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레야는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더니, 손수건을 먼저 꺼냅니다. 그리고는 자신의 손바닥 위에 그 손수건을 펼치더니, 그 손수건 위에 태양교의 상징인 태양 인장을 올려둡니다. 에레야 같이 '신실한' 이단심문관의 몸에서 한참 오랫동안 함께 있어서 그랬던 건지, 아니면 축성을 잘 한 건지는 모르겠는데, 지켜보는 것만으로 눈알이 구워질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로 고통스럽습니다. 아무튼 에레야는 손수건에 태양 인장을 돌돌 싸더니 엘리 쪽으로 휙 던지고, 엘리는 잡는 것만으로 마치 인간이 맨손으로 녹기 직전의 쇠를 잡는 것처럼 달달대다가, 장갑을 끼고 나서야 겨우 참을 만하게 잡게 됩니다.
"...그래. 혹시라도 그거 말고 다른 보상을 요구할 생각이 있다면 나를 찾아와라. 아니면 편지를 하던지. 할 수 있다면 말이야. 그리고..."
에레야는 엘리에게 이야기합니다.
"...인간 문화에 꽤나 관심이 많은 것 같던데, 뱀파이어 같이 보통은 화형당하는 입장에서 화형을 집행하는 건 수천년을 살았대도 쉽게는 못하는 경험이야. 이번에 저놈들이 저지른 짓도 짓이겠다, 그리고 저놈들이 뱀파이어가 되고 싶어서 이 모든 미친 짓을 벌였겠다, 뱀파이어들은 인간이 뱀파이어가 되길 원하지 않는 걸 넘어서 혐오한다는 메시지를 주는 의미에서 네가 장작더미에 불을 당겨주는 건 어떨까 싶은데."
...엘리, 뱀파이어한테 사형 집행을 요구하는군요. 아마 이번에 묶일 인간들은 그냥 태어난 거 자체가 죄인 게 아니라, 진짜 산채로 불태워질 만한 죄를 지은 놈들이긴 합니다만.
에레야는 질렸다는 듯 이야기하고는, 집게를 들고 가던 사람 하나를 붙잡습니다. 그 사람이 갑자기 붙잡혀서 멀뚱멀뚱 쳐다보기도 전에, 그 사람의 가슴팍에 돈자루를 확 던지더니 집게를 냅다 뺏어버리고는, 그 집게를 다시 엘리에게 던집니다. 네. 그제야 좀 나아지는군요. 집게를 써서라도 성물을 꼭 들고야 말겠다는 엘리의 저 집념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던 에레야는, 고개를 젓더니 엘리에게 이야기합니다.
"뭐 됐고, 아무튼 넌 이제 할 일 없다. 들어가서 쉬고 있어. 설마하니 여기까지 와서 사고를 치진 않겠지만, 그러지 말고."
...라 이야기하고, 에레야는 체포해야 할 사람들이 많은 성당으로 들어갑니다.
이제 엘리는 어떻게 하나요? 별달리 할 일이 없을 경우, 다음날 화형식이 거행되는 황혼 시간대까지 시간을 돌릴 수 있습니다.
>>161 네. 셀프 고문입니다. 엘리가 몸에 대자마자 격통에 몸부림치고, 다른 사람한테 슬쩍 갖다대니 무슨 이상한 인간인가 싶으면서도 지나갑니다. 아무래도 엘리가 '특이한 체질'인 것을 확인하려는 목적이었다면 정말 맞는 것 같습니다. 아니면, 이대로 이걸 엘리와 비슷한 태양교의 성물에 치명적인 반응을 보이는 '불경한' 존재들에게 무기로 사용하려는 목적이라면 그건 확실히 괜찮을지도 모릅니다. 아무튼 엘리는 그것을 가지고 지하수로의 안전가옥에서 시간을 보내다가... 황혼쯤이 되자, 에레야의 부하가 찾아와서 문을 두드립니다. 그는 문을 열고는 엘리에게 말하는군요. 그래도 엘리가 한 일이 일이고, 꽤 오래 봐서 그런지 존댓말이 입에 꽤 익었습니다.
"엘리자베스 님. 화형식 준비가 거의 다 끝났습니다. 아니, 그냥 다 끝났는데, 엘리자베스 님만 오면 진짜 준비 끝입니다."
한마디로 '너만오면ㄱ' 입니다. 엘리는 그 말에 따라 바깥으로 나가고, 에레야가 배려해서 그런지는 몰라도 거한은 빨간 노을빛에 태양의 기세가 약해지는 황혼 시간에도 여전히 뱀파이어에게 치명적일 수 있다는 점을 고려해, 세스타우 성의 건물들 사이의 길어진 그림자 사이로 최대한 나다닐 수 있는 골목길 루트로 엘리를 안내합니다. 그리고 점점 열성적으로 몰려드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심해지는 곳에 이르면, 사람들이 분노에 찬 괴성을 내지르며 무언가 비난하는 현장이 있고, 그 한가운데에는 장작더미에 꽁꽁 묶인 사람들과 그들과 군중 사이에 서 있는 에레야가 있습니다. 에레야는 군중들 사이의 엘리를 보더니 외치는군요.
"참 빨리도 왔구만! 심문관보들! 빨리 길을 열어줘라! 빨리 태우고 갈 길 가야지!"
그 말에 거한들이 성난 군증들을 헤치고, 그 사이로 경비들이 끼어들어 덩치로 군중들을 밀어 엘리가 지나갈 수 있는 길을 만들어줍니다. 아마 시간이 조금만 더 지나면 엘리가 박쥐의 형태를 빌어 이 자리에 나타날 수 있겠지만, 뱀파이어로 변하려던 인간놈들 죽이는 자리에 뱀파이어가 그딴 식으로 나타난다? 난리 납니다.
그녀도 필요한 것들을 재빠르게 챙기는 것을 저는 지켜 보았어요. 그렇게해서 저희는 한 차례, 본래 했어야 했던 휴식을 끝냈고 다시 길을 떠날 준비를 모두 갖췄어요. 그녀도 같은 느낌인지 확실히는 모르겠지만 저는 활력을 되찾아 가벼운 느낌마저 드는 상태로 길을 가고 있어요. 이제 호수까지는 얼마 남지 않았을 것이니 만큼 그 거리를 빠르게 좁혀서 도착하는 것에 전념하는 일만 남은 것이라고 할 수 있겠어요
"기록 이외 것으로도... 호수에 도착하면 무엇부터 하시겠어요? "
길을 가면서도 이번에 그녀가 웃으며 그렇게 말해보이면 저는 그렇게 물어보았어요. 그녀는 호수의 풍경을 마음에 들어할까요? 저희가 마침내 호수에 도착하여 이 목표를 완수한다면 그 후에 무엇을 할까요...? 고생해가며 호수까지 왔으니 만큼, 호수에서 할 수 있고, 하고 싶은 것들을 충분히 해두는 것도 좋을 것 같네요. 저도 그 아름다운 풍경을 천천히 감상하면서 생각해볼까요
@@ >>136 누누코는 역시나 요한의 말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보내었다. 지금까지의 일생을 살육에 바쳐온 토끼가 이해하기엔 너무 심오한 내용이었던 까닭이었다. 딱히 관심이 없기도 했던데다가... 이 무가치한 금속에 목숨을 걸고, 원하는 걸 받는다. 인간사회는 그걸로 전부인게 아니었나?
'이 인간은 말하는 걸 정말 좋아하네.' 입술 틈 사이로 짧은 한숨을 내보이며 짐칸으로 몸을 움직여 천을 걷고 트렁크를 열었다.
"탈러를 원한다는 거지." 그렇다면 현상금 사냥꾼 겸 외과의사 겸 이발사가 말하길, 인간 세상은 정신병자들이 가득한 세상. 그런 세상에서 누누코가 믿는 것은 오로지- 신성한 들판에서의 자유로운 바람과, 그곳에 사는 동료들. 그리고 쇠와 피 뿐이었다.
"가져가고 싶으면 가져가 봐," 누누코의 손을 떠난 도끼가 우아한 원을 그리며 날았다. 그리고 곧 강렬한 충격과 함께 누군가의 두개골을 반으로 쪼개고 파고들었다.
"이 썩은내 나는 송장 덩어리들이여!" 마차 위에 올라선 누누코의 손 마디마디에는, 아직 충분한 양의 쇠붙이들이 끼워져 있었다.
>>163 "음... 일단 뷔르트겐 호수에 있는 생물들을 기록할 거고요. 여기서 있던 일들로 쓸 법한 글감들을 최대한 기록할 거고요. 또 여기서 만난 사람들을 기록할 거고..."
놀랍게도, 베스니가 말하고 있는 그 모든 것들 중에서 '기록'이 아닌 것들은 단 하나도 없습니다. 그나마 찾고 찾아서 기록이 아닌 것이 딱 하나 나오긴 했는데, 이것도 광의의 의미로 따지자면 기록에 가까운 이야기입니다. 그래도 검은 숲에서 병신이 되고 죽을 뻔해서 그런지 이 숲을 나름대로 생각한 방식으로 존중하려는 방식은 높이 평가할 만합니다.
"...신기한 조약돌 같은게 있으면 기념으로 하나 주워가고 싶어요! 그, 좀 귀중해보이는 생물이나 그런 건... 왠지 그런 거는 나중에 심하게 저주받을 거 같아서 안 되고요. 그러니까, 예를 들어서 이런 거 있잖아요! 이거 좋네요. 이렇게..."
베스니는 눈 앞에서 작은 조약돌 하나를 주워서 아앨라나에게 보여줍니다. 우윳빛 색깔의 반투명한 방해석질의, 보송보송하게 구멍이 잔뜩 뚫려 해면 모양이 된 조약돌입니다. 베스니가 그 조약돌을 바라보고 있는 동안... 아앨라나는 그 조약돌이 아닌 조약돌 너머를 봅니다. 이 검은 숲에서 보기 힘든, 나무가 단 한 채도 없는, 아니, 당연히 없을 수밖에 없는 공간. 가까이에서는 바닥의 흙빛과 초록색 이끼빛이 드러나고 저 멀리는 마치 거울처럼 지평선부터 저 위의 하늘까지 담는 일렁임 없이 수면(水面). 그리고 그 수면이 과연 물인지, 거울인지 의심될 때쯤, 물 위에 둥둥 떠 있던 새가 아래에서 올라오는 거대한 메기를 피해 하늘로 붕 뜨면서, 메기가 물 위로 잠시 나타나면서 그 수면이 일렁여, 밝은 태양빛이 그 일렁임을 기회 삼아 반짝이며 두 사람에게 손을 흔듭니다.
뷔르트겐 호수. 검은 숲이 품은 바다. 호수임에도 수평선을 볼 수 있는 호수가 그들을 맞이했습니다. 베스니는 한참 동안 조약돌을 바라보다가, 뒤를 돌아보더니 아앨라나에게 묻습니다.
아마 '년'이라고 말하려 했던 것 같던 사내의 말은 채 이어지지 못하고, 도끼날이 박혀 들어가는 두개골과 함께 두쪽이 나서 어휘가 끊어져 버리며 말 뒤편으로 낙마해 버립니다. 끌어줄 주인을 잃어버린 말은 바로 고삐가 힘없이 풀리자 정처없이 대열에서 이탈하고, 옆에서 다른 남자가 석궁을 쏘지만 누누코는 도끼를 던져 빈 손으로 그 살을 잡아버리는 묘기를 넘어선 신기를 선보이고는, 바로 도끼를 던져 이번에는 명치에 꽂아버립니다. 이번에는 의식이 있어서 피 끓는 소리로 어떻게든 끄아악, 그르아아앓 소리를 내면서 도끼를 빼내려다가 사이좋게 낙마합니다.
"이... 익... 이 개새끼들이!!!!"
그러자 누군가가 마차 앞에서 달려옵니다. 누누코가 도끼를 던지는데, 아까 전 그 놈들이랑은 다른지, 아니면 뇌가 조금 더 나아서 학습능력이 있는지, 도끼들을 피해서 달려옵니다! 어, 이번에는 위험하겠다 싶었는데, 그것을 말고삐를 잡고 있던 요한이 석궁으로 머리통을 쏘는군요. 석궁의 볼트가 날아가 개새끼들이!!!! 라고 욕하느라 벌린 입 안으로 쏙 들어가고, 목젖과 경추를 꿰뚫고 뒤로 나옵니다. 네, 사망입니다. 멍청한 주인을 싣던 말은 마차와 부딪쳐서 죽고 싶을 정도로 멍청하진 않은지라, 슬쩍 피해서 자유를 찾아 훨훨 도망치고, 요한은 누누코에게 웃으면서 이야기하는군요.
"만만하게 생겨서 나쁜 점이 있고 좋은 점이 있습니다. 나쁜 점이야 뭐 아실테고, 좋은 점은..."
요한은 누누코에게 도끼 몇 개만 남긴 채 나머지는 짐칸에 넣고, 석궁에 시위를 다시 먹인 뒤 정리하면서 껄껄 웃으며 말합니다.
생각해보면 이 사람들이 뭔 놀이를 하겠습니까? 공기치기? 고무줄놀이? 말타기? 술래잡기? 그런 애들 놀이는 애들이나 하라죠. 옛날에 있었던 콜로세움도 그렇고, 역시 진짜 재미는 사람을 죽이는 거다 이겁니다. 그것도 만약 아무 잘못이 없는 사람이라면 좀 많이 거시기하고 일부는 이건 정신이 나갔다며 비난하겠지만, 온 세스타우를 혼란에 빠트리고 자기들을 전부 도축할 뻔한 미친놈들이라면... 자기가 직접 불을 못 당기는게 애석할 뿐이죠. 에레야는 엘리에게 불을 주기 직전, 먼저 묶여있는 귀족들의 죄를 낱낱이 고하는 시간을 가집니다. 에레야의 목소리는 기이할 정도로 크고 쩌렁쩌렁하게 울리는군요.
"이단 화형에 앞서 이들의 죄를 고하겠다! 이들은 뱀파이어가 되겠다는 불경한 마음을 품고 그 악성 종양 같은 뿌리를 여기에 내렸다. 이 귀족, 아니, 인간이란 이름이 아까운 혐오체들은 세스타우의 아편굴에 불법 실험실을 차리고, 경비대의 수뇌부를 차지하고, 세스타우의 밀수를 장악했지. 사람들이 홀연히 사라지는데도 경비대는 제 기능을 못 했고, 지하 수로는 랫킨과 고블린과 식인종이 날뛰는 핏빛 지옥이 되었고, 사교 파티는 식인을 '미식'이랍시고 행하는 광기의 만찬이 되었다. 하지만!"
에레야는 엘리를 가리킵니다. 그리고, 세스타우 귀족사회 타락 사건 해결의 최대 공로자, 엘리자베스 바토리 블라드 체페슈, '뱀파이어'를 모두에게 소개합니다.
"...인간이 뱀파이어가 되겠다는 정신나간 발상은, 뱀파이어들에게도 정말로 불경했기에, 여기에 선 뱀파이어 '엘리자베스 바토리 블라드 체페슈'가 적극 협력하여 세스타우 영지민의 보호와 사건 해결에 앞장섰다!"
헉! 사람들이 뱀파이어라는 말에 숨이 멎습니다. 몇몇은 이게 맞는건가, 에레야와 엘리를 번갈아 쳐다보지만, 그들이 뭐라 이의를 제기하기도 전에, 에레야는 다시금 이단심문의 광기로 그들을 선동합니다.
"이제 엘리자베스가 해결사의 권리로, 공로자의 권리로 이들에게, 이들이 있어야 할 곳으로 보낼 특권을 얻었으니... 귀 있는 자들이여, 들으라! 눈 있는 자들이여, 보라! 입 있는 자들이여, 대답하라! 이 이단들에게 무슨 판결이 합당하리오!!!"
>>169 생각해보면, 세스타우에 온 이래로 참 이상한 일들만 있었습니다. 그녀는 친절로 위장한 악의가 아닌 진심에서 우러나온 친절로 건네준 수호부에 손을 데였고, 지하의 괴물들이 아닌 이단심문관과 함께 일했으며, 마지막에는 화형대에 불을 당기는 역할까지 맡았습니다. 원래대로라면, 엘리가 올라가는 게 더 어울렸을 곳을 말입니다. 아직도 엘리의 몸은 뱀파이어, 태양을 제대로 맞으면 불타고, 신성한 무언가에 닿으면 죽어버리는 무언가지만, 적어도 그 아래에서 편안함을 느끼는 이들에게 한층 더 가까이 다가갔음은 안심이 됩니다. 그렇기에, 이 불도, '이단'과 '불경'을 태우는 불도, 조금은 따뜻하게 느껴지고.
화르륵
순간, 엄청난 열기에 엘리는 뒷걸음질치며 눈을 감습니다.
"으... 으아아아아악!!!!!"
"아아아아아아아!!!!"
"우와아아아아아아아아!!!!!!"
수많은 사형수들의 비명과, 군중들의 환호 속에서, 엘리가 쏘아올린 작은 불은 거대한 장작불이 되어 세스타우의 어둠을 정화합니다. 이건 갈 데까지 가버린 종교의 광기가 아닙니다. 엘리가 보았듯이, 죽을 만한 이들이었고, 더 나은 방법이 있다면 더 고통스럽게 죽일 수도 있었을 이들입니다. 세스타우 사람들은 더 불타라면서 쓰레기 따위를 던지고 휘파람을 불고, 환호성을 내지릅니다. 그리고 저 수많은 군중들의 편에 서서 사형을 집행한 엘리는, 참으로 이상한 고양감, 집단의 의지를 수행하는 '칼잡이'가 되는 게 이렇게나 끝내주는 기분이었나 잠시 숨을 고르는데, 옆에서 에레야가 옆구리를 쿡쿡 찌르며 이야기합니다.
"원한다면 연설 기회를 줄 수도 있다. 그런 거 취향이 아니라면, 슬슬 눈치 봐서 내려가도 되고."
저는 고개를 살짝 끄덕이면서 말했어요. 저의 질문에서 그녀의 대답은 기록 이라는 주체에서 벗어나지 않았지만 그녀가 이곳에 있는 이유, 지금까지 해왔던 행동들로 보았을때 어쩌면 그녀의 반응은 당연했던 것일지도 몰라요. 굳이 여기까지와서 다를 이유가 없다는 것이려나요? 그렇지만 그녀의 대답이 이렇다고 해서 그녀의 행동이 이것 뿐만이 이라고 할 수는 없을거에요
"좋은 선택이네요. 제가 물가에서 조개를 가져왔듯이, 특색이 있는 것을 가져가는 거네요"
이어지는 그녀의 말과 함께 저에게 지목하여 보여주는 꽤 괜찮은 모양새의 조약돌에서 저는 긍정하면서 이전에 제가 했던 행동에 비유를 곁들이며 말했어요. 봐요, 그녀의 행동은 기록을 한다. 에만 있는 것은 아니에요. 그래도 연관될 수는 있을 거에요. 탐험으로서 전문적인 표현을 붙여보자면 연구 표본이라고 할 수 있겠네요
그렇게, 다음 저는 건너편에서 엿보이는 광활하다고도 할 수 있는 크기와 그 특유의 모습을 과시하는 호수의 모습을 제대로 볼 수 있었어요. 그 변함이 없는 듯한 아름답고도 신비한듯한 광경은 쉽게 잊혀지지는 않을 거에요
베스니는 입을 벌린 채 아무 말도 못 하고, 목석처럼 그 자리에 한참동안 서 있었습니다. 움직일 수 있게 되자, 뷔르트겐이라는 자연의 경이를 두 눈에 담으려고 고개를 왼쪽으로 돌리고, 오른쪽으로 돌리고, 앞으로 돌렸을 뿐입니다. 한참 동안 눈으로 보기만을 반복한 그녀는 수첩을 꺼내고, 깃펜을 그 위에 꺼내 자신이 보고 느낀 것을 거침없이 적어내려갑니다. 쉴새없이 봇물터진 것마냥 떠들던 그녀의 입은 묵언하고, 그 떠들던 속도는 펜을 움직이는 손으로 옮겨간 것만 같습니다.
호수 반대편이 식별 불가할 정도로 넓은 면적, 바닥의 깊이를 가늠할 수 없어 생겨난 거울같은 수면, 그 수면에 비춘 파란 하늘, 그걸 바라보는 두 사람. 그걸 한참동안 적고 그려내던 베스니는 아앨라나에게 말합니다.
딸랑딸랑, 문간에 걸린 작은 방울이 흔들리며 손님이 왔다고 알리지만 반갑게 맞이하는 목소리는 없고, 무거운 침묵이 헬렌의 양 어깨를 짓누릅니다. 만약 헬렌에게 정령을 보는 능력이 없었다면, 그래서 맥주잔 주변에서 낄낄거리는 작은 주정뱅이 정령을 못 봤다면 청각이 망가졌나 진지하게 걱정했을지도 모릅니다. 그 정도로 조용합니다.
"..."
"..."
보면 사람들이 전부 다 표정이 죽상이고, 얼굴에 검댕이 묻어 있는것이 광부로 보입니다. 왜 광산에서 탄을 안 캐고 이러는 걸까요? 그때, 여관 주인이 헬렌에게 퉁명스레 말합니다.
"갈데 없다고 죽치는 놈들은 저 놈들로 충분하니 댁은 여기 있고 싶으면 방 빌리던지 뭐 먹을거 마실거 하나라도 시키쇼."
펼쳐진 호수의 풍경이 그녀에게 어떻게 다가왔는지, 한 동안 마치 그대로 멈춰버린 듯한 그녀의 곁에서 저는 같이 호수를 바라보았어요. 이윽고 그녀는 움직였어요. 호수에 홀리듯 열렬하고 분주하게 움직이는 손에 천천히 시선을 따라가며 그녀가 하는 것들을 지켜보았어요. 그녀가 지금까지 해왔던 것들은 전부 이것을 위해서 있었던 것이라 칭해도 과언이 아니라고 말 할 수 있을거에요. 그만큼 그녀의 행동에는 강한 마음이 깃들어 있는 것이 엿보여요
저희는 이렇듯 호수에 도달함으로서 목적을 달성했어요. 그러니 그 보상이라고 할까요? 호수가 보여주고 있는 그 자태를, 여기에서 얼마간 머물면서 즐기며 노는 것도 좋을거에요. 잠시동안 그녀와도 같이 저는 줄곧 침묵을 지켰어요. 그리고 이 상황에서 먼저 말을 꺼내게 된 것은 그녀 이였어요
"후후후... 그렇다면 기대하고 있겠어요. 제가 할 일은 그때가 될때까지 기다리는 것, 이겠지요?"
그리고... 충만한 마음이 우러나오는 듯한 그 눈빛과 함께 그렇게 말하는 그녀로부터 저는 한번 다정하게 웃어보이며 대답했어요
@@ >>167 보는 사람이 시원할 정도로 목구멍 가장 안쪽의 자리에 볼트가 자리잡았다. 탈러를 위해 살다 세상과 하직하는 또 다른 인간을 차갑게 바라보며, 누누코는 주변에 잔당이 남지 않았음을 확인하고는 다시 자리에 내려와 앉았다.
"후흥... 지극히 '인간적인' 방식이네." 짐승은, 자신의 목숨이 위협을 본능적으로 느낀다. 마치 이미 저 멀리 꽁지를 내빼고 있는 주인 잃은 말처럼. 천적과 마주하면 도망가게 되는 것이다. 누누코는 그 모습을 바라보면서 요한에게 말을 얹었고, 그들의 주위로는 순식간에 사람의 시체 최소 세 구가 생겨났다. 곧 청소부들이 나타나 그들의 연고를 묻지않고 친히 해체해줄 것이다. 그게 무엇이든간에.
"매번 이런 식인가?" "인간은 다들 요한같은 거야? 아니면..." 아니면- 누누코는 거기까지 말하곤 고개를 돌려 어깨 너머로 시체를 살짝 돌아보았다. 이 상황에 어울리는 무언가 적절한 말을 찾고 싶었는데, 결국엔 단어를 찾지 못하고 얼버무리는 형태가 되어버렸다. 그게 '무식하다' 였나?
>>176 사람들은 거대한 불길에 열광하고 있기에, 그저 개인일 뿐인 엘리가 그 열광에서 슬금슬금 피해 내려오는 건 쉬운 일이었습니다. 엘리가 뜨거운 연단에서 내려오면, 붕대로 온몸을 싸맨 거한들이 그녀를 마주합니다. 에레야와 마찬가지로, 그들이 신전 지하 고문실의 괴이와 혐오체들에게 보여주었던 증오와 분노는 없고 웃으면서 엘리를 맞이합니다. 다들 감사할 일이 많나봅니다.
"엘리자베스 님 덕분에, 이번에 대주교좌 방첩특무성으로 전근 가게 됐습니다."
"에레야 님께서 절 심문부관으로 임명하셨습니다. 승진이다 이거죠."
누구는 영전, 누구는 승진. 경사났네 경사났어, 엘리는 고맙다며 어깨와 등을 툭툭 치는 거한들을 보고 자기가 이렇게 환영받는 존재였나 혼란스러워합니다. 뭐 아무튼 그건 확실합니다. 엘리자베스 바토리 블라드 체페슈, 별종 뱀파이어와 함께 싸워본 이들은 이제 이단심문소, 나아가 태양교의 피비린내 나는 모든 부분에 퍼질 것이고, 다른 뱀파이어들은 몰라도 엘리의 평판은 이들 덕분에 조금이나마 나아질 겁니다. 개중 하나가 묻습니다.
"혹시 이 다음에 뭘 할지 생각해봤습니까? 어디로 가서 쉰다던지, 어디로 가서 책을 읽는다던지요."
"아마 내 생각엔 이 근처 슬로인 왕국에 가실 것 같은데. 거기도 비인간 적대 정책이 없거든."
"아니면 대학도시 호르뮈셰도 가실 수 있잖아. 거기가 신성도, 뱀파이어도 다 연구한다던데."
"근데 꼭 떠날 것처럼 얘기하네? 이 근처 숲이나 지하에서 쉴 수도 있잖아."
저들끼리 떠들기 바쁩니다. 그러고보니, 엘리는 어떻게 할 건가요? /// 제3의 방안을 원하면 상담바람
>>180 두 사람은 호수를 거닙니다. 뷔르트겐 호수는 정말로 넓어서 다 탐사할 수는 없고 두 사람이 당장 볼 수 있는 전경만을 눈에 담을 뿐입니다. 베스니야 이 지역에 대해 아는게 없기도 하고, 또 그녀에게는 이 호수의 존재 그 자체가 신비니만큼 그저 기록하기 바쁘지만 아앨라나는 다릅니다. 여기는 검은 숲 내에서 꽤나 풍요로운 곳이고, 덕분에 어촌이 이뤄져 교역이나 어업이 이뤄집니다. 다시 말해 배를 빌리거나 베스니가 나갈 배편을 구할수도 있고, 아앨라나도 책에서나 본 호수의 신비생물을 탐사할 준비를 할 수도 있죠. 아니면 그냥 앨리스 님의 집으로 돌아가거나요.
>>181 "누누코 씨의 부족에도 다양한 군상이 있지 않던가요? 누군가는 누누코 씨 같을 테고, 누군가는 저만큼은 아니어도 현학적인 고찰과 수사를 좋아하는 사람이 한명쯤은 있을테고, 누군가는 노래와 춤을 좋아할 테고, 누군가는 조금... 도무지 이해가 안 되는 행동 양상을 보여주는 사람들이 있었겠죠. 그렇지 않습니까? 문명 사회도 그렇습니다. 다만 부족 사회와는 다르게, 규모도 크다 보니..."
인간이 많으면 쓰레기도 많다, 뭐 그런 이야기겠죠. 요한은 그렇게 말하면서 마차를 계속 끌고 갑니다. 그것 이외에도 여러 말을 했었지만 위에서 했던 말보다도 더욱 더 영양가가 없었기에 누누코는 상큼하게 씹었던 것 같습니다. 마차는 계속 구르고 구르다가, 몰약 냄새에 누누코의 코가 익숙해져서 맡아지지 않는 것인지 아니면 몰약 냄새가 다 날아간 것인지 몰약 냄새가 느껴지지 않을 때쯤, 요한의 마차가 도착하는 곳이... 어... 낯설지가 않습니다. 비든베일(그 촌장네 집에서 토끼뼉다구네 뭐네 대놓고 앞담 들었고 목욕하는거 훔쳐보다가 두들겨처맞고 나무에 거꾸로 매달리게 된 그놈 보게 된 그 동네 맞습니다.)보다는 훨씬 큽니다.
"낯이 익다면, 우연이 아닙니다."
...라고 말합니다. 네, 누누코가 왔다가 취업사기 한번 거하게 당했던 그 도시입니다. 그새 교수형을 당한 '이상한 열매'들이 잔혹하게 뜯겨먹고 있군요.
>>179 헬렌은 방값을 먼저 계산합니다. 부잣집은 망해도 삼대를 가고, 백작가는 망해도 십대를 갑니다. 헬렌이 이런 마차 여관의 방 한칸 값을 못 낸다면 그게 더 웃길 거고, 설령 진짜로 못 낸다 하더라도 귀족이라는 것을 증명만 할 수 있다면 그 자리에서 남들이라면 씨알도 안 먹힐 '외상'을 당당하게 펑펑 쓰고 나갈 수 있을 겁니다. 아무튼 각설, 헬렌은 방값에 상응하는 동전을 지불하고, 이 사람은 돈도 없는 주제에 갈 곳 없다고 죽치는 놈팽이들이랑은 확실히 다름을 직감한 여관 주인은 태도가 훨씬 싹싹해져서, 혀를 쯧쯧 차면서 저들도 불쌍하게 됐다고 이야기합니다.
"이 동네에서 솔직히 농사짓던 치들은 1년 지어 1년 겨우 빌어먹고, 저 광부들이 돈 좀 만지는 치들이었수다. 근데 최근에 괴물이 나왔답시고 용병들이 들어갔다가 통 나오지를 않는데, 뭔 일 있나 해서 광부들 몇 명이 들어갔는데 소식이 없는 게 다 뒤졌는가 하고 있는디... 뭐, 그래서 저렇게 죽상들 되가지고 초상집이지. 그래도 맨날 여기서 부어라 마셔라 돈 써주던 인간들이니 쫓아낼 수도 없고 거 참..."
@@>>191 헬렌은 여관 주인에게 이야기를 듣고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던전이다. 헬렌은 사실 로망같은 것이 있었다. 선조들의 이야기 속에서 그들은 정령의 힘을 빌어 수 많은 사람들을 구했다. 그것에는 자연재해도 있었고 전쟁도 있었지만 이와 같은 던전에 대한 이야기도 있었다. 인간을 해치는 괴물들을 없애고 마을을, 도시를, 나라를 지키는 무용담에 얼마나 설레했던가.
“그것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알 수 있을까요?”
여관 주인이 더이상 아는 것이 없다면 광부들에게 다가가 들어보려고 한다. 위치나 규모나 나오는 몬스터의 종류라거나.
지금의 실력으로 혼자 가도 괜찮을지, 아니면 길드에서 사람을 구해 같이 가는 것이 좋을지는 일단 들어보고 고민해도 늦지 않으리라.
거한들은 그렇게 말하면서 하나둘 사라지고, 엘리는 혼자 남습니다. 아마 이런저런 수속 절차가 남겠지만, 이제 남은 가장 큰 일은 '호르뮈셰로 가기'고 나머지는 잘잘하겠군요. 누군가와 할 이야기가 있으면 지금 하고, 사야 할 게 있다면 사고, 팔 게 있다면 팔면 되겠습니다.
여관주인은 공을 광부들한테 넘깁니다. 여관 주인은 설명하는 값 하라며 광부들한테 술 한 잔을 돌리고, 광부들은 술을 마시더니 헬렌을 슬쩍 봅니다. 헬렌의 척 봐도 고풍스러워보이는 행색을 보고는 저들끼리 쑥덕대다가, 그래도 싸우지는 못하더라도 도움을 불러올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지 자기 사정들을 이야기하기 시작합니다. 발단은 한 달 전인데, 광산에서 열심히 일하고 있었는데 웬 거대한 뱀 한 마리가 광산으로 들어왔다는 겁니다. 그 뱀이 워낙에 강해서 광부들이야 당연히 탄을 캐도 그건 못 캐던 치들이니 덤벼들다 죽었고 남은 이들은 다 도망쳐 나왔는데, 용병들이 선금을 받고 들어갔는데 아직도 안 나왔다는 겁니다. 그 후로도 계속 용병을 보냈는데 계속, 계속, 계속...
>>200 가는 날이 장날, 쇠뿔도 단김에 빼라, 쇠는 뜨거울 때 두들겨라, 그런 격언들이 헬렌의 머리속에서 요동치고 헬렌은 바로 일어납니다. 멀뚱멀뚱 쳐다보는 광부들과 방은 세팅해두겠다는 주인장을 뒤로 하고 헬렌은 물어물어 광산으로 향합니다. 그리고 그녀가 광산의 검은 구멍 속으로 가까이 가면, 주변에 널린 피 묻은 두개골과 뼈들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 광경에 여기서 일어났다는 습격사건이 헛말이 아니란 건 확실히 알겠다고 생각하려는 순간...
'소름끼치는 광경이군요. 그렇지 않습니까?'
'정신 차려. 이런 때일수록 냉철해야지.'
...헬렌의 머릿속에서 정중한 한 노신사의 목소리와 청아하고 당당한 소녀의 목소리가 맞섭니다. 다른 이들이라면 자기가 미쳤나 의심하겠지만, 이미 저택의 보이지 않는 '고용인'과 '문객'들과 안면을 수백번도 튼 헬렌은 이것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습니다. 뒤를 돌아보면... 뭔지는 모르겠지만, 노신사는 직감과 본능의 총합인 '소름'이요 소녀는 '논리'를 대표하는 존재임은 알겠습니다. 둘은 서로를 지그시 바라보다 헬렌에게 이야기합니다.
'이 안에는, 지금으로선 말할 수 없지만, 매우 위험한 것이 도사립니다.'
'저 왕재수 노인네가 마음에 안 들긴 하지만, 내가 싫다면 저 노친네라도 데려가는게 좋을 거야. 야, 백과사전! 우리가 뭔지 네 잘난 지식으로 설명해봐.'
'소름의 정령 암허슈트: 위협을 감지할 수 있는 최소 수준 이상의 지성을 가진 동물들의 본능, 공포, 예감을 관장하는 중급 정령입니다. 논리의 정령 로지: 특정한 조건 내에서 틀리지 않는 합리적인 추론 과정을 뒷받침하는 중급 정령입니다.'
>>203 엘리는 요리에도 재간이 없고 지금까지 인간들 잘 도와줘놓고 이제와서 인간을 사냥해 피를 흘리게 만들어 굳히는 것도 우스운 일입니다. 부담없는 한끼는 닭피, 좀 뻑뻑하고 진한 맛은 돼지피, 그리고 고급적인 맛은 소 피. 굳이 '품질관리'도 식육을 위한 '품종개량'도 되지 않은 인혈이 뭔 필요란 말입니까. 엘리는 푸줏간에 가서, 블랙 소시지를 사려는데...
꽤애애애액!!!!
돼지의 비명소리가 참 살아있습니다. 그런데 정작 푸줏간 주인으로 보이는 아저씨는 잘게 뭉친 고기반죽을 씻은 창자에 치덕치덕 밀어넣고 있고, 뒤에는 웬 작은 소녀가... 아니, 비냐가 여관 일은 어쩌고 돼지의 목을 자기 팔뚝만한 칼로 40cm 넘게 째면서 쏟아지는 선혈을 대야에 받고 있습니다. 사장은 엘리에게 묻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