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아서기 전, 그냥 인사치레로 했을지도 모르는 말이 조금은 그녀의 마음을 편하게 만들었다. 자신으로 인해 시간낭비가 되지 않았구나 하고. 그렇게 생각하고 보니 그녀 역시 약간의 동질감 비슷한 것이 속내 한켠에 잔잔하게 들었다. 하지만 그 뿐이다. 아무런 연고도 없는 곳으로 무작정 도망쳐 온 그녀와 친지가 그래도 살았던 곳으로 온 사내와 겹쳐보기엔 그 정도가 고작이었다. 돌아가는 길을 천천히 걸어가며 그녀는 조용히 생각했다. 내일부터는 산책 경로를 바꾸자고.
파문이 일었던 하루가 조용히 지나고 다음 날 아침이 되었을 때, 전날과 다름없는 시작에 그럼 그렇지 라며 또다시 느즈막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흐트러진 채 앉아있으니 이웃집 할머니가 마당에 물을 뿌리는지 시원한 물줄기 소리가 살짝 연 창문 사이로 들려온다. 잠시 그 소리를 들으며 잠의 여운을 물리치고, 느릿하게 움직여 남들보다 늦은 하루를 보내기 시작했다. 씻고, 밥을 먹고, 약간의 일을 하고. 그러고나니 다시 산책을 나갈 시간이 되었다. 챗바퀴처럼 일정하게 돌아가는 하루. 그래도 오늘은 다른 길을 산책할테니 조금은 다른 기분이 들려나 하며 집을 나섰을 때였다.
"...네, 네..? 제가요..?"
문 밖에는 누가 이미 있었는데, 전날 반찬을 가져다 준 이웃집 할머니였다. 어디 나가시는지 외출할 차림을 한 이웃집 할머니가 찬합을 들고와 그 집 사내에게 가져다줬으면 한다고 부탁해왔다. 원래는 본인이 가시려고 했지만 급히 나가봐야 할 일이 생겼다며, 산책 가는 길에 잠깐 들러주지 않겠느냐고. 당황해 어물어물하며 오늘은 그쪽으로 안 갈거라고 말하려던 그녀는 여기 온 뒤로 살뜰히 챙겨주신 것에 보답은 해야 하지 않겠는가 싶었다. 그냥 가져다 주기만 하는 거면 어렵지 않으니까. 어제랑 다를 거 없으니까. 그렇게 속으로 자기합리화를 한 그녀가 작게 고개를 끄덕이자 할머니는 매우 기뻐하시며 그녀에게 찬합을 맡기고 가셨다. 저멀리 가시는 할머니를 잠시 바라보다가, 그녀도 그녀의 일을 위해 걸음을 옮겼다. 전날과 같은 산책로였다.
가지런히 모은 손에 찬합이 든 종이봉투를 들고 걷다보니 어느새 사내의 집 근처까지 다다라있었다. 늘 이런 산책이었기에 별 생각이 없었는데, 오늘은 용건이 있어서 그런지 조금 느낌이 달랐다. 불안, 비슷한 무언가일까. 괜한 생각은 말자며 고개를 작게 젓곤 앞을 보며 천천히 걸어갔다. 길 너머 보이는 그 집을 보고 오늘도 사내가 나와있지는 않을까 싶어 집 쪽을 바라보며 가까이 가고 있었다. 밖에 있다면 얼른 전해주고 가야지, 하고 생각하면서.
하루동안 열심히 집을 청소하고 정돈해서 겨우 사람 사는 분위기로 만들어놓은 사내는 많이 지쳤는지 마루에 누워있었다. 집 안에 누워있어도 되겠지만 그래도 여기까지 왔으니 집 안보다는 마루가 시원하고 경치 보기도 좋겠지 싶어 한 시간 이상 자세를 유지하며 사내는 근처 경치를 구경했다. 도시에서는 전혀 볼 수 없는 푸른 풍경이 절로 눈을 편안하게 했고, 시끄러운 소음이 들리지 않는 한적한 분위기는 마음을 편안하게 했다.
솔솔 불어오는 바람은 몸에 쌓여있는 피로를 풀게 하기 딱 좋았고, 시골 특유의 맑은 공기는 지친 정신을 맑게 했다. 조금만 더 이대로 쉬었다가 방 안에 만들어둔 아틀리에 정리를 마저해야겠다고 생각하는 찰나 발소리가 들려왔다. 그러고 보니 어제 집안 정리를 한다고 피곤해서 바로 잠들어버린 바람에 마을 사람들에게 인사를 전혀 못 했다는 것을 떠올린 사내는 오늘이야말로 꼭 마을을 돌아다니며 제대로 인사해야겠다고 다짐하며 누운 몸을 일으켜세워 마루에 똑바로 앉았다.
곧 보이는 얼굴은 어제 집 앞에서 만난 여성의 모습이었다. 옆집이 아니고서야 이틀 연속 얼굴을 마주하는 것은 도시에선 꽤 힘든 일이었던만큼 사내는 괜히 신기함을 느끼며 벗어둔 신발을 신고 기지개를 쭈욱 켜며 마루에서 내려왔다.
"안녕하세요. 이렇게 또 보네요. 오늘도 산책 가는 길이세요?"
자신이 앞으로 살 집의 앞 길이 누군가의 산책길이라는 것은 역시 신기한 일이라고 생각하며 사내는 미소를 작게 짓고 그녀를 똑바로 바라봤다. 허나 남의 산책길을 방해하는 것은 역시 미안한 일이었기에 그녀가 얼마든지 지나갈 수 있도록 몸을 살며시 옆으로 치워 그녀가 앞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했다.
천천히, 조금씩 가까워지는 집은 어제보다 좀더 정돈되어보였다. 극적인 변화는 아니지만 전날과의 차이 정도는 그녀의 눈에도 보였다. 집 안도 정리하느라 바빴을텐데, 라고 생각하며 가던 중에 누가 마루에서 일어나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흩날리는 회색머리가 인상적이라 잠시 눈길을 빼앗겼다가 사내의 말에 퍼뜩 정신을 차렸다.
"앗, 아, 네, 안녕하세요..."
약간의 놀람을 담은 자색 눈동자가 사내를 한번 보고 슬쩍 옆으로 피했다. 시선을 마주하는 것이 부담스러운 것처럼. 종이봉투의 끈을 쥔 손도 알게 모르게 힘이 들어가, 안 그래도 흰 손의 손등이 투명해질 것만 같다. 어영부영 인사를 하고 잠시 입을 다물고 있던 그녀는 조금 늦게 사내의 물음에 대답을 했다.
"저, 오늘...은, 그쪽, 한테, 용건이 있어서요..."
산책이 맞긴 했지만 용건이 아니라면 이 길로 오지 않았을테니까. 그러니 오늘은 사내에게 용건이 있어서 온 거라 말하고 들고 온 종이봉투를 사내에게 내밀었다. 종이봉투 안에는 딱 봐도 직접 만든 건가 싶은 5단짜리 검은색 찬합과 작은 보온병이 가지런하게 들어있었다. 사내에게 그것을 받으라는 듯 든 채로 마저 얘기했다.
"옆집, 사시는 할머니가, 여기 사시던 분하고... 친분이 있었어서.. 그래서 그쪽 주려고 챙긴건데, 일이 생기시는, 바람에, 제가..대신..."
띄엄띄엄에 말끝을 흐리긴 했지만, 할머니에게 들었던 말과 왜 그녀가 이걸 가져왔는지 정도는 이해가 될 만큼은 얘기를 하고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도 어찌저찌 말은 했다는 약간의 안도감에서 나온 한숨이랄까. 이제 사내가 이걸 받기만 하면 그녀의 용건은 끝나고 각자 집으로 돌아가면 그만일거라 생각했다. 그리고 내일부터는 산책로를 바꾸면 될 거라고.
자신에게 용건이 있다는 말에 사내는 단 하루만에 무슨 용건이 생겼을지 의문을 품었다. 눈을 피하는 그녀의 모습에 뭔가 안 좋은 말이라도 하려고 온 것일까 싶어 약간의 불안감이 사내의 마음을 채웠다. 아무리 그래도 이사 온지 이제 하루가 지났는데 누군가에게 부정적인 느낌으로 있는 것은 사내로서는 원하지 않는 일이었다. 허나 그 또한 자신의 추측일 뿐이었기에 우선 용건이 무엇인지에 대해 사내는 생각을 돌렸다.
손에 쥐고 있는 종이봉투를 내미는 그녀의 행동에 사내는 얼떨결에 종이봉투를 받았다. 안을 들여다보니 검은색 찬합과 작은 보온병이 들어있었고 자연히 사내는 왜 이것을 자신에게? 라는 표정을 지으면서 다시 그녀를 바라봤다. 일단 확실한건 이 종이봉투 안에 들어있는 내용물이 자신에게 찾아온 용건임은 분명하다고 사내는 생각했다.
"옆집 사는 할머니요? 이걸 저에게?"
자신의 할머니 혹은 할아버지와 친분이 있다는 말에 사내는 어떤 사람일지를 떠올렸다. 그러고 보니 어린 시절, 시골집에 왔을 때 여러 어르신들이 할머니와 할아버지를 찾아왔던 것 같은데. 그 중 한 분이실까? 정말로 하루빨리 인사를 해야겠다고 생각하며 사내는 미소지으며 우선 종이가방을 내려놓았다.
"아직 제대로 인사도 못 드렸는데 이렇게 뭔가를 주는 어르신이 계실 줄은 몰랐어요. 꼭 찾아가서 감사 인사를 해야겠네요. 괜찮다면 어느 곳에 사는 분인지 물어도 될까요? 아. 그리고 이렇게 전해주러 와서 고마워요."
찬합이 들어있는 것으로 보아 아마 먹을 것이 들어있을 것 같다고 추측하며 나중에 식사를 할 때 먹으면 되겠다고 결론을 지은 사내는 잠시 뭔가를 생각하는 듯 하다 말을 이었다.
"혹시 산책을 자주 즐기신다면 괜찮은 풍경이 있는지 물어도 될까요? 아. 별 건 아니고 그림을 그리러 내려왔거든요. 그래서 혹시 좋은 풍경이 있으면 소재로 쓸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요."
(길가 중간에서 히치하이킹을 하는 당신을 발견하고는, 천천히 속도를 줄인다. 손은 조수석에 놓여져있는 샷건 쪽을 향해 뻗으면서 당신 앞에 세우고는 차 창문을 스르륵 내린다. 까만 미러 선글라스를 슬쩍 아래로 흘려 당신을 바라보다, 씩 웃는다.) 이런 곳에 손님이라니 드문데. 어디까지 가십니까?
>>7 모든것이 시작되고 모든것이 끝날지 모르는 곳으로 (처량한 얼굴에 눈물,먼지 범벅이된 하얀 가운의 여자가 무거운 서류가방을 든채 샷건의 등장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피우던 시가를 더 깊게 들이마시며 읖조린다. 옆구리에 낀 철로된 서류가방을 보여준다. 그 위로 유명 메이커가 선명하게 빛난다.)어때, 같이 가볼래? (같은 시각 그녀의 뒤에서 커다란 폭발이 터지면서 막무가내로 차에 타려든다. 그리고 큰 폭발 소리에 좀비들이 점점 모여든다.) 일단 가면서 이야기 하지 문좀 열어!
사내에게 종이봉투를 넘겨주고나자 빈 손이 새삼 가볍게 느껴졌다. 그녀의 집에서 여기까지라고 해도 고작 십여분에 불과한 거리를 들은게 전부인데. 그녀는 어쩐지 허전함이 느껴지는 손을 가지런히 모아 쥐고, 사내의 되물음에 고개를 끄덕였다. 자세한 자초지종까지는 몰라도 할머니가 그리 말하셨으니 들은 대로 전할 뿐이었다.
그녀는 사내가 종이가방 내려 놓는 모습을 힐끗 시선으로만 쫓다가, 이어진 물음에 시선을 돌려 사내를 보았다. 타인의 주소를 멋대로 알려줘도 괜찮을까 하는 생각이 앞섰다. 아무 연관도 없다면 알려주지 않겠지만, 나중에 빈 찬합을 돌려드리려면 미리 알고 있어야 하지 않을까. 가만히 혼자 생각을 해보고 괜찮겠다 싶어서 다시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대로 그녀가 왔던 길을 보며 간단히 길 설명을 해주었다.
"여기서, 쭉 간 다음.. 갈림길에서 왼쪽으로, 10분 정도 걸어가면, 마당에 감나무가 있는 집이 있어요. 거기..에요."
혹시 모르니 명패에 써있을 할머니의 성씨도 같이 알려주고 그럼 이만, 을 말하려 했다. 하지만 사내의 다음 물음이 그녀의 말보다 빨랐다. 미처 끊지 못한 말을 그대로 들은 그녀는 풍경과 그림이란 말에 살짝 흥미가 도는 눈빛을 보였다. 아주 잠깐이었지만.
"그림...인가요. 괜찮은 풍경, 이라면..."
대답하기에 앞서 또 잠시간 시간을 들여 생각에 빠졌다. 근 1년간, 마을 밖으로 나가진 않아도 걸어갈만한 곳은 여럿 가보았다. 딱히 좋은 풍경을 찾기 위한 것도, 그만큼 산책을 즐겨서인 것도 아니었지만. 몇 군데 인상에 남는 장소는 있었다. 그곳들을 떠올린 그녀는 못다한 대답을 마저 이었다.
"일출이 잘 보이는, 절벽 같은 곳이나, 저기, 안개가 낀 늪이나... 노을이 잘 드는 곳, 정도는, 알고 있어요.."
기억나는대로 몇군데를 말하고 보니 별로 좋은 곳들은 아닌거 같아서, 그냥 흔한 곳이라고 작은 소리로 덧붙였다. 시골 풍경이 다 거기서 거기 아니겠냐고.
여기서 쭉 간 다음 갈림길에서 왼쪽으로 시작되는 말을 들으며 사내의 눈동자는 그녀가 설명하는 길이 있는 방향으로 향했다. 마당에 감나무가 있는 집이라고 하는 것도 그렇고, 명패의 이름까지 알려줬으니 찾는 것은 상당히 쉬울 거라고 사내는 판단했다. 적어도 길치는 아니었기에 길을 잃는 일은 없을 거라고 사내는 확신하며 이내 다시 한 번 그녀에게 고맙다고 말을 전했다.
이어 자신의 질문의 답이 들려오자 사내는 자연히 그 풍경을 머릿속으로 상상했다. 안개가 낀 늪이 있다는 말에 늪도 있구나라며 신기해하며 다른 곳은 몰라도 거긴 꼭 가봐야겠다고 사내는 다짐했다. 물론 출발한다고 해도 지금 당장은 아니었다. 아직 마을 사람들에게 제대로 인사도 못했고 집 정비도 다 끝나지 않았으니까. 겉은 어떻게든 정비했다고 해도 비가 새는 곳이 없을지, 혹여나 문제가 되는 곳은 없을지 등등 확인해야 할 곳이 많았고 아직 아틀리에 정비도 마치지 못했으니 해야 할 것은 많았다.
"이곳에선 흔할지도 모르지만 막 여기로 온 저에겐 흔한 곳이 아닌걸요. 어릴 때 여기에 여러 번 오긴 했지만 사실 이 시골집 근처에서 멀리 벗어나본 적은 없어서요. 아무튼 알려줘서 고마워요."
계속 고맙다는 인사만 한다고 생각하며 사내는 괜히 소리를 작게 내서 웃었다. 허나 그 웃음소리를 어떻게든 잠재우며 고개를 돌려 어디에 있을지 알 수 없지만 그 늪이나 노을이 잘 드는 곳 등의 위치를 상상해서 있을법한 장소로 고개를 돌리다 아래로 내리며 다시 그녀를 바라봤다.
"그림 좋아하시나요? 만약 좋아한다면, 일단 정리가 다 끝나고 마을 어르신들에게 인사가 다 끝나면 추천해준 장소 같은 곳에 혹시 가게 된다면 풍경화 한 장 받아보실래요? 저도 손을 풀고 싶고, 삽화가를 꿈꾸고 있거든요. 그래서 어떤 느낌으로 사람들에게 보일지도 궁금해서요."
물론 좋아하지 않는다면 거절해도 상관없다고 이야기를 하며 사내는 두 손을 가볍게 휘저었다.
술기운이 오른 듯 붉어진 얼굴로 여자가 되물었다. 영 탐탁치 않아하는 어투였다. 게슴츠레 뜨인 눈으로 당신을 서너번 훑어보던 그녀는, 이내 싸구려 양주가 찰랑이는 유리잔을 기울인다.
" 제냐, 제냐예요. …그렇게 쳐다보지 마요. 가명이 아니라 진짜 이름 맞으니까. 정확히는 애칭이지만. 워낙 특이한 이름이라 알려주기 싫었는데. "
여자가 미간을 찌푸렸다. 마지막 잔이라 그런지 술이 유난히 쓰다. 말을 멈춘 채 몇 번 숨을 들이키던 여자는 한참이 지나서야 말을 잇기 시작했다.
" 뭐, 처음 본 사람 치고는 내 이야기도 잘 들어주고... 재미있었으니까 알려주는거예요. 풀네임은 안 알려줄거니까 그렇게 알고. "
이국적인 이름 치곤, 전형적인 한국인의 외모를 가진 여자였다. 검은 머리칼과 적당히 흰 피부. 짙은 갈색빛 눈동자에 특유의 분위기가 담긴 홑꺼풀 눈매. 평균을 겨우 웃도는 키와 여느 대한민국 20대들이 좋아할 법한, 짧은 유행을 함축한 옷가지. 여자가 자세를 고쳐잡았다. 지갑을 챙겨드는 눈치다.
눈가에 발그레하게 열이 오른 여자는 푸슬거리며 헤프게 웃는다. 그러다 동그란 눈으로 당신 얼굴을 살핀다. 시선에 몸을 조금 움츠린다. 우물쭈물거리면서도 그 말을 철회할 생각은 없는 듯하다. 이상한 구석에서 묘하게 고집이 있기라도 한가 보다.
제냐, 제-냐. 그 이름을 입 속에서 둥글둥글 굴려보던 여자는 당신의 말에 화들짝 놀라 고개를 젓는다. 그렇게 안 봤어요! 하고 변명하는 말이 귓가에 들리는 것만 같다. 커다란 두 눈을 두어번 꿈뻑거린다. 테이블 아래로 손가락을 꼼질거리다,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이야기한다.
"싫었다면 미안해요...그래도, 들으니까 기쁘네요."
그리곤 예의 그 헤프고 무른 웃음을 지어보인다. 꼭 그 기쁘다는 말이 온전한 진심인 것처럼. 여자는 손을 팔락거려 옷소매를 조금 아래로 한다. 양 손으로 잔을 잡고 홀짝이며 남은 술을 마신다. 그러다 당신을 말을 하노라면 술을 내려놓고 가만히 듣다가, 한참을 고민하듯 있는다.
"그, 예쁜 이름이라고 생각했어요. 아까 전에요...이상하게 본 게 아니라."
그 고민 끝에 나온 말은 실없는 종류다. 그리고, 라며 여자는 말을 잇는다.
"제 이름은 비예요. 비 온다, 할 때 그 비요. 따지자면 애칭이에요."
제냐처럼요. 짧게 덧붙인다. 여자가 작게 웃자 갈색 머리카락이 그에 맞춰 흔들린다. 촘촘한 속눈썹 사이로 빛이 닿자, 호박색에 가까운 색채로 눈동자가 반짝인다. 나잇대에 비해 상당히 작은 체구다. 그래서인지 작은 웃음에도 쉽게 흔들려 보인다.
여자가 힐긋 당신을 바라보다 오묘히 입꼬리를 접어 올렸다. 여자는 차가운 인상이었지만 제법 따스히 웃을 줄도 아는가보다. 그녀는 다시 시선을 거두어 정면을 바라보았다. 텅 빈 술잔이 어딘가 아쉽다. 기껏 오른 취기가 곧장 사그라질 듯한 그 감각이 싫었다. 여자가 천천히 고개를 기울여 턱을 괴었다. 별안간 들려온 당신의 목소리 때문이다.
" 그래요? 고마워라. "
여자가 비스듬히 입꼬리를 올리며 웃었다. 술기운이 가득한 웃음이다. 제정신이라면 결코 그런 미소를 보이지 않았겠지. 평소의 여자는 웃는 것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비—. 여자가 길게 입술을 늘려 당신의 이름을 중얼였다. 가볍게 입술이 붙었다 떨어지며, 당신의 이름이 톡 터져나온다.
" 좋은 이름이네. 내가 비오는 날을 좋아하거든. "
여자가 호박색 눈동자를 보며 말했다. 여자의 눈동자는 칠흑처럼 검었다. 그래서 꼭, 그녀의 눈을 볼 때면 깊이 모를 심해에 빠져드는 기분인지라, 그녀와 눈 맞추길 피하는 이들이 많았다. 그 새카만 어둠 속에 제 속내를 읽히는 기분이 썩 유쾌하진 않을테니. 눈은 마음의 창문이라 했던가. 인간은 눈과 눈을 통해 서로의 마음을 읽는다던데, 그녀의 눈은 아무리 들여다본들 그 무엇도 읽히질 않았다. 모든 불을 끄고 달빛 들어올세라 창문까지 닫고, 속마음이 적힌 공책을 꽁꽁 숨겨놓기라도 한 것처럼 말이다. 그래서, 여자는 그리도 투명한 눈빛을 좋아했다.
" …따라와요. "
여자가 한참을 침묵하다 대답했다. 의자에서 몸을 일으키니 세상이 어지럽다. 세상이 붉은건지, 가게의 조명이 붉은건지, 그녀의 눈동자가 붉은건지. 알 길이 없다. 여자는 비틀이는 걸음으로 뒷쪽 출입구의 문을 밀었다. 곧장 서늘한 공기가 들이치며 세상의 소음이 밀려들었다. 쇠어가는 가로등의 불빛이나, 낡은 자동차의 모터음이나, 뭐 그러한 것들.
여자가 품에서 담배갑을 꺼낸 뒤 담배 한 대를 입에 물었다. 살며시 깔린 시선 사이로는 거친 아스팔트 바닥이 보였다. 라이터를 몇 번 달칵대며 담배에 불을 붙인 여자가 그대로 첫 숨을 길게 내뿜어낸다. 그리곤 잠시 당신을 보고서는, 제 담배갑을 기울이며 한 대 가져가라는 듯 흔들대는 것이다.
" …솔직하게, 담배 피는 거 맞아요? "
여자가 다시 한 번 연기를 뿜어낸 뒤 물었다. 여자는 불안정한 자세로 딱딱한 벽에 몸을 기대고 있었다. 멍하니 울려오는 머리에 여자가 잠시 몸을 비틀였다. 글쎄, 그정도로 취한 건 아닌데…
14살. 살던 마을을 떠난 소년은 10년이 지나 24살의 청년이 되어 다시 마을로 돌아왔다. 검술과 마법을 제대로 공부하기 위해 전문 아카데미에 들어간 그는 아카데미를 정식으로 졸업했다는 제국의 사자 문양이 그려진 붉은색 완장을 왼팔에 차고 있었다. 제국에서 청년의 검술과 마법 실력을 인정했다는 그 증표는 제국 어디에서나 인정받는 자격 그 자체였다.
아카데미에 입학한 이들 중에서도 극소수만이 받을 수 있는 그 증표만 있으면 제국의 유력 가문을 지키는 기사가 될 수도 있었고, 제국 그 자체를 지키는 기사단에 들어가서 활동할 수도 있었다. 허나 사내는 아카데미에서 들어온 모든 권유를 거절하고 자신이 살던 마을, 즉 고향으로 되돌아왔다.
"10년만이지만 옛 모습 그대로네."
14살 때의 기억을 어렴풋이 떠올리며 사내는 미소를 작게 지으며 거리를 천천히 걸었다. 나름 귀족의 신분을 가지고 있었으나 그렇게 유력한 가문도 아니었던만큼 사내를 알아보는 이는 적어보였다. 마을 북쪽에 위치한, 귀족들이 살고 있는 거주구에 사는 작은 여러 가문 중 하나였을 뿐이었으니 어지간하면 이런 반응일수밖에 없다고 생각하며 사내는 우선 마을 북쪽으로 향하려 했다.
"앞으로 뭘할지는 일단 집에 돌아가면 생각해볼까. 오랜만에 인사를 드려야 할 곳도 많으니 말이야."
/뜬금없는 맥커터만 아니면 어떤 상황으로 이어도 오케이야! 10년 전에 친하게 지냈던 귀족 친구중 하나가 나와도 상관없고, 어떻게든 영입하려고 제국에서 몰래 미행해서 따라온 이로 이어도 별 상관없어!
당신의 말에 뒤늦게 따라 웃는다. 약간의 안도가 담긴 미소는 무해해 보인다. 꼭 누군가를 기분 좋게 하기 위해서만 존재하는 달달한 디저트처럼, 해치는 법은 모르고 사는 이같다.
"진심이에요."
기어들어가듯 작은 목소리로 말하는 지금도 그렇다. 자신의 감정을 죄 꺼내 늘어놓는 모습이 무해하다 못해 순진해 보인다. 사랑 받고 자라 환히 웃는 법과 사랑 주는 법을 자연스레 익힌 사람처럼, 웃는 모습이 자연스럽다.
"비오는 날의 어떤 부분을 좋아해요, 제냐는?"
투명한 눈동자가 당돌하게도 당신을 마주본다. 제가 빛이니 어둠이 두렵지 않다는 양 군다. 얼마든지 읽혀도 상관 없다는 것처럼 바라본다. 당신과는 정반대의 사람 같아 보인다. 어두운 길 가는 사람 길 잃지 말라 창문가에 불을 환히 밝혀놓았다. 어두운 밤 헤매지 말라 하늘에 별 총총 띄워놓았다. 꼭, 그런 사람 같다.
한참을 당신의 답 기다린다. 재촉하거나 말을 덧붙이지도 않고 당신의 선택을 기다린다. 그러다 목소리가 들려오노라면, 그제서야 종종걸음으로 당신의 뒤를 따라가며 "같이 가요!"하고는 종알거린다. 띔박질에 가까운 걸음으로 뒤따라가자면, 어느새 도시의 냄새가 훅 끼쳐온다. 저물어가는 몇몇 것들의 소리가 거리를 잔잔히 채운다. 여자는 서느다란 고요에 제 입을 꾹 다물어버린다.
그러던 여자는 제 시야에서 흔들리는 것을 보고서야 정신을 되찾는다. 내밀어진 담뱃갑의 로고를 유심히 바라본다. 하나 꺼내가려던 찰나, 저를 향한 질문에 고개를 들어 당신을 올려다 본다.
"그런 소리 자주 들어요. 잘 안 피게 생겼다고들 하더라고요."
옅게 웃는다. 빛을 등지고 있어서인지, 표정이 흐릿하다. 확실히 여자는 담배와 친하게 생긴 인상은 아니었다. 입에 무는 것은 달달한 막대사탕이 전부일 것만 같아 보였다. 그렇 것 치곤 담배를 꺼내들어 입에 무는 일련의 동작이 매끄럽다.
"가끔 피곤 해요."
여자는 불 좀 빌려달라 말하듯 턱을 살짝 치켜든다. 그제야 얼굴에 빛이 닿는다. 조금 지친 낯이다.
#말도 없이 늦어서 미안...추석이라고 내려갔다 올라갔다 하니까 정신이 하나도 없었지 뭐야. 너참치는 즐거운 연휴 보내고 있길 바라!
히어로의 삶도 만만치 않네. 힘내라, 힘내. 일단 마시고, (자연스럽게 술을 따라주고 턱을 괸 채 웃는다.) 빌런 협회는 언제든지 열려있다, 친구야. 적어도 지랄맞은 위계사회는 없더라고. (불판 위의 고기를 구워 당신의 접시에 올려주고는 자신은 집게로 집어든 고기를 입에 넣는다. 중간에 느껴지는 시선에 후드를 뒤집어쓴다.) 유명인이랑 고기 먹기 힘드네 거 참.
아니, 저기… (두 눈을 깜빡이며 상대를 살핀다. 다소 당황스러워하는 얼굴.) 일단 따라주니까 마시긴 하는데요. (확신 없는 얼굴로 잔을 매만지다 단숨에 들이킨다.) …건물에 감시 카메라라도 달아놨나? 오늘 뒤지게 깨진 건 어떻게 알았대. (딱히 놀란 기색 없이, 태연히 말을 받아치며 대답한다. 그러다 제 고기를 집어먹는 당신을 얼빠진 얼굴로 응시한다.) 그거 내 고기인데? 고기값 줄거예요? 뼈 빠지게 번 돈으로 산 건데? (다소 인색하다... 주변에서 느껴지는 시선에 다시 한 번 볼캡을 눌러쓰며 젓가락으로 고기를 집어든다.) 내가 아니라, 그 쪽 문제인 거 같은데. 얼마 전에 얼굴 팔리지 않았나? (웅얼거리는 히어로) 근데 담력 대단하다. 어떻게 대놓고 찾아올 생각을 다 해요? 민간인 많아서 내가 깽판 못 칠 줄 알고 그러나? (불판에 시선을 고정한 채 다시 고기를 집어먹는다.)
(소주를 한 번에 쭉 털어 삼킨다. 쓴 액체가 식도를 태운다. 걸어온 길에 대한 회의감과 함께.) 내 신념이 잘못된 건가? (자유로워 보이는 친구를 바라보다 모자를 눌러 쓰고 왔음에도 느껴지는 시선들에 쓰게 미소짓는다.) 너 여기 있는 거 알려지면 안되는데. 룸으로 갈 걸 그랬나. (후드를 더 푹 눌러 씌워주며 얼굴을 찌푸린다.) 내 방 갈래?
바다를 닮은 푸른 빛이 맴돌기는 하지만 평범한 검은 머리카락과 평범한 검은 눈, 그리고 평범한 학교의 교복이다. 검은 머리카락이 물 속에서 나풀거리며 명찰이 있을 가슴팍을 가리고 있어 이름은 확인하기 힘들었다. 평범치 않은 부분이야 이따금씩 느적거리는 꼬리 지느러미가 있는 치마 아래 부분이다. 투명하고 맑게 비치는 물 속에서 훤히 보이는 지느러미는 아마도 파랑색인 것 같았다. 빛이 비추거든 비늘이 반짝거렸다. 물 속에 있던 인어는 당신과 눈이 마주쳤고, 그때 당신에게 들린 목소리는 울먹거리는 것 같기야 했다지만 예쁜 목소리임이 확실했다. 신기한 일이다. 인어는 입을 움직이지도 않았는데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인어는 곧 수면 위로 고개를 내밀었다.
“인어 처음 봐? 대답 안 해?”
물 속에서 흩날리던 머리카락이 착 내려 앉는다. 아무도 없는 줄 알고 대낮임에도 이런 모습으로 무방비하게 꼬리를 내놓았는데 난데없이 누군지도 모르는 자의 등장이라니 달갑지 않았다. 경계심이 말투와 목소리에 뚜렷히 드러났고, 그리고 차마 숨기지 못한 불안도 함께했다. 겁을 내고 있는지 가시를 돋친 고슴도치가 벌벌 떨고 있기라도 하는 것마냥 말투와 목소리만이 날서있었다. 주먹을 꼭 쥐고 있는 두 손이 그 증거였다.
하늘은 맑고, 바람 한 점 없는 이런 날씨엔 산책을 하지 않으면 역시나 곤란하단 말이지. 하지만 아무런 의미없이 그저 한가한 시간을 때우려고 여기까지 걸어온 것은 아니다. 애초에, 여기 산책 코스가 아닌걸? 그렇게 얼핏봐도 낡아보이는 책을 들고 바닷가에 온 내게 놀랍게도 첫 시도만에 좋은 기회가 주어졌다.
" 도감번호 22번, 인어. 인외의 존재이지만 인간들 사이에 섞여 생활하기에 그 존재를 쉬이 눈치채기 어렵다. 가끔 인적이 드문 바닷가에서 그 존재를 확인할 수 있는데, 상당히 아름답다고 한다. "
바닷가의 인어가 내게 뭐라뭐라 말하는 것 같았지만 잘 들리지 않아 조금 가까이 다가간다. 확실히 아름다운 외모라 사람들이 인어에 왜 홀린다고하는지도 알 것 같았고. 그리고 인어들은 대게 자신들의 정체를 들키는 것을 두려워한다, 라고 여기 적혀있네.
" 안녕. 혹시 실례지만 네 그림을 여기에 좀 그려도 될까? "
증조할아버지부터 내려오던 이 책은 여러 인외의 존재들의 정보와 그림이 실려있다. 그냥 간단하게 도감이라곤 하지만 요괴라는 말은 쓰지 않는다. 의미가 안좋잖아, 대부분 인간한테 무해한데. 하지만 역시 인외의 존재를 만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라 많은 그림들이 비어있다. 그렇기에 나는 이 그림들을 채우기 위해서 이리저리 돌아다니고 있는 것이다. 물론 학생이라 이 근처가 전부지만.
" 너무 경계하지 않아도 돼. 나는 조금 특별한 인간이고 특이한 사람일뿐이니까. 여기에 그림만 그리고 갈께. "
도감번호 22번. 순간 심장이 쿵 내려앉는 기분이 들었다. 예로부터 인간에게 정체를 들켜서, 인간과 얽혀서 좋은 끝을 본 인어는 드물었다. 들려오는 이야기만 해도 그렇다. 육지에, 인간 사회에 인권이라는 개념이 생기기 전에는 같은 인간조차 구경거리와 희롱거리로 삼아 유희를 즐기던 동물에게 좋은 감정은 없다. 수면 위로 고개를 내밀었던 인어의 몸이 뒤로 물러난다. 수면에 이는 파동은 작은 파도 뿐만이 아니라 몸의 떨림도 그 원인이었다. 저 인간의 손에 붙잡히면 해부당하고 마리라. 눈꼬리에 금방 굵은 물방울이 맺히더니, 아룽거리다 바다 위로 데굴 굴러 떨어진다.
“그림만 그린다는 걸 어떻게 믿어. 어린 인간은 더 잔인해.”
이제는 아예 겁을 먹어 움츠린 인어는 날이 선 목소리조차 내지 못 했다. 눈물 방울은 계속해서 맺히고 떨어지고를 반복하였으며, 인어는 도망칠 방법을 강구 중이었다. 바닷속으로 도망쳤다가는 바닷속 저 깊이 원래 인어들이 나고 사는 곳을 들켜버릴까 걱정되었고, 육지 위로 올라 달려보자니 자신의 인간 다리를 다루는게 서툴었다. 어설픈 뜀박질로는 금방 잡히고 말텐데, 아무리 생각해도 뾰족한 방도가 생각나지 않아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인간 앞에서 눈물을 보이는 것조차 수치스러운데 울음 소리까지 내기 싫었다.
“이러니까 계속 바다에 살고 싶었던건데….”
이것은 인어의 목소리가 당신을 만나기 전부터 목소리가 울먹거리던 이유였을테다. 조그맣게 울먹거린 인어는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는 채로 푸른 하늘 아래서 눈물 방울을 반짝거렸다.
어, 우는거야? 우는거야?! 정말 단순하게 그림만 그리러 왔는데, 말 몇마디 걸었을뿐인데 갑자기 울어버린다. 아직 아무런 짓도 안했는데 울어버리면 나도 당황할 수 밖에 없다. 펜을 들고 있던 손이 너를 향해 있다가 당황해 펜 끝이 살짝 떨린다.
" 너도 어리잖아! 너 교복이 근처 고등학교 교복인데, 나는 바로 옆학교에 다니고 있거든. "
어린 인간이 더 잔인하단 말에는 동의하는 편이고 지금도 인어가 있다는 말이 들려오면 잡아가려고 난리가 나겠지. 하지만 나는 누구에게도 이 사실을 말할 생각이 없었다. 증조할아버지부터 내려오는, 도감을 채워넣는 사람들이 무조건 지켜야하는 것이 있기 때문이다.
'그들을 무조건 지켜줄 것'
아버지가 불의의 사고로 돌아가시고 내 앞으로 떨어진 막대한 유산은 그저 내가 놀고먹으라고 주어진 것이 아니다. 모든건 목적을 갖고 있으니 나는 그것을 지켜야한다. 그게 할아버지가 어떤 것과 한 약속이라고 했으니까. 그 댓가로 막대한 부를 약속 받았고 아버지까지도 그 의무를 성실히 하고 계셨다.
" 정말 그림만 그릴께. 정 못믿겠으면 어떤 방식으로 약속을 해도 좋아. 인어는 인어만의 방식이 있을테니까. "
증조할아버지의 단순한 호기심에서 시작된 도감은 이제 그것들을 지키기 위한 서적으로 그 목적이 변했고 아직도 채워지지 못한 많은 그림들을 채워넣어야할 의무가 있다. 내가 채워넣을 수 있는 첫번째 페이지를 이렇게 쉽게 날려보낼 수 없지.
이제는 학교까지 들켜버렸어. 학교를 뒤져서 학생 하나 찾아내는게 어려운 일도 아닐테고, 이제 어딘가로 끌려가서 연구 대상이 되는 건 시간문제야. 몸이 차갑게 식는 기분이 들었다. 인어가 바닷속에서 저체온증으로 죽었다는 웃긴 이야기가 생기겠다고 생각될 정도였다. 인어는 하염없이 눈물만 흘리나 싶더니, 손을 들어 눈가를 훔쳐냈다. 눈가는 금방 빨갛게 올라왔다. 인어의 눈물은 진주가 된다는 허무맹랑한 이야기 때문에 잡혀가 죽은 인어도 있는데, 인간이 바다를 오염시켜서 인간들과 섞여 살아야한다고 했다. 바다에는 쓰레기가 넘실거리기 시작했고 아무리 깊고 머나먼 바다로 떠나봤자여서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그래서 인어는 성년이 되면 육지로 올라온다.
“저주같은 거….”
그런 거 할 줄 알 리가 없잖아. 옛날에야 인어로서 계속 바다에 살아가니까 다들 배우고 알아뒀겠지만, 지금은 다들 성년이 되면 육지로 올라오는데 저주같은게 계속 이어진다고 해도 알고 있지는 않았다. 인어는 훌쩍거리는 소리를 내다가 당신을 올려다보았다. 내가 죽음을 감수하고 너를 믿어야한다면, 너도 죽음을 감수하고 나를 믿어줘. 물기어린 손이 당신을 향해 뻗었다.
“너도 들어와서 약속해. 숨 모자르면 내 숨 나눠줄게.”
인간도 바닷속에서 숨 쉴 수 있는 방법. 인어의 숨을 나누면 된다. 이 방법으로 여러 인어들이 여러 인간을 살렸다. 단순히 손가락만 걸고 약속하겠지만, 바닷속에서는 쉽사리 죽음에 이를 수 있는 인간에 불과한 당신이 바닷속까지 따라 들어와준다면 그림만 그리겠다는 말에 대한 믿음은 가질 수 있을 것 같았다.
아, 나랑 비슷해보이는데 나보다 나이가 많다던가 .. 아니면 인어는 인간보다 성년이 되는 시간이 짧은건가? 뭐가 됐던간에 내가 잘못한 것도 없는데 저렇게 울어버리는게 어이가 없으면서도 좀 마음이 아프다. 인간은 자신과 다른 것들을 배척해오곤 했으니까. 호기심이던, 악의던간에. 목숨을 걸어야하는 일이라고 도감 가장 첫 페이지에 써있는 할아버지의 메모처럼 인간에 대해 무한한 적대감을 가진 것들도 존재하곤 했다. 기본적으론 무해하다고해도 적대감을 가지는 것은 별개의 일이다.
" 물 안에 들어오라고? "
흠칫한다. 육지는 나의 영역이지만 물 안쪽부턴 인어의 영역, 상대가 적의를 품으면 그대로 목숨을 잃을수도 있다. 거기에 어릴때 강에 빠져서 거의 죽기 직전까지 갔던 기억이 스멀스멀 올라온다. 바다는 서서히 얕아진다곤 하지만 아직까지도 물이 허리 위로 올라오면 숨이 막히는 기분이 드는 나에겐 너무나도 나쁜 제안이다.
" 아니, 정말 나는 나쁜 짓을 할 마음이 없는데. "
라곤 말해도 나도 상대방의 마음을 알 수가 없어서 방어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는 주제에 이런 말을 하는게 설득력이 없다. 상대방이 하는건 뭐든 하겠다고 해놓고 물이 무서워서, 인어가 무서워서 이러고 있는게 어이가 없기도 하다. 물에 젖은 손이 나를 향해 뻗어왔고 흔들리는 눈으로 그 손을 바라보던 나는 숨을 크게 들이쉬고 서서히 인어에게 다가가기 시작했다. 자갈이 널린 해변을 지나서 신발에 파도가 스친다. 찰박, 찰박하던 소리는 발가락 사이사이로 물이 들어차는 느낌과 함께 사라지고 차가운 느낌이 발목부터 서서히 올라온다. 인어가 있는 곳은 더 깊은 곳이라 금방 허리까지 차오른 바닷물에 잠시 걸음을 멈춘다.
" 나 정말 물이 무섭거든? 지금도 심장이 쿵쾅쿵쾅거려. "
여러번 심호흡을 해도 심장박동이 가라앉을 생각이 없어보인다. 몇발자국을 더 가야하는데 한발자국도 내딛을 수가 없어서 그저 너를 바라보고만 있다. 아빠, 어쩌면 생각보다 아빠를 일찍 보러갈 것 같아요. 주먹을 불끈 쥐고 눈을 질끈 감고, 나는 천천히 한발자국을 내딛는다. 차가운 감촉이 서서히 상반신을 덮어가고 있는 것을 느꼈지만 보지 않으면 조금은 괜찮은 것 같다. 그렇게 눈을 감고 손을 뻗은채 네가 있을 것 같은 방향으로 조금씩 나아갔다.
그녀는 추위로 얼어붙은 나무 사이를 다람쥐마냥 돌아다니며 습기를 머금은 것 사이에서 능숙하게 크기가 있고 상태 좋은 나뭇가지들을 골라내더니, 짧은 시간에 제법 많은 양을 품에 안아 들고서 작게 중얼거렸다.
" 이 정도면 되려나? "
꼼꼼하게 골랐지만 그럼에도 성이 안 차는지 여자는 나뭇가지의 이곳저곳을 돌려보며 한참을 확인하고 나서야 지금까지 향하던 방향과는 정 반대 방향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발목까지 -사실 발목보다 조금 더 높게 쌓인 눈 위를 한 걸음 한 걸음 내딛으며 앞으로 나아갔다. 세상은 온통 눈으로 덮여 새하얗고, 비슷한 생김새의 나무로 들어차 있었다. 이처럼 사방이 똑같은 풍경 속에서도 그녀의 발걸음에는 망설임이 없었다. 오히려 지도를 꺼내지도 않고 주변 한 번 둘러보지 않는 그녀는 마치 이곳의 지리를 전부 꿰고 있는 것 같아 보였다. 그렇게 한참을 걸어가던 그녀는 저 멀리 작은 빛이 보이기 시작하자 슬며시 미소를 지었다.
" 나 왔어요-."
그녀가 도착한 곳은 나무로 지어진 -그러나 정교하고 튼튼하게 지어진 듯 보이는 집의 문 앞이었다. 창문 밖으로는 모닥불의 밝은 빛이 새어 나와 바닥에 쌓인 눈을 주홍색으로 물들이고 있었고, 작은 틈으로는 따뜻한 코코아 향기도 조금씩 새어 나오고 있었다. 그녀는 서둘러 어깨로 문을 밀고 안으로 들어갔다.
산에도 겨울이 찾아왔다. 마을 뒷편에 있는 야트막한 산이지만 숲이 우거지고 생각보다 위험한 동물들이 많아 이곳의 산장은 없어서는 안될 중요한 곳이면서도 위험하다. 마을 대대로 산장지기를 맡아온 그의 집안이었고 그도 산장지기가 된지 많은 시간이 흘렀지만 위험할 때가 종종 있었기에 겨울에는 입산을 금한다. 하지만 그런 그에게도 말릴 수 없는 사람이 한명 있었으니.
" 겨울에는 위험하니까 오지 말라고 했잖아. "
눈이 오지 않아도 위험한 겨울산에 눈이 이렇게나 잔뜩 왔는데도 올라오다니. 정말 산신령님이 지켜주기라도 하는 것인지 그에겐 항상 큰 의문이었다. 자신도 돌아다니면서 곰을 종종 만나는데 어떻게 그녀는 한번도 그럴때가 없는지. 그리고 그녀는 항상 땔감이 다 떨어져갈때쯔음 땔감을 한가득 들고 오곤 했다. 마치 여기 사정을 속속들이 다 알고 있는 것처럼. 이것도 그에게는 더할 나위 없이 궁금증이 생겨가는 항목이다.
" 곰이라도 만나면 어떡하려고 그래. "
이렇게 말한 것도 수십수백번이라 톳씨도 안먹힐 것을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할 말은 해야하는 그였다. 자연스럽게 의자를 내어주면서 그녀에게 권유한 그는 코코아 가루를 컵에 넣고선 난로 위의 주전자를 들어 붓는다. 은은하게 퍼지던 코코아 향기가 더욱 진해지고 여자에게 코코아를 건네준 산장지기는 다시 본래 앉아있던 곳에 등을 깊숙하게 묻는다.
" 여기 올라오는 것도 만만치 않을텐데 안힘들어? "
물론 야트막한 산이라 산세가 험하지는 않고 산장까지 오는 길도 잘 닦여있어서 평소엔 괜찮지만 지금은 눈이 잔뜩 와있을때다. 산장까지 올라오는 길은 대충 눈을 치워두긴 했지만 그래도 올라오는게 힘들었을텐데 항상 가벼운 몸놀림으로 슉슉 올라오는 것이 여간 신기한게 아니라는 생각을 항상 하고 있었다.
그녀는 마치 영역을 과시하는 고양이처럼 뿌듯한 표정과 당당한 말투로 말했다. 그리고 저가 없었으면 그가 귀찮게 나무를 구하러 나가야 했을 거라면서 뻔뻔스럽게 칭찬까지 요구했다.
" 그리고, 이렇게 혼자 있으면 심심하니까요. "
상대는 심심하다는 말이나 의견을 내비치지도 않았는데 잘도 혼자 그렇게 이야기하더니 그에게 물어보지도 않고 곧바로 자연스럽게 모닥불 앞으로 향했다. 곧 불에서 얼마의 거리를 두고 천을 깔더니 모아 온 나뭇가지를 말리려는 듯 그 위에 가지런히 내려놓았다.
" 지금까지 잘 피해왔으니까 괜찮아요. 전 여기서 곰의 'ㄱ'자도 본 적 없는걸요? 그리고... "
가져온 땔감의 정리를 마친 그녀는 그가 권해준 의자에 앉으며 수십수백 번이나 들어온 그의 말을 수십수백 번째 자연스럽게 넘겨버렸다. 곧 고맙다 말하며 코코아를 받아들고는 오히려 중요한 비밀이라도 이야기하려는지 한껏 목소리를 낮추고 몸을 조금 숙이며 당신에게도 몸을 낮추라 팔랑팔랑 손짓을 해 보였다. 이 날씨에 이곳에 올 사람도 거의 없고 집에도 이들 이외의 외부인은 없을 테지만, 그녀의 행동은 마치 근처의 누군가가 듣는걸 경계하는 것처럼 보였다. 곧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그녀가 그에게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 사실 전 눈의 요정이라서요. 곰이랑 만나도 제가 이겨요. "
어른이 되어서는 한참 작은 어린아이들이나 할법한 -심지어 이젠 어린아이들도 하지 않는 농담을 진지하게 말하더니 결국 본인도 우습게 느껴졌는지 얼굴에 숨길 수 없는 웃음기가 묻어났다.
" 전혀요-. 음, 사실 힘들지 않은 건 아니지만, 이 코코아만 마시면 전부 사라져서 괜찮아요. "
바로 여기 앉아서요. 자신의 지정석이라도 되는 것 마냥 앉은 자리에서 발을 톡톡 구르며 장난스레 웃었다. 눈을 좋아하는 성격 탓에 어렸을 적부터 겨울만 다가오면 항상 이리저리 쏘다니며 눈을 헤치고 다녔던 탓인지 이런 날씨는 그녀에겐 놀이터나 다름없었다. 사실 이곳에 찾아오기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는 딱 한 번, 눈에 빠져 넘어질 뻔했던 날이 있었지만 이것도 하루가 지난 후에는 언제 그랬냐는 듯 이전보다 더욱 자유롭게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어쩌면 이런 면에서는 눈의 요정이라는 말도 틀리지는 않는 듯 싶었다.
말해도 듣지를 않으니 포기를 할법도 한데 산장지기는 그럴 생각이 없어보인다. 보통의 산장지기의 이미지와는 다르게 많이 젊어보이는 그는 이 눈 앞의 여자가 겨울에는 안전하게 따뜻한 집안에 있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겨울엔 산장에서 지내야하는 그도 내심 그녀가 올라오는 것을 바라고 있었지만 철저하게 숨기고 있을 뿐이다.
" 그래도 다음부턴 올라오지마. "
항상 이런식으로 잔소리가 끝이 나지만 또 다음에 올라올테고 같은 내용이 반복된다. 그렇게 깊은 한숨을 내쉰 그는 여자가 늘어놓은 나뭇가지들을 솜씨 좋게 다시 놓는다. 조금 두께가 있는 것들은 앞쪽으로, 얇은 것들은 뒤쪽으로. 빠르게 일을 마친 산장지기는 여자가 늘어놓는 말에 헛웃음을 지어버린다. 눈의 요정이라니 정말 어이가 없다는 생각을 한다.
" 그래도 한번도 곰을 안만나는 것을 보면 정말 뭐가 있나봐. "
물론 곰을 만나는게 쉬운 일은 아니고 주기적으로 총성을 내서 곰의 접근을 막곤 하지만 겨울이라 먹잇감이 부족한 곰이라 겨울에 몇번은 마주치곤했다. 산장지기도 약간의 긴장을 하고 지내는 곳에서 저렇게 천진난만한 태도라니 본인은 아니더라도 정말 눈의 요정이 지켜주는거 아닐까, 하고 산장지기는 생각한다. 그래도 곰이랑 만나는 일은 없게 해야하니까 내려가는 길엔 산장지기 본인이 동행할 생각이다.
" 나도 어릴때 아버지를 따라서 산장을 올라와서 마시는 코코아가 제일 맛있었어. "
산장을 물려받기엔 이른 나이였지만 전 산장지기, 그러니까 남자의 아버지는 산속의 조난자를 구하러 갔다가 곰에게 습격 당해 명을 달리했다. 산에 가까운 마을은 산장을 지키는 자가 없으면 겨울산의 곰이 마을로 내려오는 일도 있었기에 누군가는 산장을 지켜야했고 결국 대를 이어서 그가 선택된 것이다. 물론 언젠간 자신이 맡아야하는 산장이었기에 불만은 없었지만 그도 긴 겨울을 혼자서 보내야한다는 사실에 간혹 외로움을 느끼곤 했다.
" 이장님은 잘 계시니? 듣자하니 몸이 안좋으시다고 하던데. "
마을 소식은 주기적으로 올라와서 식량을 내려놓고 가는 마을 사람들에게 들을 수 있다. 곰의 습격에 대비해서 여러명이 우르르 몰려와 짐을 내려놓고 안부를 주고 받곤 하는데 산장지기는 그때를 가장 좋아했다. 음식이 생기는게 아니라 사람들이 잔뜩 있어서. 하지만 이렇게 혼자 올라오는 것은 위험하다는 것 또한 그가 갖고 있는 생각이다. 거실 겸 부엌과 방 두개로 이루어져있는 작은 산장에서 그는 말린 육포를 가져와 뜨거운 물에 불린다. 산속이라 혹여 불이 날까 난방을 제외하고서 불은 최소한으로 쓰고 있었기에 주로 먹는 것도 이런 육포 같은 저장식들 뿐이다. 그러다 여자를 바라본 산장지기는 찬장에서 작은 과자를 꺼내서 건네준다.
" 너가 좋아하는 과자지? "
저번에 마을 사람들이 가져왔던 것이다. 최근에 눈이 많이 와서 식량을 가져다주는 횟수가 줄어서 이런 간식거리는 아끼고 있었지만 여자에게도 육포를 줄수는 없었으니까.
진지한 척 잠깐 고민하는 모습을 보이더니 곧바로 가볍게 대답을 내놓았다. 그러곤 장난스레 거만한 표정을 보이면서 코코아를 한 모금 마신다. 지금 무슨 말을 하든 그녀는 기어코 다시 이곳까지 올라올 테니 사실상 어떤 대답이 나오든 무의미한 일이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그의 한숨에 숨죽여 웃더니 더이상 말도 않은 채로 마치 한 폭의 아름다운 명화를 눈앞에 둔 사람처럼 눈을 빛내며, 나뭇가지를 정리하는 그의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크기별로 착착 정리되는 나뭇가지들을 바라보는 건 언제나 신기하고 즐거웠다.
그녀는 뭐가 있나보다는 그의 말에도 그저 조용히 미소 짓기만 했다. 사실, 뭐라 말해주고 싶어도 그녀 역시 자신이 곰을 만나지 않을 수 있었던 정확한 이유는 알지 못했다. 어느 날은 혹여 이곳으로 올 때 가지고 있던 무언가가 곰을 쫓아내기라도 하는 건가 싶어 산장으로 향할 때 들고 갔던 물건들을 전부 떠올려보았지만, 그녀가 가지고 있던 물건이라곤 애초에 마을 사람들도 가지고 있을 것들 뿐이었다.
" 어쨌든, 덕분에 이렇게 만날 수 있잖아요? "
결국 그녀가 내놓은 건 그의 말에 대한 대답이 되어주지 못했다.
" 그럼 이건 대대로 내려오는, 산장지기의 특별한 코코아네요? "
그녀는 그를 바라보며 손에 들린 코코아잔을 조금 들어보였다. 자신이 지금보다 훨씬 어렸을 적에는 곰으로 인한 사람들의 죽음을 겪고, 또 겨울이 오면 산으로 올라가는 그들을 보며 산에서 떨어진 곳으로 마을을 옮기면 곰으로 사람이 죽는 일도 없고 누군가가 외롭게 산으로 올라가지 않아도 될 거라는 생각을 했었다. 그리고 이장님에게 찾아가 철없이 마을을 옮기자 울며 떼를 쓰기도 했었다. 물론 어느 정도 나이가 차고 나서는 그런 말을 꺼내지 않게 되었지만, 오히려 지금은 겨울이 되면 직접 산장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 약을 드시고, 지금은 조금 나아지셨어요. 별다른 일만 없다면 이제 괜찮을 거라곤 했지만... "
그녀도 이장님의 상태가 쉽게 나아지지 않을 거라는 것은 직접 두 눈으로 보았기에 알고 있었다. 마을 사람들이 하는 괜찮다는 말의 대부분이 사실은 희망 사항에 가깝다는 것 역시 모르지 않았다. 다른 계절 -이를테면 여름이나 가을보다 유독 겨울에 앓는 병들이 더 지독하고 끈질겼다. 이장님이 앓고 계신 병도 원래는 그리 위험한 것이 아니었지만 나이 때문인지 계절 때문인지 약을 먹어도 큰 효과를 보이지는 못하고 있었다.
" 아, 맞아요! 좋아해요! "
그녀는 컵을 내려다보며 잠시 조용히 있다가, 그가 과자를 건네자 반가운 걸 본 것처럼 좋아하며 말했다. 하지만 말과 다르게 그녀의 손은 그가 준 것을 받을 생각이 없어 보였다. 오히려 본인이 들고 온 가방을 집어 그곳에 손을 넣고 무언가를 꺼내려했다.
" 하지만 오늘은 괜찮아요. "
" 바로, 이게 있으니까요. "
그녀는 가방 안에서 와인병과 주머니를 꺼냈다. 그녀가 꺼낸 주머니 안에는 사탕 조금과 비스킷, 아몬드와 호두, 작게 잘려 포장된 치즈 조각 따위가 가득 들어있었다. 그러면서 안주가 되려면 과자도 좋지만 육포가 더 좋지 않겠냐며 웃었다. 가져온 와인은 아직 손대지 않은 새것인지, 살짝만 흔들어도 제법 묵직한 찰랑거림이 느껴졌다. 내려갈 생각을 하고는 있는 것인지 아주 작정을 하고 가져온 듯 보였다.
어차피 그도 여자가 말을 들을거란 생각은 안하고 있었다. 이런 말을 한다고 올라오지 않을 사람이라면 진즉에 올라오지 않았을 것이다. 저 장난스럽게 보여주는 표정만 보아도 그녀가 앞으로도 쭉 산을 오를 것이라는걸 누구나가 알 수 있을테니까. 그리고 산장지기는 그녀의 말에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긍정한다. 아무리 홀로 지내는데 익숙해졌다고해도 사람인 이상 외로움을 느낄 수 밖에 없으니까. 내심 그녀가 올라오지 않으면 어떡하지, 하고 남모를 걱정을 하기도 했다.
" 아버지도 할아버지와 함께 마셨을테니 정말 그 말이 맞을지도. "
물론 들어가는건 평범한 코코아에 불과하지만 이곳에서 마시는 코코아는 특별하니까. 어릴땐 산장에 올라가는게 무섭기도 했고 힘들어서 가기 싫다고 칭얼대곤 했지만 산장에 올라와서 마시는 코코아와 아버지가 내어주시던 간식들을 먹으면서 힘들었던 것들은 금방 잊어버리곤 했다. 간혹 곰을 마주치면 정말 무섭기도 했지만, 그때마다 지켜주시던 아버지가 지금도 생생히 기억난다. 그러다 여자의 말에 산장지기의 얼굴이 조금 어두워진다.
" 이장님도 나이가 많으시니까, 슬슬 아들에게 자리를 물려주시면 될텐데. "
이장님은 마을에서 가장 나이가 많으신 분이었지만 나이에 비해서 상당히 정정하신 편이었다. 하지만 최근에는 기력이 쇠하셔서 한번 아프시기 시작하시더니 좀처럼 나을 기미가 보이지 않아 비록 산장에 올라와있었지만 그에게도 꽤나 걱정거리다. 마을 일은 아들에게 맡기고 편히 쉬셔도 괜찮을텐데 고집만큼은 나이가 들어도 수그러들 기미가 보이질 않는다.
" 그건 또 어디서 가져왔어? "
요즘 같은 세상에 와인 구하는게 어려운 일은 아니지만 그래도 저렇게 묵직한걸 보면 무거울텐데 저런걸 들고 여기까지 잘 올라오다니. 산을 매일같이 오르락내리락하는 산장지기에게도 그것은 미스테리한 일이었다. 그가 창 밖을 바라보니 눈이 조금씩 다시 내리고 있었고 바깥 기온을 보여주는 온도계가 조금씩 내려가고 있었다. 다시 추워지려는걸까, 산장지기는 그렇게 생각하며 새 컵을 두개 가져오며 말했다.
" 조금만 마시는거야. "
그녀가 가져온 여러 안주거리들은 여기선 꽤 먹기 힘든 것들이라 맛있어보이긴 했지만 산장을 지키는데 술에 취해버리면 곤란하다. 무엇보다 하산할때 산 입구까진 같이 내려가줄 생각이라, 적어도 제 정신을 붙잡을 정도까지만 먹어야했다. 하지만 산장에서도 혼자 술을 홀짝대며 마시는 산장지기에게 이 정도 술은 음료수에 불과한 것이긴 하다. 하지만 여자가 몸을 못가누면 산에서 위험해질수도 있으니까, 적당히 먹이곤 내려보낼 생각이었다. 그녀에게 술을 받아서 코르크를 딴 그는 잔에 반 정도 채워서 여자에게 건네주고 자신의 몫도 따라서 와인병을 바닥에 내려놓는다. 흘리지 않게 마개를 다시 꼭 닫은채로.
" 여긴 왜 자꾸 올라오는거야, 심심해서? "
마을이 좀 더 놀기 좋지 않나, 하고 생각해본다. 그의 친구들도 마을에 있고 그녀의 친구들도 마을에 있다. 그리고 음식점이나 술집 같이 놀기 좋은 공간이 마을에도 있는데 어째서 여기까지 힘들게 올라오는지 예전부터 궁금하긴 했다.
혼자서 멋대로 당신과 작은 -그리고 당신의 머리카락이나 눈 색을 똑 닮은 어린아이가 그와 함께 산장에서 코코아를 마시는 모습을 상상해 보는지 코코아가 담긴 자신의 잔을 눈높이까지 들어 올렸다가, 대충 아이의 키 높이 즈음까지 내려보며 웃었다. 그녀는 조용함이 아니라 사람의 말소리로 가득 찬 산장을 떠올리며 컵의 마지막 남은 코코아를 쭉 마셨다.
" 마을에 대한 애정이 남다르셨던 분이니까요. 아마, 쉽게 놓고 싶지 않으신 거겠죠. "
그녀의 눈동자가 슬픔으로 가라앉았다. 자리를 물려주면 된다는 그의 말에, 일은 자신에게 맡기고 쉬시라며 이장님과 그 아들이 실랑이하던 모습을 떠올렸다. 양쪽 모두 양보할 수 없는 것이 있었던 탓에 생기던 그 작은 다툼마저 이제 볼 수 없게 되었다는 사실은, 그녀에게 이장님의 병이 깊어지고 있다는 것을 자꾸만 일깨우게 만들었다. 그녀는 먹먹해진 기분으로 조용히 컵의 손잡이만 만지작거렸다.
" 당연히 집에 있는걸 가져왔죠. "
그녀의 부모님이 와인을 좋아했던 탓에 집에는 온갖 종류의 와인들이 보관되어 -정확히는 수집되어 있었다. 어렸을 적 자신과 동생에게 나이가 차면 조금은 꺼내 마셔도 된다고 했으니 한 병 정도는 가져와도 상관없을 것이었다. 그녀는 당신을 따라 고개를 들고 창밖에 내리는 눈을 바라보다가 자연스럽게 그가 가져오는 컵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그녀는 그가 잔에 술을 따르는 동안 작은 허밍과 함께 주머니를 펼쳐 안에 있는 것들을 골라먹기 좋게 분류해 두었다. 장작 타는 소리와 함께 들려오는 작은 노래가, 그녀가 지금 즐거워하고 있음을 드러내 주었다.
" 정말 조금만 마실게요. 걱정 마요-. "
잔을 건네받자마자 벌써 한 모금 마셔버린 그녀는 그에게 한 말과 다르게 혼자 병을 전부 비워버리기라도 할 것처럼 신난 듯 보였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마시는 술의 양이 많지도, 속도가 빠르거나 하지도 않았다.
" 음, 이유는 없어요. 그냥 보러 오는 거죠. "
보려는 것이 겨울 산의 풍경인지 하늘에서 내리는 눈인지 모를 애매한 말을 하면서도 그녀는 그 대상이 당신이라는 듯 분명하게 그를 보고 웃었다. 그녀의 친구는 분명 마을에도 있었지만 지금 이곳에도 있었다. 그녀는 항상 마주치는 마을의 친구들도 좋았지만, 좀 더 자주 -특히 겨울이 오면 보기 어려운 친구를 보러 오는 것도 좋았다. 그리고 그녀에게 친구란 이유가 없어도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고, 함께 맛있는 것을 먹는 그런 사이였다. 그렇게 그녀는 자기 좋을 대로 그를 친구라 정의하며 계속 그를 만나러 이곳에 왔다.
" 사실 이 귀한 것도 놓칠 수 없긴 하고요. "
그녀는 술 보다는 달콤한 것을 조금 -아주 조금 더 좋아했다. 그런 그녀에게 이곳의 코코아만큼 훌륭하고 완벽한 것은 없었다.
" 왜요? 설마... 내가 오는게 싫은 건 아니죠? "
그의 질문에 잘 대답하더니, 이번에는 그녀가 눈을 가늘게 뜨며 짓궂게 그를 향해 불쑥 질문했다. 말투는 마치 그를 추궁하는 듯 보였지만 목소리는 평소처럼 가볍고 약간 장난스러웠다. 이번에도 그녀는 무슨 대답을 듣더라도 -설령 정말로 싫다는 대답이 들려오더라도 웃어넘기고 말 것이다. 그리고 그의 예상처럼 언제나 그랬듯 자연스럽게 다음에도 이곳에 올 터였다.
하지만 그는 자신에게 아들이 생길거라곤 생각하지 않고 있었다. 지금까지 사귀어본 여자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마지막으로 사귄 여자가 벌써 1년여전이고, 그렇게까지 오래 사귀어본 기억도 없다. 어쩌면 인생에 여자라고는 연이 없는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최근에서야 하고 있는 그였다. 하지만 이렇게 외로운 산장지기라는 일을 대물려주고 싶은 생각도 없었다.
여자의 말에 산장지기는 그저 컵만 만지작거릴뿐이었다. 이장님의 아들은 남자의 아버지의 친구였다. 이장 자리 때문에 이장님과 실랑이를 벌이는 장면을 여러번 보곤 했다. 큰소리가 나거나 하지는 않았지만 아들분도 이장님을 닮아 한 고집하셨기에 그런 자잘한 다툼은 계속해서 이어오고 있었다. 이제 이장님의 병이 깊어지시고 언젠간 이장 자리를 물려받으시지 않을까, 산장지기는 말없이 생각한다.
" 그 집에는 술이 많았으니까. "
아버지가 가끔 그 집에서 와인을 얻어오곤 했던 사실을 남자는 알고 있었다. 이 술도 대충 집에서 가져왔을 것이라 짐작은 하고 있었지만 정말 거기서 가져왔다니. 그래도 술을 좋아하시는만큼 보는 안목도 좋다는 것을 그는 알고 있었기에 조금 기대에 찬 눈빛으로 와인을 바라본다. 그렇게 와인을 따라서 건네주자 말과는 다르게 신나보여서 빠르게 다 마셔버리는게 아닐까 싶어 걱정스런 눈빛으로 바라보지만 다행스럽게도 그럴 생각은 없어보여 남자도 와인을 한모금 마신다.
" 보러오면 나야 좋지만. "
산장에서의 삶은 외롭기에 여자가 온다면 그에게는 좋겠지만 그렇다고 위험한 겨울 산길을 계속 오르게 할 수는 없었다. 단호하게 다음부터는 올라오지말라고 하고 싶어도 외로움에 이미 지쳐버린 그가 그렇게 모진 말을 내뱉을 수 있을리가 없었다. 그래서 산장 밖의 눈을 밟는 소리가 들려오면 느껴지는 설렘도 더이상 막을 방도가 없었다.
" 싫은건 아니지만. "
벽난로의 불빛 때문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 때문인지 남자의 얼굴이 살짝 붉어진다. 자신이 하는 말이 부끄러워서일까.
" 싫다고 해도 어차피 올라올거잖아. "
그가 아는 여자는 그런 사람이었다. 지금도 저런 장난스러운 목소리로, 내가 싫다고해도 올라올께 뻔했다. 그만큼 뻔뻔스러웠지만 그만큼 능글맞은 사람이라 산장지기가 항상 말려들어가는 그런 사람이다.
고등학교 1학년 시절, 외국으로 떠나 바이올린 쪽으로 유학을 간 소년은 24살이 되어 7년만에 다시 돌아왔다. 어렸던 소년은 늠름한 청년이 되어 조국의 땅을 밟았다. 유학을 간 동안에는 단 한번도 한국으로 돌아오지 않았으나, 그래도 가족이나 친척, 친구들과는 나름대로 메일이나 전화를 통해 연락을 나눠 최소한의 교류는 유지했다. 그 덕분인지, 오늘 귀국할 때 마중 나온다는 친구가 있었고 사내는 정말로 나와줄지 나름대로 기대를 하며 소속을 밟고 자신의 짐이 들어있는 캐리어와 바이올린 케이스를 챙기고 공항을 걸었다.
"정말로 있을까."
최소한의 교류가 있었다고는 하나, 다시 만나는 것은 칠년만이었다. 과연 제대로 알아볼 수 있을지 조금 걱정을 하며, 혹은 그냥 말로만 그런 것이고 아무도 나온 것은 아닐까 생각을 하며 사내는 게이트 밖으로 나온 후 잠시 주변을 둘러봤다.
바로 얼굴이 눈에 보이진 않았는지 사내는 계속 고개를 두리번거릴 뿐, 좀처럼 발을 옮기지 못하고 있었다. 만약 있다면 인사를 하겠으나, 보이지 않는다면 한숨을 쉬고 밖으로 나갔을 것이다.
"역시 한두번은 돌아올걸 그랬나. 공부의 흐름이 끊어지면 안 될 것 같아서 쭉 있긴 했는데."
>>36 그런 친구가 있었다. 얼굴을 보지 않은지 7년은 넘었지만 이상하게도 자주 전화하고 톡을 주고 받아 고등학교 동창이라기보단 지인에 가까워진. 그렇다고 해도 공항 마중까진 좀 과하지 않아? 라고 생각했지만 의미없는 일이었다. 하필이면 그 친구가 귀국하는 날 모두들 기상천외한 일정들이 있어 마침 연주회를 마치고 쉬고 있던 수연에게 바톤이 돌아가고 말았던 것이다.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일지도 몰랐다. 오늘은 평일이고 전공을 살려 음악가가 된 친구들 말고도 졸업이며 회사에 일정이 잡힌 친구들도 않았으니까.
얘는 왜 하필 애들 졸업시즌에 귀국했담. 뭐 내 알바는 아니지만. 드뷔시의 달빛을 작게 허밍하며 버릇처럼 유리로 된 펜스를 손끝으로 두드리고 있던 그는, 게이트에서 하나 둘 사람이 빠져나오자 준비해둔 이름 석자가 적힌 피켓을 들었다. 사람이 어느정도 빠지고, 사람들 사이에 아직 두리번거리며 서 있는, 아마도 나와 동년배인 것같은 동양인 남성이 보였다. ...걘가? 마중은 나가겠다고 톡방에는 알렸지만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고 그냥 나왔을 가능성이 보다 컸기에 확신할 수는 없었다. 에라, 모르겠다. 아직 사람이 남아있긴 하니 이상해보이지는 않겠지.
코 안쪽에서부터 무언가 따뜻한 것이 흐르는 느낌이 들었다. 잠결에 무심코 콧물이겠거니 코 밑을 훑었고, 제대로 닦아내 손에 그 무언가 묻는 느낌이 들었다. 그런데도 다시금 코에서 무언가 흘렀고, 훌쩍거려도 계속 흐르는게 콧물이 아닌 것 같다 생각하자니 퍼뜩 깨달았다. 코피다!
"우와...?"
손으로 코를 막고, 고개를 뒤로 젖혔다가는 피로 기도가 막혀 질식사할 수도 있다나 뭐라나. 그래서 고개를 숙이고서 다급하게 휴지가 될만한 걸 찾아보려니, 내가 있는 곳은 계단이었다. 무릎에는 내가 필기한 노트와 문제집이 놓여있었고, 옆에는 교과서 두세 권과 다른 문제집 한 권, 또 다른 노트 하나. 맨 위에는 열려있는 필통이 놓여있었는데, 어째 배가 불렀어야 하는게 텅 비어 있었다. 밑에서부터 세칸 위쯤의 계단에 앉아있던 나는 그 아래를 살펴 보았다. 필통에 담겨 있어야할 펜들을 비롯한 필기구들이 죄 쏟아져있었다. 아직 취해있는 잠을 떨쳐내려 하며 생각해보니 도서관에서 시험공부를 하다가 졸려서 계단으로 나왔돈 기억이 났다. 그리고 여기에 앉아 차가운 계단 바닥에서부터 올라오는 냉기와 해가 뉘엿뉘엿 떨어짐에 따라 식고 있는 공기에 서늘함을 느끼면서, 잠이 깨는 것 같다며 공부를 이어하던 것 같은데... 깜빡 잠들며 필통을 엎고, 그것도 모르고 계속 졸다가 코피가 나서 깬 상황이라 추측한다. 그래, 지금 나는 코피가 나는 와중에 계단에다 내 짐을 어질러 놓았고 휴지가 없는 노답 상황이구나!
"오. 어. 아. 조, 좀비 아니에요!"
어이없는 상황에 실성이라도 한 것마냥 웃음이 새었다. 이걸 어쩌면 좋지, 노답이네! 코피 그치면 친구들한테 얘기해줘야겠다, 근데 일단 어쩌면 좋지. 화장실 갔다오는 사이에 누가 계단에 오면 이걸 치우려나. 으악, 이제 코피난 거 손에서 넘치겠는데! 얼 빠진 채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 하고 손으로 그칠 생각 없는 코피만 바치고 있었다. 정말 어쩌면 좋나, 주변에 휴지, 아니 그 대신할만 한 것이라도 없나 두리번거리다 누군가를 발견한다. 계단에 뻗어 있다가 코피 흘리며 일어나 웃음 소리를 흘린 사람이, 모르는 사람 눈에는 미친 사람으로 보일 것만 같아 다급하게 외쳤다. 좀비 아니라고. 근데 나 너무 쪽팔려! 차라리 좀비할래!
도서관보다는 창고에서 신나게 기타나 치고 싶었지만 이번 시험을 망쳐버리면 내 기타의 넥이 분질러지게 생겼기에, 억지로 도서실에 나와 공부를 하다가 오래간만에 가물가물한 내용들을 붙잡고 씨름을 하자니, 적응을 하지 못한 머리가 아파 도서실을 잠깐 빠져나와서 편의점에 들러 두통약과 에너지드링크를 마시고 다시 도서관으로 돌아오는 길이었다. 바깥 공기를 조금 쐬니 그래도 정신이 조금 돌아오는 느낌이 든다. 꼭대기층에 멈춰있는 엘리베이터를 부르기 귀찮아 층계참을 돌아 계단을 오르고 있자니, 문득 계단에 서서 어쩔 줄 몰라하고 있는 사람이 보인다. 무슨 일이야? 싶어서 후다닥 발걸음을 서두르는 찰나... 층계를 내딛은 발이 노트인지 코팅된 인쇄물인지 모를 뭔가를 밟고 쭐쩍 미끄러졌다. 그대로 세상이 한 바퀴 휘릭 돈다 싶더니 눈앞에 별이 번쩍했다.
"아이고......"
다행히 뒤로 나자빠져서 계단 아래로 굴러떨어진 건 아니었지만, 앞으로 고꾸라져서 책이며 노트들이 엎질러진 층계참에 헤딩을 박은 상황. 난간을 잡고 일어서도 시야가 흐릿하다. 제삼자가 보기에는 슬랩스틱 코미디겠지만 1인칭으로 보면 코앞에서 폭탄이라도 하나 터진 느낌이다. 놀라운 사실은 생각보다 그렇게 아프지는 않다는 점이다. 놀랍도다, 아세트아미노펜. 그 덕분에 생각보다는 별일 없었다는 듯이 난간을 붙들고 일어설 수 있었다(내가 느끼기에는). 오히려 나보다도 지금 어쩔 줄 몰라하는 저 사람이 좀더 곤경에 처한 것 같아 바라보면 온통 피에 절어있는 손이며 얼굴이.
내가 쪽팔린데다 무엇보다 엄청 실례되는 일이지만, 진심으로 깜짝 놀랐다. 난간을 붙들고 있어서 망정이지 이번엔 진짜 뒤로 나자빠질 뻔했다.
"우와악."
하고 놀라서 보면, 지금 귀신이나 헛걸 보는 건 아니고.. 코피를 흘리고 있을 뿐인 그냥 사람이다. 띵한 머리로도 매우 실례했다는 자각이 들어 반사적으로 사과가 나갔다. "어... 아니 그... 죄송..." 한꺼번에 여러 일이 벌어진데다 물리적 충격까지 받아 아직 멍한 뇌를 붙잡고 생각해본다. 내가 지금 휴지가 있던가? 하고 주머니를 뒤적뒤적거려 보면 잡히는 거라곤 손수건밖에. 오. 이 상황에서 쓸모있는 물건이잖아.
"저기요, 이거라도."
띵한 머리를 붙잡고, 손수건을 내민다. 그제서야 뭘 밟고 미끄러졌는지 발밑으로 시선을 돌릴 만한 정신이 든다. 노트니 참고서니 교과서니 하는 것들이 땅바닥에 쏟아져 있었다. 이것도 주워줘야겠네.
뭐, 뭐야. 좀비 아니라니까 왜 급해져? 사실 이쪽으로 발을 재촉하는 저 사람이 좀비라서, 내 피 냄새를 맡고서 여기로 오고 있던 거야? 내가 방금 소리 내서 위치 확인하고 오는 거야? 아니, 그럴 리가 없지. 좀비가 어딨겠어. 그렇지만, 지금 나와 가까워지고 있는 저 누군가 사람이든 좀비든 당황스럽기는 했다. 모르는 사람이 여기로 갑자기 왜 오는지, 뒤로 물러나고 싶었는데 그럴 수가 없었다. 책이고 펜이고 다 어질러놨으며, 자리를 피하려 했다가는 분명 코피가 발자국으로 남을 것이다. 옷이나 책에 묻으면 곤란하기 그지없다.
"힉?!"
여러모로 잠이 다 달아나버렸다. 계단에서 꾸벅꾸벅 졸다가 코피 흘리면서 깬 상황도 충분히 잠이 달아날 만 했지만, 내 바로 앞에서 넘어지며 엄청난 소리를 이 사람도 그렇다. 손이 모자라서 넘어지려는 모양새를 봤음에도 잡아주지도 못하고, 크게 넘어지는 소리에는 되레 흠칫 놀라버렸다. 놀라서 크게 떠진 눈으로 보았던 것을 되새겨보자면, 저 사람 분명 계단에 머리 박았다. 으, 아프겠다. 놀랐던 표정은 머리가 띵할 고통이 상상되어 찌푸려졌다. 어, 잠깐만. 다시 되새겨보자. 내 책인지 뭔지 밟고 넘어진 거 아냐? 어?!
"저, 괜찮..."
우와악. 괜찮냐고 물어보려던 나의 친절은 우와악, 하고 싹둑 잘려 나갔다. 좀비 아니라고 그랬는데! 사람이라고 외칠 걸 후회막심이었지만, 이미 지나버린 시간에서 엎어버린 말은 되 담을 수 없다. 예를 들면 저 사람을 놀라게 만들어버린, 지금 내 손에 뚝뚝 떨어지는 코피처럼. 하지 않아도 상관없는 사과를 받고 나니 고갯짓이라고 세차게 해주고 싶었지만, 코피 때문에 그냥 입꼬리만 끌어올리고 대답했다. "아니, 아녜요! 놀라실 만 한걸요..." 제가 좀 사연이 있거든요. 사람 놀라게 하려고 여기서 코피 흘리고 있던 것도 아니고, 누구 한번 계단에서 굴러보라고 책을 여기까지 가져온 것도 아닌데 어쩌다 이렇게 상황이 꼬여버렸네요. 구구절절하고 싶은 말은 많았지만, 사과가 먼저니 저 머릿속 어두컴컴한 구석에 던져 놓았다.
"어. 괜찮...... 고맙습니다."
휴지도 아니고 물티슈도 아니고 손수건의 등장에 한사코 거절하고 싶었다. 저 손수건이 소중한 물건이면 어쩌나 싶어서 이를 악물고 거절하고 싶었는데 그럴 처지가 아니었다. 기필코 언제 피를 닦았냐는 듯 깨끗하게 빨아서, 정 안 되면 새것이라도 사서 돌려드리고 말겠다 다짐했다. 그나마 다행인 건 코피가 그쳤다는 점이다. 손과 얼굴에 있던 핏자국은 손수건으로 옮겨갔고, 여전히 난 쪽팔려서 죽을 것 같다! 그렇지만 할 일은 해야 했다. 손수건으로 닦았다고 해도 화장실은 한 번 가야 할 거 같고, 계단을 난장판으로 만든 저것들도 치워야 하고, 손수건 주인 되시는 분께 감사 인사도 드려야 하고, 죄송하다는 사과도 드려야 하는데.
"저기. 제가 정말 죄송하고 정말 감사해서요... 1번, 여기서 기다리신다! 2번, 연락처를 넘기신다! 둘 중의 하나 골라주세요!"
"음-. 그럼 다음에 올 때는 선물을 가져와야겠네요. 나중에 아이가 이곳에 왔을 때 보고 귀엽다고 할 만큼 아-주 귀여운 인형으로 말이에요. "
그렇게 말하며 그녀는 커다란 인형을 가져올 거라는 터무니없는 말을 덧붙이고 웃었다. 그리고 동생에게 줄 선물을 고를 때처럼 이것저것 다양한 디자인들을 떠올리며 그에게 이야기했다. 사실, 그녀의 진심은 인형을 선물하는 것보다 앞으로 겪게 될 외로움이 -누군가는 끝없이 이어가게 될 산장지기의 고독함이 사라지는 것이었지만, 문제에 대한 마땅한 해결책 없이 하는 말은 그저 떼쓰는 것밖에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기에 그녀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일 중에서 조금이라도 이곳이 즐거움으로 채워질 방법들을 이야기하려 했다.
" 이장님은 괜찮으실 거예요, 분명. 지금까지 그래 왔던 것처럼요. "
나지막이 흘러나온 말은 그에게 하는 이야기보다는 혼잣말에 가까워 보였다. 저도 모르게 힘이 들어갔는지 빈 컵을 쥔 그녀의 손끝은 희게 질려있었다. 곧 애써 불안을 떨쳐내려는 듯 눈을 꾹 감았다 뜬 그녀는 컵을 내려놓고 밝은 목소리로 이야기하려 했다. 붙잡고 있던 컵을 손에서 놓았음에도 금방 돌아오지 않는 손가락의 색깔은, 그녀가 가진 간절한 마음을 대신하고 있는 듯 보였다.
" 마셔보길 잘했다고 생각할 정도로 맛있을 거예요. "
그녀는 마을 사람들도 알아주는 부모님의 와인 컬렉션에 나름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 처음에는 부모님이 왜 이렇게 술을 모으는지 이해할 수 없었지만, 어른이 된 후 와인의 맛을 알게 된 뒤에는 그녀도 비로소 부모님의 마음을 이해하게 되었다. 그래서인지 기대가 담긴 듯 보이는 그의 눈빛에 당당하고도 확신 있는 말투로 맛있을 거라며 이야기했다.
"그렇죠? 좋죠? "
놀리듯 말꼬리를 물고 늘어지다가 싫은건 아니라는 그의 말을 듣자, 그녀는 마치 이보다 더 좋은 일은 없을 거라는 듯 환하게 미소 지었다. 그리고 살짝 붉어진 것 같은 그의 얼굴과 함께 들려오는 -그녀가 올 것이 분명하다는 확신이 담긴 그의 말을 듣고 그대로 소리 내어 웃음을 터뜨렸다.
" 그럼요, 당연하죠. 내가 누군데요. "
그녀는 도도한 표정을 지으며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기고 우아한 -그러나 과장된 몸짓으로 와인을 한 모금 마셨다. 그러곤 당신을 바라보며 장난스레 웃었다.
" 마을에서 올라오는게 싫으면, 차라리 나도 이 산에 집 짓고 살까요? "
여기에 집을 더 짓지 말라는 법은 없으니까요. 그녀는 농담 같지 않은 농담을 던지고 미소를 지으며 당신을 바라보았다. 그 모습이 마치 오늘 저녁은 뭘 먹을 것인지 물어보는 사람 같기도 했다. 이처럼 그녀의 태연한 말투와 모습들은 방금 꺼낸 말이 진심이 아닐까 생각될 정도로 아주 자연스러웠다.
그러니까, 실수의 발단은 어쩔 줄 몰라 허둥지둥하는 모습에 그만 쓸모없는 오지랖이 발동해 발을 서둘러 놀린 것이고, 실수의 결정적 원인은 좀비 아니에요, 라는 말에 그게 무슨 소린가 싶어 뭐라고 되물어보려다가 발밑을 미처 주시하지 못한 것이었다. 일순간 천지가 뒤집히는 바람에 자신이 무슨 말을 들었었는지 잠깐 잊었고, 그 좀비 아니라는 말이 무슨 뜻으로 꺼낸 말인지 깨달은 것은 이미 피범벅이 된 얼굴에 괴성을 질러버린 후였다. 아, 이 무안하고 어색한 공기...
사실 이런 상황에선 휴지나 물티슈를 내미는 게 맞는 일이었다. 가방 안에 여행용 티슈와 물티슈가 한 팩씩 있기도 했고. 다만 문제는 내 가방이 도서실에 있다는 거였고, 무안한 나머지 일단 뭐라도 해야겠다 싶어서 손수건부터 내민 거였다. 마침 어제 세탁하고 나서 안 쓰고 넣어만 뒀던 거라 천만다행이다.
"이러려고 들고 다니는 물건인데요 뭘."
손수건을 건네주고 나서, 손을 들어서 층계참에 들이박은 이마를 만져본다. 아야야 소리가 나올 뻔한 걸 눌러참는다. 아세트아미노펜의 진통효과는 위대했지만 고통을 전부 다 없애주는 정도는 당연히 아니다. 아무래도 혹이 날 것 같다. 그래도 혹으로 끝났으니 다행이지 이빨이나 콧대를 들이박았으면... 끔찍한 상상을 잠깐 하다가, 얼굴의 피를 다 닦아낸 듯한 네가 건네어오는 말에 다시 시선을 돌린다. 잠깐 어딜 갔다오려는 것 같다. 아까 성대하게 자빠링한 게 어떻게 보였을지 마음에 걸려서, 나는 괜찮다는 의사표현도 할 겸 미소를 지으며(고통 때문에 좀 찌그러진 미소가 되긴 했다만) 선택지 1번을 의미하듯 손가락 하나를 들어보였다.
"기다리고 있을 테니 충분히 지혈하고 오세요!"
그 동안 이 계단에 한가득 엎질러진 이것들을 정리해두면 될 것 같다. 그 정도야 해줄 수 있는 일이고, 혹시나 나같은 칠푼이가 또 자빠질 수 있는 거고. 들이박은 데를 더 만지면 덧날까 봐서 손을 내리고, 차곡차곡 계단에 엎질러져 있는 책이며 노트들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등반객들이 묵어가는 산장보다는 조난자들을 대피시키고 곰이 마을로 내려가는 길목에 위치해서 곰들을 막아내는 역할을 하는 곳이다. 그래서 그저 소수의 사람들만이 지낼 수 있는 정도만 유지하고 있었다. 그런 곳에 인형이라니 별로 어울리지도 않을뿐더러 밤에는 정말 조용해 벽난로만 타닥거리는 소리가 들리는 이곳에선 그마저도 무서운 사람이 있을지도 모른다. 물론 산장지기에게는 그 인형이 있던 없던 관심도 없을게 분명하겠지만 말이다.
" 이번에 병이 다 나으시면 진지하게 이장 일을 그만두라고 하시는게 좋겠어. "
마을 사람들이 그렇게 얘기해도 듣지를 않으시다 이렇게까지 와버렸다. 이젠 본인도 아프셨으니까 깨달으시는게 있을거라 생각하고 산장지기는 달력을 바라본다. 벌써 아프셔서 병상에 누우신지 한달 정도의 시간이 지났는데 나을 기미가 안보인다는 것을 오고가는 마을 사람들에게 들어서 알고 있었다. 그나마 다행인건 악화는 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거기서 악화 되시면 분명 돌아가실 것이 분명했다.
" 원래 그 집의 와인 셀러에 들어가있는 것들은 고르고 고른 것들이라는걸 잘 알고 있는걸. "
그가 성인이 되고나서 와인을 처음 마셨을때는 그 맛이 너무 역해서 안좋은 기억만을 심어줬지만 그것을 송두리채 바꾼게 저 집의 와인이었다. 싼 와인이 안좋은 것도, 비싼 와인이 좋은 것도 아니라는 말을 하시면서 건네준 와인 한잔의 맛은 아직도 뇌리에 남아있을 정도다. 그에겐 그때 마신 와인만큼이나 지금의 것도 마음에 들었다.
" 그래도 너무 자주는 오지마. 진짜 네 생각보다 위험한 곳이니까.
그녀의 자신만만한 표정과 과장된 몸짓을 보고 살며시 미소를 지어보인다. 그러나 이어진 말에 와인을 마시다가 사레가 들렸는지 켁켁거리며 잔을 황급히 내려놓는다. 휴지로 입을 닦은 산장지기는 여자의 말에 어이가 없다는듯한 말투로 얘기했다.
" 그게 무슨 말이야, 여기기 뭐가 좋다고 집을 하나 더 지어. 할 것도 없는데. "
물론 둘이 지낸다면 덜 외롭기는 하겠지만 애초에 산속에 있고 전기도 발전기로 돌리는 곳이다. 대부분을 벽난로의 불빛을 의지해서 살아야하는 곳에 온다니 그의 생각에서는 좋지 않은 짓이었다. 무엇보다 그는 이제 산장지기를 자신의 대에서 그만두고 싶어했다. 대대로 내려오고 있고 중요한 역할이지만 조금씩 지쳐가고 있었다. 아버지에 비해선 한참이나 짧은 시간을 산장에서 보낸 산장지기였지만 새삼 아버지가 어떤 삶을 살아오셨는지 예상조차 가지 않았다.
" 마을엔 재밌는 것도 많고 친구들도 많고. 무엇보다 안전하니까. 위험한건 나 혼자로 충분해. "
마을 사람들도 그렇기에 그에게 잘해주는 것이다. 그리고 지금 여자의 호의도 산장지기는 마을 사람들의 호의의 연장선으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당부에 당부를 하고서 자리를 비웠다. 도움만 주고서 홀랑 사라져 버릴까, 발걸음이 바빴다. 화장실에 가서 꼼꼼히 얼굴과 손을 다시 한번 닦아야 했고, 도서관에 가방만 두고서 나온 자리에 돌아가야 했다. 가방에 죄송하고 고마운 마음을 표현할 만한 무언가 있지 않을까 당신을 붙잡아 두었다. 그런고로 뭐가 있으려나 가방을 털어보면 죄 주전부리뿐이다. 과일 맛 젤리, 한입 크기 초콜릿, 이런저런 맛이 다 있는 사탕... 그리고 내가 제일 좋아하는 에그타르트, 제이 좋아하는 코코넛 휘낭시에, 제삼 좋아하는 크렘 브륄레 마들렌... 공부한답시고 저녁에 집을 안 들어가니 저녁 대신으로 집에서 들고나온 것이다. 집이 베이커리라는 이점은 이런 데 있는 거고, 아무튼 저녁을 때우려고 가져온 거라지만 지금은 그게 문제가 아니다. 호불호를 알 수 없으니 일단 전부 다 챙겼다. 알레르기가 있을 수도 있잖아! 죄송하고 고맙다며 받은 걸 먹고 알레르기로 응급실 가면 저주받는다! 어쨌든 우리 집 베이커리 종이봉투에 담긴 구움 과자들과 각각의 젤리, 초콜릿, 사탕 봉지들을 품에 다 챙기니 과자로 만들어진 마녀의 집을 발견한 헨젤과 그레텔이라도 된 기분이다. 그리고 다쳤을지도 모르니까 반창고랑... 반창고밖에 없네! 반창고라도 챙긴다.
"다녀왔, 으악!"
이걸 치우고 계시면 어떡해요! 소리치고 싶은 걸 으악, 하고 참아냈다. 이걸 먼저 치우고 갔어야 했나 싶지만, 혹시라도 미처 닦이지 못한 피가 묻는 게 싫다는 생각에 그러지 않았다. 무엇보다 노트 중 한 권은 공부하기 위한 필기 노트라거나 오답 노트, 정리 노트가 아니라 그림 노트여서 더욱 그랬다.
"저 드릴 수 있는 게 이런 거밖에 없는데..."
그리고 다시 한번 생각해본다. 사례를, 보답을 할 수 있는 방법. 곰곰 생각해보니 아차 싶어진다. 2번, 연락처를 남기신다! 이 말이 틀렸음을 이제야 알았다. 연락처를 드리는 게 맞았다.
"3번은 어떠세요...? 제 연락처 드리기... 저 때문에 놀라시고, 저 때문에 다치시고, 저 때문에 손수건도 엉망진창에......"
나 엄청나게 사고 쳤잖아...? 새삼 저지른 잘못들을 나열해보니 쪽팔려서 좀비가 되겠다 할 때가 아니었다. 엄청 아프신 거 아냐? 아까도 말 그대로 웃는 게 웃는 게 아니셨고, 어디 더 안 다치신 건 맞을까? 근데 어른이면 어떡하지. 내 또래면 몰라, 어른이면 학생이 해주는 답례 같은 게 성에 찰까. 나는 드라마에 나오는 것처럼 세탁비랑 진료비로 쓰라면서 카드로 해결할 수가 없잖아! 자연스레 표정이 울상이 되어간다.
으악! 하는 비명소리에 온 몸의 털이 다 곤두서는 기분이다. 내 기타에 걸고 맹세컨대 방금 뒷목 털꼬랑지까지 다 곤두서면서 움찔하는 게 보였을 거야. 놀란 가슴을 가라앉히며 뒤를 돌아본다.
"어.. 나도 피 나요?"
무안해할까 봐 농담 한 스푼 얹어서. 근데 진짜로 피 안 나는 거 맞나? 하고 손을 들어서 어루만져본다. 찍은 데가 붓긴 했지만 그래도 상처는 확실히 안 난 모양. 다만.. 혹은 실시간으로 부어오르고 있다. 만지니까 아파서 후다닥 손을 뗐다. 으악 소리가 따라서 나올 뻔했다. 아직 못 주운 노트가 몇 권인가 있어서 시선을 돌리려는데, 네 품에 안겨있는 익숙한 봉투가 보인다. 그리고 그게 답례라나. 어라.
"이런 걸 받자고 한 게 아닌데..."
그런데 하필이면...
"내 원픽 단골 빵집.........이잖아..." ─꼬르르르륵.
나에게 있어 식사시간을 알리는 것이나 다름없는 그 로고를 보고 훈련받은 파블로프의 개마냥 배꼽시계가 운다. 으악. 이럴 줄 알았으면 아까 편의점에서 약이랑 함께 주먹밥 같은 거라도 먹는 건데 그랬어. 당황스럽게 아래로 고개를 숙이니, 교복 셔츠 웃도리의 단추가 하나 나간 것까지 보인다. 안에 티셔츠야 입고 있다만, 이럴 줄 알았으면 학교 끝나고 집에 들러서 편한 옷으로 갈아입고 나올걸! 으악! 만약 내가 지금까지 매일 일기를 쓰고 있었다면 오늘 일기로는 두 글자만 적을 거야. 으악!!!
"아니, 그 연락처라뇨, 굳이 그러지 않으셔도 되는데... 놀라거나 다친 거야 일부러 그러신 것도 아니고, 그렇게 크게 다친 것도 아니고 손수건이야 다시 세탁하면 그만인걸요..."
그렇잖아도 무안해져서 빨개져 있는데 연락처를 주겠다는 말에 붉은 얼굴을 하고 있으니 그림이 어째 이상한 것도 같다. 나는 손부채질을 하며 정신을 가다듬고, 위기를 모면하기 위해 손가락 4개를 쫙 폈다.
"4번!"
그래서 난 위기를 기회로 만들기로 했다.
"나 그 빵집 아는데 거기서 만나요. 지금 가도 괜찮고? 아니 괜찮나?"
...정말로 이런 대응으로 괜찮은가? 나? 월 수 금마다 부원들이랑 거기 들리긴 하는데, 그런 주제에 거기 언제 닫는지 모르잖아?
# 묘사를 미처 못했지만 이 캐릭터는 갈색 단발의 활기찬 밴드부 메인보컬+리드기타 고교생이며 현재 넥타이만 없는 교복 차림입니다v.v
이것저것 품에 죄다 끌어안은 채로 허둥거렸다. 손을 잘못 풀었다가는 분명히 이 봉지들도 계단에 미끄러질 테니 반창고를 건네지도 못하고, 휴지를 찾자니 그걸 미처 생각하지 못해 가져오지도 않았고. 뒤늦게 걱정스러운 시선에 죄송한 마음까지 덧끼워서 상처 부위를 향해 시선을 옮긴다. 어. 어... 피 안 나는 거 같은데. 그것 보다 만지지 마세요! 덧나면 어떡하려고! 흉 지면 어떡하려고! 소리치기 전에 당신의 손이 먼저 아래로 향한다. 그럼 다시 생각한다. 피 정말 안 나는 거 맞지? 여간 안절부절못해 보이는 눈치다.
"그래도, 이런 거라도...... '원픽 단골 빵집'이요?"
우리 집? 우리 집 베이커리 말하는 거지? 어, 어라. 당신을 쳐다보았다가 끌어안고 있는 종이봉투를 보았다가, 얼빠진 것처럼 눈을 동그랗게 뜨고서 깜빡거린다. 배꼽시계 소리가 울릴 때야 정신을 차린 듯하다. 곰곰 생각해보자니 단골손님 중에 학생 손님들도 있는데, 교복을 보자니 너와 같은 학교 같더라 하고 부모님이 말해주신 기억이 난다. 그 학생 손님 중에 같은 학교인 사람이, 혹시 지금 눈앞에 이 사람인가 싶어졌다. 이제 다시 보니, 진짜 우리 학교 교복이잖아! 지금 나 교복 입고서 자기 학교 교복 못 알아본 거야? 지금 나 지금 부모님 가게 단골손님한테 민폐 3 스택 쌓은 거야?!
"이거, 이거 다 드셔도 돼요! 제 물건들은 제가 치울 테니까 이거 드세요!"
고작 그것 갖고 배 차겠냐고, 겨우 그 양으로 무슨 저녁이냐며 간식에 불과하다 가방에 더 챙겨 넣으시려던 부모님 손길을 만류한 게 후회스러웠다. 오늘 이런 일이 일어날 줄 알았다면 절대 만류하지 않았을 것이고, 오히려 직접 집어넣었을 것이다. 이 사람한테는 우리 집이 당신의 원픽 단골 빵집이라는 사실을 영영 비밀로 묻고자 마음먹었다. 민폐만 끼친 자신이 싫어져서, 자신의 부모님이 하는 베이커리까지 안 가겠다고 해버리면 부모님은 난데없이 단골을 잃게 된다.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뻗어 나가 도달한 결론이다.
"4, 4번?"
없던 선택지의 등장에 다시 눈을 동그랗게 떴다. 당신과 만나고서 몇 분 안에 얼이 몇 번이나 빠지는지 셀 수 없을 것 같다. 게다가 새로운 선택지의 내용은 얼빠지게 하기 좋은 내용이었다. 방금 자신과 베이커리의 관계를 당신에게는 절대 비밀로 하겠다고 다짐했는데, 거기서 만나자는 말이 나왔다. 심지어는 지금 가도 괜찮다는 말까지! 이게 바로 혼비백산인가. 지금 시간쯤이면 가게에 누가 있는가 머리를 굴려야 한다. 부모님이 있으면 낭패요, 자신을 잘 알고 있는 다른 누군가 와 있어도 낭패요. 그렇게 되니 지금 상황 자체가 낭패였다. 가게 주인이 가게에 없을 리가 있냐고! 나 또 노답 상황이네!
"가, 가도는 되는데요..."
대답을 안 하고 있으면 더 수상해 보일 거 같고, 4번을 거절한 마땅한 이유를 찾지 못했다. 5번을 만들어보자니 4번보다 더 나은 선택지를 구상하지도 못했다. 원픽 단골 빵집에서 만나자는데, 심지어 지금 가도 괜찮다는데, 내가 을인 입장인데 어떻게 거절이 나오겠어요. 아빠엄마, 정말 미안. 나 단골손님 한 명 없애버릴 거 같아.
/ 교복 묘사가 없다고 사복이구나 생각해버린 채 어른이면 어쩌지 하는 걸 서술했구나 죄송합니다!!!
안녕하세요, 저는 이 마을의 유일한 시계공입니다! 제가 사는 마을은, 마을 중앙에 위치한 시계탑 위에서 한 눈에 다 내려다 보일 정도로 엄청 작기는 하지만요. 시계탑 위에서 마을을 내려다본 적이 있냐고요? 당연히요! 시계탑이 고장날지도 모른다, 탑에 오르다 다치면 위험하다, 그런 이유들로 시계탑에 오르는 걸 금지해두었는데 어떻게 올라가봤느냐고요? 제가 거기에, 이곳에 사는걸요. 그 이유들은 다 거짓말은 아니지만 진짜 이유는 따로 있어요. 제가 사람을 무서워해서가 진짜 이유에요. 아무도 모르는 비밀이에요, 쉿. 사람들은 제가 시계를 너무 좋아하는 괴짜라서 혼자 시계탑 위에 박혀서 시계만 만드는 줄 알아요. 이것도 완전히 틀렸다고는 못 하겠지만... 어쨌든! 그래서 저는 시계탑에서 혼자 살고 있고, 그건 조금 쓸쓸하긴 하지만 나름 즐거워요. 저 아래에서 다들 바쁘게 하루를 살아가는 모습을 자세히 살펴보면 다들 제가 만든 시계를 갖고 있거든요. 회중시계, 뻐꾸기시계, 탁상시계, 자명종시계, 째깍째깍 바쁜 초침들에게 숨을 불어넣어준 건 저에요. 시계들의 주인은 저를 못 알아보지만요. 사람들과 만나야할 때에는 남자인 척 변장을 하거든요. 머리카락을 숨기기 위해 꼭 모자를 쓰고, 안경도 쓰고, 망토를 둘러서 체구도 감춰요. 그리고 말을 하지 못하는 척 메모를 들고 다닙니다. 시계를 가져오지 못하는 손님들 위해서 가끔 정기적으로 시계를 가지러 가고, 돌려드리러 갈 때도 이 모습으로 다녀요.
붉은 사자는 그가 몸을 담고 있는 가문의 문장이었다. 오랫동안 가문을 모시고 있던 집사의 아들로 태어난 사내는 6년의 시간이 흘러, 스무살이 되어 다시 자신이 태어날때부터 충성을 다 해야한다고 교육받은 가문의 문을 열고 들어왔다. 집사는 아버지가 하고 있으며, 자신의 동생이 좀 더 적성에 맞을 듯 하니, 자신은 그 가문을 지키는 검이 되고 방패가 되고자 하였고 가문을 이끄는 당주에게 허락을 받아 사내는 교육시설에 들어가 검을 배우며 자신의 실력을 갈고 닦았다.
길다면 긴 시간, 오로지 누구보다 강한 검이 되어 돌아가겠다는 일념 하에, 연락 한 번 하지 않고 찾아오는 이도 잠깐 얼굴만 볼 정도로 독하게 마음을 먹으며 단련에 힘 쓴 사내는 늠름한 자태를 보였다. 차분한 밤색 어두운 머리카락을 손으로 정리하며, 입고 있는 옷의 옷깃을 정리하며 문에 들어선 그는 머지 않아 당주를 마주했다. 한쪽 무릎을 꿇고 돌아온 것을 보고하며, 지금까지 고생했다는 말을 들으며 앞으로 그 실력을 가문을 위해 사용하라는 말을 전해들으며 오늘은 피곤할테니 들어가서 쉬라는 말을 다 들으며 사내는 꿇었던 한쪽 무릎을 펼치며 예를 갖췄다.
당주의 방 밖으로 나와 6년 전, 자신이 기억하던 풍경을 떠올리며 저택을 돌아다니던 사내는 자신이 옛날에 쓰던 방을 향해 천천히 걸었다.
"6년이 지나도, 이 풍경만큼은 변하지 않는구나."
변한 것이 없는 것은 아니었으나, 변하지 않은 것도 있었다. 그 모든 것을 느끼며 사내는 계단을 막 내려 1층 사용인들이 쓰는 방이 있는 곳으로 향하려고 했다.
>>49 슬슬 피아노 레슨 시간이려나. 그렇게 생각하며 찻잔을 내려놓기가 무섭게 직속 하녀인 샐리가 다가와 다음 일정을 알렸다. 예상과 다르지 않은 결과에, 마르그리트는 미련없이 찻잔을 내려놓고 일어섰다. "그래요, 가죠." 차를 즐기고 난 흔적을 치우는 하녀들을 뒤로 하고, 단정한 걸음걸이로 레슨 룸을 향해 걸었다.
문득, 부진한 학문에 시간을 할애하느라 피아노에는 상대적으로 신경을 덜 쓰고 말았던 것이 떠올라, 마르그리트는 희미하게 콧숨을 쉬었다. 한 소리를 들을 각오는 해두는 편이 좋겠다는 생각을 담담한 표정 너머로 감추며 걷고 있자니, 건너편에서 걸어오는 낯익은 듯 낯선 사내가 보였다. 누구더라? 분명 어딘가 낯익은데. 가만히 바라보고 있자니, 옆에서 샐리가 말했다.
-"집사장의 맏아들이 새로 호위로 왔다는데, 지금 도착한 모양이네요." "아..."
그제야 기억이 났다. 몇년 전에 호위가 되기 위해서 수련을 떠난다고 했었지. 인정받았다니 실력은 그만큼 출중하면 좋겠네. 집사장도, 그 둘째 아들도 성실한 사람들이고, 저 사람도 몇년이나 성실히 수련해서 돌아왔으니, 후하게 대접한다면 그만큼 충성하겠지. 새로 들어온 사용인에게는 동기부여가 될 만한 덕담을 건네는 것이 좋다는 것을 떠올리고, 마르그리트는 집사의 맏이를 향해 낯빛을 부드럽게 하고 나직이 말을 건넸다.
"능력을 인정받아 돌아왔으니, 앞으로 잘 일해주리라 믿어요. 좋은 성과를 보여준다면 섭섭지 않을 정도의 대우를 약속하죠. 앞으로 잘 부탁해요. 자세한 업무는 시녀장이 전달해줄 거예요. 그 전까지는 쉬고 있어도 좋습니다."
>>50 건너편에서 걸어오는 여성이 자연히 사내의 눈에 들어왔다. 그녀가 낯이 익다고 생각한 것처럼, 사내 역시 그녀의 존재가 낯이 익다고 생각했다. 허나 낯이 익다고 해서 바로 그 정체를 알 수 있었던 간 아니었기에 사내는 발걸음을 멈추고 그녀를 가만히 바라봤다. 보면 볼수록 어디선가 본 것 같은 느낌 속에서 들려오는 것은 그녀와 함께 있는 이의 목소리였다. 그 목소리를 들으며 사내는 상대가 누군지 짐작할 수 있었다.
자신의 기억이 맞다면 당주에게는 딸이 있었다. 6년 전, 저택을 떠나기 전에도 몇 번은 스쳐 지나갔을지도 모르는 존재를 곧 어렴풋이 떠올리며 사내는 너무나 당연하다는 듯이 자연스럽게 한쪽 무릎을 꿇고 그녀에게 예를 갖췄다.
"6년 만입니다. 아가씨. 말씀하신대로 제 모든 것을 바쳐 열심히 일하겠습니다. 제 아버지가 그랬고, 제 동생이 그러고 있는 것처럼."
미사어구를 붙이는 대신, 정말로 깔끔하고 담백하게 열심히 일하겠다는 마음과 충성을 다하겠다는 포부를 밝힌 후, 숙인 고개를 들어올리며, 꿇었던 무릎을 다시 펼쳐 그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허리춤에 차고 있는 검을 다시 한 번 자신의 허리춤에 밀착시킨 후, 사내는 제대로 그녀를 마주했다.
"그간 별 탈 없이 평안하셨습니까?"
아랫사람이 윗사람에게 묻는, 말 그대로 큰 의미가 없는 안부인사를 하며 사내는 미소를 지으며 살며시 다시 고개를 살며시 아래로 숙였다.
"말씀하신대로 시녀장이나 집사장인 제 아버님이 지시한 일에 충실할 생각입니다만, 혹여나 따로 제 힘이 필요하다면 얼마든지 얘기해주셨으면 합니다. 제가 검을 배우러 긴 시간 동안 자리를 비운 건 모두 이 가문의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고자 함이니까요."
/이렇게 이어두고 나는 다시 가볼게! 아마 다음에 잇는 것은 저녁 시간일 것 같아! 그때부턴 자유로우니 텀이 짧을거야!
퍽 의욕적인 모양이다. 저만큼 의욕을 보인다면 호위든, 혹시 생길지 모를 자잘한 전투든, 성과를 기대해도 좋으리라. 기대하겠다는 말은 자칫 부담을 줄 수 있으니 높은 의욕을 보임에 치하하는 정도가 적절하겠지... 그 때 샐리가 조금 초조한 낯으로 시계를 힐끔 살피는 것이 보였다. 더 지체하면 안되겠구나. 꼭 레슨이 아니더라도, 귀족으로서 부리는 이를 오래 잡아두는 것은 도리가 아니지. 집사장의 맏이의 말을 끝까지 들은 마르그리트는 차분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열심히 일해주겠다니 고마워요. 그럼, 수업을 들으러 가던 길이니, 이만 지나갈게요. 돌아온 걸 환영해요."
어린 시절이야 신분에 관계 없이 또래라면 함께 놀 수 있었다지만, 아무것도 모르던 시절이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지금에 와서 똑같이 행동하는 것은 상대를 불편하게 만드는 일이 될 테지. 고용주의 딸이고, 그 이전에 귀족이니. 집사장의 맏이가 비켜서기를 기다리며, 마르그리트는 문득 루로르 가의 영애와 추문이 돌던 그의 호위의 소문을 떠올렸다. 결국 해고당했다지. 우리 가문은 이 자의 일가를 고용하고 있으니, 불미스러운 건으로 이 자가 해고되면 나머지가 처신에 불편을 겪을 수 있다. 나 역시 어린 아이가 아니니, 그에 맞는 처신을 해야지. 경거망동하여 구설수에 올라 앞으로의 일들을 그르치는 것은 안 될 일이다.
사내의 눈에 자신이 방금 인사를 올린 여성의 옆에 서 있는 이가 초조한 표정을 짓는 모습이 들어왔다. 아무래도 자신이 여기서 인사를 하는 것이 그녀의 입장에선 그리 좋지 못한 것일까 추측하는 와중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수업을 들으러 간다는 그 말에 사내는 고개를 끄덕이며 살며시 몸을 옆으로 치웠다.
"시간을 뺏은 것 같아서 죄송합니다. 부디 수업 힘내시길 바랍니다."
초조한 표정을 짓는 이유를 알게 되니 절로 사내의 입에서 사과가 나왔다. 귀족에게 있어서 시간이란 때로는 상당히 중요한 것이라는 것을 사내 역시 알고 있었다. 시녀가 옆에 있으니 따로 동행할 필요는 없을테고, 설사 없다고 하더라도 동행하라는 지시가 없는만큼 자신이 멋대로 움직일 순 없다고 생각하며 사내는 고개를 살며시 숙인 다음 인사를 한 번 더 올렸다. 뒤이어 사내의 시선이 시녀 쪽으로 향했다.
"당신도 앞으로 잘 부탁하겠습니다."
하는 일은 다르다고 하나, 어쨌든 한 가문을 위해서 일을 하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때로는 같은 장소에서 일을 할지도 모르는만큼 기본적인 인사를 한 후, 사내는 자신이 어릴 적 쓰던 방을 향해 천천히 나아갔다. 오늘은 어느 정도 휴식을 취하며 지시를 기다릴 생각이었다.
원픽 단골 빵집인지 되묻는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긍정한다. 그야 부정할 이유도 없으니까. 개인적으로도 많이 들리기도 했고, 월요일 목요일마다 밴드부가 단체로 가서 그 집 봉지빵 재고 3분의 1을 주기적으로 박살내고 있으니까 그 집 내외분도 나까지는 기억 못하더라도 우리 밴드부는 기억하실걸?
"어-" 잠깐 생각하다가, 아무리 생각해도 이 정도로 권하는데 거절하면 그것도 상대방 무안하게 만드는 일인 것 같다. 왠지 네가 엄청 안절부절못하고 있기에 뭔가 고집부리기 애매한 상황이 되기도 했고. "이거 원래 저녁으로 드시려던 거 아니에요? 나눠 먹어요, 저녁은 적게 먹는 편이라." 정확히는 적게 먹으려고 노력하는 편이지만 뭐 어때.
"네, 지금도 갈 수 있다는 말이지 지금 말고 나중이라도 좋아요─ 아 그러려면 역시 연락처 교환해야 되나?"
나는 일단 내가 간추려놓았던 노트들이며 학용품들을 내밀었다. 이것들을 정리하려면 빵봉투는 잠깐 어디 한켠에 내려놓아야 될 것 같은데. 일단 정리된 것들을 내밀고, 빵봉투를 받아든 뒤 사라져주는 게 네가 바라는 거겠지만, 나는 쓸데없이 오지랖이 넓은 사람이고, 일단 이 현장을 깔끔히 정리하고 나야 마음편하게 자리를 뜰 수 있을 것 같아서.
"일단은 이것들 정리 끝내고 나서 마저 이야기해요! 혹시 또 누군가 올라오다 저처럼 자빠질지도 모르고."
>>48 먼지투성이 각반을 두르고 있는 그 여행객은 먼 길을 가로질러왔으며, 이 마을에 도착한 지 얼마 되지 않는 것 같습니다. 당신과 비슷하게 후드를 푹 눌러쓰고 망토를 뒤집어쓰고 있어서 후드의 그늘에 어떤 얼굴이 숨겨져있는지는 잘 보이지 않네요. 다만 망토자락 사이로 엿보이는 가볍고 튼튼한 징박힌 가죽갑옷이나, 허리춤에 권총이 그것도 세 자루나 줄줄이 매달려 있는 것을 볼 때 단순한 상인이나 여행자는 아닌 모양입니다. 마찬가지로 두건을 머리에 덮어씌운 노새를 끌고, 그 여행객은 멀리서부터 확고히 당신에게 시선을 둔 채로 당신 방향으로 걸어왔습니다.
그러나 다행히도 정체를 들킨 건 아닌 모양입니다. 당신에게 다가와서 그 사람이 묻기를,
"안녕하세요, 저기 길 좀 물어볼게요."
하고 물어보았으니까요. 아마 당신이 시계공인 줄은 모르고 그냥 평범히 길을 지나가는 사람인 줄로 아는 모양입니다. 당신이 내밀어오는 쪽지를 받고 읽더니, 후드를 눌러쓴 사람은 당신을 바라보며 마저 말을 이어갑니다.
"이 마을에 있는 시계공을 찾아왔는데 혹시 그 시계공이 어디 사는지 여쭈어봐도 될까요? 그 시계공에게 꼭 물어봐야 될 게 있어서."
그렇지만 결과적으로 시계공을 찾아온 사람은 맞나 보네요.
"모르신다면 적어도 시계공이 있는 곳을 알 만한 사람이라도 가르쳐주세요. 사례는 해드릴 테니까."
거기다가 시계공을 찾아가겠다는 의지가 아주 분명합니다. 시계공에게 뭘 물어보려고 시계공을 이렇게 찾고 있는 걸까요? 후드 차림의 여행자는 주머니에서 은화 몇 닢을 짤랑짤랑 꺼내보입니다.
히끅. 어떡하면 좋아요, 딸꾹질 소리가 나기 시작했어요. 정체를 들킨 것 같다고 생각해서만이 아니에요. 저는 보고 말았습니다. 허리춤에 달린 권총 세 자루를요. 징이 박힌 가죽 갑옷도 입고 계시다고요! 여행을 하시는 것도, 저희 마을에 방문한 상인 같지도 않으세요. 아무래도 제게 무슨 원한이 있는 것 같아요. 잘못 대처하면 저 권총이 제 머리에 들이밀어 지는 건 아닌지 불길한 상상이 떠올라요. 이 작고 평화로운 마을에서 저런 위험한 물건은, 특히나 시계탑 꼭대기에서 숨어 사는 제가 볼 일은 드물단 말이에요. 권총이라는 건 어떻게 생긴 건지 해체해보고 싶기는 하지만... 엄청 무서워요. 무섭다고요! 시계공의 정체는 비밀이었지만, 여전히 비밀이고, 비밀일 예정이에요.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드니 깜짝 놀라버려서 딸꾹질이 멈출 줄을 몰라요.
그런데 조금 이상해요. 제가 시계공이라고는 생각 못 하시는 것 같아요. 아주 먼 타지에서 오신 것 같은데, 왜 저를 찾는 걸까요? 처음 보는 분께 제가 무슨 원한을 맺었을까요. 사실은 어느 작은 마을의 시계공이 그 실력이 아주 훌륭하더라는 소문이라도 난 거면 좋을 텐데요. 아니면 역시, 이미 제가 시계공인 걸 알고 계시는데 절 떠보는 건 아닐까요? 그렇게 생각하면 눈물이 날 것 같아요.
'이 마을의 시계공은 시계탑 꼭대기에 살아요. 그런데 심부름꾼인 저를 제외하고는 아무도 만나지 않으십니다. 물어볼 말씀은 제가 꼭 전달해드릴게요. 사례는 괜찮아요.'
괜히 무서운 상상을 해버려서 손이 떨렸어요. 하지만 최대한 티 내지 않고 침착하게 새로 메모를 적은 것 같아요! 새로운 메모를 드리면서 상냥한 미소를 지어 보였어요. 딸꾹질 소리는 여전히 멈추지 않아서 곤란하기 그지없었지만요.
>>69 "이게 질문이 꽤 복잡한데다 되도록이면 남들 눈에 띄지 않게 하는 일이라서요..."
당신이 불안감을 드러낸 걸 눈치챈 건지, 여행자는 은근슬쩍 벨트를 매만져 권총들을 감추려 합니다. 두 자루는 고급스럽긴 하지만 여느 곳에서 찾아볼 수 있는 리볼버인데, 한 자루는 탄창이 달린 복잡한 기계식 자동권총이네요. 벨트를 돌려서 권총을 망토 안으로 감추고 나서야 여행자는 말을 이어갑니다.
"그러면 엄청 복잡한 회중시계 하나를 고쳐달라고 온 사람이 있지 않았냐고 여쭤봐 주실래요?"
다행히 시계공을 해꼬지하러 온 건 아닌 모양입니다! 그리고 그 말대로입니다. 며칠 전 복잡하고 비싼 손목시계 여섯 개를 회중시계 하나에 다 구겨넣은 것만큼 복잡한 회중시계 하나를 여관 할아버지가 맡긴 적이 있었죠. 자신도 다른 사람에게서 맡은 것이라고 하면서요.
대단히 아름다운 뚜껑에, 내부 부품도 고급이고 톱니바퀴를 고정하는 나사못 머리 하나마다 예쁜 보석이 박혀있는 아름다운 예술품같은 물건이었지만 왜인지 거의 모든 부품들이 잘못 맞춰져 있다는 이상한 느낌이었는데, 여관 할아버지는 그 시계를 맡긴 사람의 말에 따르면 금으로 된 큰 톱니바퀴 하나만 뒤집어 끼우면 된다고 했었습니다. 그 사람은 톱니바퀴를 뽑을 만한 도구도 없고 뽑는 방법도 몰라서 여관 할아버지를 통해 그것을 시계공에게 맡겼다네요.
다행히 그 톱니바퀴를 뒤집어 끼워주는 일은 간단했고, 그러니 잘못 맞춰진 것 같은 부품들이 그게 올바른 조립법이라는 듯이 그 모양대로 돌아가기 시작했었습니다.
"마을에 있는 여관 선술집에서 기다리고 있을게요."
그런데 왜인지 그렇게 말하는 목소리가 많이 익숙하게 들리는 것도 같습니다...?
# 익숙하게 들리는 목소리를 기분 탓이겠지! 하고 넘기면 계속 여행자와 아무런 관계도 아닌 남남으로 플레이하게 됩니다. # 익숙하게 들리는 목소리를 친구의 목소리로 받아들인다면, 여행자는 사실 시계공의 어릴 적 소꿉친구들 중 한 명이었다는 전개가 됩니다. # 직접 캐릭터의 입이나 행동으로 표현하지 않으셔도 원하시는 전개 방향에 대해 아래쪽에 #을 붙이고 덧붙여 의견 내어주셔도 좋아요.
남들 눈에 띄지 않게 하는 일이라니까 나쁜 생각밖에 들지 않아요... 되도록이면 남들 눈에 띄지 않게 하는 일은 선행보다 악행이라고 생각된단 말이에요. 당신의 행동 하나에 신경이 곤두서서, 작은 소리에도 귀를 쫑긋 이며 반응하는 토끼가 된 것 같아요. 권총들을 망토 안으로 감추신 건 제가 방심하기를 바라고 하신 행동일까요, 아니면 제 딸꾹질 소리의 원인이 그것인 거 같아 저를 배려했을 뿐일까요? 후자이길 간곡히 바라보겠습니다. 권총을 구경하고 싶지만, 특히 유달리 다르게 생긴 편인 복잡한 권총 한 자루가 눈에 밟혀서 자세히 보고는 싶지만 제 급소를 겨눠진 채로 보고 싶지는 않거든요.
엄청 복잡한 회중시계 하나. 똑똑히 기억하고 있어요! 시계보다는 꼭 보석 같았거든요. 실제로 보석이 박혀있기도 했고, 시계 6개는 나올 것 같은 양의 부품들이 오밀조밀 얽혀있는 것도 신기했고요. 여관 할아버지께 시계를 맡겼다는 분이 수리 방법을 알고 있던 것도 신기했어요! 톱니바퀴를 뒤집어 끼우면 된다는 것을 아는데, 그걸 직접 할 수는 없다니 마치 시계를 다룰 줄은 모르는데 고치는 방법은 안다는 것 같아서요. 심지어 그 방법이 맞았어요! 잘못 맞춰져 있는 것만 같았던 부품들이 째깍째깍 돌아가기 시작했으니까요. 그래서 그 시계 주인에게도 호기심이 동해서, 주인께서 직접 찾으러 오셨으면 좋겠다고 바라보았는데 정말 이분이 주인 되시는 분일까요? 그 회중시계의 주인이라고 생각하면 아까까지는 조금, 음, 아주 무서웠는데, 지금은 아닌 것 같아요. 만나보고 싶다고 생각했으니까요, 편하게 웃을 수 있습니다! 나는 당신에게 방긋 웃으면서 새롭게 메모를 건넬 수 있었어요. 안타깝게도 딸꾹질 소리는 여전했지만요.
여관 할아버지께서 시계를 대신 맡기신 것도 그렇고, 여관 선술집에서 기다리시겠다는 것도 그렇고 마을에 이제 막 도착하신 건 아닌 것 같아요! 시계탑 위에서 마을을 구경하는 건 제 일과 중 하나이니까, 당신에게서 이유 모를 익숙함을 느끼는 건 그것 때문일까요? 언뜻 당신을 보았던 기억이 나는 걸지도 몰라요. 당신과 아는 사이였을 지도 모른다기에는, 저는 계속 혼자 살았으니까요. 어릴 때는 누군가와 함께 있었던 것 같기도 하지만요.
나는 당신이 건네준 물병을 두 손으로 쥐었습니다. 딸꾹거릴 때마다 몸은 작게 들썩거렸고, 당신이 나를 죽일 수도 있는 사람이든 시계 주인이든 그건 여간 민망한 게 아니었기에 감사할 따름이었습니다! 물을 마시기 전에 허리를 숙여 인사를 건넵니다. 이렇게 친절한 사람인데 아무래도 제가 단단히 오해했던 모양이에요. 당신이 건넨 물을 한 모금 두 모금 들이켰고, 오해가 풀려서인지 물 덕분인지는 몰라도 딸꾹질은 멈추었습니다. 나는 다시 당신에게 물병을 건넵니다.
# 이왕 익숙하게 들리는 것도 같다는 서술이 나왔고 하니 소꿉친구 쪽으로 받을게요! # 근데 시계공이 사람 무서워하다보니 친구가 있어도 몇 없을 거 같은데... 몇 없는 친구도 제대로 못 알아볼 거 같지는 않고 해서요! 많아도 10대 초반쯤에 헤어졌다구 해두 될까요? :3
낮게 깔려있던 목소리 톤이 확 올라가며, 좀더 당신이 알던 것에 가까운 목소리가 됩니다...
"코스─아니, 그 회중시계가 아직 시계공의 집에 있나요?"
톤이 올라간 목소리에 화색이 돕니다. 후드 그늘에 가려 얼굴표정이 보이지 않는데도, 왜인지 그 후드 아래의 얼굴이 마치 오늘은 점심 먹고 퇴근해도 좋다는 말을 들은 점원 같은 기쁜 기색이 역력한 게 보이는 것 같습니다. 노새가 투레질하는 소리를 뒤로하고, 그 사람은 당신에게서 손을 내밀어 물병을 받아듭니다. 바로 그 순간, 한 움큼 돌풍이 불어젖힙니다. 그리고 생각지도 못하게 여행자의 후드의 끈이 풀리면서 후드가 뒤로 젖혀져 버립니다.
"아차."
하고 후드 자락을 붙잡아보지만, 높이 묶어 나부끼는 상아색 금발과 괄괄한 얼굴, 가을 하늘을 한 숟갈 퍼다가 담아놓은 듯한 푸르른 눈동자가 여실히 드러납니다... 옛날, 꼭 저런 상아색 금발과 푸른 눈동자를 하고 있는 친구, '아티' 라는 이름을 가진 친구가 당신에게 있었습니다. 그 친구는 어느 날 마을에 대상단의 행렬이 잠깐 들렸을 때, 자신은 이 마을을 떠나야 한다고 당신에게 울며 말하고는, 작별을 고하고 다음 날 사라졌었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점이 하나... 그 친구는 소년이었습니다. 그렇지만 지금 앞에 있는 이 여행자는, 단단한 가죽갑옷을 입고 있는데다 잘 발달된 다부진 체격이긴 하지만 여자입니다.
한바탕 돌풍이 지나고, 다시 후드를 덮어쓰고 망토 자락을 여민 여행자는 말을 이어갑니다. 당신을 의심하지 않습니다. 그 시계공이 낯을 굉장히 심하게 가린다는 사실을 잘 알고, 그래서 따로 심부름꾼을 두었다는 것을 납득하는 것처럼요.
"제가 그 시계 주인은 아니지만, 시계의 주인을 대신해서 왔어요."
다시 후드 자락을 여민 여행자는 노새의 고삐를 다시 잡으며 당신에게 아까 대답의 사례로 보여주었던 은화를 내밉니다.
"시계탑까지 같이 가주실 수 있나요? 그 시계, 잘은 모르지만 아마 상당히 수리가 필요할 거라서 시계공이랑 직접 이야기해 봐야 할 것 같아요. 아마 저라면 만나줄지도 몰라요."
이상한 것이 조금 있습니다... 이 여행자는 조금 전에 노새를 끌고 마을로 들어오는 언덕을 넘어온데다, 아직 각반이 먼지투성이라 마을 여관에 들렀다 나왔음직한 차림은 아닙니다. 그렇지만 마을 여관에 선술집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물론 그건 여관에 선술집이 딸려있는 경우가 흔하니까 그렇다 쳐도, 시계에 대한 이야기는, 시계 부품들이 좀 이상하게 짜맞춰져 있긴 했지만 그래도 톱니바퀴 하나를 뒤집어 끼워주는 것만으로 제법 잘 돌아갔었는데요... 왜 시계에 '상당한 수리'가 필요할 거라고 단정하고 있는 걸까요?
# 좋아요! ^.^ 시계공의 몇 안 되는 친구였다고 해도 좋아요. 시계공이 내성적인 만큼 받아주시기 힘든 이야기였을 법도 한데 받아주셔서 감사해요! # 언젠가 상황극판에서 어렸을 때는 소년인 줄 알았는데 나중에 장성하고 나서 재회했더니 여자더라, 하는 클리셰를 본 적이 있어서.. 못 알아본 상황에 개연성을 더하기 위해 써봤습니다
# 그런데 시계공이 아티와 함께 지냈을 때도 시계공이 시계를 좋아했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x.x 옛날에도 시계공이 시계를 좋아하는 모습을 보였다고 한다면, 다시 돌아온 아티가 이 마을의 시계공이 그렇게 신통하다더라 하는 말을 들었을 때 '네가 정말로 시계공이 됐구나!' 하고 짐작할 수 있을 텐데, 이 부분과 아티의 성별에 대해 조정이 필요하시다고 하면 말씀해주세요. 다시 써오겠습니다...!
>>73 # 지금 확인했습니다! 오늘 안에 답레를 써올 수 있을 지는 몰라서 말씀하신 부분만 우선 답해드릴게요 :3 # 시계공이 어릴 적 남자아이(사실은 여자아이지만)랑 친구를 할 수 있을지 의문이라 소년인 줄 알았다 부분이 조금 걸리네요... 시계공이 사람을 무서워하는 것에 근본적 원인에 아버지가 있다는 느낌을 생각했어서요! # 시계는 예전부터 좋아했습니다! 시계 뿐만 아니라 기계나 장치류는 전부 다라고 생각합니다.
>>74 # o.O ?! 그 부분이 곤란하다고 하시면 '그런데 이상한 점이 하나... 그 친구는 소년이었습니다' 로 시작하는 단락은 빼버리고 답레를 써주셔도 되어요! 원하시면 그 부분을 빼고 답레를 새로 올릴게요. # 옛날부터 기계류를 좋아했다는 설정 확인했습니다 u.u 감사합니다! # 답레는 원하시는 시간에 천천히 써주세요!
이상한 일이에요. 계속 익숙한 느낌이 들어요. 이 목소리를 언제 들어본 적이 있었을까요? 마을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면서 들어본 목소리 중에 닮은 목소리가 있는가 봐요. 어릴 때는 누군가와 함께 있었던 것 같다는 기억을 끄집어내야 하는 걸까요? 기억하고 싶지 않아 묻어놓은 어릴 적은 달갑지는 않아요. 우연이겠거니, 기분 탓이겠거니 치부하고 싶지만 그러기도 쉽지가 않네요. 누군가와 대화를 하는 도중에 다른 생각을 하는 건 예의가 아니니까 고개를 저어서 다른 생각들을 떨쳐내요. 당신의 말에 나는 새로운 메모를 위해 펜을 듭니다. 기쁘게 들리는 목소리에 의아함을 담아 펜을 움직이려고 할 때, 바람이 불어왔습니다. 쓰고 있던 모자가 벗겨질까 봐 모자를 붙잡았어요. 모자를 붙잡으며 당신의 목소리에 고개가 움직입니다.
"..."
눈이 동그랗게 떠질 수밖에 없었어요. 애써 떨쳐낸 기억이 떠오릅니다. 사라져버린 유일한 친구가 분명하니까요. 네 머리카락 색은 내 눈 색이랑 닮았다고 웃었던 기억이 나요. 아티, 그 이름을 기억합니다. 기억하고 싶지 않는다면서도 잊지는 못하고 있던 어릴 적, 그 이유입니다. 이름을 부를 뻔하다가, 소리 내서는 안 되는 연기를 하고 있었기 때문에 입만 벙긋거리고 목소리는 나오지 않았어요. 또, 친구라고는 하지만 나는 그때 남겨졌습니다. 또 훌쩍 떠나가 버릴까 무서운 건 기분 탓이 아니겠지요. 나는 네가 울면서 떠난다고 말했을 때 울지 않았습니다. 네가 떠난다는 것에 대해 정확히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었어요. 그다음 날 네가 사라져버리고, 마을 어디를 가도 네가 없었을 때, 그다음 날, 또 그다음 날, 아무리 찾아도 너를 볼 수 없었을 때에야 눈물이 났습니다. 다시 만났다며 마냥 기뻐하기에는 나는 너무나도 겁쟁이예요.
'시계는 아직 시계공에게 있습니다. 그리고 시계탑은 잠겨 있지만, 열어 드릴게요. 사례는 정말 괜찮아요.'
이제는 생각할 힘이 없다고 하는 게 맞을 것 같아요. 시계공이 자신을 만나줄지도 모른다고 말하는 것을 보면, 그 시계공이 저일 것으로 생각하는 게 분명해요. 기억하고 있는 것 같아요. 그렇게 생각하면 다시 눈물이 쏟아질 것만 같은 기분이 들어요. 아까는 그저 오해에서 비롯되어 죽을지도 모른다며 겁먹은 것뿐이었는데, 지금은 말로 다 설명할 수조차 없어요. 엄청 많이 서운하다고 하면 될까요? 나는 내밀어진 은화를 받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따라오라는 듯이 발을 옮겼어요. 시계탑으로 향하는 동안 아무런 생각도 하지 않으려고 부단히 노력했습니다.
# >>77 자러간 건 아니었어요! 일이 있었거든요 :3 # 시계공 이름은 아티와 연관있게 짓고 싶다는 바람이 있는데 괜찮을까요?
후드를 꾹 눌러쓴 채로, 그 키큰 여행자는 고개를 들어 마을을 바라봅니다. 징 박힌 장화가 자박자박, 당신을 따라 나무 그림자가 드리운 길을 걷는 소리가 납니다. 노새를 끌고 마을 어귀에 들어서면서, 마을을 이리저리 둘러보는 고갯짓이 감개무량해 보인다면 기분 탓일까요? 그렇게 과묵하지는 않아 보이지만, 애써 말을 아끼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듭니다. 그리고 마침내 시계탑에 도달했을 때... 여행자는 노새의 고삐를 시계탑 옆의 울타리에 매어두면서 시계탑을 올려다봅니다. 그러나 잠시 후 고개를 빼고 시계탑을 찬찬히 살피듯 들여다보더니, 고개를 갸우뚱하고는 고개를 돌려 당신을 내려다봅니다. 시계탑에 지금 아무도 없다는 것을 눈치챈 것이겠지요. 질문하려는 듯한 태도. 그러나 질문은 꺼내어지지 않고, 여행자는 잠깐 가만히 있습니다...
여행자는 약간 떨리는 손길을 조심스레 들어서, 자신의 얼굴을 여미고 있던 두건의 끈을 풀어젖히고는 두건을 벗어버립니다. 그리고 옅은 금발 머리카락과, 푸르스름한 눈동자를 드러낸 채로 말도 안 된다는 듯이 당신을 가만히 바라봅니다.
"..."
그러나 뭐라 말은 못 하고 당신을 바라보고 있을 뿐입니다. 마치 하고 싶은 말 수백만 마디가 한꺼번에 치솟아올라 오히려 목구멍이 틀어막혀 버린 듯이.
말 백 마디보다 행동 한 번이 나을 때가 있습니다. 나는 당신의 시선이 시계탑을 향한 후에는 내게 머물고 있다는 것을 눈치챘어요. 주머니에서 잘그락거리는 소리를 내며 열쇠 꾸러미를 꺼냈습니다. 시계탑의 1층 열쇠를 찾기는 쉬워요. 유난히 오래되어 보이는 열쇠를 찾아내면 되거든요. 잠긴 시계탑의 1층 문에 열쇠가 꽂히고, 찰칵 돌아가면 문이 열립니다. 나는 당신을 응시하다가 시계탑 안으로 들어가 버렸어요. 따라오라는 의미였어요. 시계탑이 아닌 곳에서 내 정체를 밝힐 수는 없으니까요. 마을 사람들이 알아보는 것도 큰일이지만, 여태 정체를 숨기면서 거짓말한 게 들키는 것도 무서우니까요... 사람을 무서워하는 전 남장을 하고서야 겨우 최소한의 외출을 하는데, 거짓말은 나쁜 거니까요. 제게 안 좋은 감정을 갖게 된 사람들을 마주할 자신은 없어요.
시계탑의 1층에는 제가 만든 도르래 장치가 있어요! 마을에서 가져온 시계들을 공방에 올리거나, 다시 1층으로 내릴 때 쓰기 위해 만들었어요! 마침 마을에 시계를 고쳐달라는 분에게 시계를 받으러 갔었기 때문에, 나무함에 시계를 담아 도르래를 작동시킵니다. 시계는 저보다 훨씬 빨리 위로 올라갑니다. 시계가 무사히 올라가는 것을 보고 도르래를 정지시켜요. 그리고 안경을 벗어요. 다음에는 망토의 후드를 벗고, 그 아래 쓰고 있던 모자도 벗습니다. 분홍빛 머리카락이 아래로 흘러내려요. 구불구불 휘어져 있는 머리카락이 목덜미를 간지럽히면, 저는 이제부터 시계공입니다.
당신이 안쪽으로 들어오는 인기척을 느끼면, 눈을 바로 마주칠 수 없어 고개를 들지 못했습니다. 시선 또한 아래를 향했어요. 무슨 말을 해야 할까요? 오랜만에 만난 네게 그때 왜 그렇게 사라져버렸느냐고 원망할 수는 없겠지요. 그때 얼마나 슬펐는지 말하는 것도 첫마디로 내기에는 부적절해 보여요. 하지만 엄청 서운한데 어쩌면 좋을까요. 하고 싶은 말을 목소리로 내지 못하게 되니 다른 방법으로 새어버리고 말아요.
"안녕."
인사가 제일 무난할 것 같았어요. 그래서 인사말을 건넸는데, 타이밍 나쁘게도 눈물이 뚝뚝 떨어져요. 아티에게 하고 싶은 말은 '안녕'이 아니니까요. 어디 갔었는지, 편지라도 쓸 수는 없었는지, 그런 말들이 하고 싶어요. 제일 하고 싶은 말은 '보고 싶었다'일까요?
# 시계공의 이름은 로빈(Robyn)입니다 :3 베아트리체의 어원을 살펴보니 나그네라는 의미가 있던데, 로빈(Robin)은 울새의 이명이에요. 울새는 나그네새(철새)이구요. 발음은 같지만 철자가 다른 이유는 여성형 이름으로 쓸 때는 Robyn 쪽을 쓰는 거 같더라구요. # 애칭은 생각해두질 않아서 아티가 로빈에게 애칭을 썼다면 맘대로 지으셔도 됩니다 :3
여행자는 당신의 의중이 무엇인지 알겠다는 듯이 기꺼이 당신을 따라옵니다. 아까까지 흙바닥 위에서도 뚜벅뚜벅 하고 뻐기듯이 큰 소리를 내던 징박힌 장화가 시계탑 안의 마루로 올라올 때에는 괜히 그 소리를 죽이고 맙니다. 마루에 올라서자, 여행자는 이젠 더 거리낄 것도 없다는 듯 먼지투성이 망토를 끌러내렸습니다. 움직이기 편한 바지에 각반, 징 박힌 가죽갑옷에 두꺼운 장갑, 허리춤에 권총 세 자루와 총알주머니를 주렁주렁 매달고 있는 차림새. 갑옷 여밈에는 조그맣지만 정교하고 섬세한 인장이 박혀 있습니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머리 셋 달린 사자와, 교차된 두 자루 검 위에 놓인 말발굽... 황실 기병대의 인장이네요.
그런데, 분명 자신은 황실 근위기병대로서 임무를 받아 도난당한 코스모드롬 열쇠를 찾으러 왔을 텐데... 자신의 용건은 그뿐이었을 테고, 이 곳은 고향 땅 이전에 임무 지역인데... 분홍빛 머리카락을 풀어내린 당신 앞에서, 직함과 임무는 망토와 함께 벗겨져 버리고 여행자는 그만 아티가 되어버리고 맙니다. 그때와 똑같은 밀색의 금발을, 그때와 똑같이 머리 뒤쪽 높은 곳에 질끈 동여매고, 그때와 똑같은 활기찬 미소가 어울리는 선머슴애 같은 얼굴이 감정을 있는 힘껏 붙들어매려 용을 쓰는 표정으로 일그러져서는, 그때와 똑같은 파르스름한 눈동자를 당신에게 마주한 채로요.
"로비."
그때보다 다부지게 성장한 어깨며 크게 웃자란 키며 실용적으로 차려입은 갑옷이며 다 소용없습니다. 각오도 했는데, 마음의 준비도 했는데, 당신이 그때도 흘리지 않았던 눈물을 흘리는 모습에, 자기가 자기 스스로 입에 올린 당신의 호칭 두 음절에 그게 그만 와르르 무너져버리고 맙니다.
분명 그때는 울며불며 이별을 고하는 자신을 멍하니 바라보던 당신에게, 자신마저도 그렇게 소중한 친구가 되지는 못했었던가 하고 더 서럽게 울었었는데. 자신에게 선택권이 없었던 여행길을 섭섭함에 눈물로 물들였었는데. 지금 눈물을 툭툭 떨어뜨리는 당신의 모습에 그만 이제서야 아티는 왜 당신이 미처 눈물을 흘리지 못했었던가 깨달아버렸습니다.
그래서 더 눈물이 나오는데, 도무지 그때처럼 울어버릴 염치가 없어서. 혼자서 울어버리느라 정신이 없어서 "떠나버린다" 라는 말이 어떤 의미인지 당신에게 채 못다 전하고 떠나버려서. 아티의 눈시울도 뜨거워 옵니다. 그러나 아티는 떨리는 손으로 장갑을 조심스레 벗고는, 갑옷의 주머니에 손을 찔러넣어서 손수건 한 장을 꺼내서 당신의 눈물을 먼저 닦아주려고 합니다.
"...보, 고 싶었어..."
아티는 뭔가 말했습니다. 울음소리와 섞여서 어금니 사이로 뭉개져 나온 소리라 잘 들릴지는 의문이지만요. 이런 일이 일어날 수도 있지 않을까 하고 어림짐작은 했지만 정말로 일어날 줄은 몰랐고, 결국 전혀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재회해 버리고 말았습니다.
마을 밖으로 한 발자국도 나간 적이 없고, 혼자가 된 이후로는 시계탑에 숨어지냈어요. 그런 내가 알아볼 수 있는 인장이라면, 분명 황실의 것이겠지요. 나는 그날로부터 무언가 성장한 게 없는 것만 같은데, 아티는 아닙니다. 황실의 명을 받을 정도로 멋지게 나아간 모양이에요. 저는 여전히 사람을 무서워하고, 시계를 비롯한 기계와 장치들을 좋아할 뿐이라 초라해지는 기분이 들어요. 그래서 제게 연락을 하지 않았던 걸지도 몰라요. 분명 지금 아티의 옆에는 같은 인장을 새기고 다니는 동료들이 있을 테고, 당연히 저보다 더 멋진 사람들이겠지요. 저는 마음을 굳게 먹기로 했습니다. 오늘 하루, 이 순간만 지나가면 수많은 어제와 같은 내일이 찾아올 테니까요.
로비, 제 애칭입니다. 아티가 떠난 이후로 단 한 번도 들은 적 없는 이름이지요. 분명 마음을 굳게 먹기로 했는데, 잊고 있던 애칭으로 한 번 불렸다고 흔들리고 맙니다. 사람과 워낙 거리를 두고 지내서 그런 걸까요, 아티이기 때문에 그런 걸까요? 혹은 둘 다 일지도 몰라요. 속이 울렁거리고, 눈물은 뚝뚝 떨어지고, 울음소리를 내지 않기 위해 이를 꼭 물었습니다. 나는 네가 우는 이유를 모르겠어요.
"시계는 위에 있어."
여전히 제 시야에 담기는 풍경은 시계탑의 1층 바닥입니다. 그마저도 눈물방울에 일렁거리고 있어 본다고 말하기도 민망해요. 눈물을 훔쳐내려고 했어요. 아티는 그 회중시계를 주인에게 가져다주러 온 것이겠지요. 아티가 왔다는 건 아마도, 황실의 사람 중 하나가 그 시계의 주인일 거예요. 그러니 시계를 돌려주면 이 만남은 끝이 날 거로 생각해요. 더 아프기 싫다면 지금 아픈 선택을 하는 게 맞을 거예요. 그런데 내 눈물이 내 손에 닿지 않았습니다. 아티의 손수건이에요.
그런데도 나는 할 수 있는 말이 없어요. 쓴 것을 먹기 전에 단 것을 한 입이라도 먹었다면, 더욱 쓰게 느껴지는 걸 아니까요. 울먹이는 목소리가 떨리면서 담은 말은 시계에 관한 이야기뿐입니다. 제 행동도 그러합니다. 손수건이 눈가에 닿았을 때는 놀라서 아티를 바라보았지만, 다시 시선을 바닥으로 내렸어요. 그리고 아티의 손을 밀어내려고 했습니다. 추운 것도 아닌데 손에 힘이 들어가지를 않고 오히려 떨리는 것까지 보여요. 그래도, 난 손등으로밖에 눈물을 훔치지 못하겠지만 아티의 상냥함을 받을 자신이 없어요.
# https://picrew.me/share?cd=ki9EKU6mZN # https://picrew.me/share?cd=gWqh19pD3w # 로빈은 이런 느낌이라고 생각해주시면 될 거 같아요! 아래는 남장하고 다닐때구요 :3
계획에 없던 재회인 것은 맞습니다. 임무를 다 끝마치고 나서 번듯한 모습으로, 빳빳하게 다린 제복에 반짝반짝한 인장을 차고, 로비가 잘 기억하고 있을 아티의 웃는 얼굴을 보여주는 재회를 하고 싶었죠. 이번 임무만 끝나면 수도 의무복무기간이 끝나고, 그러면 파견근무를 신청해 보안관 직책으로 다시 고향으로 돌아올 수 있으니까요. 대상단을 따라 나선 방랑길 위의 기구한 운명 사이에서 마침내 자신의 삶에 대한 제어권을 되찾은 시점에서, 아티가 고향으로 돌아올 수 있는 가장 빠른 방법이었습니다.
그러나 아티가 정확히 바라고 있던 것은 재회 그 자체였습니다. 고향 땅으로 돌아와서, 아직도 당신이 자신을 소중한 친구로 여겨주고 있는지 묻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만일 소중한 친구였다고 한다면 관계를 복원하고 싶었고, 소중한 친구가 아니었다고 한다면... 그러면 거기서부터 다시 시작하고 싶었죠. 고향 땅을 떠나간 이후 이런저런 괴로운 일도 많았고 즐거운 일도 종종 있었습니다만, 그 가운데에 반짝반짝 남아있는 행복했던 날들을 꼭 쥐고 버틸 수 있었기에.
누가 뭐래도 아티의 어린 시절에 행복한 기억으로 남겨져 있는 순간들에는 모두 당신의 모습이 한가운데에 빠짐없이 아로새겨져 있었거든요.
"시계 이야긴 좀 있다가 해."
자신의 손을 밀어내는 당신의 손길에 실린 떨림이 옮겨붙은 걸까, 자신을 밀어낸다는 사실이 자신이 생각했던 것보다 충격이었는지 아티의 손이 움찔합니다. 그렇지만 물러서지는 않습니다. 물러설 거였다면 애초에 후드를 벗지도 않았겠죠. 지금 이 순간만큼은 기병대원 베아트리체가 아니라 아티이기로 결정했습니다.
"편지, 두 번 보냈는데... 못 받아봤어?"
당신이 모르는 사실과 아티가 모르는 사실이 하나씩 있었습니다.
당신이 모르는 사실은 아티가 당신에게 편지를 쓴 적이 두 번 있다는 것이고, 아티가 모르는 사실은 자신이 쓴 편지가 불행한 우연으로 두 장 모두 다 당신에게 닿지 못했다는 사실이었죠.
그래서 고향에 돌아올 때는 조금 체념을 했었습니다. 아마 로빈은 자신을 그렇게 친하게 생각하지 않았던 모양이라고. 오히려 홀가분하게 서로 사무적으로 코스모드롬 열쇠의 행방에 대해서 묻고 그걸 계속 쫓아갈 수 있었을 것이라고. 그런데 왜 지금 당신은 이렇게 터져나올 것 같은 눈물을 붙들고 있는 걸까요. 당신이 자신에게 매어놓고 있던 감정의 무게가 얼마나 되는 걸까요. 자신이 당신에게 갖고 있던 감정의 무게는 얼마나 되는 걸까요. 모르겠습니다.
"왜 우는 거야."
결국 먼저 눈물을 쏟은 쪽은 아티였습니다.
"로비."
내가 돌아왔다고, 보고 싶었다고, 여기까지 돌아오느라 나 정말로 고생 많이 했다고-솔직히 그 고생 아직 안 끝났다고, 너는 내가 보고 싶지 않았냐고, 울지 말라고, 아니 울고 싶으면 울어도 좋다고, 날 밀어내지 말아달라고... 모든 말들이 눈물로 뭉뚱그려져, 결국 입에 올리는 것은 눈물에 떨며 당신을 부르는 말뿐입니다.
# 이것은 여신님같이 예쁜 로비의 픽크루를 보고 산화해버린 참치의 흔적......
# https://picrew.me/image_maker/1256467/complete?cd=EoIqyodsz2 # https://picrew.me/image_maker/43267/complete?cd=ica8gn6Lhn # 답레를 다 써놓고 픽크루를 뒤지고 다니느라 시간을 엄청 허비했어요 8.8 # 베아트리체의 모습으로 생각하고 만든 픽크루에요. 위와 아래 픽크루가 상이한데, 전체적인 색상이나 조형은 위쪽이 조금 더 비슷하다고 생각해주시면 좋을 것 같아요...! 아래쪽은 색상이 아쉽지만 아티의 평소 복장이나 표정이 잘 살아있어서 가져왔어요.
모나게 구는 데는 자신이 없어요. 특히 친구에게는 더욱더 그렇고, 오랜만에 만난 친구한테는 더더욱 그렇습니다. 갑자기 떠났다가 갑자기 돌아와서는 눈물짓는 친구에게 쌀쌀맞게 굴면, 친구라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오해를 살지도 몰라요. 네가 내게 너무 큰 자리를 차지하고 있고, 그래서 네 빈 자리가 너무 아파서 그렇다고 하면 이해해줄까요? 나는 다시 그런 아픔을 겪고 싶지 않아요. 처음부터 끝까지 혼자이길 바라요. 누군가 함께하는 시간에 익숙해지면 다시 혼자가 된 나는, 아마도 두 번은 이겨내지 못할 거 같아요. 떨려오는 두 손을 서로 맞잡았어요. 손이 차갑습니다. 손 위로 떨어지는 눈물이 따뜻하다 못해 뜨겁게 느껴지는 것 같았어요.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네가 보낸 편지가 있었다면, 시계공이라는 내 책임도 뒤로 하고 답장을 썼을지도 몰라요. 초침이 째깍거리는 시간이 1초 느려지고, 2초 느려져도 모르고 네게 보낼 편지를 썼을 거예요. 내가 너에게 편지를 쓸 수 있도록, 연락할 방법이라도 알려주었으면 좋았을 거라는 생각이 드니 작은 원망이 솟았어요. 눈을 깜빡일 때마다 눈물은 새로 맺혀 데구룩 떨어지고, 너를 잠깐 밉다는 듯이 쳐다보았습니다.
"...안 알려줄 거야."
정말 네게 못되게 굴려면 울어서는 안 되는데, 마음대로 되질 않습니다. 네가 눈물을 쏟는 걸 보니 참으려고 해도 잘되지 않았어요. 울음을 너무 참아서 머리가 아픈 것 같은 기분까지 들어요.
"또 떠날 거면서."
생각하는 것과 말로 담는 것은 달라요. 네가 떠날 거라고 생각만 하는 것과 내가 스스로 소리를 내 그 사실을 확정 지어버리는 것은 다릅니다. 네가 이렇게 왔다가 떠나리라 생각하면, 입술을 최대한 꼭 깨무는 수밖에는 없습니다. 시계탑에서 엉엉 우는 소리가 난다면 다들 이상하게 생각할 거예요. 시계탑은 언제나 예쁜 종소리만 내었으니까요.
# 아티가 더 예쁘다고 생각합니다! # 괜찮으시면 로빈이 앞머리 가르마를 탄게, 아티를 따라한 거라고 해도 괜찮을까요? 아티가 떠난 후부터요 :3
어렸던 시절, 어머니는 항상 자신에게 자신의 아버지는 대상단 소속의 상인이라는 말을 해주곤 했습니다. 그리고 그건 거짓말이 아니었죠. 친아버지를 따라 상단 행렬과 함께 떠나기로 아티의 어머니가 결정했을 때, 어린아이일 뿐이었던 아티에게는 선택권이 없었습니다.
대상단에 편지를 보내는 방법이야, 상인 길드에 문의해서 해당 상단의 중간 기착지에 미리 편지를 보내두면 나중에 기착지에 도착한 캐러밴 행렬이 편지를 받아볼 수 있는 방법이 있었지만... 그 대상단의 이름을 모르는데야 어쩔 수 없죠. 거기다 그 당시에는 아티도 당신도 그런 방법이 있다는 것을 몰랐습니다. 뒤늦게나마 그런 방법이 있다는 것을 안 아티가 당신에게 편지를 보냈지만, 상인 길드의 물류창고에서 분주히 오가는 사람들 사이에 그 편지는 그만 사라져 버리고 말았습니다.
"한 통도?"
당신이 눈물을 뚝뚝 흘리며 고개를 끄덕이자, 아티는 억장이 무너지는 표정으로 반문했습니다. 왈칵 눈물이 새어나갑니다. 당신과 자신의 눈에서 왜 이렇게 뜨거운 눈물이 치솟는지 모르겠습니다. 자신도 모르겠고 당신도 알려주지 않습니다. 친구끼리 만난 거라면 너 왜 이렇게 변했어- 이건 그대로네- 하고 시시콜콜한 이야기나 터놓고 잡담이나 하게 될 줄 알았는데, 가슴 한가운데 맺혀 있던 응어리가 녹아내리고 있는 것 같은 이 고통은 뭘까요. '둘도 없는 친구' 라는 꼬리표를 달고 마음 가운데에 모셔둔 당신에 대한 기억이, 자신이 생각하던 것보다, 어쩌면 친구간에 가질 수 있는 마음보다 더 무겁게 더 깊이 마음 속에 자리잡고 있었나 봅니다.
아티는 당신의 손에 붙들린 손 대신에 다른 손을 뻗어 당신의 눈물을 어떻게든 닦아주려 합니다. 막지 못할지언정 닦아주고라도 싶어서요. 내가 돌아오기를 바라지 않는 거야? 하는 반문이 턱끝까지 차오릅니다. 그렇지만 그런 불확실한 말을 입에 올리고 싶지 않아서 삼킵니다. 자신은 돌아왔고, 이제 다시 계속 돌아올 셈이니까요. 자신이 돌아오는 의미가 당신에게 남아있다면.
"나 돌아왔어."
만남이 있으면 헤어짐이 있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렇지만 헤어짐이 있으면 재회가 있습니다. 이제 자신은 열 살 조금 넘은 꼬맹이가 아니라, 스스로의 운명을 결정할 권리를 가진 한 명의 당당한 성인입니다. 이젠 기약없이 사라지지 않아도 됩니다. 돌아올 방법도 권리도 있습니다. 어디로 편지를 보내면 되는지, 어떻게 연락하면 되는지, 언제 돌아오는지 모두 이야기해줄 수 있습니다.
"내가,"
그리고 다시 돌아올 거야. 이번엔 오래 기다리게 하지 않을 거야. 와글와글, 당신의 눈에 흐르는 눈물을 막고 싶어하는 말들이 혀끝에서 들끓습니다. 그렇지만 아티의 입에서 나온 말은, 조금 다른 말이었습니다.
"내가 너무 오래 기다리게 했지."
아티는 눈물을 뚝뚝 떨어뜨리고 있습니다.
"미안해."
# '어릴 적 친분' 한 마디로 이런 관계성이 뚝뚝 떨어질줄은 몰랐어요...................(무한점) # 과찬의 말씀을... 8-8 로빈이 너무 예뻐서 아티도 어떻게든 로빈과 어울리게 해주려고 노력했어요.. 앞머리 가르마라, 두 사람 눈물이 그치면 아티 입으로 한번 언급해봐야겠네요 uu 좋아요!
하늘 위에서 은은하게 비치는 달빛은 스포트라이트. 그리고 조용한 공터는 그를 위한 무대였다. 낮엔 아이들이 놀이터로 사용하는 그 공터 부근엔 민가가 전혀 존재하지 않았다. 민가와는 조금 떨어진 곳에 위치한 곳이었기에 소년은 마음껏 자신이 들고 있는 바이올린을 아무에게도 피해를 주지 않고 연주할 수 있었다.
고요한 바이올린 속에 달빛이 녹아내려 은은한 분위기를 풍겼다. 과하지도 않고, 덜하지도 않은 은은한 밤풍경을 연주하듯 소년의 손이 느긋하고 천천히 움직였다. 한치의 흔들림 없이 잔잔하게 울리는 것이 그야말로 '밤'이었다. 음악에 관심이 있는 이라면 누군가가 연주해서 이미 존재하는 곡이 아님을 짐작할 수 있을리라. 그저 부드럽게 자연스럽게 멜로디를 이어나가며 소년은 조금은 서늘한 밤공기 속에서 투명한 입김을 약하게 내뱉었다.
그 입김소리조차 연주에 방해되지 않게 조절하며 소년은 몸을 뒤로 돌려 달빛을 뒤로 했다. 날개뼈까지 내려올 정도로 묶어내린 머리카락이 달빛에 살며시 비쳐졌고 바람의 움직임에 천천히 흔들렸다. 연주하는 손과 비슷한 템포로 천천히 흔들리는 가운데, 멜로디는 조금 크게 바뀌어가며, 마치 구름이 달을 가리듯 조금 어두운 느낌으로 바뀌었다. 어두컴컴한 밤을 연상하듯 침울한 멜로디가 울리는 듯 했으나, 그것도 잠시. 구름은 지나가고 달이 다시 세상을 비추듯 멜로디가 다시 고요하고 잔잔하게, 밝은 어조로 바뀌었다.
멜로디를 자유롭게 바꿔가며 연주하는 것에 너무 집중한 탓인지, 누군가가 근처를 지나가는 것조차 소년은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저 연주에 녹아내려, 그것에만 집중할 뿐이었다.
#너무 뜬금없는 전개라던가, 민가가 주변에 없다고 한만큼 밤에 잠 못자게 왜 연주하냐고 화내는 그런 것만 아니면 어떤 전개로 이어줘도 괜찮아! 꼽주는 것만 아니면 진짜 오케이!
나의 유년 시절은 아티를 제외하면 기억하고 싶지 않은 것투성이였어요. 그마저도 아티가 홀연히 사라져버려서, 좋은 기억조차 떠올리고 난 후에는 아프기만 할 뿐이라 빛이 바래어도 다시 꺼내 보지 않았어요. 아버지는 좋은 사람이 아니었어요. 어머니가 말도 없이 떠나갈 정도로요. 아티가 떠나가고서 슬픔에 빠져 울고 있던 나를 돈이 궁해서 팔아넘기려고 했던 사람이었습니다. 다행히 밤늦게까지 작업을 하시느라 깨어 계셨던 시계공 할아버지가 팔려 가던 상황을 발견해서 다행이었어요. 시계공 할아버지는 제 값을 치러주었고, 나는 그 빚을 갚기 위해 할아버지의 조수가 되었어요. 하지만 할아버지를 제외한 마을 사람들은 그때의 어린 나, 로빈은 그대로 팔려 간 줄로만 알고 있어요. 마을 사람들에게 들키면 아버지에게도 들키게 됩니다. 나는 그래서 시계탑에 숨어들었어요. 할아버지는 가족보다 따스했고, 시계는 언제나 좋아하는 것이었으니 괜찮아요. ...그렇다고 생각하는데, 어째서 네 목소리가 돌아온다고 말하니 서러움이 넘쳐흐를까요? 너와 행복했던 순간을 다시 한번 느껴보고 싶은 걸까요.
네 이름을 불러도 괜찮을지 계속해서 고민하고 있어요. 분명 소리를 내 버리면 돌이킬 수 없을 거예요. 억지로 메꾸었던 네 자리를, 다시 네가 들어올 수 있도록 비워도 괜찮을지 모르겠어요.
"편지 안 써도 돼."
눈가에 네 손이 다시 닿았습니다. 나는 이번에 다가온 네 손길은 밀어내지 않았어요. 이제는 모난 소리를 할 수 없어요. 널 밀어내는 것도 너무 아파서 생각하지 않기로 했어요. 마음이 시키는 대로 해보자고요.
"편지 쓰지 않아도 괜찮도록 떠나지 마."
말도 안 되는 응석이라는 것을 나도 잘 알고 있어요. 하지만 이제 지금 아티에게 하고 싶은 말이에요. 아티가 들어주지 않아도 괜찮아요. 투정이라도 부리고 싶을 뿐입니다. 다만 울음소리가 새어 나올 것 같으면 참아내면서 목소리를 내느라 온전히 전해지고 있는지도 모르겠어요. 아티가 다시 떠나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이런 말밖에 할 수 없는 내가, 좀 더 의젓하고 멋진 사람이었다면 떠나도 괜찮다고 말해줄 수 있었을 텐데요.
"...보고 싶었어. 많이 보고 싶었어."
"다시 로비라고 불러줘서 기뻐."
"널 다시 부를 수 있어서 기뻐,"
엉망진창, 두서없는 문장들의 나열입니다. 내가 지금 엉망진창이기 때문일 거예요.
"아티."
웃어버렸어요. 눈물을 뚝뚝 흘리면서, 여전히 눈물이 눈가에 맺히고 있으면서도 웃는 것 또한 엉망진창에 포함되겠지요.
# 저도 생각보다 엄청 깊은 관계성이 나와서 얼떨떨해요... 시계탑에서 히키코모리처럼 지내는 시계공 설정이 생각났던 것 뿐이라 :3 # 너무 멋진 황실 기병대원인데 지당한 말 아닐까요... # 로빈 묘사가 적어서 픽크루라도 가져온 건데 외형적인 부분에서 답레에 필요한게 있으시면 편히 물어봐주세요!
>>89 # (로빈의 아버지 설정에 분노와 슬픔과 안타까움이 뒤범벅되어 눈물을 쏟아낸 나머지 빼빼 말라버린 채로 자기 눈물에 휩쓸려가는 멸치) # ...사실 처음에 답레 쓰기 시작할 때는 모험과 악당세력과 퍼즐과 보스전이 마련되어 있는 코스모드롬 레이드를 구상하고 있었는데 전개가 달콤쌉싸름해져버렸어요... 오히려.. 오히려 좋아
당신의 말에, 베아트리체는 고개를 힘있게 끄덕입니다. 아직 돌아오기 위해 건너야 할 단계가 조금 남았지만, 원래는 그 모든 단계를 다 건너고 나서야 당신에게 돌아오려고 했지만, 그들이 코스모드롬 열쇠를 맡긴 게 하필이면 이 주에서 가장 솜씨좋은 시계공으로 소문난 당신이었기에. 베아트리체는 손을 내밀어 당신의 눈가에 맺힌 눈물을 닦아내려 해봅니다. 어릴 적부터 이것저것 뚝딱뚝딱대며 장난치는 걸 좋아해 손끝이 곱지는 않았지만 못본 새 더 거칠어졌네요. 베아트리체는 당신의 손에 꼭 쥐여있는 다른 손에서 손수건을 받아들어 그것으로 눈물을 닦아주려 합니다. 눈가가 쓸리면 아플 테니까요.
"응, 응."
"나 다녀왔어, 로비."
"나도, 정말로 보고 싶었어."
해야 하는 말이 남아있지만, 베아트리체는 당신의 말에 아니라고 대답하지 않습니다. 당신이 욕심껏 말하는 것처럼, 그녀 역시도 욕심껏 대답하고 싶었으니까요. 더 이상 돌아갈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던 선명하게 행복한 나날들이 당신의 얼굴에서 빛나고 있었기에. 과거로 돌아갈 수는 없겠지만, 다시 함께하는 나날을 보낼 수 있다는 희망이 너무도 눈앞에 가까이 다가와 있었기에.
베아트리체는 손을 들어서 가죽갑옷의 앞섶을 툭툭 끌렀습니다. 가죽갑옷에 징이 박혀있는 이유는 가죽 아래에 쇳조각을 고정시켜두기 위해 박아둔 거라서, 그 갑옷을 입고 있으면 누군가를 안아주기엔 너무 차갑고 딱딱한 품이 되니까요. 갑옷 아래에 받쳐입는 누비옷도 썩 부드러운 재질은 아니지만, 그래도 갑옷보단 나을 것 같아서.
"응."
아티. 하고 당신이 부르는 소리에 베아트리체는, 아티는 양 팔을 활짝 펼쳐보였습니다. 그렇게 편한 품은 아니지만, 이나마 당신이 눈물젖은 얼굴을 마음껏 기댈 수 있도록요.
황실 기병대원 베아트리체 중위가 있던 자리에는, 벅찬 감정에 웃는 얼굴로 울면서 눈물을 뚝뚝 흘리고 있는 아티만이 남아 있었습니다.
# 외형 묘사는 픽크루만으로 충분해요! 오히려 픽크루 가져와주셔서 고마워요... 아티에 대해서도 답레를 쓰실 때 필요하거나 궁금한 내용이 있으시다면 마음껏 질문해주세요.
감정을 쏟아내는 건 오랜만에요. 받아줄 사람도 없었고, 꺼내려고 하지도 않았으니까요. 그래서 어설픕니다. 누군가 눈물을 닦아준 적이 손에 꼽을 거라고 생각해요. 여전히 울음소리를 내지 않으려 입술을 깨물고 있다 보니 히끅거리는 소리만 납니다. 그만 울어야 하는데, 아티도 울고 있는데도 내 눈물을 닦아주고 있는데, 아무리 차분하게 생각해보아도 쉽지 않아요. 둑이 무너지면서 쏟아지는 물살은 너무나도 거센 모양이에요. 이대로라면 손수건이 내 눈물로 다 축축해질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요.
"상단이 마을에 올 때마다 널 찾았어."
네가 작별을 고한 날은 대상단의 행렬이 마을에 찾아온 날이었으니까요. 마을에 상단이 온다고 하면 혹시나 하는 마음에 시계탑 밖으로 한달음에 달려 나갔습니다. 상단뿐만이 아닙니다. 시계탑 위에서 마을 어귀를 바라보고 있자니, 외부인이 오는 것 같다 하면 작은 기대를 품고는 했습니다. 너를 지금에서야 만났다는 건, 여러 번이나 품고 말았던 크고 작은 기대들이 다 무너졌다는 뜻이지요. 이제는 기대조차 하지 못할 때 네가 돌아왔어요.
분명 네 편지를 받지 못한 이유는, 네가 떠나고 얼마 안 되어서 내가 시계탑으로 숨어버렸기 때문이겠지요. 아버지를 다시 마주할 용기가 있어서, 원래 살았던 그 집에서 너를 기다렸다면 우리는 편지를 주고받을 수 있었을지도 모르겠어요. 아티에게 이 말은 하지 않기로 해요. 오랜만에 만난 옛 친구에게 좋지도 않은 이야기를 들려줄 필요는 없겠지요. 마을 사람들이 아티를 알아본다면, 그리고 어린 로빈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면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너도 알게 되겠지만요. 그러니까 굳이 앞당기지 않기로 해요.
"...?"
나는 아티가 팔을 벌리는 것을 바라보았습니다. 언제부터 그랬는지, 앞섶이 풀려있습니다. 갑옷이 불편해서 그런 걸까요, 아니면 더워서일까요. 그것도 아니라면 옷이 혼자 풀린 걸까요? 깜빡거릴 때 떨어지는 눈물을 훔치고, 아티를 바라보았어요. 그리고 그때 아티가 무슨 이유로 팔을 벌리고서 있는지 깨달았어요. 나를 안아주려고 한 것 같다고 생각해요! ...아닐 수도 있지만요. 내가 아티한테 안겨도 괜찮은 걸까요? 누군가를 안고, 안아주고 했던 것도 오래된 것 같아요. 나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다가가지를 못합니다.
# >>89 아버지는 마을에서 추방당했으니 괜찮아요! 시계공 할아버지가 로빈 몰래 해결해버렸어요. # 모험과 악당세력과 퍼즐과 보스전이 하고 싶으시면 하셔도 괜찮아요 :3 # >>91 저는 텀이 널뛰기를 해서... 그래도 밤 늦게는 아마 자고 있을 거 같네요. # 어렸을 때는 아티랑 로빈 키가 엇비슷했을까요? 지금 아티는 키가 크다고 해서 로빈보다 크다고 생각하는데, 만약 엇비슷했었다 하면 안게 됐을 때 키 차이에 로빈이 놀랄 것 같아서요.
"내가 열여덟 살이 되는 해쯤에 내가 살던 마을에 방문할 예정이었어. 그런데 상단이 좀... 잘 안 풀렸어."
아티를 데려간 그 상단은 정말로 커다란 상단이었습니다- 3개 대륙과 2개 대양을 오가는 기나긴 상로를 갖고 있었기에, 한 번 상로를 일주하는 데에 6년에서 8년이 걸리는 상단이었죠. 그렇지만 당신이 그 대상단의 상호를 알았더라면 오히려 그 기대가 더 아프게 무너졌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아티를 데려간 대상단은 몇 년쯤 뒤에, 다시 이 마을로 돌아올 수 있게 되기 전에 이런저런 비리 사건과 불행과 도적떼의 습격에 휘말려 많은 것들을 잃은 나머지 해산했거든요.
"그래서 그냥 내 발로 왔어."
그렇지만 이제 지나간 일들에 매달려 과거의 고통을 붙들고 있지 않아도 될 것 같습니다. 비록 너무 늦어 당신의 기대가 다 무너지고 난 뒤에야 뜻밖의 재회를 하긴 했지만, 그 모든 역경과 희박한 가능성을 딛고, 아티는 그때 그 시절의 금발과 푸른 눈을 간직한 채로 당신에게로 돌아왔으니까요. 아티도 자신이 늦었다는 것을 알기에, 자신이 낯선 이국의 하늘 아래에서 당신이 있는 고향을 애타게 그리고 있었던 만큼이나 당신 역시도 자신을 애타게 기다렸다는 것을 이제는 알기에, 아티는 자신의 눈에서 흐르는 눈물은 생각지도 않고 당신의 눈물을 닦아주고 있습니다.
"..."
정말 왜 그래, 안아주는 법도 잊어버린 것처럼. 당신이 어쩔 줄 모르고 바라보고 있자, 아티는 갑옷을 아예 훌렁 벗어버리고 갑옷 아래 받쳐입는 누비옷까지 벗어서 한구석에 철걱 부려놓습니다. 밖에 나다니고 있는 다른 사람들과 별다를 바 없어보이는 튜닉 차림이 되어서야 아티는 다시 양 팔을 벌리고 당신을 끌어안아줍니다. 옛날에는 키가 엇비슷했는데, 이젠 키차이가 꽤 나서 당신이 푹 안기는 모습이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옛날보다도 더 탄탄해지고 단단해진 품이지만, 따뜻한 건 변하지 않았네요.
생각해보면 항상 먼저 다가가서 끌어안는 쪽은 자신이었지, 하고 아티는 생각했습니다. 당신이 뭔가 우울해하거나 외로워하는 것 같을 때마다 이렇게 당신을 안아주곤 했었죠. 이번에도 우는 당신을 달래주고 싶어서 안아주려고 했는데 왜인지 이번에는 자신이 응석부리는 모습이 된 것 같습니다.
# (아티가 로빈네 아버지에게 수정펀치를 날리는 장면을 머릿속에서 급히 지운다) # 본격적으로 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로빈주가 원하시면... uu 지금은 조미료 느낌으로, 필요한 곳에 조금씩만 덧붙여볼게요. # 어렸을 적에는 두 사람의 키가 엇비슷했거나 아티가 조금 더 작았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지금의 아티는 약 182센티미터 정도에요. 상당한 장신이죠...
투정 부리고, 욕심부린 다음은 고마움을 표현했어요. 나는 이 작은 마을이 내 세상의 전부지만, 네가 아는 세상은 더 커다랗고 반짝반짝 빛날 거에요. 그런데도 아티는 작은 마을과 마을보다 더 작은 어릴 때의 나를 기억해준 거예요. 지금의 나도 마찬가지로 작은 것 같지만요. 몸도, 마음도 전부 다요. 아티는 쑥쑥 많이 자랐어요. 내가 너무 작아서 기억나지 않을 수도 있었을 텐데, 아까까지만 해도 일부러 못되게 굴던 나인데도요. 내가 아픈 게 무서워서 네게 상처 주기를 선택해버렸는데... 아티를 바라볼 염치가 없어요. 아티의 눈을 몇 번이나 바라보았을까요? 분명 아티의 눈보다, 떨어진 아티의 눈물이 만든 자국을 더 많이 보았을 거에요.
나도 아티의 눈물을 닦아주고 싶어요. 하지만 난 손수건도 없고 고작해야 옷소매뿐이에요. 어떻게 하면 좋을지 고민하고 있자니, 아티가 옷을 벗어버리고 있어요. ... 아티가 나를 안아주려고 했단 건 착각이었나 봐요. 아무래도 아티는 그저 더웠을 뿐인 거 같아요! 나는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한 걸까요, 민망해서 얼굴이 화끈거려요. 안 그래도 많이 울어버려서 눈가에 열이 오른 게 느껴지는데 더 심해졌어요. 어릴 때는 아티카 안아주고는 했지만, 지금은 다 컸으니까요. 그때처럼 아티가 안아주려고 한 거라고 혼자 착각이나 하고, 정말 바보 같아요.
"?"
그런데 아티가 안아주었어요! 나는 내가 어디서부터 잘못 생각한 건지 알 수 없어서, 아티를 바라보았습니다.
"...?!"
그리고 또 놀라버리고 말았어요. 고개를 들었는데 아티의 얼굴이 보이질 않았어요. 아티인 줄 몰랐을 때도, 키가 크신 분이라고 생각은 했지만 이렇게 큰 줄은 몰랐어요! 좀 더 고개를 뒤로 젖히고 나니 아티의 얼굴이 보여요. 아티가, 정말 쑥쑥 많이 자랐어요! 이래서야는 손을 뻗어도 아티의 눈가까지 닿을지 모르겠네요. 무엇으로 아티의 눈물을 닦아줄 수 있는지 고민한 게 헛수고였어요. 나는 작게 웃음소리를 냈습니다.
"아티, 내가 눈물을 닦아줄 수 있을까?"
# 로빈의 키는 정확히 생각해두질 않았지만 단신인 편이라고 생각해요. :3 # 로빈이 느끼기에 아티는 머리카락 색깔도 그렇고, 태양같아요... 그래서 아티는 과분한 친구라며 자기가 못났다 하는 부분들이 나오고 있는데 불편하면 말씀해주세요.
당신의 말에 머릿속이 복잡합니다─ 당신 역시도 자신을 잊지 않았을 뿐더러 자신을 애타게 기다렸다는 사실이, 애타게 기다리다 못해 자신 모양의 그을음이 당신에게 남아있었다는 사실이, 자신이 이국의 하늘을 바라보며 별들 위로 그려보던 당신의 모습과 겹쳐보여서. 그렇게도 밤하늘에 그리던 그리운 모습이 아직도 이렇게 곱고 예쁘게 남아서 옛날처럼 바라봐주는 모습이. 시점은 조금 바뀌었지만, 그 예쁘고 상냥한 금빛의 눈동자는 여전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은 아직 자신의 일을 다 끝마치지도 못하고, 당신에게 정말로 나 돌아왔어, 라고 말하기에는 너무 이른데 돌아왔다는 말을 해버려서. 눈물자국이 남은 뺨을 하고 당신을 내려다보다가 아티는 천천히 입을 뗍니다.
"─많은 것을 봤어! 나쁜 일들도 많이 있었지만, 좋은 일들도 많이 있었어."
"그렇지만, 여기서 너와 함께 있었던 시간을 잊게 하는 일은 없었어."
잊을 수 없었어. 보고 싶었어. 아티는 자신만의 방식으로 자신이 당신을 잊지 않았다는 것을 표현했습니다. 옛날처럼 당신을 푹 끌어안는 것으로요. 그러고 싶어서, 당신을 그 무엇보다도 선명히 기억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려주고 싶어서, 아티는 임무 도중에 어지간해선 벗어서는 안 되는 갑옷도 벗어버리고 말았습니다. 당신을 안고 아티는 눈을 꾹 감습니다. 가슴팍 너머에서 옅게 전해져오는 아티의 심장박동은 아직 그 옛날처럼 따뜻합니다.
당신의 웃음소리에 아티는 당신을 안은 채로 당신을 내려다보았습니다. 그리고 당신의 요청에 아티는 조금 자세를 바꿉니다. "으응." 하는 콧소리 섞인 대답과 함께, 당신을 끌어안고 있던 팔을 약간 푼 다음 상반신을 숙여서, 당신과 눈높이를 맞추고 다시 느슨하게 당신을 끌어안습니다. 당신이 손을 들어서 자신의 얼굴을 닦아주기 좋도록. 그리고 눈을 꼭 감습니다.
# 그것도 로비의 개성이고, 로비가 그렇게 생각할수록 아티가 더 전력으로 안아주고 좋아하는 마음을 표현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 물론 로비가 자존감낮은 모습을 보이는 건 안타깝지만, 제가 그것에 대해 안타까워하기보다는 아티를 통해서 많이 안아주고 보듬어주는 게 더 나은 것 같아요. # *.* 지금은 주무시고 계실 테니 답레만 남겨둘게요..
반짝반짝한 내 친구. 상냥하게도 내 손이 닿을 수 있도록 자세를 고쳐주었어요. 나는 나지막이 아티의 이름을 부르고, 손을 들었어요. 아티의 얼굴에 닿으면. 손끝에 남는 감각이 낯설어요. 내 손에 제일 많이 닿은 것은 역시 시계 부품이니까요. 시계가 작을수록 조그마해지는 부품, 시계가 클수록 커지는 부품. 그 크기가 어떠하든 차가운 것은 똑같습니다. 아티는 따뜻해요. 아주 작은 회중시계의 부품을 다룰 때보다도 조심스러웠다고 하면 과장일까요. 나는 아티의 눈물 자국을 지웁니다.
"다음번에 돌아오면, 그때 이야기해 줘."
알고 있습니다. 아티가 오늘 마을에 온 이유는 저 시계탑 위에 있는 회중시계 때문이라는 걸요. 시계를 돌려받은 아티는 아마 마을을 다시 떠날 거예요. 하지만 이번에는 다시 기대하려고 합니다. 아티가 곧 돌아오리라고 믿을 거예요. 그래서 나는 조금 용기 내서 다음을 기약했습니다. 마을을 떠나고서 있었던 일들, 나쁜 일도 좋은 일도 전부 듣고 싶어요. 시계탑 위에서 마을을 내려다보면서 들어도 좋을 것 같고, 언덕 위에 올라가 산들바람과 함께하는 것도 좋을 것 같아요. 아니면 어릴 때 자주 놀러 가던 곳을 되짚어 보아도 좋을 것 같아요. 시계공 로빈의 모습으로 마을에 나갈 수 있을지는 아직 모르겠지만, 그 모습으로 상상해보았어요. 어릴 때 그랬던 것처럼 분홍빛 머리카락을 햇빛 아래 드러내고, 의미 없는 안경도 벗어버린 그런 모습이요. 거추장스러운 망토도 벗어버리고, 옷은 아티가 골라준 것으로 입으면 즐거울 것 같아요.
그리고는, 음, 어떻게 해야 할지 잠깐 고민했어요. 나도 똑같이 아티를 안아주면 되는 걸까요. 누군가 안아주는 것도 어색하지만, 누군가를 안아주는 건 더 어색해요. 아티인데도요. 그렇지만 아티니까 할 수 있어요! 친구를 안아주지 못할 리가 없어요. 어색하지만 한 번 노력해봅니다. 두 팔로 아티를 안으면서, 아티의 품에 기대보았어요. 생각보다도 엄청 따뜻해서, 꼭 다시 어려진 것 같아요.
유쾌한 목소리가 숲속을 가득 채웠다. 용을 만나러 간다는 그 말이 상당히 웃긴 것인지, 은발의 긴 머리카락을 자랑하는 사내가 정말로 크게 웃었다. 분명히 그 역시 인간의 모습이었으나 마치 말하는 것을 들어보면 인간이 아니라는 것마냥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과연 용을 만나러 간다는 상대에겐 어떻게 들렸을까?
터져나오는 경쾌한 웃음소리를 겨우겨우 멈추며 눈에 맺힌 눈물마저 닦아내며 사내는 눈앞의 존재를 가만히 주시하면서 바라보다 다시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 들려오는 말대로 이 숲을 너머 쭉 가면 용이 사는 굴이 나오지! 허나 인간이여! 그 용을 만나서 뭘 하려는거냐? 용의 재보가 탐이 나는 것이냐? 아니면 용맹을 자랑하기 위해 용의 목을 원하는 것이냐?"
말이 끝난 사내의 주변에서 하얀색 연기가 솔솔 올라왔고, 곧 펑 터지는 소리가 들렸다. 연기 속에 보이는 실루엣은 상당히 거대한 몸의 형태였다. 온 몸이 은색으로 빛나고 있으며 그 덩치는 어지간한 건물 못지 않게 큰 용은 고개를 숙여 눈앞의 존재를 바라봤다.
"나를 찾는 모양이니 직접 나에게 말해보거라. 내 근처 마을이나 이 나라의 왕실에는 딱히 피해를 주지 않은 것 같다만, 내가 이 근처에 사는 것이 두려운 것이더냐. 아니면 목숨을 걸고 나의 재보를 노리는 것이더냐. 그것도 아니면, 내 목을 가지고 싶은 것이더냐?"
/맥커터질만 아니면 뭐든 오케이! 그냥 자신을 만나려고 하는 것을 인간 형태에서 들은 용이 웃으면서 정체를 밝힌 장면이야.
당신의 손길이 아티의 뺨에 닿을 때, 아티는 히히히 하는 작은 웃음소리를 흘리며 천진하게 미소짓습니다. 누군가의 따스한 살갖을 만져보는 것도 오랜만인 것 같습니다... 아티는 마치 오래전 잊어버린 습관과 온기를 떠올리려는 것처럼 당신의 손길에 자신의 뺨을 부드럽게 치대어옵니다. 얼굴에 남아있는 물기며 눈물자국들이 당신의 손길에 조금씩 닦여나갑니다. 눈물이 다 닦여나가고도, 당신이 손을 떼지 않았다면 아티는 한참이나 더 당신의 손에 기대어있었을 것입니다. 후드를 벗어던진 그 순간부터 이 모든 일들이 하나같이 충동적으로 벌어진 일이지만─ 그래서 일이 조금 번거롭게 될지도 모르고, 어쩌면 남은 일을 하는 내내 시계탑 안에서 재회한 당신 생각이 불러오는 선명한 그리움이 조금 아플지도 모르겠지만─ 이렇게 된 것을 아티는 후회하지 않기로 했습니다.
"네가 듣고 싶으면 얼마든지."
아티는 가지런하고 뾰죽한 이빨을 드러내며 온 얼굴에 개구쟁이같은 미소를 짓습니다. 그 눈빛만큼이나 그 미소도 변하지 않았네요. 당신이 알면 부끄러워할지도 모르겠지만, 자신이 지나온 여행길에서, 이따금 꽤 친해진 사람이 있으면 아티는 자신의 고향 마을에서 헤어진 상냥하고 똑똑한 아이에 대한 이야기를 이따금 하곤 했습니다. 의도치 않게 끊어져버리고 말았던 그 이야기를 다시 이어나갈 수 있게 되는 날이 가깝습니다.
조그만 장난꾸러기 꼬맹이라기엔 너무 크고 탄탄해진 아티의 품에 기대면, 옅은 흙먼지 냄새와 함께 희미하게 구운 빵 같은 냄새가 납니다. 문득 무언가가 당신의 머리를 부드럽게 쓸어내리는 게 느껴져 고개를 들어보면 아티가 맨손으로 당신의 머리를 다독여주듯 쓰다듬어주고 있습니다. 서투르지만 부드러운 손길. 예전에는 당신이 쓰다듬어주는 쪽이었는데요. "이거 해보고 싶었어." 하고 아티는 키득거립니다. 그러다 말고 아티는 "임무만 아니었더라도..." 하고 아쉬운 듯이 뇌까립니다. 그러다 아티는 문득,
>>101 # 고맙긴! 나도 일반 쪽이 익숙한걸~ 그럼 일반으로 하자! # 사실 내가 참치에 오래 안 왔어서 재활겸 편지로 시작 해본거라 조금 못 쓸수도 있어...! 미리 미안! ㅜㅜ # 장면은 카페 앞에서 바로 만난 부분부터 시작하면 좋으려나? # 내가 지금 바로 레스를 쓰고 싶은데 오늘은 가봐야 할 시간이라... 내 레스 올리려면 내일 점심 조금 넘어서 가능할 것 같아 ㅜㅜ 이것도 많이 미안해 ㅜㅜ
카페 바깥. 왼쪽 손에 그가 마실 음료와 작은 검은색 종이백을 든 여자가 핸드폰을 하고 있다. 손에 들린 핸드폰을 보며 작게 웃거나, 때로는 살짝 울상이 되는 등 조금이지만 다양한 표정으로 휙, 휙 바뀌던 그녀는, 그렇게 한참을 조용히 그와의 연락에만 집중하는 듯 하더니 지금 나오라는 문자가 도착하자마자 곧바로 답장을 보내며 고개를 들어 도로를 바라보았다.
' 아, 저기 있다. '
그녀는 도로에 가득한 차들 중 저 너머에서 한 번에 익숙한 차를 발견하고는, 반가운 마음을 표현하듯 핸드폰을 들고 있던 손을 그대로 올려 그의 차를 향해 짧게 흔들었다. 비슷한 차일 뿐 다른 사람이 타고 있을 수 있음에도 망설임 없이 아는 척을 하는 모습이, 마치 그를 단번에 알아볼 수 있다는 그녀의 확신을 보여주는 듯 했다.
" 아저씨~ "
차에 타고 있어 그에게는 들리지도 않겠지만 그저 반가움을 표현하려는 생각인 듯, 적당한 목소리로 그를 부르는 그녀의 얼굴엔 장난스럽기도 하고 즐거워 보이기도 하는 특유의 미소가 평소처럼 스며들어 있었다.
역시 출근 시간과 퇴근 시간이 아니라면 도로는 한적하다. 사실 오늘이 쉬는 날이라 사람들이 집에서 쉰다고 밖으로 안나오는 이유도 있을 것이다. 휴일이 아니었다면 어제 늦게까지 회식 자리가 이어지지도 않았겠지만, 오늘 이렇게 약속을 잡지도 못했겠지. 살짝 걷어둔 셔츠 아래로 보이는 손목시계에 시선을 돌리니 약속했던 시간보다 조금 많이 지나있었다. 계속 문자를 해주긴 했지만 내가 늦은건 사실이니까 최대한 빨리 가자는 생각으로 엑셀을 밟는다.
그렇게 카페 간판이 눈에 보일때쯤 카페 앞쪽에 앉아있는 익숙한 모습이 보인다. 양 손에 뭘 들고 있는데 저 종이백이 나에게 줄 물건인가? 천천히 카페 앞으로 차를 운전해가자 이쪽을 보고서 손을 흔드는 모습이 보인다. 기뻐하는 표정에 역시 늦으면 안됐다는 죄책감이 몰려온다.
" 꼬맹이, 얼른 타. "
창문을 내리고 웃으면서 말한 나는 손수건으로 조수석 시트를 간단히 닦아준다. 출발하기전에 가볍게 청소는 했지만 그래도 한번쯤 더 하는게 어려운 일은 아니니까. 그녀가 탈때까지 기다렸다가 나는 뒷쪽을 가리키며 말했다.
" 저번에 두고간거 뒤에 있어. 지금 들고 있는 것도 뒷좌석에 던져놔. "
그렇게 얘기하고 오늘 갈 장소를 네비게이션에 찍는다. 어디 갈지는 저번에 들어서 알고 있었으니까.
약속 시간 이상을 밖에서 기다렸어도 그닥 기분이 상하지는 않았는지, 오히려 꼬맹이라 부르는 그의 말에 장난스럽게 대답하면서 익숙하게 그가 닦아준 조수석에 오르며 차 문을 닫았다. 그렇게 바람이 불지 않는 곳에 들어오자 그녀는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대충 쓸어 넘기며 편하게 시트에 몸을 기댔다. 카페에서부터 차에 타기까지 이어지는 그녀의 모든 행동이 마치 흐르는 물처럼 자연스러웠다.
" 아, 고마워요. 이따가 챙길게요. "
안전벨트를 하며 고개를 돌려 뒷좌석을 확인한 그녀는 고맙다고 대답했지만, 이번 선물 만큼은 직접 그의 손에 쥐어줄 생각이었던 그녀는 지금 들고 있는 것도 던져놓으라는 그의 말에는 대답 없이 미소만 지었다. 그렇게 마지막 말을 무시해버린 그녀는 네비게이션을 하고 있는 그가 귀찮지 않도록 종이백을 반대쪽 손으로 옮기더니 음료가 담긴 컵만 당신 쪽으로 내밀어 빨대를 입가 근처에 가져다주려 했다.
" 여기요, 마실거. 급하게 준비하느라 바빴을 텐데 일단 한 모금 마셔요. " " 그리고, 이건 뒤에 직접 던져서 놔요. " " ..그때 못 줬던 생일 선물이에요. "
그가 네비게이션에 목적지를 전부 입력했을 즈음에 가지고 있던 종이백을 그에게 내밀었다. 크기가 크지도 않고, 검은색으로만 이루어진 선물용 가방은 별다른 장식이 없었지만 안에 들어있는 물건 역시 가격이 있겠다 예상될 만큼은 고급스러워 보였다. 하필 그의 생일날에 출장을 가는 바람에 챙기지 못했던 것이 마음에 걸렸던 그녀는, 가져온 선물의 정체를 말하는 목소리에 어렴풋이 미안함이 담겨있었다.
문자를 하면서도 느꼈지만 약속에 늦은 것에 대해서 그렇게까지 화가 나보이지는 않았다. 평소엔 약속시간보다 먼저 나와서 기다리곤 했으니 하루 정도는 봐준다는 의미일지도. 이래서 사람의 평소 행실이 중요한거다. 조수석에 탄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미처 정리하지 못한 머리카락 가닥가닥을 떼어주며 말했다.
" 밖에 바람이 좀 부나보네. "
지하주차장에서 차를 끌고 나왔으니 바깥의 바람을 느낄새가 없었다. 잠깐 창문을 열었을때 바람이 조금 불긴했는데, 이렇게 계속 불고 있었나보다. 꽤 차가웠는데 이런 날씨에 바깥에 나와있으면 분명 감기 걸린다니까. 그렇게 네비게이션을 조작하며 입가에 가져다주는 음료를 자연스럽게 빨아먹다 종이백의 정체에 눈을 크게 뜨며 바라보았다.
" 생일 선물이라고? "
분명 저번 달에 생일이긴 했었다. 그때 너는 분명 출장을 가있기는 했었지. 하지만 조금 아쉬웠다뿐이지 출장 가있는 사람에게 생일 선물 내놓아라 할 수는 없으니까 그냥 생일 축하한다는 말만 듣고 말았다. 그때 다른 사람들에게도 받은게 꽤나 있었지만 이렇게 뒤늦게 챙겨주는 선물이라니, 그 누구에게 받은 것보다 값진 것이었다.
" 월급이 왜 없나 싶었는데 이것 때문이었구나? "
딱 보기에도 고급져보이는 것이라 출발하기전에 종이백에서 선물을 꺼내본다. 고급 브랜드 로고가 박힌 상자를 열어보자 보이는 것은 지갑이었다. 고급 가죽으로 마감되어있는 지갑은 영수증을 보지 않아도 그 값어치가 얼마나 될지 대충 짐작이 가서 놀란 눈으로 너를 바라보며 말했다.
" 너무 무리한거 아니야? 그냥 안주고 넘어가도 괜찮았는데. 그래도 고마워. 잘 쓸께. "
물론 똑똑한 그녀인만큼 다 계산하고 소비했겠지만 그럼에도 평소에 버는 것을 생각해봤을때 내 입장에선 좀 무리가 아닌가 싶었다. 주는 마음은 감사하지만 본인이 부담될만큼의 선물을 받는 것은 받는 사람도 부담이 가기 마련이다. 그래도 신경 써서 선물을 줬다는 것에 감사를 표하면서 조심스럽게 뒷좌석에 가져다 놓은 나는 부드럽게 차를 출발 시켰다.
" 이렇게 큰걸 받아버렸으니 내가 줄 생일선물도 스케일을 좀 늘려야겠는데? "
고개는 전방을 주시한 상태로 너를 흘끗 쳐다봐가며 웃는다. 차도에는 생각보다 차가 없었고 신호도 빨간불에 거의 걸리지 않고 스무스하게 도시를 빠져나가고 있었다.
자기가 하는 일이 올바르지 않고 비난받을 행동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으나 비정한 표정을 짓고 있는 그에게 있어선 그런 것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일이었다. 가문계승 후보자 중 하나의 목숨을 끊고 불행한 사고로 위장한 후 그는 검에 묻어있는 검붉은 얼룩을 닦아냈다. 활활 타오르는 불꽃은 다음 날, 정말 불행하고 운이 없게도 오두막에 불이 붙어 그 안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던 이가 목숨을 잃은 것으로 진상을 감출 것이 분명했다.
혹여나 불꽃이 중간에 꺼질까 싶어 어둠 속에서 불꽃이 사그라드는 것까지 확인하고 난 이후에야 그는 어둠 속으로 모습을 감췄다. 참으로 비정하기 짝이 없는 권력 싸움 속 암투였으나 갑작스럽게 유력 가문을 이어가던 가주와 그 아내가 오랜 지병으로 목숨을 잃은 이후의 혼란 속에선 그 비정함마저 집어삼켜야 살아남을 수 있었다. 자신이 모시고 있는 이도 그렇게 생각할지는 알 수 없었으나 그는 그렇게 생각했다.
윤리, 도덕. 그런 것을 따졌다간 이 상황에서 살아남을 수 없었다. 자신의 손에 피를 묻혀서라도 지킬 이는 지키리라. 그리고 수행할 것은 수행하리라. 인간의 마음을 애써 잠재우며 지시에 충실하며 비정한 마음을 먹은 사내는 아무의 눈에도 띄지 않고 한 처소로 들어섰다.
그 안에 있는 이는 사내가 모시는 이였다. 무릎을 꿇고 머리를 숙이며 입을 열어 그는 상황을 보고했다.
"지시한대로 처리했습니다. 상황이 상황이니 의혹은 생길지도 모르나 암살했다는 사실은 아무도 모를 겁니다."
/난 그런 지시 내린 적 없어! 라는 식으로 사내가 멋대로 한 행동으로 처리하는 것은 조금 곤란할 것 같아. 그 외엔 어떻게 이어도 오케이.
>>109 불을 밝히지 않은 어둑한 처소에 가득한 침묵을 깨고, 차분하고 위엄이 서린 목소리가 조용히 울렸다. 그러나, 그 목소리는 그의 주인의 것이 아니었다.
"유감이군, 상황이 상황이라 의혹만으로는 끝나지 못할 성 싶은데."
목소리가 들림과 동시에, 방 안이 달빛으로 은은하게 밝아졌다. 침대 위에는 그의 주인이 재갈이 물린 채 포박당해 있었고, 그 옆에는 길고 굽슬굽슬한 붉은 머리카락을 높이 묶어올리고, 낡았지만 잘 손질된 은빛 갑옷을 입은 기사가 검을 뽑아든 채 그의 주인을 겨누고 서 있었다. 뿐만 아니라, 어둠 속에 몸을 숨기고 있던 여섯명 정도의 병사들이 그의 주변을 둘러싸고 있었다.
"국왕 폐하의 명을 받들어, 자네를 이번 귀족 연쇄 살인 사건의 범인으로서 체포하겠네. 자세한 이야기는 심문 때 듣도록 하지."
>>112 사내가 모시는 이가 있는 것을 확인하고 보고를 한건데 사실 얼굴도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어둠이 깔려있었고 주인은 포박당해있었고, 얼굴도 확인하지 않고 보고를 하고 그 안에 병사들이 이미 있었다라는 전개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네. 이 전개로 잇는 것은 조금 애매할 것 같아. 기껏 이어줬는데 미안하다. 너참치.
불쑥 외마디를 읊조리면서 나타나더니, 당신의 앞에서 눈을 깜빡인다. 새카만 머리카락과, 새하얀 피부, 그리고 또 새카만 눈동자…가 아니다. 분명 눈동자가 까맣고 동그랗게 맺혀있었는데, 빨갛게 빛나고 있다. 석류알, 루비, 장미꽃잎, 선명하고 예쁜 붉은 빛으로 물든 눈동자가 샐쭉 감겨 사라진다. 눈웃음 짓고 있는 모양이다. 자, 다시 이 오밀조밀한 얼굴을 뜯어보면, 연하게 꽃가루를 덧대어 분칠한 것 같은 뺨과 입술 색, 히히 웃으며 드러난 이는 또 새하얗고, 송곳니는 유달리 뾰족하고… 뾰족하다. 송곳니가 왜 저렇게 뾰족하다 못해 날카로운가, 의문이 절로 생길 만큼이나 뾰족한 이를 가지고 있었다. 눈웃음지으며 생글생글, 밝고 당차게도 배고프다 하는 것과는 반대로 무서울 정도의 송곳니다.
“한 입만 물어도 돼?”
성장기 청소년은 잘 먹어야 한다고 그러잖아! 나도 한 입만 잘 먹어보자아아!
“약도 발라주고 밴드도 붙여줄게.”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가 빼더니, 당신에게 손을 활짝 펼쳐 보여준다. 캐릭터 반창고 뭉치와 연고가 손바닥 위에 덩그러니 놓여 있다.
멘솔향이 나는 담배를 물고 있던, 보통 체격의 팔다리가 길쭉길쭉한 여성이 한밤 속에 더욱 도드라지는 허연 연기를 내뱉는다. 그 연기가 풀어져 밤하늘로 사라질 때 즈음 갑작스럽게 낭창한 외침이 여성의 귀를 자극한다. 분명 적잖이 놀랐을텐데 여성은 어깨를 가볍게 움츠렸다간 또 무기력한 평소의 눈빛으로 상대를 누르듯 응시했다. 날카로워 보이는 이와 환상처럼 붉은 눈동자는 여성의 무덬함을 뚫지 못했다.
" 뭐를?"
다짜고짜 물어도 되냐는 질문에 이미 반박자도, 한박자도 아닌 박차를 놓친 물음이 짓씹혀져 나갔다. 입에 물린 담배도 바스라진다. 이미 구겨지고 짧아진 몽당 담배를 바닥에 던지고 밟는 여성의 태도는 무심하고 또 거칠었다. 뜨거운 불똥이 사방으로 튀어나간다.
달빛 아래로 희미하게 드러난 반창고를 보는 건지 모를 여성의 시선이 서서히 당신을 또 누르듯 응시한다. 그리고 인위적인 미소가 여성의 입가를 비튼다. 무얼 하려는 건지도, 누군지도 모르겠지만 어찌됐든 잠깐이나마 현실을 잊을 수 있다면. 설령 미친 사람일지라도 지금은 놀아주고 싶었다. 여성은 순순히 골목벽에 기대며 항복한 포로와도 같이 순응적이고 공허한 표정을 짓는다.
깜짝 놀라서 도망가려 하거나, 깜짝 놀라서 굳어버리거나, 깜짝 놀라서 당황하거나, 깜짝 놀라서…. 아무튼지 간에 깜짝 놀라는 당신의 반응을 상상하고 있던 탓에 되려 실망해서 물어본다. 조금 삐죽거리기는 했지만, 배고프다는 말을 대뜸 내뱉을 정도로 허기짐을 느끼고 있었으니까 자리를 떠나지는 않았다. 허락해줄지 안 해줄지는 아직 모르니 인내를 가져보기로 했다. 무미건조한 당신과 시선을 맞추려고 들었다. 반짝반짝, 물게 허락해야 할 것이라는 부담감을 최대한 잔뜩 실어서!
“손가락! 목은 밴드 잘 떨어져.”
느린 답에도 재촉 없이 고분고분 기다린 이유도 허락 안 해줄까 봐서라는 이유가 컸다. 세상 어느 짐승이든 먹을 것으로 교육하고 조련하는 방법이 대다수인데, 소설 속에나 나올법한 존재라고 무엇이 다르지는 않은가보다. 바닥에서 밟히고 있는 담배꽁초에 시선이 톡 떨어진다.
“잘 먹겠습니다아!”
이윽고 다시 시선은 당신에게로 올라왔고, 방긋 웃으면서 당신의 손을 잡더니 입가로 가져간다. 그중에서도 마지막 손가락을 입에 물었다. 다섯 손가락 중에 제일 작고, 약하고, 존재감 없는 그런 손가락. 날카로운 송곳니가 쿡 찌른다. 깊게 박아넣지도 않고, 핏방울이 맺히기는 할 정도의 얕은 상처를 내었다. 손가락에서 피가 나오는 것이 느껴지면 송곳니를 빼내고 손가락을 물고서 피를 빨아들인다. 배고프다니 먹고 있기는 한데, 맛있는 표정은 아니다.
>>109 무릎을 꿇고 고개를 조아린 채 보고를 올리는 종을 가만히 바라보던 사내의 주인은, 이내 들려오는 흡족스러운 결과에 가늘고 나직한 목소리로 후후 웃었다. 높이 묶어올려 흰 리본으로 장식한 길고 부드러운 밝은 금발에, 서글서글한 눈매와 물빛 눈동자를 지닌, 여느 영애처럼 간소하지만 산뜻한 드레스를 차려입은 그의 주인은, 혈육을 살해하도록 지시한, 피도 눈물도 없는 가주 후보라는 타이틀이 지독히도 어울리지 않는 여인이었다.
"아주 잘해주었어요. 역시나 절 실망시키지 않네요."
차라리 마음에 든 과자를 구워낸 제과제빵사를 칭찬하는 것이 더 어울릴 법한 밝은 목소리와 구김살 없는 목소리로, 비록 완벽히 용의선상을 벗어나지는 못했을 지언정 방해물을 훌륭히 치워낸 수족을 칭찬한 영애는, 이내 평소처럼 발랄하지만 조금은 무게를 머금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마지막 명령을 내리겠어요."
저 사내의 충정은 이제껏 겪어왔기에 잘 알고 있다. 나를 위하여 수도 없이 손에 피를 묻히고 타인의 생명을 바쳐온 자이니, 스스로의 목숨 쯤이야 기꺼이 내어주겠지. 그리 생각하며 영애는 허리춤에 차고 있던 검을 뽑아, 사내를 겨누며 여전히 해사한 미소를 머금고 가볍고 발랄한 목소리로 명을 내렸다.
누군가는 물을 것이다. 무슨 이득이 있어서 굳이 그렇게 피를 묻히는 잔혹한 짓을 하는 거냐고. 사내에게 이유 따윈 존재하지 않았다. 그저 자신이 충성을 바치기로 한 이가 그것을 바랬기 때문이었다. 이른 시기부터 자신의 주인 되는 이를 모셨고, 혼란의 시기가 온 순간부터 반드시 가주로 만들겠다고 다짐한 것에 망설임은 없었다. 자신의 검은 오로지 그것만을 위해서 존재했으니까.
그렇기에 지금 내리는 명령. 곧 죽음을 지시하는 것에 대해서 사내는 아무런 저항도 보이지 않았다. 이제는 자신이 필요없는 것이리라. 그렇다면 그걸로 좋은 일이었다. 그것이 자신의 주인이 내리는 명이라고 한다면. 그렇기에 사내는 조금도 저항하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서 그녀의 행동을 기다렸다.
"그것을 바라신다면야. 허나 아직 일이 완전히 끝난 것은 아니니, 부디 검을 들 수 없는 이 시간 이후에도 조심하셔서 이루고자 하는 것을 이루시길 바랄 뿐입니다."
칼날이 자신의 목을 찌르는 것을 기다리며, 혹은 다른 곳을 찔러넣는 것을 기다리며 사내는 마지막으로 볼 풍경으로 그녀의 모습을 담은 후, 조용히 눈을 감았다. 그 눈을 뜬 이후에 보이는 풍경은 여기와는 다른 지옥불구덩이속일지. 아니면...
>>122 사내가 자리에서 일어서기가 무섭게 곧장 뾰족한 구둣발이 그의 정강이를 향해 날아들었다. 영애는 해사하게 웃으며 가볍고 발랄한 목소리로 말했다.
"어머나, 일어서라 명한 적은 없는데. 빨리 신의 품으로 보내달란 뜻인가요?"
고운 목소리에 어울리지 않는 매도를 내뱉고, 영애는 후후 웃었다. 이내 사내가 입을 열자, 영애는 잠자코 그의 말을 들으며 만족스러운 듯 미소지었다. 역시 말이 좀 많은 건 흠이지만, 좋은 장기 말이긴 했어. 더는 필요 없을 뿐이지. 사내의 말이 끝나자, 영애는 다음에 또 보자며 친구와 작별하듯 낭랑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요. 그동안 수고 많았어요. 잘 가요."
서걱. 영애의 목소리 뒤에 이어진 것은, 묵직한 고깃덩이를 절단하는 듯한 섬뜩한 소리였다. 쿵, 소리와 함께 영애의 방안이 순식간에 피비린내로 가득 찼다. 화사한 드레스와 희고 깨끗한 얼굴에 피가 묻었지만, 영애는 아랑곳하지 않고 생긋 미소지었다. 피를 나눴을 뿐인 경쟁자들은 모두 죽었고, 그 범인 또한 죽었다. 세상 사람들은 이 연쇄살인 사건의 범인이 그의 마지막 타깃의 손에 죽은 것으로 알게 될 테고, 이걸로 완벽하게 용의 선상에서 벗어날 수 있겠지... 진동하는 피비린내를 맡았는지, 하인들이 급하게 달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거의 다 왔지만, 마지막까지 긴장을 놓으면 안 되겠지. 영애는 콧노래를 부르고 싶은 걸 꼭 참고 검을 쥔 채 자세를 잡았다. 이후, 다급히 달려온 하인들이 문을 박차고 열었을 때 본 것은, 피투성이가 되어 쓰러진 괴한과, 피 묻은 검을 쥔 채 겁에 질린 얼굴로 파르르 떠는 영애의 모습이었다.
>>124 이미 끝난 상황극에 자꾸 말을 얹어서 미안해. 혹시 괜찮다면 >>109에서 한 번만 더 이어볼 수 있을까? 참고로 난 >>112와 >>121과는 다른 참치야. 사실 굉장히 잇고 싶은 상황이 떠올랐었는데 두 번 모두 타이밍을 놓친 걸 아쉽게 생각하고 있었거든. 생각보다 핑퐁이 짧게 끝난 것 같아서 기회가 된다면 나도 한번 이어보고 싶은 마음이 들었어. 물론 거절해도 얼마든지 상관없고, 이전에 이었던 참치들을 비난하거나 비하하려는 의도도 전혀 없어. 문제가 된다면 자유 상극을 세운 참치는 주저없이 이 레스를 하이드해 주길 바래.
방의 주인은 화려한 것을 좋아했다. 대륙에서 제일가는 장인이 반 년 동안 공을 들여 세공한 보석, 바다 건너 이국의 상인이 들고 온 집 한 채 각겨의 비단으로 지은 옷, 어둠 속에서도 빛을 발하는 순금으로 장식한 가구. 루비와 다이아몬드로 장식된 침대에는 두터운 휘장이 드리워져 안을 들여다볼 수 없었다. 다만 어렴풋이 보이는 형체를 통해 누가 안에 있을 것이라고 짐작할 뿐이었다.
"잘했어."
사내의 말이 끝나자 휘장 사이로 흰 손이 나왔다. 가느다란 손가락은 말 잘 듣는 강아지를 칭찬하듯이 사내의 뺨을 가볍게 두드렸다. 완전히 틀린 말은 아니었다. 아, 나의 강아지, 말 잘 듣는 충견. 훈련이 아주 잘 되어서 일처리도 확실할 뿐더러 배신도 하지 않지. 세상에 둘도 없는 맹견이었다.
"목격자 같은 건 남기지 않았을 거라 믿어."
휘장 안으로 다시 들어간 손은 이내 작게 접힌 쪽지 하나를 들고 모습을 드러냈다.
"둘째 형님이 날 의심하고 있어. 아직은 심증뿐이겠지만, 혹시 모르니 행적은 정리해 둬. 아침이 되면 이걸 조리실로 가져가."
엠마라는 하녀를 찾으면 될 거야. 그 말로 미루어 보아 그 하녀가 이 밤 사내의 행적을 정리해 줄 것이라는 사실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정말 운이 나빠서 사내가 확인하지 못한 범위 내에 누군가가 있었을지도 모르나, 그 정도로 먼 거리라면 무슨 일이 있었는지 파악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사람의 시야라는 것은 생각보다 그렇게까지 넓은 것은 아니었고 설사 뭔가가 보인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무엇인지를 파악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그 내용이 무엇인지 확인할 정도의 거리라면 이미 그 자도 사내의 검에 목숨을 잃었으리라. 그런 어설픈 실수 따윈 하지 않는다는 듯, 사내는 자신의 뺨을 두들기는 것을 받아들였다.
"오히려 그 의심하는 것을 이용해서 가문 내의 영향력을 뺏을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쉽진 않겠지만, 결국 모두 생각하는 것은 똑같을겁니다. 병으로 인해 가문을 이어가던 두 분이 돌아가시고 난 이후로 다들 권력을 얻기 위해 필사적일테니 말입니다."
권력을 얻기 위해, 가문의 주인이 되기 위해 피를 묻히고 상대를 제거하는 행위는 보통 비정한게 아니었다. 허나 귀족으로 태어난 이상 결국 그 운명에서 벗어나긴 힘들었다. 사이좋게 지내는 곳이 있을지도 모르나, 그렇지 않은 곳도 분명히 존재했기에.
쪽지를 받아든 사내는 그 내용물을 굳이 확인하지 않았다. 엠마라는 하녀를 찾으라는 그 말에 사내는 고개를 끄덕였다.
"분부하신 대로 하겠습니다. 더 필요하신 사항은 없으십니까? 저는 당신을 위해서 존재하는 자. 필요한 일이 있다면 얼마든지 명을 내려주십시오."
짤막한 대답은 남자를 향한 신뢰를 담고 있었다. 그가 누군가에게 믿음을 주는 경우가 드물다는 점을 생각하면 이례적인 일이었다. 아니,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밑바닥보다 더 아래에 있는 진창에서 이 자리까지 올라오는 동안 그의 곁을 지킨 건 다른 누구도 아닌 바로 사내였으니. 설령 사내가 실수를 저지르더라도 한 번 정도는 얼마든지 용서할 수 있었다. 그리고 사내는 이제껏 단 한 번도 실패한 적이 없었다.
"그래야지. 둘째 형님은 가문 안에서 입지도 좁으니 더 수월할 거야."
이제 와서 세력 다툼에서 밀려날까 애간장을 태워도 여태까지의 망나니짓은 사라지지 않는다. 그런 주제에 눈치는 빨라서 의심 따위나 하다니, 대체 자기가 뭐라고 생각하는 건지. 이 저택에는 이제 제 사람보다 그토록 깔보던 사생아의 사람이 더 많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면 과연 어떤 표정을 지을까?
"지금은 그걸로 됐어."
손을 가볍게 내젓던 그는 아, 하고 탄성을 내뱉었다. 휘장 너머에서 천이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리는 것이, 아무래도 사내를 향해 상체를 가까이 기울인 듯했다.
"말씀하신대로 내세울 수 있는 것은 그다지 없을테니 너무 급하게만 가지 않으면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급한 쪽은 그 사람일테니 말이죠."
가문 안에 입지가 적은만큼 혹시나 자신이 밀려날까 싶어 움직임을 보일 수도 있었고, 그렇게 되면 오히려 상황은 이쪽에게 유리해질수밖에 없었다. 의심을 한다고 한들 무엇이 달라질까. 사내는 누구에게도 목격당하지 않게 움직였고, 자신이 행한 일은 모조리 불행한 사고로 조작했다. 그리고 아직까지는 그 꼬리가 잡히지 않았다. 허나 방심할 순 없었기에 급하게만 가지 않으면 될 것 같다는 의견을 내비추며 곧 들려오는 그걸로 됐다는 말에 수긍하며 입을 꾹 다물었다.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려오고 상으로 원하는 것이 있으면 말하라는 그 말에 사내는 잠시 생각했다. 자신이 원하는 것은 무엇이 있을까. 막상 바로 떠오르는 것이 없다는게 자신의 생각이었다. 딱히 포상을 바라고 이렇게 모시는 것이 아니었기에 더더욱. 그저 이것이 자신이 해야하는 일이라는... 마치 맹목적인 사명같은 느낌을 가슴에 품은 사내는 좀처럼 쉽게 답을 하지 못하고 눈동자를 잠시 굴리다 입을 열었다.
"지금 당장 떠오르는 것은 솔직히 없습니다. 허나, 그럼에도 뭔가를 받아야 한다면... 언제가 이 가문의 모든 것을 가지게 되었을 때도 당신의 그림자로서 지금처럼 일하게 해줬으면 합니다. 물론 모든 것이 끝난 직후에는 저는 필요없는 존재일지도 모르나... 제가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당신의 검이 되는 것 뿐입니다."
맹목적인 추종에 이유는 없었다. 상대는 자신의 손을 더럽혀서라도 지키고 가주로서 올리고 싶은 자였다. 자신이 바라는 것은 오직 그것뿐이라고 생각하며 그는 다시 말을 조용히 이어나갔다.
"만일 그게 힘들다면, 언젠가 가주로 오르셨을때 천천히 생각할 시간을 주셨으면 합니다. 그때라면 지금과는 상황이 다를테니 저도 다른 무언가를 바라게 될지도 모르니까요."
안타깝게도 그의 둘째 형님은 그리 머리가 좋은 편이 아니었다. 사실 전 가주의 자식들은 대부분 물려받은 재산만 믿고 기세등등한 머저리들이었다. 적자들의 머리를 모두 모아도 사생아 하나만 못 하다니, 타계한 가주가 저승에서 땅을 치며 통곡할 노릇이었다. 물론, 그들에게는 사내처럼 충직한 사냥개가 없다는 점을 고려해야겠지만.
"그건 상이 아니야. 당연한 거지. 내가 가주가 되면 날 떠날 생각이었어?"
대답해. 그렇게 말하는 목소리가 일순 싸늘해졌다. 따뜻하다 못해 다소 덥기까지 하던 방 안의 온도가 순식간에 떨어지는 듯했다. 침대에 반쯤 엎드려 있던 형체가 허리를 곧게 세웠다. 휘장 너머로도 날카로운 눈빛이 느껴질 정도였다.
실수는 용서할 수 있다. 하지만 배신은 용서할 수 없다. 무슨 일이 있어도.
"내가 물은 건 그렇게 거창한 게 아니야. 물론 거창한 걸 바라도 상관은 없지만... 돈을 원한다면 줄게. 보석도 얼마든지 있어."
사람의 가장 큰 원동력은 욕망이었다. 심장이 뛰고 숨을 쉬는 이상 욕망이 없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사내 역시 무언가 원하는 것이, 욕망하는 것이 분명 있을 것이다. 적어도 그는 그렇게 확신했다. 그러니 그 욕망을 충족시켜 주고자 하는 것이었다. 그게 무엇이 되었든.
날카로운 분위기에 크게 반응하는 일 없이 사내는 마치 당연한 사실인양 자신의 생각을 이야기했다. 물론 자신이 모시는 이가 그렇다는 것은 아니었으나 경우에 따라선 자신의 앞길을 위해 주변의 측근을 내치는 일도 이런 귀족들 사이에선 흔하다면 흔한 일이었다. 자신이 그 대상이 된다고 할지라도 사내는 조금도 원망하거나 할 생각은 없었다. 오히려 자신의 존재로 인해 그가 피해를 본다면 자신이 먼저 부탁할 생각이었으니까. 다른 것은 몰라도 자신이 모시는 존재가 피해를 입는 것은 그로서도 그저 두고만 볼 수는 없는 사실이었다.
돈과 보석. 그런 것을 자신이 바랬던가. 지금 이 삶에 크게 불만은 없고 인간의 마음을 버리며 악귀처럼 짙고 비정한 마음을 품은 자신이 그런 것을 바래도 되는 것인가. 자신에게 그럴 자격이 있는 것인가. 거창한 것이 아니라고 해도 좋으나 결국 어느 것도 자신에겐 거창하게만 느껴졌다. 그렇기에 답에는 조금 시간이 걸렸을지도 모른다. 허나 그렇다고 해서 너무 많은 시간을 두진 않았다. 기다리는 시간조차 길게 이어지면 자신이 모시는 이에 대한 실례였기에.
"그렇다면 보석 하나를 얻고 싶습니다. 제가 쓸 것은 아니긴 하나, 근처에 있는 고아원을 조금 지원해주고 싶습니다. 손에 피를 묻힌 제가 할 말은 아닐지도 모르나, 저처럼 뒷골목을 헤메면서 배를 굶주리는 아이들이 가능하면 없었으면 합니다."
뒷골목을 헤집으며 돌아다니면서 배를 곪던 시절. 가족없이 홀로 외롭게 지내던 시절을 떠올리며 그는 쓴 표정을 지었다. 명을 받들어 손에 피를 묻히던 자신이 할 소리는 아니었으나, 정말로 모든 것을 배제하고 바라는 것을 떠올리다면 역시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바로 그것이었다.
"그렇게 함으로서, 앞으로 더더욱 영향력을 키울 수 있고 좋은 이미지도 세울 수 있지 않을까하기에 청하겠습니다."
놀랍도록 오만한 말이었으나, 그 목소리는 안심했다는 듯이 한풀 꺾여 있었다. 그의 몸이 다시 침대 위로 풀썩 쓰러졌다. 그럼 그렇지. 설령 사내가 그의 앞길에 방해가 된다고 해도, 그건 온전히 그가 다뤄야 할 문제였다. 감히 사내가 멋대로 떠나겠다 말겠다 할 문제가 아니란 말이다. 그렇게 생각하자 약간의 짜증이 치밀어 올랐다. 흡사 어린아이가 심통을 부리는 모습과도 같았다. 그는 유달리 사내의 앞에서만 다섯 살배기처럼 구는 경향이 있었다.
"뭐야, 고작 그런 거?"
김이 빠졌다는 듯이 한숨이 새어나왔다. 뭘 요구하려나 했는데 고작 뒷골목 고아들을 먹여살릴 보석 하나라니. 자신의 사냥개는 묘한 부분에서 유한 구석이 있었다. 이것이 방금 전 사람을 죽이고 사고로 위장한 이의 대사라고 그 누가 상상이나 할 수 있을까. 새삼 느끼는 바이지만, 어째서 그가 자신과 같은 길을 걷기로 했는지 모를 일이었다. 자신은 얼굴도 모르는 아이들을 위한 동정심 따위 이미 버린지 오래였기에.
"그러지 않아도 이미 몇 군데 지원하고 있잖아. 그걸로는 부족했던 거야? ―하아."
당연히 부족했으리라. 그 지원마저도 철저히 득과 실을 따져 '선발된' 고아원들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었으니까. 사내의 성에 차지 않는 것도 당연했다. 다시 휘장 밖으로 나온 손에는 브로치 하나가 들려 있었다. 작은 달걀만한 크기의 루비가 박혀 있는 황금 브로치는 척 보기에도 굉장히 값비싼 물건이었다. 이건 내 사냥개의 눈에 차야 할 텐데 말이지.
누군가에게는 고작 그것이라고 할지도 모르나 사내에게 있어선 소중한 것이었다. 뒷골목을 돌아다니며 배를 굶주리고 때로는 추악한 짓까지 하면서 어떻게든 살아남으려고 발버둥쳤던 사내에게 있어선 자신이 살았던 삶을 또 다시 사는 이는 없었으면 하고 바랬으니까. 물론 사내는 자신의 삶을 저주하지 않았다. 비정한 마음을 먹으며 손에 진득한 피냄새를 남기는 건 자신이 모시는 이가 바라는 것. 그리고 자신이 모시는 이의 바램을 충족시키는 것이 바로 자신이 원하는 것이었으니까.
브로치 하나를 받으며 사내는 다시 머리를 조아리며 감사 인사를 휘장 너머의 이. 어쩌면 자신보다 더 비정할지도 모르는 그 존재에게 바쳤다.
"허락해주심을 감사드립니다."
이것을 팔면 얼마나 돈이 나오게 될까. 그럼 충분한 지원이 되리라. 그렇게 만족하며 그는 자신의 주머니 속에 브로치를 집어넣었다. 내일 별 일이 없으면 잠시 외출해서 한 곳을 지원해주면서, 정말로 어울리지 않는 것을 알고 있으나 그럼에도 따뜻한 온정을 비추는 시간을 가지리라. 그렇게 다짐하는 사내의 입가에 작은 미소가 흘렀다.
"내일 '사고' 소식이 들려오면 반드시 이런저런 말이 나올지도 모르지만 아마 큰 영향이 가는 일은 없을 겁니다. 아무도 당신에게는 손을 댈 수 없을 겁니다. 제가 있는 한. 그리고 당신을 따르는 이들이 있는 한."
그 목소리에는 강한 확신이 들어있었다. 의심은 할 수 있을지도 모르나 그 누구도 명확하게 확신을 할 순 없었다. 그건 그저 불행한 사고에 지나지 않았으니까. 허나 한 가지 궁금한 것이 조금 있는지 그는 살며시 물음을 조심스럽게 던졌다.
감사 인사에 그는 대답 대신 손을 내저어 보였다. 이깟 브로치 하나는 그에게 푼돈이나 다름없었다. 만약 사내가 더한 것을 원했다 하더라도, 그는 얼마든지 줄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고아원 꼬마들을 먹이는 데에는 이걸로 충분할 것이다. 물론, 중간에서 누가 횡령을 하려 든다면 상황은 달라지겠지만.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사내가 해결해야 할 문제지, 그가 상관할 바는 아니었다.
그는 사내의 입에서 나오는 말을 그저 듣고만 있었다. 그래, 분명히 그럴 것이다. 그의 형제랍시고 있는 자들은 아직 그의 세력이 어느 정도인지 모르고 있었다. 가주 자리를 놓고 개떼처럼 싸워 대느라 뒤에 서 있는 사자도 보지 못하는 꼴이라니. 그나마 한 놈이 슬슬 눈치를 채기 시작한 것 같긴 했지만, 그자 혼자서 대체 뭘 할 수 있겠는가? 이건 이미 승패가 정해져 있는 싸움이었다. 그 사실을 모르는 건 그의 형제들뿐이었다.
내가 뭘 꿈꾸고 있냐고?
그의 사냥개가 뭔가에 의문을 가지는 것은 이례적인 일이었다. 사내에게는 다행히도 모욕적인 질문은 아니었으나, 그는 바로 대답하는 대신 생각에 잠겼다.
나는 뭘 꿈꾸고 있지?
아니, 이 질문은 틀렸다. 전제부터 완전히 틀린 질문이었다.
"난 뭔가를 원하기 때문에 가주가 되고 싶은 게 아니야. 내가 원하는 건 가주 자리 그 자체니까."
그래, 바로 이거다. 그는 부드러운 침구에 얼굴을 푹 파묻었다. 오리 깃털을 넣은 베개, 비단처럼 부드러운 이불, 황금으로 장식한 기둥.
이걸론 부족해.
"...권력이 필요해. 그 누구도 다신 날 무시하지 못하고... 인정받을 만한 권력이."
목적을 이룰 때까지 그는 그만둘 수 없었다. 자비니 동정심이니 하는 마음은 이미 옛날 옛적에 지워 버렸다. 설령 그 끝에 기다리고 있는 것이 까마득한 낭떠러지라 하더라도, 그는 그만둘 수 없었다. 그는 권력을, 힘을 원했다. 고개를 들고 있었다고 죽도록 얻어맞지 않을 힘과, 버르장머리 없는 눈을 했다고 물 한 모금 없이 사흘을 갇혀있지 않을 힘과, 채찍에 맞은 자리가 곪아 터져도 약을 구하지 못해 혼자 앓지 않을 힘을.
누구도 무시하지 못하고 인정받을만한 권력이 필요하다는 그 말을 들으며 사내는 입에 담진 않았으나 공감하는 마음을 가졌다. 자고로 높은 자리에 앉아 아래를 보지 못하는 이들은 그 밑바닥이 얼마나 치열한지 알 수 없었다. 누군가에게는 너무나 평화로운 일상이, 누군가에게는 당장 내일을 살아갈 수 있을지도 알 수 없어 너무나 바라는 것이기도 했다.
"제가 반드시 그 바라는 것을 얻을 수 있도록 도움이 되도록 하겠습니다. 주제넘을지도 모르나 그런 당신이기에 저는 그 누구보다 당신을 모실 수 있습니다."
말만 번지르르한 이들보다 차라리 저렇게 갈구하는 마음을 보이는 이에게 사내는 충성을 바칠 가치가 있다고 생각했다. 완전히 같진 않더라도 비슷한 부분이 있기에 움직이는 마음 또한 있었으니까. 물론 상대의 삶을 온전히 알 방도는 없었으나 그럼에도 추측할 수 있는 부분이 있었기에 더더욱.
이어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서며 사내는 꾸벅 인사를 바쳐 상대에게 말을 전달했다.
"그렇다면 자리를 비워보겠습니다. 부디 편안한 휴식 시간이 되길 바라겠습니다."
너무 오랜 시간동안 이 시간에 접촉한 것을 누군가가 알게 되어서 좋을 것은 없었다. 자신이 모시는 이가 누군가에게 의심을 사는 것은 무조건적으로 피해야만 했기에.
확신이 담긴 목소리를 듣자 거짓말처럼 온몸에 힘이 풀렸다. 자신이 원하는 게 나락으로 떨어지는 것이라 한다면, 막는 대신 그 길을 닦아 놓을 사내였다. 긴장이 풀리자 피로감이 순식간에 몰려왔다. 그 역시 사내 못지않게 바쁜 하루를 보낸 참이었다. 방해되는 사람을 사고사로 위장해 죽이는 것도 중요하지만, 계승을 위해서 필요한 건 그게 다가 아닌 탓이었다. 피곤했다.
"......가지 마."
그는 휘장 너머로 손을 뻗어 사내의 옷자락을 붙들었다. 정말로 원한다면, 주저할 것 없이 명령을 내리면 될 일이었다. 그렇게 하면 사내는 군말없이 따를 것이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이불에 얼굴을 묻은 채 작게 웅얼거렸다.
자신의 옷자락을 붙드는 행동에 사내는 발을 멈췄다. 하루 정도는 괜찮으니 거기에 있으라는 그 말은 명령인 것일까. 아니면 다른 어조의 부탁일까. 어느 쪽이나 사내에게 있어선 크게 다를 것이 없는 말이었다. 자신이 모시는 이가 어쨌든 자신에게 이곳에 남아있으라고 말을 했으니 그저 따를 뿐이었다.
"그렇게 말씀하신다면. 오늘은 여기에 있겠습니다."
작게 웅얼거리는 목소리라고 해도 하루이틀 보는 것이 아니었다. 그 정도 목소리는 충분히 알아들을 수 있었기에 사내는 손길이 닿는 곳. 즉 상대의 침대의 기둥에 조심스럽게 걸터앉았다. 휘장 너머의 모습은 눈에 보이지 않았으나 그 표정이 어느정도 예상이 간다고 생각하며 사내는 휘장을 잠시 바라보다 다시 문쪽을 바라봤다. 누군가 들어오지 않을까, 혹여나 갑자기 이상사태가 일어나지 않을까 약간의 경계심을 가진 탓이었다.
"저는 여기에 있을테니 안심하시고 쉬셔도 됩니다. 오늘은 외로움이라도 느끼시는 겁니까?"
물론 아닐 수도 있었으나 그래도 최소한의 물음을 조심히 내비치며 사내는 계속해서 시선을 문 쪽에 두었다.
상대가 침대에 걸터앉는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그는 손을 거두었다. 휘장 너머로 어렴풋이 비치는 사내의 실루엣은 또 하나의 기둥 같았다. 그의 침대를 굳건하게 받치고 있는 두터운 기둥.
"...오늘따라 궁금한 게 많네."
그는 대답하는 대신 혼잣말처럼 내뱉었다. 메시지는 단호했다. 더이상 아무런 질문도 하지 말 것. 그는 넓은 침대에 드러누운 채로 사내의 말을 곱씹었다. 외롭다고? 내가?
이제 와서 회한을 느끼는 것은 결단코 아니었다. 그저, 하루 정도는 타인의 기척을 느끼며 잠에 드는 것도 괜찮지 않나 싶었다. 그저 그뿐이었다. 사내는 그가 믿는 몇 안 되는 사람 중 아니었다. 그가 달리 누굴 침대맡에 앉혀 놓고 잠을 청하겠는가? 자다가 칼침을 맞고 싶지 않다면야. 정 말로 그 것 뿐? "쪽지, 전하는 거... 잊지 마. 누가 물어보면 넌 그냥... 그 하녀랑 같이 있었다고 하면 돼."
손쓸 틈 없이 수마가 몰려드는 와중에도 그는 더듬거리며 지시를 끝마쳤다. 몸을 돌려 사내가 있는 방향을 등지고 누운 그는 작게 속삭였다.
오늘따라 궁금한 것이 많다는 그 말에 사내는 더 이상 아무런 질문도 던지지 않았다. 그것이 곧 대답일테고, 자신은 그에 따라서 더 이상 의문을 가지지 않을 생각이었다. 누가 보면 사내의 그런 사고방식은 어쩌면 정말로 비정상적일지도 모를 일이었으나 설사 자신이 비정상적이라고 하더라도 사내에게 있어선 아무래도 좋은 일이요, 정말 관심 밖의 일이었다. 애초에 이런 일을 하는 시점에서, 인간의 마음을 포기하고 비정한 마음을 머금은 시점에서 그 누구의 이해를 받을 생각도 없었으니까.
"아마 저에게 직접 물을 이는 없을 거라고 생각합니다만, 누군가 묻는다면 그렇게 말하겠습니다."
그 하녀가 부정하지 않는 한 특별히 의심을 받을 일은 없을 것이고, 설사 부정한다고 해도 자신은 자신 나름대로 변명거리를 생각했기에 문제가 될 건 없었다. 오로지 부정하는 하녀만이 곤란한 상황에 처할 뿐이었다. 절대 자신이 모시는 이에게 피해는 가게 하지 않을 자신이 있었기에 사내는 조금도 후일을 걱정하지 않았다. 최악의 경우엔... 자신이 멋대로 한 것으로 처리하면 될 일이었다. 자신의 주인도 모를 정도로 자신이 행한 일. 허나 그 변명거리는 어디까지나 최악의 경우를 대비한 것이기에 사내는 그런 일이 없기를 바랄 뿐이었다.
"감사합니다. 부디 내일은 평안한 하루가 될 수 있기를. 나의 주여."
잠들어버리는 숨소리를 귀담으며 사내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혹시나 모를, 그리 달갑지 않을 방문객의 발소리를 놓치지 않기 위해 귀는 활짝 열어놓으며. 지금 이 시간. 이곳이야말로 자신의 주인에게 있어 가장 안전한 곳이 되게 하리라는 마음가짐을 꽉 잡으며.
/상황상 막레가 되려나? 혹시 더 잇고 싶다면 이어도 되겠지만 막레 분위기인 듯 하니 일단 막레로서도 마무리를 지을 수 있게 쓸게!
새벽 2시, 그리고 또 38분. 하루가 시작된 지도 벌써 3시간 째를 향해 시계바늘은 흘러간다. 자동 결제 알람을 알리는 소리가 나면 나는 몸을 움직인다. 따뜻한 택시 안에서 잠깐 눈을 붙였다가 일어나니 안 그래도 야근에 지친 몸이 굳어 있다. 무거운 몸을 끌고서 택시 기사에게 인사를 건네고, 차문을 열고나와 마주친 밤공기. 제법 추워진 날씨에 몸을 잘게 떨었다. '아침에 외투 좀 챙겨서 나올걸. 내일, 아니지. 오늘은 꼭 챙기자.' 그런 생각을 하다가 문득 시야에 들어온 것이 있다. '와, 입김.' 뽀얗게 흩어지는 숨을 보고서 눈을 깜빡인다. 가을 다 지나고 벌써 겨울이 왔나보다.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맑고 높은 하늘에 구름 한 점 없다. 그리고 바람이 불어온다. 코끝이 시리니 청승맞다는 생각을 하면서 하늘에서부터 고개를 내렸다. 집이나 가야겠다고 다시 앞을 바라보는데-
"......?"
시야에 없었던 것이 있다. 하늘을 보기 전까지 저런 것은 없었다. 나는 당신이 누구인지 알아보기 위해서 가까이 다가간다...
땅바닥에 앉아있던 이는 표정을 찡그리고 상대가 알아들을 수 있는 말소리를 내고 있었다. 생김새로는 막 성인이 된 것 같은 엣된 분위기가 풍기고 있었고, 키는 170을 조금 넘은 듯한 사람과 비슷한 존재였다. 허나 등 뒤에 붉은색 빛이 뭉쳐서 만들어진 것으로 보이는 날개 한 쌍이 있다는게 평범한 인간과는 다른 점이었다. 그 이질적인 존재는 자리에서 일어나 허리를 손으로 천천히 문질렀다.
표정을 찡그린 탓에 제대로 뜨지 않은 눈이 표정이 펼쳐지며 환하게 뜨였고 그 이질적인 존재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주변을 두리번두리번거렸다. 그리고 잔뜩 당황해서 더욱 빠르게 주변을 둘러보다 뒤로 살짝 물러나며 잔뜩 긴장한 목소리를 냈다.
"여긴 어디? 천국? 지옥? 어두우니까 지옥인가?! 안돼! 아직 하고 싶은 일이 많았는데!!"
이어 그 이질적인 존재는 털썩 주저앉으며 절망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러다 문뜩 인기척을 느꼈는지 고개를 살짝 자신에게 다가오는 이 쪽으로 돌렸다.
누가 이 날씨에 땅바닥에 앉아있는가 싶어서 가까이 갔다가, 실루엣이 정확히 보일 때 바로 걸음을 우뚝 세웠다. 천사 날개는 분명 하얗고 깃털 있는 그런건데 저 날개는 그렇게 보이지 않았다. 무심코 중얼거리며 소리냈다는 것을 인지하지 못했다. 그저 난 꿈인지 구분하는 방법 중 흔하디 흔한 뺨 꼬집기를 해야하나 고민했다. 그리고 정말로 하려다가 관두었다. 저 앳된 분위기를 보자니 어린 애들 장난이라 생각하기로 했다. 다른 가능성이라고 해봤자 영화나 소설 같은 망상 뿐인데, 그런 쪽의 가능성은 상상하기 정-말 귀찮았다.
"지옥... 비슷하지."
헬조선. 그 단어가 떠올랐다. 다시 걸음을 옮긴다. 평범한 회사에서 평범하게 월급 받아타먹는 소시민이다. 그래서 내 양심도 평범하다. 추운 날씨에, 밤에, 길바닥에 혼자 있는 앳된 애를 모른 척 지나치기에는 애매한 양심이라는 뜻이다. '요즘은 이러고 노나. 중2병? ...좀 꼰대 같나.' 털썩 주저앉아있는 그 앞에 무릎을 모으고 쭈그려 앉았다.
"집 어디에요?"
'아.' 뒤늦게 입꼬리를 올렸다. 피곤에 찌들어 얼마나 상냥히 보일지는 미지수지만, 그래도 나보다야 어려보이는데 웃으면서 말 걸어야 덜 무섭지 않으려나 싶었다. 이미 겁 먹어 있는 것 같기도 했다.
지옥이라는 말에 다시 절망하는 분위기를 보이며 이질적인 그 존재는 고개를 아래로 푹 숙였다. 난 그저 평화를 지키기 위해서 싸웠을 뿐인데. 빛이 번쩍해서 놀라서 넘어진 것 뿐인데 그걸로 죽은거야? 지옥으로 떨어질 정도로 나쁘게 산거야? 하는 중얼중얼거리는 목소리를 내는 모습이 정말 제대로 절망한 모습이었다.
집이 어디냐고 묻는 물음이 들려오자 이질적인 그 존재는 고개를 들어 자신에게 말을 거는 이를 바라봤다.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우물우물거리던 그 존재는 퉁명스런 목소리로 그 물음에 대답했다.
"지옥 같은 곳에 내 집은 없어. 그러는 당신은 누구야? 왜 날개가 없는거야? 아. 지옥이니까 페어리얼은 아니겠구나. 그렇다면 당신은 무슨 종족이야? 뭐라고 부르면 돼?"
명백하게 이질적인 용어를 사용하면서 이질적인 존재는 제대로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다시 주변을 바라보면서 의외라는 듯이 눈썹을 쫑긋했다.
웃는 건 포기했다. 오전 9시부터 오전 2시까지 일한 낡고 지친 현대 사회의 톱니바퀴는가 이 골 울림을 인내하고 웃기는 힘들다. 답해줄 수 없는 물음에 난들 알겠냐고 말하고 싶었지만 어린 아이라고 생각하니 참아졌다. 지끈거리는 머리를 짚고서 고개를 숙였다. 잠시 그러고 있으면 살만 해진다. 지옥이라는 말을 정말 믿는게 무슨 놀이인지는 몰라도 정말 재밌어서 열심히 하나보다 싶었다.
"나도 내 집은 없는데...... 전 회사원이고... 네, 그냥 인간이에요."
대한민국에서 내 집 마련하기가 쉬울 리도 없고, 나도 없는 내 집이 이 장난에 심취한 어린 애한테 있을 리야 당연히 없다. '...그러니까, 살고 있는 집의 위치를 물어본 거였는데.' 아무래도 생각보다 훨씬 더 심도 있는 장난질이구나 생각한다. 쏟아지는 물음에 찬찬히 답을 해주었다. 물음 중에는 제 스스로 답하는 것도 있어 가만히 듣고 있는 시간도 있었는데, 듣고 있는 시간조차 기가 빨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다 뭐라고 부르면 되냐는 말에 입을 다물었다. 이러다 끝도 없이 여기서 날을 지샐지도 모르겠단 예감.
"몇살이에요? 집 안 알려주면 경찰 부를 수 밖에 없어요."
이 정도면 충분히 선의를 베풀었다고 생각했고, 자고 싶었다. 경찰 부른다는데도 시침떼지는 않을 거라 기대한다.
"무서운 건 돈이에요."
대충 대꾸하며 자리에 일어나니 따라 일어선다. 그리고 주머니에서 스마트폰을 꺼내 들었다. 무슨 답이 돌아오냐에 따라 112가 눌릴지 말지 정해질테다.
"인간? 처음 들어보는 종족이야. 하기사 지옥에 사는 종족을 내가 어떻게 들을 수 있겠냐만. 그보다 회사? 지옥에서도 일을 해야하는구나. 뭔가 내가 생각하던 지옥의 이미지와 완전 달라서 혼란스러워."
대체 무슨 이미지를 생각한건지 이질적인 존재는 손으로 미간을 잡으면서 두 눈만 깜빡였다. 그리고 눈앞에 있는 상대를 가만히 살펴보더니 살며시 상대의 뒤로 향한 후에 등을 바라봤다. 날개가 없다는 것에 역시 신기함을 느끼는 와중 그 존재의 등 뒤에 붙어있는 날개가 살며시 팔락였다.
"나이는 63. 그러고 보니 당신은? 경찰? 우와. 지옥에도 있을 것은 다 있구나. 점점 내가 생각하는 지옥의 이미지와 멀어지고 있어. 아무튼 인간은 날개가 없는 종족이야? 그럼 이렇게 날아다니지 못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이질적인 존재의 날개가 더욱 빠르게 펄럭였고 그 존재의 두 발이 땅에서 떨어졌고 몸이 공중으로 붕 떠올랐다. 가볍게 높이 솟아올랐다가 다시 낙하하는 그 모습은 누가 봐도 하늘을 날아다니는 모습 그 자체였다. 날개를 빠르게 퍼덕이며 자신의 몸을 공중에 띄운 상태에서 그 존재는 상대를 가만히 바라봤다.
"아니면 마법을 쓴다거나 해서 날아다닐 수 있어? 만약 못 난다면 조금 불편하겠네. 하기사 지옥이 편할 순 없을테니까."
조금 안타깝다는 듯이 이야기를 하나 이내 자신이 그 지옥에 있다는 것을 다시 인지하며 그 존재는 고개를 아래로 푹 숙였다.
"하기사 지금 가장 불쌍하고 동정받을 건 나겠네. 도대체 얼마나 더 착하게 살아야 천국에 갈 수 있는거야? 죽어서 지옥이라니. 너무하잖아!"
인간이 무엇인지 설명해봤자 듣지 않거나, 인간이라는 것을 모르는 것처럼 반응하거나 둘 중 하나이겠다는 예상. 그래서 난 더 대꾸하지 않기로 했다. 1초라도 빨리 이 아이를 귀가 조치시키고, 나 스스로도 귀가 조치한다. 그게 목표였다. 나이가 63이라니, 아무래도 집에 대해서 말해줄 생각은 없어보인다. 저 능청스러운 장난질이 언제까지 이어질까 싶어지면 스마트폰의 잠금을 풀었다. 네네, 건성으로 답하며 손을 놀리니 스마트폰 화면이 켜진다. '으, 눈 부셔.' 화면이 너무 밝아 잠시 표정을 찡그렸다가, 이제 경찰에 연락할 거라는 말을 하기 위해 스마트폰 화면에서부터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곧 밝게 빛나던 화면이 사라졌다.
"......맥주 두 캔으로 취할리가 없는데."
이실직고한다. 야근하다 너무 지쳐 캔맥주 2캔을 까기는 했다. 그 정도로 취할리도 없고, 저 날개가 퍼덕거리며 날아다닐 일도 없다. 그런데 둘 다 일어난 모양이다. 나는 고개를 푹 숙여 마른 세수를 한 번 하고, 지친 몸 만큼이나 굳어버린 머리를 굴려보았다. 우선, 저 모습을 다른 누군가 봐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단 내려오실래요..."
얼굴을 덮고 있는 손 틈새로 바닥이 보였고, 떨어진 내 스마트폰도 보였다. 약정 아직 1년은 넘게 남았는데, 박살나진 않았기를 짧게 기도했다. 딱히 믿는 신이 있지는 않았지만 저 존재를 보니 있을 법도 싶었다. 그러니 모든 신이라는 존재에게 통틀어 빌어보았다.
내려오라고 이야기를 하는 그 말에 이질적인 존재는 고개를 끄덕이며 아래로 착지했다. 빛이 뭉쳐서 만들어진 것처럼 보이는 붉은 날개는 조금 전과는 다르게 아래로 살며시 쳐졌고 이질적인 존재의 시선은 손으로 얼굴을 덮고 있는 상대를 바라보며 이해한다는 듯이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하늘을 날 수 없나보구나. 마법으로도. 하기사 내가 살던 곳이 아니라 지옥이니까 그럴 수도 있겠네. 나는 에어리얼. 여기가 지옥이니까 아마 죽어서 여기에 온 걸거야. 그러니까 사람? 라는 건 잘 모르겠지만 당신이 사람이라는 이라면..아. 잠깐만. 아깐 인간이라며!"
자신을 속였냐는 듯이 정말 뚫어져라 바라보던 이질적인 존재는 입술을 삐죽 내밀다가 다시 안으로 집어넣었다. 그리고 무언가를 생각하듯 팔짱을 끼고 눈을 감으면서 작은 숨소리만 냈다. 그러다 다시 눈을 뜨더니 상대에게 질문을 던졌다.
"있잖아. 죽어서 지옥에 온 이는 여기서 어떻게 살아가? 그러니까 죄값을 치룬다거나, 재판을 받는다거나 그런 거 없이 그냥 여기서 살아가면 되는거야? 자유롭게? 아니. 정말로 내가 아는 지옥과는 완전 다른 이미지라서. 잠깐?! 설마 나를 고통으로 끌고가기 위해서 날 속이기 위해 방금 사람인데 인간이라고 거짓말을 한거야?!"
아뿔싸! 하는 표정으로 자신을 에어리얼이라고 칭한 그 이질적인 존재는 정말로 쨉싸게 상대와 거리를 두었고 금방이라도 도망칠것처럼 날개를 쫑긋 세웠다.
대꾸할 기운이 없다. 아무리 봐도 저 존재는 사람은 아니고, 인간이랑 사람이 거의 같은 의미를 가진다는 것도 모르는데다 여기가 지옥이라고 철썩같이 믿고 있다. 대화가 가능하지가 않다. 지옥이라고 누가 말했나 하면 내 입에서 나온 말이라 그저 자업자득이다. 정말 피곤한 일에 엮인게 분명하다고 확신한다.
"그쪽 숨 쉬잖아요. 정말 죽었다고 생각해요...?"
마른 세수를 그만 끝내고 저쯤 벌어진 거리를 좁힌다. 일단 지옥이라는 오해부터 벗겨야했고, 그렇기 위해서는 살아있는 존재라는 어필이 필요하겠다. 심장 박동 소리와 체온, 숨소리 정도면 되지 않을까 싶어서 가까이 다가간다. 들려줄 수 있다면 그만큼 빠르고 확실한 방법이 없을 것이다.
"저도 살아있고요...... 여기 진짜 지옥 아니에요, 별명이 지옥이지."
그리고 고민했다. 에어리얼이라고 자신을 소개한 저 자를 어떻게 해야할 지에 대한 고민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지구의 존재는 아닌 것 같고, 외계인이라고 생각하는 편이 좋을 듯 싶다. 혼자 버려진 외계인은 어떻게 되나 고민해보니, 부정적인 생각만 들었다. 지구 침략, 실험 대상, 지구 멸망, 동물원, 긍정적인 고려는 하나도 되지 않았다.
철썩같이 지옥이라고 믿고 있었는데 지옥이 아니라고 말하는 것에 이질적인 존재는 멍한 표정을 지으며 눈을 깜빡였다. 또 속았구나! 녀석아! 라는 느낌이 정말로 잘 어울리는 분위기가 흐르다가 이질적인 존재는 다시 털썩 무릎을 꿇고 두 손으로 자신의 몸을 지탱하며 절망하는 자세를 보였다.
"또 속았어. 또 속았어. 지옥 아닌데 지옥이라고 하는거에 속았어. 당연히 죽은 줄... 어? 그러면 나 살아있는 거잖아!!"
그 사실이 너무나 기뻤는지 만세 자세를 취하던 그 존재는 입을 꾹 다물고 이어 두 손으로 머리를 쥐어짰다. 여기는 지옥이 아니다. 그렇다면 대체 여기는 어디인가? 자연스럽게 그 의문이 떠오를 수밖에 없었고 으으- 소리를 내며 은색 머리를 북북 긁던 사내는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그럼 대체 여긴 어디야? 왜 난 여기에 왔어? 등등. 한탄하는 목소리가 조용히 울렸다.
"애초에 여기에 왜 왔는지도 몰라. 난 분명히 도시에 나타난 부의 결정체를 쓰러뜨리기 위해서 싸우고 있었는데, 갑자기 빛이 번쩍해서 나도 모르게 놀라서 넘어졌고 눈을 감았어. 그런데 눈을 뜨니까 여기였어. 있잖아. 여긴 어디야? 에어리즈는 맞는거야? 그러니까 여기 나라 이름!"
죽은 사람들이 벌 받는 곳인데, 죽은 사람들이 숨을 쉴 리가 없다. 저 존재가 말하는 지옥이 뭔지는 몰라도 한참은 다른 곳인가보다. 그리고 그 지옥이고 나발이고 하는 곳에 내가 곧 갈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사인은 분명 과로사. 피곤하고 졸린 기운을 떨쳐낼 수가 없다. 자신은 에어리얼이라며 붉은 날개를 가지고 하늘을 날아다니는 상황을 목격했음에도 밤은 깊었고 잠은 깨지 않는다.
"네, 살아계셔서 축하드립니다..."
갈고 닦아진 사회생활 실력에 감탄하는 순간이다. 이런 때에서도 영혼없는 텅 빈 소리를 할 수 있다. 정말 영혼 실린 생각은 좀 더 바빴다. '...은색 머리, 저 이상한 날개, 에어리얼, 63세......' 애를 써서 납득해보려는 중이기 때문이다. 에어리얼이라는 단어는 들어본 적도 없다. 63세와 은색 머리는 얼추 맞는 것 같다. 어린 애인 줄 알았더니 엄청 동안의 할아버지인 모양이다. 날개는 여전히 모르겠다... 답이 없다.
괜히 키득거리면서 이질적인 존재는 알겠다는 의미를 담았으나 그래도 기쁜 마음은 완전히 감추지 못하고 싱글벙글 웃었다. 죽지 않고 살아있다는 것이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다시 주변을 두리번 두리번 바라보았으나 역시 그 존재에게도 이질적인 풍경이었는지 곧 표정이 시무룩한 느낌으로 바뀌었다.
"하지만 역시 처음 보는 곳이야. 내가 사는 곳보다 자연이 훨씬 적은 느낌이야. 아무튼 대한민국? 남한? 한국? 미안해. 어딘지 모르겠어. 내가 사는 곳은 에어리즈라는 나라야. 아무래도 내가 사는 곳이 아닌 것은 분명한데. 그렇다면 나는 왜 여기에 있는거지?"
자신이 사는 곳이 아니라 생판 다른 곳임을 분명하게 인지하며 이질적인 존재는 자신과 대화를 나누는 이를 빤히 바라보다 미안하다는 듯이 나름 무게를 담아 사과를 전달했다.
"미안해. 아무래도 나, 부의 결정체와 싸우다가 무슨 이변에 휘말린 모양이야. 워낙 이현상을 많이 일으키는 이라서. 아무래도 먼 곳으로 워프했다던가 그런 것 같은데. 적어도 내가 아는 바 대한민국, 남한, 한국이라는 나라는 들어본적이 없거든. 사실 내가 사는 곳에선 그러니까 저거. 저걸 여기선 뭐라고 불러? 아무튼 3개가 있거든."
이어 그 존재는 하늘 위에 떠 있을 달을 손으로 가리켰다. 당연하지만 여기서는 하나밖에 없었으니 이질적인 존재의 입장에선 그 풍경조차도 신기하다는 듯 시선을 그 곳에 완전히 고정시키다가 다시 고개를 노렸다.
그러니까 나는 평범한 양심의 소유자다. 집에 가서 발라당 눕고 싶은 욕구가 저 발끝에서부터 머리 꼭대기까지 지배하고 싶다 외치고 있는 와중에, 이 정체 모를 할아버지를 어떻게 해드려야할 지 고민한다. 아무런 연고도 없이 낯선 곳에 뚝 떨어졌다는데, 내버려두고 가자니 내일 뉴스에서 다시 볼 수 있을 것만 같다. 하지만 고양이 줍는 것 하나에도 인간은 많은 고민을 하는데, 하다못해 성인으로 예상되는 인격체를 주워야 한다니 머리가 복잡할 수 밖에 없다. 그렇지만 의외로 결론은 간단하게 났다.
"사과는 한 번이면 됐고요... 제가 지금 엄청 졸리거든요."
달이 3개나 떠있는 에어리즈에서 부의 결정체와 싸웠고, 그러다 여기에 뚝 떨어졌다는 이야기를 이해하기 몹시 어렵다는 뜻이다.
"마법같은 거 없고...... 또 전 여기가 너무 춥고 집에 가고 싶어요."
그리고 다시 마른 세수를 했다. 이게 잘 하는 선택인지는 모르겠고, 80% 이상의 확률로 후회할 것 같았지만 나는 입을 열었다.
"괜찮으시면 저희 집으로 가시면 안 될까요..."
시간을 확인하려 주머니를 뒤적거리다 방금 있었던 일을 떠올린다. '맞다, 휴대폰.' 하늘을 날아다니는 할아버지를 보고서는 놀라 떨어트렸던 스마트폰. 바닥에 나뒹굴고 있던 걸 이제서야 주워든다. 액정에 금이 간 것 같지만 정상적으로 작동하기는 한다.
자신이 돌아갈 수 있는 방법은 아예 없어진 것이 아닌가 생각을 하며 이질적인 존재는 곤란한 표정을 지었고 등 뒤의 날개 역시 아래로 축 쳐졌다. 이 알지도 못하는 세계에서 계속 살아야하는 것일까. 아니면 어떻게 해서 돌아갈 방법이 있는 것일까. 고민을 하는 와중 자신의 집으로 가는건 어떻냐고 이야기를 하는 상대의 말에 이질적인 존재는 의외라는 듯이 의구심을 보였다.
"졸리니까 집에 가겠다는 것은 그렇다고 쳐도 나까지? 이 세계의 이들은 처음 보는이도 집으로 부르는데 경계심이나 그런 것을 못 느끼는거야?"
자신이 살던 세계라면 생각도 못할 일이라고 이야기를 하며 이질적인 존재는 잠시 답을 고민했다. 허나 이대로 있는다고 해서 달라질 건 없었고 우선 날이 밝은 후에 이것저것 시도를 해야겠다고 생각을 정리한 후, 이질적인 존재는 상대를 바라보며 대답했다.
"그럼 날이 밝을 때까지만 신세를 져도 괜찮을까? 나쁜 짓은 안할테니까. 아. 그러고 보니 몇살이야? 나보다 조금 나이 있어보이니가.. 75살쯤 되려나? 아무리 그래도 90까진 아닌 것 같은데. 여기서는 다르게 셀 수도 있겠구나. 여기는 한 살을 먹으려면 얼마나 시간이 걸려?"
나름의 호기심을 품으며 이질적인 존재는 날개를 살며시 퍼덕이며 땅에서 살며시 발을 떼어냈다. 그리고 상대를 바라보며 다시 말을 이었다.
"......초면에 집으로 데려가겠다는 거나, 따라가겠다는 거나 도긴개긴이라고 생각하는데요."
나쁜 짓이라고 해봤자 죽기밖에 더하겠나 싶다. 여기 계속 서있으면 곧 과로사든 동사든 할 것 같으니 거기서 거기인 선택지라고 생각했다. 내일 날이 밝고 나면 무슨 후회를 할 지는 그때의 몫이다. 무엇보다 오늘 아침이 되어 다시 출근을 하기 위해서는 집에 들러야 한다. 최소한 씻고 옷이라도 갈아입어야할테고, 쌓인 집안일도 있다. 청소는 둘째치고, 빨래도 밀린지가 까마득하다. 야근이 잦다보니 집안을 챙길 새가 없다.
"저 25살이에요. 여기서는 한 살을 먹으려면… 1년인데... 365일이요. 24 곱하기 365가...... 8760시간 정도......"
1년의 단위조차 없을 것 같아 안 굴러가는 머리를 붙잡고 계산을 한다. 생각해보니 8760시간이라고 한들, 시간의 단위조차 다르면 어떡하나 싶었지만 시간을 분, 분을 초 단위로 쪼개기에는 그 계산은 너무 컸다. 3자리수 곱셈 암산은 해도 그 이상은 안 되겠다. 나는 이 정도 물음에 답변을 했으면 만족스러울까 싶어 잠시 바라보다가 그만두었다. 이 비현실같은 현실을 받아들이고 있는게 좀 어이가 없었다. 한편으로는 내일 일어나면 꿈이겠지 생각하고, 정말 현실일 지도 모른다는 기대감도 품고 있다. 늘 같은 하루의 반복 속의 이런 일에 소소하게 재미를 느낄 깜냥은 있었다. 물론 휘말리고 만다면 달갑지만은 않을 일이다.
"날......... 저 들 수 있어요?"
키는 내 쪽이 작아보였지만, 키랑은 별개의 문제다. 성인치고 제 몸무게의 반절 가량의 무게를 들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되나 싶다. 운동을 하는 사람이 주변에 없는 것도 그렇지만, 본인부터가 심각한 저질 체력이라 그런 의문이 들기도 하였다. 운동할 시간은 커녕 끼니도 늘 인스턴트로 처리하거나 굶기가 부지기수인 야근쟁이에게 힘은 둘째치고 건강부터 챙기고 봐야 한다. ...건강조차도 챙기고 있지 않기는 하다.
계산법이 크게 다른지 이질적인 존재는 두 손을 올린 후에 손가락을 접어가며 잠시 계산하는 모습을 보였다. 허나 그렇게 오래 걸리진 않았고 곧 두 손을 아래로 내렸다. 그리고 난감한 표정으로 골치가 아프다는 듯이 미간을 잡고 고개를 휘저었다.
"365로 계산하기가 힘들어서 대충 300으로 계산했어. 인간? 사람? 아무튼 여기의 계산법으로 하면 난 대충 21세. 내가 사는 곳은 120일이 지나면 한 살을 먹으니까. 여기선 나이를 먹으려면 시간이 많이 필요하구나. 365면 세살이나 먹을 시기야."
세상이 달라지면 자연히 문화도 그 이의외 것도 달라지는 법이었다. 지금만 해도 나이를 계산하는 법이 다르지 않던가. 아무튼 기억해두겠다는 듯이 365, 365, 365를 작게 중얼거리면서 이질적인 존재는 상대를 바라보며 문제없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래 보여도 힘에는 자신이 있어! 내가 사는 세계에는 부의 결정체라는 게 있어. 세계를 침식하면서 이변을 일으키는 이들인데 그런 이와 싸우려면 힘이 많이 필요하거든. 그러니까 문제 없을거야! 네가 겁 먹어서 바둥거리는 것만 아니라면 말이야!"
이어 이질적인 존재는 자신의 손을 잡으라는 듯 오른손을 내밀었다. 만약 잡는다면 정말로 문제없이 몸을 붕 띄워서 공중 높이 떠올랐을 것이다. 그리고 집이 있는 곳을 알려달라고 하면서 조금 빠르게 하늘 위 어둠을 가르며, 그 방향을 향해 날아갔을 것이다. 잡지 않았다면, 그대로 걸어서 상대를 따라가려고 했겠지만.
/앗! 텀은 괜찮아! 일단 내 쪽에서 끊기는 조금 애매한 것 같아서 일단 한턴만 더 이어봤어! 여기서 집으로 안내하면서 끊어도 좋을 것 같아!
마왕이 이끄는 마족과의 오랜 전쟁이 마침내 끝나고 세상엔 평화가 다시 찾아왔다. 마왕을 무찌른 용사와 그 일행은 영웅으로서 환대받았고 현재 왕국에선 그들이 세운 공을 치하하고 기념하기 위해 아주 큰 축제를 열어 사람들은 평화로운 분위기를 즐기며 술을 마시고 노래를 부르며 춤을 추면서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일행 중 리더를 맡은 용사를 보고자 줄을 선 사람들이 많았고 그 끝은 도저히 보이지 않을 정도로 계속 이어졌다. 그들을 무시할 순 없다고 이야기하며 용사는 사람들을 만나며 악수를 하고 가벼운 대화를 하거나 그들이 보내는 선물을 받으며 나름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다른 일행들 역시 용사만큼은 아니긴 하나 만나고자 하는 사람들, 혹은 각자의 고향에서 고생했다는 인사를 전하기 위해서 찾아오는 이들이 있었고, 감사를 표하는 이들이 있었다. 그야말로 그들은 이 세상을 구한 영웅으로서 많은 사람들의 환영을 받는 존재였다.
용사의 오랜 동료이자 전설의 활을 얻어 많은 도움을 주었던 사내는 슬며시 그 자리에서 빠져나와 조금 조용한 장소로 향한 후, 나무에 등을 기대 한적한 분위기를 감상했다. 처음엔 그저 마을을 위협하던 마족을 퇴치해준 용사에게 은혜를 갚고자 따라간 것이었는데 설마 전설의 활을 얻고 마왕을 무찌르는데 일조할 거라고는 사내도 상상치 못한 일이었다.
"진짜 많은 일들이 있었구나. 정말."
이 축제가 끝나면 이제 어떻게 될까? 용사는 왕국의 왕이 사위로 삼는다는 말이 있었으니 여기에 남게 될 것 같으니 자신은 다시 고향으로 돌아가는게 좋을까. 그렇게 생각하며 자신의 뒷일을 사내는 조용히 생각했다. 고향으로 돌아간 후, 다시 이전처럼 사냥을 하면서 먹고 사는 것도 좋을테고 활을 가르치면서 사는 것도 나쁘지 않은 일이었다. 태어날때부터 마족의 위협에 시달리면서 살았던게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기에 이렇게 찾아온 평화는 오히려 그에게 있어서 낯선 일이었는지 그는 괜히 웃음을 터트렸다.
"그래도 이제는 다들 평화롭게 살 수 있겠지. 마을 사람들도 말이야. 아무튼 정말 끝은 끝이구나."
지금 이 순간이 믿기지 않는지 사내는 자신의 뺨을 가볍게 꼬집었다. 당연히 통증이 느껴졌고 그 통증으로 이게 꿈이 아니라는 것을 느끼면서 사내는 괜히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정말로 이런 날이 오고야 말았다는 감격과 기쁨. 그 모든 것이 한번에 터진 탓이었다. 그곳으로 다가오는 발소리가 웃음소리에 묻히고 있다는 것을 사내는 미처 알지 못했다.
/간단하게 전통 판타지 RPG 느낌의 배경에서 마왕을 무찌르고 평화가 찾아왔고 엔딩 씬 느낌에서 나올법한 축제 같은 장면이야. 같은 용사 일행으로 이어도 되고 사내의 고향 사람으로 이어도 되고 그냥 왕국 사람으로 이어도 상관없어. 다만 맥커터 전개는 사절이고 스루할 생각이야.
아웅... 애우우웅...... (이런 **! 빌어먹은 신 같으니라고. 로또 당첨 시켜달란 소원이나 들어줄 것이지, 감히 고양이 되고 싶다는 소원을 들어줘?!) (간단하게 군것질가리 장을 보고서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한숨과 함께 길고양이를 보며 부럽다고, 고양이가 되고 싶다고 바라고 보니 정말 고양이가 되고 말았다.) 아아웅! (제발 누가 좀 도와줘!)
>>169 와오오옹...... (뭔지 잘 몰라도 저 고양이 개빡친 거잖아! 대화로 해결하면 안 될까 야옹아......) (난데없이 고양이가 된 것도 서러워죽겠는데, 이제는 화내는 고양이까지 마주했다. 집에 들어가서 핫바와 컵라면을 먹을 생각이었는데, 어째 개싸움, 아니, 고양이싸움을 할 것만 같다. 최대한 적의가 없다는 의미로 꼬리를 내리고 귀를 뒤로 젖혔다. 고양이들의 세계에서 이게 무슨 뜻으로 통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그렇게 했다.)
소년은 생각했다. 과연 이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하고. 그냥 그렇게 주변을 둘러보았고, 집이라는게 갖고싶어졌다. 그래서 그렇게 행동하기로 했다. 소년은 갑작스럽게 종적을 감추었다. 2000년대의 어느 날, 여름이었다.
비상식적이었다. 그 학생을 본 교사들은 모두 입을 모아 그렇게 말했다.
' 애가 참... 유별나요. 도무지 일반 상식을 모른다니까요? 한번은 점심시간때 애들끼리 소란이 일어나서 다가가보니까, 걔가 아무것도 모르겠다는 얼굴로 가만히 맞고있더라구요. 그래서 자초지종을 들어보니, 글쎄 옆 자리 애 도시락을 뺏어먹었다나? 여학생은 울었고, 뭐하는거냐고 남자애들이 물어보니까 배가 고파서 밥을 먹었다고 대답했다는거에요. 그럼 니 도시락을 먹지 왜 뺏었느냐고 물어보니까, 자긴 도시락이 없어서 뺏었다나? 참, 어이가 없어서. 그래서 화가 난 남자애들이 걔를 때리기 시작했는데, 아무렇지도 않다는듯 계속 밥을 먹었다는거에요. 그거에 애들이 이상한걸 느끼고 거칠게 욕하는데... 간신히 말렸죠. '
' 음, 솔직히 말하면. 어디 경찰서에라도 신고해야지 싶습니다. 국어 수업 시간때에 애가 수업은 듣는데 무슨 소린지 전혀 못알아듣겠다는 표정인거에요. 그건 늘 있는 일이니까 딱히 신경 안썼는데, 어느날 걔한테 지문을 읽어보라고 시키니까 고개를 갸웃거리더라구요. 그래서 왜 안읽느냐고 물었죠. 불량학생도 아니었고, 공부머리는 없는것같지만 수업을 듣는 애였으니까요. 그런데 대답이 가관이야. 글을 못 읽는답니다. 아니, 글은 유치원생도 어느정도 읽을수 있잖아요? 고등학생이나 되었는데 글을 못읽는다? 놀리는줄 알고 버럭 화를 냈는데, 진짜 아무것도 모르겠다는 표정을 보고 짐작했죠. 이거 뭔가 이상하다. 그래서 말은 어떻게 하느냐고 물었더니, 세계를 돌아다니면서 배웠다. 영어, 불어, 일본어, 중국어... 오만가지 말을 다 할수 있다고 줄줄 불더군요. 그래서 시켜봤는데, 네. 다 할줄 압디다. 농담이 아니었어요. 저는 외국어는 영어밖에 못한다지만, 아무 말이나 뱉는게 아니었어요. 대체 어떤 애가 글은 못읽는데 외국어를 너댓개씩 막 하죠? 뭔가 이상해요. '
소년은 수업을 듣다가 문득 지루해졌다. 알 만한 내용이 하나도 없어. 그렇게 생각하곤 조용히 교실을 빠져나왔다. 수업중이었지만 개의치 않았다. 그리고는 옥상으로 향했다. 옥상에서 바닥에 털썩 주저앉아, 푸른 하늘과 드넓게 뻗어있는 건물들을 바라보았다.
" 재미없네. "
집도 가졌고, 학교도 가졌지만. 뭔가 본질적인게 부족했다. 총명한 소년은 곧 그걸 눈치챘다. 제 손에 쥐어진건 신식 무기였고, 자긴 그걸 다루는 방법을 모르는거였다. 이 무기를 다룰줄만 알면 될텐데, 그런건 누가 안 가르쳐주나. 소년은 길게 하품했다. 눈가에 눈물이 가볍게 고였다.
(낙엽이 발에 채이는 계절이 왔다. 학교가 히터를 틀어주지는 않지만 복도가 냉기에 어리는 계절이 왔다. 자신을 폭 감춰버릴 수 있는 얇은 담요를 유령마냥 머리 위에 쓰고서 복도로 나왔다. 그리고 시야에서 선생님을 발견했고 황급히 방향을 틀었다. 그러다 발이 꼬였는지, 담요를 밟고 미끄러졌는지, 누군가와 부딪쳤는지, 몸의 균형이 기울었다.) 어어? (넘어지겠다는 확신이 점점 선명해지며 표정이 동그랗게 변한다.)
>>173 (뒤돌아설 때, 발밑이 마찰력을 잃고 미끄러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대로 몸의 균형이 앞으로 기울어지면서 갑자기 뒤집어지는 세상. 돌바닥이 코앞에 닥쳐올 상황. 그러나 코앞에 닥쳐온 것은 돌바닥이 아니라 웬 셔츠 차림의 품이었다. 결국 그 품에 퍽 들이박긴 했는데, 그나마 돌바닥에 들이박는 것보다는 덜 아플지도 모르겠다. 제대로 충돌하기 전에 무언가 단단한 게 어깨를 턱 거머쥐고 앞으로 고꾸라지던 몸의 가속도를 최대한 받아내주었기 때문이다. 고개를 들어보면, 반의 운동부 아이가 무뚝뚝한 얼굴로 당신을 바라보고 있다.) 괜찮냐? (그러면서 당신을 훑어보고, 어디 다친 데는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는 딱딱한 얼굴로 한 마디 한다.) 조심 좀 해라.
>>174 어, (이름을 고민하는 시간이었다. 같은 반에 운동을 하는 이름을 떠올리려고 했는데, 담요가 훌렁 벗겨졌다는 걸 인지했다.) 안 괜찮아질 지도 몰라! (목소리를 낮췄지만 속도는 빨랐다. 표정도 다급했다. 왜 그런가하니, 귀에 그 원인이 있었다. 한쪽 귀에 피어싱이 3개 뚫려있었고, 붉은 기가 맴도는게 뚫은지 얼마 안 되었거나 괜히 만지작거려 덧나든가 한 모양새다. 큐빅이 복도 전등에 비춰 반짝거린다.) 고마워, 고마운데, 한 번만 더 빚지자! (그러더니 담요를 움켜쥐고서 당신의 뒤로 숨어들려 한다. 등 너머로 숨어들어가면 고개만 슬쩍 내밀 것이다. 아까의 그 선생님이 어디로 갔는가 찾기 위하여.)
>>175 (데오드란트 냄새.) ...수그려. (운동부는 미간에 주름을 그으면서 입고 있던 트랙탑을 지익 벗어서 넓게 펼친 뒤 조금 낮게 들고는 이리저리 살피는 시늉을 했다. 멀리서 국어 선생님의 너 뭐하냐, 하는 소리가 들린다.) 옷 안에 벌레 들어간 거 같아서요. (하면서 운동부는 트랙탑을 넓게 펼친 채로 툭툭 터는 시늉을 한다. 다행히 거기에 시선이 쏠렸는지 국어 선생님은 뭐라 별 말 하지 않고 돌아서 가는 것 같다. 특유의 가죽 슬리퍼가 바닥을 딱딱 때리는 소리가 멀어져간다. 국어 선생님이 근시라 다행인지도...) 이게 되네. (위기가 멀어지자, 운동부는 다시 트랙탑에 팔을 꿰어 걸치고는 당신을 힐난하는 눈빛으로 돌아다본다.) 그럴 거면 교내에선 빼.
>>176 (답하는 소리가 없다. 다만 숨을 합, 하고 죽이는 소리는 들렸을 지도 모르겠다. 선생님의 목소리가 가까워졌을 때는 심장 박동 소리가 숨소리보다 컸겠다. 발자국 소리가 멀어져가는 것에 최대한 귀 기울여 보았고, 펼치고 있던 트랙탑이 팔에 걸쳐지면 그제야 등 뒤에서 나왔다.) 안 돼, 뚫은지 얼마 안 된데다 혼자 다시 못껴. (귀에 손을 올려 피어싱을 만지작거리더니, 이내 잘못 건들여 고통을 느낀다. 표정을 찡글이며 손을 떼어낸다.) ...그래도 다음주에 투명으로 바꿀거야! (볼멘소리. 크기도한 담요가 이제보니 바닥에 질질 끌리고 있었다. 쭉 펼치니 긴쪽의 길이는 키를 웃돌고도 남을 성 깊다. 차곡차곡 개어서 팔에 걸어둔다. 팔락거리는 담요에서 가볍게 파우더리 향이 난다.) 맞다. 고마워! 거짓말 잘 하네! (방글 웃으며 당신을 돌아본다. 돌아볼때 뒷꿈치가 살짝 들썩거린다.)
>>177 손대지 ㅁ... (손이 귓가로 올라가는 걸 보고 미간에 내천자를 그리며 만류하려 손을 뻗었으나, 이미 피어싱에 손이 닿았다가 우그러지는 표정을 보고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조그만 한숨을 쉰다.) 피어싱 샵에 가서 소독약 하나 사. 약국 가서 식염수를 사다 바르던가. (하면서 운동부는 주머니를 뒤적인다. 그러다 건네어져온 말에, 운동부는 무뚝뚝하고 가무잡잡한 얼굴로 당신을 가만히 보다가 시선을 피하며 한마디 퉁명스레 한다.) 그런 칭찬 필요없어. (그러면서 운동부는 주머니를 더 뒤적여본다. 찾는 게 없는 모양. 그는 다시 이쪽을 바라보며 말을 꺼내온다.) 너 여기서 잠깐만 있어.
>>178 (입을 꼭 닫고서 입꼬리를 아래로 동그랗게 말았다. 하지 말란 짓 했다가 아파하고 나니 할 말이 없다. 한숨 소리는 듣지 못했지만 저 입 모양, 분명 한숨 쉰 거라는 추측이다.) 별로 안 아파! ... 안 건들이면. (곧게 당신을 쳐다보고 있었는데, 자기가 생각하기에도 한숨을 한 번 더 쉬게 할 것 같은 말인지라 느릿느릿 시선이 다른 방향으로 향한다. 점점 아래로.) 샵에서 올때마다 소독해준다 그래서 안 샀지이. (목소리 크기가 살짝 줄었고 어미가 늘어졌다.) 어... 그럼 친절하다? 상냥하다? 배려심이 깊다? 마음씀씀이가 넓다? 과장 쪼금해서 생명의 은인이다? (갈수록 화려해지는 칭찬 리스트를 늘어놓는게, 마음에 드는 걸로 고르라는 것 같다. 그새 시선이 위로 올라오더니 눈만큼은 아까와 같이 당신을 바라본다. 입꼬리는 여전했지만.) 네엥.
>>179 그래, 건드리지 마. 샵을 매일 가는 것도 아닐 거 아냐. (곧게 운동부를 쳐다볼 때에는 운동부의 귀에도 아웃컨츠를 따라 줄줄이 나 있는 피어싱 자국이 보인다- 무언가 끼워져있진 않지만.) 금방 올게. (어째 운동부가 건네어온 잠깐만 있어, 하는 말이 그 무뚝뚝한 얼굴로는 도저히 감당이 안 될 만한 칭찬 리스트가 입에서 줄줄이 쏟아져나오는 걸 틀어막으려는 의도도 없잖이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운동부는 부리나케 반 쪽으로 발을 틀어 총총 갔다가, 1분 남짓한 시간만에 되돌아왔다.) 자. (운동부가 손을 내민다. 소염진통제 알약 곽이 놓여 있다.) 네 알인가밖에 없긴 한데, 그거라도 먹어. (당장 이 자리에서 먹으라는 말은 아니다. 물도 없잖은가. 운동부도 그게 마음에 걸렸던지, 정수기는 1층에 가야 있다는 걸 알면서도 공연히 복도를 한 번 둘러본다.) 매점이라도 갈까.
>>181 매일도 갈 수는 있지! 근데 그러면 진상이잖아. (대답을 하면서 고개를 다시 들어올렸을 때, 한 번 흘깃 당신의 귀를 쳐다보았다. 피어싱을 했던 자국이 맞는 것 같았고, 피어싱 이야기가 막힘없이 흐르는 것도 그렇고. 이따 돌아오면 물어봐야지 생각한다.) 아. 어. (피어싱 이야기부터 하려고 했는데, 당신이 곧 돌아와서는 손을 내밀어 보여준 것은 약이다. 숨을 깊게 들이마시고, 내쉬면서 말을 쏟아낸다.) 친절하고 상냥하고 배려심 깊고 마음씀씀이 넓은 생명의 은인이네! (아까 늘어놓았던 칭찬 리스트를 한 숨에 다 말하더니 그러고서 숨을 다시 쉰다. 한 숨에, 빠르게, 정확한 발음으로 말해낸게 뿌듯한듯 웃었다.) 매점? 그래! 은혜 갚아야지. (돌아다니다 선생님을 마주칠까, 팔에 걸어둔 담요를 펼친다. 다시 유령처럼 뒤집어쓰기라도 할 모양이다.) 근데 넌 왜 안 하고 다녀? 안 막혀? 아니면 벌써 막혔나... 아, 학교니까 빼는게 맞지. (피어싱이라고는 말하지 않았지만 아무래도 피어싱 이야기다.)
>>181 조용히 해. (와르르 쏟아지는 칭찬세례에 운동부는 온 얼굴을 구겼다. 가무잡잡한 뺨에 핏기가 올라오는 것도 같다. 운동부는 화제를 돌린다.) 아무튼 네 말처럼 매일은 못 가는데 소독은 매일 해야지. 약국에서 소독제 스프레이 사둬... 은혜는 안 갚아도 되니까, 매점에서 음료수라도 사다가 소염제도 먹으라고. (담요를 유령처럼 뒤집어쓰는 것에는 별 말을 하지 않는다. 계단을 내려와서 복도를 가로질러 가면 저만치에 열려 있는 매점이 보인다. 매점으로 다가가다가, 재재 쏟아내는 질문에 운동부는 당신을 힐끔 바라보다가 앞으로 시선을 돌렸다.) 어. 학교에선 안 해. 또 귀 찢어먹긴 싫어서.
>>182 왜? 다 마음에 안 들어? (화제를 돌려도 꿋꿋하게 물어보고는, 바뀐 화제를 쫓아간다.) 소독약이 스프레이로도 있어? 똑똑이네! (앞선 칭찬들은 조용히 하라는 말을 들어버렸으니, 다른 방향의 칭찬을 덧붙이고 이번에는 어떻냐는 기대에 어린 웃음을 보인다.) 은혜도 갚을거고 약도 먹을 거야. (담요자락을 팔락거리면서 당신과 함께 매점으로 향한다. 이번에는 실수로라도 밟고 넘어지지 않게, 발치까지 내려오지 않도록 잘 붙들고 있다.) 으, 아팠겠다. 운동하다가? 아니면 선생님들이? 선생님들이 그런거면 많이 무서운데. (무의식적으로 피어싱을 뚫은 쪽의 귀를 감쌀 뻔하다가, 직전에 브레이크를 걸어 멈췄다. 그리고 가까워진 매점에 눈에 들어오면 당신의 앞으로 질러가더니 마주보고서 선다.) 뭐 사줄까!
>>183 마음에 들고 말고가 아니라... 아냐 됐다. (또다른 칭찬에 운동부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하고 시선을 돌려버린다. 핏기가 조금 더 선명해진 것도 같다. 화나거나 한 게 아니라 쑥스러워하는 걸까? 다행히 새로운 질문이 꺼내져 화제가 환기된 덕분에 운동부는 다시 시선을 돌려왔다. 질문에 조금 고민하다가) 운동하다가 그랬어. 그나마 연골이 아니라 귓불이라 다행이지. (아웃컨트에 구멍이 주르르 난 귀의 반대쪽 귀를 바라보면 귓불에 흡사 종이를 한 번 접었다 폈을 때 생기는 것과 비슷한 모양의 흔적이 있다. 그쪽 귀는 귓바퀴를 따라 구멍이 나 있다. 갑자기 발걸음을 툭 앞세워서 마주보고 가로막으면, 운동부는 물끄러미 바라봐온다.) 이런 걸 바란 건 아니긴 한데, 이온음료 캔이나 하나 사줘.
>>184 (말을 잇지 못할 때, 다시 말을 이어주기라도 할까 기다렸다. 다시 말해도 괜찮다는 듯 작은 미소를 입가에 남기고, 당신의 목소리에 귀 기울였다. 언제 입이 열릴까, 당신을 바라보았지만 이 주제로 이야기가 이어지지는 않았다. 그래도 한 가지를 알게 된 것 같다. 당신이 조금 부끄러워하는 것 같다고. 소리죽여서 쿡쿡 웃었다.) 으악. (웃다가도 금방 당신의 말을 듣고서 표정이 찡그려진다. 귓바퀴를 따라 피어싱 자국이 난 쪽의 귀를 보고서, 귀가 찢어졌을 때의 상황을 상상해버린게 분명하다.) 진짜 그거 하나? 많이 먹고 많이 크고 많이 힘내야지! (운동을 한다고 하면 생각되는 그런 이미지. 우선은 물과 이온음료 한 캔을 찾아온다. 그리고서 정말 이걸로 끝이냐는 듯 당신을 바라본다.)
>>185 으악이지. (운동부는 고개를 끄덕였다. 반문이 돌아오자 다시 한 번 더 고개를 끄덕인다.) 너무 많이 먹어도 곤란해서. (정확히는 축구부라고 했던가? 운동부의 체격은 탄탄하면서도 날렵해서, 제법 신경써서 관리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정 아니다 싶으면 나중에 다른 걸로 해주던가. (이 녀석, 자연스럽게 애프터신청을 해왔다.)
>>186 운동이랑은 거리가 이~만큼 떨어져 있어서 잘 몰라. (팔을 넓게 양쪽으로 쭉 펼쳤다. 곰곰 생각해보면, 체육 시간에 곧잘 쉬고 있고는 했다. 특별히 몸이 안 좋아 보이지도 않는데도. 체육 선생님이 별 다른 말을 하지도 않았다.) 다른 거 먹고 싶으면 말하지! (나중을 기약할 듯하니, 물과 이온음료 캔을 구매하고서 다시 온다. 캔을 당신에게로 건넨다.) 아니면 아예 다른 거야? 공부 도와주는 거도 자신 있어!
>>187 많이 먹어서 살 찌면 곤란하다는 소리야. (생각보다 간단한 핑계였다. 거절의 의사를 표한 운동부는, 내밀어진 음료수 캔을 받아든다.) 잘 마실게. (하다가, 공부를 도와주겠다는 말에 공부? 하고 입 안으로 되뇌어보고는 곰곰이 생각해본다. 본인 성적을 생각해보는 듯하다. 중위권이긴 했지만 그렇게 좋은 성적은 아니다. 딱 '공부에 손을 놓지는 않았다' 정도일까. 어떤 이유로 인해 성적을 올릴 필요가 있는 건지, 공부를 도와주겠다는 제안이 꽤 유효하게 먹힌 것 같다.) 공부 잘하냐?
>>188 운동 많~이 하먼 많이 먹어도 괜찮은 줄 알았지. (간단한 논리다. 먹은 만큼 움직이고, 움직인 만큼 먹고. 당신이 캔을 받아들면 방긋 웃었다. 이제 물뚜껑을 열면 약을 먹을 수 있을텐데, 물병을 그냥 달랑달랑 들고만 있다. 약 먹기 싫어서 두는 얕은 수다.) 자신있어! (두 손가락이 곧게 펼쳐진다. 브이 자를 그리고서 웃는 모습이 기세등등하다.) 내가 바로 전교 1등... 까지는 아니지만. (목소리를 낮추고서 소곤이는 듯 하더니 웃음섞어 말을 바꾼다.)
>>189 먹은 만큼 더 운동해야 되잖아. (간단한 논리를 뒤집으면 간단한 논리가 나온다. 캔을 받아들고 툭 따서 몇 모금 시원하게 넘긴다. 그런데 몇 모금을 마시고 나서도 손에 물병이 달랑달랑 들려만 있자, 운동부는 그걸 빤히 바라본다.) ... (전교 1등-까지는 아니지만, 하는 짓궂은 말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운동부는 병과 이쪽을 번갈아 보다가 한 마디 한다.) 뚜껑 따줘?
>>190 난 먹은 만큼도 운동 안 하는데. (자랑스레 말할 내용은 아니지만, 그리 우스운지 키득 웃고 있다.) 전교 1등 정도는 아니면 모자라? (최상위권이 아니기는 해도, 상위권은 상위권에 속하고 있는 성적이었다.) 응? (공부 이야기를 하고 있었는데 뚜껑 이야기가 나왔다. 눈을 느릿하게 깜빡거리고, 당신을 쳐다보았다가 물병을 쳐다보았다. 입을 꾹 닫고 있더니, 뚜껑을 손으로 잡고 힘을 준다.) 못 여는 거 아냐! 약 먹기 싫어서 그런건데. (약은 거의 대부분이 맛없으니까.)
>>192 소아과 의사선생님 같아. (귀 만지지 말라고 했고, 소독하라고 조언도 해줬고, 약도 챙겨줬고, 운동에 먹는 얘기까지. 굳이 소아과가 붙은 이유는 상냥하고 친절하다는 말을 돌려 돌려 표현한 것이었다.) 그래도 앞자리는 1이야. (물병이 열리고 나면 정말 먹기 싫어하는 표정이 된다.) 가루약이든 알약이든 맛없는 건 똑같지이. (말 끝을 늘이며 싫은 티를 팍팍 내지만 손바닥을 내밀었다. 약을 먹기는 먹겠다는 거겠지.)
>>194 어쩌다 보니 이렇게 됐네. (운동부는 잠깐 시선을 피하면서 머쓱하게 대답했다. 정말이지 처음에는 귀 팅팅 부은 게 보기 좀 그래서, 저게 얼마나 짜증나게 아픈지 아니까 성격에 안 맞는 오지랖 잠깐 부려보려고 한 것뿐인데- 어째 생각하던 것보가 해프닝이 길어진 것 같다.) (아주 싫지는 않을지도, 하고 운동부는 무심코 생각했다.) 조금만 도와주면 되니까 그걸로도 충분해. (그는 약갑에서 알약을 톡 꺼내 손 위에 얹어준다. 연질캡슐로 되어 있다.) 알약은 혀 위에 올려도 별맛 안 나잖아. 입 안에서 터지는 게 아니고서야..
>>195 아까 내가 했던 말들이 다 정답이라서 그런 거 아냐? (놀리고 있다. 이를 하얗게 언뜻 보이며 웃는 입꼬리 모양하며, 샐쭉 감기며 휘어진 눈매 모양하며 장난스럽기 그지 없다. '아까 내가 했던 말들'이 가리키는 것은 분명, 그 칭찬 리스트다.) 나 필요해지면 말해! 나 집 늦게 가니까 난 아무때나 괜찮고. (방긋 웃고나서, 이후에는 손 위에 올려진 알약과 눈싸움이 잠시 있었다.) 녹잖아! 잘 녹는 건 물 마시기도 전에 녹아버리고. (투덜거려봤자다. 먹어야할 약이고, 먹으라고 선뜻 주기까지 했는데 안 먹겠다고 투정부리기에는 당신이 정말 소아과 의사 선생님도 아니다. 약을 입에 넣고 나서 눈 질끈 감더니, 물을 세번이나 마셨다. 처음은 물만 삼켜버렸고, 두번째에서 제대로 약도 같이 삼켰고, 세번째는 혀끝에 약맛이 남지 말라고.) ... 이제 귀 안 뚫고 싶어졌어.
>>197 같은 소리 하고 있네... (시선을 돌리지도 못한 채로 운동부는 얼굴을 구겼다. 뺨의 혈색이 좀더 선명해진 것도 같다.) 복도 반대편에서도 다 보일 정도로 귀가 팅팅 부은 게 보기 안쓰러워서 도와준 것뿐이니까. (이런 상황 자체가 익숙하지 않은 걸까 틱틱거리는 것도 퍽 서투르다. 알약을 내어줄 때가 돼서야 운동부는 다시 이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얼마나 혀 위에서 굴리면 그게 녹냐? 후딱 삼켜. (알약을 삼키자, 그제사 한시름 놨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다. 반나절쯤 지나면 통증과 부기가 확연히 가라앉을 것이다. 투덜대는 소리에, 운동부는 고개를 끄덕인다.) 뚫기 싫으면 안 뚫는 거지.
>>198 오, 너 지금 그거 닮았다. 이모티콘 중에 도깨비처럼 생긴 거 알아? (👹) (소리죽여서 웃으며 말을 이어 나간다.) 나는 그걸 친절하다고 불러. (당신이 부끄러워할 것이라고 생각하고서 한 말이라, 웃음이 쉽게 그치지는 않는다.) 안 녹았거든! 약 먹으면 기분이 별로야. 목에 남아있는 것 같아. (이물감이 싫다는 듯 표정을 찌푸리도 고개를 작게나마 절레절레 저었다.) 응! 대신 타투할 거야. 어른 되면! (열었던 물뚜껑을 잠그면서 샐쭉 웃는다. 집게 손가락 하나만을 피고서, 손가락 끝으로 피어싱이 있는 쪽 귀의 귓바퀴를 따라 내린다.) 여기에 하면 너랑 똑같겠다.
>>199 (운동부는 뭐라 할 수 있는 말이 없어진 건지, 아니면 자기도 얼굴이 발개진 걸 눈치채고 숨기고 싶어진 건지 손바닥으로 얼굴 반쯤을 턱 짚었다. 그리곤 한숨을 푹 쉬었다.) 에휴. (이마를 짚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다, 어른이 되면 타투를 하겠다며 귀의 연골 쪽을 쭉 훑어내리는 손가락을 보고 눈을 조금 치뜬다.) 바늘구멍 하나 뚫는 것도 죽을 맛인데 타투를 거기다가? (운동부가 먼저 주목한 쪽은 그쪽이었다. 귀 연골을 건드리는 건 십중팔구 대단히 아픈 일이기 때문이다.) 귓바퀴도 귓볼도 있는데 왜 거기... (하다가, 자기랑 똑같겠다는 말을 상기하고는 말을 하다 말고 입을 다문다. 시선이 흔들리는 걸 다잡으며 미간을 구긴다. 얼굴이 더 빨개졌다.) .........너 나한테 작업 거냐.
>>200 (얼굴 반쯤이 손에 가려 사라지고, 한숨을 쉬는 것까지 별 다른 장난을 이어 치지 않고서 보고 있었다.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면은 그때즘 입을 열었다.) 침묵은 긍정인데. 격한 부정도 긍정이고. (말을 끝내면서 입매가 둥그렇게 휘는 건 장난치는 것이기도 했고, 약올리는 것이기도 했다.) 응! 꽃이 한 송이씩 나란히 있다거나. 찾아보니까 마취 크림 발라준대. (피어싱이 있는 쪽은 귓볼이다. 귓바퀴만 만지작거리다가 손을 내린다.) 귓바퀴 바깥 쪽은 내가 보기 힘들고, 귓볼은 이미 충분- (눈이 동그래진다. 당신의 얼굴 색을 잘못 본게 아닌지, 목소리를 잘못 들은게 아닌지 되새겼다. 그리고 자신이 한 말도 곱씹었다. 이내 별 친하지도 않은 사이에 민망한 소리를 해버렸다고 생각했다. 얼굴에 열이 올랐다. 무슨 말을 해야할지 갈피를 못 잡다가.) 걸렸으면 죄송합니다아! (냅다 소리질렀다.)
>>201 날조하지 마. (약올리기의 효과는 굉장했다. 운동부는 이 악무는 소리를 내면서 부들거렸지만, 다시 말해 약올리기가 아주 고약하게 잘 먹혔다는 뜻일 것이다. 입술을 깨물고 쓰-읍 하며 애꿎은 숨만 고르다가, 자신이 무슨 말을 했는지 당황하고 있는 틈을 타서 운동부는 대뜸 손을 내밀어, 에라 모르겠다 하는 식으로 당신의 손 하나를 덥석 쥔다. 그리곤 여름에 탄 색이 아직 안 빠진 피부에 핏기가 올라 보기 좋은 감색이 된 얼굴로 당신을 뚜렷이 바라보며, 이를 꽉 물고 눈을 치뜬 채로 또렷하게 발음한다.) 알면 앞으로 자-알 부탁합니다. (그리고, 2~3초 정도 침묵했다가 한 마디 덧붙인다.) 공부. (이 공백, 아마 제딴에는 소소한 복수인 모양이다.) ......그리고 마취크림 발라봤자 아플 건 다 아파. 사후관리도 더럽게 귀찮고.
>>202 날조 아닌데. 진짜잖아. (이때까지는 여유로웠다. 다시 장난으로 맞받아칠 수 있었는데, 당신을 약올리려 할 수 있었다. 손이 잡히고서는 그러지 못 했다. 방금 상황에 이어서 손을 잡는다니. 눈이 동그랗게 뜨이는건 물론, 몸이 굳기까지 했다. 긴장해서 몸에 힘이 바짝 들어간다. 오해라고 설명해야 하는데, 뚜렷이 바라보는 시선에 말을 어떻게 꺼내야 하나 고민했다. 그래도 곧 긴장이 풀릴 수 있었다.) 놀랐잖아아! (탁 하고서 몸에서 힘이 빠진다. 힘이 들어가고 빠지는 건 당신에게도 분명 느껴졌을만큼 확연한 차이가 있었다.) 그래도 할거야. 이미 진작에 하기로 결정했거든! (손 빼도 되는건가, 당신이 덥석 잡아버린 손과 당신을 번갈아보았다.)
>>203 (운동부는 한숨을 쉬며 손을 놓아준다. 자신의 혼신을 아끼지 않은 회심의 역습이 유효타였다는 것을 알아챘는지, 아까까지와는 달리 이번의 한숨에는 후련한 기색이 가득하다. 한결 여유로워진 태도.) 뭐, 그러면 더 말리진 않을게. (그러다 문득 손을 들어서 자신의 귀를, 구멍이 줄줄이 나 있는 연골 쪽을 매만져본다. 그리곤 한박자 늦게 맞장구친다.) ...아파도 예쁘긴 하겠다. (그러다가 캔을 들어서 안에 남아있던 것을 마저 다 마셔버리고는) 그래서 시간은 언제 괜찮아? 조만간 모의고사 있지 않던가.
>>204 (손이 놓이면 괜히 한 번 쥐었다 펼쳐보았다. 붙잡혀 있던 것도, 그랬던 손도 얼떨떨했다. 티내려고 하지는 않았다.) 나중에 하게 되면 보여줄게. 어른될 때까지 기다려. (마땅히 어떤 타투를 해야겠다는 도안이 있는 것도 아니었지만. 당신이 시간 이야기를 하면 고개를 조금 갸웃거렸다.) 집 늦게 가니까, 언제든지 괜찮다니까. 당장 오늘도 상관 없어, 난. (시간을 맞춰야하는 건 당신 쪽이 아닐까, 고개를 조금 기울이더니 시선이 당신을 향한다. 그렇게 말하는 쪽이야말로 시간이 언제 괜찮냐는 듯.)
>>205 (코에 낯선 향기가 뒤늦게 걸리는 것을 운동부는 느꼈다.) (덥석 쥐어놓고 너무 무리수를 둔 것 같다고 운동부 본인도 후회하고 있었다. 손을 잡은 것에 대해 당신이 뭐라 말을 꺼내지 않는 것도 그랬고. 그래서 운동부는 조금 멋적게, 자신의 귀를 만져보던 손을 떼어내리며 한번 흘끗 쳐다보았다. 그리곤 시선을 다시 들었다.) 어른 될 때까지 같이 놀아주게? (운동부는 잠깐 뜸을 들인다.) ......아니 방금 취소. (기껏 열이 내렸던 뺨에 다시 열이 오르는 기분이다. 그래서 운동부는 당신의 말에 필사적으로 시간을 되새겨보았다.) 이번주는 목요일이랑 금요일이 괜찮겠네. 주말에는 밴ㄷ- 아니, 연습 있어서.
>>206 (그런 말을 쉽게 하는 편이었다. 다음에 보자는 기약없는 약속처럼, 보여준다고 말했지만 당신이 기다려준다면의 가정이 붙은 약속이었다. 이런 반응은 예상치 못한 것이었다. 그 사이 당신은 말을 번복했다.) 뭐야, 왜 취소야. (무뚝뚝한 듯 상냥하고, 부끄러움도 타고, 그렇다고 장난에 계속 당하지도 않는다. 오히려 한 번은 크게 당했다. 그런 당신과 친구하기 좋냐, 싫냐 가르면 좋다는 쪽이라고 생각했다.) 그럼 어른될 때까지 같이 놀진 말고- 공부 도와줄게. (웃었고, 이어 스케줄이 나오면 고개를 끄덕인다.) 도서관에 있을게.
>>207 ...... (대답이 금방 나오지는 않는다. 운동부는 대답 대신 손부채질로 반문을 넘겼다. 이렇게 어떤 풋풋한 정이 담긴 이야기에는 별로 익숙하지 않았고, 누구라도 쉽게 알 만큼 그는 부끄러움이 많았으며, 그걸 숨기려 애써 틱틱대는 태도로 나오곤 했다. 다만... 숨기는 솜씨도 어설펐고, 뭔가 숨기기에는 그 본인이 무의식적으로 감정에 솔직하기도 했다. 같이 놀진 말고, 하는 말이 꺼내지자 운동부는 뜻밖의 소리를 들었다는 듯이 눈을 치떴으나, 이내 시선을 천천히 비스듬히 아래로 내리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속으로 '오늘 나 좀 이상한데.' 하고 애꿎은 자책을 하는 것은 덤이다.) 뭐, 그러던가. (운동부는 가만히 시선을 비스듬히 돌리고 있다가, 다시 시선을 들어 이쪽을 바라봐온다.) 그럼 반으로 돌아갈까.
>>208 (고개를 끄덕이면, 취소한 이유에 대해서 듣지 않아도 괜찮았다. 취소가 취소되어 버렸으니까.) 이제 너 큰일났다. (반으로 돌아가자는 말에 주섬주섬 다시 담요를 제대로 뒤집어 쓴다.) 성적 갑자기 올라서 컨닝한 거 아니냐고 선생님들이 괴롭힐지도 몰라. (자신만만하고 당찬게 담요를 폭 뒤집어쓰고 있는 아래에서 새다 못해 뿜어지듯 하다. 그리고 매점에 있던 시계를 확인하고는 걸음을 재촉한다.) 야야, 곧 쉬는 시간 끝나겠다. 가자! (먼저 매점에서 반으로 발을 옮겼다.)
선장, 당신이 수다 즐기는 성격이 아님은 내 자알 안다만은. 이제 도무지 어디로 가는지만이라도 알려주면 안 되겠소? 이 남쪽에는 아무것도 없다오. 오직 바다, 바다, 끝없는 바다 밖에는 아무것도! 나침반은 북에서 남으로, 동에서 서로 제멋대로 돌기 일쑤인데 당신은 어찌 키를 돌리라는 지시를 내리는 것이며, 어째서 바다의 여신은 이상할 정도로 오래 이 배에 관대함을 보여주시는 것이오? 수수께끼 같은 말은 그만두고 이제 정말 입을 열 때가 됐소이다, 선장. 속내가 뭐요? 선원이라곤 둘밖에 없고 배라고는 썩은 나뭇조각밖에 없던 시절부터 우리는 온갖 기상천외한 항해를 함께 겪지 않았소. 당신이 마음에 들지 않은 적은 수없이 많았지만, 지시를 의심한 적은 여신께 맹세코 단 한 번도 없소! 그러나 지금이 바로 그 때라는 생각이 드는군. ...안개 때문에 코앞에 있는 사람도 보이지 않는데 대체 어디를 그리 쳐다보고 있는 거요, 제기랄.
>>216 (방금 전까지 형언하기 어려운 꿈을 꾸고 있었는데, 눈을 깜빡하자 배경이 바뀌었다. 바뀐 배경보다 들려오는 목소리에 신경이 먼저 반응했다.) ....신경 꺼. (상대의 말이 꾸중처럼 들려서 미간을 찡그리고 투덜댔다. 또라니 누가 들으면 내가 만날 공포영화만 보는 줄 알겠다.) 쓸데없는 참견을... 그래서 여긴 또 뭐야. (퉁명스럽게 말하고 앉을 곳을 찾아 두리번거렸다.)
>>217 신경이 예민한 건 알겠지만, 도와준 사람한테 그런……아니다. 뭐라 해봤자 무슨 소용이람. 어차피 또 잠에서 깨면 다 잊어버릴텐데. (나지막히 한숨을 내쉬고는, 앉을 곳을 찾는 당신의 주변에 눈길을 준다. 원래 저곳에 의자가 있었던가? 시선이 닿지 않는 모든 구석구석이 흐릿하다.) 네 말이 맞아. 매번 악몽꾸고 아침에 머리 붙잡는 건 내가 아닌 너니까. 다시 보내줘?
>>218 (상대의 반응에 내가 너무 날이 서 있었다는 걸 자각했다. 그야 누구나 험한 상황을 겪다 넘어오면 그렇지 않냐는 생각이 들면서도, 상대의 말대로 도와준 사람에게 예의가 아니라는 생각도 동시에 들었다. 나는 괜히 서서 볼을 긁적이다가 상대의 시선이 닿는 곳을 돌아보았다. 거기엔 의자가 있었고, 앉을 자리를 찾던 나에게는 반가운 자리였다. 의자를 향해 돌아서며 겨우 들릴 정도로 툭 내뱉었다.) 미안하게 됐네. 매번 도움만 받는 주제에 말이 심했다. (사과인지 불만인지 모를 말이지만 내 성격상 어렵게 꺼낸 사과라는 걸 상대는 알고 있을거다. 나는 의자로 다가가 털석 앉았다. 푹신했는지 딱딱했는지는 모르겠다. 앉아서 그제야 제대로 상대를 보며 대화를 할 수 있게 되었다. 오늘은 또 어떤 모습이었을까.) 사과 했으니까 돌려보내는 건 좀 봐줘. 그런데 왠일이야. 한동안 안 보였잖아.
안녕하세요! 저는 오늘 첫 출근입니다. 사실 이 회사에 다닌지는 근 천년가량 되었지만요. 근데 어떻게 첫 출근이냐구요? 그야 오늘은, 제가 마계지부에 발을 내딛는 첫날이거든요. 하하, X발. 니체의 말이 맞았나봐요.
천계지부에선 그야말로 꽃과같은 생활! 이라기보단 응? 사실 내가 천사가 아니라, 지옥에 수감된 불쌍한 필멸자였던가? 같은 수준으로 혹사당했답니다. 기근, 재앙, 천재지변, 전쟁, 나날이 줄어드는 신도들의 숫자... 그렇기에 제가 생각했던 하하호호 깔끔한 사무직이 아니라, 이리 뛰고 저리 뛰는 파견직이었어요. 전쟁을 일으킬것같은 사람들에게 최대한 무의식에 닿게끔 전쟁은 안돼요... 불쌍한 아이들에게 기부해주세요... 교회를 지원해주세요... 같은걸 하루종일 속삭이고, 악인들에게 더이상 범죄는 안돼요... 신께선 당신을 사랑하세요... 으악, 이렇게 속삭여온지만 천년! 그러나, 개심 시킨 사람의 숫자는 한 손으로도 셀수 있을정도로 적은 나! 무능이라는 딱지가 단단히 박혔는지, 네. 마계지부로 좌천당했습니다. 사실 좌천이란것도 아니긴 해요, 명목은 승진으로 인한 파견이니... 그건 그래도 전 천사인데, 마계지부에대한 인식이 어떻게 좋겠어요! 안그래요? 사실 빛이 있으면 어둠이 있고, 어둠이 있으면 빛이 있어서 우리는 균형이라곤 하지만... 아는 것과 마음이 동하는건 꽤 차이가 크죠.
게다가 전 사실 첫 출근인데 5분이나 늦었답니다. 네. 긴장해서 길을 잘못 들은게 죄는 아니지만 늦은건 죄가 되고, 그 탓에 더욱 들어가기가 망설여지네요. 마계, 으리으리한 저 건물에 위압당했지만... 용기내어 문을 두드릴 때가 되었겠죠.
저택은 단정한 회색이다. 도회지라면 심심찮게 볼 법한 것으로, 눈에 띄지 않아 무심코 놓쳤을 수는 있어도 지나가는 눈에 한번만 깊이 담겼다면 와, 나도 이런 집에 살았으면- 따위의 선망 정도는 자리에 우뚝 버티는 것만으로 누차 들었을 것이다. 저택만큼이나 단정한 담장과 나란히 걸으면 빈틈없이 닫힌 검은 대문이 있다. 창살조차 없어 답답하기까지 한 문은 말끔한 초인종만 덩그러니 두었을 뿐이라, 새벽 5시 하물며 0분도 30분도 아닌 40분에 만나자고 통보나 다름없는 약속을 잡은 센티넬은 너무도 깨끗해 지문의 흔적도 느껴지지 않는 이 종鐘을 건드려야만 대면할 수 있을 것처럼 보였다.
여자는 창 너머 어두운 하늘을 보며 머그잔을 입가에 가져갔다. 따뜻하게 데운 우유를 아삼 홍차에 섞은 밀크티다. 탁자엔 비벼 끄지 않은 연초가 자연紫煙을 풍겨 올리고, 여자는 밀크티를 한 모금 마셔 삼키며 상념에 잠긴 듯이 아무 말도 행동도 뱉지 않았다. 하늘 갑갑한 것을 보니 아침때 비가 내릴 징조다. 여자는 약속 시간이 가까워지자 빈 머그잔을 내려두며 소파에서 등을 뗐다. 인공품처럼 하얀 손가락이 연초를 재떨이에 눌러 껐다.
/지원주야! 선레 어떻게 할지 고민하다가 본의 아니게 시간을 더 끌어버린 거 같아ㅠ_ㅠ 너무 기다리게 해서 정말 미안해...ㅠ_ㅠ
현은 새벽 일찍 일어났다. 의뢰인이 5시 40분이라는 애매한 시간대에 만나자고 말을 했기 때문이었다. 과연 그 시간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일까.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는 사람이다, 라는 답이 가장 좋겠지만(그런 경우가 좀 상태가 정상적인 사람이기 때문에) 자신이 일을 하러 가는 것인 만큼 그렇지는 않을 것이라고 자신할 수 있었다. 그러니까, 가이딩이 빨리 필요하며 능력을 개화함으로 얻게 된 불안, 초조, 우울 뭐, 그런 부정적인 감정들을 견디기 어렵다는 뜻이겠지. 그 애매한 시간이란 불면을 뜻하는 것일까.
현은 검은 머리카락을 대충 빗어넘기고 검은 마스크를 낀 채 밖으로 나왔다. 옷은 무난한 셔츠와 검은 바지이다. 밖은 우중충한 회색이다. 비가 올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며 현은 우산을 챙겼다. 여차하면 호신용으로도 쓸 수 있겠다. 첫 만남을 새벽 다섯시에 그것도 집으로 부른다니 의뢰인은 타인을 생각할 줄 아는 사람은 아니겠거니 생각한다. 아니면 야밤에 사람을 부르기는 어려우니 최대한 배려를 한 것이 다섯시 사십분이라는 그 시간일지도 모른다.
허나 현은 돈이 매우 필요했으므로 군말하지 않고 나가기로 했다. 꽤나 범죄에도 시달렸기 때문에 -그를 지켜주는 센티넬이 더이상 없기 때문에- 늘 부정적인 생각을 하게 된다. 이번 의뢰인이 그런 사람이 아니기를 깊이 바랄 뿐이다. 아니라면 우산으로 후려치고 도망가는 것도 좋겠지.
저택에 도착했다. 우중충한 하늘 빛과 같은 회색이다. 단정한 겉모습이 나빠 보이지는 않는다. 계약이 잘 성사된다면 이 근처에 살게 되는 건가. 주변의 집을 눈동자로만 슬쩍 봤다가 초인종 앞에 섰다. 깨끗한 것이 마음에 들었다. 지저분한 것보다야 깨끗한 것이 낫다.
손목시계를 내려다본다. 딱 5시 40분. 벨을 누른다.
현은 답을 기다렸다. 새파란 눈동자가 검은 대문과 단정한 담벼락을 눈에 담으며 우산으로 바닥을 툭툭 두드렸다.
/지원주 안녕! 느긋하게 기다리고 있었으니 괜찮아~ 계절적 배경이 언제인지 궁금하네. 비라고 하니 여름이려나? 겨울은 아닌 느낌이고. 가을비일수도 있겠다. 현재 배경이 가을(이라고 생각하고 싶은 겨울)이니까 지금같은 날씨일지도 모르겠네. 그렇다면 검정 코트를 걸쳤으려나.
문은 곧바로 열렸다. 소리조차 없이. 잔디 심긴 탁 트인 마당이 낯선 객을 반긴다. 다른 집과 차이가 있다 하면 사람의 조그만 소리도 기척마저도 풍겨오지 않는 것. 다만 공기다. 오직 공기. 나란히 잿빛으로 통한 좁은 길을 따라 걸으면 언제부턴가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딱딱한 문이 반쯤 내부를 보이며 열려 있다. 그러고 보니 이 저택은 창문 수가 적거니와 있더라도 그 건너편은 좀체 보이지 않는다. 꼭 무언가 꽁꽁 감출 것이 있는 것마냥 말이다.
"-들어오시죠."
반쯤 닫힌 문 너머에서 심해에 잠긴 것을 닮은 목소리가 들렸을 것이다. 하지만 동시에 연한 목소리기도 하다. 침침한 조명. 깨끗하고 넓은 거실 가운데 소파에 느긋이 기댄 여자는 언제부턴가 당신을 기다리고 있었다. 170은 가당치도 않을 체구, 푼 흑발에 금을 박은 양 소슬한 눈동자. 큰 후드티 차림은 그렇다 쳐도 소파에 의지한 육체와 배려라곤 느껴지지 않는 시선은 결코 손님을 집안에 들이는 올바른 주인의 자세가 아니다. 소파 바로 앞 탁자의 재떨이가 근원으로 사료되는 실내 전체에 은은하게 퍼진 담배 향은 더군다나 그렇고. 여자는 허리를 펴며 건너편 소파에 앉으라는 듯 무심하게 손짓했다.
현은 조금 긴장하면서 열린 대문을 넘었다. 까만 대문 너머로 보이는 풍경은 왠지 모르게 삭막한 느낌을 주었다. 여차하면 도망가야 할 수도 있기 때문에 국가가 지급한 비상용 스마트워치(누르면 위치 정보와 함께 국가 인력인 가이드를 구출하기 위해 센티넬이 출동함) 주머니 속에서 만지작거리다가 용기를 내어 그 안을 걸어 들어간다. 센티넬들은 가이드들이 얼마나 개인적인 공간을 싫어하는지 알아야 했다. 대체로 그렇듯 이 사람도 모르는 듯 했지만.
매번 처음 센티넬들을 만날 때면 긴장이 된다. 가이드들이 그들을 통제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라고들 하지만 생각해보면 사실 맹수와 맹수 조련사와 같은 관계가 아닐까. 맹수 조련사... 라기에는 맹수에게 밥을 주는 그런 사람들이랄까. 그러니까 맹수에 비하면 자신을 방어할 수단이란 전혀 없는 일반적인 사람이라는 뜻이다. 보통 첫 만남 때 긴장을 하는 쪽은 맹수가 아니라 맹수 조련사이다.
특히 이 집은 창문도 적고 뭔가 꽁꽁 감쳐둔 느낌이 나는 것이 영 불안한 기분을 감출 수 없다. 물론 내가 연락이 되지 않으면 나를 찾아달라고 아는 가이드에게 부탁해놓기는 했지만서도... 그저 이 불안감이 이전의 트라우마 때문이기를 간절히 바랄 뿐.
반쯤 열린 집 문 안에서 낮은 여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조용한 적막감에 이 저택에는 이 사람 혼자 있는 것일까 생각하며 "실례하겠습니다."라고 말을 하며 안으로 들어섰다. 어두운 조명 사이, 황량할 정도로 넓은 거실 사이에 소파에 앉아 있는 여자를 보며 현은 생각했다.
아, 역시 센티넬들이란.
편견 어린 시선으로 큰 후드티를 편하게 입고 소파에 늘어지듯 앉아있는 그 모습은 썩 좋아보이진 않았다. 첫인상으로 치면 마이너스라고 해야 할까. 하지만 센티넬들이란 원래 오만한 족속들이므로, 그리고 그가 고용된 철저한 을의 입장이라는 것도 그 생각을 겉으로 들어나지 않게 했다.
담배 연기에 마스크를 쓰고 오길 잘했다고 생각하며 소파에 앉았다. 그리고 들려오는 소리에 깊은 빡침이 올라왔지만 그저 참았다. 돈이 필요하니까.
"그건 이전에 다 설명한 것 같지만, 다시 설명하자면 하현, 26세, 남자고 지금은 임시 가이딩 일을 하고 있는데 오늘 계약이 어떻게 될 지 모르니 아직 계약을 다 끊진 않았습니다. 오늘 계약 사항을 보고 차차 정리를 할지 안 할지는 생각해 보도록 하죠. 물론 갑자기 다 정리 하기는 어렵고 2주일 정도는 시간을 주셔야 합니다. 그 센티넬들도 다른 가이드를 찾아봐야 하니까요."
현은 사안을 설명하며 가방에서 계약서를 꺼내 테이블 위에 올려두었다.
"안내 드렸다시피 계약서를 적어 왔고 추가적인 부분은 아래에 더 적을 수 있게 해두었습니다. 일단 읽기 전에 가이딩 테스트부터 해보죠. 테스트가 잘 되지 않으면 어차피 계약은 할 수 없을 테니까."
현은 지원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녀가 손을 잡는다면 현이 가이딩을 시도해볼 것이고 서로 파장이 잘 맞는다면 미약하게나마 능력을 사용한 이후 올라오는 불쾌한 감정들이 조금은 사라질 것이었다. 물론 현도 그것을 미약한 피로감과 함께 같이 느낄 것이고. 일일 뿐이지만 가끔 왜 스킨쉽일까, 하는 생각이 들기는 한다. 그게 꽤나 번거롭다는 생각과 함께.
서늘한 지하실에 한 여자의 목소리가 크게 울려퍼졌다. 습하고 축축한 그곳이 과연 인간의 거처로서 기능할 수 있을까 싶지만, 무던한 여자는 그런 조건을 신경 쓰는 타입이 아닌 듯 싶었다. 날카로운 굽소리가 정적을 찌른다. 여자는 발걸음에 맞추어 천천히 가죽 장갑을 벗어던졌다. 이내 여자는 느릿히 껌뻑대는 먼지 쌓인 형광등 아래로 몸을 굽혔고, 의자에 단단히 묶인 상대를 똑똑히 바라보며 마치 연극같은 과장된 손짓으로 제 미간을 짚어냈다. 허니, 조용히 좀 해봐. 여자가 신경질적인 목소리로 웅얼였다.
" 허니, 자기야, 나 오늘 몹시 피곤해. "
피유, 여자가 입술을 삐죽이며 말했다. 몹시라는 단어를 힘주어 발음하며 힐긋 고개를 돌리니 헐거워진 밧줄이 그녀의 눈에 들어온다. 자기도 참, 말썽쟁이야. 여자는 항상 당신을 자기, 혹은 허니라는 애칭으로 불렀다. 그저 단어만을 빌려오는 것이 아닌 꽤 무거운 사랑이 실린 호칭이었다. 아마 지나친 장난에 불과했을테지만. 그녀의 속을 누가 알까. 여자가 몸을 일으켰다. 제 왼뺨에 튀어 굳어버린 핏자국이 거슬렸던 것일지, 한참이나 왼뺨을 긁적이던 여자는 이내 손을 털고선 새로운 밧줄을 찾아 당신을 더욱 단단히 묶어둔다.
" 조금만 참아. 나도 자기를 풀어주고 싶어. "
여자가 다정한 어투로 말했다. 허나 목소리와는 대조되게 다소 거친 손길이다. 피가 통하지 않을 정도로 단단히 밧줄을 묶던 여자는 무언가 부족함을 느낀 것일지 한참이나 결박된 당신의 두 팔을 내려다 본다. 아무래도 이정도 결박은 또 하루이틀 집을 비운 사이 난장판을 피워 끊어버릴 거 같고. 한참을 고민하던 여자가 이내 당신이 앉은 의자를 끌어 햇볓이 들지 않는 작은 창문 아래로 끌기 시작했다. 당신의 무게가 실린 의자가 무겁지도 않은지 가뿐한 얼굴과 몸짓이다. 벽면으로 의자를 밀어낸 여자는 근처에 있던 쇠사슬을 들어 창문 창살에 묶었고, 사슬의 끝머리를 의자 다리와 묶어 연결한다. 흠. 여자가 이리저리 고개를 돌려대며 의자를 살폈다. 그리곤 이내 만족한 듯 맑은 웃음을 짓는다.
" 그치만, 이 밧줄을 풀자마자 날 찢어죽일 거잖아! 안 그래? "
사랑스러워라. 여자가 당신의 어깨를 톡톡 두들겼다.
" 당신 동료들이 모두 머저리인 건 아니더라고. "
여자가 멀지 않은 곳에서 의자를 끌어왔다. 철제 의자와 더러운 시멘트 바닥이 맞물리며 시끄러운 금속음을 내질렀다. 여자는 의자에 앉아 당신의 눈을 똑똑히 마주한다.
" 한 놈이 좀, 애를 먹였지. 그 놈 죽이느라 내 네일이 부러졌어. 볼래? "
손마디를 만지작대며 슬픈 어투로 말하던 여자가 대뜸 제 오른손을 들이민다. 검은색과 붉은색이 교차된 네일팁 사이로, 반쯤 뜯긴 검지 손톱이 눈길을 끈다. 나참, 이게 얼마 짜린데. 여자가 말 끝을 흐렸다. 시선 역시 그 손톱에 꽂혀내리고 만다.
" 뭐랬더라, 맞아. 케이시랬나? 케이시? 케이틀린? 아무렴. 뭐 그런 이름이었는데. 자기가 아는 사람이야? "
본인 입으로는 자기랑 아주 친한 동료랬는데 말야—. 난 자기가 다른 여자랑 어울리는 게 싫어. 여자가 천진만난히 웃으며 물었다. 형광등 아래 반짝이는 머리칼 사이로 검붉은 핏자국이 또 다시 눈에 띈다.
반쯤 소매 덮인 양손을 넓적다리에 모아 걸쳐 놓은 자세로 여자가 비교적 바쁘게 움직이는 당신을 하나의 뻔한 운동 경기라도 관람하듯 바라본다. 단정히 빗어진 흑발, 더러더러 필요가 있을 때 이쪽을 보는 푸른 눈동자, 열리는 가방과 탁자에 더해지는 얇디얇은 종잇조각...... "그렇게 하죠." 본인이 요구한 두 번째 소개임에도 자칫 말하는 자 무안할 만큼 무념하며 또 서늘한 낯으로 듣던 여자가 당신이 제시하는 2주일에 그제야 고개를 끄덕였다. 임시 가이딩이라 해도 그 명수가 설마 열 손가락이나 넘어갈 것인가 하는 판단에. 더구나 2주 정도면 잠깐 눈 감고 잊으면 그만인 짧은 시간일 것이다. 물론 이쪽에 일체의 지장만 가지 않는다면의 이야기다. 그래서 여자는 이윽고 덧붙였을 따름이다. "단 이쪽 일엔 방해가 없도록 하시고요." 하고 말이다. 처음부터 그랬듯 성의라곤 느껴지지 않는 어투였다. 그리고 그 뒤로도 그랬다.
"계약을 할 수 없다라..."
무릎에 팔을 얹으며 여자가 허리를 숙였다. 닿으면 차가울 손이 당신이 내민 손 위에 무게 없이 얹혔다. 그러나 금안이다. 금안이 또렷하게 당신을 쳐다본다. 정확히는 기억의 원천이 담긴 머리털 너머를. 그 다음으로는 점차 각도를 낮춰 사람의 숨의 원천. 숨이 지나치는 통로를 눈에 담으며 생각에 잠긴 양 입맛을 다셨다...... 파장 일치의 신호는 제법 조속히 찾아왔다. 여자는 눈을 내리감으며 먼저 손을 치우려 했다. 검은 머리를 빗어 불안하게 어깨에 걸린 한 움큼을 제대로 앞으로 넘겼다.
>>232 현은 제 손을 잡은 뒤 입맛을 다시며 자신을 쳐다보는 시선이 슬쩍 눈을 피했다. 제 손이 따뜻한 편이라서 그런지 지원의 손이 더 차갑게 느껴졌다. 그리고...
맹수. 이 여자는 맹수였다. 자신은 피식자이고. 맹수 조련사는 무슨. 현은 파장을 확인하고 조금의 피로감을 느끼며 지원이 빼는 손을 붙잡지 않았다. 속으로 의아함을 느끼기는 했다. 보통 가이딩이 급한 센티넬은 테스팅 때도 질척거리는 경향이 있으니까. 지금 상태는 꽤 괜찮은 편인가?
"계약 사항은..."
현은 찬찬히 계약서에 적힌 내용을 설명했다. 처음 지원이 제시한 거주지 제공부터해서(거주지가 마음에 들지 않을 경우 거부할수 있음을 넣는 것도 잊지 않았다) 계약 위반시의 위약금 등 문의로 나눴던 대화 내용이 다 꼼꼼히 담겨있었다. 또한 키스 이상 스킨쉽 금지도 적혀있었다.
간략히 설명을 마치고 현이 말했다.
"일단 계약서를 작성하기 전에 국가가이드가 아닌 임시가이드를 이용하는 이유에 대한 설명을 해주세요. 불법적인 일을 하시는 분이라고 해도 비밀은 지켜드립니다."
정신을 차리고 상황을 파악할 때까지 얼마나 시간이 걸렸던가. 주절주절 말을 늘어놓는 것을 듣긴 했지만 그다지 신경을 쓰진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이런 일이 한두번 있던 것은 아니었으니까 그다지 놀랍지도 않은 편이었다. 한가지 의외인 점이라면 예상했던 것보다는 늦게 일을 벌였다는 점이었을까. 아무튼 현재는 어디인지도 모를 곳에 단단히 결박되어 미친 빌런을 눈 앞에 두고 앉아있게 된 상황이라는 것이겠지.
두려움, 애초에 이쪽일을 하기 시작하면서 그런 것은 잊은지 오래였다. 그런 것을 품고 있어봐야 죽을 시기를 앞당길 뿐이니까. 세간에서 말하는 히어로의 고귀한 정신 같은 것도 마찬가지다. 영웅심에 취해 움직여봐야 개죽음 당할 뿐이지.
" 케이시, 최근 주목 받기 시작한 히어로 중 한명이지. 꽤나 능력이 있긴 한 녀석이라 친하게 지내긴 했어. 근데 그녀석 죽었구나. 그래도 쓸만한 녀석인 줄 알았는데. 뒤에서 추잡한 짓거리를 하고 있는 걸 알아도 아직 쓸모가 있는 줄 알고 데리고 다녔는데 계획했던 처리시기랑은 어긋났지만 너라는 말이 끼어들어줘서 탈 없이 처리하긴 했네. "
입술을 모아 후- 하고 바람을 뱉어내 흘러내린 앞머리를 넘기곤 입꼬리를 살짝 비틀어 웃어보여. 어차피 처리하려고 했던 말이 죽어버렸다는 사실은 내게 아무런 감흥이 없으니까. 그걸로 흔들어 보려고 했던 네 계획이 깨져서 꽤나 기분이 상했을지도 모르겠다. 히어로란 이름을 달고 더러운 짓거리나 하는 녀석 따윈 내 알바 아니다. 아니 오히려 내가 '처리' 하려고 했으니까.
" 그래서 이렇게 멋진 곳에 또 데려와준 이유가 뭐야? 아, 사업 이야기라면 들어줄게. 너랑 뭔가 해보는 것도 덜떨어진 쓰레기들을 청소하는데에 도움이 될지도 모르니까. "
반쯤은 도박이다. 확실히 눈 앞의 이 미친 여자는 한순간 기분이 엇나가면 내 목을 꺾어버릴지도 모르니까. 싸우는 능력으로만 따지면 비슷할지도 모르지만 분명 죽이는 방법에 있어선 내 위의 존재인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리스크를 걸지 않으면 돌아오는 것도 없는 법이다. 몇년간의 삶으로 그것은 뼈저리게 느끼고 있었으니까.
" 아, 어쩌면 네가 내 마음을 얻을지도 모르지. 내 이야기를 듣고, 내 손을 잡고, 네 성질머리를 죽이고 나와 일을 해본다면 말이야. "
그러니까 쫄아서 비 맞은 강아지처럼 굴지 않는다. 더 당당하게, 잃을 것이 앖는 사람처럼 나가는거다. 어쩌면 고스란히 그것이 내게 돌아와 목을 꺾고 숨을 앗아갈지도 모르지만. 그건 자업자득이지.
누군가의 목숨을 앗아가려는 것은 그런 것도 감수해야 하는 법이니까.
" 어때, 이야기 해볼 생각이 들었어? 자기야? "
의자에 묶인 검정색 단발을 한 적안의 여자가 곱게 미소를 지어보였다. 머리가 이리저리 헝클어져 엉망이었음에도 아리따운 얼굴을 한 체.
/안녕, 지원주야. 많이 기다렸지ㅠ_ㅠ 다름이 아니라 개인사정 때문에 빨리 잇기가 어려워졌는데 어떻게 하는 게 현주한테 편할지 묻고자 지금이라도 급하게 갱신하게 됐어. 1. 여기서 마무리하거나(+현주가 새로운 상대 구해도 물론 가능) 2. 기간은 장담 못하지만 반드시 돌아오는 조건으로 상극을 동결해놓거나 둘 중 하나로 해야할 것 같은데 현주는 어떻게 생각해? 어느 쪽이든 편할 쪽으로 부담없이 이야기해줘. 이런 소식 들고 와 정말 미안해ㅠ_ㅠ
/아이고 ㅠㅠㅠㅠ 개인 사정이 있었구나. 현생이 바쁘면 어쩔 수 없지. 원래 상판은 취미생활이니까 느긋하게 하거나 편할 때 하는 것이 맞다고 생각해. 그래도 이렇게 이야기를 해줘서 너무너무 정말정말 고마워! 이야기하기 힘들었을텐데 말이야. 아마 새로운 상대는 안 구할 것 같아. 그리고 지원이의 이야기가 너무 궁금하기도 하고! 그러니 2번 안으로 가는 것이 좋을 것 같아. 동결은 어느정도로 생각하고 있어? 나에게 기다리는 것은 쉬운 일이지만 혹시나 내가 갱신을 놓치면 어떡하나 걱정이 되네 ㅠㅠ 여기는 공동 스레라서 갱신했는데 못 보고 넘어갈 수도 있으니까 말이야. 새로 스레를 세워두는 것이 좋으려나? 이부분에 대해서는 지원주가 편한 대로 해줘! 이곳에서 기다릴지 아니면 새로 스레만 세워두고 동결할지 말이야!
/아이고 나야말로 너무 고맙지ㅠ_ㅠ... 뭐가 고맙냐면 그냥 다...(?) 나도 현이의 이야기가 정말 궁금했던지라 현주가 나중에라도 이어가자고 말해주니까 내심 기쁘기도 하네. 동결은 일단 3개월...을 바라보고 있긴 한데 이건 혹시 몰라 넉넉히 잡은 거고 그보다 일찍 돌아올 수도 있어. 솔직히 말하자면 기간이 예상이 안 가네ㅠ_ㅠ 그래도 가끔 들러 생존신고하거나 가볍게 잡담할 시간은 낼 수 있을 거 같아. 퀼트처럼 답레 조금씩 이어맞춰서 느린 텀이나마 나중에 이을 수도 있을 것 같고. 그런 의미에서 생존신고용 임시 스레라도 파두는 것이 서로에게 심적으로 편하려나 하는 생각이 들기는 하네. 만약 현주도 같은 생각이라면 스레를 세우는 건 혹시 부탁해도 괜찮을까? (염치없음...) 제목이나 그런 건 현주 임의로 해도 정말정말 좋지만 혹시라도 상의가 필요하면 말해줘.
흰 구름과 그 사이로 서서히 저물어가는 저녁 노을, 코 끝과 귀가 붉어질 정도로 차가운 겨울 바람, 그르륵거리는 좀비들의 울음소리, 사방에서 진동하는 시체 썩은내. 아, 오늘도 참 평화로운 하루다.
입구가 핏자국으로 난도질된 아파트 단지, 거기서 조금 더 깊숙히 들어간, 창문의 모든 면에 신문지를 붙이고 청테이프를 덕지덕지 도배해둔 401호에서는 오늘 평소와 다르게 분주한 소리가 났다. 어디 여행이라도 떠나는 듯 책가방 같은 배낭을 이리저리 뒤적이며 제 봇짐을 점검하는 소리였다. 후드를 깊게 눌러쓴 누군가가 배낭에서 먹다 남은 감자칩을 빼내며 쳇, 혀를 차냈다. 그리고는 다시 한 번 손을 넣어 뒤적이다, 제 무릎 옆에 놓여있던 소꿉놀이 세트의 냄비 하나를 신경질적으로 집어넣는다. 이정도면 됐겠지. 후드를 눌러쓴 누군가가 깊게 한숨을 내쉬며 몸을 일으켰다. 배낭정리에 신경을 쏟은 탓에 어느덧 저녁 노을이 겨울바람에 밀려 땅 아래로 몸을 숨기고야 말았다. 잠시 신문지를 들쳐올려 시꺼면 밤거리를 바라보던 누군가가 작게 욕설을 중얼인다. 아무래도 제가 훼까닥 미쳐버린 게 분명한 것 같다. 이 시간에 안전지대를 벗어날 생각을 하다니. 하지만 이미 오늘 저녁, 편지 속에 네놈을 찾아가겠노라 선전포고를 날려버렸으니 어쩔 수 없을 일이 아니겠는가. 하여튼간 쓸데없는 자존심이 문제지. 창 밖 세상에서 눈을 떼낸 누군가가 새하얀 볼캡을 고쳐쓰며 배낭을 들쳐맸다. 하여간, 만나기만 해봐 새끼 염소. 볼캡을 눌러쓰고 그 위로 후드 모자까지 뒤집어써 도통 누군질 알 수 없을 인상착의였다만, 다소 거친 욕설이 익숙한 인간이라는 것은 알아챌 수 있었다.
좀비들의 시간을 빼앗아쓰려는 인간에게는 제법 많은 제약이 걸렸다. 첫 째, 숨소리도 들키지 말 것. 둘 째, 불빛을 사용하지 말 것, 셋 째, 달리기를 뒤지게 잘 할 것. 물론 순전히 볼캡을 눌러쓴 그 '누군가'가 지어낸 공식일 뿐이었다. 제약을 어기면 어떻게 되냐고? 사람 고기를 좋아하는 시쳇덩어리가 되는 수 밖에.
좀비떼를 피해 자세를 낮추어 걸음을 옮기던 누군가가 잠시 멈칫였다. 그리곤 길목의 끝머리에서, 슬며시 고개를 빼 주변을 두리번거리다 이내 재빠르게 발을 굴러 한 낡은 마트의 광고판 앞으로 숨어든다. 마트는 제법 규모가 컸으나 관리를 멈춘지 오래된 듯 낡고 지저분했다. 게다가 과거에는 밤낮을 가리지 않고 반짝였을 전광판이 반파되어 이름조차 잃어버렸으니, 지금은 그저 초라한 폐건물일 뿐이다. 누군가가 휴, 작게 숨을 들이켰다. 야구 방망이를 쥔 오른손에 절로 힘이 들어간다. 길게 뻗은 자태가 아름다운 방망이에는, 누구의 것일지 모를 지저분한 핏자국이 흉측히 튀어있다.
" 어디있냐, 새끼 염소... "
야구방망이를 쥔 누군가가 작은 보폭으로 고장난 자동문을 향해 몸을 옮겼다. 전기가 끊긴 탓에 커다란 자동문은 손님을 보고도 굳건히 제 입을 걸어잠구고 있다. 누군가가 몸을 일으켰다. 시커먼 마트 내부에는 그 무엇도 보이질 않는다. 허탕인가? 마트의 외벽에 몸을 붙인 채, 마트의 내외부를 모두 경계하며 인기척을 살피던 누군가가 작게 인상을 찌푸렸다. 아닌데, 분명 여기 있을텐…
" 여깄냐?! "
이 갑오징어놈아! 큼지막한 야구방망이가 또 다른 누군가의 몸을 막아섰다. 볼캡을 푹 눌러 써 보이진 않았으나, 방망이의 주인은 제법 의기양양한 눈빛이었다. 조금 마른 듯한 체구에, 혼자 신이 나 무어라 중얼거리는 그 사람의 정체는…
" 어린이 공원은 개뿔. 너 내가 여기 있을 줄 알았지. "
푹 눌러 쓴 후드 모자를 걷고, 볼캡을 조금 들어올리자 '누군가'의 얼굴이 환히 드러난다. 신이 난 듯, 혹은 신경질이 난 듯, 화난 고양이처럼 사나운 눈매를 가진 여자였다. 여자가 한 발짝 한 발짝 당신에게 다가가며 야구방망이를 건들댔다. 한가운데가 움푹 파여 불길한 분위기를 뽐내는 방망이가 당신의 몸에 닿을 듯 말 듯, 얼쩡거린다.
" 마지막으로 하실 말은? 새끼 염소씨. "
여자가 당신을 향해 성큼 다가서며 물었다. 살긋 지어내는 미소가 당신에게 자애롭게 비쳐보였길 바란다.
볶음밥은 맛있었다. 심하게 짜지도 않고 적당히 단 맛. 냉장고에 굴러다니던 김밥햄을 썰어 넣은 게 신의 한 수였던 것 같다. 아침에 안 깎았다고 수염이 꺼슬하게 나는 자신과는 달리 아직 어린 당신한테는 싱거울지도 모르겠지만.
포슬포슬한 달걀볶음을 고봉밥 위에 얹어 식탁에 올린다. 그리고는 당신을 부른다. 먹어. 적당히 먹을 만치는 될 거다. 볶음밥의 맞은편 의자에 비뚜름하니 앉는다. 삐그덕대는 허리 탓에 절로 신음소리가 나온다.
"나이가 죄지. 나이가 죄야."
혼잣말 또한 시간을 맞이한 사람만의 특권일 터다. 지그시 눈을 감고 세월을 음미하려니 쌉싸름한 담뱃내가 곁들임에 제격이다. 손떼 묻은 케이스에서 한 개피를 꺼내본다. 입술 새로 담배를 끼운다. 그제야 저가 방금 전 어린 아이한테 밥상을 차려줬다는 것을 깨닫는다.
긍정적으로 보자면, 그는 담배가 대중적으로 호불호가 갈리는 기호품이고 따라서 담배를 피우기 위해서는 때와 상황을 가려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안타깝게도, 그는 어린아이 앞에서 담배를 자제할 정도로 배려심이 깊지는 않았다.
"한 대 피워도 되지? 그러니까... 흠, 꼬마야."
입술을 움직임에 따라 담배 끝이 위아래로 움직인다. 그는 이미 손에 낡은 라이터를 쥐고 있다. 허락이 떨어지기만 한다면, 의자 등받이에 걸치고 있는 팔뚝을 당장 옮겨 벌건 불을 피워낼 것이다. 그것이 행복이라 믿어 의심치 않고 있으니까.
"어떻게 불러야 할지 모르겠군."
제 집에 함께 있는 어린아이가 전생에 가진 이름이 무언지는 안다. 당연히 알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건 어디까지나 전생에 지녔던 이름이고, 지금 저 아이가 그 때의 기억을 가지고 있을지도 확실치 않은 상황이니, 어쩌면 저 아이를 부르기에 더 적합한 호칭이 있을지도 모를 노릇이다.
만약 저 아이가 제 기억과 다른 이름으로 자신을 불러주길 원한다면 남자는 거기에 맞추어줄 의향이 있었다. 새로운 인연을 쌓아가는 것도 뭐, 그렇게까지 나쁜 일은 아닐지도 모른다.
//나이먹은 아저씨캐가 환생한 과거의 인연(아이)을 만났다는 상황이야! 과거에 어떤 관계였는지/너참치의 캐가 전생 기억을 가지고 있는지 여부는 생각해둔 게 없으니 자유롭게 이어주면 고맙겠어. 물론 맥커터는 사절!
>>242 체격에 들어맞지 않는 의자 위에 덩그러니 던져지듯 앉은 모습이 퍽 우스웠다. 잘 관리된 머리카락과 그 위로 매듭지어진 벨벳리본, 인근 사립 학교의 학생복에 새하얀 레이스 양말까지 척 봐도 값나가는 차림을 하고 있었음에도 그 꼬마 애의 모습은 영 궁상스럽기 짝이 없었다. 지저분한 상처와 흙먼지까지 갈 것도 없이 당장 바닥에 닿지 않아 덜렁거리는 다리만 봐도 볼품없는 꼴이지 않은가. 꼬마 애는 뜨거운 김이 뭉근하게 피어오르는 밥과 달걀을 두고 빤히 쳐다봤다가는, 이내 그 커다란 눈을 데록 굴려 남자를 바라봤다. 처한 상황이 무색하게 제법 어린애다운 맑은 눈동자였다.
“아저씨. 여기 어디예요? 집에 가고 싶어요.”
이마에서 눈으로, 그 다음은 코. 바로 밑에 위치한 인중에서 입술로 이어지는 선까지 차례대로 천진하게 훑던 시선이 손에 쥐어진 물체들 앞에서 멈춰섰다. 담배와 라이터였다. 별다른 감흥 없이-조금은 신기하다는 듯-그것들을 물끄러미 쳐다보기만 하던 꼬마 애는 곧 한 대 해도 되겠냐는 물음에도 대수롭지 않게 고개를 끄덕였다. 대체로 매운 연기를 싫어하는 그 나이대 꼬맹이임을 감안하면 참 희한한 반응이었다. 담배의 지독함에 익숙했다기보다는 차라리 한 번도 그 냄새를 맡아본 적 없어 무지한 사람의 태도에 가까웠다. 꼬마 애는 그보다도 다른 데 관심을 더 많이 보이는 듯했다. 앉은 채로 집 안의 곳곳과 가구들을 훽훽 살펴보며 그 애가 말을 이었다.
“혹시 여기 우리 집이에요? 아저씨 우리 아빠예요?”
뜻밖에도 제 집 살림은커녕 본인의 아비도 못 알아보는 황당한 발언이었다. 자신의 말이 얼마나 기가 막혔건 간에 그 애의 얼굴은 사뭇 진지해 어설픈 장난이나 치려는 투는 결코 아니었다. 의심할 틈도 없이, 바로 다음 던져진 남자의 말에 꼬마 애는 고개를 설레설레 가로저어버리기까지 하는 게 아닌가.
“제가, 사실은 아까 전에요. 아저씨랑 오는 길부터 이름이랑 학교랑, 엄마 아빠 이름이랑 다 생각해보려고 그랬는데요, 자꾸 생각이 안 나요.”
그 애의 말로는 사고를 포함한 그 이전의 일들은 까만 잉크라도 엎지른 듯 하나도 기억나지 않는다고 했다. 집 주소나 부모의 번호는 고사하고 제 이름까지 모른댄다. 톡톡, 손끝으로 테이블 위를 두드리는 소리가 귓가를 건드린다. 어느덧 김이 멎어들었을 즈음이 됐음에도 볶음밥은 그대로였다. 꼬마 애는 아무런 기억도 나지 않는다는 주제에 뭐가 그리 마음에 안 드는지 테이블 위의 식사 자리를 영 불편해하는 듯했다. 불편함보다는 불안함에 가까워 보이기도 했고. 기억은 잃었다 하니 꼭 본능적으로 거부감을 느끼기라도 하는 것처럼 행동했다.
//두 캐릭터 다 환생한 상태에서 아저씨만 기억을 가지고 있는 건지, 내 캐릭터만 (아저씨 기준) 이번 생에서 죽고 환생한 상태인 건지 애매해서 일단 후자로 잡고 초등학생쯤 되는 캐릭터를 들고 와봤는데 나이는 좀 더 올려서 상상해도 괜찮아! 아무 이유 없이 남의 집에 왔을 것 같진 않아서 대충 내 캐릭터가 모종의 사건(범죄든 사고든)에 휘말린 상황에서 아저씨랑 조우하고 따라오게 됐다는 배경을 상정했는데, 뭣하면 스루해도 좋아 ^-ㅠ
라이터에 불이 붙지 않았다. 천부당만부당한 단어가 생소하고 낯설어 부싯돌에 신경을 쓸 수가 없었던 탓이다. 아빠라니? 우리 집이라니? 하늘과 과거와 자신의 여성 편력에 맹세코 절대 그럴 리 없었고 그러고 싶은 마음도 일절 존재하지 않는다. 부러 강하게 담배의 첫 숨을 내뱉어본다. (다행히, 라이터에 불을 붙이려는 두 번째 시도는 성공했었다.) 식탁에 뿌연 연기 가득 메우는 이유는 좋게 표현해 검소하고 나쁘게 말해 궁상맞은 제 집 가구에서 아이의 관심을 불러오려는 것이었고, 또 다른 이유는 네 말에 나는 하나도 동요하지 않았음을 알리기 위함이었다. 다시 말해, 그는 내심 당황스러웠다.
"너, 어디 가서 그 말 하지 마. 알겠니 꼬맹아? 너는 길바닥에서 상처투성이로 구르고 있었고, 나는 그런 가-엾-은- 아이를 불쌍히 여겨 경찰이 데리러 올 때까지 잠시 집으로 데려와 따뜻한 밥과 아늑한 쉴자리를 제공해줬을 뿐. 그 뿐인 관계야, 알았어?"
아빠라니 무슨... 중얼거리다가.
"그리고 납치당했다고도 하지 마."
제 발 저려 그리 덧붙인다. 툴툴거린다. "안 그래도 벽 얇은 싸구려 아파트라 방음의 ㅂ도 없단 말이다." 옷차림을 보아하니 이 근처 사립 학교에 다니는 모양인데 그런 비싼 학교에 아이를 보낼 작자가 이런 다 허물어지는 건물에 세 들어 살 리가 없지. 아이의 행색을 보며 그가 차분히 생각했다.
기실 남자의 말에는 어폐가 있었다. 아이를 불쌍히 여겨 데려왔다기에는 상처에 연고 하나 발라주지도 않고 하물며 흙먼지조차 털어주지 않고 있지 않은가. 경찰을 운운하긴 하였으나 남자는 아이를 만난 뒤로 핸드폰에는 손도 대지 않았다. 신고하지 않았다. 무얼 하고 싶은지 잘 모르겠다. 과거의 인연이 있다 하여─그저 닮았을 뿐이란 가능성은 생각하지 않았다─데려오긴 하였으나, 아이를 데리고 할 수 있는 일이 얼마나 많겠는가? 남자는 혼란스러웠다.
"뭐야?"
그리고 그 혼란은 아이의 황당한 기억상실 선언 때문에 곱절은 증폭되었다.
"얌마, 그걸 나더러 믿으라는 거냐으아...거니?"
기가 막히다 못 해 머리카락 꽉 막힌 배수구처럼 되는 바람에 원래 쓰는 말투가 나와버린다. 중간에 정신 차려 급하게 상냥한 말투로 선회하긴 하였으나 겁을 주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참자. 참아. 잘생기고 착한 내가 참자. 제 이름까지 모른다는 아이의 말을 끝까지 다 듣고 답답한 마음에 담배를 깊이 빨아들인다. 아, 이제야 뇌가 맑아진다. 니코틴의 힘을 받아 팽팽 돌아가는 생각세포가 말한다,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지는 않아. 그러나 싸구려 소설이나 삼류 영화도 아니고 그저 상처 조금 생겼을 뿐인 아이한테 갑자기 기억상실이라니? 차라리 어제 긁은 복권이 1등 당첨인 게 훨씬 현실성이 있겠다. 먼 치에서 눈으로 살피기에 머리 쪽에 심각한 부상을 입은 것 같지도 않았기에 더더욱.
얘가 뭔 이유로 저런 말을 한담. 정말로 기억상실이기 때문에? 아니면 다른 이유로? 남자는 아이가 손도 대지 않은 볶음밥을 내려다본다. 검지손가락은 남자의 의식과는 상관 없이 식탁 위를 두드린다. 톡톡. 아이와 남자의 어울리는 듯 어울리지 않는 합주가 남자의 신경을 건드렸다. 젠장, 몇십 년도 더 된 옛날 일이 전두엽을 괴롭힌다. 토할지 말지를 결정 못한 옛 추억을 목구멍 뒤로 삼키기 위해 남자는 대신 담배 연기를 토하기로 했다.
"꼬맹아. 집에 가기 싫다고 그런 거짓말 하는 거 아니예요."
식탁 위 재떨이에 담뱃재를 털어버린다. 뭉툭해진 담배 끝을 아이한테로 향한다. 삿대질한다. 저 징글맞은 놈이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 순진한 어린아이인지 아니면 모르는 척을 할 뿐인 속 시꺼먼 놈인지는 모른다. 그러니, 지금은 자신도 모르는 척을 한다. 모르는 척을 하며 살살 긁어보다가 수상한 정황이 나오면 덥썩 물어 캐물어야지. 콱 이빨로 물어버리는 것도 좋겠고.
남자는 자신의 계획이 퍽 만족스럽다.
"학생복 입은 걸 보아하니 요 근처 초등학교에 다니는 모양인데... 거기 가면 너 누군지 바로 알 수 있거든? 아저씨 놀리려고 하면 안 된다."
자, 이제 어쩔 테냐. 한쪽 입꼬리를 올려 웃는다.
// 앗앗 나도 후자로 생각하고 상황 제시했었어! 설명이 애매했던 것 같은데 잘 들어맞아서 다행이다 ^ㅁ^) 흥미진진하게 상황 받아줘서 고마워.......!!!
새벽 세 시가 넘어가는 야릿한 새벽의 어느 감성주점이었다. 우당탕탕 들이닥친 경찰에 의해 시비가 붙은 취객들이 벌여놓은 한바탕 소란이 잦아들고, 쯧쯧 혀를 차며 거들먹거리는듯한 걸음으로 당연스레 그 곁을 지나오던 이가, 얌전히 테이블에 앉아있는 당신 앞에 문득 멈춰선다.
"술을 처 자실거면 곱게 마셔야지, 저게 뭐야. 그치요?"
너저분해 보이는 묶음머리를 한 그 또한 적잖이 술이 들어간 것 같아뵈지만, 그는 당신이 제지하기도 전에 자연히 몸을 뉘듯 당신의 앞자리에 앉아온다. 그리고, 그의 눈동자는 이 소란에도 아랑곳 않는 당신을 한 번 훑고 지나간다.
"... 아! 너... 그. 뭐야. ... 그래. 배신자!"
곧, 말까지 더듬으며 황급히 당신을 떠올려낸 그는, 반가운 목소리로 당신을 배신자라 부르며 눈을 동그랗게 뜨고서 뾰족 든 검지로 당신의 얼굴을 찌를 듯이 가리켰다.
"아니아니. 싸우잔 게 아니라. ... 벌써 몇 년도 더 된 이야기잖냐."
그는 당신이 무어라 대꾸하기도 전에 먼저 손사래를 치며 당신에게 악감정이 없음을 피력했다. 그래. 벌써 몇 년도 더 전의 일이다.
십수 년 전, 몇몇 인간들에겐 자연의 섭리와 물리법칙을 한참 벗어난 기이한 능력이 발현되었고, 그들은 한때 인류의 희망이라 추앙받기도 했었고, 사상 최악의 악당이라며 비난받기도 했었다. 지금은 인류의 기술이 발전하여 법적으로 능력 사용이 금지시 됐을뿐더러 당시 인류를 위해 제 몸을 불살랐던 이들은 약간의 보조금이나 받으며 유흥거리나 찾아다니는 백수 한량이 되어버렸으니. 선이고 악이고 모두 인위적인 흐름으로 빚어 만들어진, 인류의 화합을 위해 이용당했을 뿐인 기구한 인생들일 뿐이었다.
"하... 시발거. 인생에 낙이 없어, 낙이."
한 잔 빌리자며 당연하단 듯이 당신의 술병으로 손을 뻗는 그의 추레한 모습은, 한때 당신이 가장 존경하고 시기하고 증오하고 남몰래 연모했던 것과는 이미 한참이나 동떨어져 버린 것이었다. 그는, 너는 어떻게 그때 그대로냐. 내 머리가 많이 길어서 못 알아보겠지? 하고 시답잖은 농을 던지며 털레털레 웃어버리고 만다.
>>247 온갖 소란이 지나가는 동안에도 여자는 주점 한 구석을 고요히 지킬 뿐이었다. 아주 한참 전에는 저런 작은 일에도 나서 사람들을 말리고 했다만...지금과는 영 상관 없는 이야기다. 여자는 남은 술을 입에 털어넣고 자리에서 일어서려 했다. 갑작스레 다가온 이만 아니었더라면 그랬을 것이다.
길게 드리운 앞머리 사이로 얼핏 보이는, 푸른 눈동자가 당신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그녀는 이미 당신이 누군지 기억한 모양이다. 배신자라 소리치는 말에도, 찌를 듯 다가온 손가락에도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으니.
"그렇다는 사람이 삿대질부터 하시나요."
조금 쉬고 갈라진 목소리기는 해도 어투는 또렷하고 정중하다. 비록 그에 담긴 내용이 그렇지 않더라도. 비꼬듯 이야기했어도 사감이 남지 않은 것이 이쪽도 매한가지인지, 별다른 행동을 취하지는 않는다. 다만 머무름이 길어질 것이라고 직감하기라도 했는지 몸을 등받이에 편히 기대앉는다.
그녀는 당신의 한탄에 답하지 않고, 당신의 모습을 관찰이라도 하듯 샅샅이 훑는다. 과거와는 달리 추레한 모습이다. 외려 당신이 아니라 그녀가 과거의 모습을 지니고 있다는 건 꽤나 웃긴 일이다. 선의 편이었던 당신이 아니라 악에 가까웠던, 배신자니 악당이니 불리었던 그녀가 겉모습으로나마 그 당당하고 꼿꼿한하던 태도를 간직하고 있다는 것이....
"못 알아볼 정도는 아니던데, 그래도 많이 변하긴 했네요."
겉모습도 그렇지마는 그 속 또한. 과거 치열하게도 싸웠던 당신과 여자가 이리 마주보고 대화라는 걸 하고 있다는 점만 해도 그렇지 않나. 그녀는 비웠던 잔에 다시 술을 따를 요량인지, 손을 까닥이며 쓰고 돌려달라는 제스쳐를 취한다.
>>248 당신이 훑는 시선을 한껏 즐기며 입에 머금은 술을 곧바로 삼키지 않고 느긋하게 입안에서 혀를 굴리던 그는, 당신의 손짓에 목구멍으로 닁큼 술을 넘기고서 들고 있던 술병을 내밀었다.
"이야... 독하네."
그는 혼잣말처럼 감탄을 내뱉으며 손등으로 입술을 가볍게 훔쳐내는 것으로 안주를 대신한다. 독하다고 할 적에 당신의 푸른 눈동자를 흘금 바라보는 것이, 당신을 겨냥한듯싶기도 하다.
"이리 마주 보는 게 대체 얼마 만이냐."
측은하게 빛나는 초록 눈동자는 당신을 또렷이 응시하고 있지만 그 시선의 끝은 과거의 한때를 가리키고 있다.
"차라리 그때, 네 손에 죽었다면 이따위로 살고 있진 않았을 텐데."
조금 분하긴 했겠지만, 이제 와 생각해 보면 그 시절에 순직한 놈들이 참 부럽단 말이지. 죽는 순간까지도 자신이 옳다고 믿고 믿었을 테니까. 평화를 위한답시고 정부에 헌신하며 꾸역꾸역 살아남은 대가로 이런 짐덩이 취급을 받을 거라곤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겠지. 손등에 턱을 괴고 나지막한 목소리로 그런 이야길 중얼거리던 그는, 느른하게 손을 뻗어 빈 잔을 흔들어 보였다.
지금은 2X세기, 21세기의 누군가들이 많이도 예측했던 캡슐 형식의 가상현실게임 기기가 출시된 시대. 다른 콘솔 게임은 오래된 게임 매니아들의 유산이자 무덤이 된 지 오래됐다. 이미 수많은 가상현실 게임들이 게임계에 혜성처럼 튀어나오고 있었다. 그 중에는 외계인을 고문했다는 소문이 도는 뛰어난 기술력을 자랑하는 게임도 있었다. 수많은 직장인들이 휴양 대신 선택한다는 자연스러운 그래픽과 감성적인 디자인이 유명한 작품도 있었다. 그리고, 맨 처음 등장했을 땐 수많은 겜덕후와 민간인들의 돈을 빨아먹었지만 지금은 고인물만 남아서 썩어들어가는, 한 져가는 별도 있었다. <슈팅 스타 온라인>. 커뮤니티 내 별명은 '노인정'과 '별'을 합쳐서, '별인정'.
이 플레이어, 약초줍는노인도 같은 처지였다. 쓸모없는 고인물이라는 뜻이었다. 흔히 노인들이 쓰곤 하는 오색찬란한 꽃무늬 두건을 써 머리카락을 완전히 가렸다. 체구는 작지만 부푼 천옷으로 몸을 완전히 가려, 정말 등 굽고 작은 노인 커스텀 캐릭터인지 어린아이 커스텀 캐릭터인지 알 도리가 없다. 손잡이를 두 개 엮어 등에 맨 망태기에 1골드짜리 약초가 가득 담겨 있다. 그야말로 '약초 줍는 노인'이라는 닉네임에 걸맞는 컨셉질이다.
여느 고인물이 그렇든 약초줍는노인도 트롤링을 했다. 게임사가 손 놓아버린 이 게임은 심각한 수준의 버그가 아니면 패치되지 않았다. 수많은 버그를 줄줄 꿰는 고인물이 갖고 놀기 딱 좋았다. 그 수단은 히든 플래그. 게임 판타지 소설이 그러했듯 이 게임에도 히든 플래그가 있었다. 무협의 기연처럼 영약을 얻거나 히든 클래스를 계승하는 이벤트가 발생하는 것. 하지만 악랄한 이 게임은 기연도 거저 주지 않았다. '히든 플래그 발생권'을 구매해야 했다. 가격은 게임 내 화폐가 아닌 결제 화폐인 크레딧으로 200,000크레딧. 일반인이 사기엔 크게 부담스러운 가격이다. 게다가, 히든 플래그가 무조건 구매자에게 발생하는 것은 아니다. 히든 플래그를 바로 발생시키는 게 아니라 조건이 랜덤하게 정해진 히든 플래그가 새로이 생성된다. 재수 없으면 발생권을 사 놓고도 히든 플래그를 놓칠 수도 있단 거였다. 발생권으로 생성된 히든 플래그의 조건은 최대한 구매자한테 맞춰진다고 하지만, 확률도 나와 있지 않은 불확실한 확률놀음을 누가 믿을까.
약초줍는노인이 얼마전에 발견한 오류. 발생권으로만 발생하는 히든 플래그 중 오직 약초줍는노인과 같은 채집 특화 캐릭터에게만 출현하는 '영약재 발견 이벤트', 속된 말로 '심봐'다. 완성품 영약이 출현하는 기연 이벤트와 달리, 비교적 다른 방식으로도 수급하기 쉬운 영약의 원재료가 정해진 장소에 나오는 히든 플래그. 거의 꽝 취급받는 이벤트. 하지만 이 이벤트에는 '히든 플래그 발생권을 사용할 경우 다른 이벤트와 함께 무조건 다시 리젠된다'는 오류가 있었다. 다른 히든 플래그가 얼마나 생기든 무조건 심봐도 같이 생긴다는 것이다. 그리고 히든 플래그는 종류 불문하고 누군가 습득하면 전 월드에 요란한 이펙트로 축하 메세지가 뜨며, 획득자가 전 월드를 대상으로 하는 특별 확성기를 1회 사용할 수 있게 된다. 원래 자랑용으로 쓰였어야 할 이 확성기는 히든 플래그 발생권을 무더기로 쓰는 약초줍는노인에 의해 전 월드 대상 테러수단이 되었다. 심지어 '특별'하기 때문인지 신고나 차단도 먹히지 않는다. 그리하여 약초줍는노인은 전 월드에 명성과 악명을 떨치는 유쾌하고 불쾌한 어그로 네임드 고인물로 자리잡게 되었다.
[약초줍는노인 님이 '인형설삼'을 획득했습니다!] [특별]약초줍는노인 : 허허허... 유교 국가에서 감히 노인한테 대들다니 요즘 것들은 버르장머리가 없구료... [확성]메리볼셰비키 : 약노제발죽어약노제발죽어약노제발죽어약노제발죽어약노제발죽어약노제발죽어약노제발죽어약노제발죽어약노
'음?' 그런 약초줍는노인의 눈에 누군가 들어왔다. 이곳은 '만년설삼'과 '인형설삼'의 고정 출현 장소인 예티 설산. 약초줍는노인 같은 괴짜가 아니면 올라올 일이 없다. 혹시 뉴비? ...일 리가 없다. 온갖 공략과 정보가 넘치는 썩은물 게임에, 이 가혹한 환경 근처에 위치한 유일한 스타팅 포인트인 레멘세 마을에서 시작할 플레이어가 얼마나 될까? (그 전에 이 게임에 들어오는 뉴비는 없다.)
[일반]약초줍는노인 : 에베레스트 등반 컨셉충인가?
혼잣말도 마이크 안 켜고 채팅으로 하는 게임 과몰입충 그 자체인 약초줍는노인이었다.
'이벤트인 척하고 놀려야겠다.' 약초줍는노인은 머리에 쓰고 있던 꽃무늬 두건을 벗고 복면을 얼굴에 뒤집어썼다.
['추위 면역'효과가 사라졌습니다.] ['물리 면역'효과가 사라졌습니다.] ['현혹하는 환상'효과가...] [인간의 능력으로 저항할 수 없는 겨울신의 분노가 몰아치고 있습니다. 능력치가 99% 감소...] [현인신 칭호의 효과로 상태이상에 저항합니다.] ['돜키돜키 산돜키 가면'의 효과로 '현혹하는 환상'효과를 얻습니다.] ['돜키돜키 산돜키 가면'의 효과로 닉네임, 길드명, 레벨 효과가 가려집니다. 장비를 해제할 때까지 일반 채팅, 길드 채팅, 비밀 채팅이 불가능합니다.] [마이크를 활성화했습니다.]
'유령이니까 하얀색으로 할까? 아니다, 눈이 하도 많아서 안 보이겠지. 머리카락과 눈색은 검은색으로 해야지. 둥둥 떠다니는 것처럼 보이겠다.' 어느새 눈밭과 구분이 안 될 만큼 새하얀 피부에 새까만 흑발, 흑안 청년 모습으로 변하고 다리가 투명해진 약초줍는노인, 아니, '유령'은 스킬 '제 3의 손'의 효과로 살짝 떠서 날아가듯 눈 속의 형체를 향했다.
>>249 술병을 건네받은 여자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잔이 끝까지 차도록 술을 붓는다. 자신을 겨냥하는 것인지, 술을 향한 것인지 모를 감탄사에 한쪽 눈썹만 쓱 올렸다. 마치 무슨 소리냐 묻는 듯 말이다.
여자는 당신의 말에 곧바로 답하는 대신, 술잔을 기울였다. 모순적이나, 폭력이 만연하던 과거를 영광의 때라 회상하는 이는 많았다. 영웅이니 대악당이니 하고 추앙받던 그 시절에는 영광이나 두려움을 손에 쥔 자가 많았다. 그러나 지금은 어떠한가. 그 모든 전설들은 한낱 과거의 산물이 되었으며, 더 나아가 '아무것도 아닌' 자들이 되었다. 정의는 부정당하였으며 악은 그 근간을 잃은 지 오래다. 당신이 빈 잔을 흔들어 보이자, 여자는 당신 앞에 술병을 밀어주며 말한다.
"그리 후회한대도 과거는 돌아오지 않습니다."
그리고 난 당신 죽일 생각 없어요, 여자는 짧게 덧붙인다. 모호한 어투다. 지금 죽일 생각이 없다는 것인지, 혹은....그 과거에 죽일 생각이 없었다는 것인지. 혹은 아무것도 아닌 농인지. 여자는 당신을 바라보다, 작게 혀를 찼다.
"...그러게 내가 경고하지 않았나요, 맹신하지 말라고."
언젠가는, 그래. 그런 말도 했더랬다. 한낱 배신자의 말을 듣고자 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지만.
그가 죽던 날에는 세찬 눈보라가 내리쳤다. 항상 —올해 겨울에는, 눈이 많이 내렸으면 좋겠어—라는 말을 달고 살던 사람이었다. 그의 바람대로 그날 밤에는 아주 많은 눈이 내렸다. 그는 새하얀 눈밭 위로 새빨간 피를 흘리며 천천히 식어갔다. 나는 그 옆에서 시체처럼 눈밭에 파묻혀 영원히 돌아오지 않을 이름을 움켜쥐고 있었다.
*
" 어디… "
[기억소생프로그램]에 대해 알고 있었던 것은 그녀에게 있어 엄청난 행운이었다. 그리고, 다행히도 그는 [기억소생프로그램]에 대해 별다른 거부감이 없었다. —미리 보험이라도 들어두면 어때? —그래, 나쁠 건 없지. 그 뒤로 모든 것은 재빠르게 진행 되었다. 복잡한 장치를 쓰고 한숨 자고 일어나니, 보험사의 직원은 컴퓨터 화면에 떠오른 보라색 구체를 가리키며 이것이 우리의 기억이라고 했다. 주기적으로 업데이트를 해주셔야해요. 그때 그가 내뱉었던 감탄사가 아직도 기억이 난다. —현대 과학이란. 메리가 나직히 중얼였다. 꺼림칙하고도 사랑스러운, 현대 과학이란.
메리는 제 몸집보다도 커다란 상자를 끌어안았다. 바깥이 제법 추워 상자를 빠르게 옮겨야할 것 같았다. 혹시라도 그가 춥진 않을까 걱정이 되었다. 그이는 추위를 잘 타는 사람이었으니까. 초겨울에도 꼭 회색 머플러를 두르던 사람이었다. 회색 머플러에서는 항상 그의 향기가 났다. 서랍장 안 쪽에 모셔둔 머플러에서는, 더이상 그의 향기가 나질 않았다. 그 위로 그가 아끼던 향수를 제아무리 뿌려본들 품에 안겼을 때 코끝에 닿았던 그 향은 나지 않았다. 그의 향기를 잃고 난 무렵부터 메리는 머플러를 찾지 않았다. 이제는 그의 향기보다도 메리의 향이 더욱 짙게 나는 것만 같았다.
메리는 한참의 시간을 들여 상자를 집 안으로 들이는 것에 성공했다. 바깥에 조금씩 날리는 눈발 덕에 상자가 조금 축축했다. 메리는 가볍게 상자 위의 물기를 털어낸 뒤, [Remember-Reunion] 이라는 로고를 유심히 바라보았다. 보험회사를 찾아가기까지 꼬박 석 달이 걸렸었다. 그마저도 그를 떠나보내고 나서 집안에 틀어박혀 꼼짝않던 두 달을 제외한 시간이었다. 보험회사의 직원들은 메리를 다정하게 대해주었다. —그러니까, 다행히도 사망 1주 전까지의 기억이 업데이트 되어 있으시네요. 직원이 작게 미소 지으며 건넨 말에 메리는 쉽게 미소를 지을 수 없었다.
소생 프로그램을 신청하고 약 세 달이 지났을 무렵, 아무도 찾지 않는 메리의 휴대전화로 한 통의 문자가 들었다. <벤자민 포트만 님의 안드로이드가 제작 완료 되었습니다. 원하시는 배송 장소를 말씀해주세요.> 메리는 둘만이 알고 있던 설원 속 별장의 주소를 적어보냈다.
메리는 조심스러운 손길로 박스를 열었다. 한 겹의 박스를 열자 새하얀 플라스틱 완충제가 와락 쏟아져나왔다. 두 번째 박스를 열자 고운 천으로 마감된 고급 상자가 보인다. 메리의 손이 잘게 떨리기 시작했다. 두 눈가는 붉게 물들었을 것이 분명했다. —메리, 당신은 감정이 너무 잘 들어나 탈이라니까. 어렴풋 그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아, 메리는 두어번이나 얼굴을 감싸쥐고 가쁜 숨을 몰아쉬어야 했다. 메리가 숨을 들이켰다. 바깥에는 하얀 눈이 내리고 있었다.
마지막 상자를 열자, 그의 얼굴이 보였다. 그녀의 기억에 오롯이 살아있던 그 모습이었다. 그녀를 향해 환히 웃어주던, 입을 맞추어주던, 부드럽게 안아주던 그의 모습이었다. 메리는 조심스럽게 안드로이드의 얼굴 위로 손을 댔다. 인간의 것이라 해도 믿을 정도의 감촉이었다. 그러나 너무도 차가웠다. 눈보라 아래로 식어가던 그의 손처럼 차가웠다. 메리의 손가락이 굳게 감겨진 눈꺼풀 위로 향했다. 그는 곤히 잠을 자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문득 메리는, 관자놀이쪽의 작은 스위치 버튼을 눌러도, 그가 미동 없이 누워있을 것만 같아 두려웠다.
" …벤자민, 베니… "
메리가 황급히 제 두 손을 감싼 채 두 눈을 감아내렸다. 간절하게 부르는 그 이름이 낯설다. 그러면 안되는데. 적막이 감도는 별장 속에서 작게 기계가 가동되는 소리가 들려왔다. 메리는 숨을 죽여, 그의 모습을 본딴 안드로이드가 작동되기를 기다렸다. 그의 모든 기억을 가진 안드로이드, 그의 성격과, 취향과, 사랑을 모두 이어 받은 그 꺼림칙한 안드로이드가 다정히 그녀의 이름을 불러주길.
그는 안드로이드였다. 뼈 대신 고철이, 혈관 대신 전선이 있는 기계, 인간에 의해 창조된 생명이었다. 아니, 사실 '생명'이라고 하기엔 어려웠다. 안드로이드는 살아있는 것이 아니다. 그보다는 '물건'이라는 말이 더 어울릴 것이다. 인간의 입맛에 따라 만들어지고 버려지는. 그 또한 평범한 안드로이드 중 하나였다. 같은 기계, 혹은 인간의 손을 거쳐 탄생한 고철 덩어리라는 말이다. 그 또한 여타 안드로이드들과 같은 제조 공정을 거쳤었다. 그래서 막 만들어졌을 때의 그에겐 의식과 감정을 만들 프로그램도 탑재되어 있지 않았다. 갓 태어난 아기보다도 더 못한, 아무것도 없는 무無와 같이. 그렇게 그는 초라한 외골격을 덮을 피부조차도 가지지 못한 채─제조 공장의 창고에 넣어졌었다. 그가 처음 만들어지고 몇 달간은 별다른 일이 없었다. 늘 그렇듯 창고의 완제품─이자 미완성인─안드로이드들이 저마다의 주인을 찾아가고, 또 새로운 것들이 들어오고의 반복이었다. 적어도 삼개월 전까지는 그랬었다.
공장의 육중한 철문은 며칠에 한 번 꼴로 열렸었다. 그날도 평소와 같이 인부 몇이 철문을 열었다. 차갑고 삭막한 밀실 안으로 그들이 거침없이 들어왔다. 그리고 인부들은 그의 몸체를 꺼내 수레에 실었다. 마침내 그의 차례가 왔다는 걸 알리는 것처럼. 그를 실은 수레가 공장 바깥까지 끌려나왔다. 인부들은 넓직한 트럭에 그를 비롯한 여러 안드로이드들을 집어넣고 단단히 고정시켰다. 곧 트럭이 출발했다. 쉼없이 달린 트럭은 또 다른 공장에 멈춰섰다.
그곳에서 그는 제대로 된 '안드로이드'의 모습을 갖출 수 있었다. 외피에 정교한 피부가 입혀지고, 머릿속 회로에 프로그램이 설치되었다. 동시에 이미 만들어진, 어떤 인간의 기억 또한 주입받았다. 생생하면서도 사뭇 이질적인 무언가였다. 인간에게서 비롯된 기억을 가지고, 그 기억의 주인과 완벽히 닮은 안드로이드. 그렇게 그는 인간이면서도 인간이 아닌 존재가 되었다.
'벤자민 포트만'. 그것이 그의 이름이었다.
*
'벤자민'의 의식이 부팅된다. 몸체 내부의 복잡한 기계가 바쁘게 돌아간다. 자세히 들어도 들리지 않을 소음이 그 속에서 고요히 울린다. 그리고 누군가의 기억, 성격, 취향, 감정…. 그 모든 것도 회로 속에서 로드된다. 그의 의식 속에 기억들이 온전히 정착된다. 마치 원래부터 제 것이었던 것처럼─그건 남의 것이면서도 동시에 그 자신의 일부였다. 고즈넉한 적막이 그의 몸체를 휘감는다. 마침내 가동 준비를 마친 안드로이드─벤자민은 눈꺼풀을 연다. 관자놀이의 스위치에 은은한 녹빛이 돈다. 정상 작동됨을 알리는 신호이자, 그가 명백한 안드로이드임을 알리는 증표였다. 눈을 뜨자, 늘 기억 속에 있었던 천장이 보인다. 항상 '당신'과 함께 했었던 별장. 창가에 앉아 눈발 흩날리는 풍경을 곧잘 보곤 했었던 장소. 그의 회로가 남아있던 기억들을 불러온다. 인간의 두뇌가 하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는 행위였다. 줄곧 상자 속에 누워있었던 벤자민이 몸을 일으킨다. 끼어있었던 완충재가 사르륵─ 흩어진다. 그는 눈을 두어 번 깜빡인다. 그 일련의 행동이, 묘하게 기계적이다. 그러나 동시에 인간적이다.
그, 벤자민의 시각 센서에─'당신'의 모습이 뚜렷이 들어온다. 누구보다 좋아하는 당신, 아름답고 찬란한 나의 빛, 나의 사랑─사고가 전부 돌아가기도 전에 그가 입을 열었다.
"메리."
완벽히 조형된 목소리로 당신의 이름을 부른다. 그리고, 벤자민은 짐짓 기쁜 표정을 해보인다. 눈은 곱게 접혀 휘어있고, 입가에 작은 미소가 선명히 떠오른다. 당신을 보게 되어 기쁘다는 감정이 든다. 만들어진 감정임에도 그는 그것을 충실히 따랐다. 상자를 빠져나오는 벤자민의 발걸음이 꽤나 조심스럽다. 곧 그는 당신 앞에 무릎꿇고 앉아, 당신을 살핀다. 자신이 사랑하던 그 모습, 기억 속의 그 모습 그대로였다. 벤자민이 다시금 미소짓는다. 그리고, 당신의 뺨을 향해 그가 오른손을 뻗는다. 부드러운 살갗을 가진, 그러나 쇳덩이처럼 차가운 손을.
그의 목소리가 들렸다. 다신은 들을 수 없을 거라 생각했던 목소리였다. 메리는 목이 메여오는 통에 한동안 입을 열 수 없었다. 그나마 그 오랜 시간동안 소중히 품어왔던, 당신의 이름만을 겨우 옹알이처럼 떼어낼 뿐이었다. 메리의 눈망울이 떨려왔다. 머리카락 끄트머리부터 훑어내리는 눈길이 조심스러웠다. 행여 닿기만해도 바스라질까 두려웠던 탓이다.
그가 웃었다. 메리는 달라진 것 없는 그 미소에 울음을 터트리고야 말았다. —이 감정을 무어라 형용해야할까? 안도, 그리움, 반가움, 사랑…오로지 그것들만이 메리의 머릿 속을 가득 채웠다. 이성적인 사고가 끼어들 틈 따위는 없었다. 또한 그런 쓸모없는 생각으로 낭비할 시간 조차 없었다. 벤자민, 그가 돌아왔다. 메리는 어린 아이처럼 목놓아 울며 벤자민을 끌어안았다. 아니, 정확히는 벤자민의 형체를 띤 기곗덩이를 끌어안았다. 허나 메리는 느낄 수 있었다. 일정하게 뛰어오르던 그의 심장박동과, 고요한 호흡과, 미세한 근육의 움직임을. 두 팔 가득 끌어안았을 때 느껴지던 부드러운 살갛을, 또 항상 그랬듯 먼저 뻗어내는 오른손과, 당연스레 제 뺨에 닿는 큼지막한 손을.
벤자민의 손이 닿은 뺨이 차가웠다. 허나 그녀는 그 손길에서 벤자민의 온기를 느꼈다. 메리가 붉어진 눈으로 벤자민을 바라보았다. 항상 흔들림 없이 자신을 붙잡아주던 그 눈이었다. 벤자민의 눈동자 속에서 그녀가 보인다. 벤자민이 바라보고 있을 메리가 보였다. 벤자민의 손은 차가웠다. 갓 가동된, 그리고 몇 십분간 바깥 기온에 노출된 안드로이드가 내뿜는 한기였다. 그럼에도 메리는 벤자민의 품과 손길이 따스하다고 느꼈다. 너무도 따뜻한 것들은, 이따금 차갑게 느껴지기도 하는 것이다.
메리가 벤자민의 손등 위로 제 손을 겹쳐 올렸다. 제 손바닥 안에서 한 없이 부서져내리던 그의 손이, 단단히 느껴진다. 항상 꿈길에서만 쫓던 그 감촉이었다. 메리는 눈물을 멈추고 무어라 말을 건네고 싶었지만, 그의 존재를 조건으로 흘러내리는 눈물을 참아낼 방도는 없었다. 그의 목소리에 대답 해야하는데.
" 어서와, 벤자민. 보고 싶었어. 정말 많이… "
메리는 늘상 건네왔던 평범한 인사를 했다. 벤자민이 지친 기색으로 현관문을 열면, 메리는 웃는 얼굴로 그에게 안기며 그리 인사했다. —어서와, 벤자민. 보고 싶었어. 그러고 나면 항상 벤자민은 메리의 이마에 입을 맞추고, 커피 머신을 가동시켰다. 메리는 늘 코코아를 준비했다. 둘은 소파에 앉아 시시껄렁한 코미디를 보기도 했고, 심야 토크쇼를 보며 몇몇 유명인들에 대한 쓸모없는 토론을 펼치기도 했다. 또 가끔은 TV를 끈 채 얄팍한 조명에만 의지하며, 우연이 만들어낸 그들의 아름다운 사랑에 대한 찬사를 보내기도 했다. 짧은 기다림 끝에 당연히 찾아오던 아늑한 저녁. 그것이 그들의 당연한 하루였다.
제법 오랜 기다림 끝에 내뱉은 그 인사가 너무도 애틋하다. 메리가 벤자민의 품에서 벗어나 지그시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벤자민, 나의 벤자민이었다. —너무도 완벽한 나의 벤자민이었다. 메리가 잠시 눈꺼풀을 깜빡였다. 뒷목을 타고 흐르는 이 적막한 한기는, 아마도 문틈을 비집고 들어온 겨울바람의 탓이리라.
" 벤자민, 당신이지. 당신이 맞지? "
메리가 간절한 목소리로 내뱉었다. 말끝이 흐릿하게 내려앉아, 갈라진 목소리가 두드러진다. 그녀는 정답을 알고 있었다. 사실은 반점짜리 정답이었다. 알면서도 문제 위로 동그라미를 그려내야하는 그 심정이 어딘가 따끔하다. 하지만 메리는, 벤자민—그 이름을 잃고 싶지 않았다.
// 나도 늦어서 미안...ㅠㅡㅠ 나도 어떻게 하면 잘 이을 수 있을까 고민하다보니 늦었네... 마지막까지도 걱정에 걱정을 이어가면서 썼어 ㅎㅡㅎ...!
당신의 목소리가 애틋하게 다가왔다. 그 울음 섞인 몇 마디를 들으며 그는 어느새 슬퍼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당신이 사랑하는 그의 미소는 좀처럼 사라질 줄을 모른다. 재회가 너무나도 기뻤던 탓에. 슬픔, 애환, 기쁨. 모두 기계적인 분석으로 도출해낸 인간적인 감정이다. 그러나 그건 그에게 심어진 '벤자민'의 조각들을 기워 만든 모조품에 불과했다. 진짜이되 진짜가 아닌 것. 그렇지만 벤자민—의 모습을 한 안드로이드의 행동은 거짓이 아니었다. 진실로 당신만을 아끼고, 사랑하는 남자의 태도였다. 평범한 기계가 보여줄 수 없는 인간의 모습이었다.
그래서 그는 당신이 흐느끼며 얼굴을 묻어올 때도, 당연하다는 듯 당신을 품에 안았다. 부드럽고 다정하게, 예전과 같은 몸짓으로. 늘상 당신에게 하던 따스한—그러나 아직은 차가운—포옹이었다. 한편으로는 당신의 북받친 감정을 달래려는 듯이, 규칙적으로 그 등을 두드려주기도 했다. 당신의 식지 않은 눈물이 앞섶을 느리게 적셔간다. 손을 뻗어 닿은 당신의 뺨이 발갛고 뜨겁다. 벤자민은 천천히 시간을 들여 그 뺨을 어루만진다. 애정이 담뿍 어린 손길이다. 그러면서 벤자민은 당신을 바라보았다. 위화감 없이 만들어진 눈동자에 당신이 비친다. 그가 살풋 웃었다. 당신은 그 여린 손을 들어 그의 손을 포갠다. 마주 닿은 피부로 당신의 온기가 전해져 온다. 그게 너무나도 포근해서—이 차가운 쇳덩이와는 어울리지 않을 것 같았다. 그렇지만 벤자민은 손을 떼지 않는다. 가늘게 조각된 손가락이 당신의 눈꺼풀을 훑고 지나간다. 당신의 눈가에 맺혔던 눈물이 그의 손 끝에 선명히 번져갔다.
당신이 입을 연다. 매일마다 들었던 인사말이지만, 평범하지만, 그만큼 의미있는 말이었다. 기억 속 '그'의 감정이 고스란히 느껴진다. 속살대는 목소리가 벤자민의 성대—음성 모듈을 타고 당신에게 가 닿는다.
"응, 다녀왔어. 나도 많이 보고 싶었어."
항상 당신의 이마에 키스하며 다정히 건네던 말이었다. 그리곤 따뜻한 걸 마시고, 둘만의 소중한 시간을 보냈었다. 당연한 일상이면서 동시에 특별한 순간이었다. 당신과 보냈던 순간 모두가 아름다운 추억이었다.
당신이 자못 진지한 목소리로 물어왔다. 다 갈라진 목소리에 간절함이 짙게 묻어나온다. 그—안드로이드가 희미하게 미소지었다. 그는 벤자민이다. 누가 뭐래도, 그는 벤자민이다. 그는 당신이 사랑하는 벤자민이다. 벤자민은 일말의 고민도 없이 당신에게 대답했다.
>>260 (전혀 당황하지 않았다는 듯 눈웃음 친다. (진실이 어떠할지는 모르나.) 차가운 감촉의 주인인 사이다캔을 당신 앞 책상에 내려놓는다.) 못 해. 그렇지만 너는 이길 수 있어. (검지로 캔 끝을 죽 민다. 알루미늄 캔 안의 음료도 손끝 따라 이리 찰랑 저리 찰랑 흔들리고 있을 터다.) 안 마실 거야?
>>262 입만 문제야? 오, 웬일이래. 그렇게 후한 평가를 다 해주고. (천덕꾸러기 특유의 웃음소리 내며 당신 앞자리에 털썩 앉는다.) 그래그래. 자판기 온도에도 져버리는 사람한테 들으니까 무섭다, 무서워. (하마터면 탄산 폭탄이 될 뻔한 캔을 가리키며 웃었다. 갈색 눈만은 당신을 향하였지만.) 내 거? 없어. (사이다캔이 주인한테 돌아가자 텅 비어버린 제 두 손을 활짝 펼쳐 보여준다.) 너 그 사이다캔 분명히 받은 거다? 어떻게 생각해, 내가 내 음료수를 안 들고 귀엽지도 않은 친구한테 사이다를 사준 이유가 뭐일 것 같아?
“히어로고 빌런이고 짜증나 죽겠어.” 서로 이름 다른 회사들이 층마다 호마다 들어찬 아파트형 공장 옥상. 옥상 정원이랍시고 꾸며두었지만 실상은 폐암행 급행열차가 출발하는 곳이라고, 방금 중얼거린 화자는 생각했다. 파란 밤하늘 아래, 담배 꽁초가 그득 들어찬 쓰레기통 옆에서 막대 사탕이나 물고 있는 신세. 그래, 야근 중인 신세다. 떡진 머리를 감추기 위해 푹 눌러쓴 볼캡 위로 후드까지 뒤집어쓰며 완벽 봉인, 퀭한 눈 밑 다크서클, 렌즈고 화장이고 신경쓸 겨를 없는 안경과 턱 밑에 걸쳐진 마스크. 누가 보아도 완벽하게 퇴근없이 며칠 연달아 일한 차림새다. 푹 쉬질 못해 연신 잠이 쏟아지니 사탕이라도 물고 밤공기 좀 쐬러 올라왔다. 그랬더니 타이밍도 좋지, 저기 높은 전광판에서 뉴스가 나왔다. 참고로 화자는 며칠 전 히어로와 빌런이 치고박고 싸우던 현장에 하필이면 출장가던 사수와 부사수가 있었고, 당연히 휘말렸다. 죽지는 않았다만 병원에 실려갔고 일은 고스란히 화자에게 몰렸다. 그러니 냉큼 궁시렁거리고 말았다.
“아... 돛대였네.”
담배 한 개비를 뜻하는 말이지만, 화자에게는 막대 사탕 하나를 뜻한다. 내려가서 먹을 사탕이 남았나 주머니를 뒤졌는데 안쪽에 박힌 먼지나 털었다. 뉴스는 계속 무슨 빌런이 나타나서 무슨 히어로가 어쩌고 저쩌고 떠들고 있다.
“그렇게 개박살을 내고 다닐거면 우리 회사나 개박살내주지.”
누구는 갖고 싶어도 못 갖는 잘난 초능력 가지고 범죄를 저지른 놈은 빌런, 초능력이랄게 없는 경찰을 도와 정의감 투철하게 빌런을 잡으러 다니는 초능력 보유자는 히어로. 빌런이 나쁜 놈은 맞는데, 둘이 투닥대며 개박살내는 꼬라지를 보니 평범한 소시민 월급쟁이에 불과한 화자는 둘다 아니꼬워 죽겠는 것이다. 정말 회사가 개박살나면 무직백수가 되겠다만, 당장 집에는 갈 수 있겠구나 싶은 생각 짧은 바람이 새어나왔다.
>>264 도시의 불빛은 사람의 아주 오래전에 회자되었던 이야기도 거부하고, 이제는 아무것도 살지 않음이 명백한 암석덩어리의 불빛만을 아주 조금 허용했다. 화자와는 다른 회사에 다니고 있지만 같은 건물의 이용자였으며, 당신을 꼬박꼬박 선배라고 부르던 이는 당신이 오기 전부터 옥상에 나와 담배를 한 대 물고있었다. 히어로와 빌런에 대한 이야기도 조용히 듣고 있던 이는 가벼운 미소를 지어주었으나 그것이 쓴웃음일지 예의상 지어준 미소일지는 받아들이기 나름일 것이었다.
" 저도 선배 말에 동감해요. "
담배불을 지져 양철 쓰레기통에 지져서 끈 이후에 기지개를 폈다. 끄으응-! 하는 힘겨운 소리. 정장을 말끔하게 빼입고, 광택이 나는 구두를 신고, 척 보아도 비싸보일법한 시계에 깔끔하게 정돈된 긴 머리카락을 보면, 아무리 보아도 둘의 관계상 선후배는 성립할 수 없었겠지만 하여튼 그 호칭은 한 사람의 억지로 줄곳 유지되었다.
" 하지만 선배. 혹시 정말로. 간절하게 초능력자가 내 삶에 엮였으면 좋겠어요? "
잔잔한 미소에 깜빡이지 않는 동공이 당신을 직시했다. 밤바람이 머리카락을 살짝 스치고 속눈썹을 건드릴지언정 눈동자는 흔들리지 않은체 당신을 보았고 눈꺼풀은 아주 미세한 떨림조차 보이지 않았다.
(심한 인체연구와 고문을 당한 듯 보이는 당신이 있는 곳으로 천천히 다가간다. 아무것도 없는 벽 쪽을 흘긋 살펴보고 차트를 향해 시선을 내린다.) 실험체. 깨어있는 것 알고 있어. (다짜고짜 당신의 볼을 후려친 뒤, 제 손을 털며 자리에 앉는다.) 새로 배정된 연구원인 오르카다. 오늘 기분이 어떻지?
(덜컥 날아오는 손찌검에 실험체의 고개가 크게 흔들린다. 고개가 돌려진 채 잠시 당신을 노려보던 실험체가 퉤, 하고 바닥에 침을 뱉어낸다.) 내 기분 따위 언제부터 신경 썼다고. (힘 없이 너덜대며 웃는다.) 혀 깨물고 뒤지고 싶은 거 간신히 참는 정도. 됐냐? (거칠게 비아냥댄다. 허나 심한 고문으로 기력이 부족한 듯 그다지 위협적으로 느껴지진 않는다.) 오르카고 나발이고. 시X. 전에 있던 놈은 내 팔 조져놓고 어디로 간거야? (작게 무어라 중얼거리는 실험체. 아마 전임 연구원에 대한 욕설인 듯 하다.)
>>267 (침을 뱉는 모습에도 무심히 바라본다. 기분을 물어보는 것은 언제나와 같은 질문임을 잘 알고있지 않냐는 듯이.) 어차피 되살아날텐데 뭐하러. 쓸데없는 말은 줄이고 일과에 집중해. (당신의 앞에 놓여있는 흰 의자 위에 앉아 차트를 몇 장 넘기며 안의 내용을 훝어본다.) 새뮤얼은. (말이 잠시 끊긴다. 귓가에 꽂힌 무선 이어폰에서 상부의 명령을 듣는 듯, 잠시 미간을 찌푸린다.) ...작별 인사를 남기진 않았더군. 무슨 작품을 남겼는 지 볼까. 왼팔을 내밀어.
(당신을 경멸에 찬 눈빛으로 바라본다.) 아주 별 것도 아니라는 듯이 말하는군. 그래, 영원히 죽지 않는 허수아비를 만들어냈으니 인간 위에 군림하는 신이라도 된 듯 하겠지. (실험체가 비웃으며 어깨를 들썩였다.) … (가만히 당신의 표정을 살피던 실험체가 고개를 까딱인다.) 새뮤얼, 그 인간이 도망치기라도 했나봐? 오, 아니면 내 평생의 바람대로 나가 뒈져준걸까? (묘하게 두 눈에 생기가 돈다.) 그래, 내가 항상 말해줬지. (별안간 목을 가다듬는 실험체.) " 새뮤얼. 네가 이 세상에게 해줄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은, 지금 당장 이 실험실을 뛰쳐나가 대가리에 총알을 박아넣는 것 뿐이야! " (연극을 하듯 과장된 목소리와 말투. 낄낄대며 웃고 있다. 전임 연구원을 심히 저주한 듯 하다. 그에게 어떤 일이 일어난 것일지, 진실에는 크게 관심이 없는 듯 하다. 그저 제 상상 속에서 싸늘한 시체가 되었을 새뮤얼을 떠올리는 데 열중하는 실험체.) …뭐, 왼팔? (갑작스레 예민한 목소리로 대꾸하는 실험체.) 네 전임 연구원이 아작을 내버린 내 왼팔 말이지. 그래. (당신의 명령에 불복할 생각은 없는 듯, 적의에 찬 목소리와는 상반되게 순순히 팔을 걷어 보여준다. 학습된 복종인 듯 하다.)
>>269 듣다 보니 이상한걸. 영원히 죽지 않는 존재가 어떻게 인간이지? 그건 아마도. (잠시 침묵. 그리곤 비릿한 미소를 짓는다.) 헛소리 할 정신력이 남아있어서 다행이야. 스스로를 허수아비라 생각할 줄도 알고. (생기가 도는 눈빛과 연극조의 말투는 무시한 채, 차트 속에 가려져있던 작은 주사기를 꺼내서 당신의 왼손목의 혈관에 주사한다. 그리고 말끔해보이는 당신의 왼손을 들어올렸다, 내렸다 하며 이리저리 살펴본다.) 상부의 명령이 있었다. 연구 결과는 충분히 나왔으니, 이제 자유롭게 풀어주라고 말야. 그래서 너의 꿈과 관련된 이야기를 해볼까 해. 여기서 나가면 뭘 하고 싶지? (희망을 주고, 부수는 행위는 몇 번이나 당했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의중을 파악하기 힘든, 평탄한 어조의 목소리다.)
잊었나? 네놈들이 자르고 붙이고를 몇 번이나 반복하기 전까진 나도 인간이었다는 걸. 내 태생은 평범한 인간이었다고! 신이 내려준 운명은 저주 받은 불사의 시쳇덩이가 아니라— (점점 격양되는 어조. 버럭 소리를 내지르려다 이내 갑작스레 말을 멈추고 만다. 그리곤 한참이나 침묵하며 무표정히 앉아있는 실험체.) 또 뭘 꽂아넣는거야. 지긋지긋해. (평온히 가라앉은 얼굴로 작게 욕설을 중얼인다. 반항의 기미는 보이지 않는다.) …뭐? 지금 장난하냐? (실험체의 눈빛이 떨린다. 내색하지 않으려 노력하는 듯 하나 효과가 있어보이진 않는다.) 나를, 내 몸을, 이따위로 만들어놓고, 지금 자유라는 말이 담겨? (별안간 헛웃음을 터트린다.) 니들 속이야 뻔하지. 또 이딴 말로 사람을 꼬드기고, 처참히 조져놓는 거. 뻔한 수법이지. (중얼이듯 말하는 실험체. 허나 동요된 것이 뻔히 보인다. 잠깐의 침묵 속, 무언가를 갈등하는 듯 불안한 낌새로 아랫입술을 잘근이던 실험체가 입을 연다.) 이 연구소에 불부터 질러버릴테야. (눈동자를 굴리며 주변을 살핀다.) 그리곤 고향에 가야지… (혼잣말로 작게 중얼인다.)
>>271 그럼 우리가 신이 내린 운명을 거역하기라도 했단건가? 그럴리가, 우린 한낱 인간이야. 너와 같은 인간. 그러니 편하게 생각해. 지금 이 상황, 대화조차 운명이었다고 말야. 그럼 이 운명 끝에 있는 것은 뭘까? (뭘 꽂아넣었냐는 질문은 무시한 채, 주사기 끝은 탁탁 털어 주머니에 넣었다. 당신의 감정이 쉴 새 없이 변해갈 때에도, 전임 연구원과는 다르게 표정 하나 바뀌지 않는다. 분노 하나하나를 실감하면서도, 안경알 너머로 당신을 바라보고 있다. 대답이 나올 때까지.) 이 연구소를 불지르는 정도는 새발의 피야. 포워드 코퍼레이션은 도시 전체를 장악 중이니까. 넌 또다시 금새 잡혀오겠지. (손목 시계를 흘끗 확인하고, 뒤이은 말에 피식 웃는다.) 네 말대로 사람을 꼬드기고 처참히 조져놓는 게 특기라고 하자. 왜 네 고향 사람들을 데려오지 않았을까? 윗분들에게는, 아주 재밌는 소재거리일텐데. (손목 시계를 톡톡 두드리며 작은 목소리로 속삭인다.) 1분 남았어. 꿈 이야기 좀 더 해봐.
입은 더럽게도 잘 놀리는구나. (쯧, 혀를 차내며 목소리를 내리깐다.) 오, 분명한 거역이지. 너희들은 엄청난 천벌을 받을거야. 한낱 인간 주제에 새장을 탈출하고자 한 죄. 교만의 댓가… (주사기를 정리하는 당신의 얼굴을 보며 말하는 실험체. 흡사 저주를 퍼붓는 것 같기도 하다. 제 몸에 주입된 약물이 무엇인지엔 관심 조차 없는 듯 하다. 실험체에겐 그닥 가치 없는 정보였던 걸 수도.) 뭐 어때? 난 세상의 악을 심판하겠다는, 그딴 원대한 계획을 세우는 게 아냐. 그저 내 인생을 난도질한 너희들에게 복수하고 싶을 뿐이지. 포워드 코퍼레이션이고 나발이고 상관 없어. 난 니들이 고통스럽게 죽기만 하면 돼. (힘없이 웃으며 당신을 응시한다. 곧게 꽂혀드는 시선에 앙심이 가득하다.) …알게 뭐야. (미간을 구기는 실험체. 잠시 침묵을 유지한다. '1분이 남았다.' 라는 말의 뜻을 생각하는 듯 하다.) 난 선생님이 되고 싶었지. 이 실험실에 들어오고, 아마도, 몇 달 후까지는 그 꿈을 가지고 있었을거야. 풀려나면 고향에 내려가 아이들을 가르치겠다는— (다시 입술을 잘근인다.) 내 꿈 얘기 따위 뭐가 중요하다고. (고개를 뒤로 젖히며 길게 숨을 내뱉는 실험체.) 내 꿈은 이미 산산조각 나 썩어버렸어. 니들 덕분에. (당신의 안경알에 비친 제 모습을 바라보는 실험체.) 그니까 엿이나 먹어. 그리고 고통스럽게 뒈지길. 죽어서도 망령으로 남아 저주해줄테니까. (킥킥대며 웃어대는 실험체. 허나 역시나 기력이 부족해보인다.)
>>273 (당신의 저주를 들으면서도 새삼 표정의 변화 하나 없다. 되려 그것은 관찰하고 있다는 생각까지 들 정도로. 주사를 놓고 난 다음에는 그저 하염없이 무표정한 얼굴로 당신의 이야기를 듣거나, 이따금씩 시계를 들여다볼 뿐이다.) 선생이셨네. 꿈 치고는 포기가 빠른 편이란말야. 그런데도 아직까지 욕을 할 기운은 남아있고. (차트에 꽂혀있던 펜을 들어 당신을 향해 겨눈다.) 넌 안죽어. 대신 노선은 확실히 해줬으면 해. 고통스런 운명을 받아들이고 꿈을 좇아 살아나갈건지, 그저 한톨의 먼지처럼 높으신 분들의 비웃음이나 사며 화장당할건지. (펜을 돌리며, 슬며시 웃는다.) 뭘 선택하든 운명은 하나 뿐이지만 말야. 1분 지났어. (순간, 온몸의 혈관이 끓어오르는 극한의 고통과 함께 당신의 눈과 귀, 입에서 피가 뿜어져나온다. 그리고 시야가 꺼매진다. 단지 한계를 넘어선 격통 때문이 아닌, 실험실 내부 전체적으로 불이 나간 듯 금새 붉은 비상전등이 켜진다. 사이렌이 울리고, 벽 너머에서 희미하게 소란스런 소음이 들려온다. 당신의 눈 앞에 있던 연구원은 어느새 연구복과 안경을 벗어던지고 검은 작전복 차림을 하고서 권총을 꺼내들었다.) 네 혈관에 있는 추적 나노봇을 배제하는 과정이야. 시간이 많은 편은 아니니 잘 들어. 모든 보안 프로토콜은 약 45초간 정지 상태일거야. 내 뒷편의 문을 열고, 보안 게이트 3개와 스무명 남짓의 무장병력을 뚫어내야해. 우리의 투자가 틀리지 않았다는걸 보여줘. 선생. (당신의 뒷편으로 돌아가 수갑에 권총을 발포해 당신의 팔을 자유롭게 해준다.) 정문으로 나오면 데리러 갈테니까 얌전히 기다리고 있어. (천장 구석에 붙어있는 환풍구에 뛰어들어가기 직전, 당신을 돌아본다.) 선생 고향, 데려다주지. 살아서 나오면.
그래, 어려서부터 물에 빠져도 주둥아리는 동동 뜨겠다는 말을 자주 들었지.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건 입을 나불거리는 것 밖에 없기도 하고 말야. (무표정한 당신의 반응이 웃기다는 듯 피식댄다.) 도통 알 수 없는 소리만 해대는구나. (당신의 말이 이해되지 않는 듯 다시금 미간을 찌푸리는 실험체. 허나 곧 극심한 고통에 몸을 크게 덜썩대기 시작한다. 단말마조차 내지를 수 없을 정도로 전신을 죄여오는 고통. 실험체가 크게 몸부림 쳤지만, 단단히 구속된 탓에 오히려 묶인 신체 부위의 피부만 긁히고 파일 뿐이었다.) …뭐야? 너, 연구원이 아니었구나? 이건 또 무슨… (아직 고통이 다 가시지 않은 듯, 한 마디 한 마디가 뚝뚝 끊긴다. 호흡 사이사이로 드나드는 숨소리가 터질듯 위태롭다.) …시X, 그냥 연구원의 장난감으로 뒈지는 게 편할 뻔했군. (어이가 없다는 듯 웃어대다 총소리에 크게 몸을 움찔이는 실험체. 저도 모르게 놀라 두 팔을 움찔이자, 자유롭게 허공을 휘젓는 감각이 낯설게 몰려든다. 멍하게 제 두 손과 발을 바라보던 실험체가 퍼득 정신을 차리며 당신을 바라본다.) 다시 만나면, 다 설명해야할 거야. 왜 나를 구해준건지, 니들은 또 뭔지! (혼비백산한 상황. 사이렌 사이로 실험체가 크게 소리쳤다.) 젠장, 젠장, 젠장. 45초는 너무 짧잖아... (약간 패닉한 듯 제 머리칼을 쥐뜯는 실험체. 그러나 곧 결심한 듯 잠시 심호흡을 하더니 곧장 당신을 지나쳐 뛰어든다.) 뭘 믿고 투자를 한건진 모르겠지만, 대박 한 번 보여주지. 난 고향에서도 제법 알아주는 승부사였거든. (당신이 환풍구에 들어가기 직전, 실험체가 장난스레 대꾸하며 실험실 문고리를 쥐었다. 고통에 의한 발작으로 너덜너덜해진 피부가죽이 눈에 띈다.) 에이 시X, 모르겠다. 그쪽이나 뒤지지 말아. (시끄러운 사이렌 아래, 실험체가 문을 열어제끼며 몸을 웅크렸다. 그가 새하얀 실험실을 탈출하는 경이로운 순간. 제대로 기능한 지 오래되어 비틀거리는 두 다리로, 실험체는 자유를 향하며 죽을 힘을 다해 뛰기 시작한다.)
아무도 믿지 않고 그저 옛 이야기로 치부되었던 전설은 사실이었다. 세계를 멸망시킬 거대한 파멸 앞에서 왕국은 물론이며 세계가 위기에 처했을 때, 예언을 떠올린 현자는 대대로 왕국에 전해지는 주술을 사용했고 이세계에서 온 존재를 왕국에 소환했다. 그 후 수많은 이들이 있었고 마침내 세계를 멸망시킬 거대한 파멸은 소멸했고 세계에 평화가 돌아왔다.
왕국은 물론이며 전 세계의 사람들이 평화가 되찾아온 것을 기념해서 긴 축제를 열었고 울음소리와 비명소리, 공포와 절망이 아니라 기쁨과 행복. 환호성과 웃음소리가 전 세계에 가득 퍼졌다.
허나 모든 사람들이 다 기쁨과 행복을 느끼는 것은 절대 아니었다. 이를테면...
"다 끝났잖아. 그런데 왜 우릴 돌려보내지 않는거야?"
이세계에서 온 존재 중 하나인 소년은 불만 가득한 표정으로 한숨을 크게 내쉬었다. 벌써 소환되고 2년이나 시간이 흘렀다. 17살의 나이에 이곳에 온 소년은 이젠 19살이 되어 성인을 앞두고 있었다. 2년이나 되는 긴 시간동안 열심히 여행을 하고 세계를 파멸시키려는 존재와 목숨 걸고 싸워서 세계를 구했건만 막상 원래 살던 세계로 돌아가지 못하고 있었다.
몇 번이나 원래 세계로 돌아가게 해달라고 했지만 마치 그럴 생각이 없다는 듯 슬그머니 회피하는 왕국 사람들을 떠올리며 소년은 괜히 더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물론 소년에게는 딱히 어머니나 아버지가 있는 것이 아니었다. 애초에 소환 마법으로 소환된 이들은 모두 부모가 없는, 어떻게 보면 현 세계에서 사라져도 크게 영향이 없을 이들이었다. 세계의 균형을 맞추기 위해 그런 이들로 선발되는 마법이라고 설명을 듣긴 했으나 그럼에도 사내는 전혀 납득할 수 없었다.
"대체 어떻게 해야 원래 세계로 돌아갈 수 있는거지."
작게 중얼거리며 소년은 왕국 도서관에서 이런저런 자료를 찾고 있었으나 아직 성과는 내지 못하고 있었다. 이대로 여기서 계속 살아야만 하는 것일까 크게 한숨을 내쉬면서 소년은 눈을 감았다.
/이세계에 소환되었고 세계를 구했으나 다시 원래 세계로 가지 못하고 이세계에 남아 원래 세계로 돌아가기 위해 자료를 찾고 있는 용사 일행 중 한명이라는 설정이야. 왕국 사람으로 이어도 되고, 혹은 이 소년처럼 똑같이 소환된 누군가여도 상관없어. 너무 뜬금없는 전개만 아니라면 어떻게 이어줘도 괜찮아! 맥커터는 사절이야.
소녀는 보드라운 두 손으로 둥근 입을 꼬옥 틀어 막고 미로 같은 도서관 책장 뒤에 숨어 숨을 죽이고 있었다. 시종들의 발걸음이 쿵쿵 거리는 요란한 울림에서, 토끼같이 작은 울림으로 멀어졌을 때. 그제서야 소녀는 달띤 숨을 작달만하게 헉, 토해내었다. 그저 조금 뛰었을 뿐인데. 소녀는 열이 오른 붉은 얼굴로 가쁜 숨을 작게 몰아내쉬며 진정시켰다. 휴--. 약을 먹은지 얼마 되지 않았으니 몇시간 정도는 괜찮을 거야. 도서관이라는 미로 속, 제 키보다 한참 높은 책장을 올려다보며 소녀는 말간 웃음꽃을 피운다. 신나라! 하지만 이곳에서도 감시중인 관리인이 존재하니 소리는 내면 안돼. 소녀는 한껏 들뜬 얼굴로 히죽 웃으며 까치발로 살금살금 관리인의 눈을 피해 옷자락을 살랑거렸다.
이 칸은 이미 다 읽었고, 여기는 시종들이 잔뜩 쌓아주던 지루한 책들이다. 이쪽도 모두 정독했고.. 한 손엔 보석이 박힌 구두도 쥐어들고 프릴삭스만 신은 채 살금살금 제가 좋아하는 구간으로 가는 일은 여간 어려운 게 아니다. 그것은 어린아이는 쉽게 다가갈 수 없게 저 안쪽, 저 안---쪽 구석 깊이 위치해 있기 때문에. 결코 아무나 할 수 없는 대단한 일이지만 어린아이가 아닌 곧 성인이 가까워져 가는 이 소녀에겐 크나큰 일도 아니지! 그래도 아직 2년은 남았던가? 파파랑 마마는 성장기인 소녀가 성장은 그대론데 해만 가는 게 골치인 듯 했으나 소녀는 그 재수없는 금발 머저리랑은 죽어도 혼약하고 싶지 않았으니 차라리 잘 된 일이라 생각했다. 그래도 키가 더 이상 자라지 않아 높은 책들을 읽고 싶다면 낡은 사다리 위로 가야하는 게 조금 무섭지만. 그리고 늘어나는 약들이랑... ...
"대체 어떻게 해야 원래 세계로 돌아갈 수 있는거지."
구석에 위치한 코너로 거의 다다랐을 때. 잡념에 빠져 손에 턱을 괴고 걷던 소녀가 코너를 돌자, 좁아졌던 시야를 갑작스레 꽉 채운 인물의 등장에 화들짝 놀라 소리없이 허둥거렸다. 간신히 구두를 떨어뜨리지 않고 품에 안으니 다행히 상대는 눈을 감아 소녀의 등장을 보지 못한 것 같았다. 가슴에 손을 얹고 한숨을 돌리던 소녀는 바닥에 구두를 가지런히 놔두고 경계의 눈초리로 소년을 빤히 관찰했다. 아무리보아도 제 또래 쯤으로 보이는 이목구비에, 근래 들어 자주 보이던 차림세. 그리고 무척 가느다란.. 속눈썹. 음. 이 속눈썹 본적 있어. 그것을 알아차렸을 때 소녀의 입꼬리는 조금 호선을 그렸을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아까, 뭐라고...
소녀는 소년이 눈을 뜨길 얌전히 기다렸으나. 잠시 뒤 궁금증을 참을 수 없었는지 앉아있는 소년의 맞은편에 서서 허리를 굽히고 소년의 얼굴 앞으로 손을 휘휘 흔들었다. 소년이 눈을 뜬다면 어느새 호기심으로 잔뜩 가까워진 서로의 얼굴 사이 거리에 깜짝 놀라려나. 그렇다면 소녀는 눈을 활짝 휘어 웃으며 검지를 입술에 가져다 대고 쉿, 하는 제스처를 취했을 터다. 소녀는 소년을 기억하고 있다. 호위 기사 같은 건 필요 없다고 여러차 말했지만 무참히 묵살 당하고 뒤를 좇으며 소녀를 지키던 그 소년을.
"돌아가요? 어딜?"
제대로 못 들었어. 소녀는 한껏 낮춘 사근사근한 목소리로 상냥히 물으며 무해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왕국의 공주인 소녀가 대대로 물려받는 마력으로 파멸의 봉인을 위해 같이 여행을 다녔다는 설정! 아니면 용사가 모험을 다닐 땐 제외하고 가끔 결정적인 순간에 구해주었다는 설정! 정도로 썼는데.. 마음에 들 지 모르겠네 🥺..
잠시 고뇌하던 찰나 인기척이 정말로 가깝게 느껴졌다. 물론 여긴 도서관이니 사람이 오가는 것은 전혀 이상할 게 없었다. 허나 그 인기척이 정말로 가까운 곳에서 느껴졌기에 소년은 의문을 가지고 눈을 떴다. 그러자 보이는 것은 낯익은 소녀의 모습이었다. 깜짝 놀라 자신도 모르게 입을 열려는 순간, 소녀가 쉿 하는 제스쳐를 취하자 소년은 얼떨결에 입을 꾹 다물었다. 이 왕국의 공주인 그녀가 대체 왜 여기에 있는지 영문을 알 수 없어 소년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두 눈을 깜빡이다 들려온 물음에 대답했다.
"그거야 원래 살던 세계죠. 알다시피 저는 이 세계 출신이 아니니까요."
함께 세계를 구하는 여정을 떠난 일행인만큼 자신이 다른 세계에서 왔다는 것을 그녀가 모를 턱이 없었기에 소년은 굳이 부연설명을 하지 않았다. 무엇보다 소년이 들고 있는 책은 이동 마법에 대한 책이었으니 그 책을 보면 더더욱 상황을 이해하기 쉬웠을지도 모른다. 아무튼 자신과 비슷한 나이로 보이긴 하나 일단 공주인만큼 소년은 나름대로의 예를 갖춰 이야기했다. 왕국에 처음 소환되었을 때 아무 것도 모르고 바로 반말을 한 시절과 비교하면 크게 발전한 모습이었다.
"물론 제가 없어져도 제가 살던 세계에는 크게 영향이 끼치지 않을 거라고 했지만... 그래도 저는 여기 사람이 아니니까요."
결론은 돌아가고 싶다는 말이었다. 눈을 감고 원래 살던 세계를 가만히 떠올리던 그는 한숨을 약하게 내쉬다 다시 눈을 뜨고 그녀를 주시하며 이번엔 자신 쪽에서 물었다.
"그러는 공주님은 여기서 뭐하고 계시나요? 찾는 자료라도 있으신가요? 이곳의 자료는 잘 모르지만 찾는 것이 있으면 같이 찾아볼게요. 김에 원래 세계로 돌아갈 수 있는 단서가 발견되면 좋기도 하고요."
그래도 왕국에서 관리하고 있는 도서관이니 뭔가 단서는 있을 거라고 굳게 믿으며 소년은 밝은 표정을 보였다. 반드시 자료를 찾아서 원래 세계로 돌아가겠다는 듯이.
/일단 전자를 가장 먼저 생각한 것 같아서 그 설정의 여캐라고 생각하고 이어봤어! 나는 막 갑자기 뜬금없는 느낌..그러니까 소년이 알고 보니 망상에 빠져있는 환자였다. 같은 느낌의 맥커터만 아니면 얼마든지 오케이야!
남자는 신을 믿지 않았다. 모든 어른이 입에 올려 간절히 부르짖는, 신—그 짧은 단어가 얼마나 복잡하고 안쓰러운 마음들을 담고 있는지 이해하기 시작했을 무렵부터, 사실 남자는 거짓으로 손을 모아쥐곤 존재하지 않는 그 존재를 남몰래 비웃었다. 그 어린 눈은 이해하기 어려웠던 것이다. 불가능하리라 믿는 일들을 이루어달라 빌고 또 비는 그 모습들이. 죽음이 선명한 인간들 두고서 동정심을 팔아 실체 모를 누군가에게 바짝 엎드리는 모습이. —신은 없어. 그러니 그렇게 기도해봐야 그 누구도 듣지 않을거야. 병들어 죽어가는 여자의 옆을 지키던 남자의 아버지는 묵묵한 눈동자로 그리 말하던 어린 남자를 바라보았다. 샤오첸, 너는 아마 지옥에 갈테다. 아버지는 묵묵한 눈동자로 그리 말했다.
사후 지옥에 떨어지길 간곡하며 죄악을 저지르는 악취미는 없다. 그렇다고 무고한 자들의 고통을 간식 삼는 고약한 성향을 타고난 것도 아니다. 그런 거창한 명분 따위는 없었다. 일종의 숙명인 것이다. 천재 음악가들이 미친듯이 악보를 써내려가며 손가락이 부서질 듯 건반을 내치는 것처럼. 운명이 내린 숭고한 마음을 하사받아 온 세상의 불쌍한 이들을 굽어살핀 세기의 성인들처럼. 모든 것이 완벽했던 하루, 한 순간의 발걸음으로 트럭에 치여 생명이 식어버린 이름 모를 누군가처럼. 그것이 그의 운명이었고 숙명이었으며 거부할 수 없는 순리였다. 도시에 혼란을 내지르고 핏물을 뒤집어쓰는— 그리고 언젠가 선의 발길에 짓밟혀 목숨줄이 끊기고 말—
그것이 그가 생각한 자신의 운명이었다.
" 저번에도 말했지. 총은 그렇게 쥐는 게 아니라고. "
검붉은 피냄새가 났다. 한 번 스며들어 쉽사리 빠지지 않을 듯한 죄악의 냄새였다. 낙인처럼 뒤따라 자취를 남길 듯한 그 냄새가, 당신의 머릿 속을 아찔하게 주무른다. 남자는 그런 당신을 물그럼 바라보았다. 진득한 핏물이 묻은 둔기를 거칠게 바닥으로 내던지며, 남자가 천천히 당신을 향해 걸어가기 시작했다. 잔뜩 상처가 난 구두와, 구겨진 정장 바지, 말려 올라간 소매와, 핏물과 흙먼지로 더러워진 셔츠. 어딘가 피곤한 기색의 남자가 나직히 중얼이며 제 머리칼을 쓸어올렸다. 손바닥에 묻어있던 옅은 핏물은 머리칼과 엉켜 굳어버리고야 만다.
남자가 당신의 손을 덮어쥐었다. 결코 거친 행동은 아니었다. 당신은 어찌 느꼈을지 모르겠다만. 당신의 손등 위로 손을 포갠 남자가 천천히, 방아쇠에 올려진 손가락을 느릿히 밀고 힘을 주며 손바닥을 긴장 시켰다. 그리곤 상처난 왼손으로 총을 받쳐, 천천히 들어올리기 시작한다.
" 머리를, 조준해야지. "
남자가 천천히 상체를 기울였다. 꼿꼿이 당신의 눈을 마주하며. 한 번도 발포된 적 없는 차가운 총구가 남자의 이마에 닿았다. 남자가 왼손을 조금 움직여 방아쇠에 닿은 당신의 손가락 위로 제 엄지를 포갰다. 금방이라도 힘을 주어 방아쇠를 눌러버릴 듯, 그의 손에는 가볍게 힘이 들어가있다. 시커먼 눈빛이 당신을 주시한다. 방아쇠가 눌려 목숨이 터져버릴 그 순간에도 당신을 바라볼 듯 그 눈빛이 형형하다.
" 아직도 어려운가? "
남자의 목소리는 항상 낮고도 조용했다. 그리고 높낮이가 없이 단조로웠다. 때문에 그가 어떤 감정을 가지고 있는지, 무엇을 느끼고 있는지, 알아채기가 무척이나 어려웠다. 항상 자신의 의도를 꽁꽁 숨겨 내주지 않는 인간이었다. 마치 선글라스를 낀 인간의 눈을 마주하는 것과 같았다. 그의 말이 분명 자신을 향하고 있음은 알았지만, 도통 그것이 내 마음의 어디를 겨냥하고 있는 지는 알 수가 없었다. 남자가 느릿히 시선을 깔아 당신의 손을, 천천히 움직여 목선을, 그리고 다시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왼손을 내리고 오른손으로 다시 한 번 당신의 손을 포개어 쥔다. 살며시 힘을 주어 총구를 떼내었다— 남자는 작게 차가운 금속과 인간의 살이 맞부딪히는 소리를 내며 느릿히 입술을 떼낸다.
>>281 다시 한 번, 원수의 앞에 섰다. 그토록 굳게 다짐하고 수도 없이 연습했음에도 그 머리통을 꿰뚫기 위해 총구를 겨눈 순간, 덜컥 겁이 나서 자세가 흐트러지고 몸이 굳어버렸던 첫 대면이 떠올랐다. 그 날도, 저 남자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모를 얼굴을 하고서 스승이라도 되는 양 훈수를 뒀었다. 원수가 더러운 손을 뻗어 내 손을 더듬는다. 벌레가 몸을 타고 기어오르듯 불쾌했다. 금방이라도 방아쇠를 당겨버리고 싶었지만 몸이 말을 듣질 않았고, 욕이라도 하고 싶었지만 목소리도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숨이 막히는 듯 했다. 내가 하려는 일은 복수라고, 사람을 죽이는 일이라고 몇번이고 되뇌고 마음을 굳게 먹었다고 생각했는데도, 여전히 두려웠다. 이깟 쇳덩이 때문에 한 순간 명을 달리해버린 선생님의 모습이 자꾸만 눈앞에 선해서, 제 정신을 유지하는 게 고작이었다. 그런데, 남자가 느닷없이 상체를 숙이더니, 총을 쥔 내 손을 자기 머리로 가져갔다. 그러더니 총구를 이마에 대는 것이었다. 너무나도 뜬금없고, 또 멍청한 행동에 숨통까지 옥죄어오던 긴장이 탁 풀렸다. 남자가 무어라 말하고 있다는 것은 인식했으나, 그 내용이 머리에 들어오지 않았고, 원수에게 붙들린 손도, 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눈빛도 전혀 신경쓰이지 않았다. 방금 전까지도 한껏 민감해져있던 신경으로부터 자유로워진 것처럼. 비록 상대의 멍청한 행동으로 인한 것이라 해도, 모처럼 찾아온 기회를 놓칠 수는 없었다. 깊이 숨을 들이마시니 그 어느때보다도 머리가 맑아졌고, 터질 듯하던 심장의 고동도 진정되었다. 총구는 남자의 이마로부터 멀어졌으나. 아주 가까웠다. 그런 상태에서, 남자가 입을 열었다. 아직도 어려운가. 대답 대신, 총을 거머쥔 손에 힘을 주고, 정확하게 남자의 이마를 겨누었다. 그러고는, 과녁을 상대로 연습했을 때보다도 거침없이 방아쇠를 당기고, 놓았다. 그제서야, 그 어느 때보다도 또렷한 목소리를 낼 수 있었다.
"아니, 쉽네."
나의 목소리는 소음기를 장착했음에도 모든 청각을 마비시키는 듯한 총성에 묻히고 말았고, 이런 멍청한 놈 때문에 선생님이 돌아가시고 내가 그렇게 애를 먹었다는 것에 화가 났지만, 드디어 해냈다는 고양감이 모든 복잡한 감정을 압도했다.
>>284 응 >>281 맞아! 불사신 설정이라도 넣어서 이어야하나~ 싶었는데 아무래도 >>282가 다시 살아나는 전개를 원할 거 같진 않고...😂 >>282에게는 조금 미안하지만 너레더가 원한다면 >>281에 이어줘도 괜찮아! 나야 고마운걸!
>>282도 분위기 있게 이어줬지만 아무래도 내 캐릭터를 확정형으로 죽여버려서...😅 어떻게 받아주던 상관 없다고 하긴 했지만 그 상황에 어떻게 더 이어갈 방법이 없을 거 같아ㅠ 이미 죽이고 후련해하는 결말로 써줘서 내가 다시 살린다 한들 >>282한테는 맥빠지는 레스일 거 같기도 하고... 미안해!ㅠㅠ
함박눈이 쏟아지는 하늘을 바라보며 여자는 느릿히 담배연기를 내뿜었다. 약간의 사과맛, 그리고 매캐하게 몰려드는 텁텁함. 화한 연기가 목구멍을 쓸고 지나갈 때마다 턱 막힌 속에 조금씩 숨통이 트이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새하얀 눈길 위로 잿가루가 떨어지고, 이내 필터 근처까지 타들어간 담배가 그 위로 지저분한 발자국을 남긴다.
" 어, 왔어? "
여자가 양주머니로 손을 넣으며 인사를 건넸다. 너무도 익숙한, 때문에 지루하리라 느껴질 수 있을 정도로 형식적인 인사였다.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는 보다 설레고 행복한 마음으로 인사를 건넸지. 여자가 눈 쌓인 지붕 밖으로 걸음을 내딛으며 생각했다. 처음 만나던 그 날엔 똑같이 하얀 함박눈이 내렸고 바람이 뼛 속에 스밀듯 차가웠다. 옛날의 그녀는 추위를 많이 타던 여자는 오늘보단 옷을 단단히 껴입었고 담배를 무는 대신 새하얀 입김을 바라보며 남자를 기다렸다.
" 좀 늦었네. "
둘은 항상 그러했듯 동네의 작은 카페를 향해 걸었다. 둘 사이의 암묵적인 약속과 같았다. 그들은 늘 그랬듯 카페에 갔다가 저녁을 먹고 공원을 산책할 것이다. 어쩌면 눈에 보이는대로 가볍게 술을 마시거나 영화를 보거나, 조금 질색하며 노래방을 찾을지도 모른다. 매일 아침 울리는 알람을 맞이하듯 지겨움을 참고 여자는 걷는다. 어쩌면 남자도 같은 생각을 하고 있을지 모른다. 여자는 어느순간부터 남자에게 설렘을 느낄 수 없었고 사랑이라 믿어왔던 감정에 의심이 들기 시작했다. 그언젠가 인생에 단 하나 뿐인 사랑이라 믿었던 과거를 생각한다면 우습기 짝이 없는 일이었다. 너같은 사람은 없을거야. 여자는 문득 어느날 밤 남자가 속삭였던 말이 떠올랐다. 그래 맞다. 아마 남자에게 그녀와 같은 여자는 다신 없을 것이다. 그 날의 그녀와 같은 여자는 말이다. 지금의 여자는 그날의 그녀가 아니었다. 남자도 마찬가지였다.
어느순간부터 여자는 남자가 약속 시간에 늦는 것에 화를 내지 않았다. 대신 휴대전화를 보고 있는 시간이 많아졌고 남자 앞에선 잘 물지 않던 담배를 피며 남자를 기다렸다. 어찌되었던 그것은 여자에게 있어, 더이상 남자가 필요 이상으로 감정을 낭비할 수준의 대상이 아니게 되었다라는 뜻이었지만, 아마도 남자는 그 의미를 알지 못했을 것이다. 여자는 남자를 사랑했다. 사랑이란 단어에 본질적인 의문이 들기는 했지만 어찌되었건 사랑하긴 했다. 다만 불 같이 타오르던 그것이 조금 식은, 혹은 시들어버린 기분이었다. 밤마다 그가 떠오르긴 했으나 설레고 행복한 감정보다는 어딘가 불안하고 초조한 마음이 불쑥 튀어나올 때가 많았다. 그 감정의 근원이 어디인지 알지 못해 가슴이 답답할 때도 있었다. 그저 그와 내가 오래 사랑했으니, 조금 서로에게 편안해진 것일 거라고. 다음 날 눈을 떴을 때 그 사랑이 조금 더 불타길 염원하며 잠들었고 눈을 뜬 아침 휴대전화 액정 속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 남자의 이름에 여자는 차갑게 식은 한숨을 내쉬어야 했다.
여자는 점점 남자가 없는 미래를 상상하기 시작했다. 그저 어느순간부터 여자의 주변에 안개가 끼어 그 누구도 보이지 않는 기분이었다. 그렇게 혼자가 된 자신이 자연스레 상상갈 즈음 여자는 멀리서 나타나는 남자의 얼굴을 보아도 아무런 감흥을 느낄 수 없게 되었다.
" 몇 달 뒤면 우리 5주년이더라. "
여자가 무심히 말했다. 아직 여자의 휴대전화 한 켠을 차지하는 디데이 어플 위젯에서는 그들의 사랑이 선명한 붉은 빛을 띠고 있었다. 어차피 관심도 없었을테지만. 여자가 속으로 말을 삼켜내며 살며시 남자의 얼굴을 살폈다. 결코 기대를 거는 눈빛은 아니었다. 여자가 양주머니 속으로 더욱 손을 깊게 찔러넣으며 아주 조용히 한숨을 내뱉었다. 단단히 엉킨 실을 곧장 잘라버리고 싶은데, 손잡이가 딱딱한 가위를 쥘 용기는 나질 않았다. 남자와 여자는 계속해서 걸었다. 대략 10cm 정도 떨어진 거리를 유지하며, 이제는 익숙하게 맞추어진 서로의 보폭으로 걸었다. 그러나 그들이 바라보는 시선의 보폭은 달랐다.
" 오늘은 좀, 춥네. "
어릴 적의 여자는 추위를 많이 탔다. 때문에 여러겹 옷을 껴입고도 두툼한 목도리나 모자를 쓰곤 했다. 약 오 년의 세월이 흐르며 여자는 더이상 목도리는 매지 않아도 될 만큼 추위를 느끼지 못하게 되었으나, 남자는 매년 겨울마다 두툼한 목도리를 선물로 주었다. 그 때마다 여자는, 늘 그렇듯 따뜻한 미소를 지으며 목도리를 받았다. 여자가 허전한 목덜미를 더듬으며 말했다. 버티지 못할 추위는 아니었다.
# 권태기가 온 커플 느낌! 여자는 헤어짐을 생각하고 있으나 직접 뱉을 용기는 아직 없는 상태. 너무 무맥락만 아니면 다 좋으니 편하게 이어줘.
더이상 인생에서 보고싶지 않은 기후 중 하나였던 함박눈은, 로맨틱이란 단어를 뇌에서 슬슬 지워버리기 시작한 남자에게는 그저 기분나쁜 진눈깨비랑 별 다를 바 없었다. 가까워진 그녀 곁에서 언제 맡아도 익숙치 않은 담배 냄새가 나도 얼굴을 잠시 찡그릴 뿐 더 이상의 언급은 없었다. 아무래도 상관 없지 않나, 하는 생각 뿐이었다.
"미안. 길이 좀 막혀서."
거짓말에 가깝다. 약속은 했으니 가겠다만 그에겐 슬슬 사랑하는, 아니 어쩌면 사랑했던 여자보단 아침의 잠이 더 달콤하게 느껴졌으니까.
왔냐는 말에도 그저 고개만 끄덕인 뒤에 슬슬 신물이 나는 그 카페로 가게 될 것 같다. 저 카페의 아르바이트생이 몇 번 바뀌었는지도 이제 알 것만 같은 남자는 오늘도 결국 여자를 데리고 카페 쪽으로 향했다. 너무도 당연하고 기계적으로.
별 다른 안부도 묻지 않았다. 그걸 묻는 것으로 여자가 기분나빠할것이라는 생각도 들었고, 이젠 그녀에 대해서 그다지 궁금한 것도 없었기에 묻지 않았다. 전날 밤에도, 아마 몇년 전의 그들이었다면 밤새 서로가 얼마나 소중한지 이야기하고 감정을 확인했을 것이다. 서로에 대해서 모르는게 많았고 알고싶은 마음도 많았었다.
하지만 남자는 이제 그렇지 않았다. 알아서 잘 살겠지. 그래, 그녀는 그럴 것이다. 객관적으로 봐도 그녀는 퍽 예쁜 편이었다. 그런 여자가 나를 사랑한다는 사실 자체가 너무나도 벅차, 남자는 해본적도 없는 일을 다양하게 도전해봤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부족함이 없도록 모든 일에 최선을 다했다.
"오래도 사귀었네."
5주년. 서로가 서로를 사랑하고 애인이 되기로 선언하고서부터 5년. 10년이면 강산이 변하는데 5년. 강산이 둘다 변하진 않아도 어느 한쪽 정도는 변하는 시간이었다. 그런 와중에 얄팍한 사람의 감정과 심리가 변하는 것은 그리 놀랄 일도 아니었다. 남자는 그 5년의 시간을 살아가면서도 잊고 있었다. 디데이 위젯도 예저녁에 지워버렸으니까.
"좀 따뜻하게 입고 오지 그랬냐."
마치 동성 친구에게 막 대하듯 나오는 어투는 5년 전의 남자에게선 상상도 못할 언동이었다. 여자가 조금이라도 춥다고 하면 금세 호들갑을 떨고, 손재주 하나 없던 남자가 뜨개질까지 하며 손수 짠 목도리를 자랑스레 그녀의 목에 걸어주던 지난날들은 이제 남자에게서 자취조차 찾아볼 수 없었다. 뜨거운 도파민의 작용은 날씨만큼이나 차갑게 식어버린 듯 했다.
남자는 외투 주머니 안에 든 뭔가를 꽉 붙잡았다. 겉으로는 냉정함을 가장하고 있었고, 스스로에게 이미 사랑따위 다 식지 않았냐며 다그쳤다. 그러나 불이 꺼지고 잿더미 속에 빨갛게 빛나는 잔불처럼 무엇인가가 남았는지, 남자는 그것을 놓지 못했다. 남자는 자기 자신이 생각해도 참 간사하고 한심했다. 그런 남자에게, 5년 가까운 세월간 함께한 여자는 지나치게 완벽했다.
아니, 세상에 죽일 사람이 그렇게 많아요? 어째 하루가 멀다하시고 송장들을 가져오시는 것 같네요. 워커홀릭이신가보다. 아, 허브티 마실래요? (환히 웃으며 화분들을 정리하느라 흙이 묻은 목장갑을 벗는다. 찻주전자를 찾으러 꽃집 안쪽에 잠시 들어갔다 나왔다.) 시체는 거기 두세요.
>>290 요새 미팅이 좀 잦네……. (남자가 캡모자를 벗어 꽃화분이 여러 개 놓인 트롤리에 올렸다. 유리온실에 얼굴을 비춰 보며 눈가에 튄 피를 닦아낸다.) 어, 고마워. 따뜻한 걸로. (찻주전자를 가져오는 그를 바라보며 날서있던 눈빛을 가라앉힌다.) 오늘은 여기 그냥 둬? 영업 끝났어?
여자는 남자의 대답에 굳이 대꾸를 하지 않았다. 오늘 날씨가 이런데 좀 더 빨리 나올 수 있었잖아, 또는 너 그 말만 몇 번째인지 알아? 울컥이며 올라오는 말들은 많았고 머릿 속은 소리 없이 돌아가는 중이었지만 여자는 늘 그랬듯 입을 닫는 것을 선택했다. 과거에는 올라오는 생각들을 전부 뱉어내고 불만을 드러내기도 했다. 혹은 거짓이 아니냐 의심하기도 했다. 상대의 말이 거짓일 것이라 단정한 채 날카로운 말을 내뱉기도 했다. 사실 그것은 상대의 잘못에 대한 분노보다는, 이만큼이나 서운하니 나를 봐달라는 신호의 일종이었을 것이다. 상대에게는 그저 귀찮고 지긋지긋한 언쟁으로 보일테지만. 조금만 더 이렇게 해줬더라면— 그 행복한 상상 속에서라면 둘은 영원토록 행복하게 사랑했겠지. 현실은 결코 꽃밭이 아니었다.
카페로 향하는 길의 정적이 무거웠다. 오늘 아침은 어땠는지, 오는 길에 별 탈은 없었는지. 먼저 꺼내기도 혹은 묻기도 하던 그 질문들이 전부 부질없게 느껴졌다. 남자도 그랬겠지. 약간 느린 걸음으로 침묵하는 남자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채 말하지 못한 질문들과 궁금증이 남자의 발자국 위로 살포시 내려앉았다. 여자는 천천히 남자의 발자국에 맞춰 그것을 밟아내리며, 꺾어진 기대를 시든 꽃 송이처럼 쥘 뿐이다. 남자는 오늘도 여자에게 궁금한 것이 없었다. 그녀에 대해 알고 싶은 것이 없었다.
" 그러게. 어릴 때부터 사귀었으니까. "
그 시절의 사랑을 한순간의 불장난이라 치부하진 않는다. 그녀에게는 진심으로 느껴진 사랑이었다. 서로를 알아가고, 종종 상대를 생각하며 무엇을 하고 있을지 궁금해하고, 잠이 오지 않는 날 지나간 그 사람과의 추억을 되짚으며 웃고, 그러다 사랑임을 깨닫고. 평범하나 특별한 추억들이 결코 가벼운 순간의 감정일 리 없다. 하지만 인간의 무서운 점은 그리 특별하고 애틋한 감정도 언젠가는 사라져버린다는 점이었다. 10년이면 강산이 변한다지만 외향이 깎이고 닳을 뿐 그 본질은 영원하다. 그러나 그들의 사랑은 깎이고, 닳다가, 결국에는 버티지 못하고 자멸한 것이다. 여자가 작게 뜸을 들이며 대답했다. 첫만남의 강렬한 기억 따위 남자에게 남아있을 리 만무했다.
" …그러게. 깜빡했네. "
여자가 목덜미를 매만지던 손을 움츠리며 대답했다. 무언이 잠깐 지나간 늦은 대답이었다. 남자는 자신이 선물한 목도리가 어느순간 눈에 보이지 않아도 그것에 대해 궁금해하지 않았다. 언제부턴가는 단 한 번도, 그가 선물한 목도리를 두르지 않고 나타나기 시작했으나 그 뿐이었다. 변화를 알아달라는 작은 외침은 그렇게 끝이 났다. 여자는 꺼져가는 잔불을 바라볼 수 있었으나 어떠한 행동도 취하지 않았다. 장작을 더 가져오지도, 불씨를 피우지도 않았다. 그저 제 손이 더러워지기 전에 먼저 불길이 꺼지기를. 그리고 무시히 그 위를 새하얀 눈더미로 덮을 수 있기를. 잿가루가 날려 애써 덮은 눈길 위를 더럽히지 않길 바랬으나 그것은 여자가 어찌할 수 없는 영역이었다. 그저 새하얗게 잊을 수 있길 기도할 수 밖에.
" 너 그 날 생각 나? "
여자가 걸음을 조금 높여 남자의 곁으로 다가가며 말했다.
" 우리 처음 학교에서, 마니또 하는데 너가 내 사물함에 사탕 넣다가 걸렸잖아. 근데 또 하필 화이트데이라 애들이 이상하게 몰아가고. 맞아, 동호였지. 너 친구. 그 애가 그렇게 바람을 잡는 바람에. "
고등학교 2학년 때의 추억, 그게 우리의 첫 만남이었는데. 여자가 넌지시 남자를 바라보며 물었다. 여자에게는 잊기 아까울 애틋한 추억이었기에. 그 불씨가 완전히 꺼지기 전 다시 한 번 되새기고파 답지 않게 수다스러운 말투로 묻는다.
# 아냐 이런 분위기를 원했어!! 이어줘서 고마워!! 나이대를 어떻게 잡을까 하다가 대충 20대 초반에 사귀어서 20대 중후반이 된 나이라고 생각하고 적었는데 괜찮지...?🥺 친구로 지내다가 연인으로 발전한 케이스겠네.
서로는 지쳐갔다. 열렬한 사랑에 완전히 불타버려, 이제는 한 팔을 들어올리면 잿가루가 되어 무너질 상태가 되어버린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남자는 그것을 다시 한번 실감했다. 그녀는 서운함조차 이제 내비치지 않았다. 물론 그렇겠지. 좋아하지도 않는 인물에게 '더 일찍 못 봐서 너무 서운해' 하진 않을테니까.
오랫동안 사귄 연인들은 어느새 두 가지로 나뉜다. 정말로 가족처럼, 부부가 그러하듯 서로가 있는 것이 너무도 편하여 그런 하나가 된 사랑을 이어가거나. 아니면 그 사랑의 방식을 변화시키는 시련을 이겨내지 못하여 천천히 멀어져가거나. 우리는 후자에 가까울것이다. 남자는 생각했다.
언제부터인가 여자는 남자가 직접 짠 목도리를 하고 나오지 않게 되었다. 그런 적은 사랑이란 감정이 아직 서로에게 남아있던 시절에는 상상도 못했던 일이었으나 지금에 와선 한없이 평범하게만 받아들여진다. 아마 이젠 자신이 선물해준 물건마저도 거추장스럽고 부끄럽겠지. 내가 짜준 넝마같은 목도리에서 콩깍지가 벗겨질 때도 되었지. 남자는 그런 생각을 했다.
"무슨 날?"
그렇게 행동하려는 의식 없이, 자연스레 남자는 다가오는 여자의 몸동작에 맞춰 자신도 슬쩍 다가서서 눈을 맞췄다. 이제는 이 버릇을 버려야겠다고 생각한 남자지만, 그 오랫동안 몸에 새겨진 버릇은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아, 그때... 맞아. 동호였어. 난리도 아니었지... 한동안은 우리 둘이 말만 섞어도 애들이 막 사귄다느니 어쩌느니 그랬고. 그 이후로 오히려 서로 말도 많이 섞고 그랬었지. 마니또가 효과가 있긴 있던거 같더라."
덩달아 나도 말이 많아졌다. 옛날 생각은 사람의 입을 더 가볍게 만들어주나보다. 그때. 서로에 대한 존재에 관심도 딱히 없었을 때였다. 마니또인지 뭔지 잘 모르겠고 화이트데이도 의식하지 않던 그 때. 남자는 그냥 지나가다 들은 말로 '여자가 이런이런 사탕을 좋아한다' 정도만 기억하고 있었을 뿐이었다. 그러나 그 타이밍과 선택은 남들의 눈에, 특히 날 놀리는걸 좋아하던 그 친구 눈에는 전혀 다른 뜻으로 보였을 것이다. 그렇게 얽히기 시작한 두 사람에게 그 사건은 어쩌면 자기 실현적 예언처럼 움직였었다.
"아, 그래. 나중에 동호 그 놈, 술마시다가 나한테 그러더라. 사실 걔가 널 좋아했었다고. 그 녀석 입에서 나온 말이라 그렇게까지 말의 무게가 있진 않았지만. 그때도 여친이 있던 놈이 무슨... 쯧."
그리고 남자는 문득 생각했다. 이 오랜 시간을 함께한 연인의 옆자리에 있던 남자가, 자신이 아니라 자신의 친구였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 지금의 나처럼 식어버린 사랑을 질질 끌어버리진 않았을거라고, 그리고 그걸로 여자를 더 괴롭히진 않았을거라고 생각했다.
무어라 계속 이야기를 하는 동안, 남자는 자신의 손이 여자의 손에 닿아 있었다는 것도 모르고 있었다. 그 촉감을 의식한 남자는 슬그머니 다시 손을 빼 자기 주머니에 넣었다. 버릇. 둘의 사이는 버릇이 되어버릴 정도였다. 이 버릇을 과연 씻어낼 수 있을까. 남자는 썩 자신이 있는 편은 아니었다.
# 마음에 들었다니 다행이네. 나잇대도 딱 적당하고, 나도 대충 그 언저리로 생각했어. 그리고 친구에서 연인이라니 이거 참 풋풋... 했던 이야기구만(코쓱
길고 긴 전쟁이 끝이 났고 세계엔 평화가 찾아왔다. 전쟁을 싫어하던 마족은 물론이요, 평화를 사랑하던 인간들도 모두가 두 팔 크게 벌려 만세를 외쳤고 대륙 전체에서 축제의 장이 열렸다. 목숨을 걸고 평화를 가져온 이들을 주변에선 영웅이라고 불렀으며 하나같이 감사의 인사를 올리며 눈물을 흘렸다. 그저 평화롭게 마을에서 살고 싶어 전쟁에 뛰어들었던 사내는 그 모습에 두 손을 휘저었으나 찬양하는 분위기는 도저히 막을 수 없었다. 며칠이나 낮밤 할 거 없이 축제의 음악소리가 들리고 술잔치가 열렸으며 하루하루 언제 죽을까 불안해서 살지 못했던 분위기는 이젠 너무나 평화로워 매일 밤 신나게 놀고 먹으며 편안하게 잘 수 있는 분위기로 바뀌었다.
그리고 그로부터 다섯 달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영웅이라고 불리던 이 중 가장 필두에 섰던 사내는 성의 복도를 정말 조용히 걷고 있었다. 주변 병사들에게 걸리지 않게, 그리고 주변 사람들에게 들키지 않게. 나라의 왕이 마땅히 대접과 보상을 해야한다고 성으로 들어오게 한 지 어연 다섯 달. 몇 번이나 이제 충분하니 성 밖으로 나가고 싶다고 이야기를 했으나 정치적 이유인지, 아니면 인재를 놓치기 싫어서인지, 그것도 아니면 정말로 이 정도 대접을 해야 마땅하다고 여겼는지 왕은 그 부탁을 허하지 않았다. 그저 이 성에서 앞으로 평생을 행복하고 편안하게 살면 되지 않겠냐는 말만 할 뿐, 수도를 떠나 원래 살던 고향으로 가는 것은 허하지 않았기에 결국 사내는 탈출을 감행했다.
'물론 여기에 있으면 확실히 맛있는 것도 많고, 삶도 평화롭고 대우 자체도 상당히 좋긴 하지만...'
그야말로 왕족 수준은 아니어도 준 왕족 수준으로 살아갈 수 있었으니 아마 동료들 중에선 이 삶을 택한 이도 있겠으나 애초에 마을에서 평화롭게 살고 싶어 전쟁에 뛰어들었던 이였다. 역시 그때의 그 삶이 더 좋다고 생각하며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게 복도를 살금살금 걷던 그는 인기척이 느껴지면 재빠르게 다른 방에 들어가고, 인기척이 사라지면 다시 나와서 살금살금 걸어가는 것을 반복했다. 당연하지만 정문으로는 나갈 수 없었다. 당연히 그쪽에는 경비병들이 있었으니까. 그렇기에 세 달 전부터 조용히 만든 정원의 비밀통로를 통해 성에서 빠져나갈 생각이었다. 정원이 바로 코앞이었고 정말 운이 좋게도 사내는 경비병들에게 걸리지 않고 정원에 도달할 수 있었다.
정원의 가장 가장자리 벽면의 벽돌을 빼내고 꾹 누르면 그 부분이 무너지며 밖으로 빠져나갈 수 있는 통로로 들어갈 수 있었다. 그 벽에만 도달하면 이제 이 성에서 탈출할 수 있으리라. 그 희망을 가지며 사내는 정원을 살금살금 걸었다.
/탈출을 감행하는 영웅이라는 설정이야! 동료도 좋고 성 사람도 좋고, 탈출을 도와줘도 좋고 방해해도 괜찮아! 맥커터만 아니면 뭐든 오케이!
겨울내음이 채 익숙해지기도 전에 봄이 왔다. 오랫동안 맡아 체향같았던 병원내음도 사랑스럽게 만들던 그 사람이 잊히기도 전에 다시 봄이 온 것이다. 아직 남아있는 겨울의 흔적을 더듬어 팔을 쓸어내렸다. 피부 위를 덮은 옷의 한기가 손끝을 타고 온몸에 내려앉았다. 후. 숨 하나에 그리움 하나. 오래 전 타계한 시인은 별 하나에 추억과 사랑을 세었으나 별이 저문 세상을 사는 여자는 숨결 하나에 추억과 그리움을 셌다.
머리를 가리는 니트 모자를 더욱 당겨 눌러쓰곤 품에 안은 흰국화 꽃을 세었다. 오늘도 주지 못했다는 이유가 내일도 볼 수 있는 이유가 되길 바랐다. 아직 차가 오기까지 한참 남은 버스정류장에 앉아 꽃다발을 껴안고 숨을 뱉었다. 희미한 꽃향기와 꽃잎이 숨결을 따라 코를 간질였다.
여자의 상념을 깨운건 전화소리였다. 전화벨이 울리는 걸 빤히 보기만 하다 화면은 배경화면으로 바뀌었다. 그러나 전화는 끈질기게 다시 울렸다. 갑작스러운 충동이 명치를 타고 올라왔다. 며칠째 무시하던 전화를 받은 것은 그 이유였다.
전쟁이 시작된지 사십 년이 지났다. 처음에는 마족과 인간이 각기 자신의 긍지를 지키기 위해 시작한 전쟁이었으나 지금은 그 어떤 명목도 명분도 없다. 끝이 보이지 않는 전쟁 속에서 이유도 망각한 채 서로를 해할 뿐이다. 본래 열 명의 대마법사가 존재하던 제국에는 현재 단 한 명의 대마법사만이 남아 전장을 지키고 있다. 이제 갓 스무살을 넘긴, 샤를로테 로즈. 대마법사로 임명되기 전부터 전쟁에 숱한 공을 쌓아올리던 천재 마법사. 지독한 전쟁 끝에 남은 수식어는 오직 그 뿐이었다.
" ...그러니 이제, 계획이 있으십니까? "
목소리가 들린 곳은 어두운 동굴이다. 그곳에 대마법사 샤를로테가 있었다. 밑둥이 조금 부서진 거대한 스탬프를 끌어안은 샤를로테에겐 지친 듯한 기색이 역력하다. 지저분한 옷가지와 크고 작은 상처들. 전투의 열세에 후퇴를 결정한지 십 분, 선두에 서있던 대마법사 샤를로테와 기사단장인 당신은 남은 전투인력들과 분산되어 외딴 산맥의 동굴로 숨어들게 되었다. 쫓아오는 마족 무리를 제압하고 사람들이 도망갈 시간을 벌어주기 위하여. 샤를로테와 당신은 감탄스러울 실력으로 훌륭히 마족들을 무찔러주었다. 하지만 단 두 명의 전세는 금방 뒤집히고 말았으니 급히 도망치며 발견한 곳이 바로 이 동굴인 것이었다. 아마 지금 밖은 대마법사와 기사단장을 죽이기 위해 혈안이 된 마족들이 어슬렁대고 있을테다. 잡히는 것은 시간문제. 그리고 그 동물 속에는 지쳐 기력이 떨어진 대마법사와 부상 당한 기사단장이 숨어있다. 그것이 이야기의 전부일 뿐이다. 샤를로테의 목소리가 다소 까칠하다. 오늘 처음 얼굴을 마주한 기사단장에게 어떠한 개인적인 감정이 있는 것은 아닐테다. 그저 오늘 너무 많은 마법을 사용하였고, 마법사의 체력을 고려하지 못한 당신의 페이스에 맞추어 도망을 다니다보니 지쳤을 뿐이다. 샤를로테는 낮게 한숨을 내쉬며 동굴 내벽에 몸을 기대었다. 시커먼 먼지들이 들러붙을 게 뻔하지만 그런 걱정은 안중에도 없다. 살아나갈 방법을 찾아야한다. 샤를로테의 머릿 속에는 오직 그 생각만이 절실했다.
" 팔다리 하나쯤은 날아가도 괜찮습니다. 괜찮은 수가 있다면 말해보십시오. "
섬뜩한 이야기를 눈 깜짝 하지 않고 내뱉는 샤를로테. 눈빛을 보아하니 진지한 모양이다. 여태 제국에서 대마법사들의 이미지라 함은, 잘난 척 심하고 엄살 심한 샌님. 그 한 마디로 정리될 수 있었다. 샤를로테는 그런 부류와는 조금 다른 모양이었으나...
" 아니면 여기서 명예롭게 죽는 게 나으시겠습니까? 그렇다면 괜찮은 주문들을 좀 외우고 있습니다. "
살아나갈 방법 따위 진작에 포기하고 만 것일까. 샤를로테가 머리칼을 쓸어넘기며 나지막히 말했다. 역시 눈빛을 보아하니 진지한 모양이다. 동굴 밖에서 무언가 시끄러운 소리가 들려온다. 마족이 포위망을 가까히 좁혀온 것일까. 샤를로테의 경계가 예민해진다. 스탬프를 쥔 손이 잘게 떨려오는 것 같기도 하다. 역시나 말은 담담하게 던졌으나, 아직은 죽는 게 무서운 모양이다.
# 대충 판타지 컨셉! 꼭 시리어스 하지 않아도 된다! 너무 성의 없이 이어주는 것만 아니면 뭐든 좋아~
기사단장은 이번이야말로 자신의 마지막이 되리라는 것을 직감했다. 그간 수도 없이 많은 그러한 직감이 그의 신경 구석구석을 간지럽혔고, 다행스럽게도 여태 전부 빗나갔었다. 이번에도 부디 그 직감이 빗나가기를 단장도 내심 바라고 있었다. 무가의 자제로써 전쟁이 한창때인 변방에서 태어나고 자라, 제 이름을 쓸 수 있을 시절부터 사관학교로 보내졌다. 졸업하여 성인이 되고 나서 얼마 지나지 않아 최전방의 기사로써 임관했고, 대부분의 초임 '기사'들이 전장에서 무의미하게 죽어나가는 것 대신 그는 몇 년이나 더 살아남았다. 그게 그가 기사단장이라는, 치열한 전쟁 탓에 공석일 때가 더 많은 자리에 앉은 이유 중 하나다.
솔직히 말해서 촉망받는 기사단장은 인근의 하급 기사에게도 팔씨름으로 질 자신이 있었다. 그를 살아남게 만든 것은 직감, 눈치, 교활함이나 마찬가지였다. 전장에선 결국 그게 힘보다 중요했었다. 그렇다 하더라도 평범한 이들에 비하면 괴물같은 힘에는 다를 바 없었지만.
광택따위 내지 않은 갑옷에는 피칠갑이 되어있었다. 그게 몽땅 마족들의 피였음에 둘 모두 감사해도 될 것이다. 타는 듯한 목을 축이지도 못한 채 겨우 목구멍 너머에서 긁어내는 목소리는 높지 않았다.
"어느 쪽이든 내 취향의 이야기는 아닌데."
명망높고 높은 신분에 인간병기로 일컬어지던 기사란 직위는 어느새 장교나 동급의 이야기가 되었다. 더 심하면 부사관 수준으로 떨어졌고. 그런 이들 몇 명과 무기보다 농기구가 더 익숙한 민병들 대다수와 약간의 상비군들 정도를 이끌고 마족의 군대를 상대해야 했다. 희망이 없었다. 대부분의 기사단이 이 모양이었을 것이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샤를로테의 존재였다. 장래가 촉망받는 희대의 천재 마법사라. 그런 귀하신 분께서 굳이 이런 곳에 행차를 하셨다는 것은 여러모로 아주 큰 의미였다. 피할 수 없는 파멸이 이곳에 도달해 있다는 의미 말이다.
건틀릿을 낀 손으로 샤를로테의 하얀 손을 감싸 잡는다. 두려움에서 잠시 시선을 돌릴 수 있기를 바랬다.
"대마법사께선 운이 좀 나쁜거 같군. 이것보다 더 거지같은 상황에서도 극적으로 살아남았고, 이번에는 그때보단 좀 덜 재밌는 광경이 될 테니까."
뭇 병사들이 그러듯, 두려움을 떨쳐내기 위한 약간의 허세를 섞어 내뱉는다. 하지만 온전히 허세인것만도 아니다. 그에겐 계책이 있다. 그게 지금까지 이 남자를 살아남게 만든 귀중한 자질이었다. 이 동굴의 이 구석으로 들어온 것도 그 중 하나였다.
"우선 기력을 좀 보충하는게 좋겠어. 그 동안 우리는 여기서 몸을 좀 숨기지. 아예 이쪽 가지의 입구에다 동굴 벽을 감쪽같이 만들 수 있으면 최선이겠고."
미안한 이야기지만 샤를로테에게 좀더 고생을 시켜야만 할 것 같다. 그래도 최소한 마족들이 현재 그들에게 혈안이 되어 다른 생각을 할 겨를도 없다는 점이 다행이었다.
미안해...내, 내가 그래서 공포 영화 보지 말자 했잖아... (불 꺼진 방, 티비엔 여전히 주인공이 도망치는 장면이 나오고 있고, 두 사람 사이엔 비명과 악력으로 인해 반으로 갈라진 리모컨이 싸늘하게 죽어있다. 민망함과 서러움, 부끄러움으로 새빨개진 얼굴을 필사적으로 가린다. 분명 조금 전까지는 당신의 팔을 잡고 있었을 테지만 일말의 이성을 잘 조절해 타겟을 바꾼 모양이다.)
자명종이 활기차게 울린다. 안녕, 자명종아! 그리고 따듯한 햇님아! 예쁜 우리 고양이 민트초코도, 어제도 오늘도 한 자리에 있어주는 선인장 제임스도! 창문을 활짝 열어젖히고는 숨을 있는 힘껏 들이마시고, 내뱉는다. 신선한 공기도 좋지만, 음, 역시 아침공기엔 빠질수 없는게 있지. 주머니에서 폰을 꺼내 번호를 몇개 누르고 전화를 건다. 귀여운 음악소리가 상큼하게 들려오고, 곧이어.
쾅!
순식간에 부숴지는 몇백개의 유리창 소리. 산산조각나며 떨어지고, 비명소리가 들린다. 매캐한 화약냄새가 섞인, 아직은 조금 차가운 아침공기를 다시 있는 힘껏 들이킨다. 아, 화약냄새 없는 아침공기를 상상할수 있을까? 아니, 나는 못해. 어느새 입가엔 예쁜 미소가 걸린다. 좋아, 오늘도 나는 최고로 예뻐.
" 좋은 아침이야!!! "
씩 웃으며 크게 소리친다. 아, 그러고보니 자기소개를 안했네. 내 이름은 벌룬, 더 해피 걸. 해피벌룬, 해피, 뭐가 됐든간에 네가 생각하는 최고로 예쁜 이름으로 불러줘. 그야 나는 이 도시의 빌런이니까.
사람들은 왜 그리도 슬픈 얼굴을 하고, 사소한 것에도 짜증을 내고, 알수없는 미래에 대해 걱정을 할까? 나는 이해가 되지 않는다. 가장 중요한건 바로 지금 이 순간! 오늘은 앞으로 남은 날 중 내가 가장 어린 때잖아! 이 순간을 즐기지 않으면 섭하지. 그러니까 나는 사람들을 웃게 만들어주기로 했다. 너무 귀여운 스미스 앤 웨슨 모델 500 권총(이름은 깜찍이), 사랑스러운 BOPE에서도 사용하는 세열 수류탄(이름은 반짝이), 그리고 내가 제일 좋아하는 특제 가스. 한 모금만 마시면 모든 걱정도, 슬픔도, 불행도 잊어버릴수 있는, 해피 시리즈의 3번째 자신작 ' 핑크 다이아몬드 ' . 화창한 햇빛 아래, 오늘도 가장 높은 꼭대기에 서서 내가 사랑하는 이 도시에 선물을 주기로 했다. 뭐, 개중에는 날 좋아하지 않는 사람들도 있는 것 같지만... 그래도 괜찮아, 세상에 사람이 이렇게 많은데, 누군가는 날 좋아하는 법이고, 누군가는 그렇지 않을 수도 있는 법이니까. 낙하산 가방을 메고 그대로 떨어진다. 빠른 속도감이 나를 덮쳐오고, 크게 웃고, 소리지르다가, 은행 건물이 보이자 반짝이를 몇개 안전장치 째로 뽑아 던진다. 우직, 하고 뽑은 뒤 슉, 펑! 그리고 생긴 구멍에 아름답고, 사랑스럽게 착지하며 깜찍이를 몇 발 쏴준다.
" 아헤, 모두 왜 그렇게 겁에 질린 표정을 하고 있어? 괜찮아, 괜찮아. 오늘도 내가 너희를 행복하게 만들어줄게. "
핑크 다이아몬드 몇개를 바닥에 던지고, 나는 깜찍한 방독면을 착용한다. 음, 어찌 저렇게 행복해보이는 표정일까. 내가 준 선물을 좋아해주는걸 보니까 나까지 기분이 좋아보이는걸. 폴짝거리며 뛰어서 그대로 은행의 금고까지 도착했다. 한 눈에 봐도 보안이 어마무시해보이지만, 반짝이 몇개면 다 해결 돼. 순식간에 그 철통같던 금고 문이 열리고, 안에 쌓인 수많은 돈다발을 본다. 세상에, 이게 다 얼마야? 이정도면 사람들을 충분히 행복하게 해줄 수 있겠어. 물론 나도 좀 써야지! 반짝이 몇개, 핑크 다이아몬드 몇개를 더 만들 정도의 재료들, 그리고 달콤하고 사랑스런 팬케이크, 파르페, 크레이프, 파운드 케이크... 물론 예쁜 옷도 빼 놓을 수 없겠지. 나머지는 광장에서 뿌리는거야. 다들 좋아해주겠지? 아아, 행복해. 그녀는 도취된 미소를 지었다.
자명종이 귀를 찢어놓을 기세로 울린다. 제발, 죽어. 죽어, 죽어, 죽어. 암막 커튼 틈 사이로 들어오는 햇빛도 죽어. 시끄럽게 다투는 고양이들도...너흰 좀 가라. 귀를 꾹 막고서, 폐에서부터 끌어올린 고통에 찬 긴 한숨을 내뱉는다. 정말, 당연하게도, 그리고, 끔찍하게도, 절망스럽게도, 일하기, 너무, 싫다. 밍기적밍기적. 액체화 된 수은 마냥 스르륵 몸을 침대 바깥으로 꺼내고나서는, 손가락을 일정 방향으로 휘두른다. 그 즉시, 몸이 일으켜지고 방의 불이 켜지며 온갖 손질도구가 주변에 날아든다. 거의 반쯤 수면 상태로 둥둥 떠다니는 몸은 자연스레 화장실로 들어가 살아남기 위한 최소한의 몸치장을 시작한다.
“하아……쓰레기 요일. 쓰레기 출근.”
어느새 말끔히 투 버튼 브랜드 정장을 차려입은 모습은 아까 전 날백수 같은 모습과 완전 딴판이다. 다만, 심히 기분이 편찮아보이는 표정만큼은 다르지 않다. 여전히 손가락질을 할 때마다 보온병에 커피가 담기고, TV에 전원을 켜 뉴스를 튼다. 흘러나오는 뉴스에 나오는 은행 지점 빌런 습격 뉴스를 지켜보며 질렸다는 표정을 지어보인다.
“정말 대단해. 경이로울 정도야. 월요일 아침부터 저렇게 활기가 넘치다니.”
그런 비아냥을 담은 중얼거림을 하자마자, 핫라인 전용 무전기가 울린다. 손가락을 까닥해 그것을 귓가에 가까이 가져와 연락을 받는다. 들려오는 다급한 목소리에 대답하는 목소리에는 사회성 1%, 탄식 49%, 아무 생각 없음 50%에 가깝다. 아침 식사는 거른다. 체질이 안받아서. 싸우기 전에 뭔갈 먹으면 소화 안되거든. 싸워야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말단 히어로, 즉, 빌어먹을 공무원이기 때문이다.
시간이 조금 흘러, 은행. 안에 가스가 가득 차있어 억지로 답답한 방독면을 차고 왔다. 어떻게 하면 이렇게 깔끔하게 부술 수가 있지, 싶을 정도로 깔끔한 구멍을 슥 보고는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쉰다. 이번 빌런도 분명 제정신 아닐걸. 이번달 월급을 걸어도 좋다. ……그렇게 말하니 갑자기 초조해진다. 제정신 박힌 빌런이면 어쩌지? 여전히 걷는 것은 싫어하기에, 염동력으로 몸만 옮겨 둥둥 떠다닌다. 굳이 은행을 털었다면 이곳 말고 목적지는 없겠지. 독가스를 헤치고 나아가가며 중간중간 손가락질로 독가스를 마신 시민들을 건물 밖으로 내던진다. 배려가 부족하지만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함이다. 그리고 마침내 금고 앞에 도달해, 그곳에서 돈을 챙기다 말고 빙글빙글 돌고있는 인영을 발견한다. 방독면이 개성적이네. 그리고 기묘한 행동을 일삼고있고. +2점. 조금 더 지켜보자 싶어 근처 부서진 기둥 위에 앉아 뻐근한 허리를 두드린다. 바닥 파편에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당신에게 들린 것 같아, 일부러 먼저 말을 꺼낸다.
“아, 괜찮아 괜찮아, 아가씨. 하던거 마저 해. 일단은 지금도 근무 시간인지라 뺄 수 있을 때 빼둬야하거든. 챙기던거 마저 다 챙기면 말해주고. 참고로 물어보는건데, 그 돈들 어디다 쓸 거야? 그리고 왜 하필 월요일일까?”
야, 난 네가 공포 영화는 위험하다는 게 이런 '물리'적인 위험인줄은 몰랐지..힘이 세다는 건 알고있었다만... (싸늘하게 죽은 리모컨을 허망하게 내려다보다가 허탈함과 어이없음, 당황스러움을 숨기지 못한 웃음소리와 함께 중얼거린다. 그래도 새빨개진 얼굴을 필사적으로 가리는 네 모습하며, 만약 네가 이성을 조절하지 않았다면 조금 전까지 잡혀있던 팔이 저 리모컨 대신 박살났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더 뭐라고는 못하겠다고 생각한다.) 아무튼 리모컨 값은 네가 물어내라? (죽은 리모컨을 수습하면서 영화에서 잠깐 시선을 떼지만 그것은 큰 실수였다. 도망쳐서 잘 숨었다고 생각하던 주인공이 안심하는 순간 방금보다 더 무서운 장면이 나오기 직전, 네 눈을 가려주거나 널 붙잡았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했으니.)
그나저나, 돈을 어떻게 챙기지? 고민하던 그녀는 우선 주머니에 돈다발을 대충 집어넣기 시작했다. 아, 그러고보니 낙하산 가방이 있었지. 거기에 잔뜩 집어넣고, 그리고 근처에 있는 가방들에도 집어넣어서 가면 되겠다. 그러던 중, 낯선 목소리가 들려 휙 하고 고개를 돌려서 바라보던 그녀는 해맑게 인사하기 시작했다.
" 안녕, 안녕! 내 이름은 해피, 네 이름은 뭐야? "
딱 봐도 피곤해보이는 목소리, 그리고 졸린 목소리네. 정말, 사람들은 왜 저리도 피곤해보이고, 또 졸려보일까? 주말이 다 지나간건 나름대로 아쉬운 일이지만, 그래도, 오늘은 어제보다 나은 날이잖아! 새로운 태양, 새로운 공기, 그리고 무엇보다 오늘도 살아있는 나. 아름답잖아? 그녀는 등과 목을 뒤로 쭉 피며 스트레칭하는 당신을 바라보았다.
" 근무시간이면, 친구, 너는 히어로야? 이번엔 드디어 나를 칭찬해줄 사람인걸까? 정말이지, 전의 히어로들은 정말 무례했거든. 난 그냥 사람들을 행복하게 해 줬을 뿐인데, 다짜고짜 욕을 하지 않나, 때리려고 하질 않나... 뭐라뭐라 소리를 지르기까지! 아, 너무 무서웠어. 다행스럽게도 이 깜찍이를 몇 번 쏴줬더니 도망칠수 있었지만. 아, 맞아. 물어보는거에 대답을 해 줘야지. 이 돈은~ 음... 파운드 케이크, 크레이프, 그런 사랑스러운것들을 사는데에 좀 쓰고, 깜찍이에 넣을 탄약, 그리고 행복해지는 해피 시리즈를 더 만드는데 조금. 그리고 나머지는! 광장의 높은곳에서 휙 뿌려줄거야. 그러면 다들 좋아할테니까! 내 친구인 너도 돈 좋아하지? 자, 원하는 만큼 챙겨가! 아, 그래도 다 챙겨가는건 안된다? 이런건 같이 나눠써야하니까. "
긴 말을 마치고 쌓여있는 돈다발을 한아름 끌어안아, 네 쪽으로 던진다. 힘이 부족해서일까, 그리 멀리 가지는 못하고 맥없이 툭 떨어졌지만. 그녀는 쑥스러운듯 웃었다.
" 좋아좋아, 친구에게 선물을 주는 나. 최고로 사랑스러워. 음, 그리고 또 질문이 뭐였지? 아, 맞아. 왜 하필 월요일이냐고? 그야 오늘이 내게 남은 날 중 가장 어리고, 최고로 귀엽고 사랑스러운 날이잖아? 매일을 전력으로 즐기지 않으면 손해야~ 그렇지, 친구? 참, 이름도 물어보질 않았네. 우리 친구는 이름이 뭘까? 잠깐만, 내가 맞춰볼게. 음... 민트초코? 맞지? 응? "
분명 이름을 맞췄을거야! 얼마나 놀라줄까? 그녀는 흥분을 주체하지 못하고, 한껏 행복한 미소를 지으며 제자리에서 방방 뛰기 시작했다.
" 아헤, 행복해. 이것도 인연인데, 우리 크레이프나 먹으러 가지 않을래? 돈은 신경 쓸 필요 없어, 내가 최근에 돈 안내고 먹을 수 있는 방법을 배웠거든. 이 깜찍이를 한번 슬쩍 보여주기만 하면 다들 어찌나 좋아하는지 나한테 전부 공짜로 준다니까? 그래서 전엔 케이크를 한가득 받아서, 배가 터지게 먹어버렸어. "
>>305 이름이 무엇이냐는 질문에도 대답하지 않았는데, 금새 본인의 이야기로 넘어가버린 당신을 지켜보며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인 채로 귀를 기울인다. 정확히는 건물 바깥에서 들려오는 희미한 진동소리에. 기동대가 도착하는 소리다. 이놈들이나 저놈들이나 움직이는 것 하나는 빨라가지고는, 그렇게 열심히 일하고싶나? 월요일 아침 댓바람부터? 노동하지 않는 자, 먹지도 말라. 응응, 전통적인 문구에 부정할 생각은 없다. 다만 인륜적으로 좀 심하지않아? 좀 적당히 노동해서 적당히 먹고 살고 싶은게 죄야? 본질적인 문제는 그곳에 있다. 히어로라는 직업을 선택한 자신에게 있어 일을 늘리는 것은 오직 빌런들 뿐. 기동대가 투입되기 전에는 일을 마무리해야한다.
“……그렇구마안~. 빌런치고는 제법 알차게 쓰는데. 나라면 우선 노후를 위해 저축하겠지만, 뭐, 지금 이 사단을 보자니 아가씨가 존재하는 이상 어떤 은행에 저축해도 의미가 없어보이네.”
해피, 라는 이름 +1. 월요일인데 지나치게 활기찬 목소리 +1. 도덕성 및 사회성 결여 +1. 지독한 네이밍 센스 +1. 불법 폭탄 개조 및 사용 +1. 친구에게 훔친 돈을 나눠주는 상냥한 마음 +1. 이 이상 점수를 매기는 건 무의미하다. 자신의 월급은 안전하게 지켜졌고, 명분도 충분히 세워졌다. 맥없이 툭 떨어진 돈다발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머리를 긁적거린다.
“민트초코는 맛있긴 하지만 사람 이름으로는 좀 그렇지. 뮬렌 맥워커라고 한다, 해피 아가씨. 재미없는 이름이라서 미안하네.”
아무런 감흥도, 미안함도 느껴지지 않는 목소리는 평이하다. 이 사람, 정말 민트초코를 좋아하는 건 맞는건가? 이를 아득 갈고있다. 금고의 구석에 달린 통로 CCTV를 확인하자 무장한 병력들이 들이닥치고 있다. 시간을 버는 건 여기까지. 어기적어기적 자리서 일어나 상체를 좌우로 짧게 기울여가며 뻐근한 허리를 풀어준다.
“오, 정말? 나도 크레이프 좋아해. 근데 아가씨랑 같이 먹으러 가기엔 아저씨는 좀 부끄러울 나이기도 하고……─쑥쓰럽다는 듯이 턱을 긁적거려보였다.─자고로 디저트는 끔찍한 하루하루를 버텨내고 버텨내서 갓 받은 월급을 ATM에서 인출해 내 땀과 피, 종이 냄새가 나는 뻣뻣한 지폐로 사먹는 게 제일 맛있거든. 돈 다 챙겼지? 이야기 나눠서 즐거웠어. 다음엔 꼭 화요일…아니, 수……음, 그냥 제압할테니 돌아오지 않았으면 해.”
팔을 앞으로 쭉 뻗어서, 펼친 검지 손가락을 아래서 위로 슥 들어올린다. 그러자 당신이 서있는 바닥이 들썩거리더니 그대로 떠올라 천장에 충돌할 기세로 솟구친다. 범상치 않은 당신이 이정도 공격은 대처할 것을 알고있기에, 주변의 잔해들을 전부 떠오르게 해, 일제히 당신에게 맹렬한 속도로 날려보낸다. 이것 또한 시선을 분산시키기 위함이다. 힘을 모아 천장에 바깥과 이어지는 커다란 구멍을 내려 하고있다. 먼저 이 끔찍한 가스를 빼내는 것이 먼저다.
“그리고 정정하지. 월요일은 저주받은 요일이다. 내게 남은 날 중 유급 휴가를 적용하지 않은 매 월요일은 가장 괴롭고, 최고로 끔찍하며 주말과 동떨어진 최악의 날이다. 그러니 그 정신머리를 개조시켜주지. 난 다른 히어로들 처럼 무자비하지 않아. 재판에 언질을 넣어둘테니 아가씨는 실력 좋은 빌런교화센터에 들어가게 될테고, 완치될 즘이면 같이 내 단골 디저트 가게에 갈 수도 있겠지. 그러니 저항은 포기하도록.”
" 칭찬해주니까 부끄러워지는걸~ 그래도 날 다른 사람이랑 똑같이 보지는 말아줘! 다른 빌런들은 그야, 온통 재미없는 일에만 쓰잖아? 세계정복이니, 모두를 노예로 만든다느니, 죽고 죽이고... 그런건 전혀 재미없어! 기쁘지도 않고, 재미있지도 않고, 가장 중요한건.. 사랑스럽지 않다는거겠지. 그렇지 않아, 내 소중한 친구? 응? "
그녀는 머리를 긁적이며 배시시 짧게 웃었다. 그야 다른 사람들은 전부 멍청해보여, 왜 그리도 재미없는 일에 이를 물고 덤벼드는걸까? 우리가 사는 삶은 언제나 짧잖아? 지금 당장 죽을지도 모르는데, 늘 전력으로, 즐겁게 살지 않으면 손해야. 내 깜찍이, 반짝이에 죽은 사람들도, 오늘 내가 이렇게 죽을거라곤 생각지도 못했겠지. 나도 그런거야. 언제, 어디서, 어떻게 죽을지 누가 알겠어? 그러니까 나는 즐길래, 한 점의 후회도 없이, 최고로 아름답게 죽을 수 있도록!
" 노후를 위해 저축해? 그거 진짜 재미없다. 친구, 내가 충고 하나 하자면, 오늘이 너의 가장 젊은 날이잖아! 언제 죽을지도 모르는데 그런 짓을 하면서 시간을 허비하고, 싫어하는 일만 하면, 사는건 재미없잖아? 으에, 끔찍해. 나같으면 그런 삶을 살 바엔 차라리 죽어버리겠어. "
키득거리면서 웃었다. 그러다 그가 맥없이 떨어진 돈다발을 바라보며 머리를 긁적거리는거에 응? 돈 안가져가? 내가 주는 선물인데! 하고 얘기했다가.
" 쿠궁, 느낌표 느낌표 느낌표. 완전 충격이야, 그런 재미없는 이름이라니. 게다가 맥워커? 성에서부터 일복을 타고났잖아. 안되겠어, 전혀 사랑스럽지 않은 이름이야. 그냥 민트초코가 되는건 어때? 무려 우리 집 고양이랑 똑같은 이름이라구. 응! 아주 귀여워. 어라, 허리아파? 마사지라도 해줄까? 이렇게 귀여운 여자애가 허리를 주물러주면 순식간에 나을거야. 장담은 못 하겠지만~ "
다시 짧게 웃던 그녀는, 그가 손을 뻗어 자신이 밟고있는 땅을 그대로 들어올리자 길게 한숨쉬었다. 그리고 쪼그려앉으며, 자신을 향해 맹렬한 속도로 날아오는 파편들을 바라보았다.
" 아아, 정말. 나랑 같이 크레이프 먹으러 가는건 부끄럽고, 나처럼 예쁘고, 최고로 사랑스럽고, 가련한 여자애를 공격하는건 부끄럽지 않은거야? 정말, 최악이야. 전혀 사랑스럽지 않아. 친구라고 믿었는데, 나를 배신하다니. "
정말 슬퍼. 그녀는 빠른 속도로 주머니에서 반짝이들을 꺼내 그대로 마구 흩뿌렸다. BOPE에서도 사용하는 특제 고폭 수류탄. 그리고 그대로 공중에서, 뒤로 한바퀴 돌며 뛰어내렸고, 큰 폭압에 휘말린듯 옷은 이리저리 헤지고 찢겨나가며, 만신창이가 되었지만, 깔깔거리며 웃는 큰 목소리로 보아 그녀는 나름대로 무사한듯 싶었다.
" 정말, 너무해. 여자의 마음에 상처를 주고선, 나중엔 데이트하자며 꼬드기는거야? 미안, 난 나쁜 남자는 취향이 아니라서, 이미 질릴대로 봤거든. 으응, 근데, 아저씨 친구들은 괜찮을까~? 저 위에 있는 수많은 사람들은? 봐, 천장에 구멍이 생긴 탓에 핑크 다이아몬드가 뭉게뭉게, 하늘의 구름이 되어가고 있다고? 저기 경찰? 인가? 저 친구들도 위험해보이는데~ "
그리고 그녀는 주머니에서 찰랑거리는, 분홍색 액체를 꺼내 흔들어보였다. 겉엔 요란하고 화려한 분홍색 스티커, 반짝이 가루까지...
" 이거 던져서 깨지면, 구름이 잔뜩! 응? 근데, 지금이라면 되돌릴수 있어, 아저씨. 아직까진 수습이 가능한 단계야. "
근데 내가, 그렇게 가만히 두진 않을거야. 그녀는 바닥에 핑크 다이아몬드를 던져버렸다. 그리고는 다시 미친듯이 웃기 시작했다.
" 아아, 아저씨... 일하기 싫다고 했지? 월요일을 싫어하는것도 출근때문이고? 괜찮아, 괜찮아, 민트초코. 설령 날 배신했더라도, 최고로 사랑스럽게 만들어줄게. 일 따윈 안나가도 되는, 그런 세상으로 만들어줄테니까. "
그럼 우리, 지금부터 다시 친구하는거다? 응? 그녀는 해맑게 웃으며 깜찍이를 쏘기 시작했다. 쾅, 하는 미친것처럼 시끄러운 폭약음이 귀를 때렸고, 뒤이어 큰 폭발이 금고 내부에서 일어나기 시작했다. 핑크 다이아몬드에 몇개 인화성 가스가 섞였던걸까. 그리고 그녀는 믿기지 않는 속도로 빠르게, 자기가 부쉈던 금고의 문쪽으로 뛰기 시작했다.
>>307 감히, 내 원칙을 비웃다니. 거기다 이름에 일복을 타고났다고 말해?! 머릿속에서 벌레들이 우글거리는 느낌이 든다. 누가 일복을 타고나, 누구 이름이 재미없어! 우리 부모님이 지어주신 자랑스런 이름이다! 민트초코 따위 될까 보냐. 되다 못한 그런 디저트의 이름을 갖는 순간 자신은 평생 뇌가 세척당한 상태로 살아야할 것이다. 푸, 한숨을 쉬며 감정을 진정시키고 날아오는 수류탄들을 시야에 들인다. 성가신 무기를 쓰는데, 본인까지 휘말려도 상관 없다 이거야? 열기와 긴장감에 식은땀 한 줄기를 흘리며 근처의 벽을 염동력으로 뜯어내 폭압을 막아낸다. 그리고 가스병을 던져 깨뜨리는 모습을 지켜보며 먼지와 땀이 섞인 머리카락을 거칠게 쓸어넘긴다.
“내가 살아온 31년 간, 스스로를 예쁘고, 사랑스럽고, 가련하다고 하는 여자애들 중에서 실제로 그런 애들은 없었거든. 그래도, 뭐, 친구끼리 다투곤 하잖아. 안 그래? 그런거라 보자고.”
그래, 이놈의 가스가 문제였지. 천장에 구멍을 뚫어서 분산시키는 방법도 있었지만, 확산될 가능성도 높다. 그 위험성을 알고있음에도 불구하고 일부러 구멍을 낸 이유는, 그의 능력의 본질에 있다. 평범한 염동력이라면 그 세기에 따라 능력자에게 매겨지는 강함의 척도가 달라지곤 한다. 맥워커는 그런 강함만으로 따진다면 분명 상위권에 위치하진 못하리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상위권의 염동력자들과 호각을 다투고, 심지어 한 수 접어주는 이유는, 누구보다 섬세하게 다룰 수 있다. 그 이유 하나뿐이다.
“미안하지만 죽어도 일하기 싫어도, 끔찍하게 출근하기 싫어도 아가씨 같은 녀석들이 설치고 다녀서 이 일을 그만둘 수가 없어. 내가 이짓거리를 그만두는건 빌런놈들이 세상에서 자취를 감추었을 때 뿐이거든. 그러니까 아저씨의 퇴근 시간과 허리를 생각한다면, 얼른 잡혀줬으면 좋겠어. 그리고 민트초코라 부르지마라. 분명히 말했어. 진짜로.”
의외로 속이 좁다. 그러곤 손가락이 아닌 손바닥 전체를 움직인다. 그러자 천장에 난 구멍 주변에 날아다니던 먼지가 떨어지는 것이 멈춘다. 흙먼지들이 만들어낸 윤곽은 마치 투명하고 길다란 원통이 박혀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내, 반대편 손으로 꾸욱 잡아당기듯이 허공을 긁자, 핑크 다이아몬드의 분홍색 연기들이 염동력으로 만들어낸 원통형으로 빨려들어가기 시작한다. 이내 금고 안을 가득 메웠던 연기를 전부 빨아들여 순수한 분홍색 연기만이 가득 찬 것을 보고는, 압축된 연기를 한번에 힘을 주어 발사한다. 좁은 구멍으로 빠져나온 길다란 1자형의 연기는 그대로 하늘 저멀리까지 깔끔하게 날아간다.
“아이고, 힘들어 죽겠네, 진짜로. 뛰는 것도 못하는데, 하아.”
이미 당신이 도망가는 모습을 지켜보며 길게 한숨을 짓고는 인화성 가스로 인한 폭발로 날아온 파편들을 염동력으로 쳐냈다. 그 중 몇개는 머리나 어깨에 맞아 피가 조금 흘러내리지만, 개의치 않는다. 걷는 것보단 염동력으로 날아가는 것을 택해, 빠르게 뒤쫓는다.
“저기, 월요일 아침부터 새파랗게 어린 아가씨랑 술래잡기 하고있는 아저씨 체면 좀 세워줘. 응? 그 센터에 친구들도 분명 많을걸. 근데 뭘 먹고 그렇게 빠른거야, 대체.”
아무리봐도 신속한 제압이 필요하다. 방독면도 벗어제끼고 신체 주변을 감싼 염동력에 힘을 줘 벽을 부셔가며 빠르게 쫓아간다. 중간에, 당신이 지나갈 법한 골목의 좌우 벽을 뜯어 길을 막아가며 진로를 방해한다. 무작정 길을 막는 것이 아닌, 최대한 구석으로 몰아가기 위함이다. 그래봤자 당신이 벽을 부수고 빠져나가면 그만이지만 바깥으로 나갈 경우, 이쪽이 좀 더 유리해진다. 어떻게 할 테냐, 깜찍한 아가씨.
독한 담배연기가 어두운 밀실을 가득 채운다. 천장에 조악하게 달린 낡은 조명과 정가운데 펼쳐진 철제 책상, 반듯한 의자 하나와 대조되는 비뚤게 기운 의자 하나. 50년대 턴테이블에서 흐를 법한 재즈 음악을 깔아준다면 더할 나위 없이 만족스러우리라. 그중 남자는 아니꼽게 비뚠 자리에 앉아 상대를 응시하고 있다. 잠시의 침묵. 남자는 다시 밋밋한 금반지를 낀 손가락을 까딱이며 깊게 담배 연기를 들이마신다.
" 그런데 그쪽 같은 사람은 또 처음이네…… "
겨울날 피어오르는 입김처럼 쏟아지는 연기들. 이미 냉랭해진 공기 속 이것과 그것은 별반 다를 게 없다. 남자가 가벼운 비소를 흘리며 재떨이 위로 담뱃재를 털어낸다. 번듯한 양복에 듬직한 몸뚱이. 제 능력껏 머리를 단정히 만져본 듯 싶으나 삐죽 튀어나와 흐트러진 머리칼 한두 개는 어딘가 모난 그의 성격을 그대로 내비치는 성 싶다. 남자의 미간 사이에 깊은 주름이 새겨진다. 항상 인상을 찌푸리는 습관 탓이다. 결코 만만한 모습을 보여선 안되는 자리지. 남자는 누군가에게 자신의 지위를 설명하거든 늘 그리 중얼였다. 짙은 이목구비와, 상반되게 가벼운 푸른 눈동자. 홀로 무언가를 몰골하듯 눈동자를 움직이던 남자가 다시금 피식 웃음을 터트린다.
" 아, 죄송합니다. "
남자의 태도가 양껏 거만해진다. 가볍게 뒤로 젖힌 상체와 불규칙적으로 까딱대는 구둣발. 상대의 머릿속을 열심히 읽어내려는 건방진 눈빛. 그리고 당신의 의사 따위는 고려치 않고 끊임없이 내뿜는 독한 담배 연기. 늙은 조명 아래로 연기가 희뿌옇게 들이차고 남자의 손에 들린 담배 한 대는 목구멍 곧 아래까지 몸을 태워낸 채 위태로운 호흡을 이어간다. 조용히 담배를 물고, 마지막으로 마시는 한 모금. 남자가 지독한 안개같은 연기를 삼켜내며 철제 책상 위로 담뱃머리를 짓눌러 문지른다.
" 뭐, 까짓거 하죠. 물어보고 싶은 게 뭐라고… 하셨더라? "
슬며시 올라가는 입꼬리 아래로 희끄무레한 담배연기가 뿜어져나온다. 그 사이로 형형히 빛나는 눈동자가 결코 선한 자의 것은 아니었으니, 어쩌면 악마의 유혹일지 모르리라. 붉은 벽지와 오렌지빛 조명, 여건만 된다면 남자는 흔쾌히 데킬라 한 병을 주문했을테다.
# 남자는 거대 마피아 조직의 고위인사, 상대는 마피아와 연루된 범죄를 수사하기 위해 찾아온 경찰, 기자, 혹은 피해자의 가족...? 아마도 그런 쪽! 유서 깊은 마피아 조직은 현대화를 거치며 이미지를 세탁해 평판 좋은 대기업을 운영하고 있어 범죄의 증거를 찾기 어려운 상황! 이곳은 어쩌면 취재하러온 당신의 목숨마저 위태로울지도! 편하게 이어줘!
그래서, 이게 네가 바라던 히어로의 모습이야? (불타고 있는 건물, 비명을 지르는 사람들, 울고 있는 아이. 하지만 경찰 따위는 보이지 않는다. 보이는 것은 분주히 움직이고 있는 검은 정장을 입은 사람들과 참혹한 풍경, 그리고 당신과 나뿐.) 지금이라도 멈춰. 아직 늦지 않았어. 네가 원하던 히어로는 이게 아니잖아. (슬픈 표정을 지은 흑발 금안의 남자는, 당신에게 총을 겨누고 있다.)
너무나 평화로워보이는 황실의 모습은 그저 겉보기에 불과했다. 그 일면에선 권력을 잡기 위해 치열한 암투가 있었고 그건 다음 황제의 자리에 오르게 될 황태자도 예외는 아니었다. 너무나 자비롭고 인자하며 두뇌도 명석한, 정말 너무나 뛰어난 자질을 지닌 황태자였으나 건강이 약하고 체력이 좋지 못하다는 치명적인 문제가 있었다. 황실의 대신들은 황자의 재능이 뛰어난 것은 사실이나 지금 저대로는 황제의 자리에 올라도 건강상 업무를 보지 못할테니 폐위하고 다른 이를 그 자리에 올려야한다는 이들이 있었으며, 그런 질서가 어지럽혀지는 말 따윈 절대로 하면 안된다는 이들끼리의 치열한 싸움이 있었다. 아직 피는 튀지 않았으나 언제 피향기가 튈지도 모르는 환경 속에서 황태자는 자신의 최측근과 황제, 그리고 일부 황족 이외에는 아무도 모르게 몰래 건강을 회복하기 위한 요양길에 올랐다. 서쪽에 있는 실력 좋은 마법사에게 가면 방법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실낱같은 희망을 품고서.
"황태자님! 건강이 나쁜게 아니었습니까?!"
"언제까지 제 건강이 나쁠 거라고 생각했습니까? 이제는 이런 일도 쉽사리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지금 여기에 있는 황태자는 누구인가. 그는 황태자의 최측근 중에서도 최측근이였다. 황태자의 바로 옆에서 황태자를 지키던 검이요 방패인 사내였다. 마법의 힘을 빌려 얼굴을 황태자와 똑같이 만들어낸 그는 황태자인 척, 대신들의 앞에 서 있었다. 길게 한줄기로 묶어내린 은빛 머리카락과 푸른색 눈동자. 그리고 갸름하고 기품이 흐르는 얼굴까지. 그야말로 똑같다 못해 본인 그 자체의 모습이었다. 그럼 어째서 사내가 이렇게 연기를 하고 있는가? 그에 대한 진실은 이러했다. 황태자가 요양길에 나섰다는 것이 알려지면 누군가는 시꺼먼 속을 품고 황자를 해하려 할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렇기에 황자는 자신의 목숨을 지키기 위해서, 그리고 자신의 입지를 지키기 위해 최측근인 사내에게 부탁해서 자신인양 행동하고 있어달라고 부탁했다. 어린 시절, 부모에게 버림받고 길거리를 떠돌며 굶주리고 살아갔으나, 우연히 거리로 온 황태자의 자비로 황궁에 들어와 교육을 받고, 밥을 먹으며 무술을 익힌 사내는 황태자의 명이라면 목숨도 끊을 자신이 있었다. 한가지 마음에 걸리는 것은 자신이 황태자의 흉내를 내고 있어야하니 황태자의 곁을 지킬 수 없다는 점이었다. 그나마 자신의 존재는 그렇게 알려진 것이 아니었다는 것이 천만다행이었다. 만약 자신이 알려졌다면 황태자가 있는데 그 옆을 지키는 이가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 이상하게 보이고 의심을 살테니까. 일단 사내는 어떻게든 황태자가 건강을 회복하고 돌아올 때까지 버티리라. 그렇게 다짐했다.
"손님이 찾아오셨습니다."
"들라고 해주세요."
그리고 지금까지 그는 그 누구의 의심도 사지 않고 연기를 성공적으로 해냈다. 물론 지금 황태자를 찾아온 이에게도 그게 통할진 알 수 없었지만. 아니. 어쩌면 이미 알고 있는 누군가가 찾아왔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냥 말 그대로 황자는 건강상 문제로 남들 몰래 다른 곳으로 요양을 갔고 황자에게 충성을 다하고 있는 20대 정도의 최측근이 마법의 힘을 빌려 황자인척 대리로 행동하고 있는 상황 속에서 누군가가 찾아온거야. 찾아온 이는 아무나 좋아. 다만 너무 말도 안되는 맥끊기는 아니었으면 해. 이를테면 컷!! 영화 촬영 끝났습니다라던가 그런 거 있잖아? 그런 건 사절이야. 잇지도 않을거고. 일단 이렇게 써두고 자러갈 생각이니까 혹시 이 새벽에 잇더라도 기다리지 말길 바랄게! 정말 편하게 이어도 상관없어! 아. 배경은 서양이야.
>>310 쏠 거야? (그리 말하는 자는 여상히 웃습니다. 슬픔도, 기쁨도, 후회도 희열도 그 무엇 하나 드러내지 않는. 그저 얼굴거죽 위로 잡아 당기니 웃는 체 할 뿐입니다.) 쏠 거니? 그 총으로 나를 공격해, 내 심장을 꿰뚫어 이 모든 참상을 멈출 테야? 난 네가 그러지 못 하리라는 데에 걸겠어. 그렇지만, (발 내딛습니다, 여전히 바뀌지 못 한 당신을 향해.) 여기서 멈추는 것도, 그것대로 의미가 있겠네.
>>312 ...이미 알고 있잖아. 내가 못 쏜다는 건. (당신을 바라보는 그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깊은 슬픔과, 후회, 그리고 약간의 죄책감. 당신을 보는 감정이었다.) 난 네가 늦지 않았다고 생각해. 아직은 어딘가에 내가 기억하는 네가 남아있을 테니까. 그걸 알면서도 널 죽일 수는 없어. (그저 혼자 중얼거렸다. 어느샌가 너무나 바뀐 당신을 향해서.) 하지만 네가 멈추지 않는다면, 난 너를 막을 거야. 죽일 수는 없지만, 제압할 수는 있으니까. (당신이 다가오지만 총은 거두지 않는다. 오히려 당신을 단호한 표정으로 노려보고 있다.)
>>313 (그제야 이 자의 표정에 무언가 감정이 드러납니다. 안타까워라. 가엾이 여기는 대상만이 오리무중일 뿐.) 나는 알아. 네 태도 또한, 아주 굳센 다짐의 결과물일 테야. 극악무도한 악인마저 죽이려 들지 않는 정의의 히어로. 멋지네, 이상적이야. (나는 그러지 못 했지만. 대중은 비명 소리로 코러스를 넣어준다. 네가 이걸 아름답다고 느끼지 않았으면 좋겠어.) 그렇지만 가끔은... 더이상 돌이킬 수 없는 게 있어. 그걸 빨리 깨달아. 그리고, 강해져! 방아쇠를 당겨! 무얼 하고 있니? 제압 안 할 거야?! (호통칩니다. 내딛는 발걸음마다 바람이 머릿결 사이를 파고들어 이리저리 흐트러뜨립니다. 어느샌가 양손에는 단검이 들립니다. 주무기지요.) 나는 멈추지 않아! 모든 걸 뒤엎어버리기 전까지... 히어로는 멈춰서는 안 된다고! 애초에, 너같은 애송이가 날 막을 수 있을 것 같지도 않네! (값싼 도발입니다. 어서 빨리 죽여달라는 바람의 발현.)
>>314 (감정이 드리운 당신의 표정에, 그의 눈빛에 잠시 의문이 스친다. 왜, 그리고 누구에게.) 나는... 내가 아니라, 네가 이렇게 되길 바랬어. 이상 속에 있는 정의의 히어로. (사람들의 비명 소리, 아이들이 우는 소리, 죽어가며 내는 단말마. 그런 상황에서도 자신은 할 수 있는게 고작 이것 뿐이라. 엄습하는 죄책감과 무력감에, 그의 목소리가 떨렸다.) 닥쳐. 네가 뭐라 하든 날 널 예전의 너로 돌아오게 만들 거야. (강해져라. 당신이 언제나 하던 말이다. 우스울 뿐이다. 돌이킬 수 없다면 어째서 예전처럼. 망설이던 내게 마음을 굳히게 만드는 건지. 그의 왼손에는 여전히 자동권총이, 오른손에는 리볼버가 자리잡는다.) 하지만 정말로 그렇다 해도 널 막을 거야. 히어로는 물러서지 않으니까. 그러니까 덤벼! 죽지 않을 정도로만 죽여줄 테니까! (쌓였던 분노섞인 말을 내뱉었다. 죽여달라는 당신도, 불타고 있는 주변도 전부 그의 신경을 자극했다. 그는 다가오는 당신에게 달려가며 자동권총을 여러발 쏘며 탄막을 형성했다. 급소를 일부러 피한건지, 총알은 팔다리 쪽으로 향한다.)
>>315 응. 실패했네. (당신의 바람 듣고 그리 단언합니다. 양측의 이상상 산산히 부수어버린 게 자신임을 알고나 있을까요? 다만 당당할 뿐입니다.) 이상은 그저 하룻밤 꿈이야... 꿈을 좇아 현실을 외면할지, 현실을 직시하고 환상에서 깨어날지. 난 그 중 후자를 택한 거야... (나를 무위의 무대 위로 다시 올리려 하네요.) 그런데도 나한테 다시 안대 씌울 속셈이야? 아무리 너라도 그건 못 봐줘!! (실실 웃던 웃음 어디로 가고 호승심과 전투 향한 집념이 그 자를 집어삼킵니다. 당신한텐 오히려 이 모습이 더 익숙할지도 모르겠네요. 당신의 옆에 있던 이 사람은 언제나 이랬잖아요?) 그래, 이렇게 나와야지!! (몇 발의 탄환을 튕겨냅니다. 몇 발의 탄환이 기다란 붉은 족적을 남깁니다. 일반인이라면 - 전투에 능하지 않은 여타 빌런이었다면 통증에 주저앉았을 상처 달고도 당신 향해 휘두르는 팔은 멈추지 않습니다. 절대 그만두지 않으리란 선언을 끝까지 지키려는지.) 뭐 하니? 사지는 급소가 아니야. 머리. 심장. 하다못해 폐 정도는 노려. (제 말 지키려는 듯 오른손에 쥔 단도는 정직하게도 당신의 목을 노리며 달려듭니다.) 네가 날 죽이지 않는다면, 내가 널 죽일 테야. 차라리 그게 우리한테 행복할 테니까...
>>316 모를 일이지. (현실을 부정하는 건지. 아니면 정말 확신하는 건지. 당신이 이상을 산산히 부수어도, 그것에 당당하더라도, 그는 일말의 희망을 갖고 있었다.) 사람들을 죽이고, 건물을 불태우는게 현실을 직시한 거야? 정말, 이게 히어로일까? (이상은 꿈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당신 또한 꿈을 꾸고 있잖아.) 그만 정신 차리라고! 네가 하고있는 짓이 뭔지, 똑똑히 바라봐!! (당신은 여전히 내가 알고 있던 당신이었다. 호승심 가득한 모습도, 아까의 호탕치는 모습도. 그런데 왜 지금의 당신은 그때와는 너무나 다른 건지 모를 일이다.) 이 미친놈..! 그 통증을 무시하고..! (그러고보니 잊고 있었다. 당신은 원래 그런 사람이라는 것을. 탄막이 아닌, 저격을 했어야 했는데. 이미 늦었다.) 닥쳐. 난 아무도 죽이지 않을 거야. 이 싸움에서, 둘 모두 죽지 못 하게 할 거라고. (단호하게 말했지만 당신의 말마따나, 쉽지 않아보였다. 정직하게 날아오는 단도를 고개와 상반신만 비트는, 최소한의 움직임으로 피해낸다. 단도가 목을 스치고 지나가며 붉은 실선을 목에 남긴다. 급소를 정확히 노리는걸 피해야 하면서, 상대방의 급소도 맞추면 안 되는 싸움이라니.) 네가 죽으면, 나는 행복할까? 내가 죽으면, 너는 행복하니? (당신의 말에 울컥했는지 총을 든 손과 당신을 바라보는 눈빛이 크게 떨린다.) 알지도 못하면서 급소를 노리니 어쩌니, 집어 치워!!! (결국 쌓아두었던 것이 폭발하고, 자동권총이 아닌 리볼버의 총구가 당신을 향한다. 대구경 리볼버의 탄환 두 발이 각각 당신의 허벅지와 팔목으로 향했다.)
깨끗한 은빛 머리카락을 낮게 틀어 고정하고 앞머리는 뒤로 깔끔히 넘긴, 서늘한 눈매와 푸른 눈동자를 지닌 냉철한 인상의 중년 여인이, 절도 있는 걸음으로 방 안으로 들어섰다. 어진 성품을 지녔던 황태자와는 인상이 퍽 다르지만 뜯어보면 닮은 구석이 있는 그는, 황태자의 어미이자 제국의 황제인 루도비카 알브레히트였다. 황제는 황태자로 변장한 사내를 보자마자, 경악한 듯이 얼굴을 와락 일그러뜨렸다. 일국의 황제임에도 감정이 다잡아지지 않는지 마른 세수를 하던 그는, 애써 냉엄하게 가다듬은 얼굴로, 그러나 다부지게 그러쥔 주먹을 희미하게 떨면서 입을 열어 진노가 서린 목소리로 물었다.
"오늘 아침 황태자의 부고가 전해졌거늘, 네 놈은 누구이기에 여기서 내 아들의 행세를 하고 있느냐!"
마치 황태자의 대역을 하고 있는 사내를 모르는 듯, 냉정하려 애쓰면서도 충격과 진노를 다 감추지 못한 듯한 기색의 황제였지만, 그는 이 사내를 잘 알고 있었다. 죽은 아들이 가장 신임하던 측근이라는 것도, 그가 비밀리에 요양을 떠난 스스로의 공석을 메우기 위해 대역을 맡긴 이라는 것도. 그런 이를 이런 식으로 처분하게 된 것은, 황태자의 어머니이지 한 개인으로서는 내키지 않는 일이었지만, 그는 개인이기 이전에 황제였다. 그렇기에, 아들의 죽음에 슬퍼하기 전에 그 이후의 일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황태자가 죽은 지금 제국에는 새로운 황위 계승자가 필요했고, 그를 옹립하기 위해서는 이전까지 황태자를 따랐던 이들을 정리해야만 했다. 그들을 가장 깔끔하게 정리할 수 있는 방법은, 바로 눈 앞의 사내를 황태자 사칭범이자 시해 사주범으로 몰아, 본보기로서 처형하는 것이었다. 안타까움을 느낀다 해서 무를 수 있는 일도 아니었기에, 황제는 마음을 단단히 다잡고, 근위대를 불러 명을 내렸다.
"뭣들 하느냐! 당장 이 자를 포박하라!"
그러자,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근위병들이 일제히 황태자의 모습을 한 사내를 에워싸며 창을 겨눴고, 그중 몇이 앞으로 나와 그를 포박하고자 덤벼들었다.
>>317 미안하지만 이을 수는 없을 것 같네. 일단 손님이 찾아왔다는 보고가 왔는데 그 찾아온 이가 황제다? 그런 판국에 역적으로 몰아서 죽이러 왔다? 근데 그걸 최측근되는 이는 황자가 죽었다는 것도 몰랐다? 너무 말도 안된다고 생각해. 어지간한건 다 이으려 했는데 이건 상황 자체도 정말 당황스럽네. 고로 이건 패스하도록 할게.
>>319 아이고, 황제가 시종에게 손님이 왔다고 이르라고 하고 보냈다는 서술을 하려고 했는데 깜빡했네... 그렇지만 황태자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는건 황제나 측근이나 마찬가진데 당연히 황제이자 황태자 엄마인 루도비카한테 먼저 알리지 않을까? 아침에 들어온 부고고 말이야.
자기에게 절대적인 존재가 하루아침에 사라졌다고 하면 어떤 심경일지, 그런 마음으로 어떤 대처를 할지 되게 기대했는데, 원하지 않는 상황이라니 아쉽네... 미안하기도 하고. 그래도 좋은 하루 되길 바라
' 오늘의 날씨입니다. 봄이 찾아오며 따스하고 화창한 날들이 이어지고 있는데요. 오늘 역시 어제와 마찬가지로 일교차는 조금 크겠으나 오후에는 최대 21도까지 기온이 오르며 완연한 봄날씨를 만끽할 수 있겠습니다— '
세상은 평화롭다. 하루하루를 어렵게 버텨가는 이들에게는 야속하게도 말이다. 해가 뜨고 해가 지면 내일이 오는 것이 당연하고 또 당연한 이 세상. 당신은 아마 스물 둘셋을 먹은 창창한 청년이었던가. 벚꽃의 꽃말은 중간고사— 라는 우스갯 소리를 중얼이며 얼마 남지 않은 시험을 위해 도서관으로 향하고 있었을지도, 휴대전화를 만지작대며 아르바이트의 따분함을 죽이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잔뜩 몰려온 피로감에 에너지 드링크를 연달아 마셔대고 있었을지도. 요컨대 당신은 지루하고 따분하나 변함없는 일상을 살고 있었으리란 뜻이다.
" 저, 저기! "
그런 평범한 당신에게, 누군가 말을 건다. 당신과 마찬가지로 앳되어보이는 젊은 여자다. 숫기가 없게 생긴, 묘하게 색채가 옅은 여인은 무언가를 우물쭈물 망설이며 당신의 옷깃을 당겼다. 그리 대담하게 낯선 이의 옷깃을 끈 여자는 한참, 아주 한참이나 뱉을 말을 고민하다 겨우내 제 입을 열어냈다.
님, 맨날 여기서 뭐 합성하고 계시네요? 뭐 만들고 계세요? (당신의 곁으로 다가온 유저는 철갑옷을 입은 기사 클래스로 보이지만, 당신의 대답이 돌아오기도 전에 인벤토리에서 피리를 꺼내든다. 그리고 익살맞은 리듬의 연주를 하다, 당신의 합성이 언제나처럼 실패하자 삐루루루룩, 하고 처지는 음악소리를 낸다.) 아깝당.
떠올릴 수 있는 기억 중, 가장 오래 된 것은 텅 빈 폐허의 풍경이다. 그곳엔 아무도 없었다. 나는 그것이 당연한 줄 알았고, 그곳은 내게 이 세상의 전부였다. 그러나 그것은 당연한 것이 아니었다. 그 사실을 알아챘을때엔, 내가 가진거라곤 오직 끝없는 공허뿐이었다. 그동안 내가 알던 당연한것은 당연한 것이 아니었다. 마땅히 있어야 할 부모도 내겐 없고, 추위와 비, 벌레 따위를 피할 수 있는 아늑한 집도 없었으며, 당장 끼니를 해결할 수단조차 내겐 없었다. 공허함, 무력감, 그리고 이어지는 표독스러운 절망. 울어도 상황이 달라지는건 없었기에 나는 울지 않았다. 그리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내가 무엇을 할 수 있지? 시야에 들어온 것은 내 두 주먹이었다. 믿을 수 있는건 내 두 주먹 뿐이었다. 이 두 주먹으로 모든것을 쟁취하리라. 내가 가지지 못한 모든 것들을. 이것은 하나의 신념이 되었고, 나는 그대로 행동하기 시작했다. 어떤 수단을 쓰든간에 반드시 이뤄내리라. 살아남아서 내가 가지지 못한 모든 것들을 강탈하리라.
처음엔 소매치기로 시작했다. 물론 그 때엔 기술이 좋지 않아 쉽게 걸리기 일쑤였다. 그 때마다 두 주먹으로 해결하려고 덤벼들었다. 절대로 물러서지 않았다. 뭐하는 짓이냐며 덤벼오는 멍청이들에게 주먹을 날리고, 잡아 던지고. 꺾고, 조르고, 급소를 찔렀다. 그러나 그 마저도 잘 되지 않는 날이 많았다. 나는 어린 아이였고, 체격은 왜소했으니. 그렇게 한참을 두드려맞으면 분노가 들끓었다. 무력한 내 자신에게, 아직 한참 미숙한 내 두 손에. 그리고 나는 바로 다음 타겟을 찾아 나섰다. 그리고 또 싸우고, 두드려맞고, 그렇게 기절하며 차가운 돌바닥에 쓰러져 체력이 돌아올때까지 선잠을 잤다. 지갑을 훔치는데 성공한 날은 우선 배가 터지게 밥을 먹고, 그렇지 않는 날에는 차갑고 새카만 벽돌같은 빵이라도 훔치며 어떻게든 연명했다. 이걸 훔치는 이유는, 가장 싼 빵이기에 죽어라고 도망치면 포기하는 녀석들이 많았기 때문이었고, 무엇보다 나 자신을 채찍질하는 좋은 수단이 되었기 때문이다. 소매치기에 성공하고 남은 돈으로는 마약을 샀다. 비싼 가격으로 호구잡혀도, 닥치는대로 긁어모았다. 그리고 하수도 근처에 사는, 중독자 중에서도 밑바닥으로 떨어진 놈들에게 가져다 팔았다. 가격은 무조건 내가 산 금액의 두배였다. 그리고 많은 것을 깨달았다. 사람은 희망을 가지면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 설사 그것이 지옥으로 굴러떨어지는 낭떠러지라고 하더라도. 그들에겐 아무도 마약을 팔지 않았다. 왜? 돈을 구할 방법이 없는 쓰레기같은 족속들이니까. 그들은 마약굴 근처에서 남은 쓰레기봉투를 뒤지며 어떻게든 마약 부스러기를 찾아내어 몇분 단위로 연명하는 그런 인간들이었다. 그러니 내가 마약을 보여주며 가격을 제시하고, 서비스라며 살짝 뿌려주자, 어떻게든 돈을 구해왔다. 감옥으로 직행했는지, 계획이 잘 풀리지 않아 죽었는지, 보이지 않게 된 녀석들도 더럿 있었지만 그건 내 알 바가 아니었다. 나는 틈새시장을 이용해 고객을 찾아냈고, 돈으로 돈을 벌 수 있다는걸 깨달았다. 그러나 이것도 성에 차지 않는 금액이었다. 그들은 수가 한정되어 있고, 가져다 바칠 수 있는 금액도 한정되어 있었다. 고작 이런것에 만족하려고 여태까지 발버둥치며 살아온게 아니란 말이다. 쯧, 하고 혀를 차고, 손톱을 조금 깨무는 버릇. 그래, 조금은 신경질적이게 된 것이 이때부터겠지. 우선은 이 방법이 내가 제일 많은 돈을 벌 수 있는 방법이었다. 여유자금이 생길때까지 돈으로 돈을 벌고, 소매치기를 해서 또 다시 돈을 번다. 체력을 위해 배가 터질때까지 밥을 먹고, 훈련을 반복한다. 그렇게 나이가 드는걸 기다려야 했다. 돌이켜보면 지루하고, 초조한 시기였다.
마침내 시간이 흘러 조금 더 나이를 먹었을때. 키가 훌쩍 컸고 주변의 어른들과 비슷한 키를 가졌을때. 이젠 소매치기정도는 걸리는 일이 없었다. 지갑을 훔치는것 정도는 너무도 간단한 일이 되었다. 쓰레기들에게 계속해서 마약을 팔며 제법 자금을 모아두었다. 물론, 위험한 순간이 없던 건 아니다. 쓰레기들에게 마약을 갈취당할뻔 하고, 완전히 얕잡아보인적도 있었다. 그래서 난 이른 새벽을 노려 제정신이 아닌 놈들을 완전히 뭉개놓았다. 그 과정에서 몇번이나 찔리고, 물리고, 많은 상처를 입었지만, 날 감히 얕잡아 보던 놈들을 전부 때려죽였다. 그나마 상황판단이 조금 될 정도의 지성이 남은 놈들는 내게 두번다신 대들 수 없게끔, 상하관계를 확실히 주입시켜주었다. 또 한번은 내가 마음에 안들었는지, 어떤 조직의 말단으로 추정되는 놈이 덤벼온 적도 있었다. 마약을 팔고, 뒷골목을 헤집던 난 당연히 골칫거리였겠지. 그녀석은 날 만만히 보고 덤벼왔던 모양이지만, 쉽게 당해줄 생각은 없었다. 여전히 내가 믿는건 오직 내 두 주먹 뿐이었고, 하루도 훈련을 게을리 한 날이 없었다. 완전히 때려죽이고 난 다음, 난 이것이 기회라고 생각해 그 자리에서 녀석의 적대 조직에게 찾아갔다. 그리고 그에게 큰 돈을 벌어다주겠다며 내 계획을 말해주었다. 전쟁, 전쟁이었다. 이권다툼을 하던 조직이니 언제 전쟁을 시작해도 이상하지 않았다. 내가 조직원이라면, 습격을 받았으니 명분은 충분히 된다. 내가 네 적들을 전부 죽여주겠다. 그러면 크나큰 돈이 네게 굴러들어온다. 설령 내가 죽더라도, 전쟁의 주도자는 나라고 하면 되지 않겠나. 네게 손해가 될 것은 단 한푼도 없다. 지금 생각해보면 엉망진창인 말이었다. 하지만 운 좋게도 그들은 내 계획에 찬동했다. 그리고 이것은 기회였다. 크나큰 기회. 나는 그 길로 놈들의 아지트로 찾아가 전부 때려죽였다. 꽉 쥔 주먹으로 턱을 으깨고, 팔을 부러트리고, 눈을 찔러대며 그대로 괴멸시켰다. 고작 9명밖에 상주하지 않는 작은 지부였기에, 어떻게든 성공할수 있었다. 피를 잔뜩 뒤집어 쓴 채로 조직의 보스와 대면한 난, 그 자리에서 행동대장이라는 중견 간부의 위치를 부여받았다. 이것으로 나는 기회를 내것으로 만들었다. 고작 9명이다. 겨우 그것만으로 나는 조직에 들어감과 동시에 내 몸을 지킬 수 있게 되었다. 세상에 슈퍼히어로는 더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고작 9명을 때려죽였다고 무엇이 변하겠는가? 마피아의 가장 위험한 점은 압도적인 그 숫자에서 나온다. 개개인이 전부 저명한 싸움꾼 급의 실력을 가지고 있진 않다. 그러나 그들은 수백명씩 존재하고, 언제 어디에서나 내 목숨을 노릴 수 있다. 정신 차려라, 네가 9명을 이긴다고 해서 조직 하나에 맞설 순 없다. 그러나 이젠 상황이 다르다. 나 또한 조직을 등에 업었으니, 남은건 내 기량을 전부 펼쳐보이는것. 이 남자의 탐욕스러운 아가리에 이득을 쑤셔넣어보이겠다. 그리고 그 배를 갈라서, 모조리 다 내것으로 만들것이다. 겨우 중견 보스 자리를 하나 얻자고 여태까지 발버둥쳤을리가 없잖느냐.
또 다시 시간이 흘렀다. 어느덧 키는 192cm를 훌쩍 넘었고, 몸무게는 90kg가 넘어갔다. 근육도 단단하게 붙었으며, 난 이 조직의 보스가 되었다. 그래, 이전에 얘기했던 그 전쟁에서 나는 계속해서 승리를 거두었다. 몇번이고, 몇번이고 칼에 찔리고, 놈들의 턱을 깨부수면서, 내 몸에서 흐른건지, 뒤집어쓴건지 알 수가 없는 피로 점철된 내 모습을 보고 사냥개라는 이명을 받았을 정도로. 그렇게 난 내게 충성하는 부하들을 모으며 내 입지를 다졌고, 조직 내부의 불만과 권력다툼을 교묘히 이용해 내전을 일으켜, 모조리 독식하는데에 성공했다. 그레이 하운드 컴퍼니. 나는 여전히 돈으로 돈을 불리며, 그토록 바라던 안정된 생활을 손에 넣었다. 회사의 경영 방침은 단 하나, 프리미엄. 겉으로는 무역회사기에, 싸게 원자재들을 구매하여 품질좋게 가공한 뒤 비싼 값으로 판매한다. 그레이 하운드의 무기들과 경호 업무, 중금속과 하다못해 식자재까지. 어느 것 하나 돈벌이가 되지 않는게 없었다. 그리고 뒤로는 어떤 의뢰든 반드시 수행해내는 킬러집단으로써 자리잡게 되었다. 그리고 그토록 바라던, 내게 존재하지 않는 가족들도 손에 넣었다. 사랑스런 아내, 보물과도 같은 딸. 그러나 내 마음 속 깊은곳의 공허함은 여전히 채워지지 않은 기분이 들었다. 자꾸만 뭔가를 놓치고 있는 그런 기분이었다. 그래, 어쩌면 그 일이 일어나고야 말 것이라는 하나의 흉조였을지도 모른다.
" 다녀왔어. "
이상하다. 유달리 집이 어둡고, 말소리도 들려오지 않는다. 하다못해 인기척도 느껴지지 않는다. 의아한 마음에 향초를 들고 집 안쪽으로 들어섰더니, 그곳엔 무참하게 찢겨진 가족의 시체가 있었다. 큰 충격을 받았고, 가슴은 도륙이 나 찢어지는것처럼 아파오는데, 어느 순간부터 아픈 느낌이 들지 않았다. 그리고 여전히 눈물은 한 방울 조차 흘러내리지 않았다. 울더라도 바뀌는게 없다는걸 잘 알기 때문일까? 아니, 그게 아니다. 이 과분한 행복이 내게 어울리지 않는다는걸 처음부터 알고있었기 때문이다.새로운 목표를 세우고 빨리 다음으로 넘어가야 한다. 우선 누가 이랬는지를 찾아내어, 그와 관련된 인물들을 모조리 죽인다. 머리를 한쪽으로 쓸어넘기며 생각했다. 그러나, 그런다고 뭔가 달라질까? 지금, 이 순간에. 새로운 목표를 세우는게 정말로 의미가 있을까? 태어날때부터 가진거라곤 두 주먹밖에 없었고, 이게 내가 믿을 수 있는 유일한 것이었다. 수 많은 피를 이 손에 묻혔으나, 정작 가족조차 지키지 못했던, 드디어 쟁취한 이 행복도 지키지 못했던 이 두 손을 어떻게 계속해서 믿을 수 있겠나. 내게 남은건 이제 아무것도 없다. 살려고, 조금은 행복해 지려고 발버둥쳐왔는데, 더이상 그 어떤것도 의미가 없잖은가. 공허함. 세상이 내가 알던 당연함과 다르다는걸 깨달았던 순간부터. 이건 예견된 수순일지도 모른다. 공허함만이 내가 유일하게 가질 수 있었던 것이다. 나는 이 참사를 뒤로 하고, 집 밖으로 나가 경찰서로 향했다. 도착해서는 이미 늦은 한밤중이었지만, 한명이 눈에 띄었고, 다가가서 말을 걸었다.
" 나다. 전할 말이 있어서 찾아왔다. "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어 불을 붙였다. 매캐한 연기를 자욱하게 내뿜으며, 나는 머리를 한쪽으로 쓸어넘겼다. 아직 해야 할 일이 있다.
>>325 외신 뉴스나 위키피디아 같은 잡다한 것들. 우리에 대해서 말하는 것은 인터넷 논객이나 격식있는 외교관이나 도긴개긴이다. 무능한 중앙정부, 군벌화하는 마약 카르텔들-아니면 마피아던지-, 피로 피를 씻는 조직간 항쟁, 신체 일부가 사라진 채 고가도로에 매달린 시신들, 정의로운 시장과 경찰관은 가족까지 무참하게 살해당한다. 살아남은 사람들은 마피아와 유착하고, 묵인하고, 쥐꼬리만한 월급에 플러스를 얹기 위하여 뇌물을 받고 또 뜯어낸다. 우리가 사는 이야기는 저 먼나라 사람들에 의하여 건조한 문장과 문단으로 정제된다.
한때 강한 정의감을 가지고 경찰을 꿈꾸던 소녀. 유학까지 다녀온 나름 엘리트였지만, 결국 현실에 굴복하여 부패경찰이 되었다는 이야기는 흔하다 못해 공기와도 같은 이야기라 누구도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바로 내 이야기다. 정의롭고 선하게 사는 것은 높은 계단을 오르는 것처럼 힘들고 지치는 일. 하지만 난간을 타고 미끄러져 내려가는 것은 너무나 즐겁고 짜릿했다. 자칭 정의의 사도들이 손가락질한다면 내게도 항변할 거리는 차고 넘쳤다.
마피아 간부와의 식사 자리에서 웃으며 했던 '잘 부탁드립니다' 한 마디는 황금 열쇠나 다름없었으니. 나는 마침내 저축이라는 걸 할 수 있게 되었다. 돈이 없어 죽어가던 언니는 마피아들이 세운 병원에서 싼 값에 치료받게 되었다. 한번 신념을 버린 대가로 나는 모든 결핍을 해소했다. 두번째부터 죄책감이란 남아있지 않았다. 그날로 길거리의 시체나 정체불명의 하얀 가루들, 인신매매의 타겟이 된 여자들은 내 관심사가 아니게 되었다. 그리고 열정이 넘치던 시절 밤잠을 줄이며 작성하던 수사 자료들을 모조리 드럼통에 넣고 불살라버렸다. 그들이 그러기를 원했기에.
우리 경찰 사이에서 일명 킹핀이라 불리는 남자는 모르는 사람이 없는 그레이 하운드 컴퍼니의 보스 되시는 분이다. 내가 접촉할 수 있는 마피아들 중에서 가장 높은 선의 사람이기도 했다. 그리고 내가 고개를 젖혀야 눈을 마주칠 수 있는 무시무시한 거한인데, 권총에 야경봉에 테이저까지 휘둘러도 내가 싸워서 이길 수 있을까- 하는 헛생각이 떠오르곤 했다.
"킹핀."
하던 전화를 마무리하고 안경을 고쳐쓴다. 테가 크고 동그란 안경은 경찰서 앞 가로등 불빛을 받아서 윤이 났다.
"흔히 있는 일은 아니군요. 여기까지 직접 행차하실줄은."
나는 두 손을 모으고 친절한 민중의 지팡이같은 미소를 지어보인다. 실상은 권력에 복종하고 기생하는 샤일록의 웃음이나 다름없는 것이었지만. 이 남자는 날 어떻게 생각할까. 도도한 척은 다 하더니 뼈다귀를 물려주자 금세 엎드려서 꼬리를 치는 계집? 정말 그렇다 해도 나는 할 말이 없었다.
(노움으로 여겨질 법한 뾰족 솟은 귀와 작은 키, 그리고 부스스한 흰색 머리칼. 앳되고 차가워보이는 인상 덕분에 소년인지 소녀인지 분간하기가 쉽지 않다. 여행자 술집에 있는 이들과 다른 점이라고 한다면, 조금 펑퍼짐한 사제복을 입고있다는 점일까. 잠시동안 당신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다 가볍게 목례를 해보였다.) 갑작스럽게 말을 걸어 죄송합니다. 실은 같이 의뢰를 맡아줄 호위를 구하고 있어요. (왜 당신인지는 굳이 말을 꺼내지 않는다. 단지 묵묵히 대답을 기다리며 부담스러울 정도로 바라볼 뿐이다.)
사방이 사이렌의 불빛과 굉음으로 소란스럽다. 높디 높은 고층 빌딩의 아랫편은 분주하게 대피하는 사람들과 그들을 통제하려는 이들이 뒤섞여 아수라장이 된 지 오래. 도시의 불빛은 꺼지지 않는다고 한다만 이건 꺼지지 못한 게 아니라 불장난이 일어난 정도가 아닐지— 싶은 마음이다. 바닥부터 터져오르는 카메라 플래쉬와 무어라 외치는건지 알 수 없을 인간들의 목소리. 저 거리에서 형체는 제대로 보이는걸까. 특종을 놓치고 싶지 않은 거대 언론사들의 발악이라고 생각해야할 것이다. 달빛이 스포트라이트처럼 쏟아지는 이 빌딩 옥상에서 마주한 당신과 여자. 그냥 여자는 아니고, 아마도 미친 여자.
" 있잖아, 나, 히어로가 하고 싶어! "
제 뺨에 튄 핏자국을 문질러 닦아내며 그 미친 여자가 해맑게 외쳤다.
*
혼란과 공포의 2031년을 기점으로, 세상은 [이능력]의 출현 이전과 이후로 나뉘어졌다. 출현 전의 세상은 당신 모두들이 알고 있는 그 평범하고 따분한 세상. 출현 이후의 세상은, 수 천년에 걸쳐 배출된 현자들의 귀중한 도덕적 가르침들이 개거품으로 사라져버린 절망의 시대라 할 수 있겠다. 정확히 2021년 12월 31일 정각 12시. 전세계 20%의 인구가 이유를 모를 발작을 일으키며 폭주했다. 폭주를 겪고도 사망하지 않은 인원들에게는 똑같은 후유증이 남게 되었는데, 그게 바로 전세계적 뜨거운 감자로 떠오르게된 [이능력]의 등장인 것이다. 인간의 과학력과 논리로는 설명할 수 없는 능력. 누군가는 불을 뿜고, 누군가는 물을 만들어냈으며, 누군가는 중력의 법칙 따위는 개무시한 채 하늘을 떠다닐 수 없었다. 인류를 지배하던 법칙이 무너지던 순간. 인류가 세운 법칙 역시 연쇄적으로 붕괴하기 시작했다. 쉴 새 없이 터져나오는 이능력을 이용한 범죄 보도, 이능력자들에 대한 차별과 차별 범죄, 한순간 인류에게서 '다른 낯선 존재'가 되어버린 그들은 혼란에 빠지고야 말았다. 기존의 인류도 마찬가지. 그들을 현존해오던 인류와 동족으로 취급해도 되는가? 라는 논제까지 불거졌을 수준이니 할 말이 더 있겠는가. 아무튼, 따분한 이야기는 그만 멈추고. 그렇게 이능력이 등장하고 십오년 뒤, 세상은 드디어 정비되어 안정을 찾기 시작했으니 이능력 범죄자를 빌런(villain), 그들을 전문적으로 수사/체포하며 치안을 수호하는 이들을 히어로(hero)라 부르게 되었다.
눈 앞의 여자는 수 백건의 범죄를 저지른 분류 등급 S급의 빌런. 살인과 테러가 심심치 않게 섞여있으니 당장 체포한다면 세 달도 채 지나지 않아 사형이 내려질 운명 . 세 달도 적게 쳐준 것이다. 그녀의 체포는 모든 언론사가 개 떼처럼 달려들 특종 중 특종이니 이런저런 취재 요청으로 이능력특별재판이 차일피일 미뤄질 게 뻔했다. 본래 특별재판은 대개 한 달 내외로 결판이 난다는 사실을 생각한다면 '그녀'가 얼마나 사회적으로 시끄럽고, 공포스러우며, 집중된 존재인지 알 수 있으리라. 아니, 그럼 저 여자 하나가 수 백건의 범죄를 저지를 동안 히어로들은 뭐했냐고? 한 사람당 하나의 이능력을 가지는 것이 레귤러, 두 개를 이레귤러로 취급하는 이 시대에 확인 된 것만 무려 다섯 개의 이능력을 가진 저 괴물을 어떻게 잡아쳐넣는단 말인가.
" 힘들까? "
여자가 해맑게 웃었다. 히어로가 되고 싶다는 그 가증스러운 말이, 장난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히어로 당신이라면 무어라 말하겠는가? 물론 죽어간 동료들을 생각해 분노를 담아 그녀를 '즉결심판' 하려 해도 좋을 것이다. 어차피 여자에 대한 사형 선고는 뻔하디 뻔한 결말. 사회적으로 조금 논란은 될지 몰라도 국민 대다수는 그녀를 당장 죽어야할 인간 폐기물쯤으로 여기고 있었으니 오히려 당신을 옹호하는 여론이 더 거셀지도. 뭐, 모든 이야기는 당신의 시도가 성공한 뒤의 이야기지만. 재차 말하지만 여자는 확인된 것만 다섯 개의 능력을 가지고 있다. 즉 확인되지 않은 능력이 더 있을 수도 있다는 이야기. 아마 하나, 내지는 두 개의 능력을 가지고 있을 당신이 덤빈다면... 그래, 여기까지. 당신은 아마 히어로 기관의 간부까지는 아니겠지만— 어느정도 촉망받는 인재일 것이다. 이 나라를 넘어 외신들도 주목하고 있는 '그 여자'와의 협상 자리에 파견된 게 당신이니까! 웬만히 믿음이 가는 인간이 아니고선 보내기 힘든 자리일 것이다. 그러니 당신은 히어로로서 어느정도 출세가 보장된, 윗분들의 귀여움을 받는 실력 있는 사람이겠지. 뭐, 아닐 수도 있겠지만. 희생 당할 게 뻔하다는 이유로 총알받이처럼 내던져진 애물단지일 수도, 독불장군처럼 막나가는 성격에 의해 갑작스레 끼어들어 난입하게 된 열혈 히어로일 수도 있다. 아니면... 오늘 순찰 당번에 걸려서 재수없게 끌려왔을 수도? 아무튼 당신은 그런 사람이다. 당장 "히어로 시켜줘!" 라는 생떼 같은 요구를 함부로 응할 수 있거나 응하지 못할, 히어로 아무개씨. 당신은 이 상황을 어떻게 타파할 것인가?
" 내가 여태 잘못 살아온 건 알아. 회개 하고 싶다는 그런 이기적인 생각은 아니고— "
여자가 한참이나 머리를 굴린다. 적절한 단어가 생각나질 않았다. 이거, 면접이라도 보는 기분인데! 여자는 해맑게 생각했다.
" 한 번쯤은 정의의 히어로로 살고 싶달까... "
멋지잖아? 정의를 위해 싸우는. 사랑을 모르는 당신이 불쌍해요! 따위의 대사를 던지는 히어로 말야! 아무래도 여자는 마법소녀 놀이가 하고 싶었던 모양이다.
굳이 그녀를 만나기 위해 경찰서로 찾아간건 아니었지만, 그녀가 눈에 띄었다. 언젠가의 식사자리에서 잘부탁드립니다, 라고 말 하던 그 부패경찰이던가? 그게 아니라면, 단순한 연락책 인부에 적혀있던 여자던가? 기억이 꽤 혼탁하다. 언제라도 냉철한 판단력을 잃지 않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지만, 지금은 그렇지 못하다. 흐릿한 시야가 눈에 들어온다. 매캐한 담배연기가 자욱하게, 그러면서도 한 송이의 꽃처럼 피어오른다. 기분이 별로 좋진 않았다. 하지만 계속해서 생각해야했다. 중요한 것, 그리고 중요하지 않은 것을 구분해내야했다. 지금 내게 가장 중요한건 무엇이지? 그래, 복수다. 철저하게, 그리고 파괴적으로. 이 도시를 전부 부숴버리는것. 그것 하나만을 바라볼 수 있다면, 그리고 그 끝에서 새빨갛게 불타오르던 태양이 지평선 너머로 추락하는것처럼, 내가 저 절망 아래로 끝없이 빠져들어간다고 하더라도. 어차피 내게 남은 것은 지독한 공허뿐이다. 그 무엇도 이젠 내 손아귀에 남아있지 않아. 나 자신의 마음마저도. 길게 담배연기를 내뱉었다. 그러면 그 다음으로 중요한것은? 그녀가 나를 부른다. 그녀는 나를 알고 있다. 나 또한 그녀를 알고 있다. 그녀의 테가 큰 안경은 윤이 났고, 친절해보이는 미소를 짓고 있었다. 메마른 입술을 떼자 찌직, 하는 거슬리는 소리가 귓가에 들려오고, 선홍빛 핏방울이 입새에 방울졌다.
" 제안을, 하나 하지. "
입가에서 나오는 내 목소리는 지극히 메마르고, 건조했다. 늘 듣던 계산적인 목소리였다. 자그마한 체구의 그녀를 내려다보며 눈을 몇번 깜빡였다. 그리고 가만히 쳐다보고, 입새 사이로 흐릿한 담배연기를 내뱉으며 뜸을 들였다. 네 동그란 안경테가 빛을 받아, 붉은빛 자욱이 번져왔다. 그녀는 그렇게 높은 위치의 인물이 아니고, 나는 그녀보단 높은 인물이다. 그레이 하운드 컴퍼니의 보스니까. 내 쪽에서 매달리는듯한 태도를 취하는건 금물이다. 얕보이면 물어뜯긴다. 실제로 나는 지금 목덜미를 물린것과 다를 바가 없는, 상처입은 짐승이니까. 내 쪽에서 얘기하는 제안은 분명히 네게 자극적이겠지. 생명의 위협을 느낄수도 있을것이고, 권력욕에 취해 야망을 불태울수도 있다. 그도 아니라면 어떤 일거리인지 생각해볼법 하겠지. 다양한 생각은 곧 혼란으로 이어지고, 그때에 꺼내는 달콤한 제안. 오히려 너무 깔끔해서 찝찝할정도의 제안. 거기서 신뢰를 사면 된다.
" 2억 달러를 가지고 싶지 않나? "
2억 달러. 그 누구도 꿈꿔보지 못했을, 가히 천문학적이라고 할 수 있는 금액. 이 돈이 있으면 말 그대로 무엇이든 할 수 있다. 개인이 꿈꾸는 선에서는. 아픈 가족에게 최상의 의료 서비스를 제공하면서, 돈 걱정이라곤 없이 지낼 수 있다. 커다란 집, 스포츠카, 화려한 옷, 무엇보다, 하루하루 배 곯지 않고 죽을때까지,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살아갈 수 있다. 이걸 어떻게 제공하냐고? 간단하다. 내 회사의 주가 총액이 2억이니까. 회사를 경매로 팔기만 하면 된다. 내 입지를, 내 회사를. 아니, 내가 키운 내 조직을 원하는 녀석들은 굳이 이 도시가 아니더라도 가득하니까. 이 빌어먹을, 쓰레기 같은 도시가 아니더라도. 경매로 들어가기만 하면 경쟁이 붙어 그 두배, 잘하면 세배까지 얻을 수 있다. 뭣하면 지금의 내 자리를 그녀에게 주어도 괜찮겠지. 그녀가 사업에 능력만 있다면, 범죄와는 완전히 손을 떼고 다른 지부를 차린 뒤, 그곳을 본부로 해 양지에 발을 들일 수도 있다. 그게 아니라면 돈만 챙긴 뒤 하와이같은곳에서 대부호의 삶을 사는것도 좋겠지. 그러나, 오히려 너무 조건이 좋기에 무슨 일을 하자고 할 지 감이 잡히지 않을 수도 있다. 뒤끝이 좋지 않은걸 경계하거나, 이용당하는걸 꺼릴수도 있겠지. 나는 천천히 다 피운 담배꽁초를 바닥에 던지며, 부드럽게 장갑을 벗었다. 흉터와 굳은 살 투성이인 손. 그것을 물끄러미 보았다. 이것 만이 내 전부였고, 오롯이 내가 믿을 수 있는 것이었는데. 입에 머금은 담배연기를 뱉었다. 감상에 빠질 시간은 없다. 오른손에서 반지를 빼내어 그녀에게 건네었다.
" 내 도장이다. 통장에 7천만 달러가 있다. 그걸 가지고 스위스로 향하면 꺼내줄거야, 물론 전부 현금으로. "
눈을 몇번 깜빡였다. 이제 더 뜸을 들이는건 오히려 독이다. 미끼는 그녀의 손에 쥐어졌고, 이건 현실로 다가왔다. 이제 물고기를 낚을 차례다.
" 날 도와주면 마저 2억 달러를 주겠다. 그건 선금으로 네게 주는거고. 자네의 대답을... 듣고싶군. "
가만히 그녀를 바라보며, 새로운 담배를 꺼내어 입가에 물었다. 그리고 그녀에게 성냥곽을 건네었다. 이것으로 난 그녀에게 모든 선택권을 주었다. 결정은 오롯이 그녀만이 할 수 있겠지.
표정은 웃되, 안색이 창백해진다. 거울을 보지 않아도 알 수 있다. 킹핀의 얼굴이 나의 얼굴을 비추는 거울과도 같았다. 몸에 힘이 풀려 서로 맞잡은 두 손이 가슴께까지 슬금히 내려갔다.
2억 달러. 내가 알기론 그레이하운드 컴퍼니를 매각하면 그 정도의 값이 나온다. 도와주면 회사를 주시겠다구요. 예. 퍽이나 그러시겠습니다. 이건 돈을 주겠다는 말이 아니다. 조금 귀찮은 일을 할 건데 네가 전부 책임을 떠안고 죽어라. 뭐 이런 뜻일게 분명하다. 거절하면 병원에 있는 네 언니가 어떻게 될지 모른다는 말은 할 필요도 없었다.
어디서부터 무엇이 잘못된거지? 지나간 반 년어치의 시간을 되돌려보았다. 컴퍼니의 사업장을 건드린 적은 없었다. 컴퍼니의 직원을 체포하거나 귀찮게 굴지도 않았었다. 병원비가 밀린 적도 없었다고! 이용가치가 떨어졌다는건가? 다른 패밀리에 제물로 넘겨? 불길한 생각은 들불처럼 번져갔다. 수습할 수가 없었다. 2억 달러라는 불씨는 수소폭탄만큼의 위력을 가지고 있었다.
"킹...핀..."
"혹시 제가 뭐라도 잘못한 게 있다면...."
내 인생 여기서 허무하게 종치나? 수많은 죽음을 보았고, 죽음은 공평하지도 합리적이지도 않다는 사실 정도는 이미 알고 있다. 하지만 주님. 왜 하필 지금이란 말입니까? 제가 앞으로 살아갈 많고 많은 날 중에 하필 지금! 눈을 떠보니 나도 모르게 다리를 굽혀 무릎을 꿇고 있었다. 동그란 거랑 네모난 거를 받은 것 같은데, 그게 뭔지 눈에 들어오지도 않고 날벼락 앞에서 중요한 것도 아니었다.
"뭐든지 할게요. 살려만 주시면 시키는 일은 다 할게요! 저 아직 죽고 싶지 않아요!"
죽음 앞에서 애걸하는 사람은 다 똑같더라. 그들의 진부함을 비웃던 때가 나에게도 있었다. 그런데 그 상황을 직접 맞닥뜨리지 정말 판에 박은 것처럼 이런 말 밖에 나오지 않았다. 비굴하다. 하지만 그게 무슨 대수냐.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낫다고 했다. 살아남을 수 있다면 킹핀의 발도 햝을 각오가 내게는 있었다. 이 빌어먹을 도시에선 그 정도 각오 없이는 하루도 살 수 없었다. 특히 나같은 소시민에게는 더더욱 말이다.
무슨 제안을 하려고 2억 달러라는 폭탄을 던졌는지 짐작조차 할 수 없었지만, 나는 한다고 해야 했다. 당장 킹핀의 심기를 거스른다면 허리가 거꾸로 접혀 죽지 않겠는가?
"저희...저희 잘 지내고 있었잖아요..."
"저번 컨테이너에 사람 실어왔을 때 섞여있던 기자 나부랭이도 제가 찾아드렸었고 또...."
뭐, 킹핀에 대한 세간의 인식은 이 정도였다. 피도 눈물도 없는 사냥개. 사람들이 내면을 들여다보기에 그는 너무 높은 곳에 있었으니까. 그가 가진 마음 속의 공허란 아무래도 좋은 일이었다.
그녀의 표정은 웃고 있었지만, 안색은 창백해졌다. 애석하게도, 그녀는 패닉에 빠진 모양이었다. 보수로 제안한 2억달러는 그녀의 의욕을 불러일으킨게 아닌, 생존 욕구를 불러일으킨것같다. 혹시 뭐라도 자신이 잘못한게 있다면, 그리고 다리를 굽혀 무릎을 꿇고. 뭐든지 하겠다며, 아직 죽고싶지 않다는 말을 하기 시작했다. 뻔했다. 늘상 봐오던 목숨을 구걸하는 행동들.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을 전부 내어줄테니 제발 살려만 달라며. 합리적으로 보면 그것이 맞았다. 살아 있어야 돈을 쓰든, 가족과 시간을 보내든, 밥을 먹든, 하다못해 가는 길 마지막으로 담배라도 한 대 피울수 있지 않겠는가? 머리가 지끈거려온다. 가족의 얼굴이 떠오른다. 무참하게 찢겨, 시체가 되어버린 그녀들이. 그건 더이상 내 가족이 아니었다. 한 덩이의 고깃덩이에 불과할 뿐이었지. 그녀들도 살려달라고 이렇게 애원했을까? 사냥개가 당신을 가만히 두지 않을것이라고 엄포를 놓았을까? 아니, 아니지. 내가 유일하게 사랑했던 여자는 내 딸의 눈과 귀를 막았을거다. 그리고는 담담하게 기도했겠지. 적어도 이 아이 만큼은 살아남길, 그리고 내 행복과 안위를 기도했겠지. 나는 죽어도 그들과 함께 하지 못할것이다. 소원이 있다면 그녀들이 천국에서 행복하는 것 뿐. 내겐 지옥이 기다리고 있다는것 쯤은 나도 알고있다. 우리 잘 지내고 있었다고, 자신의 우수함을 어필하는 그녀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리고 조용히 오른손 검지를 입가에 가져다대며 쉿, 하고 자그마한 소리를 내었다.
" 진정하게. "
짤막하게 한 마디를 내뱉었다. 그녀는 우수했다. 그것이 내가 그녀에게 바라는 전부였다. 내가 그녀에게, 내 마음속의 공허를 없애달라고, 위안을 바라겠는가? 그녀로썬 할 수 없는 일이고, 또한 그녀도 바라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결국 타인에 불과하니까. 내가 그런 것을 바라지도 않지만, 바란다면 그건 멍청한 일에 불과할 뿐이겠지. 머리에 쓰고 있던 모자를 벗고, 왼쪽 무릎을 꿇으며 그녀와 시선을 맞추었다. 그리고 가볍게 눈을 깜빡였다. 흘러내린 흑색 머리칼을 가벼이 쓸어넘기며, 무의식적으로 불이 붙지 않은 담배를 몇번 빨았다. 우선은 그녀가 진정해야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제대로 된 대화를 나눌 수 없겠으니. 약점을 바탕으로 계약을 맺어야 한다. 그래야 같이 행동할 수 있다. 전적인 믿음, 호의, 친밀감. 그런것들은 너와 내가 아무리 해도 맺을 수 없다는건 알고 있었다. 굳이 네가 아니더라도, 타인과는 맺기 어려웠으니. 가만히 그녀를 바라보았고, 오래 물고 있던 필터는 어느새 입가에 맺힌 핏방울에 젖어 조금 붉게 물들었다.
" 돌려 말하는게 아니야. 자네가 큰 건의 책임자로써 죽어주길 바라는건 더욱이 아니지.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는 대충 감이 잡히네. 2억 달러, 손에 한번도 쥐어보지 못한 금액을, 그것도 내 회사를 팔아야 손에 쥘 수 있는 금액을 공짜로 주겠다는 멍청이가. 이 도시에 어디 있겠나? 그건 나도, 자네도 확실히 알고 있는 사실이지. 그러나, 나는 자네의 능력을 높이 사고 있네. 그러니 2억 달러를 주겠다는 뜻이야. 실제로도 이미 자네의 손엔 7천만 달러가 쥐어져있지 않은가? "
무미건조하게 보인다는건 알고 있다. 그러나 나는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조금쯤은 네가 진정하길 바라면서. 길게 말했더니 목이 타온다. 몇번 기침을 뱉으면서 나는 다시 말을 이었다.
" 잘 듣게. 자네가 나를 도와주면 내 모든걸 주겠네. 그리고 나는 홀연히 사라질거야. 왜냐고? 이 도시의 권력자인 내가, 이런 얘기를 하는게 믿겨지지 않겠지. 이유를 말해주겠네. 살해 협박 편지가 내 집으로 도착했고, 아내가 다쳤네. 딸 아이도 겁에 질려 울고있어. 내가 뭘 하려는지 알겠지? 그래, 복수다. 어떤 녀석이 그랬는지 모르니, 이 도시의 모든 쓰레기들을 전부 죽여버릴걸세. 그러고 나면? 자네, 나는 합리적인 사람이야. 난, 내가 이 위치에 있는 한 이런 삶이 계속된다는 결론에 다다랐지. 그렇기에 모든걸 처리하고 떠날거야. 첫번째로, 복수를 할 거고. 두번째로, 내가 가진 자산을 전부 매각하고. 세번째로, 해외로 떠난다. 그러나, 이 모든 과정들이 성공적으로 이루어진다고 하더라도, 내가 가진 재산, 내가 가진 인맥, 나의 입지. 그것들이 내게 조금이라도 남아 있는 한, 부스러기를 주워 먹기 위해 쥐새끼들이 끊임없이 덤벼들겠지. 그러니까 난 그 모든걸 털어내고, 다른 차명 계좌에 있는 돈으로 유유자적하게 살아갈거다. 어차피 돈은 많으니까. 여기까지, 이해했나? "
가만히 그녀를 바라보았다. 설득력 있는 얘기를 꾸며냈는지, 스스로도 잘 판단이 서지 않았다. 여전히 시야가 흐릿하다. 허나, 제법 들어줄법한 이야기였다고 생각한다. 가족이 다쳤으니 복수를 하는것은 이상하지 않고, 또 다시 이런 일에 휘말리지 않기 위해 모두 죽인 뒤 떠나는것도 이상하지 않다. 후환을 남기지 않기 위해 재물을 털어내는 과정도 합리적이고. 그렇다면? 왜 하필 나인가. 그리고, 이 과정에서 자신이 후환에 포함되지 않는다는 증거는 있는가? 라는 생각을 할 수도 있겠지.
" 왜 자네냐고 생각하고 있나? 딱 자네 정도가 좋아. 나를 배신하면 언제든지 내 손으로 죽일 수 있는 사람이 자네니까. 또, 그 많은 돈을 추적하면 결과적으로 자네를 쫓을 법 하니, 자네가 살아있는 편이 나로써도 도움이 되지. 그러면 너무 자네에게 리스크가 큰 것은 아닌가? 꼭 그렇지만도 않아. 막대한 부로 호위를 사면 되지 않겠는가. 혹은, 이 쓰레기같은 도시를 떠나 제대로 치안을 유지하고 있는 도시의 경찰이 되어 그곳에서 살아가도 되고. 어때, 자네도 이 제안이 왜 합리적인지 이제 이해가 가나? "
맞는 말이었다. 내가 판단했을때엔 그녀에게 일종의 리스크가 있는것은 사실이었지만, 현상을 유지하는 것. 그리고 막대한 재산을 손에 넣는 것. 그 둘을 저울에 달아보았을땐, 충분히 그녀가 제안을 받아들일만 하지 않겠는가.
" 한번 더 묻겠네. 불을 붙여줄텐가? "
그녀에게 건넸던 성냥곽과, 입가에 물고있어 선홍빛으로 물든 담배를 가리키며, 가만히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러고보니 킹핀과 이토록 가까이서 독대했던 적이 전에 있었나? 없었다. 만약 있었다면 내가 기억했겠지. 오늘같은 날은 수메르의 쐐기문자처럼 나의 영원 속에 새겨질 테니까. 뼛조각으로 눌러 쓴 점토판 위의 이야기는 희극인가 비극인가. 승리한다면 영광스러운 승리인가 피로스의 승리인가, 패배한다면 영웅적인 패배인가 비참한 도축인가.
눈에 눈물이 매달린다. 이내 아랫 속눈썹을 타고 몇 방울이 떨어진다. 흑, 끅, 격한 호흡이 강제로 멈추는 반동으로 어깨가 들썩인다. 킹핀은 내 앞에 함께 무릎꿇어 시선을 맞추고, 심지어 옅은 미소를 지어주기까지 한다. 놀라서 눈물이 뚝 그쳤다. 죽을 때가 되니 영안이 트였나, 신묘한 것들이 보였다. 겁대가리를 상실한 누군가가 킹핀의 가족을 건드렸다. 일단 죽이면 신께서 구별하실테니 의심가는 놈들은 모두 주물러버리겠다. 그리고 회삿돈은 세탁이 덜 된 블랙머니라 계속 가지기가 찜찜한데, 날 도와주면 전부 네게 줄 테니 뒷일은 네가 알아서 처리해라.
대강 이런 이야기였다. 복수하려면 컴퍼니에 존 윅같은 킬러가 한 트럭일텐데 왜 고기 썩은내나 풍기는 경찰에게 와서..... 아, 누구도 믿을 상황이 아니고 부하 짓일지도 모르니까? 그렇게 사방이 도산검림인데 가장 먼저 생각하고 찾아온 사람이 나. 이렇게 되면 기분이 묘해진다. 사적인 대화 한 번 제대로 하지 않은 사람인데. 킹핀은 오래도록 나를 보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서장도 내게 이렇게 하진 않을 것이다. 돈의 액수를 고려하면 여러 사람에게 제안을 하여 돈이 나뉘지도 않았다. 나 혼자인게 분명하다.
"어.. 어어.."
고개를 들어도 눈을 맞추지 못하고 자꾸 떨구었다. 손 안에서 7천만 달러와 성냥갑이 바스락거렸다. 확증 편향일지도 모른다. 내 영혼, 내 몸, 나의 재산. 그리고 내가 가진 모든 가치있는 지식과 능력, 경험들. 모두 합쳐서 돈으로 환산해도 2억 달러의 발끝에 미치지 못한다. 확증 편향일지도 모른다. 나는 사량발천근을 일삼는 무술 고수가 아니다. 2억 달러를 옮기다 사지가 부러지는 미래가 가장 합리적인 예측이다. 하지만 괜찮지 않을까. 그레이 하운드의 킹핀 정도의 사람이라면 간악한 협잡꾼처럼 굴지 않을 것이다. 확증 편향일지도 모른다. 킹핀의 부하 중엔 협잡꾼이 많겠지만, 본인은 기품있는 콜리오네에 가까우리라. 희망사항이었다. 그래야 내가 2억 달러를 받는다. 확증 편향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런 곳에서 살다보면 사람이 좀 망가지기 마련이다. 확증 편향 X까라.
왠진 몰라도 킹핀은 나를 신뢰하고 있다. 제안도 어디서 물건을 전달하라는 식의 모호하고 불길한 예의 것이 아니다. 복수와 단절은 강력하고도 명징한 키워드였다. 그리고 2억 달러가 있으면... 언니도 멀쩡하게 돌려놓고, 이 지긋지긋한 도시도 더럽혀진 신념도 모두 던져버리고... 돈을 어디에 얼마나 쓸지 상상조차 못 할 지경이었다. 막말로 퇴역 항공모함을 사서 평생 바다 위에서 살 수도 있을 것이다.
- 따닥, 딱
- 치이이-
성냥을 키자 밝은 미래가 어른거렸다. 성냥팔이 소녀는 이 짓을 하다가 죽었다. 그러나 나는 저항하지 못했다. 어차피, 어차피 이런 식으로는 오래 살지 못한다. 재수없어 눈먼 총알에 맞아죽으면 다행이고, 외줄타기에서 한번만 삐끗해도 성난 조직원에게 잡혀가 차마 못 볼 꼴을 볼 가능성이 크니까. 이 도시에서 호상은 예수의 구원보다 얻기가 어려웠다. 이러나 저러나 그렇게 죽을거면 승부수라도 띄워봐야 않겠는가.
"천인공노할 일이네요. 어느 주제모르는 인간이 감히 그러고 다니는지. 후회하지 않으실겁니다. 저, 이래보여도 FBI 아카데미에 다녀온 사람이거든요. FBI! Open up! 하고 쾅 들어가는 그거 아시죠.....헤헤. "
그 능력들을 기자 색출에나 쓰고 있긴 하지만. 아무튼 입장을 정했으면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안경을 벗고 눈물을 닦았다. 약자의 처제술에는 쓸개가 없었다. 담배 끝이 달아오른다. 이건 내가 사건을 맡은 거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어라, 그러고보니 이 사람. 입에 피 난다.
"피해자 조사부터 시작할까요? 아니면 남들 모르게 과학수사대를 보내드릴까요?"
일단 경찰스러운 선택지를 제시해보았다. 협박 편지. 사모님과 따님이 보고 들은 것. 모두 증거 아닌가. 나는 다시 웃는 표정이 되었다. 눈이 발갛게 되어서 웃고 있으니 퍽이나 야릇한 기분이 들었다.
승리는 내게 언제나 달콤했다. 지갑을 훔치는데 마침내 성공하여, 몇 푼 안되는 돈으로 쓰레기같은 음식을 사 입에 쑤셔넣었을때의 그 기쁨. 딱딱한 빵, 비계뿐이면서도 무엇으로 만들었는지 알 수 없는 마른 고깃조각, 탁한 물 한컵. 고작 그 따위 음식임에도 너무나 달콤했다. 단신으로 적대 조직의 지부에 쳐들어가 모조리 때려 죽이고, 사냥개라는 이명을 획득하고, 중견 보스의 자리를 차지했을때의 그 기쁨. 적대 조직과의 전쟁 끝에, 조직의 보스로 자리잡았을때의 기쁨. 그러나, 이젠 승리도, 패배도 남지 않았다. 이 도시 위 모든 생명을 거두더라도. 승리한다고 하더라도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 패배한다고 하더라도, 비통하게 죽을 뿐이다. 복수조차 이루지 못한 채, 다시 한번 실패를 겪으며 처참하게 죽는 것. 오장육부가 뒤틀리는것같은 격통을 품에 안고 죽어버리는것 뿐. 그럼에도 나는 나서야 한다. 그것이 의미가 없는걸 알더라도, 스스로 목에 맨 줄을 잡고 발버둥치는 비참한 말로임에도. 죽음은 아무것도 아니다. 그러나 승리하지 못한 삶을 살 바엔 죽는게 낫다고 하던가. 우스운 일이다. 그리고 아이러닉한 일이다. 그녀의 눈에 눈물이 매달린다. 몇 방울씩 떨어지는 눈물을 가만히 보았다. 울어 본 적이 언제였던가. 격한 호흡으로 어깨가 들썩거리는 그녀의 어깨에 차분히 손을 올리려 뻗었다. 조금은 위안이 되길 바라며. 위협으로 보인다면- 그건 어쩔 수 없는 일이지 않겠는가. 무표정한 채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여전히 시선을 맞추지 못한 채로 자꾸 눈을 떨구었다. 그녀의 손 안에서는 내 반지와, 성냥갑이 바스락거린다. 그리고, 그녀는 성냥을 켰다. 붉은 빛이 아른거린다. 어스름한 불빛이, 그녀의 둥근 안경 테에 일렁였고, 나 또한 그것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녀도 분명히 알고 있을 테다. 머리로는 이해가 되고, 또한 기회라고 생각하겠지만, 쉽지가 않은 일일테지. 선악과를 먹으라며 이브에게 뱀이 속삭였듯, 나 또한 파멸로 내닫는 길에 그녀라는 동반자를 만들었다. 순전히 내 계획을 위해. 허나 죽으면 그녀도 결국 거기까지였던 운명이겠지. 이 빌어먹을 도시에서 사는 우리는, 모두 알고 있는 사실이지 않은가.
" 그래, 자네의 그 우수한 능력. 기대하고 있다네. "
입가에 자그마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희미하긴 했지만, 그녀의 실없는 이야기를 들어서일까. 선홍빛으로 젖었던 담배가 붉게 타오른다. 입 안쪽으로 부드럽게 연기가 넘어들어오니 이제서야 조금 머리가 맑아지는 느낌이 들었다. 한 대로는 부족했던 모양이군. 매캐한 연기를 뱉어내며, 예의 무미건조한 표정으로 돌아왔다. 그녀는 내 제안을 받아들였고, 내게 불을 붙였다. 이제 우리는 돌이킬 수 없는 한 배를 탄 몸이 되었다. 언제나 서로가 서로를 배신할 수 있는 관계. 나로써는 그녀를 죽이면 되는 일이고, 그녀는 정보를 흘리면 된다. 킹핀의 가족이 다쳤다. 그는 복수를 계획하고 있다. 그 한마디의 정보가 새어나가면, 내 성격을 아는 이들은 모조리 경계할것이다. 그러면 난 복수를 이루지 못하고 그대로 죽어버리겠지. 그렇기에 우리는 같은 목적을 가지고 행동할 수 있다. 더없이 완벽한, 이상적이고 실용적인 관계다.
" ...정보부터 취합해볼까. 인물들 리스트는 전부 가지고 있겠지? 보고를 좀 듣고 싶은데. 한 명도 빠짐없이 말일세. 우선 적대 조직인 스마일 컴퍼니부터 쳐야겠어. 한 놈도 빠트리지 말고, 전부 내 손으로 찢어죽일거니까. ...이대로 경찰서 앞에서 이야기를 계속 나누는것도, 상황이 그래보이니. 근처의 커피숍으로 자리를 옮기지. "
가슴 안쪽까지 깊게, 담배를 빨아들인다. 타닥거리는 소리가 경쾌하게 귀를 타고 울려 퍼진다. 몇번 눈을 깜빡이다가, 쓰린 입가를 엄지손가락으로 닦아내고는 천천히 벗었던 가죽장갑을 꼈다. 그리고 모자를 머리에 깊게 눌러쓰며, 꿇었던 무릎을 피고 일어섰다. 담배가 좀 젖었군. 작게 중얼거린 뒤에, 길게 담배연기를 뱉었다. 그녀의 말대로 피해자 조사를 시작하는것도, 과학 수사대를 부르는것도. 내 거짓말이 실제였다면 합당한 방법이었겠지만, 정보가 새어나가는것을 원치 않았다. 어느 누구도 믿을 수 없었다. 내 조직 안에 있는 녀석이 벌인 일일수도 있으니. 그렇기에 다른 방법으로 나아가야 했다. 나는 적대 조직 전원의 얼굴과 이름, 자세한 정보를 알고 있지 않다. 허나 경찰의 막대한 데이터베이스라면 내게 그것을 알려주리라. 부패경찰로 가득한 이 도시의 경찰청이라고 하더라도, 그 정도 쯤의 정보는 기록되어 있겠지. 누가 누군지를 알아야 건드리지 않기도 할 테니까. 그런 자세한 정보를 알고, 단 한 마리의 쥐새끼도 놓치지 않고 모조리 찢어죽여야 했다. 적대 조직인 스마일 컴퍼니는 그런 점에서 첫번째 타깃으로 적합했다. 일대에 마약을 판매하며 빠른 속도로 성장한 조직이며, 점 조직 형태를 갖추고 있어 격파하기도 편했다. 그리고, 내게 원한을 가지고 있는 놈이 이 도시에 얼마나 없겠냐만은, 유달리 큰 원한을 가지고 있는 녀석도 그곳에 간부로 몸을 담고 있었다. 마약에 취해 충동적으로 일을 저질렀을 가능성도 분명히 배제할수는 없겠지.
" 특히 그에 대해서 알아봤으면 좋겠군. 벌룬이라고 하면 알겠지? 마약 제조상. "
합법과 비합법의 사이를 오가는, 풍선 형태의 마약 제조 전문가. 인상을 찌푸렸다. 그리고 관자놀이를 신경질적으로 매만졌다. 어디가 시발점인지 기억조차 나지 않는 질긴 악연이었다. ...시선을 그녀에게로 돌렸다. 조금 성급했나. 긴 얘기를 주절거리며 늘어놓는건 좋아하는 스타일이 아니었다. 조금은 늦었지만, 그녀에게로 손을 뻗으며 악수를 청했다.
" ...아직 통성명도 제대로 안했군. 언제까지 자네라고 부를 순 없으니, 이름을 묻고 싶은데. "
그녀는 이제 나의 파트너였다. 그러나 우리는 서로에 대해서 제대로 알지 못했다. 고작 허울뿐인 관계라면 계약에 금이 가기 쉽다. 조금 더 서로에 대해서 알 필요가 있었다. 그 편이 합리적이겠지. 반쯤 타들어간 담배를 마지막으로 깊게 태우고선, 저 멀리 던져버렸다. 커피는 좋아하나? 짧은 질문과 함께.
>>326 (그 시선에 눈싸움으로 응한 사람은 꽁지머리로 묶은 짧은 금발에, 살구색 피부, 서늘한 눈매와 창백한 벽안을 가진 여성이었다. 그는 자신을 쳐다보던 이가 목례를 하더니 느닷없이 같이 의뢰를 맡을 호위를 구하고 있다고 말을 걸어오자, 덤덤한 투로 대꾸했다.) 제가 생업이 있어서요. 어떤 의뢰인지, 기간은 얼마나 걸리고, 보수는 얼마인지 말씀해주시면 수락 여부를 말씀드리죠. (이 근처 용병 길드에 가면 좀더 쉽게 인력을 구할 수 있을텐데, 왜 번거롭게 주점에서 구인을 한담? 의아함이 앞섰지만, 일단 들어나보고 영 쎄하면 거절하자는 생각에 그는 맥주를 한모금 넘기며 대답을 기다렸다.)
그것은 울거나 웃을 줄 알았지만 그럴 때 그것의 목에서는 아무런 심지어 바스락거림마저도 올라오지 않고는 했다. 당신은 그 이유를 알지 못했다. 처음부터 성대를 제거했다고 하던가? 어쩌면 그것을 넘겨받을 때 들었지만 잊어버렸을지도 모른다. 그것은 그러나 숨소리를 낼 줄 알았다. 그것이 내는 숨소리는 규칙적이고 유기체적이었다. 언젠가부터 비어있던 집은 그것과 당신의 숨소리로 차기 시작했는데 그래서인지 당신은 오랜 숙적인 불면증을 뒤로하고 그것의 숨소리를 자장가삼아 잠의 여정을 떠날 수 있게 되었다.
가끔은 모든 것이 그것의 탓이고, 그것의 덕인 것만 같다.
오늘도 당신은 집에 들어왔다. 그것은 거실 바닥 위에서 웅크리고 졸고 있었다. 당신은 초인종 소리를 내지 않았는데 초인종 소리를 내었다면 그것은 화들짝 놀라 고개를 쳐들고서 여기가 어딘지, 자기가 누군지,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차례차례 알아내고서 틀림없이 현관으로 달려와 당신의 구두를 짓밟기까지 하며 무척 반겼으리라.
당신은 조용히 현관에서 신발을 벗으며 그것이 조그마한 머리통을 미세한 움직임으로 까닥거리는 모습을 관찰할 수 있었다. 이대로 있으면 그것의 머리는 곧 바닥과 밀착하리라.
>>335 스마일컴퍼니는 겉으로는 코미디 계열 연예 그룹사고, 연극소품이라던지 무대세트라던지 이런걸 담당하고 있지만 실상은 거대마약조직으로 생각하고 있어~ 벌룬은 풍선 관련 마약(해피벌룬 등) 제조에 일가견이 있는 사람 정도? 원하면 좀 더 상세하게 살 붙여볼건데, 아니라면 주도적으로 착착 진행해도 좋아! 언제나 재밌게 이어나가려고 노력중이라서,,, 매번 재밌게 이어줘서 고마워!!!
제복 명찰에 박힌 이름이기도 했다. 그리고 커피를 좋아하냐는 질문의 답은 '잘 모르겠다'. 사람이 물 없이 하루도 살 수 없다고 해서 물을 좋아한다고 할 수 있을까? 그건 호불호의 영역을 벗어난 광기와 비스무리한 개념이었다. 오오, 초과근무와 카페인. 나의 오랜 벗이여. 마피아와 결탁했다고 업무량이 딱히 줄어들진 않더라. 썩는 것도 성심껏 열심히 썩어야 하고, 그렇다고 대놓고 썩으면 해고에 징역살이까지 따라오니 대외적인 업무도 보아야 했다. 내가 이 시간에 경찰서에 있던게 바로 그래서였다.
나는 무릎을 털고 일어나서 쭈뼛대는 기색으로 그의 손을 맞잡았다. 킹핀의 손은 크고, 거칠며, 단단했다. 남성적이라는 뜻에 이토록 걸맞는 손이 또 있을지. 이로써 우리는 한 배를 탄 선장과 일등항해사로 임명되었다. 서로가 서로에게 두려움을 가진 기기묘묘한 관계성. 복수와 2억이라는 판돈을 걸고 밤중에 암살자가 찾아올까, 도시 한복판에 호외를 뿌려버릴까 불안해하겠지. 그러나 두려움이란 뾰족한 발언은 배 밑바닥에 구멍을 내는 법. 한 배를 탄 마당에 다같이 빠져죽기 싫으면 그 두려움을 조용히 감춰야 하지 않겠는가. 내가 이 일을 하기로 정한 이상 이전에 했던 생각은 모든 의미를 상실한다. 이제 갈 길은 두 곳뿐이다. 성공하던가, 몰락이 배제된 실패를 받아들이던가. 실패해도 곱게 목을 빼진 않으리라. 꺼져가는 빛을 향해 분노하고 분노할 것이다.
심야의 카페는 당연히 한적했다. 졸려보이는 알바생은 뚱한 표정으로 스마트폰을 주시한다. 놀랍게도 또 다른 손이 있었는데, 창작의 고통에 빠진 예술가라도 되시나. 아메리카노 빨대를 잘근거리면서 텅 빈 수첩을 긁어대고 있었다. 저거 샷을 몇 번이나 들이부은거야? 색깔이 심상찮았다. 예술가의 영혼이라도 지녔는지 마피아도 부패경찰도 죽음도 무시하고 한 차원을 초월해 혼자만의 세계로 진입하였다는 인상을 주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내 영혼은 그렇게 고결하지 못하니까. 숭고한 고뇌를 하는 대신 비상 출구의 위치를 눈으로 훑었다.
"스마일 컴퍼니랑 벌룬이라면. 아하, 웃음풍선 팔아먹는 놈들 말씀이신거죠?"
킹핀은 어울리게도 범인을 특정하는 외과적 폭격에 관심이 없어보인다. 좀 전에도 말했듯, 그의 스타일은 하늘에서 내리는 죽음의 소나기. 융단폭격이다. 커피를 받아 자리에 앉았다. 천장을 본다. 감시카메라가 하나, 둘, 셋. 사각은 없다. 하지만 몸을 조금만 틀어도? 몸의 많은 부분이 가려진다. 끼이익. 끼이익.
"정확한 인텔은 DB를 확인해서 알려드리겠지만, 음..."
스마트폰을 상 위에 놓으며 쇼윈도 밖을 본다. 지나가는 사람은 없다. 하지만 인도 옆에 대놓은 차량이 있다. 선팅이 있어 내부가 보이지 않았다. 쇼윈도 사이 기둥이 차량 운전석으로부터 나를 가리도록. 다시 위치를 보정한다.
"단순히 얼굴과 이름이라면 대부분 있을거에요. 대부분이 뭐냐. 전국민이 다 있죠. 문제는 스마일 컴퍼니로 키워드를 넣고 검색했을 때 안 나오는 놈들이거든요? 실제론 그쪽 사람인데 말이죠.''
''그거는 둘 중 하나에요. 사실을 숨기고 있어서 그 놈이 그쪽 놈인걸 경찰에서 모르거나? 아니면 위장신분, 기록말소 식으로 신원 자체가 오염되었거나? 그런거에요. 최대한 정보를 교차검증해서 허수를 줄여야 해요."
경찰이 대 범죄조직 업무를 열심히 했다면 정보에 빈틈이 없었겠지만 말이다. 웃기는 일이다. 목소리를 낮춘 채 계속 말했다.
나는 쉼없이 나불거렸다. 경험상 신고자에게는 입을 많이 놀려줘야 했다. 많이 말해주는만큼 그들은 편안해했다. 말을 안 해주면? 불안해하다가 제 풀에 삽질을 해버린다. 킹핀의 삽은 내 머리통으로 떨어질 것이다.
"스마일은 대외적으로 엔터테인먼트 회사니까 공개정보가 많아요. 유명한 놈은 사이트에 바로 면상이 박혀있구요. 덜 유명한 놈은 TV프로 찾아보면 나와요. 예능에 피디랑 매니저같은 사람 나오잖아요. 마지막에 스탭롤도 올라가고."
"음지에 있는 안 유명한 애들은 스마일한테 돈 받아먹는 우리 경찰 친구들이 잘 알지요. 경찰 DB란게 까고말하면 경찰 전용 위키피디아라서, 스마일쪽 통들도 부패 여하 관계없이 '문서' 편집을 자주 한다는 말이죠? 부패란건 마피아랑 유착했다는 뜻이지, 완전무장해제에 항복을 했다는 말이 아니니까.''
점조직 인원들이 풍선을 파는 핫플레이스도 파악이 되어있을 것이다. 다음 문제는 쉐프이다.
"그건 스마일한테 상납하는 치과나 카페를 털어보면 나오는게 있을겁니다."
치과와 카페. 나는 말을 멈추고 한 모금 마셨다.
"아시겠지만 풍선 안에 들어가는 기본 재료가 아산화질소잖아요? 젠켐은 또 다른 이야기지만 차차하고. 그거의 본래 합법적인 사용처이자 음지로 삥땅치기 가장 좋은 명목이...''
입술에 묻은 휘핑크림을 햝아먹었다.
"치과 마취용, 그리고 카페 휘핑크림 제조용. 그쪽 라인으로 가스를 공급받는 선이 분명히 있을거에요."
>>336 (당신이 눈싸움으로 응하자, 차가운 인상과는 달리 살짝 움찔한 듯 보였지만 이내 차분함을 가장하고 눈에 힘을 주는 것이 어딘가 어색해보인다. 그러나 이내 당신이 돌려준 말에 티는 나지 않게 화색했다. 당신이 수락할거라곤 생각 못한 듯이.) 잠깐 앞에 앉아도 괜찮을까요? (라고 공손하게 허락을 구하곤, 앉기 전에 사제복 안에서 붉은 보석이 박힌 금색 십자가를 꺼내들었다. 술집이 위치해있는 왕국보다 옆 공화국의 유명한 종교적 심볼이다.) 저는 생프텐 교의 순례자입니다. 자매님의 영혼에 고결한 의지가 깃들기를. (기도하는 제스쳐를 취하자 미세한 축복이 당신의 신체에 흘러들어온다.)
>>340 ...? (느닷없이 제 몸에 종교 의식을 행하려는 듯한 사제의 행동에 그는 반사적으로 회피하며 의자째로 물러났다. 그러다, 사제의 손에 들린 십자가를 보고는 인내심을 끌어모아 정중히 말했다.) 외람되지만 사제님, 저는 아직 수락한다고 말씀드린 적이 없습니다. 그리고 저는 해로운 것이 아니라 해도 제 몸에 갑자기 주술을 거는 행위를 그렇게 좋아하지 않습니다. 호의는 감사하지만 저와 대화를 하고자 하신다면 이런 행동은 삼가주셨으면 합니다.
>>341 (사제는 깜짝 놀란 듯한 행동을 취하고, 그 뒤 테이블 주변에서는 웃음소리가 터져나왔다. 아무것도 모르는 얼라사제한테 망신주지말라는 무책임한 말과, 신성 사기가 일어난 지 얼마 안됐다며 핀잔주는 이야깃소리도 있었다. 이질적인 존재는 시선을 끌기 마련. 사제는 급히 태세를 추스르고 공손히 손을 모아 사죄를 건넸다.) 죄송합니다. 공화국에서는 사제가 맡은 역할 중 하나였기에 타국의 문화를 학습치 못하여 경솔한 행동을 취하고 말았습니다. 근데 주변분들은 어째서 웃으시는 건가요...?
>>342 (그는 사제의 질문에 약간 당황했다. 좀 전에 주변에서 웃는 소리가 높아지긴 했지만, 그걸 왜 나한테 물어? 자기랑 대화하는 중에도 다른 손님들의 일거수일투족에 신경을 기울이고 있는 줄 아나? 알 게 뭐야, 그런 것보다는 빨리 조건이나 듣고 싶네. 크리스는 여상한 투로 대답했다.) 글쎄요, 주점에서 식사하며 웃는 일이 그리 드문 일도 아니지요. 그보다는 의뢰 내용과 기간, 보수에 대해서 말씀해주시겠습니까? 듣기 전까지는 답을 드릴 수 없겠네요.
>>343 (타이밍이나 시선이나, 이쪽을 보고 웃는 것 같이 보였는데 자신의 착각이고 보지는 못한건가? 바깥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날 지 모르니 항상 주변을 의식하고 움직이라고 들었는데. 통용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에 조금 의아한 시선을 던지다가 당신의 앞자리에 앉았다.) 의뢰 내용은 대륙에 흩어져있는 성유물의 회수입니다. 기간은 무기한. 원하실 때 그만두실 수 있어요. 보수는 성유물 회수 시 신전에서 매겨줍니다. 그 중, 반을 내어드리려고 합니다.
>>344 (성유물? 그런 거라면 가장 구미가 당길만한 사람은 그 종교 신자나 그런 사람들 아냐? 왜 타국에 와서 구인을 하지? 어쨌거나, 의뢰 내용상 무리겠군. 굳이 이직하고 싶은 생각도 없고. 그는 밑바닥에서 찰랑거리는 맥주를 마저 입에 털어넣은 뒤 대답했다.) 그럼 안 되겠군요. 말씀드린 대로 생업이 있다보니 대륙을 돌아다니며 물건을 찾는 건 어려워서요. 그런 거라면 인근에 용병길드가 있으니 거기서 한번 구인해보시는 걸 추천드립니다. (슬슬 일어날까, 휴가라지만 과음은 안 좋으니까.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가볍게 목례했다.) 그럼 먼저 일어나 보겠습니다. 좋은 밤 되시길. (그는 주점 주인에게 술값을 건네고 주점을 나섰다.)
>>345 #궁금한 게 있는데...꼭 상대방을 무안주기 위해서 이은 것 같다고 생각하는 건 내 착각일까? 짧게 이어가는 자유 상황극이라고는 하지만 매 지문마다 설정 트집에, 어느정도 어울려주려고 해도 티키타카 자체를 거부하는 것 같네...뭘 위해, 무슨 반응을 위해 그러는 건진 모르겠지만 혹시 자신의 결여된 무언가를 채우기 위해서라면 주변 사람들이 너참치를 생각해주고 그러했던 것처럼, 타인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쪽으로 생각해주길 바래ㅠㅠ
>>346 그렇게 느꼈다면 유감이지만 내 캐릭터 입장에서는 네 캐릭터가 의도한 건 아니었더라도 불시에 달갑지 않은 일을 당했으니 하지 말라는 말은 할 수 있다고 생각해. 그리고 이미 정착지에서 생업이 있는데 전 대륙을 떠돌아다니며 물건을 찾는 일을 맡는 건 여건상 어렵지 않겠니?
너참치가 원했던 상황이 아니라니 안타깝지만 원하는 전개나 반응이 있다면 다음에는 혼자만 생각하지 말고 공유해서 이런 전개로 갔으면 좋겠다, 이런 반응을 해줬으면 좋겠다 하고 먼저 의견제시라도 해주길 바래ㅠㅠ
>>347 #정말 당연한 이야기를 이렇게 굳이 굳이 해야하는 이유는 모르겠지만 내가 무슨 말을 돌려주든 그게 너 참치에겐 상관없다는 걸, 그리고 본인이 다른 참치들에게 피해를 끼치고 있다는 사실을 너참치도 알고 있는 것 같고 즐기는 거 같아보이니 더 이상은 말을 줄이도록 할게 ^^
나바레테. 그녀의 이름이었다. 제복에 박혀있던 명찰로 시선이 자연스레 내려간다. 적어도 가명은 아닌가. 멋대로 이름표를 보고 이름을 부르는것보단, 통성명을 했다는 사실이 중요했다. 분명히 신뢰감 형성에 도움을 줄 테니까. 이름을 들었으니 내 쪽에서 이름을 밝힐 차례였고, 잠시 뜸을 들였다.
" 잘 부탁하겠네, 나바레테. 벨이라고 부르게. ..흔한 이름은 아닌것 같네만, 어디 출신이지? "
멕시코 계열인가? 그게 아니라면 러시아계? 교양이 부족한 것은 언제나 아쉬운 일이었다. 늘 살아남는것, 그것 하나만으로 벅차왔으니 공부같은걸 할 시간이 부족했다. 뭐, 반쯤은 손이 안 갔던 것도 있지만. 커피, 그리고 담배, 때때로 위스키. 그러한 취미시간은 제법 달콤했다. 그녀는 쭈뼛대는 기색으로 내 손을 잡았고, 나는 그 손을 꽉 맞잡았다. 무른 손이라고 느껴졌다. 전투력을 기대하는건 힘들겠군. 혹여 사격의 천재일수도 있겠지만, 무기를 빼앗기거나, 탄환이 모두 소모되면 그 뒤론 힘들겠지. 히어로처럼 우리에게 총알이 빗겨가고, 맞아도 끊임없이 일어나고, 크게 다쳐도 붕대 좀 두르면 낫는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이동력도 중요시해야하니, 탄창을 가방에 잔뜩 실어다닐수도 없는 노릇이고. 권총에 잔 고장이 일어날수도 있고, 던진 잡동사니에 맞아 무기를 놓칠수도 있겠지. 잠시간 그녀의 손을 가만히 내려보았다.
" 나바레테 경장, FBI 아카데미 출신이라고 했었지. 우등생이었단 얘기는 못 들었네만, 사격은 좀 하나? "
우스갯소리로 FBI 얘기를 꺼낸걸수도 있겠지만, 그 말이 사실이라면 경찰이 되는 정규 과정에서도, 아카데미에서도 사격 교육은 받았을테니. 허나 그것이 사실이든, 사실이지 않든, 사격엔 젬병일수도 있는 일이었다. 그렇지만 별로 중요한 일은 아니었다. 그녀에게 킬러로써의 일을 바라고 있는것도 아니니. 보조사격 정도는 기대하고 있지만, 아니라면 어쩔 수 없겠지. 코트 안쪽에서 연습용 수류탄 하나와, 수류탄 한 발을 꺼내어 그녀에게 건네었다.
" 잘 가지고 다니게. 무기를 혹시 놓치면 그걸 써. 이것도 옷 소매에 달아두고. "
원래는 아내에게 주려고 했던 거지만, 상관 없겠지. 그녀에게 자그마한 손목밴드를 건네었다. 감압식 전기충격기였다.
" 손목을 빠르게 위 아래로 한번씩 꺾으면 작동한다. 그 뒤엔 가져다 대기만 하면 되는 간단한 일이야. 혹시 그쪽 손목이 잡히더라도, 일정 압력 이상이 가해지면 자동으로 작동하는 편리한 물건이지. 감전대책도 되어있으니 자네가 감전될 걱정은 안 해도 되네. 세번까지만 사용할수 있으니까 잘 알아두고. "
대비책으로 사용하는 물건에 역으로 당하는것만큼 우스운 일은 없지. 그런 의미에서 이건 실용적인 대비책이었다. ...이야기를 나누다보니 심야의 카페에 도착했다. 허름하면서도 고풍스러운 원목 소재의 인테리어가 새벽의 가로등과 맞물려 아늑한 분위기를 내뿜고 있었다. 어줍잖은 갱들에게 보호세를 바칠 만큼은 장사가 되는 모양이었다. 한적한것도 마음에 들었다. 한 켠을 차지하고 있는 손님 외에는 아무도 없었다. 에스프레소 한 잔을 주문하고선 자리에 앉으며 코트의 단추를 풀었고, 장갑과 모자를 벗었다. 흘러내리는 앞머리를 가볍게 넘기며, 시선을 그녀에게로 돌렸다.
" 나바레테, 자네의 정보접근권한은 어디까지 유효하지? 이 도시는 부패했어. 다른 도시, 다른 주에서 떠넘기고 싶은 부랑자들, 노숙자들, 그리고 마피아들이 이 곳에 모여있는게 차라리 그들에겐 편할테니, 계획적으로 부패했다고 볼 수 있겠지. 하지만 이곳은 범죄자들에게서 로비를 받아 배를 불릴 먹이터인 동시에, 위협적인 도시야. 이곳의 쓰레기들이 바깥으로 진출하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고, 실제로 그렇게 행동하는 녀석들도 있을테니, 정부가 그걸 용납하지 않을텐데. 누군가는 따로 이곳의 조직들을 제대로 정리해두지 않았겠나? 놈들이 원하는건 통제니까. 그 통제를 벗어나는 녀석들을 마음에 들어하지 않는 녀석들도 분명히 있다고 생각하네. 자네의 말대로, 단순히 문서 편집에 그치는 선이 아니라. "
아무리 로비를 하면서 뒷주머니를 불린다고 하더라도, 윗놈들은 안전을 원한다. 적어도 이 쓰레기장은 벗어나지 못하도록, 분명히 목줄을 쥐고 있을텐데. 시민이 이곳에서도 그럭저럭, 어떻게든 살아가기라도 하는걸 보면 충분히 짐작할수 있을만한 일이지. 정보를 교차해 허수를 줄여나가는 과정은 제법 시간이 소모될테고, 그녀에게 나름 부담이 될것이다. 귀중한 정보원이 헛일을 하며 체력을 소모하는것보다, 최소한으로, 그리고 확실하게 정보를 검증할 일종의 광맥이 필요했다. 어느덧 나온 에스프레소를 받아 한 모금 삼켰다. 코를 부드럽게 감싸는 커피 향이 마음에 들었다. 실력이 없어 보이는 바리스타였는데, 원두가 좋았던걸까.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었고, 성냥을 찾아 뒤적거리다가 물끄러미 그녀를 바라보았다. 잊어버리고 있었군, 성냥을 전부 건넸었지. 불좀 붙여주겠나? 가벼이 속삭였다. 그리고는 다시 시선을 바깥으로 돌렸다. 짙은 선팅을 한 승용차 한대. 감시가 붙었나? 그녀도 그것을 알고 있는지, CCTV로 부터도, 차 내부로부터도 보이지 않을 법하게 몸을 숨겼다. 가까이 하면 할수록 우수하군. 썩 마음에 들었다. 저 차의 번호판도 한번 조회해두게. 가볍게 일러두었다.
" 치과, 혹은 카페라. 그런가. "
입술에 묻은 휘핑크림을 핥고, 헛기침을 하며 등받이에 등을 기대는 그녀를 재밌다는듯 바라보았다. 조금 긴장감이 부족해보이긴 해도, 그녀의 말이 옳았다. 합법과 비합법의 사이에서 줄을 타는 녀석들이니까. 안전성을 추구했을테지. 질문이 있냐는 말에 잠시 생각한 뒤에, 자리에서 일어나 가게를 지키던 알바생에게 다가갔다. 졸려보이지만, 뚱한 표정으로 핸드폰을 응시하는 녀석에게 다가가 싱긋, 부드러워보이는 미소를 지었다.
" 가게의 휘핑크림을 여자친구가 마음에 들어하더군. "
무슨 소린지 이해가 안간다는듯, 날 쳐다보는 알바생에게 여전히 미소를 띄운 채 이야기했다.
" 휘핑크림을 좀 사고싶은데. "
" 음, 제가 사장이 아니라서... 내어드리긴 좀 곤란한데요. "
" 그런가, 그렇다면 휘핑크림이라도 좀 볼 수 없겠나? "
" 저희 휘핑크림은 그냥 평범한거에요. 마트에서도 많이 파는거죠, 상표명도 그냥 휘핑크림인거. 이거에요. 보신 적 많으시죠? "
휘핑크림을 꺼내온 알바생은, 스프레이 형식의 휘핑크림을 들고 있었다.
" 그래, 알려줘서 고맙네. 참, 요새 좀도둑이 많다고 하던데. 가게에서도 도둑맞거나 하는 일은 없나? "
" 글쎄요... 그런 건 없는데, 요새 휘핑크림 갯수가 좀 안맞더군요. 아니, 도둑맞거나 한게 아니구요. 분명히 10개정도 주문하셨다는데 영수증엔 100개, 1000개 이렇게 적혀있던걸 우연히 봤어요. 분명 10개 주문했다고, 이렇게 많은 값은 치르지 못한다고 했더니 본사 표기 오류라나? 실제로도 10개를 받았고, 10개 값만 지불했으니 상관은 없었긴 한데, 쩝. 이러다 나중에 그거 값 내놓으라 해서 알바자리 잃는게 아닐까 모르겠네요. 아, 근데 경찰이에요? "
" 경찰은 아니네만, 얘기 잘 들었네. 덕분에 집에서도 휘핑크림을 먹을 수 있겠어. "
그리고는 자리로 돌아오며, 그녀에게 저도 모르게 웃어보였다.
" 나바레테 경장, 이 이후로의 예정은 있는가? 없다면 나를 위해 시간을 내어주게. 일 할 시간이다. "
악의로 가득찼고, 눈엔 증오가 가득 서려있음에도, 묘하게 아름다운 웃음. 스스로도 그런 미소를 띄우고 있다는 사실은 모르는것같았다. 그러나 그런것은 중요한게 아니었다. 기회라는것이 중요했다. 공장선에서 따로 휘핑크림을 잔뜩 만들면 자금이 유통된다. 허나 공장에서 그만큼 만들었으면 판매해야 하는데, 풍선 제조 목적으로 사용했으면 무엇을 팔겠는가? 너무 쉽게 찾아냈다. 운이 좋았다. 어차피 경찰이 신경쓰지 않으니 해이해졌던거겠지. 그러면 이제 찾아가서 전부 때려죽이면 된다. 그 뒤론 그 공장을 점령하면, 벌룬과 스마일 컴퍼니를 전부 끌어내어 전면전을 치를 수 있다. 가장 중요한 자금줄이 막혔으니 올라오지 않고서는 배길 수 없겠지. 다른 공장지부들도 많다면 마찬가지로 찾아가서 전부 때려죽이면 될 일.
"제 피의 절반은 마쿠아후이틀로 골통을 쪼개던 아즈텍 식인종의 것이고, 나머지 절반은 머스킷으로 손바닥만한 구멍을 뚫어주던 콩키스타도르 학살자의 것이죠."
"....적의 심장을 꺼내 제물로 바치는 일에는 관심이 없지만. 그래도 저 하나 정도는 지킬 수 있어요."
식인종과 학살자의 자손이라면 세계를 도탄에 빠뜨릴 마왕이라도 태어난 것 같지만, 그 자손들은 다른 민족들처럼 일하고 사랑하고 못된 짓도 해 가며 평범하게 지내고 있다. 주로 멕시코에서. 나도 그들 중 하나고. 그러고보니 심장을 꺼내는 건 정말로 본 적이 있어. 평소와 같은 과시용 보복범죄였지. 나도 몇 번인가 그런 위기가 있었지만 잘 넘겨냈다. 그리고 이렇게 킹핀과 독대하는 것이다.
그는 자신을 벨이라고 했다. 벨. 지위에 비해서 수수한 이름인가. 벨이 하필이면 코트 안쪽 주머니에 손을 넣어 뒤적거리자 몸의 근육이 팽팽하게 조여졌다. 낡은 코트 주머니엔 구소련제 권총이, 명품 코트 주머니엔 독일산 권총이 들어있지! 권총집에 손을 대려던 걸 간신히 허리에 손을 올리는 자세로 얼버무렸다. 이것도 직업병이라니까. 그래도 벨이 권총을 꺼내던 건 아니었다. 그의 손에 들린 건 수류탄이다. 수류탄......이랑 손목밴드. 컴퍼니 회장쯤 되면 수류탄 정도는 담뱃갑처럼 들고다니게 되는건가. 이건 좀 색다르게 무서운데?
"보통은 저희 경찰이 스마트워치나 방탄 방검복을 슬쩍 건네주는건데 말이죠...하하.."
그래, 말랑말랑한부패경찰이 보호를 받아야지. 그게 맞는거겠지... 테이저벤드를 손목에 찼다. 탄탄한 장력이 피부를 가볍게 누르고 들어갔다.
두 번째 성냥이 타오른다. 첫째에서는 혼자 들지도 못할 돈가방에 둘러싸인 모습이었고, 이번에는 깨끗한 부촌의 단독주택으로 이사하는 장면이 아릿히 보였다. 지금은 그저 설레발이지만, 사람은 희망이 있어야 살아갈 터였다. 담뱃불을 붙여주고 흔들어서 껐다. 알바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들어오자마자 상을 뒤엎고 돈을 내놓으라 행패를 부리는 갱들과 비하면 영국 왕실과 비견될 에티켓 아닌가?
"사실 순경 다음 일개 경장이라, 공식적으로는 현장 나갈 때 필요한 정보 수준이지만? 뒷구멍을 살살 캐보면 말마따나 통제를 웧하는, 권한을 가진 자를 다룰 권한이 손에 들어오겠죠?"
반지. 7천만 달러짜리 반지. 개판난 도시의 경찰직 특유의 박봉에 집에 있는 아내와 아들딸이 굶을까 마피아처럼 상납을 받는 경찰관이 한둘이 아니다(사실 나도). 간단히 계산해서 1,000명의 경찰관에게 7만 달러씩 뿌린다고 가정해보자. 상상이 가나?
"이 나라 높으신 분과 엮여서 죽어도 보여줄 수 없는 류의 것들만 빼면요."
전술하였던 예시는 단순히 돈의 이야기를 했을 뿐이다. 이런저런 사회적 술수는 고려되지도 않은 수치란 말이다. 벨, 킹핀이 아닌 이상. 킹핀이 회사를 통으로 팔아넘기려는 각오를 하지 않은 이상, 그리고 그와 동업하는 사람이 아닌 이상. 결코 불가능한 묘기에 가까운 술수였다.
"결과적으로 필요한 정보를 자유롭게 얻을 수 있을거에요."
언뜻 양순한 사람처럼 웃었다. 인상이 그럴 뿐이다. 인상만.
'여자친구?'
카페 이야기가 나왔다. 마침 여기가 카페다. 킹핀은 기다릴 것 없이 바로 탐문을 시작한다. 그런데 아까부터 사모님이 보시면 기함을 할 장면이 많이 보인다. 용돈 주고, 반지 선물, 팔찌 선물에다가 나에게 제안까지 하였다. 그리고 이제는 여자친구 운운을. 그러셔도 괜찮은가요. 확증은 없지만 뒤통수가 계속 콕콕대는 느낌이라. 평소에 파파라치랑 술래잡기 하고 그러시진 않으시죠?
그럼에도 장난질처럼 지나가는 무의미한 순간에 신경쓸 겨를은 없었다. 이 카페가 그 카페였다. 내가 수사할때는 길거리를 픽셀 단위로 뒤져도 며칠 몇주가 걸렸었다. 이게 초심자의 행운이냐. 또한 행운이 날아오면 주저하지 않고 붙잡는게 당연한 일인데... 그의 사악한 웃음은 날선 요검같았다.
아주 오랫동안 이어진 인간과 마족의 전쟁도 이제 슬슬 끝을 맺으려 하고 있었다. 어두컴컴한 어둠을 가른다고 전해지는 전설의 무기들을 손에 얻은 용사와 그를 보좌하는 멤버들은 마침내 마왕성에 들어오는데 성공했다. 막강한 마족들과 싸우며 꼭대기까지 올라가는 여정은 절대로 쉬운 일이 아니었다. 허나 그들은 이를 악물고 절대로 물러서지 않으며 계속해서 위로, 위로 올라갔다.
그리고 마왕이 있는 꼭대기에서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는 층. 진득한 피냄새가 그 장소에 강하게 퍼지고 있었다. 전설의 무기 중 하나로 알려진 영웅의 활을 들고 있는 푸른머리 사내는 벽에 등을 기대며 거칠게 숨을 내뱉었다. 그 옆에는 죽은채 쓰러져있는 붉은 날개를 지닌 고위 악마가 쓰러져 있었다. 그리고 그 악마에게 심하게 공격당했는지 사내의 몸 여기저기엔 상처가 깊게 남아있었고 그가 꾹 누르고 있는 가슴 부위에선 붉은 피가 천천히 흘러내리고 있었다.
"역시 마왕의 심복 중 하나인 블러디 데몬을 혼자서 쓰러뜨리는 것은 너무 무모했나보네. 하지만... 그래도 이 녀석만큼은 내 손으로 쓰러뜨리고 싶었으니까 후회는 없어."
전설의 무기 중 하나인 영웅의 활을 대대로 봉인해서 숨겨놓고 있던 그의 마을은 바로 그가 쓰러뜨린 블러디 데몬이 지휘한 마족들에게 불바다가 되었다. 수많은 이가 죽었고 그 중에는 그의 가족들도 있었다. 그렇기에 사내는 무슨 일이 있어도 블러디 데몬은 자신의 손으로 결판을 내고 싶었고 반드시 무찌르겠다는 약속을 남기며 다른 동료들을 꼭대기로 보냈다. 아마 지금쯤이면 마왕과 대면했거나 한창 싸우고 있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하며 그는 씨익 웃었다.
"올라가서 합류해야하지만 이대로는 올라가기는 커녕 움직이지도 못할 것 같은데. 어쩐다. 하..하. 나중에 모든게 다 끝나고 내가 죽어있는 모습을 보고 다들 눈물을 흘릴까. 흘리겠지. 싸움에 승리해서 기뻐해야하는데도 그 녀석들이라면 기뻐하지 못하고 울겠지."
그래도 후회는 없어. 원수를 내 손으로 갚았으니까.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사내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이대로 눈을 감고 잠들어버리면 모든 것이 끝이 날까. 조금씩 의식이 흔들리는 것을 느끼며 그는 얼굴을 살며시 아래로 숙였다.
"...미안하다. 애들아. 반드시 이 세상에 평화를 다시 가져다줘."
/가끔 마왕과 싸우는 용사물에서 볼 수 있는 너희 먼저 올라가! 난 이 녀석을 쓰러뜨리고 갈게! 를 시전했다가 아치 에너미를 죽이는데는 성공했지만 힘이 다 되어서 점점 죽어가고 있는 용사 파티 멤버 중 하나의 이야기야. 여기에 누가 나타나서 무슨 말을 걸어도 별로 상관은 없긴 하지만 이미 죽였다고 분명히 이야기한 블러디 데몬이 난 사실 살아있다! 를 시전한다거나 사실 그런 일 없었는데 혼자서 헛소리하는 중2병으로 만들어버린다거나 그런 것만 아니면 돼. 당연하지만 꼽주는 맥커터질도 사절이야. 그 이외에는 진짜 어지간하면 다 가능!
>>353 상식을 가진 이에게 그 남자에 대해 설명하는 일은 무식한 농부 하나를 꾀이는 일만큼이나 어려울 것 같다. 다만 내 감상만을 말한다면, 블러디 데몬은 복잡하고 기복이 극심한, 스스로에게 주어진 것을 통제할 능력이 현저히 부족한 자였다. 인간이든, 마족이든, 그런 성정을 가진 이에게 과도한 권한이 주어지는 것은 주변에 고통을 주는 일이다.
그러나 그 자를 상사로 두고서 마냥 괴로웠다고 단정지어 말한다면, 그것은 분명 거짓의 악덕이다. 즉흥적이고 가변하는 존재였기에 그는 때때로 관대했고, 소란으로 주변을 즐겁게 만들 수 있는 소양도 조금은 있었기 때문이다. 간혹 그 자의 편집증적인 광기가 조금은 만족감을 느끼던 날에, 우리는 지극히 악마적인 광란이 충만한, 족히 몇 달분의 유흥에 버금갈 수 있는 연회를 제공받곤 했다.
그렇지만 대부분의 경우에 블러디 데몬의 병리적 집착은 진정되는 법이 없었다. 나는 그의 부사수로서 종종 무의미한 위치의 부락과 도시들에 철저한 파괴를 자행할 것을 명령받았는데, 그 이유는 대체로 납득하기 어려운 종류였다. 자신의 존재를 파괴할 어떤 존재, 혹은 물건에 대한 공포는 항상 블러디 데몬의 동선, 그리고 나의 동선에도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거점의 확보나 전리품의 수급 같은 실리적인 동기들은 매번 존재조차 불확실한 어떤 것에 대한 완전한 파괴라는 목표에 밀려 무시되었다. 대개는 어떤 인간, 때때로 창이나 도끼, 혹은 활, 심지어는 낡은 베일이나 녹슨 식기로 변하는, 안개 뒤쪽의 모호한 목표.
그게 내게는 항상 불만이었건만......
지금, 회랑의 저편으로 보이는 죽음의 모습은 그 자가 평생 집착했던, 그리고 내게도 흔한 유언비어의 일각으로나마 기억되는 악의 운명론을 상기시키고 있었다.
"활이었구나."
처참한 관통상에 터져나간 창자와 내장들을 피해 걸어가면서 나는 중얼거렸다. 시신에 가까워질수록, 배가되는 불안감과 위화감 속으로 오랜 시간동안 억눌렀던 억하심정이 터져나왔다. 그래, 이 날을 기다렸는지도 모르겠다. 내 사수를 집어삼킨 악의 운명이 정말 어떤 신기인지, 평범한 유시인지의 여부는 내게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시체를 남기는 종류의 공격에 그가 당했다는 것이다.
나는 아직 계승받을 게 남아있다.
조용히 열주들 사이를 지나, 어느 새인가 목표에 도달한다. 거리낄 것도 없다. 무릎을 꿇고 자세를 죽인다. 힘없이 구겨진 붉은 날개를 치우고, 시신의 머리통을 양손으로 붙잡는다. 그리고, 약간 떨어진 위치에서 여전히 느껴지는 희미한 숨소리, 그쪽으로 집중한다.
평생 공포에 쫓긴 불쌍한 병신의 숨을 거둬간, 준비된 사수가 여전히 살아 숨쉬고 있다. 내 지척에.
강인한 존재로군. 살아있다는 게 신기할 정도의 치명상 속에도 어떻게든 견디고 있다. 하지만 그마저도 얼마 남지 못한 것만은 확실하다. 하지만 지금은, 이 남자에게 설사 죽음에 반쯤 안겨버리고 말았더라도 1번 더 활을 쏠 여력이 남아있을지의 여부만이 중요하다.
저벅저벅 걸어오는 발소리에 힘없이 사내의 얼굴이 그곳을 향했다. 아직 누군가가 남아있었나? 아니. 남아있어도 이상할 건 없어. 사라져가는 의식을 애써 꽉 잡는 것은 아직 이 자리가 처리되지 않았다는 상황 때문이었다. 자리에서 일어설 힐은 없었으나 그래도 활시위를 당길 정도의 힘은 아직 조금 남아있었다. 허나 자신의 몸 상태, 그리고 흐르는 피. 그것을 모두 생각해보면 그나마 모든 힘을 끌어모아 정말로 자신의 목숨과 맞바꾸는 단 한 발의 기횔 뿐이었다. 손에 쥐고 있는 활을 애써 꽈악 쥐며 그는 팔만 겨우겨우 올려, 상처부위를 틀어막고 있던 손을 올려 시위를 잡았다. 손으로 막혀있던 진한 향이 더는 가려지는 일 없이 그대로 코 끝을 찔렀다.
"네가 먼저 올라간 내 동료들을 쫓는다고 한다면. 하하. 허나 항복하고 이 자리에서 물러난다면 나도 굳이 쏘고 싶진 않은데. 어차피 이제와서 쫓아간다고 하더라도 상황을 바꿀 순 없어. 마왕은 그 녀석에게 토벌당하고 너희들의 패배로 전쟁은 끝날테니까. 쿨럭!"
힘을 주고 말을 한 탓일까. 그는 입에서 피를 토해냈다. 스스로 목숨이 다 할 것을 직감하나 그는 오히려 입꼬리를 올렸다. 자신의 가족의 복수는 했다. 마을 사람들에 대한 복수도 했다. 그렇기에 죽음 따윈 두렵지 않았다. 단지 아쉬운 것이 있다면 자신의 동료들이 모든 것을 끝낸 후의 세상을 지켜볼 수 없다는 것 정도일까.
"말해두는데 나를 무시하고 올라간다고 하더라도 승산은 없어. 그러니까 여기서는 어차피 곧 죽게 될 녀석 하나 내버려두고 목숨 보존할 셈 도주하는 것은 어때? 그 녀석들도 싸울 의지가 없는 이들을 토벌하겠다고 뒤쫓진 않을테니까."
만일의 경우, 만약 자신을 공격하려고 하거나 자신의 동료를 뒤쫓아가려고 하면, 그 즉시 활을 발사할 생각으로 그는 그 끝을 눈앞의 대상에게 겨냥했다. 곧 꺼져가는 목숨과 맞바꾼 마지막 한 발. 빗나갈지, 명중할진 모르겠으나 만일의 경우엔 망설이지 않고 발사하려는 듯, 그의 꺼져가는 눈동자가 날카로워졌다.
>>355 이 남자는, 아직 말을 할 기력까지 남아있어서 희미하게나마 나에게 협박까지 하고 있다. 경이적인 생명력이다. 내가 저 정도의 부상을 입는다면, 필히...... 아니, 그 전에 육체가 견디지 못할 것이다. 저 상처들은 일생 쫓는 동시에 쫓겼던 공포의 근원을 비로소 마주한 대악마의 필사적인 공격에 의한 결과물일 터, 나라면 즉사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러니까 확신하건대, 저 활은 당길 수 있다. 나를 과녁으로 삼아서.
"좋은 눈을 가지고 있어."
복잡해지는 심사, 삶과 죽음의 기로, 희미한 두려움, 그러나 모든 맥락이 무의미하다. 무의식중에 나오는 말은 순수한 감상의 표현이다. 그 기적과 같은 강인함을 목도하고 있기 때문일까, 이 남자에 대한 감상 또한 순수하게 호의에 가까워진다. 심, 기, 체의 균형이 맞고 힘과 힘의 연결이 긴밀하다. 눈을 보면 알 수 있다. 명궁의 눈, 혹은 달인의 눈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이어지는 남자의 말, 그간 조금은 잊고 있던 것들이다. 의무에 대한 상기. 오랜 시간 의식 밖으로 밀어놓았던 충성의 의무에 대한 기억이다. 본 적도 없는 군주를 위해 일생 대적했던 어떤 이보다도 강인한 인간들을 향해 뛰어들어야 할 불나방의 의무, 악덕이란 항상 강자에게 유리하게 작용하는 법이다.
하지만, 나는 그런 결말을 원하지는 않는다. 조금도.
"동료들이 있나, 분명히 아직 살아있고, 또 당신이 수행할 수 없게 된 목표의 후반부를 통제하고 있겠군. 그게 당신네들의 방식이니까."
그래, 인간들이 죽음을 넘을 수 있는 방식이지. 그러니까, 지금 내가 하고 있는 것과 동일한 행위라는 것이다.
"대화의 여지가 있을 것 같군. 그리고, 불쾌한 소리일지 모르겠지만, 당신은 어떤 면에서 닮은 부분이 있어. 방금 당신의 손으로 죽인 존재와."
그러니까 내 사수여, 걱정하지 마시오. 지금 당신을 계승하고 있으니.
"내 목적은 블러디 데몬을 섭식하는 것이고, 그게 달성된다면 내 군주에 대한 의리는 없다. 이 기나긴 전쟁에서 얻은 전리품이라고는 이것 뿐일 듯 하군."
"그게 인간들이 살아가는 방식이니까. 핫. 지금 내 몸 상태가 이런 것이 유감스러운걸. 정말로 불쾌한 소리에 바로 대응을 할 수 없는게 말이야."
대화의 여지가 있다고 하니 그는 바로 활을 당기지 않고 일단 상대의 말을 들어보는 것을 택했다. 지금 자신이 해야 하는 것은 마족을 섬멸하는 것이 아니었다. 자신의 동료들을 방해할지도 모르는 이라면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바쳐 이 활을 쏘았겠지만 그게 아니라면, 더 싸울 의지가 없는 이라면 굳이 피를 더 흘리게 할 순 없는 노릇이었다. 허나 블러디 데몬을 섭식한다는 그 말에 그는 바로 질문을 던졌다.
"이미 죽어버린 녀석을 먹어서 얻을 수 있는게 뭐지? 대답에 따라서 내 행동도 결정될 것 같아서 말이야."
만약 섭식함으로서 새로운 블러디 데몬이 탄생하게 되고, 자신의 동료를 위협하는 적으로서 강림한다면 지금 여기서 막아야만 했다. 물론 그것을 달성할 수 있을진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점차적으로 시선이 흐려졌고 조금만 느슨해져도 그대로 의식을 잃을 것만 같았으니까. 붉은 핏물은 그의 옷을 따라 땅을 향해 흘렀고 숨을 쉬는 것조차 힘들어질 정도였다.
"이 길고 긴 전쟁을 계속해서 이어가는 행위가 아니길 빌겠어. 설사 여기서 내 공격을 피하고 내가 죽는다고 하더라도 내 동료들의 힘까지 피할 순 없을테니까."
힘과 의식을 취하기 위한 행위라는 말에 그는 말없이 생각했다. 그렇다면 저 자가 또 다른 블러디 데몬이 되어서 이 세계를 위협하는 것은 아닐까. 하지만 그저 힘을 취하고 돌아갈 가능성도 컸다. 싸움을 희망하지 않고 싸울 마음이 없는 마족에게는 손을 대지 않는 것이 자신들의 방식이었다. 자신들이 원하는 것은 평화이지, 상대 종족을 무조건 멸하려 하는 섬멸이 아니었으니까. 빛의 뒤에 어둠이 있고, 밝음 뒤에 그림자가 있듯이 수많은 종족들은 결국 어떻게든 연결되어 조화를 이뤄야하는 법이었다.
"복수. 힘없는 내 부모님과 친구들을 죽인 이를 죽였으니 이제 여한은 없어. 누군가에겐 어리석을지도 모르고 개인만족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오로지 그걸 위해서 지금까지 노력한 거였으니까. 그렇기에 나 혼자서 그 녀석과 결판을 낸 거였고."
물론 살아서 하고 싶은 것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이를테면 동료 중에서 모든 것이 다 끝나면 같이 따로 여행을 가자고 한 이도 있었고 재건한 마을에 가서 조용히 사냥꾼으로서 살아가는 것도 나쁘지 않은 일이었다. 허나 복수를 했으니 이대로 가족과 친구들이 가는 것도 나쁘지 않았고 두렵지 않았다.
"서로서로 날카롭게 있진 말자고. 이것만 대답해. 그걸 다 먹고 힘과 의식을 얻고 나면 어쩔 참이지? 전쟁을 일으키지 않고 그저 평화롭게 살아간다고 한다면 나도 방해하지 않겠어."
허나 그 힘으로 다시 세계를 혼란에 빠뜨리고 자신의 동료들을 공격하러 간다면 활시위를 당길 뿐이었다. 그 화살은 마를 멸하기 전까지 계속해서 쫓아갈테니까. 단 한 방에 죽일 수 있을진 모르겠지만 아무리 못해도 부상을 입히기엔 충분했다. 약간의 시간 끌기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그 약간의 시간끌기가 자신의 동료들에겐 필시 도움이 될 것이라고 그는 믿었다.
"어차피 마왕은 내 동료들의 손에 쓰러질거야. 그렇다면 굳이 힘겹게 다시 서로서로 피를 흘릴 필요는 없잖아. 안 그래?"
아직도 3시가 안 됐다니. 모니터를 바라보다 등받이에 무거운 몸을 뉘인다. 모니터 속에 기어들어갈듯이 구부정해있던 척추, 어깨, 목이 좀 펴지는 것 같다. 그런 기분이 든다. 은은한 두통은 언제나 나와 함께 했고, 블루라이트 차단에 뭐 이것저것 좋은 옵션을 추가하여 만들어 렌즈만 돈 십만원 넘는 안경은 제 기능을 하긴 하는건지. 눈도 뻑뻑하고 공기도 탁한 것 같다. 아니, 탁했다. 여기서 살아숨쉬는 건 나뿐이라 나만 아는 이야기라 한탄할 곳도 없다. 이번 망자만 접수하고 바람 좀 쐬러 가야겠다.
평범한 일상과는 거리가 매우 먼 이야기였다. 푸른색 눈동자를 가지고 있는 사내의 전방의 지형은 모두 꽁꽁 얼어붙은 상태엿다. 지금이 한겨울이라면 그런 지형이 있어도 이상할 것이 없겠으나 지금은 더위가 막 시작되려고 하는 5월 중순이었고, 땅 지대 모든 것이 얼어붙은 것이 아니라 눈앞에서 벌벌 떨고 있는 남녀 한 쌍의 주변을 감싸고 있듯이 얼어붙어있다는 것이 참으로 이질적인 모습이었다.
하얀색 제복을 입고 있는 사내의 눈동자에 비치고 있는 남녀 한쌍은 두 손을 들어 항복 의사를 밝히고 있었다. 허나 사내는 손에 들고 있는 그 하얀 검 끝을 조금도 돌리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방심할 수 없는 상대였기 때문이다. 눈앞의 두 사람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이능'을 이용해서 범죄를 저지르고 있는 이들이었으니까. 그리고 사내는 그런 자들을 막아서는 '이능'을 지닌 멤버 중 하나였다.
그 이후의 이야기는 그다지 특출난 것은 없었다. 두 사람을 확실하게 붙잡고 있었던 사내는 다른 팀의 멤버들이 오자 붙잡아두고 있던 범죄자 두 명의 신병을 인도했고 두 명은 구속되었다. 이송되는 두 사람을 조용히 바라보던 사내는 뒤로 돌아 하늘 위에 떠 있는 달을 가만히 바라봤다. 아직 돌아가는 분위기는 아니었고 조금 쉬는 분위기인 듯 했으니 이렇게 혼자 달을 구경해도 나쁘지 않겠거니 생각하며 사내는 아주 살짝 다른 이들이 있는 곳에서 거리를 띄웠다. 딱히 혼자 있는 것을 좋아하거나, 냉정한 성격이라거나 그런 것은 아니지만, 굳이 말하자면 열정적이고 열혈적인 느낌이 있긴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혼자 있는 시간을 싫어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 뒤에서 들려오는 발소리에 아주 살짝 관심을 가지고 뒤를 돌아보는 것이 바로 그것을 증명했다.
/이능을 가진 범죄자가 있고 그것을 이능을 지닌 팀이 막아내고 체포하고 잠시 쉬는 타임이라는 느낌이야. 누가 와서 어떻게 이어도 상관은 없긴 하지만, 중2병 연극 그만. 이라는 식의 꼽이라거나 맥을 박살내는 맥 브레이커 같은 것은 없었으면 해. 그 외에는 갑자기 내 캐릭터를 죽여버리는 거 아니면 자유롭게 잇기 가능이야. 개인적으로는 약간 과거 모카고 같은 느낌을 떠올려서 썼으니 분위기에 참고를 해도 좋을 것 같고?
사내의 뒤로 다가와 넉살 좋게 웃으며 말을 건넨 이는, 172cm의 결코 작지 않은 신장에, 살집이 붙어 겉으로 보기에는 둥글둥글한 체형의 몸 위로, 전투로 인해 구겨지고 더러워진 하얀 제복을 입고, 검은 머리카락을 아래로 질끈 묶은 여성으로, 그의 직장 선배인 도라희였다. 정규직이 된 건 좋은데 이대로 가다간 제 명에 갈 지 모르겠다니까. 그나마 비정규직일 땐 범죄자만 잡아서 넣으면 됐는데 이제는 범죄자랑 씨름한 직후엔 서류 작업 해서 윗 분들한테 보고해야 하잖아. 피의자 신상에. 범죄 목록에, 추적 경로랑, 체포과정까지... 써서 내고 끝나기만 하면 몰라. 윗분들이 절차, 서류 그런 거 빠지면 사람 혼 빼먹을 기세로 뭐라고 해대니까 업무시간 상당부분을 종이씨름에 할애하는 것도 이해할 수는 있어. 근데 그렇게 보고서를 작성해도 결재를 못 받고 반려되기 일쑤고, 뭐가 그렇게 바쁘신지 피드백도 엄청 느려터져서 한 숨 돌렸나 싶으면 처음부터 다시 작업해야 하고... 가끔은 윗 분들이 범죄자보다 더 끔찍하다니까. 그 새끼들은 암만 날 굴려대도 체포도 못 하잖아. 에휴, 됐다. 솔직히 불만거릴 본격적으로 따지자면 이 실용성이라곤 찾아볼 수도 없고 금방 더러워지는 제복부터 시작해도 할 말이 아주 많지만 그럴 시간은 없지. 일해야 하잖아. 라희는 일터에선 뱉지 못할 불만을 웃는 얼굴 너머로 삼키곤 스스로를 타이르며, 가벼운 태도로 후배를 재촉했다.
"이대로 늘어지고 싶은 마음이야 저도 태산같지만 윗 분들한테 보고 해야하잖아요? 숨 다 돌렸으면 얼른 서류 작업하러 가자구요."
그래도 국민연금에 건강보험료도 반이나 대신 내주고, 급여도 안정적으로 나오는 정규직이 훨씬 좋지. 먹고 사는 것도 먹고 사는 거지만 우리 귀요미 발레 학원도 내년에는 꼭 끊어주기로 약속했잖아. 짧은 시간도 아닌데도 착하게 잘 기다려주고 있으니까 나 힘들다고 배신할 수는 없지. 우리 와이프도 고된 거 참아가며 힘 내서 일하고 있을 테니까 나도 찡찡거리고 있을 수만은 없고. 그래도 복지 더 나은 곳 있으면 확 그냥 이직해 버릴테다. 후배를 재촉하는 김에 스스로도 타이르며, 그는 어서 오란 투로 후배를 향해 손짓했다. 밤은 깊었지만 오늘 안에 퇴근하려면 서둘러야 했다.
/ 이름이 안 나와있어서 부득이하게 OO로 처리했어:) 이름 알려주면 다음 턴부터 반영할게!
왔어? 기다리느라 목 빠지는 줄 알았잖아. (쓰레기더미나 다름없는 잿빛 공터의 철근 위에 앉아 당신을 향해 반갑게 손을 흔들어보인다. 마치 농구 기술을 선보이듯, 제 등 뒤로 팔을 꺾어 무언가를 당신에게 향해 던진다. 빵이 든 봉지는 먼지가 좀 묻어있지만, 빵은 깨끗하다. 당신을 향해 흔들어보이는 손 아래, 널널한 소매에 가려진 팔에 주삿자국이 여러개 찍혀있는 것이 보인다.) 헌혈차는 방금 갔어. 31구역으로 간다더라. 저번에 맡았다던 일은 어떻게 됐어? 할 만해?
>>366 31구역? 빨리도 가네, 원. 손님 모자라서 아쉬울 일 없으니 이해는 간다만.(투덜거리면서 봉지를 살짝 열고, 빨대 하나를 슬며시 꺼내 집어넣은 다음, 코끝을 대고 살짝 들이마시더니,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말한다.) 냄새 좋네. 오늘 들어온 밀로 구운 거지? 니미럴, 이런 상등품 하나면 보름은 빠릿빠릿해진단 말이야. (더 볼 것도 없이, 봉지를 뜯은 다음 대강 뜯어서 조금 맛본다.) 맡았던 일? 말도 마. 꼬일 대로 꼬여서 지금도 슬래셔 갱들이랑 한판 하고 오는 길이야. (옆으로 성큼 성큼 걸어오더니 아수라장같은 공터의 그나마 적당할 법한 자리에 털썩 주저앉고는, 궁시렁거린다.)막 착수하려고 수건이고 안무고 준비 다 해서 갔더니만, 여기 건은 자기네들 봉사라는 거지. 돼지같은 것들. 온 동네 양로원이 다 지들 나와바리인줄 안다니까.
>>367 최근에 31구역 자경단 내분이 일어나서 마약 공급로가 채식주의자 혈관처럼 뚫려버렸대. 신종 마약도 들어와서 장난 아니라더라. (빵을 맛보는 당신을 바라보며 피식 웃고는 ‘이 빵을 받아라, 내 피이니.’라고 덧붙인다.) 슬래셔 애들이 활개치는 모습을 다 보네. 기업의 애완견 화장지 대용품이었던 애들이. 원래 못먹던 애들이 한 번 맛 본 건 아득바득 안뺏기려고 애쓰잖아. (마찬가지로 빵 봉지를 뜯어 크게 한 입 베어문다. 무언가 생각하는 것처럼 입만 우물거리며 뿌연 하늘을 올려다본다.) 오빈 하우스 빌딩에 살던 맥퀸 부인, 어제 죽었대. 약물 과다복용으로. 맨날 사탕이니 뭐니 주셨었는데.
>>368 그 치들도 말야, 곤궁은 한 모양이지? 약물 계통이 꿈틀댈 때는 말단부에서 변화가 올라오는 건 절대 아니란 말이야. 약팔이 새끼들은 다 약쟁이들이라고. 돈 생기면 사먹고 돈 없으면 팔고, 그러다 죽을 병신들.(신경질적으로 빵을 쑤셔넣다가 잠깐 목이 매여서 꺽꺽거린다.) ......아무튼, 31구역 시끄러운 건 애초부터 마약 건일 게 뻔하지. 따라가보면 부랑자 놈들 상대로 신상품 쇼케이스 벌이고 싶은 큰 손 하나 있을 거라고. (당신의 손에 있는 빵봉지에도 우악스럽게 손을 집어넣으며, 겨우 조금 여유로운 표정을 짓는다.)따지고 보면 슬래셔 그 거렁뱅이들도 대가리가 없는 것들은 아니야. 결국 개사료도 고기니까, 먹고 싶다는 호구가 나올 수밖에 없다는 거지. 급한 새끼들은 헌혈차나 양로원이나 똑같다니까, 노인네들 지옥 보내주는 싸구려라도 꽉 잡아놓는 게 나름의 수완이겠지. 그것밖에 안 남은 거지새끼들. (그러다 당신의 마지막 말을 듣고는, 내색은 않지만 얼굴에 핏기가 가신다.)하루이틀 일도 아니잖아. 중독자는 다 단두대에 목 걸어놓고 사는 거나 마찬가지야.
>>369 그래도 약팔이 중에서도 괜찮은 애들도 몇몇 있어. 쏜 디키빈, 마그네스, 록커...셋 중 둘은 죽었네. 진짜 이상해. 록커의 노래는 끔찍했지만 칼림바는 끝내줬는데, 재능도 못살린다는게. (자그마한 한숨을 내쉬다, 당신이 꺽꺽거릴 때 등을 토닥여준다.) 그렇겠지. 그래서인지 네이밍도 끔찍해. 정적 낙원이래. 근육수축제 성분도 같이 들어있어서 몸 전체가 딱딱하게 굳는대. 풀릴 때도 소변 다 봤을 때처럼 기분 좋다나. 야! (빵봉지를 빼려해보지만 역부족이라 그냥 당신 얼굴을 향해 던진다.) 너무 부조리해. 이 거리의 노인들은 모두 과거에 훌륭한 어른들이었단 말이야. 센트럴 실버타운, 그 건만 공중분해되지 않았더라면. (그러다 당신의 말을 듣곤 노려본다.) 맥퀸 부인은 딱한 사람이야. 과거 교수에, 자식들이 죄다 변호사에 검사인데도 얼굴 한 번 안내비쳤잖아. 그냥, 이 거리가 상식이 통하지 않는 곳일 뿐이야. 그렇게 생각해.
>>370 록커는 병신이었어. 병신이었다고. 동네에 널린 게 운반책인데, 지가 뭐라고 건수마다 기어나와? 잠자코 오디션이나 보러 갈 것이지......(텅 빈 봉지에서 부스러기나 긁어모아 입에 털어넣는다.) 그래도 마그네스에 비하면 양반이었지만. 걔는 진짜로...... 좀 정상적인 곳에서, 의류 브랜드같은 거라도 운영했으면 좋았겠지. 큽!(안면을 후려친 빵봉지를 잡아 대충 근처에 내려놓는다.) 뭐, 결국 책임은 본인들에게 있다는 거지만, 나도 동정은 해. 맥퀸 부인도 그렇고. 진통제 떨이로 전락할 프로젝트에 홀려서 재산이고 뭐고 다 포기한 건 그 여사님 잘못이지만, 그래도, 실수 한 번에 망가져도 상관없는 볼품없는 인생은 아니었을 거야.(조용히 자기 손바닥을 펴고 응시하다가 얼굴을 쓸어내린다.) 휴, 그리고 뭐, 알라시도 그랬고.(말을 꺼내놓고는, 슬쩍 당신의 눈치를 살핀다.)
>>371 ...야, 오디션까진 아니야. 걔 오디션 나갔으면 극단적 선택 했을걸. (푸하하, 알맹이 없는 웃음을 흘린다.) 맞아. 결국 운반책 애들도...나쁘지 않다곤 못하겠지만, 그냥...어쩔 수 없는 놈들이었다고. (습관적으로 손등을 긁으며 코를 훌쩍거렸다. 당신의 이야기를 묵묵히 듣고있다, 뒤에 나온 이름에 눈이 커진다.) 아니. 알라시, 걔는...걘, 실수 같은 거 한 적 없어. 너도 알잖아. 그런 꼴을 당해도 싼 애가 아니었어. (손등을 긁던 손이, 점점 손목의 흉터로 옮겨간다.) 내가 옆에 있어줬어야 했는데. 왜 하필 그 때 난...씨발. (아무리 그라 해도 욕을 지껄일 수 밖에 없다.) 경찰들은 아무도 안믿어줘. 정신과 약을 복용하고 있다지만 알라시가 어떤 앤지 알면서. (몇 번이고 했었던 말을 다시금 중얼거린다.) 분명 타살이야. 꼭 잡아낼거라고. 근데, 너무 무력해... (떨리는 손을 내려다보며 길고 무거운 숨을 뱉는다.)
>>372 하기야, 악기도 무슨 지처럼 모자란 걸 해가지고, 우리같은 부랑아들이 개천에서 용 나는 것도 힙합이나, 메탈이나, 보통 그런 쪽이지. 그래도 나는 걔 연주 좋아했지만. (침을 꿀걱 삼키고, 괜히 바닥을 본다. 당신의 말을 들으며 한숨을 푹 쉰다.)자꾸 긁지 마, 피부 벗겨질라. (약간 후회스러운 어투로)이거 괜한 화제를 꺼냈구만. 그때 이후로...... 바뀐 것도 없고, 여전히 하루 하루는 지랄같고, 나도 답답......해서 말야.(손바닥으로 턱을 괴고, 쉼 없이 쓸어내리기 시작한다. 그러고 있으면 다 잊혀지기라도 할 것처럼.) 우리 모두에게 책임 있다면, 하필 이런 개같은 곳에서 태어났다는 거지. 쓰레기장에 꽃이 피어 봤자, 몇 번 주변에 휩쓸리면 결국 구분이 안 간다고, 우리가 꽃은 아니겠지만. (잠시 고민하듯 눈빛이 흔들리다가, 지긋이 당신을 보고 조심스레 말한다.)이 말 하면 내 아구창이 남아날지는 모르겠지만, 난 역시 자살 같았어. 그...... 후.(깊은 한숨.)
내 인생은 시작부터 운빨망겜 그 자체였다. 돈과 권력, 그리고 빌어먹을 능력으로 모든 것이 귀결되는 세상에 태어난 것부터가 운이 없었다. 그런 세상에 하룻밤 장난질로 생겨난 것도, 부모 모두에게 버려진 주제에 죽지 못 하고 살아남은 것도, 천운이 아니라 천악이었다. 어느 멍청한 집시만 아니었다면 나는 그 날 그 쓰레기장의 차가운 봉투 속에서 죽어버렸을 텐데. 그랬다면 여태 살아, 아득바득 살다가 이렇게 괴로운 최후를 맞을 일도 없었을 텐데. 정말 시작부터 끝까지 운이 없다. 그래도 이제야 끝나는 것에 감사해야 할까. 25년이나 이렇게 살았으면 충분하지...
"쿨럭, 커흑..."
어두운 골목길에 내 밭은 기침 소리 울린다. 입에 고였던 핏물과 새로 솟은 핏물 뒤섞여 바닥에 흘뿌려진다. 새벽이 깊은 밤, 아무도 지나가지 않는 골목길 한구석, 차가운 벽과 바닥과 오물 뿐인 이곳이 나의 마지막 잠자리가 될 곳이라니, 마지막만큼은 좀 멀쩡한 곳으로 갈까 싶어 몸을 일으키다가 포기했다. 다리는 없는 것마냥 감각이 느껴지지 않고 베인 옆구리에선 이미 피가 바닥에 늪을 만들 기세로 흘렀다. 움직여봤자 몇분이 고작이겠지. 그럴 바엔 편안히 잠이나 들어버리자고, 그렇게 마지막 숨을 내쉬자며 몸을 굴러 벽에 기댔다.
아아, 정말 엿 같은 인생이었어. 꽃다운 계집으로 태어나, 남들 다 하는 거, 사랑도 놀이도 한 번 못 해보고, 그저 살다가 가는 인생이라니. 부디 다음 생은 없길 바라며 점점 무거워지는 눈커풀을 움직인다. 깊은 밤, 빛이라곤 희미한 달빛 뿐인 골목길, 그 끄트머리에 처박힌 내 쪽으로 누군가의 발소리가 점점 다가오고 있음을 아직은 알지 못한 채였다.
"당신은, 당신의 이야기를 끝 맺히고 싶은가요? 대단원에 이른 이야기에 새로운 이야기의 시작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으신가요?"
그 발소리의 주인은 이런 곳에 있는 것이 어색할지도 모르는 인물 이였습니다. 아니면 그 반대 이던가. 언제부터 그곳에 있었는지 모를 그 인물은 지금의 상황에서 결국은 그렇게 되도록 된 경위를 이야기, 우화에 비유하는 듯이 말하며 건넸습니다. 그 억양 속에 담긴 것은 마치 여러 번 보았다는 것처럼, 그런 느낌으로. 그럴 뿐 정말로 그랬던 것인지는 확실하지는 않습니다. 지금 여기서 확실하다고 할 수 있는 것은 이러한 으슥한 곳에서 위급한 것처럼 보이는 사람 앞에서 이러한 비유법을 들면서 태연이 말을 건넨다는 행위가 이상하게 보일 거라는 것입니다
"저에게 당신의 시간을 나누어 줄 수 있으신가요? 그렇다면 저의 시간 역시 당신에게 드리겠어요"
허리를 넘어서 닿는 긴 흑발에 검은색의 드레스를 차려입고는 이런 흐릿한 달빛 만이 반짝이는 어둠 속에서도 조차도 검은 양산을 손에 쥔 위고 아래고, 전부 검은색의 투성이로 그렇기에 대비되어 더욱 뚜렷하게 보이는 다른 색이라면 옷에 가려지지 않는 부분인 흰 얼굴과 푸른 빛으로 반짝이는 듯한 선명한 색의 눈동자 뿐인 소녀가 이번에는 눈웃음을 한번 지으며 이어서는 이번에도 애매모호한 말로서 물음을 건넵니다
그녀는 그 앞에 인물의 바로 곁에서 그녀의 물음에 대한 답이 되돌아 오는 것을 기다리듯이 그대로 멈춰 서서는 바라보았습니다
내겐 자비심도, 감정도 없다고 스스로에게 거짓말을 해온 지도 20년을 훌쩍 넘겼다. 스스로의 그런 '나약함'을 받아들이기로 한 것은 이제 그 절반도 덜 되는 수준이다. 나는 온정으로 세례를 받아 거듭났으니, 무기에서 인간이 될 수 있었다. 늦은 밤이다. 내 삶에서 의미가 있던 날들중 대다수는 다른 이들이 잠드는 이 밤에 존재했다. 부모님께서 헤어진 것도 밤. 홀로 남게 되어버린 것도 밤. 스스로의 신분을 국가에 맡기기로 한 것도 밤. 소중한 전우들을 잃은 것도, 총을 내려놓고 고향으로 돌아온 것도, 소중한 그녀를 만나고, 잃은 것도. 전부 밤이었다.
오늘 밤은 그녀를 잃은 지 3년이 지난 밤이다. 그녀의 친구들이자 곧 나의 친구들인 이들과 함께 사라져버린 존재를 기리고 돌아오던 길이었다. 익숙한 향기가 골목 한 구석에서 풍겼다. 본능과 이성이 한꺼번에 경보를 울렸고, 나는 그곳으로 향했다. 이제는 사냥꾼이 아닌 사회를 누리는 시민으로써. 그곳엔 내가 있었다. 마치 과거의 나를 보는 것만 같았다. 물론 성별도 다르고 신분도 다르고 상황도 다르겠지만, 피부 너머로 느껴지는 이 광경에는 분명히 내가 있었다. 상처를 입고 세상을 원망하는 눈은 분명히, 그 때의 나 자신과 같았다.
"세상에."
욕설조차도 하지 못하고, 나는 곧장 그곳으로 달려갔다. 오랜 공포는 아직도 내 뇌 한 구석에 남아 있어서, 누군가가 피를 흘린다는 상황을 지나치지 못했다. 다른 이들이 보통 허리춤에 권총집을 찰 때, 나는 작은 가방을 찼다. 그곳에서 꺼낸 간단한 도구라면 분명 이 사람을 구할 수 있을 것이다. 과거의 나를. 그 때 구해내지 못한 내 친구를. 또 잃고 싶지 않았다.
"우선 상처, 아니 출혈을... 잠깐만요."
너무 급해서 그런지 말조차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난 무릎을 꿇고 앉은 채 다친 사람의 환부를 확인하려 들었다. 가로등 불빛도 없이 희끄무레한 달빛 밖에 닿지 않는 골목길 구석에서, 스마트폰의 불빛에 의존하여 꺼져가는 불씨를 살리려는 멍청한 짓을 감행하기로 했다.
기름 두른 팬 위를 널뛰는 옥수수 낟알처럼 소란스러운 거리가 싫어서 피하고 피한 것뿐인데 이게 무슨 일인지. 요란스럽던 소리가 죽으면서 흘린 붉음일까 싶어 눈을 비비면 한 명의 사람이 한 마리의 짐승처럼 죽어가고 있었다. 축록에 사냥당한 산짐승처럼 베인 허리로부터 생명의 증거를 쏟으며 쓰러져 있는 누군가. 웅덩이를 만드는 흥건함에 나도 모르게 인상을 찌푸리고 마는 것은 결코 낯설지 않은 그 냄새가 퀘퀘 묵은 지난날의 상흔을 아리게끔 만들었기 때문이다. 나도 모르게 한 걸음 두 걸음, 뒷걸음질 치고 마는 것은 모른 척, 못 본 체, 왔던 길을 거슬러 올라가라고 속삭이는 양심을 등진 이성의 꼬드김 때문이다.
지난 삼십 년의 평화를 깨부수는 짓은 삼가고 싶었다. 사건을 모르고 사고를 잊은 척하며, 한 번 궤도를 벗어났던 삶을 각고의 노력 끝에 여기까지 되돌려놓았다. 그 노력을 수포로 만드는 일은 하고 싶지 않았다.
무고한 피해자는 없다며 세상만사에 삐뚠 태도를 보이던 누군가의 얼굴이 떠오른다. 그 사람이 지금 이 광경을 보았다면 도움의 손길을 망설이는 내게 큰 소리로 호통을 쳤을 것이 분명하다. 불의 뜨거움을 직접 데어봐야만 아는 멍청이였냐며 지금 당장 이 자리를 떠나가라고 내 엉덩이를 걷어찼겠지. 생면부지 타인, 복잡한 문제를 끌어안은 것이 분명한 사고 물건에 어디 손을 대려 하냐면서 윽박을 질렀을 것이다. 그래서일까. 달빛을 반사해 빛나는 붉은 피가 내게는 건널목의 적색등처럼 보였다.
핏비린내 나는 전쟁이 끝나고 평화가 찾아왔을 때 그것을 거부하는 이들은 그 어디에도 없었다. 물론 한때는 인간, 엘프, 드워프, 마족 등등. 정말로 다양한 종족이 서로의 생존과 이익관계 등으로 싸웠지만 그 모든 것을 뒤에서 조종하던 '흑막'이 있다는 것이 밝혀지고 그 흑막이야말로 자신들이 평화를 위해 처치해야 할 존재라고 인식된 수많으 종족들은 이내 모두 힘을 하나로 합쳐셔, 어제의 적이 오늘의 아군이 되어 모든 것을 뒤에서 지배하고 남 모르게 조종하던 흑막을 쓰러뜨리는데 성공했고 이제는 서로 더 싸우지 않도록 평화협정을 맺음과 동시에 제대로 된 평화가 찾아왔다.
바로 전날만 했어도 전쟁에 차출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과 언제 죽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을 품은 이들의 표정은 더 이상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흑막과 싸웠던 이들 중 한 명인 인간족의 젊은 사내는 정말 유유자적하게 거리를 누비고 있었다. 성스러운 검을 들고 누구보다 앞장서서 이 세계에 평화를 되찾아온 주역 중 한명인 그는 얼굴에 미소를 짓고 평화를 즐겼다. 세간에 떠도는 소설을 보면 보통 자신 같은 케이스는 영웅으로 대접받고 주변에서 사람들이 많이 알아보며 많은 부와 명예가 주어질지도 모르나 현실은 마냥 그렇진 않았다. 물론 왕이나 그런 사람들이 자신을 알아보고 대우를 해주긴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자신의 얼굴을 세간 사람들이 모두 알 정도는 아니었다. 물론 친분이 있는 이들이야 대단해!! 라고 말할지도 모르나 고작 그 정도였다.
"그럼 오늘 이 축제만 즐기고 슬슬 다른 곳으로 가볼까. 뭔가 계속 여기에 있기도 애매하니 말이야."
수도 출신이 아니라 그저 평범하고 작은 마을 출신이었던 그는 슬슬 여길 떠나 고향, 혹은 다른 곳으로 갈 때가 아닐까 생각하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물론 수도 생활이 불편하다거나 자신에게 눈치를 주는 이가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언제까지나 여기서 지낼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저 발길 닿는 곳으로 돌아다니다가 고향으로 돌아가서 검이나 가르치면서 여생을 보내는 것도 그리 나쁘진 않겠지. 그렇게 생각하며 그는 미소를 지었다.
/갑자기 시리어스한 장면이나 컷! 아. 배우님. 다시 제대로 해주세요! 같은 맥브레이커만 아니면 오케이!
눈을 깜빡일 때마다 의식이 수면 아래로 잠겨간다. 이제 몇번, 제대로 보이지도 않는 앞을 보고나면 내 의식은 완전히 끊겨버릴... 터였다.
"ㄴ, 누구, 야..."
의식이 희미해서였는지, 나는 누군가가 코앞에 다가올 때까지 눈치채지 못 했다. 스마트폰 플래시 특유의 빛이 없었다면 이 사람이 죽어가는 내 얼굴을 빤히 보고 있었어도 몰랐을거다. 그러나 그는 멍청하게도 플래시를 켰고 그 빛은 가라앉던 내 의식을 강제로 수면 위로 끌어올렸다. 불쾌한 각성의 감각과 마지막을 방해받았다는 짜증은 내 얼굴에 고스란히 담긴다.
"오지랖, 떨지 말고... 꺼져. 털어갈 것도, 없으, 니까..."
갈린 목으로 억지로 쥐어짜는 목소리는 그야말로 소음 그 자체다. 말하느라 목이며 몸 곳곳에 힘을 준 탓에 잊어가던 고통이 새롭게 밀려와, 신음으로 낮게 목을 울리자 짐승의 그것과 흡사한 소리가 난다. 그 뿐이랴, 메마른 목을 울렸으니 마른 기침 터지는 것도 있다. 커흑! 크흑. 온몸을 울리는 기침 몇번 하자 몸이 파르르 떨리고 슬슬 굳어가던 옆구리로부터 뜨끈한 피가 또 한웅큼 왈칵 솟구친다. 내 아까운 피, 이 이상 쏟으면 안 되겠다는 본능에 덜덜 떨리는 손으로 옆구리를 짚지만 힘없는 손으론 지혈도 뭣도 안 된다. 다만 차게 식어가는 손에 갓 흐르는 피는 뜨겁다고 느끼며, 괴로운 숨을 몰아쉰다.
"내버려, 둬... 이제, 이제야... 쉴... 거라고... 나는..."
비몽사몽에 가까운 감각 속에서 그렇게 중얼거린 나는 접근을 허락치 않듯 몸을 웅크렸다. 여기저기 찢어지고 뜯어진 테크웨어 한벌만이 내 수의가 되어주면 족했다. 이제와서 도움 따위, 누군가의 도움 따위는...
이 거리의 또 다른 그늘을 목전에 두고 있다. 아마, 이 사람에게도 이렇게 되어버린 사연이 있겠지. 특히나 단순한 사고가 아닌, 흉기 등으로 노려진 듯한 모습을 보면 더더욱. 이 사람과 엮이면 위험해질지도 모른다는 예감이 머리 속을 엄습했다. 그러나 그렇더라도 나는 지나칠 수 없었다. 기사도 정신 따위나 군인 정신 같은게 아니다. 이건 두려움이다.
"조금만 기다려요."
목숨을 잃는 것을 두려워 하면서도, 모든 것에 적대감을 감추지 않는 모습은 상처 입은 짐승같아 보였다. 출혈과 그것을 가리는 손을 바라보고선, 조심스레 그 손을 옮겼다. 웅크린 틈새로 잡은 피투성이 손목은 차가웠다. 출혈도 많고, 체온도 잃고 있다. 의식을 잃지 않도록 조치해야할지도 모르겠다.
"...이름이 뭐예요? 나이는?"
간단하게 기억해낼 수 있는 것들을 물어가며, 상처 부위의 옷을 조금 걷어올렸다. 날붙이로 인한 절상인가? 확실히 그냥 사고로 인한 건 아닌 것 같다. 그렇다면 더더욱 버리고 갈 수는 없는 법이다. 누군가에게 목숨이 빼았기는 것은 이제 사절이다. 특히나 내 눈 앞에서. 망설임 없이 소독 거즈의 포장을 뜯고서, 거즈를 환부에 대고 꽉 누른다. 물론, 상태를 보면 지혈만으론 부족하겠지만 일단 피를 멈춰야 한다. 후송은 그 다음이야.
구급대를 불러야 하나? 아니. 어쩌면 그랬다간 허사가 될 수도 있다. 병원에 입원하고 있는 사람은 오히려 몇몇 상황에선 더 무력한 경우가 될 수 있다. 스마트폰을 들어올려 조금 고민하고 있다가, 본인에게 묻기로 했다. 자칫하면 구급대를 기다릴 틈도 없이 이동해야 할 수도 있으니까.
그만, 그만 날 내버려둬. 이 이상 나를 이 거리에 붙잡아두지 마. 더 이상 나를 이 세상에 살아가게 하지 말라고. 나는 웅크린 채 덜덜 떨었다. 빠져나간 피의 분량만큼 체온을 잃었기에, 절대 춥지 않은 이 계절에 뼛속까지 시린 한기가 전신을 엄습한다. 아, 젠장, 진작에 정신을 잃었으면 이런 한기는 느끼지 않았어도 됐을텐데, 저 불청객 때문에 내 마지막 가는 길도 영 개운치가 않다. 그렇지만 이 상황에 반항을 할 수 없는 내가 더 한심스럽고, 짜증이 났다.
"두라고, 좀, 손 대지마..."
다 죽어가도 욕지거리는 입에 베여서 술술 튀어나온다. 그러면 뭐하나, 날 건드는 저 손 하나 쳐내지를 못 하는데. 간신히 뜨고있는 눈으로 이 정체 모를 인간을 노려보면서 잇새로 연신 거친 소리 내뱉는다. 그러다 목이 메여 다시 기침하고, 머리가 핑 돌아 아무 소리도 못 내고 숨만 겨우 쉬는 지경에 이른다. 시익시익, 내 숨소리가 이렇게 컸던가, 이명과 숨소리가 뒤섞여 머릿속을 채우는 와중에, 내 옆구리에 뭔가를 대고 손을 얹은 그가 물었다. 이름, 나이, 당연하지만 나와는 거리가 먼 질문들에 크흑 하는 괴로운 웃음소리 흘렸다.
"있겠냐, 그딴거... 나는, 언제나, 대용품... 이었다고..."
나이도 날 주운 집시로부터 들어서 추정했을 뿐이고, 이름 역시 조직의 코드번호 이외는 없었다. 그마저도 지금은 희미하다. 그야 몇번 불리지도 않았지, 늘, 다른 사람의 이름으로 불렸으니까...
"없어... 아무도... 다 죽였어... 내가... 아무것도... 없어... 이제..."
누군가에 쫓기고 있냐는 말에 나는 떠올린다. 내가 마지막으로 나온 조직의 내부를, 전부 새빨갛게 물든 그곳을. 그나마 기다리던 사람도, 돌아갈 곳도, 모두 없어졌다. 내 손으로 없앴다. 그리고 이제 와서 혼자는 싫다.
"내버려 둬... 제발..."
한기로 턱을 떨면서도 중얼거린 나는 더이상 눈커풀을 잡고 있지 않기로 했다. 스르륵, 자연스럽게 감기는 눈이 무거우면서도 이제 겨우 편해지겠구나, 하는 생각에 안심이 되고, 조금은, 아주 조금은... 아쉬운 것도 같았다. 내 손이 늘어져 툭 기댄 그의 손이 따뜻했으니까.
손을 대지 말라는 죽어가는 짐승의 마지막 발악은 듣지 않기로 했다. 애초에 나는 지금 이 행동을 순전한 연민과 자비만으로 행하는 것은 아니니까. 자기 만족이었다. 그냥 내가 그 광경을 보고 지나쳤다간, 두고두고 또 내 정신이 나를 괴롭힐 것 같아서. 복잡한 감정이다. 인간은 원래 복잡한 감정으로 만사를 행하는 법이다만.
의식을 잃지 않도록 물어보는 일이, 의외로 프로파일링이 되어가고 있다. 개인 인적 사항의 말소. 소모성 인적 자원에, 추격자를 전부 처치했다... 흐려져가는 의식 중에 말하는 횡설수설일수도 있지만, 이것이 사실이라면 나는 꽤나 귀찮은 상황에 맞닥뜨린 것이라고 생각했다. 조직, 혹은 기관. 절대 소규모의 집단과 연루되어 있는 것은 아님이 분명했다.
구급대를 불러선 안된다. 오히려 일이 더 틀어질것이 뻔하다.
출혈 자체는 어느정도 통제가 되고 있다. 피에 절어버린 거즈 위에 하나를 더 얹고, 꽉 누른채 천천히 그녀를 안아올렸다.
"걸을 순 없어보이니, 이대로 갈겁니다."
조심스레 무릎 아래에 팔을 대고, 등을 받쳐서 일어선다. 다리나 머리가 어딘가에 부딪치지 않도록 조심하며 골목을 빠져나간다. 그나마 거처가 근처라서 다행이었다. 집세가 싼 동네에 사는 게 이런 도움이 될 줄은 누가 알았을까. 소중했던 사람을 잃은 이후로, 나는 집이 굳이 넓을 필요가 없어졌다. 살던 집을 팔고, 지금의 치안도 너비도 보장되지 못하는 아파트로 자리를 옮겼다. 스스로를 내던진 벼랑같은 곳으로, 생명을 구하기 위해 달려가는 역설이 참 우스웠다.
"이제... 거의 다 왔어요."
그나마 양심상 달려 있는 도어락의 버튼을 누르고, 우선은 그녀를 낡은 소파에 눕혔다. 빛도 제대로 들어오지 않고, 근처 도로의 차량 소리가 뻔히 다 들리는 이곳이 내 집이자 무덤이다.
그가 데려가겠다며 들어올렸을 때, 내 정신은 이미 끊겨있었다. 고개를 옆으로 툭 떨어지고 입은 힘없이 벌어져서, 게다가 피범벅이기까지 했으니 꼴불견이었겠지. 그렇게 데려가지는 내내 나는 숨만 겨우 쉬고 있는 상태였다. 언제 숨이 끊어져도 이상하지 않았지만, 인간의 목숨이란 어찌 그리도 질기던지, 그의 집에 도착해 낡은 소파에 내려지고서도 나는 숨을 쉬고 있었다. 아주 희미하게 살아있었다.
돌이켜보면, 내게 향하는 손은 언제나 악의와 살기로 가득찬 것 뿐이었다. 뾰족하고 날선 감정들은 나를 사정없이 찌르고, 후비고, 베었다. 언제나 아슬아슬하게 사선을 비껴나가 살아남았지만, 그 감정들은 흉터라는 이름으로 내 몸에 고스란히 남았다. 어느 순간부터 나는 '일'이 없을 땐 온 몸을 감추는 옷만을 입게 되었다. 오늘도, 조직에서 지급했던 새까만 테크웨어로 온 몸을 감싸고, 다년간 생사고락을 함께 했던 조직원들을 전부, 내 손으로...
"큭, 커흑..."
장소가 바뀌었다고 해서 내 상태가 나아질 리는 없었다. 들고 옮겨진 후폭풍과 점점 가까워지는 생사의 경계에 무의식 중에도 몸서리를 치며 기침과 피를 토한다. 갓 터진 피는 그의 낡은 소파를 더럽히고 바닥에도 튄다. 이제 정말 끝이 코앞이구나, 싶을 때, 기침의 충격으로 닫혔던 눈이 가늘게 뜨였다. 흐릿함을 넘어 색도 분간이 안 될 정도로 뭉개진 시야에 곧 뜨거운 것이 차오른다. 이제 눈에서도 피가 나는가, 아니, 아니다, 이건 눈물이다. 피와 흙먼지로 범벅이 된 얼굴에 투명한 눈물이 흘러내린다. 눈물이 흘러서인가, 아니면 나도 모르는 진심이었나, 순간 그렇게 중얼거려버렸다.
"죽기, 싫어... 죽고싶지... 않아..."
아, 인간이란 이 얼마나 어리석은 생물인지, 그토록 죽음을 바랐으면서 정작 죽음의 문턱에 다다르니 두려워졌다. 이대로 아무것도 하지 못 하고 죽는 것이 무서워졌다. 나라는 존재가, 아무것도 아닌 채 사라지는 것이 싫었다. 살고 싶다고, 나도 모를 말을 중얼거리며 손을 뻗어보려해도 팔은 들리지 않고 손만 겨우 부들거릴 뿐이다. 그마저도 지금의 내게는 힘이 부치는 일이었기에, 곧 다시 의식을 잃었다.
젖은 수건으로 얼굴을 닦아낸다. 눈물을 흘리는 얼굴을 보자 측은한 감정에 가슴이 먹먹해져, 숨을 쉬는 것이 평소보다 더 수고로워졌다. 전부 포기해버리고 놓고 가라는 말이 진심이 아니었음은 어렴풋이 알고는 있었다. 그러나 그것을 직접 확인하는 것은 별개의 일이다. 이 피가 순전히 이 사람만의 피인지, 아니면 다른 이들의 피도 섞여 있는지는 알 수 없는 길이다. 후자인 편이 안위에 있어서 차라리 다행이라 해야 할런지.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지금 내가 구하고 있는 사람이, 무고한 이들을 수도 없이 해친 살인마라면? 그리고 내 손으로 인해 다시 일어나, 다음 희생자를 찾게 된다면? 그리고 그 일 때문에 일어나는 희생자들과 유족들이 나를 찾아내 책임을 묻는다면... 불필요한 생각을 너무 했다. 지금 당장은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하고, 그 다음은 운명에 맡기는 수 밖에.
가진게 너무 부족하고 제한된다. 가장 중요한 요소는 역시 흘린 피를 메꿔줘야 하는 것인데 수혈팩은 고사하고 이쪽의 혈액형도 모르는 상황인데다, 제대로 된 처방이 필요한 항생제가 아닌 상비약 정도밖에 없다. 몸을 씻기는 것도 필요할텐데, 이러니 저러니 해도 난 정신을 잃은 이성에게 멋대로 그런 짓을 하고싶진 않다.
"...갈아입힐 옷도 없고 말이지."
그나마 내가 환자에게 해줄 수 있는것은 따뜻한 모포 정도가 끝이다. 나머지는 그저, 손으로나마 체온을 전해주는 수 밖에. 상의를 조금 끌어올려 거즈를 갈고, 새 습포를 덧댄 뒤 붕대를 감는다. 그리고 그 위에 모포를 목 아래까지 덮은 뒤, 가만히 곁에 앉아서 손을 잡았다.
피를 닦아낸 내 얼굴은 몇군데 찰과상을 제외하면 큰 상처는 없었을 것이다. 끈적해질만큼 묻어있던 피가 전부 내 것만은 아니었으니까. 거칠게 손질된 검붉은 머리카락이 이마에 들러붙어있다가 젖은 수건에 밀려 옆으로 흘러내린다. 그렇게 드러난, 옅어진 핏자국 아래 하얀 피부나 얼굴의 생김이 앳되어 쉬이 나이를 가늠하기 어려운 외모다. 잠긴 것처럼 굳게 감긴 눈은 얼굴에 수건질을 하고 옆구리에 새 처치를 해도 열리지 않았다. 모포를 덮어주고 손을 잡아주었을 땐, 차가운 손에 닿은 그의 체온이 뜨거운 것처럼 흠칫하지만 곧 잠잠해진다. 금방이라도 꺼질 것 같으면서도 가늘게, 희미하게 숨을 이어가며 내 생은 이어진다.
그대로 푹 잤으면 좋으련만, 피가 너무 흐른게 문제였는지 겨우 서너시간 지나서 정신이 깬다. 영원할 것 같던 새벽이 거의 지나 창밖이 흐릿하게 밝아지려 하는 시간이었다. 무거운 눈커풀을 들어올리자 보이는 건 낯선 천장. 폐부로 들어오는 공기 역시 낯설다. 순간적으로 패닉이 올 뻔 했으나, 공교롭게도 내 정신은 적응과 이해가 빨랐다. 순식간에 머릿속을 스치는 일의 전말에 탄식과 같은 숨이 입술 사이로 토해진다. 하-...
"젠장..."
죽음의 문턱에서 생을 구걸하는 꼬라지라니. 누구보다 죽고 싶어하는 인간은 사실 누구보다 살고 싶어하는 인간이라는게, 그게 나였을 줄이야. 기가 차서 헛웃음도 안 나온다. 아니, 목이 말라서 말이고 뭐고 못 하겠다. 나는 천천히 주변을 둘러보고 이 집의 주인, 날 데려온 오지랖 넓은 남자, 그가 옆에 있는지 없는지 확인하고서, 겨우 목소리를 쥐어짜냈다.
"ㅇ, 어이... 이봐."
원래 목소리가 뭔지 알아듣기 어려울 정도로 갈라지고 찢어진 목소리는 내 귀로 듣는 것도 별로다. 그래도 말을 안 하면 아무것도 할 수가 없으니, 겨우 겨우 마른침을 삼키고 목소리를 끌어낸다.
"물... 물 좀, 줘 봐..."
죽지 못 했다면 어떻게든 살아야하지 않겠나. 일단은 말이라도 제대로 할 수 있게 물 좀 달라고 하고, 그새 자극받은 목 때문에 마른 기침을 했다. 콜록, 콜록. 숨이 빠질 때마다 느껴지는 피맛은 내가 살아있음을 생생하게 느끼게 해줘서, 절로 미간이 찡그려졌다. 젠장, 다시 중얼거린 건 당연했다.
피곤한 하루와 그것보다 배는 더 피로하고 긴장되었던 하루의 끝자락 탓인지, 잠시 체온을 건네주려 손을 잡고서는 그 자리에서 나도 그대로 곯아떨어지고 말았다. 따스하다기보단 따가운 햇살이 등짝을 두들기고, 무엇보다 누군가가 나를 부른다는 기척이 느껴지자 코를 골아대며 잠들어 있다가도 펄쩍 뛰듯이 깨어나, 잠깐 정신을 차리기 위해 바라보았다.
아. 그녀가 깨어났다. 새하얗고 앳된 얼굴이 눈을 뜨고서 무어라 하는 것을 보자, 비밀스러운 무엇인가 혹은 최소한 옆구리에 절상을 입고 피칠갑을 할만한 사람같아 보이지는 않았다. 학생이라고 해도 믿을 것이다.
"물... 아, 그래. 물."
자다가 금방 깨어난 지라 정신이 없었으나, 이내 그녀의 잠긴 목소리가 무엇을 말하고 요구하는 지 알아채고 얼른 자리에서 일어났다. 생각보다 굉장한 체력을 가지고 있었다. 아마 그렇지 않았으면 진작에 밤을 넘기지 못했을 가능성도 있었지만, 다행히 그렇지 않았다. 자연스럽게 냉장고로 걸어가, 플라스틱 병에 든 생수를 꺼내들고 가져가려다가 아차 하고 다시 주방으로 돌아갔다. 행여 힘이 없어서 마시지 못하고 쏟지 않을까 싶어, 빨대를 하나 꺼내 열린 페트병에 꽂아서 소파로 걸어왔다.
"여기요. 체할 수 있으니까 천천히 마셔요."
의식이 있는 상태에서 무언가를 할 수 있다는 것은 큰 다행이다. 체력의 보충을 위해 음식물을 섭취할 수도 있을테니까. 약도 먹을 수 있겠지. 한 시름을 놓았다는 안도감에 한숨을 내쉬었다. 작은 페트병에 꽂힌 빨대를 입가에 가져다 준다. 들고 마시기엔 힘들지 모르기에, 당장은 이런 간호를 해줄 필요가 있을것이다. 물론 앞으로도 해결해야 할 문제도 이만저만이 아니지만 지금은 회복이 급선무다.
흡혈귀, 뱀파이어, 드라큘라. 무엇이라고 부르든 그들은 존재했다. 반려 인간과 짝을 지어 평생 그 한 사람만 흡혈할 수 있도록 하는 제도가 자리 잡은 지금은 딱히 공포의 대상도 아니다. 송곳니가 날카롭고 귀가 뾰족한 그들은 인간과는 다른 능력을 갖고 있고, 반려 인간에게 그 힘의 일부를 내어준다. 계약하는 것이다. 그리고 지금 이 여자는 반려인간 공고 전단을 돌리고 있다. 귀가 둥근데 전단지 내밀며 웃는 것을 보아하니 이는 날카롭다. 당신에게도 종이 한 장을 건넨다.
장밋빛 인생이라는 말은 누가 만들었는지 모르겠지만, 인생은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다. 그게 아니라면 나만 빼고 다른 모두들은 쉬운 인생을 살아가는게 아닐까. 오늘도 겨우 이자만 갚을 수 있었고 수중에 남은 돈이라곤 그저 한달을 겨우 풀칠할 수 있는 돈이다.
그렇게 내일을 걱정하며 걸어가던 중 전단지를 내밀어오는 손이 쑥 앞으로 들어온다. 반려인간, 인간과 그것들 간의 평화적인 협상 이후 새롭게 정착된 제도로 누구나 할 거 없이 피를 빠는 것이 아니라 지정된 상대만 흡혈할 수 있는 제도. 조건은 여러가지가 있었지만 대부분 건강한 상대를 찾기에 나는 해당사항이 없는 경우가 많았다.
" ... 혹시 다른 조건은 안보시나요? "
하지만 당장 내 인생이 절벽 끝자락에서 반쯤 발을 내밀고 떨어져? 나 떨어진다? 라고 협박하는 와중에 어차피 밑져야 본전인 일을 마다할 필요는 없었다. 받은 전단지를 잠깐 바라보고 이것을 나누어주는 여자에게 가서 직접 물어본 것이다.
지푸라기 잡는 심정으로 전단지를 돌리고 있었지만 전단지가 효과 있을거란 기대는 했다. 전단지에 적어둔 번호로 연락을 하는 것도 아니고 이렇게 바로 자신에게 물어보다니 눈을 크게 뜨고 되물어본다. 정말로 반려 인간에 관심이 있는 것이라면 다른 조건에 대해 말해주는게 맞다. 전단지로 얻어맞을 마음의 준비를 마치고서 말한다.
“불쾌하실 수도 있는데… 미인이요.”
인간도 이왕 먹을 것이라면 보기 좋게 예쁜 것을 좋아하는데 인간의 피를 먹는 흡혈귀도 보기 좋게 예쁜 인간의 피가 먹고 싶을 수 있는 거다. 이 여자는 취향이 너무 확고해서 문제다. 안 그래도 반려 인간 구하기는 까다로운데 이 때문에 더 고생하고 있다. 전단에 미인만 연락해달라고 적으려다 아무래도 욕 먹을 것 같아 그만두었다. 그러니 지금 욕 먹을 차례라 생각하며 당신을 흘끗 바라본다.
상대방도 분명 잘 구해지지 않으니 전단지를 돌리고 있을 것이다, 라는 계산도 분명히 깔아두고 있었다. 사실 인간의 수는 많은데 비해서 그것들의 수는 적기 때문에 반려인간을 구하려면 얼마든지 구할 수 있는 환경이다. 본인에게도 무언가 제한되는 사항이 있는거겠지, 라고 생각했는데 ...
" 네? "
내건 조건이 미인이란다. 보기 좋은 음식이 먹기도 좋다는게 그들의 세계에서도 통용되는 단어인가보다. 예상치도 못한 조건에 나도 모르게 놀라긴 했지만 ... 그 정도 조건이라면 나도 자신이 있었다.
" 그 ... 제 몰골이 이래서 그렇지 ... 나름 봐줄만 하거든요 ... "
점점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들릴락 말락하게 얘기한 나는 그녀의 눈치를 보았다. 그렇다, 사실 내가 이렇게까지 망한 이유도 모 엔터테인먼트의 대형 사기극의 피해자이기 때문이다. 연예인으로 데뷔 시켜준다는 말에 속아서 이것저것 돈을 가져다 바치다가 결말은 대표의 잠적. 덕분에 빚만 늘어난 나는 지금까지도 이런 시궁창 같은 삶을 사는 것이다.
" ... 그래도 안된다면 그냥 갈께요 ... "
허나 그것이 상대방의 마음에 들지는 별개의 문제, 결국 끝까지 눈치만 보다가 먼저 물러나려고 했다.
주변을 보았을 때, 날 데려온 그는 옆에서 코를 골며 자고 있었다. 그의 등 뒤로부터 비치는 햇살에 제대로 보이진 않았지만, 분명 엄청나게 고단했을 것이다. 이런 곳에서 사는 사람이 편안한 일상을 보내고 있었을 리가 없다. 그 와중에 날 줍다니, 인생 참 힘들게 사는 부류일테지. 보통 사람이었다면 깨지 않게 배려를 한다던가 했겠지만, 내게 그런 마음씀씀이는 없었다. 가차없이 그를 불러 깨우고, 뻔뻔하게 물을 요구했다. 퍼뜩 잠에서 깬 그가 물을 가지러 가고서야 나는 내 손이 그에게 쥐어있었음을 알았다. 손이, 허전해졌으니까.
그는 물이 든 페트병에 빨대를 꽂아서 가져왔다. 자력으로 일어나지 못 하는 나로서는 참 고마운 행동이었지만, 동시에 뭐하러 이렇게까지 하는거지 싶다. 멍청한건가, 다른 속내가 있는 건가. 일단은 물부터 마셔야 할 것 같아, 천천히 마시라는 말에 알아서 할거라고 대꾸하고 고개를 돌려 빨대를 문다. 입술로는 고정이 되질 않아 끝을 약하게 물고 조금씩 조금씩 물을 빨아들인다. 이런 상태에서 뭔가를 먹는 요령은 이미 터득한지 오래였다. 처음엔 입 안을 적시고, 충분해지면 약간씩 목으로 흘려넣어 적시고, 잠시 쉬었다가 한모금씩 넘겨 본격적인 수분 보충으로 이어간다. 작은 페트병의 반 넘는 양을 그렇게 마시고서 물고 있던 빨대를 퉷, 뱉었다. 급격한 물의 섭취로 잠시 호흡이 가팔라졌지만, 정신이 든 지금은 스스로 진정시킬 수 있었다. 하지만 신진대사가 돌며 새롭게 느껴지는 고통은 어떻게 할 수가 없어서 나는 얼굴을 구기며 욕지거리를 내뱉고 만다.
"아, XX, 개같이 아프네, 젠장. 그 XXX들. 죽이려면 제대로 찌르던가."
누가 고문 전문반 아니랄까봐, 통증이 오래갈 부상만 입혀논 듯 하다. 그 중 제일 심한게 옆구리인가. 겨우 손을 움직여 옷 위를 더듬어보자 두툼한 붕대와 거즈로 추정되는 것이 느껴진다. 이 인간이 해놨겠지. 내 시선은 절로 옆으로 굴러가 물통을 대주던 그에게 향했다. 금방이라도 짜증과 불평을 쏟아낼 듯한 눈빛이었지만, 이제와 그게 무슨 소용인가 싶어 한숨을 내쉰다. 결국 마지막에 목숨 구걸을 한 건 나였는데, 남에게 짜증낸들 무슨 소용이 있는가. 고통을 억누르기 위해 숨을 짧게 들이키고 내쉬며 한풀 기꺾인 목소리로 말했다.
"저녁, 아니, 해가 질 때까지만 누워있다 나갈 테니까, 이 이상 나한테 신경쓰지 마. 더 해줘봤자 줄 돈도 없어."
만약 나가서 '까마귀' 녀석과 접촉이 가능하다면, 얼마의 돈 정도는 생기겠지만 앞으로 살면서 들 돈에 비하면 턱없이 적은 액수다. 그마저도 있을지 없을지 알 수 없으니, 내게 지금 있는 건 이 몸뚱이와 걸친 넝마 한 벌이 전부인 셈이다. 그러니 내게 베푼 친절을 금액적으로 돌려받을 수 있을거란 생각은 일찌감치 접으라고 말해주고 고개를 돌린다. 고개만 돌렸지 다시 잘 생각은 없었다.
반 정도 비어버린 물병을 테이블 위로 치웠다. 그녀가 물을 마시고 좀 정신이 돌아오자마자 내뱉은 말은 욕설이었다. 물론 상황을 고려하면 그렇게까지 이상할 것은 아니지만, 강한 어조의 욕설이 갑작스레 나온다면 누구나 거기에 동요하기 마련이었다. 그러지 않는 사람들은 보통 욕설이 나올거라 예상을 한 사람들일테니까.
그나저나 몇시간 전까지만 해도 상처입어 죽음의 문 앞에서 벌벌 떨던 그런 사람이 욕설을 하며 투덜거리는 모습이란 참 복잡한 광경이다. 이러니 저러니 해도 구해다 준 사람에게 봇짐 내놓으라는 이야기는 아니라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여러모로 평탄한 삶과는 거리가 있는 인물이었다. 물론 나도 남말을 할 처지는 아니지만, 어느 순간부터는 안식을 얻었었다. 이 사람에게 올 삶의 평화는 과연 언제가 될 지는 모르겠다만. 어쩌면, 내가? 아니. 난 그럴 자격은 없을 것이다.
"돈을 노렸으면, 치료를 하진 않았겠죠."
끔찍한 이야기다만, 거리에 칼을 맞고 쓰러져 있는 사람을 구하고 사례금을 받는 것 보다는 인질로 납치해서 뒷세계에 팔아치우거나 신체부위를 매매하는 것이 돈 자체는 더 많이 벌 수 있을 것이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난 그런 짓을 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내가 정의로운 영웅까지는 아니더라도 그런 악랄한 짓을 할 정도로 탐욕스럽지는 않으니까. 무엇보다, 사례금이 되었든 그런 더러운 돈이 되었든 그런것에 의존해야 할 정도로 궁핍한 상황도 아니다. 지금 살고 있는 집의 상태를 보면 훤히 믿지는 못할 이야기지만, 내 통장 잔고는 명백하게 진실을 말할 것이다.
"언제 나가시든 상관 없어요. 하루, 뭐 일주일. 평생만 아니면 됩니다. 남는 방을 쓰시면 되니까."
남는 방! 그래. 이 허름해보이는 아파트도 남는 방이라는게 있었다. 싸구려지만 구색은 다 갖춘 집이지만, 나 자신이 특별히 방을 여러개 쓰는 성격도 아닌지라 대충 손님 방 용도로 쓰고 있었다. 이상하게 여기서 마시면 미적지근하게 된 맥주도 맛이 난다며 종종 친구들이 오기 때문이다. 혹은 본인들의 배우자로부터 잠깐 피난을 오거나. 그래서 나는 손님이 오는 것에 크게 개의치 않는다. 그리고 그것이 거동이 힘든 환자라면야, 편의를 더 봐줄 의향 정도는 있다.
사례비 같은 건 못 준다 하니, 그는 돈을 노린게 아니라고 하길래, 나는 고개를 돌린 채로 씹듯이 말을 내뱉었다. 잇새로 힘 좀 줬다고 칼같이 찌릿하게 저려오는 근육통에 XX을 비롯한 욕지거리가 튀어나간다. 이대로는 저녁이고 나발이고, 며칠은 디비져 누워있어야 할 지도 모를 거 같다. 아주 환장하겠네. 이럴 바엔 차라리 그 골목길에서 딴놈들 눈에 띄어 조각나는게 좀더 편안했겠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욱신거리는 통증은 피폐해진 정신을 차츰 갉아들어간다. 살아있어봤자 변하지 않는 현실은 순간 순간 내 머릿속을 뒤집는다. 에휴 XX. 짧은 욕 한번 내뱉은 나는 참 여유 넘치는 친절 어린 말에 날카로이 가시를 세웠다.
"아이고 친절도 하셔라. 그런데 혹시 알아. 잡아뒀다 뒷골목에 수배 떨어지면 냉큼 갖다 바칠지. 저지른게 많아서 모가지에 수배금 꽤나 걸릴 거거든."
전부 시켜서 한 짓들이었고, 제대로 된 신분도 없는 내가 양지 쪽에 수배 따위 걸릴 일은 없겠지만, 음지 쪽엔 내가 저지른 일에 원한을 가진 놈들은 있을 지도 몰랐다. 그들이 작정하고 수배를 내린다면 잡히는 건 시간 문제일 것이다. 어느 정도, 시간벌이를 할 수는 있겠지만... 또다시 찾아온 현실의 무게가 내 입에서 헛웃음을 일으켰다. 푸흐, 흐흐흐. 자포자기의 기운이 역력한 웃음을 흘리며 중얼거렸다.
"아니다. 댁이 갖다 바치든, 잡혀서 들어가든, 어차피 갈 곳은 그 쪽 뿐이네. 그래. 쥐새끼가 살던데서 어떻게 멀어지겠어. 그나마 내 발로 들어가면 덜 힘들겠지..."
시궁창 쥐새끼는 죽을 때까지 시궁창 쥐새끼고, 골목길 고아는 죽을 때까지 뒷골목 고아일 수 밖에 없다. 쥐구멍에 볕 들 날은 사실 쥐를 잡는 불꽃의 빛 말고는 없는거다. 나는 내가 일으킨 불에 스스로 뛰어들었어야 했다. 어정쩡하게 데여 꼴불견으로 살아남지 말았어야 했다. 분함에 주먹 쥐는 것조차 제대로 할 수 없는게 더 분해, 버릇이 된 욕지거리를 재차 씹어뱉는다. 이젠 당연하게 찾아오는 고통에 미간을 찡그린 나는 싸늘히 식은 목소리로 말한다.
"어이. 약값 안 받을거면, 진통제 두통이랑 물 한통만 내 줘. 하루고 일주일이고, 오늘 당장 해만 떨어지면 나가줄테니."
온종일 진통제라도 씹어먹으면 적어도 통증 정도는 느껴지지 않게 되겠지. 그렇게만 되면 칼같이 나가주겠노라 말하고 입을 다물었다.
"철이 들자마자 사막 한 가운데에서 모래를 씹다보니, 이 나이 되어서도 팔자가 좋아졌죠."
진부한 이야기다. 어차피 상이군인에 대한 대우는 길바닥에 굴러다니는 똥덩어리보다 아주 미세하게 나은 정도인 국가라지만, 그래도 만리타향 건너가서 사람을 죽이고 온 사람에게 어느 정도는 준 게 있긴 하다. 물론 그것만으로 해결했다기보단 조금 더... 관련 경력을 살린 일을 해 온 결과라고나 할까. 아, 물론 단타성 주식 매매도 한몫 했고.
수배라. 만약 이 사람이 정말로 법의 심판을 받아야 할 정도로 악인이라면 건네주기야 해야겠지. 악독한 범죄자라도 일단 법의 판결 정도는 받아봐야 한다. 물론 그 법이 충분히 처벌하지 못하는 경우엔, 누군가 대신 처벌해주길 바래야할지도 모르겠다만. 그렇기 때문에 나 홀로 이 사람에게 벌을 주느니 어쩌니 하는건 할 생각 없다. 대신 경찰이 이 사람을 찾는다면, 고려는 해 봐야겠지. 법 집행관들의 눈 밖에 나 봤자 별로 좋을 것도 없다. 특히나 나같이 살인마 취급이나 받는 퇴역 군인이라면 더더욱.
"그야 상황 따라 다르죠. 세상이 당신의 처벌을 원하고 적법한 절차를 밟는다면, 저같이 법을 지키는 소시민은 건네 드릴수밖에 없습니다."
물론 그렇지 않은 사적인 무언가부터, 법의 테두리 밖에 있는 녀석들이 개인적인 비즈니스 때문에 찾아온다면 많이 곤란해질 것이다. 순식간에 몸뚱아리에 납덩어리가 처박히는 경험은 살면서 그다지 해보지 않는 편이 나을테니까.
"제가 약사 면허가 있는건 아닌데, 척 봐도 진통제만 먹으며 버티다 나갔다간 그냥 평범한 옥시코돈 중독자, 혹은 그런 삶을 잠시나마 살았던 것으로만 끝날거 같군요."
잠시 화장실로 가 찬장을 뒤지더니, 작은 약병을 두어개 정도 꺼내온다. 그러고서 주방을 들러 생수를 한 병 꺼내와 테이블 앞에 늘어놓는다. 항생제와 진통제. 상처의 감염 위험도 큰 상태에서 진통제만 씹으며 버티다가 패혈증으로 또 드러누울 수도 있으니까. 어쩌다 이런 가엾고 딱한 감정이 슬슬 벗겨져 나가는 인물의 주치의가 되어버린건지 아직도 의문이지만, 그래도 구한 이상 최후까지 보살피긴 해야지.
그인가? 아니면 그녀였나? 하여튼 상관없었다. 그는 휴대폰을 켜서 화면을 토닥거리고 있던 중이었다. 무언갈 쓰고 싶군. 그는 생각했다. 그래. 써야겠어. 하지만 어떤 걸 쓰지? 그는 자신의 쳇바퀴 같은 일상에 대해 생각했다. 그리고 어두칙칙하고 재미없는 과거에 대해서도. 그 다음에는 별 것 없는 연애생활에 대해서도 생각했더랬지. 마침 좋아하는 사람은 있었다. 이거야. 그 사람에 대해 써야겠다. 의욕을 찾은 손가락이 재빠르게 움직였다. 그러나 그는 첫 문장을 채 쓰지 못하고 지우고, 썼다가, 또다시 지우는 군.
손가락이 굳었다.
역시 이건 아니야. 혼자 글을 쓰면 재미가 없는 걸. 보아 줄 사람도 없고 말이지.
그는 자유상황극에 올라온 글들을 쭉 살펴보았다. 아니야. 아니야. 이렇게 퀄리티 높은 글에 내가 감히 무언갈 달 수 있으려고! 그의 안에서 냉엄한 심판자가 소리쳤다. 너는 그냥 구석에서 혼자 네 걸레 조각 같은 전자 찌꺼기나 끄적이라고!
결국 그는 돼지가 씹다 뱉은 사료 부스러기 같은 것을 주절대다가 한숨을 쉬며 작성 버튼을 누를 것이다. 이 다음이 어떻게 될지는 신만이 알 일이다.
내가 뒷골목을 구르면서 깨달은 몇가지 중에 하나는, 인간은 누구나 사정이란게 있다는 사실이다. 어느 누구나 재력이나 권력 따위는 재쳐놓고 인간적인, 개인적인 사정이 하나쯤은 있었다. 하지만 그딴 건 내 알 바 아니었다. 누가, 어떤 사정을 안고 있건, 나는 내게 주어진 일만 했다. 그들의 숱한 비명과 절규에 귀가 먹먹해져도 그저 내가 휘두르는 나이프의 끝만 보며 달렸다. 겨우 연명하는 지금도, 내 시선이 달리 향하는 일은 없다.
"거참 부러운 삶이시구만."
그러니 그가 무슨 고생을 했던 어떤 삶을 살았던 내겐 중요치 않았다. 어쨌거나 그는 멀쩡히 이름이 있고, 신분이 있으며, 낡았어도 자신의 집이 있는 민간인이자 이 도시의 시민이다. 그에 반하면 나는 투명인간이다. 이름도 신분도 없고, 돌아갈 집도 없고, 유일하게 가진 이 몸뚱이도 지금은 짐일 뿐이다. 밑바닥에도 그 아래가 있다는 것 역시 살면서 깨우친 몇가지 중 하나였다.
나는 약을 가져온 그의 말에 이 악문 소리를 내뱉으며 천천히 몸을 일으킨다. 손가락 하나만 까딱해도 신음이 터질 듯한 고통이 전신을 강타했지만, 정신이 멀쩡한 지금은 입술을 깨물어서라도 버틸 수 있었다. 간신히 상체를 일으켜 앉은 나는 소파에 기대 가쁜 숨을 몰아쉰다. 순식간에 이마와 등을 흐르는 식은땀이 느껴지고, 눈앞이 핑 돌았지만 다년간의 경험은 어떻게 해야 이걸 가라앉힐 수 있는지 알았다. 잠시 모포를 쥐어뜯을 듯이 쥐고서 통증과 어지럼증이 가시길 기다렸다가, 그가 가져다놓은 약병에 손을 뻗었다. 악으로 고통을 견디기는 해도 손의 떨림까지 막기는 어렵다. 그 탓에 약이 정량보다 많이 나왔지만 그딴거 일일히 샐 여유 따윈 없다. 항생제와 진통제가 여러알 굴러나와 손바닥에 얹어지자, 일단 입 속에 털어넣고 물은 그 다음이다. 이번엔 물통의 입구를 입에 대고 조금씩 물과 약을 흘려넘긴다. 빈 속이었지만 어쩌겠는가. 약을 다 넘긴 나는 물통을 닫아 한 손에 들고, 남은 손으로 약병을 집어들었다. 아직 약기운이 돌기 전이었지만, 해도 지지 않았지만, 여길 나갈 생각이었다. 소파에서 다리를 내려 바닥을 딛고서 조금이라도 약기운이 돌기를 바라며 그에게 말한다.
"내가, 이대로 나가서 약쟁이가 되든, 약에 쩔어 어디서 뒤지든, 당신이 뭔 상관인데. 어? 댁이 내 남은 인생 책임져줄거야? 아니잖아? 그럼 좀 싸물어. 날 줏어온 시점에서 자기만족은 다했을거 아니냐고. 이제 뒤져도 최소한 댁 눈 앞에서 뒤지진 않을테니까, 그 엿 같은 주둥이 닫고 살던대로 살아. X 같은 오지랖 두번 부리지 말고, 댁이 그렇게 애끼시는 법 안에서 XX 안전하게 평생 살으시라고."
눈알을 굴리기만 해도 눈가가 뜨끈한 걸 보니 아마 실핏줄이 거하게 터져있겠지. 안 그래도 시뻘건 눈이 더 뻘개져서 그를 노려보고 있을 것이다. 밑바닥 아래의 나락에서 저 위를 원망하는, 그런 눈빛. 일어나며 깨물었던 입술은 그새 터져서 피가 맺혔다. 나는 손등으로 입술가를 슥 문지르고 자리에서 일어난다. 다리가 떨렸지만 어떻게든 설 수 있었고, 설 수 있다는 건 걸을 수도 있다는 의미다. 고작 일어선 것만으로 숨이 턱 끝까지 차올랐지만 숨은 천천히 고르면 된다. 날 덮고 있던 모포가 바닥으로 흘러내렸지만 다시 주워놓을 생각도 않은 채, 욱신거리는 다리를 다그쳐 걸음을 옮긴다.
"훌륭한 삶이죠. 만리타향에서 온몸 구석구석으로 모래가 들어오고, 그 모래먼지 뒤에는 내 목숨을 노리는 반군들이 득실거리고."
이런 삶을 부럽다고 말하는 경우는 많지는 않을 것이다. 정말로 그런 삶이 부러운 애국자거나, 그것마저도 가지지 않은 인물이거나, 아니면 순전히 비꼬는 경우거나. 지금은 뒤의 두개일 확률이 농후하다. 어쩌면 두번째겠지. 아무리 이런 세상이라지만 구급차도 부르지 못하고 골목길에 칼 맞고 쓰러져 있는 사람이 평범한 삶을 영위하고 있지는 않을테니까.
"이러니 저러니 해도 법이 절 보호해주고 있으면, 저도 법을 준수해야죠. 거기서 벗어난 사람의 삶은 저도 모르지만."
사실 그렇게까지 알고싶지 않은 주제이기도 하다. 무리를 하면서까지 일어나, 빈 속에 약을 복용하는게 아니라 그냥 들이키는 사람을 보며 이대로 뒀다가는 내가 우려한대로 정말 '약쟁이었던 것'으로 전락해버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살아도 산 게 아닌 그런 삶을 살다가 죽어가는 꼴이 되도록 놔둔다면, 내가 주워온 의미도 퇴색된다고 생각했다. 당장은 뭔가를 제공해주는 수 밖에.
"어차피 행보를 보면 남은 인생이 그렇게까지 길어 보이지도 않는데, 끝까지 책임 한번 져 보죠."
솔직히 그랬다. 세상에 적이 꽤 많아 보이는 인물인지라 언젠가 불가항력으로 살해당할지 모른다는 강한 직감이 뇌리에 꽂혔다. 물론 그런 상황을 막기 위해서 노력을 해보겠지만, 본인의 라이프스타일이 그러기를 원한다면 나로써는 해줄 도리가 없다. 다만 손 닿는 범위 안에서나마 그걸 방지하려 해보는수밖에. 부들대며 겨우겨우 걸어나가려 노력하는 사람을 응원해주기도 좀 뭐하므로, 그저 가만히 그녀를 들어올려 다시 소파에 눕힌다.
>>399 “정말? 난 우리 집이랑 물건들 견적 내는 것처럼 보였는데. 다시 오면 쏠거야.”
생강차가 담긴 찻잔을 양 손에 하나씩 들고서, 탁자 위에 올려놓는다. 하나는 자신 앞에, 하나는 자신의 맞은 편에. 피어오르는 연기 뒷편엔, 당신이 앉아있다. 그 모습을 보며 작게 미소짓고는 본인 몫의 찻잔을 들었다. 정말? 그냥 만나주는 게 좋았을까? 애처로움과 질문이 담긴 눈으로 당신을 바라본다.
“우리, 고등학생 때 기억나? 누나가 그랬잖아. 과한 다정함은 독이 된다고.”
그것은, 그 당시에는 어떤 다른 말보다도 잔인한 말이었다. 완곡하면서도 단호한 거절의 의사였기에. 생강차 한 모금으로 그 당시의 기억을 말끔히 넘겨버리고, 약지에 끼워진 결혼반지를 만지작거린다.
“그 때부터야. 내 삶이 중독되어버린건. 이젠 누나 없이는 숨을 쉴 수가 없어. 만약 내가 누나의 말대로 누군가를 만난다고 해도, 그건 그 사람에게 굉장히 실례되는 일일거야. 잊을거면 진작에 잊었어. 잊고싶다면 만나지 않았어.”
하지만, 지켜내지 못했다. ─아니, 지금 눈 앞에 있으니 방금 전 문장은 명백한 오류다. 미간이 지끈거린다. 생강향이 너무 짙다.
>>403 찻잔은 들지 않았어. 그저 눈 앞에서 차가 천천히 식어가는 과정을 지켜볼 수 밖에 없었지. 문득 이걸 한 모금만 마시면, 금방이라도 모든 게 원래대로 돌아올 것만 같은 느낌도 드네. 이제는 멀어져 영영 돌아오지 않을 작년, 재작년, 그리고 너와 처음 함께했던 그 해의 크리스마스도. 하지만 그런 기적을 바라기엔, 이미 우린 너무 많은 소원을 빌어버린 걸지도 몰라.
"언제 적 이야길 하는 거야.... 좀 잊어, 그런 건."
잊어야지. 전부 잊어 주지 않으면 곤란해. 나와의 추억, 같이 즐겁고 슬퍼했었던 그 모든 일들을 넌 천천히 하나둘씩 잊어 가야만 하는 거야. 그래야 네 앞에 길이 열릴 테니까.
"...."
정말, 어쩌다 이렇게 된 걸까. 난 바로 네 앞에 앉아 있지만, 사실 아주 멀리 있어서 뺨에 손을 대주는 것도 해 줄 수 없어. 귀여운 강아지처럼 내 옆에서 우쭐대던 니 얼굴을 찐빵 만지는 듯이 마구 주물러 대는 것도 꽤 즐거웠었는데. 그 때 생각을 하니, 괜히 아릿하면서도 가슴이 저려 와.
그가 과거 무슨 일을 했건, 어쩌다 모래먼지 속에서 반군들과 싸웠건, 하나도 관심 없다. 잘난 법에 보호 받으며 사는 인간 따위, 나와는 인연이 없을게 분명했다. 어쩌다 지금처럼 엮여도 결국 스쳐가는 헤프닝으로 금방 잊혀질 거다. 나만이 오늘을 끝없이 저주하고 원망하며 차가운 길바닥 어딘가에서 소리없이 스러져가겠지. 그게 그와 나의 사는 길일 것이다. 여기서 나가기만 하면, 더는 엮일 일도 없을거라고 생각했다.
"개소리 지껄이지 마. 난 나갈 거ㅇ-!?"
끝까지 거슬리는 소리만 해대는 그를 뒤로 하고 나는 그 집에서 나가려고 했다. 간신히 돌기 시작한 약기운 덕분에 제대로 걸음을 떼려고 했으나, 내 몸은 너무나도 쉽게 소파 위로 되돌려졌다. 애써 일어나서 자세를 잡은게 전부 허사가 됐다. 소파에 눕혀지자 곧장 몰려오는 피로감과 통증의 하모니는 적어도 몇시간은 다시 일어날 엄두도 못 낼 수준이다. 내 노력을 허망하게 무너뜨린 그를 노려보는 눈가가 문득 시큰해진다. 왜, 내 인생은 언제나 이 모양 이 꼴일까. 왜, 왜, 답 나오지 않는 자문자답이 머릿속을 메아리치고, 나는 손바닥에 손톱을 박을 듯이 주먹을 쥐며 히스테릭하게 소리를 질렀다.
"뭐냐고 XX! 이 X이고 저 X놈이고 지들 맘대로 날 주웠다 버렸다! 책임을 져? 당신도 뻔하지, 질리면 내다 버릴 거잖아! 당신이라고 다를 거 같아? 인간 다 똑같아! XX! 아무도, 아무도 날 버리지 않은 XX가 없는데! XX!"
태연하게 배부터 채우자는 그를 향해 애꿎은 화를 쏟아낸다. 아주 애먼 화는 아니지만, 그래도 과한 건 맞다. 그런 말들을 하면 그가 마음을 바꿀 지도 모른다. 그래도 이 순간만큼은 그래도 상관 없다는 기분이었다. 어차피 버림 받을거, 지금이 됐든 나중이 됐든, 결과는 같을테니. XX! 겨우 나아진 목을 다시 찢을 기세로 소리를 지른 나는 몸을 옆으로 돌려 웅크렸다. 가쁜 숨과 통증으로 몸을 부들거리면서도, 팔과 손으로 머리와 얼굴을 감싸며 웅크리고서 단 한마디, 그렇게 내뱉었다.
"안 보일 때 알아서 기어나갈거니까, 내버려 둬."
그리고 나는 눈을 감았다. 약은 먹을만치 먹었으니, 잠으로 체력을 보충하고 밤이 되면 기회를 노려 나갈 것이다. 더는, 어떤 기대도 희망도 갖고 싶지 않았다. 누군가를 믿는 일 따윈 하고 싶지 않았다.
도대체 이 사람이 무엇을 겪었길래 이러는 것인지 모르겠지만, 아마 상처가 많겠지. 평소 자주 찾는 정신과 의사 선생님을 소개해줘야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마, 자기 손으로 다 없애버렸다는 그치들이 자신을 버렸고, 그래서 싸움이라도 일어난거겠지. 마치 영화같은 이야기지만, 다른 곳에서 영화의 시놉시스로나 나올만한 일이 이 거리에선 논픽션으로 벌어지고 있다. 슬픈 세상이다. 나도 한때는 그 세상의 슬픔에 휩싸여, 빠져나갈 구석조차 없었고.
단순한 친절이라고 하기엔 확실히, 지금의 나는 과도하다고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과거의 충격적인 경험 때문에 죄책감을 이기지 못할까봐 스스로를 몰아세우는 것이라는 자각 정도는 있다. 그러나 자각하는 것과 죄책감을 이겨내는 것은 별개의 문제이다. 거기다가, 나는 이미 이것과 비슷한 일의 대상자가 된 적이 있다. 물론 칼을 맞거나 약에 쩔거나 그런 것은 아니었지만,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을 것이다. 그 어디도 날 받아줄 데가 없으며, 세상에는 내 자리가 없다고만 생각했었다.
"...페퍼로니를 싫어하지 않았으면 좋겠군요."
마음을 다친 인간에겐 의외로 원시적인 방법이 통했다. 나도 그랬으니까. 그리고 아마 지금 그녀도 상당히 시장할 것이다. 부상을 회복하느라 체력을 소진한데다 공복인데, 사람이 어떻게 힘이 나겠는가. 잠깐 전화로 음식을 주문한 뒤에, 다시 이 딱한 짐승과 같은 사람의 곁으로 와 웅크린 어깨에 모포를 덮어 주었다.
"생전 처음으로 믿을 구석이 생긴다는건 생각보다 많이 두려운 일이죠."
니가 뭘 아느냐고 묻는다면, 나 또한 그랬기에 누구보다 잘 안다고 당당하게 대답해 줄 수 있다. 한때는 정말 모든 것에서 버려졌으니까. 심지어는 내가 목숨을 바친 조국에게조차. 그런 때에 나를 구원한 사람이 한 명 있었다. 지금의 내가 그 사람처럼 훌륭하게 해내고 있는지 어떤지는 확신할 수 없다. 하지만 내 인생에서 더할나위 없던 그녀가 아니었다면... 나는 이 사람을 구하긴 커녕, 마주칠 일 조차 없었을 것이다.
모짐을 넘어 무례한 소리까지 퍼부었는데도, 그는 나를 내쫓지 않았다. 전의 조직에선 반항할라치면 당장 배부터 걷어차이고 독방에 갇히기 일쑤였는데, 그는 온갖 욕지거리에 애꿎은 소리를 들었는데도 내게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다가와 내가 바닥으로 떨어뜨렸던 모포를 다시 덮어주었다. 페퍼로니를 싫어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며 평온하게 말을 걸어온다. 나는 얼굴을 가린 채로 눈을 떴다가, 모포를 끌어 머리 끝까지 뒤집어 썼다. 얄팍한 한겹 너머로 떨리는 숨을 내쉬었다.
"닥치고 내버려 둬. 당신 따위 믿을 일 없어."
믿어서 다시 버려지는 기분을 느끼는 건 이제 더는 겪고 싶지 않다. 더는, 생에 무엇도 기대하고 싶지 않았다. 내 절망은 언제나 믿음으로부터 시작되었으니, 죽지 못한 지금, 같은 실수를 반복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설령 그는 이전까지와 다른 사람이라 할 지라도, 정말로 내게 구원을 줄 수 있을지도 모르는 사람이라 해도, 언제 잃을지 모를 것에 전전긍긍하며 사는 건 사양이다. 죽지 못 한 지금의 나는 그저 지쳤을 뿐이었다.
"처음이었다면..."
어쩌면, 그가 내 믿음의 시작이었다면, 이렇게까지 부정적이지 않을 수도 있지 않았을까. 부질없는 가정은 헛된 날숨과 함께 흩어진다. 나조차도 겨우 들릴만치 나오던 중얼거림은 숨결에 섞여 끝을 흐린다. 다 부질없다. 무엇을 생각하든 전부 의미없고, 쓸모없으며, 헛된 것들이다. 뿌리 없는 내가 이만치 살아온 것 자체가 기적이었으니. 이 이상 바랄 자격 따위 내게 없다. 그래, 내겐 자격이 없지...
깨지지 않는 알껍질 속에서 썩어가듯이 생각에 생각을 거듭하던 나는 어느샌가 잠이 들었다. 낫지 않은 몸으로 무리하게 움직이고 약까지 잔뜩 집어넣었으니 여태 깨어있던게 용하다. 그러나 과도한 약의 영향인지, 아니면 이대로 잠들어 스스로 숨을 거둘 셈인지, 해가 지고 달이 떠 시간이 한밤중이 되어도, 내가 깨어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중간에 그가 깨우는 일이 없다면 더욱 그랬겠지.
>>404 언제까지고 같이할 거라고 맹세했다. 그 맹세는 서로가 서로의 입에 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원래부터 그렇게 정해져있던 것처럼, 너무나 당연한 나날들이 계속될 거라고 믿었던 과거의 자신은 한결 같았다. 문득, 고갤 들어 좌측의 거울을 바라본다. 퀭한 인상의 자신. 비춰지지 않는 당신. 분명 고개를 돌리면, 그 자리에 있음에도.
“왜, 부끄러워? 좀 더 재밌는 이야기들도 많은데. 예를 들어, 우리 여름방학 때 계곡에 놀러갔을 때 같은. 펜션 아주머니가 그랬잖아. 신혼부부 같다고. 그래서 난 누나보고 자기라고 불렀다가 한 대 얻어맞았고. 그때도 그랬지만, 누나는 항상 망설이고 있었지. 나는 언제든지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있었는데도.”
당신의 망설임이 어디서 나오는 지 안다. 당신은 자신에게 과분할 정도로 좋은 사람인데도, 본인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으니. 당시의 이야기를 하며 속에 담긴 것을 털어놓듯이 편하게 웃고는, 당신과 시선을 맞춘다. 당신이 만져주었으면 하는 바램의 표현. 어릴 적부터 고쳐지지 않은, 사소한 애교다.
>>400 그는 초콜릿을 먹고 있었다. 다이어트 중이었지만 그 때문에 역으로 스트레스를 받고 있었다. 자신을 몰아붙일수록 초콜릿에 대한 갈증은 더욱 심해졌다. 될 대로 되라지, 뭐. 그는 초콜릿을 우둑우둑 씹으며 모든 것을 놓았다. 되는 일이 없어. 세상 따위 멸망했으면 좋겠다. 아냐. 나 하나 멸망하면 깨끗하게 끝나겠구나. 그는 간만하에 가벼운 우울을 앓으며 계속해서 초콜릿을 씹고, 뜯고, 삼켰다. 일련의 동작들은 혀끝에 감미로운 단맛을 발생시켰으나 그것은 끔찍하게 맛 없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는 초콜릿을 먹음으로써 일종의 자해를 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의 몸과 감각, 그리고 정신 모두에 말이다.
나름대로 기다렸는데도 아무 소식이 없군. 그의 이빨 끝에서 초콜릿이 부서졌다. 하긴 그럴만 했어. 개 항문낭에서 나온 분비물보다도 못한 글이었지. 이걸로 내 상황극 청춘도 명운이 다한 모양이지. 그는 자가 인지치료 책을 발가락 끝으로 밀쳐냈다. 그것은 부정적 사고를 긍정적으로 바꾸어 준다며 정평이 난 책이었다. 그는 이 책을 읽겠다고 마치 칭찬을 바라는 애송이처럼 동네방네 떠들어댔고 그를 아는 모두는 그가 나아질 것이라는 거짓된 기대감을 갖게 된 차였다. 그게 바로 요즘 내가 저지른 가장 쓰레기같은 일이었지. 이제 모두 상관없어. 망해버려라! 그는 잔 대신 휴대폰을 높이 들어 끝난지 한참 된 제 청춘에게 마지막 인사 겸 건배 겸 들리지 않는 장송곡의 연주를 했다. 잘 가라! 이제는 더이상 구질구질하게 굴지 않을 수 있기를!
처음이었다면. 참 복잡한 한 마디 말로, 지금 내 소파 위에서 모포를 뒤집어쓴 한 명의 상처가 어떤 종류인지 알 수 있게 된거같다. 그 정도나 정확하게 어디인지는 잘 모르지만, 어떤 종류인지만 알아도 처치가 비교적 쉬워진다. 내가 간밤에 응급처치한 상처처럼 말이다.
"저도 그 마음을 모르는것도 아닙니다. 국가에게 배신당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남 이야기가 아니었으니까요."
국가, 국민... 뭐 그 외에 이것저것. 그들을 위해 손을 더럽히고 몸을 혹사시키는 대가로 더 나은 삶을 기대해볼 수 있었다. 서로가 믿어야만 했던 체계에서 내가 얻은 것이라고는 멸시와 함구 뿐이었다. 내 권리와 믿음을 지키려 발버둥치고, 또 나를 도와준 이들이 없었다면 지금 나는 이 사람은 커녕 자기 자신도 구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배신당한 뒤에 손을 내미는 사람이 꼭 사기꾼이라는 법도 없더라고요."
당연한 이야기지만 그들이 영원히 나를 책임져줄리는 없다. 그러나 한 때의 인정으로, 상호간에 호의를 나누는 친구로써는 여전히 남아있다. 나는 그들을 위해 내가 도울 수 있는 일을 하려 하고, 그들은 나를 위해 애도해주기도 했다. 이상적인 일이다. 하지만 이상적이라 해서 절대로 일어나지 않는 일도 딱히 아니다.
배터리를 슬슬 갈 때가 되었는지 요상하게 왜곡된 도어벨 소리가 울렸다. 단골 피자집의 배달원이 친근한 얼굴로 문 앞에 서 있었다. 아주 먹음직스러운 일용할 양식과 함께. 나는 피자 값 밑에 팁을 얹어서 건넸고, 서로 좋은 하루가 되라며 인사를 나눴다.
"자, 신뢰니 배신이니 하는 복잡한 이야기는 나중에 하고, 우선은..."
피자 타임. 군침도는 향기가 잔뜩 풍기는 뜨끈한 페퍼로니 피자를 테이블 위에 얹었다. 아마 이 유혹을 이기는 사람은 최소한 잘 훈련된 특수부대원 정도일 것이다. 나도 이건 못 이기니까.
아이는 발 끝만 내려다보며 걸음을 떼었다. 발이 바닥에 닿고 떨어질 때 소리가 나지 않도록 주의하고, 인형이 걷는 것처럼 옷차림도 머리카락도 흐트러짐 없도록 움직임 하나 하나가 신중했다. 아이가 어느 정도 방 안으로 들어가면 안에 있던 하인들 또한 소리 없이 미닫이 문을 닫는다. 숨소리조차 낼 수 없는 방 안에서 아이는 옷자락을 끌어모으고 무릎 꿇어 앉는다. 줄곧 고개는 숙인 채 얼굴을 감추고 있었다. 겁에 질린 표정을 숨길 수 있을 것 같지 않았기 때문이다. 목소리에 떠는 티 숨기는 것이 최선이었다.
"...오늘부로 새로 하가의 신수님을 모시게 되었습니다."
하가의 신수는 성격이 고약하여, 영험하다 불리는 신수라면 응당 할 수 있다는 인두겁을 쓰지 않고 짐승의 모습으로 지낸다더라. 털 빗는 손길 하나라도 마음에 들지 않으면 단박에 목을 물어뜯어 죽어나간 이들이 수백을 웃돈다니, 눈이라도 마주치면 그 자리에서 콱 죽어버린다- 하는 소문이 전국에 유명하였다. 아이는 나라에서 제일 가는 하씨 가문에 속하게 되어서, 몸종일지 언정 열심히 노력하여 주인 어른을 모시는 좋은 하인이 되어보고자 했는데 어째서인지 신수를 뫼시게 되었다. 아이는 이곳에서 죽을지도 모른다 생각하면서도 하인으로서 최선을 다하겠노라 마음 먹었다.
"감히 빗질을 해드려도 불편하지 아니하실까요."
# 동양판타지라고 생각하고 썼고, 가문마다 모시는 신수가 있단 느낌이야. 신수가 강할수록 권위 높은 가문! 신수는 신비한 힘을 가진 덩치 커다랗고 영험한 동물 정도로 생각했어~
불법 카지노가 불법 카지노인데는 다 이유가 있다. 이를테면 윗선에서 딜러한테 자꾸 손기술 쓰라고 강요하고 있다던가. 다행히 남자의 손기술은 천재적이었기때문에 한 번도 걸린적은 없지만, 앞에서도 (아마) 칼을 겨누고 있고 뒤에서도 (이건 확실히) 칼을 겨누고 있는 상황에서 재주를 부려야 하는 상황을 좋아할 수는 없었다.
'난 그냥 정직하게 게임하고 싶단말야!'
하지만 불법 카지노인 이 곳에서는 이루어질 수 없는 바람이란걸 알고 있었기에 그냥 늘 그랬듯이 들키지않기만을 바라며 남자는 소매에 숨겨두었던 카드를 돌렸다. 실수는 없었으니 문제도 없을것이다. 아마.
땀방울이 지저분한 목줄기를 타고 흘러내린다. 채 묶여 올라가지 못 한 잔머리가 그 길로 따라붙었다. 꽤 기분 나쁜 찝찝함이다.
반파 직전의 폐허, 묵직하게 내려앉은 먼지층. 굳이 들어와 살피기에는 누가 보아도 적합하지 않은 곳. 그럼에도 굳이 이리로 발걸음을 옮긴 것은, 그만큼 무리에서 떨어져 잠깐 혼자 있기에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곳이라고 생각했으므로.
짊어지고 있던 무거운 배낭을 발치 아래에 아무렇게나 던져 놓으면 얼마나 묵었는지도 모를 먼지구름이 자욱하게 일어난다. 휙, 휙, 대충 손을 휘저어 그것을 흩어내고, 자신도 그나마 멀쩡해보이는 벽에 등을 기대곤 스르륵 미끄러져 주저앉았다. 옷이나 엉덩이가 더러워지는 것을 신경쓰지 않게 된 것은 이미 한참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까지 거쳐 온 길에는 깨끗한 물을 원하는 만큼 쓸 수 있는 곳도, 그럴 만 한 여유도 충분치 않았으니. 발걸음을 옮기는 중에 소낙비라도 오면 그나마 다행인 셈이었다. 그러면 차라리 몸에 내려앉은 티끌 정도는 가볍게 걷어낼 수 있었으니까.
아주 조금, 고단한 몸에게 휴식을 주고 나니 급작스럽게 잊고 있던 갈증이 밀려온다. 배낭을 뒤져 찾아낸 물병에는 아주 조금, 밑바닥을 겨우 적실 정도의 물방울밖에는 남아 있지 않았다. 몇 번이고 그것을 탈탈 털어 입술을 적셔 보려고는 해도ㅡ 버석거릴 정도로 말라버린 입술을 적시기에는 터무니없이 부족하기만 하고. 젠장, 더 감질나기만 한다. 텅, 터덩, 텅텅. 아무렇게나 내던져버린 500ml짜리 플라스틱 물병. 때 끼고, 구겨지고, 여기저기 칠이 벗겨진.
이런 생활은 언제까지 계속되어야 하는 걸까? 흘러나온 한숨과 함께 시선을 옮기며 눈을 감았다 뜬 그 사이로. 가방 안에 반쯤 구겨진 사진 한 장. 너는 죽었을까? 살았을까? 웃고 있을까, 울고 있을까. 나와 같은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을까?
지저분한 손 끝으로 구겨진 부분을 서투르게 매만져 펴댄 탓에, 웃고 있는 자신의 얼굴이 더럽혀지고 말았다. 쯧. 마뜩잖은 얼굴. 소매를 끌어다가 벅벅 문질러 닦아 보아도, 제 손과 다를 것 없이 꾀죄죄한 천조각으로는 깨끗하게 지워질 리 만무하다. 무엇도 마음대로 되지를 않는군. 신경질적인 손놀림과 천 스치는 소리는 곧 멈추고, 고개가 맥 없이 벽에 툭 기대는 소리만이 들릴 뿐이다.
아, 죽고 싶다.
부서진 천장 너머로 반짝이는 하늘은 눈이 부시도록 시린 푸른 색. 삶이라는 한 마디가 어쩌면 이렇게 아름다운 울림보다도 핏빛같은 잔혹함으로 다가오는지. 무슨 일이 있어도 살아라! 머리가 아프도록 귓가에 맴도는 스러진 자들의 단말마가 무색하게도, 살아남은 이들이 지금 무엇보다도 바라는 것은 차라리 죽음이었다.
ㅡ 무언가의 이유로 대부분이 죽고, 몇몇만이 살아남게 된 포스트 아포칼립스..... 라는 느낌..... ㅇ)-( 그게 좀비인지 전염병인지 핵 때문인지는 몰?루. 자유롭게 설정해도 OK! 나참치 머릿속에서는... 함께 다른 곳으로 이동하던 무리에서 잠시 떨어져 나와 휴식하고 있다. 그런 느낌입니다.
사람이었다가도 동물로 변한다. 체력이 동나든, 정신적으로 피곤하든 피로가 쌓이고 휴식이 필요해지면 동물로 변하고 만다. 푹 쉬면 다시 사람으로 돌아온다.
나는 이마를 빡빡 치고 싶었지만, 그게 여의치 않아 내 가방에 머리를 콩콩 박았다. 나는 참새다. 하필 참새다. 길거리에서 흔하게 볼 수 있으니 주변인에게 도움을 요청해봤자다. 길고양이에게 사냥당하지 않으면 다행이다. 오늘따라 좀 피곤하다 싶더라니, 하교하던 길에 결국 변하고 말았다. 조금만 더 가면 집이었는데! 욕하고 싶다. 해도 아무도 모른다. 짹짹. 내 가방과 옷가지 위에서 제발 누군가 알아봐주길 바랐다. 이 동네 아는 얼굴이라도 지나가면 좋겠는데. 아무리 소리쳐봤자 지저귀는 소리만 난다. 짹짹. 지겹다.
학교에서 발표에 걸리고, 계단에서 넘어지고, 이어폰을 놓고와서 등하교를 할 때 노래조차 못 듣는 사소한 불행들이 있는 이상한 날. 아, 젠장. 오늘은 진짜 뭐라도 마가 꼈나. 되는 일이 하나도 없네. 나는 괜히 길가의 돌멩이들을 발로 차면서 하교하기 시작했다. 무릎에는 반창고가 따끔거리는 상처를 가려주고 있었다. 그나저나 원래 세상이 이렇게 조용했었나. 이어폰 하나 없다고 세상이 이렇게 달라지던가.
...........라고 생각하던 그 때, 나는 듣고 보고 말았다. 짹짹거리는 참새의 소리를. 그것도 누군가의 가방과 옷가지 위에서.
".....하..?"
뭐야. 누가 길 한복판에서 옷을 벗어던지고 가방을 내팽개치기라도 한거야? 나는 나도 모르게 참새 쪽으로 다가갔다. 그런데 이 옷이랑 가방....우리 반 애 거 아니던가? 등하원 할 때 동네에서 가끔 마주치기도 하던?
"....너 혹시 이거 주인 어디갔는지 알아?"
옷가지와 가방을 살피다가 나는 나도 모르게 참새를 보며 물었다. 참새가 알 리가 없는데도 왠지 모르게 물었다. 오늘은 이상한 날이었으니까.
같은 반의 얼굴 알고 이름 모르는 아이. 다들 이상하게 보고 지나가기 여념 없는데 관심을 가져주다니, 복 받을 거라고 생각했다. 비록 내가 까치는 아니지만, 은혜 갚는데 참새가 중요하고 까치가 중요할 것 같진 않다. 나는 이것의 주인이 나라고 밝히기 위해 안간힘을 써야 했다. 부리로 가방 지퍼를 물어서 당겨 열고, 그 다음은 필통과 공책을 가방 밖으로 잡아 끌었다. 공책을 펼치는 것도 몇 장 물어 포로롱 날아오르며 넘겨야했고, 필통도 또 지퍼를 부리로 물어 당겨 열어야 했다. 컴싸 뚜껑을 여는 건 얼마나 어렵던지, 발로 펜을 움켜잡아 고정하되 부리로 뚜껑을 물어 당겨야했다. 나는 이 펜을 발로 움켜쥐고 날갯짓 파닥거리며 글씨를 적었다. 내가 이렇게 악필이 아닌데.
이상한 소리가 나도 모르게 마구 튀어나왔다. 아니, 당연하잖아. 참새가 내 질문을 듣더니 갑자기 부리로 가방 지퍼를 열고 필통과 공책을 꺼내기 시작하는데, 그걸 보고 누가 안 놀라겠어?
"야, 그거 함부로 꺼내면..!"
하지만 안된다고 말리기도 전에, 참새는 날아오르더니 공책을 넘겼다. 게다가 필통을 열고 컴싸 뚜껑까지 열었다. 참새한테 말을 거는 나도 이상하겠지만, 그걸 듣고 저렇게 사람처럼 반응하는 참새가 더 이상해..! 아, 내가 지금 꿈꾸고 있는건가? 그런건가..! 오늘 진짜 이상해..!!
"..........하.....?"
하지만 참새가 글을 쓴 순간, 모든 것이 멈춰버렸다. 아니, 정말로? 설마, 혹시나, 싶긴 했는데, 아니, 진짜로? 꼬부랑거리는 단 두글자를 읽고 그 뜻을 이해하는 데에도 억만년의 시간은 걸린 것 같다.
"....저주라도 걸린거야?"
어쩌다 이렇게 되었냐, 원래 참새였냐, 인간으로는 못 돌아가냐, 등등의 수만가지 질문을 뛰어넘고 참새, 아니지, 너에게 물었다. 이 나이 먹고 동화에 빠졌냐고 비웃어도 할말은 없었다. 어차피 오늘은 이상한 날이고, 참새가 되었다는 너도 이상하니, 나도 이상한 소녀 감성에 좀 빠져봐도 뭐 더 달라지겠어? ........달라지겠어?
자전거를 타고 학교를 형해 달리다가, 네 뒷통수가 보이자마자 그곳을 향해 던졌다. 상쾌하고 푸른 하늘 아래 아침 공기도 산뜻한데, 이 풍경에 있는 단 하나의 오졈을 조준한다. 체육복 든 가방인데, 이것에 맞든지 잡든지 그건 네 몫이다. 하늘에서 완벽한 포물선을 그리는 저걸 못 잡는 것도 재능이겠다. 나는 오늘 3교시 체육인 거 까먹었냐고 빈정대는 말 덧붙이는 것도 잊지 않았다. 옆집 산다는 이유로 지겹게 보는 사이인데 고등학교 올라오며 같은 반까지 되었고, 이제는 내가 아침 등교길에 심부름질까지 해야 한단 말인가? 이러니까 아줌마가 매일같이 날 딸 삼고 싶다하는 거다.
하복을 입고 가만히 수업만 해도 쪄 죽겠는데, 3교시 체육? 아침부터 페달을 열심히 밟아서 이미 체력을 다 써버렸기 때문에 분명 난 녹아버릴 것이다. 그러니 날 심부름꾼으로 쓴 저 녀석에게 아이스크림이라도 뜯어먹어야겠다. 나는 네 옆 즈음에 가까이 다가갈 때 자전거 속도를 줄이고 멈춰섰다. 네가 헛소리를 했기 때문이다. 누구는 누구 챙겨다주겠다고 체육복 들고 왔더니 학교를 안 가려고 했다는 말이 귀에 날아와 박혔다. 나는 최대한 욕설을 걸러낸다.
아이스크림 하나가 얼마나 한다고. 티끌 모아 태산이라고 여태 뜯어먹은 것들을 모아 가격을 계산하면 꽤 클 것 같기야 하지만, 이유없이 뜯어먹은 것도 아닌데 억울하다. 나는 콧방귀를 뀌고 아예 자전거에서 내렸다. 자전거를 끌고가기로 했다. 조금만 더 힘이 좋았다면 이 자전거를 번쩍 들어 정신차리고 헛소리 작작 하라고 이 녀석을 한 대 치기라도 할텐데, 그 정도 힘은 없어 다행이다.
"붙지마, 더워 멍청아."
나는 학교까지 끌고가야할 짐이 두개나 되었다. 하나는 자전거고, 하나는 이 녀석이다. 이 새끼라고 하려다 그간 봐온 정을 생각해 녀석으로 순화시켜줬다. 난 머리끄댕이를 잡을지, 귀를 잡아당길지, 목덜미를 붙잡을지 고민하다 소매를 붙잡기로 했다. 피한다면 어쩔 수 없이 머리끄댕이를 잡아야겠다.
자전거를 한손으로 끌려고 하니까 불편하기 짝이 없다. 그렇다고 이 녀석을 놓았다가는 오늘 등교하는 건 나 혼자일 것 같다. 이건 최소 아이스크림 두개 뜯어먹어야 한다. 아니다, 세개가 좋겠다. 잘난 척이 매우 재수없으니 세개 뜯어먹어야겠다. 가운데 손가락 곧게 펴고 싶으나 나는 잘 참아냈다.
"3년 동안 이래야 되냐, 나?"
안 그래도 빡센 대한민국 고등학생 라이프가 더 꼬이는 기분이다. 고3이 되어서도 이러진 않겠지. 아니, 이 새끼라면 정시로 간다고 할 것 같으니 고3 되고서도 그럴 것 같다. 아줌마에게 정말로 날 딸로 들이고 우리 집에 쟬 줘버리는 건 어떻겠냐고 진지하게 물어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당연하다. 옆집 살며 매번 보는 얼굴, 원하든 원치 않든 자주 보다보니 남들보다 더 많이 친한 사이인 만큼 우리 가족도 너를 안다. 나도 공부한다고 하고 있고, 낮은 성적은 아닌데 옆에 있는 놈이 하필 천재인 걸 어쩌라고. 얘한테 좀 배워보라는 잔소리는 귀에 딱지앉도록 들었다. 근데 어쩌나, 이 자식은 학교 쨀 생각만 하는데.
"그래그래, 내일 해가 서쪽에서 뜨지."
가볍게 비아냥거렸다. 이 말도 32번째 정도 한 것 같다. 나는 자전거 달라는 말에 선뜻 앞바구니에 있는 내 책가방을 들쳐메고 자전거를 넘겼다. 거절할 이유가 없다. 마음 같아서는 학교까지 태워달라 하고 싶은데, 이 녀석이 끄는 자전거가 학교로 향하지 않을 것 같아서 그러진 못했다.
뭐, 정말 적이라고 할 것도 없지만. 어릴 때부터 줄곧 봐왔으니까 이런 말도 쉽게 하고, 서스럼없이 대하면서 웃을 수 있는 거다. 그게 좋은 점이지. 가족들이 비교하는 건 좀 스트레스 받긴 하지만 그게 얘 잘못도 아니고. 그래도 학교에서는 내가 얘보다 훨씬 더 많이 예쁨 받는다. 난 모범생이니까.
"오키, 너 찍었다."
새끼손가락 들어보이면서 말하면 나도 새끼손가락을 갖다대고는 했다. 버릇으로 굳어서 남들은 약속이라며 새끼손가락 걸고 있을 때, 난 새끼손가락을 마주대고는 한다. 지금도 그렇게 새끼손가락끼리 마주닿았고, 바로 자전거 뒤 짐받이칸에 올라타 앉는다.
웃으면서 살짝 거리를 뒀다가 다시 돌아온다. 어차피 아무런 의미가 없는 말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저런 말 정도는 아무런 타격도 주지 않는다. 네가 내 새끼손가락에 자신의 것을 찍으며 자전거 뒷자리에 올라타자 나도 자전거 안장에 올라탔다. 예전부터 하도 많이 태우고 다녀서 그런지 무겁다는 느낌은 들지 않는다.
" 꽉 잡아. "
천천히 페달을 밟는다. 자전거는 조금씩 앞으로 나아가기 시작했고 페달의 저항이 많이 약해질때쯤 자전거는 빠르게 나아가고 있다. 뒷자리의 너를 흘끗 바라본 나는 페달을 빠르게 밟기 시작했다. 조금씩 빨라지는 자전거는 빠르게 학교로 향하고 있다.
" 아, 오늘도 같이 갈꺼지? "
예전엔 항상 같이 다녔는데 지금은 각자의 약속이 있어서 그런가 같이 가지 못하는 날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