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부터 이렇게 빗소리를 좋아하게 되었는지 모르겠다. 그렇게 오래된 일은 아닌 것 같은데,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런데 빗소리를 좋아한다고 했지 비를 좋아한다고는 한 적 없다. 이런 식으로까지 흠뻑 즐기고 싶진 않았다. 하늘이 말갛길래 저녁 반찬 장 보려고 크록스 끌고 떨레떨레 나왔다가 갑자기 우르르 쏟아지는 봄비에 처마 밑에 오도가도못하고 갇혀서 빗소리를 실컷 즐기고 싶지는 않았다...! 유유히 장 보고 돌아와서 쾌적한 기숙사 주방에서 야채 손질하면서 듣는 빗소리가 좋은 거지 이런 빗소리는 싫다!
그래, 호랑이 차라리 빈손이라면 그냥 쿨하게 봄비 샤워를 즐기며 유유히 기숙사로 걸어갔을지 모르겠으나, 문제는 지금 호랑의 품에 먹을거리로 가득 찬 종이가방이 들려있다는 거다. 밀봉되어 있는 것도 있었지만, 그냥 봉지에 담긴 채소들도 있었고, 종이 한 장에 싸인 바게트도 있었다.
도움을 청하자니 딱히 도움을 청할 사람도 없다. 눈 딱 감고 룸메이트인 선아를 부르면 될지 모르나, 선아가 스케줄이 있다고 나갔기 때문에 그것도 불가능. 그 끝에, 지금 정호랑은 쏟아지는 비 아래에서 처마 하나에 의지해 된통 갇혀버린 꼴이 된 것이다.
그런데 그때 나타난 것이, 우산을 쓰고 나타난 병아리콩...... 아니, 절친한 소꿉친구이자 누나인 지나였다.
"아이고 이게 누구야 이런데서 다보네, 우리 숏다ㄹ... 아니, 병아리콩 어서오고."
이 자식 그럴 거면 2인칭을 왜 굳이 고치는 거냐.
"저녁은 여기 있는데(그는 종이가방을 흔들어보였다) 우산이 없네. 그 짧은 사이에 쏟아질 줄은 몰랐지."
호랑의 품 안에는 먹거리로 가득한 종이가방이 들려 있었다. 우르르 내리는 비와 종이봉투. 확실히 환경에는 종이봉투가 좋지만 이대로 빗속을 달렸다간 종이 봉투가 다 젖어 찢어지는 바람에 내용물이...... 끔찍한 상상은 여기까지만 하기로 했다.
확실히 요리라곤 관심 없어보이는 이모ㅡ호랑의 어머니ㅡ라던가 닭가슴살을 냉장고에 잔뜩 채워넣기를 좋아하는 아저씨ㅡ호랑의 아버지ㅡ를 생각하면 호랑은 어디서 온 흥미인 건지 요리를 퍽 잘했던 것으로 기억했다. 우리 엄마가 요리를 잘하는 것과 자신의 요리 실력은 상관이 없던데. 혹시 내가 받아야 할 엄마의 요리실력을 정호랑이 뺏어간 건 아닐까? 그건 마치 호랑네 집에 자주 간 반찬 배달로 인한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호랑의 환영 인사가 무척 건방지다. 얘는 내가 누나라는 사실을 잊는 것이 아닐까? 아니면 일부러 흐린 눈을 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나마 병아리콩이라고 고친 것에 부루퉁한 얼굴을 하는 정도로 끝낸다.
“우산은 여기 하나 있으니까 씌워줄게. 가는 길은 같을 테니까. 음, 우산을 네가 들고 내가 종이가방을 드는 게 좋겠지?”
지나는 우산을 주고 자신이 종이가방을 들려고 했다. 갈 준비가 끝났으면 같이 걸음을 옮기려고 했을 것이었고.
“오늘 저녁은 뭐야? 선아랑 같이 먹어?”
처음에 호랑이 선아와 같은 페어가 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꽤나 속으로 걱정을 많이 했다. 변화는 항상 파장을 불러오는 법이니까. 헤어지고 시간이 지나 조금은 안정되었다고 생각한 두 사람이 다시 부딪혔을 때 올 충격이 과연 긍정적일지 부정적일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다행이도 지난 방송 영상을 봤을 때 그리 나쁘진 않아 보였다. 그래서 조금은 수월하게 선아의 이름을 입에 올린다. 물론 호랑이 속앓이를 하고 있을 것은 뻔히 보였지만.
/내 마음대로 적폐가 섞였는데 혹시 아니라면 꼭 이야기해달라...... 전에 호랑마마랑 호랑파파 썰 듣고 한 생각인데(흠) 아니면 호랑파파가 음식에 조예가 있는 걸까?(흠티콘)
지나의 기억은 정확하다. 호랑의 어머니인 천진영은 음악적 능력을 대가로 그 외 모든 능력이 바닥난 글러먹은 어른으로, 지나에게 흔히 하는 입버릇이 '나같은 어른은 되지 마라'인 사람이다. 그 대신 호랑의 아버지가 요리실력이 있긴 하나, 모든 식단을 몹시 건강하게 짜는 사람이라 호랑이 종종 보여주곤 하는 그나잇대 고등학생치곤 제법인 요리실력의 출처라고 하기엔 어렵다.
호랑의 요리실력에 지나의 어머니의 반찬이 한몫 했을 거라는 지나의 예상은 틀리지 않았다. 그러나 그 외에도 출처가 2군데 더 있었는데, 헬스 센터를 운영하면서 태릉선수촌의 코치로도 활동하고 있는 바쁜 아버지가 밥을 차려주지 못할 때면 어머니가 이런저런 식당에를 데려가는 일이 잦았고, 종종 할머니가 오셔서는 맛있는 거 먹고 자라야 할 애한테 밥상이 너무 삭막한 거 아니냐고 아버지의 등짝을 때리며 밥을 차려주시는 일도 종종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호랑은 건강한 식단과 맛있는 식단 양쪽을 다 접하며 자랐다- 아무튼, 먹을 거 때문에 사람이 비뚤어지거나 하진 않았다. 그냥 타고난 성격이 짓궂을 뿐. 지나의 부루퉁한 얼굴에 호랑은 낄낄대며 어깨를 툭툭 쳐줬다.
"에이, 우산 얻어쓰는 것도 감지덕지인데 누나한테 짐까지 들려줄 수야 있나."
지금 상황에서 제가 을이라는 걸 아는지 은근슬쩍 호칭을 누나라고 바꾸는 것도 킹받는다. 호랑은 종이가방을 품에 안은 채로, 지나의 손에서 우산을 받아들었다.
"글쎄다, 선아가 언제 올지 몰라서? 좀 해놓게."
지나가 선아를 언급했을 때, 지나는 순간적으로 호랑의 얼굴에 스쳐지나가는 착잡한 기색을 볼 수 있었다. 저번 영상에서 지나가 보았던 것들이 사실과 크게 다르지 않은지, 지나가 걱정할 필요가 있는 새로운 어떤 고민거리가 엿보이거나 하는 건 아니었지만, 오랜 고민이 아직도 해결되지 않고 흉터로 남아있는 것은 분명했다.
"미트볼 넣은 에그 인 헬을 좀 해놓을까 싶걸랑. 그렇지, 재료도 충분한데 우리 강낭콩은 저녁 드셨어?"
호랑이 지나의 어깨를 툭툭 치자 지나도 그대로 돌려주고 싶었으나 그러기엔 호랑의 키가 너무나 컸다. 분명히 어릴 적엔 키가 비슷한 때가 있었던 것 같은데 어느 순간부터 호랑이 키가 쑥쑥 크기 시작하더니 거의 두 배나 차이나기 시작했다ㅡ그 정도는 아니다ㅡ. 왠지 분해진다.
“이럴 때만 누나라고 하지.”
지나가 샐쭉하게 호랑을 흘긴다. 물론 이런 일이 한두번이 아니라서 익숙할 지경이다. 호랑이 이렇게 하지 않으면 그 때야 말로 긴장해야 하는 순간인 것이다. 호랑이 우산을 들자 두 사람은 빗속으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선아 어디 나갔구나. 선아는 좋겠네. 무료로 요리사 한 명 고용한 셈이니까ㅡ.”
지나의 눈에는 순식간에 지나간 호랑의 착잡한 표정을 캐치할 수 있었다. 그야 꽤나 많은 시간을 같이 보냈으니 말이다. 지나의 입장에서는 여전히 호랑이 선아와 헤어진 것에 대해 완전히 이해하지는 못했다. 호랑은 자신이 자격이 없다고 말했지만... 그런 자격이라는 게 어떤 걸 말하는 것이냔 말이다.
“떡볶이 먹긴 했는데...... 그거 맛있겠다.”
지나는 침을 꼴깍 삼킨다. 미트볼 넣은 에그 인 헬이라니... 그거 엄청 맛있는데. 물론 강낭콩이라는 말이 지나간 것 같은데 슬쩍 무시한다.
“그나저나 좀 어때? 선아랑 지내는 거.”
이왕 이렇게 이야기할 기회가 생긴 겸 지나는 가타부타 말 없이 벌써 본론을 꺼내든다. 찰박찰박 걸음을 옮기면서 호랑의 표정을 살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