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96306068> 자유 상황극 스레 3 :: 1001

이름 없음

2021-09-13 08:11:25 - 2022-12-20 23:06:42

0 이름 없음 (wSjOpuFcMU)

2021-09-13 (모두 수고..) 08:11:25

이 상황극은 5분만에 개그로 끝날수도 있고, 또다른 장편이야기가 될수도 있습니다.(물론 그때는 다른 스레를 만들어주세요.)

아니면 다른 스레의 자캐가 쉬어가는 공간이 될수도 있습니다. 크로스 오버도 상관없습니다.

자유 상황극 스레에 오신걸 환영합니다.

951 이름 없음 (OVdQD2Jljk)

2022-11-26 (파란날) 22:14:05

>>945 외투를 단단히 입었거니와 달려오느라 몸이 더워졌을 수도 있고 몇 걸음만 떼면 집인 만큼 바람막이를 걸치겠냐는 것은 딱히 달갑지 않은 제안일 수 있다. 그런데도 상단주 오스카는 약초꾼 코니가 바람막이를 꺼내자마자 눈이 실눈이 되도록 환히 웃어주며 반색했다. 거기까지는 다행이고 고마운데 오스카는 뭐라고 말릴 새도 없이 제 코트를 벗어다 코니에게 걸쳐주고는 자기는 바람막이를 입어버렸다. 난감하다. 바람막이는 쌀쌀한 바람을 잠깐 견디는 용도로나 쓸 만하지 털외투를 대신할 정도의 보온성은 없다. 그런데 바람막이 입자고 코트를 벗어버리면 어쩌나? 이래서야 바람막이를 걸치겠냐고 물은 게 역효과다. 바로 돌려드리고 찬데서 외투를 벗으면 감기 드신다고 했어야 하지만 다시금 이어지는 여보라는 호칭에 코니의 머릿속은 도로 화끈하게 달아오르고 말았다. 그렇게 얼이 빠진 채 찬바람을 맞기를 수차례 되풀이하고서야 정신이 났고 그제야 이럴 시간에 얼른 들어가는 게 낫겠다는 (상식적으로만 생각했다면 바람막이 따위를 권하기보다 앞서 떠올렸어야 할) 결론에 이를 수 있었다.

“이, 이, 이..” 그런데도 머리와 입이 따로 놀기라도 하는것처럼 이걸 자기한테 벗어주시면 어쩌냐는 소리만 입안을 맴돌다가 가까스로 말문이 트였다. “퍼뜩 들가시소. 시장하시지예? 식사하시고 괜찮으시모 차도 내오께예.”

지껄이다보니 앞뒤없이 뜨겁던 머릿속도 차츰 정리되는 기분이었다. 식사는 오스카의 고용인들이 준비하겠지만 차는 팔기 애매한 약초들을 말려둔 잎으로 코니가 우려볼 수 있었다. 거기에 머루와 누가를 곁들이면 나름 그럴싸한 다과를 드릴 수 있을듯했다. 오스카가 차를 들기보다 쉬기를 바란다면 당연히 그만둘거지만

/좀 짧나; 엄청 열정적으로 이어주는거 같아서 그러는 보람이 있게끔 하고 싶은데 괜찮을지 모르겠다

952 이름 없음 (HibghR.Q/.)

2022-11-27 (내일 월요일) 22:57:44

>>951 또 한번 내뱉은 여보 소리에 완전히 새빨개져서는 고장난 듯 그자리에 굳어버리더니, 말을 더듬기까지 하는 코니를 보며, 오스카는 필사적으로 웃음을 참고 그가 진정할 때까지 기다렸다. 애정을 표현하거나 칭찬을 해서 낯간지럽게 만들면 잘 익은 토마토처럼 새빨개져서는 버벅거리는 모습은 무척이나 사랑스러웠지만, 웃음을 터뜨리기라도 했다가 행여라도 놀리는 것으로 느껴 상처를 받게 해서는 안 되니까. 조금 기다리자니, 코니는 말문이 트였는지 한결 침착해진 목소리로 들어가서 식사를 하자고 권해왔다.

"좋아요! 나 배고팠어요. 코니가 타주는 차도 그리웠구요. 코니도 식사 아직이죠?"

코니와 함께 식사를 하고 차를 마시는 것도 얼마만인지. 이번 항해는 그리 긴 편도 아니었다지만, 그럼에도 교역을 하면서 겪고 들었던 기가 막히기도 하고 조금은 아찔했던 경험들을 들려줄 생각에 신이 났다. 오스카는 싱글벙글 웃으며 코니에게 잡아달라는 듯 손을 내밀었다.

"얼른 들어가요! 오늘 저녁은 뭐 먹고 싶어요?"

/나는 재밌으면 길이는 신경 안쓰는 편이라 걱정 마! 그리고 요 앞으로는 서로 짧게짧게 잇는 것도 괜찮을 것 같아. 밥 먹고 나서 차 마시는동안 오스카가 교역하면서 겪은 일들을 코니한테 들려주는 식이면 어떨까 생각중이거든. 다음 내 턴에 식사 마치고 나서 차 마시는 상황으로 점프할까 하는데 그래도 될까? 코니주 턴에서 그렇게 해줘도 고맙고!

953 이름 없음 (WgbX7wh2FM)

2022-11-30 (水) 00:39:55

>>952 환한 웃음. 코니의 차가 그리웠다는 밝은 목소리. 잡고 가자고 내미는 손. 코니에게 이 모든 것은 꿈결처럼 들뜨면서도 마음이 확 놓이도록 정겨웠다. 자기같이 평범한 인간에게 오스카가 정성을 쏟는 것이며 그러면서 행복해 보인다는 건 봐도봐도 실감이 안 났지만, 가무잡잡한 손에서 전해져 오는 온기며 튼실하면서도 부드러운 손아귀에 닿아 있노라면 이분이 건강하고 여기가 이분이 돌아올 곳이 맞다고 확인받는 기분이었다.

그렇다곤 해도 감상에 젖어 오스카를 밖에 세워두는 건 곤란하다. 코니는 뭘 먹고 싶냐고 묻는 오스카에게 대답하는 대신 맞잡은 손을 끌다시피해서 부랴부랴 들어왔다. 그리고 집안에 들기 무섭게 훈기가 피부에 와닿아서 밖에 더 머물지 않길 그나마 잘했다 싶었다.

"주방장님이 해산물 스프랑 훈제 칠면조 준비하신다꼬 들어씸더. 스프는 빵 그릇에다 담아 주겠다 카시든데예."

좋아하시려나? 고기와 빵과 스프가 다 갖춰진 식사니까 먼길 고생하신 뒤에 속을 든든히 채우기에는 좋을 것 같고 주방장님도 당연히 이분의 식성을 알고 준비했겠지만 당사자가 안 내키면 소용없으니까. 그와 별개로 식당에 가까워질수록 훈제로 익힌 칠면조 특유의 향과 갓 구운 빵 냄새와 따끈한 스프 냄새가 강해져서 침이 절로 고였다. 그렇게 식당에 이르자 주방에 있던 고용인들이 인사를 하고는 기다렸다는 듯이 식탁에 음식을 올리기 시작했다. 갓 조리해 내어주는 음식을 보고 있자니 식욕이 샘솟았다.

"고생하싰은께네 영양가 있는 걸로 든든히 잡수시야 됨미더." 코니는 오스카가 평소 앉는 자리의 맞은편 자리에서 오스카가 앉기를 기다렸다. 그러고는 가장 궁금했던, 오스카가 그간 어떻게 지냈는지와 밀접한 질문을 던졌다. "이번 교역은 어땠심꺼? 괘야나씸꺼?"

/교역중에 있었던 일을 화제삼아 수다떠는거 좋을거같아 근데 식사도 같이 할텐데 그때 얘기 안하다가 차 마실때로 넘어가는건 약간 어색할거 같아서 식사를 건너뛰진 않았어 식당까지 가는 과정이나 먹을 음식을 내가 임의로 정했는데 괜찮을까? 바꾸고싶은 부분 있으면 알려줘

954 이름 없음 (SkiBd49nhM)

2022-11-30 (水) 19:48:25

>>953 코니를 끌어안을 때도 그랬었지만, 손 안에 쏙 들어오는 작은 손을 꼭 감싸쥐자 새삼 집에 왔다는 실감이 나고, 손 안에서 느껴지는 그의 손의 온도가 그렇게 차지 않다는 것도 안심이 되어서, 함박웃음이 얼굴을 떠나질 않았다. 누가 보면 푼수같다 싶을 법한 얼굴로 코니의 손에 이끌려 집안에 들어서려니 코니의 목소리에 정신이 들었다. 해산물 스프에 칠면조라니, 적절한 식사 메뉴가 아닐 수 없었다. 자신은 항해로, 코니는 산행으로 체력을 소모한데다, 밖에 오래 있기도 있었으니.

"맛있겠네요! 항해하는 동안 집밥이 엄청 고팠던 거 있죠. 특히 코니랑 같이 먹는 밥이요."

무심코 또 낯간지러울 법한 소리를 내뱉었다가 멋쩍게 웃은 것도 잠시, 식당에 들어서자 인사하는 고용인들에게 손을 들어 답하고는, 평소 앉던 코니의 맞은 편 자리에 앉으며, 건너편에서 들려오는 퍽 정겨운 잔소리에 배시시 웃으며 대답했다.

"그럼요, 나 잘 먹을테니까 코니도 식기 전에 들어요. 나 기다린다고 추운 데 오래 있었잖아요."

코니는 식사하는 모습도 아기 다람쥐같고 귀여운데, 그 모습을 오랜만에 보겠구나. 그래도 너무 대놓고 구경하면 신경쓰일테니까 잘 먹어가면서 적당히 봐야지. 오스카는 큼직한 칠면조를 칼로 먹기 좋게 해체해서는 통통한 다리살을 코니의 접시 위에 올려준 뒤, 제 접시에도 얹은 뒤에야 자리에 앉고 수저를 집어들었다. 맞은 편에 앉은 코니가 이번 교역은 괜찮았냐고 물어오자, 오스카는 기다렸다는 듯이 눈을 빛내며 입을 열었다.

"네! 가는동안 풍랑도 심하지 않았고, 우리가 싣고간 수하물도 거의 다 좋은 가격에 매각한 데다, 교역품도 잔뜩 수입해왔어요. 심지어 이번에는 신상품도 들여와서 당분간은 항해 안 나가고 여기 일에만 집중해도 될 거예요."

딱 한 군데서만 교역을 못 하긴 했지만, 그걸 감안해도 이 정도면 아슬아슬하게 흑자니까, 다음 항해까지 서류 업무나 자선재단만 돌보는 정도면 코니하고 더 많이 시간을 보낼 수 있겠지. 신난다! 그런 생각에 싱글벙글하려니, 교역을 제대로 못 한 나라에서 들은 기막힌 사연이 생각났다. 사연이라기엔 역사서에 적힐만한 스케일이었지만.

"...아, 그런데 딱 한 나라에서만 교역을 제대로 못하긴 했어요. 수하물을 다 파는 것만으로도 벅차서 교역품 매입을 못 했었거든요. 배에서 내려서 상황을 알아보니깐 글쎄, 황제의 국혼이 진행중이었는데, 국혼 시기인 것 치고는 도시 전체가 분위기가 좀 뒤숭숭한 거예요. 알아 보니까 황조가 막 바뀐 참이었더라구요. "

/아 하긴 식사하면서도 충분히 이야기할 수 있겠다. 스프랑 칠면조구이 정도면 충분히 먹으면서 대화 가능한 메뉴고. 그리고 나는 자연스러워서 좋았어! 메뉴도 맛있어보이고😆 나도 먹고 싶다 빵스프랑 칠면조... 참, 이제부터는 길이가 좀 들쭉날쭉해질 수 있을 것 같은데, 코니주도 편한길이로 이어주면 고마워!😂

955 이름 없음 (UfyEMG.xTc)

2022-12-01 (거의 끝나감) 17:17:01

>>954 집밥을 먹고 싶었다며 신이 난 오스카를 보고 있자니 항해중에 알게모르게 있었을 고충이 상상되었다. 배에 싣는 식량은 운반상의 편의며 부패 방지 등을 위해 대부분 말린 것들일 거고 아니라도 여러모로 육지에서 먹는 음식만은 못할 것이다. 그런 만큼 모처럼 갓 조리된 음식을 먹는 순간은 기쁘고 설레는 시간 아닐까? 그런데 그시간을 코니와 함께하는게 그리웠단다. 믿기지 않도록 감동적이고 뭉클하면서도 어쩐지 간질간질하고 쑥스럽기도 하고 형언하기 어려운 기분이었다. 그런 나머지 그가 배고플텐데도 음식을 들 생각은 않고 코니 몫부터 덜어주는데도 그만 얼이 나가있었다. 내가 먼저 챙길걸. 얼른 드시라고 말하려는데 오스카가 맑은 유리구슬 같은 눈망울을 반짝이며 교역이 성공적이었다며 자랑처럼 말했다. 그렇게 즐거워하는 모습을 보자니 마음이 푸근해졌고 당분간 항해를 안 나가도 될 것 같다는 것도 기뻤다. 그와 함께있을 시간이 늘어나는것도 좋지만 무엇보다 그가 덜 위험할거라고 생각하니 안심이 되었다. 아무리 많이 다니고 익숙해져도 바다는 언제 무슨일이 있을지 모르는 곳이니까.

그런데 그렇게 재잘거리던 그가 뒤늦게 생각났다는듯 한곳에서는 교역품을 구입하지 못했단다. 황제가 막 바뀐 참이라 분위기가 뒤숭숭했다나? 아니 황제만 바뀌었다면 전임 황제의 승하나 양위 직후려니 했을 텐데 무려 황조가 바뀌었단다. 뭔가 큰일이 있긴 있었나 보다. 어떤 일인지 궁금하긴 했으나 그보다는 오스카가 그쪽일에 휘말리지 않고 돌아와준게 천만다행이다 싶었다.

“난리가 크게 났는가배예. 무사하시스 다행임더.”

/맛있을거 같다니 다행이네 응 길이는 그렇게 알고있을게

956 이름 없음 (9QIhQc9Nxg)

2022-12-02 (불탄다..!) 15:53:52

>>955 재잘거리는 와중에도 뚜껑 역할을 했을 빵조각을 스프에 적셔 야무지게 오물거리던 오스카는, 무사해서 다행이라는 말에 고마운 마음 반 미안한 마음 반인 복잡하면서도 뭉클한 심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먹고 있던 것을 삼키고 입을 열었다.

"그럼요. 무슨 일인지 알자마자 급하게 마무리하고 최대한 빨리 출항했어요. 국혼 준비기간이니까 어느정도 안정이 되었다고 볼 수도 있지만 보통 테러는 그런 기간에 터지곤 하잖아요. 그런데, 확실히 큰일은 큰일이었는지, 주점에서 사람들이 공공연하게 수군거리더라고요. 그래서 술 한잔 씩 돌리면서 캐봤는데, 전 황조 말기부터 조금씩 일이 터지기 시작했대요. 당시에 황태자였던 제 1황자가, 전 황제와 황후를 포함한 황족들 앞에서 공개적으로 선언을 했대요. 나 황태자 안 한다고."

나였으면 그런 식으로 안 했을텐데. 이야기를 들었을 당시에 강하게 느꼈던 당황스러움을 되새기며, 오스카는 한입 크기로 자른 칠면조 고기를 입에 넣고 우물거렸다. 그러고 있으려니 조금 더 설명이 필요하겠다는 생각에, 오스카는 입안에 든 것을 삼키고 다시 재잘거렸다.

"근데 나이가 어리고 황태자 자리가 부담되면 그럴 수도 있잖아요. 그래서 물어봤어요, 당시 1황자의 춘추가 얼마였냐고. 근데 갓 성년이 되었다지만 지지 세력이 적을 만큼 어린 나이도 아니었고, 심지어 동맹국의 왕녀와 혼인할 예정이었다는 거예요."

/양해해줘서 고마워! 그리고 반응하거나 잇기 애매할 때는 편히 말해줘😊

957 이름 없음 (dBAfKFv5c2)

2022-12-03 (파란날) 01:04:10

>>956 오스카가 빵뚜껑부터 스프에 적셔서 오물거리는 것을 보고 있자니 안먹어도 배부른 기분이었다. 원래라면 눈앞에 먹을걸 두고도 안먹는건 상상도 못했고 누가 그랬다고 해도 의심했겠지만 오스카가 맛있게 먹으니까 흐뭇하고 안심되어서 눈을 떼기가 아까웠다. 그래도 누가 빤히 보면 민망할수도 있고 안먹는다고 걱정할지도 모르니 빵뚜껑을 한입에 넣고는 물도 한모금 머금는데 그가 꺼낸 화제는 그야말로 놀랄노자였다. 교역차 들렸던, 황조가 바뀌었다는 나라에서 예전 황태자가 자긴 황태자 안하겠다고 황족 전체 앞에서 선포했다나? 그건 높으신분들의 사정이라고는 1도 모르는 코니에게도 어리둥절하기 그지없는 얘기였다. 황제님의 맏이이면 당연히 황태자 아닌가? 아닐수가 있나?

"구암ㄷ..."

얼떨한 나머지 입에 욱여넣은 빵을 씹기도 전에 말(이라기보다는 의미불명의 웅얼거림)이 튀어나오고서야 코니는 제 실수를 알아차리고 먹던것을 맹렬히 씹기 시작했다. 그러다보니 머리속이 정리되는것도 같았다. 그의 말대로면 그나라 황조가 바뀌었다니까 황태자가 당연한 제자리를 안하겠다는 바람에 온나라에서 내가 황제님 하겠다고 반란이 난게 아닐까? 입안의 빵을 꿀꺽 삼키고 제추측이 맞나 제대로 확인하려는데 오스카의 말이 이어졌다.(다행히 오스카는 얘기하는 와중에도 먹을건 야무지게 챙겨먹고 있었다.) 황태자를 안하겠노라고 폭탄선언을 했던 황태자는 당시 성년이었고 혼인도 예정되어 있었단다. 아니 어린애도 아니고 다큰 어른이 그랬다고? 그런식으로 내팽개치면 뒤는 어떻게 된대?

"그래가꼬 반란이 난 김미꺼? 다음 황제님 자리가 비서예?"

/별말씀을 애매한건 편하게 말해달라니 내가 더 고맙짛ㅎ 너참치도 불편하거나 아리까리한거 있으면 말해줘 그나저나 오스카 디게 맛있게 먹는다 그시대의 먹방러?

958 이름 없음 (8kisnPCyxM)

2022-12-03 (파란날) 19:09:16

>>957 입안에 넣은 빵조각으로 볼이 톡 튀어나온 채로 무언가 대답을 하려는 듯 웅얼거리는 모습에, 오스카는 입꼬리가 치솟으려는 것을 감추려, 일부러 물을 한모금 들이켰다. 오랜만에 보는 아기 다람쥐같은 모습은 물론이고, 알아듣기 힘든 웅얼거림마저 사랑스러웠기 때문이었다. 진짜 어떻게 다 큰 어른이 이렇게 귀엽고 사랑스러울 수가 있지? 진짜 사람이 아니고 요정인 거 아닐까? 이어 코니가 생각에 잠긴 듯한 표정으로 먹던 것을 삼키려는지 맹렬히 오물거리기 시작하자, 오스카는 귀가 빨개진 채 애써 고개를 숙이고 아직 따끈따끈한 해산물 수프를 떠먹었다. 지금만큼은 음식에 집중하지 못하면 코니가 귀여워 죽겠다는 마음을 주체하지 못할 것 같았다. 그렇게 배를 채우며 진정하려니 먹던 것을 삼켰는지 코니가 물어왔다. 그것 때문에 반란이 난 거냐고.

"공석인 동안은 그런 분위기가 되었을 지도 모르겠는데, 일단 다음 황태자는 2황자가 됐대요. 그래서 1황자랑 정략혼을 한 왕녀의 나라에서도 공식적으로 항의를 표할 정도로 반발했나봐요. 황태자 안 하겠다면서 말한 이유 중에 왕녀와 혼인하고 싶지 않다는 것도 있어서 그것까지 동맹국 왕의 귀에 들어간데다가, 혼사를 계속 추진한다 해도 처음에 황태자비 자리를 약속했다가 말이 달라진 격이잖아요. 그래서 황제가 자기 조카인 대공을 사절로 보내서 이 문제를 무마시켰어요. 현재의 혼담은 양측에 모두 부정적이니 파기하고, 왕녀와 새 황태자의 혼담을 추진하는 방향으로요. 그랬더니 글쎄,"

오스카는 물을 한모금 넘기고 말을 이었다.

"이번엔 새 황태자가 '난 정략혼은 원치 않소!' 라고 공개적으로 선언해버린 거예요! 심지어 어린 시절에 몇번 왕래하고 서신을 주고 받았다지만 그다지 기억도 나지 않을 정도로 오랜 과거의 이야기에는 아무런 의미도 없다면서요."

// 아무래도 오랜만에 코니랑 함께하는 식사다보니 식욕도 더 돋지 않았을까ㅋㅋㅋ 근데 코니도 먹는 모습 되게 귀욤뽀짝하다😆 확실히 먹을 거 볼에다가 저장했다가 뇸뇸 먹는 다람쥐같아ㅋㅋㅋ

959 이름 없음 (a6tI/4qEgw)

2022-12-04 (내일 월요일) 15:58:20

>>958

960 이름 없음 (a6tI/4qEgw)

2022-12-04 (내일 월요일) 16:01:51

>>958 입에 음식을 넣고 말하는건 누가 해도 결례일거다. 보기에 좋지않을뿐더러 자칫 입안에 있던 음식물이 튀기라도 했다간 비위생적인 공격에 가까워지니까. 다행히 음식이 튀어나가는 불상사는 없었으나 오랜만에 오셨는데 잘해드리지는 못할망정 몰상식한 행위를 해버린게 부끄러웠다. 입을 다물고 손으로 가리는데 이상하게도 오스카는 불쾌해기는커녕 오히려 즐거워보였다. 심지어 코니가 겨우 입안의 음식을 처리하고 말을 꺼냈을때는 무척 들뜬 사람처럼 상기된 얼굴로 스프를 떠먹었다. 기분이 상하지 않은듯한건 다행이지만 그래도 실례가 아닌건 아니니까 주의해야지. 그래서 (오스카가 미리 나눠줬던) 훈제 칠면조를 입에 넣고서는 아예 입을 가리고 우물거리는데 오스카가 설명해 준 그나라 사정은 코니의 예상과 사뭇 달랐다. 황태자가 나몰라라하고도 반란이 일어나진 않았고 그동생이 황태자를 하기로 했는데 이번엔 원래 황태자가 맺었던 동맹국과의 정략혼이 문제가 됐단다. 그나라에서 자기네 공주에게 황태자비이자 미래의 황후님 자리가 예정되어 있었던게 무산된거(단순히 무산된게 아니라 공주랑 결혼하기 싫어서 황태자 안하겠다는 식으로 전해진 모양이다.)로 반발했고 그걸 무마하고자 원래 황태자의 동생인 새 황태자와의 정략혼을 재추진했다는 설명이었다. 형이랑 결혼하기로 했다가 동생과 결혼하게 되다니 기분 되게 이상하겠다 싶었지만 왕족이나 귀족님들은 신분에 걸맞은 혼처를 원하고 결혼을 통해 어떤 지위가 보장되느냐가 중요한 모양이니 그런가보다 했다.

그런데 오스카가 뒤이어 조곤조곤 알려주는 내용에 하마터면 사레가 들릴뻔했다. 그 두번째 정략혼도 새 황태자가 거절하면서 어그러졌다는거다. 별 교류가 없고 기억도 안나는 사람과의 혼사는 싫다고 했다나? 마침 입을 막고있던덕에 그대로 잠시 캑캑거리면서 진정시킬수 있었다. 그렇게 먹던걸 넘기고 물도 마신뒤에야 코니는 다시 물었다.

“그라모 그 공주님은 두번이나 파혼당해삔기네예. 공주님도 공주님이지만 그나라 체면도 말이 아일끼고. 그거때문에 전쟁이 나삐스 황조가 바뀐거임꺼?”

그런데 말하고나니 이상하다. 제국이라고 할 정도면 강대국일텐데 외국이 쳐들어온다고 무려 황조가 바뀔까? 도대체 무슨 난리가 어떤식으로 터진건지 짐작도 안갔다.

/959는 잘못 누른거야; 밖에서 폰으로 올리려다보니ㅜㅜㅜㅜ 그나저나 먹다가 말하려던거 난 상상하니 더러워서 나중에 좀 미안해질 정도였는데 오스카는 좋아해주네 그렇게 이어줘서 고마워

961 이름 없음 (3U3O/8f8co)

2022-12-04 (내일 월요일) 23:08:34

>>960 퍽 부끄러웠던지 입을 가리는 코니를 보고, 오스카는 아무리 사랑스러웠어도 귀엽다고 호들갑 떨지 않길 잘했다고 생각했다. 오히려 더 창피할 수도 있었으니까. 그러면서도 자신이 잘라준 칠면조 고기를 맛있게 먹는 모습에 눈을 떼지 못한 채로 계속 재잘거리던 중, 오스카가 전 황조의 삽질이 극에 달한 부분을 이야기했을 때 코니가 사레가 들린 듯 켁켁거렸다. 오스카는 깜짝 놀라 냅킨을 잡으려다, 이내 그가 먹던 것을 넘기곤 물을 마시자 한시름 놓은 얼굴로 물병을 집어들어서는 거의 비어가는 그의 잔에 물을 채워주었다. 이내 코니가 진정하고서는 묻는 말에, 오스카는 살짝 고개를 젓고서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제국이 더 강대국이니 전쟁을 벌이기는 쉽지 않았나봐요. 그래서 적당히 외교적으로 넘어간 줄 알았는데, 전 황제가 사절로 보낸 대공이 귀국하자마자 쿠데타를 일으켰대요. 아무래도 대공도 사절로 가 있는동안 어지간히 열 받았던 거 아닐까 싶어요."

전 황조의 황족들이 어떻게 되었을지는 불보듯 뻔했지만, 남의 나라 일이라 해도 밥상머리에서 사람 죽은 이야기를 적나라하게 하기도 뭐했기에, 오스카는 부러 돌려 말하곤, 마저 칠면조 고기를 포크로 찍어 입에 넣고 우물거리다 삼키고는 마저 재잘거렸다.

"그래서 대공이 현 황제로 즉위했고, 시국이 얼추 안정되어서 국혼을 추진 중인 것 같긴 했는데, 그래도 반란으로 바뀐 정권일 수록 또 전복되기도 쉽잖아요. 당분간 분위기가 험악할 것 같아서 수하물만 처리하고 얼른 나왔어요."

/도중에 작성될 때 있지ㅋㅋㅋ 별말씀을! 더럽기는 커녕 음식때문에 발음 뭉게지는게 귀여울 것 같아서😆 무심코 그랬을 정도면 코니도 많이 벙쪘나보다 싶기도 했고 말야. 나야말로 코니가 엄청 귀엽고 반응도 재밌어서 즐겁게 잇고 있어!

962 이름 없음 (gzbjQMAb4c)

2022-12-06 (FIRE!) 01:02:50

>>961 사레들려 정신없던 순간을 넘기고 보니 비어가던 물컵에 어느새 물이 넘실거렸다. 일부러 챙겨주셨구나. 한창 얘기 중이었다가 자기가 산만하게 굴었는데도 언제 봤을까. 그 마음씀씀이가 고맙고 또 고마웠다. 이렇게까지 애써주시는게 아깝지 않게 나도 잘해야 하는데. 그래서 그의 물컵을 힐끗 보니 조금 마시긴 했어도 아직 제법 남은채라 채우기는 애매했다. 적당한 타이밍이 되도록 주시하고 있어야겠다. 아니면 이따가 머루랑 누가를 드릴때 잘익은거랑 견과가 실하게 든 부분을 골라드려야지.

그렇게 다짐하는데 그가 나긋나긋한 어조로 코니의 질문에 답해주었다. 역시나 공주가 2번이나 파혼당한 나라가 전쟁을 벌여서 황조가 바뀐건 아니었다. 그대신 외교사절로 갔던 대공이 반란을 일으켰단다. 더 강대국 입장에서 간 사절인데도 (오스카의 추측대로) 너무 다사다난했던 나머지 반란까지 벌인건지, 아니면 전 황태자의 폭탄선언 이후로 벌어진 일련의 사건들로 제국의 황조가 일반백성들은 물론 대소신료들과 귀족들의 신망도 잃었던건지까지는 모르겠으나 사필귀정이면 사필귀정이고 허망하다면 허망한 결말이었다.

"원래 황태자였던 양반이 막살놓지만 안했어도 그래는 안돼쓸낀데예..."

아닌가? 일단 2황자가 새황태자가 될때까지는 별일없었으니까 2황자가 나라끼리 약속한 국가적 사업인데도 정략혼은 싫다고 깽판친게 발단인가? 아니지, 그러고도 상대국이 찍소리 못했을 정도면 그거도 어찌어찌 수습됐던 모양이고 사실은 대공이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고 있었던걸까? 모르겠다. 어쨌거나 황제의 다른 자식을 옹립한게 아니라 본인이 황제가 됨으로써 황조를 갈아엎었다면 전 황제님은 물론 그일가가 어떤 처지에 몰렸을지는 안봐도 뻔했다. 차라리 외국과의 전쟁이었으면 포로가 된대도 몸값이나 주고(물론 그몸값이 나라를 반쯤은 털어먹은 정도겠지) 풀려났겠지만 그게 아니면...... 가만, 그러고보니 전 황제님이랑 그일가는 잡혀죽었을까? 탈출해서 재기할 기회를 노리고 있을까? 황제의 국혼이라는 나라에서 제일 큰 행사를 추진할 정도면 전자일거 같으면서도 이분이 또다른 난리를 염려하고 서둘러 출항했을 정도라 후자 같기도 하다.

"그라모 원래 황조 가문은 우째 돼씸꺼? 황제님하고 전 황태..." 혀가 꼬이는 기분이었다. 전 황태자 있고 새 황태자 있으니 뭐라고 지칭하는게 무난할지 헷갈렸다. "아무튼 그 가문 사람들예."

/재밌다니 고맙고 기쁘네 현생에 치여서 오늘 못이을줄 알았는데(12시 지났으니 못이은거 같기도..) 고마워서 서둘러봤어 저나라 사정 스펙타클하닿ㄷㄷ

963 이름 없음 (E.6I.zrRpg)

2022-12-06 (FIRE!) 22:33:17

이 학교에는 이해가 가지 않는, 참 이상한 규칙들이 많다.

예를 들어 4층 남자 화장실의 창문은 항상 잠궈 둬야만 한다던가,

음악실에 오르간 소리가 나면 절대 들어가선 안된다거나,

또 체육 창고에 들어갈 때는 항상 다른 한 사람이 문이 닫히지 않도록 잡고 있어야 한다거나,

대개 그런 영문 모를 것들이다.

대체 누가 이런 규칙들을 정한 건지는 알 수 없었다. 아마 처음엔 다들 우습게 생각했을 것이다.

다만 그 규칙을 어긴 학생들이 점차 하나 둘 주변에서 사라지자, 더 이상 아무도 이를 가볍게 웃고 넘길 수 없게 되었다.

이제 단순한 소문이라 치부하기엔, 너무나도 공교롭고도 찝찝한 사건들이 연달아 일어나 버렸으니까.

그리던 어느 날, 어쩌다 보니 당신은 체육 창고에 홀로 놓고 온 물건을 가지러 오게 되었다.

온도는 왠지 여름인데도 서늘하고, 심지어 다소 소름이 돋을 정도로 춥기까지 했다.

끼익-. 그 때 아무도 서 있지 않은 체육 창고의 푸른 철제 문이 닫히려 했고, 마침 닫히려는 순간에 누군가가 발 앞꿈치를 집어넣어 그것을 탁 막았다.

"거기서..., 혼자 뭐하고 있어."

검은 단발 머리의 여학생이 문을 열고 들어와 가만히 당신을 마주했다. 3학년 오컬트부 부장, 이름은 피 은유. 평소에 말도 없고 음침하기 짝이 없는 선배. 생긴 것은 다소 인기가 있는 편이다. 그러나 대놓고 주변인을 피하는 행동 때문에, 교내에서 아무도 그녀에 대해 좋게 이야기하는 사람은 없다.

그리고 절대, 남한테 먼저 말을 걸어 오는 일도 없었다. 적어도 지금까진.

//나폴리탄 괴담 소재로 같이 괴담극에 엮일 참치 구할게. 캐릭터는 평범한 남자 후배로 들어와 줬으면 좋겠어. 또 되도록 심리 묘사가 되는 1인칭 시점으로 써주길 희망하고 있어. 이리저리 휘둘리는 거 좋아하는 오너면 아마 잘 맞을 거야. 길이는 길지 않더라도 맥커터만 아니면 좋으니까, 참여 기다리고 있을게.

964 이름 없음 (wYzdTWqrrw)

2022-12-07 (水) 00:19:49

>>962 "그만두는 타이밍도 방법도 부적절했죠. 최소한 혼담이 오가지 않을 시기에 지지자들이 본인을 단념할 만한 구실을 주고서 그만두고자 했어야 한다고 봐요. 이도 저도 곤란하면 죽음을 위장하기라도 하거나요. 황태자 자리는 유지하면서 정략혼도 하지 않겠다고 우긴 동생 쪽도 어리석었지만요."

맏이에게 우선적으로 계승권이 주어지는 게 탈이 덜한 것은 어쩔 수 없으니, 형제가 위아래로 군주의 재목이 아닌 데다 어리석기까지 한 건 그저 그 황가의 불운인가보다. 그런 생각도 들었지만, 오스카로서는 첫 황태자와 두번째 황태자가 두 차례나 사고를 치는 동안 속수무책이었던 황제에 대해 의구심을 품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제 와서 장자 계승이 아닌 다른 방법을 택하기도 어렵기는 했다지만, 둘째를 황태자로 올리면서 정말 이렇게 될 줄 몰랐을까? 물론 알 길은 요원했다. 그런 생각을 하며 스프에 푹 젖은 빵의 속살을 긁어먹는데, 코니가 물어왔다. 전 황가 사람들은 어떻게 되었냐고. 이런, 좀 돌려서라도 미리 말할걸. 오스카는 물을 마시며 자기가 아는 표현 중 가장 간접적인 표현을 고르다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아마 모두 이 세상에 없을 거예요. 전 황제와 동생 쪽 전 황태자가 대공에 의해 사망하고 나서 나머지 황족들이 도망치긴 했는데, 대공이 즉위하자마자 본인과 본인의 자손이 아닌 모든 초록색 머리와 눈을 가진 자는 모두 멸하라는 명을 내렸거든요."

그렇게 황조가 교체되면 피바람이 부는 게 당연하다는 건 알고 있지만, 일개 상인으로서는 제 터전에 일어나지 않았으면 하고 바랄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윗분들의 분위기가 눈에 띄게 험악해지면 민생 또한 흉흉해지기 마련이니까. 그러나 그런 것보다도 당장 걱정되는 건, 이 살벌한 결말에 자신의 소중한 배우자가 입맛을 잃거나 질겁할 지도 모른다는 것이었다. 그렇다고 해도 자신이 먼저 호들갑을 떨면 되려 부담을 지울 수 있기에, 오스카는 제 걱정이 심하게 티나지는 않길 바라며 코니가 괜찮은지 조심스레 살폈다.

/에구 바쁜날이면 피곤했을텐데 이어줘서 고마워! 나도 평일엔 정신없어서 오래걸렸네😂 뭔가 기왕 썰푸는거 들을때 흥미진진했으면 해서 이것저것 지어내봤는데 스펙타클하다니 다행이다ㅋㅋㅋ 나도 코니 반응 보는 맛에 썰푸는 재미가 있네! 이것저것 짐작해보는 내용이 일리 있고 신선해서 좋기도 하고ㅋㅋㅋ

965 이름 없음 (UhcEh3aRJA)

2022-12-07 (水) 19:43:17

>>964 망한 황조의 원래 황태자나 새 황태자가 다 문제라는 오스카의 평을 들으니 새삼스럽게 의문이 들었다. 원래 황태자는 무책임한 선택이긴 하지만 본인의 마음에 안드는 정략혼을 피하기위해 황태자 자리를 그만두는 강수를 뒀는데 새 황태자는 정략혼을 싫어하면서 황태자 자리에는 왜 올랐을까? 책임감 때문에 피하지 못했다고 하기에는 무려 외교 분쟁의 해결책으로 결정된 결혼을 대놓고 거부한게 이상하고 제마음대로 살고자 했다기에는 스스로보다 나라의 안녕을 우선시할 의무가 생기는 자리에 오른게 이상하다. 차기 황제로서 권력과 부귀영화를 누리고 싶으면서도 개인적인 행복도 포기하기는 싫었나? 그렇다면 반란이 안나서 황제님으로 즉위했대도 좋은 황제님은 못되었겠다.

그런저런 추측을 하느라 음식에서 손을 뗀 사이 오스카는 빵그릇의 속부분을 긁어먹기 시작했다. 아이고, 안먹고 있으면 걱정하실텐데. 코니는 제빵그릇에서 빵반죽처럼 되어버린 스프에다 고기를 찍어 먹더니 곧이어 빵그릇에 고기를 채워 샌드위치처럼 만들고는 와구와구 물어뜯었다. 그러나 그도 잠시, 전 황제님의 일가는 모두 죽었을거라는 오스카의 답변에 코니는 먹던 음식을 머금은채 그만 얼이 빠지고말았다. 일가가 몰살당했기 때문에 언급을 피하셨던거구나. 괜히 말했네. 눈치없이 질문한걸 만회해보려다 입안이 가득찬걸 의식하고 멈칫했다. 하마터면 아까랑 똑같은 실수를 할뻔했다. 결국 음식물을 곱씹고 삼킨 뒤에야 겸연쩍은 얘기나마 꺼낼수 있었다.

"죄송함미더. 좋은일도 아인거를 들미삤네예."

이 화제로는 더 얘기하지 않는게 낫겠다 싶으면서도 한편으로는 어리둥절한게 다 죽었을거라고 추측하신 이유가 뭔가 이상했다. 머리카락과 눈동자가 초록색이면 모두 죽이라는 명이 있었다고? 전 황제님 일가의 외모 특징이려니 생각해도 문제다. 우연히 초록머리 초록눈동자로 태어난 사람까지 졸지에 봉변을 당했을거 아냐? 그래서 더더욱 얘기하기 싫으셨던걸까? 풀죽은 소리가 절로 나왔다.

"초록머리 초록눈이라꼬 다 지기라 캐쓰모 오만 사람 다 휘말릿겠네예. 우짜노.."

/난 막연히 꽁냥거리는거만 상상했는데 소재를 많이 준비했구나 평일은 다들 바쁘지 그런데도 칼답 고마워

966 이름 없음 (xSfBGF7XYA)

2022-12-08 (거의 끝나감) 23:52:42

>>965 제 이야기에 골똘히 생각에 잠기느라 잘 못먹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에 걱정이 되면서도 식사중엔 잔소리를 하고 싶지 않아 고민을 하려니, 코니가 수저를 움직였다. 안심하며 식사를 재개하려던 오스카는, 꾸덕해진 스프에 고기를 찍어먹더니, 빵그릇에 고기를 채워 넣어 샌드위치처럼 만들어서는 복스럽게 먹기 시작하자 무언가를 깨달은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우와! 그렇게 먹으면 더 맛있겠어요. 코니 천잰데요?"

코니의 기발한 발상에 대한 칭찬도 빼놓지 않고서, 오스카는 코니가 한 것처럼 빵그릇 안에 남은 제 몫의 고기를 채워넣고는 납작하게 눌러 배어물었다. 확실히 빵과 수프, 고기가 어우러져 입안에서 파티가 벌어지는 듯 했다. 맛있다. 역시 우리 여보는 천재라니까. 그도 잠시, 코니가 조심스레 털어놓은 그 황족들이 맞이한 최후에 겸연쩍은 듯 사과를 건네자, 오스카는 음식물로 볼이 빵빵해진 채로 고개를 도리도리 젓고는, 입에 든 것을 꼭꼭 씹어 삼키고 조근조근 말했다.

"코니가 미안해할 일 아니에요. 코니가 괜찮으면 나도 괜찮으니까요. 나는 이런 일 교역하다가 종종 접하니까요. 군주의 가문이란 게 살벌할 땐 제대로 살벌하기 마련이잖아요."

놀랐는데도 말하는 내가 편치 않았을까봐 걱정해줬구나. 난 코니만 안 힘들다면 뭐든 괜찮은데. 습관처럼 그를 안고 다독이고 싶어졌지만, 식사중이니 자제하기로 마음먹으며 수프볼 샌드위치를 마저 물어뜯었다. 이어 코니가 풀죽은 목소리로 말했다. 초록 눈이라 애먼 사람들까지 휘말렸겠다고. 내가 자세히 설명하지 않아서 그런 생각이 들었구나. 짠한 마음에 오스카는 코니를 달래듯 입을 열었다.

"그게, 사실 그렇지만도 않아요. 바텐더 말로는 그 제국에선 신기하게도 황제 일가에서만 초록색 머리카락과 눈이 나왔다고 했거든요. 그래서 제국 유일의 에메랄드빛 머리칼과 눈동자는 황제 일가에 대한 신의 사랑과 가호를 상징한다는 식으로 상찬했다는데... 그 제국 유일의 머리색과 눈동자색 때문에 추적이 용이했고, 그래서 한 사람도 빠짐없이 숙청당했다고 봐야죠. 얄궂게도 말이에요."

//칼답이라고 하기엔 조금씩 늦어서 미안했는데😂 코니주한테도 흥미가 생길만한 소재였다면 다행이야! 이제 불금이네, 즐거운 금요일 보내길 바래!

967 이름 없음 (iY9yz/lpck)

2022-12-09 (불탄다..!) 19:50:39

>>966 빵그릇을 샌드위치빵 삼아서 우걱우걱 먹는데 오스카가 맛있겠다며 눈을 반짝이더니 듣기 민망할만큼 칭찬했다. 이렇게 고평가를 받을만한 일인가 이게? 얼른 먹으려거뿐인데. 쑥스러운 나머지 입에 넣은 빵그릇을 베어물지도 못하고 눈만 꿈벅였다. 빵그릇에 스민 스프고 빵그릇속 스프고 어느 정도 식어서 뜨거운건 하나도 없는데도 어쩐지 홧홧한 기분이었다. 그래도 그가 고기를 꽉 채운 빵그릇을 한입 야무지게 물고는 한껏 만족스러운 얼굴로 오물거리는 모습에 금세 마음이 훈훈해졌다. 대단한 일이든 아니든 이분이 흡족해하시니 아무래도 좋았다.

그 즐겁고 기분좋은 식사 자리에서 사람 숱하게 죽어나갔다는 울적한 화제나 끄집어내시게 하고말았으니 실수도 여간 큰실수가 아니다. 사과도 뒤늦은것만 같고 수습할 방도가 떠오르지않아 우물쭈물하고 있는데 그가 음식을 한가득 머금은, 꼭 다람쥐나 햄스터같은 모습으로 고개를 붕붕 세차게도 젓고는 코니가 괜찮으면 본인도 괜찮다신다. 실수는 내가 했는데 결코 기분좋은 화제가 아니었을텐데 어쩌면 이렇게나 내생각만 해주실까. 눈시울이 뜨끈해지고 목이 메는것 같았지만 이상황에 울먹이기까지 하면 정말로 난처하실거다. 다행히 식사에 열중하신거 같으니까 한탄은 그만둬야지. 물을 마셔서 숨을 돌린뒤 고기로 찬 빵그릇을 마저 먹기 시작하는데 오스카가 초록머리 초록눈동자는 전황제님 일가만의 외모적 특징이었다고 알려주었다. 그래서 황실이 온전할때는 신의 가호라고 선전할수 있었다는데 지금은..

"나라가 깽판만 안나쓰도 축복일끼 저주가 돼삤네예.."

그래도 그덕분에 애꿎은 사람이 살해당하는 사태는 안일어났으니 전황제님 일가를 제외한 나머지 사람들에게는 축복일까? 모르겠다. 어딘지도 모르는 나라라 해도 사람이 죽어나가는 난리는 역시 듣기좋은 이야기가 아니다. 코니는 남은 빵그릇(이제 빵그릇이라기보단 빵조각에 가까운)을 모조리 욱여넣어 삼키고는 화제를 바꾸고자 시도했다.

"차도 드시고싶다 카싰지예? 괘야느시모 산에서 딴 머루하고 장에서 산 누가하고도 후식으로 자실람미꺼?"

/스프볼샌드위치는 그냥 빨리 먹으려다 보면 그러지않을까 싶어서 넣어본건데 (해본적은 없어; 하다간 빵그릇에서 스프가 새서 손에 다 묻을듯..) 그런 사소한걸로도 무한칭찬을 해주는 사랑꾼이구나 오스카는 코니만 괜찮다면 자기도 괜찮다고 해주는것도 그렇구 내가 다 과분하게 느껴질정도다 그나저나 외모 특징때문에 몰살당하다니 황제 일가는 외모가 너무 알려지는게 좋은거만은 아닌셈이네ㄷㄷ

968 이름 없음 (GSuUFe07p6)

2022-12-10 (파란날) 19:58:21

>>967 냅다 칭찬하면 코니가 수줍어할 것은 짐작할 수 있었지만, 자제할 수가 없었다. 잘 익은 사과처럼 보기 좋게 새빨갛게 익어서 버벅거리거나 아무 말도 못하고 눈만 꿈벅이는 모습이 무척이나 귀엽고 사랑스럽기 때문이었다. 그도 잠시, 미안하다며 풀죽은 모습이 가여워서 코니 잘못이 아니라고 위로하려니 그는 금방이라도 울 듯한 얼굴로 눈시울을 붉혔다. 눈물을 흘리면 금방이라도 안으러 갈 생각도 했으나, 물을 마시며 감정을 추스르는 모습에, 오스카는 가까스로 자제심을 발휘하여 못 본 척 식사에 집중하기로 했다. 그러면서 애먼 사람이 죽지 않을 수 있었던 내막을 설명하니, 코니가 안타까워하며 한탄처럼 꺼낸 말에 오스카는 동의의 의미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게 말이에요. 그렇게 됐으니 바뀐 정권이라도 잘 정착해서 안정을 찾길 바랄수밖에 없지만서도요."

윗사람들끼리의 피바람은 민생에 영향을 줄 수밖에 없으니까. 오스카 역시 한 입 크기로 작아진 빵조각을 입안에 넣고 우물거리다 삼키고서 냅킨으로 입가를 닦으려니 코니가 제안해왔다. 차와 같이 후식으로 산에서 딴 머루와 장에서 사온 누가도 먹겠느냐고. 오스카는 언제 착잡해했냐는 듯 반색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먹을래요! 엄청 맛있겠다. 코니가 최고예요!"

해실거리며 버릇처럼 주접을 부리려니, 또 부끄러워하려나 하는 생각이 뒤늦게 들었지만, 이번에도 정정하지는 않았다. 산에서 약초를 캘 때도 고되고 바빴을 테고, 일을 마치고는 노곤했을텐데도 그 와중에 머루를 따고 누가를 사서 자신에게 나눠준다 하니, 감동하지 않을 수 없었다. 물을 한 모금 넘기는 것으로 식사를 마무리하려니, 자신도 동방에서 코니와 먹으려고 챙겨온 것이 있다는 것이 한발 늦게 떠올라, 오스카는 들뜬 낯으로 신이 나서 말했다.

"실은, 나도 동방대륙에 있는 나라에서 처음 보는 간식을 챙겨왔는데, 그것도 같이 먹어봐요! 익힌 쌀을 으깨서 만든 떡이라는 간식인데, 화덕에 구워먹으면 더 맛있을 거예요."

음식이 그득 담겨있었던 그릇들이 텅텅 비어있는 걸 확인하고, 오스카는 자리에서 일어나 코니에게 다가가서는 손을 내밀었다.

"그럼 차랑 간식은 방에 가서 먹을까요?"

/왠지 상상하니까 맛있어보이더라구ㅋㅋㅋ 살살 잡고 먹으면 의외로 괜찮지 않을까? 아무튼 사랑꾼스러웠다니 다행이다😆 코니가 귀엽고 사려깊고 똑똑하니까 사랑꾼 캐입하기도 쉽더라구. 그리고 아무래도 전복되기 직전의 황가의 황족들이라면 외모라도 덜 특정적인게 생존에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더라😂 물론 자기네 가문이 망할 줄 아는 당사자는 드물겠지만 말이야. 꽤 이어지기도 했고 막레같이 쓰여졌네. 요걸 막레로 삼아줘도, 마무리를 지어줘도 좋을 것 같아!

969 이름 없음 (p04uc8oWSE)

2022-12-11 (내일 월요일) 01:45:58

>>968 새황조가 잘 자리잡길 바란다, 그말대로다. 전쟁은 외침이든 내란이든 피바람을 불러오고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일수록 그피바람에 휘말리기 일쑤니까. 또 새황조의 나라가 안정되면 이분이 고생하며 항해하시고도 이번처럼 소득없이 돌아오는 경우도 줄어들테니까. 이런 희망사항 품어봤자 실질적으로 보탬되는건 하나도 없지만 그래도 무던하게 수습됐으면 좋겠다. 그정도로 그나라에 대한 생각을 정리하고 냅킨으로 손과 입을 닦는데 그가 후식 얘기에 해맑게 함박웃음을 띄었다. 그라면 짐마차에 한가득 실어먹을수도 있는 흔한 먹거리인데도 극찬해주니 쑥스러워 고개를 못들겠는데도 그웃음이 고와서 그마음이 고마워서 가슴이 찡했다.

그런데 감동적인건 그게 끝이 아니었다. 그가 얼핏 들어서는 어떤 음식인지 감이 안오는 동방의 새로운 먹거리를 이번에 가져왔다는것이다. 이국의 진귀한 음식이니 국왕님이나 영주님께 진상해서 잘보일수도 있을텐데 나눠먹자니. 이렇게 퍼주고만 싶어하시는 마음이 아깝지않게 잘하고싶다. 당장은 어떻게 해야할지 모르겠고 앞으로 평생 궁리한대도 달리 뾰족한 수는 안나올거 같지만 일단은 고마움을 제대로 표현하는게 먼저일것 같다. 그렇게 다짐하며 코니는 다과를 방에서 먹자는 오스카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자신에게 내밀어진 손을 약초의 뿌리가 상하지않도록 캘때처럼 조심스럽게 마주잡았다.

/968을 막레삼기는 조금 아쉬워서 마무리 부분을 덧붙여봤어 꽁냥거릴거 아니면 싫다고 무리한 요구를 달았는데도 어울려줘서 고마웠어 즐거운 주말 보내

970 이름 없음 (BXa3BC5isM)

2022-12-11 (내일 월요일) 06:18:41

>>969 /나야말로 코니가 너무 착하고 똑똑하고 사려깊고 귀엽고 다해서 즐거웠어! 오스카 캐입이 괜찮았다니 뿌듯하기도 했고😆 막레 고마워! 코니주도 즐거운 주말 보내!

971 이름 없음 (toruvyw1YM)

2022-12-11 (내일 월요일) 19:11:55

"미안해. 속이려고 한 것은 아니었는데 말을 할 타이밍을 잡을 수 없었어. 그래서 다음에 말해야지. 다음에 말해야지. 그렇게 생각하면서 미뤘는데 결국 이제야 말하게 되었네."

찬란하게 은색으로 반짝이는 짧은 머리카락을 지니며 푸른 눈동자를 지니고 있는 사내는 눈앞에 있는 자신의 동료들을 바라보며 면목없다는 듯이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세계를 구하기 위해 길고 긴 여행을 떠나 겨우 세계를 구한 영웅들은 지금 알테리아 제국의 수도에 있었다. 정확히는 제국의 황족이 살고 있는 성이 보이는 길거리 한복판이었다. 사내는 검을 다루는 검사였다. 물론 일행을 이끌던 리더는 아니었고 그저 일행이 여행을 하는 도중 마족과 싸우는 사내를 발견해서 도와줬고 그 인연으로 함께 다니는 존재였다. 리더와 동료들을 바라보며 잠시 말을 끊은 사내는 지금까지 동료들에게 차마 말할 수 없어서 숨기고 숨기고 숨기던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나는 이 알테리아 제국의 제 2 황자인 테일러.S.알테리아야. 이 제국을 지키기 위해서 형님과 누님보다는 상대적으로 자유로웠던 나는 병사들과 마족과 싸웠었어. 너희들과 만난 그 날에도 병사들을 데리고 마족과 싸우는 와중에 함정에 걸렸거든. 나 혼자 떨어져서 하마터면 죽을 뻔 했는데 너희들을 만났었어. 원래는 그 날 내 정체를 밝혔어야 했는데 내 정체를 말하기엔 그 당시 분위기가 상당히 긴박하기도 했고 괜히 내 신분을 신경쓰다가 급한 일을 해결하지 못하는게 아닐까 싶었거든. 그래서 테일러라고만 자칭했었고."

자신의 사정을 이야기하며 그는 정말로 미안하다는 듯이 고개를 아래로 숙였다. 그렇게 잠시 조용히 있었던 사내는 다시 고개를 올렸고 동료들을 바라보면서 다시 입을 열었다.

"일단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형님과 누님이 너희들을 만나고 싶어해서. 잠깐만 같이 가서 만나줄 수 없을까? 아. 물론 지금 당장은 아니야. 3일 정도 후가 될 것 같아. 자세한 것은 내가 전 날에 이야기를 할게. 아무튼 지금은 여기서 편하게 자유롭게 보내줘. 아버지와 어머니가 너희들의 편의를 최대한 봐주라고 이야기를 했다고 하니까 지내는데 불편함은 없을 거야."

세계를 구한 영웅들의 행차였다. 그 정도 편의는 당연히 봐줘야 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이 제국을 다스리고 있는 황제의 생각은 그러한 모양이었다. 아무튼 제국에서 편하게 있어도 좋다고 했고 지금 당장 황제를 만날 수 있는 것은 아니었기에 자연히 일행은 자신들이 하고 싶은 것을 하기 위해서, 혹은 휴식을 취하기 위해서 하나둘 흩어졌다.

남은 것은 사내와 함께 여행을 떠난 동료 중 하나. 그리고 사내는 그 동료를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너는 뭘 할 거야? 혹시 원하는 것이 있으면 얘기해줘. 내가 도울 수 있는 것은 도울테니까."

/판타지 배경이고 영웅이 세계를 파멸하려고 하는 마왕을 물리쳤습니다! 라는 엔딩 이후에 정체를 숨기고 있던 동료 중 하나가 자신의 정체를 밝힌 대충 그런 내용이야.
동료가 누구인지는 크게 상관은 없는데 막 시리어스한 전개로 흘러간다거나 그런 것은 조금 힘들 것 같아. 그리고 사실 동료가 아니었는데 황자가 멋대로 동료라고 부르고 있다던가 뭐 그런 맥커터적인 것도 힘들 것 같아. 아무튼 그 외에는 자유롭게 설정하고 이어줘!

972 이름 없음 (xd/ZbrxvK2)

2022-12-11 (내일 월요일) 19:53:13

>>971 자신이 사실은 제국의 황자요 하고 밝힌 이제까지 함께해온 은발의 전우를, 그의 머리칼과는 상반되게 새까만 머리칼과 밤색 피부를 지닌 중년 여성이 바라보았다. 여성의 이름은 키치. 동료 중에서 완력으로 둘째가라면 서러울 정도에 신장과 체격은 누가봐도 첫째인 그는 외출하거나 짐을 싸는 대신 현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사고의 노력을 기울였다. 죽어라 싸우고 진짜로 죽는줄 알았다가 겨우 살았더니 황자라고? 그럼 여태 허물없이 대했던 건 뭐가 되지? 황자님을 막 대했다고 죄라도 뒤집어쓰는 건 아닌가? 아무래도 의심스러웠기에 키치는 미간에 패인 주름도 떨떠름한 표정도 풀지 않고 대꾸했다.

“지금 말씀은 황자 전하로써 하시는 겁니까? 아니면 우리 친구 테일러가 하는 소리야?”

973 이름 없음 (toruvyw1YM)

2022-12-11 (내일 월요일) 20:03:54

>>972

"적어도 난 친구이자 동료로서 이야기하고 있어."

역시 이런 말이 나올 수밖에 없겠구나. 그렇게 생각하며 테일러는 씁쓸한 표정을 지었으나 그와 동시에 지금 이 상황을 납득했다. 이전까지는 생사를 함께 한 동료였으나 이제는 마냥 그렇게 보일 수는 없을테니까. 납득해야지. 그렇게 생각하며 그는 애써 표정을 관리한 후, 그녀를 바라보며 다시 한 번 고개를 아래로 숙였다.

"내 입장에선 이전처럼 대해달라고 말하고 싶지만 그게 쉽지 않다는 것은 알고 있어. 아마 나라도 비슷한 느낌일 것 같거든. 그래도 여기에 있는 동안에는 내가 할 수 있는 한 최대한 편의를 봐주고 싶어. 그게 널 포함해서 다른 이들에게 내가 해줄 수 있는 일일테니까."

일단 최대한 자신의 진심을 담아 이야기를 하며 적어도 지금은 황자로서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이전의 동료로서 이야기하는 것을 그는 최대한 알리고자 했다. 물론 그게 전달되었을지는 모르겠지만.

"그러니까 편하게 있어줬으면 좋겠는데 힘들 것 같아?"

974 이름 없음 (rPBCR8gma6)

2022-12-18 (내일 월요일) 11:29:42

그곳은 공기 맑고 바람이 시원한 시골 동네였다.

조금씩 발전이 이뤄지고 있었으나 도시에 비하면 턱없이 부족했고 그럼에도 작게나마 있을 것은 있었던 그 시골 동네에 눈이 사르륵 내리자 온 땅이 새하얗게 물들었다. 뽀드득, 뽀드득. 눈 밟는 소리가 고요하고 맑게 울리는 그 조용한 길가에 붉은색 목도리를 하고 있는 소년이 서 있었다. 어둠에 묻힐 정도의 진한 회색 점퍼를 입은 올해 열 일곱살이며 이내 열 여덟살로 올라갈 예정인 소년은 하얀 입김을 내뱉었다. 도시와는 다르게 듬성듬성 있는 가로등 불빛 아래의 벤치로 걸어간 소년은 벤치 위에 깔려있는 눈을 손으로 털어냈다. 검은 장갑을 끼고 있어 손이 시리지 않았기에 별 문제없이 눈을 털어낸 소년은 그 위에 조심스럽게 앉았다.

소년은 이 시골 마을의 토박이였다. 어린 시절부터 저 하늘 위의 별들은 소년에게 있어 너무나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풍경이었지만 그럼에도 소년은 그 풍경을 좋아했다. 봄, 여름, 가을, 겨울. 매일매일은 아니나 한번씩 바로 이 자리에 나와서 의자에 앉아 별을 조용히 구경하는 것이 소년에게 있어선 취미 중 하나였다. 마을에서도 이 소년이 이곳에 나와서 별 구경하는 것을 좋아하는 것이 소문이 짝 퍼질 정도였으니 오죽할까.

뽀드득. 뽀드득.

고요한 바람소리를 가르는 또 다른 발소리가 들려왔다. 도시라면 단번에 밝은 불빛으로 누가 다가왔는지 알 수 있었겠지만 이곳은 시골 마을. 즉, 가로등 불빛이 그렇게 붙어있는 지역이 아니었다. 사람 실루엣이 그의 눈에 비쳤다. 자신의 또래일까. 어른일까. 남자? 여자? 적어도 소년의 위치에선 알 길이 없었다. 허나 소년은 이내 다시 고개를 들어 별을 바라봤다. 별자리를 손으로 괜히 그려보기도 하며 고개를 돌려 다른 반짝이는 별들을 구경하기도 하며. 그럼에도 이곳으로 오는 이가 누구인지 한번씩 고개를 내려 그 실루엣을 확인하는 것 또한 잊지 않았다. 워낙 사람 좋은 동네니 딱히 경계하는 것은 아니었으나 누구인지는 궁금한 모양이었다.

#그냥 평범한 시골 마을에서 소년이 밤에 나와서 별 구경하고 있는데 발소리가 들린 그런 상황!
#오는 사람은 누구라도 상관없지만 시리어스하거나 혐관적인 그런 것은 곤란해!
#뜬금없이 꼽주는 맥커터 전개도 잇기 곤란해! 결론적으로 그냥 티키타카식으로 이어갈 수 있으면 어지간하면 오케이!

975 이름 없음 (SugSnbIGck)

2022-12-18 (내일 월요일) 17:36:25

>>974
그 발소리는 아주 멀리에서부터 천천히, 천천히 다가왔다.

멀리서부터 시작된 발소리를 소년이 깨달았을 때는 소리의 근원이 제법 가까워진 후였다. 밤의 어둠을 틈타 조용히 나온 듯한 발소리는 소년의 것보다는 가벼웠다. 가볍고도 느린, 마치 지면에 정성스레 발자국을 남기듯 걷는 걸음소리는 조금씩 소년과의 거리를 좁히고. 시야에 닿는 지척에 다다라서야 그 모습을 볼 수 있었을 것이다.

어둠 속에서 살며시 모습을 드러낸 이는 소년의 또래로 보이는 소녀였다.

"..."

소녀는 자신의 모습이 소년의 시야에 들자 가만히 걸음을 멈추었다. 적당히 성장한 키에 검은 머리칼과 검은 눈을 가진 그 소녀는 마을 토박이인 소년이 못 보던 이였다. 하얀 다리를 반쯤 내놓은 원피스에 얇은 코트만 걸친, 겨울밤의 외출복이라기엔 확연히 부족해 보이는 차림 또한 보기 드물었을 것이다. 혹은 이상해 보이거나.

소녀는 멈춰서 소년을 보았다. 말없이 응시하다가 살짝 다물려 있던 입술을 달싹였다.

"안녕."

너무나 단조로운 인사를 건네고 소녀는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자리를 뜨지도 않은 채, 소년을 물끄러미 보고만 있었다.

//이런 느낌은 괜찮을까? 별로면 스루해줘~

976 이름 없음 (rPBCR8gma6)

2022-12-18 (내일 월요일) 17:53:01

>>975

가로등 불빛이 소녀를 비추자 소년은 시선을 그 방향으로 고정했다. 검은 머리카락과 검은 눈의 소녀는 소년이 보기에도 자신의 또래와 비슷한 느낌이었다. 자신보다 나이가 좀 더 많을 수도 있고 어쩌면 조금 낮을 수도 있었다. 허나 확실한 것은 자신이 살던 마을에선 본 적이 없는 얼굴이었다. 학기가 끝나서 도시에서 시골집으로 내려온 이는 아닐까하고 소년은 생각했다. 다른 시골 마을과 마찬가지로 이곳에서도 젊은 사람보단 노인들이 많았고 명절시기가 되면 온갖 사람들이 몰려들어서 시끌벅적했으니 저 소녀도 비슷한 느낌일지도 모르겠다고 소년은 생각했다. 낯설은 느낌은 아주 잠시. 다리를 반이나 내놓은 저 옷차림이 상당히 춥지 않을까 싶어 소년은 조용히 두 눈을 깜빡였다. 저런 복장으로는 꽤 추울텐데. 그런 복합적인 생각을 이어하는 도중 소녀에게서 인사가 들려왔다.

"아. 네. 안녕하세요."

얼떨결에 나온 목소리는 높임말이었다. 물론 자신의 또래 같긴 했으나 그 나이를 짐작할 수 없는 탓이었다. 물론 상대가 먼저 반말을 썼으니 자신도 반말을 써도 상관없을지도 모르나 나온 말이 높임말인 것을 어쩌겠는가. 일단 소년은 괜히 제 뺨을 오른손으로 긁적이다 소녀를 바라보면서 물었다.

"안 추워요? 그렇게 입으면. 굉장히 추울 것 같은데."

조심스러움이 섞여있는 걱정스러운 어투를 내뱉으며 소년은 자신의 옆 쪽, 정확히는 자신이 앉아있는 자리보다 조금 더 옆의 자리의 눈을 살살 장갑 낀 손으로 털어냈다. 이어 소녀를 바라보며 소년은 다시 입을 열었다.

"여기 앉게요? 눈 치운 자리에 앉으시면 될 것 같은데."

#당연히 이런 전개는 얼마든지 괜찮아!!

977 이름 없음 (SugSnbIGck)

2022-12-18 (내일 월요일) 20:07:00

>>976
소년이 인사에 답을 해줄 때까지, 소녀는 가만히 있었기에, 얼핏 보기에 그렇게 세워놓은 마네킹 내지는 조각상 같았다. 호흡을 따라 흘러나오는 입김과 간간히 보이는 눈 깜빡임마저 없었다면 정말 그래보였겠지만. 인사를 받아준 소년을 향해 고개를 살짝 기울였으니 허상이 아니라 사람이구나, 하고 알 수 있었을 것이다.

"응."

짤막하게 소리를 낸 소녀는 기울인 고개를 들고 시선을 앞으로 향했다. 다시 그 방향으로 걸어갈 듯. 그러나 재차 움직인 것은 걸음이 아니라 눈동자였다. 소년이 춥지 않냐고 물어서다. 소녀의 눈은 천천히 아래로 내려가 소녀의 옷차림을 보았고, 새삼스럽게 아, 하고 입을 열었다.

"추워. 그런데 옷이 없어서."

소녀는 그렇게만 말하고 손으로 코트를 매만졌다. 검푸른 모직 코트 위를 손이 스칠 때마다 사라락 소리가 난다. 춥다는 말처럼, 코트를 만지는 손이 붉게 얼어있었지만 소녀는 그다지 개의치 않아보였다. 그 손을 코트 주머니에조차 넣지 않고 다시 늘어뜨려놓고, 소년이 벤치의 눈을 털어주자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고마워."

그리고 짤막한 인사와 함께 눈이 털어진 벤치에 앉았다. 사뿐히 앉는 소녀에게서 이름 모를 과일의 향이 피어올랐다가 흩어졌다.

벤치에 앉은 소녀는 다소곳히 손을 모으고서 정면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천천히 고개를 돌려 그 주변을 둘러보았다. 고개를 돌렸으니 당연히 바로 옆에 앉은 소년에게도 시선이 향했다. 발갛게 물든 뺨과 귀가 스치는 머리칼 사이로 잘 보였을 것이다. 소녀는 크게 주위를 둘러보고, 잠시 동안 정면을 향해 있다가, 소년을 보며 물었다.

"주변에 아무것도 없는데, 혼자 뭐 하고 있었던 거야?"

그 물음에 악의나 의도는 없었다. 그저 순수한 호기심만이 소녀의 시선과 함께 느껴졌을 것이다.

//땡큐땡큐~

978 이름 없음 (rPBCR8gma6)

2022-12-18 (내일 월요일) 20:55:11

>>977

옷이 없다는 말에 아직 겨울옷을 사지 않았나하는 의문이 소년의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자연히 소년의 손이 자신이 입고 있는 회색 점퍼로 향했다. 아주 잠깐. 조금이나마 추위를 달랠 수 있게 이 점퍼를 빌려주는 것이 좋을까 생각을 하나 소년이 점퍼를 벗는 일은 없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자신도 추웠고 자신도 이것이 없으면 버티기 힘들었을 것 같았기에. 무엇보다 생판 초면인 이가 점퍼를 빌려준다고 해도 받는 쪽의 입장은 난감하지 않겠는가.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소년은 그렇게 스스로 결론을 내렸다.

벤치에 앉는 모습을 확인하며 소년은 아주 살짝 옆으로 자리를 옮기면서 조금 더 자리를 확보했다. 가장자리에 살짝 닿을 것 같은 기 아슬아슬한 부분에 정착하며 소년은 다시 고개를 들어 별을 바라봤다. 오늘도 하늘 위 별들은 찬란하게 반짝였고 선을 긋기 딱 좋도록 옹기종기 모여있었다. 꼭 정해진 별자리로만 선을 그으란 법은 없었기에 소년은 그저 눈대중으로 선을 그리며 들려오는 물음에 조용히 대답했다.

"별을 보고 있었어요. 여긴 다른 계절에도 별이 잘 보이긴 하지만 겨울이 되면 특히나 더 잘 보이거든요. 어릴 적부터 매일 보던 풍경인데 전혀 질리질 않네요."

괜히 어깨를 으쓱하며 소년은 미소를 조용히 지었다. 그러다 고개를 내려 소녀가 앉아있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니 자신을 바라보는 소녀의 시선이 보였다. 아무런 말 없이 하얀 입김을 조용히 내뱉으며 소녀를 바라보던 소년은 두 손을 주머니 속에 집어넣으며 이야기했다.

"도시에서 시골집으로 내려왔어요? 여기 살면서 본 적 없는 얼굴인데. 그러면 보통은 도시에서 시골로 내려온 분들이더라고요. 할머니, 할아버지 보러."

979 이름 없음 (SugSnbIGck)

2022-12-18 (내일 월요일) 22:38:03

>>978
옷을 빌려주지 않아도 소녀에게서 추워하는 기색은 전혀 없었다. 추워보이지만 떨지도 않고 그저 다소곳이 앉아있기만 했다. 앉아서 주변을 둘러보았지만 위는 보지 않았다. 소년이 하늘을 볼 때에도 가만히 앞을 향하고 있었다. 위를 보는 법을 잊은 것처럼.

"아. 별."

무얼 하고 있냐고 물어서, 별을 보고 있었다는 대답을 듣고서야 소녀는 위도 있었지, 하는 반응으로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았다. 드넓게 펼쳐진 밤하늘에 뿌려놓은 듯 반짝이는 별들이 소녀의 검은 눈에 한가득 담겼다. 시린 겨울 하늘을 채우는 자잘한 별빛들을 물끄러미 보고만 있던 소녀는 소년이 질문을 하고서야 고개를 내렸다. 그리고 고민하듯 고개를 옆으로 살짝 기울였다가, 다시 되돌리고서 대답했다.

"내려온 건 맞는데. 누굴 보러 온 건 아니야."

소녀는 뭔가를 더 말하려는 듯이 입술을 움직였지만 다른 말은 나오지 않았다. 입술만 잠시 달싹거리다가 조용히 다물었다. 그리고 다시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고, 하- 숨을 내뱉으며 고개를 내렸다. 그대로 눈동자만 소년을 향하고서 말했다.

"얘. 이 마을엔 뭐가 있어?"

뻔하다면 뻔한, 화제를 돌리고 싶은 어투의 질문이었다. 소녀의 시선도 그저 검고 담담했다. 유리구슬처럼.

980 이름 없음 (sBAqYFWPRU)

2022-12-18 (내일 월요일) 22:48:20

멈칫거린다. 마주친 두 눈은 둥글고 반짝거려서 떨리는 기색이 너무나도 도드라졌다. 몸을 움츠려 겁먹은게 빤히 보였다.

"저…"

해가 뜨든 달이 뜨든 시커멓기만 한 탓에 으스스한 소문이 나도는 숲. 숲 한가운데 마녀가 산다던가, 괴물이 산다던가. 동물 소리도 낯설고 빛을 잡아삼키는 듯한 빽빽하고 울창한 숲에 길을 잃어 죽은 자도 많다는 이야기는 마을에 다섯 난 꼬마도 알았다. 그러니 이런 밤 중에 그 숲 속에서 등불을 들고 있는 아이는 이질적이었다. 그러고보니 잘 모르겠다. 아이인가, 아가씨같기도 하고 노파같기도 하다.

"길을 잃으셨어요?"

다가오지는 않은 채 조심스레 묻는 표정이 감정을 숨기는데 서툴러보인다.

981 이름 없음 (rPBCR8gma6)

2022-12-18 (내일 월요일) 22:53:07

>>979

누굴 보러 온 것이 아니라면 이 시골까진 뭐하러 온 것일까. 소년은 바로 그 답을 알 수 없었다. 애초에 지금 어디서 지내고 있는 것인지. 말로만 듣고 소문으로만 듣던 가출 비슷한 것일까? 아니면 시골집에 오긴 했지만 다른 의도로 이곳에 왔다는 것일까? 더 말을 하진 않으면서 주제를 노골적으로 바꾸려고 하는 소녀의 말에 소년은 그 이상의 관심을 가지는 것을 그만뒀다. 말하기 싫다는 그런 의미일거라 짐작하며.

"특별히 뭐가 있거나 한 것은 아닌데요. 여긴."

그래봐야 도시의 발전도와 비교하면 확연하게 떨어지는 시골 마을이었다. 물론 편의점이나 PC방이나 오락실이나 그런 것들은 있었으나 유명한 가게가 있는 것은 아니었으며 그렇다고 도시에서 쉽게 볼 수 있는 대형마트가 있다거나 그런 것도 아니었다. 물론 중형마트 정도는 있긴 했지만 도시에서 온 이가 봤을 때는 전혀 눈에 차지 않으리라. 그렇기에 소년은 그런 것이 아니라 다른 쪽으로 생각했다. 이곳에서 볼 수 있을 법한 유명한 장소라고 한다면...

"자연 명소라고 한다면 나름 이름이 있는 폭포가 하나 있어서 가끔 외부인들이 구경하러 오기도 하고, 그 근처에 등산로가 있어서 등산을 할 수 있는 곳도 있고... 커다란 호수도 하나 있어요. 지금은 꽁꽁 얼어있겠지만요. 가끔 거기서 얼음 낚시를 하는 이들도 있긴 한데."

발에 밟히는 눈 위에 발자국을 무의식중에 내다 뽀드득, 뽀드득. 소리가 들리자 소년은 살짝 움찔하며 발을 위로 올렸다. 자연히 소년의 등이 등받이에 밀착했다.

"봄이 되면 온갖 예쁜 꽃이 피는 꽃밭도 하나 있고... 거북 바위라고 해서 거북이를 쏙 빼닮은 바위도 하나 있어요. 오랜 옛날, 이 마을을 지켜줬다고 하는 거북이 신이 깃들어있는 바위라고는 하는데. 어디까지나 전설일 뿐이고 저에게 있어선 거북이를 닮은 바위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고 마지막으로..."

이어 소년은 고개를 올리면서 오른손을 위로 뻗어 하늘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면서 이야기했다.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저 별하늘도 있고요. 이 정도일 것 같네요."

982 이름 없음 (SugSnbIGck)

2022-12-18 (내일 월요일) 23:40:41

>>981
특별한게 있다거나 한 곳이 아니라고 해도, 소녀는 질문을 무르지 않고 기다렸다. 기대 담기지 않은 눈이 천천히 깜빡이고 있을 뿐이다. 조용히 기다리다 소년이 하나둘 말로 설명하기 시작하자 소녀는 시선을 거둬 살짝 아래를 향했다. 소녀가 걸어온 발자국을 보며 소년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중간에 뽀득 소리가 나자 고개가 움찔했지만, 잠깐이었다.

폭포, 등산로, 호수... 꽃밭, 바위, 마지막으로 어디서나 볼 수 있는 별하늘.

시골 마을 답게 수수하고 그렇게 특별할 것도 없어보이는 요소들이다. 폭포는 외부인들이 구경하러 온다니까 그나마 볼만 한 곳인 것 같다. 호수는 얼음 낚시를 한다니까 얼지 않았을 때도 낚시를 하는 사람도 있다는 의미일 것이다. 전설이 있는 바위도, 꽃밭도...

갖은 생각이 소녀의 머릿속을 스쳐지나간다. 그 중 어느 것도 말이 되어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말없이 저 앞 바닥을 응시하는 모습은 소년의 말을 듣고는 있나 싶다. 하지만 소녀는 그 뒤에도 얼마간을 말없이 있다가, 그 사이 얼지 않았을까 싶은 입술을 움직여 말했다.

"많은 것이 있는 곳이구나. 하늘도 보이고. 별도 많고."

소녀는 중얼거리는 말과 달리 이번엔 고개를 들지 않았다. 오히려 더 아래로 기울여, 검은 머리카락이 흘러내려 옆얼굴을 가릴 만큼 고개를 숙였다. 가려진 사이로 하얀 입김이 길게 흘러나왔다. 긴 숨소리와 함께.

잠시 후 고개를 들며 소녀의 손이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걷어 어깨 뒤로 넘겼다. 그러면서 얼굴을 가볍게 손으로 쓸어내는데, 그 때문인지 숙이기 전보다 더 붉었다. 뺨에서 눈가까지. 느릿느릿 머리카락을 다 넘기자 다시 손을 무릎에 올린 소녀가 말했다.

"너는, 여기에서 사는게 즐겁니? 만족하고 있어?"

역시나 담담한 말투와 목소리. 하지만 미미하게 가라앉아있었다.

983 이름 없음 (rPBCR8gma6)

2022-12-18 (내일 월요일) 23:55:38

>>982

시간이 지날수록 하얀 입김이 조금 더 선명하게 바뀌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시골의 밤은 깊어지고 그에 따라 추위도 강해지기 마련이었다. 자연히 소녀가 괜찮을지에 대해 소년은 걱정했다. 더 추워질텐데 지금이라도 집에 들어가라고 하는 것이 좋지 않을까 싶었으나 바로 말을 꺼내진 못하며 그 대신 소녀를 바라보며 붉어진 뺨에 주목했다. 역시 지금 시기는 춥지. 춥겠지. 그렇게 생각하던 와중 소년은 막 들려오는 물음에 침묵을 지키다가 고개를 돌려 앞을 바라봤다.

"저는 여기서 쭉 자랐고 살고 있어서 그런지 그다지 생각해본 적이 없어요. 즐겁냐라던가, 만족하냐라던가. 하지만 적어도 여기에 사는 것에 대한 불만은 없어요. 저런 별하늘도 도시나 다른 곳에 가면 보기 힘들다고 그러고."

어릴 때부터 쭉 본 풍경이긴 하나 역시 소년은 저 풍경이 좋았다. 다른 친척집에 가거나 했을 때는 보고 싶어도 볼 수 없었던 저 별하늘은 이곳에서는 마음껏 볼 수 있는, 어떻게 보면 소년에게 있어선 보물과도 같은 풍경이었다. 다른 풍경 역시 마찬가지. 물론 도시에서 온 이들에게 있어서 그런 것이 뭐가 좋냐라고 물어볼 수도 있지만 어쩌겠는가. 소년에겐 너무나 좋은 것을.

"외부에서 온 이들은 이해하기 힘들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여기가 제 고향이고 제가 태어나고 자란 곳이거든요. 그래서 그럴까. 오히려 여기에 있는 것이 너무나 자연스럽고 당연하고... 그냥 그 자체에 만족하면서 사는 것 같아요."

저렇게 물어보는 이유가 무엇일지 소년은 자연히 추론했다. 어쩌면 새로 이사를 온 이가 아닐까. 건강 문제건 다른 문제건. 원하지 않는 이사를 온 바람에 이곳에서의 삶에 대해 불안함을 가진 것은 아닐까. 그렇게 생각하기도 하나 소년은 굳이 입에 담진 않았다.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자신이 더 이러쿵저러쿵 할 사안은 아니었으니까. 이내 소년은 그 대신 다른 것을 제안했다.

"그것보다 뺨이 상당히 붉어졌는데. 추우면 어서 들어가보는 것이 좋지 않겠어요? 그러다가 감기 걸릴지도 모르는데."

물론 이곳도 병원은 있었다. 어쨌건 사람이 사는 곳이었으니까. 조금 거리는 있지만 크기가 큰 병원도 하나 있긴 했다. 물론 그렇다고 해도 도시의 종합병원에 비할 수는 없었지만 아플 때 갈 수 있는 곳은 있었다. 하지만 병원이 있다고 해서 아파야 할 이유는 없지 않겠는가.

984 이름 없음 (Q1om6BsV0g)

2022-12-19 (모두 수고..) 02:45:46

>>983
아무렇게나 흘려버려도 될 질문들에 소년은 하나 하나 답을 돌려준다. 성의가 없지 않으면서 과하지도 않은 대답이다. 소녀가 외부인인 걸 알 텐데, 언제 휙 가버릴 사람일지도 모르는데, 친절함이 기본인 소년일까. 아니면 이 마을에서 사는 사람들은 모두 이런 걸까. 생각이 떠오르고 흩어진다. 느릿하게 깜빡이는 눈앞이 어쩐지 조금 흐리다고 소녀는 생각했다.

이곳에서 사는 것이 즐거운지, 만족스러운지, 소녀의 물음에 소년은 잠시 지나서 대답을 해주었다. 소녀는 옆에서 들리는 잔잔한 목소리에 조용히 귀를 기울였다. 소년은 대답 끝에 걱정으로 들리는 말을 보탰지만, 소녀는 고개를 기울이며 작게 중얼거렸다.

"부럽다."

짧고, 아주 작은 선망이 담긴 중얼거림. 소녀의 시선은 다시금 아래를 향해있었다.

"있는 것이 자연스럽고, 당연하고, 그래서 지내는게 즐겁고, 만족스러운 곳이 있다는게."

담담하면서도 어딘가 가라앉듯이 읊조리던 소녀는 이내 고개를 들었다. 후. 허공을 향해 긴 숨을 내쉬자 하얀 입김이 길게 선을 긋고 흩어진다. 그리고 천천히 몸을 뒤로 기울여 소년처럼 벤치에 등을 기댄 소녀는 여전히 차분하게 말했다.

"돌아가고 싶어도, 길을 잃었어. 그냥 나와서 걷다보니까 여기였어. 나와서 만난 사람도 너 뿐이야."

가진 것도 없다는 걸 보여주려는 듯 소녀는 무릎에 포갠 손을 한 번 들었다 내렸다. 그 손은 이제 코트에 가려진 손목 근처까지 새빨갛게 물들어 있었다. 움직이면 꾸득 부서지는 소리가 나지 않을까 싶을 만큼.

"그래도 괜찮아. 여기 있으면 누구든 데리러 올 거야. 아마도."

소녀는 자신의 상황이 별 거 아닌 것처럼 말을 했다. 누구든 데리러 올 거라고 했지만, 아무도 오지 않아도 상관없는 것처럼 보였다. 벤치에 앉아 주변을 한 번 둘러보고, 두어번 밤하늘 본 것을 제외하면 소녀는 줄곧 앞 아니면 어딘지 모를 바닥만 보고 있었으니까.

985 이름 없음 (8HXywG/.yM)

2022-12-19 (모두 수고..) 19:37:21

>>984

마치 자신에겐 그런 곳이 없다는 듯이 이야기를 하는 것에 소년은 입을 꾹 다물고 조용히 입김만 내뱉었다. 지금의 저 말이 너무나 쓸쓸하게 느껴져서 소년의 표정은 이내 떨떠름한 느낌으로 바뀌었다. 자신이 너무 단순하게 생각하는 것인지, 아니면 이 소녀는 저런 말이 절로 나올 정도로 지금 외로운 것인지. 그 와중에 길까지 잃어버렸다는 그 말에 소년은 머리를 긁적일 수밖에 없었다.

"어디서 왔는데요? 그러니까 지금 지내는 곳이 어디에요? 이 마을 토박이니까 어지간한 장소는 다 아는데. 저."

물론 마을의 외부, 그야말로 다른 마을이나 이런 곳에서 왔다고 한다면 자신이 어떻게 도와줄 여지가 없었다. 하지만 적어도 마을 내부에서 지내는 이라고 한다면 자신이 모를 장소는 없었다. 물론 1할 정도는 모르는 곳이 있을지도 모르나 확률로만 따지자면 그럴 확률이 얼마나 되겠는가. 이내 소년은 자신이 끼고 있는 장갑을 벗은 후에 소녀에게 내밀었다.

"길 안내해줄게요. 그러니까 이거 껴요. 데리러 오는 사람이 언제 올 줄 알고. 그것보다는 그냥 제가 안내하는 것이 더 빨라요."

저대로 두면 다음 날 감기에 걸릴 것은 불 보듯 뻔한 일이었다. 괜히 아파서 무엇하겠는가. 그렇기에 소년은 자신이 안내해주겠다고 이야기를 하며 소녀를 바라봤다. 만약 소녀가 거부한다면? 그땐 누군가가 정말로 나올 때까지 같이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고 소년은 생각했다. 아무리 그래도 길을 잃어버린 소녀를 그냥 두고 가기에는 제 마음이 편치 못했으니까.

986 이름 없음 (Q1om6BsV0g)

2022-12-19 (모두 수고..) 23:33:57

>>985
그냥 나와서 걷다보니까 여기였다. 그랬다. 처음 보는 집, 처음 보는 골목, 처음 보는... 소녀는 눈을 뜨고 일어나 밖으로 나와 여기까지 온 길을 생각해보았다. 전부, 처음 보는 곳이었다. 한없이 낯설고, 내딛은 한발짝 뒤조차 기억나지 않을 만큼 캄캄했다. 그래서 무작정 걸었다. 가로등이 있으면 잠깐 멈추고, 다시 걷고, 반복했다. 밖에 나와 처음으로 사람을, 소년을 마주칠 때까지.

그러니 소년이 소녀의 행적을 물어도 답해줄 말은 그것 뿐이었다.

"미안해. 잘 모르겠어. 길 나오는대로 걸어와서."

오는 내내 앞을 보았는지 바닥을 보았는지도 모른다. 여기까지의 기억이 흐릿하다. 소년이 아무리 이 마을의 토박이라도 지나온 길의 설명조차 못 하면 도와주지 못 할 것이다. 소녀는 자신이 소년의 호의를 무시하는 것 같다고 느끼며 다시 작게 중얼거렸다.

"신경 쓰이게 해서 미안. 그냥 지나가는 사람일 뿐이니까 이대로 둬도 괜찮아."

소녀는 장갑을 향해서도 느릿하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붉게 언 얼굴 위로 시린 검은빛 머리카락이 넘실거렸다. 잠시 넋 나간 듯 앞을 보던 소녀가 느릿하게 고개를 돌려, 소년에게 시선을 주며 말했다.

"너도 더 앉아있을 거면, 별 얘기 좀 해줄래?"

조금 전 그랬던 것처럼, 소녀는 화두를 돌렸다. 그저 조용히 까만 눈으로 시선을 주며.

987 이름 없음 (8HXywG/.yM)

2022-12-19 (모두 수고..) 23:55:13

>>986

길 나오는대로 걷기만 했다. 그렇다고 한다면 자신이 사는 마을에서 온 것인지, 아니면 조금 멀리 있는 마을에서 온 건지도 알 길이 없었다. 지금 이대로는 경찰을 불러야 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하며 소년은 잠시 망설였다. 돌아가는 길을 모른다면 이대로 계속 추위 속에 있어야 한다는 이야기가 아닌가. 자신이라고 계속 여기에 있을 수도 없는 일이었다. 차라리 눈에 찍혀있는 발자국을 역으로 추적해서 길을 찾아야 하는 것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소년은 지금 이 상황을 어떻게 대처해야할지 망설이고 또 망설였다.

"연락처는요? 핸드폰이라던가 혹은 가족의 전화번호라던가."

이런 시골에서조차도 핸드폰은 필수품이 된 시대였다. 아예 핸드폰을 두고 왔다면 또 모를까. 소지하고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어떻게든 상황은 넘길 수 있지 않을까. 그것도 안되면 결국 경찰의 도움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시골의 밤은 도시와는 다르게 어둡고 차갑고 순식간에 모든 것을 꿀꺽 삼킬 정도로 무서운 곳이었으니까. 이런 겨울은 어디에서 멧돼지가 내려와도 이상하지 않았다. 먹을 것을 찾아 내려오는 멧돼지는 마을 토박이인 소년조차 피하고 싶은 생물이었다.

"그러면 적어도 손을 주머니에 넣어서라도 녹이세요. 동상이 걸리거나 하진 않겠지만 너무 식어도 안 좋으니까."

지나가는 사람. 맞는 말이었다. 터놓고 얘기해서 소년은 이 소녀가 누군지도 모르고 몇 살인지도 어디에서 온 건지도 알지 못했다. 하나 확실한 것은 어떻게든 이야기 주제를 바꾸려고 한다는 것이었다. 별 얘기를 더 해달라는 그 말에 소년은 잠시 생각하다가 오른손을 하늘로 뻗어서 이 별자리는 무슨 별자리고 저 별자리는 무슨 별자리인지 하나하나 설명했다. 물론 소년도 어디까지나 열 일곱살밖에 되지 않는 나이였기에 자세히 많은 것을 아는 것은 아니었다. 보는 것을 좋아하지, 연구하는 것을 좋아하는 것은 아니었기에 그냥 책으로 읽은 지식이 전부였고. 이내 소년은 몇 개의 별을 설명하고 이야기하다 소녀에게 물었다.

"당신도 별 좋아해요?"

988 이름 없음 (i/LspeqYkQ)

2022-12-20 (FIRE!) 02:40:54

>>987
소년이 골몰하는 사이, 소녀는 아까 소년에게 인사를 건넸던 것을 조금 후회했다. 소녀가 인사로 말을 걸지 않았다면 소년이 괜한 염려를 하지 않아도 되었을 텐데. 그냥 지나쳤더라면, 소녀 자신이 말한 것처럼 그저 지나가는 사람으로 흘러갔더라면, 이름도 모르는 소년에게 성가신 존재가 되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지만 아까로 다시 돌아가더라도 말을 걸지 않고 지나갈 거란 가정조차 소녀는 하지 못 했다. 다시 그 어두운 길을 정처없이 걸어, 이 가로등 아래, 이 벤치 앞에 서면, 다시 소년에게 인사를 해버릴 거라고, 그래버릴거라고 소녀는 생각할 수 밖에 없었다.

"그거... 어제인가, 던졌더니 부숴져서, 없어."

핸드폰. 그 단어에 소녀는 떠올렸다. 투박한 잿빛 벽에 부딪히고 떨어져 더이상 제기능을 할 수 없게 된 그 도구를, 그리고 그걸 던진게 소녀 자신이라는 것만은 선명히 기억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안의 연락처들은 이미 기능을 잃었기에, 역시나 없다는 의미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기억하지 못 하는 번호 역시 의미 없으니까.

길도 몰라, 연락처도 없어, 뭐든 부정 밖에 못 하는 자신이 미안해서, 소녀는 적어도 손을 주머니에 넣으라는 소년의 말을 순순히 들었다. 이젠 옷이 스치는게 따갑게 느껴지는 손을 얇은 코트 주머니에 넣은들 소용이 있을까 싶었지만, 적어도 아린 감각은 서서히 누그러들었다.

그렇게 손을 넣고 코트를 여민 소녀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았다. 소년의 오른손이 별들을 가리키며 별자리를 얘기하면 눈으로 그 선을 그어보고, 들어본 적 있는 이름이 들리면 그게 그거였구나, 생각도 해본다. 소년의 이야기는 많은 내용은 아니었지만 듣는 동안 그저 소년의 목소리와 밤하늘에 집중할 수 있는 것으로 충분했다. 그동안 다른 생각은 하지 않아도 되었는데, 소년의 물음이 소녀의 고개를 아래로 기울였다.

"별을, 이렇게 보는 건 처음이라. 지금은 그냥 신기하기만 해. 좋고 싫고를 떠나서."

소녀가 사는, 아니, 살았던 곳은 밤에도 빛이 밝은 곳이었다. 자연히 하늘도 밝아서 별은 보이지도 않았다. 달조차 해처럼 보이던 도시가 지금은 가로등을 벗어나면 캄캄한 시골로 바뀌어있다. 소녀는 밤하늘과 이어진 어둑한 곳을 물끄러미 응시하다가, 나즈막히 덧붙였다.

"별은 잘 모르지만, '작은 별'을 피아노로 연주하는 건 좋아해."

좋아해, 라고 말은 끝났지만 소녀는 속으로 자문했다. 지금도? 라고. 답은 할 수 없었다. 그저 착잡해질 뿐인 기분을 조용히 밀어넣으며, 소녀는 조용히 눈을 깜빡였다.

989 이름 없음 (5X039d3StE)

2022-12-20 (FIRE!) 20:14:19

>>988

"그러면 돌아갈 방도가 전혀 없잖아요. 이 추운 겨울에."

핸드폰마저 없다고 한다면 정말로 경찰을 불러서 보호를 시킬 수밖에 없는 거 아닐까 싶어 소년은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짜증이 난다거나 귀찮게 되었다, 혹은 한심하다라는 감정과는 거리가 먼 걱정스러운 목소리가 절로 소년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시골의 겨울 밤은 차갑고 서늘했다. 언젠가 자신은 돌아가야만 했고 그 이후에 이 소녀는 혼자 남겠지. 그렇게 생각하며 소년은 우선 자신이 사는 마을까지 데리고 가는 것이 좋지 않을까 싶어 내적 고민을 시작했다.

"도시에서 왔나보네요. 명절 때 마을에 오는 도시 사람들이 별 보고 감탄 엄청 하는데. 신기하다는 말도 하고요. 아무튼 피아노 치시나봐요? 작은 별이라. 초등학교 때 음악실에서 쳤던 것 같기도 한데."

하지만 지금 연주하라고 하면 칠 자신이 소년에겐 없었다. 악보가 있다면 더듬더듬 연주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으나 아무 것도 없는 상태에서 피아노 앞에 서서 연주하라고 시키면 필시 제 손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은 작은 별이 아니라 연결되지 않는 불협화음일테니까. 그렇기에 그 대신 입으로 휘파람으로 작은 별을 연주하던 소년은 살며시 손을 털었다.

"마을까지 안내해줄게요. 아무리 그래도 여기서 쭉 있는 것보단 마을로 가는게 나을 거예요. 어쨌건 마을에 있으면 따뜻하게 있을 수 있는 곳도 있을테니까. 마을 회관이라던가."

요청하면 안에 들어가서 몸을 녹일 순 있을테니 적어도 여기에 있는 것보다는 나을 것이다. 그렇게 소년은 판단했다. 그리고 이 소녀가 마을에서 온 것이라고 한다면 집이 어딘지는 몰라도 근처까지는 데려다줄 수 있는 거니까.

"어차피 저도 조금 더 있다가 다시 집에 돌아갈 생각이기도 했고."

990 이름 없음 (i/LspeqYkQ)

2022-12-20 (FIRE!) 20:51:22

>>989
돌아갈 방도가 없지 않느냐는, 소년의 그 말이 타박처럼 들려 소녀는 말없이 눈을 내리깔았다. 아니라고 반박할 수도 없고, 어쩔 수 없었다 뻔뻔히 굴 수도 없었다. 돌아가지 못 하게 되기를. 내심 그렇게 되길 바랐다는 것을 소녀는 부정할 수 없었으니까. 그저 눈을 감고 작게 숨을 내쉬는 것이 소녀가 할 수 있는 것의 전부였다.

조용한 가운데 소년의 목소리 만이 선명하다. 도시에서 왔냐던가, 피아노를 치냐던가, 소녀의 말을 하나 하나 짚어오자 말의 끄트머리쯤 고개를 끄덕인다.

"별, 도시에선 한 번도 저렇게 본 적이 없었어. 피아노는, 쳤었는데, 안 친지 좀 됐어."

가물가물한 기억을 더듬어보면 1년여쯤 되었던가. 희고 검은 건반에 손끝을 올려본 것이 너무나 오래전으로 느껴졌다. 소녀는 코트 주머니에 넣은 손을 조금 움직여보다가 멈추었다. 둔한 저릿함에 제대로 움직이는지도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대신 소년의 휘파람에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눈 감고도 칠 수 있는 멜로디를 한 음 한 음 따라가다가, 후, 다시 숨을 내뱉었다.

그런, 가까운 파출소에 데려다줄래? 이미 신고가 들어가 있을 지도 모르고."

친절히 마을까지 안내해주겠다는 소년에게 소녀는 그런 부탁을 했다. 따뜻하게 보호 받을 수 있는 회관이 아니라 가출 내지는 수색 신고가 들어와 있을 지도 모르는 파출소로 데려가 달라고. 담담하게 부탁을 하는 모습은 스스로의 행동을 잘못이라 여기며 소녀 자신을 죄인 취급하는 것 같다.

소녀는 그렇게 부탁을 하고, 소년이 들어주지 않아도 갈 듯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앉을 때와 달리 조금 흔들거렸지만 곧게 서서 소년에게 시선을 주었다.

991 이름 없음 (5X039d3StE)

2022-12-20 (FIRE!) 21:19:24

>>990

회관이 아니라 파출소로 데려가달라는 말에 대해서 소년은 별 의미를 두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파출소에 있는 쪽이 어쩌면 확실히 안전할테니까. 아무도 없고 혼자 있는 곳보다는 적어도 어른들이 있는 곳이 안전할테니까. 물론 그 명제가 항상 참이라는 법은 없지만 적어도 경찰은 믿을 수 있는 이들이 아니던가. 적어도 이 마을에선 그랬다. 자리에서 일어나는 소녀를 바라보며 소년 역시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어 엉덩이에 조금이나마 묻었을 눈을 살살 털어낸 후, 기지개를 쭉 켰다. 몸이 뻣뻣하거나 하진 않았지만 자신도 모르게 나온 행동이었다. 제 아버지를 보다가 배운 버릇일지도 모르는 일이고.

"그럼 따라오세요. 여기서 그렇게 안 머니까."

시간으로 따져보면 십오분 정도 걸리는 거리였다. 가볍게 산책을 할 수 있는 그런 거리. 물론 자신의 집에 가려면 조금 더 걸어야했고 파출소로 가려면 조금 더 시간이 필요했지만 그래봐야 오분에서 십분 정도 더 차이가 나는 정도였다. 소녀가 따라올 수 있도록 소년은 천천히 발을 옮기며 뽀드득, 뽀드득 발소리를 냈다. 하얀 입김을 천천히 내뱉기도 하며, 소녀가 잘 따라오고 있는지 한번씩 뒤나 옆을 보면서 확인하기도 하며.

"다음에는 따뜻하게 입어요. 딱히 잘못이라거나 그런 것은 아니지만 아깝잖아요? 추워서 별 조금만 보고 들어가면. 저런 하늘은 쉽게 볼 수 있는 것이 아니거든요."

괜히 그렇게 이야기를 하면서 소년은 오른손으로 하늘을 가리켰다. 하늘을 바라보면서도 따라올 수 있도록 일부러 발걸음을 천천히 하면서 앞으로 걸어가니 저 편에 마을의 모습이 보였다. 그리고 거기서 조금 더 나아가니 보이는 것은 불빛이 환하게 들어온 아주 작은 파출소였다.

"저기가 파출소에요. 밤에도 사람이 있으니까 아마 들어가면 도움을 줄 거예요."

992 이름 없음 (i/LspeqYkQ)

2022-12-20 (FIRE!) 22:17:05

>>991
뒤따라 일어서는 소년을 소녀의 눈이 쫓는다. 일어나서 기지개를 켜는 행동까지 쭉, 검고 동글한 눈동자가 따라가다가 휙 아래로 내려간다. 그대로 발끝을, 얄팍한 캔버스화의 앞코를 응시하던 소녀는 따라오라는 소년의 말에 고개를 조금 들었다. 그리고 끄덕였다.

소년이 먼저 걸음을 뗀 후에야 소녀도 굳은 다리를 움직여 걷기 시작했다. 희던 다리도 이젠 얼굴 못지 않게 붉었지만 아직 걸을 수는 있어서, 느리게나마 소년의 뒤를 쫓았다. 걷는 소년 소녀의 아래로 뽀득이는 소리와 사박이는 소리가 번갈아 난다. 소년이 뒤를 돌아볼 때마다 보였을 소녀는 조금 고개를 숙이고 있지만 제대로 따라오고 있긴 했을 것이다.

그런 소녀가 고개를 든 건, 소년이 저런 하늘은 쉽게 볼 수 있는게 아니라며 팔을 드는 기척이 느껴져서였다. 무심코 고개를 들어 본 하늘엔 누군가 반짝이는 실로 자수를 놓은 것처럼 별들이 반짝거리고 있어서, 소녀는 저도 모르게 대답했다.

"다음에는, 그럴게."

다음이 있을지 모르지만, 이라는 말은 숨과 함께 삼켰다. 그리고 다시 조용히 걷다 보니 저 앞으로부터 환한 불빛이 소녀의 사야에도 들어왔다. 고개를 들자 익숙한 표시가 보이고, 소년 역시 저 곳이 파출소라고 알려주었다. 작은 마을답게 작은 파출소였다. 소녀는 파출소의 불빛이 보이는 곳에서 멈춰서서 잠시 보고 있다가, 소년을 향해 고개를 돌려 말했다.

"고마워. 그리고, 성가시게 해서 미안했어."

그 말을 남기고 소녀는 천천히 걸음을 틀어 파출소로 향했다. 몇걸음 걸어가다가 멈칫, 서서 소년을 보았지만, 검은 눈동자로 물그러미 응시하다가 다시 돌아섰다. 그리고 다시 느릿느릿 걸어 파출소를 향해 걸어갔다. 소년이 재차 불러세우지 않는다면, 소녀의 걸음이 다시 멈출 일은 없었을 것이다.

파출소에서 새어나오는 빛은 환했지만, 그 탓에 소녀의 뒷모습은 너무나 어두웠다. 파출소 안으로 모습을 감추기 직전까지.

993 이름 없음 (5X039d3StE)

2022-12-20 (FIRE!) 22:43:28

>>992 음. 뭔가 상황적으로 소년이 저기서 굳이 또 말을 걸거나 하진 않았을테니 막레가 될 것 같네. 저게!
그냥 별 생각없이 시골 마을 배경 소년으로 굴려보고 싶어서 선레를 써본건데 재밌게 이어줘서 고마워!! 소녀의 어둠이 조금 궁금하긴 한데... 집에서 학대 비슷한 것. 혹은 자신에게 큰 기대감을 가진 것 때문에 부담스러워서 도망쳐 나온 걸까 싶기도 하고.. 아무튼 재밌었다!

994 이름 없음 (i/LspeqYkQ)

2022-12-20 (FIRE!) 22:49:56

>>993 재밌었다면 나야말로 기쁘네~ 나도 소년이 딱 나잇대 느낌으로 풋풋하고 귀여워서 재밌었어! 중간에 마을 설정도 꽤 흥미로웠구. 덕분에 나도 소녀 설정을 이것저것 생각하면서 이을 수 있었던 거 같아~ 즐거웠어~

995 이름 없음 (5X039d3StE)

2022-12-20 (FIRE!) 23:06:42

>>994 그렇다면 다행이야! 그 나잇대의 이미지를 살려보고 싶었거든! 아무튼 나 역시도 상당히 즐거웠어!! 또 어딘가에서 볼 수 있으변 보자! 너참치!

996 이름 없음 (cdrUiujHhI)

2022-12-26 (모두 수고..) 03:0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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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97 이름 없음 (cdrUiujHhI)

2022-12-26 (모두 수고..) 03:0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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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98 이름 없음 (cdrUiujHhI)

2022-12-26 (모두 수고..) 03:01:33

...

999 이름 없음 (cdrUiujHhI)

2022-12-26 (모두 수고..) 03:01:38

....

1000 이름 없음 (cdrUiujHhI)

2022-12-26 (모두 수고..) 03:01:45

.....

1001 이름 없음 (cdrUiujHhI)

2022-12-26 (모두 수고..) 03:01:53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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