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87 확실히 귀족의 태가 나는 사람을 마주하니 익숙한 느낌이 든다. 이어나가는 말들에는 현재 남작이 몸이 좋지 않고 힘들어하고 있다는 것이 느껴졌고. 그럼에도 이렇게 와 이야기하는 것은 영지의 사정이 좋지 않고 분납에 대해 요청하기 위해 이렇게 아픈 몸을 끌고 왔다는 것이겠지.
헬렌은 이 영지에 와서 온갖 불쾌한 일들을 잔뜩 겪었음에도 이러한 남작의 태도를 보니 조금은 마음이 누그러짐을 느꼈다. 게다가 출산 직후에 몸을 추슬러야 할 때에 이런 큰 일이 일어나 정신 없이 바빴을 테니. 몸이 얼마나 힘들겠는가. 안타까운 마음도 들었고.
그럼에도 급료와 포상금을 받지 않겠다고 하는 것은 남작에 대한 예가 아니고, 그렇다고 이러한 제안을 무작정 받아들일 수도 없다.
“남작님의 말씀은 잘 이해했습니다. 하지만 아무런 조건 없이 분납에 응할 수는 없습니다.”
헬렌은 단호히 이야기했지만, 이내 미소를 띄며 뒤이어 말한다.
“하지만, 저에게는 이 영지가 조금은 특별한 의미가 있거든요. 여행 중 처음 머문 곳이기도 하고 나름의 제 실력을 발휘해 곤경에 빠진 이들을 도운 첫 장소이기도 하고요. 그런 장소가 저로 인해 곤란을 겪는다면 저로서도 마음이 아픈 일일테니......”
고민하는 듯 말을 늘였다가 헬렌은 베르나를 보며 말한다.
“이렇게 뵙게 된 것도 인연인데, 앞으로도 친교를 이어나감은 어떨까요. 상호 우호의 의미로 2년 분납이야 못할 것이 없는 일이 아니겠습니까. 다만, 저 또한 이러한 우호의 증표를 받을 수 있다면 서로 멀리 떨어져 있어도 믿음을 가질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789 이리저리 말을 꼬았지만, 그래도 타고나기와 자라기를 민초와 달리한 베르나 남작은 그 속뜻을 금방 이해합니다... 우호의 증표를 지금 이 상황에서 달란다면 그게 담보 말고 뭐겠습니까. 베르나 남작은 침음성을 흘리더니 한참을 고민합니다. 그러더니 문을 열고 가신을 불러 이야기합니다.
"양피지를 얻어오고, 공문서용 적밀랍도 좀 가져오도록."
베르나 남작은 여러가지 담보와 이자가 될 법한 옵션들을 제시합니다. 몇몇은 당장 헬렌의 모험에 도움이 될 수 있고, 몇몇은 장기적으로 헬렌의 목적인 백작령의 경제적 부흥에 직결됩니다.
"먼저 24개월의 이자에 대해서는... 지금 바로 드릴 수 있는건 이 정도 중에 하나겠습니다. 루마족이 쓰는 집채만한 마차와 그를 끌 말 4마리. 은광석 한수레. 보물 백은검 두 자루. 중에서 하나를 골라주시면 준비하겠습니다."
@@>>790 헬렌은 베르나 남작의 이야기를 듣고 고개를 끄덕인다. 이자로 제시하는 것 중 마차는 아무래도 늪지로 갈 것이다보니 오히려 불편해질 수도 있을 것 같다. 은광석 수레를 집으로 보내면 아버지가 그래도 내가 조금의 성과라도 내고 있나보다 생각하겠지만 왠지 영지 복구에 힘을 써야 할 자금이 바로 빠져나가는 것이 영지에서는 부담일 것 같고.
“그럼 이자는 백은검으로 받을게요.”
페로에게는 잘 모르겠지만 그 검이 자신에게 들어와서 제대로 쓰여질지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여행을 지속하다보면 동료도 계속해서 생길테니 이쪽이 더 나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다.
“우호의 증표라고 함은....... 이번에 태어난 아이의 이름을 짓는 걸로 어떨까요. 물론 어려우시다면 남작 저택도 괜찮겠지만요.”
역시 남작에게 무언가 뜯어내려고 하니 마음이 영 좋지 않다. 여행의 취지도 돈을 버는 것 외에도 명예를 드높이는 것이 있었으니 확실히 곤란한 이의 주머니까지 터는 건 양심에 찔린다고 해야할까. 태어난 아이의 이름을 가까운 이의 이름을 따 짓는 것은 흔한 일이기도 하고.
아니, 이름 하나로 남작 저택 담보 대신 받겠다고 하는 것은 헬렌에게는 정말로 우호로 하는 말이긴 했다. 남작이 받아들이기 힘들다고 하거나 모욕적이라고 여긴다면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여자아이라면 그대로 이름을 따 헬렌, 남자아이라면 헬런은 어떠려나.
제가 다가서자 집이 우리가 올 것임을 알고 이를 환영하듯이 그 문을 열어주었어요. 이는 저에게는 평범하다고 할 수 있었지만 함께 있었던 그녀에게는 아니겠지요. 그 행동만 보아도 알 수 있어요. 그녀는 전사이고 알고, 가려내며, 막아서는 일을 하기 때문에 그런 점도 크겠지요
그렇게 함께 집안으로 들어서고자 할 때, 그녀가 먼저 마녀 님의 이름을 부르며 한발, 한발, 내딛을 때마다 바람과 함께 이를 타고 들려오는 자연의 소리들이 감싸듯 울리는 목소리. 그것은 마녀 님이 넬루의 부름에 응하여 답해주시는 거에요
"돌아왔어요, 앨리스 님"
"알고 계실 수도 있으시겠지만 이번에는 플라베르흐의 넬루 씨와 함께 오게 되었어요"
그렇게 저와 그녀는 마녀 님의 그 모습을 앞에 두고 맞이하게 되었지요. 저는 마녀 님의 앞에 서서는 앞으로 상반신과 허리를 깊게 숙이며 정중히 인사를 드리며 함께 그녀를 소개해 드렸지요. 그녀는 뭔가 이 만남에 당황했는지 마녀 님의 이름을 한 번 더 불러보았네요
>>791 이름을 따서 짓는 것은 어떠냐는 말에, 남작의 눈이 크게 뜨입니다. 아이의 이름을 짓는 건, 특히 귀족 아이의 이름을 짓는 건 확실히 가벼운 일이 아닙니다. 이름에 힘이 있고 작명을 잘 해야 오래 산다는 미신뿐만이 아니라, 그 이름이 정해지면 앞으로 평생 그 이름으로 불리고 적히며 살테니까요. 하지만 그렇다쳐도, 영지의 명운이 걸렸던 의뢰 보수의 분납을 위한 담보라 생각하면... 말도 안 될 정도로 베르나 남작에게 유리한 조건입니다.
"영애님께서는 정말로... 인상적인 조건을 제시하시는군요. 몸둘바를 모르겠습니다."
남작이 헬렌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와중 가신이 조심스레 양피지와 인장용 붉은 밀랍을 가져왔습니다. 남작은 양피지의 첫단에 "지급 확인서"라고 쓰면서, 다시 가신에게 일을 시킵니다.
"하인을 시켜 백은검 한 쌍을 가져오고, 약초사에게 내 아이를 데려오라고 말해줘."
다시 가신이 나가고, 백은검은 영주 저택까지 다녀오느라 늦지만 약초사와 함께 밖에 있던 아기는 금방 들어옵니다. 약초사는 베르나에게 아이를 건네고 뒤로 물러나고, 베르나는 아이를 품에 안은 채 말합니다.
>>794 생각해보면 엘리는 그녀 스스로가 생각하기에도 참 충동적이었습니다. 세스타우에서는 내킨 김에 이단심문관을 도왔다가 진짜로 죽을 뻔했고(그것도 이단심문관이 아니라 뱀파이어 사교 지배자에게), 그 외에도 여러 고초를 겪었습니다. 하지만 그 충동이 때려친다는 쪽으로, 그러니까 일족 영지로 돌아간다는 방향으로 나타난 적은 한 번도 없었습니다. 이유야 당연합니다.
영지를 떠난 이유까지 충동은 아니었습니다. 뱀파이어라면 응당 두려워할, 필멸을 넘어 즉멸의 심판을 담은 햇빛. 그 두려운 햇빛을 피해야 할 저주가 아닌, 다른 생명체들이 그러하듯 평범하게 받아들이는 자연물로 끌어내리기 위해, 눈이 탈 정도로 밝은 햇빛을 두려워 않을 권리를 위해. 그녀의 모든 충동은 비록 충동일지언정 동기를 배신하지 않았습니다.
"...엘리자베스."
류드밀라는 동생을 바라봅니다. 한심하다기보다는, 진심으로 걱정되는 표정으로. 결국 그녀는 고개를 끄덕입니다.
"네가 말로 한다고 들었으면 여기까지 오지도 않았을 테지. 알았어. 하지만..."
이번에는 조건을 붙이는군요.
"네가 밤의 군주로 선택된 만큼, 내보여야 할 때는 참지 마. 그리고... 어찌됐건, 여기 일이 정리될때까지 난 같이 갈 거야." //올만
음 북극곰..그러니깐 안타르크티스. 꽤 낯선 이름이라 이름을 외우는데 좀 걸릴 수도 있겠단 생각이 든다.
그러다 다시 뭔가를 끄적이는 소리를 듣고 고개를 돌린다.
귀하게 부탁이라..본인이 귀하신 몸이라는 말인가 싶어 살짝 웃음이 나온다.
..밥? 물론 밥을 살 정도의 돈은 있지만..돈이라는 것은 언제 어디서나 확실하게 도움이 된다. 반면 솔러는 어떨까. 확실히 호의는 얻을 수 있겠지만 그 호의가 정말 가치가 있을까?
슬쩍 안타르크티스를 보니 먹기도 여간 많이 먹는 게 아닐 거 같은데..
'크론'은 그런 내색 없이 솔러를 향해 고개를 돌리며 묻는다.
"오..안타르크티스는 물고기를 먹으려나? 당장 먹을 건 없지만 근처에서 살 순 있을 거 같아. 근데 혹시 솔러는 여비를 다 쓴 거야?" '크론'은 짐짓 걱정된다는 듯이 묻지만 설마 무일푼으로 떠났을 리가 없으니 남은 돈이 있다면 이제라도 아!하면서 꺼내라는 본심이 그 안에 숨겨져 있다.
@@>>793 헬렌은 이를 남작이 받아들이고 아이를 데려와 품에 안으며 이름을 불러주는 것을 보며 부드러운 미소를 띈다. 역시 이런 모습은 보기 좋다고 생각든다. 원래 처음부터 이 일에 돈을 생각하고 뛰어든 것도 아니었으니까. 그리고 이런 따스한 장면 만으로도 지금까지의 고생이 다 씻겨나가는 느낌이기도 했고.
“헬레나에게 정령의 축복이 함께하기를.”
작은 축복의 말 또한 건넨다. 감사의 인사에 헬렌은 마주 웃어보인다.
“로렌스 가와 베르나 가의 우호가 강물처럼 이어지길 바랄 뿐입니다.”
돈은 중요하지만 세상에 돈만큼 중요한 가치도 많다고 생각한다. 특히 귀족에게 있어서 명예란 목숨보다 중요한 것이기도 했으니까. 무언가를 조금 더 받아내는 것보다는 작은 우호의 시작이 더욱 도움이 될 때가 있으리라.
앨리스는 잠시 턱을 매만지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입니다. 아무래도 살아있던 날이, 검은 숲에서 보낸 나날이 하루이틀이 아니다보니, 검은 숲에 대한 정보가 쌓여도 너무 많이 쌓여서 기억해내는 데 다른 의미로 시간이 걸리는 것 같습니다. 앨리스는 손짓하며 두 사람이 들어오도록 길을 내주고, 저 사람이 진짜 앨리스라고? 믿기지 않는 표정으로 바라보던 넬루는 못 믿는 눈치면서도 어쨌든 여기까지 왔겠다, 일단 들어갑니다. 들어가면, 아앨라나에게는 익숙하고 넬루에게는 그렇지 않을... 그리고 매우 의외인 공간이 펼쳐집니다. 의외인 이유는 별 것 없습니다.
"생각보다... 평범하네요."
있으면 있는 대로, 없으면 없는 대로 짓고 만들어 쓰던 플라베르흐에서는 구하기 힘들 서재나 선반 따위의 가구들이 있지만, 그렇다고 마녀 하면 흔히 생각할 법한 별세계는 아닙니다. 가마솥, 냄비, 부엌칼, 말린 약초와 토끼고기 등등... 검은 숲에서 살아남는 방법을 아는 이라면 누구나 할 법한 생존술의 흔적이 있을 뿐입니다. 앨리스는 그런 넬루를 보고는 피식 웃더니, 본론으로 들어갑니다.
"그럼 뭐, 나는 집이 아니라 어디 우주에서 사는 줄 알았어? 됐고, 검은 숲 사람들은 다 나만 보면 호들갑을 떠니까 뭐라도 가져왔을 텐데 그거나 보여줘봐."
...라 말하자, 넬루는 정신을 차립니다. 비록 기억을 잊었어도 아앨라나가 알려준 정보로 어느 정도 갈피는 잡았고, 자기 등에 엄청나게 중요한 게 매였다는 것을 확인하고는 아앨라나의 말이 진실임을 깨달았으니 동작은 빠릅니다. 넬루는 앨리스 앞에 보자기에 싸여있던 것을 내보이는데... 앨리스는 그걸 보더니 호오, 하고는 하나하나 살펴봅니다.
슥슥, 드르륵, 탁. 솔러는 한참 동안 글을 쓰더니 다시 보여줍니다. 크론은 눈치껏 돈을 꺼내라고 한 말이었지만, 먼 곳에서 와서 글도 겨우 쓰는 소녀에게 크론의 완곡어법은 너무나도 어려웠나 봅니다. 솔러는 순수하게 무표정한 얼굴로 자신의 대답을 적어놓았고, 크론은 천천히 읽어내려가고, 고작 이런 걸 쓰자고 그렇게 시간을 들였나, 그리고 이렇게 대책이 없는 아이였나, 정말로 뒷골이 당겨옵니다.
'여비가 무엇입니다?'
....크론도 사실 여기까지 올 때 어느정도 대책 없는 면은 있었습니다. 당장 크론이 '크론'이 되기 전에 입학생의 시체를 발견했을 때만 해도, 크론은 뒷일은 뒤에 가서 생각하는 것이라 믿고 옷을 뺏고 신분을 세탁했고, 여기까지 오면서도 솔직히 임기응변으로 해결한 일들이 많았습니다. 하지만 그렇다 해도, ㅡㅋ론은 나름대로 준비할 수 있는 건 다 했습니다. 마검학 교수의 검술조교와 만났을 때는 그를 경호원 겸 말벗 삼아 동행했고, 자신의 가짜 지위를 십분 활용해 받아낼 수 있는 건 다 받아냈습니다. 하지만 이 소녀는...
'고향, 얼음 땅. 여비, 몰라요.'
...대체 그 추운 곳에서 어떻게 그렇게 대책 없이 막 올 수 있었는지, 정말 신기할 따름입니다. 그리고...
'꼬르르르륵'
"꾸으으으응..."
안타르크티스가 목을 쭉 빼더니 크론의 손을 핥다가, 갑자기 입 안으로 넣어서 쭉쭉 빨기 시작합니다... 이거, 무언의 경고일까요? 그런데, 솔러가 칠판을 슥슥 지우더니 다시 씁니다.
>>798 정령의 축복이 함께하기를, 이라는 말을 헬렌이 듣기 좋으라고 한 말인지, 실제 정령들의 축복을 기원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정령들에게 있어 헬렌의 말은 말이 씨가 되다 못해 말만 했다고 바로 나무가 자라고 열매가 열리는 격이나 다름없습니다. 바바 페흐는 '헬레나'라고 이름 붙은 아이를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여기서 제일 큰 저택에 그 할망이 요즘 뭐 하더라... 이야기를 전해야 하는데."라고 고민하고, 암허슈트는 곤히 자고 있는 아이의 머리에 손을 얹고 "앞으로 세상에서 두려운 것을 많이 볼 테니, 적어도 지금은 아무 걱정도, 공포도 느끼지 마십시오."라고 말하며 아기의 표정을 한층 더 편하게 만듭니다. 로지와 백과사전의 정령은 눈치껏 입을 다물고 있고, 헬렌조차도 자기 몸에 붙어있는지도 몰랐던 타톤 군체의 잔여 포자들이 '타톤...타톤...'거리는 이상한 숨소리와 함께 헬레나에게 가까이 다가가 붙습니다. 그렇게 숨낳은 정령들의 축복을 실제로 받은 아기는 조금 더 건강해지고, 베르나 남작은 웃으면서 이야기합니다.
"로렌스 백작가와 같은 대귀족가와 친분만으로도 영광인데, 분에 넘치는 은혜를 얻었습니다. 그리고..."
"실례합니다. 말씀하신 백은검 한 쌍을 지금 대령했습니다."
가신이 영주성에서 가져온 선물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습니다. 선물 보자기를 풀면... 마치 테이블 위에 길고 날카로운 달이 뜬 것처럼, 은은하게 빛나는 은색의 검 두 개가 놓여있습니다. 베르나 남작은 헬렌에게 양 손으로 칼 손잡이와 칼등을 받쳐 올리면서 주의점을 이야기하는군요.
"비록 보물로 간직했지만, 무기로도 쓸 수 있습니다... 다만, 은제라 내구성이 아주 좋지는 않은 만큼 꼭 은에 피해를 심하게 입는 괴물한테만 쓰는 걸 추천드립니다."
마녀 님으로부터 호수의 어촌의 이름으로 그 한마디가 나오자 저도 덩달아서 반복하며 말하고는 끄덕였어요. 이후 저희는 곧이어 마녀 님의 손짓에 따라서 집 안에 완전히 들어갔어요. 그러면서도 여전히 넬루의 표정이나 태도는 여전히 이 상황을 그대로 받아들이기에는 미덥지 않게 느끼는 부분이 있어 보였어요
"그래요, 이것은 평범한 것이 곧 특이함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넬루 씨는 어떤 모습을 상상하고 계셨나요?"
저는 그녀의 그런 말에 넌지시 물어보았어요. 그녀는 무엇을 기대하고 어떤 모습을 상상했을까요? 숲에서 전해지는 마녀 님의 위상을 미루어보았을때 그런 태도도 이해할 수는 있겠지요
"언제보아도 예쁘네요. 하나 같이 전부 품질이 좋아보여요"
저는 숲이 선사해주는 둥글고 예쁘게 은은히 반짝이는 돌이 아닌 돌을 같이 바라보며 말했어요. 이것들은 마녀 님의 말처럼 희귀품이었으니까요. 이런 수량이라면 수많은 노력이 쏟아내 얻게 되었을거에요
거기에서 내보이는 마녀 님의 그 말에는 날이 선듯한 어조는 분명 저를 향하신 꾸지람이겠지요. 어촌에서 있었던 일에 대해서요
"어촌의 주민들은 저에게 말해주었어요. 어촌의 근간이 되는 호수에 도사리며 삶과 터전 그 자체를 위협하는 호수의 괴수에 대해서요. 그 큰 존재는 저로서도 쉬이 대적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였어요. 하지만 주민들의 헌신으로서 그 도움으로 힘을 얻었고 그리하여 저는 호수의 괴수를 처단할 수 있었어요 "
이뤄내기 위해서 모두를 위하여 그 몸을 다한 희생으로서 저는 완수 할 수 있었어요. 부정하는 것은 이들의 마음과 선택을 욕되게 하는 거에요. 결과를 마주보아야해요. 저는 사실대로 설명을 말하며 이어나갔어요
...류드밀라가 뭐라 한소리 하려다가 겨우 참는데, 두 사람을 지켜보던 논까사들 중 뚱뚱한 노인이 가까이 가서 두 뱀파이어 자매를 반갑게 맞이합니다. 여기 있는 다른 모든 이들이 그렇듯 참으로 허름한 학사복을 입고 있는데... 그의 온 몸에 걸려있는, 아니, 마치 그의 내복을 대신한 듯한 온갖 종이 묶음들은 의미없는 문자들의 나열이 아닙니다. 분명 어떤 규칙이 있고... 엘리자베스는 읽을 수 있습니다. 왠지 모르게 익숙합니다... 그런데, 뚱뚱한 노인이 굳이 어디서 많이 봤는데... 라 생각할 것도 없이 물어봅니다.
"반갑습니다. 요즘은 뱀파이어를 한 분만 뵈어도 행운이라는데, 뱀파이어를 두 분이나 뵙는군요. 위에 위겔 교수는 만나보았겠죠? 그 친구, 지금 제가 살아 있는 걸 알려나 몰라..."
...음. 아무래도 논까사 중에서, 다른 이도 아니고 '교수'급의 사람을 저렇게 편하게 부를 수 있을 정도로 한때 잘나갔거나 오래된 사람도 있는 것 같습니다. 잘 나가던 사람이라면 결국 이 어두컴컴한 수로로 굴러떨어진 셈이고, 오래되었을 뿐이라면 이 어두컴컴한 수로에 아직도 갇혀있다는 이야기니 뭐 좋지는 않지만요. 류드밀라는 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고개를 돌리고는, 차가운 목소리로 대답합니다.
"여기 있는 엘리자베스라면 만나보았어. 나는 아니고."
"혹시 가능하시다면, 그 친구에게 한번만 제 쪽지를... 다름이 아니라 제가..."
"난 심부름꾼이 아니라서, 이만."
류드밀라는 상대하기도 귀찮다는 듯 박쥐가 되어 날아갑니다. 사실 엘리가 엄청나게 특이한 수준이고, 류드밀라도 반응이 저래서 그렇지 인간에게 아주 적대적인 편은 아닙니다... 이게 적대적이지 않은 게 좋은 얘긴진 모르겠지만.
아무래도 손님이 와 있는 곳에서 대놓고 들으라고 악을 쓰면서 혼내는 건 아앨라나에게도, 손님인 넬루에게도 에의가 아닙니다. 앨리스는 웃으면서 검지손가락을 입술에 가져다대는데, 어째 '너 끝나면 두고봐'로 보이는 건 아마도... 착각이 아닐 겁니다. 아무튼 앨리스는 온 김에 식사나 하고 가라면서 토끼 스튜를 끓이러 들어가고, 넬루는 앨리스가 어딘가로 가자 뭘 예상했던 거냐는 아앨라나의 질문에 솔직하게 대답합니다.
"글쎄... 그, 말하는 초상화라던지, 머리 세 갈래로 갈라진 거대한 경비뱀이라던지, 살아 움직이는 세계수의 어린 뿌리라던지, 더 밑으로 내려가면 항상 은하수가 흐르는 밤하늘이라던지... 그런 게 보일 줄 알았어요. 그런데 여기는 음... '그냥' 좋네요."
아앨라나는 말해도 되나 안 되나 고민했을 겁니다. 말하는 초상화는 저기 다락방에 있다고 말입니다. 그것도 도리언 씨라는 이름을 얻은 채로. 아무튼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는 사이, 주방에서 맛있는 고기 냄새가 퍼져오고, 앨리스는 각자의 그릇에 걸쭉한 토끼 스튜를 가득 넣어서 가져왔습니다. 계속 맛대가리 없는 보존식만 씹던 넬루는 침을 꿀꺽 삼키는데, 앨리스가 한 마디를 더 얹습니다.
마녀 님이 저에게 그리 보여 주시는 그 시늉은 저를 혼내시는 것을 나중에 하시겠다는 의미이겠지요. 우리 모두의 체면을 위해서요. 그 때가 돌아오게 된다면 마녀 님은 제게 무엇을 말하실까요? 다른 것은 몰라도 의식을 거행하기 앞서 좀 더 신중하게 결정해야 했었다고 하실 것 같아요. 저는 마녀 님의 그 모습에 시선을 두고 식사를 위해서 주방으로 향했을 그 뒷모습을 바라보았다가 이내 다시 고개를 돌려 앞을 보았어요
"그 중 하나는 직접 만나 볼 수 있을 거에요. 나중에 소개해 드릴게요"
그리고 제가 물어보았던 대로 넬루가 그녀가 상상했던 것들을 말해주었을 때 그녀의 상상은 저에게도 약간의 자극을 주었어요. 그건 저에게도 멋들어지거나 흥미롭게 느껴지는 것이었으니까요
특히 거기에서 말하는 초상화 라고 한다면 그녀에게 보일 수 있는 딱 맞는 존재가 있었어요. 바로 도리언 씨를 말하는 것이 아니겠나요
그렇게 말과 말이 오가는 사이에 맛있는 향기가 저희에게 와서는 그 코끝을 어루만지며 이와 함께 마녀 님이 토끼 스튜를 가져오시는 것을 저는 보았어요. 지금까지 계속 몇 번인가 먹어왔지만 그 풍족한 맛은 질리지 않아요
>>809 세 사람은 정겹게 식사를 나누는데, 아알래나와 앨리스와는 달리 그녀는 조금씩 조금씩 숟가락을 푸는 속도가 느려지다가, 끝내 눈을 끔뻑이면서 눈물을 찔끔 흘리고 하품을 하기 시작합니다. 플라베르흐 마을에서 보여주었던 모습을, 그리고 넬루가 앨리스를 만나러 가는 마을 대표로 선정되었음을 생각해보면, 넬루가 손님으로 방문한 자리의 식탁에서 저런 짓을 대놓고 벌일 정도로 무례한 건 아닐테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칠 정도로 졸리다는 게 맞을 것 같습니다.
"그나저나 요즘도 거기에 큰 배가 들어오려나 모르겠네? 요즘은 아무리 넓어도 호수에 난파선이 잔뜩 생겨서... 어머, 많이 졸린가봐?"
"...죄송합니다... 몸 상태를 잘 살피지 못한 것 같은데..."
넬루는 눈을 끔뻑이다가 순간 스튜 그릇에 머리가 떨어져 얼굴이 국물 범벅이 될 뻔하고, 앨리스가 넬루의 머리채를 잡아 겨우 제지합니다. 앨리스는 외견에 어울리지 않는 인자한 목소리로 말합니다.
"안나, 좀 있어보렴. 얘 이대로 돌아가면 곰이 잡아먹는대도 모르겠다."
그리고는 넬루를 손님용 다락방으로 모십니다. 넬루가 기다렸다는 듯 잠에 드는데, 아앨라나는 서당개도 삼년이면 풍월을 읊는다는데 그간 살아온 평생을 앨리스와 함께했으니... 넬루의 스튜에만 무언가... 다른 재료를 넣었거나, 아니면 문자 그대로 '마법'이 걸려있음을 직감적으로 알아차립니다. 그리고 나서, 앨리스는 웃는데... 무언가 싸늘한 얼굴로 앉더니, 스튜를 먹으면서 이야기하는군요.
"사람의 생명을 활용해 난국을 타개한다는 발상은 이전부터 흔하긴 하지만... 네 나잇대 아이가 진지하게 저지를 정도로 가벼운 일은 아니란 건 알지? 대체 어떤 연유로 그렇게 된 건지 좀 듣고 싶구나."
>>810 "아, 걱정 마시죠! 위겔 교수는 저랑 호르뮈셰에 같이 들어온 동기였거든요. 그런데... 그 친구는 성공했고 저는 실패했을 뿐이랍니다... 그 친구는 뱀파이어에 일종의 신비감을 가지고 있었고... 저는 아니었다는 차이 정도가 있지요. 아무래도 제 평판이 위에서는 그렇게 좋은 게 아니다보니... 위겔을 위해서도 알음알음 서신으로 서로 뭘 부탁한다고 이야기하는데... 요즘 들어서, 위겔 교수한테 경비가 많이 붙은 뒤로 논까사들이 접근할 방법이 없답니다."
자세히 보니, 그 뚱뚱한 사내의 얼굴은 위겔 교수와 비슷한 나이일 것 같습니다. 아무래도 위에서 정식 교수로 임용받고 손에 물 묻히는 일은 뱀파이어 해부 말고는 해본 적이 없을 위겔 교수와는 달리 이 지하수로에서 온갖 개고생은 다 한 이 사람의 얼굴은 훨씬 삭았을 것을 고려해서 조금... 보정을 해 준다면 말입니다. 그래도 믿지 못하는 기색이자, 그는 서신을 직접 열어서 보여줍니다.
"별 내용은 아닙니다! 심심하면 가다가 읽어보셔도 될 정도요."
내용은 정말로 별 것 없습니다...
'땅 속의 오랜 친구가 땅 위의 성공한 친구에게.
지난번에 보내준 소시지 꾸러미는 정말 큰 도움이 되었어. 이번에도 염치 불구하고 부탁 한번 더 하는데, 자네의 비위는 뱀파이어 해부에만 써야 하니 혹시 도축업자에게 물어 동물 내장을 어디다 버리는지 알려만 주면 정말 고맙겠네.
그리고 요즘 들어 경호가 많이 붙어 안전할 거라고 안심하고 싶네만... 조심하게. 경호가 많이 붙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지.
>>811 크론이 손을 빼려고 하는데 잘 빠지지 않습니다. 안타르크티스가 벌써 뺄 손도 없게 잡아먹은 것은 아니고... 이빨로 씹는 대신에 맛이라도 보자고, 마치 얼음보숭이를 먹거나 빨대를 빨아먹듯 쭈우우우욱 빨고 있는데, 북극곰과 인간의 체급 차이가 너무도 심각한 나머지 북극곰의 기초 폐활량과 그 폐활량에서 나오는 막대한 음압이 팔을 뺴내려는 크론의 힘보다 더 강했습니다. 빼내려면 빼낼 수야 있을 것 같긴 한데, 크론은 여기서 옛날에 노예상들한테 잡혀서 일부러 굶어 수갑보다 팔목을 얇게 만들어 도망친 그 때를 생각하며 난처해하는데... 솔러가 도와줍니다.
"크르루응..."
순간, 안타르크티스가 아닌 솔러의 입에서 나왔다고는 믿기지 않는 중후한 목소리가 나옵니다. 그러자 안타르크티스는 축 늘어진 얼굴로, 마치 씹던 껌을 뱉듯 캭 퉤 하고 크론의 손을 빼냅니다. 그리고 나서, 솔러는 다시 칠판으로 글을 쓰는군요.
'사람 말, 어렵다. 동물 말, 쉬워요.'
말귀도 다 잘 알아듣고, 성대도 다치지 않은 것 같은데 굳이 칠판을 써서 필담을 나누는 이유를 이제 알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 와중에 옆에서 스멀스멀 작은 소리가 들려옵니다.
>>813 '신비연금술적 관점에서 은광석은 달의 성질을 품은 비교적 저렴한 원료 중 하나로 햇빛을 반사하는 달의 성질에 깊은 연관이 있고 밤에 숨은 부정한 것들에게 달은 유일하게 그들이 보이는 방법이기에, 그들은 은제 무기를 두려워한다고 합니다. 그렇기에 은제 무기를 사용하면 태양빛처럼 치명적이지는 않더라도 상당한 피해를 입힐 수 있습니다. 또한 원칙연금술적 관점에서 은광석은 반응하는 성질이 커서 부정한 것을 막기에, 이러한 관점에서 은은 여러가지로 쓰이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망령을 일반적인 쇠붙이 무기로 공격하려 든다면 유의미한 타격을 기대하기는 어렵지만, 순은제 무기를 사용하면 망령을 공격할 수 있고, 좀비 등 이미 죽었어야 하는데 살아 움직이는 삶을 모독하는 언데드나, 뱀파이어와 같이 햇빛 아래에서 삶을 허락받지 못한 이들, 끔찍하고 모독적이고 세상에 대한 인식을 형해하는 고대신 주술로 움직이는 것들에 대해 효과적입니다...'
...라고 백과사전의 정령이 주절주절 떠듭니다. 대충 정리하면, 언데드, 뱀파이어, 유령 계열에 효과적이라는 이야기입니다. 물론 백과사전의 정령이 백날을 떠들건 천날을 떠들건 알아들을 일이 없는 베르나 남작은 그저 웃을 뿐입니다.
"나중에 상황이 정리된 다음에 꼭 방문해주시길 부탁드리겠습니다. 사실 이번 사건만 아니었다면, 은 제련과 세공을 함께 하는 작업장을 새로 만들어서 가동할 생각이었는데... 그걸 만들게 되면 은제 식기건 은제 티아라건, 반드시 영애님께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저는 마녀 님께서 정성스레 차려주신 토끼 스튜의 맛을 음미하며 허기를 채우고 있었어요. 그러던 와중에 슬쩍 보니 넬루의 모습이 좀 달라지고 있네요. 그녀의 손은 조금씩 느려지고 이윽고 행동 전체에 변화가 보이고 있어요. 그녀는 갑작스러운 졸음의 습격에 저항하고 있는 듯 했어요
"큰 배를 저는 보았어요. 이제는 제대로 방문할 것이라고 생각해요. 배가 자주 난파되는 원인을 해결했으니까요"
거기에서 저는 마녀 님의 그 말씀에 설명하듯이 이어가며 말했어요. 호수 속으로 배가 가라앉아 잊히는 것은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가장 큰 이유를 제가 지워버렸으니 이제 괜찮겠지요
"자책하지 마세요, 넬루 씨의 잘못이 아니라고 생각해요"
저는 그녀의 그러한 모습을 태연이 바라보면서 그렇게 말을 남겼어요. 그래요. 이건 그녀의 탓이 아닐 거에요. 이상하지요? 그녀는 왜 갑작스럽게 이렇게나 심하게 졸음에 시달리게 되었을까요? 이에 대한 대답은 가까운 곳에 있을 거에요
"네. 그래서, 그런 곰이 있었어요. 하지만 곰은 그렇게 하기 전에 핏덩이가 되어버렸어요"
또 다시 마녀 님이 그런 넬루를 옮겨주며 말하시면 저는 그 모습을 바라보면서 담담히 그렇게 말했어요. 마녀 님이 말하셨던 대로 곰이 있었어요. 굶주린 야수는 첫 번째는 빛으로 실패했고 두 번째는 그 존재로서는 결코 막을 수 없는 힘의 존재에게 삼켜져서 실패했지요
그리고 저는 그녀의 행동이 왜 바뀌었는지 그 원인을 파악하고 알아차렸어요. 그녀의 몫의 스튜에는 거부할 수 없는 깊은 잠으로 끌어당기는 마력이 깃들어 있었어요. 그건 마녀 님이 하신 거겠지요. 이렇게 상황을 의도적으로 바뀐다면 이제 그 순간이 맞이하게 되겠네요
"저는 주민들로부터 설명을 듣고 보았으며 부탁을 받았어요. 제가 플라베르흐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상황은 나빴어요. 어촌에는 호수에 둥지를 튼 괴수의 다가오는 파멸 앞에서 저물어 가는 생명들로 채워져 갔고 최악으로 이어지는 것은 시간 문제 이었어요. 저는 그 부탁을 이루고 싶어졌어요. 그러나 호수의 괴수는 저로서는 상대할 수 있을지는 미지의 존재 이었어요"
"그때 가말라시엘 님이 제게 말해 주셨어요. 저들의 생명은 얼마 남지 않고 타올라 녹아내리는 촛농 처럼 그 마지막을 향하고 있으니 이대로 그저 불꽃을 꺼뜨리기 보다는 남겨진 이들에게 선물을 선사 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은 어떠냐고 하셨지요. 그래서 저는 그들에게 물어보았어요. 그들이 품은 생명이라는 이름의 불꽃을 어떻게 쓰고 싶은지요. 그들은 대답했고 저는 그에 맞춰 원하는 결말로 이끌기로 했어요"
마녀 님께서 몸소 이렇게 상황을 만들어내셨고 이제 저는 묻는 질문에 대답해야겠지요. 그래서 저는 차분히 어떻게 그렇게 되었는지 차근차근 설명하여 보았어요
아앨라나의 말을 무표정으로 천천히 듣습니다. 앨리스는 의도적이라 느껴질 정도로 얼굴에 드러나는 감정을 지웠습니다. 그녀의 눈빛에는 이해나 연민, 수용 같은 것도 없고, 질책과 실망, 걱정도 없습니다. 감정은 자연스레 입꼬리 높이를 오르내리게 하고 눈썹을 펼치면서도 찡그리지만, 앨리스의 얼굴은 감정이라는 끈과 완전히 끊어진 인형처럼 그 자리에 그대로입니다. 그 상태로 아앨라나의 해명을 다 들은 앨리스의 시선은 더 이상 아앨라나를 향하지 않고, 그녀의 지팡이를 향합니다.
'앨리스! 그 존재감은, 느낄 수 있는 자에게는 고통스럽기까지 하죠!'
'다 들리는 건 알지, 괴물?'
아앨라나에게만 들려야 할 목소리를 앨리스가 듣고, 가말라시엘만 말할 수 있는 줄 알았던 안나의 머릿속에서 원래부터 그랬다는 듯 앨리스의 목소리도 들려옵니다. 가말라시엘도 당황했는지 순간 침묵했다가, 이내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능청스럽게 대답합니다.
'그러니까 좋게 말했죠. 아무튼, 제 사도님을 잘 가르치신 은사이기도 하고...'
'헛소리 그만하고.'
오싹, 하고 안나의 등골의 척추 마디 하나하나가 극북의 얼음 기둥처럼 아프게 싸늘해집니다. 순식간에 분위기를 휘어잡은 앨리스는 말을 잘 듣는다면 협박, 아니라면 살인 예고가 될 경보를 날립니다.
'내가 아앨라나를 일일이 챙길 수 없으니까 너 같이 귀신 들린 마법봉을 주워도 그런갑다 했는데... 이번에 크라켄은 몰라도, 그 곰 안나한테 끌고 온 거, 너였지?'
...이런저런 이야기가 나오고 나서...
'이번에는 내가 수도사 심정으로 넘어가는데, 한번 더 애한테 이상한 거 가르치면... 그때는 네가 살았고 살아갈 그 수만년에서 가장 후회하게 만들어줄게.'
팟! 뭐라 말하려던 가말라시엘의 목소리가 끊기고, 앨리스가 감정을 되찾은 앳된 목소리로 묻습니다.
저의 설명을 들어주시는 그때 마녀 님의 모습은 마치 겨울과도 같았어요. 차갑고 고요하지요. 길에 가득 쌓여서는 매워버리는 새하얀 눈과 같이, 무엇도 엿보여지지 않는 그 모습으로 시선은 제가 식사가 놓여진 탁자 옆에 기대어 세워두었던 지팡이로 향하셨어요
"가말라시엘 님은 그렇게 느껴 지셨나요? 아니면 그저 제가 알지 못했을 뿐일까요?"
저는 가말라시엘 님의 '고통스럽다' 라는 말에 고개를 살짝 갸웃하고는 그렇게 묻듯이 말해보았어요. 마녀 님의 올곧으며 다정하신 모습을 알고 있고 그 곁에서 살아왔던 저로서는 이런 분위기와 그 표현에 미묘하게 느끼었어요
그리고 곧바로 이어져 저에게 들려오는 익숙한 목소리가 있었지만 그 익숙함 속에는 새로움 또한 깃들어 있었어요. 소리를 내지 않지만 그럼에도 서로에게 말하듯이 마음과 정신으로 나누는 대화었어요. 크게 놀랄만한 것은 아니었어요. 저는 이미 몇 번인가 다른 형태로 겪었으니까요. 마녀 님이 보여주신 꿈과 현실의 경계면에서의 대화도 그 중 하나겠지요. 그러니 마녀 님에게는 간단할 거에요. 그렇지 않더라도 어려운 일은 전혀 아니 셨을 거에요
저는 두 분의 대화를 가만히 듣고 있었어요. 그 내용은 대체로 저를 향하시기 보다는 가말라시엘 님에게 향한 마치 단단한 얼음으로 벼려낸 칼날을 겨누듯이 하시는 말씀이셨어요. 마녀 님이 말해 주셨고 저도 알고 있듯이 그 사건에 대해서 결과는 옳지만 과정은 뒤틀렸다고 하시는 거에요
그래서 정말 그 야수는 가말라시엘 님이 불러내신 건가요? 이상하기는 해도 저는 대단한 우연이라고 여기고 있었지만 가말라시엘 님의 힘과 능력을 본다면 불가능하지는 않겠지요. 그리고 무엇보다도 마녀 님께서 말하셨으니 근거는 확실할 거에요. 그렇다고 하더라도 저로서는 여전히 묘하게 여기는 부분이 있었어요. 바로 마석, 그러니까 그 야수와 힘 깃들어 있는 그 불길한 힘의 돌은 그럼 어떻게 된 것일까요?
"네, 그럼요. 이는 전부 저를 위해서 말씀하여 주셨으니까요"
그렇게 하여 두 분이 대화가 끊어지자 겨울이 지나 다시 봄이 찾아오듯이 돌아오는 마녀 님의 그런 물음에 저는 싱긋 눈웃음을 지어 보이며 대답했어요
"그런데... 앨리스 님께 제가 보여드리고 싶은 것이 있어요"
그리하여 어촌에서 있었던 일에 대해서 이야기가 마무리된 것으로 보였기 때문에 저는 곧이어 그렇게 말했었어요. 제 앞의 그릇을 옆으로 약간 치워두고는 저번에 야수로부터 얻었던 마석을 살며시 탁자 위에 올려놓았어요. 그리고 천천히 덩쿨을 풀어내고 닿지 않도록 하면서 조심스럽게 천을 아래로 흘러내리게 해서는 그 형상을 드러나도록 했어요
>>819 뚱보는 엘리를 빤히 쳐다봅니다. 기분이 나쁘다기보다는, 의아함과 의외가 더 눈에 띕니다. 마치 "네가 이걸 몰 오히려 모르는 게 신기하다"는듯한 뉘앙스로 되묻습니다.
"뱀파이어님. 모르셨습니까? 지금 위겔만큼 목숨이 위험한 친구도 없고, 살아있는 인간들 중에... 위겔만큼이나 태양교 재세례파한테 증오받는 이도 없을 겁니다."
그러면서, 먼저 자신과 위겔의 과거를, 어쩌다 자신은 걸어다니는 시궁쥐 신세가 되고 위겔은 잘나가는 교수가 되었는지부터 이야기합니다.
"위겔과 저는 같은 뱀파이어학을 연구했지만 방향이 달랐습니다. 그때의 저는, 그때까지의 뱀파이어 연구자들처럼... 뱀파이어의 신비적 측면, 태양과 밤의 대립에 주목했다면 위겔은... 특이하게도 뱀파이어의 생물적 특성에 관심을 가지고 연구를 시작했죠. 처음에는 위겔이 많이 쪼들렸고 저는 개인 연구실까지 받아서, 위겔을 제 조수로 고용해서 임금도 주고, 위겔이 교수와 싸워서 낙제점을 여럿 받아 퇴학당할 처지에 몰렸을 때도 제가 연구필수인력 구제제도인가? 그 제도로 그 친구를 몇 번 구했죠. 그 때는 참, 제가 이리 될 줄 알았겠습니까? 허허."
뭐, 이 긴긴 설명에서 엘리가 굳이 알아야할 거라면 연구 방향의 차이 정도입니다. 다음은, 엘리 입장에서도 영양가가 있을만한 부분이 있군요.
"하지만 위겔의 뱀파이어 해부 자료가 쌓이고, 뱀파이어와 인간의 주요한 신체적 차이를 정리하면서, 위겔은 유능한 연구자가 아니라... 인식의 파괴자이자 창조자가 되었답니다. 뱀파이어와 인간을 각각 세로 절반씩 해부해 박제한 것을 보여주고, 뱀파이어는 신비한 초자연체가 아니라 그냥 좀 차갑고... 입맛 이상한 생물들일 뿐이라는 자신의 주장을 퍼뜨렸습니다. 뱀파이어를 신비에서 현실로 끌어내린 게지요. 그게 잘 먹혀들어가서 제 연구는 망했지만, 단순히 또 싸울 때까지 서로의 영역을 침범하지 말자는 휴전 협정이, 서로의 존재가 참 불편하더라도 참아주자는 평화 협정 수준으로 다듬어진 건 위겔 덕이었죠. 제가 뱀파이어의 신비를 완전 그리고 그것 때문에, 위겔이 너무 위험해졌습니다."
그는 씁쓸한 표정으로 말을 잇습니다.
"재세례파, 태양교에서 가장 과격하고... 인기 좋은 교파였습니다. 뱀파이어 님은 그게 그거 아닌가 할 수 있겠지만, 어지간한 이단심문관보다도 더 가혹하기로 악명이 높았죠. 그런데 위겔 이후로 냉전 기조가 화해까지 번지면서... 그 놈들은 뱀파이어보다도 그 친구 목을 더 노릴 겁니다."
>>827 아앨라나는 앨리스의 앞에 기이한 마석을 꺼내 보여줍니다. 불곰의 눈에 박혔던 그것 맞습니다. 앨리스는 그 마석을 바라보더니, 아앨라나는 천으로 감쌌던 그것을 염력으로 붕 들어올립니다. 손을 휘휘 저으며, 휘젓는 손의 방향에 따라 마석이 돌아가는 신기를 보이며 마석을 한참 동안 살피던 앨리스의 표정이 점점 어두워집니다. 믿을 수 없다는 듯 다시 보고, 또 보던 앨리스는 벌컥 일어나더니 책장에서 책들을 와르르 쏟습니다. 그러면서 이 모든 일이 끝난 후 이걸 다시 정리해야 할 아앨라나에게 이야기하는군요.
"이해 좀 해주렴. 네가 가져온 건... 이 숲에는 있어서는 안 될 물건이야. 100년 전에 내가 이 마석을 마지막으로... 아, 씨!"
앨리스는 고개를 돌리더니, 성큼성큼 걸어와 아앨라나 옆에 있던 가말라시엘의 지팡이를 붙잡더니, 눈을 부라리다가 일부러 아프라고 그러는 듯 바닥에 내동댕이...칠 뻔 하다가 간신히 참고는 심호흡을 합니다. 아무리 아앨라나와 앨리스의 관계가 가깝다고 해도, 아앨라나는 앨리스를 반쯤 어머니처럼 취급하고 앨리스 역시 아앨라나를 반쯤 딸 취급한다 해도... 아닌 건 아닌 겁니다. 가말라시엘을 인격체 취급도 안 하는 앨리스 입장에서라면, 그렇다면 이 지팡이 역시 아앨라나의 '물건'이지 신이 깃든 성물 따위가 아닙니다.
앨리스는 검은 숲에 아주 오랫동안 살면서 온갖 마법과 기묘한 지식을 깨우쳤지만, 아무래도 분노를 잘 억누르는 법은 잘 배우지 못한 모양입니다. 자기가 어지른 건 자기가 정리하는 버릇까지 합해서 말입니다.
"어쩐지 고작 이 지팡이에 갇힌 놈이 어떻게 곰을 끌어왔나 신기했더니만..."
앨리스는 머리를 싸매고 미치겠네, 미치겠네... 말만 반복하다가 아앨라나에게 말합니다.
"아앨라나, 마석에 대해 아는 대로 다 말해보겠니?"
//코멘터리: 자유서술. 아예 모른다 해도 되고 대충 대답해도 되고 지어내서 엄청 자세하게 말해도 되고.
류드밀라는 가볍게 주의를 줍니다. 집행자라 하더니 중대한 규칙 위반이 아니라 '인간의 말버릇' 같은 것도 다 주의를 주는군요. 뚱뚱한 사내는 그 광경을 보고는 "이런 걸 볼 때면, 저도 위겔의 주장에 감정적으로는 동조하게 되지요."라고 말을 얹으며 허허 웃습니다. 앞이 안 보여도 대충 어디가 위고 어디가 아래인지는 알기에, 류드밀라는 손가락으로 천정을 가리키며 말합니다.
"...해가 지고 있어. 엘리. 티호미르, 예마랑 접선해서... 그 재세례파들을 사냥할 시간이야. 네가 위겔한테 대체 뭐가 아쉽다고 뜯어내니, 마니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그 정도면 섭섭잖은 덤 정도는 될 거야."
철퍽! 분노와 증오가 극에 달했는지, 류드밀라가 손을 훅 털자 양 손에서 눈을 의심할 정도로 예리한 칼날들이 나옵니다.
마녀는 어쩌다보니, 크론에게 밀어붙여집니다. 크론이 배운 처세술 중, '누가 네 등에 칼 찍기 전에 먼저 찍어라' '배신은 안 하는 놈이 병X이다' 같은 그가 원래 살던 지옥 같은 곳에서나 쓸데있는 것 말고, 제대로 된 처세술이 나온 순간입니다. 그렇게 크론은 북극곰과 동물과 대화하는 소녀와 마녀, 총 세 명의 참 이상한 사람들을 데리고 학생식당으로 가게 됩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 뭔가 이상한 횡설수설 소리가 들려와서, 모두가 뒤를 바라보면 아까 전에 크론이 그냥 미친 놈 같으니 상대도 안 해야겠다고 결심했던 생긴 것만 멀쩡한 미친놈이 따라붙었습니다.
"...우리는 하늘에서 피어나 영원한 닭고기를 외우고 찬송은 1절까지만..."
...그렇습니다. 총 네 명을 끌고 가는 꼴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 때, 자기가 길을 안내하는 주제에 끌려가는 입장이던 마녀가 그 미친놈의 뜻을 해석해줍니다. 대체 어떻게 알아들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큰 도움이 되는군요. 솔직히 이건 도움이 될 필요가 전혀 없지만 말입니다.
"...오늘은 입학생이 많아서... 정말 많은 양으로 준비했을 거라고..."
마녀는 그리고는 고개를 숙이는데, 어깨를 조금씩 들썩입니다... 뭔가, 자기가 도움이 되었다는 게 기쁜 것 같습니다.
"..."
솔러는 어느새 북극곰 위에 올라타서 칠판에 무언가를 적고, '우응'이라고 북극곰 말소리를 따라하자 안타르크티스가 앞서 갑니다. 그리고 솔러는 칠판에 적힌 걸 보여줍니다.
'저 여자, 저 행동, 이유가 있습니까?'
...추운 곳에서 온 말 못하는 여자가 보기에도 좀 웃긴 광경인가 봅니다. 더 큰 문제가 있다면...
"...저 곰은 뭐야?"
"아오, 저 미친 놈 또 입학했어?"
"어떻게 된 게 사람 네 명 중에 멀쩡한 게 저기 남정네 하나밖에 없냐."
...다들 수군거리고 있다는 겁니다. 물론 말이 아니라 칼로 여러번 찔렸던 크론 입장에서 이거야 아무것도 아니지만요.
>>826 일단 페로의 경우는 굳이 부를 필요도 없었습니다. 베르나 남작이 나가자마자 페로는 자연스럽게 들어오더니, 걱정되는 표정으로 물어봤습니다. 말이야 좀 '귀족'과는 다르게 많이 통속적이고 직설적이지만 그래도 걱정만큼은 진심으로 들립니다. 그리고 살아온 배경이 배경이다보니, 걱정에도 세세한 디테일이 서려있고 구체적으로 뭘 당했을까 걱정하는지도 말해줍니다.
"혹시 저 남작도 아가씨한테 꼬장 부렸어요? 막 돈 내놓으라고, 배상하라고... 그런 거 아니...죠? 아까 전에 나가던 사람들 표정이 좋던데, 막 잘 뜯어서 잘 됐다 그렇게 생각한 건 아니겠죠? 당장 돈 못 주겠으면 할부도 된다고 이상한 데 서명하라고 강요한 거 아니죠?"
뭐, 할부도 된다고 말한 건 맞습니다. 다만 할부로 돈을 내는 게 헬렌이 아니라 상대, 베르나 남작일 뿐이죠. 그러다가 탁자에 놓인 백은검을 보자 놀라서 페로의 귀와 꼬리가 위로 쫑긋 섭니다.
"아니, 이게 다 뭐래?"
그리고 주인장도, 부르려고 '주...'자를 발음하자마자 바로 노크를 합니다. 이 사람도 기다리고 있었던 모양인데, 뭔 말을 할 지 아는 것처럼 이야기하는군요.
"예에! 아가씨! 피곤하시지요? 저녁을 준비해드릴까요? 이부자리를 펴 드릴까요? 방을 바꿔드릴까요? 그, 특실이 지금... 긴급 보수 중이라 특실 빼고 가장 좋은 방을 빼 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