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모두는 누군가를 위한 이야기의 소품이자, 단역이자, 조연이기도 하고 동시에 자기 이야기의 주인공이기도 하다. 그 이야기는 비참할 수도, 행복할 수도 있고, 기승전결이 갖춰졌거나 이야기의 어떤 구성요소 하나도 제대로 된게 없을 수 있다. 하지만 아무리 엉망인 이야기가 되는 한이 있어도 우리는 선택하고, 때로는 강요당하면서 우리의 이야기를 써낸다. 이야기의 악마 이프가 이제 마침표를 찍으라 권할 때까지, 죽음이 우리를 찾아올 때까지. 왜냐면 우리는 살아있으니까. 그 이야기는 우리의 삶이니까.
골절도 종류가 다양합니다. 단순골절, 복합골절, 개방성 골절 등등... 그리고 이 여자는 상태가 정말 심각합니다. 다리가 부러져 종아리가 뒤틀리다 못해 뼈가 약간 살을 뚫고 나왔군요. 이 여자가 심하면 쇼크사, 적어도 기절하지 않은 채 의식을 유지하는 것마저도 장할 지경입니다. 이 사람을 구하려면 기절시키던지, 팔다리를 잘라가도 모를 정도의 강력한 마취를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아앨라나의 머리속에 두 목소리가 울려퍼집니다. 하나는 기억, 하나는 악마입니다.
'네 유치에 충치가 나서 뺄 때였단다. 워낙에 자지러지게 울길래, 영면버섯 빻은 가루를 물에 개어 먹였지. 보다시피 넌 잘 살아있단다. 적당히 쓰면 영면버섯도 쓸 수 있어. 물론 못 맞추면 영면이지."
"사도여! 다친 이는 죽고, 먹잇감이 되는 자연의 섭리를 거부하라! 나는 모든 불경한 의심과 사유의 후원자, 역심의 파종꾼이니! 나의 힘을 빌어 이 세상을 개변하고, 세상의 본질을 바꿀 혼돈을 파종하라! 이는 개인의 목숨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의 사변이니!"
음. 가말라시엘 님의 말씀을 일상언어에 맞게 다듬으면 내 힘을 빌려서 고쳐보되 좀 기이한 일이나 이상한 부작용이 일어날 수 있단 것 같습니다. // 지금 봉인상태의 가말라시엘을 말 엄청 많고 쓸데없이 무게감 잡는 컨셉으로 했는데 괜찮아?
히메가 던진 돌멩이는 수탉의 머리를 맞추...지는 못하고 지붕을 지탱하는 등골 끝자락을 때렸습니다. 그래도 수탉을 놀래키기는 충분해서, 늙은 수탉은 푸드덕거리며 허공으로 날아올랐다가 이내 떨어져 브우니크 할멈의 손에 모가지가 잡힙니다. 제아무리 할머니가 늙었더라도 수십년 일한 주부의 경륜은 이길 수 없어 푸드덕거리기만 합니다.
"그래. 이샤. 고맙구나. 오늘은 이놈 고아줄테니 늦지 말고 오그라."
그녀의 이름은 히사히메지만, 이 지역 사람들은 외국 정도가 아니라 세계 반대편에서 오다시피한 사람의 이름이 워낙 생소하고 발음도 어려운지 그녀의 이름을 이샤, 히메까지 붙이면 이샤힘, 으로 부르고 있군요. 아무튼 브우니크 할멈 가라사대 오늘 메뉴는 닭수프랍니다. 음, 포치는 옆에 앉아서 눈을 밝히고 있군요. 먹는거 얘기는 개의 몸에 갇힌 인간마냥 무섭도록 잘 알아듣습니다.
>>392 돌은 아쉽게도 닿지않았으나 이 또한 짐의 자비로움이 표현된 것이로다! 음, 내 오늘은 봐줄테니 다음번엔 할마마마를 곤란하게 하는 일은 없어야할 것이ㅇ... 음! 생각해보니 마지막 반란이라면 딱히 상관 없도다! 인생의 마지막에 죽음의 운명으로 부터 저항조차 하지 않는 것은 대장부의 그릇이 아니니!
"닭고기인게냐! 으흥흥~ 참으로 기대가 되는구나!!!"
한잔하거라! 비록 내 애플파이는 먹지 못하게 되었어도 닭고기는 도미다음으로 좋아하는 음식이니! 신선한 도미를 먹지 못하는 이곳에서는 그야말로 가장 좋아하는 부위였노라! 헌데 포치 네놈은 왜 그리 눈을 빛내더냐. 짐의 음식을 빼앗아먹는것은 아무리 저 머나먼 귀인국에서부터 함께한 충신이라고 하여도 반역의 대죄에 해당되나니, 볼을 주물러지는 형벌에 처하겠노라.
에레야는 혀를 차면서 군의를 부르고, 새부리 가면을 쓴 군의가 가까이 옵니다. 장갑을 쓴 양손을 싹싹 비비는 군의는 후욱후욱 방독면 너머로 거친 숨을 뱉으면서, 엘리의 온 몸에 가득한 상처를 탐욕스럽게 바라보면서 여러 의미로 참 무시무시한 말을 꺼냅니다.
"뱀파이어를 해부하는 게 아니라 치료하는 건 처음인데... 후욱후욱... 정말 기대되는군..."
뱀파이어를 치료해본 적 없는데다가, 밤피로필리아랑은 다른 의미로 변태인 놈 같은데... 다행히도 실력은 있는 놈입니다. 군의는 엘리의 찔린 상처를 좀먹어가는 녹색 발광도료를 보고, 이것이 랫킨의 마석임을 눈치챕니다. 군의는 환부 근처의 찢어진 옷감을 잘라내고 성수를 바를 뻔하다가 엘리의 종족을 뒤늦게 깨닫고 고농도 식초로 환부를 닦아낸 후, 주머니에서 작은 쇠막대기를 꺼내 녹색으로 발광하는 상처에 집어넣어 휘젓습니다. 치직... 치지직... 녹색 마석이 쇠와 반응해 고열을 내며 무해한 물질로 바뀌고, 덕분에 엘리의 환부는 고열에 삶아지며 저절로 소작됩니다. 유일하게 문제가 있다면, 이 모든 과정에 마취는 없었다는 걸까요.
>>393 "일? 으음. 생각해보면 서까래 썩은 것도 갈아야 하고, 울타리도 세워야 하고... 으음. 할 일이야 많지만, 우리 공주님은 일하기 싫어하는 거 아니었니? 귀족은 다 그렇던데."
히사히메의 자존심에 상처가 될 수도 있는 말이지만, 놀랍게도 이 마을은 귀족이 진짜로 아무것도 안 하고 놀고 먹는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늑대가 나타났을 때도 그걸 물리친건 히사히메였지 그 누구도 아니였으니까요. 그래서 고민하던 와중, 힘레먼 할아버지가 나타납니다.
"이샤야, 고트뢰 놈 마차가 도랑에 빠졌단다. 좀 도와주거라. 마을 젊은놈들, 다 밥만 쳐먹지 이샤 하나만 못해요."
>>395 엘리는 간신히 서서 전투를 지켜봅니다. 인간들의 전투는 고블린처럼 맹렬하지도, 식인종처럼 우직하지도, 랫킨처럼 교활하지도 않습니다. 정말로 단조롭고 지루하고 어찌 보면 유치하기까지 합니다. 하지만, 그 단조로운 대열은 달려드는 적들을 단 하나도 허용하지 않습니다. 방패에 막히고, 방패병 뒤에 서 있던 경비가 단창을 내리쳐 머리통을 쪼갭니다. 배후에 서 있던 식인종 궁수들은 이미 몸통이 과녁마냥 고슴도치가 되어 쓰러졌고, 고블린 샤먼이 주술을 쓰려고 하지만, 에레야가 수첩을 꺼내더니 샤먼을 정죄합니다.
"신께서 가라사되, 삿된 말로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
그러자 주술을 외우려던 샤먼의 입이 사라지고, 석궁을 든 경비들이 고블린 샤먼에게 화력을 집중합니다. 그리고 구울이 달려들어 방패병 위를 타넘지만 단창 여럿에 꿰여 경비들과 함께 넘어지고, 다른 경비들이 단창을 더 꽂아 움직임을 봉쇄하더니 도끼나 망치를 든 경비들이 두들겨패 짓뭉갭니다. 식인종들이 엘리에게 비슷한 짓을 할 뻔한걸 생각하니 소름이 돋지만 지금은 그걸 신경쓸때가 아닙니다.
"나팔총사수! 앞으로!"
그 말과 함께 나팔총을 든 경비들이 방패병 사이사이에 서서 방패 위로 나팔총을 올립니다. 에레야는 마지막으로 달려드는 적들을 보면서, 계속 정지, 정지, 정지... 를 외우다, 그들이 가까워진 순간 외칩니다.
"쏴!"
꽈아아아아앙!!!!!
폭음과 함께 앞을 가리는 연기가 수로를 채웠다가 이내 사라집니다. 앞을 보면 수천개의 쇠구슬에 걸레마냥 너덜너덜해진 고깃덩이들이 널부러져 있고, 운 좋게 살아남은 이들은 종족을 가리지 않고 도망치기 바쁩니다.
엘리는 문득 뱀파이어들 사이에서 악명이 높았던 이단사냥 시기를 생각합니다. 인간들과 친하게 지내자, 최소한 괴롭히진 말자는 주장에 동의하지 않았던 일원들이, 수천명이 하나의 생명체처럼 움직여 쫓아다니니 못 견디고 죽었지요.
에레야는 고개를 끄덕이며 엘리의 말에 동의했습니다. 보통의 사교도나 식인종 떼라면 이 정도로만 손을 봐줘도 다 끝난 거라 볼 수 있지만, 엘리가 본 게 있는 이상 여기서 끝났다고 돌아갈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에레야는 무기를 정비하고 탄약을 좀 갈아두라고 명령하고, 병사들은 전투 이후 고요해진 지하수로 거점에서 마른 목을 축이고, 에레야는 거점에서 식인종들이 만든 온갖 불길한 토템이나 상징 따위를 보면서 혀를 찹니다. 준비를 모두 마치자, 에레야는 일어나서 경비들에게 명령합니다.
"자, 이제 앞으로 전진한다!"
그리고, 에레야의 말은 듣자마자 그 불길함에 소스라치게 온몸이 떨리게 만드는 기이한 목소리에 끊깁니다.
"아니, 그럴 필요 없다."
에레야가 반사적으로 나팔총을 꺼내 겨누고, 엘리도 강자의 기운에 그 쪽으로 고개를 돌립니다. 붉은 로브를 입은 사제, 엘리를 뱀파이어라고 귀빈 대접했던 그놈입니다. 겉모습만 보면 그냥 로브를 뒤집어쓴 수상한 놈 같지만... 에레야는 이단심문관의 타협 없는 신앙에 맞부딪치는 끔찍한 악의를, 엘리는 뱀파이어가 느끼는 강자의 아우라에 저놈이 보이는 것 이상임을 깨닫습니다. 사제는 엘리 쪽으로 고개를 돌리더니 그녀를 비웃습니다.
"이단심문관과 함께 싸우는 뱀파이어? 멍청하군. 네 년의 모습을 동족이 보면 어떻게 생각할 지 생각이나 해보았나?"
그리고는 로브를 벗고, 에레야와 방패병 뒤에 서 있던 경비들은 그 무시무시한 모습에 기겁해서 순간 뒷걸음질칩니다. 입가와 턱은 흥건한 피로 물들어 있고, 아랫턱은 알 수 없는 괴물의 것을 붙여서 바늘로 꿰맨 흔적이 역력합니다. 얼굴에도 뭔가 했는지, 얼굴을 고정하려는 목적으로 온 얼굴에 대못이 박혀있고, 눈은 벌겋게 충혈되어 있습니다. 사제는 엘리를 가리키고는, 에레야에게 거래를 제안합니다.
"뭐, 됐다. 뱀파이어는 하등한 이들의 피를 먹고 살지만, 동족의 피를 마시고 강해지니까. 난 너희들에게 관심 없다. 지금 당장 이 년을 여기 두고 물러난다면, 난 세스타우 성에서 물러나지. 그러니까 꺼져."
에레야는 잠시 고민하는 척하고, 말을 조금 늘입니다.
"피차 바쁘니 빨리빨리 대답하지. 그러니까..."
그리고 험악한 표정으로 짧게 끊는군요.
"...아니, 그냥 죽어."
꽈아아아앙!!! 에레야의 나팔총이 불을 뿜고, 사제는 뒤로 넘어집니다. 하지만 에레야는 이거로 끝나지 않을 것임을 잘 알아서, 경비들에게 외칩니다.
"석궁!"
슉, 슈슉! 볼트가 바람을 가르고 날아가 쓰러진 사제의 다리와 발을 찌릅니다. 하지만 사제의 몸은 그러거나 말거나 부글부글 끓으며 이상 증식하더니, 다시 일어납니다... 팔다리가 비대해지고, 머리가 세 갈래로 분리된 괴물, 이제는 더 이상 인간의 흔적조차 보이지 않습니다.
'아아으, 부끄러워요~ 그런 과거는 적절한 처리를 해주세요~ 하지만, 그것도 경험이고 지식이에요. 바로 지금 그게 필요할 수도 있는 파편이 될 수 있겠어요'
그 영면이라는 의미를 저는 생각하고는 했어요. 때로는 죽음을 영원한 잠으로 비유하기도 해요. 수면과 죽음의 차이가 무엇인지 아시나요? 이 둘은 겉보기에 상당히 비슷하지만 좀 달라요. 하나는 다시 움직이고 지속하기 위해서 거쳐가는 것이고, 반대는 그대로 멈춰버리고 존재마져도 남겨지는 것을 멈추겠지요. 그리고 그 곰팡이의 효능은 두가지를 절반으로 나눈뒤 섞어 둔 것처럼 작동할 거에요. 약과 독의 차이는 투여량의 따라 결정되요. 특별한 예외가 없다면요
"그래요, 그래요. 자연을 거부한다기 보다는 우회한다고 하는게 맞을 것 같아요. 어쨌든 자연 그대로 두는 건 아니지요?"
"작은 무언가가 사실은 큰 것을 이루는 일부가 될 수도 있어요. 무언가를 바꾸기 위해선 차근차근, 하나부터 시도해가는 거에요. 퍼즐 조각을 하나씩 자리에 놓아서 그림을 완성해야 해요"
정말 자연의 법칙을 거부하려면 사령술로 가짜 생명이라도 부여하는 것이 좋을 것 같지요? 아무튼, 이 여성 분을 도와드려야 겠어요. 방식이 초래할 것들... 고려해야 하는 것. 하지만 어때요? 이론도 중요하지만 그 이론이라는 건축물의 구조를 지탱해줄 실습이라는 기둥과 지지대가 필요한 걸요. 이 여성분은 그것을 시도해보기에 알맞는 것 같아요. 이대로 두어도 좋은 결말을 맞이 하지는 못하실 것 같아 보여요, 그렇다면 할 수 있는 것을 하고, 더 좋은 변화에 이르는 것에 닿도록 해보는 것이 더 좋지 않겠어요?
원래부터 그럴 생각이었는지 아니면 동의했는지, 에레야는 병사들을 뒤로 물립니다. 병사들도 살고 싶은지 걸음이 빨라지고, 엘리와 에레야만 앞에 남습니다. 엘리가 앞길을 막자 에레야는 자연스레 뒤에 서고, 괴물은 엘리를 보더니 피식 웃습니다. 뭐... 목소리가 그렇다는 이야기입니다. 얼굴이 세 갈래로 쪼개져서 지옥에서 올라온 꽃봉오리마냥 벌어졌는데, 미소를 지을 수 있을 리가 없죠. 엘리의 판단은 옳습니다. 엘리가 자기보다 훨씬 격이 낮은 이들 상대로는 정확한 연계가 없는 이상 얼마나 달려들어 찔러도 피 한번 쭉 빨고 다시 싸울 수 있는 것처럼, 이 괴물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렇다면, 이 괴물 입장에선 어떻게든 저 병사들을 공격하는 게 답입니다.
콰직,
괴물이 발에 힘을 주자, 묵직한 바윗돌에 발길이 파입니다. 그리고 엘리에게 달려들고, 엘리도 동시에 달려듭니다. 괴물은 엘리를 공격할 것처럼 양 팔을 뻗고, 엘리가 당연히 반격하려고 몸을 비틀자... 엘리는 뒤늦게 이 괴물의 진정한 수를 파악하고 눈을 크게 뜹니다.
뻐억!!!!
엘리가 자신의 팔을 붙잡고 돌려고 하자, 그대로 밀쳐 엘리를 날려버리고 병사들에게 달라붙습니다. 이 녀석, 엘리만큼 빠른 주제에 엘리보다 힘도 강합니다.
"으아악! 끄아아아악!!!"
"이런 씨이바아알!!!"
병사들의 대열이 한도를 한참 넘어선 괴물의 돌진에 무너지고, 방패병을 짓밟고 들어간 괴물이 병사들을 난도질하려 들지만, 바로 직전에 정신을 차린 경비병들이 단창으로 괴물의 팔을 찌릅니다. 하지만, 그 괴물은 다섯 개가 넘는 단창이 박혔는데도, 경비들이 갑옷을 입은 자신의 몸무게까지 이용해 이를 악물고 지탱하는데도 그대로 나가고, 불발된 나팔총을 어떻게든 고치려던 경비에게 다가갑니다.
"오, 오지 마! 오지 마! 으아아아악!!!"
서걱
괴물이 나팔총병의 목을 그어버리고, 같이 싸우던 경비들의 얼굴에 동료의 따뜻한 피가 묻으며 공황 상태에 빠집니다. 에레야도 구경만 할 순 없기에 외칩니다.
"그에 도워단이 이르되, 하늘에 이르는 복락의 날에 가라지들은 땅에 떨어져 한 발짝도 움직이지 못하리라!"
힘레먼 할범은 포치에게 손짓하고, 또 '뼈다귀'는 기가 막히게 알아들은 포치는 꼬리를 흔들면서 힘레먼 할범 주위를 뛰어다닙니다. 서역인들이 데려왔다는 묵서가국 원산의 단모 치와와도 평소에는 광견병 걸린 것마냥 날뛰는 것이 어르신이 키우면 참 착하게 잘 따른다니 포치는 오죽하겠냐 싶기도 하지만서도, 개는 주인이 아니라 먹을 걸 따른다는 농담이 생각나 조금 서운하기도 합니다. 그래도 히사히메는 잘 알고 있습니다. 곧 이곳을 떠난다면 포치는 당연히 자기를 따를 것이란 점을요! 아무튼 포치는 마차를 옮기는 데 도움을 줄 수 있을 리는 없으니 가 보면...
"아이고, 하필 빠져도 이런 데 빠져!"
"행님요! 다음번엔 마차를 좀 작은 걸 사던지, 아니면 동네 사람들이랑 길을 넓히던지 합시데이!"
동네 장정들이 모여서 도랑에 빠진 마차를 당기고 있는데, 척 보면 빼기 힘들 법도 합니다. 당연히 그럴 것이, 도랑의 각도가 40도가 넘는 데다가, 마차의 크기도 작은 오두막 정도는 됩니다. 그래서인지 말에 더해 사람들도 앞에서 당기고 뒤에서 미는데도 빠질 생각을 안 하는군요. 뭐, 히사히메야 혓바닥 길어질 게 변명할 것도 없이 흡 하고 힘줘서 좀 쎄게 밀면 그만이겠지요.
상대는 고개를 끄덕입니다. 지금은 찬밥 더운밥 가릴 때가 아니기도 합니다. 지금은 전근대, 의학 학교에서 제대로 된 외과의사가 배출되기 시작한 지 백년도 지나지 않았고 아직도 머리 깎는 이발사가 외과의사도 겸하는 시대입니다. 다리가 부러진 여성은 이 정도 골절이라면 당장 다리를 잘라버려도 할 말이 없으니, 그저 아앨라나가 고통 없이 고치는 방법을 알고 있기를 바랄 뿐입니다. 아앨라나는 지팡이를 들어서, 가말라시엘의 제안대로 그 힘을 이용해 고쳐보기로 합니다. 심호흡을 하고, 아앨라나는 아주 잠깐, 가말라시엘의 의지를 조금 더 폭넓게 받아들입니다. 그리고, 가말라시엘의 명령이, 그 악마를 따르는 이 시대 유일의 사도 아앨라나의 입으로, 이 세상에 전해집니다.
דיין פיס וואַקסן צוריק.
아앨라나 그녀 자신도 이해할 수 없는 속삭임과 함께, 조난당한 여자의 부러진 다리가 검게 물듭니다. 그 여자는 아앨라나를 바라봅니다. 무언가 이상한 것에 빙의된 것 같은 눈동자, 점점 내 것이 아닌 것처럼 변해가는 다리, 사라져가는 감각에 당황해서 번갈아 보지만 너무 늦었습니다. 혹시 내가 부탁할 사람을 잘못 골랐나 벌벌 떨지만, 어쩌겠습니까. 그녀에게 선택권은 없었습니다.
가말라시엘이 다시 자신의 은거지인 지팡이로 물러나고, 정신을 차린 아앨라나는 그녀의 다리를 내려다봅니다. 다리는 말끔하게 나았습니다. 마치 말의 다리처럼... 아니, 문자 그대로 말의 다리처럼 변했습니다. 여자는 완전히 사라진 통증, 말처럼 변해버린 자신의 다리를 내려다봅니다.
"이, 이게 무슨..."
어쩌면 악마의 농간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는 상황, 하지만 그녀는 분노에 빠져 따지거나 공포에 빠져 도망치는 대신 눈을 빛내며 감사를 표하는군요.
"...대, 대단해요!!! 어, 어떻게 이런 일을 한 거죠?! 사람의 다리를 말의 다리로 만들다니! 검은 숲에는 정말 강한 마녀가 산다는데, 호, 혹시 당신인가요?!"
귀인국에서는 주로 바깥활동을 할때 마차보다는 가마를 이용했느니라. 지형적인 이유로 마차로만 움직이면 다닐 수 있는 곳이 제한되기 때문이기도 했으나 그 이상으로 어지간해선 숙련된 가마꾼이상으로 그런 돌투성이 지형을 건너는 것에 특화된 이들이 없기 때문이기도 하느니라. 그렇기에 기실, 이런 것은 처음이니라!!! 무엇이냐 저것은!!! 뭔놈의 마차가 저리 무식하게 크단 말이더냐?! 이건 마치 애영지... 아니 이미 집이 아니더냐!!!! 이렇게 커다란 마차라면 안에는 국서라도 타고 있는 것더냐?!
"비키거라 비켜!!! 그냥 짐이 하는 것이 빨라보이느니라!!!"
장정들을 물리고 가볍게 힘을 줘 마차를 들어올렸느니라. 으음, 목재가 좋아서 그런지 무게는 그리 엄청나진 않은 것 같구나! 짐이 타기에는 다소 너무 나약해보이니 일단 넘기도록 할까.
>>414 엘리는 암살쥐에게서 빼앗은 녹색 단검을 듭니다. 이거에 찔린 암살쥐의 목은 환부가 초록색으로 발광하며 썩어들어감과 동시에 타들어갔고, 자폭쥐들도 이것 앞에서는 무력하게 쓰러졌습니다. 물론 칼을 맞으면 일반적인 생명체는 죽습니다. 하지만, 이건 다릅니다. 엘리 같이, '일반적이지 않는' 생명체에게도 통하는 악마 같은 무기입니다.
뭐라도 해보라고?
에레야의 선언 덕분에 다른 건 몰라도 저 괴물의 속도만큼은 확실히 느려졌습니다. 그래도 뱀파이어는 뱀파이어, 엘리에게 죽어나갔던 다른 식인종들이나 랫킨과는 다르게 엘리가 뭘 하려는 건지, 얼마나 빨리 달려오는지는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건 아무것도 바꾸지 못합니다. 알고 당하나, 모르고 당하나, 결국 '당한다'는 건 똑같습니다. 엘리는 씩 웃고, 달려듭니다.
그래, 뭐라도 해볼게.
제아무리 괴물이라 해도, 제아무리 불경한 힘으로 축복받았다 해도, 그 근본은 강해진 수많은 근육 하나하나의 협응으로 이뤄질 뿐입니다. 그 말은, 운동 수행에 치명적인 부위를 찌른다면 당해낼 재간이 없다는 뜻입니다. 뱀파이어의 본능으로, 일족의 교육으로, 수많은 사냥 경험으로, 엘리는 인간 비스무리한 놈들이라면 어딜 찔러야 병신이 되는지, 어딜 찔러야 제일 고통스럽게 죽는지 잘 압니다.
철퍽!
"크웨엑!!!"
엘리가 무릎을 찌르자, 안 그래도 칼이 찔리면 세상이 노래질 정도로 아픈 무릎에 녹색 단검의 작열통까지 더해지며 끔찍한 고통이 괴물의 광기를 잠시 짓누릅니다. 그 다음은 어깨를, 그 다음의 다음은 척추를 노려 찌릅니다. 이 세상에 육을 빌려 존재하는 이상, 육체가 정신을 지배할 순 있어도 정신이 육체를 지배할 순 없습니다. 어떻게든 멀쩡한 한쪽 다리에 체중을 실어 서 있으려던 괴물은 이를 악물고 버티려 합니다. 하지만, 이 괴물이 불가해한 공포가 아니라 정신만 차리면 극복할 수 있는 또다른 적임을 목도한 경비들이, 용기를 얻어서 도끼와 망치로 나머지 다리를 찍어버립니다.
"뒤, 뒤져!"
괴물의 무릎이 우드득, 하며 꺾이면 안될 방향으로 꺾이고, 괴물의 자세는 무너집니다. 만세! 경비병들은 사기가 충전해서 이 괴물에게 달려듭니다. 그도 그럴 것이 이런 괴물을 죽였다는 경험은 언제 해보겠습니까? 경비들은 도끼와 망치로 괴물을 마구 내려치고, 단창을 꽂았던 경비들은 허리춤에서 단검을 꺼내 괴물을 푹푹 찌릅니다. 엘리도 뭔가 해냈다는 생각에 녹색 단검으로 찌르면 정말 아플 법한 부위를 골라서 찌르려는데... 뭔가, 경비들의 눈이 이상합니다. 눈이 붉게 물들고, 표정은 기이할 정도로 웃고 있습니다. 엘리는 방금 전에 이걸 본 적이 있었는데... 라고 생각하다, 이게 고블린들이 주술에 광폭화되었을 때임을 생각합니다. 그리고 거기에 생각이 닿자마자...
간만에 힘 좀 써보기로 한 히샤히메가 장정을 툭툭 치자, 장정은 마치 곤장을 옆구리에 맞은 것처럼 고통스러워하며 옆으로 물러납니다. 히샤히메의 힘을 잘 아는 다른 장정은, 행여 히샤히메의 힘 때문에 말까지 마차에 매달려 올라갈까 황급히 말과 마차를 묶은 줄을 풉니다. 그리고 마차주인 고드뢰는 대머리에 송골송골 맺히는 땀을 닦으면서, 행여 히샤히메의 힘 때문에 마차가 개박살날까 벌벌 떨면서 바라봅니다. 장정들과 말이 주변에서 물러나서 한나절 힘 빼느라 지친 몸을 가쁜 숨을 몰아쉬며 회복하는 동안, 히샤히메는 잡을 만한 모서리에 양 손을 얹더니 힘을 줍니다.
흡.
히샤히메의 양 근육이 순간 팽창하고, 그녀의 몸을 지탱하는 등골의 근육이 수축하며 사람들이 오니를 상상할 때마다 생각하는 무시무시한 괴물의 얼굴이 등근의 형태로 나타납니다. 마차의 모서리는 히샤히메의 무시무시한 손아귀힘을 이기지 못해 콰직, 하고 손아귀의 형태대로 파고들어가고... 쪼그려 앉은 히샤히메가 구부린 무릎을 펼치자, 히샤히메는 기이한 동방의 도술을 선보입니다. 기대하시라!
마차가 하늘에 붕 뜨는 마술입니다!
서커스의 속임수도 그 무엇도 없는, 우월한 완력과 마법이 도저히 구분되지 않는 경지에 장정들이 입을 떡 벌립니다. 마차 모서리가 박살난 고드뢰는 울다가 웃다가 난리도 아니지만요.
>>423 에레야가 이렇게 절박하게 외쳤던 적이 없습니다. 심지어 불타서 다 쓰러져가는 여관에서도, 엘리에게 여유롭게 여기서 싸우면 너 반드시 죽는다고 말했던 그 이단심문관이요. 그 말은, 정말 어지간히 큰일난 게 아니란 소리죠. 에레야 휘하의 이단심문소 소속 방패병들은 이미 에레야를 둘러싸고 있고, 석궁병과 나팔총병도 기이할 정도로 폭력적으로 돌변한 동료들을 보고 뒤로 물러난 상태입니다. 뭔가 이상합니다. 도시를 지키기 위해, 아니면 이번 주 급료를 삭감 없이 제대로 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마치, 폭력을 위해 폭력을 휘두르는 것 같습니다. 에레야는 흉갑에 새겨진 철십자 인장에 왼손을 얹은 채 조용히 기도문을 암송하고, 이 폭력성의 영향에서 아슬아슬하게 벗어난 경비병들은 언제 도망치게 해주나 발을 동동 구르며 에레야만 쳐다봅니다.
"죽어! 죽어! 죽어!"
"크하하하하하하하!!!"
괴물 위에 올라탄 경비병들이, 하나 둘 그 괴물의 몸속에 파고들어갑니다. 피에 침식하는데도, 괴물의 피가 덩굴처럼 엉겨붙으며 그들의 팔다리를 집어삼키는데도, 기쁘게 폭력을 반복합니다. 죽어! 죽어! 죽어! 죽으라고!!!!! 간신히 기도를 마친 에레야, 간신히 빠져나온 엘리는 폭력에 사로잡힌 경비들을 봅니다. 처음에는 괴물을 찌르던 경비들이, 이제는 피웅덩이 속에서 헤엄치는 듯 하다가... 어느 순간, 더 이상... 누가 죽으라고 말하는 것인지 구분되지 않을 정도로, 괴물과 한 몸이 됩니다.
"죽어! 죽어! 죽어! 죽어! 죽어!!!!!!!!!!!!"
눈 앞에 드러난 것은, 에레야의 신앙과 엘리자베스의 혈통을 모두 모독하는 무언가입니다.
인간보다 반은 더 큰 키, 무시무시하게 벌어진 어깨, 매끈한 유선형의 머리, 그리고 어디든 날아갈 수 있는 날개. 엘리자베스 바토리 블라드 체페슈는 이 형태를 잘 알고 있습니다. 인간들이 진정으로 두려워하는, 뱀파이어 중에서도 선택받은 뱀파이어만이 취할 수 있는 진정한 형태입니다. 이 사제는, 뱀파이어들만이 알아볼 수 있는 그 아름다운 형체를 모독하고 있습니다.
에레야의 눈도 떨립니다. 심장 등 필수 장기, 뼈를 제외한 모든 살덩이들은 갈려나가 걸쭉하고 끈적하게 엉겨붙은 피죽으로 변했고, 심장이 한 번 고동할 때마다 그간 저 괴물이 잡아먹었을 수많은 이들이 죽기 직전 지었던 표정이 와류 속에서 생겨났다가 사라지기를 반복합니다. 살아있지 말아야 할 이들 중에서도, 진정 살아있지 말아야 할 자.
에레야는 엘리를 제외한 남아있는 이들에게 명령합니다.
"이 작전은 실패다! 모두 후퇴해! 신전으로 가서 비상 사태라고 알려!"
그러자, 방패병들이 일사불란하게 나가는 동안 석궁사수와 나팔총사수들은 걸음아 나 살려라하고 도망칩니다. 하지만, 불운한 방패병 하나가 그 괴물의 손아귀에 잡힙니다. 방패병은 붙잡힌 상태에서도 메이스로 저항하지만, 그 괴물이 세 갈래로 쪼개진 머리로 방패병을 그대로 삼켜버립니다. 그 안에서, 무언가 저항하는 듯 뒤틀리지만, 이내 괴물이 자신의 배를 강타하자 침묵합니다. 에레야는 쯥, 하고 혀를 찹니다.
"살다살다 뱀파이어하고 편 먹고 싸우다 죽게 될 줄은 몰랐군."
싸울 생각이라면 조심하십시오. 대체 어떻게 인간이 이 경지에 이르렀는지는 모르지만... 아무리 모독적이라도, 이 괴물은 뱀파이어의 진정한 형태를 취하고 있습니다!
아 그리고 공지할게. 지금처럼 사람이 적다면 하루 1개를 넘어 합이 잘 맞으면 4-5개도 진행할수 있긴 한데 사람이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나도 사람이라(손가락에 챗gpt 달렸으면 좋겠다 ㅜㅜ) 진행레스가 내가 공언한대로 하루 1개로 제한될 가능성이 높아. 그러니까 참고해줘!
이단심문관, 이단심문관과 그 아래에서 이끄는 수많은 병력들과 정보망은 그 사제가 불경한 세상에 몸을 담았을 때부터 무슨 대가를 치르고라도 도망쳤던 공포의 대상입니다. 이단심문관은 신의 권능으로 심판을 행했고, 병력들은 항상 어둠에 숨어살 수밖에 없었던 그의 부하들과 협력자들을 잔인하게 찢어발겼고, 정보망은 물리적인 그물보다도 더 무시무시한 그물이 되어 사제의 온 몸을 옥죄곤 했습니다. 이들은 자비도, 타협도, 후회도 없었습니다.
뱀파이어, 뱀파이어는 그가 어릴적부터 동경했던 진정한 '생득권자'이자 먹이사슬 최상위였습니다. 어둠 속에서 암약하면서, 온갖 인간들을 가축처럼 사역하고 부릴 권리를 지닌 존재. 그래서 되고 싶었습니다. 온갖 연구를 다 했고 안 해본 방법이 없습니다. 이론적으로 그럴싸한 방법부터 척 봐도 사기가 분명한 방법까지, 모든 것을 시도했습니다. 그럴 만큼 되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아닙니다.
이단심문관도 그에게는 발라먹을 가시가 조금 많은 생선처럼 보이고, 뱀파이어마저도 감히 그의 하위로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누구를 먼저 공격할까 고민하던 그 형체는, 그간 어둠의 영역까지도 거침없이 쳐들어오던 이단심문관에게 쌓인 울분을 먼저 풀기로 합니다. 수많은 이들의 가죽을 엮어 만든 날개를 펼쳐 올리고는, 그간 올려다보며 도망쳤던 이단심문관을 이제 쫓으며 내려봅니다. 반대로 에레야는 항상 태양신에 맹세할 때만 올려다보던 하늘을, 이제는 저 끔찍한 괴물을 보고자 올려다봅니다.
이거 진짜 죽겠는데?
자신에게 급강하하는 괴물을 바라봅니다. 에레야는 저게 달려오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뿐입니다. 피할 수는 없습니다. 눈을 감고, 신을 향한 자신의 헌신이 충분했나 생각하려는 그 순간...
키야아아아악!!!
엘리가 사제에게 달라붙어 암살쥐의 단검으로 날갯죽지를 찌르고 비틉니다. '승천'한 몸으로도 피할 수 없는 필멸의 고통에 사제가 비명을 지르며 몸을 뒤틉니다. 몸을 뒤틀며 비행 궤도가 변한 탓에 아슬아슬하게 공격을 피한 에레야는, 엘리와 사제가 지하수로 바닥을 구르는 것을 보고 달려듭니다. 그리고 신의 권능을 받아 빛나는 망치로 사제를 내려칩니다. 어떤 공격도 통하지 않을 것 같던 사제의 형체가 뒤틀리며 불안정하게 변하고, 고통을 넘어 신의 심판에 끌려가는 것 같은 공포에 사제가 비명을 지릅니다.
이익, 이이익!
사제가 뒤에 붙은 엘리를 끝장내려 하면 에레야가 망치로 후려쳐 방해하고, 에레야를 죽이려고 아가리를 내밀면 엘리가 대신 머리를 내밀어 할큅니다. 뱀파이어와 이단심문관이, 뱀파이어보다 더한 무언가에 맞서다보니 합이 잘 맞고, 에레야와 엘리의 머리에 똑같은 생각이 스칩니다.
곰을 잡을 수 있느냐는 말에는 조금 당황하기는 했다만 그것 역시 왕으로서의 넓은 아량으로 본다면 이해하지 못할 것은 아니니라! 전래 동화중에는 그런 식으로 곰과 스모를 하여 동료로 만든 용사의 이야기도 있었으니! 짐 역시 그런 이야기는 아주아주 좋아하느니라! 헌데 이상하구나. 짐이 이리도 도움을 주었거늘 고드뢰녀석은 어찌 저리 울상인고? 고작해야 끝부분이 살짝 부서진 정도. 그정도야 고치면 그만이거늘! 전부를 폐기시키는 돈보다야 수리비용이 싸게 치이지 않겠더냐?
"실로 좋구나! 헌데, 이 마차는 무엇이더냐? 마을에서 이런 커다란 것을 탈만한 녀석은 못 봤던 것 같은데. 거인이라도 오는것이냐?!"
>>435 날개, 특히 익막은 조금이라도 찢기거나 구멍이 나면 제기능 하기 힘들어지는 신체부위입니다. 비록 이 시대에는 공기저항이네, 유체역학이네, 같은 대단한 물리학적 이해는 없지만, 집채만한 돛에 구멍이 뚫린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안 그래도 벌어진 상처가 있는 팔을 계속 쓴다면 상처가 어떻게 되겠습니까? 공포 속에서 희망을 잡자, 엘리는 이성을 회복하고, 그 이성으로 적절한 판단을 내렸습니다. 사제도 무슨 생각을 하는지 눈치채고 엘리를 내동댕이치지만, 엘리는 데굴데굴 구르다가 낙법으로 몸을 말더니, 그대로 튀어나가 다시 사제의 날갯죽지에 붙어 양 손톱을 길게 세우고, 날갯죽지를 뜯어버릴 기세로 손톱을 쳐박습니다.
하지만, 살과 뼈가 아닌 걸쭉한 수프를 휘젓는 것 같은 맥없는 느낌과 함께, 엘리는 무언가 잘못되었음을 느낍니다. 박혀 들어갔지만, 벨 수 없습니다. 찌를 수 없습니다. 마치 물을 베려는 것 같이 모든 공격이 의미없이 느껴지는 맥빠지는 감각. 마치, 붉은 슬라임을 칼로 베려고 한 것처럼 어리석게 느껴집니다.
빈틈.
고작 한 합, 많이 쳐봤자 세 합 정도만 낭비했을 뿐인데, 이것만으로 빈틈이 생겼습니다. 사제는 에레야의 망치 자루를 붙잡습니다. 엘리를 도우려던 에레야는, 홀로 시간이 멈춘 것처럼 그 자리에 정지한 워해머를 보고는 욕을 내뱉습니다.
"이런 썅."
쾅!!!!
욕 한마디 할 시간만 주고, 사제는 에레야를 망치째로 들어 내팽겨칩니다. 에레야는 벽에 쳐박혔다가 떨어지고, 그녀의 등골 대신 우그러진 흉갑은 제 기능을 하지 못하고 쪼개졌습니다. 에레야는 쿨럭거리며 내장 섞인 피를 뱉습니다. 그리고, 사제는 이단심문관 대신 뱀파이어를 먼저 처리하기로 방침을 바꿨는지, 엘리를 돌아봅니다. 엘리도 바보가 아니니 물러나려고 하지만...
스르륵...
살 대신 핏물로 이루어진 몸이 변하더니, 분명 엘리가 찌를 때만 해도 등이었던 곳이 이제는 어깨가 되었고, 엘리는 사제의 뒤가 아니라 앞에 매달린 형국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사제는 엘리의 것보다 훨씬 긴 손톱을 뻗어, 엘리를 양 손으로 찔러버립니다. 격통과 함께 엘리는 힘없이 위로 들어올려지고, 이단심문관에게 사냥당해 말뚝에 꽂혔던 놈들마냥 하늘 위로 솟습니다. 너무 갑작스러워서, 공포감도 없습니다.
그냥 도망칠 걸.
핏물로 이루어진 사제의 얼굴에서 소용돌이가 치더니, 순수한 기쁨으로 환희하는 그 혐오스러운 얼굴이 나타납니다. 그리고는, 그 얼굴이 세 갈래로 갈라져서 지옥의 꽃봉오리가 되어, 엘리를 집어삼키려 합니다. 이렇게 잡아먹히는군요. 이렇게 끝나는군요. 엘리는 눈을 감습니다.
지금 드는 생각은... 의외로 공포심도 아니고, 허무함도 아닙니다.
가소로움입니다.
뱀파이어, 그 중에서도 오직 선택받은 뱀파이어만이 취할 수 있는 진정한 형태. 한때 뱀파이어를 두려워하던 인간들이 지어주고, 뱀파이어를 한낱 모기 따위로 격하하려는 종교인들조차도 차마 깎아내리지 못하고 남겨둔 그 이름.
지금 여기서 엘리를 집어삼킨다고, 이 녀석이 뱀파이어가 될까요? 아니면, 뱀파이어의 노예라도 될 수 있을까요?
개소리죠.
유일하게 유감인 게 있다면, 지금 그 뱀파이어 참칭자에게 엘리가 잡아먹히게 생겼다는 것뿐...
펑!!!!!!!!
그 순간, 사제의 등에서 실명할 것 같은 빛과 함께 폭발이 일어납니다. 엄청난 폭압에 사제와 엘리는 동시에 밀려나고, 순간 육과 혼이 멀어졌다가 다시 붙는 것 같은 끔찍한 느낌에, 엘리는 신성력이 깃든 폭발임을 감지하며 땅을 구릅니다! 강력한 사제마저도 비틀거리고, 엘리는 갑작스런 신성력의 파동에 노출되어 발작처럼 온 몸을 떱니다.
피만 좀 충분하다면, 저 한심한 참칭자에게 진짜 뱀파이어의 형태를 보여줄 텐데, 진짜 밤의 군주로 선택받은 이의 위용을 보여줄 텐데. 하지만 엘리는 무력하게 벌벌 떨고만 있을 뿐.
그 때... 엘리의 입에 피가 쏟아집니다. 얼굴에 마구 튀는 피를 닦아내고 보면, 아편을 씹으며 간신히 기어온 에레야가 엘리를 내려다보며, 고블린의 잘린 머리를 쭉 짜서 피를 엘리의 입에 마구 쏟아넣었습니다. 하지만 그러고도 엘리가 못 일어나자, 에레야는 엘리의 턱을 억지로 벌리고 자신의 팔뚝을 엘리의 입에 물립니다. 그리고, 진지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