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모두는 누군가를 위한 이야기의 소품이자, 단역이자, 조연이기도 하고 동시에 자기 이야기의 주인공이기도 하다. 그 이야기는 비참할 수도, 행복할 수도 있고, 기승전결이 갖춰졌거나 이야기의 어떤 구성요소 하나도 제대로 된게 없을 수 있다. 하지만 아무리 엉망인 이야기가 되는 한이 있어도 우리는 선택하고, 때로는 강요당하면서 우리의 이야기를 써낸다. 이야기의 악마 이프가 이제 마침표를 찍으라 권할 때까지, 죽음이 우리를 찾아올 때까지. 왜냐면 우리는 살아있으니까. 그 이야기는 우리의 삶이니까.
@@ >>816 "옷은 없었어." "누누코는 요한이 일부러 그런 줄 알았는데. ...후흥." 그녀는 요한의 말에 그렇게 대답하면서 그의 말에 따라 시야를 넓게 펼쳐서 마을을 바라봤다. 마치 그림으로 그린 듯이 평화로운, 다르게 표현하자면 틀에 박힌 변두리의 마을이었다.
"노예를 안 써?" 의문스러운 되물음과 함께 누누코의 처진 눈이 살짝 커졌다. 하지만 그녀가 실제로 느끼고 있는 것은, 이 비든베일에 유행하고 있는 그런 '자비로운' 철칙 때문은 아니었다.
"...그럼 누누코의 동족을 찾을 수 없잖아." 누누코의 눈이 다시 원래대로 돌아와서는 -어쩌면 더욱 신경질 적이었을 수도- 마치 요한에게 따지듯 그렇게 말했다. 누누코의 '전사적인 사고방식' 으로는 고작 그정도의 발상이 한계였던 것이다. 아마도 그가 설명할 시간인 것 같았다.
>>815 술병은 점점 더 커지고, 술은 점점 더 독해집니다. 피 탄 와인부터 시작해서, 럼주, 소독용으로나 쓸 법한 고도수 증류 알코올까지... 엘리자베스, 아니 옐리사베타는 어색한 존댓말을 집어치우고 반말을 하면서... 지금 이 상황에서 그녀가 해야 하는, 그리고 가장 하기 쉬운 '술 마시기'를 하며 '옐리사베타'라는 자신의 가짜 인격과 완벽히 합쳐집니다. 이제는 연기도 아니고, 정말로 동쪽에서 온 가련해보이지만 술 냄새만 맡으면 꼭지가 돌아가는 진정한 나로즈냐 귀족 옐리사베타는 젠튼이 아니라 귀족들을 도발하듯 더 많은 술을 마십니다.
"야, 미친놈아. 너 죽어!"
그리고, 젠튼의 얼굴이 빨개지다 못해 노래져서 이대로는 큰일나겠다 싶던 다른 귀족들이 젠튼을 뜯어말리며 술 결투는 옐리사베타의 승리로 끝이 납니다. 귀족들은 옐리사베타의 튼튼한 몸에 박수를, 그리고 나로즈녜인의 주량에 감히 도전한 젠튼의 혈기에 박수갈채를 날리고, 젠튼을 술상에서 끌어내던 그의 친우들은 옐리사베타를 보면서 말합니다.
"그나저나 저 아가씨 취하긴 한거냐? 와인 한 병 마신 거랑 럼 10병 마신 거랑 얼굴빛도 눈빛도 똑같은데?"
"나로즈녜 귀족이라잖아. 엄마 젖이 아니라 술부터 마셨을거다."
...혹시나 위장 신분이 들통나나 했지만, 정말로 편리한 국적입니다. 하지만, 지금 엘리는 뱀파이어임을 감안해도 심각할 정도로 많은 술을 마셨고, 이는 엘리의 정신에도 영향을 끼치고 있습니다. 엘리의 시야가 빙빙 돌고, 말이 헛나올 것 같습니다... 옐리사베타와 엘리의 경계가 흐릿해져서, 그녀는 주변을 막 돌아다니기 시작합니다...
먼저 누누코와 자신이 힘을 합친 계기를 일깨워준 요한은 늘상 하던대로, 인간 사회에 대한 상식이 부족할 수밖에 없는 누누코에게 이곳을 고른 이유를 차근차근 설명해줍니다. 그러면서도, 기껏 잡은 호구인지 아니면 우량 고객님인지를 놓치지 않으려고 이 비든베일 사람들의 올바른 됨됨이와 생활정신을 칭찬하는 것도 잊지 않습니다.
"그러려면 일단 누누코 씨가 목욕도 하고, 옷도 새로 입고, 가능하다면 누누코 씨인지 모를 정도로 위장도 한 다음에 찾아가는 것이 좋을 겁니다. 그렇기에 제가 여기를 고른 거고요. 왜냐하면 방금 제 부족한 실력을 높이 사주신 이 분들처럼 문객들이 오가는 이야기를 다른 곳에 이야기하지 않고 선선히 받아들여주는 마을이 필요했거든요! 그리고 여긴 적격이죠!"
그러면서, 방금 충치 발치를 예약한 농부를 예의바르게 가리키며 "문제의 근본적인 원인을 알고 해결할 줄도 아는 안목이 있는 분", 황달기 있는 아이 데려온 아낙더러 "아이를 살리기 위해서면 백방도 백약도 돈이 아깝지 않은 참어머니", 같은 식으로 추켜세워주고, 사람들은 어려운 단어의 공세에 혼란스러워하면서도 어쨌든 자기를 띄워주려는 뉘앙스가 읽혀 기분 좋아합니다. 뭐 아무튼, 누누코가 알아야 할 정보를 말하자면...
"여기는 누누코 씨의 동족을 찾으러 온 게 아닙니다. 잠시 누누코 씨가 씻고, 밥도 좀 챙겨 먹고, 그리고 가능하다면 제대로 차려입기 위해 찾은 곳이죠. 그 다음부터는 뭐, 생각하시는 대로 그런 거에 신경쓸 시간이 없을 테니까요!"
@@ >>823 요한의 말에 그제야 다시 기억난듯, 누누코의 얼굴이 냉정으로 굳어졌다. 조금은 어둡기도 했고, 조금은 결의로 차기도 했다. 현실을 직시한 자의 표정이었다.
'그랬었지.' 누누코도 천천히 마차 위에서의 기억을 더듬고 정리한다. 그리고 둘 사이에 오고 간 거래. 그것을 재상기시킨다. 머릿속에서는 여전히 오랜 도주로 인해 생겨난 자욱한 안개가 존재하긴 했지만, 어쨌든 지금은 그것을 들출 정도는 되었다.
"알겠어." "하지만 요한." 그러나 그녀는 한 발짝 더 나아갔다. 요한과 누누코의 몸이 가까이 붙으면서, 거의 영거리에서 서로의 얼굴을 마주할 정도가 되었다. 그 안에서, 누누코는 자신의 본성을 조금 드러내었다. 보팔토끼의 호전성말이다. 이 사이로 숨결이 흘러나오고 눈빛이 번뜩였다.
"서둘러야 할 걸. 지금도 누누코의 동족은 짐승보다 못한 인간밑에서 구르고 있어. 시간이 없어." "그렇지 않으면. 누누코가 전부―" 그런데 그때, 둘 사이에 끼어들듯이 '꼬르륵' 하는 소리가 울렸다. 누누코는 자연히 수인의 육감을 따라 소리가 난 곳을 바라보았다. 그것은 자신의 배였다. 그리고 깔끔할 정도로 명백한 공복을 알리는 그 소리는, 누누코가 고개를 내려 복부를 바라보는 그 순간까지도 이어지고 있었다. 그것이 그녀의 상태를 반영했다.
>>824 배꼽시계가 울려퍼지고,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그 자리에서 입을 다뭅니다. 한 시도 쉬지 않고 나불거리며 돈을 뜯어내려던 요한의 입도, 동족의 소중함을 설파하던 누누코의 입도, 그리고 오랜만에 명의 겸 이발사 겸 뭐 아무튼 좋은 사람이 와서 좋다던 마을 사람들도. 사람들은 누누코의 눈치를 떠듬떠듬 살피다가, 충치를 뽑기로 한 농부가 누누코를 직접 찌르긴 그랬는지 옆으로 와서 요한의 옆구리를 쿡쿡 찌르고 말합니다.
"그, 잘 부탁드리는 의미로 오리알 좀 삶아드리면 어떻겠소잉?"
그러자, 요한은 웃으면서 누누코를 살펴보고는 말합니다.
"들으셨죠?"
중의적인 의미입니다. 하나는 당신 배에서 나는 소리를 들었죠? 이고, 나머지 하나는 말 그대로 저 농부가 하는 말대로 오리알 삶은거도 먹고 밥도 좀 먹고 기운 좀 내고, 다른 할 일도 좀 하자는 의미죠. 아무튼, 누누코는 지금 휴식은 취했지만, 충분한 영양 섭취 없는 휴식은 반쪽에 불과하니 뭔가 먹긴 먹어야 할 겁니다! 특히 누누코가 앞으로 사람도 여럿 죽이고 살려면요!
@@ >>826 "...후흥." 누누코가 예의 입버릇을 내며 뒤로 물러났다. 그래, 그들의 말이 맞았다. 복수를 위해선 미스터 스위트를 확인해야 했으니... 일단 무언가 위장에 넣어두는게 좋을 터였다. 누누코는 그 이상으로 말하진 않았지만, 그것은 분명 암묵적인 동의였다. 그리고 그 증거쯤 되는 것으로, 누누코는 요한, 혹은 충치를 가진 농부에게 이렇게 물었다.
>>825 머리가 빙빙 도는 것이 마치 엘리가 도는 게 아니라, 세상이 자기를 중심으로 360도로 도는 것 같습니다. 이대로 박쥐로 변한다면, 박쥐 한 마리 한 마리가 진심을 담은 구토를 여기 있는 모든 귀족들에게 흩뿌리며 사방으로 날아갈 것 같습니다. 엘리의 제정신과 함께 말이죠... 뭔가, 생각이 잘 되지 않습니다. 생각이 되긴 되는데, 생각이 두 계단, 세 계단으로 이어지지는 않고, 마치 계단이 아닌 허공에 발을 디디려다 실패하듯, 발을 자꾸 헛디디고 헛디뎌 부유합니다. 그리고...
"어이쿠!"
엘리는 무언가 짚을 것을 찾아 더듬거리다가, 귀족들이 앉아있던 탁자 하나를 그대로 밀어버립니다. 하지만, 그들은 엘리가 아니라 방금 전에 사교 파티 술 대결의 최고 기록을 갱신한 '옐리사베타'를 보고 있기에 그런 추태도 이해해주고, 그 틈을 타... 옐리사베타가 눈을 뜹니다. 옐리사베타, 사실상 엘리가 술에 박혀서 될 대로 되라고 세상에 제 판단을 떠넘기며 탄생한 인격(?)이 귀족들을 바라보더니 씩 웃습니다. 그리고는 갑자기, 그들 모두에게 도발을 날립니다.
"너희들은 전부 다 나처럼 되고 싶어하잖아? 근데 절대 그렇게 될 수가 없거든!!! 자아! 봐라! 난 집부터 이러케 머찌다구!!!"
갑작스런 헛소리에 귀족들이 깜짝 놀라지만, 옐리사베타는 신경쓰지 않고 남아있던 도화지 하나를 붙잡더니 그림을 그리기 시작합니다. 물론 물감은 빨간색, 엷은 빨간색, 진한 빨간색으로, 오직 빨간색의 명도와 채도만을 조절해 그림의 선과 면, 질감과 양감을 구분해야 합니다만... 옐리사베타는 무서운 속도로 그림을 그려냅니다. 그리고는 자랑스럽게, '나로즈녜 차르국'에 있는 예페슈크 남작가 저택 그림을 보여줍니다...
"...차르국은 집을 저렇게 짓나?"
"어디서 많이 본 것 같은데?"
인격은 옐리사베타 블라디미로비나 예페슈카여도, 기억은 엘리자베스 바토리 블라드 체페슈입니다. 뭐, 집이라고 그려봐야 당연히 엘리 일족이 살던 그 뾰족뾰족하고 무시무시하고 큰 그 저택이죠. 아주 잠깐, 엘리는 제정신을 차립니다. 하지만, 아주 잠깐일 것만 같은 예감이 듭니다. 엘리는, 취기 때문에 옐리사베타에게 다시 판단을 맡겨야 하기 전, 아주 간략적으로 행동 방향을 정할 수 있을 겁니다.
>>811 베스니와 아앨라나는 식사를 꺼냅니다. 장비를 다소 희생하는 대가로 식량을 좀 더 챙겨온 덕에 식량은 아주 풍족합니다! 민물고기를 잡아서 말린 어포와 딱딱한 건빵 같은 보존식품류는 양껏 먹을 양이 있고, 자칫 짜고 텁텁할 수 있는 식사에 변주를 더할 잼류와 신선한 과일도 섭섭잖게 챙겨와서 입이 심심하지 않습니다. 두 사람이 어디서 뭘 하건 무심하게 우는 올빼미 소리, 찌르르르 하는 풀벌레 소리도 오늘만큼은 두 사람을 부러워하는 듯하게 들립니다. 베스니는 당장이라도 전부 삼키고 싶은 욕망을 참고, 어포를 나뭇가지에 꿰어서 모닥불 위에 올리고 빙글빙글 돌려 겉면이 살짝 탈 정도로 데웁니다.
"여기 있어요!"
말라붙은 어포에서 지방이 지글지글 익으며 녹아내리고, 구수한 냄새와 함께 딱딱한 육포도 먹을 만하게 부드러워집니다. 딱딱한 건빵 같은 경우는... 뭐, 먹을 수 있는 식사니까 아무래도 좋습니다! 그래도 이빨보다는 단단하지 않으니 충분히 먹을 만하죠. 두 사람은 맛있게 식사를 즐기는데, 베스니는 양껏 먹는 중에 이야기합니다.
"혹시 아앨라나 님! 제가 이렇게 받기만 하기는 조금... 죄송해서 그런데, 혹시 바깥 세상 물건 중에 원하시는 거 있을까요? 예를 들어서, 좀 비싼 것도 괜찮아요! 하늘의 별을 좀 더 자세히 볼 수 있는 망원경이라던지, 아니면 검은 숲에서는 나지 않는 보석이라던지... 비싸지만, 그래도 여태까지 해주신 게 있잖아요!"
베스니의 말 자체는 맞습니다. 한쪽 다리가 말다리가 되긴 했지만, 아앨라나가 아니었다면 지금쯤 베스니는 음유시인이 아니라 음유시체가 되어 들개와 늑대들에게 한번 뜯어먹히고, 파리와 구더기에게 두번 뜯어먹히고, 마지막에는 땅에 묻혀 멧돼지인지 인간인지도 모르는 뼈다귀가 되었다가 흙이 되어서 사라졌을 겁니다. 그러니 이런 말을 하는 것도 이해는 되지요. 베스니가 바깥으로 나간 다음에, 그 나쁜 의미로 대단한 길 찾는 재주로 어떻게 아앨라나를 찾아온다는 건지는 의문입니다만.
>>827 "보통 마을 남정네들은 저기 아랫쪽 개울 가서 씻고 마을 여편네들은 저 위 가서 씻어요잉. 거 훔쳐보는 넘이 절~때 없다고는 말 못하는디, 잡히면 저렇게 만들어두는 식으로 우리도 노력을 하니까는 이해를 해주시라고잉."
이 썩은 농부가 큰 나무 쪽을 가리킵니다. 거길 보니... 도시에서 본 사람 모양의 '이상한 열매'가 여기도 매달려 있군요. 그런데 차이점이 있다면, 이 열매는 목을 맨 게 아니라 양 발을 매놨고, 깔끔하게 목만 매단 그것과는 다르게 두들겨패놔서 그런지 상태가 영 안 좋고, 그리고 살아있습니다. 아마 여자들이 목욕하는 곳을 좋다고 훔쳐봐놓고는 '어릴 적의 치기'로 무마하려다가, 동네 사람들한테 거꾸로 매달려서 퍽치기를 여럿 당한 모양입니다. 요한은 누누코에게 귓속말로 속삭입니다.
"농경 사회의 흔한 스포츠입니다! 큰 자극이 없으니 마을의 규율을 심하게 해친 이를 '단속'하는데 모두가 나서서 스트레스를 풀지요. 아무튼! 저는 제 실력을 믿어주신 손님께 좋은 서비스로 보답해드리러 가야 해서 이만! 아, 참고로, 누누코 씨가 씻고 나서 입을 옷 일체는 마을 아낙이 윗쪽 계곡에 목욕하러 간다길래 그 분께 맡겨놨습니다. 잘 찾아보시죠."
@@ >>830 "흥미롭네." 누누코는 인간모양 열매를 향해 다가가서는 그것을 자세히 살펴보기 위해 쪼그려 앉았다. 이 열매는 신기하게도 말하고 있었다. 조금 멍이 들었지만 제대로 '신선한' 것 같았다. 대단한 생명력이었다. 아마 이 경험은 이 열매에게도 귀중한 교훈이 되겠지.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말해둘게." 누누코가 손끝으로 그 열매의 뺨을 스치면서 말했다. 눈은 멍들었고, 이빨은 부분적으로 나가있었다. 누누코는 그것도 손대어 보았다. 그리고는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누누코네 고향에도 유행하던 놀이가 있었어." "좀처럼 재미 볼 기회는 없지만 모두가 즐거워하던 놀이였지." "...특히 누누코가 말이야." 누누코는 거기까지 얘기하고서는 무릎에 손을 올리고 힘을 주어 도로 일어났다. 과거에 대한 회상때문이었는지 그녀는 잠깐이지만 웃었고, 드러난 이는 줄지은 송곳처럼 날카로웠다. 하늘은 높고, 햇볕은 따스하게 내려쬐고 있었다. 그 아래의 마을은 정말이지 평화롭기 그지 없었다. 그 풍경의 가운데에서, 누누코의 발걸음도 서서히 움직였다. 이 썩은 농부가 알려준 개울가로 향하기 위해.
"흥미있으면 찾아 와." 그리고 곧, 그 자리에 그 말만이 잔영처럼 맴돌며 그녀의 실루엣은 서서히 사라지고 있었다.
반응이 없습니다. 아마 시체... 는 아니고, 숨 붙은 것만 빼면 시체나 다름없는 상태로 있는 겁니다. 그래도 누누코가 전하고자 한 교훈은 잘 알아들었을 것이라 믿으며, 누누코는 마을 여자들이 몸을 씻는다는 위쪽 개울가로 올라갑니다.
위 개울가로 올라가는 길은 꽤나 멉니다. 온 동네를 뒤집을 것 같은 돼지 멱 따는 소리도, 그에 질세라 이빨을 뽑히는 고통에 온 몸을 비트는 이 썩은 농부의 비명도 한 걸음 한 걸음마다 멀어지고 점점 깔깔거리는 말소리가 들려옵니다. 이번에 우리 집에서 닭이 병아리를 스무 마리나 품었다, 오리들이 개울가에서 노니까 고양이가 못 채가던데 나도 닭이 다 잡혀가면 오리로 바꿔야겠다... 평범한 이야기들입니다. 그리고, 잠시 멈춘 누누코는 아주 잠깐이지만, 고향의 풍경을 보았습니다.
"야, 물 튀기지 마!"
"야, 마지막이잖아. 이제 너 약혼식 한다며? 얼레리꼴레리~"
...물론, 누누코가 살던 곳에서는 이런 큰 개울을 정해두는 게 아니라, 개울을 보면 그때그때 목욕을 하고 남는 사람들이 누가 안 훔쳐보나 망을 봤지만.... 그녀를 받아들였던, 그녀를 하나라 생각했던, 그녀가 진정으로 생각했던 부족에서는 그녀에게도 이렇게 장난을 치는 동료가 있었고, 동포가 있었습니다. 그들을 생각하니, 누누코는 잠시나마 웃을 수 있지만...
"어? 그 약팔이 아저씨가 말한 아가씬데?"
"아, 안녕하세요. 옷은 여기 바위 위에 놔뒀어요!"
...웃음은 사라집니다. 예의바르지만, 어디까지나 부외자에게 보이는 예의에서... 누누코는 농경인이고 부족인이고 상관 없이 인간이라면, 사회에 한번이라도 발을 담근 자라면 알 수 있는 부외자의 벽을 느낍니다. 그래도, 누누코에게 동족을 찾고야 말겠다는 다짐을 새겨준 것은 고마울 따름입니다.
@@ >>832 개울로 걸어가며, 누누코의 입이 다시 원래대로 시옷자로 돌아왔다. 중간중간 마을에 울리는 돼지 멱따는 소리와 등 뒤에서 울리는 사람 멱따는 소리가 넝마 안에 덮인 누누코의 귀를 넘실거리게 했다. 다른 인간들은 어떻게 생각할진 몰라도, 누누코에게 그것은 좋은 환경음이었다. 물소리, 닭소리, 풀소리, 바람을 타고 전해지는 비명소리. 그것이 누누코에게 하여금 생명력을 느끼게했다. 이곳에 오기 전 마주쳤던 그 죽은 듯한 도시보다는 훨씬 낫다고 생각했다. 살아있음을 자각한다. 그것이 비명과 함성이 하는 역할이겠지. 누누코는 잠시나마 고향에 돌아온 듯한 기분을 느꼈다.
개울에 오니 이미 많은 인간이 그곳에 있었다. 저마다의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나누면서 웃고있었지만, 누누코의 등장에 그것은 덧없이 사라졌다. 누누코는 부외자의 벽을 느끼긴 했지만, 별로 개의치는 않았다. 오히려 자신에게 지대한 관심을 표하는 것보다 낫다고 생각했다.
"..." 그리고 누누코는 그녀들에게 한 명씩 시선을 번갈아 주다가, 그저 말 없이 몸을 감싸던 넝마를 벗어던졌다. 그제서야 누누코가 이제껏 숨기고 있던 기다란 토끼귀와... 조금 더 짧은 중간 길이의 토끼귀가 드러났다.
토끼귀가 드러나자 목욕하던 여자들은 전부 헉, 하고 숨을 들이마시더니 모두 누누코에게 시선을 집중합니다. 누누코가 무엇을 상상했건 간에... 상당히 의외일 반응을 보이면서 다가오더니, 위아래로 누누코를 훑어봅니다. 누누코의 눈은 그들을 빠르게 훑어봅니다. 그리고, 싸울 대상과 그러지 않을 대상을 빠르게 파악할 수 있는 전사답게... 누누코의 눈은 여기 있는 이들이 적대, 모욕, 경멸 같은 목적이 아니라 순수한 호기심과 궁금함, 반가움으로 자기를 둘러싸고 있음을 깨닫습니다.
"혹시 어디 사람이에요?"
"레포리드 계열이면... 우리 할머니가 토끼족이셨는데!"
"아이구, 이 예쁜 토끼귀는 어쩌다가 잘렸대...?"
누누코는 목욕에 집중하려고 하지만, 어쩌다보니 목욕은 시작도 안 했는데 물범벅이 아니라 질문 범벅이 된 기분입니다.
길을 떠나기 앞서 가져온 식량들을 먹을 차례가 왔어요. 식사의 조리는 그녀가 거들어 주었어요. 피워낸 모닥불의 따스한 열기로 인해 녹아가듯 하는 것을 바라보며 기다리던 저는 그녀로부터 제 몫을 받아 가져왔어요. 고요하게 보이는 숲으로부터 들려오는 소리와 함께 그 자리 잡은 어둠 속에도 생물들이 그 존재감을 들어내요
"지금까지의 대한 보답인가요? 음~ 제가 무엇을 바래야 할까요? 도시에는 향상된 기술을 바탕으로 다양한 것들이 만들어진다고 알고 있어요. 그 중에서 얻을 수 있는 것들이면 어떨까요? 마법이나 특이한 것에 관련되어 있다면 더욱 좋겠지요. 그러니까, 지금으로서는 망원경이라고 해두어도 괜찮겠지요"
그렇게 조리된 식사를 먹고 있던 저는 그녀의 질문에 생각해 보았지만 선뜻 결정할 수는 없었어요. 숲의 밖깥의 생활상에서의 것들에 대한 경험이 부족하고 저였기 때문에 이에 대하여 다양한 선택지 있다는 것에 무엇을 골라야 할까요? 경험은 부족하더라도 마녀 님의 서재에 있던 책들을 읽어 왔기에 지식은 어느정도 갖추고 있어요. 숲이 아닌 도시에서 구할 수 있는 것들을 말하는 것이 좋을 것 같아요
// 괜찮아요~! 매번 진행을 한다는 것은 어렵고, 그러다 보면 실수 할 수도 있고 그런 거잖아요
>>835 뱀파이어인 것을 숨겨야 한다... 엘리자베스 바토리 블라드 체페슈, 뱀파이어의 기억으로 옐리사베타 블라디미로비나 예페슈카, 인간의 인격을 연기하고 있는 그녀에게는 어려운 이야기입니다. 뱀파이어가 아닌데 뱀파이어인 걸 어떻게 숨기란 말입니까? 아니, 잠깐, 왜 내가 뱀파이어의 기억을 가지고 있지? 내가 왜 피를 빨았지? 내가 왜... 내가 왜..... 옐리사베타는 머리를 잠깐 싸매고, 젠튼만큼 무모하지는 않지만 레이디를 다루는 센스가 있는 한 남자가 그녀를 부축합니다.
"레이디, 많이 취하신 것 같습니다."
그리고는, 젠튼과는 다르게, 정말로 신사적으로 그녀를 필요할 만큼만 끌고 간 뒤 어디에 앉혀두고는, 자신의 명함을 남겨둔 채 조심스럽게 뒤로 물러납니다. 옆에서는 좀 더 들이대 보지 그랬냐고 핀잔을 주지만, 옐리사베타 입장에서는 안 그래도 머리 깨질 것 같은 상황에 방해하지 않아줘서 고마울 따름입니다. 옐리사베타는 뒤통수를 벽 쪽에 기대고 한숨을 쉽니다. 이 상태로 취해서 아무 대답도 못 하는 상태를 연기한다면, 최소한 숨겨지겠죠... 아마도요. 그런데, 벽 너머의 응접실에서 무언가 들려옵니다.
"...그년, 성가셔."
"집 지키는 개들 쪽은 내가 얘기를 해놔서 숫자를 좀 만져놨어. 그런데... 쓸데없이 의심 많은 년이 끼어들었어."
"...너네 개 간수 잘한 거 맞아? 우리쪽 애도 잡히고, 밑에도 다..."
갑자기, 동방의 귀족 옐리사베타가 아닌 이단심문관 에레야와 협력하는 뱀파이어 엘리자베스로서의 자신이 돌아와, 이 내용이 중요한 것임을 깨닫습니다. 하지만 엘리가 자세히 이야기를 들으려고 몸을 틀다가, 하필 유리잔을 떨어뜨립니다. 쨍그랑! 하는 소리와 함께 뭔가 중요해보이던 대화가 끊기고, 서둘러 나가는 소리가 들립니다. 옐리사베타는 의심을 피하려 눈을 감고 술에 골아떨어진 척 병나발을 불다가, 그들을 슬쩍 바라봅니다. 한 명은 등이 패인 붉은 드레스를 입은 여자고, 한 명은 흉갑을 입은 청년, 나머지 한 명은 노인입니다. 그들은 인파 속으로 사라지는데... 따라간다면 한 명만 따라갈 수 있을 거고, 아니면 다른 방법을 찾아볼 수도 있습니다.
>>839 "망원경! 알겠어요! 자이츠-카를 합자회사의 망원경은 제일 멀리 볼 수 있고, 튼튼한 건 빈첸초 탐험길드 직영제작소제가 최고에요. 고장났을 때 유지보수가 잘 되는 게 좋다면... 아! 마도생물학 쪽이 만든 도구생물 중에 망원관이라고 안 쓸 때는 흙에다 꽂아두고 거름이랑 물을 주면 스스로를 수리하고 자라나는 망원경 모양의 식물도 있답니다. 역시 그게 제일 좋겠네요!"
...이거, 첫째랑 둘째까지는 뭐 평범하게 성능이 좋느냐 튼튼하게 좋느냐의 문제인데, 세번째는 음... 진정한 신비는 검은 숲이 아니라 바깥에 있다는 생각까지 들 정도입니다. 아무튼 두 사람이 평범하게 밥을 먹고 있는데... 지글지글 익는 냄새가 온 사방에 퍼지면서, 숲 속의 배고픈 영혼들을 깨운 모양입니다. 벌레 몇 마리야 그냥 무시하던지, 아니면 고기인 셈 치고 먹으면 그만이지만... 좋다고 웃고 떠들고 있는 베스니와 달리, 이 숲에서 오래 살아온 아앨라나는 무언가 이상함을 느낍니다. 그리고, 한동안 조용하던 가말라시엘도 한 마디 거들어, 그녀의 촉이 맞다고 말하는군요.
"지금 웃을 때가 아닌 것 같은데요, 사도님?"
...슬쩍 앞을 보면, 한참 굶은 것 같은 불곰이 인간 암컷 두 마리(그런데 하나는 한쪽 다리가 말다리인)를 보고 입맛을 다시고 있습니다.
"하아." '다가오지 마' 라는 한 마디 하기가 이렇게 힘들어서야. 순식간에 쏟아지는 질문에 한숨을 뱉었다. 누누코가 제일 대하기 힘들어하는 인간상이란 잔학무도한 노예상도 아니고, 청산유수같은 사기꾼도 아니고, 바로 이런 저의없이 달려드는 인간들이었다. 상대의 종족이 무엇이건 간에. 누누코는 이 상황을 어떻게 할까 잠시 그자리에 서서 생각하다가, 그냥 무시하고 물 속에 몸을 들였다. 개울의 찬 물살이 누누코의 몸을 감쌌고, 기나긴 짙은 밤색 머리가 수면 위로 떠올랐다. 이대로 그냥 잠수해버릴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풀 컨디션의 누누코라면 4분 정도는 여유롭게 잠수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대로 말을 안하고 있으면 질문 공세가 더 강해질 것은 불보듯 뻔한 일이라서, 결국엔 이렇게 말했다.
인간이 아니야, 라는 말에 아가씨들은 서로를 쳐다보다가, 누누코는 알 수 없는 듯한 속뜻을 저들끼리 전달하더니 멋대로 누누코의 말을 넘겨짚고 이야기합니다. 이 여자들도 눈이 있고 귀가 있고, 눈으로는 누누코의 초라하고 남루한 행색을, 귀로는 요한한테 들은 게 있을 테니까 뭐... 일종의 연민을 느꼈겠죠. 마을 아가씨들 중에서 가장 나이가 많아보이는 사람이, 물 속으로 앉아서 누누코와 눈을 맞추더니 말했습니다.
"아가씨, 무슨 생각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여기는 사람들 만만해보인다고 납치해서 팔아먹는 그런 곳은 아니에요."
"우리 할머니도 토끼족이라니까 그러네."
대충... 누누코와 대화를 하고 싶다, 누누코도 손님으로 맞이하고 싶다는 것 같지만... 뭐, 소득이 있을 리가요. 아가씨들은 불편한가보다, 어색한가보다, 그렇게 좋게좋게 생각해주며 누누코가 혼자 구석에서 씻을 수 있도록 배려해주려고, 조금 떨어진 다른 구석으로 가서 다시 이야기합니다.
>>848 옐리사베타의 술 취하고 비틀거리는 컨셉을 유지한자는 느낌에서도, 노인을 택하는 건 좋은 선택이었습니다. 옐리사베타는 술을 들이킨 상태로 온갖 추태를 부리면서 다가가는데, 그 몰골을 보고 비법하는 이들에게는 유감입니다! 옐리사베타는 웨이터가 들고 가던 술을 뺏어서 병나발을 불고, 탁자를 엎고 어깨를 툭 치며 지나가다, 노인이 다시 들어간 응접실 근처에 엎어집니다. 그리고...
"애들이 다 어이없게 죽었어. 한 년은 잡혀서 나발을 븰지 않나."
"아무래도 안 되겠어. 나는 살아야지..."
...노인이 다시 나가고 텅 비자, 옐리사베타가 아닌 엘리로서 고개를 든 그녀는 응접실을 쳐다봅니다. 들어가나요?
>>850 지금만큼은 술을 먹어 앞뒤 분간이 안 되는 동방귀족 옐리사베타, 그리고 뭐 하나라도 건져가야 하는 엘리자베스의 의견이 일치하고, 안 그래도 거리낌없던 성격에 술까지 들이붓자 거침없이 일어나 들어갑니다. 응접실 안에는 세월의 흔적이 녹아든 가구들이 놓여있는데, 개중에 유일하게 새로운 종이가 보입니다...
'하수구를 이용할 수 없으니, 거름으로 위장해 외부로 나가야 한다.'
'그 개새끼가 우리 쪽 끄나풀을 고문했다. 마리엘의 허브가 노출되었다.'
문득 이 부분에서, 엘리는 그 팔 잘린 밀수업자가 했던 말을 떠올립니다.
'마리엘의 허브! 마리엘의 허브 창고 42번 칸에 내 밀수품을 팔아서 쌓은 금화가 많아! 제발 그만 때려! 으아아아악!!!'
'이 마을 인간들이 적어도... 그 도시 근처에서 마주친 녀석들이랑 다른 녀석들이란 건 알고있어.' 그렇지만, 누누코에게 지금까지 박혀버린 관념과 부족의 관습. 그리고 보팔토끼의 흉폭한 본능. 만약 그들의 언동이 누누코의 신경을 조금이라도 거스른다면 -그들이 그런 의도가 없다고 해도-
'누누코는 이 인간들을 해칠지도 몰라.' 누누코의 진홍색 눈이 저편의 여인들에게 힐긋 향했다. 웃고 떠드는 얼굴들이 보였다. 그리고 마차 위에서 들었던 요한의 주의도. 아무래도 저들과 섞이는 건 어렵겠다고 누누코는 다시 한 번 생각하면서, 어느새 몸을 씻는 것을 모두 마치고 개울 밖으로 나오고 있었다.
>>855 누누코는 몸을 씻습니다. 어제만 해도 요한이 소독해줘야 했던 상처는, 소독을 잘 하고 연고를 바른 덕분인지 붉은 딱지가 앉아서 손이 닿을 때마다 간지럽습니다. 못 씻은지 얼마나 되었을까요? 일주일? 한 달? 누누코는 몸 곳곳에 묻은 때와 흙먼지를 씻어내고, 놓여있던 자갈 한움큼으로 몸을 박박 긁어서 때도 벗깁니다. 마지막으로 누군가 놔둔 잿물에 머리를 담갔다가 다시 헹구고... 누누코는 개울 아래로 땟국물이 흘러가는 걸 봅니다.
"..."
누누코는 바깥으로 나옵니다. 그녀는 고슴도치입니다. 그것도, 원치 않는 이에게 가시를 세우지 않는 법을 모르는 고슴도치. 계속 이렇게 살 순 없다지만 상관없습니다. 그녀는 찾아야 할 부족원이, 해야 할 복수가 있습니다. 빠르게, 기계적으로 목욕을 끝낸 누누코는 옷을 다 입고 나섭니다. 이제 어떻게 하나요?
@@ >>857 누누코는 물 밖으로 나와서 자신이 착용한 입은 옷을 살핀다. 허리를 비틀어도 보고, 팔을 움직이거나 엉덩이를 올려보기도 한다. 전사에게 장비란 중요한 것이었다. 지금 당장은 평화롭다고 하지만, 싸움이라는 것은 언제나 원할때에만 찾아오는 것이 아니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언제나 자신의 몸을 날카로운 칼처럼 준비시켜 놓을 필요가 있는 것이었다. 그리고나서는 미련없이 물가를 벗어나 자신이 거슬러 왔던 길을 도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오리알이라고 했었나. 보팔토끼는 육식이었다. 사실은 지금 저기 닭장에 있는 닭을 생으로 뜯어먹고 싶은 충동을 느꼈지만, 지금은 오리알에 만족하자고 생각하면서 요한을 찾아갔다.
우우우ㅡ 귀청을 뒤덮는 소리 아닌 소리가 절그럭거리는 쇠사슬 소리와 슥슥 끌리는 살이 마찰하는 소리를 멀리 밀어내고, 시야는 마치 물 속에 갇힌 것처럼, 두 눈이 따로 움직이는 것처럼, 여러개의 상을 띄우지만 겹치지도 합치지도 못한 채 따로 놉니다. 겨우겨우 눈을 뜨면 복면 쓴 남자가 그녀의 발을 묶은 채 질질 끌고 가는 것이 보이고... 이내, 그녀를 다른 '고기'들처럼 들쳐업어, 천장과 연결된 쇠사슬에 거꾸로 매답니다.
"...오랜만에 좋은 고기 납품이군."
복면 쓴 사내는 그렇게 이야기하고, 엘리는 간신히 맞춰진 초점으로 주위를 다시 바라봅니다. 돼지라기엔 팔다리가 너무 길고, 소라기엔 머리가 너무 작은 '출처 불명의 고기'들이 창백하게, 쇄골부터 하복부까지 절개된 채 내장을 싹 비웠습니다. 옆을 보면 복면 쓴 사내가 엘리 팔뚝만큼 긴 칼을 그녀의 목에 대는데, 그 순간ㅡ
"멈춰. 그 년. 연회로 간다."
엘리의 목을 그을 뻔한 칼날은 엘리의 경동맥 대신, 한 여자의 손아귀를 벱니다. 그 여자는 엘리가 지하수로에서 죽였던 사제와 똑같은 옷을 입었는데, 손아귀가 베여 피가 흐르는데도 무덤덤합니다. 그에 사내는 어깨를 으쓱이고 사슬을 다시 풀기 시작합니다...
...엘리는 어떻게 합니까? 좀 더 비련의 희생양을 연기할 수도 있고, 연기는 집어치울수도 있고, 선택은 당신의 몫이니까요.
>>860 내키는 대로 한다면, 그리고 그럴 수 있다면 누누코는 당장이라도 저 닭장에 들어가서 한두마리 정도는 물어 나오고 싶은 심정입니다. 그도 그럴 것이, 보팔토끼 수인은 일부의 경우(구토를 위해, 소화를 위해, 식물성 기름 섭취)를 제외하면 육식 이외에는 입에 대지 않았고 지금의 그녀는 숲에서 토끼 한두마리에 숲쥐 굴 하나를 비운 것을 제하면 먹은 게 없었습니다. 하지만 누누코는, 그녀가 개울의 목욕하는 아가씨들에게 말한 것과는 달리 아무튼 '인간'이었기에 참습니다.
누누코는 요한을 찾아 마을을 돌아다니다, 요리 냄새를 따라 자기가 깨어났던 집으로 돌아갑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누누코는 아낙과 함께 요리하는 요한을 발견합니다. 정말... 지나칠 정도로 안 어울리지만요.
"누누코 씨! 앉아계시죠! 조금 있으면 다 됩니다!"
요한은 아낙네를 도와서, 토끼고기를 퐁당퐁당 썰어넣고 치즈와 함께 뭉근하게 끓인 밀죽, 기러기 간 구이, 어포-토끼 꼬치, 통닭을 내옵니다. 군침을 흘리는 부부와 함께 앉은 요한이 말하는군요.
@@ >>864 누누코는 순간적으로 얼어붙은듯 시선을 때지 못했다. 그것은 음식 재료에 토끼고기가 들어가있어서도 아니고, 요한이 요리를 돕고 있어서도 아니었다. 단지... 시야에 담고있는 현장에는, 그녀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호화로운 만찬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누누코는 자기도 모르게 순간 입에서 침이 고이는 것이 느껴졌고, 그것이 입술 사이로 새어 흐르려고 할때 얼른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휘휘 저었다.
"...오리알이 준비되어 있는 거 아니었어?" 근처의 자리에 천천히 몸을 내려 앉고서는 요한에게 그렇게 물었다.
>>863 툭! 옐리사베타를 계속 연기하기로 한 그녀의 몸이 바닥에 툭 떨어지고, 사제복을 입은 여자는 엘리의 턱을 붙잡더니 쯧, 하고 혀를 차면서 복면 쓴 사내를 책망합니다. 뭐든 간에, 사람 죽을 뻔한 자리에서, 그리고 곧 죽을 자리에서 할 말은 절대 아니지만 말입니다. 복면 쓴 사내도 지지 않고 맞서지만 결국 져주는 척 하는군요.
"내가 버러지들 말고 좀 있어보이는 애들, 특히 아가씨들은 좀 조심히 다루라고 말 안 했나?"
"1분 전까지만 해도 도축 확정된 년이었잖아. 아무튼, 이 년은 왜 그렇게 난리지?"
"나로즈녜 차르국, 먼 동네에서 왔어. 죽어도 소식 닿는데는 한참이고, 처리만 잘 하면 그냥 죽었다고 판단하고 끝날 거란 말이야."
...에레야가 나로즈녜 차르국 소속으로 위장 신분을 만들어준 이유를 이제야 알 것 같습니다. 일단 나로즈녜 차르국은 정말로 먼 곳에 있으니까, 남작가 한둘쯤이야 즉석에서 지어내도 그럴듯하게만 꾸미면 당장은 의심받을 일도 없고, 아무리 간 큰 범죄자들도 귀족은 안 건드리지만, 먼 나라의 '남작'이라고 하면 조용히 제끼면 할만하겠는데? 라 착각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다시 엘리사베타가 되어, 이번에는 묶인 상태 그대로 테이블에 올라서 실려갑니다. 그리고, 다시 어둠이 옵니다. 기절한 것은 아닙니다. 갑자기, 어두운 곳에 들어간 겁니다.
"...여러분. 오늘의 미식을 소개합니다."
그리고 눈이 아플 정도로 밝은 빛이 옐리사베타, 엘리를 비춥니다. 그리고는 갑자기 십수명 정도 되는 이들의 박수 소리가 들려옵니다.
"요즘 들어 많이 힘드셨을 겁니다. 자꾸 쓸데없는 일로 사람 귀찮게 만드는 놈들이 많았으니까요... 하지만, 오늘은 다릅니다. 저 먼 나라에서 온 귀족 영애 하나 죽는다고, 그 나라에서 신경이나 쓸 수 있겠습니까? 하하, 농담도."
그 와중에, 아까 전에 봤던 흉갑 입은 청년이 나와서 이 '미식'이 얼마나 안전한지 설명하는군요.
"언제나 그렇듯, 집 지키는 개새끼들은 아무 말도 못 합니다. 아마 이 여자가 여기 왔다는 것도, 잊어버리겠죠."
계속 헛소리가 나오는 동안, 엘리는 자신의 상태를 확인합니다. 뒤통수를 처맞아서 생긴 뇌진탕은 가라앉았지만, 손발이 묶여있습니다.
요한은 손가락을 딱 튕기더니, 호주머니에서 삶은 오리알을 꺼내 누누코 쪽으로 휙 던집니다. 보팔토끼의 반사신경과, 그에 더해 오랫동안 해온 수련 덕분에, 누누코는 '잡아야겠다'는 생각보다도 손이 앞서서 오리알을 탁 잡아냅니다. 갓 삶았는지 따뜻함이 느껴지는군요. 요한은 침 안 새게 하려고 온갖 노력을 다 하는 누누코를 귀여운 듯 바라보면서 이야기합니다.
"많은 문화권에서 더 많은 술과 더 많은 식사를 해치우는 것도 전사의 한 덕목으로 간주합니다. 많이 먹어야 힘도 많이 쓴다는 거죠. 아무리 누누코 씨가 힘이 세도, 그 많은 이들에게 일일이 다 복수를 하고 다니려면 좀 먹고 다니셔야죠?"
약간은 아버지 같으면서도, 약간은 어머니 같은 말투로 요한은 다시 한번 앉으라고 권유하고, 옆에 앉은 부부도 불평합니다.
@@ >>867 "아니, 누누코는―" 그러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달걀이 휙하니 날아왔고. 누누코의 손은 순전 반사적인 반응으로 그걸 받아내었다. 아직도 속에 뜨거울 정도의 온기를 담고있는 오리알이었다.
'...딱히 오리알이 먹고싶다는 이야기는 아니었는데.' 누누코가 무어라 하려 했던 것은, 오리알이 특별히 먹고싶었다기보다는 이미 이 식탁엔 오리발 보다 훨씬 호화로운 만찬이 올라올 예정이었기 때문이었다. 그것에 대해서 이유를 알 수 없었다. 구태여 외부인인 사람들에게 왜 이런 만찬을 먹이려 하는가. 이것도 요한이 그들을 구워 삶았기 때문일까. 의심 반, 본능 반. 그리고 알 수 없는 작은 감사함을 느끼며- 누누코는 조용히 삶은 오리알을 우적 씹으면서 자리에 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