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모두는 누군가를 위한 이야기의 소품이자, 단역이자, 조연이기도 하고 동시에 자기 이야기의 주인공이기도 하다. 그 이야기는 비참할 수도, 행복할 수도 있고, 기승전결이 갖춰졌거나 이야기의 어떤 구성요소 하나도 제대로 된게 없을 수 있다. 하지만 아무리 엉망인 이야기가 되는 한이 있어도 우리는 선택하고, 때로는 강요당하면서 우리의 이야기를 써낸다. 이야기의 악마 이프가 이제 마침표를 찍으라 권할 때까지, 죽음이 우리를 찾아올 때까지. 왜냐면 우리는 살아있으니까. 그 이야기는 우리의 삶이니까.
안녕 참치들아. situplay>1596260129>999 에 올렸던 사람이야. 아직 반응은 적지만 하고 싶어하는 사람이 있는것 같아서 올려봐. 일단 나는 설정이 과하면 서사를 오히려 구속한다 생각해서 기본 뼈대 설정이랑 시스템만 풀어둘게
설정 세계관: 신과 천사, 악마, 유령, 그 외 기타등등이 있고 워낙 방대한 나머지 서로가 서로를 모르는 세계 기술력: 일부 부족이나 마법공학 문명을 제외하면 대부분 15-17세기 근세+마법 종족들?: 엘프, 고블린, 오크 등등 있을건 다 있고, 나머지 종족들도 마이너할 뿐이지 다 있음.(즉, 상의후에 시트에 커스텀 종족 등록 가능) 인권개념: 신분차별은 있지만 성차별은 최대한 없다고 할 예정. 남편은 궂은일 아내는 집안일 같은 성역할 고정관념을 완전히 배제하는 스토리는 어렵더라도, "어딜 감히 여자가 큰소리를" 같은 장면은 특수한 설정의 국가가 아닌이상 안 넣을 것. 이프?: 이야기의 악마. 악마하면 생각나는 사악한 의미보단 "민지왓쪄염 뿌우 'ㅅ'"에 더 가까움. 플레이어들의 이야기가 잘 흘러갈 수 있도록 개입하기도 함
시스템 캐릭터는 근력, 체력, 지능, 민첩, 매력 중 강한 것 두개, 보통 두개, 약한 것 하나를 선택. 물론 이건 기본이고, (내가 잘 묘사할 자신은 없지만) 강한걸 더 선택하거나 약한 걸 더 선택할 수 있음. 이건 묘사나 행동의 성공여부에 큰 영향을 끼침 되도록이면 서사를 성공적으로 마치기 위한 난이도는 쉽게 가고자 함. 참치들 중에 하드코어나 배드엔딩을 원하는게 아닌이상...
시트양식 이름: 성별: (남녀 외 가능) 종족: (커스텀 종족은 사전 상의요망) 성격: (너무 공격적인 성격은 반려되거나 서사 진행 과정에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음) 나이: 능력치(기본 강함 2 보통 2 약함 1) (능력치 배분 변경을 원할시 사전 상의요망) 근력 체력 지능 민첩 매력 과거사: 현재 상황: 궁극적 목표: 원하는 서사: 기타:
서사를 예로 들자면 이역만리 도시에 잡혀온 수인 노예가 가까스로 탈출하고, 고향으로 돌아가려는 이야기 어려움 없이 살던 귀족영애가 계승권을 노린 반란에 죽을 뻔하는 상황을 이겨내는 이야기 악마에게 죽음을 저당잡힌 노병이 악마의 농간도 이길 정도로 강한 이를 찾아 떠도는 여정
>>5 이게 어디에 테마(육아물적인 아이들이 성장하는 보람? 또는 저마다의 이유로 불행한 가정의 아이들과 함께 상처를 보듬는 한국 산업화시대 소설, 맨발의 겐적 감성?)를 두느냐에 따라 전개가 다른데, 일단 가능할듯. >>60 ㅇㅇ. 다만 이 경우는 잊힌 영웅의 흔적을 쫓는 고고학자를 겸하거나, 대영웅 한두명만 지켜보는 느낌이 될듯? 아무리 사후에 만드는 세계관이라도 대영웅이 양산되면 곤란하니까. 아니면 별거 없어보이던 동료가 살신성인하고, 어쩌다보니 영웅과 함께한 음을시인이 되는것도 가능하겠네
이름:라제스 성별:남 종족:인간 성격:낭만을 추구하며 즐거움을 최고 가치로 여긴다. 감수성 넘치며 자극에 약하다. 꽤 겁쟁이지만 할 때는 하는 성격. 나이:21세 능력치 근력 보통 체력 약함 지능 강함 민첩 보통 매력 강함 과거사:어린 시절 그는, 부모님이 운영하지는 주점에 들른 한 손님에게 커다란 영향을 받았다. 손때가 탄 오래된 리라를 연주하며 감미로운 목소리로 전쟁 영웅의 일화, 늙은 기사의 충직, 현자의 지혜, 악룡을 죽인 복수귀에 대한 노래를 부르던 한 음유시인. 다른 아이들은 그 노랫속 영웅들을 동경했지만, 그는 그 음유시인이 가장 멋지다고 생각했다. 찬란하게 빛났던 그들의 영광을 영원토록 이어질 수 있게 노래하는 그와 같은 존재가 되기를 꿈꾸게 된 것이다. 현재 상황:제대로 다루는 법도 모르는 리라 하나와 배낭 하나만을 들고 세계 각지를 떠돌고 있다. 부족한 음악 실력으로 야유를 받아가며 사람들이 잘 모르는 사소한 영웅들의 행적을 노래하면서, 지금은 그 누구도 연주하지 않는 없는 잊혀진 영웅담을 찾고자 고대의 흔적을 추적하고있다. 궁극적 목표:이제는 더 이상 울려퍼지지 않는 영웅의 행적을 발굴해 세상에 퍼트리는 것. 원하는 서사:어쨌든 모험! 그리고 탐험이다! 영웅의 행적을 쫒아가며 유쾌하게 노래하는, 그런 걸 원합니다! 기타:리라가 정확히 무슨 악기인지 사실 모른다. 마을에 있던 골동품점에서 리라 하나 달라고했더니 주인 아저씨가 비슷한거라고 준 것을 리라라고 들고 다니고 있다. 어쨌든 소리만 잘 나면 그만 아닐까?
시트양식 이름: 레이첼 맥도웰 성별: 여성 종족: 인간 성격: 아직 세상의 때가 묻지않은 듯 순수한 성격. 남을 잘 의심하려 들지 않고 희박한 정보에도 로망이 있다며 달려든다. 나이: 21세
능력치 근력 보통 체력 보통 지능 강함 민첩 강함 매력 보통
과거사: 서쪽 왕국의 역사학자. 어린 시절 침대에서 어머니가 읽어주셨던 옛날 이야기들에 매료되어 언제나 탐험을 나가기를 꿈꾸었다. 하늘을 날아다니는 고래, 바다 위를 떠다니는 거대 거북과 그 위에 살고 있는 사람들, 바다의 저편에 있는 절벽. 그중에서도 그녀가 가장 좋아했던 이야기는 고대의 기술로 만들어진 자립형 골렘들과 인간들의 이야기였다. 그녀는 꿈을 이루기위해 어린 나이에 왕립 학교에 진학, 실력을 인정받아 담당교수가 치프를 맡은 발굴현장으로 가게 된다. 몇년간의 발굴작업 끝에 그녀는 고대 유적의 묘실을 발견하게 되었고 그 공을 인정받아 남작지위를 얻게 되었다. 다만 그것이 그녀가 얻은 것의 전부는 아니었으니 그 누구보다도 먼저 묘실에 진입한 그녀는 아직 작동하는 마도공학 기계를 발견하여 몰래 가지고 나왔고 아직 머리가 깨끗했던 그녀는 이것이 자신과 모험을 이어주는 열쇠라고 생각한채 그대로 여행을 떠나게 된다.
현재 상황: 자기 보신용으로 배운 평범한 수준의 마법과 그저 어딘지 모를 방향을 가리키고 있을 뿐인 오래된 마도공학 구체를 들고 여행을 하고 있다. 고대문명의 유적을 찾아다니지만, 이전과는 달리 지원이 없는 상황이라 그리 유복한 생활은 하지 못하고 얼기설기 엮인 흔적만을 찾아다닌다.
궁극적 목표: 잊혀져버린 고대문명의 정체를 밝혀내는 것. 그리고 그 과정에 있는 모든 경험들이 그녀의 목표이다. 원하는 서사: 모험! 탐험!!! 인디아나 존스! 그리고 말년에는 한적한 도시 외곽의 오두막집에서 경험을 글로 써내려가고 싶어요!
기타: 직업적으로는 역사학자이지만 마법이나 함정해제등 모험가적인 지식이 더 특출나다. 기초적인 수준의 함정해제나 식량의 구분정도는 할 수 있고 마법역시 자기 몸을 지킬 수 있을 정도로는 사용할 수 있는 편. 다만 근력만큼은 다른 모험가나 역사학자에 비견하더라도 한심한 수준으로 일반인보다 아주 살짝 떨어지는 정도.
>>16 라제스, 자칭 음유시인에게는 참 많은 일이 있었습니다. 라제스는 분명 매력적이었고, 부모님이 아들놈 기죽지 말라고 하는 말이 아니라 극단에 거둬졌다면 꽤나 날리며 살았을 정도로 잘 생겼고 언변도 뛰어났습니다. 물론 그는 주점 아들내미였고, 주점 아들내미로서는 말 잘하고 얼굴 잘생긴 놈팽이보다야 못생기고 힘 좋은 놈이 최고인 게 문제였지만요. 여튼 주점에서 일한 덕분에 동냥술 받아마시려는 사람들은 언제나 많았고, 개중 동냥술 받을 만한 사람은 바로 음유시인이었습니다. 라제스는 그 음유시인을 동경하며 모험길에 올랐고, 노랫가락을 수집하던 도중 '샬러스빌'이라는 한 낡은 마을에서 흥미로운 광경을 보았습니다. 아이들이 모여서 킥킥대면서 노래를 부르고 있었습니다.
"가막새야, 울지마라. 망태할범, 울고간다."
"예끼, 이놈들아! 그딴 노래 부르지 말래두!"
이것만으로는 그리 흥미로운 상황은 아니지만, 부모나 삼촌뻘로 보이는 어른들은 혀를 차며 지나가고, 노인들은 막대기를 휘휘 내저으며 혼을 냅니다. 라제스의 상식으로 듣기에 상식적으로 그리 천박한 노래는 아닙니다만.... 왜 그러는 걸까요? //시작!
>>25 노인은 라제스의 이야기를 듣고 크흠... 하면서 잠시 고민하는 듯하더니 고개를 끄덕입니다. 하지만 못내 의심스러운 속내는 숨기지 못해, 라제스에게 노령을 고려해도 참 낮고 걸걸한 목소리로 이야기합니다. 말이야 길지만, 속뜻은 간단합니다: 알면 다쳐.
"알겠슈. 근데 젊은이. 아직 세상 살아본 세월이 짧아서 그런 것 같은데, 세상에는 몰라도 되는 일도 많고, 몰라야 하는 일도 있슈. 마을 일이니까 더 간섭하지 마시라고."
물론, 라제스는 이런 이야기를 듣는다고 굽힐 사나이가 아닙니다. 그런다면 부동산이자 알짜배기 돈통인 주점을 이어받는다는 편한 선택을 내버려두고, 연주법도 제대로 모르는 리라를 들고 여기까지 나와서 이러고 있겠습니까? 물론... 지금은 아주 잠시, 굽히는 척을 하는게 나아보인다고, 라제스의 직감이 말하고 있습니다. 노인은 슬금슬금 곁눈질로 옆을 바라보고, 그 노친네들의 시선을 따라간 시냇가에는... 아낙네들이 몽둥이를 들고 참 살벌하게 빨랫감을 내리치면서... 라제스를 보고 있군요. 보통은 라제스 정도로 잘생긴 남정네를 보는 건 흔한 일이 아니라 그렇겠지만... 글쎄요. 라제스를 보고 좋아 죽던 여편네들은 최소한 표정이 저렇진 않았습니다.
>>30 아무래도 라제스가 멀리 있어서 얼마나 멋진지 몰랐던 걸까요? 아낙네들은 라제스가 가까이 다가오자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르고 좋다고 깔깔대면서 다가옵니다. 이래서 사람이 멋지고 봐야 하나 봅니다. 하지만... 여자들이 잘생긴 남자를 본 적이 몇 번 없는 걸까요? 아낙네들은 라제스의 사방으로 몰려들고, 하나같이 라제스의 칭찬만 합니다.
"아유, 총각이 참 반반혀. 어디서 뭘 먹어야 이런 얼굴이 나오나 몰러?"
그리고 개중에서 제일 나이가 많아보이는 할머니가 앞으로 나와 마을에 전해지는 옛냘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아이를 바꿔친 요정 이야기, 피리 부는 사나이 이야기... 이야기를 흥미롭게 듣던 라제스는 저도 모르게, 이야기들의 다음 장면을 추측해버리고 맙니다. 그렇습니다. 이건 라제스도 잘 아는, 아니, 라제스기에 아주 잘 아는 공통적인 이야기들입니다... 왜 이렇게 개성 없는 이야기들만 가득할까요?
"어때, 할미 얘기 재밌쟈?"
할머니가 물어옵니다. 솔직하게 답한다면, 다 아는 내용이라 뻔하다고 할지도 모르죠. 아무튼, 라제스가 무슨 말을 할까요?
일단은 시트스레 정식으로 세우고 시스템에 대해서도 좀 더 토론해볼 수 있으면 좋겠네. 이런거 있으면 좋겠다, 싶은거 있음 알려줘! 육성스레에서 시도됐던 일상 돌리면 얻는 재화로 스토리상 이득을 얻는 건... 일단 사람이 적기도 해서, 베타테스트로 좀 해도해도 스토리 전개가 안된다 싶을때 도와주는 식으로 출연할지도 모르겠네.
시트양식 이름: 레이첼 맥도웰 성별: 여성 종족: 인간 성격: 아직 세상의 때가 묻지않은 듯 순수한 성격. 남을 잘 의심하려 들지 않고 희박한 정보에도 로망이 있다며 달려든다. 나이: 21세
능력치 근력 약함 체력 보통 지능 강함 민첩 강함 매력 보통
과거사: 서쪽 왕국의 역사학자. 어린 시절 침대에서 어머니가 읽어주셨던 옛날 이야기들에 매료되어 언제나 탐험을 나가기를 꿈꾸었다. 하늘을 날아다니는 고래, 바다 위를 떠다니는 거대 거북과 그 위에 살고 있는 사람들, 바다의 저편에 있는 절벽. 그중에서도 그녀가 가장 좋아했던 이야기는 고대의 기술로 만들어진 자립형 골렘들과 인간들의 이야기였다. 그녀는 꿈을 이루기위해 어린 나이에 왕립 학교에 진학, 실력을 인정받아 담당교수가 치프를 맡은 발굴현장으로 가게 된다. 몇년간의 발굴작업 끝에 그녀는 고대 유적의 묘실을 발견하게 되었고 그 공을 인정받아 남작지위를 얻게 되었다. 다만 그것이 그녀가 얻은 것의 전부는 아니었으니 그 누구보다도 먼저 묘실에 진입한 그녀는 아직 작동하는 마도공학 기계를 발견하여 몰래 가지고 나왔고 아직 머리가 깨끗했던 그녀는 이것이 자신과 모험을 이어주는 열쇠라고 생각한채 그대로 여행을 떠나게 된다.
현재 상황: 자기 보신용으로 배운 평범한 수준의 마법과 그저 어딘지 모를 방향을 가리키고 있을 뿐인 오래된 마도공학 구체를 들고 여행을 하고 있다. 고대문명의 유적을 찾아다니지만, 이전과는 달리 지원이 없는 상황이라 그리 유복한 생활은 하지 못하고 얼기설기 엮인 흔적만을 찾아다닌다.
궁극적 목표: 잊혀져버린 고대문명의 정체를 밝혀내는 것. 그리고 그 과정에 있는 모든 경험들이 그녀의 목표이다. 원하는 서사: 모험! 탐험!!! 인디아나 존스! 그리고 말년에는 한적한 도시 외곽의 오두막집에서 경험을 글로 써내려가고 싶어요!
기타: 직업적으로는 역사학자이지만 마법이나 함정해제등 모험가적인 지식이 더 특출나다. 기초적인 수준의 함정해제나 식량의 구분정도는 할 수 있고 마법역시 자기 몸을 지킬 수 있을 정도로는 사용할 수 있는 편. 다만 근력만큼은 다른 모험가나 역사학자에 비견하더라도 한심한 수준으로 일반인보다 아주 살짝 떨어지는 정도.
>>37 내가 그 장르를 해보진 않았지만 대충 무슨 느낌인진 알 것 같아. 캐릭터가 바윗덩인줄 알았던게 갑자기 일어나는 걸 보고 "?????????" 하는 장면도 재밌겠네. 향후 서사에 그런 부분 나오게 해볼게! >>38 우와 다행이다. 지금 간략하게 짜본 설정이 딱 그거거든. 알겠어!
일단 2명 정도로 소수진행 하게 될것 같은데, 일단 한김에 이거로 계속 진행해봐야겠다. 짧게 하면서, 이런 부분은 개선했으면 좋겠다 싶은거 알려줘. 일단 이야기하자면
1. 중간에 고난(캐릭터가 갑자기 물리적으로 뒤통수에 뭘 맞고 기절한다던지)은 있지만 데플이나 데플이나 다름없는 신세(식물인간, 전신마비)는 플레이어가 그걸 원하는 게 아닌이상 절대 없을 거야. 이 부분은 유념해줘. 2. 그리고 캐릭터가 시도하는 행동들 중 일부는 상황에 따라 실패할 수도 있어. 예를 들어 근력이 약한 캐릭터가 술집의 거한을 주먹으로 때려서 머리통을 깨버리려 하면 역으로 손목이 붙잡혀 꺾이거나 걷어 차이겠지? 이 부분은 실패했다고 좌절하는 게 아니라, 캐릭터의 서사의 한 요소로 생각해줬으면 좋겠다. 캐릭터가 어딜 가나 무조건 성공만 하는 이야기도 수요는 있지만, 어쨌든 전통적인 이야기에는 캐릭터의 실패도 무조건 있으니까. 3. 물론 2번은 내가 묘사를 잘 해야 하는 것도 있을거야. 캐릭터의 실패를 실패 그 자체로 그냥 '님 바보 히히' 하는게 아니라, 최대한 다양한 이야기가 전개될 수 있도록 해볼게. 던전월드 같은 룰에서 실패를 단순히 캐릭터를 바보 만들고 끝내는 게 아니라, 상황에 또다른 불리한 변수를 부여하고 그 변수로 다양한 이야기를 창출하는 데 있는 것처럼!
레이첼의 담당교수가 수업시간에 처음 말했던 이야기입니다. 그 때는 멋모르고 넘겼던 말이지만, 지금의 레이첼은 그 말을 마음에 담게 되었습니다. 왜냐? 그녀의 기념비적인 첫 발굴 이래, 지금까지 별 발굴 성과가 없었던 건 분명 이 고대 문명이 전설이 되다 못해 신화가 되어 사라졌기 때문일 테니까요. 고대 문명의 묘실을 발굴하고 몰래 작동하는 마도 유물을 빼돌렸을 때는, 묘실의 존재를 알리고 (1대 한정이지만) 맥도웰 가문에 '학술남작'이라는 멋진 작위를 붙여줬을 때는 그야말로 세상을 다 가진 것 같았습니다! 그러지 않았더라면, 적어도 좋다고 장려금을 팍팍 쓰다가 쪼들리는 지금 상황에 이르지는 않았을 텐데요.
어쨌든, 레이첼은 여기서 포기할 수 없습니다. 고대 문명이 애초 존재하지도 않는 거대한 지적 사기극이라 여겼던 이들에게 욕을 먹으면서도 계속한 발굴 작업인데, 이제와서 고작 돈 문제 때문에 포기할 리가 없습니다. 레이첼은 마음을 다잡고 일어납니다. 이곳은 베스터란트 왕국의 길리움 도시, '코주부와 홀쭉이'라는 이름도 참 괴상한 여관. 이제 길만 나서면 그만이지만... 한 가지 문제가 있습니다. 레이첼이 계획한 대로 파손된 탐험 도구(곡괭이, 램프, 밧줄, 그외 기타등등)를 새로 구입할 돈을 제하면... 이 여관의 방값과 식비를 못 낼 것 같습니다.
레이첼은 꽤 팍팍한 현실이구나, 하고 생각했다. 그 사실을 명확하게 인식하게 된 것은 오늘 오후였다.
“뭐 그 정도야 있어요.”
레이첼은 그리 말하며 빵을 베어 물었다. 평범한 흑빵일테지만 생각 이상으로 맛이 진하네. 그런 생각을 하며 그녀는 평온한 표정을 지었다. 솔직히, 돈을 내지 못하는 것은 아니었다. 문제가 있다면 이 여관비와 식사비를 내고 나면 수리가 불가능한 수준인 물건들을 다시 갖출 돈이 남지않는다는 점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돈을 내지 않고 도망친다면 허울뿐이라도 남작의 품위에 문제가 된다.
요즘의 사람들은 로망이 없는 것인지 아니면 그저 과거를 공부하기에는 살기가 바쁜 것인지 이런 일에 도움을 주기는커녕 귀신같이 돈을 받아낼 생각만 한다니까요. 위대한 위업에 동참할 기회는 언제나 오는 것이 아닌데.
레이첼은 꽤 팍팍한 현실이구나, 하고 생각했다. 그 사실을 명확하게 인식하게 된 것은 오늘 오후였다.
“뭐 그 정도야 있어요.”
레이첼은 그리 말하며 빵을 베어 물었다. 평범한 흑빵일테지만 생각 이상으로 맛이 진하네. 그런 생각을 하며 그녀는 평온한 표정을 지었다. 솔직히, 돈을 내지 못하는 것은 아니었다. 문제가 있다면 이 여관비와 식사비를 내고 나면 수리가 불가능한 수준인 물건들을 다시 갖출 돈이 남지않는다는 점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돈을 내지 않고 도망친다면 허울뿐이라도 남작의 품위에 문제가 된다.
요즘의 사람들은 로망이 없는 것인지 아니면 그저 과거를 공부하기에는 살기가 바쁜 것인지 이런 일에 도움을 주기는커녕 귀신같이 돈을 받아낼 생각만 한다니까요. 위대한 위업에 동참할 기회는 언제나 오는 것이 아닌데.
걸걸한 목소리로 내뱉던 반말이, 돈 얘기에 긍정적인 답을 얻자 쾌활한 존댓말로 바뀝니다. 아무리 돈 낼까 의심스러운 손놈이랑 돈은 잘 내는 손님이 다르다지만, 정말 사람 대하는 태도가 손바닥 뒤집듯 바뀌는군요.
어쨌든 학술남작도 남작은 남작인데, 여기서 그런 이유로 도망친다면 남작의 체면이 안 삽니다! 그리고, 뭔가 주문해놓고 도망치는 꼴은 레이첼의 성격이 용납하지 않기도 하고요. 시큼텁텁한 흑빵을 마저 다 먹은 레이첼은 일어나서 돈이 될 만한 일을 고민해보기로 합니다. 간단하게는, 이 도시는 뭔 일손이라도 필요한 곳이 있을 정도로 크다는 겁니다. 몸이 약해도 마차에서 물건을 내리는 일을 잠시 거들 수 있고, 레이첼이 가방끈 덕 좀 보려고 한다면 귀족들한테 찾아가서 뭔가 일거리를 물어보는 방법도 있을 겁니다!
나름 학술남작로서 귀족위에 있으니 그녀는 일을 고르는 데에 있어서는 어느정도 까다로운 눈을...가지지는 못했습니다. 어쩌겠어요. 고작해야 재능빨로 얻어낸 작위, 왕이 인정을 해주었다 해도 그것이 천성을 바꿀 수는 없는 법입니다. 지금 체면이 중요합니까 못먹어서 죽게 생겼는데!
우선은 저잣거리로 나가서 일거리를 찾아보도록 합시다. 확실히 생각보다 마을이 넓으니 무슨 일이라도 알아볼 수 있을거에요. 그러면서 돈을 많이 주는 일이라면 더 좋고.
레이첼은 알아서 하라는 여관주인을 뒤로 한 채 나갑니다. 길리움 시에 처음 들어왔을 때 보았던 잘 짜맞춘 벽돌 길이 그녀를 반기고, 주변에는 아이들이 웃으면서 뛰어다닙니다. 돌아다니다 보면 여러가지 일거리... 라 할만한 것들은 모르겠지만, 레이첼은 여러가지를 보았습니다.
"이 염병할 놈! 오라질 놈! 쓸모없을 때는 짜증날 정도로 주둥이 나불대더니만 필요할 땐 유령마냥 사라져요!"
식당에서는 설거지 하던 욕쟁이 아줌마가 어디로 갔는지 모르겠다고 욕을 퍼붓는 식당주인이 접시 사이에 끼여 비명을 지르고 있고, 사람들은 그걸 보고 껄껄 웃으면서 술을 한잔 더 주문합니다.
"으아아앙! 내 반지! 내 반지이!"
"아가씨, 그러게 이런 곳은 돌아다니지 말라고... 큰일났네. 이걸 어찌한담."
딱 봐도 돈이 많아보이는 귀족 아이는 좀... '귀족적'이지 않은 수챗구녕 앞에서 울고 그 옆에는 수행원으로 보이는 대머리 아재가 이미 다 빠진 머리를 쥐어뜯으며 이를 악물고 있군요.
그리고 학술원은 좀 멀리 있는 것 같습니다. 게시판에 붙은 마법학회 발표 공고를 보니, 북쪽으로 몇 블럭 더 올라가면 있다는군요.
평온한 하루가 흘러갑니다. 옛날 이야기에는 관심이 없다는 듯 오늘 하루도 바쁜 하루가 흘러가고 있습니다. 식당 주인은 날뛰고 어린아이는 울면서 수채구멍앞에서 울고있고... 음, 이거 평온한거 맞을까요? 제가 몇년동안 여행하는 사이에 평온의 기준이 바뀐 건 아니겠죠?! 어디 보통은 벽보에 구인공고가 붙어있으니...
"학술원은... 발표회?! 아니 이런걸 왜 지금 알게된거에요!!"
인간을 미지로 이끄는 원동력!!! 학술적 탐구심! 신이 인간을 만든 이래로 인간을 발전 시킨 것은 순수하게 더 나은 삶을 위한 갈망과 그렇게 쌓아온 시행착오의 역사가 아닌가요!!! 지금 하루에도 의미앖지만 위대한 논문들이 몇개씩 나오고 있는데 이런 곳에서 시간을 낭비할 수는...
"으아아앙! 내 반지! 내 반지이!"
당장에라도 학술원으로 달려가서 자리잡고 새로운 지식을 탐미해도 모자랄 시간인데!!! 크으윽... 어쩔 수 없네요.
"저기... 무슨 일 있으신가요?"
그렇게 머리를 잡으면 탈모가 가속될거라는 말은 꾸역꾸역삼켜버리고 근처에 있던 수행원 아저씨에게 말을 걸었습니다.
수행원은 레이첼에게 사정을 설명합니다. 아가씨가 반지를 끼고 바깥에 나갔다가, 그만 반지를 이 수챗구멍에 빠트리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밑에 하수구는 사람이 들어갈 정도로 크긴 한데, 아가씨의 옷은 평민의 2년치 연봉, 수행원의 옷은 평민의 1달치 옷이라 괜히 들어갔다간 반지를 새로 사고 마는게 나은 꼴이 되며, 옷이야 새로 사면 된다쳐도 안에 위험한 것들이 있다는 소문을 들어서 걱정이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수행원은 레이첼을 보더니, 귓속말을 합니다.
"도와주시면... 옷 버린 값, 더러운 하수구 걸어들어간 값 섭섭잖게 쳐드릴 수 있는데 어떻게, 괜찮으실까?"
>>62 라제스는 적당히 넘깁니다. 할머니는 허허 웃고 다른 아낙들도 약속한 것처럼 물러나는군요. 그리고 라제스는 돌아서서, 문득 생각해봅니다. 마을 사정을 알려는 외부인을 껅는건 당연하지만, 여긴 정도가 심합니다. 그런데도, 물어봐서 해주는 마을의 이야기들은 마치... 판에 박힌 것처럼 정형적입니다.
활달하고, 도전적인 것에 전혀 거리낌이 없다. 계획과 비전 없이 들이박는 것에 가까울지도.
나이 : 83 능력치(기본 강함 2 보통 2 약함 1) 근력 - 약함(낯의 경우 약함) 체력 - 강함(낯의 경우 약함) 지능 - 보통(낯의 경우 약함) 민첩 - 보통(낯의 경우 약함) 매력 - 강함(낯에는 햇빛에 노출당해 죽는 걸 방지하기 위해, 얼굴을 모두 덮은 가면을 쓴 모습이 사뭇 수상하다. 또한, 겉 보기의 연장자나 사회적 지위가 높은 이에게 존대를 쓰지 않는다는 점에서 약함)
과거사: 흡혈귀. 밤의 지배자, 따위의 거창한 이름으로도 불리는 종족.
오래도록 살아가기에 개체수가 적으며, 자연적인 생태계에서도 상위 포식자에 위치하기에 서로 큰 다툼 없이 살아갔다.
살아가기 위해선 다른 생물의 피 따위가 필요하기에, 분쟁을 빚기도 했지만...
흡혈귀는, 싸움에도 강한 종족이었으나 밤 속에 숨어드는 것에 더더욱 능했다. 누군가에게 쫓긴다면, 밤의 어둠 속에 숨어서 도망치면 될 뿐.
그녀의 동족들은 그렇게 하루하루, 근근이 살아갈 뿐이었다. 수십 년이고, 수백 년이고.
일족의 젊은 흡혈귀인 엘리로썬 영 맘에 들지 않는 일이었다. 우리도, 밝은 낯의 세상에서 살아가면 안되는걸까? 밤의 세상에서 다른 이들과 어울리지 못하고 홀로 살아가야 하는걸까?
우선은... 태양을 극복하는 것 부터 시작해야 했다. 흡혈귀는, 맨몸으로 태양 아래에 노출될 경우 활활 타다 사망. 태양빛을 막을 수 있도록 꽁꽁 싸매도 모든 능력이 심히 약화되는 정도였으니까.
그렇게 그녀는 당당하게, 낯의 세상으로 나섰다.
...어떻게 태양을 극복할지에 대한 구체적인 계획 없이.
현재 상황: 인간들이 자주 드나드는 성에 출입하기 위해, 검문을 받는 줄에 서있는 상태. 온몸을 가리는 칙칙한 검은 로브와, 가면을 쓴 채로. 과연 자신이 수상한 사람이 아님을 증명할 수 있을까?
궁극적 목표: 태양의 극복. 당당히 낯의 세상에서 살아가는 것
원하는 서사: 수상하게 취급받던 뱀파이어가, 인간 사회에 당당히 들어가 서서히 낯의 세계에서 인정받게 되는 이야기. 태양을 극복하기 위해 강해지는 모험도 한 스푼!
기타: 낮에는 전신을 가리는 검은 로브와 가면을 착용한다. 햇빛이 들어오는 걸 최대한 틀어막기 위한 복장 선택. 다른 사람들의 눈에는, 복면을 쓰고 돌아다니는 도둑처럼 보이지 않을까.
목소리는 소녀의 그것. 괴한(?)차림과는 다른 언밸런스한 목소리가 포인트.
좋아하는 피는 닭의 피. 낯의 세계로 나가기 위해서 지성체 흡혈은 자제해야 한다고 인지하고 있다.
체력이 강한 것은, 뱀파이어의 강점이라고도 할 수 있는 재생력. 낮이거나 태양 계열의 힘으로 입은 게 아니라면, 어지간한 상처는 금새 재생된다.
엘리자베스 바토리 블라드 체페슈. 옐리사베타, 바토리, 블라드 등등 부르는 방법도 다양했지만... 너무 '귀족적'인 이름은 원치 않았던 그녀는 지금 세스타우 성문 앞에서, 다른 수많은 이들처럼 줄을 서서 능선과 능선을 잇는 뱀 같은 인파의 한 부분을 이뤘습니다. 이글이글 끓는 햇빛은 온 몸을 감싸도 그깟 천쪼가리로 천벌을 막을 생각이었냐는 듯, 보이지 않는 빛의 족쇄를 채운 것 같습니다. 아무튼 살아있으니 아무래도 좋고, 엘리는 앞을 바라봅니다. 앞에 서 있는 사람들이 검문을 받으며, 대충 어떻게 해야할지 감을 주는군요.
"저는 베겐이라고 아랫골 사는 농노인데, 교회에다 이번달 계란 바치러 왔습지요."
"슈미스라 이르는 대장장이요. 성벽 안쪽에 귄터라고 살 텐데 주문한 못 납품하러 왔수다."
그리고, 졸려 죽으려 하는 경비 앞에 드디어 엘리가 서고, 경비는 엘리의 꽁꽁 싸맨 옷을 보고 묻습니다.
"덥지도 않나... 됐고, 이름, 목적." //처음부터 난관을 주면 싫어하는거같아 일단 성 입장은 어지간해선 그냥 할 예정. 그런데 해뜬 날에는 강제로 약함 고정이면 강함을 몇개 더 넣어도 되지않나 싶네!
어차피 평생 갈 약점이 아니라 극복할 약점이니 그대로 가야지~ 라고 생각했는데, 생각해보니 극복 시점이 개인서사 끝물이었어! (진행중엔 수혜 못본다는 뜻)
근력 - 약함(낯의 경우 약함) 체력 - 강함(낯의 경우 약함) 지능 - 보통(낯의 경우 약함) 민첩 - 강함(낯의 경우 약함) 매력 - 강함(낯에는 햇빛에 노출당해 죽는 걸 방지하기 위해, 얼굴을 모두 덮은 가면을 쓴 모습이 사뭇 수상하다. 또한, 겉 보기의 연장자나 사회적 지위가 높은 이에게 존대를 쓰지 않는다는 점에서 약함)
그렇다면 민첩 강함과 뱀파이어의 종족 특성? 마법? 인지는 모르겠지만 [박쥐 변신]까지 더 넣어도 될까나! 밤에는 박쥐로 변해 빠르게 날 수 있다는 느낌으로!
>>71 스탯 배분을 해둔게 밸런스 문제라기보단 솔직히 말해 대책없이 강하면 뭔 난관이 있어도 '짱쎈캐릭이 다죽였다'로 끝나서 도저히 재밌게 글을 쓸수가 없어서 그런건데, 엘리의 경우에는 페널티가 워낙에 강하다보니 박쥐 변신... 도 진짜 박쥐떼로 변해서 움직이는 정도, 뱀파이어의 힘이 강해지는 황혼-새벽 사이에만 쓸 수 있음으로 설정하면 ㅇㅋ로 할게! >>70에 반응 줘!
태양을 마주보러 왔다, 그 이야기에 경비는 저도 모르게 하늘을 올려보았다가, 땅 사람들의 눈길이 너무 부끄러운 햇님 아가씨에게 뜨거운 불빛을 쏘였습니다. 뭐, 좀 더 쉬운 말로 말하자면, '눈뽕'을 맞은 것이죠. 어우 내 눈! 경비는 그런 식으로 불평을 하고 나서, 엘리를 바라봅니다. 엘리가 죽기 싫어서 온 몸을 꽉꽉 뒤엎어쓴 덕분에 엘리의 본모습을 알아볼 순 없었지만, 어떻게든 나름의 방식으로 이해한 모양입니다. 좀... 뱀파이어 입장에서는 껄끄러울 수 있는 방식이지만 말입니다.
"그, 태양 교단의 분파인가?"
태양 교단? 햇빛이 내리쬐는 곳에 맨몸으로 나갔다간 산 채로 화장당하는 고통을 맛보는 엘리가, 태양 교단이요? 것 참 웃깁니다! 하지만 경비는 그 이상 생각하고 싶지 않은 모양인지 휘휘 손을 젓는군요.
>>76 엘리는 무사히 세스타우 성으로 들어갔습니다. 성 안에서는 아까 전에 계란 바치러 온 사람, 못 납품하러 온 사람들이 슬쩍슬쩍 보이고, 엘리를 제외한 다른 '정상적인' 뱀파이어들은 끔찍하게 여길 광경이 펼쳐집니다. 사람들은 왁자지껄 떠들어대고, 이곳저곳에서 무언가 두들기질 않나, 그리고... 사람! 사람! 사람! 그놈의 사람이 너무 많습니다! 엘리는 일족 중 한 명이 고작 집 몇 개 모인 마을에 갔다가 혼절할 뻔한 것을 생각하면서, 가면 아래에서 웃음을 흘리고 안쪽을 구경합니다... 물론, 신전은 멀리멀리 피합니다. 태양을 마주보는 것은 정말로 도전할 만한 일이지만 지금 당장 할 만한 짓은 아니고, 그건 신전에 제 발로 들어가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여기 사람들은 좋게 말하면 배려심이 깊고, 나쁘게 말하면 오지랖이 더럽게도 넓군요. 어떤 할머니가 엘리의 손목을 꽉 잡았습니다.
"이방인! 여기서 아무런 조치도 없이 무얼 하시는가?"
할머니는 뿌리칠 시간도 주지 않은 채, 세스타우 성의 신전에 방문해야 할 이유들을 구구절절이 설명합니다. 결론이야 뭐... 똑같지만요.
"요즘 밤이 흉흉하이. 온갖 흉적들이 날아온다우. 아기를 채가는 나쁜 요정들, 걷는 모기들, 몽마놈들... 구경할 때가 아니야!"
>>78 "나중에 들어가면 늦어! 목소리를 들어보니 낯선게 이방인인 모양인데, 여기가 안전해보여도 낮에만 그렇지 밤에는 아주 지옥이야!"
...뭐 그렇답니다. 아무리 엘리가 햇빛에 약해졌다고 해도 할머니 한명을 못 털어낼 정도는 아니기에, 그냥 인파 속으로 사라집니다. 그렇게 엘리는 세스타우 성을 한나절 다 돌아보고 나서 대충 여기에 성주관저, 경비대 막사, 대장간 등 어지간한 성이면 다 있는 시설부터 여관, 신전, 상점가까지 있을건 다 있다는 걸 깨닫습니다.
뱀파이어의 특성상 인간보다야 훨씬 오래산 덕분에, 엘리는 인간이라면 죽을 날만 기다릴 80대가 되었습니다. 이런 농담도 있습니다. 뱀파이어가 돈이 많은 건 그네들이 무슨 특별한 능력을 가지고 뒷세계를 주무르고 암흑가에서 검은 돈을 벌어서가 아니라, 막말로 수백년을 살수 있는데도 돈을 못 모으면 그건 머저리라는 농담 말입니다!
"방에서 잠만 자는데 동화 5개, 식사랑 목욕은 은화 1개. 더 싼데 있으면 거기 가슈."
엘리의 행색을 보고 수상히 여긴 여관 주인이 퉁명스레 대답할 동안, 엘리는 인간의 돈을 얼마나 갖고 나왔나 세봅니다. 가출할 때 대충 들고 나온게 은전 50개군요.
...하지만 수상한 건 수상한거고, 돈 주는 건 돈이죠. 돈이 나오자 태도가 갑자기 확 바뀌어서는, 여관 주인은 퉁명스런 태도를 치우고 급사를 불러 방 안내를 시킵니다. 비냐, 라 불린 하플링 여급은 짧은 몸으로 앞서 나갑니다. 끝단을 묶은 긴 머리가 발치에 닿을 듯 흔들리는 게 시선을 빼앗는군요.
"여기가 방이에요. 내일 점심시간까지 사용할 수 있고, 식사는 오늘 저녁이랑 내일 아침에 제공된답니다!"
비냐가 안내한 방은... 음, 창문이 널빤지로 막혀있는 것만 빼면 괜찮군요. 침대는 짚 따위가 아닌 제대로 된 침대고, 책상과 선반도 있습니다. 그런데, 비냐가 문을 닫더니 소곤소곤 눈치를 보며 얘기하는군요.
"아, 그리고... 여관주인 아저씨가 손님 떨어질까 말 안한 것 같거든요... 여기는 한밤중에 날개 달린 괴물이 쳐들어와서 손님이 죽었어요. 지난주부터 치워서 겨우 다시 연 건데... 조심해야 해요."
그리고 조심하라는 의미로, 신전에서 받아온 수호부를 건네는군요. 아주 이곳은 선의로 포장된 살인도구 투성이인 걸까요? // 반응이 늦어서 미안! 오늘은 여기까지 하고 들어가볼게!
엘리는 잠에 듭니다. (엘리의 맨얼굴에 대면) 못생긴 가면도, 옷인지 족쇄인지 알 수 없는 두꺼운 천옷도 벗은 덕분에 피로가 풀리는 느낌입니다. 선반에 던진 수호부의 존재가 좀 재수 사납게 느껴지지만, 다행히도 면죄부보다 효능이 아주 조금 나은 수준이라 단순히 같은 방에 있다고 엘리의 단잠을 최악의 악몽으로 바꾸는 일은 없었습니다.
"저녁 시간이에요! 은화 낸 손님들! 빨리 식당칸 내려오세요! 늦으면 돈 내 놓고 밥 못 먹어요!"
쾅쾅쾅, 쾅쾅쾅! 비냐의 당찬 목소리와 함께 문을 쾅쾅 두드리는 소리가 들립니다. 잠시 잠에 들었던 엘리는 일족이 모여살던 저택에서는 꿈도 꿀 수 없는 천한... 아니, 거침없는 저녁식사 알림에 놀랍니다.
내려가니 비냐가 사람들 사이를 돌아다니며, '은화 손님'들에게 음식들을 다 내려두고 있습니다. 하지만 은화 손님이 은화 손님이라고 얼굴에 써둔 것도 아닌데, 비냐는 어떻게 잘 알아차리고 음식을 가져다 두는군요. 음식은 뭐... 크게 바랄 건 없습니다. 며칠이나 끓였는지 모를 스튜가 한 그릇 나가고 거기에 블랙 푸딩, 좀 더 알아듣기 쉽게 얘기하면 굳힌 돼지 피로 속을 채운 소시지 하나씩이 나가는군요. 뱀파이어 일족들 중 수천년째 최후의 전쟁 타령을 외치는 치들이 피를 저런 식으로 굳혀 먹는다고 하니, 아마 엘리자베스도 먹을 수는 있을 겁니다... 먹을 생각이라면요. 그렇게 생각하며 주변을 구경하는데, 비냐가 음식을 다 옮기고 주방으로 돌아가던 중에 엘리와 부딪칩니다.
"으엑! 앞에 좀 보고 다녀요... 에? 누구세요?"
비냐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당신을 올려다봅니다. 그럴 법도 합니다. 들어올 때는 가면에 온갖 변장을 다 하더니, 이제는 풀어버리면 비냐 입장에서는 알아볼 길이 없죠. // 가능하다면 엘리 외모 묘사 답레에 부탁할게!
장난스러운 인상과 긴 편에 속하는 은색 머리는 그렇다치고, 톡 튀어나온 송곳니를 비롯해 내 붉은 눈은 꽤나 이질감을 불러일으켰다. 일반적인 "적안"이 광택 있는 붉은 빛깔이라면, 나의 그것은 말 그대로 피의 색깔. 이 시대에 있을 수 없는 용어를 빌려 설명해보자면, 동공 자체에 색소가 없어서 내부의 혈관이 비쳐 보이는 모습이었으니까.
목소리를 듣자 비냐는 굳어버립니다. 마치 고장난 인형 같이, 엘리자베스의 선혈 같은 눈동자와 은색 머리를 멍하니 쳐다보고만 있습니다. 비냐는 상대가 누군지 알아본 모양입니다. 생긴 건 모르겠지만 목소리는 딱 그 '은화 손님'이었을테니까요. 그런데 그 가면을 쓴 이가 알고 보니 이런 여인일 줄은 꿈에도 몰랐던 모양입니다. 비냐는 잠시 동안 바라보다가 벌벌 떨리는 손가락으로 천천히 한 자리를 가리킵니다. 구석자리, 공교롭게도 아무도 없는 자리입니다. 비냐는 거기에 엘리를 앉히고 피소시지와 스튜를 가져다줍니다. 걸쭉한 밀죽을 기초로 뭉근하게 녹은 콩과 당근 덩어리, 그리고 네모난 크기로 썬 다양한 종류의 고기들이 인상적인 스튜입니다. 피소시지도 갓 만들었는지 아직 싱싱한 쇠비린내가 조금은 느껴지는군요. 하지만... 옆에는 비냐가 엄청 심각한 표정으로 물어보고 있습니다.
비냐는 할 말을 잃고 잠시 서 있습니다. 공포일까요, 충격일까요, 황당함일까요. 어느 쪽이건 간에, 이것 하나는 확실합니다. 전혀 긍정적인 감정은 아닙니다. 계속 엘리의 선혈 같은 눈동자를 바라보던 비냐는 말없이 주방으로 돌아갑니다. 다행히도 왁자지껄 떠들기 바빠서 주변은 못 들었지만, 왠지 모르게 여기서 엘리의 일족은 환영받지 못하는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군요. 어쨌든 인간들이 먹는다는 피소시지를 체험을 끝마치고 스튜는 거르는 엘리 앞에, 여관주인이 정말 심각한 표정으로 오더니 맞은편에 앉고는 아직 따지 않는 술병 하나를 올려둡니다. 그리고 넌지시 턱짓으로 뒷편을 가리키며 이야기하는군요.
여관 주인은 여관 뒤로 엘리를 부르고 나서, 주변을 살피더니 살며시 문을 닫습니다. 하늘의 서쪽에서는 아직 붉게 물든 햇빛이 보였지만 이제는 어느 정도 괜찮으니, 엘리는 그냥 따라갔을 뿐입니다. 여관 주인은 골목길 문을 닫고 나서 한숨을 쉬더니, 쉬이이... 하면서 목소리를 낮추라 하고는 죽일 듯한 눈빛으로 엘리에게 말합니다. 어느 정도 감정을 다스린 것 같지만 목소리에서 공포인지, 분노인지, 하여튼 부정적인 감정을 숨길 수 없는 모양입니다. 그는 술을 건네더니 이야기합니다.
"지난번에 괴물이 들어와서 다 헤집고 나갔더만, 이번에는 뱀파이어야? 그것도 인간 사이에 뱀파이어가 나돌아다니면 뭐가 문젠지도 모르는 뱀파이어? 제기랄, 환장하겠군."
여관 주인은 대체 인생이 왜 이 모양인지, 왜 이런 것들만 손님으로 들어오는지 한참 동안 불평을 주절주절 늘어놓더니 엘리에게 아직 따지 않은 술을 건네고는 이야기합니다.
"내가 접객의 신 박툼을 믿는 걸 감사하게 여기셔. 아무튼 우리 가게에 돈 내고 들어왔으니 오늘 하룻밤은 자고 가게 해주겠지만 더 이상은 안 돼. 이 술 줄 테니까, 어디 가서 당신이 우리 여관에서 하룻밤 묵었다곤 얘기하지 말고."
아무튼, 엘리랑 얘기도 끝났겠다 여관주인은 엘리와 함께 들어갑니다. 엘리는 엘리자베스라 불리던 일족 생활 시절 배운 것을 떠올립니다. 기본적으로 인간은 뱀파이어에 대한 본능적 혐오, 종교적 악마화, 그리고... 솔직히 말해 뱀파이어들 잘못도 있는 인간-흡혈귀 전쟁 문제, 지금도 어디선가 어떤 뱀파이어가 저지르고 있을 인간목장 및 노예제 문제 때문에 큰 거부감을 가지고 있다고요. 이 거부감은 사람마다 달라서 잘하면 용인받는 문화권에 갈 수도 있다지만 여기는 조금 애매하군요. 뱀파이어라고 환영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이단심문관을 불러 이 미친 암모기를 당장 매달아 불태우라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지는 않으니 말입니다! 여관으로 들어가던 엘리는, 뉘엿뉘엿 지던 해가 완전히 지평선 너머로 푹 꺼지고, 어둠이 세상을 뒤덮은 것을 목격합니다.
엘리자베스 바토리 블라드 체페슈. 별난 뱀파이어도 뱀파이어이고, 그녀는 뱀파이어 일족 중에서도 꽤나 고귀한 혈통입니다. 인간들이 불을 켜놨지만 이것으로 태양의 권능을 대신할 수는 없고, 엘리는 온 몸의 족쇄가 풀린 것을 느낍니다. 느릿느릿하고 답답하던 몸놀림이 빨라져 앞서가던 여관 주인의 장화 뒷굽을 저도 모르게 몇번 밟고, 여관 안에 들어가니 소리도 잘 들리는군요.
>>114 머뭇거리던 엘리는 그걸 생각해봅니다. 생각해보면, 인간의 피를 빨아본 것도 너무 오래됐습니다. 일족이 경영하던 영지에서 농산물 대신 피 한모금 분량으로 세금을 대신할 때를 제외하면 인간의 피를 마셔본 적이 없었습니다. 해봤자 닭 피, 좀 사치부리면 소 피였을까요.
"야, 이년 쫄았어!"
"너무 겁주지 마. 긴장하면 강직 푸는데 오래 걸려."
말할 수 있고, 생각하고, 사랑하는 지성체의 피를 마시는 건... 배덕 그 자체입니다. 소유할 수 있다는 게, 언제든 먹어버릴 수 있다는 게, 얼마나 달콤한지, 얼마나 짜릿한지.
"잠깐, 어디 갔지?"
식인종들은 갑자기 사라진 인영에 당황해서 주위를 살펴봅니다. 그리고 자기들이 상대를 잘못 골라도 한참 잘못 골랐음을 깨닫는데 오래 걸리지 않습니다. 그녀 자신조차도 인지할 수 없는 속도로 달려든 엘리의 송곳니가 드러나고, 그대로 식인종 하나를 붙잡아 목을 깨뭅니다.
"끄, 으아아아아아!!!!"
...엘리가 송곳니를 꽂는 방식은, 많은 호사가들이 생각한 것처럼 야릇하고 관능적이지도 않고, 엘리가 영지민 소녀에게 그랬던 것처럼 부드럽고 정중하지도 않습니다. 세상에 사냥감 사정 신경쓰는 사냥꾼은 없고, 엘리도 그렇습니다.
"사, 살려줘! 나 죽는다아아!!!!"
송곳니에 뚫린 피부에서 피가 새어나오고, 역겹지만 중독될 것 같은 피비린내가 비강을 채우자 온 몸에 다행감이 퍼지며 웃습니다. 하지만 피비린내 속에서 달콤한 맛, 텁텁한 맛, 시큼한 맛이 자기주장을 하고 있습니다. 한두명을 식인한 게 아닌 모양이라 생각하니 혐오감이 들어 송곳니를 빼려는 찰나...
"뒤져라! 이년아!"
"야, 쑤셔!"
쌔액, 푹, 푸슉! 옆구리와 등에서 느껴지는 격통에 엘리의 눈이 뜨이고 저도 모르게 목을 깨문 입을 콱 악물어 버립니다. 사람을 먹는 놈들도 꼴에 동료애는 있는지 엘리를 죽이려고 녹슨 칼로 마구 난자하지만, 차라리 피를 좀 빨게 냅뒀으면 좋으련만. 격통에 무의식적으로 이빨을 악물자 송곳니가 식인종의 경동맥을 꿰뚫고, 식인종의 심장이 엘리의 입 안으로 신선한 동맥혈을 쏴버립니다.
"아오 이 미친년!"
"아 씨... 오랜만에 맛있을 것 같았는데."
...여러개의 칼에 쑤셔지는 상황은 누구한테나 목숨이 위험한 상황이고, 엘리가 인간이었다면 벌써 죽었을 겁니다. 세 명이 달라붙어 1분 동안 쑤셨으니 분명 얼마 못 갈 거라 생각해 식인종들이 몇 걸음 물러납니다. 하지만 뱀파이어의 생존 본능이, 엘리의 입을 잠시 지배해서 식인종을 포식했습니다. 식인종의 피에서 얻은 기이한 생명력이 벌어진 상처들을 꿰매고, 십년만에 마약 같은 인혈을 한 모금도 아니고 '성체 수컷' 1체만큼 포식하니 온 몸이 행복해집니다. 이성이 마비된 건 아니지만, 쾌락이 지금 이 순간만큼은 웃으라 하는군요.
"야 저거 뭐야?"
"이... 인간 아니었냐?"
그리고 그제서야, 식인종들은 기분 탓인지는 몰라도 더 선명해진 것 같은 핏빛 눈동자를 보며 깨닫습니다.
혹시 이거 때문에 불쾌감 느낄까 미리 설명하면 1. 나는 엘리 서사의 테마를 '위험하다고 배척받는 소수자가 이해와 상호부조를 통해 거부감을 희석하고 용인받는 과정'으로 생각하고, 이 과정에서 당장은 식인종의 시체 때문에 곤란을 겪을 순 있어도(엘리가 어떻게 수습하냐에 따라 안 겪을 수도 있음. 확정 아님) 결과적으로 엘리주의 궁극적 목표에 반하는 전개는 없을 예정이야
식인종들 중 가장 나이가 많아보이는 이가 이야기합니다. 이것 역시 맞는 판단이지만 문제가 있습니다. 제아무리 이놈들이 밤길을 아무리 나다닌다 해도, 엘리처럼 타고난 밤눈을 이길 순 없습니다. 마치 고양이가 사냥감을 굴리듯, 천천히 어둠 속으로 사라진 엘리는 그들을 노려봅니다. 칼을 든 손이 벌벌 떨리고, 가장 겁이 많은 이가 벌벌 떨리는 목소리로 도망치자고 제안합니다.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목소리인데, 이렇게 겁 많은 놈이 범죄는 뭔 생각으로 저질렀나 싶어질 정도입니다.
"야, 도, 도도도, 도망치자. 이러다 우리 다 죽는 거야!"
"닥쳐! 도망을 쳐도 어디로 갈 건데? 씨발..."
온갖 욕지거리를 나누던 와중에 엘리가 달려듭니다. 적은 총 셋, 세 명이서 각자의 시야각으로 120도 앞을 보고, 뒤와 옆은 동료들이 지키는 이상적인 방어 진형입니다. 정말로 좋은 능력입니다. 하지만 엘리라고 방법이 없는 건 아닙니다. 최근에는 굳이 쓸 일이 없었지만... 사실 엘리는 자신의 형체에 대해 큰 고정관념이 없는 사람입니다. 특히 밤에는요. 엘리가 눈을 감고...
끼리릭, 끼리리릭!
"이, 이게 무슨 소리야?"
"아가리 닥치고 앞이나 똑바로 봐! 한 명만 빵꾸나도 다 뒤지는...!"
...난생 처음 들어보는 쇳소리 같으면서도, 목소리를 턱밑까지 긁는 것 같은 소리에 기겁하는 반응을 들으며 눈을 뜹니다. 엘리의 몸은 수백마리 박쥐떼가 되고, 어둠 속에서 자연스레 셋 중 가장 연장자에게 수백마리의 눈으로, 수백개의 입으로, 수천개의 이빨로 달려듭니다.
"으으아아아악! 씨발! 씨바아아알!!!"
한 두 마리라면 떼어내겠지만 수십마리가 되고, 수십마리를 떨쳐내려다 수백마리가 붙습니다. 제아무리 엘리의 근력이 약하더라도, 엘리가 사람 몸 위에 올라탄다면 어찌 될까요? 엘리는 지금 그 대답을 어둠 속에서 보여주고 있었습니다. 수백개의 입들이 식인종을 물어뜯기 시작하고, 날카로운 이빨에 살점이 씹힙니다. 가장 용감하던 이는 어떻게든 떼어내려고 이리저리 달려들다가 어둠 속으로 도망쳐버리고, 두 식인종이 부르는 말에는 대답도 못 하고 비명만 지릅니다. 벌벌 떨기만 하던 놈 말고, 나머지 한 식인종이 램프를 꺼내 급하게 불을 켭니다. 겁쟁이가 말리려고 하지만 소용없습니다.
"이, 이봐! 바깥에선 안 켜기로 했잖아! 경비가 오면 어쩌려고...!"
"경비가 오면 죽을 수도 있지만, 여기서 저 새끼 못 제끼면 다 죽어 병신아!"
수백마리 박쥐떼가 참 욕심스러운 수백번의 '한입만'을 마칠 때쯤, 식인종들이 램프를 켰습니다. 이것 역시 좋은 판단입니다. 불빛 하나 없이 야밤중에 뱀파이어를 상대한다는 건 고통스러운 자살 방법에 불과하니까요. 하지만 그들은 눈 앞에 드러난 동료를 보고 굳습니다.
허여멀건하던 살가죽이 이리저리 벗겨지고 찢어져 보이는 속살도 엉망으로 헤집어졌습니다. 얼굴은 형체도 남지 않게 뜯어먹어서, 귀와 코는 깊은 양 구멍이 그대로 보이고, 최후의 양심으로 남겨준 두 안구는 깜빡이고 싶어도 깜빡일 눈꺼풀 없이 램프 불빛을, 아직 멀쩡한 두 동료를 바라봅니다. 머릿가죽도 벗겨져 드러난 두개골은, 박쥐가 아쉬움을 못 참고 남긴 수십개의 이빨자국이 선합니다. 거추장스러운 옷은 전부 벗었고, 속살도 거추장스러워 전부 벗은 그는 의학 학교의 인체모형마냥 내장과 갈비뼈를 생생히 보여주며 다가오더니 한 마디를 합니다.
"죽여줘..."
엘리는 식인종이 쓰던 녹슨 칼을 들고, 천천히 그 끔찍한 몰골의 식인종과 함께 걸어오더니 등을 찔러 심장을 꿰뚫습니다. 그제서야 식인종의 고통이 끝나 땅바닥에 쓰러지고, 엘리는 불빛 뒤에 숨은 식인종들을 바라보면서 충고합니다.
"도망쳐 봐."
"히, 히히이익...!"
"그럼, 한 명 쯤은 살아서 도망칠 수 있을 지. 누가 알아?"
그 말에 식인종들은 램프를 버리고 도망칩니다. 겁이 많은 놈은 제 발에 걸려 넘어질 것 같고, 고분고분히 고문에도 응할 것 같아 내버려둔 엘리는 램프를 켰던 놈을 쫓아가 단방에 녹슨 칼을 척추 옆에 빗겨 찌르고, 갈비뼈의 결을 따라 바깥쪽으로 그으며 폐, 간, 위장을 일자로 한 방에 그어버립니다. 알아서 제 피에 익사하게 내버려둔 엘리는 이제 겁쟁이를 쫓아갑니다... 아니, 쫓을 필요도 없었습니다. 어둠 속에서 쌓아둔 양동이를 넘어뜨려 그 안에 갇혔군요. 어떻게든 나오려고 허우적대고 있습니다. 그런데...
콰아아앙!!!!
엘리는 멀리서 폭발음이 들려서 그 쪽을 바라봅니다. 분명 엘리가 하루 묵기로 했던 여관이 있는 곳에서... 비명 소리가 참 거하게 들리고 있군요. (이제부터 반응해주면 돼!)
해봤자 양동이 몇 개 더 떨어진 것뿐이건만, 뱀파이어 보고 놀란 가슴 양동이 보고 놀란 나머지 식인종은 머리에 바윗돌이라도 떨어지는 양 비명을 지르다 안에 처박혔습니다. 엘리는 일단 그렇게 내버려두고 여관으로 돌아갑니다. 방금 전 식인종들과의 싸움에선 미끼를 자처한 덕분에 쉽게 일이 풀렸지만, 아무런 준비도 계획도 없이 일단 달려가는 발길에는 불안함이 감돕니다. 어쨌든, 엘리는 빠르게 달려 여관으로 왔습니다. 참 오랜만에, 뱀파이어의 육체에 땀이 흐르고 숨이 가빠집니다. 엘리는 여관을 바라봅니다. 여관은 불타고 있었습니다.
"아이고, 내 여관! 내 여관!"
"이봐, 저기 안에 사람은 어쩔 거야! 저 안에 열 명 넘게 남아있다고!"
누가 그런 건지는 몰라도 여관은 아주 제대로 박살났습니다! 지붕에 뚫린 큼지막한 구멍이 저 안으로 들이닥친 괴물의 무서움을 알려주고 있고, 경비병들도 쉽사리 들어가지 못해 벽 주변을 둘러싼 채 창과 활만 겨누고 있군요. 경비대장은 온갖 욕지거리를 하면서 땅을 구릅니다.
"이런 제기랄, 아무나 다 불러! 하다못해 이단심문관이라도 불러! 이단 혐의점이 없다고? 아무튼 있다고 하면 되잖아!"
엘리는 어안이 벙벙해진 경비대장을 뒤로 하고 박쥐의 형태로 바뀌어서 여관 안으로 들어갑니다. 어차피 이 안에서는 박쥐의 형태를 취해봤자 더 취약하니, 그녀는 창문 틈새로 들어오자마자 다시 원래의 몸으로 바꾸고, 여관 1층을 바라봅니다. 여관 안은 난장판이 되었습니다. 몇시간 전까지만 해도 부어라 마셔라 즐거웠을 여관 안에 사람들이 널브러져 있고, 다들 몰골은 다양하지만 어째 다 죽은 느낌입니다. 부러진 창칼들을 보아하니 여관 안에 있던 모험가나 용병들이 쉽게 죽어줄 생각은 없었던 것으로 보이지만 어쨌든 실패했는지 죄 죽어있고, 여관 입구는 무너져서 한 불운한 경비병의 머리를 투구째로 짓뭉개 버렸습니다. 아마 이 모양이니, 경비대도 쉽사리 들어가질 못하고 있겠죠.
화덕은 박살나서 불씨와 재만 보여주고 있고, 사방에 날카로운 발톱과 뭉개진 발자국이 보입니다. 얼마나 많은 이들이 살아남았는진 모르겠지만... 그리 많진 않을 겁니다. 엘리의 감각이 예민해지고, 두 가지를 잡아냅니다. 구르릉... 구르릉... 2층, 손님실에서 뭔가 큰 것이 조금씩 미동하는 소리가 들립니다. 그리고 시체 무더기들 사이에서, 뭔가 흐느끼는 소리가 들리는군요.
시체 무더기에서 산 사람을 구분하는 방법. 이라고 한다면... 살아있는 신선한 피를 감지하는 기관이 나에게는 있지 않은가.
비유하자면, 인간의 코로 차게 식은 식중독 위험군 음식과 갓 나온 따끈한 빵을 가려내는 시도와 같았다. 생존자가 피가 흐를 정도의 상처를 입지 않았다면 찾기 어렵겠지만... 긁힌 상처라도 있다면. ,조금의 피라도 나 있다면. 사냥감을 찾는 사냥꾼의 감각이 힘을 발휘할 수 있겠지.
'아, 사냥감이란 표현은 좀 그런가?'
그래도 구출 시도인데. 나는 눈을 감고 코를 쫑긋거리며, 있을지도 모르는 생존자의 피 냄새를 쫓기 시작했다.
>>134 엘리는 피냄새로 생존자를 찾으려다가 이내 관둡니다. 시신들이 다양한 부위에서 흘리는 피냄새가 엘리의 후각을 과포화해서, 정작 필요한 정보를 찾는 것을 전력으로 방해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눈을 감은 덕분에 청각이 민감해져서, 엘리는 금방 생존자의 죽을 것 같은 숨소리를 듣고 눈을 뜹니다. 눈을 뜨면, 엘리가 알고 있던 하플링 소녀와 눈이 마주칩니다. 제 발치까지 닿는 긴 머리칼을 이로 악문 채 소리를 죽이고 있었지만, 엘리를 보자마자 다 틀렸다고 생각하는지 발광하는군요.
"~~! ~~~~~!!!"
비냐는 손에 잡히는대로 다 던지고 있지만, 엘리가 그냥 맞아주면서 기다리자 한참을 발악했는데도 죽지 않은 상황에 이상함을 느껴 발광을 그만둡니다. 그리고 떨리는 목소리로 겨우 이야기하는군요.
비냐는 아직 당신을 못 믿는 것 같습니다. 뱀파이어에게 당하고만 산 사람이야 뭐 세상에 잘 찾아보면 있다는데, 재수없게도 비냐가 그런 존재였을까요? 확실치는 않겠지만 그랬다면 엘리와의 첫인상은 정말 최악일 겁니다. 인사를 너무 개판으로 해서 그랬나 하고 너무 상심할 필요는 없습니다! 엘리가 비냐를 귀족마냥 받들어모시건 뭘 하건 첫인상은 무조건 최악이었을 테니까요. 결국 안 되자, 엘리는 발치까지 닿는 그녀의 긴 머리칼을 붙잡고 마치 밧줄에 사람을 매단 것처럼 시체 사이에서 꺼내듭니다. 그러자 비냐가 깜짝 놀라 말하는군요.
"아, 안 돼요! 괴물이 있어요. 괴물이!!! 지하로 숨으세요!"
하지만, 엘리도 귀가 달려있고, 그 귀가 보통 좋은 귀가 아니라 다 들었습니다. 괴물이고 현물이고, 엘리는 어쨌든 비냐를 살려줘야 하니 적당한 창문을 찾습니다. 비냐는 창문으로 나가려다가 키가 안 닿아 바동댔지만, 보다 못한 엘리가 앞으로 밀어버려 내보냈습니다. 돌아선 엘리는 주변을 바라봅니다. 적어도 1층에는, 생존자의 숨소리가 들리지 않고, 2층에는 뭔가 거대한 존재가 미동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뭐, 비냐가 묻지도 않은 여관의 층수까지 다 이야기해준 덕분에 여기는 지하층, 1층, 2층으로 구분된 건 알았습니다.
>>139 또각, 또각, 또각... 한 계단 한 계단을 오릅니다. 위에 뭐가 있을지 모른다는 긴장에 엘리의 숨이 멎을 것 같군요. 그래도 엘리는 지금은 밤, 자신 같은 뱀파이어들의 무대임을 다시금 되새기면서 용기를 얻고 올라갑니다. 올라가자마자 괴물이 나타날 것 같았지만... 이상하게도, 2층으로 올라왔는데도 별 일은 없습니다. 엘리는 어둠 속에서, 소리만으로도 제 존재를 드러내던 괴물을 마주할 준비를 하고 소리가 들리는 쪽을 바라보았습니다. 하지만...
"으극, 으그윽..."
"죽여줘..."
엘리는 눈을 뜨고, 그 '괴물'이라 생각했던 것을 봅니다. 거대한 덩어리도, 사실 생각해보면 각각의 부분이 모여 만든 것입니다. 그리고 이 덩어리는 불운한 사람들이 한데 얼기설기 엮여서 만들어졌습니다. 그것들은 엘리를 보더니 수백개의 팔다리를 질질 끌어 그녀에게 다가오려 하는군요. 하지만 이들은 식욕으로 움직이지 않습니다. 절박함, 희망, 공포. 엘리가 누군가를 죽일 때 익숙하게 느꼈을 그 감정입니다. 아니, 그럼 괴물은? 이라고 생각할 때쯤 뒤에서 뭔가 느껴집니다.
"성가셔."
뒤를 돌아보자마자, 온 몸이 피와 살점으로 뒤덮인 사람... 형태의 무언가가 그녀를 걷어찹니다. 엘리는 그대로 날아가 사람들이 엮인 살덩이들에 부딪쳐 튕겼다가, 낙법을 취해 데굴데굴 굴러 다시 일어납니다. 그런데, 이거 사람은 맞나요? 사람도 아니고, 엘리가 아는 괴물도 아닌 것 같은 이상함이 그녀를 혼란스럽게 만듭니다. 하지만 그건 그거고, 전투는 전투입니다.
>>141 어릴 때부터, 엘리는 일족 내에서도 적어도 재빠른 것으로 남한테 뒤진 적은 없었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그렇습니다. 아까 전만 해도 식인종들을 사냥할 때, 솔직히 말해 느려서 문제가 된 건 없었으니까요. 피투성이가 된 상대의 몰골도 무섭지 않습니다. 그야 당연하죠. 엘리는 저 몰골을 수없이 본 게 아니라, 저 몰골을 만들어도 봤습니다. 엘리는 상대에게 달려들고, 상대는 거기에 맞춰 주먹을 들지만... 엘리의 입가가 씩 올라갑니다.
'느려'
상대가 엘리에게 주먹을 내질렀지만, 공기를 주먹으로 치려고 하는 것처럼 엘리에게는 아무 소용도 없습니다. 엘리는 팔 안쪽으로 파고들어, 상대의 목숨 따위는 신경쓰지 않고 입을 쩍 벌려 상대의 목을 한입에 담고 그대로 꽉 깨물어버립니다. 살점이 송곳니에 뚫려 파이는 느낌은 여전히 좋지만, 그 안에서 나오는 피는 그렇지 않습니다. 그녀의 입 안으로 들어오는 피는 그 어떤 것보다도 역겹습니다. 아니... 역겨운 '피'가 아닙니다. 인간의 미식 기준을 뱀파이어에 대자면...
고기는 맞는데, 마치 몇 달간 푹 썩힌 다음 온갖 이상한 연금술 약품에 절인 끔찍한 고기 같습니다.
퍼억!
그런 감상을 느낄 찰나도 없이, 상대는 엘리의 하복부에 주먹을 꽂습니다. 엘리는 눈을 부릅뜨고, 하나하나가 과도 수준으로 길고 날카로워진 손톱으로 그의 가슴팍을 마구 난자합니다. 비록 엘리가 근력은 약하지만 체력은 정말로 강했고, 여기에 남자 하나를 포식했으니 재생력도 엄청나서 이런 근성 싸움도 상대가 신성력을 쓰는 게 아닌 이상 버틸 만하겠죠. 하지만...
쾅!
엘리는 확실히 힘이 약했습니다. 수십번이나 찔린 상대는 엘리의 목을 붙잡더니 그대로 한 문간에 던져버리고, 엘리는 또다시 나동그라집니다. 지금 보니 엘리의 방이군요! 의도치 않게 친절을 베푼 상대는, 엘리를 끝장내는 대신 엘리의 손아귀에 헤집어져 갈비뼈와 그 아래 내장이 드러난 흉곽을 억지로 부여잡고... 살덩이 쪽으로 걸어갑니다. 비명이 들리는군요...
"오, 오지 마! 오지 마!!! 으아아아아아악!!!!!!!"
엘리가 슬쩍 기어서 살펴보니, 수많은 사람들이 엉긴 살덩이 속에서 한 운없는 이를 골라서 '잡아먹고' 있습니다. 제아무리 뱀파이어가 인간의 피도 빤다고 하지만... 그런 뱀파이어 입장에서도 참 역겹군요. 더 역겨운 건... 그랬더니, 엘리가 박살낸 상처가 무색하게 완전히 재생됐다는 겁니다! 상대는 엘리를 노려보더니 다가옵니다.
"...성가셔."
엘리는 침을 꿀꺽 삼키고, 상대를 바라봅니다. 인간을 제물로 사용하는 기이한 재생력, 인정하기는 싫지만... 엘리와 비슷한 부류입니다. 밤에만 살 수 있거나 밤을 더 좋아하고, 어둠 속에서 암약하며, 호시탐탐 먹잇감을 노리고... 신성력에는 갑자기 약해지는, 동족은 아니지만 꽤나 비슷한 부류.
상대의 재생력은 저 '살덩이'가 없다면 엘리에 비해 무조건 밀리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조심하십시오! 저 살덩이가 다 떨어질 때까지 상대는 뭔 일이 있었냐는 듯 재생할 수 있고, 시간을 끌면 끌수록 지는 건 엘리일 겁니다.
>>143 동족은 아니지만 동류라면... 그럼 엘리가 무서워하는 것도 똑같이 통하지 않을까요? 엘리는 그 생각을 바로 실천에 옮겨서, 술을 따서 불에다 붓습니다. 그러자, 순간 엘리의 손 끝을 불태울 뻔할 정도로 불이 높이 타올랐습니다. 어... 근데 잠깐만. 너무 타오르는데요? 엘리는 어릴 적을 떠올립니다. 누가 불장난을 했다가 저택을 통째로 태웠다길래 "뭘 어찌 해야 조그만한 성냥 하나로 집을 통째로 태우냐"고 멍청하다고 욕했는데... 지금 엘리가 그 사람을 욕할 계제가 아닌 것 같습니다. 살덩이에 엮인 사람들의 비명으로 알겠군요.
"으, 으아아! 불탄다!!"
"살려줘! 살려주세요!!!!"
상대는 잠시 굳어서, 엘리를 바라봅니다. 굳이 이 감정을 말로 설명하자면, 엘리가 대체 왜 그랬는지 이성적으로 잠시 고민했다 보면 되겠군요. 하지만 고민은 의미가 없고, 엘리 때문에 '살덩이'를 포식하지 못하게 된 게 마음에 걸리는지 이를 악물고 다시 다가오며 말합니다.
"너, 진짜 성가셔."
아마도... 엘리는 여기서 살아나갈 수 있을 겁니다! 하지만... 저 살덩이로 엮인 사람들까지 전부 구해서 나가려면... 빨리 저놈을 처리해야겠군요. //오늘은 여기까지! 수고 맣았어!
엘리의 발이 마루판을 파고들어 발판이 되고, 발톱이 땅을 박는 고통에 이가 악물리며 아드레날린이 분출됩니다. 동공이 수축하며 시야가 좁아지는 느낌이지만, 상관없습니다. 오히려 좋은 듯도 합니다. 엘리는 저 놈만 죽이면 그만이고, 저 놈만 시야에 담으면 그만입니다.
"성가..."
철퍽!
엘리의 주먹이 상대의 흉곽에 꽂혀, 깊이 들어갑니다. 엘리를 붙잡으려던 상대도 명치에 움푹 박힌 공격에 움찔하지만... 동시에, 엘리도 손목이 꺾이는 고통과 함께 한 손이 잘못된 방향으로 돌아갔음을 느끼고 비명을 지릅니다. 그래도 손을 내주고 가슴을 박살냈으니 다행이고,
죽이지 않으면, 죽는다.
인혈이 내어준 불경한 재생력과, 살려면 죽여야 한다는 피의 부름이 고통을 잊게 하고, 엘리는 용기를 내어 한쪽 주먹을 머리에 꽂아버립니다. 이번에는 상대의 머리가 돌아가버리고, 상대는 제 세상이 흔들리는 혼란스러운 상황에 머리를 싸맵니다.
끄으윽...
그리고 주먹을 마저 배에 꽂아넣자, 못 참고 망가진 폐에 쌓인 피를 뱉어냅니다. 얼굴까지 더러운 피가 잔뜩 튀지만 의외로 기분은 상쾌합니다. 엘리가 다시 아직 멀쩡한 한쪽 주먹을 들려는 순간
퍼억ㅡ
다시 한번, 날아갑니다. 날아가는 기분이 신기해 주먹에 맞은 격통은 잊어버릴 것 같습니다.
쾅!!!!
그리고 다시 자기 방에 처박힌 엘리는, 빠른 속도로 낮은 근력을 극복할 수 있다면 반대로 높은 근력으로 낮은 속도를 극복할 수도 있음을 깨닫습니다. 그래도 좋게 생각합시다. 엘리는 부서진 손목을 재생할 시간을 벌었고, 이번 건 아무리 인간이 아닌 동류라도 충분히 목숨이 위험할 치명상이었으니까요.
"으아아아악!!!"
이런, 또 살덩어리를 먹고 재생하려 드는군요. 바로 그 순간을 노릴 생각에 일어난 엘리는, 발을 디디자마자 마치 불 위를 걷는 것 같은 작열통에 황급히 발을 뗍니다. 지금 보니... 비냐가 건네줬던 수호부가 난리통 와중에 떨어진 모양입니다.
꼴에 수호부라고, 소매를 통해 잡아도 마치 녹기 직전까지 달궈진 쇠를 고작 장갑 하나 끼고 만진 것마냥 뜨겁습니다. 엘리는 딱히 신에게 악감이 없었지만, 신께서는 아주 많으신지 엘리의 손아귀에 화상을 입힙니다! 소매를 통해 어느 정도 덮었고, 그리 강한 신성력을 품지 않은 게 차라리 다행이군요. 그리고 엘리는 살덩이에 엮인 사람을 잡아먹던 녀석에게 수호부를 온 힘을 다해 던집니다!
툭
...참 힘없는 소리였지만, 그 다음에는 마치 비계가 잔뜩 낀 돼지고기를 굽는 듯 보글보글 기름 터지는 소리와 함께 살갗을 녹여버리더니 녹은 살갗과 함께 떨어집니다. 상대는 등에 신성한 가호... 엘리와 비슷한 부류에게는 끔찍할 고통을 느끼고 비명을 지릅니다.
"으아아아아아!!!!"
상대의 살갗을 봅시다! 찢기고 부서지고 잘린 다른 상처들은 모두 인간의 살점을 한 점씩 먹을 때마다 아물지만, 이런 단순한 화상은 전혀 재생하지 못해 녹고 익은 자국이 선합니다. 상대는 엘리를 돌아보더니 노기를 숨기지 않고 이를 악뭅니다.
"넌 특별히 고통스럽게 죽여줄게."
물론, 엘리 입장에선 자기가 할 말을 대신 해서 수고를 덜어준 것처럼 들립니다. 엘리는 좁은 복도에서 달려드는 적에게 맞서 달려들어 뛰어오르고, 그의 정수리를 뜀틀처럼 양손으로 짚어 상대를 넘습니다. 그리고 수호부를 망가진 손으로 집어 온 힘을 다해 상대의 옆구리에 쑤셔 쳐박습니다.
"아, 으아아아아아악!!!!"
이게 엘리의 비명인지 상대의 비명인지 모르겠습니다. 엘리는 안 그래도 손목이 부서진 골절통에 작열통까지 맛보고, 상대는 문자 그대로 뱃속에 숯덩이가 박힌 셈이니. 엘리는 상대의 뱃속을 헤집으며 빙빙 돌아간 손을 빼내고, 고통에 자지러져 엎어지더니 바닥에 흐르는 인혈을 핥으며 간신히 진통합니다. 그동안 상대는 수호부 때문에 발광하면서 사람들이 엮인 살덩이 쪽으로 기어가다가...
"끼익, 끅, 끄으윽...!"
"넌 그냥 닥쳐라."
꽈앙!!!
귓전을 울리는 폭음과, 이 혼란한 화재 현장에서도 분명히 느껴지는 매캐한 탄내. 지난 세기에 인간들이 드워프와 공동개발했다는 화약총입니다. 엘리가 간신히 일어나보니 아까 전까지만 해도 살벌하게 싸우던 괴물의 머리통이 터져 있고, 그 총을 쏜 사람은 가운데에 해골이 박힌 철십자, 이단심문소 인장을 새긴 흉갑을 입고 그 위에 검은 롱코트를 걸친 중년의 여성입니다. 그녀는 철봉을 꺼내 괴물의 몸통에 박고 끝을 구부려 못 빠져나가게 하고, 다 불타가는 화재현장 속에서 매캐한 연기를 헤치고 아직 쏘지 않은 화약총을 엘리에게 겨누고 말을 겁니다.
"싸우는 걸 보니 인간은 아니군."
하지만 금방 총구를 내리더니 협상을 제시하는군요.
"하지만 이러다가 우리 둘 다 이 사람들이랑 타죽게 생겼으니, 일단 나머지 얘기는 서로 도와서 이 사람들을 빼내고 하는게 어떨까? 원치 않는다면, 너죽고 나죽자 싸워도 괜찮지만... 당신, 진짜 죽어."
엘리가 사람들을 일일이 꺼내려는 동안 이단심문관은 밧줄과 작살을 꺼내더니, 살덩이의 가장 윗부분에 작살을 꽂고 밧줄을 연결하고는, 엘리에게 밧줄을 던지고 함께 당기기 시작합니다. 끙차! 끙짜! 공 형태로 뭉쳤다해도, 표면이 잘 다듬어진 수정구 같은게 아니라 문자 그대로 살덩이라 바닥에 쓸릴 뿐 당겨지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이단심문관과 엘리가 겨우 계단까지 끌고 오자, 이 살덩어리는 계단을 따라 구르기 시작합니다.
"어? 어어어?!"
"피해."
이단심문관은 계단 난간을 타넘어 공마냥 구르는 사람 덩어리를 피하고, 엘리도 속도는 자신있었기에 쉽게 피합니다. 살덩어리는 바닥에 부딪치더니 짓뭉개지고, 1층은 경비병들이 물통을 들고 들어와 불을 끄고 있군요. 매캐한 연기와 기침 소리를 뚫고 들어온 경비대장이 이단심문관에게 묻습니다.
"심문관님? 이 살덩이... 아니, 사람들은 어쩝니까?"
"죽었으면 신전 영안실에 보내고, 살았으면 박수치고 격리소 들어가라고 해야지요."
"알겠습니다! 그런데 이 여자는...?"
"중요 참고인이요. 내 긴히 할 말이 있어서 데려가니 내버려두고, 여관은 계속 봉쇄해두쇼."
이단심문관은 엘리를 앞세웁니다. 뱀파이어를 잘 알고, 죽기 싫은 이들은 뱀파이어에게 등을 절대 보이지 않는다는 핑계좋은 이야기와 함께요. 엘리의 걸음은 조금씩 조금씩 느려지지만, 이단심문관은 그녀를 밀면서 신전 가까이 갑니다. 그리고...생각보다 별 것 없었습니다. 신전은 세스타우 성의 그 어느 곳보다도 빈민들이 많았고, 수사와 수녀들이 앓는 소리를 내는 빈민들을 돌보고 있었습니다. 아주 옛날에 일족이 경영하던 영지에 패혈병이 돌아 영지민들이 죽어나가고 산 자들의 피 맛이 똥오줌 수준으로 역해져서 한동안 일족 전체가 타지에서 농노들을 초청할 때까지 동물피로 연명했던 적이 있었는데, 엘리는 자신의 원대한 꿈이 진즉 이뤄졌다면 더 많은 이가 살았을 것이라 탄식하고 말았습니다.
"멈춰."
상념에 빠져 더러운 천막들 사이를 거닐 때 이단심문관이 엘리를 잡아세우더니, 손에다가 철십자 모양의 수호부를 와락 쥐여줍니다. 철십자 수호부를 반사적으로 던져버리려고 하자, 이단심문관은 주먹을 꽉 잡고 경고하는군요.
"이단 정보 수집 등의 목적으로, 신께 봉헌된 장소에 발을 디딘 불경한 놈들에게 배포해서 잠시 체류를 허락해주는 수호부다. 다시 말해, 이거 없이 맨몸으로 몇발짝 더 디디면 굳이 내가 싸울 수고도 없이 잿더미가 된단 말이지."
그리고는 다시 걸어가라고 요구합니다. 수호부... 뭔가, 달군 돌처럼 따뜻하지만 엘리를 공격하지는 않습니다. 그리고 신성한 기운이 온 몸을 흐르는데도... 간지럽기만 하지 별 위해는 없군요. 인생 첫 체험입니다.
목숨이 위험하진 않다지만 위축되는 건 자연스러운 반응입니다. 철십자 수호부가 없이 여기까지 들어왔다면 엘리는 잿더미가 되었을 테니까요. 어둑어둑한 밤의 신전 안으로 들어가니, 램프로 밝힌 스테인드 글라스의 좋으신 천사들과 선하신 성인들이 엘리를 내려다보는 것 같습니다.
예배당 복도를 지나 지하로 들어가니, 음... 무시무시한 광경이 나옵니다. 위에서 빈자들을 돕던 성직자들과는 다르게 인상이 험악한 이들이 각자의 방에서 무기를 갈고 닦거나, 그렘린 따위의 괴물과 희생자의 시신을 부검하거나, 유령을 심령통에 담아 고문하는 등 살벌한 광경이 나옵니다.
"걱정 마. 넌 어지간히 잘못하지 않는 이상 저 꼴 안나."
...것 참 안심되는 말을 하면서 엘리를 자신의 심문실까지 데려간 이단심문관은, 엘리를 위해 의자 하나를 끌어주더니 차를 끓이기 시작합니다.
"대답할 건 많지만 이것부터 시작하지. 넌 누구고, 어느 일족이지? 먼저 밝히자면 난 에레야, 사람 십자가에 매달아 불태우는 미친 광신도다."
"...엘리자베스 바토리 블라드 체페슈. 일족에서도 꽤 사는 가문 사람인가 보지? 바토리, 블라드, 체페슈... 하나만 있어도 대단할 이름들을 여럿 붙였군."
에레야는 서류에 엘리의 이름을 적더니, 엘리를 바라봅니다. 그리고는 와보고 싶어서 왔다는 말에 어깨를 으쓱입니다.
"정말 아무것도 모르고 온 것치곤 운이 좋았네. 세스타우 성이 속한 왕국은 뱀파이어를 존재한다는 이유만으로 공격하진 않기로 협약을 맺었거든. 그게 뭐 100% 안전하다는 뜻은 아니고. 아, 그리고 말 편하게 해라. 내가 나이 먹었어도, 뱀파이어한테 존댓말 들을 정도로 할매는 아니라서."
나름 분위기를 풀어보려고 농담했던 에레야는, 금방 농담같지도 않은 농담을 거두고 말합니다.
"그럼, 여기 왔을 때부터 아까 그 괴물이랑 겨뤘을 때까지 진술을 들어야겠는데. 이야기해주겠나?"
어떻게 하나요? 전부 이야기한다,고 하면 엘리는 세스타우 성에 들어온 뒤부터 지금까지의 일을 모두 자신의 관점에서 어느 정도 가감하더라도 어쨌든 다 털어놨다고 전개하며, 일부 또는 전부 내용을 거짓말로 대답하거나 의도적으로 누락하려면 직접 서술하시면 됩니다.
>>166 엘리는 세스타우 성에 들어와서 있었던 일들을 모두 고합니다. 대낮에 몸을 꽁꽁 둘러싸고 성에 들어온 일, 여관에서 방을 잡은 일, 여관 주인에게 축객령을 당한 일, 식인종을 세 명 죽이고 나머지 한 명을 제압한 일, 여관을 습격한 괴물을 죽인 일... 에레야는 흥미롭게 듣습니다. 엘리의 '죄'가 얼마나 참작될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지금은 엘리의 행동이 범죄냐 아니냐는 상관 없이 이야기 자체에 집중하는 것 같습니다. 특히, 식인종이 등이 굽고 손이 벌벌 떨렸다던지나, 여관의 괴물이 엘리와 동류로 추정된다던지 싶은 정보가 이목을 끈 것 같습니다. 에레야는 말없이 엘리를 쳐다보다가, 손가락을 딱딱 쳐서 험악한 인상의 부하 중 하나를 부릅니다.
"예, 심문관님."
"다른 부검 예정된거 전부 미루고, 여관 현장에서 주운 괴물 시체 지금 당장 배 갈라서 뭐 보이는지 보고해."
"...내가 이단심문을 20년 넘게 했는데 양동이로 묻어두고 제압이라 부르는 사람은 처음 본다."
에레야는 쯧, 혀를 차더니 일어납니다. 그리고 엘리에게 이야기하는군요. 그간 들었던 말 중에 가장 반가운 말이 나옵니다. 여기서 나가자는 겁니다. 심문관이 장비를 챙기러 개인실로 들어간 동안, 험악한 인상의 거한이 인상과 덩치에 걸맞지 않게 쭈글쭈글대며 다가옵니다. 그리고 엘리를 찾는군요.
"당신... 우리 심문관님이랑 협력하는 뱀파이어죠? 안 위험한 뱀파이어죠? 혹시 좀 도와줄 수 있나요?"
거한은 고문실에서 팔다리가 쭉쭉 늘어나는 고문을 받고 있는 죄수를 가리킵니다. 음. 이런 데 있을 법한 여자는 아닌 것 같은데 말입니다. 여튼 거한은 꿋꿋이 뒤틀리는 관절을 견디고 있는 저 여자를 가리키며 말합니다.
"심문관님께서 이 성에서 조사하는 사건 관련해서 사교도 조직죄로 체포한 년인데... 뭔 수를 써도 입을 안 열더라고요. 뭘 해야 말하겠냐고 하소연하니 뱀파이어를 데려와 흡혈을 체험시켜주면 뭐든 다 말하겠다는데... 어떻게 안 될까요?"
"피를! 내 피를 딱 한번만 바치게 해줘!"
...이런 부탁이니 이단심문관 부하가 엘리 같은 뱀파이어한테 저자세로 쭈굴대며 높여 부르죠. 상대는 음... 흔하진 않아도 종종 있다는 밤피로필리아, 뱀파이어에게 피를 빨리고 예속되는 걸 좋아하는 변태로 보이는데... 원한다면 부탁을 들어줘도 되고, 아무리 그래도 변태의 피는 좀 그렇다면 당장 나가야 하는 걸 핑계 삼아도 됩니다.
경비병은 상황을 설명합니다. 횡설수설하는 언어와 밑도끝도 없는 징징거림을 제하면, 대충 이 놈이 다짜고짜 달려와서 누가 사람을 죽였다니, 도와달라니 헛소리를 하길래 걷어찼더니 계속 달라붙고, 끝내는 사방에 구토를 하며 제 몸에도 토하길래 겁이 나서 떨어질 때까지 찔러 죽였다는 겁니다...
"...엘리, 생각 좀 해봐."
에레야는 침착하게 상황을 살펴보기 시작합니다. 엘리도 자신이 방어 차원에서 그랬다는 점을 인정받으려면 뭔가 더 그럴듯한 증거나 진술이 필요하겠군요! /오늘은 여기까지
"난 트롤한테 척추 부러졌다가 잘못 붙는 바람에 굽었는데 그럼 나도 밤마다 사람 먹겠네?"
경비들이 엘리의 말을 반박하고, 특히 대머리나 등이 굽은 사람이 감정적인 반응을 보이는군요. 뭐 당연한 일입니다. 아저씨는 마음씨가 대머리예요! 해도 우는 게 대머리인데, 대머리라고 식인종 취급 받으면 서러울 법도 하죠. 그런데 그 중 엘리에게 가까이 다가온 사람이 횃불을 비춰봅니다. 샛노란 횃불이 노란 색깔을 흰 피부에, 은색 머리칼에 입히지만, 그녀의 선혈 같은 진홍색 눈동자는 그대로 드러냅니다.
"뭐야 이년... 아니, 이건?"
"두발로 걷는 모기 아냐?"
경비병들이 창칼을 들고 엘리를 에워싸기 시작합니다. 당장이라도 죽일 것처럼 구는군요. 생존 본능이 엘리의 손톱과 송곳니를 불쑥, 뽑아내지만 그때 에레야가 엘리의 손을 주름진 제 손으로 가리고 앞에 섭니다.
"불경한 존재의 조사 및 처분은 현장 상황상 불가피할 때를 제외하고 이단심문관의 소관이다. 그리고, 이 '두 발로 걷는 모기'가 틀린 말을 한 것도 아니야. 굽은 등과 벗겨진 머리는 구울병을 의심할 수 있는 1차 증거지."
에레야는 식인종의 시신을 분석하기 시작합니다. 엘리가 봤던 대로 허여멀건 피부는 백반증이었습니다. 에레야가 식인종의 입을 벌리자 기이할 정도로 발달한 송곳니와 멧돼지 엄니처럼 변한 이빨, 그리고 열악한 위생 상태를 고려해도 기이할 정도로 뒤틀린 치열. '치아 이상발달'이라 부를 수 있겠군요. 그리고...
"엘리. 너 운 좋은데?"
에레야는 식인종의 이빨 사이에 낀 긴 금빛 머리칼을 떼냅니다. 그 머리칼에는... 두피로 추정되는 살덩이가 덜렁대고 있군요.
아니 땐 굴뚝에서 연기 안 나고, 아니 아픈 몸에서 눈물 안 나는 법입니다. 수호부처럼 고통스러운 신성력이라면 아파서라도 눈물이 날 테니 그 심산으로 만진 거지만... 에레야의 흉갑을 두들겨봐도 놀랍게도 별 반응은 없습니다. 에레야는 뚱한 표정으로 엘리를 내려보다가 나직이 흉갑의 효능을 설명해줍니다.
"뭘 기대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이건 그냥 흉갑이야."
.........왠지 모르게 부끄러워서 눈물이 나지만 괜찮습니다. 눈물은 눈물이니 엘리는 혼신의 눈물연기를 합니다. 여전히 반응은 적대적이지만 말입니다.
"...재수 없어."
"이단심문관님이 이 성에 없었으면 별 잘못 없는 사람들 피도 빨았을 거 아니냐?"
에레야의 비호 아래 있으니 체포한다던지 추방한다던지 하는 위력행사는 차마 못하지만 말은 막 하는군요. 에레야도 이단심문관의 입장상 뱀파이어를 옹호할 순 없는 노릇인지 엘리의 옆구리를 툭툭 찌르며 말합니다.
"일단 다른 데 가서 이야기하지. 곧 해가 뜰 거야."
그러면서 턱짓으로 동쪽을 가리키는데, 제기랄... 검보랏빛 일색의 하늘에 파란색, 전혀 반갑지 않은 여명의 전령이 보입니다.
네. 고문도구와 해부침대가 즐비하고, 엘리에게 강제로 예의를 주입하던 신전 지하의 심문소 이야기입니다. 에레야는 엘리의 반응을 살피다 농담이라 정정하고는 근처를 바라봅니다. 에레야는 엘리와 함께 뒷골목을 걷습니다. 스스슥, 스스슥. 둘을 지켜보던 시선이 느껴지지만 가까이 가면 이내 사라지고, 에레야는 엘리를 세스타우 성내의 지하 수로로 데려갑니다.
"우우..."
어둡습니다. 에레야는 벽을 손으로 짚은 채 앞서가고, 퀴퀴하고 습한 물내를 헤치고 엘리의 밝은 밤눈에 빈민들이 보입니다. 다들 상태가 신전의 빈민들보다도 심하군요. 누군가 에레야와 엘리의 발을 붙잡지만 에레야는 확 걷어차 쳐내고, 창살 걸친 나무문으로 보호되는 안전가옥에 다다릅니다. 문을 닫고 문에 난 쪽창도 닫은 에레야는, 방 안에 낀 발광버섯에 물을 뿌려 푸르고 차가운 불빛을 밝힌 후 한숨을 쉽니다.
>>189 "지금까지 내 모가지에 이빨을 안 꽂고, 듣자하니 피 빨리고 싶다는 미친년도 마다했다는 걸 보니... 꽤나 우릴 신용하고 있군. 그럼 나도 그 신용에 나름대로 보답해야지."
에레야는 먼저, 비록 함께한 시간이 매우 짧지만(체감상 길어보이는 거지 지금 만난지 12시간 겨우 다 되어갑니다.), 엘리를 신용하기로 했음을 먼저 밝히고 '사건'에 대한 이야기를 꺼냅니다. 엘리가 방금 추측한 바대로 에레야도 추측하고 있었군요.
"그래. 지금 당장은 다 별개로 보이지만 이상했어. 다수의 괴물 습격사건의 목격담을 종합해보면 그리펜이나 코카트리스 같은 자연의 맹수들이 아니라 네가 싸웠던 것들처럼 역겹게 엮인 것들이었어. 그리고 구울병에 걸릴 정도로 대량의 인육을 섭취한 식인종들이 발견됐다면 당연히 사람들이 끌려갔을테니 실종자 신고가 늘어야 하는데 전혀 그렇지 않았지... 그래서 뭔가, 더 큰 건 아래에서 이 일들이 일어나는 것 같은데..."
에레야는 수통을 꺼내 물을 마시더니 엘리에게 대뜸 묻습니다.
"그래서, 엘리자베스 바토리 블라드 체페슈. 고귀한 뱀파이어. 왜 여기에 왔지? 그냥 도망가는 게 합리적일 텐데 왜 여관에서 괴물놈과 죽어라 싸우고, 높으신 흡혈귀족님 입장에선 빨아도 닭만큼의 피도 안 나오는 하플링 여급을 구한 거지? 솔직히 대답해."
에레야는 복잡한 표정으로 엘리를 바라보더니 간신히 고개를 끄덕입니다. 엘리 같은 불경한 존재를 사냥하는 것을 업 삼은 사람에게 엘리의 존재는 너무 이해하기 어려운 것일까요? 아니면 개인적인 혐오가 너무 큰 걸까요? 누군가를 엘리에게 겹쳐보는 걸까요? 에레야는 작은 열쇠를 꺼내더니 엘리와 그녀 사이의 책상에 올려두고 말을 계속합니다.
"네 말을 얼마나 믿어야 할지는 모르겠지만, 행동으로 보여준게 많으니 더 많은 말은 않겠어. 그러니까, 엘리. 내가 선택지를 둘 주지."
에레야는 두 손가락을 펼치고 하나씩 접으며 선택지를 제시합니다.
"하나, 사냥당할 걱정 없이 세스타우 성과 인근 지방에서 멀리멀리 떨어진 곳으로 도망칠 권리. 왜냐면 지금 우리는 여기서 벌어지는 일만으로도 짜증나서 어디로 튈지 모르는 너 같은 변수를 일일이 챙길 힘이 없어서 그래."
그리고 나머지 하나를 접습니다.
"둘, 우리와 협력하기. 이단심문소와 협력하는 건 너희에게는 미친 짓으로 들릴 수도 있겠지만 그리 나쁘지 않을 거야. 여기 이 지하수로 안전가옥 열쇠도 빌려줄 거고. 참고로 여기는 세스타우 성 근처 강에서 흘러오는 강물을 받아와서 하수 구역으로 보내는 통로라서 똥냄새도 안 나. 네가 살던 귀족 저택에 대면 부족한 건 많지만... 여기서 이 정도면 난 뱀파이어 기준 중산층 집 정도는 된다 생각하는데. 어떻게 하겠나?"
에레야는 엘리의 손을 잡습니다. 이단심문관의 손, 이라는 생각에 근육이 잠시 꿈틀,하고 굳었다 풀어집니다. 엘리가 태어났을 적에는 빨리 안 자고 돌아다니는 아이는 이단심문관이 잡아가 해가 뜰 때까지 말뚝에 꽂아둔다는 무시무시한 자장가를 들으며 잠에 들었고, 조금 더 자라 아이가 되었을 적에는 이단심문관이 저지를 수 있는 끔찍한 일들을 들었고, 80의 젊은 나이에 이른 지금도 에레야의 직위는 반갑지 않습니다.
하지만... 에레야의 주름진 손은 따뜻합니다. 다른 모든 인간들이 그렇듯, 그녀의 손에서도 고동치는 맥박이 존재를 과시합니다. 무고한 이의 목을 째고 주머니를 채가는 도적, 그럭저럭 농사 짓고 사는 평범한 부부, 교회에서 예배를 보는 신부, 타의건 자의건 그녀가 속한 일족을 따르던 영지민들. 그들 모두처럼, 에레야는 인간입니다. 인간이라는 건 참 단순하면서도 많은 의미를 지니고 있죠. 다른 모든 인간들이 그렇듯 에레야는 당신과 좋은 친구가 될 수도 있고, 그저 이름과 얼굴만 알 뿐인 남남이 될 수도 있고, 최악의 경우는 목숨 걸고 싸울지도 모릅니다. 뭐, 그래도 시작은 좋군요?
"이제부터 넌 이단심문관의 임시 협조자고, 협조를 위해 이 안전가옥을 제공받은 거다. 여긴 안전가옥이니까, 수로에 깔린 거지들 불쌍하다고 여기에 들여서 동네방네 여기에 비밀기지 있다고 나발 불지 말고. 알았어?"
...쯥. 위에 구구절절 써둔거 감동 다 깨지게, 에레야는 참 팍팍하고 현실적인 이야기만 하는군요.
>>197 "대낮에 돌아다니고 싶어하는 뱀파이어라, 그것 역시 특이하군. 뭐... 자주 부를 거다. 하지만 지금 너한테 요청할 일은 바깥에 나가서 하는게 아니야."
에레야는 엘리에게 당장 해야 할 일을 설명해줍니다. 안전가옥을 지하수로에 하나 내주더니, '협조자'로서 맡기는 첫 임무도 지하 수로와 엮였군요.
"지하수로에서 자꾸 사람들이 실종되고 있다, 이상한 것들이 나오고 있다는 소문이 들리고 있어. 원래는 그냥 지하수로가 그런 소문이 붙는 곳이라 넘기겠지만, 아까 상황 설명 들었지? 그래서 여길 조사하긴 해야 하는데... 우리가 사람이 좀 없기도 하고, 밤눈 밝은 사람은 특히 더 없단 말이야. 하지만 넌 뱀파이어잖아? 지하수로로 들어가서 식인종, 괴물, 그 외 기타등등 이상한 게 있는지 살펴보고, 좀 중요하다 싶은 게 있으면 전부 기록해 둬. 괜히 싸웠다가 피 보면 다 피곤해지니까 피하되... 만약 싸우게 된다면..."
에레야는 제 입술에 검지손가락을 가져다대더니 쉿, 하는 제스처를 취합니다.
"기절할 정도로만 빨던지, 그것보다 더 빨았으면 시체를 조각내서 수로에 던져버려. 뱀파이어한테 당한 시체가 부검실에 올라가면 사건 보고서 쓰기가 진짜 머리 아파지니까."
...세상에, 엘리는 조건이 달려있긴 해도 "피 빨아도 된다"고 말하는 이단심문관을 만난 것 같습니다!
>>202 "그럼 지하수로 부분은 맡기지. 그리고 양동이에 묻어놨다고 체포했다고 얘기하지 마라."
그 부분이 워낙에 인상적이었던지 또 강조하고, 에레야는 안전가옥에서 먼저 나갑니다. 또각... 또각... 에레야의 발소리가 사라지면, 안전가옥은 유령의 울음소리처럼 스산한 바람소리와 간헐적으로 무언가 까각, 까가각 하고 벽을 긁는 소리, 어디선가 물이 솨아아 쏟아지는 소리만 들립니다... 낮을 좋아하는 인간들에게는 무시무시하고 불안한 소리지만... 피에 흐르는 저주를 극복하겠다는 일념을 품고 '엘리'라 불리기 전, 뱀파이어 귀족 엘리자베스로서 80년을 넘게 산 그녀에게는 왠지 모르게 그립고 평온한 소리입니다. (조건이 있지만) 흡혈 허가도 받았겠다, 엘리는 문을 닫고 바깥으로 나옵니다.
지하수로를 걸어가던 엘리는, 바람소리와 물소리 이외의 소리가 점점 섞이는 것을 발견합니다. 찌찍, 찌찌직... 쥐가 우는 소리와 함께 두두두두 하는 발소리가 들리는군요. 엘리는 어둠 속에 몸을 숨기고, 한 손을 벽에 댄 채 천천히 걷기 시작합니다. 엘리가 밤눈이 밝긴 하지만 이곳에서 살 생각을 하는 괴물들은 최소한 엘리만큼 밤눈이 밝거나, 눈이 안 좋은 걸 만회할 수 있는 무언가를 가지고 있을 겁니다. 찢어지게 가난한데다 신전에도 못 가는 진짜 빈민들을 제외하면 말입니다. 그리고 엘리가 발견한 것은...
"그르르르륵, 그릉..."
....초록색의 척 봐도 질겨보이는 가죽, 물 위에 둥둥 뜬 눈과 길쭉하고 거대한 아가리, 가끔씩 물살이 칠 때마다 드러나는 거대한 몸뚱아리... 엘리는 박물학 서적에서만 보았던 '악어'입니다. 사시사철이 한여름인 남부 지방에서는 전쟁보다도 사람을 더 많이 죽이는 원인이라고 하는 맹수들 중 하나인데... 이게 왜 여기 있는 걸까요? 아무튼, 악어가 수로를 막고 둥둥 떠 있습니다.
엘리는 기척을 죽인 채 천천히 다가갑니다. 엘리가 워낙에 동작이 빠른데다가, 오밤중이라 악어가 앞이 잘 보이지 않다보니 거의 뒤통수까지 왔는데도 악어는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습니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보면, 어지간한 동물들은 배가 약점이니 악어도 배가 약할 것 같지만... 엘리는 악어의 배를 물자고 잠수하는 자살 행위를 할 수도 없고, 설령 그런다 해도 악어가 순순히 배를 물리진 않을 것 같으니 등 쪽으로 접근합니다. 하지만 악어의 등판은 인간의 팔뚝이나 목과는 달리 워낙에 넓어서, 이빨을 댈 부위도 마땅치 않습니다. 엘리는 목만 빼고 악어의 등판을 물어보려 하지만, 턱이 빠질 것처럼 아픈 느낌이 듭니다.
"그르르르르..."
악어의 등가죽을 물어뜯으려고 했지만, 쩍 벌린 입에 느껴지는 건 피맛이 아닌 물비린내와 이끼의 쓴맛입니다. 그나마 다행인 건... 역설적으로 엘리가 이 공격으로 악어한테 전혀 피해를 주지 못했기에 악어는 등에 이상한 간지러움만 느끼고 몸을 잠깐 비틀기만 했고, 엘리가 입으로 냠냠할 수 있는 거리까지 접근했는데도 악어는 엘리를 전혀 인식하지 못한다, 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즉, 엘리가 일부러 악어한테 잡아먹히려고 몸을 던지지 않는 한, 이 악어는 (엘리에 한해) 없는 셈 쳐도 된다는 뜻이죠.
엘리는 다시금 나아갑니다. 악어를 지나치고 나가니, 이번에는 말소리가 들리는군요... 하지만 거리가 워낙에 멀고, 말소리가 지하수로의 벽에 이리저리 울려퍼지는 바람에 잘 들리지 않습니다. 그나마 일부라도 들을 수 있어서 다행입니다. 엘리는 귀를 바짝 댄 채, 어떻게든 조금이라도 들으려 노력합니다.
"....내려올 거야......때는...온갖...들겠지."
"우리가...있을까?"
"항상...우리가...정 안 되면...알지?"
뭔 말을 하는지 전혀 모르겠군요. 일단 지금 들을 수 있는 건 이 정도가 한계입니다. 그리고... 다시 침묵이 찾아오고 우우우 스산한 바람 소리만 들립니다. 아무래도 더 가봐야 할 것 같다고 생각하는데...
"도, 도망쳐...!!"
어둠 속에서 누군가 양 팔을 허우적거리며 달려오더니, 엘리와 부딪쳐 넘어집니다. 나동그라진 이를 바라보니, 한 사내인데 한쪽 팔이 잘려 있습니다. 그는 고통스럽게 구르다가, 엘리를 보더니 히익...! 하면서 어떻게든 뒤로 물러나려고 합니다.
남자는 엘리가 박수를 치자 정신을 차리고 엘리를 올려다봅니다. 어두워서 다른 건 보이지 않지만 백은색 머리칼은 이 어둠 속에서도 저 멀리서 반사된 침침한 빛을 받아 약하게나마 제 존재를 드러내며 인사하고... 뱀파이어임을 나타내는 핏빛 눈동자는, 분명 광원이 별로 없는 환경인데도 기이하게도 잘 보입니다. 남자는 벌벌 떨다가, 숨을 몇 번이나 몰아쉬고는 상황을 설명합니다.
"여, 여여여... 여기에 내 짐들을 숨겨놓은 걸 찾으려고 내려왔는데... 제, 제길... 고, 고고고블린이랑... 쥐새끼들이... 평소보다도 더 빨리 활개를 쳐서... 내 물품 창고를 덮쳤어요."
상황을 설명하자 제정신이 돌아왔는지, 사내는 주머니에서 붕대를 꺼내서 한쪽 끝을 입으로 물고, 성한 나머지 한쪽 손으로 더러운 절단면을 칭칭 감아서 지혈하는군요. 대충대충 응급처치를 마친 남자는 그제야 팔이 잘렸다는게 실감되는지 깊은 한숨을 내쉬고, 엘리에게 부탁합니다.
"이, 이봐요... 꽤 강해보이는데... 수로 따라서 쭉 가다보면 이끼가 전혀 끼지 않은 벽이 나올텐데, 거기에 달려있는 문고리를 밀고 오른쪽으로 돌려서 당기면 내 창고가 나와요. 거기에 노란색 액체가 담긴 유리병 하나가 있을건데 그걸 가져와주면 안될까요?"
물론, 온갖 괴물이 설치는 이곳에서 맨입으로 그런 일을 시키면 안된다는 건 잘 아는지, 보통의 용병이라면 꽤나 솔깃할만한 제안을 하는군요.
"그 창고 안에 든 게 많아요. 엄청 귀한 약도 있고, 동방에서 온 코끼리 가죽도 있고... 아무튼! 그 유리병 말고는 창고까지 포함해서 아가씨가 다 가져도 되니까, 어떻게 안 될까요?"
남자는 주저앉아서 수로의 벽에 기댄채 눈을 질끈 감습니다. 워낙 상황이 급해 잊고 있었던 절단통이 뒤늦게 찾아온 모양입니다. 하지만 엘리는 잘 싸우는 뱀파이어지 소문난 명의는 아닌고로 그의 고통에 특별히 해줄 수 있는 뭔가는 없습니다. 엘리는 남자를 내버려둔채 수로로 더 깊이 들어갑니다. 워낙에 어둡다보니, 엘리마저도 손으로 한쪽 벽을 짚은 채 점점 구려지는 냄새로 자기가 점점 하수로로 가고 있다는 것만 알고 가는데...
키야아아악!!
갑자기 괴성을 시작으로 깡! 쾅! 쿵! 무기가 부딪치는 소리, 벽을 긁는 소리, 고통에 찬 비명이 울려퍼집니다. 하지만 가까이 갈수록 소리가 커지는 일 없이 점점 작아지더니, 엘리가 무슨 상황인지 알 때쯤이 되면 소리가 잦아들어 간신히 살아남은 승자들의 가쁜 숨소리와 상처를 할짝이는 소리만 들립니다.
"찌찍... 끼이익..."
"데호를 카매나리비둠. 츠크빅 아눅..."
"킷스타바리메님 야불..."
뭐라 하는지 전혀 모르겠지만, 이 목을 쥐어짠듯한 쇳소리와 안절부절 못하고 킁킁대며 훌쩍이는 소리... 엘리의 신경이 곤두서고, 어둠 속에서 보이는 움직임만으로 상대의 정체를 눈치챕니다.
랫킨, 다른 말로 "사람만한 쥐새끼"들이, 고블린 무리와 싸워 이기고 격렬한 싸움 이후를 수습하고 있습니다...
엘리는 자신의 몸을 수많은 박쥐로 나눠서 그들 사이를 지나칩니다. 고블린들이 널부러져 있는데 대형견만한 거미도 딸려있는 것으로 보아 고블린 쪽도 꽤나 준비를 한 것 같습니다. 박쥐도 쥐라고 뭔가 찍찍대는 소리가 울려퍼지고, 그 소리에 화들짝 놀란 랫킨들이 무기를 치켜들지만 뭐가 지나간건지 겨우 감을 잡을때쯤, 엘리는 이미 그들을 넘어 백걸음이나 넘게 멀어진 뒤입니다. 그런데 잠깐... 그 자리에 선 엘리는 갑작스레 변한 냄새에 머리가 아파옵니다! 냄새가 역겨워서? 아닙니다. 뭔가 무서운 존재가 있어서? 아닙니다!
...이 하수구랑은 연이 없을 것 같은, 정말로 달콤한 냄새입니다. 엘리는 정신을 집중하고, 눈을 감아 이 냄새에서 정보를 추출하려 합니다.
생명, 달콤한 생명입니다. 다른 동물의 생명을 훔쳐야 살 수 있는 그녀 같은 뱀파이어가 갈구하는... 피와 살의 냄새. 그것도 아주 제대로 숙성된 냄새입니다... 이게, 지하수로의 더러운 공기를 덮어버릴 정도로 잔뜩 퍼집니다.
...지하수로가 에레야 말마따나 진짜 하수만 씻어 흘려보내는 거라면 피냄새가 이리 날 일이 있나요? 어디서 고기파티라도 하나?
피냄새는 피냄새고, 엘리는 엘리입니다. 저 피냄새의 근원은 찾을수도 안 찾을수도 있는거고, 지금 당장은 창고문을 여는 것에 집중해야지요. 그렇게 걸어가던 엘리는 창고를 금방 찾아냅니다. 이끼가 전혀 없고, 문고리도 있군요. 남자가 알려준대로 문고리를 조작한 엘리는 절꺽, 하고 걸쇠 같은 게 떨어지는 소리를 듣습니다. 시범삼아 조금 당기자...
구궁... 끼이이이이이...
당겨지긴 하는데, 뭔 문을 통짜 바윗덩이 그대로 만들었는지 무겁군요. 계속 당기려 들자, 바닥이 긁히며 기분나쁜 쇳소리를 만듭니다.
이 창고에 숨기던 남자놈은 제 명을 재촉한 셈 같습니다. 이렇게 시끄러운 창고에 뭘 숨겨두다뇨! 그나마 다행인건, 엘리도 아예 못 당길 건 없어보입니다.
귓전을 울리는 소리와 함께 문을 당깁니다. 쾅! 쾅! 쾅! 석문의 밑바닥이 어딘가에 닿을 때마다 채석장에서 기중기에 메단 추로 돌을 깨는 소리가 들립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습니다. 시작한 김에 끝내야겠다고 생각하면 엘리는 문을 잡아당기고...
콰콰콰캉!!!!!
...이거 창고 맞...겠지? 엘리는 저도 모르게 그런 생각을 합니다. 이쯤 되면 이 남정네가 어떤 괴물놈들이랑 한패라서 함정을 팠나 싶지만, 그런 생각들은 안에 들어가서 램프에 불을 당기자마자 보이는 온갖 금은보화 앞에서 사라집니다.
남자가 말했던 예의 그 노란 액체가 든 유리병, 속을 꽉 채운 은화 사이에 드문드문 보이는 금화가 매혹적인 돈자루, 마법 스크롤 더미, 황금으로 자아낸 것 같은 비단 원단 뭉치, 유니콘 뿔을 비롯한 고급 연금술 재료, 그리고... 탁자 위에 놓인 갈기갈기 찢긴 책? 아무튼 엘리는 이곳을 둘러보다가, 사방에서 들려오는 저벅저벅 발소리와 쇳덩이가 벽을 긁는 소리에, 자기가 지금 쇼핑할 때가 아님을 깨닫습니다.
지금 당장 챙길 것만 챙긴다 치면, 엘리는 위에 언급된 것들 중 유리병을 포함해 최대 4개를 들고 갈 수 있으며, 민첩 스테이터스 저하 없이 가져갈 수 있는 건 총 2개입니다.
아니면, 도망치는 대신 엘리의 싸움 실력을 시험해보거나, 목숨 걸고 문을 안에서 닫으려 시도하거나, 아예 존엄성을 좀 희생하고 하수가 되어버린 지하수로의 유류에 몸을 맡기거나, 다른 방법도 있겠죠?
치이이이익... 엘리의 손이 약간 뜨겁지만, 수호부와는 다르게 그냥 손난로처럼 따뜻하군요. 유니콘의 뿔이 엘리의 '불경한' 종족을 거부하는 것 같지만, 엘리가 나름 '깨끗한' 아가씨였던 덕분인지 유니콘의 뿔이 거부하려다가 만 것 같습니다. 엘리는 뿔을 살인 무기 삼아 들고 양쪽을 바라봅니다
"키키키키킷!"
...무언가 지나갈거라 생각도 못한 틈새에서 덩치가 작은 고블린들이 우르르 몰려나옵니다. 짱돌, 몽둥이, 쇳조각 등 변변찮은 무기에 영양 상태도 안 좋은지 수척하지만, 눈빛에는 신선한 고기를 향한 열망이 가득합니다. 그리고 제기랄, 바로 위와 연결된 수직 우수관을 통해 대형견만한 거미들이 고블린을 등에 짊어진 채 내려옵니다! 이놈들은 준비가 나름 철저한지, 불길한 문양이 새겨진 두개골을 뒤집어쓰고 조잡하게나마 의식용 지팡이를 든 샤먼도 있군요.
반대편을 봐도 상황이 영 좋지 않습니다.
"연장 챙겨라!"
"오늘 고기파티다!"
엘리가 지난 밤에 사냥했던 식인종들입니다. 하지만 이번에는 고블린만큼은 아니어도 수가 꽤 되고, '출처를 알기 힘든' 가죽으로 만든 방어구를 걸쳤고, 이런... 구울병 말기에 이르러 진짜 구울이 된 놈들, 식인의 부작용인지 뭔지 풍선마냥 부푼 돼지들도 있습니다. 그리고...
"키킥?"
"저년 뭐냐?"
식인종들이 밤눈을 밝히려 불을 켜자, 엘리는 뻘쭘하게 유니콘 뿔을 든 채 양쪽 사이에 끼인 형국이 됩니다.
엘리가 처음으로 노린 건 고블린 떼입니다. 마치 식인종 그룹의 선두라도 된 것마냥, 고블린들 사이로 파고들어갑니다. 처음으로 달려든 고블린은 옆으로 슬쩍 피하자 제 속도를 못 이기고 물 속에 풍덩하고, 두번째는 그냥 수로 쪽으로 밀어버립니다. 그렇게 고블린을 무기 하나 없이 두놈이나 제낀 그녀는 바로 뿔을 치켜들어, 시범 삼아 한놈을 찌릅니다.
"키야아아아악!!!!!"
고블린이 찔린 부위가 타오르는 끔찍한 고통을 느끼면서 드러눕고, 연이어 엘리는 뒤따르는 고블린들을 무릎, 쇄골, 팔뚝, 허벅지, 옆구리 등등 다양한 부위에 뿔침을 놓고, 상당수가 살점 타는 소리와 함께 주저앉지만...
"으아악! 죽어! 죽으라고!!!"
그새 끼어든 식인종과 고블린들이 공격을 주고받는 모습을 보면서 엘리는 새삼스레 깨닫습니다. 그냥, 칼은 맞으면 죽도록 아픈 겁니다. 엘리는 고블린들에게 칼침 한방씩만 놓으면서 밀어버리고, 고블린들이 아파서 발광하자 자연히 엘리 주변에 공간이 생깁니다. 하지만, 그 순간, 엘리는 끔찍한 구토감을 느낍니다! 뭔 일인가 보니, 손가락 말단부터 혈관이 점점 검어지면서 점점 근육이 굳고 있습니다. 제기랄, 샤먼이 저주를 걸었습니다!
엘리는 근육이 마저 굳기 전에 유니콘의 뿔을 던집니다. 빙빙 돌아가있긴 하지만, 유니콘의 뿔도 끝의 날카로움을 생각해보면 엘리는 고블린 샤먼에게 송곳을 던진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하지만 엘리가 던지기 직전 고블린 무리에게 밀린 식인종이 엘리의 뒤를 덮치고, 앞에서는 고블린이 용기를 내 엘리의 배에 뼈칼을 찌르며 파고들면서 자세가 흐트러졌습니다. 게다가 근육이 굳어가니, 유니콘의 뿔은 그 이름이 무색하게 참 힘없이 샤먼에게 날아갑니다. 샤먼은 그걸 보고 지팡이를 들어 괴상한 주술을 외웁니다. 그리고 엘리를 비롯한 그 자리에 있던 모두가, 잠시 실명할 것 같은 섬광에 시력을 잃습니다.
콰콰쾅!!!!!!
그리고, 이 자리에 있는 이들 중, 오직 엘리만이 인지할 수 있는 찰나가 지나고 폭발이 일어납니다. 폭음 뒤에는 삐이이ㅡ 하는 소리가 귀청이 찢어졌음을 알려주고, 축축해진 귀에서 흘러내리는 액체에서 쇠비린내가 납니다. 제아무리 엘리가 빨라도, 눈이 먼 상태에서 폭압에 휩쓸린 수십명의 식인종과 수백 고블린의 무게를 이길 수 없어 그대로 나동그라지고, 엘리는 축축하지만 딱딱한 바닥을 짚고 숨을 쉬면서 그나마 자기는 물에 빠지지는 않은 운 좋은 누군가임을 상기합니다. 엘리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눈으로 아무 팔다리나 잡아 끌어서 꽉 깨뭅니다. 그리고 부들대는 걸 무시하고 이빨을 더 깊게 박고 한참을 빨고 나서야, 시야와 청각이 돌아오고 상황 파악이 시작됩니다.
"으아아윽... 뭐야 이거..."
"야! 일어나 씨발!"
비명을 지르거나 비명 지를 힘도 없어 끙끙대는 이들 사이에서 홀로 일어난 엘리는 뭔 일이 일어난건지 생각해봅니다. 유니콘의 뿔은 부정한 것을 배제하는 성질이 있고, 고블린들은 야금술부터 주술까지 뭐든 할 수는 있지만 참 개판으로 하는 것으로 유명합니다. 뭔가 얼개가 맞는 것 같습니다. 샤먼이 유니콘의 뿔을 막으려고 주술을 썼다가, 위력은 형편없는 주제에 엄청 '부정한' 것들을 많이 끌어다쓴 덕분에... 안 그래도 고블린의 피를 머금은 유니콘 뿔이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폭발한 것 아닐까요? 아무튼 고블린 떼거리 한가운데에서 폭발한 유니콘 뿔은 전세를 단숨에 식인종 쪽으로 몰아세웠고, 그나마 피해를 덜 본 식인종들은 비명을 지릅니다.
"야, 밀어! 밀라고!"
식인종들은 꼬챙이로 널부러진 고블린들을 하나 둘 찍고, 아직 도망칠 여력이 남아있던 고블린들은 황급히 도망칩니다. 하지만 시력과 청력이 상한 나머지, 아무 곳으로나 막 뛰어가다가 식인종에게 제발로 뛰어들거나, 물 속에 쳐박히기를 반복합니다. 대부분의 식인종들은 고블린에 꽂힌 나머지 엘리의 어깨를 툭! 툭! 밀치면서 지나갔지만, 개중 누군가가 엘리에게 칼을 들이밀었습니다.
식인종 몇 명을 떨어뜨리자, 누군가 엘리의 머리채를 잡습니다. 하지만 엘리는 저항하는 대신, 그대로 양 손으로 그 손을 붙잡고 몸을 돌려 그 놈을 물 속으로 빠트리고, 자기도 휘말리기 전에 박쥐의 형태로 바꿉니다. 하지만 너무 많이 바뀐 나머지 벌써 피로 부른 배가 꺼졌다 싶을 때쯤, 누가 엘리의 얼굴을 손바닥으로 콱 붙잡자, 엘리는 오히려 잘 됐다며 그 손을 붙잡고 손가락이 절단되기 직전까지 갈 정도로 꽉 깨물어서 피를 빱니다. 비명이 들리지만 이 식인종도 사람 잡아먹을 때 그 사람 사정 신경 썼을까요? 엘리는 콱, 콱, 콱, 한번 열었다 다물면서 손목의 동맥에 송곳니를 박고 분수처럼 쏟아나오는 피를 마십니다.
"야 이 답답한 새끼들아! 고작 한 명을 못 죽여?!"
"다 붙어!!!!"
지난 밤보다 훨씬 많은 식인종들이 칼을 들고 엘리에게 달라붙습니다. 세 명이 아니라 여덟명이 넘는 놈들이 한번에 엘리를 포위하니 찔리는 부위도 다양하고, 피도 위험할 정도로 빠져나갑니다. 하지만 엘리는 문 사냥감을 놓치지 않고, 피를 너무 빨았는지 동맥에 이빨을 꽂았는데도 더 이상 나오지 않자 엘리의 목을 노린 칼을 턱을 빼서 피하고 손목을 또 깨뭅니다. 박쥐로 변할 수도 없을 정도로 너무 좁게 포위당했지만, 그렇게 한참을 빨고 찔린 결과...
"헉... 헉..."
"뭐야 이년...!"
그녀를 찔렀던 식인종들이 힘이 빠져 먼저 나동그라지고, 그를 보자 안 되겠다고 판단한 거구의 덩치들이 달려들고, 식인종들이 묶어놨던 구울들을 엘리를 보게 한 뒤 풀어버립니다.
달려드는 구울을 날렵한 몸짓으로 피하지만, 그 중 한 놈이 우연히 엘리의 갈비뼈에 손톱을 박아넣었다가 이내 빼버립니다. 그 사이로 피가 흐르는 것 같지만, 엘리는 그동안 빨아먹은 피로 빠르게 재생합니다. 엘리를 놓친 구울들이 손을 휘저으며 넘어진 동료 식인종들을 박살내다가, 뒤돌더니 다시 엘리에게 달려듭니다. 이번에도 요행으로 피했지만, 워낙에 공간이 좁은 나머지 피할 공간이 마땅치 않습니다! 그래서 박쥐로 다시 변하려는 순간에...
"아오, 이 모기 같은 년!"
수로에는 어떻게 들어왔는지 참 궁금한 식인종 덩치가 엘리의 종아리를 붙잡더니, 그녀를 거꾸로 듭니다. 고블린, 식인종, 구울, 지하수로. 이 모든 것이 순간 거꾸로 뒤집혔다가, 세상이 아주 빠르게 움직이며 머리가 멍멍해집니다! 쾅! 쾅! 쾅! 엘리를 좌우로 마구 패대기치더니 벽에 던져버리고, 고블린보다는 훨씬 나은 조직력을 가진 식인종들은 길쭉한 쇠막대기를 들고 오더니 엘리의 몸에 쇠막대기 여러개를 꽂아 밀어버립니다.
"야, 이 년 못 움직이게 막아! 한방울이라도 피 빨면 우리 다 좆되는거야!"
정확한 분석이고, 식인종들은 그 분석에 따른 당연한 대책을 실행하고 있습니다. 엘리가 얼마 남지 않은 피로 박쥐로 변해야 하나 고민할 때, 식인종들은 아마 희생자를 포획하는 데 썼을 그물도 가지고 오는군요. 이거 잘못하면 진짜 망하겠다 싶을 때쯤... 어디선가 목소리가 들려옵니다.
"거기까지! 내 직접 봐야겠다!"
그 목소리에 식인종들이 화들짝 놀라더니, 엘리를 감시하는 이들을 제외하고 나머지는 벌떡 일어섭니다. 그리고 그 목소리가 이어지는군요...
식인종들 사이에서 정말로 높아보이는 누군가가 나옵니다. 후드가 달린 붉은 사제복을 입고 있고, 그 후드 때문에 얼굴이 가려져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빙빙 도는 시야로 그 사내를 바라보는데, 그 사내는 엘리 쪽을 보는 듯하더니 한쪽 무릎을 꿇고 정중히 사과합니다. 아까 전에 식인종들이 엘리를 당장이라도 찢어죽이려 들던 것과는 완전히 정반대입니다.
"무례를 용서해주십시오. 밤의 귀족이시여. 이곳의 상황이 좋지 않아, 부득이하게 아가씨를 제압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아니, 정반대 정도가 아니라 아주 빙글넹글 돌아버렸는뎁쇼? 어안이 벙벙해진 엘리에게 그 사내가 말합니다.
"이 결박은 금방 풀어드리겠나이다. 저희 쪽으로 오셔서, 저희가 무엇을 하는지 보시면 바로 이해하실 수 있을 겁니다."
사제가 손가락을 튕기자 죽기 싫어서 엘리의 몸에 쇠꼬챙이를 박아넣었던 식인종들이 벌벌 떨다가, 사제가 신경질적으로 손가락을 두번 튕기자 마지못해 눈을 질끈 감고 엘리의 몸에 박힌 꼬챙이를 뺍니다. 엘리가 움직일 수 있을 때까지 기다려준 사제는 가까이 가서, 이리저리 멍들고 다친 식인종들은 신경도 쓰지 않은채 엘리의 상처만 살핍니다.
"야만적인 족속들 같으니. 윗물이 높은지 아랫물이 높은지도 모르고..."
뒤에 서 있는 식인종들을 경멸한 사제는 붉은 액체가 담긴 병을 꺼내, 케밥마냥 이리저리 쑤셔져서는 뻥 뚫린 상처에 붓습니다. 엘리는 상처를 감싸안는 따뜻한 감촉을 느끼며 이게 인간의 피임을 깨닫습니다. 그리고 피를 머금은 상처가 새살이 돋아나며 닫히는 것을 보고 사제는 아이처럼 기뻐합니다.
"오오, 확실하군요. 그대는 분명 고귀한 혈통을 가진 터!"
사제는 엘리가 뱀파이어임을 확인하고, 그녀를 이끌고 지하수로 깊은 곳으로 들어갑니다. 가끔씩 고깃덩이를 짊어진 식인종들을 마주치지만 다들 엘리를 위해 길을 비켜주고, 엘리는 지나가던 도중 어딘가의 하수구와 연결되었을 배출구에서 대량의 피와 살덩이가 떨어지고, 식인종들이 달려들어 피를 받고 살덩이를 줍는 것을 봅니다. 사제는 익숙하다는 듯 지나치는군요.
사제는 엘리를 지하수로 깊숙이 데려갑니다. 어디서 산소를 가져오는지 의문이지만 푸른 횃불이 지하수로 벽을 밝히고, 엘리는 어릴적 개인적으로 교류했던 묘지기 덕분에 '초고온' 이외에 저런 색깔의 불꽃을 만드는 방법을 잘 알고 있습니다. 뼈를 곱게 빻아 불꽃에 섞던지 뼈를 장작 삼아 불을 때면 저런 색이 나오죠. 그리고 그 불꽃은 벽을 칠한 검붉은색의 물감을 비추고 있는데, 이 물감... 엘리는 알 수 있습니다. 공기에 노출된 지 오래되어 변색된 얇게 펴바른 선지, 즉 피입니다. 엘리 같은 뱀파이어들도, 심지어는 야생에 사는 일족도 이딴 짓은 안 하는데, 올려다보면 뱀파이어의 날카로운 치열과 그들에게 잡아먹히는 인간들이 어우러진 기이한 그림입니다. 그 와중, 사제는 엘리에게 말을 겁니다.
"아가씨는 축복받았다는 생각을 해보셨습니까? 바로 그 혈통, 뱀파이어 말입니다."
해 뜨면 다 죽는 혈통이 축복은 뭔 미친놈의 축복... 이라고 말할 틈도 없이, 사제는 계속해서 주절주절 늘어놓습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우리 모두는 지배하고 지배당합니다. 우린 가축을 지배하고 그들을 먹고, 뱀파이어도 인간을 지배하고 먹지 않습니까?"
역시 이번에도, 사제는 엘리의 긍정 따위 기다리지 않고 계속 이어갑니다.
"그리고, 뱀파이어는 지배하기 위해, 아니, 지배해야 하는 운명 아닙니까? 지배해서 피를 빨 권리가 있고 살기 위해 마땅히 그래야 하는 이들이죠. 그래서 우린 당신 같은 이들이 너무 부러웠습니다. 그래서..."
이야기하다보니, 지하수로의 광장? 같은 곳에 조성한 제단에 다다릅니다. 사제는 자랑스럽게 말합니다.
"그러니 우리의 산제물을 흠향하고, 우리들 중 선택받은 자가 당신과 동등해질 수 있도록 도와주겠습니까?" // 내 세계관에서 뱀파이어는 전염, 후천적으로 되기 어려운 설정!
사제는 엘리 쪽을 보더니, 의심스럽다는 듯 되묻습니다. 뱀파이어가 인간으로 돌아간 사례를 신화나 전설이 아닌 제대로 된 역사서에서 찾아보기 힘들듯, 인간이 상세불명의 초자연적 저주나 혼혈 등이 없이 인위적으로 뱀파이어화한 사례도 찾아보기 힘듭니다. 대부분의 경우는 구울, 인육에 대한 갈망에 사로잡힌 식욕의 노예로 전락하니까요. 하지만...
"그렇다면 알겠습니다! 하지만 지금 오신 곳으로 다시 가는 건 위험합니다. 거기는 이단심문소랑 마녀 사냥꾼부터, 하수구 경비들이 가끔씩 순찰을 오거든요. 지금 위에서 난리가 났으니, 눈에 불을 켜고 있겠죠. 따라오시길. 안전한 통로가 있습니다."
높은 계급이 좋습니다! 이렇게 조금 미심쩍어도 그런갑다 하고 넘어가니까요. 이 미친놈들 기준으로 안전한 게 과연 뭘지 의심스럽지만 말입니다.
사제는 잠깐 고민하더니 고개를 끄덕입니다. 사제가 손가락을 딱, 튕기자 식인종들이 제단에 누워있던 비냐를 들고 옵니다. 앞으로 끌려온 비냐는 엘리와 눈이 마주치자 발작이 의심될 정도로 몸부림치지만, 다행히도 입마개를 하고 있어서 여관이 어쩌고, 흡혈이 어쩌고 남들 다 보는 앞에서 나발 부는 일은 없을 것 같습니다!
"이 년보다 더 좋은 것도 충분히 구해드릴 수 있습니다. 천천히 오시길."
식인종이 엘리 앞에 비냐를 던지고, 비냐는 어떻게든 안 끌려가려고 별 발광을 다 하는군요. //혹시 여기서 틀어져서 싸우고 부딪치며 얼래벌래 기어나가는 전개? 아니면 무사히 나가는 전개 중 어떤게 좋을까?
엘리는 다른 쪽으로 몸을 돌립니다. 비냐도 이세는 울 기력조차 사라졌는지, 아니면 체념했는지 더 이상 저항하지 않는군요. 지하수로가 점점 좁아지다 다시 넓어지고, 엘리는 발에 채이는 금속 소리에 주변을 바라봅니다. 아까 전에... 엘리가 고블린과 식인종과 마구 싸웠던 창고 근처입니다. 그새 시체를 전부 수습했는지 피냄새만 느껴지는군요. 어떻게 수습했는지는... 괜히 정신 사나워지니 생각하지 맙시다.
드디어 비냐는 입을 다뭅니다. 최소한 엘리가 비냐를 잡아먹을 생각이 없다는건 받아들였기 때문이죠. 하지만 엘리가 말한 것과는 다르게, 팔이 잘린 남자가 악어보다 먼저 나옵니다. 남자는 돌바닥에 누워 붕대 감은 팔을 벽돌 위로 올린채 잠들었군요. 자기 싫어도, 상당한 출혈과 격렬한 상황 이후의 탈력감 때문에 잠에 들 수밖에 없었을 겁니다.
>>275 엘리는 유리병을 두고 나름대로 의사표현도 한 뒤 비냐와 함께 나아갑니다. 악어는... 아까 전의 대학살을 듣고 잔칫상 즐기러 갔는지 다행히도 없군요. 엘리는 비냐를 데리고 에레야가 내주었던 안전가옥 근처까지 오는데 성공합니다. 그리고 아까 전보다 훨씬 신선해진 냄새에 엘리는 저도 모르게 드디어 쨍쨍한 바깥을 볼 생각에 기쁘...지 않았습니다. 전혀요. 여기까지 오자, 엘리는 하수구 쇠창살에 반사된 희미한 햇빛을 보고 바깥은 아직 대낮임을 떠올립니다.
비냐는 한참동안이나 그 말을 곱씹고 되새깁니다. 비냐가 뱀파이에 대해 어찌 생각하건 간에, 그것만큼은 사실입니다. 뱀파이어는 태양을 두려워하건, 혐오하건, 엘리처럼 그 불빛 앞으로 나아가려 하지 않는게 일반적입니다. 하지만 엘리는 다릅니다. 엘리는 다른 뱀파이어들처럼 피를 빨고, 잽싸고, 동물로 변하고, 날카로운 송곳니가 있지만 그녀의 머리만큼은 다릅니다.
"그렇군요."
비냐가 엘리의 말에 담긴 본뜻을 완전히 이해했는지, 아니면 문자 그대로 이해했는지, '태양'으로 대표되는 인간 중심의 세계와 그 세계의 위협적인 종족을 배제하려는 압력으로 이해했는지는 모릅니다. 하지만 그렇게까지 구체적으로 이해할 필요는 없습니다. 엘리자베스 바토리 블라드 체페슈, 아니, 엘리는 비냐가 알던 뱀파이어와는 아주 다르다는 것만 알면 됐습니다.
비냐는 마침내 돌아서서, 엘리에게, 엘리가 인간 사회에 온 이후 들을 일이 없었던 말을 건넵니다.
"...구해줘서 정말 고맙습니다. 그리고..."
...들을 일이 없었던 엄마 잔소리도 추가해서요.
"...나오면 좀 씻으세요. 모르는 사람이 보면 산채로 가죽을 벗긴 줄 알겠어요."
확실히 그렇습니다. 엘리는 식인종과 고블린의 피, 살, 심하게는 가죽까지 뒤집어쓴 상태입니다. 다행히도 이곳 수로의 물은 엘리가 휘저었던 곳들보다는 훨씬 깨끗해서 목욕이 아니라 아예 마셔도 될 정도고, 안전가옥도 있으니 엘리가 목욕하다 말고 들이닥치는 빈민이나 경비병 때문에 존엄을 해칠 일도 없을 겁니다.
편하디 편한 일족의 저택 생활을 마다하고 비루한 인간들과 함께 구르는 삶을 선택했을 때부터 못 씻는 건 각오하긴 했지만, 이렇게 심한 꼴까지 각오한 적은 없었습니다. 엘리는 몇 양동이 가득 물을 떠오고, 안전가옥에 나 있는 샘물도 사용합니다. 먼저 얼굴을 씻는 것부터 시작했는데... 얼굴에 물을 뿌려서 슥슥 닦아내자... 비냐가 알아본 것이 참 기적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엄청나게 많은 핏덩어리가 손에 잡힙니다. 이제 보니 비냐가 기겁한게 엘리가 뱀파이어란 걸 알아서가 아니라, 진짜 괴물같이 생겨서 그랬던 것 아닐까... 싶어지는군요. 아무튼 엘리는 다 씻고 나서 피에 절은 옷을 벗습니다. 인간 세상은 위험천만하고 힘들다길래 나름대로 버려도 되는 옷을 입고 왔는데, 만약 이 동네가 나체에 대해 큰 거부감이 없다면 당장 이걸 버렸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엘리는 세스타우에서 오래 체류하게 된다면 이 안전가옥을 좀 더... '인간적'으로 꾸며야겠다고 다짐합니다. 예를 들어, 돈이 많으면 연금술사들이 최근에 팔고 있다는 '비누'를 좀 들여두던지, 최소한 밀짚 태운 잿가루라도 둬서 세탁도 좀 잘 되게 하고! 세탁에 쓸 수 있는 빨래판과 큰 양동이, 인력식 탈수기도 좀 들여놓고... 에레야가 이곳이 뱀파이어 기준으로는 중산층 살만한 집이라고 했는데 헛소리 같습니다. 아무튼 엘리는 몸을 씻고 자신의 옷도 세탁해서 (언제 마를진 모르겠지만) 어딘가에 널어둔 뒤, 행복하게 잠을 청합니다...
시간은 낮. 착한 뱀파이어는 잠들 시간입니다. 밤 즈음까지만 자면 피로도 적절히 풀리겠죠. 하지만...
네 시간은 잤을까요? 엘리가 깊은 꿈속에서 좋았던 옛날을 생각하던 도중 누군가 문을 쾅쾅쾅 두들깁니다. 인간의 기준으로 보면, 해가 뜬 것 같기도 하고 안 뜬 것 같기도 한 새벽 5시쯤에 갑자기 문을 박살낼 듯 두들기는 민폐입니다.
>>291 문을 열자마자, 엘리의 눈높이는 철십자 인장이 새겨진 흉갑과 마주합니다. 위를 올려다보면, 이제 와서 이야기하기도 참 새삼스럽게 에레야가 와 있군요. 자야 할 꼭두대낮에 갑자기 문을 쾅쾅 두들겼으니 엘리의 표정은 짜증이 가득할 법도 하지만, 오히려 에레야는 "그래도 노크라도 해준게 어디냐, 고마운 줄 알아라."는 듯 뻔뻔할 정도로 무덤덤합니다. 에레야는 엘리의 옷이 아직 마르지 않아 젖은 걸 봅니다. 바깥과 통하지 않는 지하에, 발광이끼가 낄 정도니 당연한 일이지요. 에레야는 후, 한숨을 쉬더니 뒤에 서 있던 누군가에게 명합니다.
"거기 경비, 그래 너. 위에 올라가서 옷가지 좀 가져와라."
그리고는 경비가 금방 옷을 가져오자, 엘리에게 그걸 떠넘기듯 건네고는 문을 다시 쾅 닫는군요.
"그거로 갈아입고, 말리고 있던 옷은 경비들한테 넘겨. 아마 뱀파이어들은 잘 모르겠지만, 햇빛이 뱀파이어만 바싹 말리는 게 아니고 옷도 잘 말리거든."
뒤에 저딴 목숨 가지고 농담하는 유머만 없었다면 참 스윗하다고 생각했을 텐데요. 하지만 상황이 바쁜지, 에레야는 문 너머로 이야기합니다.
"갈아입으면서 들어. 솔직히 말하면, 너가 내 어지간한 똘마니들보다도 더 쓸모 있었다. 지금 온 동네 경비들이 동원되어서 인간이 오갈 만한 지하수로로 연결되는 통로를 전부 봉쇄했고, 너가 보고했던 이 루트로 갈 거야. 그리고..."
"야, 놔! 놓으라고 이 새끼들아!"
"경비. 재갈."
...아까 전에 엘리가 도와줬던 그 남자, 왜인지는 모르겠는데 체포당했군요.
"...밤눈도 밝고, 이런 곳에서 날아다니는 네 도움이 아주 많이 필요할 거다. 인간 에레야로서 하는 말이 아니라, 이단심문관으로서의 입장도 똑같아. 그러니까 갈아입는 김에 다른 준비도 좀 하고 나와."
사실 유니콘 뿔도 있긴 했지만, 이건 엘리가 고블린 샤먼을 방해하기 위해 던졌다가 수십마리 고블린의 모가지를 잡고 장렬하게 저 세상으로 떠났으니, 이젠 없습니다. 정확히는 있었는데 없어진 거지만 뭐 어떻습니까. 없는 게 사실인데. 엘리는 금방 옷을 갈아입고 나옵니다. 경비들은 석궁과 창칼, 도끼, 횃불 따위를 들고 있고 몇명은 에레야처럼 살벌한 나팔총을 들고 있군요. 에레야는 들고 있는 무기들을 다시 한번 점검한 후, 엘리와 함께 경비병들 앞에 섭니다. 그리고 엘리에게 주의사항을 알려주는군요.
"우리 뒤에 서 있는 애들이 그나마 경비병들 중에서 가장 쓸만한 애들이야. 나머지는 들어가봤자 죽기밖에 더 못하니까, 그냥 입구만 봉쇄해놨어. 말인즉슨, 적을 발견하면 반 죽여놔서 못 도망치게 해야 한단 거야. 그리고 우리 목표는... 네가 그 하플링을 통해 보고했던 지하의 미친 식인쟁이 집단들이다. 나머지도 방해하면 쳐죽여야겠지만, 그걸 잊으면 안 돼. 알겠지?"
이단심문관 밑에서 일하던 거한들이 갑옷을 차려입고 길쭉한 방패와 철퇴를 든 채 에레야와 엘리 앞에 섭니다. 금방이라도 사람 하나 죽일 것마냥 험악해보이던 거한들이 투구까지 꾹 눌러쓰니, 이제는 마치 고성의 움직이는 갑옷병정처럼 보입니다. 이 정도로 방어력을 챙길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굳이 엘리가 몸빵할 일은 없겠군요. 에레야는 엘리에게 진짜 해야 할 것을 이야기해줍니다.
"너는 뒤에서 뭐가 보이면 벽을 세번, 그리고 두번 두들겨. 그러면 모두 멈출거야. 그리고 뭐가 보였던 건지 이야기해. 그리고 가다가 갈림길이 나오면 그 쪽으로 너 혼자 100m 정도 걸어들어가서 뭐가 있는지 보고 나와."
즉, 정찰을 하라는 소리입니다. 지금 상황에 믿을 건 엘리의 밤눈뿐이니까요. 에레야는 엘리에게 말합니다.
"그리고 깊숙이 들어가면, 본격적으로 전투가 시작하기 전까지 횃불도 다 끄고 램프도 가릴 거야. 그때까지는 우리들 중 네 눈이 거의 유일한 밤눈이다. 인간들이랑 함께 살고 싶어하는 것 같은데, 인간 사회는 같이 하는 일이 중요하거든? 첫 일부터 망치지 말고. 알았어?"
엘리를 둘러싼 병사들이 앞으로 나아가고, 갑옷들이 절걱거리느 소리를 냅니다. 발소리와 쩔걱거리는 소리가 사방에 울려퍼지자, 에레야는 한숨을 쉬더니 횃불을 켜라고 명령합니다. 어차피 귀 있는 놈들이면 이 소리를 듣고 위에서 수십명이 몰려오고 있다는 걸 모를 리가 없으니, 차라리 불이라도 켜서 앞이라도 밝히자는 겁니다. 그래도, 불을 켜도 눈 앞만 보이지 멀리는 보이지 않기에 여전히 엘리의 밤눈은 쓸만합니다. 그리고... 엘리는 벽을 세번 두드리고 다시 두번 두드립니다. 병사들이 전부 다 멈추고, 엘리는 자신이 본 형체, 자신이 맡은 냄새, 자신이 들은 소리를 바탕으로 에레야에게 보고합니다.
전방 30m에 랫킨 10체 이상. 갑옷과 방패 등으로 중무장. 최고 경계상태. 이쪽을 보고 있음.
"...모두 전투준비."
에레야는 폭탄을 하나 꺼내고, 나직이 병사들에게 속삭입니다. 앞에 방패를 들고 서 있던 병사들은 방패로 앞을 가리고, 뒤에서 경비들이 몰려와 위를 가립니다. 그리고 그 사이로, 석궁을 든 경비들이 나와 앞을 겨눕니다. 엘리가 밤눈이 밝은 거지 이들은 사실상 어둠 속을 겨누고 있는 상태지만, 좁은 지하수로에 놈들이 발 디디고 있을 곳이야 뻔하기에 아무래도 상관없는 모양입니다. 그리고 에레야는 엘리의 어깨에 손을 얹고 말합니다.
"엘리, 넌 좀 있어봐."
그리고 에레야가 쏴, 라고 말하자... 석궁을 든 경비들이 방아쇠를 당기고 바람 찢는 소리와 함께 볼트들이 날아갑니다. 몇 발은 빗나가고 나머지도 방패와 갑옷에 막히지만, 무언가 던지려던 랫킨에게 명중, 던지려던 것과 함께 그대로 그 자리에 고꾸라지고... 굳이 엘리가 말해줄 필요도 없는 비명소리가 들립니다.
"찌이이야아악!!!"
푸쉭ㅡ! 무언가 김 빠지는 듯한 소리가 들리지만, 랫킨들이 발광하는 소리는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꺽, 꺼억, 꺼어억, 엘리는 랫킨들이 꺽꺽대면서 쓰러지는 것을 확실히 볼 수 있습니다. 한 놈이 기적적으로 이 쪽으로 걸어오지만 전투 의지는 완전히 상실했습니다. 에레야는 석궁을 쏘려고 방패병 사이에 선 경비의 투구를 툭 치고, 그새 재장전한 경비가 불빛에 랫킨이 식별될 정도로 걸어오자 갑옷 틈새로 석궁을 쏴서 그 더러운 삶을 끝내줍니다. 에레야는 손에 침을 묻히더니 위로 쳐들어 지하수로의 풍향을 확인합니다. 지금 엘리와 에레야는 바람을 등지고 있습니다. 즉, 랫킨들 스스로를 죽여버린 저 치명적인 독바람 때문에 진격이 느려질 일은 없다는거죠. 일행은 계속 이동합니다. //오늘은 여기까지! 잘 자!
에레야는 짧게 끊습니다. 무슨 의미인지 정확히 이해하기엔 짧지만, 지금 상황이 상황이니 어쩔 수 없습니다. 한가하게 종교와 이단의 정의를 논하기엔 두 사람한테 걸린 목숨이 워낙 많은고로, 길게 얘기하기도 힘듭니다. 엘리는 계속 걸어가다가, 다시 벽을 두드려 일행을 멈춰세웁니다.
고블린. 셀 수 없이 많음. 최소 서른? 거미 기수 최소 다섯. 고블린 샤먼 최소 둘, 우리와 같은 방향으로 이동 중.
얼핏 봤는데도 이 정도입니다. 이 정도면 군대입니다. 엘리네 가문이 경영하던 영지에서도 이 정도면 마을이 해결할 수 없다고 간주하고 일족이 나섰을 일입니다. 보고 내용 중 그나마 다행인 건 이쪽으로 오고 있는게 아니란 겁니다. 묵묵히 듣던 에레야는 되묻습니다.
에레야는 엘리에게 진지한 목소리로 작전을 설명합니다. 말만 쉬운 작전이군요. 엘리는 고블린들 바로 뒤를 따라가, 고블린들이 식인종 본거지를 공격하는 순간 고블린을 도와서 식인종 중에 번거로운 놈들. 예를 들어 덩치 큰 놈이나 구울, 두개골 척탄병 등을 죽이고, 랫킨 등 다른 놈들이 오면 그놈들 중에서도 독바람 척탄병이나 다른 괴물들 위주로 썰어버리라는 겁니다. 에레야는 폭탄 하나를 건넵니다
"폭음탄이다. 어느 정도 정리되거나, 너가 죽을것 같으면 이걸 터뜨려."
그리고 경비들 눈치를 보다가 엘리의 가슴팍을 밀치듯 혈액이 담긴 유리병을 건네고 말합니다.
"살다보니 뱀파이어한테 피 한방울이라도 바치고 싶다는 미친년을 다 보고, 그 미친년 피를 뱀파이어한테 전달하는 일이 다 있군."
그럼, 신의 가호가 있기를. 엘리자베스 바토리 블라드 체페슈, 뱀파이어에게 하기에 참 좋은 말을 뒤로 한 채 엘리가 앞으로 나섭니다. 어둠 속에서, 엘리는 자연스럽게 한발씩 내딛어 고블린의 뒤를 밟습니다. 다행히도 감이 예민한 거미떼나 주술의 영향으로 미래와 과거가 뒤틀린 상태로나마 보이는 샤먼들도 엘리를 모르는것 같습니다. 잘 됐습니다. 어둠은 엘리의 친구니까요. 엘리는 고블린들에 가까이 다가가고, 고블린들 중에 제대로 된 무기로 무장한 이들이 꽤 많다는 걸 깨닫습니다. 가는 날이 장날, 진짜로 딱 좋은 때에 내려왔군요. 그리고...
"ܛܠܬܪܐ . ܵܠ ܲܲܨܫ"
나직이, 고블린 샤먼이 주술을 외웁니다. 무슨 뜻인지는 알 수 없지만, 나름의 규칙과 뜻을 가진 건 확실한 주술 언어가 고블린들 사이에 울려퍼지고, 고블린들은 그들답지 않게 잠자코 샤먼의 주술이 끝나기를 기다립니다. 그리고 엘리는... 신체에 알 수 없는 고양감을 느낍니다. 손톱이 가를 살점을 찾아 제멋대로 길어지고, 송곳니가 피에 헐떡여 드러납니다. 엘리는 눈을 부릅뜨고, 무언가 죽이고 싶다는 생각에 심장이 두근거립니다. 인간의 희고 검은 살점 아래의 붉은 속살은 얼마나 달콤할까요? 얼마나 참혹할까요?
아.
엘리는 고개를 젓습니다. 엘리는 가슴에 손을 얹어 진정시키고 주변을 둘러봅니다. 고블린들의 눈빛이 빨갛게 발광하고 있고, 키킥 키키킥 무섭게 울고 있습니다. 그리고...
본거지 외곽의 식인종 초소에서 경종이 어지럽게 울리고, 급박한 목소리가 지하 수로에 울려퍼집니다. 하지만 연장을 들어 후려치기도 전에 선두에 선 고블린이 쇳조각으로 배를 찌르며 부딪치고, 뒤에서는 다른 고블린들이 달라붙습니다. 바닥에 쓰러지자 굳이 죽일 필요도 없습니다. 수백개의 초록발이 칼에 찔린 식인종을 짓뭉개고, 거미 기수들은 거미에 등에 매달린 채 거미를 몰아 벽에 올라탑니다.
"뭐 해! 마름쇠 가져와!"
식인종들이 목책 너머에서 마름쇠를 던지고, 앞서가던 고블린들이 발바닥을 짓이기고 발등을 뚫는 고통에 비명을 지르며 나동그라지고, 나동그라지다가 등을 포함한 온 몸에 마름쇠가 꽂힙니다. 하지만 뒤에서 달려오던 고블린들은 피에 미쳐서, 동료를 짓밟으며 앞으로 나가 목책에 달라붙습니다. 식인종들도 이거로는 부족한 걸 잘 알아서 눈물 가루를 던지려는데, 벽에 매달린 거미 기수들이 떨어져 식인종들을 덮칩니다.
"으아아악! 끄악! 악!!!!!"
"사, 살려줘!!!"
거미들이 위아래로 마구 이빨자국을 남기며 산 채로 인육을 뜯어먹고, 목책 너머가 혼란해진 틈에 고블린들이 얼기설기 엮은 조잡한 목책들 사이로 기어오르거나, 길다란 막대기를 사다리 삼아 붙잡고 올라갑니다. 고블린들이 올라와서 의기양양하게 목책 너머를 보자마자 그 골통에 화살이 꽂히지만, 지금 피에 미친 이들 입장에선 아군이 죽었어도 자기가 안 맞았으니 그만... 이 아닙니다. 식인종 중 덩치가 큰 놈들이 뒤에서 발리스타를 들어서 쏘고, 고블린 몸통만한 돌을 던지고 있습니다. 엘리는 본능적으로 눈치챕니다. 지금이, 엘리가 나설 때입니다. (계속. 아직 반응 x)
발치에서 피 끓는 소리가 들립니다. 아래를 내려다보면 마름쇠에 꿰이고 동료들에게 밟혀 갈비뼈며 무릎뼈며 목숨 빼면 모든 것이 개박살난 고블린이, 의미가 없는 것을 알면서도 숨을 몰아쉽니다. 엘리는 그 고블린을 집어들어서, 목을 콱 깨물어 고블린의 얼마 남지 않은 삶을 고통 없이 빨아들입니다. 축 늘어지고 눈에 띄게 하얘진 고블린 시신을 수로에 던져 수장하고, 엘리는 고블린들 사이로 뛰어오릅니다.
붕ㅡ
"켁?!"
"끽?"
"흐뱍!"
마치 초록색 강물 위에 뜬 돌을 밟듯, 엘리는 고블린들의 머리를 짓밟고 초록 물결을 건너고, 벽에 발을 붙였다가 순간의 반발력으로 벽을 밀어 올라갑니다. 그리고 엘리의 눈에 '성가실 것들'이 보입니다. 하나는 큰 돌을 집어 던지는 덩치, 둘은 발리스타를 들고 쏘는 덩치, 셋은 큰 몽둥이를 고블린들을 두들겨패는 덩치.
식인종 중 경륜이 가장 높은 이의 명령에, 덩치는 가늠쇠 위에 샤먼의 머리를 올리고 쏠 준비를 합니다. 원래는 모가지가 뽑히는 '요술' 정도만 보여줘도 도망치는게 고블린인데 피에 미쳐 발광하는 건 분명 저 샤먼놈의 농간이 분명하고, 샤먼만 죽일 수 있다면 저 고블린들은 분명 아무것도 아닐 거라는 당연한 판단입니다.
"킥, 키이익?!"
고블린 샤먼도 자기를 노리는 발리스타의 흉악한 화살 크기에 경악합니다. 저거에 맞는다면 무조건 사망입니다. 나름대로 주술을 많이 연습한 덕분에 날아오는 화살들은 빗겨내고 느리게 만들어 약화시켰지만 저건 약화도 뮛도 소용이 없을 텐데. 고블린 샤먼이 공포에 질리기 직전, 엘리가 달려들어 발리스타를 든 덩치의 머리로 뛰어오릅니다. 갑자기 시야가 가려지고 머리에 성인 여성 하나가 매달리자 당연히 조준이 틀어지고, 발리스타 화살은 애먼 벽에 박힙니다.
"이, 이익! 뭐야 이거!!!"
덩치가 엘리의 정체를 고블린쯤으로 착각해, 털어내려 합니다. 하지만 엘리는 고블린 따위가 아닙니다. 덩치가 발리스타를 내팽개치기도 전에, 엘리는 하나하나가 단검 수준으로 날카로워진 손톱을 세워, 그대로ㅡ
푸샤아아악!!!
ㅡ덩치의 목덜미로 내리쳐 꽂습니다. 엘리는 손을 적시는 피에 희열에 미소지으며, 벌어진 상처로 손을 쑤셔넣습니다. 철퍽! 철퍽! 철퍽! 엘리가 손으로 할퀼 때마다 덩치의 모가지는 더 박살나서 너덜너덜하게 벌어지고, 그걸 본 몽둥이 든 덩치가 분노해서 엘리에게 달려들어 휘두르지만...
퍼석!
엘리는 손쉽게 피하고, 덩치의 너덜너덜해진 머리통이 대신 몽둥이에 맞아 뜯겨 날아갑니다. 야구 경기라면 홈런이겠지만, 머리통은 대신 뒤에 서 있던 한 식인종 궁수의 몸통에 맞아 그 궁수와 함께 터져버립니다. 엘리 덕분에 십년감수하고 끝낸 고블린 샤먼은 다른 샤먼을 불러 합동주술을 암송하기 시작하고, 엘리는 곧바로 돌 드는 덩치에게 달려들지만...
뻐억!
돌에 어깨를 맞아 어깨가 뒤틀리며 바닥에 떨어집니다. 절체절명의 상황, 덩치가 혼란스런 상황 속에 고블린과 식인종들을 밀치며 오더니, 그 은빛 머리와 붉은 눈을 내려다보고 무시무시하게 웃습니다.
하필 변태의 피를 마시는 건 거부감이 있었지만, 지금은 어쩔 수 없는 상황입니다. 엘리는 피를 벌컥벌컥 마시고, 아까 전에 마신 고블린 피에 더해 유리병 하나 분량의 피가 더해져 뒤틀린 어깨가 붙기 시작합니다. 엘리는 다시 덩치에게 달려듭니다. 이 덩치가 한번이라도 엘리를 붙잡는다면 엘리가 지겠지만, 엘리의 대응책은 간단합니다.
안 잡히면 그만입니다.
엘리는 덩치의 팔 아래로 미끄러져 들어가, 식인종의 바지를 찢고 그 아래 맨살에 상처를 남깁니다. 그리고 뒤돌아 주먹을 휘두르자, 엘리는 그의 날아오는 팔목을 철봉처럼 붙잡아 그 속도를 이용해 빙글 돌아서 위로 점프하고, 엘리의 날카로운 손톱이 핏자국을 남기고...
퍼퍼퍽!
엘리의 몸에 화살이 박히지만, 이상하게도 아프지 않습니다. 거한의 주먹이 코 앞에서 빗나가자 너무 아쉽습니다. 엘리의 손톱이 쇄골에 박혀 충돌하며 손톱이 부서지고 뽑히는 것 같은 감각에 입꼬리가 올라갑니다. 그렇습니다. 이 느낌은...
쾌감입니다.
ܟܕܥܕܠܣܣܥ. ܘܥܝܛܐ̈̈ ܩܣܕ
...엘리는 샤먼 쪽을 바라봅니다. 영문은 모르겠지만 자길 구해주고 골치아픈 놈들을 다 조지고 있는 그녀를 대충 자기 편인 셈치고 온갖 주술을 다 선보인 듯합니다. 그녀의 눈에 교활한 고블린들이 덩치의 온갖 숨겨진 약점을 찌르는 환각이 보이고, 피를 향한 갈증이 심해집니다. 더 고통받고, 더 피를 보고 싶습니다!
"이, 이익...!"
엘리는 덩치의 가슴에 달라붙습니다. 흉곽 부위의 수술한 흉터에 양 손톱을 박아 넣습니다. 식인종들의 화살이 수십발 꽂히고 덩치가 엘리를 마구 두들겨팹니다. 얼굴에 맞아 이빨이 나가도, 두개골에 금이 가도, 턱이 부서져도.
고블린 떼는 식인종들과 싸우면서 피해를 누적했고, 식인종들은 단순히 대가릿수 더 채우는 것 이외에 실제로 상대에게 피해를 줄 만한 덩치들 따위가 엘리에게 뚜껑이 거의 다 따였고, 구울은 있지만 뭐 상관없습니다. 이제 남은 건 랫킨입니다. 분명 어부지리를 노렸겠지만, 엘리에게 있어 이 싸움의 어부는 엘리 그 자신, 더 더해도 에레야 일행이지 그들이 아닙니다.
후우우우우우욱...
폐가 부풀어 터질까 걱정될 정도로 숨을 들이킨 엘리는, 눈에 죽여야 할 것들을 분명히 담습니다. 독바람 척탄병, 자폭쥐... 엘리는 쥐들 사이를 뛰어가 박쥐로 변해서 유유히 독바람 척탄병들 사이에 섭니다. 그리고 바로 한 마리의 털이 부숭부숭한 모가지에 아가리를 쩌억 벌려 깨물지만, 방독면의 가죽 때문에 이빨이 잘 박히지 않습니다.
"찌익!"
철퍽!
쥐들 사이에 숨어있던 암살쥐가 엘리의 등을 찌릅니다. 주술의 영향으로 쾌감이 느껴...져야 하는데 이상합니다. 뜨거운 고통, 칼을 맞으면 응당 느껴야 할 고통입니다. 엘리는 암살쥐에게 손을 휘두르지만... 엘리만큼이나 짜증나게 빠르군요. 암살쥐와 합을 겨루다 받아친 엘리는 도망치던 독바람 척탄병의 방독면 안구에 빈 유리병을 꽂아 박살내고, 탄띠에 매달려있던 독바람 폭탄이 바닥에 떨어집니다!
"찌, 찌이이익!"
암살쥐가 놀라서 피하다 말고 폭탄들을 다 받아내고 뒹굽니다. 여간 불안정한게 아닌 모양입니다. 그리고 다른 암살쥐가 엘리에게 달려듭니다.
여기서, 엘리는 딜레마에 빠집니다. 독바람 척탄병과 암살쥐를 어떻게 처리하느냐입니다. 암살쥐 처리에 주력한다면 독바람 척탄병은 무리에 숨을 게 뻔하고, 반대의 경우 엘리만큼이나 날쌘 이들이 에레야는 몰라도 경비 정도는 쉽게 담글 겁니다. 엘리가 다소의 안전, 생명의 안위를 포기한다면 둘 다 죽일 수 있겠지만 저 독가스를 실컷 들이마실수도 있을 겁니다.
시트양식 이름: 히샤히메 성별: 여 종족: 귀인 평상시엔 완력을 제외하면 인간과 다를것이 없으나 분노가 극에 달하면 머리에서 뿔이 솟는다. 이 뿔의 크기가 그 귀인의 잠재력으로 취급받아 귀인의 나라에서는 유년기에 완전히 분노를 폭발시킬만한 사건을 경험하게 한다. 이런 풍습으로 인해 야만족 취급을 받기도 한다. 성격: 나이에 걸맞게 활기차고 조금 오만하다. 어린애. 잔정이 많고 감정표현도 과하지만 그래도 할때는 한다. 나이: 15세 능력치 근력 강함 체력 보통 지능 약함 민첩 보통 매력 강함
과거사: 동쪽의 섬나라, 귀인들의 나라. 귀인의 피를 타고난, 왕의 혈통. 전륜왕이라 불리는 왕의 막내딸로 태어나 금지옥엽 손에 물한방울 묻히지 않고 자랐다. 어차피 실권과는 한참 멀리 떨어져있고 후계자가 될 가능성도 없다시피 하기에 다른 가족들과의 관계도 무난. 편집증이 있는 삼남조차 히메와는 편하게 독대할 정도였다. 기초적인 교육과 예절교육을 받았지만 어디로 튈지 모르는 성격탓에 집안에서도 눈만떼면사라져있다며 골칫덩이로 취급받기도 했다. 이는 호위로 붙인 한조라는 닌자의 탓으로 그의 밑에서 공부하여 독학으로 인술을 습득하였던 것이다. 이런 성격과 실력이 있으니 바깥으로 튀근 것은 당연지사. 생일날 나도 왕권경쟁에 참여한다며 서역으로 간단 편지한통을 방에 달랑 남겨둔채 애완견인 포치와 함께 서역으로 향했다. 집에서는 닌자 몇명을 파견해 히메의 행방을 찾고있는중.
현재 상황: 작은 농촌 마을에 잠입히 친절한 노부부 밑에서 막내딸로 살고 있다. 슬슬 무언가를 해야할 것 같은데 집밥이 너무 맛있다. 데리고 온 포치는 벌써 안락삶에 예전의 슬림함은 찾아볼 수도 없다. 내일은 진짜 출발해야지.
궁극적 목표: 서역기행문을 만들어 아버지에게 헌상하고 왕이 된다.
원하는 서사: 바보아가씨의 우당탕탕 서역모험! 가벼운 느낌의 모험을 원해요!
기타: 가출하면서 집안의 금을 좀 많이 챙겨와 재정적으로 부족해질 일은 거의 없다. 지금 신세를 지는 집도 농촌의 평범한 민가다보니 쓸일도 없다. 필요할때는 동네 뒷산에서 짐승을 사냥해서 모험가 길드에 팔아넘기니 촌동네에선 부족할 일도 없다. 그야말로 안락삶을 겪고 있는 중.
1년정도 서역에서 생활중이지만 아직도 글을 잘 읽을 줄 모른다. 어려운 단어는 할머니가 적어준 단어노트를 보고 드문드문 읽는수준.
무기는 없지만 단검이나 로프정도는 다룰 수 있다. 걸음마를 뗀 순간부터 배워온 인술의 영향.
키는 150을 겨우 넘기는 수준. 잘 다듬은 검은 무리카락과 여러색의 눈동자를 가지고 있다. Ai그림
#이런저런 닌자캐릭터를 생각해봤지만 닌자몰살의 엔딩에서 벗어날 수 없게 되버린고로... 닌자향첨가 동방아가씨를 가져왔어요
에레야가 엘리의 생각을 알았더라면 기특하다고 박수라도 쳐줬을 일입니다. 그녀는 자기 잘못이 아닌 것까지 다 내 탄이라 자책하며 내 탓이오 내 탓이오 나의 큰 탓이오 세번 외치는 그놈의 죄인 행세에 빠진 종교쟁이처럼 살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어쨌든 하기로 한 일은 똑바로 하자는 생각은 있었기에 엘리는 한번 도전해보기로 마음먹습니다
"찌, 찌이익!"
엘리는 독바람 척탄병 사이로 끼어듭니다. 살가죽에 손톱이 막히고, 방독면 면체는 이빨이 들어가지 않습니다. 그래도, 뭐 살인은 쉬워서 하던가요? 해야 하니까 하지. 엘리는 바로 튀어나온 쥐꼬리를 붙잡고, 옆에 있던 다른 놈의 목에 칭칭 감고 가볍게 묶습니다. 숨 막히는 비명이 들려오고, 엘리는 눈 앞에서 녹색으로 빛나는 단검을 들고 달려오는 암살쥐와 마주합니다.
쥬겨!
서투른 인간말로 다그치며 휘두르자, 엘리는 안으로 파고들어 칼 대신 쥐의 팔목을 받아내고 손톱을 목에 휘두릅니다. 하지만 기다렸다는 듯 그녀의 손아귀를 한 손으로 붙잡아 깍지를 끼고, 뒤에서 암살쥐가 달려듭니다! 엘리는 몸을 틀어 뒤의 공격이 애먼 척탄병을 찌르게 만들지만, 이 두 녀석, 프로입니다! 척탄병 중 용기있는 녀석이 살려면 엘리를 봉쇄해야 한다는 생각에 그녀의 다리에 붙들려 늘어지고, 실수한 암살쥐가 두 번은 안 한다는 생각으로 녹색 칼을 들고 엘리에게 달려듭니다.
서늘하다면 서늘하고 시원하다면 시원할 바람이, 나무 아래에 누워 낮잠을 청하던 한 소녀의 빰을 가볍게 간지럽합니다. 멀리 뻗은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푸르고, 언덕 아래의 마을에서는 목책을 망치로 두들기는 소리, 소가 밥 달라고 우는 소리가 어우러지지만, 동방에서 온 소녀에게는 그저 한낮의 자장가에 불과합니다. 수풀은 폭신한 이부자리고, 바람은 부채라. 계속 이렇게 놀고먹고 싶어라ㅡ는 생각에 절로 미소가 지어지지만...
서역 견문을 마을에서 1년간 놀고 먹는 것으로 지을 수는 없고, 이야기의 악마도 한 공주가 서역의 한 마을에서 계속 놀고먹었다는 이야기를 할 생각은 없습니다. 그럴 바에 야 귀인국이 속한 타이세이 열도, 서쪽의 세올국, 더 서쬐의 대명국을 거쳐 남만, 천축국, 대압국, 기설랍국을 거쳐 여기까지 오느라 개고생한 일들을 쓰고 말지요. 운명의 강요인가 바람의 장난인가, 그녀의 머리 위로 알이 큰 사과 하나가 떨어져 콩! 하고 히샤히메를 깨웁니다.
마을 어귀의 언덕에서 일어나보면 마을이 다 보입니다. 나무판자로 지붕을 하고, 돌과 나무를 섞어 만든 집들 주위를 가을걷이 끝난 들판이 둘러싸고 있는 바츨라우 마을입니다. 풍요로운 곳임과 동시에, 귀인 공주 히샤히메가 무려 1년 동안 '평화적' 교류한 곳이기도 합니다.
시트양식 이름: 아앨라나 '안나' 플레이오네 성별: 여성 종족: 인간 성격: 평소에는 나긋나긋하며 얌전하지만 화나면 무섭다. 상대가 괴물이든 뭐든 그녀에게 호의적으로 대해준다면 친구가 될 수 있다 나이: 16세 능력치
근력-약함 체력-보통 지능-높음 민첩-보통 매력-높음
과거사:
아앨라나는 '검은 숲' 이라는 이명으로 더 유명한 마력이 유난히 깊고 널리 퍼져 흐르는 숲 속에서 생활했습니다. 숲 자체의 미묘한 색상이나 특유의 높은 높이와 울창히 덮혀 자라나 햇빛이 잘들지 않기에 유래가 되었습니다. 그때문인지 숲 자체에 기이함이 다소 있어서 탐색이 어렵고 위험할 수도 있지만 그 특징 탓에 오히려 마법에 관심에 있는 이들이게 가끔씩이지만 꾸준히 대상이 되고는 합니다. 이 뿐만이 아니라 이 숲에는 오래되고 강력하며 두려운 마녀가 있다는 오랜 전설과도 같은 이야기 있는데 이는 어느정도 사실으로 바로 그 마녀에게 거둬져 생활하게 된 것이 바로 아앨라나 입니다. 그녀는 마녀의 아래에서 여러가지를 배우며 스스로의 힘과 능력을 키워나갔습니다. 숲 속에서의 생활만으로는 그녀 자신의 열망을 이루기에는 한계가 있다고 생각이 점차 들며 만족할 수 없었던 아앨라나는 마녀에게 허락을 구한뒤 숲 밖으로 세상으로 나아갔습니다
현재 상황: 검은 숲을 기점으로 그 근방의 것들부터 세어나가며 세상의 문물을 둘러보며 종종 그녀가 배운 지식들을 토대로 다른 이들과 거래하거나 돕는 것을 시도 하고 있다. 세상을 제대로 여행하기 위해선 여러가지 해야 될 일이 있는 것이니까요
궁극적 목표:세상을 탐방하면서 거기에 있을 온갖 진귀한 것들 보고 배우며 얻는다. 훗날 그녀를 거눠준 마녀와 같이 대단해지고 싶어하기도 한다
원하는 서사: 잔잔하게, 때로는 기묘하게, 어느때는 화사하게, 세상을 떠돌아다니며 세계와 자신의 엮어 이야기를 만들어 간다. 그로인해 완성될 것에는 세상에게도 그녀에게도 서로에게 무엇이 어떻게 될지는 누가 알 수 있을까?
기타: 과거사의 연관성 때문인지 어느세인가 외모에 비해 휠씬 오랜 세월을 살아왔다는 마녀라는 소문이 종종 뒤따르고 있는 여러가지 마법을 부리는 어려 보이는 마법사. 소문 속의 누군가들은 그녀가 장생자의 비법을 얻어냈다고 냈다고들 하거나... 어린 외모에 비해서 비교적 마법에 정통하고 잡학지식을 두로 갖추고 있기 때문인지. 거기에다 악마나 혹은 그와 비슷한 다른 세상의 것들을 불러내어 부린다는 소문도 섞기고 있기에 그녀가 마녀라고 불리게 되는 이유일지도. 그런 무성히 흘러 떠도는 소문들이 과연 진실일지는 그녀만이, 어쩌면 그녀조차 모를 일인 것 같아 보인다
그녀 본인 만큼이나 특이하다고 할 수 있는 것은 바로 그녀가 가지고 있는 마법의 지팡이인데 화려하면서도 불길한 느낌을 주는 모양의 금속으로 된 듯한 그것은 강력한 마력을 지니고 있을 뿐만이 아니라, 스스로의 의지 또한 갖추고 있다. 그것에 담긴 의식은 한때 가말라시엘이라는 이름으로 불리우던 강대하고 혼란스럽게 했던 어둠의 존재가 옛 사람들의 막대한 헌신으로서 봉인되어 지금과도 같은 모습이 되었다고 주장하고 있지만 그것이 진실인지는 아앨라나도 모르는 듯합니다. 이 존재는 지금까지 자신을 봉인에서 해방시켜줄 이를 오랜시간 동안 찾으며 바래왔다고 하며 마침내 아앨라나를 통하여 기회를 찾았고 서로에게 협력을, 힘을 빌려주도록 약속했다고 한다. 그 이유가 무엇인가 하면 그녀의 태도가 마음에 들고 무엇보다 여러모로 힘의 파장이 잘맞는 대상이였기에 때문이라고 한다
생활하던 환경이나 마녀에게 줄곧 배워왔기 때문에 어느정도는 재료을 구별하고 찾아내 스스로 요리, 시료나 약으로 제조할 수는 있다
>>348 척탄병은 머리 위에서 나는 잔인한 난도질 소리에 눈을 질끈 감고 있다가, 이쯤 되면 죽었겠거니 하고 올려다봅니다. 하지만 보이는 건 참혹하게 죽어 초점을 잃은 눈이 아닙니다. 랫킨과 인간의 말이 서로 통하지 않더라도, 동물이라면, 죽음의 공포를 느낄 지성이 있는 동물이라면 말보다도 더 확실하게 전할 수 있는 공포의 언어가, 엘리의 눈빛으로 전해집니다.
곧 죽어도 네 모가지는 끌고 간다고.
그럴 리가 없어. 라고 부정하려 하지만, 엘리의 선언은 사실이 됩니다. 바로...
"크르르르륵!"
엘리를 두세번은 찔렀을까 싶을 때쯤, 뒤에서 구울들이 달려와 부딪치고, 찌르려던 암살쥐는 구울에게 눕혀져서 퍽! 퍽! 퍽! 하고 공격 한방마다 짓이겨집니다. 아마 구울이 엘리를 찢어죽이길 바란 것 같지만... 뭐, 엘리처럼 빠르니 됐습니다.
"아 이 씨발! 저 년 죽이라니까!!!"
엘리는 마치 구울처럼 기이하게 웃으며 척탄병에게 다가가고, 그 무시무시한 피투성이 모습에 경악할 새도 없이 엘리가 방독면을 벗겨 손톱으로 쥐의 길쭉한 얼굴이 인간의 그것마냥 평평해질 때까지 난도질해 갈아버립니다!
그러자 뒤에서 암살쥐가 그녀의 목을 제 꼬리로 휘감고, 양 손으로 당겨 엘리를 질식시키려 합니다. 하지만, 암살쥐의 두 손이 비었다는 걸 눈치챈 엘리는 적의 허리춤을 더듬어, 그 녹색빛 칼로 암살쥐의 목을 찌르고 비틀어 죽여버립니다. 뒤를 돌아보면, 녹색 칼에 찔린 부분이 초록색으로 빛나며 끓어오르고 있군요...
...이게 내 몸을 찔렀다고?
라 생각할 틈도 없이, 치지지직 하고 심지 타는 소리에 시선이 다른 척탄병에 갑니다. 패닉에 빠져서, 벌벌 떨면서 독바람 폭탄을 터뜨리려 하는군요.
머리에 떨어진 것에 적의 공격인가 싶어 조금 놀라기는 했으나! 짐은 귀인국의 적법한 후계자! 체통없이 땅을 뒹굴...지는 않았도다! 정말로! 짐은 은은히 배어나오는 기품을 갖추었으니 크게 하품을 하며 자리에서 일어서 떨어진 사과를 적당히 주웠느니라. .. 쩝 저녁으로는 할마마마께 애플파이를 해달라고 해야겠구나. 옷에 묻은 풀잎들이 신경쓰이기는 했으나 이 또한 귀인만이 가질 수 있는 야성의 멋이 아니겠느뇨? 킥킥거리며 웃고있다니 어느새 살이 찐 포치녀석이 느릿느릿 걸어와 곁에 자리를 잡고 누우려 하기에 감히 주인은 일어섰음에도 태평하게 누우려는 것이 괘씸하여 사과를 적당히 던져주자 입으로 문채 자리에서 일어나 어슬렁 어슬렁 언덕을 걸어내려갔도다.
이 마을은 실로 마음에 들었도다. 사시사철 아름다운 풍경을 자랑하며 주민들도 느긋하게 삶을 이어가는 실로 올바른 형태의 마을이기에 짐 역시 굉장히 마음에 들었도다. 그런 연유로 짐의 자비를 얻어 1년간 무려 평화적인 삶을 이어왔으니 언젠가 귀인국이 영토를 넓혀 서역끝자락까지 도달하게 된다면 이 주변에 거처를 마련하는 것도 좋을 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할 정도로! 뭐 아바마마께서는 그러한 정복에는 관심이 없으신 분이셨으니 한참 뒤의 일이 되겠지만!
"우선 집에 좀 가봐야겠구나."
어지간해선 나를 따라 오지도 않을 포치가 왔다는건 마음의 변화가 있거나 뭔가 시키실 일이 있어서가 아닐까 싶노라. 음, 역시 짐. 지능이 높군. 추론의 귀재로다.
>>359 히샤히메는 마을길을 따라 내려갑니다. 암탉들이 병아리를 이끌고 나와 줍지 않고 남은 이삭들을 주워먹고, 마을 아낙과 촌부들이 히샤히메를 보자 가볍게 목례합니다. 그녀가 (이 서역 무지렁이들은 모르겠지만) 이름에 써 있는대로 히메이기도 하지만, 가축을 보고 입맛을 다시던 늑대들을 침대보로 만들고, 바츨라우 마을 유일의 사냥꾼이 다리를 다쳐 요양할 동안 사슴부터 토끼까지 잡아와 마을 사람들 밥상에 고기반찬 올린 공로가 더 클 겁니다.
그렇게 촌부들의 인사를 받으며 위풍당당하게 나아간 히메는 브우니크 할머니가 지붕 위에 올라간 수탉을 보고 쩔쩔매는 걸 봅니다.
검은 숲. 온갖 신비들이 학문의 이름으로 체계라는 폭력적이면서도 엄밀한 발견에 발가벗겨지고, 싸구려 무당과 할머니의 옛날 이야기로 점점 밀려나 삭막해지는 세상 속에서, 많은 이들이 상상하고 동경했던 신비의 원천은 수천년 전부터, 누군가 과거를 남기고자 하여 역사가 시작된 때부터 이미 존재했습니다. 박해받던 이들, 조용함을 찾던 이들, 또는 심각한 길치들이 이곳에 모여들었고... 오늘은 지도를 보고 동서남북도 못 읽는 한 길치로부터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언제나처럼 시약 재료를 찾아 숲을 거닐던 아앨라나. 등푸른버섯은 갓이 상하지 않게, 너도맨들뿌리는 뿌리 하나도 세심하게 캐다가, 본인 주장으로 지옥의 수문장이자 666번 저주받은 자이자 13번 천벌받을 자이자 케르베로스의 주인인 가말라시엘이, 그녀에게 말을 겁니다.
에레야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주 짧은 순간, 엘리는 저게 터지면 죽음을 구걸하게 될 것 같은 끔찍한 예감에 폭음탄의 심지를 짧게 끊고는 폭탄에 달린 부싯돌을 당겨 불을 붙이고, 위로 던진 채 귀를 틀어막고 척탄병에게 달려듭니다.
그리고
삐이이ㅡㅡㅡㅡㅡㅡㅡ
소리가 너무 컸던 나머지, 엘리의 귀청이 격통과 함께 부서집니다. 분명 시끄럽고 처절해야 할 혈투의 한복판은, 소리만 들으면 마치 남의 일인것마냥 작고 멀게 느껴집니다. 하지만 엘리는 지금 여기서 멈출 수 없습니다. 척탄병을 몸으로 들이받은 엘리는 폭탄을 빼앗아, 불꽃이 폭탄 안으로 들어가기 직전 손으로 심지를 붙잡아 뽑아버립니다.
엘리는 고통스러워하는 척탄병을 간단하게 처리하고, 상황을 다시 살핍니다. 고블린들, 식인종들, 랫킨들. 모두 심각한 피해를 입었지만 아직 유의미한 전력이 살아있습니다. 고블린은 샤먼, 식인종들은 구울, 랫킨은 자폭쥐. 다 죽인다면 좋겠지만, 폭음탄이 터진 이상 에레야가 오기 전까지 다 죽이는 건 무리 같군요. 아마 하나만 골라야 할 겁니다.
>>369 "감각을 '오감' 따위로 나누려는 헛된 시도를 거부하고, 이 대악마 가말라시엘의 인도에 따라 진정한 세계를 바라보는 눈을 기르라!"
가말라시엘 님이 자기 세계에 빠져있도록 내버려두고, 아앨라나는 끙끙대는 소리가 나는 곳으로 가봅니다. 그리 멀리 갈 필요도 없이, 별 일 없으면 파릇파릇하게 서 있어야 할 클로버 풀밭이 부자연스럽게 누운 자국이 있어, 그걸 따라 그냥 걸어가기만 하면 끝입니다. 아앨라나는 별 수고 없이 부상자를 찾아냅니다. 한 여자인데 다리가 부러져서 이를 악물고 있군요. 골절통이 너무 심한 나머지 붕대로 뭘 한다던지, 저걸 한다던지, 그런 걸 할 여유가 없었던 모양입니다.
"윽... 으윽... 으..."
만약 아앨라나가 오지 않았다면, 그리고 지금 여기 있더라도 아앨라나가 돕지 않는다면, 아마 이 흑림은 24시간 이내로 또다른 인간 거름을 받아들이게 되겠군요.
>>370 판단을 마친 엘리는 자폭쥐 쪽으로 달려듭니다. 자폭쥐는 척 봐도 잘못 반응하는 순간 펑 터지게 생긴 화학물질이 가득 담긴 병들을 온몸에 주렁주렁 달고 있었습니다. 당연히 제정신으로 자폭할 리가 없으니 마약에 취한 상태지만, 마약에 취했어도 마약이 청각을 보호해주지는 않는지라 방금 전의 폭음에 정신을 잃은 상태입니다. 엘리는 자폭쥐가 정신을 차리고 기폭하기 전 하나씩, 그 목숨을 끊어버립니다. 아까 전이 엘리의 사냥이었다면, 지금의 엘리는 마치 작업장에서 기계적으로 맡은 일만 하는 목수마냥 암살쥐에게서 뺏은 녹색빛 단검으로 목을 그어 쓰러뜨립니다. 하나, 둘, 셋. 오랜 뱀파이어 생활의 영향으로 무의식중에 인간을 은근히 아래로 깔보게 되고, 랫킨처럼 뱀파이어와 외견조차 닮지 않은 종족들은 같은 사람으로 취급조차 않게 되는 느낌이 이럴 때는 낫군요. 죄책감이 없으니. 하지만...
"찍! 찌이익!"
자폭쥐 중 한마리가 엘리를 알아보더니, 지옥에 데려갈만한 적수가 눈 앞에 나타난 것을 기뻐하며 기폭용 밧줄을 당기려고 합니다. 하지만 엘리의 옆구리와 팔 사이를 아슬아슬하게 스친 볼트가 자폭쥐의 눈구멍을 꿰뚫는군요. 뒤를 돌아보면, 에레야가 다 쓴 석궁을 뒤에 있는 경비에게 던지듯 돌려주고는 엘리에게 손짓합니다. 이리 오라는 신호 같군요.
무엇보다도 마음에 드는 것은 이곳, 생각보다도 신민들의 예절교육이 잘 되어있다는 것이다. 처음에는 어쩐지 경계하는 모습이 보이기는 했으나 짐의 화려한 행적을 보고나서는 마치 이미 왕을 갈아치운듯 저리도 존경심을 내비치고 있지 않더냐! ...동네 꼬마들이 고기잡는 누나라고 불렀던 것은 잊지 않았노라! 그 이후로는 뭔가 사냥꾼 녀석이 짐을 후계자로 보는 것 같은 눈으로 본것도!!! 에이잇, 짐은 언젠가 귀인국의 왕이될 자이거늘!!! ...뭐 그래오 사냥을 하는 정도 이리도 자원이 풍부한 곳이서는 어렵지도 않은 일이었지! 귀인족으로 태어나 고작 그 정도도 하지 못할정도로 약하게 자라지는 않았느니라!!!
"그대여, 무슨 일이 있는 것이더냐?"
대충 주변을 훑어보니 음, 확실히 난제로고. 어째 이집의 닭은 지붕을 좋아하는구나. 저번에도 이랬던 적이 있는 것 같노라. 적당히 작은 돌을 주워 손에 두고 튕겨 닭의 머리를 맞춰보려 시도했느니라. 짐의 저격술은 그야말로 귀인국제일! 성내의 장수들과 물수제비를 뜨더라도 언제나 1위를 차지할 정도였으니!
그리고 400레스 향하는 만큼 내가 이 어장을 열면서 세운 이 어장의 목적을 여기다가 적어서 새기고자 해. 이 어장을 열면서 내가 지향한 목표는 '머리 크게 안 쓰고 도파민 얻는 텍스트 기반 게임'이야.
그를 위해서... 1. 캐릭터의 행동을 간략하게만 입력해도 대충 그 다음 결과를 써줍니다. 2. 설정은 뼈대조차도 없이 우리 모두가 알고 있는 판타지에 대한 공통 심상을 기반으로 필요할때 그때그때 상의를 통해 세분화 3. 스포가 되는 한이 있더라도 전개에 대해 사전 합의
그리고 제일 중요한거 캐릭터가 만약에 실패하거나, 틀리거나, 크게 다치더라도, 그건 캐릭터의 이야기에 변주를 주는 방향으로 가지 밑도끝도 없이 상황 개판났네요 하하 개판이네요 이런 건 자제하려고 해. 이건 내가 던전월드 TRPG를 하는데, 대실패가 떴을 때 이걸 단순히 "대실패 떴네요 피 깝니다 피가 0이네요 시트 찢으세요"로 끝난게 아니고 그거로 캐릭터가 곤경에 처하는 상황을 만들고, 그 상황에서 다른 재밌는 상황을 파생시키는 마스터링을 보고 감명을 받아서 최대한 따라해보려 하는거야.
그리고 히샤히메주는 본인이 생각하고 있는 귀인 설정 간략하게라도 풀어주고(오니 계통인건 아는데, 오니도 워낙에 작품마다 설정이 달라서...) 아앨라나주는 아앨라나 외모 좀 알려주고(내가 왜 시트에 외모를 안 적어놨을까...), 아앨라나를 거둬준 마녀 외형은 이런 마녀 할머니에 더 가까울까? 아니면 요즘 뜨는 클리셰인 마법에 통달해 외모가 어릴 적에서 고정된 아름다운 마녀일까? 이 부분 생각해둔거 있으면 말해줬으면 고맙겠어!
아 그리고 엘리주는 진행 때 처음에 캐릭터가 손톱으로 누구를 할퀴는데 이거 엄청 치명적으로 묘사되는 걸 보고 좀 혼란스러워 했던것 같아서... 엘리 같은 뱀파이어는 누구 죽이려고 본색 드러내면 (얼굴은 빼고) 손톱이 지금 이거의 절반 정도로 길어지고, 하나하나가 갓 갈아낸 칼 수준으로 날카로워진다고 생각하면 될 거 같아. 갑옷을 입은 사람이라면 모르겠지만, 맨몸이라면 충분히 찢어발길 만하겠지! https://static.wikia.nocookie.net/witcher/images/b/b5/Tw3_journal_dettlaff_vampire.png/revision/latest?cb=20160601042441
>>385 모티브로는 가면라이더 히비키(변신)과 동방프로젝트의 오니족에서 따왔어요! 다른 점이라면 동방의 설정을 잘 모르다보니 상상적으로 때워서 당대(15~17세기)에 맞게 대충 전국시대쯤을 생각하고 있어서 시대적으로는 도요토미와 도쿠가와가 열도를 절반씩 먹은 느낌으로 작성을 했네요. 외형이 평소에 인간과 차이가 거의 나지않는다는 점을 빼면 보편적인 오니의 이미지를 생각해주시면 좋을 것 같아요. 힘이 세고 생각이 그리 깊지 않고 술을 잘마시고... 여기에서 오니의 요술이 인술로 대체된 느낌!
골절도 종류가 다양합니다. 단순골절, 복합골절, 개방성 골절 등등... 그리고 이 여자는 상태가 정말 심각합니다. 다리가 부러져 종아리가 뒤틀리다 못해 뼈가 약간 살을 뚫고 나왔군요. 이 여자가 심하면 쇼크사, 적어도 기절하지 않은 채 의식을 유지하는 것마저도 장할 지경입니다. 이 사람을 구하려면 기절시키던지, 팔다리를 잘라가도 모를 정도의 강력한 마취를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아앨라나의 머리속에 두 목소리가 울려퍼집니다. 하나는 기억, 하나는 악마입니다.
'네 유치에 충치가 나서 뺄 때였단다. 워낙에 자지러지게 울길래, 영면버섯 빻은 가루를 물에 개어 먹였지. 보다시피 넌 잘 살아있단다. 적당히 쓰면 영면버섯도 쓸 수 있어. 물론 못 맞추면 영면이지."
"사도여! 다친 이는 죽고, 먹잇감이 되는 자연의 섭리를 거부하라! 나는 모든 불경한 의심과 사유의 후원자, 역심의 파종꾼이니! 나의 힘을 빌어 이 세상을 개변하고, 세상의 본질을 바꿀 혼돈을 파종하라! 이는 개인의 목숨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의 사변이니!"
음. 가말라시엘 님의 말씀을 일상언어에 맞게 다듬으면 내 힘을 빌려서 고쳐보되 좀 기이한 일이나 이상한 부작용이 일어날 수 있단 것 같습니다. // 지금 봉인상태의 가말라시엘을 말 엄청 많고 쓸데없이 무게감 잡는 컨셉으로 했는데 괜찮아?
히메가 던진 돌멩이는 수탉의 머리를 맞추...지는 못하고 지붕을 지탱하는 등골 끝자락을 때렸습니다. 그래도 수탉을 놀래키기는 충분해서, 늙은 수탉은 푸드덕거리며 허공으로 날아올랐다가 이내 떨어져 브우니크 할멈의 손에 모가지가 잡힙니다. 제아무리 할머니가 늙었더라도 수십년 일한 주부의 경륜은 이길 수 없어 푸드덕거리기만 합니다.
"그래. 이샤. 고맙구나. 오늘은 이놈 고아줄테니 늦지 말고 오그라."
그녀의 이름은 히사히메지만, 이 지역 사람들은 외국 정도가 아니라 세계 반대편에서 오다시피한 사람의 이름이 워낙 생소하고 발음도 어려운지 그녀의 이름을 이샤, 히메까지 붙이면 이샤힘, 으로 부르고 있군요. 아무튼 브우니크 할멈 가라사대 오늘 메뉴는 닭수프랍니다. 음, 포치는 옆에 앉아서 눈을 밝히고 있군요. 먹는거 얘기는 개의 몸에 갇힌 인간마냥 무섭도록 잘 알아듣습니다.
>>392 돌은 아쉽게도 닿지않았으나 이 또한 짐의 자비로움이 표현된 것이로다! 음, 내 오늘은 봐줄테니 다음번엔 할마마마를 곤란하게 하는 일은 없어야할 것이ㅇ... 음! 생각해보니 마지막 반란이라면 딱히 상관 없도다! 인생의 마지막에 죽음의 운명으로 부터 저항조차 하지 않는 것은 대장부의 그릇이 아니니!
"닭고기인게냐! 으흥흥~ 참으로 기대가 되는구나!!!"
한잔하거라! 비록 내 애플파이는 먹지 못하게 되었어도 닭고기는 도미다음으로 좋아하는 음식이니! 신선한 도미를 먹지 못하는 이곳에서는 그야말로 가장 좋아하는 부위였노라! 헌데 포치 네놈은 왜 그리 눈을 빛내더냐. 짐의 음식을 빼앗아먹는것은 아무리 저 머나먼 귀인국에서부터 함께한 충신이라고 하여도 반역의 대죄에 해당되나니, 볼을 주물러지는 형벌에 처하겠노라.
에레야는 혀를 차면서 군의를 부르고, 새부리 가면을 쓴 군의가 가까이 옵니다. 장갑을 쓴 양손을 싹싹 비비는 군의는 후욱후욱 방독면 너머로 거친 숨을 뱉으면서, 엘리의 온 몸에 가득한 상처를 탐욕스럽게 바라보면서 여러 의미로 참 무시무시한 말을 꺼냅니다.
"뱀파이어를 해부하는 게 아니라 치료하는 건 처음인데... 후욱후욱... 정말 기대되는군..."
뱀파이어를 치료해본 적 없는데다가, 밤피로필리아랑은 다른 의미로 변태인 놈 같은데... 다행히도 실력은 있는 놈입니다. 군의는 엘리의 찔린 상처를 좀먹어가는 녹색 발광도료를 보고, 이것이 랫킨의 마석임을 눈치챕니다. 군의는 환부 근처의 찢어진 옷감을 잘라내고 성수를 바를 뻔하다가 엘리의 종족을 뒤늦게 깨닫고 고농도 식초로 환부를 닦아낸 후, 주머니에서 작은 쇠막대기를 꺼내 녹색으로 발광하는 상처에 집어넣어 휘젓습니다. 치직... 치지직... 녹색 마석이 쇠와 반응해 고열을 내며 무해한 물질로 바뀌고, 덕분에 엘리의 환부는 고열에 삶아지며 저절로 소작됩니다. 유일하게 문제가 있다면, 이 모든 과정에 마취는 없었다는 걸까요.
>>393 "일? 으음. 생각해보면 서까래 썩은 것도 갈아야 하고, 울타리도 세워야 하고... 으음. 할 일이야 많지만, 우리 공주님은 일하기 싫어하는 거 아니었니? 귀족은 다 그렇던데."
히사히메의 자존심에 상처가 될 수도 있는 말이지만, 놀랍게도 이 마을은 귀족이 진짜로 아무것도 안 하고 놀고 먹는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늑대가 나타났을 때도 그걸 물리친건 히사히메였지 그 누구도 아니였으니까요. 그래서 고민하던 와중, 힘레먼 할아버지가 나타납니다.
"이샤야, 고트뢰 놈 마차가 도랑에 빠졌단다. 좀 도와주거라. 마을 젊은놈들, 다 밥만 쳐먹지 이샤 하나만 못해요."
>>395 엘리는 간신히 서서 전투를 지켜봅니다. 인간들의 전투는 고블린처럼 맹렬하지도, 식인종처럼 우직하지도, 랫킨처럼 교활하지도 않습니다. 정말로 단조롭고 지루하고 어찌 보면 유치하기까지 합니다. 하지만, 그 단조로운 대열은 달려드는 적들을 단 하나도 허용하지 않습니다. 방패에 막히고, 방패병 뒤에 서 있던 경비가 단창을 내리쳐 머리통을 쪼갭니다. 배후에 서 있던 식인종 궁수들은 이미 몸통이 과녁마냥 고슴도치가 되어 쓰러졌고, 고블린 샤먼이 주술을 쓰려고 하지만, 에레야가 수첩을 꺼내더니 샤먼을 정죄합니다.
"신께서 가라사되, 삿된 말로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
그러자 주술을 외우려던 샤먼의 입이 사라지고, 석궁을 든 경비들이 고블린 샤먼에게 화력을 집중합니다. 그리고 구울이 달려들어 방패병 위를 타넘지만 단창 여럿에 꿰여 경비들과 함께 넘어지고, 다른 경비들이 단창을 더 꽂아 움직임을 봉쇄하더니 도끼나 망치를 든 경비들이 두들겨패 짓뭉갭니다. 식인종들이 엘리에게 비슷한 짓을 할 뻔한걸 생각하니 소름이 돋지만 지금은 그걸 신경쓸때가 아닙니다.
"나팔총사수! 앞으로!"
그 말과 함께 나팔총을 든 경비들이 방패병 사이사이에 서서 방패 위로 나팔총을 올립니다. 에레야는 마지막으로 달려드는 적들을 보면서, 계속 정지, 정지, 정지... 를 외우다, 그들이 가까워진 순간 외칩니다.
"쏴!"
꽈아아아아앙!!!!!
폭음과 함께 앞을 가리는 연기가 수로를 채웠다가 이내 사라집니다. 앞을 보면 수천개의 쇠구슬에 걸레마냥 너덜너덜해진 고깃덩이들이 널부러져 있고, 운 좋게 살아남은 이들은 종족을 가리지 않고 도망치기 바쁩니다.
엘리는 문득 뱀파이어들 사이에서 악명이 높았던 이단사냥 시기를 생각합니다. 인간들과 친하게 지내자, 최소한 괴롭히진 말자는 주장에 동의하지 않았던 일원들이, 수천명이 하나의 생명체처럼 움직여 쫓아다니니 못 견디고 죽었지요.
에레야는 고개를 끄덕이며 엘리의 말에 동의했습니다. 보통의 사교도나 식인종 떼라면 이 정도로만 손을 봐줘도 다 끝난 거라 볼 수 있지만, 엘리가 본 게 있는 이상 여기서 끝났다고 돌아갈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에레야는 무기를 정비하고 탄약을 좀 갈아두라고 명령하고, 병사들은 전투 이후 고요해진 지하수로 거점에서 마른 목을 축이고, 에레야는 거점에서 식인종들이 만든 온갖 불길한 토템이나 상징 따위를 보면서 혀를 찹니다. 준비를 모두 마치자, 에레야는 일어나서 경비들에게 명령합니다.
"자, 이제 앞으로 전진한다!"
그리고, 에레야의 말은 듣자마자 그 불길함에 소스라치게 온몸이 떨리게 만드는 기이한 목소리에 끊깁니다.
"아니, 그럴 필요 없다."
에레야가 반사적으로 나팔총을 꺼내 겨누고, 엘리도 강자의 기운에 그 쪽으로 고개를 돌립니다. 붉은 로브를 입은 사제, 엘리를 뱀파이어라고 귀빈 대접했던 그놈입니다. 겉모습만 보면 그냥 로브를 뒤집어쓴 수상한 놈 같지만... 에레야는 이단심문관의 타협 없는 신앙에 맞부딪치는 끔찍한 악의를, 엘리는 뱀파이어가 느끼는 강자의 아우라에 저놈이 보이는 것 이상임을 깨닫습니다. 사제는 엘리 쪽으로 고개를 돌리더니 그녀를 비웃습니다.
"이단심문관과 함께 싸우는 뱀파이어? 멍청하군. 네 년의 모습을 동족이 보면 어떻게 생각할 지 생각이나 해보았나?"
그리고는 로브를 벗고, 에레야와 방패병 뒤에 서 있던 경비들은 그 무시무시한 모습에 기겁해서 순간 뒷걸음질칩니다. 입가와 턱은 흥건한 피로 물들어 있고, 아랫턱은 알 수 없는 괴물의 것을 붙여서 바늘로 꿰맨 흔적이 역력합니다. 얼굴에도 뭔가 했는지, 얼굴을 고정하려는 목적으로 온 얼굴에 대못이 박혀있고, 눈은 벌겋게 충혈되어 있습니다. 사제는 엘리를 가리키고는, 에레야에게 거래를 제안합니다.
"뭐, 됐다. 뱀파이어는 하등한 이들의 피를 먹고 살지만, 동족의 피를 마시고 강해지니까. 난 너희들에게 관심 없다. 지금 당장 이 년을 여기 두고 물러난다면, 난 세스타우 성에서 물러나지. 그러니까 꺼져."
에레야는 잠시 고민하는 척하고, 말을 조금 늘입니다.
"피차 바쁘니 빨리빨리 대답하지. 그러니까..."
그리고 험악한 표정으로 짧게 끊는군요.
"...아니, 그냥 죽어."
꽈아아아앙!!! 에레야의 나팔총이 불을 뿜고, 사제는 뒤로 넘어집니다. 하지만 에레야는 이거로 끝나지 않을 것임을 잘 알아서, 경비들에게 외칩니다.
"석궁!"
슉, 슈슉! 볼트가 바람을 가르고 날아가 쓰러진 사제의 다리와 발을 찌릅니다. 하지만 사제의 몸은 그러거나 말거나 부글부글 끓으며 이상 증식하더니, 다시 일어납니다... 팔다리가 비대해지고, 머리가 세 갈래로 분리된 괴물, 이제는 더 이상 인간의 흔적조차 보이지 않습니다.
'아아으, 부끄러워요~ 그런 과거는 적절한 처리를 해주세요~ 하지만, 그것도 경험이고 지식이에요. 바로 지금 그게 필요할 수도 있는 파편이 될 수 있겠어요'
그 영면이라는 의미를 저는 생각하고는 했어요. 때로는 죽음을 영원한 잠으로 비유하기도 해요. 수면과 죽음의 차이가 무엇인지 아시나요? 이 둘은 겉보기에 상당히 비슷하지만 좀 달라요. 하나는 다시 움직이고 지속하기 위해서 거쳐가는 것이고, 반대는 그대로 멈춰버리고 존재마져도 남겨지는 것을 멈추겠지요. 그리고 그 곰팡이의 효능은 두가지를 절반으로 나눈뒤 섞어 둔 것처럼 작동할 거에요. 약과 독의 차이는 투여량의 따라 결정되요. 특별한 예외가 없다면요
"그래요, 그래요. 자연을 거부한다기 보다는 우회한다고 하는게 맞을 것 같아요. 어쨌든 자연 그대로 두는 건 아니지요?"
"작은 무언가가 사실은 큰 것을 이루는 일부가 될 수도 있어요. 무언가를 바꾸기 위해선 차근차근, 하나부터 시도해가는 거에요. 퍼즐 조각을 하나씩 자리에 놓아서 그림을 완성해야 해요"
정말 자연의 법칙을 거부하려면 사령술로 가짜 생명이라도 부여하는 것이 좋을 것 같지요? 아무튼, 이 여성 분을 도와드려야 겠어요. 방식이 초래할 것들... 고려해야 하는 것. 하지만 어때요? 이론도 중요하지만 그 이론이라는 건축물의 구조를 지탱해줄 실습이라는 기둥과 지지대가 필요한 걸요. 이 여성분은 그것을 시도해보기에 알맞는 것 같아요. 이대로 두어도 좋은 결말을 맞이 하지는 못하실 것 같아 보여요, 그렇다면 할 수 있는 것을 하고, 더 좋은 변화에 이르는 것에 닿도록 해보는 것이 더 좋지 않겠어요?
원래부터 그럴 생각이었는지 아니면 동의했는지, 에레야는 병사들을 뒤로 물립니다. 병사들도 살고 싶은지 걸음이 빨라지고, 엘리와 에레야만 앞에 남습니다. 엘리가 앞길을 막자 에레야는 자연스레 뒤에 서고, 괴물은 엘리를 보더니 피식 웃습니다. 뭐... 목소리가 그렇다는 이야기입니다. 얼굴이 세 갈래로 쪼개져서 지옥에서 올라온 꽃봉오리마냥 벌어졌는데, 미소를 지을 수 있을 리가 없죠. 엘리의 판단은 옳습니다. 엘리가 자기보다 훨씬 격이 낮은 이들 상대로는 정확한 연계가 없는 이상 얼마나 달려들어 찔러도 피 한번 쭉 빨고 다시 싸울 수 있는 것처럼, 이 괴물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렇다면, 이 괴물 입장에선 어떻게든 저 병사들을 공격하는 게 답입니다.
콰직,
괴물이 발에 힘을 주자, 묵직한 바윗돌에 발길이 파입니다. 그리고 엘리에게 달려들고, 엘리도 동시에 달려듭니다. 괴물은 엘리를 공격할 것처럼 양 팔을 뻗고, 엘리가 당연히 반격하려고 몸을 비틀자... 엘리는 뒤늦게 이 괴물의 진정한 수를 파악하고 눈을 크게 뜹니다.
뻐억!!!!
엘리가 자신의 팔을 붙잡고 돌려고 하자, 그대로 밀쳐 엘리를 날려버리고 병사들에게 달라붙습니다. 이 녀석, 엘리만큼 빠른 주제에 엘리보다 힘도 강합니다.
"으아악! 끄아아아악!!!"
"이런 씨이바아알!!!"
병사들의 대열이 한도를 한참 넘어선 괴물의 돌진에 무너지고, 방패병을 짓밟고 들어간 괴물이 병사들을 난도질하려 들지만, 바로 직전에 정신을 차린 경비병들이 단창으로 괴물의 팔을 찌릅니다. 하지만, 그 괴물은 다섯 개가 넘는 단창이 박혔는데도, 경비들이 갑옷을 입은 자신의 몸무게까지 이용해 이를 악물고 지탱하는데도 그대로 나가고, 불발된 나팔총을 어떻게든 고치려던 경비에게 다가갑니다.
"오, 오지 마! 오지 마! 으아아아악!!!"
서걱
괴물이 나팔총병의 목을 그어버리고, 같이 싸우던 경비들의 얼굴에 동료의 따뜻한 피가 묻으며 공황 상태에 빠집니다. 에레야도 구경만 할 순 없기에 외칩니다.
"그에 도워단이 이르되, 하늘에 이르는 복락의 날에 가라지들은 땅에 떨어져 한 발짝도 움직이지 못하리라!"
힘레먼 할범은 포치에게 손짓하고, 또 '뼈다귀'는 기가 막히게 알아들은 포치는 꼬리를 흔들면서 힘레먼 할범 주위를 뛰어다닙니다. 서역인들이 데려왔다는 묵서가국 원산의 단모 치와와도 평소에는 광견병 걸린 것마냥 날뛰는 것이 어르신이 키우면 참 착하게 잘 따른다니 포치는 오죽하겠냐 싶기도 하지만서도, 개는 주인이 아니라 먹을 걸 따른다는 농담이 생각나 조금 서운하기도 합니다. 그래도 히사히메는 잘 알고 있습니다. 곧 이곳을 떠난다면 포치는 당연히 자기를 따를 것이란 점을요! 아무튼 포치는 마차를 옮기는 데 도움을 줄 수 있을 리는 없으니 가 보면...
"아이고, 하필 빠져도 이런 데 빠져!"
"행님요! 다음번엔 마차를 좀 작은 걸 사던지, 아니면 동네 사람들이랑 길을 넓히던지 합시데이!"
동네 장정들이 모여서 도랑에 빠진 마차를 당기고 있는데, 척 보면 빼기 힘들 법도 합니다. 당연히 그럴 것이, 도랑의 각도가 40도가 넘는 데다가, 마차의 크기도 작은 오두막 정도는 됩니다. 그래서인지 말에 더해 사람들도 앞에서 당기고 뒤에서 미는데도 빠질 생각을 안 하는군요. 뭐, 히사히메야 혓바닥 길어질 게 변명할 것도 없이 흡 하고 힘줘서 좀 쎄게 밀면 그만이겠지요.
상대는 고개를 끄덕입니다. 지금은 찬밥 더운밥 가릴 때가 아니기도 합니다. 지금은 전근대, 의학 학교에서 제대로 된 외과의사가 배출되기 시작한 지 백년도 지나지 않았고 아직도 머리 깎는 이발사가 외과의사도 겸하는 시대입니다. 다리가 부러진 여성은 이 정도 골절이라면 당장 다리를 잘라버려도 할 말이 없으니, 그저 아앨라나가 고통 없이 고치는 방법을 알고 있기를 바랄 뿐입니다. 아앨라나는 지팡이를 들어서, 가말라시엘의 제안대로 그 힘을 이용해 고쳐보기로 합니다. 심호흡을 하고, 아앨라나는 아주 잠깐, 가말라시엘의 의지를 조금 더 폭넓게 받아들입니다. 그리고, 가말라시엘의 명령이, 그 악마를 따르는 이 시대 유일의 사도 아앨라나의 입으로, 이 세상에 전해집니다.
דיין פיס וואַקסן צוריק.
아앨라나 그녀 자신도 이해할 수 없는 속삭임과 함께, 조난당한 여자의 부러진 다리가 검게 물듭니다. 그 여자는 아앨라나를 바라봅니다. 무언가 이상한 것에 빙의된 것 같은 눈동자, 점점 내 것이 아닌 것처럼 변해가는 다리, 사라져가는 감각에 당황해서 번갈아 보지만 너무 늦었습니다. 혹시 내가 부탁할 사람을 잘못 골랐나 벌벌 떨지만, 어쩌겠습니까. 그녀에게 선택권은 없었습니다.
가말라시엘이 다시 자신의 은거지인 지팡이로 물러나고, 정신을 차린 아앨라나는 그녀의 다리를 내려다봅니다. 다리는 말끔하게 나았습니다. 마치 말의 다리처럼... 아니, 문자 그대로 말의 다리처럼 변했습니다. 여자는 완전히 사라진 통증, 말처럼 변해버린 자신의 다리를 내려다봅니다.
"이, 이게 무슨..."
어쩌면 악마의 농간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는 상황, 하지만 그녀는 분노에 빠져 따지거나 공포에 빠져 도망치는 대신 눈을 빛내며 감사를 표하는군요.
"...대, 대단해요!!! 어, 어떻게 이런 일을 한 거죠?! 사람의 다리를 말의 다리로 만들다니! 검은 숲에는 정말 강한 마녀가 산다는데, 호, 혹시 당신인가요?!"
귀인국에서는 주로 바깥활동을 할때 마차보다는 가마를 이용했느니라. 지형적인 이유로 마차로만 움직이면 다닐 수 있는 곳이 제한되기 때문이기도 했으나 그 이상으로 어지간해선 숙련된 가마꾼이상으로 그런 돌투성이 지형을 건너는 것에 특화된 이들이 없기 때문이기도 하느니라. 그렇기에 기실, 이런 것은 처음이니라!!! 무엇이냐 저것은!!! 뭔놈의 마차가 저리 무식하게 크단 말이더냐?! 이건 마치 애영지... 아니 이미 집이 아니더냐!!!! 이렇게 커다란 마차라면 안에는 국서라도 타고 있는 것더냐?!
"비키거라 비켜!!! 그냥 짐이 하는 것이 빨라보이느니라!!!"
장정들을 물리고 가볍게 힘을 줘 마차를 들어올렸느니라. 으음, 목재가 좋아서 그런지 무게는 그리 엄청나진 않은 것 같구나! 짐이 타기에는 다소 너무 나약해보이니 일단 넘기도록 할까.
>>414 엘리는 암살쥐에게서 빼앗은 녹색 단검을 듭니다. 이거에 찔린 암살쥐의 목은 환부가 초록색으로 발광하며 썩어들어감과 동시에 타들어갔고, 자폭쥐들도 이것 앞에서는 무력하게 쓰러졌습니다. 물론 칼을 맞으면 일반적인 생명체는 죽습니다. 하지만, 이건 다릅니다. 엘리 같이, '일반적이지 않는' 생명체에게도 통하는 악마 같은 무기입니다.
뭐라도 해보라고?
에레야의 선언 덕분에 다른 건 몰라도 저 괴물의 속도만큼은 확실히 느려졌습니다. 그래도 뱀파이어는 뱀파이어, 엘리에게 죽어나갔던 다른 식인종들이나 랫킨과는 다르게 엘리가 뭘 하려는 건지, 얼마나 빨리 달려오는지는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건 아무것도 바꾸지 못합니다. 알고 당하나, 모르고 당하나, 결국 '당한다'는 건 똑같습니다. 엘리는 씩 웃고, 달려듭니다.
그래, 뭐라도 해볼게.
제아무리 괴물이라 해도, 제아무리 불경한 힘으로 축복받았다 해도, 그 근본은 강해진 수많은 근육 하나하나의 협응으로 이뤄질 뿐입니다. 그 말은, 운동 수행에 치명적인 부위를 찌른다면 당해낼 재간이 없다는 뜻입니다. 뱀파이어의 본능으로, 일족의 교육으로, 수많은 사냥 경험으로, 엘리는 인간 비스무리한 놈들이라면 어딜 찔러야 병신이 되는지, 어딜 찔러야 제일 고통스럽게 죽는지 잘 압니다.
철퍽!
"크웨엑!!!"
엘리가 무릎을 찌르자, 안 그래도 칼이 찔리면 세상이 노래질 정도로 아픈 무릎에 녹색 단검의 작열통까지 더해지며 끔찍한 고통이 괴물의 광기를 잠시 짓누릅니다. 그 다음은 어깨를, 그 다음의 다음은 척추를 노려 찌릅니다. 이 세상에 육을 빌려 존재하는 이상, 육체가 정신을 지배할 순 있어도 정신이 육체를 지배할 순 없습니다. 어떻게든 멀쩡한 한쪽 다리에 체중을 실어 서 있으려던 괴물은 이를 악물고 버티려 합니다. 하지만, 이 괴물이 불가해한 공포가 아니라 정신만 차리면 극복할 수 있는 또다른 적임을 목도한 경비들이, 용기를 얻어서 도끼와 망치로 나머지 다리를 찍어버립니다.
"뒤, 뒤져!"
괴물의 무릎이 우드득, 하며 꺾이면 안될 방향으로 꺾이고, 괴물의 자세는 무너집니다. 만세! 경비병들은 사기가 충전해서 이 괴물에게 달려듭니다. 그도 그럴 것이 이런 괴물을 죽였다는 경험은 언제 해보겠습니까? 경비들은 도끼와 망치로 괴물을 마구 내려치고, 단창을 꽂았던 경비들은 허리춤에서 단검을 꺼내 괴물을 푹푹 찌릅니다. 엘리도 뭔가 해냈다는 생각에 녹색 단검으로 찌르면 정말 아플 법한 부위를 골라서 찌르려는데... 뭔가, 경비들의 눈이 이상합니다. 눈이 붉게 물들고, 표정은 기이할 정도로 웃고 있습니다. 엘리는 방금 전에 이걸 본 적이 있었는데... 라고 생각하다, 이게 고블린들이 주술에 광폭화되었을 때임을 생각합니다. 그리고 거기에 생각이 닿자마자...
간만에 힘 좀 써보기로 한 히샤히메가 장정을 툭툭 치자, 장정은 마치 곤장을 옆구리에 맞은 것처럼 고통스러워하며 옆으로 물러납니다. 히샤히메의 힘을 잘 아는 다른 장정은, 행여 히샤히메의 힘 때문에 말까지 마차에 매달려 올라갈까 황급히 말과 마차를 묶은 줄을 풉니다. 그리고 마차주인 고드뢰는 대머리에 송골송골 맺히는 땀을 닦으면서, 행여 히샤히메의 힘 때문에 마차가 개박살날까 벌벌 떨면서 바라봅니다. 장정들과 말이 주변에서 물러나서 한나절 힘 빼느라 지친 몸을 가쁜 숨을 몰아쉬며 회복하는 동안, 히샤히메는 잡을 만한 모서리에 양 손을 얹더니 힘을 줍니다.
흡.
히샤히메의 양 근육이 순간 팽창하고, 그녀의 몸을 지탱하는 등골의 근육이 수축하며 사람들이 오니를 상상할 때마다 생각하는 무시무시한 괴물의 얼굴이 등근의 형태로 나타납니다. 마차의 모서리는 히샤히메의 무시무시한 손아귀힘을 이기지 못해 콰직, 하고 손아귀의 형태대로 파고들어가고... 쪼그려 앉은 히샤히메가 구부린 무릎을 펼치자, 히샤히메는 기이한 동방의 도술을 선보입니다. 기대하시라!
마차가 하늘에 붕 뜨는 마술입니다!
서커스의 속임수도 그 무엇도 없는, 우월한 완력과 마법이 도저히 구분되지 않는 경지에 장정들이 입을 떡 벌립니다. 마차 모서리가 박살난 고드뢰는 울다가 웃다가 난리도 아니지만요.
>>423 에레야가 이렇게 절박하게 외쳤던 적이 없습니다. 심지어 불타서 다 쓰러져가는 여관에서도, 엘리에게 여유롭게 여기서 싸우면 너 반드시 죽는다고 말했던 그 이단심문관이요. 그 말은, 정말 어지간히 큰일난 게 아니란 소리죠. 에레야 휘하의 이단심문소 소속 방패병들은 이미 에레야를 둘러싸고 있고, 석궁병과 나팔총병도 기이할 정도로 폭력적으로 돌변한 동료들을 보고 뒤로 물러난 상태입니다. 뭔가 이상합니다. 도시를 지키기 위해, 아니면 이번 주 급료를 삭감 없이 제대로 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마치, 폭력을 위해 폭력을 휘두르는 것 같습니다. 에레야는 흉갑에 새겨진 철십자 인장에 왼손을 얹은 채 조용히 기도문을 암송하고, 이 폭력성의 영향에서 아슬아슬하게 벗어난 경비병들은 언제 도망치게 해주나 발을 동동 구르며 에레야만 쳐다봅니다.
"죽어! 죽어! 죽어!"
"크하하하하하하하!!!"
괴물 위에 올라탄 경비병들이, 하나 둘 그 괴물의 몸속에 파고들어갑니다. 피에 침식하는데도, 괴물의 피가 덩굴처럼 엉겨붙으며 그들의 팔다리를 집어삼키는데도, 기쁘게 폭력을 반복합니다. 죽어! 죽어! 죽어! 죽으라고!!!!! 간신히 기도를 마친 에레야, 간신히 빠져나온 엘리는 폭력에 사로잡힌 경비들을 봅니다. 처음에는 괴물을 찌르던 경비들이, 이제는 피웅덩이 속에서 헤엄치는 듯 하다가... 어느 순간, 더 이상... 누가 죽으라고 말하는 것인지 구분되지 않을 정도로, 괴물과 한 몸이 됩니다.
"죽어! 죽어! 죽어! 죽어! 죽어!!!!!!!!!!!!"
눈 앞에 드러난 것은, 에레야의 신앙과 엘리자베스의 혈통을 모두 모독하는 무언가입니다.
인간보다 반은 더 큰 키, 무시무시하게 벌어진 어깨, 매끈한 유선형의 머리, 그리고 어디든 날아갈 수 있는 날개. 엘리자베스 바토리 블라드 체페슈는 이 형태를 잘 알고 있습니다. 인간들이 진정으로 두려워하는, 뱀파이어 중에서도 선택받은 뱀파이어만이 취할 수 있는 진정한 형태입니다. 이 사제는, 뱀파이어들만이 알아볼 수 있는 그 아름다운 형체를 모독하고 있습니다.
에레야의 눈도 떨립니다. 심장 등 필수 장기, 뼈를 제외한 모든 살덩이들은 갈려나가 걸쭉하고 끈적하게 엉겨붙은 피죽으로 변했고, 심장이 한 번 고동할 때마다 그간 저 괴물이 잡아먹었을 수많은 이들이 죽기 직전 지었던 표정이 와류 속에서 생겨났다가 사라지기를 반복합니다. 살아있지 말아야 할 이들 중에서도, 진정 살아있지 말아야 할 자.
에레야는 엘리를 제외한 남아있는 이들에게 명령합니다.
"이 작전은 실패다! 모두 후퇴해! 신전으로 가서 비상 사태라고 알려!"
그러자, 방패병들이 일사불란하게 나가는 동안 석궁사수와 나팔총사수들은 걸음아 나 살려라하고 도망칩니다. 하지만, 불운한 방패병 하나가 그 괴물의 손아귀에 잡힙니다. 방패병은 붙잡힌 상태에서도 메이스로 저항하지만, 그 괴물이 세 갈래로 쪼개진 머리로 방패병을 그대로 삼켜버립니다. 그 안에서, 무언가 저항하는 듯 뒤틀리지만, 이내 괴물이 자신의 배를 강타하자 침묵합니다. 에레야는 쯥, 하고 혀를 찹니다.
"살다살다 뱀파이어하고 편 먹고 싸우다 죽게 될 줄은 몰랐군."
싸울 생각이라면 조심하십시오. 대체 어떻게 인간이 이 경지에 이르렀는지는 모르지만... 아무리 모독적이라도, 이 괴물은 뱀파이어의 진정한 형태를 취하고 있습니다!
아 그리고 공지할게. 지금처럼 사람이 적다면 하루 1개를 넘어 합이 잘 맞으면 4-5개도 진행할수 있긴 한데 사람이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나도 사람이라(손가락에 챗gpt 달렸으면 좋겠다 ㅜㅜ) 진행레스가 내가 공언한대로 하루 1개로 제한될 가능성이 높아. 그러니까 참고해줘!
이단심문관, 이단심문관과 그 아래에서 이끄는 수많은 병력들과 정보망은 그 사제가 불경한 세상에 몸을 담았을 때부터 무슨 대가를 치르고라도 도망쳤던 공포의 대상입니다. 이단심문관은 신의 권능으로 심판을 행했고, 병력들은 항상 어둠에 숨어살 수밖에 없었던 그의 부하들과 협력자들을 잔인하게 찢어발겼고, 정보망은 물리적인 그물보다도 더 무시무시한 그물이 되어 사제의 온 몸을 옥죄곤 했습니다. 이들은 자비도, 타협도, 후회도 없었습니다.
뱀파이어, 뱀파이어는 그가 어릴적부터 동경했던 진정한 '생득권자'이자 먹이사슬 최상위였습니다. 어둠 속에서 암약하면서, 온갖 인간들을 가축처럼 사역하고 부릴 권리를 지닌 존재. 그래서 되고 싶었습니다. 온갖 연구를 다 했고 안 해본 방법이 없습니다. 이론적으로 그럴싸한 방법부터 척 봐도 사기가 분명한 방법까지, 모든 것을 시도했습니다. 그럴 만큼 되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아닙니다.
이단심문관도 그에게는 발라먹을 가시가 조금 많은 생선처럼 보이고, 뱀파이어마저도 감히 그의 하위로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누구를 먼저 공격할까 고민하던 그 형체는, 그간 어둠의 영역까지도 거침없이 쳐들어오던 이단심문관에게 쌓인 울분을 먼저 풀기로 합니다. 수많은 이들의 가죽을 엮어 만든 날개를 펼쳐 올리고는, 그간 올려다보며 도망쳤던 이단심문관을 이제 쫓으며 내려봅니다. 반대로 에레야는 항상 태양신에 맹세할 때만 올려다보던 하늘을, 이제는 저 끔찍한 괴물을 보고자 올려다봅니다.
이거 진짜 죽겠는데?
자신에게 급강하하는 괴물을 바라봅니다. 에레야는 저게 달려오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뿐입니다. 피할 수는 없습니다. 눈을 감고, 신을 향한 자신의 헌신이 충분했나 생각하려는 그 순간...
키야아아아악!!!
엘리가 사제에게 달라붙어 암살쥐의 단검으로 날갯죽지를 찌르고 비틉니다. '승천'한 몸으로도 피할 수 없는 필멸의 고통에 사제가 비명을 지르며 몸을 뒤틉니다. 몸을 뒤틀며 비행 궤도가 변한 탓에 아슬아슬하게 공격을 피한 에레야는, 엘리와 사제가 지하수로 바닥을 구르는 것을 보고 달려듭니다. 그리고 신의 권능을 받아 빛나는 망치로 사제를 내려칩니다. 어떤 공격도 통하지 않을 것 같던 사제의 형체가 뒤틀리며 불안정하게 변하고, 고통을 넘어 신의 심판에 끌려가는 것 같은 공포에 사제가 비명을 지릅니다.
이익, 이이익!
사제가 뒤에 붙은 엘리를 끝장내려 하면 에레야가 망치로 후려쳐 방해하고, 에레야를 죽이려고 아가리를 내밀면 엘리가 대신 머리를 내밀어 할큅니다. 뱀파이어와 이단심문관이, 뱀파이어보다 더한 무언가에 맞서다보니 합이 잘 맞고, 에레야와 엘리의 머리에 똑같은 생각이 스칩니다.
곰을 잡을 수 있느냐는 말에는 조금 당황하기는 했다만 그것 역시 왕으로서의 넓은 아량으로 본다면 이해하지 못할 것은 아니니라! 전래 동화중에는 그런 식으로 곰과 스모를 하여 동료로 만든 용사의 이야기도 있었으니! 짐 역시 그런 이야기는 아주아주 좋아하느니라! 헌데 이상하구나. 짐이 이리도 도움을 주었거늘 고드뢰녀석은 어찌 저리 울상인고? 고작해야 끝부분이 살짝 부서진 정도. 그정도야 고치면 그만이거늘! 전부를 폐기시키는 돈보다야 수리비용이 싸게 치이지 않겠더냐?
"실로 좋구나! 헌데, 이 마차는 무엇이더냐? 마을에서 이런 커다란 것을 탈만한 녀석은 못 봤던 것 같은데. 거인이라도 오는것이냐?!"
>>435 날개, 특히 익막은 조금이라도 찢기거나 구멍이 나면 제기능 하기 힘들어지는 신체부위입니다. 비록 이 시대에는 공기저항이네, 유체역학이네, 같은 대단한 물리학적 이해는 없지만, 집채만한 돛에 구멍이 뚫린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안 그래도 벌어진 상처가 있는 팔을 계속 쓴다면 상처가 어떻게 되겠습니까? 공포 속에서 희망을 잡자, 엘리는 이성을 회복하고, 그 이성으로 적절한 판단을 내렸습니다. 사제도 무슨 생각을 하는지 눈치채고 엘리를 내동댕이치지만, 엘리는 데굴데굴 구르다가 낙법으로 몸을 말더니, 그대로 튀어나가 다시 사제의 날갯죽지에 붙어 양 손톱을 길게 세우고, 날갯죽지를 뜯어버릴 기세로 손톱을 쳐박습니다.
하지만, 살과 뼈가 아닌 걸쭉한 수프를 휘젓는 것 같은 맥없는 느낌과 함께, 엘리는 무언가 잘못되었음을 느낍니다. 박혀 들어갔지만, 벨 수 없습니다. 찌를 수 없습니다. 마치 물을 베려는 것 같이 모든 공격이 의미없이 느껴지는 맥빠지는 감각. 마치, 붉은 슬라임을 칼로 베려고 한 것처럼 어리석게 느껴집니다.
빈틈.
고작 한 합, 많이 쳐봤자 세 합 정도만 낭비했을 뿐인데, 이것만으로 빈틈이 생겼습니다. 사제는 에레야의 망치 자루를 붙잡습니다. 엘리를 도우려던 에레야는, 홀로 시간이 멈춘 것처럼 그 자리에 정지한 워해머를 보고는 욕을 내뱉습니다.
"이런 썅."
쾅!!!!
욕 한마디 할 시간만 주고, 사제는 에레야를 망치째로 들어 내팽겨칩니다. 에레야는 벽에 쳐박혔다가 떨어지고, 그녀의 등골 대신 우그러진 흉갑은 제 기능을 하지 못하고 쪼개졌습니다. 에레야는 쿨럭거리며 내장 섞인 피를 뱉습니다. 그리고, 사제는 이단심문관 대신 뱀파이어를 먼저 처리하기로 방침을 바꿨는지, 엘리를 돌아봅니다. 엘리도 바보가 아니니 물러나려고 하지만...
스르륵...
살 대신 핏물로 이루어진 몸이 변하더니, 분명 엘리가 찌를 때만 해도 등이었던 곳이 이제는 어깨가 되었고, 엘리는 사제의 뒤가 아니라 앞에 매달린 형국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사제는 엘리의 것보다 훨씬 긴 손톱을 뻗어, 엘리를 양 손으로 찔러버립니다. 격통과 함께 엘리는 힘없이 위로 들어올려지고, 이단심문관에게 사냥당해 말뚝에 꽂혔던 놈들마냥 하늘 위로 솟습니다. 너무 갑작스러워서, 공포감도 없습니다.
그냥 도망칠 걸.
핏물로 이루어진 사제의 얼굴에서 소용돌이가 치더니, 순수한 기쁨으로 환희하는 그 혐오스러운 얼굴이 나타납니다. 그리고는, 그 얼굴이 세 갈래로 갈라져서 지옥의 꽃봉오리가 되어, 엘리를 집어삼키려 합니다. 이렇게 잡아먹히는군요. 이렇게 끝나는군요. 엘리는 눈을 감습니다.
지금 드는 생각은... 의외로 공포심도 아니고, 허무함도 아닙니다.
가소로움입니다.
뱀파이어, 그 중에서도 오직 선택받은 뱀파이어만이 취할 수 있는 진정한 형태. 한때 뱀파이어를 두려워하던 인간들이 지어주고, 뱀파이어를 한낱 모기 따위로 격하하려는 종교인들조차도 차마 깎아내리지 못하고 남겨둔 그 이름.
지금 여기서 엘리를 집어삼킨다고, 이 녀석이 뱀파이어가 될까요? 아니면, 뱀파이어의 노예라도 될 수 있을까요?
개소리죠.
유일하게 유감인 게 있다면, 지금 그 뱀파이어 참칭자에게 엘리가 잡아먹히게 생겼다는 것뿐...
펑!!!!!!!!
그 순간, 사제의 등에서 실명할 것 같은 빛과 함께 폭발이 일어납니다. 엄청난 폭압에 사제와 엘리는 동시에 밀려나고, 순간 육과 혼이 멀어졌다가 다시 붙는 것 같은 끔찍한 느낌에, 엘리는 신성력이 깃든 폭발임을 감지하며 땅을 구릅니다! 강력한 사제마저도 비틀거리고, 엘리는 갑작스런 신성력의 파동에 노출되어 발작처럼 온 몸을 떱니다.
피만 좀 충분하다면, 저 한심한 참칭자에게 진짜 뱀파이어의 형태를 보여줄 텐데, 진짜 밤의 군주로 선택받은 이의 위용을 보여줄 텐데. 하지만 엘리는 무력하게 벌벌 떨고만 있을 뿐.
그 때... 엘리의 입에 피가 쏟아집니다. 얼굴에 마구 튀는 피를 닦아내고 보면, 아편을 씹으며 간신히 기어온 에레야가 엘리를 내려다보며, 고블린의 잘린 머리를 쭉 짜서 피를 엘리의 입에 마구 쏟아넣었습니다. 하지만 그러고도 엘리가 못 일어나자, 에레야는 엘리의 턱을 억지로 벌리고 자신의 팔뚝을 엘리의 입에 물립니다. 그리고, 진지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는군요.
서운한 기색을 감지했는지, 마을 장정들은 울상이 된 마차 주인 고드뢰를 툭툭 치면서 일어나라고 핀잔을 줍니다. 여기서는 히샤히메와 그녀를 두둔하는 장정들이 객관적으로 옳습니다. 만약 히샤히메가 없었거나 돕지 않았다면, 고드뢰는 저 부서진 자국을 수리하는 데 드는 돈의 50배는 되는 인건비와 말 빌리는 값을 들여서 마차를 빼냈어야 할 겁니다. 그 사이에 마차를 못 써서 발생하는 일실수입 손해를 생각하면? 셈이 조금이라도 되는 인간이라면 일어나지 않을 일인데도 소름이 팍 돋습니다. 그렇기에 고드뢰도 감정을 접어두고, 집채만한 마차를 보고 히샤히메가 묻자 대답합니다.
"예에. 이샤힘 공주님은 키타이에서 오셔서 잘 모르겠지만... 루마족이라고, 이리저리 마차 타고 떠돌아다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 마차에서 살던 가족이 자기네 대에서 유랑 생활을 끝내고 싶다고 해서, 땅 몇 개랑 이 마차랑 맞바꿨습죠."
루마족이 뭔지는 모르겠지만, 이렇게 들으니 마차가 문자 그대로 집채만한 게 이해가 됩니다. 좁아터졌어도 일가족이 좀 참고 살만하려면 집채만해야죠! 히샤히메가 쓸 서역견문록 한 구절이 벌써 정해진 것만 같은 기분입니다!
//참고로 이 루마족은 알 수도 있겠지만 집시족(Romani people)에서 따온 거야!
만약에 이걸 신실한 신부가 들었다면 도끼눈을 떴을 거고, 감 좋은 이단심문관 귀에 들어갔다면 다짜고짜 칼을 들었을 겁니다. 하지만 여긴 검은 숲, 자기네 신 빼면 모두 잡귀일 뿐이라는 편협한 머저리들이 아닌 설명할 수 없고 이해할 수도 없기에 서로 내버려두는 신비가 머무는 장소입니다. 그렇기에 이 여자는 말의 튼실한 그것으로 변해버린 자신의 한쪽 다리를 만지면서, 이 지팡이에 봉인된 대악마가 아니라 강력한 마녀, 드루이드가 도와준 것이라 좋게좋게 해석하고는, 아앨라나가 다시 지팡이를 들어 자기 다리를 '회복' 시키려고 하자 달라붙더니 소리를 지릅니다.
"아, 안 돼!!!! 내 탐험의 증거가!!!!! 안 돼요!"
대충 알 것 같습니다. 가말라시엘의 힘을 빌린 결과로, 아앨라나는 부러져버린 다리를 '말의 다리'로 바꿔서, 한 쪽은 사람의 다리요 한 쪽은 말의 다리라는 부정할 수 없는 신비의 증거를 남겼습니다. 그러니 기왕 고쳐주는 거 제대로 고쳐주려고 다시 지팡이를 든 아앨라나의 선의를, 증거를 지워버리려는 시도로 이해했겠지요. 화내기는커녕 오히려 좋다고 달라붙고, 해주고도 욕먹을 것 같은 기분이라 제대로 고치려고 해도 안 된다고 뜯어말린다니. 검은 숲 바깥의 사람들이 전부 이런 별종인지는 아앨라나로서는 전혀 모를 일이지만, 적어도 이 여자만큼은 별종이 맞는 것 같습니다. 한참 동안이나 그러지 말라고 사정사정하던 여자는, 어느 순간 진정하더니 묻는군요.
"그건 그렇고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제 이름은 베스니, 음유시인이에요. 혹시 이름을 여쭤봐도 될까요?"
>>448 스스로를 바치는 자의 피는 달콤했습니다. 갓 성년을 넘긴 마을의 젊은 남녀들의 싱싱한 피, 숨을 다하기 전 마지막으로 문안 인사차 찾아온 노인의 숙성된 피, 그리고... 엘리자베스 바토리 블라드 체페슈, 뱀파이어에게 자신의 피를 판돈 삼아 마지막 도박에 나서려는 이의 피.
하지만, 엘리는 이런 피는 마셔본 적이 없습니다. 이단심문관의 피 말입니다. 솔직히 말해, 교단은 정말로 성가셨습니다. 이단심문관은 수많은 동족들을 꼬챙이에 꿰었고, 엘리의 가문은 처신을 잘했다곤 해도 이단심문관은 정말로 끔찍했습니다. 그런 이단심문관이, 자신의 팔을 들이밀고 피를 빨라고 합니다.
콰직
박혀 들어간 이빨 사이로 피가 샙니다. 끄윽, 으윽... 에레야는 힘없이 신음하고, 엘리는 피비린내 속에서 절박함을 음미합니다. 그 무시무시한 이단심문관도 피를 빨 수 있는 또다른 인간이라는 사실에 취해 피를 들이마시고, 에레야가 피가 너무 빠져나가 기절했을 때쯤 일어난 엘리는 뒤를 돌아봅니다. 비틀거리다 충격에서 회복한 사제가 그녀의 가슴에 손톱을 휘두르지만...
턱.
엘리는 허무할 정도로, 그 개고생이 무색할 정도로, 어이없게 그 손톱을 멈춥니다. 이제 소꿉장난은 여기까지. 엘리의 날개뼈에서, 손아귀처럼 말린 칼날이 살갗과 옷을 찢고 나오더니, 활짝 펴져 거대한 날개가 됩니다. 그리고 엘리의 손아귀도, 다리도, 발도, 아니, 온 몸이 거대해지고... 인간의 탈을 벗어난 엘리는, 거대해보이던 사제를 이제는 내려다보고, 그가 되고 싶었지만 영원히 되지 못할 어둠의 정점을 보여줍니다.
밤의 군주.
엘리자베스 바토리 블라드 체페슈, 고귀한 이명으로 세 번 찬양받고, 모든 괴이에게 세번 경외받을 이여.
베스니는 안나의 이름을 수첩에 받아적습니다. 안나, 라는 별칭은 안중에도 없고 아앨라나라는 본명에 팍 꽂힌 나머지 그것만 적고, 아앨라나의 외형도 일일이 기록합니다. 한참동안이나 기록에 열중한 베스니는 그제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쉽니다.
"히야! 덕분에 살았어요! 안 맞는 지도를 보고 가다가 잘못 떨어져서 다리가 부러졌을 땐 이렇게 끝인 줄 알았거든요! 그런데 이렇게 마음씨 좋은 마녀를 만나 얼마나 다햇인지 몰라요! 아차차! 내 정신 좋 봐! 뭔가 보답을 해야지!"
베스니는 주머니를 뒤집니다. 하지만 준비성이 영 꽝인지 깃펜, 양피지 두루마리 따위의 생존술 상황에서는 영 필요성이 의심스러운 것들만 우수수 떨어지고, 지팡이에서 가말라시엘의 깊은 한숨이 들려오는 것 같습니다. 마침내 찾아낸 것은 버덕버적 마른 육포 한 단, 베스니는 자신만만하게 건넵니다.
"악어 육포에요! 한번 드셔보세요!"
꼬르르르르르르륵
...라 말하기가 무섭게, 베스니의 배꼽시계가 우렁차게 울립니다. 그녀의 얼굴이 빨개지고, 가말라시엘이 비웃듯 안나에게 말을 건넵니다.
"구해줬더니 밥도 내놓으라는군요. 하지만 사도님이라면, 분명 한 끼를 차려주겠죠. 친절이라! 필요하지만, 악마의 힘을 구하는 이들에겐 사라진 덕목이죠."
>>456 뱀파이어가 동족을 집어삼키는 행위는 특별한 의미를 지닙니다. 사제가 뱀파이어에 대해 유일하게 옳게 알고 있는 것이라면, 뱀파이어는 인간의 피로 살지만 동족의 피로 강해진다는 겁니다. 가문의 가주가 너무 오랜 시간이 지나 지성이 마모되었을 때, 사전에 약속한 후계자가 그 피를 들이마셔 흡수하면 핏빛 계승이라 부르고, 큰 잘못을 저지른 뱀파이어를 처형할 때는 '재활용'이라 불러 사람 취급조차 안 합니다. 별 죄 없는 동족의 피를 전부 흡수하면, 그건, 별 대단한 건 아니고 살인이라 부르죠.
우드득
"끼이이익?!"
엘리는 사제의 어깨를 붙잡고 가볍게 비틀어 부숴버립니다. 그렇다면, 뱀파이어조차 아니고 인간도 아닌, 이 이도저도 되다 만 참칭자를 흡수한다면 그건 뭐라 부를까요? 잠시 고민하던 엘리는, 찢고 씹어 집어삼키는 기능만 남은 아가리로 어색하게 웃으면서 간단하게 결론을 내립니다.
뭐긴 뭡니까. 식사죠.
인간은 어린아이조차도 그간 먹은 빵의 갯수를 대답할 수 없고, 뱀파이어 역시 그간 피를 받아낸 인간의 수효를 셀 수 없습니다. 이건 재활용도 살인도 아닙니다. 엘리는 아가리를 쩍 벌려, 사제에게 다가갑니다. 아직 멀쩡한 한쪽 팔로 엘리의 턱을 치자, 되려 사제의 팔이 부서지고, 엘리는 사제를 들어서 걸쭉한 핏물을 마십니다. 꿀꺽... 꿀꺽...
저항하던 사제는 얼마 못 가 힘을 잃고, 살과 거죽을 대체한 핏물이 빠지자 흉측한 뼈대와 장기만 보입니다. 결국, 사제는 자신이 잡아먹으리라 선언한 뱀파이어에게 먹히고, 음미를 끝마친 엘리는, 자신의 몸 어딘가에 새로운 장기가 숨쉬기 시작한 것을 깨닫습니다. 그것은 뇌처럼 생각하고, 심장처럼 맥동하고, 혀처럼 음미합니다. 일족의 주치의가 가끔씩 생길수도 있다던, 공생성 기형종양 같군요. 쉽게 말하면, 엘리가 죽음에 이르면 그녀의 몸 속 장기를 대체해 두번째 삶을 줄 무언가라는 겁니다.
보통 이 종양은 뱀파이어가 인간을 과식한 결과 영양 과잉으로 생겨나는, 인간으로 치면 비만에 대응하는 질환의 일종입니다. 즉 사제는 엘리에게 있어 좀 쥬씨한 인간이었을 뿐이죠.
...그런데, 쓰러져 뼈와 장기만 남은 사제의 시체에서 위장만 꿈틀대고 있습니다. 그러고보니, 이 사제가 방패병을 통째로 주워먹었네요.
>>459 밤의 군주의 위용이 무색하게, 엘리는 궁상맞게 쪼그려앉아 위장을 가릅니다. 그나마 다행인 점이라면 엘리의 손톱이 워낙에 날카로워진 덕분에 그냥 ㆍ해도 잘 잘려나갑니다. 그렇게 위장을 열면, 손 하나가 위장 밖으로 나오더니 곧이어 소화액으로 범벅이 된 몸이 기어나옵니다. 갑옷 덕분에 아직 안 녹은 모양인데, 엘리는 배려 차원에서 좀 더럽긴 하지만 수로에 던집니다. 뭐, 똥물이 아무리 더러워야 염산통보다 낫습니다.
그런데, 누군가 엘리의 커다란 손을 잡습니다. 내려다보면, 그새 정신을 차린 에레야입니다. 에레야가 이리 작게 보이는 것에 신기해할 새도, 이단심문관 앞에서 이걸 보였다는 거에 뻘쭘해할 새도 없이...
"카르밀라?"
...엘리에 대고 전혀 모르는 사람 이름을 부르다가, 고개를 떨구더니 한숨을 쉽니다.
"아니, 그 녀석일 리가..."
떨리던 목소리와 그리운 표정을 그치고, 에레야는 엘리에게 조언합니다.
"나갈 때는 그 모습 말고 인간 비스무리한 모습으로 돌아와라. 애초에 나가지도 못할 거고, 입장 바꿔서 너가 성직자라면 그 모습 보면 무슨 생각 들지는 이해가 가지?"
>>461 "뭐든 안 챙겨주겠니? 욕조도 하나 놔 주고, 바람도 통하게 해 주고, 뭐든 다 해주지..."
에레야는 엘리가 지하수로 똥물에 던진 병사를 끌어냅니다. 소화액은 다 닦였는데, 상처가 잔뜩 난 상태로 똥물에 들어갔으니 상태가 영 좋지 않을 것은 확실합니다. 하지만 지금 당장은 에레야도 해줄 수 있는게 없기에, 에레야는 수통을 꺼내 깨끗한 식수를 좀 부어줍니다. 그리고는, 잠깐 생각났다는 듯 말을 끝맺습니다.
엘리가 하플링 여급에게 했던 말을 그대로 돌려줍니다. 그건 사실입니다. 엘리는 태양 아래에서 떳떳하고 싶은 뱀파이어입니다. 다만 지금 상황에서 떳떳하게 바깥으로 나갔다간 산채로 타죽는다는게 문제죠. 에레야는 농담조로 꺼냈던 말을 거두고... 엘리가 따지기가 무섭게 폭탄을 온몸에 주렁주렁 매단 병사들이 들어옵니다. 표정이... 당장 에레야가 명령만 내리면 스스로 폭발사산하게 생겼군요. 에레야는 고개를 저으며 그들을 진정시킵니다.
"다 끝났어. 진짜로. 다른 병사들 불러와."
병사들이 들어와서 현장을 수습하기 시작합니다. 엘리는 가장자리에 앉아있고, 에레야는 엘리에게 물린 자국을 붕대를 감아 숨긴 채 현장의 증거를 어떻게 수집해야 할지 일일이 감독합니다. 저 태피스트리는 찢지 말고 못째로 뽑아서 빼내라, 이 피그림은 씻지 말고 수행하는 환쟁이를 불러 모사해라, 사제의 시신을 보존해야 하니 6번 보존독을 가져와라, 온갖 명령을 다 하고 병사들은 그걸 해냅니다. 에레야는 어느 정도 작업이 알아서 진행되기 시작하자, 엘리에게 가까이 가서 옆에 앉습니다. 그리고 어린 병사가 목이 너덜너덜하게 뜯긴 식인종을 끌어내다가 머리가 끝내 찢어져 눈이 마주치자, 못 버티고 수로에 구토를 하는 것을 씁쓸하게 바라보는군요.
"나도 이 일 말고 다른 일 했으면 저렇게 멀쩡하게 반응했을텐데."
그렇습니다. 피가 온 사방에 튀고, 내장이 쏟아지고, 산 채로 사람이 잡아먹힌 이 현장은 일반인이 보면 절로 구토가 나올 광경입니다. 하지만 에레야는 오랜 세월동안 이것보다 심한 걸 너무 본 나머지 마음이 무뎌졌고, 엘리는 무언가, 자신이 뱀파이어임을 고려해도 정말로, 정말로 아무렇지 않음을 느낍니다. '밤의 군주'로서의 자신을 너무 드러내면, 언젠가 개개의 자신을 잊고 뱀파이어라는 종족의 한 개체, 즉 사냥꾼의 본능만 남는다고 가주가 경고했는데 이 때문일까요. 아무튼 씁쓸하게 앉아있던 에레야는 엘리에게 묻습니다.
"그냥 묻는 말인데, 혹시 친한 사람, 친척, 또는 건너건너 아는 사람 중에 카르밀라라는 뱀파이어가 있나?"
고드뢰는 손가락으로 서쪽 멀리를 가리킵니다. 서쪽은 강 하나를 두고 다리가 놓여져 있는데, 집의 흔적도 없이 길만 쭉 뻗어 있습니다.
"다른 마을에 제가 가지고 있던 땅을 팔았습니다요. 바츨라우 마을의 노른자위 땅은 큰형이 상속받고, 다른 마을에 있는 땅은 제가 받았습니다. 그 땅도 나쁜 건 아닌데, 다른 마을까지 가서 경작하기도 좀 그렇고, 그 동네 습속도 모르는데 제가 괜히 지주 노릇한다고 날뛰다가 칼 맞을까 루마족 사람들한테 팔았습니다. 멀리는 아니고, 저기 서쪽으로 하루 정도 걸어가면 나옵니다요."
"에유, 좋댄다. 또 땅자랑 하네."
장정들은 고드뢰의 설명에 핀잔을 주지만, 그렇게 진심으로 경멸하는 눈치는 아닙니다. 그도 그럴 것이, 히샤히메는 귀인국 제왕교육 당시에 졸면서 들은 내용 중에 '왕이 잘 살피지 않으면 지주와 영주들이 농민을 쥐어짜니 조심해야 한다'는 내용을 기억했는데, 고드뢰는 바츨라우의 땅들 중 상당수를 명목상 소유한 지주인데도 딱히 부자 티를 안 내기 때문입니다. 아무튼 고드뢰가 '자랑 좀 하게 냅둬라!'라고 말하면서 장난으로 투닥대는 동안, 히샤히메는 무언가 자기 발을 간질이는 것을 느낍니다.
에레야는 그렇게 말하며 쉽게 수긍하지만, 말과는 다르게 에레야의 표정에서는 씁쓸함이 쉬이 가시지 않습니다. 그 씁쓸함은 그리움이 남긴 얼룩처럼 쉽게 지워지지 않더니, 한 경비가 다가와서 여관에서 수습한 엘리의 옷을 앞에 내려놓자 바뀝니다. 가면, 붕대, 그 외 기타등등. 에레야는 그걸 그대로 엘리에게 넘기고, 따라오라고 손짓합니다.
그녀는 숲을 탐구하는데 열성적인 것 같아요~ 저는 그녀의 중요한 참고 자료가 되고 있는 것 같아요. 저는 제가 숲에 사는 마녀라고 한다면, 틀린 것은 아니지만 올바른 것도 아닐 거에요. 진정한 숲의 마녀 님은 따로 있으니까요! 저는 그 분 아래서 생활했고 존경하고 있어요 그래서 저는 그녀의 말을 칭찬으로 받아들었지만 실제로는 어떻게 될 수 있는 걸까요?
"그런 사연과 상황에 있으셨으니 그렇게 느끼시는 것도 그렇겠네요"
좋은 운세와 나쁜 운세가 공존하는 상황을 보았다고 할 수 있겠지요? 제가 그녀를 알지 못했다면 그녀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굳이 상상할 필요는 없을 거에요
육포 자체는 특이할 것이 없지만 그래도 그것은 저의 관심을 끌어당겼어요. 보통 그런 것들은 가축으로 주로 키우는 동물의 고기를 가공하여 만들지만 악어의 고기로 만든 육포를 먹어볼 기회는 흔하지 않아요!
"악어의 고기로 만든 육포인가요? 흥미롭네요~"
저는 그녀가 보답으로서 건네주는 육포를 받아서는 곧바로 약간 먹어보았어요. 어딘가 모르게 조류의 고기와 비슷한 맛이 나는 것 같아요. 어류가 좀 섞여 있는 것 같기고 하고요. 그렇지만 악어는 둘다 아니에요
"생리적인 현상이니까요. 사람의 장기는 솔직해서 숨기지 않아요. 일부 장기는 그렇지 않기도 하지만요"
부끄러워하는 그녀의 모습을 앞 두고 저는 자연스러운 일이니까 너무 부끄러워 할 필요는 없다는 식으로 말했어요. 그렇지만 그녀의 보여주는 행동도 이상한 것은 아니에요. 부끄럽다고 느끼는 것은 부끄러운 거에요. 실체와 감성의 영역의 차이라고 해야할까요
>>471 "내가 만약 일을 편하게 하는 부류라면, 여기서 사건이 종결되었다고 하고 너랑도 작별이다. 그런데 난... 다른 인간 말을 빌려서 '쓸데없이 피곤하게 일 벌리는 년'이자 '문제를 해결하려고 또다른 문제를 만드는 답답이'라서 말이야."
에레야는 그렇게 말하면서 계속해서 지하수로를 나아갑니다. 중간에 거대한 지하수로 악어가 보이지만, 경비병이 악어를 배부르게 만들어 식욕을 없애는 겸해서 시체를 처리하려고 랫킨과 고블린 시신들을 쏟아붓고 있어서, 악어는 더 이상 위협이 되지 않습니다. 개처럼 먹이 주는 사람한테 충성은 안 하더라도, 자기한테 잘해주는 놈한테 우호적으로 변하는 게 온 동물의 공통적인 심리라, 악어는 어째 좀 행복해 보이기도 합니다... 뭐, 어쨌든 중요한 건 위협이 되지 않는다는 겁니다. 엘리는 잠자코 에레야를 따라가고, 에레야는 뭔가 이상한 점이 있다고 말합니다.
"위에서 자꾸 살덩이들이 떨어지지. 그런데 이건 너무 많아. 네가 도와줬던 그 남자도 나발을 쉽게 안 부는 게 좀 수상하고. 하지만 지금 이야기할 수 있는 건 여기까지."
에레야와 엘리는 지하수로 끝자락에 도착합니다. 에레야가 말한 대로, 엘리가 쓰던 안전가옥은 지금 험악한 거한들이 앉아 있군요. 엘리의 진가를 알아보았으니 딱히 죽일 듯 바라보진 않지만, 아무튼 힘들어서 그런지 표정 관리는 전혀 안 되고 있습니다. 에레야는 그들을 내보내고, 여러번 빨고 햇빛에 바짝 말려 보송보송해진 엘리의 원래 옷을 건넵니다.
"이거 입어. 그리고 다음번에는 그런 식으로 피튀기게 싸울 거면 옷을 빨간 걸 입던지, 아니면 세탁비는 네가 내라."
그리고 엘리가 다시 들어가면, 에레야는 설명합니다.
"지금까지 일 잘해놓고 이런 말 해서 미안하지만, 이단심문관과 뱀파이어가 친하다는 건 코메디라는 건 너도 알고 있지? 지금 상황이 그래. 우리가 같이 잘 싸웠어도, 어쨌든 난 '우연히' 뱀파이어와 조우해 공동의 목표 달성을 위해 잠시 싸웠고, 공동의 위협이 해소되자 즉시 적대했으나 수사력 부족으로 놓쳤다'고 기록해야 하니까. 그냥 보낼 순 없으니 보상은 주겠지만, 세스타우 성을 떠나던지, 아니면 나랑 일 하나만 더 하던지. 선택해줘야겠어."
>>472 베스니는 어색하게 웃으면서 주변을 둘러보더니, 사라지려고 합니다. 꽤나 부끄러웠던 상황인 것 같습니다. 나름대로 보답도 했겠다, 얘기도 충분히 했겠다, 무엇보다도 더럽게 쪽팔리겠다, 베스니는 말과 다름없이 변한 한쪽 다리와 함께 급히 떠나려고 몸을 돌립니다.
"그, 그럼 저는 이만!"
하지만, 그러자마자 베스니는 엄혹한 검은 숲의 현실과 마주합니다. 숲은 원래 그늘지고, 어둡고, 방향 감각을 상실하기 딱 좋은 곳입니다. 사냥꾼이나 숲지기처럼 직업 특성상 숲에 들어갈 수밖에 없는 이들을 제외하면 숲으로 들어가는 걸 최대한 자제했던 이유가 괜한 게 아닙니다. 나무들은 다 똑같이 수피가 어두운 색깔이고, 하늘을 봐도 수관에 산란되는 햇빛만 보이고, 돌들도 똑같이 이끼가 끼어 있고... 태어나서 기억이 시작됐을 때부터 이곳에서 살았던 아앨라나야 감과 소리 따위에 의지하면 길이 찾아진다지만 베스니 같은 초행자가 여길 그냥 헤쳐나간다고요? 베스니는 한참 동안 가만히 서 있더니 다시 돌아서서 부탁합니다.
"죄송합니다. 도와주세요..."
그리고 가말라시엘은 비웃듯 부연합니다.
"어느 선택을 하건 당신의 자유랍니다, 사도님. 왜냐? 당신이 안 도와줘도 당신의 평판은 나빠질 게 없거든요. 안 도우면, 이 사람 일주일도 못 가서 여기서 죽습니다."
엘리는 가면과 붕대를 칭칭 둘렀는데도 맨정신으로 버틸 수 없는 햇빛에 저절로 이가 악물리고, 온 몸에 태양빛 족쇄가 채워져 그녀를 감금합니다! 아까 전까지만 해도 밤의 군주를 자칭하던 그녀의 지성도, 속도도, 힘도, 체력도, 모두 그녀를 옭아매고 빨리 어둠 속으로 썩 꺼지라고 강요합니다. 엘리의 뱀파이어 혈통에 엮인 저주로, 지금의 엘리는 모든 능력이 '약함' 상태로 고정됩니다. 주의 바랍니다. 그러거나 말거나, 이 상황에도 엘리에게 아무런 악의도 가지지 않은 에레야는, 그녀가 '해야 할 일'을 설명합니다.
"세스타우 성은 한번 돌아봤지? 베르야 의복점이라고 찾아가서, '타운스픽의 주선으로 왔다'고 이야기하면 옷을 맞춰줄 거야. 어떤 스타일로 맞춰도 네 자유지만, 그 옷 입고 싸울거면, 특히 너 싸우는 방식 안 고칠거면 그냥 검붉은 색으로 바꿔라. 그리고 난 다음에는..."
에레야는 엘리에게 묵직한 돈다발을 던집니다. 딱 보니 팔 잘린 남자가 창고에 모아놨던 그 돈을 좀 나눈 모양입니다.
"이거로 여관 잡고 날 보내던지, 뭐 좀 먹던지 알아서 해. 이 돈은 걱정 마. 수색 참여한 경비들한테도 좀 먹여놔서 네가 돈 쓰는 거 봐도 입 닥치고 있을 테니까. 이해했나?'
저는 이제 이 자리를 떠나려는 그녀의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았어요. 그녀의 언행에 따라 이어지는 모습은 저의 시야에서 벗어나기도 전에 곧 멈춰버렸어요. 잠시 숲의 형상을 다시금 살펴보고는 마음에 바뀌었나 봐요. 아마도 짦은 순간 여러가지 생각이 들었겠지요. 그녀가 또 다시 위험하게 가능성은 부정하지 못할 이유가 있어요
"그래요, 사람들에게 이야기가 흐르기 위해선 이야기도 사람들에게 닿아야할 필요성이 있어요. 그래도 1주일이면 충분히 노력한 것 같아요"
저는 가말라시엘 님의 말에 수긍했어요. 그녀의 상처를 치유해주었으니 방금처럼 그녀는 스스로 원하는 곳에 가도록 남겨둘수 있어요. 그러한 이야기가 흐르던 그렇지 않던 저는 그다비 관심이 있지는 않지만, 마침 그녀가 도움을 원하기도 했으니까요, 이번에는 좀 더 그녀와 같이 있기로 했어요
"좋아요, 이미 한번 도와드렸으니 두 번도 별로 문제 없을거에요~"
저는 그녀의 요청에 고개를 끄덕이면서 가볍게 응했어요. 두 번까지 이어진다면 세번도 있을 수 있어요. 어쩌면 그 때는 얼마지나지 않아서 올수도 있겠지요. 이 만남은 어디까지 이어질 수 있을까요?
>>485 밤에는 휙휙 날아다니는 몸이건만, 낮만 되면 햇빛 만난 고로케마냥 말라 비틀어져 부서질 것 같은 몸이 밉습니다. 에레야 같은 인간들이 밤에는 너무 어두워서 앞을 못 본다면, 엘리 같은 뱀파이어들은 너무 밝아서 앞을 못 봅니다. 엘리는 잠깐이나마 태양의 저주가 덜해지는 그늘에 숨어서 방향을 잡은 후 의복점으로 걸어갑니다.
띠링~
"있어봐요!"
문에 걸린 종이 울리고, 귀찮은 표정으로 바느질을 하고 있던 여자의 목소리가 들립니다. 이상할 정도로 익숙해서 이상함을 느낄 새도 없이, 얼굴에 난 잔주름하며 희끗희끗한 단발까지 엘리가 목숨 걸고 함께 싸운 이단심문관과 비슷합니다. 의복점 사장은 가면부터 붕대까지 둘러싼 엘리의 꼴을 보고 묻습니다.
"...내 의복점은 그런 엑스페리몽 전반은 취급 안 하는데."
대충 좋게 말해 전위적이고 나쁘게 말해 괴악한 그 패션은 여기서 환영 못 받는다는 뜻 같은데, 그건 모르겠고 진짜 에레야를 닮았습니다.
>>494 "루마족? 알지. 알다마다. 그 무슨 이상한 부적 팔고 다니는 털쟁이들 얘기 아니냐. 그 마차 보고 신기해서 그러는 모양이구만.
힘레먼 할범은 그렇게 대답합니다. 히샤히메의 입장에서 루마족은 정말로 신기한 사람들이지만, 힘레먼 할범 같이 이 지역에서 평생을 살아온 사람에게는 그저 가끔씩 지나가는 신기한 종족 중 하나일 뿐입니다. 초록색의 길쭉한 몸에 흰 마디로 갈린 대나무도 이 지역에 들여온다면 정말 신기하다고 칭송받겠지만, 히샤히메가 살던 열도 지방에서는 "그게 뭐??" 소리밖에 안 나올 것이랑 비슷한 이치지요. 힘레먼 할범은 구수한 요리의 향기가 둘을 이끌 정도로 집에 가까워지자, 히샤히메에게 주의를 줍니다.
"루마족은 조심하거라. 그 놈들이 요술과는 연이 없지만, 눈 깜짝할 사이에 네 호주머니에서 무언가 사라지는 요술만큼은 최고란다."
히샤히메가 알아들을지는 모르겠지만, 이건 "그놈들은 도둑질에 일가견 있는 놈들이다"의 다소 직접적인 표현일 가능성이 큽니다.
엘야를 무서울 정도로 닮은 사장은 엘리의 말을 그렇게 정정하더니, 엘리를 유심히 바라봅니다. 워낙에 옷을 꽁꽁 싸매입은 탓에 쳐다보는 것만으로는 그다지 큰 정보를 얻을 수는 없겠지만 말입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쭉 본 그녀는 한숨을 깊게 내쉬더니 바로 누가 보냈는지 알아맞춥니다.
"에레야, 그 미친 년이 보냈구만. 그렇지요?"
에레야를 미친 년, 이라고 부르는 걸 보니까 꽤나 가까운 사이인 것 같습니다. 엘리가 인간 사회에 대해서는 좀 생소하긴 하지만, 이단심문관은 인간들 사이에서도 최소한 두려움 최대 존경을 받는 위치에 있는 이들인데, 이단심문관으로 일하는 에레야를 저런 식으로 부를 수 있는 건 분명 가까운 사이기에 가능할 일입니다.
"꼴에 언니라고 공짜로 벗겨먹으려고 하길래, 뱀파이어 손님이라도 주선해줄 것 아니면 절대 공짜로 일 안 한다고 말했어요. 그러니까, 댁이 어지간히 특별한 인간이 아니면 나한테 공짜로 뭐 얻어갈 생각 마세요."
...라고 말합니다. 이거 어째, "절대 안 돼"를 강조하려고 수사적으로 돌려 말한걸, 에레야가 그대로 받아서 되돌려 맥인 느낌입니다.
>>499 >>484 아앨라나는 일단 베스니가 가지고 있던 지도를 받습니다. 처음에는 검은 숲에서 사는 이들이 제작하는 지도 양식과 상당히 달라서 처음에는 생소했지만 금방 적응했고, 검으 숲 외부인이 만들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데도 꽤나 이 지역을 잘 반영하고 있다는 인상을 받습니다. 미시적인 냇가나 바위 등은 알 수 없지만, 지형이나 지류 등은 꽤나 잘 묘사했습니다. 여기에 바깥을 나돌아다니는 사람이라면 당연히 가직 ㅗ있을 상식을 조합하면 이 꼴이 나기도 힘들었을 텐데, 옆에서 지도를 보면서 쓸모없는 설명을 하던 베스니가 뭔가 이상한 이야기를 합니다.
"이 지도대로라면 서쪽에 큰 호수가 있어야 하는데, 아무리 가도 없는 거에요."
...이건 분명 검은 숲에서 가장 잘 알려진 뷔르트겐 호수를 얘기하는 것 같은데, 지도대로라면 동쪽입니다. 그렇습니다. 베스니는...
"사도님! 이거 길을 알려줄 게 아니라, 동서남북 보는 법부터 다시 알려줘야겠는데요? 분명 이 사람은 신의 간택을 받았을 겁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방위도 못 보는 인간이 여기 들어와서 살아있을 리가."
저는 그녀가 건네준 지도를 받아 들고는 살펴보았어요. 이 지도는 숲을 탐험하기에는 좋은 도구가 될 수 있겠네요. 숲은 그 빈도는 적지만 숲 자체가 지닌 매력을 알아보는 사람들의 손길이나 관심을 항상 받아왔어요. 그래서, 다녀온 사람들이 나뉘어진 경험과 지식이 한데 모아, 어울러진 결과가 아마 이것일 거에요. 이러한 양식은 낯선 곳으로 부터의 장소를 기억에 남겨두는 방식에 대한 신선한 경험이에요
"그러네요, 호수라고 한다면 멋진 곳을 알고 있어요~"
저는 그녀가 호수의 존재를 만나 볼 수 없는 이유 알 수 있었어요. 그녀는 방향을 잘 못 알고 있는 것 같아요. 처음에 올바르게 가늠하지 못하면 계속 틀어지는 것이기도 햬요
"와~ 그렇지도 몰라요. 세상은 궁극적인 가능성의 집합으로의 존재라고 할 수 있으니까요"
실수는 누구나 할 수 있어요. 하지만 실수가 아니라 처음부터 시도하는 과정 자체가 틀렸을 경우도 있지요. 그녀는 주로 방향을 어떻게 알아보고 결정하는 것일까요?
"주로 어떻게 방향을 알아보고 있으신가요?"
저는 그녀에게 물아보았어요. 어떠한 기술이나 도구을 사용하는 것일까요? 어쩌면 그녀의 행동에서 보았을때 둘 다 아니라 그저 자신의 감으로 맞추려 하는 것일지도 몰라요
>>402 "네! 뷔르트겐 호수요! 거기가 정말 끝내준다고 하길래 가보려 했는데, 관광 패키지는 너무 비싸서... 그럴 바에야 제가 그냥 오고 만다 했거든요."
지금 상황을 보면 차라리 그냥 돈 내고 갖다오는 게 좋았을 것 같습니다만, 뭐 어떻습니까. 가말라시엘 님의 가호로 부러진 다리가 말다리로 바뀌어지는 경험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니니까요. 본인도 좋다고 했고요! 그러다가, 방향을 어떻게 잡냐는 말에 베스니는 의기양양하게 하늘을 가리킵니다.
"당연하죠! 저 하늘의 별을 보면 방향을 알 수 있어요! 저기 있는 북극성의 신이 남쪽을 바라보고 있대요! 그래서 저 별을 따라서 쭉 걸으면 남쪽으로 간다고 하더라고요! 그리고 남북을 알면, 동서야 대충 알 수 있죠! 해 뜨는 쪽이 동쪽이니 그거로 참고해도 되고!"
남북 방향을 알면 동서를 대충 알 수 있고, 그 반대도 대충은 맞습니다만, 북극성의 이름 뜻만 풀이해봐도 알 수 있는 상식을 정반대로 알고 있습니다. 가말라시엘 님의 말대로, 정말 살아있는 게 기적이군요.
에레야의 동생... 일 사장은 반사적으로 재단가위를 치켜들었다가 얌전히 내려놓습니다. 저 뱀파이어가 지금 그녀를 죽일 생각이었다면 이미 죽었을 거고, 좀 시간을 두고 죽이려는 거여도 이 쪽가위 따위로는 어떻게 할 수 없음을 잘 알기 때문입니다. 그녀는 가까이 가서, 엘리의 입을 쭉 벌리고 송곳니를 한번 확인하고, 눈꺼풀을 위아래로 당겨서 그녀의 선혈 같은 붉은 눈을 바라보더니 고개를 끄덕입니다.
"그 오라질 년이 내 말을 이렇게 받아치네. 그래도 뭐, 뱀파이어라도 그 년이 보낸 뱀파이어면 들어갔다가 난데없이 피 빨릴 일은 없겠네."
그녀는 의상실 안쪽의 피팅룸 문을 열더니, 엘리에게 손짓합니다.
"일단 치수부터 재보죠. 요즘에는 옷에 사람이 맞추는 헛소리를 하는 놈들이 유행이던데, 난 그딴 유행 따를 생각은 추호도 없어서."
>>508 "옷 벗으시고. 걱정 마세요. 나는 에레야처럼 뱀파이어한테 크게 흥미 없고, 이상하다 싶으면 부검하는 취미도 없고, 난 '베르야' 내 이름 석자 걸고 장사하니까."
이름이 베르야였나 봅니다. 그래서 베르야 의복점이었나 보군요. 베르야는 엘리의 치수를 재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에레야랑은 다르다고 말하긴 했지만... 가슴둘레, 허리둘레 같은 기본적인 것부터 시작해서, 허벅지 위 아래 둘레, 무릎 둘레, 종아리 둘레, 발 둘레, 손목 둘레, 각 손가락의 마디별 둘레, 머리의 윗둘레 아랫둘레, 목 둘레 등등 온갖 것을 다 재는군요. 그림을 전혀 못 그리는 사람도 적절한 도구와 최소한의 제도 실력만 있다면, 지금 베르야가 측정하고 있는 자료를 기반으로 엘리의 체형을 그려낼 수 있을 정도입니다. 그렇게 한참 동안 측정하고 나서, 베르야는 엘리에게 말합니다.
"듣던 대로, 뱀파이어는 몸이 차갑네요. 뭐, 그건 옷 맞추는 데 중요한 게 아니고... 뱀파이어를 손님으로 맞는 것도 인생 경험이니 두 벌 맞춰드리죠. 이 어떻게 살아서 나다니는 걸 보니 하프 뱀파이어거나, 그 이상한 옷차림으로 다니면서 어떻게든 목숨만 건사하고 다니는 것 같은데... 대낮에 걸어다니기 위한 방호복 용도랑, 평상시에 편하게 입기 좋은 옷 위주로 해드리면 될까요?"
라고 묻습니다. 대낮용 자외선 방호복 한 벌에 더해, 전투용 또는 귀족...용? 복장 중 한 벌을 선택해 만들어달라 할 수 있겠군요.
숲 밖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한 지역에 모여서 마을과 성을 짓고 살아간다고 마녀 님의 서제에서 읽었어요. 숲의 밖에서 바라본다면 멀리서 보이는 그것들이에요. 그리고 서로에게 무언가를 빠르게 거래하거나 요구하기 위해서 수단을 미리 약속해서 정해놓았다고 해요. 바로 화폐라고 하는 것이지요. 숲에서는 그다지 필요한 것은 아니겠지만 세상을 모험하는 이들에게서는 필요할 거에요. 만나는 사람들로 부터 무언가를 부탁할때 건네 주어야 할 것 같으니 많이 필요할 것 같아요. 저도 숲 밖의 세상을 돌아다녀 보고 싶으니만큼 지식만이 아니라 실제로 경험도 갖춰야 할 거에요
"그럼, 이번 기회에 저와 함께 가보도록 해요~ 뷔르트겐 호수에 대한 좋은 추억을 만들 수도 있을거에요"
호수가 보여주는 아름다움은 숲의 밖에서도 그 존재감을 지닌 것 같아요. 그만한 가치가 있어요. 일용할 양식이 되어주는 좋은 물고기들도 살고 있지요~
"그래요, 별 님들이 보여주는 것들은 많은 사람들에게 이야기와 도움이 되었을 거에요. 하지만 별 님들의 뜻을 잘못 알고있다면 그것은 또 다른 이야기에요"
그녀의 뱡향을 결정하는 방식에 대해서는 좋았던 같아요, 하지만 그것을 올바르게 활용했더라면 더 좋았을텐데요. 하지만 별 님들은 여전히 그녀를 인도해주었던 것일까요?
아앨라나는 그녀를 뷔르트겐 호수로 데려다주기로 합니다. 하지만 뷔르트겐 호수는 여기서 지금 당장 출발해도 이틀, 사흘 정도가 걸리는데다가, 아앨라나는 오늘 나오면서 그 정도의 장기 일정을 계획하지 않았기 때문에 대단한 보급품을 챙겨오지도 않았습니다. 그나마 다행인 점이라면, 뷔르트겐 호수가 있는 동쪽으로 가는 와중에 아앨라나가 살고 있는 집에 들를 수 있다는 점일까요?
베스니는 신나서 방방 뛰고 있는데, 한쪽이 말다리라 그런지 일반적인 인간보다도 더 잘 뛰는 느낌입니다.
"저희가 있는 장소로부터 호수는 먼 곳에서 있을 거에요, 그러니까 그만한 준비를 갖춰야만 하겠지요"
저희가 도달해야 할 목표는 정했지고 그녀는 정말 신나보였어요. 하지만 바로 호수로 향하기 전에 우선 그에 합당한 준비가 필요했어요. 처음에 거처에서 나올때 호수에 갈 예정이 없었기 때문에 그렇지요. 하지만 때마침 여기에서 간다면 그 길에 완전히 오르기 전에 들르고 갈 수 있을 거에요
"그전에 저의 거처로 먼저 가기로 해요. 호수와도 가야하는 뱡향이 같답니다~"
거기에서 이것저것 필요한 것들을 챙겨야 겠어요 시간이 오래 걸리는 만큼 야영을 하게 될 수 있을 테니까요
어쩌면 이때 하는 경험과 행동이, 만약에 숲 밖으로 나가서 세상을 돌아다녀 볼때 비슷한 상황에서 좀 더 잘 할 수 있도록 예비 연습을 하는 것이라 볼 수도 있겠네요~
아 그리고 아앨라나주는 혹시 가말라시엘의 성격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1. 풀려나는 순간 세상이 무너지는 악마, 대체 어떻게 봉인했는지 궁금해지는 대악마(이건 모티브가 너무 많다) 2. 악마다운 무시무시하고 전능한 능력을 보여주지만, 세상에 개입하는 데는 한계가 있고 악마만이 가능한 인내심과 설계로 사람에게 현실이 지옥처럼 보이게 몰아감 3. 길모퉁이 마족 등 일본계 창작물 등지에서 보이는 좀 호구같은 악마
셋 중 어떤 게 좋아? 지금 당장은 셋 다 전부 차이가 없겠지만, 전개를 하면 할수록 차이가 드러나야 해서 그래.
베스니는 눈을 반짝이면서 방방 뜁니다. 뭔가 엄청 대단한 걸 기대하는 눈치로 또 수첩을 꺼내는군요. 글을 잘 쓸 수 있는 걸 빼면 어린아이처럼 귀엽고 순수합니다. 그리고 물어보는 것도 어린아이 같군요. 알고 싶은 건 많은데 말할 시간은 부족할 때, 딱 저렇게 이야기하는 느낌입니다.
"혹시 그 집은 얼마나 커요? 골렘이나 앤트도 살아요? 아니면 버섯인간? 혹시 집은 어떻게 지은거에요? 토굴 파서? 나무 속을 파서? 아니면 고대의 건축양식? 혹시 거기는 몇 명이나 사나요? 동물들도 키워요? 약초는 어떤거 키워요? 혹시 안에 연금술 시약대도 있어요? 마법 인챈트 장비는요?"
베르야는 그렇게 말하면서 옷감을 잘라냅니다. 처음에는 정말 이해할 수 없는 간격과 마감으로 자르는 것 같은데, 말도 안 되는 것 같은 옷감이 어느순간 말이 되게 붙습니다. 그리고 베르야는 바늘을 들고, 믿을 수 없는 속도로 손을 움직여 옷을 만들기 시작합니다. 마법이 깃든 손이 빛나고 베르야는 미친듯이 손을 움직여 바지 하나를 만들더니 건넵니다.
그녀는 제 말을 듣자, 아주 신나보여요. 미지의 것 자체를 즐기고 파헤치는 순수한 마음의 모험가! 그녀의 행동이나 방식은 다를 수 있지만 그 열정을 향한 노력만큼은 본받아야 될 수 있겠네요
"설명보다는 직접 보는 것이 좋을거에요, 그때의 즐거움으로, 남겨두겠어요~"
저는 눈웃음을 한번 지어보이고는 그녀의 질문에 일일이 대답하기 보다는 그렇게 말해주었어요. 도달해서 스스로 보고 느껴보는 것이 더 좋을 거에요. 놀라움을 간직하는 거라고 할까요? 우거진 숲 속에 큰 집이 있으니까 가깝게 되면 그 존재를 대략적으로 알아볼 수 있을 거에요
덩쿨이나 이끼도 좀 자라나 있는데 그것이 일종의 장식 같은 역할을 해줘요, 겉모습도 뭔가 고고하게 서있어 분위기가 있는 느낌이지요~ 저는 그렇게 느끼고 있고 마음에 들어요. 다만, 완전히 다른 사람이 보기에는 이렇게 있으니까 어떻게 보여지게 될까요. 하지만 그녀만큼 어쩐지 좋아해줄 것 같다는 예상을 해볼 수 있겠어요
"쏟아지는 말의 비에 젖는다면 그럴수 있겠네요. 많은 줄기때분에 몇 단어들은 금세 묻히고 말아요"
>>531 "가짜 뱀파이어라. 누가 어디서 코르셋이라는 이상한 걸 조인다길래 세상이 미쳐간다 싶었는데 혹시나가 역시나였군요. 동생년이 여태껏 저지른 짓 중에 가장 맘에 드는구만."
베르야는 손을 분주하게 움직여 엘리를 위한 상의도 만들면서, 그렇게 이야기합니다. 상의는 바지보다도 더 품이 많이 들어가는지, 손이 보이지 않을 지경입니다. 베르야가 잘라놓았던 천들이 하나둘 재봉선을 따라 붙으면서 엘리도 알 법한 옷의 형태가 만들어지고, 무슨 원단으로 만들어졌는지는 몰라도 신축성과 주머니 여럿이 달려있어 기능도 챙기고, 결정적으로 멋지게 보입니다. 베르야는 상의도 주면서 입어보라고 권하고, 다시 묻습니다.
"그 년, 어디 있습니까? 마지막으로 이야기 들었을때는 틀락즈카텍 대륙인가? 아무튼 이름도 어려운 거기서 뭘 때려잡고 있었댔는데."
>>532 나무를 이루는 어두운 갈색과 짙은 초록색, 그리고 바닥을 이루는 이끼의 밝은 초록색. 검은 숲의 대부분을 이루는 색깔들 사이에서, 수관 사이에 뻥 뚫린 하늘에서 햇빛을 받고 있는 집은, 흰색의 벽돌과 빨간색 지붕이라는 이곳에서 보기 힘든 색조의 조합으로 이루어진 집이 나타납니다. 초록색 덩쿨과 이끼가 조금씩 조금씩 넘보지만, 그것마저도 이 집의 색깔에 독특한 패턴을 추가할 뿐 이 집을 숲의 색깔로 채 물들이지는 못했습니다. 마녀의 집, 아앨라나가 눈을 뜨고 세상을 담고, 기억하던 그 세상이 시작되고 지금까지 이어진 곳.
"이게... 마녀의 집?"
생각했던 것보다는 조금 평범한지, 아까 전과는 다르게 호들갑을 덜 떨지만, 그래도 베스니는 열심히 적습니다. 그러는 동안 아앨라나는 집에 딸린 곳간을 엽니다. 조금 낡은 야영용 도구 일체와 식량들이 다 여기 모여 있군요. 하지만 야영용 도구를 전부 가져가면 두 명이라도 식량을 충분히 챙기지 못하고, 식량을 다 챙기면 야영이 아니라 노숙이 될 지도 모릅니다. 적절한 양을 고르는 게 중요하겠군요. 가말라시엘 님이 부연합니다.
"저 음유시인의 말다리를 구워먹을 게 아니라면, 식량도 잘 챙겨야 할 겁니다. 이곳에서는 비를 잘못 맞다가는 머리에 버섯이 자라날 수도 있구요."
충분한/빈약한 캠핑도구, 충분한/빈약한 식량. 한 쪽이 충분하면 나머지 한 쪽이 빈약해질 것입니다. 아앨라나는 어떻게 준비하나요?
저는 자랑하듯이 으쓱이며 그녀에게 말했어요. 이곳은 제가 마녀 님과 함께 그 시간을 줄곧 보내왔던 곳, 말 그대로에 의미 라고 할 수 있지요
이제 집에 왔으니 온 목적을 달성해야 겠지요. 그런데 달성하기 위한 문제에서 선택해야 될 순간이 왔어요. 식량인가? 비품인가? 하는 것이에요. 숲 주변에 찾을 수 있는 식용 버섯이나 열매를, 아니면 소동물을 잡아서 먹을 수도 있겠지만 찾거나 얻는 것은 충분하지 않을 수 있어요. 또한 비품이 부족하다면 크게 불편할 수 있겠지요 쉽게 대처할 수 있는 수단도 줄어들 거에요
"그 버섯을 채취해서 시료로 사용한다면 어떠한 약을 만들수 있을까요? "
머리에 난 버섯? 재미있는 농담이에요. 그건 곰팡이들을 머리에 쒸우고있다는 것을 의미하겠지요. 어쩌면 농담이 아닐 수도 있어요. 마력이 깃든 것들은 다르게 행동하거나 작용 할 수도 있으까요
"앨리스 님~ 집에 계세요~?"
저는 앞선 문제에 대한 방향성을 짦게 생각하다가 그것을 결정하기 이전에 마녀 님의 이름을 부르며 안으로 집 안으로 들어가기로 했어요. 제가 몇일 동안 말 없이 보이지 않는다면 분명 걱정하실 거라고 생각해요! 저는 아직 숲 밖으로, 세계로 떠나지 않았고 지금처럼 호수로 향하는 것이 아닌 적당히 채취하고 돌아오려고 했었으니까요
>>538 엘리는 사실대로 말했습니다. 에레야가 동방 닌자 왕국에 가서 5천년 동양 신비의 닌자 무술을 배워와 분신술을 쓰거나, 알고보니 에레야의 형태를 베낀 악마였다거나, 그게 아닌 이상 에레야는 여기 있습니다. 그런데 자기가 사는 곳에 있다고 말했을 뿐인데, 베르야는 눈을 크게 뜨더니 묻습니다.
"그 년이 여기 있다고요?"
베르야의 입에서 온갖 욕이 다 나오기 시작합니다. 오라질년, 염병할 년, 지하수로 똥물에 삶아먹을 년, 이단이라면 갓난애기라도 부검할 년, 온갖 욕을 다 하더니 대뜸 동그란 눈구멍 뚫린 가면과 흰색 슬라임을 내놓는군요.
"빨리 일 끝내고 그년 조지러 가야지. 자, 가면은 착용자를 돋보이게 만들어야 한다, 숨겨야 한다 중 어느 쪽을 지지하시죠?" //
>>539 "사도님. 수사적 표현에 대한 공부가 필요하겠군요. 즉, 그렇게 비를 퍼맞게 된다는 뜻이지요."
농담의 핀트가 어긋나자 난감해하는 가말라시엘을 뒤로 하고, 안나는 앨리스를 찾아 안으로 들어갑니다. 거실에 없으면 서재, 서재에 없으면 침실, 침실에 없으면 텃밭, 텃밭에 없으면 다락... 일텐데, 이상하게도 없군요. 그런데, 다락으로 가는 계단에 걸려있던 그림이 말을 거는군요. 도리언 씨의 초상, 마녀 앨리스가 이상한 나라에 가서 얻어온 거라고 합니다.
"미스 플레이오네! 분명 앨리스 님을 찾고 계신 거겠죠? 세계수의 지맥망? 삶의 거미줄? 아무튼 뭔가를 수리하러 일주일 정도 비운다고 하셨습니다. 정말 급히 나갔지요."
>>540 "떠난다고? 이샤힘. 너 그 말 지난번에도 하지 않았니? 언제더라, 그 6달쯤 전에 6개월 됐으니, 9달쯤 전에 3개월 됐으니 하며..."
히샤히메는 몇 번 떠나려고 마음을 먹었고, 그때마다 번번이 실패했습니다. 석달째 되던 때에는 겨울이었는데 비축한 건초에 비해 소가 너무 늘어나 씨암수소만 제외하고 죄 도살하느라 그 고기에 홀려 못 나갔고, 여섯달째 되던 때는 봄이었는데 그때 보리사탕을 준다는 말에 홀려 또 말뚝을 박았죠. 그래도 이번엔 다를 걸 느꼈는지 힘레먼 할범은 고개를 끄덕입니다.
"그래. 누가 와서 물어도 대답 안 하려면 잊어버려야 할 테니, 잊기 전에 잔치나 하자꾸나. 이것저것 해둔게 있어서 말이다."
그 말대로, 힘레먼 할범은 그녀를 촌장댁으로 이끕니다. 이 동네에선 마을회관을 겸하는 곳입니다.
베르야는 슬라임을 엘리의 손 쪽에 휙, 하고 던집니다. 그러자 손을 휘감은 슬라임은 그녀의 옷과 몸을 따라 타고 올라가더니, 얼굴을 어떻게든 덮으려고 합니다.
"긴장하지 말고 숨 쉬세요. 입이랑 코 둘다로. 그러면 구멍 뚫릴 거고, 이게 손님 얼굴에 맞춰서 그럭저럭 예쁜 가면 하나 만들어줄 겁니다. 당황해서 떼어내려 하지 마세요. 그랬던 손님이 아주 웃긴 가면을 하나 만들어버렸거든요. 뭐, 본 직업이 광대라서 아무래도 좋았다지만."
...그러니까, 광대마냥 우스운 꼴을 보여야 하는 상황이 아니면 얼굴에 뭐가 붙어도 일단 기다리는 말 같습니다.
슬로인 왕성의 벽은 수백년간 슬로인의 깃발 아래에서, 수많은 것들을 바깥으로부터 지켜 왔습니다. 왕과 여왕, 왕세자녀와 대귀족들, 왔다 나가는 수많은 시종들, 수많은 암투들, 해자 밑바닥의 진흙보다 더 두껍고 숨막히는 망각에 가라앉은 수많은 역심과 야망들, 그저 남들보다 더 많은 것을 가졌을 뿐인 이들, 그것만으로 죽은 이들의 백골, 그리고 지금 여기서 졸고 있는 경비병까지. 슬로인 왕성은 지난 몇백년간 그랬고, 슬로인 왕국이 망할 때가 오지 않는 이상 슬로인 왕성은 계속해서 이 자리에서 지켜야 할 모든 것들을 지킬 것입니다.
단 한 명, 샤토리아 필레미오르 루코 슬로인, 백색의 괴물 공주를 제외하면요.
"...왕녀님. 시간이 되었습니다."
유난히 잘 보이는 그녀의 백색 머리칼, 백색 피부, 붉은색 눈동자는 사람들뿐만 아니라, 달님의 이목마저 끌었는지 어둠 속에서 빛납니다. 어떤 귀족은 이 피부를 위해 얼굴에다가 백색 납분을 칠하고 머리카락을 온갖 유독하고 정체모를 화학 약품으로 물들여 탈색하는 동안, 그녀는 이 몸을 타고났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녀는 백색증 환자이고, 이 백색증이 공주인 그녀에게 '괴물'이라는 칭호를 붙였습니다. 이 왕성은 물론 그녀도 지켰지만, 그녀만큼은 지켜진다기보단 갇혔다고 보는 게 맞았습니다. 그 누구도 감옥섬에서 죽을 날만 기다리는 이가 파도치는 바다와 그 아래에 숨은 상어들 덕분에 지켜진다고 말하진 않듯이요.
하지만 테렌, 그녀를 위해서라면 지옥불에도 뛰어들 기사에게는 아닙니다. 그는 이 감옥을 벗어날 최적의 시간을 알아냈습니다. 그날의 경비 담당도, 경비병도 제일 멍청하고 게으른 놈일 때를 딱 맞춰서, 샤토 왕녀를 데리러 온 것입니다. 어둠 속에서, 그의 짐승 같은 눈이 빛납니다.
"이제 나오기만 하시면 됩니다. 제 말과 왕녀님의 말, 총 두 마리니 이번에는 꽤 멀리 나가실 수 있을 겁니다."
>>554 몇 번의 호흡으로 숨구멍이 뚫리고, 자글자글하던 슬라임이 어느 순간 굳어버립니다. 베르야는 가면을 떼더니, 엘리의 눈과 가면을 번갈아보며 눈구멍을 파내고는, 거기다가 머리끈을 달고 엘리에게 돌려줍니다. 이렇게 가면이 하나 만들어졌군요. 이리하여, 엘리는 새로운 옷 한벌을 얻었습니다. 붉은색과 진홍색, 검은색을 위주로 하여 몸에 착 붙는 실용성을 최우선으로 하되 미감도 챙긴 옷입니다. 그리고 가면도 있으니, 이전에 입던 옷은 이 옷을 빨 때를 제외하면 굳이 입지 않아도 되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557 "베스니라는 사람과 함께 뷔르트겐 호수로! 뷔르트겐 호수! 정말 좋은 곳이죠. 제가 이 액자에서 나갈 수 있다면, 하다못해 액자에 발이라도 달린다면 저도 가서 한번은 구경하련만!"
...이라고 말하자, 가말라시엘 님이 들어있는 지팡이가 떨립니다. 가말라시엘 님은 비웃음을 흘리면서 제안하는군요. 다만, 베스니의 부러진 다리에 일어난 일을 생각해보면, 이게 정말로 좋은 해결책일지는 모르겠습니다. 심지어 본인도 많은 대가를 언급하고 있군요. 뭐, 아앨라나가 원한다면 도리언 씨의 의사는 무시하고 그냥 저지를 수도 있습니다.
"뭐든 못 하겠나요? 다리도 달아주고, 액자에서 빼줄 수도 있고. 하지만 정말 많은 대가가 따르겠지요."
어쨌든, 바깥으로 나온 아앨라나는 베스니를 마주합니다.
"그래서 전 뭘 하면 되나요?"
이제 선택의 시간입니다! 사지 중 하나가 말이 되어버린 베스니와, 지팡이를 타고 다니는 아앨라나는 어떻게 짐을 꾸릴까요?
>>559 이곳저곳 돌아다니던 엘리는 문득, 자신이 걷고 있는 이 거리가 정말로 익숙한 것 같은 착각에 빠집니다. 이 익숙한 바닥벽돌의 뒤틀림, 이 익숙한 자갈, 이 익숙한 간판... 이 왜 바닥에 떨어져있죠? 엘리는 앞을 바라봅니다. 멋들어진 2층 여관...은 검게 탄화되었고, 지붕에 뚫린 구멍은 천막때기로 대충 때워놨습니다. 엘리가 머물렀다가 어떤 괴물이 개박살낸 그 여관이군요. 그리고 그 여관 앞에는, 어떻게든 그 끔찍한 참화의 현장에 몸서리쳤을 수많은 이들의 기억을 만회하려는 듯 현수막이 하나 붙어있습니다.
"우리가게 정상영업합니다."
그리고, 그 밑에 현재 이용 가능한 서비스라 해서 주점, 요식업, 여관업(일부 방 이용 불가)라고 써 놨군요. 게다가 안에서 사람들이 몇명씩 오가는 것으로 보아, 장사가 아예 안 되는 것도 아닌 모양입니다. 세스타우에 여관이 여기 하나만 있는 건 아닌 것으로 그때 봤는데, 이 모양이 되고도 장사가 된다니... 여관 주인이 수완이 좋긴 좋은 모양이군요. 엘리는 이곳으로 향하나요? 아니면, 다른 여관을 찾아보거나, 아예 다른 제3의 선택지를 제시할 수도 있습니다.
이라고 말하면서도, 힘레먼 할아범은 딱히 거절하지 않고 히샤히메의 등에 업힙니다. 마차도 금방 밀어내는 그녀에게 노인 한 명의 무게는 딱히 신경쓰이지도 않는 수준이었고, 덕분에 늙은이 걸음에 맞출 필요 없이 히샤히메는 성큼성큼 촌장댁으로 걸어갑니다. 바츨라우의 집들 중에서, 가장 길쭉하고 가장 높고, 가장 넓어보이는 집을 찾으면 그게 촌장댁입니다. 다른 집들보다 기초도 더 깊게 파고, 돌담도 더 높게 쌓고, 대충 회칠한 티가 나는 다른 집들과는 다르게 네모반듯한 나무를 대각선, 직선으로 여러번 짜맞춰서 내구성과 심미성을 제대로 살렸습니다. 아마 이 지역 귀족의 집이라 해도 믿겠군요.
히샤히메는 안뜰로 통하는 문을 거침없이 엽니다. 건물과 담장 사이의 안뜰에는 마을 사람들 중 요리나 공연에 나름대로 일가견이 있는 사람들이 모여서 각자의 장기를 준비하고 있군요. 그러다가 히샤히메가 나타나자, 그들은 하나같이 인사를 합니다.
"도리언 씨가 그런 방식을 원한다면요. 그때와는 달리 선택을 위한 시간이나 기회는 충분해요"
"아니면... 단순히 제가 도리언 씨의 모습이 담긴 액자 째로 들고 이동할 수도 있겠지요"
도리언 씨의 심정은 저도 어느정도는 이해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타인의 마음을 완벽히 이해하고 공감한다는 것은 어렵거나 심지어 불가능하겠지만 그래도 이렇게 생각해볼 수는 있어요. 매번 같은 장소에서 같은 일만 한다면 정말 지루할 거에요! 제가 말한 행동을 실천할 수 있을지는 저도 모르겠네요. 아마도, 힘들거에요
"조금 생각해 봤는데요. 두 사람이니까 비품도 비품이지만 식량을 좀 더 챙겨가는 것이 좋을 것 같아요"
저는 그녀 앞에서 잠시 고개를 갸웃거리며 생각해보고는 말했습니다. 인간에게 있어 도구의 사용은 주요한 위치에 있어요. 인간이 지금의 생태적 위치를 고수할 수 있게 될 수 있던 이유도 바로 도구의 제작과 그것을 활용할 재치 때문이지요. 하지만 이 경우에는 그런 행동을 제대로 할 수 있도록 연장시켜줄 식량의 확보가 중요할 것 같아요
>>562 꼭 여관을 숙박 목적으로만 들어가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냥 지나가다가 우연히 볼 수도 있고, 요즘 같이 여관이 식사도 제공하는 시대에는 더욱 그렇지요. 더군다나 저 여관은 엘리가 구해준 하플링 여급 비냐가 일하던 곳이니, 혹시나 해서 한번 들어가볼 수도 있는 것 아닙니까? 엘리는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고, 예상 외의 광경을 마주합니다.
엘리가 마지막으로 보았을 때, 이곳은 불타고 있었습니다. 지금도 이 건물을 지탱하고 있는 돌과 나무를 물들인 검은색이 선연하게 증언하고 있습니다. 너무 심하게 탄 주춧돌들은 다시 회칠하고, 너무 타버린 나무들은 그 부분을 잘라내 새로 덧대 못으로 옆과 고정하고 그 아래에 새 나무기둥을 덧댔습니다. 엘리가 비냐를 꺼내주었던 시체무더기가 있던 자리에는 언제 그랬냐는 듯 길쭉한 탁자가 놓여 있습니다. 옆을 바라보면 엘리가 비냐를 밀어냈던 구멍에서 햇빛이 반짝반짝 들어오고, 그곳을 여관 주인으로 보이는 사내가 판자를 덧대고 망치질하고 있습니다. 몇몇 공간은 아직도 부서진 잔해들로 뒤덮여 있고, 그것을 천막으로 가리고 있습니다. 실로 어떻게든 삶은 이어진다고 생각하는데... 건물보다 사람들이 더 활기찹니다.
"어우, 여기 술맛 사고 난 뒤에 더 좋아진 것 같네."
"죽은 놈들 뼈로 담갔나봐? 아무튼 살았으니 한잔들 더 해!"
"야, 전쟁 갔다가 다리 병신 되어서 돌아온 우리 삼촌이 그랬는데 투석기 돌은 한번 떨어진 데는 안 떨어진대! 사고 한번 났으니까 한동안은 걱정 붙들어!"
그리고 그 변고를 당하기 전보다는 훨씬 사람이 적지만 그래도 옹기종기 흩어져 앉아 사용할 수 있는 탁자들을 꽤 많이 점유하고 있습니다. 이번에는 사고를 도저히 숨길 수가 없었지만, 굳이 숨길 필요가 있었나, 싶을 정도입니다. 그리고, 엘리가 이곳에 온 목적을 찾아 얼굴을 분주히 돌리는데, 무언가, 사람들 사이에서 움직임이 보입니다. 사람들이 둘러앉은 탁자보다 조금 더 높은 것 같은 키높이, 길쭉하게 땋은 머리... 이 여관에서, 이런 특징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그녀 하나밖에 없지요.
"아야! 으윽... 근데, 누구에요?"
비냐는 그들 사이를 뛰어다니면서 열심히 무언가를 나르다가, 이번에도 엘리와 부딪칩니다. 그리고는, 엘리를 올려다봅니다. 이번에는 옷도, 가면도 전부 바뀌었지만, 가면이 엘리의 얼굴을 본딴 슬라임으로 제조되었기에 생각보다 금방 엘리를 알아봅니다. 그리고 그 선혈 같은 눈동자를 보면서, 예상과는 다르게 질렸다는 목소리로 이야기합니다.
"사도님. 이 음유시인, 눈치가 없는 건지 아니면 없는 척하는지 모르겠지만... 한 다리가 말다리가 되었으니 좀 부려먹어도 괜찮을 겁니다! 저도 이 몸으로는 무거운 건 잘 못 옮기거든요."
가말라시엘은 지금 지팡이에 갇혀있는 자기 신세를 상기시키면서, 베스니에게 온갖 짐을 다 맡기는 게 좋을 거라고 경고합니다. 아무튼 안나는 베스니와 함께 창고에서 식량들을 가득 꺼내고, 비품들은 최소한으로 챙깁니다. 베스니는 한쪽 다리뿐이긴 하지만 말다리가 된 덕분에, 두 사람이 먹을 식량 상자를 챙겼는데도 크게 무거워하지 않습니다. 비품은 식량을 옮기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지게, 그 식량이 비에 맞지 않게 덮고 밤이 되면 텐트로 쓸 천막, 부싯돌, 그리고 가말라시엘 님이 깃든 지팡이입니다. 어쩌다보니 베스니가 전부 다 짐을 들게 된 상태이지만, 오히려 이 상태를 더 좋아하는 것 같습니다.
"우와! 저 이런 거 꼭 해보고 싶었어요! 마녀 옆에서 수행하는 짐꾼! 역시 제일 좋은 건 용사 일행의 짐꾼이지만요!"
그녀는 순진할 뿐더러 이런 면에서 충실한 사람인 것 같아요. 저는 가말리시엘 님에 말 따라 결국에는 그녀에게 우리가 필요하게 될 것들을 대부분을 지니고 가도록 하게 되어버렸지만 그럼에도 그녀도 수긍해주었어요. 아니, 단순히 수긍하는 정도가 아니라 이것을 흥미로운 경험으로서 오히려 좋아해주었어요. 그 모습을 보고 있자면 제가 다 조금은 자숙하게 될 정도로요~
"마음에 드신다니 다행이네요~ 덕분에 행동이 한결 수월해질 것 같아요"
그녀의 당당한 모습에 저는 작게 웃어보이며 말했어요. 지금 그녀의 역할을 누군가는 우숩게 여길지도 모르지만 일행의 유지를 책임진다고 해도 괜찮을 거에요. 필요한 것들 옮기고 있으니까요!
뭔가 복잡한 표정입니다. 그래도 엘리의 정체를 처음 깨달았을 때와는 다르게, 무슨 지옥에서 기어나온 사람 되다만 괴물딱지처럼은 더 이상 보지 않습니다. 그 와중, 옆에 앉아있던 술 취한 사람이 갑자기 탁자를 겨우 넘는 비냐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낄낄 웃습니다. 비냐도 갑작스런 무례에 순간 분노조차 잊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근데 진짜, 요 애가 진짜 똑 부러져서 좋아. 어떻게 이렇게 개박살난 여관에서 다시 일할 생각... 끄아아악!"
비냐는 그 손을 붙잡더니 자기 입가로 내리고 꽉 물어버립니다. 취한 사람은 비냐가 아니라 제 손가락이 똑 부러지는 것마냥 비명을 지릅니다. 기어코 쇠비린내와 피맛을 볼 지경이 되어야 비냐는 손을 놔주고, 그 사람의 맥주잔을 뺏어 그의 피가 섞인 침을 퉤 뱉어주고 되돌려줍니다. 탁자에 앉아있던 사람들이 벙찌지만, 대충 수선을 마친 주인은 비냐를 제지할 생각은 없이 다짜고짜 비냐를 쓰다듬은 사람을 타박합니다.
"쟤 저래 봬도 스물 넘겼어요. 그리고 사고 난 이후로 성격 더러워졌다고 그리 주의했는데 왜 사람 말을 안 들으셔들."
...뭐, 그 제단에 있던 게 엘리가 아니라 다른 뱀파이어였다면 엘리가 했던 말마따나 간식거리 신세가 됐을테니, 그 일에 성격이 지랄맞아지는 것도 그럴 법합니다. 그래도 충격에 극도로 소심해지는 것보단 낫고, 살았지 않습니까. 비냐는 여관 주인에게 말합니다.
안나는 지팡이 위에 빗겨앉아, 가말라시엘의 존재감을 다리삼아서 붕 뜬 채 앞으로 나아갑니다. 침대속으로 쓰면 오리털만큼이나 폭신할 이끼를 두 발로 느끼지 못하는건 조금 아쉽지만, 가말라시엘 덕분에 안나는 같은 거리도 별로 힘들이지 않고 이동할 수 있으니 좋을 뿐입니다. 신전의 검은 기둥들 같은 거목을 지나고 차가운 시냇물을 지나다보면, 베스니는 입이 심심한지 또 묻습니다.
"가면서 들으세요! 혹시 아앨라나 씨는 언제부터 마녀를 했나요? 마녀도 대학 같은게 있나요?"
'시간 나면 앨리스 씨한테 물어보시죠. 제 기억이 맞다면 아마 삼백년 전 쯤에는 분명 하나쯤 있었을 겁니다.'
어둠 속에서, 테렌의 표정은 잘 보이지 않고, 샤토는 그저 그가 잠시 눈을 감았다는 것만 알 수 있습니다. 아마 테렌은, 자기 얼굴을 샤토 왕녀가 볼 수 없다는 것을 감사히 여길 겁니다. 그 역시 어엿한 기사로서 군마를 받았고, 슬로인산 군마는 그 어느 말보다도 등허리가 튼튼해 제아무리 무거운 기사라도 굳건하게 실어주기로 명성이 자자하니, 테렌과 더불어 샤토 왕녀를 태우고 가는 것도 무리는 아닐 겁니다. 하지만... 그래도, 그대로 뭔가 마음에 걸리는 건 있는 모양인지 한참이나 뜸을 들이다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자기 말에 가득 실었던 짐을 다른 말로 옮기고, 제 말의 안장과 발걸이를 다시 한번 다듬은 후 조금 떨리는 목소리로 왕녀를 부릅니다.
"알겠습니다. 먼저 타시면, 그 다음에 제가 오르겠습니다."
아직 달이 지고 하늘이 밝아지려면 한참 남았습니다. 다른 말들이라면 이미 자고 있을 밤 시간인데도, 말들은 제 주인을 닮아서 그런지 가야 하는 곳이라면 어이든 갈 준비가 된 듯합니다. 이제 남은 건, 백색의 왕녀 샤토가 말 위에 올라서, 테렌과 함께 여행을 떠나는 것뿐입니다. 이번에는 슬로인 왕성 근처라면 어디든 갈 수 있을 것입니다. 귀족들의 화려한 무도회와 중앙 광장, 사제들이 횃불을 든 채 밤새 순회하며 밝히는 장엄한 신전부터 해서, 양식 있는 사람들은 '굳이 볼 필요를 못 느끼는' 이종족들의 슬럼, 빈민가까지. 테렌은 어디든 그녀를 데려가주고, 자신의 힘이 닿는 한 그녀를 지킬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중요한 건 샤토, 그녀가 어디로 가고 싶은지뿐입니다.
>>577 물음에 대한 답을 듣기까지, 시간이 좀 걸렸다. 어두워 표정은 잘 보이지 않있지만, 적어도 잠시 주저했다는 것쯤은 알 수 있었다. 테렌은 내 부탁이라면, 거의 대부분 군말 없이 따르곤 하니까.
하지만 난 말을 아직 제대로 몰아본 적도 없을 뿐더러, 이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고삐를 놓지 않을 악력이나 담력도 없다. 내 자신의 능력이 어느 정도인진, 아마 내가 가장 잘 알고 있을 터. 무얼 걱정했는지 난 모르지만, 적어도 그게 날 납득시킬 만한 정도의 것은 아니니라. 만약 그랬다면..., 그는 삼키지 않고 내게 말을 꺼냈겠지.
“알았어.”
로브를 푹 눌러 쓰고, 다소 힘겹게 말을 올랐다. 준마라 하여 덩치 좋은 훌륭한 말이라지만, 내겐 되려 그 덩치 때문에 오르기도 힘들다. 그럼에도 이번에는 저번처럼 떨어질 뻔히진 않았다. 아마 그 이후로 테렌이 발걸이 높이를 내게 딱 맞춰두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막상 안장 위에 오르니 가슴이 떨려왔다. 매 순간, 성의 외로움이 아닌 도시의 어둠이 나를 감쌀 때마다 그러하다.
나는 곧 내 충실한 왕자님에게 오늘 내가 가고 싶은 희망 행선지를 하달한다.
“오늘은 뒷골목으로 가 보고 싶어. 왕도의 어두운 면, 존재한다는 것은 어렴풋이 알고 있었지만.... 아직 책으로 밖에 읽지 못했으니까.“
왕녀의 걸음이 조금 더디다 싶으니, 테렌은 "무례를 용서하시길."이라 나직이 속삭이며, 그녀의 한 손과 어깨를 잡고 쭉 당겨 올려줍니다. 쉽게 그녀를 들어올려 앉힌 테렌은, 주변을 살피며 행선지를 듣습니다.
"뒷골목... 알겠습니다."
뒷골목, 이야기가 나오자마자 테렌의 어깨가 흠칫 떨립니다. 그도 그럴 것이, 샤토에게는 그저 책에 나오는 이야기에 불과했던 그곳은, 병든 가족을 고치려면 왕실 도서관의 장서를 훔쳐야 할 정도로 미쳐야 했던 테렌에게는 현실이기 때문입니다. 그곳은 샤토 왕녀가 항상 거니는 곳처럼 시들겠다 싶으면 시종들이 갈아주는 꽃병도, 항상 분주하게 치우고 청소하는 복도도, 가끔씩은 인간보다는 인형으로 보일 정도로 예의와 격식을 갖추는 수많은 이들도 없는 곳입니다. 냄새는 지독하고, 말발굽에 쓰레기가 채이고, 부족함에 베이고 상처받은 정신들이 헤매고, 그녀가 왕녀라는 신분을 밝히지 않는 이상 그저 그녀가 신고 있는 신발 한 켤레를 얻으려고 왕녀를 죽일 이들이 기다리는 곳입니다. 그리고, 그 어둠에는 무엇이 있을지, 테렌은 잘 알고 있었고, 솔직히 말해 왕녀는 몰랐으면 했지만... 이 대탈주의 주인공은 왕녀 샤토였고, 테렌이 생각하기에 그는 그저 조역일 뿐.
"그렇다면, 가시기 전에 이걸 받으시죠."
테렌은 주머니에서 반지를 꺼냅니다. 은반지에 빨간 마석이 끼워져 있는데, 테렌은 그 반지의 용도를 설명해줍니다.
"그런 일은 절대 없어야겠지만, 만약 왕녀님과 제가 떨어지게 된다면... 이 마석에 화살표가 비쳐서 서로의 위치를 가리킬 겁니다."
테렌은 손가락에 반지를 끼고, "훠이!"하며 말고삐를 당깁니다. 두 사람이 탄 말이 앞서 나가고, 짐을 실은 말은 익숙한 듯 테렌과 샤토의 뒤를 털레털레 따라오는군요. 그리고 놀랍게도, 말 두마리 다그닥거리는 소리가 해자 사이의 나무 다리를 요란하게 두들기는데도, 경비병들은 그것마저도 자장가의 캐스터네츠 소리 삼아 더 깊게 잠듭니다. 음, 한심하군요! 덕분에 샤토 왕녀가 이렇게 나갈 수도 있는 것이지만 말입니다.
>>575 비냐는 엘리를 개인 다락방으로 데리고 갑니다. 이 다락방은 정말로 작고 창문 같지도 않은 미닫이식 나무판이 달려 있는데, 미닫이를 열면 햇빛이 들어오고 닫으면 햇빛이 차단되는 구조입니다. 비냐는 엘리를 생각해서, 다락방의 창문을 확 당겨서 닫아버리고는, 어둠 속에서 촛불을 켭니다. 햇빛에 노출된 시간이 너무 길고, 또 지붕 사이 균열에서 햇빛이 조금씩 새기에 완벽하진 않지만, 엘리는 무언가 몸이 조금 편해진 느낌을 받습니다. 비냐는 촛불 빛에 노랗게 빛나는 얼굴로 엘리에게 말합니다.
"그 때는 경황이 없어서 제대로 말을 못 했는데... 정말 고마워요. 아마, 엘리 님이 아니었다면 저는 제 남매들 뒤를 따라갔겠죠."
...음. 뭔가 어둡고 무거운, 그것도 뱀파이어와 연관된 이야기가 시작될 것 같은 조짐입니다. 그리고 실제로 그렇습니다.
"사실, 제가 그때 그렇게 떨떠름한 반응을 보였던 건, 뱀파이어가 사람을 돕는다... 는 것을 이해할 수 없어서 그랬어요. 맏언니부터 막내동생까지, 전부 뱀파이어한테 죽었거든요. 지하 광산에서 마석을 캐다가 몸이 오염되어서 반신불수가 된 어머니만 남았는데, 왜냐면... 피가 참 더럽게 맛이 없어서 그랬어요. 그러다 저도 때 되면 죽겠구나 했는데... 에레야 님이 그 뱀파이어가 다스리던 영지에 와서... 뱀파이어들을 전부 다 심판했어요. 그런데 그곳에서는 제가 혼자 살 수 없어서, 세스타우로 와서 어머니를 봉양할 돈을 벌고 있어요."
엘리와 그녀의 일족은 피가 좋은 거지 인간의 대량 학살이 좋은 건 아니었고, 무엇보다도 이단심문관조차 아닌 봉기한 농노들한테 꿰뚫려 죽은 수많은 뱀파이어 소식을 들으면서 서로가 좋게좋게 사는 방식을 일찌감치 택해 몇백년간 내려왔습니다. 그렇기에 엘리처럼 인간 사이에 섞이고자 하는 별종도 나오는 것이죠. 하지만... 엘리는 아직도 인간을 말할 줄 아는 가축으로 보는 뱀파이어들도 꽤 있음을 들었습니다. 아마 비냐는 그 피해자겠지요. 비냐는 흠... 흐으음... 한참 동안 한숨을 쉬다가 이야기합니다.
"그래서, 지금 세스타우는 뱀파이어와 조약을 체결한 왕국이 다스리는 도시지만... 솔직히 말해 저는 뱀파이어가 달갑지 않아요. 여기 여관 주인 아저씨도 그걸 잘 알고요. 그래서, 처음에는 여관 주인 아저씨한테 이야기해서 엘리 씨를 쫓아내려 한 거였어요. 하지만... 이제는 안 그래도 될 것 같아요. 아직도 뱀파이어를 보면 기분이 그렇지만..."
비냐는 말을 끝맺기 전, 촛불 앞에서 빛나는 선혈 같은 눈동자를 바라보고 감사를 표합니다.
브우니크 할멈이 그렇게 말한 것을 시작으로, 옆에 있던 사람들이 전부 다 박수를 칩니다. 히샤히메, 이 지역 사람들에게 그녀의 이름은 발음하기 너무 어려워서 다들 '히메'까지 붙여 이샤힘이라 불렀지만, 그렇게 부른다고 해서 그들이 히샤히메와 함께했던 추억까지 전부 그렇게 우습게 기억하는 건 아닙니다. 오히려, 그들은 히샤히메 덕분에 많은 것을 얻었고, 심심해 죽을 정도로 평범한 마을에 극동의 귀인족이 1년간 살았다는 것은 그 자체만으로도 마을의 자랑거리라 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히샤히메 자신도 잊고 있던 것을 이들이 더 잘 기억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네가 그랬지. 6개월 전인가? 그 때 우리가 만들어준 보리사탕을 먹고 나서는 딱 6개월만 더 있다가 나갈 거라고 그랬잖니. 그리고 이제 여섯달이 지났구나."
사람들은 아쉬워하지만, 그래도 이 기억을 좋게 끝내려는 듯 웃으면서 한 마디씩 거듭니다. 마을의 사냥꾼은 대신 사냥을 해주어서, 양치기는 가축을 노리던 늑대들을 찢어발겨 카펫으로 만들어줘서, 그리고 고드뢰는 마차를 꺼내줘서... 남들이 머리가 나쁘면 몸이 고생한다 머리를 탓할 때, 몸이 나쁘면 머리가 고생한다며 몸을 탓하던 히샤히메 덕분에 많은 일이 편해졌습니다. 그리고 브우니크 할멈과 힘레먼 할범이 앞에 서서 말합니다.
"자식들 뼈빠지게 일해서 비싼 돈으로 대학 보내서 시 서기에 세관 관리에 별 관직 다 시켜줬지만, 지금은 폭력배마냥 말없이 용돈이나 좀 부쳐주고 마는게 기념품 수준으로 쓸모가 읎어..."
"하지만 뭐라고 해야 할까. 딱 이샤힘한테서 힘 참 센 것만 빼면 손자녀 있는 거랑 똑같지 않았을까 싶다. 덕분에 손자녀 구경 1년간 대신 시켜줘서 고맙구나."
...하지만 그들도 알고 있습니다. 그녀는 어쨌든 견문을 넓히고자 온 동방의 공주지 이민자가 아니고, 견문을 넓히기에 이 마을은 너무 작다는 사실을요. 고드뢰는 무거워지는 분위기를 감지하고, 마차에 실어온 술통의 꼭지를 툴어 맥주를 병에 콸콸 쏟으며 외칩니다.
"자! 술통에 음식에 다 갖다놓고 눈물 짜지 말고! 일단 술 한잔 마시고 시작합시다!"
파티의 시작입니다! 히샤히메는 이곳에서 나가기 전 다른 이들과 이야기를 나눌 수도 있고, 유용한 정보나 물품을 얻을 수도 있습니다.
길을 가던 도중에 그녀가 저에 대한 것과 관련된 것을 물어보았어요. 그녀는 호기심도 있고, 여정에 스스로의 목적에 달하기 위해 여기에까지 왔어요. 그녀와도 비슷하게, 저 또한 숲 너머의 세상을 바라보는 것처럼요
"숲 밖에 사람들에게는 지금은 어떤가요? 비슷하게는 오래전에는 존재했지만 이제는 없다고 하는 것 같으니까요. 그 대신에 저에게는 제자가 되었고 직접 전수 받았어요"
저는 마녀 님에게 거두어진 이래 줄곧 숲에서, 그 분 아래서 생활해왔어요. 말하자면 평생의 스승이자 어머니와도 같은 역할을 해주셨다고 할 수 있어요. 그리고 솔직히 그 이전의 과거의 기억에 남겨진 것도 있지만 흐릿해요. 마치 벌레가 파먹은 열매와도 같이 구멍이 많다고 표현해도 무리는 아닐 거에요
>>583 엘리는 이곳에 오면서 수많은 혐오의 레퍼토리를 떠올렸습니다. 암컷모기, 피빨이, 걸어다니는 모기, 인간 사이즈 모기, 사람같이 생긴 흡혈박쥐, 괴물딱지, 사람 되다만 박쥐, 죽일 것, 신고대상, 이단심문관!!!! 하지만, 세스타우에 처음 들어와서 지금까지, 엘리는 참 예상할 수 없는 난적을 여럿 만났습니다: 바로, 그녀가 이곳에서 쉬이 얻으리라고는 생각지 못한 '친절'입니다. 처음에 세스타우에 들어왔을 때, 어떤 할멈은 괴물이 출몰하는 세상이라며 막 돌아다니면 안된다고 진심으로 걱정했고, 비냐는 엘리의 안전을 기원하며 그녀에게 수호부를 주었습니다.(처음에는 기겁했지만 결과적으로는 실제로 안전에 도움이 되었지요.) 그리고, 에레야는 이단심문관이라는 직위에도 불구하고 엘리를 진지하게 인격체로 대했으며, 그녀의 자매로 추정되는 베르야 역시 '친절'...과는 거리가 멀었지만 그래도 다른 인간에게 하듯 엘리를 대했습니다. 그리고, 여기서... 엘리는 비냐를 보고 참 죽을 것 같은 생각이 듭니다. 그도 그럴 것이, 엘리가 이 상황에서 당최 뭔 말을 해야 한다는 말입니까?
'인간을 대할 때는 항상 친절하게 대하되 항상 죽여버릴 준비를 해 놓아라'
가주의 가르침도 이 때는 쓸모가 전혀 없습니다. 결국, 엘리는 은화를 던지듯 주고 도망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비냐는 은화를 받자 놀라서 뛰어내려가더니, 도망치듯 아무 방이나 잡아 들어가려는 엘리의 다리를 꽉 붙잡고 늘어집니다.
"위험해요! 위험하다구요! 일단 기다려 봐요!"
엘리를 뜯어말린 비냐는 비어있는 방의 문을 열고, 엘리는 왜 비냐가 자기를 뜯어말렸는지 이해합니다. 여관 주인장이 두 번은 안 당하겠다는 마음인지, 지뢰밭같이 성물들을 깔아놓았습니다. 저기 걸려있는 액자는 최초의 이단심문관 '베어코버'의 이콘이고, 창문은 대체 뭔 돈이 나서 어떻게 단가를 맞췄는지 모르겠지만 성인들의 모습을 그린 스테인드 글라스이고, 꽃병에 들어있는 건 수도원에서 정성껏 키우고 기도해서 재배한다는 '신앙화' 품종의 백합이고, 바닥에는 태양교의 상징인 근엄한 얼굴의 태양이 있습니다. 뱀파이어고 뭐고 불경한 존재는 다 죽여버리겠다는 악의가 느껴집니다. 비냐는 이콘은 떼고, 창문은 천막으로 가리고, 꽃병은 빼고, 태양교단 상징은 발깔개를 깔아서 막는 조치를 취한 다음에 엘리를 환영합니다.
>>587 "어릴 적부터... 우와! 이게 그 대마녀와의 기연?! 아니면 태어나서부터 마녀의 운명을 타고난 그런 느낌인가요?!"
그렇게 말하면서 베스니는 안나를 따라갑니다. 그리고 바깥 세상에 대해서 이야기하는군요. 아주 어릴 적, 아앨라나가 기억할 수 있는 아주 어릴 때부터 대부분의 시간을 이 검은 숲에서 보낸 그녀에게 바깥 세상은 존재한다고 말로만 들었고, 다른 사람들이 존재한다고 하니 아마 맞겠거니... 한 곳일 뿐입니다. 그래서, 아앨라나가 실제로 관심이 있냐 없냐와는 별개로, 조금씩 이야기가 귀에 들어옵니다.
"당연하죠! 저도 대학 음악학부에서 공부했거든요. 예전에는 음악도 전부 유명한 음악가한테 배우거나, 음유시인 따라다니면서 배워야 했는데 이제는 대학이 생겨서 돈만 좀 있으면 누구나 배울 수 있어요! 저는 돈은 없었지만, 후원자를 잘 만났죠... 그 뭐냐, 족보집에 가서 한달치 봉급만 주면 제 이름을 어디 귀족가에 올려주거든요? 그러면 후원을 구할 자격이 생기니까..."
...말이 더 이어지기도 전에, 가말라시엘 님이 텔레파시로 들어옵니다. 그리고 비웃는군요.
'세상의 사기꾼들은 두 가지 유형이 있지요. 알면서 치는 사기꾼, 모르면서 치는 사기꾼. 지금 이 사람은 후자입니다.'
...음, 경계해야 할까요? 아무튼 아앨라나는 묵묵히 들으면서 올라갑니다. 다리 하나가 말다리가 되었는데도 좋아하는 걸 보면 아무튼 음유시인과 모험에 대한 열정은 진짜인 것 같으니. 아앨라나는 앞서 가다가, 눈 앞에 보이는 움직임에 멈춰섭니다. 머리에 붉은 열매가 달린 굵은 뿌리들이... 두 다리? 같은 잔뿌리로 아앨라나 쪽을 향해 오고 있군요. 베스니는 모르겠지만 아앨라나는 잘 압니다: 가을 맨드레이크. 추운 겨울을 대비해 어딘가로 동면을 떠나는 모양입니다. 그러다가, 아앨라나와 마주치자 얼굴? 인지 아닌지 모를 대충 얼굴같은 표면을 이리저리 움직이며 둘을 바라봅니다.
이름도 알 수 없는 도시는 누누코 같은 이방인 내지는 '범죄자'들에게 전혀 자애로운 곳이 아님은 여기 오기 한참 전부터 알았습니다. 사람 키보다 큰 나무들은 모두 교수대가 되어 사람처럼 생긴 이상한 열매들이 수십개씩 매달려 있었고, 그 열매들은 모두 '도둑' '탈영병' '체납자' 같은 상품명들이 하나씩 붙어있었습니다. 이 이상한 열매들은 수십개씩 줄을 지어서 누누코가 가는 길마다 몸을 흔들며 그녀를 반겼고, 그녀의 반쪽짜리 귀도 나풀나풀 흔들리며 그들을 지나쳤습니다. 물론, 누누코의 삶은 성인식을 거친 이래, 전사의 시험을 통과한 이래 항상 폭력과 피, 살점의 바다였기에 이런 광경을 본다고 대경할 일은 없었지만, 사방을 채운 시체의 냄새와 누누코의 몸에도 혹시 먹을 게 없을까 달라붙는 파리떼들은 반갑지 않았습니다. 그것들을 헤치고 나온 누누코는 언덕에서 도시를, 이곳의 살풍경과는 전혀 다르게 무서울 정도로 평화로워 보이는 도시를 눈에 담았습니다.
'화살 수매단가 상승에 따라 무단침입 경고사격 절차를 폐지함' '무단 침입자 적발 즉시 사살 - 경고 사격을 예상하지 마시오'
그리고, 눈 앞에 적혀있는 표지판도 눈에 담습니다. 이 도시를 들어가는 게 맞을지, 아니면 그냥 우회해서 다른 곳으로 가는 것도 방법일지, 다시 돌아가서 숲 속에서 추적자들이 잠잠해질 때까지 숨어있을지... 다양한 방법들이 떠오릅니다. 심지어는, 아주 잠깐이지만... 포기하는 건 어떨까, 하는 생각마저. 하지만 누누코는 고개를 젓고 다시 앞을 바라봅니다. 지켜야 했던 이들, 맞이해야 했던 최후, 죽었어야 했던 적들. 아직 많은 것들이 남아있습니다. 그녀는 여기서 멈출 수 없습니다. 그래서 뭐라도 하려고 고민하는데, 뒤에서 휘파람 소리와 말발굽 소리가 들립니다.
"거기! 토끼귀 양반! 그래요! 당신!"
한 사람이 손을 흔들며 멀찍이까지 다가오더니, 누누코에게 묻습니다.
"내 한쪽 귀가 잘린 토끼귀 달린 아가씨를 찾고 있었네만, 당신이 맞는 것 같군."
그리고는, 주변을 보면서 표정을 찡그리더니 다시 말을 잇습니다.
"물론 여기가... 귀족들의 다과회를 열기에는 좀 그런 곳이긴 하지만, 잠시 친절한 분위기에서 이야기를 좀 나눌 수 있을까요?"
사람들이 많이 는 것 같아서, 원활한 진행을 위해 공지합니다. 오늘 이 시간부로 시트스레는 임시로 잠그도록 하겠습니다. 최소 1일 1답레를 목표로 운영하는데, 여기서 사람이 더 많아지면 상황에 따라 1일 1답레도 힘들어질 수 있어서 부득이하게 이러한 결정을 내리게 되었습니다. 앞으로 제 상황이 나아져서 더 많은 분들을 모실 수 있게 되거나, 공석이 발생하면 시트 스레를 다시 열도록 하겠습니다. 일단 지금은 시트스레에 등록된 시트들만 본 어장에 참여할 수 있으며, 향후 10일 이상 무통보로 반응 없을 시 또는 1개월 이상 장기 부재가 예상될 시 시트를 한시적으로 다시 열겠습니다.
엘리가 뱀파이어만 아니라면, 아니, 뱀파이어라도 제일 멀쩡한 방이라는 게 비냐의 설명입니다. 다른 방들은 무슨 일이 있었는고 하니, 엘리가 봤던 그 살덩어리 뭉치가 저 방에서 처음 만들어지는 바람에 여관 주인이 마녀를 불러 잡귀를 쫓고 태양교 사제를 불러 축성을 하고 심지어는 이단심문소의 심문서기보 한명을 불러 이단성 검토까지 했다고 합니다. 엘리가 원래 있던 방은 개박살나서 가구들을 재활용할 수가 없어서 짚과 이끼를 채운 천쪼가리를 침대 삼고 나머지 가구들은 싹 다 빼서 장작으로 써버리고 있고, 다른 방은 불탔거나 사람이 너무 죽어서 피비린내를 뺄 수 없어 그냥 할인가로 운영한다... 는 이야기도 합니다. 비냐는 피비린내 얘기가 나오자 조심스레 묻습니다.
누누코주한테 물어보고 싶은점 1. 누누코에 대해 생각한 액션은 어떤 느낌? 일단 나는 읽어보고 ( https://www.youtube.com/watch?v=ownBlRvIf00 영화 밀수 액션신, 유혈 주의!) 이런 느낌 들었는데. 2. 중간에 누누코가 추적자들에게 납치당하거나, 별 상관없는 노예사냥꾼에게 납치당하는 서사가 나올 수도 있는데 괜찮을까? 다만 이건 배드엔딩 직행은 아니고, 원하는 서사에 적힌 인간 NPC와의 접점을 위한 것읾
마치 감탄하듯 하는 그녀의 말에 저는 긍정하듯이 대답했어요. 그녀의 표현에도 끼워맞춘다면 사실에 근접한다고 할 수도 있겠네요. 만약에... 마녀 님에게 거두어지 못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상상하기 무섭네요. 이런 것은 좋게 생각하는게 남는 일이 될 거에요
"그러니까, 살펴보아요. 어떠할까요? 스스로에게조차 속아버린 거짓말쟁이인가요?"
그녀 또한 그녀 자신에 대해서 말해주었어요. 몇몇은 생소한 것들이지만 거기에는 알고 있는 것도 있어요. 가말라시엘 님의 말따라 경계해서 나쁠 것은 없지만, 이제와서 바로 적대할 필요는 없을 거에요. 아직 진실은 모르겠지만 미지에 대한 탐구심과 그 열의만큼 진짜일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베스니 씨, 잠시 멈춰주세요. 저희는 초목의 형상을 지닌 숲의 존재들을 만나게 될테니까요. 갑작스런 만남이겠지만 정중하게 대해야해요"
길을 가던 와중에 저희들은 다른 이들과 마주쳤다고 할 수 있었어요. 그들은 숲의 유구한 생물들, 아마 동면 해야할 시기에 따라서 나서는 것일테니 그들의 행동을 방해하지 말아야겠지요. 그들이 저희를 용인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듯이 그래야 하지요
'그리고 또 인간.' 저벅저벅, 계속해서 걷는다. 발이 닿는 곳마다 잡아 끌어 당기듯이 질척이는 발소리가 울리며 훔쳐 신고나온 싸구려 신 밑창에 흙이 달라붙었다. 그렇게 걷던 누누코는 어느 시점에 멈춰서서, 고개를 하늘 높이 들어올렸다.
'여기나 저기나 역겨운 인간들 뿐이네...' 가늘어진 눈으로 표지판을 바라보고, 그 뒤에는 표지판 너머의 도시도 바라본다. 도시는 괜스레 증오심을 느낄 정도로 조용하고 평화로워보였다. 이유는 모른다. 하지만 더 나아가서 그 평화라는 것이 자신에게 마저 살갑게 손을 뻗어줄지, 그것만큼은 절대로 모르는 일이었다. 그리고 그때 뒤에서 또 다른 자의 목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한다.
'이크.' 방심하고 있었다. 잠시 갑갑해서 후드를 벗는다는 것이 도시 주위를 걷는 내내 후드를 다시 올리는 것을 깜빡한 것이었다. 누누코는 뒤늦게나마 귀를 가리듯이 후드를 머리 위로 뒤집어 써서 자신이 '잘린 토끼귀 달린 아가씨' 처럼 보이지 않도록 했다. 하지만 보아하니... 이미 늦은 것 같네. 누누코는 어쩔 수 없이 그를 향해 몸을 돌리기로 했다. 바닥의 진흙이 발의 움직임을 따라 궤도를 그리며 튀었고, 누누코의 자홍빛 눈동자가 후드의 어둠속에서 은은하게 빛났다.
"누누코한테 볼일이야?" 누누코가 목소리를 내었다. 특유의 허스키하고 나른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볼일이 있으면 이 자리에서 해." "왜냐면, 누누코는... 지금 바쁘거든. 후흥." 자신이 토끼귀 양반인 것을 숨기는 것은 이미 늦었지만... 어쨌든 누누코는 최대한 '평범한 사람'인 척하며 버릇처럼 가벼운 코웃음 소리를 내었다. 버릇은, 여유있는 분위기를 둘러 방심과 빈틈을 일부러 유도하는 버릇이었다. 그러나 동시에 누누코의 눈은 쉬지않고 상대의 몸을 면밀이 훑고 있었다. '부수기 쉬워보이네... 여차할때 가슴을 통째로 뭉개버리면 좋겠어.' 누누코는 대답을 기다리며 눈 앞의 인간을 보며 생각했다. 그것 또한 '전사의 습관' 같은 것이었다.
>>601 1. 느와르 액션이네요~ 이런 것도 멋있어서 좋아해요~ 하지만 제 머릿 속에서 누누코의 움직임은 조금 더... 아니메틱 하다고 해야할까요? 굉장히 야만적이지만 유연하고 전문적인 느낌이라고 해야하나.... 지금까지 유튜브에서 자료 열심히 찾아봤는데 어울릴만한 영상을 못 찾겠네요 힝.... 나중에라도 찾게 되면 공유해줄게요~ >< 2. 완전 괜찮아요오~ 이 부분은 캡틴도 잘 알고계실거라고 생각해서 맡기도록 할게요~ 그리고 원하는 서사는 진짜진짜 생각나는 대로 적은 거라서 나중에라도 더 생각나면 말해도 될까요?
역시, 테렌은 뒷골목에 대해 잘 아는 모양이다. 당연하겠지. 왕도가 몸이라면, 뒷골목은 마치 혈관처럼 도시 곳곳에 치밀하게 펼쳐져 있다고 하니까. 누군가 그랬어. 이 도시에서 몸담은 자라면 누구든, 뒷골목과 연관되지 않은 이 없다고. 게다가 내 테렌은 정말 가난해. 아마 일반적인 경우라면 극형을 피하지 못할 어미어마한 일을 담담하게 벌였을 정도로.
뒷골목의 사람들이 그 가난의 향기를 맡지 못할 리 없어. 왜냐하면 뒷골목의 주민들 역시 같은 냄새를 풍기고 있으니.
그나저나 이건... 반지인가? 서로 같은 모양의 것을 끼우니, 마치 결혼반지와 같아 보인다.
“테렌..., 음흉해.”
기쁘기도 하지만, 알아. 이건 결코 그런 의미의 선물이 아니지.
애초애 내 왕자님은 날 너무 맹목적으로 따라. 아마 자신의 목숨조차 아끼지 않을 정도로. 그래서 아마 추측하건대, 테렌은 날 사랑할 수 없을 거야. 설령 나에 대한 호감이 있다 해도, 필시 그것을 불경한 감정이라 여기고 있을 터이니.
허나 설령 그가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는 걸 알고 있다 해도, 난 그것을 꼬집어 바꿀 수 없다. 왜냐하면, 그건 내가 책임질 수 있는 범주의 일이 아니니까.
평민의 아들과, 왕의 딸. 지금의 난... 너와 결코 맺어지지 못해. 아직은 말야.
“응.”
마찬가지로 나 역시 테렌과 같은 반지를 끼우고 손을 확인한다. 뭔가 그와 내가 이어져 있다는 느낌이 드는 건..., 단순한 착각만은 아닐 지도 모른다.
“마치 수면제라도 먹은 것 같네.“
성을 지키는 경비병들은 정말 곤히 자고 있다. 아버님께서 만약 이걸 직접 보시게 된다면, 날아가는 건 저들의 직업이 될까, 아님... 목이 될까. 퍽이나 궁금도 하였으나, 날 이렇게 무사히 보내주었다는 것에 대한 감사를 담아 이번만 눈 감아 주기로 했다. 어차피 언젠가는 내가 아닌 누군가에게라도 걸리게 되어 있을 테니.
“뒷골목엔 조직이 있다 들었어. 도시 뒷 편엔 수많은 조직이 있고, 걔 중엔 고위 귀족을 등에 업고 활동하는 이들도 있단 걸.”
책에서 본 내용을 읊는다. 나도 알건 알아. 하지만 책은 사실을 그저 담담하게 적어내려갈 뿐이다. 아쉽게도 그 이상의 것은 담겨있지 않았어.
그러니 난 그에게 물었다. 왕도에서 가장 유명한 조직, 어중간한 하급 귀족 같은 건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지게 만들 정도의 바로 그 조직의 이름을.
뭐냐고 묻는 베스니의 눈에 걸어다니는 흙뿌리들이 들어옵니다. 아앨라나는 아주 잘 알지만 베스니는 잘 모르는, 책에서만 본 살아있는 맨드레이크입니다. 네. 그리고 이 맨드레이크들은, 외부 세계에서는 인간이 캐려고 들거나 가까이 접근만 해도 사람들을 미치게 만드는 끔찍한 괴성을 지르는 식물 겸 괴물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인간들은 자기가 감당할 수 없는 일에는 최대한 손을 안 대려고 하는데, 그 감당할 수 없는게 제발로 걸어오니 미칠 노릇입니다.
"으, 으아아! 맨드레이크다!"
...가을 맨드레이크는 소리를 잘 안 지르고, 그 소리도 무언가를 미치게 만드는 위험종도 있지만 소리를 질러 먹히는 방식으로 전파하는 맨드레이크도 있다는 걸 알려줘야 했을텐데. 길도 모르는 숲속으로 대책없이 뛰어가는 그녀를 보고 아앨라나는 저도 모르게 그리 생각했을 겁니다.
남자는 목을 가다듬더니 본론부터 말한답시고, 그녀가 절대 잊을 수 없는 이의 이름을 부릅니다. 눈 앞의 보팔족 살인토끼가 여차하면 자기 흉곽을 부숴 터뜨릴 생각을 하고 있고, 실제로 그리할 수도 있단 것은 꿈에도 모른 채로. 그의 목소리는 운율이 있고 경박도 해서, 마치 노래를 부르는 음유시인처럼도 들립니다.
"미스터 스위트, 로데스 대농장주 겸 지주 겸 소영주 겸 일백 노예의 주인. 지금까진 위세를 부리며 살았던 사람이죠."
과거형인 이유야 간단합니다. 눈 앞의 한쪽 귀 잘린 살인토끼가 그를 찢어죽여 버렸으니까요. 만딩고라는 노예 결투경기에 나가면 잘 싸울 거라는 생각까진 했는데, 그 토끼가 노예가 아닌 자유인이라고 못 찢어죽일 이유는 없고, 누누코는 노예에 대해 익숙한 사람이 아닌 부족 출신이라 죽으면 죽었지 남 밑에서 대가도 없는 노역을 위해 쇠고랑을 찰 개돼지가 아니라는 생각까진 못 한 사람이죠. 그 이름이 나오자 누누코의 귀가 반사적으로 확 뜨며 후드가 벗겨지고, 그 남자가 말을 끝맺습니다.
"그 사람을 죽인 간 큰 노예를 찾고 있었는데, 마침 여기서 만난 것 같군요! 운명의 놀라움이란!"
@@ >>612 "...후흥." 수인의 반사신경은 인간의 배의 속도로 빠르다. 특히나 평생을 전투로 단련시킨 전사의 경우라면 그 속도가 배로 날뛴다. 광대같은 남자는, 그 자신이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누누코가 빠른 반응을 보일거라고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었다.
"인간, 누누코를 알고있네." 분위기가 일변하며 공기가 차갑게 얼어붙는다. 미스터 스위트, 그 이름이 나오자마자 거의 즉시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누누코의 나른한 눈빛이 증오를 숫돌삼아 날카롭게 벼려졌다. 그것이 일평생을 보팔토끼 전사로서 신성한 들판을 수호하던 누누코의 본연의 모습이었다. 후드가 벗겨지며 귀가 튀어나왔다. 하지만 그것은 귀가 솟아올랐기 때문이 아니라, 누누코가 바람을 가르며 빠르게 움직였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다음 순간에, 누누코는 눈 앞의 남자를 눌러덮치고 그 위에 올라타 있었다.
"호기심은 쌍꼬리붙이 야수마저 죽여." "인간은 그 돼지가 어떻게 자신의 죄를 속죄하게 되었는지 궁금한가보네." 누누코가 목덜이에 줄지은 송곳같은 이빨의 끝을 가볍게 얕게 찔러넣고는 말했다. 이정도 무방비한 사람이라면 방금 전의 도약에서, 바로 목을 뜯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러지 않은 것은, 누누코 스스로도 정보가 절실하다는 것을 느끼고 있기 때문이었다. '역겨운 냄새...' 누누코가 생각하면서 이빨을 한층 더 거칠게 찔러넣었다.
"인간이 알고있는 것을 말해." "그럼... 바쁜 누누코가 빠른 죽음이라는 자비를 배풀어줄게." 하지만 그렇다고 그게 도망친 노예가 추적자를 죽이지 못할 이유는 되지 못할 것이다. 지금의 누누코는 어찌되었든 그를 죽일 심산으로 몰아붙이고 있었다.
아쉽게도 이곳은, 뱀파이어에게는 전혀 친화적인 곳이 아닌가봅니다. 그래도, 술 한병 주며 나가라던 전날과는 다르게 더 이상 엘리를 쫓아내지 않고 엘리가 내는 돈도 소중한 한푼 취급하며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을 보니, 엘리가 꿈꾸는 삶이 한 걸음은 가까이 다가온 것 같아 기분이 좋아집니다. 전날 하루종일 지하수로에서 랫킨, 고블린,식인종, 그외 기타등등 온갖 흉악한 것들을 죽이고 이단심문관의 피까지 들이켜가며 싸운 보람이 있습니다.
아무튼 이렇게 해서 엘리는 또다시 일주일간 머물 곳을 마련했습니다. 이번에는 일주일 동안 여관에 아무 일도 없길 기도해봅시다. 아니면 뭐, 또 사람 여럿 죽어나가겠죠.
샤토의 그 말은 약간의 어리광이자 장난이었지만, 테렌은 난색을 표하며 말고삐 잡은 손에 땀을 쥡니다. 그도 그럴 것이, 귀족가와 평민 사이에 정분이 났다거나 혹은 그랬다는 소문만 돌아도 평민 쪽은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인생이 피곤해지거나 심하면 죽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한 술 더 떠 왕녀와 수인 평민이라면... 진심으로 차라리 사형을 구걸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아무튼, 테렌은 샤토를 뒤에 태운 채 말을 재촉하고, 말어 움직임에 따라 두 사람의 몸이 흔들리며 달빛과 횃불을 따라 나아갑니다. 그러던 도중, 샤토가 묻자 테렌이 설명합니다.
"정확한 책을 읽으셨군요. 맞습니다. 알라릭의 세 손가락, 정말로 강력한 이들은 맞습니다. 그래서, 왕녀님을 이런 곳에 모셔오는게 과연 현명한 일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테렌은 망설이는 듯한 목소리로 대답하다, 앞에서 보이는 무언가에 멈춥니다. 야간 검문입니다. 테렌은 샤토에게 묻습니다.
"검문은 기사 권한으로 통과할 수 있겠지만, 우리가 뭘 하러 가는지, 무슨 관계인지 정도는 지어내야 합니다. 생각해두신 게 있을까요?"
베스니의 반응은 생각보다 돌발적이였어요. 아마 제 말은 그녀에게는 닿지 못했을 거에요. 제대로 숲의 길을 살펴가는 것이 아니라 아무렇게나 가로지르는 것은 좀 부정적으로 될 수 있겠어요. 특히 그녀의 경우에는 더욱 심할 수도 있다는 것이 문제겠네요
그래요, 이렇게나 서로의 태도가 나뉘는 것도 어쩌면 다 삶의 방식의 차이겠네요. 가진 것도, 아는 것도, 그리고 느낌도 다를 것이니까요. 그녀가 대략적으로는 알아보는 것을 미루어보았을때 이런 행동의 화근은 어중간한 지식이려나요? 그나마 불행중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요? 적어도 그녀가 그들에게 놀라서 달아나려 했을뿐 그들과 싸워서 상처를 주려하지는 않았어요
저는 잠시동안 대치하게 된 그들의 의중을 조심스럽게 살펴보다가 그들을 향해서 정중한 표현으로 반응하고는 자리를 벗어나 베스니를 행방을 쫒으려 했어요
>>616 진심으로 곤란한 표정을 보니, 귀엽다는 생각만이 들었다. 그의 성격상, 아마 지금 이 말이 밖으로 새어나갔을 때의 영향을 생각해 본 걸 거야. 분명 난리가 날 테니까. 물론 신분이 맞지 않는 이들끼리의 결혼이 아예 없는 건 아니지만, 대개 그러한 경우 합당한 이유가 있기 마련이다.
몰락한 귀족가를 부유한 평민이 먹여 살린다거나, 전공을 세운 평민이 작위와 함께 귀족 아내를 하사받는다거나..., 물론 내 경우엔 아버님께서 두 눈 시퍼렇게 뜨고 있는 한, 그것조차 어렵겠지만. 게다가 귀족과 왕족은 또 입장이 다르니.
생각하다 보니 머리가 어지러워진다. 그만 두자. 지금은 모험을 떠나러 왔으니. 앞으로의 계획 쯤이야 그 텅 빈 방 안에서도 충분히 짜낼 수 있어.
그나저나, 어쩌면 테렌은 알라릭의 세 손가락과 직접 닿아본 적이 있는 걸지도 모른다. 단순히 위험한 조직이라는 것 뿐만이 아닌, 아주 확실히 그 조직이 내게 끼칠 위험성을 고려하고 있어. 분명 현명한 선택은 아니겠지, 하지만...
“하지만, 넌 날 지켜 줄 테니까. 어떤 상황에서든.”
단순히 띄워주기 위한 말도, 그를 유혹하기 위한 언사도 아니었다. 난 그저 그렇게 믿고 있을 뿐이다. 그리고 설령 그 믿음이 배신당한다 할 지라도, 난 모두 받아들일 수 있어. 전부 내 선택이니까.
“윽.”
갑자기 멈춰 선 테렌. 그 등에 살짝 부딪혀 소릴 내고, 무슨 일이냐 물으려다 먼저 그에게 물음을 당한다. 잠시 생각해 봤다. 그리고 곧 재미있는 생각이 떠올랐다.
“주인과 하인.... 성 밖으로 출정을 떠나는 기사가, 하인을 데리고 길을 나서는 건 당연하지.“
마침 입고 있는 로브도 허름하기만 하다. 이것 역시 내가 부탁해 특별히 그가 가져다 준 것. 본래라면 이런 물건은 애초에 성 안에 들이지조차 않을 테니까. 나라는 사람을 가리기엔 이것만 한 것도 없지.
난 또 덧붙였다.
”의심 같은 건 전혀 받지 않을 거야. 되려 쉬쉬하겠지. 젊고 혈기왕성한 소년 기사가 나처럼 쓸모 없는 짐짝 같은 하인을 구태여 고된 여정에 데려가는 이유는, 정말 뻔한 이유니까. 안 그래?”
비록 견습이라 해도, 그는 일단 엄연히 왕실 소속의 기사다. 그런 자의 치부를 그가 바로 앞에서 지켜보는 가운데 들출 원칙주의 병사가 몇이나 될까.... 정말 완벽한 변명거리다. 단 하나, 억울하게 오해를 살 내 왕자님만을 제외하면.
@@ >>618 '이상해.' '근육이 전혀 딱딱해지지 않잖아.' 누누코는 단지 이빨에 닿는 촉감만으로 그정도의 정보를 가져온다. 마치 이대로 당기면 쉽게 물어 뜯길 것같은 물렁한 근육이다. 그것은 이상한 일이었다. 이런 상황에서도 근육이 경직되지 않는다는 것은, 그가 죽음에 대해 전혀 공포를 느끼지 못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누누코는 그것을 의아하게 여기며 그의 이야기를 끝까지 들었다.
"...그렇군." 그리고 어쩌면, 그 즉시 그의 목을 몸에서 찢어서 떨어트릴 수도 있었을 것이다.
"너는 돈에 찌든 종류의 인간이구나." "인간들은 항상 그렇게 행동하지..." 하지만 누누코는 그러지 않았다. 대신, 그에게서 송곳같은 이빨을 때고 고개를 뒤로 물리는 것을 선택했다. 입가에서 늘어지는 침의 실선을 손목으로 닦아내며 그를 그저 노려봤다. 인간을 증오하는 보팔토끼치고는 이례적인 판단이었다. 그러나 누누코로서는, 합리적인 판단이었다. 근거는 몇 가지 있었다. 왜냐하면 누누코가 돈의 가치는 알고있지는 못해도, 돈을 쫓는 자들은 보통 눈 앞에 있는 현실보다... 그 무엇보다도 돈을 숭상한다는 것을 경험적으로 알고있기 때문이었다.
'이 요한 브룬이라는 인간도 누누코를 사람으로 보고있지 않아.' '하지만... 누누코를 잡으려고 하지도 않겠지.' 아마도 당장은 말이다. 누누코는 돈이 아니니까. 그것이 누누코의 생각이자 논리였다. 이런 인간이라면 언제든지 죽여도 늦지 않다고 생각했던 것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여기서, 누누코의 작은 두뇌가 굴러가 번뜩이듯 생각해 낸 또 다른 근거가 있었다. 여전히 그의 배를 깔고 위에 앉아있는 누누코는 그를 깊은 분홍색 눈으로 응시하다가 이렇게 말했다.
"누누코에게 돈을 줘." ―거래, 라기보다는 거의 협박에 가까운 통보식의 어투다. 200탈러? 150탈러? 잘 모르겠다. 하지만 아직 좀 더 살아야 할 것 같으니... 그에게서 돈을 뜯을 수 있을 것 같다고 생각한 것이었다.
"그럼 누누코가 말해줄거야. 인간이 찾고있는 보물이 어디에 있는지... 말이지." "후흥." 누누코는 어느새인가 몸에 두르고 있던 살기를 흩어내고 평소처럼 나른한 눈매가 되어서, 버릇처럼 소리내며 그렇게 말했다.
왕녀 자신조차도 부끄럽게 만들 침묵이 한참동안 이어지고, 그 시간 동안 테렌이 죽지 않았다는 것은 오직 흐읍, 하, 반복하는 숨소리와 그에 따라 들렸다 내려가는 어깨로만 알 수 있습니다. 샤토 왕녀가 제안한 바야 뭐 불 보듯 뻔하고, 테렌도 어깨 위에 달린게 머리고 그 머리에 딸린 짐승귀 두 짝이 정상이라면 못 알아들었을 리가 없습니다. 테렌은 몇번 헛기침을 하더니 말합니다.
"방금 말씀은 못 들은 것으로 하겠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테렌의 입장에선 급히 왕가 일원을 탈출시켜야 하는 비상 상황도 아닌데 왕녀를 하인이라 둘러대는 것도 참 무례한 일이고, 그런 방향으로 생각하니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뇌를 뽑고 싶은 불충에 대역 같아서, 테렌은 다른 방법을 선택했습니다. 그는 야간 검문소로 천천히 말을 몰고 나아가고, 경비병이 하품을 하면서 검문 목적으로 다가옵니다.
"통과 희망인원, 각 인원의 신원, 통과사유를 제시하십시오."
테렌은 투구를 벗어 수인 특유의 눈동자와 귀를 드러냅니다. 노란 불빛의 그의 검은 머리털이 윤기를 발하고, 그는 떳떳하게 자신이 생각한 가짜 신원을 이야기합니다.
"2명. 난 견습기사 테렌이고 여기 말에 탄 아가씨는 내가 잘 아는 사람의 딸인 베르니 세아, 다. 가족이 위독하다 하여 찾아온 후 내가 데려다주는 길이다."
그러자 듣는 둥 마는 둥 하는 경비병을 밀치고 경비대장이 투구를 벗습니다. 그 역시도 수인인데, 테렌과는 달리 말하는 동물 수준으로 수인화 정도가 높습니다. 그는 웃으면서 손을 흔듭니다.
"테렌! 나 알란이야! 기사가 됐다더니 몰라보겠구만! 그래. 빨리 가봐! 기사 됐으면 돈도 많을 텐데 술도 좀 사고 그래라!"
>>620 "물론! 드리죠. 하지만 확인이 먼저 되어야 합니다. 입장을 바꿔서 누누코씨라면 물건을 보지도 않고 돈을 받으려는 장사치를 죽이려 들지 않을까요?"
말 자체는 틀린게 아닙니다. 여기서 누누코에게 가장 유리한 선택지는 엉뚱한 곳을 알려준 후 돈만 받고 째는 겁니다. 만약 미스터 스위트가 죽은 장소를 진짜로 요한이 찾아가 누누코에 대해 발설한다면 누누코를 쫓는 이들이 더 많아질 겁니다. 그러니 이 사람이 누누코에게 확인을 요하는 것도 당연하죠. 물론, 반대로 누누코 역시 거기까지 갈 이유가 없긴 합니다. 미쳤다고요?
"아니면, 저와 누누코 씨 모두 이 일을 잊고, 다시 가던지요. 저도 그 남자만 쫓는게 아니라 꽤 바쁘거든요."
이도저도 안될 것 같자, 요한이 제안하더니 한 마디를 붙입니다.
"돈은 못 줘도 공짜팁은 드릴수 있으니, 말씀드리죠. 후훙, 이라는 말투는 안 쓰시는게 좋을 겁니다. 그거로 구분하라고 추적자들 사이에서 정보가 다 돌았거든요."
>>623 엘리는 근처에 목장이 있나? 생각해봅니다. 일단 사람들이 목장, 하면 생각하는 마소와 양 따위를 부속한 목초지에 풀어놓아 사육하는 목장은 여기에 없습니다. 그도 그럴것이 세스타우 성은 사람 살곳도 모자라 집이 빽빽히 찼으니 목초지가 있을 리 없고, 목초지가 없는데 목장이 있을리도 없습니다.
그렇다면 성 바깥으로 나가서 목장을 찾아봐야 하는데, 당장 나가서 이 뙤약볕 밑에서 한참 걸으면 무슨 일이 생길지 모릅니다. 그래서 고민이 깊어가는데, 마침 누군가 문을 두들깁니다. 여관 주인의 목소리군요.
@@ >>630 남자의 입에서 말이 나오자, 누누코의 입이 별안간 사납게 벌어지더니 보팔토끼 특유의 뾰족한 이빨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맹수마냥 입김을 뱉으며 거칠게 말하는 것이었다.
"누누코를, 인간의 사고에 빗대며 모욕하지마. 기분이 나빠." "이 다음에 똑같은 실수를 하면 방금 전의 선택을 번복하겠어..." 물론 요한은 딱히 모욕을 하진 않았지만, 인간 특유의 교활한 사고방식이 누누코의 심기를 거스른 모양인 것일지. 요한이 알 일은 없을 것이다. 아무튼 그녀는 그렇게 위협하고 나서야 입술을 닫았다. 그제야 입술이 평소대로 시옷자가 되어 돌아왔다.
"그럼 이 거래는 결렬이네. 인간은 누누코를 못 믿고, 누누코도 인간을 못 믿어. 둘 다 시간만 낭비했네." "누누코도 신성한 들판에 맹세코 좋은 조언을 해줄게, 인간은 지금 누누코를 만나지 않은 걸로 해." "그렇지 않으면..." 그리고 침묵이 흘렀지만, 그 침묵이 무엇을 말하는지는 이 자리에 있는 둘 모두 잘 알고 있었다.
"...후흥, 이만 갈게. 날 쫓지마." 누누코는 그렇게 말하고는, 다시 후드를 뒤집어쓰고 몸을 돌려 제 갈 길을 떠날 준비를 하고있었다.
도달하게 되는 곳만 제외한다면그녀는 거침없이 잘 이동하는 것 같아요. 저와 만나기 이전에도 이렇게 숲을 지나왔을지도 모르겠어요
"그러네요, 그녀는 그때도 좋아해줄까요? 균형이 안맞아 잘 못걷게 될 수도 있어요"
저는 가말라시엘 님의 말에 수긍하면서도 길을 걸었어요. 그녀를 찾는 것은 속히 되어야 하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성급하게 행동해서는 안될 거에요. 몇몇 사냥꾼은 목표를 적극적으로 쫒는 것 뿐만이 아니라 그 목표가 스스로 멈추도록 꾀를 짜네기도 해요, 저는 토끼를 쫒는 늑대와도 같은 느낌이 되려나요?
발자취를 뒤따르던 저는 이미 경험한 적이 있는, 어쩌면 익숙하다고 할 수도 있는 느낌에 멈춰섰서요. 또 다른 숲의 존재의 전조에요
"안녕하세요, 저의 일행을 보셨나요? "
숲의 얼굴, 그들에게 저는 고개와 상체를 가볍게 한 번 숙이며 정중한 태도로 인사했어요. 그들의 곁에 있을때는 특유의 효과 때문에 행동을 조심스럽게 조금씩 이어가며 가는 것이 좋아요
그것은 장난과 비슷해서 그들에게 따로 악의가 있지는 않을 것임을 알고 있어요. 베스니도 어쩌면 괜찮을지도 몰라요. 같은 곳을 빙글,빙글돌다가 지쳐서 멈춰설지도 모르지요
@@ >>640 '인간과 웃으면서 조우한다고?' '맹세코 그럴 일은 없어.' 누누코는 돌아가는 그를 유령처럼 흘려보내고는, 다시 도시에 들어가기 위한 궁리를 하기 위해 시야를 넓혔다. 고독과 증오, 철옹성처럼 느껴지는 평화로운 도시, 그 바로 바깥의 나무에 매달린 죽음의 열매들. 그리고 요한이 남긴 추적자에 대한 말들만이 누누코의 곁에서 맴돌고 있었다.
"움직이자." 누누코는 우선 도시에 들어갈 방법을 찾기 위해, 길을 따라 걸으며 가느다란 눈으로 도시의 겉면을 살피기 시작했다.
박다람쥐, 버섯 합창단, 타코이드 군체, 우파루파, 노새거미, 그 외 기타등등. 아앨라나가 바깥 세상은 몰라도 이 숲에서는 발이 꽤나 넓기에, 다른 이들은 친구가 한두명 있을 이보다도 친구가 여럿인 아앨라나의 친구를 찾는 것을 더 어려워했습니다. 하지만 아앨라나가 인상착의를 설명하자, 그들은 이해했다는듯 나뭇가지를 흔듭니다.
"아, 외말다리 사람."
"저기 갔어."
"아냐, 저리 갔어."
"여기 있어."
총체적 난국이군요. 서로 다른 나무들이, 서로 다른 방향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이들에게 동서남북의 방위 개념은 너무 어려우니, 이들은 자기 기준으로 말하는데... 이때 가말라시엘이 거드는군요.
'사도님. 내 힘을 써 보시죠. 후회하지 않을 겁니다... 어느 의미로든, 확실할 거거든요.'
>>641 누누코는 도시를 멀리서 한번 훑은 후 내려가면서 디테일을 눈에 담습니다. 도시에 딸린 작은 마을들, 아직 매달리지 않는 난민들, 줄 서서 밀죽 한 술이라도 타려는 이들의 행렬, 야위어 축 늘어진 살가죽과 갈비뼈가 선연한 젖소. 여기는 난민촌이라 봐도 믿겠습니다.
누누코는 한바퀴 빙 둘러보고, 어렵겠다고 직감합니다. 경비들은 지쳤지만 눈빛만큼은 삼엄하고, 기병 순찰대들이 계속 주위를 순찰하고 있습니다. 누누코의 싸움 실력이라면 지친 경비들이 지키는 검문 초소쯤은 식은죽 먹기지만, 그 다음에 어떻게 될지는 자신할 수 없습니다. 전투는 이겼으나 전쟁은 진 그녀의 운명이 경고하는군요. 그때, 사람들이 몰린 곳에서 말소리가 들립니다.
"이봐, 이거 진짜야?"
"어허, 쉿! 누가 들으면 어쩌려고!"
가까이 간 누누코는 어떤 여자가 하는 말을 듣습니다.
"찔러보기만 할 놈들은 꺼져. 도시에 들어가서 한 달 일하는 대가로 도시로 들어가게 뚫어줄테니까, 붙을 사람만 붙어."
//요한 브룬은 설정은 킹 슐츠 맞음! 이름의 유래도 추리에 성공한다면 그 npc 서사도 감이 잡힐듯
어쩔 수 없었다. 이별은 언제나 갑작스럽게 찾아오는 것이니라. 원하든 원치 않든 언젠가는 떠나게 되는 것이 인생이니, 짐의 사랑하는 이들이 이다지도 열심히 준비해준 것 앞에서 눈물을 보이는 것은 그들의 노력을 깎아내는 것이니라! 짐은 울지 않았느니라. 어쩐지 뭔가 이상한 것이 흐르는 것 같았지만 그래도 울지 않았느니라!!!
"음!!! 짐이야말로 그간 고마웠느니라. 허나, 오늘이 이번생의 이별이 될리는 없으니!"
먼저 잔을 들어올린 고드뢰를 따라 적당한 고기를 손에 들고 높이 들며 소리쳤느니라. 짐보다 먼저 잔을 든 것은 경을 쳐도 할 말이 없으나 저자가 저러는 것 역시 언제나 있던 일이 아니더냐! 왁자지껄해진 축제의 장에서 짐은 할멈과 할아범 사이에 자리를 잡았느니라. 이제와서는 고정석에 가까웠기에 그걸 막으려는 이들도 없었고.
"할멈, 할아범. 자식들은 어디에 살고 있더냐? 짐이 한번 만나서 꼭 혼이라도 내주마. 사람된 자라면 부모는 1년에 두번은 만나러 와야하는 것이거늘."
@@>>648 누누코는 도시 주위의 전경을 눈에 담았다. 특히 눈에 띄는 것은 후미지고 작은 마을이었다. 너무나 낙후된 곳이었다. 인간들이 말하길, '야만적'이고 '미개'하다고 하던 누누코의 고향, 신성한 들판보다 더. 그런 곳을 속으로 코웃음치며 지나가려고 하는데, 짧은 이야기가 공기를 타고 전해져 와 누누코의 발걸음을 멎게했다. 후드 속에 숨겨진 귀가 쫑긋대며 부스럭거렸다.
'도시에 들어갈 수 있다면.' '이용해보는게 좋을지도 몰라.' 도시를 정면으로 파훼하는 것은 힘들다. 아직 누누코의 몸에 머무르고 있는 피로, 자잘한 통증과 굶주림같은 것들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물론 인간들을 위해 일한다는 것은 별로 마음에 드는 이야기는 아니었지만. 어차피 도망치는 몸이기에, 틈을타서 도망쳐버리면 된다고 생각하는 것이었다. 그것만으로 그저 완벽한 계획이다. 그렇게 생각하면서 누누코는 입가에 희미한 미소를 띄웠고, 조용히 걸어가 이야기의 주축이 되는 곳으로 가서 섰다.
>>649 사람들은 웃으면서 잔치를 즐깁니다! 솔직히 말해 제사는 알 바 아니고 젯밥에나 관심있는 놈들이 없다고는 말 못하겠지만, 무시합시다! 그런 인간들 일일이 신경쓰면 고기맛 다 죽습니다. 동방을 가보기는커녕 동방 음악을 들어본 적도 없는 음유시인이 제 딴에 '신비한' 동방 음악을 연주하고, 그 사이에 노부부가 이야기꽃을 피웁니다.
"아들 웁제크는 보셴 시에 있는 행정관 순회출장소에서 서기로 일하고, 딸 레야는 저기 북쪽에 이름도 어려운... 노르드보티? 아무튼 그 항구에서 징수관보로 일한다는데... 영감. 그 항구 이름이 뭐였지?"
"노르드보티예체쉘링. 레야 이 년 머리가 굵더니, 지 애미애비도 보기 싫어서 우리 같은 늙은이들은 발음하기도 힘든 곳에 직장을 잡았어."
...라고 말하다, 힘레먼이 브우니크를 살피더니 고개를 끄덕입니다. 그러자 브우니크 할멈은 동전 자루를 꺼내 히샤히메에게 줍니다.
"애들이 보낸 건데, 내가 자식 키웠지 언제 따박따박 돈 보내는 빚쟁이 키웠나. 난 이 돈 보기 싫다. 이샤힘 노잣돈 해라."
>>650 검문소 문이 열리고, 샤토 왕녀 일행은 별 문제 없이 검문소를 빠져나갑니다. 아까 전에는 경비병 때문에 일이 골치아파질 뻔 했지만, 알란을 만난 덕분에 일이 잘 풀렸습니다. 테렌을 오래 본 듯 자연스레 아는척을 하니, 왕녀가 궁금해서 물어보는 건 아주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알란 마누엘, 잘 아는 친굽니다."
테렌이 수인들치곤 높이 올라간 케이스긴 하지만, 하급병사와 노역 등에 복무하는 수인들 사이에서 진짜 유명한 건 알란 마누엘입니다. 기사만큼은 아니지만 왕도의 한 구역의 경비대장을 맡을 정도로 높이 올라갔고, 수인들의 어려운 삶을 고려해 합리적으로 치안 업무를 운영하고 개인적으로도 알고 돕는 수인이 많아 발이 참 넓다는 겁니다. 테렌의 견습기사 서임까지 어려울 때 이것저것 도와준 것도 알란이었다 합니다.
"그 빚은 잊지 않고 갚았지만, 더 이야기해보려는데 알란은 경비대장으로, 저는 견습기사로 바빠져서 잘 마주치지 못했습니다."
그렇게 말하며 테렌은 말을 끌고 가고, 바닥에 짜맞춘 네모난 돌을 말발굽이 두들기는 소리와 함께 밤의 불빛이 그들을 찾아옵니다. 밤에도 대낮같고 파티가 끊이지 않는 귀족가를 지나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인지, 이곳에선 걷는 이보다 마차와 말을 탄 이가 훨씬 많습니다.
사람들을 불러모은 여자가 이런 일이 가능한 이유, 즉 '사업 모델'을 설명하면서 사람들을 안심시키려고 합니다. 불법 체류자가 경제에 미치는 영향, 이민자와 불체자 사이의 회색 경계 같은 도시인들이나 신경쓰는 헛소리를 죄 쳐내고 누누코의 지적 수준에 맞게 본론만 말하면, 나무통 안에 들어가 술통으로 위장해 들어가게 도와주는 비용이 5탈러 후불이고, 한달 동안 부자의 집에서 궃은 일을 하면 대충 5탈러가 나오니 고생 좀 하면 된다는 겁니다.
"고향에서 장작패기 안 해본 사람? 장원에서 노역 안 해본 사람? 딱 그런 것들이야."
그러자, 튀어나온 물배만 빼면 전부 홀쭉한 사내가 손을 들어 묻습니다.
"그럼 밥은?"
"머슴 하려면 귀족집 머슴하란 말도 몰라? 당연히 나오지! 저 도시는 말이지, 댁들이 살던 거지동네가 아니라고. 그래서, 할 사람?"
몇몇 사람들이 앞으로 나서고, 남은 이들은 눈치를 봅니다. 누누코가 끼려면 지금밖에 기회가 없겠군요.
힘없는 울음소리와 함께 닭의 목이 꺾이고, 엘리는 목 부위의 털을 뽑습니다. 인간은 생닭을 먹으면 탈이 난다고 알려져 있지만, 피만 쪽 뽑아먹는데다 인간도 아닌 엘리에겐 해당사항이 없으니 넘깁니다. 포도식초 병을 꺼내 털을 뽑아낸 부위에 부어 한번 닦아내면, 교양 있는 뱀파이어의 한끼 식사 준비가 끝납니다.
콰직
엘리가 이빨을 박아넣고, 송곳니를 견디기엔 너무 작고 연약한 닭의 경추까지 이빨이 닿습니다. 한번 목뼈가 꺾이며 목을 헤집었기에 피가 배어나왔고, 엘리는 닭의 하얀 살결에서 느껴지는 포도식초의 산미와 첫 피의 달콤함이 어우러진 새콤달콤한 맛을 음미합니다.
닭 등 동물의 피를 마시는 것을 보고 다른 이들은 궁상맞다 할지도 모르지만, 어차피 본인들도 잡아먹는 동물의 피를 빤다고 뭐라 하는 인간은 없고, 엘리는 계혈을 좋아합니다. 그러면 된 거죠. 아, 한가지 더 좋은 점을 떠올렸습니다.
툭
엘리는 바스러질 정도로 피가 빨린 닭을 바깥에 돌아다니전 도죽고양이의 머리 위에 던지면서, 닭은 죽을 때까지 빨아도 된다는 점이 좋음을 상기합니다.
@@ >>663 누누코는 후드 안쪽에서 웃는 여자를 향해 의미심장한 눈길을 한 번 주더니, 금방 눈을 감아버렸다. 그녀를 따라가면 술통을 마주할 수 있었다 잔뜩 쌓여있는 그것들은 이미 뚜껑이 모조리 열려있었다. 물론 그 안에는 무엇도 차있지 않다. 누누코는 고개를 돌려 이 일의 주선자로 보이는 여자를 한 번 쳐다보고는, 이내 술통 안으로 자신의 몸을 집어넣었다.
>>664 "좋아. 조금만 참아. 좀 흔들릴 수도 있겠지만, 저 더럽고 추한 바깥이랑은 안녕이라고."
여자는 그렇게 말하고, 휘파람을 불자 인부들이 나타나더니 누누코를 포함한 사람들이 들어간 나무통 위에 나무 뚜껑을 덮고 단단히 못질합니다. 땅, 땅, 땅, 땅, 땅, 소리가 마치 머리를 두들기는 것처럼 크게 들린 후, 무심코 손을 뻗어 위로 밀어보니, 지금처럼 완전히 쪼그려서 제대로 몸을 낮춰 자세를 갖출 수 없는 상황에서는 도저히 부술 수 없을 정도로 단단하게 밀봉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어두운 통 속에서 유일한 빛은 정수리 바로 위에 난 나무통의 숨구멍 하나뿐인데, 영차! 영차! 하며 천을 덮어씌우는 소리가 나더니 그 작은 빛마저 사라져 완전한 어둠이 남습니다.
그리고는, 덜컹! 쿵! 하며 마차가 흔들립니다. 마차를 개판으로 만들었는지, 축이 뒤틀렸는지, 아니면 길이 망가졌는지, 나무통 안에 들어있는 누누코는 한번 흔들릴 때마다 허리를 누가 걷어차는 것 같은 통증을 맛봅니다. 옆에서는 진짜로 아픈지 아이구! 으악! 하는 소리가 들리는군요. 그래도, 도시 안으로 들어갈 수 있다고 말한 건 거짓이 아닌지 경비병과 말하는 소리가 들립니다. 이건 술이다, 쉬기 전에 납품해야 한다... 그러더니, 경비대에서 '검역'해야 하니 샘플용 술을 주겠다고 말하는 것도 들리는군요. 누누코도 잠깐이지만 인간의 땅에서 생활을 했으니 압니다. 저건 뇌물입니다. 그렇게 무사히 통과한 나무통 속 누누코는 계속 가다가, 어딘가에서 멈추고 천막이 걷히는 소리가 들리자 드디어 나가나 기대합니다. 하지만...
"부어!"
갑자기 숨구멍으로, 차가운 액체가 쏟아지기 시작합니다! 놀랄 새도 없이, 차가운 액체는 누누코가 깔고 앉은 바닥에 차더니 점점 위로 올라오기 시작해 턱밑까지 차오르고, 이내 얼굴까지 잡아먹어 버립니다. 필사적으로 나무통을 긁고 치지만, 쪼그린 자세와 수압이 방해하는 상황에서는 그녀마저도 힘을 제대로 낼 수 없습니다. 어떻게든 숨구멍을 막아보려 하지만 너무 늦었습니다. 작은 나무통 안에서, 부글거리던 누누코는 정신을 잃습니다...
...팟!
눈을 뜹니다. 덜컹거리고 있지만 최소한 나무통 속은 아니군요. 주변을 둘러보니 누누코는 함께 자원했던 다른 사람들과 쇠창살 마차에 실린 채 어딘가로 향하고 있습니다. 화가 나서 아무거나 부수려는데... 다들 척 보고 보팔토끼 수인을 그대로 내버려두면 뭔 일이 날 지 알았는지, 누누코는 양 팔과 양 손을 뒤로 묶어버리고, 하체는 다리부터 무릎, 허벅지까지 8단에 걸쳐 묶어놨습니다. 이거, 묶고 푸는 것만 돈을 줘야 하겠는데요.
>>665 엘리는 잠에 듭니다. 식인종들과 싸웠을 때는 돌아와보니 기껏 돈 내고 빌린 여관방이 박살났고, 지하수로 안전가옥에서는 자려는데 에레야가 문을 쾅쾅쾅 두들기며 방해했죠. 하지만 식인종들의 본거지는 에레야와 함께 열심히 박살내놔서 경비병들이 뒷처리중이고, 여관방을 박살낸 괴물은 엘리가 다 죽인 걸 에레야가 막타만 뺏어 먹었고, 유일하게 살아남은 에레야는 지금 베르야와 옥신각신 싸우고 있겠죠. 숙면을 방해하는 모든 걱정거리가 사라진 엘리는 자연스럽게 잠에 듭니다...
그리고 꿈 속에서, 무언가 속삭임이 들리는군요.
"당신은 섞일 수 없는 것과 섞이려 하고 있소. 그러고자 한다면, 왜 섞일 수 없는지 이유부터 찾으시오."
...팟, 눈을 뜨면 어느새 밤입니다. 아래에서는 자는데 시끄럽다는 민원 때문에 간드러지는 자장가만 연주하는 음유시인의 노랫소리가 들려옵니다.
@@ >>666 누누코의 암전되었던 시야가 개이고 잃어버렸던 정신이 돌아왔다. 고개를 들어올린다. 그와 함께 서서히 주변 상황이 파악되기 시작했다. 시간은 오래걸리지 않았다, 뻥 뚫린 하늘과 덜컹거리는 마차, 우울한 표정의 사람들. 그리고 쇠창살. 불쾌한 느낌이 엄습했다.
'그 여자...' 통에 들어가기 전부터 거슬렸던 그 여자가, 누누코의 기억을 순간적으로 스치고 갔다. 그 기회주의적인 웃음, 처음부터 마음에 들지 않았었다. 그래도 잠깐 참으면 될 거라고 생각했는데... 결국은 이렇게 되는 건가? 내가 신성한 들판을 지키지 못해서? 내가 그 돼지를 죽이고 도망친 노예라서? 아니면 그저 놀기 좋은 '값비싸고 희귀한 수인' 이어서?
'제길, 제길... 제길!!' '빌어먹을 붉은 잎 신수여!' 누누코는 이내 분개하며 주변에 있는 모든것을 눈에띄는 대로 부수려 했다. 그러나 그것마저도 할 수 없었다. 자신의 몸에 있는 구속구가 그녀의 행동을 완벽하게 저지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전사였던 누누코는 빠르게 알아차린다. 이것은 보통의 솜씨가 아니라고. 훈련이 되었거나... 또 다른 기술이 들어간 구속이라고. 이내 누누코는 포기하듯이 몸을 늘어트리고 쇠창살에 몸을 기대듯이 뉘였다. 다만, 그녀의 처진눈매를 뚫고, 눈동자에는 방황하는 분노와 증오만이 뒤섞이며 조용히 타오르고 있었다.
>>669 아앨라나가 가말라시엘과 이야기하는 동안, 어디선가부터 다시 말소리가 들려옵니다. 베스니입니다.
"으아아아아!!!!!"
방전되지도 않는 대단한 체력으로 달려온 베스니는 그대로 나무들과 부딪쳐 뒹굴고, 넘어지더니 아앨라나와 눈이 마주칩니다. 그리고, 가말라시엘 님이 봉인된 지팡이가 불길하게 암전하고, 베스니가 달려온 길이 검은색으로 일렁이는군요. 가말라시엘의 소행이 맞는 듯합니다. 가말라시엘은 껄껄 웃으면서 이야기합니다.
"대가는 사도님이 치르지 않습니다. 안심하시죠."
...어쩌다보니, 결과적으로 베스니를 찾았습니다.
// 다음 답레부터는 아앨라나가 구체적으로 무슨 행동을 하려고 하는지 묘사해줬으면 좋겠어!
>>672 누누코가 분노에 몸을 뒤틀지만, 철창 안에서의 분노는 찻잔 속의 태풍과도 같아서 앞에서 마차를 끌고 가는 노예상들에겐 아무 감흥도 없습니다. 노예들은 묶인 이상 아무 위협이 되지 않고, 노예주들은 고삐를 쥔 이상 위험하지 않습니다. 누군가 노예제를 처음 고안해낸 이래 수천년간 계속 유지된 진리였습니다. 물론 누누코는 그냥 묶어서 통제될 위인이 아니었기에 아주 제대로 묶어야 했지만 말이죠. 노예상들은 누누코의 난동을 무시한 채로, 저들끼리 이야기를 나눕니다.
"이번 애들은 어디로 판대?"
"반은 킬리츠 경매장, 반은 로데스 직송."
킬리츠 경매장은 누누코가 150탈러에 낙찰되어 팔린 곳이었고, 로데스는... 누누코가 제 주인인 미스터 스위트를 찢어죽인 곳입니다. 이거 안 좋은데요. 하지만 지금은 방법이 없습니다. 혹시 이송 과정에서 빈틈이 생길지도 모르지만, 지금은 그 어떤 빈틈을 만들 방법도 없습니다. 이대로 끝나는가, 들어가서 탈주와 반역의 대가로 사형당하나 싶고, 몸부림도 힘이 빠져서 어느새 밤이 됩니다. 누누코는 반쯤 잠들고 반쯤 깬 상태로 실려가다가, 갑자기 마차가 멈추자 관성에 쇠기둥에 머리를 쿵 박아 잠이 훅 깹니다.
"으악!"
"야, 조심하랬잖아!"
"에이, 씨..."
철장의 모서리가 부서지고, 노예들이 깜짝 놀라 웅크리는 동안 누누코의 손가락에 작은 쇠조각 하나가 들립니다.
@@ >>675 "윽....!" 머리에 강력한 충격이 찾아오며 몽롱했던 정신에서 깨어난다. 느껴지는 통증에 눈을 자연스럽게 찡그리지만, 욱신거리는 머리를 쓰다듬을 손도 자연스럽게 다루지 못한다는 사실에 자신의 처지를 다시 한 번 상기시켰다. 그리고 그 때에, 누누코의 토끼귀가 쫑긋거렸고 무언가 떨어지는 소리를 포착해냈다. 딱히 자신의 처분을 기다리는 것외에 할 것이 없던 누누코는 자연스럽게 그곳으로 엉덩이를 옮겨가 그 무언가를 손에 쥐었다. 작은 쇠조각이었다.
'비록 혼자 살아남아 더럽혀진 배신자라고 해도...' '아직 붉은 잎 신수에게 완전히 버림 받은 건 아닌 모양이네.' 누누코는 그것을 놓치지 않게 꼭 그러쥐고는 날카로운 모서리를 사용해 손목의 구속부터 서서히 긁어내어 풀어가기 시작했다.
>>676 "아무튼 좀 조심 좀 해라. 지난 번에도 지랄 나서 우리 둘 다 죽을 뻔했는데..."
삭삭삭삭삭... 자유를 향한 수많은 노예 반란의 외침이 거대했듯, 그녀가 이 결박을 푸는 소리도 참 시끄러웠습니다. 서로 옥신각신하며 내 탓이나 네 탓이다 하던 노예상들은 계속 들려오는 삭삭삭 소리에, 처음에는 노예가 그럴 거라고는 차마 생각지 못하고 또 서로를 탓합니다. 물론 그 삭삭거리는 소리의 범인인 누누코는 저들이 계속 헛다리만 짚기를 바랄 뿐입니다.
"야, 이 새끼야. 너 또 엉덩이 긁냐?"
"지랄은. 니가 해놓고 나한테 또 지랄하는 거 아니냐?"
하지만, 두 사람이 어두운 밤 속에 램프를 켜서 비추자, 두 사람 모두 양 손이 엉덩이는 커녕 허공에 붕 뜬 걸 확인합니다. 그런데도 무언가 긁는 소리는 들려옵니다. 주변을 바라보다 뒤를 바라본 노예상들은, 하필 다른 놈도 아니고 누누코가 결박을 풀려고 시도하는 걸 목격하고는 경악합니다.
"이런 미친!"
"야, 이년 묶어!"
그때, 손목의 결박이 운 좋게 풀리지만, 한 명이 누누코의 머리칼을 철창 밖으로 잡아당긴 후 목에 밧줄을 걸어 잡아당겨 질식시키려 하고, 다른 한 명이 누누코의 허리춤에 칼을 찌르려 합니다. 손목이 풀린 건 다행이지만, 팔의 결박이 너무 심한 나머지 한 명밖에 못 죽일 것 같군요. 이 상황에서도 한 명이라도 죽일 수 있는 게 다행이지만 말입니다. 누누코는 어떤 선택을 할까요? 누구를 죽여도 되고, 제 3의 선택을 해도 됩니다.
@@ >>677 손목이 풀렸다, 그리고 그것과 거의 동시에 누누코의 머리가 잡아당겨지며 목에는 밧줄이 걸렸다. 다른 한 명은 그런 누누코를 향해 작은 나이프를 들고 달려들었다. 조여오는 목, 뒤로 젖혀진 고개. 그러나 누누코는 조금도 동요하지 않았고 눈알을 힐긋 굴려 짧은 순간 둘을 탐색하기 시작했다.
'누누코를 기절시키려 하네.' '하지만 안일해.' 그것은 냉정같은 것이 아니라, 전사의 본능이었다. 그저 누누코가 이보다도 거친 상황을 숫하게 거쳐온 전사였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누누코의 손이 풀려난 지금, 누누코의 눈에 두 사람의 모습은 그저 사냥감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사냥감이 저항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누누코는 그렇게 생각했다.
누누코는 눈 앞의 인간이 자신의 허리에 칼을 찔러넣기 위해 팔을 내뻗는 순간, 절묘하게 몸을 움직이며 흘려내고 손아귀에 팔을 쥐어 꺾어버렸다. 그리고 그가 놓친 칼을 반대손으로 잡아 내며, 인간을 더욱 자신쪽으로 끌어당겼다. 단단히 잡혀진 상태에서 넘어지며 팔이 있을 수 없는 각도로 꺾였고, 균형이 무너진 틈을 타 드러난 연약한 목에 칼날을 박아넣었다. 한 번으로는 부족하다. 두 번 세 번, 박아 넣어 그를 확실하게 침묵시킨다.
누누코는 그 인간의 팔을 꺾어버리고, 반대손으로 칼을 잡아내어 목을 찔러버립니다. 한순간에 너무 많은 일이 일어나고, 목을 조르던 남자의 얼굴에 동료의 피가 튑니다. 누누코는 혈향을 맡으며 자기 도박이 성공했음을 확신하지만, 목이 막히는 건 어쩔 수 없습니다. 이를 아무리 악물고 눈을 아무리 치떠도 숨이 막히는 건 어쩔 수 없습니다. 점점 숨이 막히고, 다시 한번, 나무통 속에서 물을 먹을 때처럼 점점 숨이 막히고, 다시 암전되는 그 순간입니다.
"으아아악!!!!"
누누코의 목을 조르던 남자의 허리에 화살이 박히고 쓰러집니다. 덩달아 마차 안에 쓰러진 누누코는 숨을 몰아쉬면서 꺽꺽대는 와중이라 화살 박힌 남자의 비명은 안중에도 없습니다. 노예들이 혹시 도적의 습격인가 두려워하며 몸을 낮추고 벌벌 떠는데, 사박사박 누군가의 발걸음 소리가 가까워오더니 바닥에 떨어진 램프를 주워 불을 켜는 소리가 들립니다. 그리고, 누누코를 비롯한 노예들은 얼굴에 갑자기 램프의 밝은 불빛이 비춰지자 눈이 멀 것 같은 섬광에 눈을 질끈 감습니다. 그리고, 익숙한 목소리가 들립니다.
@@ >>679 눈 앞의 인간은 해치웠지만... 목에 걸린 줄에 의해 서서히 숨이 다해가고 있었다. 그리고 누누코의 몸 상태는 질식을 다시 한 번 겪고도 일어난 체력이 남아있지 않았다. 어쩌면, 여기서 끝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누누코를 덮쳐왔다. 죽음에 대한 공포는 없었다. 하지만 후회는 밀려왔다. 아무것도 지키지도, 이루지 못하고 죽은 전사. 신성한 들판의 전사에게 있어서 굉장한 수치이며 불명예였다. 또한 역설적으로, 계속해서 반복되는 누누코네 부족의 역사이기도 했다. 그것을 피하는 일은 있을 수 없었다. 그렇기에 누누코가 지금 맞고 있는 죽음은 어떻게 보면 필연적인 것이었다. 비참하다. 그리고 후회스럽다. 죽어서라도 할 수 있다면 놈들을... 누누코는 지금까지 수많은 동족들이 생각해 왔던 것처럼 그렇게 생각하며, 서서히 어둠이 주는 안식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크학!" 하지만, 운이 좋다고 해야할지. 아니면 나쁘다고 해야할지. 누누코는 목에 걸린 줄이 순간적으로 풀리면서 앞으로 튀어나왔다. 그리고 마치 물밀듯이 목구멍 안으로 공기가 들이닥쳤고, 고여있던 침이 기도에 같이 침입하며 거센 기침을 유발했다. 그녀에게 아직 안식은 이른 것이었다.
"하아, 하아.... 큭!!" 누누코가 그렇게 회복이 주는 고통 속에서 숨을 몰아쉬며 다시 생명을 되찾고 있을 때, 그녀의 초인적인 청력이 발소리를 감지했다.
"누누코에게 다가오지마!!! 찢어죽여버리겠어!!" 아직 구속이 완전히 풀리지 않은 누누코가 거칠지만 쉰 목소리로 외쳤다. 하지만 발걸음은 멈추지 않았고, 이내는 램프에 불이 올라왔다. 눈이 부실듯이 타오른느 램프의 섬광에도 지지않고 눈을 뜬 채로, 지친 몸으로 온 신경을 집중시키며 빛 너머를 굉장한 살기로 노려보았다. 그리고 곧 목소리가 들려오며 모습이 드러났다.
"...인간..." "너는..." 그러자 거기엔, 일찍이 아주 짧은 만남을 가졌던 '광대같은 인간' 이 서있었다.
>>680 기나긴 햇빛, 기나긴 저주와 모멸의 시간이 끝났으니 이제 진정한 뱀파이어이자 밤의 군주로 선택받은, 엘리자베스 바토리 블라드 체페슈로 돌아갈 시간이 왔습니다. 그렇게 생각하면서 방문을 열어제끼자, 엘리는 눈 앞에 서 있는 거한의 험악한 얼굴에 화들짝 놀랍니다. 얼굴이 무서워서 놀란 건 아니고, 뜬금없이 얼굴이 눈 앞에 있길래 놀란 것에 가깝습니다. 그 거한은 어째 낯이 익은게, 에레야가 부리던 부하들 중 하나인 것 같습니다. 그리고 팔에 엘리가 죽였던 가짜 뱀파이어 머리를 담근 액침 박제도 끼고 있군요. 그는 엘리에게 말합니다.
"이단심문관님께서 찾으신다, 아니, 찾으십니다."
그리고는 옆으로 비켜서는군요. 다른 존재도 아니고 뱀파이어한테 존댓말을 다 쓰는 상황이 온 게 얼떨떨한 모양이지만, 그래도 에레야가 개인적으로 신임하는 주요 협력자한테 큰 무례는 저지르지 않은 것 같습니다.
>>681 "음. 아무래도 신사적이고 이성적인 대화를 할 상황이 아닌 것 같군요. 어디 보자..."
그 남자는 램프를 자기 쪽으로 돌려 얼굴을 비춥니다. 요한 브룬, 누누코는 잘 알고 다른 이들은 잘 모르는 사내입니다. 그는 그 상황에 걸맞지 않게 사람 좋은 웃음을 지으면서, 누누코에게 그랬던 것처럼 자기를 소개합니다. 손에 그 노예상 중 하나를 찔러버린 석궁이 들린 것만 빼면 정말로 신사라 해도 믿을 정도군요.
"그래도, 일단 저를 소개해야죠. 저는 요한 브룬, 현상금 사냥꾼 겸 외과 의사 겸 이발사입니다. 아, 노예 회수는 제가 취급하는 업무가 아니고요. 이제 풀어드리죠. 잠시만요..."
요한은 사망한 두 노예상의 시체를 뒤져 열쇠를 찾아내고는 마차 문을 열어제낍니다. 그리고는 무슨 상황인지 아직 파악이 안 된 노예들 중 하나의 수갑을 열쇠로 풀어주더니, 그 사람의 손에 열쇠를 쥐어주고 다른 노예들을 풀어달라고 부탁합니다.
"아쉽게도 제가 시간이 부족한고로, 이 야만적이고 비이성적인 행위의 수습을... 대신 좀 부탁드려도 되겠습니까? 네, 열쇠로 다른 사람들 수갑을 좀 따주면 됩니다. 네에, 그렇게요."
그리고는, 누누코를 보더니 혀를 찹니다. 그럴 법도 합니다. 어지간한 대도시의 정신병원도 어지간히 미친 광인이 아닌 이상 사람을 이렇게 묵진 않습니다. 요한은 칼을 꺼내더니, 누누코의 결박을 하나둘 풀기 시작합니다. 가끔씩 차갑고 날카로운 금속이 누누코의 맨살에 닿을 때도 있지만, 누누코는 그 차가움에서 악의는 느끼지 못합니다.
@@ >>683 어지러운 상황. 겁먹은 노예와 죽은 노예상, 잔뜩 증오에 찬 보팔토끼 수인. 그리고 여유로운 의문의 한 남자. 냉정하게 보아도 정상인 상황은 아니었다. 그러나 다시 누누코의 눈 앞에 나타난 그는 마치 이런 상황이 익숙한 것처럼 아주 능숙히 상황을 통제하기 시작했다. 특히 노예를 풀어주는 것은 그렇다고 해도, 수인인 자신에게까지 구속을 푸는 것은 누누코에게 있어서 굉장히 의외로 다가왔다.
"...읏..." 결박를 하나씩 자르며, 칼날의 차가운 감촉이 맨 피부에 닿는다. 그러자 누누코의 입에서 가녀린 소리가 튀어나왔다. 동시에 누누코의 뺨이 살짝 붉어졌다. 고작 이정도의 자극에 신성한 들판의 전사가 소리를 냈다는 것이 수치스러웠기 때문이었다. 처음에는 자신을 그 칼로 찌르려는 줄 알았다. 하지만 예민해질대로 예민해진 수인 특유의 육감으로, 그 칼날에는 어떠한 살의도 느껴지지 않는다는 것을 누누코는 느꼈다.
"누누코를 쫓지 말라고 했을텐데." "인간은 정말 돈에 미쳐있나 보네. 그렇지?" 입에 씁쓸한 미소가 피워내며, 누누코는 자유로운 팔과 다리를 움직이면서 말했다. 요한에 대한 조롱의 말이기도 했다. 그렇지 않으면 이런 산중에 와서... 이미 한 번 들었던 답을 또 듣겠다고 질문을 할 리는 없을테니까. 누누코는 아직도 기분 나쁜 구속구의 감촉이 느껴지는 손목을 쥐고 천천히 돌려 움직이면서, 날카롭게 변한 눈매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조용히 물었다.
"...인간은 왜 누누코를 풀어주는 거야?" "제대로 대답해야 할 거야. 왜냐하면 누누코가 인간을 어떻게 할지... 정할거거든." 누누코는 그렇게 말하며 조금은 누그러진듯한 시선을 창살 밖으로 보냈다. 마치 위협하는 듯도, 추궁하는 듯도 한 물음이었다.
그 말에 따라 엘리는 아래층에 내려갑니다. 그리고 정말로 이상한 광경을 바라봅니다. 엘리가 들어올 때까지만 해도 사람들이 북적거리며 "살았으면 박수쳐!"라고 부어라 마셔라 난리도 아니던 곳이 지금은 무섭도록 텅 비었습니다. 음유시인...도 엘리가 처음 이 여관에 들어왔을 때 보던 음유시인이 아니고, 에레야를 수행하는 거한이 덩치에 전혀 걸맞지 않은 귀여운 크기의 리라를 연주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다른 거한들이 물을 한 잔씩 마시고 있고, 거한이 문간을 틀어막은 채 헛기침을 하고 있군요. 비냐는 어디 갔는지 보이지 않고, 여관 주인은 귀에 무언가를 쑤셔박은 채 하품만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여관의 한가운데 자리를 차지한 에레야가 손짓합니다. 머리가 헝클어졌고, 술에 잔뜩 취한 상태군요.
"잠은 좀 잤나, 엘리? 네가 그년한테 내 위치를 알려준 덕분에 난 귀중한 두 시간을 그 년 연행하는 데 날렸지. 그건 중요한 게 아냐... 제기랄. 아무튼 앉아."
아앨라나의 머릿속에 얼굴 달린 나무들의 불안한 목소리가 울려퍼집니다. 그 목소리에 베스니의 발바닥을 보니... 무언가, 수천년 묵은 마녀의 직감이 아니더라도 척 보면 불길할 수밖에 없는 어두운 기운이 감돕니다. 하지만 베스니는 그것도 모른 채로 숨을 한참 동안 고르더니 아앨라나를 바라봅니다. 이 모든 끔찍한 일을 겪고 있는데도, 아직도 이 여자는 너무나도 긍정적입니다. 말다리와 발바닥의 어두운 기운이 아니라 이 기이할 정도의 긍정적 편향이 악마의 농간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요.
"하아, 하아, 멋대로 도망쳐서 죄송해요... 맨드레이크를 이렇게 가까이서 보는 건 처음이라..."
그렇게 말하고는 멋쩍게 웃어보입니다. 그리고는 가방을 맨 어깨에 힘을 다시 한번 착 주더니, 아앨라나에게 묻는군요.
>>686 음흠, 흠흠. 누누코의 말을 경청하던 요한은, 슬쩍 옆을 보더니 고개를 척 돌립니다. 누누코가 뭐라 질문하지만, 요한은 대답하는 대신에 말을 끊은 것에 사과하면서 화제를 돌리는군요.
"아, 잠깐만요. 말 끊어서 죄송합니다. 자, 거기 누누코 씨를 제외한 납치 피해자 여러분들은 들으시죠! 저 앞을 보십시오!"
램프를 번쩍 들어서 앞을 가리킵니다. 그러자 노예들의 시선이 앞을 향하고, 노예들은 헉 하며 숨이 멎는 순간을 경험합니다. 척 봐도 스무개 남짓은 되어보이는 눈들이 램프의 불빛에 어둠 속에서 노랗게 빛나고, 다른 이들이 공포에 벌벌 떨 동안 요한은 익숙하다는 듯, 당장 사람을 죽일 수 있는 짐승이 아니라 서커스장 철창에 갇힌 괴물들을 소개하는 듯 저 눈알들의 주인들을 어떻게 다뤄야 하는지 친절하게 이야기해줍니다. 아니, 서커스조차 아닙니다. 이렇게 여유롭고 나긋해서야 저잣거리 만병통치약 파는 사기꾼, 벌떡주 파는 노친네나 다름없는 꼴이라 노예들은 이상하게 혼란스러워 하면서도 끝까지 다 듣습니다.
"늑대들입니다! 인간의 피냄새에 환장하죠. 하지만 시튼 경이 밝힌 대로 정말 영리하기도 해서, 쓸데없는 무력 충돌은 원하지 않는답니다. 지금 상황 같은 경우에는... 여러분들이 성인 남성 2인 정도 분량의 고기만 던져준다면 굳이 공격하지 않겠군요."
말하는 바야 간단합니다. 지금 죽은 두 놈을 던지면 살 수 있단 말이죠. 노예들은 바로 마차에서 내려 자신들을 납치했던 노예상 두 명의 아직 따뜻한 주검의 사지 한 쪽씩을 잡고, 늑대들이 보이는 쪽으로 붕 던져버립니다. 그러자, 램프의 불빛에 비치던 옷의 끝자락이 땅에 끌리면서 사라지고, 으적거리는 불길한 소리만 들려옵니다. 요한은 다시 누누코를 보고 이야기하는군요.
"왜 풀어줬느냐면, 그래야 동등한 거래가 성립하기 때문입니다! 제가 만약에 누누코 씨를 풀어주는 대가로 미스터 스위트를 찾게 도와달라고 했다면, 그건 사실상 강요에 해당하지요. 하지만 제가 누누코 씨를 이렇게 풀어드려서, 원한다면 지금 당장 떠나도 되는 동등한 자연인의 상태로 회복시킨 다음에 거래를 제안한다면, 그것이야말로 진정 동등한 거래 제안 아니겠습니까?"
네. 신념형 또라이입니다. 요한은 사람 좋게 웃다가, 이번에는 또 정신 없게 화제를 돌려 누누코의 잘린 귀와 온 몸에 가득한 상처를 램프로 비춰보며 말합니다.
@@ >>690 "..." 누누코는 말없이 이야기를 떠드는 요한과 시체를 던지는 노예들을 한 시야에 담아 바라본다. 그리고 뜯겨나가는 노예상의 시체도. '야만적'이었다. 물론, 인간의 기준으로. 누누코에게서는 그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사람이 죽고, 먼지가 되어 자연으로 돌아가는 것. 고기가 되는 것. 약한 동물이 강한 동물에게 먹히는 것. 그것 모두가 누누코에게 있어서 진리와 같은 것이었다. 그렇지만 이 진리를 받아들이고 이렇게 친화적으로 활용하는 인간은, 적어도 누누코가 살아온 시간동안에는 보지 못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의 이야기... 인간의 기준에게 있어서는 미련한 것이겠지만, 누누코에게 있어서는 딱히 그런 것도 아니었다.
"소독이라고?" "...상관없어, 누누코는 이런 걸로 쓰러지지 않아." 누누코는 자신의 몸을 팔로 끌어 당기듯이 안으며 고집부리듯이 말했다. 그러면서, 어깨에 불로 낙인 찍힌 '노예의 증표'도, 손바닥으로 숨겼다. 뜯겨나간 귀와 그것은 누누코에게 자신의 치부 이상으로 수치스러운 것이었다.
숲의 존재들이 외치고 있어요, 그에 반응하듯이 저의 직감 또한 그들 처럼 외치는 것 같아요. 그녀에게 문제가 되는 것이 있다고 한다면, 아마도 신체 문제가 아닐 거에요. 그녀에 조금씩 깃들어 가는 듯한 이 불가사의한 것은 무엇일까요? 그리고 정말 신체에도 전혀 없는 것은 아닐 거에요
그녀는 누군가가 보고 말하기를, '비정적으로 긍정적이다' 라고 평가를 할만 해요. 과도하게 순수한 물이 이상한 것처럼. 그녀의 그러한 성향이 본래의 것인지 아닌 것인지 지금으로서는 모르겠네요
"너무 놀랐다면 그럴 수도 있을거에요. 다음부터는 다시 그러하지 않도록 배우고 경험해보아요"
저는 일단 그녀의 그 괜찮다며 웃어보이는 모습을 바라보며 좀 더 관찰해보기로 했어요. 그녀에게 있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 싶어요.그녀에게서 멀어져야만 하는 걸까요?
"저희의 목표로 돌아가야 하겠지요? 호수로 가는 길에 다시 올라서요"
저는 그녀의 물음에 그렇게 대답하면서 다시 호수로 같이 향하기고 했어요. 호수에 도착한다면 그때는 무엇을 해야할지 또 다른 고민이 이어질 것 같다는 예감이 들어요
짧게 답한 에레야는 술을 쭉 들이키고 나서 한숨을 쉽니다. 말이 한참 동안 없는 동안 엘리는 저도 모르게 당연한 의문을 떠올립니다: 보안을 생각하면 신전 지하면 됐지 여길 왜 골라? 에레야는 엘리의 마음 속에 피어오른 의문을 감지한 듯 손가락을 딱딱 튕기고, 그러자 창가 주변에 있던 거한들은 푸하하 웃으면서 술을 마시는 척을 합니다. 마치, 나 술 마셨소, 나 재밌소, 나 즐겁소, 하는 연기 티가 나는 것이... 연기는 중요한 게 아니고 말소리를 가리는 게 더 중요한 것 같고, 그를 증명하듯 리라 연주하는 소리도 더 커집니다. 에레야는 엘리에게 조용히 말합니다.
"식인종들이 어떻게 그렇게 많은 숫자를 불릴 수 있었는지는... 진술에 따르면, 식인종들이 점거하고 있던 곳은 어떤 하수구와 연결되어 있었는데, 그 하수구에서 계속해서 인육을 포함한 다양한 도축 부산물들이 쏟아졌다고 했어. 그 하수구를 역추적해봤는데, 사형 집행인이 시체를 의사를 지망하는 애한테 팔아먹었다더라. 좀 석연찮지만, 이건 상부에서 보완해서 내린 결론이니까 그런 거야."
...그렇다고 합니다. 에레야는 계속해서 엘리가 알아야 할 것들을 이야기합니다. 거한은 눈치를 보다가 엘리와 에레야가 앉은 탁자에 여관 괴물과 사제의 머리가 담긴 유리병을 올려둡니다. 둘 다 노란 액체 속에 갇힌 채 둥둥 떠 있군요.
"그리고 네가 여관에서 죽였던 그 괴물이랑, 지하수로에서 죽였던 가짜 뱀파이어는 본질적으로 동일해. 뱀파이어가 되려다 만 인간이라는 게 부검 결과 밝혀졌지. 그런데... 문제가 있어. 그 놈들이 대체 어떻게 뱀파이어가 되는 방법을 알아냈는지, 어떻게 의식을 준비했는지, 그리고 네가 여관에서 죽인 놈은 원래 신원이 뭔지도 밝혀지지 않았어. 하지만 세스타우 영주도, 세스타우 교구도, 그리고 내 윗선도 이 사건을 여기서 종결하고 싶어해. 나만 또 예민한 년 되는 거지 뭐."
에레야는 다시 손을 튕기고, 거한이 여관 주인을 톡톡 쳐서 술을 꺼내오게 시킵니다. 에레야는 자기 잔에 술을 붓더니, 엘리에게 묻습니다.
"상식적으로 보면, 넌 이미 한참 전에 손을 털고 발을 뺐어야 하는데도 여기까지 왔지. 그러니까 다시 한번 묻고 싶어. 이 사건을 파보자고 나랑 같이 지옥까지 달려보고 싶나? 아니, 네 기준으론, 천국까지 달려보고 싶나?"
>>691 "전사의 긍지는 질병을 치료하지 않습니다! 이건 천연두, 파상풍, 그 외 알 수 없는 수많은 전투 외상에서 발생한 등창과 종기로 죽어간 사례들이 임상적으로 증명한 사실이지요. 쉽게 말씀드릴까요? 오기 부리다 죽는다는 겁니다."
요한은 그렇게 말합니다. 오기 부리다 죽는다. 그가 말했던 이야기들 중에 드디어 좀 이해할 만한 것이 나왔습니다. 요한은 자신의 가방을 펼쳐서, 그 안에 들어있는 여러 약병과 의료도구들을 보여줍니다. 누누코는 의료에 대해 잘 모르지만, 대충 미스터 스위트를 죽이고 난 뒤 잠시 옷장에 숨어있을 때, 공황에 빠진 그의 딸이 데려왔던 의사가 이런 도구들을 가지고 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즉 도구만큼은 제대로 갖췄다는 뜻이죠. 요한은 누누코에게 다시 한번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저는, 그렇게 안 보일지도 모르지만, 현실 속에서 살아숨쉬는 영웅적인 서사와 재미있는 이야기를 좋아합니다. 그리고 자유를 찾아 노예주를 죽이고 탈주한 부족 전사가 상처 감염에 죽었다는 이야기는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그 누구도 재미있다고 좋아하지 않죠."
...라고 말하다가, 요한은 다시 정신 사납게 화제를 돌려서 다른 납치 피해자, 짧게 말해 노예들에게 시선을 돌립니다.
"그리고 당신들은 늑대가 출몰하는 곳에 계속 있기 싫다면, 이 마차를 끌고 가던 걸어가던 해서 북쪽으로 계속 가시면 됩니다. 거기도 난민 처우가 심각하긴 하지만 난민들을 속여서 납치하는 이들은 단속하고 있거든요. 혹시나 해서 작은 천문학 상식을 알려드린다면, 저기 저 별이 보이시나요? 네, 저게 북극성입니다. 저걸 계속 따라가시면 됩니다."
@@ >>694 "아니." "누누코는 영웅이 아니야." 누누코는 단호한 목소리로 말하면서, 그가 말한 북극성을 올려다보았다. 그것은 누누코의 부락에서도 볼 수 있는 밝게 빛나는 별이었다. 누누코는 그의 동료들과 함께 그것을 올려다보며 하루의 사냥에 대해 이야기하곤 했다.
"누누코는 아무것도 이루지 못했어. 전사라고 하면서, 그 무엇도 지키지 못했어. 더러운 발로 신성한 들판을 침입하는 인간들, 돈으로 우리를 사고파는 돼지들... 막지못했어. 지금도 누누코의 동족은 고통받고 있겠지." '누누코의 탓이야...' 그녀는 중얼거리며 어깨를 끌어안았다. 높게 솟았던 귀가 조금이지만 반으로 접혀 늘어졌다.
"...하지만 이대로 있으면 누누코는 녀석들처럼 죽겠지." 누누코는 고개를 치켜들고 거의 다 먹혀가는 노예상들을 바라봤다. 처진 눈에는 전사 특유의 결의같은 것이 감돌고 있었다.
"거래를 받아줄게 인간." "누누코가 인간과... 잠시 함께 행동할 거야." 누누코에게 그말을 하는게 정말 쉽지 않은듯이, 눈을 반쯤 질끈 감으며 힘을 눌러담아 말했다. 그것은 정말로 누누코에게 있어서, 금기와 같은 것이었다. 그녀는 스스로 금기를 깨려 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오해는 하지마." "누누코는 인간을 아직 믿지 않아. 너희가 한 것들, 네 동족에게 저지른 것들. 누누코는 죽을때까지 잊지 않아." 누누코의 몸에 미약한 살기가 감돌았다. 이 쇠창살 안에 소동물이 있었다면, 지레 겁먹고 도망갈 정도의 살기. 그런것이 누누코의 날카로운 이빨의 사이로 새어져 나와 공기중으로 흩어졌다.
라고 말하면서, 베스니는 다시 아앨라나를 따라 걸어갑니다. 빨리 물러가라는 나무들의 아우성은 멀어지고, 다시 풀벌레 우는 소리와 새 지저귀는 소리, 물 졸졸거리는 소리가 들리는 평범한 숲속의 광경이 펼쳐집니다. 검은 숲이라는 이름답게 광원이 제한적이지만, 그래도 아앨라나는 지팡이에 탄 것도 있고 해서 잘 따라오고, 베스니도 잘 따라옵니다. 그러다가, 아앨라나의 손등 위에 갑자기 물이 떨어집니다. 손등을 내려다보니, 큰 물방울이 보여서 위를 보면... 아앨라나의 얼굴 위로 빗방울이 둘, 넷, 여덟, 그리고 수백개가 떨어지기 시작합니다! 바닥에 박혀있던 버섯들이 발을 꺼내 위로 올라가고, 베스니는 발을 동동 구르면서 아앨라나에게 묻는군요.
"아앨라나 씨! 어떻게 할까요?!"
아앨라나는 반사적으로 주변을 살핍니다. 이곳은 푹 꺼진 곳, 비가 온다면 침수되기 딱 좋을 곳이니 살고 싶으면 다른 곳으로 가는 게 좋을 겁니다. 조금 낮지만 쓰러진 나무 아래에 있는 곳, 높지만 나뭇잎에 가려져서 빈약한 곳 등... 선택지는 두 가지겠군요. //오늘은 여기까지. 수고 많았어!
기이함을 안고 저는, 여전히 그녀와 호수를 향한 여정을 같이했어요. 숲에서는 많은 것들 느끼고 접할 수 있어요 그것들을 보고, 듣고, 그 향취를 즐기듯 나아갔어요. 그녀 역시 그러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 걸음 걸이는 흩어짐 없이 똑바로 가고 있어요. 정확한 시간은 모르겠지만 꽤 됐을까요?
갑작스레 물방울이 저와 맞이하게 되어요. 그것은 하늘로부터 온 것이고 이어서 많은 이들이 뒤따라서 우리에게 왔어요. 그러고 우리는 그들을 피해가야해요. 이곳은 그들과 함께 있기에 좋은 곳이 전혀 아니에요
주변을 살펴보면 마침 그럴듯한 더 나은 곳이 있었어요. 두 가지가 있고 둘다 장단점이 있는데, 저는 높이 조금 낮더라도 안정적인 곳을 택하기로 했어요 저 하나 뿐만이라면 괜찮겠만 두 명이라면, 부실한 곳에 머물려 하다가 무너지면 그대로 한 순간에 더욱 나쁘게 될 수도 있으니까요
"우리는 저곳에 있는 나무가 그 몸을 눞혀 맡기고 있는 곳으로 대피하는 것이 좋을 것 같아요"
저는 장소를 손가락으로 가르키면서 그녀에게 말했어요 이것은 단순히 지나쳐가는 소나기일 수도 있으니 일단은 잠시 기다려보는 것도 좋겠어요
>>695 노예들은 눈치를 보다가 슬금슬금 자신들을 속박하던 마차를 몰아서 북극성을 따라 떠나고, 남은 요한은 누누코의 이야기를 조용히, 그다운 웃음기를 싹 뺀 채 경청합니다. 신성한 들판에 침략자가 들이닥치고, 전사들은 죽고, 나이가 차지 않은 이들은 노예로 팔려간... 흔해서는 안되지만 너무도 흔하기에 비극인 그녀의 이야기입니다. 얼마나 많은 이들이 죽었을지, 살았을지, 차라리 죽는 게 나은 꼴에 처했을지. 아직도 하나하나 이름을 기억할수 있는 부족원들의 얼굴이 스쳐 지나갑니다.
"...흠."
요한은 가방에서 독한 증류주와 깨끗한 헝겊을 꺼내고, 헝겊에 증류주를 묻혀 누누코의 상처를 닦아냅니다. 독한 술이 상처에 쓰라리게 다가오지만, 동포의 고통을 생각하니 이가 악물려서 누누코는 분노로 제 신경을 마취하는데 이릅니다. 요한은 지져진 자국에도 증류주를 바르고 연고를 치덕치덕 펴댄 후 거즈와 풀로 덮습니다.
"좋습니다! 항상 이 일에 쓸만한 기술을 가진 이들은 찾기 힘들었는데, 드디어 좋은 사람을 만나는군요. 잘 부탁드립니다."
@@ >>703 술의 독한 냄새가 누누코의 예민한 코를 찌르면서 표정을 찡그리게했다. 와중에 덮쳐오는 쓰라림이 누누코의 입에서 신음을 흘리게했다. 이게 정말 괜찮은 '소독'인지 누누코는 판단할 수 없었다.
"...후흥." 마치 그런 고통을 억누르듯, 아니면 불안을 억누르듯. 누누코는 평소처럼 버릇같은 입소리를 냈다.
"누누코를 어떻게 생각하든 인간 마음이겠지." "하지만 누누코가 인간을 업고 뛰게하지만 마." 누누코는 사람좋게 웃는 요한을 보며 말했다. 누누코에게 있어서, 그는 여전히 의문의 존재였다. 전사의 날카로움이라고는 조금도 느껴지지 않지만 이런 상황을 통제하는 것에 대해서는 일가견이 있어보였다. 물렁해 보이는데, 상황 판단은 민첩했다. 그러면서도 몸은 누누코 자신의 손이 닿으면 쉽게 부서질 것처럼 보였다. 돈을 쫓는다면서 수인 노예와 함께하려고 한다. 결과적으로 영 못미더운 인간이었다.
"그리고 두 가지를 기억해." "인간이 찾는 그 돼지의 시체가 수습되면 우리의 협력은 끝이야." "또, 이 일이 끝나면 누누코에게도 탈러를 줘. 이건 어디까지나 그런 거래니까 말이야." 누누코는 일부러라도 그렇게 말해서 이 일의 목적을 상기시키며, 자신의 보상을 빼먹지 않고 그에게 이야기했다. 어쨌든, 무상이라는 것은 없으니까. 인간의 세계에서 말이다.
에레야는 엘리의 빈 잔을 낚아채고 술을 주르르 담습니다. 그리고 단검을 꺼내 자신의 손가락에 피가 날 정도의 상처를 내서 엘리의 술잔에 주르륵 흘립니다. 투명한 술의 표면 위에 피가 배여 들어가 붉은 색을 더하고, 핏방울이 배인 술을 엘리 쪽으로 민 에레야는 이 혈주에 담긴 의미를 설명합니다.
"내가 살던 고향 메스터셔도 뱀파이어 영주가 지배하는 땅이었어. 그리고 뭔가 더럽게 곤란하지만 어쨌든 뱀파이어의 도움이 필요한 문제에 개입을 청원할 때면 형편 닿는 선에서 가장 비싼 술에 피를 타서 바쳤지."
한 잔 해. 에레야는 그렇게 말하고, 엘리와 잔을 나눕니다. 불처럼 뜨겁지만 위협적이진 않은 혈주가 기분좋게 그녀를 담그고, 엘리는 두 번째로 이단심문관의 피를 마십니다.
>>702 안나는 베스니를 끌고 나무가 누워서 만들어진 피난처 안으로 들어갑니다. 두 사람이 숨기엔 아늑함과 좁음 사이를 넘나드는 나무 아래에 들어가자, 후두두두둑 하며 빗방울이 나무를 때리는 소리가 귀를 간질입니다. 그러는 동안 빗방울은 더 심해져서 방울방울 떨어지던 물이 줄줄 흐르기 시작하고, 어느새 폭포 안의 동굴에 있는 것처럼 물이 쏴아아 들이치는 광경이 보입니다. 베스니는 이 광경이 신기한지 수첩을 꺼내고, 아앨라나는 가만히 바라봅니다... 무언가, 무언가 들립니다. 꺄하하 웃는, 꺄르르르르 웃는 듯하면서도 울리는 소리가 귀에 울려옵니다.
"이 소리는 뭔가요? 아앨라나 씨?"
아앨라나는 이 소리가 익숙하지만, 뭔가 기억이 잘 나지 않습니다... 앨리스 님이 알려줬던 것 같기도 한데, 우호적인 정령이라고 하더군요. 마치 아이가 웃는 듯한 목소리로 깔깔거리는 목소리에, 베스니는 신기하게 바라보며 그것도 기록하다가, 앞을 가릴 정도로 폭포처럼 쏟아지는 물에 웃는 얼굴이 나타나자 그것도 기록합니다.
요한은 과장된 몸짓을 지으면서 말 쪽으로 가까이 가더니, 자신의 말을 쓰다듬습니다. 말은 영양상태가 좋아서 털에 윤기가 흐르고, 털도 잘 빗어주었는지 엉킴도 꼬임도 없습니다. 요한의 손길에도 불편한 티를 내기는커녕 오히려 기대는 것에서 요한이 그 말을 잘 대해줬음이 보입니다. 요한은 말을 쓰다듬고 말의 엉덩이를 툭툭 두드리더니 마차 마부칸 위에 올라타고는 고삐를 한번 잡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옆자리를 툭툭 내리쳐 올라오라는 제스처를 취하는군요. 그리고 누누코에게 그다운 정중하고 간드러지는 부탁을 전합니다.
"누누코 씨의 원초적인 투쟁심과 의기는 높이 삽니다만, 그에 과하게 도취되어 살의를 가지지 않았거나 가지지 않아야 할 대상에게 마치 그렇게 보이는 치명적인 오인 상황을 피해달라는 것입니다."
>>707 뱀파이어와 이단심문관, 겸상은커녕 서로 생사결이나 안 하면 다행일 둘이 함께 술을 마시고 술잔을 쾅! 하고 바닥에 내리칩니다. 에레야는 일어나서, 술 취한 사람답지 않은 결기로 거한들에게 명령합니다.
"세스타우 식인 뱀파이어 사건은 '공식적으로' 종결됐지만, 너희들은 이제부터 내 강압으로 여기서 내가 종결한다고 결정할 때까지 계속해서 수사한다. 이 여관은 이제부터 새로운 수사 거점이 될 테니까 위층은 숙소, 여기는 위장용 겸 응접실, 아래층은 심문실 및 부검실로 사용한다. 용도에 맞게 개조를 실시하고, 예산은..."
에레야는 지하로 통하는 계단 쪽에 서 있는 거한을 흘깃 바라봅니다. 그러자 그 거한은 아래로 내려가더니, 아둥바둥하는 남자를 데려옵니다. 팔 잘린 남자인게, 엘리한테 노란 유리병을 가져와달라 했던 그 남자입니다. 거한은 그 남자를 여관의 무대에 내동댕이치고, 거한 몇 명이 달려들어 그 남자를 마구 짓밟으면서 무자비하게 폭행하기 시작합니다. 한 30초 그랬을까요? 엘리라도 저항하지 않으면 진짜 아팠겠다 싶을 때쯤, 그 남자의 입에서 바른 말이 나옵니다.
"마리엘의 허브! 마리엘의 허브 창고 42번 칸에 내 밀수품을 팔아서 쌓은 금화가 많아! 제발 그만 때려! 으아아아악!!!"
>>712 엘리는 거한을 따라 지하실로 내려갑니다. 엘리가 기대한 것과는 다르게, 별 것 없이 한 켠은 술과 식량을 보관하는 창고고 한 켠은 지하실입니다. 그리고 지하실에는 뭐... 신전 지하처럼 고문실과 부검실이 있군요. 고문실에는 신전 때보다 더 참혹해진 고문 피해자들이 있는데, 지금 잡혀있는 이들은 식인종이라 딱히 동정심은 들지 않습니다. 그런데, 거한을 따라가자 거기에는 뱀파이어에게 한번만 피를 빨려보고 싶다던 여자가 붙잡혀 있습니다. 완전히 피떡이 되어서... 이제는 이전의 외모도 겨우 알아볼 정도지만, 아직도 입을 열지 않은 듯합니다. 거한은 엘리에게 말하는군요.
"뱀파이어 님. 상황이 그렇게 됐습니다. 이 년이 그 식인종이랑 뱀파이어 사교도의 연결 고리를 알고 있을 것 같은데... 아직도 입을 안 열었습니다."
그리고 말하는군요.
"변태 피건 뭐건, 인간 피지 않습니까. 이 년 흡혈만 해 주십쇼. 그럼 이 년이 입을 열고, 모두가 행복해질 겁니다. 이 년까지 포함해서요."
인간의 의지란 실로 대단합니다. 하지만 엘리는 그 인간의 불굴의 의지를, '뱀파이어에게 피를 빨려보고 싶다'는 부분에서 느낄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인간이 무서울 줄은 알았습니다. 하지만 그건 인간들이 뿔이 나서 엘리를 죽이려 들고, 십자가에 엘리를 묶어서 화형시키려 하는 것에서 느낄 줄 알았던 것이지, 엘리한테서 기어코 피를 빨려 보려는 미친년한테서 느낄 줄은 꿈에도 몰랐던 것입니다. 엘리는 몇 번이나 머뭇거리다가 겨우 입을 열고, 그녀의 목덜미에 이를 박아 넣습니다. 그러자 그 여자는 행복한 미소를 지으면서, 이 세상의 어떤 마약을 가져와도 못 지을 행복한 표정을 짓습니다. 옆에서 보던 거한도 고개를 젓습니다.
"인생 이 새끼처럼 살면 힘들 게 뭐 있냐..."
엘리는 몇 번 피를 빨고 빼려고 하지만, 그 여자는 기이한 힘으로 엘리의 뒤통수를 잡습니다. 그리고 더!!!!! 라고 외치는군요. 엘리는 놀라서 저도 모르게 빨아들이는 힘을 더 강하게 하고, 원치 않는 몇 모금을 더 마십니다. 그 피는 분명 달콤합니다. 스스로를 바치는 이의 피는 달콤하니까요. 하지만, 인간으로 따지면 설탕을 퍼부은 과자만 먹으면 구토를 하듯, 엘리도 구역질을 할 것 같고, 하필 이런 변태의 피라는 생각에 엘리는 당장이라도 구토를 하고 싶어집니다. 아무튼 그 여자는 웃더니, 약속대로 입을 엽니다.
"우리 교단은 세스타우 귀족들의 지원을 받아서 깨끗하게, 떳떳하게 운영했어! 방금 내 공물을 받아주신 뱀파이어 님처럼 된다는 멍청한 생각을 한 건 웃기지만, 그래도 그럴 법도 하지! 뱀파이어는 정말 아름다우니까!"
저희는 한 동안 이곳에서 비를 피하기로 했어요. 처음에는 연약했던 빗줄기는 더욱 거세졌어요. 그러던 중에 어느 소리가 들려왔어요 당연히 빗소리를 말하려는 것은 아니에요. 아무래도 이 곳에 선객이 있었나 보네요. 아니면 그 반대거나요. 어쩌면, 둘 다 해당하지 않을지도요
"숲에는 다양한 존재들이 머물고, 생활하고 있어요. 저의 추측이 맞다면 지금은 우리의 곁이 맴도는 이는 정령일 거에요"
빗줄기 자체가 폭포처럼, 이윽고 마치 얼굴처럼 보이는 모습을 만들어내는 것을 보며 베스니가 제게 이 목소리와 형상에 대해서 물어보면 저는 그렇게 설명해주었어요. 목소리와 물의 형상을 취한 이 존재는 어딘가 모르게 익숙한 느낌이지만, 정확한 정체가 무엇이였는 잘 기억이 나지 않아요. 하지만 나쁘지 않을 거에요, 오히려 좋다면 좋다고 할 수 있겠지요
저는 '정령'이 저희에게 그 자신의 존재를 주장하는 것에는 무엇이 있을지를 생각해보면서 비가 그치기를 기다려 보기로 했어요
대답이 없습니다. 뭔가 이상해서 뒤를 보면, 거한은 헐레벌떡 위로 올라가고 있습니다. 조금 있으니, 에레야가 급한 걸음으로 걸어오더니 그 여자 앞에 서고, 그 여자의 턱을 꽉 붙잡고 그녀를 노려봅니다. 그리고는, 그녀가 전해들은 이야기를 그 여자에게 되묻습니다.
"방금 넌 세스타우 귀족들이 뱀파이어로 변하기 위한 계획의 일환으로, 네가 소속된 뱀파이어 숭배 및 식인 활동을 자행한 사교도를 비밀리에 지원했다고 진술했다. 방금 진술한 내용에는 일점 일획의 거짓도 없는가?"
되묻는 것에 무슨 소용이 있을까요? 그렇게 생각하던 엘리는, 갑자기 자신이 옷뿐만 아니라 살가죽과 뼈, 장기까지 발가벗겨져서, 불쾌한 수십억개의 시선에 노출되어 찢겨나가는 듯한 불쾌감에 몸부림칩니다. 다시 에레야를 바라보니, 에레야의 두 눈이 정체를 알 수 없는 신성한 태양의 힘으로 빛나며 피떡이 된 사교도를 노려보고 있고, 그 여신도는 그 시선을 보고도 당당하게 끄덕입니다.
"당연하지. 어떻게 뱀파이어 님 앞에서 거짓을 고하겠어?"
...이야, 이거 진짜 신념형 개또라입니다. 아무튼, 에레야는 그걸 듣더니 머리를 싸매고 한숨을 쉽니다.
"이 년이 말한 게 사실인지는 모르겠지만, 그건 확실해. 이 년, 거짓말은 안 했어."
엘리는 그 말을 듣고, 일족이 이단 사냥에 풍비박산을 당해 이단심문 대응법을 알려주며 연명하던 한 뱀파이어가 강연하던 내용을 떠올립니다. 태양의 눈. 이 세상을 비춰 어둠 속에 숨지 못하게 만드는 태양처럼, 사람의 마음 속 어둠을 모두 비추는 이단심문관의 심문 기법이라고요. 물론 만능은 아니지만, '예, '아니오' 정도의 간단한 정보값은 거의 100%라 봐도 좋다는 심문 기법입니다. 에레야가 '천국까지 달려보고 싶나?'고 말한 게 괜한게 아니군요.
@@ >>710 "싫어." 누누코가 딱 잘라 대답했다. 단호한 대답이었고, 마치 벌써부터 둘 사이에 불화가 생기는 듯이 했다. 하지만 누누코는 별 생각 없다는 듯이 노예 마차에서 괜찮은 거적대기를 하나 찾아내고는, 그것을 판초 두르듯이 머리위로 둘렀다. 거적대기가 펄럭이며 내려오면서 그녀의 두 토끼귀와 흉터 많은 몸을 가렸다. 이어서 그녀는 말했다.
"확신할 수 없거든. 신성한 들판의 전사는, 지키지 못하는 약속따위는 하지 않아." 딱히 요한에게 반감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녀의 입장에서, 신용하지 못하는 인간과 약속 같은건 불가능에 가까운 것이었다. 그녀가 갖고 있는 복수심은 거의 그정도의 뜨거운 열기로 불타며 사방으로 튀고 있는 것일테다. 누누코는 다음 순간, 토끼 수인 특유의 각력을 뽐내듯 뛰어올라 그의 제스처에 따라 능숙하게 말에 올랐다. 그의 옆자리에서, 그녀는 요한에게 고개를 돌려 시선을 보내며 말했다.
"하지만..." "말을 좀 줄여 볼 순 있겠지. ...후흥." 마침 자신도 인간과 말을 섞는건 그다지 좋아하지 않고 말이다. 하지만 끝내는 순순히 부탁을 받아주겠다고는 말하지는 않는 것이, 둘의 운명이 결코 순탄하지는 않은 여행길이 되리라는 것을 암시하고 있었다. 그리고 누누코는 손을 뻗었다. 그녀에게서는 보기 힘든 친밀한 손길이었다. 그 손은 말의 갈퀴에 닿아, 피부까지 부드럽게 훑으며 그의 말을 쓰다듬어주었다.
검은 숲에 사는 아앨라나가 아닌, 어떤 것이든 피곤하게 따지고 엄밀하게 '정의'라는 것을 하려 들며 그 '정의'란 것도 '정의'하고자 하는 베스니가 살던 곳의 기준으로 '정의'하자면, 정령이란 '어떤 물체나 자연현상에 깃들어 지성을 가진 채 주위의 자극에 반응하는 초자연적 현상의 총합'입니다. 하지만 검은 숲의 마녀뿐만 아니라, 바깥 세상 사람들도 어지간히 엄격한 학자가 아닌 이상 그딴 재미없는 정의로 정령을 재단하지 않습니다. 왜냐? 정령은 재밌으니까요! 정령은 흥미로우니까요! 베스니는 눈을 빛내며 그것을 기록하는 손에 불이 나도록 가속하고, 다른 한 손은 흔듭니다.
"안녕! 정령아! 안녕!!!"
하지만 정령은 계속해서 웃기만 할 뿐이고, 어느 순간 비가 그치자 그 정령은 그치면서 바닥으로 푹 꺼지는 물웅덩이와 함께 사라집니다. 그러자 베스니는 실망한 기색이 역력하군요.
>>720 "인간 사회의 어법도 배워두면 좋답니다. '노력해보겠다'. 해보려고는 하겠는데, 실패해도 어쩔 수 없단 뜻이지요."
요한은 그렇게 말하고, 지도를 펼쳐서 램프를 대고 어디로 가야 할지 살펴봅니다. 보팔 토끼의 각력으로 한번에 뛰어 올라오자, 그 각력에 한번 흘깃할 뿐 다시 지도를 보는군요. 그러다가 누누코가 자기 말에 대해 묻자, 지도를 뒤로 휙 던지고는 사람 좋게 웃으면서 대답합니다.
"바퀴벌레라고 부른답니다!"
...바퀴벌레, 말한테 붙이기에 퍽이나 좋은 이름입니다. 하지만 '바퀴벌레'는 그 이름이 마음에 드는지, 아니면 바퀴벌레라는 이름이 붙어도 어차피 말이라 못 알아듣는 건지 기분 좋게 푸르륵거립니다.
하염없이 웃기만을 반복할 뿐인 빗줄기, 그 존재는 무엇에 그리 재미있어하는 것일까요? 저는 옆에서 베스니가 열심히 분주하게 스스로 할 일을 하는 것을 조금 그대로 지켜보았어요. 상황이 이러하니, 모처럼 이렇게 가까이서 살펴보는 것도 괜찮을 거에요. 숲을 비롯하여 다른 온갖 것들을 그녀는 이렇게 기록함으로서 그 경험과 지식을 남겨두는 것은 그녀를 위해서도 다른 이들을 위해서도 좋은 일이 되려나요. 그것은 다르게 말하자면, 마음에 드는 것들을 수집해서 모아다가 간직하는 것과 같을까요?
"정령이란 달리 말하자면 자연의 의인화이며 그 모습은 계속 바뀔 뿐, 사라지는 것이 아닌 어느곳이든 있을거에요. 단지, 저희가 알아보거나 대화를 나누지 못하는 것일뿐이려나요"
얼마정도 시간이 지났을까요, 짦지는 않은 시간이 흐른 것 같았고 거세던 빗줄기도 점차 시들어가면서 이내 우리에게서 그 모습을 감췄어요. 그렇지만 비가 내렸다는 것을 여전히 알 수 있는 흔적들은 남아있어요
"그 존재는 가버렸어요, 아니면 그저 보이지 않을뿐인 것일지도 몰라요. 그러니, 저희도 가보도록 할까요? 호수를 향해요"
저는 슬슬 자리에서 벗어나 다시금 호수를 향하기로 하고자, 밖으로 나와 다시 보이는 하늘을 한번 바라보고는 그녀에게 그리 말했어요
에레야는 눈을 질끈 감고 주저앉고 거한들이 그런 그녀를 달려가 부축합니다. 과연, 그런 미친 능력을 아무런 제약도 대가도 없이 쓸 수 있었다면 엘리자베스는커녕 그 증조모 대에 뱀파이어가 죄 멸족되었겠죠. 거한들은 성수를 에레야의 양 눈에 부어 식혀주고, 에레야는 두 눈알을 달군 인두로 지지는 고통 속에서도 엘리에게 말합니다.
"식인종이 이렇게 날뛰는데도 실종자 신고가 턱없이 적었던 것, 지하수로에서 인육이 저리 떨어지던 것, 부검된 반-뱀파이어 혐오체들 영양 상태로 대충 가설은 세워 놨지. 그리고 그게 이번에 심증이 생겼네."
간신히 눈을 뜬 에레야는, 엘리가 오늘 밤 해야 할 일을 알려줍니다.
"오늘 밤, 세스타우 성에서 열리는 사교 파티에 참석해. 드레스는 베르야가, 신분은 내가 꾸민다."
베스니는 다시 한번 힘을 내서 발걸음을 옮깁니다. 비가 온 땅이 젖으면 질퍽해질 법도 하지만, 풀과 나뭇조각이 가득 깔린 땅은 두 사람의 발을 부드럽게 안아줍니다. 폭신폭신한 땅을 밟으면서 두 사람은 앞으로 나아가고, 비가 그치자 아앨라나는 다시 앞으로 나아갑니다. 계속해서 앞으로 나아가던 아앨라나는 , 점점 땅거미가 지고 있는 것을 알아차립니다. 네, 시간이 가고 있고, 밤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지금 당장은 아니더라도 곧 어딘가에 캠프를 차리고 야영을 해야 할 겁니다. 베스니는 그런 것도 눈치채지 못한 채, 구슬같은 땀방울을 흘리면서 웃기만 합니다.
>>733 "대충 아가씨인 척하고 존댓말 해. 전 엘리자베스와요. 이런 식으로. 얼굴이 그렇게 생겨먹은 덕분에, 눈동자 분장만 잘 하면 알아서 동부 귀족이라고 속아넘어가 줄거다. 원래 싸울 줄 모르는 귀족들은 전부 병신이고, 여기 귀족들은 죄 싸울 줄 모르거든."
워, 정말 신랄한 발언입니다. 에레야가 신분을 이야기하기 시작하자, 거한들이 가까이 다가오고, 척 봐도 품질이 좋아보이는 양피지에 엘리자베스의 인간으로서의 신분을 적어내기 시작합니다. 옐리사베타 블라디미로비나 예페슈카, 동부 나로즈녜 차르국을 섬기는 남작가의 자유분방한 딸. 어릴 적부터 저택 안에서만 자유롭게 나다녔기에 나로즈녜 차르국의 문화도, 귀족의 예법도 잘 익히지는 못했지만 어쨌든 귀족적인 기풍은 가지고 있다는 그런 설정입니다. 에레야는 엘리에게 설명합니다.
"너무 불평 가지지 마. 네 원래 성격과 정반대의 신분을 부여하면 그 신분을 유지하는 데만 온 신경을 쏟아야 해서 임무 수행 못 해. 이제, 베르야가 분장을 해줄 거다."
그러자, 거한이 지하실에서 계단으로 올라가더니 베르야를 데리고 옵니다. 베르야는 '연행'된것 치곤 꽤나 멀쩡한 상태로 오더니 에레야를 노려보는군요. 그리고 한 마디 쏘아붙입니다.
>>734 "그렇습니다! 바퀴벌레처럼 살아남으라는 의미로 지어준 이름이고, 실제로 바퀴벌레처럼 살아남아 주었죠."
요한은 밤하늘의 별을 세는 것보다도 이야기하는 것이 더 재밌는지, 그 '바퀴벌레'와 엮인 이야기를 해 줍니다. 화살을 여러 발 맞았는데도 산 이야기, '바퀴벌레'를 산 채로 해부해야 했던 이야기, '바퀴벌레'의 폐에 농양이 생겨 구더기를 집어넣어 썩은 살을 제거한 이야기 등등. 온갖 난해하고 '유식한' 단어로 점철되었던 요한의 다른 말들과는 다르게, 이 말에 대한 이야기는 간결하고 정확한 것이, 드디어 누누코도 진지하게 공감할 수 있을 법한 진심을 느끼게 합니다. 그리고, 누누코의 일족도 말 자체는 생소하지 않은 만큼 다른 이야기들과는 다르게 그나마 들어줄 만도 합니다. 그렇게 한참 동안 이야기를 하다가, 요한은 누누코에게 묻습니다.
"그나저나 누누코 씨. 신성한 들판을 이야기하시는 것을 보니... 누누코 씨는 유목 민족이거나, 또는 반농반목 민족 계통의 부족 전사셨던 것 같은데 맞습니까? 혹시 가능하시다면, 누누코 씨가 이런 비인도적인 수모를 당하시기 전 좋았던 시절에 대해 저에게 말해주실 의향이 있으신지 궁금하군요."
>>740 베르야는 엘리를 위한 옷을 즉석에서 만들기 시작합니다. 나로즈녜 차르국, 추운 동네 특유의 모피와 가죽 코트를 먼저 만들고 그 아래에 입을 복잡한 패턴으로 짜낸 직물 드레스를 만들어냅니다. 거한들은 빛나는 손이 만들어내는 기적을 보면서 입을 다물지를 못하고, 입을 다물고 보던 엘리는 아주 옛날 어릴 적, 외증조어머니가 살아계실 적에 '블라드 체페슈'라는 성씨가 어디서 시작했는지를 알려주시기 위해 읽어주셨던 그림책의 내용을 떠올립니다. 블라드 체페슈라는 가문명은 먼 동쪽에서 시작했고, 그 동쪽 고향보다도 먼 동쪽에 있는 차르국 사람들과 교류하기도 하고 싸우기도 하면서 살았다고 동화책을 읽어 주셨죠... 그 동화책에 나오던 드레스가 좀 더 화려해졌다면 이런 느낌일 겁니다.
"...언제 봐도 솜씨가 대단하군."
"대단하면 돈이나 똑바로 내놔. 30금화. 깎으려고 하면 입술 꼬매버릴 줄 알아."
베르야는 엘리를 위해 드레스 한 벌을 후딱 만들어치우고는, 눈에 넣는 빨간 물약을 줍니다.
"별 건 없어요. 그냥 눈 색깔을 좀 더 진하게 만들어 줍니다. 뱀파이어처럼 선혈로 보이는 게 아니라, 그냥 진홍색으로 보여서 뱀파이어라는 의심을 피할 거에요."
공지 내일부터 내가 시작하는 일이 격일 단위로 기쁨이 넘치는 하루 14시간 노동 - 휴식 - 기쁨이 넘치는 하루 14시간 노동 - 휴식을 반복하는지라 오늘은 저녁 7-8시쯤에 들어가보고 내일은 ㄹㅇ 인당 1답레씩만 진행할수도 있을듯; 노동착취를 당하는 캡틴이라 미안하다. 내일 모레는 일어나는 대로 좀 더 많은답레 주도록 노력할개...
@@ >>739 "인간... 아니," 이야기를 잠자코 듣던 누누코는 중얼거리듯이 운을 텄다. 그러더니 이내 "요한은 바퀴벌레를 아끼는구나." 하고 말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어둠 속을 해쳐 밤하늘의 별을 바라보던 시선을 '바퀴벌레' 에게로 옮겼다. 바퀴벌레는 쭉 뻗은 네 다리를 움직이며 두 사람과 마차를 이끌고 있었다. 터프한 말이다. 그런 일이 있었는데도 아직까지도 자신의 직무를 놓지 않고 있었다. 짐승은 때때로 인간보다 더욱 활기를 띄곤한다. 어쩌면 신성한 들판의 아이들, 자신과 같은 동족들보다도 더욱. 누누코는 그렇게 생각하며 마치 바퀴벌레를 인정해주듯 손을 뻗어 갈퀴를 쓰다듬어주었다. 마치 그를 전사로 인정해주듯이.
"누누코의 이야기가 듣고 싶은 거네." "――요한에게 별로 흥미로운 이야기는 아닐거야." 그리고 마차가 굴러가는 동안, 누누코는 이야기해주었다. 자신이 처음 부족으로 인정 받고 전사가 되기로 맹세한 날. 그렇게 하기까지의 노력. 신성한 들판의 자유로움. 드넓음. 어떻게 일곱 다리 야수를 사냥하는지. 그 소재로 무엇을 만들 수 있는지. 신성한 들판의 나뭇잎 칼을 어떻게 휘두르는지. 마치 인간과 수인의 경계를 허문듯이 보였다. 그런 이야기를 시작하기 전에, 그녀는 어디까지나 요한같은 인간을 인정한 것이 아니고 딱히 할 것도 없기 때문이라고 선 긋듯이 말했지만 이야기를 푸는 사이에 어쨌든 그녀는 잠시동안이나마 고통을 잊고 즐거워보였다. 그리고 때로는 우수에 찬 눈이 되기도 했다. 자신의 동족을 기리는 눈이었다.
"누누코는... 누누코네 부락으로 돌아가려고 했어." "부끄러운 일인걸 알아. 하지만 다들 어떻게 지내는지 알고싶거든. 그곳에서 누누코의 동족들과 만남을 가지고, 영혼을 담금질 할거야." "...그리고 죽이겠어... 그 날, 그 자리에 있던 인간들을 남김 없이, 말이지. ...후흥." 그리고는 평소대로 피비린내 나는 문장을 입에 담으며, 그것이 달콤하게 느껴지는 듯 입가를 비틀면서 버릇과 같은 웃음소리를 내었다.
참고가 될 진 모르겠지만... 누누코도 말해주고 있으니까 풀어보는 시트에 적지 못했던 설정! 누누코의 종족인 보팔토끼 수인은 인간은 물론이고 수인들 사이에서도 맹수로 느끼고 위협적이라고 생각해서 보통 배척받는 종족이에요~ 그래서 누누코는 원래부터 신선한 들판의 주민이 아니고, 방황하고 있던 그녀를 신성한 들판에서 포획하고 받아들여줬어요. 보팔토끼 수인과 보통의 토끼 수인은 얼핏 비슷해보이지만 확실한 차이가 있고, 보팔토끼 수인쪽이 확실하게 희귀해서 보통 토끼 수인인 줄 알고 다가가다가 일어나는 사고가 빈번한 편이에요. 보팔토끼 수인 그 특유의 희귀성과 호전성 때문에 연구는 크게 이루어지지 않았고 교양이 깊게 있는 인물이 아니라면 그 존재조차도 제대로 인지하고 있지 못해요. 아마 누누코도 그래서 신성한 들판에 더 애착을 갖고있지 않을까 생각하고 있네요~
>>744 거한이 거울을 가지고 옵니다. 그러자... 엘리는, 자신이지만 자신이 아닌 누군가를 마주합니다. 선혈처럼 붉은 눈이 아닌 어둡고 그윽한 진홍색의 눈동자. 매일 입고 다니던 작업복이나 새로 입게 된 늘씬한 일상복이 아닌 나로즈녜 차르국 식의 모피를 걸친 화려한 패턴의 직물 옷을 입은, 옐리사베타 블라디미로비나 예페슈카, 나로즈녜 차르국의 블라디미르 예페슈크 남작가의 말괄량이 영애가 됩니다. 에레야는 엘리에게 다시 한번 설명해줍니다.
"시간이 없으니, 지금부터 익숙해져야 할 거야. 그러니까 지금부터 널 그 뱀파이어 엘리자베스가 아닌 동방 귀족 옐리사베타로 간주할 거야."
에레야는 엘리... 아니, 옐리사베타의 가슴팍에 초대장을 팍 밀어제낍니다. 엘리/옐리사베타는 그 초대장을 봅니다. '옐리사베타'의 이름과 '블라디미르 예페슈크' 남작가의 인장이 찍혀 있군요. 그리고, 에레야는 다음 말부터는 갑자기 엘리를 엘리가 아닌, 옐리사베타로서 존대하면서 부르기 시작합니다.
"그러니, 옐리사베타 아가씨. 1층으로 나가시면 우리 애들이 사교 파티로 가는 마차를 준비해놨을 겁니다. 거기로 가서, 밝은 밤귀와 밤눈으로 귀족들이 무슨 호박씨를 까는지 들어 주십시오. 말도 안 되는 헛소리라도, 좀 이상하다 싶으면 전부 수집해주세요. 알겠습니까?"
요한은 어깨를 으쓱이면서 누누코의 이야기에 맞장구를 칩니다. 모든 인간들에게 자신을 일원으로 받아들여주는 '공동체'란 것은 소중합니다. 공동체 따위는 필요 없고 혼자 살아도 된다는 이들은, 사실 너무나도 큰 공동체에 살고 있어서 그 공동체의 존재 자체를 잊어버렸거나 세상 물정을 너무 모르거나 둘 중 하나일 뿐이죠. 그리고 태어난 혈통을 이유로 배척당하던 누누코에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를 받아들여준 신성한 들판은 너무나도 소중했습니다. 그렇기에, 누누코는 그 소중한 들판에 패악질을 부린 이들을 다 죽이겠다는 결심을 굳힙니다.
"원래 저는 동종업계 사람들의 사업은 방해하지 않습니다만, 노예 사냥꾼들은 예외죠."
요한은 누누코를 구하길 잘 했다면서, 그녀의 무운을 간접적으로 빌더니 그렇게 묻습니다.
"그렇다면 궁금한 것이 있습니다만, 누누코 씨만 잡혀간 것이 아닐 텐데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된 건가요?"
@@ >>751 "몰라." "...모르겠어." 누누코가 자신의 무릎 정도로 시선을 내리깔고는 말했다. 멍청한 대답이었지만 동시에 차가운 사실이다. 그것이 그녀가 겪고있는 상황의 가장 큰 문제였다. 누누코의 힘은 대단한 것이나, 손이 닿지 못하면 아무런 소용도 없다. 그렇다고 그녀에게는 인간 사회에 녹아들 요령조차도 갖고있지 않았다. 다른 동족들이 어떻게 되었는지,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아무것도 알고있지 못했다. 누누코가 알고있는 것은 그저 사람의 모습을 한 돼지들의 냄새. 그리고 얼굴. 오직 그것 뿐이었다.
"하지만 누누코가 붉은 잎에 맹세코 전부 찾아낼 거야." 누누코는 오직 기억에 눌러붙은 그 피비린내나는 감각을 상기하며, 몸에 걸친 넝마를 주먹으로 꾹 쥐며 맹세했다.
>>753 안타깝게도 이 세상이란 곳은 원래 그렇습니다. 죽는지도 모르고, 왜 죽는지도 모르고 죽는 이들. 사라져서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 이들이 가득한 세상. 유령으로라도 다시 만나면 좋으련만, 그럴 수조차 없어서 죽어서 다음 생에서 만나자고 기약 없는 눈물로 맹세할 뿐이지요. 그것이 이 세상의 현실이었고, 누누코와 함께 끌려갔던 이들도 그랬고, 요한이 그간 구했던 수많은 노예들도 그랬을 것입니다. 요한은 웃음기를 완전히 빼고 닥치고 있다가, 진지한 목소리로 나직이 묻습니다.
"감히, 제가 영업을 하나 해보고자 합니다만."
영업. 이 와중에 영업이라니, 정말로 좋은 이유가 있는 게 아닌 이상 요한 브룬은 자기 머리가 따일 각오도 해야 할 겁니다. 하지만, 요한은 자기가 생각하기에는 아주 좋은 사업 아이템을 제시했군요.
"저는 현상금 사냥꾼이지만, '살아있는 상태'로 누군가를 찾아내서 데려오는 것에도 꽤 능합니다. 그러니까, 저와 함께, 누누코 씨가 당하셨던 유감스러운 상황에 처해 있을 이들의 위치와 구체적인 구제 방안을 알아볼 수 있을 거란 말이지요."
요한은 그렇게 말하고 대가에 대해서는 그답지 않게 말을 피합니다.
"뭐, 대가는 좀 있다가 생각해보는 것으로 하고요. 한 명이 찾는 것보단 두 명이 찾는 게 더 효율이 좋지 않겠습니까?" // 오늘은 여기까지!
"누구인가에 따라서 다를 것이에요. 비슷한 효능을 내는 약을 만들수 있을거에요, 그에 뒤쫒아 오는 부작용도 감내해야겠지요"
저는 그녀의 질문에 대답해주면서 제가 실제로 무엇을 해줄 수 있을지 덧붙여 말해주었어요. 그렇지만 그녀가 지금까지 이르도록 보여준 모습을 바라보았을때 굳이 이러한 약이 없어도 그녀라면 가능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약간 들었어요
숲의 사이로 스며들어오는 빛이 마치 그 힘을 잃어가듯 연약하게 사그라들고, 슬쩍 하늘을 바라보면 해가 지고 숲에 밤이 도래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어요. 숲에 어둠이 자리잡으면 그 모습은 좀 달라요. 검은색 물감으로 색을 입힌 도화지 같다고 해야할까요? 생물발광성을 지닌 버섯이나 이끼들 그리고 동물들이 눈에 잘들어 온다는 것은 괜찮은 일이 되겠지만요
"어둠이 완전히 숲에서 자리를 차지하기 전에, 저희가 당분간 머물고 가게될 적당한 장소를 찾아보기로해요. 길로 향함에 있어서 적절한 휴식은 필요할 것이에요"
그렇게 되었니 저는 그녀가 알고 있는지 아닌지, 여전히 가야될 길을 걷는 것에 몰두하는 것에 멈춰세우듯 말하였어요. 적당한 휴식도 없이, 밤새도록 계속 움직이는 것은 좋은 선택이 아닐 거에요. 그래서 제대로 야영을 할만한 장소를 찾아보아야 겠어요. 저는 한 손으로 손가락을 튕겨내 보이고는 손가락 끝에 촛불과도 같이 불꽃을 피어냈어요. 저는 마녀 님에게는 비할바는 될 수 없겠지만 그래도 저는 바로 마녀 님의 바로 아래서 이어질 제자로서 배워왔어요. 이정도의 작은 마법을 부리는 것은 간단한 편에 속할 거에요
@@ >>754 "...영업?" 마차가 이동하는 내내 바퀴벌레 아니면 주변의 자연물만 보고 있던 누누코의 눈이, 처음으로 요한에게로 돌아갔다. 요한같은 일반적인 인간에게, 그 보팔토끼 수인의 눈빛은 굉장히 서슬어린 스산한 것이었지만 누누코는 그저 '영업' 이라는게 무슨 뜻인지 몰라서 되물었을 뿐이었다. 그리고 그 영업이 무엇을 의미하는 지는, 금방 들을 수 있었다.
"피네가 대가 없는 거래는 없다고 하던게 기억 나." 누누코가 동족의 목소리를 떠올리며 중얼거리듯이 말했다. 게다가 이것은 하물며 인간이 먼저 제안하는 거래였다. 안타까운 일인지, 누누코에게는 요한이 제안한 것이 함정인지 아닌지 판단하고 따질 수 있는 지능이 되지 못했다. 지금 그의 손을 받아들이는 것이 정말 괜찮은 결정일지도 알지 못했다. 마치 이미 멀어진, 피로 얼룩진 노예마차처럼 말이다. 이미 지긋지긋했다. 만약 이 제안을 받아들인다면 마차가 또 다른 미래가 되어 닥쳐올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하지만 누누코가 동족을 찾지 못하면, 누누코가 숨쉬는 의미따윈 없을거야." 그러나 누누코는 생각했다. 사실은 언제나 생각했던 일이었다. 단지 가장 중요한 순간에, 누누코는 그러지 못했다. 누누코는 매순간 그 일을 원망하며 자책하고 있었다. 그녀는 어쨌든 선택을 해야했고 이내 체념과 결심이 섞인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들었다. 구태여 말로 하지는 않았지만, 그것은 암시적인 승낙에 가까운 몸짓이었다.
>>758 엘리를 모시고 갈 마차는 여태껏 엘리가 직접 본 마차들과는 비교를 불허합니다. 여객마차는 그냥 가축마차나 다름없었고, 짐마차의 승객칸은 인간을 짐짝 취급합니다. 하지만 엘리, 아니, 옐리사베타 아가씨를 위해 준비된 이 마차는... 정말 엘리가 탔던 다른 마차들과 같은 종류로 보는게 맞을지 모르겠습니다.
말들은 갈기며 털이며 윤기가 흐르고, 마부는 (가면 뒤집어쓴 거한이지만) 수행원의 옷을 입고 그녀를 기다립니다. 마차, 딱 엘리 한 명이 들어갈 마차는 다리를 쭉 뻗는게 아니라 그냥 자도 될 정돕니다. 거한은 '옐리사베타'를 보자마자 마차 문을 열어 정중히 모십니다.
>>760 좋은 선택입니다! 아앨라나와 베스니 일행은 나올 때부터 장비보다 식량을 우선해 챙겼고, 그 말은 부족한 것은 최대한 자연물을 이용해 때워야 한다는 뜻이죠. 그리고, 좋은 지붕 겸 집이 되어주는 저 텅 빈 큰 나무는, 적어도 지금 이곳에서는 두 사람들의 부족한 자재를 때워지는 좋은 '자재'가 되어줄 것입니다. 베스니는 야삽을 꺼내 나무밑둥 앞의 땅을 팍팍 파내기 시작하고, 안나는 쓰러진 나무에 천막을 엮어 임시 은신처를 만들기 시작합니다. 베스니는 헤헤 웃으면서 이야기합니다.
"제가 여기 들어온 지 며칠이 됐는데 드디어 야영다운 야영을 해보네요."
그 말과 함께, 가말라시엘의 지팡이가 흔들립니다.
"그간 살려두느라 고생 좀 했죠. 한심하길래 좋게는 안 살려놨습니다."
// 아앨라나주 이 가말라시엘 성격에 대해서 할 말이 있는데... 2. 세상을 파멸시키는게 아니라 파멸로 몰아가는 음모가형 3. 호구형 악마 중간의 느낌이 좀 어렵다... 그리고 2번으로 간다면 그 면모를 보이기 위해 베스니나 주변 인물 하나가 죽거나 죽느니만도 못한 꼴 보게 될 것도 같은데 이건 어떻게 생각하는지...
말 두마리가 경쾌하게 사교 파티장으로 나가고, 엘리는 마차가 이렇게 편할 수 있었나 감탄하며 말 그대로 '흔들리지 않는 편안함'을 만끽하면서 지나갑니다. 원래 인가들은 밤길을 좋아하지 않는다지마, 세스타우는 도시인데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없습니다. 집을 구하지 못한 거지들이 있을 법한데도 거지들조차 보이지 않습니다. 아마 엘리가 있던 지하수로처럼, 어딘가 한 곳에 모여서 어떻게든 횃불이나 짱돌, 막대기처럼 저항이라도 해볼 수 있는 것을 든 채로 벌벌 떨고 있겠죠. 이 동네가 그렇게 된 이유는, 엘리에게 피를 빨리길 원햇던 그 미친 사교도가 말한 바와, 엘리가 싸웠던 두 유사-뱀파이어와, 식인종들과 어느 정도 연관이 있을 겁니다. 그리고... 마차 마부석과 마차 사이에 난 쪽문으로, 거한이 작은 쪽지 하나를 던져 넣습니다.
"'아가씨'. 어느 정도 기본 교양은 알아두셔야 합니다. 숙지해두시길."
그 쪽지를 보면... 나로즈녜 차르국의 간략한 정세가 적혀 있습니다.
- 현재 나로즈녜 차르국은 차리나 나타샤가 통치하고 있으며, 반대하는 귀족들을 학살하고 제압하는 데 성공했음. - 차리나 나타샤는 극동으로 탐험대를 보내 영토를 넓히려는 시도를 하는 중.
"그래야겠어... 이런 장비로는 어떤 적도 죽일 수 없어..." "냄새를 없애고, 칼날을 갈거야... 마주치는대로 목을 뜯어주지..." "...누누코가 전부 죽일거니까..." 얼마나 지났다고 입에서 피비린내 진한 말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하지만 목소리는 갈라졌고 말꼬리에선 힘이 빠졌다. 누누코의 눈꺼풀이 자신도 모르게 감기고 있었다. 미스터 스위츠의 영지부터 요한의 마차까지, 한시라도 제대로 잠든 적이 없기에 묵은 피로가 한꺼번에 쏟아지고 있는 것이었다. 누누코는 간헐적으로 눈을뜨며 저항했지만, 그런 '동물적 법칙'에 저항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죽이겠어..." 그런 잠꼬대를 마지막으로, 어느새인가 누누코는 마차에 흔들림에 몸을 맡기고 잠들어있었다.
>>770 육체가 정신을 지배하고, 토대가 상부를 정의합니다. 이걸 '유물론'이라 부르며 구체화하는 건 이 시대에는 너무 이르지만, 어쨌든 이 시대 사람들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사람들은 동물들을 끝까지 쫓아가서 지쳐 쓰러지게 한 다음 잡아먹고 사람들 입에서 바른 말이 나올 때까지 육체에 온갖 고문을 가하지요. 아무튼 누누코의 육체도 피로 앞에선 속절없이 무너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생각해보면 미스터 스위트를 죽인 이래 무슨 범죄자들을 나무열매마냥 매달아둔 정신나간 도시까지 뜬 눈으로 걸어왔고, 거기서 납치당했고, 납치당한 다음에도 계속 끌려왔고, 끌려간 다음에도 요한의 마차에서 뜬눈으로 계속 있었습니다. 자지 않는다면 심장이 자버릴 정신나간 스케줄이죠.
"...이런."
...정신을 차리면, 흰색 천장입니다. 곰팡이들이 파란색, 흰색으로 알록달록한 천장입니다. 일어나보면 누누코는 곡물푸대 사이에 누워있고 옆에는 쪽지가 놓여있습니다.
>>772 짧은 '마차 체험'이 끝나고, 엘리는 마차에서 내립니다. 이제 본격적으로, 뱀파이어 엘리자베스 바토리 블라드 체페슈가 아닌 인간 귀족 옐리사베타 블리디미로비나 예페슈카로서의 첫 시간입니다. 연미복을 입은 거한이 그녀의 앞에 서서 파티가 열리고 있는 대저택의 문을 지키고 있던 경비병 앞에 서고, 경비들 중에 잘 차려입은 남자가 나와서 손을 뻗습니다.
"초대장을 보여주시겠습니까."
자고로, 귀족들의 '행정 절차'라는 것은 귀족들끼리 면대면으로 이뤄지지 않습니다. 이런 '천것들'끼리 이루어지죠. 실무교섭을 다 마친 다음에 마지막에 서명이나 결재는 본인 서명으로 할 수도 있다지마는... 아무튼, 거한이 초대장을 건네자 경비병은 초대장을 확인하더니 목례합니다.
"협조 감사드립니다. 옐리사베타 남작영애님. 안으로 들어가시죠."
...그리고 안으로 들어가면, 그간 엘리가 봐왔던 것들과는 정반대로 화려한 것들이 엘리의 눈을 사로잡습니다. 유리잔도, 식사도, 옷도, 사람들도, 전부 화려하기 그지없습니다. 사람들은 호호 웃고 허허 웃으면서, 각자 좋은 말만 하는 것처럼 들리지만 악마는 디테일에 있는 법이고, 옐리사베타는 여기 웃기 위해가 아니라 듣기 위해 왔습니다. 그것을 꼭 명심하십시오.
@@ >>773 낯선 천장이었다. 상투적이지만 그랬다. 그도 그럴게 누누코에게는 열린 하늘보다 닫힌 천장에 훨씬 낯선 것일테니. 개운한 기상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정신을 되찾을 정도는 되었다. 누누코가 머리를 긁으며 상체를 일으켰고, 기다란 토끼귀가 살랑대며 흔들렸다. 그녀는 곧 쪽지를 발견할 수 있었다. 글씨로부터 목소리가 들리는 듯한 기분이었다.
"...후흥." 누누코는 짧게 소리내고는, 쪽지를 아무데나 던져버리고는 땅을 딛고 일어났다. 이곳이 어딘지 파악할 시간이었다.
저는 그녀가 말하는 야영다운 야영에 대하여 알아보고자 물아보았어요. 그녀를 처음 만나게 되었을 때를, 지금까지에 이르게되는 것들을 다시 되돌아 생각해보았어요. 그녀는 탐험가이고 세상을 걷다가 숲으로 넘어왔을 거에요. 그렇지만 딱히 야영을 위한 장비나 기제를 온전히 갖추고 있지는 않는 것으로 보였어요. 다만, 그녀에게는 나름대로 경험이 있을것이니만큼 간접적이거나 조금 가깝게 저도 참고로삼아서 알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렇다고 할 수 있겠네요. 이상하다고 여길수 있지만 그것이 그녀의 개성일지도 몰라요"
긍정적으로 말한다면 개성적이에요, 나쁘게 말한다면 괴상하다고 할 수 있겠지요? 이와 상관없이 그녀가 대신 짐을 나르거나 밑작업을 대신 해주어서 저는, 저희가 목적을 달성하는데 있어 저에게는 한 결 일이 편하게 되었어요. 올바르게 넘어갈 일도 좀 틀어지는 것도 있었지만요
이제 얼추 저희가 야영을 하며 날을 보내게 될 곳이 준비가 된 것 같아요. 저는 제대로 시간을 보내고 휴식으로서 가만히 있거나 다른 행동을 해봐야 될지 생각해보기로 했어요
...평범하게 싸움이 난 평온한(?) 집구석입니다. 기름을 먹인 종이로 만든 창문을 밀어서 열어보면 마을의 풍경이 보입니다. 그다지 풍족하다고는 할 수 없지만, 그렇다고 찢어지게 가난하다고 할 수도 없는 그런 마을 말입니다. 마을 아낙들은 우물가에 모여서 수다를 떨면서 물을 한 동이 두 동이 길어가고, 남정네들은 삽을 들고 나와서 동네 배수로를 푹푹 퍼내고 있습니다. 자라나는 밀들은 아직 수확기가 덜 됐는지 푸른 빛이 도는군요. 마을 이름이 어떤지는 모르겠지만, 여긴 노예 추적자랄 만한 사람도 안 보입니다. 수상할 사람이라곤 누누코와 요한 브룬이 가장 '수상'할 겁니다.
>>777 이게 좀 아앨라나가 옆에서 부대끼던 사람 죽어나가도 그런갑다 하면 좀 캐릭터가 사악하게 묘사될 수밖에 없고 당연히 주변인한테 비난받을 수밖에 없는데, 이걸 과연 아앨라나주가 좋아할까? 싶어서... 아앨라나가 가말라시엘을 좀 좋을대로 이용하고 벗겨먹는 느낌으로 갈지, 아니면 정말로 "가말라시엘이 아앨라나 빼고 다 파멸시키는 느낌"으로 가도 될지 모르겠음...
@@ >>780 또 다른 마을이었다. 언뜻 보기엔 평화로웠지만, 그래봤자 수인족인 누누코에겐 인간들의 마을일 뿐이었다. 몸에 긴장과 흥분이 도는 것이 느껴졌다. 몇 일 내내 도망과 은신을 반복하며 이런 짓을 하고있으니 세상에 내던져진 느낌이었다. 하지만 적어도 누누코도 혼자는 아니었다. 적어도 지금은.
'...요한은 어딨지.' 자연스럽게 누누코의 머릿속에서도 그런 의문이 피어났다. 하지만 이내 그런 의문도 빠르게 흩어져버렸다. 누누코가 무관심해서가 아니고, 그 인간이라면 알아서 잘 할 것 같다는 막연한 생각 때문이었다. 누누코의 관심이 자연스럽게 방 안으로 향했다. 누누코의 진홍색 눈이, 잠시 하루의 요람 역할을 해준 이 방 안을 샅샅히 훑기 시작했다.
>>776 '제가 대신 말씀드리죠. 처음에는 목 대신 가방을 불곰에게 잃었고, 그 다음에는 보셨던 대로 다리가 부러졌답니다.'
가말라시엘이 비웃듯 이야기합니다. 이 다음에 가말라시엘은 이 여자의 다리 한짝을 말다리로 만들어버렸죠. 이 다음에는 무슨 끔찍한 일이 일어날까요? 아니, 살아는 있을까요? 뭐, 뷔르트겐 호수까지 간 다음에, 더 아나가 그녀가 헤어진 다음에는 아앨라나가 알 바는 아니지만 말입니다. 베스니는 자신이 챙겨왔던 부싯돌을 꺼내들지만, 그러기가 민망하게 아앨라나가 손가락 끝에 불을 훅 피워내 모아낸 장작 위에 불을 붙입니다. 그리고, 휴식이냐 다른 일이냐를 생각할 겨를도 없이 베스니가 묻습니다.
"아앨라나 씨! 혹시 앨리스 님은 어떤 분이신가요? 연세는 어떻게 되세요? 어떤 능력을 가지고 계세요? 혹시 어떤 마녀신가요? 저, 엄청 궁금한 게 많거든요!"
오호호, 우호호, 아하하, 허허허, 옐리사베타는 몰라도 그 안에 들어있는 엘리는 들으면 들을수록 "아가리 닥치고 그냥 할 말만 해"라고 말하고 싶은 욕망을 참느라 힘들어집니다. 뱀파이어들은 나이가 들면 들수록 이성 관리를 똑바로 안 하면 점점 이성이 뭉텅뭉텅 깎여서 말이 직설적으로 변해가는 바람에, 엘리가 마지막으로 전대 가주를 보았을 때, 그녀는 엘리더러 '돌연변이, 가.' 라고 말하며 엘리의 바깥 여행을 허락했지요. 그 때는 좀 말이 너무하고 매정하다 생각했지만 여기 오니 뱀파이어 일족들의 무서울 정도로 직설적인 발언들이 너무나도 그리워집니다. 그러던 와중, 한 남자가 다가옵니다.
"안녕하십니까, 아가씨. 제 이름은 젠튼, 혹시 아가씨와 합석하는 영광을 누려도 되겠습니까?"
>>791 에고 소드와 비슷한 그냥 자아를 가진 지팡이라 하면 악마까진 아니어도 내가 다루긴 좀 편할듯. 아니면 그냥 jrpg에 나오는 호구형 대악마를 봉인해놔서 가말라시엘이 "나 쟤 죽일래"라고 했을때 아앨라나가 지팡이 불태우려 들고 그러니까 가말라시엘이 "나쟤죽일래 로 5행시 해보겠습니다"로 말바꾸거나
"행운과 불운이 그 자리를 바꿔가며 그녀의 곁을 맴돌고 있는 것 같아요. 마치 행운과 불운이 서로에게 누가 이길지 내기를 하는 것만 같아요"
저의 물음을 그녀가 아닌 가말라시엘 님이 말해주었고 그것에 저는 그렇게 평을 내렸어요. 그러한 일들을 당하고도 결국 그녀는 저와 만나서 이렇게 괜찮게 있어요. 이런 만남은 단순히 우연일 수도 있지만 그렇지 않을 수도 있어요. 어느것이 되었더라도 이렇게 곁에 있을때 만큼은 그녀를 살펴보면서 알 수 있는 것들이 있을거에요
"저의 존경스러운 스승님이시자, 위대한 마녀이신 분, 그분께서 바로 앨리스 님이랍니다! 정확한 나이는 알려주시지 않았지만 오랫동안 있으셨던 것 같아요. 그렇지만, 화사하고 아름다우셔요. 훌륭한 기예와 지혜로 함께 온갖 마법들을 능히 발휘하시기도해요"
그녀의 그런 질문에 저는 자랑스런 표정을 지으며 당당하게 설명해 보았어요. 제가 이렇게 좋은 솜씨와 지식, 그리고 적절한 생활을 하는 것도 마녀 님께서 거두워주신 덕분이지요. 마녀 님은 제게 말해주셨어요. 마법의 길을 타고난 아이로서 장차 뒤를 이어갈 좋은 마녀가 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해주셨어요. 그랬기 때문일까요? 저는 마녀 님에게 배우고 수련을 거듭해왔고 크게 어렵지 않게 마법을 사용할 방법을 배우고 이를 실현할 수 있게 되었고 어느덧 능숙해졌어요. 그러니까, 저는 앨리스 님이 말해주신대로 훌륭한 마녀가 되고 싶어요
>>782 누누코의 시각이 보기에는 특별할 게 없습니다. 진짜로 그냥 곡물을 쟁여두는 곳으로밖에 보이지 않고, 제일 윗칸에는 천장과 비슷한 색의 곰팡이가 핀 치즈가 놓여있습니다. 기러기, 토끼 따위를 사냥한 후 속을 비워 말려둔 것이나 민물고기 어포도 놓여있습니다. 옆에는 마늘뭉치부터 바질 묶음까지, 곡물에 비하면 그다지 많다고 할 순 없지만 그럭저럭 구색은 갖출 정도입니다.
후각으로 가면, 곡물이 가득한 곳에서 풍기는 특유의 노란 밀 같은 냄새와, 마늘의 묵직하고 알싸한 냄새, 치즈의 쿰쿰하지만 기름진 냄새, 바질의 가볍고 산뜻한 냄새, 마른 어포에 남은 짠내와 약간의 비린내가 함께 어우러집니다. 네, 그냥 창고고, 누누코는 곡물부대 겸 침대, 광주리 겸 서랍을 가지고 있는 셈입니다. 공짜라 치면 뭐 감방도 고맙고, 아니라도 뭐...
"아유, 당신 말 잘했다! 무슨 사기꾼놈이랑 어서 굴러쳐먹은지모를 토끼뼈다구 좋다구 데려와놓고 뭐? 당신이 그렇게 대책없으니 평생 밀죽이지!"
'...그 광대가 적절한 바보를 찾은 모양이네.' 그리고 누누코의 입가에는 옅게 웃음이 걸렸다. 어쩐지 요한이 저 바깥의 남자를 구워삶는 모습이 연상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웃음은 빠르게 흩어졌다. 대신, 어제 걸치고 왔던 넝마에게로 시선이 향했고 누누코는 그것을 붙들고 몸에 휘둘러 걸치고서는 망설임 없이 바깥으로 나왔다.
"..." 어디서 굴러쳐먹은지 모를 토끼뼈다구가 그렇게 그들 앞에 나타났다. 다만 누누코는 가만히 서서 진홍색 눈으로 그들을 지켜볼뿐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아주 잠깐 그렇게 서서 응시하더니 이내 곧 다리를 움직여 다른 곳으로 걸어갔다. 넝마 아래는 거의 속옷과도 같은 차림이 드문드문 드러났지만 누누코는 딱히 수치심도 없이 걸었다. 그런 그녀에겐 목적지도 없었지만, 누굴 찾아야 할지는 알고있었다.
>>797 베스니는 그 어둠 속에서도, 장작을 검댕이 좀먹어가며 커졌다 꺼졌다를 반복하는 불안정한 불빛에 의지해 안나의 이야기를 적어갑니다. 남의 이야기를 듣길 좋아하고 또 그걸 받아적어 펴내는게 일인 음유시인의 특성을 생각해보면 그리 별날 일은 아니지만, 그래도 베스니는 관심이 정말 많아보입니다. 그리고 그녀는 여러 이야기를 꺼내는군요.
"마녀의 과자집. 마녀의 가마솥. 마녀의 개구리. 이런 관념적인 것들을 정말 많지만 실제로 마녀가 어떤지를 다루는 건 찾아보기 어렵죠. 그래서 제가 적어보려구요!"
젠튼은 엘리를 이끌고 사교 파티의 더 깊숙한 곳으로 향합니다. 좀 더... '은밀'하고 기이한 향이 퍼지는 향로가 온갖 곳에 놓여있고, 귀족들이 성별과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그곳에서 기분 좋게 늘어져 있습니다. 물론 그런 것만 있는 건 아니고, 어떤 사람은 그림을 그리거나 술 더 많이 마시기 게임을 하는 등 다양한 놀이를 하고 있습니다. 젠튼은 하나하나 설명해주는데, 먼저 향로입니다.
"어렵게 구한 향로라고 하더군요. 파티 주최자가 설치해놨는데... 피부 미용에도 좋고, 심신을 안정시키는 효과도 있다고 하니 한번 체험해보시죠."
그리고 그 다음으로 지목하는 것은 그림입니다. 사람들이 그림을 그리고, 물감을 머금은 천주머니를 흰 천막에 던져 색물이 튀게 하는데... 물감이 전부 채도와 명도의 차이만 있을 뿐 붉은색 계통입니다. 젠튼은 자랑스레 설명하는군요.
"레이디의 고향에서는 어떤지 모르겠지만, 요즘 세스타우 성이 속한 벨레윈 지역에서는 '뱀파이어리즘' 사조가 유행이랍니다. 물론 우리가 뱀파이어가 될 순 없지만... 이런 식으로, 붉은색 계통의 그림을 많이 그려보는 것이죠."
그리고 그 다음으로는 술 게임입니다. 사람들 중 하나가 술을 마시다가 나가떨어지고, 한 쪽이 웃으면서 승리를 선언합니다. 그리고는 웃으면서 게임을 설명하는군요.
"간단합니다. 누가 더 많이 마시나로 강함을 겨뤘던, 옛날 전통에서 비롯된 일종의... 싸움이죠. 그러고보니, 나로즈녜 차르국 사람들이 그렇게 술을 잘 마신다고 하던데..."
>>799 "아유, 저 년 눈 좀 봐! 아주 눈알로 사람도 쏴죽이겠어! 좋다고 저런 년을...!"
"이 미친 여편네야! 다 들린다고 다 들려!"
집을 나서면 마을 전경이 좀 더 눈에 잡힙니다. 산지기 겸 돼지치기가 숲에서 돼지 한 마리를 끌고 오는데, 돼지가 온 동네에 꽥꽥대는 소리를 내자 몇몇 사람들이 짜증을 내며 가서 돼지 끌고 가는 걸 도와줍니다. 그 돼지 멱 따는 듯한 울음소리가 누누코의 귀를 자연스레 접어버리고... 주변을 다시 둘러봅니다. 생각해보니 요한은 마차를 가지고 있으니, 그 마차를 찾으면 간단할 일입니다. 이 작은 마을에 마차가 있어봤자 얼마나 찾기 힘들려고요. 그리고 그 판단대로, 요한은 마차 앞에 탁자를 놓고 사람들을 하나둘 보고 있습니다...
저는 질문에 대답하고는 그 이후 있어 그녀의 행동을 바라보았어요. 그녀가 소개했을때 스스로를 음유시인이라고 했어요, 사람들에게 이야기를 남기고 전달하는 이들로서 그것과 비숫하지만 수단을 달리하는 이들도 다수 있어요. 그녀는 스스로의 행동에 확신을 갖고 깊은 관심을 갖고 있는 것처럼 보여요. 저도 마법과 지식, 특별한 것들을 획득하고 탐구하려고 하기에 그녀의 열의에 공감할 수도 있을거에요
"그러네요, 책에서도 그러한 묘사를 보았어요. 종종 이상함에 가볍게 웃기도 했답니다~"
"하지만, 마법적으로 실제로 시도 해볼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녀의 말에 저는 수긍하면서 말했어요. 거짓과 전실이 뒤섞여 재미있는 말들을 만들어내요. 실제로 과자로 집을 만든다면 어떨까요? 그리 오래가지는 않을 것 같아요
"식사가 필요함을 알려주고 있네요. 지니고 있는 식량을 풀고 취식할 준비를 해보아요"
그렇지 않은 이는 제외하고는 사람은, 생물은 음식을 먹어야만 해요. 그녀의 위장이 먼저 주장하고 있어요. 이러한 자리인 만큼 저 또한 크게 허기가 지기 전에 같이 먹는 것이 좋을 것 같아요
>>810 젠튼과 엘ㄹㅣ... 아니, 옐리사베타는 한 자리에 앉습니다. 딱 봐도 건장해보이는 남자와 여자의 대결, 몇몇 사람들은 대진표가 너무 재미가 없다며 아예 자리를 돌아서지만, 누군가는 이런 경기가 오히려 흥미진진하다면서 주변을 둘러쌉니다. 옆에서 나온 사람이 술을 꺼내들고, 젠튼과 옐리사베타는 먼저 가벼운 포도주 한 병부터 시작합니다. 네, 한 잔이 아닌 한 병입니다. 낮은 도수의 술은 술 따위로도 안 쳐준다는 것 같습니다. 옐리사베타는 술을 음미하고... 눈을 확 뜹니다. 옐리사베타가 아닌 엘리자베스로서.
포도주인 걸 감안해도, 부자연스러울 정도의, 황홀한 단맛. 그렇습니다. 이거, 피입니다. 하지만 주변을 둘러보면, 이상할 정도로 다들 의문을 제기하고 있지 않아서, 엘리는 계속 옐리사베타로서 연기를 해나갑니다. 덕분에 엘리는 포도주 한 병을 마셨는데도, 취하긴커녕 오히려 더 멀쩡해지고, 옆에서 구경하던 이들 중 몇몇이 엘리의 가짜 신분을 칭찬합니다.
"이야, 이거 봐! 나로즈녜 차르국 사람은 역시 포도주 따위는 술로도 안 본다 이거야?!"
"차르국 사람들은 술을 조금 먹은 상태가 좀 정신을 차린 상태라던데, 이 말이 딱 맞구만!"
>>813 "알죠. 불철주야 농사만 지으시는 분들에게 제가 어찌 비싼 값을 물어내라 합니까? 그러니까, 이빨 발치하는 제 공임은 받지 않겠으니 아편값과 소독용 증류주 값 등 기타 재료비만 해서 딱 낳은지 1년 안 된 암오리나 암탉 두 마리만..."
예, 장사 잘 하고 있는데, 중간에 누누코가 나타납니다. 거적때기를 입은 몰골이 마을 사람들의 이목을 끌지만, 누누코나 요한이나 크게 신경쓰지 않습니다. 요한은 잠시 기다려보라는 듯 손사래를 치더니, 금방 암오리와 암탉 한 마리씩을 받아냅니다. 요한은 마을 주민에게 이빨에 관해 간단한 이야기를 해두고 누누코를 봅니다.
"아무튼, 집에 가서 물을 뜨겁게 끓여두시고... 그래요. 누누코 씨? 제가 옷을 안 갖다뒀었나요? 아니면 거기서 챙겨주는 걸 까먹었나? 뭐 상관없습니다."
@@ >>816 "옷은 없었어." "누누코는 요한이 일부러 그런 줄 알았는데. ...후흥." 그녀는 요한의 말에 그렇게 대답하면서 그의 말에 따라 시야를 넓게 펼쳐서 마을을 바라봤다. 마치 그림으로 그린 듯이 평화로운, 다르게 표현하자면 틀에 박힌 변두리의 마을이었다.
"노예를 안 써?" 의문스러운 되물음과 함께 누누코의 처진 눈이 살짝 커졌다. 하지만 그녀가 실제로 느끼고 있는 것은, 이 비든베일에 유행하고 있는 그런 '자비로운' 철칙 때문은 아니었다.
"...그럼 누누코의 동족을 찾을 수 없잖아." 누누코의 눈이 다시 원래대로 돌아와서는 -어쩌면 더욱 신경질 적이었을 수도- 마치 요한에게 따지듯 그렇게 말했다. 누누코의 '전사적인 사고방식' 으로는 고작 그정도의 발상이 한계였던 것이다. 아마도 그가 설명할 시간인 것 같았다.
>>815 술병은 점점 더 커지고, 술은 점점 더 독해집니다. 피 탄 와인부터 시작해서, 럼주, 소독용으로나 쓸 법한 고도수 증류 알코올까지... 엘리자베스, 아니 옐리사베타는 어색한 존댓말을 집어치우고 반말을 하면서... 지금 이 상황에서 그녀가 해야 하는, 그리고 가장 하기 쉬운 '술 마시기'를 하며 '옐리사베타'라는 자신의 가짜 인격과 완벽히 합쳐집니다. 이제는 연기도 아니고, 정말로 동쪽에서 온 가련해보이지만 술 냄새만 맡으면 꼭지가 돌아가는 진정한 나로즈냐 귀족 옐리사베타는 젠튼이 아니라 귀족들을 도발하듯 더 많은 술을 마십니다.
"야, 미친놈아. 너 죽어!"
그리고, 젠튼의 얼굴이 빨개지다 못해 노래져서 이대로는 큰일나겠다 싶던 다른 귀족들이 젠튼을 뜯어말리며 술 결투는 옐리사베타의 승리로 끝이 납니다. 귀족들은 옐리사베타의 튼튼한 몸에 박수를, 그리고 나로즈녜인의 주량에 감히 도전한 젠튼의 혈기에 박수갈채를 날리고, 젠튼을 술상에서 끌어내던 그의 친우들은 옐리사베타를 보면서 말합니다.
"그나저나 저 아가씨 취하긴 한거냐? 와인 한 병 마신 거랑 럼 10병 마신 거랑 얼굴빛도 눈빛도 똑같은데?"
"나로즈녜 귀족이라잖아. 엄마 젖이 아니라 술부터 마셨을거다."
...혹시나 위장 신분이 들통나나 했지만, 정말로 편리한 국적입니다. 하지만, 지금 엘리는 뱀파이어임을 감안해도 심각할 정도로 많은 술을 마셨고, 이는 엘리의 정신에도 영향을 끼치고 있습니다. 엘리의 시야가 빙빙 돌고, 말이 헛나올 것 같습니다... 옐리사베타와 엘리의 경계가 흐릿해져서, 그녀는 주변을 막 돌아다니기 시작합니다...
먼저 누누코와 자신이 힘을 합친 계기를 일깨워준 요한은 늘상 하던대로, 인간 사회에 대한 상식이 부족할 수밖에 없는 누누코에게 이곳을 고른 이유를 차근차근 설명해줍니다. 그러면서도, 기껏 잡은 호구인지 아니면 우량 고객님인지를 놓치지 않으려고 이 비든베일 사람들의 올바른 됨됨이와 생활정신을 칭찬하는 것도 잊지 않습니다.
"그러려면 일단 누누코 씨가 목욕도 하고, 옷도 새로 입고, 가능하다면 누누코 씨인지 모를 정도로 위장도 한 다음에 찾아가는 것이 좋을 겁니다. 그렇기에 제가 여기를 고른 거고요. 왜냐하면 방금 제 부족한 실력을 높이 사주신 이 분들처럼 문객들이 오가는 이야기를 다른 곳에 이야기하지 않고 선선히 받아들여주는 마을이 필요했거든요! 그리고 여긴 적격이죠!"
그러면서, 방금 충치 발치를 예약한 농부를 예의바르게 가리키며 "문제의 근본적인 원인을 알고 해결할 줄도 아는 안목이 있는 분", 황달기 있는 아이 데려온 아낙더러 "아이를 살리기 위해서면 백방도 백약도 돈이 아깝지 않은 참어머니", 같은 식으로 추켜세워주고, 사람들은 어려운 단어의 공세에 혼란스러워하면서도 어쨌든 자기를 띄워주려는 뉘앙스가 읽혀 기분 좋아합니다. 뭐 아무튼, 누누코가 알아야 할 정보를 말하자면...
"여기는 누누코 씨의 동족을 찾으러 온 게 아닙니다. 잠시 누누코 씨가 씻고, 밥도 좀 챙겨 먹고, 그리고 가능하다면 제대로 차려입기 위해 찾은 곳이죠. 그 다음부터는 뭐, 생각하시는 대로 그런 거에 신경쓸 시간이 없을 테니까요!"
@@ >>823 요한의 말에 그제야 다시 기억난듯, 누누코의 얼굴이 냉정으로 굳어졌다. 조금은 어둡기도 했고, 조금은 결의로 차기도 했다. 현실을 직시한 자의 표정이었다.
'그랬었지.' 누누코도 천천히 마차 위에서의 기억을 더듬고 정리한다. 그리고 둘 사이에 오고 간 거래. 그것을 재상기시킨다. 머릿속에서는 여전히 오랜 도주로 인해 생겨난 자욱한 안개가 존재하긴 했지만, 어쨌든 지금은 그것을 들출 정도는 되었다.
"알겠어." "하지만 요한." 그러나 그녀는 한 발짝 더 나아갔다. 요한과 누누코의 몸이 가까이 붙으면서, 거의 영거리에서 서로의 얼굴을 마주할 정도가 되었다. 그 안에서, 누누코는 자신의 본성을 조금 드러내었다. 보팔토끼의 호전성말이다. 이 사이로 숨결이 흘러나오고 눈빛이 번뜩였다.
"서둘러야 할 걸. 지금도 누누코의 동족은 짐승보다 못한 인간밑에서 구르고 있어. 시간이 없어." "그렇지 않으면. 누누코가 전부―" 그런데 그때, 둘 사이에 끼어들듯이 '꼬르륵' 하는 소리가 울렸다. 누누코는 자연히 수인의 육감을 따라 소리가 난 곳을 바라보았다. 그것은 자신의 배였다. 그리고 깔끔할 정도로 명백한 공복을 알리는 그 소리는, 누누코가 고개를 내려 복부를 바라보는 그 순간까지도 이어지고 있었다. 그것이 그녀의 상태를 반영했다.
>>824 배꼽시계가 울려퍼지고,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그 자리에서 입을 다뭅니다. 한 시도 쉬지 않고 나불거리며 돈을 뜯어내려던 요한의 입도, 동족의 소중함을 설파하던 누누코의 입도, 그리고 오랜만에 명의 겸 이발사 겸 뭐 아무튼 좋은 사람이 와서 좋다던 마을 사람들도. 사람들은 누누코의 눈치를 떠듬떠듬 살피다가, 충치를 뽑기로 한 농부가 누누코를 직접 찌르긴 그랬는지 옆으로 와서 요한의 옆구리를 쿡쿡 찌르고 말합니다.
"그, 잘 부탁드리는 의미로 오리알 좀 삶아드리면 어떻겠소잉?"
그러자, 요한은 웃으면서 누누코를 살펴보고는 말합니다.
"들으셨죠?"
중의적인 의미입니다. 하나는 당신 배에서 나는 소리를 들었죠? 이고, 나머지 하나는 말 그대로 저 농부가 하는 말대로 오리알 삶은거도 먹고 밥도 좀 먹고 기운 좀 내고, 다른 할 일도 좀 하자는 의미죠. 아무튼, 누누코는 지금 휴식은 취했지만, 충분한 영양 섭취 없는 휴식은 반쪽에 불과하니 뭔가 먹긴 먹어야 할 겁니다! 특히 누누코가 앞으로 사람도 여럿 죽이고 살려면요!
@@ >>826 "...후흥." 누누코가 예의 입버릇을 내며 뒤로 물러났다. 그래, 그들의 말이 맞았다. 복수를 위해선 미스터 스위트를 확인해야 했으니... 일단 무언가 위장에 넣어두는게 좋을 터였다. 누누코는 그 이상으로 말하진 않았지만, 그것은 분명 암묵적인 동의였다. 그리고 그 증거쯤 되는 것으로, 누누코는 요한, 혹은 충치를 가진 농부에게 이렇게 물었다.
>>825 머리가 빙빙 도는 것이 마치 엘리가 도는 게 아니라, 세상이 자기를 중심으로 360도로 도는 것 같습니다. 이대로 박쥐로 변한다면, 박쥐 한 마리 한 마리가 진심을 담은 구토를 여기 있는 모든 귀족들에게 흩뿌리며 사방으로 날아갈 것 같습니다. 엘리의 제정신과 함께 말이죠... 뭔가, 생각이 잘 되지 않습니다. 생각이 되긴 되는데, 생각이 두 계단, 세 계단으로 이어지지는 않고, 마치 계단이 아닌 허공에 발을 디디려다 실패하듯, 발을 자꾸 헛디디고 헛디뎌 부유합니다. 그리고...
"어이쿠!"
엘리는 무언가 짚을 것을 찾아 더듬거리다가, 귀족들이 앉아있던 탁자 하나를 그대로 밀어버립니다. 하지만, 그들은 엘리가 아니라 방금 전에 사교 파티 술 대결의 최고 기록을 갱신한 '옐리사베타'를 보고 있기에 그런 추태도 이해해주고, 그 틈을 타... 옐리사베타가 눈을 뜹니다. 옐리사베타, 사실상 엘리가 술에 박혀서 될 대로 되라고 세상에 제 판단을 떠넘기며 탄생한 인격(?)이 귀족들을 바라보더니 씩 웃습니다. 그리고는 갑자기, 그들 모두에게 도발을 날립니다.
"너희들은 전부 다 나처럼 되고 싶어하잖아? 근데 절대 그렇게 될 수가 없거든!!! 자아! 봐라! 난 집부터 이러케 머찌다구!!!"
갑작스런 헛소리에 귀족들이 깜짝 놀라지만, 옐리사베타는 신경쓰지 않고 남아있던 도화지 하나를 붙잡더니 그림을 그리기 시작합니다. 물론 물감은 빨간색, 엷은 빨간색, 진한 빨간색으로, 오직 빨간색의 명도와 채도만을 조절해 그림의 선과 면, 질감과 양감을 구분해야 합니다만... 옐리사베타는 무서운 속도로 그림을 그려냅니다. 그리고는 자랑스럽게, '나로즈녜 차르국'에 있는 예페슈크 남작가 저택 그림을 보여줍니다...
"...차르국은 집을 저렇게 짓나?"
"어디서 많이 본 것 같은데?"
인격은 옐리사베타 블라디미로비나 예페슈카여도, 기억은 엘리자베스 바토리 블라드 체페슈입니다. 뭐, 집이라고 그려봐야 당연히 엘리 일족이 살던 그 뾰족뾰족하고 무시무시하고 큰 그 저택이죠. 아주 잠깐, 엘리는 제정신을 차립니다. 하지만, 아주 잠깐일 것만 같은 예감이 듭니다. 엘리는, 취기 때문에 옐리사베타에게 다시 판단을 맡겨야 하기 전, 아주 간략적으로 행동 방향을 정할 수 있을 겁니다.
>>811 베스니와 아앨라나는 식사를 꺼냅니다. 장비를 다소 희생하는 대가로 식량을 좀 더 챙겨온 덕에 식량은 아주 풍족합니다! 민물고기를 잡아서 말린 어포와 딱딱한 건빵 같은 보존식품류는 양껏 먹을 양이 있고, 자칫 짜고 텁텁할 수 있는 식사에 변주를 더할 잼류와 신선한 과일도 섭섭잖게 챙겨와서 입이 심심하지 않습니다. 두 사람이 어디서 뭘 하건 무심하게 우는 올빼미 소리, 찌르르르 하는 풀벌레 소리도 오늘만큼은 두 사람을 부러워하는 듯하게 들립니다. 베스니는 당장이라도 전부 삼키고 싶은 욕망을 참고, 어포를 나뭇가지에 꿰어서 모닥불 위에 올리고 빙글빙글 돌려 겉면이 살짝 탈 정도로 데웁니다.
"여기 있어요!"
말라붙은 어포에서 지방이 지글지글 익으며 녹아내리고, 구수한 냄새와 함께 딱딱한 육포도 먹을 만하게 부드러워집니다. 딱딱한 건빵 같은 경우는... 뭐, 먹을 수 있는 식사니까 아무래도 좋습니다! 그래도 이빨보다는 단단하지 않으니 충분히 먹을 만하죠. 두 사람은 맛있게 식사를 즐기는데, 베스니는 양껏 먹는 중에 이야기합니다.
"혹시 아앨라나 님! 제가 이렇게 받기만 하기는 조금... 죄송해서 그런데, 혹시 바깥 세상 물건 중에 원하시는 거 있을까요? 예를 들어서, 좀 비싼 것도 괜찮아요! 하늘의 별을 좀 더 자세히 볼 수 있는 망원경이라던지, 아니면 검은 숲에서는 나지 않는 보석이라던지... 비싸지만, 그래도 여태까지 해주신 게 있잖아요!"
베스니의 말 자체는 맞습니다. 한쪽 다리가 말다리가 되긴 했지만, 아앨라나가 아니었다면 지금쯤 베스니는 음유시인이 아니라 음유시체가 되어 들개와 늑대들에게 한번 뜯어먹히고, 파리와 구더기에게 두번 뜯어먹히고, 마지막에는 땅에 묻혀 멧돼지인지 인간인지도 모르는 뼈다귀가 되었다가 흙이 되어서 사라졌을 겁니다. 그러니 이런 말을 하는 것도 이해는 되지요. 베스니가 바깥으로 나간 다음에, 그 나쁜 의미로 대단한 길 찾는 재주로 어떻게 아앨라나를 찾아온다는 건지는 의문입니다만.
>>827 "보통 마을 남정네들은 저기 아랫쪽 개울 가서 씻고 마을 여편네들은 저 위 가서 씻어요잉. 거 훔쳐보는 넘이 절~때 없다고는 말 못하는디, 잡히면 저렇게 만들어두는 식으로 우리도 노력을 하니까는 이해를 해주시라고잉."
이 썩은 농부가 큰 나무 쪽을 가리킵니다. 거길 보니... 도시에서 본 사람 모양의 '이상한 열매'가 여기도 매달려 있군요. 그런데 차이점이 있다면, 이 열매는 목을 맨 게 아니라 양 발을 매놨고, 깔끔하게 목만 매단 그것과는 다르게 두들겨패놔서 그런지 상태가 영 안 좋고, 그리고 살아있습니다. 아마 여자들이 목욕하는 곳을 좋다고 훔쳐봐놓고는 '어릴 적의 치기'로 무마하려다가, 동네 사람들한테 거꾸로 매달려서 퍽치기를 여럿 당한 모양입니다. 요한은 누누코에게 귓속말로 속삭입니다.
"농경 사회의 흔한 스포츠입니다! 큰 자극이 없으니 마을의 규율을 심하게 해친 이를 '단속'하는데 모두가 나서서 스트레스를 풀지요. 아무튼! 저는 제 실력을 믿어주신 손님께 좋은 서비스로 보답해드리러 가야 해서 이만! 아, 참고로, 누누코 씨가 씻고 나서 입을 옷 일체는 마을 아낙이 윗쪽 계곡에 목욕하러 간다길래 그 분께 맡겨놨습니다. 잘 찾아보시죠."
@@ >>830 "흥미롭네." 누누코는 인간모양 열매를 향해 다가가서는 그것을 자세히 살펴보기 위해 쪼그려 앉았다. 이 열매는 신기하게도 말하고 있었다. 조금 멍이 들었지만 제대로 '신선한' 것 같았다. 대단한 생명력이었다. 아마 이 경험은 이 열매에게도 귀중한 교훈이 되겠지.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말해둘게." 누누코가 손끝으로 그 열매의 뺨을 스치면서 말했다. 눈은 멍들었고, 이빨은 부분적으로 나가있었다. 누누코는 그것도 손대어 보았다. 그리고는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누누코네 고향에도 유행하던 놀이가 있었어." "좀처럼 재미 볼 기회는 없지만 모두가 즐거워하던 놀이였지." "...특히 누누코가 말이야." 누누코는 거기까지 얘기하고서는 무릎에 손을 올리고 힘을 주어 도로 일어났다. 과거에 대한 회상때문이었는지 그녀는 잠깐이지만 웃었고, 드러난 이는 줄지은 송곳처럼 날카로웠다. 하늘은 높고, 햇볕은 따스하게 내려쬐고 있었다. 그 아래의 마을은 정말이지 평화롭기 그지 없었다. 그 풍경의 가운데에서, 누누코의 발걸음도 서서히 움직였다. 이 썩은 농부가 알려준 개울가로 향하기 위해.
"흥미있으면 찾아 와." 그리고 곧, 그 자리에 그 말만이 잔영처럼 맴돌며 그녀의 실루엣은 서서히 사라지고 있었다.
반응이 없습니다. 아마 시체... 는 아니고, 숨 붙은 것만 빼면 시체나 다름없는 상태로 있는 겁니다. 그래도 누누코가 전하고자 한 교훈은 잘 알아들었을 것이라 믿으며, 누누코는 마을 여자들이 몸을 씻는다는 위쪽 개울가로 올라갑니다.
위 개울가로 올라가는 길은 꽤나 멉니다. 온 동네를 뒤집을 것 같은 돼지 멱 따는 소리도, 그에 질세라 이빨을 뽑히는 고통에 온 몸을 비트는 이 썩은 농부의 비명도 한 걸음 한 걸음마다 멀어지고 점점 깔깔거리는 말소리가 들려옵니다. 이번에 우리 집에서 닭이 병아리를 스무 마리나 품었다, 오리들이 개울가에서 노니까 고양이가 못 채가던데 나도 닭이 다 잡혀가면 오리로 바꿔야겠다... 평범한 이야기들입니다. 그리고, 잠시 멈춘 누누코는 아주 잠깐이지만, 고향의 풍경을 보았습니다.
"야, 물 튀기지 마!"
"야, 마지막이잖아. 이제 너 약혼식 한다며? 얼레리꼴레리~"
...물론, 누누코가 살던 곳에서는 이런 큰 개울을 정해두는 게 아니라, 개울을 보면 그때그때 목욕을 하고 남는 사람들이 누가 안 훔쳐보나 망을 봤지만.... 그녀를 받아들였던, 그녀를 하나라 생각했던, 그녀가 진정으로 생각했던 부족에서는 그녀에게도 이렇게 장난을 치는 동료가 있었고, 동포가 있었습니다. 그들을 생각하니, 누누코는 잠시나마 웃을 수 있지만...
"어? 그 약팔이 아저씨가 말한 아가씬데?"
"아, 안녕하세요. 옷은 여기 바위 위에 놔뒀어요!"
...웃음은 사라집니다. 예의바르지만, 어디까지나 부외자에게 보이는 예의에서... 누누코는 농경인이고 부족인이고 상관 없이 인간이라면, 사회에 한번이라도 발을 담근 자라면 알 수 있는 부외자의 벽을 느낍니다. 그래도, 누누코에게 동족을 찾고야 말겠다는 다짐을 새겨준 것은 고마울 따름입니다.
@@ >>832 개울로 걸어가며, 누누코의 입이 다시 원래대로 시옷자로 돌아왔다. 중간중간 마을에 울리는 돼지 멱따는 소리와 등 뒤에서 울리는 사람 멱따는 소리가 넝마 안에 덮인 누누코의 귀를 넘실거리게 했다. 다른 인간들은 어떻게 생각할진 몰라도, 누누코에게 그것은 좋은 환경음이었다. 물소리, 닭소리, 풀소리, 바람을 타고 전해지는 비명소리. 그것이 누누코에게 하여금 생명력을 느끼게했다. 이곳에 오기 전 마주쳤던 그 죽은 듯한 도시보다는 훨씬 낫다고 생각했다. 살아있음을 자각한다. 그것이 비명과 함성이 하는 역할이겠지. 누누코는 잠시나마 고향에 돌아온 듯한 기분을 느꼈다.
개울에 오니 이미 많은 인간이 그곳에 있었다. 저마다의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나누면서 웃고있었지만, 누누코의 등장에 그것은 덧없이 사라졌다. 누누코는 부외자의 벽을 느끼긴 했지만, 별로 개의치는 않았다. 오히려 자신에게 지대한 관심을 표하는 것보다 낫다고 생각했다.
"..." 그리고 누누코는 그녀들에게 한 명씩 시선을 번갈아 주다가, 그저 말 없이 몸을 감싸던 넝마를 벗어던졌다. 그제서야 누누코가 이제껏 숨기고 있던 기다란 토끼귀와... 조금 더 짧은 중간 길이의 토끼귀가 드러났다.
토끼귀가 드러나자 목욕하던 여자들은 전부 헉, 하고 숨을 들이마시더니 모두 누누코에게 시선을 집중합니다. 누누코가 무엇을 상상했건 간에... 상당히 의외일 반응을 보이면서 다가오더니, 위아래로 누누코를 훑어봅니다. 누누코의 눈은 그들을 빠르게 훑어봅니다. 그리고, 싸울 대상과 그러지 않을 대상을 빠르게 파악할 수 있는 전사답게... 누누코의 눈은 여기 있는 이들이 적대, 모욕, 경멸 같은 목적이 아니라 순수한 호기심과 궁금함, 반가움으로 자기를 둘러싸고 있음을 깨닫습니다.
"혹시 어디 사람이에요?"
"레포리드 계열이면... 우리 할머니가 토끼족이셨는데!"
"아이구, 이 예쁜 토끼귀는 어쩌다가 잘렸대...?"
누누코는 목욕에 집중하려고 하지만, 어쩌다보니 목욕은 시작도 안 했는데 물범벅이 아니라 질문 범벅이 된 기분입니다.
길을 떠나기 앞서 가져온 식량들을 먹을 차례가 왔어요. 식사의 조리는 그녀가 거들어 주었어요. 피워낸 모닥불의 따스한 열기로 인해 녹아가듯 하는 것을 바라보며 기다리던 저는 그녀로부터 제 몫을 받아 가져왔어요. 고요하게 보이는 숲으로부터 들려오는 소리와 함께 그 자리 잡은 어둠 속에도 생물들이 그 존재감을 들어내요
"지금까지의 대한 보답인가요? 음~ 제가 무엇을 바래야 할까요? 도시에는 향상된 기술을 바탕으로 다양한 것들이 만들어진다고 알고 있어요. 그 중에서 얻을 수 있는 것들이면 어떨까요? 마법이나 특이한 것에 관련되어 있다면 더욱 좋겠지요. 그러니까, 지금으로서는 망원경이라고 해두어도 괜찮겠지요"
그렇게 조리된 식사를 먹고 있던 저는 그녀의 질문에 생각해 보았지만 선뜻 결정할 수는 없었어요. 숲의 밖깥의 생활상에서의 것들에 대한 경험이 부족하고 저였기 때문에 이에 대하여 다양한 선택지 있다는 것에 무엇을 골라야 할까요? 경험은 부족하더라도 마녀 님의 서재에 있던 책들을 읽어 왔기에 지식은 어느정도 갖추고 있어요. 숲이 아닌 도시에서 구할 수 있는 것들을 말하는 것이 좋을 것 같아요
// 괜찮아요~! 매번 진행을 한다는 것은 어렵고, 그러다 보면 실수 할 수도 있고 그런 거잖아요
>>835 뱀파이어인 것을 숨겨야 한다... 엘리자베스 바토리 블라드 체페슈, 뱀파이어의 기억으로 옐리사베타 블라디미로비나 예페슈카, 인간의 인격을 연기하고 있는 그녀에게는 어려운 이야기입니다. 뱀파이어가 아닌데 뱀파이어인 걸 어떻게 숨기란 말입니까? 아니, 잠깐, 왜 내가 뱀파이어의 기억을 가지고 있지? 내가 왜 피를 빨았지? 내가 왜... 내가 왜..... 옐리사베타는 머리를 잠깐 싸매고, 젠튼만큼 무모하지는 않지만 레이디를 다루는 센스가 있는 한 남자가 그녀를 부축합니다.
"레이디, 많이 취하신 것 같습니다."
그리고는, 젠튼과는 다르게, 정말로 신사적으로 그녀를 필요할 만큼만 끌고 간 뒤 어디에 앉혀두고는, 자신의 명함을 남겨둔 채 조심스럽게 뒤로 물러납니다. 옆에서는 좀 더 들이대 보지 그랬냐고 핀잔을 주지만, 옐리사베타 입장에서는 안 그래도 머리 깨질 것 같은 상황에 방해하지 않아줘서 고마울 따름입니다. 옐리사베타는 뒤통수를 벽 쪽에 기대고 한숨을 쉽니다. 이 상태로 취해서 아무 대답도 못 하는 상태를 연기한다면, 최소한 숨겨지겠죠... 아마도요. 그런데, 벽 너머의 응접실에서 무언가 들려옵니다.
"...그년, 성가셔."
"집 지키는 개들 쪽은 내가 얘기를 해놔서 숫자를 좀 만져놨어. 그런데... 쓸데없이 의심 많은 년이 끼어들었어."
"...너네 개 간수 잘한 거 맞아? 우리쪽 애도 잡히고, 밑에도 다..."
갑자기, 동방의 귀족 옐리사베타가 아닌 이단심문관 에레야와 협력하는 뱀파이어 엘리자베스로서의 자신이 돌아와, 이 내용이 중요한 것임을 깨닫습니다. 하지만 엘리가 자세히 이야기를 들으려고 몸을 틀다가, 하필 유리잔을 떨어뜨립니다. 쨍그랑! 하는 소리와 함께 뭔가 중요해보이던 대화가 끊기고, 서둘러 나가는 소리가 들립니다. 옐리사베타는 의심을 피하려 눈을 감고 술에 골아떨어진 척 병나발을 불다가, 그들을 슬쩍 바라봅니다. 한 명은 등이 패인 붉은 드레스를 입은 여자고, 한 명은 흉갑을 입은 청년, 나머지 한 명은 노인입니다. 그들은 인파 속으로 사라지는데... 따라간다면 한 명만 따라갈 수 있을 거고, 아니면 다른 방법을 찾아볼 수도 있습니다.
>>839 "망원경! 알겠어요! 자이츠-카를 합자회사의 망원경은 제일 멀리 볼 수 있고, 튼튼한 건 빈첸초 탐험길드 직영제작소제가 최고에요. 고장났을 때 유지보수가 잘 되는 게 좋다면... 아! 마도생물학 쪽이 만든 도구생물 중에 망원관이라고 안 쓸 때는 흙에다 꽂아두고 거름이랑 물을 주면 스스로를 수리하고 자라나는 망원경 모양의 식물도 있답니다. 역시 그게 제일 좋겠네요!"
...이거, 첫째랑 둘째까지는 뭐 평범하게 성능이 좋느냐 튼튼하게 좋느냐의 문제인데, 세번째는 음... 진정한 신비는 검은 숲이 아니라 바깥에 있다는 생각까지 들 정도입니다. 아무튼 두 사람이 평범하게 밥을 먹고 있는데... 지글지글 익는 냄새가 온 사방에 퍼지면서, 숲 속의 배고픈 영혼들을 깨운 모양입니다. 벌레 몇 마리야 그냥 무시하던지, 아니면 고기인 셈 치고 먹으면 그만이지만... 좋다고 웃고 떠들고 있는 베스니와 달리, 이 숲에서 오래 살아온 아앨라나는 무언가 이상함을 느낍니다. 그리고, 한동안 조용하던 가말라시엘도 한 마디 거들어, 그녀의 촉이 맞다고 말하는군요.
"지금 웃을 때가 아닌 것 같은데요, 사도님?"
...슬쩍 앞을 보면, 한참 굶은 것 같은 불곰이 인간 암컷 두 마리(그런데 하나는 한쪽 다리가 말다리인)를 보고 입맛을 다시고 있습니다.
"하아." '다가오지 마' 라는 한 마디 하기가 이렇게 힘들어서야. 순식간에 쏟아지는 질문에 한숨을 뱉었다. 누누코가 제일 대하기 힘들어하는 인간상이란 잔학무도한 노예상도 아니고, 청산유수같은 사기꾼도 아니고, 바로 이런 저의없이 달려드는 인간들이었다. 상대의 종족이 무엇이건 간에. 누누코는 이 상황을 어떻게 할까 잠시 그자리에 서서 생각하다가, 그냥 무시하고 물 속에 몸을 들였다. 개울의 찬 물살이 누누코의 몸을 감쌌고, 기나긴 짙은 밤색 머리가 수면 위로 떠올랐다. 이대로 그냥 잠수해버릴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풀 컨디션의 누누코라면 4분 정도는 여유롭게 잠수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대로 말을 안하고 있으면 질문 공세가 더 강해질 것은 불보듯 뻔한 일이라서, 결국엔 이렇게 말했다.
인간이 아니야, 라는 말에 아가씨들은 서로를 쳐다보다가, 누누코는 알 수 없는 듯한 속뜻을 저들끼리 전달하더니 멋대로 누누코의 말을 넘겨짚고 이야기합니다. 이 여자들도 눈이 있고 귀가 있고, 눈으로는 누누코의 초라하고 남루한 행색을, 귀로는 요한한테 들은 게 있을 테니까 뭐... 일종의 연민을 느꼈겠죠. 마을 아가씨들 중에서 가장 나이가 많아보이는 사람이, 물 속으로 앉아서 누누코와 눈을 맞추더니 말했습니다.
"아가씨, 무슨 생각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여기는 사람들 만만해보인다고 납치해서 팔아먹는 그런 곳은 아니에요."
"우리 할머니도 토끼족이라니까 그러네."
대충... 누누코와 대화를 하고 싶다, 누누코도 손님으로 맞이하고 싶다는 것 같지만... 뭐, 소득이 있을 리가요. 아가씨들은 불편한가보다, 어색한가보다, 그렇게 좋게좋게 생각해주며 누누코가 혼자 구석에서 씻을 수 있도록 배려해주려고, 조금 떨어진 다른 구석으로 가서 다시 이야기합니다.
>>848 옐리사베타의 술 취하고 비틀거리는 컨셉을 유지한자는 느낌에서도, 노인을 택하는 건 좋은 선택이었습니다. 옐리사베타는 술을 들이킨 상태로 온갖 추태를 부리면서 다가가는데, 그 몰골을 보고 비법하는 이들에게는 유감입니다! 옐리사베타는 웨이터가 들고 가던 술을 뺏어서 병나발을 불고, 탁자를 엎고 어깨를 툭 치며 지나가다, 노인이 다시 들어간 응접실 근처에 엎어집니다. 그리고...
"애들이 다 어이없게 죽었어. 한 년은 잡혀서 나발을 븰지 않나."
"아무래도 안 되겠어. 나는 살아야지..."
...노인이 다시 나가고 텅 비자, 옐리사베타가 아닌 엘리로서 고개를 든 그녀는 응접실을 쳐다봅니다. 들어가나요?
>>850 지금만큼은 술을 먹어 앞뒤 분간이 안 되는 동방귀족 옐리사베타, 그리고 뭐 하나라도 건져가야 하는 엘리자베스의 의견이 일치하고, 안 그래도 거리낌없던 성격에 술까지 들이붓자 거침없이 일어나 들어갑니다. 응접실 안에는 세월의 흔적이 녹아든 가구들이 놓여있는데, 개중에 유일하게 새로운 종이가 보입니다...
'하수구를 이용할 수 없으니, 거름으로 위장해 외부로 나가야 한다.'
'그 개새끼가 우리 쪽 끄나풀을 고문했다. 마리엘의 허브가 노출되었다.'
문득 이 부분에서, 엘리는 그 팔 잘린 밀수업자가 했던 말을 떠올립니다.
'마리엘의 허브! 마리엘의 허브 창고 42번 칸에 내 밀수품을 팔아서 쌓은 금화가 많아! 제발 그만 때려! 으아아아악!!!'
'이 마을 인간들이 적어도... 그 도시 근처에서 마주친 녀석들이랑 다른 녀석들이란 건 알고있어.' 그렇지만, 누누코에게 지금까지 박혀버린 관념과 부족의 관습. 그리고 보팔토끼의 흉폭한 본능. 만약 그들의 언동이 누누코의 신경을 조금이라도 거스른다면 -그들이 그런 의도가 없다고 해도-
'누누코는 이 인간들을 해칠지도 몰라.' 누누코의 진홍색 눈이 저편의 여인들에게 힐긋 향했다. 웃고 떠드는 얼굴들이 보였다. 그리고 마차 위에서 들었던 요한의 주의도. 아무래도 저들과 섞이는 건 어렵겠다고 누누코는 다시 한 번 생각하면서, 어느새 몸을 씻는 것을 모두 마치고 개울 밖으로 나오고 있었다.
>>855 누누코는 몸을 씻습니다. 어제만 해도 요한이 소독해줘야 했던 상처는, 소독을 잘 하고 연고를 바른 덕분인지 붉은 딱지가 앉아서 손이 닿을 때마다 간지럽습니다. 못 씻은지 얼마나 되었을까요? 일주일? 한 달? 누누코는 몸 곳곳에 묻은 때와 흙먼지를 씻어내고, 놓여있던 자갈 한움큼으로 몸을 박박 긁어서 때도 벗깁니다. 마지막으로 누군가 놔둔 잿물에 머리를 담갔다가 다시 헹구고... 누누코는 개울 아래로 땟국물이 흘러가는 걸 봅니다.
"..."
누누코는 바깥으로 나옵니다. 그녀는 고슴도치입니다. 그것도, 원치 않는 이에게 가시를 세우지 않는 법을 모르는 고슴도치. 계속 이렇게 살 순 없다지만 상관없습니다. 그녀는 찾아야 할 부족원이, 해야 할 복수가 있습니다. 빠르게, 기계적으로 목욕을 끝낸 누누코는 옷을 다 입고 나섭니다. 이제 어떻게 하나요?
@@ >>857 누누코는 물 밖으로 나와서 자신이 착용한 입은 옷을 살핀다. 허리를 비틀어도 보고, 팔을 움직이거나 엉덩이를 올려보기도 한다. 전사에게 장비란 중요한 것이었다. 지금 당장은 평화롭다고 하지만, 싸움이라는 것은 언제나 원할때에만 찾아오는 것이 아니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언제나 자신의 몸을 날카로운 칼처럼 준비시켜 놓을 필요가 있는 것이었다. 그리고나서는 미련없이 물가를 벗어나 자신이 거슬러 왔던 길을 도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오리알이라고 했었나. 보팔토끼는 육식이었다. 사실은 지금 저기 닭장에 있는 닭을 생으로 뜯어먹고 싶은 충동을 느꼈지만, 지금은 오리알에 만족하자고 생각하면서 요한을 찾아갔다.
우우우ㅡ 귀청을 뒤덮는 소리 아닌 소리가 절그럭거리는 쇠사슬 소리와 슥슥 끌리는 살이 마찰하는 소리를 멀리 밀어내고, 시야는 마치 물 속에 갇힌 것처럼, 두 눈이 따로 움직이는 것처럼, 여러개의 상을 띄우지만 겹치지도 합치지도 못한 채 따로 놉니다. 겨우겨우 눈을 뜨면 복면 쓴 남자가 그녀의 발을 묶은 채 질질 끌고 가는 것이 보이고... 이내, 그녀를 다른 '고기'들처럼 들쳐업어, 천장과 연결된 쇠사슬에 거꾸로 매답니다.
"...오랜만에 좋은 고기 납품이군."
복면 쓴 사내는 그렇게 이야기하고, 엘리는 간신히 맞춰진 초점으로 주위를 다시 바라봅니다. 돼지라기엔 팔다리가 너무 길고, 소라기엔 머리가 너무 작은 '출처 불명의 고기'들이 창백하게, 쇄골부터 하복부까지 절개된 채 내장을 싹 비웠습니다. 옆을 보면 복면 쓴 사내가 엘리 팔뚝만큼 긴 칼을 그녀의 목에 대는데, 그 순간ㅡ
"멈춰. 그 년. 연회로 간다."
엘리의 목을 그을 뻔한 칼날은 엘리의 경동맥 대신, 한 여자의 손아귀를 벱니다. 그 여자는 엘리가 지하수로에서 죽였던 사제와 똑같은 옷을 입었는데, 손아귀가 베여 피가 흐르는데도 무덤덤합니다. 그에 사내는 어깨를 으쓱이고 사슬을 다시 풀기 시작합니다...
...엘리는 어떻게 합니까? 좀 더 비련의 희생양을 연기할 수도 있고, 연기는 집어치울수도 있고, 선택은 당신의 몫이니까요.
>>860 내키는 대로 한다면, 그리고 그럴 수 있다면 누누코는 당장이라도 저 닭장에 들어가서 한두마리 정도는 물어 나오고 싶은 심정입니다. 그도 그럴 것이, 보팔토끼 수인은 일부의 경우(구토를 위해, 소화를 위해, 식물성 기름 섭취)를 제외하면 육식 이외에는 입에 대지 않았고 지금의 그녀는 숲에서 토끼 한두마리에 숲쥐 굴 하나를 비운 것을 제하면 먹은 게 없었습니다. 하지만 누누코는, 그녀가 개울의 목욕하는 아가씨들에게 말한 것과는 달리 아무튼 '인간'이었기에 참습니다.
누누코는 요한을 찾아 마을을 돌아다니다, 요리 냄새를 따라 자기가 깨어났던 집으로 돌아갑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누누코는 아낙과 함께 요리하는 요한을 발견합니다. 정말... 지나칠 정도로 안 어울리지만요.
"누누코 씨! 앉아계시죠! 조금 있으면 다 됩니다!"
요한은 아낙네를 도와서, 토끼고기를 퐁당퐁당 썰어넣고 치즈와 함께 뭉근하게 끓인 밀죽, 기러기 간 구이, 어포-토끼 꼬치, 통닭을 내옵니다. 군침을 흘리는 부부와 함께 앉은 요한이 말하는군요.
@@ >>864 누누코는 순간적으로 얼어붙은듯 시선을 때지 못했다. 그것은 음식 재료에 토끼고기가 들어가있어서도 아니고, 요한이 요리를 돕고 있어서도 아니었다. 단지... 시야에 담고있는 현장에는, 그녀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호화로운 만찬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누누코는 자기도 모르게 순간 입에서 침이 고이는 것이 느껴졌고, 그것이 입술 사이로 새어 흐르려고 할때 얼른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휘휘 저었다.
"...오리알이 준비되어 있는 거 아니었어?" 근처의 자리에 천천히 몸을 내려 앉고서는 요한에게 그렇게 물었다.
>>863 툭! 옐리사베타를 계속 연기하기로 한 그녀의 몸이 바닥에 툭 떨어지고, 사제복을 입은 여자는 엘리의 턱을 붙잡더니 쯧, 하고 혀를 차면서 복면 쓴 사내를 책망합니다. 뭐든 간에, 사람 죽을 뻔한 자리에서, 그리고 곧 죽을 자리에서 할 말은 절대 아니지만 말입니다. 복면 쓴 사내도 지지 않고 맞서지만 결국 져주는 척 하는군요.
"내가 버러지들 말고 좀 있어보이는 애들, 특히 아가씨들은 좀 조심히 다루라고 말 안 했나?"
"1분 전까지만 해도 도축 확정된 년이었잖아. 아무튼, 이 년은 왜 그렇게 난리지?"
"나로즈녜 차르국, 먼 동네에서 왔어. 죽어도 소식 닿는데는 한참이고, 처리만 잘 하면 그냥 죽었다고 판단하고 끝날 거란 말이야."
...에레야가 나로즈녜 차르국 소속으로 위장 신분을 만들어준 이유를 이제야 알 것 같습니다. 일단 나로즈녜 차르국은 정말로 먼 곳에 있으니까, 남작가 한둘쯤이야 즉석에서 지어내도 그럴듯하게만 꾸미면 당장은 의심받을 일도 없고, 아무리 간 큰 범죄자들도 귀족은 안 건드리지만, 먼 나라의 '남작'이라고 하면 조용히 제끼면 할만하겠는데? 라 착각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다시 엘리사베타가 되어, 이번에는 묶인 상태 그대로 테이블에 올라서 실려갑니다. 그리고, 다시 어둠이 옵니다. 기절한 것은 아닙니다. 갑자기, 어두운 곳에 들어간 겁니다.
"...여러분. 오늘의 미식을 소개합니다."
그리고 눈이 아플 정도로 밝은 빛이 옐리사베타, 엘리를 비춥니다. 그리고는 갑자기 십수명 정도 되는 이들의 박수 소리가 들려옵니다.
"요즘 들어 많이 힘드셨을 겁니다. 자꾸 쓸데없는 일로 사람 귀찮게 만드는 놈들이 많았으니까요... 하지만, 오늘은 다릅니다. 저 먼 나라에서 온 귀족 영애 하나 죽는다고, 그 나라에서 신경이나 쓸 수 있겠습니까? 하하, 농담도."
그 와중에, 아까 전에 봤던 흉갑 입은 청년이 나와서 이 '미식'이 얼마나 안전한지 설명하는군요.
"언제나 그렇듯, 집 지키는 개새끼들은 아무 말도 못 합니다. 아마 이 여자가 여기 왔다는 것도, 잊어버리겠죠."
계속 헛소리가 나오는 동안, 엘리는 자신의 상태를 확인합니다. 뒤통수를 처맞아서 생긴 뇌진탕은 가라앉았지만, 손발이 묶여있습니다.
요한은 손가락을 딱 튕기더니, 호주머니에서 삶은 오리알을 꺼내 누누코 쪽으로 휙 던집니다. 보팔토끼의 반사신경과, 그에 더해 오랫동안 해온 수련 덕분에, 누누코는 '잡아야겠다'는 생각보다도 손이 앞서서 오리알을 탁 잡아냅니다. 갓 삶았는지 따뜻함이 느껴지는군요. 요한은 침 안 새게 하려고 온갖 노력을 다 하는 누누코를 귀여운 듯 바라보면서 이야기합니다.
"많은 문화권에서 더 많은 술과 더 많은 식사를 해치우는 것도 전사의 한 덕목으로 간주합니다. 많이 먹어야 힘도 많이 쓴다는 거죠. 아무리 누누코 씨가 힘이 세도, 그 많은 이들에게 일일이 다 복수를 하고 다니려면 좀 먹고 다니셔야죠?"
약간은 아버지 같으면서도, 약간은 어머니 같은 말투로 요한은 다시 한번 앉으라고 권유하고, 옆에 앉은 부부도 불평합니다.
@@ >>867 "아니, 누누코는―" 그러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달걀이 휙하니 날아왔고. 누누코의 손은 순전 반사적인 반응으로 그걸 받아내었다. 아직도 속에 뜨거울 정도의 온기를 담고있는 오리알이었다.
'...딱히 오리알이 먹고싶다는 이야기는 아니었는데.' 누누코가 무어라 하려 했던 것은, 오리알이 특별히 먹고싶었다기보다는 이미 이 식탁엔 오리발 보다 훨씬 호화로운 만찬이 올라올 예정이었기 때문이었다. 그것에 대해서 이유를 알 수 없었다. 구태여 외부인인 사람들에게 왜 이런 만찬을 먹이려 하는가. 이것도 요한이 그들을 구워 삶았기 때문일까. 의심 반, 본능 반. 그리고 알 수 없는 작은 감사함을 느끼며- 누누코는 조용히 삶은 오리알을 우적 씹으면서 자리에 앉았다.
>>868 식사가 시작됩니다! 원래대로라면 그냥 허여멀건한 밀이나 잔뜩 들어갔으면 다행일 밀죽은 네모나게 썰린 고기와 치즈가 들어가 맛이 더 진해지고, 부드러워졌습니다. 물론 토끼고기는 고기치곤 특유의 맛이 없는 것으로 유명하지만, 그래도 고기는 고기라고 육식성인 누누코의 입 안에서 원래대로라면 고통스러워야 할 밀죽의 풋내를 진한 고기맛으로 바꿔 주었습니다. 그리고 기러기 간 구이는... 누누코는 숲쥐나 토끼를 먹을 때는 뇌까지 먹어치워야 겨우 맛볼 수 있던 기름의 맛에 눈을 빛냅니다. 한 입 베어물 때마다 기름이 들어찬 풍선이 터지는 것 같은데, 다른 상황이라면 구역질이 나겠지만 영양 섭취가 부족한 그녀에게는 천국이나 다름없습니다.
"아따, 덩치도 작은 처자가 밥은 황소처럼 해치우고 있네잉."
"나는 밥 못 먹고 돌아가신 우리 어매 옆에 있어도 이거 다 못 먹을 거 같은디 대단도 혀."
부부는 보기만 해도 배부른 누누코의 먹방을 보면서 혀를 내두르고, 요한은 그 옆에서 친절하게 꼬치를 한접시 더 밀면서 말합니다.
"조금 돈을 내긴 했습니다만, 그래도 이 정도면 가치가 있는 것 같습니다. 그렇죠?"
...그렇게 빠르게 식사를 끝마치고, 요한은 누누코에게 말합니다.
"잠시 방으로 들어가서 이야기 좀 나누실까요? 물론! 일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참고로, 방이래봤자 누누코가 일어났던 그 식료품 창고입니다. 네, 거기요.
//참고로 토끼고기는 누누코가 보팔토끼 수인이라서 등장하는 건 아니고, 전근대 시대에서 사냥꾼의 도움 없이 평범한 농민 선에서 사냥할 만한 한계선이라 그런거!
"그런가요. 숲의 밖에서 보고 가질 수 있는 것에는 흥미롭다고 생각되어요. 특히, 그 생물은 독특해요. 그러나 생물은 기른다는 것은 그 존재를 확실히 책임져 줄 수 있는 마음가짐이 있어야 좋아요. 하지만 저로서는 스스로를 확신할 수 없어요. 그러니 일반적인 도구가 좋겠지요"
그녀가 말했던 명칭들은 제작자나 그 관계자들을 일컬는 것일거에요. 그들은 숲의 밖에서 어떠한 모습, 무엇을 할까요? 물건을 사고 팔고 하는 것이겠지요. 그녀의 설명은 흥미로운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었어요. 앞에 두 가지는 보통의 도구라고 생각되지만 마지막 세번째는 아니에요. 마법적으로 인위적인 방식으로 탄생한 생물. 자연적으로는 없을 특징을 가진 부여되어 꾸며진 존재. 정말 자연적으로 없을지는 모르겠지만요
그러다가 저는 문뜩 묘한 느낌이 들었고 이내 생각이 들었어요. 냄새란, 생물의 활동에서 여러가지 의미와 역활을 가져요. 저희가 하는 행동은 그 냄새를 퍼트리게 되는 것이 되었어요. 그리고 그것은 다른 존재들에게 우리의 존재를 과시하는 것과 같다고 볼 수 있어요. 즉, 숲 어느 한켠에서 그것이 뜻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그렇네요. 곰...인가요? 그러고 보니 저희의 행동은 좋지만 나쁜 것이에요. 곰의 후각은 뛰어나요. 그리고 그 곰은 기분이 좋지 않는 것처럼 보여요"
제가 느끼게된 묘한 느낌의 정체는 숲 속의 어느 한 존재, 곰 이라는 이름으로 부르는 존재의 출현을 알려주었던 것이였어요. 이것은 저희가 한 행동이 화근이 된 것이라고 생각이 들어요
"베스니 씨, 즐거운 대화 시간은 지금부터 아니게 될 것 같아요. 저의 말을 침착하고 들어주세요. 저 앞 쪽에 냄새에 이끌린 것으로 생각할 수 있는 존재인 곰이 나타났어요. 저희의 곁에 다가서는 것 같아요. 그리고 저희를 노리고 있는 것 같아보여요"
성급한 행동은 포식자의 본능을 자극하고 유도할 수 있기 때문에 이럴때 일 수록 침착하게 행동하는 것이 중요할 거에요. 저희가 단순한 피식자가 아닌 존재로서 상대하기에 난해하다는 것을 보여주어야 할 것이에요. 저는 그녀에게 제가 파악한 상황을 전달하였어요. 곰의 시선과 마주치지 않도록 하면서도 주시하며 즉시 곰의 행동에 대하여 움직일 수 있도록 경계했어요
@@ >>870 맛이 어떤지, 어떤 재료가 들어갔는지 따질 겨를이 없었다. 고작해야 굶주린 산 짐승 정도를 잡아먹었던 지난 날에 비해서는 최고의 식사였다. 그렇게 오리알을 시작으로, 통째로 구운 닭까지. 상에 있는 모든 것을 먹어 치울때까지 이미 누누코에게서는 주변의 사람 말은 들리지 않고 있었다. 그런 식으로 누누코는 만찬을 해치운다.
그리고 잠시 뒤, 요한과 누누코는 단 둘이 방 안에 있었다. 물론, 짚단과 곰팡이 냄새가 가득한 누누코의 아늑한 임시 침실이었다. 그런 곳의 창문으로 누누코는 눈만을 빼꼼 내밀고서 토끼귀를 세우고 있었다.
"주변엔 아무도 없네." 누누코는 결론을 내린듯이 그렇게 말하며 다시 종이로 기운 창문을 닫았고. 벽에 기댄 채로 요한이 운을 틔우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869 "여러분들은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실종자 숫자? 언제부터 그들이 사라진 사람들의 숫자를 셌다고 생각합니까? 그들은 '제가 원하는 숫자'를 눈치껏 적어내는 겁니다. 한동안만 숨 죽이고 있으면..."
...있으면? 있으면 그 다음은? 귀족들은 다음 이야기를 들으려고 귀를 더 가까이 기울입니다. 그래서 뭐? 안전하다는 건가? 안심해도 된다는 건가? 하지만 청년은 답이 없습니다. 그저, 가래 끓는 듯한 소리가 잠깐 들리더니, 뚜둑 하는 소리가 들리고, 툭! 하는 소리가 들릴 뿐입니다. 뭐가 됐건 간에 인간의 입에서 나올 소리는 아닌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귀족들이 웅성거리는데... 잠깐. 이게 뭐죠?
"...'미식'이 어디 갔지?"
"뭐야, 어디 간 거야?"
귀족들의 웅성거림이 커지다가, 불빛이 다시 원래 비추려던 '미식', 아니, 이제는 '미식가'를 비추자 사라집니다. 엘리자베스 바토리 블라드 체페슈, 아주 잠깐 동안 옐리사베타로 위장했던 그녀는 청년의 목을 잘라서 바닥에 던져버린 채, 관중들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눈동자로 전합니다.
너네 다 죽었다고.
어둠 속에서 귀족들이 비난하는 목소리가 들려옵니다. 괴물이라고, 미친년이라고, 죽일 년이라고. 다 사실입니다. 하지만 엘리가 할 말은 그것뿐입니다: 그래서요?
요한 브룬은 원래 휘황찬란한 미사여구를 사랑하는 사람이지만, 누누코가 그런 것을 극도로 혐오한다는 것도 잘 아는지 이번에는 정말로 빠르게 본론을 찌릅니다. 누누코는 아까 전에 깨끗하게 씻어서 더러운 몸을 정결하게 만들었고, 옷도 새로 입었고, 밥도 먹었으니 이제는 일에 대해 얘기할 시간이 되었다. 요한 브룬은 아침까지만 해도 누누코가 침대로 쓰던 곡물 푸대 위에 앉더니, 손가락 세 개를 펴고 그 중 하나를 접습니다.
"첫째, 그냥 우리 둘이 힘으로 뚫는 겁니다! 방해하는 사람들은 죽이고, 막는 것들은 전부 부수면서요. 아마 누누코 씨가 미스터 스위트를 죽이고 탈출할 때 이런 대범한 방법을 쓴 것으로 기억합니다만, 너무 많은 이들이 죽으면, 그 사망자들의 죽음이 윤리적으로 옳은지는 둘째치고 우리한테 많은 이목이 쏠릴 건 분명합니다. 그리고 제가 한 행동은 공식적으로 '마차 강도', 누누코 씨의 행동은 '반역 및 살인' 인 상황에서, 그렇게 이목을 끌어봤자 현상금 사냥꾼 말고는 붙을 이들도 별로 없구요."
본론 찌르나 싶더니만, 또 장황하고 어렵고 긴 말 하는 버릇 나옵니다. 대충 말하자면, 누누코가 미스터 스위트네 저택 박살내던 때처럼 그냥 들어가서 다 때려부수고 들어가서 다 때려부수고 나오는 방법인데, 이목을 너무 심하게 끌어서 앞으로 처신하기가 힘들어질 거란 얘깁니다. 요한은 두 번째 손가락을 접습니다.
"두번째, 도둑처럼 숨어서 들어가는 겁니다. 물론 몰래 움직이려면 준비할 수 있는 장비가 삽 말고는 없어서... 솔직히 말하면 누누코 씨의 전투력에 완전히 의존해야 할 겁니다. 그래도 성공만 한다면, 미스터 스위트의 고용인들은 자기한테 봉급 주던 주인 시체가 사라졌단 것도 모를 겁니다! 그러기가 조금... 어렵겠지만요."
네. 그냥 시체 도둑질 하자는 얘깁니다. 그리고 요한은 마지막으로, 누누코의 화려하지는 않지만 단정하고 정갈한 평복을 가리킵니다. 상의와 하의로 나뉘는데, 상의의 긴 밑단이 아래로 내려가 바지를 가려 원피스 역할을 수행하고, 밑단의 옆에는 길게 옆트임이 나 있어 누누코가 각력을 발휘해 누군가의 골통을 박살내야 할 때 아무런 문제가 없도록 조치해놨습니다. 요한은 자랑스럽게 이야기하는군요.
"그 옷은 살인에도 훌륭하지만... 사회적인 친교 기능을 보조하는 데에도 더없이 훌륭한 옷이죠! 그러니까, 만약 누누코 씨만 원하신다면, 저는 마차 행상, 그리고 누누코 씨는 그 마차 행상의 조수 같은 느낌으로 위장해 미스터 스위트의 집으로 들어가는 겁니다. 들키면 뭐... 고생하겠지만, 마차를 가지고 저택에 들어갈 수 있으니 시체만 한번 파내고 나면 나가는 건 쉬울 겁니다!"
요한은 세 가지 선택지마다 손가락을 다 접어 결국 주먹을 쥐었습니다. 그리고 누누코에게 묻는군요.
뒤에서 지켜보고 있던 사제가 쯧, 하고 혀를 차더니 손가락을 딱딱 칩니다. 그러자, 주변을 지키고 있던 붉은 갑옷을 입은 병사들이 엘리에게 칼끝을 겨누고 달려들지만, 엘리는 그 병사들의 움직임이 정말 가소로울 뿐입니다. 이렇게 어두운 곳에서, 불 하나 안 켜고, 고작무대 조명 하나에 의지해 그녀를 쫓겠다고요? 굳이 엘리가 얼마나 멍청한 발상인지 지적할 필요도 없었습니다. 엘리가 자신을 비춘 무대 조명의 자리에서 살짝 발을 비켜 어둠 속으로 숨자... 그들의 칼은 허공을 가르고 찌릅니다.
"이이익!"
엘리만큼은 아니지만, 최소한 어둠 속에서 움직이는 것을 알아볼 밤눈은 있는지 엘리가 움직인 방향으로 다시 칼을 휘두르고 찌릅니다. 하지만 엘리는 그들을 비웃듯, 춤을 추듯, 경동맥을 찌르려는 칼을 옆으로 몸을 틀어 가볍게 피하고, 배를 그으려는 칼을 뒷걸음을 성큼 해서 피하고... 마지막으로 누군가 둔기로 엘리의 머리를 찍으려고 다가오자, 엘리는 그 둔기에 엉겨붙은 피와 은발 머리칼을 보고 저게 누굴 때렸었는지 깨닫습니다. 누구긴 누구겠습니까, 엘리자베스 바토리 블라드 체페슈죠. 엘리는 피하는 대신, 초인적인 속도로 그 경비의 품 안으로 파고들어서, 둔기를 잡은 어깻죽지에 머리를 턱 올리고 속삭입니다.
너구나?
"커흑?!"
엘리는 그의 호주머니에서 칼을 꺼내 옆구리를 찌르고, 경비가 비명을 지르며 둔기를 놓치자 그것도 놓치지 않고 둔기를 붙잡아서, 다른 경비병들이 엘리를 뒤돌아보기도 전에 그의 허리, 무릎, 어깨를 순서대로 부숴버리고 주저앉힙니다. 순식간에 병신이 되는 고통을 느낀 사람의 비명은 필설로 형언할 수 없는 소리가 되어 울려퍼지고, 엘리는 둔기를 던진 채 무대조명 위로 그를 던지고, 그 위에 올라타 칼로 수십번을 난자합니다. 더 좋은 점은, 그러고도, 상대는 살아있다는 겁니다.
"아, 으아아...!"
"씨... 씨발! 불 켜!"
"안 돼! 불 키면 우리 다 좆된다고!"
엘리의 밤눈에, 불을 켜려고 옥신각신 다투는 귀족들이 보입니다. 왠지 알 것 같습니다. 불을 켜면 신원이 다 특정될테고, 그러면 다 '좆될' 테니까요. 하지만 불을 끄고 싸우자니 어둠 속에서 서로 찌르지나 않으면 다행일 판이라 그런 것 같습니다. 엘리는 어떻게 하나요? 저 귀족 말대로 불을 켜는 걸 돕습니까? 아니면 일단 어둠 속에서 싸우고 죽일 만큼 죽이고 찌를 만큼 찌르고 빨 만큼 빤 뒤 불을 켜겠습니까?
눈 앞에 불곰이 있습니다. 그것도 며칠 굶은 지 침을 질질 흘리는 불곰이. 이건 좋지 않습니다. 베스니는 아앨라나의 뒤에 생쥐마냥 숨더니, 도움 안 되는 온갖 헛소리를 합니다. 혹시 마녀가 호신 마법은 안 가르쳐 줬느냐, 드루이드의 동물 교감 같은 것으로 저 불곰이랑 어떻게 대화 안 되냐, 아니면 정신지배 마법 같은 건 없냐, 텔레포트 마법으로 도망치면 안 되느냐... 아앨라나보다도 가말라시엘이 더 거슬렸는지, 그녀에게 텔레파시로 말합니다.
'저라면 저 음유시인을 곰에게 던지고 도망치겠습니다. 어차피 이 근방 지리는 훤하시지 않습니까, 사도님?'
베스니에게는 참 심한 소리를 하는데, 아앨라나는 양 쪽의 말을 전부 다 씹고 곰의 시선을 피하면서, 천천히 몸을 들고 당당한 자세로, 겁먹지 않았다는 듯한 제스처를 취합니다. 하지만 곰이 계속 다가오고... 베스니의 숨은 점점 가빠지고... 가말라시엘이 재촉합니다.
>>880 순식간에, 동방에서 온 이름모를 귀족을 잡아먹으려는 파티는 대학살 현장으로 변합니다. 어차피 여기 앉아있는 모두는 적이니, 엘리는 아무나 붙잡아 등을 찌르고 목에 이빨을 꼽아 피를 마십니다. 밝은 밤눈으로 보면, 식인종들보다도 더 웃기게 싸우고 있습니다. 그놈들은 최소한 피아식별이라도 됐는데, 이 녀석들은...
"으아아아악!!!"
"이봐! 난 너랑 같..."
퍽! 철퍽! 푸쟉! 귀족들은 패닉에 빠져서 서로를 찌르고 죽입니다. 정말로 우스운 광경입니다. 일부러 이러는 거라 봐도 무리가 없을 지경입니다. 얼마나 멍청한지 모릅니다. 엘리는 그걸 보고 웃는데, 어째 엘리가 죽이는 인간들보다 서로 죽이는 인간 수가 더 많을 지경입니다. 하지만 그 때, 갑자기 불이 확 켜지더니 폭음탄이 터집니다.
꽝!!!!
언제 들어도 적응되지 않는 귀청이 터지는 폭음과 함께 아직도 살아남아 있던 이들이 쓰러지고 불이 켜집니다. 귀족들은 작게는 베인 상처부터 크게는 배에 찔린 상처를 입은 채 고통스럽게 신음하고 있는데, 그 와중에 누군가 엘리의 어깨를 턱 잡습니다. 엘리가 반사적으로 손아귀를 들어 베려고 하지만, 그 손아귀는 익숙한 얼굴을 보고 멈춥니다. 그녀를 데려온 거한도 아닌, 비냐입니다. 그녀는 후드를 뒤집어쓴 채 주변을 둘러보다가 말합니다.
@@ >>874 누누코야 당연히 첫번째 안에 더 이끌리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본능대로 고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신성한 들판의 전사에게 싸움이란 살아가는 이유와도 같았고, 겸사겸사 인간들을 자신의 손으로 찢고 부술수 있다면 그것은 호재나 다름 없었다. 그 최후가 죽음이라도 기쁘게 맞이할 것이다. 그렇지만 실질적으로, 누누코는 자신의 목표를 떠올렸다. 누누코의 목표는 물론 인간들을 향한 복수이다. 그러나 혼자서는 그것을 이룰 수가 없었다. 무엇보다 정보가 필요했고, 저택에 되돌아가서 무사히 나온다 한들 요한의 말대로 얼굴이 알려지면 곤란했다. 자신뿐이라면 상관이 없었다. 하지만 자신의 대변인 -사실은 거의 변호인에 가까웠지만- 역할을 맡고있는 요한이 움직일 수 없게되는 것은 곤란했다. 결국엔 그가 자신같은 외지인이 아니고, 인간사회에 몸담고 있는 인간이기 때문이었다.
"선택지가 없군." 그것을 알아차린 누누코가 언짢으면서도 마지못해 인정하는듯이 그렇게 말했다. 그녀는 어쩌면 이 눈앞의 입 살은 남자가 처음부터 자신이 두 번째 안을 고르도록 유도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속았나,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그게 그다지 기분 나쁘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어쨌든 누누코는 복수로 이어지는 혈흔을 찾을 수만 있다면 상관 없는 이야기였다.
그렇게 생각하며 넘기고는, 그의 설명에 몸을 움직여 자신이 입은 옷을 찬찬히 살폈다. 기본적으로 인간의 무리에 숨어들 수 있도록 '평범한 옷' 의 모습을 하고 있었지만, 마치 검을 곱게 감싸둔 천처럼, 언제든지 누누코가 야생의 폭력을 드러낼 수 있도록 사적인 조치가 되어있는 옷이었다.
>>882 엘리는 비냐를 마치 짐짝처럼 들고 움직입니다. 엘리가 그렇게 힘이 강한 편은 아니지만, 아까 전에 대량 학살의 현장에서 기름기 흐르는 영양가 좋은 피를 꽤나 마셨기에 체력은 부쩍부쩍 오른 덕분입니다. 비냐는 엘리가 잡고 가는 대로 흔들리면서도, 할 말은 다 하고, 가리켜야 할 방향도 다 가리킵니다. 사교 파티장은 이미 아수라장이 되었는데, 그 덕분에 비냐와 엘리가 움직이기가 더 편한 면도 있습니다. 어차피 사방팔방이 피바다가 되는 마당에, 피 묻은 여자 한 명이랑 그 여자한테 잡혀가는 하플링 여급 하나가 눈에 띌까요?
"왼쪽 계단으로 내려가요! 그리고 대체 무슨 생각이에요?!"
비냐는 악악대면서도, 계단의 단차에 발이 닿을때마다 콩,콩, 콩, 하면서 시야가 위아래로 마구 흔들리는 것을 느낍니다. 하지만 그런데도 할 말은 다 하는군요.
"제가 오늘 사교파티 주방보조 한 명으로 들어오라고 임무를 받았는데, 이렇게까지, 심하게 할 줄은, 그 분도... 오른쪽이요!"
휙! 엘리는 오른쪽으로 몸을 돌리고, 딱 봐도 '나 식료품 창고요'하는 듯한 곳에 도착합니다. 엘리는 그 안으로 들어가는데... 엘리를 마차로 이곳에 데려왔던 거한이 배를 움켜쥔 채 피를 흘리고 있군요. 그는 입으로도 피를 흘리면서 둘을 바라봅니다. 왼쪽으로 돌아, 오른쪽으로 돌아, 정신없던 비냐는 엘리의 손을 뿌리치고 그 거한에게 달려갑니다.
"엘리 님! 일단 이 아저씨를 지혈할 테니까 누가 안 오나 좀 봐주세요!"
비냐는 한두번 해본 솜씨가 아닌 듯 거한의 입에다가 쓴 뿌리를 물리고, 횃불을 들어 배를 냅다 지져버립니다. 으으으으읍!!!! 미친 듯한 고통의 소리와 고기 익는 냄새가 퍼지지만, 다행히도 기절하지 않았습니다. 비냐는 한숨을 쉬고 나서 곡물 푸대를 당겨서 숨겨놨던 개구멍이 드러나게 하는데, 갑자기 식량 창고를 쾅! 두들기는 소리가 들립니다. 어쩌다 실수로 부딪친 게 아니라, 반대편에서 고함이 들리고 하나, 둘, 하는 구령이 들리는 것으로 보아 여기에 무언가가 숨은 걸 눈치챈 것 같습니다.
>>883 "그건 나중에 조치해드리죠. 아무튼 알겠습니다. 사람들은 우리가 앞으로 할 행위를 '도둑질'이라 부르겠지만, 저는 좀 더 정중하게... 당사자들과 사전 조율이 잘 되지 않은 채증 절차라고 부르겠습니다."
요한은 웃으면서 자신이 가장 마음에 드는 안을 골라준 누누코에게 감사를 표합니다. 누누코의 판단은 옳았습니다. 첫번째 방안대로 간다면 당장 누누코를 못살게 굴었던 인간들을 깡그리 죽여버리고, 겸사겸사 때리는 시모보다 말리는 누이가 더 밉다고 남 일이라 지나가던 놈들도 팔다리 한두짝 정도는 간단하게 불구로 만들 겁니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큰일이 날 거고, 세번째 안도 분장을 정말 잘 하지 않는 이상 누누코를 알아볼 이가 한 명도 없다고 말할 수는 없지요. 그렇다면 답은? 시체 도둑질입니다. 요한은 작전에 대해 자세하게 설명해줍니다.
"로데스는 여기서 마차를 타고 하루 정도 걸리는 거리에 있습니다. 그곳으로 가서, 마차를 적절한 곳에 숨긴 뒤에, 삽 두 개만 들고 몰래 미스터 스위트가 소유했던 대농장으로 들어가서, 누누코 씨가 그 미스터 스위트를 죽였던 곳, 묻었을 만한 곳을 찾아서 거기를 파낼 겁니다. 그러고 나서, 시체를 확보하면 빈 관뚜껑은 다시 덮어버리고 우리는 달콤한 현상금 200탈러를, 합리적인 비율로 나누고 우리의 첫 번째 동업에 기쁜 마침표이자, 다음 동업의 행복한 따옴표를 찍겠지요."
그리고 요한은 누누코에게 로데스에 대해 조사해온 것들을 줄줄이 말합니다. 키가 큰 옥수수, 과일 등을 재배하고 있는데 지금은 옥수수 수확기 직전이라 옥수수 사이에 숨으면 방향은 잘 잡아야겠지만 접근하기는 쉬울 것이다, 밤중에 들킬 것 같으면 과수 위에 올라가 둥지인 척해도 된다는 등... 누누코도 당장 다 죽여버리겠다는 본능에 사로잡혀 지나쳤던 것들인데, 그것들이 요한의 설명과 함께 하나둘 떠오르니다. 아무튼 설명을 다 마치고 나서, 요한이 되묻는군요.
비냐는 엘리가 방금 저지른 짓을 보고 말을 잃고 어이없다는 표정을 짓지만, 그럴 새도 없이 문이 열리자 경비병들이 쏟아져나옵니다. 문을 들이받아야 했던 공성추... 대신 기둥이 먼저 비냐의 머리를 향하지만 거한이 그녀의 손을 꽉 붙잡아 당겨버리고, 경비들은 어어할 새도 없이 제 몸무게를 못 이기고 앞으로 쏟아지다가 맨 앞에 있던 이는 선반에 턱이 부딪쳐 목이 뒤로 꺾이고 뒤에서 오던 이들도 마구 엎질러지다가 선반이 무너지면서 쾅! 하고 깔립니다. 그 혼란 와중에도 몸을 건사했던 비냐와 거한은 엘리를 죽일 듯 바라보지만, 결과적으로 보면 음... 괜찮으려나요?
"하아... 아무튼 나가야 해요!"
비냐는 아직도 살이 지져진 고통에 비몽사몽한 거한의 양 어깨를 붙잡고 낑낑대며 그를 개구멍으로 밀어넣은 다음, 자기도 개구멍으로 들어간 뒤 엘리에게 손짓합니다.
"뭐 해요? 빨리 들어와요! 그리고 들어올 때 곡물푸대 같은 거로 가리는 거 잊지 말고요!"
>>891 "잠입해야 한다는 것, 시체를 파내야 한다는 것만 이해했으면 다 이해하신 겁니다!"
...그렇게 말하면 될 걸 그렇게 놀랍도록 길게 말하는 것도 재주라는 생각이 들지만, 누누코는 굳이 따지지 않고 넘기기로 합니다. 나머지는 이해 못 했지만 어차피 중요한 게 아니고, 누누코는 언제나 그랬듯 자기 할 일만 잘 하면 그만일 테니까요. 요한은 웃으면서 곡물푸대가 쌓인 '침실'을 누누코와 함께 나서고, 마을 어귀에 세워놨던 마차에 '바퀴벌레'를 끌고 와서 다시 이어줍니다. 하루종일 바퀴벌레마냥 뭔가 먹고만 있던 '바퀴벌레'가 더 못 먹는게 아쉬운지 젖은 코를 혀로 낼름낼름 핥자 요한은 주머니에서 콩을 한움큼 꺼내 먹여주고, 마부석에 올라서 누누코에게 손짓합니다.
"이번 시체 절도는 누누코 씨의 잠입 실력이 생명이 됩니다. 그러니까, 좀 더 휴식을 취하고 싶으시다면... 비좁긴 해도, 마차에 들어가서 주무셔도 됩니다."
요한은 대단한 친절을 베푼 것마냥 어깨를 으쓱거리며 웃는군요. 그러다가 아! 하고 뭔가 생각났는지 손가락을 튕기고는 말합니다.
"여기서 뭔가 더 하실 일이 있으시면, 오늘 석양이 지기 전까지 하다 오셔도 되고요."
누누코는 어떻게 하나요? 바로 출발할 수도 있고, 아니면 좀 더 비든베일에 머무르다 갈 수도 있습니다.
그 곰은 명백한 태도로 저희에게 조금씩 다가왔어요. 그 야수가 어떠한 행동을 하려할지 쉽게 예상할 수 있었지요. 재빠르게 저의 뒤로 몸을 숨긴 베스니가 말하던 것들 중에서 마법적인 것은 제가 몇가지를 실천하려 할 수도 있겠지만 우선 저 야수의 헛점을 만들어내는 것이 좋을 것 같아요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어요. 저희가 도주한다면 다른 방법도 있으니까요"
굳이 그녀를 곰에게 주지 않아도 할 수 있는 방법은 있을거에요. 심지어 그녀를 건네준다고 해도 그 야수가 만족할지 모르는 일이에요
"그렇겠지요? 우리들 모두 비슷하게 생각하고 있을거에요"
숲은 찾아온 어둠으로 감싸여 있어요. 그 안에서 제대로 돌아다니기 위해서는 아직 남아있는 희미한 빛들을 가능한 많이 얻기 위해서 눈은 변화해요. 동공은 커지고 민감해져 한번에 대량으로 증폭하여 받아들일 수 있게되지요. 그리고 그것은 달리 말하자면 빛에 취약하게 되었다고 할 수도 있을거에요
"베스니 씨, 시력을 보호하려면 눈을 가리세요"
저는 순간적으로 눈을 감고, 얼굴을 가리는 거의 동시에 눈이 멀어버릴 폭발하듯 강렬하게 비추어주는 섬광을 뿜어내 발했었요. 그때 만큼은 어둠이 내려온 숲의 한 곳에는 빛으로 채워질 거에요
>>898 엘리는 개구멍에 제일 늦게 들어가 곡물포대를 끌어당겨 막아버리고, 앞은 물 먹은 발광버섯이 제공하는 푸르스름하고 침침한 불빛으로 겨우 건너갈 수 있는 통로가 펼쳐져 있습니다. 거한이 힘이 부쳐 쓰러지면 비냐가 끌어당겨 느리게라도 가고, 그 과정에서 발에 벌레인지 쥐인지가 마구 밟히는 감촉이 느껴지지만 비냐도, 거한도, 엘리도 신경쓰지 않습니다. 그리고 지하수로의 익숙한 물비린내가 느껴질 때쯤 앞에서 갑옷 절그럭거리는 소리와 함께 램프와 횃불 여러개가 나타나고, 그 쪽에서 소리칩니다. 경비병 같기도 하고... 잘 모르겠군요.
"정지! 정지! 정지! 너희 뭐야!"
거한은 비냐를 하플링도 겨우 들어갈만한 구멍에 어거지로 밀어넣은 채 이를 악물고 주저앉고 엘리를 바라봅니다.
>>900 아앨라나는 자기가 만들어낼 것의 위력을 아주 잘 알고 있어 반사적으로 눈을 감고, 뒤에 있던 베스니는 겁에 질려 이미 눈을 질끈 감았습니다. 가말라시엘이 깃든 지팡이의 끝에 거대한 빛의 구슬이 떠오르고, 그 구슬의 요상한 형태와 눈이 멀 정도로 밝은 빛을 불곰이 이상하게 여기기도 직전
팟
질끈 감아 어두워진 세상도 억지로 밝히고, 마치 천국에 온 것처럼 세상이 밝아집니다. 소리 없는 섬광에 놀란 날짐승과 쥐가 뛰쳐나가는 소리, 시력에 비가역적 손상을 입은 불곰이 고통스레 몸부림치는 소리가 들리자 아앨라나는 눈을 뜨는데, 눈을 감았는데도 아플 정도로 강한 빛에 동공이 쪼그라들어, 안 그래도 어두운 세상에 칠흑을 더합니다. 그래도 고통스레 도망가는 불곰은 보이는군요.
요한은 그렇게만 물어볼 뿐 더 따져 묻지는 않고, 바퀴벌레가 끄는 마차를 몰기 시작합니다. 마차는 비든베일 어귀를 지나고, 각자 크건 작건 각자의 크기가 있던 사람들과 나무들, 딥들, 가축들, 밭들이 작아지더니 똑같이 콩알같은 크기가 되어 뒷편의 지평선에서 사라질 때까지 바퀴는 계속 구릅니다. 요한은 사람들과 마주칠 때마다 손을 흔들어 살갑게 인사하고, 익숙하진 않지만 최소한 참아줄 수준은 되는 휘파람 노래를 부르며 숲에 들어갑니다. 그리고 마차 마퀴가 빠지는 건 아닐까 걱정되는 곳까지 들어가고 나서 요한은 마차를 멈추고, 삽 두개를 꺼내 누누코와 나눕니다.
"로데스 대농장까지 걸어서 한 시간 거립니다. 여기부터는 숲을 거쳐 옥수수밭으로 숨어 들어가죠."
누누코는 무심코 하늘을 바라봅니다. 동쪽에서는 어둠이 쫓아오고, 서쪽에서는 태양이 수줍게 얼굴을 붉히며 사라지는 저녁 시간대입니다.
>>911 "그 분은 어떻게 생겼대? 가끔 본영에 들른다던데 나는 본영에 갈 일이 있어야지."
"낸들 알겠냐. 나도 본영은 그냥 경비대장님 모시러 가는데, 아마 내근직 애들이나 좀 알겠지."
뭐 그런 이야기들입니다. 엘리가 엘리자베스로서 일족 저택에서 살 때도, 일족의 영지에는 엘리자베스의 얼굴을 한 번이라도 본 사람보다 못 본 사람들이 훨씬 많았고, 여기서도 아마 그럴 겁니다. 그러니, 이들은 사교 파티에서 일어난 일도 모르거나 아예 조금만 알 것이라며 자연스레 안심하려는데... 갑자기 앞에서 또다른 경비대가 나타납니다. 이번에는, 좀 더 계급이 높아보이는 이가 나타나고, 경비들은 창대를 바닥에 탁탁 쳐서 경례합니다.
"충성!"
"흰 머리의 빨간 눈동자를 가진 여자가 파티장에서 난리를 부렸다고 하더군. 그 년을 찾아야 한다."
어... 네?
경비들의 시선이 자연스레 엘리를 향하고, 거한이 어떻게든 비냐를 밀어넣어 숨긴 이유를 깨닫게 될 때쯤, 갑자기 어디선가 엘리가 그토록 기다렸던 구원의 목소리가 들려옵니다.
"그래, 그 년을 찾아야 하죠."
"이게 무슨... 이단심문관님?!"
이단심문관은 경비대 중에서 높아보이는 이를 슬쩍 지나쳐서, 엘리가 뭐라 하기도 전에 손에 수갑을 채우고 '조용히 하라'는 듯 눈을 한번 깜빡이고는 다시 경비대들에게 고개를 돌립니다.
"위에 올라가서 사교 파티장을 통제해 주십시오. 이단심문관 치안인력 징발법에 따라, 여러분은 24시간 동안 제 명령에 '이유 없이' 따라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그게... 그럼 이 여자는..."
"사건은 종결했지만, 제가 담당한 사건에서 부속하여 발생한 것으로 보이는 사건의 중요 참고인... 또는 피의자니 제가 잘 데리고 있겠습니다."
에레야는 그렇게 말을 끊고, 거한과 엘리를 데리고 지하수로 바깥으로 성큼성큼 걸어나가기 시작합니다.
@@ >>909 "그냥." 누누코는 단지 그렇게 말하며 턱을 괴고 바퀴벌레가 끌어주는 마차의 거친 흔들림에 몸을 맡겼다. 하늘은 이제 막 어두워지기 시작하고 있었다.
"아무 것도 아니야." 그리고 그들이 뒤로 한 비든베일의 개울가의 근처 나무 밑동에는 갈대볏짚으로 엮어서 만든, 끝이 뾰족한 잎의 꽃이 하나가 생겨났다. 그것이 신성한 들판에서의, 서로의 무운을 빌때 의식처럼 나누어주는 칼날 이파리 꽃의 모양을 본따 만든 장식이라는 사실을. 그들이 알게 된 것은 아마 시간이 꽤 흐른 뒤였을 것이다.
숲에 와서, 누누코는 요한과 함께 마차에서 내렸다. 땅을 밟고나서 그녀가 가장 먼저 한 것은, 삽을 쥐어잡고 허공에 가볍게 휘둘러보는 것이었다. 통짜 쇠가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위협적으로 울리면서 요한의 머리털을 스쳤다. 전사이자 살인토끼의 습관이었다. 자세는 마치 작업을 위한 연장을 들었다기 보다는 무기를 쥔 것 같았다. 이제부터 해야할 일을 생각하면, 마치 이 삽이 망가지기 전에 몇이나 되는 사람을 때려눕힐 수 있을지 가늠하는 것 같은 움직임이었다.
에레야는 머뭇거리는 거한의 무릎을 걷어차서 자기 위에 얹히게 한 후, 거한을 그대로 업고는 들어서 여관으로 갑니다. 밤인데다 주변이 혼란스러워서 엘리와 에레야를 알아보는 이들은 없지만, 에레야의 목소리에는 노기가 어려 있어서, 엘리가 뭘 했는지는 몰라도 그게 에레야를 상당히 피곤하게 만들었음은 알 수 있습니다. 에레야는 엘리에게 상황을 설명합니다.
"웬 흰머리 동방 귀족이 사교 파티에서 갑자기 칼부림을 벌이고, 그에 따른 폭력사태로 수십명의 사상자 발생...이 지금 사방에 퍼진 사건 내용이야. 아마 네가 갑자기 사람 죽이고 싶었으면 이것보다 더 얌전하게 할 수 있었을 테니 나름의 이유는 있겠지만..."
어느새 에레야와 엘리는 여관에 도착하고, '반값 할인!'이라는 현수막 문구와 그 문구를 보고 딸려들어와 1층에서 부어라 마셔라 노는 이들을 제치고 지하로 내려갑니다. 에레야는 거한을 수술할 줄 아는 부하에게 맡기고, 엘리에게 이야기합니다.
"자, 뭔 일이 났던 건지 전부 이야기해 줘. 널 욕하려는 게 아냐. 일단 네가 뭘 했는지 내가 정확히 알아야 말을 맞추니까."
베스니는 아앨라나에게 되묻지만, 아앨라나의 말을 '뭔가 해야 한다'는 무언의 눈치로 받아들였는지 잠시 주변을 살펴보더니 캠프를 정리하려고 듭니다. 아앨라나가 생각하기에도, 불곰까지 끌어들일 정도면 아앨라나와 베스니는 캠핑 장소 선정을 잘못해도 한참 잘못한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그리고 불곰이 온 마당에 늑대 따위가 무서울까... 라고 생각하기에 아앨라나는 그 정도의 강심장은 아니고, 더군다나 베스니라는 말만 잘하지 할 줄 아는 건 아무것도 없는 짐짝을 달고 있는 상황에서는, 잠시 다리를 쉬게 한 것에 의의를 두고 출발할 수밖에 없습니다. 베스니는 은신처를 덮었던 천막을 주섬주섬 정리하고, 아앨라나는 그 동안 주변을 살핍니다. 그리고...
"우으으으으..."
뭔가, 어둠 속에서 흐느끼는 소리가 들려옵니다. 아앨라나는 주변을 살펴보지만, 아무런 이상함도 없습니다. 분명 사람이 우는 소리 같기도 하고, 발정기의 숲고양이가 발광하는 소리 같기도 한데... 뭔가 이상합니다. 하지만, 그녀의 눈으로는 잘 살펴볼 수 없습니다.
요한은 조심히 다뤄달라는 말이겠지만, 누누코에게는 별로 와닿지 않는 소리입니다. 그때그떄 필요하면 만들어 쓰고, 정말로 소중한 물건은 '싸다' '비싸다'의 개념이 없었으니까요. 소중하면 소중한 거고 소중하지 않으면 소중하지 않을 뿐입니다. 누누코는 이 삽으로 사람 여럿을 파죽일 수도 있겠다고 생각은 했지만 소중하다고 생각하지는 않고, 요한과 함께 숲 속으로 나아갑니다. 요한은 이곳의 지리를 알아왔고, 누누코의 본능은 피해야 할 때와 나아갸아 할 때를 귀신같이 구분합니다. 누누코가 아니라 요한보다도 큰 옥수수대를 헤치고, 솨아아아 불어오는 바람은 두 사람이 거침없이 땅을 휘적거리는 것보다도 더 큰 소리를 내며 그들을 가려줍니다. 그리고 옥수수밭을 헤치면 옥수수가 또 나오고 옥수수가 또 나오던 풍경을 지나서, 누누코가 마침내 바깥으로 발을 내딛기 직전 요한이 누누코의 어깨를 턱 잡습니다.
"잠깐 기다려주시겠습니까."
누누코는 손가락으로 앞을 가리킵니다. 울타리에 석궁과 칼로 무장한 두 남자가 껄껄거리며 저들끼리 이야기하고 있고, 모닥불에는 쥐와 새로 추정되는 것들을 꿰어놓은 꼬치를 여럿 걸어두고 있습니다. 요한은 누누코를 돌아보며, 어둠 속에서도 알아볼 수 있는 매우 진지한 낯빛으로 말합닏.
"제가 '아, 이런. 내가 술을 가져오지 않았는데!'라고 이야기하기 전까지는 절대 끼어들지 마십시오."
"계속하세요, 하고 있는 행동을 하세요. 어쩌면 저희는 잘못된 장소에서 행동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르는 일이에요. 만일, 그렇다면 바로잡야겠지요"
저는 그녀가 물어보면서도 먼저 자리를 정리하는 것에 동조하여 그렇게 말했어요. 아무래도 저희가 머물러야 하는 장소를 잘못 선정한 것 같네요. 어쩌면 장소가 아니라 저희가 틀린 행동을 했을지도 모르겠어요. 온전하게 휴식은 될 수 없었지만 그래도 할 수 있는 일을, 필요로 하게될 것을 어느정도 해냈어요
"소리가... 이것은 목소리인가요? 어떠한 징조일까요?"
빛이 찾아올 수 있더라도 낮이 아닌 이상 숲은 여전히 곳곳에 어둠이 내려와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어요. 주변을 살펴 보았지만 소리의 근원이라 할 수 있을 만한 것은 잘 모르겠어요. 예감으로 봐본다면 이것은 또 다른 숲 속의 존재일 것 같다는 생각이 들지만 아닐수도 있어요. 아무래도 묘한 느낌이요. 저희는 그 소리로부터 할 수 있는 만큼 멀리 떨어져야 할까요? 다른 무언가가 있나요?
@@ >>920 '인간이다.' 누누코의 귀가 쫑긋 솟아올랐다. 전방에 있는 익숙하고도 아주 역겨운 냄새- 인간을 감지한 것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금방 요한이 누누코의 움직임을 제지하듯 어깨를 붙잡으며 기다리라며 말한다. 요한의 손가락을 따라 시선을 옮긴 곳에는 둘의 남자가 있었다. 누누코가 보기에는 그저 사냥꾼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뿌리 깊은 증오탓인지, 아니면 누누코의 동물적 직감때문인지. 누누코는 그들을 시선 안에 가두면 알 수 없는 기분 나쁨이 느껴지고 있었다.
"알겠어." 누누코는 그렇게 말하고서는 근처의 나무로 재빠르게 움직여 몸을 숨겼다. 요한에 대해서는 별로 걱정이 없는듯한 모습이었다. 남은 것은 이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지켜보는 것 뿐이었다.
에레야는 신경질적으로 책상을 두들기면서 한숨을 쉽니다. 하지만 눈 앞에 있는 옐리사베타 블라디미로비나 예페슈카, 아니... 엘리자베스 바토리 블라드 체페슈를 아무리 탈탈 털어도, 아예 내장을 갈라 버려도 그녀가 찾는 물증이 나올 리는 없다는 것을 알기에, 에레야는 손을 휘휘 저어서 엘리가 볼일을 보도록 합니다. 하지만 지금 위에는 한참 난장판이고, 엘리의 인상착의에 수배령이 걸린 이상 함부로 올라갈 수는 없기에, 거한들이 빈 포도주 통을 들고 오더니 거기에 양동이로 물을 붓고는 수건과 갈아입을 엘리의 새 평상복만 남겨둔 채 문을 걸어잠가 버립니다.
엘리는 다시 한번, 피에 젖고 지하수로까지 거닐어 썩은 물내가 밴 몸에 휴식을 선사합니다. 포도주의 단내와 알코올의 쓴내가 배이는 것 같지만, 단내는 좀 '고급스러운' 목욕 하는 셈 치고 알코올은 이거로 혹시 모를 잔상처를 소독하는 셈 칩시다. 엘리가 다 씻고 나오면, 거한들이 아앨라나에게 수갑과 재갈을 내밀고, 에레야는 무거운 얼굴로 말합니다.
"잠시만 참아줘."
왜 그러냐ㅡ고 물어볼 것도 없이, 에레야보다도, 아니, 엘리의 질문보다도 위에서 먼저 대답이 들려옵니다.
"이단심문관 에레야 님! 이단심문관 지위를 남용한 폭력 행위에 대한 조사에 협조해주셔야겠습니다!"
베스니는 귀를 기울이며 주변을 둘러보지만, 그녀의 귀에는 나뭇가지와 나뭇잎이 바람에 흔들리는 소리와 가끔씩 우는 부엉이 소리만 들릴 뿐입니다. 베스니는 괜히 불안하게 만든다며 토라진 소리를 내고, 아앨라나도 더 신경쓰지 않고 넘기기로 합니다. 어두운 밤이지만, 아앨라나는 앨리스 님에게 배운 밤하늘의 별 보는 법을 떠올리며 별이 가리키는 방향을 따라 앞으로 향합니다. 뷔르트겐 호수는 워낙에 크니, 대충 '이 방향이겠거니' 하고 따라가도 나온다는 것은 위안입니다. 하지만...
"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
"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
베스니는 묵묵히 아앨라나를 따라오는데, 아앨라나에게는 도저히 무시할 수 없을 정도로 거슬리는 그 소리가, 다시 한번 들려옵니다.
>>922 요한은 슬쩍 옥수수밭에서 나가더니, 얼굴빛을 싹 고치고 자연스럽게 "어이! 어이!"라고 말하면서 두 남자의 시선을 끕니다. 모닥불 앞에서 노가리를 까던 두 사람은 갑작스레 어둠 속에서 누군가 나타나자 석궁을 조준하는데, 요한은 석궁을 조준하건 말건 양 손을 들고 그들 앞에 가까이 서더니,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한 바보같고 어수룩한 말투로 그들에게 묻습니다. 이건 평소에 누누코가 알고 있던 요한의 그 말투가 아니라, 마치 마을의 코흘리개한테 옮은 듯한 바보 말투입니다.
"내가 미스터 스위트님 대농장에 고용됐다고 편지를 받았는데요, 어디로 가야 하나요? 삽 쓰는 일을 해야 한대서 삽을 들고 왔는데..."
"뭐? 뭐 이런 새끼가 다 있어?"
"이거 진짜 맞아? 그 사람은..."
한 남자가 뭐라 말하려다가 옆에 있던 이에게 정강이를 탁 맞고 입을 닥칩니다. 정강이를 걷어찬 남자는 벌떡 일어나더니 요한에게 성큼성큼 걸어가서, 요한의 멱살을 확 붙잡고 울타리 쪽으로 밀칩니다. 그리고는 칼을 꺼내드는군요.
"어어, 어어어..."
하지만 요한은 바보 행세만 할 뿐 반격도, 억울하다는 표현도 하지 않습니다... 옥수수밭 사이에 숨은 누누코는, 멱살을 잡은 남자에게 살의를 느낍니다. 그리고 그 순간에, 남자의 칼이 요한의 목으로 향하는 것이 보입니다!
>>929 세상 일 어떻게 돌아가는지 아무도 모른다지만, 엘리는 세상 일이, 그것도 자기 인생이 이런 식으로 돌아갈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에레야와 함께 죽인 놈들의 숫자가 좀 된다지만, 그래도 엘리는 뱀파이어고 에레야는 이단심문관일진대 살다살다 이단심문관과 이단심문의 권위가 누군가를 이기길 이리도 바라게 되다니요.
"좀 아플 거다... 겁니다. 참아...요."
엘리는 입에 물려지는 재갈에 해면이 꽂혀있는 걸 느낍니다. 저도 모르게 혀를 굴리면 해면 특유의 꺼끌꺼끌한 촉감과 함께 달콤한 피 맛이 느껴지고, 거한은 그녀를 의자에 앉히고 묶습니다. 그리고 거한들이 몽둥이를 들고 엘리를 때리기 시작합니다.
"쟤 너네가 힘빠져 죽을 때까지 때려도 안 죽어. 그래도 허리, 무릎, 어깨같이 아프기는 죽도록 아픈데 소리 안 사는 데는 때리지 말고."
즉, 쇼 좀 하라는 건데... 확실히, 소리만 퍽!! 퍽!! 엄청 나지 아프진 않습니다. 기분은 더럽지만요.
"...문 열어."
그 말과 함께 경비병들이 들이닥치고 아까 봤던 높아보이는 경비가 앞장서서 들어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뭔가 다릅니다. 손에 영장을 들고 있고 개중에는 교회의 인이 찍힌 것도 있습니다.
"이단심문관님의 노고는 인정합니다만, 최근 이단심문관님의 불법행위에 대한 믿을만한 증거를 다수 확보하여 이 자리에 섰습니다."
"그렇다면 아주 좋은 증거가 필요할 겁니다."
에레야는 경비와 단 한 마디도 밀리지 않습니다. 에레야의 지위, 종교의 권위, 사건의 특수성, 특유의 블랙유머를 총동원하지만, 사실 이단심문관이 이렇게 이야기해야 한다는 것부터 뭔가 일이 개판으로 됐다는 신호입니다. 어쨌든 둘은 팽팽하게 기싸움을 벌이다가 결국 경비가 한 발 물러섭니다.
"내일 저녁 6시, 신전에서 에레야 이단심문관님의 정직 여부를 검토하는 긴급 청문회가 태양교단 세스타우 교회 주관으로 열릴 예정입니다. 제 미약한 경비로서의 권위는 몰라도 부디 같은 교우의 부름은 무시하지 마시길 바랍니다."
경비대장은 그렇게 말하고 다시 올라가고, 거한들은 엘리를 때리던 것을 멈추고 바로 풀어줍니다. 그리고 에레야는 한숨을 아주 길게 내쉽니다.
"..." 그러나 누누코는 그저 귀를 가볍게 움직일뿐.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고 나무 위에서 그걸 바라보고 있었다. 물론 요한이 미리 해둔말이 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누누코에게 있어서 이것은 일종의 시험이기도 했다. 요한이 그저 입만 산 인간인지, 아니면 전사의 자질을 가지고 있는 영혼인지 직접 보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누누코는 개입하지 않았다. 여기서 협력은 끝나는가? 아니면 그 새치같은 혀로 상황을 모면할 것인가? 하지만 그렇게 하기에는 이미 늦은 것 같았다. 그의 다음은 어떻게 될 것인가. 누누코는 그저 그것만을 흥미에두고 이 상황을 보고있었다.
에레야는 의자에 침통한 표정으로 주저앉고 거한은 눈치껏 술 한 병을 에레야의 손에 쥐여줍니다. 에레야는 술 한 병을 그대로 쭉 들이키는데 술이 그리 도수가 낮지도 않은 눈치입니다. 그런데도 한 병을 금방 해치운 에레야는 이 위기 상황에서도 엘리에게 지금 상황을 알려줍니다.
"그래, 이판사판이다. 저 새끼들이 비밀기지 위치도 알았겠다, 소환장도 냈겠다, 그 전에 내 애들은 다 죽을지도 몰라. 네 정확한 정체는 몰라도 네가 내 끄나풀인건 눈치챈 모양이니 내 수족을 다 자르고, 날 정직시켜서 보호 특권을 말소시킨 다음 제거할 생각이겠지."
에레야는 술 취한 상태로 이야기하면서 엘리 쪽에 세스타우 성의 지도를 던집니다. 엘리가 옐리사베타라는 명의로 한바탕 뒤집은 귀족가의 사교 파티장, 세스타우 경비대 건물, 그리고... 아직 가보지 않은 빈민가의 아편굴까지... 새삼 이 동네 참 막장이란 생각이 듭니다. 에레야는 엘리가 할 일을 설명합니다.
"네가 사교파티에서 흡혈귀식 사교를 즐기는 동안 우리도 논 건 아냐. 그 피빨이 지망생들이 숨어있을 만한 곳을 뒤져봤고, 뭔가 확실히 있을법한 곳들을 찾아냈어. 분명 경계가 삼엄할 거야. 우리 애들은 아마 쳐들어가더라도, 자료를 전부 파기해버리겠지. 하지만 넌 이야기가 달라."
모두의 시선이 엘리에게 몰립니다. 엘리가 이단심문관과 험상궂은 따까리들에게서 기대는커녕 상상도 못한 유능한 동료를 보는 시선입니다.
"사교 파티는 뒤집었으니 빼고, 한 곳을 선택해서 침투해. 우리는 죽이 되건 밥이 되건 나머지 한 곳을 습격해서, 설령 우리가 실패하더라도 놈들의 계획이 단 하루라도 늦어지게 만들 거다."
사내의 칼날이 요한의 목 앞에서 멈추고, 사내는 잠시 요한의 얼빠진 얼굴을 바라보더니 피식 웃고는 칼날을 거둡니다. 사내는 칼을 칼집에 넣고는 요한의 어깨를 툭툭 치면서 장난치곤 심했던 협박 행위를 뒤늦게 수습합니다. 그 와중에도 요한은 계속 상황파악 안되는 바보연기를 하고 있고요.
"장난이야, 임마."
"아, 아...?"
"오늘은 날이 너무 늦었어. 왼쪽 길 따라 쭉 가면 길쭉한 헛간이 있을텐데 거기 가서 하룻밤 자고 가."
그렇게 말하고 사내는 동료와 함께 모닥불을 짓밟더니 어디론가 가버립니다. 시간이 조금 지나자, 요한은 누누코가 숨어있을 풀밭 쪽으로 손짓합니다. 나와도 좋다는 신호입니다.
>>941 "살인은 정말로 훌륭한 수단입니다. 사람이 없으면 문제도 없고,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은 다 죽이는 것이죠. 예를 들어 누군가 굶주리고 있다면, 죽이면 평생 굶지 않아도 되고, 누군가 상처가 썩어서 고통스러워한다면, 머리통을 이 삽으로 내리쳐 쪼개면 더 이상 고통도 없겠죠."
요한은 누누코를 데리고 걸어가면서, 누누코가 그랬던 것처럼 삽을 휘둘러봅니다. 지금 보면 삽의 옆면에는 톱니가 나 있고 날이 날카롭게 서 있는 것이, 요한도 상황이 미쳐돌아갈 것을 예측하고 삽을 '개조'한 모양입니다. 이쯤 되면 누누코의 기준으로도 귀중한 물건... 까진 아니더라도, 누누코가 필요하면 쓸 만한 살인 무기 정도는 되는 것 같습니다. 아무튼 요한은 선문답 같은 설명을 먼저 하더니, 그 다음으로 요한이 그들을 '살려준' 이유를 설명합니다.
"하지만 그렇게 확실한 만큼, 부작용도 확실하죠. 그 두 사람이 죽는다면 어떻게 될까요? 그 사람들을 어디에 버리죠? 묻나요? 묻으면 우리가 원래 해야 할 일은 어느 시간에 하죠? 만약 대농장의 고용인들이 우리가 죽인 시체를 발견한다면? 일이 더 커질 겁니다. 하지만 걱정하지 마십시오."
요한은 허허 웃으면서 램프불을 켜고 지도를 살핍니다. 그러더니 헛간의 위치를 살피고, 자신의 위치를 확인하더니 어디로 가야 할 지 확인합니다.
"누누코 씨, 저기에 가시죠. 아마 대농장에서 공동묘지로 쓰고 있는 곳은 저기일 겁니다."
에레야가 큰 소리로 이야기하고, 거한들은 고개를 주억거리더니 흉갑을 입고 투구를 낍니다. 이번에는 경비병들의 지원을 못 받는 게 아니라, 재수 없으면 그 경비병들과 싸워야 할 수 있으니, 이전에는 경비병들에게 맡겼던 석궁 등의 무기도 챙기고, 철퇴를 휘둘러 그 묵직함을 다시 한번 느낍니다. 진지하지만 자신감이 넘치던 지하수로에서의 눈빛과는 달리, 이번에는 아직 누가 죽지도 않았는데도 처절해 보입니다. 그리고 그 처절함은 투구의 눈구멍 사이가 아니라, 그들이 꺼내는 살벌한 더더욱 살벌한 무기들로 강조됩니다. 거한들이 쥐에게서 뺏은 방독면을 나눠주고, 척 봐도 불길한 초록색의 액체가 담긴 유리구슬들을 챙깁니다... 독바람 척탄병이 쓰던 가스 폭탄입니다. 그리고 검은색의 고색창연한 폭탄까지... 이거, 경비대 막사를 털기로 했다면 진짜 세스타우가 문자 그대로 뒤집혔겠습니다.
"여명까지 몇 시간 남지 않았어. 실종자 수를 조작한 증거, 식인종 활동을 은폐한 증거, 범죄 활동을 덮은 증거 등등. 전부 가져와야 해. 이단심문관이 되어서 뱀파이어한테 사람 죽이고 다니라고 말은 못하겠지만, 필요하다면..."
에레야는 지하층에 난 쪽문을 걷어차고, 어둠 속에서 비밀 통로가 열립니다. 에레야는 거한들을 먼저 들여보내고 사라지기 전, 엘리에게 이야기합니다.
>>944 엘리는 후드를 뒤집어쓴 채로 여관을 나섭니다. 사람들은 여저히 술을 마시고 있고, 술 냄새와 떠드는 소리 속에서 엘리의 흰 머리칼과 붉은 눈동자... 평범한 인간이라고 보기는 어려운 그녀의 외관도, 경비병들이 막지 못한 흥과 취기 앞에서 자연스레 밀려납니다. 엘리자베스 바토리 블라드 체페슈, 뱀파이어의 심장이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갈 때마다, 경비대 본부 막사에 점점 더 가까워질 때마다 박동이 더 커집니다. 인간은 여럿 죽여봤습니다. '체페슈'의 이름으로 지배하던 영지에서 노인의 임종을 지키러 가면, 그 노인의 마지막 피를 빨아들인 것은 엘리였습니다. 엘리를 대책 없이 돌아다니는 세상 물정 모르는 아가씨로 착각한 도적들은 산 채로 비장과 간을 절개해 피를 짜냈고, 이곳에 오면 식인종과 고블린의 피도 열심히 빨았습니다. 하지만 이건 다릅니다.
"...어이, 요즘 그거 들었어? 요새 안 보이는 그 친구 말이야..."
"...뱀파이어인가? 늑대인간인가?"
뱀파이어, 그녀는 어찌 됐건 인간의 공포를 사는 존재입니다. 인간을 먹는 존재입니다. 이제는 손 다 털었다지만 엘리도 잘 알고 있습니다. 이건 완전히 다른 이야기입니다. 경비대를, 인간들을 지키는 인간을 죽이러 갑니다. 비록 그들이 괴물들에게 목줄이 걸린 개새끼더라도, 엘리는 그놈들을 상대하러 가는 겁니다. 에레야는 최대한 침투해서 자료를 빼오라 했으니 살인이 제1목표는 아니지만, 자료를 빼오는 과정에서 뭔가 일이 생긴다면...
아무튼, 세스타우 성에서 누군가를 내려다보듯 높이 솟은 곳은 그리 많지 않고, 그중에서 횃불과 총안구, 경비대 인장을 단 곳은 한 곳밖에 없기에 엘리는 쉽게 그 곳으로 향합니다. 당장 걸어서 들어갈 수 있는 곳은 정문이고, 엘리가 스스로의 능력에 자신이 있다면 성벽을 등반하거나, 박쥐 형태로 변신해서 날아들어가도 됩니다.
>>949 박쥐가 자주 나타나는 지역도 아닌데 박쥐가 한 마리도 아니고 수십마리가 떼로 몰려들어 경비대 성문을 타넘는다면 그것도 그것 나름대로 의심스러울 것이고, 그렇다고 정문을 뚫자니 그건 벌써부터 살인을 하겠단 소리밖에 안 됩니다. 엘리는 특유의 밤눈으로 성벽을 올려다보고, 사이사이에 튀어나온 나무 기둥이나 돌 사이 틈들을 보고 어떻게 올라갈지 잠시 생각해봅니다. 대충 계산을 마친 엘리는 족제비처럼 점프해 나무 기둥을 붙잡고, 그대로 몸을 휘둘러 발을 돌 틈에 끼운 후 다리를 당겨 한 발 두 발 올라갑니다. 엘리 스스로도 놀랄 만큼 빠른 속도로 올라오자마자...
"하암..."
"야, 하품 소리도 내지 마."
"내 입으로 하품 소리도 못 내냐?"
위기입니다! 엘리가 바로 착지한 성벽 위 보도로 경비 두 명이 걸어옵니다. 대낮이면 이미 들켰겠지만 밤이라 밤눈이 없어 엘리를 아직 못 본 모양입니다. 하지만 더 가까워지면 들킬 겁니다. 주변을 살펴보면, 당장 숨을 만한 곳은 크게 없어보이고 (엘리가 스스로의 팔근육을 믿는다면) 벽에 매달려서 버티던지 다른 방법이 필요할 겁니다!
@@ >>942 언제나 그렇듯이, 누누코는 요한의 말을 절반정도 밖에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요지는, 섵불리 사람을 죽여서는 안되는 것이었다. 모종의 준법정신과 윤리를 막론하고, 그것이 그들이 이 일을 하기로 한 방식이며- 나아가서는 인간사회가 돌아가는 방식이기 때문에.
"...그게 누누코가 인간의 싫어하는 점이야." 그렇기에 누누코는 역겨움을 느꼈다. 죽음에 문제를 만들고, 호들갑을 떨고, 잘잘못을 따지는 것. 왜냐하면 그것은 '인간' 들에게만 통하는 방식이기 때문이었다. 그 범주에서 조금만 벗어난다면, 요한이 말한 것들 중에 적용 되는 것은 머리를 내려쳐 쪼개 죽이는 것밖에는 없었다. 그런 식으로 누누코의 동족들은 죽어갔다. 어쩌면, 지금도. 누누코는 다시 한 번 날카로운 송곳니를 내비치면서. 그와는 별개로 능숙하게 살기의 창을 닫았다. 그렇게 누누코는 요한을 따라 공동묘지로 향했다.
>>951 정말이지 무식한 방법입니다! 인간성을 완전히 잃기 직전 '나를 죽이고 계승하라'는 명령을 내렸던 전대 가주가 이 꼴을 봤다면, 아마 잃어버렸던 인간성이 엘리의 이 폭거에 반쯤은 돌아왔을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엘리는 양 손의 손톱을 길게 해서 성벽의 돌틈 사이에 끼우고, 그것만으로는 모자란지 발을 디딥니다. 누군가 마취 없이 손톱을 생으로 위로 까뒤집어 버리려는 느낌이 칼에 찔리는 것보다 더 아프고 고통스럽지만, 엘리는 이를 악물고 버팁니다. 결국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던 경비병들은 저들끼리 다투던 와중, 엘리는 무언가 듣습니다.
"이봐, 이단심문관한테 이번에 수색 영장을 발부했다면서?"
"살다살다 이런 일도 다 보네. 그러면 우리가 이단심문관을 하옥시키는 건가?"
"그건 모르지... 잠깐, 저거 뭐야?"
경비병들이 저게 뭐냐고 말하고, 엘리는 설마 들켰나 싶어 온 몸에 힘이 쫙 들어가지만 사실 그들은 엘리를 발견한 게 아니라, 더 멀리, 빈민가에서 피어오르는 불꽃을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엘리도 고개를 그쪽으로 틀어서 보면 빈민가 쪽에 불이 여럿 붙은 게... 아무래도 에레야와 부하들이 벌써 행동을 개시한 모양입니다. 경비병들은 바로 어딘가로 달려가 경종을 치고, 경비대원들이 막사에서 우루루 쏟아져나오는 소리가 들립니다. 이게 호재인지는 알 수 없지만, 어쨌든 당장은 경비가 나갔으니 엘리는 다시 위로 올라와서, 성벽 위에서 들어갈만한 곳을 봅니다.
일단은 1층의 지하로 통하는 문이 있고, 1층 정문, 높은 망루, 2층 창문 등 들어갈 곳은 많습니다. 엘리는 어디로 진행하나요?
>>952 "싫던 좋던, 누누코 씨는 지금 인간이 지배하는 인간의 땅을 밟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게 가장 무서운 점이라면 따를 생각이 없더라도 따라야 하고, 또 그렇게 될 수밖에 없단 점이죠."
누누코와 함께 공동묘지 쪽으로 걸어간 요한은 묘비들을 살핍니다. 묘비조차 없거나 대충 작대기 몇 개 세워둔 곳은 안 봐도 노예나 갈 곳 없는 고용인들의 시신일 것이고, 참 고맙게도 비석은 '받을 만한' 사람의 시체 위에만 세운 모양입니다. 아예 씨가 다르다고 공언이라도 할 요량인지 막무덤과는 단도 다릅니다. 요한은 그 위를 성큼성큼 걸어다니며 비석을 살피다가, 흙을 만져보고 갓 묻었음이 분명한 곳을 보더니 그곳의 이름을 확인하고 누누코를 부릅니다.
"이제 팔 시간이군요."
요한과 누누코는 그렇게 열심히 파기 시작합니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묻을 때 몇 명은 동원했을 무덤을 고작 두 명이서 도로 되파는 건 진짜로 힘든 일입니다. 하지만 동이 트면 끝장이니 열심히 파는데, 갑자기 어디선가 소리가 들려옵니다. 요한은 이번에는 좋은 말로 넘어가기 힘들 것이라 판단했는지, 누누코를 툭툭 치는군요.
"숲의 존재로서 추측 할 수 있을 뿐인 이가 저에게 관심을 가진 것만 같은 느낌이 들어요"
그녀는 그 소리를 듣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아요. 그러니 더이상 소리에 대해서 말해보아도 이제는, 더이상 하면 나쁘게 될 뿐일 거에요. 그래서 저는 이를 무시하고 넘기려 했었어요. 단순히 그것으로 끝나게 될 일이라면 좋았겠지만 그 소리는... 신음을 흘리며 저를 계속 뒤따라 오고 있어요. 아무래도 이 소리의 존재는 저에게만 관심이 있는 것일까요? 그렇다면 왜 그러한 것일까요?
길을 계속 걸으며 생각해보았어요. 이 존재가 저에게 무언가를 중요한 것을 알려주고 싶지만 지금 할 수 있는 행동이 그것이 유일하기 때문에 어쩔수 없었거나, 혹은... 저의 주의를 끌어들이고 이 기이한 존재의 목표를 이루기 위한 수단으로서 사용하려는 것이거나요. 검은 숲은 깊고 거기에는 마력이 강줄기처럼 흘러가며 담겨지고 풀어지는 곳. 그에 따라서 무언가가 있을 가능성은 있을 거에요
그렇다면 저는 무엇을 해야할까요? 그 존재는 저에게 소리일 뿐이기 때문에 지금으로서는 최대한 인내심을 발휘하며 길을 가는 수밖에 없을 것 같아요. 하지만, 어쩌면... 그 소리의 존재에게 무엇을 위해서 저를 뒤따르는지 소통을 시도해볼 수 있을지도 몰라요. 만약, 그 존재가 심음 밖에 낼 수 없다면 구별을 위한 신호 방식을 가정하여 말해보는 것은 어떨까요? '예' 는 신음을 한번, '아니오' 는 신음을 두 번 내는 것이에요. 이 존재가 이것을 따라준다면요
베스니는 아앨라나의 설명에 괜히 무섭게 한다고 칭얼거리던 것을 멈추고 다시 눈을 반짝입니다. 이번에도 아앨라나의 말이 베스니의 호기심을 자극한 듯합니다. 그도 그럴 ㄹ것이, 남들은 듣지 못하는데 나는 들을 수 있는 소리는 시대가 몇백년 흘러가면 정신병에 의한 환각, 환청으로 치부될 일이지만 지금 상황에서는 신성하게 여겨집니다. 너무나도 중요하고 신성한 목소리를 들은 나머지, 아니면 오직 자격 있는 자만이 들을 수 있는 소리인 나머지 이방인인 베스니는 듣지 못하고 이 숲에 평생을 바친 아앨라나만 들을 수 있다, 좀 그렇게 착각을 한 것 같습니다. 베스니는 어둠 속에서 수첩에자기 감이 이끄는 대로 마구 휘갈겨 적으며 이 경험을 풀어내면서도 같이 갑니다. 하지만...
퍽!
"꺄악?!"
베스니는 수첩에 무언가를 다 쓰고 앞서나가다가 부딪칩니다. 매번 사람과 부딪칠 일이 많은 도시인답게 죄송하다고 사과하려던 그녀는, 여기가 숲임을 알아차리고 앞을 봅니다. 이건 나무도, 바위도 아닙니다. 그렇다고 털이 가득한 짐승도 아닙니다. 이건 인간인데.... 베스니는 무심코 램프를 들어 그 사람을 비추고 기겁합니다.
숭숭 빠진 머리, 좌우로 돌아가 초점을 맞출 수 없는 눈, 이빨 다 빠져서 무너진 하관, 줄줄 새는 침, 허리춤만 겨우 가리는 거적때기, 앙상한 몰골... 두 글자로 줄이면 '광인'이 두 사람을 보고 있습니다. 정확히는 아앨라나 쪽을 보고 있군요. 그리고, 아앨라나만 들었던 말소리를 이번에는 베스니에게, 이 숲 근처의 모두에게 들려줍니다.
>>961 엘리는 돌 틈 사이에 끼운 목재 기둥을 밟으며 위험천만하게 2층 창문으로 향합니다. 다른 사람이라면 밑으로 머리부터 떨어져 골통이 터지고 난리도 아니겠지만 그녀는 엘리, 뱀파이어, 즉 타고난 침투자이자 암살자입니다. 엘리는 일반적인 인간들은 쉬이 올라갈 수 없는 곳까지 올라가, 창문을 깨려고 합니다. 그것도 손톱을 꽃고 아래로 그어서 조용히 부수는 참 기발한 방식으로요. 하지만...
"어우, 졸려라..."
엘리한테 굳이 그래야겠냐고 알려주려는 듯, 바로 밑층에서 누군가 창문 밑턱을 잡고 위로 올려버립니다. 그리고는 오늘같이 지랄인 날 본부 근무라 잘됐다고 스스로를 칭찬하며 그새 코를 곱니다. 상황 파악이 전혀 안 되고 있다는건 엘리한테는 분명 희소식이니, 엘리는 창문 밑턱을 들어올려 2층 안으로 침투합니다. 이 안은... 2층 침대 여럿이 줄지어 있고 사람들이 자고 있는 침실입니다. 아마 2층은 병사들의 생활 공간일 텐데 여기서 큰 정보를 얻긴 힘들어보입니다. 엘리는 나가기 전 어디로 갈지 고민해봅니다.
>>963 엘히는 경비대 본부를 통째로 떼가도 모를 정도로 세상 모르고 자는 경비병들을 뒤로 한 채 문을 열어제낍니다. 이 경비견들의 목줄을 쥔 이가 그놈의 '뱀파이어리즘'을 동경했는지, 아니면 동네가 워낙에 개판이라 예산을 아끼려고 그러는지는 몰라도 문 사이사이에 촛대가 여럿인데도 켜져있는 촛불은 몇 되지 않아서 복도가 참 어둡습니다. 뭐 엘리에게는 어느 이유건 간에 고맙게 된 일입니다. 엘리는 야음을 틈타 쉽게 아래로 내려가고... 내려가는 길에 경비병을 마주쳐 경동맥을 그어버릴까 고민하지만, 경비는 이 세스타우 인간들이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예상 외의 이야기를 꺼냅니다.
"밑에 청소 좀 제대로 해주세요. 고양이 사체를 묵혀놨나, 썩은 내가 여기까지 올라오는 거 같단 말이에요."
어둠 속에서 엘리를 청소하는 하녀로 착각한 모양입니다. .엘리는 경비의 말을 들은 척 간단히 고개만 끄덕이고 아래로 내려가는데 어우... 진짜 썩은내가 나는군요. 엘리는 1층 구석에서 갈 수 있는 방향을 살핍니다. 지하로 가는 층계참, 양쪽으로 여는 크고 웅장한 문, 어두운 복도. 어두운 복도를 제외하면 모두 두 명의 경비병들이 지키고 있습니다. 엘리는 어디로 가나요?
"제가 듣고 느꼈다고 생각하게 되었던 것들, 그렇게 해서 예감이 들었던 것뿐이에요. 사실은 다를 수 있어요. 확실하다고 할만 한 것은 아직은 없으니까요"
그녀가 저의 말을 듣고는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는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언뜻 그 태도를 바라보았을때 그녀가 저에게 한 껏 기대감과 호기심에 마치 그 눈빛을 반짝이는 듯한 모습을 보고는 설명을 해보았어요. 생각하는 것과 크게 다를 수도 있기 때문이에요. 기대했던 것과 다르다면 아무래도 실망감이 엄습하니까요
그리하며 저희는 계속 길을 걸어갔을 거에요. 이번에는 조금 앞서 나아가던 그녀가 무언가에 부딪히면서 상황은 달라졌어요. 아마도 저희는 기이한 신음 소리의 정체가 되는 이를 찾은 것만 같아요. 아니면 저희에게 찾아온 것일까요? 그녀가 들고 있던 램프에서 발하는 빛이 비치어 주는 그곳에는 누군가가 있었어요. 그곳에는 비틀리고 병든 듯한 모습과 신음만 울리는 그 언행은 아무래도 무언가 사연이 있는 것 같았어요. 왜 그러한 상태로 어떻게 이곳에서 저희와 만나게 된 것일까요? 저희가 그 사람을 바라보듯이 그 사람도 저희를 바라보았고 그 시선은 저에게 향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어요
"당신이... 저희가 가는 길에서 저를 부르셨나요? 저희의 말이 들리시나요? 만약, 그렇다면 신음을 짦게 한번만 말해주세요. 이후에 이어지는 대화에서도 그렇다면 짦게 신음을 한번, 아니라면 신음을 두번 말해주세요"
그 사람의 의도가 무엇인지 모르겠어요. 그렇기 때문에 경계심은 여전히 충분히 가져야 하겠지만 이렇게 된 것도 그 사람이 저희와 이야기를 할 의도가 있다면 이 말의 뜻이 제대로 통한다면 그 사람은 대답해 줄 것이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이전에 길을 걸으며 생각해 보았던 것에서 추려서 조심스럽게 말을 건네보았어요
...소리 자체는 들리는 것 같지만 아앨라나가 무슨 뜻을 전하려는 건지, 아니, 그 전에 언어라는 것의 의미를 알고 있는건지 의문입니다. 이 숲에서 일어나는 일인데 아앨라나가 모른다면 베스니라고 알 리가 없으니 서로 곤란해진 마당에, 불곰의 눈을 구워버린 후 한동안 말이 없던 가말라시엘이 입을 엽니다.
"이게 누구야! 저를 파괴하려 하길래 경고 의미에서 정신을 간단하게 손봐준 친구인데 아직도 잘 살아있었군요!"
가말라시엘은 못 알아보겠다, 저게 요새 백색마탑 유행 패션이냐고 한참 비꼬며 웃더니 아앨라나에게 참 오랜만에 절대자와 사도의 관계로, 참 갑작스럽게 명령합니다.
"사도님. 저 친구를 당장 죽이십시오. 이유는 나중에 설명할 테니."
가말라시엘의 목소리엔 웃음기도 장난기도 없이 냉혹합니다. 네, 이 지팡이에 깃든 영은 지금 아주 진지합니다.
>>967 에레야가 만약 살인이 불가피해진다면 주저하지 말라고 말하긴 했지만, 그건 피할 수 없는 싸움을 피하지 말란 얘기지 안 해도 될 싸움을 굳이 일으켜서 경비대 본부를 피바다로 만들라는 얘기는 분명 아니었을 겁니다. 엘리는 어두운 복도로 들어가고, 워낙 어두운 나머지 엘리 그녀마저도 물체의 크기와 큰 움직임만 파악하지 자세한 실루엣은 보이지도 않습니다. 엘리는 천천히 움직이다가, 무언가 밟습니다.
콰직!
이건 엘리가 썩은 마룻바닥을 밟으며 난 소리가 아닙니다. 어둠 속에서 나타난 형체가 엘리의 흉곽을 강타하며, 갈비뼈가 심장과 폐 대신 우그러진 소리입니다. 그리고 그 형체는 엘리를 붙잡더니, 그대로 바닥에 쾅! 쾅! 쾅! 내리칩니다.
꽝!
한번 부딪치니 순간 시야가 암전하고
콰캉!
두번 부딪치니 눈 앞이 빨개지고 그녀의 코가 피와 회반죽 냄새와 '멍한' 냄새가 가득차고
콰지직!
세번 부딪치니 엘리는 굳이 지하에 걸어 내려갈것도 없이 1층의 바닥이자 지하층의 천장을 뚫고 아래로 떨어집니다. 기습에 완전히 당했지만 두 가지 다행인 점이 있다면,
엘리는 이제 이 토할 것 같은 썩은내의 근원을 알아차렸다는 게 하나, 그리고 바닥에 피와 살점이 쌓여있어 박살난 온 몸을 재생하기 쉽단 겁니다. 그리고 촛불과 조명이 있어서, 구멍 사이로 뛰어내린 상대가 보입니다.
"이렇게 맞고도 숨이 붙은 걸 보니 지하수로 그 년이 맞나보군."
먼저 보이는 건 기이한 종양과 촉수, 돌기, 눈알, 이빨 등이 돋아난 목입니다. 그 목에서 자라난 기형종양은 창백한 머리를 금방이라도 밀어낼 것 같고, 머리의 눈알은 엘리를 바라보지만 초점이 금방 풀리고 입은 통제 불가능할 정도로 침을 질질 흘립니다. 어디서 많이 본 것 같아 아래를 내려보면 피 묻은 흉갑이 보입니다... 엘리가 아예 목을 땄던 그 흉갑 입은 청년입니다.
"그리고 식재료 주제에 미식회를 박살낸 그 동방귀족년도 너고."
그렇게 말하는 청년은 양 손에 각각 철퇴와 검을 들고, 그그 옆으로 경비병들이 도열하는데... 다들 상태가 이상합니다. 전부 정교한 밀랍 인형처럼 이질적일 정도로 눈빛이 죽었고, 제 대장이 저렇게 보기 싫은 꼬라지가 됐음에도 대경하긴커녕 눈길조차 주지 않고 엘리만 노려봅니다... 최소 수십대 일의 상황, 청년은 거기에 더해 경비병을 시켜 딱 봐도 '신성해보이는' 빛나는 쇠사슬을 철퇴에 감습니다.
"이단심문관 하나도 골치아픈데 적이랑 아군도, 똥이랑 소시지도 구분 못하는 년까지 참 상황 좆같구만. 그러니까..."
그는 엘리를 무기로 가리키며, 그녀의 죽음을 선언합니다.
"...저 년 빨리 죽이고, 아편굴 처리 지원하러 간다."
엘리의 감각이 말합니다. 무기술도 무기술이고, 목을 쳤는데도 살아있는 걸 보니 재생능력도 엘리의 그것에 버금갈 거라고. 조심하십시오.
>>969 엘리가 분명 상대를 오판한 면도 없잖아 있을 겁니다. 어차피 어둠 속에선 장님이나 다름없는 게 인간들이니, 그 인간들이 모인 경비대 본부야 정말 뒤집으려 하면 얼마든 뒤집을 수 있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죠. 하지만 엘리는 창을 들고 덤벼대는 경비들을 보면서, 상대 역시 엘리를 한참 오판했음을 깨닫습니다.
"이익!"
이렇게 허접하게 휘두르고 내지르다가, 엘리는커녕 서로의 창대를 치고 끝나는 창놀림은 굳이 피할 필요도 없습니다. 뒤에서 달려들던 이는 엘리가 뒤통수에 눈이 없다는 것만 너무 믿은 나머지, 보지 않아도 뻔할 정도로 정직하게 내질러 엘리가 옆으로 몸을 틀자 허공을 찌릅니다. 그렇게 경비들은 엘리를 제압하려다 스스로가 제압당하는 한 편의 어릿광대 희극을 찍고, 엘리는 이런 놈들이라면 늙어죽을 때까지도 놀아줄 수 있겠다 생각하는데...
깡!!!
엘리의 오금이 비정상적인 격통과 함께 무너지고, 주저앉은 그녀의 등허리에 박히는 칼날이 서늘합니다. 뒤를 돌아보자 흉갑 입은 청년이 그녀를 끝장내겠다는 악의를, 아니 묵직한 사슬 감긴 철퇴를 휘두르고 엘리의 얼굴이 맞은 그대로 뭉개지며 쓰러집니다. 식인종들이 그랬던 것처럼 경비병들이 창으로 엘리가 못 도망치게 콱콱 찍어버립니다. 함몰되지 않은 한쪽 눈으로 보면, 그가 든 검에서 엘리의 피가 지글지글 익더니 끓어오릅니다. 즉 은검입니다.
축성한 사슬에 두 방이나 맞고 은검에 주요 장기를 찔렸으니 이제 끝입니다. 허무하지만, 그래도 꽤나 재밌게 산 것 같다고 생각하며, 뒤돌아선 흉갑 청년의 흉한 뒷모슥을 바라보며 죽으려는데...
"시체는 어쩔까요?"
"아편굴 쪽 상태 보고 판단한다. 일단 여기 둬."
...이상하게도 엘리는 죽지 않고, 주마등만 스쳐 지나갑니다. 태어났을 때, 첫 피를 마셨을 때, 성인식 날 피로 가득찬 욕조에서 세례받았을 때, 일족을 떠난 때, 세스타우에 온 때, 그리고 수호부를 받은 때.
'이단 정보 수집 등의 목적으로, 신께 봉헌된 장소에 발을 디딘 불경한 놈들에게 배포해서 잠시 체류를 허락해주는 수호부다. 다시 말해, 이거 없이 맨몸으로 몇발짝 더 디디면 굳이 내가 싸울 수고도 없이 잿더미가 된단 말이지.'
>>971 아직 정보가 부족한 엘리는 잠시동안 자기가 왜 안 죽었는지, 또는 자기가 살아있는 게 맞긴 한지 생각해보는 시간을 가집니다. 일단 그녀는 살아있습니다. 그녀의 모든 감각이 멀쩡하고, 이 모든 것이 환각이 아니라고 전제한다면, 엘리는 살아서 숨쉬고 있고, 그녀의 심장은 미약하게나마 뛰고 있고, 눈동자는 계속해서 시각 정보를 수집하고, 귀에는 계속해서 엘리의 '시신'이 끌려가는 소리가 들리고, 뇌는 계속 생각하고 있으니까요. 어떤 철학자가 말하길,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엘리는 생각하고 있고, 그녀는 존재하고 있습니다. 몸 속의 공생성 기형종양은 그녀의 몸을 덮지 않은 채 그저 홀로 뛰고 있고, 즉 그녀는 한번 죽은 것조차 아닙니다... 그렇다면 확실합니다. 그녀는 은검과 신성한 철퇴로도 죽지 않았고, 죽었다고 멋대로 판단한 경비병들에게 지금 끌려가고 있습니다.
"......"
"......"
엘리는 무서울 정도로 아무 말 없이 그녀를 끌고 가는 경비병들을 봅니다. 이제보니 그들의 경추와 흉추 사이 경계에, 그 흉갑 청년의 목에 난 것과 비슷한 기형 종양이 돋아나 있습니다... 다른 모든 것이 멀쩡한데 저기만 이상하다면 저걸 의심해볼 만하겠죠.
>>974 엘리는 몸을 움직이려고 시도해봅니다... 내 몸이 내 몸이 아닌 것 같은 재수없는 감각이지만 그녀는 분명히 살아있고, 분명히 움직이고 있습니다. 다만 아까 전에 입은 부상의 여파에 더해 재생을 위한 피도 충분히 마시지 않아서 몸이 말을 잘 듣지 않는군요. 하지만 다행인 점은 아까 봤던 대로 바닥이 피투성이라는 겁니다. 엘리가 재생하려면 뭘 해야 할 지는 아마 엘리 자신이 더 잘 알 겁니다.
>>978 엘리는 바닥에 엉겨붙은 피를 핥아 마십니다. 이건 뭐 동네 똥개도 아니고... 싶다만, 지금 상황은 개가 아니라 황제라도 살고 싶다면 그리 해야 할 상황. 엘리는 엘리자베스 바토리 블라드 체페슈라는 일족의 이름보다도 '엘리'라는 이름을 택할 정도로, 그리고 그 이름을 택한 이유 중 하나가 '짧아서 부르기 편하잖아'일 정도로 매우 실용적인 사람입니다. 엘리는 피와 살점을 씹고... 점점 몸이 재생되는 걸 느낍니다. 경비병들은 그것도 모른 채 엘리를 어둠 속으로 계속 끌고 가고 있습니다. 박살난 무릎이 붙고, 찢어졌던 내장이 다시 조립됩니다. 엘리는 주변 눈치를 살피다가, 몸이 어느 정도 회복되자 다시 나설 준비를 합니다. 지금 당장은 끌려가고 있지만요.
@@ >>954 요한의 말을 들은 누누코는, 그 즉시 초인적인 도약력을 보이며 밖으로 나왔다. 땅을 짚어 자세를 낮게 낮추고 어둠을 가르듯 어둠 저편을 바라봤다. 움직임을 포착하려는듯 귀는 쫑긋거리고, 손에는 살인무기로 개조를 거친 삽이 들려있었다. 무엇이 나오든 즉시 달려들 생각이었다.
>>981 끌려가던 엘리는 경비병들을 바라봅니다. 자기가 끌고 가는게 '생물'인지 죽은건지도 모르는 꼴이 참 한심합니다. 뭐 그래도 엘리는 그 덕분에 빈틈이 아니라 빈 절벽이라 불러도 될 큰 기회를 얻게 되었으니... 엘리는 슬쩍 일어나고, 뭐가 걸렸나 싶어 우뚝 선 경비병들이 뒤돌아보기도 전에 뒷목을 긴 손톱으로 찍어버립니다.
"큭?!"
"끄윽?!"
두 경비병은 뒷목에 붙은 종양이 터지자, 마치 목 잘린 닭처럼 발작하고 허공을 더듬다가 이내 쓰러집니다. 죽은 건가 싶다가 다시 일어나길래 죽이려는데, 돌아보는 눈빛이 살아있습니다. 그들은 혼란스러워하다 엘리를 봅니다.
"젠장, 머리 깨지겠네... 여긴 뭐야? 냄새 진짜..."
"잠깐, 당신... 지하수로 그 여자? 그... 엄청 잘 싸웠다던?"
정신을 차려보니 눈 앞에 엘리가 서 있는 상황이 혼란스러운 모양이지만, 엘리는 이제 알았습니다. 저 종양이 문제였습니다.
그 사람은 저의 말을 듣고 있는 것 같아요. 하지만, 그것을 언어로서 이해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어요. 좀 더 시도해보면 알 수 있지 않을까요? 바로 알 수 있을 만큼 저에게 시선을 보내거나, 마주하기 전에 저에게만 들려오던 신음 소리를 전달한 이가 맞다면 그것은 무언가 있다는 것을 의미할 것이에요. 그것이 사소하거나 중요한 것이거나 상관없이요
"그러셨나요. 이 사람이 어떻게 이 상태로 살아있는지 그 이유 부터 알아봐야 하지 않을까요. 이미 한번 일어났다면 두 번도 가능할 거에요"
한 동안 말이 없으셨던 가말라시엘 님이 갑자기 그렇게 큰 일을 요구하시네요. 그 요구에 약간에 변화를 주기 위한 시도에요. 이유를 알아내지 않고 시도하면 일이 잘못 될 수도 있어요. 자신을 파괴, 사람으로 빗대어 말하자면 살해하려고 했었던 이에게 보복인 거네요. 저는 이미 충분히 되었다고 생각하지만 후환을 남기고 싶지 않는 것도 있을까요
말해주신 것으로, 이 사람의 대해서 이해할 자그마한 파편 같은 것을 얻게 된 것 같아요.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제대로 할 수 없어요. 그 언행에 있어 그렇게 보일뿐 의도나 목적 어떠한 것에도 해당하지 않을 경우에는, 그저 단순히 불빛에 벌레가 이끌리듯 본래의 이성에서 부터 할 수 있었던 행동의 잔재일 수도 있어요
누누코의 눈이 적들을 훑습니다. 뭘 하는 거냐고 묻는 이들이 둘, 뒤에 석궁과 칼을 든 이들이 셋입니다. 그들이 어떻게 생겼는지는 알 바가 아닙니다. 인간들은 누누코가 보기에 다 똑같이 생겼고, 특히 사람을 노예로 부리는 새끼들 얼굴 따위는 알고 싶은 생각도 없습니다. 중요한 건 그것뿐입니다: 누누코 혼자 저 놈들을 다 담굴 수 있는가?
답은 간단합니다, 누누코는 삽을 고쳐잡고 그들이 누누코의 적의를 알아차리기도 전에 성큼성큼 다가가 한 남자의 어깨를 삽날로 내리쳐 심장까지 갈라버립니다. 저 새끼 뭐냐던 남자는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느낌과 함께 비명도 못 지르고 죽어버리고, 누누코는 그의 복부를 걷어차 삽을 빼내며 자신의 질문에 스스로 대답합니다.
그딴 것도 질문이라고.
그리고 남자의 인영이 스러지며 누누코의 붉은 눈이 사내들 앞에 드러나고, 누누코가 달려들어 한 사람의 목을 횡으로 그어 잘라버리고, 삽을 휘두르며 돌아가는 힘에 저항하는 대신 그대로 받아들여 허리를 돌려 그 힘으로 갈비뼈를 걷어차 흉곽째로 부숴버립니다. 1분도 지나지 않은 시간에 바로 세 명이 싸울 생각도 못하고 죽어버리고, 나머지는 무기를 뽑아들지만 그게 상황을 바꾸지는 못합니다. 그저 피할 화살, 막을 무기를 늘렸을 뿐.
"씨, 씨발!!! 습격이다!!!!"
사내가 칼을 휘두르자, 누누코는 삽을 걸어 궤도를 옆으로 빗겨 내리고, 무릎을 내질러 사타구니를 찍어버립니다. 거기에 있어야 할 것이 골반 안으로 파고들어감과 동시에 골반이 반쪽으로 금이 가고 척추와 요추가 무너집니다. 순식간에 곧 죽을 하체 불구자가 되어 내장과 피를 토하는 사내는 아직 쓸모가 있습니다. 누누코는 자기보다 큰 사내를 밀어내며 석궁 화살을 막는 방패로 삼고, 사내가 쓰러지면 누누코는 그 시체를 밟고 도약해 석궁을 든 이에게 뛰어듭니다. 상대는 석궁을 던지고 단검을 꺼내들지만, 누누코는 그새 사내의 시신을 뚫은 화살촉을 부러뜨려 임시 무기로 만들었습니다. 누누코는 칼을 든 사내의 오른손을 보고 어깨죽지에 꽂아 못 휘두르게 만들고, 단검을 뺏어 그의 목을 그어버립니다.
"그으읋..."
기도가 찢어진 그는 비명을 지르고저 하지만 그럴 수 없고, 그의 숨구멍에서 선혈과 함께 쏟아지는 마지막 단말마는 더 이상 인간의 그것이 아닙니다. 순식간에 다섯 명을 죽여버린 누누코는 공동묘지 저편을 바라봅니다. 비상이라고 외친 소리가 퍼졌는지 사방에서 불이 켜지고 경종이 울리는군요. 요한은 시체를 끌어내다 누누코에게 묻습니다.
"누누코 씨! 시체를 다 파냈는데 상황이 안 좋군요!"
요한은 누누코에게 묻습니다.
"머리만 쳐낼까요? 아니면 몸을 들고 갈까요?"
전자의 경우 시신 신원 확인이 조금 어려워져 보수가 적어질 수 있고, 후자는 도주가 늦어져 누누코가 더 많은 적과 더 피튀기게 싸우는 수가 있습니다.
경비들은 기억을 전혀 못하는 눈치입니다. 적어도 아까 전에 그 흉갑 청년이 명령하는 대로 엘리를 죽이려 들었고, 엘리가 '사망'하자마자 산지직송하는 중책을 맡고 그 몸뚱이를 핏덩어리 바닥에 끌고 간 건 전혀 기억하지 못하는 눈치입니다. 그들은 혼란스럽게 주변을 바라보다, 이곳의 구조가 자신들이 기억하는 경비대 본부의 지하와 비슷함을 깨닫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마지막으로 방문했던 그곳과는 달리 시체 썩는 냄새와 피비린내가 진동하고, 바닥은 지옥 밑바닥에서 열린 추수감사제처럼 내장과 피가 부츠를 적실 정도로 쌓여 있어 여기가 정녕 그들이 알던 곳이 맞는지, 아니, 그들이 지금 현실의 이승에 발을 들인게 맞긴 한지 의문입니다. 그들은 떨리는 목소리로 물어봅니다.
>>988 아앨라나의 머뭇거림운 예상치 못했는지, 가말라시엘은 잠깐 딱딱하게 멈춰섰다가 차가운 목소리를 싹 지우고 평소처럼 기이할 정도로 쾌활하고 냉소적인 모습으로 돌아갑니다. 하지만 목소리에 돋친 가시는 비아냥과 냉소가 되어 '저 친구'보다도 아앨라나를 더욱 거세게 찌릅니다. 가말라시엘은 누군가에게 살인을 요구하려면 응당 제시해야 할 '정당한 이유'를 대는 대신 직접 보라는 듯 눈 앞의 광인에게 나름의 방식으로 설명하라는 듯 웃습니다.
경비병들은 서로를 바라보고 엘리를 바라봅니다. 그 가짜 뱀파이어... 라면, 아마 지하수로의 그 괴물을 말하는 것이겠지요. 그게 여기 있다고? 못 믿을 것 같다는 눈빛으로 다시 엘리를 바라보지만, 온 사방이 정신나간 광기와 피로 물든 이 상황에 그나마 '멀쩡'한 건 엘리밖에 없고, 정 믿는다면 그녀의 말 말고는 믿을 것도 없습니다. 경비병들은 머뭇거리다가 칼을 꺼내고 벽을 다시 짚어보고, 어디로 나가야 할 지 감을 잡고는 엘리가 원하는 정보를 알려줍니다.
"그... 잘 모르겠어요. 여기가 지하인데 한동안 '하수도 공사'를 한다고 통제해버렸거든요... 중요한 시설이라 한다면..."
대충 떠듬떠듬 긁어모은 기억을 바탕으로 알려준 정보는 다음과 같습니다. 마지막으로 봤을 때는 지하수로로 오물을 쏟는 통로를 넓힌다고 지하수로와 통하는 굴을 뚫어둔 곳이 있었고, 감옥이 있었는데 작년 대홍수 때 침수되면서 죄수들이 떼죽음을 당한 이후로 죄수들을 1층 헛간에 묶는 것으로 타협하고 그곳을 무슨 증거품 창고인지 임시 서류보관소인지로 쓰고 있었다는 겁니다. 다만 주의하십시오. 이 정보는 어디까지나 '그들 기준으로' 최신 정보일 뿐입니다. 지금 바닥이 피와 살점으로 칠해진 상황에서 얼마나 유효한 정보일지는 엘리 당신이 스스로 추측하고 판단해야 합니다.
요한은 갓 파낸 미스터 스위트의 시체의 어깨와 허리, 사타구니를 밧줄로 튼튼하게 묶어내서는 끙! 하고 당겨냅니다. 누누코보다 힘이 약하지만, 누누코가 곧 달려올 경비들을 다 담궈야 하는 만큼 요한을 도와줄 여유는 없습니다. 요한은 미스터 스위트를 파내고 나서, 어차피 다섯명이나 죽었으니 감쪽같이 묻는 것도 의미가 없겠다, 미스터 스위트의 수의에 자신의 삽을 대충 쑤셔넣고 그를 짐짝마냥 들쳐 업습니다. 누누코를 구해줄 때처럼, 요한은 석궁을 잘 쓸 수 있지만 지금 상황에서는 요한의 어깻죽지에서 제3, 제4의 손이 자라나지 않는 이상 그걸 기대할 순 없습니다. 당장 무거운 시체를 짊어진 요한이 누누코보다도 그걸 잘 알기에, 요한은 누누코에게 외칩니다.
"옥수수밭으로! 지금 뻥 뚫린 곳으로 나가면 우린 과녁 신세입니다!"
그리고는 어차피 누누코가 훨씬 더 빠를테니, 누누코 쪽은 돌아보지도 않고 요한이 먼저 옥수수밭으로 뜁니다. 하지만 컹컹거리는 개 소리가 헛간 쪽에서 여럿 들려오고, 누누코의 귀가 쫑긋거립니다. 옥수수밭으로 따라 들어간 누누코는 어떻게 대비하나요?
>>998 엘리는 임시 서류보관소로 향합니다. 일부러 소리를 내려는 것도 아닌데, 점점 바닥에 흐르는 피의 수위가 높아지고, 피에 잠긴 살점들 때문에 저절로 발이 미끄러져 헛디디느라 찰박찰박 하는 물소리가 납니다. 이 침침한 어둠 속에서는 당연히 못 쓰는 시각을 보조하기 위해 다른 감각이 예민해지는데 영 좋지 않은 신호지만, 그렇다고 고작 걷자고 박쥐로 변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 엘리는 경비병들이 알려준 대로 걸어갑니다. 그리고 엘리는 저절로 멈춥니다. 눈빛이 죽은 경비병들이 창을 든 채, 상자와 서재가 가득한 창살들 사이를 지키고 있습니다. 엘리가 걸으면서 낸 소리를 들은 모양인지 엘리 쪽을 바라보는데, 어둡기도 하고 자기 편도 발이 달린 이상 어차피 걸으면서 물소리가 날 수밖에 없다는 걸 아는지 그냥 누구인가 궁금만 하는 것 같습니다. 엘리는 어떻게 하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