하실 때 그만두실 수 있어요. 보수는 성유물 회수 시 신전에서 매겨줍니다. 그 중, 반을 내어드리려고 합니다.
>>344 (성유물? 그런 거라면 가장 구미가 당길만한 사람은 그 종교 신자나 그런 사람들 아냐? 왜 타국에 와서 구인을 하지? 어쨌거나, 의뢰 내용상 무리겠군. 굳이 이직하고 싶은 생각도 없고. 그는 밑바닥에서 찰랑거리는 맥주를 마저 입에 털어넣은 뒤 대답했다.) 그럼 안 되겠군요. 말씀드린 대로 생업이 있다보니 대륙을 돌아다니며 물건을 찾는 건 어려워서요. 그런 거라면 인근에 용병길드가 있으니 거기서 한번 구인해보시는 걸 추천드립니다. (슬슬 일어날까, 휴가라지만 과음은 안 좋으니까.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가볍게 목례했다.) 그럼 먼저 일어나 보겠습니다. 좋은 밤 되시길. (그는 주점 주인에게 술값을 건네고 주점을 나섰다.)
>>345 #궁금한 게 있는데...꼭 상대방을 무안주기 위해서 이은 것 같다고 생각하는 건 내 착각일까? 짧게 이어가는 자유 상황극이라고는 하지만 매 지문마다 설정 트집에, 어느정도 어울려주려고 해도 티키타카 자체를 거부하는 것 같네...뭘 위해, 무슨 반응을 위해 그러는 건진 모르겠지만 혹시 자신의 결여된 무언가를 채우기 위해서라면 주변 사람들이 너참치를 생각해주고 그러했던 것처럼, 타인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쪽으로 생각해주길 바래ㅠㅠ
>>346 그렇게 느꼈다면 유감이지만 내 캐릭터 입장에서는 네 캐릭터가 의도한 건 아니었더라도 불시에 달갑지 않은 일을 당했으니 하지 말라는 말은 할 수 있다고 생각해. 그리고 이미 정착지에서 생업이 있는데 전 대륙을 떠돌아다니며 물건을 찾는 일을 맡는 건 여건상 어렵지 않겠니?
너참치가 원했던 상황이 아니라니 안타깝지만 원하는 전개나 반응이 있다면 다음에는 혼자만 생각하지 말고 공유해서 이런 전개로 갔으면 좋겠다, 이런 반응을 해줬으면 좋겠다 하고 먼저 의견제시라도 해주길 바래ㅠㅠ
>>347 #정말 당연한 이야기를 이렇게 굳이 굳이 해야하는 이유는 모르겠지만 내가 무슨 말을 돌려주든 그게 너 참치에겐 상관없다는 걸, 그리고 본인이 다른 참치들에게 피해를 끼치고 있다는 사실을 너참치도 알고 있는 것 같고 즐기는 거 같아보이니 더 이상은 말을 줄이도록 할게 ^^
나바레테. 그녀의 이름이었다. 제복에 박혀있던 명찰로 시선이 자연스레 내려간다. 적어도 가명은 아닌가. 멋대로 이름표를 보고 이름을 부르는것보단, 통성명을 했다는 사실이 중요했다. 분명히 신뢰감 형성에 도움을 줄 테니까. 이름을 들었으니 내 쪽에서 이름을 밝힐 차례였고, 잠시 뜸을 들였다.
" 잘 부탁하겠네, 나바레테. 벨이라고 부르게. ..흔한 이름은 아닌것 같네만, 어디 출신이지? "
멕시코 계열인가? 그게 아니라면 러시아계? 교양이 부족한 것은 언제나 아쉬운 일이었다. 늘 살아남는것, 그것 하나만으로 벅차왔으니 공부같은걸 할 시간이 부족했다. 뭐, 반쯤은 손이 안 갔던 것도 있지만. 커피, 그리고 담배, 때때로 위스키. 그러한 취미시간은 제법 달콤했다. 그녀는 쭈뼛대는 기색으로 내 손을 잡았고, 나는 그 손을 꽉 맞잡았다. 무른 손이라고 느껴졌다. 전투력을 기대하는건 힘들겠군. 혹여 사격의 천재일수도 있겠지만, 무기를 빼앗기거나, 탄환이 모두 소모되면 그 뒤론 힘들겠지. 히어로처럼 우리에게 총알이 빗겨가고, 맞아도 끊임없이 일어나고, 크게 다쳐도 붕대 좀 두르면 낫는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이동력도 중요시해야하니, 탄창을 가방에 잔뜩 실어다닐수도 없는 노릇이고. 권총에 잔 고장이 일어날수도 있고, 던진 잡동사니에 맞아 무기를 놓칠수도 있겠지. 잠시간 그녀의 손을 가만히 내려보았다.
" 나바레테 경장, FBI 아카데미 출신이라고 했었지. 우등생이었단 얘기는 못 들었네만, 사격은 좀 하나? "
우스갯소리로 FBI 얘기를 꺼낸걸수도 있겠지만, 그 말이 사실이라면 경찰이 되는 정규 과정에서도, 아카데미에서도 사격 교육은 받았을테니. 허나 그것이 사실이든, 사실이지 않든, 사격엔 젬병일수도 있는 일이었다. 그렇지만 별로 중요한 일은 아니었다. 그녀에게 킬러로써의 일을 바라고 있는것도 아니니. 보조사격 정도는 기대하고 있지만, 아니라면 어쩔 수 없겠지. 코트 안쪽에서 연습용 수류탄 하나와, 수류탄 한 발을 꺼내어 그녀에게 건네었다.
" 잘 가지고 다니게. 무기를 혹시 놓치면 그걸 써. 이것도 옷 소매에 달아두고. "
원래는 아내에게 주려고 했던 거지만, 상관 없겠지. 그녀에게 자그마한 손목밴드를 건네었다. 감압식 전기충격기였다.
" 손목을 빠르게 위 아래로 한번씩 꺾으면 작동한다. 그 뒤엔 가져다 대기만 하면 되는 간단한 일이야. 혹시 그쪽 손목이 잡히더라도, 일정 압력 이상이 가해지면 자동으로 작동하는 편리한 물건이지. 감전대책도 되어있으니 자네가 감전될 걱정은 안 해도 되네. 세번까지만 사용할수 있으니까 잘 알아두고. "
대비책으로 사용하는 물건에 역으로 당하는것만큼 우스운 일은 없지. 그런 의미에서 이건 실용적인 대비책이었다. ...이야기를 나누다보니 심야의 카페에 도착했다. 허름하면서도 고풍스러운 원목 소재의 인테리어가 새벽의 가로등과 맞물려 아늑한 분위기를 내뿜고 있었다. 어줍잖은 갱들에게 보호세를 바칠 만큼은 장사가 되는 모양이었다. 한적한것도 마음에 들었다. 한 켠을 차지하고 있는 손님 외에는 아무도 없었다. 에스프레소 한 잔을 주문하고선 자리에 앉으며 코트의 단추를 풀었고, 장갑과 모자를 벗었다. 흘러내리는 앞머리를 가볍게 넘기며, 시선을 그녀에게로 돌렸다.
" 나바레테, 자네의 정보접근권한은 어디까지 유효하지? 이 도시는 부패했어. 다른 도시, 다른 주에서 떠넘기고 싶은 부랑자들, 노숙자들, 그리고 마피아들이 이 곳에 모여있는게 차라리 그들에겐 편할테니, 계획적으로 부패했다고 볼 수 있겠지. 하지만 이곳은 범죄자들에게서 로비를 받아 배를 불릴 먹이터인 동시에, 위협적인 도시야. 이곳의 쓰레기들이 바깥으로 진출하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고, 실제로 그렇게 행동하는 녀석들도 있을테니, 정부가 그걸 용납하지 않을텐데. 누군가는 따로 이곳의 조직들을 제대로 정리해두지 않았겠나? 놈들이 원하는건 통제니까. 그 통제를 벗어나는 녀석들을 마음에 들어하지 않는 녀석들도 분명히 있다고 생각하네. 자네의 말대로, 단순히 문서 편집에 그치는 선이 아니라. "
아무리 로비를 하면서 뒷주머니를 불린다고 하더라도, 윗놈들은 안전을 원한다. 적어도 이 쓰레기장은 벗어나지 못하도록, 분명히 목줄을 쥐고 있을텐데. 시민이 이곳에서도 그럭저럭, 어떻게든 살아가기라도 하는걸 보면 충분히 짐작할수 있을만한 일이지. 정보를 교차해 허수를 줄여나가는 과정은 제법 시간이 소모될테고, 그녀에게 나름 부담이 될것이다. 귀중한 정보원이 헛일을 하며 체력을 소모하는것보다, 최소한으로, 그리고 확실하게 정보를 검증할 일종의 광맥이 필요했다. 어느덧 나온 에스프레소를 받아 한 모금 삼켰다. 코를 부드럽게 감싸는 커피 향이 마음에 들었다. 실력이 없어 보이는 바리스타였는데, 원두가 좋았던걸까.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었고, 성냥을 찾아 뒤적거리다가 물끄러미 그녀를 바라보았다. 잊어버리고 있었군, 성냥을 전부 건넸었지. 불좀 붙여주겠나? 가벼이 속삭였다. 그리고는 다시 시선을 바깥으로 돌렸다. 짙은 선팅을 한 승용차 한대. 감시가 붙었나? 그녀도 그것을 알고 있는지, CCTV로 부터도, 차 내부로부터도 보이지 않을 법하게 몸을 숨겼다. 가까이 하면 할수록 우수하군. 썩 마음에 들었다. 저 차의 번호판도 한번 조회해두게. 가볍게 일러두었다.
" 치과, 혹은 카페라. 그런가. "
입술에 묻은 휘핑크림을 핥고, 헛기침을 하며 등받이에 등을 기대는 그녀를 재밌다는듯 바라보았다. 조금 긴장감이 부족해보이긴 해도, 그녀의 말이 옳았다. 합법과 비합법의 사이에서 줄을 타는 녀석들이니까. 안전성을 추구했을테지. 질문이 있냐는 말에 잠시 생각한 뒤에, 자리에서 일어나 가게를 지키던 알바생에게 다가갔다. 졸려보이지만, 뚱한 표정으로 핸드폰을 응시하는 녀석에게 다가가 싱긋, 부드러워보이는 미소를 지었다.
" 가게의 휘핑크림을 여자친구가 마음에 들어하더군. "
무슨 소린지 이해가 안간다는듯, 날 쳐다보는 알바생에게 여전히 미소를 띄운 채 이야기했다.
" 휘핑크림을 좀 사고싶은데. "
" 음, 제가 사장이 아니라서... 내어드리긴 좀 곤란한데요. "
" 그런가, 그렇다면 휘핑크림이라도 좀 볼 수 없겠나? "
" 저희 휘핑크림은 그냥 평범한거에요. 마트에서도 많이 파는거죠, 상표명도 그냥 휘핑크림인거. 이거에요. 보신 적 많으시죠? "
휘핑크림을 꺼내온 알바생은, 스프레이 형식의 휘핑크림을 들고 있었다.
" 그래, 알려줘서 고맙네. 참, 요새 좀도둑이 많다고 하던데. 가게에서도 도둑맞거나 하는 일은 없나? "
" 글쎄요... 그런 건 없는데, 요새 휘핑크림 갯수가 좀 안맞더군요. 아니, 도둑맞거나 한게 아니구요. 분명히 10개정도 주문하셨다는데 영수증엔 100개, 1000개 이렇게 적혀있던걸 우연히 봤어요. 분명 10개 주문했다고, 이렇게 많은 값은 치르지 못한다고 했더니 본사 표기 오류라나? 실제로도 10개를 받았고, 10개 값만 지불했으니 상관은 없었긴 한데, 쩝. 이러다 나중에 그거 값 내놓으라 해서 알바자리 잃는게 아닐까 모르겠네요. 아, 근데 경찰이에요? "
" 경찰은 아니네만, 얘기 잘 들었네. 덕분에 집에서도 휘핑크림을 먹을 수 있겠어. "
그리고는 자리로 돌아오며, 그녀에게 저도 모르게 웃어보였다.
" 나바레테 경장, 이 이후로의 예정은 있는가? 없다면 나를 위해 시간을 내어주게. 일 할 시간이다. "
악의로 가득찼고, 눈엔 증오가 가득 서려있음에도, 묘하게 아름다운 웃음. 스스로도 그런 미소를 띄우고 있다는 사실은 모르는것같았다. 그러나 그런것은 중요한게 아니었다. 기회라는것이 중요했다. 공장선에서 따로 휘핑크림을 잔뜩 만들면 자금이 유통된다. 허나 공장에서 그만큼 만들었으면 판매해야 하는데, 풍선 제조 목적으로 사용했으면 무엇을 팔겠는가? 너무 쉽게 찾아냈다. 운이 좋았다. 어차피 경찰이 신경쓰지 않으니 해이해졌던거겠지. 그러면 이제 찾아가서 전부 때려죽이면 된다. 그 뒤론 그 공장을 점령하면, 벌룬과 스마일 컴퍼니를 전부 끌어내어 전면전을 치를 수 있다. 가장 중요한 자금줄이 막혔으니 올라오지 않고서는 배길 수 없겠지. 다른 공장지부들도 많다면 마찬가지로 찾아가서 전부 때려죽이면 될 일.
"제 피의 절반은 마쿠아후이틀로 골통을 쪼개던 아즈텍 식인종의 것이고, 나머지 절반은 머스킷으로 손바닥만한 구멍을 뚫어주던 콩키스타도르 학살자의 것이죠."
"....적의 심장을 꺼내 제물로 바치는 일에는 관심이 없지만. 그래도 저 하나 정도는 지킬 수 있어요."
식인종과 학살자의 자손이라면 세계를 도탄에 빠뜨릴 마왕이라도 태어난 것 같지만, 그 자손들은 다른 민족들처럼 일하고 사랑하고 못된 짓도 해 가며 평범하게 지내고 있다. 주로 멕시코에서. 나도 그들 중 하나고. 그러고보니 심장을 꺼내는 건 정말로 본 적이 있어. 평소와 같은 과시용 보복범죄였지. 나도 몇 번인가 그런 위기가 있었지만 잘 넘겨냈다. 그리고 이렇게 킹핀과 독대하는 것이다.
그는 자신을 벨이라고 했다. 벨. 지위에 비해서 수수한 이름인가. 벨이 하필이면 코트 안쪽 주머니에 손을 넣어 뒤적거리자 몸의 근육이 팽팽하게 조여졌다. 낡은 코트 주머니엔 구소련제 권총이, 명품 코트 주머니엔 독일산 권총이 들어있지! 권총집에 손을 대려던 걸 간신히 허리에 손을 올리는 자세로 얼버무렸다. 이것도 직업병이라니까. 그래도 벨이 권총을 꺼내던 건 아니었다. 그의 손에 들린 건 수류탄이다. 수류탄......이랑 손목밴드. 컴퍼니 회장쯤 되면 수류탄 정도는 담뱃갑처럼 들고다니게 되는건가. 이건 좀 색다르게 무서운데?
"보통은 저희 경찰이 스마트워치나 방탄 방검복을 슬쩍 건네주는건데 말이죠...하하.."
그래, 말랑말랑한부패경찰이 보호를 받아야지. 그게 맞는거겠지... 테이저벤드를 손목에 찼다. 탄탄한 장력이 피부를 가볍게 누르고 들어갔다.
두 번째 성냥이 타오른다. 첫째에서는 혼자 들지도 못할 돈가방에 둘러싸인 모습이었고, 이번에는 깨끗한 부촌의 단독주택으로 이사하는 장면이 아릿히 보였다. 지금은 그저 설레발이지만, 사람은 희망이 있어야 살아갈 터였다. 담뱃불을 붙여주고 흔들어서 껐다. 알바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들어오자마자 상을 뒤엎고 돈을 내놓으라 행패를 부리는 갱들과 비하면 영국 왕실과 비견될 에티켓 아닌가?
"사실 순경 다음 일개 경장이라, 공식적으로는 현장 나갈 때 필요한 정보 수준이지만? 뒷구멍을 살살 캐보면 말마따나 통제를 웧하는, 권한을 가진 자를 다룰 권한이 손에 들어오겠죠?"
반지. 7천만 달러짜리 반지. 개판난 도시의 경찰직 특유의 박봉에 집에 있는 아내와 아들딸이 굶을까 마피아처럼 상납을 받는 경찰관이 한둘이 아니다(사실 나도). 간단히 계산해서 1,000명의 경찰관에게 7만 달러씩 뿌린다고 가정해보자. 상상이 가나?
"이 나라 높으신 분과 엮여서 죽어도 보여줄 수 없는 류의 것들만 빼면요."
전술하였던 예시는 단순히 돈의 이야기를 했을 뿐이다. 이런저런 사회적 술수는 고려되지도 않은 수치란 말이다. 벨, 킹핀이 아닌 이상. 킹핀이 회사를 통으로 팔아넘기려는 각오를 하지 않은 이상, 그리고 그와 동업하는 사람이 아닌 이상. 결코 불가능한 묘기에 가까운 술수였다.
"결과적으로 필요한 정보를 자유롭게 얻을 수 있을거에요."
언뜻 양순한 사람처럼 웃었다. 인상이 그럴 뿐이다. 인상만.
'여자친구?'
카페 이야기가 나왔다. 마침 여기가 카페다. 킹핀은 기다릴 것 없이 바로 탐문을 시작한다. 그런데 아까부터 사모님이 보시면 기함을 할 장면이 많이 보인다. 용돈 주고, 반지 선물, 팔찌 선물에다가 나에게 제안까지 하였다. 그리고 이제는 여자친구 운운을. 그러셔도 괜찮은가요. 확증은 없지만 뒤통수가 계속 콕콕대는 느낌이라. 평소에 파파라치랑 술래잡기 하고 그러시진 않으시죠?
그럼에도 장난질처럼 지나가는 무의미한 순간에 신경쓸 겨를은 없었다. 이 카페가 그 카페였다. 내가 수사할때는 길거리를 픽셀 단위로 뒤져도 며칠 몇주가 걸렸었다. 이게 초심자의 행운이냐. 또한 행운이 날아오면 주저하지 않고 붙잡는게 당연한 일인데... 그의 사악한 웃음은 날선 요검같았다.
아주 오랫동안 이어진 인간과 마족의 전쟁도 이제 슬슬 끝을 맺으려 하고 있었다. 어두컴컴한 어둠을 가른다고 전해지는 전설의 무기들을 손에 얻은 용사와 그를 보좌하는 멤버들은 마침내 마왕성에 들어오는데 성공했다. 막강한 마족들과 싸우며 꼭대기까지 올라가는 여정은 절대로 쉬운 일이 아니었다. 허나 그들은 이를 악물고 절대로 물러서지 않으며 계속해서 위로, 위로 올라갔다.
그리고 마왕이 있는 꼭대기에서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는 층. 진득한 피냄새가 그 장소에 강하게 퍼지고 있었다. 전설의 무기 중 하나로 알려진 영웅의 활을 들고 있는 푸른머리 사내는 벽에 등을 기대며 거칠게 숨을 내뱉었다. 그 옆에는 죽은채 쓰러져있는 붉은 날개를 지닌 고위 악마가 쓰러져 있었다. 그리고 그 악마에게 심하게 공격당했는지 사내의 몸 여기저기엔 상처가 깊게 남아있었고 그가 꾹 누르고 있는 가슴 부위에선 붉은 피가 천천히 흘러내리고 있었다.
"역시 마왕의 심복 중 하나인 블러디 데몬을 혼자서 쓰러뜨리는 것은 너무 무모했나보네. 하지만... 그래도 이 녀석만큼은 내 손으로 쓰러뜨리고 싶었으니까 후회는 없어."
전설의 무기 중 하나인 영웅의 활을 대대로 봉인해서 숨겨놓고 있던 그의 마을은 바로 그가 쓰러뜨린 블러디 데몬이 지휘한 마족들에게 불바다가 되었다. 수많은 이가 죽었고 그 중에는 그의 가족들도 있었다. 그렇기에 사내는 무슨 일이 있어도 블러디 데몬은 자신의 손으로 결판을 내고 싶었고 반드시 무찌르겠다는 약속을 남기며 다른 동료들을 꼭대기로 보냈다. 아마 지금쯤이면 마왕과 대면했거나 한창 싸우고 있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하며 그는 씨익 웃었다.
"올라가서 합류해야하지만 이대로는 올라가기는 커녕 움직이지도 못할 것 같은데. 어쩐다. 하..하. 나중에 모든게 다 끝나고 내가 죽어있는 모습을 보고 다들 눈물을 흘릴까. 흘리겠지. 싸움에 승리해서 기뻐해야하는데도 그 녀석들이라면 기뻐하지 못하고 울겠지."
그래도 후회는 없어. 원수를 내 손으로 갚았으니까.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사내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이대로 눈을 감고 잠들어버리면 모든 것이 끝이 날까. 조금씩 의식이 흔들리는 것을 느끼며 그는 얼굴을 살며시 아래로 숙였다.
"...미안하다. 애들아. 반드시 이 세상에 평화를 다시 가져다줘."
/가끔 마왕과 싸우는 용사물에서 볼 수 있는 너희 먼저 올라가! 난 이 녀석을 쓰러뜨리고 갈게! 를 시전했다가 아치 에너미를 죽이는데는 성공했지만 힘이 다 되어서 점점 죽어가고 있는 용사 파티 멤버 중 하나의 이야기야. 여기에 누가 나타나서 무슨 말을 걸어도 별로 상관은 없긴 하지만 이미 죽였다고 분명히 이야기한 블러디 데몬이 난 사실 살아있다! 를 시전한다거나 사실 그런 일 없었는데 혼자서 헛소리하는 중2병으로 만들어버린다거나 그런 것만 아니면 돼. 당연하지만 꼽주는 맥커터질도 사절이야. 그 이외에는 진짜 어지간하면 다 가능!
>>353 상식을 가진 이에게 그 남자에 대해 설명하는 일은 무식한 농부 하나를 꾀이는 일만큼이나 어려울 것 같다. 다만 내 감상만을 말한다면, 블러디 데몬은 복잡하고 기복이 극심한, 스스로에게 주어진 것을 통제할 능력이 현저히 부족한 자였다. 인간이든, 마족이든, 그런 성정을 가진 이에게 과도한 권한이 주어지는 것은 주변에 고통을 주는 일이다.
그러나 그 자를 상사로 두고서 마냥 괴로웠다고 단정지어 말한다면, 그것은 분명 거짓의 악덕이다. 즉흥적이고 가변하는 존재였기에 그는 때때로 관대했고, 소란으로 주변을 즐겁게 만들 수 있는 소양도 조금은 있었기 때문이다. 간혹 그 자의 편집증적인 광기가 조금은 만족감을 느끼던 날에, 우리는 지극히 악마적인 광란이 충만한, 족히 몇 달분의 유흥에 버금갈 수 있는 연회를 제공받곤 했다.
그렇지만 대부분의 경우에 블러디 데몬의 병리적 집착은 진정되는 법이 없었다. 나는 그의 부사수로서 종종 무의미한 위치의 부락과 도시들에 철저한 파괴를 자행할 것을 명령받았는데, 그 이유는 대체로 납득하기 어려운 종류였다. 자신의 존재를 파괴할 어떤 존재, 혹은 물건에 대한 공포는 항상 블러디 데몬의 동선, 그리고 나의 동선에도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거점의 확보나 전리품의 수급 같은 실리적인 동기들은 매번 존재조차 불확실한 어떤 것에 대한 완전한 파괴라는 목표에 밀려 무시되었다. 대개는 어떤 인간, 때때로 창이나 도끼, 혹은 활, 심지어는 낡은 베일이나 녹슨 식기로 변하는, 안개 뒤쪽의 모호한 목표.
그게 내게는 항상 불만이었건만......
지금, 회랑의 저편으로 보이는 죽음의 모습은 그 자가 평생 집착했던, 그리고 내게도 흔한 유언비어의 일각으로나마 기억되는 악의 운명론을 상기시키고 있었다.
"활이었구나."
처참한 관통상에 터져나간 창자와 내장들을 피해 걸어가면서 나는 중얼거렸다. 시신에 가까워질수록, 배가되는 불안감과 위화감 속으로 오랜 시간동안 억눌렀던 억하심정이 터져나왔다. 그래, 이 날을 기다렸는지도 모르겠다. 내 사수를 집어삼킨 악의 운명이 정말 어떤 신기인지, 평범한 유시인지의 여부는 내게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시체를 남기는 종류의 공격에 그가 당했다는 것이다.
나는 아직 계승받을 게 남아있다.
조용히 열주들 사이를 지나, 어느 새인가 목표에 도달한다. 거리낄 것도 없다. 무릎을 꿇고 자세를 죽인다. 힘없이 구겨진 붉은 날개를 치우고, 시신의 머리통을 양손으로 붙잡는다. 그리고, 약간 떨어진 위치에서 여전히 느껴지는 희미한 숨소리, 그쪽으로 집중한다.
평생 공포에 쫓긴 불쌍한 병신의 숨을 거둬간, 준비된 사수가 여전히 살아 숨쉬고 있다. 내 지척에.
강인한 존재로군. 살아있다는 게 신기할 정도의 치명상 속에도 어떻게든 견디고 있다. 하지만 그마저도 얼마 남지 못한 것만은 확실하다. 하지만 지금은, 이 남자에게 설사 죽음에 반쯤 안겨버리고 말았더라도 1번 더 활을 쏠 여력이 남아있을지의 여부만이 중요하다.
저벅저벅 걸어오는 발소리에 힘없이 사내의 얼굴이 그곳을 향했다. 아직 누군가가 남아있었나? 아니. 남아있어도 이상할 건 없어. 사라져가는 의식을 애써 꽉 잡는 것은 아직 이 자리가 처리되지 않았다는 상황 때문이었다. 자리에서 일어설 힐은 없었으나 그래도 활시위를 당길 정도의 힘은 아직 조금 남아있었다. 허나 자신의 몸 상태, 그리고 흐르는 피. 그것을 모두 생각해보면 그나마 모든 힘을 끌어모아 정말로 자신의 목숨과 맞바꾸는 단 한 발의 기횔 뿐이었다. 손에 쥐고 있는 활을 애써 꽈악 쥐며 그는 팔만 겨우겨우 올려, 상처부위를 틀어막고 있던 손을 올려 시위를 잡았다. 손으로 막혀있던 진한 향이 더는 가려지는 일 없이 그대로 코 끝을 찔렀다.
"네가 먼저 올라간 내 동료들을 쫓는다고 한다면. 하하. 허나 항복하고 이 자리에서 물러난다면 나도 굳이 쏘고 싶진 않은데. 어차피 이제와서 쫓아간다고 하더라도 상황을 바꿀 순 없어. 마왕은 그 녀석에게 토벌당하고 너희들의 패배로 전쟁은 끝날테니까. 쿨럭!"
힘을 주고 말을 한 탓일까. 그는 입에서 피를 토해냈다. 스스로 목숨이 다 할 것을 직감하나 그는 오히려 입꼬리를 올렸다. 자신의 가족의 복수는 했다. 마을 사람들에 대한 복수도 했다. 그렇기에 죽음 따윈 두렵지 않았다. 단지 아쉬운 것이 있다면 자신의 동료들이 모든 것을 끝낸 후의 세상을 지켜볼 수 없다는 것 정도일까.
"말해두는데 나를 무시하고 올라간다고 하더라도 승산은 없어. 그러니까 여기서는 어차피 곧 죽게 될 녀석 하나 내버려두고 목숨 보존할 셈 도주하는 것은 어때? 그 녀석들도 싸울 의지가 없는 이들을 토벌하겠다고 뒤쫓진 않을테니까."
만일의 경우, 만약 자신을 공격하려고 하거나 자신의 동료를 뒤쫓아가려고 하면, 그 즉시 활을 발사할 생각으로 그는 그 끝을 눈앞의 대상에게 겨냥했다. 곧 꺼져가는 목숨과 맞바꾼 마지막 한 발. 빗나갈지, 명중할진 모르겠으나 만일의 경우엔 망설이지 않고 발사하려는 듯, 그의 꺼져가는 눈동자가 날카로워졌다.
>>355 이 남자는, 아직 말을 할 기력까지 남아있어서 희미하게나마 나에게 협박까지 하고 있다. 경이적인 생명력이다. 내가 저 정도의 부상을 입는다면, 필히...... 아니, 그 전에 육체가 견디지 못할 것이다. 저 상처들은 일생 쫓는 동시에 쫓겼던 공포의 근원을 비로소 마주한 대악마의 필사적인 공격에 의한 결과물일 터, 나라면 즉사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러니까 확신하건대, 저 활은 당길 수 있다. 나를 과녁으로 삼아서.
"좋은 눈을 가지고 있어."
복잡해지는 심사, 삶과 죽음의 기로, 희미한 두려움, 그러나 모든 맥락이 무의미하다. 무의식중에 나오는 말은 순수한 감상의 표현이다. 그 기적과 같은 강인함을 목도하고 있기 때문일까, 이 남자에 대한 감상 또한 순수하게 호의에 가까워진다. 심, 기, 체의 균형이 맞고 힘과 힘의 연결이 긴밀하다. 눈을 보면 알 수 있다. 명궁의 눈, 혹은 달인의 눈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이어지는 남자의 말, 그간 조금은 잊고 있던 것들이다. 의무에 대한 상기. 오랜 시간 의식 밖으로 밀어놓았던 충성의 의무에 대한 기억이다. 본 적도 없는 군주를 위해 일생 대적했던 어떤 이보다도 강인한 인간들을 향해 뛰어들어야 할 불나방의 의무, 악덕이란 항상 강자에게 유리하게 작용하는 법이다.
하지만, 나는 그런 결말을 원하지는 않는다. 조금도.
"동료들이 있나, 분명히 아직 살아있고, 또 당신이 수행할 수 없게 된 목표의 후반부를 통제하고 있겠군. 그게 당신네들의 방식이니까."
그래, 인간들이 죽음을 넘을 수 있는 방식이지. 그러니까, 지금 내가 하고 있는 것과 동일한 행위라는 것이다.
"대화의 여지가 있을 것 같군. 그리고, 불쾌한 소리일지 모르겠지만, 당신은 어떤 면에서 닮은 부분이 있어. 방금 당신의 손으로 죽인 존재와."
그러니까 내 사수여, 걱정하지 마시오. 지금 당신을 계승하고 있으니.
"내 목적은 블러디 데몬을 섭식하는 것이고, 그게 달성된다면 내 군주에 대한 의리는 없다. 이 기나긴 전쟁에서 얻은 전리품이라고는 이것 뿐일 듯 하군."
"그게 인간들이 살아가는 방식이니까. 핫. 지금 내 몸 상태가 이런 것이 유감스러운걸. 정말로 불쾌한 소리에 바로 대응을 할 수 없는게 말이야."
대화의 여지가 있다고 하니 그는 바로 활을 당기지 않고 일단 상대의 말을 들어보는 것을 택했다. 지금 자신이 해야 하는 것은 마족을 섬멸하는 것이 아니었다. 자신의 동료들을 방해할지도 모르는 이라면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바쳐 이 활을 쏘았겠지만 그게 아니라면, 더 싸울 의지가 없는 이라면 굳이 피를 더 흘리게 할 순 없는 노릇이었다. 허나 블러디 데몬을 섭식한다는 그 말에 그는 바로 질문을 던졌다.
"이미 죽어버린 녀석을 먹어서 얻을 수 있는게 뭐지? 대답에 따라서 내 행동도 결정될 것 같아서 말이야."
만약 섭식함으로서 새로운 블러디 데몬이 탄생하게 되고, 자신의 동료를 위협하는 적으로서 강림한다면 지금 여기서 막아야만 했다. 물론 그것을 달성할 수 있을진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점차적으로 시선이 흐려졌고 조금만 느슨해져도 그대로 의식을 잃을 것만 같았으니까. 붉은 핏물은 그의 옷을 따라 땅을 향해 흘렀고 숨을 쉬는 것조차 힘들어질 정도였다.
"이 길고 긴 전쟁을 계속해서 이어가는 행위가 아니길 빌겠어. 설사 여기서 내 공격을 피하고 내가 죽는다고 하더라도 내 동료들의 힘까지 피할 순 없을테니까."
힘과 의식을 취하기 위한 행위라는 말에 그는 말없이 생각했다. 그렇다면 저 자가 또 다른 블러디 데몬이 되어서 이 세계를 위협하는 것은 아닐까. 하지만 그저 힘을 취하고 돌아갈 가능성도 컸다. 싸움을 희망하지 않고 싸울 마음이 없는 마족에게는 손을 대지 않는 것이 자신들의 방식이었다. 자신들이 원하는 것은 평화이지, 상대 종족을 무조건 멸하려 하는 섬멸이 아니었으니까. 빛의 뒤에 어둠이 있고, 밝음 뒤에 그림자가 있듯이 수많은 종족들은 결국 어떻게든 연결되어 조화를 이뤄야하는 법이었다.
"복수. 힘없는 내 부모님과 친구들을 죽인 이를 죽였으니 이제 여한은 없어. 누군가에겐 어리석을지도 모르고 개인만족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오로지 그걸 위해서 지금까지 노력한 거였으니까. 그렇기에 나 혼자서 그 녀석과 결판을 낸 거였고."
물론 살아서 하고 싶은 것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이를테면 동료 중에서 모든 것이 다 끝나면 같이 따로 여행을 가자고 한 이도 있었고 재건한 마을에 가서 조용히 사냥꾼으로서 살아가는 것도 나쁘지 않은 일이었다. 허나 복수를 했으니 이대로 가족과 친구들이 가는 것도 나쁘지 않았고 두렵지 않았다.
"서로서로 날카롭게 있진 말자고. 이것만 대답해. 그걸 다 먹고 힘과 의식을 얻고 나면 어쩔 참이지? 전쟁을 일으키지 않고 그저 평화롭게 살아간다고 한다면 나도 방해하지 않겠어."
허나 그 힘으로 다시 세계를 혼란에 빠뜨리고 자신의 동료들을 공격하러 간다면 활시위를 당길 뿐이었다. 그 화살은 마를 멸하기 전까지 계속해서 쫓아갈테니까. 단 한 방에 죽일 수 있을진 모르겠지만 아무리 못해도 부상을 입히기엔 충분했다. 약간의 시간 끌기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그 약간의 시간끌기가 자신의 동료들에겐 필시 도움이 될 것이라고 그는 믿었다.
"어차피 마왕은 내 동료들의 손에 쓰러질거야. 그렇다면 굳이 힘겹게 다시 서로서로 피를 흘릴 필요는 없잖아. 안 그래?"
아직도 3시가 안 됐다니. 모니터를 바라보다 등받이에 무거운 몸을 뉘인다. 모니터 속에 기어들어갈듯이 구부정해있던 척추, 어깨, 목이 좀 펴지는 것 같다. 그런 기분이 든다. 은은한 두통은 언제나 나와 함께 했고, 블루라이트 차단에 뭐 이것저것 좋은 옵션을 추가하여 만들어 렌즈만 돈 십만원 넘는 안경은 제 기능을 하긴 하는건지. 눈도 뻑뻑하고 공기도 탁한 것 같다. 아니, 탁했다. 여기서 살아숨쉬는 건 나뿐이라 나만 아는 이야기라 한탄할 곳도 없다. 이번 망자만 접수하고 바람 좀 쐬러 가야겠다.
평범한 일상과는 거리가 매우 먼 이야기였다. 푸른색 눈동자를 가지고 있는 사내의 전방의 지형은 모두 꽁꽁 얼어붙은 상태엿다. 지금이 한겨울이라면 그런 지형이 있어도 이상할 것이 없겠으나 지금은 더위가 막 시작되려고 하는 5월 중순이었고, 땅 지대 모든 것이 얼어붙은 것이 아니라 눈앞에서 벌벌 떨고 있는 남녀 한 쌍의 주변을 감싸고 있듯이 얼어붙어있다는 것이 참으로 이질적인 모습이었다.
하얀색 제복을 입고 있는 사내의 눈동자에 비치고 있는 남녀 한쌍은 두 손을 들어 항복 의사를 밝히고 있었다. 허나 사내는 손에 들고 있는 그 하얀 검 끝을 조금도 돌리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방심할 수 없는 상대였기 때문이다. 눈앞의 두 사람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이능'을 이용해서 범죄를 저지르고 있는 이들이었으니까. 그리고 사내는 그런 자들을 막아서는 '이능'을 지닌 멤버 중 하나였다.
그 이후의 이야기는 그다지 특출난 것은 없었다. 두 사람을 확실하게 붙잡고 있었던 사내는 다른 팀의 멤버들이 오자 붙잡아두고 있던 범죄자 두 명의 신병을 인도했고 두 명은 구속되었다. 이송되는 두 사람을 조용히 바라보던 사내는 뒤로 돌아 하늘 위에 떠 있는 달을 가만히 바라봤다. 아직 돌아가는 분위기는 아니었고 조금 쉬는 분위기인 듯 했으니 이렇게 혼자 달을 구경해도 나쁘지 않겠거니 생각하며 사내는 아주 살짝 다른 이들이 있는 곳에서 거리를 띄웠다. 딱히 혼자 있는 것을 좋아하거나, 냉정한 성격이라거나 그런 것은 아니지만, 굳이 말하자면 열정적이고 열혈적인 느낌이 있긴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혼자 있는 시간을 싫어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 뒤에서 들려오는 발소리에 아주 살짝 관심을 가지고 뒤를 돌아보는 것이 바로 그것을 증명했다.
/이능을 가진 범죄자가 있고 그것을 이능을 지닌 팀이 막아내고 체포하고 잠시 쉬는 타임이라는 느낌이야. 누가 와서 어떻게 이어도 상관은 없긴 하지만, 중2병 연극 그만. 이라는 식의 꼽이라거나 맥을 박살내는 맥 브레이커 같은 것은 없었으면 해. 그 외에는 갑자기 내 캐릭터를 죽여버리는 거 아니면 자유롭게 잇기 가능이야. 개인적으로는 약간 과거 모카고 같은 느낌을 떠올려서 썼으니 분위기에 참고를 해도 좋을 것 같고?
사내의 뒤로 다가와 넉살 좋게 웃으며 말을 건넨 이는, 172cm의 결코 작지 않은 신장에, 살집이 붙어 겉으로 보기에는 둥글둥글한 체형의 몸 위로, 전투로 인해 구겨지고 더러워진 하얀 제복을 입고, 검은 머리카락을 아래로 질끈 묶은 여성으로, 그의 직장 선배인 도라희였다. 정규직이 된 건 좋은데 이대로 가다간 제 명에 갈 지 모르겠다니까. 그나마 비정규직일 땐 범죄자만 잡아서 넣으면 됐는데 이제는 범죄자랑 씨름한 직후엔 서류 작업 해서 윗 분들한테 보고해야 하잖아. 피의자 신상에. 범죄 목록에, 추적 경로랑, 체포과정까지... 써서 내고 끝나기만 하면 몰라. 윗분들이 절차, 서류 그런 거 빠지면 사람 혼 빼먹을 기세로 뭐라고 해대니까 업무시간 상당부분을 종이씨름에 할애하는 것도 이해할 수는 있어. 근데 그렇게 보고서를 작성해도 결재를 못 받고 반려되기 일쑤고, 뭐가 그렇게 바쁘신지 피드백도 엄청 느려터져서 한 숨 돌렸나 싶으면 처음부터 다시 작업해야 하고... 가끔은 윗 분들이 범죄자보다 더 끔찍하다니까. 그 새끼들은 암만 날 굴려대도 체포도 못 하잖아. 에휴, 됐다. 솔직히 불만거릴 본격적으로 따지자면 이 실용성이라곤 찾아볼 수도 없고 금방 더러워지는 제복부터 시작해도 할 말이 아주 많지만 그럴 시간은 없지. 일해야 하잖아. 라희는 일터에선 뱉지 못할 불만을 웃는 얼굴 너머로 삼키곤 스스로를 타이르며, 가벼운 태도로 후배를 재촉했다.
"이대로 늘어지고 싶은 마음이야 저도 태산같지만 윗 분들한테 보고 해야하잖아요? 숨 다 돌렸으면 얼른 서류 작업하러 가자구요."
그래도 국민연금에 건강보험료도 반이나 대신 내주고, 급여도 안정적으로 나오는 정규직이 훨씬 좋지. 먹고 사는 것도 먹고 사는 거지만 우리 귀요미 발레 학원도 내년에는 꼭 끊어주기로 약속했잖아. 짧은 시간도 아닌데도 착하게 잘 기다려주고 있으니까 나 힘들다고 배신할 수는 없지. 우리 와이프도 고된 거 참아가며 힘 내서 일하고 있을 테니까 나도 찡찡거리고 있을 수만은 없고. 그래도 복지 더 나은 곳 있으면 확 그냥 이직해 버릴테다. 후배를 재촉하는 김에 스스로도 타이르며, 그는 어서 오란 투로 후배를 향해 손짓했다. 밤은 깊었지만 오늘 안에 퇴근하려면 서둘러야 했다.
/ 이름이 안 나와있어서 부득이하게 OO로 처리했어:) 이름 알려주면 다음 턴부터 반영할게!
왔어? 기다리느라 목 빠지는 줄 알았잖아. (쓰레기더미나 다름없는 잿빛 공터의 철근 위에 앉아 당신을 향해 반갑게 손을 흔들어보인다. 마치 농구 기술을 선보이듯, 제 등 뒤로 팔을 꺾어 무언가를 당신에게 향해 던진다. 빵이 든 봉지는 먼지가 좀 묻어있지만, 빵은 깨끗하다. 당신을 향해 흔들어보이는 손 아래, 널널한 소매에 가려진 팔에 주삿자국이 여러개 찍혀있는 것이 보인다.) 헌혈차는 방금 갔어. 31구역으로 간다더라. 저번에 맡았다던 일은 어떻게 됐어? 할 만해?
>>366 31구역? 빨리도 가네, 원. 손님 모자라서 아쉬울 일 없으니 이해는 간다만.(투덜거리면서 봉지를 살짝 열고, 빨대 하나를 슬며시 꺼내 집어넣은 다음, 코끝을 대고 살짝 들이마시더니,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말한다.) 냄새 좋네. 오늘 들어온 밀로 구운 거지? 니미럴, 이런 상등품 하나면 보름은 빠릿빠릿해진단 말이야. (더 볼 것도 없이, 봉지를 뜯은 다음 대강 뜯어서 조금 맛본다.) 맡았던 일? 말도 마. 꼬일 대로 꼬여서 지금도 슬래셔 갱들이랑 한판 하고 오는 길이야. (옆으로 성큼 성큼 걸어오더니 아수라장같은 공터의 그나마 적당할 법한 자리에 털썩 주저앉고는, 궁시렁거린다.)막 착수하려고 수건이고 안무고 준비 다 해서 갔더니만, 여기 건은 자기네들 봉사라는 거지. 돼지같은 것들. 온 동네 양로원이 다 지들 나와바리인줄 안다니까.
>>367 최근에 31구역 자경단 내분이 일어나서 마약 공급로가 채식주의자 혈관처럼 뚫려버렸대. 신종 마약도 들어와서 장난 아니라더라. (빵을 맛보는 당신을 바라보며 피식 웃고는 ‘이 빵을 받아라, 내 피이니.’라고 덧붙인다.) 슬래셔 애들이 활개치는 모습을 다 보네. 기업의 애완견 화장지 대용품이었던 애들이. 원래 못먹던 애들이 한 번 맛 본 건 아득바득 안뺏기려고 애쓰잖아. (마찬가지로 빵 봉지를 뜯어 크게 한 입 베어문다. 무언가 생각하는 것처럼 입만 우물거리며 뿌연 하늘을 올려다본다.) 오빈 하우스 빌딩에 살던 맥퀸 부인, 어제 죽었대. 약물 과다복용으로. 맨날 사탕이니 뭐니 주셨었는데.
>>368 그 치들도 말야, 곤궁은 한 모양이지? 약물 계통이 꿈틀댈 때는 말단부에서 변화가 올라오는 건 절대 아니란 말이야. 약팔이 새끼들은 다 약쟁이들이라고. 돈 생기면 사먹고 돈 없으면 팔고, 그러다 죽을 병신들.(신경질적으로 빵을 쑤셔넣다가 잠깐 목이 매여서 꺽꺽거린다.) ......아무튼, 31구역 시끄러운 건 애초부터 마약 건일 게 뻔하지. 따라가보면 부랑자 놈들 상대로 신상품 쇼케이스 벌이고 싶은 큰 손 하나 있을 거라고. (당신의 손에 있는 빵봉지에도 우악스럽게 손을 집어넣으며, 겨우 조금 여유로운 표정을 짓는다.)따지고 보면 슬래셔 그 거렁뱅이들도 대가리가 없는 것들은 아니야. 결국 개사료도 고기니까, 먹고 싶다는 호구가 나올 수밖에 없다는 거지. 급한 새끼들은 헌혈차나 양로원이나 똑같다니까, 노인네들 지옥 보내주는 싸구려라도 꽉 잡아놓는 게 나름의 수완이겠지. 그것밖에 안 남은 거지새끼들. (그러다 당신의 마지막 말을 듣고는, 내색은 않지만 얼굴에 핏기가 가신다.)하루이틀 일도 아니잖아. 중독자는 다 단두대에 목 걸어놓고 사는 거나 마찬가지야.
>>369 그래도 약팔이 중에서도 괜찮은 애들도 몇몇 있어. 쏜 디키빈, 마그네스, 록커...셋 중 둘은 죽었네. 진짜 이상해. 록커의 노래는 끔찍했지만 칼림바는 끝내줬는데, 재능도 못살린다는게. (자그마한 한숨을 내쉬다, 당신이 꺽꺽거릴 때 등을 토닥여준다.) 그렇겠지. 그래서인지 네이밍도 끔찍해. 정적 낙원이래. 근육수축제 성분도 같이 들어있어서 몸 전체가 딱딱하게 굳는대. 풀릴 때도 소변 다 봤을 때처럼 기분 좋다나. 야! (빵봉지를 빼려해보지만 역부족이라 그냥 당신 얼굴을 향해 던진다.) 너무 부조리해. 이 거리의 노인들은 모두 과거에 훌륭한 어른들이었단 말이야. 센트럴 실버타운, 그 건만 공중분해되지 않았더라면. (그러다 당신의 말을 듣곤 노려본다.) 맥퀸 부인은 딱한 사람이야. 과거 교수에, 자식들이 죄다 변호사에 검사인데도 얼굴 한 번 안내비쳤잖아. 그냥, 이 거리가 상식이 통하지 않는 곳일 뿐이야. 그렇게 생각해.
>>370 록커는 병신이었어. 병신이었다고. 동네에 널린 게 운반책인데, 지가 뭐라고 건수마다 기어나와? 잠자코 오디션이나 보러 갈 것이지......(텅 빈 봉지에서 부스러기나 긁어모아 입에 털어넣는다.) 그래도 마그네스에 비하면 양반이었지만. 걔는 진짜로...... 좀 정상적인 곳에서, 의류 브랜드같은 거라도 운영했으면 좋았겠지. 큽!(안면을 후려친 빵봉지를 잡아 대충 근처에 내려놓는다.) 뭐, 결국 책임은 본인들에게 있다는 거지만, 나도 동정은 해. 맥퀸 부인도 그렇고. 진통제 떨이로 전락할 프로젝트에 홀려서 재산이고 뭐고 다 포기한 건 그 여사님 잘못이지만, 그래도, 실수 한 번에 망가져도 상관없는 볼품없는 인생은 아니었을 거야.(조용히 자기 손바닥을 펴고 응시하다가 얼굴을 쓸어내린다.) 휴, 그리고 뭐, 알라시도 그랬고.(말을 꺼내놓고는, 슬쩍 당신의 눈치를 살핀다.)
>>371 ...야, 오디션까진 아니야. 걔 오디션 나갔으면 극단적 선택 했을걸. (푸하하, 알맹이 없는 웃음을 흘린다.) 맞아. 결국 운반책 애들도...나쁘지 않다곤 못하겠지만, 그냥...어쩔 수 없는 놈들이었다고. (습관적으로 손등을 긁으며 코를 훌쩍거렸다. 당신의 이야기를 묵묵히 듣고있다, 뒤에 나온 이름에 눈이 커진다.) 아니. 알라시, 걔는...걘, 실수 같은 거 한 적 없어. 너도 알잖아. 그런 꼴을 당해도 싼 애가 아니었어. (손등을 긁던 손이, 점점 손목의 흉터로 옮겨간다.) 내가 옆에 있어줬어야 했는데. 왜 하필 그 때 난...씨발. (아무리 그라 해도 욕을 지껄일 수 밖에 없다.) 경찰들은 아무도 안믿어줘. 정신과 약을 복용하고 있다지만 알라시가 어떤 앤지 알면서. (몇 번이고 했었던 말을 다시금 중얼거린다.) 분명 타살이야. 꼭 잡아낼거라고. 근데, 너무 무력해... (떨리는 손을 내려다보며 길고 무거운 숨을 뱉는다.)
>>372 하기야, 악기도 무슨 지처럼 모자란 걸 해가지고, 우리같은 부랑아들이 개천에서 용 나는 것도 힙합이나, 메탈이나, 보통 그런 쪽이지. 그래도 나는 걔 연주 좋아했지만. (침을 꿀걱 삼키고, 괜히 바닥을 본다. 당신의 말을 들으며 한숨을 푹 쉰다.)자꾸 긁지 마, 피부 벗겨질라. (약간 후회스러운 어투로)이거 괜한 화제를 꺼냈구만. 그때 이후로...... 바뀐 것도 없고, 여전히 하루 하루는 지랄같고, 나도 답답......해서 말야.(손바닥으로 턱을 괴고, 쉼 없이 쓸어내리기 시작한다. 그러고 있으면 다 잊혀지기라도 할 것처럼.) 우리 모두에게 책임 있다면, 하필 이런 개같은 곳에서 태어났다는 거지. 쓰레기장에 꽃이 피어 봤자, 몇 번 주변에 휩쓸리면 결국 구분이 안 간다고, 우리가 꽃은 아니겠지만. (잠시 고민하듯 눈빛이 흔들리다가, 지긋이 당신을 보고 조심스레 말한다.)이 말 하면 내 아구창이 남아날지는 모르겠지만, 난 역시 자살 같았어. 그...... 후.(깊은 한숨.)
내 인생은 시작부터 운빨망겜 그 자체였다. 돈과 권력, 그리고 빌어먹을 능력으로 모든 것이 귀결되는 세상에 태어난 것부터가 운이 없었다. 그런 세상에 하룻밤 장난질로 생겨난 것도, 부모 모두에게 버려진 주제에 죽지 못 하고 살아남은 것도, 천운이 아니라 천악이었다. 어느 멍청한 집시만 아니었다면 나는 그 날 그 쓰레기장의 차가운 봉투 속에서 죽어버렸을 텐데. 그랬다면 여태 살아, 아득바득 살다가 이렇게 괴로운 최후를 맞을 일도 없었을 텐데. 정말 시작부터 끝까지 운이 없다. 그래도 이제야 끝나는 것에 감사해야 할까. 25년이나 이렇게 살았으면 충분하지...
"쿨럭, 커흑..."
어두운 골목길에 내 밭은 기침 소리 울린다. 입에 고였던 핏물과 새로 솟은 핏물 뒤섞여 바닥에 흘뿌려진다. 새벽이 깊은 밤, 아무도 지나가지 않는 골목길 한구석, 차가운 벽과 바닥과 오물 뿐인 이곳이 나의 마지막 잠자리가 될 곳이라니, 마지막만큼은 좀 멀쩡한 곳으로 갈까 싶어 몸을 일으키다가 포기했다. 다리는 없는 것마냥 감각이 느껴지지 않고 베인 옆구리에선 이미 피가 바닥에 늪을 만들 기세로 흘렀다. 움직여봤자 몇분이 고작이겠지. 그럴 바엔 편안히 잠이나 들어버리자고, 그렇게 마지막 숨을 내쉬자며 몸을 굴러 벽에 기댔다.
아아, 정말 엿 같은 인생이었어. 꽃다운 계집으로 태어나, 남들 다 하는 거, 사랑도 놀이도 한 번 못 해보고, 그저 살다가 가는 인생이라니. 부디 다음 생은 없길 바라며 점점 무거워지는 눈커풀을 움직인다. 깊은 밤, 빛이라곤 희미한 달빛 뿐인 골목길, 그 끄트머리에 처박힌 내 쪽으로 누군가의 발소리가 점점 다가오고 있음을 아직은 알지 못한 채였다.
"당신은, 당신의 이야기를 끝 맺히고 싶은가요? 대단원에 이른 이야기에 새로운 이야기의 시작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으신가요?"
그 발소리의 주인은 이런 곳에 있는 것이 어색할지도 모르는 인물 이였습니다. 아니면 그 반대 이던가. 언제부터 그곳에 있었는지 모를 그 인물은 지금의 상황에서 결국은 그렇게 되도록 된 경위를 이야기, 우화에 비유하는 듯이 말하며 건넸습니다. 그 억양 속에 담긴 것은 마치 여러 번 보았다는 것처럼, 그런 느낌으로. 그럴 뿐 정말로 그랬던 것인지는 확실하지는 않습니다. 지금 여기서 확실하다고 할 수 있는 것은 이러한 으슥한 곳에서 위급한 것처럼 보이는 사람 앞에서 이러한 비유법을 들면서 태연이 말을 건넨다는 행위가 이상하게 보일 거라는 것입니다
"저에게 당신의 시간을 나누어 줄 수 있으신가요? 그렇다면 저의 시간 역시 당신에게 드리겠어요"
허리를 넘어서 닿는 긴 흑발에 검은색의 드레스를 차려입고는 이런 흐릿한 달빛 만이 반짝이는 어둠 속에서도 조차도 검은 양산을 손에 쥔 위고 아래고, 전부 검은색의 투성이로 그렇기에 대비되어 더욱 뚜렷하게 보이는 다른 색이라면 옷에 가려지지 않는 부분인 흰 얼굴과 푸른 빛으로 반짝이는 듯한 선명한 색의 눈동자 뿐인 소녀가 이번에는 눈웃음을 한번 지으며 이어서는 이번에도 애매모호한 말로서 물음을 건넵니다
그녀는 그 앞에 인물의 바로 곁에서 그녀의 물음에 대한 답이 되돌아 오는 것을 기다리듯이 그대로 멈춰 서서는 바라보았습니다
내겐 자비심도, 감정도 없다고 스스로에게 거짓말을 해온 지도 20년을 훌쩍 넘겼다. 스스로의 그런 '나약함'을 받아들이기로 한 것은 이제 그 절반도 덜 되는 수준이다. 나는 온정으로 세례를 받아 거듭났으니, 무기에서 인간이 될 수 있었다. 늦은 밤이다. 내 삶에서 의미가 있던 날들중 대다수는 다른 이들이 잠드는 이 밤에 존재했다. 부모님께서 헤어진 것도 밤. 홀로 남게 되어버린 것도 밤. 스스로의 신분을 국가에 맡기기로 한 것도 밤. 소중한 전우들을 잃은 것도, 총을 내려놓고 고향으로 돌아온 것도, 소중한 그녀를 만나고, 잃은 것도. 전부 밤이었다.
오늘 밤은 그녀를 잃은 지 3년이 지난 밤이다. 그녀의 친구들이자 곧 나의 친구들인 이들과 함께 사라져버린 존재를 기리고 돌아오던 길이었다. 익숙한 향기가 골목 한 구석에서 풍겼다. 본능과 이성이 한꺼번에 경보를 울렸고, 나는 그곳으로 향했다. 이제는 사냥꾼이 아닌 사회를 누리는 시민으로써. 그곳엔 내가 있었다. 마치 과거의 나를 보는 것만 같았다. 물론 성별도 다르고 신분도 다르고 상황도 다르겠지만, 피부 너머로 느껴지는 이 광경에는 분명히 내가 있었다. 상처를 입고 세상을 원망하는 눈은 분명히, 그 때의 나 자신과 같았다.
"세상에."
욕설조차도 하지 못하고, 나는 곧장 그곳으로 달려갔다. 오랜 공포는 아직도 내 뇌 한 구석에 남아 있어서, 누군가가 피를 흘린다는 상황을 지나치지 못했다. 다른 이들이 보통 허리춤에 권총집을 찰 때, 나는 작은 가방을 찼다. 그곳에서 꺼낸 간단한 도구라면 분명 이 사람을 구할 수 있을 것이다. 과거의 나를. 그 때 구해내지 못한 내 친구를. 또 잃고 싶지 않았다.
"우선 상처, 아니 출혈을... 잠깐만요."
너무 급해서 그런지 말조차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난 무릎을 꿇고 앉은 채 다친 사람의 환부를 확인하려 들었다. 가로등 불빛도 없이 희끄무레한 달빛 밖에 닿지 않는 골목길 구석에서, 스마트폰의 불빛에 의존하여 꺼져가는 불씨를 살리려는 멍청한 짓을 감행하기로 했다.
기름 두른 팬 위를 널뛰는 옥수수 낟알처럼 소란스러운 거리가 싫어서 피하고 피한 것뿐인데 이게 무슨 일인지. 요란스럽던 소리가 죽으면서 흘린 붉음일까 싶어 눈을 비비면 한 명의 사람이 한 마리의 짐승처럼 죽어가고 있었다. 축록에 사냥당한 산짐승처럼 베인 허리로부터 생명의 증거를 쏟으며 쓰러져 있는 누군가. 웅덩이를 만드는 흥건함에 나도 모르게 인상을 찌푸리고 마는 것은 결코 낯설지 않은 그 냄새가 퀘퀘 묵은 지난날의 상흔을 아리게끔 만들었기 때문이다. 나도 모르게 한 걸음 두 걸음, 뒷걸음질 치고 마는 것은 모른 척, 못 본 체, 왔던 길을 거슬러 올라가라고 속삭이는 양심을 등진 이성의 꼬드김 때문이다.
지난 삼십 년의 평화를 깨부수는 짓은 삼가고 싶었다. 사건을 모르고 사고를 잊은 척하며, 한 번 궤도를 벗어났던 삶을 각고의 노력 끝에 여기까지 되돌려놓았다. 그 노력을 수포로 만드는 일은 하고 싶지 않았다.
무고한 피해자는 없다며 세상만사에 삐뚠 태도를 보이던 누군가의 얼굴이 떠오른다. 그 사람이 지금 이 광경을 보았다면 도움의 손길을 망설이는 내게 큰 소리로 호통을 쳤을 것이 분명하다. 불의 뜨거움을 직접 데어봐야만 아는 멍청이였냐며 지금 당장 이 자리를 떠나가라고 내 엉덩이를 걷어찼겠지. 생면부지 타인, 복잡한 문제를 끌어안은 것이 분명한 사고 물건에 어디 손을 대려 하냐면서 윽박을 질렀을 것이다. 그래서일까. 달빛을 반사해 빛나는 붉은 피가 내게는 건널목의 적색등처럼 보였다.
핏비린내 나는 전쟁이 끝나고 평화가 찾아왔을 때 그것을 거부하는 이들은 그 어디에도 없었다. 물론 한때는 인간, 엘프, 드워프, 마족 등등. 정말로 다양한 종족이 서로의 생존과 이익관계 등으로 싸웠지만 그 모든 것을 뒤에서 조종하던 '흑막'이 있다는 것이 밝혀지고 그 흑막이야말로 자신들이 평화를 위해 처치해야 할 존재라고 인식된 수많으 종족들은 이내 모두 힘을 하나로 합쳐셔, 어제의 적이 오늘의 아군이 되어 모든 것을 뒤에서 지배하고 남 모르게 조종하던 흑막을 쓰러뜨리는데 성공했고 이제는 서로 더 싸우지 않도록 평화협정을 맺음과 동시에 제대로 된 평화가 찾아왔다.
바로 전날만 했어도 전쟁에 차출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과 언제 죽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을 품은 이들의 표정은 더 이상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흑막과 싸웠던 이들 중 한 명인 인간족의 젊은 사내는 정말 유유자적하게 거리를 누비고 있었다. 성스러운 검을 들고 누구보다 앞장서서 이 세계에 평화를 되찾아온 주역 중 한명인 그는 얼굴에 미소를 짓고 평화를 즐겼다. 세간에 떠도는 소설을 보면 보통 자신 같은 케이스는 영웅으로 대접받고 주변에서 사람들이 많이 알아보며 많은 부와 명예가 주어질지도 모르나 현실은 마냥 그렇진 않았다. 물론 왕이나 그런 사람들이 자신을 알아보고 대우를 해주긴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자신의 얼굴을 세간 사람들이 모두 알 정도는 아니었다. 물론 친분이 있는 이들이야 대단해!! 라고 말할지도 모르나 고작 그 정도였다.
"그럼 오늘 이 축제만 즐기고 슬슬 다른 곳으로 가볼까. 뭔가 계속 여기에 있기도 애매하니 말이야."
수도 출신이 아니라 그저 평범하고 작은 마을 출신이었던 그는 슬슬 여길 떠나 고향, 혹은 다른 곳으로 갈 때가 아닐까 생각하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물론 수도 생활이 불편하다거나 자신에게 눈치를 주는 이가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언제까지나 여기서 지낼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저 발길 닿는 곳으로 돌아다니다가 고향으로 돌아가서 검이나 가르치면서 여생을 보내는 것도 그리 나쁘진 않겠지. 그렇게 생각하며 그는 미소를 지었다.
/갑자기 시리어스한 장면이나 컷! 아. 배우님. 다시 제대로 해주세요! 같은 맥브레이커만 아니면 오케이!
눈을 깜빡일 때마다 의식이 수면 아래로 잠겨간다. 이제 몇번, 제대로 보이지도 않는 앞을 보고나면 내 의식은 완전히 끊겨버릴... 터였다.
"ㄴ, 누구, 야..."
의식이 희미해서였는지, 나는 누군가가 코앞에 다가올 때까지 눈치채지 못 했다. 스마트폰 플래시 특유의 빛이 없었다면 이 사람이 죽어가는 내 얼굴을 빤히 보고 있었어도 몰랐을거다. 그러나 그는 멍청하게도 플래시를 켰고 그 빛은 가라앉던 내 의식을 강제로 수면 위로 끌어올렸다. 불쾌한 각성의 감각과 마지막을 방해받았다는 짜증은 내 얼굴에 고스란히 담긴다.
"오지랖, 떨지 말고... 꺼져. 털어갈 것도, 없으, 니까..."
갈린 목으로 억지로 쥐어짜는 목소리는 그야말로 소음 그 자체다. 말하느라 목이며 몸 곳곳에 힘을 준 탓에 잊어가던 고통이 새롭게 밀려와, 신음으로 낮게 목을 울리자 짐승의 그것과 흡사한 소리가 난다. 그 뿐이랴, 메마른 목을 울렸으니 마른 기침 터지는 것도 있다. 커흑! 크흑. 온몸을 울리는 기침 몇번 하자 몸이 파르르 떨리고 슬슬 굳어가던 옆구리로부터 뜨끈한 피가 또 한웅큼 왈칵 솟구친다. 내 아까운 피, 이 이상 쏟으면 안 되겠다는 본능에 덜덜 떨리는 손으로 옆구리를 짚지만 힘없는 손으론 지혈도 뭣도 안 된다. 다만 차게 식어가는 손에 갓 흐르는 피는 뜨겁다고 느끼며, 괴로운 숨을 몰아쉰다.
"내버려, 둬... 이제, 이제야... 쉴... 거라고... 나는..."
비몽사몽에 가까운 감각 속에서 그렇게 중얼거린 나는 접근을 허락치 않듯 몸을 웅크렸다. 여기저기 찢어지고 뜯어진 테크웨어 한벌만이 내 수의가 되어주면 족했다. 이제와서 도움 따위, 누군가의 도움 따위는...
이 거리의 또 다른 그늘을 목전에 두고 있다. 아마, 이 사람에게도 이렇게 되어버린 사연이 있겠지. 특히나 단순한 사고가 아닌, 흉기 등으로 노려진 듯한 모습을 보면 더더욱. 이 사람과 엮이면 위험해질지도 모른다는 예감이 머리 속을 엄습했다. 그러나 그렇더라도 나는 지나칠 수 없었다. 기사도 정신 따위나 군인 정신 같은게 아니다. 이건 두려움이다.
"조금만 기다려요."
목숨을 잃는 것을 두려워 하면서도, 모든 것에 적대감을 감추지 않는 모습은 상처 입은 짐승같아 보였다. 출혈과 그것을 가리는 손을 바라보고선, 조심스레 그 손을 옮겼다. 웅크린 틈새로 잡은 피투성이 손목은 차가웠다. 출혈도 많고, 체온도 잃고 있다. 의식을 잃지 않도록 조치해야할지도 모르겠다.
"...이름이 뭐예요? 나이는?"
간단하게 기억해낼 수 있는 것들을 물어가며, 상처 부위의 옷을 조금 걷어올렸다. 날붙이로 인한 절상인가? 확실히 그냥 사고로 인한 건 아닌 것 같다. 그렇다면 더더욱 버리고 갈 수는 없는 법이다. 누군가에게 목숨이 빼았기는 것은 이제 사절이다. 특히나 내 눈 앞에서. 망설임 없이 소독 거즈의 포장을 뜯고서, 거즈를 환부에 대고 꽉 누른다. 물론, 상태를 보면 지혈만으론 부족하겠지만 일단 피를 멈춰야 한다. 후송은 그 다음이야.
구급대를 불러야 하나? 아니. 어쩌면 그랬다간 허사가 될 수도 있다. 병원에 입원하고 있는 사람은 오히려 몇몇 상황에선 더 무력한 경우가 될 수 있다. 스마트폰을 들어올려 조금 고민하고 있다가, 본인에게 묻기로 했다. 자칫하면 구급대를 기다릴 틈도 없이 이동해야 할 수도 있으니까.
그만, 그만 날 내버려둬. 이 이상 나를 이 거리에 붙잡아두지 마. 더 이상 나를 이 세상에 살아가게 하지 말라고. 나는 웅크린 채 덜덜 떨었다. 빠져나간 피의 분량만큼 체온을 잃었기에, 절대 춥지 않은 이 계절에 뼛속까지 시린 한기가 전신을 엄습한다. 아, 젠장, 진작에 정신을 잃었으면 이런 한기는 느끼지 않았어도 됐을텐데, 저 불청객 때문에 내 마지막 가는 길도 영 개운치가 않다. 그렇지만 이 상황에 반항을 할 수 없는 내가 더 한심스럽고, 짜증이 났다.
"두라고, 좀, 손 대지마..."
다 죽어가도 욕지거리는 입에 베여서 술술 튀어나온다. 그러면 뭐하나, 날 건드는 저 손 하나 쳐내지를 못 하는데. 간신히 뜨고있는 눈으로 이 정체 모를 인간을 노려보면서 잇새로 연신 거친 소리 내뱉는다. 그러다 목이 메여 다시 기침하고, 머리가 핑 돌아 아무 소리도 못 내고 숨만 겨우 쉬는 지경에 이른다. 시익시익, 내 숨소리가 이렇게 컸던가, 이명과 숨소리가 뒤섞여 머릿속을 채우는 와중에, 내 옆구리에 뭔가를 대고 손을 얹은 그가 물었다. 이름, 나이, 당연하지만 나와는 거리가 먼 질문들에 크흑 하는 괴로운 웃음소리 흘렸다.
"있겠냐, 그딴거... 나는, 언제나, 대용품... 이었다고..."
나이도 날 주운 집시로부터 들어서 추정했을 뿐이고, 이름 역시 조직의 코드번호 이외는 없었다. 그마저도 지금은 희미하다. 그야 몇번 불리지도 않았지, 늘, 다른 사람의 이름으로 불렸으니까...
"없어... 아무도... 다 죽였어... 내가... 아무것도... 없어... 이제..."
누군가에 쫓기고 있냐는 말에 나는 떠올린다. 내가 마지막으로 나온 조직의 내부를, 전부 새빨갛게 물든 그곳을. 그나마 기다리던 사람도, 돌아갈 곳도, 모두 없어졌다. 내 손으로 없앴다. 그리고 이제 와서 혼자는 싫다.
"내버려 둬... 제발..."
한기로 턱을 떨면서도 중얼거린 나는 더이상 눈커풀을 잡고 있지 않기로 했다. 스르륵, 자연스럽게 감기는 눈이 무거우면서도 이제 겨우 편해지겠구나, 하는 생각에 안심이 되고, 조금은, 아주 조금은... 아쉬운 것도 같았다. 내 손이 늘어져 툭 기댄 그의 손이 따뜻했으니까.
손을 대지 말라는 죽어가는 짐승의 마지막 발악은 듣지 않기로 했다. 애초에 나는 지금 이 행동을 순전한 연민과 자비만으로 행하는 것은 아니니까. 자기 만족이었다. 그냥 내가 그 광경을 보고 지나쳤다간, 두고두고 또 내 정신이 나를 괴롭힐 것 같아서. 복잡한 감정이다. 인간은 원래 복잡한 감정으로 만사를 행하는 법이다만.
의식을 잃지 않도록 물어보는 일이, 의외로 프로파일링이 되어가고 있다. 개인 인적 사항의 말소. 소모성 인적 자원에, 추격자를 전부 처치했다... 흐려져가는 의식 중에 말하는 횡설수설일수도 있지만, 이것이 사실이라면 나는 꽤나 귀찮은 상황에 맞닥뜨린 것이라고 생각했다. 조직, 혹은 기관. 절대 소규모의 집단과 연루되어 있는 것은 아님이 분명했다.
구급대를 불러선 안된다. 오히려 일이 더 틀어질것이 뻔하다.
출혈 자체는 어느정도 통제가 되고 있다. 피에 절어버린 거즈 위에 하나를 더 얹고, 꽉 누른채 천천히 그녀를 안아올렸다.
"걸을 순 없어보이니, 이대로 갈겁니다."
조심스레 무릎 아래에 팔을 대고, 등을 받쳐서 일어선다. 다리나 머리가 어딘가에 부딪치지 않도록 조심하며 골목을 빠져나간다. 그나마 거처가 근처라서 다행이었다. 집세가 싼 동네에 사는 게 이런 도움이 될 줄은 누가 알았을까. 소중했던 사람을 잃은 이후로, 나는 집이 굳이 넓을 필요가 없어졌다. 살던 집을 팔고, 지금의 치안도 너비도 보장되지 못하는 아파트로 자리를 옮겼다. 스스로를 내던진 벼랑같은 곳으로, 생명을 구하기 위해 달려가는 역설이 참 우스웠다.
"이제... 거의 다 왔어요."
그나마 양심상 달려 있는 도어락의 버튼을 누르고, 우선은 그녀를 낡은 소파에 눕혔다. 빛도 제대로 들어오지 않고, 근처 도로의 차량 소리가 뻔히 다 들리는 이곳이 내 집이자 무덤이다.
그가 데려가겠다며 들어올렸을 때, 내 정신은 이미 끊겨있었다. 고개를 옆으로 툭 떨어지고 입은 힘없이 벌어져서, 게다가 피범벅이기까지 했으니 꼴불견이었겠지. 그렇게 데려가지는 내내 나는 숨만 겨우 쉬고 있는 상태였다. 언제 숨이 끊어져도 이상하지 않았지만, 인간의 목숨이란 어찌 그리도 질기던지, 그의 집에 도착해 낡은 소파에 내려지고서도 나는 숨을 쉬고 있었다. 아주 희미하게 살아있었다.
돌이켜보면, 내게 향하는 손은 언제나 악의와 살기로 가득찬 것 뿐이었다. 뾰족하고 날선 감정들은 나를 사정없이 찌르고, 후비고, 베었다. 언제나 아슬아슬하게 사선을 비껴나가 살아남았지만, 그 감정들은 흉터라는 이름으로 내 몸에 고스란히 남았다. 어느 순간부터 나는 '일'이 없을 땐 온 몸을 감추는 옷만을 입게 되었다. 오늘도, 조직에서 지급했던 새까만 테크웨어로 온 몸을 감싸고, 다년간 생사고락을 함께 했던 조직원들을 전부, 내 손으로...
"큭, 커흑..."
장소가 바뀌었다고 해서 내 상태가 나아질 리는 없었다. 들고 옮겨진 후폭풍과 점점 가까워지는 생사의 경계에 무의식 중에도 몸서리를 치며 기침과 피를 토한다. 갓 터진 피는 그의 낡은 소파를 더럽히고 바닥에도 튄다. 이제 정말 끝이 코앞이구나, 싶을 때, 기침의 충격으로 닫혔던 눈이 가늘게 뜨였다. 흐릿함을 넘어 색도 분간이 안 될 정도로 뭉개진 시야에 곧 뜨거운 것이 차오른다. 이제 눈에서도 피가 나는가, 아니, 아니다, 이건 눈물이다. 피와 흙먼지로 범벅이 된 얼굴에 투명한 눈물이 흘러내린다. 눈물이 흘러서인가, 아니면 나도 모르는 진심이었나, 순간 그렇게 중얼거려버렸다.
"죽기, 싫어... 죽고싶지... 않아..."
아, 인간이란 이 얼마나 어리석은 생물인지, 그토록 죽음을 바랐으면서 정작 죽음의 문턱에 다다르니 두려워졌다. 이대로 아무것도 하지 못 하고 죽는 것이 무서워졌다. 나라는 존재가, 아무것도 아닌 채 사라지는 것이 싫었다. 살고 싶다고, 나도 모를 말을 중얼거리며 손을 뻗어보려해도 팔은 들리지 않고 손만 겨우 부들거릴 뿐이다. 그마저도 지금의 내게는 힘이 부치는 일이었기에, 곧 다시 의식을 잃었다.
젖은 수건으로 얼굴을 닦아낸다. 눈물을 흘리는 얼굴을 보자 측은한 감정에 가슴이 먹먹해져, 숨을 쉬는 것이 평소보다 더 수고로워졌다. 전부 포기해버리고 놓고 가라는 말이 진심이 아니었음은 어렴풋이 알고는 있었다. 그러나 그것을 직접 확인하는 것은 별개의 일이다. 이 피가 순전히 이 사람만의 피인지, 아니면 다른 이들의 피도 섞여 있는지는 알 수 없는 길이다. 후자인 편이 안위에 있어서 차라리 다행이라 해야 할런지.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지금 내가 구하고 있는 사람이, 무고한 이들을 수도 없이 해친 살인마라면? 그리고 내 손으로 인해 다시 일어나, 다음 희생자를 찾게 된다면? 그리고 그 일 때문에 일어나는 희생자들과 유족들이 나를 찾아내 책임을 묻는다면... 불필요한 생각을 너무 했다. 지금 당장은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하고, 그 다음은 운명에 맡기는 수 밖에.
가진게 너무 부족하고 제한된다. 가장 중요한 요소는 역시 흘린 피를 메꿔줘야 하는 것인데 수혈팩은 고사하고 이쪽의 혈액형도 모르는 상황인데다, 제대로 된 처방이 필요한 항생제가 아닌 상비약 정도밖에 없다. 몸을 씻기는 것도 필요할텐데, 이러니 저러니 해도 난 정신을 잃은 이성에게 멋대로 그런 짓을 하고싶진 않다.
"...갈아입힐 옷도 없고 말이지."
그나마 내가 환자에게 해줄 수 있는것은 따뜻한 모포 정도가 끝이다. 나머지는 그저, 손으로나마 체온을 전해주는 수 밖에. 상의를 조금 끌어올려 거즈를 갈고, 새 습포를 덧댄 뒤 붕대를 감는다. 그리고 그 위에 모포를 목 아래까지 덮은 뒤, 가만히 곁에 앉아서 손을 잡았다.
피를 닦아낸 내 얼굴은 몇군데 찰과상을 제외하면 큰 상처는 없었을 것이다. 끈적해질만큼 묻어있던 피가 전부 내 것만은 아니었으니까. 거칠게 손질된 검붉은 머리카락이 이마에 들러붙어있다가 젖은 수건에 밀려 옆으로 흘러내린다. 그렇게 드러난, 옅어진 핏자국 아래 하얀 피부나 얼굴의 생김이 앳되어 쉬이 나이를 가늠하기 어려운 외모다. 잠긴 것처럼 굳게 감긴 눈은 얼굴에 수건질을 하고 옆구리에 새 처치를 해도 열리지 않았다. 모포를 덮어주고 손을 잡아주었을 땐, 차가운 손에 닿은 그의 체온이 뜨거운 것처럼 흠칫하지만 곧 잠잠해진다. 금방이라도 꺼질 것 같으면서도 가늘게, 희미하게 숨을 이어가며 내 생은 이어진다.
그대로 푹 잤으면 좋으련만, 피가 너무 흐른게 문제였는지 겨우 서너시간 지나서 정신이 깬다. 영원할 것 같던 새벽이 거의 지나 창밖이 흐릿하게 밝아지려 하는 시간이었다. 무거운 눈커풀을 들어올리자 보이는 건 낯선 천장. 폐부로 들어오는 공기 역시 낯설다. 순간적으로 패닉이 올 뻔 했으나, 공교롭게도 내 정신은 적응과 이해가 빨랐다. 순식간에 머릿속을 스치는 일의 전말에 탄식과 같은 숨이 입술 사이로 토해진다. 하-...
"젠장..."
죽음의 문턱에서 생을 구걸하는 꼬라지라니. 누구보다 죽고 싶어하는 인간은 사실 누구보다 살고 싶어하는 인간이라는게, 그게 나였을 줄이야. 기가 차서 헛웃음도 안 나온다. 아니, 목이 말라서 말이고 뭐고 못 하겠다. 나는 천천히 주변을 둘러보고 이 집의 주인, 날 데려온 오지랖 넓은 남자, 그가 옆에 있는지 없는지 확인하고서, 겨우 목소리를 쥐어짜냈다.
"ㅇ, 어이... 이봐."
원래 목소리가 뭔지 알아듣기 어려울 정도로 갈라지고 찢어진 목소리는 내 귀로 듣는 것도 별로다. 그래도 말을 안 하면 아무것도 할 수가 없으니, 겨우 겨우 마른침을 삼키고 목소리를 끌어낸다.
"물... 물 좀, 줘 봐..."
죽지 못 했다면 어떻게든 살아야하지 않겠나. 일단은 말이라도 제대로 할 수 있게 물 좀 달라고 하고, 그새 자극받은 목 때문에 마른 기침을 했다. 콜록, 콜록. 숨이 빠질 때마다 느껴지는 피맛은 내가 살아있음을 생생하게 느끼게 해줘서, 절로 미간이 찡그려졌다. 젠장, 다시 중얼거린 건 당연했다.
피곤한 하루와 그것보다 배는 더 피로하고 긴장되었던 하루의 끝자락 탓인지, 잠시 체온을 건네주려 손을 잡고서는 그 자리에서 나도 그대로 곯아떨어지고 말았다. 따스하다기보단 따가운 햇살이 등짝을 두들기고, 무엇보다 누군가가 나를 부른다는 기척이 느껴지자 코를 골아대며 잠들어 있다가도 펄쩍 뛰듯이 깨어나, 잠깐 정신을 차리기 위해 바라보았다.
아. 그녀가 깨어났다. 새하얗고 앳된 얼굴이 눈을 뜨고서 무어라 하는 것을 보자, 비밀스러운 무엇인가 혹은 최소한 옆구리에 절상을 입고 피칠갑을 할만한 사람같아 보이지는 않았다. 학생이라고 해도 믿을 것이다.
"물... 아, 그래. 물."
자다가 금방 깨어난 지라 정신이 없었으나, 이내 그녀의 잠긴 목소리가 무엇을 말하고 요구하는 지 알아채고 얼른 자리에서 일어났다. 생각보다 굉장한 체력을 가지고 있었다. 아마 그렇지 않았으면 진작에 밤을 넘기지 못했을 가능성도 있었지만, 다행히 그렇지 않았다. 자연스럽게 냉장고로 걸어가, 플라스틱 병에 든 생수를 꺼내들고 가져가려다가 아차 하고 다시 주방으로 돌아갔다. 행여 힘이 없어서 마시지 못하고 쏟지 않을까 싶어, 빨대를 하나 꺼내 열린 페트병에 꽂아서 소파로 걸어왔다.
"여기요. 체할 수 있으니까 천천히 마셔요."
의식이 있는 상태에서 무언가를 할 수 있다는 것은 큰 다행이다. 체력의 보충을 위해 음식물을 섭취할 수도 있을테니까. 약도 먹을 수 있겠지. 한 시름을 놓았다는 안도감에 한숨을 내쉬었다. 작은 페트병에 꽂힌 빨대를 입가에 가져다 준다. 들고 마시기엔 힘들지 모르기에, 당장은 이런 간호를 해줄 필요가 있을것이다. 물론 앞으로도 해결해야 할 문제도 이만저만이 아니지만 지금은 회복이 급선무다.
흡혈귀, 뱀파이어, 드라큘라. 무엇이라고 부르든 그들은 존재했다. 반려 인간과 짝을 지어 평생 그 한 사람만 흡혈할 수 있도록 하는 제도가 자리 잡은 지금은 딱히 공포의 대상도 아니다. 송곳니가 날카롭고 귀가 뾰족한 그들은 인간과는 다른 능력을 갖고 있고, 반려 인간에게 그 힘의 일부를 내어준다. 계약하는 것이다. 그리고 지금 이 여자는 반려인간 공고 전단을 돌리고 있다. 귀가 둥근데 전단지 내밀며 웃는 것을 보아하니 이는 날카롭다. 당신에게도 종이 한 장을 건넨다.
장밋빛 인생이라는 말은 누가 만들었는지 모르겠지만, 인생은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다. 그게 아니라면 나만 빼고 다른 모두들은 쉬운 인생을 살아가는게 아닐까. 오늘도 겨우 이자만 갚을 수 있었고 수중에 남은 돈이라곤 그저 한달을 겨우 풀칠할 수 있는 돈이다.
그렇게 내일을 걱정하며 걸어가던 중 전단지를 내밀어오는 손이 쑥 앞으로 들어온다. 반려인간, 인간과 그것들 간의 평화적인 협상 이후 새롭게 정착된 제도로 누구나 할 거 없이 피를 빠는 것이 아니라 지정된 상대만 흡혈할 수 있는 제도. 조건은 여러가지가 있었지만 대부분 건강한 상대를 찾기에 나는 해당사항이 없는 경우가 많았다.
" ... 혹시 다른 조건은 안보시나요? "
하지만 당장 내 인생이 절벽 끝자락에서 반쯤 발을 내밀고 떨어져? 나 떨어진다? 라고 협박하는 와중에 어차피 밑져야 본전인 일을 마다할 필요는 없었다. 받은 전단지를 잠깐 바라보고 이것을 나누어주는 여자에게 가서 직접 물어본 것이다.
지푸라기 잡는 심정으로 전단지를 돌리고 있었지만 전단지가 효과 있을거란 기대는 했다. 전단지에 적어둔 번호로 연락을 하는 것도 아니고 이렇게 바로 자신에게 물어보다니 눈을 크게 뜨고 되물어본다. 정말로 반려 인간에 관심이 있는 것이라면 다른 조건에 대해 말해주는게 맞다. 전단지로 얻어맞을 마음의 준비를 마치고서 말한다.
“불쾌하실 수도 있는데… 미인이요.”
인간도 이왕 먹을 것이라면 보기 좋게 예쁜 것을 좋아하는데 인간의 피를 먹는 흡혈귀도 보기 좋게 예쁜 인간의 피가 먹고 싶을 수 있는 거다. 이 여자는 취향이 너무 확고해서 문제다. 안 그래도 반려 인간 구하기는 까다로운데 이 때문에 더 고생하고 있다. 전단에 미인만 연락해달라고 적으려다 아무래도 욕 먹을 것 같아 그만두었다. 그러니 지금 욕 먹을 차례라 생각하며 당신을 흘끗 바라본다.
상대방도 분명 잘 구해지지 않으니 전단지를 돌리고 있을 것이다, 라는 계산도 분명히 깔아두고 있었다. 사실 인간의 수는 많은데 비해서 그것들의 수는 적기 때문에 반려인간을 구하려면 얼마든지 구할 수 있는 환경이다. 본인에게도 무언가 제한되는 사항이 있는거겠지, 라고 생각했는데 ...
" 네? "
내건 조건이 미인이란다. 보기 좋은 음식이 먹기도 좋다는게 그들의 세계에서도 통용되는 단어인가보다. 예상치도 못한 조건에 나도 모르게 놀라긴 했지만 ... 그 정도 조건이라면 나도 자신이 있었다.
" 그 ... 제 몰골이 이래서 그렇지 ... 나름 봐줄만 하거든요 ... "
점점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들릴락 말락하게 얘기한 나는 그녀의 눈치를 보았다. 그렇다, 사실 내가 이렇게까지 망한 이유도 모 엔터테인먼트의 대형 사기극의 피해자이기 때문이다. 연예인으로 데뷔 시켜준다는 말에 속아서 이것저것 돈을 가져다 바치다가 결말은 대표의 잠적. 덕분에 빚만 늘어난 나는 지금까지도 이런 시궁창 같은 삶을 사는 것이다.
" ... 그래도 안된다면 그냥 갈께요 ... "
허나 그것이 상대방의 마음에 들지는 별개의 문제, 결국 끝까지 눈치만 보다가 먼저 물러나려고 했다.
주변을 보았을 때, 날 데려온 그는 옆에서 코를 골며 자고 있었다. 그의 등 뒤로부터 비치는 햇살에 제대로 보이진 않았지만, 분명 엄청나게 고단했을 것이다. 이런 곳에서 사는 사람이 편안한 일상을 보내고 있었을 리가 없다. 그 와중에 날 줍다니, 인생 참 힘들게 사는 부류일테지. 보통 사람이었다면 깨지 않게 배려를 한다던가 했겠지만, 내게 그런 마음씀씀이는 없었다. 가차없이 그를 불러 깨우고, 뻔뻔하게 물을 요구했다. 퍼뜩 잠에서 깬 그가 물을 가지러 가고서야 나는 내 손이 그에게 쥐어있었음을 알았다. 손이, 허전해졌으니까.
그는 물이 든 페트병에 빨대를 꽂아서 가져왔다. 자력으로 일어나지 못 하는 나로서는 참 고마운 행동이었지만, 동시에 뭐하러 이렇게까지 하는거지 싶다. 멍청한건가, 다른 속내가 있는 건가. 일단은 물부터 마셔야 할 것 같아, 천천히 마시라는 말에 알아서 할거라고 대꾸하고 고개를 돌려 빨대를 문다. 입술로는 고정이 되질 않아 끝을 약하게 물고 조금씩 조금씩 물을 빨아들인다. 이런 상태에서 뭔가를 먹는 요령은 이미 터득한지 오래였다. 처음엔 입 안을 적시고, 충분해지면 약간씩 목으로 흘려넣어 적시고, 잠시 쉬었다가 한모금씩 넘겨 본격적인 수분 보충으로 이어간다. 작은 페트병의 반 넘는 양을 그렇게 마시고서 물고 있던 빨대를 퉷, 뱉었다. 급격한 물의 섭취로 잠시 호흡이 가팔라졌지만, 정신이 든 지금은 스스로 진정시킬 수 있었다. 하지만 신진대사가 돌며 새롭게 느껴지는 고통은 어떻게 할 수가 없어서 나는 얼굴을 구기며 욕지거리를 내뱉고 만다.
"아, XX, 개같이 아프네, 젠장. 그 XXX들. 죽이려면 제대로 찌르던가."
누가 고문 전문반 아니랄까봐, 통증이 오래갈 부상만 입혀논 듯 하다. 그 중 제일 심한게 옆구리인가. 겨우 손을 움직여 옷 위를 더듬어보자 두툼한 붕대와 거즈로 추정되는 것이 느껴진다. 이 인간이 해놨겠지. 내 시선은 절로 옆으로 굴러가 물통을 대주던 그에게 향했다. 금방이라도 짜증과 불평을 쏟아낼 듯한 눈빛이었지만, 이제와 그게 무슨 소용인가 싶어 한숨을 내쉰다. 결국 마지막에 목숨 구걸을 한 건 나였는데, 남에게 짜증낸들 무슨 소용이 있는가. 고통을 억누르기 위해 숨을 짧게 들이키고 내쉬며 한풀 기꺾인 목소리로 말했다.
"저녁, 아니, 해가 질 때까지만 누워있다 나갈 테니까, 이 이상 나한테 신경쓰지 마. 더 해줘봤자 줄 돈도 없어."
만약 나가서 '까마귀' 녀석과 접촉이 가능하다면, 얼마의 돈 정도는 생기겠지만 앞으로 살면서 들 돈에 비하면 턱없이 적은 액수다. 그마저도 있을지 없을지 알 수 없으니, 내게 지금 있는 건 이 몸뚱이와 걸친 넝마 한 벌이 전부인 셈이다. 그러니 내게 베푼 친절을 금액적으로 돌려받을 수 있을거란 생각은 일찌감치 접으라고 말해주고 고개를 돌린다. 고개만 돌렸지 다시 잘 생각은 없었다.
반 정도 비어버린 물병을 테이블 위로 치웠다. 그녀가 물을 마시고 좀 정신이 돌아오자마자 내뱉은 말은 욕설이었다. 물론 상황을 고려하면 그렇게까지 이상할 것은 아니지만, 강한 어조의 욕설이 갑작스레 나온다면 누구나 거기에 동요하기 마련이었다. 그러지 않는 사람들은 보통 욕설이 나올거라 예상을 한 사람들일테니까.
그나저나 몇시간 전까지만 해도 상처입어 죽음의 문 앞에서 벌벌 떨던 그런 사람이 욕설을 하며 투덜거리는 모습이란 참 복잡한 광경이다. 이러니 저러니 해도 구해다 준 사람에게 봇짐 내놓으라는 이야기는 아니라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여러모로 평탄한 삶과는 거리가 있는 인물이었다. 물론 나도 남말을 할 처지는 아니지만, 어느 순간부터는 안식을 얻었었다. 이 사람에게 올 삶의 평화는 과연 언제가 될 지는 모르겠다만. 어쩌면, 내가? 아니. 난 그럴 자격은 없을 것이다.
"돈을 노렸으면, 치료를 하진 않았겠죠."
끔찍한 이야기다만, 거리에 칼을 맞고 쓰러져 있는 사람을 구하고 사례금을 받는 것 보다는 인질로 납치해서 뒷세계에 팔아치우거나 신체부위를 매매하는 것이 돈 자체는 더 많이 벌 수 있을 것이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난 그런 짓을 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내가 정의로운 영웅까지는 아니더라도 그런 악랄한 짓을 할 정도로 탐욕스럽지는 않으니까. 무엇보다, 사례금이 되었든 그런 더러운 돈이 되었든 그런것에 의존해야 할 정도로 궁핍한 상황도 아니다. 지금 살고 있는 집의 상태를 보면 훤히 믿지는 못할 이야기지만, 내 통장 잔고는 명백하게 진실을 말할 것이다.
"언제 나가시든 상관 없어요. 하루, 뭐 일주일. 평생만 아니면 됩니다. 남는 방을 쓰시면 되니까."
남는 방! 그래. 이 허름해보이는 아파트도 남는 방이라는게 있었다. 싸구려지만 구색은 다 갖춘 집이지만, 나 자신이 특별히 방을 여러개 쓰는 성격도 아닌지라 대충 손님 방 용도로 쓰고 있었다. 이상하게 여기서 마시면 미적지근하게 된 맥주도 맛이 난다며 종종 친구들이 오기 때문이다. 혹은 본인들의 배우자로부터 잠깐 피난을 오거나. 그래서 나는 손님이 오는 것에 크게 개의치 않는다. 그리고 그것이 거동이 힘든 환자라면야, 편의를 더 봐줄 의향 정도는 있다.
사례비 같은 건 못 준다 하니, 그는 돈을 노린게 아니라고 하길래, 나는 고개를 돌린 채로 씹듯이 말을 내뱉었다. 잇새로 힘 좀 줬다고 칼같이 찌릿하게 저려오는 근육통에 XX을 비롯한 욕지거리가 튀어나간다. 이대로는 저녁이고 나발이고, 며칠은 디비져 누워있어야 할 지도 모를 거 같다. 아주 환장하겠네. 이럴 바엔 차라리 그 골목길에서 딴놈들 눈에 띄어 조각나는게 좀더 편안했겠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욱신거리는 통증은 피폐해진 정신을 차츰 갉아들어간다. 살아있어봤자 변하지 않는 현실은 순간 순간 내 머릿속을 뒤집는다. 에휴 XX. 짧은 욕 한번 내뱉은 나는 참 여유 넘치는 친절 어린 말에 날카로이 가시를 세웠다.
"아이고 친절도 하셔라. 그런데 혹시 알아. 잡아뒀다 뒷골목에 수배 떨어지면 냉큼 갖다 바칠지. 저지른게 많아서 모가지에 수배금 꽤나 걸릴 거거든."
전부 시켜서 한 짓들이었고, 제대로 된 신분도 없는 내가 양지 쪽에 수배 따위 걸릴 일은 없겠지만, 음지 쪽엔 내가 저지른 일에 원한을 가진 놈들은 있을 지도 몰랐다. 그들이 작정하고 수배를 내린다면 잡히는 건 시간 문제일 것이다. 어느 정도, 시간벌이를 할 수는 있겠지만... 또다시 찾아온 현실의 무게가 내 입에서 헛웃음을 일으켰다. 푸흐, 흐흐흐. 자포자기의 기운이 역력한 웃음을 흘리며 중얼거렸다.
"아니다. 댁이 갖다 바치든, 잡혀서 들어가든, 어차피 갈 곳은 그 쪽 뿐이네. 그래. 쥐새끼가 살던데서 어떻게 멀어지겠어. 그나마 내 발로 들어가면 덜 힘들겠지..."
시궁창 쥐새끼는 죽을 때까지 시궁창 쥐새끼고, 골목길 고아는 죽을 때까지 뒷골목 고아일 수 밖에 없다. 쥐구멍에 볕 들 날은 사실 쥐를 잡는 불꽃의 빛 말고는 없는거다. 나는 내가 일으킨 불에 스스로 뛰어들었어야 했다. 어정쩡하게 데여 꼴불견으로 살아남지 말았어야 했다. 분함에 주먹 쥐는 것조차 제대로 할 수 없는게 더 분해, 버릇이 된 욕지거리를 재차 씹어뱉는다. 이젠 당연하게 찾아오는 고통에 미간을 찡그린 나는 싸늘히 식은 목소리로 말한다.
"어이. 약값 안 받을거면, 진통제 두통이랑 물 한통만 내 줘. 하루고 일주일이고, 오늘 당장 해만 떨어지면 나가줄테니."
온종일 진통제라도 씹어먹으면 적어도 통증 정도는 느껴지지 않게 되겠지. 그렇게만 되면 칼같이 나가주겠노라 말하고 입을 다물었다.
"철이 들자마자 사막 한 가운데에서 모래를 씹다보니, 이 나이 되어서도 팔자가 좋아졌죠."
진부한 이야기다. 어차피 상이군인에 대한 대우는 길바닥에 굴러다니는 똥덩어리보다 아주 미세하게 나은 정도인 국가라지만, 그래도 만리타향 건너가서 사람을 죽이고 온 사람에게 어느 정도는 준 게 있긴 하다. 물론 그것만으로 해결했다기보단 조금 더... 관련 경력을 살린 일을 해 온 결과라고나 할까. 아, 물론 단타성 주식 매매도 한몫 했고.
수배라. 만약 이 사람이 정말로 법의 심판을 받아야 할 정도로 악인이라면 건네주기야 해야겠지. 악독한 범죄자라도 일단 법의 판결 정도는 받아봐야 한다. 물론 그 법이 충분히 처벌하지 못하는 경우엔, 누군가 대신 처벌해주길 바래야할지도 모르겠다만. 그렇기 때문에 나 홀로 이 사람에게 벌을 주느니 어쩌니 하는건 할 생각 없다. 대신 경찰이 이 사람을 찾는다면, 고려는 해 봐야겠지. 법 집행관들의 눈 밖에 나 봤자 별로 좋을 것도 없다. 특히나 나같이 살인마 취급이나 받는 퇴역 군인이라면 더더욱.
"그야 상황 따라 다르죠. 세상이 당신의 처벌을 원하고 적법한 절차를 밟는다면, 저같이 법을 지키는 소시민은 건네 드릴수밖에 없습니다."
물론 그렇지 않은 사적인 무언가부터, 법의 테두리 밖에 있는 녀석들이 개인적인 비즈니스 때문에 찾아온다면 많이 곤란해질 것이다. 순식간에 몸뚱아리에 납덩어리가 처박히는 경험은 살면서 그다지 해보지 않는 편이 나을테니까.
"제가 약사 면허가 있는건 아닌데, 척 봐도 진통제만 먹으며 버티다 나갔다간 그냥 평범한 옥시코돈 중독자, 혹은 그런 삶을 잠시나마 살았던 것으로만 끝날거 같군요."
잠시 화장실로 가 찬장을 뒤지더니, 작은 약병을 두어개 정도 꺼내온다. 그러고서 주방을 들러 생수를 한 병 꺼내와 테이블 앞에 늘어놓는다. 항생제와 진통제. 상처의 감염 위험도 큰 상태에서 진통제만 씹으며 버티다가 패혈증으로 또 드러누울 수도 있으니까. 어쩌다 이런 가엾고 딱한 감정이 슬슬 벗겨져 나가는 인물의 주치의가 되어버린건지 아직도 의문이지만, 그래도 구한 이상 최후까지 보살피긴 해야지.
그인가? 아니면 그녀였나? 하여튼 상관없었다. 그는 휴대폰을 켜서 화면을 토닥거리고 있던 중이었다. 무언갈 쓰고 싶군. 그는 생각했다. 그래. 써야겠어. 하지만 어떤 걸 쓰지? 그는 자신의 쳇바퀴 같은 일상에 대해 생각했다. 그리고 어두칙칙하고 재미없는 과거에 대해서도. 그 다음에는 별 것 없는 연애생활에 대해서도 생각했더랬지. 마침 좋아하는 사람은 있었다. 이거야. 그 사람에 대해 써야겠다. 의욕을 찾은 손가락이 재빠르게 움직였다. 그러나 그는 첫 문장을 채 쓰지 못하고 지우고, 썼다가, 또다시 지우는 군.
손가락이 굳었다.
역시 이건 아니야. 혼자 글을 쓰면 재미가 없는 걸. 보아 줄 사람도 없고 말이지.
그는 자유상황극에 올라온 글들을 쭉 살펴보았다. 아니야. 아니야. 이렇게 퀄리티 높은 글에 내가 감히 무언갈 달 수 있으려고! 그의 안에서 냉엄한 심판자가 소리쳤다. 너는 그냥 구석에서 혼자 네 걸레 조각 같은 전자 찌꺼기나 끄적이라고!
결국 그는 돼지가 씹다 뱉은 사료 부스러기 같은 것을 주절대다가 한숨을 쉬며 작성 버튼을 누를 것이다. 이 다음이 어떻게 될지는 신만이 알 일이다.
내가 뒷골목을 구르면서 깨달은 몇가지 중에 하나는, 인간은 누구나 사정이란게 있다는 사실이다. 어느 누구나 재력이나 권력 따위는 재쳐놓고 인간적인, 개인적인 사정이 하나쯤은 있었다. 하지만 그딴 건 내 알 바 아니었다. 누가, 어떤 사정을 안고 있건, 나는 내게 주어진 일만 했다. 그들의 숱한 비명과 절규에 귀가 먹먹해져도 그저 내가 휘두르는 나이프의 끝만 보며 달렸다. 겨우 연명하는 지금도, 내 시선이 달리 향하는 일은 없다.
"거참 부러운 삶이시구만."
그러니 그가 무슨 고생을 했던 어떤 삶을 살았던 내겐 중요치 않았다. 어쨌거나 그는 멀쩡히 이름이 있고, 신분이 있으며, 낡았어도 자신의 집이 있는 민간인이자 이 도시의 시민이다. 그에 반하면 나는 투명인간이다. 이름도 신분도 없고, 돌아갈 집도 없고, 유일하게 가진 이 몸뚱이도 지금은 짐일 뿐이다. 밑바닥에도 그 아래가 있다는 것 역시 살면서 깨우친 몇가지 중 하나였다.
나는 약을 가져온 그의 말에 이 악문 소리를 내뱉으며 천천히 몸을 일으킨다. 손가락 하나만 까딱해도 신음이 터질 듯한 고통이 전신을 강타했지만, 정신이 멀쩡한 지금은 입술을 깨물어서라도 버틸 수 있었다. 간신히 상체를 일으켜 앉은 나는 소파에 기대 가쁜 숨을 몰아쉰다. 순식간에 이마와 등을 흐르는 식은땀이 느껴지고, 눈앞이 핑 돌았지만 다년간의 경험은 어떻게 해야 이걸 가라앉힐 수 있는지 알았다. 잠시 모포를 쥐어뜯을 듯이 쥐고서 통증과 어지럼증이 가시길 기다렸다가, 그가 가져다놓은 약병에 손을 뻗었다. 악으로 고통을 견디기는 해도 손의 떨림까지 막기는 어렵다. 그 탓에 약이 정량보다 많이 나왔지만 그딴거 일일히 샐 여유 따윈 없다. 항생제와 진통제가 여러알 굴러나와 손바닥에 얹어지자, 일단 입 속에 털어넣고 물은 그 다음이다. 이번엔 물통의 입구를 입에 대고 조금씩 물과 약을 흘려넘긴다. 빈 속이었지만 어쩌겠는가. 약을 다 넘긴 나는 물통을 닫아 한 손에 들고, 남은 손으로 약병을 집어들었다. 아직 약기운이 돌기 전이었지만, 해도 지지 않았지만, 여길 나갈 생각이었다. 소파에서 다리를 내려 바닥을 딛고서 조금이라도 약기운이 돌기를 바라며 그에게 말한다.
"내가, 이대로 나가서 약쟁이가 되든, 약에 쩔어 어디서 뒤지든, 당신이 뭔 상관인데. 어? 댁이 내 남은 인생 책임져줄거야? 아니잖아? 그럼 좀 싸물어. 날 줏어온 시점에서 자기만족은 다했을거 아니냐고. 이제 뒤져도 최소한 댁 눈 앞에서 뒤지진 않을테니까, 그 엿 같은 주둥이 닫고 살던대로 살아. X 같은 오지랖 두번 부리지 말고, 댁이 그렇게 애끼시는 법 안에서 XX 안전하게 평생 살으시라고."
눈알을 굴리기만 해도 눈가가 뜨끈한 걸 보니 아마 실핏줄이 거하게 터져있겠지. 안 그래도 시뻘건 눈이 더 뻘개져서 그를 노려보고 있을 것이다. 밑바닥 아래의 나락에서 저 위를 원망하는, 그런 눈빛. 일어나며 깨물었던 입술은 그새 터져서 피가 맺혔다. 나는 손등으로 입술가를 슥 문지르고 자리에서 일어난다. 다리가 떨렸지만 어떻게든 설 수 있었고, 설 수 있다는 건 걸을 수도 있다는 의미다. 고작 일어선 것만으로 숨이 턱 끝까지 차올랐지만 숨은 천천히 고르면 된다. 날 덮고 있던 모포가 바닥으로 흘러내렸지만 다시 주워놓을 생각도 않은 채, 욱신거리는 다리를 다그쳐 걸음을 옮긴다.
"훌륭한 삶이죠. 만리타향에서 온몸 구석구석으로 모래가 들어오고, 그 모래먼지 뒤에는 내 목숨을 노리는 반군들이 득실거리고."
이런 삶을 부럽다고 말하는 경우는 많지는 않을 것이다. 정말로 그런 삶이 부러운 애국자거나, 그것마저도 가지지 않은 인물이거나, 아니면 순전히 비꼬는 경우거나. 지금은 뒤의 두개일 확률이 농후하다. 어쩌면 두번째겠지. 아무리 이런 세상이라지만 구급차도 부르지 못하고 골목길에 칼 맞고 쓰러져 있는 사람이 평범한 삶을 영위하고 있지는 않을테니까.
"이러니 저러니 해도 법이 절 보호해주고 있으면, 저도 법을 준수해야죠. 거기서 벗어난 사람의 삶은 저도 모르지만."
사실 그렇게까지 알고싶지 않은 주제이기도 하다. 무리를 하면서까지 일어나, 빈 속에 약을 복용하는게 아니라 그냥 들이키는 사람을 보며 이대로 뒀다가는 내가 우려한대로 정말 '약쟁이었던 것'으로 전락해버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살아도 산 게 아닌 그런 삶을 살다가 죽어가는 꼴이 되도록 놔둔다면, 내가 주워온 의미도 퇴색된다고 생각했다. 당장은 뭔가를 제공해주는 수 밖에.
"어차피 행보를 보면 남은 인생이 그렇게까지 길어 보이지도 않는데, 끝까지 책임 한번 져 보죠."
솔직히 그랬다. 세상에 적이 꽤 많아 보이는 인물인지라 언젠가 불가항력으로 살해당할지 모른다는 강한 직감이 뇌리에 꽂혔다. 물론 그런 상황을 막기 위해서 노력을 해보겠지만, 본인의 라이프스타일이 그러기를 원한다면 나로써는 해줄 도리가 없다. 다만 손 닿는 범위 안에서나마 그걸 방지하려 해보는수밖에. 부들대며 겨우겨우 걸어나가려 노력하는 사람을 응원해주기도 좀 뭐하므로, 그저 가만히 그녀를 들어올려 다시 소파에 눕힌다.
>>399 “정말? 난 우리 집이랑 물건들 견적 내는 것처럼 보였는데. 다시 오면 쏠거야.”
생강차가 담긴 찻잔을 양 손에 하나씩 들고서, 탁자 위에 올려놓는다. 하나는 자신 앞에, 하나는 자신의 맞은 편에. 피어오르는 연기 뒷편엔, 당신이 앉아있다. 그 모습을 보며 작게 미소짓고는 본인 몫의 찻잔을 들었다. 정말? 그냥 만나주는 게 좋았을까? 애처로움과 질문이 담긴 눈으로 당신을 바라본다.
“우리, 고등학생 때 기억나? 누나가 그랬잖아. 과한 다정함은 독이 된다고.”
그것은, 그 당시에는 어떤 다른 말보다도 잔인한 말이었다. 완곡하면서도 단호한 거절의 의사였기에. 생강차 한 모금으로 그 당시의 기억을 말끔히 넘겨버리고, 약지에 끼워진 결혼반지를 만지작거린다.
“그 때부터야. 내 삶이 중독되어버린건. 이젠 누나 없이는 숨을 쉴 수가 없어. 만약 내가 누나의 말대로 누군가를 만난다고 해도, 그건 그 사람에게 굉장히 실례되는 일일거야. 잊을거면 진작에 잊었어. 잊고싶다면 만나지 않았어.”
하지만, 지켜내지 못했다. ─아니, 지금 눈 앞에 있으니 방금 전 문장은 명백한 오류다. 미간이 지끈거린다. 생강향이 너무 짙다.
>>403 찻잔은 들지 않았어. 그저 눈 앞에서 차가 천천히 식어가는 과정을 지켜볼 수 밖에 없었지. 문득 이걸 한 모금만 마시면, 금방이라도 모든 게 원래대로 돌아올 것만 같은 느낌도 드네. 이제는 멀어져 영영 돌아오지 않을 작년, 재작년, 그리고 너와 처음 함께했던 그 해의 크리스마스도. 하지만 그런 기적을 바라기엔, 이미 우린 너무 많은 소원을 빌어버린 걸지도 몰라.
"언제 적 이야길 하는 거야.... 좀 잊어, 그런 건."
잊어야지. 전부 잊어 주지 않으면 곤란해. 나와의 추억, 같이 즐겁고 슬퍼했었던 그 모든 일들을 넌 천천히 하나둘씩 잊어 가야만 하는 거야. 그래야 네 앞에 길이 열릴 테니까.
"...."
정말, 어쩌다 이렇게 된 걸까. 난 바로 네 앞에 앉아 있지만, 사실 아주 멀리 있어서 뺨에 손을 대주는 것도 해 줄 수 없어. 귀여운 강아지처럼 내 옆에서 우쭐대던 니 얼굴을 찐빵 만지는 듯이 마구 주물러 대는 것도 꽤 즐거웠었는데. 그 때 생각을 하니, 괜히 아릿하면서도 가슴이 저려 와.
그가 과거 무슨 일을 했건, 어쩌다 모래먼지 속에서 반군들과 싸웠건, 하나도 관심 없다. 잘난 법에 보호 받으며 사는 인간 따위, 나와는 인연이 없을게 분명했다. 어쩌다 지금처럼 엮여도 결국 스쳐가는 헤프닝으로 금방 잊혀질 거다. 나만이 오늘을 끝없이 저주하고 원망하며 차가운 길바닥 어딘가에서 소리없이 스러져가겠지. 그게 그와 나의 사는 길일 것이다. 여기서 나가기만 하면, 더는 엮일 일도 없을거라고 생각했다.
"개소리 지껄이지 마. 난 나갈 거ㅇ-!?"
끝까지 거슬리는 소리만 해대는 그를 뒤로 하고 나는 그 집에서 나가려고 했다. 간신히 돌기 시작한 약기운 덕분에 제대로 걸음을 떼려고 했으나, 내 몸은 너무나도 쉽게 소파 위로 되돌려졌다. 애써 일어나서 자세를 잡은게 전부 허사가 됐다. 소파에 눕혀지자 곧장 몰려오는 피로감과 통증의 하모니는 적어도 몇시간은 다시 일어날 엄두도 못 낼 수준이다. 내 노력을 허망하게 무너뜨린 그를 노려보는 눈가가 문득 시큰해진다. 왜, 내 인생은 언제나 이 모양 이 꼴일까. 왜, 왜, 답 나오지 않는 자문자답이 머릿속을 메아리치고, 나는 손바닥에 손톱을 박을 듯이 주먹을 쥐며 히스테릭하게 소리를 질렀다.
"뭐냐고 XX! 이 X이고 저 X놈이고 지들 맘대로 날 주웠다 버렸다! 책임을 져? 당신도 뻔하지, 질리면 내다 버릴 거잖아! 당신이라고 다를 거 같아? 인간 다 똑같아! XX! 아무도, 아무도 날 버리지 않은 XX가 없는데! XX!"
태연하게 배부터 채우자는 그를 향해 애꿎은 화를 쏟아낸다. 아주 애먼 화는 아니지만, 그래도 과한 건 맞다. 그런 말들을 하면 그가 마음을 바꿀 지도 모른다. 그래도 이 순간만큼은 그래도 상관 없다는 기분이었다. 어차피 버림 받을거, 지금이 됐든 나중이 됐든, 결과는 같을테니. XX! 겨우 나아진 목을 다시 찢을 기세로 소리를 지른 나는 몸을 옆으로 돌려 웅크렸다. 가쁜 숨과 통증으로 몸을 부들거리면서도, 팔과 손으로 머리와 얼굴을 감싸며 웅크리고서 단 한마디, 그렇게 내뱉었다.
"안 보일 때 알아서 기어나갈거니까, 내버려 둬."
그리고 나는 눈을 감았다. 약은 먹을만치 먹었으니, 잠으로 체력을 보충하고 밤이 되면 기회를 노려 나갈 것이다. 더는, 어떤 기대도 희망도 갖고 싶지 않았다. 누군가를 믿는 일 따윈 하고 싶지 않았다.
도대체 이 사람이 무엇을 겪었길래 이러는 것인지 모르겠지만, 아마 상처가 많겠지. 평소 자주 찾는 정신과 의사 선생님을 소개해줘야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마, 자기 손으로 다 없애버렸다는 그치들이 자신을 버렸고, 그래서 싸움이라도 일어난거겠지. 마치 영화같은 이야기지만, 다른 곳에서 영화의 시놉시스로나 나올만한 일이 이 거리에선 논픽션으로 벌어지고 있다. 슬픈 세상이다. 나도 한때는 그 세상의 슬픔에 휩싸여, 빠져나갈 구석조차 없었고.
단순한 친절이라고 하기엔 확실히, 지금의 나는 과도하다고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과거의 충격적인 경험 때문에 죄책감을 이기지 못할까봐 스스로를 몰아세우는 것이라는 자각 정도는 있다. 그러나 자각하는 것과 죄책감을 이겨내는 것은 별개의 문제이다. 거기다가, 나는 이미 이것과 비슷한 일의 대상자가 된 적이 있다. 물론 칼을 맞거나 약에 쩔거나 그런 것은 아니었지만,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을 것이다. 그 어디도 날 받아줄 데가 없으며, 세상에는 내 자리가 없다고만 생각했었다.
"...페퍼로니를 싫어하지 않았으면 좋겠군요."
마음을 다친 인간에겐 의외로 원시적인 방법이 통했다. 나도 그랬으니까. 그리고 아마 지금 그녀도 상당히 시장할 것이다. 부상을 회복하느라 체력을 소진한데다 공복인데, 사람이 어떻게 힘이 나겠는가. 잠깐 전화로 음식을 주문한 뒤에, 다시 이 딱한 짐승과 같은 사람의 곁으로 와 웅크린 어깨에 모포를 덮어 주었다.
"생전 처음으로 믿을 구석이 생긴다는건 생각보다 많이 두려운 일이죠."
니가 뭘 아느냐고 묻는다면, 나 또한 그랬기에 누구보다 잘 안다고 당당하게 대답해 줄 수 있다. 한때는 정말 모든 것에서 버려졌으니까. 심지어는 내가 목숨을 바친 조국에게조차. 그런 때에 나를 구원한 사람이 한 명 있었다. 지금의 내가 그 사람처럼 훌륭하게 해내고 있는지 어떤지는 확신할 수 없다. 하지만 내 인생에서 더할나위 없던 그녀가 아니었다면... 나는 이 사람을 구하긴 커녕, 마주칠 일 조차 없었을 것이다.
모짐을 넘어 무례한 소리까지 퍼부었는데도, 그는 나를 내쫓지 않았다. 전의 조직에선 반항할라치면 당장 배부터 걷어차이고 독방에 갇히기 일쑤였는데, 그는 온갖 욕지거리에 애꿎은 소리를 들었는데도 내게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다가와 내가 바닥으로 떨어뜨렸던 모포를 다시 덮어주었다. 페퍼로니를 싫어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며 평온하게 말을 걸어온다. 나는 얼굴을 가린 채로 눈을 떴다가, 모포를 끌어 머리 끝까지 뒤집어 썼다. 얄팍한 한겹 너머로 떨리는 숨을 내쉬었다.
"닥치고 내버려 둬. 당신 따위 믿을 일 없어."
믿어서 다시 버려지는 기분을 느끼는 건 이제 더는 겪고 싶지 않다. 더는, 생에 무엇도 기대하고 싶지 않았다. 내 절망은 언제나 믿음으로부터 시작되었으니, 죽지 못한 지금, 같은 실수를 반복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설령 그는 이전까지와 다른 사람이라 할 지라도, 정말로 내게 구원을 줄 수 있을지도 모르는 사람이라 해도, 언제 잃을지 모를 것에 전전긍긍하며 사는 건 사양이다. 죽지 못 한 지금의 나는 그저 지쳤을 뿐이었다.
"처음이었다면..."
어쩌면, 그가 내 믿음의 시작이었다면, 이렇게까지 부정적이지 않을 수도 있지 않았을까. 부질없는 가정은 헛된 날숨과 함께 흩어진다. 나조차도 겨우 들릴만치 나오던 중얼거림은 숨결에 섞여 끝을 흐린다. 다 부질없다. 무엇을 생각하든 전부 의미없고, 쓸모없으며, 헛된 것들이다. 뿌리 없는 내가 이만치 살아온 것 자체가 기적이었으니. 이 이상 바랄 자격 따위 내게 없다. 그래, 내겐 자격이 없지...
깨지지 않는 알껍질 속에서 썩어가듯이 생각에 생각을 거듭하던 나는 어느샌가 잠이 들었다. 낫지 않은 몸으로 무리하게 움직이고 약까지 잔뜩 집어넣었으니 여태 깨어있던게 용하다. 그러나 과도한 약의 영향인지, 아니면 이대로 잠들어 스스로 숨을 거둘 셈인지, 해가 지고 달이 떠 시간이 한밤중이 되어도, 내가 깨어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중간에 그가 깨우는 일이 없다면 더욱 그랬겠지.
>>404 언제까지고 같이할 거라고 맹세했다. 그 맹세는 서로가 서로의 입에 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원래부터 그렇게 정해져있던 것처럼, 너무나 당연한 나날들이 계속될 거라고 믿었던 과거의 자신은 한결 같았다. 문득, 고갤 들어 좌측의 거울을 바라본다. 퀭한 인상의 자신. 비춰지지 않는 당신. 분명 고개를 돌리면, 그 자리에 있음에도.
“왜, 부끄러워? 좀 더 재밌는 이야기들도 많은데. 예를 들어, 우리 여름방학 때 계곡에 놀러갔을 때 같은. 펜션 아주머니가 그랬잖아. 신혼부부 같다고. 그래서 난 누나보고 자기라고 불렀다가 한 대 얻어맞았고. 그때도 그랬지만, 누나는 항상 망설이고 있었지. 나는 언제든지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있었는데도.”
당신의 망설임이 어디서 나오는 지 안다. 당신은 자신에게 과분할 정도로 좋은 사람인데도, 본인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으니. 당시의 이야기를 하며 속에 담긴 것을 털어놓듯이 편하게 웃고는, 당신과 시선을 맞춘다. 당신이 만져주었으면 하는 바램의 표현. 어릴 적부터 고쳐지지 않은, 사소한 애교다.
>>400 그는 초콜릿을 먹고 있었다. 다이어트 중이었지만 그 때문에 역으로 스트레스를 받고 있었다. 자신을 몰아붙일수록 초콜릿에 대한 갈증은 더욱 심해졌다. 될 대로 되라지, 뭐. 그는 초콜릿을 우둑우둑 씹으며 모든 것을 놓았다. 되는 일이 없어. 세상 따위 멸망했으면 좋겠다. 아냐. 나 하나 멸망하면 깨끗하게 끝나겠구나. 그는 간만하에 가벼운 우울을 앓으며 계속해서 초콜릿을 씹고, 뜯고, 삼켰다. 일련의 동작들은 혀끝에 감미로운 단맛을 발생시켰으나 그것은 끔찍하게 맛 없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는 초콜릿을 먹음으로써 일종의 자해를 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의 몸과 감각, 그리고 정신 모두에 말이다.
나름대로 기다렸는데도 아무 소식이 없군. 그의 이빨 끝에서 초콜릿이 부서졌다. 하긴 그럴만 했어. 개 항문낭에서 나온 분비물보다도 못한 글이었지. 이걸로 내 상황극 청춘도 명운이 다한 모양이지. 그는 자가 인지치료 책을 발가락 끝으로 밀쳐냈다. 그것은 부정적 사고를 긍정적으로 바꾸어 준다며 정평이 난 책이었다. 그는 이 책을 읽겠다고 마치 칭찬을 바라는 애송이처럼 동네방네 떠들어댔고 그를 아는 모두는 그가 나아질 것이라는 거짓된 기대감을 갖게 된 차였다. 그게 바로 요즘 내가 저지른 가장 쓰레기같은 일이었지. 이제 모두 상관없어. 망해버려라! 그는 잔 대신 휴대폰을 높이 들어 끝난지 한참 된 제 청춘에게 마지막 인사 겸 건배 겸 들리지 않는 장송곡의 연주를 했다. 잘 가라! 이제는 더이상 구질구질하게 굴지 않을 수 있기를!
처음이었다면. 참 복잡한 한 마디 말로, 지금 내 소파 위에서 모포를 뒤집어쓴 한 명의 상처가 어떤 종류인지 알 수 있게 된거같다. 그 정도나 정확하게 어디인지는 잘 모르지만, 어떤 종류인지만 알아도 처치가 비교적 쉬워진다. 내가 간밤에 응급처치한 상처처럼 말이다.
"저도 그 마음을 모르는것도 아닙니다. 국가에게 배신당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남 이야기가 아니었으니까요."
국가, 국민... 뭐 그 외에 이것저것. 그들을 위해 손을 더럽히고 몸을 혹사시키는 대가로 더 나은 삶을 기대해볼 수 있었다. 서로가 믿어야만 했던 체계에서 내가 얻은 것이라고는 멸시와 함구 뿐이었다. 내 권리와 믿음을 지키려 발버둥치고, 또 나를 도와준 이들이 없었다면 지금 나는 이 사람은 커녕 자기 자신도 구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배신당한 뒤에 손을 내미는 사람이 꼭 사기꾼이라는 법도 없더라고요."
당연한 이야기지만 그들이 영원히 나를 책임져줄리는 없다. 그러나 한 때의 인정으로, 상호간에 호의를 나누는 친구로써는 여전히 남아있다. 나는 그들을 위해 내가 도울 수 있는 일을 하려 하고, 그들은 나를 위해 애도해주기도 했다. 이상적인 일이다. 하지만 이상적이라 해서 절대로 일어나지 않는 일도 딱히 아니다.
배터리를 슬슬 갈 때가 되었는지 요상하게 왜곡된 도어벨 소리가 울렸다. 단골 피자집의 배달원이 친근한 얼굴로 문 앞에 서 있었다. 아주 먹음직스러운 일용할 양식과 함께. 나는 피자 값 밑에 팁을 얹어서 건넸고, 서로 좋은 하루가 되라며 인사를 나눴다.
"자, 신뢰니 배신이니 하는 복잡한 이야기는 나중에 하고, 우선은..."
피자 타임. 군침도는 향기가 잔뜩 풍기는 뜨끈한 페퍼로니 피자를 테이블 위에 얹었다. 아마 이 유혹을 이기는 사람은 최소한 잘 훈련된 특수부대원 정도일 것이다. 나도 이건 못 이기니까.
아이는 발 끝만 내려다보며 걸음을 떼었다. 발이 바닥에 닿고 떨어질 때 소리가 나지 않도록 주의하고, 인형이 걷는 것처럼 옷차림도 머리카락도 흐트러짐 없도록 움직임 하나 하나가 신중했다. 아이가 어느 정도 방 안으로 들어가면 안에 있던 하인들 또한 소리 없이 미닫이 문을 닫는다. 숨소리조차 낼 수 없는 방 안에서 아이는 옷자락을 끌어모으고 무릎 꿇어 앉는다. 줄곧 고개는 숙인 채 얼굴을 감추고 있었다. 겁에 질린 표정을 숨길 수 있을 것 같지 않았기 때문이다. 목소리에 떠는 티 숨기는 것이 최선이었다.
"...오늘부로 새로 하가의 신수님을 모시게 되었습니다."
하가의 신수는 성격이 고약하여, 영험하다 불리는 신수라면 응당 할 수 있다는 인두겁을 쓰지 않고 짐승의 모습으로 지낸다더라. 털 빗는 손길 하나라도 마음에 들지 않으면 단박에 목을 물어뜯어 죽어나간 이들이 수백을 웃돈다니, 눈이라도 마주치면 그 자리에서 콱 죽어버린다- 하는 소문이 전국에 유명하였다. 아이는 나라에서 제일 가는 하씨 가문에 속하게 되어서, 몸종일지 언정 열심히 노력하여 주인 어른을 모시는 좋은 하인이 되어보고자 했는데 어째서인지 신수를 뫼시게 되었다. 아이는 이곳에서 죽을지도 모른다 생각하면서도 하인으로서 최선을 다하겠노라 마음 먹었다.
"감히 빗질을 해드려도 불편하지 아니하실까요."
# 동양판타지라고 생각하고 썼고, 가문마다 모시는 신수가 있단 느낌이야. 신수가 강할수록 권위 높은 가문! 신수는 신비한 힘을 가진 덩치 커다랗고 영험한 동물 정도로 생각했어~
불법 카지노가 불법 카지노인데는 다 이유가 있다. 이를테면 윗선에서 딜러한테 자꾸 손기술 쓰라고 강요하고 있다던가. 다행히 남자의 손기술은 천재적이었기때문에 한 번도 걸린적은 없지만, 앞에서도 (아마) 칼을 겨누고 있고 뒤에서도 (이건 확실히) 칼을 겨누고 있는 상황에서 재주를 부려야 하는 상황을 좋아할 수는 없었다.
'난 그냥 정직하게 게임하고 싶단말야!'
하지만 불법 카지노인 이 곳에서는 이루어질 수 없는 바람이란걸 알고 있었기에 그냥 늘 그랬듯이 들키지않기만을 바라며 남자는 소매에 숨겨두었던 카드를 돌렸다. 실수는 없었으니 문제도 없을것이다. 아마.
땀방울이 지저분한 목줄기를 타고 흘러내린다. 채 묶여 올라가지 못 한 잔머리가 그 길로 따라붙었다. 꽤 기분 나쁜 찝찝함이다.
반파 직전의 폐허, 묵직하게 내려앉은 먼지층. 굳이 들어와 살피기에는 누가 보아도 적합하지 않은 곳. 그럼에도 굳이 이리로 발걸음을 옮긴 것은, 그만큼 무리에서 떨어져 잠깐 혼자 있기에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곳이라고 생각했으므로.
짊어지고 있던 무거운 배낭을 발치 아래에 아무렇게나 던져 놓으면 얼마나 묵었는지도 모를 먼지구름이 자욱하게 일어난다. 휙, 휙, 대충 손을 휘저어 그것을 흩어내고, 자신도 그나마 멀쩡해보이는 벽에 등을 기대곤 스르륵 미끄러져 주저앉았다. 옷이나 엉덩이가 더러워지는 것을 신경쓰지 않게 된 것은 이미 한참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까지 거쳐 온 길에는 깨끗한 물을 원하는 만큼 쓸 수 있는 곳도, 그럴 만 한 여유도 충분치 않았으니. 발걸음을 옮기는 중에 소낙비라도 오면 그나마 다행인 셈이었다. 그러면 차라리 몸에 내려앉은 티끌 정도는 가볍게 걷어낼 수 있었으니까.
아주 조금, 고단한 몸에게 휴식을 주고 나니 급작스럽게 잊고 있던 갈증이 밀려온다. 배낭을 뒤져 찾아낸 물병에는 아주 조금, 밑바닥을 겨우 적실 정도의 물방울밖에는 남아 있지 않았다. 몇 번이고 그것을 탈탈 털어 입술을 적셔 보려고는 해도ㅡ 버석거릴 정도로 말라버린 입술을 적시기에는 터무니없이 부족하기만 하고. 젠장, 더 감질나기만 한다. 텅, 터덩, 텅텅. 아무렇게나 내던져버린 500ml짜리 플라스틱 물병. 때 끼고, 구겨지고, 여기저기 칠이 벗겨진.
이런 생활은 언제까지 계속되어야 하는 걸까? 흘러나온 한숨과 함께 시선을 옮기며 눈을 감았다 뜬 그 사이로. 가방 안에 반쯤 구겨진 사진 한 장. 너는 죽었을까? 살았을까? 웃고 있을까, 울고 있을까. 나와 같은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을까?
지저분한 손 끝으로 구겨진 부분을 서투르게 매만져 펴댄 탓에, 웃고 있는 자신의 얼굴이 더럽혀지고 말았다. 쯧. 마뜩잖은 얼굴. 소매를 끌어다가 벅벅 문질러 닦아 보아도, 제 손과 다를 것 없이 꾀죄죄한 천조각으로는 깨끗하게 지워질 리 만무하다. 무엇도 마음대로 되지를 않는군. 신경질적인 손놀림과 천 스치는 소리는 곧 멈추고, 고개가 맥 없이 벽에 툭 기대는 소리만이 들릴 뿐이다.
아, 죽고 싶다.
부서진 천장 너머로 반짝이는 하늘은 눈이 부시도록 시린 푸른 색. 삶이라는 한 마디가 어쩌면 이렇게 아름다운 울림보다도 핏빛같은 잔혹함으로 다가오는지. 무슨 일이 있어도 살아라! 머리가 아프도록 귓가에 맴도는 스러진 자들의 단말마가 무색하게도, 살아남은 이들이 지금 무엇보다도 바라는 것은 차라리 죽음이었다.
ㅡ 무언가의 이유로 대부분이 죽고, 몇몇만이 살아남게 된 포스트 아포칼립스..... 라는 느낌..... ㅇ)-( 그게 좀비인지 전염병인지 핵 때문인지는 몰?루. 자유롭게 설정해도 OK! 나참치 머릿속에서는... 함께 다른 곳으로 이동하던 무리에서 잠시 떨어져 나와 휴식하고 있다. 그런 느낌입니다.
사람이었다가도 동물로 변한다. 체력이 동나든, 정신적으로 피곤하든 피로가 쌓이고 휴식이 필요해지면 동물로 변하고 만다. 푹 쉬면 다시 사람으로 돌아온다.
나는 이마를 빡빡 치고 싶었지만, 그게 여의치 않아 내 가방에 머리를 콩콩 박았다. 나는 참새다. 하필 참새다. 길거리에서 흔하게 볼 수 있으니 주변인에게 도움을 요청해봤자다. 길고양이에게 사냥당하지 않으면 다행이다. 오늘따라 좀 피곤하다 싶더라니, 하교하던 길에 결국 변하고 말았다. 조금만 더 가면 집이었는데! 욕하고 싶다. 해도 아무도 모른다. 짹짹. 내 가방과 옷가지 위에서 제발 누군가 알아봐주길 바랐다. 이 동네 아는 얼굴이라도 지나가면 좋겠는데. 아무리 소리쳐봤자 지저귀는 소리만 난다. 짹짹. 지겹다.
학교에서 발표에 걸리고, 계단에서 넘어지고, 이어폰을 놓고와서 등하교를 할 때 노래조차 못 듣는 사소한 불행들이 있는 이상한 날. 아, 젠장. 오늘은 진짜 뭐라도 마가 꼈나. 되는 일이 하나도 없네. 나는 괜히 길가의 돌멩이들을 발로 차면서 하교하기 시작했다. 무릎에는 반창고가 따끔거리는 상처를 가려주고 있었다. 그나저나 원래 세상이 이렇게 조용했었나. 이어폰 하나 없다고 세상이 이렇게 달라지던가.
...........라고 생각하던 그 때, 나는 듣고 보고 말았다. 짹짹거리는 참새의 소리를. 그것도 누군가의 가방과 옷가지 위에서.
".....하..?"
뭐야. 누가 길 한복판에서 옷을 벗어던지고 가방을 내팽개치기라도 한거야? 나는 나도 모르게 참새 쪽으로 다가갔다. 그런데 이 옷이랑 가방....우리 반 애 거 아니던가? 등하원 할 때 동네에서 가끔 마주치기도 하던?
"....너 혹시 이거 주인 어디갔는지 알아?"
옷가지와 가방을 살피다가 나는 나도 모르게 참새를 보며 물었다. 참새가 알 리가 없는데도 왠지 모르게 물었다. 오늘은 이상한 날이었으니까.
같은 반의 얼굴 알고 이름 모르는 아이. 다들 이상하게 보고 지나가기 여념 없는데 관심을 가져주다니, 복 받을 거라고 생각했다. 비록 내가 까치는 아니지만, 은혜 갚는데 참새가 중요하고 까치가 중요할 것 같진 않다. 나는 이것의 주인이 나라고 밝히기 위해 안간힘을 써야 했다. 부리로 가방 지퍼를 물어서 당겨 열고, 그 다음은 필통과 공책을 가방 밖으로 잡아 끌었다. 공책을 펼치는 것도 몇 장 물어 포로롱 날아오르며 넘겨야했고, 필통도 또 지퍼를 부리로 물어 당겨 열어야 했다. 컴싸 뚜껑을 여는 건 얼마나 어렵던지, 발로 펜을 움켜잡아 고정하되 부리로 뚜껑을 물어 당겨야했다. 나는 이 펜을 발로 움켜쥐고 날갯짓 파닥거리며 글씨를 적었다. 내가 이렇게 악필이 아닌데.
이상한 소리가 나도 모르게 마구 튀어나왔다. 아니, 당연하잖아. 참새가 내 질문을 듣더니 갑자기 부리로 가방 지퍼를 열고 필통과 공책을 꺼내기 시작하는데, 그걸 보고 누가 안 놀라겠어?
"야, 그거 함부로 꺼내면..!"
하지만 안된다고 말리기도 전에, 참새는 날아오르더니 공책을 넘겼다. 게다가 필통을 열고 컴싸 뚜껑까지 열었다. 참새한테 말을 거는 나도 이상하겠지만, 그걸 듣고 저렇게 사람처럼 반응하는 참새가 더 이상해..! 아, 내가 지금 꿈꾸고 있는건가? 그런건가..! 오늘 진짜 이상해..!!
"..........하.....?"
하지만 참새가 글을 쓴 순간, 모든 것이 멈춰버렸다. 아니, 정말로? 설마, 혹시나, 싶긴 했는데, 아니, 진짜로? 꼬부랑거리는 단 두글자를 읽고 그 뜻을 이해하는 데에도 억만년의 시간은 걸린 것 같다.
"....저주라도 걸린거야?"
어쩌다 이렇게 되었냐, 원래 참새였냐, 인간으로는 못 돌아가냐, 등등의 수만가지 질문을 뛰어넘고 참새, 아니지, 너에게 물었다. 이 나이 먹고 동화에 빠졌냐고 비웃어도 할말은 없었다. 어차피 오늘은 이상한 날이고, 참새가 되었다는 너도 이상하니, 나도 이상한 소녀 감성에 좀 빠져봐도 뭐 더 달라지겠어? ........달라지겠어?
자전거를 타고 학교를 형해 달리다가, 네 뒷통수가 보이자마자 그곳을 향해 던졌다. 상쾌하고 푸른 하늘 아래 아침 공기도 산뜻한데, 이 풍경에 있는 단 하나의 오졈을 조준한다. 체육복 든 가방인데, 이것에 맞든지 잡든지 그건 네 몫이다. 하늘에서 완벽한 포물선을 그리는 저걸 못 잡는 것도 재능이겠다. 나는 오늘 3교시 체육인 거 까먹었냐고 빈정대는 말 덧붙이는 것도 잊지 않았다. 옆집 산다는 이유로 지겹게 보는 사이인데 고등학교 올라오며 같은 반까지 되었고, 이제는 내가 아침 등교길에 심부름질까지 해야 한단 말인가? 이러니까 아줌마가 매일같이 날 딸 삼고 싶다하는 거다.
하복을 입고 가만히 수업만 해도 쪄 죽겠는데, 3교시 체육? 아침부터 페달을 열심히 밟아서 이미 체력을 다 써버렸기 때문에 분명 난 녹아버릴 것이다. 그러니 날 심부름꾼으로 쓴 저 녀석에게 아이스크림이라도 뜯어먹어야겠다. 나는 네 옆 즈음에 가까이 다가갈 때 자전거 속도를 줄이고 멈춰섰다. 네가 헛소리를 했기 때문이다. 누구는 누구 챙겨다주겠다고 체육복 들고 왔더니 학교를 안 가려고 했다는 말이 귀에 날아와 박혔다. 나는 최대한 욕설을 걸러낸다.
아이스크림 하나가 얼마나 한다고. 티끌 모아 태산이라고 여태 뜯어먹은 것들을 모아 가격을 계산하면 꽤 클 것 같기야 하지만, 이유없이 뜯어먹은 것도 아닌데 억울하다. 나는 콧방귀를 뀌고 아예 자전거에서 내렸다. 자전거를 끌고가기로 했다. 조금만 더 힘이 좋았다면 이 자전거를 번쩍 들어 정신차리고 헛소리 작작 하라고 이 녀석을 한 대 치기라도 할텐데, 그 정도 힘은 없어 다행이다.
"붙지마, 더워 멍청아."
나는 학교까지 끌고가야할 짐이 두개나 되었다. 하나는 자전거고, 하나는 이 녀석이다. 이 새끼라고 하려다 그간 봐온 정을 생각해 녀석으로 순화시켜줬다. 난 머리끄댕이를 잡을지, 귀를 잡아당길지, 목덜미를 붙잡을지 고민하다 소매를 붙잡기로 했다. 피한다면 어쩔 수 없이 머리끄댕이를 잡아야겠다.
자전거를 한손으로 끌려고 하니까 불편하기 짝이 없다. 그렇다고 이 녀석을 놓았다가는 오늘 등교하는 건 나 혼자일 것 같다. 이건 최소 아이스크림 두개 뜯어먹어야 한다. 아니다, 세개가 좋겠다. 잘난 척이 매우 재수없으니 세개 뜯어먹어야겠다. 가운데 손가락 곧게 펴고 싶으나 나는 잘 참아냈다.
"3년 동안 이래야 되냐, 나?"
안 그래도 빡센 대한민국 고등학생 라이프가 더 꼬이는 기분이다. 고3이 되어서도 이러진 않겠지. 아니, 이 새끼라면 정시로 간다고 할 것 같으니 고3 되고서도 그럴 것 같다. 아줌마에게 정말로 날 딸로 들이고 우리 집에 쟬 줘버리는 건 어떻겠냐고 진지하게 물어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당연하다. 옆집 살며 매번 보는 얼굴, 원하든 원치 않든 자주 보다보니 남들보다 더 많이 친한 사이인 만큼 우리 가족도 너를 안다. 나도 공부한다고 하고 있고, 낮은 성적은 아닌데 옆에 있는 놈이 하필 천재인 걸 어쩌라고. 얘한테 좀 배워보라는 잔소리는 귀에 딱지앉도록 들었다. 근데 어쩌나, 이 자식은 학교 쨀 생각만 하는데.
"그래그래, 내일 해가 서쪽에서 뜨지."
가볍게 비아냥거렸다. 이 말도 32번째 정도 한 것 같다. 나는 자전거 달라는 말에 선뜻 앞바구니에 있는 내 책가방을 들쳐메고 자전거를 넘겼다. 거절할 이유가 없다. 마음 같아서는 학교까지 태워달라 하고 싶은데, 이 녀석이 끄는 자전거가 학교로 향하지 않을 것 같아서 그러진 못했다.
뭐, 정말 적이라고 할 것도 없지만. 어릴 때부터 줄곧 봐왔으니까 이런 말도 쉽게 하고, 서스럼없이 대하면서 웃을 수 있는 거다. 그게 좋은 점이지. 가족들이 비교하는 건 좀 스트레스 받긴 하지만 그게 얘 잘못도 아니고. 그래도 학교에서는 내가 얘보다 훨씬 더 많이 예쁨 받는다. 난 모범생이니까.
"오키, 너 찍었다."
새끼손가락 들어보이면서 말하면 나도 새끼손가락을 갖다대고는 했다. 버릇으로 굳어서 남들은 약속이라며 새끼손가락 걸고 있을 때, 난 새끼손가락을 마주대고는 한다. 지금도 그렇게 새끼손가락끼리 마주닿았고, 바로 자전거 뒤 짐받이칸에 올라타 앉는다.
웃으면서 살짝 거리를 뒀다가 다시 돌아온다. 어차피 아무런 의미가 없는 말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저런 말 정도는 아무런 타격도 주지 않는다. 네가 내 새끼손가락에 자신의 것을 찍으며 자전거 뒷자리에 올라타자 나도 자전거 안장에 올라탔다. 예전부터 하도 많이 태우고 다녀서 그런지 무겁다는 느낌은 들지 않는다.
" 꽉 잡아. "
천천히 페달을 밟는다. 자전거는 조금씩 앞으로 나아가기 시작했고 페달의 저항이 많이 약해질때쯤 자전거는 빠르게 나아가고 있다. 뒷자리의 너를 흘끗 바라본 나는 페달을 빠르게 밟기 시작했다. 조금씩 빨라지는 자전거는 빠르게 학교로 향하고 있다.
" 아, 오늘도 같이 갈꺼지? "
예전엔 항상 같이 다녔는데 지금은 각자의 약속이 있어서 그런가 같이 가지 못하는 날도 있었다.
별 대수로운 소리를 하고 있단 듯 받아치고, 네가 자전거 안장에 올라타자 허리에 팔을 감아 붙잡는다. 꽉 잡으라는데 두 손으로 붙잡을 것까지 있겠나 싶다. 다른 한 손으로는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시간을 보니 지각하진 않겠다. 이내 자전거가 달려나가고 머리카락이 흔들린다. 남이 태워주는 자전거 개꿀.
"어- 나 오늘 뭐 있었던 거 같은데."
일정 정리를 제대로 안 해놓은 과거의 내 잘못이다. 카톡에 들어가 톡방들을 뒤져보는 수 밖에 없다. 공지나 연락이 와 있을테니까. 나는 한 손으로 톡톡 휴대폰을 뒤진다. 학교 쨀 궁리만 하는 누구와는 다르게 일이 많단 말이지. 학생회든 동아리든.
톡방을 확인해보니 학생회 쪽 일정이 오늘이었다. 공지에 적힌 걸 보아하니 기억난다. 오늘 회의는 학기마다 한 번 정기적으로 하는 전체 회의인데, 오히려 빠르게 끝난다고 들었던 것 같다. 각 반 반장들과 부반장들도 부르고, 학급 회의에서 나온 안건들을 정리한다고 했던 거 같은데... 학생회 하는 애들이 거의 다 반장, 부반장도 하고 있는데다 학급 회의 시간에 회의가 진행되는 경우도 적으니 겉치레 같은 느낌이다.
"생기부 빵빵하게 채워서 대학 가야지. 대학에선 떨어지자?"
설마 대학도 같은 곳 가겠어. 재수없는 자식, 얜 당연히 인서울할텐데 난 모르겠다.
"오늘은 금방 끝나."
학교 앞 자전거들이 늘어서 있는 자전거 보관대 옆에 내 자전거도 멈춘다. 나는 가볍게 뛰어내렸다. 체육하기 정말 싫게 날씨가 좋다. 왜 째고 싶다는지 알 것 같기도.
얜 지겹지도 않나, 무슨 그런 소리를 해. 반 갈리든 학교 떨어지든 옆집이라 주구장창 봤는데 헛소리도 그런 헛소리가 없다. 고등학교 3학년까지 같은 반이라니, 말이 되나. 그렇다고 막상 옆에 늘 있던 애 없으면 기분 이상할 것도 같긴 하다. 얘만큼 편한 친구 만들 수 있으려나.
"끝나면 전화함."
교문을 지나친다. 학교 째면 뭐하고 있을까 궁금하긴 하다. 집이랑 학교 둘 다 발칵 뒤집힐 걸 생각하면 제대로 놀지도 못 할 것 같은데.
"진짜? 오늘 점심 굶어야겠다."
농담이지만 아줌마 요리 엄청 맛있으니까. 어차피 저녁에 갈 거면 그냥 집 가서 씻고 옷만 갈아입은 다음에 바로 넘어가 있어도 되겠다. 얘 집이 우리 집이고 우리 집이 얘 집이지 뭐.
학교에서 제일 많이 하는 말이 졸리다, 오늘 급식 뭐냐, 집 가고 싶다 기타 등등이라 오늘 급식 메뉴가 무엇인지 알 리가 만무한 나다. 어차피 학교만 가면 칠판에 적혀 있든 학급 게시판에 붙어있든 애들이 떠드는 이야기 중에 들리든 하니까. 학교는 째려고 안달났으면서 급식 외우고 있는 이유가 뭔가 싶어 물어보기나 한다. 그냥 한 번 보면 외워진다고 하면 이번에야말로 기필코 내 가운데 손가락이 세상에 등장할 것이다.
"아오씨, 내가 알람이냐."
담임쌤이 출석 부를 때 좀 깨워보라고 하다가 이제는 포기했다는 걸 아는지 모르겠다. 어느새 도착한 반, 나도 자리에 가방을 걸고 앉는다. 아, 집 가고 싶다.
요즈음 초등학교에 가서 장래희망이 무엇이냐 물으면 열이면 열, 백이면 백 히어로라고 말한다고 합니다. 저도 작고 희망찬 어린 시절에는 그런 꿈을 꾸었지요. 제 초능력이 히어로가 되기에 볼품없다는 걸 깨닫기 전에는요. 결국은 작은 편집사에서 월급 받아먹고 사는 평범한 회사원이 되었습니다. 무슨 일을 하느냐면 잡일 담당입니다. 아직 입사한지 반년도 못 채운 신입이라서 그런걸까요? 제가 편집하고 디자인한 작업물을 보고 싶은데 무슨 아이디어를 내고 디자인을 해도 혼나기만 해요. 아차, 이야기가 샜네요. 아무쪼록 그런 평범한 회사원인 제게 지금 좀 큰일이 생긴 것 같아요.
"…살아계세요?"
집으로 가고 싶은데, 길에 뻗대고 누워있는 이 사람 때문에 못 가고 있습니다. 아무리 보아도 낯이 익은게 요새 뉴스에도 나오고 유튜브에도 나오는 유명인사 같습니다. 복장도 일반인이라면 절대 입지 않겠구나 싶은 것이 히어로 혹은 빌런인 것 같은데 어떡하면 좋을까요? 적당히 옆으로 밀고서 112를 부른 다음 저는 그냥 집으로 들어가버려도 괜찮을까요?
대답하는 목소리는 힘은 없었지만 침착했습니다. 뉴스나 유튜브를 자주 본다면 익히 알 법한 목소리와 복장이었습니다. 미스테리한 옛날 마법사 같은 긴 로브로 온몸을 가리고 가면까지 써서 얼굴을 가린 가장 비밀스러운 히어로. 최대한 목소리를 내지 않으며, 만약 목소리를 낸다 하더라도 일부러 중성적인 톤으로 내어 그 성별이나 정체마저 알 수 없는 히어로. 그것이 저였습니다.
"…저 좀 도와주실래요?"
세상에서는 절대 죽지않는 불사의 히어로니 뭐니 하며 떠들어대지만 그것은 반은 맞고 반은 틀렸습니다. 저는 이미 수없이 죽었고 수없이 살아났으니까요. 제가 가지고 있는 이 초능력 때문에요. 그러나 저는 저의 초능력마저 비밀로 숨겼기 때문에 그 사실을 아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로브 안에서 새는 피가 숨기지도 못하고 바닥에 웅덩이를 만들 정도의 치명타를 입어서 저 혼자서 움직이는 것은 불가능했습니다.
살고 있는 중이라는 대답에 힘이 없습니다. 맥아리 없는게 저는 휴대폰을 꺼내들었습니다. 112든 119든 불러야겠다고 생각합니다. 누구인지 기억하려는 한 편 머릿속은 피곤해하고 있습니다. 퇴근길에 재수가 없어도 이렇게 될 수가 있나 싶은 것입니다. 저는 한 때 히어로를 꿈 꿨을지언정 지금은 그저 평범하고 두드러지는 부분 하나 없는 소시민입니다. 평균 중에서도 평균이 제가 아닐까 싶어요. 그런 저에게 이런 이벤트가 있을 줄 알았겠나요? 이제야 검붉은 웅덩이가 보입니다. 피 비린내가 나요. 휴대폰을 떨어트리고 말았습니다.
"잠시만요, 곧 경찰이든 구급차든… 네?"
아무도 없는 곳에 데려가달라는 부탁을 받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사실은 지금 이 상황은 꿈일지도 모릅니다. 꿈이기를 바랐습니다. 저는 휴대폰을 줍기 위해 몸을 낮추었다가 그 말에 놀라서 당신을 바라봅니다. 얼굴 따위 보이지 않는 수수께끼의 복장. 이제야 불사의 히어로라는 기사 제목이 기억났습니다. 못나게도 저는 안심해버렸습니다. 불사라면 이 사람이 이만큼 핏웅덩이를 만들고도 죽지 않을 거라고 생각해버렸기 때문입니다. 히어로라고 한들 다친 사람을 앞에 두고 할 생각은 아닌 것 같아 금방 생각을 쫓아냅니다.
"…부축해드리면, 걸을 수 있나요?"
이곳에서 가까워 금방 이동할 수 있고, 아무도 없는 곳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제가 사는 집입니다. 저의 목적지. 저까지도 없어야 한다면 잠시 집 밖으로 나가있으면 되겠지요. 히어로가 시민의 집에서 무언가 할 것 같지도 않고요. 단지 지금 걱정되는 것은 핏자국입니다. 길에서부터 집까지 이어질 핏자국을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그리고 저 히어로가 입고 있는 피 묻은 옷. 피얼룩은 찬물에 손세탁해야하는데다 시간이 지날수록 잘 지워지지 않습니다.
저는 어차피 불사의 히어로. 이런 상처 정도야 혼자서도 극복해낼 수 있고, 그래야만 했습니다. 신고해주려는 그 선의는 고마웠지만 경찰이든 구급차든 제 초능력보다 큰 도움은 안될 것도 뻔히 알았습니다. 그래서 힘 없는 목소리를 쥐어짜내 대답했습니다. 꾸며낸 목소리마저 점점 원래대로 돌아올 것 같았습니다.
"걸을 수 있어요."
아마도였지만 가능은 할 것이었습니다. 그동안은 혼자서 어떻게든 아무도 없는 곳으로 기어가기도 했으니까요.
"피는 신경쓰지마세요. 제가 연락해서 지워달라고 할테니."
어쨌든 민간인에게 이런 피는 별로 좋은 광경은 아닐테니 잊을 수 있게 안심시켜주려고 했습니다. 히어로 본부에서 비밀스럽게 뒷정리를 담당하는 다른 히어로나 직원들에게 부탁하면 이런 핏자국 정도는 금방 지울 수 있으니까요. 옷 역시 본부에 말해서 새로 교체하면 그만이었습니다.
"어서 데려가주세요. 부탁드립니다…"
방금 전의 전투 때문일까요. 피곤했습니다. 지쳤습니다. 그래도 살아야 했습니다. 살아있어야 했습니다.
떨어트린 휴대폰을 집어들었습니다. 저는 휴대폰을 가방에 넣고, 마음의 준비를 했습니다. 책상머리 앞에 앉아있는 것이 일상 대부분을 차지하는 제게 크게 다친 사람을 무사히 부축할 수 있는 힘이 있느냐면, 그러길 바랐습니다. 히어로로 추정되는 이 사람의 팔을 들고서 전 그 아래로 위치합니다. 어깨동무 비슷한 자세입니다. 다만 저도 똑같이 어깨동무하듯이 어깨 위로 팔을 두르는 것이 아니라, 이 분의 등에 손을 받칩니다. 허리나 옆구리를 받치는 것이 맞지 않느냐면, 상처에 손이 닿을까 겁났습니다. 불사의 히어로라고 고통까지 없는 것은 아니겠지요.
"…독심술도 쓰세요?"
핏자국 생각하는 것을 들킨 것 같습니다. 말한 적 없는데 이게 무슨 일일까요? 이전에 생각했던 무례한 생각까지 들으셨을까 겁납니다. 다른 생각을 해야겠어요. 그래, 목적지 이야기를 해볼까요. 다행히 집은 정말 가까웠습니다. 나름 신축 오피스텔이라고 엘리베이터도 있으니, 3층까지 올라가는 길은 험난하지 않을 예정입니다. 전세 대출로 얻어 벌써 4개월 째 제 보금자리가 되어준 집은 여기서 2분 거리였습니다.
"조금만 참으세요."
이게 맞는지 아직도 모르겠습니다. 집에 가서 쉬고 싶었는데 이게 무슨 일인지 아직도 어안이 벙벙합니다. 하지만 다친 사람을 무시하기에는, 못 본 척 하기에는 그것도 찜찜합니다. 나는 숨을 흡 들이쉬며 일어납니다. 넘어지거나 쓰러지는 일 없이 무사히 집에 간다면, 당신을 겨우 현관에서만 살짝 안쪽으로 들여놓고 겨우 현관문을 닫을 것 같습니다.
이 낯선 사람이 어깨동무를 하듯 부축하자 힘 없는 제 몸이 그대로 따라갔습니다. 의외로 덩치가 작은 제 몸을 이 사람에게 들키게 되었지만 지금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다만 허리가 아닌 등에 손을 받쳐주는 배려는 썩 고마웠습니다. 이미 힘들게 일어서는 것만 해도 고통이 생생하게 느껴졌으니까요. 불사의 히어로라고 고통까지 없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민간인들에게 피는 무서운 거니까요."
고통을 참고 침착하게 대답했습니다. 당연한 것이었습니다. 히어로나 빌런이 아닌 이상 이런 피투성이 모습을 보는 것은 흔한 일이 아니었으니까요. 그러나 더이상 목소리를 내기에는 한계였습니다. 조금만 참으라는 말에 정신을 붙잡고 겨우 일어섰습니다. 그리고 한 걸음, 한 걸음, 힘들게 걸어나갔습니다. 그러나 도착한 곳은 의외로 신축 오피스텔이었습니다. 설마 이 사람의 집일까요? 어두운 숲 속이나 인적 드문 뒷골목 등을 예상한 저로서는 이 선의가 당황스러우면서도 지금은 어쩔 수 없음을 깨달았습니다.
"…초면에 이런 말하기 죄송하지만…"
닫힌 현관문에 털썩 기대앉으며 숨을 헐떡였습니다. 그리고 숨겨진 초능력을 발동시켜야 하나 고민하며 현관문 밖에 있을 그 사람에게 물었습니다.
"혹시 사람 죽여본 적 있어요?"
아님 사람이 죽은 걸 봤다거나. 목소리가 점점 작아졌습니다. 피가 너무 빠져나갔습니다. 따뜻하고 평화로운 평범한 사람의 집. 그리우면서도 낯선 공간 속에서 저는 피 묻은 저의 손을 내려다 보았습니다.
상냥한 히어로인 것 같습니다. 정의의 편이라는 히어로가 상냥하지 않을 수도 있는 것 아니겠나요. 아니면 직업 의식일까요? 저는 히어로일지라도 팀장님에게 상냥하고 싶지 않습니다. 초능력이 뛰어났더라도 히어로가 될 재목은 아니었을 것 같아요. 무엇보다 저렇게 생사를 오갈 것 같은 부상을 입고서 민간인이니 일반인이니 하며 신경쓸 자신이 없습니다.
"…네?"
이미 지쳐 있었습니다. 퇴근길이었으니까요. 이미 그랬던 제가 피 흥건한 사람을 마주하고, 그 사람을 집까지 부축해 데려왔다니 완벽히 한도 초과입니다. 이런 이벤트는 한 번이면 만족합니다. 아니, 없어도 괜찮습니다. 평범하고 지루한 나날을 하루라도 더 영위하는 것이 제 인생입니다. 가끔 월급날 갖고 싶었던 옷을 산다거나, 좀 값나가는 음식을 사먹거나 하는게 행복인 그저 그런 삶입니다. 특출나게 좋지도 나쁘지도 않습니다. 전 현관문을 닫고서 복도에 있습니다. 문 너머로 들린 말이 무얼 뜻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엘리베이터부터 문까지 핏길이 이어져있습니다. 저한테도 묻어 있을 수 밖에 없겠지요. 눈을 질끈 내려 감고, 현관문에 기대 무릎을 모으고 앉았습니다. 이웃이 나오면 무어라고 설명해야 하는지가 지금의 고민인 저에게 얼토당토 않는 질문입니다.
"그럴 리가 없잖아요…."
사람을 돕는 건 좋은 일인데, 기분이 썩 좋지는 않습니다. 상처는 제대로 보지도 못했고 핏자국과 그 냄새만으로도 이렇습니다. 독심술을 못 써서 다행입니다. 얼마나 혼자 두어야할 지 모르겠습니다.
힘 없는 웃음소리가 나왔습니다. 이제 정말 한계입니다. 선택을 해야 할 시간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미 답은 정해져 있었습니다. 이 이상 이 낯서고도 선한 사람의 평화로운 집을 이딴 피로 더럽힐 수 없었습니다. 일반인과 히어로의 차이는 그것이었습니다. 빛나보이는 히어로의 뒷면에는 빌런과 다름없는 피로 물들어 있다는 것. 저는 품 안에서 날카로운 단도를 꺼내들었습니다.
"안에서 무슨 소리가 들리더라도 절대 문을 열지 마세요. …끔찍한 기억을 심어줘서 미안해요."
저는 현관문 밖에 있을 당신에게 이 모든 일들에 대하여 사과했습니다. 힘을 다한 마지막 중얼거림은 중성적이었던 목소리 대신 원래의 목소리로 나왔습니다. 마지막이었습니다. 이 시간은 익숙하지만 언제나 두려웠습니다. 저는 떨리는 손으로 단도를 집어들고 그대로…
현관문 밖에 서있던 당신에게는 쿵 하고 쓰러지는 큰 소리가 들렸을 것이었습니다. 만약 당신이 제 말을 들어서 문을 열지 않았다면 잠시 후 안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렸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만약 당신이 제 말을 듣지 않아서 문을 열었다면 심장에 단도가 꽂혀있는 저를 발견했을 것 같습니다.
저는 처음 일았습니다. 너무 놀라면 목소리도 나오지 않고, 극도로 공포감에 휩싸이면 저지할 새도 없이 눈물이 나온다는 것을요. 드라마나 영화에서 극적인 효과를 위해 과장하는 줄 알았는데, 겪어보니 알겠습니다. 모두 진실이었어요. 쿵 하고 쓰러지는 소리가 들려서, 절대 문을 열지 말라고 했지만 열 수 밖에 없었습니다. 너무 아파서 쓰러진 것이면 어쩌나 싶었습니다. 오늘, 너무 많은 오지랖을 부렸습니다. 그 죄인 것이지요. 현관문을 다시 열고, 집으로 들어서지도 못 하고 주저 앉았습니다.
"아, 으………."
구역감이 솟구칩니다. 토를 할 것 같았어요. 아니, 필사적으로 참고 있습니다. 아까부터도 머리가 어지럽고 심장이 쿵쿵 뛰었는데, 지금 절정을 달했습니다. 한 번 최고점을 찍은 후에는 밑도 끝도 없이 곤두박질칩니다. 몸이 차갑게 굳는 것 같았습니다. 죽었을까요? 죽은 것일까요? 불사의 히어로가? 응급처치를 해야 하지 않을까요? 히어로로서 살아가는 것이 버거워 끝내고 싶었던걸까요? 민간인에게 피는 무서운 것이라며 신경써주었던 상냥한 사람이, 그 민간인의 집에서 이런 선택을 할 수 있을까요? 저는 이 사람이 이렇게 될 수 밖에 없었던 존재, 가령 빌런같은 자가 여기까지 뒤쫓아왔다고 생각했습니다. 그게 맞는 것 같았습니다. 세상에는 수많은 초능력이 있으니 불가능할 것은 없겠지요. 응급처치를 하려면 어떻게 해야할까요. 저곳은 분명 심장일 것입니다. 칼을 제거하고 지혈을 하면 될까요? 오히려 칼을 빼서 과다출혈이라던지, 아아. 얄팍한 지식들은 부정확하여 오히려 혼란을 야기합니다. 이제는 경찰이든 구급차든 불러야할 것 같습니다. 눈물로 얼룩져 뿌연 시야와 덜덜 떨리는 손이 말을 듣지 않습니다. 휴대폰을 가방에서 찾는 것은 이렇게나 어려운 일이었군요.
불사의 히어로. 세상에 알려지기로는 치유 초능력으로 그 어떤 상처들도 낫게 한 후 다시 싸운다는 의미로 그렇게 불리고는 했습니다. 그것도 반은 맞았습니다. 치유 초능력도 어느 정도는 있었으니까요. 하지만 저에게는 아무도 모르는, 숨겨진 다른 초능력이 하나 더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부활이었습니다. 목숨을 위협하는 치명상은 회복하는 데에 치유 초능력으로는 너무 오랜 시간이 걸렸습니다. 저는 히어로. 빌런들을 막기 위해 언제나 싸울 준비가 되어있어야 했습니다. 그러기 위해선 저는 늘 살아있어야 했고, 살기 위해서는 죽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오늘은 운이 좋았고, 운이 나빴음을 알아야 했습니다. 운이 좋은 것은 도움을 주려는 선한 당신을 만난 것이었고, 운이 나쁜 것도 도움을 주려는 선한 당신을 만난 것이었습니다. 칼에 찔리는 엄청난 고통 후 저는 쓰러졌습니다. 그리고 시야에는 어둠이 가득했습니다. 정신을 잃기 직전, 저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현관문을 연 당신이 울고 있는 모습을 본 것 같기도 했습니다. 쓰러진 저의 몸은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당신이 울면서 휴대폰을 찾고 있던 그 때, 갑자기 아름다운 불과도 같은 무언가가 제 심장에서부터 새어나와 순식간에 제 몸을 휘감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미동도 없던 저는 서서히 죽었던 몸을 일으켰습니다. 그러면서 로브가 아래로 스르륵 떨어졌습니다.
"…………"
순식간에 불길이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사라졌습니다. 아무도 모르던 불사의 히어로의 정체. 그것을 처음으로 드러내며 저는 황금색의 눈동자로 울고있는 당신을 마주보았습니다. 꿈이 아니었군요. 저의 착각이 아니었습니다.
"……미안해요. 잊어버려요."
저는 바닥에 고인 핏자국들과는 상관 없다는 것처럼 상처 하나 없이 깨끗해진 몸을 움직여 당신의 눈을 손으로 가려주었습니다. 저의 손에서는 아까와는 다르게 미약한 피 냄새조차도 나지 않았을 것 같습니다.
"……………미안해요."
다시 살아나자마자 한 말은 당신에게 전하는 사과였습니다. 선한 당신에게는 죽었던 저의 피를 묻히고서 이런 끔찍한 모습을 보게 될 죄는 없었는데. 어쩌면 이 순간만큼은 저는 히어로같은 이 사람에게 있어서 빌런일지도 몰랐습니다.
불길이라기에는 불꽃 같았습니다. 저는 그것이 빌런의 초능력인 줄로만 알고 놀라서 굳어버립니다. 불을 끄기 위해 필요한 것은 물 혹은 산소 차단일텐데, 저것이 빌런의 초능력이라면 그런 상식적인 방법으로는 끌 수 없을 수도 있습니다. 주저 앉아있어 발을 동동 구를 수도 없고, 저 불을 어떻게 해야한다고 생각하면서도 움직이지 못합니다. 굳어버린 몸이 꼭 남의 몸에 들어온 것도 같습니다. 그런데, 제가 움직이지 못하는 것이 단지 놀랐기 때문이라고만은 못 하겠습니다. 불꽃이 아름다워 보였다고 하면 다들 저에게 미쳤다고 하겠지요. 미쳤다고 한대도 위험하지 않아 보였습니다. 손을 뻗어 닿아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만큼요. 이상합니다. 빌런의 소행이라고 생각하여 겁에 질려있는데 불꽃에 닿고 싶단 생각을 할 수 있을까요?
"…살아계세요?"
놀라면 몸이 굳는다는 표현, 비단 몸 뿐만은 아닌 것 같습니다. 눈물도 놀라 떨어지다 멈춘 것 같습니다. 저는 당신이 움직였을 때, 불길이 사라졌을 때 더 이상 생각을 할 수 없었습니다. 사과를 받기보다는 안심하고 싶었습니다. 빌런이 없다든지, 당신은 살아있는게 맞다든지 하는 말로요. 심장을 찔리고 불탔다면, 그전에도 핏웅덩이를 만들만큼의 치명상을 입었다면 살아있지 않는 것이 정상일테니까요. 불사의 히어로라는 말을 이해합니다. 불사라는 것이 죽음을 피하는 것만이 아니라, 죽음을 맞이하더라도 없던 듯 되돌릴 수 있다는 뜻도 되나봅니다. 사람들은 모르겠지요. 사람들은 모를 것입니다. 그리고 저는 알았습니다. 얼마나 많은 죽음이 있었을지 생각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런 이유들로 저는 처음 물었던 말과 같은 것을 소리내고, 눈을 감았습니다. 의미는 없었습니다. 당신의 깨끗한 손이 눈을 가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저 제 손은 피투성이로 끈적거립니다.
당신은 몸이 굳어버린 것 같았습니다. 아니, 당신의 눈물마저도 멈춘 것 같았습니다. 당연합니다. 누구라도 죽었던 사람이 살아 움직인다면, 당연히 놀라서 굳어버리겠지요. 그러나 그 죽은 모습을 당신에게 보이기는 싫었습니다. 아니, 당신 뿐만이 아니라 그 누구에게도 보이기 싫었습니다. 히어로로서 결코 좋은 모습은 아니었으니까요. 히어로는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어야 하는 존재입니다. 결코 빌런에게 져서도 안 되고, 죽는 것은 더더욱 안 됩니다. 그래서 저는 언제나 혼자서 저를 죽였고, 혼자서 저를 살렸습니다. 그러나 오늘은 달랐습니다. 죽인 것은 저였지만, 저를 살린 것은…
"네, 살아있어요."
당신의 똑같은 질문에 대답하는 목소리는 상냥하고 부드러운 목소리였습니다. 일부러 내는 중성적인 목소리는 더 이상 없었습니다. 로브와 가면마저 떨어진 상황에서 목소리 따위는 더 이상 비밀이 될 수 없겠지요.
"당신 덕분에요."
당신은 죽어가는 저를 도와주려 했고, 아무도 없는 곳에 버리고 갈 수도 있었음에도 저를 당신의 집까지 데려다주었습니다. 그리고 현관문을 열어 죽은 저를 보며 울어주기까지 했습니다. 그런 선의를 가진 당신은 분명 저보다도 더 히어로에 걸맞은 사람이겠지요.
"미안해요. 그리고 고마워요. 더이상 위험하거나 무서운 일은 없을테니 안심하세요. 핏자국들도 제가 연락해서 금방 지워드릴테니까요. 원하신다면 당신의 기억도요."
당신의 눈을 가렸던 손을 천천히 내렸습니다. 그리고 피투성이로 끈적이는 당신의 손을 잡아주었습니다. 깨끗한 손에 다시 피가 묻었지만 상관 없었습니다. 제 정체를 들키게 된 불안보다도 당신을 우선 안심시켜주고 싶었습니다.
전쟁은 모든 것을 황폐하게 만들기 마련이었다. 제 아무리 생명이 가득한 땅이라고 하더라도 이내 죽음의 향이 섞여있는 삭막한 분위기로 바뀌기 마련이었고 평화로운 분위기가 가득했던 마을은 당장 내일의 목숨이 어떻게 될 지 알 수 없어 살벌한 분위기로 바뀌기 마련이었다. 빛의 힘을 다룰 수 있는 종족인 인간족과 어둠의 힘을 다룰 수 있는 종족인 마족은 정말로 사소한 싸움을 시작으로 이제는 살벌하게 전쟁을 치르고 있었다. 허나 전쟁이 길어지면 그에 회의를 느끼고, 왜 전쟁을 해야 하는지 의문을 품는 이들이 하나둘씩 생겨나는 법이었다. 그 분위기를 온전히 무시할 순 없었으며 처음엔 자존심을 위해서 싸우던 이들조차 회의감에 사로잡히면 평화를 위해 협상을 하기 마련이었다.
마족들이 살아가는 국가의 대표이자 마족 측의 가장 큰 제국을 이끄는 황제는 인간족들이 살아가는 국가의 대표와 중립지역에 만나 협상을 추진하고 있었다. 어느 한 쪽도 손해를 보지 않기 위해 정치적인 싸움을 하고 있었으나 적어도 두 측 모두 전쟁을 이 이상 진행하는 것에 대해서는 회의적이었기에 협상은 치열한 감은 있었으나 순조롭게 이어지고 있었다.
마족측 항제의 아들이자 황자는 마족들의 가장 큰 특징인 등에 달린 검은색 날개를 접고 중립지역에 만들어진 정원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렇게나 아름다운 생명들이 가득한 지역이 자신이 살고 있는 곳에도 있었건만, 전쟁이 시작되고 나서 확연하게 줄어들었고 그 때문인지 정원을 바라보는 황자의 눈빛이 아련함으로 가득했다. 그들 역시 파멸을 바라는 것이 아니라 그저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서 살아가는 또 하나의 종족이었기에 생명을 바라보는 눈빛은 다른 종족과 크게 다를 것이 없었다.
조용하고 평화로운 분위기 속에서 발소리가 조용히 들려왔다. 이름 모를 작은 꽃을 구경하던 사내의 눈빛이 소리가 나는 곳으로 향했다. 무슨 소리인가 싶어 바라보는 눈빛에 기품이 가득 쌓여있었고 적대감은 그다지 느껴지지 않았다. 물론 누군가가 자신을 몰래 해치기 위해서 온 이라면 그 눈빛에 살벌함과 살기가 가득하겠으나 아직은 확인단계였기에 그런 살기를 보일 필요가 없었다.
싸움이 금지되어있는 중립지대에 자신처럼 인간족의 대표를 따라서 온 이가 있는지, 아니면 자신 측에서 데리고 온 호위일지, 그것도 아니면 전혀 예상하지 못한 존재일지. 어느쪽이건 평화로움 속에서 담소 대상은 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하며 그는 상대가 모습을 나타내는 것을 가만히 기다렸다.
/갑자기 자객을 보냈습니다! 같은 것이나 꿈이니까 일어나! 류의 맥브레이커만 아니면 오케이!
>>454 늦어서 미안. 답레를 어떻게 이어야할 지 모르겠어서… 참치가 준 답레가 문제라는게 아니라 이쪽의 평범한 직장인 캐릭터가 어떤지 잘 상상이 안 가. 안심해서 눈물 흘리고, 기억 지워달라고 할 것 같다고 대략적인 큰 행동만 상상해둔 채 세세하게 감정선이라든지의 묘사가 어렵네. 돌리는 동안 즐거웠어서 꼭 이어주고 싶었는데… 다시 한 번 미안해.
스승님, 스승님. 어디로 가는 거야? (가방을 고쳐메며 한달음에 옆으로 쫓아와 붙는다. 가방은 척 보기에도 제 몸집보다 커다랗고 잡동사니가 많이 들어있겠구나 감이 오는 모양이다. 걸음마다 잘그락 달그릭 거리는 소리도 튕긴다.) 바다를 볼 수 있는 곳이면 좋겠다~. (태평하고도 나른하여 기대감이 드러난다.)
>>458 아직은 제자가 아니라니까, 애송아.(대조적으로 짐이라곤 없고 옷도 한량처럼 널널하게 입고 있다. 성가셔하는 투로 대꾸하면서도 노곤한 표정을 잠시 흐뭇한 미소가 덮고,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어준다.) 정식 절차를 밟기 전까지는 일단, 어디서 대뜸 스승님이라고 부르지 좀 마라, 참... 짐은 그렇게 이고서 용케도 서 있구나. 목적지는, 아마... 바다가 있던가...(턱을 쓰다듬으며 말끝을 흐린다.)
>>459 스승님 말고 달리 부를만한 것도 없잖아. (투덜거리며 오리부리마냥 입술을 쭉 내밀었으나, 가벼운 쓰다듬에 간지러워하는 성 싶더니 곧잘 말간 미소를 지었다.) 그럼 작게 부를게. (가방을 고쳐메듯이 한 번 통통 어깨를 뛴다. 이 정도 쯤이야 가뿐하다는 퍼포먼스였다. 이내 목덕지에 바다가 있는지에 대한 고민을 하듯 하기에 기대어려 바라보나, 말끝을 흐리기에 체념한 듯 불퉁히 말한다.) 좋아, 가는 곳에 바다가 없어도 돼. 그럼 가는 길에 바다는 있어?
>>461 아니, 뭐, 대장님이라던가, 주인님이라던가... 그냥 스승님이 낫겠군.(빠른 단념의 지혜를 제자에게 보여주고는, 잠시 얼굴을 찡그리고 생각하다가 대답한다.) 아마도, 가는 길에야 있을걸. 아니, 한 지평선 근처에 파란색이 걸리는 정도까지는 가까이 가겠지. 일부러 해안선을 우회하지 않는다면. (약간 짓궂은 표정으로 묵직한 제자의 배낭을 툭툭 친다. 아주 짧게나마 나타나는, 장난스레 골려주려는 듯한 눈빛은 거의 아이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니까 욘석아, 바다 보고 싶으면 짐이나 좀 덜어라! 그 상태로 빙 우회해서 걸으면 가다 퍼질 게 눈에 선하니.
>>461 아, 그럼 예비 스승님으로 하자! 줄여서 예스. 어때? (짓궂고 장난기 묻어나는 웃음 소리가 입 밖으로 나오진 못 하고 다시 삼켜지며 작게 울린다.) 일부러 해안선 우회하면 스승님 등에 매달릴거야. (가방을 툭툭 치니 살갑게 스승님, 스승님 하고 부르던 것 치고는 꽤나 매서운 눈길로 쳐다본다. 그래봤자 하룻강아지가 범 앞에서 이 드러내보는 것 정도는 할까.) 그렇게 걱정되면 스승님이 대신 들어주면 되잖아. 아니면 날 들어줘. 목마 태워줄래? (씨익 웃으며 이 드러내니 개구쟁이가 따로 없다.)
>>462 노우!(가볍지만 강한 거부의 의사.) 바다 보고 싶다면서, 그보다는 덜 걷는 게 더 좋으냐? 게으른 제자로구만.(씨익 웃으면서, 하지만 매서워진 표정에는 나름대로 주의 깊게 접근한다. 머쓱해져서 배낭을 건드린 손을 올려 그대로 뒷목을 긁적거리지만, 부드러운 눈길로 달래듯이 한다.) 아서라, 존경하는 스승의 목을 꺾어놓을 셈이냐? 열심히 걸으면 하루에 2시간 정도까지는 생각해 보마.(그러다가 이내 평소와 같은 노곤한 표정으로 돌아가버린다.) 아니, 역시 목마는 힘들겠구나.(너털웃음.)
>>463 (누가 간지럼 태운 듯 꺄르륵 웃음 소리 낸다. 맑은게 종소리라도 딸랑딸랑 울리는 것 같은 소리다. 노우! 하는 짧고 굵은 답이 우스운갑다.) 스승님은 짐 하나 없잖아. 내가 아무리 힘이 좋아도 그렇지. 맛있는 거 사준다고 하면 우회해도 안 매달릴게. (바다는 보고 싶지만, 일부러 돌아걷기는 싫다. 그렇다고 또 바다를 놓치자니 그건 더 싫다. 고민스러운 일이라 길 걷다 발에 채인 애꿎은 돌멩이를 걷어 차버린다. 멀리 가지도 못하고 길가로 데구르르 굴러 나자빠지는 돌멩이다.) 목마도 못 태워주는 스승님은 존경 안 해. (기대했더니만 그 기대한지 3초도 안 되어 풍비박산나버렸다.)
>>464 (눈을 감고, 감상하듯 웃음소리를 듯다가 미간이 살짝 찡그려지더니, 갑자기 한숨을 짧게 뱉는다.)미안하지만, 나도 덜 걷는 게 낫겠구나. 북부를 가로질러 가면 거리는 반토막나고 바다는 코빼기도 볼 일 없겠지. 목마 탈 만큼 힘들지도 않겠구나. 대신에...(차여 굴러다니는 돌맹이를 대수롭잖은 동작으로 슬쩍 집어든다.) 대륙 최대의 담수호를 끼고 돌 텐데, 바다 비슷하게 보이려면, 얼기 전에 도착해야 할 거다. 그러니까 빨리 재촉해서 기온 떨어지기 전까지 호수까지 열심히 걸으면, 나머지는 매일 다섯...(짧은 고민의 흔적이 얼굴을 확 스친다.) 음, 네 시간씩 목마를 태워 주마. 그리고... 기분이다! 맛있는 것도 사주고.(자상한 미소를 지어 보인다. 순진무구하게 느껴질 정도로 솔직한 표정이다. 그러나 문득 고개를 돌려 두 사람이 서 있는 위치의 바깥쪽을 내다보며, 순식간에 냉각된 표정이 되어 빠르게 주변을 시선으로 훑는다. 주워든 돌맹이는 빠르게 손아귀 안에서 주억거린다.)
>>465 게으른 스승님이로구만. (똑같은 말로 받아치는 당찬 목소리. 결국 바다는 고민할 이유도 없이 작별이다. 푸른 하늘과 푸른 바다가 맞닿아서 그 경계선이 흐릿한 모습이 보고 싶었는데, 어쩔 수 없는 노릇이다. 돌멩이를 집어드는 모습을 물끄럼 바라보다 담수호라는 단어에 눈을 빛낸다.) 스승님, 약속이야. 어기면 담수호에 빠트려 버릴거야. 얼음 스승님으로 만들테다. (담수호에, 매일 네 시간씩 목마 그리고 또 맛있는 것까지 걸렸는데 열심히 걷지 않을 이유 있을쏘냐. 입꼬리 귓가에 걸고 꾹꾹 걷는다. 힘찬 발걸음에 발자국이 좀 더 짙어진 것도 같고 걸음이 빨라진 것도 같다. 그러다 냉각된 표정을 보고 눈치 빠르게도 걸음을 다시 줄여 옆으로 돌아온다. 다만 대화는 능청맞게 이어간다.) 그래도 내가 봐줄게, 스승님. 목마는 세 시간으로.
>>466 피차 게으르니까 사제의 연이 닿은 거다. 서로 맞지 않는 놈들끼리 존경과 자애를 나눌 수 있을 것 같으냐?(농담을 지껄이며 천천히 걸음을 시작한다. 어쩐지 감당 못할 약속을 해버린 기분이 들어서인지, 아니면 감각을 보다 집중하기 위함인지, 걸음이 느릿느릿하다.) 호수가 얼어서 도착하면 어차피 국물도 없을 것을, 얼음 스승을 만들겠다는 건 약속을 지키던 말던 무조건 날 던지겠다는 말이겠구나. 이거, 꼼짝없이 애송이한테 당하겠는걸. 호수에 스승을 던질 생각이나 하고 말이지, 심보가 이렇게 되바라졌는데 내가 손을 댈 수도 없고 말이다.(이런 저런 말꼬리잡기들을 하며 돌맹이를 손아귀에서 굴린다. 제자가 눈치껏 말을 이어가는 기색을 보고 기특하게 쳐다보지만, 한편으로 꼬투리는 잊지 않고 잡는다.) 좋다, 세 시간! 말이라는 것은 주워담을 수 없는 법, 더도 말고 덜 수는 있는 세 시간으로 하자꾸나.
이건 어떠냐? 재미있는 것을 가르쳐줄 테니, 두시간 반으로... 흠흠.(준비가 끝났다는 것을 드러내듯이 날카로운 미소, 당연하지만 바깥쪽을 향해 있다.)
>>467 하긴 나 말고 누가 스승님을 스승님이라고 부르면서 쫓아다니겠어. 스승님 복 받았다~. (천천히 걷는 걸음에 발을 맞추었다. 보폭을 좁히고 속력을 줄이되 느긋한 걸음으로 보이도록 뒷통수에 두 손을 짚는다. 가방끈 붙잡고 걷던 손에 머리를 기대고서 느지막히 걸으니 한껏 여유로워 보인다.) 얼음 스승님이 싫으면 날 업고 해안선으로 우회하면 돼. 난 스승님을 쫓아갈 뿐이니까 선택은 스승님의 몫이야? (실실 웃으며 시답잖은 대화를 잇는다. 바깥쪽에 무언가 기척이 느껴지나 귀라도 쫑긋 세워보지만 아직은 잘 모르겠다. 냄새라도 나나 코 끝에 집중 해보도 하고, 눈을 굴리기에는 들킬 위험이 있으니 그러지 않는다.) 세 시간에서 더 더는거야?! 재밌으면 얼마나 재밌겠다고. 스승님 양심은 벌써 담수호에 빠졌구나…. (한숨 푹푹 내쉬며 고개를 설레설레 젓는다. 머리 뒤로 이고 있던 손을 내리고 다시 가방끈을 꼭 붙잡아맨다. 목소리를 낮추고 바라보는 표정이 익숙하단듯 싶다.) 스승님 화이팅~. (스승의 앞으로 빙 돌아 자리를 바꿔 안쪽으로 위치한다. 인질로 잡히는 일 없게 알아서 잘 처신하겠단 듯 퉁명한 목소리의 응원이 싱겁다.)
>>468 그래, 복 받았다 치자고. 그렇게 따지면 이 세상에서 가장 복 받은 사람은 내 은사였겠지만.(뻔뻔한 태도로 그렇게 주장하며 자신의 걸음걸이에 맞추는 제자의 정수리를 장난스레 쿡쿡 찌른다.) 그런데 이 복 받은 스승님이 이대로 가면 얼음 스승이 되고, 모로 가면 또 소금 스승이 될 판 아니냐? 참 복된 스승이다, 애송아.(나름대로 집중해서 기척을 찾아보는 모습을 흐뭇하게 내려다보면서, 돌멩이를 굴려대던 손은 돌연 멈춘다.) 재미있다니까? 고얀 녀석, 배우고 싶어서 스승님 스승님 하더니만 정말 가르쳐주려니 떡고물에나 관심이 있구나. 맛뵈기로 하나, 아까처럼 돌쪼가리라도 걷어차 봐.(자연스럽게 손을 펴고, 쥐고 있던 돌멩이를 그대로 바닥에 흘린다. 그게 바닥에 떨어진 순간에, 희미한 파열음과 어디에선가 들려오는 비명인지 모를 소리, 그리고, 스승은 더 이상 당신의 곁에 없다.)
>>469 스승님도 제자일 때가 있었어? (그야 물론 있었겠지만, 믿기지 않는단 듯이 두 눈을 땡그랗게 뜨고서 바라본다. 땡그랗게 뜨고 있던 눈은 곧 정수리 쿡쿡 찌르는 손에 가늘게 뜨여 또 불만스럽게 스승을 바라본다.) 얼음이랑 소금 중에 고를 수 있는게 어디야, 스승님. (덕을 베풀고 은혜를 베풀고 자비를 베풀었단듯 어울리지도 않는데 제 덕분인 줄 알란듯이 과시한다. 자리를 바꾸고서도 가방끈 메고 있는 어깨가 높이 솟아 아직도 그러고 있는 것 같다.) 스승님이 세 시간에서 더 덜려고 했잖아, 바보야? 목마 세 시간도 지켜달라고. (투덜거리다 이내 스승이 사라져버리자 지루한 표정을 짓는다. 비명 소리가 들려오니 귀 후비적거리며 소리가 들린 쪽을 바라본다.) 화이팅이 아니라 살살 하라고 할 걸 그랬어. (스승이 바닥에 흘린 돌멩이를 빤히 바라보다가, 걷어찰 지 말 지 고민하더니 이내 신발코 끝으로 톡 건들여본다.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니 조금 겁먹은 듯이 가방끈을 두 손으로 꽉 쥐고 눈을 힘주어 감았다.)
>>470 (용케도 데굴데굴 앞으로 굴러가는 돌멩이를, 어느 새인가 앞에 쪼그려앉아서 슬그머니 받아든다. 눈을 꼭 감은 꼴을 무심히 바라보다가, 돌연 소리를 지른다.) 왁!!
어떠냐? 놀랐는지 궁금한데.(씩 웃으며 일어나서 어께를 토닥여 보인다.) 미안하지만 사실 나는 네 스승이 아니란다. 싸우다 죽은 네 스승을 모습을 취했지만 내 진정한 정체는 바로 수백년 전 못된 제자에 의해 얼음장같은 겨울 호수에 내던져졌던 얼음스승귀신이란다.(뭐가 그리도 웃긴지, 한참 혼자 키득거리다가 피를 한 모금 뱉어낸다. 짜증스레 부연한다.) 개같은, 손 좀 쓰려고 할 때마다 혀 씹는 버릇은 고쳐지지를 않는구나. 이건 됐고, 소리를 들었겠지? 어떤 소리가 들리던? 애송아.(입꼬리가 내려간다. 사뭇 진지한 표정에, 귀를 기울이는지 눈은 살며시 감았다.)
/맥락상, 주고받던 대화의 다른 부분은 이 파트 다음에 이어져야 할 것 같아서 이번에는 뺐어.
>>471 흐악—! (스승이 제 앞에 와있을 줄은 상상도 못 했는지 깜짝 놀라서 심장을 부여 잡는다. 새된 비명소리 내었는데 당연히 놀라지 않았겠나, 놀랐는지 궁금하다며 어깨를 토닥이는 스승의 손길을 슬쩍 피해버린다.) 스승님 유치해. (키득거리는 모습을 재미없다는 듯이 쳐다본다. 어디까지 하나 보자고, 아예 팔짱까지 끼고있다가 피를 뱉는 모습에 놀란다.) 뭐야, 배에 구멍이라도 난 줄 알았네! (가방을 앞으로 돌려메고 급하게 뒤적거린다. 혀 깨문 것도 상처는 상처고, 피는 피니까 이 한짐 되는 가방 안에 치료가 가능한 것 하나 쯤은 있을 것이다. 워낙에 든게 많아 찾는데 한나절 걸릴 것 같아서 문제다.) 소리? 깨지는 소리랑 비명 소리, 혀 깨문 스승님이 분위기 잡는 소리. (무얼 하든 다친 것부터 어떻게 해두고서 해야할 것 아닌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어 빈정대는 말이 붙었다. 걱정해서 하는 말이 곱지가 못하다.)
>>472 나는 재밌거든? 아우.(헛웃음 흘리다가 잠깐 신음하고, 짜증스러운 동작으로 입가를 소매로 훔친다.) 뭐 꺼내지 마라, 가오 상하게. 상처같은 건 원래 침 좀 발라주면 낫는 법인데, 입안에는 항상 침이 있잖아.(괜히 심려를 끼친 것 같아 약간은 무안한 모양이다. 시덥잖은 소리를 하지만서도 한숨을 흘리며 손을 내저어 만류한다.) 팔 하나쯤 떨어져도 네 목마 정도야 매일 6시간은 거뜬한 몸이다. 이래저래 걱정은... 아니, 4시간 정도라고 하자. 아무튼, 걱정할 것 없다. 한겨울 호수에 날 던질 생각이나 하던 녀석이, 괜시리 소란 떨기는.(자존심 때문인지, 알게 모르게 슬슬 복부를 문질러대고 어딘가 불편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말이나 걸음걸이에는 티를 내지 않으려는지 반듯하고 힘이 들어가 있다.) 그보다, 상당히 많이도 들었군. 앞으로는 애송이라 부르기도 이상하겠구나. 이런저런 감각이 상당히 괜찮아서.
>>473 아우, 많이도 재밌겠다. (신음 소리를 따라하고 빈정대지만, 고개는 숙여 가방 안만 바라보는게 지금 뒤적거리고 있는 가방 속으로 빨려들어갈 것만 같다. 무게중심 놓치고 제 몸집만한 가방과 함께 구를 것도 같고.) 스승님, 스승님 가오는 이미 다 상했어. 그러다 혀 썩어서 자른다? (가방 속에 쑥 들어가 나오질 않고 뒤적거리고만 있던 팔이 무언갈 찾은 듯 드디어 빠져나온다. 제자의 손바닥보다 작은 유리병인데 얼핏 보면 잼같기도 하다. 닫힌 뚜껑 사이로 달큰한 내도 피어오르고, 색깔도 푹 고은 것 뿐인 잼의 색이다.) 이거 피 나는데 발라. (무척 맛없고 쓰고 떫고 맵다는 경고는 생략했다.) 말로는 6시간이 뭐야, 하루 종일도 해. 난 스승님 없고 마을이 보일 때까지 뛰어갈 수 있어. (허세 좀 그만 부리라고, 질린 표정을 짓는다. 그러면서도 불편해보이는 스승의 표정과 배 문질러대는 동작을 잡아낸다. 스승의 얼어붙은 표정 보고서도 눈치 빠르게 행동했었으니까.) 스승님, 한 물 갔구나…. 맞았어? 응, 이제 내가 스승님할게. 스승님이 애송이 해.
>>474 재미있어야 할 걸, 왜냐면 너는 아직 그 깊은 크레바스와 같은 두려움을 모르기 때문이야. 다 큰 어른이 한번 삐지면 얼마나 끔찍스러운지에 대한 두려움을 말이다.(에휴, 하고 균형을 잃을 정도로 가방 속에 파고드는 제자의 뒷덜미를 붙잡아 고정시켜준다.) 내 혀가 사라지면 말을 할 수 없으니 필담을 해야겠지. 매순 날려 쓴 기나긴 줄글을 읽어야 하는 것은 네가 될 테니, 나야 크게 문제될 것도 없는 것 같구나. 그러니 그 정체 모를 약은 좀 치우지 그러냐.(떨떠름한 표정으로, 그러나 성의만큼은 기쁘게 생각하며 가능한 한 살짝 새끼손가락에 찍어 입 속으로 가져간다. 어차피 부상은 구내가 아니라 사실 복부 내상이지만, 이제 와서 해명하는 건 더욱 체면 구기는 일이고...) 으, 이것때문에 혀가 썩겠다, 욘석아! 이 와중에 너는 스승 안위보다 몇시간 업히느냐가 그렇게 중요한가 보구나. 정 그렇다면야, 하루 종일이라도...(기껏 꼬이는 거수자도 족치는 겸 교육의 장으로 삼으려 했더니, 살짝 방심해서 완전히 꼬여버린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모든 가르침은 완전히 통제된 상황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라는 은사의 말이 새삼 생각난다. 차라리 목마 시간으로라도 스승의 위대함을 알려줄까 하는 유혹이 고개를 들지만, 도무지 각오가 노곤함을 넘을 수는 없다.) 해줄지, 말지, 흠.(그렇게 말끝을 흐리다가, 들려오는 마지막 말에는 신경질적이면서도 장난스럽게 쏘아붙인다.) 그래라, 이 영악한 녀석아! 어차피 정식 절차도 안 밟았으니 지금부터 네가 스승, 내가 제자 하자꾸나. 듣는 법도 다 모르는 애송이 자식이 참 잘도 날 가르칠 수 있겠다. 복부에 한대 얻어맞고 온 것 가지고 아주 유세는, 내 배 한대 까볼 수 있으면 배우자도 팔아먹을 놈들이 수두룩한 판에...(심각해보이지는 않는다. 그저 끊임없이, 하면 할수록 여러모로 더 없어보이게 툴툴거리고 있을 뿐.)
>>476 와아, 재밌다~! (목소리만큼은 들떠 설레는 감정을 담아내려 노력했지만 표정까지는 꾸미지 못 했다. 표정 변화 하나도 없이 재밌다고 말하니, 스승을 놀려먹으며 말장난칠 때가 더 즐거워보인다. 뒷덜미 붙잡혀도 놀라는 기색없이 가방을 뒤진다. 스승이라서인지, 자주 잡혀봐서인지.) 제자된 바, 어떻게 스승님이 손수 글을 적는데 내가 편하게 말로 답할 수 있겠어. 나도 열심히 적어줄게, 스승님. (스승만 편하게 두지 않겠다는 이 눈웃음, 걱정되어 잼 같은 약병을 찾아낸 것과 너무 반대된다.) 왜, 그거 효과 좋아. 안 썩어, 걱정마. 먹어도 되는 재료들로 만들어졌으니까 먹어도 돼. (혀가 썩겠다는 말에 활짝 웃으며 병의 뚜껑을 닫고 다시 가방 안에 쑥 집어넣는다. 약병을 챙길 때 이 약을 쓰게 되면 자신이 쓸 거라고 생각했고, 안 다칠 자신이 있어서 대충 가방 아래 넣어뒀던 사실이 떠올랐다. 다음부터는 가방 위에 넣어야겠다고 생각한다.) 스승님, 고민하면 가오 더 상해. 가오살게 해주겠다고 해야지. (하루 종일이라도 해주겠다 말할 것만 같길래 기대했다가, 역시 또 속아버렸단 듯이 지긋지긋한 표정을 짓는다. 장난스럽게 쏘아붙이기 시작하면 귀를 막았다. 손가락으로 귀를 막고 못들은체를 대놓고 한다. 군소리 지겨워 못 살겠다고 얼굴에 써붙여 놓은 것 같더니, '복부에 한대 얻어맞고 온 것 가지고' 라고 말하면 다시 눈 땡그랗게 떠 놀란 눈 되어 바라본다.) 진짜 맞았어?! 어디 맞았는데? (걱정 반, 장난 반이 섞인 호들갑이다. 손을 쭉 뻗어 스승의 배로 가져가 더듬어보려고 한다. 꾹 눌러 아픈 곳이 있다면 그곳이겠지.)
>>477 (그만 너털웃음을 터뜨려버리고 만다. 뻣뻣하고 어수룩한 테가 나는 것을 보면 역시, 아직 어린 녀석일 뿐이다. 겨우 이런 일로 삐진 어른이 되기에는 너무 아끼고 싶은 녀석이기도 하고.)좋은 접근이다. 덕분에 혹여나 나중에라도 네가 불구가 될 일이 생긴다면 더 정성을 쏟을 마음이 샘솟는구나. 왜냐하면, 아무리 생각해도 이 몸은 손가락 하나 결단날 일이 없을 것 같으니 말이다.(허세를 부리며 시원하게 웃는다. 하지만 조금도 의심이라고는 없는 자기확신은 스스로에게도 조금 놀랍다. 가장 확신을 가지고 대해야 할 녀석의 앞에 있기에 그런 것인지.) 하지만 마음은 상하는 법, 7시간! 더는 말하지 마라. 그저 '존경하는 스승님, 목마를 7시간 태워주고도 땀 한방울 나지 않는다니, 역시 대단하시옵니다.'라는 말을 준비해두...(복부로 뻗어오는 손길에 당황해 말이 멎는다. 살짝이라기에는 좀 과하게 뒤로 몸을 젖히면서 손을 부드럽게 털어내고는, 가소롭다는 것처럼 이마를 손가락으로 꾹 눌러주며 마저 말한다.)...면 된다. 오지랖은, 걷어차인 거라니까. 떨어져나간 사지가 하늘을 수놓는 일류들의 난전에서 겨우 발차기만 허용한 스승에게 감사하거라. 칼이라도 맞았으면 너는 빨간 스승을 8시간이고 9시간이고 끝없이 업어야 했을 테니까.(실제로 잠깐 사라졌던 동안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야, 본인 외에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들린 소리는 여러 명과의 싸움이 아니었던 게 확실하다.)
>>478 (스승의 웃음이 사그라들 때까지 지그시 바라보다가, 잠잠해지면 입을 열었다.) 스승님, 나 스승님 놀아주는 거 피곤해. (애 놀아주기 힘들다는 듯이 고개를 슬슬 좌로 우로 젓는다. 피곤한 기색이 묻어나는 건 아까와 같은 꾸민 목소리가 아니라 진실된 것 같다.) 아니, 정성을 쏟을 마음이 샘솟는게 아니라 '귀여운 우리 제자가 그럴 일 없게 지켜줘야겠구나!' 라고 생각해달라고…. 손가락 결단날 일 없으면 뭐해, 얻어맞고 다니는데. (아예 한심하다는 듯이 불퉁스러운 표정을 짓고 가방을 여몄다. 여며진 가방을 다시 뒤로 고쳐메고 어깨를 통 튕긴다. 제대로 메어진 듯 두손으로 가방 어깨끈을 붙잡는다.) 응, 지금 스승님한테서 썩은 내 나. 마음 많이 썩었나보다. 존경하는 스승님, 이 썩은 내부터 어떻게 해주시면 대단히 감사하겠 내 머리! (아픈 것도 아니면서 스승에게 이마를 꾹 누르니 엄살부린다. 과하게 반응하는 걸 보아서는 정말 한 대 얻어맞긴 했구나 확신하는데, 스승이 말하는 것을 들어보니 걷어차였다고 한다.) 스승님…. 얻어맞는 것도 아니고 차이고 다녀? 이러다 토끼한테도 발로 맞고 다니겠어……. (일류들의 난전이고 뭐고 하나도 믿지 않는 투다.)
>>479 인마!(손모양을 딱밤을 때리려는 듯 오므렸다가, 이내 머리 근처로 가서는 타격하는 대신 그냥 손을 다시 펴서 거칠게 쓰다듬고 만다.) 무례하기는, 새파랗게 어린 녀석 말동무 해주는 걸 고맙게 생각을 해야지. 그런 못된 마음을 먹고 있으니까, 애송아, 원하는 것을 못 받는 거다. 세상이라는 것이 항상 행한 만큼 돌아오는 법이니까... 그리고 누가 얻어맞았다고! 어쩌다 한번 난 일을 자꾸 강조할 테냐!(진저리를 치며 일어난다. 가진 짐이 없어서 헐렁한 옷 좀 여미면 그게 채비의 끝이다.) 정식으로 널 거둬들인 뒤에는, 언젠가 한번 투계 하는 시장판에라도 가 봐야겠구나. 닭한테 걷어차여보는 경험은 상당히 귀하지. 토끼보다는 말이다.(한숨을 흘리고, 노곤함과 의무감 사이에서 잠깐 저울질한다. 결과로 가뭄에 콩 나듯 일어나는 이변이 나온 것은, 오늘 있었던 일 때문일까.) 타라.(스스로의 목덜미를 가볍게 가리켜 보인다.)
>>480 아. 아! 여기 사람 잡— 안 잡네. (엄살에 호들갑에 난리를 치려다가, 딱밤 대신 쓰다듬는 손길에 겨워 머쓱하게 말을 마무리했다. 올라가던 목소리 크기가 민망하게 줄어들었다. 스승의 손이 쓰다듬고 지나간 자리를 매만진다. 헝클어진 감이 있지만 대충 손으로 얼기설기 넘기고 그만두었다.) 나처럼 착한 제자가 또 어디 있다고. 난 나중에 복받겠네. (진저리 치는 소리를 귀 후비적거리며 무시한다. 앞으로도 계속 강조하고 놀려먹고 되짚어주겠다는 의미로 받아들여도 괜찮겠다.) 응, 스승님이 닭한테 걷어차이는 걸 내가 어디서 또 보겠어. 난 좋아! (닭한테 걷어차이는 주체를 스승으로 들었다. 일부러 활짝 웃는 표정이 짓궂어서 영악하다는 스승의 평이 잘 맞아떨어진다.) 뭐? 스승님 진짜 아파? 배 차일 때 명치도 맞았어? (타라는 말에 반가워 화색을 띄우다가도 이 스승님이 무슨 속셈인가 싶어 의심한다. 그래도 목마 타고 싶어 가리킨 목덜미를 바라보다가 우물쭈물 망설인다. 가방이 한 짐이라 이걸 메고서 저기 올라타도 되는지 고민하는 듯 하다.)
>>481 착한 것이 어디 쉬운 일인 줄 아느냐? 너는 영특하기는 해도 선량하기에는 아직 멀었다. 그리고 앞으로도 힘들지 않겠느냐? 애송이 녀석 뒷바라지하려면 교양서라도 하나 사야겠구나.(특히나 귀 후비는 재스쳐를 더욱 뻔히 바라보면서 강조한다. 그래도 아직 어린아이니까 관심거리 따라 자연히 잊어버리겠거니 하고, 자기변호도 슬슬 그만두기로 한다.) 큰 투계장은 닭발에 칼날도 달아 두더라. 잘도 날 보고 그런 데 차이라고 말하는구나. 이거 정말, 스승을 잡을 재목인데.(그렇지만 약간 투덜거리는 것은 그만둘 수 없는지, 여느 때와 같이 노곤함에 붙들린 표정으로 돌아가서도 몇 마디 이어붙인다.) 그래도 투계가 보고 싶기는 한 모양이지. 호수가 좋을지, 바다가 좋을지, 시장이 좋을지는 차차 생각해 봐라.
걱정 떨치고 타라. 설령-.(이래저래 말꼬리 붙잡는 피곤한 이야기들이 입안에서 근질거리지만, 웬일로 말을 줄이고 묵묵히 목을 내준다.)
>>482 영특하기라도 한게 어디야. 스승님, 바라는게 많다. (그럼에도 교양서를 사지 말라고 하지 않는 걸 봐서는 스승이 가르친다면 배우겠고 읽으라고 한다면 책을 떼겠다. 짓궂게 장난치고 무시하는 듯 해도 쫓는 스승은 스승이기에.) 스승님은 나 차이라고 말했잖아. 제자 잡는 스승님이나 스승님 잡는 제자나 똑같거든? (닭한테 걷어차여보는 경험은 상당히 귀하다며 말한 주제가 제자였다면 이 말에 반박치 못할테고, 스승 본인이었다면 자신이 차여보겠다고 하는 이야기에 맞장구친 것뿐이니 한 소리 들을 이유가 없다. 당당한 표정 보라.) 호수는 가기로 했잖아! 바다 대신 호수 가는 거였잖아! 호수는 무조건 가야지! (말 바꾸지 말라는 듯 칭얼거린다. 곧 볼에 공기라도 채울 듯 하더니, 내준 목을 보고 눈 끔뻑거린다.) 스승님 목이 부러지지 않게 해주세요…. (조심조심 스승의 어깨에 다리 하나씩 걸며 자세를 잡아본다.)
>>483 새앙쥐가 저울 위에 올라가 자화자찬하며 부끄러움을 모르는구나. 너무 좋아하지만은 말거라. 멍청한 놈이 지나고 보면 제일 나을지도 모른단다. 조숙한 게 빨리 그릇이 찬다는 소리가 되기도 하거든.(모처럼 가라앉은 어투로 말하지만, 뒤로 갈 수록 결국에는 가벼워진다.) 욘석아, 나중에 그게 까발려지더라도 스승의 교수법을 탓하지는 말거라. 반대로 청출어람의 결과가 나온다면, 그것은 내가 잘 가르친 덕이고.(표정이 미묘해진다. 뻔뻔함과는 거리가 멀어 보인다. 일견 무책임한 태도가 엿보이는 것 같지만, 또 어쩌면, 나름대로 부담을 덜어내기를 바라는 노파심의 표현인지도 모르겠다. 워낙 가벼운 마음가짐으로 돌아다니고 있는지라, 제자 쪽이 부담을 느끼고 있는 것 같지는 않다고 생각했지만.) 뭐, 누가 닭에 차이는지는 모르는 일이지. 거기서 내가 닭을 살 수도 있고, 아는 사람을 만날지도 모르고, 누군가는 결국 차이게 될... 알았다고, 이 녀석아. 호수는 갈 거야. 어차피 그 근방에 용무가 있단 말이다. 겨울 바다처럼 포근하지는 않겠지만, 나름 묘미가 있을 거다.(이윽고 목에 다리가 걸쳐지자 양팔로 제자의 다리와 등허리를 잡아 고정시킨 채로 대뜸 벌떡 일어난다.) 30분! 이 망할 애송이 자식아, 7시간이라니, 내가 미쳤지. 대체 가방에 뭘 넣고 다니는 거냐? 은사님 제 죄가 큽니다. 내 목뼈를 노리는 영악한 녀섭을 허우대 멀쩡한 사람으로 만들어놔야만 한다니...(다시 투덜거리기 시작하면서도 꽤나 산뜻한 걸음으로, 걸어나가기 시작한다.)
>>484 찍찍. (새앙쥐라고 했으니 대답도 쥐 울음소리로 해주겠다는 건지, 말을 하지 않고 찍찍거리며 스승의 머리 위로 팔을 괸다. 고갯짓이라도 하여 흔들리면 가방 무게에 쏠려 뒤로 홰까닥 몸이 넘어갈 수도 있다. 하지만 그렇다는 것을 스승이 염두에 두고 있을거라고 믿고 있는지, 아니면 그런 생각을 못한건지 팔을 얹어도 스승이 별 말 않고 움직임 또한 없다면 턱까지 괴려 들었다.) 무엇이 되는 내 스승은 목마 하나 태우는데 말 백 마디 하던 스승이었다 말할게. (그런 것치고는 목마 타고 있는게 재미있는지, 발을 동동 흔든다. 왼발과 오른발이 교차로 흔들리는데 스승이 그 발을 탁 잡아 가만두게 힘을 주었다면 여러번 흔들지는 못 했을 것이다.) 닭 사면 잡아먹자. 맛있겠다~. (목마를 타고 위로 올라오니 땅에 서 있을 때보다 당연하게도 시야가 높고 넓었다. 조금 더 멀리까지 보이는 풍경 구경에 정신 팔렸는가 대답이 영 시원찮다.) 7시간이 30분 되면 너무 짧잖아. 빨리 호수로 가기나 해, 스승님. (정말 무거운가 싶기도 했지만 걷는 걸음걸이 산뜻하게 시원하니 그런 생각은 그만두었다.) 가방에 뭘 넣고 다니긴, 스승님 다치면 발라줄 약이랑 아프면 먹일 약만 한 바구니야. (아직까정 놀리고 있다.)
>>485 울음소리는 쥐와 같고, 높은 데 대뜸 자리 펴는 것은 새와 같고, 일관성이 없구나. 그래도 기왕 축생으로 내려가려거든 새가 낫겠다. 날개가 있으니 말이다.(약간 성가셔하면서도, 별 말 없이 고개를 살짝 앞으로 숙인다. 기왕 받아주기로 한 어리광이니까.) 그건 또 너무 평가가 후하겠구나. 다음 번에는 천 마디, 십만 마디는 칭얼거려야 내 마음이 다시 동할 것 같거든. 하지만 그쯤 말을 나누다 보면 네놈도 슬슬 혀 놀림이 무거워질 만큼 스승에 대한 존경심이 생겨나지 않겠느냐?(또 장난스레 딴지를 걸어 보지만, 목마에 탄 뒤부터 제자의 말이 짧아지는 것을 느끼고 허, 하고 웃음인지 탄성인지 모를 감상을 표한다.) 벌써 혀가 무거워졌구나. 수백 마디 언쟁이 목마 한 번에 견줄 수가 없겠어.(키득거리면서 제자의 다리를 꽉 붙잡고 시원시원하게 다리를 뻗는다. 끝까지 한 마디를 보태는 것은 잊지 않는다. 어린 녀석 달고 다녀서 얻는 유일한 낙이 그것이니까.) 그래, 호수로 가자꾸나. 이대로 물가에서 허리만 앞으로 숙이면 얼음 제자를 하나 건질 수 있겠지만, 그 무겁고 불충한 배낭만 빼고 말이다.(또 실없이 웃다가, 이내 말수가 줄어든다. 조용히 더욱 빠르게 걸음을 재촉하기 시작한다.)
>>486 그럼 스승님이 쥐해. 스승님도 찍찍 해보자, 찍찍. (스승의 머리 위로 몸을 기대고 있으니 제법 편한가보다. 살짝 고개 숙여주는 스승의 고갯짓에 작게 웃음 소리 내기도 한다.) 마음을 넓게 쓰고 겸손할 줄을 알아야지. 안 되겠다, 스승님도 나랑 교양서 같이 읽자. (다리가 붙잡혀서 더 동동 흔들지는 못 했지만 그래도 목마 타고 있는게 좋은지 불평불만하는 소리는 없다. 여지껏 그래왔듯이 스승과 말 꼬리를 잡고, 또 잡으며 속없기도 하고 실없기도 하지만 가끔은 뼈가 있는 대화가 오갈 뿐이다.) 그럼 목마 매일 태워줘. 나 키 안 크면 스승님 탓이야. (가방 무게에 제 몸 중심이 흔들릴 정도라면 키 안 큰다는 말이 농이 아닐지도 모르겠다.) 야—호—! (어린 아이 같아라. 호수로 간다는 말에 신난 기분이 더 보태져 나온 소리에 메아리 치지 않는게 아쉽다. 정말 30분만 태우고 내려주더라도, 6시간 30분은 앞으로 차차 나눠 타겠다고 말하고서 얌전히 걷겠지만 아쉬운 표정을 못 감출 것 같다. 담수호를 볼 생각하며 견뎌낼 지도 모르고.)
/ 이어줘서 고마웠어, 막레로 받아줘. 제자는 스승님이랑 즐거운 여행 보낼 거 같아. 스승님의 이야기가 궁금해서 물어보고 싶지만 곤란하면 무시해줘. 아무쪼록 돌리는 동안 재밌었어 :D
/나도 간만에 진짜 재밌었다, 죽이 잘 맞는 사제관계로 쭉 이어졌으면 좋겠어. 스승님은 뒷설정에 크게 자세한 살이 붙어있는 건 아닌데 뼈대만 추려 보면, 조금 답답하고 고지식한 집단에 속해 있다가 답답해서 아무 핑계나 대고 무기한 휴가 겸 여행나온, 그러다가 제자 하나 거둬서 계속 유랑다니는 자유분방한 스테레오타입, 일종의 사내정치라던지 불미스러운 일 같은 것도 있어서 돌아가기는 싫지만 제자를 정식으로 받으려면 돌아가서 절차를 치뤄야 하니까 고민하는 캐릭터라고 생각하고 썼어. 제자 쪽은 어떠려나? 무쟈게 귀여웠는데 ㅎㅎ 마찬가지로 곤란하면 답은 안해줘도 좋아.
>>488 재밌었다니 다행이야. 나도 제자가 어른이 될 때까지도 그 이후로도 사제관계로 길게 남으면 좋겠어, 언젠가 스승님이 제자도 누군가에게 스승 소리 듣는 거도 보고. 스승님의 이야기는 그런 느낌이었구나. 계속 절차같은 말이 나와서 길드 같은 곳에 소속 신고 같은 거를 해야하는 건가 상상했는데 얼추 맞았네. 제자는 모종의 이유로 보호자가 없는 상황 속에서 무턱대고 스승을 쫓아왔다고 생각했어. 스승이 제자를 어떻게 받아줬을지도 미지수고 제자도 뒷설정이 없지만 나이와 덩치에 비해 힘이 센 건 맞아서 힘 쓰는 일 하겠다며 쫓았을 거 같았고. 스승님도 귀여웠어 XD 한창 대륙 내에서 손에 꼽던, 이름 날리던 유명한 실력자일 거 같단 생각도 했고. 제자는 너무 어려서 모르는 이야기라거나.
>>489 은사님 말이 그 뜻이었구나 하는 심정을 스승 쪽에서 무지하게 적용시키고 있었는데 뜻이 통했나 보다. 제자의 뒷설정은 개인적으로는 약간 어두운 과거사같은 게 있지 않을까 하고 추측했는데, 진행하면 할수록 밝고 능청스러워서 그런 예측은 거의 잊고 받았던 것 같아. 생각해보니 그렇게 큰 짐가방을 들고 다닌다는 게 보통 완력이면 힘든 일일텐데, 전혀 힘이 센 아이라는 생각을 못했네... 다시 보니 예비 힘캐였잖아? 스승은 쓰다 보니 가벼운 느낌이 마음에 들어서 뒤로 갈수록 실력에 대해서는 점점 절하하는 쪽으로 생각했던 것 같아. 다만 교육이나 보호자로서는 초짜고, 제자를 가르치는 만큼 본인도 제자에게 배워 원숙해지는 캐릭터라는 느낌만은 확실히 잡고 끌어갔던 것 같아. 나중에라도 다른 어장에서 만날 수 있다면 좋겠다. 재밌었어~
여기서 들어봤던 것 같은 이름을 전부 뇌어보아요. 하지만 연구원님의 이름이 무엇인지는 도저히 모르겠어요. 나는 바보다. 하지만 내 의사는 필요없다고 모두가 말해. 그러니까 이름을 몰라도 괜찮을 것 같아요. 저는 저렇게나 새하얀 가운을 입은 분들의 말씀만 잘 따르면 괜찮을 거라고 했어요. 저를 훌륭하다고 했답니다. 갇혀 있지도 않고 자유로워요. 하지만 내가 있는 방에 고정된 체인이 발목에 걸려있어요. 내가 갈 수 있는 이동 거리는 제한적이다. 나를 제일 오래 맡은 연구원님이 수석이 되어서, 수석이 되어 제안했대요. 그래서 저는 다른 분들과 자유롭게 말한다. 나는 온순한 성향을 띄며 성공적으로 기대 결과에 가까운 진행도를 보이는 중요한 샘플입니다. 물론 돌아다녀도 재밌는 일은 없어요. 새하얀 이 곳은 매우 넓고 복잡한데 모두 새하얗습니다. 기계도 새하얗고, 응, 그러니까 David 인가요?
“오늘 저와의 약속에 3분 51초 늦으셨어요. 후후.”
소리내서 웃습니다. 이 곳의 모두는 웃지 않아요. 나는 웃을 줄 아는데, 내가 바보라니 저들도 바보다. 즐거움을 향유하며 노래하고 춤출 줄 아는 저는 바보가 아니에요. 지금도 콧노래를 흥얼거리고 싶지만 연구원님의 기분을 나쁘게 할 수도 있으니까 조용히 해요. 소근소근 거래를 제안합니다.
“Ston. 더 이상 내 이름을 늘리지 말아주었으면 해, V-58. 푸딩 건은 고려해보지. 빨간 푸딩? 보라색 푸딩?”
생체 반응 확인. 당신의 동공 위아래를 집게손가락으로 붙잡고 늘려 소형 라이트로 빛을 쐰다. 너무 아프지 않을 정도로만 거리를 두고서 동공을 들여다보고는 금새 놓아준다. 그리고 당신의 손목을 붙잡아 맥박 체크. 연구 시설치고는 원시적이라고 할 수 있지만, 당신과 근접한 전자 기계들이 종종 이상반응을 보이게 되는 것은 이미 알려진 사실이다. 당신의 맥박을 느끼며, 불온한 기분을 느낀다. ‘동조’되기 전에 손을 뗀다. 자신을 향해 자칭하기는 좀 그러나, 베테랑이 아니면 접촉 역시 일체 금지되어있다.
하지만 나는 또 까먹을 거에요. 잊을 겁니다. 나를 보러 오는 사람은 너무나 많고, 나는 사람이 아니다. 사람으로 취급받지 않음을 피부로 느낍니다. 손톱 끝 하얀 반달은 나를 인간이라고 비춥니까, 적빛 핏방울이 인간임을 시사합니까. 나는 안다. 내가 이들에게 애정을 가지는 것과 이들이 나에게 가지는 애정은 전혀 다른 것이다. 그렇게 믿어야 합니다. 나는 당신들을 사람으로 봐요. 그러니 정이라는 것은 사치스럽다. 나도 이름이 있었을까요?
“하얀 푸딩이 좋아요.”
하얀 푸딩은 우유로 만들어졌대요. 나는 내 눈꺼풀이 타의로 인해 억지로 열리고 갑작스레 빛을 쐬어도 익숙해서 내 할 말을 늘어놓는다. 동공은 빛으로 인해 수축했다. 나의 홍채는 빛을 쐬면 어떤 색으로 반짝이는 지도 기록하고 있으면 좋겠습니다. 쓸모없는 정보이니 그런 것은 기록되지 않겠지요. 손목 피부 아래로 흐르는 혈은 건강하게 뛰었다. 나는 건강합니다. 내 몸이니까 내가 제일 잘 알아요. 외상, 질병, 스트레스, 무엇도 허락하지 않습니다. 누가 허락하지 않는지는 모르겠어요. 나는 허락한 것 같은데 이상해.
“즐거운 파티라서 저를 잊으셨나요? 통신 탓하지 않아도 괜찮아요, Ston. 저는 언제나 여기 있으니까 잊어도 사라지지 않는답니다. 아시잖아요.”
방긋 웃습니다. 나는 이 허물같은 대화를 좋아해요. 질문을 하나씩 주고 받을 뿐인데 달갑다.
“늘 같은 대답이지만, 늘 같은 걸요. 오늘도 어김없이 기분 좋은 날이에요. 비록 당신이 3분 51초 늦었다고 하더라도요.”
손목시계 없는 내 손목을 쳐다보았습니다. 나를 찾아오는 연구원들은 손목시계를 좋아한다. 나는 무슨 질문을 하면 좋을까 고민했고, 생각보다 금방 오늘의 질문을 정했습니다.
손아귀가 아프다. 몸이 받아들이고 통제할 수 있는 영역의 충격이 아니다. 허용범위를 통증을 잊어버리기 위해서, 경련에 가까운 반응이 오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내색할 수는 없다. 몸이 불편해질 정도의 충격을 받았다는 사실을 저 녀석에게 들키기 싫다. 그래서 하얗게 질린 손을 애써 꽉 쥐었다. 미치도록 아프다. 정말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용케 찢어지지 않았다고 생각될 정도다.
내 가슴에 경련이 올 것만 같다.
한참 뒤로 날아가 꽂힌 칼을 향해 눈길을 주지만, 차마 회수하러 갈 수는 없다. 터덜 터덜 뒤로 걸어가 떨어진 무기를 줍는 패배자같은 꼴의 자신을 도저히 용납할 수가 없다. 어째서 이러고 있는지 솔직히 나 자신도 모르겠다. 이렇게 승리에 연연하고, 갈망했던 적이 이제껏 한 번이라도 있었던가.
그나마도 이번이 마지막일 것이다. 마지막에 내가 보였던 모든 공격들은 억지나 다름없는 것들이었다. 칼을 다룰 줄 아는 자라면 절대로 쓰지 않을 수들이었다. 그러니까 다음에는, 통하지 않을 것이다.
다음에는 무조건 진다.
도저히 고개를 들 수가 없다. 지금 녀석을 직시하면, 표정을 관리할 수 없으리라는 확신이 든다.
숨을 내뱉는다. 빈 손을 잠시 쥐었다 폈다. 상대의 공격에 맞춰 방어를 하면서 억지로 검을 쳐냈다. 그러면서 제 검도 놓쳐버려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럼으로 인해 승부는 오늘도 역시 무승부가 되었다.
앞에 있는 이와 이런 소모적인 승부를 한지도 꽤 오래 되었다. 사실 속마음으로는 굳이 이런 승부를 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이렇게 하지 않으면 앞에 있는 이 사람은 자신을 저런 열망어린 눈으로 바라봐주지 않을 것이라는 걸 알았다. 자신은 인간적으로 이 앞에 있는 사람이 좋았으나, 앞에 있는 이 사람은 내 능력만 바라볼 뿐 나 자신을 봐주지 않았다.
“이제 그만하자.”
고개를 떨군 채 바닥을 보는 너에게 나는 한숨어린 말을 내뱉는다. 이제는 자신도 지쳤다. 검을 사용하여 단련하는 것은 자신에게 있어서 누군가를 지키기 위해서이지 누군가를 이기기 위해서는 아니었다. 그렇기에 나는 더더욱 너를 이해할 수 없을 것이고 너 또한 나를 이해하지 못하겠지.
나는 바닥에 떨어진 내 검을 주워 검집에 넣었다. 네 검은 저 뒤로 날아갔으나 그것까지 내가 주워줄 필요는 없을 터였다.
저도 모르게 앞을 흘끗거리지만, 곧바로 후회하고 만다. 역시 보지 않는 편이 나았다는 것을 바로 체감했으니까.
직감적으로 느낄 수밖에 없는 것이다. 선이 저쪽에 있다는 것을. 승부의 선이든, 도리의 선이든, 모두 빼앗기고 말았다. 그것이 승패보다 괴롭다. 가슴 속의 뜨거운 것이 부당함을 인정하는 것. 부정적인 감정을 느끼는 대상에게서 어떤 잘못된 면도 찾을 수 없고, 어떤 적개심도 반사되어 오지 않는 것을 안다면, 결국 스스로가 이유 없는 미움에 사로잡힌 추한 존재임을 자각할 수밖에 없다.
"아니, 아직이야."
주먹을 꽉 쥔다. 이대로 달려들어서 한대 치고 싶다는 본능을 억제할 수 있는 이유는 그게 얼마나 멍청한 생각인지를 알기 때문이 아니다. 공격을 성공시킬 자신이 없기 때문이다. 품위도, 우정도 빠르게 잃어가는 모양이다. 이딴 생각이나 하고 있다니.
"승부는 아직 끝나지...... 끝나......"
애써 격양을 숨기려 평정심을 가장하면서 앞으로 한 걸음, 걸음이, 떼어지지 않는다. 어지럽다. 피가 머리로 쏠린다. 흥분 때문인가? 아니다. 몸이 견디지 못하는 것이다. 이대로 쓰러지면, 추하게 쓰러지면 나는, 다시 너를 볼 낮이 있을까. 제발, 한번만 말 좀 들어라. 온갖 발악과 바람이 무색하게도 몸이 앞으로 기운다. 어떤 고된 부하도 받아내고 움직여 왔던 몸, 단련의 표상이, 허영에 눌려서 무너진다.
너를 죽이고 싶어. 내가 병신이라는 것을 모르지는 않아. 그런데 생각을 통제할 수가 없어. 미치기라도 한 것처럼.
앞에 있는 이가 부족하다는 것은 아니었다. 도리어 차고 넘치는 편이었다. 자신도 엄청 지친 상태였다. 손끝이 저리고 금방이라도 주저앉고 싶고. 하지만 그러지 않는 것은 자신도 나름 앞의 상대에게 지고 싶지 않다는 것이겠지. 그렇게 열정적으로 이기고 싶은 것도 아니지만.
너는 아직이라며, 말을 하지만 딱 보기에도 더 무언가를 할 수 있는 상태는 아니었다. 나는 조금 지친다는 표정으로 너를 바라보다가 네가 몸을 비틀거리다가 쓰러질 것 같자 나 또한 걸음을 옮겨 너를 붙잡으려고 한다.
“윽….”
하지만 내 몸도 부하를 이기지 못했는지 너의 몸을 잡기는 했지만 그 무게를 버티지 못하고 같이 쓰러지고 말았다.
“아, 씨….”
쪽팔리게.
그래도 바닥에 누워버리니 훨씬 마음은 가볍다. 일어나기가 더 귀찮아져버린다. 눈 앞으로 보이는 하늘은 파랬다. 아주 맑고 맑은 하늘이었다.
“…도대체 넌 나한테 왜 그러는 거야? 진짜 짜증나.”
짜증나서 짜증난다고 하는 것은 아니다. 이 감정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 지 모르겠어서 그 감정이 제일 비슷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렇게 말한 것 뿐. 그러니까 왜 나는 매번 네가 싸우자는 것을 받아주고, 네 승부하자는 말 대신 그냥 인간적인 안부를 묻고 답하고 싶은 건지, 하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고 늘 매번 이런 식인 건지.
오늘도 오셨군요. (여자는 당신을 돌아보지도 않고 말했다. 당신은 기척 따위 내지 않았을지도 모르지만 일정한 시간마다 찾아오는 당신을 보면 모를 수도 없겠다고 여자는 생각했다.) 아직은 때가 아니라면서 저에게 계속 찾아오시는 이유가 무엇인지요? (여자는 커피 포트에 물을 담아 끓이는 일을 계속하며 혼잣말을 하듯이 당신에게 물었다.) 아, 커피 한 잔 드시겠어요? 마침 믹스커피를 선물로 받았는데. 비스킷도 있고. (너무 익숙하게 당신을 맞이하며 이미 여자는 잔 두 개를 꺼내고 있었다. 당신이 먹을 수 있는지는 알 수 없긴 했지만.)
# 맥커터 사절 ~ 상대방은 대충 저승사자나 악마나 천사나........ 뭐 그런 인외적인 존재로 생각하고 썼어 ~
흙먼지가 시야를 엄습한다. 꼴이 말이 아니게 됐다. 부축도 제대로 받지 못하고 볼품없이 흙바닥에 뻗은 꼴이다. 유일한 위안거리라면, 혼자서 험한 꼴을 당한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저도 모르게 픽, 하고 웃음이 나왔다. 아무래도 몸 상태가 심각하기는 한 것 같다. 넘어뜨렸다, 공격이 통했다, 이길 수 있다, 그런 말도 안 되는 비약의 징검다리를 밟고 생각은 뻗어나간다. 역시 집어치워야 한다. 기껏 손을 뻗어 준 사람을 상대로 이딴 희열을 찾을 정도로 정신이 썩어버린 건 아니라고 믿고 싶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냥, 실성한 듯 바닥에 얼굴을 묻고 계속 웃을 수밖에 없다. 이렇게라도 해야, 격양된 감정을 조금이라도 흘려보낼 수 있을 것 같다. 피로에 젖은 폐가 아우성을 쳐도 멈출 수가 없다. 아니, 그 아우성이 웃음으로 발하는 것만 같았다.
"왜 그러냐, 고?"
허, 웃기는 녀석이다. 아니, 불행히도 웃기는 상대를 만난 녀석이다. 절대로 나만은 대답할 수 없는 질문, 나이기에 영원히 답을 알 수 없는 공허한 물음에 나는 입으로 들어온 모래들을 퉤 뱉어내고 반문한다.
"글쎄, 알려줘. 왜 나는 이러고 있어?"
확실한 것은, 도저히 미워할 수가 없는 너이기에 미워하리라는 것, 그리고 이 억지가 기약 없이 반복되리라는 것, 자기화할 수 있는 설명은 오직 이것 뿐.
"......네가 바보같고, 재수없고, 불쾌해서?"
그리고 내게 할 수 있는 설명을 타인에게 해주기 위해서 또 깎아내리면, 이런 꼴이 되고 만다.
또 다시 돌아왔다는 걸 알아챈 뒤부터 거리를 두긴 했어도 당황스러운 말일 것이다. 불과 며칠 전까지 옆에서 행복하게 웃으며 사랑을 말하던 사람이 갑작스레 끝을 고하는 셈이니. 하지만 계속 당신 옆에 있기엔 너무 지친 상태였다. 몇 번이고 당신의 죽음을 지켜보는 일이나 그 모든 죽음을 기억한 채로 가장 행복한 순간으로 돌아오는 것은. 처음 몇 번은 쓰러질 정도로 울었던 것 같다. 그러다 어느 순간에는 눈물조차 나지 않았다. 싸늘하게 식은 당신 몸을 끌어안고 멍하니 눈만 깜빡일 뿐. 그 때문에 내가 당신을 죽음으로 몰아넣었다는 소문이 돌기도 했다. 이제는 그게 소문인지도 의문스럽다. 내가 하지 않은 건 당신 심장에 직접 칼을 꽂지 않은 것뿐, 내 옆에 있었다는 이유로 당신이 죽은 것은 아닌가. 그렇다면 결국 당신을 죽인 건 내가 맞지 않나.
확실히 미친 것 같다. 그러나 갑자기 미쳐버리거나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제서야 자각했을 뿐이다. 그래서, 내 앞의 네녀석은 정말 재수가 없는 놈이라고 다시금 생각한다. 한 번 문 것은 절대 놓지 않는 미친 놈에게 물려버렸으니.
시원하게 한참을 웃으니 조금이나마 몸의 피로감이 가시는 것 같다. 어떻게든 움직일 수 있다는 것이 고맙게 느껴진다. 그래, 아직 싸울 수 있다. 사지가 멀쩡하고 생각이 몸을 통제할 수 있는 한 내게는 여전히 기회가 있다. 아집을 포기하기에는 너무 늦었다. 너에게도, 나에게도 불행한 일이다.
"끝은 없어. 회수하지 않는 한."
내 목, 승자의 권리, 그걸 취해가지 않는다면, 절대 끝은 없으리라는 것을 안다. 불은 꺼지지 않는 이상 계속 태워야 한다. 내 집념, 열등감, 칩착, 열정...... 어쩌면 인연까지도, 무뎌지기에는 너무 날카롭고, 매번 맹렬하게 갈려서 다시 태어난다.
하지만 언젠가 정말 내가 패배하더라도, 넌 가져가지 않을 것 같군. 아마도 그것 때문에 널 싫어하는 것 아닐까.
싫어할 이유를 찾을 수가 없어서.
"떠나?"
득의양양하게 웃으며 바닥을 더듬고, 콜록거리며 기어간다. 마치 날 부르는 것처럼, 그것이 그 방향에 있다는 사실을 안다. 끝내 손끝에 뜨거운 금속의 감각이 걸려서, 곧장 내 칼이라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수백 번 격렬하게 부딫히며 달궈진 뜨거운 날은, 주인의 마음을 닮은 듯 위험하다.
겨우 겨우 칼을 세워서, 수직으로 땅에 꽂는다. 손잡이에 턱을 기대고 숨을 몰아쉬며 간신히 안정된 자세를 찾는다. 주저앉아 칼에 기댄 자세, 지금의 상태로 이보다 최상의 태세는 가져갈 수 없다.
어느 새 준비의 자세를 취하는 상대를 지긋이 올려다보고 있으려니, 암담하다. 나 역시 일어나야만 했다. 우리는 비긴 거니까. 아직은 지지 않았으니까, 여력에서 밀리고 싶지는 않아. 살짝 버둥거리다가 애써 손잡이를 양손으로 잡아 누르며 허리를 일으킨다. 아직 너에게는 지고 싶지 않다.
"그리고, 상관없잖아."
이유는 집어치우라고. 포기가 느린 녀석아. 끝나지 않을 거라는 것만 알면 돼. 그래도 이유가 필요하다면야.
"묻고 싶은 게 있어."
칼을 짚고 서 있기도 힘든데, 몸을 지탱하고 있는 칼에서 애써 다시 양손을 떨어뜨렸다. 적의가 없음을 드러내기 위해 손바닥을 펴서 네게 보여주고, 숨을 훅 내뱉은 다음 남은 호흡으로 겨우 중얼거렸다. 너무 작은 소리지만, 들렸기를 바라.
상대가 알려주지 않는다면 알 수 있는 방법은 없다. 한숨을 내쉬고 가까스로 일어나는 너를 본다. 그러다 한 번 더 하지는 않을 듯 손을 펴서 보여주는 너를 보고 그제야 긴장을 다시 누그러뜨린다. 검을 쥔다는 것은 늘 외줄을 타는 것만 같다고 생각했다. 언제든 다칠 수 있고 언제든 죽을 수 있는 길을 걷는다는 것.
하지만 이 길을 가게 된 이유를 묻는다면.... 다른 이들에게는 굳이 하지 않았던 말을 너에게 처음으로 꺼낸다. 뭐, 아니 다른 이들은 묻지도 않았던 것이었지만.
"지켜야 할 사람이 있어."
살짝 눈을 내려깔고는 잠시 회상에 잠긴다.
"어릴 때 어쩔 수 없이 헤어져서, 지금은 생사도 알 수 없고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지만.... 약속했거든. 내가 지켜주기로."
어쩔 수 없이 헤어지게 된 이후로 자신은 그 약속을 지키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검을 배우게 되었다. 그러다 여기까지 흘러들어왔고.
"떠난다는 것도 그 애를 찾으려고 가는 거야."
찾지 못 할 수도 있다. 이 험한 세상에 이미 죽었을지도 모른다. 그래도 이제 내 한 몸 지킬 수 있고, 어쩌면 다른 이도 지킬 수 있는 실력이 되었다고 생각이 드니까. 그 애를 찾으려는 시도만이라도 해보고 싶은 것이었다.
싸우지 않겠다고 의사를 표한 것은 이쪽이지만, 긴장을 풀고 태세가 느슨해진 상대를 보니 공세를 취할 기회가 눈에 들어오고, 자연히 충동이 다시 고개를 든다. 고단함에 눌려 뇌의 의사도 제대로 따라오지 못하던 주제에, 손가락 끝이 손잡이를 다시 붙잡고 싶어서 꿈틀거린다. 비난을 들어도 할 말이 없을 것이다. 한숨을 쉬며 두 걸음 뒤로 물러섰다. 역시 불리한 것은 여전히 이쪽이다. 몸의 충동에 따라갈 이유가 없다. 그냥 이대로, 상대의 말을 들을 따름이다.
"부럽군."
진심으로 하는 말이었다. 마찬가지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보호하기 위해서라고. 나 역시 그렇게 배웠다. 상처를 주고, 파괴하는 기예이기에 더욱이 그런 마음이 필요하다. 균형의 문제였다. 스스로까지 해롭게 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자기통제와 보호의 미덕을 쫓아야 했다.
그런데, 네놈과 검을 나눈 직후부터 그게 흐려졌다. 이제는 알 수 없게 되었다. 스스로가 왜 칼을 들고 있는지를 잊어버렸다. 내지는 이제서야 깨달았다. 애초부터 몰랐던 것을 부정하고 있었음을.
부럽다는 말에 답할 말이 없다. 처음부터 그런 일을 겪지 않는 편이 좋았을지도 모른다. 보호자 없이 보호막 없이 살아왔다는 건 험한 일도 많이 겪었다는 뜻이었다. 가족 같았던 이와 찢기듯 헤어져야만 했던 것도 끔찍하게 마음아픈 일이었다. 차라리 아무런 일도 겪지 못해서 검을 드는 마음 같은 거 몰랐을 것이 나았을 것이었다.
"내가 어떻게 해주길 원해."
물음이었다.
"네가 이기게 되면 만족할 것 같아?"
나는 고개를 모로 기울이며 관찰하듯 너를 물끄럼히 바라본다. 무의미한 싸움을 계속 하는 것도 지칠 따름이다. 인간적인 호의로 계속하여 대련을 해왔지만 정도를 넘는 공격들에 대응하는 건 힘든 일이기도 했다. 그리고 이제 떠나기로 마음먹었으니 계속 이곳에 있을 수도 없는 노릇이고.
스스로도 표현하기 어려워서, 볼을 긁으며 애매하게 말꼬리를 흐렸다. 하지만, 분명 내 자존심이 허락하는 선 안에서는 간을 드러내고 쓸개를 끄집어내듯이 하는 말이었다.
"지키고 싶은 사람이 있다고 했잖아."
'도와줄까'나 '잘 해봐'같은 말은 도저히 하지 못하겠다. 너에게 느껴야 하는 감정은 어디까지나 호승심, 그리고 적대감. 싸우기에 가장 용이한 감정만 남겨놓을 뿐이다. 싸움이 끝나면 드러내는, 그래서 내게 혼란을 남겨 버리는 인간적인 호감 따위, 내 입으로는 절대 인정하고 싶지 않다.
이 순간 내 목소리가 어린아이의 철없는 억지와도 같이 들렸음을, 자각하지 못한다면 병신이겠지. 왜 자꾸 이렇게 되는 걸까. 열등감 때문인지.
그렇지만 내심, 튀어나온 목소리에 기쁨이 섞여 있었다는 것만큼은, 절대 인정할 수 없다.
"결투는 내가 원할 때, 마음대로 할 거야. 그래, 한 달에 한 번이면 족하지만......"
이젠 나도 모르겠다. 긍정을 하는 것인지, 부정을 하는 것인지. 그냥 어느 쪽이던 내 의지를 조금 더 부연하고 싶어서, 바닥에 꽂혀 있던 칼을 힘차게 뽑아 겨눈다. 솔직히 '힘차게'라는 표현에는 많이 어폐가 있어서, 겨눈 칼끝도 허공에서 힘에 부쳐 불안하게 흔들리고 있지만, 지금의 몸으로는 이게 최선이다.
"필요하다면, 도와주지. 말마따나, 네 녀석은 바보고, 재수없고, 불쾌하니까. 분명 힘이 부칠 일이 있을테니까."
이렇게 또 한번, 패배감과 자조를 스스로 무너뜨린다. 불쾌하고, 재수없는, 바보에게 언제까지고 밑지고 있을 수는 없으니까.
결혼을 하고 나서도 우리는 행복했다고 생각했다. 오래 알고 지냈고 서로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것은 내 오만이었던 것일까. 최근 들어 당신이 나를 피하고 있다는 것은 알았지만, 그래서 걱정을 하고 있었긴 했지만 단지 무슨 고민거리가 있거나 아니면 뭔가 다른 이벤트 같은 것을 꾸미고 있는 건가 하는 생각을 했을 뿐이었다. 그래도 조금 느낌이 이상해서 대화를 해봐야지 했었지만…. 그렇다고 이혼이라는 말을 들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거짓말….”
사랑하는 사람이 생겼다니, 그런 일이 있을 리가 없었다. 그런 낌새도 없었고 그리고 우리 사이가 어떤 사이인데 거짓말 하나 알지 못할까. 나는 고개를 저은 뒤 당신을 보았다. 무감한 눈동자 속에 아픔이 비치는 것만 같았다. 이 또한 내 오만으로 인한 착각일까.
“갑자기 왜 그래…. 무슨 일인데. 내가 뭔가 잘못했어? 응?”
눈썹이 일그러진다. 최근에 있었던 일을 죄다 곱씹어 봐도 이혼 이야기가 나올 정도의 무언가는 있지 않았다. 아니, 행복했다고 생각했는데. 잘 지냈었고 서로 사랑한다고 속삭이지 않았던가.
당신의 악마 선배는 dew처럼 맑고 lovely한 목소리로 수화기를 내려놓습니다. 쓸데없이 넓기만 한 office는 air conditioner도 마음대로 틀 수가 없어 푹푹 찌는 무더위였습니다.
"어이 신입. 거기 냉장고에서 얼음컵좀 가져와보십시오."
더운 숨을 삼키며 의자 등받이를 뒤로 젖히고 거만하게 다리를 꼰 리디아는 상냥하게 통화를 할 때와는 정반대인 고압적인 태도로 사무실 구석에 왜 있는지 모를 냉동 쇼케이스를 손가락질하며 당신을 바라봅니다. 그녀의 빨간 악마 꼬리가 바퀴 달린 의자 아래로 축 늘어져있습니다.
>>520 일단 배경은 현실로 따지면 20세기 초반쯤의 기술력이라고 생각하면 될 것 같네. 사회적으로는 신분제가 존재하는 제국 정도로 생각하면 될 것 같아. 이능력자가 존재하는 세계관인데, 그 수는 상당히 적어. 전 세계에 100명 정도? 선천적인 능력이고 유전은 되지 않아. 아저씨는 대륙을 양분하던 두 국가가 충돌했을때 동부의 국가에서 특수부대로 활약했던 전적이 있지. 그래서 서부에선 악마로 불리우는거고, 전적도 화려해! 다만 후유증으로 PTSD를 겪고 있어. 아저씨도 이능력자인데 전쟁이 끝난 이후로는 한번도 사용하지 않았으니까 꼬맹이는 아마 모르지 않을까? 사실 이능력의 수준도 막 전술병기! 이런 느낌보단 보호막을 친다거나 사람들을 약간 비틀거리게 한다거나, 그런 수준 정도라고 생각하면 될 것 같아.
또 대륙의 북부에는 위험한 생물들이 많은데, 이 생물들에서 나오는 부산품들이 비싸게 거래 되고 있어서 아저씨는 그런 것들을 의뢰를 받아 잡아다주는걸 업으로 삼고 있어. 검술이 상당히 뛰어나거든!
>>521 / 세계관 일부만 들었는데도 심장이 두근거린다...! :3c 참치가 바이올렛 에버가든을 알고 있을지 모르지만... 이능력이나 생물이 추가된 약판타지 더하기 바이올렛 에버가든 느낌의 분위기라고 생각하면 될까? 아니면 중세 판타지 배경에 20세기 기술력이 더해진 분위기? 그럼 꼬맹이는 주변에서 이능력자 얘기 들어도 아저씨는 이능력자가 아니니까 하고 생각하겠네! 검술 뛰어난 아저씨라니 이건 심장 뿌시기 완벽한 조합이다. >:3 그럼 꼬맹이는 아저씨에게 가르침 받았으니 특수부대에 소속되어 있을까? 아저씨 뒤를 이어 들어간다고 했을 때 아저씨가 반대했으려나?
>>523 / 무슨 느낌인지 이해! 속으로 분위기를 그려보다가 바이올렛 에버가든이 문득 떠오르더라고! ;3 게다가 약판타지가 섞였다니 마음에 쏙 든다!! >:3c 남아있지 않고 해체 되었구나! 그것도 좋지!! 그럼 아저씨와 동료들은 약간 용병같이 활동하는 건가? 마물 퇴치 전문 용병? 일할때 복장은 자유로운 쪽이야? 아님 정해진 제복이 있나? 세계관이 너무 매력이라 자꾸 궁금한게 늘어가네... 미안해! <:3c 참치는 상라랑 일반이랑 어느 쪽이 쓰기 편해?
그때 동료들은 대부분 뿔뿔이 흩어지거나 죽어서 남은건 아저씨 뿐이야. 딘 씨도 같은 부대는 아니었고 아저씨가 진입하고 나면 바로 뒤따라 들어가는 부대 소속이었다고 생각하면 돼! 아저씨는 용병 같은 느낌이고~ 복장은 자유로워! 군대 느낌은 아닌 곳이니까~ 미안할 필요는 없어! 근데 이러면 그냥 일댈을 파는게 더 낫지 않나 ... 하는 생각이 드는걸! 나는 상라던 일반이던 안가리니까 참치 편할걸루 해줘~
>>527 (임무를 마치자마자 동료들의 술파티 권유도 마다한 채 반쯤 통보와도 같은 저녁 약속을 잡아낸 그녀는 한껏 들뜬 표정으로 숲길을 가로질렀다. 제대로 관리되지 않아 울퉁불퉁한 산속을 망설임 없이 뛰어다니는 그녀의 모습은 마치 숲속을 자유롭게 내달리는 늑대처럼 날렵하고 안정적이었다. 얼굴을 스치는 바람. 잔가지와 나뭇잎에 쓸리는 감각. 모든 것이 그녀의 심장을 뛰게 했다. 강 너머를 이어주는 긴 다리와 드문드문 들꽃이 핀 푸른 잔디밭, 병원을 지나 광장을 모두 통과해 골목으로 들어설 때까지 그녀는 그 먼 거리를 쉬지않고 달려왔음에도 신기하게 호흡하나 흐트러지지 않았다. 그렇게 그와 약속했던 장소인 사거리 근처까지 짧은 시간에 도착한 릴리아는 그제서야 달리기가 걸음으로 바뀌었다. 목적지에 가까워지며 시간에 여유가 생기자 그녀는 자연스럽게 약속을 잡기 전 그와 나누었던 대화들을 떠올렸다. 가장 먼저 자신이 했던 말을 곱씹으며 자아성찰을 해보던 그녀는 점점 스스로가 떼를 쓰는 어린아이 같이 보이지는 않았을까 하는 불안함을 느꼈다. 결국 부정적인 생각 하나가 시작되자 당연한 것처럼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더니, 오랜 시간 말하지 않았던 마음을 그에게 고백했다는 부끄러움까지 도달했다.) 그때 그렇게 얘기하지 말걸...! (잠시 멈춰서 양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웅얼거리던 릴리아는 자꾸만 머리를 채우는 걱정을 없애고 마음을 진정시키기 위해 길게 늘어선 가게들로 시선을 돌리려 노력했다. 빵이 구워지는 고소한 냄새와 사람들의 대화에 집중하기 위해 온갖 노력을 기울이던 중 그녀는 이제 막 가게 앞에 진열되는 꽃들에 순간적으로 시선을 빼앗겼다. 그렇게 꽃가게 앞에 걸음이 붙어버린 릴리아는 그 많은 꽃 중에서도 유독 분홍색 장미에 눈이 고정되어 있었다.) ('마음에 드시면 한 송이 포장해 드릴까요?') 아... 네! (점원의 질문에 홀린 듯 대답한 그녀가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잘 포장된 예쁜 꽃 한 송이를 품에 안고 사거리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릴리아는 멍하니 품속에 있는 장미를 바라보았다. 이걸 받으면서 점원 언니가 해줬던 말이 뭐였더라. 분홍 장미의 꽃말은 맹세라고 했던가? 분명 사랑에 빠지면 제정신이 아니게 된다는 말은 들어봤지만, 이렇게 연애를 하기도 전부터 정신을 못 차리다니. 그녀는 스스로가 그에게 제법 깊게 빠져있구나 하는 생각에 헛웃음을 지었다. 와중에도 그녀의 입꼬리 끝은 주어진 기회에 대한 감출 수 없는 기쁨이 보였다.)
/ 상라와 일반을 수없이 오가며 생각한 결과... 꼬맹이 성격에는 상라가 더 분위기에 맞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상라로 가져와 봤어! 사실 어떻게 보면 그냥 일반 같기도 하지만...! <:3c 일단 이건 둘째치고 기다려줘서 고마워!!
(릴리아의 밥을 먹으러 가자는 연락을 보고서 그는 아무런 말이 없이 침대에 몸을 묻었다. 실시간 연락기(Real Time Two-Way Communicator, RTCOM)를 손에 쥔채로 멍하니 천장만 바라보던 그는 침대 옆의 서랍에서 무언가를 뒤적이더니 사진 한장을 꺼내들었다.) ... 이게 네가 원한거야? 로즈? (그 곳에는 제복을 입은 군인들이 포즈를 취하고 서있었는데, 사진 왼쪽에 젊을때의 그의 모습과 함께 서있는 여자의 모습도 있었다.) 여러모로 귀찮게하는구나. (작게 한숨을 내쉰 그는 사진을 다시 서랍에 넣고 침대에서 일어섰다. 화장실로 향해 지저분하던 수염을 정리하고 덥수룩하던 머리도 정리를 한다. 혼자하는 것임에도 상당히 능숙해서 금세 말끔해진 그는 입고있던 옷도 말끔한 외출복으로 갈아입은 뒤에 천천히 집을 나섰다. 조금 거리를 걸어가니 근처에 사는 아주머니가 말을 걸었다.
' 에반, 오늘 수도라도 가는거야? ' ) 아주머니 좋은 저녁이네요. 아뇨, 오늘은 수도에 가는 날은 아니고 그냥 기분전환 삼아서. (웃으며 대답한 그는 시간에 맞추어 식당 앞으로 도착했다. 아직 릴리아는 도착하지 않은 모양이라 그는 식당 앞에 마련된 의자에 앉아서 그녀를 기다리기로 했다.) 꼬맹이, 조금 늦었구나. (그리고 저 멀리서 임무를 끝마치고 오는 릴리아가 보이자 평소와 다름없이 대충 손을 흔들며 그녀를 맞이해준다.)
>>529 (자기 자신도 놀란 깜짝 선물을 들고 조금을 더 걸었을까. 저 멀리에서 대충 손을 흔드는 그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하자 릴리아도 인사에 답하듯 머리 위로 손을 들어 크게 좌우로 몇 번 흔들었다. 그녀는 먼저 도착해 앉아 있는 에반을 보고는 걷는 속도를 다시 높여 식당 앞까지 금세 도착했다.) 아저씨, 이거... 받아요! (릴리아는 그의 앞에 도착하자마자 늦었다고 이야기하는 그 말에 대답하기도 전, 일단 안고 있던 꽃부터 에반에게 내밀었다. 에반의 앞에 놓인 분홍색 장미 한 송이는 천과 레이스, 얇은 끈으로 잘 감싸여 있었다. 그에게 오는 동안에도 소중히 들고 있었는지 장미와 포장 모두 흐트러진 곳 없이 깔끔했다. 묘하게 뚝딱이는 릴리아의 말과 행동, 시선을 꽃에 고정한 채 눈만 깜빡이는 모습은 그녀가 조금 긴장한 듯도 보였다.) 그래도 저기에서 여기까지 이 정도면 엄청 빠르게 왔는데...! ...많이 기다렸어요? (먼저 약속을 잡아놓고 늦게 나왔으면서도 오히려 뻔뻔하게 자신은 잘못이 없음을 주장하더니, 곧바로 태도를 바꿔 그의 눈치를 보듯 조심스레 질문하며 장난스럽게 에반을 곁눈질했다. 꽃을 주던 때와는 정반대로 평소와 다름없는 그녀의 모습은 신기하게도 방금 고백한 대상을 앞에 두었다기에는 상대를 크게 의식하는 기색이 없어 보였다.)
응? 갑자기 왠 꽃이냐. (저 멀리서 걸어오는 릴리아의 손에 무언가 들려있길래 유심히 바라보던 그는 그것이 꽃임을 깨달았다. 갑자기 꽃을 들고 오는게 누가 꽃이라도 주면서 고백한건가 싶었는데 그녀가 다가와 자신에게 대뜸 건네주니 그는 고개를 갸웃한다.) 설마 나 주려고 사온거냐? (잘 포장된 분홍색 장미 한 송이가 그의 손에 들려지고 평생 이런거 한번 받아본 적이 없던 그라서 꽃과 릴리아의 얼굴을 번갈아가면서 볼 뿐이었다.) 음 ... 뭐, 잘 간직하마. 물병에 꽂아두면 조금은 오래 가겠지. (어색하게 웃으며 릴리아의 머리를 한껏 쓰다듬은 에반은 릴리아의 질문에 고개를 저었다.) 네가 뛰어오는 시간쯤이야 내 머릿속에 있으니 말이다. 나도 방금 도착한 참이니까 말이다. 임무도 방금 끝나서 배고플테니 얼른 들어가자. (식당 문을 열어서 릴리아가 먼저 들어가게 해주고 뒤따라 들어간 에반은 주인과 눈인사를 나누며 적당한 자리에 테이블을 잡는다. 에반의 훈장이 가진 상징성 때문인지 에반은 마을에서 꽤나 유명인사라 모르는 사람이 별로 없었다.) 네가 먹고싶은걸로 시킬래? (평소와 다름없이 웃는 표정이다.)
>>531 그럼요. 당연하죠! 내가 이런 걸 아저씨 아니면 누구한테 주겠어요! (꽃과 자신을 번갈아 바라보는 에반의 모습과 어색한 웃음을 보고 그녀는 능청스럽게 대답하며 활짝 웃어 보였다. 속으로는 그가 혹시 꽃을 받아주지 않으면 어쩌나 걱정을 했었는지 기뻐 보이는 웃음 사이로 안도감이 언뜻 나타났다가 사라지기도 했다.) 이제 내가 아저씨한테 줄 수 있는 게 하나 생겼으니까, 앞으로는 매일 한 송이씩 선물해 줄게요. (릴리아는 집에 물병이 수십 개 있어도 부족할 거라면서 기대하고 있으라는 농담 같은 진담을 하며 장난스럽게 웃었다.) 아저씨, 머리! 나 머리 망가져요! (그가 머리를 쓰다듬자 그녀는 고개를 아래로 숙이듯 그의 손길을 거부하는 것처럼 행동하며 곧바로 투덜거렸지만, 그 와중에도 실력 좋게 그의 손을 피하지는 않고 끝까지 그리고 아주 마음껏 쓰다듬을 받았다. 하지 말라며 이야기하는 그녀의 목소리와 표정에도 짜증은 없고 즐거움만 한가득 담겨 있었다.) 네? 정말요? 그런 것도 알고 있어요? 아저씨는 정말 모르는 게 없는 것 같아요. (뛰어오는 시간을 알고 있었다는 말에 릴리아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그를 올려다보았다.) 네. 감사합니다, 친절하신 신사분. (대체 언제 연습을 했는지, 그가 식당 문을 열어주자 릴리아는 금세 표정을 바꿔 우아한 미소를 흉내 내더니 있지도 않은 치맛자락을 손끝으로 잡아 올리는 시늉을 하며 무릎을 굽혀 마치 어딘가의 고아한 숙녀처럼 인사해 보였다. 아직 완벽하게 몸에 익히지는 못한 듯 다년간의 훈련으로 다져진 절도 있는 움직임을 전부 숨길 수는 없었지만, 그래도 생각보다 그럴싸한 자세로 물 흐르듯 부드럽게 인사를 했다. 식당에 들어가자마자 우아하던 숙녀의 모습은 다시금 금세 사라지고 평소와 똑같은 활발함이 그 자리를 채웠다. 릴리아는 일단 활짝 웃으며 예의 바르게 식당 주인에게 인사부터 했다. 그리고, 그 모습은 에반을 닮은 것도 같았다. 마을의 유명인인 에반의 덕을 본 탓인지 릴리아는 마을에서 겉돌지 않고 생각보다 빠르게 잘 적응해나갈 수 있었다. 그녀가 이렇게 올바르게 자랄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었다.) 그것도 좋지만, 오늘은 아저씨가 먹고 싶은 걸로 먹을래요! 음... 어떤게 좋아요? (먹고 싶은 걸 고르겠냐는 그의 말을 듣기는 한 걸까? 릴리아는 최대한 그가 좋아할 만한 음식이 무엇일지 혼자 심각하게 고민하더니 결국 그에게 선택권을 넘겨버렸다.)
난 또 누가 너한테 고백하면서 같이 준건줄 알았다. (요즘 같은 시대에 꽃 같은걸 건네어주면서 고백하는 사람이 어딨냐고 하려고 했다는 사실은 에반만 알고 있는 비밀로 하기로 했다.) 됐다 됐어, 무슨 매일 한 송이냐. 이걸로도 충분하니까 매일매일 사오지는 마라. 가끔씩 사오면 내가 받아줄께. (능청스럽게 웃으며 대답한 그는 잔뜩 릴리아의 머리를 쓰다듬다가 릴리아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널 훈련시킨게 나인데 그 정도는 당연히 알지. 그리고 임무 다녀오는 것도 몇번 봤고 네가 임무 나가는 지역은 내가 몇번이고 다녀와본 곳이니까 그 정도 예상하는건 별 거 아니지. (먼저 들어가라며 문을 열어주었더니 우아한 미소를 짓는 릴리아를 보고 그는 살짝 멈칫했지만 아무렇지 않은척 식당으로 들어갔다.) 내가 먹고싶은거라 ... 딱히 없는데 말이다. 그래도 양고기를 파는 곳이니까 양갈비 정도는 먹어봐야겠지. 난 양갈비 먹고싶으니까 다른건 너가 먹고싶은거 시켜라. (메뉴를 슬쩍 보고서 양갈비로 금방 정해버린 그는 다른 메뉴들은 다시 릴리아에게 일임하고선 테이블에 식기를 세팅했다.) 그래서 오늘 임무는 할만 했니? 확인해보니까 그렇게 어려운 임무는 아니었지만 언제나 마물을 마주칠 위험이 있으니까 말이다. (릴리아를 바라보며 물어본 에반은 물수건으로 손을 닦고나서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선 잠깐 침묵했다가 입을 연다.) 릴리아, 언제부터 날 좋아했는지 모르겠지만 말이다. 네가 기다리는 시간은 어쩌면 몇년, 몇십년이 될지도 모른단다. 정말 괜찮겠어?
>>533 에이, 그럼 제가 안 받아왔죠. 전 아저씨뿐인데! (릴리아는 에반에게 그렇지 않냐며 능청스럽게 질문하고 웃어보였다.) 안 돼요. 사랑은 매일 표현해야 하는 거라고 했어요. (릴리아는 자신은 아저씨에게 열심히 대시해야 하는 입장이 아니냐며 나름의 이유를 이야기했다. 매일 꽃을 선물하겠다는 결정을 취소할 생각은 없는 듯 장난 가득한 목소리로 고집을 부리며 웃었다.) 다른 동료들은 아무리 같이 다녀도 그런 건 모르던데요? 물론 저도 그런 건 잘 못하고요. 역시 아저씨는 대단한 사람인 것 같아요. (그녀는 그렇게 혼자서 결론을 내리고 전부 이해했다는 듯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우리 아저씨야'라고 혼자 중얼거리면서 뿌듯해하는 것도 빼먹지 않았다.) 오늘은 그럭저럭 괜찮았어요. 오히려 평상시보다 더 조용한 것 같아서 좀 이상하긴 했지만요. 그래서 확인도 할 겸 며칠 뒤에 다시 한번 가보기로 했어요. 음...! 전 이걸로 먹을래요! (릴리아는 그의 말을 전부 듣고 대답도 착실하게 하고 있었지만, 눈은 여전히 메뉴에 향해있었다. 그렇게 그가 식기를 세팅하는 줄도 모른 채 혼자서 열심히 메뉴들을 노려보며 고민하던 그녀는 결국 양고기 스테이크를 선택하고 그대로 그의 것과 함께 주문했다. 그 후에 뒤늦게 자신과 그의 앞에 가지런히 놓인 식기를 발견한 릴리아는 에반에게 고맙다며 인사하고는 손을 닦았다.) 저는... (그의 질문에 릴리아는 장난스러움을 지우고 진지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다가 식탁 위로 시선을 내렸다. 할 말을 고르는 듯 잠시 생각에 잠긴 모습으로 가만히 있던 그녀는 천천히 입을 떼기 시작했다.) 예전에 전, 제가 아저씨에게 큰 짐일 거라고 생각했어요. 저는 그날이 지나고 나서도 남아버린... 마치 깨진 유리의 조각 같은 거니까 아저씨가 절 볼 때마다 힘들지는 않을까 했죠. 그래서 빨리 독립해야겠다고 마음먹고 있었고요. 장난이었기는 했지만... 동료들 사이에서 언제까지 결혼 못하면 그냥 우리들끼리 살자는 얘기가 나온 적도 있어서 다 함께 집을 알아보려고 했던 적도 있었어요. (릴리아는 그때를 떠올리듯 손가락 끝으로 책상을 가볍게 톡톡 두드리다가 멈췄다.) 뭐 지금 생각하면 아마 그때 사춘기라도 왔었나 봐요. 전 오히려 제가 아저씨를 기다릴 수 있다면 좋은걸요? 사실 아저씨가 기다려도 된다고 했을 때 이제 죽어도 여한은 없겠다 싶었던 거 있죠? (의외로 진지하다 싶더니 결국 마지막에 와서는 다시 말투에 장난스러움이 가득해졌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에반을 향해있던 차분하게 빛나는 두 눈동자는 그녀가 한 말이 모두 진심이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었다. 그녀는 소리없이 작게 어깨를 들썩이며 웃었다.) 사실 내가 정말 아저씨를 좋아해도 되는 게 맞는지, 이런 선택을 해도 되는지 지금도 가끔씩 생각해요. 말은 이렇게 해도 결국 마음을 포기하지는 못했지만요! (장난치듯 말을 끝맺었지만 역시 죄책감을 지우지는 못했던 것일까. 릴리아는 어색하게 웃으며 결국 그를 끝까지 바라보지 못하고 자연스럽게 시선을 피했다.) 아저씨는요? 제가 이렇게 아저씨 좋아해도 괜찮아요? (결국 그녀가 그를 다시 바라보았을 때는 웃음기에 가려져 다른 감정을 짐작하기 어려웠다. 릴리아는 진지하게 그의 대답을 들을 생각은 아니었는지 마치 오늘 날씨가 참 좋지 않냐는 투로 그에게 가볍게 질문했다.)
그런 오글거리는 말을 아무렇지 않게 잘도 하는구나. (릴리아의 말에 조금은 어색한 표정을 짓는다. 그는 누군가에게 이런 애정표현을 받아본 적이 없기 때문이었다.) 사랑은 다른 방식으로 표현해도 괜찮은거 아니냐? 굳이 꽃이 아니더라도 ... (사실 그도 다른 방법이 뭐가 있는지 딱히 기억나는건 없었다. 꽃을 받는건 좋긴했지만 나중에 치워야할 일이 생각나서 이렇게 얘기하는 것뿐이었다.) 그냥 예전의 습관이 남아있는거라고 생각하면 된다. 생각하지 않아도 무의식적으로 되는거라서. (전쟁 당시엔 시간이 생명이었기에 그의 몸에도 습관처럼 배어버린 것이었다. 이제 와선 하고 싶지 않아도 알아서 되는 것이라 그도 어쩔 수는 없었다.) 지금이 가장 조용할 시기이긴 하지만 ... 그래도 교활한 놈들이니 조심하도록 해. 위험하면 언제든지 통신기로 날 부르고. (말만 안하지 릴리아가 임무를 나갈때면 조금 초조해지는 마음은 어쩔 수가 없어서 통신기를 손에 쥐고 내려놓은 적이 없었다.) 단언컨데 너를 그곳에서 구해왔을때부터 그렇게 생각한적이 없단다. 오히려 부대원들이 얼마나 기뻐했는데. 너를 그렇게 생각했다면 진즉 고아원에 보냈을꺼다. 하지만 그렇지 않고 내가 맡았지. 다른 대원들은 가정이 있거나 다른 사유가 있었으니까 말이야. (릴리아의 말에 대답한 에반은 독립하려고 했다는 사실에 그래봤자 내 손바닥 안이라면서 이마를 손가락으로 톡 때리려했다.) 네가 나를 좋아하는건 ... 그래 나도 솔직하게 말하자면 눈치채지 못한건 아니었다. 그리고 그걸 나쁘게 생각해본적도 없고. 하지만 나는 자신이 없는거야. 네가 나와 함께해서 행복할 수 있을지. 나는 너를 딸처럼 키우면서 너가 행복하게 자랄 수 있기를 빌었으니까. (릴리아의 진지한 눈빛에 그도 진지한 목소리로 대답해주기 시작했다. 자잘한 흉터가 가득한 손이 릴리아의 머리를 살살 쓰다듬어주며 말했다.) 그리고 그건 아직까지도 내 삶의 유일한 목표라고도 할 수 있어. 너는 정말 나랑 함께하면서 행복했니? 그리고 앞으로도 그렇게 행복할 자신이 있어?
>>535 그게 제 장점이죠! 다른 방식이요? 어떤 방식이요? 알려주면 그 방법으로 표현해 드릴게요! (릴리아는 어색한 표정의 에반을 보며 웃더니 그의 말에 오히려 역으로 질문하며 신나서 그를 놀리기 시작했다.) 예전... (그 예전이라는 것이 전쟁을 의미한다는 것을 너무도 잘 알고 있기에 그녀는 예전 습관이라는 말을 듣고 아무런 대답도 못 한 채로 입을 꾹 다물었다.) 네,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누군데요! 아저씨 제자예요, 제자. 항상 조심하고 있으니까 괜찮아요. 위험할 일 없어요! 지금까지도 잘만 해왔는걸요? (그의 제자라는 말을 하며 뿌듯하게 웃던 릴리아는 자신의 위험에 더는 그를 끌어들이지 않기 위해 통신기를 사용하지 않을 생각으로 교묘하게 그 대답만을 피했다. 그리고 태연하게 긍정적인 대답만 내놓았다.) 정말 단 한순간도 그렇게 생각했던 적 없었어요? 원망도, 후회한 적도 없었어요? (에반의 말을 들으며 겉으로는 믿을 수 없다는 듯 장난스러움 가득하던 목소리 그대로 그에게 질문했지만, 속으로는 그 당시 직접 볼 수 없었던. 정확히는 사경을 헤매며 정말로 볼 수 없었던 장면들과 꿈인지 현실인지 분간할 수 없었던 단편적인 기억들을 떠올리려 하면서 당시의 상황을 온전히 짐작하고 그의 말이 진실인지 판단하려 애썼다. 무너진 잔해와 안개처럼 자욱하던 어둠. 의식이 멀어져 가는 와중에도 본능적으로 잡았던, 아마도 그의 것이었을 손. 자신을 데려온 아저씨. 기뻐했다는 대원들. 피 냄새와 뒤섞인 약 냄새. 희미하게 들려오던 다정한 목소리. 그리고 자신을 살리며 희생한 —. 혼잡한 기억 속에서 허우적거리던 그녀는, 그에게 이마를 맞자 마치 아파서 손바닥으로 이마를 가리는 척 슬그머니 얼굴을 가리며 겨우 유지하고 있던 미소를 풀고 표정을 숨겼다. 그래도 맞은 건 조금 억울했는지 손바닥 안이라는 그의 말에 '그렇긴 하지만...'이라고 중얼거리면서 소심하게 반항했다. 잠시 후 그녀는 얼굴을 가리고 있던 손을 천천히 내렸다. 다행히도 금방 감정을 갈무리한 듯 표정은 평소와 다름없이 매우 괜찮아 보였다.) 지금까지 이렇게 같이 밥 먹고, 떨어져 있을 때는 서로 연락도 하고, 대화하고, 장난치고... 따지고 보면 동료들과도 하는 일이고, 그렇게 대단한 일도 아니잖아요? 그런데 이런 사소한 것들이 전부 아저씨와 함께했다는 것만으로도 엄청 소중하고 행복한 거 있죠? (그가 머리를 쓰다듬어주기 시작하자 릴리아는 느릿하게 이야기했다. 그리고 머리를 쓰다듬는 그의 손 위에 자신의 손을 겹치려 하며. 그 흉터투성이인 손을 이끌어 자신의 볼에 가져가려 하며 웃었다.) 아저씨도 나도 사람이니까 언제나 행복하기만 할 수 없다는 건 알고 있어요. 그래도 전 아저씨랑 헤어지는 것보다 같이 있는 게 더 큰 행복이에요. 아저씨가 제 행복이니까요. (그녀는 너무 오글거리는 말이었냐며 장난스러우면서도 얄밉지 않게 그에게 질문했다.)
>>538 글쎄, 아침마다 모닝 키스를 해준다던지? (신나서 놀리려는듯한 릴리아를 보고 에반은 조금 짓궂은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이런 부분에 있어서는 에반도 장난끼가 있는 편이긴 했다.) 딱 그때가 가장 위험할 시기니까 좀 더 조심해야해. 자신감을 가지는건 좋지만 잘못하면 화를 부를 수도 있으니까 말이야. (그렇게 잘못되어버린 동료들을 많이 봐온 에반이었기에 릴리아가 더욱 걱정되는 것이었다. 하지만 더이상 얘기하면 잔소리로 들릴까 그는 다른 질문에 대답을 했다.) 단 한번도 그래본 적은 없다. 네가 크는걸 보는 것으로 그날 죽은 동료들에게 속죄하는거라 생각했거든. 사실 너를 구조한다고 본래 이탈했어야하는 시간보다 늦게 이탈했었다. 그래서 결국 공격을 받았지만 ... 그날 다쳐서 평생 장애를 안고 살아가는 동료들 또한 너를 원망한 적이 없단다. 옛날에 한쪽 팔이 없는 아저씨 본 적 있지? 그 아저씨도 내 동료였단다. 그때는 어릴적 친구로 소개했지만 말이야 ... 전쟁은 너무 오래 지속되었고 모두가 지쳐가고 있을때였어. 그 와중에 네 존재는 우리에게 큰 기쁨이었단다. (릴리아가 자신의 손을 볼로 가져가자 그는 볼을 손가락으로 가볍게 쓸어주며 말했다.) 조금 오글거리긴 했지만 이번엔 들을만 했다. 아 음식이 나오나보다. (볼을 만져주던 손을 거두고 테이블에 공간을 만들자 주문했던 음식들이 나왔다.) 맛있게 먹어라. 꼭꼭 씹어먹는거 잊지말고.
>>539 그... 그게 좋으면 내일부터 해 드릴게요! 굿나잇 키스도 해줄 수 있어요 난...! (설마 그에게서 그런 대답이 돌아올 줄은 몰랐는지 방심하고 있던 릴리아의 눈동자가 순간 흔들렸다. 그를 놀리려고 했던 그녀는 반대로 본인이 당황해서 허둥지둥 시선을 피했다. 나름 에반에게 반격을 한다고 아무렇지 않은 척 한술 더 떠 이야기하기는 했지만 이미 얼굴이 붉어진 모습으로 봐서는 별로 믿음직스럽지 못했다.) 정말 조심, 또 조심할게요. 큰일은 없을 테니까 괜찮아요! (그녀도 에반이 일을 위해 나가 있었다면 온종일 그를 걱정했을 것을 알기에. 그리고 그의 마음을 모르지 않았던 릴리아는 나름 에반의 말을 잔소리라 불평하지 않고 잘 경청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속죄는 아저씨가 아니라 제가 해야 하는걸요. 저 때문에 일어난 일이었으니까... 네, 기억해요. 그날 이후로 잊은 적이 없어요. 그때 제대로 인사도... 사과도 못 드리고. 정말 많은 걸 받았어요. 평생 갚을 수 없을 정도로요. 아저씨에게도, 그분들 모두에게도 말이에요. 감사해요. (어릴적 친구가 아닌 아저씨의 동료였다던 그를 처음 만났던 날을 떠올리던 릴리아는 기쁨이라는 에반의 표현에 더 말을 이어가지 못하고 멈칫했다. 처음 보는 아이 하나 때문에 잃지 않았어도 되었을 많은 것을 잃고, 모두에게 돌이킬 수 없는 상처와 고통이 남았음에도 자신에게 원망 대신 사랑과 희망을 주었던 그들의 다정함과 배려가 그녀에게 가슴 아플 정도로 와닿았다. 결국 릴리아는 제대로 웃지도 울지도 못하고 그저 그의 손에 얼굴을 묻으며 찡그리듯 웃어 보였다. 아직 모든 죄책감을 버리지는 못한 듯했지만 이전보다 마음이 한결 편해진 것만큼은 확실해 보였다.) 이번엔 괜찮았어요? (그녀도 음식이 나오려 하는 것을 보고 그의 손을 놓아주었다가 들을만했다는 그의 말에 가볍게 웃었다.) 네. 아저씨도 꼭꼭 잘 드셔야 해요? 잘 먹겠습니다! (그녀는 밥을 먹기 직전까지 그를 놀리려 하곤 버릇처럼 혼잣말에 가깝게 식전인사를 했다.) 역시 양고기는 여기가 최고인 것 같아요...! 아저씨, 이거 진짜 맛있는데 드셔 보실래요? (릴리아는 스테이크를 조금 잘라서 먹어보더니 만족한 표정으로 웃었다. 그리고 다시 한 조각을 잘라 포크로 찍어 그에게 보여주듯 조금 들어 올리며 에반에게 맛볼 것을 권유했다.)
얼굴이 새빨개진게 굿나잇 키스까진 못하겠는데 그래. (자신의 장난섞인 말에 얼굴이 붉어진채로 얘기하는 릴리아를 보고 에반은 재밌다는듯이 웃으며 얘기했다. 이럴때는 영락 없는 소녀라서 세월이 느껴지기도 했고.) 그렇게까지 말하니 걱정은 좀 덜하겠구나. 그래도 요즘엔 위험한 수준의 마물은 잘 보이지 않는다고 하니. (사실 에반의 일이 뜸한 이유도 위험한 마물만 골라서 사냥하는 것도 있었다. 물론 릴리아에겐 철저히 비밀이었지만.) 그 누구도 속죄할 필요는 없는 일이야. 그런걸로 죄책감 같은건 가질 필요 없다. 그 전쟁도 우리 같은 사람들에겐 어느날 갑자기 일어난 것이니까 말이야. 우리는 그냥 휘말린 것에 불과해. 그러니까 너는 속죄보단 더욱 잘 사는 모습을 보여주는게 좋다고 생각한다. (릴리아의 표정에 볼을 만져주던 손을 다시 머리로 올려서 몇번 쓰다듬어준 그는 차려진 음식을 보고선 식기를 들었다.) 나야 위장이 튼튼해서 괜찮단다. 잘 먹겠습니다. (자신 몫의 양갈비를 썰어서 먹던 그는 릴리아의 말에 자신의 접시를 가리키며 말했다.) 여기 올려두면 알아서 먹을께. 너도 이것 좀 먹어봐라. (자신 몫의 고기를 썰어서 릴리아의 접시에 놓아준 에반은 문득 무언가 궁금한게 생겨서 씹던 고기를 넘기고선 말했다.) 근데 누가 너한테 고백했다는거냐? 내가 이 마을 남자애들은 대부분 알고 있는데 ... 요 녀석들 티를 안내고 있었던거냐!
>>541 아, 할 수 있어요! 오늘 할 테니까 두고 봐요! (본인도 얼굴이 빨개진 것을 알고 있었는지 그에게 직접적으로 지적당하자 릴리아는 고개를 돌려 붉어진 얼굴을 숨기려 하면서도 결국 끝까지 자존심을 굽히지 못하고 이야기했다.) 마물도 아저씨처럼 움직이기가 싫은가봐요. 어떻게 아저씨가 일을 안 하는 타이밍에 맞춰서 그 위험하던 마물들도 보이지를 않네요. ... 설마 안 나오는 시기가 아니라 원래 마물들이 있어야 하는데 아저씨가 다 없애버린 건 아니죠? (그가 위험한 마물을 사냥하러 가는 것을 꿈에도 모르고 있는 그녀는 그저 농담처럼 이야기하며 웃었다. 아마 이를 알고 있었다면 농담이 아니라 잔소리를 했을 것이었다.) 꼭... 잘 살게요. 절 살려주신 걸 후회하지 않으시도록 말이에요.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던 릴리아는 조금 잠긴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렇게 다시 그의 쓰다듬을 받게 된 그녀의 입가에는 다행히도 작은 미소가 맺혀있었다.) 감사해요, 저도 잘 먹을게요! 아저씨도 많이 드세요! (튼튼하다는 그의 말에 소리없이 웃으면서 마저 고기를 먹던 릴리아는 고개를 끄덕이며 스테이크를 잘라 작은 부분을 남겨두고 크고 좋은 부분을 에반의 접시에 옮겼다.) 제, 제가 그런 말을 했었나요? 기억이 안 나는데... —. 그거 제가 아니라 아저씨 아니었어요? (그녀는 그가 준 양갈비를 잘 맛보고 있다가 고백 얘기가 나오자 움찔하더니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는 척 괜히 물만 마시면서 시선을 피하며 어설프게 말 돌리기를 시도했다. 이제와 그의 앞에서 타인에게 고백받았다는 것을 자랑하듯 이야기하기에는 어쩐지 좀 부끄러운 탓이었다.) 그냥 그... 있어요, 걔... 그나저나 아저씨, 다음 주에 수도에서 열리는 축제 갈 거예요? (그녀는 조금이라도 말을 아끼기 위해 얼른 고기를 먹으며 입을 다물었다.)
(얼굴이 붉어진채 얘기하는 릴리아를 보며 에반은 몇번 웃음소리를 내고선 릴리아의 말에 대답했다.) 내가 무슨 힘이 있다고 마물들을 다 처리하고 다니겠니. 그냥 적당적당한 녀석들이나 하나씩 처리하는거지. 한창 시끄러울때도 있으니 이렇게 조용할때도 있어야 하는법 아니겠니? 그래그래. 애초에 내가 키웠으니 올바르게 자란거지만 말이야. (장난스럽게 웃으며 대답한 그는 스테이크의 좋은 부분을 썰어서 자신을 주는 릴리아를 보면서 말했다.) 이런거 주면 너는 먹을 곳이 없잖아. 나는 괜찮으니까 너 많이 먹어라. (릴리아가 썰어서 준 부분의 2/3 정도를 다시 썰어서 릴리아의 접시 위에 놓아준 에반은 그녀의 말에 재밌다는듯이 웃으며 말했다.) 누군지 얘기 안하는거보니 대충 내가 아는 애들 중에 있을 것 같구나. 그래도 사생활이 있으니 굳이 캐고 다니진 않으마. (대충 누구인지는 짐작을 하고 있었지만 릴리아가 거절을 했다는 사실을 알았으니 굳이 캐고 다닐 생각은 들지 않았다.) 수도 축제는 안그래도 초청장이 왔었다. 황제 폐하 직인으로 온거라서 이번엔 가야할 것 같은데 ... 가고 싶어서 그러는거냐? 아마 간다면 무도회에도 초청 받을거라서 예복을 입어야하는데 말이다. (얼마전에 우편으로 온 편지를 기억하며 그는 얘기했다. 슬슬 전보가 활성화 되는 시기에 우편으로 온 것이라 무엇인가 했는데 무려 황제폐하 직인이라 조심스럽게 서랍에 넣어두고 있었다.)
>>543 그렇죠? 역시 아저씨는 아니죠? 혹시나 하는 말이지만 그런 일 절대 하면 안 돼요 아저씨! (그녀는 불가능하지 않을까 생각하면서도 에반의 실력이라면 정말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혹시 자신이 한 말이 사실이 되어버릴까, 그에게 미리 안된다며 못을 박았다.) 그러게요. 항상 시끄럽기만 하면 일이 너무 많아져서 힘들기는 할 것 같아요. (그가 할 일이 적어지면 적어질수록 다칠 일도 줄어들 거라 생각한 릴리아는 얌전히 그의 말에 동의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나 아저씨가 키워줘서 이렇게 잘 자랐어요. (릴리아는 뿌듯함이 가득 담긴 목소리로 장난스럽게 이야기했다.) 저 다이어트 하는 중이라 적게 먹어야 해서 괜찮아요. 괜찮... 은데... (대충 적당한 핑계를 말하던 릴리아는 스테이크의 일부가 돌아오자 어쩐지 불만이 있어 보이는 표정으로 접시 위에 올라온 고기를 바라보았다. 다시 그에게 스테이크를 주어야 하나 속으로 깊게 고민하던 릴리아는 결국 포기를 한 것인지 아니면 스테이크의 유혹을 이기지 못한 것인지 고기를 잘라서 자신의 입에 넣어버렸다. 다이어트는 정말 핑계가 맞는 것인지 그녀의 접시는 생각보다 빠르고 깔끔하게 비어갔다.) 아저씨가 알 것 같다고 하거나 찾아내겠다고 하면 정말 다 찾을 것 같아서 무서워요...! (캐고 다니지는 않겠다는 말에 일단 안도의 한숨을 내쉰 그녀는 에반에게 장난처럼 이야기했지만 그 속에는 숨기지 못한 진심이 담겨있었다.) 아저씨는 귀찮다고 안 갈 것 같아서 이번에도 안 가시는 건가 궁금해서 물어봤어요. 그런데 황제 폐하 직인이라니... (예상하지도 못한 초청장의 출처에 그녀는 황제 폐하를 앞에 둔 것도 아니면서 괜히 긴장했다. 물론 에반과 함께 축제를 즐겨보고 싶은 마음이 없는 것도 아니었고, 그에게 이야기해서 함께 갈 수 있다면 즐겁기는 하겠지만 황제 폐하가 포함된 지금만큼은 즐거움보다 편안함을 챙기고 싶은 마음이 더욱 커졌다.) 저는 그날 임무를 하러 갈 것 같아서요! 잘 다녀오세요 아저씨! (무도회라는 말에 릴리아는 앞선 고민이 무색하게 급히 고개를 저으며 빠르게 포기했다. 그녀는 자신이 그런 것들에 어울리는 사람이 아니라 생각했다. 그가 예복을 갖춰 입고 무도회를 즐기는 모습은 좀 보고 싶었지만 높으신 분들이 가득할 그곳을 자신 같은 사람이 갈 수 있다는 생각은 해본 적도 없었고, 가도 될 것 같지도 않다는 생각에 그녀는 작은 미련마저도 털어내기 위해서 차라리 없던 임무를 만들어 일이라도 하기로 마음먹었다.)
이젠 그럴 힘도 없다. 그리고 조만간 대대적으로 북부 마물을 토벌할꺼라더라. 토벌이 끝나면 우리도 슬슬 다른 일을 먹고 살 준비를 해야지. (얼마전 수도에서 온 사람에게 들은 소식이었다. 전쟁이 끝나고 반쯤 박살난 국내 경제를 열심히 부흥 시키던 황제는 슬슬 내실이 안정되자 북부를 노리고 있다고 말했다. 에반은 그 말에 코웃음을 치긴 했지만.) 다이어트는 무슨. 평소에 네가 먹는 양만 봐도 다이어트랑은 거리가 멀다. 그리고 네가 다이어트할 살이 어딨어? 매일 같이 뛰어다니면서. 임무를 위해선 밥도 잘 먹어야하는 법이다. (결국 자신이 준 고기를 다시 주지 못하고 입으로 넣는 릴리아를 보며 에반은 흐뭇하게 웃었다. 그녀가 어릴때부터 잘 먹어야한다고 가르쳤던 그였기에 먹는 모습만 봐도 행복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맘만 먹으면 못찾을건 없지. 마을 사람들 대부분이랑 알고 지내는데 몇번 찔러보기만 해도 금방 캐낼 수 있다. 네가 누군가랑 사귄다는 소문이 돌았으면 진즉에 찾아냈겠지. (장난스런 표정으로 놀리듯이 얘기한 에반은 릴리아의 말에 아쉽다는 표정으로 얘기했다.) 그러냐? 안가는건 네 마음이지만 ... 기왕이면 예쁜 모습도 보면 좋을 것 같은데 말이야. 그리고 이번엔 내 동료들도 다 온단다. 거기서 네가 자란 모습을 한번쯤 보여드리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은데, 아니냐? (릴리아가 거절하기 힘든 발언으로 축제에 데려갈 생각인 에반은 걱정말라는듯 덧붙였다.) 황제 폐하는 어차피 나만 알현할꺼다. 알현하는 과정이 생각보다 복잡하거든. 너도 같이 알현하게 해달라고하면 가능하겠지만, 한번도 예법을 배운적이 없지? 나는 예전에 몇번 뵌적이 있으니 걱정하지 않아도 괜찮다. 그래도 임무에 갈래? (빙긋 웃으며 얘기한 그는 마지막 고기 조각을 입에 넣고 무릎 위에 올려둔 냅킨으로 입을 닦았다.)
>>545 아니, 북부 토벌이요? 제가 아는 그 마물을 말이에요? 정말... 어... 정말 대단하네요... (토끼처럼 눈을 동그랗게 뜬 그녀는 못 믿겠다는 듯 말하더니 끝에 와서는 매우 복잡한 감정이 담긴 애매한 말투로 이야기했다.) 그럼 저는 이제 뭘로 먹고살아야 할까요? 아저씨는 뭐든 잘하시니까 걱정 없지만, 저는 힘 쓰는 것밖에는 잘하는 게 없는데. (장난스럽게 말하던 그녀는 마치 바람 빠진 풍선처럼 천천히 의자에 등을 기대며 점점 힘없이 이야기했다.) 그때는 다이어트하던 때가 아니었어요! 다이어트는 그... 어제! 어제저녁부터 시작했단 말이에요! 그리고 저 진짜 요즘 살쪘어요! 이거 봐요! ... 원래 다이어트는 적게 먹고 많이 움직이는 그런... 건데 아저씨가 그렇게까지 말하니까... 많이 먹을게요... (그녀는 황급히 똑바로 고쳐 앉아 팔을 들어 보이다가 그의 미소를 보고는 멈칫하더니 기세가 한풀 꺾였다. 그 직후 다이어트할 살이 어디 있냐는 말을 뒤늦게 인식한 그녀는 당황한 듯 말끝이 늘어지더니 자연스러운 척 순순히 뜻을 굽히며 급하게 말을 끝냈다. 그녀는 머쓱함 가득한 표정으로 깨끗하게 비워진 자신의 빈 접시를 바라보았다가 그를 힐끗 바라보더니 헛기침을 하며 딴청을 피웠다. 릴리아는 그렇게 웃는 건 반칙이 아니냐며 에반에게 한 마디 하고 싶은 것을 꾹 참으며 얼굴이 빨개지지는 않았는지 걱정스러운 듯 괜히 자신의 볼을 손등으로 한 번 쓸며 속으로 투덜거렸다.) 제발 아니라고 해주세요...! 아저씨, 사실대로 말해봐요. 대부분이 아니라 마을 사람 전체, 아니, 세상 사람 전체랑 알고 지내는 거죠? 맞죠? 그러니까 아저씨 말을 바탕으로 결론을 내리자면... 뭐든 아저씨 몰래 하려면 마을 밖에서 해야 한다는 뜻이네요?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앓는 소리를 내던 그녀는 에반에게 다 안다는 듯한 목소리로 말하며 마치 이 비밀을 자기만 알고 있겠다는 사람처럼 그의 대답을 재촉하더니 진지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아니, 그럼 평소에는 안 예쁘다는 뜻... 네? 동료분들이요...? (릴리아는 예쁜 모습도 보면 좋을 것 같다는 그의 말에 장난스럽게 투덜거리다가 그의 동료들이 모인다는 말을 듣고 순간 심각한 표정으로 바뀌며 귀를 의심했다.) 저는 알현하지 않아도 괜찮을 것 같아요! 예법은 당연히 배워본 적도 없죠! 여기 들어오기 전에 아저씨도 봤잖아요, 인사도 엉망인 거. (그나마 예법이라고 할 수 있을 만한 것은 이전에 마을에 잠시 머물렀던 귀족 아가씨와 우연한 계기로 친해지며 장난처럼 배우게 된 숙녀나 신사의 인사법이나 간단한 사교춤뿐이었다. 그마저도 오래 연습한 게 아니라 완벽히 몸에 익지 않아 릴리아는 자신의 인사가 매우 어설프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춤은 기본 스텝 한두 개가 겨우였기에 알고 있다고 하기에도 부끄러웠다.) 그... 러니까... 일단 집에 가면서 생각해볼게요! (임무와 축제를 두고 끊임없이 고민하던 그녀는 그가 다 먹은 것을 보고는 도망치듯 자리에서 일어서며 계산을 하기 위해 움직였다. 사실 그의 동료들이 온다고 했을 때부터 릴리아에게 거절이라는 선택지는 없어진 것이나 마찬가지였으나, 막상 직접 만난다고 생각하니 다시금 두려움이 생긴 탓에 섣불리 대답할 수가 없었다.)
새 지저귀는 소리와 함께 '그것'은 몸을 가볍게 풀었다. 튼튼한 4개의 다리를 쭉 뻗고 가볍게 기지개를 펴자 구름이 사방 천지로 흩어지는 느낌이 들었고, 사슴의 눈망울과 닮은 양 눈은 천지 만물을 꿰뚫어보는 듯 했으며, 용과 같은 그 머리는 강인한 의지를 표현하는 듯 했으나, 용과 같이 강인한 인상보다는 부드럽고 편안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그것'이 사방을 둘러보자 수많은 동물들이 잠에서 깬듯 천천히 몸을 일으키고 있었고, 그것은 그 광경을 바라보며 자신이 있던 자리에서 발을 가볍게 구른 뒤 자리를 박차고 뛰어 올랐다. 발에 달린 하얀색 갈기는 마치 구름을 흩날리며 하늘을 수 놓는 듯 했고, 온 세상에 생명력을 흩뿌리기라도 하듯이 오색창연한 몸의 빛을 내며 대지와 창천, 그 경계를 거닐기 시작하였다.
"─────!!"
휘파람 소리와도 같은 울음소리가 창공 너머로 울려퍼지자 가벼운 산들바람이 휘몰아쳤다, 수많은 생명들을 보듬는 목소리였다. 아침이 왔음을 알리고, 또 저녘이 되면 다시 한번 몸을 내달려 수많은 이들에게 평안함을 안겨다 주는 것. 360여가지 털을 가진 동물들의 정점에 선 존재의 의무감이라고 봐도 무방하겠으나, 역설적이게도 '그것'은 그 자각을 가지지 않았다. 오히려 자신은 이 대지에게 너무나도 많은 것을 받았으며, 이 하늘 아래에서 자유로이, 평안함을 깨닫고 살아간다면 그것으로 족하다고 생각하였으니까. 그렇가 한참을 내달리던 '그것'은 조심스레, 풀이 자라지 않은 땅 위에 내려 섰다. 유려한 한폭의 그림을 보는 듯한 자태 그대로, '그것'은 목을 뻗어 조심스레 물가에 자신의 입을 가져다 대었고, 조심스레 한 모금씩 물을 머금기 시작하였다. 이 장면을 누군가 보고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은채 말이다.
그래도 북부 토벌은 긴 시간 진행될 예정이다. 교활하기 짝이 없는데다 수도 만만치 않은 놈들이니까 말이야. 적어도 우리가 살아있는동안은 끝나지 않을테니 일자리 걱정은 안해도 될꺼다. (먹고 사는 일을 걱정하는 릴리아의 표정에 에반은 귀엽다는듯이 바라본다.) 뭐, 정말 할 일이 없어지면 내가 먹여살릴테니 걱정 말거라. (평생 데리고 살 예정인지 걱정말라며 웃어보이기까지 한다.) 어제 저녁부터 다이어트를 했다고? 그렇다기엔 내가 옆집 아주머니에게 받아온 푸딩은 정말 잘 먹던데 ... 사실 네가 활동하는 양에 비해서 적게 먹는거니까 꾸준히 잘 먹도록 해라. 한번에 많이 못먹는다면 자주 먹기라도 해줘야하니까. (마물을 만나면 정말 엄청나게 움직여야하고 만나지 못하더라도 북부의 지형을 생각하면 에너지 소모도 만만치 않을 것이다.) 마을 바깥에도 내가 아는 사람이 없을거라고 생각하는거냐? 물론 마을보다야 적긴 하겠지만 말이다. (큭큭대며 장난을 치던 에반은 그녀의 말에 고개를 저었다.) 평소에도 예쁘지만 더 예쁜 모습을 보고싶다는거 아니겠니. 나한테 초청장이 온 것을 보면 다른 동료들도 분명히 왔을테니까 말이다. 직인이 찍혀있으니 거절하기도 힘들테고. (하지만 에반처럼 그나마 몸이 성한 동료들은 별로 없었기에 그도 걱정이 많았다. 대부분은 수도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살고 있었으니까.) 그래도 이번에 축제에 가면 저번에 그 귀족 아가씨도 만날 수 있을꺼다. 이름이 ... 아스타샤, 아스타샤였지. 물론 네가 싫다면 어쩔 수 없지만 긍정적인 방향으로 생각해주면 좋겠구나. (집에 가면서 생각해본다는 말에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사실 그도 동료들이 몇명이나 올지 정확히 알 수가 없었다.) 다 먹었으면 집에 가야지. 옆집 아주머니가 오늘은 케이크를 가져다 주셨으니까 디저트는 집에 가서 먹는게 좋을 것 같은데 ... 어때?
>>548 죽을 때까지 일자리 걱정이 없다는 건 다행... ... 이겠죠? (마물이 토벌된다면 자신이 일자리를 잃어도 안전이 높아질 것이고, 마물이 토벌되지 않는다면 여전히 위험은 많겠지만 일자리가 지켜질 것이다. 이 외에도 마물의 부산물과 관련된 많은 것들이 큰 변화를 맞이하는 등 분명 토벌은 여러 곳에 다양한 영향을 미칠 것이었다. 그녀는 토벌이 사람들에게 가져올 이득과 문제점을 두고 과연 어느 쪽이 더 좋은 일인지 가만히 눈을 감고 얼굴을 찌푸린 채로 고민하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릴리아는 결국 다행이라는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의문문으로 말을 끝맺었다.) 아저씨, 그런 말은...! ('꼭 프러포즈 같잖아요'라는 뒷말은 얼굴을 가린 두 손에 의해 밖으로 나오지 못하고 묵음 처리되어 사라졌다. 릴리아는 잠깐의 말 몇 번에도 사람 마음을 이리저리 움직이게 만드는 에반을 보며 분명 심장 때문에 오래는 못 살겠다고 속으로 한탄했다.) 푸딩... 은, 그건, 그것만 먹고 다이어트 하려고 했어요... 진짠데... 네... 많이 먹고 자주 먹으면서 열심히 뛰어다닐게요. (푸딩 얘기가 나오자 소심하게 반박해보려던 그녀는 이젠 정말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여기보다는 소식이 느리겠죠! 일단 멀리 있는 마을로 가서 인적 드문 곳을 찾는다면... (역시 아저씨는 전 세계 사람이랑 알고 있는 게 맞았다며 이야기하던 그녀는 무슨 계획이라도 꾸미는 사람처럼 장난스럽게 중얼거렸다.) 그런 걸 전부 알려주시면 거절을 못 하는데... 최대한... 긍정적으로... 검토하겠습니다... (평소에도 예쁘다는 말에 순간 멈칫했지만, 이제는 심장이 떨어지든 말든 전부 포기한 것처럼 릴리아는 그저 눈만 질끈 감았다가 떴다. 그의 말을 모두 듣고 입술을 깨물며 고민하던 그녀는 한숨을 쉬듯 말을 내뱉었다. 그 후로도 한참을 생각하던 릴리아는 축제에 가기로 마음먹었지만 결국 대답은 끝까지 미루기로 했는지 애매하게 대답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미움받는 것도 용기가 필요하다던데, 애정을 받는 것도 용기가 필요할 줄은 몰랐다. 그녀는 에반의 말을 듣고 그의 동료들이 자신을 미워하지 않을 것이라는 걸 머리로는 잘 알고 있었지만 마음으로는 아직 완벽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그들을 마주했을 때 울지 않을 자신도 없었다.) 좋아요! 그럼 집에 가서 먹을래요. 옆집 아주머니께서 주신 건 안 먹을 수가 없죠! 아주머니의 케이크! 거부할 수 없는 맛! (계산을 마친 그녀는 이번에는 자신이 먼저 가게 문을 열어주려 하며, 디저트 이야기로 생각을 환기시키려는 듯 그의 말에 좀 더 활발하게 대답했다. 마지막에 가서는 노래를 부르듯 말에 음정이 들어갔다.) 빨리 가요 아저씨! (릴리아는 장난스럽게 웃으며 그에게 빨리 오라는 듯 손짓했다.)
일단 국가가 참여한다는 것만으로도 처우가 개선이 될테고 들쭉날쭉한 의뢰 보상금도 어느정도 평균화 될꺼다. 물론 그만큼 사상자가 많이 나오기도 하겠지만 국가적인 사업, 그것도 이런 류의 사업이라면 그런 것들을 전제로 깔고 가니까 말이다. (고민하며 얼굴을 찡그린 릴리아를 보고 에반은 답해주었다. 하지만 그도 그것이 좋은 일이 될지 나쁜 일이 될지는 함부로 예측할 수가 없었다.) 음? 왜 그러냐? 내가 무슨 말을 했다고? (빙그레 웃으며 대답하는 그의 표정은 릴리아의 마음을 아는듯 모르는듯 오묘했다. 하지만 어쩐지 재밌다는 느낌이 나는 표정은 왠지 알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다치지 않으려면 잘 먹기부터 해야하니까 말이다. 그리고 멀리가도 소식이 느리긴 해도 나한테 닿기는 할테니까 ... 그러면 내가 직접 가야지. (장난스런 표정으로 에반은 살짝 윙크까지 하며 말했다. 하지만 반쯤 진심이 느껴지는 것 같기도 하다.) 그럼 같이 가는걸로 알고 있으마. 가서 무도회 같은 것도 즐기려면 드레스도 한벌 맞춰야하니까 축제 일정보단 좀 더 일찍 출발해야해. (어차피 자신과 갈거라는걸 알고 있는 것처럼 에반은 말했다. 이미 수도에도 묵을 곳을 마련해놨고 짐만 싸서 출발만 하면 되는 상황이긴 했다.) 늦게 간다고 케이크가 어디 안도망간다. 천천히 가, 천천히. (릴리아가 열어준 문으로 나가며 에반은 감사합니다, 레이디. 라는 말을 하면서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밖으로 향했다. 그리고선 빨리 오라는 릴리아의 말에 결국 고개를 끄덕인다.)
// 막레쯤 되지 않을까 싶네~ 릴리아 너무 귀엽다 ㅠㅠㅠ 일댈로 이어가고 싶은 마음이 커져버렸어
>>550 처우 개선은 나쁘지 않네요! 동료들도 이것 때문에 가끔 얘기가 있었거든요. 음... 토벌이 되도록 좋은 쪽으로 작용하면 좋겠는데 말이에요. (그의 말을 들으며 열심히 고개를 끄덕이던 릴리아는 한숨처럼 이야기했다.) 그러니까 이런...! 아니지. 방금... —... ... 아, 몰라요! (이렇게 아무것도 모르는 척하는 그의 모습과 방금 전 했던 말 모두 지적하고 싶었는지, 횡설수설하듯 말을 바꾸며 이야기하던 그녀는 결국 두 개 모두 실패하고 자포자기하듯이 말했다. 그래도 불만은 드러내고 싶은 듯 뚱한 표정으로 볼을 부풀리며 삐진 척을 해 보였다.) 정말요? 직접 올 거예요? (그의 말을 알아서 해석하고 혼자 기대하며 신난 듯 하다가도, 아차 싶었는지 헛기침을 하며 그럼 잡히지 않게 도망가야겠다고 장난스럽게 이야기했다.) 드레스 같은 건 한 번도 입어본 적이 없는데 걱정이네요... 사실 그냥 다 걱정이에요...! (가는 걸로 알고 있겠다는 그의 말에도 부정이나 긍정을 표현하지 않는 것으로 릴리아는 결국 암묵적으로 동의했다. 그녀의 걱정 가득한 목소리가 보여주고 있는 것처럼, 실제로 릴리아는 지금까지 치마나 장신구 모두 직접 사본 적이 없었다. 이렇게 일반적인 치마도 입어본 날이 손에 꼽을 정도인데 드레스는 분명 말할 것도 없을 것이었다. 유행이고 뭐고 꾸미는 것과는 거리가 멀었던 그녀는 드레스를 포함해 새로운 걱정들로 머리가 더욱 복잡해졌다. 준비부터 출발까지 일이 생각 이상으로 막힘없이 술술 풀리는 것 같다고 느낀 릴리아는 어쩐지 그에게 당한 것 같다는 기분을 지우지 못했다.) 제 케이크는 안 도망가도, 아저씨 케이크는 도망갈걸요? 제가 아저씨 몫까지 다 먹을 거니까요! (그의 인사에 눈을 휘며 예쁘게 웃어 보인 릴리아는 가게 주인에게 인사를 하고 에반을 따라 나갔다. 그리고 멀찍이 달려가더니 장난스럽게 그에게 외치며 멈추지 않고 그대로 집 방향으로 뛰어갔다.)
/ 그럼 이쯤에서 막레로 할까? 수고했어!! 최대한 귀여운 릴리아가 될 수 있도록 노력했는데 다행이다! :3c 아저씨 너무 멋있어! 쿄쿄쿄 >:3c 나도 일댈 욕심이 정말로 큰데 내가 지금 일댈을 하기에는 현실의 내가 너무 바빠버렸다... 미안해... 자유 상황극에서 끝났던 것도 못다말에서 부를 수 있으면 언제가 될지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시간이 지난 나중에라도 기회가 생겼을 때 슬쩍 에반 아저씨를 불러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 물론 참치가 괜찮다면 말이야!
육중한 소리와 함께 회백색 머리카락의 중년 남자가 들고 있던 거검이 바닥에 꽂혀있었다. 아니 그것은 검이라고 부르지 못할 물건이었다. 날이 서있지 않아 적을 무게로 베어가른다기 보다는 패죽이거나 후려쳐 죽이는데 아주 적합한 물건..... 수많은 격전을 치루었음에도 금 한올 가지 않은 자신의 애병에 대해 남자는 숨을 고른뒤 천천히 주변을 바라보았다.
"다 죽었냐. 다 죽었냐고."
자신을 따라오던 별동대를 바라보며 조용히 뇌까린다. 20명 남짓이었지만 본대가 후퇴하기 위한 시간을 벌기 위해서 자신이 고른 정예만 데리고 왔는데..... 살아 돌아갈 생각은 전혀 하지 않았지만, 남자는 너무나도 아쉬웠다. 귓가로 두장 300명씩 때려잡으면 간단하지 않냐던 막내 녀석, 돌아가면 이번에는 남편이랑 제대로 여행 한번 다녀오겠다는 홍일점, 마지막에 마지막까지 자신의 명령에 항명하다가 몸이 갈가리 찢어진 부장 녀석까지.... 살려가지 못한게 자신 천추의 한이었다.
"야 그래도 솔직히 진짜 잘 버티지 않았냐."
남자는 천천히 산 아래를 내려다 보았다. 다시 거대한 둔기를 뽑아들고 어깨에 걸친채 응시하니 숲으로 무언가 꾸물꾸물 기어올라오는 것이 보인다. 아마 이것이 마지막이지 않을까란 생각이 남자의 머리로 스쳐지나간다. 그래 마지막까지 춤을 춰보자꾸나, 연심도, 명예도, 꿈도, 금전욕도.... 세상만사 모든 것을 이미 하늘 너머에 두고 왔으니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자유 아니겠느냐."
동시에 남자가 뛰쳐내려간다. 마지막에 마지막까지 연애 한번 못하고 죽을꺼라던 부장녀석의 말이 귓가에 울리지만, 뭐 상관 없지 않을까.
어둡고 습한 지하실은 그 안에 있는 남자와 잘 어울렸다. 곰팡내라도 날듯한 외관과 달리 크레졸과 포름알데히드액의 냄새에 쩔어있는것 까지. 남자는 책상에 앉아서 불도 켜지 않은 채 책을 읽고 있다가, 당신이 오자 어두운 황록색 비늘로 덮인 손을 들어 천천히 안경을 벗고 의자를 돌려 당신을 바라보았다.
"이런 시간에 무슨일인가. 하긴, 의사를 찾아온 사람에게 무슨 일이냐 묻는것도 어처구니없는 질문이네만."
그렇게 말하고선 낮게 껄껄 웃은뒤에야 남자는 의자에서 일어나 늘어진 꼬리를 유려하게 저으며 당신을 맞이했다.
"늘 하는 말이네만, 의사에게는 거짓말해선 안 되네. 그랬다가 손해보는것은 분명히 자네야. 어디서, 무엇을 하다, 어떻게 다친건지 상세히 말해보게."
이곳은 항상 그래왔다.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풍기는 약물 냄새를 따라 발걸음을 옮기면 언제나처럼 유들유들하게 대하는 상대의 모습에 인상을 찡그리게 된다. 쓰고있던 선글라스를 벗자 묘안(고양이눈)이 미끈하다 못해 장신구 같다고 느껴지는 황녹색 비늘을 응시한다. 진청색 머리카락을 길게 길러, 여인의 묘한 분위기에 발 맞춰 밤하늘을 수놓은 느낌을 연상시키는 느낌이었고, 목에 난 아가미의 흔적은 그녀가 육지생물이 아님을 표현하고 있었다. 담배를 빼어물려다가 이 곳이 어떤곳인지 떠올리고는 물었던 것을 다시 담배갑에 넣으면서, 그녀는 천천히 의자에 털썩 주저 앉았다.
"글쎄, 이곳까지 아득바득 기어왔는데..... 싸우다가 눈먼 칼에 맞아서 물불 안가리고 뛰쳐 나왔다가, 생각 잠깐허니 당장 떠오르는 곳이 여기밖에 없더라고?"
여인이 파리하게 질린 안색으로 입꼬리를 올린다. 젊은 나이었지만 이 골목에서는 모르는 이 없는 미친 교룡, 청상아리의 그녀가 천천히 뱀을 바라본다. 포식자의 입장에서 보자면 분명 한입거리도 되지 않겠으나, 오늘밤을 날 수 있는지는 이 눈앞의 남자에게 달렸으리라. 아니, 오히려 자신이 죽임을 당할 수도 있겠지.
"아재, 한두번 보는것도 아니잖수. 좀 잘 좀, 안아프게, 싸게싸게, 하룻밤만 부탁하겠수."
그녀가 천천히 입고 있던 백색의 양복을 걷어 붙인다. 겉어붙인 새하얀 속살에는, 탄탄하게 잡힌 복근 그 밑으로 꽤 깊이 난 상처가 선혈을 내뱉으며 그녀의 목숨을 갉아먹고 있었다. 이곳에 오자마자 긴장이 풀려버린 것일까, 그녀는 숨을 몰아쉬며 입을 열었다.
"아 참, 너무 아파서 그런디.... 담배도 한까치 피워두 되겠수?"
/청상아리 여성 수인이에요! /뒷골목에서 꽤 이름 날리는 폭력배입니다! 자주 들렀다는 설정으로 잡았는데 괜찮을까요? ;) /오지콘끼도 살짝 있어요(속닥속닥)
솔직히 지금 남은 담배 마저도 돗대라서 피운다 하더라도 회복하고 나면 언제 사다 피울 수 있을지 조금 걱정이 들었다. 그래도 지금 이 눈앞의 남자, 그것도 몇년이나 자신을 뭐라고 해온 이 남자라면 조금은 피우게 해줄 수 있지 않을까, 라는 헛된 망상을 하며 키득키득 웃었다. 평소의 그녀를 생각하면 절대로 생각 못할 모습이었다. 대놓고 뒷골목에서 상대를 만나면 "이 ———야!! 죽을만큼 뭔들 못할까!!" 라는 말이 대번에 튀어나올 정도로 성격이 뭣 같다고 알려져 있었다. 괜히 광교룡(미친 교룡)이라는 이명이 붙은게 아니라고 증명하듯, 그녀는 광기와 독기, 타고난 신체능력을 바탕으로 뒷골목에서 자리를 잡아갔다.
"그래도 내가 아재 앞에서만 이래. 다른데에서는 말이야, 응? 진짜 이런 웃는 낯짝도 잘 안한다고."
그래도 매번 금전은 잘 챙겨주는 편이었다. 게다가 이곳이 그나마 안전지대인것도 어쩌면 그녀의 덕일지도 몰랐다. 금전은 비싸더라도 실력은 확실한 이 뱀수인은 뒷골목에서 상당히 위험한 위치임을 알까? 언제 적대 조직을 치료해줬다는 의미 하나만으로 잡혀갈 수도 있다는 것을 말이다. 어쩌면 그녀가 빨리 정상을 차지하려는 것도.... 결국 돛대는 피우지 않기로 한다. 아픈 것 정도야 어떻게 참으면 되고, 게다가.... 솔직히 그를 보며 속을 썩이고 싶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녀는 우물우물 거리면서 잠시간 고민을 했다. 솔직히 처음 만났던 2년전 부터, 의미없이 살짝 다치더라도—가령 그게 스친 정도의 아주 가벼운 상처더라도— 결국 그녀는 쫄래쫄래 이곳으로 와서 상처를 치료하고 갔다.
"야, 내가 미쳤나보다야....."
방년 24세, 한창 대학교에서 봄을 찾았을 나이였지만, 그녀에게는 전혀 허락되지 않았던 여성으로서의 마음. 그녀는 작게 자신의 깊은 곳, 콩닥거리는 마음을 진정시키면서 유려하고도 부드러운, 예술적이라고도 부를 수 있는 그의 모습을 바라보며 수술 준비를 하였다. 한순간이었지만 얼굴에 혈류가 모였었는지 순식간에 발그레 해졌지만 이내 그녀는 쓰게 웃으며 자리에 드러누웠다.
"끝나고, 그 다음에 실컷 피우게. 혹시 아는가, 이러면 피우고 싶어서라도 살 의지가 생길지."
당신의 웃음에 응하듯 옅게 웃음소리가 깔린 목소리였지만, 결국은 피우지 말라는 소리였다. 그렇다고 그 말이 아주 헛 된 말은 아니었지만. 오늘내일 할만한 상처였으니 당신의 의지도 필요했다.
"그런것 같기는 했지. 여기서 들리는 자네 이야기를 듣다보면 밖에서는 어떤지 대강 가늠은 된다네."
이 축축한 지하로 떨어진 자들은 당연하다면 당연하게 다들 거기서 거기였다. 조직다툼, 중독자, 망나니. 뒷골목에서 굴러먹는 자들. 교룡에게 물어뜯긴 자들은 물론이었다. 그들 전부 이 어두운 곳에서 뱀에게 목숨을 얻어간다. 당신만큼 뺀질나게 오는자는 거의 없었지만. 아니, 전혀 없던가. 이름을 날리는 만큼 돈이 썩어 넘치는걸까 하는 생각을 종종 하곤 했다.
"이제 알았는가 광교룡? 알았으면 늦기전에 정신을 챙기는게 좋을걸세. 자네는 아직 젊으니... 아니, 젊기 때문에 이런 꼴을 만들어 오는건가. 나는 요새 종이에 베이는것도 겁나더마는. 쯧, 정말로 자네는 자네 태생에 감사하는게 좋아."
껄껄 웃으며 농담치레를 하는가 싶더니 금세 다시 툴툴거리며 안경을 쓰고, 장갑을 끼고, 원래는 순백이었을 가운 주머니에서 주사며 약병따위를 꺼냈다. 그 사이에 당신이 발그레 해지는것을 보았을 수도 있고, 못 보았을 수도 있다. 서른 여덟. 보았더라도 못 본척 할만한 연령이었다. 괜스레 나이 이야기를 하고, 혀를 차고 상처를 만지기 시작했다.
/낮에는 접속을 잘 못 해서 조금 늦었다...! /광교룡 묘사도 엄청 매력적이네요! 심지어 얀끼까지...!
말은 이렇게 하면서도 툴툴거리면서 결국 그의 말대로 담배갑은 양복 안족 주머니로 들어갔다. 갑갑한 셔츠를 풀어헤치고 이를 살짝 갈아붙인다. 일종의 습관이었다. 담배가 떨어졌을 때나 간혹 기분이 나쁠때, 그녀는 자신의 이중으로 나있는 이빨을 살짝 갈아붙임으로서 그 기분을 진정시켰다. 물론 지금 이 눈앞에 있는 남자를 볼때도 마찬가지였다. 기분이 나쁘다기 보다는, 가슴 한구석이 계속 먹먹해와서, 아니, 그 이상으로 가슴이 두근거려서 말이다. 먹먹하게 눈을 침잠시키며 그녀가 조용히 뇌까린다.
"그렇게 하면.... 아재 만날수 있잖아."
뒷말은 애써 삼킨다. 지난 2년간 가만히 지켜보면서 그녀는 자신 눈앞의 뱀을 바라보아 왔다. 물론 그 시선이 가장 많이 향하는 곳은 자신이었지만, 다른 곳으로 시선이 향할 때, 특히, 사창가의 여인들이 이곳으로 와서 남자에게 꼬리칠 때, 그 씁쓸함은 배가 되었다. 자기도 만약 꾸미고 가꾼다면, 조금이라도 봐줄까? 아니, 나는 저런 모습은 전혀 어울리지 않아. 남을 찢어발기고, 주먹을 휘둘러 굴복 시키는 것..... 결국 자신이 알고 있던건 그것뿐이었으니까. 그래서 그런걸지도 모른다. 일부러 폭력을 휘두르고 다쳐서 이곳에 오면, 그가 나를 더 봐줄테니까. 나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있다고 했지? 하지만 그거 알아? 당신은 나에 대해 전부는 몰라. 그걸 알고 있다면 나를 그런 미소로 봐주지 않을테니까. 그래도 괜찮아, 당신은 내가 아니니까, 모를꺼야.
"정말 그래....?"
젊다고 해서 좋은게 아니야, 입밖으로 낼수 있는 말을 다 하지 못하는건 나이가 많고 적어도 관계가 없잖아. 그래서 더 그러는거야. 당신만 매순간을 바라 보는데 결국 그 시선의 끝엔 내가 없잖아.
- 이렇게 애달픈데. - 이렇게 애틋한데.
말을 하지 못하는게 너무 슬퍼. 그렇게 상념이 이어질 찰나, 상처에서 통증이 재차 올라오고, 그녀는 가볍게 숨을 몰아쉬며 꼬리를 천천히 내렸다. 자신의 머리색과 닮은 짙푸른 비늘을 가진 매끈한, 하지만 상처투성이의 꼬리였다. 그와는 완전히 정반대 되는, 너무나도 망가진 모습을 대변하기라도 하는 모습이었다.
"..... 아재, 그럼 나 한숨 잔다."
눈 떴을때, 당신이 있었으면 좋겠어.
그러면 안심하고, 나도 꿈을 꿀수 있을테니까.
/괜찮아요! 내일부턴 저도..... (먼산) 그러니까 천천히 가죠! /컴퓨터라 픽크루를 못가져 왔네요! 대신 테마곡을 가져왔어요! /얀에도 종류가 있다죠!!(의존형 + 자해형이라고)
말에 탄 일단의 병사들이 쉼 없이 달렸다. 가벼운 무장을 한 그들은 빽빽한 삼림 속에서도 높은 속도를 유지하며 쉼없이 달리고 있었다. 그것만으로도 묘기였으나, 정작 그들 안에서는 만족감을 느끼지 못하기는 듯, 고성이 터져나왔다.
"더 빨리!"
개중에서 선두의 남자, 혈기가 넘칠 법한 젊은 나이의 장교는 목에 핏대가 설 정도로 소리쳤다. 짧고 가벼운, 그러나 날카롭게 벼려진 기병도를 한껏 치켜들고서, 장교는 바람을 가르고 달리는 기병들을 이끌고 필사적으로 말을 몰아갔다.
"오늘 반드시 놈들의 숨통을 끊어야 한다! 다음은 없다!"
사력을 쏟아 겨우 얻어낸 1번의 승리, 그러나 2번의 결과를 만들 여력 따위는 없다. 이 전투의 승리는 반드시 전쟁의 승리로 이어져야 한다. 그러기 위한 유일한 방법은 섬멸 뿐. 그러기 위해서 그들은, 병력이 흩어지는 위험을 감수하고 패주하는 적을 쫓아 깊숙이 적진으로 파고들고 있었다.
위험천만한 임무였다. 그러나-.
"너희라면 가능하다! 내가 훈련시킨 네놈들이라면!"
장교는 이를 악물고 소리치며 나아갔다. 목소리에는 절박함 이상으로 자부심이 강하게 묻어났다. 그 자부심의 원천이라고 할 만한 등 뒤의 병사들 또한 기꺼이 호응하며, 장교와 합을 맞춰 달리고, 또 달렸다.
그러나 한편으로 그들은, 약간 불편한 눈으로 장교의 등을 바라볼 수밖에 없다. 그들을 자국 제일의 정예로 만들어 준 장교는 한편으로 외국인이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오늘 그가 베어야 할 상대가 고향의 군대임을 생각하면 더욱이, 그들조차도 의심의 눈길을 보낼 수밖에 없다.
"조금만 더! 곧 있으면 선발대와 합류해 포위진을 짤 수가......?"
그런 의심을 스스로도 알기 때문인지, 아니면 고향을 등지는 자괴감 때문인지, 더욱 악을 쓰며 병사들을 인도하던 장교는 문득 속도를 줄이기 시작했다.
그의 눈에 들어온 것은 무수히 늘어선 선발대의 시체,
그리고 야수의 눈을 가진 한 사내였다.
장교는 침을 삼키고 말에서 내렸다. 그의 표정은 이미 참담했지만, 손은 놀라울 정도로 정교하게 움직여 앞을 경계했다.
그 짧은 순간에, 그녀는 꿈을 꾸었다. 솔직하게 그에게 자신의 심정을 고백하는 그런 내용의 꿈이었다. 그렇게 손을 내밀려는 순간 피범벅이 되어있는 손이 눈에 들어온다. 아차하는 순간 그의 눈에 어린 경멸감을 보며 소녀는 절망하고야 말았다. 이래서야 내가 꼭대기로 올라가고자 한 이유가 없는거잖아. 꼭대기로 올라간다면 그가 한번은 나를 봐주지 않을까 싶어서, 아득바득 올라갔던 것인데..... 울었다. 한참을 울었다. 그렇게 그 꿈의 끝에서 소녀는 깨달았다. 결국 봐주지 않는다면 나만을 돌아보게 만들자고, 징짜 끝으로 올라가서 내가 파멸을 하게 되더라도.... 그 순간 소녀는 눈앞의 자신의 모습을 내려다 보았다. 수많은 피를 밟고 일어선 그녀, 정점에 도달해서 많은 이들을 보고 있지만 결국에는 그의 마음을 얻지 못한채 공허하게 있는 모습을 말이다.
—안돼. —싫어. —어째서 당신이 그런눈으로 나를 보는거야?
허우적대며 남자를 뒤에서 껴안으려 한다. 하지만 그 모든것이 허상이라는 듯 남자는 여인이 된 소녀를 무시한채 더욱더 멀어져갔고, 이내 그녀는 눈물을 쏟아내며 애처로울 정도로 울음을 터트렸다. 잘못했어요, 가지 말아주세요. 제가 전부 잘못한 거에요. 그러니까....
"아....."
수술이 마무리 지어진것일까, 더이상 배쪽에서 통증이 느껴지지 않았다. 하지만 아까전의 꿈의 소녀의 모습이 진심이라는 듯 그녀는 눈가에 흘렀던 눈물을 느낄수 있었고, 천천히 떠듬거리며 입을 열어갔다. 아직 제대로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지만 그녀의 시선 끝에 그 유려한 모습의 뱀의 모습이 비쳐졌고, 소녀는 자신도 모르게 입가에 호선을 그리고야 말았다.
"아재...."
잠깐 움직이려하자 마취가 덜풀린것에 더해 완전히는 가라 앉지 않았다는 듯 느껴지지 않던 통증이 그녀를 엄습해왔다. 하지만 무언가를 결심이라도 한 것인지 그녀는 가볍게 숨을 몰아쉬면서, 애써 담담한 표정을 지어보이면서 환자로서의 권리를 행사하기 시작하였다.
피범벅이된 장갑을 벗는것으로 수술을 끝내고 곤히 잠든 당신을 보았다. 남자로서는 보기 드문 풍경이었다. 대부분은 고통에 일그러진 표정을 지었으니까. 비단 당신만이 아니더라도. 꾸덕한 습기와 어둠, 고통과 죽음에 절여진곳을 기는 뱀을 좋아할 자는 없었기에 구태여 자신을 찾아오는 당신에게 정이 붙지 않았다고 하면 거짓말이기는 했다. 그래서 더더욱 당신이 건강하기를 바랐다. 다치지 않기를. 아프지도 않기를. 그렇게, 영영 이 저승길 문턱을 떠나기를. 너무 늦기 전에. 그런 생각에 빠져 한참을 바라보던 무렵 당신의 눈에서 눈물이 흐르는것을 보고 남자는 적잖이 당황했다. 자연스럽게 깨는것을 기다리는게 아니라 인위적으로 깨워야 하는지, 아니면 손수건이라도 꺼내야 하는지. 아니, 오히려 그게 더 안 좋은 선택인지 갈피를 잡지못해 역으로 아무것도 못 하고 있을 무렵 당신이 눈을 떴다.
"으응, 깼는가."
침착하자. 라는 마음을 다행히 몸이 잘 따라주었다. 아무일도 없었다는마냥 대답하고 주머니 속 물건들을 만지작댔다. 손수건이든 라이터든 필요한것을 줄 수 있도록.
"불을 먼저 달라할거라 생각했는데 물이 더 급했구먼. 뭐, 몸에는 그게 더 좋다네."
아무리 그래도 정말로 일어나자마자 담배를 찾지 않았다는것에 조금 만족하면서 적당히 미지근한 물병을 꺼내와서 당신에게 건넸다. 찬 물은 속 버린다.
/뭔지 궁금하니까 해도 된다고 할게요!! :3 /교룡씨 얀에 진심인 분이구나ㅋㅋ /헉 픽크루 헉 역시 얀데레하면 죽은눈이죳
당신은 끝까지 저를 배려하는군요, 자신 안의 소녀는 결국 졌다는 듯이 웃음을 터트리고야 말았다. 의무교육이 끝나자마자 부모는 자신을 나몰라라 하고 버리고, 소녀는 그 이후 뒷골목에서 몸을 파는 행위 이외의 모든것을 해왔다. 어쩔때는 소매치기, 어쩔때는 기습으로 다른 불량배들을 때려눕혀 지갑을 강탈하고, 소녀의 도덕성과 감수성은 그렇게 메말라갔다. 그렇게 도달한 곳은 다름아닌 조직폭력배, 그것도 이제는 행동대장격으로 다른 이들의 머리위에 서있게된 존재, 지금은 아직 행동대장이고, 돈도 많이 번다면 번다고 할수 있겠지만, 결국 이 바닥에서 남는건 정점뿐이었다. 알고 있다, 손에 앞으로 얼마나 더 피를 묻혀야 할지, 이 바닥을 떠날 수 있을지, 소녀는 남자가 내민 따스한 온기가 담긴 물을 바라보았다.
—아니야, 부족해.
그 생각이 스쳐 지나가는 순간, 여인이 된 소녀의 손이 강하게—평소보다는 약하지만— 남자의 팔목을 붙잡고 당긴다. 아차하는 순간에 남자의 얼굴이 여인과 근접할 정도로 가까워지지만, 여인은 괘념치 않았다. 아니, 오히려 그녀의 눈은 아까전에 몽롱한게 거짓말이라는 듯 포식자의 눈빛으로 반짝이고 있었다.
"아재, 그거 알고 있었지? 내가 항상 아재 보고 있었다는거?"
아니다, 포식자의 눈동자가 아니다. 오히려 그보다도 더 원초적인, 수컷을 원하는 암컷의 눈동자였다.
"항상 어필하고 또 기다릴만큼 기다렸어. 이제는 못기다려, 아니 안 기다려."
사실 힘들어 죽을 것 같아, 배에서 느껴지는 고통, 마취의 후유증 때문에 어지러워 금방이라도 쓰러질거 같다고. 근데 여기서 도망가면 내가 뭐가 되는거야? 맨날 꼭대기로, 정점으로 올라가겠다고 말해놓고서 결국 사랑하는 사람 하나 못 잡으면 어떻게 하란거야?
—그러니까 붙잡자. 나는 상어, 노리는 먹잇감은, 절대로 안 놓칠꺼야. 그게 사랑이건 정점이건 말이야. "아재는, 내꺼야."
그와 동시에 여인의 입술이 그대로 남자의 입에 포개어졌다.
/받아라 상여자식 고백! /픽크루 머리색이 짙은 청색이 아닌건 머리색을 정할수가 없어서 그래요 :( /나름 연구 좀 했다고요?! 그리고 안데레와 메가데레는 종이 한장차이!! 그래서 지금은? 메가데레랍니다!!
갑작스런 행동에 빛의 변화도 없건만 남자의 동공이 움츠러들듯 가늘어졌다. 포식자를 목전에 둔 피식자라도 된듯이. 그래서 거침없이 묻는 당신과 달리 섣불리 입을 열 수가 없었다.
"자네..."
알게되려 하지 않았기에 반쯤은 정말로 모르고 있었던것은 알고 있었다고 할 수 있을까? 일부러 묻어두었던것을 끄집어내고선, 못박아버린 당신의 묘안에 원초적인 빛이 감도는것을 보고난 다음 든 생각은 상상보다도 침착한 것이었다. 결국은 사고를 쳤군, 하고 알고 있었던 부분의 마음이 말했다. 하지만 아직은 괜찮다. 얼버무릴 수 있다. 마취기운도 아직 남있을테니 다시 재우던가, 아무튼ー 딱 거기까지 생각했을 무렵 입을 열 수 없게 되었다. 뱀의 독니를 신경쓰지 않는건 그녀가 상어이기 때문인가? 아니면. 반사적으로 눈을 감자 당신의 열기가 느껴졌다. 뱀의 피트기관은 섬세하게 열기를 자신에게 전달하여 눈돌릴 수 없도록 했다. 눈을 감는다고 못 본걸로 만들 수 없다는듯이. 잠시 움직이지 못 했던 상황이 지나고 나서 천천히, 원래도 빠르게 움직이는 일이 없긴 했지만 그보다도 더욱 느릿하게 입술을 떨어뜨리고 그러고서도 잠시 뜸을 들인 뒤에야 남자는 입을 열었다.
"...자네는 내 속 썩이는게 그리 좋은가."
/교룡이 멋지잖아! 과연 육식동물!(?) /아항 그래서 보라색이었군요. 확실히 둘 다 어울리네요 고민 되겠는데요ㅋㅋ /메가데레가 되었다니. 이게 사랑의 키스의 힘이군요(끄덕)
입술이 떨어지고 나서야 자신이 무슨 짓을 했는지 대충 짐작이 간듯 가벼운 신음을 내며 천천히 뒤로 넘어간다. 아까전에도 말했다시피 마취 기운과 배쪽의 통증이 가라앉지 않은 상황, 거기에 자신이 저지른 행동에 머리에 열이 올라온 듯 헤실헤실 웃으면서 괜찮다는 어필을 해보지만 그녀의 머릿속은 도파민 과다 분비로 인해 가벼운 마약을 하기라도 한 듯 한 모습이었다.
"속 썩이다니, 나 만큼 아재 말 잘 듣는 환자도 없잖수."
환자 맞을까? 아니야, 그래도 난 그것보다는 더 깊은 관계가 되고 싶은걸. 비록 다른 여자들에 비해 멋도 없고, 내세울거 하나 없는 몸뚱아리지만, 그래도 당신 앞에서는 누구보다 더 사랑을 받고 싶은 여자인걸. 그러니까 지금만큼은 내 어리광을 받아줘, 언젠간 당신이 내가 없이 살수 없게 만들때까지. 그녀는 그 속마음을 담아 천천히 손바닥을 들어올리고는 가볍게 자신의 입 언저리를 쳤다. 그리고는 그대로 손바닥으로 입을 가려 고개를 숙인뒤 천천히 손을 보여주었다.
"아재, 미안하지만 노끈좀 가져다 주라."
그런 그녀의 입에는 더이상 이빨이 하나도 없었다. 그걸 증명하기라도 하듯 그녀의 손에는 이빨이 한가득 들어 있었다. 그것도 발치하지 않아 가장 날카롭고 튼튼한 이빨들이었다. 아직 이빨을 갈때도 되지 않았는데 무엇을 하고 싶은 것일까? 그녀는 천천히, 그리고 절대로 그녀답지 않은, 하지만 가장 그녀다운 순수한 미소를 지어보이면서 바보같이 웃었다.
"헤헤.... 상어수인들은 말이야.... 이빨이 금방 나, 그리고 지금 가장 튼튼한 이빨로 가지고 장신구를 만들어 주면.... 그 사람은 무병장수한다나 뭐라나...."
미친 교룡이 저런 행동을 보이는것을 안다면 모두가 놀라 자빠지겠지, 모두가 두려워 마다하지 않고, 가장 난폭하고 그에 걸맞는 무력을 가진 여인이 바로 그녀였으니까. 하지만 그 앞에서는 한낱 사랑에 빠진 소녀였다는 건 모두가 부정하지 못하리라. 그리고 그녀가 모르는 사실이 하나 있었다. 본래 상어의 장신구는 그러한 뜻을 가지고 있지만, 가장 튼튼한 이빨로 만든 장신구를 이성에게 선물한다는 것은, 바로 구애의 뜻이 담겼다는 것을 말이다. 하지만 머리에 열이 오를만큼 오른 지금, 그 사리판단을 할수 있을 정도로 그녀는 냉정하지 못했다.
/먼저 반하게 한게 잘못아닐까요!! :) /그래도 청상아리니까 진청색입니다!! 다른 의견은 네버!! /그래도 언제나 얀얀은 주의하는걸루다가 헿
마지막 한 녀석의 머리를 부수고 나자 뒷쪽으로 고개를 돌리며 남자는 천천히 웃음을 지었다. 삶에 모두 달관하고 초연한 그 모습은 마치 은거를 눈앞에 둔 노기인의 모습이었으나,그 전신으로부터 풍겨오는 혈향과 투기는 그가 아직 불타오르는 중임을 대변하고 있었다. 천천히 둔기를 어깨에 걸쳐메고 걸어오는 그 모습은 마치 흉신악살 그 자체였고, 거리가 충분히 있음에도 심기가 약한 몇몇 병사들은 겁에 질린 듯 무기 끝이 떨리고 있었다.
"솔직히 동향 사람을 여기서 만나게 될 줄은 몰랐는데 말이야."
너무 긴장하지 말라는 듯이 그는 손을 내저었다. 그런 그의 입가로는 걸걸한 웃음을 흘리고 있었다. 어차피 자신들의 목적은 달성했다. 목숨을 걸고 이곳을 지켜 병력을 분산시킴과 동시에 역으로 적의 본진을 전부 급습한다. 그쪽에서 요청했던 1주일의 마지막 날이다. 댓가가 자신과 지금 같이 있던 별동대원들의 목숨이라면 아주 싼 것이 아닐까? 그것도 무려 6천명이다. 20명으로 6천명의 발목을 잡은 것이다. 그렇다면..... 이미 목적은 초과달성이다. 기분이 착잡한 것인지 그는 천천히 웃음을 지우면서, 특유의 느물느물한 어투로 입을 열었다.
"어차피 우리의 목적은 너희 발을 잡는 것 뿐이야, 물론 우리 작전이 들통났으면 우리 본대도 다 작살났겠지. 그러니까 제안 하나 할까 하는데 어때?"
그가 천천히 둔기를 땅에 쳐박는다. 어차피 여기서 활을 쏴도 죽고, 창을 던져도 죽는다. 하지만 그는 전혀 괘념치 않는다는 듯이 어까를 으쓱이며 재차 말을 이어나간다.
"솔직히 너도 여기서 병사 손실 내기 뭣하고, 이제 별동대도 대장인 나 하나 뿐이다. 북방의 대전사인 내 목이면 충분히 전공의 값어치는 될거 같다만, 구미가 당기지 않나? 응? 동향이니까 이런 파격제안을 하는거지, 아니면 이런 거래? 오우, 절대 없지!!"
하지만 호락호락하게 당해는 주지 않겠다는 듯이 그는 둔기에 힘을 주고 있었다. 마치 마지막 생명을 전부 불살라 주겠다는 듯, 광기어린 미소가 지옥 너머로 부터 비추고 있었다.
장교는 침착한 어조로 말하고 있었지만, 이빨이 갈리는 불쾌한 소리 또한 또렷하게 퍼져나갔다. 그가 둔기를 어떻게 하고 있던 상관없다는 듯, 정자세로 겨눈 기병도를 조금도 치우지 않은 채로 장교는 발목 근처에 손을 가져갔다. 손가락 끝이 정강이의 홀더에 걸린 순간, 장교의 손에는 두 자루의 단검이 들려 있었다. 탁월하다면 탁월할 손재주였지만, 장교는 알고 있었다. 이것마저도 상대에게 훤히 읽힐, 북부의 기예라는 것을.
"미안합니다만, 나는 이미 당신의 동향인이 아닙니다. 이제 나는...... 뭣들 하고 있나!"
앞으로는 대적자의 압도적인 기백, 그러나 동시에 등 뒤로 닿는 것은 불안과 의심, 눈치채지 못할 수가 없다. 도저히, 진정한 의미의 신뢰를 살 수는 없는 것인가, 암담한 기분이었지만, 공교롭게도 장교는 용수철같은 성격을 가진 사람이었다. 배후의 압박감이 거세지자 장교는, 오히려 크게 윽박질렀다.
"너희에게 여기서 발이 묶일 여유가 있느냐! 달려! 죽는 한이 있어도 본대를 따라잡아! 우리에겐 이미 뒤가 없단 말이다!"
잠깐의 정적, 너희의 의심이 내 지휘권마저도 넘어선 것인가 하는 괴로움도 잠시, 말이 달리는 소리가 재개되자 장교는 겨우 안도했다. 방금 전까지 자신을 누르던 압박감이 이제, 격려로 바뀐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미안하지만, 대전사님, 당신의 목으로 만족하기에 우리는 너무 멀리 왔습니다."
그대로 앞을 경계한다. 그리고, 싱긋 웃었다. 모든 것을 바쳐 육성한 자신의 부대가 적의 본대를 따라잡는 동안, 이 사내의 발목을 잡을 의무는 장교, 자신에게 있었으니까.
바로 옆에 있는 의자에 털썩 앉으며 꽁하게 그런말을 했다. 아무래도 갑작스레 '넌 내꺼야!' 같은걸 당했으니 아직 당황스러움이 가시지 않은 탓도 있었다. 말 잘 듣는 환자냐 하면 그야 다짜고짜 총칼을 휘두르거나, 하지 말란것만 골라서 한 다음 책임전가를 하는 부류도 많으니 아니라곤 할 수 없었다. 그러나 당신의 행동은 의사와 환자의 관계를 한참 벗어난 것이기에 쉬이 답을 내리지 못 하고 괜스레 이런 태도나 보이게 되는것이었다. 그래. 그게 문제였다. 차라리 자신이 저 여인을 환자로만 대했다면 훨씬 쉬운 문제였을턴데 그러지 못 하고 사사로운 감정을 품어버린탓에 눈을 돌리고 차일피일 미루기만 했던. 그러니까 이젠 어떻게든 매듭을 짓기위해 무슨 말이라도 하려던 그 때 당신의 갑작스런 행동에 끊기고 말았다.
"노끈이 문제가 아니지 않나. 아니, 방금 수술도 한 사람이 무슨..."
상어 수인들의 이빨 구조에 대해 모르지는 않았다. 비록 치아에 통달한것은 아니지만 아직 당신의 이빨이 갈이를 할 만큼 무디지는 않다는것과 당신이 천진한 미소를 지으며 하는 말, 그리고 그 장신구의 의미정도 까지는 알고 있었다.
"그래, 그럼 나는 대신 허물을 주면 되는겐가?"
도대체가 그런 의미로 하는말이 맞는건지 싶어 달라는 노끈은 안 주고 그런 말을 했다. 뱀의 허물이 가진 가장 큰 상징성은 물론 영생과 재생이지만, 이성에게 건낼 때는 의미가 조금 달라졌다. '이 허물을 잃어버리면 저는 당신과 함께 있을 수 없어요' 어쩌구 하는 설화가 있지 않았는가. 허물을 가지고 있는자를 떠날 수 없다는. 즉, 구애의 의미를 가진것이었다. 그다지 크게 알려진 의미도 아니건만 이렇게 굳이 돌려돌려 말 하는 이유는 당신이 지금 그다지 냉정한 상태가 아니라는걸 눈치채고 있기 때문이었다. 무슨 뜻인지 못 알아들으면 그냥 거절하려고. 이런 능구렁이 같은 기질은 분명 자신이 뱀인탓이지, 자신 자체의 문제는 아니라고 생각하면서.
/뱀이 요물취급받는 동물인 이유가 있었군요...! /역시 '청'상아리니만큼 그렇긴 하겠죠!ㅋㅋ /그치만 거기에 넘어가버렸구ㅎ
뒤에 구절들이 전부 생략 된 것은, 온갖 단어가 붙을수 있다는 반증이었다. 내가 그 여자들보다 더 이뻐, 아니면 더 몸매도 괜찮아, 등등... 어쩌면 그 모든 말에 숨어있는 것은 열등의식 일 수도 있었다. 자신도 모르니까, 자신이 한평생 가꾸는데만 살아온 여자들에 비해 투박하고, 제대로 말도 못하는 여자인건 사실이니까. 그래도 그녀는 괜찮았다. 지금만큼은,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으니까. 그거 하나만으로도 몽롱한 정신을 붙잡고 방실방실 웃을수 있었다. 평소의 날카로움과 폭력성은 어디가고, 유순한 상어 한마리만 남아 있는 모습을 보면 평소 모습을 아는 이들이 전부 자신의 눈을 세척해달라 요청하지 않을까. 양손에 이빨을 한사바리 들고서 노끈을 가져다 주길 바라는 모습은 마치 목줄을 기다리는 강아지와도 같았다. 오히려 그 언밸런스한 모습 자체가 매력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평소의 태도와는 완전히 상반된 그녀의 모습은, 진짜 그녀가 맞을까 라는 생각마저 들게 할 정도였다. 그렇게 방실방실 웃으려던 찰나, 그녀의 얼굴이 싸늘하게 식는다.
"허물?"
갑자기 너무나도 냉담한 모습, 이성을 찾기라도 한 것일까?
"줘."
예상외의 대답이었다.
"아니, 앞으로 벗을거도 줘."
..... 애시당초 차게 식었던 표정은 이성을 찾은게 아니었던 것일지도 몰랐다. 24년, 살면서 선물 한번도 받지 못한 여인에게 있어 그것은 너무나도 강렬한 유혹 그자체였다. 하물며 그게 사랑하는 사람의 피부였다고? 상처만 아니었다면 바로 달려들었을지도 모르는 상황이었다. 차게 식은 표정 아래로 느껴지는 감정은, 갈망, 아니 독점욕 그 자체였다. 씨익 웃어 보이는 모습은 말그대로 여지껏 받지 못했던 보상을 전부 받아내겠다는 강한 의지였다.
"한평생 받아낼꺼야. 응, 2년간 못받은거 그 이상으로 받아내도 되는거지?"
무슨 의미인지는 절대로 중요하지 않았다. 백년가약이 무슨 뜻인지도 몰랐다. 그저 그냥, 자신의 눈앞에 있는 이 남자를 자신의 손에 쥐고 싶다는 욕망뿐인, 포식자의 천성 그자체였다.
/요물 덩어리!! 그러니까 얀을 드리겠습니다(?) /그래서 이걸 어떻게 끝마무리를 내야할까욬ㅋㅋㅋㅋㅋ
신뢰를 바탕으로 결속을 이뤄낸 병사들의 일사분란함에 그가 혀를 내두른다. 자신의 별동대와는 다른 결속의 모습에 감탄을 터트리며 병사들이 지나가는 모습을 바라보고는 조용히 길을 터준다. 의외의 모습이었다. 나약한 이들을 쫓는 맹수 마냥 눈앞의 사내를 무시하고 뛰쳐나갈 줄 알았는지 병사들은 의외의 상황에 자신의 상관에 대한 걱정을 하면서 서둘러 진격을 이어나갔다.
"왜, 의외냐? 대화를 원하는 건 너였잖아?"
강자를 존중하는 듯한 태도였다. 여지껏 자신과 싸운 이들중에서 이 정도로 당당함을 보인 이는 없었다. 그것이 만용인지 아닌지 자신이 판가름하는 것이지만, 그에게 있어서 그런건 딱히 중요하지 않았다. 싸우고 살아남는다, 그렇게 살아남은 자들은 다시 강해지고 또 서로에게 칼을 겨눈다. 그래서 자신이 살아 남아 온 것이다. 자신은 강자였으니까.
"아 대화를 시작하기전에 약속은 하나 해주지, 내가 이겨도, 저 녀석들 뒤는 쫒지 않도록 하마."
이 또한 배려였다. 마음속에 모든것을 내뱉으라는 의미였다. 싸우는 자에게 있어서 마음속 무거움이란 힘을 더하는 것도 있지만 과도한 부담은 힘을 내지 못하게 함이니, 그는 그렇게 모두 벗어나 던짐을 종용하였다. 앞으로의 있을 생사투에는 그런거 따위 필요없다는 의미이기도 하리라.
"일단 가볍게 나도 이야기를 해볼까. 아 생각해보니 망할 할망구 말이 맞잖아. 고요함 한가운데, 두마리 맹수 서로에게 이빨을 겨누니, 상처 투성이의 늙은 짐승, 대지에 몸을 눕히리라."
자신의 최후를 이야기 하는 모습은 무덤덤하다 못해 익살스러움 그 자체였다. 고요함이라 함은 이 숲 자체를 가리키고, 맹수는 지금 이 두 사람을 뜻하는 것, 그중 늙은 짐승이라는건 분명 대전사를 가리킴이고, 대지의 몸을 눕힌다는 것은....
"근데 말이야. 그게 오늘이 아닐수도 있잖아?"
그가 웃는다. 광기가 빠진 순수한 투기였다. 그래, 여지껏 나는 이것을 위해 살아온거야, 강자들과 맛부딪하고 거센 풍파를 이겨온 자들을 상대하면서 그들의 결실을 보며 살아가고 또 살아온 것!! 그러니까 내 눈앞의 너 또한 그것을 보여주면 좋겠구나!!
그 생략된 구절들에 전부 대답하는 말이었다. 당신이 어떤 여자인지는 알고 있다고. 그럼에도. 아니, 그렇기에 하는 말이라고. 어느정도냐 하면, 당신에게 물어뜯겼던 환자들이 지금의 유순한 당신을 본다면 아까 놨던 주사에 이상한거 섞어둔거 아니냐고 묻지 않을까하는 실없는 생각을 해버릴 만큼. 그런 생각이나 하면서 잠시 풀려있던 정신은 당신이 냉담하게 식는것을 보고 금세 다시 돌아왔다. 역시 잡아먹히는건 자신쪽이었나보다.
"그거 다 모아서 어디다 쓰려그러나... 애초에 자네, 내 탈피 주기는 아나 모르겠구먼."
한 번 노린 먹잇감은 절대 놓지 않는 당신의 면모는 알고 있었기 때문에 허허실실하게 대답할 수 밖에 없었다. 아마도 진심이겠지. 생각해보면 그런 면모에 이끌린걸지도. 그래서 노끈을 가져다주며 이렇게 대답했다.
"한 평생 하나도 안 갖다버릴 자신이 있다면야 생각해 보겠네. 그대가 달라 했으니 그 정도는 해줄테지."
그 의미도 모르고 그저 직선으로 돌진하는, 그야말로 상어 그 자체인 여인에게 제대로 물렸으니 이정도 농을 하는것정도야 괜찮을터였다.
/요물과 얀. 무서운 조합...! /일단 마무리하기 쉽게 써보았다! 요걸 라스트로 하셔도 되고 막레를 쳐주셔도 됩니당
지금 이순간 포식자의 그것이 풀리고 유순한 여인의 모습으로 돌아간다. 아까전의 패기는 어디 갔냐는 듯이 눈을 내리깔고 수줍은 새색시 마냥 몸을 배배 꼬며 자신의 남자에게 투정을 부리고 있었다. 마음 같아서는 이제 다 내팽개치고 그대로 그의 품으로 뛰어들고 싶었다. 지금의 상황이라면, 그가 그만두라고 했을 때 바로 조직에서 손가락 한두개 내던지고 바로 그에게 달려와 평생을 헌신하고 살 자신이 있으리라. 그녀는 무언가를 원하는 듯 병상에서 몸을 비비적거렸다. 단 한마디로 그녀의 마음을 다시 되돌린 이 장면을 본다면 모두가 그대로 기겁하고 자신의 눈을 비빌 것이다.
"저기.... 그러니까...." -따르르르릉!! "에이, ㅆ....[자체 검열], 어떤 놈이얏!"
전화가 울림과 동시에 그녀의 입에서 걸쭉한 욕설이 터져나왔다. 좋은 분위기 산통 다깼다는 것일까, 그녀의 분노는 오갈데를 모르며, 아까까지 병약한 한명의 여성은 온데 간데 없이 미친 교룡이 침대위에서 으르렁거리고 있었다. 신경질적으로 핸드폰을 조작한 그녀는 그대로 귓가에 울려퍼지는 부하의 말에 그르렁거리기 시작했다.
"왜 이샛꺄!!" [누님! 다친데는....] "너때문에 다시 도졌어! 왜그러는데!" [아버지가 보고하라ㄱ....] "그걸 왜 나한테 [자체 검열][일단 검열]인데!! 이 [아무튼 검열]이!! 확 [그만 검열좀....]해버릴라!!" [히이익!!] "끊엇!!"
부득부득, 이빨이 다 빠진 잇몸을 갈아붙이며 그녀가 숨을 고른다. 그러다가 아차, 싶었는지 이내 멋쩍은 웃음을 터트리고는 그를 향해 입을 열었다. 이제는 완전히 사랑에 빠져버린, 수줍은 새색시 마냥 그를 바라볼 뿐이었다.
".... 이해줄꺼지?"
그녀가 숨을 고른다. 그리고 이내 개구지고 자신감 넘치는 미소가 흘러나온다. 정점에 오르는 사람은 바로 자신이라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는 미소였다. 그래, 나는 내 사랑을 얻었으니까, 이걸로 만족해, 하지만 나는 아직 배고파. 그러니까....
"아ㅈ.... 아니, 당신!!"
그녀가 환자복을 벗어던지고 다시 하얀색 정장을 챙겨 입는다. 이제는 완연히 정신을 차린것일까? 그녀는 자신감 넘치는 미소를 지어보이며 그를 향해 엄지 손가락을 치겨들려고 하였다. 하지만 아차 싶었는지 그대로 돌아 그에게 성큼성큼 다가선뒤 그대로 아까보다 더 깊고 깊은 키스를 날렸다. 그렇게 한참을 하던 그녀는, 이내 입술을 떨어트린뒤 아직 만족 못한 듯 입맛을 다시며 입을 열었다.
"나머지는 다음에, 알겠지?"
그와 동시에 그녀가 천천히 문밖으로 나선다. 이제는 돌아올 곳이 생긴, 기운 넘치는 발걸음이었다.
눈앞의 사내에게 자신의 부대에 대한 칭찬을 듣는다는 것은 장교에게 있어 고무적인 일이었다. 고향을 배신한 이래로, 어쩌면 자신의 부대는 모든 면에서 콤플렉스의 반영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런 장교의 자기의심을 조금은 잊을 수 있게 해주는 말을 처음으로 해준 것은, 이제 곧 자신을 살해할지도 모르는 적군의 전설이다. 아이러니한 일이다.
"원조에게 칭찬받는 것은 영광입니다. 그러나, 추적하지 않겠다는 그 말, 솔직히 만용임을 증명하고 싶어지는군요."
쓸데없는 오기라고 해야 할까, 어쩐지, 눈앞의 상대가 자신의 부대를 보내주는 것을 후회하게 만들고 싶다는 욕망이 들었다. 뒤늦게라도 쫓고 싶어서 안달이 나게 만들고 싶었다. 자존심, 그리고 동시에 이 장소에 쓰러진 상대의 정예들에 대한 예우 때문이기도 했다. 자신의 부대를 만들기 시작했을 때 모티브로 삼았던 자들의 처참한 죽음들은, 어쩌면 선봉의 비대한 손실만큼이나 장교에게 씁쓸한 감회를 주는 모습이기도 했다.
그러나 일단은, 눈앞의 상대와 맞서는 것이 급선무일 것이다. 상처투성이지만 여전히 살아 있고, 무수한 피를 빼앗았으면서도 자신의 피를 갈망하는.
"남방의 불길을 타고 고향을 향하는 야수는, 사냥하기 위해 달리는 자신이 사냥당할 운명을 모른다. 저는 예언을 믿지는 않습니다만......"
저도 모르게 인용하는 타인의 말로 사내에게 답한다. 유황 연기른 마시고 환각을 보는 미친 사람의 헛소리라고 생각했지만, 돌아보면 꾸준히 그 말을 실현하기 위해 달리고 있었다. 장교는 허탈한 웃음을 흘렸다. 의식하지 못한 새 운명의 실에 따라간 스스로의 행적에 대한 비관일까, 어쩌면, 순수하게 탁월한 상대를 마주한 야수의 기쁨인지도 몰랐다. 자신이 사냥을 위해 이 자리에 있다면, 사냥꾼에게는 위험한 상대일수록 트로피가 되는 법.
"그래도, 그런 허황된 말 위에서라도 당신에게 최후를 안겨줄 수 있는 사람으로 꼽힌다면 영광입니다. 한때 북방 사람으로서, 전사로서 당신을 동경했으니까요."
광소가 하늘 저멀리까지 퍼져나간다. 미친듯이 한참을 웃어제끼던 그가 눈에 냉정을 찾으면서 천천히 둔기를 뽑아들고는 입을 열었다. 자신의 눈앞에 있는 남자는 그릇의 크기부터가 달랐다. 아니, 자신의 고향에서 도망치지 않았다면 진즉 자신의 눈에 들어왔다면 수제자가 되어 다음 대전사역을 물려줬을지도 모르는 일, 세상만사 참 알수 없다면서 그는 웃음을 그친채 입을 열었다. 그렇다고 귀에 걸린 입꼬리는 내려가지 않았지만.
"마, 내가 칭찬을 꽤 아끼는 편은 아니지만 등돌린 사람에게까지 이렇게 말하는건 처음이다. 말했잖아? 이미 처음부터 질 거 감안하고 시작한 전쟁이다. 애시당초 죽을 장소 찾아다니던 놈이, 가장 좋은 것을 두고 그 아랫것을 쫒아간다는게 가당키나 하냐?"
지금 눈앞에 있는 사내가 있기에 지금 병단은 완성된것이다. 병사들은 소모품에 불과할 수도 있지만, 그 소모품이 1급품이 될지, 폐품으로 될지는 오직 장교의 여하에 달려있는 것, 그렇기에 이 사내가 대단한 것이다. 자신도 해내지 못한 전인밎답의 경지를 스스로 개척해 나간것이지 않은가, 그것이 무가 되었던, 병법이 되었던 존중 받아 마땅한 것이다. 그리고 그 두가지를 모두 해낸 이는 절대로, 약자가 아닐테니까.
"서론이 길었구만, 시작하자꾸나. 선공을 양보하마."
스승의 어투였다. 하지만 동시에 그려지는 모습은 만 백수의 우두머리로서 대지를 지배하는 백수의 황제, 베히모스의 모습이었다. 전 대륙을 들어서도 다섯 손가락에 꼽힐 이, 일주일간의 밤낮없는 게릴라 전을 펼쳐 20명의 병사로 6천명을 묶은 역발산기개세..... 그가 둔기를 뽑아들고 조용히 그를 바라보았다.
/기동무투전 g건담을 안봤다면 동방불패 최후의 전투 장면을 보면 될꺼야!! 그런 느낌으로 가려고!! /말이 그렇지, 1주일간 잠도 안자고 20명을 이끌면서 6천명의 병사를 막아세웠어, 피로감과 누적된 피해는 상상이상이라고? 아마 꼴딱꼴딱 이전이니까, 천천히 즐겨! 마지막 수업이라는 느낌도 괜찮을꺼야!
백수의 황제에게 용감히 달려드는 용자의 모습은 그 누구보다도 믿음직스러운 형상이었다. 그것은 만용을 논하기 이전, 뛰어들수 있다는 것 자체가 매우 대단한 것이었다. 죽기위해 달려드는 것이 아닌, 살기 위해, 이기기 위해 달려드는 것임을 누가 모르겠는가? 그 용기에 찬사를 보내며, 그의 손에 쥐어진 애병이 방패가 되어준다. 넓은 면, 대검과 같은 형상이지만 날이 없는 둔기는 충분히 방패를 역할이 되어주기엔 충분했고, 그는 망설임없이 둔기로 찌르기를 막은채 입을 열었다.
"북부는 그 설정에 걸맞게 흉폭하고 약육강식에 맞춰서 발전해왔다. 그에 반해 남부는 사람과 사람이 싸우기에 절제되고, 또 기교가 크게 발전해왔지. 그 반증이 바로 접근전의 차이다."
마치 무언가를 가르치기 위한 말투, 하지만 그 말투에는 여전히 강렬한 투기가 서려있었다. 당연한 것일지도 몰랐다. 자신의 눈앞에 있는 이 남자는 북부의 전투기술과 남부의 무예를 모두 익혀냈고 그 성과를 보여주었다. 실제로 지금 남자의 한순간의 찌르기가 모든 것을 설명해주고 있었다. 북부의 강맹한 공격을 남부의 기예로 덮어서 자신조차도 한순간 놀랄만한 성과를 보여줬으니까. 지난 일주일간 제대로 쉬지 못한 것이 피드백되어 온다. 축적된 피로는 육체가 불만을 토로하게 하기에 충분했고, 격전을 거치는 동안 누적된 피해는 이젠 무시하기 어려운 수준, 하지만 충분한 패널티였다. 다음대 대전사역을 이어줄지는 모르겠지만, 충분히 시련으로 거듭나 이 눈앞의 남자가 이겨나가기엔 매우 적절한 패널티였다! 대전사의 입가에 미소가 머금어지고 둔기를 거세게 휘둘러 단검을 밀쳐냄과 동시에, 둔기를 횡으로 두번 휘두른다.
[제 1식, 산들바람.] "너는 지금 그 두가지를 모두 손에 쥐었지, 그럼 어찌해야되겠는가?"
상대방이 어떻게 나오는지 알길이 없었다. 눈썰미가 좋다면 분명히 그 틈을 파고들순 있을것이다. 하지만 그것 또한 그가 노리는 바, 산들거리는 바람 그 사이로 순식간에 물보라를 한순간 일으킬 강렬한 기세로 올려베어간다.
[제 6식, 된바람.] "답은 간단하다, 네가 이미 한 것처럼 하나로 어우러지게 만든다. 양손에 쥔 것 중 하나를 포기하기에는 네 경지가 그를 허할 리가 없으니."
동시에 한 순간, 올려베는 기세 그대로 그가 허공에 아주 잠시간 떠올랐다. 대전사만의 연계기, 남자또한 눈에 익을 정도로 유명한 일격이었다. 산들바람에서 이어져 된바람으로 올려 베고, 다시 강맹한 내려찍기 그자체인 9식, 큰센바람은 가장 효율적이고 그이기에 가능한 공격이었으니, 하지만 대전사는 오히려 한손으로 둔기를 붙잡은채, 있는 힘껏 둔기를 사내에게 집어던졌다. 놀라우리만치 강한 완력에 둔기의 무게가 더해져, 대포환이 던져진거 같은 느낌마저 들게 하였다.
[제 9식 - 큰센바람, 변형 - 황소바람] "상대방의 큰 힘에 현혹되지 말고 흐르는 듯이 들어가라, 큰 힘에 휘둘러지는 갈대는 전혀 꺾이지 않고, 그 흐름에 발맞춰 멈추지 않음이니."
/완료형이 많지만, 그만큼 틈이 많아! 전부 피할수 있고 실제로도 많이 피곤하고 아픈 상태니까 그 헛점을 파고 드는 묘사면 충분해! /사진의 발바토스 루프스는 대전사의 무기가 어떤건지 표현만 해주는거니까 이런 무기구나! 생각하면 편할꺼야!!
'이거 불공평하군.' 입을 열어 말할 새는 없었다. 상대의 병기에 직격당하면 죽는다는 아주 직관적인 압박이 장교를 돌려세우려 들고 있었다. 확실한 것은, 찌르기가 적중하기 직전에 마음 속으로 망설임을 상정했기에 반격을 피할 수 있었다는 사실 뿐이다.
'그래, 양손에 하나씩 쥐고 있으니까, 남는 손이 없군.' 회피를 위한 망설임은 곧바로 다음 순간을 위한 위치선정으로 이어진다. 직선으로 사내에게 쇄도하고 있었음에도 단번에 직각으로 진행방향을 틀어 장교는 사내의 공격범위에서 사선으로 벗어났다. 특유의 걸음걸이로 기민하게, 동시에 쉼 없이 적절한 포제션을 탐구한 끝에 그 위치를 택했다. 다만, 이어지는 사내의 동작에 대응하기에 좋은 위치만은 아니다. 날아드는 제 2격도 횡적인 베기, 종적인 후퇴를 가져가야만 회피에 용이했을 것이다. 그러나 장교는 물러나지 않았다. 간격에 대한 특유의 판단력으로, 그는 위험을 감수할지언정 이 이상 상대가 무기를 휘두를 거리를 줄 수 없다고 판단했다.
'빌어먹을, 잘도 지껄이는데, 하지만-.' 객기의 대가는 위험천만했다. 장교는 이를 악물고 물러나는 대신 자세를 낮추고 살짝 허리를 틀었다. 몸통으로 닿는 서늘한 바람은 그에게 한 뼘 이하의 차이로 즉사를 면했음을 느끼게 해 준다. 그러나 동시에, 공격에 유리한 위치를 지켰음을 확신시킨다. 장교는 교묘한 발동작으로 빠르게 한 걸음 나아가며 기병도를 뻗고자 했다. 리치가 짧다는 것은 가까이 붙을수록 이점이 생가다는 뜻, 또한 상대의 무기에 중량이 있기에, 무기를 휘두르고 회수하는 기본적인 공격동작의 속도에서 이점을 얻을 수 있으리라는 판단이었다. 설사 그것이 상대가 지치지 않았더라면 존재하지 않았을 이점이라고 해도, 놓칠 수는 없었다.
'북방과 남방, 야성과 기교, 본성과 이성? 합치라고? 어쩌면......' 그러나 기껏 획득한 유리한 간격을 순식간에 무색하게 만드는 상대의 도약에 장교는 이를 악물고 새로운 회피동작을 준비했다. 여전히 예상보다는 조금씩 앞서나가는 동작의 빠르기였기에, 올려베기에서 시작하는 예의 움직임을 익히 알면서도 막지 못했다. 더군다나, 지금이라면 사내가 다음 공세를 취하기에 충분한 공간을 차단할 수도 없다. 고스란히 후속타에 노출된 상황, 장교는 빠르게 판단했다.
'춤추는 쇳덩어리 앞에서는 점점 구분이 어렵군.' 그야말로 본능의 발로, 동시에 정교한 예비동작을 통해 장교는 뒤로 몸을 젖혔다. 기병도를 쥔 왼팔로 배후의 땅을 가볍게 짚어 겨우 안정적인 브릿지의 자세로 만든다. 또 한번, 아슬아슬하게 공격을 흘려낸다. 동시에 오른발을 거세게 차올린다. 보지 않고 하는 공격, 상대에게 맞을 리가 없지만, 발목의 홀더에는 아직 단검이 하나 남아 있다. 허공으로 비산하는 그 칼날이 기립할 시간을 벌어줄 것이라고 믿었다.
'갈대 휘어지는 기교도 선천적인 것이라면,본능과 기교에는 차이가 없겠지.' 이윽고 장교는, 차올렸던 발을 크게 굴리며 번개처럼 몸을 일으킨다. 기병도는 여전히 왼손, 간격은 양호, '알면서도 저지할 수 없었다, 당신의 공격, 그러니까......' 한쪽 발을 뒤로 살짝 미끄러뜨려서, 자세를 빠르게 낮춘다. 동시에 반댓발을 축으로, 공격경로를 빠르게 뒤튼다. 모든 동작이, 생각이라는 과정을 건너뛰며 천변만화한다.
[남방의 불-북방의 춤, 찌르기.] '내 나름의 청출어람이라면, 모르기에 저지할 수 없는 공격을.' 장교는 그대로 기병도를 내찔렀다.
둔기가 내는 소리라고 생각이 들지 않을 정도로 강렬한 폭음과 함께 그가 눈살을 찡그린다. 다른건 다 괜찮았지만 북방에서 터트릴때와 다르게 여기는 흙먼지가 비산하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그런 상황에서도 그는 스승의 눈길로 상대의 행동을 분석하고 있었다. 아까전의 회피의 판단, 무기의 중량에서 차이나는 상황과 관성까지 모든것을 판단해서 그는 2보 전진을 위한 1보 후퇴를 선택하였다. 거기에 아까전의 브릿지는 충분히 남방에서만 배울수 있는, 절대로 북부인들이 행하지 못하는 회피기동이었다. 그들이라면 그렇게 피할지언정 힘으로 맞부딪혔겠고, 마찬가지로 자신도 그렇게 피했을테니까. 거기에 마지막 상황에서 던져진 칼날, 빠르게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면 정확히 미간에 박혔을 것이다. 그 완벽한 빈틈을 포착, 자신에게 갖춰진 그 빈틈을 확실하게 캐치하는 것까지 아주 완벽했다. 누군가 그랬었다. 연습이야 말로 완벽한 스승이라고, 지금 그 사실이 여기서 일어나고 있다. 지금 이 눈앞의 남자는 자신을 교보재 삼아 계속해서 성장해나가고 있다. 이것이야 말로 정말 훌륭한 재능이 아닌가?
"훌륭하군. 그래, 네 안에 있는것을 모두 끄집어 내는 것이다. 네가 기억하는 것이건, 아니면 기억하지 못하는 것이건, 그 모든 잠재력이 지금 그 자신을 빛나게 해주고 있음을 생각하는 것이다."
그 순간, 그는 자신이 생각 하는 것 이상으로 그의 칼날이 빛나는 것을 보았다. 흙먼지 사이를 뚫고, 자신을 향해 뛰어 나오는 것을 보며 그는 쾌감어린 미소를 지어보였다. 그래, 해보니까 되지 않느냐. 그것이야 말로 지금 네가 해낸 경지다. 너는 지금 내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내 움직임을 잘 따라오고 있어. 그렇다면 이렇게 했을때는 어떤 상황일지 볼까? 그 순간 대전사의 허리가 굽혀진다. 찌르기의 최대 약점, 그것은 찌르는 행동 그자체가 문제인 것이다. 가장 힘을 낼수 있는 것은 바로 찌르기가 맞았다. 실제로도 사람의 공격 행위 중에서 제일 가장 많이 쓰는 것은 주먹이었고, 칼에서 주먹을 내지르는 것은 바로 찌르기였으니까. 하지만 그만큼 그 틈새도 매우 클수밖에 없는 것이 사실, 그 순간 칼이 날아오는 궤도를 앞질러 그의 손이 펼쳐진다.
─푸우욱!!
파육음이 들림과 동시에 그의 왼손바닥에서 저릿한 기운이 느껴진다. 그것은 다름 아닌 찌르기가 그의 손바닥 정 한가운데를 뚫고 들어갔음이니까, 하지만 고통은 익숙하다, 그는 기병도가 꿰뚫으려는 궤도를 따라 자신의 손바닥을 휘둘렀고 그 결과 오히려 손 하나를 희생해서 그와 영거리를 만드는데 성공하고야 말았다. 무기도 없고 아무것도 없지만 영거리인 상황에 아직 오른손이 남아 있는 상황, 그는 그와 완전히 대면한 상황에서 입을 열었다.
"너와 나는 잘 알고 있다, 지금 우리가 서로 싸우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자기 자신과 싸우는 것이다."
그 순간 그의 왼손이 결국 끝에 도달해 기병도의 손잡이를 움켜쥐는데 성공하고, 그는 있는 힘껏 왼손에 힘을 주고 칼을 뺏으려 함과 동시에 오른손에 온 정신을 집중, 그대로 강타를 휘둘렀다. 어떠한 형식도, 기교도 없는 아주 순수한 힘이 담긴 일격, 영거리인 시점에서 휘두른 상황이라 피한다해도 어느정도의 피해는 감수해야 할 것이다. 과연 어떻게 할 것인가? 그는 남자의 다음 행동에 더욱 기대를 할 뿐이었다.
"탁월함, 그것은 절대로 예술이 아니지, 반복에서 나오는 결과물이라고 해야할까, 그저 습관처럼 반복하다보면 예술이 되는 것이지."
실제로도 그랬다. 지금 눈앞에 있는 사내가 배워나간 남부의 기예는 그들이 만들어낸 수많은 경험의 유산이었고, 자신이 쓰는 북방의 전투기술 또하 수백년에 걸쳐 그들이 만들어낸 많은 예술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지금 그들도 마찬가지였고. 하지만 그는 알고 있다, 지금 이 눈앞에 남자는 그 수백년을 넘어서, 새로운 길을 창조해내고 있음을.
야성이 살아나는 것 같다. 말은 험악해졌지만 장교의 눈망울은 경외감으로 빛났다. 적수공권으로 회심의 일격을 잘도 막아낸 사내에 대한 그 나름의 경의였다. 그러나 동시에, 제 2격을 만들어내기 위한 변수가 없다는 사실이 뼈아프게 다가온다. 기습적으로 상황을 흔들 단검은 이제 한 자루도 남지 않았다. 하지만 곤란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쓸 수단이 사라질수록, 감각은 맑아진다. 더 노골적으로, 본능에 접목하는 동작으로 이어진다.
기병도를 잡은 손아귀는 찢어질 듯이 아파왔지만, 이제껏 내본 가장 강한 악력으로 어떻게든 칼을 붙들고자 했다. 끌려가지 않고자 하는 생각 뿐이었다. 그러나 동시에, 반대쪽에서 접근하는 지극히 야성적인 일격, 피하기 어렵다고 생각한 동시에 반응하여 턱을 쇄골 근처로 붙인다. 할 수 있는 한 가장 안정적인 자세로 머리를 고정한다. 뇌가 흔들리지 않는다면, 정신을 잃지만 않는다면 한 번의 직격까지는 용인한다는 판단이었다.
그러나 너무 무른 생각이었는지도 몰랐다. 순간 시야가 하얗게 물들었고, 장교는 거의 정신을 잃을 뻔했다. 간신히 의식을 붙들고 있게 해준 유일한 힘은 오로지 오기 뿐이었다. 이빨이 몇 개나 나갔는지, 피가 흐르기 시작한 입을 빠르게 훔쳐내고서 장교는 재빨리 비어있던 손을 뻗었다. 절박하게 휘두른다. 사내가 주먹을 거두기 전에 모든 동작은 이루어져야 했다.
"어울려드리죠. 당신의 방식에!"
금나수, 남방에서도 지극히 여리고 심약한 기술로 여겨지는, 그러나 장교의 손에서 발한 순간 손톱을 휘두르는 야수처럼 맹렬한 수로 탈바꿈된 기예가 펼쳐졌다. 누구라도 쓸 수 있는 평범한 주먹질이 상대의 손에서 불세출의 절기가 되었듯이, 금나수 또한 장교의 손에서 사납고도 광포한 반격의 수가 된다. 목표는 사내의 오른손, 낚아채서 꽉 맞잡으려 한다. 성공한다면, 서로의 양손을 결박하는 것과 마찬가지가 된다.
생각해보니 이 나이가 되도록 결혼은 커녕 연애 한번 제대로 하지 못한 그였다. 사실 그런거에 관심이 없다고는 할 수 없겠지만, 자신에게 있어서 그런건 너무나도 하찮게까지 느껴지는 귀찮음의 산물이라고도 느끼고 있었다. 그러니까 그녀—부관—에게 맨날 면박이나 듣고 다녔던 것일지도 몰랐다. 하지만 지금 그런게 중요한게 아니었다. 나이, 신분, 소속, 그 모든것을 뛰어넘은 남자의 싸움이 바로 지금 이 눈앞에서, 스스로 당사자가 되어 싸우고 있다. 이것에 비견할만한 즐거움이 어디있겠는가? 백수의 황제와, 지금 막 용이 되려는 남자가 목숨을 건 사투를 벌이고 있다. 전대 대전사는 말하였다. 남자라면 언젠가는 목숨을 걸만한 가치를 지킬 때가 생긴다고, 그리고 그것이 바로 자신에게 지금이었다.
"헛!!"
나이에 맞게 생각이 많아지고, 그간 중첩된 피로가 안좋은 시너지를 내며 그를 압박해온다. 평소라면 힘으로 충분히 뚫었을 만한 사내의 금나수, 하지만 대전사장은 왼손에서 느껴지는 고통과 더불어, 상정하지 못한 상황에 어설프게 풀어내려던 오른손이 움직인 탓에 순식간에 오른손의 자유를 속박당할 처지에 놓인다. 하지만 억지로 떨쳐내려던 것이 악수가 된 것일까? 순식간에 남자의 손은 그대로 대전사의 어깨를 옭아매는데 성공하고, 대전사는 당황스러움을 집어 던진채 흐뭇한 웃음을 지어보였다.
"훌륭하구나, 너는 지금, 네 생각보다 훨씬 스스로가 강하다는것을 알고 있겠지."
그래, 너는 지금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강하고, 단련되었다. 지금의 너라면 나를 쓰러트리는 것도 꿈은 아닐것이다!! 하지만 아직 부족하다!! 나는 네가 좀더 성장하길 기대하고 있다!! 사내는 그렇게 생각하며 그 짧은 대치 순간에 잔인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허나, 본능을 완전히 이끌어내지는 못했구나."
인체에서 가장 단단한 부위이자, 가장 위험한 부분을 꼽으라면 어디를 꼽을 수 있을까, 백에 백은 머리라고 답할 것이다. 지금도 그랬다. 이런 대치 상황에서는 오히려 다리를 휘둘러 차는 것은 각도도, 힘도 안받는다. 그렇다면 오직 답은 하나.
"왜 북부의 무예가 아닌, 전투기술인지 깨닫거라."
그 순간, 대전사의 머리가 그대로 도끼마냥, 남자의 머리를 노리고 날아들었다. 남을 존중하고 단련함이 목적이 아닌, 살아남고 이겨내기 위한 기술..... 그것이 그가 말하는 전투기술이리라.
빠르게 짓쳐들어오는 박치기에 장교는 기겁을 하며 뒤로 몸을 젖혔다. 그러나 클린치 상태, 물러나는 만큼 자신의 힘으로 상대를 끌어들이고 만다. 그나마 턱을 위로 치켜들며 가슴팍을 내밀었기에, 박치기는 흉부에 꽂힌다. 소름끼치는 파열음, 흉근이 찢어지고 갈비뼈가 끊어지는 소리들, 귀그대로 입으로는 선혈을 토하며, 추락하는 연처럼 뒤로 날아간다. 양팔의 결박을 유지하고 있어 어떻게든 사내를 끌어들이지만, 이대로 뒤로 넘어지면 끌어들여도 마운트를 내줄 뿐이다. 그러나 본능도, 판단도 도저히 다음으로 이어지지 못한다. 의식이 빠르게 멀어진다. 이대로-.
쾅! 둔탁한 충격이 등으로 엄습한다. 어느 새 마치 벽에 몸을 기댄 듯 더는 넘어지지 않는다. 그리고, 꺼지기 직전이었던 장교의 정신을 간신히 회생시킨다. 자신의 몸이 기대고 있는 뜨거운 금속의 감촉, 보지 않아도 무엇인지 알 수 있다. 장교는 신음 속에서 간신히 한 마디를 쥐어짜낸다.
"니미럴......"
아까 머리 위로 흘려내서 배후로 떨어진, 그래서 주인의 적을 묵묵히 받아낸 사내의 둔기는 어떤 대답도 보내주지 않는다. 장교 또한, 막상 적의 무기에 구원받은 상황에 대한 수치는 느끼기 어렵다. 감회가 새롭다. 증오하지 않는다, 실망하지 않는다고 몇 번이고 다짐했지만 사실, 미움을 가지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고향에 대한 미움, 자신을 발견해주지 못한 땅을 증오하고 있었기에, 눈앞의 사내도 사실은 쳐부수고 싶었다. 증오로.
그러나 사실은, 인정받고 싶었다. 몸의 일부가 될 정도로 익힌 북방의 전투기술을 무의식중에 체화하지 못할 정도로. 감추고 있었지만, 인간과 인간 사이의 관계, 감정, 그런 것에 목말라 있었기에 남방의 기예와 체질이 맞았는지도 몰랐다.
그게 지금은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치매에 주의하실...... 나이로 보이는데."
박치기 한 방에 뇌병변이 따르지는 않겠지만, 적어도 상대도 자신 못지않고 의식이 아득하리라는 확신으로 장교는 다시 움직인다. 왼팔을 휘둘러, 거세게 아래로 내리친다. 그에 딸려오는 것은 당연히도 금나수에 잡혔던 사내의 오른팔, 목표는 둔기의 손잡이, 애병에 내리쳐서 손목을 부숴주마, 장교의 눈이 이글거렸다.
/어느 순간부터 손의 좌우가 바뀐 것 같은데, 일단 이대로 갈게. 현재 장교의 오른손(사내의 왼손)에 기병도가 있어.
치매가 오기 전에 먼저 모가지가 따이지는 않을까? 당장 그 험지에서 살아남는 것만 생각해도 굉장한 일이었다. 그렇게 그들은 남부의 그 여유를 부러워했고 이런 사단이 벌어진 것이 아니었을까. 사실 전쟁을 막고자 할 이유는 없었다, 형제 자매들이 목놓아 슬픔을 토했고, 약육강식에 찌들은 그들은 남방이란 정복의 대상으로 보이지 않았을테니까. 그들의 오만이, 지금의 상황을 만든 것이리라. 그렇게 생각하는 순간 그의 시선으로 상대방의 눈이 들어온다. 수많은 사선을 넘나들며 만든, 우리가 만든 괴물이었다. 약육강식에 잡아먹혀 그를 버티지 못한 이들의 소외감, 그리고 증오, 그 모든 것이 어우러진 괴물이자, 역작이었다. 어떻게 보면 이 결과물이야말로 우리가 추구했던 최악, 최고의 모습이 아닐까, 라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렇게 사내를 잠시간 온화함 반, 대견함 반으로 지켜보는 순간, 그의 오른손이 잡아당겨진다.
"오호."
어느정도의 수를 읽은 것일까, 그는 말그대로 괴력을 선보이면서도 사내의 흐름에 발맞췄다. 일부러 뼈와 근육을 뒤틀듯 사내의 손목이 기묘하게 움직이고, 마치 사내가 자신의 무기에 가져다 주듯, 그는 손아귀에 있는 힘껏 무기를 부여잡고, 뒤틀린 상태 그대로 무기를 움켜쥐는데 성공하였다. 괴물, 이라고도 볼수 있겠지만, 이러한 수를 쓸만큼 이제 그에게는 여유가 없다는 뜻이리라.
"대단해, 대단해!! 이정도로 몰아 세울줄이야.... 그리고..... 정말 대단한게 뭔지 아나? 자네가 이만큼 성장했다는 것일세."
무기를 뽑아든 채 그가 천천히 뒤로 물러섰다. 잠깐, 물러섰다고?
"놀랐나 보군?"
대전사가 손을 펴보였다. 왼손이 눈에 들어온다. 아주 말끔히 잘려나간 듯 왼손바닥 이었던 것에는 더이상 중지부터 시작해 대부분의 형상이 없는 상황이었다. 단적으로 말하자면, 검지와 엄지를 연결하는 살부분을 제외한, 손바닥 자체가 없었다. 그랬다, 상대방이 금나수를 선보일때 무의식적으로 그는 전신에 힘이 들어갔고, 동시에 발맞춰 자세를 취할때 기병도가 사내의 손을 완전히 찢어 발겨버린 것이다. 슬슬 피로감과 피를 계속 흘린 댓가가 날아들기 시작한다. 억지로 정신력에 힘을 주고 버텼지만 이 이상으로는 절대 안된다는 듯이 그는 바위에 자신의 오른팔을 후려쳐 억지로 근육과 뼈를 끼워 맞추고는 씨익 웃었다. 이제는 진짜로 마지막을 장식해야할 때가 온 것이다.
"지금의 내가 산으로 보이는가?"
그가 웃는다. 그 표정은 산을 닮았다. 때로는 못 이길 시련처럼, 때로는 아버지같이 따스하게, 생의 마지막에 이르러서야 그는 정말로 자신의 모든 것을 이어받아낼 남자를 찾은것이다.
"남은 시간이 별로 없네만, 그대라면 내 모든 것을 가져가도 좋네. 대전사의 칭호, 자네에게 물려주고 싶네만."
남은 한손으로 둔기를 집어 든다. 아까와 같은 투기와 패기는 없지만, 막대한 거력을 담아낸 듯, 태산과도 같은 험준하고 광대한 기운을 보여주고 있었다. 아마 사내의 시선으로는 분명, 마지막으로 화려하게 태우는 불꽃이 그의 눈 안에서 보일 것이리라.
뒤틀려버린 손으로도 기어코 애병을 다시 잡아챈 사내의 집념에 장교는 기를 써서 기병도를 휘두르려 했다. 아니, '휘둘렀다.' 저항감 없이 날이 허공을 반 바퀴 긁은 뒤에야 장교는 오른손이 더 이상의 속박을 받고 있지 않음을 깨달은 것이다. 어쩌면 상대의 기백에 지나치게 눌려 있던 것일까, 클린치에서의 무수한 수싸움과 격한 몸의 흔들림을 생각하면, 날을 쥔 손이 남아날 거라 생각한 게 이상했다. 그 정도로 상대의 위용에는, 도무지 불신의 칼을 대기 힘들었다.
"당신같은 상대를 반드시, 하나 더 찾아내기 위해서."
그러나 지금, 의식하지도 못하는 새에 비로소 날이 들어갔다. 최초의 접근 이후 처음으로 벌어진 여유로운 간격 너머로 보이는 남자는 더 이상, 항거할 수 없는 철벽이 아니었다. 끓어오르듯 가쁜 호흡 속에서, 점점 희열이 나타났다. 드디어, 도달해간다. 반죽음 상태의 중년을 상대로 느낄 감정은 아닌지도 모르지만, 따라잡아가는 기쁨, 도전자가 아닌, 대적자로서 서 있음을 느꼈다.
"지금의 저는, 산으로 보입니까?"
광포한 북방의...... 아니, 그 자신의 오만을 드러내 보이며, 장교는 간격이 벌어진 잠깐의 여유를 틈타 스스로의 가슴을 눌러, 부러진 갈빗대들을 어떻게든 엇갈리게 만들었다. 그렇게 해서 적어도 싸움이 끝나기 전까지는 엇나가 내장을 찌르지 못하도록 했다. 이쪽도 꽤나 만신창이지만, 어떻게든 버틸 수 있다. 그 터프함의 원천을 생각하면 자연스레, 장교는 처음으로 자신의 출신에 감사를 느꼈다. 끊임없이 스스로를 괴롭히던 도망자의 콤플렉스를, 오롯이 떨쳐낼 수 있었다.
"무례를 용서하신다면......"
장교는 기병도를 가볍게 몇 번 휘둘러 허공을 수놓았다. 반사광의 미묘한 연결로부터 시작되는 간단한 기교는 남방의, 아니, 장교 자신의 의례였다. 일생에 마주한 가장 뛰어났던 자, 누구보다도 동경했던 자, 한때 원망으로 따라잡길 바랐던 자, 마지막으로, 스승이었던 자에게, 장교는 가능한 한 최대의 경의를 표한 다음, 우레와 같이 포효했다. 한 명의 전사로서, 그리고 답할 수 없는 제안에 대한 그 나름의 의사 표현으로서.
그가 웃음을 터트렸다. 그래, 드디어 너 다운 모습이 나왔다고 해야겠구나. 드디어 내 죽음이 헛되이지 않겠어, 보이냐? 이 녀석들아!! 이 녀석이 바로 다음대 대전사다!! 너희는 해내지 못한 전인미답(前人未踏)의 경지에 드디어 올라 선 것이다!! 그 웃음에 모든 감적이 튀어나온 듯 그가 웃음을 사방으로 터트린다. 전쟁에서 패하고 전투에서도 패하였으나 이미 모든 것을 얻어낸 것인지 그는 자신이 산으로 보이냐는 말에 웃음으로 답한 것이었다. 불완전 했으나 멈추지 않고 결심한 것을 움켜쥐었다. 다만 아쉬운 것이 있다면 이 눈앞의 막무가내 사내가 무아지경으로 붙잡은 이 기회를 어디까지 가지고 올라갈 것인지 끝까지 보지 못함뿐,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다.
"사람들이 나를 보고 일기당천의 사내라고 하더군. 하지만 말이야. 이제 그것도 옛말이 되겠군, 자네는 일기당천을 이긴사내가 되는 거지. 그래 무슨 칭호가 어울릴까...."
그 순간 천천히 미소를 띄우던 그가 입을 열었다.
"그래, 천하무쌍(天下無雙)이 좋겠군."
그와 동시에 나지막한 말이 그의 외침에 묻혀 사라지고, 그와 동시에 그의 둔기가 천천히 휘둘러진다. 산들바람부터 건들바람, 흔들바람, 된바람에 순식간에 큰센바람까지 올라가고, 마침내 북부 최후의 전승비기인 싹쓸바람까지 휘둘러진다. 마치 자신 눈앞의 사내에게 이 모든 것을 기억하라는 듯 기술의 힘배분과 모든 것을 하나하나 전승시키기 위해 한차례의 고된 춤을 추었다. 그 순간 모든 바람이 멎은 듯한 느낌이 드는 것은 절대 착각이 아니었다. 흐릿해져가는 정신을 붙잡으며 그의 둔기가 거대한 사선을 그었다. 하늘부터 땅까지, 모든 것을 삼킬듯한 바람이 터져 나오며 그의 말이 조용히 위대한 전설이 될 남자에게 흘러 갔다.
"고생했네, 후예여. 모든 원망은 나에게 두고 앞으로 가시게. 아니지 아니야...." [제 12식 - 싹슬바람, 아류 - 용오름] "다음을 부탁하지, 다음 대전사."
온전한 상태라면 분명히 최후의 일격이 되었을지도 모르겠지만.... 아마 지금 눈앞의 사내는 알것이다. 기술의 기수식 자체가 양손으로 휘둘러야만 온전한 일격이 되는 그러한 기술임을.
손에 우산을 쥐고 있었지만 펼치고 싶지 않았다. 비를 피할 수 있는 지붕이 있는 곳으로 자리를 피하지도 않았다. 추적추적 떨어지는 비를 맞고 있을 뿐이다. 나는 아무도 듣지 못하는 비명을 지르고 있는 중이다. 미친 년처럼 보일 기행을 저지르는 중이다. 나도 그저 따스한 누군가의 진심 어린 걱정을 받고 싶을 뿐이야. 아무것도 말하지 않고 그런 걸 바란다니 과분해도 너무 과분하다. 당신도 나를 지나쳐가겠지. 나는 비에 젖은 몸이 추위에 떨기 시작하면 집으로 갈 것이었다. 죽고 싶거나 미쳤다는 말이 참말이기에 이러고 있는 것이 아니니까.
처음에는 미친년인가 싶었다. 우산을 들고 있음에도 나리는 비를 그대로 맞고 섰는 저 여자는 뭐 마음이 그리 고될까. 통념적으로 그녀에게 우산을 씌워주거나 각별히 다독여주는 것이 마땅할진대, 그건 진심도 걱정도 아닌 남에게 아량을 베풀었다는 데에서 오는 알량한 자존감의 충족일 뿐일지다. 다만 그것을 잘 알면서도 그냥 지나치질 못하고 말없이 다가가 구태여 비를 막아주는 것은 비이성적인 행동에 대한 약간의 호기심이 목구멍을 슬쩍 긁어놓은 탓이다.
육중한 둔기가 허공을 수놓는 것을 조용히 바라보던 장교의 팔이 흔들렸다. 큰 게 온다는 직감과 함께 그는 마지막을 예감하며 반격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내심으로 생각하기를, 선발제인의 수로 기수식에서 저 동작을 꺾어버리는 판단에 마음이 동한다. 하지만 그것은 저 사내의 여력을 너무 과소평가하는 것이다. 외팔일지언정, 상식을 무시하고 지친 상태에서도 자신과 같은 속도로 저 거병을 움직이던 완력이다. 설사 이빨만 남는다 하더라도, 준비동작에서 반격을 허용할 상대가 아니다.
대신 극도로 공격적으로 칼을 앞으로 뻗고 맞서기를 택한다. 바람을 막기 위해서, 무엇을 필요로 하는가? 천막? 벽? 하지만 지상 어디의 바람보다도 차갑게 다가와 살을 씹어먹는 북풍을 상대로는, 때때로 막는 것보다 나은 선택도 있다. 어쨌든, 벽보다는 깃털이 싸게 먹히는 법이다.
장교는 몰아쳐오는 사내의 거병을 향해 가볍게 도약했다. 막을 생각은 처음부터 없었다. 다만 바람을 탈 뿐이다. 폭풍에 휘말린 뇌운처럼, 바람을 타고 퍼져나가는 민들레의 종자처럼 장교는 몸을 펼쳤다. 부족한 손의 한계로 필연적으로 찾아오는 공세의 감속, 그 짧은 순간을 포착해, 휘둘러오는 둔기를 발로 디뎠다.
발목을 감싸는 알싸한 충격, 그러나 버틸 수 있다. 원래라면 박살이 났을 발을 축으로 삼아 다시 한 번 도약한다. 동시에, 오른팔을 뒤로 한 번 펼치고, 빠르게 갈무리한다. 소름끼치는 파공음과 함께 기병도는 앞으로 당겨지고, 몰아쳐온 거센 바람을 거꾸로 타고 앞으로 뻗는다.
태양과 장교의 형체가 일순 겹쳤다. 일광을 등진 장교의 목이 찰나에, 위아래로 끄덕여졌다. 바로 직후에, 위에서 아래로 기병도를 찔러내려갔다. 남방의...... 아니, 자기 자신만의 유파, 폭풍에 휘말려 밀려들어와서, 어느 새 폭풍보다도 깊은 상흔을 남기고 떠나는,
대전사의 눈이 살짝 휘둥그레해진다. 그것은 마치, 한순간이나마 옛날로 돌아간 기분이었다. 수많은 이들이 어전투구 속에서 살아남아 승리를 쟁취했을때의 그 감정이었다. 청출어람이라고 했던가, 잠깐동안이지만 그의 성장을 지켜보는 이로서는 가장 크나큰 즐거움이 지금이라고 할수 있으리라. 폭풍을 거슬러 오르는 그의 모습은 마치 등용문을 오르는 용어의 모습이었다. 자신을 막아섰을때의 그를 보고 잠깐이나마 가소롭게 생각했던 자신을 향해 뒤통수를 한대 후려갈기고 싶은 느낌까지 들었다. 용이 되려는 남자를 막아서서 그 성장의 한걸음이 되어주었다, 그것 하나만으로도 남자는 이미 이 생에 모든 일을 다 한 것이 아닐까란 생각이 들었다.
"굉장하구나."
감탄사가 터져나온다. 상처를 입어가면서도 폭풍의 한가운데를 거슬러 오르는 용의 모습에 그는 순수한 웃음을 터트렸다. 삶의 끝에 도달한 지금, 그는 지금 막 백수의 황제를 쓰러트리고 저 먼 하늘을 비상해 오르는 용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래, 어서 서둘러 올라가라, 하늘을 향해 올라가는 용과 같이, 나를 밟고 그 하늘 너머로 날아가는 것이다. 출신, 성분, 나이, 그 모든 족쇄가 지금만큼은 모두 박살나가는게 느껴진다. 폭풍을 꿰뚫고 하늘을 뒤덮인 구름을 바라보며 그는 천천히 둔기를 땅바닥에 꽂았고, 천천히 가슴팍을 바라보았다.
"축하한다.... 네가 다음 대전사다....."
가슴으로부터 뜨거운 피가 쏟아진다. 하지만 그의 입가로는 감출수 없는 미소가 드러난다. 그것은, 진정으로 용이 된 남자를 위한 축하의 선물이었다.
장교의 손이 부르르 떨렸다. 승리의 직감, 동시에 공포, 혼란, 흉부를 관통한 기병도가 뒷걸음질에 따라 느릿하게 뽑혀나왔다. 붉게 물든 날을 멍하니 쳐다보다가, 그는 물기 어린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일어나."
누구에게 하는 말인지는 불분명했다. 그러나 곧 장교의 한쪽 발목이 육체를 지탱하지 못해 스러졌다. 그대로 한쪽 무릎을 꿇고서, 마치 그림자를 보는 것처럼 장교 또한 칼을 바닥에 꽂았다. 거친 숨소리와 함께 장교는 토혈했다. 몇 개의 이빨이 피 속에 섞여 흘러나왔다.
"겨우 찾았는데, 이 개같은, 투쟁 뿐인 세상에서."
전신이 엉망이지만, 장교는 어떻게든 몸을 추스렸다. 죽을 정도는 아니다. 이런 격전을 벌였음에도 아직 이승에 발 붙일 수 있다. 그러니까 당신같은 자도 버틸 수 있을 거라고, 있어야 한다고, 억지를 써 보려 했다. 그러나 붉게 타오르는 듯한 기병도의 날만이 눈에 들어올 뿐이다.
"스승을......"
최초로 사냥당한 베히모스의 앞에서 장교는 이를 악물고 고개를 숙였다. 고통 때문인 것처럼, 동시에 경의를 표하는 것처럼도 보였다. 곧 비명이 울렸다. 누구에게도 보여지지 않는 장교의 입에서 나온 비명은 곧 줄어들어 신음이 되었고, 고통스레 끊기는 것을 몇 번이고 반복하면서도, 이어졌다. 듣고 있으면, 그것이 하나의 멜로디임을 알 수 있다. 투박한 전사의 노래, 6천명의 시체 위에 태연하게 서 있던 전사에게 보내는 용의 장송곡이 울려퍼졌다.
그가 천천히 미소 짓는다. 흐릿해지는 시야가 모든 것을 말해주듯 죽음에 초연해진 위대한 전사는 만족한 표정이었다. 참으로 아이러니하였다. 승자는 울음을 참고 있고, 패자는 오히려 만족했다는, 그런 이상한 결과가 벌어졌다. 그러나 오히려 역설적으로 그것은 합당한 결과일 수도 있으리라. 그것이야 말로 사람들이 말하는 남자의 세계였으니까. 대전사는 자신의 죽음으로 용이 탄생하는 것을 목도하였다. 그렇기에 그는 용의 울음소리를 들으며, 천천히 둔기를 잡은 손에 힘을 넣었다. 무언가를 휘두르기 위함이 아닌 자신의 마지막 유언을 전하기 위해, 앞으로 날아오를 용을 위해, 백수의 황제는 마지막 사력을 다해 위풍당당한 모습을 보여주기로 결심하였다. 아주 잠깐이지만 혈색이 도는 모습은, 그 누구보다도 생기가 넘쳐보였다.
"네가 산으로 보이냐고 물었지 않느냐. 이제 그 답변을 들려주마."
그가 왼팔을 들어올린다. 이젠 만신창이가 되어서 더이상 손이라고 할수 없는 그것에선 더이상 온기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다. 하지만 그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는 엄지와 검지만 남은 손을 용의 머리에 올려두며 격려섞인 쓰다듬을 행하였다. 아들, 제자...... 저승으로 향하기 직전 가장 소중한 이에게 해줄수 있는 선물이었다.
"너는 하늘이다. 구름도, 바람도, 산도 모두 덮을수 있는 저 하늘이다. 생에 마지막, 너를 보고 네 길의 완성을 볼 수 있어서 다행이구나."
그가 웃음을 터트렸다. 모든 것을 이뤄낸 남자였다. 사내로서 천하를 호령하고 힘으로나마 무언가를 이뤄내었다. 모든 것을 잃었으나 모든 것을 얻었다. 죽음으로써 가장 아쉬운 것은, 눈앞의 젊은 용이 세상을 어떻게 호령할지, 그것을 보지 못해 아쉬울 뿐이었다. 하지만 어떠한가, 이미 자신은 그 역할을 다하였고, 이제는 그에게 맡겨야할 시간이었다.
"이젠 진짜 작별할 시간인가, 이게 내가 깔아놓은 길의 마지막이다. 남은건 스스로...."
숨 쉬기 어려운 고통과 흐릿해진 시야,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 모르겠다. 건조해진 시선으로 이곳 저곳을 쓸어봐도 주위에 살아있는 것이라고는 없다. 눈 앞에는 마치 세월의 풍파를 오래도록 견딘 거상과 같이 한 남자의 시체가 서 있었다. 지독한 피의 냄새와 끔찍한 고통이 없었더라면 정말로 오해했을지도 모를 만큼, 모든 것이 꿈처럼 느껴졌다.
"잘 가시오."
모든 것을 세상에 풀어놓고 사라진 자에게, 무덤은 필요하지 않을 것이다. 다만 여전히 흉부에서 피가 흘러내리는 사내의 몸을, 벌레와 까마귀에 맡기고 싶지는 않았다. 저도 모르게 대전사는 성치 않은 몸을 움직였다. 나무와 풀, 다음 번의 비가 내릴 때까지 원 없이 타오를 수 있을 만큼의 땔감을 끌어모았다. 결코 사냥해서는 안 되었던 야수의 죽음에 대한 하늘에의 탄원이요, 마음 한켠에 미뤄두고 있었지만, 6천 명의 시신을 수습하기 위한 화장이기도 했다.
그러고 있으려니, 말이 주인의 곁으로 돌아왔다. 대전사는 안장에서 물병을 꺼내어 목을 축였고, 직후에 말의 등 위로 엎어졌다. 조금은 쉴 시간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일단은 간소하게 몸 곳곳에 부목을 하고, 움직일 준비를 했다. 쉬기에는 할 일이 아직 많았기에, 우선 앞서 나간 자신의 부대를 따라잡을 생각이었다. 맡겨진 무수한 책임들을 모두 해결하기 전까지는 움직임을 멈출 수 없다. 혹여나라도, 이 책임을 넘겨줄 만큼 걸출한 사람이 나타나기 전까지는.
'모든 일이 끝나면, 고향으로 돌아가야 할지도 모르겠군. 그 때가 되면-.'
자신의 단검을 찾아 갈무리하고, 닦아낸 기병도를 칼집에 꽂고, 말 위로 올라타서, 대전사는 조용히 전대에서 부시를 꺼내었다. 터져나오듯이 만들어진 뜨거운 불길을 홰에 옮겨붙이고 나서, 대전사는 천천히 고삐를 잡아당기기 시작했다. 처참했던 격전의 현장을 비스듬히 돌아가면서, 마지막으로 그는 속삭였다.
"다시 돌아오겠습니다."
대전사는 횃불을 던졌다.
사방으로 번지기 시작한, 모든 전투와 죽음을 처음부터 없었다는 듯이 지워나가는 불길을 뒤로 하고 말은 달렸다. 빠른 속도로 산길을 향하며, 얼마쯤 뒤에는 매캐한 연기와의 거리도 벌려나갔다. 그러나 말 위의 기수는 못내 미련이 남아 뒤를 돌아볼 수밖에 없었다.
이윽고 겉잡을 수 없이 타오르는 불길 속에서, 대전사는 거무튀튀한 것의 반사광을 보았다고 생각했다. 몇 번의 계절과 풍파가 지나도 여전히 그 자리에 남을 한 자루의 거병이, 한 사내의 묘비로서, 뜨거운 화염을 입은 채로도 당당히 서 있었다.
/이걸로 막레...일 듯 하네. 이야, 상당히 길었다 우리 원조 대전사님은 이걸로 성불하셨으려나?
/고생했어!! 성불 수준이 아닐꺼야!! 아마 극락왕생하지 않을까 싶네! 생에 마지막 한조각까지 본인의 모든것을 받아내고, 동시에 그 사람이 자기를 뛰어 넘는걸 봤으니 이미 미련없이 갔을꺼야!! /오랫만에 원없이 전투씬을 써봤는데 내가 좀 억지로 굴린게 없잖아 있었다고 느꼈음에도 끝까지 같이 어울려줘서 고마워!!
>>607 /하얗게 불태웠다고 생각해도 되겠지...? 음, 전투씬은 나도 많이 쓰고 싶어하는 사람이라, 그렇게 생각할 필요는 없어. 지를 만큼 지르며 어울린 건 피차 마찬가지라고 근데 여기까지 와서 그닥 상관은 없겠지만 그래도 궁금한 건데, 전쟁의 승패는 어떻게 되는 거야...?
/아 결말? 북부의 대패야 /애시당초 대전사 본인이 말했듯이 '모든것을 잃었으나 모든것을 얻었다'는 말 자체가 이미 전투에서도, 전쟁에서도 패배할 것을 예측하였으나 지금 장교를 만나서 다행이라는 의미였거든 /사족을 덧붙이자면, 대전사는 전쟁에 반대했어. 보급선도 제대로 유지 안될 뿐더러 추운 북쪽지방과는 달리 남쪽 지방은 북부인들이 경험하지 못한 풍토병이나 독성을 가진 풀들도 많았고, 기동성을 살린 공격을 가하더라도 백병전에선 이길지언정 공성전에서는 패배할 수밖에 없다는 의견을 제시했거든. 지극히 정상적인 의견이었지만..... 결말은 보면 알겠지? :)
/2차대전 독일을 생각하면 편할꺼야 ㅋㅋㅋㅋㅋㅋㅋㅋ /그리고 말했지? 북부는 약육강식의 세계라서 힘을 보여주면 끝이야, 힘을 가지고 약식이긴 하지만 대전사의 계승을 거쳤는데 대전사를 인정안한다고? 오우 그거.... /아 그리고 대전사의 계승 방식은 매우 간단해, 전대 대전사를 죽이면 끝.
/뭣하면 둔기라도 들고가서 내가 니네 대전사 죽이고 승계의식 치뤘으니까 꼬우면 덤벼!! 이라던가!! 정식 대전사 계승식은 무조건 1:1이고 진행되는 동안에는 절대로 다른 사람들이 못 껴드니까!! /그대목 답변은 중국 한족과 유목민들 관계를 생각하면 빠를꺼야!! 티격태격 하면서 틈나면 한판 거하게 치르는.... 다만 이쪽의 경우는 아직까지 남부를 정복한 예가 없다는 정도?
신호음이 끊기자마자 혀 꼬부라지는 소리가 들린다. 분명 통화로는 소리 밖에 안 들릴텐데 술 냄새가 진동을 하는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로, 달릴 때까지 달리고 있는 중인 목소리다. 평소보다도 높게 튄 음이라던지 부정확하게 굴러가는 발음이라던지, 또 주변에서 웅성이는 시끄러운 소리 등이 상황을 짐작케 한다.
따뜻하게 덥힌 우유 한 모금을 들이키며 탁자에 앉아 하루간 있었던 일을 정산하려던 찰나, 울려오는 핸드폰에 그가 눈쌀을 찡그렸다. 이 시간에 전화가 울린다면 단 한명밖에 없다고 생각하며, 남자는 아주 살짝 미간을 찡그렸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불쾌한 것은 아니었다. 내일은 그나마 주말이었고, 지금 이 전화의 대상이 절대로 나쁜 상대는 아니었으니까. 그 반증으로 그는 핸드폰을 집어들고 있었다. 아니나다를까, 꼬인 발음과는 다르게 꽤 익숙한 목소리가 들린다. 거기에 혼자 갔는지, 다수가 갔는지 모를 정도로 소란 스러운 상황, 얼마나 퍼마셨는지는 몰라도 그는 어차피 상관 없다는 듯 무미건조한 상태로 무덤덤한 반응을 보이며 전화기 너머의 상대방을 향해 입을 열었다.
"얼마나 드신겁니까."
상당히 정중한 목소리로 그는 가운을 벗은뒤 블루투스 이어폰을 끼고 상대방의 전화를 끊지 않은채 옷을 챙겨입기 시작하였다. 평소에 입고 다니던 검정색 양복이 아닌, 캐주얼한 디자인의 블랙진에 하얀색 셔츠, 그리고 검정색 조끼를 챙겨입은채 그는 핸드폰을 챙겨들고 집밖으로 나서며 한숨을 쉬었다.
"아무리 내일이 주말이라지만 이 시간에 전화하는 건 민폐라는거 못 배우셨는지요. 그래서 어디로 모시러 가면 됩니까."
본인이 말해놓고도 스님이라는 말이 우스운지 한바탕 웃는 소리가 난다. 그래도 내일이 주말이라니 자정을 넘기도록 퍼마시진 않아 다행일지도 모른다. 혹은 자정이 넘지도 않았는데 이렇게나 취기가 올랐다면 언제부터 언제까지 마실 작정인지를 고민해야할 지도 모른다. 통화에 넘어오는 다른 사람들의 목소리나 소음은 당신에게도 시끄럽겠지만 그 뿐만이 아닌 것 같다.
"야아아, 너네 시꺼. 나갈래, 나갈래~!!!"
천천히 소란스러운 소리은 사그라든다. 어딘지는 모르지만 술을 마시던 왁자지껄 시끄러운 장소의 밖으로 나온 모양이다. 다만 공백은 다른 소리로 채워진다. 자동차 오가는 소리가 들린다.
푸념아닌 푸념을 흐트리면서 올백머리스타일에 조금은 날카롭지만, 순박한 인상의 남성은 빠르게 검은색 승용차에 올라탄뒤 길거리를 내달리기 시작했다. 솔직히 술만 아니면 좋은 상관인데 술만 들어가면 이 상황이 되는 거 자체가 우스운 상황인거지만, 애시당초 주말도 없는 상황이 좀 많이 슬프지만 자신의 일이기에 그는 그냥 묵묵히, 자신의 주인을 위해 달릴뿐이었다.
".... 후우, 알겠습니다. 단 한잔입니다. 위치만 말씀해주십시요."
그렇게 한숨을 내뱉자 마자 그가 창밖을 바라본다. 아직 날은 지나지 않았지만 밤거리는 위험하다. 언제나 화려한 네온싸인은 그를 감추기 바빴고, 언제 모를 사고는 후끈하고 왁자지껄한 분위기에 가려져 보이지 않을 뿐이었으니까. 항상 노파심이라고는 하지만 자신의 주인은 그만큼 자유분방하고 어디로 튈지 모르는 사람이었고 말이다. 남자는 입안에 은단을 털어넣었다. 지금 자신의 주인을 섬기기 위해, 그는 많은 것을 포기했다. 술을 그만둔지는 2년밖에 되지 않았으나, 담배는 일을 시작하자마자 끊었다. 처음에는 괜찮았지만, 이제는 은단으로 버틸만 했으니까. 다만, 자신의 주인이 술을 마셨다는 소리만 들리면 그날만큼은 너무나도 담배가 땡겨왔다.
/대강 위치 브리핑 해주시고오~ 검정색 제네시스니까 보이면 가볍게 브리핑해주세오!! 성별따라 호칭 달라지니까 말해즈시구!!
당신이 만족스런 미소를 띄자 여성의 얼굴은 더 찌푸려진다. 약한 흥얼거림마저 불만스러운지, 삐딱한 자세로 기대 앉은 당신 쪽을 째려보았다.
"그래, 걱정된다. 됐어?"
당신의 웃는 얼굴마저 얄미웠다. 얼굴에는 피칠갑을 해놓고 당신은 뭐가 그리도 좋은지.
"미운 놈 떡 하나 더 주는 거다, 왜. 불만 있어?"
말투는 톡 쏘아도, 당신의 얼굴을 닦아주는 여성의 손길은 부드럽고 조심스러웠다. 최대한 당신이 따갑지 않도록 주의하는 행동이었다. 피를 닦아주느라 당신과의 시선을 마주치지 않던 여성의 눈동자가, 당신이 눈동자를 굴리자 그제서야 당신에게로 향했다.
"......넌 고작 그런 이유로 싸우는 놈은 아니잖아."
여성은 말을 툭 내뱉었다. 당시 현장을 지켜본 것은 아니었기에 당신이 싸운 정확한 이유는 모르지만, 그래도 여성은 당신이 양아치여도 마구잡이로 싸우는 놈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교장실로 따라온 것도, 반장인 것도 반장인 것이었지만 당신을 두둔하기 위해서라고도 말하지 않았다.
하지만 당신이 맑게 웃으면 다시 또 당신이 얄미워졌다. 여성은 당신이 발 장난을 걸어오자 당신을 째려보더니 똑같이 발로 당신의 신발을 가볍게 쳤다.
"난 걱정 붙들어매시지. 이렇게 잠깐 빠지는 걸론 대학 진학에 영향 없거든?"
여성이 전교권에서 놀고 있다는 것을 당신은 알고 있는지. 여성은 나름대로 당신을 위해 여기 있는 건데, 당신이 그렇게 말하고 장난치면 더 얄미웠다. 당신의 얼굴에 반창고를 붙여주는 여성의 손길이 심술을 부리듯 조금 거칠어졌다.
"도련님. 아무리 그래도 상대방은 만나보고 결정을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러는 것은 상대방에 대한 실례행위입니다." "만나긴 할 거에요. 하지만 꼭 만나본 후에 결정을 해야 할 필요는 없잖아요. 전 정략 약혼 같은거 하기 싫어요."
귀족가의 사람이라면 거의 대부분이 한 번은 부딪쳐야 할 관문이 바로 이 정략 약혼이었다. 집안과 집안의 이득을 위해 자식들끼리 약혼 관계를 맺으려고 하는 것이며 때로는 당사자들끼리의 동의가 있었지만 때로는 동의없이 일방적으로 체결하려는 가문도 있었다. 옛날에는 후자가 대다수였으나 시간이 흘러 이제는 전자와 후자가 반반 정도로 나뉘어져있었고 집사의 말에 고개를 도리도리 젓고 있는 이 푸른 머리 사내는 후자에 해당되었다. 상대방 집안은 모르겠지만 적어도 자신은 딱히 약혼에 대해서 들은 것이 없었다. 갑자기 약혼을 맺으려고 하며 약혼 상대방을 집에 초대했으니 만나볼 준비를 하라는 제 부모님의 지시를 떠올리며 사내는 괜히 더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그럼 도련님은 혹시 마음에 두고 있는 이라도 있으신겁니까?"
"아니요. 지금은 딱히 그런 쪽으로는 생각이 없어요. 무엇보다 누군지도 모를 이와 어떻게 약혼을 한다는 말이에요. 무슨 할아버님 시절도 아니고."
"굳이 말하자면 정말로 어린 시절에 면식은 있는 분입니다만..."
"기억도 안 나는 어린 시절을 카운트하지 말아주세요."
적어도 자신은 생각이 없다는 듯 사내는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그래도 집안에서 상대방을 초대했으니 자신이 나가지 않으면 그야말로 상대 가문에 대한 무례였으며 상대 가문의 입장에선 말로 다 할 수 없는 창피나 마찬가지였다. 약혼은 싫지만 그렇다고 무례를 범할 수는 없기 때문에 사내는 일단 상대방을 만날 생각이었다. 물론 바로 거절할 생각이었지만.
하얀 와이셔츠에 검은색 정장을 입어 나름대로 예복 차림을 갖춘 사내는 도망치지 않을테니 따라오지 말라는 부탁을 집사에게 하며 응접실로 향했다. 슬슬 도착 시간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뭐가 어찌되었건 상대방과의 약혼은 거절할 생각이었고 경우에 따라서, 예를 들면 상대방도 영 내켜하지 않는다면 연합해서 부모님에게 이 약혼은 절대로 하고 싶지 않다는 뜻을 보이리라고 그는 머리를 굴렸다.
/그냥 정략 약혼을 정말로 꺼려하는 귀족집 도련님이고 상대가 곧 온다고 해서 일단 기다리고 있다는 그런 느낌이야. 꼭 상대방이 아니어도 되니까 그냥 편하게 이어줘도 괜찮아. 하지만 맥브레이커나 그냥 단순히 꼽 주려고 잇는 전개면 스루처리할 생각이야.
어느 귀족가로 향하는 마차 안에서 곱게 단장한 여성이 남몰래 한숨을 삼킨다. 느닷없는 정략 약혼을 위해 상대를 만나러 가라니, 아버님도 참 너무하시지. 귀족으로 태어난 이상 무엇 하나 자유롭지 못 할 것은 어릴 때부터 알고 있었다. 그렇지만 이건 너무 급작스럽잖아.
"자꾸 한숨 쉬시면 안 되요, 아가씨." "안 쉬었어. 릴리." "속으로 삼키신 것, 표정에 다 드러나신답니다." "흥. 릴리는 내 맘도 모르고."
성년이라고는 하나 여성은 아직 앳되었다. 나이도 마음도. 아직 세상 궁금한게 많을 나이였고, 조금은 더 두근거리는 경험을 하고픈 시기였다. 약혼 상대도 가능하면 스스로 고르고 싶었다. 예를 들면, 아주 어릴 적 만났던, 신비로운 푸른 머리의 소년이라던지-
"곧 도착하겠네요. 자, 내리기 전에 거울 한번 더 보셔요. 어서요." "치잇... 알았어.."
자신의 마음은 새카맣게 모르는, 아니 모르는 척 하는 시녀의 닥달에 그녀는 마지못해 거울을 들고 얼굴을 비춰보았다. 분을 바르지 않아도 새하얀 피부, 앵두를 머금은 듯 붉고도 도톰한 입술, 길고 가지런한 속눈썹과 진한 에메랄드의 눈동자, 아침부터 갖은 수고로움을 들여 손질한 백금의 머리카락...
"세상에 아가씨보다 더 고운 영애가 계실까! 분명 상대분도 홀딱 반하실 거에요!" "상대가 반하면 뭐해. 내 맘에 안 들면 흥이지." "아가씨!" "흥!"
그녀가 시녀와 티격태격 하는 사이 마차는 귀족가의 정문에 도착해 멈춰섰다. 시녀가 마찬 안에서부터 능숙하게 그녀의 드레스를 정돈해주어 내릴 때 고운 자태를 뽐낼 수 있게 해주었다. 또각. 마차에서 내린 그녀는 귀족가 사용인의 안내를 받으며 응접실에 도착했다. 사용인이 먼저 문을 두드리며 그녀의 도착을 알리고, 문이 열리자 그녀가 안으로 들어갔다. 사뿐사뿐 들어가, 고운 로즈핑크빛 드레스 자락을 살짝 잡아 예를 갖춘 자세를 취하며 그녀는 귀족가 영애다운 인사를 올렸다.
"안녕하셔요. 오늘 이렇게 만나뵙게 되어 영광이어요."
미모에 걸맞는 완벽한 미소를 지으며 인사를 올린 그녀가 고개를 들어 상대를 확인했을 때, 그의 머리색을 보고 흠칫 놀랄 뻔 했으나, 단단히 교육받은 귀족의 몸가짐을 떠올리며 애써 티를 내지 않을 수 있었다. 그럼에도 속으로는 혹시, 설마- 하는 의혹이 생기지 않을 수 없었지만.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자 사내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손님이 왔는데 자리에 앉아서 맞이하는 것은 귀족 이전에 상대에 대한 예의가 아니었다. 자신이 상전도 아니고 어쨌든 대등한 눈높이에서 마주보는 시대가 아니던가. 자신의 할아버지 시절이라면 또 모를까. 아무튼 사내의 시선이 자연히 막 들어온 영애의 모습으로 향했다. 에메랄드 빛 눈동자와 정말로 고운 빛깔의 백금 머리카락. 그리고 정말로 부드러워보이는 고운 하얀 피부에 상당히 아름다운 여성의 모습이 거기에 있었고 사내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멍하니 그녀를 바라봤다. 허나 곧 정신을 차리려는 듯 눈을 꾹 감았다가 다시 뜨며 그녀에게 다가갔다.
"여기까지 오신다고 수고 많으셨습니다. 일단 자리에 앉으시죠."
상당히 고운 여성이었다. 어쩌면 자신이 대충 머릿속으로 생각한 이미지보다 더. 아니. 애초에 상대에 대해서 나름 이름 있는 귀족가의 영애라는 것 외에는 들은 것이 없으니 머릿속으로 생각한 이미지와 비교하는 것 자체가 그다지 의미가 없었다. 어쨌든 그녀의 자리를 안내하며 그녀가 앉는 것을 확인한 후에야 그는 앉았던 자리로 가서 앉았을 것이다. 정확하게 마주보는 구도로. 서서 이야기를 나눌 순 없지 않겠는가.
마주보자 자연히 보이는 그녀의 에메랄드 빛 눈동자가 그의 보라빛 눈동자에 비쳤다. 생각보다 되게 예쁜데. 하지만 약혼. 거절 해야하는데. 그렇게 생각하며 그는 그녀보다는 덜하지만 그래도 나름 곱고 연한 하얀 빛 뺨을 긁적이다 손을 아래로 내렸다. 결심을 확실하게 굳힌 후, 사내는 입을 열었다.
"초면에 실례가 될 순 있으나 저는 정략 약혼에 응하고 싶지 않습니다. 당신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거나, 불만족스럽다거나 그런 것은 아니고 그냥 아직은 그런 것을 생각하고 싶지 않다고 해야할까. 그냥 그런 느낌입니다. 제 집사의 말로는 저와 당신이 어린 시절에 면식이 있었다고는 하지만 사실 그다지 기억도 나지 않을 정도로 어린 시절의 이야기에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싶고요."
확실하게 거절 의사를 밝히면서도 아까운 짓을 한 것이 아닐까 조마조마한 마음을 애써 티내지 않으려고 하면서 사내는 마음을 굳게 먹고 여성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녀의 의사를 물었다.
귀족으로 태어난 아이들은 어릴 적부터 다양한 가문의 또래 아이들과 접하며 자랐다. 그녀도 마찬가지로 계급의 상하를 막론하고 여러 집안의 자제들과 한번씩은 어울렸었다. 그 때야 아직 어리니 그저 아이의 마음으로만 순수히 놀았었으나, 유달리 기억에 남는 소년이 있었다. 깊은 바다를 닮은 머리카락에 예쁜 보석 같은 보랏빛 눈동자를 가진 소년이었다.
"아, 아. 네. 친절하기도 하셔라."
그런데 이 무슨 운명의 장난인지. 정략 약혼을 위해 만나게 된 상대 역시 그녀의 기억 속 모습과 흡사한 사람이었다. 가까이 온 그의 눈동자를 보고 더욱 이미지가 맞아들어간다. 아직 왈가닥이던 그녀는 하마터면 그를 보자마자 혹시 그 소년이었냐며 질문세례를 쏟아내었을 뻔 했으나, 자신이 귀족이란 점을 머릿속에 떠올리며 참아내었다. 집에서 어머님께 배운 대로 예의 바른 인사를 하고, 고운 미소를 지으며 그가 안내하는 자리로 가서 배운 대로 사뿐히 앉았다. 두근두근. 그 사이 의혹은 궁금증으로 변해가 그녀의 심장을 들뜨게 만들었지만, 맞은편에 앉은 그가 첫 마디를 꺼내자마자 두근거림이 가라앉았다. 동시에 그녀의 표정도 시무룩해졌다.
"그러시군요..."
어릴 적 면식이 있었다-는 말로 그녀의 의혹은 사실이었음이 밝혀졌으나, 그래서 더더욱 들뜰 수도 있었으나, 너무나 확고한 거절의 의사는 식은 들뜸을 다시 일으키기에 역부족이었다. 이래선 마차에서 릴리에게 했던 말의 부메랑이나 다름없잖아. 내가 마음에 들어도 상대의 마음에 들지 않으면 무슨 소용이람. 너무 시무룩해져서인지 그녀는 애꿎은 손가락을 괴롭히며 바닥과 자리 사이 어딘가를 바라보았다. 딱 봐도 저 토라졌어요, 를 티내면서. 그가 의견을 묻자 샐쭉하게 한 번 바라보더니 손만 더 꼼지락거린다.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그가 말을 꺼내기까지 잠시 시간이 있었던 것처럼 조금 후에 그녀가 대답을 꺼냈다.
"당신께서는 기억도 나지 않을 어릴 적이겠지만.. 어린 제게는 특별한 만남이었고 오늘 오는 동안에도 만난다면 그 사람을 다시 만나고 싶다고 생각했었어요. 그래서, 여기 들어와 당신의 머리칼만 보고도 가슴이 뛰었고 어쩌면, 혹시, 라며 조금은 설레였는데..."
그렇지만 들은 얘기는 단호하디 단호한 이 약혼의 거절 의사였지. 게다가 어릴 때 만났던 건 의미도 없단다. 그녀는 잠깐이나마 혼자 들뜨고 혼자 설렜던게 바보 같이 느껴졌다.
"제가 그렇다 해도... 옛 일은 옛 일일 뿐이겠지요. 저도, 아버님이 한 번 나가보라 하셔서 온 것이니, 당신의 생각이 그러시다면 돌아가서 아버님께 잘 말씀드릴게요."
사실은 조금만 만나보면 안 될까, 만나다보면 정략이 아니라 정말 마음에 들 수도 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 그런 말들이 목 끝까지 차오르긴 했지만 그녀에게 그의 태도가 마음을 완전히 굳힌 듯 보였다. 결국 꺼낸 말은 돌아가서 얘기 잘 해드리겠다는 그의 의견에 동의하는 걸로 자리를 끝맺고 그녀는 곧 일어날 것처럼 몸을 살짝 움직였다.
아무래도 상대는 자신과의 만남을 기억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특별한 만남이었다고 이야기하는데 대체 그때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인가. 자신만 기억을 못한다는 것이 묘하게 죄책감이 느껴졌고 그에 따라 사내의 마음도 절로 무거워졌다. 머리칼을 보고 가슴이 뛰고 어쩌면 혹시라고 하면서 설렜다는 그 말에 그의 입술이 아주 가볍게 흔들렸다. 자신과 완전히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음을 보여주는 그 모습에 사내는 잠시 말을 고민하다 입을 열었다.
"일단 사과부터 전하겠습니다. 정말로 저에게 있어서는 그다지 기억이 안 날 정도로 어릴적이고, 제가 기억하지 못한다는 것은 아마 그 이후에 특별히 더 교류가 있던 것도 아니었을 거라고 생각이 들기도 하고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과 약혼을 하는 것은 제 자신으로는 도저히 납득할 수 없었습니다. 다시 말하지만 당신이 마음에 들지 않거나 싫은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굳이 말하자면... 생각보더 더 예쁜 분이 오셔서 놀랐습니다."
상대는 매력적이었으며 상당히 아름다웠으나 그럼에도 잘 알지 못하고 집안과 집안의 이득을 위해서 약혼을 한다는 것을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것이 역시 제일 큰 이유였다. 어차피 장차 약혼을 하고 결혼을 한다면 서로 잘 아는, 그리고 마음이 통하는 그런 사람과 하는 것을 그는 원했다 애초에 요즘 시대가 어느 시대던가. 마음이 통해서 서로 약혼하는 이들도 늘어나는 판국인만큼 적어도 그에게 있어서 집안의 이득을 위해서 약혼을 하는 것은 구시대적 발상이었던 것이었다. 그런 생각을 다 털어놓진 않았으나 적어도 그녀가 마음에 들지 않거나 싫다거나 그런 것은 아니라는 것을 그는 강조하듯 그렇게 이야기하면서 말을 이어나갔다.
"조금 무책임한 발언일지도 모르지만 당장 약혼을 하기보다는 그냥 지금 제 삶에 조금 더 집중하고 싶기도 하고... 이런 마음으로 단순히 당신이 예쁘고 매력적이라고 약혼에 응하겠다고 하는 것은 역시 실례라고 생각합니다."
뒤이어 숨을 약하게 내뱉으면서 그는 그녀가 몸을 살짝 움직이는 것을 바라보며 그녀의 생각을 다시 한 번 물었다.
"말씀을 들어보면 약혼에 호의적인 것 같은데 어릴 적 저를 기억한다고 해도 지금의 저는 아무 것도 모르는데, 그럼에도 집안과 집안 사이의 이득을 위해서 약혼을 맺는 것이 괜찮으신건지요. 마치 제가 거절하지 않으면 그대로 약혼을 이어가려는 것처럼 들려서."
원래 이렇게까지 말할 생각은 없었으나 상대가 저렇게 이야기를 하고 있지 않은가. 마음을 굳게 먹는 것도 그에게는 힘든 일이었다.
/전혀 그렇지 않으니까 괜찮아! 오히려 캐릭터 설정과 캐입이라고는 하나 남캐가 너무 철벽을 친 것 같아서 잇기 힘든 것이 아닐까 싶어서 미안한 마음마저 드는걸.
사실 어릴 적 만남은 여느 아이들간의 교류와 별반 다를게 없었을 것이다. 세간적으로 보면 기억이 잘 안 날 만도 하고 그녀도 지금은 그 소년의 모습을 어렴풋이 기억하는게 전부였다. 그저 어릴 적 추억으로 남겨두려던 만남이, 기어코 찾아와버린 정략혼 얘기에 생각났고, 만난 상대가 그 소년과 너무 닮아서 주책맞게 들떠버렸다. 집에서 나올 때까지만 해도 그와 비슷하게 시큰둥했던 건 깜빡 잊을 만큼.
헌데 그렇게 들뜨면 뭐하나. 설레면 무엇할까. 그녀를 그리 만든 상대는 저토록 단호한데. 마치 철벽과도 같은 그의 태도는 평소 말 많고 촐싹거려 어머니는 물론 시녀에게조차 제발 얌전해지라 듣는 그녀가 당돌한 말 한 마디 못 꺼내게 하였다. 역풍을 제대로 맞아버린 것이다. 그래도 그를 탓하지는 않았다. 그녀 역시 그가 아니었다면 비슷한 태도를 취했을테니, 그저 입장이 바뀌었다 받아들이기로 했다.
시무룩하지만 차분한 말 뒤로 그리 생각하고 있던 그녀는 그가 사과를 꺼내자 살짝 의외란 표정을 지었다. 그 표정은 곧 발그레하게 번진 홍조로 물들었다. 생각보다, 라곤 했지만 예쁘게 보여서 놀랐다고 하니까. 방금도 그렇고 자신이 싫어서 그런 건 아니라고 재차 말하는 걸 보니 정말일지도- 싶었다. 그녀가 예쁘니까 라는 마음으로 약혼을 하기엔 실례라 생각했다는 말도 그녀의 표정을 풀어주는데 일조했다. 처음처럼 미소를 짓진 않았지만 적어도 시무룩함은 없어진 연녹빛 눈동자가 그를 응시한다. 뒤이어진 그의 물음에, 그녀는 자세를 바로하곤 조곤히 대답했다.
"실은 저도 마차에 오를 때에만 해도 그저 아버님이 다녀오라시니 간다는 마음이었답니다. 이 자리에 계신 분이 당신이 아니셨다면, 아마 제가 당신이 하셨던 말씀과 똑같은 걸 말했을지도 모르죠. 그렇지만 당신이 어린 제가 만났던 그 분이라 해서 성급히 약혼을 진행할 생각 역시 아니었어요. 제가 지금의 당신을 모르듯, 당신께서도 지금의 저는 무엇 하나 알지 못 하시니까요. 그러니 조금이라도 저를 긍정적으로 보아주신다면, 서로 알아가는 시간을 갖지 않으실런지 여쭈려고 했답니다. 저희 아버님들도 그렇게 말씀드리면 분명 얼마간의 시간은 주시겠지요."
그의 진심이라고 할지, 성의 담긴 말에 페이스를 되찾은 그녀의 말투는 또박또박하고 확실했다. 귀족의 영애라 해서 마냥 여리지만도 않은 모습이었다.
"저 역시 귀족이기에 집안을 아주 신경쓰지 않을 수 없지만, 그렇다 하여 제 주관까지 내려놓아가며 약혼과 혼인을 할 마음은 없으니까요. 그러니 정 원치 않으신다면 이 약혼 얘기는 서로 아닌 걸로 하셔도 괜찮답니다."
하고 싶은 말을 일목요연하게 꺼내서인지 한결 편해진 얼굴의 그녀가 그를 바라보며 살짝 미소지었다. 그가 정말, 정 원한다면, 그녀도 이 약혼은 원치 않는다 말하겠노라고 하면서.
/아냐 오히려 캐입 탄탄해서 좋았어! 근데 내가 잇는게 너무 억지스러운 전개가 될까봐 걱정되더라구. 괜찮다니 다행이야!
쏟아지는 빗소리에도 아랑곳 하지 않고, 그는 아무렇지도 않게 자신 옆에 놓인 커피를 한모금 들이키며 놓여진 서류를 바라보았다. 하얀색 셔츠에 자주색 베스트가 잘어울리는 남자는, 반쯤은 희끗해진 머리카락과는 반대로, 43세라는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30대 초반—더 잘쳐주면 20대 중후반까지도—보이는 외모를 가지고 있었다. 적당히 꿉꿉한 공기가, 에어컨에 녹아 사라지는 것을 느끼며 그는 서류를 내려놓고 천천히 주머니에서 전자담배를 꺼내들었다. 한 모금, 들이키고 내쉬고, 퍼졌다가 다시 흩어지고, 청포도 향이 퍼졌다 흩어진다. 조만간 끊어야지, 결심을 하거서도 결국은 원상복귀, 남자는 잠시간 머릿속으로 헛생각을 하며 허공으로 흩어지는, 자신의 입으로부터 비롯된 희뿌연 안개를 바라보며 등받이를 뒤로 젖혔다.
"시간이 이렇게 되었는가."
이미 다른 이들은 전부 가정으로 돌아갔을 시간이다. 하지만 자신은 이 나이가 되도록 일에 매진하였고, 그래도 이제는 이 뒷세계에서 만큼은, 절대로 누구에게 꿀리지 않을만한 권력과 힘을 손에 쥐고 있었다. 적수공권으로 올라와 많은 것을 이루어 내었고, 간판이라는 이름의 명성까지 자신의 손으로 거머쥐었다. 주먹을 쓰던 옛날이 그립지 않다고 하면, 그것은 거짓말이었다. 하지만 시대는 변하였고, 이제 주먹으로 정상을 거머쥐는 일 따위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렇기에 그는 양지로 나섰고, 자신의 조직원들 중 자신을 따르는 이들만을 엄선한채 이 회사를 차렸다. 이제는 어엿한 경호회사의 주인으로서, 또 그들을 이끄는 이들로서..... 슬슬 후계를 생각할 때가 다가온건가, 그렇게 그답지 않게 상념에 잠기려는 순간, 똑똑 소리가 들려온다.
"들어오거라."
/양지로 나와 10년간 회사를 운영해온 뒷세계 거물이 후계자를 고민중이라는 내용, 이지만 다른 방향도 오케이! 어느 정도의 맥커터도 받아쳐줄수 있으니 너무 무리수만 아니면 되오!!
그녀에게서 시선을 돌린 적이 없었기에 그의 보라빛 눈동자에 그녀의 표정이 변한 것이 그대로 비쳤다. 이어지는 그 말에 그는 조용히 귀를 기울였다. 만약 자신이 아니었다면 자신이 지금 한 말과 별 차이가 없게 이야기를 했을 거라고 하는 말에 결국 그녀도 자신과 마음은 비슷했을지도 모르겠다고 그는 생각했다. 결론적으로 지금 저렇게 이야기를 하는 것도 어린 시절에 만난 것을 기억하고 있다는 이유 때문이라는 것이 아닌가. 그렇게 생각하니 그는 괜히 조금 더 찔리는 것 같아 자신도 모르게 움찔했다. 나중에 집사에게 가서 어린 시절 무슨 이유로 그녀와 교류를 했는지 확인해야겠다고 생각하며 그는 우선 그녀의 말에 귀를 쭉 기울였다.
"서로 알아가는 시간..."
물론 지당한 말이었다. 알지 못하기에 약혼을 하는 것이 꺼려지고 싫은 거라면 서로 알아가면 달라질 수도 있다는 이야기니까. 그녀의 그 말에 어느 정도는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허나 한가지 걸리는 것이 있다면 그렇다고 해서 자신이 그녀와 약혼을 할 지의 여부는 약속을 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괜히 기대감을 키웠다가 나중에 실망하는 결과를 불러 일으키는 것은 아닐까 그렇게 생각하며 그는 입을 꾹 다물고 잠시 눈을 감았다. 오른손을 테이블에 올리고 검지로 톡톡. 마치 버릇처럼 그렇게 여섯 번을 친 후, 감았던 눈을 뜨며 그녀의 말에 대답했다.
"차후에 긍정적인 대답을 드리지 못할 수도 있는데 그래도 괜찮다면 그 제안. 받도록 하겠습니다. 반대로 당신도 진지하게 고려하고 생각해줬으면 하고요. 기왕이면... 일방적으로 좋아하거나 집안의 이득 때문에 약혼을 어떻게 맺는 것보다는 서로 마음이 통한 후에 하는 그런 것을 하고 싶어서. 그래서 이번 약혼도 거절했던거고."
어떻게 보면 귀족의 발상과는 조금 거리가 멀지도 모를 일이었다. 하지만 달리 말하자면 그것은 옛날처럼 너무 꽉 막힌 사회가 아닌 것을 의미하기도 했다. 그런 것들이 어느 정도는 허용될 수도 있다는 것이었으니까. 뒤이어 그는 다시 그녀를 똑바로 바라보며 자신의 결론을 내렸다.
"그걸로 괜찮으시다면 저희 아버님과 어머님에겐 제가 얘기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나야말로 여캐가 확실하게 성격이나 그런 특성이 잘 잡혀있는 것 같아서 캐입으로 대답하기 편했어! 그러니까 정말로 걱정하지 말기!
의견 피력을 마친 후에는 그녀도 그를 계속 바라보았다. 잠시지만 대화를 하고, 마주하고 있으니, 어릴 적 모습이 아주 없어진 건 아니어 보였다. 그 소년이면서 자신처럼 어엿하게 자란 쳥년의 모습은 슬그머니 그녀의 가슴이 설레게 만들고 있었다. 행여나 그가 여기서 역시 안 되겠다를 말해도, 지금은 괜찮겠다고 생각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인연이란 마음처럼 되지 않는 것이니까. 그러니 잠자코, 그가 생각을 정리해 말을 꺼내기를 기다렸고 그 끝에 들은 대답에 조금 더 활짝 웃어보였다. 각오는 했다지만, 그래도 좋은게 좋은거 아니겠는가.
"좋은 대답을 돌려주셔서 감사해요. 물론 저도 제 주관대로 진중하게 생각하고 고민할 터이니 당신께서도 그리 해주셔요."
그녀 역시 그 제안을 하면서 무조건 긍정적인 결과만을 생각하지는 않았으니까 그의 말에 선뜻 고개를 끄덕일 수 있었다. 서로 집안의 명예상, 약혼을 하고 사이가 틀어지는 것보단 조금 시간을 들여 서로의 입장과 마음을 확실히 한 후에 약혼을 하거나 아예 없던 얘기로 돌리는 것이 가장 이상적인 그림이기도 했다. 그녀들의 부모님 세대까지만 해도 통용되지 않을 방법이었지만 시대는 점점 변하고 있다. 귀족이라는 틀에 갇혀 시대의 흐름을 따라가지 못 하게 되면 그건 그거대로 집안에 좋지 못 한 일이니 분명 양측의 부모들도 얼마의 기간을 유예삼아 내어주실 것이다.
"네. 저는 저희 부모님께 얘기 전하도록 할게요. 아예 거부하는 것도 아니니, 분명 잘 들어주실거에요."
밝게 웃으며 자신도 그렇게 말을 전하겠다고 대답한 그녀는 잠시 말없이 마주한 그를 보았다. 속세에 물들지 않고 자기 주관이 또렷이 빛을 발하는 에메랄드빛 눈동자가 그의 푸른 머리카락을, 보랏빛 눈동자를, 그녀와 마주한 모습을 시야에 담았다. 어쩌면 그가 아니라 다른 사람이었어도 약혼을 미루고 만남을 제안했을 수도 있다. 그렇지만 역시 그가 그여서 다행이라고, 그녀의 제안을 그에게 할 수 있어서 그것만으로도 기쁘다고 생각하자 고운 웃음이 사르르 띄워졌다. 기쁨이 그대로 드러나는 표정의 그녀가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서로 마음이 정해질 때까지, 잘 부탁드려요. 저, 최선을 다해볼게요."
유예의 끝이 서로 이어지지 않는 결과가 되더라도 그녀는 받아들이겠다고, 이 때엔 그렇게 생각했다.
/고마워 고마워! >< 음, 일단 상황 거의 끝난 거 같은데 더 이을거야? 아니면 마무리?
집사와 이야기를 나눌 때만 했어도 약혼을 받을 생각 따윈 없을 거라고 생각하고 그렇게 다짐했건만 결국 결과는 이렇게 유예가 되었다. 생각보다 예쁜 여성이 온 것도 있어서 흔들린 것도 분명히 있었으나 아마 정면으로 제대로 이야기를 하는 모습이 너무나 빛나보였기 때문이라고 그는 짐작했다. 그 증거로 지금도 그는 그녀에게서 눈을 떼어내지 못하고 있지 않던가. 물론 그녀를 본다고 해서 딱히 가슴이 두근두근 뛴다거나 그런 것은 아니었다. 그렇기에 어쩌면, 정말로 어쩌면 그녀가 아니었으면 지금 이 결과는 그 무엇보다 잔혹한 결과가 될 수도 있었을터였다. 그녀이기에 어쩌면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그는 곧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할 생각이에요. 당신에게 큰 실례가 되지 않도록."
굳이 말하면 초기에 바로 생각이 없다고 말한 것이 상대에 대한 실례가 아니었나 생각했고 집사도 대체 왜 그랬냐고 혼낼지도 모를 일이었으나 그녀 쪽에선 크게 문제 삼진 않는 것 같았으니 그도 굳이 더 입을 열진 않았다. 그럼 자신은 자신 나름대로 진지하게 생각하고 그녀와 마주보겠다고 다짐하면서 이내 그는 진지하게 고했다.
"그러면 저는 저대로 당신을 제대로 마주하도록 하겠습니다. 일단 이야기는 끝난 것 같지만 여기까지 오셨으니 저택 구경이라도 좀 시켜드릴게요. 따라와주시겠어요?"
어쨌건 서로 알아가기로 한 사이였다. 그러면 볼일이 다 끝났다고 바로 돌아가는 것보다 조금은 서로의 시간을 가지는 것이 좋을터였다. 물론 저택에서 일하는 사용인들이 나중에 이 관련으로 속닥속닥 이야기를 나눌지도 모르나 그건 또 자신이 감당해야 할 일이었다. 이내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선 그는 그녀를 바라보며 입꼬리를 살며시 올려 미소를 지었다.
"저 역시도 잘 부탁하겠습니다."
/그렇다면 일단 이건 이렇게 막레를 써볼게! 음. 사실 별 생각없이 쓴 거기도 하고 상대 캐릭터 쪽에서 집사나 사용인이나 집안 사람이 올 거라고 예상을 한지라 설마 약혼을 맺기로 한 여캐가 올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해서 조금 놀라긴 같지만 아무튼 재밌게 잘 돌렸어! 아무튼 이 이상 돌리면 일댈로 행하게 되려나? 다만 여기서 더 돌리면 지금 이 분위기대로라면 러브코미디 느낌으로 가게 될 것 같기도 하고.. 일단 너참치는 어떻게 하고 싶은지 물어도 될까?
>>630 나 역시도 비슷하게 생각해. 아무래도 즉흥적으로 올린것이다보니 일댈은 조금 애매하지 않나 싶고 러브코미디 쪽은 내가 잘 못하는 분야기도 해서 말이지. 혹시나 일댈을 제안하면 거절하려고 생각 중이었어. 뭐 이후는 저 두 캐릭터가 알아서 한 것으로 처리하고 끝내는 것이 좋을 것 같아.
>>624 많이 좋아했었다. 그렇게 기억은 하고 있다. 그랬으니 연애도 했겠지. 나름대로는 최선을 다했다고 생각했지만, 상대가 만족한 모습을 본 적은 별로 없었던 것 같다. 그러다 보니 그가 기뻐하는 모습을 상상하며 행복해지던 순간은 점차 그가 불만족한 티를 내면 어찌 대처해야 하나 골머리를 앓는 순간으로 바뀌어 갔고, 그 골치 아픈 순간의 연속조차 어느날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눈 앞의 그가 무슨 말을 할 지는 뻔했다. 한때는 상상만 해도 두려웠던 그 말을 상대가 하려고 한다는 걸 뻔히 느끼면서도, 눈물이 나지도 가슴이 쓰라리지도 않았다. 오히려 조금 후련했다. 야자 끝나기 10분 전 비슷한 기분일까. 그가 입을 열어 말을 꺼냈다. 예상하던 그 말이었다.
"네, 그러죠. 그럼 먼저 갈게요."
입술을 짓씹는 것을 모른 체하며, 이별통보를 받고 헤어지는 사람 치고는 퍽 평온한 톤으로 대답하고선 짐을 챙겨 자리에서 일어섰다.
받은 만큼 돌려주었을까? 아닐 것이다. 사랑하기보다 사랑받고 싶어 하지 않았나, 보기 좋은 연애는 절대 아니었다. 예쁜 연애도 아니었다. 나를 좋아한다던 네가 나에게는 무척이나 과분했고 그걸 몰랐다. 이제는 알고 있지만, 너의 옆에서 실수를 되잡고 고쳐나기에는 늦었다고. 이별 사유를 묻지도 않는다는게 이 연애에서 나의 종착지인 것이다. 그만큼 좋은 연인이 아니었던 나는 네 평온한 목소리가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떠나려는 사람에게 작별인사를 할 시간은 남아 있지 않을까.
“미안해요. 그리고… 고마워요.”
한참, 오늘이 다 가도록 이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할 것이다. 어떻게 고마움과 미안함을 전할 수 있을까. 아니, 그보다야 염치없이 후회하며 우는 꼴 같은 걸 안 보이게 하는게 우선이다.
그 드래곤의 크기는 얼핏 봐도 일반적인 사람보다 거대했다. 두 발로 일어서면 약 4m 정도의 키를 가지고 있었으며 꼬리까지 포함해서 길이를 잰다면 어림잡아 6m는 되지 않았을까. 제 아무리 키가 큰 장성이라도 그 드래곤은 아주 가볍게 손에 쥘 수 있었을 것이고 기습적으로 공격을 가한다고 해도 그 공격을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칠 수 있는 단단한 황금색 비늘이 몸에 붙어있었기에 기습은 어림도 없었을 것이다. 그런 드래곤이 바로 앞에 서 있었다.
"인간의 아이야. 여기까지 왔다는 것은 필시 무슨 목적이 있을터이다. 그렇지 않느냐."
허나 드래곤은 딱히 눈앞의 이를 공격할 생각은 없어보였다. 아니. 굳이 이야기하자면 동굴 입구, 그리고 긴 통로를 지나 자신의 둥지가 있는 이곳까지 온 인간에게 흥미와 호기심을 가진 것 같았다. 물론 마냥 방심하진 않을 생각인지 어느 정도 경계하는 모습을 보이고는 있었으나 적어도 먼저 공격해올 것 같진 않아보였다.
"네가 바라는 것이 무엇이냐. 이 동굴에 있는 나의 재보를 노리고 왔느냐? 아니면 나를 쓰러뜨리고 내 심장을 가져가 명예를 취하고자 하느냐. 그것도 아니면 인간들이 멋대로 자신들을 지켜달라고 너를 제물로 바쳤느냐."
용건이 있으면 어서 이야기하라는 듯이 황금빛 드래곤은 눈앞에 있는 인간을 바라보며 자리에 털썩 앉았다. 공격하지 않을테니 편하게 앉아도 좋다는 듯, 왼쪽 앞발로 앉으라는 제스쳐를 취하면서 드래곤은 말을 이어나갔다.
"가능하면 나를 쓰러뜨리는 용건은 아니었으면 좋겠구나. 그다지 싸움은 하고 싶지 않아서 말이다. 특히 여기서 싸웠다간 나중에 이 둥지를 다시 정리정돈하기가 상당히 귀찮아서 말이다."
/그냥 거대한 황금빛 드래곤이 자신의 둥지에 찾아온 인간과 대면한 상황이야. 인간이 누구인지는 그냥 편한대로 이어도 괜찮아. 다만 분명한 목적이 있어서 찾아왔다는 설정이었으면 해. 막 맥커터나 그런 것은 사절.
여성은 능글맞은 표정으로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검정색 체인메일에 자주색 하드레더 아머를 걸친, 흔히들 말하는 모험가라 불리우는 여자였으나, 모험가 길드 내에서 가장 강하다고 알려진 드높은 10석중 한 명, '가을매'라고 불리우는 여인이라면 단순한 모험가는 아니리라, 그래도 나름 준비를 하고 왔다는 것인지 양 팔뚝에 매어져 있는 각종 암기에 어깨에 둘러져 있는 숏소드 두개, 허리에 매어진 바스타드 소드는 절대로 그녀가 이번 안건을 가볍게 여기고 왔다는 뜻은 아니라는 반증일 것이다. 거대한 체구를 보면서도 여성은 빙글빙글 웃고 있었다. 딱히 상대방이 해칠 의사도 없고 어차피 목적도 달성 했다는 것일까, 딱히 문제는 될 거 없다는 듯이 그녀는 유유자적한 태도를 보이면서 어깨를 가볍게 으쓱인뒤, 어울리되 어울리지 않는 예법을 선보이며 살짝 눈을 찡긋해 보인다.
"위대하신 분의 거처인줄 몰랐나이다. 인간세계에선 '가을매'라는 간단한 명칭으로 불리우는 졸자라고 합니다."
그녀는 자신이 혼자 왔다는 듯이 양손을 쫙펴보였다. 보통의 모험가들이 파티를 맺고 움직인다지만 드높은 10석들은 제각각의 특징이 있다고들 알려져 있었다. 그중 '가을매'의 특징은 혼자서 세계를 방랑하고 자신이 원하는 대로 마음껏 살고, 의뢰도 자기 멋대로 행하는, 그렇다고 절대로 악인은 아닌, 혼돈 선에 가까운 인물이었다. 이번 몬스터 대규모 이동건에 대해서의 의뢰를 받고 온 것도 마찬가지, 그저 '재밌을거 같고, 내가 움직이면 다치는 일은 별로 없을꺼 아냐?'라는 의미가 강했기 때문이었다. 실제로도 그녀가 여기에 온 것도 우연에 우연이 겹쳐서 온 것이다. 몬스터가 대규모 이동을 했다는 것은 몬스터들의 서식지에 거대한 문제가 생겼다는 것을 의미했고,실제로도 그런식으로 범람들을 예측해온 결과였다. 인간들로서는 몬스터들의 대규모 이동에 촉각을 세울수 밖에 없는 현실, 그렇기에 여성 모험가 '가을매'는 이번 일에 적극적으로 나선 것이었다.
"아쉽게도 의뢰에는 드래곤 퇴치라던가, 용심장 뽑기라던가, 드래곤 제물 되어주기라던가는 없었는데 말이죠. 후후, 그래도 좋은 구경 하고 있는건 사실이네요! 이렇게 진짜 드래곤을 보는건 모험가로서 크나큰 영광이죠! 그것도 전투가 아닌 이런 상황에서는 더더욱!"
그녀는 예의 그 능글맞은 태도를 보이면서 대놓고 양반다리를 하고 앉았다. 여자로서는 꼴불견인 자세일 수도 있겠으나, 그녀는 자신의 성별보다는 모험가로서의 자신이 더 좋았으니 당연한 태도이리라.
"어차피 의뢰도 끝났겠다, 한 1주일 예정이었던거 4일만에 끝났으니 여기서 농땡이나 피우고 가렵니다. 허락해주실꺼죠? 방세는.... 어.... 음....."
생각해보니 드래곤들은 자신이 상상하는 이상의 부자였다는걸 떠올린 그녀였다. 그런 그녀는 멋쩍게 자신의 주머니를 탈탈 털어 먼지만 튀어나오는 꼴을 보여주며 머쓱하게 웃음을 지어보인뒤 입을 열었다.
"..... 방세는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로라도 안될까요?"
/몬스터 대규모 이동 조사를 하다가 아주 우연히 드래곤 레어를 발견한 여성모험가입니다!! 우연찮게 드래곤 레어를 발견했으니 목적은 정확히 없지만, 드래곤 하나를 봤다는 것만으로도 모험가들에게는 매우 큰 로망이 아닐까 싶네요!! /싸울 의사 없습니다! 그냥 이야기나 술 드링킹, 아니면 연애사라든가 그런거 좋아요!!(?)
이 무슨 당돌한 여성인지. 가을매라고 불리는 졸자라고 불린다고 하니 이 인간의 이름은 가을매가 분명하다고 드래곤은 생각했다. 딱히 드래곤 퇴치를 위한 것도, 자신의 심장을 뽑는 것도, 그리고 제물이 되러 온 것도 아니라고 하니 그야말로 이곳에 구경을 온 것인지, 아니면 우연히 섞여들어온 것인지. 어느 쪽이건 그다지 무서워하는 모습도 없고 자신을 흥미롭게 바라보는 그 모습이 드래곤에게 있어선 더욱 흥미를 돋구고 있었다. 아무튼 모험가라고 하니 드래곤은 슬며시 그녀가 가지고 있는 무기를 바라봤다. 아니. 어디 무기뿐일까. 지금 자신을 이렇게 앞에 두고 저렇게 여유롭게 말할 수 있는 자세 자체가 보통 모험가는 아니라는 것을 드래곤은 짐작할 수 있었다.
"인간의 아이을 정면으로 마주하는 것은 흔하지 않지만 그 마주친 인간이 도망치거나 나를 죽이려고 하지 않고 오히려 당당하게 구경을 하고 있을 뿐이라고 말하는 경우는 흔하지 않다 못해 처음이구나. 인간들 사이에선 나와 동포들이 딱히 위협하지 않아도 다들 겁먹기 바쁘고 도망치기 바쁘고 공포의 대상으로 섬기면서 필요하지도 않은 제물을 갖다바치거나 죽여야만 하는 존재로 보는 경우가 허다한 것으로 알고 있다만."
물론 드래곤이라고 해서 다 같은 것은 아니었다. 당장 자신만 해도 저 옆나라에 살고 있는 레드 드래곤이나 저 아랫산 너머 깊숙한 계곡에 둥지를 파고 살고 있는 블루 드레곤과는 다르지 않던가. 굳이 말하면 자신은 이 둥지 안에서 트러블 없이 조용히 뒹굴거리다가 적당히 먹을 거 먹고, 평화롭게 살고 싶은 족속이었다. 그러고 보니 전에 슬슬 인간들에게 공포를 주겠다고 호언장담하던 레드 드래곤은 어떻게 되었으려나. 그런 아무래도 좋은 생각을 하다 마치 자신의 이 둥지에서 지내겠다는 식으로 말을 하는 여성을 바라보며 드래곤은 눈썹을 실룩거렸다.
"여긴 인간이 지내기에는 편한 환경이라고는 할 수 없을터인데 왜 굳이 여기서 지내려고 하는 것이더냐. 조금 멀긴 하지만 실력 좋은 모험가라면 하루 정도를 걸어가면 마을에 도달할 수 있을터인데."
당연한 의문이었다. 여긴 인간들이 사용한다는 그 푹신한 침대도 없었고, 가게에서 흔하게 살 수 있는 빵이나 우유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저 있는 것은 자신의 보물과 식수로 사용하고 있는 넓은 동굴 안의 호수, 그리고 자신이 잘 때 사용하는 넓은 개인 공간, 그리고 자신이 지금 이렇게 있는 다른 드래곤이나 다른 종족을 마주하고자 할 때 사용하는 이 커다란 공간. 그 정도였다.
"허나 그 당돌함은 꽤 재미있구나.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라고 했느냐. 우리들에게 세상 돌아가는 일은 아무래도 좋은 일이다. 그러니 너에 대해서 얘기를 듣고 싶구나. 이렇게까지 나에게 당돌하게 구는 인간은 네가 처음이니 말이다. 아무튼 내 보물과 내 목숨을 노리는 것이 아니라면 불편함을 감수한다고 할 때 있어도 상관은 없다."
/오케이. 확인했어!! 이야기나 술 드링킹은 뭔지 알 것 같은데 연애사는 이 드래곤과 지금 여캐의 연애사 이야기를 말하는거야?
생각해보면 드높은 10석 들 죄다 정상인들은 없었다. 아니 정확하게는 정상이 아니기에 그들은 유명해진것일지도 몰랐다. '가을매'는 겁없고 유유자적하며 자유롭고, 다른 10석들은 난폭하거나 일중독 등 여러가지 특이한 성향을 지니고 있었다. 그렇게 남은 짐을 뒤적거리던 그녀는 이내 화색을 보였고, 이내 찾아낸걸 꺼내 뚜껑을 따내 물통을 들이키기 시작했다, 일주일치 식량에 물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마치 남자가 길을 나설때의 모습과 같았고, 여느 여식 같지 않게 꾸밈없는 모습은 생동감이 넘쳐보이기에 충분했다. 물을 꿀꺽꿀꺽 마시던 그녀는 남자 마냥 한숨을 푸하-하고 내쉰 뒤 입을 열었다.
"인간들끼리 정보 공유가 안되서 그래요. 솔직히 저처럼, 에이 내 입으로 말하려니까 부끄러운데..... 저 정도 급 되면 온갖 사료를 다 찾아볼수 있어서 그런건 죄다 헛소문이라는 걸 알죠, 모험가는 절대로 단순한 직업이 아니라고요? 몬스터들의 생태, 의뢰지의 환경, 각 지역의 특수한 상황 등등 여러가지를 전부 고려하지 않으면 생존률은 절대적으로 내려가요."
물론 그렇게 모은 자료들은 전부 모험가 길드에 전부 공개된다, 하지만 그것을 전부 공개한다고 해서 모험가들이 전부 읽는 것은 아니었다. 애터지게 자료들을 만들고 각종 직원들이 필사를 하더라도 결국 그것을 교육하는 인원이 부족해서 모험가들은 지금도 죽어나가는 경우가 일상다반사였다. 하지만 자신은 그들과 달랐다. 기본적으로 실력도 출중했고, 공부도 많이 한다. 천하를 유랑하는 때가 아니면, 그 외의 모든 상황은 그녀가 공부하거나 실력을 가다듬는 모습일 뿐이었으니까, 그녀는 연보랏빛 머리카락을 흩날리며 미소를 지어보였다. 여느 귀족 여식 못지 않은 미색에 건강미가 겹쳐지니 금상첨화가 따로 없었다.
"모험가에게 있어서 비 바람 피할 곳만 있으면, 어디든지 잘수 있어요. 하늘이 이불이고, 땅이 베개니까요? 어디까지나 저에게 있어서 새로운 경험만큼 마음을 뛰게 하는게 없어요. 그리고 드래곤 레어에서 입구일지라도 잠을 잘 수 있다는게 어디에요? 어디 가서 안주 삼아 먹을만큼 재밌는 이야기 아닐까요?"
그렇게 답변하던 그녀가 천천히 몸을 일으켜 풀숲에서 무언가를 꺼낸다. 풀숲 사이에다가 숨겨둔 개인 물건들을 꺼내 천천히 옆에 둔 여인은 가볍게 기지개를 편 뒤 입을 열었다.
"드래곤씨도 생각해보세요, 나중에한 1천년쯤 지나서 '우리집 앞에 나랑 노닥거리다가 집세 대신 수다로 돈 안내고 도망간 미친 여자가 있다.'라고 하면 아마 다른 드래곤들에게도 꽤 쓸만한 이야기 거리가 되지 않을까요?"
..... 아니다. 이 맛간 여자야.
/그것도 오케이입니다!! 아니면 각자 지낸 시간이 있으니 연애 한번쯤은....?(아님) /그래도 무리수는 아니었나 보네요!! 맥커터 될까봐 걱정했는데!!
"내 입장에선 차라리 공포의 대상이 되어서 찾아오는 이가 적은 것이 나을 것 같구나. 가끔 어떤 목적을 가지고 찾아오는 인간을 보는 것도 나쁘지 않지만 너무 자주, 그리고 다양하게 찾아오면 대응하기도 힘들고 무엇보다 귀찮거든."
인간 하나는 아주 가볍게 짓밟아버릴 수 있을 정도로 드래곤과 인간의 힘의 차이는 컸으나 인간이 뭉치면 그만큼 강해진다는 것을 드래곤은 아주 잘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그 많고 많은 인간들이 한번에 여기로 몰려오거나 하면 얼마나 골치가 아프겠는가. 조용히 평화롭게 둥지 안에서 뒹굴거리면서 살고 싶었던 드래곤에게 있어서 그 사태는 최대한 피하고 싶은 일이었다. 동굴 입구를 바위로 막아도 그 바위를 박살내고 들어올 것만 같기에 더더욱 그러했다.
"모험가라는 이들에 대해서 자세하게 아는 것은 아니지만 네 말대로라면 참으로 독특한 이라고밖엔 할 말이 없구나. 인간의 아이야. 모험가라는 이들은 다 너처럼 당돌하면서도 용기 있는 자들이더냐. 내 둥지에서 자는 것이 흔하지 않은 일이라. 내가 사실 먹잇감을 유인하기 위해서 이러는 거고, 네가 방심하고 있을 때 갑자기 공격하기라도 하면 어쩔 참이더냐. 난 몬스터로 구분되고 싶진 않지만 너희 인간에게는 우리들도 그들과 크게 다를 바가 없을터인데 너는 정말로 두렵지 않은 것이냐?"
정말 허락만 하면 진짜 이곳에 드러누워서 태연하게 잠을 잘 것 같았기에 드래곤은 키득키득 웃음을 터트렸다. 물론 딱히 그녀를 잡아먹거나 해치거나 할 생각은 없었다. 배가 고프면 저런 인간보다 밖으로 나가서 짐승을 잡아먹는 것이 더 맛있을테니까. 혹은 자꾸 동굴 근처를 어슬렁거리는 몬스터 중 하나를 본보기로 잡아서 구워먹을 수도 있는 것이고. 혹은 조금 더 별미가 먹고 싶으면 재보를 조금 챙겨서 둥지 밖으로 날아올라 인간의 형태로 폴리모프해서 마을에 들어가 무언가를 사먹으면 될 일이었다. 고작 인간 하나를 잡아먹을 생각은 없었으나 그럼에도 어떻게 나올까 싶어 드래곤은 그렇게 말하며 고개를 살짝 내려 그녀를 바라봤다.
"그거 내가 그냥 호구가 되는 결말 아니더냐. 하지만 좋구나. 그런 추억거리 하나 있어서 나쁠 건 없겠지. 편한대로 하거라. 아까도 말했다시피 내 재보와 목숨을 노리는 것이 아니면 딱히 나도 공격하거나 해칠 마음은 없으니까."
/적어도 맥커터는 아니었다고 생각해! 갑자기 드래곤이 기억력이 나쁘다는 설정이 타의로 추가되어서 전에 만났는데 왜 벌써 까먹었냐. 그런 식으로 나와버리면 그런 것은 맥커터가 되겠지만 말이야.
"그런걸 막는 것도 사실 모험가 길드 역할 중 하나에요. 쓸데없는 객기나 만용을 부리는 녀석들을 제압하고 제대로 된 교육을 시켜 적재적소에 활용하고 자유를 지켜주는거죠. 책임없는 자유는 방종이니까요."
아무리 가을매라 불리우는 그녀라도 선이 있었다. 제멋대로인것 같지만 기본적으로 인도적인 면에서는 다른 모험가들에게 귀감이 되는 그녀이기에 많은 이들에게서 평판은 매우 훌륭한 편에 속하였다. 실제로도 후배 모험가들을 가장 위하는 모험가로서는 그녀가 아니던가. 그런 의미에서 용사라는 것들은 그녀에게 있어 최악의 존재였다. 그들은 정의를 구현하겠다는 이유로 여러가지로 생태를 건드리고 말도 안되는 일들을 벌이려고 하니까. 그렇게 판을 벌일 준비를 하던 와중 드래곤의 농담을 들으며 그녀가 갑자기 진지하게 고민을 해오기 시작한다.
"음? 흐으으음...."
드래곤이 사람을 먹는다는 사료는 하나도 없었다. 뭏론 전설상에서 사람 먹는 마룡이 있다고는 했지만 너무 오래전 사료라서 믿을만한 물건은 되지 못하였다. 하지만 그게 진실이라면? 그런 생각들이 순식간에 지나가며 내린 결론을, 그녀는 배시시 웃으면서 뒷머리를 긁으며 입을 열었다.
"그건 그때가서 생각해야죠. 물론 그렇게 되면 제 공부가 모자랐던거고 그건 제 책임이니까. 그래도 사실 가장 중요한건..... 눈을 봤거든요. 왜 눈은 마음을 바라보는 창이라고 하잖아요?"
흔히들 모험가를 하다 보면 닳고 닳는다고 한다. 하지만 그녀는 그렇지 않았다. 아직까지도 순수하게 반짝이는 양 눈은 미지에 대한 열망과 쌓아올린 지혜, 그리고 자신감으로 반짝이고 있었고, 그 시선의 끝에 닿은 것은 다름아닌 황금빛으로 몸을 감싼 드래곤이 가볍게 웃는 모습이었다. 그렇기에 그녀 또한 미소를 짓는다.
"드래곤씨는 그러지 않을거 같거든요. 응, 믿고 맡길 수 있을꺼 같아요."
그녀는 그렇게 믿고 있었다. 와관보다는, 상대방의 말속의 진의를 자신의 시선으로 믿고 싶은것이리라. 그녀는 그렇게 웃으면서 천천히 눈 앞의 드래곤을 향해 입을 열었다.
생각도 못한 말. 정확히는 그렇게 되어도 자신의 책임이니 원망하지는 않겠다는 듯이 이야기를 하는 그녀의 모습에 드래곤은 결국 껄껄 웃음을 터트렸다. 당돌한 줄 알았더니 순수한 느낌도 있다고 해야할지. 아니면 그 와중에 또 용기가 있다고 해야할지. 오랜만에 보는 인간이었으나 꽤 재밌는 이라고 생각하며 드래곤은 웃음을 좀처럼 멈추지 못했다. 둥지에 처박혀 뒹굴거리면서 살려던 삶에 끼어든 약간의 자극은 생각보다 만족스러운 모양이었다.
"유감이지만 나는 인간을 먹을바에야 밖으로 나가서 멧돼지를 잡아서 먹고 싶단다. 인간을 먹어본 적은 없지만 그다지 맛이 있을 것 같지도 않고 무엇보다 배가 찰 것 같지도 않으니 말이야. 무엇보다 동굴 근처엔 들짐승이 많아서 사냥을 하는 것이 그리 어려운 것도 아니지 않더냐. 그러니까 잘 기억해두거라. 겁을 먹은 인간들은 드래곤에게 인간을 제물로 바치는 일이 있으나 우리 드래곤에겐 그것만큼 난감한 일도 없다는 것을. 간혹 시종으로 쓰는 이도 있긴 하지만 적어도 잡아먹은 적은 내가 알기로는 없단다. 물론 정신이 나가서 앞뒤 구분도 못하는 제 정신이 아닌 동포는 잡아먹는다고도 한다만."
허나 그것은 이성을 잃고 본능으로만 살아가는, 말 그대로 제 정신이 아닌 케이스이니 해당하는 일이 아니었다. 그렇게 자신이 아는 정보를 하나 알려주며 드래곤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땅이 울리지 않게 조심스럽게 일어서는 것은 눈앞의 여성을 놀라지 않게 하고자 보인 약간의 배려였다.
"따라오거라. 여기서 며칠 쉬었다가 간다면 적어도 모든 생명체가 필요한 물은 있어야 하지 않겠느냐. 물을 마실 수 있는 곳을 알려줄테니 괜히 더럽히지만 말거라."
이곳에서 며칠 있다가 가는 것을 깔끔하게 허락하는 것은 그 당돌함과 용기, 그리고 묘하게 귀여운 것이 마음에 들어서였으나 굳이 그것을 표하진 않으며 드래곤은 성큼성큼 안쪽으로 들어갔고 안쪽 갈림길에서 맨 왼쪽의 길목으로 향했다. 그곳을 따라 걸어가면 정말로 넓고 넓은 동굴 속 호수가 펼쳐져있는 것을 볼 수 있었을 것이다. 만약 그녀가 당장 따라오지 않았다면 드래곤은 그냥 위치만 알려주고 다시 자리에 앉았을 것이다.
"그래서 여기에 묵는 동안 내 도움이 필요한 것이 있느냐. 묵는 값은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보다 그냥 이렇게 말동무를 해주는 것으로 충분하니 염려는 말거라. 오랜만에 보는 인간이 꽤 재밌는 이니 내 특별히 그 정도로 끝내주도록 하마."
솔직히 인간이 인간을 제물로 바친다는 이야기 자체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 그녀였다. 기사 가문에서 태어나 출세에 미친 아버지 몰래 14살의 나이에 탈주를 감행해 지금까지 이름과 모든 것을 버리고 자신만의 검술을 개척해 버틴 그녀로서는 정략결혼과 제물이 하나로 겹쳐보인 탓일지도 몰랐다. 그렇기 때문일지는 몰라도 이번에 돌아가면 길드를 들들 볶아내서라도 이 이야기는 널리 알려야겠다고 결심한다. 그렇게 허둥지둥 드래곤을 따라가 들어가본 광경은 놀라우리만치 아름다운 광경이었다. 넓은 길을 따라 들어가 가보면 그 안에는 넓은 공간과 각종 종유석이 조각을 맺고 있었고, 그 한가운데 자리잡은 물은 놀라우리만치 깔끔했다. 그녀는 조심스럽게 물에다가 손을 가져다 댄뒤 가볍게 손으로 떠서 물을 마셨다. 보통 물에도 단계가 있지만 이 정도면 끓여 마실 필요도 없이 깔끔하고 부드러운 물이었다. 이런 물이라면 뭘 만들어먹어도 깔끔한 맛이 나오지 않을까.
"감사합니다."
그녀 다운, 밝고 투명한 미소를 지으며 천천히 광경을 바라본다. 화려하지 않지만 단아한 태초의 신비가 있다면 여기가 아닐까 싶을 정도로 그녀는 이 곳의 모습 하나하나를 모두 기억하겠다는 듯이 바라보았다. 그렇게 넋놓고 보길 잠시, 이내 잠시간의 고민을 끝낸 그녀는 드래곤의 황금빛 거체를 바라보며 장난스레 미소를 머금은채 입을 열어보였다.
"사실 시선을 맞추고 싶은데 위대하신 분의 몸은 너무 커서 이 각도에선 보이지 않네요."
말하고 싶은바가 뚜렷하지 않다고 생각한 것일까, 그녀는 잠시간 멋쩍게 머리를 긁적인뒤 정확하게, 자신이 원하는 바를 말하였다.
"드래곤분들은 전부 마법의 조종들이라고 들었는데.... 혹시 몸집이 작아지는 마법도 있을까요?"
가령, 인간의 모습이 되는 마법이라던가, 라는 뒷말은 삼킨 채 그녀는 기대감 반, 호기심 반의 시선으로 그를 올려다 보았다.
>>635 미안하다, 고맙다, 그리고 조심히 들어가라. 그런 말들이 귓가에 들려왔다. 서로 이별에 합의한 이상 다른 테이블에서 오가는 대화만큼이나 내게는 의미 없는 말들이다. 묵례 한 번으로 회답하고 짐을 챙겨 카페를 나섰다.
마침 저녁때다. 오늘 저녁은 뭐 먹지? 모처럼 나왔으니 보양식 삼아 돈까스라도 먹을까? 아니다, 내일 출근 준비도 해야 하고 햇반 유통기한 아슬아슬하니까 집에 가서 남은 반찬이랑 먹자. 내일 먹을 도시락도 싸야 하고. 아니다, 회사 근처에 새 카페 하나 개업했던데 거기서 브런치 메뉴를 먹어볼까? 맛이 별로거나 양이 적으면 보충해서 먹게 간단하게라도 도시락을 싸긴 싸야겠네.
이런저런 궁리를 하다 보니 문득, 이별보다도 뭐 먹을 지에 신경이 쏠리는 게 퍽 신기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좋아했던 사람이었고, 그만큼 두려워했던 이별이었는데. 하기야, 내 밥 친구 사랑과 전쟁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에피소드에 이런 말이 나왔었다. 아낌없이 주는 것의 장점은 후회가 안 남는 거랬다. 나 역시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고, 그렇기에 후회가 안 남는 거겠지. 고맙다고 했던가. 나 역시 동기가 뭐든 상대가 연애의 끝을 바라준 것 만큼은 진심으로 고마웠다.
그러고 보니, 이제 퇴근하고 나면 자유시간이 늘겠네. 마침 사놓고 시간이 없어서 못 해본 게임이 있으니 이참에 내일 퇴근하고 켠왕해야지. 볼륨이 꽤 있으니 켠왕이 될지는 모르겠다만, 안 돼도 내일모레까지 안 심심하고 좋지, 뭐.
갑자기 왜 자신과 시선을 맞추고 싶다는거야? 그런 생각에 드래곤은 고개를 갸웃하며 살며시 고개를 아래로 내려 그녀를 바라봤다. 확실히 자신과 그녀의 키 차이는 컸으니 얼굴을 마주하려고 해도 마주하긴 힘들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자신이 아예 엎드려서 그녀와 시선을 마주할 수는 없지 않겠는가. 해줄수야 있지만 계속 그렇게 엎드리고 다니면 자신의 허리가 버틸 수 없었다. 그 와중에 덧붙여진 그녀의 말을 들으며 드래곤은 곧 이해했다는 듯이 피식 웃었다.
"확실히 여러 마법을 사용할 수 있고 네가 바라는 마법도 쓸 수 있단다. 하지만 이 몸을 유지하며 작아지는 것도 영 불편하니 그냥 네 눈맞이에 맞는 모습을 해주도록 하마. 당돌하기 짝이 없는 인간의 아이야."
이어 드래곤은 잠시 그녀에게서 멀어졌다. 바로 옆에서 해도 상관은 없을지도 모르나 일단 마법을 사용하는 것이고 연기가 주변을 잠시 가릴 예정이었기에 바로 옆에서 써봐야 그녀에게 좋을 것이 없었다. 어쨌든 자신의 둥지에 들어온 손님이기도 한만큼 나름대로 배려하려고 하며 드래곤은 머릿속으로 주문을 외우었다.
회색 연기가 드래곤의 근처에서 피어올랐고 그 상태로 마치 장막을 펼치듯, 온전히 드래곤의 모습을 감춰버렸다. 연기 너머로 비치던 거대한 실루엣이 희미해졌고 이내 연기 속에서 인간 형태의 누군가가 걸어나왔다. 드래곤의 몸을 감싸고 있던 황금빛 피부와 비슷한 색의 밝은 황금빛 머리카락은 뒷부분이 목까지 내려올 정도로 길었으며, 앞부분은 눈썹을 살짝 가리는 정도의 길이였다. 20대 중반 정도로 보이는 젊은 남성의 연한 푸른빛 눈동자를 지니고 있었으며 그 눈매가 동글동글하면서도 살짝 뿌리가 올라 날카로운 면이 있었다. 어깨가 쩍 벌어진 것이 나름 체격이 있었고 복장 역시 마법으로 미리 맞춘 것인지 일반적으로 마을에서 볼 수 있는 평상복을 하고 있었다.
"이 정도면 만족하겠느냐. 인간의 아이야. 인간들 사이에 끼여야 할 일이 있다면 항상 이런 모습을 하고 있었단다. 다른 모습으로 변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나 역시 이 모습이 편하구나. 그보다 나와 시선을 마주하고자 하는 이유는 무엇인지도 궁금하구나."
온갖 무모하기 그지 없는 의뢰들을 긴장감 하나 없이 받아 챙기는 모습을 보며 많은 이들이 하는 말이었다. 그러면 어떠한가, 그렇게 계속 이 바닥에서 버텨왔고 18세부터 시작해 10년이라는 짧은 세월동안 10좌의 한자리를 차지하고 앉아 세상을 방랑하고 하고 싶은대로 살면서 놀고 싶은대로 놀고 즐기고 싶은 대로 즐겨왔다. 다른 여인들이 안전한 곳에 자리잡고 삶의 여유를 즐길때 그녀는 세상을 벗삼고 즐기며 살아왔다. 지금에 와서 후회할 일은 없고, 때로는 자신감 있게, 때로는 신중하듯 신중하지 않게 그녀는 세상을 지냈다. 그렇게 '가을매'가 되었고, 10좌의 자리에 앉아서 강자가 되었다. 물론 지금 이 눈앞의 드래곤에게 있어서 그걸 뽐낼 여유는 없지만 말이다. 그렇게 물로 자신의 얼굴을 가볍게 닦아낼 순간, 자신의 반 농담, 반 진담을 들어주는 드래곤의 말에 잠시간 놀란듯 바라본다. 어? 진짜 이걸 들어주신다고? 이분도 정말 별종이시네, 아니지, 별종은 진짜 나인거 같은데, 나니까 이딴 이상한 부탁을 하는거고. 물론 그 마저도 이 눈 앞의 드래곤이 성격이 매우 훌륭(?)하다는 반증이 아닐까 싶다. 보통의 드래곤이라면 자존심 구기는 부탁이라고 한방에 죽이지 않을까? 라고 생각 하는 순간 연기가 걷히고 그녀의 눈이 휘둥그레해진다.
"어???? 어????????"
그녀가 잠시간 눈을 끔뻑인다, 하지만 그마저도 잠시간이었다. 이내 확 부끄러워진듯 그녀가 얼굴을 붉히며 더듬거린다. 물론 사랑에 빠졌다기 보다는 확실히 자신의 취향의 얼굴이었기에 조금 당황한 듯한 모습이었다. 둥글둥글하면서도 살짝 날카로운 인상은 마치 황조롱이를 보는 듯 했고 건장한 체격은 마치 표범의 그것을 보는 듯해서 과하지 않게 날렵한 근육매를 보여주고 있었다. 옷감 자체는 분명히 평범한 그것이었지만 오히려 그것이 범상하지 않음을 표현하고 있다는 것을 이 눈앞의 드래곤은 알고 있을까.
"그, 그러니까아아아..... 시선을 맞추자는 것은 역시 아무래도 처음 만나는 사람, 아니 아니 아니 아니, 존재끼리는 역시 아이컨택을 함으로서 서로를 증명하는 거니까으아으아, 아니지, 으에? 이게 맞나?"
그녀 답지 않게 당황한 듯이 말을 심하게 더듬는다, 아까전의 여유는 어디갔는지 당황한 나머지 자신이 무슨 말을 내뱉고 있는지도 헷갈려하는 듯 싶었다. 그러면서도 아까전의 현상을 어떻게든 기록하려고 하는 모습은 그녀가 역시나 이런 현상에 대해서는 무조건 기록해두려고 하는 그런 습관을 반증하고 있었다. 그렇게 마음속으로 침착하게 '저건 사람이 아니다, 드래곤이라고. 잘못하면 뼈도 못추린채 벼락 맞는다.'라고 애써 토닥이면서 천천히 다시 얼굴을 바라보는 순간,
눈이 휘둥그래져서 당황하는 것 같은 그녀의 모습을 바라보며 드래곤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녀가 원한 것이 이런 것이 아니었는가. 인간의 어법은 어쩌면 말하는 그대로 해석하면 안되는 것이 아닐까하는 가설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다시 바로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가는 것도 애매한 일이었다. 그렇기에 드래곤은 일단 인간의 모습을 유지하며 그녀의 모습을 가만히 바라봤다. 얼굴이 붉어지고 방금 전과는 다르게 말까지 더듬으며 이런저런 말을 하며 정신을 못 차리는 그녀의 모습이 꽤 흥미로운지 드래곤은 미소를 지었다. 이 인간은 처음 만날때부터 흥미로운 모습만 보이더니 지금도 흥미로운 모습을 보이니 꽤 재밌는 이였다. 적어도 드래곤에겐.
"인간에게는 그런 관습이 있느냐? 확실히 가끔 마을에 이 모습으로 찾아가면 유난히 눈을 마주하려고 하는 모습들이 있었는데 관습 때문인 모양이구나. 허나 나는 인간이 아니라 드래곤이니 굳이 인간의 관습을 예의마냥 지킬 필요는 없단다. 그럼에도 마음이 영 걸린다면 내 그 관습을 맞춰줄수는 있으나 원래 모습으로 돌아가서 눈을 마주하려고 하면 나는 허리를 굽혀야하니 불편하고, 너는 고개를 높이 들어야하니 힘들지 않더냐. 그러니까 이런 모습으로밖에 해줄 수 없으니 그 점은 네가 이해하도록 하렴."
그건 그렇고 꽤 흥미로운 관습이 아닐 수 없었다. 인간은 눈을 보면서 서로를 증명한다고 말을 했으나 무엇을 증명한단 말인가. 눈을 보면서 마음을 읽는 재능이라도 있는 것인가. 그렇다면 지금 자신이 뭘 생각하는지 그녀도 알아맞출 수 있을지 궁금하여 드래곤은 하늘에서 떨어지는 하얀 눈을 떠올리며 그녀의 눈을 마주하고자 했다.
"심장? 딱히 마법을 쓴 적은 없는데 무슨 일이더냐. 너무 놀라서 심장이 아픈 것이더냐?"
얼굴이 해롭다니. 인간으로 변한 자신의 얼굴에 무슨 문제라도 있는 것인가 싶어 드래곤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이 고개를 오른쪽으로 살짝 갸웃했다. 어쨌건 지금 이 모습은 그녀에게 있어선 그다지 좋은 모습은 아닌 것이 아닐까라는 가설을 내며 드래곤은 그녀에게 물었다.
"그렇다면 다시 원래 모습으로 돌아갈테니 그러면 괜찮겠느냐? 물론 원래 모습으로 돌아가도 허리를 굽혀서 눈을 마주치진 않을텐데 그래도 괜찮겠느냐? 인간의 눈높이에 내 모습을 맞추려고 하면 하루종일 허리를 굽혀야 하니 보통 힘든 것이 아니란다."
>>648 (바다는 얼마간 물살 철썩이는 소리만 내며 여자의 부름에 응답해주지 않을 것 같았다. 그러나 부자연스러운 물 튀기는 소리가 나고, 여자가 앉은 바위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서 누군가 고개를 내민다. 물 속에서, 물 밖으로.) ...그거, 내 거... (푸르스름한 머리칼과 비늘 박힌 피부, 세로동공의 파란 눈을 한 소녀? 소년? 인어가 작게 중얼거린다.)
반칙이야!! 반칙이라고!! 그녀는 속으로 미친듯이 NG를 외치면서 이런 건 반칙이라고 되뇌였다. 여지껏 이 자리에 올라오면서 수많은 미남들을 만나봐왔지만 다들 '응, 그냥 그렇구나?' 하고 웃어 넘기던 그녀였지만 이건 완전히 취향 저격을 당한 것인지 무슨 말을 해야할지 모르는 듯 마구잡이로 무슨 말을 해야할지 헤메고 있었다. 분명히 능글맞은 태도였었는데 지금은 어느 여인 마냥 당황한 듯 어버버 거리면서 상대를 대하고 있었다. 상대가 드래곤이라는 것마저 잊은 것 마냥 말이다. 그렇게 잠시간 심호흡을 하며 어떻게든 버텨보려 하지만 저 미친 외모의 파괴력은 그녀를 강타하기 충분했다.
"그러니까, 그러니까아아아!! 관습은 맞는데에에에에.... 아으아으..... 그래!! 위대하신 분은 인간의 모습일때 궁금해서 그랬어요! 사료 상에서는 드래곤 분들은 전부 유희때 변신하는 모습을 제대로 안보이시니까....."
결국에는 솔직하게 말하고야 말았다. 그만큼 자료가 많으면 많을수록 그녀에게 있어 최고의 포상이 아닐수 없으니까, 하지만 지금 만큼은 그런 포상보다도 자신 취향의 남자가 지금 다름아닌 인간이 아니라는 사실이 그녀를 아쉽게 할 뿐이었다. 그렇다고 계속 무례를 끼칠수는 없으니까, 그녀 또한 애써 마음을 진정시킨뒤 멋쩍은 웃음을 지어보였다. 그래, 상대는 위대한 드래곤이야, 나같은 사람이── 그 순간 그녀의 눈으로 맑고 맑은 눈망울이 비춰진다. 호수같이 넓은 눈동자에 그녀의 새빨갛게 익은 얼굴이 비춰진다.
"..... 그거, 반칙이라구요...."
너무나도 순수한 눈동자였다. 오래 살았다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순수하고 깨끗한 눈동자, 그래, 이분은 나를 똑바로 보고 있구나, 존재와 존재로서 나를 바라보고 또 인지하고 있어..... 그녀의 부끄러움과 함께 무언가가 느껴지기라도 하듯 그녀는 천천히 배시시 웃음을 터트리며 상대방을 바라보았다.
"진짜, 반칙이에요. 백치미까지 완벽하다니까요. 아마 인간계에선, 위대하신 분은 최고의 인기남일꺼에요. 음.... 모르긴 몰라도.... 여자들은 전부 끔뻑 죽을꺼에요. 응, 제가 보장해요."
>>649 (부자연스러운 물 소리. 바다에 빠지기 직전이었던 여자는 고개를 돌린다. 푸른빛이 가득한 소녀? 소년? 그건 모르지만 인어는 확실했다.) 네, 맞아요. 그때 당신이 저를 구해주신거 맞죠? 그때 떨어트리셨나봐요. 제 손목에 이게 감겨있었대요. (인어를 봐도 여자는 놀라지 않는다. 푸른빛을 기억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여기요. 가져가실 수 있.... (인어 쪽으로 몸을 돌리다 바위를 짚고 있던 손이 물기에 미끄러진다. 여자의 목소리 대신 다른 물 튀기는 소리가 들린다.)
/마음에 들어!! 남캐일지 여캐일지 궁금하다! 성별이 밝혀질수도 있으니까 바다에 빠졌다고 이어줘도 좋고, 바위 위에 넘어져서 손만 빠지고 바다에 빠지지는 않았다고 이어줘도 괜찮아.
>>651 (바다의 일부인 듯 푸른 인어는 여자가 돌아보자 파드득 놀라며 물 속으로 조금 잠겼다. 머리의 반, 눈 위쪽만 드러내어 그 아래는 잘 보이지 않는다. 인어는 새파란 눈을 깜빡이며 여자를 바라보다가 여자가 삐끗 하자 짧은 비명을 질렀다.) 위험...! (인어의 비명과 동시에 여자가 앉은 바위 아래쪽에서 작은 물보라가 튄다. 곧 여자는 깨달을 것이다. 물 속에서 보들미끌한 무언가가 받침대를 해주어 다행히 손만 빠지고 완전히 빠지는 사태는 면했다는 것을.) ..ㄱ...괜찮, 아....? (여자를 받쳐준 무언가는 금방 물 속으로 스르르 사라진다. 인어는 여전히 나타났던 자리에서 얼굴을 빼꼼한 채로 여자의 안위를 살피는 듯 했다. 꼬리가 쳐진 눈동자와 눈썹에 걱정이 한가득이었다.)
"대체 그 사료에 뭐라고 적혀있는진 모르겠다만 적어도 다른 드래곤들을 포함해서 나도 이렇게 변신하는 일은 적긴 하단다. 딱히 변신할 이유가 없지 않니. 인간의 마을에 들어갈 때나 변신하는 일이 잦고 다른 종족들에게 찾아가거나 할 때 괜히 시끄러워지면 곤란하니까 변신하는 것이 고작이란다. 무엇보다 나는 이 둥지에서 그렇게 많이 나가거나 하진 않으니 말이야."
물론 배가 고프거나 하면 사냥을 하기 위해서 나가지만 둥지에서 아늑하게 지내는 것이 바로 드래곤의 삶의 방침이었다. 괜히 밖에 많이 돌아단봐야 겁먹은 이들이 나타나서 소리를 질러서 시끄럽기만 하고 그냥 비행을 하면서 공중에서 바람을 쐬고 싶을 뿐인데 드래곤이 노했니 뭐니 하면서 인간 제물이 어쩌고 저쩌고 소리를 해대서 귀찮아서 도망치듯 벗어난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때를 떠올리며 드래곤은 쓴 웃음소리를 냈으나 딱히 그것으로 불평하진 않았다. 지금 눈앞의 인간의 잘못은 아니었고 자신이 무섭게 보이는 것은 당연한 것일테니까.
"그렇다는 것은 너도 끔뻑 죽는다는 것이 아니더냐. 인간의 아이야."
그래서 그렇게 당황한 것인가. 그다지 생각을 한 적이 없는 일이었다. 인간의 기준에 있어서 제 얼굴은 꽤 잘생긴 편인 모양이었지만 그 말에 어떻게 반응해야할지 드래곤은 알 수 없었다. 일단 칭찬이라는 것은 알 수 있었기에 그에 감사는 표하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하며 드래곤은 입을 열었다.
"칭찬은 고맙게 받도록 하마. 허나 인간계에 가면 최고의 인기남이라니. 인간들 중에서는 더욱 멋진 이도 있지 않겠니. 너무 과찬이로구나. 물론 너도 꽤 예쁘다고 생각한단다. 인간의 아이야. 네가 진정으로 베필을 찾고자 한다면 너의 그 귀여우면서도 어여쁘고 당돌한 매력에 빠질 이가 많겠지."
그녀에 대해서 자세하게 아는 것은 아니었으나 적어도 당돌한 것은 마냥 나쁜 말은 아니었다. 인간 중에서는 그런 것을 좋아하는 이도 있을테니 그런 이에게는 필시 인기가 좋을 거라고 생각하며 드래곤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튼 인간의 아이야. 물은 여기서 먹으면 된단다. 그 외에는... 그렇구나. 동굴 밖으로 나가면 일단 들짐승이나 과일이 열려있는 나무도 있긴 한데 인간은 그 정도 음식이면 충분할지 모르겠구나. 마을에 가면 온갖 별미를 다 먹는 것 같던데 여기서는 그런 것을 먹기는 힘드니 그것만은 나도 어쩔수 없단다."
/부지런하다고 해야할까. 그냥 기본적인 것만 하는 것일 뿐이야! 그보다 반해버린 쪽이 지는 것..ㅋㅋㅋㅋㅋㅋ 여캐 왜 이렇게 귀여워. 진짜. 귀여운 매력 장난 아니야. 진짜.
>>652 (여자는 생각했다. 또 바다에 빠지겠구나. 그러나 여자는 곧 깨닫는다. 물 속에서 무언가가 받쳐주어 또 빠져버리는 불상사는 면했다는 것을. 그리고 인어가 또 구해주었다는 것을.) ....아.... 네. 고마워요. 당신이 도와주신 거 맞죠? 또 당신 덕분에 살았네요. (얼굴만 간신히 보일 정도였지만 인어의 눈동자와 눈썹에서는 걱정이 엿보인다. 여자는 인어를 안심시키기 위해 옅게 웃는다. 방금 죽을 뻔했던 사람같지 않다.) 그래도 목걸이는 무사히 잘 지켜냈어요. (멀쩡히 진주가 빛나고 있는 목걸이를 보여준다.) 제가 전해드리는 게 싫다면 이거, 이 바위 위에 올려놓아 드릴까요? (여자는 파드득 놀라며 거리를 두던 인어를 떠올린다.)
/고마워! 너참치도 상황 재밌게 받아주는구나! 너참치도 하고 싶은 상황 아무거나 자유롭게 전개해줘도 괜찮아.
"우히히, 드래곤님들 관련 자료는 적은게 현실이라고요. 원체 환상종에 가까우다 보니까 알려진 자료도 적고 전부 뜬구름 잡는 이야기들만 해대니까 이렇게 근접해서 보는건 정말로 대단한거라고요? 마을 분들에게는 제가 잘 전달하겠지만 아마 어쩔수 없을꺼에요, 워낙에 가까이 지내는게 아니니까요. 그렇잖아요? 위대하신 분들은 만년을 장수하시지만 저희는 끽해야 찰나의 시간을 스쳐지나가는 것 뿐이니까요."
물론 본인들은 자각이 없지만 실제로도 그랬다. 유희중은 드래곤들은 자신들을 밝히지 아니하였고, 크나큰 족적을 남기기도 하였으나 결국에는 다들 하나같이 신비에 쌓였으니까, 그래서 정확한 자료는 손에 꼽을 정도였고, 그녀도 그 진실과 거짓을 분류하는데 큰 골머리를 썩기도 하였다. 하지만 그래도 이렇게 실물로 만났다는 것 자체가 너무나도 대단한게 사실이었다. 그렇기에 그녀는 이곳에 많은 학술 자료를 가져 오지 못했다는 사실도 아쉬웠다. 물론 마을로 돌아가서 이곳으로 돌아오는 길을 찾는 것은 쉬웠지만....
'아쉽다.'
솔직히 자유롭게 지내면서 이렇게 한존재에 얽매이는 것은 처음이었다. '가을매', 가을 한철을 지내며 어느 순간 바람과 같이 사라진다 하여서 다른 10좌들이 붙여준 이름이었다. 그런 그녀였기에 이러한 생각 자체가 처음으로 든 것은 사실이었다. 어쩌면 운명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들었다. 운명을 믿지 않았기에 오히려 이 순간에 더욱 끌리는 것이 아닐까? 그녀는 손가락을 꼼지락 거리면서 어린 소녀 같이 드래곤의 말을 들었다. 칭찬이었다. 너무나도 진심어린 칭찬이었기에 오히려 너무 부끄러웠다. 그 깊은 속을 자신이 어림짐작 하는 것은 절대로 쉽지 않았지만 그래도 그 목소리에 깃든 진심만큼은 너무나도 확실히 와닿았다. 순식간에 확 올라오는 뜨거운 감정에 그녀는 왠지 짖궃게 웃으면서 이 오랜 존재에게 장난기 어린 목소리로 은근하게, 게슴츠레한 눈초리로, 허리를 숙여 올려다 보는 자세 그대로 뒷짐을 진 채 혀를 빼물며 질문을 던졌다.
"히히히, 그러면 위대하신 분이 보기엔 저는 어떤가요? 왜, 만약 제가 같은 종족이었다면 푹 빠질거 같나요?"
함정에 가까운 질문이었지만, 과연 그는 어떨까? 우회? 아니면 회피? 아니면..... 정면돌파? 어느쪽이건 재밌을거 같다고 생각한 것인지 그녀는 마음속 나침반을 들고 가만히 그의 깊은 마음속에 파문을 던져 보았다.
/으히히히 노렸습니다!! /괜히 연애사도 넣은게 아니라고요? 물론 종족의 차이가 있으니까, 어디까지나 여사친 남사친으로 끝날수도...!!
>>654 (빤히 지켜보던 인어는 여자가 무사해보이자 눈동자에서 걱정의 빛이 조금 사그라들었다. 여자의 미소가 진심으로 안심되어보였나보다.) 그, 으... 응... (인어는 뭐라 말을 하고 싶었던건지 입을 몇번 벙긋거렸지만. 말은 못 하고 작게 어물거리기만 했다. 여자가 목걸이를 들어올리자 순간적으로 눈이 반짝 빛나며 목걸이를 따라가다가 앗, 하듯 물 속에 얼굴을 감춘다. 제자리에서 계속 머뭇거리던 인어는 여자가 목걸이를 놓아두겠다고 하자 물 속에서 뭐라고 하는 듯이 기포가 보글보글 한다.) ..우으... (그러더니 수면 아래로 아예 들어가버리는데. 그렇게 사라질 것 같은 인어는 잠시 물 속을 유영하다가 여자가 앉은 바위 바로 밑에서 슬그머니 머리를 들었다. 인어의 얼굴과 피부가 좀 더 가까이 보이고, 푸른 머리카락이 제법 길게 물 속에서 일렁이고 있음이 보인다.) ...ㅎ주ㅁ... (인어는 바위 그늘에 숨듯이 붙어서 중얼거렸다. 어째 가까워졌지만 목소리는 더 작아지고, 여자를 곁눈질로 보는 모습이 겁먹은 것 같기도, 부끄러워 하는 것 같기도 하다.)
/하고싶은... 여캐의 심장 홀리기!? 넝담~~ ㅎㅎ 이거 시간대는 밤인걸까? 아니면 낮?
만약 그녀가 자신과 같은 드래곤이라고 한다면 어떨까. 일단 첫 인상은 꽤 정신없는 이가 아닐까라는 생각이었다. 당돌한 것은 어디까지나 그녀가 자신을 두려워하는 일이 많은 인간이라는 종족 때문이지. 자신과 같으 드래곤이라고 한다면 당돌한 것이 아니라 까불까불거리는 성격이 아니겠는가. 허나 그것이 마냥 나쁘다고 생각하진 않았다. 물론 조용하고 아늑하게 지내고 싶은 자신에게 있어서 조금 귀찮은 존재가 될지도 모르겠으나 그렇다고 온전히 떨치고 싶진 않았다.
"그렇구나. 네가 만약 나의 동포라고 한다면 적어도 가깝게 지내고 싶을 것 같구나. 이 둥지에도 자주 초대하면서 말이야. 그러다보면 또 뭔가 감정이 생길수도 있겠지만 지금 내가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여기까지란다."
애초에 그녀는 자신처럼 드래곤이 아니었으니 그것을 가정하고 생각하는 것은 조금 애매한 이야기였다. 그래도 조금 귀찮을지도 모르지만 상당히 가까운 사이로 지내고 싶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하며 드래곤은 그 정도로 결론을 내렸다. 그보다 이런 것을 왜 묻는 것인지. 물론 아까 전의 질문도 그렇고 지금 그녀가 보이는 생각도 그렇고 어느 정도 짐작은 할 수 있었다.
"인간의 아이야. 너는 드래곤을 동경하는 것이더냐. 허나 삼 일 있다가 떠나야만 하는 상황에 그 감정은 너의 발목을 잡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단다. 모험가라는 이들은 모험을 하면서 살아가는 이지. 계속 같은 곳을 왔다갔다 하는 이는 아닌 것으로 알고 있는데 내 인식이 잘못된 것이더냐?"
모험가라는 직업인 이상 이리저리 떠돌아다녀야 하는만큼 그냥 좋은 추억으로 간직하는 것이 좋지 않을까 생각하며 드래곤은 말을 마쳤다. 일단 사흘 정도 있다가 가겠다고 한 것은 그녀였으니까.
/아앗..ㅋㅋㅋㅋㅋㅋㅋ 연애사도 나쁘진 않지만 일단 지금 이 드래곤은 아무래도 바로 그 감정을 느끼진 않을 것 같네. 당돌한 인간 정도로만 보고 있으니 말이야. 물론 어여쁘고 귀엽다고 생각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656 (순간적으로 반짝 빛나는 인어의 눈. 여자는 생각했다. 이 목걸이, 역시 당신에게 소중한 것이었구나.) .....네? (기포가 보글보글하지만 물 속에서 하는 말은 알아들을 수가 없다. 여자는 애꿎은 기포만 더 자세히 지켜본다.) 아.. (그리고 인어가 사라진다. 여자의 고민이 깊어진다. 이대로 이 목걸이를 바위에 두고 가면 되는 건가? 목걸이를 난감하게 보던 여자의 눈에 푸른빛이 잡힌다. 인어였다.) .....네? (인어가 먼저 다가오는 건 처음이었다. 바다와 하나가 된 것처럼 일렁이는 푸른색의 제법 긴 머리카락. 그러나 더 작아진 목소리에는 다시 반문할 수밖에 없었다. 여자는 알아들을 수 없는 푸른빛을 내려다보다 조심스레 목걸이의 줄 끝을 잡는다.) 그럼 이러는건 어떨까요? 이러면 당신도 저와 닿지 않을 수 있을 거에요. (목걸이의 빛나는 진주 부분이 인어를 향하도록 인어에게로 내민다.)
/그건 이미 홀려졌는데~~ ㅎㅎ 시간대는 생각 안했는데, 나는 밤이어도 낮이어도 예쁠 것 같네. 너참치가 원하는 시간대라고 하자!
>>658 (하늘이 어둑한 밤이었지만 둥글게 떠오른 달에서 내리는 빛으로 사방은 환했다. 검푸른 수면을 비추고 바다속까지 비춰주진 않았지만 인어의 긴 머리카락 아래로 은빛 비늘의 꼬리가 살랑이는 것 정도는 충분히 보인다.) 아냐... (인어는 여자가 목걸이를 내려주는 걸 보고 고개를 가로저었다. 목걸이를 올려다보는 눈은 소중한 것을 보는 눈이 맞으나, 가져가지는 않고 시선을 여자에게 옮겼다.) 그거, 내 거, 인데.. 준 거야... 너한테... (인어가 띄엄띄엄 꺼낸 얘기는, 여자를 구해주던 날, 우연히 손목에 감긴게 아니라 인어가 준 것이라는 내용이었다.) 그러면, 나를, 기억... 하지 않을까, 해서.. 다시, 와, 오지, 않을까... (기어들어가는 목소리지만 여자가 알아들을 수는 있게끔 말을 한다. 인어는 더 말을 하기 부끄러운지 물에 스르륵 잠겼다. 멀리에서 그랬던 것처럼 눈만 내놓고서 여자를 지그시 바라본다.)
>>659 (어둑한 밤이어도 보름달이 이 바다만을 비추고 있는 것처럼 인어와 여자 주변은 환했다. 여자는 다시 생각했다. 이것도 당신의 능력인 것일까. 여자의 눈이 달빛을 닮은 인어의 비늘에 잠시 닿는다.) .....네? (목걸이를 건네주어도 인어는 받지 않는다. 놀란듯 반문하던 여자는 처음으로 인어의 말을 알아들을 수 있었다. 기어들어갈 정도로 작은 목소리지만 그 내용만큼은 확실히 들렸다. 여자는 다시 물에 스르륵 잠기는 인어를 멍한 표정으로 바라본다. 부끄러워하는 것 같은 모습. 혼란스러워진 여자는 손에 들린 목걸이와 인어를 번갈아 보다 인어에게로 시선을 둔다.) ..제가 다시 여기 와주었으면 했나요? (여자는 그것밖에 물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다시 목걸이로 시선을 돌린다.) 네, 덕분에 당신을 한번도 잊은 적 없어요. 이 목걸이를 볼 때마다 당신의 푸른빛이 떠올라서. 당신이 기억나서. 그래서 다시 돌려드리려고 여기 온 건데.. (당신은 거부했다. 그리고 여자에게 혼란을 남겼다.) 이거, 당신에게 소중한 거 아닌가요? 저에게 주어도 정말 괜찮은 건가요? (여자의 붉은 눈이 인어를 가만히, 걱정스레 바라본다.)
>>660 (여자를 바라보던 인어는 여자의 반문에 조금 주저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기억해주었으면 했다. 다시 와주었으면 했다. 위험을 무릅쓴 인어의 행동은 여자가 다시 오게 하기 충분했을까.) ..기억, 해줘서, 고마워... (인어는 여자가 줄곧 기억해주었다고 하자 희미하게 웃는 듯이 표정을 지었다. 그렇지만 목걸이를 돌려주려하는 것엔 미소가 사라지고 서글픔이 그 자리를 대신한다. 여자의 손에서 반짝이는 진주 목걸이는 분명 인어에게 소중한 것이 맞았다. 맞았지만...) 그렇, 지만.. 그거, 가져가면, 다시.. 안 올, 거.. 잖아... (인어는 여자가 온 이유가 목걸이를 돌려주기 위함이니 지금 저걸 받는다면 다시는 오지 않을지도 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대로 진주가 없으면, 앞으로는 더힘들 것이 분명했다. 받느냐. 마느냐. 갈등이 담긴 인어의 푸른 눈이 여자의 붉은 눈과 마주쳤다.)
>>661 ..저야말로 구해주셔서 고마워요. (인어는 처음으로 웃는 것 같은 표정을 짓는다. 아름다워요. 여자는 무심코 튀어나오려던 말을 참아낸다. 당신이 남자인지 여자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정말 아름다웠다. 그것이 인어이기 때문인지 그냥 당신 자체가 아름다웠기 때문인지.) ....... (인어의 미소가 사라지고 서글픔이 나타난다. 인어의 푸른 눈에는 갈등이 가득 담겨있다. 여자는 말 없이 인어의 눈을 바라본다.) 이거, 당신에게 꼭 필요한 것이 맞죠? (한참만에 입을 연 여자는 인어에게 다른 질문을 던진다.) 그렇다면 당신에게 돌려드릴게요. 그리고 다시 또 올게요. 다음번에는 목걸이를 돌려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당신을 보러. 약속할게요. (여자의 몸이 다시 천천히 바다를 향해 기울어진다. 바다와 가까워지니, 인어와도 조금 더 가까이.) 내일 밤.... 다시 만나러 와도 될까요? (인어의 푸른 눈과 조금 가까워진 여자의 붉은 눈이 살짝 휘어지며 옅게 웃는다.)
>>662 (여자가 말이 없는 동안엔 인어도 말이 없었다. 한참이 지나 여자가 묻자, 인어는 머뭇거리다가 끄덕였다. 소중한 것이며 동시에 꼭 필요한 것. 하지만 여자가 그것만 주고 떠난다면, 다시 받지 않아도... 라고 고민할 수도 있는 것. 인어의 갈등에 막을 내려준 건 여자의 말이었다.) 정..말..? 정말, 다시, 올 거야...? (여자를 바라보는 인어의 푸른 눈에 희망이 반짝 감돌았다. 목걸이를 돌려주어도 다시 와주겠다고. 인어를 보러오겠다는 말이 정말 기뻤다. 귀가 있어야 할 자리에 붙은 작은 물갈퀴가 파르르 떨리며 기쁨에 어쩔 줄 몰라하다가, 내일 밤이라는 말에 다급히 대답한다.) 내일은..! 안 돼, 내일은, 파도, 높은 날..이야... 위험해... (보러와주는 건 기쁘지만 그 탓에 여자가 또 위험해지면 안 된다. 인어는 내일 밤은 안 된다고 하고 고민하다가 달이 세번 지나면... 이라고 중얼거렸다.) 그 때는, 괜찮아. 바다, 조용해... (사흘 뒤라면 괜찮다는 말을 하고, 인어는 뒤늦게 조금 가까워진 여자를 보며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렸다. 부끄러워 하는 걸까. 그래도 조금 전처럼 물 속에 숨거나 하진 않았다.)
>>663 네, 정말로요. 정말 다시 올게요. (인어의 푸른 눈에 희망이 감돈다. 그에 안심하듯 여자의 붉은 눈도 조금 더 부드러워진다. 인어의 작은 물갈퀴가 기뻐하며 떠는 것을 지켜보던 여자의 눈이 인어의 다급한 말에 크게 뜨여진다.) 내일은 위험한가요? (이미 몇 번씩이나 바다에서 죽을 뻔 했는데도 여자는 오히려 덤덤해보인다.) 달이 세번 지나면.... 사흘 뒤라면 괜찮다는 말이죠? 알겠어요. 그럼 그때는 당신을 보러 올게요. 사흘 뒤에, 나를 기다려줄래요? (여자는 옅게 웃는다. 그리고 부끄러워하는 것 같으면서도 물 속에 숨지는 않는 인어를 가만히 바라본다.) 왜 제가 다시 와주었으면 했나요? (목걸이 때문이 아니라면 인어가 여자를 다시 만나고 싶어했을 이유는 무엇이었던 걸까. 궁금해진 여자는 약간 위태롭게 바다와 인어에게 조금 가까워진 그대로 묻는다.)
>>664 (여자가 순순히 사흘 뒤를 약속하자 인어는 얼른 끄덕끄덕하며 대답한다.) 응, 응! 기다릴게. 나, 기다리는 거, 잘 해... (여자를 구해준 뒤에도 언제 올 지, 정말 오긴 올 지 모르는데 매일 이 앞바다까지 오곤 했다. 사흘 정도는 그 기다림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여자의 시선에 인어는 눈을 맞추진 못 해도 물러서거나 숨지 않았다. 가만히 있던 인어는 왜, 냐는 물음에 여자를 보았고 위태로운 여자의 모습을 보고 손을 들어 안전한 바위 위로 올라가게 하려고 했다.) 그, 그러다가, 떨어져, 안 돼... (인어의 손은 수중 동물처럼 갈퀴가 있고 손톱은 살짝 뾰족했으며 역시나 비늘 투성이다. 행여나 닿았다가 여자를 상처 입힐까 봐 불안한지 직접 대지는 않고 뒤로 물러가라고, 그런 손짓을 한다. 인어의 대답은 여자가 안전해졌다 싶을 때 나왔다.) 그, 그날, 바다에, 빠진, 네가... 별님, 같았어... 그러, 그러니까.. 별님, 하늘에, 가지 말고.. 다시, 와주면.. 해서, 목걸이, 줬어... (인어는 별을 좋아했다. 닿을 수 없는 하늘에서 반짝이는 별 보는 걸 좋아했다. 그래서였을까. 바다에 빠진 여자가 바다에 떨어진 별님처럼 보였고, 아니, 별님이라면 좋겠다고 생각했을지도. 인어는 여자가 다시 몸을 내밀지 않게 하려는지 조금 더 물 위로 나왔다. 거칠한 바위 표면을 손으로 짚고 상체를 조금 들자 젖은 머리카락이 들러붙은 몸이 달빛 아래 어렴풋이 드러났다. 자세히 보면 좀 더 보일지도.)
>>665 고마워요. 저도 밤이 찾아오면 바로 이곳으로 올게요. (인어는 밝은 낮에 모습을 드러내기 곤란할테니. 옅게 웃은 여자는 인어를 바라본다. 인어에게 궁금한 것이 많았다. 그래서 가장 궁금한 것을 무심코 질문했다.) 걱정해주는 거예요? (역시 인어라 그런지 인간과는 다른 손. 닿으면 상처가 날지도 모르는데도 여자는 바다에 빠지는 것에 대해서처럼 덤덤하다. 닿지 않는 인어의 손을 가만히 지켜본다. 그리고 그 손짓대로 바위 위로 천천히, 안전히 올라간다.) .....별님? (여자의 눈이 놀라 크게 뜨여진다. 별님처럼 보여서 나를 구해준 것일까. 여자는 말이 없어진다.) ....별님이 하늘에 가지 않기를 바랬다면 그대로 바다에 데리고 있는 것이 더 나았을 수도 있었을텐데요. (하지만 인어가 그러지 않아주었기에 여자는 이렇게 살아있을 수 있었다. 당신은 선한 마음씨를 가졌군요. 그런데 만약 제가 당신에게 있어서 별님처럼 보이지 않았다면 저는 과연 어떻게 되었을까요. 여자는 목걸이를 바라보며 생각했다. 물 소리가 들린다. 여자는 시선을 인어에게로 옮긴다. 달빛 아래, 조금 더 물 위로 나온 인어가 보인다. 여자는 무심코 처음으로 얼굴 이외의 모습을 드러낸 인어의 몸을 자세히 본다.)
>>666 (밤에 오겠다는 배려 담긴 말에 인어는 조금 전의 웃음 비슷한 표정을 지었다. 밤은 모두가 쉬는 시간, 자는 시간인 걸 인어도 안다. 세상이 잠드는 시간에 인어를 보러 오겠다는 말이 기쁘지 않을 수 있을까. 인어는 손을 보는 여자의 시선에 손을 살짝 오므렸다. 걱정이라...) 아마, 도..? 잘, 모르겠어... (위험한 날 바다에 오지 않았으면. 바다에 빠지지 않았으면. 그런 걸 바라는 마음이 걱정인지 인어는 잘 몰랐다. 그저 조마조마하고 안절부절하게 된다. 싱숭생숭한 기분은 여자가 안전하게 올라가자 진정되었다.) ...별님, 은... 하늘에, 있을 때, 가장.. 예쁘니까... (인어는 우물우물 중얼거렸다. 여자가 정말 별님이어도, 아니어도, 있을 곳이 인어가 있는 곳은 아니라는 걸 알았다. 그래서 여자를 인어의 곁에 두지 않고 지상으로 돌려보내주었다. 그러면서 기원했다. 다시 만나러 와주길.) 으음... (인어는 여자의 시선이 몸에 향한 걸 알았는지 가까워졌을 때처럼 눈을 둘리며 작게 목을 울렸다. 귀의 갈퀴가 살짝 아래로 쳐저 끝이 바들바들하는게 부끄러움의 표시일까. 피하지 않고 시선을 받아내는 인어의 몸은 조명이 달빛 뿐이긴 하나 선이 매우 가늘고 마른 몸이라는 건 알 수 있다. 가는 몸에 군데 군데 은백색의 비늘이 있고 피부는 창백하다. 그리고 머리카락에 덮여 제대로 보이지는 않지만, 가슴이 납작하고 도드라진 어깨선이 소년의 체형이구나 싶게 한다. 그런데 여자의 기억 속 여자를 구했던 그 인어도, 이렇게 작고 가늘었던가?) ..에으... (인어는 뒤늦게 손으로 몸을 감쌌다. 그 몸짓은 몸을 가리기 위해서보단 무언가를 감추려고 하는 것 같다. 예를 들면 부자연스럽게 비늘이 떨어진 옆구리나 허리쯤의 지느러미가 찢긴 것이라거나.)
>>667 (인어의 웃음 비슷한 표정에 여자는 안심한다. 여자의 생명을 구해준 이런 순수하고 선한 인어가 다른 사람들에게 보여지는 것은 반드시 막아야 했다. 아름다운 인어들을 향한 추악한 욕망을 드러내는 사람들이 많았다. 불쾌한 기억을 떠올린 여자의 얼굴에 어둠이 잠시 드리웠다 사라진다.) 그렇군요. 아마 그것이 걱정일 거예요. 걱정해줘서 고마워요. (여자는 옅게 웃는다. 인어의 걱정은 여자를 전에도, 지금도 안전하게 지켜주었다.) ..그건 그렇네요. 당신이 바다에 있을 때 가장 예쁜 것처럼. (여자는 하려던 말 대신 다른 말을 나긋한 미소로 전한다. 여자는 생각한다. 지금은 지상으로 돌아왔지만 정말로 하늘의 별님이 되면 어떨지. 하지만 지금처럼 당신을 다시 만나러 오지는 못하겠죠.) .....아, 미안해요. 실례를 범했네요. 당신이 너무 아름다워서 그만... (귀의 갈퀴가 떨리는 인어를 보고 놀란 여자는 무심코 생각하고 있던 바를 그대로 말한다. 마르고 창백하지만 소년의 체형에 가까운 모습. 당신, 남자아이였군요. 여자는 의아했다. 그런데 처음 저를 구해주셨을 때, 그때도 당신은 이렇게 작고 가늘었던가요? 여자는 희미한 기억을 더듬어본다. 그때는 이런 모습이 아니었던 것 같았는데..) ..아. (상념에 빠졌던 여자의 눈에 무언가를 감추려는 것 같은 인어의 몸짓이 들어온다.) 잠시만요. 이거 뭐예요? (여자는 다급히 인어에게로 더 가까이 몸을 기울인다. 비늘이 떨어진 옆구리, 찢어진 허리 부근의 지느러미. 인어의 상처들을 자세히 살펴보던 여자의 시선이 인어에게로 옮겨진다.) 당신, 다쳤어요? (여자의 붉은 눈에 놀람과 걱정이 한가득 담긴다.) ..이 목걸이가 없었기 때문인가요? (인어에게 소중하고 꼭 필요한 것. 여자는 목걸이를 바라보다가 천천히 인어의 목에 목걸이를 걸어주려고 한다. 인어가 조금이라도 거부의 의사를 보이면 대신 조심스레 인어를 향해 목걸이를 내민다.)
/남자애였구나! 이제 남자애인지 남자어른(?)인지 또 비밀을 파헤치는 것인가~~ ㅎㅎ 인어씨 신비로워서 궁금해!
>>668 (여자의 얼굴에 어둠이 스쳐가자 인어의 얼굴에도 걱정 어린 기색이 지나갔다. 부끄러워 시선을 피하다가도, 인어의 눈은 어느샌가 여자에게 향했다. 여자가 옅게 웃으면 인어도 입술이 살짝 호선을 그렸다.) 걱정.. 으응... (인어는 여자의 말을 따라하듯 중얼거리며 고개를 기웃 했다. 여자의 말처럼 인어의 감정은 걱정인 걸까. 비슷하면서도, 다른 것 같다.) ...너도, 예뻐.. 예쁜, 별님, 같아... (인어는 여자의 말들에 수줍은 듯이 고개를 숙이면서도 들을 수 있게끔 말했다. 물에 떨어졌던 여자도. 지금 인어를 바라보는 여자도. 인어에겐 반짝반짝 예쁘게 보일 뿐이었다.) 읏, 에, 아, 아니... (여자가 상념에 잠긴 사이 퍼뜩 상처를 깨닫고 뒤늦게 몸을 가렸다가, 되려 여자의 신경이 쏠리자 안절부절 한다. 다쳤냐는 말에 아니라고 하지만 아무리 봐도 인어의 몸에 난 그건 상처였다.) 우.. 으... (가린 곳만이 아닌 팔과 다른 곳에도 자잘한 생채기가 여럿 있었다. 인어는 잘못이라도 한 것처럼 여자와 시선을 마주치지 못 하다가 목걸이가 없어서였냐는 물음에 겨우, 아주 작게 끄덕거렸다.) ....나, 기다릴, 테니까.. (여자가 목걸이를 주려 하자 인어는 거부 대신 약속을 되새기듯 읊조렸다. 목걸이가 없어도 인어를 보러 오겠다는 여자의 말을 믿겠다고. 기다리겠다고. 그리고 머리를 숙여 여자가 목걸이를 걸어줄 수 있게끔 해주고, 영롱한 진주가 인어의 가슴팍으로 떨어지자 비로소 안심한 듯이 긴 숨을 내뱉는다.) 고마워.. (목걸이를 돌려받은 인어는 작게 말하고 바위에서 떨어져 물 속으로 퐁당 들어갔다. 그러나 인어의 은빛 꼬리는 달빛 아래 사라지지 않고 물 속에서 계속 유영하고 있었다. 불렀다면 그 즉시, 아니라면 조금 후에 처음 그랬던 것처럼 눈만 슬그머니 내밀었을텐데. 한층 밝아진 달빛 탓인가. 조금 더 진해진 머리색과 소년의 티를 벗은 눈매가 여자를 물끄러미 바라본다.)
/인어가 너무 깔게 많아서 재미없지 않을까 싶었는데 너참치도 즐기고 있는거 같아서 기쁘당! ㅎㅎㅎ
신기방기, 처음부터 꽤 깨방정이랑 오지랖을 피웠다고 생각하고 사실 호감도 다 깎아먹은거 같은데 의외의 호평에 까르르 웃어버리고야 만다. 가벼운 태도같기도 했지만 오히려 그런 상쾌한 모습이 그녀다운 향기를 풍기고 있었다. 땀범벅에 땟국물이 섞인 체취가 아닌, 인간미가 나는 향기였다. 그녀는 오히려 대 만족이라는 듯이 박수를 치면서 고개를 끄덕인다. 그러면서도 그녀는 머리를 긁적이며 반 웃음, 반 고민 담긴 표정으로 드래곤을 바라보았다.
"동경, 이라기 보다는 호기심과 여러가지 복합적이죠? 아무래도 저로서는 처음 만난 존재기도 하고요. 물론 왜 위대하신 분들이라는 호칭이 붙었는지는 알거 같네요. 삶의 깊이가 저희랑은 남달라요. 그래서 뭐랄까? 편안하고 느긋해진달까요."
손사래를 치는 그녀의 손으로 그녀의 외모에 걸맞지 않은 굳은살이 돋보인다. 본래는 고운 손이었겠으나, 그녀가 얼마나 훈련에 매진하고 지금의 이자리에 어떻게 올라왔는지 대변하는 모습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그것을 감출 생각이 없어보였다. 오히려 그것을 자신의 자랑거리로 삼기라도 하듯이 그녀는 빵긋 웃음을 지어보이며 상대방을 바라보았다. 진짜로 드래곤이 아니었다면, 모든것을 다 바칠테니까 같이 살아달라고 하지 않았을까?
"아하하!! 괜찮아요, 괜찮아요!! 제가 괜히 가을매가 아니라고요? 물론, 어딘가에 둥지를 틀지도 모르지만...."
그 순간 그녀의 눈빛이 도전적으로 변한다. 그러고보니까, 그랬지. 제 1좌 녀석은 인간이면서 여성 엘프랑 결혼했고, 제 4좌인 라미아는 드워프 청년이랑 사귀고 있다고..... 그렇다면 자신도 도전하면 문제가 없지 않을까? 수명?
"항상 이곳에 돌아온다면 괜찮지 않을까요? 마치 철새처럼 말이에요."
언제부터 본인이 그런거 신경썼다고.
"물론 저도 지금 이 감정이 되게 충동적인거 아는데.... 음..... 사실 저도 궁금해요!! 지금 이게 진짜 한순간의 꿈인지, 아니면 진짜 영원히 타오를 불길인지, 그러니까.... 지금부터 연구하면 되지 않을까요? 저 그런거 좋아하거든요."
그녀가 상쾌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그 모습은 마치 바람의 대정령, 실피드의 바람보다 청아하고, 드라이어드의 숲속 보다도 푸르른 목소리였다.
/사실 이쪽도 연애감정인지, 아니면 진짜 충동적으로 흔들리는건지 모른다 카더라요! /드래곤씨는 진중하지만 이쪽은 너무 한없이 가벼워서 오히려 읍읍
>>669 고마워요. 당신이 그렇게 말해준다면 당신에게는 저도 어쩌면 진짜 별님이 될 수 있겠죠. (여자는 옅게 웃는다.) 당신은 보름달을 품은 바다 같아요. (여자의 목소리가 나긋하게 속삭인다. 지금 이 순간조차 전부 인어처럼 아름다웠다. 잔잔한 파도 소리, 밤이 깊은 바다의 바람조차 인어를 닮아 아름다웠다. 여자에게는 그랬다.) 거짓말 하지 마세요. 당신, 몸 여기저기에 상처가 났잖아요. (옆구리와 허리의 지느러미 외에도 인어의 팔과 다른 곳에 나있는 생채기를 발견한 여자의 얼굴에 다시 어둠이 드리운다. 여자는 생각했다. 모두 자기 탓이라고. 더 일찍 이 목걸이를 당신에게 돌려주었어야 했는데..) ....저도, 이번에는 늦지 않을테니까요. (여자도 인어와의 약속을 읊조리며 천천히 목걸이를 앞으로 내민다. 머리를 숙인 인어에게 목걸이를 조심스레 걸어주며, 여자의 손이 인어의 푸른 머리칼을 살짝 스쳐내려간다. 목걸이를 걸어준 여자의 손이 천천히 멀어지고, 목걸이가 드디어 제 주인을 찾아가자 더욱 신비롭게 빛난다.) 저도 고마워요. (인어는 다시 바다로 들어간다. 당신, 이제 다시 깊은 바다 속으로 돌아가는 건가요? 그러나 사라지지 않고 계속 유영하는 인어의 은빛 꼬리를 지켜보던 여자의 시선은 조금 후에 다시 슬그머니 올라온 인어의 시선과 만난다. 그런데 눈만 내민 인어의 모습은 왠지 방금 전보다 성장한 것처럼 보여 여자도 인어를 가만히 바라본다.) ..혹시 저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나요? (여자는 고개를 옆으로 갸웃한다. 그리고 처음 그랬던 것처럼 다시 바다 쪽으로 몸을 기울인다. 이번에는 인어가 걱정하지 않도록, 상체만 살짝.) 아니면 제가 당신에게 궁금한 것들을 물어보아도 되나요?
/신비로운 인어씨가 귀엽고 예쁘고 멋있어서 궁금하고, 너무 재미있게 즐기고 있어 ㅎㅎㅎ 너참치도 재밌게 즐기고 있었으면 좋겠당!
"과찬이로구나. 물론 우리들을 네가 말하는대로 위대한 이라던가 고위 생명체라고 부르는 이들도 있는 것으로 알지만 위험한 몬스터라고 부르는 이들도 있고 괴물이라고 칭하는 이도 있단다. 결국 우리들 역시 자연의 일부이고 세상을 살아가는 생명체의 한 부분일 뿐이란다. 물론 동포들 중에선 우리야말로 최고의 생명체라고 부르는 이도 있는 것 같지만 적어도 난 그 사상에는 동조하기 힘들구나."
물론 자신들이 조금 더 강한 존재이긴 하겠으나 퇴치되는 드래곤도 있듯이 드래곤이라고 해서 완전히 무적은 아니었다. 당장 자신의 몸 중 한 곳은 그 어떤 것에도 너무나 취약한 부분이 있기도 했고. 물론 그 부분이 어디인지는 그 누구에게도 말할 생각이 없었기에 드래곤은 예시로도 그 부분은 이야기하지 않았다. 자신을 해칠 의사는 없다고는 해도 굳이 자신의 약점을 드러낼 필요는 없었으니까.
한편 가을매라는 호칭이 나오자 드래곤은 고개를 슬며시 갸웃했다. 그녀를 지칭하는 이름이 아니라 그냥 호칭 비슷한 것인가. 그렇다면 그녀의 이름은 무엇인가라는 의문이 살짝 듣다 또 다시 당돌한 말이 나오자 드래곤은 껄껄 웃음소리를 작게 냈다.
"우연이나 길을 잃다가, 혹은 보물을 노리거나 퇴치하기 위해서 오는 인간이 가끔 있었지만, 항상 이곳에 오겠다는 이는 또 처음이로구나. 당돌한 것이 처음 마주했을 때와 변함이 없구나. 물론 하루도 지나지 않았지만 앞으로도 계속 그렇게 당돌하게 있을테니 우리들에게 당돌한 자세를 보일 수 있는 것은 네가 처음이 아닐까 싶단다. 인간의 아이야."
상쾌하게 웃음을 터트리는 그녀의 모습이 굉장히 청아하고 아름답게 보였고 드래곤은 자신의 눈에 그 모습을 그대로 담으며 조용히 미소를 지었다. 오지 말라고 해도 아마 어떻게든 다시 올 이가 아닐까. 그렇다면 적어도 지금은 가끔 이야깃거리 상대로 마주해도 별 상관이 없지 않을까 결론지으며 드래곤은 손을 뻗어 그녀의 앞머리카락을 손으로 정리해주려고 하면서 이야기했다.
"그 연구에 효율성과 성과가 있을진 모르겠지만 네가 좋을대로 하거라. 인간의 아이야. 어차피 한적한 곳. 발길이 절로 끊길 때까지는 오고 싶으면 오거라. 물론 늘 여기에 있다는 보장은 할 수 없으니 그 점은 네가 이해하도록 하렴. 나도 가끔은 다른 드래곤을 만나러 가거나 교류를 하러 가고는 하니까."
둥지 안에 처박혀 뒹굴거리는 평화로운 삶읆 추구한다고 해도 아예 다른 드래곤과 교류를 하지 않고 살 순 없었다. 자신도 친구는 있었고, 다른 둥지에 놀러갈 때도 있었으니까. 반대로 다른 드래곤이 이곳에 놀러오는 일도 있었제만 그때는 대충 자신의 시종이라고 적당히 말하고 넘겨도 되지 않을까 생각하며 드래곤은 생각을 정리하고 그녀에게 질문을 던졌다.
"가을매라는 호칭이 아니라 너를 지칭하는 이름은 무엇이라고 하느냐. 인간의 아이야."
/처음부터 막 자신을 적대하거나 죽이려고 하지 않으면 딱히 적대하지도 않고 위협하지도 않는 순한 드래곤으로 설정했으니까! 아무튼 표현이 진짜 예쁘다. 너참치.
"으에, 그건 저희 인간들도 마찬가지인데..... 사는 곳은 다 비슷한거 같네요....."
실제로도 그랬다. 마법 좀 배우고, 머리에 좀 뭔가 들은 놈들은 죄다 인간이 최고라느니, 인간이 자연을 정복해야하느니 이상한 소리를 지껄이고 있었다. 그런 같잖은 생각을, 그녀는 누구보다도 혐오하고 있었다. 실제로도 10좌 중 8좌는 인간제일주의 사상에 이종족혐오주의까지 가지고 있었다. 그렇기에 매번 회의에 참석하지 않았고─10좌중 절반은 전부 이종족이다.─, 가장 뛰어난 1좌 마저도 그녀의 말에 혐오감을 드러낼 정도였다. 그렇게 결국 자신과 드잡이질을 하였고, 그 결과 그녀가 8좌의 머리끄댕이를 잡고 연무장 한가운데에 끌고 나와 뺨을 살벌할 정도로 후들겨 패고서야 일단락 되었었던 그 일대 사건을 기억해내면서, 혀를 내두르며 생각하기도 싫다는 듯 고개를 내저었다. 그러던 와중 용의 말에 그녀가 배시시 웃는다. 누군가 들으면 비꼬는 말과 같이 들리겠으나, 그녀에게 있어 지금 그 말은 그 어떤 말보다도 최고의 찬사였다. 게다가 자신이 호감을 가진 남자가 아니던가, 그녀는 그에 고개를 주억거리면서 당당하게 가슴을 쭉 폈다. 연보랏빛 머리카락이 찰랑이며 부드러운 에메랄드 빛 눈동자가 광채를 더하며 그 말에 용을 바라보며 히죽 웃어보였다.
"헤헹! 칭찬으로 알아듣겠슴다!! 그리고 어.... 사실 조금 죄송해요. 제가 좀 건방진 태도로 대한 거 같아서요. 그래도.... 좋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하지만 그 당당함도 잠시, 결국 다시 본래의 천진난만한 웃음을 지어보이며 그 손길을 즐긴다. 부드럽고 따스한 손길, 아버지는 자신을 도구로만 봐왔고 자신에게 이러한 행동도 해주지 않았기에 만약 아버지가 조금이라도 따스했다면 그러한 태도를 보이지 않았을까 싶으며, 그녀는 잠시간 자신의 머리카락을 손질하는 그 상황을 배싯거리는 웃음으로 즐기고 있었다. 하지만 이 눈앞의 용은 알까, 지금 이 모습은 마치 첫날밤 신부의 베일을 벗기는 신랑의 모습과도 흡사하다는 것을.
"다음번에는 갑옷도 벗고, 깨끗이 씻고 올께요. 누가 봐도 아깝다고 할 정도로 말이에요."
그것은 선전포고였다. 언젠가는 자신이 먼저 죽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 이 불씨가 거짓말이 아님을, 단 하룻밤만의 한여름 속 꿈이 아님을 그녀는 굳게 다짐하였다. 가을매라고 하였던가, 절대로 머물지 않을것만 같던 새가 조용히 자신의 집터를 정하는 순간이었다. 그것을 증명하기 위해, 그녀는 천천히 자신이 버렸던 이름을 꺼내들었다. 지금은 입고 있지 않은 드레스를 입은 것 처럼, 그녀는 우아하지만 화려하지 않게, 단아하고도 부드러운 자태를 보이며 살짝 뒤로 물러나 귀족의 예법에 따라 조심스레 허리를 숙였다.
"가을매 린, 정식 이름은 리나 폰 샤로시아레스라고 하옵니다. 미숙하나마 모험가들이 이르는, 드높은 10좌 중 3좌에 자리잡고 있나이다. 위대하고도 지고하신 분의 성함을 듣고자 청하오니 저의 무례를 용서해주시렵니까."
그리고 그 단아하고도 아름다운 자태도 잠시, 어느새 고개를 살짝 든 그녀의 입가에는 장난기 반, 부끄러움 반이 섞인 개구진 미소가 드러나 있었다.
"에헤헤헤.... 어울리나요?"
/대신에 일에 자주 잡아먹히지만요!! 드래곤씨도 너무 표현력이 좋아서 답레 써드리는 맛이 일품이에요!! /드래곤씨 멋있어요, 응, 멋있어요. 한입에 잡아먹혀도 행복사(?)할 지 몰라요!!
>>671 (진짜 별님이 될 수도 있다. 여자의 말은 인어의 가슴을 술렁이게 했다. 진짜 별님. 인어만의 별님... 어수선하지만 싫지는 않은 이 기분은 무어라고 부를까.) ...에, 아, 으... (인어의 상처를 발견한 여자가 걱정스럽게 말하며 얼굴이 어두워지자 인어는 어쩔 줄 몰라 했다. 위험하지 않은데 여자의 표정이 좋지 않아 기분이 어지럽다. 여자가 저런 표정을 짓게 하고 싶지 않은데,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그래서 순순히 목걸이를 받은 것도 있다. 여자가 목걸이를 가지고 있어서 그 탓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으면 해서. 여자도 약속을 되내이면 인어는 작게 끄덕였다.) ...으음... (목걸이를 받고 한 번 잠겼다가 다시 올라온 인어는 여자가 인어를 바라보자 슬며시 시선을 피했다. 하고 싶은 말이 있느냐 물었을 땐 다시 바라보며 아까처럼 기포를 보글보글 올렸다. 여자가 상체를 기울이자 위험하지 않은데도 눈동자가 살짝 커지더니, 더 나올까 싶었는지 미끄러지듯 물살을 가르고 바위로 돌아온다. 이번엔 주저없이 몸을 내밀어 바위 아래 걸터앉아, 여자를 바라보았다. 이제 소년이 아닌 성인의, 중저음의 감미로운 목소리가 여자에게 들린다.) 좋아. 물어보는 거. 대답, 해줄게. 그러니까, 더 나오지 마. (달빛 아래 드러난 인어의 모습은 완연한 성체였다. 소년의 가녀린 선은 온데간데 없고 다부지고 듬직한 상체와 비늘이 아름답게 반짝이는 하반신이 바위를 스치는 물살 사이로 보이다말다 한다. 긴 머리카락은 좀더 진하고 푸른 색이 된 걸 빼면 다를게 없지만, 깔끔한 턱선과 매끄럽게 솟은 콧대, 가늘은 눈매지만 사납지 않은 시선 등의 얼굴은 잘 만든 조각 같다. 성인의 모습이 된 인어는 여자를 바라보다가 웃는 것처럼 눈매를 살짝 휘었다.) 뭐가, 궁금해? 붉은 별님아. (기분 탓일까. 인어가 말할 때마다 물살조차 숨을 죽이는 듯 하다.)
"이제와서 사과할 필요는 없단다. 두려움의 대상보다는 훨씬 낫지 않니. 나는 그런 당돌함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한단다. 상대가 누구라도 할 말을 하는 것이 나쁜 것은 아니지 않니. 물론 장소와 때는 가려야할지도 모르지만 눈치를 보고 비굴하게 나서는 이보다는 당당하고 할 말은 할 수 있는 용기를 지닌 이가 나는 더 좋다고 생각한단다."
당돌하다는 것이 예의가 없다는 이야기는 아니었으며 건방지다와 동의어도 아니었다. 아니. 물론 드래곤 중에서는 그녀를 상당히 건방지게 생각할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야말로 인간을 얕잡아보는 이가 없는 것은 아니었으니까. 허나 적어도 자신은 인간을 적대하지도 않으며 얍잡아보지도 않았다. 오히려 정말로 가끔 마을로 찾아갔을 때 보는 인간들은 신기한 것이 많았다. 그리고 절대 얕잡아볼 수 있는 존재는 아니었다. 하나는 약할지도 모르나 단체로 모이면 정말로 강하며, 그 지혜는 빈약할지도 모르나 결국엔 자신들을 더욱 강하게 만들며, 위험에도 맞서는 강한 용기를 품은 이도 많았다. 눈앞의 여성도 별 다를바 없지 않은가. 드래곤을 앞에 두고서도 저렇게 말할 수 있는 것이 용기가 아니면 무엇일까.
"가장 가까운 마을에서 여기까지 꼬박 걸어 하루는 걸릴텐데, 갑옷을 입지 않고 오면 네 목숨이 위험하지 않겠니? 몬스터가 잘 없지만, 그래도 아예 없는 것은 아니란다. 그러니까 안전을 중시하렴. 우리 드래곤도 어느 순간, 인간의 손에 죽을 때가 있는데 인간이라고 어디 다를까. 앞일은 아무도 모르는 법이란다."
물론 제 눈에는 저 갑옷이 얼마나 단단한진 모르겠지만 여기저기에 모험을 떠나는 이라면 약한 것을 쓰진 않을테니 적어도 인간 기준으로는 상당히 강하지 않을까 싶어 고개를 끄덕이며 납득했다. 다음에 언제 인간의 마을에 갈 일이 있으면 궁금증을 풀기 위해서라도 비슷한 갑옷이 있으면 하나 구입해봐야겠다고 드래곤은 생각했다. 인간의 형태라면 자신도 입어볼 수 있을테니까. 아무튼 그녀의 이름. 리나 폰 샤로시아레스라는 말과 10좌 중 3좌라는 말이 나오자 드래곤은 가만히 입을 다물고 방금 들은 정보를 생각했다. 10좌 중 3좌. 모험가 중 3번째로 강한 이라는 것인가. 만약 그렇다면 인간 중에서는 꽤 거물이 아닐까 생각하며 드래곤은 말을 이었다.
"폰. 인간의 신분 중 귀족에 속하는 인물이었느냐. 그렇다면 이제 너를 지칭하는 이름을 들었으니 리나..라고 부르면 되겠느냐? 아니면 가을매 린이라는 호칭이 편하더냐? 아무튼 내 이름이라. 보통은 골드 드래곤이라고 불리지만 드래곤들 사이에선 '라인하트'라고 불린단다."
자신의 앞머리카락을 손으로 정리하고 자신의 이름을 소개한 후 개구진 미소를 짓고 있는 그녀를 바라보며 라인하트는 낮은 톤의 웃음소리를 동굴 속에서 조용히 울렸다.
"인간들의 관습. 그 중에서도 귀족의 몸가짐이나 예의는 잘 모르기 때문에 잘 어울릴지는 모르지만 우아하구나. 모험을 떠난 햇수가 적은 것 같지 않은데 몸에 잘 녹아있는 것이 신기하게 느껴지니 나도 예법은 맞춰주고 싶구나. 잘 아는 것은 아니나..."
이내 라인하트는 발을 옮겨 그녀 앞에 섰고 그녀의 오른손을 살며시 쥐려고 했다. 만약 피하지 않았다면 살며시 잡았다가 고개를 살짝 숙이다가 다시 놓아주며 고개를 올렸을 것이다. 자세히 아는 것은 아닌 조금은 어설픈 몸동작이었다.
"이렇게 하는 것이더냐. 서투르다면 이해해주길 바란다. 우리 드래곤에겐 이런 예법은 없단다."
/여캐야말로 진짜 너무 우아한데. 처음에는 되게 당돌했다가 뭔가 높은 신분이라는 떡밥이 계속 보이긴 했는데 정말로 높은 집안 따님이었구나. 와아.
용의 갑작스러운 칭찬에 몸둘바를 모르겠다는 듯 그녀가 살풋 미소를 머금는다. 평소에도 웃음에는 헤픈 그녀였으나, 지금만큼은 여자다운 미소를 지어보고 있었다. 아마 지금 다른 사람들이 그녀의 모습을 본다면 '쟤가 저런 표정을 짓는다고?', '해가 내일은 한가운데에서 뜨는구나.' 이런 말을 한마디씩 내뱉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그녀는 부드럽고 편안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런 미소와는 정 반대로 타오를정도로 익은 얼굴은 잘 익은 한떨기 장미를 보는 싶을 정도로 빨개진 상황이었다. 그렇게 용의 말에 그녀는 샐쭉 웃으며 장난스럽게 대꾸하였다.
"에헤헤, 걱정해주셔서 감사해요. 하지만 그래도 제 몸 하나 지키지 못할 정도로 약하지 않답니다."
실제로도 그녀는 가문에서 온갖 기예를 배웠다. 검을 겨우 들수 있게된 7살부터 18살까지 그녀는 쉴새 없이 가문의 예법은 물론이요, 온갖 검술을 섭렵해야만 했고, 그 결과 지금의 상황에서도 오만갖 기예를 구사할 정도가 되었다. 그러나 아버지, 아니 가주는 그녀를 그저 한낱 도구로만 취급하였고, 그렇게 그녀는 야밤을 틈타 도주를 감행하였다. 그렇게 5년의 도피 생활을 하면서 모든 신분을 버리는데 성공하고, 찬란한 은빛 머리카락은 아는 마법사의 도움을 받아 연보랏빛으로 염색하였다. 눈동자색만은 어찌 할 수 없었으나, 결국 그녀는 완벽히 자신을 감추는데 성공하고, 샤로시아레스라는 성을 버리고 지금 가을매 린으로 자리잡은 것이었다.
"옛날이에요. 전부 잊고 싶은 과거고요. 지금은 '가을매'나 '린'쪽이 저 답다고 생각하는데 어떠신가요?"
정말로, 그 인간이 자신의 아버지라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진저리가 쳐질 정도였다. '결함품', 가주가 자신을 지칭하는 말, 그렇기에 그녀는 어렸을 시절 10년 동안 단 한번이라도 그가 자신을 다시 봐주길 바랬으나, 그것은 전부 허상이었다. 그렇게 그녀는 자신의 가주와 현실을 버리고 도망쳤고, 가장 자신다운 자신을 찾아 이곳까지 이르게 된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는 순간, 부드러운 미소가 찬찬히 울려퍼져, 그녀의 하늘에 파문을 일게 하였고, 자유로이 날던 매 한마리는 어느 순간 달콤한 모습에 취해 가만히 체공하며 순수하고도 따스한 그 목소리에 몸을 맡긴채 가만히 내려다 보았다. 서투르다고 할 수 없을 정도로 수려하고도 부드러운 자태에 그녀가 살짝 탄성을 내지른다. 그 어떤 복장과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수수한 모습이었지만, 기품이라는 것은 복장으로부터 나오는 것이 아님을 보여주는 듯한, 가장 교과서적이고도 그 누구에게도 비견할 수 없을 그 자태에 여인은 한순간이나마 예전 자신의 영애 시절 모습으로 돌아간 듯한 착각에 손으로 가볍게 미소를 머금으며 입을 열었다.
"그것이 서투른 것이라면 제가 여지껏 봐온 그들의 행태는 그저 어린아이 소꿉장난이랍니다. 너무나도 멋있었어요."
잠시간 호칭을 정해야 한다는 듯이 아주 잠깐 동안 그녀의 말이 멎는다. 하지만 이내 장난기가 돈 것일까? 그녀는 개구쟁이 같은 미소를 지으면서 천천히 고개를 숙여 입을 열었다.
"정말로 훌륭했다고요? Your majesty(나의 군주시여)."
진심이 담긴 호칭이었다. 아주 잠깐이지만 그녀는 그 긴세월을 지낸 용의 모습에서 군주의 상을 비춰보고야 말았고, 그 마음이 투영된 호칭이 바로 그것이었다.
"라인하르트.... 절대로 잊지 못할 이름이네요. 이름엔 강한 힘이 있다고들 하는데, 위대하신 분에게 어울리는 이름이라고 생각해요. 강인하고도 의지가 될 듯한 이름, 혹시 같은 동족들에게 상담같은거 많이 받지 않으신가요?"
장난기가 감도는 말이었다.
/나름 공작가 집안 출신이에요!! 다만 전술했다 시피..... 아버지라는 양반이 너무 쓰레기라 도망쳤습니다!! /같이 올린 노래는 진짜 테마곡!! 입니다!!
>>674 (인어가 목걸이를 순순히 받아주면 여자의 얼굴에 안도의 기색이 맴돈다. 이 신비한 목걸이가 저를 지켜주었던 것처럼, 당신도 다시 지켜주길. 하지만 여자는 인어의 바람 중 한 가지만큼은 들어줄 수 없었다. 제 탓이라는 생각을 버리는 것만큼은.) .....아... (한 번의 잠수 후 다시 올라와 바위로 다가온 인어. 그런 인어를 시선에 담은 여자의 눈이 놀람으로 크게 뜨여진다. 바위 아래 다시 몸을 내민 인어의 모습은 더이상 소년이 아니었다. 들려오는 목소리조차 성인 특유의 부드럽게 가라앉은 중저음의 미성이었다. 남성의 다부진 상체와 아름다운 비늘로 둘러싸인 물고기의 하반신. 좀 더 깊어진 바다가 담긴 것 같은 긴 머리카락에, 말 그대로 조각 같은 얼굴. 여자는 순간 생각했다. 인어의 아름다움을 찬양하고, 인어에게 홀려 바다에 스스로 몸을 던지는 사람들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고.) .....저... (정말로 모습이 변화한 인어를 보자, 놀람과 당황스러움, 알 수 없는 부끄러움 등으로 이번에는 처음으로 여자가 시선을 피한다. 가슴이 술렁이고 생각이 어지러워지는 것은 여자도 마찬가지였다. 기분 탓일까. 성인이 된 인어는 성격마저도 조금 바뀐 것 같아서, 여자는 다시 인어를 바라보기 위해 알 수 없는 용기마저 내어야 했다.) ....어느 모습이.. 진짜 당신인 건가요? (묻고 싶은 것은 많았다. 어쩌다 다친 건가요? 그 목걸이는 무엇이었던 건가요? 별을 좋아하나요? 등. 그러나 여자는 무심코 그 질문을 먼저 물어버린다.)
/다행이다! 인어씨와 여캐도 서로 더 알아갔으면 좋겠네 ㅎㅎ 어른이 인어 보고 여캐도 나도 심장 홀려버렸당....... 너참치 묘사도 완벽하게 설레는데 짤 보니 더 설레버렸어! 짤 고마워! /여캐는 외양 아직 못 정했는데, 인어씨가 붉은 별님이라고 불러주는 거 보고 인어씨와 반대로 웨이브가 들어간 긴 붉은 머리칼에 붉은 눈으로 설정 할까 해.
"옛날로 돌려도 전부 잊고 싶어도 과거는 절대로 사라지지 않는단다. 지금 네가 몸에 익히고 있는 그 예법이 여전히 남아있는 것처럼. 그러니까 그 과거를 잊지도 말고 옛날 일로 치부하지 말고 그런 환경이 있었기에 지금의 네가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렴. 물론 이미 그렇게 살고 있을지도 모르니 넘겨도 된단다. 네 가치관이 모든 것을 잊는 것이라면 그것도 좋겠지. 린."
잠시 호칭을 고민했으나 라인하트는 그녀의 이름을 린으로 칭했다. 자신의 말을 어떻게 들어도 별 상관없는 일이었다. 그냥 자신이 하는 말은 약간의 조언이었을 뿐, 그것을 취할지, 버릴지는 오로지 그녀의 자유였으니까. 정말로 끔찍한 과거이고 떠올리고 싶지 않은 일이라면 어쩌면 버리는 것이 나을지도 모를 일이었기에 라인하트는 굳이 더 말을 하지 않았다.
"그럴리가 있겠니. 나도 살면서 들은 지식으로 흉내낸 것에 지나지 않는데 너무 과찬이로구나. 허나 칭찬은 들어서 나쁠 것이 없으니 고맙게 받아들이마."
나의 군주. 그 호칭에 라인하트는 굳이 말을 꺼내진 않았다. 인간의 눈에 자신은 그렇게 보이는가. 자신은 그저 둥지에서 뒹굴거리고 싶은 드래곤일 뿐인데. 자신이 군주라고 불릴 정도의 드래곤인진 모르겠지만 역시 들어서 나쁠 일은 없었다. 그렇게 미소로 화답하며 라인하트는 따라오라는 말을 하며 맨 처음 그녀와 마주했던 손님을 맞이하는 공간으로 향했다.
"너는 듣기 좋은 말만 하는구나. 다른 이를 기분 좋게 하는 재능이 있는 것을 보아 주변 인간들에게 좋은 평을 많이 받았을 것 같구나. 나 말이냐? 상담보다는 같이 놀자고 찾아오는 이는 많단다. 정말로 현명한 동포는 나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이기에 보통 그 분에게 많이 가서 상담을 받고는 하지. 애초에 백여년 정도밖에 살지 못한 나는 드래곤 중에서는 그렇게 나이가 많은 편도 아니란다."
정확히 100년은 아니고 그보다는 조금 길게 살았지만 그럼에도 더 오래 산 드래곤들의 수명에 비하면 비교도 할 수 없었기에 라인하트는 고개를 살며시 저었다.
뒤이어 손님을 맞이하는 공간, 처음 그녀와 마주했던 그 공간에 도착한 라인하트는 뒤돌아서 그녀를 마주하면서 이야기했다.
"아무튼 묵을 장소는 이 공간을 사용하렴. 아까도 말했다시피 인간이 찾아올 것은 예상하지 못했기에 인간이 사용하는 푹신한 천은 없지만 혹시나 필요한 것이 있으면 안쪽에 공간이 있으니 얼마든지 찾아오거라. 그러고 보니 인간은 목욕을 자주 해야 했었지. 아까 물을 마시는 공간에서 조금 더 안으로 들어가면 동굴 안에서 떨어지는 폭포수가 있는데 그곳의 물을 사용하면 될 것 같구나. 혹시 더 필요한 것이 있니?"
/테마곡은 아주 잘 들었어! 좋은 곡인걸? 공작가 집안이면 완전 높잖아! 아버님..대체 어쩌자고 이런 어여쁜 딸을... 아무튼 라인하르트가 아니라 라인하트야. 혹시나 그렇게 착각하지 않을까 싶긴 했지만! 아무튼 슬슬 막레 쪽으로 가는 것이 좋으려나. 물론 좀 더 잇고 싶다면 이어도 괜찮아!
>>679 (성인의 모습으로 나온 인어는 여자가 놀라거나 시선을 피해도 담담했다. 완전히 차분한 건 아니고 머리를 살짝 기울이며 여자가 피한 시선을 맞추려 하거나 눈을 깜빡일 때마다 눈웃음을 짓는 것처럼 눈매가 호선으로 접혔다. 이제는 검푸른 눈동자가 부드러운 시선으로 여자를 응시한다. 물살도 조용조용 오가는 와중, 여자가 다시 인어를 보자 인어의 눈매가 조금 더 휘었다. 비스듬히 기울인 머리 탓에 물방울 하나가 턱 끝에서 똑.. 떨어졌다.) 진짜, 나? 어느 모습이? (인어는 여자의 물음을 확인하듯이 중얼거렸다. 어느 모습이 진짜인가. 인어는 바다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가 천천히 되돌아와 다시 여자를 바라보았다. 무슨 생각을 했는지 알 수 없지만, 대답은 곧 나왔다.) 어느 모습도, 다 나야. 붉은 별님아. 너를 구해준 나도. 너를 기다린 작은 나도. 지금도. (여자를 만나기 전까지 줄곧 고독했던 인어도. 전부 인어이며 인어였다. 인어는 몸을 기울여 여자가 앉은 가까이에 엎드려 기대었다. 나른한 듯 안심한 듯 늘어져 줄곧 시선은 여자에게 두고서, 특튜의 미성을 여자에게 들려주었다.) 궁금한 건, 그것 뿐? 다른 거, 얼마든지 물어도 돼. 붉은 별님아. (인어의 시선이 여자의 붉은 머리칼을 따라 도르륵 구르고, 다시 여자의 붉은 눈에 촛점을 맞추었다. 지그시.)
/ㅎㅎㅎ 여캐도 여캐주도 반응이 너무 좋다~~ 즉흥으로 생각난게 많은데 마음에 들어해서 다행이야! 눈동자만으로 붉은 별님이라 한 건데 머리색도 맞춰주는거 너무 센스있구! 즐겁다!
/사실 억지 설정이 조금 있는거 같은데..... 그래도 만족하셔서 다행이에요! 여담으로 아빠라는 인물이 진짜 상상할 수 있는 최악의 쓰레기라.... 괜히 그런 양반 밑에서 컸다는 거 자체를 수치스러워 하는게 아니랍니다 헿 /왈가닥 여 모험가라는 설정에 귀족 영애라는 반칙 설정을 섞었으니 치트키급 캐릭터가....!!
>>684 그건 확실히 느껴진 것 같아. 진짜 아빠를 싫어한다는 묘사가 계속 나오기도 했고 말이야. 억지 설정이라고 느껴질만한 것은 없었던 것 같은데. 애초에 1:1 상황극인데 그렇게까지 깐깐하게 봐야 할 것은 없다고 생각하기도 해서! 아무튼 여기서 계속 잡담을 하는 것은 다른 이들에게도 피해가 될 것 같네. 우선 여캐주는 이 이야기를 계속 이어가고 싶어? 아니면 내일 막레로 끝내는 것을 원해?
>>686 하루에 1~2레스씩 이어가는 거야 크게 어려울 것은 없으니까 괜찮아. 음. 원래는 그냥 드래곤이 인간과 만나서 이야기 나누는 것을 생각하고 썼기 때문에 별로 일댈 생각은 없긴 했는데 생각보다 엄청 매력적인 캐릭터와 만나게 되어서 조금 더 이야기를 즐겨보고 싶기도 해. 물론 연애나 그런 쪽은 아무래도 캐입으로 하는 것이기 때문에 확정을 짓긴 힘들긴 하지만 그래도 괜찮다면 일단 여기서의 상황극이 끝나면 일댈에 가서 이야기 나눠볼래? 물론 여캐주가 괜찮다고 한다면!
>>683 (성인이 된 인어의 눈동자는 깊은 심해를 닮았다. 그 눈을 바라보고 있으면 빨려들어가버릴 것만 같아서, 그리고 인어는 더이상 여자의 눈을 피하지 않아서, 시선을 피하게 된 건 이제 반대로 여자였다. 용기내어 다시 마주본 인어는 눈웃음마저 짓는 것 같아, 여자의 가슴은 더 술렁여버린다.) 네. 어느 모습이 진짜 당신인 건가요? (여자는 혼란을 품고 한번 더 같은 물음을 전한다. 생각보다 길지 않은 기다림 끝에 인어의 대답이 나온다.) ....모두가 당신이군요. (겉모습이 달라져도, 목소리가 달라져도, 성격이 달라져도, 그 모든 것들은 모두 다 인어. 여자는 이해하기 어려웠지만,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여자에게 전해지는 인어의 선한 마음만큼은 변화 없이 그대로였으니까.) .....저.... (그러나 역시 지금의 인어는 죽음에도 덤덤하던 여자의 가슴과 머리를 어지럽혔다. 처음 만났을 때처럼 겁 먹은 모습은 간 데 없이 가까이 엎드려 기대는 인어는 정말로 홀리는 것처럼 아름다웠고, 그 목소리마저도 달콤한 속삭임처럼 들려와 거역하기도 어렵게 만들었다. 여자는 지그시 바라보는 인어의 시선을 마주보다 못해 시선을 내린다.) ..어쩌다 다친 건가요? 그 목걸이는 무엇이었던 건가요? 그리고.... (여자는 말을 멈추고 숨을 고른다.) ....예전에도 바다에 빠진 사람을 구해준 적이 있나요? (무심코 또 다른 물음이 나온다.)
/ㅎㅎㅎ 인어씨도 인어주도 매력적으로 이어줘서 그래~~ 즉흥이라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너무 마음에 들어! 바다에 빠지면 눈동자도 눈동자지만 머리카락이 제일 눈에 들어올 것 같아서~~ 고마워! 인어주도 좋아하고 즐거워해줘서 다행이야!
>>688 (모두가 인어. 모든 모습이 인어라는 추상적인 대답을 여자가 읊조리자 인어는 그렇다는 듯이 끄덕였다. 인어로서는 그 대답이 가장 이상적이었다. 본질만 같다면 외모는 어떻게 바뀌어도 달라지지 않는다. 단지 약해지고, 그만큼 살아남기 힘들 뿐.) 응? (여자의 마음이 얼마나 떨리고 소란스러운지 인어는 알지 못 하니. 시선을 피해도 계속 바라보고 있고, 작은 목소리만 들려도 은백색 갈퀴를 살짝 움직이며 반응한다. 인어는 여자가 말을 꺼낼 때까지 잠자코 기다렸다. 기다림 끝에 질문을 들은 인어는 그게 궁금했던 거냐고 말하듯이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그리고 천천히 대답을 해주었다.) 이 목걸이는, 내 근원. 영혼, 일지도 몰라. 가지고 있으면 다치지도, 위험하지도 않지만. 그렇지 않으면, 나는 점점 약해져. 그래서 다치고, 약해지면 죽을 지도. (인어는 목걸이를 근원 혹은 영혼에 가까운 것이라 했다. 그렇게 중요한 걸 기약 없는 바람을 위해 여자에게 주어버렸던 것이다. 그러나 인어의 목소리는 평온했고 말투도 차분했다. 그 모습은 행여나 여자가 오지 않아 사라졌더라도 아무런 미련도 없을 것처럼 보였다.) 예전, 이면... (대답을 하던 중 여자가 말하는 예전이 언제인지 가늠이 되지 않아 인어는 조금 말끝을 늘였다. 잠시 생각에 잠긴 듯 눈동자가 아래로 향했다. 두어번 깜빡일만큼의 시간이 지나고, 인어는 다시 여자를 바라보았다.) 붉은 별님아. 예전이면, 언제? 잘 모르겠어. (인어는 여자와 사는 시간의 흐름이 달랐다. 어긋난 흐름 사이에 접점이 있는 것이 되려 별난 일인 것이다. 인어는 천천히 눈을 내리 감았다 뜨며, 여자의 말을 기다렸다. 다른 질문 혹은 다른 말을.)
/오오 여캐주 싱크빅이 남달라! 인어씨 이만큼 진화(?)한 건 여캐의 호응 덕분인것~~ 그나저나 예전에도 그랬던 적이 있냐고 물어보는 건 떡밥 같은데?! 혹시 몰라 대답을 한턴 미뤘다! 인어씨는 몰?루를 시전했다!!
>>689 (인어는 알지 못할 것이다. 본능적으로 사람의 마음을 잡아끄는 당신의 매력을. 성인이 되자 수줍음마저 없어진 것 같은 당신은 귀여웠던 소년 때와는 또 다른 성숙한 매력을 한 층 더 돋보이게 보여주고 있다는 것을. 여자는 시선을 피해도 인어의 시선을 느낄 수 있었고, 갈퀴가 반응하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그러나 그 어느 것도 여자의 마음만큼 소란스럽지는 않았다. 하지만 인어의 대답이 들려오면 소란은 잠재워지고, 여자는 인어를 바라본다.) 그거, 당신의 근원, 영혼이었어요..? (놀라서 크게 뜨여진 눈. 생각보다도 더 중요한 발언에, 여자는 다급히 몸을 기울여 인어에게로 얼굴을 바짝 가까이 하고서 말을 잇는다.) 그렇게 중요한 걸 저에게 주면 어떡해요! 다시는 아무에게도 주지 말고, 오로지 당신이 가지고 있으세요! (여자의 목소리가 당신에 대한 걱정 때문에 처음으로 커진다. 여자의 표정도 화남, 슬픔, 걱정 등으로 얼룩진다. 역시 돌려주는 것이 조금만 더 늦었으면 큰일날 뻔 했다고, 인어가 다친 것은 저 때문이라고, 여자의 자책감이 여자에게 속삭인다. 여자는 가까워졌던 얼굴을 다시 뒤로 물린다.) ........잘 모르는군요. (인어의 대답을 말 없이 기다리던 여자는 덤덤하게 반응한다. 여자의 입술이 살짝 벌어져 물음을 더 자아내려다, 다시 닫히며 그만둔다. 여자는 인어를 바라보던 시선을 돌려 밤의 바다를 응시한다. 여자의 얼굴에 드리워진 어둠은 밤이기 때문일까, 아니면. 잠시 바다를 보던 여자의 시선이 다시 느리게 인어에게로 향한다.) .....별, 좋아해요? (여자는 대신 다른 질문을 한다.) 당신의 눈에는 인간들이 별로 보이나요? (인어인 당신이 바라보는 세상은 어떤 모습일까요. 붉은 별님이 된 여자는 다시 옅게 웃어본다.)
>>690 (그저 사실대로 대답했을 뿐인데, 여자가 몸을 숙여 얼굴을 가까이 할 정도로 놀라자 인어의 눈도 덩달아 커진다. 깜빡이는 것도 잠시 잊은 인어의 눈이 가까이 온 여자의 붉은 눈을 거의 제로 거리에서 마주한다. 심해를 닮은 인어의 눈동자는 곧 스르르 접히는 눈매에 가려 반달 모양이 되었다.) 그래도, 네가 달라면 줄 수 있어. 붉은 별님에게라면. (인어의 대답이 여자의 마음을 얼마나 애태우는지도 모르는지. 순진하게, 순수하게 인어는 말했다. 그리고 다시 돌아가는 여자를 가만히 바라본다.) ...? (인어는 여자가 더 할 말이 있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왠지 말하고 싶지 않아보인다. 물어볼까. 말까. 고민하는 사이, 여자는 새로운 질문을 인어에게 주었다. 아, 별. 그건 한치의 고민도 없이 대답할 수 있었다.) 응. 별 좋아. 반짝반짝하고, 예쁘고, 늘 하늘에 있어. 보이지 않아도, 알아. (인어는 여자의 물음에 답을 하며 바다를 잠시 보았다. 오늘 밤은 하늘이 흐려 수면이 잔잔한데도 별이 거의 비치지 않는다. 그래서일까. 여자의 얼굴도 어두워보인다. 어느샌가 여자의 얼굴을 바라보던 인어는 머리를 기웃 했다.) 아니. 너 뿐이야. 붉은 별님아. 다른 인간은, 잘 몰라. 하지만 별은 너 뿐이야. 그건 알아. (인어는 엎드려있던 상체를 천천히 일으켰다. 일어나 손을 들어 여자의 얼굴에 가까이 하려다가, 중간에 멈추고 내려 여자의 손 위를 살짝 건드리려 했다. 손끝으로만 아주 약하게 토닥이듯이. 조심스러운 손짓만큼 인어의 목소리도 다정했다.) 붉은 별님아. 그런 얼굴, 하지 말아. 이걸 네게 준 것도, 너를 기다린 것도, 다 내가, 원한거야. 별님은, 잘못 없어. 괜찮아. (인어를 바라보면, 살며시 휘어진 검푸른 눈이 선한 시선을 보내온다. 괜찮다고 다시금 말해주는 것처럼.)
/무려 이로치 진화(?)일지도?! ㅋㅋㅋㅋ 아앗 답을 회피하다니! 하지만 인어씨 다시 캐물을만큼 똑똑하지 않은 걸! 몽총한 걸! 별님이랑 있어서 마냥 좋을 뿐인 걸! 이렇게 되면 좀더 강력한 미인계를!!!
>>691 ..그러니까, 그러면 안된다니까요.. (여자는 하고 싶은 말을 넘기고 한숨 비슷한 말을 읊조린다. 그 목걸이는 당신의 근원, 영혼. 그것이 없으면 점점 약해져 죽을지도 모른다면서, 왜 당신은 그것을 저에게 주려 하시나요. 여자는 절대로 그것을 달라고 말하지 않을 것이다. 이 순진하고 순수하고 아무것도 모르는 인어를 죽일 수는 없다. 심해 같은 인어의 눈을 얼굴이 닿을 듯 마주하던 여자의 눈이 복잡한 마음을 내보이다가 느리게 뒤로 물러난다. 여자는 인어가 목걸이를 감아주었던 손목을 만져본다.) 맞아요. 별은 예쁘죠. 역시 당신은 별을 좋아하는군요. (그런데도 그런 예쁜 별의 호칭을 정말로 제가 들어도 되는 걸까요. 여자는 옅게 웃어본다. 하지만 오늘은 보름달만이 밝을 뿐, 흐린 하늘 때문에 별은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일까. 여자의 얼굴은 달빛이 닿지 않는 곳에서 잠시 어둠이 드리웠다 사라진다.) ....... (인어는 천천히 상체를 일으킨다. 인어의 손이 얼굴로 다가오다 멈추더니 아래로 내려간다. 여자의 시선이 인어가 손을 움직이는 것에 따라, 살짝 맞닿은 서로의 손에 내려앉는다. 토닥이는 손짓도, 다정한 목소리가 전하는 말도, 시선을 올리면 보이는 선한 눈동자도, 모두 여자의 가슴과 머리를 술렁이게 했다. 여자는 다시 가만히 시선을 내린다. 설사 상처가 나도 상관 없다는 듯 여자의 손이 인어의 손을 조심스레 잡아보려 한다.) ....당신은 왜 이렇게 저에게 다정한가요? 어떤 인어들은 인간을 무서워하거나 증오하기도 한다던데요. (대답 대신 여자의 질문이 이어진다. 혹시 일부러 저를 홀리려는 건가요? 여자는 묻고 싶었다. 하지만 저를 홀려도 저는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어서 당신에게 득 될 것이 없는 걸요. 여자는 인어의 선한 호의가 고마우면서도, 어지러운 마음이었다. 저는 당신에게 아무것도 해준 것이 없는데. 차라리 당신도 처음부터 저에게 이렇게 다정하지 않았다면, 저도 이렇게 흔들리지 않았을까요.)
/무려 이로치 진화(?)! 역시 목걸이를 돌려주는 것이 답이었나! ㅋㅋㅋㅋㅋ 몽총해도 별님이랑 있어서 마냥 좋아하는 인어씨는 귀여우니까 괜찮아~~ 이미 홀려지고 있는데 좀더 강력한 미인계라니! 여캐도 여캐주도 심장 흔들려!!!
>>693 (여자가 그러면 안 된다고 해도, 인어는 정말 달라고만 하면 줄 것이다. 목걸이가 없으면 반영생을 사는 인어도 죽어버리지만 여자에게라면 주어도 좋다. 비록 육신은 없어져도 근원은, 영혼은 여자의 곁에 남을 테니까. 그렇지만그런 것을 생각하고 있다기엔 인어의 표정이 너무 순수했을 것이다.) 응. 별 좋아. 그리고 너도 좋아. (좋다는 말을 아무렇지 않게 꺼내는 인어가 여자에겐 어떻게 비췄을까. 성인의 모습이 되었지만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이 여자를 바라보며 다정한 말들을 건네는 인어가 어떻게 보였을까. 인어는 여자가 손을 잡으려 하자 움찔 했지만, 곧 뾰족한 손톱을 감추듯 손을 오므렸다. 소년일 때처럼 거칠진 않지만 단단하고 차가운 손이 여자의 손에 가만히 잡혀졌다.) ...잘, 모르겠어. (손을 내어준 인어는 잠시 생각한 끝에 대답했다. 잘 모르겠다고.) 인간은 무서워. 미워. 좋아하지 않아. 하지만 너는 달라. 붉은 별님아. 너는, 별님 같아. 별님이었으면, 좋겠어. (여자를 별님이라 부르지만, 별님이 아닌 건 인어도 인지하고 있었다. 여자는 인간이다. 때때로 동족들을 위협하며 아프고 무서운 것들로 동족들을 잡아가는, 죽이는, 그 인간이다. 하지만 여자는 바다에 떨어졌었고, 목걸이를 다시 주기 위해 와 주었다. 그것 만으로도 충분했다. 인어에게는.) 예쁜, 붉은 별님아. (인어가 여자를 바라보며 물었다.) 너는 왜, 목걸이를 가지지 않았어? 왜, 다시 주려고 왔어? (인어의 시선은 여전히 다정했다. 무슨 대답을 해도 받아들여줄 것처럼.)
/여캐주 귀여워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미인계는 쓰다보니 이건 아닌거 같아서 대신 왜? 를 시전했다!
"알아요. 그렇기에 어차피 살아 가는 거 즐기면서 살아가는거겠죠. 저도, 다른 사람들도."
그녀가 대수롭지 않게 말한다. 안에있는 아버지라는 존재에 대한 증오는 사그라들지 않지만, 그렇다고 그것을 표출해내지는 않는다. 그것은 오직 자신이 안고 가야할 짐이었으니까, 그 짐을 다른 이들에게 굳이 알릴 필요는 없으니까. 그리고 그 짐이 무겁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이미 10년이나 지나지 않았는가. 그 직후의 문제들은 전부 그녀에게 있어서 크게 문제되지 않았고 10년간 돌아다니면서 사귄 인연들은 그 짐의 무게를 잊을만큼 너무나도 소중하고 찬란한 것들이었으니까.
"그렇기에 과거는 부정하지만, 버리고 싶지는 않아요. 어쩌면 괜히, 버리고서 후회할 바에야 끝까지 안고 가야하지 않겠어요?"
그렇게 그녀는 깊은 호수같은 눈동자를 응시하며 가볍게 웃었다. 어쩌면 당신에게 있어서 나는 그저 스쳐지나가는 바람일지도 몰라요, 하지만 그래도 지금 이 한순간 만큼은, 지금 이렇게 둘이 마주보는 순간 만큼은 그 넓은 호수가 제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기분이 좋아요. 그녀는 그렇게 되뇌였다. 욕심 내지 않는거야, 그에게는 한순간일지 몰라도 그에게 매일 같이 새로운 기억을 남기자, 나라는 바람을 잊지 않도록, 그의 마음속에 깊고 깊게 새겨놓는거야. 그녀는 그렇게 천천히 미소를 지은채 그를 따라 들어갔다. 처음의 그 곳이다. 돌고 돌아 다시 돌아온 이곳은 그녀가 이제 찾은 보금자리였다. 많은 것이 필요했다. 모포부터 접이식 침대, 각종 편의성 가재도구들과 필요하다면 조립식 옷장에 각종 여벌 옷까지, 앞으로 어디를 다녀오건간에 더이상 그녀가 돌아갈 곳은 길드나 주점, 여관이 아닌, 바로 이 장소라고 생각하며 그녀는 하나도 빠트리지 않고 머릿속으로 그림을 그려가기 시작했다.
"아뇨, 넘치게 충분해요. 제가 씻느라 물을 더럽히는 건 조금만 용서 해주세요."
가볍게 눈을 찡긋이면서 개구진 미소를 지어보인다. 그와 자신의 미적감각은 다르겠지만, 만에하나 그가 자신의 씻는 장면을 본다면.... 오, 그것도 괜찮을지도, 라고 가볍게 중얼거리는 그녀였다. 무슨 상상을 한 것인지는 아마 그녀만이 알겠지. 그 순간이었다, 자신만 이렇게 부끄러운 상상에 부끄러워 하는데, 상대방은 전혀 그런 기색조차 보이지 않는다. 갑자기 심술이 샘솟은것인지는 몰라도 그녀가 에메랄드빛 눈동자로 가만히 자신의 군주를 올려다 본다.
"에잇." -쪽
순식간에 부드러운 감촉이 그녀의 입술에 닿는다. 아주 잠깐사이에 그가 방심한 틈을 타 볼에다가 가벼운 버드키스를 남긴 그녀는 히쭉 웃은채 손가락으로 브이를 그리며 혀를 빼어 물며 순식간에 거리를 벌렸다.
"헤헤, 저만 부끄러울수는 없다고요! 그럼, 저는 제 짐을 가지러 다녀오겠습니다!! 앞으로는 계속 여기 있을꺼니까, 3일이란 약속은 파기하는걸로!!"
그렇게 그녀가 출구를 향해 달려나간다. 마치 처음과 마찬가지로 상쾌한 바람과 청아한 내음을 남긴채 그녀는 자신의 보금자리로 돌아오기 위해 다리에 힘을 주었다.
>>695 막레 아주 잘 받았어! 마지막까지 정말로 귀엽구나! 그리고 어제 그렇게 이야기를 하긴 했지만 여캐주에겐 조금 미안하지만... 오늘 회사에서 일을 하면서 이런저런 일상거리를 생각해보려고 했는데 뭔가 뭔가 그다지 떠오르는 것이 없더라. 흑흑. 진짜 캐릭터가 너무 귀여워서 조금 더 이야기를 해보고 싶었는데 막상 이후의 이야기를 떠올리려고 해도 일상 소재가 그렇게 막 떠오르지 않는 것을 보면 시작을 해도 뭔가 좋게 가진 못할 것 같다는 예감이 들어서.. 물론 여캐주의 여캐가 매력이 없다는 것은 아니야. 진짜 너무 귀여워서 지금도 고민에 고민을 하다가 이렇게 레스를 쓰는 중..이야. 정말로 미안하다는 말을 전하고... 그래도 아마 저 이후에 좀 더 시간이 흐르면 라인하트는 린에게 결국 함락되지 않았을까 생각이 드네. 원래 작은 바람이 스며들면 순식간에 물들어버린다고 하니 말이야. 그래서 아마 영생은 아니어도 정말로 오래 살 수 있도록, 하지만 그 대신 자신에게 영혼의 한조각까지도 속하게 되는 그런 계약을 제안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드네. 드래곤식 결혼법? 대충 그런 느낌?
아무튼 어제 일댈을 얘기했지만 이렇게 얘기해서 다시 한 번 미안하다는 말 전해. 흑흑. 그래도 돌리면서 린 너무 귀여웠다..미련 뚝뚝 떨어지네..
/현실에 치이는 것도 결국 비슷하네요 :) 괜찮아요!! 그럴수 있어요!! /결혼이라니 린이라면 눈물 펑펑 쏟으면서 기뻐할 지도 몰라요! 한평생 독신으로 살다가 가려고 했는데 순식간에 가족계획에 얘이름까지 상상했을지도요!! /다시 한번 괜찮다고 말씀드릴께요!! 그만큼 요 몇일간 돌리면서 린은 행복했을테고 말씀하신대로라면 또 행복하게, 또 자기 아빠랑 결국 결자해지를 했을테니까 경사에 겹경사엮겠죠!! 고마워요!! 몇일간이나마 재밌게 돌리고 가요!! 다음번에 만난다면 다른 모습 다른 캐릭으로 만나는걸로 해요!! ;)
>>697 이해해줘서 고마워! 린이 기뻐하는 모습이 절로 머릿속으로 떠오르네. 아마 그때부터는 라인하트도 용의 모습으로 지내기보다는 인간의 모습으로 아예 고정해서 지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들어. 가족계획에 애 이름까지라니. ㅋㅋㅋㅋㅋ 진짜 너무 귀엽다. 린..으앙. 아무튼 나 역시도 돌리면서 정말로 재밌었어. 만약에 또 어딘가에서 볼 수 있다면 그땐 다른 캐릭터와 다른 이름으로 보자! 하루 잘 보내!!
>>694 (인어는 너무 순수해 보였다. 보여지는 모습은 성인인데도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 아이처럼. 좋다는 말조차 아무렇지 않게 꺼내버리는 인어를 담던 여자의 눈동자가 움찔 떨리다 슬며시 아래로 내려간다.) ....그런 말도 그렇게 쉽게 하면 안되는 거예요. (한숨처럼 읊조리던 여자는 생각했다. 이것은 홀려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고. 당신은 의도하지 않았겠지만. 그래도 인어인 당신은 타고난 매력을 흘리고 있었고, 그 어떤 인간이 오더라도 다정하고 아름다운 당신을 좋아하게 되어버릴 거라고. 어지러운 생각을 정리하자, 약간 상기되었던 여자의 얼굴이 다시 원래의 색을 되찾는다.) ....... (오므려진 인어의 손을 가만히 잡는다. 부드럽고 따스한 여자의 손과, 단단하고 차가운 인어의 손. 여자를 구해주었던 손. 맞닿은 손을 내려다 보던 여자의 붉은 눈이 천천히 인어에게로 올라온다. 인어가 붉은 별님을 불렀기에. 이제 인어가 질문하고 여자가 답할 차례였다.) 그건, 제 것이 아니었으니까요. (여자는 다정한 인어의 시선을 받으며 대답한다.) 그때 바닷속에서 보았던 당신을 잊을 수가 없었으니까요. 그리고 그 목걸이는 마치 지켜주려고 하는 것 같아서.. 원래의 주인에게 꼭 돌려주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인어가 미워하는 인간들이었다면 목걸이를 얻은 순간 비싼 값에 팔아넘기거나 더 많은 목걸이들을 빼앗으려 혈안이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인어는 알고 있을까. 여자도 인간이지만, 그런 인간들을 싫어한다는 것을. 인어가 바라는 예쁜 별님이 될 수 있을지의 여부는 자신할 수 없지만. 여자의 손 끝이 인어의 손등을 느리게 쓸어내려주다 서서히 멀어진다.) 당신에게 돌려줄 수 있어서 정말 다행이에요. (붉은 눈이 휘어지며 선명한 웃음을 인어에게 처음으로 보인다. 인어가 보아왔던 별님처럼, 어둠 속에서 반짝이는 예쁜 미소를.)
>>699 (좋다는 말도 쉽게 하면 안 된다고 여자가 말하자 인어는 모르겠다는 듯이 머리를 기울인다. 좋아서 좋다고 말한건데. 왜 쉽게 하면 안 되는 걸까. 잘 모르겠다. 여자의 말은 어렵지만 그래도 좋다. 한결같은 인어의 푸른 눈동자가 천천히 깜빡였다.) 따뜻해. (여자의 손이 인어의 손을 감싸자 오므려진 손이 살짝 풀어졌다. 차가운 인어의 손에 비하면 여자의 손은 정말 따뜻했다. 따뜻하고, 부드럽다. 예쁜 별님은 손도 예쁘다. 인어의 손이 덜 차갑고 딱딱하지 않았으면 저 손을 꼬옥 잡을 수 있었을까. 같은, 인간의 손이었다면.) 응. 그래도 내가, 별님에게 준 거니까, 가졌어도 좋았을 거야. (인어는 왜, 라는 물음에 여자가 해준 답을 들었다. 그리고 다시금 말했다. 여자가 돌려주지 않았어도, 그대로 가졌어도 좋았을 거라고. 인어는 여자의 손이 물러나는 걸 보고, 인어를 향해 지어주는 예쁜 미소를 바라보았다. 어스름한 달빛 속에서도 살며시 빛을 내는 듯한 미소는 인어도 같이 웃게 만들었다. 눈이 가늘어지도록 접히고, 입술 역시 고운 호선이 그려지며 마주 방긋 웃는다.) 별님, 웃으니까 더 예뻐. 반짝반짝, 빛나. (인어는 조심스레 손을 움직여 여자의 손을 감싸쥐었다. 그리고 또 조심히 들어 손만을 가까이 가져온다. 잠시 여자의 손을 바라보다가, 머리를 숙여 손등에 이마를 댄다. 차갑지만 매끈한 머리칼이 살짝 닿고 떨어지면 다른 감촉이 닿는다. 인어의 푸르스름한 입술이 여자의 손등을 스치며 지나가고, 시선을 든 인어는 여자를 바라보며 다시 웃었다.) 나도, 별님이 별님이라서, 다행이야. (인간이지만 별님이라서. 예쁜 웃음을 보여줘서. 정말 다행이라고, 인어는 생각했다.)
/여캐주와 여캐의 협공은 어마어마했다.. 하지만 이대로 당하고만 있을 수는 없으니 반격이다! 가라 댕청인어!
>>700 그러니까, 어떤 인간들은 그런 말을 들으면 더 나쁜 마음을 품고 당신을 맹목적으로 잡아가려고 하거나 해치려고 할 지도 모른다고요. 조심해야 해요. (여자는 어린 아이를 다루는 것처럼 조곤조곤히 설명한다. 광기 어린 사랑은 무서운 거에요. 사랑이라는 말조차도 붙이기 싫지만. 하지만 순수한 인어가 그것을 알고나 있을까.) 뜨겁지는 않나요? 다행이네요. (여자는 옅게 웃는다. 물 속에 사는 당신이니, 제 손이 화상이라도 입힐까봐 걱정했어요. 여자의 손이 살짝 풀어진 인어의 손을 더 부드러이 감싼다.) 그래도 저는 돌려주는 것이 더 좋아요. 당신이 다치거나, 죽거나 하지 않았으면 해요. (여자의 목소리는 나긋하게 속삭였고, 여자의 손은 천천히 물러난다. 처음으로 서로를 향한 웃음이 어스름한 달빛 아래서 빛난다.) .....네? (그러나 인어의 다정한 말과 행동은 다시 여자의 가슴이 소란스러워지게 만들어 버린다. 조심스레 감싸 잡혀 인어에게로 향하는 손. 이윽고 손등에 인어의 머리칼이 닿고 푸르스름한 입술이 닿으면, 여자의 눈이 크게 뜨여진다.) 아... 저.... (다시 상기된 얼굴. 여자는 처음 인어가 그랬듯, 부끄러워 하는 소녀처럼 시선을 피한다.) ....인어는, 원래 다 그러나요? 저는 아직 당신 말고는 다른 인어를 본 적이 없어서 잘 모르지만, 인간들 사이에서는 그렇게 좋아한다고 말한다던가, 손등에 입을 맞춘다던가 하는 것은 정말로 소중한 사람.. 그러니까, 연인처럼 서로 사랑하는 사람들끼리 하는 거라고요. (한참을 쉽게 말을 자아내지 못하던 여자는 한숨을 섞으며 설명해준다. 인어는 별 뜻이 없을텐데도 혼자 홀려지는 것 같은 제 모습이 한심스러웠다.) 그러니까, 아무에게나 그러면 안 돼요. (여자는 생각했다. 당신이 저를 특별하게 여겨주는 것 같은 이 착각에 익숙해지면 안된다고.)
/인어주와 인어씨의 반격으로 여캐주와 여캐는 KO패 되었다.. 여캐도 반격하고 싶지만 여캐는 인어씨처럼 순수하지 못해 그건 아닌 것 같아서, 대신 인어씨의 이해를 돕기 위한 설명을 시전했다! 가라!
>>701 (인어는 여자의 설명을 완전히 이해하지는 못 했지만, 그래도 여자가 인어를 걱정해준다는 것과 '나쁜 인간'이 인어에게 아픈 짓을 할 수도 있다는 건 알아들었다. 좋아하는데 어째서 나쁜 짓을 하는 걸까. 여자가 하는 말보다 더, 인간은 어렵다. 인어의 가지런한 눈썹이 살짝 쳐졌지만, 금방 원래대로 돌아온다. 뜨겁지 않냐는 물음에 도리도리 고갯짓을 한다.) 응. 이제 다치지 않아. 죽지도 않을 거야. (인어가 목걸이를 받았으니 여자의 바람대로 될 거라고 인어는 말했다. 그건 곧 인어와 여자의 시간이 어긋남을 의미하지만. 인어는 잘 몰랐다.) 별님, 얼굴도 별빛이 됐어. 예뻐. (인어의 행동에 붉어진 여자의 얼굴을 보고 붉은 별님의 색이 되었다며, 예쁘다며 웃었다. 웃는 얼굴도 좋지만 빨갛게 반짝반짝하는 얼굴도 예쁘다. 싱긋 웃고있던 인어는 여자가 입을 열자 조용히 그 목소리에 귀기울였다. 소중한 사람, 연인, 사랑하는 사람에게나 해주는 것. 좋아한다는 말도 손등에 입을 맞추는 것도. 멀뚱히 머리만 기울이던 인어는 아무에게나, 라는 말에 얼른 머리를 가로저었다.) 아무한테나 하는 거 아니야. 나, 너 말고 이런 적 없어. 붉은 별님한테만, 보고 있으면 이러고 싶어지니까. 좋아한다고 말도 하고 싶어지니까, 너한테만. (인어는 뜻밖에도 진지한 표정에 진지한 눈빛으로 얘기하더니, 폭탄과도 같은 발언을 참 쉽게도 내놓는다.) 나.. 별님을, 사랑, 하는 걸까? (너무 오랜 시간을 고독하게 지낸 인어는 알 수 없었다. 대답을, 해답을 구하듯 여자를 바라보는 인어의 뒤로, 저 멀리 수평선부터 빛이 떠오른다. 새벽이 옷자락을 거두고 아침이 찾아올 시간이 곧이었다.)
>>702 다행이에요, 정말. 앞으로도 다시는 다치거나 죽으면 안 돼요. (여자의 목소리가 나긋한 속삭임을 전한다. 다치지도 죽지도 않는다는 것은, 이제 정말로 당신과 저는 살아가는 길이 달라졌다는 뜻이겠죠. 여자는 어긋나버린 인어와 여자와의 시간을 어렴풋이 느꼈다. 하지만 말 대신 옅은 미소만을 인어에게 보여준다.) .....보지 마세요. (인어는 순수하게 보이는 그대로를 말했을 뿐일테지만, 여자에게는 그것조차 큰 파동을 일으키는 것이었다. 뒤늦게나마 여자는 고개를 돌려 머리카락으로 상기된 얼굴을 가려버린다.) .......저.. 잠시만요, 당신.... (당신,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건지 알고는 있나요? 여자는 묻지 못했다. 진지한 인어의 표정과 눈빛을 마주한 여자의 붉은 눈이 크게 뜨여지고, 입술은 말을 자아내지 못한다. 여자는 인어의 질문에도 대답을 할 수 없었다. 여자의 마음이 소란스럽다. 심장 소리가 시끄럽다. 당신이, 들어버릴 것만 같아요.) ........ (인어의 뒤로, 아침 해의 빛이 서서히 떠오르기 시작한다. 어둠이 천천히 걷히려 하자 인어의 말대로 별빛처럼 붉게 상기된 여자의 얼굴이 선명히 드러난다.) .....사흘 뒤. (잠시 후, 여자는 대답 대신 다른 말을 꺼낸다.) 그 때까지,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을 서로 생각해보도록 해요. 저희가 다시 만날 때까지. (여자는 인어의 손을 조심스레 들어올린다. 나긋히 말하던 여자의 붉으스름한 입술이 인어의 손등에 살며시 내려앉았다 멀어진다.) .....이제 아침이에요. (이별의 시간. 여자는 마지막으로 한번 더 인어의 손을 따스히 감쌌다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난다.) 다시 만날 때까지, 잘 지내요. 당신. (몸을 기울인 여자는 인어에게 인어가 좋아하던 별님 같은 얼굴로 웃어준다. 아침이 찾아와도 잊혀지지 않을, 인어만의 붉은 별님처럼.)
>>703 (여자가 보지 말라고 하고 고개를 돌려도 인어는 줄곧 바라보았다. 가리지 말고 더 보여줬으면 좋겠는데. 예쁜데. 인어가 움직이면 보일까 싶던 여자의 얼굴은 상기된 채 눈동자를 동그랗게 띄운 모습으로 다시 보였다.) 눈도 반짝반짝해. 예쁘다. 붉은 별님아. (인어는 여자의 표정이, 그 반응이, 인어가 던진 말 때문인 줄도 몰랐다. 그저 예쁘게만 보였다. 예쁜 얼굴에 서서히 비춰오기 시작한 아침 햇살이 조금은 반가울 만큼.) 응. 달이 세 번, 뜨고 지면, 다시 만나자. 다시 얘기하자. (여자는 대답을 보류, 혹은 얼버무렸지만 인어는 다시 만나자는 약속만으로도 좋았다. 알겠다고 대답을 하던 인어에게 여자가 손등에 입 맞추는 모습이 보였다. 짧은 순간이었지만 입술이 닿을 때 조금 뜨거웠다. 하지만 싫지 않다. 인어는 여자가 놓아준 손을 거둬 그 손등에 얼굴을 댔다. 여자의 온기를 오래도록 기억하고 싶어서.) 붉은 별님도, 아프지도 다치지도 말아. 예쁜 별님으로 다시 만나자. (인어는 여자를 바라보며 같이 환한 웃음을 보여주었다. 성큼 다가온 햇살이 인어의 얼굴을 비춰 미소는 더욱 선명해진다. 서로 나중을 기약하고, 인사를 한 후엔, 인어도 바위에서 훌쩍 몸을 내려 물 속으로 잠겼다. 참방이는 작은 물살 아래로 은빛 비늘이 한참을 반짝거렸다. 여자가 바위를 떠나고 해변을 떠날 때까지, 언제까지고 그 자리를 맴돌다가 어느 순간 깊숙한 곳으로 사라졌다. 사흘 뒤를 기약하며.)
야! 너 죽기 전에 연애 고수였다며. 네 조언만 믿으라며! 이게 뭐냐고, 소개팅 나온 사람 표정이 그렇게 겁에 질리는 건 난생 처음 봤다. 경찰에 신고하려던걸 간신히 막았다고. (추천 받아 산 화려한 형형색색의 하와이안 셔츠에 선글라스, 그것으로도 가려지지 않는 흉악한 얼굴로 이미 죽어 영혼만 남은 당신에게 역정을 낸다. 사실 화를 내기보다는 기운이 없어 보이지만.)
>>705 엄밀히 말해서 소개팅 상대가 신고까지 하려 들 정도로 안전감을 못 느낀 걸 내 잘못이라고 하면 안되지. 그 친구가 네가 진짜 마음에 들었으면 아보카도 티셔츠에 호박바지를 입고 있었어도 개의치 않았을 걸? (하늘색 바탕에 흰 꽂무늬가 그려진 하와이안 셔츠에 청반바지를 입은 귀신이 뚱한 얼굴로 대꾸한다.) 애초에 난 내 애인과의 연애는 잘 해냈다고 했지 패션 고수란 소리는 안 했다. 생전에 패션과는 1도 상관 없이 취향껏 입고 살았던 일반인 귀신한테 뭘 바래? 어쨌거나 일 끝났으니 난 그만 성불하련다. 담당 사자 양반이 더 지체되면 못 간다고 난리라고. 그럼 간다. (빨리 오라고 재촉하는 저승사자를 따라 훌훌 간다.)
오랜 전쟁이 드디어 끝을 맺었다. 오랫동안 세계 뒤에서 혼란과 혼돈을 조장하며 그것을 즐기던 사악한 존재가 있었고 그 때문에 세계에 살아가던 수많은 종족들은 교묘하게 유도되어 서로를 미워하고 시기하고 치열하게 싸우며 다른 종족을 서로 멸하려고 했다. 자신들이 멸망할 위험에 놓였을 때, 인간족들은 오랜 전설로 내려오던 의식을 시도했고 그 의식에 따라 다른 세계에서 선택받은 존재를 소환하는데 성공했다. 처음에는 어리둥절해서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한 사내였으나 곧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이고 그는 인간족을 위해서 싸웠다.
처음에는 대립하고 못 잡아먹던 분위기였으나 이세계에서 소환된 사내의 활약으로 점점 그 오해가 풀리면서 싸움은 사그라들었고 마침내 전 종족들은 자신들을 뒤에서 교묘하게 조종하던 사악한 존재를 알게 되었다. 각자의 종족을 대표하는 이들은 자신들의 종족에서 전해지는 시련을 극복하여 그 종족에게 이 세계를 창조한 창조주가 내렸다고 하는 전설의 무기를 손에 넣었고, 그 무기를 이용해 마침내 사악한 존재를 완전히 소멸시킬 수 있었다.
물론 이 이후에 종족간의 싸움이 일어나지 말라는 법은 없었으나 적어도 서로를 멸하기 위한 전쟁이 일어나는 것은 아주 먼 훗날이 될 것이 분명했다. 아니. 어쩌면 아예 일어나지 않을지도 모를 일이었고. 어쨌든 종족이 하나가 되어 길고 긴, 서로를 멸하는 전쟁이 끝나고 평화가 찾아오는 것을 상당히 기뻐했다.
허나 온전히 지금 이 상황을 기뻐하기 힘든 사람도 한 명 있는 법이었다.
'...일단 다 끝난 것 같긴 한데, 돌아가지 못하겠지. 난. 사고에 휘말렸다가 누군가의 목소리를 듣고 여기로 왔고...'
보름달이 뜨는 밤 시간, 축제 소리에서 조금 멀리 떨어진 한적한 담벼락에 사내는 고개를 들어 달을 바라봤다. 하늘에 떠 있는 달은 2개의 원이 겹쳐진 형태였기에 상당히 이질적인 것이었으나 이 세게에 온지 여러해가 지난 사내에게 있어서는 그리 낯선 광경은 아니었다. 허나 그 달의 모습을 볼 때마다 자신이 다른 세계에 왔다는 것을 제대로 깨달을 수 있었다.
'내가 원래 살던 세계는 지금 어떻게 돌아가고 있을까. 난 죽은 것으로 처리 되었을까. ...궁금해지네. 여러모로.'
물론 부모님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사내는 고아였으니까.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에 어떻게든 들어갔고 학비를 모으기 위해 밤새 아르바이트를 하다가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갑자기 차량이 들이닥쳤으니까. 반사적으로 몸을 가리면서 방어자세를 취하다가 갑자기 눈이 번쩍했고 아무 것도 보이지 않다가 무슨 목소리가 들렸고 정신을 차려보니 어두컴컴한 성의 지하실 안이었다. 그 이후에 이 나라의 왕에게 불려가 이런저런 설명을 듣고 뭔가 이런저런 사명을 맡게 되었던가. 자신이 이 세계에 처음 왔을 때를 떠올리며 사내는 쓴 표정을 지었다.
'아무튼 이제 어쩌면 좋으려나. 내가 여기에서 할 수 있는 것도 이젠 없지 않나. 그렇다고 돌아갈 수 있는 수단이 있는 것도 아니고. 뭔가 막막하네.'
/아주 흔한 이세계물로 이세계에 와버린 사내가 자신의 사명을 다 했지만 돌아가지 못하고 이세계에서 달을 보면서 생각에 빠진 그런 상황이야. 어떤 캐릭터로 이어줘도 상관없지만 뜬금없이 전쟁 분위기를 또 만들거나 막 뜬금없이 이상한 것으로 꼽을 주는 맥커터만 아니면 어떻게 이어도 오케이!
목소리가 울려퍼진다. 하지만 용자가 두리번 거려봤자 아마 찾을수는 없을것이다. 그것은 다름아닌 저 위의 상공으로 부터 들려오는 목소리였으니까, 목소리가 점점 가까워져가고 이내 목소리가 점이 되어가며 사내의 시야로 들어온다. 그것은 다름아닌 와이번 라이더, 전쟁 내내 그와 전선이 겹치지는 않았으나, 나름 인족 사이에서 인망이 두터운, 전쟁 후반에는 그의 의견에 동조해서 이야기를 끝맺는데 열심히였던 인물이었다. 각 종족 내에서 와이번 라이더들은 정말 드문 개체들이었다. 그마저도 각종 무기들을 다룰수 있고 전선 주파 능력이 뛰어났던건 인족의 와이번 라이더였던 그녀 뿐이었으니까, 그렇게 순식간에 활강을 하며, 평범하고도 비범한 용기사는 은색 빛의 와이번을 능숙하게 조절해 유려하고도 부드럽게 바람 한점 없는 기세로 와이번을 내려 앉히고는 그대로 지상에 착지, 고생했다는 듯이 냉동보존 마법이 걸린 사슴고기 한덩어리를 와이번의 입에 물린 뒤 가만히 그에게 다가갔다.
"승리의 주역이자 종지부의 쐐기께서 왜 그렇게 죽상이야?"
만난적도 얼마 되지 않았지만 그녀는 마치 오랜 친구를 만난 마냥 기쁘게 그의 등을 토닥이면서 낄낄 웃었다. 물론 그녀도 대강은 짐작하고 있었다. 전선에서 있다보면 온갖 소문이 들렸으니까, 그 중에는 암암리에 용사가, 지금 이 눈앞에 있는 남자가 자기들과 사는 곳이 다른 곳에서 왔다는 이야기도 있었으니까 말이다. 그래도 그녀는 개의치 않았다. 그저 같이 전장에 서서 선봉장을 맡고, 탐색과 보급을 맡았던 같은 전우로서 그저 조금 짐이 무거워 보여서 말을 걸은 것 뿐이니까. 그녀는 천천히 은색 수통을 집어 들었다. 망설이지 않고 수통을 개봉하는 순간 알싸한 알코올 내음과 함께 특유의 기포가 올라온다. 냉장 보존 마법이 걸린 수통에 물 대신 맥주를 집어 넣었다니, 전시라면 백타 걸려서 경을 칠 일이었으나, 이미 그런걸 신경쓸 상황은 멀리 날아간지 오래였다.
"마실래?"
/지역 순찰 중인 와이번 라이더 여기사라는 설정이야!! 종족 대표전에서는 선발되지 않았지만 각 전역에서 소수의 와이번 라이더들을 이끌고 사상자 한명 없이 완벽히 임무를 수행해낸 베테랑중의 베테랑 드라이버라고 보면 되!! 용사하고는 직접적인 안면 인식은 없지만, 소문이나 실제 전장상에서 보고 도중에 용사 소식을 알음알음 접해왔고 이번에는 진짜 우연히 만나게 됐다는 걸로 내용 가닥을 잡았어!
목소리가 난 상공을 바라보자 뭔가가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그것은 와이번. 아니. 정확히는 와이번에 타는 전사, 와이번 라이더의 모습이었다. 물론 딱히 안면이 있는 이는 아니었다. 물론 상당히 실력 좋은 와이번 라이더들이 있었고 그 중에 정말로 실력이 좋은 베테랑 중의 베테랑인 인간인 와이번 라이더가 있다는 것은 사내도 들은 적이 있었기에 대충 어떤 이인지 정도는 알고 있었다. 아름다은 은색 빛의 와이번이 고기를 먹는 모습을 바라보던 사내는 여성을 바라봤다. 자신의 등을 토닥이면서 껄껄 웃으면서 말하는 모습을 바라보며 사내는 쓴 미소를 지었다. 승리의 주역이자 종지부의 쐐기. 자신을 그렇게, 혹은 비슷하게 부르는 이를 꽤 많이 만났지만 역시 익숙하지 않은 호칭이었다.
"그 싸움은 내가 주역이라기보다 모두가 함께 했기에 끝낼 수 있었던 싸움이야. 그러니까 승리의 주역이라고 하면 너도 포함되어야 하지 않을까? 이름은 모르지만... 상당한 엘리트이자 베레탕인 인간 와이번 라이더 씨."
함께 생사를 같이 한 동료는 아니긴 했으나 그럼에도 한 번은 마주하고 싶었던 인물인 것은 사실이었다. 그런 이가 술을 권하고 있었고 그는 그것을 거절하지 않았다. 오늘은 조금 마시고 싶었으니까. 딱히 미성년자도 아니었으니 술을 먹는다고 해도 크게 마음에 찔리는 것이 없었다. 오히려 이곳 술은 이곳 술대로 특유의 향과 맛이 있어서 마음에 들기도 했고.
"괜찮다면 한 잔 받아도 될까? 그것도 그런데 그렇게 죽상이었나? 혼자 조용히 있다보니 나도 모르게 조금 이런저런 생각이 나서 말이야. 너무 못 난 표정이었다면 못 본 척 해줄 수 있을까? 다른 이에게는 비밀로."
딱히 다른 이와 벽을 두고 사는 성격은 아니었으나 아직은 모든 전쟁이 끝이 나고 세계에 평화가 온 것을 기뻐하고 축하할 시기였다. 그렇기에 사내는 자신의 사정은 아주 살짝 미뤄두기로 했다.
"그건 그렇고 너는 여기엔 무슨 일로? 축제 거리와는 조금 떨어진 곳인데."
/설정 잘 읽었어!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일단 사내 쪽에서도 그 여기사의 이야기는 듣지 않았을까 생각이 드네! 물론 딱히 마주친 적은 없지만 그래도 나름 이름이 있고 유명한 여기사인 모양이니 말이야. 그렇기에 사내 쪽에서도 어느 정도 이야기를 들었다는 설정으로 잡아봤어.
금발에 잡티없는 전형적인 고양이 상의 미인이 입가로 씨익 호선을 그린다. 얼음장 같은 외모와는 달리 상당히 털털한 성격을 자랑하며 그녀는 아무렇지도 않게 경장차림 그대로 자리에 털썩 주저 앉아 찬합을 꺼내 술을 따라 건네었다. 조금은 미안한 것인지 그녀는 머쓱한 듯 술이 가득 담긴 찬합을 남자에게 건네며 살짝 떨떠름한 웃음을 그렸다. 뭐랄까, 다른 의미는 없이 잔을 안챙겨왔다는 그런 미안한 표정이 담긴 웃음이었다.
"예로부터 상관이 고생해야 아랫사람들이 편하다고 했어, 오늘 당직 겸 초계 근무 1~2번은 나거든. 최소한의 인원은 빼고 전부 휴식 보냈어. 경사고 오랜 기간동안 싸웠던 아이들이잖아. 좀 쉬어야지."
그렇게 그녀가 아무렇지 않게 상황을 이야기 해준 뒤, 수통에 입을 대고 술을 들이킨다. 과실주도 조금 섞인 탓일까, 맥주의 알싸하고 강렬한 목넘김 뒤로 사과향이 톡 쏘듯 감칠맛을 더해준다. 이런 밤 하늘 분위기에는 최고의 반주가 아닐까, 그녀는 살짝 웃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당장 2년전만 하더라도 정말로 미친듯이 날아다녔다. 그렇게 종족 연합군으로 이뤄져서 편제에 대해 고민하고 또 각종 초계 근무까지 몸을 갈아넣는 업무는 그녀에게 있어서 그저 어제보다 나은 내일을 꿈꾸며 달려나가는, 맹목적인 달리기였다. 때로는 힘들었고 때로는 지쳐 쓰러질 것 같았다. 하지만 그렇게 종족을 넘어서서 자신을 믿은 그들은 결국 모든 것을 포기하고 처음부터 끝까지 재 무장을 하고야 말았고, 그들의 단결력은 전 군의 귀감이 되어서 결국 초창기 제압당했던 제공권을 다시 찾아오는 혁혁한 공을 세움으로서 하늘 길을 열어내었고, 그들의 대장이었던 그녀는 그 공을 부하들에게 전부 돌림으로서, 자신의 이름보다는 부하들의 이름이 빛나게 하여, 군인으로서의 역할을 다해내고 종전인 지금에서도 휘하 장병들의 존경이 되고 있었다.
"처음 만났지만, 너도 참 꽉 막힌거 같아."
동류를 만났다는 듯한 그녀가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그녀가 자신의 가슴을 툭 치며 말했다. 경장 속에 체인메일이 입혀져 있기 때문일까? 살짝 쩔그럭 소리가 가볍게 울려퍼진다.
"막막하지 않냐. 사실 나도 그렇거든, 전쟁 끝나고 이제 뭐해야 하나 싶기도 하고 말이야."
그녀가 살짝 윙크를 보내며 용사, 아니 그저 평범한 사내를 바라보았다. 세간은 단합을 이뤄낸 자, 주역, 등등으로 칭송하기 바빴지만 지금 그녀가 보기에는 그저 남들과 비슷하지만, 그저 조금 더 무거운 짐을 지고 있는 사내일 뿐이었다.
/오히려 받아줘서 고마워!! 사실 엄청난 일이지, 따지자면 대령급이 지금 초계 근무를 읍읍.... /전역 직전의 군인들끼리의 대화는 남녀 상관없이 막막하다 카더라요
그녀가 내민 찬합을 받아들며 사내는 아무런 말 없이 조용히 쭈욱 들이켰다. 역시 자신이 원래 세계에서 먹던 맥주와는 다른 맛과 향이었다. 언제 먹어도 이쪽이 조금 더 취향이라고 생각하며 그는 찬합을 입에서 떼어냈고 입가에 묻어있을 술을 입고 있는 옷 소매로 닦아냈다. 그러다 들려오는 그녀의 말에 사내는 피식 웃으면서 입을 열었다.
"그런데 이렇게 술을 먹어도 되는 거야? 그것도 이렇게 구석진 곳에 와서 말이야. 물론 나도 누군가에게 말하진 않겠지만 조심해. 물론 나라면 적어도 요 며칠 동안은 조금 봐주고 그럴 것 같지만 윗분들 중에서는 묘하게 딱딱한 이들도 있잖아? 여기서도 말이야."
동료들과 길을 떠난 후 있었던 이런저런 일들을 떠올리며 사내는 쓴 웃음소리를 냈다. 상황을 잘 모르면서 무작정 좋은 결과만 가지고 오라고 달달 볶는 왕가의 사람들부터 포함해서 귀족가의 사람들까지. 모두 한때는 참으로 곤란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물론 모든 것이 끝나고 사명을 마친 지금에서는 다 지나간 추억일 뿐이었기에 그는 그저 그런 웃음소리로 넘길 수 있었다.
꽉 막혔다는 그 말에 사내는 무슨 말인가 싶어 그녀를 바라봤다. 이어 들려오는 말은 막막하지 않냐는 물음이었다. 그 말에 사내는 하늘의 달을 바라보며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너 정도라면 여기저기서 불러주지 않을까? 집으로 돌아갈 수도 있고, 다른 일들을 할 수도 있을 것 같은데. 치안을 지키는 기사 일을 계속 할 수도 있을 것 같고. 물론 내 쪽은 확실히 막막하지만 말이야."
다른 세계에서 소환되었고 그야말로 갈 곳 없는 처지였다. 물론 한동안은 영웅이라면서 여기저기서 혜택을 많이 주고 이런저런 특혜를 줄지도 모르나 그게 과연 얼마나 갈까? 시간이 지나면 자연히 그 모든 것이 잊혀지기 마련이었고 자신 역시 그저 갈 곳 없는 떠돌이 신세가 될 것은 불 보듯 뻔하지 않던가.
"고향으로 돌아갈까 싶어도 돌아갈 수도 없거든."
/대령급이 초계 근무라니. 대체 얼마나 솔선수범한 지휘관인거야! 저런 지휘관이 많아져야 하는데 말이야. 물론 사내는 전역 때문에 막막한 것만은 아니지만 비슷한 처지긴 하네.
생각보다 어리다고 생각해서 잘 못 마실줄 알았는데 마시는 폼이 제법이다. 다행히 초계비행이 아직 안끝난 상태라 약한 술로 가져 왔는데 오히려 잘 되었다고 생각하며 그녀도 재차 술을 한모금 들이킨다. 재차 알코올의 씁쓰름함이 다시 한번 사과향에 어우러져 하모니를 이루어내고 그녀는 자기도 모르게 탄성을 내며 웃음을 터트리고는 말했다.
"상관 없어. 어차피 지휘관도 나고, 높으신 분들이 뭐라해도 어차피 너나 나나 공적은 많아서 이정도 땡땡이는 껌이야 껌, 게다가 다들 지금쯤이면 골아떨어졌을텐데, 안 들키면 블랙잭 19번패지 뭐. 게다가 시간 많아. 2번초까지 내 근무고, 어차피 3번초부턴 다시 당직 사령으로 들어간뒤 근무 끝나자 마자 3박 4일 휴가, 완벽한 시나리오지."
그렇게 말하면서 그녀는 하늘을 바라보았다. 그간 본인이 날면서 본 하늘은 검은 구름과 매캐한 연기로 가득찬 전장의 하늘뿐이었다. 모든 일이 끝나고 올려다본 하늘은 이렇게 청아할 수 있을까, 라고 느낄 정도로 아름다웠고, 이 하늘 길을 열어낸게 자신이라고 생각하면 일말의 뿌듯함 마저도 느껴지고 있었다. 그렇게 생각하며 이어지는 용사라고 불리우는 사내의 말에 그녀는 끌끌 웃으면서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가볍게 먼지를 털어낸 다음 천천히 자신의 애룡, 은빛 여왕의 고삐를 잡아채고는 가만히 용사를 바라보았다. 어쩌면 그 또한 답을 찾고 싶다는 생각이 든 것인지, 그녀는 천천히 투구를 다시 쓰며 입을 열었다.
"그럴때, 난 가끔씩 이 아이랑 날았어. 아무리 피곤한 때라도 하늘을 날고 있는 동안에는 많은걸 잊을 수 있으니까, 하지만 오히려 답을 알려 줄때도 많았어. 그러니까...."
물론 칭찬할 행동은 아니라고 생각했으나 굳이 그는 세세하게 더 말을 하진 않았다. 지금은 전쟁이 끝났고 모든 종족들이 하나가 되어 축제를 벌이고 있었다. 당장 위험한 일은 벌어지지 않을테고 하루 정도 눈감아준다고 당장 큰일이 일어나진 않을테니까. 사악한 존재가 온전히 사라져버린 것은 이미 자신의 두 눈으로 확인했었으니 의심할 여지조차 없었다.
한편 이어지는 그녀의 말에 그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물끄러미 그녀를 바라봤다. 단순히 하늘을 날고 있는 것만으로 많은 것을 잊을 수 있다면 좋기야 하겠지만 과연 답을 찾을 수 있을진 알 수 없었다. 자신의 고향으로 돌아가기 위해서는 세계 자체를 넘어가야 하는데 그 방법이 자신이 알기로는 여기에 없었다. 자신이 이곳에 올 때 들려오던 목소리가 또 들려온다면 모를까. 그 날 이후, 그는 단 한 번도 그 목소리를 듣지 못했으니까.
하지만 그와는 별개로 도발하듯이 올라타라고 하는 그 말에 사내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하늘이 무섭냐고? 천만에. 여기에 막 왔을 때라면 모를까. 이 세계에 와서 별별 체험을 다 했었다. 고작 하늘을 날아가는 것이 무서울리가 있을까.
"누가 무섭대? 와이번은 아니어도 하늘을 나는 다른 생명체를 탄 적도 많거든? 좋아. 할 것도 없고 지금은 축제에 끼일 기분은 아니기도 했으니까."
이내 그는 가만히 바라보다 와이번의 뒤에 조심스럽게 올라탔다. 그러고 보니 이거 두 명이 타도 괜찮은건가? 보통은 한 마리당 한 명만 올라타지 않나? 그렇게 생각하며 그는 늦게나마 그녀에게 물었다.
"그런데 이 와이번. 두 명이 타도 괜찮은거야? 물론 와이번이나 되었으니 갑자기 무거워하진 않겠지만..."
은빛 여왕을 걱정해주는 모습에 그녀가 의외의 표정을 지어보인다. 용기사들이 타고 다니는 와이번들은 전부 그 힘이 무지막지 하기로 유명했다. 실제로도 그녀가 꾸린 용기사 편대가 중간 보급로에서 긴급한 최전방 부대까지 모든 장구류를 벗어 경량화 한 직후 2일에 걸쳐서, 한달은 족히 견뎌낼 보급품을 투하하는데까지 성공했으니까. 게다가 은빛 여왕은 그 와이번들 중에서 정점에 속해있었다.현대로 따지자면 최신예 전투기라고 봐도 무방할 정도의 강함을 지닌게 은빛 여왕이었다. 자리를 잡은 용사의 말에 그녀는 아주 잠깐 동안 투구가리개를 벗고 믿음직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나는, 아니 우리는 베테랑이야. 한번 믿어봐."
그녀가 여분 투구를 건넨다. 용기사 투구는 날카로운 곡선형 디자인이었다, 최대한 바람 저항을 견뎌내고 사용자의 안전을 생각한 디자인, 안쪽으로는 방풍마법과 보온 마법이 걸려 있어 안전한 항행을 보장하는 필수품을 증명하고 있었다.
"너, 하늘길 열린 이후 제대로 안날아봤지? 전장의 그것과는 차원이 다를꺼야. 그러니까 네가 한걸 보러가보자."
그 말을 끝으로 그녀가 투구 가리개를 가리고 고삐를 힘껏 움켜쥐었다. 그녀의 뜻을 안 것일까, 은빛 여왕은 거세게 날개를 친다음 가벼운 목울림을 내며 순식간에 급상승을 해보인다. 찬 바람이 몸을 그대로 강타하는 느낌과 함께 순식간에 고도가 올라가자 풍경이 바뀌어간다.
>>723 항상 거짓말하잖아, 너. 저번에 사달라했던거 진짜 마지막이라고 한 거 기억안나? (머리카락을 빙글빙글 말아 파마한 사람처럼 만드는 것을 반복한다.) 오케이, 인정. 근데 내가 운 이유는 너가 화장실에서 안나왔기 때문이다. (당신의 손부채질로도 감질이 나는 지, 서랍에 마음대로 손을 넣어 당신의 교과서를 꺼내 부채질을 한다.)
>>725 또, 또 거짓말. 이 입이 문제냐? (모르고 한 올 뽑아버린 머리카락으로 당신의 입술을 쿡쿡 찌른다.) 뭐 어때. 내츄럴하고 좋은데. (그렇게 말하면서도, 슥슥 앞머리를 깔끔하게 정돈해준다.) 미쳤냐? 내가 연 화장실 문으로 너가 들어갔잖아. (이쪽도 어이가 없기는 마찬가지다. 당신이 물고있는 막대를 뽑아 쓰레기통을 향해 던진다.) 아무래도 아이스크림 귀신이 들러붙었나보다. 언제 갈건데?
...이런 이런. 있어선 안 될 이가 여기 있구나. (마경이라 불리는 어느 숲 속. 인간은 절대 제 발로 들어오지 않을 그런 곳에 있는 한 인간을 보고 그 존재는 중얼거렸다. 어떤 감정도 없는 눈으로 인간을 지그시 바라보다가 말을 걸어본다.) 이름 모를 인간아. 어인 일로 예까지 들어왔더냐? 여기는 생을 마감하는 곳이 아니란다. 길을 잃은 거라면 내 친히 밖으로 내어보내주마. (망토를 단단히 두르고 모자를 푹 눌러쓴 그 존재는 나긋한 울림이 듣기 좋은, 하지만 차가운 목소리를 갖고 있었다.)
/무서운 숲 속에 사는 마녀? 마남?과 어떤 이유로 무서운 숲에 버려졌거나 스스로 들어온 인간의 조합이 급 땡겨서 올려본다! /인간은 어린아이일지 어른일지는 이어주는 참치 자유! 맥커터는 절 대 사 절!!!
>>728 누가 댕댕이냐? 누가? (물어버리려고 했으면서 참 뻔뻔하다.) 내가 언젠가 꼭 네 머리를 삐삐로 만들어버릴테다. (고갯짓으로 피해나간 손이 어정쩡하게 멈췄다. 눈을 가늘게 뜨고 바라보는게 사냥감이라도 노리는 건가 싶고.) 귀신님은 내가 너 놀아주느라 고생 많다던데. (축구공이 저에게 날아오는 줄 알고 깜짝 놀라 움찔거렸다. 네가 막아주니 심장께 꼭 쥐고서 농담이나 한다.) 와이씨, 귀신님 만나러 갈 뻔 했네. (쓰레기통 안에 들어간 공을 보고서 네가 하는 말에...) 어, 네 물건에도 다 침 발라둘테니까 다 나 줘라. 내가 대신 써줌.
무모하게 행동하는 것은 아닌 것 같았고 저렇게 자신만만하니 사내는 그녀를 믿기로 했다. 만약 일부러 떨어뜨리려고 하는 것이라면 그건 그것 나름대로 대처법이 있기도 했으니까.아무튼 그녀가 내미는 투구를 얼굴에 쓰며 그는 나름대로 위치를 조정했다. 낯선 투구였지만 그럼에도 마냥 불편하진 않았기에 그는 편하게 쓸 수 있었다.
"전쟁 중에선 꽤 여기저기 날아다녔지만 평화가 찾아온 이후로는 없었어. 딱히 그렇게 할 이유가 없기도 했고. 그럼 기분 좋게 날아볼게."
고도가 순식간에 바뀌자 점점 땅이 멀어져갔다. 무언가에 타고 하늘을 날아가는 기분은 역시 비행기를 타는 것과는 조금 다른 느낌이었다. 허나 이런 경험이 처음은 아니었기에 그는 나름대로 균형을 잘 맞췄다. 자신의 실수로 떨어지기라도 하면 그건 그것 나름대로 위험한 일이고, 민폐가 될 일이었으니까. 두 손으로 꽉 잡으며 그는 바뀌어가는 풍경을 가만히 바라봤다. 투구 덕인지 정말로 빠르게 비행하고 있었으나 그 바람이 그렇게까지 매섭게 느껴지진 않았다. 이게 와이번을 타고 다니는 이들이 쓰는 무장인 것인가. 신기하다고 느끼며 그는 고개를 내려 땅을 바라봤다. 높이가 꽤 있었기에 정확하게 땅의 모습이 정확하게 보이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기분은 좋았기에 그는 미소를 지었다.
"이런 말 하긴 뭐하지만 정말 이 세계에 평화가 찾아왔다는 것이 절로 느껴지는걸. 이렇게 날아다녀도 갑자기 공격당할 일도 없는 거잖아. 있잖아. 너는 어때? 지금 이 분위기. 이곳에서 태어나고 자랐으니까... 그리고 전쟁이 정말로 길었다고 하니까 역시 이런 분위기는 익숙하지 않아?"
자신이 살던 세게는 정말로 평화로움 그 자체였다. 허나 이곳은 달랐다. 자신이 이 세계에 오기 한참 전부터 전쟁이 있었고 인간족들은 멸망 직전의 상황까지 몰렸었다고 하니까. 그런만큼 지금 이 평화는 그녀에게, 그리고 이 세계의 사람들에게는 낯설지 않을까 생각하며 그는 그렇게 물었다.
>>729 우왓. 뭐, 뭐야. 사람? 이딴 곳에...? (불쑥 상대가 말을 걸어오자 놀란 기색을 하며 뒷걸음질 친다.) 잠깐. 근데 뭐어? 생을 마감? 길을 잃어? (그러나 그것도 잠시. 상대의 말에 대해 곧바로 반박하는 것이다.) 헹, 미안하지만 둘 다 틀렸거든? 이몸은 제 발로 스스로 이곳에 걸어들어온 거란 말씀이야. 왜, 그러면 안 되나? (무슨 자랑이라도 하는 양 제 가슴을 툭툭 두드려보이면서 말한다.) 그리고 미리 말해두지만, 밖으로 다시 나갈 생각따윈 요만큼도 없어. 물론 순순히 죽어줄 생각도 없네요- 어차피 이 숲은 사유지같은 것도 없는 버려진 곳이잖아? 분명 마을 녀석들은 마경이라고 했던가... 그러니까 나같은거 하나 들어온다고 해서 대체 누가 막을 수 있... ...아니지. 애초에 댁이 뭔데? (퍽 경솔한 태도이다. 그리고 상대의 정체가 무엇인지 전혀 짐작도 못하고 있는 것처럼 되물었다.) ...아, 내 이름은 일단 맥스웰인데. (그렇다고는 해도, 이런 마경에서의 만남은 확실히 우연이었다. 정리되지 않은 부스스한 곱슬머리를 긁적거리며 머쓱함을 표하고 있었다.)
"말이 그렇지, 아직도 우리 중에 대다수는 자다 깜짝깜짝 깬다고? 외상후 스트레스 증후군이라 하던가. 그런 어려운 단어는 모르겠지만, 우리중 대다수는 그걸 잊을수가 없을꺼야. 옆에 있는 친구의 목이 무참히 잘려나가고, 또 고통스러운 비명을 지름에도 나아가야한다는 사실 자체만으로도 엄청나게 압박감이 몰려오니까. 지금도 저 아래 있는 사람들은 전부 비슷한 감정일꺼야."
그 순간 옆으로 초계 근무중이던 용기사 한명이 가볍게 스쳐지나간다. 그러고보니까 복귀시간이었나. 스쳐지나가는 용이 가볍게 선회를 한다음 다시 저 멀리 사라져가는 것을 보며 그녀는 손을 가볍게 들어 경례를 대신 한 뒤 히죽 웃었다. 그녀가 순식간에 투구 가리개를 올리고 내장 고글을 쓴채 씨익 웃어보인다. 순식간에 구름을 가르고 날아간 장면은.... 바로 수도 정 한가운데, 아직도 축제가 한창인 불야성 그 자체였다.
"너 아까, 모두가 일어낸 기적이라고 했지? 모두가 주역이라고?"
은빛 여왕이 순식간에 체공을 하면서 불야성의 정경을 하나하나 비춰주기 시작한다. 전쟁중에 가득했던 매연이 사라지고, 죽었던 공기가 살아나 나타난 상쾌한 바람이 어우러진, 너무나도 아름다운 광경이었다. 절대로 꿈을 꾸지 못하였고 희망보다는 생존 욕구를 위해서 꾸역꾸역 살아남았던 그 시절을 말이다. 그것이 우리였다. 언제까지 싸워야 할까? 언제까지 이 목숨을 붙잡아야 할까? 그 고민이 끝나기 전에 우리는 재차 검을 집어 들었다. 그 순간이었다. 용사라고 불리운 남자는 결국 그 흐름을 바꾸었다.
"네 말도 맞지만, 어쩌면 그렇지 않을 수도 있어, 왜곡된 현실을 바꾸려고 하는 것은 스스로 가능성을 믿는 사람만이 가능했었고, 우리는 그러지 못했지, 그러나 너는 달랐어. 너 자신의 가능성을 믿었고, 그 속에서 우리는 그렇게 너라는 가능성을 얻었지."
그렇게 우리는 동료들을 얻었다. 고집불통, 혹은 맹신으로부터 벗어나 우리는 손을 잡을수 있었고, 그렇게 하나의 창이 되어서 진정으로 기억에 남을 끝을 얻어낸 것이니까. 있건 없건 우리는 다시 날개를 얻었고, 바랬으니까 이루어지도록, 그는 진정으로 무엇을 해야하는가를 알려주었다. 아니, 사실 그가 한 것은, 그저 우리가 쥐려고 하지 않았던 열쇠를 주머니에 넣고 직접 가져 갈 수 있도록 시선을 돌려준 것 뿐이 아닐까? 그녀는 그렇게 생각하면서 호탕하게 웃으면서 입을 열었다.
'돌아가고 싶다면 스스로 찾아내! 여기 있고 싶다면 여기 남아! 너는 너라는 가능성에 대해 좀 더 믿음을 가져도 괜찮아! 왜냐면...."
그 순간 다시 한번 불야성의 정경이 눈에 들어온다. 너무나도 평화롭고 활기 넘치는 모습이었다.
"네가 만든 장면을, 네가 무시하지 않을 수 없잖아. 너는,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강하고 믿음직스러우니까. 내가 본 너는 그런 존재야."
그렇게 그녀가 천천히 은빛 여왕의 고삐를 가볍게 틀어쥐며 나즈막히, 하지만 그 어느 순간보다도 경쾌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두려워하지 말고, 믿는거야. 네 안에 있는 가능성을 믿고 힘을 다하면, 길은 반드시 열려. 해야 한다고, 하고 싶다고 생각한 것을 하는거야. 너는 이 풍경을 만든 사람이니까."
>>732 호오. 배짱 좋은 인간이로고. (그 존재는 마경 안에서 자신을 보고도 놀라 도망치지 않고 오히려 큰소리를 치는 상대를 보며 흥미로운 듯이 읊조렸다. 그러나 고저가 없는 어투는 축음기에서 나오는 것처럼 기계적이다.) 스스로 들어와 나갈 생각이 없다면 일부러 내보내지는 않으마. 네 말대로 이곳은 버려진 땅이다. 인간들조차 손 댈 수 없어 버린 땅에 스스로 들어갔으니. 누가 막을까. 누군가 들어오는 널 보았다면, 넌 이미 죽은 것으로 치부되고 있겠구나. (그 존재는 담담하게 말하고 상대를 응시하는 것 같더니 흠. 짧게 숨을 내쉬는 소리를 냈다.) 필시 네 심장은 뭇 인간보다 크기가 배는 되겠구나. 내가 무어냐 했던가. 나는 이 숲을 돌보는 관리자다. 마물이 숲 밖으로 나가지 못 하게 감시하고, 너 같은 인간들이 들어오면 적절한 조치를 취하는 것이 일이지. (일이라 하였지만 누구도 그 존재에게 그런 일을 맡긴 적도 부탁한 적도 없었다. 그럼에도 그 존재는 스스로를 마경이라 불리는 숲의 관리인이라 하며, 누구도 맡기지 않은 일을 해왔다. 까마득한 시간 동안.) 맥스웰이라 하는 인간아. 너는 나갈 생각이 없다 하였지. 그럼 무얼 할 것이냐. 이곳에 인간이 할 수 있는 건 없고, 인간을 위한 자리 또한 없다. 네 가치는 좋게 쳐주어야 어린 마물의 양분 이상은 되지 않겠지. 그것 뿐인 죽음이 바깥에서의 삶보다 가치 있을 거라 생각지는 않는다만. (그 존재는 그저 안부라도 묻듯이 상대에게 물었다. 인간은 기껏해야 먹이감이 되는게 고작인 이 숲에서 무얼 할 것이냐고.)
별 말 없이 사내는 그녀가 하는 말에 귀를 기울였다. 하나하나 무게가 있는 말이었다. 역시 이름이 있는 이는 다르다고 느끼면서 사내는 아무런 말 없이 미소만 작게 지었다. 허나 역시 그에게 있어선 너무나 과찬이었다. 어쩌다보니 이 세계에 왔고 자신의 사명을 따라 행동할 뿐이었다. 물론 모든 것을 사명이라는 이름 아래에 행한 것은 아니었으나 무언가 거창한 것을 했냐고 물으면 역시 스스로는 감이 안 오는 편이었다. 어쨌건 자신 혼자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었고 함께 한 동료들이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었으니까.
"돌아가고 싶어도 당장은 돌아갈 방법이 아직은 없어. 내가 살던 곳은 이 세계가 아니거든. 얼마나 먼진 모르겠지만 아마도 차원의 벽을 넘어선만큼의 거리야. 그리고 어느 순간 나는 여기에 소환되었고, 그 후로 여행을 떠나고 전쟁을 하면서 틈틈히 정보를 찾아봤지만 세계를 뛰어넘는 그런 마법이나 기술은 아직 발견하지 못했어."
아는 사람만 아는 사실. 자신은 이 세계의 사람이 아니라 다른 세계에서 온 이. 어떻게 보면 이질적인 존재였다. 물론 지금이야 이 세계의 옷을 입고 있고, 이 세계의 무장을 하고 있지만 처음 왔을 때 얼마나 사람들이 저 옷은 무엇인가. 등등의 말을 했던 것을 떠올리며 그는 이제는 재밌는 추억이라는 듯이 웃음을 터트렸다.
"하지만 역시 이 세계도 나쁘지 않아. 이제는 이곳의 생활도 익숙해졌고... 살고 있는 이들과도 정이 많이 들었거든."
평화롭고 활기넘치는 평화로운 거리와 공간. 그 모든 것을 눈에 담으면서 미소를 짓다 사내는 고개를 들었다. 자신을 바라보며 미소를 짓는 그녀의 모습에 그 역시 미소를 방긋 지었다.
"아직 답은 못 내릴 것 같지만... 어차피 당장 돌아갈 수도 없으니 어떻게든 지내면서 생각해봐야겠어. 그래. 여길 떠나 다른 곳을 돌아보는 것도 좋을지도 모르겠어. 이전에는 살벌하게 싸웠지만 이제는 마족과도 평화로운 분위기잖아? 그런 곳을 돌아다니면서 이것저것 생각을 해보는 것도 좋겠네."
그렇게 해도 답을 찾지 못할지도 모르고 고민의 시간이 더 길어질지도 모를 일이었다. 하지만 바람을 쐬어서 그런지, 그녀의 말이 있어서 그런지. 아까전보다는 조금 더 머리가 시원해진 것 같다고 느끼며 그는 조금 더 개운한 표정을 지었다.
"고마워. 확실히 바람을 쐬니까 뭔가 생각이 조금은 개운해진 것 같아. 물론 답을 찾으려면 시간이 걸리겠지만. 내가 살던 세계에선 여기와 비슷한 분위기의 장소를 배경으로 소설을 쓴 것도 있거든. 거길 보면 대체로 다들 좋은 이도 만나고 그러는데, 역시 현실은 다른지 나는 딱히 그런 이는 없어서 말이야. 그래서 그런지 조금은 자유롭게 생각할 수 있을 것 같으니.. 조금 여유를 가져야겠어."
>>730 입에서 삐 소리 나오게 하지 마라. 내 머리를 만질 수 있는 건 나 뿐이다. (어정쩡하게 멈춘 손을 손가락 끝으로 슥 밀어낸다. 눈빛을 보곤 잽싸게 손가락을 빼버리지만.) 귀신님 자존심 상하겠다. 방금 건 맞아도 안죽어. 네 손이 더 매울듯? (과거를 회상하듯, 아련한 눈빛을 지어보이다 당신의 선포에 질린 표정을 지어보인다.) 진짜 끔찍하다. 내 물건들한테 사과해. (그러고선 슬그머니 지갑을 확인한다.) 오늘 끝나고 뭐해?
>>736 변발보다는 삐삐가 나을텐데. 아니면 삭발? (해맑게 방긋 웃으니 대화 소리만 들리지 않는 거리에서라면야 무슨 즐거운 이야기를 하나 싶어보일 정도.) 그래? 맞아보고 얼마나 매운지 알려주라. 어디 맞을래? (당장이라도 때려줄 수 있단듯 손을 들었다.) 왜, 이제 내껀데 사과를 하래? (오늘 끝나고 뭐하냐고 물으니 고개를 길게 늘이며 기지개를 쭉 편다.) 바리깡 사러갈 듯?
>>734 내 심장이 다른 녀석들보다 배는 되보인다고? (담담하게 들이밀어지는 말에 눈을 깜빡인다.) 음- 뭐, 그럴지도 모르겠네. (어깨를 가볍게 으쓱이고는.) 이래봬도 이몸은 마을에서 유명인이시거든. 그래, 대부분은 안 좋은 쪽으로 말이지... (과거를 되새기듯 중얼거리다가.) 참내, 이상한 건 그녀석들이라고. 전혀 모르고있어. 이따위 숲이나 마물같은게 대체 뭐가 무섭다는 거야? 마을 놈들은 순전 겁쟁이들이야. 삼삼오오 모여서는 말도 안 되는 소문이나 퍼트리고 앉았고. 그렇다고 특별한 뭔가를 해보려고 하지도 않는 주제에, 매일같이 그놈의 고리타분한 전통타령뿐... 그걸 깨보려고 하면 배신자같은 취급이나 해대면서. 어쩌라고? (인간은 제 뒷통수에 깍지를 꺾어 붙이는 자세로 한동안 볼멘소리를 늘어놓았다. 투덜거리는 것처럼 보였지만 그렇다고 해도 딱히 강렬한 분노는 전해지지 않았고, 외려 자신을 몰라주는 마을 사람들이 진심으로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한 말투에 가까웠다.) 뭐, 그래서 아무도 날 좋아하지 않아. 적어도 나한테는 이 숲이 저쪽 마을보다 훨씬 괜찮은 장소처럼 보이는데. 그러니까 아마 내가 죽었다는 소문이 돌면 아마 놈들은 더 좋아하지 않을까? 도로 돌아간들 똑같을 걸. 큭, 그런 녀석들은 내쪽에서 먼저 사양이라고. (인간은 보통의 상식을 상회하는 인물이었다. 이 숲에 들어왔다는 사실을 그렇게나 안이하게 여기다니.) 그러니까 마음대로 생각하라지~ 어차피 걔네가 뭐라고 생각하든 나라는 녀석은 이렇게나, 떳떳히 살아있는데. 안 그래? (그런 것이 그들에 대한 복수라도 되는 것처럼 차라리 후련한 표정으로 코웃음을 흘린다. 그러나 당돌하기도 하고 살짝 머리가 이상한 것처럼 보였던 인간은, 눈 앞의 존재에게서 직접 그 실체를 전해듣자 눈동자가 급격히 커졌다.) 뭣. 잠- 지금, 관리자라고...?! (밖에서 부터 일찍이 괴짜취급을 받는 인간이었다지만 아예 위기의식이 없다는 것은 아닐까.) 그렇다는건 설마 댁이... (주춤대며 살짝 뒷걸음 치며 물러난다.) ...하, 방금 나에게 뭘 할거냐 물었지. (그러나 그것도 잠시다.) 그 답은 이미 찾은거나 마찬가지인 것 같네. (인간은 다시 발걸음을 물려 앞에 섰다. 느슨한 긴장이 돌던 태도는 없고 관리자를 바라보는 눈매가 날카로워졌다. 그 눈에서는 어떠한 결의마저 느껴진다. 그리고 인간은 다음 순간 자신을 엄지로 가리키며 이렇게 말했다.) 나, 댁에게 마법이라는 걸 한 번 배워보려고 하는데.
>>738 (늪의 표면처럼 정적인 존재와 달리 상대는 쉴 새 없이 출렁이는 바다 같았다. 묻지 않은 말들을 장황히 늘어놓으며 야단스럽게 움직이는 상대를 그 존재는 그저 마주하고만 있었다. 아주 조용히 있지만은 않았지만.) 오랜 시간 지켜진 것엔 의미가 있으며 정당한 사유 없이 그것을 무시하려 하면 배제되는 것은 당연하다. 미지를 두려워함은 인간으로서 갖는 당연한 본능이며 천성이기에. (잘 알 수는 없으나, 그 존재가 판단하기에 이 인간은 인간사회에서 어지간히도 모난 돌 취급을 받는 듯 했다. 말과 행동을 보면 자업자득일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숲에 들어와서 이렇게나 태평할 수는 없을테니.) 지금이야 살아있다만. 하루 버티면 오래 버틴 셈일게다. (후련해 보이는 상대에게 무덤덤하게 현실을 얘기한다. 그러나 그 존재가 숲의 관리자임을 듣고 눈에 띄게 놀라는 상대를 보고, 깊게 눌러 쓴 챙 넓은 모자가 옆으로 기울었다. 고개를 갸웃 한 것처럼. 그리고 상대가 마법을 배우고 싶다 말하고 몇 초간의 정적이 지났다.) ...프흐. (모자의 챙이 가늘게 떨리며 그 아래에서 작은 숨소리, 아니 실소가 흘러나왔다. 너무 어이 없는 말을 들어서 저도 모르게 흘린 듯이.) 여타 인간들이 너를 왜 그리 배척하고 멀리했는지 알 것도 같구나. (일순간 웃은 것이 거짓말처럼 무뚝뚝한 목소리로 그 존재는 말했다.) 내 온 기억을 뒤집어보아도, 제자를 들이겠단 공고는 한 적이 없다. 앞으로도 제자 따위를 들일 생각은 없다. 꿈 같은 소리는 꿈 속에서나 하려무나. 이 숲에서 꿈을 꿀 여유가 있다면 말이다. (그 존재는 딱 잘라 거절하고 느릿하게 몸을 돌렸다. 바닥까지 늘어진 망토가 쓸리는 소리와 가벼운 발소리가 낙엽을 밟으며 돌아서 그 자리를 뜨려는 듯 천천히 걸음을 떼었다.)
그녀가 별거 없다는 듯이 말했다. 갈팡질팡 할 때는 그게 최고라는 듯 내뱉는 말에는 확실히 뼈가 있었다. 겉보기에는 20대 중반이지만 내년이면 이제 32세다. 보통이라면 결혼을 하고 아이도 하나 가졌을 나이지만 이제 드레스보다는 군복이, 구두보다는 차징랜스가, 화장보다는 투구가 더 어울리는 모습이었다. 아무리 관리를 잘한다 하더라도 어린 여자들에게는 당해내지 못하니까.
"너는 아직 젊어, 네가 하고 싶은걸 하면 돼, 왜 가능성이겠어. 가능성은..... 인간이 가지고 믿을수 있는 유일한 신이야."
신성교단에서 들으면 당장 이단심문으로 끌고 갈 법한 발언이지만 이 공중은 그 누구의 말도 들리지 않는 그런 성역이었다. 오직 공중을 범할 수 있는 용기사들과 고위 마도사들의 성역 말이다. 그것이야 말로 용기사들의 자부심이었고 그들의 요람을 스스로 지키는 의미였으니까. 그녀는 저 멀리로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
"이 세상은 넓어, 네가 이 세상 모두를 가본건 아니잖아? 당장 이 아이를 타고 있는 나조차도 이 세계를 다 안다고 장담할수 없으니까, 네 눈으로 보고 스스로 가능성을 열어가. 아까 말했다시피 믿고 두드리면 길은 반드시 열려."
떠난다는 말에 그녀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를 지었다. 천천히 은빛 여왕의 고삐를 틀어쥐고 다시 한번 재차 선회를 크게 하면서 초계 근무를 마무리 지으려는 듯이 천천히 먼 곳으로 나아가며 말했다. 어차피 이제 곧 복귀 시간이기도 하고 문제될 것은 크게 없기에 그녀는 씨익 웃으며 말했다.
"그리피프스 전역 때도 그랬어."
그리피프스 전역, 용사와 동료, 연합군들이 진격하고 있는 동안 공중 지역 요충지이자, 고산 지대로 유명한 지역이었다. 하지만 별것 아닌 산에서 연합군은 상당수의 공중, 대공병력을 투입했는데 그것은 바로 직접적으로 연합군의 후방기지와 전방기지를 이을 수 있는 최적의 장소였기 때문이었고, 적들 또한 이곳을 장악해야만이 그들의 공세를 반으로 분단시킬 수 있었기에 필사적으로 그들을 막아섰다. 2주간의 밤낮이 바뀌고 사선을 넘나드는 전투 끝에, 그녀가 적장의 목을 완전히 끊어버리고서야 끝난 것이다. 그렇게 연합군은 공중 전선 보급기지를 확보하는 것은 물론이요, 전쟁 내내 적군의 제공권을 전부 앗아가는데 성공한 것이었다.
"불가능 한 것은 결국 아무것도 없는 거야. 그러니까 뭐든 저질러 버려, 여행이건 뭐건 그냥 내키는대로 저지르는거야. 뭐 필요하면 용기서들이 네편이라는거 잊지 말고."
>>739 ...하? (이번엔 인간이 의문스럽게 반응을 표한다. 마치 자신은 우스운 소리는 한 적 없다고 말하는 것처럼. 결의를 품은 날카롭게 변한 눈매도 여전히 그대로다.) ...그래? (하지만 현실은 현실인 것. 존재의 말을 들은 인간은 금세 단념하기로 한 것처럼 기세가 살짝 수그러든다. 인간이란 족속들은 포기가 빠르니까.) 그럼, 그 공고는 언제하는데? (하지만 그 입에서 이어지는 말은 더욱 어처구니 없는 것이었고.) 그때까지 기다리면 되는 거지? 숲도 이런 체계적인 시스템을 갖추고 있을 줄은 몰랐는데. 사실은 마을이랑 별반 다를 거 없는 건가? 흐음, 그런거라면 조금 실망인데. 아니, 그럴리는 없겠지... 왜냐하면 이 숲에는 댁 혼자 밖에 살고 있지 않는 것 같... 야, 잠깐. 어디가! (존재가 사라지려하자, 인간은 당황하면서도 그 뒤를 따랐다.) 그거라도 알려주고 가야 할 거 아냐! 사람이 물었으면 답을 해달라고! (자리를 뜨려하는 버림받은 숲의 관리자. 반쯤 달리는 걸음으로 그 존재를 끈질기게 쫓았다.) 큭... 관리자면 다라는 거냐! (인간은 놓치지 않기 위해 존재에게로 손을 뻗는다. 별 다른 일이 없다면 그 손은 늘어뜨려진 망토를 붙잡아, 자신쪽을 돌아보게 만들려고 했을 것이다.)
가능성을 믿고 나아가라는 조언에 사내는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물론 그 가능성이 반드시 있다고는 할 수 없었다. 애초에 자신이 왜 이곳에 오게 되었는지도 알 수 없었으니까. 물론 무슨 의식이 있었던 것 같지만 정작 자신을 소환한 왕가에서도 자신들은 전설로부터 내려온 소환 마법을 시도한 것 뿐이지. 돌려보내는 마법은 모른다고 했으니까. 그 말이 거짓일지도 모르나 적어도 그가 봤을 때는 거짓말은 아니었다. 그렇다면 역시 다른 종족의 정보를 찾아볼 수밖에 없을까. 그렇게 생각하며 쓴 웃음소리를 냈다. 차라리 이 세계에서 다른 중요한 것이 생겼다면 이렇게까지 고민하지 않아도 되었을텐데. 정말 어중간한 것은 이래서 곤란한 법이었다.
"가능성이 있을지의 여부는 모르겠지만, 어차피 당장 뭔가를 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니까. 내가 어느 정도 유명세를 떨치고 있을 때, 많은 것을 해야겠네. 유명세가 사라지고 내 존재가 자연히 잊혀지면 그땐 많은 것이 제한 될테니까."
천년 만년, 그대로 쭉 기억되는 이는 없는 법이었다. 물론 자신은 일단 용사로 불리는 것 같으니 조금 더 그 유명세가 이어질지도 모르나 그것도 얼마나 오래 갈지는 알 수 없지 않겠는가.
다시 고개를 아래로 내려 땅을 바라보면 정말 여러 종족들이 한 곳에 뭉쳐 춤을 추고 노래를 부르고 술을 먹는 모습들이 보였다. 자신이 이 세계에 와서 이뤄낸 것. 아니. 정확히는 자신과 동료들이었지만. 이렇게 된 이상 동료들에게 이야기를 해서 정말로 뭐라도 준비를 해야겠다고 생각하며 김에, 자신을 소환한 왕가에도 인사 정도는 해야겠다고 생각하며 사내는 미소를 지었다.
"준비해야 할 것이 많을 것 같아. 왕가에도 찾아가야 하고, 같이 행동을 했던 동료들에게도 가서 이야기를 해야 할 것 같고. ...고마워. 조금은 마음을 정할 수 있었던 것 같아. 답은 못 정했지만."
그 답은 이내 여행을 하면서 정할 수 있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하며 그는 이제 슬슬 내려가겠다고 이야기했다. 그래도 언제까지나 근무를 서는 이의 와이번을 타고 날아다닐 수는 없었으니까.
>>741 (그 존재는 거절했다 하여 상대가 단념했겠거니 생각하지 않았다. 그건 사실일 뿐이었다. 그저 사실을 말이라는 형태로 나열하고, 갑작스레 들어온 인간의 확인이 끝났으니 자리를 떠나는 일만 남았다. 사박사박. 가벼운 걸음이 착실하게 자리를 떠나고 있었다.) ...무엇이냐. 나는 분명 제자를 구한다거나 들일 일은 없을 거라고 말 했다만. (상대- 그가 뻗은 손은 망토에 닿긴 했지만 잡지는 못 했다. 마치 허상인 것처럼 손을 통과시키며 약올리듯 흔들린다. 대신 그 존재가 멈춰서 반쯤 돌아섰다. 뭐가 문제냐는 듯이.) 얼마를 기다린들 내 말을 바꾸진 않을 것이니. 무의미하게 기다릴 필요 없다. 그렇게 허비할 시간이 있거든 당장 오늘밤 보낼 생각부터 하거라. 마물에게 밤은 자유의 시간이다. (그 존재의 말을 뒷받침하듯 숲 깊숙한 곳으로부터 소름 끼치는 울음소리가 울려퍼진다. 거대한 날개짓 같은 풍향음이 뒤를 따르고, 바위가 구르는 듯한 진동이 몸으로 느껴질 정도로 바닥이 울린다. 그 존재는 숲 안 쪽을 보듯 모자를 위로 들었다가 다시 내리고 그에게 말했다.) 아니면 지금이라도 생각을 바꾸어 나가겠느냐. 바깥 세상 어딘가엔 네 말을 들어주고 너와 행동을 함께하는 곳도 있겠지. 여기서 죽느니 그곳을 찾는게 더욱 가치 있을테니. 나갈테냐. 어쩔테냐. (숲의 소란은 강렬했지만 점점 사그라들고 있었다. 하지만 언제 다시 소란스러워지고, 그 속에서 무엇이 그를 덮칠지는 모르는 일이다. 그리고 그 존재가 도와주는 건 이 숲에서 나가는 것 뿐이라는 사실은 아까부터 변함없는 태도로 보아 명백했다.)
>>737 어이쿠, 내 이야기 다 흐른다 이거. (당신의 귓가에서 자신이 한 이야기가 흘러나오는 것 마냥, 양손으로 받아 당신 얼굴에 뿌려준다. 알 수 없는 복도 한복판의 물놀이 같다.) 개인적으로 3번 늑골이랑 쇄골이 가장 매웠습니다. 인간 하바네로. 하바네로 주먹. 작은 고추가 더 맵다. (덤덤한 깐족거림을 멈추지 않으며 고민하는 표정을 지어보인다.) 그럼 오늘 외식은 없는걸로. 이의 없으십니까?
>>744 네 이야기면 네가 맞으시지? (뿌리는 시늉한 걸 그대로 두 손으로 받아 당신에게 뿌린다. 둘이 무얼 하는 건지는 둘만 알겠지.) 여기랑... (때릴리야 없다. 들어올렸던 손은 네 쇄골께를 짚으려고 했고, 그 다음은 3번 갈비뼈를 찾아 손을 아래로 내리다 멈칫한다.) 명치가 낫겠는데. (고민하는 표정을 보며 아이스크림은 언제 먹으러 가냐고 불퉁한 시선을 보낸다. 외식이라는 단어를 들으면 눈이 동그랗게 뜨인다.) 웬 외식? 갑자기? 너 나한테 뭔 잘못했냐?
>>747 아, 시원해. (샴푸 광고처럼 머리카락을 한 번 털어준다. 그러고나서도 머리카락을 정돈하는 걸 잊지 않는다.) 너, 너 진짜 내 쇄골 작살내려고. (장난이 아니라 흠칫 몸을 떨며 몸을 옆으로 뺀다. 갈비뼈 쪽에 다가오는 손을 지켜보다 질린 표정을 지어보인다.) 이미 한 번 부셔봤으니까? 야, 네가 부순거 잘 붙었는지 확인해봐. 아직도 비오면 쓰라려. (당신의 손목을 붙잡아 제 갈비뼈가 있을 곳을 가져다대려한다.) 오늘 내가 왜 축구 용병 뛰었겠어. (주머니에서 꺼내든 건 커플 뷔페 식사권이다. 은근한 미소.) 바리깡 잘 사오고. 동석이랑 팔짱끼고 가야겠네.
>>743 마물? (그때, 소름끼치는 숲의 울부짖음이 하늘을 가로지르며 인간의 몸을 진동한다. 그것을 고스란히 전해받은 인간은 그 위협에 압도되어 저도 모르게 몸을 움츠러트렸다.) ...하하. ...야아, 꽤나 무서운 동물들이 사는 모양인데. (침을 꿀꺽 삼킨다.) 하지만, 아니. (안으로 굽었던 어깨를 펴고서는.) 다시 생각해봐도 역시 난 나갈 생각이 없는 것 같아. (인간은 공포따윈 잊은듯 방금 처음 보았을 때 그대로의 실없는 자신으로 찬 얼굴을 하고 있었다. 머리가 어떻게 된게 틀림이 없다.) 그런데, 그렇다고 순순히 죽어줄 생각도 없어. 그야 난, 댁을 보기 위해 여기까지 온 거 거든. 그리고 이렇게 좋은 기회가 찾아왔는데 바보가 아니고서야 이제와서 왜 물러나겠어? 평생 후회하면서 잠도 못 잘 거라고. (인간의 태도는 완고하다. 하지만 완고한 것은 존재의 태도는 마찬가지였다. 존재의 말대로, 관리자에게 있어서는 들어오는 인간을 보살필 이유는 없다. 지금까지 말했던 것처럼 돌려보내는 것이 최선일 것이다. 그렇지만, 그렇다고 이제와서 물러나기는 죽기보다도 싫다. 방법을 생각해야 했다. 아니, 생각 해야만 했다. 그러니까 생각해라. 생각해!) ...하루 버티면 오래라고 했었지... (그리고 인간은, 문득 무언가에 홀리기라도 한 듯이 홀로 중얼거린다. 곱슬머리 아래로 입이 씩 미소짓는다. 악동같은 얼굴이 있었다.) 좋아, 그럼 이렇게 하자. (인간은 이렇게 말한다.) 그럼 만약 내가 이번 밤에도 죽지 않고 살아있다면, 나에게 마법을 가르쳐 줘. 댁은 내가 이 숲에서 앞가림도 못하는 마을 촌뜨기같은 녀석 쯤으로 보고 있나 본데... 길게 실랑이 할 거 없이 직접 몸으로 증명해주면 되잖아? 만약 댁 말대로 내가 죽지 않고 이 숲에 뜨는 해를 맞이 한다면. 그럼 그건, 녀석들도 나를 인정했거나... 뭐 아니면, 나한테도 이 숲에서 지낼 여지가 있다는 게 되겠지. (궤변도 이런 궤변이 없었으나, 나름대로 말이 되는 이야기 아니련지. 존재의 말대로 이 숲이 무고한 인간을 해치는 장소라면, 그런 곳에서 살아남은 인간이 생긴다면 존재가 틀렸거나 인간이 틀려먹었거나 둘 중 하나일 것이다.) 헤헤... 물론 이 제안, 받아들여주겠지? 설마 스스로 관리자라는 양반이 자기 스스로 뱉은 말을 넘겨 짚겠다고 하지는 않을 것 같은데! (인간은 자신이 처한 상황도 파악하지 못한 것처럼 그렇게 말했고, 의도가 뻔히 보이기에 오히려 열이 받는, 그런 퍽 짓궂은 얼굴을 하고있었다.)
>>748 니 이야기 바닥에 다 떨어졌는데. (네 이야기 흐른다면서 두 손으로 받아놓고 지금은 뭐하는 거냐고 핀잔주듯하다가, 지금 상황이 우스워서 웃는다.) 손만 댔는데 부러지냐? 샤프심이야 뭐야. (몸을 빼는 걸 보고 손을 거두려고 했으나 손목이 붙잡혔다.) 부순 적 없거든? 오늘 부술 수는 있겠지만. (네가 직접 가져다대니 노크하듯이 손목을 돌려서 똑똑 두드리는 체 한다.) 뭐야. 축구 뛰면 그런 것도 줘? (뷔페 이용권에 시건이 꽂혔다. 고양이가 레이저 쫓듯이.) 나 어제 동석이로 개명했잖아. 나랑 팔짱까지 끼고 가고 싶었을 줄은 몰랐지만 친히 동행해주마.
>>750 됐어, 내 말 아무도 안들어줘. (마찬가지로 이게 뭐하는 건가 싶어 실소같은 웃음을 터뜨린다.) 역시 매콤주먹이야. 근데 참아주라. 붙은 지 얼마 안됐거든. (두드리는 체를 해보이자 네, 누구세요, 하고 가느다란 목소리를 연기한다.) 아니, 이번만 받아온거야. 이런거 없으면 이 날씨에 굳이 축구를 왜 해. (라고 하지만, 꽤 많이 해왔을 것이다. 당신의 시선이 식사권에 꽂히자, 팔랑팔랑 좌우로 흔들어보인다.) 동석아. 동석 씨. 예쁜 이름 지어준 부모님 가슴에 대못 박지 마세요. 내 머리 바리깡으로 안밀거라고 약속하렴. 팔짱은...너 하는 거 봐서. (당신의 코 앞에서 종이를 흔들거린다.)
>>749 마물이란다. 동물이 아니라. (그 존재- 관리자는 그가 착각하는 줄 알았는지 정정해주었다. 이 숲에, 저 안에 사는 것은 보통 동물이 아니라 마물이라고. 그럼에도 그가 위축되는 건 잠깐이었다. 또 쉴 새 없이 떠들며 뭔가를 궁리한다. 그의 말과 행동을 보며 관리자는 또다시 기다렸다. 어차피 남아도는 시간이었으니.) ...그건, 일리 있는 제안이구나. (그의 당당하고 무모한 궤변을 다 들은 관리자는 선뜻 그렇게 말했다. 그의 말대로라면 일리 있는 것은 분명 맞았다. 관리자는 반만 돌렸던 걸음을 완전히 돌려 그를 마주했다. 마주했다곤 하나 보이는 건 무겁게 늘어진 챙모자 밖에 없었겠지만. 검은 모자 속에서 담담한 목소리가 기계적으로 읊었다.) 너의 제안은 분명 아귀가 들어맞는 제안이긴하나. 그것을 용인하기 전에 사실을 몇가지 확인해야겠다. 하나, 하루로는 수지타산이 맞지 않는다. 적어도 1주, 못 해도 달 하나는 홀로 버텨내야 제자의 건을 진지하게 생각할까 말까다. 둘, 무엇보다 너는 당장 하루를 버틸 만한 도구는 있는가? 식량은? 물은? 이 숲의 것은 전부 인간세상과 다르다. 셋, 이것이 가장 중요하다. 이 숲에서 나에게 마법을 배운다면, 넌 영영 이 숲을 벗어날 수 없다. 정확히는 인간의 세상으로는 돌아가지 못 한다. 살아서는 물론 죽어서도. (관리자의 말이 끝날 쯤 주변의 소란도 잦아들어 어느새 처음처럼 조용해졌다. 언제 깨질지 모르는 불온한 정적 속에서 관리자의 목소리가 울린다.) 나의 말에 거짓은 없으며 현실은 더 가혹하다. 그래도 고집을 꺾지 않을테냐?
>>751 왜, 동석이가 들어준대. (웃음소리 섞인 목소리는 여름 지옥을 찾던 아까와는 달리 조금 시원했다.) 보건실이라도 데려다주랴? 거짓말쟁이, 엄살은. (노크에 응답하는 목소리. 노크한 부분에 가까이 대고서 작게 소근거린다.) 네, 오늘 여기 공사하러 왔어요~ 다 부순다고 하던데. (작게 속삭이는 목소리가 담은 내용은 섬뜩한 내용이다.) 맨날 하드만, 이번에 처음 이겨서 받아온 거 아니고? (팔랑팔랑이는 식사권을 따라 시선도 팔랑팔랑.) 알았어, 알았어. 안 밀기로 약속! (동석이라는 이름이 중하랴, 바리깡이 중하랴, 팔짱이 중하랴. 새끼 손가락을 내밀고 흔들거리는 종이 너머로 고개를 기웃 내민다. 약속하라는 재촉.)
>>753 동석이는 여깄고. 야, 네 이름 이제 얘한테 뺏김. 새 이름 지어놔. (지나가다 보인 동석이에게 말을 걸고 지나가자, 뒤에서 뭔데, 뭐냐고 하는 목소리가 들려온다. 평소대로 돌아온 당신의 모습을 지켜보며 낮게 웃는다.) 야야, 내 심장 겁먹어. 듣지마 저런 말. (제 가슴팍을 양손으로 조신하게 가리는 모습이 퍽 우습다.) 와, 선 넘네. 내게 1ml의 관심도 없구나 넌. (제일 듣기 힘든 말은 축구 못한다는 말인데. 충격 먹은 표정으로 바라보다 약속이라며 뻗어온 새끼손가락을 당신의 얼굴과 번갈아 쳐다본다.) 그래. 까짓거. (새끼 손가락을 걸려하며,) 근데 아이스크림은 너가 사야한다? (이젠 억지로 거는 수 밖에 없다.)
>>755 됐어, 동순이 같은 걸로 지어주면 되지. (성의없음의 극치다. 그럴 필요 없다는 듯이 명찰을 때어주려던 당신의 손을 톡톡 두드려준다.) 우리 수학여행 때 유령의 집 들어갔을 때의 추억을 나누어볼까? (쫄보에 겁쟁이라는 말은 부정하지 않는다.) 뭔 소리야, 이런 건 가끔 있는거지. 그리고 왜 네 뷔페야. 제 뷔페겠죠. (새침하게 정정해주고는, 예상대로 피하려는 당신을 따라가며 새끼손가락을 걸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 필사적인 미소.) 그런 말 한 적 없다. 빨리 걸어. 나 지갑에 돈 없음. (복도 한복판에서 실랑이를 벌이다, 결국 웃음을 터뜨린다.)
>>755 그게 뭐야, 그럼 니가 동순이 하고 니 이름 주자. (너무나 대충 지은 이름에 킥킥 작게 웃었다. 톡톡 두드려진 손은 명찰에서 손을 떼었다.) 주인 잘못 만나서 고생이네, 날 닮았으면 겁쟁이에 쫄보는 아니었을텐데. 그때 기억은 나냐? (얄밉게 눈 가늘게 뜨고서 약 올린다. 안쓰럽다는 뉘앙스였지만 듣는 기분은 전혀 그렇지 않을 것이다.) 아, 뭐야. 난 또 나 빼고 너 혼자 다 먹은 줄. 콩 하나라도 나눠 먹으랬어, 이짜식아. (아이스크림 혼자 다 먹은 자의 발언. 새끼손가락이 걸릴까봐 아예 주먹을 쥐고 뒷짐지어 손을 숨겨버린다.) 사준다고 했다니까? (실랑이질 하다 수업 시작하겠네. 수업 시작 종 소리보다는 둘의 웃음 소리가 더 빨랐지만.)
>>743 동물이 아니라 마물...? (별거 아닌 사실이 의아하게 느껴지는 듯이 턱을 매만지며 중얼거린다. 의미를 이해를 못 한 건지,) 스읍, 햇갈리는데. (...아니면 단순히 햇갈린 것 뿐인지.) 뭐 어때, 그런건 지금 당장 중요한 것도 아닌데! 어쨌든 위험한 녀석들은 사람을 잡아 먹는다는 사실은 똑같잖아? 그러니까 그거 말인데... (인간이, 전에 없던 표정으로 방긋 웃으면서 말했다.) 아니, 무리야. 역시 하루로 해 줘. (뻔뻔스럽다.) 문제가 많잖아. 일단 첫 번째는 내겐 난이도가 너무 높다고. 굳이 이런 외지고 낯선 숲이 아니라도 아주 평범한 숲에서 한 달씩이나 살아남기는 보통 사람에겐 너무 어려운 과제라고. 그리고 두 번째. 이봐이봐... 당연히 그런게 있을리가 없잖아! 봐봐, 난 곧바로 마을의 번화가에서부터 마음껏 놀림 당하다가 숲으로 직행한 다음, 지금은 무기 하나도 없이 그 전설의 관리자를 자칭하고 있는 댁과 대면하고 있는 중이라고? 지금 나온 것 만해도 이미 대단하다고 생각 안 해? (인간은 믿지 못하겠으면 직접 확인해봐도 좋다는 듯이 양 팔을 벌리고 몸을 휙휙 회전 시켜보였다.) 하지만... 댁이 중요하다고 말한 그 세 번째는 정말 아무래도 상관 없어. (깍지를 끼어 뒷통수에 놓는다. 그것이 인간에게는 가장 편한 자세로 여겨지고 있는가보다.) 솔직히, 지금 마을 녀석들은 질릴대로 질리기도 했고. 오히려 다신 꼴도 보기 싫은게 지금 내 상태야. 뭐 확실히, 외지에서 지내다보면 가끔은 보고싶어질지도 모르겠지만... (인간인 이상, 미련이 남지 않을 수는 없다. 그는 과거를 천천히 짚듯 중얼거리며 말을 흐리다가.) 그건 그때가서 생각해보면 되니까! (역시 말도 안 되는 소리와 함께 실없는 웃음을 보인다.) 자 그래서, 어쩔거야? 받아들여 줄거야? 억지스러운 요구는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아니면 내가 그냥 여기서 죽게 놔둘래? 아니, 당연히 받아주겠지! 왜냐하면 댁도 여기서 혼자 지내느라 심심했을테니까! 이건 천재일우의 기회라고! (억측도 이런 억측이 또 없다. 하지만 그것이 타당한 주장이라고 생각하듯, 인간의 얼굴은 영락없이 이건 먹힌다, 고 쓰여있는 것 같았다.)
>>757 왜, 내 이름 싫어? 우리 친할머니가 지어주신건데. 잠깐 할머니랑 전화해봐야겠다. (휴대폰을 꺼내드는 폼이 정말로 전화를 걸 셈이다.) 그 때 귀신 튀어나올 때마다 내 옆구리 팔꿈치로 가격한 게 누군데. ...생각해보니까 나 왜 너한테 맞고만 살았지. (갑자기 생각해보니 꽤 억울한 모양인지 가늘게 뜬 눈으로 당신을 흘겨본다. 장난인 듯, 곧 웃어버렸지만.) 나만큼 너 챙겨주는 사람이 어딨다고. 다음교시 생물인데 생물이 나한테 뭐 물어보면 너한테 넘길테니까 정답 생각해둬. (뻔뻔한 말을 잘도 내뱉고는 손가락을 뒤로 숨긴 당신과 잠시 대치한다.) 하나...둘... (셋까지 세지않고 당신에게 ㄴ냅다 달려든다. 정확히는 당신이 뒤로 숨긴 새끼손가락을 노리고서.)
>>759 내가 언제 니 이름 싫대! (손을 뻗어서 폰을 잡으려고 한다.) 그거 귀신님일 걸? 친구들 보는 거 같다고 신나셨대. (어깨를 으쓱거리며 모른체한다. 흘겨보는 시선도 그렇게 무시해버렸다.) 아, 너 생물 드릅게 못하지. 그래그래, 내가 대신 답해줘야지. (뻔뻔함으로는 지지 않는다. 손을 뒷짐진 채로 네가 달려들까 싶어 대치상황에 신경이 곤두선다. 그래봤다 셋까지 셀 줄 알았던 숫자가 둘 밖에 세지 않으면 당황해버렸다.) 숫자 셀 줄 모르냐고! (달려드는 걸 피하진 못 했지만, 그래도 새끼손가락은 안 내어주겠다고 주먹을 있는 힘껏 쥐고 있을 것이다.)
>>758 너처럼 궤변을 숨 쉬듯이 내뱉는 인간은 처음... 은 아닌가. (관리자는 조건을 하나하나 궤변으로 받아치는 그를 향해 평이한 어조로 중얼거릴 뿐이었다. 궤변. 앞서 했던 제안이 그나마 일리있는 제안이었다면 지금 하는 말들은 터무니없는 궤변이자 뻔뻔스러운 변명이었다. 그가 마을에서 뭘 했고 어쩌다 여길 왔건 그런 건 관리자에게 아무짝에도 쓸모 없는 정보이며 사실이다. 그러나 그를 보고 있으니 관리자는 예전 일이 흐릿하게 떠오르는 듯 했다. 인간세계에서는 아마 전설이라 불릴 정도로 오래된, 관리자에게는 그리 오래 전도 아닌 것 같은 옛 일이...) ...좋다. 정 고집을 꺾지 않겠다면, 나가지 않겠다면 기회 한 번 정도는 주겠다. 기회를 잡아 무엇이 될 지는 네 근성과 영혼에 달렸으니. (안에서 팔이라도 움직이는지 망토가 작게 흔들린다. 이내 관리자는 망토 밖으로 팔을 뻗어 한 손을 그에게 내밀었다. 창백한 피부의 팔과 손은 인간의 것과 다르지 않다. 살짝 움켜쥔 손은 뭔가를 쥐고 있었고 관리자는 그걸 그에게 보여주었다.) 마지막 경고이자 시험이다. 네가 앞서 했던 말들을 번복하지 않을 자신이 있다면, 이걸 삼키거라. 삼키는 척 하는 꼼수 부릴 생각은 말아라. 나는 지금 당장 너를 마물의 둥지로 던질 수도 있다는 걸 명심해라. (관리자의 손이 든 건 엄지 한 마디만한 붉은 덩어리다. 덜 말린 고깃조각을 둥글게 뭉친 것 같은, 씹으면 비리고 쓴 맛과 함께 핏물이 찍 나올 것 같은 그런 모양이다. 관리자는 그걸 내민 채로 또다시 가만히 그의 선택을 기다렸다. 삼킬 것인가. 끝의 끝에서야 생각을 바꿀 것인가.)
>>760 싫어하진 않는다는 거지? (손을 위로 높게 뻗어 닿지는 않게 하지만, 떠있는 잠금 화면만 보면 이전에 벚꽃을 보러갔을 때의 사진이다.) 그래서 그 귀신님이 너한테 붙어와서 가끔 날 때리는 거고? 그런 것 치고는 감정이 묻어나던데. (여전히 의뭉스런 시선을 던지는 것을 멈추지 않는다.) 바보, 셋까지 센다고 누가 그랬는데? 이리와. (힘의 차이는 있겠지만 정면에서 뒷짐 진 손을 피게하기 위해 어정쩡한 자세를 취하다보니 힘이 들어가질 않는다. 그래도 당신의 손을 피게 만드려는 듯, 꾸욱 힘을 주며 웃는다.) 5초 안에 왼쪽인지 오른쪽인지 골라. 말한 쪽 옆구리 간지럽힐 테니까. 순순히 새끼손가락을 내놓아라.
>>762 방금 말한 건 귓등으로 들었냐? (이상하게 말 꼬아서 할머니한테 전화하느니 하는게 얄미워 네 이름 못났다, 소리치고 싶지만. 다행히 폰 화면은 전화 걸려고 하지 않는 것 같아 다행이다.) 벚꽃보다 이름 예쁘십니다, 예에. (봄은 다 갔고, 겨울이 천국이지만.) 귀신님 보기에 네가 날 너~무 괴롭히는 거 같아서 복수해주셨대. (귀신님이 진짜 있기라도 한 양.) 그럼 둘 까지 센다고는 누가 그랬냐고! 너 같으면 가겠냐? (뻐팅기며 힘을 주지만 네가 손에 힘을 주는게 느껴진다. 장기전으로 가면 불리하단걸 아는데, 손을 뿌리치지도 못 하고.) 아, 진짜. 알았어, 항복! (버티던 힘을 풀었다. 아이스크림 삥 뜯으려고 했는데 삥 뜯기게 되겠지만, 뷔페를 생각하며 참기로 한다.)
"그래, 이제 슬슬 각자의 길을 갈 시간이겠지. 답을 정하는것을 조급해 할 필요는 없어. 결국 잘 생각해보면 주머니속에 열쇠가 있는 것 처럼, 너 또한 어느 순간 답을 네 손에 쥐고 있을테니까."
그렇게 말하는 순간 순식간에 은빛 여왕이 부드럽고 우아하게 대지에 착지한다, 잔잔한 바람이 불며 먼지를 일으키지만 그녀는 가볍게 날개를 흩날리며 먼지를 밀어버렸고, 그녀는 천천히 콧방귀를 뀐 뒤 고개를 숙여 두 사람이 내리기 쉽게 만든다. 그녀는 마도구를 이용해 곧 복귀한다는 내용의 메세지를 남긴 뒤 투구를 다시 벗었다. 땀으로 가득찬 얼굴에 물기 젖은 금발이 생동감 있게 흘러 내리고, 30대라고는 믿기지 않을 외모가 밝게 빛이 난다. 그녀는 씨익 웃어보인뒤 천천히 말했다.
"만약 동부에 올 일이 있으면, 사관학교로 와, 내년부터는 내가 거기서 학부장으로 있을 예정이니까. 못해도 너한테 지낼 공간 하나쯤은 만들어줄 수 도 있어."
연애를 하는 것보다는 마치 나이 어린 동생을 걱정하는 누나의 모습이었다. 아주 잠깐동안이지만 동질감을 느꼈기 때문일까, 그녀는 용사 이전의 한 존재로서 사내를 대하고 있었다. 그것도 자기보다 어린 나이에 많은 고생을 한 동생을 바라보는 느낌이었다. 물론 걱정을 해줄 나이는 지난 것도 사실이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마음이 사라지는 것은 아닐테니까, 그녀는 손을 뻗어 사내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어 준 뒤, 자랑스러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네 자신을 믿어, 분명 아마 지금까지 받은 상처보다 더 많은 상처를 받을지도 몰라, 응, 분명 그럴꺼야. 하지만 손에 꼭 쥔 내일 만큼은 네꺼니까, 오늘을 달려나가는거야."
그렇게 가볍게 머리를 쓰다듬어 준 뒤 그녀는 가벼운 몸놀림으로 다시 은빛 여왕의 등에 올라타며,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멀지 않은 곳에 수도 정문이 보였다.
"가, 널 기다리는 사람들이 많아."
그리고─
"웃어보낸 언젠가도, 울었던 언젠가도 결국 아침은 밝아와. 우리가 그랬던 것 처럼."
그러니까─
"두번 다시 없을 오늘을 지내는거야, 그런 후회 없는 인생을 살아가길 바래."
그 말을 끝으로, 그녀는 더이상 뒤돌아 보지 않았다. 용사가 아차 하는 순간에 돌아봤다면, 아마 이미 저 멀리 사라져가는 은빛 여왕의 모습만 볼수 있으리라.
>>766 오케! 막레 잘 받았어! 멋진 기사님의 조언을 받아 아마 사내는 정말 여기저기로 돌아다니면서 어떻게 해야할지 답을 찾을 것 같네. 물론 그 과정 속에서 원래 세계로 돌아갈 수 있을지는 안 정했지만... 적어도 못 돌아간다고 해서 절망에 빠져서 살진 않을 것 같아.
>>763 여기, 여기 샌다. 어어. (아까 당했던 그대로 귀에서 당신의 이야기가 쏟아지는 시늉을 해보인다. 열연에 가깝다.) 저 때 기억나? 사람들 벚꽃 보러 몰려서 앉을 자리 찾아서 1시간 정도 돌아다닌거. (폰을 집어넣으며 당시의 기억을 떠올려본다. 기억이 생각보다 선명해서 내심 놀란다.) 귀신님이 꽤 편파적이시네. 염라대왕 앞에서는 안되지만. (되도 않는 허세.) 그건 내 마음이지. 하나만 세려던거 양보해준거야. 매너있지? (당신이 손에서 힘을 풀자, 뿌듯한 표정으로 당신을 바라보며 새끼손가락을 건다. 그리고 위아래로 흔들.) 오케이, 그럼 아이스크림은 이제 내... (라고 하자마자, 수업종이 울린다. 그대로 말도 채 잇지 못하고 굳어버린다.) ...타이밍 끝내준다, 너.
>>768 너 완전 짜증나. (이번에는 맞장구 쳐주며 따라하지는 않고, 약올라 어쩌지도 못하는 표정이다. 아이스크림 삥 뜯는데 실패해서일까.) 으, 그 때 까졌던 거 아직도 아파. (발목 뒷쪽이 따끔거리는 기분에 몸서리치듯 고개를 저었다.) 당연하지. 귀신님은 나 좋아하거든. 곧 염라대왕님도 나랑 짱친할걸? (허세도 지지 않는다.) 매너는 무슨, 손 아파 죽겠는데. (엄살이다. 새끼손가락 걸려서 흔들거리는 모습과 뿌듯한 네 표정을 영 마뜩찮게 바라보다, 이내 푸스스 웃는다. 아이스크림 하나 때문에 지금 둘 다 뭐하던 거람, 새삼 그렇게 생각해버려서.) 와, 행운의 여신도 타이밍의 신도 다 나 짱친. 어떡하냐, 뷔페 잘 먹을게? (걸려있는 새끼손가락을 네 새끼손가락에 일부러 더 꼬옥 감는다.)
>>769 그래도 싫진 않잖아. (여기서 더 놀리다간 일정 선을 넘을거라 예상했는지, 마지막으로 한마디만 하고는 더 말을 덧붙이지는 않는다.) 그래도 예뻤잖아. 괜찮았어. (사진은 잘 찍지 않지만, 꽤 많은 사진을 건졌었다.) 그래그래, 내 이야기도 좀 잘해줘. 나 천국 가고싶으니까. (허세에 당해주기로 한다. 푸스스 웃는 모습에 마찬가지로 바보 같다는 생각에 미소를 지어보이다, 다른 손으로 미간을 짚는다.) 왜 세상은 나만 미워하냐. 서러워서 못살겠다 진짜로. 이따 저녁에 시간이나 비워놔. (잔뜩 축 처진 어깨. 벗어날 수 없는 새끼 손가락을 바라보며 긴장감 어린 미소를 지어보인다.) 못이기겠네. 돌아가자. (당신이 놓아줄 때까지 기다렸다가, 교실로 향한다. 조금 시원해졌다 싶었는데, 다시금 더워진다.)
#청춘향 5000% 너무 즐거웠어!!!!! 짧은 호흡 티키타카 최고야ㅜㅜㅜㅜㅜ 딱히 정해둔 것도 없는데 얘들 이야기하는 것만 봐도 재밌었어 இ௰இ
>>761 헤헤, 사람을 뭘로 보고. 진작 그럴 것이지! (무를 생각 따윈 없다. 그 생각에 변함은 없는지, 더 생각 할 것도 없다고 하는 것처럼 창백한 손 위에 들려있는 덩어리를 겁도 없이 덥썩 집어온다.) 그러니까 그냥 이걸 먹으면 된다는 거잖아? 맞지? (인간은 덩어리를 대번에 삼키려한다. 그리고 입가에 넣기 전, 인간은 잠시 망설였다. 출처모를 고기를 한 데에 뭉친듯한, 미심쩍은 덩어리. 모습만으로 평하자면 사람이 먹을 것은 아닌 것처럼 보인다. 짐승의 먹이나 미끼와도 같은 모양새다.) ...으으음. (아무리 여기까지 와서 큰소리 치는 인간이라도 막상 그걸 먹으려하니 주저하게 되는 걸까. 그러나 인간은, 마침내 제 입 안으로 덩어리를 털어넣었다. 그냥 삼키는 것도 아니고, 우적우적 씹는다. 새로운 음식을 음미라도 하듯이) ...음~ (그 시식이 조금 더 이어지다가.) 의외로... 먹을만한데? (꿀꺽. 고깃덩어리는 목 안으로 넘어간다. 인간은 부주의하게도 소매 끝으로 입가를 한 번 스윽 닦아낸다.) 그래서 이건 뭐였는데? 용기있는 자에게 하사하는 상같은 거?
>>771 (관리자는 그가 덩어리를 가져가자 손을 다시 망토 안으로 감추었다. 모자 속 감춰진 얼굴의 낮게 뜬 눈이 그의 행동을 응시한다. 그걸 먹으면 되냐는 물음에 말 대신 모자만 가볍게 끄덕였다. 이 순간 관리자의 신경은 그가 먹을 것인지 아닌지만 생각하고 있었다.) 잘도 먹는구나. (끝내 생각을 바꾸지 않은 그가 덩어리를 입에 털어넣고, 야무지게 씹기까지 하자 그제서야 관리자가 한마디 중얼거렸다. 인간의 입에는 분명 맞지 않는 '고기' 였을 텐데 참 잘도 먹는다. 그가 완전히 삼키고 입가를 닦는 것까지 하자 관리자는 흠. 짧은 숨을 내쉬었다.) 이 숲에서 먹고 자란 것의 고기다. 또한 너를 이 숲에서 절대 내보내지 않을 쐐기이기도 하다. 이제 넌 살고 싶어도 이 숲에서만 살아야 하며, 죽으려 해도 이 숲에서만 죽음이 허락될 것이다. 허나 어느 것도 쉽지는 않겠지. 여기는 그런 곳이니. (담담히 말을 마친 관리자는 천천히 몸을 돌렸다. 그러나 아까처럼 혼자 가지 않고 그를 향해 말했다.) 거기 멍청하게 서 있지 말고 어서 따라와라. 오늘부터 당분간 자질이 있는지 내가 직접 가르치며 확인할 것이다. 그러니 잘 시간도 없이 매달려야 할 거다. 더이상 가르칠 가치가 없다 여겨지면 당장 마물에게 던져버릴테니. (관리자의 목소리가 처음보다 깐깐해진 것 같다면 기분 탓일까. 어쨌거나 그렇게 할 말을 마친 관리자는 그가 겨우 따라갈 수 있을 걸음걸이로 숲을 걸어간다. 어떻게 될지 모르는 미래처럼 컴컴한 숲 안 쪽, 더 깊은 곳으로.)
>>770 어, 아주 좋아 죽겠다. (가늘게 뜬 눈이 흘기다가 만다. 나도 널 바짝 약 올리고 싶은데 이번에도 다음 기회를 노리기로.) 예쁘긴 엄청 예뻤지. 내가 너 인생샷 삼백장은 건져줬잖아. (벚꽃이 피었던 풍경을 떠올려보았다. 하긴 발 까진 것도 하루종일 돌아다니고 나서 집 갈 때서야 아파서 확인해보니 발견했었다.) 어렵대. 수고. (고민의 흔적도 없는 답변. 천국은 무슨.) 못되게 살아서 그래, 밥팅아. 착하게 살아. (축 처진 어깨를 토닥토닥 쓸어주려고 하며.) 앗싸, 오늘 뷔페~ (가벼운 발걸음으로 교실에 돌아간다.)
#나도 즐거웠어! 낭랑한 청춘도 너무 좋고 짧게 티키타카한 것도 좋았어! 재밌었어, 고마워~
그래. 눈이 마주치는건 이상한 일도 아니겠지. 나는 골동품 점에나 볼법한 곰방대의 연기를 머금고는 그대로 음악실의 문을 세게 열어젖히고는 그 연기가 폐 속을 지독히도 더럽힐 무렵에, 마주쳤던 망령에게 다가가 독한 연기를 입 밖으로 내뱉고는 말했다.
"이리 오너라."
분명 그 말은 다가오라는 의미는 아니였다. 사극에서 양반이 하인에게 문을 열라 시키는 그런 부류의 말투. 나는 그런 부분에 있어서 무척이나 시대착오적인 행동을 하고는 했다. 하기사 저승사자나 입을 법한 검은 두루마기를 한복 위에 걸치고 곰방대를 푹푹 피워대는 모습을 보자면 이게 현대 사람이 맞냐 라던지 타임머신이라도 타고 왔냐는 말을 자주 듣기는 했다.
"네 한(恨)은 무엇이냐. 무엇이기에 죽었음에도 구천을 떠도느냐."
귀신을 보고 마주쳐도 놀라지 않고 되려 말까지 나누는게 이상하지 않은 나는 소위말하는 영매, 무당 혹은 퇴마사. 그런 부류에 속했다. 세간에서는 보이지도 않는 것으로 돈을 벌어먹는 사기꾼 여자 라는 소리도 종종 듣기도 했지만 나 유서희는죽었음에도 현세를 떠돌고 있는 망령들의 한을 풀고 성불하는 일을 하고 있었다.
>>777 전소영은 눈을 한 번 깜박였다. 제가 잘못 본 것인가 싶었으니까. 대뜸 눈이 마주친 사람, 그것도 검은 두루마기를 입은 사람이 자신에게 '오라고' 말을 했기 때문이다. 물론 그것이 발음 그대로의 의미는 아님은 소영도 알고 있었다. 다만 그 황당한 기분은 매한가지여서 소영은 두 번 더 눈을 깜박이다가 가까스로 말문을 열었다.
"나... 나? 내가 보여? 근데..."
안 무서워? 그 말이 목끝까지 차올랐다. 그러나 내뱉지는 못했다. 다음 순간, 그의 질문에 말문이 막혔으니까. 내 소원을 들어주겠다고? 근데 내 소원은... 그거, 이룰 수 있겠냐고. 순간 소영은 울컥해져서 울상을 지었다. 당최 협주곡 연주가 가능한 귀신이 어디에 떼거지로 있겠냐고. 사람이면 더 불가능하지 않냐며, 생각을 거듭한 끝에 소영은 슬픈 얼굴로 답했다.
>>779 만약 살아있는 전소영이었다면 분명 일련의 말들에 황당함이라도 비칠 수 있었겠지만, 유감스럽게도 그는 이미 죽은 사람이었다. 이미 지칠대로 지쳐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그리고 황당하지만 바로 그 지푸라기가 눈 앞에 두루마기 입은 기인(奇人)인 것이다. 때문에 소영은 머뭇거리긴 했으나, 나서서 부정하지는 않았다. 그저 말 없이 긍정하고는 긴장한 기색을 하고 있었을 뿐이다.
"그럼 말해두겠지만, 나는 분명히 어려울 거라고 얘기했어."
소영은 양 옆으로 묶은 머리끝을 메만지며 엄포를 놓았다. 만약 기분만 떠보고 가버린다면 귀신으로써 저주라도 해 주리라 생각했다. 피아노 연주를, 그것도 수 많은 사람이 함께해야 하는 이 소원을 어떻게 이뤄줄 수 있는 지 두고 보자며, 소영은 검은 눈을 번뜩였다.
"나는... 협주곡이 연주하고 싶어. 아주 큰 무대에서 수 많은 연주자가 함께하는 그런 협주곡."
그 직후 소영은 긴장한 나머지 침을 삼켰다. 아무리 뭐라고 해봐야, 저는 죽은 사람이라서 살아있는 사람에게 협박 따위 될 리 없었다. 그랬기에 간절함이 묻어나는 눈으로 눈 앞의 살아서라면 말도 걸지 않았을 괴짜를 바라봤다.
하기사 다짜고짜 찾아온 괴짜의 능력을 못믿는것도 이상한 것도 아니였다. 못마땅한 인간이 얼마나 소원을 이루어 줄 수 있는가에 대해서 역량 자체가 가늠할 수 없는 부분이니까. 그렇기에 단언할 수 있다. 세상이 자신을 사기꾼이라 부르기도 한다지만, 그건 믿지않는 부류에서의 비난이고, 수많은 영을 명부로 돌려보내는 일을 처리한 나에게 있어서 어지간한 일은,
"의뢰 금액의 두 배는 받아야 하겠군. 사람을 불러 모으고, 장소를 정하는 것은 인맥의 일이니."
의뢰한 자들 이라는 인맥을 끌어모으면 불가능 하지 않았다. 검은 두루마기를 입은 사기꾼이라 불리는 이유도 그런 이유에서 였다. 의뢰금은 딱 먹고 살정도로. 그 정도로만 받는다. 지금과 같이 인맥을 끌어다 쓰는 일이 아니라면. 반대로 인맥을 끌어다 쓰는 지금과 같은 상황이라면 두 배를 받는다. 영적인 현상으로 고통받는 사람들은 그것에서 풀려남에 따라서, 해결한 이의 부탁을 거절하지 못하는 입장이 된다. 설사 의뢰금을 이미 받았더라도 그 액수는 적었고, 두 배가 늘어난다고 해도 한달 아르바이트 값의 두 배정도다.
이런저런 이유로 이렇게 인맥을 끌어다가 쓰는 행위가 항간에 보이기에는 의뢰했던 이들의 고혈을 빨아먹은 사기꾼이라 보여도 이상하지는 않겠지.
"3년전 사망자인 피아니스트가 맞았군. 미리 맞을 경우와 아닌 경우에 대한 의뢰금을 이야기해놓길 잘했어. 그래서 이름은?"
이 의뢰에 대한 내력정도는 조사해보았기에, 눈 앞의 망령에 대하여 이름까지도 알고 있지만서도 예의차 묻는다. 제 아무리 망령이라고 하더라도 사고하는 존재에 대해 인륜적이지 않은 조치는 무례한 것과 다름이 없으니까.
"나는 해한사(解恨士, 한을 풀어주는 사람). 유서희라고 하네."
한쪽 눈은 초점을 가지고 응시하지만 현세외의 것은 아무 것도 볼 수 없다. 눈앞에 망령이 있음에도. 한쪽 눈은 초점이 없는 채로 현세의 모든 것을 볼 수 없다. 오직 영체만을 바라볼 뿐이다. 그게 내가 해한사가 된 증거이며, 살아서 삼도천을 건너본 자의 대가였다.
>>782 소영의 머릿속에서 셈해지던 암산이 끝나갈 무렵에서야... 눈 앞의 기인의 말이 머릿속을 멤돌았다. 그도 그럴것이 그 괴짜는 마치 아주 손쉬운 일이라는 듯이 무리한 요구를 일축했으니까. 그 말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뇌가 과부하로 부작용을 일으켰다 봐도 무방할 정도였다. 소영은 그 대답이 황당해서인지 잠시간 말을 멈추고 침묵했다. 그리고 조금 뒤에야 겨우 말문을 뗄 수 있었다.
"인맥이라니,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모르겠는데... 정말 내 소원을 들어주고 싶은거니? 그렇지만,"
왜? 라는 의문이 머리속을 몽글몽글 떠돌아 다녔다. 귀신인 자신을 그것도 생판 모르는 남이 돕겠다는 사실은 아무리 생각해도 납득이 가지 않았다. 때문에 소영은 대답 대신 입술을 씹으면서 답을 망설였는데, 순간 그의 질문에 경직된 기색이 얼굴을 스쳤다.
"내가 피아니스트 였다는 걸 어떻게... 너는 대체 누구야?"
경직된 얼굴이 얼핏 귀신보다 섬짓한 눈을 마주 보았다. 소영은 그 눈동자에 겁을 먹었는지, 아니면 이 상황 때문인지 불안한 기색을 드러냈다. 그런 직후 떠오른 것은 그에 대한 궁금증이나 두려움 보다도, 막연한 기대감이었다. 누군가가 자신의 소원을 해소하러 사람을 보냈을 지 모른다는, 자신을 기억하는 사람에 대한 희망. 전소영은 죽을 당시를 떠올려 보면 너무 어린 나이였다. 한창 살아있는 사람과 죽은 사람은 시간의 무게가 달랐다. 비록 이 학교의 고등학생들이 곧 성인이 될 시점의 나잇대라 해도, 그 나이에 삶이 끝난다고 하면 무척 짧게 느껴지는 시기인 것 처럼 말이다. 그런 소영이었기에 이런 순간 품는 생각은 너무도 철이 없었다. 순진했다고 할 수 있겠다.
"혹시 나를... 알려 준 사람이 따로 있니? 아직, 누군가 나를 기억해?"
3년, 지극히 길고도 짧은 기간. 한 사람이 성인이 되기까지 남은 기간임과 동시에, 잊혀지기엔 너무도 쉬운 시간이다. 소영도 무의식적으로 짐작은 하고 있었지만, 다시금 계기가 찾아오니 희망을 품게 되는 것이었다. 누군가에게 기억되는 것에 대해서. 전직 최연소 피아니스트, 17세에 꽃 피운 음악계의 전설. 모두에게 기억될 뻔 했으나, 너무 쉽게 져버린 한 송이 꽃. 아쉬울 법도 했다. 다만 그저 조금 더 성숙했더라면 자신의 죽음이 아픔이 될 것이라는 생각도 했음직 하나, 소영은 아직 잊혀지는 것을 받아들일 준비는 되지 않은 것 같았다.
"그건 간단한 이야기라네. 자네같은 망령은 꽤 이 세상에 존재하니까. 내 입에 풀칠할 정도로만 금액을 받고 빚을 세우는거지. 그렇게 쌓은 인맥의 망이 내 일을 또 돕는 일을 하게하지. 의뢰자는 적은 돈에 확실한 효과를 보았기에 그것을 은혜로 생각하게끔 하는게 내 능력이고. 악단과 악단이 활동할 무대. 두 가지가 필요하군. 그렇지 않나?"
그래서 인맥으로는 가능하다. 지금 바라고자하는 소원은 대규모의 인맥을 동원하기는 하지만 힘든 부분은 적은 편이다. 오히려 법적으로 오고가야 하는 일에 원한이 들린 원귀를 상대하고자 한다면 그쪽이 가장 까다롭다. 그 부분에 있어선 유사 탐정이나 마찬가지였으니까.
"일을 받으면 거기에 얽힌 내력을 조사하는건 내 특기일세. 곧바로 만나서 위험한 망령인지는 판단할 필요가 있으니까. 물론 이 경우에 있어서는 그대가 나에게 질문하는 대로, 의뢰자가 그대를 기억하는 쪽에 속하니 많은 정보를 내 발품없이도 꽤 알아냈지만 말이네."
요는 이 의뢰의 내용은 '음악실의 귀신을 성불해달라'가 아니라 '음악실의 유령이 만약 전소영이라면 그 한을 풀어달라' 였다. 그러니까 의뢰자는 눈 앞의 망령인 소영을 기억하고 소중하게 여기는 존재다. 아직까지도 기억하며 그리워하고 이야기를 꺼낼때 슬퍼하는 모습을 직접 보았으니까.
>>784 청산유수 흘러나오는 서희의 대답에 소영은 오히려 어물거리며 말하는 것을 망설였다. 살아서도 겪지 않았던 귀신에 관한 일들에 이렇게 까지 자연스럽게 다가와 자신의 문제를 해결할 의사를 밝히는 사람이라니 솔직한 심정으로 적응이 안됐다. 소영은 그렇게 서희의 말에 어물쩍 휘둘리는 듯 하다가 작게 입을 열었다.
"잘 모르겠지만, 날 돕고 싶다는 이야기네? 근데 돈도 많이 안 받고..."
소영은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근 3년 간을 음악실의 귀신으로 공포의 대상 취급 받으며 지내온 시간을 떠올려 보면 이건 분명 기쁜 일이었는데도, 소영은 그리 흔쾌히 기뻐하지 못했다. 이유는 간단했다. 3년 간 귀신이었음에도 소영은 여전히 살아 있던 시절의 기억과 상식으로 세상을 대했기 때문이다. 그에게 여전히 검은 두루마기를 입고 귀신 보는 사람은 비정상에 속했고, 정상 삶에 포함되었던 과거의 지식으로 볼 때, 이런 이상한 제안은 흔쾌히 받아들기에는 미심쩍은 구석이 있었기 때문이다. 때문에 소영은 망설임 어린 태도로 우물거리다가, 겨우 말을 꺼냈다. 조금 이상한 방향으로.
"그건... 네게 너무 힘든 일인 것 같아. 나는 죽었지만, 그렇다고 남을 고생시키면서 까지 소원을 이루고 싶지는 않아. 서희라고 했지? 서희 네가 나를 돕고 싶다고 해도 너무 적은 돈을 받고서 일을 한다는 건 아닌 것 같아."
소영은 이윽고 작게 웃었다. 마치 햇살이 내려앉듯 다정한 미소를 지으며, 서희의 어쩐지 두려움을 갖게 하는 눈을 마주 보았다. 소영에게 친절이란, 살아 있을적에 가졌던 상식과 품위 만큼이나 당연한 결을 지녔다. 잃게 되는 순간, 더 이상 소영은 사람으로써 남지 못하게 될 것이라 믿을 정도로 그 마음 씀씀이를 가진것으로 스스로가 사람이라는 반증이 되는 것이었다. 때문에 그는 서희의 손을 꼭 잡고 다정한 것들을 내뱉었다. 설령 그 손 너머에서 온기도 감촉도 느껴지지 않는다고 해도.
"그러니까 서희야, 네게 부탁한 사람한테 가서 다시 말해보자. 이런 힘들고 자질구레한 일을 하면서 입에 풀칠밖에 못한다니, 너무 슬픈 일인 것 같아. 네가 하는 일은 좀더 가치있는 일이라고 생각해."
소영은 자신의 소원은 안중에 없는듯이 그 사소한 일에 자꾸만 신경을 썼다. 그러나 소영의 입장에서는 오히려 죽은 사람이 연주하고 싶다는 소원 따위 보다는, 산 사람이 남 부럽지 않게 살지 못한다는 사실이 안타까웠던 터였다. 때문에 소영은 조금은 감사하고 조금은 동정하는 기색을 가림없이 드러내며 서희를 바라봤다.
"서희는 나를 돕고 싶은 좋은 사람인거지? 나는 그런 사람에게 좋은 일이 생겼으면 좋겠어."
그러다 곧 서희의 아리송한 답에도 금세 알아차렸는지, 소영의 표정이 조금은 굳혀졌다. 아마 누가 서희를 보낸 것인지 짐작이라도 한 모양이었다. 소영은 그 곤란하다는 시선으로 서희를 보며 불편한 기색을 드러냈다.
"그 의뢰했다는 사람... 이름, 내가 맞다면 장우현이 맞지?"
그는 오래 전 자신의 첫사랑이며, 라이벌이었던 한 남자를 떠올렸다. 가장 보고 싶은 친구였으며 누구보다 궁금했던 그 사람은 소영을 죽게 만든 계기가 되었던 사람이었다. 비단 그것이 사고였다 하더라도, 모든 사건에는 이유가 있기 마련이었다.
생활에 있어서는 편의를 봐주는 사람도 있고 더군다나 성불할 대상인 소영이 그걸 신경쓸 필요는 없다. 내가 이 일을 하는 이유는 본디 태어날 때 죽을 명부가 잘못 씌어진 보상책과도 같다. 달리 말하면 이 일을 하지않고서는 나에게는 미래가 없었다. 죽은 자가 현세의 미련을 끊고 명부로 돌아가는 대가로 살아갈 내일의 시간을 버는게 내가 해야하는 일이고 동시에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었으니까.
"내 일은 내가 살아가는 시간을 벌기 위한 일이라네."
그건 동정할 필요도 없고 동정받아서도 안되는 일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불행한 것은 아니였다. 비록 삶과 죽음을 확실하게 할 수있는 인간들이 부럽기는 했으나, 나는 내가 살아가기 위해 그만한 대가와 사명을 받았을 뿐이다.
"그러니까 좋은 일이라고 한다면 그대가 한을 풀고 성불하는 일 뿐이네."
살아있는 운명도 죽어있는 운명도 어딘가 적혀있다고 한다면, 나는 살아있는 운명이 적힌 순간에 죽어있는 운명도 동시에 적혀있었다. 해한사로서 지금의 사명을 얻지 못했다면 그대로 없어질 운명이었다. 지금의 삶이 나에게 있어서는 중요했다.
"의뢰자를 잘 알고있군. 어찌되었건 일을 받은 이상 일을 행하고 그대는 한을 푼다. 그것으로 충분하다."
>>786 사명, 그 단어를 말하는 서희가 소영은 기계 같다고 생각했다. 자신이 알던, 사람이라는 단어로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으니까. 자신이 느끼던 친애와 공감을 표하던 사람들과는 달리, 서희는 너무도 무감정함에 가까웠다. 그 사실이 기이하게 다가왔던지, 우습게도 귀신인 소영은 사람다움을 찾고 있었다. 때문에 서희의 답에 괜시리 어색해진 소영이 서희의 손을 잡은 채 안쓰럽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서희야, 서희는... 그런 식으로 사는 삶이 즐거워? 나는 귀신으로 남아있던 3년간, 너무 괴로웠거든. 사람들과 함께 이야기 하고, 좋아하는 일을 하던 시절이 내겐 행복했으니까. 그런데... 너는, 정말 그걸로 괜찮아?"
서희의 삶을 그가 보기에는 목숨만 붙어 있는 삶이라고 여겨졌다. 꿈도 없고, 이렇다 할 즐거움도 없이 산다는 것에만 의미가 있는 삶. 마치 근 3년 간의 귀신으로써의 자신을 보는 것만 같았다. 때문에 소영은 잠시 고민하듯 바닥을 보더니, 억지 웃음을 지었다. 죽은 주제에, 서희가 안타까워 견딜 수 없다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나 소원 안 이뤄도 돼. 고작 피아노 치는 게 대수라고. 그보다는 네가 더 행복한 일을 했으면 좋겠어. 하나뿐인 삶이잖아..."
하나뿐인 삶, 그것이 소영과 서희에게 같은 의미로 다가올까? 분명 둘은 누구보다 생의 무게를 잘 아는 입장이었지만 가치관은 달랐다. 서희와 소영은 너무 다른 사람이었다. 다정함을 사랑하고 쉽게 즐거워하며 그것이 가까운 행복이었던 소영은... 어쩌면 영원히 서희를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그렇지만 사람은 누구나 상대를 온전히 이해하지 못하지 않던가. 자신의 입장에서 상대를 추측하고 이해하려 들 뿐이다. 서로간의 간극을 가늠하며 비로소 이 사람과는 다르다고 깨닫는 과정일 뿐이다. 다만 그런 의미에서 소영은 어렸다. 아직 상대와 자신이 다르다는 것도 받아들이지 못할 정신적으로 미성숙한 시기에 죽어버렸다. 그는 영원히 열일곱이다.
소영은 감정이 쉽게 드러나는 아이 같은 태도로 애써 동정을 감췄다. 복잡한 심경과 함께 자신의 소원도 미뤄두고는 아닌 척 애써 웃었다.
"한 같은 건 없어. 그러니까 죽은 나보다도 중요한 일을 하지 않을래? 내가 서희에게 좋아했던 걸 알려주면 어떨까? 너도 즐거워 할 거라고 생각해!"
나는 혀를 쯧하고 차며 곰방대를 한참동안 뻑뻑 피워댔다. 이런 부류의 동정 혹은 연민을 죽은 자에게서 듣는 것은 정말로 스트레스가 받는 일이었다. 삶의 즐거움을 어째서 죽은 자가 논하고 있는가. 살지도 죽지도 않은 애매한 경계를 자기의 감정에 이입해 보고있는 것인가. 그렇다면 그것은 정말로 필요없는 감정이었다.
"내 삶은 내가 선택한 길이네. 태어나면서 동시에 죽었어야 할 운명을 빗겨난 대가니까. 자네가 이입할 이유도 동정할 이유도 연민할 이유도 없네. 심하게 말하자면 죽은 자가 산 자의 삶을 해결하고자 하는가? 그야말로 헛짓거리다."
물론 나는 산 자의 삶을 살지만 성불을 통해 살아갈 시간을 벌지 못하면 소멸한다. 다시 돌아갈 육도윤회의 환생도 존재하지 않는다. 속세의 삶에 있어서 달관한듯 한 이 태도 인간으로서의 삶으로서는 이미 어긋난지 오래였기 때문이다. 특히나 상대는 나를 비슷한 또래의 사람처럼 보아 말을 놓고 있는 거겠지만, 난쟁이 똥자루같은 체격에서 자라나지 못한 것 뿐이고. 기이하게 나이를 먹지않고 있다. 인간으로서는 확실히 나는 어긋나 있었다.
"삶에 있어서 미련이 남으면 죽은 영이 현세를 떠돈다. 작금에 상황에 현세의 인간을 연민하여 그저 필요없다고 미뤄두려는 속셈이 아닌가. 그건 죽은 3년전에서 정신적으로 성장하지 못한 대가인가."
"미련이라, 나는 잘 모르겠어. 하고 싶은 것이 있지만, 그건 살았을 때도 변함 없었는걸. 그건 그냥 삶을 살았던 모든 사람의 공통점 같은 거라고 생각해. 과거를 그리워하게 되는 것."
소영은 웃음 지으며 말했다. 서희의 질책에 민망해진 것도 있겠으나, 거절하려 에두르려는 것도 어느 정도는 있었다. 소영은 서희의 도움을 받고 싶지 않았다. 서희의 방식과 삶이 이해가 가지 않는 부분도 있었지만 누군가에게 도움 받으면서까지 사라지고 싶지는 않았다. 소영은 서희의 말의 절반도 이해하지 못했지만 적어도 자신의 존재가 사라지길 바라는 것 만큼은 알 것 같았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우현의 도움을 받고 싶지 않았다. 죽기 전의 케케묵은 감정이 그의 마음을 거리끼게 만들던 것이다.
"네 삶이 네가 선택한 것이듯 이건 내 선택이야. 죽어서 이렇게 남아있는 것도 이유가 있겠지. 적어도 도움을 받으면서까지 해결할 문제는 아냐."
죽은 사람은 결국 산 사람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그건 서희 역시도 같지 않을까. 한 번 죽었기에 산자와 죽은자를 모두 볼 수 있게 되었지민, 반대로 어디에도 속할 수 없는 것 아니겠는가. 죽음 이후의 그는 잠시 말이 없이 웃음 짓다가 말을 꺼냈다.
"미련이라는 말로 전부 정리될 수 있다고 믿고 싶지 않아. 그건 내 삶이 가벼웠다는 뜻이잖아. 너는 생각한 적 없어? 죽음 이후에 아무것도 남기지 못하게 된다면 어떤 기분이 들 지. 나는... 그게 너무 두려워."
그는 분명 웃고 있었지만 슬퍼하고 있었다. 삶에 있어 한 가지 염원을 남기고 떠나지 못한 영혼을 미련이 있었다고 하지만, 사실 그건 영이 떠날 각오를 만들어주는 일종의 한풀이에 지나지 않은 게 아니었을까. 만약 그렇다고 하면 소영에게는 미련이 없었다. 그건 방황하는 마음처럼 실체가 없는 두려움이었으며 구체적인 방향성이 없는 마음이었다. 소영은 아직 떠날 생각이 없었다. 마음 깊숙한 곳에서는 말이다.
"그래, 나는 네가 너무 불쌍해. 하지만 그게 도망치는 이유라는 건 심한 억지야. 나는, 내가 이루고 싶은 건 그냥 소원 하나가 아니야. 진짜 이룰 수 있겠어?"
드디어 용사는 이 세계를 어둠으로 뒤덮으려고 하는 사악한 마왕을 무찌르고 마족과의 전쟁에서 승리를 이끌어냈습니다. 보통은 여기서 이야기가 끝이 날 것이다. 허나 전쟁이 끝난 후에도 사람들의 삶은 계속 이어졌고 그건 용사 역시 마찬가지였다. 말 그대로 세상을 구한 이니 수많은 이들의 찬양을 받고 왕가에선 사위를 삼으려고도 하고 부와 명예를 약속했으나 용사는 그 모든 것을 거절하고 동료들에게 가벼운 작별인사만 하고 원래 살던 작은 시골 마을로 돌아왔다. 용사는 원래 이곳에서 매섭고 위험한 몬스터를 사냥하면서 살아가던 사냥꾼이었다. 한 손에는 검 한 자루, 그리고 등에는 하늘을 날아다니는 몬스터에게 발사하는 활과 화살을 차고 몬스터를 사냥하는 평범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으나 어느 날, 그가 살던 마을이 본격적으로 마족의 침략을 받은 것을 계기로 평범한 삶을 살아가던 사냥꾼은 마을을 떠나 여행길에 올랐다.
그 사이의 많은 이들이 있었으나 그것을 다 설명할 순 없었다. 아무튼 마을이 침략받았을 때 자신을 도와준 마법사와 기사를 따라 여행길에 올랐던 사내는 용사가 되어 다시 마을로 돌아와 이전의 삶을 살고 있었다. 마족과의 전쟁이 끝이 났다고 해서 몬스터가 돌아다니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이전처럼 그런 몬스터를 사냥해서 돈을 벌거나, 혹은 위험한 몬스터를 퇴치해주고 그 보상을 받거나 하는 등으로 용사라고 하기에는 상당히 소소한 삶을 사는 사내의 모습은 그야말로 행복해보였다.
오늘도 어김없이 사냥을 갔다가 집으로 돌아온 사내는 막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파란 지붕에 하얀색 벽돌로 쌓은 집 안은 제법 넓이가 있었다. 원래라면 가족이 같이 살고 있었으나 마을이 불바다가 되었을 때 자신의 부모님은 물론이고 하나뿐인 남동생마저도 목숨을 잃었다. 여행을 떠나기 전, 집 뒤에 만든 묘지는 아직 그 형태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었고 사내는 창가로 그 무덤을 조용히 바라보고 있었다.
-똑똑
한편 갑자기 누군가가 문을 노크하는 소리가 들려 사내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손님이 온 것일까. 누군진 알 수 없었지만 일단 사내는 자신이 안에 있다는 것을 밝혔다.
"네. 누구신가요?"
뒤이어 사내는 아마 천천히 닫혀있던 문을 열고 문을 노크한 이를 대면하려고 했을 것이다.
/엔딩 이후의 이야기라는 느낌으로 용사가 왕가에서 제안하는 사위 자리라던가 부와 명예라던가 그런 것들을 다 거절하고 동료들과는 작별인사를 하고 고향으로 돌아와 살다가 누가 집으로 찾아와서 막 문을 여는 상황이야. 맥커터는 사절할게. 뜬금없이 사내를 푹 찔러서 죽였다라는 전개만 아니면 누가 왔건 어떤 상황이건 뭐든 오케이!
수없이 입술을 짓씹고, 주먹을 쥐었다가 폈다가. 주저하고 주저했지만 결국 이 문을 두드려야 했다. 그녀는 자신의 운명이 한탄스러웠다. 난세에 태어난 것이 그녀의 유일한 죄였다. 손목에 족쇄도 없는데 들어올리는 팔이 무거웠다.
"반가워 용사. 이렇게 가까이서 보는 건 처음이지?"
똑똑. 문 뒤로 다가오는 발자국 소리가 사신의 것처럼 들렸다. 두꺼운 후드 로브에 짓눌린 시선은 아래를 향하고, 그의 발걸음은 눈 앞으로 성큼 다가왔다. 그것만 보아도 충분했다. 그녀는 자신이 제대로 찾아왔음을 직감했다. 강철 지팡이를 자신도 모르게 더 꼭 끌어안았다.
그것은 그녀보다 크고 용사와 높이가 비슷했다. 위쪽은 횃대처럼 수평으로 되어있었으며 아래쪽은 송곳처럼 뾰족했다. 어쩌면 용사가 알아볼지도 모를 유형의 물건이었다. 대전쟁의 한 부분이었던 조인들의 송곳 횃대. 그러니까, 마족의 무기. 거기에 새겨진 문양이나 묶여 있는 장신구까지 알아본다면 그 사실까지도 어렵잖게 알 것이다.
"당신을 찾느라 많이 힘들었어. 이젠 마음대로 돌아다닐 처지도 못 되거든."
저주받은 마왕의 군세를 불러모으는 갈색 깃털의 길잡이. 한밤 속에 스며드는 악마의 전령조. 부엉이 하피 소피게네이아의 지팡이임을. 그러나 후드를 벗고 얼굴을 드러낸 그녀의 눈에서는 예전의 비수같은 날카로움을 찾아볼 수 없었다. 귀깃은 축 쳐진데다 로브 아래 깃털에도 윤기가 없는 것이 명백히 보였으니까.
용사에 의해 마왕 및 핵심 수뇌부들이 몰살당한 마족들은 그대로 사분오열되었고, 그 여세를 몰아 왕국군이 지축을 울리는 발소리와 함께 진공하였다. 어떤 마족들은 최후의 최후까지 항전하다 아예 멸절되었다. 어떤 마족들은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알 수 없는 먼 땅으로 도망하였다. 죽을수도 도망칠수도 없던 마족들에게 남은 길은 인간들에게 무릎을 꿇고 복속되는 것 뿐이었으니. 소피게네이아는 세 번째 유형이었다. 강자를 따르는 것이 마족의 미덕. 더 강한 인간에게 복종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해서일지. 생존을 위해 피눈물을 삼키며 내린 결단이었을지. 그건 당사자들의 머리를 열어보지 않고서야 알 수 없는 이야기였다. 아무튼 왕국에게 중요한 것은 승리를 자축할 전리품들이었다.
"나를 싫어하는 건 알아. 하지만....조금만 시간을 써주겠어? 어찌됐건 당신이 승리했고, 당신이 더 강하잖아."
"승자와 강자의 아량을 베풀어서라도 제발..... 당신이 꼭 알아야 할 사실이 있어..."
>>795 문 뒤에 있는 이의 얼굴은 바로 보이진 않았으나 그럼에도 그 자가 누구인지 사내는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이를테면 지금 저 자가 끌어안고 있는 강철 지팡이의 형태와 문양. 그리고 묶여있는 장신구. 모두 마족의 것이 아니었던가. 물론 마족이 이 세상에서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닐테니 살아있는 이가 있어도 이상할 것은 없었다. 허나 중요한 것은 지금 이 땅에 마족이 다시 발을 들이밀었고 그것도 자신의 앞에 나타났다는 것이었다. 자연히 사내의 시선이 차갑게 변할 수밖에 없었다.
"넌..."
당연히 그 목소리도 마냥 고울 순 없었다. 어쩌겠는가. 이 마을은 한 번 마족의 침공에 의해 불탔고 자신은 그 마족들에게 가족을 잃었다. 물론 눈앞의 이 마족이 자신의 가족을 죽이거나 마을을 불태운 것은 아니었다. 어쩌면 사내가 미처 몰랐을 뿐이지. 이 마족도 그 자리에 있었을 수도 있지만 확실한 것은 적어도 자신의 기억 속에는 없다는 것이었다. 아무튼 조금만 시간을 쓰고 자신이 알아야 할 사실이 있다는 것에 사내는 잠시 생각을 하다 그녀에게 이야기했다.
"전쟁은 이미 끝났어. 이 마을을 불태우고 침공한 것이 아니라면 굳이 피를 튀길 이유도 없어. 그래서 여기엔 왜 온 거지? 내가 알야아 할 사실이 뭐지?"
여기까지 온 이유가 필시 있을테고 어떻게 할지는 그 이유를 듣고 결정해도 나쁠 것이 없었다. 그렇기에 사내는 시간을 쓰기로 결정했다. 여기까지, 정확히는 자신이 용사로 불리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이렇게 찾아왔다는 것이니까. 그 이유 정도는 들어서 나쁠 것이 없지 않겠는가.
"일단 안으로 들어와. 마을 사람들에게 보여서 좋을 것은 없으니까. 이 마을 사람들은 과거 마족에 의해서 마을이 불타고 가족이 죽은 것들 때문에 마족에 대한 감정이 그다지 좋지 않아. 마을 사람들의 눈에 띄기라도 하면 널 죽이겠다고 달려들 이도 적지 않을 거야. 그러니까 이야기는 안에서 시작하자."
이어 그는 안으로 들어오라는 듯이 그녀를 바라보며 손짓했다. 그녀가 들어왔다면 아마 문을 바로 닫았고 그녀를 바라보며 용건을 이야기하라는 듯, 조금은 싸늘한 눈빛으로 바라봤을 것이다.
/자기 전에 이어준 것이 보여서 잇고 바로 자러 가볼게! 이어주면 내일 시간 되면 바로 이을게!
>>796 소피게네이아는 신발을 신지 않는다. 낫처럼 푸른 맹금의 발톱이 바닥에 닿을 때마다 빗방울이 유리를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지나간 바닥에는 긁힌 자국, 파인 자국이 없었다. 그녀는 단신으로 이 마을의 모두를 죽이고도 더 죽일 수 있다. 여기서 그녀가 두려워하는 것은 단 하나. 용사뿐이다.
전쟁 후 인간들에겐 그런 소피게네이아를 통제하기 위한 수단이 필요했다. 그녀의 목에는 예속의 주문이 감겨 따라다닌다. 하지만 주문이 불규칙적으로 점멸하는 것이 척 보아도 정상적인 상태가 아니었다. 모종의 방법으로 주문을 무력화한 것이리라. 시간 제한이 있겠지. 하루에 허락된 시간 얼마. 그 시간이 끝나면 주문이 돌아오고, 펑. 그녀는 목이 답답한지 표정을 찡그리며 발톱으로 벅벅 긁었다.
"시간이 없어. 짧게 할게."
"두 번째 전쟁이야. 이번에는 인간과 인간. 너랑 왕국."
부와 명예 그리고 사위. 받아들여야 했어. 마족이 와해되었으니 그 다음가는 왕실의 위협은 바로 용사 당신이야. 소피게네이아는 말했다. 그의 무력, 인망, 카리스마. 그가 나타나기 전까지 무력하게 유린당하기만 하던 왕실, 실추된 권위. 왕실이 뭘 했냐고 수군대는 사람들. 모든 것은 이미 정해져 있던 셈이었다.
"그들이 곧장 군대를 보내지는 않아. 그렇지만 이미 왕실은 내부적으로 숙청을 결의했어."
"그걸 내가 어떻게 아냐고 굳이 물어보진 마. 소위 높으신 분들께서 애완동물로 들인 마족이 한둘이 아니거든?"
나까지 포함해서...라는 말은 자존심 때문에 하지 못했다. 그나마 명성이 있던 마족들이 애완동물 취급이라도 받지. 그것도 못한 하급 마족들은 한낱 자원이 되고 말았다. 노동력, 재료 등등. 그녀는 어깨를 움츠리고 벌벌 떨면서도 끊임없이 말했다. 어쩌면 예전의 그 만월같던 눈빛이 완전히 죽지는 않았을지도.
"당신도 알아야겠지, 이 사실을. 궁금한 게 있으면 아는 선에서는 말해줄게. 시간이 허락하는 한."
자신도 모르게 지팡이를 쓰다듬고 있다는 사실을. 그녀는 조금 늦게 깨달았다. 큰 전투 같은 중요한 일을 앞두고 마음을 달래기 위해 이런 행동을 하곤 했다. 그래, 큰 일을 앞두고 있긴 하지. 소피게네이아는 매캐한 미소를 지었다.
아예 생각을 하지 않은 사안은 아니었다. 허나 자신은 부도 명예도 필요없었다. 그저 다시 이전처럼 평화롭게, 정말로 평화롭게 자신의 고향에서 사냥을 하면서 지내고 싶을 뿐이었다. 한낱 사냥꾼으로 살아가는 자신이 왕의 사위가 되면 무엇할 것이며 많은 부와 명예를 얻어봐야 무엇하겠는가. 몸에 맞지 않는 옷을 억지로 입는 것과 다를 것이 없었다. 무엇보다 왕실의 공주라면 당연히 타국의 왕자와 결혼하는 것이 일반적인 것 아니겠는가. 자신은 평민 출신의 사냥꾼일 뿐이었다.
허나 왕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내부적으로 숙청을 하겠다고 한다면 아마 마지막으로 자신을 회유하려고 할테고, 그것이 실패한다면 자신을 죽이려고 하겠지. 여행을 떠나고 동료들과 이것저것 많은 것을 체험하면서 사내 역시 그 정도는 계산할 수 있었다. 물론 이 모든 것이 전부 사실이라고 했을 때지만.
상당히 벌벌 떨기도 하고 목을 답답해하는 그런 모습을 바라보며 일단 이 마족이 상당히 겁을 먹거나 통제를 받고 있다는 것을 사내는 짐작할 수 있었다. 그러면서까지 여기에 와서 자신에게 그 사실을 알린단 말인가. 적어도 그녀에게 있어서 자신은 절대로 용서할 수 없는 원수였다. 자신이 마왕을 무찔렀고 마족을 사실상 파멸시켰기에 지금 그녀는 저런 꼴이 되지 않았던가. 그럼에도 왜 그녀는...
"너는 내가 밉지 않아? 왜 나에게 그 사실을 알려주는거지? 나에게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면 지금 너를 그 꼴로 만든거나 마찬가지인 내가 죽는 것을 알 수 있었을텐데. 설사 날 구해도 너에겐 아무런 이득도 없잖아."
물론 모든 마족이 나쁘고 사악한 존재가 아니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때로는 인간이 더욱 사악하고 나쁜 면이 있기도 했으니까. 하지만 그녀가 그런 좋은 마족인지는 그도 확신할 수 없었다. 그렇기에 그는 그것을 제일 알고 싶었다. 어째서 그녀가 자신에게 이런 사실을 이야기하는지.
"아무튼 네 말이 사실이라면 동료들을 다시 만날 수밖에 없겠어. 내가 위험하다는 것은 다른 동료들도 위험하다는 이야기니까. 부와 명예를 받아들인 이도 있지만 나처럼 모든 것을 거절하고 갈 길을 간 이도 있었으니까."
초능력이라는 단어는 이능력이 되었다. 초현실적인 능력이라는 단어는 평범한 일반인과 그렇지 않는 자들의 격차를 벌린다는 사회적 시선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저 다를 뿐인 능력이라는 이름을 붙여, 이능력자들은 조금 다른 세상을 살아간다. 좋다면 좋고, 나쁘다면 나쁜 세상. 이능력을 제대로 다룰 수 없는 어린 나이에는 평범한 사회 속에서 의도치 않은 사고를 일으킬 가능성이 높다는 이유로, 이능력으로 발생한 사고는 평범한 사고와는 견줄 수 없다는 이유로 다녀야할 학교마저 정해져 있다.
‘그리고 나는………’
이능력이라지만 거창하고 좋은 것만 있지는 않다. 하늘을 난다던지, 배도 번쩍 들어올릴 만큼 힘이 세진다던지 그런 것만 있지는 않다.
‘네잎클로버에서 떨어진 한 잎.’
능력을 다루는게 서툴러서 시도때도 없이 능력을 써버리는 실수는, 이능력자들이라면야 당연히 겪는다. 소녀도 그랬다. 그러니 이능력자들만이 다니는 학교를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그건 불행한 사고에 휘말릴 타인을 위한 것인데, 소녀가 의도치 않게 능력을 써버린다면 그건…
“아야야….”
주변의 타인이 겪을 불행을 자신에게 가져오는 이능력. 몸조심을 하며 혼자 다니고 다니려고 해도 쉽지가 않았다. 능력을 다루기 위해서는 능력을 사용하며 연습하고 훈련해야 하는데 그러기 쉽지도 않다. 조절치 못하고 새어나오는 능력은 오늘도 어림없이 찾아왔다. 이미 반창고투성이인데 또 상처가 늘었다. 황급히 자리를 피해 사람을 피해 학교 뒷뜰로 향한다. 점심 시간이 너무 길다.
“아무도… 없죠…?”
돌다리도 두들겨보고 건너라고, 학교 건물 벽에 조심히 손을 디뎌 빼꼼 고개를 내밀며 확인한다. 왠지 뒷뜰에 누가 있는 것 같았다. 뒤에 누가 있는 것도 같았고, 옆에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소녀는 걱정이 많았다.
>>798 "용사... 압도적인 무력이 있으니 무엇이든 칼로 내리치면 그만이요, 자잘한 것은 신경쓰지 않는건가? 동요조차 하지 않아. 당신답군 그래."
"하지만 내가 당신을 돕는다고 해서, 인간의 덕을 받아들여 개심했다거나 하는 일은 없었다는 것만 알아둬."
그녀는 확신에 차 있었다. 무엇이든 더 나아질 거라는 희망. 숲의 현자, 지혜의 상징인 부엉이는 어디까지를 생각하고 있을까.
"왕실이 계속 지배하면 우리는 노예, 당신이 왕실을 엎는 걸 도우면 우리는 공신이 되는 거야. 단순명료하지?"
동기는 단순하되 수단은 파격적이다. 마족이 용사를 돕는다. 누가 들으면 웃겨서든 화나서든 팔짝 뛰면서 공중제비를 돌 일이다. 강한 자를 따른다. 그것이 바로 마족의 도덕이다. 왕실이 제 발을 저리는 것과 같이, 용사 이전까지 무력함의 끝을 보이던 왕실은 강하지 않았다. 적어도 마족보다는 말이다.
단발 머리에 듬성듬성난 수염, 검은색 셔츠에 사막색 조끼를 걸친 남자는 아무렇지도 않게 대추야자를 입안에 집어넣었다. 글레이즈드가 아주 완벽할 정도로 반짝이는 그 대추야자를 한 입 집어 넣는 순간 강렬한 단 맛이 그의 뇌중추를 강타한다. 하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남자는 평온하게, 또 별 대수롭지 않게 대추야자를 입안에 집어넣고 재차 그것을 목구멍 너머로 넘길 뿐이었다. 사내는 '결함품'이었었다. 그의 능력은 처음 나왔을때 큰 주목을 받았다. 수많은 철들을 조종하여 액화 시키고 새로운 형상으로 담금질시킨다, 하지만 남자는 그 능력을 어릴때 이후로는—정확히 7살 이후로— 크게 내보이지 않았다. 아마 그 이상도 가능했겠지만, 애시당초 결함품을 나누는 기준에 대해 무감각한 남자에게 있어선, 그것은 별 대수롭지 않은 것이었다. 능력보다는 더 중요한 것, 그것은 사람과 사람이 대화를 하는 것 그런 남자에게 있어 이 교사라는 것은 천직이나 마찬가지였다. 본래부터 머리가 좋았다, 기 보다는 교사하는 직업에 끌려서 공부를 하게 되었다는 것이 정답일 것이다. 사람과 사람이 대화하는데에는 그만큼의 지식이 요구되고, 또 그만큼의 대응도 요구 되는 것이니까. 그렇게 첫 부임한 교탁에 서서 보낸 첫날은 '그저 그랬다.'였다
"음?"
그렇게 부임한지 3년차, 배울거 다 배우고, 정식 교편을 잡게 되었다. 달라진건 없었지만, 그의 일과 중 추가 된 것이 있었다. 바로 '숙직', 이 귀찮은 숙직이라는 것을 행하다 보면, 의외로 재밌는 상황을 많이 보게 된다. 기껏해봐야 퇴근하고 나면 맥주 한캔에 치킨 한마리 뜯는 재미가 고작이겠으나, 숙직을 서며 만나는 학생들은 전부 어딘가 재밌는 구석이 많았기에, 그는 이 숙직이라는 당번제를 즐기는 사람 중 하나였다. 애시당초 숙직실에 자신의 이불을 가져다 놓았으니 말 다하지 않았을까. 오늘도 그랬다. 이른 시각이지만 꽤나 재밌는 상황이 아니던가. 대추야자를 다시 지퍼백에서 꺼내 한입 뇸, 하고 집어 넣은 남자는 머리를 살짝 긁적이며 천천히 움직였다. 왠지 재밌는 장난감을 만났다는 듯이 그는 천천히 주변을 둘러보는 여자애의 뒤로 다가가 어깨를 손가락으로 콕콕 찌른 뒤, 자신의 지퍼백에거 글레이즈드가 잘 형성된 대추야자를 하나 꺼내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입을 열었다.
자신도 여행을 떠나고 여러가지를 배우고 익힌 몸이었다. 어쩌면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을까 생각을 하긴 했지만 설마 그 일이 정말로 일어날줄이야. 그녀의 눈에는 비치지 않을지도 모르나 사내는 애써 태연함을 연기하고 있었다. 여러모로 복잡한 심경이었다. 그들은 나를 죽이려고 할테지만 내가 그들을 처단해도 되는 것일까. 그것은 곧 인간 사이의 내전을 이야기하는 것이기도 했다. 인간들 중 수많은 이들이 피를 흘리게 될 테고, 결국엔 어느 한 쪽이 완전히 멸하게 되지 않겠는가.
"마족과 손을 잡고 왕국을 치자고? 그리고 내가 새로운 왕이 되고 너희를 공신으로 삼으라고?"
그건 마왕과 다를 바가 없지 않은가. 아니. 그것을 노리는 것일까. 자신을 새로운 마왕으로 만들기 위해서? 그리고 자신들은 해방되기 위해서? 상당히 위험한 발상이었다. 제 목숨이 위협받는 것은 사실이나 그렇다고 해서 왕가와 싸울지는 아직 정하지 못한 일이었다. 아니. 사실 왕가에 대해서는 크게 상관이 없었을지도 모른다. 물론 최소한의 충성심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무엇보다 널 어떻게 믿지? 방금 이야기했지? 인간의 덕을 받아들이고 개심한 것은 아니라고. 설사 너와 손을 잡고 왕국을 치고 엎는다고 하더라도 그 이후 너희들이 또 다시 이 마을을, 그리고 이 세상을 다시 불바다로 만들지 않는다는 보장이 어디에 있지? 개심한 것이 아니라면 너희는 또 다시 이 마을을, 더 나아가 이 세계를 지배하고 많은 피를 흘리게 하려는 이야기와 다를 바가 없을텐데?"
그렇다. 사내는 그녀를 믿을 수 없었다. 지금 당장의 위기는 어떻게 모면한다고 치더라도 그 이후는 아직 알 수 없었다. 자신은 인간이고, 인간 그 자체를 멸하고 싶진 않았으니까.
귀신이라도 본 것처럼 소스라치게 놀란 소녀는 몸을 잔뜩 움츠리며 뒤돌아보았다. 아무도 없느냐고 물어본 안부 인사는 뒷뜰에 먼저 자리잡은 누군가를 위한 것이었지, 뒤에서 눈치채지 못한 채 다가온 누군가를 위한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부르르 떨고 한 발자국 물러난 것을 보면 애처로울 지경이었다. 막다른 골목길에서 고양이를 마주친 쥐새끼마냥 경계심이 높았고 방어적이었다. 다행히 어깨를 콕콕 찔러대던 손가락의 주인이 교칙과 사회에 반항하는 학생으로 보이진 않았기에 긴장은 조금이나마 풀 수 있었다. 완전히 풀지 못하는 이유는 소녀의 이능력 때문이었고, 또 하나는 이 사람이 누구인지 알아보질 못 했기 때문이다. 선생님이라는 것을 알아보았다면 좋았을텐데, 모르는 사람이라고 생각해버린다. 그런 와중에도 모르는 사람에게 해를 끼칠까봐 남들은 이능력을 쓰고 싶어서, 뽐내고 싶어서 안달인데 실수로 써버릴까 아등바등하자니 긴장을 풀 때가 없었다.
“…아니요.”
고민하지도 않은 거절은 말하는 목소리나 맞추지 못하는 시선과는 다르게 단호했다. 유유자적하게 대추를 씹고 있을 여유는 없었다. 누구인지 알고서 음식을 건네받아 먹는단 말인가. 학교 생활을 좀 더 사람들 사이에서 섞여 지냈다면 선생님이라는 것쯤은 알았을텐데 안타까운 일이다.
“모르는 사람이 주는 건 받는게 아니랬어요. 죄송합니다.”
예의는 발라서 남자에게 공수 인사를 건네며 허리를 숙인다. 불행을 자석처럼 답싹답싹 붙이고 다녀 남들에게 불행을 미칠지 언정, 그건 이능력 탓이지 남을 불행 구렁텅이에 굴러 넣고 싶어서 그런 것이 아니다. 무엇보다 그 불행 구렁텅이에서 제일 허덕이는 건 소녀 본인이다. 성격은 모나기는 커녕 둥글었고 되려 소심하기까지 한 경향이 있었다. 그러니 모르는 사람이라고 의심하면서도 사과를 건네는 것이다.
교사가 천천히 턱을 쓰다듬으면서 잠시간 빙글빙글 웃는다. 혹시나가 역시나라고, 이번 학생도 만만치 않게 재밌는 반응을 보여주고 있었다. 교복을 보면 자신 학교의 학생인거 같은데, 그렇다고 이 학교 최대의 글러먹은 교사(?)인 자신을 못 알아보다니, 이건 또 의외의 반응이다. 보통 자신을 보면 미친 숙직맨, 아니면 단거 학살자라는 별명으로 불러대는데 말이다. 게다가 맞지 않게 교수법은 또 유명해서 중타 이상은 친다는게 자신의 평이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이 학교에 있다면 분명히 이능력자인것 같긴 한데 도무지 무슨 유형인지 알수가 없다는 듯이 그는 잠시간 소녀를 응시 하며 말했다.
"나? 이 학교에 도둑질 하러 왔는데?"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구라를 치는 남자였다. 숙직을 서는 남자가 왜 여기를 도둑질 한단 말인가, 오히려 이곳을 지키는 번견이 자신이었으니까. 다시 재차 글레이즈드 된 대추야자를 먹으면서 그는 재밌다는 듯 소녀를 바라보았다. 연신 자신에게 사과를 하는 모습도, 또 움츠러든 모습도, 왠지 모르게 조그마한 소동물을 보는 느낌이었던 것일까, 남자는 천천히 다리를 구부려 소녀와 시선을 맞추려 한 뒤 입을 열었다.
"도둑질 하기 전에, 도둑한테 사과를 하는 것도 좀 이상하지 않니?"
아주 입만 열면 구라가 튀어나온다. 그렇게 생각하면서 그는 목에 걸린 교원증이 보이지 않게 살짝 손으로 조끼 안쪽으로 집어 넣으며, 소녀의 반응을 지켜본다. 이런 학생의 경우는 본래 소심한 성격에 더불어, 주변 영향이 커서 다른 사람들에게 질타를 받을까봐 무서워 해 과민반응을 보이는 경우가 많았다. 무리하게 손을 뻗는다기 보다는 천천히 저 돋아있는 가시를 스스로 걷어내고 몸을 일으킬수 있게 도와줘야 하는 것이 교사의 역할, 이라고 남자는 생각하며 턱수염을 천천히 쓰다듬었다.
"그리고 모르는 사람이라고 했는데, 이미 이렇게 보고 있는 것도 알게 된거 아닐까. 독 안들었어. 좀 많이 달 뿐이야. 단 거 먹으면 마음이 편해진다? 혹시 아니, 단거 먹으면 머리 회전이 빨라진다니까, 너도 갑자기 퍼뜩!! 떠오르지 않을지 말이야."
남자가 빙글빙글 웃는다. 어차피 믿지 않을 것, 이대로 구라로 밀고 나가자고 결심한 남자였다.
소스라치게 놀란 것이 가라앉으면, 놀라서 요런스럽게 뛰던 심장은 부끄러워서 요란스레 뛰었다. 사실 남자가 한 마디 얹지만 않았어도 태연하게 굴어보기라도 했을텐데, 반응 죽인다며 빙글빙글 웃는 낯에 어떻게 민망해하지 않을 수 있을까. 소녀의 낯짝은 그렇게 두껍지 않았다. 오히려 얇디 얇아 투명하기 저 안쪽 속내까지 다 비추어보이는 편이었다. 얼굴에 어린 붉은 열기도 민망하기 때문임이 확실했다.
“학, 학교에 도둑질이요…?”
훔칠게 무엇이 있다고 학교에 도둑질을 하러온 것인지 이해가 가질 않아 끔뻑거리는 두 눈이 남자를 담는다. 사람을 외모로 판단하고 들면 안 된다지만, 듬성듬성 자란 수염과 대추야자를 보니 궁핍한 생활에 대추야자로 끼니를 연명하는 생계형 범죄자일지도 모른다는 추측이 들었다. 그렇다면 학교에 훔치러 온 것은 필시 매점에 있는 간식들일 것이다. 그렇다면 학교에 도둑질하러 온 것은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도둑질을 이해할 수는 없었다. 이 자를 막아야할텐데, 소녀의 이능력은 이런 상황에 썩 유리하질 못했다. 이 남자도 이능력을 갖고 있을지, 말로 설득할 수 있을지 머릿속으로 이리저리 상황을 재보는 표정이 너무나 고민스러웠다.
“도둑인 줄 몰랐으니까요…. 그것도 훔친 거에요?”
도둑이라는 남자가 하는 지적에 입술을 오물 씹었다. 잘근 씹지도 못하고 오물거리듯이. 도둑에게 받은 지적이 분하다는 표현 치고는 작았다. 그나마 대추야자도 훔친 거냐는 의문인지 지적일지 모르는 말 한 마디라도 해서 다행이다.
“범죄자랑 아는 사이 하기 싫은데요…….”
소심한 태도치고는 그래도 할 말은 다 한다. 단 거고 뭐고 도둑이라는 자가 내미는 걸 받아먹을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아마도 아까 잘못 사용한 이능력이 가져온 불행은, 무릎에 새로운 상처가 늘어난 것 뿐만 아니라 학교에서 도둑을 만나는 것까지 포함인 것 같다고 소녀는 생각했다.
“여기 학교, 이능력자만 있는 건 아세요? 그, 돌아가시는 게… 좋을 걸요. 가는 길에 자수도 하시고…….”
지극히 상냥한 발언이다.
# 재밌게 이어줘서 고마워~! 그리고 글러먹기는 무슨 훌륭한 교사시다~!!! 대추야자를 급식으로(?) ☺️
야는 지금 내 얼굴을 모른다! 내 과목이 뭔지도 모른다! 라고 생각이 퍼뜩 든 그는 순식간에 도둑질에 성공한 물건을 지어내었다. 그도 그럴게 이미 도둑질에 성공했을수 밖에 없는게 지금 현재 본인 담당과목이 중국어였으니까, 어차피 이능력 시험이야 자기 관심 밖이고 자기도 문제 출제에 참여했으나 순수 100퍼센트, 본인이 낸 과목은 중국어뿐이었다. 그걸 증명하기라도 하듯, 마치 모 퍼렁고양이 로봇 주머니 뒤지는 것 마냥 그는 조끼 안쪽에서 자기가 출제해낸 답안지와 시험지를 흔들어 보이면서 히죽 웃어보였다. 뭐, 왜, 뭐, 내가 낸 시험지고 내 답안지야, 그거 좀 들고 있는다고 대수냐?!
"대추야자는 중국어 교사 뒤통수 후려 치고 훔쳤는데?"
이젠 자기 뒤통수를 자기가 쳤다고 구라치는 교사였다. 그러면서 이제 다음번에 어떻게 골려먹을까 고민읋 하면서 그는 대추야자를 다시 입안에 집어 넣었다. 능력의 특성상 에너지 소비가 많은 그로서는 당연히 주식에 가까운 주전부리였기에 항상 들고다니면서 고칼로리, 고열량 음식을 입에 집어 넣을 수 밖에 없었다. 그 상황을 보면서 어떤 여교사는 사기야!! 라고 외쳤지만, 그가 능력을 쓸때마다 빠져나가는 살, 나중에는 피골이 상접한 모습을 보며 결국엔 입을 다물 수 밖에 없었다. 그렇기에 이 대추야자는 자신의 능력용 대비 식품이었던 거다. 그렇게 다음 구라를 이어나가려는 순간,
[아, 아. 방송반에서 알립니다. 지금 교정 뒷편에 계신 강 소랑 중쌤, 학생주임님이 순진한 얘 그만 골려먹으라고 하셨습니다. 이상 전달 끝.] "......"
그러고보니 까먹고 있었다. 학생주임의 능력, 천리안. 백에 백 자신이 농땡이 피우고 있는거 알고 지금 어린애 골려 먹는 장면 보면서 팝콘 뜯다가 시험지 가지고 장난치는거 보고 지금 뭐라 그런거겠지. 그는 그렇게 생각하며 자신이 아닌거 마냥 다시 자신의 학생(?)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나도 이능력자니까... 어...."
젠장, 다된 밥에 코풀기라니.....
"이제 도둑 아니라고 해야하나?"
그걸 말이라고 하냐!!
"끄응..... 정식 소개하마, 뭐 오리엔테이션에서 안들었겠지만, 지금 현재 1학년부터 3학년까지 중국어 과정을 총괄하는 강 소랑이다. 뭐.... 도둑은 부업이야."
죽어서 현세에 남는 것이 순리에 있어서는 이례적인 일인 이유가 이런 법이다. 정상적인 방식으로 죽게된다면 전세의 기억은 잃게된다. 다만 이렇게 망령으로 남는다는 것은 자신이 자신으로서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을 기피할 수 밖에 없다. 망령으로서 존재하는 자아는 아직도 죽은 것이 아닌 죽기 전의 전세의 기억을 가진채로 남아있기에, 성불한다는 것은 다시말해 스스로의 소멸과도 다름 없었다.
그런 의미에서는 자신이 하고자하는 존재의 소멸을 막고자하는 것과 틀리지는 않은 것인가.
"죽기 전에 이루지 못한것이 한이고 원념이지 않은가. 죽고도 망령으로 남아있는 것은 그것이 원인이다. 그 외에 현세에 영이 떠도는 일이 있다고 생각하고 싶은건가? 삶에 가볍고 무겁고의 차이는 없다. 그저 삶에 있어서 이루지 못한 것이 현세를 떠도는 원인이니까."
자신은 어떠한가 소영의 질문에 한마디로 생각할 이유조차 없다라 단정할 수 있었다.
"새로운 삶조차 부여받지 못한 내가 생각할 이유가 있겠나? 나는 죽는 것이 아니라 말그대로 사라진다. 존재해선 안되었으니까."
해한사는 저승차사가 해야할 일의 일부인 망령의 처리를 위해 대행직으로 부여된 임시직에 불과했다. 그만큼의 편의를 제공받았지만.
"남겨진 것들을 하나하나 끝내서 성불시키는게 내 일이니 내가 하는 것이 마땅히 해야할 도리다."
나라는 이레귤러이기에 이레귤러로서 해야할 일은 실패하지 않고 모두 끝냈다. 그게 내 일이다.
>>803 "싸우기 싫으면 영원히 도망치면 돼. 우리가 싫으면 혼자 하면 돼. 그렇게 하고 싶다면."
하지만 정말 그걸 원해? 소피게네이아는 물었다. 부와 명예를 포기하면서까지 지키고자 했던 삶을 내버리고 영원히 도망치는 것. 단신의 가공할 무력으로 왕국의 군대를 깨부실지언정, 반역에 필수적인 거점들을 점령하고 유지하지 못하여 결국 파괴만을 반복하는...그래. 정말 마족처럼 될지. 당신이 바라는게 그것인가.
"그냥 당신이 마족들을 붙들고 뜻대로 휘두르는게 더 낫지 않을까? 상호 계약을 하자구."
그쪽은 머릿수가 필요하다. 이쪽은 더 나은 처우를 원한다. 서로가 서로에게 필요한 것이 있다. 남은 것은 악마와의 거래다.
"이 자리에서 바로 정하라곤 하지 않을게. 하지만 서두르는게 좋아. 내가 왕실의 참모라면 당신에게 씌워진 영웅의 이미지부터 벗겨내려고 할 테고, 그건 지금 당장이라도 시작할 수 있지."
민중들은 우매한 것이 그 성질이라 진실을 좆지 않고 자신이 좆는 것을 진실로 탈바꿈시킨다. 왕국의 지배계층은 그것을 다루는 것에 이골이 난 존재들이다. 무력에서 밀리니 그들이라도 휘어잡아 용사를 고립시키려 하겠지. 그러면 밀리는 무력을 만회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걸까. 용사와 같은 편에서 싸우다보니 힘에 대한 감각이 마비가 되었나. 멍청한 종자들. 덕분에 기회가 생겼지만 보면 볼 수록 웃음만 나와.
"시간은 계속 흐르고 있어."
그녀는 목에 채워진 주문을 과시하듯 내보였다. 여전히 불안정하게 깜박였다. 시간이 촉박한건 양 쪽이 피차일반이었다.
꽤나 간교하게 악마의 속삭임을 읊고 있다고 사내는 생각했다. 자신이 마족들을 붙들고 뜻대로 휘두르는 것이 낫지 않냐고 이야기를 하나 정말로 그렇게 하면 자신이 마왕과 다를 것이 뭔가. 마족을 이끌고 인류를 멸하려고 하고 공포에 떨게 한 그 존재와 다를 것이 뭐란 말인가. 그 선택을 하는 것은 사람으로서의 선을 넘어버리는 무언가가 아닐까 그는 생각했다. 그렇기에 사내는 쉽사리 그 말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입을 꾹 다물었다.
"마치 말만 들으면 나에게 다음 마왕이라도 되라고 말하는 것 같은 거 알아?"
시간은 상당히 촉박할지도 모르고 그 속에서 선택을 반드시 하나를 해야만 했다. 이대로 죽는가. 아니면 영원히 쫓기는가. 자신이 바라는 것은 그저 이전의 삶일 뿐인데 대체 어쩌다가 이렇게 된 것인지 숨을 약하게 내쉬면서 사내는 결심을 했다는 듯이 고개를 조용히 위아래로 끄덕였다. 이대로 죽을 순 없었다. 허나 그렇다고 저 마족의 말 그대로를 따를 생각도 없었다.
"움직이겠어. 허나 네 뜻대로 하진 않아. 너에게 걸려있는 주문을 해체하는 대신에 내 옛 동료들이 무사한지부터 확인해줘. 그리고 만약 위험하다고 한다면, 이쪽으로 데리고 와 줘. 그 정도의 시간은 당연히 있겠지? 바로 왕가의 사람들이 움직이진 않을테니까."
마족의 힘을 빌리지 않고 자신의 옛 동료들과 다시 뭉친다. 그리고 그 이후에 어떻게 할지를 결정하고 필요하다면 싸운다. 허나 싸우지 않고 빠져나갈 길이 있다면 그것을 택하고 싶었다. 그렇기에 사내는 이 마족의 주문을 해체해주고 역으로 그녀를 이용하기로 마음 먹었다. 이 마족이 자신을 이용하려는 것과 똑같이. 설사 피를 흘리는 싸움을 하지 않더라도 수고했으니 해방시켜주는 것 정도는 대가로 치룰 수 있지 않겠는가.
"나쁜 이야기는 아닐 거야. 일단 너에게는 무조건적으로 자유가 제공되니까. 아무리 뭐라고 해도 난 마족들을 부릴 생각이 없어. 마왕 같은 존재가 되고 싶진 않으니까. 그렇기에 마지막까지도 난 내 동료들과 함께 행동할거야."
설사 그러다가 죽는다고 한다면 조금 분할지도 모르지만, 그만큼은 자신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아무리 용사라고 하더라도 죽음이 피해가는 것은 절대로 아니었으니까.
>>807 소영은 대답 대신 웃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서희에게 기대 따위 하지 않는다는 듯이 말이다. 오히려 무관심에 가까운 가벼운 형태의 태도로 소영은 아무렇지 않다는 듯이 말을 가볍게 던졌다. 마치 그것이 농담이라도 된다는 듯이.
"그렇겠지. 이해 못할거라고 생각했어. 어차피 네가 어떤 사람이든, 어쩌다 날 보게 되었든... 크게 기대하지 않았는걸. 서희는 귀신에 대한 철학이 있을지 모르겠지만 당사자인 나는 그런 건 모르겠어서."
자신이었던 존재가 완전히 사라지는 것에 대한 두려움에 소영은 떠나는 것을 망설이고 있다 해도 틀린 말은 아니었다. 다만 모든 것은 한 가지 해답만이 전부는 아니었다. 세상이 1과 0으로 단순하게 이루어졌다면 서희의 말도 얼추 맞기는 했다. 그 막연한 두려움이 소영의 미련이기도 했고 그것이 일찍 죽은 것에서 비롯되었으니 한 일 수도 있었다. 다만 뭇 삶이 그러하듯 한 가지 이유만으로 사는 사람도 죽는 사람도 없었다. 하물며 일찍 죽게 된 사람이라면 그 삶의 이유와 죽지 않고자 하는 이유가 얼마나 많을까. 그런 의미에서 소영의 한은 사실 삶을 향한 미련에 가까웠고, 그 광범위한 주소를 가늠해 추측하는건 생판 모르는 남으로써는 사실 불가능에 가까웠다.
한편으로는 갑작스레 거만한 자세로 알 수 없는 말을 늘어놓는 것에 대한 무의식적인 반감도 있었을지 모른다. 결국 한을 달랜다는 것은 사람을 위로한다는 것인데, 시대가 흐르고 대상이 달라진다면 그에 대한 언행도 달라져야만 했던 법이다. 어리다는 것이 나이만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면, 서희의 서투름도 어떤 의미로는 어리다 봄 직 했다.
그러다 문득 서희가 늘어놓는 말에 소영의 시선이 조금 누그러진다. 통 속내를 알 수 없을 것 같은 사람에게서 이유를 듣는 것이 신기했던가.
"그렇구나. 그럼 지금 나와 같은 기분이겠네. 나는 다음 생이나 천국 같은 건 잘 모르겠지만, 어떻게 된다 하더라도 이 다음에 전소영이라는 사람은 없는 거잖아. 나는 내가 되어서 살아왔던 시간과 감정들, 그리고 기억이 소중한거지 다음 생이니 사후 세계니 하는 곳에서 어떤 식으로 존재하든지 중요하지 않아."
애써 밝은 체 하던 소영의 낯빛에 그림자가 드리웠다. 밝고 상냥해 보이던 인상에 그늘이 지니 이질적인 감이 유난히 느껴졌고 어느새 어스름이 낀 창 밖의 어둠에 의해 조금은 무거운 분위기가 흘렀다. 표정 변화 없는 얼굴로 서희를 보면서 소영은 나즈막히 말을 꺼냈다.
"그러니 서희도 알거야. 사라진다는 게 얼마나 막연하고 두려운 일인지. 내 한이라, 그건 아마 일찍 사라져야 한다는 것에 대한 미련이 아닐까?"
미련, 그 미련함과도 닮은 단어는 어쩌면 사자(死者)가 소원을 가지는 것이 미련한 짓이었기 때문에 기인된 단어였는지도 몰랐다. 산 자에게 말할수도 신에게 한탄하기에도 멀고 사사로운 것들을 그나마도 이루고 싶다며 '미련'을 가지는 것. 그럼에도 그들을 돕겠다고 나선다면 들을 준비가 된 사람이라는 뜻이기도 했다. 죽음 이후에도 남아버린 자잘한 미련함을 들어주고 위로해 줄 사람.
그렇지만 소영에게 서희는 그런 사람은 못 되었다. 어렸던 그에게 몇 백살이나 먹은 별종은 별달리 의지가 되지도 공감이 가지도 않는 존재였으니까. 첫 단추부터 어긋난 셈이었지만 무엇보다도 소영이 마음을 열지 못하는 건 서희가 감추는 것이 있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811 어둠을 밝히던 담뱃대의 불꽃이 일순 꺼지자, 소영의 눈은 되려 둥글게 뜨였다. 이윽고 겨눠지는 담뱃대의 끝을 눈끝으로 쫓으며 동그란 눈을 빙글빙글 돌리더니 제법 건방진 말투로 늘어놓는 조금 전 과는 다른 종류의 이야기에 눈을 유하게 누그러뜨렸다. 아무래도 관심이 생겨 호기심을 끌었다고 봐야겠지. 그러나 관심을 빛내는 것과 별개로 소영은 바로 입을 열지는 않았고 소희의 말이 끝나서야 말을 내뱉었다.
"그게 네 진짜 마음이야? 이상한 코스프레 같은 게 아니고 진짜 서희의 마음."
그러다 다시금 말을 셈하는지 입을 가리고 곰곰히 생각하다가 특유의 상냥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상냥하기에 굳이 들여다 볼 가치를 느끼지 못하는 웃음. 하지만 그 상냥함 안에는 분명 속내가 있었다. 누구도 신경쓰지 않았던 영역이었겠지만, 상냥한 사람에게도 나쁜 마음 정도는 있었으며... 지금 소영은 조금 나쁜 마음을 품고 있었다. 다른 말로 하자면 이기심.
"네 몸에 들어가도 좋다고 했지? 피아노를 치려면 네 몸에 들어가야 한다고. 그렇다는 건 네 몸에 들어가면 살아있는 사람처럼 지낼 수 있다는 뜻이지?"
이후의 말은 짐작할 법 했다. 여느 귀신처럼 네 몸을 내놔라 할 수도 있었다. 다만 소영의 얼굴을 보면 그런 생각이 아니라는 것 쯤은 알 수 있었다. 그 부드러운 미소와 함께 불안해 보이는 얼굴은 온갖 잡생각을 피어올리고 남을 쯤에야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장우현이 왜 그런 의뢰를 했는지도 알고 있어? 그 애는... 내가 죽는 모습을 본 첫 목격자거든. 죽은 뒤의 내가 뭘 하고 있을 지, 궁금해 할 이유도 없고. 장우현과는... 인생에서 유일한 실수였다고 할 관계였어."
고작 고등학교 재학 후 3년이 지난 시기의 사회 초년생이 인생에서 유일한 실수였다고 불릴법한 일이 얼마나 있을까. 확실한 건 협주곡을 연주하고 싶다던 바램과 장우현은 아주 먼 관계가 아니라는 거였다.
지금 주문을 풀어달라고 요청하는 눈앞의 마족을 바라보며 사내는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하다면 당연했다. 저 주문을 가지고 자유롭게 움직일 수는 없을테니까. 지금 그녀가 이런저런 이유를 대는 것처럼. 저 정도 주문을 풀어버리는 것은 매우 간단한 일이었다. 마왕의 성에서 싸울 때도 얼마나 많은 주문을 파괴하고 풀었던가. 물론 정말로 전문적으로 마법을 해체하는 제 동료 중 마법사에 비하면 한참 떨어지는 실력이었으나 그래도 이 정도 주문이라면 자신도 파괴할 수 있다고 생각하며 그는 눈을 감고 주문을 외웠다.
마법의 핵. 그것을 파괴하는 주문은 상당히 정신을 집중해야 사용할 수 있었다. 물론 어디까지나 자신에 한해서. 이게 바로 자신이 아직 실력이 떨어진다는 가장 큰 증거였다. 그 마법사는 아주 가볍게 여러 주문을 손쉽게 파괴했었으니까. 이내 아무런 말 없이 조용히 정신을 집중하던 사내는 영창을 마쳤고 이내 기합을 주었다. 쨍그랑. 가볍게 뭔가가 깨지는 소리와 함께 눈앞에 있는 마족에게 걸려있는 주문은 해체되었다.
물론 그녀가 배신하지 않으리라는 법은 없었다. 허나 배신한다고 해도 자신에게 크게 타격이 갈 것은 없었다. 많은 시간이 지난 것도 아니었고 자신은 아직 현역 사냥꾼이었다. 힘을 잃은 것도 아니었고. 그리고 자신의 동료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쉽게 목숨을 잃을 이가 아니었기에 별 일이 없을 거라고 사내는 판단했다.
"약속은 지켰어. 그럼 이젠 네가 약속을 지킬 차례야. 알고 있겠지?"
물론 여기서 그녀가 자유로워졌으니 바로 도망치지 말란 법은 없었다. 허나 도망친다고 한다면 도망치는대로 자신은 자신이 생각하는 바를 이루면 될 일이었다. 어쨌든 동료와 합류해서 이 상황을 해결하는 것이 먼저였으니까. 그 수단 중 하나가 사라진다고 한들, 딱히 그에게 타격이 오거나 할 일은 없었다.
"병사를 보내기 전까지는 아직 시간이 있어. 용사라는 타이틀이 설사 벗겨진다고 해도... 애초에 그런 것을 원해서 여행을 한 것도 아닐 뿐더러 당장 위해가 생기는 것은 아니니까. 그러니까 제대로만 시행해줘. 알았지?"
이 순간까지도 그는 끝까지 명예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저 아무런 위해도 없이 평화롭게, 조용히 사냥만 하고 살고 싶었을 뿐.
이미 훔쳤다니, 소녀의 눈동자가 이보다 더 커질 수 있을까 염려스러울 만큼 동그랗게 뜨였다. 심지어 훔친 것이 매점에서 파는 빵도 아니고 이번 중간고사에서 쓰일 중국어 과목 시험지와 답안지라고 한다. 보란듯이 조끼 안쪽에서 꺼내 보여주기까지 한다. 이능력자만 다니는 학교에 선생님들이 이능력자인 것도 당연했고, 이능력자들을 피해 시험지를 훔쳐낸 저 도둑도 분명 이능력자일 것이다. 그런 결론을 내리니 이번에는 표정이 심각해진다. 도둑을 붙잡기 위해 쓸 수 있는 방법은 동귀어진하는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불행을 끌어당기고 끌어당겨서, 바로 앞에 있는 이 도둑도 휘말리게 하면 어떤 불행이 올 지는 몰라도 붙잡을 수는 있지 않을까.
“뒤, 뒷통수를요…?”
이제는 놀라지 못하고 겁에 질렸다. 중요한 문서를 훔치는 것도 모잘라 사람을 해하다니 도둑이 아니라 강도 아닌가. 뒷통수에 피를 철철 흘리면서 쓰러져있는 선생님의 모습을, 상상할 수 있는 최악을 떠올렸다. 사람의 뒷통수를 후려치고 훔쳤다는 대추야자를 먹고 있는 것도, 그 대추야자를 먹으라고 권했던 것도 무서워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눈을 감았다 뜨면 꿈이었으면 좋겠다고, 누군가의 불행을 가져와서 악몽을 꿔버린 것이면 좋겠다는 작은 바람이 있었지만 이루어지지는 않았다.
“주… 죽인 건 아니죠……?”
웬만해서야 사람을 죽였냐는 질문에 그렇다고 대답하는 살인자는 없겠지만, 지금 그런 올바른 논리적 사고를 하기에는 영 제정신이 아니었다. 그리고 그 떄 교내 방송이 울렸다. 방송반에서 알린다며, 교정 뒷편에 있는…
“서, 선생님…?”
중쌤이라면, 중국어 선생님을 뜻할 것이다. 시험지와 답안지를 도난당하고, 대추야자를 빼앗기고 뒷통수를 후려맞았을 선생님이 눈 앞에 있다. 방송에 의문을 가득 품고 강도, 아니, 선생님으로 추정되는 남자를 꿈뻑꿈뻑 바라보면 선생님이라는 자기소개가 나왔다. 부업이 도둑이라는 부연설명도 있었지만 신뢰는 이미 바닥났다.
“선생님이 거짓말 하면 안 돼요.”
소심한 구석은 여전했지만 시선이 조금 불량해졌다. 그러면 안 된다고 핀잔주고 타박주고 싶은 마음이 시선에 조금 담겼다.
"오, 의외의 정답지. 상으로 너네 반에 가산점 +2... 는 그 권한은 없으니 중국어 수행평가 등급업이라도 시켜주마."
참 잘했어요, 교사의 표정으로 장난기 반, 대단함 반이 섞인 감정을 목소리에 담아내며 도장을 찍는 시늉을 한다. 교사 답지 않으면서 교사 다운 모습이 있다면 이런 모습일까, 하지만 어째서 그런 단순한 답문에 대하여 교사는 왜 그런 후하디 후한 수행평가 등급 상승을 제시한 것일까란 의문이 남는다. 그 질문에 대해 교사가 입가에 미소를 지우지 않은채 답변을 던진다.
"첫째, 아까의 의사 표현, 방금 전까지 겁에 질린 그런 표정보다도 좀 더 심지가 굳어진 듯한 표정이 첫번째고,"
지퍼백 가득 담겨있는 대추야자를 하나 더 꺼내 손가락으로 튕겨 하늘 높이 던진뒤 입안으로 골인, 하지만 자세히 보면 궤도가 살짝 엇나가 이마에 맞을뻔 한 것을 새끼 손톱만한 강철 구슬이 살짝 쳐서 궤도를 뒤틀었다는 점을 눈치 빠른 사람은 알수 있을것이다. 별거 없다는 듯 씨앗까지 다 부숴먹은 교사는 재차 말을 이었다.
"두번째, 눈빛이 좋아졌어. 겁에 질린 쥐에서 조금 나아져서 그래도 날 선 고양이 같다는 느낌이지."
아주 잠깐의 대화동안에 그는 마치 소녀를 관찰했다는 듯이 재밌는 상대를 만났다는 느낌으로 입을 열었다. 장난스럽게 교원증을 꺼내 허공으로 빙빙 돌리며 그는 입꼬리를 올렸다. 확실히 교사의 말이 그랬다. 분명 그녀를 자극하였으나, 오히려 그것이 긍정적인 반응을 일으킬 것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는 듯 아주 잠깐이나마 변화된 모습에 교사는 가산점을 부여한 것이리라.
"그래도 만점은 아니니까, 그럼 시작해볼까. 어차피 이제 이 이후로 시간 많지?"
그는 천천히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내들었다. 그것은 다름 아닌 보충수업 신청서. 마치 어떤 것을 알고 있다는 듯 교사는 재차 입을 열었다.
"무슨 사정인지는 모르겠지만, 지금까지의 태도를 보면 대인기피증에 여러가지 복합적 요소가 가미된 등교거부도 있었을거 같은데, 어때. 지금부터 나랑 보충수업 좀 하고 출석점수 채울래? 아니면 유급할래? 대신, 수업은 되게 짧게 이루어질꺼고, 추가로 이능력 조언도 해주마."
선택지는 많았다. 다만 교사가 해줄수 있는 것은 선택지에 대한 조언을 해주는 것 뿐.
//놀러온데에서 의무감을 느끼는 순간, 그건 놀이가 아니야! 그러니까 늦게 온데에 대해 너무 그럴 필요 없어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덤으로 선생님의 모습은 20~30대 기무라 타쿠야를 연상하면 매우 편한데스, 거기에 살짝 가꾸지 않은 야성미를 더하먄 완벽함!!
"어떤 쪽이냐 묻는다면 아까까지는 공무원이고. 지금은 당신이 계율의 제약을 풀었으니까 이쪽이 본연이라고 해야하나. 좋을대로 생각해. 아 이건 질문으로는 안쳐도 상관없어. 보통은 여기까지는 안오거든."
사람의 속내는 사람이 어찌알겠냐만 죽은 사람이지만서도, 직감적으로 느끼기에 이건 아까와는 다른의미의 이끌림을 불러오는데에는 성공했나보다. 이윽고 짓는 웃음은 상냥한 사람이 가면을 쓴 미소라고 생각했다. 이건 꽤 욕망이 감도는 부류다.
"체격 차를 제외하고는 생전에 움직이던 것과 별차이는 없겠지. '체격'만 제외하고는."
부끄러운 이야기지만 서영이 막상 반말을 하는 이유가 있다면 역시 내 체격이 문제일것이다. 기껏해야 중학생정도에 성장이 멈춘듯한 체격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체격을 한번더 강조하는 신경질 부분을 드러냈다.
"의뢰자랑 당신의 관계는 내가 알고있는 거랑은 꽤 다르네. 뭐 의뢰자의 태도를 보아하니 짐작은 가지만. 궁금해할 이유가 없다라는 당신의 단서가 있다면 답은 그거겠네. 죽은 사람을 봤다는 그 두려움을 지우려고 마치 더럽혀진걸 깨끗하게 하고 싶다 라고 해야하나. 하나 더 있다면 이 장소에 유령이 있다는 소문. 그걸 없애는데 강박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었어."
지금은 졸업한 인간이 아니던가? 그런 인간이 이미 거의 관계가 없어진 장소의 유령 소문을 없애려고 한다는건 꽤 의아해 할 만한 소재였다.그게 내 일과는 크게 관련이 없으니 아무런 생각도 감정도 안들었지만서도. 여기까지 짚고 넘어간다면 조금은 파볼만한 이야기가 된다.
"행여나 내 몸을 빌려서 사람을 해하던가, 범죄로 이용하려 한다면 바로 몸에서 쫒아낼거야. 계율위반이니까."
>>818 특유의 감정을 감추던 미소가 맘에 들어차는 것을 들은건지 흔쾌한 미소로 변해 얼굴 가득 피어 있었다. 무엇이 즐거운지 몰라도 늘 웃는 상의 그였지만, 지금껏 지었던 미소와 비교되지 않는 즐거워 보이는 웃음이었다. 소영은 이윽고 눈을 가늘게 뜨며 말꼬리를 늘였다. 흥미로운 것을 찾은 듯한 태도로.
"그래? 서희도 많이 피곤할 것 같네. 그런 이상한 태도로 사람을을 대해야 한다는 거, 많이 불편할거라고 생각하거든. 마음 같아서는 즐거운 일을 잔뜩 경험하게 해주고 싶지만."
키득거리는 웃음을 보면 이제 그의 속내가 보일 것이다. 그는 속 알맹이 없는 말에 능숙했으며 그 선해 보이는 얼굴은 그의 특기였다. 어쩌면 생전에 살았던 집단에서는 그런 방법이 꽤 잘 먹혔던 모양이지. 다만 그와 서희가 상극인 탓에 소영 역시 그를 속이는 것은 그만두려는 듯 했다. 그저 습관적으로 걱정을 읊더니 본심을 꺼내놓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서희의 몸을 빌리고 나면 바쁠 테니까. 키가 조금 작다는 걸 빼면 좋다는 거네? 오히려 좋은걸. 작은 사람은 귀여우니까 이건 꽤 장점이라고."
마지막에 칭찬하듯이 단점을 읊는것도 빼먹지 않고 정말 착해 보이게 못되먹은 성격이다. 다만 빙그레 웃는 것도 잠시 뿐, 우현의 말이 나오자 음악실에 드리운 어둠처럼 소영의 낯빛도 무겁게 가라앉았다. 그건 경멸이라고 하기에는 짙었으며, 분노라고 하기에는 가벼웠다. 그 명확히 형용하기 어려운 감정은 이윽고 소영이 입을 열고 나서야 드러났다.
"그 애가 아직 잘 살고 있는 게 믿겨지지 않네. 아니, 믿고 싶지 않고. 어째서 나는 죽었는데 그 애는 여전히 즐겁게 지내고 있는걸까... 만약 그럴수만 있다면, 용서할 수 없는 죄목으로 벌을 내리고 싶을 정도인걸."
나즈막히 질투 어린 감정들을 늘어놓던 소영은 서희가 말을 잇고 나서야, 잊고 있던것이 떠올랐다는 듯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 표정이 진심인 것인지는 확신할 수 없었지만, 그 능숙해 보이는 어리숙함과 특유의 쉽게 드러나는 표정으로 인해 소영은 제법 솔직해 보이는 인상을 주었다.
"아 걱정하지 마. 무서워서라도 범죄 같은 건 못하는걸. 그리고 나쁜 짓이잖아? 죽어서라도 나쁜 사람은 되고 싶지 않아. 그러니까 서희가 걱정하는 일은 없을거야."
그리고 직후 서희의 꼼꼼한 일처리 덕분에 은근 슬쩍 넘어가려 했던지, 정말 잊었던 것 뿐인지 대답을 하지 않던 소영이 특유의 부드러운 미소를 짓고 입을 열었다. 태연하게 "아참," 하고 말을 얹는 것 또한 어리숙해 보였다.
"내가 하고 싶은 것 말이지... 사실 아직 확신은 없지만 그래도 이걸 이뤄준다면 적당히 속아줄 수 있겠지 싶은 조건은 있을지도 모르겠네. 하나는 피아노를 통해 많은 사람들에게 기억될 수 있는 협주곡을 연주해 기억에 남는 것. 두번째는..."
그는 유난히 부드럽게 웃었다. 그가 괜시리 웃을 적에는 숨기려는 감정이 있을 때 뿐이었고, 그 감정은 여실 없이 드러났다. 약간의 긴장과 불안함, 그것이 생경하게 미소 너머로 드리웠다. 그리고 직후 소영이 내뱉은 것으로 미루어 볼 때, 그는 일부러 두 가지 질문을 한 것일수도 있지 않을까 싶게 망자로써 원할법한 소원을 정확히 꺼냈다.
"나이 지긋하게 드신 분들은 오히려 그쪽이 편하게 응대가능하니까. 기담이나 민간신앙에서 내려오는 이야기들을 아니까 말이지."
피곤한건 오히려 여기까지 오는 경우다 라는 말은 하지 않는다. 기본적으로 이 일에 있어서는 사적인 감정없이 냉정한 이야기로만 유지하는게 좋으니까. 그건 그렇다치고 역시 사람이 유하고 착한척하는 건 다 이유가 있는 법이라는걸 소영을 통해서도 한번더 확신할 수 밖에 없었다. 이익이 없는 선의는 존재하지 않는다. 일을 하면서 많은 망령을 본 탓에 확고하게 굳은 생각이다.
"원귀가 아니라 망령이라서 검을 안들고 온게 아쉽네. 무슨 검인지는 궁금하면 1대1 교환이야."
딱히 관련은 없는 이야기기에 키로 놀리면 귀신도 어떻게는 할 수 있다는 의지의 표명이었다. 컴플렉스에 대해서는 꽤 감정적으로 대한다. 일에 있어서는 방해니까 거슬리는건 어쩔수 없는 것이다. 정말이지 말이 통하지 않는 경우가 애초부터 어린아이 헛소리라고 죽고도 틀에 박힌 생각을 하는 경우니까.
"당신 웃는 얼굴로 꽤 위험하네. 그러다 자기 자신이 무엇인지 조차 잊어버릴수 있어. 그 상태로 말이지."
일단은 일에 있어서는 해결해야할 상대다. 행여나 그런 생각으로 물든다면 그 때는 조치가 달라진다. 일종의 경고였다. 그 선을 넘어버릴 때는 의뢰여부를 떠나서의 문제가 된다. 이 부분에 대해서도 궁금하다면 대답하겠지만. 왜? 라는 궁금증에 대해서는 굳이 알아도 영양가는 없는 이야기였다. 지금의 현상유지가 최선이니까.
"웃는걸 가면으로 쓰면서 구렁이 담넘어가듯 하는 여자는 무섭네. 소영으로서의 유명세에 대한 매듭짓기는 이해하겠지만."
연주에 대한 욕구는 처음 만났을 때 부터 확고한 의지였기에, 그 부분에 대해서는 최선의 방식으로 해결하는 것이 가능하다.
"다른 하나는 오뉴월에 서리가 내릴 법한 이야기네. 이야기의 마무리라기보다는 칼로 원고를 재단 하는 느낌이야. 네가 말하는건."
수행평가 등급 업이라고 하면, C를 받으면 B가 되고 B를 받으면 A가 된다는 뜻일테다. 우수한 성적과 공부머리가 있는 학생이 아니라면 누구나 솔깃할 만한 제안이었지만, 소녀에게는 그렇게 와닿지 않았다. 선생님이라는 것 치고는 줄줄이 이어진 거짓말들에 신뢰를 잃은 탓도 있겠지만…
“비리 아니에요…?”
마음이 석연치 않았다. 찝찝한 탓에 좋다고 냉큼 답할 수 없었다. 남들은 공부해서 얻는 성적을 자신은 지금 여기서 무얼 했다고 등급 하나를 올릴 수 있는지 이해가 가질 않았다. 선생님이 거짓말 하면 안 된다는 말은 유치원생도 할 줄 아는 말일테니까, 그런 이유들로 되려 선생님의 호의에 대한 의심만 커져간다. 또 무슨 장난을 치려고 이러는 건지 의심스럽기도 했다. 그래서 칭찬도 칭찬으로 듣지 못 했다. 소녀는 작은 새앙쥐고, 저 칭찬들은 치즈가 놓여있는 트랩 같았다. 그럼에도 목례를 하며 인사를 하기는 했다.
“칭찬은 감사합니다.”
무어가 달라졌다는지 나아졌다는지 설명해주어도 모르겠지만, 칭찬으로 들리기는 했기 때문이다. 어떤 의도를 품고 있는지 몰라도 선생님이 하는 칭찬이니까 감사 인사는 해야할 것 같았다. 졸지에 도둑에게 사과까지 했는데 선생님에게 감사 인사를 못할까. 그러고나서는 눈을 이리저리 굴렸다. 이제 선생님은 자리를 비우지 않을까, 혼자 있고 싶은 마음이 너무 커져서 보는 눈치였다. 뒷뜰에 온 이유부터가 혼자 있고 싶어서였는데 차라리 보건실에 갈 걸 그랬다. 또 다치고 왔냐는 보건 선생님 잔소리가 따가워서 뒷뜰로 피했던 것 뿐인데 후회막심이다.
“네?”
이 선생님은 무엇을 하는 선생님이길래 시험지도 답안지도, 보충수업 신청서까지도 다 들고 다니는가. 이렇게 된 이상 소녀는 시간 없다고 거절하고 먼저 자리를 비울 생각이었다. 등교거부라는 단어가 나오기 전까지는 말이다. 대인기피증은, 소녀는 스스로 대인기피증 같은게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저사람 사이에 있는게 악순환이니 어찌할 도리가 없을 뿐이라고 여겼다. 주변에 사람이 없어야 실수로 이능력을 써도 불행을 끌어당기지 못한다. 이미 불행을 끌어당겼을 때라도 혼자 있을 수만 있다면, 다른 사람이 휘말릴 일은 없다. 그러니 사람 사이에 있지 않는 것 뿐이다. 그런 이유로 등교를 안 한 적도 있었다.
“호, 혼내시는 거 아니죠………?”
첫인상은 거한 불신으로 남았다.
“유급은 하기 싫지만, 전……… 제 이능력 조언은 못 하실걸요. 안 하시는게 나아요.”
시선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무릎에 덕지덕지 붙은 반창고들이 스스로 보기에도 과하고 안쓰러웠다. 자기연민, 바닥으로 처박힌 자신감과 자존감, 불안까지 스며들어있는 문장은 문을 굳게 걸어 잠궈두고 있었다.
# 고마워 🥹 기다렸을까봐 한 말이었어! # 학생들한테 인기좋은 선생님 생각난다~ 여자애쪽은 생각보다 뾰족하게 생긴 정도? 성격이랑 인상이랑 갭이 큰 느낌인 거 말고 도움줄 말이 없네 🥲
"비리는 무슨, 수행평가는 모두 상대평가야. 언제부터 내가 절대평가를 했다고 하는게 어딨냐?"
비리라는 말에 그는 별거 없다는 듯이 말했다. 의외로 수행평가 면에서 깐깐하기 그지 없는 그로서는 모든 평가는 상대적인 평가로 이루어진다. 게다가 지난 3년간, 인성면이나 다른 면에서 발달을 보인 학생에게는 무조건 보상을 줘야한다는 그의 입장에서는 이 판정은 전혀 번복할 생각 없는 확고한 그녀에 대한 보상이었다. 그는 천천히 허리를 살짝 숙인채 소녀를 바라보며 아까전의 장난스러운 태도는 어디 갔냐는 듯이 교사의 태도로 소녀를 대하고 있었다.
'확실히 많이 소극적이야. 자기 의사표현은 분명히 할 수 있지만, 본인에 대한 자존감이 바닥을 치고 있고, 추가로 다른 복합적 요소가 확실히 이 아이의 발목에 족쇄를 걸어 잠그고 있어. 자의던 타의던 늦지 않게 발견해서 다행이야.'
순간적으로 눈이 돌아 가는 모습에 그의 마음속 한켠이 안쓰러웠다. 지난 3년간, 교생 실습 포함 5년간 많은 학생들을 만났지만 이 아이만큼 상황이 심각한 아이는 없었다. 최악의 경우 자신에 대한 비관으로 돌이킬 수 없는 선택을 할 수도 있고, 자신이 공부를 하며 얻어낸 이능력의 특성상 정말 심각한 위험을 초래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떠올리며, 그래도 아직 시간은 있고 최소한 못하더라도 그녀의 손을 잡아 줄 수 있다는 사실에 그는 안도의 한숨을 내 쉴 수 있었다. 그 순간, 뒷 말에 그가 눈을 살짝 동그랗게 뜨고 소녀를 바라보았다.
"내가 왜 혼내? 나도 너 못지 않게 고민 많이 했어, 대학교때는 학사경고도 두번 맞아봤다. 지금은 교사일지 몰라도, 나 학생으로서는 빵점이었다고 이야기 할 수 있을거 같은데?"
그렇게 말하면서 그는 천천히 자신의 조끼 포켓에서 쇠구슬을 여러개 던졌다. 그의 명령을 받아들이기라도 하듯이 쇠구슬은 일사분란하게 수많은 새싹 그림들을 땅바닥에 그려내었고, 그는 쪼그려 앉은채 그 모습 그대로 학생이 된 소녀를 바라보며 가볍게 입꼬리를 올린뒤 입을 열었다.
"당연히 못하지, 난 지금 너의 이능력을 모르니까, 하지만 가벼운 조언정도는 지금 가능하니까, 가볍게 이야기 듣는다 생각하고 천천히 들어. 이능력이라는 것은 어떻게 보면 고착화 되어있다고는 하지만 기실 많은게 달라, 정형화된 사이즈가 없다고 해야할까? 지금 이 새싹들을 전부 이능력이라고 쳤을때, 이능력은 사람이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성장의 방식이 달라져, 어떤 이능력은 꽃이 될 수도 있고, 어떤 이능력은 나무가 될 수도 있겠지만 그것의 목표는 결국 그 사람의 마음먹기에 따라 달라지지. 그렇기에 우리가 교육하는 거고."
그래서 히어로와 빌런은 종이 한 장 차이라고 사람들이 말 하는 것이 아닐까? 그의 설명에서는 많은 의미가 녹아 내려져 있었다. 그의 설명이 계속 이어진다. 아까전의 장난스러움이 거짓말이라는 듯이 그는 천천히 미소를 지은채 몸을 일으켜서 자신의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내들었다. 본인 명의로 되어 있는 외출증과 함께 교사의 이름이 적힌 신용카드, 도대체 무엇을 하라는 것일까.
"네 이능력에 대해서의 이야기는 네가 말하고 싶을때, 본격적으로 시작하는걸로 하자. 자 그럼 보충수업의 첫 과제야. 이거 내 카드, 마음껏 써도 된다. 지금부터 학교 바깥으로 나가서, 네가 사오고 싶은 물건 아무거나 3가지만 사와, 가져오는 것은 3가지 이상이 되어도 되지만, 반드시 네가 원하는 것을 사와."
첫번째 스텝, [더 안할래.]라고 말하는 아이에게 단 한번만 더 해보자고 이야기 해보기.
//나는 언제든지 기다릴수 있다!! 그러니까 천천히 즐기면서 가보자고!! //좋은 교사라면 어디까지나 학생을 자신의 성과로 보지 말고 하나의 아이로서 대해야 한다고 옛날 담임선생님이 말씀하셨어서(....) 그 말이 모티브라면 모티브겠지? :)
소피게네이아는 시원하다는 듯 몸을 짐짓 부르르 떨었다. 깃털 몇 개가 떨어졌다. 그녀에게서 두려움은 이미 멀리 떠난 것처럼 보였다. 공작이 꽤나 성질을 부리겠네. 그녀는 중얼거렸다. 소피게네이아를 묶어두기 위해 꽤나 비싼 마법사를 썼을지도 모르지만, 용사처럼 규격외를 끌고오면 아무 의미 없어지는 짓이지! 주문이 풀렸으니 이제 그녀도 마법을 사용할 수 있다. 그렇다면 그녀가 용사의 옛 동료들에게 다다르는 시간은 더욱 짧아지리라.
"정말 고마워~ 그런데 부탁 하나만 더 하자. 당신의 징표를 줘. 내가 절대 훔칠 수 없을 만한 물건."
"예를 들어서, 성기사 놈들은 날 보자마자 칼부터 뽑을 거 아냐? 네 심부름을 하고 있다는 증거 정도는 필요해보이는데.."
그 대화도 협상도 타협도 불가능한 근육뇌들 말이야. 성기사가 아니더라도 내가 널 어떻게 믿고 따라가냐고 말한다면, 소피게네이아에게 할 말이 없었다. 재수가 없으면 그 자리서 붙잡혀 그 '공작'의 영지까지 강제 송환당할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뿐이야? 최대한 조심은 하겠지만.. 병사들의 추격을 받을지도 모를 일이고.. 그렇게 되면 어쩔 수 없이 싸워서 피를 봐야 할텐데.. 싸우지 않고 넘어갈 방법이 있다면 말이지.. 응?"
절대 훔칠 수 없을만한 물건. 자신에게 그런 것이 뭐가 있을까? 그렇게 생각을 하다 그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잠시만 기다리라는 듯이 저편에 있는 자신의 침실로 들어갔다. 그리고 잠시 후, 그는 붉은 루비가 박혀있는 펜던트를 가지고 왔고 그녀에게 내밀었다. 그리고 그 펜던트가 무엇인지 대해서 그녀에게 설명했다.
"이건 아무런 효과도 없는 그냥 펜던트야. 모두와 헤어지기 전에 기념으로 나눈 물건이기도 하고. 내가 고향으로 돌아가기 전에 너희들과 산 물건이라고 하면 대충 무슨 의미인지 알아들을거야. 네가 제대로만 전달한다면 말이야."
기억을 잃은 것이 아닌 이상, 그 설명과 이 펜던트를 보여준다면 바로 알아들을거라고 사내는 확신했다. 물론 그 이후 어떻게 행동할지는 또 별개였지만. 허나 왕가에게 붙어서 자신과 다른 동료들을 해하려고 하는 이는 없지 않을까. 그렇게 사내는 생각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생사를 같이 했고 사선을 함께 넘어 마왕을 같이 물리친 사이였다. 이 세상에서 제일 믿을 수 있는 이들은 역시 자신과 함께 여정을 한 동료들이었다.
"일단은 그것으로 충분해. 물론 네가 그 어쩔 수 없이라는 것을 핑계삼아서 살생을 무차별적으로 저지른다면 이야기는 달라지겠지만 말이야."
만약 그렇게 된다면 자신은 그에 대한 댓가를 치루게 할 수밖에 없었다. 엄연히 약속을 깬 행위이고, 그렇게 되는 순간 그녀는 토벌해야 하는 마족으로 규정될테고 자신은 물론이요, 경우에 따라서는 자신의 동료들과 싸워야만 할테니까. 그런 리스크를 끌어안고 멋대로 행동을 취하진 않을거라고 생각하며 사내는 다시 입을 열었다.
"아무튼 부탁할게. 모든 일을 다 마치면 그땐 어디론가 사라져도 괜찮아. 붙잡지 않을테니까."
이러니저러니 해도 그녀는 마족이었다. 모든 일을 마치게 되면, 자신의 동료들과 접촉해서 여기로 데리고 온 후까지 이 일에 얽매일 이유는 없었다. 어디까지나 이후의 일들은 인간과 인간으로서의 일이었다. 당연히 그 마무리도 인간이 해야만 했다.
>>820 "그래, 그렇구나." 하고 소영은 조금은 서희의 입장을 이해하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정작 마음 속에서 이해하고 있었는지는 알 수 없었는데, 그 명랑한 표정으로 미루어 볼 때 특유의 좋게 넘어가려는 성격에서 기인해 그런 말을 한 것이지, 실제로 이해한 것은 아닌 것 같았다. 그 뒤에 키로 놀림받는 기분이 들자 바로 태세를 바꾸는 것을 보며 소영은 조금 웃음을 터트렸다. 늙은이 같이 굴어도 사람은 결국 어딘가 어린 면이 있는 것인지, 그도 아니면 역시 보이는 만큼 어린 것인지 서희의 그 솔직한 태도가 조금 아이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소영은 그 특유의 웃는 얼굴로 가볍게 바라보며 물었다. 정확히는 묻는 화법을 써서 본인의 이야기를 했다.
"잊어버릴 수 잊다는 건 서희가 일적으로 알고 있는 지식인 거지? 아마 신선놀음에 도끼자루 썩는 줄 모른다는 말과 비슷한 거겠지? 그렇다면 서희는 나를 신선놀음에 정신이 팔릴 사람으로 보고 있다는 거겠지만, 적어도 그렇게 쉽게 중요한 일을 잊는 성격은 못 되서 말이야. 아마도 그런 건 조금 정신 빠진 사람이 겪게 되는 일 아닐까?"
소영은 이윽고 다시금 웃었다. 이번에는 제법 작위적일 정도로 예쁜 웃음을 짓고는. 아마도 그 웃음이 감추려고 하는 건 좋은 건을 잡았다는 구린 속내인 모양이지만 소영이 늘 그렇듯 그 기분은 웃음 사이로 아주 잘 드러났다. 소영은 거짓말을 잘하면서도 감추는 게 서툴렀다. 그건 마치 사랑을 받았음에도 사랑을 요구하는 사람처럼 보였다. 이질적인 두 가지 성격이 합치될 수 있다는 것은 신기한 일이었지만 분명하게도 소영이라는 존재는 지금 서희의 눈 앞에 있었다. 명백히 무언가를 바라는 채로.
"단순히 유명세라고 결론짓지는 마. 사람이 남기게 되는 게 기억이라는 건 다들 아는 사실이니까 내가 욕심내는 것도 크게 무리하는 건 아닐거라고 생각해. 남겨지는 건, 그것 하나 뿐이잖아. 단지 그 방법이 조금 어려울 뿐이라고 생각하고 있지만."
그리고 다음 말을 꺼내기 까지는 조금 시간이 필요했다. 소영은 그 이야기를 할 때 만큼은 밝은 모습을 유지하지 못했다. 모든 나쁜 기억의 근원이라도 되는 듯이 우현에 대한 이야기를 대했다. 그걸 통해 추측이 가능했던 건, 그의 죽음과 관련된 것이 우현이라는 사실 정도였겠다. 다만 그 사실을 본인 입으로 말하지 않으니 확신할 수 있는 근거는 없었다. 그저 내뱉는 말을 통해서 근접해지길 바라는 정도겠지. 소영은 다시금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슬픈듯이 불편해 보이는 웃음을 띄고서.
"그건 그렇지... 한풀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겠네. 이건, 꽤 인상적으로 나쁜 이야기니까."
"일에 관한 이야기는 맞지만, 신선놀음 따위가 아니라 망령이 원귀가 되는 경우를 말하는거야. 당신의 욕구가 원한으로 변해 사람을 해하려고 할 무렵에는 당신이 당신으로서의 자아를 상실하니까. 그 경우에는-."
손에 있던 담뱃대를 부채로 바꾼다. 물리적인 법칙으로는 불가능한 행위였음에도 그것은 마치 도술을 쓴 마냥 도구가 다른 도구로 변화했다. 접었다 펼쳤다 할 수 있는 부채에는 敬鬼神而遠之라는 말이 적혀있다.
"敬鬼神而遠之. 성불에서 퇴마로 목적을 바꾸겠지. 과연 그건 얼빠진 존재만이 가능할까? 귀신이 사람을 해하는 것에 맛에 들리면 마치 마약처럼 끝이없고 그 끝에는 원귀가 될 뿐이니까. 그런 의미에서 인륜적인 측면에서의 복수를 돕는건 허용 범위내라고 해야겠지. 그래서 사람을 해하는 것, 죄를 범하는 것 두가지에 있어서는 불가하다. 라고 말해두는거야."
사람을 해하는 것도 죄를 범하는 것도 아닌 복수. 그것은 단순히 말해 악의적인 감정이 없이 억울하게 묻혀버린 진실을 들춰내 적합한 심판을 받게 하는 것이다. 그것이라면 해한사는 충분한 도움을 줄 기회가 많다. 다르게 말하면 그것이 아닌 복수는 인정하지 않는다.
"그렇게 단정짓는 것도 내 나쁜 버릇이니까. 개개인의 감정 하나하나를 분류해서 분석하는건 효율적이지 못하거든. 기계같다고 말하더라도 일에 있어서의 우선순위로 스위치를 누르는 시점에서 반쯤은 기계가 맞아. 정리하자면 당신이 말하고자 하는게 사람으로서 이름을 남기려 한다 라고 정정할게."
여러가지 단서와 요구가 하나둘 머리 속에서는 그물처럼 엮여 연산마냥 처리를 시작한다. 소영의 요구는 기본적으로 거창하게 말하자면 가장 빛날수 있는 피날레를 장식하고 그것으로 사람들의 기억에 남는 것. 이것이 하나. 그리고 둘 로서 의뢰자에 대해서,
"질문에는 질문으로 답해야겠지. 당신의 복수는 당신의 죽음에 대한 묻혀버린 진실을 들춰내고 흑막에게 응당한 처벌을 요구하는 것으로 충분하겠나? 단, 이 요구는 이 이상으로 해결해 줄 수 없어."
소녀로서는 이해하기 어려웠다. 수행평가가 상대평가이든 절대평가이든 무슨 상관인지, 상대평가라고 해서 비리가 아니게 된다는게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었다. 중국어 수행평가가 중국어 실력을 평가하지 않으면 그게 다 비리가 아닌가, 지금 바른 말 한 번 했다고 수행평가 등급이 올라가면 비리가 맞지 않는가. 물음표를 그리던 눈빛을 선생님이 시선을 맞춰주면 사라졌다. 이상한 선생님이랑 더 얽히지 않는게 낫다고 느꼈기 때문에, 대꾸를 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이기로 했기 때문이다.
“……교사로서는 백점이신 거에요?”
하지 못한 말을 속에 욱여넣었다. 튀어나오지 않게 힘껏 눌렀다. 숨이 막히는 기분이 들지 언정 말할 수 없었다. ‘저는 무엇으로서도 빵점인데.’ 같은 말을 해서 하등 쓸 곳이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쇠구슬이 던져진 것에 시선을 빼앗긴 척 굴었다. 별로 관심도 없는 쇠구슬들은 바닥에 떨어져서 새싹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이능력이 없기라도 했으면, 이곳이 이능력자들만 있는 고등학교가 아니었다면 조금 놀라거나 신기하기라도 했을텐데… 무감하게 바라볼 뿐이다. 선생님이 자리에 쪼그려 앉으면 교복 치마를 눌렀고, 새싹보다는 치마를 누르는 손짓에 더 신경을 썼다. 다리에 붙은 반창고들은 가리고 싶어 손에 힘을 주지만, 교복치마가 덮어봤자 무릎을 덮을락 말락하는 길이에 반창고를 가릴 수 있을 리가 없다.
“안 자라는…. 시들었거나, 꺾…인 새싹은 안 자라잖아요.”
천천히 들어보라는 이야기에 귀 기울이기는 했지만, 소녀는 새싹 그림에 자신의 이능력은 없다고 생각하니 와닿지 않았다. 그도 그런게 그림 속 새싹들은 파릇파릇하기만 하니까. 자신의 새싹이 파릇파릇하다면 독초로 자랄 것이었고, 파릇파릇하지 않다면 그게 옳은 것이라고 믿는다. 위험하기만 한 이능력을 키워서 어디에 쓸 수 있을까. ‘이제 선생님이 일어나시면, 좋은 이야기 들려주셔서 감사합니다. 가볼게요. 라고 인사하고 가자.’ 도망갈 궁리를 하고 있는 소녀의 눈 앞에 불쑥 외출증과 신용카드가 나타났다. 놀라서 동그랗게 눈을 뜬 소녀는 이 선생님이 올가미 같다고 느꼈다. 그물 같다고, 거미줄 같다고 생각했다. 도망칠 수가 없다.
“네?”
보충수업을 하겠다고 한 적도 없고, 학교 바깥으로 나가고 싶지도 않았다. 이 이상한 수업과 과제는 무엇이란 말인가.
“저, 그거 한다고 한 적도 없고, 사람 많은 곳은… 사람 많은 곳에는 못 가요…….”
저 선생님이 손에다 외출증과 카드를 쥐어줄까, 소녀는 뒤로 한 발자국 물러났다.
“………인터넷 쇼핑은, 안 돼요…?”
피할 수 없다면 더 나은 선택지로 타협하는 수 밖에.
# 고마워 🥺 재밌게 하도록 노력할게, 너무 답답하면 말해줘~ # 좋은 선생님을 모티브로 해서 좋은 선생님이 된 거구나, 난 초능력이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걸 반대로 생각한게 모티브네! 초능력이 있어서 나쁜 경우.
마음속의 교사가 침통하게 입을 열었다. 왠지 안타까웠다. 조금 만이라도 일찍 만났다면 조금은 더 자신감을 가지게 해줄 수 있었을까? 하지만 교사로서의 안 쪽으로 자그마한 불씨가 타오른다. 그간 많은 학생들을 겪으면서 다가온 자신의 마음속은 그만큼 본인이 가는 길이 틀리지 않았음을 말해주고 있었다. 그렇게 그는 아주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잠긴 빗장은 천천히 열어주자. 스스로 열 마음이 들때까지 천천히 쪼그려 앉아 눈을 마주치고 이 아이가 웃을때까지.
"흠, 좋아. 인터넷 쇼핑 오케이."
오히려 걸려들었다는 듯이 그가 살짝 웃으며 말했다. 애시당초 사회로 나가라는 뜻이 아니다. 사람을 마주치라는 뜻도 아니었다. 오히려 '자신이 원하는 물건을 사는 행위' 그 자체가 중요한 것이었다.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이 있다는 것은 역으로 지금 아직 자기가 원하는 것 자체가 있다는 것으로 비출 수 있고, 이미 자신이 예상한 타협점까지 왔다는 것 자체가 이미 계획의 일환이라 생각 한 그였다.
"안 자라는 새싹은 언젠가 더 큰 새싹이 되어 있고, 꺾여버린 새싹은 다시 한번 힘을 주고 뻗을 날을 기다리는 거다. 그게 나는 잘못된 새싹이라고 생각하지 않아, 그렇게 이야기 하면, 나 또한 완전한 결함품이니까. 넌 네가 생각 하는 것 이상으로 더 대단한 사람이 될꺼야. 내가 보증하마."
뭐 거짓말을 자꾸 밥먹듯이 해서 믿음을 많이 주지는 못하겠지만, 그만큼 교사로서의 안목 만큼은 절대적으로 믿는 그였다. 그렇기에 그는 천천히 미소를 지으며 허리를 핀 뒤 소녀에게 다가갔다. 날카로운 인상과는 반대되는 이 소극적인 모습에 그는 무심결에 손을 뻗어 조심스레 머리에 손을 얹고 따스하게 쓰다듬어주었다. [위대한 강철의 거상], 누군가 붙인 그의 이명에 어울리게, 크고 따스한 손이었다.
"교사로서 백점이라고 하면 글쎄다. 나는 항상 내가 결함품이라고 생각했다. 내 능력 바깥의 일들에 대해 눈을 돌리고 평범에 몸을 숨겨 왔으니까, 나는 그렇게 하지 않으면 누군가와 싸우고야 말았으니까. 실제로도 내 학기부 보면 꽤 만만치 않을꺼야. 하지만 그래도 결국은 가고 싶은 길이 있더라고. 그러니까 나는 너 같은 아이를 함부로 둘수는 없겠더라. 올바르게 자라고 하고 싶지는 않아. 그러니까 넌 너의 길을 갔으면 좋겠어."
그는 그렇게 말하면서 부드러운 미소를 머금었다. 아까전 그가먹던 대추야자만큼이나 달콤하고 부드러운 미소였다.
"어려운건 알아. 하지만 네가 할 의사가 있다면 언제든지 뒤집을 수 있어. 기간을 늘려주마, 네가 하고 싶다고 싶을때 하고 오렴, 그 카드는, 알아서 하려무나."
//아니야! 전혀 답답하지 않아!! 오히려 갱생욕이 생긴다!!(?) //그래도 솔직히 좀 글러먹은 교사인데....!! 잘 받아줘서 고마워!! 는 생각해보니 거의 띠동갑일세(.....) 나름 20대 후반~30대 초반을 가정한거랔ㅋㅋㅋㅋㅋ //오히려 교사에게 바라는 게 있다면 바로 말해줘!!
>>827 소영은 지금 무슨 이야기가 나오는 건지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단지 감으로써 추측해 이해해 보려고 노력할 뿐이었다. 그 나름대로 부단한 노력의 결과로 소영은 서희의 말이 나름대로 무언가를 걱정하는 것이라 결론지었다. 설령 자신을 향한것은 아니라 해도, 자신의 일이 앞날아라든가 하다못해 자신의 편리라든가 하는 것들이 있지 않은가.
"서희는 걱정이 많구나? 결국 내가 문제를 일으킬까봐 걱정되는 거잖아. 그렇지만 나도 서희가 경고하는 일은 일으키지 않을 생각이야. 손해보는 삶은 안 살거든."
빙그레 웃는 얼굴에는 소영 특유의 거짓말을 못 하는 표정이 드러났다. 살짝 경직되고 긴장된 표정으로 미루어 볼 때, 그는 분명 뭔가를 저지를 생각이었다. 그러나 입은 습관처럼 거짓말을 했다.
"그야, 나도 그 이상 요구하는 게 아닌걸. 잘 해결되면 오히려 내가 기쁘지! 그래서 내 소원은 어떻게 이뤄주는 거야?"
소영이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이렇게 흑심이 보이는 경우는 드물다. 거짓말에 서툴면서 이렇게 능숙한 사람도 드물다. 그의 인생사도 그의 행동처럼 드물었기에 원한이 남았지만 아이처럼 깨끗한 상태로 남아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소녀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인터넷 쇼핑이라는 타협안을 선생님도 별 다를 말 없이 받아주었기 때문이다. 남의 돈으로 사고 싶은 물건을 3개나 사야한다는 것은 여전히 큰 골칫덩이였지만, 적어도 사람과 사람을 만나 사지 않아도 된다는 점은 큰 다행이었다. ‘………완전 휘말렸잖아….’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자마자 고개를 세차게 저은 이유였다. 걸려들었단 듯한 선생님의 미소만 아니었다면 휘말렸단 생각은 못 했을 것이다.
“잘못됐다고 한 적은 없는데요…. 그리고 전 대단한 사람 안 할 거에요.”
대단한 사람이 되리라 생각해본 적도 없고, 될 것 같지도 않았고, 하고 싶은 마음도 없었다. 나이가서, 이 선생님에게 계속 휘말리고 싶지도 않았다. 유급은 하기 싫었지만, 지금 받은 과제 하나를 해결하면 분명 더 어렵고 까탈스러운 과제를 내줄게 빤하지 않은가. 사람을 피해다니는데는 도가 텄으니, 유달리 더 꼼꼼하게 피해다녀야할 한 사람이 생기는 건 큰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그 순간, 이 타이밍에 쓰다듬을 받았다. 대화를 할 때 상대방을 마주보는 걸 익숙히 했다면 피할 수 있었을텐데, 손이 머리 위에 내려앉아 온기가 느껴지면 고개를 움직일 수 없었다.
“저, 저, 저 강아지 아니에요…!”
낯선 행동에 더듬더듬 입을 열어보았지만 바보같은 소리만 나왔다. 선생님의 손이 떠나고 나면 이상한 기분에 쓰다듬당한 부분에 손을 올렸다. 머리 위에 두 손을 모두 올리고 멈춰있으니 기계가 오작동이라도 일으켜 멈춘 모양새와 꼭 같았다. 하지만 선생님의 손에서 느껴지던 온기가 머리 위에 고스란히 남은 것 같아서 배멀미라도 하는 것 같은 기분에 어쩔 수 없는 도리였다. 낯섦 위에 익숙함을 덮기 위해 우습더라도…
“…중국어 선생님 맞아요?”
아무래도 다른 과목 선생님 같았다. 윤리라던지, 진로라던지 과목은 많지 않나. 상냥한 미소에는 두드러기가 돋을 것 만큼이나 낯섦을 느낀다.
"저… 주문, 바로 할 수 있는데요…."
선생님의 카드를 지니고 싶지도 않았고, 사고 싶은 물건이라고 해도 남의 돈이니 가격을 높게 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러니 반창고랑 연고로 두 개를 채우고, 마지막 하나는 대추야자로 하면 세개를 채울 수 있다. 사고 싶은 물건이라고 했지, 남에게 주지 말라고는 안 했지 않나. 남에게 주기 위하여 사고 싶을 수도 있는 것이다.
# 갱생욕ㅋㅋㅋㅋㅋㅋㅋ 소녀가 졸업하게 되면 스승의 날에 선생님한테 카네이션 매년마다 보낼 것 같단 생각이 들었어~! # 교사관은 좋다고 생각하는걸! 장난기가 심하신 거 같긴 하지만? 소녀 나이 안 정했는데 고3이어도 띠동갑은 거뜬하겠다
"真的, 我是汉语先生. 你信不信我的专业, 我是你们的汉语先生.(진짠데, 나 중국어 선생님이야. 니가 내 전공을 믿건 안믿건, 난 너희 중국어 선생님이다.)"
그의 입에서 유창하게 중국어가 튀어나온다. 그렇게 말하면서 그는 가볍게 웃음을 터트려 보인뒤 가만히 그녀의 투정을 받았다. 강아지라기 보다는 상처 입은 고양이 같다고 하면, 분명히 볼을 부풀리지 않을까 라는 가벼운 생각을 떠올리며 그는 잠시간 까슬한 턱수염을 쓰다듬으며 재차 웃음을 터트리고야 말았다. 이런 단순한 쓰다듬에도 당황스러워 한다는 것은 그만큼 소녀의 마음속 깊은 곳에 상처가 아직까지 남아있다는 뜻일지도 모르니까 말이다. 그 순간, 그의 입으로 의문이 하나 던져졌다.
"대단하다는 기준이 뭐라고 생각하니?"
순간 멍해진다는 느낌이 들 정도의 화두가 그의 입에서 던져진다.
"대단하다는 것은 그리 큰 것이 아니란다. 내가 봤을때 모든 이들이 대단하거든, 매 순간순간마다 모든것에 힘쓰고, 모든 것에 고개를 돌리지 않은채 살아 가는 것도 대단한 것이고, 스스로의 한계를 넘어 나아 올라갔을때도 그것은 대단하다고 할수 있어. 내가 아까 중국어 수행평가 점수를 한단계 더 높여준다고 한건, 그만큼 네가 스스로의 벽을 무의식중에나마 올라섰다는 반증이란다."
그는 그렇게 답하면서 그녀가 내민 물건의 리스트를 바라보았다. 그는 그렇게 보면서 천천히 그녀가 고른 리스트들을 바라보았다. 당장 필요하다고 생각한 반창고와 연고, 그리고 지금 자신을 생각했다는 듯이 골라져있는 대추야자까지. 어쩌면 마음속 상처를 봉합하고 싶다는 무의식의 발현에 더불어 아직 가지고 있는 마음속 상냥함이 이러한 선택을 유도해낸 것이 아닐까.
"인간의 감각에는 오감과 의식이라고 생각 되어지는 육감이라는 것이 있지. 옛날 불교에서는 제 7의 감각, 말나식(末那識)이 있다고 했고, 이 말나식은 처음 언급되어진 오감과 육감을 제어하는 기능을 수행한단다. 하지만 이 말나식보다도 더 심층부에 존재하는 제 8의 감각이 있지, 그걸 우리는 아뢰야식(阿頼耶識)이라 부른단다. 아뢰야식은, 간단하게 말하자면 인간의 심층기록보관소라 볼수 있겠지, 7감각인 말나식부터 모든 오감, 육감을 무의식중에 전부 담아내는, 그런 감각인 셈이지."
대학원생 박사 논문에서나 볼 법한 이야기를 갑자기 왜 꺼내는 것일까? 그러고서 그는 천천히 손가락을 내밀어 그녀의 정수리에 가만히 올려두고는 방긋 미소를 지었다.
"내가 이 이야기를 꺼낸 이유는, 아까 지금 네가 수행한 과제와도 연관성이 깊단다. 이능력이 크게 발달한 사람들의 형태를 보자면 이 말나식이 크게 발달 되어 있음을 알수 있어. 실제로 히어로들 중에 감각이 예민한 사람들이 많은건 다들 알고 있는 사실이지. 하지만 이능력의 발달의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결국 네 무의식 속에 있는 네 스스로의 내재된 가능성이라 볼수 있단다."
그렇게 그가 다시 한번더 손바닥을 소녀의 머리에 얹고 가볍게 쓰다듬어 주면서 소녀를 마주한다. 자신감 없고, 이 움츠러든 소녀의 이능력이 지금 자신은 무엇인지 모른다. 하지만 확실한 것은, 여지껏 봐온 이능력들은 스스로의 노력 여하에 따라, 마음먹기에 따라 스스로의 의지대로 변화를 시키고 또 성장시킬수 있다는 것을 말이다.
"다시 말하지만, 넌 대단한 사람이 될꺼란다. 아니 이미 되었을지도 모르지. 교사로서 내가, 우리가, 이 학교에 입학한 순간부터 모두가 너의 편이라는 것을 떠올리렴."
//사실 거의 다 써두고 >>834 답변에서 반려 되었을때 예비 답나메도 적느라 시간이 더 걸린건 유머(...) //?? : 어떻게 중국어 교사가 저런걸 알고 있는거죠? 소랑 : 아카데미 교사는 뭐 꽁으로 되는줄 아냐.... 그리고 이능력 교육 담당 교사가 외부 업무가 많아서 펑크 낸거 내가 대신 하느라 관련 논문 다 외웠다고
"기어이 여기까지 왔구나. 그렇다면 그에 대한 경의를 표해서 이번에야말로 전력으로 상대해주마. 자. 덤벼라."
독수리처럼 매섭고 날카로운 눈빛. 그리고 매서운 인상. 검은색 마스크가 부착되어있는 진한 검은색 갑옷. 그리고 보라색 번개가 튀고 있는 검까지. 그 사내는 온 몸으로 악한 전사라는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바로 앞에 있는 전사 네 명과 치열하게 싸우는 사내는 조금도 물러서지 않았다. 여러 기술을 사용하고 불꽃이 튀기며, 피가 튀고. 그야말로 그 모든 것이 사투 그 자체였다. 얼마나 싸움이 이어졌을까? 그 사내는 한쪽 무릎을 꿇었다. 더 이상 싸울 힘이 없었는지 숨을 헐떡이다 털썩 자리에 쓰러졌다.
"설마 이렇게까지 힘을 길렀을 줄이야. 내 패배다. 허나 이미 늦었어. 지금쯤 나의 주인은 모든 것을 끝내셨을테니까. 하하하하하!!"
그야말로 광기 어린 목소리를 내며 사내는 마침내 완전히 쓰러졌고 그 몸은 점점 희미해졌다. 그리고 그 자리에 돈과 회복약, 그리고 강렬하게 빛나는 검은색 갑옷이 나타났다. 이내 전사들은 그것을 줍기 시작했다.
-와! 드디어 나왔다!! 갑옷 아바타 ! 대박! -오. 축하. -그거 낄거임? -진짜 운 좋네. 난 한 번만 더 돌래. 다음번엔 나올 것 같음 -나오겠음?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전사들의 머리 위에 대화창이 떠오르긴 했으나 목소리가 들리진 않았다. 이내 전사들의 모습이 사라졌고 방금 전 희미해지면서 사라졌던 사내가 다시 멀쩡한 모습으로 그곳에 등장했다.
-잠시 후, 다음 플레이어들의 입장이 있을 예정입니다. 준비해주세요.
"대체 이 갑옷이 뭐가 좋다고 이거 본딴 아바타를 얻겠다고 이 난리들인지 원."
온라인 게임 트리니티. 방대한 세계관과 매력적인 캐릭터, 그리고 화려한 스킬 등으로 한창 인기를 끌고 있는 그 게임에 나오는 NPC 캐릭터들은 오늘도 열심히 플레이어들이 활동하는 시간동안 계속 자신의 자리에서 열심히 플레이어를 맞이하고 일했다. 어떤 이는 상점 NPC로, 어떤 이는 보스 캐릭터로, 어떤 이는 레이드 보스로. 또 어떤 이는 조력자로.
시간이 흘러 그 게임 속의 세상에서만 존재하는 휴식타임이 돌아왔다. 현실세계는 인지하지 못하는 이 시간대가 되면 이 게임에서 일하고 있는 NPC 캐릭터들은 모두 퇴근하고 휴식을 취했다. 인간들의 시간 기준으로 만 하루의 시간 동안 그들은 NPC 캐릭터로서가 아니라 이 세계에서 근무하는 이들로서 생활했다. 쇼핑도 하고, 술집에서 술도 마시고, 산책도 하고. 그 시간을 어떻게 보내는진 제각각이었다.
그리고 사내는 한숨을 내쉬면서 술집에 앉아 술을 마시고 있었다.
"아무래도 일자리 잘못 잡은 것 같아. ...왜 인상 조금 매섭다고 마족의 수석기사 역할을 배정받냐고. 좋은 역할 해보고 싶었는데."
그런 한탄을 하면서 사내는 다시 술을 천천히 마셨다. 누군가가 오는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아무래도 좋다고 생각하면서 사내는 이내 안주를 먹으면서 다시 한숨을 푹 내쉬었다.
/온라인 게임의 NPC 캐릭터들이 알고 보니 게임에 취업한 그 세계의 사람들이라는 설정이야. 지금은 다들 퇴근해서 자유시간 보내는 중! 어떤 캐릭터로 이어줘도 괜찮아!
로덴버그 공작저의 연회장은 그야말로 화려했다. 루미에르 교단 성인들의 모습을 양각으로 조각한 천장의 샹들리에는 촛불은 물론 보석으로도 빛나고 있었고, 벽에도 월계수 관의 형태를 본뜬 황동 촛대가 일정 간격마다 달려 있어 거기 얹힌 촛불이 연회장을 대낮처럼 밝혀 주었다. 천장을 떠받치는 기둥은 위쪽에 아칸서스 잎이 정교한 솜씨로 새겨져 있었으며, 아이보리색 벽지의 무늬는 로덴버그 가의 상징인 수레국화 문양이었다. 한편 갖가지 음식과 술이 즐비한 테이블도 호화롭기는 마찬가지였다. 상아색 테이블보의 가장자리에는 진주 레이스가 달려 있었고, 식기는 하나같이 은제였으며, 중간중간 놓인 은제 촛대는 크리스탈 바람막이로 장식되어 영롱하게 반짝였다. 이러한 연회장의 한쪽 구석에서는 악단이 한창 흥겨운 곡조의 음악을 연주했고, 테이블 사이의 널찍한 공간에서 내로라 하는 귀족들이 음악에 맞추어 한창 춤에 몰입해 있었다. 한껏 펼쳐졌다 휘돌다를 되풀이하는 귀부인들의 비단 드레스들은 활짝 만개한 꽃의 물결 같았고, 경쾌하면서도 일사불란한 신사들의 구둣발 소리는 또 다른 타악기의 연주를 연상시킬 지경이었다.
그 현란한 연회장에 로덴버그 공작의 양녀, 정확히는 먼 친척이었으나 부모를 여읜 뒤 로덴버그 공작의 슬하에 들게 된 마리안느도 있었다. 춤을 추거나 다른 이와 말을 섞지는 않았으나 자태만은 돋보이는 데가 있었다. 한 데 모아 뒤로 틀어올린 푸르스름한 은발은 그 수수한 모양이 삼색 제비꽃 묶음을 단 머리장식과 어우러져 청초한 분위기를 풍겼고, 뒷머리나 관자놀이에서는 돌돌 말린 고수머리 가닥이 달랑거려 발랄한 인상을 더했다. 라일락으로 물들인 듯한 청보랏빛 드레스는 가슴이 파인 형태라 일견 과감해 보이기도 했으나, 윗부분에 새하얀 레이스 소매가 달려 있어 백옥을 깎아 다듬은 듯한 그의 어깨와 팔이 드러난 듯 가려진 듯 은근한 맵시가 났다. 무엇보다 두드러지는 것은 쌍꺼풀이 엷게 진 고운 눈매와 맑은 가을 하늘의 가장 짙은 한 자락을 담은 것처럼 선연하게 파란 눈망울과 매끈하다 못해 윤기가 감도는 새하얀 피부였다.
하지만 소박하면서도 화사한 차림새와 달리 마리안느의 심경은 착잡했다. 이 자리에 선 것이며 앞으로의 사교계 활동이 모두 귀족들에게 신부감으로 선보이기 위함이어서만은 아니었다. 시골 귀족가의 일원에 불과했던 자신이 무려 공작가의 영애가 되어 호사를 누린 것은 순전히 로덴버그 공작이 혼사를 통해 유력 가문과 유대를 맺고자 한 덕이니 그에 불만을 품는 것은 도리가 아니었다. 소설에나 나오는, 상대를 위해서라면 목숨도 걸 수 있는 소위 낭만적 사랑에 젖은 결혼을 바라는 것도 아니었다. 오히려 대귀족과 결혼할 가능성이 생긴 것은 감사해야 마땅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여성의 입지는 무릇 결혼에 좌우되는 법인데 과거의 자기였다면 이 연회에 참석할 만한 귀족과는 일면식을 갖기도 어려웠을 테니까. 다만 귀부인에게 필요한 교양과 화술이 부족하고 춤도 젬병인 것이나 역사책이나 소설책에 파묻혀 지냈던 부모님 슬하에서의 세월을 생각하면 자신을 결혼 상대로 여겨 줄 귀족이 있을지 자신이 없었다. 겉모습만이라면, 그리고 당분간이라면 오늘처럼 그럭저럭 꾸며 댈 수도 있겠지만 그게 얼마나 갈까.
그래도 입 다물고 얌전히 있는 게 최대한 나은 처신이라 묵묵히 있으려니 마리안느와 마찬가지로 춤을 추지 않는 귀족들의 대화가 들려왔다. 사실 음악과 구둣발 소리에 묻히고도 남을 소리였지만 최근 가장 유명한 인사라 해도 과언이 아닌, 로수스 대전에서 적국의 포로가 될 뻔한 국왕 폐하를 필기단마로 구출해 내 국왕 폐하께 니르부르크 지역을 영지로 하사받은 후작의 얘기를 하는 모양이라 귀가 절로 솔깃했다.
“세상에! 그럼 전황을 뒤바꿔 버린 맹활약이 실은...?”
“그러합니다, 부인. 악마의 힘이 아니었다면 불가능했다는 것이죠!”
마리안느는 미간이 찌푸려지는 걸 의식하고도 표정을 가다듬지 못했다. 악마의 힘이라니, 다들 소설을 너무 많이 본 게 아닐까? 하기야 그 후작의 무용담이 소설의 일부래도 허무맹랑하게 느껴질 만큼 엄청나기는 하다만, 그래도 그렇지. 악마의 힘씩이나 되는 걸 손에 넣었다면 일개 후작, 대귀족이긴 하지만, 하여튼 그 정도의 작위에 만족했을까? 나라면 아예 나라를 하나 통째로 얻고 제국도 세우겠는데?
그런데 이의를 제기하자니 머릿속이 뒤죽박죽이었다. 아니, 할 말은 많은데 어떻게 해야 그 말을 귀족답게 고상하게 전할 수 있을지를 모르겠고 어쩐지 혀까지 꼬인 것 같다. 그 바람에 마리안느는 한동안 버벅거린 끝에야 목소리를 끌어낼 수 있었다. 그마저도 듣기에 따라서는 모기 소리처럼 애매하게 거슬릴 듯한 수준이었다.
“...저...저어..., 지금 하신 말씀, ...그러니까...진짠가요? 어, 어느 분이 보셨...어요?”
활기 있게 대화하던 귀족들이 대번에 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마리안느 스스로도 제 목소리가 어벙하게 느껴지고 말투며 표현도 귀족다운 화술과는 동떨어졌다 싶어 민망할 따름이었다. 그래도 공작 영애라는 지위 덕분인지 귀족들은 달갑잖은 기색이 역력한 와중에도 마리안느에게 아는 체를 해 보였다. 특히 악마의 힘 운운했던 신사는 두 팔을 펼치고 다리를 꼬더니 가볍게 목례하는 식으로 예를 표했다.
“이거 로덴버그 공작 영애 아니십니까? 제가 직접 확인한 것은 아닙니다만, 이미 파다한 소문입니다.”
파다한 소문, 그 말이 마리안느의 반발심을 자극했다. 부모님의 장례식 때도 그 소문이란 건 파다했었다. 아들 하나 없으니 리멜트 가문은 이제 문을 닫겠다느니 내외가 갑작스레 사망했는데 영애는 건강한 게 이상하다느니, 머리가 빙빙 돌고 귀가 먹먹한데도 그런 말들은 놀라우리만치 똑똑하게 들렸었다. 모르는 일에는 침묵해 주면 좋을 텐데, 간혹 사람들은 자기가 뭘 알고 뭘 모르는지 혼동해서 모르는 일도 아는 양 떠들곤 한다, 넌덜머리나게도. 그때의 질척한 기분을 되씹는 듯한 불쾌감에 마리안느는 품위 있는 처신을 궁리하던 것도 잊고 말았다.
“어머! 믿을 뻔했는데, 그냥 소문이었나요? 그렇다면 이런 자리에서는 발설하지 않으시는 게 좋겠네요.” 마리안느는 짐짓 과장된 동작으로 입을 가리는 시늉을 하고는 덧붙였다. “참말이 아니면 두 말 할 것도 없지만 만에 하나 참말이면 악마가 비밀을 발설한 귀공을 해코지할지도 모르니까요!”
신사의 표정이 노골적으로 썩어 가는 것이 시원했지만 한편으로는 혼사길에 스스로 대못을 박아 버린 것 같다는 불안이 커졌다. 이 신사 역시 이 연회에 참석할 정도의 귀족인 만큼 공작에게 마리안느의 결혼 상대로 저울질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그런 이를 대놓고 모욕한 이상 어떻게 해도 고상한 영애로 보이긴 어렵게 됐다. 공작가에 들 때도 양녀로 삼기엔 가문의 격이 안 맞는다느니 액운을 부를지도 모른다느니 하는 뒷말이 있었던 것 같은데 오늘 일로 혼사가 막히면 어떻게 될까? 공작께서 필요 없다고 시골로 돌아가라 하실까? 이젠 아무도 남지 않은 그곳으로? 속이 점점 시끄러워졌지만 달리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무슨 일 있었냐는 듯 태연자약한 얼굴을 가장하며 서 있을 밖에.
(사랑이 무어더라. 사랑이란 감정은 글로 읽어 배울 수 없으면서 많은 글이 지어지고, 노래가 되었으며 극이 되었다. 한 마디로 똑 부러져라 정의할 수 없는 그것이 사랑이라는데, 사랑의 모습은 너무 다양해 나의 사랑은 또 어떨지 해봐야만 알 것이란다. 그리고 나는 알았다. 지금 사랑을 하고 있다고.) 벌써 은행 떨어진다. (내가 지금 무얼 하고 있던가, 어딜 가는 중이었던가. 아무튼 간에 길가를 거닐고 있었다. 옆에 네가 있다는 것만 빼고는 별 다를 것 없는 평소와 같은 거리였다. 사랑을 하는게 대수인가, 고백할 용기도 없는데. 가을 타면 외롭다더니, 가을이 오긴 온 모양이다. 그런데 사랑을 하면 봄이라더만 나는 지금 봄인가, 가을인가. 고민하던 차 길을 걷다가 스치는 손끝에 나는 그만 단풍물이 들고 오뉴월 장미가 필 것 같아 손을 움츠렸다.) 내일 비 온다던데. 은행 더 떨어지겠다. (나는 네 목소리가 듣고 싶어 시시콜콜한 말을 부질없이 건네었다.)
/ 나이는 딱히 안 정했는데 혹시라도 이어줄 참치가 필요할 것 같으면 마음대로 설정해도 오케이에요! 나이 차가 나도 되고, 이쪽의 감정을 눈치챘어도 되고 맞삽질이어도 되고 다 좋아요.
>>842 아, 그러게. 조심해야겠다. (은행은 가을에 보면 끝내 주고 열매도 맛난데 그 열매에서 나는 지독하게 썩은 변 같은 냄새만은 참아 주기 힘들다. 특히나 걸어가다가 무심결에 떨어진 걸 밟기라도 했다간 신발 밑창이 며칠은 구리구리한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 불쾌했다. 당분간 가로수 근처를 지날 때는 바닥을 유심히 보고 다녀야겠다. 그래야 은행 열매를 안 밟지.) 비? 아, 귀찮네. (우산 챙기기도 귀찮고, 길은 질척해질 테고, 네 말대로 은행이 더 떨어진다면 피해 가느라 더 신경 써야겠지. 내일은 스터디도 있고 저녁 약속도 있어서 한참 걸어야 하는데 곤란하게 됐네. 일상이 성가셔질 걸 생각하니 떨떠름한 와중에 한마디 덧붙였다.) 내일은 외투 챙겨. 비 오면 추워진다.
>>843 (분명 네 목소리가 듣고 싶어서 말을 건네고 건네었고, 네가 답을 주면 평범하게 대화하는 체 하면 됐는데 그게 어렵다. 내 목소리가 다른 말을 소리내지 않게 조심해야 하고, 떨리는 것이 드러나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자연스럽게, 이런 감정을 품기 전처럼 너를 바라다보고 나서 웃는다.) 벚꽃나무 같은 거였으면 좋았을텐데. (벚꽃, 예쁘잖아. 바닥에 떨어진 꽃잎도 예쁘고, 열매에서 냄새도 안 나고. 이런저런 이유를 덧붙이려다 말았다. 내 세상이 봄빛이라 분홍빛 꽃나무를 떠올린 것만 같은 기분이다.) 응, 점심 때부터 내린다던데. (이제 무슨 말을 해야할 지 고르지 못하고 있다가 덧붙여온 한 마디에 입을 꼭 다물고 말았다. 누구한테나 할 수 있는, 나에게도 베풀어진 작은 상냥함 때문이다. 비 오면 추워지니 외투 챙기라는 지극히 당연한 말 무엇이 설렌다고 나는 이러는가. 그러니 숨기기 위해 개구지게 웃으면서 장난같은 말을 건넨다.) 뭐야, 내가 세살짜리 애도 아니고. 내일 복장 검사하는 거야?
거석의 몸체는 천천히 대지위에서 몸을 일으켰고, 그것은 마침내 자신이 무엇을 해야하는 것인지 깨달을 수 있었다. 거대한 팔을 들어올려 땅을 단단하게 다졌고, 넘치는 생명력으로 하여금 그 단단한 대지위에 많은 생명들이 뿌리를 내리게끔 하였으며, 황폐했던 땅으로는 생명이 다시금 녹빛으로 흘러넘치게 되었다. 죽음의 비─강산성의 비─가 더 이상 생명들을 해할수 없게끔 그는 스스로 대지에 자리잡은 죽음의 기운을 거석의 육체에 받아들여 생명이 번성케 하였고, 거석은 이 별 위에 다시금 생명이 태동하게끔 하였다. 그렇게 행동하기를 태양이 지고 내림을 30번째 반복하는 날, 마침내 거석은 수많은 생명들이 땅위에서 살아감을 느꼈다. 저 멀리 물의 육체를 가진 이 또한 자신의 사명을 알고 있었다는 듯이 자기와 같은 행동을 했다는 걸 느낌으로 안 것일까, 하지만 그─혹은 그녀─가 이미 일을 마치고 잠에 들었다는 것을 눈치 챈 것인지, 그는 천천히 머릿속으로 수많은 상념에 젖어들었다. 그렇게 다시 태양이 지고 달이 뜨는 것을 7번째 반복하고 나서야, 거석은 드디어 결론을 내릴 수 있었다.
[지금으로서는, 더 이상 이들에게 나란 존재는 필요 없다.] [허나, 언젠가는....]
그렇게 결론이 내려지는 순간, 거석은 땅을 팠다. 거대한 몸뚱이를 숨기기 위해 몸을 웅크렸고, 자신에게 주어진 권능을 이용해 그 누구도 찾을수 없게, 운명의 순간, 누군가가 자신을 찾아주기를 바라면서, 대지를 열었던 위대한 거신은 거대한 산 아래로 자신의 몸을 숨기고는 대지 저 아래로 사라져 갔다. 그리고 그렇게 수많은 시간이 흘러, 거신이 묻혔다는 전설이 깃든 산에, 아주 자그마한 동굴이 열렸다.
>>846 거신이 묻혔다는 전설로 유명해진 그 산에 생긴 작은 동굴은, 점점 사람들의 발길이 오가기 시작하더니 이내 명소로 거듭났다. 인근 마을에서 그 동굴에 정성껏 마련한 음식으로 제물을 올리고 간절히 기원하면 소원이 이루어진다는 소문이 돌기 시작했던 것이다. 온갖 음식이 담긴 바구니와 보따리를 바리바리 싸 들고도 힘든 내색 없이 산을 오르는, 기골이 장대하고 어깨는 떡 벌어졌으며, 각진 턱에는 수염이 까끌까끌하게 난 사내 또한 그 소문을 듣고 동굴로 향하고 있었다. 점점 배가 불러오기 시작한 제 부인의 순산을 빌기 위해서였다. 마을에서 떨어진 숲에 사는 사냥꾼도 이 동굴에 직접 잡은 사냥감을 바쳤더니 얼마 후 멧돼지를 잡았다 하고, 얼마 전 마을에 정착한 신혼부부도 정성껏 만든 파이를 바쳐 지금의 부인과 맺어졌다고 했다. 부인도 아이를 배고 있느라 고생하고 있는데, 내가 가만히 있을 수는 없지. 그런 생각에, 사내는 가쁜 숨을 골라 가며 쉼 없이 산을 올랐다.
동굴에 다다르자, 그는 동굴 앞에 마련된 석제 제단 옆에 조심스럽게 짐을 내려놓고 숨을 몰아쉬었다. 아무리 체력이 좋다지만 험준한 산길을 많은 짐을 지고 오르는 건 조금 벅찼는지, 구릿빛 피부에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혀있었다. 휴식도 잠시, 사내는 털고 일어나 부지런히 제단 위에 음식을 차리기 시작했다. 싱싱하고 잘 익은 제철 과일과 채소, 갓 구워낸 빵, 그리고 오늘 아침 잡아, 신선한 핏빛이 가시지 않은 송아지 고기, 마지막으로 부인의 순산을 기원하며 직접 담근 과실주까지. 여러 종류의 정성이 들어간 음식들이 제단에 가득 차려졌다. 준비를 마치고, 남자는 제단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서 두 손을 모으고 나지막이 기도 하기 시작했다.
"비나이다, 비나이다. 거신이시여, 부족하나마 정성껏 준비한 제물이오니 어여삐 보아주시고, 부디 우리 부부에게, 우리 집안을 대를 이을 씩씩하고 총명한 딸아이를 보내주소서. 우리 부인 많이 아프지 않게 순산하고, 해산하고도 무사히 털고 일어나도록 보우해주소서."
사내가 조금은 무리해서, 많은 제물을 짊어지고 산을 오른 것은, 단 하나도 양보키 힘든 여러 소원 때문이었다. 가문을 이어가려면 건강하고 총명한 딸아이가 태어나야 했지만, 그만큼, 어쩌면 그보다도 중한 것은 부인이었다. 만에 하나 난산이라도 겪어 저로서는 상상도 못 할 고통을 겪고 잘못되기라도 한다면... 상상도 하기 싫을 만큼 두려운 일이었다. 부인을 보노라면 자신이 대신 아프고 싶을 만큼 안쓰러웠지만,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이 제물들이 부족함이 없기를 바라며 간절히 기원하고, 부인의 곁으로 돌아가 수발을 드는 것뿐이었다. 그렇기에, 사내는 중천에 올랐던 해가 저물어가도록, 꿇은 두 다리가 어느새 저릿하도록 그 자리에 못 박힌 채 쉼 없이 기도했다.
-어여쁜 나의 아이.... 이 아이좀 봐 나를 꼭 닮았어. 그날의 밖의 차가운 온도 바람에 나부끼는 커튼 건조한 공기 병원 소독약 냄새 기쁨에 찬 너의 목소리 모든것이 시간이 지날수록 오히려 선명해진다 다만 내가 그날 무슨 얼굴을 하였는지 오직 그것만 제외하고
"졸업 축하한다"
무뚝뚝한 목소리 앞으로 어울리지 않는 꽃다발이 건내진다. 과하게 크지도 작지도 않은 적당한 크기의 파스텔톤의 꽃다발 졸업시즌의 학교앞 간판대에서 팔리는 알록달록한 색감과 확연한 차이를 보였다. 평소 추위를 싫어함에도 일부로 개인 꽃집까지 새벽걸음으로 달려나갔을 그의 모습이 작은 꽃들 사이에 언뜻 비쳐보이는것같았다
"...그래... 앞으로 뭘 할지는 정했니?"
그리고 이어지는 침묵 이런 날까지 말이 없는것이 그 답다고 해야할까 괜히 친척 어른이나 할법한 낡아빠진 질문을 하며 서로의 시간을 죽인다. 이렇게 어색하게 굴꺼면 오지나말지 싶지만 어쩌면 이게 그가 표현할수있는 가장 큰 다정의 표현인것이다.
"아 친구들이랑 약속있니? 없으면 저녁이라도 하러갈까하는데"
/죽은 친구의 자식과 그 친구를 좋아하던 나 라는 관계야 딱히 자식쪽을 사랑하는건 아닌데 그냥 같이 있으면 좋았던 옛시절도 떠오르고 친구한테 감정적으로 빚진것도 있는데 그만큼 못해준것같아 자식한테라도 잘해주고싶고 여러모로 과거에 매여있는 사람이 보고싶었어
사내는, '육신(肉身)'이었던 자신의 몸을 바라보았다. 완전히 철제로 이루어진 몸뚱아리와 더불어 가슴에서 치밀어오르는 막대한 힘은 그에게 인지부조화를 주기 딱 적당했다. 오감이라 부르던 여러가지 인지들은 전부 하나로 뒤섞여 데이터라는 이름의 무언가로 받아들여지고 있었다. 이곳이 자신이 생활하던 시대가 아니라는 것쯤은 이미 이 철제 몸뚱아리에 남아 있던 '데이터'라는 정보에 모두 깃들어 있었고, 그 모든것을 받아들이는데는 차 한잔을 마시는 시간도 걸리지 않았다. 사내에게 있어 육신은 중요한것이 아니었다. 중요한 것은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에 대한 마음, 그리고 또 아직까지도 움직일 수 있는지에 대한 그 정신. 그 뿐이었다. 어차피 그 두가지만 있다면 살아 있다는 흔적은 남길 수 있었으니까. 그 순간 사내의 시선─메인 카메라─로 밤하늘의 풍경이 들어왔다. 더이상 별빛이 살아 숨쉬지 못하는, 형형색색의 네온 싸인이 가득한 풍경에 사내는 인간의 추악한 본성이 들어오는 것을 느꼈다. 그런 자신의 육체조차도, 결국에는 인간들의 추악한 욕망이 담긴 것이 아닐까, 그가 천천히 손을 내밀자 질량 홀로그램 프로젝트가 전개되며 한순간에 표창이 쥐어진다.
[......]
나쁘지 않다.
[재밌구나.]
사내가 천천히 허리춤에서 막대기를 하나 꺼내든다. 그와 동시에 서슬퍼런 빛이 뿜어져 나오며 검신을 이루어 내었고, 그는 그 빛나는 칼을 바라보며 천천히 그를 응시한다. 이정도의 힘이라면 예전의 몸뚱아리 그 이상의 힘을 낼수 있지 않을까? 그는 그렇게 생각하며 다리에 힘을 준다. 실린더가 압축되며 거력을 담아내었고, 남자는 숨을 고른다는 감각으로 가슴의 에너지를 응축한뒤 그대로 폭발시키듯 밤 하늘의 옥상을 내달리기 시작했다. 과거 천하제일 살수(殺手)였던 남자가, 현세에서의 실패작 몸뚱아리로 다시 부활하게 된 것은 아마 천지신명이 재차 천명을 내걸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며, 그는 저 멀리 비명이 들리는 곳을 향해 내키는대로 발걸음을 내딛었다.
/사이버펑크 살수입니다!! /살수라고는 하지만 일본 닌자 성분도 다량 포함되어 있어요! /그냥 맥커터만 아니면 됩니다! 어지간한 상황은 다 생각해뒀으니 아무나 부탁드려요!
꽃다발을 공손히 받아서 들고 고개를 숙였다가 들었다. 저분은 돌아가신 우리 엄마의 친구분이었다고 기억한다. 엄마 빈소에도 찾아와주셨었으니까. 우리 아빠가 주말에도 바쁘신 것처럼 저분도 생업이 있고 바쁘실 텐데, 내 졸업식까지 와주신 걸 보면, 엄마하고 막역한 사이셨던 것 같다. 엄마가 돌아가신 뒤로 시간도 많이 흘렀고, 아빠랑 속을 터놓으면서 많이 가라앉았다고 생각했는데도, 이렇게 아직도 우리 말고도 엄마를 기억해주는 사람이 있다는 걸 실감하니 가슴이 찡하기도 했다. 그거랑은 별개로, 이분과는 특별히 교류라고 할 만한 것도 못 했고 한참 어른이시라서 사실 대하기 어렵긴 하다. 그리고, 그런 건 저분도 마찬가지이신 모양이다. 보통 저런 진로에 대한 질문은 할 말이 없어서 어색할 때나 친척 어른이 할 말은 없는데 친근감 있다는 티는 내고 싶을 때 하는 것 같던데. 그 심경을 짐작하다 보니 저분도 어색하겠다 싶어 웃어넘기기로 했다.
"아하하, 네. 원서 넣었으니까 기다려보는 동안 천천히 생각해보려고요."
고마운 분이지만, 장래 계획까지 공유할 정도로 친하지는 않으니까. 이 정도면 예의 바른 대답이었을까 생각하는데, 저녁을 같이 먹자고 권해오셨다. 이건 진로 계획보다 좀 더 난감한데. 어쩌지? 아빤 못 오실 가능성이 더 클 것 같은데, 둘러대기엔 부러 시간 내서 축하해주러 오셨는데 죄송하고. 고민하고 있는데, 교문 쪽에서 차 소리가 들렸다. 힐끔 돌아보니, 익숙한 청회색 경차가 교문을 통해 들어와 주차장에 주차하더니, 차 문이 열리고 낯익은 사람이 내렸다. 아빠다! 오늘 못 오실 줄 알았는데. 깜짝 놀라서 움직이지도 못하고 있는데, 직장에서 막 나왔는지, 정장을 입고 큼직한 프리지어 꽃다발을 손에 든 아빠가 싱글벙글 웃으며 다가왔다.
-"딸, 졸업 축하한다! 아빠 안 늦었지?" "아빠! 오늘 못 올 줄 알았는데."
아빠가 들려준 꽃다발까지 손에 들고 나니 양팔이 꽉 차버려서 안기지는 못해도 신나서 싱글거리려니, 아빠의 큰 손이 머리카락을 헝클어뜨리듯 쓰다듬는 게 느껴졌다.
-"우리 공주 졸업식인데 당연히 와야지. 오늘만을 위해 아빠가 반차 아껴두고 있었지요." "아유 진짜 밖에서는 그렇게 부르지 말라니깐!"
나이가 몇인데 무슨 어린이집 다니는 애기 부르듯 부른다니까. 그러다 문득, 저녁을 같이 먹자는 권유에 제대로 대답을 안 한 게 생각났다. 이런, 아빠 왔다고 신나서 정말 어린애처럼 굴었잖아.
"저녁은 아빠랑 먹을게요. 감사합니다."
나름대로 예의 바르게 대답하고 고개를 꾸벅 숙였다. 아빠는 그제야 엄마 친구분이 계셨다는 걸 눈치채셨는지, 내 머리를 까치집으로 만들던 것을 멈추고 엄마 친구분께 인사했다.
-"오랜만에 뵙네요. 바쁘셨을 텐데 일부러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모처럼인데, 함께 식사하시겠습니까?"
아빠가 그렇게 권유하는 걸 보니, 일부러 와주셨는데 답례할 생각을 못 했던 게 좀 부끄러워졌다. 뭐, 먼저 권유하신 건 저 분이시고 나로서는 아빠와의 식사를 더 우선할 수밖에 없었으니 아빠가 적절하게 대처해주신 셈이지만. 나도 법적으로는 성인이지만 저렇게 능숙한 어른이 되려면 더 오래 걸리겠지. 준비 없이 어른이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었지만, 그래도 보고 배울 아빠가 있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기사의 길을 걷는 것은 상당히 길고 험했다. 체력 단련은 기본이요. 무기를 다루는 법을 배워야 했으며, 이 제국의 역사에 대해서도 깊게 공부를 해야 하는 것은 물론이며, 여러 전략도 공부를 해야만 했다. 입학하는 수는 많으나, 졸업하는 이는 상당히 적은 편이라고 했던가. 그 과정 속에서 수석으로 졸업을 한 은빛 머리 사내가 있었다. 지방 자작가의 차남인 그는 거의 모든 분야에서 좋은 평가를 받았고 당당하게 수석을 차지했다. 키도 크고 근력도 높았으며 검놀림은 그 무엇보다 날카롭고 매서웠으며 움직임도 상당히 빨랐기에 아카데미 내에서 그를 대적할 수 있는 이는 그다지 없었다.
그런 그가 오른쪽 무릎을 꿇고 있었고 그 앞에는 어린 시절, 자신이 이 아카데미에 입학하고 기사가 되면 만나기로 했던 이가 서 있었다. 조용히 침묵을 지키고 있던 사내는 고개를 아래로 숙이면서 말을 조용히 이어나갔다.
"꽤 오랜 시간이 지났고 약속대로 아카데미를 졸업하고 당당하게 기사의 자격을 가지고 당신의 앞에 이렇게 다시 찾아왔습니다."
상대가 자신에게 기대를 했을진 알 수 없었다. 아니. 애초에 자신의 존재를 제대로 기억하고 있을지도 알 수 없었다. 어쨌건 어린 시절의 이야기였으니까. 허나 자신은 그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 기사가 되겠다고 마음먹고 지금까지 열심히 노력했다. 물론 그 마음을 알아주고 응해달라는 것은 아니었다. 그저, 당당하게 자신은 약속을 지켰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을 뿐이었다. 남은 약속의 반을 수행할 수 있을지는 이제 상대의 마음에 달려있었다. 이미 어린 시절의 이야기일 뿐이라고 한다면 사내는 약간의 미련을 보일지도 모르나 그래도 딱히 더 말을 하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선 후에 돌아나섰을 것이다.
"...그건 그렇다고 쳐도 잘 지내시는 것 같아서 다행입니다."
어린 시절엔 반말이었던가. 허나 지금 그가 사용하는 말은 존대였다. 어디까지나 자신은 지금 이 자리에 기사로서 있는 것이었고, 적어도 상대는 자신보다 훨씬 높은 위치에 있는 이임은 사실이었기에. 어쨌건 자신은 자작가의 아들이었으니까. 아무튼 지금은 그것보다 상대의 대답을 기다리는 것이 먼저였다.
무슨 말이 나왔어도 그는 수긍했을 것이다. 어이없는 트집을 잡아 자신을 모욕하는 것이 아니라고 한다면.
/그냥 잡담스레에서 보고 약간 로판 분위기로 해서 기사 남캐가 어떤 장소에서 오른쪽 무릎을 꿇고 어린 시절의 약속을 이야기하면서 대답을 기다리는 장면이야. 어떻게 이어도 상관없고, 상대가 누구인지도 별 상관은 없지만... 가급적 비슷한 나이의 귀족 캐릭터. 적어도 자작보다는 높은 계급의 누군가였으면 좋겠다는 소망은 있다. 약속을 기억해도 좋고, 기억 못해도 좋고, 그냥 보내도 좋고 아무튼 그건 자유롭게 해줘. 다만 맥커터는 사절이야.
>>851 제 앞에 한쪽 무릎을 꿇은 이를 가만히 내려다보며, 그로슐라는 생각에 잠겼다. 약속이라, 누군가에게 기사가 되겠다는 약속을 받아낸 적이 있었던가. 기억을 헤집은 끝에 사교계에 입문하기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니 그제야 기억이 났다. 귀족 자제지만 부모님의 눈을 피해 대련하듯 칼싸움하며 놀던 남자아이가 있었던 것 같았다. 함께 왕립 기사단에 들어가서 만나자는 약속을 나눴던 것도 떠올려내자, 퍽 감회가 새로우면서도, 눈앞의 기사에게 경의를 표하지 않을 수 없었다. 꿈을 꾸고 결심하기는 쉬워도, 그것을 관철하기 위해 오랜 시간 꾸준히 노력하는 것은 힘든 일인 것을, 같은 길을 조금 더 먼저 걸어온 그로슐라로서는 잘 알 수밖에 없었고, 그 또한 그것을 해냈으니까.
"왕립 기사단에 입단해서 다시 만나기로 했었죠. 격조했습니다. 건강한 모습으로 다시 만나니 저 역시 반갑군요. 이렇게 서로 꿈을 이룬 걸 확인하게 된 것도요."
말은 쾌활하게 했고, 반가운 마음도 진심이었지만, 한편으로는 혼사나 성별 따위에 얽매이지 않고 승승장구할 그를 보니, 어쩔 수 없이 부럽기도, 입맛이 쓰기도 했다. 혼사에 관해 이야기하러 상대 가문의 저택까지 걸음 한 날, 무슨 생각인지 본인은 정략 결혼 같은 건 하고 싶지 않다며 자신이 어린 시절을 빌미 삼아 매달리기라도 했다는 듯한 언사로 그로슐라는 물론 그의 가문까지 모욕한 영식과의 혼담은 무산되었지만, 상대 가문에서 사죄의 뜻을 표하며 동생과의 혼담을 제안해 왔고, 긍정적인 이야기가 오가는 상태였으니까. 그 동생 또한 형처럼 몰상식하지는 않더라도, 그로슐라의 기사단 활동을 가문의 이익보다 우선해주리라고 기대하기는 어려웠다. 요즈음에야 여성도 맏이라면 가문을 이을 수 있게 되었다지만, 다른 가문의 안주인이 된 여인들에게는 후계 양육이나 다른 부인들과의 사교활동과 같이 전통적인 역할이 기대되곤 했기 때문이다.
이 친구는 나와 달리 혼사를 치르게 되더라도 지금껏 걸어왔던 길이 끊길 걱정은 안 해도 되겠지. 부럽네. 이내 고개를 터는 대신 눈을 깜빡여 상념을 털어냈다. 됐다, 그만두자. 이런다고 홀란트 공작가 측에서 내가 바라는 대로 해준다는 보장도 없고, 귀족으로 태어나서 특권을 누려온 이상, 의무를 져야지. 사람 앞에 두고 우울한 생각이나 하는 것도 흉한 노릇이고. 그로슐라는 상념을 갈무리하고, 입단식에서 작년 아카데미 수석 졸업자로서 한 말과 비슷하여 새삼스러웠지만, 웃어 보이며 축하 인사를 건넸다.
"앞으로 함께 이 나라의 평안을 위해서 잘해봅시다. 다시 한번 왕립 기사단에 입단한 걸 축하합니다."
그녀가 푸른 눈으로 기사를 내려다보았다. 들으려 하지 않아도 자연히 들려오는 이름을 무시하려 애썼던 지난 날이 떠올랐다. 기대는 실망을 불러오는 법이니까. 그는 자작의 차남이었고 그녀는 다룬드 공작의 금지옥엽, 제국의 하나뿐인 공녀였다. 바닥에 무릎을 꿇은 채임에도 의자에 앉아있는 자신과 엇비슷한 키. 몸놀림이 날렵해 늑대와도 같아 레이디들 사이에서 은빛 늑대라 불린다지. 그 때도 여우처럼 재빠르긴 했는데. 희고 싸늘한 인상의 얼굴에 남들은 알아보지 못할 정도로 희미하게 온기가 감돌았다. 망아지처럼 뛰어다니던 시기에 짧게 스쳐지나간 인연이었다. 몸이 약해 잔병치레가 잦던 그녀가 고모와 함께 따뜻한 남쪽 자작가의 영지에서 요양하던 때에. 평화로운 햇볕 아래에서 산으로, 들로 쏘다니던 그 시절. 은빛 머리칼을 보자 소설책에 나온 장면을 그와 따라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검 대신 나뭇가지로 그의 어깨를 두드리며 했던 맹세를, 사랑스러운 과거들을…….
“왕도까지 경의 소문이 자자하더군요.”
그의 실력이라면 황실 기사단에도 들어갈 수 있을 것이다. 젊고 뛰어나니 황태자의 직속 기사가 될 수도 있을테지. 그러니 고작 애들 장난같은 과거의 약속에 얽매일 필요는 없다. 그럼에도 그는. 소리 없이 찻잔을 내려놓은 그녀가 우아한 몸짓으로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어 내뱉은 말은 다분히 충동적이었다. 그것은 허망히 흩어지는 영원의 맹세들 속에서 돌아온 단 하나의 약속이었기에.
어라. 이게 이어졌다고? 생각도 못했네. 일단 이어줘서 고맙고! 어어. 하나만 질문해도 괜찮을까? 그러니까 혹시 공녀가 있는 곳의 위치 배경이 어떤 곳인지만 물어도 될까? 정원에 있는 개인 공간일수도 있고, 혹은 저택 안일수도 있고 그런 거니까! 다른 건 아니고 이을 때 나름 배경의 분위기를 살려볼까 싶어서!
아름다운 나무와 꽅이 있는 정원은 그야말로 고요했다. 자신의 본가에는 이 정도로 화려하고 아름다운 공간은 없었기에 사내는 더더욱 공녀와의 신분적 차이를 느낄 수 있었다. 같은 귀족이라고는 하나 자작가와 공작가는 분명히 차이가 있었다. 귀족에서도 서열은 있었고 자작은 가장 아래에 가까우며 공작은 가장 윗층이었으니까. 그래도 같은 귀족이라고 대놓고 무시하거나 차별을 하진 않으나 어느 정도 격은 따지는 것이 바로 귀족가의 암묵적인 분위기였다. 허나 이런 아름다운 정원이 있는 높은 공작가의 피를 이어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공녀의 말은 차갑거나 자신을 무시하는 어투는 아니었다.
"그런 소문이 나는 것을 바랬습니다. 어릴 적의 아무런 의미도 없는 약속일지도 모르지만, 그럼에도 그 약속을 잊지 않고 있다는 것을 알리고 싶었습니다."
물론 실력을 키우는 것만으로 그런 것을 유추할 순 없었다. 허나 적어도 기사가 되려고 하고 있다 정도의 소문은 들을 수 있지 않겠는가. 최대한 많이 알려지면 자연히 이 공녀에게도 알려지지 않을까 싶어 특히나 더 노력했다. 그리고 자신의 바람은 이뤄진 모양이었다. 자리에서 일어선 그녀의 모습을 그는 고개를 숙인 상태였기에 제대로 볼 수 없었다.
"그때도 지금도, 제 생각은 바뀌지 않았습니다. 저의 집은 제 형님 혹은 누님이 잘 이어갈테니, 저는 기사로서 저의 모든 것을 당신에게 바치고자 합니다. 명예도, 그리고 이 검도."
차남이었기에 오히려 행동은 자유로웠다. 기사가 되겠다는 것도 말리는 이가 없을 정도였으니까. 가문에 있어서도 공작가의 기사가 되었다고 한다면 참으로 큰 영광으로 이어질 수 있었다. 그 누구에게도 손해가 되지 않고 해가 되지 않을 결심이었다. 근처에서 불어오는 따스하면서도 시원한 바람이 그의 머리카락을 살며시 스쳐 지나갔다.
"오히려 공녀님이 그 날의 약속을 기억하고 있다는 것에 놀랐습니다. 기대를 하지 않고 그저, 기사가 되었다는 것을 알리고 싶어서 온 것이 컸기 때문에."
번잡한 사교계에서 숨을 돌리고 싶을 때 피해올 수 있는 곳. 조금은 구석진 곳에 있는 이 정원은 한 군데 한 군데 그녀의 손이 닿지 않은 곳이 없었다. 고요하고 아름다운 그녀만의 정원. 만남의 장소를 이 곳으로 정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그와 함께했던 때는 가장 몸이 아프고 힘든 시기였으나, 그럼에도 몇 안 되는 좋은 기억이었다. 고열로 앓고 난 다음 날이면 머리맡에 놓여있던 은방울꽃을 그녀는 아직도 기억했다. 그가 만남을 청해 왔다는 기별을 듣고 얼마나 놀랐던가. 기대로 간밤에는 잠을 조금 설치기도 했다는 사실은 결코 부정할 수 없었다. 그럼에도 기대는 하지 않으려고 했다. 더 이상 어린 날의 그녀가 아니었고, 그 역시 아닐 확률이 더 높았으니까. 그러나 그는 그저 정직하고 투명하게 자신의 의도와 생각을 이야기하는 자. 여전히 솔직하고 곧은 사내였다. 어찌 보면 누구보다도 귀족답지 않았다. 정원에 불어오는 바람처럼 불현듯, 그녀는 숨통이 트인다는 생각을 했다. 왜 그는 그토록 맹목적으로 나와의 약속을 지키고자 했을까. 조용히 그의 말을 듣던 그녀가 입을 열었다.
“그런 태도는 앞으로 버리세요. 경이 내게 무언가를 바친다면 나는 언제나 그에 상응하는 것을 줄테니."
공작가의 기사란 그런 존재였다. 그러나 그가 공작의 가신이 아니라 그녀만의 기사가 되길 바랐다. 나만의 것. 오로지 나만을 위해 담금질 된 검……. 몸에 단 피가 돌았다. 그럼에도 아무렇지 않은 척 짐짓 싸늘한 어투로 말하며 그녀가 두 손바닥을 펴서 내밀었다.
“검을 내게.”
/ 잠와서 다음 답레는 잇지 못하고 자러 갈 수도 있을 것 같으니까 천천히 줘!! 글구 기사 서임식(??)은 잘 몰라서ㅜㅜ 좀 모자라도 이해부탁해ㅎㅎ
말투가 조금 싸늘하긴 했으나 말하는 내용을 읽어보면 정당하게 대우를 해주려고 하는 말이었다. 성장하면서 조금 다른 느낌이 된 것은 있었으나 어떻게 보면 알맹이는 비슷하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을 하나 그녀에 대해서 많은 것을 판단하려고 하지 않으며 그는 침묵을 지켰다. 허나 상대가 말하는데 계속해서 침묵을 지키는 것은 예절적으로 그리 좋지 않은 것이었다. 자작가라고는 하나 자신 역시 귀족의 피를 이은 이였다. 기본적으로 지켜야 할 예를 지키기 위해 그는 조용히 입을 열어 방금 말에 대답했다.
"그 큰 마음. 감사히 생각하겠습니다."
정당한 대우. 그것은 쉽사리 나올 수 있는 말이 아니었다. 귀족들 중에선 기사를 하대하는 이도 있으며, 무시하는 존재도 적지 않았다. 물론 정당하게 대우를 하는 이도 있으며, 그 명예를 존중해주는 이들도 있었다. 그녀는 아마도 후자가 아닐까. 적어도 지금까지는 그렇지 않을까 그는 생각했다.
한편, 그녀가 두 손을 내밀고 검을 요구하자 사내는 아직 검을 내밀지 않았다. 그 대신 자세를 그 상태에서 유지하며 그녀에게 말을 올렸다.
"그 전에 공녀님에게 여쭙겠습니다. 저는 의무감이나 책임감이 아니라 순수하게 당신의 기사가 되고자 여기로 왔습니다. 당신은, 공녀님은 저를 당신의 기사로 맞이하고 싶으십니까? 제가 찾아왔기에, 지금 이렇게 이야기하기에 저를 받아들이고자 하는 것이 아닌지 무례를 무릎쓰고 묻고자 합니다."
억지로, 강제로, 책임감으로. 그런 것을 그녀에게 부여하고 싶진 않았다. 순수하게 자신의 실력을 탐내서건, 약속을 이행하고 싶어서건, 어쨌든 이 공녀가 자신을 강제로, 억지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순수하게 원해서 받아들이는 것을 그는 원했다. 만약 그것이 아니라면 그는 이 자리를 뜰 생각이었다. 자신의 존재가 그녀에게 있어 부담이 되는 것을 원치 않았으니까.
/답레는 일단 이어둘게! 편할 때 이어줘도 괜찮아! 그리고 잘 자!! 그리고 나도 자세히 아는 것은 아니니까 그냥 편한대로 해도 된다고 생각해!
무서우리만치 올곧은 사내였다. 단 하나를 위해 달려왔음에도 그녀가 싫다고 얘기하면 돌아서리라는 것이 빤히 보였다. 스스로의 마음 따위는 중요치 않다는듯.
"뭔가 착각하고 있군요. 나는 경이 찾아와 원한다고 해서 모실 수 있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녀가 다시 공작가로 떠나오고 그가 아카데미로 갔을 때. 가지 말라 말하고 싶었다. 왜 굳이 떨어져야만 하는지, 그때는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나 이제는 알지. 한미한 자작가의 차남과 그녀가 함께할 수 있는 길은 없었다. 한낱 평민이었다면 시종으로 둘 수 있었을테고, 고귀한 신분이었다면 혼약을 맺었을 텐데. 지금껏 그녀가 스스로 원해서 가져본 것은 단 한 개도 없었다. 이 몸도, 고귀한 신분도, 그에 당연히 따르는 권력도. 그런 그녀도 가지고 싶었던 것이 하나 있었다. 그녀는 그가 가지고 싶었다. 그와 눈이 마주쳤다. 검이 아니라 화살이었나. 속내를 꿰뚫어 오는 것 같은 시선이었다.
"모든 것은 나의 뜻대로. 그리 되게 하는 것이 경의 역할입니다."
사실은 당신을 기다렸다는 말은 차가운 얼굴 아래로 감추며 그녀가 오만한 얼굴로 턱을 들어올렸다. 명검을 가지기 위해서는 그에 걸맞은 주인이 되어야 했다.
/ 안녕~~ 오늘 내일 어디 놀러가게돼서!! 답레는 내일 가져올 수 있을 것 같아~ 오늘 올 수 있으면 오겠지만 기다리지는 말아줘!!
경과의 약속은 어릴 때의 이야기일 뿐이다. 혹은 경이 누군지 난 기억도 나지 않는다. 그런 기타 등등의 말이 나온다면 차라리 깔끔하게 모든 것을 없던 것으로 하고, 기사로서 다른 길을 찾아나설 각오도 하고 그는 그녀를 찾아온만큼 그의 목소리는 너무나 확고하고 흔들림이 없었다. 자신은 그녀가 공작가의 공녀이기에 여기로 온 것이 아니라, 그녀이기에 여기에 온 것이었으니까. 반대로 그녀 역시 자신을 자신이었기에 기사로서 삼고 싶어하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것은 분수에 넘치는 욕심일지도 모르나 그 욕심을 그는 차마 포기하고 버릴 수 없었다. 그런 속내는 감춰버리며 그는 곧 들려오는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 여기까지 찾아왔고 지금껏 노력한겁니다. 공녀님."
그 이상의 말은 필요가 없었다. 자신의 검을 두 손으로 들어올린 후 그는 그녀에게 내밀었다. 어릴 때 장난처럼 하는 약속이 아니라 진지하게 누군가의 아래로 들어가 그 기사로서 함께 하려고 하는 일종의 약속을 치를 준비를 마치며 그는 다시 고개를 아래로 숙였다.
"저는 당신의 것이요. 당신의 검입니다. 당신이 원하고 바라는 것이 있으면 그것에 따르는 충의를 약속합니다."
어릴 때 나눴던 약속의 마지막 반을 수행할 준비를 마쳤다는 듯, 그는 그 자세에서 눈을 살며시 감았다.
그의 손 위에서 검을 받아든 그녀가 검을 뽑아들었다. 이게 그 무투 대회에서 승리해 받은 보검일까. 간단한 호신술 외에는 배우지 않은 그녀조차 잘 만들어진 검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무릎 꿇은 그의 위로 어린 날의 기억이 겹쳐 보였다. 이제 나뭇가지 대신 진짜 검이라는 게, 그가 실제로 검을 바친다는 게 달라졌을 뿐. 차릉- 검이 검집에서 빠져나오며 청아한 소리를 냈다. 잘 관리되어 반짝거리는 검신을 한 번 비춰본 그녀가 오른손으로 쥔 검으로 그의 왼쪽 어깨를 두 번 두드렸다.
“그대의 방황하던 생은 나 딜라이나 다룬드가 지금 거두었으며, 그대는 지금 이 순간 내 것으로 다시 태어났다. 그대는 나의 기사. 경은 내 영광을 위해 싸울 것이며, 나 역시 주인으로서 경의 명예를 지킬 것을 맹세한다. 경은 오직 이 검으로만 죽을 수 있다.”
엄숙한 목소리로 내 손으로 네 생명을 거두기 전까지는 죽지 말라는 뜻을 전하고 나니 갑자기 검이 무겁게 느껴졌다. 그의 생명의 무게. 충의의 무게. 공녀로서 날때부터 지고 있던 무게들 보다 이것이 훨씬 무겁게 느껴졌다. 결코 잃지 않을 것이다. 나의 기사. 오직 나만의 것이 되기 위해 키워진 이 아름다운 것을…….
어린 시절에도 이런 느낌의 선언이 있었던가. 물론 그땐 검이 아니라 그저 장난검 검처럼 사용할 수 있는 나뭇가지에 지나지 않았다. 제 어깨를 치는 것이 그런 나뭇가지가 아니라 검이라는 것에 상당한 무게감을 느끼며 사내는 침을 꿀꺽 삼켰다. 지금 이 선언은 한 사람을 그대로 취하겠다는 의미. 그리고 앞에 무릎 꿇고 있는 이는 제 목숨을 다해 충성을 하겠다는 맹세의 표시였다. 누군가가 굳이 어린 시절의 약속을 왜 지키려고 하는가? 라고 묻는다면 사내는 바로 대답할 수 없었다. 명확하게 모두를 납득시킬 대답따윈 없었으니까. 그냥 자신이 그렇게 하고 싶었을 뿐이었다. 그냥 이 공녀의 기사가 되어 일생을 살아가고 싶다. 단지 그 뿐이었다. 사소한 이유야, 거기에 도다르게 된 원인은 있었으나 그것을 굳이 입에 담을 이유가 뭐가 있을까.
"명하신대로."
부드러운 정원의 바람이 불 무렵, 사내는 천천히 자리를 일으키고 고개를 제대로 들어 그녀를 마주했다. 자신의 머리카락을 손으로 정리하며 고개를 살짝 아래로 숙이니 그녀의 모습이 그대로 눈에 들어왔다. 어릴 때와는 다르게 지금은 마냥 연약하고 무디지 않은 성격이 얼굴에서 묻어나는 것 같아 역시 시간이 지났다는 것을 그는 느낄 수 있었다. 허나 아무런 문제도 없었다. 그때의 그녀도, 지금의 그녀도 결국 똑같은 존재였기에. 그 본질이 달라지진 않았을테니까.
"그럼 공작 각하에게도 보고를 드리러 가봐야 할 것 같은데. 공작 각하는 어디에 계시는지 여쭤도 되겠습니까? 공녀님의 기사라고는 하나, 어쨌든 전체적으로 보자면 다룬드 가에서 일하게 되었으니 말입니다."
누군가의 기사가 된다는 것은 그 사람과의 이야기로 끝나는 것이 아니었다. 물론 애초에 사내가 여기에 들어와있다는 것은 이미 공작과의 이야기도 다 끝이 난 것이긴 하나 그럼에도 정식으로 보고를 하고 인사를 드리는 것이 바로 기사로서의, 그리고 귀족으로서의 예의였다. 자작가의 차남이라고는 하나 귀족이었으며, 아카데미를 졸업하고서 얼마 되지 않았다고는 하나 정식으로 제국에서 그 직위를 인정한 기사였으니.
/미안할 것이 뭐가 있어! 아무튼 이어둘게! 라고는 해도 사실상 거의 끝자락 같긴 하지만 말이야.
제 약지에 반지를 끼우는 걸 내려다보며 나지막히 뱉었다. 천천히 제 눈높이에 맞춰 내려오는 시선이 닿기 전에 고개를 돌린다. 아주 성대한 결혼식이었다. 빛이 닿는 모든 게 반짝이고, 약하게 이는 바람에도 꽃향기가 실려올 만큼. 다만 당신과 나, 둘 중 그 누구도 웃음짓지 않았을 뿐이다. 오직 우리만이 누군가의 장례를 치르듯 표정없이 서 있었다.
막바지에 이른 축하 연회와 함께 해가 떨어지기 시작했다. 피로를 핑계로 먼저 올라온 방은 아늑하고 향기롭다. 눈에 닿는 모든 것이 새 것 같다. 지금까지 원하던 게 이런 것 아닌가. 막상 손에 쥐고 나니 허탈하다. 감당하기 어려운 마음을 들고 스스로를 긁어대다, 견딜 수 없을 때쯤엔 당신에게로 화살을 돌린다.
“처음부터 솔직히 말씀하셨다면 일이 이렇게까지 꼬이진 않았을 텐데. 몰라보아 미안하다 해야 합니까?”
막 문을 열고 들어선 당신을 마주본다. 그 두 눈동자에 담긴 것이 무엇인지, 이제는 읽을 수 없다.
/ 꼬인 사랑.. 애증.. 같은 걸로 굴리고 싶다 ㅎㅁㅎ 처음에는 황족인 A(참치캐)랑 B(내캐)랑 연인이었는데 B 야망이 커서 황태자랑 약혼함.. 그러다 황태자랑 황제 죽고 A가 황위 오르게 되면서 AB가 결혼하게 됨... 같은 상황이야~~ 황제랑 황태자 죽인 게 진짜 A인지는 참치 맘대로 해주면 될 듯 ~.~ 텀 많이 느릴 수 있어서 미리 양해 부탁해 ㅠ
황제의 4번째 아들로 태어나 부족함 없이 살아온 소년에게 있어서 권력이란 머나먼 무언가였으며, 형제들간의 알력이라는 것은 시시하기 그지 없는 것이었다. 애시당초부터 그에게 있어서 모든 것은 무료하기 그지 없는 것이었으니까. 천부적으로 타고난 싸움꾼이었으나 항상 그는 무력하게 패배를 하였고, 몇가지 재주─세력을 형성하거나, 온갖 학문에 대해 뛰어난 식견 등─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은 그 모든 것을 자신의 무료함을 채우는데에 치중할 뿐, 외부에 대해 관심을 보이지 않았고, 그는 그저 그렇게 패자가 되어 하루하루를 보낼 뿐이었다. 하지만 그런 그에게 있어서, 한순간이나마 색채를 더해주는 무언가가 나타났다. 아니, 정확하게는 한 소녀가 있었다. 소년은 소녀의 눈에 깃들어 있는 색채에 대해 흥미를 가지기 시작했고, 마침내 그 색채가 광채로 변해갈 때 쯤에야 그는 그 소녀에게 무언가를 갈망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는 그렇게 그녀와 연인이 되었고, 그 광채가 자신의 것이 되었음에 만족하며 지낼 뿐이었다. 하지만 그 광채의 의미는, 그가 짐작하지 못한 그녀의 마음속 갈망임을, 소년은 알지 못했다.
─왜?
광채가 변절해 자신을 떠나가고, 그렇게 떠나간 광채에 대해 분노를 토하던, 소년이었던 남자는 방에 모든것을 부수고 나서야 상황을 냉철하게 돌아볼 수 있었다. 그래, 그녀가 원하는 것은 결국 나와 같이, 그저 모든 것으로부터 피하는 삶이 아니었다는 것을 말이다. 그렇다면 그렇게 살아주마, 네가 그렇게 돌아올 수 있다면, 기꺼이 내가 그리해주마. 그는 천천히, 방안에 있던 가장 온전한 물건인, 핏빛의 액체가 담긴 와인잔을 들어올려 한 모금 축인뒤 새벽녘의 하늘을 잔을 통해 비추어 보았다. 피로 물든 하늘이 모든 것을 보여주는 것일까, 가볍게 힘을 주자 와인잔이 깨져 나가며 핏빛 하늘이 산산조각으로 부숴져 내린다.
──그 뒤로는 너무나도 간단하였다.
그가 본격적으로 황위 계승전에 이어서 그는 오히려 자신을 지지하는 군부의 세력을 적극적으로 흡수하였고, 역으로 각종 정보들을 수집하며 형제들을 압박하기 시작했다. 정치하는데 있어서 가장 위험한 정보를 아무렇지도 않게 흘리는 그들의 행태를 보며 그는 결국 이들도 한낱 더러운 토사물에 불과하다는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정신을 차렸을때, 그는 황태자를 넘어선 괴물이 되어 있었다. 그렇게 그는 결국 황태자의 세력과 정면으로 맞부딪혔고, 마침내 황성을 지나는 큰 문─당시 소녀는 그에게 매수 당한 친가에 의해 집에 돌아가 있었다.─의 앞에서 주먹을 휘둘러 단 한번에 그의 머리통을 깨부숴버렸고, 아무렇지도 않게 '자신의 아버지'라고 불리우는 장년인에게 다가가 천천히 다가가 입을 열었다.
"이제 저 밖에 안남았습니다."
그렇게 그는 황태자의 자리에 올랐고, 그로 부터 2달 뒤, 그는 황위를 계승하며 만백성의 환호 아래 그는 천천히 입꼬리를 비틀어 올렸다. 자신은 스스로 특별한 존재라고 생각하지 못하였다. 그들이 온갖 창의적인 방법으로 자신을 빛내고자 할지라도, 결국 자신은 아무런 의미도 부여하지 못했으니까, 공허하기 그지 없는 광대의 장막이 닫히고, 그는 조용히 그녀의 방으로 찾아갔다. 그가 그렇게 시선을 돌리자 소녀였던 여인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것은 책망인가, 아니면 증오인가. 왜 그런 시선으로 자신을 보는 것인지 그는 천천히 손을 뻗어, 그녀가 떠났을때와 같은 똑같은 잔에 똑같은 핏빛 액체를 한모금 들이키며 입을 열었다.
"무럿이 솔직한것인지 나는 모르겠소. 나는 아직도 변함이 없는 존재라고 밖에 할 말이 없겠지."
여인은 알까, 아직도 그는 소년인 상태 그대로 그렇게 살아가고 있음을 말이다. 아마 이제 그 유약하던 소년은 없다고 그녀는 생각할까? 아니면 그 소년이 아직까지 미련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그 순간 소년의 입이 떨어지며, 무미건조한 목소리가 울려퍼진다.
"패자(敗者)로서 살아가고자 하였으나 단 한가지를 가지지 못하여 스스로 패자(覇者)가 되었고 하늘을 불살라 생명(황가)을 취하니 그 목을 축이는 것은 결국, 패자(敗者)인 것을 말이지."
//원하는 대로 제대로 뽑혔는지 모르겠네, 씁 //일단 모티브는 던파의 폭룡왕 바칼 + 당 태종 이세민이야!
“폐하께서 변함 없으시다면 제가 틀린 게지요. 사람 보는 눈은 조금 있다고 생각했는데, 오판이었나봅니다.”
건조한 목소리에 아예 몸을 돌리고 섰다. 자조하듯 터지는 웃음에 양손으로 입가를 가렸다. 지그시 감았다가 뜨는 눈. 하늘은 어둠에 잠기고 유리창에 비친 불빛만이 일렁인다. 어린 시절부터 욕심이 많았다. 양손에 인형과 새 옷을 쥐고도 저쪽의 풀꽃 하나를 더 갖지 못하면 그게 못내 억울해 울음을 터뜨리곤 했다. 지금보다 더 좋은 것, 더 귀한 것, 더 많은 것을. 할 수만 있다면 그 누구에게도 몸을 낮출 필요 없는 곳까지. 당신과의 단란한 한때를 꿈꾸던 시절도 있었으나———. 찰나의 호시절(好時節)이었다. 당신에게서 발견했던 빛이 사라졌다 여기지는 않았다. 그게 제가 찾는 것이 아니었을 뿐. 그러나 그 때문에 당신을 사랑한 것도 사실이었다. 사랑의이유가 끝내 저버리고 마는 이유와 같다니, 우습기 짝이 없었다.
“오히려 마음이 가볍습니다. 이렇게 된 게 제 탓이라 책망하실 일은 없을 테니.”
혼잣말 중얼거리듯 내뱉고선 일순간 당신을 향해 선다. 갑작스러운 움직임에 비틀대는 걸음으로 성큼성큼 다가서 당신이 쥔 잔으로 손을 뻗었다. 이윽고 얄팍한 유리잔이 손가락에 닿으면, 그대로 감싸쥐고 남은 것을 들이켰다. 교양이라고는 눈 씻고 찾아봐도 없는 행동이었다.
“…내게 남은 사랑도, 원망도 없다고 말해요.”
빈 잔을 다시 당신 손에 쥐여주며 표정을 일그러뜨린다. 대체 무엇 때문에 이렇게 고약하게 굴게 되는 건지는, 스스로도 몰랐다.
알고 있다. 어렸을 당시는 몰랐으나, 지금에 와서 그녀가 시선을 두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말이다. 그는 어느새 비어버린 잔을 내려다 보았다. 그래, 그렇기에 그녀를 좋아한 것이었다. 자신이 가지지 못한 그 광채는 사람으로서 가질수 밖에 없는 그 욕망의 색채였으니까, 아니 그보다도 더 근본적인 무언가를 갈구했기에 그는 그녀에게 이끌릴 수 밖에 없던 것일지도 모른다. 그를 자각하게 된 것은 아주 어렸을때였을 것이다. 언제인지도 기억이 나지 않을, 한 노파가 자신을 찾아와 이야기 하던 자신의 미래를, 떠올린 시점부터 말이다.
[황자님께서는 누구보다도 위대한 용이 될 것입니다. 저희 같은 한낱 인간들을 오시할 정도로 가장 위대한 자가 될 것이지요. 허나 그 정점에 도달하는 것은 결국 본인의 의지이자, 본인의 의지가 아닐것입니다. 그 빛을 취할 것인지, 취하지 않을 것인지, 그것은 오직 황자님께 달렸을 테지요.]
그 모든 이야기들은 본인을 제외하고 비밀로 붙여진, 아무도 모르는 이야기가 되었다. 하지만 결국 그 예언이 들어맞았음에 사내는 코웃음 칠 수 밖에 없었다. 버리고자 하여 패자를 자처하였으나 결국에는 천하를 거머쥐게 되었다. 아까 전, 자신의 탓이라 책망할 일은 없을거라는 소녀의 말에 소년의 핏빛 눈동자가 가만히 소녀를 응시한다. 그 눈동자가 간직한 것은 끝모르는 무료함, 그리고 세상을 뒤덮고도 남을 만큼의 강렬한 광기(狂氣)였다.
─아직 그녀가 미운가? 너무나도 미웠다. 자신을 떨어트린 그녀가 너무나도 증오스러웠다. ─그럼에도 그녀가 사랑스러운가? 그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강욕을 드러낼 정도로 사랑스럽기 그지 없었다.
그렇기에 그는 그녀가 비워낸 자신의 잔에 조용히 레드와인을 따라내었다. 마치 피의 강을 만들어내는 것 처럼, 그 레드와인은 넘실거리듯 그의 손길을 따라 흘러내렸고, 양쪽 잔에 모든것을 따라낸 그는 천천히 다시 잔을 손바닥 안에 거머쥔채 입을 열었다. 선이 살아있는 강렬한 카리스마를 간직한 외모가 핏빛 눈동자와 딥프러시안 블루의 머리카락에 너무나도 잘 어울리는, 제국의 젊은 황제이자 오만한 천재가 소녀를 가만히 응시하며 대답하였다.
"어차피 그대는, 나를 좋아하지 않는 것 아니던가?"
무미건조한 목소리, 하지만 그 속내를 들여다 본다면 거룡의 목울림을 연상시킬, 폭발할 듯한 감정이 담겨 있음을 알게될 것이다. 동시에 그의 손에 쥐어져있던 잔이, 그녀를 처음 만났을때와 마찬가지로 그의 손아귀에서 깨져나간다. 마치 세상을 깨트려 부숴버릴 듯한 모습이었다.
"그렇기에 역으로 묻겠도다, 그대는 나에게 무슨 감정이 남아 있는가? 아니, 내가 그대에게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가? 그게, 지금 이 자리를 떠나지 않을 정도로, 중한것인가."
거대한 용이, 소녀를 바라보며 숨을 내뱉었다.
/이런말이 있지. 결국 사랑하게 된 쪽이 패배자라고, 그래서 황제는 패자(覇者)가 되었지만 결국 패자(敗者)가 되어버린 셈인거지....
방금 전 당신의 잔을 비워내던 건 없었던 일인 양 제 몫의 잔에는 심드렁한 태도였다. 실은, 간신히 감정을 억누르고 있었다. 잔에 담긴 것을 쏟아버리고 잔을 던져 산산조각내지 않도록. 어디를 향한 분노인지 알기 전까지는 섣불리 말을 뱉거나 행동하고 싶지 않았다. 꼴 같잖은 자존심이라고 해도 좋았다. 이미 충분히 우스운 꼴인데 그깟 자존심 운운하며 비꼬는 말에 흠집 하나 더 생긴다고 크게 달라질 게 있을까. 그러나 당신의 물음에는 하, 하는 날카로운 웃음을 뱉을 수밖에 없었다. 제 형제를 죽인 사람치곤 꽤 깜찍한 물음이 아닌가.
“무슨 말씀인지 잘 모르겠습니다만.”
말을 마침과 동시에 잔이 깨졌다. 움츠러들었던 것도 잠시, 처음처럼 꼿꼿하게 선 채 당신을 마주보다 한 발자국 다가선다. 와인인지 피인지 분간이 어려운 것이 떨어지는 당신의 손을 제 양손으로 꽉 쥔다. 깨어진 조각이 제 손에 흠집을 낼 때까지.
“한때는 당신을 사랑했고, 지금은 원망도 사랑도 않는다 말하지 않는 당신이 끔찍합니다. 지금 이 자리를 떠나지 않는 이유는………”
목구멍에서 울컥이듯 쏟아지는 목소리가 일순간 멈춘다. 두 사람이 지내기에도 지나치게 넓은 방을 지독한 적막이 가득 메웠다.
“당신이 내가 원했던 걸 전부 가지고 있으니까.”
아까와 같은 웃음에 얼핏 황홀경이 스치는 듯한 눈동자. 그러나 이윽고 시선을 돌려버리고 만다. 황급히 가린 입술에 맺혔던 건 웃음이었던가.
처음부터 그를 사로잡은, 패배자로 만든 그 눈동자였다. 형제도, 자신의 아버지 마저도 한낱 더러운 토사물, 그 이상도 그 이하로도 보지 않는 이 젊은 황제에게 있어서 지금 이 눈앞에 있는 추악하고도 덧없이 아름다운 한떨기 꽃은 자신을 유혹하고 있었다. 이것은 무료한 황제에게 있어서 마약이나 다름 없는 존재 일 것이다. 만약 그녀가 없었다면, 지금 이 황제는 하루에도 수십명을 죽여가며 그 삶에 색채를 더하기 위해, 자신을 죽이러 올 칼날을 기대하며 피로서 목을 축이지 않았을까. 중요한 것은 여인은 지금 자신의 가치가 그 무엇보다 드높다는 것을 모른다는 것이다. 무료함에 지쳐버려 언제라도 광기에 물들 수 있는 오만한 천재에게 있어서 지금 그녀는 그 어떤 무언가보다도 그를 옭아맬 수 있는 가장 완벽한 사슬임을 모를것이다. 이미 황제는 알고 있다. 그녀가 그 어떤 것 보다도 지금의 자신을 별로 사랑하지 않음을.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녀를 손에 움켜쥐고 싶었다.
"어차피 흙더미와도 같은 것이다. 나에게 있어서, 이런 자리는 전혀 중요치 않지."
오만하였다. 제국의 황좌에 올라서면서, 그 무엇도 중요하지 않다고 하였다.
"하지만 그대가 이것이 중하다고 하다면은, 난 이걸 끝까지 지킬것이다."
그래, 좋은 정치로 백성들의 배를 불려주마. 강력한 병권을 기반으로 정복을 진행하고 제국의 권세를 드높여 주마. 그렇게 함으로서 나의 악명보다도 드높은 명예를 세움으로서 2천년이 지나도 쇠하지 않을 제국의 기반을 마련해주겠노라. 그것이 지금 그대가 바라는 황제로서의 권세와 힘을 사랑한다면 말이다. 나에게는 그럴 힘도 있고, 시간도 있으니 말이다. 왼손에 깃든 상처에 느껴지는 차가운 온기를 느끼며 그가 천천히 소녀를 응시한다.
"너 또한 마찬가지다. 너는 내가 가지지 못한 유일한 것을 가졌으니, 나는 너를 손에 쥔 채 살아갈 것이다."
연기라도 좋았다. 한순간만이라도 좋았다. 예전으로 돌아가지 않더라도 좋았다. 지금의 황제에게 있어서, 이런 광기에 사로잡힐 정도로 자신의 삶은 무료했고, 그 무료한 삶을 깬 것은 그녀였으니까. 그 순간 황제의 눈빛이 아무런 색채도 띄지 않은채, 자연스럽고도 부자연스럽게 뒤틀린 미소를 자아내었다. 누군가 본다면 너무나도 순수한 미소겠지만, 누군가 본다면 광기와 욕망에 점철된 미소일 수도 있으리라. 과연 그녀는,
"도망 갈 꺼면 지금뿐이다. 아니, 도망가도 상관없다."
─어떤 모습을 보고 있을까.
"너는 이제 내 것이니까."
그 세상 어떤 것보다도 증오한단다. 아름다운 꽃이여.
/어차피 둘다 쓰레기로는 쓰레기지 않을ㄲ..... 한쪽은 권력욕에 사로잡혀 남자를 헌신짝처럼 버렸고, 한쪽은 집착에 사로잡혀 자신의 형제를 쳐죽인 다음 그 수급을 아버지 면전에 던졌으ㄴ.... /여담이지만 선대 황제는 즉위식 전날에 사망했어. 황태자를 죽인 넷째 아들의 행보에 충격을 먹고 심적 타격이 너무 커서 기력이 한순간에 쇠약해진 탓에 그만....
도심의 복잡한 거리 한켠에서, 여인은 벽에 기댄 채로 한숨을 푹 쉬었다. 드물게도 활기가 만연한 뭇 사람들 틈에서는 이질적인 모습이었다.
거리며, 사람들이며, 행복이 가득한 날이었다. 언제까지고 계속될 것만 같던, 죄악스러운 혼란과 사투의 시대가 겨우 끝난 직후였으니까. 수도 전체를 둘러싼 축제의 열기는 평화의 시대가 찾아왔다는 사람들의 기쁨과, 다시는 같은 비극을 반복하지 않으리라는 희망의 반영인 듯이 찬란했다. 그렇지만, 이 젊은 아가씨만은 행복에 겨운 사람들 틈에서도 우울한 표정을 고수하며 떠안은 고민거리를 곱씹고 있는 것이다.
그렇지만 한편으로는, 그녀의 고민 또한 어제까지의 그림자 드리운 고뇌에 비하면 단란하다고 할 만했다. 아니, 평화의 시대가 아니라면 꿈도 꾸지 못했을 행복한 고민이라 해도 이상하지 않았다.
평화의 바람과 축제의 열기가 수도를 휩쓸면서, 전란기에는 오랜 시간 잊혀져 있던 문화들 또한 사람들에게 돌아왔다. 특히나 연극은, 혼란을 종식시키는 데 이바지했다는 여러 영웅들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싶어하는 수많은 관객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업적에 비해, 그들 각자에 대한 이야기가 대부분 베일에 가려져 있었다는 점은 오히려 사람들의 상상력을 자극하는 요소였다.
오랜 시간 일을 쉬어야 했던 무수한 극단들이 수도로 모여든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벌써 수도의 여러 홀과 극장에서 영웅담을 재해석한 연극들이 상영하기 시작했다. 전쟁 전에 명성이 대단했던 모 여성가극단도 당연하다시피 기회를 얻었다. 사흘 뒤면 수도의 유서 깊은 극장에서 그녀들의 연극이 열릴 예정이었다.
그래서 그 연극의 주연 중 하나를 맡게 된 이 젊은 아가씨는, 한숨을 픽 내뱉으며 고민하고 있었던 것이다.
"모르겠어, 배역의 성격도, 방향도... 어떤 식으로 해야 할지."
우울함을 곱씹으며 그녀는 중얼거렸다.
"어쩌지, 이제는 정말 시간이 얼마 없는데..."
/원래는 >>380을 보고 이어보면 어떨까 싶어서 써봤던 건데, 너무 시간도 지났고 이제는 없을 것 같아서 한번 구해볼게 /기본적으로 어떤 배역을 맡은 배우와 그 배역의 모티브가 된 세계관 내의 실존인물이 우연히 만난다는 느낌을 생각하고 쓴 건데, 이게 아니더라도 맥커터만 아니면 어떻게 이어주던 괜찮아 /어... 이제 없을 거라 생각하지만 혹여나 >>380이 아직 있다면, 그 내용으로 이어주더라도 좋아.
>>876 쾅! 수심이 어린 한탄을 집어삼키듯, 근처에서 굉음이 들렸다. 나무 테이블을 내려지는 듯한 소리가 채 가라앉기도 전에, 짜증이 담긴 날카로운 여성의 목소리가 쏟아져나왔다. 소리의 근원지는 배우가 서 있는 곳에서 가까운 주점이었다. 문이 활짝 열려 있는 탓인지, 취기가 묻어나면서도 격앙된 목소리로 쏘아붙이는 말들은 귀를 기울인다면 가게 밖에서라도 들을 수 있을 정도였다.
"가라는 말이 말같지가 않아요? 그래요, 다 말할 테니 입 다물고 받아나 적으시죠. 돈 때문이에요, 그 빌어먹을 싸움에 낀 거. 그 싸움 하면 내 가족 생계를 보장해주고, 때려치면 그날로 밥줄을 끊는댔으니까. 우리 가족 배 곪는 게 싫어서 꼈어요. 이유는 그게 다예요. 영웅? 그건 떠들기 좋아하는 작자들이나 하는 소리고, 저 쪽이 더 좋은 조건을 제시했으면 그 편에 붙었을 걸요?"
비웃는 듯한 낮은 웃음소리와 함께 잠시 목소리가 끊겼다가, 조금 지나자 한층 가라앉은 듯하지만, 여전히 격앙되어있는 듯한 목소리가 다시 이어졌다.
"사명이네 의무감이네, 적어도 나한텐 해당사항 없어요. 나 살고 내 가족도 지키기도 뼈빠지겠는데 무슨 놈의 세상을 지켜요? 지킨다 쳐도, 그 대신 내가 죽으면, 내 배우자, 내 새끼가 죽으면 그게 다 무슨 소용이에요? 그냥 개죽음이지. 이 짓거리 다신 안 할겁니다. 돈 줘도 안 해요. 받을 거 다 받았고 모을 만큼 모았으니까. 이제 됐죠? 듣기 좋고 팔릴 만한 영웅담은 딴 데서 알아봐요, 호사가 양반. 나한테서 나올 이야기라곤 이 정도니까."
그 말을 끝으로 목소리는 끊겼고, 이윽고 소리가 났던 주점에서 족히 2미터 이상은 될 듯한 기골이 장대하고 우람한 체형의 여성이 걸어나왔다. 대충 묶어내린 짧은 은발은 머릿결이 억센지 잔머리가 삐져나와 있었고, 있는대로 치켜올라간 짙은 눈썹이 미간은 있는대로 구겨져있었으며, 안 그래도 삼백안이라 더욱 사나워보이는 형형한 빛을 띤 벽안을 감싼 눈매는 퍽 날카로워 험악한 인상을 더했다.
"에라이, 술맛 떨어지네. 재수가 없으려니..."
퍽 살벌한 투로 투덜거리며 주점에서 벗어나 터덜터덜 걷던 여성의 형형한 시선이 우연인지 우두커니 서 있던 배우를 향했지만, 이내 여성은 고개를 돌리고, 술이라도 깨보려는 듯 허리에 찬 수통을 풀어 벌컥벌컥 물을 들이켰다.
요란한 충격음이 들린 순간, 아가씨는 반사적으로 귀를 막고 머리를 숙였다. 학습된 동작이다. 포격음이 들릴 때마다 이러는 것에는 이골이 나 있었다.
그렇지만, 포격음 치고는 너무 작지 않나 싶은 의심에 고개를 들어보니, 바뀐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그녀는 멋쩍은 표정으로 헛기침을 하고 다시 원래대로 벽에 등을 기대었다. 남몰래 내뱉은 걱정스러운 중얼거림이 뒤따랐다.
"폭죽 터뜨릴 때도 이러려나, 나..."
아가씨는 입을 삐죽거리며 소리의 진원지를 흘겼다. 문 단속도 되어있지 않은 주점에서 쩌렁쩌렁 흘러나오는 성난 목소리는 사람들의 분위기를 역행하는 것처럼 홀로 섬뜩했다. 아까의 굉음도 그렇고, 어쩐지 전쟁 중을 다시금 떠오르게 하는 분위기에 아가씨는 내색하지 않으면서도 미미하게 어께가 떨렸다. 괜시리 주변을 다시 훑어보고, 여전히 자신이 축제의 한복판에 있음을 확인한 뒤에야 조금 마음을 놓았다. 여전히 그림자같은 전시의 기억이 남아있음이 새삼 체감되는 것만 같았다.
곧 문에서 걸어나온 한 여자의 모습이 보였다. '전사일까?' 기골이 장대한 인상이나, 아까부터 크게 울렸던 목소리의 내용으로 미루어 보면 합리적인 추측인 것 같았다. 그대로 아가씨는, 저도 모르게 그녀의 모습을 유심히 훔쳐보기 시작했다. 곧 성큼 성큼 걸어온 여전사가 어느 새 자신의 앞까지 걸어와서, 기어코 자신을 바라봐 눈이 마주치는 순간까지.
"아, 죄, 죄송...?"
황급히 눈을 내리깔고 사과의 말을 건네었지만, 그새 여전사는 자신으로부터 눈을 떼고, 수통을 꺼내 물을 마시고 있었다. 황망함을 느끼며 그녀를 불만스레 쏘아보았지만, 돌아오는 반응은 없었다. 새삼 모르는 사람 상대로 뭘 하는 건가 하는 허탈함이 느껴져, 아가씨는 결국 한켠으로 시선을 돌리고 한숨을 내쉬었다.
"뭐 하는 거람, 나도 시간이 없는데."
잊고 있었던 배역에 대한 생각이 다시 고개를 들자, 일련의 소동도 순식간에 사소한 일이 되어 버렸다. 이대로 다시 고민에 잠기려는 찰나, 언젠가 들었던 조언이 그녀의 머리를 스쳤다.
'누구라도 좋으니, 사람을 만나 대화라도 해 봐요. 연기도 결국 사람의 이야기를 하는 거니까.'
아가씨는 턱을 쓰다듬으면서, 다시 여전사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이 사람에게?' 많이 격양된 것처럼 보이는 그녀에게 말을 걸었다가, 어쩌면 괜히 한 대 얻어맞는 일이 생기지는 않으려나 싶어 망설임이 생기다가도, 그녀는 곧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저기, 괜찮으세요?"
>>878 /꽤 옛날 글이라서 없을 줄 알았는데 아직 있었구나... 아쉽게 됐지만, 그쪽도 즐거운 상판 하길 바라. 답해줘서 고마워!
>>879 큼지막한 수통을 다 비운 덕인지 차차 머리가 맑아졌고, 이내 그는 사람을 하나 담그기라도 할 것 같았던 조금 전보다는 나은 얼굴로 수통을 내렸다. 이윽고, 웬 (당연히 자기보다는) 작은 여성이 중얼거리는 소리에 그는 제게 한 말인가 가늠해보려는 듯 의아한 얼굴로 상대를 내려다보았다. 자신이 아닌 땅바닥을 향해 있는 시선에 혼잣말이었나보다 하고 걸음을 옮기려던 찰나, 조금 전 제 앞에 있었던 여성이 말을 걸어오자, 그는 걸음을 멈추었다. 괜찮냐라, 너무 술에 취해보였거나, 아니면 험악한 얼굴을 하고 있었나? 부끄럽네. 양육자가 돼서 이러고 다니면 안되는데. 배우자와 함께 있을, 옹알이밖에 못하는 제 어린 딸이 생각나 부끄러워지는 동시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는 차분해진 투로 여성에게 대꾸했다.
"괜찮습니다."
주정뱅이나 화가 나 보이는 덩치 큰 자를 보면 괜찮냐고 물어보는 대신 피하라고 말하고픈 생각이 순간 머릿속에 머물렀지만, 이내 그만두었다. 저 쪽도 액면가는 성인이고, 말해봤자 꼰대질이겠지. 일 때문에 엮인 사람들 중에 저만한 체구인데도 잘만 싸우던 사람도 제법 있었고. 가면서 술 좀 더 깨고 들어갈까. 오늘만은 마시고 풀어도 된다고 해줬지만, 지금 이 몰골로 들어갔다간 분명 속상해할 테니까. 우리 귀염둥이 볼 낯도 안 서고. 그래, 힘든 건 건강하게 풀어야지. 그런 다짐을 하며 가려던 길을 가려다, 그는 술이 덜깬 중에도, 자신을 노골적으로 훑어보거나 쏘아보던 상대의 시선을 느꼈음을 떠올렸다.
제가 일생동안 바라왔던 것을 전부 쥐고, 모두를 발 아래 두고도 이 모든 게 아무 의미가 없다 하는 당신을 보며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하나. 그 모든 걸 제 뜻대로 움직이겠다는 말은 꼭 절절한 사랑고백처럼 들리지 않는가. 그러나 여전히 당신이 나를 사랑할 리는 없다. 갑작스레 방 안에 갇힌 채 며칠을 보내며 내린 판단이었다. 나오자마자 듣게 된 당신과 나의 결혼 소식엔 잠시 착각하기도 했으나——, 당신의 말을 듣고서 작게 조소했다. 결국에는 쓸모였던 게지.황태자가 저를 택한 이유가 있듯이, 당신 역시 필요에 따라 나를 고른 것이다. 하긴, 사랑만큼 지금의 우리와 어울리지 않는 단어가 있을까. 추억을 떠올리며 감상에 젖을 시간 따위는 없었다.
“저는 모든 걸 손에 쥐고 싶어 지난 날의 당신도 버리고 여기까지 왔습니다. 하지만 아시다시피, 저는 욕심이 아주 많아요. 변덕도 아주 심합니다.”
당신의 미소를 보며 함께 웃었다. 사랑하는 사람을 보는 듯 온화한 미소, 그러나 시선에 서린 냉기까지 완벽히 감추지는 못했다.
“당신에게 없는 단 하나가 제게 있다면, 당신은 당신이 가진 모든 걸 주어야 할 겁니다. 저를 온전히 손에 쥐어야겠다면… 글쎄요, 알아서 잘 해보셔야겠습니다.”
내내 발을 옥죄고 있던 구두를 벗어던지고 서서 당신을 바라본다. 입술은 여전히 부드러운 미소를 머금은 채고.
“제게 있는 두 다리가 어디로 향할지 모르고 양 손에 무엇을 쥐고 싶어할지 모르니 말입니다.”
머리를 장식하고 있던 것들을 빼내 바닥으로 떨어뜨린다. 이따금 섬세하게 세공된 부분들은 떨어져나와 바닥을 구르기도 했다.
수통을 한번에 다 비워버리는 모습에 아가씨는 살짝 감탄했다. 이 덩치 큰 여인의 태도는 투박하면서도 여러모로 호방한 데가 있었다. 신기함을 담아 다시 눈을 게슴츠레 뜨고서 멍청하니 올려보다가, 곧 숨을 고른 그녀의 대답이 들려오자, 아가씨는 잠깐 텀을 두고 적당한 대답을 생각해내었다.
"다행이네요, 꽤나 큰... 소리가 나길래."
다시 방금 전까지 여전사가 있었던 주점 쪽을 흘끗거리고서, 반응을 조심스레 살폈다. 별다른 감정을 드러내지 않고 떠날 태도로 보였다. 어떤 식으로는 말을 붙일 필요를 느껴 아가씨는 황급히 부연했다.
"오해하는 것이 아니라면, 저한테는 언쟁하는 소리로 들렸는데요. 상당히 험악하게."
여기까지 이야기하니, 상대의 반응을 조심스레 살필 필요가 느껴졌다. 아마도 화나는 일을 상기시키는 말이었을 테니까. 괜시리 자극하는 말을 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지금 이 사람에게 띄워볼만한 화제는 이것 뿐이었다. '말을 붙인다는 거, 생각보다 어렵구나.' 속으로는 그런 생각을 하면서, 아가씨는 긴장된 태도로 질문했다.
"혹시 무슨 일 있었나요? 겨우 돌아온 좋은 날에 화를 내야 한다는 건, 괴로운 일일 거라고 생각하는데요."
결국 용이 되어버린 남자, 패황(覇皇)의 자리에 앉아 만인을 오시하게 되었으나 그 마저도 그에게 흥미를 받지 못하는, 무언가가 결여되어버린 남자에게 있어서 이 모든 것은 허울 좋은 껍데기에 지나지 않았다. 갈망을 가라앉히고자 물을 마셨으나 그 물이 결국 바닷물이었던 것 처럼 그 무엇도 그에게 충족감을 주지 못하였다. 그것은 결국 사내에게 있어서 정신을 좀먹어가는 저주나 다름 없던 것일지도 모른다. 모든 것을 가질수 있고 그런 위치에 있으며 그러한 힘까지 있음에도 하늘은 단 하나, 그것을 허하지 않았으니까, 그것이 바로 그에게 걸린 주박이었으니까. 황태자였던 형이 자신에게 무릎을 꿇고 비굴하게 굴었을때가 떠오른다, 아버지라고 부르는 황제가 인두겁을 쓴 괴물이라고 외치는 목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은 그의 마음에 상처 하나 주지 못하였다, 아니 오히려 그녀가 떠나갔을때의 그 분노에 찼던 그 순간이 용이 되기전의 남자에게 남긴 가장 큰 상흔이자, 지금의 역린이 되었을지도 모를 것이다. 순간 왼손이 아주 잠깐 시야에 들어온다. 레드와인으로 범벅이 되어 손에 흐르는 피와 같은 그 자태에─단련된 사내의 손아귀는, 결국 손바닥에 얕은 상흔만을 남겼을 뿐이었다.─자신의 길을 간접적으로 보여준 그 모습이 연상되었다. 하지만 그는 아무런 감흥도 일으키지 못한채 가만히 그녀를 바라본다.
─그 순간이었다. 그 미소가 눈에 들어온 것은. 그래, 자신이 왜 손에 피를 뭍혀가며 이곳에 왔는지를.
"상관 없다."
무엇이 상관이 없단 말인가. 그는 갑자기 타오르는 갈증과 더위를 견뎌내려고 하려는 듯 자신이 입고 있던 외투를 벗어던지고, 셔츠의 단추를 풀어 헤쳤다. 단단하고도 오밀조밀한 근육으로 이루어진 갑주, 그 위로 아로새겨진 상흔의 흔적들은 마치 굳건한 용의 자태와도 같았으며 그 모든것이 조화를 이룬 모습은 그 어떤 예술품을 가져다 놔도 그 빛이 바랠 정도였다. 그녀의 발을 묶던 신발이 벗어던져지고, 머리를 장식하던 족쇄와도 같은 장신구가 떨어져나간다. 재정관리자가 봤다면 저게 얼마짜리인데, 라고 탄식을 내뱉을 정도였겠지만, 사내는 딱히 신경쓰지 않았다. 그저 지금 이 눈앞의 소녀가 가장 자연스러운 모습을 보였다는 것에 대해 용은, 지금까지 타인들이 봐왔던 어떤 모습보다도 흥분해있었다.
─사랑하기 때문인가?
"그리고 알고 있다. 그 어떤 것도 너에겐 족쇄가 되어주지 못하겠지."
─잘 모르겠다. 그럼 증오인가?
"하지만 나는 그럼에도 너를 붙잡을 것이다."
─그 또한 잘 모르겠다.
미웠던 순간, 같이 있던 순간, 아주 잠시나마 모든 것을 놓아도 되지 않을까란 시절, 그 모든 상념들이 순식간에 지나간다. 아, 결국 너가 내 삶을 완성시켰구나, 그렇기에 나는 영원히 너에게 이길 수가 없는 것이구나. 그저 네가 떠나가면 다시 이 손에 움켜쥘 수 밖에 없는 것이구나. 그렇게 생각을 마치는 순간 용은 그 강건한 육체로 여인을 포박하듯 벽으로 밀어붙였고, 오른손으로 우악스럽게 여인을 감싼 옷의 앞섶을 움켜쥔다. 리비도(libido)를 일으키는 강렬한 향기에 용이 목울음을 내뱉으며 조용히 소녀를 바라본다.
"거부하지 않는 것으로 알겠다. 너는, 영원히 내 것이다. 살아서는 물론, 죽어서도 너는 내 것이다."
그와 동시에 사랑과 증오, 소유욕으로 점철된 감정이 입술을 타고 포개어진다.
//저질러 버렸어!(즈큥) //네, 그래요. 반쯤 맛이 간 상탭니다. 어.... 뺨을 때려도 되고 뭔 짓을 해도 오케이!
와우, 큰일났다. 진혁이랑 미선이도 물렸나봐. 쟤네 서로 삽질하던거 자기들만 몰랐을텐데, 좀비가 되고나서야 붙어다니네. (매점 문 앞을 막아둔 철제 선반 틈 사이로 복도를 살피며 중얼거린다. 대걸레 자루를 쥐고 있는 손에 힘이 들어간다.) 야, 상태 좀 어때? 창문으로 나가는 건 힘들어보여?
>>887 응. (창문을 열고 동전을 휙 던져보며)다른 위치에 소리가 나도 크게 그쪽으로 몰려가지를 않아. 이렇게 낙하지점에 바글거리고 있으면, 땅에 닿기 전에 이빨에 낚아채일 테니 낙상은 안하겠다. 어때, 밥상 위로 떨어지는 제육이 되고 싶은 생각 있어? 없다면 좋겠는데.
>>888 너무 많이 몰려있다보니 소리가 묻히나보네. (전파가 통하지않는 스마트폰을 잠시 켜보곤 다시 화면을 끈다.) 됐네요. 너때문에 이제 제육 못먹는다. 오, 이렇게 보니까 콘서트장 같기도 한데, 뛰어들면 물결로 옮겨주지 않으려나. 흥 좀 돋궈야하니 노래 한 곡 뽑아봐. (일회용 스푼을 던져준다.)
>>889 지금 매대에 남은 음식 빼고는 뭐든 앞으로 먹을 일 없을걸. (창밖에 시선을 고정해둔 채로 스푼을 탁 받고, 아주 자연스럽게)거리에 흐르는 세월에 지는 꽃잎처, 아이 씨, 지금 이럴 때냐.(안쪽으로 고개를 홱 돌려 살짝 째릿거린다.) 노래부르면서 발랄하게 끝나고 싶지는 않아. 가수 지망생도 아니고... 그보다 마침 동전이 2개 남았는데, 누가 먼저 할까?
>>890 아직 모르는 법이야. 경찰, 군대, 뭐 소방관 님들이라도 와주시지 않을까. 아, 제육먹고싶다. (자연스레 당신의 노래에 심취해 고개를 흔들다 푸핫, 웃음을 터뜨린다.) 아냐, 동전은 아껴두자. 나중에 실내로 나가야할 일이 생길 수도 있으니까. (문에서 떨어져 앉아 벽에 상체를 기댄다.) ...묭이 보고싶다. 내 침대에 오줌쌌다고 아침에 뭐라하고 나왔는데 후회돼. 부모님은 무사할려나.
>>891 뭔지 알고 아껴 두래...(허탈한 웃음소리와 함께 창을 소리 안 나게 닫고 진절머리를 치며 창가를 등진다.) 묭이는 누구야? 개? 고양이? 설나 하니, 사람은 아닐 거 아냐.(웃다가 살짝 고개를 들어 천장을 바라본다.) 반려동물 같은 거 키워 본 적이 없어서 나는 잘 모르겠지만, 부모님 보고 싶은 건 그래도 똑같구나. 똑같아, 똑같아서, 그, 엄마랑, 다들 괜찮으려나...(살짝 침묵)
>>892 사람? 실화냐. 사람이면 진심 좀비보다 더 무서워. 내 침대에 오줌 누는 사람이라니. 강아지야. 말티즈. 10살. 우리 생각보다 그리 친한 편은 아니었구나? (힘 빠지는 웃음을 흘리며 괜히 까만 화면의 핸드폰 모서리만 만지작거린다. 대기화면을 보면 더 보고싶어질 것 같아서.) ...그... (침묵에 뒤늦게 조심스레 입을 연다.) ...또다른~ 만남도 알 수 없는 운~명인 것을~ (휴대폰을 마이크 삼아 간드러지게 부른다.)
>>893 10살? 개가 10살이면 어르신이지? 노인네가 변 좀 못 가렸다고 화나 내고, 나쁜 주인이네.(헛웃음을 흘린다.) 괜찮잖아, 여기까지 와서... 나랑 발톱 넓이까지 공유할 만큼 친하지 못한 게 서운했어? 생각보다 이것저것 신경쓰는 놈이었구나, 너. (이래 저래 아무 말이나 늘어놓다가, 결국 침묵 속에 멍하니 위만 올려다본다.) ...천장, 그러고보니. (다시 창을 열며)위로 올라갈 수는 없을까?
>>894 맞아, 진짜 나쁜 주인이야. 매번 있는 일이니까 한 번 쯤은 넘어가줘도 되는데. (자책이 진심인지, 아무 말이나 내뱉는 중인지 알 길이 없다.) 어어? 양말 벗어봐. 발톱의 반지름을 구하시오. (키득거리며 밀대 끝으로 당신의 발 끝을 쿡쿡 찌른다. 그러다 창을 여는 모습을 멍하니 지켜본다.) 영화에서 본 거 같은데, 그거. 해볼래? 가위바위보! (기습으로 주먹을 낸다.)
>>895 ...매번 있는 거면 진짜 알츠하이머 아닐까? 아, 아, 찌르지 마. 찌를 거면 나보다 맛탱이 간 급우들부터 찌르라고. 그러긴 싫겠지만. (중얼거리다가 타이밍을 놓쳤지만, 잠시 후 한심해하는 표정으로 말한다.)바보냐? 보통 가만히 있을 때 손을 가위 모양으로 하는 사람이 어디 있어. (활짝 편 손을 흔들어보인다.) 일단 좀 보자고. 말은 했지만 나, 파쿠르 같은 것도 해본 적 없고, 전혀 자신 없단 말야.
>>896 원래 노견들은 다 그래. 하아, 기왕 먹힌다면 차라리 묭이한테 먹힐래. (의미없는 농담을 흘린다.) ...너 머리 똑똑해서 좋겠다. 전교 몇 등이었냐? 참고로 말하자면 난 뒤에서 세는 게 빨랐는데. (자신의 손을 가만히 내려다보다 한숨을 쉬며 창문 쪽으로 바싹 붙는다. 그리고 몸을 바깥으로 내밀어 위쪽을 살펴본다.) 그런데 해보자고 한 건 어차피 나 시킬 거였다, 이거지? 그래그래. 근데 생각보다 할 수 있을 거 같기도? 중학생 때 비슷한 걸 해봤는데, 그 때랑 비슷해보여.
>>897 전교 47등, 좀 치지? 학원에서는 꼴찌였는데, 어쩌면 지금 시험 보면 내가 1등, 네가 2등일지도?(창가에서 비켜준 뒤, 주변을 둘러본다.) 아니 아니, 생각을 해보자는 거지. 내가 그렇게 비겁한 새끼로 보였어? 일단 로프 같은 거라도 좀 찾아보자고. 매점 창고에 있으려나. (매대에서 소시지 하나를 꺼내 던져준다.)육체노동 할 거니까 일단 먹고. 중학교때 벽도 타봤냐? 태릉선수촌이 따로 없군.
모든 게 엉망이었다. 모처럼 학기말 시험이 끝나 학업으로부터 해방된 날이었는데도. 시험기간이 시작될 때부터 머리를 맞대고 고민해가며 정했던 일정이 시작부터 어그러진 것은 문제조차 아니었다. 조금 전 맞닥뜨린 일에 비하면. 유윤아는 괜찮다던 말이 무색하게 아직도 조금 넋이 나간 듯한 얼굴로 터덜터덜 걷고 있는 친구, 민혜서를 바라보다 이내 곧장 앞을 바라보았다. 속은 복잡했지만, 호들갑을 떨어 혜서를 더 피곤하게 하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 무거운 침묵 속에, 둘은 혜서가 사는 아파트 앞에 도착했다. 윤아가 침묵을 깨고 입을 열었다.
"문 앞까지만 같이 가자. 너 들어가는 거 보고 들어갈게."
그 말에 동그래지는 혜서의 눈을 보자, 윤아는 아차싶어 의식적으로 얼굴을 풀었다. 혜서는 제 매서운 인상에도 겁을 먹지 않고 진심을 잘 캐치해 주는 얼마 안되는 사람이었지만, 오늘만큼은 제 표정도 평소보다 무섭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혜서의 대답은 뜻밖이었다.
"그럼 주스라도 한 잔 하고 가, 윤아야. 나 아쉬워서 그래."
창백한 낯빛에, 안경 너머로 눈밑이 상기된 것이 빤히 보이는 얼굴로 혜서가 그렇게 말하자, 윤아는 걱정으로 찌푸려지려던 미간을 가까스로 폈다. 안색도 안 좋으면서 얘가... 평소라면 농담을 섞어서 잔소리를 떽떽거리며 늘어놓았겠지만, 오늘은 그조차도 조심스러웠다.
"쉬어야지. 힘들잖아, 무리하지 마. 다음에 컨디션 좋을 때 놀면 되지." "그래도..." "다른 생각 말고 씻고 푹 자. 쉬는게 최우선이니까, 알았지?"
그렇게 실랑이를 하며 들어가 엘리베이터를 올라가니, 어느새 혜서의 집 앞이었다. 알겠다곤 했어도 조금 전보다 더 시무룩해진 게 짠해 마음이 약해지려는 것을 애써 참으며 문이 열리고 혜서를 들여보내려는데, 집 안에 낯익은 사람이 서 있는 것이 보였다. 혜서의 아버지였다. 한번 마주친 적이 있었거니와, 윤아가 긍정적으로 생각하게 된 얼마 안되는 어른이었기에 낯섦은 덜했다. 되게 일찍 오셨네? 혜서가 매일 아빠 또 야근한다며 건강 상할까봐 걱정된다고 투덜대던게 생각나 약간은 뜻밖이었지만, 사람을 앞에 두고 멍을 때릴 수는 없다는 생각에, 윤아는 공손히 고개를 숙이고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아저씨."
인사를 하고 고개를 드는데, 옆에서 혜서의 울음이 가득 섞인 목소리가 힘없이 흘러나왔다.
"아빠..."
급히 고개를 돌렸다. 혜서는 얼굴을 잔뜩 일그러뜨린 채로도 억지로 울음을 참아보려는 듯 숨을 들이켜며 이를 악물었지만, 이내 눈에 그득 차오른 눈물이 펑펑 쏟으며 얼굴을 적시더니, 소맷자락으로 두 눈을 훔치다, 그만 그 자리에서 어린 아이처럼 큰 소리로 울음을 터뜨렸다.
/848이랑 850번 레스에서 영감을 받아서 써봤어요
상황은 아이(혜서)가 엄청 충격적인 일을 겪는 바람에 친구(윤아)한테 의지해서 겨우 귀가했다가 마침 집에 있었던 주 양육자인 아빠 보자마자 울어버린 상황입니다. 이어주시는 분이 계신다면 캐릭터는 자상하되 자녀의 문제에는 적극 개입하는 강단 있는 아빠였으면 해요.
근친 애비, 친구 딸-친구네 아빠 이상의 관계를 기대하는 답글 등 상식 밖이거나 잇기 힘든 답글에는 응답하지 않거나 중단하고 다시 상대분을 구하겠습니다.
>>900 연일 피를 말리던 팀 프로젝트가 무난하게 마무리된 덕에 현규는 지난 몇 달간 전설에서나 등장하는 무언가처럼 여겨지던 반차를 쓴 뒤 귀가하기 무섭게 유튜브의 요리 영상을 틀고 파베 초콜릿 제작에 착수했다. 오늘이 딸아이의 마지막 시험일이라고 들었기에 그간 애썼다는 의미로 딸아이에게 선물하고 싶었거니와 설령 시험 결과가 딸아이에게 만족스럽지 않았다 하더라도 달콤쌉싸름한 초콜릿을 먹으면 기분 전환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기대했다. 사실 고급 레스토랑의 코스 메뉴처럼 근사한 한 끼 식사를 준비하고 싶은 마음도 있었지만 직장 생활, 가사 노동, 딸아이의 학습 관리 등을 홀로 감당하다 보니 요리는 거의 시도조차 못하고(로봇 청소기, 식기 세척기, 세탁기, 건조기, 스타일러 같은 기계가 없었다면 가사 노동 하나도 감당하지 못했을 것이다.) 외식과 밀키트에 의존해 온 현규인지라 만들 수 있는 건 파베 초콜릿처럼 간단한 음식이 고작이었다. 물론 파베 초콜릿은 재료 비율만 잘 맞추면 금세 만들 수 있는 것이다 보니 여러 차례 시도해 봤던지라 레시피 비율 따위를 굳이 확인할 필요는 없었으나 그래도 요리는 워낙 자신 없는 분야라 영상을 틀어는 놔야 안심이 되었다.
영상에 소개되는 레시피는 다크 초콜릿 200g과 연유 300g, 이 재료를 중탕할 때 현규는 인스턴트 커피 가루 30g과 치즈 케이크 맛 비스킷 3봉지를 더 넣곤 했다. 이렇게 하면 초콜릿의 풍미가 더 깊어지는 것은 물론 꾸덕하면서도 사르르 녹는 식감에 비스킷 특유의 바삭함이 더해져 더 고급스럽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오늘도 그렇게 작업을 진행하는데 파베 초콜릿을 굳힐 채비를 마치기는커녕 재료들을 제대로 섞기도 전에 도어락 누르는 소리와 문 열리는 소리가 이어졌다. 당황스러웠다. 시험 공부로 내내 바쁘던 딸아이라 오늘은 친구와 신나게 놀고 올 줄 알았더니?
그러나 딸아이가 일찍 귀가한 것쯤은 그 뒤의 상황에 비하면 문제도 아니었다. 친구와 함께 들어온 딸아이는 흡사 뱀파이어에게 피라도 빨린 것처럼 파리하고 맥없는 몰골이었다. 순간 머릿속이 하얘져 딸아이의 친구가 하는 인사에 반응도 못 하고 있는데 딸아이가 잔뜩 잠긴 목소리를 쥐어 짜내 현규를 부르고는 눈물을 감추려는 듯 얼굴을 훔치다 이내 목 놓아 울어 버린다. 현규는 파베 초콜릿의 재료를 섞던 주걱을 팽개치고 딸아이에게 다가가 딸아이와 눈높이를 맞출 수 있도록 무릎을 굽히고 바라보았다.
“우리 공주, 무슨 일이야? 어?” 그렇게 물으면서도 한편으로는 딸아이의 친구가 신경 쓰였다. 상황이 상황이라 해도 딸아이 친구이고 손님인데 이렇게 세워 놓기만 하면 실례가 아닌가. “미안하다. 저, 지금 상황이 이래서. 잠시 거실에 앉아 있으련? 곧 마실 것이라도 준비하마.”
/849, 850에서 영감을 얻었다고 하셔서 현규가 혜서를 부르는 호칭은 850을 참고했습니다. 자식이 주 양육자를 부르고서 냅다 우는 상황이면 주 양육자가 안고 토닥거려도 무방할 거라고 생각했습니다만 다른 분의 캐를 제 마음대로 움직이는 건 좀 아닌 거 같아서 다가가서 묻기만 하게 했습니다. 기대하신 자상한 아빠에 부합할지 모르겠네요. 자식이 친밀감 있는 주 양육자에게 할 법한 행동을 혜서가 할 것 같다면 저는 ok이니 편하게 이어 주세요. 잘 부탁드립니다.
정전(政殿) 한 가운데, 그 중에서도 가장 드높은 옥좌에 한 남자가 앉아있었다. 만인의 우러름을 받들고, 또한 만인의 공포감을 간직한, 이 나라에서 그 누구보다도 고결하고 가장 강한 남자, 아니 인간이었던 것은 가만히 앉아 무엇을 기다리기라도 하듯이 가만히 정면을 바라보고 있었다. 사내는 천천히 손을 내뻗었다. 동시에 딸려오는 도수 높은 술, 스스로 마기를 모두 받아들이다 못해 그 마기를 하나로 묶어내어 지배하기 시작한 시점부터 마셔도 마셔도 취하지 않던 술이기에 가까이 하지도 않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그는 자신의 존엄도 생각하지 않은채 술병으로 병나발을 불었다. 상관 없었다. 자신을 지키던 기사들은 모두 악에 물들어 그들에게 토벌되어 사그라들었고, 또 자신을 따르던 뜻있는 대신들 또한 자신의 뜻에 동참하여 스스로의 몸을 내던졌다.
"인류를 구하기 위하여 악을 만들었으나, 결국은 실패인가."
마기에 물든 육체는 2m의 거구였던 남자를 한참 더 키워 거대한 육체를 재구성하기에 이르렀고, 지금에 들어서는 5m에 이르는 거체에 많이 컸던 옥좌마저 작다고 느껴질 정도였다. 흰자와 검은자의 구분은 뒤섞여 거대한 불꽃을 연상시키는 빨간색으로 번들거리고 있었으며, 본디 강인했던 육체에는 마기의 영향으로 수많은 마기가 갑옷을 이루듯 촘촘히 그의 육체를 지켜내고 있었다. 그가 손가락을 튕기자 마기가 움직인다, 그의 뜻에 따르기라도 하듯이 마기는 순식간에 자신이 인간이던 시절의 왕관과도 같은 모습을 취하였고, 사내는 그것을 천천히 자신의 머리에 씌운뒤 가만히 팔을 괸 채 대전을 내려다 보았다.
"기다리고 있도다, 용사여."
어서 나를 죽이러 오거라.
//스스로 인류를 위해 대적자가 된 왕이었고, 그 나라였지만 결국 패퇴하고 본인만 남은 상황!! //목 자르러 올 용사님 구합니다(?)
>>901 창백했던 얼굴이 새빨개지도록 목을 놓아 울던 혜서는, 제 현규가 다가오자마자 물에 빠진 사람처럼 와락 매달렸다. 무슨 일이냐는 말에도 답할 정신이 없는지 좀처럼 울음을 그치지 못했고, 급하게 아버지의 품으로 파고드는 몸은 경기라도 일으킨 듯 바르르 떨리고 있었다. 극심한 두려움에 전에없이 무너진 친구의 모습을 차마 바라보기 힘들어 고개를 떨구던 윤아는, 갑작스러운 상황에 정신이 없을 텐데도 손님 대접을 하려는 현규의 말에 손을 내저으려다 멈칫했다. 저대로면 혜서는 무슨 일인지 설명할 수 없을 테니까, 죄송하긴 하지만 내가 남아서 무슨 일인지 알려드려야겠구나. 어지간한 일이면 조금 늦더라도 혜서가 직접 설명하는 게 맞고, 이 와중에 손님맞이를 하게 하면 실례지만, 지금은 말 그대로 비상사태니까.
"네, 그러면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안 그래도 정신 없겠지만, 친구인 자신이 보고 있는 것보다는 아빠와 단 둘이 있으면서 응어리를 푸는 게 혜서에게도 더 좋을 것 같아, 윤아는 현규에게 한번 더 고개를 꾸벅 숙여보이고는 거실로 향했다. 소파에 앉고도 혜서의 울음소리는 조금 더 이어지다, 이내 한 풀 꺾이는 듯 하더니, 뚝 끊겼다. 설마, 얘 기절한 거 아냐? 가슴이 철렁 내려앉아서 핸드폰으로 119를 누르고 일어나려는데, 곧 이어 쌕쌕거리는 숨소리가 들려와, 윤아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곤 다시 소파에 앉았다. 기절한 게 아니라 잠든 거구나. 다행이다.
/캐조종이라기엔 모호한 부분인데도 신경써주셔서 감사합니다. 피같은 반차를 딸래미 시험끝났다고 초코 만들어주려고 써버리다니 세상 스윗한 아버지네요. 사실 워낙 요구사항이 많아서 안 달릴 줄도 알았는데, 기대 이상으로 만족했습니다😆 저도 안고 달래주거나 하는 등의 아빠가 아이에게 할 수 있는 행동은 어느정도 제 캐의 움직임이 제약되어도 ok니 편하게 해주세요! 그리고 첫 글에 쓰는걸 까먹었는데, 제 글에 길이와 상관없이 편하신 길이로 이어주셔도 좋습니다:) 쓰다 보니 길게 나왔기도 하고 단문도 잇는 데 지장 없어서요. 저도 잘 부탁드립니다!
+혹시 몰라서 살짝 부연설명하자면 혜서는 말 다운 말은 한 마디도 못하고 내내 울다가 반쯤 탈진해서 아빠 품에서 기절잠 잤다... 고 생각해주시면 될 것 같아요. 좀 일방적으로 상황을 제시하게 된 점 양해 부탁드려요😅
야, 나... (흐읍, 숨을 삼켰다.) 너한테 뽀뽀해봐도 돼? (너를 바라보고 있었지만 이제는 더 이상 눈을 맞추고 있기가 버거워서 시선을 내리깔았다. 충동적인 말이었다. 간혹 생각해보기는 했지만 이렇게 저지를 줄은 몰랐던 말. 밤에 이불이나 걷어차게 만들던 상상이 현실이 될 지도 모르는 말. 곱게 뻗어내린 속눈썹이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이상하게 들리는 거 아는데, 한 번만 부탁하자. 내일부터 모른 척 해도 돼. 학교, 학원, 어디서든. (귀가 점점 짙어졌다. 빨갛게 오르는 열을 보고 있자니 곧 터지기라도 할 것 같았다. 그래, 꼭 잘 여문 봉숭아처럼.) ...아, 입술에 하겠단 건 아냐...! 뺨, 뺨이면 돼. (어디에 하겠는지 말하지 않아 입술에 하겠다고 오해 받았을까봐 황급히 고개가 들렸다. 고개를 드니 알겠다. 열이 오르고 있는건 비단 귀 뿐만은 아니었다. 두 뺨도 벌겋지 않나. 무슨 말을 맺으려는지 입술이 열렸다 닫혔다 하는데, 답지 않게 소심하게 구는 것도 그렇고 무슨 말을 할 지 예상되는 부분이다.) 나, 아마 너 좋아하는 거 같기도 한데... 너무 오래 친구였잖아. 헷갈려서 모르겠다고.
>>904 아니, 싫어. 하지 마. (수줍어하다 못해 횡설수설하기 시작한 상대방과는 대조적으로, 싸늘하리 만치 단호한 목소리가 딱 잘라내듯 튀어나갔다.) 네가 지금 얼마나 무례한 요구를 했는지 모르나본데, 네 감정은 네가 알아서 판단해야 하는 거잖아. 그런데 내가 왜 불쾌감을 감수해가면서 확인을 시켜줘야 해? 모른 척해도 된다고 말하면 다야? 나는 네가 뽀뽀해도 되냐는 소릴 내뱉은 순간 이미 모욕감과 이 관계에 대한 환멸을 느꼈어. 나를 최소한 너랑 동등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으면 그런 요구를 받았을 때 내가 어떻게 느낄 지 정도는 생각해 봤어야하는 거 아냐? 내가 널 모른 척하고 말고를 네가 허락할 수 있는 일인 양 생색 내면 안 되는 거 아니냐고! (어느새 높아진 목소리에 잠시 말을 멈추고 숨을 가다듬었다. 진정하려고 안간힘을 썼지만, 친구라고 생각했던 사람에게서 이런 모멸감을 느끼게 될 줄은 몰랐기에 좀처럼 흥분이 식지가 않았고, 울고 싶지 않은데도 눈이 뜨거워졌다. 소매로 거칠게 눈가를 훔치고, 가까스로 낮춘 목소리로 또박또박 말을 이었다.) 그리고 한다고 치자. 해서 네 감정이 연애감정이면 어쩔거고 아니면 어쩔건데? 나를 네 감정 파악의 수단으로 삼는 게 무책임하다는 생각은 안 해 봤니? 좋아한다면서 그 상대를 도구 삼을 생각이 들어? (손까지 바르르 떨리는 것 같아, 무의식적으로 한 손으로 반대편 손목을 꾹 붙들었다.) 지금 니가 한 말은 니가 날 좋아하기는커녕 동등한 사람으로 여기지도 않았다는 인증이야. 그러니 확인해 볼 필요 따위 없겠네. 싫어. (흥분을 겨우 누른 낮은 목소리로 또박또박 내뱉으며 눈시울이 벌겋게 달아오른 눈으로 한 때 친구라고 생각했던 상대를 똑바로 노려보았다. 잘 기억도 안 나던 시절부터 어울렸던 시간들이 끔찍하게 느껴졌다. 이런 녀석인 줄 알았으면 어려서부터 어울리지도 않았을 텐데.)
>>904 (너의 말에 당황스러운 듯 머리를 매만진다. 밝은 갈색으로 염색한 머리카락이 때마침 불어온 바람에 흔들리는 것을 느끼며 말을 고르듯 입술을 달싹인다.) 후회 안 하겠어? ( 조심스럽게 꺼낸 말은 널 걱정하는 듯한 어조였다. 자기 자신보다도 오랫동안 봐온 자신의 소꿉친구를 걱정하는 목소리. ) 괜찮아. 네가 후회하지 않을 것 같으면 해봐. ( 잠시 머뭇거리다가 이내 한숨을 푹 내쉬곤 쓰디 쓴 미소를 지어보이며 말을 이어간다. ) 이거 진짜 기분 이상한데.. ( 복숭아처럼 물든 귀를 한 체 조심스럽게 널 바라본다. )
>>903 물음에 대답하기는커녕 숨 한 번 돌리지 못하고 매달리는 딸아이를 붙들면서 현규는 머릿속이 복잡해질 수밖에 없었다. 대관절 무슨 일인지 전혀 짐작이 가지 않았기 때문이다. 가장 먼저 떠오른 건 시험이었으나 수능처럼 중요한 시험도 아니고 학기마다 치르는 시험 좀 망쳤다고 이렇게까지 오열할 리는 없었다. 학교 선배나 동급생이 집단으로 괴롭히는 혼자서 대응하기 버거운 일이라도 겪은 것인가 생각해 봤으나 다친 데가 없는 듯하고 옷매무새도 말끔한 편이라 물리적 폭력을 당하지는 않은 것 같았다. 그렇다면 언어적 폭력일 가능성이 높은데 딸아이가 이럴 정도면 나중에 차근차근 떠올릴 수나 있을지 상황을 정확히 설명하도록 할 때 힘들어하지나 않을지가 걱정이었다. 위로든 격려든 법적 조치이든 딸아이에게 필요한 건 뭐든 할 테지만 혹시라도 법적 조치가 필요한 문제라면 증거 확보가 특히나 중요하니까. 녹음이라도 해 놓았다면 좋으련만 핸드폰에 녹음 앱 정도는 있을 법도 하다만, 돌발 상황에선 그런 조치까지 해 내기는 어려우니 과연 어떨지?
그렇게 생각이 많아졌으나 당장은 딸아이를 다독이는 것이 급선무라 연신 등을 쓸어내리고 토닥이며 아빠 여깄다느니 괜찮다는 소리를 되풀이했다. 그러고도 한참을 진정하지 못하고 울던 딸아이라 처음 울음소리가 줄어들기 시작할 때는 탈진하지나 않았나 덜컥 겁이 날 지경이었다. 진이 빠지도록 울어서인지 미열이 오른 것도 같아서 더 불안했지만 다행히도 열이 더 오르지는 않았고 훌쩍이는 가운데에도 숨도 고른 편이었다. 그런 가운데 딸아이는 서서히 마음을 놓은 듯 기대 오더니 누가 간질여도 모르게 푹 잠이 들었다.
그제야 현규는 딸아이를 제 방에 데려다 침대에 눕히고 찬 공기가 들지 않도록 이불로 꼼꼼히 감싼 뒤 다시 주방으로 향했다. 파베 초콜릿을 만들고자 일을 벌였던 여파로 재료는 섞이다 만 채로 굳은 몰골이고 주걱이며 용기도 엉망진창이었으나 그걸 수습할 여유 같은 건 없었다. 딸아이를 여기까지 데려와 준 것도 모자라 어색하고 난감할 상황인데도 여태 기다려 준 딸아이의 친구에게 뭐라도 대접하는 게 우선이었다. 별로 안면도 없는 남자 어른과 단둘이 한 자리에 있는 게 기꺼울 리는 없으니 고맙다고 용돈을 주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 들지 않은 것은 아니나 지금의 현규로서는 딸아이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친구에게라도 듣고 싶은 것이 솔직한 심정이었다. 제삼자라면 제삼자인 딸아이의 친구에게 물어면 딸아이가 서운해할 수도 있고 친구가 거북해할 수도 있지만 그렇다 해도 어느 정도 상황을 파악해서 마음의 준비를 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결국 현규는 겸연쩍은 기색을 감추지 못한 채로 딸아이의 친구에게 말을 건넸다.
“미안하다. 시간을 뺏었구나. 마실 건 뭐가 좋겠니? 차? 주스? 커피?”
/혜서가 울다가 아빠 품에서 잠든 상황이라고 알려 주셔서 그에 맞추어 서술하고자 했습니다. 일방적인 상황 제시라고 느끼기보다는 제가 이어 나갈 수 있게끔 정보를 제공해 주신 걸로 보였으니 괘념치 않으셔도 됩니다. 제가 먼저 친밀감 있는 주 양육자에게 할 법한 행동은 ok라고 말씀 드리기도 했고요. 오히려 현규의 대처가 아빠로서나 손님 맞는 아재로서나 괜찮은지 모르겠습니다. 혹시 걸리는 부분이 있으시면 말씀해 주세요.
>>907 조금 기다리고 있자니, 울다 지쳐 잠이 든 혜서를 안아들고 방으로 향하는 현규의 모습이 윤아의 시야에 들어왔다. 역시 완전히 기절했네. 나한테는 괜찮으니 영화 보러 가자던가, 주스라도 마시고 가라던가 그랬으면서. 많이 무리했구나. 괜찮은 척 무리하려고 들던 그 심정을 모르지 않아 안쓰럽고 착잡하면서도, 한 편으로는 마침 집에 혜서의 아버지가 계셔서 다행이라는 생각에 윤아는 현규가 혜서를 침대에 눕히는 동안 낮게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혜서는 알고 지내기 시작했었던 고등학교 시절부터 아버지와 사이가 좋다고 이야기했기에, 이야기해서 소용이 없거나 오히려 혜서가 힘들어질 걱정은 덜었지만, 앞으로가 문제였다. 다행히 중간부터나마 녹음을 따놓긴 했다지만, 녹음이 안 된 부분이나 그런 것도 조리있게 설명해야지 혜서한테 도움이 될 텐데, 힘들어하는 혜서의 앞에서는 애써 냉정을 유지했지만 어지러운 머릿속이 영 가라앉지를 않았다. 무릎을 손끝으로 톡톡 두드리며 평정을 찾고 있자니, 어느새 현규가 다가와 말을 건네자, 손을 멈춘 윤아는 시간을 뺏어 미안하다는 말에 고개를 내젓고 대답했다.
"아니에요, 저도 말씀드려야 할 게 있어서요. ...주스로 부탁드릴게요."
용건이 있는 것과는 별개로, 안 그래도 경황이 없을 것이 뻔한 데도 손님맞이를 하도록 한 게 죄송해서 음료는 사양하는 게 맞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런 윤아의 생각을 바꾼 것은, 황망한 와중에도 자신을 손님으로서 신경써서 대접하려는 현규의 태도였다. 사양하는 편이 더 무안할 수도 있을 것 같거니와, 준비하는데 손이 가는 차나 커피에 비해 손이 덜 갈 수도 있다는 계산도 있었지만. 무엇보다도 지금은 차갑고 단 걸 마셔서라도 머릿속을 정리해야 할 것 같았다. 급하게 말씀드리면 더 횡설수설하게 될 수도 있으니까. 아니, 확실히 그럴 것 같으니까. 최대한 침착해지자. 이런 상황일 수록 정신 똑바로 차려야지. 혜서를 위해서라도.
/그건 다행이네요! 저는 현규가 돌발상황에서 혼란스러운 나머지 감정적으로 대응하지 않고, 딸래미가 당장 가장 필요한 조치를 해주면서, 머릿속으로는 무슨 일인지 걱정도 하고, 적극적으로 딸을 도와주려고 이것저것 생각하는 게 지문에서 드러난 게 좋았고, 또 손님 맞는 아재로서는 윤아가 느낄 수 있는 불편이나 부담을 고려하면서 행동하는 게 인상적이었습니다:) 간만에 보는 제대로 된 어른 느낌이 나는 아재캐라 오히려 만족스럽네요😆 현규주님도 혹시 걸리는 부분이나, 윤아나 혜서의 행동에서 이해가 안 가는 부분이 있으시면 편히 말씀해주세요! (애들이 탈탈 털린 이유는 곧? 한두턴 내에 나올 것 같습니다😆)
궁녀는 사당에 들기 무섭게 빗자루로 사당의 먼지를 서둘러 쓸어 내고 곳곳에 앉은 더께를 닦아 내고는 황후의 신위 앞에 향을 피웠다. 생전에 회임을 못 했는데도 후궁은 고사하고 승은을 받은 궁녀조차 단 한 명도 없었을 만큼 성총을 한 몸에 받으신 황후이시건만 승하하시기 무섭게 이 자그마한 사당에 놓인 신위 말고는 존재가 아예 잊힌 것마냥 취급되어 왔다. 황제께서 승하한 황후에 대해 거론하는 자는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그 자리에서 참하겠노라 공언하셨던 탓이다.
다른 누구도 아니라 황태자로 책봉되었던 본인의 친형을 숙청하고서 등극하신 이래 주요 공신들까지 남김없이 토사구팽하며 황권을 공고히 구축하신 황제께서 내리신 명이니 누가 감히 거스를까만 이해하기는 어려운 일이었다. 황후께 쏟으신 지극한 총애를 생각하면 국상을 대대적으로 치르는 것은 물론 능묘의 규모며 부장품도 전례 없을 수준으로 조성할 법한데 그런 명은 일절 없는 것이 꼭 황후께서 승하하셨다는 사실을 아예 지우려는 것 같았다. 실제로 황후께서 생전에 기거하셨던 곤원궁(坤元宫)은 무엇 하나 정리되지 않았고 그곳에 소속된 궁녀와 태감들도 그대로 소임을 보는 중이다. 황제께서 여전히 어느 여인에게도 눈길 한 번 두지 않으시는 것은 물론이다. 보통 이런 상황이라면 대소신료들이 황후 책봉을 간하고도 남을 것이나 황제의 권력이 워낙 지엄한 데에다 황실에 태후 같은 어른도 아니 계시다 보니 몇 년이 지나도록 다들 쉬쉬하며 눈치만 보는 실정이었다.
그러니까 이 사당을 모른 체하시는 것도 황후께서 승하하신 것을 받아들이지 못하셔서렸다? 사당에 향을 피운 궁녀는 입속말로 중얼거린 뒤 황후의 영정에 무릎 꿇고 예를 올렸다. 영정으로 봐도 넋이 나갈 것 같은 그야말로 경국지색의 미인이라 그 옛날 서시나 왕소군의 미모가 저랬을까 싶었다. 더구나 생전의 행적도 과거 폐태자와 혼약을 맺었다는 점과 회임을 하지 못했다는 점을 제외하면 흠을 잡으려야 잡을 수가 없이 완벽하셨다고 들었다. 백성들의 곤궁한 사정을 헤아려 후궁의 지출을 줄이고 검약할 수 있는 갖가지 방법을 몸소 실천하시는 것은 물론, 궁녀와 태감들의 사정도 하나하나 살뜰히 살펴주셨고, 황제께서 대소신료들에게 노하거나 대소신료들이 황제의 뜻과 맞서는 경우가 생기면 일이 원만하게 해결되도록 중재도 하셨단다. 실로 만인에게 귀감이 되었대도 과언이 아닐 만큼 어지신 국모셨으니 황제께서 승하하신 것을 받아들이지 못하시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그러나 몇 년간 잔잔한 듯 뒤숭숭한 분위기가 이어진 여파로 쥐가 퍼트리는지 새가 퍼트리는지 모를 뒷소문도 은연중에 나돌았다. 황제께서 친형인 폐태자를 죽여 없앤 것은 황후가 폐태자와의 혼담을 진전시키기 위해 황제께 이별을 고했기 때문이라느니, 황제께서 황후를 책봉하신 것은 공신들이 전 황태자와의 혼약을 명분으로 들고일어나 반대하면 그걸 구실 삼아 공신들을 숙청하기 위해서였다느니, 황후께서 성총을 한 몸에 받으시면서도 회임은 못하셨던 까닭이 실은 황제께서 매일같이 황후를 압박하면서 소생을 갖지 못하도록 손을 써 오셨던 탓이라느니, 황후께서 꽃다운 보령에 그토록 허무하게 승하하신 연유가 황제의 분노를 풀 길이 없다 보니 마음의 병이 깊어지셔서라느니, 이러한 뒷이야기는 흥미진진하기는 하지만 처세에는 하등 도움이 안 되는 것들이다. 특히나 황제께서 불시에 사당에 걸음하시는 요즘 같은 때에는 더더욱. 황제께서 걸음하시기 전에 제대로 정리해 놓지 않으면 사당 관리에 소홀했다고 진노하실지도 모르니 할 거 다 했으면 부리나케 튀는 게 상책이다.
/황제와 황후의 파란만장 애증점철 러브스토리가 나오길 바래서 올려봐 황제피셜로 풀어줘도 좋고 궁 사정에 빠삭한 선배 궁녀나 태감이 풀어줘도 좋고 꼭 황제 황후 스토리가 아니라도 좋은데 일 잘못했다고 이 궁녀 혼내거나 목을 치지는 말아줘
(청년은 잠시 머뭇거리다 당신의 질문에 입을 연다.) 아뇨, 그게…신기해서요. 모험가 님은 항상 아무렇지도 않게 흉흉한 던전들을 다녀오시고, 대륙 이곳저곳을 탐험하시고, 또 아무 일 없다는 듯이 돌아오셔서 이야기해주시는 모습을 보니……동경심이 들었어요. (작은 마을이 한 눈에 들여다보이는 언덕 위, 노을을 향해 고개를 든다.) 저도 언젠가 이 마을을 나설 날이 올까요? 모험가 님처럼 멋진 모험을 해보고 싶어요. (당신을 향해 온화한 미소를 지어보인다.)
>>908 딸아이의 친구가 주스를 고르자 현규는 냉장고에서 패션후르츠 착즙 주스를 꺼냈다가 손님 대접을 주스만으로 그치기는 민망하다는 생각에 멈칫했다. 곁들일 만한 음식이 뭐가 있더라? 최근 건강 관리를 하기로 마음먹은지라 과자는 사 둔 게 없고 사과나 감 같은 과일을 깎아 내자니 그렇잖아도 거실에서 어색하게 있었을 딸아이의 친구를 더 기다리게 하는 꼴이라 내키지 않았다. 그러다 찬장에 둔 믹스너트 제품이 떠올라 접시에 한가득 담고 패션후르츠 착즙 주스도 두 잔 따른 뒤 각 잔에 얼음을 넣었다. 그러나 막상 준비한 것을 거실로 나르려니 딸아이의 친구에게 견과류 알레르기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번 알레르기에 생각이 미치고 나니 패션후르츠가 알레르기 반응을 유발하지는 않나 우려되어 핸드폰으로 검색해 봤더니 아니나 다를까 패션후르츠 알레르기도 있다. 난감하네. 당장 오늘 일부터 묻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은데 손님 대접이 참 쉽지가 않다. 현규는 저도 모르게 끙 하고 침음을 뱉었다가 주스와 견과를 둔 쟁반을 든 채로 뒷머리를 북북 긁었다.
“무심코 내다가 미처 생각을 못 했구나. 혹시 견과류나 패션후르츠에 알레르기는 없니?”
/혜서랑 윤아가 얼마나 심각한 일을 겪었기에 한쪽은 울다 탈진하고 한쪽은 비상사태라는지 얼른 알고 싶은데 쓰다 보니 자꾸 딜레이가 되네요. 이번에는 분량도 얼마 안 되고; 쓰는 사람이 디게 소심한가 보다고 양해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912 아아, 그렇게 이을 수도 있군요. 무슨 일이 있었는지가 빨리 나온다면 오히려 저는 좋습니다. 윤아가 알레르기는 없다고 하면 현규는 준비한 걸 내놓은 뒤에 데면데면한 어른과 단둘이 마주하기가 편치 않을 거라는 점 안다만 무슨 일이 있었는지 미리 알고 마음의 준비를 하고 싶어서 이렇게 대접한다 정도로 윤아에게 양해를 구하는 발언을 한 뒤에 혜서에게도 나중에 물을 테지만 오늘 무슨 일이 있었는지 네가 아는 만큼 얘기해 줄 수 있겠냐고 청할 것 같습니다. 이 부분도 반영해서 이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만에 하나 있었으면 서로 민망할 뻔 했겠다 싶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혜서가 아버지와 사이가 좋은 이유를 조금은 알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며, 윤아는 현규가 쟁반을 내려놓고 소파에 앉자, "감사히 잘 먹겠습니다." 라는 인사와 함께 두 손으로 잔을 들었다. 주스를 한 모금 삼키자, 새콤달콤한 맛과 차가운 온도에 머릿속이 좀 가라앉는 것 같았다. 이제 말씀드릴 준비가 된 것 같다고 생각하며 잔을 내려놓으려니, 현규가 퍽 조심스러운 어투로 말을 꺼냈다.
"데면데면한 어른과 단둘이 마주하기가 편치 않을 거라는 점 안다만, 무슨 일이 있었는지 미리 알고 마음의 준비를 하고 싶어서 이렇게 대접하게 됐단다. 혜서에게도 나중에 물을 테지만, 오늘 무슨 일이 있었는지 네가 아는 만큼 얘기해 줄 수 있겠니?" "네, 저도 빨리 말씀드려야 할 것 같다고 생각했어서요."
잔을 내려놓고 경청하던 윤아는 현규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한 뒤, 주스를 한모금 넘기고 입을 열었다.
"혜서랑 영화 보러 가는 길에, 혜서 어머님의 친구분...이시라는 아저씨하고 마주쳤어요. 표정이 안 좋아보여서 좋은 이야기 하시려는 것 같지는 않았기도 하고, 혜서도 불편해보여서 영화시간 핑계 대고 벗어나려고 했는데, 그 아저씨가 혜서를 불러세우시더니..... 음..."
최대한 간결하면서도 조리있게 설명하고자 또박또박 이야기하던 윤아는 착잡한 표정으로 말끝을 흐리다, "잠시만요."하고 양해를 구하고는 잔을 내려놓고 옆에 내려놓았던 핸드폰을 집어들었다. 뮤직 플레이어 앱을 켜고, 녹음파일을 재생하니, 핸드폰의 스피커로 희미하게 울음기가 섞인 듯 떨리는 중년 남성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장 빛나는 순간이었단다. 네 엄마는...내게 온기를 주는 유일한 사람이었어... 그걸 내 영혼이 기억하는 한, 네 마음을 받아 줄 수는 없겠구나. 그러고 싶어도, 내 염치가, 마음이, 도저히 그렇게 되지를 않는구나. 미안하다, 혜서야...'
말이 끊기고 그 중년남성의 것인 듯한 약간의 훌쩍임이 이어졌다. 몇 초의 공백 뒤, 다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아직은 이해할 수 없겠지. 넌 어리니까... 하지만, 하지만 언젠가는 알아주리라 믿는다. 널 사랑할 수는 없어도 나는...'
울먹이며 횡설수설 이어지는 목소리를, 딱딱하게 굳은 앳된 목소리가 딱 잘라냈다. 녹음되면서 톤이 달라졌지만, 윤아의 목소리와 억양이었다.
'늦겠다. 저희 이만 갈게요. 가자, 혜서야.' '으, 응...'
넋이 나간 듯한 혜서의 목소리가 이어지고, 다급한 발소리에 작은 소리로 혜서를 부르는 소리가 섞여 들리다, 이내 발소리밖에 들리지 않게 되자, 윤아는 어느새 꾹 누르고 있던 미간에서 가까스로 손을 떼고 재생정지 버튼을 눌렀다. 굳게 마음을 먹었지만, 막상 녹음된 것을 들으니 다시 머리가 지끈거렸다. 지금껏 친구로 지내면서, 혜서에게서 엄마 친구라는 그 아저씨에게 고백했다거나 좋아하는 것 같다는 말은 커녕, 그 아저씨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적도 별로 없었다. 그 아저씨에 대한 언급은 졸업식 날 밤에 했던 통화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고, 그 마저도 진로 계획 질문이나 단둘이 식사하자는 제안은 참 난감했다거나, 그래도 바쁘실 텐데 축하해주러 와주신 건 감사하긴 한데, 설명하긴 어렵지만 묘하게 대하기 불편했어서 아빠한테 솔직히 이야기했다는 말 정도였다. 그 아저씨가 한 망상대로라면, 혜서가 단둘이 식사하기를 난감해하고 불편하다고 나 뿐만 아니라 자기 아버지한테까지 이야기를 했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미친 사람이라는 생각밖에는 들지가 않았다.
/그리고 분량이 또 폭주... ㅋㅋㅋ 적다보니, 현규같은 아버지라면 혜서가 돌아가신 엄마 친구분께 이런 생각이 드는게 내가 나쁜 건가 싶으면서도 솔직히 털어놨을 것 같아서 설정을 추가했는데, 고쳤으면 하신 부분이 있으시면 편히 말씀해주세요:)
툭. 건넨다기보다는 당신의 앞 책상에 던져진 빼빼로. 다들 하교한다고 교실을 채우던 소리들이 떠난지 오래라서, 툭 하는 소리가 유달리 크게 들려왔다. 물론 던지고 싶어서 던진 것은 아니었다. '어제 열심히 만들었는데! 다 박살난 거 아냐? 떨려 죽겠네 진짜!' 긴장하고 긴장한 탓에 손이 떨려와서 떨어트린 것이었다. 그만큼이나 긴장은 충분히 하고 있었고 머릿속도 충분히 어지럽지만, 머릿속이 더 어지러워지다 못 해 새하얗게 변해버릴 사실은 한 가지 더 남아있었다. 오늘은 빼빼로데이가 아니란 것. 빼빼로데이의 하루 전 날이다. 11월 10일, 빼빼로데이까지는 하루가 모자랐다. 날짜를 헷갈린지도 모르고 어제 열심히 빼빼로를 만들었던 흔적은 빼빼로가 사라진 손 끝에 반창고가 덕지덕지 붙어 남아있었다.
"먹든가. 아니면 버려."
'아니야! 먹어줘! 맛있었으면 좋겠는데!' 생각과는 전혀 다른 말을 하고 말아버리는 자신을 원망했다. 굳어버린 표정까지 더해져 확실하게 오해사기 쉬운 모습이란 걸 알았다면, 직접 전해주는 것이 아니라 사물함이라던지 책상 서랍 앞에 넣어뒀을텐데 안타까울 따름이다. 속으로 되뇌였다. 이 고백은 실패다. 빨리 이 곳을 벗어나는 편이 좋을 것 같다.
"…뒷문 잠궜으니까 앞문으로 가고."
/ 빼빼로데이 전 날의 방과후 교실이에요 :3 상대 쪽에서 이쪽 캐릭터가 좋아하고 있단 사실을 알아도 몰라도 상관없어요~! 너무 긴장해서 주려던 캐가 아니라 다른 캐란 것도 못 알아보고 줬다고 해도 오케이! 맥커터만 사절입니다 :D
>>916 가방을 막 챙기고 일어서려는 때에 책상에 빼빼로가 다소 거칠게 던져지자 연재는 빼빼로와 그것을 놓은 사람을 번갈아 보았다. 같은 반이긴 해도 연재와 함께 어울린 적은 손에 꼽아서 낯설게 느껴지기까지 하는 친구였다. 그런데 웬 빼빼로? 빼빼로데이는 내일인데. 잠시 어리둥절했으나 이 친구가 역시나 같은 반이자 연재의 일란성 쌍둥이인 연우와 종종 어울린다는 사실을 상기하자마자 의문은 가셨다.
거짓말은 곤란스러운 상황에서 빠져나가고자 할 때 제일 간단하고 쉬운 방법이지만, 함부로 사용해서는 안 됐다. 거짓말이 들통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또 다른 거짓말을 하고, 또 거짓말을 하다보면 더 이상 걷잡을 수도 되돌릴 수도 없게 되기 때문이다. '나도 알아! 안다고! 하지만 여기서 뭘 할 수 있는데!' 차마 좋아하는 아이조차 헷갈렸다는 진실을 스스로 수긍할 수가 없었다. 아니, 스스로는 수긍한다 쳐도 연재에게도 그렇다 대답할 수 없었다. 지금 이건 실수니까 연우에게는 비밀로 해달라 하지도 못 하겠다. 그러다 모든 상황을 모면할 수 있는 뻔뻔하고 어이없는 거짓말이 한 마디 나와버린다.
"너 준 거 맞아."
물 한 컵도 아니고, 한 바가지. 아니다, 한 대야를 거하게 쏟아버렸다. 쏟아버린 물과 말은 다시 주워담을 수 없다. 그래도 원래부터 빼빼로의 주인이 연재였다고 하면 모든게 해결될 것이다. '나만 빼고!'
"별로. 그냥 조금 베인 건데."
'걱정해줘서 고마워, 고마운데…!' 이 와중에 아픈게 신경쓰일 리가 없었다. 손을 뒤로 감추었다. '진짜 쪽팔려~! 학교 어떻게 다니냐고! 미쳤어미쳤어… 연우도 연재도 이제 어떻게 봐! 반 바꿀래… 자퇴할래…' 손 끝 아린 감각이 느껴질 정도라면 긴장에 떨어 빼빼로를 잘못 주지도 않았겠다. 그나마 빼빼로데이가 11월이라서, 한달에서 두달 남짓하는 기간동안 뻔뻔하게 모른 척 하면 방학이라는 것이 참으로 다행으로 와 닿았다.
>>915 별로 안 친한 아저씨가 고백이라도 받았던 것처럼 찾아와서 거절한 거군요. 순전히 저쪽 착각이다 보니 정상으로 안 보이고 둘이라도 성인 남성을 힘으로 당하기는 어려울 수 있으니 무서울 만하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848, 850에서 영감을 얻었다고 하셨고 혜서를 찾아온 남자의 상황이 848의 캐와 유사해 보이는 점이 걸립니다. 915에 제시된 상황이 848의 캐를 미친 사람으로 간주하는 듯한 인상을 줄 수도 있을 것 같아서요. 그런 내용을 전개해도 괜찮을까요?
>>919 848에 자식 쪽을 사랑하지는 않지만 좋았던 옛 시절이 떠올라서 당사자한테 해 주고 싶었던 걸 자식한테 해 주려고 하는 과거에 매인 캐라고 명시되어 있었고, 어색한 사이인 친척처럼 진로 관련 질문을 하고 데면데면한 사이에 둘이서 밥을 먹자고 제안하는 모습에서, 정신적으로 건강하지 않고 연소자가 느낄 수 있는 불편감을 고려하지 않는 연장자 캐가 떠올라서 제가 구상한 서사에 반영했습니다.
아이의 양육자를 사랑하던 이가 양육자 사망 이후 그를 닮은 아이에게 옛 사랑을 겹쳐 본 끝에 아이와 썸을 타는 것 같은 클리셰도 연상이 되다 보니, 혜서가 자신에게 마음이 있다고 착각하고 거절하는 전개를 넣었고요.
848 850에서 영감을 얻긴 했지만 그 캐들을 그대로 차용한 건 아니고 각 레스에 드러난 캐의 속성 일부에 착안해 재창작한 것이라 문제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현규주님께서 원전의 캐가 마음에 걸리신다면 더 잇지 않으셔도 괜찮습니다.
>>920 말씀대로 과거에 집착한 나머지 비상식적으로 행동하는 어른 캐의 모티브가 될 여지가 있는 요소가 848, 850에 드러나기는 했다고 생각합니다. 또 현재까지 전개된 상황상 현규가 915의 남자에게 호의적이거나 동정적으로 반응할 가능성은 없어 보입니다. 그러나 그런 내용을 서술할 경우 다른 사람이 만든 캐를 디스하는 모양새가 될 것 같아서 이 이상 잇기는 어렵겠네요. 끝까지 이어 가지 못해 유감입니다.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909 그 때, 나지막이 천둥소리가 울리더니, 쏴 하는 소리와 함께 장대비가 쏟아졌다. 소나기 치고는 퍽 거센 빗발이 매섭게 땅을 두드리는 소리가 사당 안에도 요란히 들이쳤다. 그런 요란한 빗소리 사이로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나더니, 물에 젖은 듯한 발소리와 함께 누군가 사당 안으로 들어섰다. 봉두난발로 풀어헤쳤지만 물기로 인해 착 가라앉은 청현색의 긴 머리칼, 한 마리의 굳건한 용과 같이 장대한 기골, 풀어헤쳐진 앞섭 사이로 드러난 조밀하게 짜인 근육과 그 위로 새겨진 수많은 상흔, 서방에서 들여온 포도주같기도, 또는 핏빛같기도 한 짙은 적색의 형형한 눈동자. 비록 흐트러지고 비에 젖은 몰골을 하고 있지만, 궁인이라면 누구나 그가 이 나라의 황제라는 것을 모를 수가 없으리라. 황제는 비척거리는 걸음으로 황후의 영정 앞으로 나아가더니, 이내 그 앞에 털썩 앉았다. 체신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흠뻑 젖은 소복을 대충 걸친 몰골의 황제에게서는 비릿한 비 내음에 묻히지 않을 정도로 독한 주향(酒香)이 풍겼다. 먼저 와 있던 궁녀의 존재를 잊기라도 한 듯 일언반구도 없이, 황제는 멍하니 황후의 영정만을 들여다보았다. 살아생전의 미색을 고스란히 옮겨다 놓지는 못하였더라도, 그 마저도 절실하다는 듯 뚫어져라 바라보는 그 핓빛 눈동자에 서린 빛은, 취기보다는 광기에 가까웠다. 그렇게 불상이라도 된 듯 우두커니 앉아있던 황제가 별안간 킬킬거리며 웃음을 터뜨렸다.
"우습구나, 우스워... 참으로 우습구나. 그대를 만난 순간부터 짐의 모든 것으로 그대를 옭아매고자 하였고, 그대의 마지막조차 취하였건만... 어찌하여, 그러고도 만족할 수가 없는 겐지. 이래서야, 이래서야 마치... 머리부터 발 끝까지, 처음 만난 그 순간부터 죽음까지도 짐의 것인 그대가, 죽어서도 감히 짐을 지배하는 것 같지 않은가... 그렇게는 안 되지... 짐은 그대를 지울 것이다. 천자(天子)는 패자(覇者)여야지 패자(敗者)일 수는 없으니..."
웃음인지 흐느낌인지 모를 기이한 소리는 한동안 이어지더니, 어느순간엔가 뚝 멎었다. 죽은 사람처럼 떨구어져있던 고개는 어느새 들려있었고, 빗물이 채 마르지 못해 용안에 달라붙은 짙은 바다처럼 푸르른 머리칼 사이로 핏빛 눈동자가 조용히, 그러나 섬뜩할 만큼 집요하게 궁녀를 응시하고 있었다.
"참으로 기이한 일이구나. 너는... 황후를 꼭 빼닮았구나. 그이가 내 눈에 처음 들어왔던 것도, 딱 네 나이정도였을 때였지..."
황제의 손이 궁녀의 얼굴로 천천히 뻗어가다, 이내 바닥으로 툭 떨구어졌다. 취기로 몸을 가누기도 어려운 것인지, 황제는 사당 벽에 눕다시피 기대었다. 그러고는 몽롱한 눈으로 천장을 바라보며 혼잣말인듯 헛소리인 듯 중얼거렸다.
"만인이 짐과 황후에 대해 떠벌리고 있지. 마치, 짐의 귀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라 자신하는 듯이 말이다... 그래, 너는 어떠냐. 황후가 어떻게 죽었는지, 짐이 황후를 얼마나 괴롭혔는지, 그 내막이 궁금하지 않더냐?"
그렇게 황제가 운을 떼었을 때였다. 궁녀가 무어라 대답하기도 전에 그것을 가로막기라도 하듯, 사당 밖이 소란스러워졌다. 날붙이가 서로 부딛히고, 사람의 옷과 살을 베는 소리, 비명소리와 고함소리가 어지러이 섞여 들렸다. 그 살기등등한 소란은 한참 이어지다 조금씩 잦아들었고, 궁 안을 수색하는 듯한 여러명의 발소리가 이어지더니, 이내 사당의 문이 거칠게 열렸다. 장대비가 거칠게 들이치고, 갑옷의 비늘이 부딛히는 소리를 내며 몇명의 사람이 사당 안으로 들어섰다. 그 중 선두에 선 자가 투구를 벗고서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격조하였습니다. ...오라버니."
투명한 음색이지만 낮고 힘이 실린 목소리로, 살갑지 못한 인사를 올린 이의 얼굴을, 아직 꺼지지 않은 촛불이 희미하게 비추었다. 깔끔하게 쪽을 진 머리카락은 황제의 것과 닮은 선명한 청현색이었지만, 옆에 있던 궁녀는 아랑곳 않고 서늘한 시선으로 황제를 내려다보는 두 눈동자는 희미한 촛불빛만으로도 맑고 쨍한 빛을 내는 금색이었다. 황제가 즉위한 이후 몇년 간 궁 출입이 뜸하다, 이번 해에야 입궁이 잦아졌기에, 궁 생활이 짧다면 그의 얼굴이 생소할 법 했지만, 황제가 제 누이동생의 시가를 숙청으로 멸하고 부마마저 사사하려던 것을, 5황녀의 눈물 젖은 간청을 가여이 여겨 자비를 배풀었다는 소문은 그리 오래된 것이 아니었다. 황녀의 얼굴을 찬찬히 올려다보던 황제가, 별안간 광소를 터뜨렸다.
"이게 누구인가! 이게 누구야, 나의 귀여운 누이 원민이 아니던가! 그래, 드디어 이 오라비를 즐겁게 해주려고 왔느냐? 보시오, 황후. 반가운 얼굴이 아닐 수가 없구려. 아니 그렇소? 아아, 실로 지루한 나날들이었지. 이제는 원민이 네가 이 지루함을 달래주겠구..." "여전하시군요. 독야청정 하는 줄 아는 주정뱅이. 예나 지금이나 한결같으십니다. 곧 그토록 그리워하시던 황후 폐하와 해후하실 텐데, 그런 몰골이셔서야 되겠습니까."
짐짓 나긋나긋한 투로 황제의 말을 끊은 원민 공주가 슬몃 미소지었다. 멍한 얼굴로 그런 누이의 얼굴을 올려다보던 황제가, 노기가 서린 헛웃음을 터뜨렸다.
"고얀 것. 네 감히 할 수 있겠느냐? 지략으로는 천하를 좌지우지하고 용력으로는 만인지적이며 용의 화신으로도 일컬어지는, 천자인 이 나를 베어 넘기고, 그 자리를 대신할 수 있겠느냐 이 말이다. 어서 나를 즐겁게 해 보거라. 설마 이제 와 두렵다고 빼진 않겠지?"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파공음과 함께 무언가가 번뜩였고, 청산유수로 말을 늘어놓던 황제의 입이 멈추며, 머리가 바닥을 구르더니, 이내 주인을 잃은 목에서 피가 솟구쳤다. 황제의 말을 들은 체 만 체 하던 원민 공주가 가장 곁에 있던 장수를 향해 고갯짓을 하였고, 장수는 그 무언의 명을 받든 것이었다. 이 모든 것을 옆에서 지켜보던 궁녀는 물론, 바르작거리는 목 없는 시신에도 눈길을 주지 않고서, 원민 공주는 엄숙한 목소리로 선언했다.
"대소신료들을 멋대로 살해한 죄, 황후만을 분별없이 총애하여 황통을 방치한 죄, 백성의 안위보다 본인의 위세를 우선시한 죄로, 황제는 폐위되셨습니다."
/922 이크 너무 오래 앉아 있었네. 넋을 놓고 황후의 영정을 바라보던 궁녀는 정신을 차리려는 듯 양손으로 제 볼을 찰싹 치고는 일어섰다. 그런데 별안간 천둥이 요란하게 치더니 사당 안까지 요란해지도록 빗발이 바닥을 때려댔다. 우장(雨裝)을 미처 챙기지 못했기도 하고 갑작스레 퍼붓는 걸로 보아 금세 그칠 소나기 같기도 해서 조금 더 있어 볼까 하는데 오래지 않아 그 망설임이 뼈저리게 후회스러워질 일이 터졌다. 비에 쫄딱 젖은 채 흐트러질 대로 흐트러진 차림새와 비틀거리는 걸음에도 불구하고 누구인지 한눈에 알아볼 수밖에 없는, 이 나라의 지존(至尊)이신 천자(天子)께서 사당에 들이닥치신 것이다. 황제를 알아본 순간 궁녀의 머릿속은 그야말로 새하얘졌다. 지난 몇년간 황후의 승하를 부정하기라도 하려는 것처럼 국상이고 사당이고 나 몰라라 하던 황제가 사당에 왕림하신 이후 곤욕을 치른 이가 한둘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사당을 깨끗이 치우지 않았다거나 향로의 향이 떨어졌는데도 새 향을 피우지 않았다거나 황후께 예를 올리지 않았다거나 하는 이유로 감봉당한 이는 셀 수도 없고 심하게는 목숨을 잃은 이도 있었으니, 그런 황제와 사당에서 마주하게 된 건 한마디로 봉변이었다. 그토록 얼어버린 궁녀가 늦게나마 산란해진 정신을 수습할 수 있었던 것은 살고 싶다는 생존 본능 덕분이었다. 궁녀는 가까스로 꿇어앉았다.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만세 만세 만만세.”
다행히도 황제는 궁녀의 존재를 알아채지 못한 듯 궁녀는 거들떠보지도 않고 황후의 영정에 앉았다. 태감 하나 없이 혼자 와 있는 황제에게서 풍기는 술 냄새가 불쾌하리만치 코를 찔렀지만 자기가 와 있는 걸 모르는 까닭이 만취해서라고 생각하니 냄새고 뭐고 오히려 감미로울 지경이었다. 다만 한 가지 심각하고 또 심각한 문제는 무슨 수로 이 자리에서 발을 빼느냐였다. 물러간다고 예를 올리자니 눈에 띄자마자 무슨 트집을 잡힐지 몰라 무서웠고 몰래 나가려다가 들키면 그거대로 황제의 진노를 살 게 뻔하니 무서웠다. 어쩐다? 길다란 치맛자락에도 떨림이 감춰지지 않을 만큼 몸이 떨려 쓰러질 것 같은 와중에 웃음 같기도 하고 흐느낌 같기도 한 섬뜩한 소리와 실성이라도 한 듯한 중얼거림이 들려왔다. 마지막조차 취했다? 죽음까지도 짐의 것? 저말은 곧 황제께서 황후를 직접 해하기라도 하셨다는 뜻인가? 이제까지 들려온 뒷소문보다 훨씬 심각한 소리에 입이 떡 벌어져 비명이라도 나올 것 같아 궁녀는 두 손으로 제 입을 틀어막았다.
그런데 그때 당장이라도 사당을 집어삼키는 화마(火魔)로 돌변이라도 할 것처럼 섬뜩하게 붉은 안광이 궁녀에게 꽃히는가 싶더니 황제께서 그야말로 터무니없는 극찬을 늘어놓으셨다. 박색이나 겨우 면했지 빈말로도 미색이라고는 못할 생김새이건만 경국지색이라고밖에 할 수 없는 황후마마를 닮았다? 천자의 안목이 무슨 동태 눈깔처럼 흐려지다니 술이란 것은 대관절 얼마나 지독한 물건인가 경이로울 지경이었다. 또 그런 극찬도 달가울래야 달가울 수가 없는 것이 기막히게 운이 트인 끝에 황제의 총애를 얻는다 해도 그건 언제 사라질지 모르는 헛것이고 상대가 내 생사여탈권을 한손에 쥐신 지존이신 이상 죽으라면 바로 죽어야 하는 처지임을 궁녀는 이미 잘 알고 있었다. 그런지라 황제께서 궁녀의 얼굴로 손을 뻗으셨다가 떨구시고는 사당 벽에 눕다시피 기대시며 암암리에 파다하게 퍼진 소문을 거론하시자마자 궁녀는 그런 이야기에 호기심을 가졌던 것을 진심으로 뉘우쳤고, 지금 이 자리에서 사지 온전하게 빠져나가게만 해 주시면 앞으로 일평생 궁에서 회자되는 소문엔 눈 감고 귀 막을 거라고 천지신명께 빌고 또 빌었다.
그리 빈 보람이 있었을까? 궁녀와는 생전 인연이 없던 쇠붙이 부딪는 소리와 무언가를 가르는 소리와 고통에 찬 비명과 노성 같기도 하고 환호성 같기도 한 고함이 빗소리를 묻어 버리는가 싶더니, 오래지 않아 딱딱한 것이 바닥을 때리는 듯한 발소리가 숱하게 가까워오더니 누군가 사당의 문을 부술 듯이 열어젖혔다. 이어 창칼과 갑주에 피를 잔뜩 묻힌 군사들이 몰려왔는데 그들의 앞에 나선 것은 얼마 전 황제께 지아비를 살려줄 것을 눈물로 청했다는 5황녀였다. 코앞의 황제를 두려워해야 할지 당장 누구 하나 죽인대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은 군사들을 두려워해야 할지 궁녀가 헷갈려하는 사이, 황제께서는 5황녀를 반기는지 조롱하는지 모를 말씀을 하셨고 5황녀는 독설로 응수했다. 그리고 황제께서 진노를 감추지 못하고 저들을 도발하시기 무섭게 군사들 중 하나가 옥체를 두 동강 내어 버렸다. 지고(至高)의 존재로 천상천하 유아독존(天上天下 唯我獨尊)인 황제가 궁녀의 바로 눈앞에서 시해되고 만 것이다. 그리고 제가 목격한 것이 도대체 무엇인지 궁녀가 채 파악하기도 전에 5황녀가 위엄 서린 음성으로 황제가 폐위되었다고 선언했다. 그 직후 사당을 날려버리기라도 할 듯한 군사들의 함성에 귀가 먹먹해진 것을 의식하고서야 비로소 궁녀는 얼떨떨한 정신을 가다듬었다. 여기서 잘못 처신했다간 끝장이다. 그래서 궁녀는 꿇어앉은 자세 그대로 바닥에 찧다시피 머리를 조아렸다.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만세 만세 만만세!”
/이거 재수없으면 궁녀도 그자리에 있던 죄로 목이 달아나도 이상하지 않겠는데 쩌리캐라도 죽는건 싫어서말야 그렇게 잇지는 않아주면 고맙겠다
>>925 요의 다섯째 황녀이자, 반군의 구심점, 넷째 오라비를 배어넘긴 자, 원민 공주 황 현은 군사들의 함성 속에서 피가 튀었을 지언정 꼿꼿한 모습으로 가만히 서 있었다. 거사를 성공해 냈다는 안도감, 복수를 이뤄냈음에 대한 사사로운 만족감, 그럼에도 돌아오지 못할 이들과 사라지지 않을 자신과 지아비를 포함한, 넷째 오라비에게 많은 것을 잃은 이들의 상실에 대해서 어쩔 수 없이 느끼고 마는 헛헛함, 이제부터가 진정으로 시작이라는 것을 알기에 느끼는 먹먹함. 그런 감정들이 소용돌이치고 난 뒤에 가장 커진 것은 피로감이었다. 아니지, 곤하다 하여 이렇게 멍하니 있을 때가 아니지. 이제부터가 시작이니. 가까스로 정신을 붙들고 군사들을 진정시키려는데, 바로 근처, 그보다 아래쪽에서 다급하고 새된 외침이 터졌다. 천자를 향해 올리는 만세였다.
폐주가 오라버니는 물론 그분 소생의 태손까지 죽여 없앤지 오래이니 좋든 싫든 내가 보위를 맡는 것이 확실시되었다고는 하나, 정식으로 즉위하기 전인데. 그건 그렇고, 지금은 폐제라곤 하나, 눈 앞에서 황제의 목이 땅에 떨어졌으니 정신을 놓았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담대하고 상황판단이 신속하군. 뜻밖에도 예상보다도 빠르게 듣게 된 황제 폐하 소리에 이를 어찌 받아들이고 대응해야 할 지 고민하던 현은, 이내 만세가 제 군사들에게도 옮겨가자, 너무 복잡하게 생각하지 않기로 마음을 먹고는 헛기침을 하여 함성을 잠재우고, 또렷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폭정을 일삼아 나라를 돌보지 않은 폐주는 죽었습니다. 그대들의 노고가 있었기에 가능했습니다. 나라의 안정이 우선이라 당장 논공행상을 할 수는 없으나 그대들이 흘려 온 피땀에 대한 보상은 결코 잊지 않을 것입니다. 또한, 도탄에 빠진 나라를 외면하고 폐주에게 아첨하던 자는 응당 대가를 치를 것이나, 그릇된 충심을 버리고 나라를 바로잡는 데 힘을 아끼지 않는다면, 죄의 경중을 참작하여 처우를 정할 것입니다."
피로감을 빈틈없이 감추고서, 현은 총기를 잃지 않은 금빛 눈으로 군사들을 둘러보며 힘이 실린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릇된 것은 바로잡되, 과거의 원한에 사로잡히지 않고, 새로운 시대와 화합을 위하여 모두가 뜻을 모으길 바랍니다."
군사들을 치하하기 위한 말이기도 했지만, 한 편으로는 스스로에게 하는 다짐이었다. 폐주는 죽고, 자신이 이 나라의 모든 것을 책임지게 되었으니, 계기는 복수였을 지라도 이제부터는 원치 않는 선택을 하게 될 지라도 나라를 바로잡고 안정케 해야한다. 보위에 오르는 그 순간부터 개인이 아닌 국가와 운명을 같이 하는 자임을 망각하는 순간, 폐주의 전철을 밟게 될 되리라.
/죽일 생각은 없는데, 현이랑 궁녀가 이후에 또 접점이 있을 지 모르겠네. 현이 입장에서는 자기가 위기에 처했을 때에도 충성을 다할 측근을 원하다보니, 궁녀가 상황파악 잘 하고 빠릿하다고 생각하는 거랑 별개로 자기나 배우자(곧 국서?) 측근으로 들일 것 같지는 않아서 말이야. 좋은 아이디어 없으면 여기서 마무리하는 건 어떨까?
제 2황자인 그는 단 한번도 자신이 황제의 자리에 오른다거나 하는 것은 생각도 하지 않고 있었다. 당연히 자신에겐 늠름하고 멋진 큰 형이 있었으며 객관적인 능력치 등을 다 따져봤을 때 자신보다 훨씬 더 뛰어난 이가 바로 그의 형이자 제 1황자인 황태자였다. 허나 이건 또 무슨 일인가. 제 1황자이자 황태자는 어느날 갑자기 황실의 대신과 황제, 그리고 황후, 더 나아가 형제자매들 앞에서 자신은 정치적인 움직임에 그다지 끼이고 싶지 않으니 그저 하고 싶은 연구를 하면서 다른 의미로 제국에 이바지하고 싶다고 선언했다. 입이 쩍 벌어질법한 소리에 황실은 한동안 시끌벅적했고 설득을 하고자 하는 이들도 많았으나 제 1황자는 뜻을 전혀 굽히지 않았다. 오히려 제 2황자인 자신에게 네가 황제가 되고 자신은 하고 싶은 연구를 하면서 기술면이나 조언 등으로 지지를 하겠다고 이야기하던 그 모습이 제 2황자에게는 도저히 잊혀질래야 잊혀지지 않았다.
물론 시대가 변해 반드시 첫째인 아들이나 딸이 황제를 해야 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렇지만 당연히 많은 이들이 기대를 한만큼 그에 대한 실망감도 많았고 제 2황자가 알게 모르게 압박을 준 것이 아니냐는 말들도 황실에서 조금씩이지만 들려오고 있었다. 물론 제 2황자의 능력도 떨어지는 것은 아니었다. 허나 어디까지나 제 1황자에 비하면 떨어지는 수준이었다는 것이 문제였다. 상대평가를 했을 때 조금 더 뛰어난 쪽에게 기대를 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사람의 심리 아니겠는가. 아무튼 제 1황자의 뜻을 굽히지 못한 황실 사람들은 결국 제 2황자를 새로운 황태자로 지정했고 그로부터 딱 하루의 시간이 흘렀다.
너는 갑자기 이상한 말을 하지 않겠지? 라는 무언의 압박감을 느끼면서 제 2황자는 일단 업무를 봤다. 이전에 자신이 처리하던 것과는 차원이 다른 업무량에 쓴 웃음소리를 낼 수밖에 없었다. 지금이라도 자신도 황제의 뜻이 없다고 하면 되는 것일까. 하지만 그렇게 하면 이후 황실이 얼마나 흔들릴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참으로 이럴 때는 그 늠름하고 존경스러운 제 1황자가 조금은 원망스럽다고 생각하나 그렇다고 그 원망을 밖으로 내뱉을 정도는 아니었다. 그저 어쩌다가 이렇게 되었을까 정도의 생각이 들 뿐이었다.
"손님이 오셨습니다. 황태자님."
"응? 알았어. 들어오라고 해."
자신의 시종이 이야기하는 것에 제 2황자는 고개를 끄덕이고 손님을 맞이할 준비를 했다. 황실 대대로 전해져내려오는 제국 유일의 녹색 에메랄드 빛 머리카락을 손으로 정리하고 제국 유일의 에메랄드 눈동자를 빛내며 제 2황자는 누가 들어올지를 가만히 지켜봤다. 아는 사람일지, 아니면 잘 모르는 사람일지. 그것도 아니면 압박을 가하는 사람일지. 그것도 아니면 격려를 하려는 사람일지.
어느 쪽이건 일단 만나봐야 알 일이었다.
/간단하게 당연히 황제가 될 거라고 믿었던 제 1황자가 나는 연구만 하면서 살겠다고 선언하고 폐위되었고 그 다음에 태어난 제 2황자가 황태자의 자리에 정식으로 오르고 딱 하루가 지난 후의 시점이야. 황실에서 정한 정혼자가 찾아와도 상관없고 그냥 알고 지내는 이가 찾아와도 상관없고 누가 찾아와도 별 상관은 없다만 갑자기 반란을 일으켰다느니 음모를 꾸미고 죽이러 왔다느니 그런 맥브레이커는 사절이야. 상황극을 어떻게 이어도 상관은 없다고 하지만 적어도 연결이 될 수 있는, 흐름이 이어질 수 있도록 하는 것은 기본이라고 생각해. 간단하게 흐름을 깨고 뜬금없는 이야기를 만들려고 하거나 진짜 맥락없고 뜬금없는 참교육 스토리 만들려는 그런 이가 아니라면 얼마든지 환영!
오늘 캔 약초는 제법 후한 값에 팔렸다. 풀을 캐던 중에 잘 익은 머루도 찾아서 한 움큼 따 놓았다. 짭짤한 수확에 기꺼워진 약초꾼은 장에서 누가(nougat)를 잔뜩 사서 일행에게도 좀 나눠 주고는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집으로 향했다. 그분이 오시면 차와 함께 내어 드리면 되겠다. 해실거리는 얼굴로 맛나게 오물거리실 걸 상상하니 벌써부터 포근한 기분이었다.
그렇게 돌아온 약초꾼은 누가와 머루는 따로 잘 갈무리해 둔 뒤 서둘러 땀을 씻어내고 옷을 갈아입었다. 그러고는 다시 나와서는 댓돌에 걸터앉아 밖을 바라보았다. 집에 막 왔을 때만 해도 해가 떨어질 듯 말 듯 하늘에 불그스름한 기운을 퍼뜨리고 있었는데, 지금은 언제 그랬냐는 듯 어두워져서 별도 보인다.
오늘은 오시려나? 약초꾼은 따로 가져온 바람막이를 그러안으며 웅크렸다. 이제 밤에는 은근 쌀쌀한 터라 그분이 추워 하실지도 몰라 챙긴 것이다. 몇 걸음이면 실내이긴 하지만 그 잠깐에라도 한기보다는 온기를 느끼셨으면 했다. 그래서 약초꾼은 제 체온으로 데워지길 바라며 바람막이에 찰싹 달라붙었다.
/연인이나 배우자가 오길 기다리는 사람을 상상하고 썼어 성별은 특정하지 않았는데 나이는 장에서 거래를 할 정도면 성인일 거라고 생각해 같이 꽁냥거리고 수다떠는 내용으로 잇고 싶어서 그에 맞지 않은 내용은 유감이지만 스루할 생각이야
>>935 마지막으로 교역한 왕국에서 출항하고 나서부터는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보금자리가 있는 항구도시와 그렇게 멀지 않은 곳이라 항해하는 동안 폭풍우도 해적도 만나지 않았는데도, 오로지 빨리 집에 가고 싶다는 마음 뿐이었다. 그래도 수평선 너머로 목적지가 보이면 조금 나을 줄 알았더니, 오히려 더 애가 탔다. 차라리 여기서 뛰어내려서 수영해서 갈까, 하는 충동이 드는 것을 겨우 참아내야 할 지경이었다. 그렇게 배 위에서는 내내 마음이 콩밭에 가 있던 상단주는, 하선하고 나서는 도리어 정신을 차렸다. 무역을 마치고 귀국했지만 아직 일이 끝난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교역품 운반과 선박 청소 등 잔업이 끝나면 곧장 해산할 것을 부선장과 선원들에게 지시하고 상단 건물에 들러 거래 내역을 기록한 문서를 추가하고 정리하고 나니, 어느새 하늘이 어둑해져 있었다.
드디어 집에 가겠구나. 긴장이 풀리며 설레기도, 조급하기도 한 마음으로 머리가 꽉 찼다. 여독으로 지쳐있기도 했지만, 무엇보다도 길게만 느껴지던 항해 내내 만나지 못했던 제 배우자와 다시 만난다고 생각하니 심장이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더 참지 못하고, 상단주는 정신 없이 집을 향해 달렸다. 숨이 가빠오든 말든 쉼없이 달려 대문을 열어젖히자마자, 댓돌에 걸터앉아서는 무언가를 꼭 끌어안고 있는 인영이 시야에 들어왔다. 그였다.
"여보, 나 왔어요!"
상단주는 큰 소리로 제 배우자를 부르고는, 한달음에 달려가 그를 꼭 끌어안았다. 멀리서 봤을 때만에도 퍽 비현실적으로 느껴졌었는데, 찬 바람에 싸늘해졌지만 확실하게 느껴지는 익숙하면서도 그리웠던 느낌에, 이제야 집에 왔다는 실감이 들었다. 그의 존재를 실감하고 나니, 퍽 싸늘해진 몸이 마음에 걸렸다. 상단주는 제 배우자를 안은 손에 힘을 준 채, 걱정이 잔뜩 어린 하늘색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추웠겠어요. 안에서 있지... 많이 기다렸어요?" / 부인 바보라는 느낌으로 달아봤는데 너무 촐랑이는 아니려나 걱정되네😅 참, 내 캐릭터가 좀 더 몸집이 큰 걸로 가도 괜찮을까?
지키지 않아도 뭐라할 사람 하나도 없는 약속. 매일같이 붙어다니던 모습을 그리워한대도 시간을 되돌릴 수도 없는데 오늘도 발을 옮겼다. 집 돌아가는 길 근처를 들르는게 어렵지 않아서 그렇다. 요즘따라 부쩍 차가워진 공기가 적적하고 싸늘하게 느껴져서 제일 온기가 가득했던 때를 생각하다보니 그런 것이다. 돌아오면 만나자 약속했던 장소가 사라지고 그 자리에 들어온 작은 카페에 들러서 매일 같은 주문을 한다. 언젠가 약속이 이루어지는 날이 오면 무슨 메뉴가 제일 맛있는지, 내 취향의 노래가 자주 나온다던지, 언제나 적당히 한산해서 좋다는 둥의 이야기를 해주겠다고 생각도 했었지만 이제는 하지 않는다. 카페 아르바이트생과 더 친해졌을지도 모르겠다. 나는 스쳐지나가는 사람들을 배경으로 흐릿하게나마 입김이 번지는 것을 눈에 담았다. 의미가 없어 곧 카페의 문을 열었고, 바깥과는 달리 따스한 공기가 감싸주었다. 테이블 하나둘 남짓한 손님들은 적당한 백색소음을 만들었다. 오늘도 취향에 맞는 곡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내 발걸음은 멈추지 않고 버릇이라도 든 것처럼 어제도 내일도 지금도 늘 앉던 자리로 향한다. 길거리가 잘 보이는 창가 자리에 길고 높은 테이블을 두어 혼자 온 손님들이 즐겨 찾는 자리. 그 곳에서도 세번째 자리였다.
"…?"
그런데 그 자리에 이미 음료가 한 잔 놓여 있었다. 짐이라거나 물건을 두어 자리를 맡아둔 흔적은 하나 없이 트레이에 음료가 한 잔 덜렁 나와 있었다. 하필 내가 늘 먹던 메뉴라서 나는 이게 아르바이트생의 친절이라고 받아들였다. 엇비슷한 시간대에 찾아와 늘 같은 메뉴를 시키니까 미리 준비해둔 것이라고 생각하고서 자리에 앉있다. 가방을 옆에 두고, 컵을 두 손으로 잡아 손끝에서 느껴지는 온기를 만끽하다 한 모금 들이키려고 했다. 옆에서 누군가 머뭇머뭇 나를 부르기 전까지는. 사레가 들려 콜록거리면서 내려놓은 잔에는 "그래, 내가 방금 먹었다!" 라고 자백하듯 립이 묻어났다. 나는 당황해서 목소리의 주인을 바라보았다. 음료의 주인이 온 것 같다 생각하니 머리가 새하얗게 번져버린다.
# 옛날의 약속이 이루어지는 것도 괜찮고 아르바이트생이나 카페 사장님, 심지어는 단순히 우연으로 같은 메뉴를 시켰을 뿐인 초면의 관계도 괜찮은데, 맥커터만은 스루할게~
>>940 오랜만의 외출. 그건 친하다면 친하고 어렵다면 어려운 전 직장 동료와의 식사 약속 때문이었다. 그래서 긴장했던 탓일까? 여자는 약속한 시간보다 1시간가량 일찍 도착해 버렸고, 바깥에서 기다리자니 날이 다소 쌀쌀했기에 카페에서 시간을 때우기로 하고 자리값 삼아 음료를 주문했다. 그런데 무슨 기묘한 타이밍일까? 음료를 트레이에 받아오자마자 화장실이 가고 싶어졌고 별 생각 없이 다녀왔다.
그러고서 음료를 둔 자리에 돌아가려는데 웬걸? 그 자리에 누가 앉아 있었다. 두 손으로 잔을 쥐고 음료를 들이키는 모습이 너무나도 느긋하고 자연스러워서 순간 여자는 자기가 자리를 착각했나 헷갈릴 정도였다. 그러나 다른 1인석은 이미 음료를 마셔 가며 노트북이나 폰을 보는 손님이 앉아 있거나 테이블도 말끔하게 비어 있었으니, 저 사람이 앉은 자리며 마시는 음료는 분명 여자의 것이었다.
그런 결론에 이르자 불쾌감과 난감함이 뒤엉켰다. 그 음료를 꼭 마시고야 말겠다는 기대감보다는 시간을 때울 목적으로 골랐긴 해도 어쨌든 자기가 구매한 건데 눈 뜨고 도둑맞은 기분이었고, 남의 자리 남의 음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 없이 저리도 당당하게 먹고 있을 정도면 제정신이 아닌 사람일지도 모른다는 두려움도 생겼다. 내 거라고 말했다가 괜히 봉변당하는 거 아냐? 점원한테 조치해 달라고 얘기하는 게 나으려나?
하지만 점원은 이제 막 20대에 접어든 것 같은 앳된 얼굴의 여성이었다. 만약 자리를 차지한 이가 진짜로 심각하게 이상한 인간이라 돌발 행동이라도 한다면, 이제 막 아르바이트를 시작했을지도 모르는 경험 없고 서툰 사람에게는 무서운 경험이 될 거다. 그러니 말 걸어 보고 최악의 상황이 온다면 차라리 112에 신고를 하자. 그렇게 마음먹어도 긴장되기는 마찬가지라 여자는 심호흡을 몇 번 되풀이하고 헛기침으로 목을 가다듬고서야 말을 꺼냈다.
"저, 저기요..."
제 목소리가 떨리다 못해 쫄아 있는 티가 역력한 것을 채 느끼기도 전에 상대는 사레가 들렸는지 콜록거리면서 잔을 내려놓았다. 자기한테 말을 거는 이가 있을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는 듯이. 그게 새삼 황당했지만 돌아보는 그를 향해 한마디 덧붙였다.
>>939 와 이렇게까지 애정 뿜뿜하는 답레는 기대 안했는데 예쁘고 정성 가득한 답레 고마워 게다가 해상무역하는 상단주의 배우자라니 약초꾼 알고보니 알부자넿ㅎ 부인 바보 느낌이라.. 약초꾼 성별은 따로 설정 안했었으니까 말나온김에 여캐라고 정해도 좋을거같아 덩치도 더 크든 작든 어떻게 설정해도 난 좋아 알콩달콩한 사이로 갔으면 좋겠다는 바람은 이미 구현됐거든 지금은 밖이라 답레는 나중에 달게 939에 걸맞은 내용이 되어야 할텐뎋ㅎ
>>942 아이고 내가 무심코 부인바보라고 썼구나! 배우자바보라고 필터링해주면 고마워😅 그래도 바람이 구현됐다고 해줄 정도로 마음에 들어해줘서 다행이다. 선레에서 약초꾼도 배우자한테 지극정성이라는 느낌이라 나도 약초꾼밖에 모르는 캐가 나오더라구ㅎㅎ성별이 부각되지 않는 묘사라던지 잔잔한 분위기도 좋고! 급할 거 없으니 편할 때 편하게 이어줘!
>>939 마중나와 있으면 약초꾼이 추울 거부터 염려해주는 배우자에게 미안해 옷을 두텁게 입었던 탓일까? 아니면 바람막이가 너무 포근했던 탓일까? 바람막이에 밀착했다가 정신이 들었을 땐 이미 깜박 졸고 난 뒤였다. 입가로 침도 샌 것 같다. 바람막이 배렸으면 어쩌나? 화다닥 더듬어보니 다행히 바람막이는 물기 없이 보송했다. 한숨돌린 뒤 소매로 얼굴을 훔치고 찬바람을 맞으며 아직 다 가시지 않은 졸음을 몰아내고 있자니 친숙한 움직임의 그림자가 빠르게 다가오는 게 보이는 듯했다.
반가이 일어나려는 차에 들려온 여보 소리에 약초꾼은 제몸 하나 주체하지 못하고 새빨갛게 익고 말았다. 배우자를 부를 때만 쓰는, 세상에서 가장 가까운 사이라고 못박는 듯한 그 말은 들어도 들어도 적응이 안 됐다. 아직도 누가 꿈이라며 정신차리라면 믿길만큼 분에 넘치는 관계가 너무나도 정답고 친근한 울림으로 강조되는 게 쑥스럽고 신기해서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그러나 뒤이어 자신을 폭 감싸안는 서늘하면서도 단단하게 힘이 들어간 팔의 감촉에 현실이라는 실감이 났다. 상단주의 옷은 차가웠지만 그의 피부에서는 온기가 느껴졌다. 아무래도 한참동안 달려온 모양이었다. 그러고도 상단주는 아니나 다를까 약초꾼 걱정부터 해준다. 항해에서 막 돌아오셔서 고단하실 텐데. 그런 마음이 새삼 감동스럽고 뭉클해 약초꾼은 그의 품에서 고개를 숙였다.
“춥기는예. 이래 뜨시게 입었는데예. 바다 건너서 오시는데 맻 발짝 나와 있는 기 대숩니꺼?”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여태 붙들고 있던 바람막이가 신경이 쓰였다. 잠깐이라도 춥지 마시라고 가져온 거긴 한데 체온이 제법 올라 있으시니 이걸 건네는 게 나을지 어떨지 모르겠다. 잠시 머뭇거리던 약초꾼은 물어나 보자는 심정으로 품에서 바람막이를 끄집어냈다.
“혹시 걸치실랍니꺼?”
/약초꾼은 시골 출신일거 같아서 사투리캐로 해봤는데 괜찮을지 모르겠다 아참 그리고 상단주캐 혹시 이름 정했어? 약초꾼이 여보당신 소리는 도저히 못할 거 같고 아무개님 정도로 부를거 같아서 말야
>>944 정신없이 배우자를 품에 안으니 옷의 겉면에서부터 느껴지는 서늘함에 마음이 덜컥했지만, 자세히 보니 충분히 두툼하게 챙겨입은 게 보여 마음이 놓였다. 다행이다. 배에서 내려서도 쌀쌀한 것 같아서 감기라도 들까봐 걱정했는데. 거기에, 자신이 큰 소리로 여보라고 부른 탓인지, 제 품에 파묻힌 그의 얼굴 부분이 옷 너머로도 좀은 뜨끈하게 느껴지자, 그만 입가로 미소가 번졌다. 익숙해질 때까지 많이 많이 불러야지. 그래도 너무 익히면 곤란해질 지도 모르니까 자제는 해야겠지만. 그러다 품 안에서 들려온 배우자의 말에, 상단주는 부선장과 선원들 앞에서 체면을 차리던 모습이 거짓말인 듯, 약초꾼의 정수리에 볼을 기대고선 어린 아이같은 투로 칭얼거렸다.
"그치만 배에서 내려서도 바람도 불고 쌀쌀했는걸요. 그래도 따뜻하게 입고 있어줘서 안심했어요."
안심한 건 안심한 거고 오랜만에 만나는 배우자의 온기를 더 만끽하고 싶은 마음에 쉽사리 떨어지지 못하고 있으려니, 품 안에서 그가 꼬물거렸다. 너무 세게 안았나? 힘 조절했어야 하는데. 빈틈 없이 당겼던 팔의 힘을 풀고 그를 내려다보니 그가 품에 안고 있던 것을 끄집어냈다. 바람막이였다. 그걸 본 순간 코끝이 찡할 만큼 뭉클해졌다. 이걸 품고 기다리고 있어줬구나. 내가 오면 조금이라도 따뜻하라고. 매일같이 이러고 있었던 건 아닌지 걱정스러운 마음도 들었지만, 벅찰 만큼 자신을 아껴주는 약초꾼의 마음이 고마워, 상단주는 세상에서 제일 행복하다는 듯 두 눈이 감길 정도로 접고서 배시시 웃었다.
"나 춥지 말라고 챙겨준 거예요? 너무 고마워요! 그럼 잠깐만 기다려줘요."
상단주는 묘하게 들뜬 기색을 감추지 못한 채, 걸치고 있던 코트를 벗더니, 그 잠깐 사이에 온기가 새어나갈 새라 약초꾼의 어깨에 걸치고 꼭꼭 여몄다. 그는 그제야 배우자의 손에서 바람막이를 받아 몸에 걸치고 앞섶을 여민 뒤 해실거리며 함박웃음을 지었다.
"그나저나 이거 엄청 따뜻하다. 고마워요!"
바람막이에 잔뜩 밴 사랑하는 사람의 체온을 만끽하려니, 바람막이를 들고 있느라 덜 여며진 코트가 신경쓰였다. 배우자에게 둘러준 코트를 마저 꽁꽁 여미고 보니, 잘어울리기도 하고, 제 코트 안에 쏙 들어간 모습이 사랑스러운데다, 나쁘지 않은 너스레 거리라는 생각에, 상단주는 짐짓 장난스러운 투로 농담인 양 진담을 건넸다.
"이거 여보한테 더 잘 어울리는데요?"
/사투리 매력있는데ㅋㅋㅋ 오히려 좋아!😆 개인적으로 사투리 유창하게 구사하는 캐릭터 되게 신기했거든. 상단주 이름은 오스카야! 성은 없고. 그리고 아마 오스카는 님을 빼고 불러주면 더 좋아할 것 같아. 나도 궁금한 거 있는데, 혹시 약초꾼은 어떻게 생겼는지 알려줄 수 있어? 이다음에 쓸 때 참고하게. 간단히 써줘도 좋고 픽크루같은 프로그램 이미지도 좋아!
>>948 숏컷에 주근깨? 알았어 덩치는 작게 하기로 했고 약초꾼이면 산을 탈테니까 말랐다고 할게 피부는 산을 많이 타니 희지는 않겠다 누르스름한 정도? 머리카락은 까만색 눈동자는 진파랑색으로 할게 성별은 부인바보 소리 나온 김에 여캐 하고 이름은 부르기 편하기 성 빼고 2글자로 코니 말하다 보니 거의 시트를 짜버렸닿ㅎ 나는 금발+장발에 피부는 가무잡잡하고 남캐든 여캐든 호리호리해보여도 알고보면 근육질인 외형을 좋아해 너참치의 캐니까 이걸 다 반영할 필요는 전혀 없지만 수염은 없는 캐로 해주면 고맙겠닿ㅎ 아 그리고 답레는 주말중에 가져올게 불금 즐겁게 보내
>>949 좋아! 귀엽겠다ㅋㅋㅋ 이름은 코니구나. 오스카도 금색장발에 어두운 피부, 마른 근육질캐로 갈게! 수염은 없을거고(아마 나더라도 아침마다 부지런히 면도하는 애로 생각중이야) 눈색은 거의 시안색에 가까운 하늘색이 될 것 같아. 갑작스럽게 물어봤는데 자세하게 정해줘서 고마워. 불금은 지나갔지만 좋은 주말되길 바라!
>>945 외투를 단단히 입었거니와 달려오느라 몸이 더워졌을 수도 있고 몇 걸음만 떼면 집인 만큼 바람막이를 걸치겠냐는 것은 딱히 달갑지 않은 제안일 수 있다. 그런데도 상단주 오스카는 약초꾼 코니가 바람막이를 꺼내자마자 눈이 실눈이 되도록 환히 웃어주며 반색했다. 거기까지는 다행이고 고마운데 오스카는 뭐라고 말릴 새도 없이 제 코트를 벗어다 코니에게 걸쳐주고는 자기는 바람막이를 입어버렸다. 난감하다. 바람막이는 쌀쌀한 바람을 잠깐 견디는 용도로나 쓸 만하지 털외투를 대신할 정도의 보온성은 없다. 그런데 바람막이 입자고 코트를 벗어버리면 어쩌나? 이래서야 바람막이를 걸치겠냐고 물은 게 역효과다. 바로 돌려드리고 찬데서 외투를 벗으면 감기 드신다고 했어야 하지만 다시금 이어지는 여보라는 호칭에 코니의 머릿속은 도로 화끈하게 달아오르고 말았다. 그렇게 얼이 빠진 채 찬바람을 맞기를 수차례 되풀이하고서야 정신이 났고 그제야 이럴 시간에 얼른 들어가는 게 낫겠다는 (상식적으로만 생각했다면 바람막이 따위를 권하기보다 앞서 떠올렸어야 할) 결론에 이를 수 있었다.
“이, 이, 이..” 그런데도 머리와 입이 따로 놀기라도 하는것처럼 이걸 자기한테 벗어주시면 어쩌냐는 소리만 입안을 맴돌다가 가까스로 말문이 트였다. “퍼뜩 들가시소. 시장하시지예? 식사하시고 괜찮으시모 차도 내오께예.”
지껄이다보니 앞뒤없이 뜨겁던 머릿속도 차츰 정리되는 기분이었다. 식사는 오스카의 고용인들이 준비하겠지만 차는 팔기 애매한 약초들을 말려둔 잎으로 코니가 우려볼 수 있었다. 거기에 머루와 누가를 곁들이면 나름 그럴싸한 다과를 드릴 수 있을듯했다. 오스카가 차를 들기보다 쉬기를 바란다면 당연히 그만둘거지만
>>951 또 한번 내뱉은 여보 소리에 완전히 새빨개져서는 고장난 듯 그자리에 굳어버리더니, 말을 더듬기까지 하는 코니를 보며, 오스카는 필사적으로 웃음을 참고 그가 진정할 때까지 기다렸다. 애정을 표현하거나 칭찬을 해서 낯간지럽게 만들면 잘 익은 토마토처럼 새빨개져서는 버벅거리는 모습은 무척이나 사랑스러웠지만, 웃음을 터뜨리기라도 했다가 행여라도 놀리는 것으로 느껴 상처를 받게 해서는 안 되니까. 조금 기다리자니, 코니는 말문이 트였는지 한결 침착해진 목소리로 들어가서 식사를 하자고 권해왔다.
"좋아요! 나 배고팠어요. 코니가 타주는 차도 그리웠구요. 코니도 식사 아직이죠?"
코니와 함께 식사를 하고 차를 마시는 것도 얼마만인지. 이번 항해는 그리 긴 편도 아니었다지만, 그럼에도 교역을 하면서 겪고 들었던 기가 막히기도 하고 조금은 아찔했던 경험들을 들려줄 생각에 신이 났다. 오스카는 싱글벙글 웃으며 코니에게 잡아달라는 듯 손을 내밀었다.
"얼른 들어가요! 오늘 저녁은 뭐 먹고 싶어요?"
/나는 재밌으면 길이는 신경 안쓰는 편이라 걱정 마! 그리고 요 앞으로는 서로 짧게짧게 잇는 것도 괜찮을 것 같아. 밥 먹고 나서 차 마시는동안 오스카가 교역하면서 겪은 일들을 코니한테 들려주는 식이면 어떨까 생각중이거든. 다음 내 턴에 식사 마치고 나서 차 마시는 상황으로 점프할까 하는데 그래도 될까? 코니주 턴에서 그렇게 해줘도 고맙고!
>>952 환한 웃음. 코니의 차가 그리웠다는 밝은 목소리. 잡고 가자고 내미는 손. 코니에게 이 모든 것은 꿈결처럼 들뜨면서도 마음이 확 놓이도록 정겨웠다. 자기같이 평범한 인간에게 오스카가 정성을 쏟는 것이며 그러면서 행복해 보인다는 건 봐도봐도 실감이 안 났지만, 가무잡잡한 손에서 전해져 오는 온기며 튼실하면서도 부드러운 손아귀에 닿아 있노라면 이분이 건강하고 여기가 이분이 돌아올 곳이 맞다고 확인받는 기분이었다.
그렇다곤 해도 감상에 젖어 오스카를 밖에 세워두는 건 곤란하다. 코니는 뭘 먹고 싶냐고 묻는 오스카에게 대답하는 대신 맞잡은 손을 끌다시피해서 부랴부랴 들어왔다. 그리고 집안에 들기 무섭게 훈기가 피부에 와닿아서 밖에 더 머물지 않길 그나마 잘했다 싶었다.
좋아하시려나? 고기와 빵과 스프가 다 갖춰진 식사니까 먼길 고생하신 뒤에 속을 든든히 채우기에는 좋을 것 같고 주방장님도 당연히 이분의 식성을 알고 준비했겠지만 당사자가 안 내키면 소용없으니까. 그와 별개로 식당에 가까워질수록 훈제로 익힌 칠면조 특유의 향과 갓 구운 빵 냄새와 따끈한 스프 냄새가 강해져서 침이 절로 고였다. 그렇게 식당에 이르자 주방에 있던 고용인들이 인사를 하고는 기다렸다는 듯이 식탁에 음식을 올리기 시작했다. 갓 조리해 내어주는 음식을 보고 있자니 식욕이 샘솟았다.
"고생하싰은께네 영양가 있는 걸로 든든히 잡수시야 됨미더." 코니는 오스카가 평소 앉는 자리의 맞은편 자리에서 오스카가 앉기를 기다렸다. 그러고는 가장 궁금했던, 오스카가 그간 어떻게 지냈는지와 밀접한 질문을 던졌다. "이번 교역은 어땠심꺼? 괘야나씸꺼?"
/교역중에 있었던 일을 화제삼아 수다떠는거 좋을거같아 근데 식사도 같이 할텐데 그때 얘기 안하다가 차 마실때로 넘어가는건 약간 어색할거 같아서 식사를 건너뛰진 않았어 식당까지 가는 과정이나 먹을 음식을 내가 임의로 정했는데 괜찮을까? 바꾸고싶은 부분 있으면 알려줘
>>953 코니를 끌어안을 때도 그랬었지만, 손 안에 쏙 들어오는 작은 손을 꼭 감싸쥐자 새삼 집에 왔다는 실감이 나고, 손 안에서 느껴지는 그의 손의 온도가 그렇게 차지 않다는 것도 안심이 되어서, 함박웃음이 얼굴을 떠나질 않았다. 누가 보면 푼수같다 싶을 법한 얼굴로 코니의 손에 이끌려 집안에 들어서려니 코니의 목소리에 정신이 들었다. 해산물 스프에 칠면조라니, 적절한 식사 메뉴가 아닐 수 없었다. 자신은 항해로, 코니는 산행으로 체력을 소모한데다, 밖에 오래 있기도 있었으니.
"맛있겠네요! 항해하는 동안 집밥이 엄청 고팠던 거 있죠. 특히 코니랑 같이 먹는 밥이요."
무심코 또 낯간지러울 법한 소리를 내뱉었다가 멋쩍게 웃은 것도 잠시, 식당에 들어서자 인사하는 고용인들에게 손을 들어 답하고는, 평소 앉던 코니의 맞은 편 자리에 앉으며, 건너편에서 들려오는 퍽 정겨운 잔소리에 배시시 웃으며 대답했다.
"그럼요, 나 잘 먹을테니까 코니도 식기 전에 들어요. 나 기다린다고 추운 데 오래 있었잖아요."
코니는 식사하는 모습도 아기 다람쥐같고 귀여운데, 그 모습을 오랜만에 보겠구나. 그래도 너무 대놓고 구경하면 신경쓰일테니까 잘 먹어가면서 적당히 봐야지. 오스카는 큼직한 칠면조를 칼로 먹기 좋게 해체해서는 통통한 다리살을 코니의 접시 위에 올려준 뒤, 제 접시에도 얹은 뒤에야 자리에 앉고 수저를 집어들었다. 맞은 편에 앉은 코니가 이번 교역은 괜찮았냐고 물어오자, 오스카는 기다렸다는 듯이 눈을 빛내며 입을 열었다.
"네! 가는동안 풍랑도 심하지 않았고, 우리가 싣고간 수하물도 거의 다 좋은 가격에 매각한 데다, 교역품도 잔뜩 수입해왔어요. 심지어 이번에는 신상품도 들여와서 당분간은 항해 안 나가고 여기 일에만 집중해도 될 거예요."
딱 한 군데서만 교역을 못 하긴 했지만, 그걸 감안해도 이 정도면 아슬아슬하게 흑자니까, 다음 항해까지 서류 업무나 자선재단만 돌보는 정도면 코니하고 더 많이 시간을 보낼 수 있겠지. 신난다! 그런 생각에 싱글벙글하려니, 교역을 제대로 못 한 나라에서 들은 기막힌 사연이 생각났다. 사연이라기엔 역사서에 적힐만한 스케일이었지만.
"...아, 그런데 딱 한 나라에서만 교역을 제대로 못하긴 했어요. 수하물을 다 파는 것만으로도 벅차서 교역품 매입을 못 했었거든요. 배에서 내려서 상황을 알아보니깐 글쎄, 황제의 국혼이 진행중이었는데, 국혼 시기인 것 치고는 도시 전체가 분위기가 좀 뒤숭숭한 거예요. 알아 보니까 황조가 막 바뀐 참이었더라구요. "
/아 하긴 식사하면서도 충분히 이야기할 수 있겠다. 스프랑 칠면조구이 정도면 충분히 먹으면서 대화 가능한 메뉴고. 그리고 나는 자연스러워서 좋았어! 메뉴도 맛있어보이고😆 나도 먹고 싶다 빵스프랑 칠면조... 참, 이제부터는 길이가 좀 들쭉날쭉해질 수 있을 것 같은데, 코니주도 편한길이로 이어주면 고마워!😂
>>954 집밥을 먹고 싶었다며 신이 난 오스카를 보고 있자니 항해중에 알게모르게 있었을 고충이 상상되었다. 배에 싣는 식량은 운반상의 편의며 부패 방지 등을 위해 대부분 말린 것들일 거고 아니라도 여러모로 육지에서 먹는 음식만은 못할 것이다. 그런 만큼 모처럼 갓 조리된 음식을 먹는 순간은 기쁘고 설레는 시간 아닐까? 그런데 그시간을 코니와 함께하는게 그리웠단다. 믿기지 않도록 감동적이고 뭉클하면서도 어쩐지 간질간질하고 쑥스럽기도 하고 형언하기 어려운 기분이었다. 그런 나머지 그가 배고플텐데도 음식을 들 생각은 않고 코니 몫부터 덜어주는데도 그만 얼이 나가있었다. 내가 먼저 챙길걸. 얼른 드시라고 말하려는데 오스카가 맑은 유리구슬 같은 눈망울을 반짝이며 교역이 성공적이었다며 자랑처럼 말했다. 그렇게 즐거워하는 모습을 보자니 마음이 푸근해졌고 당분간 항해를 안 나가도 될 것 같다는 것도 기뻤다. 그와 함께있을 시간이 늘어나는것도 좋지만 무엇보다 그가 덜 위험할거라고 생각하니 안심이 되었다. 아무리 많이 다니고 익숙해져도 바다는 언제 무슨일이 있을지 모르는 곳이니까.
그런데 그렇게 재잘거리던 그가 뒤늦게 생각났다는듯 한곳에서는 교역품을 구입하지 못했단다. 황제가 막 바뀐 참이라 분위기가 뒤숭숭했다나? 아니 황제만 바뀌었다면 전임 황제의 승하나 양위 직후려니 했을 텐데 무려 황조가 바뀌었단다. 뭔가 큰일이 있긴 있었나 보다. 어떤 일인지 궁금하긴 했으나 그보다는 오스카가 그쪽일에 휘말리지 않고 돌아와준게 천만다행이다 싶었다.
>>955 재잘거리는 와중에도 뚜껑 역할을 했을 빵조각을 스프에 적셔 야무지게 오물거리던 오스카는, 무사해서 다행이라는 말에 고마운 마음 반 미안한 마음 반인 복잡하면서도 뭉클한 심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먹고 있던 것을 삼키고 입을 열었다.
"그럼요. 무슨 일인지 알자마자 급하게 마무리하고 최대한 빨리 출항했어요. 국혼 준비기간이니까 어느정도 안정이 되었다고 볼 수도 있지만 보통 테러는 그런 기간에 터지곤 하잖아요. 그런데, 확실히 큰일은 큰일이었는지, 주점에서 사람들이 공공연하게 수군거리더라고요. 그래서 술 한잔 씩 돌리면서 캐봤는데, 전 황조 말기부터 조금씩 일이 터지기 시작했대요. 당시에 황태자였던 제 1황자가, 전 황제와 황후를 포함한 황족들 앞에서 공개적으로 선언을 했대요. 나 황태자 안 한다고."
나였으면 그런 식으로 안 했을텐데. 이야기를 들었을 당시에 강하게 느꼈던 당황스러움을 되새기며, 오스카는 한입 크기로 자른 칠면조 고기를 입에 넣고 우물거렸다. 그러고 있으려니 조금 더 설명이 필요하겠다는 생각에, 오스카는 입안에 든 것을 삼키고 다시 재잘거렸다.
"근데 나이가 어리고 황태자 자리가 부담되면 그럴 수도 있잖아요. 그래서 물어봤어요, 당시 1황자의 춘추가 얼마였냐고. 근데 갓 성년이 되었다지만 지지 세력이 적을 만큼 어린 나이도 아니었고, 심지어 동맹국의 왕녀와 혼인할 예정이었다는 거예요."
>>956 오스카가 빵뚜껑부터 스프에 적셔서 오물거리는 것을 보고 있자니 안먹어도 배부른 기분이었다. 원래라면 눈앞에 먹을걸 두고도 안먹는건 상상도 못했고 누가 그랬다고 해도 의심했겠지만 오스카가 맛있게 먹으니까 흐뭇하고 안심되어서 눈을 떼기가 아까웠다. 그래도 누가 빤히 보면 민망할수도 있고 안먹는다고 걱정할지도 모르니 빵뚜껑을 한입에 넣고는 물도 한모금 머금는데 그가 꺼낸 화제는 그야말로 놀랄노자였다. 교역차 들렸던, 황조가 바뀌었다는 나라에서 예전 황태자가 자긴 황태자 안하겠다고 황족 전체 앞에서 선포했다나? 그건 높으신분들의 사정이라고는 1도 모르는 코니에게도 어리둥절하기 그지없는 얘기였다. 황제님의 맏이이면 당연히 황태자 아닌가? 아닐수가 있나?
"구암ㄷ..."
얼떨한 나머지 입에 욱여넣은 빵을 씹기도 전에 말(이라기보다는 의미불명의 웅얼거림)이 튀어나오고서야 코니는 제 실수를 알아차리고 먹던것을 맹렬히 씹기 시작했다. 그러다보니 머리속이 정리되는것도 같았다. 그의 말대로면 그나라 황조가 바뀌었다니까 황태자가 당연한 제자리를 안하겠다는 바람에 온나라에서 내가 황제님 하겠다고 반란이 난게 아닐까? 입안의 빵을 꿀꺽 삼키고 제추측이 맞나 제대로 확인하려는데 오스카의 말이 이어졌다.(다행히 오스카는 얘기하는 와중에도 먹을건 야무지게 챙겨먹고 있었다.) 황태자를 안하겠노라고 폭탄선언을 했던 황태자는 당시 성년이었고 혼인도 예정되어 있었단다. 아니 어린애도 아니고 다큰 어른이 그랬다고? 그런식으로 내팽개치면 뒤는 어떻게 된대?
"그래가꼬 반란이 난 김미꺼? 다음 황제님 자리가 비서예?"
/별말씀을 애매한건 편하게 말해달라니 내가 더 고맙짛ㅎ 너참치도 불편하거나 아리까리한거 있으면 말해줘 그나저나 오스카 디게 맛있게 먹는다 그시대의 먹방러?
>>957 입안에 넣은 빵조각으로 볼이 톡 튀어나온 채로 무언가 대답을 하려는 듯 웅얼거리는 모습에, 오스카는 입꼬리가 치솟으려는 것을 감추려, 일부러 물을 한모금 들이켰다. 오랜만에 보는 아기 다람쥐같은 모습은 물론이고, 알아듣기 힘든 웅얼거림마저 사랑스러웠기 때문이었다. 진짜 어떻게 다 큰 어른이 이렇게 귀엽고 사랑스러울 수가 있지? 진짜 사람이 아니고 요정인 거 아닐까? 이어 코니가 생각에 잠긴 듯한 표정으로 먹던 것을 삼키려는지 맹렬히 오물거리기 시작하자, 오스카는 귀가 빨개진 채 애써 고개를 숙이고 아직 따끈따끈한 해산물 수프를 떠먹었다. 지금만큼은 음식에 집중하지 못하면 코니가 귀여워 죽겠다는 마음을 주체하지 못할 것 같았다. 그렇게 배를 채우며 진정하려니 먹던 것을 삼켰는지 코니가 물어왔다. 그것 때문에 반란이 난 거냐고.
"공석인 동안은 그런 분위기가 되었을 지도 모르겠는데, 일단 다음 황태자는 2황자가 됐대요. 그래서 1황자랑 정략혼을 한 왕녀의 나라에서도 공식적으로 항의를 표할 정도로 반발했나봐요. 황태자 안 하겠다면서 말한 이유 중에 왕녀와 혼인하고 싶지 않다는 것도 있어서 그것까지 동맹국 왕의 귀에 들어간데다가, 혼사를 계속 추진한다 해도 처음에 황태자비 자리를 약속했다가 말이 달라진 격이잖아요. 그래서 황제가 자기 조카인 대공을 사절로 보내서 이 문제를 무마시켰어요. 현재의 혼담은 양측에 모두 부정적이니 파기하고, 왕녀와 새 황태자의 혼담을 추진하는 방향으로요. 그랬더니 글쎄,"
오스카는 물을 한모금 넘기고 말을 이었다.
"이번엔 새 황태자가 '난 정략혼은 원치 않소!' 라고 공개적으로 선언해버린 거예요! 심지어 어린 시절에 몇번 왕래하고 서신을 주고 받았다지만 그다지 기억도 나지 않을 정도로 오랜 과거의 이야기에는 아무런 의미도 없다면서요."
// 아무래도 오랜만에 코니랑 함께하는 식사다보니 식욕도 더 돋지 않았을까ㅋㅋㅋ 근데 코니도 먹는 모습 되게 귀욤뽀짝하다😆 확실히 먹을 거 볼에다가 저장했다가 뇸뇸 먹는 다람쥐같아ㅋㅋㅋ
>>958 입에 음식을 넣고 말하는건 누가 해도 결례일거다. 보기에 좋지않을뿐더러 자칫 입안에 있던 음식물이 튀기라도 했다간 비위생적인 공격에 가까워지니까. 다행히 음식이 튀어나가는 불상사는 없었으나 오랜만에 오셨는데 잘해드리지는 못할망정 몰상식한 행위를 해버린게 부끄러웠다. 입을 다물고 손으로 가리는데 이상하게도 오스카는 불쾌해기는커녕 오히려 즐거워보였다. 심지어 코니가 겨우 입안의 음식을 처리하고 말을 꺼냈을때는 무척 들뜬 사람처럼 상기된 얼굴로 스프를 떠먹었다. 기분이 상하지 않은듯한건 다행이지만 그래도 실례가 아닌건 아니니까 주의해야지. 그래서 (오스카가 미리 나눠줬던) 훈제 칠면조를 입에 넣고서는 아예 입을 가리고 우물거리는데 오스카가 설명해 준 그나라 사정은 코니의 예상과 사뭇 달랐다. 황태자가 나몰라라하고도 반란이 일어나진 않았고 그동생이 황태자를 하기로 했는데 이번엔 원래 황태자가 맺었던 동맹국과의 정략혼이 문제가 됐단다. 그나라에서 자기네 공주에게 황태자비이자 미래의 황후님 자리가 예정되어 있었던게 무산된거(단순히 무산된게 아니라 공주랑 결혼하기 싫어서 황태자 안하겠다는 식으로 전해진 모양이다.)로 반발했고 그걸 무마하고자 원래 황태자의 동생인 새 황태자와의 정략혼을 재추진했다는 설명이었다. 형이랑 결혼하기로 했다가 동생과 결혼하게 되다니 기분 되게 이상하겠다 싶었지만 왕족이나 귀족님들은 신분에 걸맞은 혼처를 원하고 결혼을 통해 어떤 지위가 보장되느냐가 중요한 모양이니 그런가보다 했다.
그런데 오스카가 뒤이어 조곤조곤 알려주는 내용에 하마터면 사레가 들릴뻔했다. 그 두번째 정략혼도 새 황태자가 거절하면서 어그러졌다는거다. 별 교류가 없고 기억도 안나는 사람과의 혼사는 싫다고 했다나? 마침 입을 막고있던덕에 그대로 잠시 캑캑거리면서 진정시킬수 있었다. 그렇게 먹던걸 넘기고 물도 마신뒤에야 코니는 다시 물었다.
“그라모 그 공주님은 두번이나 파혼당해삔기네예. 공주님도 공주님이지만 그나라 체면도 말이 아일끼고. 그거때문에 전쟁이 나삐스 황조가 바뀐거임꺼?”
그런데 말하고나니 이상하다. 제국이라고 할 정도면 강대국일텐데 외국이 쳐들어온다고 무려 황조가 바뀔까? 도대체 무슨 난리가 어떤식으로 터진건지 짐작도 안갔다.
/959는 잘못 누른거야; 밖에서 폰으로 올리려다보니ㅜㅜㅜㅜ 그나저나 먹다가 말하려던거 난 상상하니 더러워서 나중에 좀 미안해질 정도였는데 오스카는 좋아해주네 그렇게 이어줘서 고마워
>>960 퍽 부끄러웠던지 입을 가리는 코니를 보고, 오스카는 아무리 사랑스러웠어도 귀엽다고 호들갑 떨지 않길 잘했다고 생각했다. 오히려 더 창피할 수도 있었으니까. 그러면서도 자신이 잘라준 칠면조 고기를 맛있게 먹는 모습에 눈을 떼지 못한 채로 계속 재잘거리던 중, 오스카가 전 황조의 삽질이 극에 달한 부분을 이야기했을 때 코니가 사레가 들린 듯 켁켁거렸다. 오스카는 깜짝 놀라 냅킨을 잡으려다, 이내 그가 먹던 것을 넘기곤 물을 마시자 한시름 놓은 얼굴로 물병을 집어들어서는 거의 비어가는 그의 잔에 물을 채워주었다. 이내 코니가 진정하고서는 묻는 말에, 오스카는 살짝 고개를 젓고서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제국이 더 강대국이니 전쟁을 벌이기는 쉽지 않았나봐요. 그래서 적당히 외교적으로 넘어간 줄 알았는데, 전 황제가 사절로 보낸 대공이 귀국하자마자 쿠데타를 일으켰대요. 아무래도 대공도 사절로 가 있는동안 어지간히 열 받았던 거 아닐까 싶어요."
전 황조의 황족들이 어떻게 되었을지는 불보듯 뻔했지만, 남의 나라 일이라 해도 밥상머리에서 사람 죽은 이야기를 적나라하게 하기도 뭐했기에, 오스카는 부러 돌려 말하곤, 마저 칠면조 고기를 포크로 찍어 입에 넣고 우물거리다 삼키고는 마저 재잘거렸다.
"그래서 대공이 현 황제로 즉위했고, 시국이 얼추 안정되어서 국혼을 추진 중인 것 같긴 했는데, 그래도 반란으로 바뀐 정권일 수록 또 전복되기도 쉽잖아요. 당분간 분위기가 험악할 것 같아서 수하물만 처리하고 얼른 나왔어요."
/도중에 작성될 때 있지ㅋㅋㅋ 별말씀을! 더럽기는 커녕 음식때문에 발음 뭉게지는게 귀여울 것 같아서😆 무심코 그랬을 정도면 코니도 많이 벙쪘나보다 싶기도 했고 말야. 나야말로 코니가 엄청 귀엽고 반응도 재밌어서 즐겁게 잇고 있어!
>>961 사레들려 정신없던 순간을 넘기고 보니 비어가던 물컵에 어느새 물이 넘실거렸다. 일부러 챙겨주셨구나. 한창 얘기 중이었다가 자기가 산만하게 굴었는데도 언제 봤을까. 그 마음씀씀이가 고맙고 또 고마웠다. 이렇게까지 애써주시는게 아깝지 않게 나도 잘해야 하는데. 그래서 그의 물컵을 힐끗 보니 조금 마시긴 했어도 아직 제법 남은채라 채우기는 애매했다. 적당한 타이밍이 되도록 주시하고 있어야겠다. 아니면 이따가 머루랑 누가를 드릴때 잘익은거랑 견과가 실하게 든 부분을 골라드려야지.
그렇게 다짐하는데 그가 나긋나긋한 어조로 코니의 질문에 답해주었다. 역시나 공주가 2번이나 파혼당한 나라가 전쟁을 벌여서 황조가 바뀐건 아니었다. 그대신 외교사절로 갔던 대공이 반란을 일으켰단다. 더 강대국 입장에서 간 사절인데도 (오스카의 추측대로) 너무 다사다난했던 나머지 반란까지 벌인건지, 아니면 전 황태자의 폭탄선언 이후로 벌어진 일련의 사건들로 제국의 황조가 일반백성들은 물론 대소신료들과 귀족들의 신망도 잃었던건지까지는 모르겠으나 사필귀정이면 사필귀정이고 허망하다면 허망한 결말이었다.
"원래 황태자였던 양반이 막살놓지만 안했어도 그래는 안돼쓸낀데예..."
아닌가? 일단 2황자가 새황태자가 될때까지는 별일없었으니까 2황자가 나라끼리 약속한 국가적 사업인데도 정략혼은 싫다고 깽판친게 발단인가? 아니지, 그러고도 상대국이 찍소리 못했을 정도면 그거도 어찌어찌 수습됐던 모양이고 사실은 대공이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고 있었던걸까? 모르겠다. 어쨌거나 황제의 다른 자식을 옹립한게 아니라 본인이 황제가 됨으로써 황조를 갈아엎었다면 전 황제님은 물론 그일가가 어떤 처지에 몰렸을지는 안봐도 뻔했다. 차라리 외국과의 전쟁이었으면 포로가 된대도 몸값이나 주고(물론 그몸값이 나라를 반쯤은 털어먹은 정도겠지) 풀려났겠지만 그게 아니면...... 가만, 그러고보니 전 황제님이랑 그일가는 잡혀죽었을까? 탈출해서 재기할 기회를 노리고 있을까? 황제의 국혼이라는 나라에서 제일 큰 행사를 추진할 정도면 전자일거 같으면서도 이분이 또다른 난리를 염려하고 서둘러 출항했을 정도라 후자 같기도 하다.
"그라모 원래 황조 가문은 우째 돼씸꺼? 황제님하고 전 황태..." 혀가 꼬이는 기분이었다. 전 황태자 있고 새 황태자 있으니 뭐라고 지칭하는게 무난할지 헷갈렸다. "아무튼 그 가문 사람들예."
또 체육 창고에 들어갈 때는 항상 다른 한 사람이 문이 닫히지 않도록 잡고 있어야 한다거나,
대개 그런 영문 모를 것들이다.
대체 누가 이런 규칙들을 정한 건지는 알 수 없었다. 아마 처음엔 다들 우습게 생각했을 것이다.
다만 그 규칙을 어긴 학생들이 점차 하나 둘 주변에서 사라지자, 더 이상 아무도 이를 가볍게 웃고 넘길 수 없게 되었다.
이제 단순한 소문이라 치부하기엔, 너무나도 공교롭고도 찝찝한 사건들이 연달아 일어나 버렸으니까.
그리던 어느 날, 어쩌다 보니 당신은 체육 창고에 홀로 놓고 온 물건을 가지러 오게 되었다.
온도는 왠지 여름인데도 서늘하고, 심지어 다소 소름이 돋을 정도로 춥기까지 했다.
끼익-. 그 때 아무도 서 있지 않은 체육 창고의 푸른 철제 문이 닫히려 했고, 마침 닫히려는 순간에 누군가가 발 앞꿈치를 집어넣어 그것을 탁 막았다.
"거기서..., 혼자 뭐하고 있어."
검은 단발 머리의 여학생이 문을 열고 들어와 가만히 당신을 마주했다. 3학년 오컬트부 부장, 이름은 피 은유. 평소에 말도 없고 음침하기 짝이 없는 선배. 생긴 것은 다소 인기가 있는 편이다. 그러나 대놓고 주변인을 피하는 행동 때문에, 교내에서 아무도 그녀에 대해 좋게 이야기하는 사람은 없다.
그리고 절대, 남한테 먼저 말을 걸어 오는 일도 없었다. 적어도 지금까진.
//나폴리탄 괴담 소재로 같이 괴담극에 엮일 참치 구할게. 캐릭터는 평범한 남자 후배로 들어와 줬으면 좋겠어. 또 되도록 심리 묘사가 되는 1인칭 시점으로 써주길 희망하고 있어. 이리저리 휘둘리는 거 좋아하는 오너면 아마 잘 맞을 거야. 길이는 길지 않더라도 맥커터만 아니면 좋으니까, 참여 기다리고 있을게.
>>962 "그만두는 타이밍도 방법도 부적절했죠. 최소한 혼담이 오가지 않을 시기에 지지자들이 본인을 단념할 만한 구실을 주고서 그만두고자 했어야 한다고 봐요. 이도 저도 곤란하면 죽음을 위장하기라도 하거나요. 황태자 자리는 유지하면서 정략혼도 하지 않겠다고 우긴 동생 쪽도 어리석었지만요."
맏이에게 우선적으로 계승권이 주어지는 게 탈이 덜한 것은 어쩔 수 없으니, 형제가 위아래로 군주의 재목이 아닌 데다 어리석기까지 한 건 그저 그 황가의 불운인가보다. 그런 생각도 들었지만, 오스카로서는 첫 황태자와 두번째 황태자가 두 차례나 사고를 치는 동안 속수무책이었던 황제에 대해 의구심을 품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제 와서 장자 계승이 아닌 다른 방법을 택하기도 어렵기는 했다지만, 둘째를 황태자로 올리면서 정말 이렇게 될 줄 몰랐을까? 물론 알 길은 요원했다. 그런 생각을 하며 스프에 푹 젖은 빵의 속살을 긁어먹는데, 코니가 물어왔다. 전 황가 사람들은 어떻게 되었냐고. 이런, 좀 돌려서라도 미리 말할걸. 오스카는 물을 마시며 자기가 아는 표현 중 가장 간접적인 표현을 고르다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아마 모두 이 세상에 없을 거예요. 전 황제와 동생 쪽 전 황태자가 대공에 의해 사망하고 나서 나머지 황족들이 도망치긴 했는데, 대공이 즉위하자마자 본인과 본인의 자손이 아닌 모든 초록색 머리와 눈을 가진 자는 모두 멸하라는 명을 내렸거든요."
그렇게 황조가 교체되면 피바람이 부는 게 당연하다는 건 알고 있지만, 일개 상인으로서는 제 터전에 일어나지 않았으면 하고 바랄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윗분들의 분위기가 눈에 띄게 험악해지면 민생 또한 흉흉해지기 마련이니까. 그러나 그런 것보다도 당장 걱정되는 건, 이 살벌한 결말에 자신의 소중한 배우자가 입맛을 잃거나 질겁할 지도 모른다는 것이었다. 그렇다고 해도 자신이 먼저 호들갑을 떨면 되려 부담을 지울 수 있기에, 오스카는 제 걱정이 심하게 티나지는 않길 바라며 코니가 괜찮은지 조심스레 살폈다.
/에구 바쁜날이면 피곤했을텐데 이어줘서 고마워! 나도 평일엔 정신없어서 오래걸렸네😂 뭔가 기왕 썰푸는거 들을때 흥미진진했으면 해서 이것저것 지어내봤는데 스펙타클하다니 다행이다ㅋㅋㅋ 나도 코니 반응 보는 맛에 썰푸는 재미가 있네! 이것저것 짐작해보는 내용이 일리 있고 신선해서 좋기도 하고ㅋㅋㅋ
>>964 망한 황조의 원래 황태자나 새 황태자가 다 문제라는 오스카의 평을 들으니 새삼스럽게 의문이 들었다. 원래 황태자는 무책임한 선택이긴 하지만 본인의 마음에 안드는 정략혼을 피하기위해 황태자 자리를 그만두는 강수를 뒀는데 새 황태자는 정략혼을 싫어하면서 황태자 자리에는 왜 올랐을까? 책임감 때문에 피하지 못했다고 하기에는 무려 외교 분쟁의 해결책으로 결정된 결혼을 대놓고 거부한게 이상하고 제마음대로 살고자 했다기에는 스스로보다 나라의 안녕을 우선시할 의무가 생기는 자리에 오른게 이상하다. 차기 황제로서 권력과 부귀영화를 누리고 싶으면서도 개인적인 행복도 포기하기는 싫었나? 그렇다면 반란이 안나서 황제님으로 즉위했대도 좋은 황제님은 못되었겠다.
그런저런 추측을 하느라 음식에서 손을 뗀 사이 오스카는 빵그릇의 속부분을 긁어먹기 시작했다. 아이고, 안먹고 있으면 걱정하실텐데. 코니는 제빵그릇에서 빵반죽처럼 되어버린 스프에다 고기를 찍어 먹더니 곧이어 빵그릇에 고기를 채워 샌드위치처럼 만들고는 와구와구 물어뜯었다. 그러나 그도 잠시, 전 황제님의 일가는 모두 죽었을거라는 오스카의 답변에 코니는 먹던 음식을 머금은채 그만 얼이 빠지고말았다. 일가가 몰살당했기 때문에 언급을 피하셨던거구나. 괜히 말했네. 눈치없이 질문한걸 만회해보려다 입안이 가득찬걸 의식하고 멈칫했다. 하마터면 아까랑 똑같은 실수를 할뻔했다. 결국 음식물을 곱씹고 삼킨 뒤에야 겸연쩍은 얘기나마 꺼낼수 있었다.
"죄송함미더. 좋은일도 아인거를 들미삤네예."
이 화제로는 더 얘기하지 않는게 낫겠다 싶으면서도 한편으로는 어리둥절한게 다 죽었을거라고 추측하신 이유가 뭔가 이상했다. 머리카락과 눈동자가 초록색이면 모두 죽이라는 명이 있었다고? 전 황제님 일가의 외모 특징이려니 생각해도 문제다. 우연히 초록머리 초록눈동자로 태어난 사람까지 졸지에 봉변을 당했을거 아냐? 그래서 더더욱 얘기하기 싫으셨던걸까? 풀죽은 소리가 절로 나왔다.
"초록머리 초록눈이라꼬 다 지기라 캐쓰모 오만 사람 다 휘말릿겠네예. 우짜노.."
/난 막연히 꽁냥거리는거만 상상했는데 소재를 많이 준비했구나 평일은 다들 바쁘지 그런데도 칼답 고마워
>>965 제 이야기에 골똘히 생각에 잠기느라 잘 못먹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에 걱정이 되면서도 식사중엔 잔소리를 하고 싶지 않아 고민을 하려니, 코니가 수저를 움직였다. 안심하며 식사를 재개하려던 오스카는, 꾸덕해진 스프에 고기를 찍어먹더니, 빵그릇에 고기를 채워 넣어 샌드위치처럼 만들어서는 복스럽게 먹기 시작하자 무언가를 깨달은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우와! 그렇게 먹으면 더 맛있겠어요. 코니 천잰데요?"
코니의 기발한 발상에 대한 칭찬도 빼놓지 않고서, 오스카는 코니가 한 것처럼 빵그릇 안에 남은 제 몫의 고기를 채워넣고는 납작하게 눌러 배어물었다. 확실히 빵과 수프, 고기가 어우러져 입안에서 파티가 벌어지는 듯 했다. 맛있다. 역시 우리 여보는 천재라니까. 그도 잠시, 코니가 조심스레 털어놓은 그 황족들이 맞이한 최후에 겸연쩍은 듯 사과를 건네자, 오스카는 음식물로 볼이 빵빵해진 채로 고개를 도리도리 젓고는, 입에 든 것을 꼭꼭 씹어 삼키고 조근조근 말했다.
"코니가 미안해할 일 아니에요. 코니가 괜찮으면 나도 괜찮으니까요. 나는 이런 일 교역하다가 종종 접하니까요. 군주의 가문이란 게 살벌할 땐 제대로 살벌하기 마련이잖아요."
놀랐는데도 말하는 내가 편치 않았을까봐 걱정해줬구나. 난 코니만 안 힘들다면 뭐든 괜찮은데. 습관처럼 그를 안고 다독이고 싶어졌지만, 식사중이니 자제하기로 마음먹으며 수프볼 샌드위치를 마저 물어뜯었다. 이어 코니가 풀죽은 목소리로 말했다. 초록 눈이라 애먼 사람들까지 휘말렸겠다고. 내가 자세히 설명하지 않아서 그런 생각이 들었구나. 짠한 마음에 오스카는 코니를 달래듯 입을 열었다.
"그게, 사실 그렇지만도 않아요. 바텐더 말로는 그 제국에선 신기하게도 황제 일가에서만 초록색 머리카락과 눈이 나왔다고 했거든요. 그래서 제국 유일의 에메랄드빛 머리칼과 눈동자는 황제 일가에 대한 신의 사랑과 가호를 상징한다는 식으로 상찬했다는데... 그 제국 유일의 머리색과 눈동자색 때문에 추적이 용이했고, 그래서 한 사람도 빠짐없이 숙청당했다고 봐야죠. 얄궂게도 말이에요."
//칼답이라고 하기엔 조금씩 늦어서 미안했는데😂 코니주한테도 흥미가 생길만한 소재였다면 다행이야! 이제 불금이네, 즐거운 금요일 보내길 바래!
>>966 빵그릇을 샌드위치빵 삼아서 우걱우걱 먹는데 오스카가 맛있겠다며 눈을 반짝이더니 듣기 민망할만큼 칭찬했다. 이렇게 고평가를 받을만한 일인가 이게? 얼른 먹으려거뿐인데. 쑥스러운 나머지 입에 넣은 빵그릇을 베어물지도 못하고 눈만 꿈벅였다. 빵그릇에 스민 스프고 빵그릇속 스프고 어느 정도 식어서 뜨거운건 하나도 없는데도 어쩐지 홧홧한 기분이었다. 그래도 그가 고기를 꽉 채운 빵그릇을 한입 야무지게 물고는 한껏 만족스러운 얼굴로 오물거리는 모습에 금세 마음이 훈훈해졌다. 대단한 일이든 아니든 이분이 흡족해하시니 아무래도 좋았다.
그 즐겁고 기분좋은 식사 자리에서 사람 숱하게 죽어나갔다는 울적한 화제나 끄집어내시게 하고말았으니 실수도 여간 큰실수가 아니다. 사과도 뒤늦은것만 같고 수습할 방도가 떠오르지않아 우물쭈물하고 있는데 그가 음식을 한가득 머금은, 꼭 다람쥐나 햄스터같은 모습으로 고개를 붕붕 세차게도 젓고는 코니가 괜찮으면 본인도 괜찮다신다. 실수는 내가 했는데 결코 기분좋은 화제가 아니었을텐데 어쩌면 이렇게나 내생각만 해주실까. 눈시울이 뜨끈해지고 목이 메는것 같았지만 이상황에 울먹이기까지 하면 정말로 난처하실거다. 다행히 식사에 열중하신거 같으니까 한탄은 그만둬야지. 물을 마셔서 숨을 돌린뒤 고기로 찬 빵그릇을 마저 먹기 시작하는데 오스카가 초록머리 초록눈동자는 전황제님 일가만의 외모적 특징이었다고 알려주었다. 그래서 황실이 온전할때는 신의 가호라고 선전할수 있었다는데 지금은..
"나라가 깽판만 안나쓰도 축복일끼 저주가 돼삤네예.."
그래도 그덕분에 애꿎은 사람이 살해당하는 사태는 안일어났으니 전황제님 일가를 제외한 나머지 사람들에게는 축복일까? 모르겠다. 어딘지도 모르는 나라라 해도 사람이 죽어나가는 난리는 역시 듣기좋은 이야기가 아니다. 코니는 남은 빵그릇(이제 빵그릇이라기보단 빵조각에 가까운)을 모조리 욱여넣어 삼키고는 화제를 바꾸고자 시도했다.
"차도 드시고싶다 카싰지예? 괘야느시모 산에서 딴 머루하고 장에서 산 누가하고도 후식으로 자실람미꺼?"
/스프볼샌드위치는 그냥 빨리 먹으려다 보면 그러지않을까 싶어서 넣어본건데 (해본적은 없어; 하다간 빵그릇에서 스프가 새서 손에 다 묻을듯..) 그런 사소한걸로도 무한칭찬을 해주는 사랑꾼이구나 오스카는 코니만 괜찮다면 자기도 괜찮다고 해주는것도 그렇구 내가 다 과분하게 느껴질정도다 그나저나 외모 특징때문에 몰살당하다니 황제 일가는 외모가 너무 알려지는게 좋은거만은 아닌셈이네ㄷㄷ
>>967 냅다 칭찬하면 코니가 수줍어할 것은 짐작할 수 있었지만, 자제할 수가 없었다. 잘 익은 사과처럼 보기 좋게 새빨갛게 익어서 버벅거리거나 아무 말도 못하고 눈만 꿈벅이는 모습이 무척이나 귀엽고 사랑스럽기 때문이었다. 그도 잠시, 미안하다며 풀죽은 모습이 가여워서 코니 잘못이 아니라고 위로하려니 그는 금방이라도 울 듯한 얼굴로 눈시울을 붉혔다. 눈물을 흘리면 금방이라도 안으러 갈 생각도 했으나, 물을 마시며 감정을 추스르는 모습에, 오스카는 가까스로 자제심을 발휘하여 못 본 척 식사에 집중하기로 했다. 그러면서 애먼 사람이 죽지 않을 수 있었던 내막을 설명하니, 코니가 안타까워하며 한탄처럼 꺼낸 말에 오스카는 동의의 의미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게 말이에요. 그렇게 됐으니 바뀐 정권이라도 잘 정착해서 안정을 찾길 바랄수밖에 없지만서도요."
윗사람들끼리의 피바람은 민생에 영향을 줄 수밖에 없으니까. 오스카 역시 한 입 크기로 작아진 빵조각을 입안에 넣고 우물거리다 삼키고서 냅킨으로 입가를 닦으려니 코니가 제안해왔다. 차와 같이 후식으로 산에서 딴 머루와 장에서 사온 누가도 먹겠느냐고. 오스카는 언제 착잡해했냐는 듯 반색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먹을래요! 엄청 맛있겠다. 코니가 최고예요!"
해실거리며 버릇처럼 주접을 부리려니, 또 부끄러워하려나 하는 생각이 뒤늦게 들었지만, 이번에도 정정하지는 않았다. 산에서 약초를 캘 때도 고되고 바빴을 테고, 일을 마치고는 노곤했을텐데도 그 와중에 머루를 따고 누가를 사서 자신에게 나눠준다 하니, 감동하지 않을 수 없었다. 물을 한 모금 넘기는 것으로 식사를 마무리하려니, 자신도 동방에서 코니와 먹으려고 챙겨온 것이 있다는 것이 한발 늦게 떠올라, 오스카는 들뜬 낯으로 신이 나서 말했다.
"실은, 나도 동방대륙에 있는 나라에서 처음 보는 간식을 챙겨왔는데, 그것도 같이 먹어봐요! 익힌 쌀을 으깨서 만든 떡이라는 간식인데, 화덕에 구워먹으면 더 맛있을 거예요."
음식이 그득 담겨있었던 그릇들이 텅텅 비어있는 걸 확인하고, 오스카는 자리에서 일어나 코니에게 다가가서는 손을 내밀었다.
"그럼 차랑 간식은 방에 가서 먹을까요?"
/왠지 상상하니까 맛있어보이더라구ㅋㅋㅋ 살살 잡고 먹으면 의외로 괜찮지 않을까? 아무튼 사랑꾼스러웠다니 다행이다😆 코니가 귀엽고 사려깊고 똑똑하니까 사랑꾼 캐입하기도 쉽더라구. 그리고 아무래도 전복되기 직전의 황가의 황족들이라면 외모라도 덜 특정적인게 생존에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더라😂 물론 자기네 가문이 망할 줄 아는 당사자는 드물겠지만 말이야. 꽤 이어지기도 했고 막레같이 쓰여졌네. 요걸 막레로 삼아줘도, 마무리를 지어줘도 좋을 것 같아!
>>968 새황조가 잘 자리잡길 바란다, 그말대로다. 전쟁은 외침이든 내란이든 피바람을 불러오고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일수록 그피바람에 휘말리기 일쑤니까. 또 새황조의 나라가 안정되면 이분이 고생하며 항해하시고도 이번처럼 소득없이 돌아오는 경우도 줄어들테니까. 이런 희망사항 품어봤자 실질적으로 보탬되는건 하나도 없지만 그래도 무던하게 수습됐으면 좋겠다. 그정도로 그나라에 대한 생각을 정리하고 냅킨으로 손과 입을 닦는데 그가 후식 얘기에 해맑게 함박웃음을 띄었다. 그라면 짐마차에 한가득 실어먹을수도 있는 흔한 먹거리인데도 극찬해주니 쑥스러워 고개를 못들겠는데도 그웃음이 고와서 그마음이 고마워서 가슴이 찡했다.
그런데 감동적인건 그게 끝이 아니었다. 그가 얼핏 들어서는 어떤 음식인지 감이 안오는 동방의 새로운 먹거리를 이번에 가져왔다는것이다. 이국의 진귀한 음식이니 국왕님이나 영주님께 진상해서 잘보일수도 있을텐데 나눠먹자니. 이렇게 퍼주고만 싶어하시는 마음이 아깝지않게 잘하고싶다. 당장은 어떻게 해야할지 모르겠고 앞으로 평생 궁리한대도 달리 뾰족한 수는 안나올거 같지만 일단은 고마움을 제대로 표현하는게 먼저일것 같다. 그렇게 다짐하며 코니는 다과를 방에서 먹자는 오스카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자신에게 내밀어진 손을 약초의 뿌리가 상하지않도록 캘때처럼 조심스럽게 마주잡았다.
/968을 막레삼기는 조금 아쉬워서 마무리 부분을 덧붙여봤어 꽁냥거릴거 아니면 싫다고 무리한 요구를 달았는데도 어울려줘서 고마웠어 즐거운 주말 보내
"미안해. 속이려고 한 것은 아니었는데 말을 할 타이밍을 잡을 수 없었어. 그래서 다음에 말해야지. 다음에 말해야지. 그렇게 생각하면서 미뤘는데 결국 이제야 말하게 되었네."
찬란하게 은색으로 반짝이는 짧은 머리카락을 지니며 푸른 눈동자를 지니고 있는 사내는 눈앞에 있는 자신의 동료들을 바라보며 면목없다는 듯이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세계를 구하기 위해 길고 긴 여행을 떠나 겨우 세계를 구한 영웅들은 지금 알테리아 제국의 수도에 있었다. 정확히는 제국의 황족이 살고 있는 성이 보이는 길거리 한복판이었다. 사내는 검을 다루는 검사였다. 물론 일행을 이끌던 리더는 아니었고 그저 일행이 여행을 하는 도중 마족과 싸우는 사내를 발견해서 도와줬고 그 인연으로 함께 다니는 존재였다. 리더와 동료들을 바라보며 잠시 말을 끊은 사내는 지금까지 동료들에게 차마 말할 수 없어서 숨기고 숨기고 숨기던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나는 이 알테리아 제국의 제 2 황자인 테일러.S.알테리아야. 이 제국을 지키기 위해서 형님과 누님보다는 상대적으로 자유로웠던 나는 병사들과 마족과 싸웠었어. 너희들과 만난 그 날에도 병사들을 데리고 마족과 싸우는 와중에 함정에 걸렸거든. 나 혼자 떨어져서 하마터면 죽을 뻔 했는데 너희들을 만났었어. 원래는 그 날 내 정체를 밝혔어야 했는데 내 정체를 말하기엔 그 당시 분위기가 상당히 긴박하기도 했고 괜히 내 신분을 신경쓰다가 급한 일을 해결하지 못하는게 아닐까 싶었거든. 그래서 테일러라고만 자칭했었고."
자신의 사정을 이야기하며 그는 정말로 미안하다는 듯이 고개를 아래로 숙였다. 그렇게 잠시 조용히 있었던 사내는 다시 고개를 올렸고 동료들을 바라보면서 다시 입을 열었다.
"일단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형님과 누님이 너희들을 만나고 싶어해서. 잠깐만 같이 가서 만나줄 수 없을까? 아. 물론 지금 당장은 아니야. 3일 정도 후가 될 것 같아. 자세한 것은 내가 전 날에 이야기를 할게. 아무튼 지금은 여기서 편하게 자유롭게 보내줘. 아버지와 어머니가 너희들의 편의를 최대한 봐주라고 이야기를 했다고 하니까 지내는데 불편함은 없을 거야."
세계를 구한 영웅들의 행차였다. 그 정도 편의는 당연히 봐줘야 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이 제국을 다스리고 있는 황제의 생각은 그러한 모양이었다. 아무튼 제국에서 편하게 있어도 좋다고 했고 지금 당장 황제를 만날 수 있는 것은 아니었기에 자연히 일행은 자신들이 하고 싶은 것을 하기 위해서, 혹은 휴식을 취하기 위해서 하나둘 흩어졌다.
남은 것은 사내와 함께 여행을 떠난 동료 중 하나. 그리고 사내는 그 동료를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너는 뭘 할 거야? 혹시 원하는 것이 있으면 얘기해줘. 내가 도울 수 있는 것은 도울테니까."
/판타지 배경이고 영웅이 세계를 파멸하려고 하는 마왕을 물리쳤습니다! 라는 엔딩 이후에 정체를 숨기고 있던 동료 중 하나가 자신의 정체를 밝힌 대충 그런 내용이야. 동료가 누구인지는 크게 상관은 없는데 막 시리어스한 전개로 흘러간다거나 그런 것은 조금 힘들 것 같아. 그리고 사실 동료가 아니었는데 황자가 멋대로 동료라고 부르고 있다던가 뭐 그런 맥커터적인 것도 힘들 것 같아. 아무튼 그 외에는 자유롭게 설정하고 이어줘!
>>971 자신이 사실은 제국의 황자요 하고 밝힌 이제까지 함께해온 은발의 전우를, 그의 머리칼과는 상반되게 새까만 머리칼과 밤색 피부를 지닌 중년 여성이 바라보았다. 여성의 이름은 키치. 동료 중에서 완력으로 둘째가라면 서러울 정도에 신장과 체격은 누가봐도 첫째인 그는 외출하거나 짐을 싸는 대신 현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사고의 노력을 기울였다. 죽어라 싸우고 진짜로 죽는줄 알았다가 겨우 살았더니 황자라고? 그럼 여태 허물없이 대했던 건 뭐가 되지? 황자님을 막 대했다고 죄라도 뒤집어쓰는 건 아닌가? 아무래도 의심스러웠기에 키치는 미간에 패인 주름도 떨떠름한 표정도 풀지 않고 대꾸했다.
역시 이런 말이 나올 수밖에 없겠구나. 그렇게 생각하며 테일러는 씁쓸한 표정을 지었으나 그와 동시에 지금 이 상황을 납득했다. 이전까지는 생사를 함께 한 동료였으나 이제는 마냥 그렇게 보일 수는 없을테니까. 납득해야지. 그렇게 생각하며 그는 애써 표정을 관리한 후, 그녀를 바라보며 다시 한 번 고개를 아래로 숙였다.
"내 입장에선 이전처럼 대해달라고 말하고 싶지만 그게 쉽지 않다는 것은 알고 있어. 아마 나라도 비슷한 느낌일 것 같거든. 그래도 여기에 있는 동안에는 내가 할 수 있는 한 최대한 편의를 봐주고 싶어. 그게 널 포함해서 다른 이들에게 내가 해줄 수 있는 일일테니까."
일단 최대한 자신의 진심을 담아 이야기를 하며 적어도 지금은 황자로서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이전의 동료로서 이야기하는 것을 그는 최대한 알리고자 했다. 물론 그게 전달되었을지는 모르겠지만.
조금씩 발전이 이뤄지고 있었으나 도시에 비하면 턱없이 부족했고 그럼에도 작게나마 있을 것은 있었던 그 시골 동네에 눈이 사르륵 내리자 온 땅이 새하얗게 물들었다. 뽀드득, 뽀드득. 눈 밟는 소리가 고요하고 맑게 울리는 그 조용한 길가에 붉은색 목도리를 하고 있는 소년이 서 있었다. 어둠에 묻힐 정도의 진한 회색 점퍼를 입은 올해 열 일곱살이며 이내 열 여덟살로 올라갈 예정인 소년은 하얀 입김을 내뱉었다. 도시와는 다르게 듬성듬성 있는 가로등 불빛 아래의 벤치로 걸어간 소년은 벤치 위에 깔려있는 눈을 손으로 털어냈다. 검은 장갑을 끼고 있어 손이 시리지 않았기에 별 문제없이 눈을 털어낸 소년은 그 위에 조심스럽게 앉았다.
소년은 이 시골 마을의 토박이였다. 어린 시절부터 저 하늘 위의 별들은 소년에게 있어 너무나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풍경이었지만 그럼에도 소년은 그 풍경을 좋아했다. 봄, 여름, 가을, 겨울. 매일매일은 아니나 한번씩 바로 이 자리에 나와서 의자에 앉아 별을 조용히 구경하는 것이 소년에게 있어선 취미 중 하나였다. 마을에서도 이 소년이 이곳에 나와서 별 구경하는 것을 좋아하는 것이 소문이 짝 퍼질 정도였으니 오죽할까.
뽀드득. 뽀드득.
고요한 바람소리를 가르는 또 다른 발소리가 들려왔다. 도시라면 단번에 밝은 불빛으로 누가 다가왔는지 알 수 있었겠지만 이곳은 시골 마을. 즉, 가로등 불빛이 그렇게 붙어있는 지역이 아니었다. 사람 실루엣이 그의 눈에 비쳤다. 자신의 또래일까. 어른일까. 남자? 여자? 적어도 소년의 위치에선 알 길이 없었다. 허나 소년은 이내 다시 고개를 들어 별을 바라봤다. 별자리를 손으로 괜히 그려보기도 하며 고개를 돌려 다른 반짝이는 별들을 구경하기도 하며. 그럼에도 이곳으로 오는 이가 누구인지 한번씩 고개를 내려 그 실루엣을 확인하는 것 또한 잊지 않았다. 워낙 사람 좋은 동네니 딱히 경계하는 것은 아니었으나 누구인지는 궁금한 모양이었다.
#그냥 평범한 시골 마을에서 소년이 밤에 나와서 별 구경하고 있는데 발소리가 들린 그런 상황! #오는 사람은 누구라도 상관없지만 시리어스하거나 혐관적인 그런 것은 곤란해! #뜬금없이 꼽주는 맥커터 전개도 잇기 곤란해! 결론적으로 그냥 티키타카식으로 이어갈 수 있으면 어지간하면 오케이!
멀리서부터 시작된 발소리를 소년이 깨달았을 때는 소리의 근원이 제법 가까워진 후였다. 밤의 어둠을 틈타 조용히 나온 듯한 발소리는 소년의 것보다는 가벼웠다. 가볍고도 느린, 마치 지면에 정성스레 발자국을 남기듯 걷는 걸음소리는 조금씩 소년과의 거리를 좁히고. 시야에 닿는 지척에 다다라서야 그 모습을 볼 수 있었을 것이다.
어둠 속에서 살며시 모습을 드러낸 이는 소년의 또래로 보이는 소녀였다.
"..."
소녀는 자신의 모습이 소년의 시야에 들자 가만히 걸음을 멈추었다. 적당히 성장한 키에 검은 머리칼과 검은 눈을 가진 그 소녀는 마을 토박이인 소년이 못 보던 이였다. 하얀 다리를 반쯤 내놓은 원피스에 얇은 코트만 걸친, 겨울밤의 외출복이라기엔 확연히 부족해 보이는 차림 또한 보기 드물었을 것이다. 혹은 이상해 보이거나.
소녀는 멈춰서 소년을 보았다. 말없이 응시하다가 살짝 다물려 있던 입술을 달싹였다.
"안녕."
너무나 단조로운 인사를 건네고 소녀는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자리를 뜨지도 않은 채, 소년을 물끄러미 보고만 있었다.
가로등 불빛이 소녀를 비추자 소년은 시선을 그 방향으로 고정했다. 검은 머리카락과 검은 눈의 소녀는 소년이 보기에도 자신의 또래와 비슷한 느낌이었다. 자신보다 나이가 좀 더 많을 수도 있고 어쩌면 조금 낮을 수도 있었다. 허나 확실한 것은 자신이 살던 마을에선 본 적이 없는 얼굴이었다. 학기가 끝나서 도시에서 시골집으로 내려온 이는 아닐까하고 소년은 생각했다. 다른 시골 마을과 마찬가지로 이곳에서도 젊은 사람보단 노인들이 많았고 명절시기가 되면 온갖 사람들이 몰려들어서 시끌벅적했으니 저 소녀도 비슷한 느낌일지도 모르겠다고 소년은 생각했다. 낯설은 느낌은 아주 잠시. 다리를 반이나 내놓은 저 옷차림이 상당히 춥지 않을까 싶어 소년은 조용히 두 눈을 깜빡였다. 저런 복장으로는 꽤 추울텐데. 그런 복합적인 생각을 이어하는 도중 소녀에게서 인사가 들려왔다.
"아. 네. 안녕하세요."
얼떨결에 나온 목소리는 높임말이었다. 물론 자신의 또래 같긴 했으나 그 나이를 짐작할 수 없는 탓이었다. 물론 상대가 먼저 반말을 썼으니 자신도 반말을 써도 상관없을지도 모르나 나온 말이 높임말인 것을 어쩌겠는가. 일단 소년은 괜히 제 뺨을 오른손으로 긁적이다 소녀를 바라보면서 물었다.
"안 추워요? 그렇게 입으면. 굉장히 추울 것 같은데."
조심스러움이 섞여있는 걱정스러운 어투를 내뱉으며 소년은 자신의 옆 쪽, 정확히는 자신이 앉아있는 자리보다 조금 더 옆의 자리의 눈을 살살 장갑 낀 손으로 털어냈다. 이어 소녀를 바라보며 소년은 다시 입을 열었다.
>>976 소년이 인사에 답을 해줄 때까지, 소녀는 가만히 있었기에, 얼핏 보기에 그렇게 세워놓은 마네킹 내지는 조각상 같았다. 호흡을 따라 흘러나오는 입김과 간간히 보이는 눈 깜빡임마저 없었다면 정말 그래보였겠지만. 인사를 받아준 소년을 향해 고개를 살짝 기울였으니 허상이 아니라 사람이구나, 하고 알 수 있었을 것이다.
"응."
짤막하게 소리를 낸 소녀는 기울인 고개를 들고 시선을 앞으로 향했다. 다시 그 방향으로 걸어갈 듯. 그러나 재차 움직인 것은 걸음이 아니라 눈동자였다. 소년이 춥지 않냐고 물어서다. 소녀의 눈은 천천히 아래로 내려가 소녀의 옷차림을 보았고, 새삼스럽게 아, 하고 입을 열었다.
"추워. 그런데 옷이 없어서."
소녀는 그렇게만 말하고 손으로 코트를 매만졌다. 검푸른 모직 코트 위를 손이 스칠 때마다 사라락 소리가 난다. 춥다는 말처럼, 코트를 만지는 손이 붉게 얼어있었지만 소녀는 그다지 개의치 않아보였다. 그 손을 코트 주머니에조차 넣지 않고 다시 늘어뜨려놓고, 소년이 벤치의 눈을 털어주자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고마워."
그리고 짤막한 인사와 함께 눈이 털어진 벤치에 앉았다. 사뿐히 앉는 소녀에게서 이름 모를 과일의 향이 피어올랐다가 흩어졌다.
벤치에 앉은 소녀는 다소곳히 손을 모으고서 정면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천천히 고개를 돌려 그 주변을 둘러보았다. 고개를 돌렸으니 당연히 바로 옆에 앉은 소년에게도 시선이 향했다. 발갛게 물든 뺨과 귀가 스치는 머리칼 사이로 잘 보였을 것이다. 소녀는 크게 주위를 둘러보고, 잠시 동안 정면을 향해 있다가, 소년을 보며 물었다.
"주변에 아무것도 없는데, 혼자 뭐 하고 있었던 거야?"
그 물음에 악의나 의도는 없었다. 그저 순수한 호기심만이 소녀의 시선과 함께 느껴졌을 것이다.
옷이 없다는 말에 아직 겨울옷을 사지 않았나하는 의문이 소년의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자연히 소년의 손이 자신이 입고 있는 회색 점퍼로 향했다. 아주 잠깐. 조금이나마 추위를 달랠 수 있게 이 점퍼를 빌려주는 것이 좋을까 생각을 하나 소년이 점퍼를 벗는 일은 없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자신도 추웠고 자신도 이것이 없으면 버티기 힘들었을 것 같았기에. 무엇보다 생판 초면인 이가 점퍼를 빌려준다고 해도 받는 쪽의 입장은 난감하지 않겠는가.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소년은 그렇게 스스로 결론을 내렸다.
벤치에 앉는 모습을 확인하며 소년은 아주 살짝 옆으로 자리를 옮기면서 조금 더 자리를 확보했다. 가장자리에 살짝 닿을 것 같은 기 아슬아슬한 부분에 정착하며 소년은 다시 고개를 들어 별을 바라봤다. 오늘도 하늘 위 별들은 찬란하게 반짝였고 선을 긋기 딱 좋도록 옹기종기 모여있었다. 꼭 정해진 별자리로만 선을 그으란 법은 없었기에 소년은 그저 눈대중으로 선을 그리며 들려오는 물음에 조용히 대답했다.
"별을 보고 있었어요. 여긴 다른 계절에도 별이 잘 보이긴 하지만 겨울이 되면 특히나 더 잘 보이거든요. 어릴 적부터 매일 보던 풍경인데 전혀 질리질 않네요."
괜히 어깨를 으쓱하며 소년은 미소를 조용히 지었다. 그러다 고개를 내려 소녀가 앉아있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니 자신을 바라보는 소녀의 시선이 보였다. 아무런 말 없이 하얀 입김을 조용히 내뱉으며 소녀를 바라보던 소년은 두 손을 주머니 속에 집어넣으며 이야기했다.
"도시에서 시골집으로 내려왔어요? 여기 살면서 본 적 없는 얼굴인데. 그러면 보통은 도시에서 시골로 내려온 분들이더라고요. 할머니, 할아버지 보러."
>>978 옷을 빌려주지 않아도 소녀에게서 추워하는 기색은 전혀 없었다. 추워보이지만 떨지도 않고 그저 다소곳이 앉아있기만 했다. 앉아서 주변을 둘러보았지만 위는 보지 않았다. 소년이 하늘을 볼 때에도 가만히 앞을 향하고 있었다. 위를 보는 법을 잊은 것처럼.
"아. 별."
무얼 하고 있냐고 물어서, 별을 보고 있었다는 대답을 듣고서야 소녀는 위도 있었지, 하는 반응으로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았다. 드넓게 펼쳐진 밤하늘에 뿌려놓은 듯 반짝이는 별들이 소녀의 검은 눈에 한가득 담겼다. 시린 겨울 하늘을 채우는 자잘한 별빛들을 물끄러미 보고만 있던 소녀는 소년이 질문을 하고서야 고개를 내렸다. 그리고 고민하듯 고개를 옆으로 살짝 기울였다가, 다시 되돌리고서 대답했다.
"내려온 건 맞는데. 누굴 보러 온 건 아니야."
소녀는 뭔가를 더 말하려는 듯이 입술을 움직였지만 다른 말은 나오지 않았다. 입술만 잠시 달싹거리다가 조용히 다물었다. 그리고 다시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고, 하- 숨을 내뱉으며 고개를 내렸다. 그대로 눈동자만 소년을 향하고서 말했다.
"얘. 이 마을엔 뭐가 있어?"
뻔하다면 뻔한, 화제를 돌리고 싶은 어투의 질문이었다. 소녀의 시선도 그저 검고 담담했다. 유리구슬처럼.
멈칫거린다. 마주친 두 눈은 둥글고 반짝거려서 떨리는 기색이 너무나도 도드라졌다. 몸을 움츠려 겁먹은게 빤히 보였다.
"저…"
해가 뜨든 달이 뜨든 시커멓기만 한 탓에 으스스한 소문이 나도는 숲. 숲 한가운데 마녀가 산다던가, 괴물이 산다던가. 동물 소리도 낯설고 빛을 잡아삼키는 듯한 빽빽하고 울창한 숲에 길을 잃어 죽은 자도 많다는 이야기는 마을에 다섯 난 꼬마도 알았다. 그러니 이런 밤 중에 그 숲 속에서 등불을 들고 있는 아이는 이질적이었다. 그러고보니 잘 모르겠다. 아이인가, 아가씨같기도 하고 노파같기도 하다.
누굴 보러 온 것이 아니라면 이 시골까진 뭐하러 온 것일까. 소년은 바로 그 답을 알 수 없었다. 애초에 지금 어디서 지내고 있는 것인지. 말로만 듣고 소문으로만 듣던 가출 비슷한 것일까? 아니면 시골집에 오긴 했지만 다른 의도로 이곳에 왔다는 것일까? 더 말을 하진 않으면서 주제를 노골적으로 바꾸려고 하는 소녀의 말에 소년은 그 이상의 관심을 가지는 것을 그만뒀다. 말하기 싫다는 그런 의미일거라 짐작하며.
"특별히 뭐가 있거나 한 것은 아닌데요. 여긴."
그래봐야 도시의 발전도와 비교하면 확연하게 떨어지는 시골 마을이었다. 물론 편의점이나 PC방이나 오락실이나 그런 것들은 있었으나 유명한 가게가 있는 것은 아니었으며 그렇다고 도시에서 쉽게 볼 수 있는 대형마트가 있다거나 그런 것도 아니었다. 물론 중형마트 정도는 있긴 했지만 도시에서 온 이가 봤을 때는 전혀 눈에 차지 않으리라. 그렇기에 소년은 그런 것이 아니라 다른 쪽으로 생각했다. 이곳에서 볼 수 있을 법한 유명한 장소라고 한다면...
"자연 명소라고 한다면 나름 이름이 있는 폭포가 하나 있어서 가끔 외부인들이 구경하러 오기도 하고, 그 근처에 등산로가 있어서 등산을 할 수 있는 곳도 있고... 커다란 호수도 하나 있어요. 지금은 꽁꽁 얼어있겠지만요. 가끔 거기서 얼음 낚시를 하는 이들도 있긴 한데."
발에 밟히는 눈 위에 발자국을 무의식중에 내다 뽀드득, 뽀드득. 소리가 들리자 소년은 살짝 움찔하며 발을 위로 올렸다. 자연히 소년의 등이 등받이에 밀착했다.
"봄이 되면 온갖 예쁜 꽃이 피는 꽃밭도 하나 있고... 거북 바위라고 해서 거북이를 쏙 빼닮은 바위도 하나 있어요. 오랜 옛날, 이 마을을 지켜줬다고 하는 거북이 신이 깃들어있는 바위라고는 하는데. 어디까지나 전설일 뿐이고 저에게 있어선 거북이를 닮은 바위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고 마지막으로..."
>>981 특별한게 있다거나 한 곳이 아니라고 해도, 소녀는 질문을 무르지 않고 기다렸다. 기대 담기지 않은 눈이 천천히 깜빡이고 있을 뿐이다. 조용히 기다리다 소년이 하나둘 말로 설명하기 시작하자 소녀는 시선을 거둬 살짝 아래를 향했다. 소녀가 걸어온 발자국을 보며 소년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중간에 뽀득 소리가 나자 고개가 움찔했지만, 잠깐이었다.
폭포, 등산로, 호수... 꽃밭, 바위, 마지막으로 어디서나 볼 수 있는 별하늘.
시골 마을 답게 수수하고 그렇게 특별할 것도 없어보이는 요소들이다. 폭포는 외부인들이 구경하러 온다니까 그나마 볼만 한 곳인 것 같다. 호수는 얼음 낚시를 한다니까 얼지 않았을 때도 낚시를 하는 사람도 있다는 의미일 것이다. 전설이 있는 바위도, 꽃밭도...
갖은 생각이 소녀의 머릿속을 스쳐지나간다. 그 중 어느 것도 말이 되어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말없이 저 앞 바닥을 응시하는 모습은 소년의 말을 듣고는 있나 싶다. 하지만 소녀는 그 뒤에도 얼마간을 말없이 있다가, 그 사이 얼지 않았을까 싶은 입술을 움직여 말했다.
"많은 것이 있는 곳이구나. 하늘도 보이고. 별도 많고."
소녀는 중얼거리는 말과 달리 이번엔 고개를 들지 않았다. 오히려 더 아래로 기울여, 검은 머리카락이 흘러내려 옆얼굴을 가릴 만큼 고개를 숙였다. 가려진 사이로 하얀 입김이 길게 흘러나왔다. 긴 숨소리와 함께.
잠시 후 고개를 들며 소녀의 손이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걷어 어깨 뒤로 넘겼다. 그러면서 얼굴을 가볍게 손으로 쓸어내는데, 그 때문인지 숙이기 전보다 더 붉었다. 뺨에서 눈가까지. 느릿느릿 머리카락을 다 넘기자 다시 손을 무릎에 올린 소녀가 말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하얀 입김이 조금 더 선명하게 바뀌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시골의 밤은 깊어지고 그에 따라 추위도 강해지기 마련이었다. 자연히 소녀가 괜찮을지에 대해 소년은 걱정했다. 더 추워질텐데 지금이라도 집에 들어가라고 하는 것이 좋지 않을까 싶었으나 바로 말을 꺼내진 못하며 그 대신 소녀를 바라보며 붉어진 뺨에 주목했다. 역시 지금 시기는 춥지. 춥겠지. 그렇게 생각하던 와중 소년은 막 들려오는 물음에 침묵을 지키다가 고개를 돌려 앞을 바라봤다.
"저는 여기서 쭉 자랐고 살고 있어서 그런지 그다지 생각해본 적이 없어요. 즐겁냐라던가, 만족하냐라던가. 하지만 적어도 여기에 사는 것에 대한 불만은 없어요. 저런 별하늘도 도시나 다른 곳에 가면 보기 힘들다고 그러고."
어릴 때부터 쭉 본 풍경이긴 하나 역시 소년은 저 풍경이 좋았다. 다른 친척집에 가거나 했을 때는 보고 싶어도 볼 수 없었던 저 별하늘은 이곳에서는 마음껏 볼 수 있는, 어떻게 보면 소년에게 있어선 보물과도 같은 풍경이었다. 다른 풍경 역시 마찬가지. 물론 도시에서 온 이들에게 있어서 그런 것이 뭐가 좋냐라고 물어볼 수도 있지만 어쩌겠는가. 소년에겐 너무나 좋은 것을.
"외부에서 온 이들은 이해하기 힘들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여기가 제 고향이고 제가 태어나고 자란 곳이거든요. 그래서 그럴까. 오히려 여기에 있는 것이 너무나 자연스럽고 당연하고... 그냥 그 자체에 만족하면서 사는 것 같아요."
저렇게 물어보는 이유가 무엇일지 소년은 자연히 추론했다. 어쩌면 새로 이사를 온 이가 아닐까. 건강 문제건 다른 문제건. 원하지 않는 이사를 온 바람에 이곳에서의 삶에 대해 불안함을 가진 것은 아닐까. 그렇게 생각하기도 하나 소년은 굳이 입에 담진 않았다.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자신이 더 이러쿵저러쿵 할 사안은 아니었으니까. 이내 소년은 그 대신 다른 것을 제안했다.
"그것보다 뺨이 상당히 붉어졌는데. 추우면 어서 들어가보는 것이 좋지 않겠어요? 그러다가 감기 걸릴지도 모르는데."
물론 이곳도 병원은 있었다. 어쨌건 사람이 사는 곳이었으니까. 조금 거리는 있지만 크기가 큰 병원도 하나 있긴 했다. 물론 그렇다고 해도 도시의 종합병원에 비할 수는 없었지만 아플 때 갈 수 있는 곳은 있었다. 하지만 병원이 있다고 해서 아파야 할 이유는 없지 않겠는가.
>>983 아무렇게나 흘려버려도 될 질문들에 소년은 하나 하나 답을 돌려준다. 성의가 없지 않으면서 과하지도 않은 대답이다. 소녀가 외부인인 걸 알 텐데, 언제 휙 가버릴 사람일지도 모르는데, 친절함이 기본인 소년일까. 아니면 이 마을에서 사는 사람들은 모두 이런 걸까. 생각이 떠오르고 흩어진다. 느릿하게 깜빡이는 눈앞이 어쩐지 조금 흐리다고 소녀는 생각했다.
이곳에서 사는 것이 즐거운지, 만족스러운지, 소녀의 물음에 소년은 잠시 지나서 대답을 해주었다. 소녀는 옆에서 들리는 잔잔한 목소리에 조용히 귀를 기울였다. 소년은 대답 끝에 걱정으로 들리는 말을 보탰지만, 소녀는 고개를 기울이며 작게 중얼거렸다.
"부럽다."
짧고, 아주 작은 선망이 담긴 중얼거림. 소녀의 시선은 다시금 아래를 향해있었다.
"있는 것이 자연스럽고, 당연하고, 그래서 지내는게 즐겁고, 만족스러운 곳이 있다는게."
담담하면서도 어딘가 가라앉듯이 읊조리던 소녀는 이내 고개를 들었다. 후. 허공을 향해 긴 숨을 내쉬자 하얀 입김이 길게 선을 긋고 흩어진다. 그리고 천천히 몸을 뒤로 기울여 소년처럼 벤치에 등을 기댄 소녀는 여전히 차분하게 말했다.
"돌아가고 싶어도, 길을 잃었어. 그냥 나와서 걷다보니까 여기였어. 나와서 만난 사람도 너 뿐이야."
가진 것도 없다는 걸 보여주려는 듯 소녀는 무릎에 포갠 손을 한 번 들었다 내렸다. 그 손은 이제 코트에 가려진 손목 근처까지 새빨갛게 물들어 있었다. 움직이면 꾸득 부서지는 소리가 나지 않을까 싶을 만큼.
"그래도 괜찮아. 여기 있으면 누구든 데리러 올 거야. 아마도."
소녀는 자신의 상황이 별 거 아닌 것처럼 말을 했다. 누구든 데리러 올 거라고 했지만, 아무도 오지 않아도 상관없는 것처럼 보였다. 벤치에 앉아 주변을 한 번 둘러보고, 두어번 밤하늘 본 것을 제외하면 소녀는 줄곧 앞 아니면 어딘지 모를 바닥만 보고 있었으니까.
마치 자신에겐 그런 곳이 없다는 듯이 이야기를 하는 것에 소년은 입을 꾹 다물고 조용히 입김만 내뱉었다. 지금의 저 말이 너무나 쓸쓸하게 느껴져서 소년의 표정은 이내 떨떠름한 느낌으로 바뀌었다. 자신이 너무 단순하게 생각하는 것인지, 아니면 이 소녀는 저런 말이 절로 나올 정도로 지금 외로운 것인지. 그 와중에 길까지 잃어버렸다는 그 말에 소년은 머리를 긁적일 수밖에 없었다.
"어디서 왔는데요? 그러니까 지금 지내는 곳이 어디에요? 이 마을 토박이니까 어지간한 장소는 다 아는데. 저."
물론 마을의 외부, 그야말로 다른 마을이나 이런 곳에서 왔다고 한다면 자신이 어떻게 도와줄 여지가 없었다. 하지만 적어도 마을 내부에서 지내는 이라고 한다면 자신이 모를 장소는 없었다. 물론 1할 정도는 모르는 곳이 있을지도 모르나 확률로만 따지자면 그럴 확률이 얼마나 되겠는가. 이내 소년은 자신이 끼고 있는 장갑을 벗은 후에 소녀에게 내밀었다.
"길 안내해줄게요. 그러니까 이거 껴요. 데리러 오는 사람이 언제 올 줄 알고. 그것보다는 그냥 제가 안내하는 것이 더 빨라요."
저대로 두면 다음 날 감기에 걸릴 것은 불 보듯 뻔한 일이었다. 괜히 아파서 무엇하겠는가. 그렇기에 소년은 자신이 안내해주겠다고 이야기를 하며 소녀를 바라봤다. 만약 소녀가 거부한다면? 그땐 누군가가 정말로 나올 때까지 같이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고 소년은 생각했다. 아무리 그래도 길을 잃어버린 소녀를 그냥 두고 가기에는 제 마음이 편치 못했으니까.
>>985 그냥 나와서 걷다보니까 여기였다. 그랬다. 처음 보는 집, 처음 보는 골목, 처음 보는... 소녀는 눈을 뜨고 일어나 밖으로 나와 여기까지 온 길을 생각해보았다. 전부, 처음 보는 곳이었다. 한없이 낯설고, 내딛은 한발짝 뒤조차 기억나지 않을 만큼 캄캄했다. 그래서 무작정 걸었다. 가로등이 있으면 잠깐 멈추고, 다시 걷고, 반복했다. 밖에 나와 처음으로 사람을, 소년을 마주칠 때까지.
그러니 소년이 소녀의 행적을 물어도 답해줄 말은 그것 뿐이었다.
"미안해. 잘 모르겠어. 길 나오는대로 걸어와서."
오는 내내 앞을 보았는지 바닥을 보았는지도 모른다. 여기까지의 기억이 흐릿하다. 소년이 아무리 이 마을의 토박이라도 지나온 길의 설명조차 못 하면 도와주지 못 할 것이다. 소녀는 자신이 소년의 호의를 무시하는 것 같다고 느끼며 다시 작게 중얼거렸다.
"신경 쓰이게 해서 미안. 그냥 지나가는 사람일 뿐이니까 이대로 둬도 괜찮아."
소녀는 장갑을 향해서도 느릿하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붉게 언 얼굴 위로 시린 검은빛 머리카락이 넘실거렸다. 잠시 넋 나간 듯 앞을 보던 소녀가 느릿하게 고개를 돌려, 소년에게 시선을 주며 말했다.
길 나오는대로 걷기만 했다. 그렇다고 한다면 자신이 사는 마을에서 온 것인지, 아니면 조금 멀리 있는 마을에서 온 건지도 알 길이 없었다. 지금 이대로는 경찰을 불러야 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하며 소년은 잠시 망설였다. 돌아가는 길을 모른다면 이대로 계속 추위 속에 있어야 한다는 이야기가 아닌가. 자신이라고 계속 여기에 있을 수도 없는 일이었다. 차라리 눈에 찍혀있는 발자국을 역으로 추적해서 길을 찾아야 하는 것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소년은 지금 이 상황을 어떻게 대처해야할지 망설이고 또 망설였다.
"연락처는요? 핸드폰이라던가 혹은 가족의 전화번호라던가."
이런 시골에서조차도 핸드폰은 필수품이 된 시대였다. 아예 핸드폰을 두고 왔다면 또 모를까. 소지하고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어떻게든 상황은 넘길 수 있지 않을까. 그것도 안되면 결국 경찰의 도움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시골의 밤은 도시와는 다르게 어둡고 차갑고 순식간에 모든 것을 꿀꺽 삼킬 정도로 무서운 곳이었으니까. 이런 겨울은 어디에서 멧돼지가 내려와도 이상하지 않았다. 먹을 것을 찾아 내려오는 멧돼지는 마을 토박이인 소년조차 피하고 싶은 생물이었다.
"그러면 적어도 손을 주머니에 넣어서라도 녹이세요. 동상이 걸리거나 하진 않겠지만 너무 식어도 안 좋으니까."
지나가는 사람. 맞는 말이었다. 터놓고 얘기해서 소년은 이 소녀가 누군지도 모르고 몇 살인지도 어디에서 온 건지도 알지 못했다. 하나 확실한 것은 어떻게든 이야기 주제를 바꾸려고 한다는 것이었다. 별 얘기를 더 해달라는 그 말에 소년은 잠시 생각하다가 오른손을 하늘로 뻗어서 이 별자리는 무슨 별자리고 저 별자리는 무슨 별자리인지 하나하나 설명했다. 물론 소년도 어디까지나 열 일곱살밖에 되지 않는 나이였기에 자세히 많은 것을 아는 것은 아니었다. 보는 것을 좋아하지, 연구하는 것을 좋아하는 것은 아니었기에 그냥 책으로 읽은 지식이 전부였고. 이내 소년은 몇 개의 별을 설명하고 이야기하다 소녀에게 물었다.
>>987 소년이 골몰하는 사이, 소녀는 아까 소년에게 인사를 건넸던 것을 조금 후회했다. 소녀가 인사로 말을 걸지 않았다면 소년이 괜한 염려를 하지 않아도 되었을 텐데. 그냥 지나쳤더라면, 소녀 자신이 말한 것처럼 그저 지나가는 사람으로 흘러갔더라면, 이름도 모르는 소년에게 성가신 존재가 되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지만 아까로 다시 돌아가더라도 말을 걸지 않고 지나갈 거란 가정조차 소녀는 하지 못 했다. 다시 그 어두운 길을 정처없이 걸어, 이 가로등 아래, 이 벤치 앞에 서면, 다시 소년에게 인사를 해버릴 거라고, 그래버릴거라고 소녀는 생각할 수 밖에 없었다.
"그거... 어제인가, 던졌더니 부숴져서, 없어."
핸드폰. 그 단어에 소녀는 떠올렸다. 투박한 잿빛 벽에 부딪히고 떨어져 더이상 제기능을 할 수 없게 된 그 도구를, 그리고 그걸 던진게 소녀 자신이라는 것만은 선명히 기억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안의 연락처들은 이미 기능을 잃었기에, 역시나 없다는 의미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기억하지 못 하는 번호 역시 의미 없으니까.
길도 몰라, 연락처도 없어, 뭐든 부정 밖에 못 하는 자신이 미안해서, 소녀는 적어도 손을 주머니에 넣으라는 소년의 말을 순순히 들었다. 이젠 옷이 스치는게 따갑게 느껴지는 손을 얇은 코트 주머니에 넣은들 소용이 있을까 싶었지만, 적어도 아린 감각은 서서히 누그러들었다.
그렇게 손을 넣고 코트를 여민 소녀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았다. 소년의 오른손이 별들을 가리키며 별자리를 얘기하면 눈으로 그 선을 그어보고, 들어본 적 있는 이름이 들리면 그게 그거였구나, 생각도 해본다. 소년의 이야기는 많은 내용은 아니었지만 듣는 동안 그저 소년의 목소리와 밤하늘에 집중할 수 있는 것으로 충분했다. 그동안 다른 생각은 하지 않아도 되었는데, 소년의 물음이 소녀의 고개를 아래로 기울였다.
"별을, 이렇게 보는 건 처음이라. 지금은 그냥 신기하기만 해. 좋고 싫고를 떠나서."
소녀가 사는, 아니, 살았던 곳은 밤에도 빛이 밝은 곳이었다. 자연히 하늘도 밝아서 별은 보이지도 않았다. 달조차 해처럼 보이던 도시가 지금은 가로등을 벗어나면 캄캄한 시골로 바뀌어있다. 소녀는 밤하늘과 이어진 어둑한 곳을 물끄러미 응시하다가, 나즈막히 덧붙였다.
"별은 잘 모르지만, '작은 별'을 피아노로 연주하는 건 좋아해."
좋아해, 라고 말은 끝났지만 소녀는 속으로 자문했다. 지금도? 라고. 답은 할 수 없었다. 그저 착잡해질 뿐인 기분을 조용히 밀어넣으며, 소녀는 조용히 눈을 깜빡였다.
핸드폰마저 없다고 한다면 정말로 경찰을 불러서 보호를 시킬 수밖에 없는 거 아닐까 싶어 소년은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짜증이 난다거나 귀찮게 되었다, 혹은 한심하다라는 감정과는 거리가 먼 걱정스러운 목소리가 절로 소년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시골의 겨울 밤은 차갑고 서늘했다. 언젠가 자신은 돌아가야만 했고 그 이후에 이 소녀는 혼자 남겠지. 그렇게 생각하며 소년은 우선 자신이 사는 마을까지 데리고 가는 것이 좋지 않을까 싶어 내적 고민을 시작했다.
"도시에서 왔나보네요. 명절 때 마을에 오는 도시 사람들이 별 보고 감탄 엄청 하는데. 신기하다는 말도 하고요. 아무튼 피아노 치시나봐요? 작은 별이라. 초등학교 때 음악실에서 쳤던 것 같기도 한데."
하지만 지금 연주하라고 하면 칠 자신이 소년에겐 없었다. 악보가 있다면 더듬더듬 연주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으나 아무 것도 없는 상태에서 피아노 앞에 서서 연주하라고 시키면 필시 제 손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은 작은 별이 아니라 연결되지 않는 불협화음일테니까. 그렇기에 그 대신 입으로 휘파람으로 작은 별을 연주하던 소년은 살며시 손을 털었다.
"마을까지 안내해줄게요. 아무리 그래도 여기서 쭉 있는 것보단 마을로 가는게 나을 거예요. 어쨌건 마을에 있으면 따뜻하게 있을 수 있는 곳도 있을테니까. 마을 회관이라던가."
요청하면 안에 들어가서 몸을 녹일 순 있을테니 적어도 여기에 있는 것보다는 나을 것이다. 그렇게 소년은 판단했다. 그리고 이 소녀가 마을에서 온 것이라고 한다면 집이 어딘지는 몰라도 근처까지는 데려다줄 수 있는 거니까.
>>989 돌아갈 방도가 없지 않느냐는, 소년의 그 말이 타박처럼 들려 소녀는 말없이 눈을 내리깔았다. 아니라고 반박할 수도 없고, 어쩔 수 없었다 뻔뻔히 굴 수도 없었다. 돌아가지 못 하게 되기를. 내심 그렇게 되길 바랐다는 것을 소녀는 부정할 수 없었으니까. 그저 눈을 감고 작게 숨을 내쉬는 것이 소녀가 할 수 있는 것의 전부였다.
조용한 가운데 소년의 목소리 만이 선명하다. 도시에서 왔냐던가, 피아노를 치냐던가, 소녀의 말을 하나 하나 짚어오자 말의 끄트머리쯤 고개를 끄덕인다.
"별, 도시에선 한 번도 저렇게 본 적이 없었어. 피아노는, 쳤었는데, 안 친지 좀 됐어."
가물가물한 기억을 더듬어보면 1년여쯤 되었던가. 희고 검은 건반에 손끝을 올려본 것이 너무나 오래전으로 느껴졌다. 소녀는 코트 주머니에 넣은 손을 조금 움직여보다가 멈추었다. 둔한 저릿함에 제대로 움직이는지도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대신 소년의 휘파람에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눈 감고도 칠 수 있는 멜로디를 한 음 한 음 따라가다가, 후, 다시 숨을 내뱉었다.
그런, 가까운 파출소에 데려다줄래? 이미 신고가 들어가 있을 지도 모르고."
친절히 마을까지 안내해주겠다는 소년에게 소녀는 그런 부탁을 했다. 따뜻하게 보호 받을 수 있는 회관이 아니라 가출 내지는 수색 신고가 들어와 있을 지도 모르는 파출소로 데려가 달라고. 담담하게 부탁을 하는 모습은 스스로의 행동을 잘못이라 여기며 소녀 자신을 죄인 취급하는 것 같다.
소녀는 그렇게 부탁을 하고, 소년이 들어주지 않아도 갈 듯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앉을 때와 달리 조금 흔들거렸지만 곧게 서서 소년에게 시선을 주었다.
회관이 아니라 파출소로 데려가달라는 말에 대해서 소년은 별 의미를 두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파출소에 있는 쪽이 어쩌면 확실히 안전할테니까. 아무도 없고 혼자 있는 곳보다는 적어도 어른들이 있는 곳이 안전할테니까. 물론 그 명제가 항상 참이라는 법은 없지만 적어도 경찰은 믿을 수 있는 이들이 아니던가. 적어도 이 마을에선 그랬다. 자리에서 일어나는 소녀를 바라보며 소년 역시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어 엉덩이에 조금이나마 묻었을 눈을 살살 털어낸 후, 기지개를 쭉 켰다. 몸이 뻣뻣하거나 하진 않았지만 자신도 모르게 나온 행동이었다. 제 아버지를 보다가 배운 버릇일지도 모르는 일이고.
"그럼 따라오세요. 여기서 그렇게 안 머니까."
시간으로 따져보면 십오분 정도 걸리는 거리였다. 가볍게 산책을 할 수 있는 그런 거리. 물론 자신의 집에 가려면 조금 더 걸어야했고 파출소로 가려면 조금 더 시간이 필요했지만 그래봐야 오분에서 십분 정도 더 차이가 나는 정도였다. 소녀가 따라올 수 있도록 소년은 천천히 발을 옮기며 뽀드득, 뽀드득 발소리를 냈다. 하얀 입김을 천천히 내뱉기도 하며, 소녀가 잘 따라오고 있는지 한번씩 뒤나 옆을 보면서 확인하기도 하며.
"다음에는 따뜻하게 입어요. 딱히 잘못이라거나 그런 것은 아니지만 아깝잖아요? 추워서 별 조금만 보고 들어가면. 저런 하늘은 쉽게 볼 수 있는 것이 아니거든요."
괜히 그렇게 이야기를 하면서 소년은 오른손으로 하늘을 가리켰다. 하늘을 바라보면서도 따라올 수 있도록 일부러 발걸음을 천천히 하면서 앞으로 걸어가니 저 편에 마을의 모습이 보였다. 그리고 거기서 조금 더 나아가니 보이는 것은 불빛이 환하게 들어온 아주 작은 파출소였다.
>>991 뒤따라 일어서는 소년을 소녀의 눈이 쫓는다. 일어나서 기지개를 켜는 행동까지 쭉, 검고 동글한 눈동자가 따라가다가 휙 아래로 내려간다. 그대로 발끝을, 얄팍한 캔버스화의 앞코를 응시하던 소녀는 따라오라는 소년의 말에 고개를 조금 들었다. 그리고 끄덕였다.
소년이 먼저 걸음을 뗀 후에야 소녀도 굳은 다리를 움직여 걷기 시작했다. 희던 다리도 이젠 얼굴 못지 않게 붉었지만 아직 걸을 수는 있어서, 느리게나마 소년의 뒤를 쫓았다. 걷는 소년 소녀의 아래로 뽀득이는 소리와 사박이는 소리가 번갈아 난다. 소년이 뒤를 돌아볼 때마다 보였을 소녀는 조금 고개를 숙이고 있지만 제대로 따라오고 있긴 했을 것이다.
그런 소녀가 고개를 든 건, 소년이 저런 하늘은 쉽게 볼 수 있는게 아니라며 팔을 드는 기척이 느껴져서였다. 무심코 고개를 들어 본 하늘엔 누군가 반짝이는 실로 자수를 놓은 것처럼 별들이 반짝거리고 있어서, 소녀는 저도 모르게 대답했다.
"다음에는, 그럴게."
다음이 있을지 모르지만, 이라는 말은 숨과 함께 삼켰다. 그리고 다시 조용히 걷다 보니 저 앞으로부터 환한 불빛이 소녀의 사야에도 들어왔다. 고개를 들자 익숙한 표시가 보이고, 소년 역시 저 곳이 파출소라고 알려주었다. 작은 마을답게 작은 파출소였다. 소녀는 파출소의 불빛이 보이는 곳에서 멈춰서서 잠시 보고 있다가, 소년을 향해 고개를 돌려 말했다.
"고마워. 그리고, 성가시게 해서 미안했어."
그 말을 남기고 소녀는 천천히 걸음을 틀어 파출소로 향했다. 몇걸음 걸어가다가 멈칫, 서서 소년을 보았지만, 검은 눈동자로 물그러미 응시하다가 다시 돌아섰다. 그리고 다시 느릿느릿 걸어 파출소를 향해 걸어갔다. 소년이 재차 불러세우지 않는다면, 소녀의 걸음이 다시 멈출 일은 없었을 것이다.
파출소에서 새어나오는 빛은 환했지만, 그 탓에 소녀의 뒷모습은 너무나 어두웠다. 파출소 안으로 모습을 감추기 직전까지.
>>992 음. 뭔가 상황적으로 소년이 저기서 굳이 또 말을 걸거나 하진 않았을테니 막레가 될 것 같네. 저게! 그냥 별 생각없이 시골 마을 배경 소년으로 굴려보고 싶어서 선레를 써본건데 재밌게 이어줘서 고마워!! 소녀의 어둠이 조금 궁금하긴 한데... 집에서 학대 비슷한 것. 혹은 자신에게 큰 기대감을 가진 것 때문에 부담스러워서 도망쳐 나온 걸까 싶기도 하고.. 아무튼 재밌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