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마금을 모티브로 하고있지만 잘 모르셔도 상관없습니다. ※상황극판의 기본 규칙과 매너를 따릅니다. ※서로를 존중하고, 먼저 배려하는 마음가짐을 가집시다. 모니터 너머의 이용자도 당신처럼 '즐겁고 싶기에' 상황극판을 찾았다는 것을 기억해주세요. ※오고 가는 이에게 인사를 하는 자세를 가집시다. ※상대를 지적할때에는 너무 날카롭게 이야기하지 않도록 주의해주세요. '아' 다르고 '어' 다릅니다. ※15세 이용가이며 그 이상의 높은 수위나 드립은 일체 금지합니다. ※특별한 공지가 없다면 스토리는 토요일과 일요일 오후 7시 30분~8시쯤부터 진행합니다. 이벤트나 스토리가 없거나 미뤄지는 경우는 그 전에 공지를 드리겠습니다. ※이벤트 도중 반응레스가 필요한 경우 >>0 을 달고 레스를 달아주세요. ※계수를 깎을 수 있는 훈련레스는 1일 1회로, 개인이 정산해서 뱅크에 반영하도록 합니다. 훈련레스는 >>0을 달고 적어주세요! 소수점은 버립니다. ※7일 연속으로 갱신이 없을 경우 동결, 14일 연속으로 갱신이 없을경우 해당시트 하차됩니다. 설사 연플이나 우플 등이 있어도 예외는 아닙니다. ※기존 모카고 시리즈와는 다른 흐름으로 흘러갑니다. 따라서 기존 시리즈에서 이런 설정이 있고 이런 학교가 있었다고 해서 여기서도 똑같이 그 설정이 적용되거나 하진 않습니다. R1과도 다른 스토리로 흘러갑니다. ※개인 이벤트는 일상 5회를 했다는 가정하에 챕터2부터 개방됩니다. 개인 이벤트를 열고자 하는 이는 사전에 웹박수를 이용해서 허가를 받아야 합니다. 이벤트를 진행하는 이는 계수 10%, 참여하는 이에겐 5%를 제공합니다.
15주년 행사 기간이라도 커리큘럼은 지속된다. 더불어 방학이더라도 리라의 동선은 사실상 큰 변화가 없었다. 인첨공 내부에 별다른 연고 없는 기숙사생. 병원은 일주일에 한 번 정해진 시간. 요 며칠 데이트로 많이 돌아다니긴 했지만 대체로 동선은 정해져 있다. 기숙사, 학교, 부실, 커리큘럼, 순찰, 기숙사. 방학인 만큼 몇 개는 빈도가 줄거나 아예 리스트에서 배제되었다는 걸 고려하면 그런대로 넉넉한 스케줄이다.
오늘은 공기가 좋았다. 객관적으로 보면 자연으로 둘러싸인 그곳과 도심지인 이곳의 공기 질은 감히 비할 바가 못 되겠지만, 어쩐지 열기 어린 동시에 시원한 게 마치 은우와 세은의 초대로 다같이 놀러갔던 섬의 상쾌한 공기가 떠올라서 괜히 기분이 좋아졌다. 새로 산 썬캐쳐 구경조차 잠시 놓아둔 채, 원래 커리큘럼실로 향하던 시간보다 조금 더 빨리 기숙사를 나선 건 그런 즉흥적인 감각에서 비롯된 행동이었다. 사람이 안 하던 짓을 하면 잘못된다는데. 역시 옛말에 틀린 것 하나 없다.
"리라!"
학교 부지를 뱅글뱅글 돌다가 교문 쪽으로 다가갈 즈음이었다. 어딘가에서 그의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들려, 리라는 푸르른 하늘에 꽂혀있던 시선을 다시 지상으로 내린다. 누구지? 의아한 얼굴로 주위를 몇 번 돌아보면 금세 소리의 근원지를 파악할 수 있었다. 사복을 입은 또래의 학생들 사이로 익숙한 댄스부원 후배 두어 명의 얼굴과 같은 반 아이 서넛이 인식된다. 교문 앞에 바글바글 모여 이쪽을 바라보는 여러 쌍의 눈들. 그리고 그 사이에 유독 눈에 띄는 얼굴 하나. 익숙한 눈동자. 갈색의— 눈이 마주친다. 얼굴에서 핏기가 가셨다.
"리라야! 이리 와 봐! 이 분이 너 찾아오셨대!" "온더로드 정지호 맞죠? 저 싸인 해 주세요! 온더로드에서 언니 제일 좋아했는데!" "와, 나 현역 연예인 이렇게 가까이에서 처음 봐. 실물 대박이다."
지호는 넓은 보폭으로 성큼성큼 걸어오는 리라를 가만히 바라본다. 두 사람 사이의 거리가 좁혀지는 건 그렇게 오래 걸리지 않았다. 따스한 빛깔의 갈색 눈동자와 안개에 가려져 흐릿해진 꽃밭처럼 연한 빛을 띈 라벤더색 눈동자가 똑바로 마주친다.
"리라야! 마침 나왔구나. 다행이다. 일단 편지에 적혀있던 주소로 오긴 왔는데 네가 어디 머무는지는 몰라서..." "왜 왔어요?" "어?" "다시 물어볼게요. 대체, 왜, 뭐 때문에, 여기까지 왔냐고요."
단어 하나하나 짓씹듯 뱉는 목소리는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심상치 않은 분위기에 군중들은 어물쩍 한두 걸음 뒤로 물러나는데, 유감스럽게도 그들이 완전히 자리를 뜨는 것보다 지호가 받아치는 게 더 빨랐다.
"대답 했었잖니. 네가 편지 보내서 왔다고. 봐, 이거." "그거 제가 보낸 거 아니에요. 아니, 보냈다고 해도 오면 안 됐죠. 언니가 왜 여기까지 오는데요. 적어도 여기에는 찾아오면 안 되는 거 아니에요?" "......나한테 화났니?" "그럼 아닐 거라고 생각했어요? 왜? 뭘 해도 멍청한 척 허허 웃으면서 넘어가니까 진짜로 괜찮아 보였어요? 아니란 거 잘 알잖아요. 괜찮았으면—"
정말 괜찮았다면, 그 날 그럴 일도 없었을 거다. 애초에 재데뷔가 무산될 일도 없었고 무릎 꿇은 채 합의금을 내어줘야 할 일도 없었을 거다. 방구석에서 시체처럼 누워있다가 아무도 깨어있지 않은 새벽 욕조에 차가운 물을 받아두고, 머리끝까지 잠긴 채 이대로 숨이 멎기만을 바랄 일도 없었을 거라고. 욕조의 물과 한강의 넓고 바닥 보이지 않는 물이 오버랩된다. 물가에서는 조금 거슬리는 물비린내가 났고 사람들은 시끄러워서 귀가 따가웠다. 시끄러워. 너무 시끄러워. 쳐다보는 시선들이 아프다. 나를 보지 마. 보지 마. 아무도 나를 보지 말라고!
"—헉!" "왜, 왜 그래? 이리라! 정신 차려!"
당황한 목소리는 뻔뻔하게도 다정하고 유약해서 토기를 참을 수가 없다. 속이 뒤집어지는 것 같다. 리라는 뻗어오는 하얗고 마른 손을 강하게 뿌리친다.
"아...!" "건드리지, 헉, 건드리지 마! 어물쩍 넘어가지 말고 대답해요! 왜 왔어요 도대체! 다시 만나서 누구한테도 좋을 게 없는데 왜! 아, 혹시 나 없으니까 일들이 잘 안 풀려요? 이 안에서도 볼 수 있는 건 다 봐요. 온더로드 이벤트성 콘서트 열리려다가 나 없어서 무산됐다며. 그거 때문이에요? 그거 따지려고 왔어요?" "아니야! 난 그냥!" "그럼 납득할 만한 이유라도 대 봐요! 보고 싶어서 왔다, 새삼 그런 건 아니잖아요. 피차 꼴보기 싫을 텐데!"
날카로운 목소리가 소란스럽게 울린다. 리라는 숨을 몰아쉬며 지호를 노려보았다.
"전 언니 입장 최대한 이해하려고 했어요. 이런, 이런 식으로 화내고 싶지도 않았고, 그전에 그냥... 다시 만나고 싶지도... 않았다고요. 언니도 그럴 거 아니에요." "......"
심장이 곧 터질 것처럼 두근거린다. 당장 이 자리를 벗어나야 한다. 리라는 주춤주춤 뒷걸음질 친다. 물러갈 때를 놓친 군중들이 보내는 날것의 시선들이 아프다. 무고한 표정의 우아한 얼굴은 몹시 보기 괴롭다. 리라는 뒷걸음질 치며 거리를 벌렸다. 이대로 도망가야 해. 그리고 정말 도망갔을 것이다. 정지호에게 손목을 잡히지만 않았더라면.
"......놔요!" "못 놔. 그렇게 소리지르고 가 버리면 다야? 이리라, 내가 못 올 곳이라도 왔어? 그래. 솔직히 말할게. 무책임하게 다 때려치우는 것도 모자라 남의 발목까지 잡아놓은 주제에 안부도 모르는 곳으로 도망간 막내가 과연 얼마나 잘 살고 있나 궁금해서 와 봤어. 됐니? 할 말은 너만 있는 줄 알아? 네가 뭘 잘했다고 큰소리야!"
몰아치는 목소리에, 가증스럽게 눈물 고이는 갈색 눈에 리라는 문득 말을 잃는다. 아니 사실 대꾸할 의욕 자체가 들지 않았다. 붙잡지 않은 손으로 당긴 셔츠 깃 안쪽, 쇄골에 보이는 작은 흉터가 말문을 턱 하니 막아버렸기 때문이다.
"너 때문에 멤버들 다 힘들었던 건 기억 안 나? 사장님은 어떻고? 하물며 나는? 너 때문에 나는 재데뷔 기회도 놓쳤어. 그 시기 아니면 안 됐는데!"
이걸 좀 보라며 롱스커트를 살짝 들어올리는 지호의 손길을 따라 눈을 굴리면 날카로운 것에 찢긴 듯한 정강이께의 흉터가 보인다. 화장으로 충분히 가릴 수 있을 만큼 많이 옅어졌지만, 적어도 리라에게만은 존재감이 분명한 흉터.
"진짜 너무하다. 난 네가 나한테 조금이라도 미안해 할 줄 알았어. 그런데 이렇게 나온다니 믿을 수가 없네. 아... 머리 아프다. 이럴 줄 알았으면 그냥 그때 대충 넘어가주지 말 걸 그랬어, 그치? 사장님이 말리든 말든 네 부모님이 무릎을 꿇거나 말거나 그냥," "......제발 그만해요. 제발."
새파랗게 질린 얼굴을 마주하자 지호는 질린 듯 손을 놓았다. 그리고 옷매무새를 정돈한 다음 몸을 돌렸다.
"원하는 대로 지금 당장 꺼져줄게. 이젠 정말 다시는 볼 일 없겠다, 그럼 네 속은 좀 편해지겠네. 그렇지? 잘 살아봐. 이리라."
또각또각. 구두 멀어지는 소리를 따라간 군중의 눈이 다시 리라에게로 돌아올 즈음 그 자리엔 이미 사람이 없다.
"이리라 학생! 문 열어요! 젠장, 이게 왜 안 열려!"
정인은 꽉 닫힌 커리큘럼실 문을 두드리며 열을 내고 있었다. 이 커리큘럼실의 잠금장치는 바깥쪽에 있어서 그가 직접 잠그고 풀어야만 한다. 그런데, 분명 잠금 처리가 되어있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문이 열리지 않았다.
"X발..."
결국 내부가 보이는 매직미러 쪽으로 자리를 옮긴 뒤에야 커리큘럼실 중앙에 앉아있는 리라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정인은 이를 갈았다. 안색이나 상태가 영 이상해서 좀 쉬고 하던지 아니면 오늘 커리큘럼 일정을 조정하자고 했는데 갑자기 혼자 저벅저벅 걸어들어가더니 이 사단이 났다. 작게 욕설을 몇번 더 중얼거린 정인은 이윽고 커리큘럼실 내부 스피커에 연결된 마이크의 전원 버튼을 누른다.
[이리라 학생, 당장 문 열고 나와요.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히스테리는 딴 데 가서 부리라고요. 컨디션이 나쁘면 얘기를 하던가!]
또 쓰러지면 그것대로 문제란 말이다. 하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고 여전히 문은 열리지 않는다. 결국 30분 정도의 시간이 더 흐른 다음 정인은 우선 백기를 들고 의자를 끌어다 앉았다. 이왕 들어갔으면 멀쩡히 나와라, 제발. 귀찮은 일은 질색인데 어쩌다가 이렇게 손이 많이 가는 학생을 맡았는지 모르겠다. 머리가 지끈거린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디지털 시계의 숫자 앞자리가 바뀌는 순간 잠겼던 문에서 철컥 소리가 났다. 정인은 전기라도 오른 것처럼 빠르게 일어나 커리큘럼실 문을 열어젖힌다. 그리고 문 바로 앞에 있는 리라와 정면으로 마주쳤다.
"...놀랐잖아요." "오늘 준비해 두셨던 거 다 했어요." "누가 문 마음대로 잠궈도 된다고 했습니까. 미쳤어요?" "저번에 계수 측정 다시 한다고 하셨죠. 갈까요." "내 말 안 들립니까?" "졸려요." "뭐라고?" "졸려 죽을 것 같아요. 다 끝내고 빨리 가서 자고 싶어요."
짧은 침묵이 흘렀다. 정인은 리라의 무감각한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이내 그를 잡아 이끌었다.
[계수 측정 중...] [레벨 판정 중...] [완료] [결과 출력]
[xxxx년 xx월 xx일자 측정 결과] [대상자: 이리라] [계수: 4875]
[판정: 레벨 4]
정인은 성장을 확인한 다음에도 평소와는 달리 조용했던 담당 학생의 반응을 착잡하게 곱씹는다. 리라는 기숙사까지 돌아가지도 못하고 커리큘럼실에 마련된 커다란 쿠션에 기대서 죽은 듯 잠들어 있었다. 깨우자니 일어날 것 같지도 않고 자리를 뜨자니 영 불안해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대충 근처에 자리잡은 채로 핸드폰이나 뒤적인 게 벌써 두 시간이 넘어간다. 새로고침, 슬라이딩, 새로고침, 또 새로고침... 무작위로 흘러가는 영상들은 지친 현대인에게 가장 간편한 도파민 충전 방법이다. 강아지 영상, 고양이 영상, 15주년 행사장을 찍은 것, 이름 모를 퍼즐 게임 영상, 뮤직비디오, 불렛 직캠, 외계어로 쓰인 정체모를 영상, 하얀 머리의 소녀가 누군가와 싸우는 것 같은 영상, 토끼 영상.
"......방금 뭐야?"
정인은 손가락을 올려 조금 전 본 영상으로 돌아가려 한다. 하지만 그새 뭔가 바뀌었는지, 돌아간 자리에는 작은 달팽이가 커다란 상추를 뜯어먹는 영상만이 나오고 있을 뿐이었다.
서서히 내려가는 관람차를 바라보며 은우는 어깨를 으쓱했다. 특별히 무슨 말을 하는 일 없이, 그는 가만히 그녀를 바라봤다. 일단은 한번은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였기에 물었고, 자신은 그것을 물었다. 맞다고 한다면 진지하게 고민하고 답을 정했을 것이고, 아니라면... 말했다시피 어색한 분위기는 자신이 감당할 일이었다.
땅에 천천히 다다르고 있는 관람차를 바라보며 은우는 청윤을 바라봤다.
"나는 널 좋아해."
조용히 넘어가도 좋을 일일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역시 이대로는 너무나 불공평하지 않겠는가. 그렇기에 그는 그 사실을 조용히 입에 담았다.
"후배로서는 널 가장 신뢰하고 있어. 이유를 알려주자면, 너는 남을 위해서 눈물을 흘릴 수 있고, 남을 배려할 수 있는 그런 이기 때문이야. 이 인첨공에서 가장 지켜져야 할 것이 있다면 난 그거라고 생각해. 그렇기에 나는 널 좋아해. 후배로서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있고, 앞으로 저지먼트를 이끌어가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있어."
좋아하냐, 싫어하냐. 둘 중 하나의 감정으로 고르자면 답은 좋아한다였다. 그녀가 자신에게 그렇게 표했듯이.
"...이청윤. 작년에도 그렇고, 올해도 조금 눈여겨보고 있었지만, 역시 네가 다음 부장으로 어울릴 거라고 난 생각해. ...부담되지 않는다면 생각해둬. 네가 이루고 싶은 것이 있으면, 부장의 자리에 올라서 한번 이뤄봐. 내가 이런 말을 하는 것은 처음일거고, 네가 직접 싫다고 하는 것이 아닌 이상 번복할 생각 없어. 부장이 될거면, 부부장은 누굴 시킬지도 미리 생각하고 나중에 나에게 결제 받으러 와. 11월부터는 본격적으로, 인수인계를 할 거니까."
몇 번 이야기를 하긴 했으나, 당사자 앞에서 이렇게 공식적으로 말을 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을까. 조용히 눈을 감고 그는 어깨를 으쓱했다. 그리고 문이 열리자 그는 천천히 밖으로 나왔고, 그녀를 바라보며 이야기했다.
"너에게 진짜로 마지막으로 해주고 싶었던 이야기는 이거야. 이 이상은 내 쪽에서 딱히 할 말이 없으니까 알아두고. 가자. 다른 곳도 둘러봐야지."
잔당과 보스는 뭔가 얘기하려다가도, 입 벌리기가 무섭게 슉 사라져버렸다. 태오는 새삼 편리한 능력이구나, 생각하면서 손을 잡으려다가도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확인해볼게요…. 보고 싶으니까요, 멧돼지. 알려줘서…… 고마워요."
태오는 느릿하게 말하곤 이내 잡지 못했던 손을 다시금 조심스럽게 올렸다. 안티스킬로 가서 경위서를 작성하기 전의 짧은 대화에서 태오는 무엇을 느꼈을까. 적어도 인간의 삶은 대다수 비슷하고, 인첨공의 어두운 면은 누구에게나 적용되는구나 싶지 않았을까. 비단 직접적인 영향이 없다고 한들 사회적 분위기를 편승하는 사람은 어디에나 있기 마련이니.
"……평소처럼 구는 게, 도움이 되겠지만요… 적어도 오늘 이후로는…… 평범해도 좋다고 생각해요. 그러니까… 바깥 사람들처럼요."
"너무 우쭐하진 말고. 이후에도 지켜보고 갑자기 영 못하게 되면, 바로 철회할 거니까. 뭐, 너는 안 그러겠지만."
작년 이맘쯤의 일을 떠올리면서 그는 괜히 피식 웃었다. 그때 자신의 표정은 어땠더라. 여러모로 참 복잡한 심정이었던 것은 확실한데. 그렇게 생각하며 그는 괜히 어깨를 으쓱했다.
"적어도 난, 내가 사람 보는 눈이 없다고는 생각하지 않아. 물론, 너는 아직 미숙한 면이 있고... 조금 불안한 모습도 있어. 하지만, 2학년 동기들이 함께 있다면 어떻게든 해나갈거야. 내가 그랬던 것처럼. ...난 3학년 동기들이 함께 하기에, 지금 이렇게 서 있을 수 있었거든."
지금 이 자리에는 없는 남은 동기들을 떠올리며 그는 미소를 지었다. 그러니까 2학년 동기조와 함께인 청윤도 아마 잘 할 수 있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하며 은우는 어깨를 으쓱했다.
"내가 그렇게 생각하는 후배와 함께 보고 싶었고, 바빠지기 전에 사적으로 한 번 놀고 싶었어. 간만에 목적을 완수해서 기분이 좋네. 아무튼... 한단 말이지? 그렇다면 말이야."
이어 그는 입꼬리를 올리면서 청윤의 어깨를 가볍게, 피하지 않았다면 아주 가볍게 토닥여줬을 것이다.
"한번 해봐. 네가 할 수 있을만큼. 혼자가 아니라 다른 이들과 함께. 아. 부부장으로 낙조는 데려오지 말고. 걘 안돼."
그것만큼은 절대로 안된다는 듯이 그는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낙조를 싫어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 아이는 부부장이라기보단, 전방의 돌격부대 쪽이 조금 더 어울렸으니까.
이어 그는 그녀를 데리고 또 어디론가 천천히 걸어갔을 것이다. 어디가 되었건, 오늘 하루... 할 말은 다 전했으니 조금은 부담감없이 즐겁게 즐기기 위해서.
/이 이상 질질 끄는 것은 매너가 아닌 법! 일단 이렇게 막레를 드리겠습니다! 물어본 것은... 진짜 제가 봐도 이건 조금 헷깔린다 싶어서...뭐가 되었건 이 문제는 매듭을 지어야 한다고 생각했기에! 수고했어요!
갑자기 거대한 나무 구조물이 쓰러졌다. 거대한 물걸이 머리 위로 떨어지는 그 현장. 청윤은 한순간 얼어붙고 말았다.
"피해!"
그때 청윤을 구한 건 청윤의 아버지였다. 몸을 날려 청윤을 구조물 바깥으로 피할 수 있게 해준 것이었다.
"청윤아! 괜찮니?!" "아..아..네.."
하지만 청윤은 눈을 땔래야 땔 수 없었다. 자신의 앞에 사람들이 여럿 있었다. 청윤의 숨이 가빠왔다.
"살려주세요!"
천천히 쓰러진 덕분일까, 사람들은 아래에 깔려서 살아있었다. 하지만 저 무개를 들어올리려면 시간이 걸릴 것이다.
"아빠, 잠시만요."
청윤은 나무 구조물 앞에 섰다. 그리고 공기탄을 난사하기 시작했다. 나무조각들이 이리저리 튀었다. 손에 날카로운 나무조각이 박혔지만 청윤은 아랑곳 하지 않았다.
"이번에는.. 이번에는 구할거야.."
공기탄은 구조물을 관통해가며 점점 구조물을 부쉈다. 청윤의 몸에 부담이 생기는지 청윤의 숨이 더욱 거칠어졌다. 두통에 코피가 흘러나왔지만 청윤은 멈추지 않았다. 오히려 더욱 많은 공기탄을 쐈다.
"청윤아.. 무리하지 않아도.." "안돼요!" "오늘 만큼은 안돼요.."
청윤은 거친 숨을 내쉬면서도 공기탄을 멈추지 않았다. 청윤의 아버지는 잠시 둘러보더니 사람 몇명을 직접 찍어선 이 구조물을 드는 것을 도와달라고 요청했다. 그제야 사람들이 모여 같이 들어주려고 했다. 청윤은 마지막 남은 지지대도 부숴버리곤 남은 잔해들을 날려버리기 시작했다.
"으아아아!"
청윤은 마지막으로 기합을 넣으며 남은 잔해들을 거의 다 날려버렸다. 이제 남은 건 밑 껍데기 뿐이었고, 조금씩 조금씩 들리기 시작했다. 간신히 사람들이 빠져나올 공간이 만들어졌고 깔린 사람들은 전부 무사히 구조되었다. 하지만 청윤은 쓰러지고 말았다.
청윤의 아버지가 급히 받혀줘서 넘어지면서 다치진 않았고, 자신의 팔을 이용해 일어나보려고 했지만 팔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내려다보니 팔은 가시들이 잔뜩 박힌 흉측한 모습이 되고 말았다. 하지만 청윤은 이를 잠시 보곤 다른 사람들을 봤다. 모두 무사히 나온 것이다.
"내 손에 묻은게 전부 나의 것이라 다행이야."
청윤은 의식을 잃고 말았다.
잠시 후, 청윤이 눈을 뜨자 병실 안이었다. 손과 팔은 전부 붕대로 감겨져 있었다.
"청윤아 괜찮니?" "죄송해요 아빠.. 너무 달려들었어요.. 같이 놀 시간이 이렇게 사라졌네요.."
청윤의 아버진 고개를 젓고 말했다.
"청윤이 너, 경찰이 되지 않아도 이미 경찰들보다 더 대단한 사람이 된 것 같구나?"
청윤은 아무 말 없이 미소를 지었다.
"사람을 구하는 일은 경찰이 아니더라도 많죠?" "물론 그렇지. 소방관, 경호원, 경비원. 그게 아니더라도 의사 같은 사람도 있고."
"역시.. 이쪽이 저랑 잘 맞는 것 같아요."
팔 부상은 다행히 심한 것이 아니었다. 청윤의 기절도 무리와 과호흡이 겹친 것이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4레벨이 되었다는 통지서도 함께 나왔다.
도마를 들어올리고 통 안으로 큼직히 썬 딸기를 쏟아부으며 말했다. 늦게 눈을 마주쳐 먹을걸 바리바리 사 양손 가득 들고 다니는 제 선배를 보자니, 누군가와 같이 온 것인가, 아니면 덩치값 하게 잘 먹는 사람인가 짧은 의문이 들었다.
“제가 판거 먹고 손님 잘못되면 제 대가리가 깨지잖아요.”
사람 무안하게 비협조적인 장사 태도다. 솔직함은 미덕이라지만, 제 가게 아니라고 이런 말을 해도 되려나. 디저트류도 물론 무난히 만들어낼수 있다만 이전에 모 선배와 함께 푸딩을 만든 이후로 경진은 자신의 손재주에 의문이 약간 들었다. 호객 팁을 일러주는 선배한테 감사를 표하기는커녕, 멀뚱히 유한만 쳐다보다 고개를 살짝 젓는다. 여자애들 운운하며 그러는게 꽤나 능글맞아 보여, 이 선배 얼굴값 하는구나, 하고 수긍했다. 그 경로가 훤히 보이는 것이, 무표정하게 있다가도 곧 눈에 힘 푼듯 표정이 부드러워진다.
“저기에 자연스레 껴들만큼 제가 재치있진 않아서요.”
관광객 등쳐먹으러 창렬한 가격 다 받자니 양심이 불편해, 경진은 유한이 내민 돈에 가벼이 손사래 치며 늦게 답을 해온다. 꺼두었던 크레이프 기계의 불을 다시 키고선, 거의 꽉 찬 반죽통의 뚜껑을 열며 물었다.
"자넨 해고야." 수경: 저지먼트에서도... 해고인가요... 네.. 알겠습니다... 바로 떠나겠습니다...
"네가 제일 안정되는 공간은?" 수경: ....있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과거의 네 부모님을 만날 수 있다면 뭐라고 말할래?" 수경: 만나도 부모님인지 알아볼 수 없다면, 어떤 의미가 있겠습니까? 수경주: 너는 그전에 네가 부모님한테서 태어났냐부터 의심해야하는 수준 아닐까(?) *로벨이라고 하면 수경: ......말할 건.. 없..습니다.. 없을 거에요.
1. 『일단 좀 일어서』 “─저기, 일어날 수 있겠어? 괜찮을까? 아니, 말하려 하지 말고 일어나기 힘들면 그냥 누워있어. 내가 옮겨줄게.”
2. 『어서 죽어버려』 “저기, 내가 그런 말을 몇 번이나 들었게?” “저렇게 조그만 꼬맹이가 인간이 가장 해서는 안될 짓의 무게를 감당할 수 있을 리가 없지, 그게 얼마나 마음에 커다란 흉터를 남기는 일인데, 그 짓거리 하고도 제 정신으로 살아갈 수 있을까?” “─저기요. 오히려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제 정신으로 살아가지 못하겠는걸.” “너희들이 그렇게 날 몰아붙이고 있잖아.”
그리고 그 순간, 무언가 이변이 발생했다. 쭈그려앉은 자세에서 일어서는 그 소년의 키가, 일어서면 일어설수록, 그 소년의 원래 키보다 더 높은 곳에 다다르고 있었던 것이다. 우드득 우드득 하고, 어떤 자세로 오랫동안 굳어있던 몸을 푸는 소리가 나는 것 같았다.
“네모닉 슬러치.”
두개골의 아주 좁은 한 지점에, 정확히 120배의 중력이 쐐기처럼 내리꽂혔다.
ver. ??? “축하해. 이제부터 넌 자유야.” “부디 길게 살아. 최대한 길게 살아.”
슬픔에 일그러진 얼굴이, 무표정한 납 가면 같은 얼굴로 바뀐다. 소년은 표정 없는 얼굴로 당신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그대로 뒤로 한 발짝을 내딛었고, 아래로 멀어져갔다.
3. 『이룰 수 없는 꿈이라도』 “나 계속 네 옆에 있고 싶어. 항상 상황이 그렇게 좋지는 않겠지. 우리 앞에 놓여있는 길이 편한 길만 있지도 않을 거고, 길을 잃어버리는 순간도 있을 거고. 나만 해도, 여기로 들어온 이후 쭉 길을 잃고 헤메고 있는걸. 하지만, 그렇게 헤매더라도, 결국 어딜 가게 되더라도, 우리가 가는 길 끝에 뭐가 있어도······. 혜우야. 나는 네 옆에 내 자리가 있었으면 좋겠어.”
>>164 성운: “에─이 그건 아니지. ─우리가 알고 있는 것들을 다 제쳐두고서라도, 닿을 수나 있을까? 그 경지.” “내가 부장님에게서 보고 배우고 싶은 모습은, 퍼스트클래스 에어버스터가 아니라 목화고 부장 최은우 선배님이야.” “절대로 차기 부장이 되고 싶다는 건, 절대로, 절대로! 아니지만, 폐허에서부터 다시 일어선 모습이라고 할까─ 그 부분 말야.”
"그런데 요즘 양 선생님은 뭐해요?" "다른 거 시켰지. 네 담당에서 뺐으니까." "흐음." "왜, 다시 넣어줘?" "아뇨. 지금이 편해요. 그 선생님, 좀 질척거렸거든요." "어땠길래." "자꾸 개인적인 커리큘럼을 하려고 하고, 사적으로 연락하려고도 하고 그런 거요." "잘도 성질 참았네. 나였으면 진자읔!" "냐옹."
인생은 절대 자기 뜻대로 되는 일이 없다. 태오는 누구보다 그 사실을 잘 알았다. 지금도 딱 그랬다. 예기치 못하게 만난 데 마레의 소장과의 만남은 가시방석 위에 앉은 듯 불편했다. 호의적인 분이고, 실제로도 악의나 꿍꿍이 하나 없는 순수한 호의를 가진 사람이다. 그러나 사람을 그닥 좋아하지 않는 태오는 지금 당장 그 호의가 필요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태오야, 여기서 다 만나는구나." "아, 반갑습니다. 그건……."
데 마레의 소장, 승환의 손에는 꽃다발과 과일 바구니가 들려있었다. 딱 봐도 병문안용 선물이었다. 태오는 불안한 눈치로 승환을 쳐다봤고, 승환은 멋쩍은 듯 웃었다.
"희야가, 또 쓰러진 걸까요……." "하하, 그건 아니고……. 작은 소란이 있어서, 다른 아이 병문안 선물이란다."
태오는 자신의 한쪽 팔을 끌어안고 시선을 내렸다. 누군지는 알려주지 않는구나 싶을 때, 태오는 저도 모르게 팔을 꽉 쥘 수밖에 없었다.
"혜우가 쓰러졌지 뭐니." "아. 그렇군요."
지극히도 상투적인 대답이었다. 동생을 아끼던 희야와 태오라고 소문이 자자하더니만 세월로 하여금 빛 바래고 말았다는 듯.
"너도 같이 가지 않겠니?" "죄송합니다." "응? 뭐가 죄송하니?" "가지 못할 것 같습니다. 죄송합니다." "태오야. 그럴 필요 없단다. 네 잘못이 아니잖아. 사정이 있다면 그럴 수밖에 없지. 그것보다 커리큘럼을 찾고 있는데, 아직도 마땅한 지원자가 없구나. 오히려 내가 미안할 지경이다. 너를 위해서 떵떵거렸는데 말이다." "……실은 소장님, 그게." "괜찮니?" ─ 아이고, 안색 봐. 괜찮은 건가? 어디 아픈 건 아닐까? 열사병은 아닌가? 요즘 날이 더웠다 보니 걱정이네. 혜우도 그렇고, 희야도……. 그래, 희야는 사정이라도 있지만, 태오도 병약한 축이었으니 여간 걱정이 아니야. ─ 잘못했어요!! 잘못했어요, 아파요-
태오는 그 자리에서 우뚝 멈춰섰다. 붕대 감긴 팔을 꽉 쥐는 손이 덜덜 떨리더니 이내 힘을 주자 손가락이 새하얗게 물들었다.
"태오야." "……." "태오야?" "……." "태오야!" "저는─!"
태오는 자신이 소리친 것에 지레 겁을 먹곤 숨을 헉 들이켰다. 승환 또한 큰 소리에 화들짝 놀랐는지 저도 모르게 뒤로 한 걸음 물러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죄송. 죄송합니다. 흥분했네요. 커리큘럼에 대해선 생각이 없습니다. 데 마레에서 연관을 시켜준다 한들 저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죄송합니다." "……그랬구나. 내가 이기적이었지, 미안하다. 네 마음을 생각하질 못했구나." "아뇨, 사과하지 마세요. 제가 무능하고 게으른 겁니다. 그게 소장님이 죄송해 할 이유는 아니라고 생각해요." "태오야." "죄송합니다. 먼저 가보겠습니다."
태오는 급히 자리를 빠져나가려 들었다. 도망치듯 걸음을 재촉하자 승환은 태오를 잡지도 못하고 황망한 얼굴로 떠난 자리만 보다, 이내 생각했다. 태오는 심약한 아이긴 했지만 저 정도는 아니었다. 지금은 마치 유령에게 쫓기는 것 같지 않은가. 그래, ALTER에서 착란을 일으키고 행방불명된 이후로 그간 연락 하나 없던 아이가…….
그러고 보니, 그때 왜 나는 착란을 일으킨 경위를 물어보지 않았지? 태오는 골목에서 머리를 감싸쥐며 옹송그려 앉았다.
─ 아아아악─!! ─ 왜 나는 열등생이야? 왜? 이렇게 아픈데 왜 레벨 0이어야 하냐고, 미친 거 아냐? 이럴 거면 죽여, 죽여!! ─ 죽일 거야. 다 죽여버릴 거야…. 죽……. ─ 끝내주세요, 아파요. ─ 엄, 마……. 죄송, 해요, 보고 싶어요. 꺼내주세요. 싫어요. ─ 누군가 듣고 있다면 제발 꺼내줘…. ─ 여기는 너무 어두워, 아파……. ─ 선생님 아파요, 싫어요, 커리큘럼은 싫어요! 잘못했어요! 아아아악-!! 악!! ─ 연구소는, 연구소는 믿을 게 못 돼. 너라도 도망쳐. 도망쳐, 도망쳐, 도망쳐, 도망쳐, 도망쳐, 도망쳐-
소리가 떠나가지 않는다. 12살 때 들었던 그 소리들이 끔찍하게 귀를 어지럽히고 눈앞이 점멸하는 것 같다.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이 이명이 귀를 한참이고 괴롭히더니 소리가 뚝 끊겼다. 태오는 그제야 날카로운 숨을 뱉었다. 주머니를 뒤적거리며 연초를 꺼내더니 손을 들어 머리를 쓸어 넘겼다. 식은땀이 머리를 흠뻑 적시고 있었다.
태오는 숨을 가볍게 들이마시고 내쉬었다. 로봇 고양이를 잡아달라고 했지만 저렇게 날쌜 줄은 몰랐다. 덜컥 맡겨진 도움 요청을 무시할 수도 없고, 태오는 종이보다 못한 흐느적대는 몸뚱이로 고양이를 겨우 붙잡을 수 있었다. 애웅- 하고 우는 오토튠을 뒤로 태오는 인조 모피로 이루어진 등을 쓰다듬으며 부스로 돌아가다 털의 무늬를 보고 혹시나 싶어 손목을 댔다.
>>213 혜우우우 (차곡차곡 쌓이는 갠이벤 스택) 근데 머 혜우도 입원을 한 건 아니라서 안내데스크에 물어봐도 없다 그랬을거고 어디선가 슬그머니 영락의 소장님 나타나서 허허허 이런 그 아이는 자택에서 쉬기로 했어요 안 소장- 직접 연락을 해보셨더라면 금방 알 수 있었을 터인데- 아, 대신 전해드릴지요? 안 소장이 왔었더라고 허허- 했을것 동월이는 병원인데 태오는 연구소라니 으어어 애들 지뢰장소가 너무 많아!
>>246 으음... 가장 간단히는 그 음악회에 서헌오 박사랑 유호란 소령도 같이 있었다고 하면 될 것 같아요 나름대로 인첨공에서 가장 영향력있는 연구소 중 하나라, 협업하는 외부 기업의 인사들은 물론 영락이나 데 마레의 인사들과도 오며가며 인사 정도는 나누지 않을까 생각하고 있거든요 그리고 서헌오 박사는 성운이의 뇌전단 균열 스캐닝을 통해 성운이가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는 걸 알고 있고, 그 이름과 첼리스트라는 것까지도 알고 있어요. 혹여나 연주자의 이름이 음악회 팸플릿에 나와있었다면, 단번에 알 수 있었겠죠. 그렇게 생각은 하고 있는데.. 👀
>>249 글쎄- 얼터가 친학생적 연구소였던가? 태오랑 선관 내용이나 지금까지 나온거 보면 안 그래 보이거든 그 연주회의 초대 자격은 데 마레나 영락처럼 친학생적 연구소들이었어서 아마 초대장을 안 보냈을 거 같아 그리고 연주회는 공개적으로 연게 아니라 별도의 팜플렛은 없었고 그날 무대에 오른 사람의 명단도 영락 측에서만 갖고 있었어
>>252 일단 그러면 이 방법은 어렵겠네요...! 그렇지만 짚고 넘어가자면 알터는 결코 학생적대적인 연구소도 아니에요. 극초기 인첨공에서 퍼스널 리얼리티 이론을 연구하는 과정에서 많은 이들이 죽어간 것은 맞지만, 균열장 이론이 정립되고 나서는 많이 줄어들었으며 특히 태오가 합류할 즈음 해서 커리큘럼 과정 정립과 안정화가 크게 가속되었죠. 태오가 탈주한 이후로는 현재의 커리큘럼 과정이 거의 다 정립되었구요. 일단 서헌오 박사 본인부터가 원래는 데 마레나 영락의 다른 인사들처럼 적극적인 학생친화적 인사인데, 인첨공의 상부에서 초기에 서헌오 박사에게 비인도적인 실험을 지속적으로 강요했다고 말씀드렸지요. 데 마레나 영락처럼 적극적인 학생친화적 노선은 아니지만, 학생친화적 성향은 확실히 있어요. 적어도 근 몇 년간, 다른 연구소들이나 학생들이 접하는 알터의 모습은 그랬어요. 성운이는... 좀 많이 특별한 케이스고요. 지금은 다른 연구소에 비해 소수의 학생들만 받지만, 느리건 빠르건 학생을 확실히 2~3레벨로는 키워내는 연구소로 자리매김하고 있네요.
당혹스러운건 그녀도 마찬가지였다. 봄철에 쇄빙기는 멀쩡히 들고 다녔으면서 고작 이런 것들로 놀란다니, 역시 감상의 기준이란 개개인별로 다른 것일까? ...생각해보면 단지 그런 것을 수납할 공간이 없다는게 문제겠지만...
"...낯간지러워여~"
정작 본인이 먼저 말했으면서, 여러모로 모순되는 그녀였다. 하지만 그런 모순됨이 그녀의 본질이기도 했다. 감성적이며 무미건조하고, 지능적이며 무지하고, 유연하며 삐걱거렸고, 철학적이며 현실적이었다.
"ㅖ. 퀸에서 그 사람 있잖아여. 콧수염에 난닝구에 보헤미안 랩소디."
의미를 알수 없는 단어의 나열, 하지만 그정도면 당신도 알수 있었을 것이다.
"그름 어케여~ 하필이믄 정확도가 높은데, 하필이믄 슨배임이 앞에 있었슴다~"
앨랠래, 하는 느낌으로 회피하려던 그녀였지만 그렇다고 해서 뻔뻔한 인물인 것도 아니었기에 당신의 쿨하고 평화적인 협상에 내심 고마움을 느끼고 있었을테다.
"그름 달리 어케 생김까? 즈는 자해 해본적 읎어여."
별 도움 안되는 뜬금없는 설명을 덧붙이는 그녀였을까? 물론 당신이 '조심했어야지,'라고 놀리거나 했어도 웃어보일 그녀이기에 딱히 타격은 없겠지만 말이다.
"......"
그나마 다행인 것은, 당신이 멈추어섰다는 것이다. 만약 분을 삭히기 위해 계속 걸어나갔다면, 분명 그녀도 계속 혼란스러움에 어찌할 바를 몰랐겠지. 게다가 멈춰섰다 하더라도 진중하게 이야기를 꺼내거나 마주보며 다정한 말을 건네주지 않았다면, 다른 의미의 상처를 받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녀는 크게 개의치 않았다. 애초에 그런 일엔 익숙해서? 수많은 시선을 감당해야 하는 것보단 나은 처사라서? 당신의 시선이 자신을 탐하려는 추악한 눈빛이 아니어서? 아니, 당신이 그럴 사람이 아니란걸 믿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째선진 모르겠지만, '등을 믿고 맡기는 상대가 된다면 서로를 신뢰해야 하는게 우선이다. 언젠가 절벽에서 떨어져도 상대가 받아줄거라는 당연함을 가질만큼,' 라는 정의에서부터 나온 조금은 엉뚱하고 조심성없는 믿음이었다.
"응, 믿을게요... 어디서부터 말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언젠간 전부 말할 테니까... 믿어주길 바라고 있으니까..."
혹여 몸을 돌리는 사이 자신이 채일까 천천히, 조심스럽게 움직이던 당신의 시선을 마주하자 그녀는 자신의 가슴에 손을 올려두고서 조심스레 말을 이어나갔다.
"대신... 제게도 그런 기회를 주길 바란답니다. 당신이 추스리는동안 지켜주고 지켜볼수 있도록... 지쳤을 때 쉬어갈 수 있도록... 이 품에서 안락하고, 편안하고, 행복함을 느낄수 있도록... 언젠가 위기가 닥친다 해도 그것을 이겨낼, 혹은 잠시 몸을 숨길 수 있는 피난처가 되도록...
...의지할 누군가가 없는 것보다 더 두려운건, 의지해주는 누군가가 없는 거니까..."
그 어떤 거짓말도, 숨김도 없었다. 그녀는 자신'이' 필요로 하는 것보다 자신'을' 필요로 하는 것을 더 중요하게 생각했으니까,
그렇게라도 자신이 이곳에 존재하고 있음을, 어딘가에 소속되었다는 것을, 자신을 필요로 하는 누군가가 있음을, 이곳에 있어도 된다는 확신을 얻고 싶었으니까.
그리고 앞에 놓인 것... 슈퍼엑스트라곱배기라는 이름답게 산더미같은 밥은 물론이거니와 몇겹으로 쌓았는지 모를 고기, 수풀이 우거지는 녹색의 향연, 태양처럼 떠오른 달콤하고 고소함 그것은 분명 1인분은 커녕 2인분도 아득히 넘어선 무언가였다. 그리고 당신은 알고 있으려나? 도를 넘어선 매운맛은, 붉은 색이 아닌 보라색을 띄고 있단걸...
>>265 으음 내가 이해하고 있던 건 학생적대적은 아니지만 초기의 강요받은 실험들로 인해 인첨공 초창기 연구소들에겐 그 인상이 남아있을 듯- 이었던지라 영락도 그 중 하나라서 지금의 알터가 개선되고 학생친화적이 되었더라도 영락 입장에서 초대하진 않았을 거란 흐름이었어 그런대 >>267 이거 뭡니까 대체 이 사람아 뭘 숨긴거야!
“···뭐 좀 물어보자.” “진심으로, 너, 날 단 한 번이라도 연인이라고 생각한 적이 있었냐?” “심심풀이용 장난감이나 연애 연습용 카데바 같은 게 아니라, 살아숨쉬고, 심장이 뛰고, 네 생각을 하고, 밤에 눈을 감으면 네 얼굴이 보이고, 네가 아프지 않기를 바라고, 행복하기를 바라는 인간이라고··· 생각해본 적이나 있어?” “그러면 내가 그동안 네가 이걸 이렇게 숨겨왔다는 데에─ 내 약속을 헌신짝 취급하고 내다버린 데에 대해 뭐라고 반응해야 할까?”
“나는 자이로키네시스트야. 텔레패스나 사이코메트리스트나 리얼리티 매니퓰레이터가 아니라고. 말해주지 않으면 몰라.” “말해주지 않았다뿐일까, 감추기까지 했지. 도망치고, 피했어. 그리고 우리 사이는 이만큼 멀어져버렸네.”
“나를 단 한 번이라도 믿은 적이 있냐고.” “내가 겨우 그 정도 일로 흔들리거나 널 떠나갈 거라고 생각했어?” “내가 거기에 휘말리지 않는 게 나를 아끼는 길이라도 될 거라고 생각했어?” “아니면─ 내가 그럴 가치가 없었어?” “난 너한테 아무 것도 아니었던 거야?”
“애초부터 이럴 거면, 내가 너한테 그 되도 않는 소원이니 약속이니 지껄여댔을 때─” “그때 뺨을 때리고 욕이라도 한 사발 하지 그랬어.”
“네 소원대로 해줄게.” “축하해. 이제부터 넌 자유야.” “부디 길게 살아. 최대한 길게 살아.”
>>277 그거라면 정확하게 제가 예상하고 있던 사유가 맞네요. 그럼 이건 안 되겠고, 공개 연주회도 아닌 폐쇄적인 연주회였으니.. 그러면 이제 혜우주가 이거 괜찮다고 해주실지 더 걱정하던 다른 하나가 있네요. 성운이가 톡 보냈는데 혜우가 응답을 전혀 안해서 성운이 설표기질 발동해서 여기저기 수소문해서 혜우가 다니는 연구소 알아내서 찾아와서 로비에서 애걸복걸하고 있던 걸 유준씨가 성운이를 발견해서 혜우한테 데려왔다던가, 라는 거..
>>303 아이고 뭐 그렇게 어렵게 돌아간디야 유준이 소개시켜준게 혜우니까 곧바로 유준한테 컨택한다는 선택지는 없냐궁 글고 연구소 수소문한다고 해도 혜우 신변이 맡겨진 곳이라 쉽게 알긴 어려울 건데 성운이가 알터의 정보력?을 이용해서 알아냈다면 또 모를까 둘 중 한 방법이면 개연성은 충분햐 어느 쪽이냐에 따라 알수있는게 차이는 있겠지만
성운이 진짜 보스로 나와도 재밌을 것 같아요!! 사소한 오해로 커플이 헤어지고 아무렇지 않게 잘 사는 듯한 연인을 보며 가슴 아픈 호소를 속으로만 말하다가 결국 썩어버리는.. 결국 마지막 선을 넘은 이가 위 대사를 하며 최종 결전 후 사랑하는 사람의 손에 최후를 맞이하는 거 보고싶다!!!!!!
>>315 아 습 (그거 튀어나올뻔한거 참음) 연구소를 통해서 알아낸다면 당연히 아버지부터 시작하지 않을까 생각하네요. 아 그러고 보니 그 루트가 있었네요...! 뒷사람이 뭐 하나에 집중하기 시작하면 시야가 좁아지는 게 상판 최대단점인데 성운이가 그 단점을 그대로 갖고 있구나 아뿔싸 개연성은 충분하고... (바들바들) 그러면 이제 혜우주의 허락을 맡는 것뿐인데.. 괜찮을까요
>>354 멘탈이 허접이라 죄송해요.. 혜우한테 오늘은 좀 어떠냐고 문자를 보냈는데 혜우가 오늘 연주회를 한다는 것은 전혀 몰랐고 1시 좀 넘어서 연락을 보냈는데 응답이 없고, 그 뒤로도 연락을 서너 번은 보내고 통화도 한번 걸어봤는데 응답이 없어서 초조해하고 있는데, 그때 같이 있던 어머니가 성운이가 핸드폰 연락처 뒤적이면서 극도로 초조해하는 걸 바로 눈치채고 급한 볼일 있으면 얼른 가보라고 해서 그제서야 유준씨에게 연락한 게 오후 5시쯤이 아닐까 생각하고 있어요.
>>349 세상에 무슨 일이 있으시길래...? 날 밝으면 바로 수면의학과가 있는 병원에 가보시는 것을 추천드려요
>>346 >>353 >>356 공룡주들의 시간은 끝났지만 오히려 지금부터가 진짜라구요 (대체) (쉬핑의의도는없습니다)
>>368 갠차너 그런 성운주도 귀여우니까 (품에 넣고 토닥토닥) 오늘은 좀 어떠냐는 문자는 어떤 의미인거야? 오늘도 시간 나면 만날까 같은거? 오후 5시면 너덜너덜한 유준이 겨우 연락 받을 수 있을 쯤이네 음 딱히 거절하지 않고 받을거고 유준에게 뭘 물어보고 어디까지 행동할거야?
>>377 따뜻해에에...... (꾸꾸꾸꾸) 그러니까 오늘 하루는 어떻게 보내고 있는가 하는 안부 문자일 거라 생각해요. 설표라면 그날 오후에 만나고 싶으면 다짜고짜 아침부터 장소랑 시간만 딱 적어서 보내는데(ex: <[순찰끝나고 5시쯤해서 역앞 올영] 같은 거요. 그 이후로 혜우와 일정 흥정(?)하는), 친칠라는 일단 뭐하고 있어? 같은 말부터 꺼내는 말머리가 좀 긴() 타입이라서요. 보통은 거기서 혜우랑 이런저런 잡담만 나누거나, 만나고 싶으면 약속 잡거나 하는데 혜우가 연락이 아예 없는 건 처음일 테니까요.
유준씨한테는
<[ 선생님 ] <[ 혹시 혜우랑 자주 연락하고 지내시나요? ] <[ 혜우가 지금 전혀 연락을 안 받아서요 ] <[ 무슨 일 있나 걱정되는데... ]
정도로 연락했을 거라 생각해요 여기서 유준씨가 모른다고 뚝 잡아떼면 아버지한테 문의하는 루트로 넘어가서 영락으로 직접 방문하지 않을까 하네요 유준씨가 너 감당되겠냐고 엄포 놓거나 네가 알 바 아니라거나 하는 등 뭔가 알고는 있는데 안 알려준다는 티를 내면 애걸복걸을 할 것 같네요. 애걸복걸이 안 먹히면 코뿔소행동.. 👀
>>388 옳지 자리잡고 코 자자 (둥기둥기) 아 일종의 안부인사 겸 하는거구만 ㅋㅋㅋㅋ 설표쿤 그러다 죄다 퇴짜맞는다 그치 혜우 그래보여도 톡 씹지는 않는 편이라 오후까지 연락 없는 건 드물어 그 전에 집 다 뒤엎을 때도 태연한 척 톡 보냈으니까 가장 온화한 루트는 유준이 알려주는건데 흠 다이스함 굴려볼래 성운주?
>>404 거기에 굴린 게 아니지만 일단 질문하셨으니 대답해드리는 게 인지상정 지금의 성운이는, 아버지를 가여워하면서도 무서워하고 또한 죄책감을 품고 있네요. 옛날에는 미워하면서도 무서워했는데, 커리큘럼이 진행되면 진행될수록 아버지가 얼마나 정신적으로 피로한 일을 하고 계신지, 그리고 자신이 인첨공에 들어온 사실에 왜 그리 경악하셨는지 이해하게 됐고, 더불어 자신이 아버지를 괴롭게 했다는 부채의식을 갖고 있거든요. 하지만 마음 한켠에선 아버지를 볼 때마다 왠지 모를 위기감이 고개를 드는데, 이게 아버지를 대하는 태도에까지 문제가 생길 정도로 뚜렷한 위기감은 아니라 그냥 아버지만 보면 연구소가 떠올라서 긴장하는 모양이지~ 하고 자기 스스로가 대수롭지 않게 넘기고 있어요.
>>411 이런건 무조건 이기네 아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뭐 재밌는 쪽이 좋으니까 그냥 풀어줌 ^오^ 유준은 성운의 연락을 받고 그냥 순순히 말해줄거야 오늘 혜우 소속 연구소에서 작은 연주회를 열었는데 거기서 패닉 증상을 일으키는 바람에 진정제 맞고 집에서 휴식중이다- 라고 연락이 없는 건 아직 깨어있지 못 해서 그런 것까지가 그냥 말해주는 범위 성운이는 연락받고 어떤 반응이려나?
어쩌면 우리가 이별하기 전까지, 이 불안을 느끼며 안고 가야 한다 하더라도, 당신을 향한 자신의 마음과 다른 종류의 감정으로 당신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고 하더라도, 당신을 향한 자신의 마음은 변함이 없을 것이라고. 언제나 마지막인 것처럼, 끝이 오더라도 후회 없다고 할 수 있도록 당신을 사랑할 것이었다. 단순하지만 감각적인, 이 행복을 느낄 수만 있다면 그 불안도 잊을 수 있을 것이었다. 제 이마, 살갗을 타고 스며드는 느낌에 금은 심장이 터질 것 같다 느낀다. 그러니 당신 앞의 후배는 그런 행동을 하는 것에 당신은 망설임이 없는 것 같다 말하며, 잔뜩 붉어진 얼굴이 되어 있다. 주변을 살피던 이유는 자신들이 아는 사람이 이 장면을 볼까 하는 부끄러운 마음 때문이었고. 귓가에 속삭이면 누가 옆구리를 간지럽게 하듯, 금은 흠칫 놀라며 당신을 보았을까. 그때 가까이에서 당신에게 나던 향기를 금은 분명히 기억한다. 누가 듣는 것도 아닌데. 작게 속삭이듯 당신에게 말한다.
"그냥, 아는 얼굴들을 만날까 해서 그렇습니다."
아직 심장이 뛰면서 남은 여운이 다 가시지 않았는데 또 이렇게 다가오다니. 이런 자신의 모습을 남에게 보여주에 민망한 것이 있었을까. 당신에게 당겨진 지금, 더 가까이에 붙은 금은 작은 목소리로 말한다.
"티켓은... 아직 쓸 수 있겠지요. 못 쓴다고 하더라도, 선배와 같이 볼 수 있으면 그것으로 좋습니다."
그렇게 퍼레이드가 시작되는 장소에 도착한다면, 다행히도 아직 티켓을 쓸 수 있었을까. 오히려 앞자리로 가면 다른 사람들에게 저희의 모습이 들킬지도 모르는 것이었지만. 아무래도 좋다는 생각을 하며 금은 퍼레이드가 시작되려는 건지 소란이 일면, 당신을 놓치지 않게 잡으며 앞으로 나아간다. 그리고 시작되는 퍼레이드. 맨 앞 차에 타고 있는 레드윙과 웨이버의 모습. 웨이버가 생성한 물줄기는 하늘에서 터지며 우리를 적시고, 무지개가 떠오르면 금은 그 모습을 지켜보나, 이내 고갤 돌려 당신을 바라본다. 초능력으로 이어지는 어떤 쇼들도, 당신을 바라보는 것 보다 즐겁지 못했기에. 금은 퍼레이드를 본체만체 하였을 것이었다.
>>424 크으윽 제발 내 상상이 상상이길 바람 그 일단은... 전화로 찾아가겠다고 하면 유준 한숨부터 내쉰다 그리고 잠시 기다리라 한 담에 5분 정도 고민해 원래의 혜우라면 절대 알려지지 않게 하겠지만 지금이라면 다르지 않을까 어쩌면 지금 이 아이(성운)의 손을 잡아야 뭔가 바뀌지 않을까 혹시나 제 선택이 그릇된 것이라 역으로 망가지지는 않을까 고민 끝에 유준은 그렇게 물을 거야 꼭 가야겠냐 그냥 모른 척 돌아서는게 나을 수도 있다 내가 너희의 관계를 자세히는 모르지만 적어도 혜우에 관해서는 더 깊이 알고 있다 너 역시 혜우와의 관계에 의구심이 없지는 않으리라 생각한다 그걸 지금 덮으면 어제(퍼레이드날)와 같은 나날이 이어질거고 덮지 않으면 이전만도 못 한 일이 생길 수도 있다 그래도 가야겠냐 그래도 지금 꼭 봐야만 하겠냐 자 성운이 대답은?
이 뒤엔 사격장에 가자고 이야기가 나왔던 것도 같지만, 성운은 네가 어디에를 가더라도 좋다 싫다 말도 없이 아랑곳하지 않고 시선을 비스듬히 피한 채로 걷기만 할 뿐이었다. 네가 어디로 가는지는 그냥 외면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래서 그것은 오히려 너에게 호재였고, 성운이 주변 풍경이 좀 외따로 떨어진 인적 드문 데가 된 것 같다는 것을 눈치채고 어리둥절한 표정을 되어 고개를 들었을 때에는 이미 어리둥절해하기엔 늦은 시점이 되어 있었다. 햇볕도, 바람도 외면하여 후덥지근한 여름 공기만 어려 있는 천막과 천막 사이의 틈에 부드럽게 떠밀려들어간 성운은, 그제서야 뾰루퉁한 표정을 풀고 눈을 동그랗게 뜬 채로 입을 떼었다.
“혜우야······?”
그러나 혜우와 눈을 마주쳤을 때, 성운은 그 대답이 말로 돌아오지 않을 것이라고 느꼈다. 다만, 조금 많이 빨개졌을 뿐이다. 그러나 성운은 얼굴이 빨개졌어도 너를 밀치지는 않았고, 네 손끝이 따뜻한 턱끝에 와닿을 때도 뒤로 물러서지 않았다. 그저 네 속눈썹이 가까워져 올 때 눈을 꼭 감을 뿐이었다. 눈을 감기 직전, 네 눈에는 소년이 눈웃음을 짓는 것이 보였다. 단순히 말로만 담아내기에는 너무 커져버린 애착은, 그 대신 비밀 소꿉놀이가 됐다.
머리나 뺨을 쓰다듬어주거나 가벼운 장난을 치는 것만으로 충분히 풀렸을 어설픈 토라짐은, 그것보다 훨씬 커다란 애착의 폭격을 초래했다. 그것이 끝났을 때에 성운의 얼굴은 이미 풀리다 못해 온통 새빨개져 있었다. 네 엄지가 천천히 입술을 쓸어내자, 성운은 완전히 녹아버린 얼굴로 천진난만하고 무방비하게 이를 드러내며 미소짓고는, 네 엄지손가락에 마지막으로 작은 입맞춤을 남긴 뒤 네 품에 쓰러지듯이 기대어안겼다.
그러고 나서 조금 숨을 고르고서야, 성운은 다시 몸을 가누고 빨개진 얼굴로 누가 보는 사람은 없나 앞뒤를 휘휘 둘러보곤(다행히 없었다) 너를 한번 올려다보다가 시선을 내리깔고는 후다닥 네 팔에 매달렸다.
후배의 볼멘 소리에 혜성은 그저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제대로 된 연애를 해본 적 없지만 이런 모습을 보면 누구라도 귀엽게 생각한다는 것쯤은 알 수 있다. 당연히 혜성은 후배에게 귀엽다는 말은 하지 않기로 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주변을 둘러보는 후배의 손을 잡고 당겨 귓가에 말을 속삭이자 보이는 모습에 혜성은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중얼거렸다. 후배님 , 귀여운 면도 있구나. 하고.
"확실히 그럴지도 모르겠네. 그래도 사람이 이렇게 많은데, 알아볼 수 있을까?"
자신이 당겼기 때문에 후배와 어깨가 스칠 정도로 가까워진 혜성은 잠깐 눈을 도륵 굴리며 후배의 말에 혼잣말처럼 중얼거렸지만 굴렸던 눈은 자연스레 후배에게 향했다. 작은 목소리를 듣고, 가벼운 웃음을 흘린다. 이런 모습을 아는 사람에게 들키는 건 곤란할테니까. 터트렸던 웃음을 멈추고 혜성은 퍼레이드가 시작되는 장소로 걸음을 옮기며 말했다.
"혹시 누가 물어보면 사귄다고 해도 돼."
퍼레이드 장소에 도착해서 후배와 자신의 티켓을 건네주고 잔뜩 몰린 인파를 헤치며 가장 앞자리로 향했다. 인첨공에 사는 사람들은 전부 뛰쳐나온 것 같네. 인파에 휩쓸리지 않도록 후배의 손을 놓치지 않도록 잡고 겨우 가장 앞쪽으로 도착한 혜성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을 것이다. 퍼레이드를 보며 환호하는 사람들. 웨이버가 생성한 물줄기가 터지며 만들어낸 무지개와 물줄기로 인해 여름의 햇빛에 열기를 받았던 피부가 조금은 시원한 느낌이었다. 화려하고 또 화려했다. 하늘에 수놓아지는 무지개를 바라보고 있던 혜성의 새파란 눈동자가 후배에게 향했다. 축제의 열기와 여름의 열기가 섞여 선명하게 반짝이는 새파란 눈동자가 후배의 명도가 낮은 푸른색 눈동자를 담고 가늘어진다. 잡고 있지 않은 손으로 혜성은 후배의 뺨을 타고 흐르는 물방울을 닦아내려했다.
몸을 걷어채이는 느낌이 들자 천천히 몸을 움직인다. 쓰레기와 연초 냄새를 맡으면서 몸을 일으키는 아침은 그렇게 생소하진 않았다. 오히려 익숙하지. 거처를 갖게 된 요즘도, 가끔 일어났을 때 흙바닥 위에 펴놓은 낡은 방수포에서 깨어난게 아님에 당황할 때가 있었다. 최악을 경험하고 나면, 사람은 거기에 익숙해져버리는걸지도.
푹신하지도 않은 바닥에서 잠든지라 몸이 찌뿌둥한 상태에서 일어나려고 보니, 어느새 몇 명이 내가 자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는지 저마다 무어라 하며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자리를 내 줘야 하는건가? 아니, 그건 아닐거다. 요즘엔 그래도 노숙을 하는 스킬아웃은 비교적 줄었으니까.
그러면... 역시 그건가. 아침부터 사람 목숨을 노리다니. 그래도 자는 동안 목에다가 칼날을 꽂는다던가 그러진 않아서 다행이다. 물론 행여 그럴까봐 어느정도는 신경을 쓰며 잠들어, 자는지 깨는지 모르는 그런 상태의 선잠을 잤으니까.
"신사들 나셨네..."
자는 동안 암살을 하지 않음에 아주 감사라도 해야 하나? 그렇다기엔 사람 잠을 방해한 값을 좀 치러 주셔야겠는데. 무릎을 세우고, 그 무릎을 짚고 끙, 하고 일어난다. 어깨와 등을 잠시 스트레칭한다.
"아침 운동을 좀 할까 싶었는데... 잘 됐어!"
날아오는 주먹을 좌측으로 몸을 기울여 피한다. 그리고 자세를 낮춰 파고 든 다음... 주먹을 비스듬히 위로 뻗었다.
그런 순간을 느껴본 적 있는가? 화창하고 쨍쨍한 날인데도 불구하고, 하늘을 지나가는 몇 점의 구름의 그림자 중 가장 진한 것이 자신의 머리 위로 낮게 드리우며, 다른 모든 것들이 햇살 아래 말갛게 빛나고 있는데 자신에게만 어두운 그늘이 드리웠을 때 몰려오는 알 수 없는 불길함을.
성운은 결코 감이라던가 눈치라던가가 좋은 편이 아니었다. 사람의 감정을 느끼고 공감하는 것은 잘했지만, 스멀스멀 다가오는 불행의 전조를 알아채는 데에는 취약했다. 인첨공으로 들어오는 버스에서마저 기대감에 부푼 가슴을 움켜쥐고 있었으니 오죽하겠나. 능력 카테고리라도 인투이티브 앱티튜드였으면 차라리 나았으련만 그는 자이로키네시스트였다.
그러나 그런 성운이라도, 어느 순간 자신에게 드리우는 암운을 눈치채게 되는 순간이 있었다. 그것이 아마 오후 2시경이었나 그랬을 것이다. 어느 카페에서 어머니와 아버지가 주문을 하나씩 하실 때, 두 분이 오래간만에 이야기나누시는 새에 아까 혜우에게 보냈던 메시지를 확인해보려고 핸드폰을 꺼냈을 때, 그 때가 최초였다.
1 오후 12:31 [ (보기에도 먹음직스런 빠네 파스타 사진.) ]> 1 오후 12:31 [ 혜우야, 여기 정말 맛있어! ]> 1 오후 12:31 [ 다음에는 우리 여기에 식사하러 올까? ]>
아까 보냈던 메시지 옆에 있는 1이 사라지지 않고 있었다. 이 때 성운은 조금 불안감을 느꼈다. 혜우가 지금 문자 보내기엔 바쁜 상황이라 답신이 늦는 상황은 있어도 답신을 확인하지도 않는 상황은 한 번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불안감을, 성운은 나직이 내리눌렀다. 아마 핸드폰도 못 볼 만큼 바쁜 일이 있나 보다, 하고 생각하면서. 그래서 성운은 그 대신 손에 들고 있는 프라페 사진을 찍어다가 대신 보냈다.
1 오후 2:14 [ (딸기 프라페 사진.) ]> 1 오후 2:14 [ 네 것도 하나 사갈까? 지금 하는 일 끝나면 말해줘~ ]>
그러나 잠시 뒤, 핸드폰을 확인해봤을 때에도 1이 사라지지 않고 있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그 얼마 뒤에도, 얼마 뒤에도······
1 오후 3:26 [ 혜우야? ]> 1 오후 3:27 [ 무슨 일 있어? ]>
1 오후 4:05 [ 혜우야 ]> 1 오후 4:05 [[ 📞보이스톡 해요 0:00 ]]
그 순간이었다. 지금껏 눈부시도록 밝은 햇빛 속에서 얼굴이 부서져라 행복하게 웃던 순간을 나직이 살금살금 따라붙던 그늘이, 혜우의 발목을 움켜쥐었다는 것을 직감한 때가.
성운의 얼굴이 납빛으로 질렸다. 성운은 잠깐 생각해보았다. 부장님? 바쁘신 분께 이런 일로 전화를 걸 수는 없어. 세은이? 아니야─ 걔도 알 것 같지는 않아. 아지? 여로? 이경이? 수경이? 정하? 동월이? 리라? 부부장님? 누구, 누구한테? 아버지? 아니야, 혜우가 아버지 연구소 소속은 아닐 텐데. 하지만 아버지께 말씀을 드려보면─
그때 손끝에 잡힌 것이, 피아노 선생님, 이라는 이름의 연락처였다. 혜우가 성운에게 소개해준 피아노 선생님, 박유준.
같은 학년 친구들이나 부원들을 놔두고, 혜우와 얼마나 가까운지도 알지 못하는 어른한테라─ 그러나 혜우와 얼마나 가까운지 잘 모르는 건 다른 아이들도 마찬가지 아닌가. 애인이라고 해도 사귄 지 얼마 안 됐는제 서로 친구 사정을 다 꿰고 있을 리도 없다. ···어른이니까, 뭔가 대책이 있을 거야. 참으로 대책없는 발상으로, 성운은 유준에게 연락을 넣었다.
1 오후 5:11 [ 유준 선생님, 실례합니다 ]> 오후 5:11 [ 주말 레슨 받는 서성운인데요 ]>
1이 사라졌다. 이내 무슨 일이냐고 묻는 대답이 돌아왔다.
[ 갑자기 뜬금없는 말씀 드려 죄송한데 ]> [ 혹시 혜우와 자주 연락하고 지내시나요? ]> [ 혜우가 지금 연락을 안 받고 있어서요 ]>
그리고 성운이 떨리는 손으로 보낸 질문 아래에 돌아온 대답은, 성운의 손을 마비시키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오늘 혜우가 소속된 연구소에서 음악회를 열었으며, 거기서 공황발작을 일으켰다고. 지금은 진정제 맞고 집에서 휴식 중일 거라고. 하얗게 질린 얼굴을 한 채로 핸드폰을 들여다보고 있던 그 순간 옆에서 툭 끼어든 게 어머니였다. 성운은 화들짝 놀라 손에서 폰을 떨어뜨렸다.
“─아들. 얼굴 표정이 왜 그럴까.”
핸드폰은 땅에 충돌하기 전에 공중에서 멈춰섰다. 성운은 다시 핸드폰을 집어들며, 식은땀을 흘리는 얼굴로 대답했다.
“벼··· 별 거 아니에요.” “아들.” “네··· 네?” “가봐야 하는 일인 거지?” “······”
호란은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성운의 얼굴을 톡톡 두드려 땀을 닦아주었다.
“엄마가 뭔가 도와줄 건 없고?” “···네. 그래야만 할 것 같아요. 친구가, 몸이 안 좋아서 누워있대서.” “어머, 그래? 축제날인데 친구 혼자 아파서 누워있으면 서럽겠네. 그래, 어서 가보렴.” “그─ 그래도 될까요?” “요녀석, 이럴 때에는 눈치있게 엄마랑 아빠가 간만에 오붓하게 데이트하도록 자리 비켜줘야지!”
>:D 하고 웃으며 머리를 박박 쓸어주는 어머니의 손길에, 성운의 눈가가 촉촉하게 젖어들었다. 호란의 표정이 <:D으로 바뀌었다.
“어이구. 이 녀석 아빠 닮아서 쥬시한 것도 전혀 안 변했네.” 하고 너스레를 떨고는, 호란은 말을 이어갔다. “성운아. 나는 너를 키우면서 너한테 ‘사내새끼가 눈물 같은 거 흘리면 안 되지!’ 같은 소리는 지금까지 안 했고, 앞으로도 안 할 거야.”
그리고는 그녀는 손수건을 들어 이번엔 성운의 눈가를 톡톡 두드려주었다.
“하지만 이건 기억해두렴. 병문안은 우는 얼굴이 아니라 웃는 얼굴로 가는 게 더 좋아. 알았지?” “···네, 알았어요, 엄마.” “그러면, 가봐. 친구 기다리겠다.” “다녀오겠습니다···!”
성운은 자신의 능력을 비행에 쓸 수 있음을, 그날 처음 알았다. 자신에게 역중력을 걸어 충분한 고도까지 떠오른 뒤에, 자신이 가고자 하는 방향으로 중력의 방향을 돌려버리면 되는 것이었다.
“약속했어요. 언제라도. 무슨 일이 있더라도.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놓치지 않겠다고요. 멀어지지 않고, 걔 옆에 있겠다고요.”
유준이 한숨을 푹 쉬는 소리가 들린 것 같았다. 그리고 잠깐의 침묵 뒤에, 어렵사리 입이 열렸다. 몇 시까지 어디어디에서 보자고. 성운은 주소를 한번 더 되뇌어서 유준에게 주소를 확인받은 뒤에, 난생 처음으로 중력편향 비행에 돌입했다. 무한한 절벽을 떨어져내려가는 것만 같았다. 눈을 보호하는 아무런 장구도 없이 바람에 고스란히 노출되는 눈이 건조하고 아렸다. 눈을 계속 깜빡이느라, 눈을 뜨고 있는 시간보다 감고 있는 시간이 더 많았다. 그러나 성운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결과적으로 유준이 말했던 장소에 착지했을 때, 성운의 눈은 토끼눈이 되어 있었다. 괜찮냐는 질문에, 성운은 혜우는 좀 어떠냐는 반문으로 대답했다.
아마 아직도 자고 있을 테지. 그러나 성운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유준이 혜우의 집을 문을 열 권한이 있는 것이 평소라면 신경이 쓰였겠으나, 성운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로퍼를 벗어다 현관에 가지런히 놔두고, 성운은 양말바람으로 종종걸음을 쳐 집 안으로 들어갔다. 덜컹 하고 문이 닫히고, 복도의 불빛과 센서등까지 사라지자, 서서히 꺼져가는 태양만이 집 안에 남아 난생 처음으로 와 보는 혜우의 집이 마치 서서히 심해로 잠겨들어가고 있는 것만 같았다.
성운은 걸었다. 몸무게를 가볍게 줄이니, 발소리도 작아졌다. 그리고 살며시, 문을 연다.
그 곳에는 혜우가─네가 있었다.
마음어 무언가 꽂힌 것처럼 아팠다. 눈은 시큰거려 잘 보이지도 않았고, 머리끈은 날아오던 와중에 어디로 날려갔는지 풀어져 달아나버려 머리카락은 엉망진창으로 헝클어져 있었다. 수 킬로미터의 열공을 가로지르며 얼굴로 맞은 맞바람에 진작에 다 말라버려 뻑뻑해진 눈알이 다시 젖어드는 게 느껴졌다.
그러나 그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네가 가장 위안을 필요로 할 때, 내가 이 자리에 있을 수 있었다는 사실만으로 충분했다. 그래서 성운은 그걸 흘리지 않기 위해 눈을 질끈 감았다. 그리고 눈물을 닦고는 눈을 다시 뜬 뒤에, 최대한, 평소와 같은 미소를 지었다. 병문안은 웃는 얼굴로. 눈썹은 그렇게 되지 못했지만, 이 정도로 충분했다.
한바탕 태풍이 몰아치고 겨우 잠잠해진 후, 유준은 그녀의 집 거실에 있었다. 체력적으로 지치기도 했고 잠든 이후의 상태를 살펴야 하기도 했다.
심해 바닥 같이 조용한 집 안 거실에 앉아있으니 머릿속에 아침부터 지금까지의 일이 빨리감기 하듯 되감아졌다. 그 중에는 자신에게 반박하던 백담의 모습도 있어, 더 빨리 넘겨버리려던 찰나,
- 선배가 담당한 후로 부상도 정신적으로도 더 위험해졌잖습니까?!
백담의 말 중에서 그 말만은 반박할 수 없었다. 정황으로 보나 데이터로 보나 명백한 사실이었다.
그러나 유준은 그 모든 것을 감내하기로 했다. 그 날, 제 앞에 선 창백한 소녀 앞에서 그렇게 맹세했었다.
우우웅
얼마를 그 곳에서 그러고 있었을까. 문득 진동 소리가 들려 고개를 돌리자 제 폰이 반짝이고 있었다. 시간이, 오후 5시쯤 되었던가. 오늘 연락 올 곳이 없는데 라고 생각하며 메신저를 켰다가 심장이 쿵 떨어지는 느낌을 받았다.
서성운. 그 세 글자가 박힌 톡방에 새 메세지 표시가 떠 있었다. 무시할까 했지만 곧 생각을 바꿔 메세지에 답을 해주었다. 답신은 빨랐고, 조금 지나 전화가 걸려왔다. 만나러 가도 되겠냐는 물음에 유준이 한숨을 쉬었다. 잠시만 기다리라 하고 생각했다.
머릿속으로 그녀를 떠올렸다. 지난 3년여간의 모습, 그리고 최근의 모습, 바로 어제의 무수한 문답을 나누던 그 모습까지.
3년간 단 한 순간도 흔들리지 않던 그녀가 흔들리고 있었다. 감았던 눈을 뜨려 하고, 나아가던 길을 멈추려 하고 있었다.
유준은 물었다. 정녕 봐야만 하겠느냐고. 소년은 대답했다. 약속했노라고.
어쩌면, 이라는 생각이 머릿속을 스쳐지나갔다. 깨달았을 때는 이미 성운에게 빌라의 위치를 알려준 후였다. 다시금 주소를 확인하는 말에 대답해주고 전화를 끊었다.
부디 이 선택이 실수가 아니길.
성운이 도착한 장소는 3학구의 외곽과 번화가 사이면서 주변에 시끄러울 일 하나 없어보이는 곳에 외따로 세워진 빌라 앞이었다. 잿빛 사각의 높다란 빌라 앞에 초췌한 모습의 유준이 나와있다가 성운이 도착하자 손짓으로 불렀다. 그리고 성운과 함께 입구에서부터 걸린 보안을 열고 들어가 12층으로 올라갔다. 가는 내내 말 한 마디 없던 유준은 12층에 도착해 그녀의 집 문을 열어 주면서도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전부 맡기겠단 듯이.
그렇게 들어가게 된 그녀의 집은, 물만 없는 심해 그 자체였다.
언제부터 드리워져 있었을지 모르는 암막용 커튼이 쳐진 창, 가구의 구색은 갖췄으나 어느 것 하나 사용감 없이 심지어 포장용 천마저 그대로인 거실, 냉장고 소리만 낮게 울리며 사용한지 시간이 좀 됐는지 물기 하나 보이지 않는 부엌,
그 모든 구조를 가로질러 들어간 방이라고 오죽했을까.
벽과 바닥에 긁힌 자국 여럿 있는 큰 방은 거실보다는 나았지만 그래도 사람 사는 곳 같지 않음은 여전했다. 방 한 가운데를 차지한 킹 사이즈 침대에 그녀가 누워있었으나 그마저도 장식 같았다. 여느 때보다도 창백한 낯빛으로 푹신한 베개가 아니면 목이 툭 꺾일 듯이 정말 아무런 힘도 없고 숨소리마저 희미했으니 성운은 그 옆에 다가가고서야 그녀가 숨 쉬임을 알 수 있었을 터였다.
그러나, 다정한 쓰다듬에도, 조곤한 속삭임에도, 머리를 받치고 옆에 누울 적에도 그녀는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성운이 옆에 기대 잠들어도 뒤척임조차 없었다.
그대로 자고 일어나면 조용히 숨이 사그라들어 있는 건 아닐까 싶을 만큼.
한편, 성운을 집에 들여보낸 유준은 잠시 연구소로 복귀했다. 연주회를 그렇게 뒤로 하고 나왔으니 수습해야 할 일이 산더미일 터였다. 그러나 이미 소장이 뒷수습을 다 했는지 할 건 없었다. 하여 유준은 소장 대리의 권한으로 백담의 모든 권한을 일시정지 시킨 후, 천천히 그녀의 집으로 돌아갔다. 읽을 책 한 권과 약간의 먹을거리와 함께.
본디 수면이라 함은 심신의 회복을 꾀하는 시간이겠으나 무엇도 비추지 않는 어둠을 그저 떠내려갈 뿐인 그것을 과연 올바른 수면이라 할 수 있을까. 위도 아래도 구분되지 않는 칠흑 속을 천천히 가라앉아가며 생각했다. 이대로 영원히-
...거의 끊길 듯 하던 숨이 어느 순간을 기점으로 크게 내리쉬어졌다. 무겁게 눌려있던 눈커풀이 서서히 올려졌다. 흐리멍텅한 푸른 눈이 허공을 응시하고, 차례대로 의식을 되짚었다.
여긴, 내 새로운 집의, 나의 방, 나의 침대와, 침구, 그리고 너-
기력이 없어 놀란 소리도 내지 못 했지만 눈 만은 근래 들어 제일 크게 뜨였다.
어째서, 어째서? 성운이 옆에 있는 거지? 여긴 내 집인데?
그러나 길게 생각할 시간은 없었다. 내 옆에 누워 잠든 하얀 얼굴을 바라보다 느릿느릿 몸을 일으켰다. 내가 덮었던 얄팍한 이불을 성운의 위로 덮어주고 미끄러지듯 침대를 벗어났다.
맨발 끌리는 소리를 내며 방 밖으로 나가 문을 꼭 닫은 후 곧장 욕실로 들어갔다. 옷을 채 어쩌기도 전에 샤워기를 틀어 물을 맞으며 구역질을 했다. 자는 사이 다시 채워졌는지 끝도 없이 쏟아진 위액이 흐르는 물에 섞여 흘러내려가는 걸 흐릿한 눈으로 보았다.
물로 헹군 입 안과 쓰라린 식도가 서서히 아물어감이 너무 선명하게 느껴져 소름끼쳤다.
들어간 김에 샤워를 하고 나오자 거실 소파에 앉아 태연히 독서 중인 유준이 보였다. 그가 앉기 위해 걷어낸 흰 천이 단정하던 거실을 되려 어지른 듯한 모양새였다. 젖은 옷 대신 가운과 수건을 두른 채 다가가니 그제야 유준이 책에서 눈을 떼고 나를 보았다. 서로 다른 이유로 초췌한 두 시선이 허공에서 맞부딪혔다.
"...이게 무슨 짓이야 지금?"
그 말문을 튼 건 나였다. 혹시나 방에 들릴까 한껏 낮춰 긁는 목소리였다.
"무슨 짓." "왜 쟤를 여기 데려왔냐고. 언제 내가 데려오랬어?" "아까 그렇게 울부짖긴 했지. 보고 싶다고." "그걸- 그렇게 해석을 해?" "그것도 그렇고, 약속했다며. 쟤랑."
담담한 대꾸에 도리어 말문이 막혔다. 고작해야 이틀 전에 한 약속을 내가 잊었을 리 없었다. 그렇지만, 그렇다고 이런 식으로 쓰이길 바라진 않았는데 나를, 보이려고 한 약속은, 분명...
"이것도 네가 자초한 상황이야. 천혜우."
나즈막하고 차분한 목소리가 날카로운 창이 되어 나를 꿰뚫었다.
"넌 반드시 책임을 져야 해. 내가 그렇듯이."
그 말에 소리 없이 유준을 흘겨보다 돌아섰다. 떨리려는 다리에 꿋꿋이 힘을 주고 방으로 가는 동안 뒤에서 시선은 느껴지지 않았다. 다시 방에 들어가 문을 닫을 때까지도.
...책임. 내 일에 무고한 누군가를 끌어들여버린.
구역질과는 다른 울렁거림을 애써 무시하며 침대로 기어올랐다. 샤워 가운 차림에 머리도 젖은 채였지만 어느 것도 생각하지 않고 그 작은 온기를 이불째 감싸안았다.
심연은 별을 밀어내지 않되 외면하고자 했다. 그를 그대로 어린 왕자로 두고 싶었음일까, 아니면 그저 잠깐 목을 축일 샘을 찾아온 여행자가 소금물을 마시지 않기를 바란 것일까. 그러나 그 바람은 참 지독히도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것도, 아주 이상한 방향으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작은 별의 조그만 빛은 심해 이곳저곳을 비추었고, 그것이 신기했음일까 탐났음일까, 외면하던 눈길을 돌려 별과 마주했음에도 별은 물러서는 기색 없어 그 자리에서 네가 자신을 바라보아 주기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 같다. 이윽고 난반사된 빛들은 심해에 찾아온 여름 한 조각이 되었으며, 네가 기대한 적 없던, 생각한 적도 없던, 여태껏 심해에 단 한 번도 쌓인 바 없던 이름 모를 퇴적물이 달과 별의 어느 여름날 한 장이 되어 얕게 내려앉았다.
이 별은 아직 모른다. 이 심해에 깊은 상처로 존재하는 거대한 해구를 이 별은 아직 알지 못한다. 이 별이 과연 거기에서도 빛을 잃지 않을지는, 너도 소년도 알지 못한다. 그러나 언젠가는, 어느 순간에는, 그 해구가 이 별을 들여다보는 순간이 다가올 것이다. 생각보다 훨씬 더 가까이에 있을 그 순간이.
혹여나 기억이 흐려질까 두려워지기라도 하듯 서로에게 더 선명히 남겨두기를 몇 차례를 마치고서야, 너와 성운은 다시 인파 사이로 돌아왔다. 어떻게 해야 할지는, 천천히 생각해도 될 것 같다. 자기가 원하는 것이 자신이 명확하게 알아내는 데에 생각보다 오래 걸리는 일들도 있기 마련이다.
성운은 네 말에 선뜻 고개를 끄덕이더니, 푸드 트럭과 델리 존을 보고는 고개를 끄덕이며 웃는 얼굴로 너스레를 떨었다.
“아, 여기 올 때 저기 지나왔는데. 아침을 좀 적게 먹고 나왔는데, 냄새 때문에 고생했어─ 빨리 가자.”
하고, 그는 부드럽게 네 팔을 톡톡 당겼다.
(이 아래는 푸드트럭과 델리 존에 대한 묘사를 따로 생각한 게 없으시다면 이어주세요)
각양각색의 푸드 트럭이며 노점, 대목을 맞이한 가게들이 즐비하게 늘어선 델리 존은 인파로 가득했다. 인첨공에서 살던 이들도 있었고, 인첨공 밖에서 15주년 축제를 즐기러 온 사람들도 많이 보였다. 그만큼 메뉴도 다양했다. 크레페며 탕후루 등의 디저트라거나, 슬러시며 프라페 같은 빙과를 파는 가게도 있었고, 떡튀순이나 우동 등의 분식, 핫도그나 츄러스, 꼬치구이, 케밥, 큐브 스테이크 컵밥, 하와이식 새우구이, 타코야키, 치아바타 샌드위치─ 개중에는 능력자들(주로 파이로키네시스트나 텔레키네시스트)이 화려한 이능력을 선보이며 손님의 이목을 잡아끄는 가게도 있었다.
“우와.”
화려한 풍경에 성운은 눈을 깜빡였다. 그리고 어찌할 줄 모르는 눈으로 혜우를 바라보았다. 메뉴가··· 너무 많다!
퍼스트클래스 제 3위. 디스트로이어. 그는 군복을 상의에 걸치고 주변을 가만히 둘러보고 있었다. 검은색 안대. 그리고 험상궂게 생긴 외모. 그 모든 것은 오늘도 그를 두려움의 대상으로 만들고 있었고, 어지간한 이들은 슬금슬금 그가 걸어다니는 곳마다 피해다니고 있었다. 그런 분위기를 자신도 알고 있었는지, 철준은 칫. 소리를 내면서 바나나 아이스크림을 들고 앞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대놓고 피하지 말라고. 어쩔 수 없는 것은 아는데."
자신은 그냥 이 행사의 경비를 맡고 있을 뿐인데, 왜 이런 시선으로 보여야 하는 것인지. 알고는 있었지만 묘하게 짜증이 나는 것 또한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한편, 그렇게 앞을 걸어가고 있는 도중 저 앞 쪽에서 보이는 모습에 철준은 잠시 발을 멈춰섰다. 아무래도 불량배 능력자들이 약한 능력자를 괴롭히고 있는 모양이었다. 돈을 내놓으라니, 없으면 몸으로 갚으라라던가, 맞고 싶냐라던가. 그런 말들이 들려오자 철준은 짜증이 난다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
"야."
그가 부르자, 누구냐는 듯이 불량배 능력자 3명은 철준을 바라봤다. 허나 곧 눈에 들어오는 그의 모습에 다들 침을 꿀꺽 삼키고 움찔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리고, 철준은 목소리를 확 깔면서 이야기했다.
"거지냐. 돈이 없으면 일해서 벌어. 어린 주제에 벌써부터 한푼 줍쇼를 하고 있어. 아. 아니면 혹시 차후에 돈 한푼 못 버는 무능한 인간이 될 것 같으니까 미리 적선 연습을 하는거냐? 응?"
"아, 아뇨. 이건 자, 장난..."
"나도 장난으로 너네들을 확 벗겨먹고 싶은데 협력해줄 수 있겠지? 돈 내놔. 다 내놔. 이것들아. 너희들이 장난이라고 했으니까 나도 장난치면서 신나게 놀아보자. 자! 풍월을 울려라! 뭐해! 빨리 춤 안 추고. 장난. 퍼레이드! 오늘 여기가 우리들만의 퍼레이드장이다. 알겠나?!"
"히익?! 죄송합니다!!"
점점 아래로 깔리는 목소리를 들으면서 3명은 뒤도 안 돌아보고 도망쳤으나 방금 전까지 돈을 뜯기고 있던 이 역시, 벌벌 떨더니 뒤도 안 돌아보고 다른 방향으로 도망쳤다. 그 모습을 바라보며 철준은 아이스크림을 입에 물고 칫. 소리를 내면서 다른 곳으로 발걸음을 옮기려고 했다.
"뭐, 됐어. 이런 거 잡으라고 있는 거니까. 다음엔 어딜 가볼까. 뭘 먹을까. 시간 한번 더럽게 기네. 언제 끝나는거야. 이 경비인지 뭔지 하는 거."
아무튼 오늘은 어지간하면 집에 있을 거라서.. 손 하나가 일단 더 비니 축제기간때 한번 돌려보고 싶다 하는 분이 계시다면 얼마든지요! 데이트건 그냥 일상이건 다 받는다! 라고 올려두기! 꼭 돌려야하는 것은 아니니까 그냥 편한대로 이때 한번 돌려볼까? 하는 분이 계시면 얼마든지 얘기해주세요!
당당하게 대꾸했다. 언젠가 이야기했던 그 리스트... 그곳에 녹 제거제나 윤활유는 없었던 모양이다. 아마 있더라도 굉장히 낮은 위치였을테니.... 게다가 수납할 곳이 없다는 것도 맞았기에, 다른 잇템들도 가지고 있지는 않을 것이다.
" 뭐 어때. 그것도 청춘의 일환이다. "
동월은 '모순' 에는 유한 면이 있었다. 다만 그 모순이 한발 더 나아가 자신에게 '불합리함'을 제공한다면, 아마 얼굴을 잔뜩 찡그리며 싫어할테지. 예를 들자면 애린이 동월에게는 평범하게 말해놓고, 정작 동월이 같은 말을 하여 '낯간지럽다' 라며 모순된 행동을 보이는 것은 괜찮다. 다만 '낯간지러우니 하지 마라' 라는 불합리함을 강요한다면, 그것에 화를 낼 자신이 있다고 해야하나. 이상한데서 유하고, 이상한데서 엄격한 면이 있었다.
" 그 아저씨 이름이 그렇게 복잡한줄은 몰랐는데. "
딱히 그 그룹에 관심이 없기에, 본명이고 뭐고 알 리가 없었다. 동월은 가수에 집중하기 보다는 노래 자체에 집중했으니까. 가수가 마이너든, 메이저든. 그저 노래가 좋으면 듣는 사람이었다.
" ..... "
믿는다. 믿어주길 바란다. 무거운 말이다. 아까 불청객과 나눴던 말들, 그 후에 애린에게 들었던 말들. 그것의 진실을 아직 동월은 모른다. 그것을 들으면 어떤 기분일까? 그런건 아무래도 상관 없겠지.
" 나도... 해야 할 말이 있겠지. " " 네가 날 믿어주는 것 처럼, 나도 널 믿을게. "
믿기로 했으니까. 진실을 마주하고 어떻게 되느니, 무슨 생각이 드느니 그런건 이제 중요하지 않았다. 믿기로 했다면 끝까지 믿으면 된다. 가슴에 올려진 손 위에, 동월은 자신의 손을 겹쳤다. 자신이 살아있음을 알리고 있는 심장박동이 애린에게 고스란히 전해졌을테다.
" ...그 기회는, 언제나 너에게 있었어. 지금도 가지고 있고. "
그것은 애린이 저지먼트이자 괴이부이기를 선택한 순간부터, 쭉 가지고 있던 기회였다. 다만 동월은 표현에 서투른 사람이었기에, 그것을 표현할 방법을 모르기에... 그저 그렇게 자기 혼자 조용히 흘려보냈을테다. 하지만 지금 이렇게 애린에게 전함으로써, 앞으로는 조금 달라질 수 있지 않을까?
" 네가 아니면... 더 이상 누구에게 의지해야할지 모를 정도로. " " 꽤 큰 부분이 되어있지. "
순간적으로 번거로운 우정들의 얼굴이 머릿속을 스쳤지만, 그것과는 다른 문제다. 그 우정들은 '의지' 라기 보다는 '동행' 이라고 해야할까. 고민거리가 생기면 털어놓을 수 있다. 또 들어줄 수도 있다. 하지만 서로가 잠시 쉬어갈 수 있는 '피난처' 와도 같은 역할을 한다는 것은, 우정들과 함께하는 '동행' 과는 조금 다른 의미이지 않을까. 자신의 삶에 있어 꽤나 큰 부분을 차지하게 된 소녀는, 동월에겐 어쩌면 작은 두려움을 느끼게 했을지도 모르겠다.
훈제였군. 타조 통다리의 훈제라니 무슨 맛일지 감도 안잡혔다. 나중에 먹어보면 알겠지.
" 카레는 안물려! 게다가 점보 카레라면! "
애린도 알겠지만, 동월은 꽤나 카레광이었다. 일주일중에 4번은 카레를 먹을 정도로 사랑하고 있는 것이다. 카레라면 얼마든지 먹을 수 있겠지. 점보 카레 3그릇을 먹었다고 하지만, 마음먹으면 4그릇도 해치울 수 있을테다.
" 역시 마음이 넓은 친구ㄱ.... "
말하다 말고 자신의 앞에 놓인 '무언가'를 쳐다보았다. 대충봐도 2인분은 훨씬 넘을것 같은 크기에.... 보라색 소스를 가지고 있었다. 아니 보라색? 어째서지? 여기는 붉은색의 매운 소스를 쓰는 것이 아니라 보라색의 맹독 소스를 쓰는 것인가? 동월은 아연실색한 표정으로 애린을 돌아보았다.
" .....유언은 우리집 책상 서랍에... "
헛소리를 지껄이던 입을 꾹 닫고, 한숨을 푹 내쉬었다. 아무리 그래도 일단 주문한건데, 먹지 않으면 실례다. 일단 반쯤 죽는건 확정인 것 같은데.... 그래도, 이곳까지 자신을 데려온 정성을 봐서라도 일단 먹도록 하자.
언제 온 건진 모르겠지만 어느 순간 옆에서 걷고 있던 동월의 모습에 철준은 발걸음을 멈춰섰다. 뭐지. 이놈? 하는 눈빛이 잠시 동월을 살며시 훑고 지나갔다. 아니. 언제 온 건지는 둘째치고, 자신에게 왜 이런 것을 제안하고 있는거지? 그렇게 생각을 하며 그는 동월을 빤히 바라봤다. 안대로 가려지지 않은 눈빛이 상당히 매서웠다.
"뭐냐. 너. 그때의 에어버스터가 데리고 온 고딩이냐? 그런데 왜 나에게 말을 걸고 있어? 네가 나에게 말 걸 이유는 없을 것 같은데? 그보다 뭐야. 오락실이라니. 핫. 오락실은 친구들과 같이 가라고. 아니면 뭐냐. 오락실에 같이 갈 친구가 없는거냐?"
아무렇지도 않게 거친 목소리를 내며 철준은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자신은 갈 마음이 없는 모양이었다. 애초에 여기저기 돌아다니면서 경비를 서고 있는데 오락실로 간다니. 큰일 날 소리였다. 물론 자신의 위크니스는 감옥에 가 있었으니 갑자기 위협받는 일은 없기야 하겠지만. 어쨌건 아이스크림을 한 입 베어먹은 순간, 이어 동월의 목소리가 들려왔고 철준은 빤히 그를 바라봤다.
"바나나 아이스크림이 어때서! 바나나는 영양품도 좋고 맛도 좋고 다이어트 음식으로도 쓰이는 완전식품이야! 그 바나나맛이란 말이다! 이거야말로 진짜 완벽한 아이스크림! 너희들처럼 아무런 생각없이 달콤하니까 먹어야지! 와! 그런 건 줄 알아?! 그보다 아까부터 뭐야! 시비 걸려는거냐? 꺼져. 고딩과 싸울 이유 없으니까!"
어서 저리로 가라는 듯이 철준은 훠이훠이 소리까지 내면서 손짓을 했다. 그리고 다시 앞으로 천천히 걸어가며 바나나 아이스크림을 먹었다.
"그래서 뭐. 진짜 볼일이 뭐냐. 왜 말을 거는건데? 진짜 싸우자고 또 덤비는거냐? 애송이."
뜬금없이 나타나서 친구가 적을 것 같다고 말을 하는 것에 철준은 동월을 바라보며 피식 웃었다. 이전에도 느꼈지만 참 재밌는 녀석이야. 아주 그냥 두들겨주고 싶을 정도로 말이지. 그런 혼잣말을 속으로 중얼거리며 그는 주먹을 쥐었다, 폈다를 반복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주먹을 들거나 하진 않았다.
"시끄러워! 내가 바나나 아이스크림을 좋아하는데 무슨 문제라도 있어? 바나나가 완전식품이니까 이것도 완전식품이야!"
그 이외의 반론은 듣지 않겠다는 듯, 그는 격하게 고개를 도리도리 저으며 남은 아이스크림을 입에 쏙 집어넣었다. 이어 그는 남아있는 종이 찌꺼기를 구겨버리더니, 이내 주머니 속에 집어넣었다. 나중에 쓰레기통이 있으면 버릴 생각인 모양이었다. 이어 그는 조금 더 빠르게 앞으로 걸었다. 당연하지만 동월을 떨궈내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그가 속도를 맞춰 걸어가는 것에 그는 표정을 찌푸렸다.
"그림자?"
그러다가 그림자라는 말에 철준은 발걸음을 멈추고 동월을 가만히 바라봤다. 어떻게 생각하냐니. 그것을 왜 자신에게 묻는가라는 의문이 가장 먼저 들었다. 이어 그는 피식 웃으면서 이야기했다.
"에어버스터가 시킨거냐? 그 애송이는 정말로 리더로서는 실격이로군. 뻔히 위험한 것을 알면서 이런 고딩들을 끌어들이기나 하고 말이야."
들을 가치도 없다는 듯, 그는 고개를 홱 돌리면서 다시 한번 저리 꺼지라는 듯이 손을 훠이훠이 저었다.
"에어버스터에게 전해라. 고딩이면 고딩답게 공부나 하고 놀기나 하고 청춘이나 즐기라고. 아무런 죄도 없는 애들 끌어다가 부하처럼 써먹지 말라고 말이야."
Q.그런데 이게 전부 대대로 내려오는 이명들인가요? A.모카고 초기에는 레벨5면 이명을 가질 수 있었다가 이후에야 레벨4에게도 이명이 주어졌는데 그 레벨4까지 가는 것도 상당히 멀고 험했기 때문에 레벨4에 도달하는 이 자체가 적었답니다. 그래서 대부분의 이명이 원래 뭐였는지는 저도 몰라요. (옆눈) 그냥 대부분이 캡틴이 대충 정하는 것이니까 아. 저 캡틴. 참 센스 없네. 하고 넘기면 됩니다. (옆눈22)
동월이 던진 나무막대기는 벽에 박히기 직전, 붕 떠오르더니 그대로 돌아가서 아마 동월의 옆을 스쳐서 저 뒤로 날아갔을 것이다. 돌아보지도 않은채로 능력을 사용해서 돌려보내는 것은 그의 실력인 것일까. 아니면, 그저 야생의 감 같은 것일까. 이어 그는 가만히 뒤돌아서 동월을 바라봤다. 무슨 감정이 담겨있는지도 알 수 없는 날카로운 눈빛이 그를 찌르듯 향했다.
"어린 학생이 암부 따위에게 발을 들이미는 거 아니야. 암부는 인첨공의 어둠 그 자체. 빛만 보고 살아야하는 학생들이 어둠을 보고, 어둠에 닿아서 뭘 할 생각이냐."
자신의 청춘은 자신이 정한다. 그 패기는 마음에 들었으나 암부에 발을 들이밀려는 동월의 행동은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작게 혀를 찼다. 그도 당연했다. 암부는 얽혀서 좋을 것이 없었으니까. 왜, 자신에게 그런 것을 묻는진 모르겠으나 자신은 적어도 답해줄 생각이 없다는 듯 그는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안다고 해도 알려줄 이유는 없지."
그것만은 명백하다는 듯, 그는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그리고 씨익 웃어보이더니, 동월을 향해 한걸음, 한걸음 천천히 나아갔고 숨이 닿을 정도의 거리가 되자 발을 멈춰섰다.
"너는 아직 죽기 너무 아깝단 말이야. 너 같은 녀석이 이 인첨공에는 더 필요해. 그러니까 죽지 마라. 죽을지도 모르는 곳에 발을 들이밀지 마라. 목숨은 하나뿐이고, 너무나 쉽게 꺾이지. 그건 내가 보증해줄 수 있어. 그러니까 암부 따위에 관심을 가지지 말고 축제나 즐겨. 애송아. 암부 따위와 얽혀서 눈 하나가 날아가고 싶은 것이 아니라면 말이야."
"아뇨. 아뇨. 그런 얘기 아녜요. 못 들은 걸로 해요. 그냥 축제 기간이고 아지 군이 열심히 하니까 그런 거예요." "그래요~? 다행이다아~ 그런데 연구원님은 축제 보셨어요~?" "볼 새가 없었답니다. 괜찮아요. 잘 쉬다 왔으니 이제 일해야죠." "저어... 연구원님 있잖아요~" "괜찮아요. 아지 군은 같이 즐길 사람이 있잖아요?"
에어버스터:오랜만이네. 플레어. 플레어:응. 에어버스터. 디스트로이어:그런데 우리 왜 모인건데?! 그보다 그 녀석은 또 빠진거야? 크리에이터:이 아저씨는 일이 바빠서 너무 자주 모이는 것은 곤란한데 말이야. 하지만 일단 진정해보자. 디스트로이어. 레드윙:그런고로 이 레드윙! 조만간에 새 앨범을 내는데 사실 분?! 디스트로이어:꺼져! 누가 레드윙 따위의 노래를 들어?! 웨이버:나! 나! 웨이버가 듣습니다!
"썰어버린다고? 대체 뭘 썰겠다는거냐? 실체조차도 모르고, 그 끝이 어딘지도 모르는 것을 어떻게 썰겠다는거냐? 허공에 칼을 휘둘러봐야 베이는 것은 아무 것도 없어."
철준의 눈에는 동월은 그저, 아무것도 모르고 설치는 애송이에 지나지 않았다. 어둠이 다가오면 닿지 않는 곳으로 도망치면 되고, 적당히 눈을감고 살아가면 되는데, 왜 굳이 그 어둠을 바라보려고 하는 것인지. 인첨공이 참으로 저주스럽다고 생각하며 그는 빠득 이를 갈았다. 대체 뭐가 이 학생을 이렇게 만들었는지도 포함해서 그는 괜히 짜증이 나 한숨을 후우 내뱉었다.
"뭘 안다고 지껄이는거냐. 아무 것도 모르는 주제에."
'자기 사람 건들면 가만히 있을 수 없다는거.' 라는 말 부분에서 철준의 눈빛이 매섭게 바뀌었다. 자신을 겨냥해서 하는 말이라는 것을 철준은 정확하게 알 수 있었다. 정확히는 그때 자신의 행동을 두고 하는 말이겠지. 이어 그는 동월의 멱살을 잡으려고 했을 것이다. 붙잡혔다면 그대로가볍게 공중으로 들어올렸을 것이고, 잡히지 않았으면 매섭게 노려봤을 것이다.
"기류가 이상하고 정보를 알아둬서 나쁠 것이 없어? 그냥 눈 감고 살아! 애송이면! 그런 위험한 것에 얽히려고 하지 마!! 에어버스터의 밑에 있으니까 정말로 눈에 뵈는 것이 없어서 그러는거냐?!"
거기서 잠시 말을 마친 그는 이를 빠드득 갈면서 큰 목소리로 외쳤다.
"그게 그렇게 어려운거냐! 이미 3학구의 문제는 끝났을터다! 또 문제가 일어난다면 너희가 나서는 것이 아니라 강한 녀석들에게 맡기면 되는거야! 어떻게 그럴 수 있냐고? 위험에 맞선다는 것이 그런 거다! 약한 녀석이 설쳐봐야 아무런 도움도 안되며 오히려 그 때문에 발목을 잡게 되고 더욱 강한 피해를 입게 되지! 자. 애송이. 너는 얼마나 강하지? 네가 할 수 있는 것이 뭐냐! 애초에 너는 왜 그렇게 나에게서 그 어둠을 파악하려고 하는거냐! 네가 지키고 싶은 것이 뭔게 이렇게까지 말하면서 나를 도발하는거냐!"
" ....그야, 난 이미 그런 것들을 썰고 있으니까. " " 썰리지 않는게 아니야. " " 실체가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존재하지 않는 것 까진 아닐테니까. "
실체도 모르고 끝이 어딘지도 모르는 것. 그런것은 이미 동월이 착실하게 썰고다니는 중이었다. 철준이 괴이에 대해 알고있을진 모르겠지만... 굳이 직접적으로 언급할 필요는 없겠지.
" 둘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지. 말한다 해도 추측뿐이야. " " 그래도, 아재가 그 인간을 아낀다는 것 쯤은 알 수 있었어. "
그것은 숨기려 해도 숨겨지지 않는 것이니까. 동월도 그 기분은 알고있었다.
" 자꾸 에어버스터를 들먹이지 마!!!!!!! "
동월은 철준의 손을 피하지 않았다. 멱살이 잡혀 공중에 들어올려지는 동안에도, 그의 하얀 시선은 철준의 눈을 피하지 않았을 것이다.
" 아무리 에어버스터여도, 부장이어도 내 앞길에 간섭할 수는 없어!!!! " " 난 원래 이런 놈이다!!!!! "
남들이야 어떨지 모르겠지만, 동월은 적어도 자신의 정체성을 확실히 확립했다고 자부할 수 있었다. 잠시 인간불신에 빠졌었어도, 잠시 방황하는 시간이 있었다고 해도 그것은 누가 동월에게 간섭해서 그런 것이 아니었다.
" 강한 놈들? 약한 놈들? " " 네가 패서 쓰러트릴 수 있는 놈들은 전부 약한 놈들인가? 그렇다면 넌 충분히 강한 놈이지. 인첨공의 3위까지 올라간 녀석인데! " " 그럼 그렇게 강한 넌!!!! 지금 뭘 하고있는거냐!!!!!! " " 강한 놈들에게 맡기라며! 그럼 그토록 강한 넌 지금 왜 이딴데서 경비나 서고 있는건데!!! "
...말은 이렇게 했지만, 동월은 딱히 철준을 탓하려는 의도는 없었다. 그도 그만의 삶이 있고, 자신만의 방식이 있는 것일테니까. 그것을 동월이 정할 권리는 없었다. 단지 반박을 위해 말한 것 뿐이다.
" 약자가 자기자신을 지킬 권리를, 네놈이 짓밟지 마!!!!!!!!!!!! "
약자라고 해서 항상 강자들에게 짓밟혀야 하는 것은 아니다. 그들이 시키는 대로 할 이유가 없다. 그들이 '약자를 지킨다'는 명목으로, 강자의 희생을 지켜보게 할 권리가 없다. 강철준이라는 강자도 자신의 삶을 자신이 정할 수 있는만큼, 동월이라는 약자도 자신의 삶을 직접 정할 수 있었다.
" 디스트로이어.... 아씨 이름 되게 기네. 아저씨 이름이 뭐야? "
철준이 본명을 동월에게 알려준다면, 동월은 디스트로이어나 아저씨가 아니라 이름으로 부를 것이다.
" 지금 중요한건 내가 뭘 지키고 싶어하냐, 그런게 아니야. " " 지금 인첨공은, 칼들고 있는 녀석이 자신과 대적할 히어로를 기다려주는 만화같은 세상이 아니야. " " 강자가 눈치채기도 전에 약자는 이미 썰려있어. 약자가 강자에게 기댄다는 말은 듣기엔 좋지만, 약자에겐 그저 공상같은 일이라고. "
낮게 깔린 목소리를 뱉으며, 동월은 자신의 멱살을 잡고있는 철준의 손목을 강하게 움켜쥐려 한다.
" 그렇다면 당신같은 강자들은, '닥치고 나만 믿어라' 라고 하면 안되는 거잖아. 그건 우리한테, 죽으라고 하는거나 다름이 없잖아. " " ...뭐 그래도, 지키고 싶은 것 정도는 있네. 확실히. "
한참 말을 쏟아내니 지친 듯이 한숨을 푹 내쉬며, 몸이 조금 늘어지는게 보인다.
" ....내가 그때 했던 말 기억해요? 뭐 사람으로써 너희들을 말리러왔니 뭐니 그런말 지껄였잖아. " " 그건 이거랑 결이 달라요. 그땐 놈들한테 '사람다운 삶을 살자' 라는 말을 하기 위해 뱉은거니까. " " 하지만 이번엔... 음. 당신한테 호소하는거겠네. '날 사람답게 살게 해줘' 라고. " " 강자들에게 보호만 받으면서 키워지는 약자는, 사람보다는 가축 같잖아. "
>>0 목조 테라스가 있다. 연구소의 한켠, 홀로 이상하게 시대를 엇나간듯한 근대 유럽 양식의 테라스에서는 아래로 축제의 물결이 지나가는 것을 관망할 수 있었다. 밑에서는 잘 보이지 않도록 주위를 관엽식물 따위로 장식하고 그 중간에는 테이블을 두어 휴게공간처럼 꾸며놓았지만 이곳을 이용하는 것 따위 두사람밖에 없었다. 첫째로 한쪽에 앉아 차를 마시는 오렌지색 머리의 소녀 이외의 다른 실험체가 없기 때문이었고 둘째로는 애초에 이 연구소가 사실상 상위기관에서 문제를 일으킨 인간들의 유배지같은 곳이기 때문이었다. 소녀의 반대편에 앉은 남자는 주름한점 없이 다려진 셔츠를 입은채 담배연기를 뻑뻑피워내고 있었고 소녀는 익숙하다는 듯 차를 홀짝이며 한 손으로는 홀로그램을 띄워 영화연구부의 예산신청서를 써내려가고 있었다. 남자는 테이블을 손가락으로 치며 소리를 냈다. 소녀가 그를 향해 주의를 돌리자 그제서야 남자는 입을 열었다.
"상황을 설명해주실까. 이 비디오는 어떻게 구한거야. 분명 그 여자의 개인실에 있었을텐데"
"좋아요."
남자는 소녀가 고개를 끄덕이며 그렇게 말하는 것을 들었다. 훔친 것 자체는 부정하지 않는건가. 현서가 몇주 전 정기보고를 위해 여자와 만난 이후부터 매일 몇시간 주기로 보내오던 연구결과에 대한 독촉이 사라졌다. 몇일 정도는 무슨 일이 있었던건가 해서 연락을 취해보았지만 상위기관에서도 아무런 연락을 취하지 않는다. 메일도 채팅도. 혹시나싶어 직접 가보기까지 했지만 돌아가라는 말을 들었을 뿐 상황에 대한 정보는 그 무엇하나 듣지 못했으니. 조만간 연락을 주겠다는 말을 믿고 기다리는 것 이외에는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다른 연구소에는 폐를 끼치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현서는 스스로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지만 성과에만 집착하는 그 여자와 현서는 제법 닮아있었다. 항상 내가 처리하기 어려워하는 문제만 들고온다는 점에서 그러했고 사소한 일에도 뒤처리를 남에게 맡긴채 자기 지위만 생각한다는 점에서도 그러했다. 그런 두사람이 마주쳐서, 한치의 양보도 없이 미치광이로서의 진심을 드러내고 승부를 겨루었다면. 두사람은 몰라도 남들은 상당히 곤란해진다.
"이유는 여러가지 짐작하고 있을거라고 생각해요. 단순히 그 여자가 죽일만큼 짜증났다는 변명이나 저의 옛날 실험데이터를 원해서라던가. 뭐 이런저런 이유가 있긴 합니다만."
소녀는 그렇게 말하며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저희는 저희의 이야기를 하죠. 커리큘럼대로 하시는건?"
"대놓고 죽일 생각은 없었다는건가."
"의사지망생한테 못하시는 말도 없네요 그거. 아동학대로 고소라도 당해볼래요?" "얼마전에 제가 했던건 그냥 커리큘럼이었어요. 어릴때하던 '실험'의 연장선. 덕분에 그 아줌마는 몇달정도 요양이 필요하게 되었지만."
현서는 찻잔을 내려놓고 주머니를 뒤져서 SD카드 하나를 건냈다.
"미리 말하지만, 그 실험은 자기 선택이 없으면 진행하지 않는다는 것 정도는 알죠? 직접 고안한 실험이니까."
"그 여자, 결국 자기한테까지 한건가."
소녀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남자는 sd카드를 받아들기를 주저했다. 이것 안에 무엇이 들어있는지는 안보고도 뻔했기에.
"어차피 곧 버려질 사람이었어요. 과거에서 벗어나지 못해서 어직도 시대착오적인 실험만 하고 있으니까.."
"제 멋대로 되지 않으니까 화가 난거지."
"그리고 분에 못이겨서 거의 자결에 가까운짓도 했네요."
무슨 결과가 일어나도, 우리에게 책임은 돌아오지 않는다. 그녀와 현서의 사이가 최악이라는 것 쯤 그 연구소를 드나드는 사람 모두가 알고 있었고 동시에 그 실험을 진행한 것 역시 그녀 자신. 현서는 그날 특히 그녀의 심기를 거스르는 말을 하기는 했지만, 자신의 커리큘럼을 마친 뒤 곧바로 귀가했으며 그녀가 현서에게 하던 폐기된 통각치료에 대한 실험은 그녀 스스로 진행한 것이다. 그녀가 쇼크로 인한 혼수상태에 빠진 것은 어디까지나 그녀 스스로의 선택. 위에서도 지시하지 않았으며 설령 했다고 하더라도 뒷배가 없고 실적도 거의 없는 일개 연구원에게 할 수 있는 것은 그리 많치 않을 것이다. ......그냥 그 여자도 알아서 처리해두란 거로군.
현서가 어깨를 으쓱였다.
"벌레에게 미래를 맡길 수는 없는 법 아니에요."
"그 여자가 했던 말이군."
"지금 제 절반 정도는 그 여자라서."
찻잔이 식었다. 폐기되었던 실험이었다. 이곳에서조차 아동에게 하기엔 과하다는 말이 나와서. 확실히 이제 막 초등학생이 된 아이가 제안한 '통각재현' 실험. 외부에 유사신경을 연결하고 시뮬레이션을 반복하는걸로 고통을 느끼게한다... 결국 실패로 끝났지만 아이가 그냥 죽으려고하는 걸로 밖에 보이지 않던 것이었기에. 혹시라도 자기가 살인을 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에 지레 겁먹어서 멈추자는 의견이 나왔었지. 그리고 그것에대해 실험을 계속해야한다는 주장을 펼쳤던 것이 나와 그 여자였다. 덕분에 둘이서 사이좋게 이 아이만 맡게된데다 나는 좌천까지 당했지만. ...원본보다는 하향 조정했는데도 사람이 혼수상태에 빠질정도의 실험을 몇배의 강도로 아이에게 했다는 건 숨길수 없는 치부였기에 겸허히 받아들였다. 그렇게 여유가 생기고 나서야 윤리를 챙길 수 있었다. ...그녀는 되려 출셋길이 막혀 히스테리가 늘었지만. 어쩌면 이것도 예정된 결과일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어디까지나 자신의 이름을 알려줄 생각은 없으며, 자신은 지금 디스트로이어로서 여기에 있다는 것을 그는 분명하게 했다. 그러면서도 그는 동월이 하는 말에 귀를 조용히 기울였다. 자신의 주장을 강하게 어필하며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고, 자신의 손목을 강하게 움켜쥐는 그 모습을 바라보며 철준은 작게 혀를 찼다. 이어 그는 동월을 아래로 내려주면서 멱살을 뿌리쳤다. 겁도 없는 애송이 자식이. 그런 말을 작게 중얼거리면서그는 입을 열었다.
"눈을 감고 살아가면, 네가 그토록 바라는 사람다운 삶으로서의 삶은 보장되지. 울타리 안이지만 말이야. 하지만 그것을 벗어나겠다는거냐? 네놈은?"
하. 생각보다 더 골치 아프네. 그렇게 생각하며 철준은 오른손으로 자신의 이마를 짚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가축 같으니까 지금의 삶은 싫다. 그렇다면 어쩌겠다는 것인지. 정말로 위험에 맞서서 뭐라도 해보겠다는 것인가. 뭘 믿고? 퍼스트클래스조차도 할 수 없었던 것을 저 녀석이 뭘 믿고 한다는 것인지.
"많이는 못 알려준다. 나는 여전히 너희 같은 애송이들이 어둠에 끼일 필요는 없다고 생각하니까. 그림자는 '총 3명으로 이뤄진 과학자 집단이 주축이며, 누군지는 모르지만 강한 능력자 하나를 아군으로 데리고 있다는 것 같더군. 그리고, '제로'라는 컴퓨터를 사용하고 있다. 뭐... 듣기로는 인첨공 최고의 AI라고는 하지만, 나도 자세히 아는 것은 없어. 그 관련은."
구성원 정도만 어느 정도 이야기를 하며 그는 동월을 가만히 바라봤다. 그리고 눈을 감으면서 한숨을 크게 내뱉었다. 진짜 짜증나는 놈이라고 생각했는지 그는 괜히 오른발로 땅을 있는 힘껏 쿵쿵 쳤다.
근데 개인적으로 지금 은우가 위크니스의 해방법 찾아내겠다고 혼자서 조용히 그림자 추적하고 있으니까... 은우가 조용히 자료를 정리하려고 부실에 개인 노트북 가지고 왔다가 피곤해서 깜빡 잠들었는데.. 그 늦은 시간에 부실에 뭐 놔두고 와서 잠깐 들렸다가 켜져있는 은우 노트북을 본 누군가의 일상도 솔직히 조금은 끌립니다.
결국 여기에 온 이들의 숙명이자 어쩔 수 없는 운명이라고 일축하며 철준은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적어도 자신은 아직 이 학생들이 그런 삶에서 벗어나는 것에 대해서는 긍정적이지 못했다. 어느 정도 동월의 패기는 인정하나, 그 자체를 인정하는 것은 또 별개의 문제가 아니겠는가. 영 마음에 안 드는지, 그는 괜히 발길질을 하면서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꺼져. 형님은 무슨 얼어죽을 형님이야. 필요없어."
형님이라는 말이 나오기가 무섭게 그는 반사적으로 꺼지라는 말을 내뱉으면서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런 말을 듣는 것이 영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이었다. 어쩌면 자신을 놀리려고 그런다고 생각하는 것일지도 모르지만, 이유에 대해서 철준은 굳이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어쨌든 동월이라는 그의 이름을 들으면서 그는 피식 웃었다.
"네놈에게 있어서 인첨공은 겨울인거냐. 하긴. 봄은 아니긴 하지. 지금은 여름이니까."
과연 이 학생이 앞으로 어떤 행보를 보일지. 조금 지켜볼 필요는 있겠다고 그는 생각했다. 그러다가 죽으면 죽는 거겠지. 그렇게 생각하는 찰나, 또 다른 제안이 들려왔다. 나중에 자신들이 위험해지면 한번은 도와줄 수 있겠냐는 물음에 철준은 피식 웃었다.
"개소리는 키우는 강아지한테나 가서 해. 내가 왜 너희를 도와줘야하지? 그림자랑은 얽히기 싫냐고? 암부와 얽히는 것이 싫은 것 뿐이다. 무서운 것이 아니라, 그놈들과 얽혀서 좋은 일이 없으니까. 핫. 네놈들이 별난거다. 건방진 저지먼튼 놈들 같으니. 간댕이가 배밖에 나와서 퉁퉁 부은데다가 제발 죽여주세요라고 외치고 다니는 녀석들은 이 일을 하면서 처음 본다. 별종들만 모인거냐. 저지먼트는?"
어림도 없다는 듯이 그는 고개를 강하게 도리도리 저었다. 하지만 이내 그는 씨익 웃어보이더니, 동월의 눈동자를 잡아먹을 것처럼 날카로운 눈빛으로 바라봤다.
"하지만 임무 관련으로 근처에 있고 임무와 얽혀있다면 조금은 생각해주지. 어디까지나 임무와 연관된 거니까 말이야. 자. 이 정도로 어울려줬으면 된거겠지? 할 말 더 없으면 꺼지고 바나나 아이스크림이나 먹어. 그거야말로 아이스크림의 정점이자 완전식품이다. 학생들은 완전식품만 먹고 자라야 나중에 병 안 걸리고 건강한 법이야."
여로도 사실 손이 꽤 큰 편인 것이 아닐까. 어쩌면 지금보다 키가 더 클 수도 있겠다. 아직 열일곱이고, 더 자랄 시간이 남아있으니. 크지 않아도 좋았다. 어느 쪽이든, 이미 소년은 자신을 감싼 온기를 느낄 수 있었다. 잠시 크기를 재보듯 쫙 펼친 손을 여로의 손등에 대보았던 소년이, 손을 거뒀다.
"....."
소년은 딱히 말을 하지 않았다. 뭔가 목소리를 내고 싶지 않은 탓이다. 그저 크기가 맞지 않는 팔찌를 매만지며 슬그머니 시선을 돌릴 뿐이다. 어딜 가지도 않고 이제는 얼굴도 가리지 않았지만 시선은 어긋났다. 여로는 그것도 갖고 나중에 만들어주는 것도 가질 것이라고 선언했으나, 소년은 답지않게 망설여졌다. 장식으로 둬도 괜찮지만..
".....아.."
마니또. 소년은 그 때 받았던 것을 아직도 가지고 있었다. 티켓도, 책자도. 종이학 스트랩은 소년의 휴대폰에 잘 달려서 종종 비행을 한다. 그리고 거기서 문득 떠오른 것이 있어 소년이 손을 움직였다.
"기다려."
하얀 소년이 팔찌를 분리했다. 여러 장의 종이로 이루어진 만큼 분리하고자 하면 그럴 수 있었다. 대충 반으로 나뉜 팔찌를 두고 여로의 손을 붙잡더니, 가느다란 손끝으로 여로의 약지 손가락을 만지작거렸다. 무언가 집중하는 듯 머뭇거리지도 않는 태도로 확인을 끝낸 소년은, 길이를 조절한 팔찌를 다시 둥글게 맞췄다. 마치, 반지처럼.
생각해보면 수익을 많이 내려 하는 노점도 아니고, 그냥 축제의 일환으로 하는거니 상관 없으려나 싶다가도, 그 선배라는 이가 별로 좋아하지 않을까 하는 걱정도 들긴 했다. 어느쪽이든 그의 후배가 감당해야 할 일이었지만. 자신을 멀뚱히 바라보다 표정 부드러워지는 후배를 보자 유한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뭔진 모르겠지만, 커다란 오해를 하고 있는 것 같은데.
"너라면 등신대처럼 서있기만 해도 손님이 꼬일 것 같긴 하지만..?"
굳이 재치가 필요할까. 하는 생각을 하다가도 돈을 손사래치자 일단 받아두라며 경진에게 돈을 쥐여주었다. 괜히 무상으로 판매한걸 알면 자리를 맡기고 갔다는 선배에게 혼날까 싶은 생각이었다.
"초콜릿 있어? 아니면 바나나라던가. 단거면 다 좋아."
그리고 돈은 받아둬. 혹시 모르니까. 라며 키득거렸다. 솜씨를 구경해보겠다는 듯 경진이 만드는 모습을 보며 팔짱끼려고도 하였던가.
>>864 혜성이가 위험한 상황이라면, 혜성이를 위험에 빠트린 상대를 확실하게 죽일 수 있기 위해(?) 오히려 도움을 요청할지도요.
>>866 00. 갑자기 금이가 앞에 다가와 설까요. 물끄러미 혜성이를 바라볼 적에. 살짝 상체를 굽히면서 혜성의 귓가에 낮은 목소리로 "아까부터 보고 있었는데, 대화하고 있는 그 새끼 누굽니까?" 할 거예요. 음. 🤔 그러니 하는 말이지만, 요즘 훈련에서 나오는 K에 대해서 궁금한 게 많아요?
무려 0.5등이 상승했다고 한다. 사실 그게 어째서 잇템인지는 동월도 잘 모른다. 다만 등수는 매주 변하고 있기는 했다. 그 중에서도 쇄빙기가 0.5등이나 상승한 것이라면 꽤나 엄청난 변화였다.
" 글쎄, 다른 청춘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내 청춘은 유들유들하지. "
시시각각 표정이나 감정이 변하는 그의 청춘은 애린의 말대로 유들유들할 것이 분명했다. 킥킥거리며 장난스럽게 말한 동월은, 퀸의 이야기에 이마를 짚었다.
" ...몰라. 대충 퀸이라 해. " " 애초에 퀸 말고 다른 별명 없지 않아...? "
딱히 제대로 알지도 못하는 인간에게 쏟을 시간은 없었다. 당장 주변사람 챙기기도 바쁜데 가수까지 신경쓰기엔... 너무 촉박한 인생이었으니까.
" 뭐... 좀 묵직한 말이긴 했는데. " " 괜찮아. 믿겠다고 한 이상, 그걸 무를 생각은 없으니까. "
동월에게도 조금 벽창호같은 면이 있었다. 자신이 한 번 뱉은 말은 끝까지 책임지려 한다는 면이었다. 그렇기에 애린이 부담되는 말을 했다고 하는 것에, 회피하지 않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이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애린이 하는 말이었기에 이리도 쉽게 '믿는다' 라는 말을 했을지도 모르겠다.
" 괜찮아. 뭘 그런걸로 나쁜 아이야. " " 네 눈 덕분에 어떤 마음인지는 잘 알것 같으니까. " " 그냥, 생각나면 말해. 모르겠다면 그런대로 괜찮아. "
대답을 강요할 생각은 없었다. 단지 저 수많은 빛에 둘러싸인 눈을 보면 어느정도 알 수 있을것 같았다. 지금 애린이 어떤 기분인지를. 어쩌면 저것이 말보다 더 확실한 대답이지 않았을까? 애린의 말대로 눈은 마음의 창이라 할 수 있을테니까.
" ...... " " 응. 그렇겠지. "
아무리 위험한 곳이라 해도.... 머릿속에 떠오른 어느 장소가 있었다. 과연 동월은, 애린을 그곳에 데려갈 수 있을까? .....아마, 불가능할테지. 그런 말은 하지 않은채로, 동월은 살짝 웃는 애린을 향해 밝게 웃어보였을테다.
" 괜찮아 그거 괴이부 애들도 몰라. " " 그냥 알아둬. 나 죽으면 유품 정리할 때 거기에 있다고 말해. "
분명 그것은 단지 질 나쁜 장난일 뿐일텐데... 현재 그가 처한 상황을 생각해보면, 어쩐지 거기에 진짜 유서가 있을지도 모르겠다.
" ...... "
일단 한입 크게 물고 씹던 동월은, 뱅글이 안경을 착용한 채로 자신을 관찰하는 애린에게 째릿, 하고 날카로운 눈빛을 한 번 날렸다.
꿀꺽.
그것을 삼키고서는, 잠시동안 멈춰있었다. 그리고 그 다음 순간에... 애린은, 안 그래도 죽어있는 하얀 눈이 점점 더 죽어가는 것을 볼 수 있었을테다.
" ....맛있네! "
모든 표정을 잃어버리고, 눈에서 없던 생기마저 사라져버린 그는 애린을 향해 고개를 돌렸고,
" 너도 한 입 먹어볼래...? "
애린은 그의 입 속에서 작은 불꽃놀이가 일어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었을테다. 가까이 가면 데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