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 전, 한 아이가 몹시도 아팠습니다. 아이의 부모는 아이가 낫길 바라며 기도했고 간절한 기도를 들은 어느 신님이 부모 앞에 나타났습니다. 붉디 붉은 옷과, 붉디 붉은 꽃관을 두른, 붉은 머리, 붉은 눈의 신님은 기꺼이 아이를 낫게 해주었습니다. 그리고 신님은 말했습니다.
[이 아이는 어려서부터 병마와 재난에 시달릴 팔자로구나. 허나 이리 내게 구명을 받은 것도 무언가의 연, 이 아이의 팔자를 내 거두어 보살펴 주주고자 한다. 받아들이겠느냐.]
아이의 부모는 붉은 신님의 권유를 받아들였습니다. 붉은 신님은 온화하게 웃으며 꽃관의 가지를 하나 꺾었습니다. 가지에 핀 붉은 꽃을 잠들어 있는 아이의 입술에 올리자 붉은 꽃이 사르르 녹아 아이에게 스며들었습니다. 꽃봉오리만 남은 가지는 아이의 부모에게 주며 붉은 신님이 말했습니다.
[약속의 증표로 이것을 주마. 잘 보관토록 하여라. 이 가지가 너희와 아이를 지켜줄 것이니.]
그리고 붉은 신님은 덧붙여 말했습니다.
[아이가 성인이 되어 이 가지에 새로운 꽃이 피거든, 약속의 대가를 치를 때가 온 것이다. 이 사실은 너희만 담고 있어야 할 것이야.]
그 말을 남기고 붉은 신님은 떠났습니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붉은 신님, 아카하나히메의 꽃가지에 붉은 꽃이 피는 날이 당도했다.
"...벌써 시간이 그리 흘렀던가."
금빛 대좌에 느긋히 앉아 있던 그녀가 문득 중얼거렸다. 십여년 전, 그녀가 구명하였던 한 인간 아이가 성인이 된 날이 온 것이었다. 그 약속의 증표로 주었던 꽃가지에 선명히 피어난 꽃의 기척이 그녀에게 느껴졌다. 그 꽃 너머로 조곤히 감사를 표하는 아이의 목소리도 들려왔다.
앞으로의 팔자도 모르고 감사를 표하는 아이, 이제는 청년의 목소리에 그녀는 피식 웃었다. 웃는 얼굴로 대좌에서 몸을 일으켰다.
사뿐, 사뿐, 운신하는 소리 일절 없이 본당을 가로지르는 그녀를 향해 나이 지긋한 할멈이 공손히 허리를 숙였다. 그녀는 붉은 머리와 붉은 옷자락을 살랑이며 거처의 뒷편으로 향했다. 붉은 토리이가 일렬로 이어진 그 앞에 서서 쥘부채를 펼쳐 한 번 슥 휘저었다. 그러자 토리이 사이로 새하얀 안개가 가득 채워지며, 그녀의 모습이 그 안으로 사라졌다.
아이가 성인이 된 날, 아이의 부모는 꿈을 꾸었습니다. 하얀 안개가 뭉개뭉개 피어나는 어느 공간에 붉은 신님이 서 있었습니다. 그 오래 전과 변함 없는 모습의 붉은 신님이 말했습니다.
[아사히나 부부여. 약속의 때가 왔느니라. 오래 전 약속의 대가로 너희 아이의 여생을 받아가겠으니, 너희는 염려 말고 안심하며 지내거라. 아카하나히메의 일명을 걸고 잘 거두어 줄 것이니라.]
붉은 신님은 부드러이 미소 지었습니다. 아이의 부모에게 평온과 안심을 주는 미소였습니다. 그런 꿈이, 아이의 부모에게 비추어졌습니다. 모두 잠든 늦은 밤, 아사히나 가의 작은 제단에서 빛이 흘러나왔다. 어느새 한 송이 붉은 꽃이 핀 꽃가지로부터 나오는 빛이었다. 반짝이던 빛이 한 순간 크게 퍼지자, 붉은 형상 일렁이며 그녀가 모습을 드러내었다. 역시나 소리 없이 제단 앞에 내려선 그녀는 먼저 아사히나 부부에게 향했다.
벽도 문도 거침없이 통과하여 부부의 침실에 들어선 그녀는 부부의 꿈에 모습을 비춰 때가 되었음을 알렸다. 인간들의 이별은 언제 어느 때 어떤 형태건 아쉬우며 안타까우니, 그럴 일 없게, 편안히 날을 맞이하길 바라는 마음에서, 였다. 꿈으로 하여금 알려야 할 것을 알린 그녀는 이제 청년이 된 아이의 방으로 향했다. 알 리는 없겠으나 말끔히 목욕제계를 하고 곤히 잠든 청년의 곁으로 다가간 그녀는 다시금 쥘부채를 펼쳐들었다. 반듯한 부채로 허공을 가로로 슥 그으니, 청년의 몸 아래로 둥그런 창 같은 것이 생겨나 드르륵 열려 청년만을 그 안으로 쑥 데려갔다. 그 뒤를 그녀가 뒤따라 들어가자 창이 닫히고 이윽고 사라졌다. 그 짧은 순간이 지나고, 빈 침대와 빈 방만이 현세에 남겨져 있었다.
그리하여 무대는 현세의 뒷편이자 신과 신령, 괴이의 세상, 신은세로 넘어가지나니-
신은세의 서쪽, 그 중에서도 끝자락에 위치한 넓디 넓은 신사와 같은 가옥의 한 방에 청년은 눕혀져 있었다. 이부자리 하나만 덩그러니 있는 다다미 방의, 그 이부자리 속에 뉘여 잠든 청년의 위로, 어느새 밝은 빛이 조금씩 비춰들었다. 마치 아침 햇살 같은 밝은 빛이 어서 일어나라는 듯 환하기도 하였다.
공간을 넘어... 인간들이 사는 세계에서 신은세로 한 청년이 넘어가는 동안에도 그 청년은 조금도 눈을 뜨지 않았다. 그저 곤하게 잠들어 꿈 속 세계에 바져있을 뿐이었다. 영원한 이별의 순간이라면 매우 슬픈 꿈을 꿨겠지만, 그것은 영원한 이별의 순간이 아니었다. 아주 길지만 그럼에도 짧은 찰나의 순간. 신의 허락이 떨어지면 얼마든지 찾아가서 인사를 할 수도 있었기에, 그 순간은 신비롭지만 비극적이진 않았다. 그저 또 하나의 연이 이어지고, 시작되는 성스러운 순간이었다.
"......."
아침 햇살이 제 얼굴을 비추자 카케루는 눈을 부스스 뜨며 크게 기지개를 켰다. 눈을 뜨며 보일법한 천장이 매우 낯설법도 하건만, 천장의 차이를 눈치채지 못한 그는 잠시 멍한 표정을 지으면서 그 자세를 유지하며 크게 하품을 했다. 하지만 순간 멈칫. 그의 표정이 순식간에 굳었다. 여긴 어디? 나는 누구? 아니. 나는 아사히나 카케루. 그런데 여긴 어디? 혼란스러운 표정이 점점 그 색을 보이며 진해졌다.
"뭐, 뭐야! 여긴?! 뭐가 어떻게 된 거야?! 나, 납치? 납치 당한건가?! 나?! 아니..잠깐만?!"
자신이 납치를 당했다고 가정한다면... 그럼 부모님은? 부모님은 무사한건가? 부모님도 납치당했나? 아니. 애초에 이건 현실이 맞나? 이거 꿈 아니야? 그런 혼란스러움을 느끼며 그는 크게 당황하며 제 뺨을 꽉 꼬집었다.
"아야야얏!!"
세게 꼬집은만큼 너무나 아팠기에 그는 절로 비명을 질렀다. 꼬집은 살이 붉게 달아올랐다. 히잉... 절로 우는 소리를 내며 그는 이게 꿈이 아니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여긴 대체..."
다시 한번 불안한 생각이 그의 마음 속을 채웠다. 자신이 납치당했다고 치자. 그렇다면 부모님은 무사하겠는가? 또 다시 그런 생각이 떠올랐다. 일단 몸이 묶인 것은 아니었다는 것이 천만다행인 일이었다. 일단 상황을 파악하는 것이 먼저라고 생각하며 그는 최대한 숨소리와 발소리를 줄여 나갈 수 있는 곳을 찾아 이동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그의 두 눈동자가 정말로 바쁘게 움직였다.
/맘에 드는 정도가 아니라 감탄했는데. 그야말로 신화잖아. 신화. 진짜 일본 신화의 한 파트를 보는 것 같았어! 와아...진짜... 엄청나 베니오주. 내가 엄청난 금손을 만난 모양이구나!
아침 햇살 같은 빛은 청년이 눈을 뜨자 소르르 사라졌다. 하지만 방 안이 어두워진 것은 아니었다. 방 한 쪽 벽을 채운 창에서 은은히 빛이 넘어오며 내부를 밝혔다. 너무도 자연스러운 빛이라 막 깨어 혼란에 빠진 청년에게는 미처 생각이 닿지 않을 요소였으리라.
여하튼, 지금 이게 무슨 상황인지 파악조차 할 수 없는 청년에게 그 방은 낯설 수 밖에 없었다. 아무리 평범해보이는, 고급진 여관의 빈 방 같은 다다미방이라고 해도 말이다. 방 안을 이동해 둘러보아도 텅 빈 방에 방금 청년이 일어난 이부자리 한 채 밖에 없었다. 전통적인 방식으로 지어진 이부자리는 현세의 것과 그닥 다르지 않았다. 갑자기 움직이거나, 요동을 친다던가, 그런 일 또한 일어나지 않았다.
이변이 일어난 것은 청년이 방에서 나가는 문을 발견했을 때였다.
드르륵.
"어머, 역시나."
청년이 문을 열기 전에 먼저 문이 열리며 누군가 말했다. 친절한 옆집 할머니 같은 목소리의 주인은 그 목소리처럼 나이가 지긋한 노부인이었다. 소매가 짧은, 자색 기모노를 곱게 입고 비녀로 쪽 진 머리를 한 노부인은 청년을 보고 인자하게 미소지었다.
"잘 잤나요? 잠자리가 괜찮았을지 모르겠네요. 급히 준비했던지라. 호호."
노부인은 기품 있게 웃으며 조곤조곤 말했다. 그리고 청년이 자신을 살필 시간을 주듯 잠시 말이 없다가, 조금 지나서 덧붙였다.
"저는 이 곳 주인 되시는 분을 모시는 오키쿠라고 해요. 아가씨께서 도령이 일어났으니 데려오라시기에 왔답니다."
처음엔 길을 잃기 쉬운 곳이기에, 라며 노부인은 후후, 웃었다.
"이것저것 알고 싶은 것, 묻고 싶은 것이 많겠지요. 따라오도록 해요. 모든 설명은 이 곳 주인이시자 아가씨께서 해주실 것이랍니다."
그렇게 말한 노부인은 한 걸음 앞서 걷기 시작했다. 열린 문 너머는 평범해 보이는 목재 복도로, 노부인이 걷는 소리만 잠잠히 울리고 있었다.
방에서 나가는 문을 발견하고 막 밖으로 나가려는 찰나, 갑자기 문이 열리자 그는 깜짝 놀라 뒤로 빠르게 발걸음을 옮겼다. 어딘지도 모를 이 다다미방의 다다미를 뜯어서라도 대항을 해야겠다고 마음먹은 순간 보이는 존재의 모습에 그는 두 눈을 깜빡이며 멍하니 눈앞의 노부인을 바라봤다. 소매가 짧은 자색 기모노에 비녀를 하고 있는 노부인의 얼굴은 카케루에게 있어서 상당히 낯선 모습이었다. 즉, 그에게 있어선 눈앞의 노부인은 상당히 낯선 존재였다.
"오키쿠..."
자신의 소개를 하는 모습이 있었으나, 카케루는 좀처럼 자신의 입을 열지 않고 경계하는 모습을 보였다. 상대가 노부인이라고 한들, 납치범의 일행일 가능성이 높았다. 하지만 그 와중에 '아가씨'라는 말이 나오자 그는 순간 침을 꿀꺽 삼켰다. 모든 설명은 이곳의 주인이자 아가씨가 해주겠다는 말에 그는 일단 그녀의 뒤를 천천히 따라갔다.
"이거 하나만 물어볼게요. ...제 부모님은 어떻게 되었죠? 저를 납치했을 정도면... 부모님을 피할 순 없었을텐데. 몰래 들어와서 저만 납치해서 왔을리도 없을테고."
일단 가장 큰 걱정거리는 바로 그것이었다. 자신이 이곳에 있는 만큼, 제 부모님에게 무슨 해가 있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 불안감. 그것을 좀처럼 숨기지 못하고 그는 경계하는 눈빛과 분위기를 좀처럼 감추지 못했다. 물론 눈앞의 노부인이 진실을 알려줄진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이렇게라도 묻지 않으면 자신의 마음이 진정되지 않을 것 같았기에 그는 답을 요구했다.
"마, 말해두는데 저희 집. 그렇게 돈이 엄청 많은 집은 아니에요. 그러니까 돈을 요구해도.. 아마..."
아니. 아니다. 제 부모님은 만약에 돈을 요구한다면 어떻게든 돈을 구해서 가져올 이들이었다. 그것을 알기에 카케루의 고개는 절로 아래로 향했다.
"만약... 만약... 부모님에게 무슨 일이 생겼다면... 그땐 가만히 있지 않을 거예요."
허나, 그의 목소리는 조금도 굽혀지지 않았고, 오히려 작은 적대감이 나올 뿐이었다.
/옛날 일본신화나 혹은 다른 나라 신화를 보면 애를 데려갈 땐 그냥 말없이 스윽 데려가는 것이 대부분인 것으로 알고 있거든. 물론 말하고 데려가는 경우도 있긴 하지만 말이야! 어쨌든 고지라도 해주는 것이 어디야! 물론 카케루는... 이 건방진 놈은 지금 적대감만 가지고 있다는 것이 문제다...;ㅁ; 나중에 머리 박아라. 카케루야!
조신한 걸음걸이로 복도를 걷는 노부인의 걸음소리에 곧 청년의 것이 더해졌다. 목재라면 으레 날 법한 나뭇결 눌리는 소리와 함께 두 사람이 복도를 나아간다. 느긋히 앞서가던 노부인은 뒤따라오는 청년의 불안하고도 걱정 어린 말들에 그 기분을 아는지 모르는지, 다시금 작게 후후후, 하고 웃었다.
"심성이 고운 도령이로군요. 어쩜, 본인의 보신보다 부모를 먼저 생각하다니. 도령의 부모는 도령이 참으로 자랑스러운 자식이겠어요."
노부인은 청년의 심성에 진심으로 감탄하며 칭찬하고 있었다. 그런 청년이 기특해서인지, 걱정을 덜어주기 위해서인지, 조금 더 말을 해주기도 했다.
"도령은 물론 도령의 부모의 안전 또한 걱정하지 않아도 괜찮답니다. 돈을 요구하지도 않을 것이고, 지금이 아니라 훗날 위해를 가할 일도 없을 것이에요. 아가씨는 그런 잔악무도한 일을 하실 분이 아니랍니다."
나름 달래주려 하는 말인듯 하지만 청년에게도 그렇게 들렸을 지는 모르는 일이다. 어쩌면 의문만 더 가중시켰을 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노부인은 그 이상의 설명은 해주지 않고, 그 뒤 무엇을 물어도 아가씨께서 답해주실 거라며 해답을 미루었다. 그렇게 차츰 나아가던 복도를 한 번 꺾어 방향을 바꾸자-
청년의 눈 앞에 어느 정원 같은 풍경이 펼쳐졌다. 잘 관리된 신사의 정원인 듯한 풍경은 청년이 가봤을 신사의 그것과 같아 보였으나 어딘가 위화감이 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위화감의 정체를 찾기 전에 드르르륵, 하고 큰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나 돌아보면, 본당으로 보이는 곳의 문이 열려 있었다. 아니, 정확히는, 큰 신사의 세전함 너머로 보이는 굳게 닫힌 문, 절대 열리지 않을 것 같던 그 문이 열린 그 앞에서 노부인이 말했다.
"아가씨는 이 안에 계신답니다. 자, 들어가도록 해요."
노부인은 안내는 여기까지란 듯 문 밖에 멈춰서 있었다. 열린 문 안쪽은 비스듬한 각도로는 잘 보이지 않으나, 문 앞에 서면 내부가 훤히 보였다.
제일 먼저 문 턱 너머로 느껴지는 것은 향이었다. 은은한 어느 이름 모를 꽃의 향. 다종다양하게 섞였음에도 결코 불쾌하지 않은 향이 바람 없이도 흘러나온다. 그 다음 비추어지는 것은 내부의 모습. 일반적인 절이나 신사의 본당이 있을 그 안은, 그 어느 곳과도 사뭇 달랐다. 드넓게 깔려 있어야 할 다다미 혹은 목재 대신 수면이 찰랑거렸다. 그래, 물이었다. 딱 문 턱의 높이만큼 찬 물은 결코 넘치지도 출렁이지도 않았다. 수면에 무수히 많은 연꽃들을 피우고도 그 어떤 소란함도 없었다. 어디가 끝인지 모를 저 먼 안 쪽까지 가득 핀 연꽃의 향연에 시야를 빼앗기기도 잠시, 내부의 중앙에 자리한 구조물과 그곳에 좌중한 인형상에 자연스레 시선이 옮겨가진다.
"...오. 이제 왔구나."
마치 연못 한 가운데 띄워진 것처럼, 팔각의 목재 정자가 있었다. 그 정자 한 가운데에 금빛으로 빛나는 대좌가 있었다. 불상의 받침이 되는 연꽃 대좌 위에 한 여성이 앉아 청년을 올곧게 바라보았다.
"무얼 하느냐. 어서 들어오지 않고."
문의 입구와 중앙까지는 거리가 제법 있어 여성의 모습이 제대로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시선이 닿는 것은 마치 코 앞인 듯 선명히 느껴지며, 나긋한 목소리는 듣기에 몹시 좋고, 청년의 내면 어딘가에서 그 여성에게로 끌리는 어떤 감각이 들었을 것이다. 입구에서 중앙까지 가는 길은 복도와 같은 목재 바닥이 깔려 있었으니 그 길을 걸어 가까이 가면 될 듯 했다.
정말로 잔악무도한 일을 할 사람이 아니라면, 이런 납치극도 안해야 맞는 거 아닌가? 카케루는 그렇게 생각했다. 허나 여기서 괜히 그런 말을 하게 되면, 자신의 목숨이 위험해질 수 있었기에 쓸데없는 자극을 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그는 일단 입을 꾹 다물었다. 예전에 납치되었을 땐 납치범을 자극하지 않아야 안전하다는 내용이 담긴 책을 읽은 기억이 떠오른 탓이었다. 어쨌든 더 이상 답을 하지 않으려는 모습이 보이자 그는 알겠다고 이야기를 하며 우선 오키쿠를 천천히 따라갔다.
복도를 한번 꺾어 방향을 바꾸고 앞으로 나아가자 보이는 정원 같은 풍경에 카케루는 순간 놀라서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주변을 바라봤다. 뭐지? 이 풍경. 어디서 본 것 같은데. 그런 생각을 하며 그는 대체 어디서 그 풍경을 보았는지를 떠올리려고 했다. 하지만 바로 떠오르는 것은 없었다. 묘하게 익숙하면서도 이질감이 있는 장소. 마치 신사의 정원을 닮은 것 같은 그 풍경을 최대한 떠올리기 위해 머릿속 기억들을 하나하나 최대한 자세하게 떠오른 끝에 떠오르는 풍경이 있었다. 그것은 자신이 살던 마을의...
그 순간이었다. 본당으로 보이는 곳의 문이 열리고, 오키쿠가 그곳으로 들어가라고 하자 카케루는 조용히 그 문을 바라봤다. 저 문 너머에 바로 그 아가씨가 있는 것일까. 여기까지 온 이상 물러설 생각은 없었다. 조금 무섭긴 했지만, 그럼에도 도망칠 순 없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제대로 대면해서 자신을 이렇게 납치한 이유를 들어야겠다고 다짐하며 카케루는 용기를 내서 앞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정체불명의 향. 그리고 넘치지도 출렁이지도 않는 물. 상당히 아름답고 평화로운 풍경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이게 정말로 현실 속의 풍경이고 분위기인 것일까. 그는 그런 생각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본당 안의 풍경이 너무나 이질적이고 환상적이었으니까. 그리고 상식적으로 있을 수 없는 풍경이었으니까. 최대한 정신을 홀리지 않게 가다듬으려고 하며 그는 중앙에 위치한 구조물을 바라봤다. 팔각의 목재 정자와 금빛으로 빛나는 대좌. 그리고 거기에 앉아있는 누군가.
"......"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그는 가만히 그 존재를 바라봤다. 나긋한 목소리가 그의 귓가를 스쳐지나가자 묘한 감각을 그는 느낄 수밖에 없었다. 이건 대체...
저벅저벅. 저벅저벅. 저벅저벅.
조용한 반소리를 내며 그는 그녀가 요구하는 대로 천천히 안으로 들어섰다. 그리고 그 상태에서 그녀를 향해 질문했다.
"당신은 누구시죠? ...왜 저를 여기로 데리고 온 거죠?"
꼭 얼굴이 마주한 상태에서 질문을 해야하는 법은 없었다. 저쪽의 목소리가 자신에게 들린다면, 자신의 목소리 또한 그녀에게 들릴테니 그는 그렇게 질문했다. 목재바닥을 밟고 날아가는 발걸음. 자연히 그녀와 그의 거리가 점점 좁혀졌다.
목재 정자가 수면 위에 덩그러니 놓여있듯 목재가 깔린 길 역시 수면 위에 놓인 것이었다. 한 발이라도 내딛으면 물이 솟구쳐 발을 적실 것 같으면서도, 몇 걸음을 걸어도 물 한 방울 튀지 않았다. 청년의 걸음에 맞춰 나뭇결 눌리는 소리 대신 희미하게 파문 번지는 소리 만이 날 뿐이다. 그마저도 대좌에 자리한 여인의 웃음소리에 가려졌다.
"하하...! 무어가 그리 급하더냐. 그리도 급히 묻지 않아도, 내 모든 것을 알려줄 것이란다."
웃음소리에 이어진 목소리는 한없이 나긋하면서도 이끌리게 만드는, 묘한 기운이 감돌았다. 그 기운은 정자에 가까워질수록 짙어졌다. 어느새 사방을 휘감고 도는 꽃향기는 되려 엷고 차분하게 가라앉고 있었다. 그 엷어진 향이, 여인내의 분내 같기도 하였다.
"옳지. 거기 서거라."
여인의 목소리가 말한 때는 청년이 딱, 정자로부터 세 보 앞까지 당도했을 때였다. 거의 중앙이나 다름 없는 위치에서 내부를 보면 그것은 또 별개의 장관이었다.
가까이 보니 살짝 높이감 있게 뜬 정자를 중심으로 휘감듯 피어난 연꽃들이 갖가지 색을 품고 있으며, 천장은 그저 막힌 벽이 아닌 검푸른 바탕에 별빛 같은 것이 반짝인다. 그 반짝임들이 드문드문, 빗방울마냥 떨어져 연꽃잎을 덩달아 반짝거리게 하고, 색이 없던 연꽃은 빛방울을 맞고 다른 색으로 물들기도 하였다. 그러한 변화가 이 넓디 넓은 공간 안에서 산발적으로 이루어지는 가운데, 그 정 가운데에 있었다.
붉고 붉은 여인이 금빛 대좌에 앉아 청년을 보며 미소 짓고 있었다. 그러나 여인의 모습 역시 범상치 않았다.
그녀는 검붉은 기모노를 곱게 차려입고 다소곳이 앉은 모양새가 여느 인간과 다르지 않았으나, 검게 물든 역안의 눈과 대좌 아래로 살짝 늘어진 비늘 덮은 꼬리의 존재는 그녀가 인간이 아님을 시사했다. 게다가, 머리 위로 솟은 붉은 꽃가지와 빙 두른 붉은 덩굴이 마치 꽃관을 쓴 듯 했다. 얼굴에 엷은 가림막을 두른 그녀는 멀리서보다 더 선명하고도 울림 있는 목소리로 말했다.
"오랜만이구나. 아이야. 무사히 장성한 모습을 보니 내 심히 기쁘단다."
그녀의 말은 오래 전부터 청년을 알고 있는 듯한 어투였다. 청년 또한 기묘한 기시감, 또는 스스로도 출처를 알 수 없는 끌림이 줄곧 느껴질 것이다. 그녀는 그것을 안다는 듯 후후후, 웃었다.
"알고 싶은 것, 묻고 싶은 것이 많겠지. 내 모든 것을 알려주겠다 하였으니 숨기지 않을 것이란다. 어째, 내게 묻겠느냐, 내가 말해주었으면 하느냐? 편히 말하렴."
그녀가 살짝 손짓하니 의자와 테이블 한 쌍이 청년의 앞에 나타났다. 긴 얘기가 될 것 같으니 앉아서 편히 얘기하란 배려일까. 그녀의 손짓 역시 앉으렴, 하고 얘기하고 있었다. 주변 분위기 또한 어쩐지 사양하지 않아도 될 듯한, 나른히 풀어지게 하는 듯한 기색이 감돌고 있었다.
뭐가 그리도 급하냐니. 오히려 왜 그렇게 여유로운지 이유를 모르겠다고 카케루는 의문을 품었다. 하지만 그와는 별개로, 지금 이 분위기는 참으로 환상적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 풍경은 현실에는 존재할 수 없는 그런 풍경에 가깝지 않나...라는 생각만이 그의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지금만 해도 물이 발을 적셔야 정상인데 조금도 적시지 않고 있었다. 대체 어떻게 해야 이런 것이 가능하단 말인가. 과학적으로 이게 말이 되나? 그런 생각이 가득. 어쩌면 자신이 모르는 이론이라던가, 건축 방법이 있을 수도 있으니 그는 굳이 더 깊게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어차피 자신이 이해할 수 있는 범위가 아닌 것 같았기에.
어쨌든 그녀가 멈추라고 지시를 하자 그는 자연스럽게 발을 멈추고 가만히 고개를 들어올려 그녀를 바라봤다. 참으로 신기한 일이었다. 적대감이 그다지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조금은 풀어질 것 같은 기분이었다. 주변의 향이 제 마음을 가라앉혔고, 위험한 인물이 아니라는 것을 알려주는 것 같았다. 허나 그렇다고 해서 마냥 마음을 놓을 수 없는 것이 바로 카케루의 심정이었다. 어쨌든 이곳은 자신의 집이 아니었기에.
정자를 중심으로 해서 피어난 연꽃들은 그 색이 너무나 다양하고 고왔다. 대체 저 연꽃들은 어떤 연꽃들인걸까? 천장에서 반짝이는 별빛은 빗방울처럼 떨어지며 연꽃의 색을 바꾸고 있었다. 그리고 모든 곳의 중심. 눈앞의 여성. 검붉은 기모노를 차려입었으나 인간의 모습과는 이질적인 모습들이 그의 눈에 비쳤다. 눈동자는 그렇다고 쳐도 저 꼬리는 무엇인가. 침을 꿀꺽 삼키며 그는 시선을 피하지 않고 그녀를 바라봤다.
'날 알고 있어?'
오랜만이라니. 만난 적이 있었나? 적어도 자신의 기억 속에 저런 이는 없었다. 하지만 저 말을 들어보면 마치 자신을 모르는 것 같지 않았다. 그렇다면 대체 그녀는 누구란 말인가. 아무리 생각해도 답은 나오지 않았고, 궁금증은 더욱 커져만 갔다.
침착하게 앉으라는 허락이 떨어지자 그는 의자를 조심스럽게 꺼낸 후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리고 그녀를 바라보며 그가 가장 궁금해하는 것을 물었다.
신비함으로 가득한 공간과 범상치 않은 여인의 모습은 어느 모로 보아도 이 세상 것이 아니었다. 아무리 편안한 분위기가 흐른대도 청년 스스로 긴장하고 경계하고자 하면 얼마든지 분위기에 거스를 수 있었다. 그런 과정이 무색하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지만 말이다.
그녀는 청년의 시선을 받으면서 눈썹 하나 꼼짝하지 않았다. 한없이 느긋하며 온후한 기색이 흘러넘쳤다. 그녀는 줄곧 웃음 띈 얼굴이었고, 시선이 마주치자 눈웃음을 곱게 지었다. 청년이 뭐냐고 생각한 꼬리조차, 시선이 닿자 강아지의 그것처럼 작게 끝을 살랑거렸다.
의자와 테이블이 청년의 앞에 꺼내지고 청년이 마음 편히 앉아 질문을 꺼내기까지 그녀는 어떤 재촉도 채근도 하지 않았다. 그 여유로움은 시간이 그야말로 차고 넘치는 사람 그 자체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조용히 기다려주던 그녀에게 드디어 질문이 당도했다. 신중하면서 차근차근 질문하는 청년을 향해 기특하다는 표정을 지은 그녀가 나긋하게 웃었다.
"우후후. 영특한 아이로구나. 그래. 내 하나하나 답해줄 테니, 잘 들으려무나."
그리고 그녀는 자세를 비스듬히 늘어뜨려 편안히 취했다. 어느새 한 손에 들린 쥘부채를 까딱까딱 흔들며 말했다.
"본녀는 아카하나이치린노히메기미라 한단다. 모든 생과 명의 올바른 순환과 다시 태어남을 관장하지. 현세에서는 아카하나히메라 칭하더구나. 내 신물인 붉은 가지를 장식한 신사를 본 적이 있을지 모르겠다만은."
그녀는 청년이 충분히 듣고 생각과 이해를 할 수 있게끔 얘기해주었다. 그녀의 소개에 이어 이 곳, 신은세에 대해서도.
"그리고 이 세상은, [신은세]라고 한단다. 산 자의 세상인 현세의 뒷면이며 명계와 신계의 경계에 걸친 세상이니라. 현세에서 자리를 잃어가고 있는 괴이의 보금자리이며 미련이 너무나 커 환생에 들지 못 하는 령들의 쉼터이기도 하지. 네가 있는 이 곳은 [신은세]의 서쪽이자 수호신 중 하나인 나의 신당이란다. 내가 기거하며 나를 모시는 이들이 있는 곳이지. 그리고 네가 앞으로 지낼 곳이기도 하다."
얘기 도중, 그녀가 앞을 향해 쥘부채를 까딱 움직였다. 그러자 허공에 얕고 납작한 잔 같은 것이 나타나 그녀의 쥘부채 끝에 톡 놓였다. 잔이 떨어지지 않게 쥘부채를 든 그녀의 말이 이어졌다.
"네가 여기 있는 이유는, 단도직입적으로 표해, 내가 데려왔기 때문이란다. 네 어릴 적에 몹시 앓았던 것을 기억하더니? 약으로도 처방으로도 쉬이 낫지 않던 너를 낫게 해준 것이 본녀였단다. 당시, 네 타고난 몸이 허약한 것도 있으나 팔자 또한 고약한 것들에게 시달릴 팔자였던지라, 필생을 관장하는 본녀로서 그저 둘 수 없었더랬지. 하여 네 부모에게 네 천명을 성히 거둬주는 대신, 네가 성인이 되거든 대가를 받아가기로 약조하였단다. 그 증표로서 내 관의 가지를 하나 주었지. 네가 내게 감사를 올렸던 그것 말이다."
청년의 집에 작은 제단과 함께 올려진 붉은 꽃가지. 그것의 정체를 말해준 그녀는 웃으며 말했다.
"지난 밤, 네 탄신일을 맞아 성인이 되었으니 약조를 지킬 때가 되었지 않니. 하여 내 친히 네 집에 강림하여 널 데려왔단다. 네 부모에게도 약조의 때가 되었음을 알려주었으니 크게 상심은 않을 것이다."
질문의 답을 마친 그녀는 청년의 이해와 반응을 기다려주었다. 어느새 손아귀로 옮겨간 납작한 잔을 만지작거리며.
들어본적이 있는 신의 이름이다. 그 이름을 어떻게 잊을 수 있을까. 제 부모님이 말을 해준 적이 있었다. 어린 시절의 이야기. 자신을 구해줬다고 하는 그 신의 이야기. 그렇다면 눈앞의 존재가 바로 그 신이란 말인가. 말도 안돼. 그런 혼잣말을 그는 조용히 중얼거렸다. 물론 신을 믿지 못하는 것은 아니었다. 집에 있는 가지도 그렇지만... 철이 들 무렵부턴 이미 이 세상에 속하지 않은 존재를 봐왔으니까. 허나 자신을 어린 시절에 구해준 존재가 눈앞에 있는 것은 또 별개의 이야기였다.
신은세. 간단하게 말해서 자신이 원래 살던 곳과는 다른 세계라는 것이겠지. 카케루가 거기서 주목한 부분은 바로 '앞으로 지낼 곳'이라는 부분이었다. 그 말대로라면 이 신은...
머릿속으로 생각을 정리하는 와중에도 그는 그녀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자신이 여기에 있는 이유는 저 신이 자신을 데려왔다는 것부터 시작해서 어린 시절의 일. 그리고 그에 대한 진실. 더 나아가 성인이 되었으니 자신을 데려왔다는 이야기. 한번에 많은 정보가 머릿속으로 들어왔으나 그럼에도 어떻게든 생각을 정리할 순 있었다.
허나...
"부모님에게 들은 적이 없는 이야기네요. 물론 제가 어릴 때 그런 일이 있었다고 부모님이 이야기한 적이 있어요. 그 증표라고 하는 '가지' 역시 집에 아주 소중하게 보관되어있고요. 하지만 여기에 온다는 이야기는 한번도 들어본 적이 없어요."
그나마 부모님이 상심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에 안심을 느끼긴 했지만, 그렇다고 마냥 이 모든 상황을 쉽게 받아들일 수는 없다는 듯이, 그는 그녀를 바라보면 분명하게 이야기했다.
"...일단 묻고 싶은데... 왜 대가가 저였던거죠? 제가 당신에게 특별한 존재는 아니었을텐데요. 그저 스쳐지나가는 인간. 그 정도 아니었나요?"
청년이 생각하고 정리하는 사이, 본당의 시간은 한없이 느긋하게 흘렀다. 그 사이에도 수많은 별빛들이 떨어지고, 색색이 물든 연꽃들이 보이고 가려지길 반복했다. 간혹 들려오는 소리는 아주 작은 물방울 떨어지는 소리와, 그녀가 느릿하게 움직일 적 검붉은 기모노 자락의 결 스치는 소리 정도였다.
영원과도 같은 순간 순간이 무수히 흐르는 이상향의 시간. 그 흐름을 비집고 청년의 물음이 재차 그녀에게 닿았다.
"오호라. 예리한지고."
그녀는 청년의 반박에 마냥 즐겁다는 듯 눈을 가늘게 좁혔다. 엷디 엷은 가림막 너머의 입술이 기분 좋은 호선을 그렸다.
"약조의 대가에 대해서는 너 뿐만 아니라 네 부모도 당일까지 잊고 있었단다. 내가 그리 하라 명했으니. 미리 알고 있어본들 네 부모와 네게 좋을 것이 없지 않더냐. 미리 알았더라도 같은 삶을 살았을 것 같으니."
역안의 붉은 눈은 청년을 똑바로 마주하였다. 처음과 변함없이 온화하지만, 분명, 위에서 내려다보는 위엄이 담긴 시선이었다.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라 하지 않더니. 너희 인간들조차 그러한데, 신의 구명을 받은 것이 어디 보통의 연이겠느냐. 또한."
그리고 아주 잠깐, 그녀가 말을 멈추었다. 붉은 눈이 천천히 깜빡이고, 조금은 무게감이 실린 목소리가 말했다.
"말했다시피 본녀는 필생을 관장하는 아카하나히메. 모든 존재가 주어진 생을 올바르게 보내도록 돕는 것 또한 본녀의 소명이니. 구명한 존재의 생이 외압으로 인해 불안정해지는 것을 손수 건져낸 것에 어떤 모순이 있으랴."
그 목소리의 무게만큼 주변 분위기도 차분히 가라앉는 듯 하다. 먹먹한 기류가 흐르는 그 가운데, 그녀는 조용히 청년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의 설명을 들으며 가장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은 왜 그 대가가 자신인가였다. 자식을 살려줬으니 더 귀한 것은 얻으려고 할 수도 있지 않겠는가. 적어도 자신이라면 더 귀한 것을 요구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물론 자신은 인간이니 신의 기준과는 조금 다를 수도 있겠지만. 아무튼 곧 그녀의 설명이 들려오자 그는 그 설명에 귀를 기울였다.
"......"
그녀의 말. 미리 알고 있어봐야 좋을 것이 없다. 그 말에는 공감하며 카케루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적어도 알고 있었다면, 헤어지기 전. 마지막 인사는 할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은 있었다. 물론 인사를 하지 않는 것이 차라리 다행이었을지도 모르지만. 그 와중에 자신을 향한 붉은 눈빛을 느끼며 카케루는 저도 모르게 살짝 움찔했다. 온화하고 자상한 느낌은 있었으나 그럼에도 대등한 위치에서 바라보는 눈빛이 아니었다. 자신은 신이고, 너보다 위에 있다는 것을 명확하게 알려주려고 하는 듯한 그 눈빛을 바라보며, 그는 살짝 긴장했으나 그럼에도 그는 조금도 눈을 치우지 않았다.
"그렇다는 것은 제가 저곳에 계속 있었다면, 불안정한 삶을 살 수밖에 없었다는 건가요? 물론... 어느 정도 이해는 가지만요."
이 세상의 존재가 아닌 존재에게 시달린 나날을 떠올리며 그는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자신이 겪은 모든 것들도 다 원래 그렇게 될 운명이었던 것일까. 그렇게 생각하니 참 세상사 부질없다고 카케루는 느꼈다. 어쨌든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였다. 이어 그는 그녀에게 말했다.
"...올바르게 보내지 않아도 좋으니 돌려보내달라고 하면 어떻게 되나요?"
그 물음을 상당히 당돌했으나, 굽히는 기운이 없었다. 말 그대로 그는 그녀에게 간접적으로 요구하고 있었다.
하지만 카케루 입장에선 그건 내 의지가 아니었으니까. 일단 물어는 보기! ㅋㅋㅋㅋㅋ 물론 안된다고 하면 일단 알았다고 할 것 같아. 어쨌든 약속은 약속이니 말이야. 다만 마냥 좋은 의미로 받아들이지는 않을지도 모른다는 것 정도려나. 일단 베니오의 다음 행동에 따라서 달라질 것 같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