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식은 영원하단 말이 있지만 안식이고 뭐고를 인지할 인지능력이 없겠지. 애초에 내가 무언가의 주체가 될 수 없는 상태가 죽음이니까.
삶은 저주와 같다. 자신이 행복하다고 태어나서 행운이라고 착각하게 만드는. 삶을 이어 나가면 이 뒤로 무언가 더 좋은 일이 있을 거라고 아니면 상황이 바뀔 것이라고 세뇌시키는. 그냥 모든 게 싫고 힘들고 싫증 나니까 되지도 않는 변명을 하고 있다고 생각할 때도 있다.
하지만 가슴 한켠엔 결국 이 모든 게 의미 없다고 느끼고 있다. 그저 수십 년이면 스러질 인생에 무얼 위해 울고 웃고 아프고 기쁜 걸지 모르겠다. 인생에 있어서 그저 어둠만이 있었으면 덜 비참했을 것을. 극히 적은 순간들이 빛나서. 음영을 더 짙게 만든다. 어둠을 더 어둡게 만들고 날 더 비참하게 만든다.
솔직히 두렵다. 죽는 것이 두렵지 않다면 거짓말이다. 하지만 살아가는 것은 두렵고 화나고 슬프고 귀찮고 역겹다.
아직은 죽음의 두려움이 크다. 그래서 이러고 있을 것이니까. 누군가는 창문을 바라보면 날씨가 맑네. 비가 오네 풍경이 좋네를 생각할 테지만. 나는 여기서 떨어지면 아프게 죽을까부터 생각한다.
아프고 싶지 않다. 힘들고 싶지 않다. 실패하고 싶지 않다. 거절당하고 싶지 않다.
인정욕구로 점철된 삶을 살았다가 모든 것을 상실한 의미 없는 시간들이다. 그저 처음부터 태어나지 않았으면 좋았을 것을.
숨쉬는 게 아프지 않다는 것을 축복이라고 말할 수 있다면 내 생애는 처음부터 저주받은 것이었다. 숨을 쉴 때마다 아파오는 몸, 성큼성큼 다가오는 최후, 아파트 옥상에서 떨어트린 알루미늄 캔이 얼마나 아플지를 걱정하는 게 차라리 덜 아플 정도였던 나날들. 이윽고 끝이 찾아오게 되어있기에, 궁극적으로 나의 것인 것 따위는 존재할 수 없는 그런 인생. 실증할 수 없는 실존이라는 건 너무도 허망하지만, 언제고 놓아버릴 준비를 하는 것보다는 처음부터 잡지 않는 것이 나은 것 같아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