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모두는 누군가를 위한 이야기의 소품이자, 단역이자, 조연이기도 하고 동시에 자기 이야기의 주인공이기도 하다. 그 이야기는 비참할 수도, 행복할 수도 있고, 기승전결이 갖춰졌거나 이야기의 어떤 구성요소 하나도 제대로 된게 없을 수 있다. 하지만 아무리 엉망인 이야기가 되는 한이 있어도 우리는 선택하고, 때로는 강요당하면서 우리의 이야기를 써낸다. 이야기의 악마 이프가 이제 마침표를 찍으라 권할 때까지, 죽음이 우리를 찾아올 때까지. 왜냐면 우리는 살아있으니까. 그 이야기는 우리의 삶이니까.
뱀파이어의 특성상 인간보다야 훨씬 오래산 덕분에, 엘리는 인간이라면 죽을 날만 기다릴 80대가 되었습니다. 이런 농담도 있습니다. 뱀파이어가 돈이 많은 건 그네들이 무슨 특별한 능력을 가지고 뒷세계를 주무르고 암흑가에서 검은 돈을 벌어서가 아니라, 막말로 수백년을 살수 있는데도 돈을 못 모으면 그건 머저리라는 농담 말입니다!
"방에서 잠만 자는데 동화 5개, 식사랑 목욕은 은화 1개. 더 싼데 있으면 거기 가슈."
엘리의 행색을 보고 수상히 여긴 여관 주인이 퉁명스레 대답할 동안, 엘리는 인간의 돈을 얼마나 갖고 나왔나 세봅니다. 가출할 때 대충 들고 나온게 은전 50개군요.
...하지만 수상한 건 수상한거고, 돈 주는 건 돈이죠. 돈이 나오자 태도가 갑자기 확 바뀌어서는, 여관 주인은 퉁명스런 태도를 치우고 급사를 불러 방 안내를 시킵니다. 비냐, 라 불린 하플링 여급은 짧은 몸으로 앞서 나갑니다. 끝단을 묶은 긴 머리가 발치에 닿을 듯 흔들리는 게 시선을 빼앗는군요.
"여기가 방이에요. 내일 점심시간까지 사용할 수 있고, 식사는 오늘 저녁이랑 내일 아침에 제공된답니다!"
비냐가 안내한 방은... 음, 창문이 널빤지로 막혀있는 것만 빼면 괜찮군요. 침대는 짚 따위가 아닌 제대로 된 침대고, 책상과 선반도 있습니다. 그런데, 비냐가 문을 닫더니 소곤소곤 눈치를 보며 얘기하는군요.
"아, 그리고... 여관주인 아저씨가 손님 떨어질까 말 안한 것 같거든요... 여기는 한밤중에 날개 달린 괴물이 쳐들어와서 손님이 죽었어요. 지난주부터 치워서 겨우 다시 연 건데... 조심해야 해요."
그리고 조심하라는 의미로, 신전에서 받아온 수호부를 건네는군요. 아주 이곳은 선의로 포장된 살인도구 투성이인 걸까요? // 반응이 늦어서 미안! 오늘은 여기까지 하고 들어가볼게!
엘리는 잠에 듭니다. (엘리의 맨얼굴에 대면) 못생긴 가면도, 옷인지 족쇄인지 알 수 없는 두꺼운 천옷도 벗은 덕분에 피로가 풀리는 느낌입니다. 선반에 던진 수호부의 존재가 좀 재수 사납게 느껴지지만, 다행히도 면죄부보다 효능이 아주 조금 나은 수준이라 단순히 같은 방에 있다고 엘리의 단잠을 최악의 악몽으로 바꾸는 일은 없었습니다.
"저녁 시간이에요! 은화 낸 손님들! 빨리 식당칸 내려오세요! 늦으면 돈 내 놓고 밥 못 먹어요!"
쾅쾅쾅, 쾅쾅쾅! 비냐의 당찬 목소리와 함께 문을 쾅쾅 두드리는 소리가 들립니다. 잠시 잠에 들었던 엘리는 일족이 모여살던 저택에서는 꿈도 꿀 수 없는 천한... 아니, 거침없는 저녁식사 알림에 놀랍니다.
내려가니 비냐가 사람들 사이를 돌아다니며, '은화 손님'들에게 음식들을 다 내려두고 있습니다. 하지만 은화 손님이 은화 손님이라고 얼굴에 써둔 것도 아닌데, 비냐는 어떻게 잘 알아차리고 음식을 가져다 두는군요. 음식은 뭐... 크게 바랄 건 없습니다. 며칠이나 끓였는지 모를 스튜가 한 그릇 나가고 거기에 블랙 푸딩, 좀 더 알아듣기 쉽게 얘기하면 굳힌 돼지 피로 속을 채운 소시지 하나씩이 나가는군요. 뱀파이어 일족들 중 수천년째 최후의 전쟁 타령을 외치는 치들이 피를 저런 식으로 굳혀 먹는다고 하니, 아마 엘리자베스도 먹을 수는 있을 겁니다... 먹을 생각이라면요. 그렇게 생각하며 주변을 구경하는데, 비냐가 음식을 다 옮기고 주방으로 돌아가던 중에 엘리와 부딪칩니다.
"으엑! 앞에 좀 보고 다녀요... 에? 누구세요?"
비냐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당신을 올려다봅니다. 그럴 법도 합니다. 들어올 때는 가면에 온갖 변장을 다 하더니, 이제는 풀어버리면 비냐 입장에서는 알아볼 길이 없죠. // 가능하다면 엘리 외모 묘사 답레에 부탁할게!
장난스러운 인상과 긴 편에 속하는 은색 머리는 그렇다치고, 톡 튀어나온 송곳니를 비롯해 내 붉은 눈은 꽤나 이질감을 불러일으켰다. 일반적인 "적안"이 광택 있는 붉은 빛깔이라면, 나의 그것은 말 그대로 피의 색깔. 이 시대에 있을 수 없는 용어를 빌려 설명해보자면, 동공 자체에 색소가 없어서 내부의 혈관이 비쳐 보이는 모습이었으니까.
목소리를 듣자 비냐는 굳어버립니다. 마치 고장난 인형 같이, 엘리자베스의 선혈 같은 눈동자와 은색 머리를 멍하니 쳐다보고만 있습니다. 비냐는 상대가 누군지 알아본 모양입니다. 생긴 건 모르겠지만 목소리는 딱 그 '은화 손님'이었을테니까요. 그런데 그 가면을 쓴 이가 알고 보니 이런 여인일 줄은 꿈에도 몰랐던 모양입니다. 비냐는 잠시 동안 바라보다가 벌벌 떨리는 손가락으로 천천히 한 자리를 가리킵니다. 구석자리, 공교롭게도 아무도 없는 자리입니다. 비냐는 거기에 엘리를 앉히고 피소시지와 스튜를 가져다줍니다. 걸쭉한 밀죽을 기초로 뭉근하게 녹은 콩과 당근 덩어리, 그리고 네모난 크기로 썬 다양한 종류의 고기들이 인상적인 스튜입니다. 피소시지도 갓 만들었는지 아직 싱싱한 쇠비린내가 조금은 느껴지는군요. 하지만... 옆에는 비냐가 엄청 심각한 표정으로 물어보고 있습니다.
비냐는 할 말을 잃고 잠시 서 있습니다. 공포일까요, 충격일까요, 황당함일까요. 어느 쪽이건 간에, 이것 하나는 확실합니다. 전혀 긍정적인 감정은 아닙니다. 계속 엘리의 선혈 같은 눈동자를 바라보던 비냐는 말없이 주방으로 돌아갑니다. 다행히도 왁자지껄 떠들기 바빠서 주변은 못 들었지만, 왠지 모르게 여기서 엘리의 일족은 환영받지 못하는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군요. 어쨌든 인간들이 먹는다는 피소시지를 체험을 끝마치고 스튜는 거르는 엘리 앞에, 여관주인이 정말 심각한 표정으로 오더니 맞은편에 앉고는 아직 따지 않는 술병 하나를 올려둡니다. 그리고 넌지시 턱짓으로 뒷편을 가리키며 이야기하는군요.
여관 주인은 여관 뒤로 엘리를 부르고 나서, 주변을 살피더니 살며시 문을 닫습니다. 하늘의 서쪽에서는 아직 붉게 물든 햇빛이 보였지만 이제는 어느 정도 괜찮으니, 엘리는 그냥 따라갔을 뿐입니다. 여관 주인은 골목길 문을 닫고 나서 한숨을 쉬더니, 쉬이이... 하면서 목소리를 낮추라 하고는 죽일 듯한 눈빛으로 엘리에게 말합니다. 어느 정도 감정을 다스린 것 같지만 목소리에서 공포인지, 분노인지, 하여튼 부정적인 감정을 숨길 수 없는 모양입니다. 그는 술을 건네더니 이야기합니다.
"지난번에 괴물이 들어와서 다 헤집고 나갔더만, 이번에는 뱀파이어야? 그것도 인간 사이에 뱀파이어가 나돌아다니면 뭐가 문젠지도 모르는 뱀파이어? 제기랄, 환장하겠군."
여관 주인은 대체 인생이 왜 이 모양인지, 왜 이런 것들만 손님으로 들어오는지 한참 동안 불평을 주절주절 늘어놓더니 엘리에게 아직 따지 않은 술을 건네고는 이야기합니다.
"내가 접객의 신 박툼을 믿는 걸 감사하게 여기셔. 아무튼 우리 가게에 돈 내고 들어왔으니 오늘 하룻밤은 자고 가게 해주겠지만 더 이상은 안 돼. 이 술 줄 테니까, 어디 가서 당신이 우리 여관에서 하룻밤 묵었다곤 얘기하지 말고."
아무튼, 엘리랑 얘기도 끝났겠다 여관주인은 엘리와 함께 들어갑니다. 엘리는 엘리자베스라 불리던 일족 생활 시절 배운 것을 떠올립니다. 기본적으로 인간은 뱀파이어에 대한 본능적 혐오, 종교적 악마화, 그리고... 솔직히 말해 뱀파이어들 잘못도 있는 인간-흡혈귀 전쟁 문제, 지금도 어디선가 어떤 뱀파이어가 저지르고 있을 인간목장 및 노예제 문제 때문에 큰 거부감을 가지고 있다고요. 이 거부감은 사람마다 달라서 잘하면 용인받는 문화권에 갈 수도 있다지만 여기는 조금 애매하군요. 뱀파이어라고 환영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이단심문관을 불러 이 미친 암모기를 당장 매달아 불태우라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지는 않으니 말입니다! 여관으로 들어가던 엘리는, 뉘엿뉘엿 지던 해가 완전히 지평선 너머로 푹 꺼지고, 어둠이 세상을 뒤덮은 것을 목격합니다.
엘리자베스 바토리 블라드 체페슈. 별난 뱀파이어도 뱀파이어이고, 그녀는 뱀파이어 일족 중에서도 꽤나 고귀한 혈통입니다. 인간들이 불을 켜놨지만 이것으로 태양의 권능을 대신할 수는 없고, 엘리는 온 몸의 족쇄가 풀린 것을 느낍니다. 느릿느릿하고 답답하던 몸놀림이 빨라져 앞서가던 여관 주인의 장화 뒷굽을 저도 모르게 몇번 밟고, 여관 안에 들어가니 소리도 잘 들리는군요.
>>114 머뭇거리던 엘리는 그걸 생각해봅니다. 생각해보면, 인간의 피를 빨아본 것도 너무 오래됐습니다. 일족이 경영하던 영지에서 농산물 대신 피 한모금 분량으로 세금을 대신할 때를 제외하면 인간의 피를 마셔본 적이 없었습니다. 해봤자 닭 피, 좀 사치부리면 소 피였을까요.
"야, 이년 쫄았어!"
"너무 겁주지 마. 긴장하면 강직 푸는데 오래 걸려."
말할 수 있고, 생각하고, 사랑하는 지성체의 피를 마시는 건... 배덕 그 자체입니다. 소유할 수 있다는 게, 언제든 먹어버릴 수 있다는 게, 얼마나 달콤한지, 얼마나 짜릿한지.
"잠깐, 어디 갔지?"
식인종들은 갑자기 사라진 인영에 당황해서 주위를 살펴봅니다. 그리고 자기들이 상대를 잘못 골라도 한참 잘못 골랐음을 깨닫는데 오래 걸리지 않습니다. 그녀 자신조차도 인지할 수 없는 속도로 달려든 엘리의 송곳니가 드러나고, 그대로 식인종 하나를 붙잡아 목을 깨뭅니다.
"끄, 으아아아아아!!!!"
...엘리가 송곳니를 꽂는 방식은, 많은 호사가들이 생각한 것처럼 야릇하고 관능적이지도 않고, 엘리가 영지민 소녀에게 그랬던 것처럼 부드럽고 정중하지도 않습니다. 세상에 사냥감 사정 신경쓰는 사냥꾼은 없고, 엘리도 그렇습니다.
"사, 살려줘! 나 죽는다아아!!!!"
송곳니에 뚫린 피부에서 피가 새어나오고, 역겹지만 중독될 것 같은 피비린내가 비강을 채우자 온 몸에 다행감이 퍼지며 웃습니다. 하지만 피비린내 속에서 달콤한 맛, 텁텁한 맛, 시큼한 맛이 자기주장을 하고 있습니다. 한두명을 식인한 게 아닌 모양이라 생각하니 혐오감이 들어 송곳니를 빼려는 찰나...
"뒤져라! 이년아!"
"야, 쑤셔!"
쌔액, 푹, 푸슉! 옆구리와 등에서 느껴지는 격통에 엘리의 눈이 뜨이고 저도 모르게 목을 깨문 입을 콱 악물어 버립니다. 사람을 먹는 놈들도 꼴에 동료애는 있는지 엘리를 죽이려고 녹슨 칼로 마구 난자하지만, 차라리 피를 좀 빨게 냅뒀으면 좋으련만. 격통에 무의식적으로 이빨을 악물자 송곳니가 식인종의 경동맥을 꿰뚫고, 식인종의 심장이 엘리의 입 안으로 신선한 동맥혈을 쏴버립니다.
"아오 이 미친년!"
"아 씨... 오랜만에 맛있을 것 같았는데."
...여러개의 칼에 쑤셔지는 상황은 누구한테나 목숨이 위험한 상황이고, 엘리가 인간이었다면 벌써 죽었을 겁니다. 세 명이 달라붙어 1분 동안 쑤셨으니 분명 얼마 못 갈 거라 생각해 식인종들이 몇 걸음 물러납니다. 하지만 뱀파이어의 생존 본능이, 엘리의 입을 잠시 지배해서 식인종을 포식했습니다. 식인종의 피에서 얻은 기이한 생명력이 벌어진 상처들을 꿰매고, 십년만에 마약 같은 인혈을 한 모금도 아니고 '성체 수컷' 1체만큼 포식하니 온 몸이 행복해집니다. 이성이 마비된 건 아니지만, 쾌락이 지금 이 순간만큼은 웃으라 하는군요.
"야 저거 뭐야?"
"이... 인간 아니었냐?"
그리고 그제서야, 식인종들은 기분 탓인지는 몰라도 더 선명해진 것 같은 핏빛 눈동자를 보며 깨닫습니다.
혹시 이거 때문에 불쾌감 느낄까 미리 설명하면 1. 나는 엘리 서사의 테마를 '위험하다고 배척받는 소수자가 이해와 상호부조를 통해 거부감을 희석하고 용인받는 과정'으로 생각하고, 이 과정에서 당장은 식인종의 시체 때문에 곤란을 겪을 순 있어도(엘리가 어떻게 수습하냐에 따라 안 겪을 수도 있음. 확정 아님) 결과적으로 엘리주의 궁극적 목표에 반하는 전개는 없을 예정이야
식인종들 중 가장 나이가 많아보이는 이가 이야기합니다. 이것 역시 맞는 판단이지만 문제가 있습니다. 제아무리 이놈들이 밤길을 아무리 나다닌다 해도, 엘리처럼 타고난 밤눈을 이길 순 없습니다. 마치 고양이가 사냥감을 굴리듯, 천천히 어둠 속으로 사라진 엘리는 그들을 노려봅니다. 칼을 든 손이 벌벌 떨리고, 가장 겁이 많은 이가 벌벌 떨리는 목소리로 도망치자고 제안합니다.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목소리인데, 이렇게 겁 많은 놈이 범죄는 뭔 생각으로 저질렀나 싶어질 정도입니다.
"야, 도, 도도도, 도망치자. 이러다 우리 다 죽는 거야!"
"닥쳐! 도망을 쳐도 어디로 갈 건데? 씨발..."
온갖 욕지거리를 나누던 와중에 엘리가 달려듭니다. 적은 총 셋, 세 명이서 각자의 시야각으로 120도 앞을 보고, 뒤와 옆은 동료들이 지키는 이상적인 방어 진형입니다. 정말로 좋은 능력입니다. 하지만 엘리라고 방법이 없는 건 아닙니다. 최근에는 굳이 쓸 일이 없었지만... 사실 엘리는 자신의 형체에 대해 큰 고정관념이 없는 사람입니다. 특히 밤에는요. 엘리가 눈을 감고...
끼리릭, 끼리리릭!
"이, 이게 무슨 소리야?"
"아가리 닥치고 앞이나 똑바로 봐! 한 명만 빵꾸나도 다 뒤지는...!"
...난생 처음 들어보는 쇳소리 같으면서도, 목소리를 턱밑까지 긁는 것 같은 소리에 기겁하는 반응을 들으며 눈을 뜹니다. 엘리의 몸은 수백마리 박쥐떼가 되고, 어둠 속에서 자연스레 셋 중 가장 연장자에게 수백마리의 눈으로, 수백개의 입으로, 수천개의 이빨로 달려듭니다.
"으으아아아악! 씨발! 씨바아아알!!!"
한 두 마리라면 떼어내겠지만 수십마리가 되고, 수십마리를 떨쳐내려다 수백마리가 붙습니다. 제아무리 엘리의 근력이 약하더라도, 엘리가 사람 몸 위에 올라탄다면 어찌 될까요? 엘리는 지금 그 대답을 어둠 속에서 보여주고 있었습니다. 수백개의 입들이 식인종을 물어뜯기 시작하고, 날카로운 이빨에 살점이 씹힙니다. 가장 용감하던 이는 어떻게든 떼어내려고 이리저리 달려들다가 어둠 속으로 도망쳐버리고, 두 식인종이 부르는 말에는 대답도 못 하고 비명만 지릅니다. 벌벌 떨기만 하던 놈 말고, 나머지 한 식인종이 램프를 꺼내 급하게 불을 켭니다. 겁쟁이가 말리려고 하지만 소용없습니다.
"이, 이봐! 바깥에선 안 켜기로 했잖아! 경비가 오면 어쩌려고...!"
"경비가 오면 죽을 수도 있지만, 여기서 저 새끼 못 제끼면 다 죽어 병신아!"
수백마리 박쥐떼가 참 욕심스러운 수백번의 '한입만'을 마칠 때쯤, 식인종들이 램프를 켰습니다. 이것 역시 좋은 판단입니다. 불빛 하나 없이 야밤중에 뱀파이어를 상대한다는 건 고통스러운 자살 방법에 불과하니까요. 하지만 그들은 눈 앞에 드러난 동료를 보고 굳습니다.
허여멀건하던 살가죽이 이리저리 벗겨지고 찢어져 보이는 속살도 엉망으로 헤집어졌습니다. 얼굴은 형체도 남지 않게 뜯어먹어서, 귀와 코는 깊은 양 구멍이 그대로 보이고, 최후의 양심으로 남겨준 두 안구는 깜빡이고 싶어도 깜빡일 눈꺼풀 없이 램프 불빛을, 아직 멀쩡한 두 동료를 바라봅니다. 머릿가죽도 벗겨져 드러난 두개골은, 박쥐가 아쉬움을 못 참고 남긴 수십개의 이빨자국이 선합니다. 거추장스러운 옷은 전부 벗었고, 속살도 거추장스러워 전부 벗은 그는 의학 학교의 인체모형마냥 내장과 갈비뼈를 생생히 보여주며 다가오더니 한 마디를 합니다.
"죽여줘..."
엘리는 식인종이 쓰던 녹슨 칼을 들고, 천천히 그 끔찍한 몰골의 식인종과 함께 걸어오더니 등을 찔러 심장을 꿰뚫습니다. 그제서야 식인종의 고통이 끝나 땅바닥에 쓰러지고, 엘리는 불빛 뒤에 숨은 식인종들을 바라보면서 충고합니다.
"도망쳐 봐."
"히, 히히이익...!"
"그럼, 한 명 쯤은 살아서 도망칠 수 있을 지. 누가 알아?"
그 말에 식인종들은 램프를 버리고 도망칩니다. 겁이 많은 놈은 제 발에 걸려 넘어질 것 같고, 고분고분히 고문에도 응할 것 같아 내버려둔 엘리는 램프를 켰던 놈을 쫓아가 단방에 녹슨 칼을 척추 옆에 빗겨 찌르고, 갈비뼈의 결을 따라 바깥쪽으로 그으며 폐, 간, 위장을 일자로 한 방에 그어버립니다. 알아서 제 피에 익사하게 내버려둔 엘리는 이제 겁쟁이를 쫓아갑니다... 아니, 쫓을 필요도 없었습니다. 어둠 속에서 쌓아둔 양동이를 넘어뜨려 그 안에 갇혔군요. 어떻게든 나오려고 허우적대고 있습니다. 그런데...
콰아아앙!!!!
엘리는 멀리서 폭발음이 들려서 그 쪽을 바라봅니다. 분명 엘리가 하루 묵기로 했던 여관이 있는 곳에서... 비명 소리가 참 거하게 들리고 있군요. (이제부터 반응해주면 돼!)
해봤자 양동이 몇 개 더 떨어진 것뿐이건만, 뱀파이어 보고 놀란 가슴 양동이 보고 놀란 나머지 식인종은 머리에 바윗돌이라도 떨어지는 양 비명을 지르다 안에 처박혔습니다. 엘리는 일단 그렇게 내버려두고 여관으로 돌아갑니다. 방금 전 식인종들과의 싸움에선 미끼를 자처한 덕분에 쉽게 일이 풀렸지만, 아무런 준비도 계획도 없이 일단 달려가는 발길에는 불안함이 감돕니다. 어쨌든, 엘리는 빠르게 달려 여관으로 왔습니다. 참 오랜만에, 뱀파이어의 육체에 땀이 흐르고 숨이 가빠집니다. 엘리는 여관을 바라봅니다. 여관은 불타고 있었습니다.
"아이고, 내 여관! 내 여관!"
"이봐, 저기 안에 사람은 어쩔 거야! 저 안에 열 명 넘게 남아있다고!"
누가 그런 건지는 몰라도 여관은 아주 제대로 박살났습니다! 지붕에 뚫린 큼지막한 구멍이 저 안으로 들이닥친 괴물의 무서움을 알려주고 있고, 경비병들도 쉽사리 들어가지 못해 벽 주변을 둘러싼 채 창과 활만 겨누고 있군요. 경비대장은 온갖 욕지거리를 하면서 땅을 구릅니다.
"이런 제기랄, 아무나 다 불러! 하다못해 이단심문관이라도 불러! 이단 혐의점이 없다고? 아무튼 있다고 하면 되잖아!"
엘리는 어안이 벙벙해진 경비대장을 뒤로 하고 박쥐의 형태로 바뀌어서 여관 안으로 들어갑니다. 어차피 이 안에서는 박쥐의 형태를 취해봤자 더 취약하니, 그녀는 창문 틈새로 들어오자마자 다시 원래의 몸으로 바꾸고, 여관 1층을 바라봅니다. 여관 안은 난장판이 되었습니다. 몇시간 전까지만 해도 부어라 마셔라 즐거웠을 여관 안에 사람들이 널브러져 있고, 다들 몰골은 다양하지만 어째 다 죽은 느낌입니다. 부러진 창칼들을 보아하니 여관 안에 있던 모험가나 용병들이 쉽게 죽어줄 생각은 없었던 것으로 보이지만 어쨌든 실패했는지 죄 죽어있고, 여관 입구는 무너져서 한 불운한 경비병의 머리를 투구째로 짓뭉개 버렸습니다. 아마 이 모양이니, 경비대도 쉽사리 들어가질 못하고 있겠죠.
화덕은 박살나서 불씨와 재만 보여주고 있고, 사방에 날카로운 발톱과 뭉개진 발자국이 보입니다. 얼마나 많은 이들이 살아남았는진 모르겠지만... 그리 많진 않을 겁니다. 엘리의 감각이 예민해지고, 두 가지를 잡아냅니다. 구르릉... 구르릉... 2층, 손님실에서 뭔가 큰 것이 조금씩 미동하는 소리가 들립니다. 그리고 시체 무더기들 사이에서, 뭔가 흐느끼는 소리가 들리는군요.
시체 무더기에서 산 사람을 구분하는 방법. 이라고 한다면... 살아있는 신선한 피를 감지하는 기관이 나에게는 있지 않은가.
비유하자면, 인간의 코로 차게 식은 식중독 위험군 음식과 갓 나온 따끈한 빵을 가려내는 시도와 같았다. 생존자가 피가 흐를 정도의 상처를 입지 않았다면 찾기 어렵겠지만... 긁힌 상처라도 있다면. ,조금의 피라도 나 있다면. 사냥감을 찾는 사냥꾼의 감각이 힘을 발휘할 수 있겠지.
'아, 사냥감이란 표현은 좀 그런가?'
그래도 구출 시도인데. 나는 눈을 감고 코를 쫑긋거리며, 있을지도 모르는 생존자의 피 냄새를 쫓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