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모두는 누군가를 위한 이야기의 소품이자, 단역이자, 조연이기도 하고 동시에 자기 이야기의 주인공이기도 하다. 그 이야기는 비참할 수도, 행복할 수도 있고, 기승전결이 갖춰졌거나 이야기의 어떤 구성요소 하나도 제대로 된게 없을 수 있다. 하지만 아무리 엉망인 이야기가 되는 한이 있어도 우리는 선택하고, 때로는 강요당하면서 우리의 이야기를 써낸다. 이야기의 악마 이프가 이제 마침표를 찍으라 권할 때까지, 죽음이 우리를 찾아올 때까지. 왜냐면 우리는 살아있으니까. 그 이야기는 우리의 삶이니까.
네. 고문도구와 해부침대가 즐비하고, 엘리에게 강제로 예의를 주입하던 신전 지하의 심문소 이야기입니다. 에레야는 엘리의 반응을 살피다 농담이라 정정하고는 근처를 바라봅니다. 에레야는 엘리와 함께 뒷골목을 걷습니다. 스스슥, 스스슥. 둘을 지켜보던 시선이 느껴지지만 가까이 가면 이내 사라지고, 에레야는 엘리를 세스타우 성내의 지하 수로로 데려갑니다.
"우우..."
어둡습니다. 에레야는 벽을 손으로 짚은 채 앞서가고, 퀴퀴하고 습한 물내를 헤치고 엘리의 밝은 밤눈에 빈민들이 보입니다. 다들 상태가 신전의 빈민들보다도 심하군요. 누군가 에레야와 엘리의 발을 붙잡지만 에레야는 확 걷어차 쳐내고, 창살 걸친 나무문으로 보호되는 안전가옥에 다다릅니다. 문을 닫고 문에 난 쪽창도 닫은 에레야는, 방 안에 낀 발광버섯에 물을 뿌려 푸르고 차가운 불빛을 밝힌 후 한숨을 쉽니다.
>>189 "지금까지 내 모가지에 이빨을 안 꽂고, 듣자하니 피 빨리고 싶다는 미친년도 마다했다는 걸 보니... 꽤나 우릴 신용하고 있군. 그럼 나도 그 신용에 나름대로 보답해야지."
에레야는 먼저, 비록 함께한 시간이 매우 짧지만(체감상 길어보이는 거지 지금 만난지 12시간 겨우 다 되어갑니다.), 엘리를 신용하기로 했음을 먼저 밝히고 '사건'에 대한 이야기를 꺼냅니다. 엘리가 방금 추측한 바대로 에레야도 추측하고 있었군요.
"그래. 지금 당장은 다 별개로 보이지만 이상했어. 다수의 괴물 습격사건의 목격담을 종합해보면 그리펜이나 코카트리스 같은 자연의 맹수들이 아니라 네가 싸웠던 것들처럼 역겹게 엮인 것들이었어. 그리고 구울병에 걸릴 정도로 대량의 인육을 섭취한 식인종들이 발견됐다면 당연히 사람들이 끌려갔을테니 실종자 신고가 늘어야 하는데 전혀 그렇지 않았지... 그래서 뭔가, 더 큰 건 아래에서 이 일들이 일어나는 것 같은데..."
에레야는 수통을 꺼내 물을 마시더니 엘리에게 대뜸 묻습니다.
"그래서, 엘리자베스 바토리 블라드 체페슈. 고귀한 뱀파이어. 왜 여기에 왔지? 그냥 도망가는 게 합리적일 텐데 왜 여관에서 괴물놈과 죽어라 싸우고, 높으신 흡혈귀족님 입장에선 빨아도 닭만큼의 피도 안 나오는 하플링 여급을 구한 거지? 솔직히 대답해."
에레야는 복잡한 표정으로 엘리를 바라보더니 간신히 고개를 끄덕입니다. 엘리 같은 불경한 존재를 사냥하는 것을 업 삼은 사람에게 엘리의 존재는 너무 이해하기 어려운 것일까요? 아니면 개인적인 혐오가 너무 큰 걸까요? 누군가를 엘리에게 겹쳐보는 걸까요? 에레야는 작은 열쇠를 꺼내더니 엘리와 그녀 사이의 책상에 올려두고 말을 계속합니다.
"네 말을 얼마나 믿어야 할지는 모르겠지만, 행동으로 보여준게 많으니 더 많은 말은 않겠어. 그러니까, 엘리. 내가 선택지를 둘 주지."
에레야는 두 손가락을 펼치고 하나씩 접으며 선택지를 제시합니다.
"하나, 사냥당할 걱정 없이 세스타우 성과 인근 지방에서 멀리멀리 떨어진 곳으로 도망칠 권리. 왜냐면 지금 우리는 여기서 벌어지는 일만으로도 짜증나서 어디로 튈지 모르는 너 같은 변수를 일일이 챙길 힘이 없어서 그래."
그리고 나머지 하나를 접습니다.
"둘, 우리와 협력하기. 이단심문소와 협력하는 건 너희에게는 미친 짓으로 들릴 수도 있겠지만 그리 나쁘지 않을 거야. 여기 이 지하수로 안전가옥 열쇠도 빌려줄 거고. 참고로 여기는 세스타우 성 근처 강에서 흘러오는 강물을 받아와서 하수 구역으로 보내는 통로라서 똥냄새도 안 나. 네가 살던 귀족 저택에 대면 부족한 건 많지만... 여기서 이 정도면 난 뱀파이어 기준 중산층 집 정도는 된다 생각하는데. 어떻게 하겠나?"
에레야는 엘리의 손을 잡습니다. 이단심문관의 손, 이라는 생각에 근육이 잠시 꿈틀,하고 굳었다 풀어집니다. 엘리가 태어났을 적에는 빨리 안 자고 돌아다니는 아이는 이단심문관이 잡아가 해가 뜰 때까지 말뚝에 꽂아둔다는 무시무시한 자장가를 들으며 잠에 들었고, 조금 더 자라 아이가 되었을 적에는 이단심문관이 저지를 수 있는 끔찍한 일들을 들었고, 80의 젊은 나이에 이른 지금도 에레야의 직위는 반갑지 않습니다.
하지만... 에레야의 주름진 손은 따뜻합니다. 다른 모든 인간들이 그렇듯, 그녀의 손에서도 고동치는 맥박이 존재를 과시합니다. 무고한 이의 목을 째고 주머니를 채가는 도적, 그럭저럭 농사 짓고 사는 평범한 부부, 교회에서 예배를 보는 신부, 타의건 자의건 그녀가 속한 일족을 따르던 영지민들. 그들 모두처럼, 에레야는 인간입니다. 인간이라는 건 참 단순하면서도 많은 의미를 지니고 있죠. 다른 모든 인간들이 그렇듯 에레야는 당신과 좋은 친구가 될 수도 있고, 그저 이름과 얼굴만 알 뿐인 남남이 될 수도 있고, 최악의 경우는 목숨 걸고 싸울지도 모릅니다. 뭐, 그래도 시작은 좋군요?
"이제부터 넌 이단심문관의 임시 협조자고, 협조를 위해 이 안전가옥을 제공받은 거다. 여긴 안전가옥이니까, 수로에 깔린 거지들 불쌍하다고 여기에 들여서 동네방네 여기에 비밀기지 있다고 나발 불지 말고. 알았어?"
...쯥. 위에 구구절절 써둔거 감동 다 깨지게, 에레야는 참 팍팍하고 현실적인 이야기만 하는군요.
>>197 "대낮에 돌아다니고 싶어하는 뱀파이어라, 그것 역시 특이하군. 뭐... 자주 부를 거다. 하지만 지금 너한테 요청할 일은 바깥에 나가서 하는게 아니야."
에레야는 엘리에게 당장 해야 할 일을 설명해줍니다. 안전가옥을 지하수로에 하나 내주더니, '협조자'로서 맡기는 첫 임무도 지하 수로와 엮였군요.
"지하수로에서 자꾸 사람들이 실종되고 있다, 이상한 것들이 나오고 있다는 소문이 들리고 있어. 원래는 그냥 지하수로가 그런 소문이 붙는 곳이라 넘기겠지만, 아까 상황 설명 들었지? 그래서 여길 조사하긴 해야 하는데... 우리가 사람이 좀 없기도 하고, 밤눈 밝은 사람은 특히 더 없단 말이야. 하지만 넌 뱀파이어잖아? 지하수로로 들어가서 식인종, 괴물, 그 외 기타등등 이상한 게 있는지 살펴보고, 좀 중요하다 싶은 게 있으면 전부 기록해 둬. 괜히 싸웠다가 피 보면 다 피곤해지니까 피하되... 만약 싸우게 된다면..."
에레야는 제 입술에 검지손가락을 가져다대더니 쉿, 하는 제스처를 취합니다.
"기절할 정도로만 빨던지, 그것보다 더 빨았으면 시체를 조각내서 수로에 던져버려. 뱀파이어한테 당한 시체가 부검실에 올라가면 사건 보고서 쓰기가 진짜 머리 아파지니까."
...세상에, 엘리는 조건이 달려있긴 해도 "피 빨아도 된다"고 말하는 이단심문관을 만난 것 같습니다!
>>202 "그럼 지하수로 부분은 맡기지. 그리고 양동이에 묻어놨다고 체포했다고 얘기하지 마라."
그 부분이 워낙에 인상적이었던지 또 강조하고, 에레야는 안전가옥에서 먼저 나갑니다. 또각... 또각... 에레야의 발소리가 사라지면, 안전가옥은 유령의 울음소리처럼 스산한 바람소리와 간헐적으로 무언가 까각, 까가각 하고 벽을 긁는 소리, 어디선가 물이 솨아아 쏟아지는 소리만 들립니다... 낮을 좋아하는 인간들에게는 무시무시하고 불안한 소리지만... 피에 흐르는 저주를 극복하겠다는 일념을 품고 '엘리'라 불리기 전, 뱀파이어 귀족 엘리자베스로서 80년을 넘게 산 그녀에게는 왠지 모르게 그립고 평온한 소리입니다. (조건이 있지만) 흡혈 허가도 받았겠다, 엘리는 문을 닫고 바깥으로 나옵니다.
지하수로를 걸어가던 엘리는, 바람소리와 물소리 이외의 소리가 점점 섞이는 것을 발견합니다. 찌찍, 찌찌직... 쥐가 우는 소리와 함께 두두두두 하는 발소리가 들리는군요. 엘리는 어둠 속에 몸을 숨기고, 한 손을 벽에 댄 채 천천히 걷기 시작합니다. 엘리가 밤눈이 밝긴 하지만 이곳에서 살 생각을 하는 괴물들은 최소한 엘리만큼 밤눈이 밝거나, 눈이 안 좋은 걸 만회할 수 있는 무언가를 가지고 있을 겁니다. 찢어지게 가난한데다 신전에도 못 가는 진짜 빈민들을 제외하면 말입니다. 그리고 엘리가 발견한 것은...
"그르르르륵, 그릉..."
....초록색의 척 봐도 질겨보이는 가죽, 물 위에 둥둥 뜬 눈과 길쭉하고 거대한 아가리, 가끔씩 물살이 칠 때마다 드러나는 거대한 몸뚱아리... 엘리는 박물학 서적에서만 보았던 '악어'입니다. 사시사철이 한여름인 남부 지방에서는 전쟁보다도 사람을 더 많이 죽이는 원인이라고 하는 맹수들 중 하나인데... 이게 왜 여기 있는 걸까요? 아무튼, 악어가 수로를 막고 둥둥 떠 있습니다.
엘리는 기척을 죽인 채 천천히 다가갑니다. 엘리가 워낙에 동작이 빠른데다가, 오밤중이라 악어가 앞이 잘 보이지 않다보니 거의 뒤통수까지 왔는데도 악어는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습니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보면, 어지간한 동물들은 배가 약점이니 악어도 배가 약할 것 같지만... 엘리는 악어의 배를 물자고 잠수하는 자살 행위를 할 수도 없고, 설령 그런다 해도 악어가 순순히 배를 물리진 않을 것 같으니 등 쪽으로 접근합니다. 하지만 악어의 등판은 인간의 팔뚝이나 목과는 달리 워낙에 넓어서, 이빨을 댈 부위도 마땅치 않습니다. 엘리는 목만 빼고 악어의 등판을 물어보려 하지만, 턱이 빠질 것처럼 아픈 느낌이 듭니다.
"그르르르르..."
악어의 등가죽을 물어뜯으려고 했지만, 쩍 벌린 입에 느껴지는 건 피맛이 아닌 물비린내와 이끼의 쓴맛입니다. 그나마 다행인 건... 역설적으로 엘리가 이 공격으로 악어한테 전혀 피해를 주지 못했기에 악어는 등에 이상한 간지러움만 느끼고 몸을 잠깐 비틀기만 했고, 엘리가 입으로 냠냠할 수 있는 거리까지 접근했는데도 악어는 엘리를 전혀 인식하지 못한다, 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즉, 엘리가 일부러 악어한테 잡아먹히려고 몸을 던지지 않는 한, 이 악어는 (엘리에 한해) 없는 셈 쳐도 된다는 뜻이죠.
엘리는 다시금 나아갑니다. 악어를 지나치고 나가니, 이번에는 말소리가 들리는군요... 하지만 거리가 워낙에 멀고, 말소리가 지하수로의 벽에 이리저리 울려퍼지는 바람에 잘 들리지 않습니다. 그나마 일부라도 들을 수 있어서 다행입니다. 엘리는 귀를 바짝 댄 채, 어떻게든 조금이라도 들으려 노력합니다.
"....내려올 거야......때는...온갖...들겠지."
"우리가...있을까?"
"항상...우리가...정 안 되면...알지?"
뭔 말을 하는지 전혀 모르겠군요. 일단 지금 들을 수 있는 건 이 정도가 한계입니다. 그리고... 다시 침묵이 찾아오고 우우우 스산한 바람 소리만 들립니다. 아무래도 더 가봐야 할 것 같다고 생각하는데...
"도, 도망쳐...!!"
어둠 속에서 누군가 양 팔을 허우적거리며 달려오더니, 엘리와 부딪쳐 넘어집니다. 나동그라진 이를 바라보니, 한 사내인데 한쪽 팔이 잘려 있습니다. 그는 고통스럽게 구르다가, 엘리를 보더니 히익...! 하면서 어떻게든 뒤로 물러나려고 합니다.
남자는 엘리가 박수를 치자 정신을 차리고 엘리를 올려다봅니다. 어두워서 다른 건 보이지 않지만 백은색 머리칼은 이 어둠 속에서도 저 멀리서 반사된 침침한 빛을 받아 약하게나마 제 존재를 드러내며 인사하고... 뱀파이어임을 나타내는 핏빛 눈동자는, 분명 광원이 별로 없는 환경인데도 기이하게도 잘 보입니다. 남자는 벌벌 떨다가, 숨을 몇 번이나 몰아쉬고는 상황을 설명합니다.
"여, 여여여... 여기에 내 짐들을 숨겨놓은 걸 찾으려고 내려왔는데... 제, 제길... 고, 고고고블린이랑... 쥐새끼들이... 평소보다도 더 빨리 활개를 쳐서... 내 물품 창고를 덮쳤어요."
상황을 설명하자 제정신이 돌아왔는지, 사내는 주머니에서 붕대를 꺼내서 한쪽 끝을 입으로 물고, 성한 나머지 한쪽 손으로 더러운 절단면을 칭칭 감아서 지혈하는군요. 대충대충 응급처치를 마친 남자는 그제야 팔이 잘렸다는게 실감되는지 깊은 한숨을 내쉬고, 엘리에게 부탁합니다.
"이, 이봐요... 꽤 강해보이는데... 수로 따라서 쭉 가다보면 이끼가 전혀 끼지 않은 벽이 나올텐데, 거기에 달려있는 문고리를 밀고 오른쪽으로 돌려서 당기면 내 창고가 나와요. 거기에 노란색 액체가 담긴 유리병 하나가 있을건데 그걸 가져와주면 안될까요?"
물론, 온갖 괴물이 설치는 이곳에서 맨입으로 그런 일을 시키면 안된다는 건 잘 아는지, 보통의 용병이라면 꽤나 솔깃할만한 제안을 하는군요.
"그 창고 안에 든 게 많아요. 엄청 귀한 약도 있고, 동방에서 온 코끼리 가죽도 있고... 아무튼! 그 유리병 말고는 창고까지 포함해서 아가씨가 다 가져도 되니까, 어떻게 안 될까요?"
남자는 주저앉아서 수로의 벽에 기댄채 눈을 질끈 감습니다. 워낙 상황이 급해 잊고 있었던 절단통이 뒤늦게 찾아온 모양입니다. 하지만 엘리는 잘 싸우는 뱀파이어지 소문난 명의는 아닌고로 그의 고통에 특별히 해줄 수 있는 뭔가는 없습니다. 엘리는 남자를 내버려둔채 수로로 더 깊이 들어갑니다. 워낙에 어둡다보니, 엘리마저도 손으로 한쪽 벽을 짚은 채 점점 구려지는 냄새로 자기가 점점 하수로로 가고 있다는 것만 알고 가는데...
키야아아악!!
갑자기 괴성을 시작으로 깡! 쾅! 쿵! 무기가 부딪치는 소리, 벽을 긁는 소리, 고통에 찬 비명이 울려퍼집니다. 하지만 가까이 갈수록 소리가 커지는 일 없이 점점 작아지더니, 엘리가 무슨 상황인지 알 때쯤이 되면 소리가 잦아들어 간신히 살아남은 승자들의 가쁜 숨소리와 상처를 할짝이는 소리만 들립니다.
"찌찍... 끼이익..."
"데호를 카매나리비둠. 츠크빅 아눅..."
"킷스타바리메님 야불..."
뭐라 하는지 전혀 모르겠지만, 이 목을 쥐어짠듯한 쇳소리와 안절부절 못하고 킁킁대며 훌쩍이는 소리... 엘리의 신경이 곤두서고, 어둠 속에서 보이는 움직임만으로 상대의 정체를 눈치챕니다.
랫킨, 다른 말로 "사람만한 쥐새끼"들이, 고블린 무리와 싸워 이기고 격렬한 싸움 이후를 수습하고 있습니다...
엘리는 자신의 몸을 수많은 박쥐로 나눠서 그들 사이를 지나칩니다. 고블린들이 널부러져 있는데 대형견만한 거미도 딸려있는 것으로 보아 고블린 쪽도 꽤나 준비를 한 것 같습니다. 박쥐도 쥐라고 뭔가 찍찍대는 소리가 울려퍼지고, 그 소리에 화들짝 놀란 랫킨들이 무기를 치켜들지만 뭐가 지나간건지 겨우 감을 잡을때쯤, 엘리는 이미 그들을 넘어 백걸음이나 넘게 멀어진 뒤입니다. 그런데 잠깐... 그 자리에 선 엘리는 갑작스레 변한 냄새에 머리가 아파옵니다! 냄새가 역겨워서? 아닙니다. 뭔가 무서운 존재가 있어서? 아닙니다!
...이 하수구랑은 연이 없을 것 같은, 정말로 달콤한 냄새입니다. 엘리는 정신을 집중하고, 눈을 감아 이 냄새에서 정보를 추출하려 합니다.
생명, 달콤한 생명입니다. 다른 동물의 생명을 훔쳐야 살 수 있는 그녀 같은 뱀파이어가 갈구하는... 피와 살의 냄새. 그것도 아주 제대로 숙성된 냄새입니다... 이게, 지하수로의 더러운 공기를 덮어버릴 정도로 잔뜩 퍼집니다.
...지하수로가 에레야 말마따나 진짜 하수만 씻어 흘려보내는 거라면 피냄새가 이리 날 일이 있나요? 어디서 고기파티라도 하나?
피냄새는 피냄새고, 엘리는 엘리입니다. 저 피냄새의 근원은 찾을수도 안 찾을수도 있는거고, 지금 당장은 창고문을 여는 것에 집중해야지요. 그렇게 걸어가던 엘리는 창고를 금방 찾아냅니다. 이끼가 전혀 없고, 문고리도 있군요. 남자가 알려준대로 문고리를 조작한 엘리는 절꺽, 하고 걸쇠 같은 게 떨어지는 소리를 듣습니다. 시범삼아 조금 당기자...
구궁... 끼이이이이이...
당겨지긴 하는데, 뭔 문을 통짜 바윗덩이 그대로 만들었는지 무겁군요. 계속 당기려 들자, 바닥이 긁히며 기분나쁜 쇳소리를 만듭니다.
이 창고에 숨기던 남자놈은 제 명을 재촉한 셈 같습니다. 이렇게 시끄러운 창고에 뭘 숨겨두다뇨! 그나마 다행인건, 엘리도 아예 못 당길 건 없어보입니다.
귓전을 울리는 소리와 함께 문을 당깁니다. 쾅! 쾅! 쾅! 석문의 밑바닥이 어딘가에 닿을 때마다 채석장에서 기중기에 메단 추로 돌을 깨는 소리가 들립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습니다. 시작한 김에 끝내야겠다고 생각하면 엘리는 문을 잡아당기고...
콰콰콰캉!!!!!
...이거 창고 맞...겠지? 엘리는 저도 모르게 그런 생각을 합니다. 이쯤 되면 이 남정네가 어떤 괴물놈들이랑 한패라서 함정을 팠나 싶지만, 그런 생각들은 안에 들어가서 램프에 불을 당기자마자 보이는 온갖 금은보화 앞에서 사라집니다.
남자가 말했던 예의 그 노란 액체가 든 유리병, 속을 꽉 채운 은화 사이에 드문드문 보이는 금화가 매혹적인 돈자루, 마법 스크롤 더미, 황금으로 자아낸 것 같은 비단 원단 뭉치, 유니콘 뿔을 비롯한 고급 연금술 재료, 그리고... 탁자 위에 놓인 갈기갈기 찢긴 책? 아무튼 엘리는 이곳을 둘러보다가, 사방에서 들려오는 저벅저벅 발소리와 쇳덩이가 벽을 긁는 소리에, 자기가 지금 쇼핑할 때가 아님을 깨닫습니다.
지금 당장 챙길 것만 챙긴다 치면, 엘리는 위에 언급된 것들 중 유리병을 포함해 최대 4개를 들고 갈 수 있으며, 민첩 스테이터스 저하 없이 가져갈 수 있는 건 총 2개입니다.
아니면, 도망치는 대신 엘리의 싸움 실력을 시험해보거나, 목숨 걸고 문을 안에서 닫으려 시도하거나, 아예 존엄성을 좀 희생하고 하수가 되어버린 지하수로의 유류에 몸을 맡기거나, 다른 방법도 있겠죠?
치이이이익... 엘리의 손이 약간 뜨겁지만, 수호부와는 다르게 그냥 손난로처럼 따뜻하군요. 유니콘의 뿔이 엘리의 '불경한' 종족을 거부하는 것 같지만, 엘리가 나름 '깨끗한' 아가씨였던 덕분인지 유니콘의 뿔이 거부하려다가 만 것 같습니다. 엘리는 뿔을 살인 무기 삼아 들고 양쪽을 바라봅니다
"키키키키킷!"
...무언가 지나갈거라 생각도 못한 틈새에서 덩치가 작은 고블린들이 우르르 몰려나옵니다. 짱돌, 몽둥이, 쇳조각 등 변변찮은 무기에 영양 상태도 안 좋은지 수척하지만, 눈빛에는 신선한 고기를 향한 열망이 가득합니다. 그리고 제기랄, 바로 위와 연결된 수직 우수관을 통해 대형견만한 거미들이 고블린을 등에 짊어진 채 내려옵니다! 이놈들은 준비가 나름 철저한지, 불길한 문양이 새겨진 두개골을 뒤집어쓰고 조잡하게나마 의식용 지팡이를 든 샤먼도 있군요.
반대편을 봐도 상황이 영 좋지 않습니다.
"연장 챙겨라!"
"오늘 고기파티다!"
엘리가 지난 밤에 사냥했던 식인종들입니다. 하지만 이번에는 고블린만큼은 아니어도 수가 꽤 되고, '출처를 알기 힘든' 가죽으로 만든 방어구를 걸쳤고, 이런... 구울병 말기에 이르러 진짜 구울이 된 놈들, 식인의 부작용인지 뭔지 풍선마냥 부푼 돼지들도 있습니다. 그리고...
"키킥?"
"저년 뭐냐?"
식인종들이 밤눈을 밝히려 불을 켜자, 엘리는 뻘쭘하게 유니콘 뿔을 든 채 양쪽 사이에 끼인 형국이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