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장도 옛날 번역이라 어렵게 되어있고 비유도 많고 읽기 쉬운 글은 아니지. 간단한 일화도 막 두세번씩 곱씹어야 뭔말인지 이해할수 있거든. 어떻게 해석하는건지 예를 들어주면 조금 도움이 되려나 싶어서 하나만 가져와볼게.
한 장을 통째로 가져오는건 글자수를 너무 많이 먹으니까 자세한 이야기는 생략하고 대신 위치를 알려줄게.
대충 요한복음 4장에서 예수님이 사마리아 지방을 지나가다가 우물가에서 쉬게 돼. 그때가 6시 쯤이었는데 한 여인이 우물에 물을 길러 나와. 오래 걸어와서 지쳐있던 예수님은 여인에게 물을 조금 나눠달라고 해. 하지만 그때 당시에 유대인은 사마리아를 천시했거든. 그래서 원래 유대인들은 우리를 상종도 안하더니 목마르니까 물달라그러네? 하고 거절당하지. 중간 문답은 대충 생략하고, 예수님은 여인에게 말해. 너는 오히려 내게 물을 달라고 구해야 한다. 이 우물의 물은 마시면 다시 목마르지만 내가 주는 물을 마시면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그 말을 들은 여인은 물동이를 내려두고 마을 사람들에게 가서 복음을 전하게 되지.
자 여기서 마시면 목마르지 않은 물이 복음을 의미한다는건 추측하기 쉬워. 하지만 그걸 알아도 좀 이상하잖아? 복음을 들으면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거라고 말은 해도 기독교인이라고 물을 마시지 않고 살수 있는건 아닌데. 아무리 들어도 뜬구름잡는 소리같은데 그걸 듣고서 여인이 갑자기 복음을 전하는 사람이 됐다고?
사실 여기서 핵심은 다른데 있어. 이 일화에서는 여인이 재혼을 6번 한 사람이라는게 나오거든. 그런데 현대에도 이혼하고 재혼하는게 쉬운 일이 아닌데 그때 그 시절이면 어떻겠어. 자세한걸 알수는 없지만 여인이 계속 자신의 진정한 '남편'을 찾고자 재혼을 반복해왔다는건 추측할수 있지. 인간관계에 대한 채워지지 않는 갈증이 있는거야. 예수님은 그 부분을 지적한거지. 너 지금 아무리 재혼을 반복해도 목마를 뿐이지 않냐.
사실 여인은 예수님한테 남편에 대해서 말을 하지 않았어. 그도 그럴게 외부인이고, 초면이고, 심지어 유대인인데 자기 사정을 줄줄 말할리가 없지. 오히려 남편이 없다고 말했거든. 그런데 예수님이, 이전에 남편이 다섯이 있었고 지금 남편도 남편으로 생각하지 않는구나? 하니까 놀란거지. 말도 안했는데 정확하게 맞춘거잖아.
이때 마을로 먹을걸 구하러 떠나있던 제자들이 돌아와. 제자들은 예수님이 사마리아 여인과 대화하는걸 보고도 왜 이방 사람과 대화하세요? 이러지 않았단말이야. 비록 속으로는 이상하게 여겼어도. 그런데 아까도 말했듯이 당시 유대인은 사마리아인을 천시했단말이야. 그게 여인에게 알려준거지. 이들의 신은 우리가 이방인이라고 차별을 두지 않네?
그 모든게 맞물려서 여인으로 하여금 예수님은 선지자고 그들의 신은 진짜구나 하고 생각하게 만든거지.
자 이렇게 간단한 일화를 하나 해석해봤는데 청새치씨가 성경을 해석하는데 도움이 되면 좋겠네. 좀 어렵지... 많이 어렵지...
뭐 경전이니까 그런게 아닐까. 해설서가 아니잖어. 성경은 그 시대에 쓰인걸 보존하고 번역만 해서 내놓은건데 해설은 후대에 이뤄지는거니까. 또 성경은 예언서적인 면모가 있다고 했잖아? 기독교의 역사가 긴 만큼 많은 연구가 있었기에 정설로 받아들여지는 해석도 많지만 예언서기에 한가지 해석으로 단정할수 없는 부분도 분명히 있고.
오늘 심심하고 할짓 없는 시간에 좀 생각해봤거든. 지금의 청새치씨한테 추천해줄수 있을만한 책이 하나 있는데 한번 고려해보면 어떨까 싶어.
소개할 책은 스크루테이프의 편지라는 소설이야. 아니 갑자기 왜 소설? 그 이유는 이 책이 악마인 스크루테이프가 인간들을 현혹하는 방법에 대해 조카에게 편지로 조언을 해주는 내용을 담고 있거든. 악마의 입장에서 서술된 만큼 상당히 악마적인 내용이지만, 역설적으로 그렇기에 기독교인들이 어떻게 살아야할지에 대해 아주 잘 담고있지. 반대로 하면 되니까!
청새치씨가 궁금해하는게 기독교의 구원이 다른 종교에 비해서 너무 쉬워보이는데 그게 사실인지 아닌지에 대한 궁금증이라고 이해했거든. 내가 이해한게 맞다면 이 책은 아주 좋은 대답이 될수 있을거라고 생각해. 악마가 기독교인을 유혹하는 내용이라면 기독교인이 살면서 겪는 어려움이 그대로 들어있지 않겠어? 또 소설책인 만큼 성경에 비해 이해하기 쉽게 쓰여있지.
하지만 조금 추천해주기 망설여지는 부분도 있어. 이 책은 이걸 읽는 독자가 성경 내용을 알알고있을것을전제로 쓰여진 책이란거야. 이 책만 먼저 읽었을 때는 그게 뭔데? 싶을 부분이 없지 않거든. 그리고 하지 말아야 할 행동을 거꾸로 뒤집는건 해야 할 행동의 일부이지 전부가 아니라는것도 있어. 너무 단편적인게 아닌가 싶은거지. 앞의 단점과 일맥상통하는거야. 독자가 성경을 알고있다는걸 전제로 쓰였다...
이러한 우려사항이 있음에도 상술한대로 이 책은 꽤 괜찮은 책이거든. 장단점이 있으니 청새치씨가 판단해봐. 이걸 읽을지, 성경을 읽을지, 이걸 읽고 성경을 읽을지, 성경을 읽고 이걸 읽을지, 그리고 기타 등등.
내 생각엔 기독교의 구원이 쉽다기보단... 뭐, 당연한 이야기지만 구원은 쉬운 길일 수가 없다는 거 알잖냐? 그런 뜻으로 한 말은 아니고... 성경이 신자들에게 말하는 걸 보면 과정지향적이라기보다는 목표지향적이랄까? 일단 나는 그렇게 이해가 됐음. 내가 지금 잠언을 한 30% 정도 읽어가는데 어떤 주제를 설명할 때 취하는 기본적인 구조는 '뭐는 되고, 뭐는 안 된다' 이거고, 매 장마다 주제를 가지고 이야기하면서 삶의 방식을 엄청 조금씩 가르치는 것 같단 말이지.
분노를 다루는 것만 봐도 잠언 14장 17절에 "노하기를 속히 하는 자는 어리석은 일을 행하고" 라 하고, 15장 1절에 "유순한 대답은 분노를 쉬게 하여도 과격한 말은 노를 격동하느니라" 하면서 분노와 관련된 경험을 제공하고 있다... 라고 나는 이해했는데, 그 왜, 배우는 과정에서 다들 그렇듯이 '들으면 그렇구나 하는데 막상 닥치면 잘 모르는' 상태가 되는데 성경이 이걸 도와주진 않더라고. 그래서 아까 설교를 듣는다는 것이 전제되냐고 물어본거임. 아니면 해설서를 같이 보는 게 좋다던가?
무튼 기독교의 구원이나 성경이 쉽다고 생각하진 않고요... 위의 이유로 진의를 오해하기 쉽다고는 생각함.
이런 생각이 왜 들었나 생각해보면 내가 동서양의 경전을 골고루 손대서 이것저것 비교가 되니까 그런 것 같음. 일단 주역이랑 불교 경전을 보면 한 가지의 사고 흐름을 쭉 보여줌. 주제보다도 흐름을 더 중요시한다는 느낌이랄까... 특히 불교의 경전은 생각하는 법을 기르고, 질문하도록 한다면 성경은 한 줄 한 줄이 세세한 행동 강령이라 신자가 고민할 부분을 줄이는 방향으로 보임. 요구사항이 적다고 말한 건 이런 부분 ㅇㅇ
예수님 믿으면 천국 가는 거긴 하지만 당장 천국 갈 건 아니니까 행동하는 건 이러이러하게 하거라~~~ 저런 건 안 된다~~~~ 그러면 천국 갈 수 있으니 딴생각 말거라~~~~~~ 라는 느낌.
분노가 나쁘다는건 알겠는데 실제로 닥쳤을때 어떻게 해야하는지 실전 노하우를 알려주진 않는것같다는거지? 일단 대답하기 전에 이건 내가 아는 부분에 대한 이야기일 뿐이라는거 밝혀둘게. 왜냐면 기독교는 교파가 상당히 많거든. 근데 난 다른 교파에 대해서는 잘 모르니까 내가 모르는 부분을 일반화할수는 없어서.
난 가족이 전부 침례교고, 침례교 교회 위주로 다녔고, 친구도 침례교야. 그런 내가 겪은 침례교 교회의 분위기는 '그런거 안알려준다'야. 침례교가 스스로 깨닫는걸 중시하는 경향이 있거든. 여기는 공식적으로 못박아진 교리도 없어. 물론 성경에 기반하여 기독교의 핵심이 되는 부분은 당연하게 모든 기독교가 공유하는거고. 교리가 없다는건 기독교인은 술을 마셔도 되느냐 마느냐같은 실천적인 부분 말하는거야. 자기 자신이 성경을 읽고, 기도해서 얻은 답을 따르는걸 기본으로 해. 남이 시키는걸 마냥 따라가는건 진정한 자의가 아니라는거야. 자기 스스로 결단하고 행해야 가치있다는거지. 물론 한국에서 교회는 담임목사 한명이 자기 교회를 맡아서 운영하기때문에 같은 교단이라도 성향이 좀 달라지는 경우가 있어. 그래서 신천지같은 사이비가 우리 기독교에용 하고 속이기도 쉬운거고... 뭐 이건 옆길로 새는거고 아무튼 모든 케이스를 일반화할수는 없다는 이야기야. 경향성을 따졌을때 침례교는 자율적으로 두려고 하는 경향이 강하다고 이해하면 될거야.
내가 작품 감상할 때 주가 되는 것들 다음으로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주변 인물이다. 헤어질 결심 왜 칭찬하냐... 주연 둘에 조연 여섯. 주연 하나에 조연 셋씩 달아서 딱 양 쪽의 사연이 어떤지를 알 수 있게 해주는 정도로 적당해서 좋았다.
주변인물을 잘 설정해야 주인공이 잘 드러나는 것 같음. 그래서 한국 드라마는 재미가 없어. 조연들이 영혼이 없거든. 그냥 사건으로만 스쳐지나가지, 그들도 어떤 욕구가 있는 인물로 다루지 않는다. 혹은 또 조연들의 욕구를 너무 존중한 나머지 이야기가 산으로 가버리기도 함.
한국에서 작품하는 사람들... 특히 대중문화산업에 기여하는 사람들은 주인공이 이야기 끝까지 가지고 갈 가치나 특성을 쥐어준다고 생각함. 그래서 밋밋하고 재미가 없는 거 아닐까? 주연들과 조연들 사이의 관계도 상호작용도 너무 약한거임. 어쩌면 우리나라 사람들은 사실 사람들과 어울리기 싫은 게 아닐까? 그런 게 피곤하니까 작품으로도 보고싶어하지도 않는 건 아닐까?
생각해보면 진짜 웃기고 괜찮았던 드라마 영화들은 다 인물들이 엄청난 변화를 겪었음. 여기서 변화란 캐릭터의 속성이 아예 변해버렸다는 거임.
<38사기동대> 백성일은 청렴한 세금징수원이었는데 EQ 쩌는 사기꾼이 다 됐고, <극한직업> 팀원들은 치킨집 경력이 생겼고, <정직한 후보> 주상숙은 거짓말을 할 수 없는 몸이 되어버렸음. 한국 코미디만 봐도 일단 이 정도. 계속 칭찬하는 <헤어질 결심>은 무엇이든 해냈던 인물들이 사랑 앞에 좌절했지.
<그린 북>의 주연 두 명은 절대 어울릴 것 같지 않던 서로와 가장 친한 친구가 됐고, <멘체스터 바이 더 씨>의 주인공은 흔한 멍청이들처럼 편하게 살다가 사고 이후 감당하기 어려운 고통을 혼자 짊어져야만 했다. <아이, 로봇>의 주인공은 안드로이드를 바라보는 시각이 완전히 달라졌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