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모두는 누군가를 위한 이야기의 소품이자, 단역이자, 조연이기도 하고 동시에 자기 이야기의 주인공이기도 하다. 그 이야기는 비참할 수도, 행복할 수도 있고, 기승전결이 갖춰졌거나 이야기의 어떤 구성요소 하나도 제대로 된게 없을 수 있다. 하지만 아무리 엉망인 이야기가 되는 한이 있어도 우리는 선택하고, 때로는 강요당하면서 우리의 이야기를 써낸다. 이야기의 악마 이프가 이제 마침표를 찍으라 권할 때까지, 죽음이 우리를 찾아올 때까지. 왜냐면 우리는 살아있으니까. 그 이야기는 우리의 삶이니까.
엘리가 처음으로 노린 건 고블린 떼입니다. 마치 식인종 그룹의 선두라도 된 것마냥, 고블린들 사이로 파고들어갑니다. 처음으로 달려든 고블린은 옆으로 슬쩍 피하자 제 속도를 못 이기고 물 속에 풍덩하고, 두번째는 그냥 수로 쪽으로 밀어버립니다. 그렇게 고블린을 무기 하나 없이 두놈이나 제낀 그녀는 바로 뿔을 치켜들어, 시범 삼아 한놈을 찌릅니다.
"키야아아아악!!!!!"
고블린이 찔린 부위가 타오르는 끔찍한 고통을 느끼면서 드러눕고, 연이어 엘리는 뒤따르는 고블린들을 무릎, 쇄골, 팔뚝, 허벅지, 옆구리 등등 다양한 부위에 뿔침을 놓고, 상당수가 살점 타는 소리와 함께 주저앉지만...
"으아악! 죽어! 죽으라고!!!"
그새 끼어든 식인종과 고블린들이 공격을 주고받는 모습을 보면서 엘리는 새삼스레 깨닫습니다. 그냥, 칼은 맞으면 죽도록 아픈 겁니다. 엘리는 고블린들에게 칼침 한방씩만 놓으면서 밀어버리고, 고블린들이 아파서 발광하자 자연히 엘리 주변에 공간이 생깁니다. 하지만, 그 순간, 엘리는 끔찍한 구토감을 느낍니다! 뭔 일인가 보니, 손가락 말단부터 혈관이 점점 검어지면서 점점 근육이 굳고 있습니다. 제기랄, 샤먼이 저주를 걸었습니다!
엘리는 근육이 마저 굳기 전에 유니콘의 뿔을 던집니다. 빙빙 돌아가있긴 하지만, 유니콘의 뿔도 끝의 날카로움을 생각해보면 엘리는 고블린 샤먼에게 송곳을 던진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하지만 엘리가 던지기 직전 고블린 무리에게 밀린 식인종이 엘리의 뒤를 덮치고, 앞에서는 고블린이 용기를 내 엘리의 배에 뼈칼을 찌르며 파고들면서 자세가 흐트러졌습니다. 게다가 근육이 굳어가니, 유니콘의 뿔은 그 이름이 무색하게 참 힘없이 샤먼에게 날아갑니다. 샤먼은 그걸 보고 지팡이를 들어 괴상한 주술을 외웁니다. 그리고 엘리를 비롯한 그 자리에 있던 모두가, 잠시 실명할 것 같은 섬광에 시력을 잃습니다.
콰콰쾅!!!!!!
그리고, 이 자리에 있는 이들 중, 오직 엘리만이 인지할 수 있는 찰나가 지나고 폭발이 일어납니다. 폭음 뒤에는 삐이이ㅡ 하는 소리가 귀청이 찢어졌음을 알려주고, 축축해진 귀에서 흘러내리는 액체에서 쇠비린내가 납니다. 제아무리 엘리가 빨라도, 눈이 먼 상태에서 폭압에 휩쓸린 수십명의 식인종과 수백 고블린의 무게를 이길 수 없어 그대로 나동그라지고, 엘리는 축축하지만 딱딱한 바닥을 짚고 숨을 쉬면서 그나마 자기는 물에 빠지지는 않은 운 좋은 누군가임을 상기합니다. 엘리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눈으로 아무 팔다리나 잡아 끌어서 꽉 깨뭅니다. 그리고 부들대는 걸 무시하고 이빨을 더 깊게 박고 한참을 빨고 나서야, 시야와 청각이 돌아오고 상황 파악이 시작됩니다.
"으아아윽... 뭐야 이거..."
"야! 일어나 씨발!"
비명을 지르거나 비명 지를 힘도 없어 끙끙대는 이들 사이에서 홀로 일어난 엘리는 뭔 일이 일어난건지 생각해봅니다. 유니콘의 뿔은 부정한 것을 배제하는 성질이 있고, 고블린들은 야금술부터 주술까지 뭐든 할 수는 있지만 참 개판으로 하는 것으로 유명합니다. 뭔가 얼개가 맞는 것 같습니다. 샤먼이 유니콘의 뿔을 막으려고 주술을 썼다가, 위력은 형편없는 주제에 엄청 '부정한' 것들을 많이 끌어다쓴 덕분에... 안 그래도 고블린의 피를 머금은 유니콘 뿔이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폭발한 것 아닐까요? 아무튼 고블린 떼거리 한가운데에서 폭발한 유니콘 뿔은 전세를 단숨에 식인종 쪽으로 몰아세웠고, 그나마 피해를 덜 본 식인종들은 비명을 지릅니다.
"야, 밀어! 밀라고!"
식인종들은 꼬챙이로 널부러진 고블린들을 하나 둘 찍고, 아직 도망칠 여력이 남아있던 고블린들은 황급히 도망칩니다. 하지만 시력과 청력이 상한 나머지, 아무 곳으로나 막 뛰어가다가 식인종에게 제발로 뛰어들거나, 물 속에 쳐박히기를 반복합니다. 대부분의 식인종들은 고블린에 꽂힌 나머지 엘리의 어깨를 툭! 툭! 밀치면서 지나갔지만, 개중 누군가가 엘리에게 칼을 들이밀었습니다.
식인종 몇 명을 떨어뜨리자, 누군가 엘리의 머리채를 잡습니다. 하지만 엘리는 저항하는 대신, 그대로 양 손으로 그 손을 붙잡고 몸을 돌려 그 놈을 물 속으로 빠트리고, 자기도 휘말리기 전에 박쥐의 형태로 바꿉니다. 하지만 너무 많이 바뀐 나머지 벌써 피로 부른 배가 꺼졌다 싶을 때쯤, 누가 엘리의 얼굴을 손바닥으로 콱 붙잡자, 엘리는 오히려 잘 됐다며 그 손을 붙잡고 손가락이 절단되기 직전까지 갈 정도로 꽉 깨물어서 피를 빱니다. 비명이 들리지만 이 식인종도 사람 잡아먹을 때 그 사람 사정 신경 썼을까요? 엘리는 콱, 콱, 콱, 한번 열었다 다물면서 손목의 동맥에 송곳니를 박고 분수처럼 쏟아나오는 피를 마십니다.
"야 이 답답한 새끼들아! 고작 한 명을 못 죽여?!"
"다 붙어!!!!"
지난 밤보다 훨씬 많은 식인종들이 칼을 들고 엘리에게 달라붙습니다. 세 명이 아니라 여덟명이 넘는 놈들이 한번에 엘리를 포위하니 찔리는 부위도 다양하고, 피도 위험할 정도로 빠져나갑니다. 하지만 엘리는 문 사냥감을 놓치지 않고, 피를 너무 빨았는지 동맥에 이빨을 꽂았는데도 더 이상 나오지 않자 엘리의 목을 노린 칼을 턱을 빼서 피하고 손목을 또 깨뭅니다. 박쥐로 변할 수도 없을 정도로 너무 좁게 포위당했지만, 그렇게 한참을 빨고 찔린 결과...
"헉... 헉..."
"뭐야 이년...!"
그녀를 찔렀던 식인종들이 힘이 빠져 먼저 나동그라지고, 그를 보자 안 되겠다고 판단한 거구의 덩치들이 달려들고, 식인종들이 묶어놨던 구울들을 엘리를 보게 한 뒤 풀어버립니다.
달려드는 구울을 날렵한 몸짓으로 피하지만, 그 중 한 놈이 우연히 엘리의 갈비뼈에 손톱을 박아넣었다가 이내 빼버립니다. 그 사이로 피가 흐르는 것 같지만, 엘리는 그동안 빨아먹은 피로 빠르게 재생합니다. 엘리를 놓친 구울들이 손을 휘저으며 넘어진 동료 식인종들을 박살내다가, 뒤돌더니 다시 엘리에게 달려듭니다. 이번에도 요행으로 피했지만, 워낙에 공간이 좁은 나머지 피할 공간이 마땅치 않습니다! 그래서 박쥐로 다시 변하려는 순간에...
"아오, 이 모기 같은 년!"
수로에는 어떻게 들어왔는지 참 궁금한 식인종 덩치가 엘리의 종아리를 붙잡더니, 그녀를 거꾸로 듭니다. 고블린, 식인종, 구울, 지하수로. 이 모든 것이 순간 거꾸로 뒤집혔다가, 세상이 아주 빠르게 움직이며 머리가 멍멍해집니다! 쾅! 쾅! 쾅! 엘리를 좌우로 마구 패대기치더니 벽에 던져버리고, 고블린보다는 훨씬 나은 조직력을 가진 식인종들은 길쭉한 쇠막대기를 들고 오더니 엘리의 몸에 쇠막대기 여러개를 꽂아 밀어버립니다.
"야, 이 년 못 움직이게 막아! 한방울이라도 피 빨면 우리 다 좆되는거야!"
정확한 분석이고, 식인종들은 그 분석에 따른 당연한 대책을 실행하고 있습니다. 엘리가 얼마 남지 않은 피로 박쥐로 변해야 하나 고민할 때, 식인종들은 아마 희생자를 포획하는 데 썼을 그물도 가지고 오는군요. 이거 잘못하면 진짜 망하겠다 싶을 때쯤... 어디선가 목소리가 들려옵니다.
"거기까지! 내 직접 봐야겠다!"
그 목소리에 식인종들이 화들짝 놀라더니, 엘리를 감시하는 이들을 제외하고 나머지는 벌떡 일어섭니다. 그리고 그 목소리가 이어지는군요...
식인종들 사이에서 정말로 높아보이는 누군가가 나옵니다. 후드가 달린 붉은 사제복을 입고 있고, 그 후드 때문에 얼굴이 가려져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빙빙 도는 시야로 그 사내를 바라보는데, 그 사내는 엘리 쪽을 보는 듯하더니 한쪽 무릎을 꿇고 정중히 사과합니다. 아까 전에 식인종들이 엘리를 당장이라도 찢어죽이려 들던 것과는 완전히 정반대입니다.
"무례를 용서해주십시오. 밤의 귀족이시여. 이곳의 상황이 좋지 않아, 부득이하게 아가씨를 제압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아니, 정반대 정도가 아니라 아주 빙글넹글 돌아버렸는뎁쇼? 어안이 벙벙해진 엘리에게 그 사내가 말합니다.
"이 결박은 금방 풀어드리겠나이다. 저희 쪽으로 오셔서, 저희가 무엇을 하는지 보시면 바로 이해하실 수 있을 겁니다."
사제가 손가락을 튕기자 죽기 싫어서 엘리의 몸에 쇠꼬챙이를 박아넣었던 식인종들이 벌벌 떨다가, 사제가 신경질적으로 손가락을 두번 튕기자 마지못해 눈을 질끈 감고 엘리의 몸에 박힌 꼬챙이를 뺍니다. 엘리가 움직일 수 있을 때까지 기다려준 사제는 가까이 가서, 이리저리 멍들고 다친 식인종들은 신경도 쓰지 않은채 엘리의 상처만 살핍니다.
"야만적인 족속들 같으니. 윗물이 높은지 아랫물이 높은지도 모르고..."
뒤에 서 있는 식인종들을 경멸한 사제는 붉은 액체가 담긴 병을 꺼내, 케밥마냥 이리저리 쑤셔져서는 뻥 뚫린 상처에 붓습니다. 엘리는 상처를 감싸안는 따뜻한 감촉을 느끼며 이게 인간의 피임을 깨닫습니다. 그리고 피를 머금은 상처가 새살이 돋아나며 닫히는 것을 보고 사제는 아이처럼 기뻐합니다.
"오오, 확실하군요. 그대는 분명 고귀한 혈통을 가진 터!"
사제는 엘리가 뱀파이어임을 확인하고, 그녀를 이끌고 지하수로 깊은 곳으로 들어갑니다. 가끔씩 고깃덩이를 짊어진 식인종들을 마주치지만 다들 엘리를 위해 길을 비켜주고, 엘리는 지나가던 도중 어딘가의 하수구와 연결되었을 배출구에서 대량의 피와 살덩이가 떨어지고, 식인종들이 달려들어 피를 받고 살덩이를 줍는 것을 봅니다. 사제는 익숙하다는 듯 지나치는군요.
사제는 엘리를 지하수로 깊숙이 데려갑니다. 어디서 산소를 가져오는지 의문이지만 푸른 횃불이 지하수로 벽을 밝히고, 엘리는 어릴적 개인적으로 교류했던 묘지기 덕분에 '초고온' 이외에 저런 색깔의 불꽃을 만드는 방법을 잘 알고 있습니다. 뼈를 곱게 빻아 불꽃에 섞던지 뼈를 장작 삼아 불을 때면 저런 색이 나오죠. 그리고 그 불꽃은 벽을 칠한 검붉은색의 물감을 비추고 있는데, 이 물감... 엘리는 알 수 있습니다. 공기에 노출된 지 오래되어 변색된 얇게 펴바른 선지, 즉 피입니다. 엘리 같은 뱀파이어들도, 심지어는 야생에 사는 일족도 이딴 짓은 안 하는데, 올려다보면 뱀파이어의 날카로운 치열과 그들에게 잡아먹히는 인간들이 어우러진 기이한 그림입니다. 그 와중, 사제는 엘리에게 말을 겁니다.
"아가씨는 축복받았다는 생각을 해보셨습니까? 바로 그 혈통, 뱀파이어 말입니다."
해 뜨면 다 죽는 혈통이 축복은 뭔 미친놈의 축복... 이라고 말할 틈도 없이, 사제는 계속해서 주절주절 늘어놓습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우리 모두는 지배하고 지배당합니다. 우린 가축을 지배하고 그들을 먹고, 뱀파이어도 인간을 지배하고 먹지 않습니까?"
역시 이번에도, 사제는 엘리의 긍정 따위 기다리지 않고 계속 이어갑니다.
"그리고, 뱀파이어는 지배하기 위해, 아니, 지배해야 하는 운명 아닙니까? 지배해서 피를 빨 권리가 있고 살기 위해 마땅히 그래야 하는 이들이죠. 그래서 우린 당신 같은 이들이 너무 부러웠습니다. 그래서..."
이야기하다보니, 지하수로의 광장? 같은 곳에 조성한 제단에 다다릅니다. 사제는 자랑스럽게 말합니다.
"그러니 우리의 산제물을 흠향하고, 우리들 중 선택받은 자가 당신과 동등해질 수 있도록 도와주겠습니까?" // 내 세계관에서 뱀파이어는 전염, 후천적으로 되기 어려운 설정!
사제는 엘리 쪽을 보더니, 의심스럽다는 듯 되묻습니다. 뱀파이어가 인간으로 돌아간 사례를 신화나 전설이 아닌 제대로 된 역사서에서 찾아보기 힘들듯, 인간이 상세불명의 초자연적 저주나 혼혈 등이 없이 인위적으로 뱀파이어화한 사례도 찾아보기 힘듭니다. 대부분의 경우는 구울, 인육에 대한 갈망에 사로잡힌 식욕의 노예로 전락하니까요. 하지만...
"그렇다면 알겠습니다! 하지만 지금 오신 곳으로 다시 가는 건 위험합니다. 거기는 이단심문소랑 마녀 사냥꾼부터, 하수구 경비들이 가끔씩 순찰을 오거든요. 지금 위에서 난리가 났으니, 눈에 불을 켜고 있겠죠. 따라오시길. 안전한 통로가 있습니다."
높은 계급이 좋습니다! 이렇게 조금 미심쩍어도 그런갑다 하고 넘어가니까요. 이 미친놈들 기준으로 안전한 게 과연 뭘지 의심스럽지만 말입니다.
사제는 잠깐 고민하더니 고개를 끄덕입니다. 사제가 손가락을 딱, 튕기자 식인종들이 제단에 누워있던 비냐를 들고 옵니다. 앞으로 끌려온 비냐는 엘리와 눈이 마주치자 발작이 의심될 정도로 몸부림치지만, 다행히도 입마개를 하고 있어서 여관이 어쩌고, 흡혈이 어쩌고 남들 다 보는 앞에서 나발 부는 일은 없을 것 같습니다!
"이 년보다 더 좋은 것도 충분히 구해드릴 수 있습니다. 천천히 오시길."
식인종이 엘리 앞에 비냐를 던지고, 비냐는 어떻게든 안 끌려가려고 별 발광을 다 하는군요. //혹시 여기서 틀어져서 싸우고 부딪치며 얼래벌래 기어나가는 전개? 아니면 무사히 나가는 전개 중 어떤게 좋을까?
엘리는 다른 쪽으로 몸을 돌립니다. 비냐도 이세는 울 기력조차 사라졌는지, 아니면 체념했는지 더 이상 저항하지 않는군요. 지하수로가 점점 좁아지다 다시 넓어지고, 엘리는 발에 채이는 금속 소리에 주변을 바라봅니다. 아까 전에... 엘리가 고블린과 식인종과 마구 싸웠던 창고 근처입니다. 그새 시체를 전부 수습했는지 피냄새만 느껴지는군요. 어떻게 수습했는지는... 괜히 정신 사나워지니 생각하지 맙시다.
드디어 비냐는 입을 다뭅니다. 최소한 엘리가 비냐를 잡아먹을 생각이 없다는건 받아들였기 때문이죠. 하지만 엘리가 말한 것과는 다르게, 팔이 잘린 남자가 악어보다 먼저 나옵니다. 남자는 돌바닥에 누워 붕대 감은 팔을 벽돌 위로 올린채 잠들었군요. 자기 싫어도, 상당한 출혈과 격렬한 상황 이후의 탈력감 때문에 잠에 들 수밖에 없었을 겁니다.
>>275 엘리는 유리병을 두고 나름대로 의사표현도 한 뒤 비냐와 함께 나아갑니다. 악어는... 아까 전의 대학살을 듣고 잔칫상 즐기러 갔는지 다행히도 없군요. 엘리는 비냐를 데리고 에레야가 내주었던 안전가옥 근처까지 오는데 성공합니다. 그리고 아까 전보다 훨씬 신선해진 냄새에 엘리는 저도 모르게 드디어 쨍쨍한 바깥을 볼 생각에 기쁘...지 않았습니다. 전혀요. 여기까지 오자, 엘리는 하수구 쇠창살에 반사된 희미한 햇빛을 보고 바깥은 아직 대낮임을 떠올립니다.
비냐는 한참동안이나 그 말을 곱씹고 되새깁니다. 비냐가 뱀파이에 대해 어찌 생각하건 간에, 그것만큼은 사실입니다. 뱀파이어는 태양을 두려워하건, 혐오하건, 엘리처럼 그 불빛 앞으로 나아가려 하지 않는게 일반적입니다. 하지만 엘리는 다릅니다. 엘리는 다른 뱀파이어들처럼 피를 빨고, 잽싸고, 동물로 변하고, 날카로운 송곳니가 있지만 그녀의 머리만큼은 다릅니다.
"그렇군요."
비냐가 엘리의 말에 담긴 본뜻을 완전히 이해했는지, 아니면 문자 그대로 이해했는지, '태양'으로 대표되는 인간 중심의 세계와 그 세계의 위협적인 종족을 배제하려는 압력으로 이해했는지는 모릅니다. 하지만 그렇게까지 구체적으로 이해할 필요는 없습니다. 엘리자베스 바토리 블라드 체페슈, 아니, 엘리는 비냐가 알던 뱀파이어와는 아주 다르다는 것만 알면 됐습니다.
비냐는 마침내 돌아서서, 엘리에게, 엘리가 인간 사회에 온 이후 들을 일이 없었던 말을 건넵니다.
"...구해줘서 정말 고맙습니다. 그리고..."
...들을 일이 없었던 엄마 잔소리도 추가해서요.
"...나오면 좀 씻으세요. 모르는 사람이 보면 산채로 가죽을 벗긴 줄 알겠어요."
확실히 그렇습니다. 엘리는 식인종과 고블린의 피, 살, 심하게는 가죽까지 뒤집어쓴 상태입니다. 다행히도 이곳 수로의 물은 엘리가 휘저었던 곳들보다는 훨씬 깨끗해서 목욕이 아니라 아예 마셔도 될 정도고, 안전가옥도 있으니 엘리가 목욕하다 말고 들이닥치는 빈민이나 경비병 때문에 존엄을 해칠 일도 없을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