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모두는 누군가를 위한 이야기의 소품이자, 단역이자, 조연이기도 하고 동시에 자기 이야기의 주인공이기도 하다. 그 이야기는 비참할 수도, 행복할 수도 있고, 기승전결이 갖춰졌거나 이야기의 어떤 구성요소 하나도 제대로 된게 없을 수 있다. 하지만 아무리 엉망인 이야기가 되는 한이 있어도 우리는 선택하고, 때로는 강요당하면서 우리의 이야기를 써낸다. 이야기의 악마 이프가 이제 마침표를 찍으라 권할 때까지, 죽음이 우리를 찾아올 때까지. 왜냐면 우리는 살아있으니까. 그 이야기는 우리의 삶이니까.
>>134 엘리는 피냄새로 생존자를 찾으려다가 이내 관둡니다. 시신들이 다양한 부위에서 흘리는 피냄새가 엘리의 후각을 과포화해서, 정작 필요한 정보를 찾는 것을 전력으로 방해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눈을 감은 덕분에 청각이 민감해져서, 엘리는 금방 생존자의 죽을 것 같은 숨소리를 듣고 눈을 뜹니다. 눈을 뜨면, 엘리가 알고 있던 하플링 소녀와 눈이 마주칩니다. 제 발치까지 닿는 긴 머리칼을 이로 악문 채 소리를 죽이고 있었지만, 엘리를 보자마자 다 틀렸다고 생각하는지 발광하는군요.
"~~! ~~~~~!!!"
비냐는 손에 잡히는대로 다 던지고 있지만, 엘리가 그냥 맞아주면서 기다리자 한참을 발악했는데도 죽지 않은 상황에 이상함을 느껴 발광을 그만둡니다. 그리고 떨리는 목소리로 겨우 이야기하는군요.
비냐는 아직 당신을 못 믿는 것 같습니다. 뱀파이어에게 당하고만 산 사람이야 뭐 세상에 잘 찾아보면 있다는데, 재수없게도 비냐가 그런 존재였을까요? 확실치는 않겠지만 그랬다면 엘리와의 첫인상은 정말 최악일 겁니다. 인사를 너무 개판으로 해서 그랬나 하고 너무 상심할 필요는 없습니다! 엘리가 비냐를 귀족마냥 받들어모시건 뭘 하건 첫인상은 무조건 최악이었을 테니까요. 결국 안 되자, 엘리는 발치까지 닿는 그녀의 긴 머리칼을 붙잡고 마치 밧줄에 사람을 매단 것처럼 시체 사이에서 꺼내듭니다. 그러자 비냐가 깜짝 놀라 말하는군요.
"아, 안 돼요! 괴물이 있어요. 괴물이!!! 지하로 숨으세요!"
하지만, 엘리도 귀가 달려있고, 그 귀가 보통 좋은 귀가 아니라 다 들었습니다. 괴물이고 현물이고, 엘리는 어쨌든 비냐를 살려줘야 하니 적당한 창문을 찾습니다. 비냐는 창문으로 나가려다가 키가 안 닿아 바동댔지만, 보다 못한 엘리가 앞으로 밀어버려 내보냈습니다. 돌아선 엘리는 주변을 바라봅니다. 적어도 1층에는, 생존자의 숨소리가 들리지 않고, 2층에는 뭔가 거대한 존재가 미동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뭐, 비냐가 묻지도 않은 여관의 층수까지 다 이야기해준 덕분에 여기는 지하층, 1층, 2층으로 구분된 건 알았습니다.
>>139 또각, 또각, 또각... 한 계단 한 계단을 오릅니다. 위에 뭐가 있을지 모른다는 긴장에 엘리의 숨이 멎을 것 같군요. 그래도 엘리는 지금은 밤, 자신 같은 뱀파이어들의 무대임을 다시금 되새기면서 용기를 얻고 올라갑니다. 올라가자마자 괴물이 나타날 것 같았지만... 이상하게도, 2층으로 올라왔는데도 별 일은 없습니다. 엘리는 어둠 속에서, 소리만으로도 제 존재를 드러내던 괴물을 마주할 준비를 하고 소리가 들리는 쪽을 바라보았습니다. 하지만...
"으극, 으그윽..."
"죽여줘..."
엘리는 눈을 뜨고, 그 '괴물'이라 생각했던 것을 봅니다. 거대한 덩어리도, 사실 생각해보면 각각의 부분이 모여 만든 것입니다. 그리고 이 덩어리는 불운한 사람들이 한데 얼기설기 엮여서 만들어졌습니다. 그것들은 엘리를 보더니 수백개의 팔다리를 질질 끌어 그녀에게 다가오려 하는군요. 하지만 이들은 식욕으로 움직이지 않습니다. 절박함, 희망, 공포. 엘리가 누군가를 죽일 때 익숙하게 느꼈을 그 감정입니다. 아니, 그럼 괴물은? 이라고 생각할 때쯤 뒤에서 뭔가 느껴집니다.
"성가셔."
뒤를 돌아보자마자, 온 몸이 피와 살점으로 뒤덮인 사람... 형태의 무언가가 그녀를 걷어찹니다. 엘리는 그대로 날아가 사람들이 엮인 살덩이들에 부딪쳐 튕겼다가, 낙법을 취해 데굴데굴 굴러 다시 일어납니다. 그런데, 이거 사람은 맞나요? 사람도 아니고, 엘리가 아는 괴물도 아닌 것 같은 이상함이 그녀를 혼란스럽게 만듭니다. 하지만 그건 그거고, 전투는 전투입니다.
>>141 어릴 때부터, 엘리는 일족 내에서도 적어도 재빠른 것으로 남한테 뒤진 적은 없었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그렇습니다. 아까 전만 해도 식인종들을 사냥할 때, 솔직히 말해 느려서 문제가 된 건 없었으니까요. 피투성이가 된 상대의 몰골도 무섭지 않습니다. 그야 당연하죠. 엘리는 저 몰골을 수없이 본 게 아니라, 저 몰골을 만들어도 봤습니다. 엘리는 상대에게 달려들고, 상대는 거기에 맞춰 주먹을 들지만... 엘리의 입가가 씩 올라갑니다.
'느려'
상대가 엘리에게 주먹을 내질렀지만, 공기를 주먹으로 치려고 하는 것처럼 엘리에게는 아무 소용도 없습니다. 엘리는 팔 안쪽으로 파고들어, 상대의 목숨 따위는 신경쓰지 않고 입을 쩍 벌려 상대의 목을 한입에 담고 그대로 꽉 깨물어버립니다. 살점이 송곳니에 뚫려 파이는 느낌은 여전히 좋지만, 그 안에서 나오는 피는 그렇지 않습니다. 그녀의 입 안으로 들어오는 피는 그 어떤 것보다도 역겹습니다. 아니... 역겨운 '피'가 아닙니다. 인간의 미식 기준을 뱀파이어에 대자면...
고기는 맞는데, 마치 몇 달간 푹 썩힌 다음 온갖 이상한 연금술 약품에 절인 끔찍한 고기 같습니다.
퍼억!
그런 감상을 느낄 찰나도 없이, 상대는 엘리의 하복부에 주먹을 꽂습니다. 엘리는 눈을 부릅뜨고, 하나하나가 과도 수준으로 길고 날카로워진 손톱으로 그의 가슴팍을 마구 난자합니다. 비록 엘리가 근력은 약하지만 체력은 정말로 강했고, 여기에 남자 하나를 포식했으니 재생력도 엄청나서 이런 근성 싸움도 상대가 신성력을 쓰는 게 아닌 이상 버틸 만하겠죠. 하지만...
쾅!
엘리는 확실히 힘이 약했습니다. 수십번이나 찔린 상대는 엘리의 목을 붙잡더니 그대로 한 문간에 던져버리고, 엘리는 또다시 나동그라집니다. 지금 보니 엘리의 방이군요! 의도치 않게 친절을 베푼 상대는, 엘리를 끝장내는 대신 엘리의 손아귀에 헤집어져 갈비뼈와 그 아래 내장이 드러난 흉곽을 억지로 부여잡고... 살덩이 쪽으로 걸어갑니다. 비명이 들리는군요...
"오, 오지 마! 오지 마!!! 으아아아아아악!!!!!!!"
엘리가 슬쩍 기어서 살펴보니, 수많은 사람들이 엉긴 살덩이 속에서 한 운없는 이를 골라서 '잡아먹고' 있습니다. 제아무리 뱀파이어가 인간의 피도 빤다고 하지만... 그런 뱀파이어 입장에서도 참 역겹군요. 더 역겨운 건... 그랬더니, 엘리가 박살낸 상처가 무색하게 완전히 재생됐다는 겁니다! 상대는 엘리를 노려보더니 다가옵니다.
"...성가셔."
엘리는 침을 꿀꺽 삼키고, 상대를 바라봅니다. 인간을 제물로 사용하는 기이한 재생력, 인정하기는 싫지만... 엘리와 비슷한 부류입니다. 밤에만 살 수 있거나 밤을 더 좋아하고, 어둠 속에서 암약하며, 호시탐탐 먹잇감을 노리고... 신성력에는 갑자기 약해지는, 동족은 아니지만 꽤나 비슷한 부류.
상대의 재생력은 저 '살덩이'가 없다면 엘리에 비해 무조건 밀리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조심하십시오! 저 살덩이가 다 떨어질 때까지 상대는 뭔 일이 있었냐는 듯 재생할 수 있고, 시간을 끌면 끌수록 지는 건 엘리일 겁니다.
>>143 동족은 아니지만 동류라면... 그럼 엘리가 무서워하는 것도 똑같이 통하지 않을까요? 엘리는 그 생각을 바로 실천에 옮겨서, 술을 따서 불에다 붓습니다. 그러자, 순간 엘리의 손 끝을 불태울 뻔할 정도로 불이 높이 타올랐습니다. 어... 근데 잠깐만. 너무 타오르는데요? 엘리는 어릴 적을 떠올립니다. 누가 불장난을 했다가 저택을 통째로 태웠다길래 "뭘 어찌 해야 조그만한 성냥 하나로 집을 통째로 태우냐"고 멍청하다고 욕했는데... 지금 엘리가 그 사람을 욕할 계제가 아닌 것 같습니다. 살덩이에 엮인 사람들의 비명으로 알겠군요.
"으, 으아아! 불탄다!!"
"살려줘! 살려주세요!!!!"
상대는 잠시 굳어서, 엘리를 바라봅니다. 굳이 이 감정을 말로 설명하자면, 엘리가 대체 왜 그랬는지 이성적으로 잠시 고민했다 보면 되겠군요. 하지만 고민은 의미가 없고, 엘리 때문에 '살덩이'를 포식하지 못하게 된 게 마음에 걸리는지 이를 악물고 다시 다가오며 말합니다.
"너, 진짜 성가셔."
아마도... 엘리는 여기서 살아나갈 수 있을 겁니다! 하지만... 저 살덩이로 엮인 사람들까지 전부 구해서 나가려면... 빨리 저놈을 처리해야겠군요. //오늘은 여기까지! 수고 맣았어!
엘리의 발이 마루판을 파고들어 발판이 되고, 발톱이 땅을 박는 고통에 이가 악물리며 아드레날린이 분출됩니다. 동공이 수축하며 시야가 좁아지는 느낌이지만, 상관없습니다. 오히려 좋은 듯도 합니다. 엘리는 저 놈만 죽이면 그만이고, 저 놈만 시야에 담으면 그만입니다.
"성가..."
철퍽!
엘리의 주먹이 상대의 흉곽에 꽂혀, 깊이 들어갑니다. 엘리를 붙잡으려던 상대도 명치에 움푹 박힌 공격에 움찔하지만... 동시에, 엘리도 손목이 꺾이는 고통과 함께 한 손이 잘못된 방향으로 돌아갔음을 느끼고 비명을 지릅니다. 그래도 손을 내주고 가슴을 박살냈으니 다행이고,
죽이지 않으면, 죽는다.
인혈이 내어준 불경한 재생력과, 살려면 죽여야 한다는 피의 부름이 고통을 잊게 하고, 엘리는 용기를 내어 한쪽 주먹을 머리에 꽂아버립니다. 이번에는 상대의 머리가 돌아가버리고, 상대는 제 세상이 흔들리는 혼란스러운 상황에 머리를 싸맵니다.
끄으윽...
그리고 주먹을 마저 배에 꽂아넣자, 못 참고 망가진 폐에 쌓인 피를 뱉어냅니다. 얼굴까지 더러운 피가 잔뜩 튀지만 의외로 기분은 상쾌합니다. 엘리가 다시 아직 멀쩡한 한쪽 주먹을 들려는 순간
퍼억ㅡ
다시 한번, 날아갑니다. 날아가는 기분이 신기해 주먹에 맞은 격통은 잊어버릴 것 같습니다.
쾅!!!!
그리고 다시 자기 방에 처박힌 엘리는, 빠른 속도로 낮은 근력을 극복할 수 있다면 반대로 높은 근력으로 낮은 속도를 극복할 수도 있음을 깨닫습니다. 그래도 좋게 생각합시다. 엘리는 부서진 손목을 재생할 시간을 벌었고, 이번 건 아무리 인간이 아닌 동류라도 충분히 목숨이 위험할 치명상이었으니까요.
"으아아아악!!!"
이런, 또 살덩어리를 먹고 재생하려 드는군요. 바로 그 순간을 노릴 생각에 일어난 엘리는, 발을 디디자마자 마치 불 위를 걷는 것 같은 작열통에 황급히 발을 뗍니다. 지금 보니... 비냐가 건네줬던 수호부가 난리통 와중에 떨어진 모양입니다.
꼴에 수호부라고, 소매를 통해 잡아도 마치 녹기 직전까지 달궈진 쇠를 고작 장갑 하나 끼고 만진 것마냥 뜨겁습니다. 엘리는 딱히 신에게 악감이 없었지만, 신께서는 아주 많으신지 엘리의 손아귀에 화상을 입힙니다! 소매를 통해 어느 정도 덮었고, 그리 강한 신성력을 품지 않은 게 차라리 다행이군요. 그리고 엘리는 살덩이에 엮인 사람을 잡아먹던 녀석에게 수호부를 온 힘을 다해 던집니다!
툭
...참 힘없는 소리였지만, 그 다음에는 마치 비계가 잔뜩 낀 돼지고기를 굽는 듯 보글보글 기름 터지는 소리와 함께 살갗을 녹여버리더니 녹은 살갗과 함께 떨어집니다. 상대는 등에 신성한 가호... 엘리와 비슷한 부류에게는 끔찍할 고통을 느끼고 비명을 지릅니다.
"으아아아아아!!!!"
상대의 살갗을 봅시다! 찢기고 부서지고 잘린 다른 상처들은 모두 인간의 살점을 한 점씩 먹을 때마다 아물지만, 이런 단순한 화상은 전혀 재생하지 못해 녹고 익은 자국이 선합니다. 상대는 엘리를 돌아보더니 노기를 숨기지 않고 이를 악뭅니다.
"넌 특별히 고통스럽게 죽여줄게."
물론, 엘리 입장에선 자기가 할 말을 대신 해서 수고를 덜어준 것처럼 들립니다. 엘리는 좁은 복도에서 달려드는 적에게 맞서 달려들어 뛰어오르고, 그의 정수리를 뜀틀처럼 양손으로 짚어 상대를 넘습니다. 그리고 수호부를 망가진 손으로 집어 온 힘을 다해 상대의 옆구리에 쑤셔 쳐박습니다.
"아, 으아아아아아악!!!!"
이게 엘리의 비명인지 상대의 비명인지 모르겠습니다. 엘리는 안 그래도 손목이 부서진 골절통에 작열통까지 맛보고, 상대는 문자 그대로 뱃속에 숯덩이가 박힌 셈이니. 엘리는 상대의 뱃속을 헤집으며 빙빙 돌아간 손을 빼내고, 고통에 자지러져 엎어지더니 바닥에 흐르는 인혈을 핥으며 간신히 진통합니다. 그동안 상대는 수호부 때문에 발광하면서 사람들이 엮인 살덩이 쪽으로 기어가다가...
"끼익, 끅, 끄으윽...!"
"넌 그냥 닥쳐라."
꽈앙!!!
귓전을 울리는 폭음과, 이 혼란한 화재 현장에서도 분명히 느껴지는 매캐한 탄내. 지난 세기에 인간들이 드워프와 공동개발했다는 화약총입니다. 엘리가 간신히 일어나보니 아까 전까지만 해도 살벌하게 싸우던 괴물의 머리통이 터져 있고, 그 총을 쏜 사람은 가운데에 해골이 박힌 철십자, 이단심문소 인장을 새긴 흉갑을 입고 그 위에 검은 롱코트를 걸친 중년의 여성입니다. 그녀는 철봉을 꺼내 괴물의 몸통에 박고 끝을 구부려 못 빠져나가게 하고, 다 불타가는 화재현장 속에서 매캐한 연기를 헤치고 아직 쏘지 않은 화약총을 엘리에게 겨누고 말을 겁니다.
"싸우는 걸 보니 인간은 아니군."
하지만 금방 총구를 내리더니 협상을 제시하는군요.
"하지만 이러다가 우리 둘 다 이 사람들이랑 타죽게 생겼으니, 일단 나머지 얘기는 서로 도와서 이 사람들을 빼내고 하는게 어떨까? 원치 않는다면, 너죽고 나죽자 싸워도 괜찮지만... 당신, 진짜 죽어."
엘리가 사람들을 일일이 꺼내려는 동안 이단심문관은 밧줄과 작살을 꺼내더니, 살덩이의 가장 윗부분에 작살을 꽂고 밧줄을 연결하고는, 엘리에게 밧줄을 던지고 함께 당기기 시작합니다. 끙차! 끙짜! 공 형태로 뭉쳤다해도, 표면이 잘 다듬어진 수정구 같은게 아니라 문자 그대로 살덩이라 바닥에 쓸릴 뿐 당겨지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이단심문관과 엘리가 겨우 계단까지 끌고 오자, 이 살덩어리는 계단을 따라 구르기 시작합니다.
"어? 어어어?!"
"피해."
이단심문관은 계단 난간을 타넘어 공마냥 구르는 사람 덩어리를 피하고, 엘리도 속도는 자신있었기에 쉽게 피합니다. 살덩어리는 바닥에 부딪치더니 짓뭉개지고, 1층은 경비병들이 물통을 들고 들어와 불을 끄고 있군요. 매캐한 연기와 기침 소리를 뚫고 들어온 경비대장이 이단심문관에게 묻습니다.
"심문관님? 이 살덩이... 아니, 사람들은 어쩝니까?"
"죽었으면 신전 영안실에 보내고, 살았으면 박수치고 격리소 들어가라고 해야지요."
"알겠습니다! 그런데 이 여자는...?"
"중요 참고인이요. 내 긴히 할 말이 있어서 데려가니 내버려두고, 여관은 계속 봉쇄해두쇼."
이단심문관은 엘리를 앞세웁니다. 뱀파이어를 잘 알고, 죽기 싫은 이들은 뱀파이어에게 등을 절대 보이지 않는다는 핑계좋은 이야기와 함께요. 엘리의 걸음은 조금씩 조금씩 느려지지만, 이단심문관은 그녀를 밀면서 신전 가까이 갑니다. 그리고...생각보다 별 것 없었습니다. 신전은 세스타우 성의 그 어느 곳보다도 빈민들이 많았고, 수사와 수녀들이 앓는 소리를 내는 빈민들을 돌보고 있었습니다. 아주 옛날에 일족이 경영하던 영지에 패혈병이 돌아 영지민들이 죽어나가고 산 자들의 피 맛이 똥오줌 수준으로 역해져서 한동안 일족 전체가 타지에서 농노들을 초청할 때까지 동물피로 연명했던 적이 있었는데, 엘리는 자신의 원대한 꿈이 진즉 이뤄졌다면 더 많은 이가 살았을 것이라 탄식하고 말았습니다.
"멈춰."
상념에 빠져 더러운 천막들 사이를 거닐 때 이단심문관이 엘리를 잡아세우더니, 손에다가 철십자 모양의 수호부를 와락 쥐여줍니다. 철십자 수호부를 반사적으로 던져버리려고 하자, 이단심문관은 주먹을 꽉 잡고 경고하는군요.
"이단 정보 수집 등의 목적으로, 신께 봉헌된 장소에 발을 디딘 불경한 놈들에게 배포해서 잠시 체류를 허락해주는 수호부다. 다시 말해, 이거 없이 맨몸으로 몇발짝 더 디디면 굳이 내가 싸울 수고도 없이 잿더미가 된단 말이지."
그리고는 다시 걸어가라고 요구합니다. 수호부... 뭔가, 달군 돌처럼 따뜻하지만 엘리를 공격하지는 않습니다. 그리고 신성한 기운이 온 몸을 흐르는데도... 간지럽기만 하지 별 위해는 없군요. 인생 첫 체험입니다.
목숨이 위험하진 않다지만 위축되는 건 자연스러운 반응입니다. 철십자 수호부가 없이 여기까지 들어왔다면 엘리는 잿더미가 되었을 테니까요. 어둑어둑한 밤의 신전 안으로 들어가니, 램프로 밝힌 스테인드 글라스의 좋으신 천사들과 선하신 성인들이 엘리를 내려다보는 것 같습니다.
예배당 복도를 지나 지하로 들어가니, 음... 무시무시한 광경이 나옵니다. 위에서 빈자들을 돕던 성직자들과는 다르게 인상이 험악한 이들이 각자의 방에서 무기를 갈고 닦거나, 그렘린 따위의 괴물과 희생자의 시신을 부검하거나, 유령을 심령통에 담아 고문하는 등 살벌한 광경이 나옵니다.
"걱정 마. 넌 어지간히 잘못하지 않는 이상 저 꼴 안나."
...것 참 안심되는 말을 하면서 엘리를 자신의 심문실까지 데려간 이단심문관은, 엘리를 위해 의자 하나를 끌어주더니 차를 끓이기 시작합니다.
"대답할 건 많지만 이것부터 시작하지. 넌 누구고, 어느 일족이지? 먼저 밝히자면 난 에레야, 사람 십자가에 매달아 불태우는 미친 광신도다."
"...엘리자베스 바토리 블라드 체페슈. 일족에서도 꽤 사는 가문 사람인가 보지? 바토리, 블라드, 체페슈... 하나만 있어도 대단할 이름들을 여럿 붙였군."
에레야는 서류에 엘리의 이름을 적더니, 엘리를 바라봅니다. 그리고는 와보고 싶어서 왔다는 말에 어깨를 으쓱입니다.
"정말 아무것도 모르고 온 것치곤 운이 좋았네. 세스타우 성이 속한 왕국은 뱀파이어를 존재한다는 이유만으로 공격하진 않기로 협약을 맺었거든. 그게 뭐 100% 안전하다는 뜻은 아니고. 아, 그리고 말 편하게 해라. 내가 나이 먹었어도, 뱀파이어한테 존댓말 들을 정도로 할매는 아니라서."
나름 분위기를 풀어보려고 농담했던 에레야는, 금방 농담같지도 않은 농담을 거두고 말합니다.
"그럼, 여기 왔을 때부터 아까 그 괴물이랑 겨뤘을 때까지 진술을 들어야겠는데. 이야기해주겠나?"
어떻게 하나요? 전부 이야기한다,고 하면 엘리는 세스타우 성에 들어온 뒤부터 지금까지의 일을 모두 자신의 관점에서 어느 정도 가감하더라도 어쨌든 다 털어놨다고 전개하며, 일부 또는 전부 내용을 거짓말로 대답하거나 의도적으로 누락하려면 직접 서술하시면 됩니다.
>>166 엘리는 세스타우 성에 들어와서 있었던 일들을 모두 고합니다. 대낮에 몸을 꽁꽁 둘러싸고 성에 들어온 일, 여관에서 방을 잡은 일, 여관 주인에게 축객령을 당한 일, 식인종을 세 명 죽이고 나머지 한 명을 제압한 일, 여관을 습격한 괴물을 죽인 일... 에레야는 흥미롭게 듣습니다. 엘리의 '죄'가 얼마나 참작될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지금은 엘리의 행동이 범죄냐 아니냐는 상관 없이 이야기 자체에 집중하는 것 같습니다. 특히, 식인종이 등이 굽고 손이 벌벌 떨렸다던지나, 여관의 괴물이 엘리와 동류로 추정된다던지 싶은 정보가 이목을 끈 것 같습니다. 에레야는 말없이 엘리를 쳐다보다가, 손가락을 딱딱 쳐서 험악한 인상의 부하 중 하나를 부릅니다.
"예, 심문관님."
"다른 부검 예정된거 전부 미루고, 여관 현장에서 주운 괴물 시체 지금 당장 배 갈라서 뭐 보이는지 보고해."
"...내가 이단심문을 20년 넘게 했는데 양동이로 묻어두고 제압이라 부르는 사람은 처음 본다."
에레야는 쯧, 혀를 차더니 일어납니다. 그리고 엘리에게 이야기하는군요. 그간 들었던 말 중에 가장 반가운 말이 나옵니다. 여기서 나가자는 겁니다. 심문관이 장비를 챙기러 개인실로 들어간 동안, 험악한 인상의 거한이 인상과 덩치에 걸맞지 않게 쭈글쭈글대며 다가옵니다. 그리고 엘리를 찾는군요.
"당신... 우리 심문관님이랑 협력하는 뱀파이어죠? 안 위험한 뱀파이어죠? 혹시 좀 도와줄 수 있나요?"
거한은 고문실에서 팔다리가 쭉쭉 늘어나는 고문을 받고 있는 죄수를 가리킵니다. 음. 이런 데 있을 법한 여자는 아닌 것 같은데 말입니다. 여튼 거한은 꿋꿋이 뒤틀리는 관절을 견디고 있는 저 여자를 가리키며 말합니다.
"심문관님께서 이 성에서 조사하는 사건 관련해서 사교도 조직죄로 체포한 년인데... 뭔 수를 써도 입을 안 열더라고요. 뭘 해야 말하겠냐고 하소연하니 뱀파이어를 데려와 흡혈을 체험시켜주면 뭐든 다 말하겠다는데... 어떻게 안 될까요?"
"피를! 내 피를 딱 한번만 바치게 해줘!"
...이런 부탁이니 이단심문관 부하가 엘리 같은 뱀파이어한테 저자세로 쭈굴대며 높여 부르죠. 상대는 음... 흔하진 않아도 종종 있다는 밤피로필리아, 뱀파이어에게 피를 빨리고 예속되는 걸 좋아하는 변태로 보이는데... 원한다면 부탁을 들어줘도 되고, 아무리 그래도 변태의 피는 좀 그렇다면 당장 나가야 하는 걸 핑계 삼아도 됩니다.
경비병은 상황을 설명합니다. 횡설수설하는 언어와 밑도끝도 없는 징징거림을 제하면, 대충 이 놈이 다짜고짜 달려와서 누가 사람을 죽였다니, 도와달라니 헛소리를 하길래 걷어찼더니 계속 달라붙고, 끝내는 사방에 구토를 하며 제 몸에도 토하길래 겁이 나서 떨어질 때까지 찔러 죽였다는 겁니다...
"...엘리, 생각 좀 해봐."
에레야는 침착하게 상황을 살펴보기 시작합니다. 엘리도 자신이 방어 차원에서 그랬다는 점을 인정받으려면 뭔가 더 그럴듯한 증거나 진술이 필요하겠군요! /오늘은 여기까지
"난 트롤한테 척추 부러졌다가 잘못 붙는 바람에 굽었는데 그럼 나도 밤마다 사람 먹겠네?"
경비들이 엘리의 말을 반박하고, 특히 대머리나 등이 굽은 사람이 감정적인 반응을 보이는군요. 뭐 당연한 일입니다. 아저씨는 마음씨가 대머리예요! 해도 우는 게 대머리인데, 대머리라고 식인종 취급 받으면 서러울 법도 하죠. 그런데 그 중 엘리에게 가까이 다가온 사람이 횃불을 비춰봅니다. 샛노란 횃불이 노란 색깔을 흰 피부에, 은색 머리칼에 입히지만, 그녀의 선혈 같은 진홍색 눈동자는 그대로 드러냅니다.
"뭐야 이년... 아니, 이건?"
"두발로 걷는 모기 아냐?"
경비병들이 창칼을 들고 엘리를 에워싸기 시작합니다. 당장이라도 죽일 것처럼 구는군요. 생존 본능이 엘리의 손톱과 송곳니를 불쑥, 뽑아내지만 그때 에레야가 엘리의 손을 주름진 제 손으로 가리고 앞에 섭니다.
"불경한 존재의 조사 및 처분은 현장 상황상 불가피할 때를 제외하고 이단심문관의 소관이다. 그리고, 이 '두 발로 걷는 모기'가 틀린 말을 한 것도 아니야. 굽은 등과 벗겨진 머리는 구울병을 의심할 수 있는 1차 증거지."
에레야는 식인종의 시신을 분석하기 시작합니다. 엘리가 봤던 대로 허여멀건 피부는 백반증이었습니다. 에레야가 식인종의 입을 벌리자 기이할 정도로 발달한 송곳니와 멧돼지 엄니처럼 변한 이빨, 그리고 열악한 위생 상태를 고려해도 기이할 정도로 뒤틀린 치열. '치아 이상발달'이라 부를 수 있겠군요. 그리고...
"엘리. 너 운 좋은데?"
에레야는 식인종의 이빨 사이에 낀 긴 금빛 머리칼을 떼냅니다. 그 머리칼에는... 두피로 추정되는 살덩이가 덜렁대고 있군요.
아니 땐 굴뚝에서 연기 안 나고, 아니 아픈 몸에서 눈물 안 나는 법입니다. 수호부처럼 고통스러운 신성력이라면 아파서라도 눈물이 날 테니 그 심산으로 만진 거지만... 에레야의 흉갑을 두들겨봐도 놀랍게도 별 반응은 없습니다. 에레야는 뚱한 표정으로 엘리를 내려보다가 나직이 흉갑의 효능을 설명해줍니다.
"뭘 기대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이건 그냥 흉갑이야."
.........왠지 모르게 부끄러워서 눈물이 나지만 괜찮습니다. 눈물은 눈물이니 엘리는 혼신의 눈물연기를 합니다. 여전히 반응은 적대적이지만 말입니다.
"...재수 없어."
"이단심문관님이 이 성에 없었으면 별 잘못 없는 사람들 피도 빨았을 거 아니냐?"
에레야의 비호 아래 있으니 체포한다던지 추방한다던지 하는 위력행사는 차마 못하지만 말은 막 하는군요. 에레야도 이단심문관의 입장상 뱀파이어를 옹호할 순 없는 노릇인지 엘리의 옆구리를 툭툭 찌르며 말합니다.
"일단 다른 데 가서 이야기하지. 곧 해가 뜰 거야."
그러면서 턱짓으로 동쪽을 가리키는데, 제기랄... 검보랏빛 일색의 하늘에 파란색, 전혀 반갑지 않은 여명의 전령이 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