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중으로 따지면 두 배가 넘긴 한다만, 그건 중요한 게 아니다. 호랑이 이렇게 자라나면서 변한 것도 있었지만, 변하지 않은 것들도 있었다. 호랑이 지나를 아주 가까이, 일종의 손윗누이쯤으로 여기고 있는 점이라던가, 그래서 친근감 표현도 자주 한다던가. 지나에게는, 지나의 키를 갖고 장난스런 별명을 붙이는 건 좀 변했으면 싶겠지만. 이럴 때만 누나라고 부르냐는 지나의 타박에 호랑은 넉살을 부린다.
"아 이럴 때 안 부르면 언제 불러."
하고 얄궂게 받아넘기고는, 이어지는 지나의 말엔 이렇게 대답한다.
"어휴, 걔 스케줄이 얼마나 빡센데 밥이라도 맛있는 거 먹어야지."
사람을 단련시키는 데 달인인 아버지 밑에서 자라면서 호랑이 갖게 된 생각 몇 가지가 있었는데, 그 중 하나는 고된 일정을 마친 사람에겐 건강한 식사보다 맛있는 식사가 더 도움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호랑이 다음 마디를 덧붙일 때는,
"해줄 수 있는 게 그런 것들뿐이기도 하고..."
문득, 먹구름의 그림자에 우산 그림자까지 겹친 어둑한 그림자 속에 있는 얼굴이 더 어둑해보이는 것 같았다. 그때 들려온 그거 맛있겠다 하는 지나의 말에 호랑은 고개를 돌린다. 마침 옆의 가게의 조명이 호랑의 얼굴에 비쳐, 호랑의 얼굴은 평소와 같은 능청스러운 웃음을 건 느긋한 얼굴로 돌아왔다.
"맛이나 좀 보셔. 바게트 썰어다가 얹어먹으면 얼마나 맛있는데."
하며 호랑은 넉살좋게 품안에 안은 식료품 봉투를 흔들어보였다. 그러다 지나가 선아 이야기를 꺼내자, 호랑은 윽, 하고 정곡을 찔린 것 같은 표정이 됐다.
"어, 뭐..."
다른 사람이 물어봤더라면, 호랑은 대충 둘러대는 말을 했을 것이다. 괜찮아. 잘 지내고 있어. 생각보다 아무 일도 없이 무난해. 우리는 괜찮고, 모든 것이 나쁘지 않아... 그러나 상대는 지나였다. 호랑은 한숨을 푹 쉬었다.
"...생각보다 아무 일도 없이 무난해."
그래, 앞서 말했듯 이것은 둘러대는 말의 예시로 쓰였다. 그러나 앞과 뒤에 괜찮아, 라는 말이 붙지 않았기에, 이것은 지나에게 털어놓는 솔직한 고민이 되었다.
그렇게 세나와 파트너가 된지 며칠이 지나고 해인은 학교의 가정 실습실을 빌려서 무언가를 열심히 만들고 있었다. 참가자들이 머무는 방에는 안전상의 이유로 부엌이 없고 냉장고와 전자레인지 같은 것들만 배치가 되어있었기에 본격적으로 요리를 하기 위해선 이렇게 가정 실습실에 방문을 해야했다. 해인이 만들고 있는 것은 도시락. 한쪽에는 장을 봐왔는지 봉투가 놓여있었고 해인은 거기서 재료들을 꺼내 손질하며 차근차근 요리를 해나가기 시작했다.
" 너무 많이 만들 필요는 없겠지. "
그가 만든 것은 유부초밥과 베이컨 말이 정도였지만 말이다. 딱히 손이 많이 가는 것들은 아니라서 누구나 만들 수 있는 것이라 그도 금방 요리를 끝내고 뒷정리까지 할 수 있었다. 이른 아침에 일어나서 도시락을 전부 다 싸고 나니 딱 적당한 시간이라 해인은 방으로 돌아가 나갈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오늘은 세나와 벚꽃 구경을 가기로 했기 때문이었다.
" 흠 ... "
평소엔 잘 안입는 착장을 입은채 거울 앞에서 둘러보던 해인은 마지막으로 머리까지 스프레이로 살짝 정리하고선 방을 나섰다. 대체로 교복을 선호하기에 사복을 입을 일이 잘 없는 해인은 오늘만큼은 오버핏 셔츠에 후드티를 매치하고 검은색 와이드 팬츠를 입고 있었다. 아무래도 데이트라는 명목이 있다보니 옷장에서 오랜만에 꺼낸듯했다.
지나가 빽 소리를 지르면서 주먹으로 호랑의 복부를 쳤다. 물론 격투기를 한 놈에게 지나의 주먹 정도는 솜방망이처럼 느껴졌겠지만. 지나의 주먹질은 늘 호랑에게만 향한다는 건 그만큼 친근하다는 뜻이다. 아마도...
“응. 선아는 늘 바빠 보이더라.”
호랑과 선아가 사귀기 전에 둘이 어떠한 썸띵이 있다는 사실도 알기 전에 지나는 선아와 이미 알고 지내는 사이었다. 예쁘고 친근한 후배. 그건 확실히 귀했다. 거기에다 노래도 연기도 잘하는 대단한 후배. 무대 보러 갔었을 때 얼마나 잘 하던지 반짝반짝해 보였다. 그만큼의 실력을 가지려면 그만큼 노력했겠지. 그런 것이 눈에 보였다.
언뜻 지나간 호랑의 그늘 진 얼굴을 보며 지나는 호랑과 헤어진 후의 선아의 얼굴을 떠올렸다. 아파도 아픈 티 안내려고 하는 그늘진 얼굴. 지나는 선아와 호랑이 이런 점은 닮았다고 생각했다. 쓸데 없이 이런 점만 닮아가지고는. 지나는 중간에서 답답해 죽을 맛이다.
“...그럴까?”
바게트에 올린 에그 인 헬....... 순식간에 꿈뻑 넘어간다. 지나는 먹을 거에 약하다. 호랑도 그걸 잘 알고 있고.
지나는 정곡을 찔린 호랑의 모습과 한숨을 내쉬며 솔직하게 털어놓는 호랑의 말을 귀기울여 듣는다. 지나는 호랑이 얼마나 힘들어했는지 안다. 당시 호랑이 얼마나 큰 몸과 마음의 상처를 입었는지. 그래서 술을 입에 대며 비행했던 것도 안다. 하지만 선아는 모른다. 이유 모를 일방적인 이별 통보는 선아에게 큰 상처를 남겼을 것이었다. 선아는 감추려 했으나 지나는 선아의 상처를 엿봤다. 그래서 지나는 안다. 하지만 호랑은 모른다.
“음... 뺨 한대로 퉁치기에는 네가 더 잘못했지.”
지나의 생각은 그렇다. 호랑은 선아에게 이별을 통보하는 대신 자신의 상황과 감정을 이야기 했어야 했다. 아니, 이별을 통보하더라도 상황 설명을 해줬어야 했다. 선아는 이별 통보를 받았음에도 호랑을 걱정했다. 뺨을 때릴 수 있을리가 없다. 선아는 호랑을 나쁜 놈이라 생각하지 않는 것 같지만, 지나는 선아만 생각하면 호랑이 나쁜 놈 같았다.
“그래서 프로그램 끝날 때까지 그렇게 무난한 척 지나갈 거야? 너 아직 선아 좋아하잖아.”
지나는 솔직하게 숨김 없이 직설적으로 물었다. 물론 그것이 호랑에게는 스트레이트 펀치 같았겠지만.
데이트라는 명복으로 말이 나오긴 했지만, 결국 오랜만에 놀러가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라고 세나는 생각했다. 물론 방송을 보는 이들의 눈에는 다르게 보일지도 모르지만 어쩌겠는가. 그런 시선까지 모두 즐기는 것이 바로 이 방송의 취지 아니겠는가. 말도 안되는 오해나, 상대를 상처주는 그런 것이 아니면 자유롭게 상상하게 해도 된다고 그녀는 생각했다.
바로 전 날. 자신의 소속사 식당으로 향한 그녀는 그곳의 조리기구를 사용했다. 그래도 벚꽃을 보러 가는데 도시락 하나 없어서야 말이 안되지 않겠는가. 한번 정도는 제대로 만들어주고 싶기도 했고. 식재료는 모두 자신이 구입했으니 소속사 입장에서도 금전적으로 크게 나가는 것은 없었다. 휘파람을 불며 이것저것을 만들어보니 도시락 크기가 3칸이었다. 어머. 생각보다 많이 만들어졌네. 뭐 어때. 싱긋 웃으면서 그녀는 분홍색 사각형 3층 도시락통을 챙긴 후에 방으로 돌아와 바로 냉장고 안에 집어넣었다. 같이 사용하는 냉장고니 내용물이 들킬 위험이 있긴 했으나 해인이라면 보지 않을 것이라고 믿었기에 가능한 행동이었다.
어쨌건 아침 이른 시간. 그녀는 샤워를 마친 후, 자신의 방으로 들어섰다. 뭘 입을까 고민을 하다 최근에 산 분홍색 봄 셔츠를 입은 후, 길이가 짧은 검은색 미니스커트를 입었다. 당연히 속바지 또한 잊지 않았다. 그리고 검은색 스타킹을 신으며 나름대로 산뜻하면서도 귀여운 봄 스타일을 완성했다. 방에 있는 전신거울을 바라보며 가볍게 뱅그르 돈 후, 뒤로 묶은 자신의 머리카락을 한 번 더 가다듬고, 앞머리카락을 빗으로 정리한 후에야 그녀는 방 밖으로 나왔고 어제 냉장고에 넣어둔 도시락을 하얀색 손가방 안에 집어넣었다.
"저도 준비 다 했어요!"
해맑게 배시시 웃으면서 그녀는 가만히 고개를 들어 해인의 얼굴을 바라봤다. 아무런 말 없이 빤히 바라보던 그녀는 싱긋 웃으면서 오른쪽 눈을 살며시 감아 윙크를 보냈다.
"뭐예요? 엄청 꾸미신 것 같은데? 예전에 저랑 공연할 때보다 더. 데이트라고 힘 팍팍 주신 거예요? 후훗."
세나의 옷차림을 보고 해인은 살짝 웃으며 말했다. 확실히 교복 차림보다 더 분위기가 사는게 아이돌은 아이돌이다 싶었다. 엄격한 체중관리를 하고 있으니 어떤 옷을 입어도 잘 어울리겠지만 세나는 특히나 더한 느낌이었다. 놀리듯이 얘기하는 세나의 말에 해인은 흐음, 하는 소리와 함께 잠시 시선을 맞췄다.
" 잘 보이고 싶은 법이니까. "
일부러 애매한 말만 하는 것인지 해인은 그렇게 얘기하고선 한쪽 어깨에 걸치고 있던 백팩을 양 어깨에 제대로 맸다. 이젠 출발할 일만 남았고 ... 벚꽃을 보기 좋은 곳은 마침 근처에 있었기에 멀리 갈 일도 없었다. 다만 짐이 좀 있으니 버스보단 택시로 이동하는게 나을 것 같아 미리 핸드폰으로 택시를 호출한 해인은 손을 내밀며 말했다.
" 가방, 내가 들어줄께. "
평소보다 좀 더 말이 없어진건 아무래도 아침 일찍 일어난게 원인인듯 싶었다. 물론 피곤한 기색은 별로 보이지 않았지만 말 자체가 적어지는 것은 어쩔 수 없는 모양이니까 말이다. 택시는 금방 도착할 위치에 있었기에 미리 내려가있겠다는 생각으로 문을 열고 나선 해인은 말했다.
흐응. 그렇게 나오시겠다? 잘 보이고 싶은 법이라는 해인의 말에 세나는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오른손으로 입을 살며시 가리면서 작게 소리없이 웃었다. 자. 그러면 나는 어떻게 해볼까? 그렇게 생각하며 세나는 가만히 해인을 올려다보면서 이야기했다.
"그렇죠? 시청자들에게 멋진 모습 보이고 싶잖아요. 그래야 이거 끝났을 때 해인이 오빠 인기도 올라가죠. 그런데... 오빠. 그거 알아요?"
이어 그녀는 가만히 자신의 전신을 보여주려는 듯, 아주 가볍고 유연하게 오른쪽 발을 축 삼아 뱅그르르 돌고 천천히 멈췄다. 그리고 오른쪽 눈을 살며시 감아 다시 윙크를 보내면서 이야기했다.
"전 시청자는 잘 모르겠고 오빠에게만 예쁘게 보이면 그만인데. 후훗."
그 순간의 표정은 살짝 진지한 느낌이었지만, 과연 그게 진심인지. 아니면 방송용 서비스인진 아무도 알 길이 없었다. 어쩌면 나름대로 경험을 쌓기 위해서 일부러 이렇게 말하는 것일 수도 있고. 진실은 오직 제 가슴 속에 품어두면서 그녀는 해인이 손을 내밀자 고개를 갸웃했다. 손 잡자는건가? 그런 생각을 하는 와중 가방을 들어주겠다고 이야기를 하는 것에 그녀는 잠시 생각하다가 조심스럽게 가방을 내밀었다.
"든 것은 별로 없긴 한데... 그래도 너무 무거우면 얘기하세요. 아. 가방 안의 내용물은 함부로 보면 안되는 거 알죠? 손가방 안에는 여성의 비밀이 가득 들어있거든요. 그 너머는 함부로 엿보면 안돼요."
설사 그게 여자친구라도요. 그렇게 이야기를 하며 가볍게 웃던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며 해인의 뒤를 따랐다.
"그러고 보니 어디로 갈지는 정했어요? 벚꽃 명소가 꽤 많았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저는 사람이 많아도 되니까 제일 화려한 곳에 가보고 싶어요. 역시 벚꽃놀이를 한다고 하면 가장 화려한 곳이 좋잖아요?"
친구인지 웬수인지 모를 이 철딱서니없는 왕덩치에게 지나가 이런 물리적 응징을 가할 때면 늘 그래왔듯이, 호랑은 과장된 비명과 함께 우찔근 하고 몸을 움츠리며 지나의 응징을 찰지게 접수했다. 그러면서도 우산은 흔들림없이 그 위치에 있는 것도 용한 재주다.
"저녁을 떡볶이로 때워서 쓰나. 식사다운 걸로 먹어야지."
이렇게 거침없는 지나와의 관계와는 반대로, 호랑은 선아 이야기만 나오면 조심스러워졌다. 소중함- 물론 지나 역시도 소중한 존재였지만, 지나에게 표현하는 소중함과 선아에게 표현하는 소중함은 그 궤가 달랐다. 그리고 그 차이가 세번째 포지션에서 두 사람을 바라보고 있는 지나를 갑갑하게 만든다.
"그렇고말고."
자신의 잘못이라는 지나의 지적에, 호랑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싸다- 이것은 지나와 호랑이, 선아에게 호랑이 했던 일에 대해 갖고 있는 공통적인 견해였다. 아무렴, 나쁜 놈이다. 선아에게 자신은 더 이상 너를 행복하게 해줄 수 없을 것 같다, 너와 함께 행복하기엔 너무 모자란 사람인 것 같다-는 그 설명은 선아에게 모자라도 한참 모자란 설명이었으니.
그러나 이 상황을 어떻게 해결할지에 대해, 호랑의 견해와 지나의 견해는 그 궤가 달랐다. 그리고 그 차이는 호랑에게, 지금까지 맞아본 그 어떤 펀치보다도 선명하고 통렬한 펀치가 되어 호랑의 정신적 안면에 직격했다.
"──아."
호랑의 발이 덜컥 접질린다. 그러나 넘어지지는 않고, 호랑은 아슬아슬하게 균형을 유지했다. 우산이 흔들려 빗물이 여기저기 튄다. 호랑은 흔들린 우산을 황급히 지나의 머리 위로 다시 기울여주면서 자세를 가다듬었다.
"...그러네."
머리를 벅벅 긁고 싶었지만, 한 손에는 우산이 들려있고 한 손에는 종이가방이 안겨있다. 호랑이 할 수 있는 것이라곤, 지나의 보폭을 맞춰 나란히 걸어가면서 가만히 침묵하며, 저만치 보이는 기숙사 건물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툭, 하고, 쓴웃음과 함께 한 마디를 내려놓는 것뿐이다.
"아직 좋아하고 있는 거네, 주제도 모르고..."
...애써 무시하고 있었는데.
"난..." 한숨. "그 생각밖에 들지 않아. 나같은 게 어떻게 선아 옆에 서있겠냐고."
그래놓고서는, 뻔뻔하게 다음 주차의 페어를 새로 매칭하느냐 기존 페어를 유지하느냐의 여부를 묻는 용지에, 유지 쪽을 체크해서 제출해버리고 말았지. 그저 미련이라고 딱지를 붙여놓고 있었다. 그 정도로 끝났으면 했으니까, 서로 추억 한 번 되짚어보고, 갈 길을 갈 준비를 마칠 시간이 필요하다고 스스로에게 그렇게 핑계를 댔으니까. 미련이라는 것은 틀리지 않았다. 다만 그게... 좀 많이 클 뿐이다.
"아 나, 술 말리네."
호랑은 부러 웃는 얼굴을 지으며 허장성세를 놓았다. ...허세라 하기도 그런 게 한 팔할 정도 진심이지만.
분명 호랑이 아프지도 않으면서 아픈 척 한다는 걸 지나는 알기에 과장된 몸짓에도 흥 하고 넘어간다. 확실히 안 아파도 아픈 척 해주는 게 괜히 기분에는 좋다. 그걸 아니까 호랑도 매번 그렇게 구는 것이겠지만.
“하긴, 그렇지?”
히히. 오랜만에 호랑이 요리 먹을 생각에 신나는 마음이 든다.
지나는 제 말에 호랑이 갑자기 덜컥 넘어지려고 해서 덩달아 놀라 걸음을 멈췄다. 우산이 흔들렸으나 호랑은 금방 균형을 잡았다. 지나는 호랑을 올려다봤다. 빗물이 우산을 두드린다. 호랑은 전혀 생각지도 못했다는 얼굴이다. 얼씨구? 지나는 어이가 없어졌다.
다시 걸음이 옮겨지고 지나는 호랑에게 감정을 갈무리할 시간을 주었다. 하지만 들려오는 말은 정말 답답한 말 뿐이다.
“그럼 다른 사람은 선아 옆에 서도 되고? 너 그거 보고만 있을 수 있어?”
흐응, 소리를 내며 지나는 호랑을 쳐다봤다. 발걸음은 찰박찰박 젖은 땅을 밟는다. 바보 호랑. 바보.
“야! 내가 술 마시지 말랬지!”
지나가 이번에는 진심 펀치로 호랑의 옆구리를 가격하려 했다. “너 진짜 아저씨한테 말한다? 그 이후로 또 마셨던 거 아냐? 아니, 도대체 술은 어디서 나는 건데. 어느 편의점이야. 내가 찔러버릴까보다!” 하는 잔소리는 덤이다. 지나는 양 허리에 손을 올리고 호랑을 내려다보듯ㅡ물론 올려다보는 자세지만ㅡ 쳐다봤다.
“넌 언제 철 들래? 진짜 선아를 위한다면 확실하게 해. 애매모호한 태도로 더 상처줄 생각하지 말고. 끊어낼 거면 확실히 끊어내던가, 다가갈 거면 확실히 다가가던가.”
세나의 윙크에 해인은 잠시 움찔했지만 금방 평정심을 찾고선 아까처럼 옅은 미소를 지어보였다. 해인도 어쨌거나 관중들의 시선엔 무척이나 익숙했으니 이런 상황에서도 당황한 기색은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 오히려 그는 세나만 들을 수 있을법한 목소리-물론 시청자들에게도 들리겠지만-로 작게 속삭여주었다.
" 그럼 오늘은 나만 봐. "
그런 발언을 아무렇지도 않게 꺼낸 해인은 세나의 가방을 받아들면서 당연하다는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택시를 타러 향하던중 들려온 세나의 질문에 해인은 잠시 고민하다가 입을 열었다.
" 강가에 벚꽃이 잔뜩 피어있는 곳이 있어. 호수공원 같은 느낌? 가로수가 다 벚꽃이라 엄청 예뻐. "
물론 그만큼이나 사람이 많긴 했지만 세나가 원하는 곳이 화려한 곳이라 그곳을 말한 것이었다. 만약 사람 적은 곳을 원했다면 물론 그런 곳도 준비는 해두었다. 언제나 여러가지 계획을 세워두는 것이 해인의 장점이었으니까 말이다. 금방 택시가 도착하고 세나를 먼저 태운뒤 뒤따라 탑승한 해인은 목적지를 말하고선 살짝 눈을 감았다가, 무언가 생각났는지 세나를 다시금 바라보면서 말했다.
" 사람 많은 곳 괜찮겠어? "
연습생이라지만 아이돌은 아이돌이니 노출을 꽤 줄여야하는게 아닌가 싶었다. 물론 자신의 걱정이 기우에 불과한 일이라는 것을 해인도 잘 알고 있긴 했지만 괜시리 걱정이 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모양이었다. 거리가 좀 있는지 택시는 좀 빠르게 달리기 시작했고 해인은 문득 무언가 생각났는지 세나에게 손을 내밀며 말했다.
자신에게 속삭이는 그의 목소리에 그녀는 크게 당황해서 얼굴을 붉혔다. 지금 발언은 방송에서는 아예 안 들리는 대사 아닌가? 일부러 들으라고 하는 대사 아닌 것 같은데? 그럼 나만 들으라고 한 소리야? 어? 어? 어버버하는 모습을 보이던 세나는 애써 표정을 관리했다. 장차 아이돌이 될 나. 이 정도로 표정에 티를 내면 안돼. 그렇게 스스로를 채찍질하면서 세나는 애써 호흡을 정리했다.
"호수 공원이요? 아. 어딘지 알 것 같아요. 저 거기 좋아해요! 센스 좋으시네요. 오빠."
작게 웃음소리를 내며 그녀는 도착한 택시에 탔다. 자신을 먼저 태운 해인을 바라보며 세나는 오른손으로 입을 막고 작게 웃었다. 이렇게 섬세하게 챙기는 부분은 여전하구나. 물론 자신의 기분 탓일지도 모른다. 애초에 소속사에서 본 것이라고 해도 그렇게 오랜 기간은 아니었고, 한번씩이었으니까. 물론 공연을 같이 했을 때는 뭔가 이것저것 챙겨주는 느낌이 분명히 있긴 했지만. 괜히 그 당시의 일을 떠올리면서 콧노래를 부르던 세나는 해인의 물음에 바로 대답했다.
"괜찮아요. 정식 아이돌이 아니라 연습생이니까요. 연습생의 얼굴은 아무도 기억해주지 않는걸요. 데뷔한다면 달라질지도 모르지만요. 후훗. 걱정해주는 거예요?"
대답을 마치며 세나는 자신의 머리카락을 손으로 정리했다. 괜히 고개를 흔들어서 자신의 뒷머리카락을 살살 흔들어서 위치를 조절하기도 하고. 핸드폰을 꺼내서 셀카 모드로 돌린 후, 자신의 얼굴을 다시 체크하기도 했다. 화장..예쁘게 잘 된 것 같네. 그렇게 뿌듯하게 느끼며 그녀는 핸드폰을 다시 집어넣었다.
목적지에 도착하자 화려한 분홍빛이 가득했다. 가로수만이 아니라 다른 나무들도 모두 분홍빛으로 물들어있었고, 그 모습을 바라보며 세나는 절로 두 눈을 반짝였다. 예쁘다! 예뻐! 절로 감탄하며 그녀는 여기저기를 둘러봤다. 여기도 벚꽃. 저기도 벚꽃. 좀 더 안쪽에선 벚꽃잎이 춤을 추듯 천천히 떨어지고 있었다. 그 모습을 구경하던 와중, 해인의 손이 그녀의 눈에 들어왔다.
"기꺼이요. 나중에 열애설 생겨서 곤란하다고 저에게 말하기 없기에요."
먼저 내민 것은 오빠잖아. 그렇게 이야기를 하며 세나는 해인의 손을 잡았다. 자연히 자신보다 커다란 손의 모습이 그녀의 눈에 들어왔다. 조심스럽게 손과 손을 엮어보려고 하면서 그녀는 앞을 보면서 미소를 지었다.
"어쩌면... 제가 오빠 팬들에게 이런저런 소리를 들을지도 모르지만요. 후훗. 뭐, 상관없긴 하지만요!"
아무래도 SNS 같은 매체가 발달하는데다 일반인 중에서도 예쁜 사람들은 곧잘 유명해지는 시대이기도 하니 그런 일이 아예 없지는 않았다. 세나 정도면 최상위권 미모니까 데뷔를 하면 말할 것도 없고 그 이전에도 눈에만 띄면 엄청 유명해지지 않을까 싶었다. 그런 의미에서 이런 벚꽃놀이 구경은 대중들에게 노출되기 쉬운 환경이기도 했고.
" 그 상대가 세나라면 영광이죠. "
아침의 피로가 조금 풀렸는지 아까보단 좀 더 말이 많아진 해인은 자신의 손을 잡은 세나를 슬쩍 보고선 천천히 걸어가기 시작했다. 해인과 세나가 나란히 걸어가고 있으니 많은 사람들이 그들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선남선녀가 그렇게 손을 잡고 걸어가고 있으면 시선이 끌릴 수 밖에 없을 것이다. 해인은 그런 시선엔 아랑곳하지 않고 핸드폰을 높이 들어 셀카 모드로 바꾸며 말했다.
" 여기까지 왔는데 사진이나 같이 찍어야지. "
앵글이 한정적이라 조금 붙어야할듯 싶어 해인은 자연스럽게 세나와 밀착할 수 밖에 없었다. 손을 어떻게할까 고민하던 해인은 마땅히 자연스럽게 놓을만한 곳이 없자 결국 어깨를 살짝 끌어안으려하며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