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모두는 누군가를 위한 이야기의 소품이자, 단역이자, 조연이기도 하고 동시에 자기 이야기의 주인공이기도 하다. 그 이야기는 비참할 수도, 행복할 수도 있고, 기승전결이 갖춰졌거나 이야기의 어떤 구성요소 하나도 제대로 된게 없을 수 있다. 하지만 아무리 엉망인 이야기가 되는 한이 있어도 우리는 선택하고, 때로는 강요당하면서 우리의 이야기를 써낸다. 이야기의 악마 이프가 이제 마침표를 찍으라 권할 때까지, 죽음이 우리를 찾아올 때까지. 왜냐면 우리는 살아있으니까. 그 이야기는 우리의 삶이니까.
서운한 기색을 감지했는지, 마을 장정들은 울상이 된 마차 주인 고드뢰를 툭툭 치면서 일어나라고 핀잔을 줍니다. 여기서는 히샤히메와 그녀를 두둔하는 장정들이 객관적으로 옳습니다. 만약 히샤히메가 없었거나 돕지 않았다면, 고드뢰는 저 부서진 자국을 수리하는 데 드는 돈의 50배는 되는 인건비와 말 빌리는 값을 들여서 마차를 빼냈어야 할 겁니다. 그 사이에 마차를 못 써서 발생하는 일실수입 손해를 생각하면? 셈이 조금이라도 되는 인간이라면 일어나지 않을 일인데도 소름이 팍 돋습니다. 그렇기에 고드뢰도 감정을 접어두고, 집채만한 마차를 보고 히샤히메가 묻자 대답합니다.
"예에. 이샤힘 공주님은 키타이에서 오셔서 잘 모르겠지만... 루마족이라고, 이리저리 마차 타고 떠돌아다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 마차에서 살던 가족이 자기네 대에서 유랑 생활을 끝내고 싶다고 해서, 땅 몇 개랑 이 마차랑 맞바꿨습죠."
루마족이 뭔지는 모르겠지만, 이렇게 들으니 마차가 문자 그대로 집채만한 게 이해가 됩니다. 좁아터졌어도 일가족이 좀 참고 살만하려면 집채만해야죠! 히샤히메가 쓸 서역견문록 한 구절이 벌써 정해진 것만 같은 기분입니다!
//참고로 이 루마족은 알 수도 있겠지만 집시족(Romani people)에서 따온 거야!
만약에 이걸 신실한 신부가 들었다면 도끼눈을 떴을 거고, 감 좋은 이단심문관 귀에 들어갔다면 다짜고짜 칼을 들었을 겁니다. 하지만 여긴 검은 숲, 자기네 신 빼면 모두 잡귀일 뿐이라는 편협한 머저리들이 아닌 설명할 수 없고 이해할 수도 없기에 서로 내버려두는 신비가 머무는 장소입니다. 그렇기에 이 여자는 말의 튼실한 그것으로 변해버린 자신의 한쪽 다리를 만지면서, 이 지팡이에 봉인된 대악마가 아니라 강력한 마녀, 드루이드가 도와준 것이라 좋게좋게 해석하고는, 아앨라나가 다시 지팡이를 들어 자기 다리를 '회복' 시키려고 하자 달라붙더니 소리를 지릅니다.
"아, 안 돼!!!! 내 탐험의 증거가!!!!! 안 돼요!"
대충 알 것 같습니다. 가말라시엘의 힘을 빌린 결과로, 아앨라나는 부러져버린 다리를 '말의 다리'로 바꿔서, 한 쪽은 사람의 다리요 한 쪽은 말의 다리라는 부정할 수 없는 신비의 증거를 남겼습니다. 그러니 기왕 고쳐주는 거 제대로 고쳐주려고 다시 지팡이를 든 아앨라나의 선의를, 증거를 지워버리려는 시도로 이해했겠지요. 화내기는커녕 오히려 좋다고 달라붙고, 해주고도 욕먹을 것 같은 기분이라 제대로 고치려고 해도 안 된다고 뜯어말린다니. 검은 숲 바깥의 사람들이 전부 이런 별종인지는 아앨라나로서는 전혀 모를 일이지만, 적어도 이 여자만큼은 별종이 맞는 것 같습니다. 한참 동안이나 그러지 말라고 사정사정하던 여자는, 어느 순간 진정하더니 묻는군요.
"그건 그렇고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제 이름은 베스니, 음유시인이에요. 혹시 이름을 여쭤봐도 될까요?"
>>448 스스로를 바치는 자의 피는 달콤했습니다. 갓 성년을 넘긴 마을의 젊은 남녀들의 싱싱한 피, 숨을 다하기 전 마지막으로 문안 인사차 찾아온 노인의 숙성된 피, 그리고... 엘리자베스 바토리 블라드 체페슈, 뱀파이어에게 자신의 피를 판돈 삼아 마지막 도박에 나서려는 이의 피.
하지만, 엘리는 이런 피는 마셔본 적이 없습니다. 이단심문관의 피 말입니다. 솔직히 말해, 교단은 정말로 성가셨습니다. 이단심문관은 수많은 동족들을 꼬챙이에 꿰었고, 엘리의 가문은 처신을 잘했다곤 해도 이단심문관은 정말로 끔찍했습니다. 그런 이단심문관이, 자신의 팔을 들이밀고 피를 빨라고 합니다.
콰직
박혀 들어간 이빨 사이로 피가 샙니다. 끄윽, 으윽... 에레야는 힘없이 신음하고, 엘리는 피비린내 속에서 절박함을 음미합니다. 그 무시무시한 이단심문관도 피를 빨 수 있는 또다른 인간이라는 사실에 취해 피를 들이마시고, 에레야가 피가 너무 빠져나가 기절했을 때쯤 일어난 엘리는 뒤를 돌아봅니다. 비틀거리다 충격에서 회복한 사제가 그녀의 가슴에 손톱을 휘두르지만...
턱.
엘리는 허무할 정도로, 그 개고생이 무색할 정도로, 어이없게 그 손톱을 멈춥니다. 이제 소꿉장난은 여기까지. 엘리의 날개뼈에서, 손아귀처럼 말린 칼날이 살갗과 옷을 찢고 나오더니, 활짝 펴져 거대한 날개가 됩니다. 그리고 엘리의 손아귀도, 다리도, 발도, 아니, 온 몸이 거대해지고... 인간의 탈을 벗어난 엘리는, 거대해보이던 사제를 이제는 내려다보고, 그가 되고 싶었지만 영원히 되지 못할 어둠의 정점을 보여줍니다.
밤의 군주.
엘리자베스 바토리 블라드 체페슈, 고귀한 이명으로 세 번 찬양받고, 모든 괴이에게 세번 경외받을 이여.
베스니는 안나의 이름을 수첩에 받아적습니다. 안나, 라는 별칭은 안중에도 없고 아앨라나라는 본명에 팍 꽂힌 나머지 그것만 적고, 아앨라나의 외형도 일일이 기록합니다. 한참동안이나 기록에 열중한 베스니는 그제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쉽니다.
"히야! 덕분에 살았어요! 안 맞는 지도를 보고 가다가 잘못 떨어져서 다리가 부러졌을 땐 이렇게 끝인 줄 알았거든요! 그런데 이렇게 마음씨 좋은 마녀를 만나 얼마나 다햇인지 몰라요! 아차차! 내 정신 좋 봐! 뭔가 보답을 해야지!"
베스니는 주머니를 뒤집니다. 하지만 준비성이 영 꽝인지 깃펜, 양피지 두루마리 따위의 생존술 상황에서는 영 필요성이 의심스러운 것들만 우수수 떨어지고, 지팡이에서 가말라시엘의 깊은 한숨이 들려오는 것 같습니다. 마침내 찾아낸 것은 버덕버적 마른 육포 한 단, 베스니는 자신만만하게 건넵니다.
"악어 육포에요! 한번 드셔보세요!"
꼬르르르르르르륵
...라 말하기가 무섭게, 베스니의 배꼽시계가 우렁차게 울립니다. 그녀의 얼굴이 빨개지고, 가말라시엘이 비웃듯 안나에게 말을 건넵니다.
"구해줬더니 밥도 내놓으라는군요. 하지만 사도님이라면, 분명 한 끼를 차려주겠죠. 친절이라! 필요하지만, 악마의 힘을 구하는 이들에겐 사라진 덕목이죠."
>>456 뱀파이어가 동족을 집어삼키는 행위는 특별한 의미를 지닙니다. 사제가 뱀파이어에 대해 유일하게 옳게 알고 있는 것이라면, 뱀파이어는 인간의 피로 살지만 동족의 피로 강해진다는 겁니다. 가문의 가주가 너무 오랜 시간이 지나 지성이 마모되었을 때, 사전에 약속한 후계자가 그 피를 들이마셔 흡수하면 핏빛 계승이라 부르고, 큰 잘못을 저지른 뱀파이어를 처형할 때는 '재활용'이라 불러 사람 취급조차 안 합니다. 별 죄 없는 동족의 피를 전부 흡수하면, 그건, 별 대단한 건 아니고 살인이라 부르죠.
우드득
"끼이이익?!"
엘리는 사제의 어깨를 붙잡고 가볍게 비틀어 부숴버립니다. 그렇다면, 뱀파이어조차 아니고 인간도 아닌, 이 이도저도 되다 만 참칭자를 흡수한다면 그건 뭐라 부를까요? 잠시 고민하던 엘리는, 찢고 씹어 집어삼키는 기능만 남은 아가리로 어색하게 웃으면서 간단하게 결론을 내립니다.
뭐긴 뭡니까. 식사죠.
인간은 어린아이조차도 그간 먹은 빵의 갯수를 대답할 수 없고, 뱀파이어 역시 그간 피를 받아낸 인간의 수효를 셀 수 없습니다. 이건 재활용도 살인도 아닙니다. 엘리는 아가리를 쩍 벌려, 사제에게 다가갑니다. 아직 멀쩡한 한쪽 팔로 엘리의 턱을 치자, 되려 사제의 팔이 부서지고, 엘리는 사제를 들어서 걸쭉한 핏물을 마십니다. 꿀꺽... 꿀꺽...
저항하던 사제는 얼마 못 가 힘을 잃고, 살과 거죽을 대체한 핏물이 빠지자 흉측한 뼈대와 장기만 보입니다. 결국, 사제는 자신이 잡아먹으리라 선언한 뱀파이어에게 먹히고, 음미를 끝마친 엘리는, 자신의 몸 어딘가에 새로운 장기가 숨쉬기 시작한 것을 깨닫습니다. 그것은 뇌처럼 생각하고, 심장처럼 맥동하고, 혀처럼 음미합니다. 일족의 주치의가 가끔씩 생길수도 있다던, 공생성 기형종양 같군요. 쉽게 말하면, 엘리가 죽음에 이르면 그녀의 몸 속 장기를 대체해 두번째 삶을 줄 무언가라는 겁니다.
보통 이 종양은 뱀파이어가 인간을 과식한 결과 영양 과잉으로 생겨나는, 인간으로 치면 비만에 대응하는 질환의 일종입니다. 즉 사제는 엘리에게 있어 좀 쥬씨한 인간이었을 뿐이죠.
...그런데, 쓰러져 뼈와 장기만 남은 사제의 시체에서 위장만 꿈틀대고 있습니다. 그러고보니, 이 사제가 방패병을 통째로 주워먹었네요.
>>459 밤의 군주의 위용이 무색하게, 엘리는 궁상맞게 쪼그려앉아 위장을 가릅니다. 그나마 다행인 점이라면 엘리의 손톱이 워낙에 날카로워진 덕분에 그냥 ㆍ해도 잘 잘려나갑니다. 그렇게 위장을 열면, 손 하나가 위장 밖으로 나오더니 곧이어 소화액으로 범벅이 된 몸이 기어나옵니다. 갑옷 덕분에 아직 안 녹은 모양인데, 엘리는 배려 차원에서 좀 더럽긴 하지만 수로에 던집니다. 뭐, 똥물이 아무리 더러워야 염산통보다 낫습니다.
그런데, 누군가 엘리의 커다란 손을 잡습니다. 내려다보면, 그새 정신을 차린 에레야입니다. 에레야가 이리 작게 보이는 것에 신기해할 새도, 이단심문관 앞에서 이걸 보였다는 거에 뻘쭘해할 새도 없이...
"카르밀라?"
...엘리에 대고 전혀 모르는 사람 이름을 부르다가, 고개를 떨구더니 한숨을 쉽니다.
"아니, 그 녀석일 리가..."
떨리던 목소리와 그리운 표정을 그치고, 에레야는 엘리에게 조언합니다.
"나갈 때는 그 모습 말고 인간 비스무리한 모습으로 돌아와라. 애초에 나가지도 못할 거고, 입장 바꿔서 너가 성직자라면 그 모습 보면 무슨 생각 들지는 이해가 가지?"
>>461 "뭐든 안 챙겨주겠니? 욕조도 하나 놔 주고, 바람도 통하게 해 주고, 뭐든 다 해주지..."
에레야는 엘리가 지하수로 똥물에 던진 병사를 끌어냅니다. 소화액은 다 닦였는데, 상처가 잔뜩 난 상태로 똥물에 들어갔으니 상태가 영 좋지 않을 것은 확실합니다. 하지만 지금 당장은 에레야도 해줄 수 있는게 없기에, 에레야는 수통을 꺼내 깨끗한 식수를 좀 부어줍니다. 그리고는, 잠깐 생각났다는 듯 말을 끝맺습니다.
엘리가 하플링 여급에게 했던 말을 그대로 돌려줍니다. 그건 사실입니다. 엘리는 태양 아래에서 떳떳하고 싶은 뱀파이어입니다. 다만 지금 상황에서 떳떳하게 바깥으로 나갔다간 산채로 타죽는다는게 문제죠. 에레야는 농담조로 꺼냈던 말을 거두고... 엘리가 따지기가 무섭게 폭탄을 온몸에 주렁주렁 매단 병사들이 들어옵니다. 표정이... 당장 에레야가 명령만 내리면 스스로 폭발사산하게 생겼군요. 에레야는 고개를 저으며 그들을 진정시킵니다.
"다 끝났어. 진짜로. 다른 병사들 불러와."
병사들이 들어와서 현장을 수습하기 시작합니다. 엘리는 가장자리에 앉아있고, 에레야는 엘리에게 물린 자국을 붕대를 감아 숨긴 채 현장의 증거를 어떻게 수집해야 할지 일일이 감독합니다. 저 태피스트리는 찢지 말고 못째로 뽑아서 빼내라, 이 피그림은 씻지 말고 수행하는 환쟁이를 불러 모사해라, 사제의 시신을 보존해야 하니 6번 보존독을 가져와라, 온갖 명령을 다 하고 병사들은 그걸 해냅니다. 에레야는 어느 정도 작업이 알아서 진행되기 시작하자, 엘리에게 가까이 가서 옆에 앉습니다. 그리고 어린 병사가 목이 너덜너덜하게 뜯긴 식인종을 끌어내다가 머리가 끝내 찢어져 눈이 마주치자, 못 버티고 수로에 구토를 하는 것을 씁쓸하게 바라보는군요.
"나도 이 일 말고 다른 일 했으면 저렇게 멀쩡하게 반응했을텐데."
그렇습니다. 피가 온 사방에 튀고, 내장이 쏟아지고, 산 채로 사람이 잡아먹힌 이 현장은 일반인이 보면 절로 구토가 나올 광경입니다. 하지만 에레야는 오랜 세월동안 이것보다 심한 걸 너무 본 나머지 마음이 무뎌졌고, 엘리는 무언가, 자신이 뱀파이어임을 고려해도 정말로, 정말로 아무렇지 않음을 느낍니다. '밤의 군주'로서의 자신을 너무 드러내면, 언젠가 개개의 자신을 잊고 뱀파이어라는 종족의 한 개체, 즉 사냥꾼의 본능만 남는다고 가주가 경고했는데 이 때문일까요. 아무튼 씁쓸하게 앉아있던 에레야는 엘리에게 묻습니다.
"그냥 묻는 말인데, 혹시 친한 사람, 친척, 또는 건너건너 아는 사람 중에 카르밀라라는 뱀파이어가 있나?"
고드뢰는 손가락으로 서쪽 멀리를 가리킵니다. 서쪽은 강 하나를 두고 다리가 놓여져 있는데, 집의 흔적도 없이 길만 쭉 뻗어 있습니다.
"다른 마을에 제가 가지고 있던 땅을 팔았습니다요. 바츨라우 마을의 노른자위 땅은 큰형이 상속받고, 다른 마을에 있는 땅은 제가 받았습니다. 그 땅도 나쁜 건 아닌데, 다른 마을까지 가서 경작하기도 좀 그렇고, 그 동네 습속도 모르는데 제가 괜히 지주 노릇한다고 날뛰다가 칼 맞을까 루마족 사람들한테 팔았습니다. 멀리는 아니고, 저기 서쪽으로 하루 정도 걸어가면 나옵니다요."
"에유, 좋댄다. 또 땅자랑 하네."
장정들은 고드뢰의 설명에 핀잔을 주지만, 그렇게 진심으로 경멸하는 눈치는 아닙니다. 그도 그럴 것이, 히샤히메는 귀인국 제왕교육 당시에 졸면서 들은 내용 중에 '왕이 잘 살피지 않으면 지주와 영주들이 농민을 쥐어짜니 조심해야 한다'는 내용을 기억했는데, 고드뢰는 바츨라우의 땅들 중 상당수를 명목상 소유한 지주인데도 딱히 부자 티를 안 내기 때문입니다. 아무튼 고드뢰가 '자랑 좀 하게 냅둬라!'라고 말하면서 장난으로 투닥대는 동안, 히샤히메는 무언가 자기 발을 간질이는 것을 느낍니다.
에레야는 그렇게 말하며 쉽게 수긍하지만, 말과는 다르게 에레야의 표정에서는 씁쓸함이 쉬이 가시지 않습니다. 그 씁쓸함은 그리움이 남긴 얼룩처럼 쉽게 지워지지 않더니, 한 경비가 다가와서 여관에서 수습한 엘리의 옷을 앞에 내려놓자 바뀝니다. 가면, 붕대, 그 외 기타등등. 에레야는 그걸 그대로 엘리에게 넘기고, 따라오라고 손짓합니다.
그녀는 숲을 탐구하는데 열성적인 것 같아요~ 저는 그녀의 중요한 참고 자료가 되고 있는 것 같아요. 저는 제가 숲에 사는 마녀라고 한다면, 틀린 것은 아니지만 올바른 것도 아닐 거에요. 진정한 숲의 마녀 님은 따로 있으니까요! 저는 그 분 아래서 생활했고 존경하고 있어요 그래서 저는 그녀의 말을 칭찬으로 받아들었지만 실제로는 어떻게 될 수 있는 걸까요?
"그런 사연과 상황에 있으셨으니 그렇게 느끼시는 것도 그렇겠네요"
좋은 운세와 나쁜 운세가 공존하는 상황을 보았다고 할 수 있겠지요? 제가 그녀를 알지 못했다면 그녀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굳이 상상할 필요는 없을 거에요
육포 자체는 특이할 것이 없지만 그래도 그것은 저의 관심을 끌어당겼어요. 보통 그런 것들은 가축으로 주로 키우는 동물의 고기를 가공하여 만들지만 악어의 고기로 만든 육포를 먹어볼 기회는 흔하지 않아요!
"악어의 고기로 만든 육포인가요? 흥미롭네요~"
저는 그녀가 보답으로서 건네주는 육포를 받아서는 곧바로 약간 먹어보았어요. 어딘가 모르게 조류의 고기와 비슷한 맛이 나는 것 같아요. 어류가 좀 섞여 있는 것 같기고 하고요. 그렇지만 악어는 둘다 아니에요
"생리적인 현상이니까요. 사람의 장기는 솔직해서 숨기지 않아요. 일부 장기는 그렇지 않기도 하지만요"
부끄러워하는 그녀의 모습을 앞 두고 저는 자연스러운 일이니까 너무 부끄러워 할 필요는 없다는 식으로 말했어요. 그렇지만 그녀의 보여주는 행동도 이상한 것은 아니에요. 부끄럽다고 느끼는 것은 부끄러운 거에요. 실체와 감성의 영역의 차이라고 해야할까요
>>471 "내가 만약 일을 편하게 하는 부류라면, 여기서 사건이 종결되었다고 하고 너랑도 작별이다. 그런데 난... 다른 인간 말을 빌려서 '쓸데없이 피곤하게 일 벌리는 년'이자 '문제를 해결하려고 또다른 문제를 만드는 답답이'라서 말이야."
에레야는 그렇게 말하면서 계속해서 지하수로를 나아갑니다. 중간에 거대한 지하수로 악어가 보이지만, 경비병이 악어를 배부르게 만들어 식욕을 없애는 겸해서 시체를 처리하려고 랫킨과 고블린 시신들을 쏟아붓고 있어서, 악어는 더 이상 위협이 되지 않습니다. 개처럼 먹이 주는 사람한테 충성은 안 하더라도, 자기한테 잘해주는 놈한테 우호적으로 변하는 게 온 동물의 공통적인 심리라, 악어는 어째 좀 행복해 보이기도 합니다... 뭐, 어쨌든 중요한 건 위협이 되지 않는다는 겁니다. 엘리는 잠자코 에레야를 따라가고, 에레야는 뭔가 이상한 점이 있다고 말합니다.
"위에서 자꾸 살덩이들이 떨어지지. 그런데 이건 너무 많아. 네가 도와줬던 그 남자도 나발을 쉽게 안 부는 게 좀 수상하고. 하지만 지금 이야기할 수 있는 건 여기까지."
에레야와 엘리는 지하수로 끝자락에 도착합니다. 에레야가 말한 대로, 엘리가 쓰던 안전가옥은 지금 험악한 거한들이 앉아 있군요. 엘리의 진가를 알아보았으니 딱히 죽일 듯 바라보진 않지만, 아무튼 힘들어서 그런지 표정 관리는 전혀 안 되고 있습니다. 에레야는 그들을 내보내고, 여러번 빨고 햇빛에 바짝 말려 보송보송해진 엘리의 원래 옷을 건넵니다.
"이거 입어. 그리고 다음번에는 그런 식으로 피튀기게 싸울 거면 옷을 빨간 걸 입던지, 아니면 세탁비는 네가 내라."
그리고 엘리가 다시 들어가면, 에레야는 설명합니다.
"지금까지 일 잘해놓고 이런 말 해서 미안하지만, 이단심문관과 뱀파이어가 친하다는 건 코메디라는 건 너도 알고 있지? 지금 상황이 그래. 우리가 같이 잘 싸웠어도, 어쨌든 난 '우연히' 뱀파이어와 조우해 공동의 목표 달성을 위해 잠시 싸웠고, 공동의 위협이 해소되자 즉시 적대했으나 수사력 부족으로 놓쳤다'고 기록해야 하니까. 그냥 보낼 순 없으니 보상은 주겠지만, 세스타우 성을 떠나던지, 아니면 나랑 일 하나만 더 하던지. 선택해줘야겠어."
>>472 베스니는 어색하게 웃으면서 주변을 둘러보더니, 사라지려고 합니다. 꽤나 부끄러웠던 상황인 것 같습니다. 나름대로 보답도 했겠다, 얘기도 충분히 했겠다, 무엇보다도 더럽게 쪽팔리겠다, 베스니는 말과 다름없이 변한 한쪽 다리와 함께 급히 떠나려고 몸을 돌립니다.
"그, 그럼 저는 이만!"
하지만, 그러자마자 베스니는 엄혹한 검은 숲의 현실과 마주합니다. 숲은 원래 그늘지고, 어둡고, 방향 감각을 상실하기 딱 좋은 곳입니다. 사냥꾼이나 숲지기처럼 직업 특성상 숲에 들어갈 수밖에 없는 이들을 제외하면 숲으로 들어가는 걸 최대한 자제했던 이유가 괜한 게 아닙니다. 나무들은 다 똑같이 수피가 어두운 색깔이고, 하늘을 봐도 수관에 산란되는 햇빛만 보이고, 돌들도 똑같이 이끼가 끼어 있고... 태어나서 기억이 시작됐을 때부터 이곳에서 살았던 아앨라나야 감과 소리 따위에 의지하면 길이 찾아진다지만 베스니 같은 초행자가 여길 그냥 헤쳐나간다고요? 베스니는 한참 동안 가만히 서 있더니 다시 돌아서서 부탁합니다.
"죄송합니다. 도와주세요..."
그리고 가말라시엘은 비웃듯 부연합니다.
"어느 선택을 하건 당신의 자유랍니다, 사도님. 왜냐? 당신이 안 도와줘도 당신의 평판은 나빠질 게 없거든요. 안 도우면, 이 사람 일주일도 못 가서 여기서 죽습니다."
엘리는 가면과 붕대를 칭칭 둘렀는데도 맨정신으로 버틸 수 없는 햇빛에 저절로 이가 악물리고, 온 몸에 태양빛 족쇄가 채워져 그녀를 감금합니다! 아까 전까지만 해도 밤의 군주를 자칭하던 그녀의 지성도, 속도도, 힘도, 체력도, 모두 그녀를 옭아매고 빨리 어둠 속으로 썩 꺼지라고 강요합니다. 엘리의 뱀파이어 혈통에 엮인 저주로, 지금의 엘리는 모든 능력이 '약함' 상태로 고정됩니다. 주의 바랍니다. 그러거나 말거나, 이 상황에도 엘리에게 아무런 악의도 가지지 않은 에레야는, 그녀가 '해야 할 일'을 설명합니다.
"세스타우 성은 한번 돌아봤지? 베르야 의복점이라고 찾아가서, '타운스픽의 주선으로 왔다'고 이야기하면 옷을 맞춰줄 거야. 어떤 스타일로 맞춰도 네 자유지만, 그 옷 입고 싸울거면, 특히 너 싸우는 방식 안 고칠거면 그냥 검붉은 색으로 바꿔라. 그리고 난 다음에는..."
에레야는 엘리에게 묵직한 돈다발을 던집니다. 딱 보니 팔 잘린 남자가 창고에 모아놨던 그 돈을 좀 나눈 모양입니다.
"이거로 여관 잡고 날 보내던지, 뭐 좀 먹던지 알아서 해. 이 돈은 걱정 마. 수색 참여한 경비들한테도 좀 먹여놔서 네가 돈 쓰는 거 봐도 입 닥치고 있을 테니까. 이해했나?'
저는 이제 이 자리를 떠나려는 그녀의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았어요. 그녀의 언행에 따라 이어지는 모습은 저의 시야에서 벗어나기도 전에 곧 멈춰버렸어요. 잠시 숲의 형상을 다시금 살펴보고는 마음에 바뀌었나 봐요. 아마도 짦은 순간 여러가지 생각이 들었겠지요. 그녀가 또 다시 위험하게 가능성은 부정하지 못할 이유가 있어요
"그래요, 사람들에게 이야기가 흐르기 위해선 이야기도 사람들에게 닿아야할 필요성이 있어요. 그래도 1주일이면 충분히 노력한 것 같아요"
저는 가말라시엘 님의 말에 수긍했어요. 그녀의 상처를 치유해주었으니 방금처럼 그녀는 스스로 원하는 곳에 가도록 남겨둘수 있어요. 그러한 이야기가 흐르던 그렇지 않던 저는 그다비 관심이 있지는 않지만, 마침 그녀가 도움을 원하기도 했으니까요, 이번에는 좀 더 그녀와 같이 있기로 했어요
"좋아요, 이미 한번 도와드렸으니 두 번도 별로 문제 없을거에요~"
저는 그녀의 요청에 고개를 끄덕이면서 가볍게 응했어요. 두 번까지 이어진다면 세번도 있을 수 있어요. 어쩌면 그 때는 얼마지나지 않아서 올수도 있겠지요. 이 만남은 어디까지 이어질 수 있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