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모두는 누군가를 위한 이야기의 소품이자, 단역이자, 조연이기도 하고 동시에 자기 이야기의 주인공이기도 하다. 그 이야기는 비참할 수도, 행복할 수도 있고, 기승전결이 갖춰졌거나 이야기의 어떤 구성요소 하나도 제대로 된게 없을 수 있다. 하지만 아무리 엉망인 이야기가 되는 한이 있어도 우리는 선택하고, 때로는 강요당하면서 우리의 이야기를 써낸다. 이야기의 악마 이프가 이제 마침표를 찍으라 권할 때까지, 죽음이 우리를 찾아올 때까지. 왜냐면 우리는 살아있으니까. 그 이야기는 우리의 삶이니까.
>>641 누누코는 도시를 멀리서 한번 훑은 후 내려가면서 디테일을 눈에 담습니다. 도시에 딸린 작은 마을들, 아직 매달리지 않는 난민들, 줄 서서 밀죽 한 술이라도 타려는 이들의 행렬, 야위어 축 늘어진 살가죽과 갈비뼈가 선연한 젖소. 여기는 난민촌이라 봐도 믿겠습니다.
누누코는 한바퀴 빙 둘러보고, 어렵겠다고 직감합니다. 경비들은 지쳤지만 눈빛만큼은 삼엄하고, 기병 순찰대들이 계속 주위를 순찰하고 있습니다. 누누코의 싸움 실력이라면 지친 경비들이 지키는 검문 초소쯤은 식은죽 먹기지만, 그 다음에 어떻게 될지는 자신할 수 없습니다. 전투는 이겼으나 전쟁은 진 그녀의 운명이 경고하는군요. 그때, 사람들이 몰린 곳에서 말소리가 들립니다.
"이봐, 이거 진짜야?"
"어허, 쉿! 누가 들으면 어쩌려고!"
가까이 간 누누코는 어떤 여자가 하는 말을 듣습니다.
"찔러보기만 할 놈들은 꺼져. 도시에 들어가서 한 달 일하는 대가로 도시로 들어가게 뚫어줄테니까, 붙을 사람만 붙어."
//요한 브룬은 설정은 킹 슐츠 맞음! 이름의 유래도 추리에 성공한다면 그 npc 서사도 감이 잡힐듯
어쩔 수 없었다. 이별은 언제나 갑작스럽게 찾아오는 것이니라. 원하든 원치 않든 언젠가는 떠나게 되는 것이 인생이니, 짐의 사랑하는 이들이 이다지도 열심히 준비해준 것 앞에서 눈물을 보이는 것은 그들의 노력을 깎아내는 것이니라! 짐은 울지 않았느니라. 어쩐지 뭔가 이상한 것이 흐르는 것 같았지만 그래도 울지 않았느니라!!!
"음!!! 짐이야말로 그간 고마웠느니라. 허나, 오늘이 이번생의 이별이 될리는 없으니!"
먼저 잔을 들어올린 고드뢰를 따라 적당한 고기를 손에 들고 높이 들며 소리쳤느니라. 짐보다 먼저 잔을 든 것은 경을 쳐도 할 말이 없으나 저자가 저러는 것 역시 언제나 있던 일이 아니더냐! 왁자지껄해진 축제의 장에서 짐은 할멈과 할아범 사이에 자리를 잡았느니라. 이제와서는 고정석에 가까웠기에 그걸 막으려는 이들도 없었고.
"할멈, 할아범. 자식들은 어디에 살고 있더냐? 짐이 한번 만나서 꼭 혼이라도 내주마. 사람된 자라면 부모는 1년에 두번은 만나러 와야하는 것이거늘."
@@>>648 누누코는 도시 주위의 전경을 눈에 담았다. 특히 눈에 띄는 것은 후미지고 작은 마을이었다. 너무나 낙후된 곳이었다. 인간들이 말하길, '야만적'이고 '미개'하다고 하던 누누코의 고향, 신성한 들판보다 더. 그런 곳을 속으로 코웃음치며 지나가려고 하는데, 짧은 이야기가 공기를 타고 전해져 와 누누코의 발걸음을 멎게했다. 후드 속에 숨겨진 귀가 쫑긋대며 부스럭거렸다.
'도시에 들어갈 수 있다면.' '이용해보는게 좋을지도 몰라.' 도시를 정면으로 파훼하는 것은 힘들다. 아직 누누코의 몸에 머무르고 있는 피로, 자잘한 통증과 굶주림같은 것들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물론 인간들을 위해 일한다는 것은 별로 마음에 드는 이야기는 아니었지만. 어차피 도망치는 몸이기에, 틈을타서 도망쳐버리면 된다고 생각하는 것이었다. 그것만으로 그저 완벽한 계획이다. 그렇게 생각하면서 누누코는 입가에 희미한 미소를 띄웠고, 조용히 걸어가 이야기의 주축이 되는 곳으로 가서 섰다.
>>649 사람들은 웃으면서 잔치를 즐깁니다! 솔직히 말해 제사는 알 바 아니고 젯밥에나 관심있는 놈들이 없다고는 말 못하겠지만, 무시합시다! 그런 인간들 일일이 신경쓰면 고기맛 다 죽습니다. 동방을 가보기는커녕 동방 음악을 들어본 적도 없는 음유시인이 제 딴에 '신비한' 동방 음악을 연주하고, 그 사이에 노부부가 이야기꽃을 피웁니다.
"아들 웁제크는 보셴 시에 있는 행정관 순회출장소에서 서기로 일하고, 딸 레야는 저기 북쪽에 이름도 어려운... 노르드보티? 아무튼 그 항구에서 징수관보로 일한다는데... 영감. 그 항구 이름이 뭐였지?"
"노르드보티예체쉘링. 레야 이 년 머리가 굵더니, 지 애미애비도 보기 싫어서 우리 같은 늙은이들은 발음하기도 힘든 곳에 직장을 잡았어."
...라고 말하다, 힘레먼이 브우니크를 살피더니 고개를 끄덕입니다. 그러자 브우니크 할멈은 동전 자루를 꺼내 히샤히메에게 줍니다.
"애들이 보낸 건데, 내가 자식 키웠지 언제 따박따박 돈 보내는 빚쟁이 키웠나. 난 이 돈 보기 싫다. 이샤힘 노잣돈 해라."
>>650 검문소 문이 열리고, 샤토 왕녀 일행은 별 문제 없이 검문소를 빠져나갑니다. 아까 전에는 경비병 때문에 일이 골치아파질 뻔 했지만, 알란을 만난 덕분에 일이 잘 풀렸습니다. 테렌을 오래 본 듯 자연스레 아는척을 하니, 왕녀가 궁금해서 물어보는 건 아주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알란 마누엘, 잘 아는 친굽니다."
테렌이 수인들치곤 높이 올라간 케이스긴 하지만, 하급병사와 노역 등에 복무하는 수인들 사이에서 진짜 유명한 건 알란 마누엘입니다. 기사만큼은 아니지만 왕도의 한 구역의 경비대장을 맡을 정도로 높이 올라갔고, 수인들의 어려운 삶을 고려해 합리적으로 치안 업무를 운영하고 개인적으로도 알고 돕는 수인이 많아 발이 참 넓다는 겁니다. 테렌의 견습기사 서임까지 어려울 때 이것저것 도와준 것도 알란이었다 합니다.
"그 빚은 잊지 않고 갚았지만, 더 이야기해보려는데 알란은 경비대장으로, 저는 견습기사로 바빠져서 잘 마주치지 못했습니다."
그렇게 말하며 테렌은 말을 끌고 가고, 바닥에 짜맞춘 네모난 돌을 말발굽이 두들기는 소리와 함께 밤의 불빛이 그들을 찾아옵니다. 밤에도 대낮같고 파티가 끊이지 않는 귀족가를 지나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인지, 이곳에선 걷는 이보다 마차와 말을 탄 이가 훨씬 많습니다.
사람들을 불러모은 여자가 이런 일이 가능한 이유, 즉 '사업 모델'을 설명하면서 사람들을 안심시키려고 합니다. 불법 체류자가 경제에 미치는 영향, 이민자와 불체자 사이의 회색 경계 같은 도시인들이나 신경쓰는 헛소리를 죄 쳐내고 누누코의 지적 수준에 맞게 본론만 말하면, 나무통 안에 들어가 술통으로 위장해 들어가게 도와주는 비용이 5탈러 후불이고, 한달 동안 부자의 집에서 궃은 일을 하면 대충 5탈러가 나오니 고생 좀 하면 된다는 겁니다.
"고향에서 장작패기 안 해본 사람? 장원에서 노역 안 해본 사람? 딱 그런 것들이야."
그러자, 튀어나온 물배만 빼면 전부 홀쭉한 사내가 손을 들어 묻습니다.
"그럼 밥은?"
"머슴 하려면 귀족집 머슴하란 말도 몰라? 당연히 나오지! 저 도시는 말이지, 댁들이 살던 거지동네가 아니라고. 그래서, 할 사람?"
몇몇 사람들이 앞으로 나서고, 남은 이들은 눈치를 봅니다. 누누코가 끼려면 지금밖에 기회가 없겠군요.
힘없는 울음소리와 함께 닭의 목이 꺾이고, 엘리는 목 부위의 털을 뽑습니다. 인간은 생닭을 먹으면 탈이 난다고 알려져 있지만, 피만 쪽 뽑아먹는데다 인간도 아닌 엘리에겐 해당사항이 없으니 넘깁니다. 포도식초 병을 꺼내 털을 뽑아낸 부위에 부어 한번 닦아내면, 교양 있는 뱀파이어의 한끼 식사 준비가 끝납니다.
콰직
엘리가 이빨을 박아넣고, 송곳니를 견디기엔 너무 작고 연약한 닭의 경추까지 이빨이 닿습니다. 한번 목뼈가 꺾이며 목을 헤집었기에 피가 배어나왔고, 엘리는 닭의 하얀 살결에서 느껴지는 포도식초의 산미와 첫 피의 달콤함이 어우러진 새콤달콤한 맛을 음미합니다.
닭 등 동물의 피를 마시는 것을 보고 다른 이들은 궁상맞다 할지도 모르지만, 어차피 본인들도 잡아먹는 동물의 피를 빤다고 뭐라 하는 인간은 없고, 엘리는 계혈을 좋아합니다. 그러면 된 거죠. 아, 한가지 더 좋은 점을 떠올렸습니다.
툭
엘리는 바스러질 정도로 피가 빨린 닭을 바깥에 돌아다니전 도죽고양이의 머리 위에 던지면서, 닭은 죽을 때까지 빨아도 된다는 점이 좋음을 상기합니다.
@@ >>663 누누코는 후드 안쪽에서 웃는 여자를 향해 의미심장한 눈길을 한 번 주더니, 금방 눈을 감아버렸다. 그녀를 따라가면 술통을 마주할 수 있었다 잔뜩 쌓여있는 그것들은 이미 뚜껑이 모조리 열려있었다. 물론 그 안에는 무엇도 차있지 않다. 누누코는 고개를 돌려 이 일의 주선자로 보이는 여자를 한 번 쳐다보고는, 이내 술통 안으로 자신의 몸을 집어넣었다.
>>664 "좋아. 조금만 참아. 좀 흔들릴 수도 있겠지만, 저 더럽고 추한 바깥이랑은 안녕이라고."
여자는 그렇게 말하고, 휘파람을 불자 인부들이 나타나더니 누누코를 포함한 사람들이 들어간 나무통 위에 나무 뚜껑을 덮고 단단히 못질합니다. 땅, 땅, 땅, 땅, 땅, 소리가 마치 머리를 두들기는 것처럼 크게 들린 후, 무심코 손을 뻗어 위로 밀어보니, 지금처럼 완전히 쪼그려서 제대로 몸을 낮춰 자세를 갖출 수 없는 상황에서는 도저히 부술 수 없을 정도로 단단하게 밀봉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어두운 통 속에서 유일한 빛은 정수리 바로 위에 난 나무통의 숨구멍 하나뿐인데, 영차! 영차! 하며 천을 덮어씌우는 소리가 나더니 그 작은 빛마저 사라져 완전한 어둠이 남습니다.
그리고는, 덜컹! 쿵! 하며 마차가 흔들립니다. 마차를 개판으로 만들었는지, 축이 뒤틀렸는지, 아니면 길이 망가졌는지, 나무통 안에 들어있는 누누코는 한번 흔들릴 때마다 허리를 누가 걷어차는 것 같은 통증을 맛봅니다. 옆에서는 진짜로 아픈지 아이구! 으악! 하는 소리가 들리는군요. 그래도, 도시 안으로 들어갈 수 있다고 말한 건 거짓이 아닌지 경비병과 말하는 소리가 들립니다. 이건 술이다, 쉬기 전에 납품해야 한다... 그러더니, 경비대에서 '검역'해야 하니 샘플용 술을 주겠다고 말하는 것도 들리는군요. 누누코도 잠깐이지만 인간의 땅에서 생활을 했으니 압니다. 저건 뇌물입니다. 그렇게 무사히 통과한 나무통 속 누누코는 계속 가다가, 어딘가에서 멈추고 천막이 걷히는 소리가 들리자 드디어 나가나 기대합니다. 하지만...
"부어!"
갑자기 숨구멍으로, 차가운 액체가 쏟아지기 시작합니다! 놀랄 새도 없이, 차가운 액체는 누누코가 깔고 앉은 바닥에 차더니 점점 위로 올라오기 시작해 턱밑까지 차오르고, 이내 얼굴까지 잡아먹어 버립니다. 필사적으로 나무통을 긁고 치지만, 쪼그린 자세와 수압이 방해하는 상황에서는 그녀마저도 힘을 제대로 낼 수 없습니다. 어떻게든 숨구멍을 막아보려 하지만 너무 늦었습니다. 작은 나무통 안에서, 부글거리던 누누코는 정신을 잃습니다...
...팟!
눈을 뜹니다. 덜컹거리고 있지만 최소한 나무통 속은 아니군요. 주변을 둘러보니 누누코는 함께 자원했던 다른 사람들과 쇠창살 마차에 실린 채 어딘가로 향하고 있습니다. 화가 나서 아무거나 부수려는데... 다들 척 보고 보팔토끼 수인을 그대로 내버려두면 뭔 일이 날 지 알았는지, 누누코는 양 팔과 양 손을 뒤로 묶어버리고, 하체는 다리부터 무릎, 허벅지까지 8단에 걸쳐 묶어놨습니다. 이거, 묶고 푸는 것만 돈을 줘야 하겠는데요.
>>665 엘리는 잠에 듭니다. 식인종들과 싸웠을 때는 돌아와보니 기껏 돈 내고 빌린 여관방이 박살났고, 지하수로 안전가옥에서는 자려는데 에레야가 문을 쾅쾅쾅 두들기며 방해했죠. 하지만 식인종들의 본거지는 에레야와 함께 열심히 박살내놔서 경비병들이 뒷처리중이고, 여관방을 박살낸 괴물은 엘리가 다 죽인 걸 에레야가 막타만 뺏어 먹었고, 유일하게 살아남은 에레야는 지금 베르야와 옥신각신 싸우고 있겠죠. 숙면을 방해하는 모든 걱정거리가 사라진 엘리는 자연스럽게 잠에 듭니다...
그리고 꿈 속에서, 무언가 속삭임이 들리는군요.
"당신은 섞일 수 없는 것과 섞이려 하고 있소. 그러고자 한다면, 왜 섞일 수 없는지 이유부터 찾으시오."
...팟, 눈을 뜨면 어느새 밤입니다. 아래에서는 자는데 시끄럽다는 민원 때문에 간드러지는 자장가만 연주하는 음유시인의 노랫소리가 들려옵니다.
@@ >>666 누누코의 암전되었던 시야가 개이고 잃어버렸던 정신이 돌아왔다. 고개를 들어올린다. 그와 함께 서서히 주변 상황이 파악되기 시작했다. 시간은 오래걸리지 않았다, 뻥 뚫린 하늘과 덜컹거리는 마차, 우울한 표정의 사람들. 그리고 쇠창살. 불쾌한 느낌이 엄습했다.
'그 여자...' 통에 들어가기 전부터 거슬렸던 그 여자가, 누누코의 기억을 순간적으로 스치고 갔다. 그 기회주의적인 웃음, 처음부터 마음에 들지 않았었다. 그래도 잠깐 참으면 될 거라고 생각했는데... 결국은 이렇게 되는 건가? 내가 신성한 들판을 지키지 못해서? 내가 그 돼지를 죽이고 도망친 노예라서? 아니면 그저 놀기 좋은 '값비싸고 희귀한 수인' 이어서?
'제길, 제길... 제길!!' '빌어먹을 붉은 잎 신수여!' 누누코는 이내 분개하며 주변에 있는 모든것을 눈에띄는 대로 부수려 했다. 그러나 그것마저도 할 수 없었다. 자신의 몸에 있는 구속구가 그녀의 행동을 완벽하게 저지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전사였던 누누코는 빠르게 알아차린다. 이것은 보통의 솜씨가 아니라고. 훈련이 되었거나... 또 다른 기술이 들어간 구속이라고. 이내 누누코는 포기하듯이 몸을 늘어트리고 쇠창살에 몸을 기대듯이 뉘였다. 다만, 그녀의 처진눈매를 뚫고, 눈동자에는 방황하는 분노와 증오만이 뒤섞이며 조용히 타오르고 있었다.
>>669 아앨라나가 가말라시엘과 이야기하는 동안, 어디선가부터 다시 말소리가 들려옵니다. 베스니입니다.
"으아아아아!!!!!"
방전되지도 않는 대단한 체력으로 달려온 베스니는 그대로 나무들과 부딪쳐 뒹굴고, 넘어지더니 아앨라나와 눈이 마주칩니다. 그리고, 가말라시엘 님이 봉인된 지팡이가 불길하게 암전하고, 베스니가 달려온 길이 검은색으로 일렁이는군요. 가말라시엘의 소행이 맞는 듯합니다. 가말라시엘은 껄껄 웃으면서 이야기합니다.
"대가는 사도님이 치르지 않습니다. 안심하시죠."
...어쩌다보니, 결과적으로 베스니를 찾았습니다.
// 다음 답레부터는 아앨라나가 구체적으로 무슨 행동을 하려고 하는지 묘사해줬으면 좋겠어!
>>672 누누코가 분노에 몸을 뒤틀지만, 철창 안에서의 분노는 찻잔 속의 태풍과도 같아서 앞에서 마차를 끌고 가는 노예상들에겐 아무 감흥도 없습니다. 노예들은 묶인 이상 아무 위협이 되지 않고, 노예주들은 고삐를 쥔 이상 위험하지 않습니다. 누군가 노예제를 처음 고안해낸 이래 수천년간 계속 유지된 진리였습니다. 물론 누누코는 그냥 묶어서 통제될 위인이 아니었기에 아주 제대로 묶어야 했지만 말이죠. 노예상들은 누누코의 난동을 무시한 채로, 저들끼리 이야기를 나눕니다.
"이번 애들은 어디로 판대?"
"반은 킬리츠 경매장, 반은 로데스 직송."
킬리츠 경매장은 누누코가 150탈러에 낙찰되어 팔린 곳이었고, 로데스는... 누누코가 제 주인인 미스터 스위트를 찢어죽인 곳입니다. 이거 안 좋은데요. 하지만 지금은 방법이 없습니다. 혹시 이송 과정에서 빈틈이 생길지도 모르지만, 지금은 그 어떤 빈틈을 만들 방법도 없습니다. 이대로 끝나는가, 들어가서 탈주와 반역의 대가로 사형당하나 싶고, 몸부림도 힘이 빠져서 어느새 밤이 됩니다. 누누코는 반쯤 잠들고 반쯤 깬 상태로 실려가다가, 갑자기 마차가 멈추자 관성에 쇠기둥에 머리를 쿵 박아 잠이 훅 깹니다.
"으악!"
"야, 조심하랬잖아!"
"에이, 씨..."
철장의 모서리가 부서지고, 노예들이 깜짝 놀라 웅크리는 동안 누누코의 손가락에 작은 쇠조각 하나가 들립니다.
@@ >>675 "윽....!" 머리에 강력한 충격이 찾아오며 몽롱했던 정신에서 깨어난다. 느껴지는 통증에 눈을 자연스럽게 찡그리지만, 욱신거리는 머리를 쓰다듬을 손도 자연스럽게 다루지 못한다는 사실에 자신의 처지를 다시 한 번 상기시켰다. 그리고 그 때에, 누누코의 토끼귀가 쫑긋거렸고 무언가 떨어지는 소리를 포착해냈다. 딱히 자신의 처분을 기다리는 것외에 할 것이 없던 누누코는 자연스럽게 그곳으로 엉덩이를 옮겨가 그 무언가를 손에 쥐었다. 작은 쇠조각이었다.
'비록 혼자 살아남아 더럽혀진 배신자라고 해도...' '아직 붉은 잎 신수에게 완전히 버림 받은 건 아닌 모양이네.' 누누코는 그것을 놓치지 않게 꼭 그러쥐고는 날카로운 모서리를 사용해 손목의 구속부터 서서히 긁어내어 풀어가기 시작했다.
>>676 "아무튼 좀 조심 좀 해라. 지난 번에도 지랄 나서 우리 둘 다 죽을 뻔했는데..."
삭삭삭삭삭... 자유를 향한 수많은 노예 반란의 외침이 거대했듯, 그녀가 이 결박을 푸는 소리도 참 시끄러웠습니다. 서로 옥신각신하며 내 탓이나 네 탓이다 하던 노예상들은 계속 들려오는 삭삭삭 소리에, 처음에는 노예가 그럴 거라고는 차마 생각지 못하고 또 서로를 탓합니다. 물론 그 삭삭거리는 소리의 범인인 누누코는 저들이 계속 헛다리만 짚기를 바랄 뿐입니다.
"야, 이 새끼야. 너 또 엉덩이 긁냐?"
"지랄은. 니가 해놓고 나한테 또 지랄하는 거 아니냐?"
하지만, 두 사람이 어두운 밤 속에 램프를 켜서 비추자, 두 사람 모두 양 손이 엉덩이는 커녕 허공에 붕 뜬 걸 확인합니다. 그런데도 무언가 긁는 소리는 들려옵니다. 주변을 바라보다 뒤를 바라본 노예상들은, 하필 다른 놈도 아니고 누누코가 결박을 풀려고 시도하는 걸 목격하고는 경악합니다.
"이런 미친!"
"야, 이년 묶어!"
그때, 손목의 결박이 운 좋게 풀리지만, 한 명이 누누코의 머리칼을 철창 밖으로 잡아당긴 후 목에 밧줄을 걸어 잡아당겨 질식시키려 하고, 다른 한 명이 누누코의 허리춤에 칼을 찌르려 합니다. 손목이 풀린 건 다행이지만, 팔의 결박이 너무 심한 나머지 한 명밖에 못 죽일 것 같군요. 이 상황에서도 한 명이라도 죽일 수 있는 게 다행이지만 말입니다. 누누코는 어떤 선택을 할까요? 누구를 죽여도 되고, 제 3의 선택을 해도 됩니다.
@@ >>677 손목이 풀렸다, 그리고 그것과 거의 동시에 누누코의 머리가 잡아당겨지며 목에는 밧줄이 걸렸다. 다른 한 명은 그런 누누코를 향해 작은 나이프를 들고 달려들었다. 조여오는 목, 뒤로 젖혀진 고개. 그러나 누누코는 조금도 동요하지 않았고 눈알을 힐긋 굴려 짧은 순간 둘을 탐색하기 시작했다.
'누누코를 기절시키려 하네.' '하지만 안일해.' 그것은 냉정같은 것이 아니라, 전사의 본능이었다. 그저 누누코가 이보다도 거친 상황을 숫하게 거쳐온 전사였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누누코의 손이 풀려난 지금, 누누코의 눈에 두 사람의 모습은 그저 사냥감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사냥감이 저항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누누코는 그렇게 생각했다.
누누코는 눈 앞의 인간이 자신의 허리에 칼을 찔러넣기 위해 팔을 내뻗는 순간, 절묘하게 몸을 움직이며 흘려내고 손아귀에 팔을 쥐어 꺾어버렸다. 그리고 그가 놓친 칼을 반대손으로 잡아 내며, 인간을 더욱 자신쪽으로 끌어당겼다. 단단히 잡혀진 상태에서 넘어지며 팔이 있을 수 없는 각도로 꺾였고, 균형이 무너진 틈을 타 드러난 연약한 목에 칼날을 박아넣었다. 한 번으로는 부족하다. 두 번 세 번, 박아 넣어 그를 확실하게 침묵시킨다.
누누코는 그 인간의 팔을 꺾어버리고, 반대손으로 칼을 잡아내어 목을 찔러버립니다. 한순간에 너무 많은 일이 일어나고, 목을 조르던 남자의 얼굴에 동료의 피가 튑니다. 누누코는 혈향을 맡으며 자기 도박이 성공했음을 확신하지만, 목이 막히는 건 어쩔 수 없습니다. 이를 아무리 악물고 눈을 아무리 치떠도 숨이 막히는 건 어쩔 수 없습니다. 점점 숨이 막히고, 다시 한번, 나무통 속에서 물을 먹을 때처럼 점점 숨이 막히고, 다시 암전되는 그 순간입니다.
"으아아악!!!!"
누누코의 목을 조르던 남자의 허리에 화살이 박히고 쓰러집니다. 덩달아 마차 안에 쓰러진 누누코는 숨을 몰아쉬면서 꺽꺽대는 와중이라 화살 박힌 남자의 비명은 안중에도 없습니다. 노예들이 혹시 도적의 습격인가 두려워하며 몸을 낮추고 벌벌 떠는데, 사박사박 누군가의 발걸음 소리가 가까워오더니 바닥에 떨어진 램프를 주워 불을 켜는 소리가 들립니다. 그리고, 누누코를 비롯한 노예들은 얼굴에 갑자기 램프의 밝은 불빛이 비춰지자 눈이 멀 것 같은 섬광에 눈을 질끈 감습니다. 그리고, 익숙한 목소리가 들립니다.
@@ >>679 눈 앞의 인간은 해치웠지만... 목에 걸린 줄에 의해 서서히 숨이 다해가고 있었다. 그리고 누누코의 몸 상태는 질식을 다시 한 번 겪고도 일어난 체력이 남아있지 않았다. 어쩌면, 여기서 끝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누누코를 덮쳐왔다. 죽음에 대한 공포는 없었다. 하지만 후회는 밀려왔다. 아무것도 지키지도, 이루지 못하고 죽은 전사. 신성한 들판의 전사에게 있어서 굉장한 수치이며 불명예였다. 또한 역설적으로, 계속해서 반복되는 누누코네 부족의 역사이기도 했다. 그것을 피하는 일은 있을 수 없었다. 그렇기에 누누코가 지금 맞고 있는 죽음은 어떻게 보면 필연적인 것이었다. 비참하다. 그리고 후회스럽다. 죽어서라도 할 수 있다면 놈들을... 누누코는 지금까지 수많은 동족들이 생각해 왔던 것처럼 그렇게 생각하며, 서서히 어둠이 주는 안식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크학!" 하지만, 운이 좋다고 해야할지. 아니면 나쁘다고 해야할지. 누누코는 목에 걸린 줄이 순간적으로 풀리면서 앞으로 튀어나왔다. 그리고 마치 물밀듯이 목구멍 안으로 공기가 들이닥쳤고, 고여있던 침이 기도에 같이 침입하며 거센 기침을 유발했다. 그녀에게 아직 안식은 이른 것이었다.
"하아, 하아.... 큭!!" 누누코가 그렇게 회복이 주는 고통 속에서 숨을 몰아쉬며 다시 생명을 되찾고 있을 때, 그녀의 초인적인 청력이 발소리를 감지했다.
"누누코에게 다가오지마!!! 찢어죽여버리겠어!!" 아직 구속이 완전히 풀리지 않은 누누코가 거칠지만 쉰 목소리로 외쳤다. 하지만 발걸음은 멈추지 않았고, 이내는 램프에 불이 올라왔다. 눈이 부실듯이 타오른느 램프의 섬광에도 지지않고 눈을 뜬 채로, 지친 몸으로 온 신경을 집중시키며 빛 너머를 굉장한 살기로 노려보았다. 그리고 곧 목소리가 들려오며 모습이 드러났다.
"...인간..." "너는..." 그러자 거기엔, 일찍이 아주 짧은 만남을 가졌던 '광대같은 인간' 이 서있었다.
>>680 기나긴 햇빛, 기나긴 저주와 모멸의 시간이 끝났으니 이제 진정한 뱀파이어이자 밤의 군주로 선택받은, 엘리자베스 바토리 블라드 체페슈로 돌아갈 시간이 왔습니다. 그렇게 생각하면서 방문을 열어제끼자, 엘리는 눈 앞에 서 있는 거한의 험악한 얼굴에 화들짝 놀랍니다. 얼굴이 무서워서 놀란 건 아니고, 뜬금없이 얼굴이 눈 앞에 있길래 놀란 것에 가깝습니다. 그 거한은 어째 낯이 익은게, 에레야가 부리던 부하들 중 하나인 것 같습니다. 그리고 팔에 엘리가 죽였던 가짜 뱀파이어 머리를 담근 액침 박제도 끼고 있군요. 그는 엘리에게 말합니다.
"이단심문관님께서 찾으신다, 아니, 찾으십니다."
그리고는 옆으로 비켜서는군요. 다른 존재도 아니고 뱀파이어한테 존댓말을 다 쓰는 상황이 온 게 얼떨떨한 모양이지만, 그래도 에레야가 개인적으로 신임하는 주요 협력자한테 큰 무례는 저지르지 않은 것 같습니다.
>>681 "음. 아무래도 신사적이고 이성적인 대화를 할 상황이 아닌 것 같군요. 어디 보자..."
그 남자는 램프를 자기 쪽으로 돌려 얼굴을 비춥니다. 요한 브룬, 누누코는 잘 알고 다른 이들은 잘 모르는 사내입니다. 그는 그 상황에 걸맞지 않게 사람 좋은 웃음을 지으면서, 누누코에게 그랬던 것처럼 자기를 소개합니다. 손에 그 노예상 중 하나를 찔러버린 석궁이 들린 것만 빼면 정말로 신사라 해도 믿을 정도군요.
"그래도, 일단 저를 소개해야죠. 저는 요한 브룬, 현상금 사냥꾼 겸 외과 의사 겸 이발사입니다. 아, 노예 회수는 제가 취급하는 업무가 아니고요. 이제 풀어드리죠. 잠시만요..."
요한은 사망한 두 노예상의 시체를 뒤져 열쇠를 찾아내고는 마차 문을 열어제낍니다. 그리고는 무슨 상황인지 아직 파악이 안 된 노예들 중 하나의 수갑을 열쇠로 풀어주더니, 그 사람의 손에 열쇠를 쥐어주고 다른 노예들을 풀어달라고 부탁합니다.
"아쉽게도 제가 시간이 부족한고로, 이 야만적이고 비이성적인 행위의 수습을... 대신 좀 부탁드려도 되겠습니까? 네, 열쇠로 다른 사람들 수갑을 좀 따주면 됩니다. 네에, 그렇게요."
그리고는, 누누코를 보더니 혀를 찹니다. 그럴 법도 합니다. 어지간한 대도시의 정신병원도 어지간히 미친 광인이 아닌 이상 사람을 이렇게 묵진 않습니다. 요한은 칼을 꺼내더니, 누누코의 결박을 하나둘 풀기 시작합니다. 가끔씩 차갑고 날카로운 금속이 누누코의 맨살에 닿을 때도 있지만, 누누코는 그 차가움에서 악의는 느끼지 못합니다.
@@ >>683 어지러운 상황. 겁먹은 노예와 죽은 노예상, 잔뜩 증오에 찬 보팔토끼 수인. 그리고 여유로운 의문의 한 남자. 냉정하게 보아도 정상인 상황은 아니었다. 그러나 다시 누누코의 눈 앞에 나타난 그는 마치 이런 상황이 익숙한 것처럼 아주 능숙히 상황을 통제하기 시작했다. 특히 노예를 풀어주는 것은 그렇다고 해도, 수인인 자신에게까지 구속을 푸는 것은 누누코에게 있어서 굉장히 의외로 다가왔다.
"...읏..." 결박를 하나씩 자르며, 칼날의 차가운 감촉이 맨 피부에 닿는다. 그러자 누누코의 입에서 가녀린 소리가 튀어나왔다. 동시에 누누코의 뺨이 살짝 붉어졌다. 고작 이정도의 자극에 신성한 들판의 전사가 소리를 냈다는 것이 수치스러웠기 때문이었다. 처음에는 자신을 그 칼로 찌르려는 줄 알았다. 하지만 예민해질대로 예민해진 수인 특유의 육감으로, 그 칼날에는 어떠한 살의도 느껴지지 않는다는 것을 누누코는 느꼈다.
"누누코를 쫓지 말라고 했을텐데." "인간은 정말 돈에 미쳐있나 보네. 그렇지?" 입에 씁쓸한 미소가 피워내며, 누누코는 자유로운 팔과 다리를 움직이면서 말했다. 요한에 대한 조롱의 말이기도 했다. 그렇지 않으면 이런 산중에 와서... 이미 한 번 들었던 답을 또 듣겠다고 질문을 할 리는 없을테니까. 누누코는 아직도 기분 나쁜 구속구의 감촉이 느껴지는 손목을 쥐고 천천히 돌려 움직이면서, 날카롭게 변한 눈매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조용히 물었다.
"...인간은 왜 누누코를 풀어주는 거야?" "제대로 대답해야 할 거야. 왜냐하면 누누코가 인간을 어떻게 할지... 정할거거든." 누누코는 그렇게 말하며 조금은 누그러진듯한 시선을 창살 밖으로 보냈다. 마치 위협하는 듯도, 추궁하는 듯도 한 물음이었다.
그 말에 따라 엘리는 아래층에 내려갑니다. 그리고 정말로 이상한 광경을 바라봅니다. 엘리가 들어올 때까지만 해도 사람들이 북적거리며 "살았으면 박수쳐!"라고 부어라 마셔라 난리도 아니던 곳이 지금은 무섭도록 텅 비었습니다. 음유시인...도 엘리가 처음 이 여관에 들어왔을 때 보던 음유시인이 아니고, 에레야를 수행하는 거한이 덩치에 전혀 걸맞지 않은 귀여운 크기의 리라를 연주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다른 거한들이 물을 한 잔씩 마시고 있고, 거한이 문간을 틀어막은 채 헛기침을 하고 있군요. 비냐는 어디 갔는지 보이지 않고, 여관 주인은 귀에 무언가를 쑤셔박은 채 하품만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여관의 한가운데 자리를 차지한 에레야가 손짓합니다. 머리가 헝클어졌고, 술에 잔뜩 취한 상태군요.
"잠은 좀 잤나, 엘리? 네가 그년한테 내 위치를 알려준 덕분에 난 귀중한 두 시간을 그 년 연행하는 데 날렸지. 그건 중요한 게 아냐... 제기랄. 아무튼 앉아."
아앨라나의 머릿속에 얼굴 달린 나무들의 불안한 목소리가 울려퍼집니다. 그 목소리에 베스니의 발바닥을 보니... 무언가, 수천년 묵은 마녀의 직감이 아니더라도 척 보면 불길할 수밖에 없는 어두운 기운이 감돕니다. 하지만 베스니는 그것도 모른 채로 숨을 한참 동안 고르더니 아앨라나를 바라봅니다. 이 모든 끔찍한 일을 겪고 있는데도, 아직도 이 여자는 너무나도 긍정적입니다. 말다리와 발바닥의 어두운 기운이 아니라 이 기이할 정도의 긍정적 편향이 악마의 농간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요.
"하아, 하아, 멋대로 도망쳐서 죄송해요... 맨드레이크를 이렇게 가까이서 보는 건 처음이라..."
그렇게 말하고는 멋쩍게 웃어보입니다. 그리고는 가방을 맨 어깨에 힘을 다시 한번 착 주더니, 아앨라나에게 묻는군요.
>>686 음흠, 흠흠. 누누코의 말을 경청하던 요한은, 슬쩍 옆을 보더니 고개를 척 돌립니다. 누누코가 뭐라 질문하지만, 요한은 대답하는 대신에 말을 끊은 것에 사과하면서 화제를 돌리는군요.
"아, 잠깐만요. 말 끊어서 죄송합니다. 자, 거기 누누코 씨를 제외한 납치 피해자 여러분들은 들으시죠! 저 앞을 보십시오!"
램프를 번쩍 들어서 앞을 가리킵니다. 그러자 노예들의 시선이 앞을 향하고, 노예들은 헉 하며 숨이 멎는 순간을 경험합니다. 척 봐도 스무개 남짓은 되어보이는 눈들이 램프의 불빛에 어둠 속에서 노랗게 빛나고, 다른 이들이 공포에 벌벌 떨 동안 요한은 익숙하다는 듯, 당장 사람을 죽일 수 있는 짐승이 아니라 서커스장 철창에 갇힌 괴물들을 소개하는 듯 저 눈알들의 주인들을 어떻게 다뤄야 하는지 친절하게 이야기해줍니다. 아니, 서커스조차 아닙니다. 이렇게 여유롭고 나긋해서야 저잣거리 만병통치약 파는 사기꾼, 벌떡주 파는 노친네나 다름없는 꼴이라 노예들은 이상하게 혼란스러워 하면서도 끝까지 다 듣습니다.
"늑대들입니다! 인간의 피냄새에 환장하죠. 하지만 시튼 경이 밝힌 대로 정말 영리하기도 해서, 쓸데없는 무력 충돌은 원하지 않는답니다. 지금 상황 같은 경우에는... 여러분들이 성인 남성 2인 정도 분량의 고기만 던져준다면 굳이 공격하지 않겠군요."
말하는 바야 간단합니다. 지금 죽은 두 놈을 던지면 살 수 있단 말이죠. 노예들은 바로 마차에서 내려 자신들을 납치했던 노예상 두 명의 아직 따뜻한 주검의 사지 한 쪽씩을 잡고, 늑대들이 보이는 쪽으로 붕 던져버립니다. 그러자, 램프의 불빛에 비치던 옷의 끝자락이 땅에 끌리면서 사라지고, 으적거리는 불길한 소리만 들려옵니다. 요한은 다시 누누코를 보고 이야기하는군요.
"왜 풀어줬느냐면, 그래야 동등한 거래가 성립하기 때문입니다! 제가 만약에 누누코 씨를 풀어주는 대가로 미스터 스위트를 찾게 도와달라고 했다면, 그건 사실상 강요에 해당하지요. 하지만 제가 누누코 씨를 이렇게 풀어드려서, 원한다면 지금 당장 떠나도 되는 동등한 자연인의 상태로 회복시킨 다음에 거래를 제안한다면, 그것이야말로 진정 동등한 거래 제안 아니겠습니까?"
네. 신념형 또라이입니다. 요한은 사람 좋게 웃다가, 이번에는 또 정신 없게 화제를 돌려 누누코의 잘린 귀와 온 몸에 가득한 상처를 램프로 비춰보며 말합니다.
@@ >>690 "..." 누누코는 말없이 이야기를 떠드는 요한과 시체를 던지는 노예들을 한 시야에 담아 바라본다. 그리고 뜯겨나가는 노예상의 시체도. '야만적'이었다. 물론, 인간의 기준으로. 누누코에게서는 그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사람이 죽고, 먼지가 되어 자연으로 돌아가는 것. 고기가 되는 것. 약한 동물이 강한 동물에게 먹히는 것. 그것 모두가 누누코에게 있어서 진리와 같은 것이었다. 그렇지만 이 진리를 받아들이고 이렇게 친화적으로 활용하는 인간은, 적어도 누누코가 살아온 시간동안에는 보지 못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의 이야기... 인간의 기준에게 있어서는 미련한 것이겠지만, 누누코에게 있어서는 딱히 그런 것도 아니었다.
"소독이라고?" "...상관없어, 누누코는 이런 걸로 쓰러지지 않아." 누누코는 자신의 몸을 팔로 끌어 당기듯이 안으며 고집부리듯이 말했다. 그러면서, 어깨에 불로 낙인 찍힌 '노예의 증표'도, 손바닥으로 숨겼다. 뜯겨나간 귀와 그것은 누누코에게 자신의 치부 이상으로 수치스러운 것이었다.
숲의 존재들이 외치고 있어요, 그에 반응하듯이 저의 직감 또한 그들 처럼 외치는 것 같아요. 그녀에게 문제가 되는 것이 있다고 한다면, 아마도 신체 문제가 아닐 거에요. 그녀에 조금씩 깃들어 가는 듯한 이 불가사의한 것은 무엇일까요? 그리고 정말 신체에도 전혀 없는 것은 아닐 거에요
그녀는 누군가가 보고 말하기를, '비정적으로 긍정적이다' 라고 평가를 할만 해요. 과도하게 순수한 물이 이상한 것처럼. 그녀의 그러한 성향이 본래의 것인지 아닌 것인지 지금으로서는 모르겠네요
"너무 놀랐다면 그럴 수도 있을거에요. 다음부터는 다시 그러하지 않도록 배우고 경험해보아요"
저는 일단 그녀의 그 괜찮다며 웃어보이는 모습을 바라보며 좀 더 관찰해보기로 했어요. 그녀에게 있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 싶어요.그녀에게서 멀어져야만 하는 걸까요?
"저희의 목표로 돌아가야 하겠지요? 호수로 가는 길에 다시 올라서요"
저는 그녀의 물음에 그렇게 대답하면서 다시 호수로 같이 향하기고 했어요. 호수에 도착한다면 그때는 무엇을 해야할지 또 다른 고민이 이어질 것 같다는 예감이 들어요
짧게 답한 에레야는 술을 쭉 들이키고 나서 한숨을 쉽니다. 말이 한참 동안 없는 동안 엘리는 저도 모르게 당연한 의문을 떠올립니다: 보안을 생각하면 신전 지하면 됐지 여길 왜 골라? 에레야는 엘리의 마음 속에 피어오른 의문을 감지한 듯 손가락을 딱딱 튕기고, 그러자 창가 주변에 있던 거한들은 푸하하 웃으면서 술을 마시는 척을 합니다. 마치, 나 술 마셨소, 나 재밌소, 나 즐겁소, 하는 연기 티가 나는 것이... 연기는 중요한 게 아니고 말소리를 가리는 게 더 중요한 것 같고, 그를 증명하듯 리라 연주하는 소리도 더 커집니다. 에레야는 엘리에게 조용히 말합니다.
"식인종들이 어떻게 그렇게 많은 숫자를 불릴 수 있었는지는... 진술에 따르면, 식인종들이 점거하고 있던 곳은 어떤 하수구와 연결되어 있었는데, 그 하수구에서 계속해서 인육을 포함한 다양한 도축 부산물들이 쏟아졌다고 했어. 그 하수구를 역추적해봤는데, 사형 집행인이 시체를 의사를 지망하는 애한테 팔아먹었다더라. 좀 석연찮지만, 이건 상부에서 보완해서 내린 결론이니까 그런 거야."
...그렇다고 합니다. 에레야는 계속해서 엘리가 알아야 할 것들을 이야기합니다. 거한은 눈치를 보다가 엘리와 에레야가 앉은 탁자에 여관 괴물과 사제의 머리가 담긴 유리병을 올려둡니다. 둘 다 노란 액체 속에 갇힌 채 둥둥 떠 있군요.
"그리고 네가 여관에서 죽였던 그 괴물이랑, 지하수로에서 죽였던 가짜 뱀파이어는 본질적으로 동일해. 뱀파이어가 되려다 만 인간이라는 게 부검 결과 밝혀졌지. 그런데... 문제가 있어. 그 놈들이 대체 어떻게 뱀파이어가 되는 방법을 알아냈는지, 어떻게 의식을 준비했는지, 그리고 네가 여관에서 죽인 놈은 원래 신원이 뭔지도 밝혀지지 않았어. 하지만 세스타우 영주도, 세스타우 교구도, 그리고 내 윗선도 이 사건을 여기서 종결하고 싶어해. 나만 또 예민한 년 되는 거지 뭐."
에레야는 다시 손을 튕기고, 거한이 여관 주인을 톡톡 쳐서 술을 꺼내오게 시킵니다. 에레야는 자기 잔에 술을 붓더니, 엘리에게 묻습니다.
"상식적으로 보면, 넌 이미 한참 전에 손을 털고 발을 뺐어야 하는데도 여기까지 왔지. 그러니까 다시 한번 묻고 싶어. 이 사건을 파보자고 나랑 같이 지옥까지 달려보고 싶나? 아니, 네 기준으론, 천국까지 달려보고 싶나?"
>>691 "전사의 긍지는 질병을 치료하지 않습니다! 이건 천연두, 파상풍, 그 외 알 수 없는 수많은 전투 외상에서 발생한 등창과 종기로 죽어간 사례들이 임상적으로 증명한 사실이지요. 쉽게 말씀드릴까요? 오기 부리다 죽는다는 겁니다."
요한은 그렇게 말합니다. 오기 부리다 죽는다. 그가 말했던 이야기들 중에 드디어 좀 이해할 만한 것이 나왔습니다. 요한은 자신의 가방을 펼쳐서, 그 안에 들어있는 여러 약병과 의료도구들을 보여줍니다. 누누코는 의료에 대해 잘 모르지만, 대충 미스터 스위트를 죽이고 난 뒤 잠시 옷장에 숨어있을 때, 공황에 빠진 그의 딸이 데려왔던 의사가 이런 도구들을 가지고 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즉 도구만큼은 제대로 갖췄다는 뜻이죠. 요한은 누누코에게 다시 한번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저는, 그렇게 안 보일지도 모르지만, 현실 속에서 살아숨쉬는 영웅적인 서사와 재미있는 이야기를 좋아합니다. 그리고 자유를 찾아 노예주를 죽이고 탈주한 부족 전사가 상처 감염에 죽었다는 이야기는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그 누구도 재미있다고 좋아하지 않죠."
...라고 말하다가, 요한은 다시 정신 사납게 화제를 돌려서 다른 납치 피해자, 짧게 말해 노예들에게 시선을 돌립니다.
"그리고 당신들은 늑대가 출몰하는 곳에 계속 있기 싫다면, 이 마차를 끌고 가던 걸어가던 해서 북쪽으로 계속 가시면 됩니다. 거기도 난민 처우가 심각하긴 하지만 난민들을 속여서 납치하는 이들은 단속하고 있거든요. 혹시나 해서 작은 천문학 상식을 알려드린다면, 저기 저 별이 보이시나요? 네, 저게 북극성입니다. 저걸 계속 따라가시면 됩니다."
@@ >>694 "아니." "누누코는 영웅이 아니야." 누누코는 단호한 목소리로 말하면서, 그가 말한 북극성을 올려다보았다. 그것은 누누코의 부락에서도 볼 수 있는 밝게 빛나는 별이었다. 누누코는 그의 동료들과 함께 그것을 올려다보며 하루의 사냥에 대해 이야기하곤 했다.
"누누코는 아무것도 이루지 못했어. 전사라고 하면서, 그 무엇도 지키지 못했어. 더러운 발로 신성한 들판을 침입하는 인간들, 돈으로 우리를 사고파는 돼지들... 막지못했어. 지금도 누누코의 동족은 고통받고 있겠지." '누누코의 탓이야...' 그녀는 중얼거리며 어깨를 끌어안았다. 높게 솟았던 귀가 조금이지만 반으로 접혀 늘어졌다.
"...하지만 이대로 있으면 누누코는 녀석들처럼 죽겠지." 누누코는 고개를 치켜들고 거의 다 먹혀가는 노예상들을 바라봤다. 처진 눈에는 전사 특유의 결의같은 것이 감돌고 있었다.
"거래를 받아줄게 인간." "누누코가 인간과... 잠시 함께 행동할 거야." 누누코에게 그말을 하는게 정말 쉽지 않은듯이, 눈을 반쯤 질끈 감으며 힘을 눌러담아 말했다. 그것은 정말로 누누코에게 있어서, 금기와 같은 것이었다. 그녀는 스스로 금기를 깨려 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오해는 하지마." "누누코는 인간을 아직 믿지 않아. 너희가 한 것들, 네 동족에게 저지른 것들. 누누코는 죽을때까지 잊지 않아." 누누코의 몸에 미약한 살기가 감돌았다. 이 쇠창살 안에 소동물이 있었다면, 지레 겁먹고 도망갈 정도의 살기. 그런것이 누누코의 날카로운 이빨의 사이로 새어져 나와 공기중으로 흩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