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렇게 귀엽고 얌전한 이쁜이 담당인게 뭐 그렇게 어렵대- 쭌- 엄살이 너무 심하당-"
"네가 한 번 겪어보면 다신 그 말 못 한다. 내 전재산 다 걸고 장담해."
"또 또- 요 엄살쟁이! 하여간 못됐다니까!"
"두고 보던가. 내가 정말 엄살인지, 현실은 더한지."
유준과 그런 대화를 나눴던게 얼마 되지도 않았건만
정말로 그 말을 체감하는 경험을 이리 빠르게 하게 될 줄은
천하의 이 진도, 감히 예상하지 못 했다.
이 정신 나간 인첨공에서 별별 사람을 다 겪고
온갖 일을 저지르며 살았다고 생각했는데
이 바닥 어딘가에서 그런 일이, 그리고 이런 사람이 있을 줄은...
고작해야 열일곱 소녀가.
목화고등학교에서 꽤나 논란이 될 법한 일이 일어났다고
진은 개인적인 인맥을 통해 전해들었다.
두 여학생이 서로 치고 받았다는,
아니, 한 명이 일방적으로 얻어맞고 계단에서 낙하까지 했다는
그 광경을 구경하던 학생들이 고스란히 보게 되는 충격적인 전개였다.
그리고 더 놀라운 사실은
일의 주체 중 한 명이 현재 진이 근무하는 연구소 소속이며
진이 일의 관할로 담당하고 있는 학생이었다.
"에- 또 귀찮게 되겠네-"
그 연락을 받은 진은
별 생각이 없었다.
자극과 스트레스에 예민한 애니까
또 한동안 컨디션 챙겨주는 것에 신경써야겠구나- 정도였다.
그러니 오늘 연구소에 온다면 일단 맛있는 거 먹이고
드라이브로 기분 전환이라도 시켜줄까 하고 있었는데.
"어? 진짜?"
"그럼 가짜겠냐."
오늘 그 애가 안 온다고, 유준이 말했다.
오늘만이 아니라 내일도랬다.
등하교도 알아서 할 테니 안 와도 된다 했다.
거짓말 치지 말라고 했지만,
유준은 내가 왜 시간낭비 하겠나며 딱 잘랐다.
"흠- 그럼 나 뭐해?"
"퇴근해. 내일은 오지 말고."
"오옥케- 외로우면 연락해용 준쨩-"
"X랄 그만 하고 가라, 좀."
뜻밖의 휴일을 얻은 진은 다음날까지도 별 생각 없이 본업에 집중했다.
직장동료 A와 B와 함께 새로운 영상 작업을 하고,
스튜디오에 쌓인 잡동사니를 정리하는 목적으로 가지고 놀고,
쓸데없는 물건들을 새롭게 쇼핑해서 기껏 비운 자리를 채우고...
"진진, 제발 청소를 하던지 정리를 하던지 하나만 해."
"응- 나중에 청소- 악!"
"제발 나잇값 좀 하자. 이것아."
간만에 직장동료들과 노는 시간도 가지며 평화로운 시간을 가졌다.
그렇게 만 하루가 지나고, 다음 날, 점심시간 쯤이었다.
"느엥?"
<[진 씨]
<[이따 저녁에 시간 있어요? 4학구에 가고 싶은데]
그 애한테서 먼저 톡이 왔다.
진이 기억하기로 처음이었다.
항상 진이 먼저 스팸급으로 보내야
사무적인 단답 몇 개 받는게 고작이었다.
그런데 하루 안 본 사이,
선톡이 오고, 심지어 말투도 제법 평범했다.
진은 이게 무슨 일이냐고 생각하며 답장을 보냈다.
[시간 완전 차고 넘치지!]>
[내 시간은 언제나 우리 이쁜이 거>.0]>
<[그럼 이따 수업 끝날 시간에 맞춰서 정문으로 와주세요]
<[4학구 미술관이랑 쇼핑 좀 하러 갈 거에요]
<[같이 가요]
[오키★도키]>
[이따 봥 이쁜아ㅏㅏㅏㅏ!!!!!!!!!!!!!!!!!!!!!!!]>
<[ㅋㅋㅋㅋ 네]
"와 머임? 이게 머임?"
그 이쁜이가 쇼핑을 하고 같이 가잔 소리를 하고
심지어 ㅋㅋㅋ까지 쓴다고?
대체 무슨 일이 있었길래?
진의 짐작에 걸리는 일은 최근의 그 일 밖에 없었다.
그래서 그 애의 수업이 끝날 때까지 시간이 남았으니
조금 더 조사해 보기로 했다.
"뇨로롱-"
오랜만에 진의 고오급 인맥 찬스를 쓸 때가 왔다.
개인 컴과 태블릿과 폰까지 연달아 늘어놓은 진이 손을 바쁘게 놀렸다.
인튜브부터 시작해 온갖 플랫폼들을 들락거리며
목화고 폭행 사건에 대한 정보를 수집했다.
수집하다보니 그 사건 말고도 요즘 자잘하게 일이 많았다.
아무래도 리버티니 뭐니 사회적으로 시끄럽기 때문인 듯 했다.
그러니 그 애의 사건도 그 연장선이겠거니 했는데
그랬는데.
"...이게, 지금..."
일의 진상과 그 뒤에 깔린 그늘을 알아버린 진은
차라리 모르는게 나았겠다고 생각했다.
적어도 이 정보를 수습할 수 있는 시간이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정신 차려보니 당장 준비하고 나가야만 했다.
처음으로, 못 가겠다 연락할까 했지만
왠지 그러면 안 될 것 같았다.
그 연락으로... 뭔가가 들킬 것 같았다.
그래서 급하게 준비를 하고 차를 몰아 목화고로 출발했다.
가는 내내 어떻게든 표정 관리를 해보는게 고작이었다.
어찌저찌 목화고 정문 앞에 도착하니
이제 막 종례가 끝났는지 학생들이 하나 둘 나오고 있었다.
늦은 건 아닌 듯 해서 다행이라 생각하며
차에서 내려 문에 기댄 채 나오는 학생들을 구경했다.
"음- 이쁘다 이뻐- 풋풋해-"
한창 파릇한 고등학생들을 보며 어느새 심란함을 잊은 진은
저멀리 그 애- 천혜우가 나오자 반갑게 다가갔다.
그 애가 교문을 넘기 무섭게 달려가서 끌어안고 호들갑스럽게 반겼다.
"이쁜아-! 오구구 보고싶었엉- 하루 안 봤는데 더 이뻐졌네에!"
주변 눈치 보지 않고 행동하는 건 진의 종특이었지만-
"킥킥... 저 봐..."
"진짜인가 봐..."
어쩐지, 귀가 간지러웠다.
그 찝찝함의 출처를 찾기 전에 끌어안긴 그 애가 반응했다.
"갑자기 불러서 죄송해요. 진 씨. 오늘 바쁜 일 있었던 거 아니죠?"
"응? 응? 아냐 아냐! 이쁜이가 언제 불러줄까 하고 오매불망 기다리고 있었지용?"
"그랬어요? 다행이네요. 그럼 이제 갈까요?"
"옥케- 에스콧 해드리겠습니당 아가씨-"
"프흐흐, 네에 네에."
진은 처음 보는 그 애의 웃는 얼굴에 잠시 눈을 끔뻑였다.
어째서인지, 잊었던 심란함이 슬그머니 고개를 들 것 같아
더 느껴지기 전에 그 애를 데리고 차에 올랐다.
손수 조수석 문을 열어 그 애를 먼저 태우고 운전석에 탄 진은
네비를 4학구 미술관으로 지정하며 말했다.
"어디 보자- 미술관 갔다가 쇼핑? 저기 중심가로 갈 거지?"
"아, 아뇨. 오늘은 4학구 쇼핑 센터에 가려구요."
"응? 굳이? 아니다, 굳이는 아닌가? 그런데 왜?"
"찾는 물건이 거기 있을 거 같아서요."
진은 대화를 이으며 차에 시동을 걸고 출발시켰다.
부드럽게 도로를 따라 주행하는 차 위로 오후의 햇살이 참 밝기도 했다.
"흐흥-뭐 찾는데엥? 누구 줄 선물이라두?"
"어라, 어떻게 알았어요? 신세 진 사람에게 줄 것을 좀 찾고 있어요. 받을지는 모르지만."
"에이! 우리 이쁜이가 주는 건데 당연히 받지! 누구야 누구 이쁜이 선물 안 받겠다는게! 말만 해- 내가 그냥 확!"
"프흐, 앞 보고 운전에 집중이나 하세요. 안전운전 안 한다고 선생님한테 일러요?"
"게엑 그건 안 돼- 그러면 월급 깎여-"
"그러면 처신 잘 하시라구요- 어디 보자, 지금 제한 속도 살짝 넘은 거 같은데?"
"악! 아님다! 시정하겠슴다!"
처음으로 그 애와 일상적인 대화를 하며 4학구로 향했다.
시간이 너무 늦진 않을까 싶었지만 미술관에 도착하니 제법 여유로웠다.
차를 주차하고, 그 애와 같이 내린 진은 미술관도 함께 들어갔다.
그 애는 들어가면서도 얘기를 했는데,
오늘 오자고 한 이유가 레이브의 신작을 보기 위해서라고 했다.
왜 공개된 첫 날 오지 않았냐고 되묻자
그 때는 사람이 많지 않냐며, 느긋하게 보고 싶었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흐음- 나야 이쁜이랑 오니까 더 좋지만?"
"진짜 말 하나는 잘 한다니까요. 진 씨는."
미술관에서의 동선은 온전히 그 애의 흐름을 따라갔다.
그 애는 거의 레이브의 작품만 보러다녀서, 지루한 동선은 아니었다.
화폭에 담긴 작품들부터 하나하나 찬찬히 감상하고
다음은 안드로이드 작품으로 향했다.
레이브의 안드로이드는 크게 인공지능이 있는 것과 없는 것으로 나뉘었다.
그 중 없는 쪽인 작품들을 순차적으로 돌아보는데,
왠일로 [Mare]를 가볍게 지나치더니 [상봉과 상실] 앞에 조금 머물렀다.
그 애의 시선은 잘린 머리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뭔가 생각하는게 분명한 시선이었지만, 감상을 방해하기 싫어 묻지 않았다.
머무른 시간은 길지 않았고, 자연스럽게 다른 안드로이드 작품에게 갔다.
"안녕. 오랜만이네."
다음은 보통 인공지능 쪽으로 갈 줄 알았는데
그 애는 감정 에디션 쪽으로 먼저 갔다.
가서 하나 하나 인사를 하고 간단한 대화를 나누었다.
진이 보기엔 전혀 대화가 이어지지 않는 작품도 있었지만
그 애는 뭐가 그리 즐거운지 키득이기도 하며 감상을 이어갔다.
그 행동은 보통 인공지능 쪽으로 가서도 똑같았다.
감정들에게 했듯 인사로 시작한 짤막한 대화를 나누며
작품 하나 하나를 사람 대하듯 했다.
전에도 같이 온 적이 있었지만, 그 때는 각자 감상하느라 몰랐던 모습이었다.
연주를 하는 사람이니 그 애도 나름 예술가의 기질이 있나보다 했다.
"안녕, 신데렐라. 오늘도 아름답네."
그 애는 신데렐라에겐 조금 다른 인사를 건네며 대화했다.
남성형에게 아름답다는 표현은 좀 아니지 않나 싶었지만
뭐, 감상이란 건 각자 다른 거니까, 그러려니 했다.
역시나 보통 사람 대하듯 평범하게 대화하는 걸 지켜보다가
그 다음에서야 레이브의 신작을 보러 갔다.
"그니까- 이름이 뭐랬드라?"
"순수요."
"아 맞당-"
[순수], 아이의 순수함을 표현한 듯 어린아이의 모습을 한 그 작품은
웃는 얼굴로 머리를 열어 내부를 보여주는 행동으로 엄청난 화제가 됐었다.
마침 그 타이밍이었는지 진과 그 애가 작품 앞으로 가자
머리 속 새빨간 근육을 드러낸 [순수]가 이 쪽을 보았다.
진은 그 모습이 아무래도 기괴해서 흠칫거렸지만
그 애는 유아형 안드로이드의 시선에 맞추듯 경계선 바깥에 수그려 앉더니
웃으며, 심지어 그 머리를 쓰다듬으려 하며 안드로이드에게 말을 걸었다.
"안녕. 넌 처음 보는 아이구나. 처음이니까- 이름을 선물해도 될까? 순수니까, 음, 이노스, 어때? 마음에 드니?"
한 발짝 떨어져서 그 애와 작품의 대화를 지켜보던 진은
어느새 미술관의 폐장 시간이 가까워졌음을 깨닫고 말했다.
"이쁜아- 오늘은 그만 놀고 가야해용- 우리 친구들 슬슬 잘 시간이랭-"
"벌써 시간이 그래요? 아쉽네. 다음에 보자. 이노스야."
그렇게 [순수]의 감상을 끝으로
폐장 준비를 하는 미술관에서 퇴장했다.
만족스러운 감상을 했는지 표정이 좋은 그 애를 보고
진은 아까와 같은 기분이 들지 않으려 노력해야 했다.
그런 진을 아는지 모르는지, 한 발 앞서 가던 그 애가 빙글 돌아섰다.
"가볍게 쇼핑하고 저녁 먹으면 딱이겠네요. 얼른 가요."
"우리 이쁜이 계획이 아주 철저한 걸? 쪼아! 여기서 제일 큰 쇼핑센터 가즈아-!"
"와아 가자-"
또다시 처음으로 그 애의 리액션을 받으며
4학구에서 제일 큰 쇼핑센터로 갔다.
지하 2층에 지상 10층이라는, 층수도 층수지만 그 면적도 어마어마해서
마음만 먹으면 하루 종일 놀 수도 있는 장소였다.
"쇼핑하구- 꼭대기층 가자- 거기 파스타 끝내주게 하는 가게 있당!"
"그래요? 기대되네요. 쇼핑이 잘 끝나면 밥맛도 좋겠죠."
"당연한 소릴 하네 우리 이쁜이! 여기라면 찾는 거 무조건 있어! 없으면 내가 만든다!"
"아하하, 진 씨는 정말 못 당한다니까요."
틈틈히 대화를 하며 에스컬레이터로 5층에 향했다.
5층은 온갖 편집샾과 캐주얼한 악세사리 전문점들이 모여 있었다.
입점한 가게 특성상, 학생들이 가장 많이 가는 층이기도 했다.
그 애도 역시 학생은 학생이구나 하며 따라갔다.
"근데 근데- 이쁜이가 찾는 건 모에요옹?"
"음- 계절에 맞춘, 간단한 소품?"
"소품? 향초 같은 거?"
"아, 그것도 좋겠네요. 하나 넣을까. 진 씨도 하나 사줄까요?"
"엣, 나도 선물이야? 꺄악 우리 이쁜이 최고-"
진열된 상품을 보며 얘기를 하던 중, 진이 또 호들갑을 떨며 그 애를 껴안았다.
그 애는 싫지 않은 듯 웃으면서 무거워요- 하고 말했다.
거부하지 않으니 내친김에 볼까지 부비며 조금 과하다시피 그러고 있는데.
"...야야, 저기..."
"뭐야, 진짜였어?"
"X발 역겨워..."
학교 정문에서 느꼈던 그 찝찝함이 다시 느껴졌다.
진은 곧장 주변을 둘러보았지만 이상한 수군거림은 그새 사라졌다.
그 애가 왜 그러냐는 얼굴로 보길래 태연히 웃으며 장난을 쳤다.
"기특한 이쁜이는 양갈래 형에 처한다!"
"그게 뭐에요-푸흐흐."
그렇게, 지나간 순간일 줄 알았다.
정문에서처럼 그저 지나가는 낌새일 줄 알았으나...
그 뒤로 어느 매장을 들어가도, 뭘 보고 있어도,
"...미XX..."
"이제 하다하다..."
"여긴 왜 옴? X 같네..."
"야야, 찍어, 찍어서 올려..."
찝찝함은 사라지지 않고 점점 더 커지기만 했다.
수많은 학생들 사이에서 보내지는 무형의 악의는
정확하게, 그 애에게 향해 있었다.
그걸 옆에서 간접적으로 느끼던 진은
어느 순간부터인가, 어떤 생각을 떨칠 수가 없어졌다.
생각의 갈무리를 할 수 없게 되자 자연스럽게 말도 줄었다.
자연스럽게 진과 그 애의 쇼핑은 묵언으로 진행되었다.
"...씨, 진 씨."
"...에, 어, 어?! 어어 왜 그래 이쁜아?!"
"저 살 거 다 샀어요. 이제 저녁 먹으러 가요."
"그래? 으응 그러자- 데이트의 마무리는 역시 맛있는 저녁식사 아니겠어-"
말 뿐만 아니라 잠시 정신도 나가 있었는지
진은 그 애가 부르는 소리에 퍼뜩 정신을 차렸다.
제정신 잡고 보니, 품에 쇼핑백을 고이 안은 그 애가 있었다.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저녁을 얘기하는 그 애를 잠시 바라보다가
가자 가자 하며 엘리베이터로 향했다.
"여기 엘베가 야경 보기 딱이다? 특히 꼭대기 층이 장관이야-"
"그럼 안 볼 수가 없죠. 아, 왔다."
엘리베이터 앞에 도착하자 마침 빈 칸이 도착해 열렸다.
또 마침, 타는 사람이 진과 그 애 뿐이라
올라가는 동안 느긋하게 바깥 감상을 할 수 있을 듯 했다.
"캬- 이거지 이거지-"
"와-"
예상대로 중간에 멈춤 없이 올라가는 엘리베이터에서
환히 보이는 바깥을 감상하며 최상층으로 올라갔다.
그렇게 아무 일 없이 올라가기만 하는 줄 알았다.
진은 그랬다.
"진 씨."
"응응? 왜 불렁 이쁜아?"
"할 말 있지 않아요? 나한테?"
"으, 으응?!"
바깥면이 강화유리로 된 엘리베이터는
경치 감상을 위해 저속으로 운행되었다.
그만큼 느릿하게 흘러가는 시간 속에, 그 애가 돌을 던졌다.
그것도 꽉 찬 직구였다.
진은 당황을 감추지 못 하는 얼굴로 그 애를 보았다.
잠시 할 말마저 잃고 가만히 서 있자
마주 본 그 애가 싱긋 웃었다.
그 웃음에 진은 척추가 쭈뼛해졌다.
제발, 저 입이 움직이지 않았으면 했지만
그 애는 창백한 입술을 움직여 말을 했다...
"아까 교문에서부터 여기 5층에까지, 줄곧 알고 있었죠? 기분 나쁜 소리랑 시선 느껴진 거. 그거 왜 그런지, 그것도 알고 있죠? 진 씨.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아는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내게 묻고 싶은게 있는 정도는 알 거라고 예상해요."
"...그, 그게 무슨 소린지..."
"에이, 왜 모른 척이에요. 진 씨는 어지간한 건 다 알 수 있잖아요. 스트레인지는 위험하니 안 건드는 거 같고."
"그- 렇긴 한데-"
그 순간, 띵- 하는 소리와 함께 엘리베이터가 멈췄다.
스르륵 열린 문 너머는 식당들이 즐비한 10층이 아니었다.
그 위, 옥상 정원이 있는 층이었다.
"바람 쐬면서 마저 얘기할까요?"
그 애는 그렇게 말하며 먼저 내렸다.
진은 걸음이 선뜻 나서지 않았지만, 어떻게든 걸어서 그 뒤를 따라갔다.
시간이 딱 저녁 식사 시간이라 그런지 정원엔 사람이 없었다.
그 애는 정원을 가로질러 조명이 장식된 난간으로 다가갔다.
딱, 한 군데 조명이 망가진 곳이 있어, 거기에 등을 기대고 서서
주변 불빛에 역광을 드리운 채 진을 바라보았다.
하얀 얼굴이 어둠 속에 일렁거렸다.
"그래서- 어디부터 얘기할까. 솔직히 진 씨가 오늘 안 나올 거라고 생각했어요. 직전에라도 못 나가겠다 연락 올 거라고 생각했는데, 연락은 없었고 평소처럼 나와주었죠. 그래서 아무 것도 모르나? 했는데, 정문에서 바로 알아버렸네요. 그 때라도 돌아가지 그랬어요. 아, 그건 싫었으려나? 돌아가려면 나를 연구소로 데려다줘야 하니까."
"...에, 에이, 모처럼 데이트 신청을 해줬는데 팽치기 싫어서-"
"정말요?"
"ㅇ,응?"
"정말이냐구요. 그 말."
역광 속 검푸른 눈이 똑바로 진을 응시했다.
서서히 저물어가는 노을 뒤로, 깊은 바다와 같은 어둠이...
진은 어쩐지 숨쉬기가 답답해진다고 느꼈다.
지상에, 그것도 탁 트인 바깥에 있건만
점점 바다 속으로 끌려들어가듯이, 가슴이 답답해져왔다.
그 답답함을 쥐어짜 겨우 목소리를 냈다.
"그... 이쁜아, 무슨 말이, 듣고 싶은 거야...?"
"음? 그런 거 없어요. 묻고 싶은 말이 있는 건 진 씨잖아요."
"그런 거 없는..."
아니, 있었다.
하지만 그 말을 차마 입에 담을 수가 없었다.
그 말을 입에서 꺼내 묻는 순간,
온 화면을 꽉 채우던 그 익명 중 하나가 될 것만 같아서,
그건 싫어서.
그러니까.
"음- 직접 말하기 무서운 걸까요? 그럼 내가 대신 말해줄까요?"
하지 마.
하지만.
"그러니까, 진 씨가 나한테 묻고 싶은 말은-"
막아야 하는데.
막기 싫다.
"박유준 씨와 나 사이에 그렇고 그런 썸씽이 있었던 거 아니냐-"
그 말이 그 애의 입에서 나온 순간
진은 안도하며 동시에 심장이 철렁였다.
차마 할 수 없던 말을 대신 꺼내 준 것에 대한 안도와
진의 속내를 꿰뚫린 것에 대한 수치심이 동시에 치밀어
그 두 감정이 맞닿은 부분부터 새까맣게 뒤섞였다.
저기 서서 진을 보며 웃는 그 애를-
"대답, 해줄까요? 아니면, 진 씨'도' 원하는 대로 생각할래요?"
진은 선택할 수 없었다.
노을이 완전히 져서 세상이 어두워질 때까지,
아무 말도 못 하고 서 있다가,
그 애가 돌아가자고 하자 그 때에서야 움직였다.
그리고 쇼핑센터를 나와 3학구로 돌아오는 내내
차 안은 정적을 넘은 더한 침묵으로 가득했다.
진은 그 날 처음으로 유준의 말을 실감했다.
어째서 유준이 그 애를 대할 때, 미증유의 두려움을 가졌는지도.
4학구에서 곧장 거주하는 빌라로 돌아온 나는
집에 들러 짐만 내려놓고 다시 나왔다.
나오긴 했으나 빌라 밖으로 나가진 않았다.
다시 엘리베이터를 타고 옥상으로 올라갔다.
그 쇼핑센터처럼은 크고 화려하진 않지만
자그맣게 정원을 꾸며두어서 가끔 올라가서 쉬곤 했다.
"...Who gives a f*** about my..."
엘리베이터가 올라가는 동안, 문득 생각난 가사를 흥얼거렸다.
그대로 허밍 반 가사 반 흘리며 옥상에 도착했다.
시간은 이미 이른 밤이라, 옥상엔 아무도 없었다.
나는 들고 온 물건을 손에 들고 흔들며 그 안으로 발을 들였다.
텅 빈 정원을 사뿐거리며 조금 걷다가,
혼자 춤을 추듯 한 발끝을 세우고 빙그르르 돌다가,
그 짓거리가 웃겨서 혼자 킥킥대고 웃다가,
또 빙그르르 돌고, 웃고, 걷고, 노래하고,
그 끝에 난간 앞에 멈춰섰다.
"하-"
어느새 차오른 숨을 잠시 가다듬었다.
숨을 고르며 바라 본 난간 너머는
3학구의 야경이 멀리 보였다.
나와는 전혀 연관이 없을 것 같던 풍경,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인 풍경,
그러나 지금은 더욱 멀어졌을.
보호 철조망 없는 난간 위에 올라갔다.
바깥을 향해 다리를 뻗고 걸터앉았다.
아래에서 위로 향하는 바람이
금방이라도 나를 끌어내릴 것 같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앉아서 가져온 물건을 들었다.
조잡한 손잡이를 열고 차칵차칵 흔들어
쭉 꺼낸 막대 끝을 후- 하고 불자-
포르르르-
오색 찬란한 비눗방울 한 무리가 밤공기에 흩어졌다.
서로 합쳐지고 나눠지던 비눗방울들이 사라지자 다시 불었다.
다시 흩어지는 풍경을 바라보고, 또 불었다.
몇 번이고 반복했다.
새 것이던 비눗방울의 액상이 반 이상 사라지고
더는 숨 불기도 힘들어질 때까지.
"...하하, 아하하! 하하하하하하!!!"
불어도 불어도 계속 사라지기만 하는 비눗방울을 보다가
뜬금없이 웃음을 터뜨렸다.
그냥, 그냥 웃음이 났다.
그래서 난간에 걸터앉은 몸을 들썩이며 웃고 또 웃었다.
또다시 숨이 차서 몸을 수그려야 할 정도로.
폭이 고작 50센치 정도는 될까 싶은 그 난간에 엎드려야 할 정도로.
"하아, 후..."
또다시 숨을 고르고, 남은 비눗방울 장난감을 닫아 옆에 내려놓았다.
그렇게 빈 손으로 난간을 짚고 일어섰다.
난간 위에 서서 그 너머를 보았다.
완전히 새까매진 하늘과, 멀디 먼 3학구의 풍경과,
아득히 높은 지상까지.
부감풍경이라는 말을 아는가?
있는 그대로 풀면, 높은 곳에서 바라본 풍경이란 의미다.
그리고 다른 의미론, 그 상황으로부터 오는 괴리감을 가리키기도 한다.
인간의 뇌는 처리 가능한 정보의 범주가 한없이 제한적이라서
느닷없이 높은 곳에서 아래를 내려다 보았을 때
그 높이감으로부터 오는 비현실성을 받아들이지 못 하고
감각을 현실성으로 되돌리기 위해 그 아래 존재하는 지상에 닿기를 추구하는
"...아."
그 순간, 밑에서 바람이 불어올라왔다.
위태로이 서 있던 내 몸은 속절없이 휘청였다.
어두운 밤풍경에 검푸른 머리카락이 물결쳤다.
허공을 휘젓는 다리는 인어의 지느러미를 닮았다.
비늘 없는 다리는 물 없는 수중을 몇 번인가 헤엄쳐
풀썩, 떨어졌다.
올려다 본 밤하늘이
너무나 검고 검었다.
"...But it's nothing you should worry yourself about..."
옆에서 쓰다 만 비눗방울 장난감이
도르륵 도르륵, 어디론가 굴러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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