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모두는 누군가를 위한 이야기의 소품이자, 단역이자, 조연이기도 하고 동시에 자기 이야기의 주인공이기도 하다. 그 이야기는 비참할 수도, 행복할 수도 있고, 기승전결이 갖춰졌거나 이야기의 어떤 구성요소 하나도 제대로 된게 없을 수 있다. 하지만 아무리 엉망인 이야기가 되는 한이 있어도 우리는 선택하고, 때로는 강요당하면서 우리의 이야기를 써낸다. 이야기의 악마 이프가 이제 마침표를 찍으라 권할 때까지, 죽음이 우리를 찾아올 때까지. 왜냐면 우리는 살아있으니까. 그 이야기는 우리의 삶이니까.
편하디 편한 일족의 저택 생활을 마다하고 비루한 인간들과 함께 구르는 삶을 선택했을 때부터 못 씻는 건 각오하긴 했지만, 이렇게 심한 꼴까지 각오한 적은 없었습니다. 엘리는 몇 양동이 가득 물을 떠오고, 안전가옥에 나 있는 샘물도 사용합니다. 먼저 얼굴을 씻는 것부터 시작했는데... 얼굴에 물을 뿌려서 슥슥 닦아내자... 비냐가 알아본 것이 참 기적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엄청나게 많은 핏덩어리가 손에 잡힙니다. 이제 보니 비냐가 기겁한게 엘리가 뱀파이어란 걸 알아서가 아니라, 진짜 괴물같이 생겨서 그랬던 것 아닐까... 싶어지는군요. 아무튼 엘리는 다 씻고 나서 피에 절은 옷을 벗습니다. 인간 세상은 위험천만하고 힘들다길래 나름대로 버려도 되는 옷을 입고 왔는데, 만약 이 동네가 나체에 대해 큰 거부감이 없다면 당장 이걸 버렸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엘리는 세스타우에서 오래 체류하게 된다면 이 안전가옥을 좀 더... '인간적'으로 꾸며야겠다고 다짐합니다. 예를 들어, 돈이 많으면 연금술사들이 최근에 팔고 있다는 '비누'를 좀 들여두던지, 최소한 밀짚 태운 잿가루라도 둬서 세탁도 좀 잘 되게 하고! 세탁에 쓸 수 있는 빨래판과 큰 양동이, 인력식 탈수기도 좀 들여놓고... 에레야가 이곳이 뱀파이어 기준으로는 중산층 살만한 집이라고 했는데 헛소리 같습니다. 아무튼 엘리는 몸을 씻고 자신의 옷도 세탁해서 (언제 마를진 모르겠지만) 어딘가에 널어둔 뒤, 행복하게 잠을 청합니다...
시간은 낮. 착한 뱀파이어는 잠들 시간입니다. 밤 즈음까지만 자면 피로도 적절히 풀리겠죠. 하지만...
네 시간은 잤을까요? 엘리가 깊은 꿈속에서 좋았던 옛날을 생각하던 도중 누군가 문을 쾅쾅쾅 두들깁니다. 인간의 기준으로 보면, 해가 뜬 것 같기도 하고 안 뜬 것 같기도 한 새벽 5시쯤에 갑자기 문을 박살낼 듯 두들기는 민폐입니다.
>>291 문을 열자마자, 엘리의 눈높이는 철십자 인장이 새겨진 흉갑과 마주합니다. 위를 올려다보면, 이제 와서 이야기하기도 참 새삼스럽게 에레야가 와 있군요. 자야 할 꼭두대낮에 갑자기 문을 쾅쾅 두들겼으니 엘리의 표정은 짜증이 가득할 법도 하지만, 오히려 에레야는 "그래도 노크라도 해준게 어디냐, 고마운 줄 알아라."는 듯 뻔뻔할 정도로 무덤덤합니다. 에레야는 엘리의 옷이 아직 마르지 않아 젖은 걸 봅니다. 바깥과 통하지 않는 지하에, 발광이끼가 낄 정도니 당연한 일이지요. 에레야는 후, 한숨을 쉬더니 뒤에 서 있던 누군가에게 명합니다.
"거기 경비, 그래 너. 위에 올라가서 옷가지 좀 가져와라."
그리고는 경비가 금방 옷을 가져오자, 엘리에게 그걸 떠넘기듯 건네고는 문을 다시 쾅 닫는군요.
"그거로 갈아입고, 말리고 있던 옷은 경비들한테 넘겨. 아마 뱀파이어들은 잘 모르겠지만, 햇빛이 뱀파이어만 바싹 말리는 게 아니고 옷도 잘 말리거든."
뒤에 저딴 목숨 가지고 농담하는 유머만 없었다면 참 스윗하다고 생각했을 텐데요. 하지만 상황이 바쁜지, 에레야는 문 너머로 이야기합니다.
"갈아입으면서 들어. 솔직히 말하면, 너가 내 어지간한 똘마니들보다도 더 쓸모 있었다. 지금 온 동네 경비들이 동원되어서 인간이 오갈 만한 지하수로로 연결되는 통로를 전부 봉쇄했고, 너가 보고했던 이 루트로 갈 거야. 그리고..."
"야, 놔! 놓으라고 이 새끼들아!"
"경비. 재갈."
...아까 전에 엘리가 도와줬던 그 남자, 왜인지는 모르겠는데 체포당했군요.
"...밤눈도 밝고, 이런 곳에서 날아다니는 네 도움이 아주 많이 필요할 거다. 인간 에레야로서 하는 말이 아니라, 이단심문관으로서의 입장도 똑같아. 그러니까 갈아입는 김에 다른 준비도 좀 하고 나와."
사실 유니콘 뿔도 있긴 했지만, 이건 엘리가 고블린 샤먼을 방해하기 위해 던졌다가 수십마리 고블린의 모가지를 잡고 장렬하게 저 세상으로 떠났으니, 이젠 없습니다. 정확히는 있었는데 없어진 거지만 뭐 어떻습니까. 없는 게 사실인데. 엘리는 금방 옷을 갈아입고 나옵니다. 경비들은 석궁과 창칼, 도끼, 횃불 따위를 들고 있고 몇명은 에레야처럼 살벌한 나팔총을 들고 있군요. 에레야는 들고 있는 무기들을 다시 한번 점검한 후, 엘리와 함께 경비병들 앞에 섭니다. 그리고 엘리에게 주의사항을 알려주는군요.
"우리 뒤에 서 있는 애들이 그나마 경비병들 중에서 가장 쓸만한 애들이야. 나머지는 들어가봤자 죽기밖에 더 못하니까, 그냥 입구만 봉쇄해놨어. 말인즉슨, 적을 발견하면 반 죽여놔서 못 도망치게 해야 한단 거야. 그리고 우리 목표는... 네가 그 하플링을 통해 보고했던 지하의 미친 식인쟁이 집단들이다. 나머지도 방해하면 쳐죽여야겠지만, 그걸 잊으면 안 돼. 알겠지?"
이단심문관 밑에서 일하던 거한들이 갑옷을 차려입고 길쭉한 방패와 철퇴를 든 채 에레야와 엘리 앞에 섭니다. 금방이라도 사람 하나 죽일 것마냥 험악해보이던 거한들이 투구까지 꾹 눌러쓰니, 이제는 마치 고성의 움직이는 갑옷병정처럼 보입니다. 이 정도로 방어력을 챙길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굳이 엘리가 몸빵할 일은 없겠군요. 에레야는 엘리에게 진짜 해야 할 것을 이야기해줍니다.
"너는 뒤에서 뭐가 보이면 벽을 세번, 그리고 두번 두들겨. 그러면 모두 멈출거야. 그리고 뭐가 보였던 건지 이야기해. 그리고 가다가 갈림길이 나오면 그 쪽으로 너 혼자 100m 정도 걸어들어가서 뭐가 있는지 보고 나와."
즉, 정찰을 하라는 소리입니다. 지금 상황에 믿을 건 엘리의 밤눈뿐이니까요. 에레야는 엘리에게 말합니다.
"그리고 깊숙이 들어가면, 본격적으로 전투가 시작하기 전까지 횃불도 다 끄고 램프도 가릴 거야. 그때까지는 우리들 중 네 눈이 거의 유일한 밤눈이다. 인간들이랑 함께 살고 싶어하는 것 같은데, 인간 사회는 같이 하는 일이 중요하거든? 첫 일부터 망치지 말고. 알았어?"
엘리를 둘러싼 병사들이 앞으로 나아가고, 갑옷들이 절걱거리느 소리를 냅니다. 발소리와 쩔걱거리는 소리가 사방에 울려퍼지자, 에레야는 한숨을 쉬더니 횃불을 켜라고 명령합니다. 어차피 귀 있는 놈들이면 이 소리를 듣고 위에서 수십명이 몰려오고 있다는 걸 모를 리가 없으니, 차라리 불이라도 켜서 앞이라도 밝히자는 겁니다. 그래도, 불을 켜도 눈 앞만 보이지 멀리는 보이지 않기에 여전히 엘리의 밤눈은 쓸만합니다. 그리고... 엘리는 벽을 세번 두드리고 다시 두번 두드립니다. 병사들이 전부 다 멈추고, 엘리는 자신이 본 형체, 자신이 맡은 냄새, 자신이 들은 소리를 바탕으로 에레야에게 보고합니다.
전방 30m에 랫킨 10체 이상. 갑옷과 방패 등으로 중무장. 최고 경계상태. 이쪽을 보고 있음.
"...모두 전투준비."
에레야는 폭탄을 하나 꺼내고, 나직이 병사들에게 속삭입니다. 앞에 방패를 들고 서 있던 병사들은 방패로 앞을 가리고, 뒤에서 경비들이 몰려와 위를 가립니다. 그리고 그 사이로, 석궁을 든 경비들이 나와 앞을 겨눕니다. 엘리가 밤눈이 밝은 거지 이들은 사실상 어둠 속을 겨누고 있는 상태지만, 좁은 지하수로에 놈들이 발 디디고 있을 곳이야 뻔하기에 아무래도 상관없는 모양입니다. 그리고 에레야는 엘리의 어깨에 손을 얹고 말합니다.
"엘리, 넌 좀 있어봐."
그리고 에레야가 쏴, 라고 말하자... 석궁을 든 경비들이 방아쇠를 당기고 바람 찢는 소리와 함께 볼트들이 날아갑니다. 몇 발은 빗나가고 나머지도 방패와 갑옷에 막히지만, 무언가 던지려던 랫킨에게 명중, 던지려던 것과 함께 그대로 그 자리에 고꾸라지고... 굳이 엘리가 말해줄 필요도 없는 비명소리가 들립니다.
"찌이이야아악!!!"
푸쉭ㅡ! 무언가 김 빠지는 듯한 소리가 들리지만, 랫킨들이 발광하는 소리는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꺽, 꺼억, 꺼어억, 엘리는 랫킨들이 꺽꺽대면서 쓰러지는 것을 확실히 볼 수 있습니다. 한 놈이 기적적으로 이 쪽으로 걸어오지만 전투 의지는 완전히 상실했습니다. 에레야는 석궁을 쏘려고 방패병 사이에 선 경비의 투구를 툭 치고, 그새 재장전한 경비가 불빛에 랫킨이 식별될 정도로 걸어오자 갑옷 틈새로 석궁을 쏴서 그 더러운 삶을 끝내줍니다. 에레야는 손에 침을 묻히더니 위로 쳐들어 지하수로의 풍향을 확인합니다. 지금 엘리와 에레야는 바람을 등지고 있습니다. 즉, 랫킨들 스스로를 죽여버린 저 치명적인 독바람 때문에 진격이 느려질 일은 없다는거죠. 일행은 계속 이동합니다. //오늘은 여기까지! 잘 자!
에레야는 짧게 끊습니다. 무슨 의미인지 정확히 이해하기엔 짧지만, 지금 상황이 상황이니 어쩔 수 없습니다. 한가하게 종교와 이단의 정의를 논하기엔 두 사람한테 걸린 목숨이 워낙 많은고로, 길게 얘기하기도 힘듭니다. 엘리는 계속 걸어가다가, 다시 벽을 두드려 일행을 멈춰세웁니다.
고블린. 셀 수 없이 많음. 최소 서른? 거미 기수 최소 다섯. 고블린 샤먼 최소 둘, 우리와 같은 방향으로 이동 중.
얼핏 봤는데도 이 정도입니다. 이 정도면 군대입니다. 엘리네 가문이 경영하던 영지에서도 이 정도면 마을이 해결할 수 없다고 간주하고 일족이 나섰을 일입니다. 보고 내용 중 그나마 다행인 건 이쪽으로 오고 있는게 아니란 겁니다. 묵묵히 듣던 에레야는 되묻습니다.
에레야는 엘리에게 진지한 목소리로 작전을 설명합니다. 말만 쉬운 작전이군요. 엘리는 고블린들 바로 뒤를 따라가, 고블린들이 식인종 본거지를 공격하는 순간 고블린을 도와서 식인종 중에 번거로운 놈들. 예를 들어 덩치 큰 놈이나 구울, 두개골 척탄병 등을 죽이고, 랫킨 등 다른 놈들이 오면 그놈들 중에서도 독바람 척탄병이나 다른 괴물들 위주로 썰어버리라는 겁니다. 에레야는 폭탄 하나를 건넵니다
"폭음탄이다. 어느 정도 정리되거나, 너가 죽을것 같으면 이걸 터뜨려."
그리고 경비들 눈치를 보다가 엘리의 가슴팍을 밀치듯 혈액이 담긴 유리병을 건네고 말합니다.
"살다보니 뱀파이어한테 피 한방울이라도 바치고 싶다는 미친년을 다 보고, 그 미친년 피를 뱀파이어한테 전달하는 일이 다 있군."
그럼, 신의 가호가 있기를. 엘리자베스 바토리 블라드 체페슈, 뱀파이어에게 하기에 참 좋은 말을 뒤로 한 채 엘리가 앞으로 나섭니다. 어둠 속에서, 엘리는 자연스럽게 한발씩 내딛어 고블린의 뒤를 밟습니다. 다행히도 감이 예민한 거미떼나 주술의 영향으로 미래와 과거가 뒤틀린 상태로나마 보이는 샤먼들도 엘리를 모르는것 같습니다. 잘 됐습니다. 어둠은 엘리의 친구니까요. 엘리는 고블린들에 가까이 다가가고, 고블린들 중에 제대로 된 무기로 무장한 이들이 꽤 많다는 걸 깨닫습니다. 가는 날이 장날, 진짜로 딱 좋은 때에 내려왔군요. 그리고...
"ܛܠܬܪܐ . ܵܠ ܲܲܨܫ"
나직이, 고블린 샤먼이 주술을 외웁니다. 무슨 뜻인지는 알 수 없지만, 나름의 규칙과 뜻을 가진 건 확실한 주술 언어가 고블린들 사이에 울려퍼지고, 고블린들은 그들답지 않게 잠자코 샤먼의 주술이 끝나기를 기다립니다. 그리고 엘리는... 신체에 알 수 없는 고양감을 느낍니다. 손톱이 가를 살점을 찾아 제멋대로 길어지고, 송곳니가 피에 헐떡여 드러납니다. 엘리는 눈을 부릅뜨고, 무언가 죽이고 싶다는 생각에 심장이 두근거립니다. 인간의 희고 검은 살점 아래의 붉은 속살은 얼마나 달콤할까요? 얼마나 참혹할까요?
아.
엘리는 고개를 젓습니다. 엘리는 가슴에 손을 얹어 진정시키고 주변을 둘러봅니다. 고블린들의 눈빛이 빨갛게 발광하고 있고, 키킥 키키킥 무섭게 울고 있습니다. 그리고...
본거지 외곽의 식인종 초소에서 경종이 어지럽게 울리고, 급박한 목소리가 지하 수로에 울려퍼집니다. 하지만 연장을 들어 후려치기도 전에 선두에 선 고블린이 쇳조각으로 배를 찌르며 부딪치고, 뒤에서는 다른 고블린들이 달라붙습니다. 바닥에 쓰러지자 굳이 죽일 필요도 없습니다. 수백개의 초록발이 칼에 찔린 식인종을 짓뭉개고, 거미 기수들은 거미에 등에 매달린 채 거미를 몰아 벽에 올라탑니다.
"뭐 해! 마름쇠 가져와!"
식인종들이 목책 너머에서 마름쇠를 던지고, 앞서가던 고블린들이 발바닥을 짓이기고 발등을 뚫는 고통에 비명을 지르며 나동그라지고, 나동그라지다가 등을 포함한 온 몸에 마름쇠가 꽂힙니다. 하지만 뒤에서 달려오던 고블린들은 피에 미쳐서, 동료를 짓밟으며 앞으로 나가 목책에 달라붙습니다. 식인종들도 이거로는 부족한 걸 잘 알아서 눈물 가루를 던지려는데, 벽에 매달린 거미 기수들이 떨어져 식인종들을 덮칩니다.
"으아아악! 끄악! 악!!!!!"
"사, 살려줘!!!"
거미들이 위아래로 마구 이빨자국을 남기며 산 채로 인육을 뜯어먹고, 목책 너머가 혼란해진 틈에 고블린들이 얼기설기 엮은 조잡한 목책들 사이로 기어오르거나, 길다란 막대기를 사다리 삼아 붙잡고 올라갑니다. 고블린들이 올라와서 의기양양하게 목책 너머를 보자마자 그 골통에 화살이 꽂히지만, 지금 피에 미친 이들 입장에선 아군이 죽었어도 자기가 안 맞았으니 그만... 이 아닙니다. 식인종 중 덩치가 큰 놈들이 뒤에서 발리스타를 들어서 쏘고, 고블린 몸통만한 돌을 던지고 있습니다. 엘리는 본능적으로 눈치챕니다. 지금이, 엘리가 나설 때입니다. (계속. 아직 반응 x)
발치에서 피 끓는 소리가 들립니다. 아래를 내려다보면 마름쇠에 꿰이고 동료들에게 밟혀 갈비뼈며 무릎뼈며 목숨 빼면 모든 것이 개박살난 고블린이, 의미가 없는 것을 알면서도 숨을 몰아쉽니다. 엘리는 그 고블린을 집어들어서, 목을 콱 깨물어 고블린의 얼마 남지 않은 삶을 고통 없이 빨아들입니다. 축 늘어지고 눈에 띄게 하얘진 고블린 시신을 수로에 던져 수장하고, 엘리는 고블린들 사이로 뛰어오릅니다.
붕ㅡ
"켁?!"
"끽?"
"흐뱍!"
마치 초록색 강물 위에 뜬 돌을 밟듯, 엘리는 고블린들의 머리를 짓밟고 초록 물결을 건너고, 벽에 발을 붙였다가 순간의 반발력으로 벽을 밀어 올라갑니다. 그리고 엘리의 눈에 '성가실 것들'이 보입니다. 하나는 큰 돌을 집어 던지는 덩치, 둘은 발리스타를 들고 쏘는 덩치, 셋은 큰 몽둥이를 고블린들을 두들겨패는 덩치.
식인종 중 경륜이 가장 높은 이의 명령에, 덩치는 가늠쇠 위에 샤먼의 머리를 올리고 쏠 준비를 합니다. 원래는 모가지가 뽑히는 '요술' 정도만 보여줘도 도망치는게 고블린인데 피에 미쳐 발광하는 건 분명 저 샤먼놈의 농간이 분명하고, 샤먼만 죽일 수 있다면 저 고블린들은 분명 아무것도 아닐 거라는 당연한 판단입니다.
"킥, 키이익?!"
고블린 샤먼도 자기를 노리는 발리스타의 흉악한 화살 크기에 경악합니다. 저거에 맞는다면 무조건 사망입니다. 나름대로 주술을 많이 연습한 덕분에 날아오는 화살들은 빗겨내고 느리게 만들어 약화시켰지만 저건 약화도 뮛도 소용이 없을 텐데. 고블린 샤먼이 공포에 질리기 직전, 엘리가 달려들어 발리스타를 든 덩치의 머리로 뛰어오릅니다. 갑자기 시야가 가려지고 머리에 성인 여성 하나가 매달리자 당연히 조준이 틀어지고, 발리스타 화살은 애먼 벽에 박힙니다.
"이, 이익! 뭐야 이거!!!"
덩치가 엘리의 정체를 고블린쯤으로 착각해, 털어내려 합니다. 하지만 엘리는 고블린 따위가 아닙니다. 덩치가 발리스타를 내팽개치기도 전에, 엘리는 하나하나가 단검 수준으로 날카로워진 손톱을 세워, 그대로ㅡ
푸샤아아악!!!
ㅡ덩치의 목덜미로 내리쳐 꽂습니다. 엘리는 손을 적시는 피에 희열에 미소지으며, 벌어진 상처로 손을 쑤셔넣습니다. 철퍽! 철퍽! 철퍽! 엘리가 손으로 할퀼 때마다 덩치의 모가지는 더 박살나서 너덜너덜하게 벌어지고, 그걸 본 몽둥이 든 덩치가 분노해서 엘리에게 달려들어 휘두르지만...
퍼석!
엘리는 손쉽게 피하고, 덩치의 너덜너덜해진 머리통이 대신 몽둥이에 맞아 뜯겨 날아갑니다. 야구 경기라면 홈런이겠지만, 머리통은 대신 뒤에 서 있던 한 식인종 궁수의 몸통에 맞아 그 궁수와 함께 터져버립니다. 엘리 덕분에 십년감수하고 끝낸 고블린 샤먼은 다른 샤먼을 불러 합동주술을 암송하기 시작하고, 엘리는 곧바로 돌 드는 덩치에게 달려들지만...
뻐억!
돌에 어깨를 맞아 어깨가 뒤틀리며 바닥에 떨어집니다. 절체절명의 상황, 덩치가 혼란스런 상황 속에 고블린과 식인종들을 밀치며 오더니, 그 은빛 머리와 붉은 눈을 내려다보고 무시무시하게 웃습니다.
하필 변태의 피를 마시는 건 거부감이 있었지만, 지금은 어쩔 수 없는 상황입니다. 엘리는 피를 벌컥벌컥 마시고, 아까 전에 마신 고블린 피에 더해 유리병 하나 분량의 피가 더해져 뒤틀린 어깨가 붙기 시작합니다. 엘리는 다시 덩치에게 달려듭니다. 이 덩치가 한번이라도 엘리를 붙잡는다면 엘리가 지겠지만, 엘리의 대응책은 간단합니다.
안 잡히면 그만입니다.
엘리는 덩치의 팔 아래로 미끄러져 들어가, 식인종의 바지를 찢고 그 아래 맨살에 상처를 남깁니다. 그리고 뒤돌아 주먹을 휘두르자, 엘리는 그의 날아오는 팔목을 철봉처럼 붙잡아 그 속도를 이용해 빙글 돌아서 위로 점프하고, 엘리의 날카로운 손톱이 핏자국을 남기고...
퍼퍼퍽!
엘리의 몸에 화살이 박히지만, 이상하게도 아프지 않습니다. 거한의 주먹이 코 앞에서 빗나가자 너무 아쉽습니다. 엘리의 손톱이 쇄골에 박혀 충돌하며 손톱이 부서지고 뽑히는 것 같은 감각에 입꼬리가 올라갑니다. 그렇습니다. 이 느낌은...
쾌감입니다.
ܟܕܥܕܠܣܣܥ. ܘܥܝܛܐ̈̈ ܩܣܕ
...엘리는 샤먼 쪽을 바라봅니다. 영문은 모르겠지만 자길 구해주고 골치아픈 놈들을 다 조지고 있는 그녀를 대충 자기 편인 셈치고 온갖 주술을 다 선보인 듯합니다. 그녀의 눈에 교활한 고블린들이 덩치의 온갖 숨겨진 약점을 찌르는 환각이 보이고, 피를 향한 갈증이 심해집니다. 더 고통받고, 더 피를 보고 싶습니다!
"이, 이익...!"
엘리는 덩치의 가슴에 달라붙습니다. 흉곽 부위의 수술한 흉터에 양 손톱을 박아 넣습니다. 식인종들의 화살이 수십발 꽂히고 덩치가 엘리를 마구 두들겨팹니다. 얼굴에 맞아 이빨이 나가도, 두개골에 금이 가도, 턱이 부서져도.
고블린 떼는 식인종들과 싸우면서 피해를 누적했고, 식인종들은 단순히 대가릿수 더 채우는 것 이외에 실제로 상대에게 피해를 줄 만한 덩치들 따위가 엘리에게 뚜껑이 거의 다 따였고, 구울은 있지만 뭐 상관없습니다. 이제 남은 건 랫킨입니다. 분명 어부지리를 노렸겠지만, 엘리에게 있어 이 싸움의 어부는 엘리 그 자신, 더 더해도 에레야 일행이지 그들이 아닙니다.
후우우우우우욱...
폐가 부풀어 터질까 걱정될 정도로 숨을 들이킨 엘리는, 눈에 죽여야 할 것들을 분명히 담습니다. 독바람 척탄병, 자폭쥐... 엘리는 쥐들 사이를 뛰어가 박쥐로 변해서 유유히 독바람 척탄병들 사이에 섭니다. 그리고 바로 한 마리의 털이 부숭부숭한 모가지에 아가리를 쩌억 벌려 깨물지만, 방독면의 가죽 때문에 이빨이 잘 박히지 않습니다.
"찌익!"
철퍽!
쥐들 사이에 숨어있던 암살쥐가 엘리의 등을 찌릅니다. 주술의 영향으로 쾌감이 느껴...져야 하는데 이상합니다. 뜨거운 고통, 칼을 맞으면 응당 느껴야 할 고통입니다. 엘리는 암살쥐에게 손을 휘두르지만... 엘리만큼이나 짜증나게 빠르군요. 암살쥐와 합을 겨루다 받아친 엘리는 도망치던 독바람 척탄병의 방독면 안구에 빈 유리병을 꽂아 박살내고, 탄띠에 매달려있던 독바람 폭탄이 바닥에 떨어집니다!
"찌, 찌이이익!"
암살쥐가 놀라서 피하다 말고 폭탄들을 다 받아내고 뒹굽니다. 여간 불안정한게 아닌 모양입니다. 그리고 다른 암살쥐가 엘리에게 달려듭니다.
여기서, 엘리는 딜레마에 빠집니다. 독바람 척탄병과 암살쥐를 어떻게 처리하느냐입니다. 암살쥐 처리에 주력한다면 독바람 척탄병은 무리에 숨을 게 뻔하고, 반대의 경우 엘리만큼이나 날쌘 이들이 에레야는 몰라도 경비 정도는 쉽게 담글 겁니다. 엘리가 다소의 안전, 생명의 안위를 포기한다면 둘 다 죽일 수 있겠지만 저 독가스를 실컷 들이마실수도 있을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