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모두는 누군가를 위한 이야기의 소품이자, 단역이자, 조연이기도 하고 동시에 자기 이야기의 주인공이기도 하다. 그 이야기는 비참할 수도, 행복할 수도 있고, 기승전결이 갖춰졌거나 이야기의 어떤 구성요소 하나도 제대로 된게 없을 수 있다. 하지만 아무리 엉망인 이야기가 되는 한이 있어도 우리는 선택하고, 때로는 강요당하면서 우리의 이야기를 써낸다. 이야기의 악마 이프가 이제 마침표를 찍으라 권할 때까지, 죽음이 우리를 찾아올 때까지. 왜냐면 우리는 살아있으니까. 그 이야기는 우리의 삶이니까.
머리에 떨어진 것에 적의 공격인가 싶어 조금 놀라기는 했으나! 짐은 귀인국의 적법한 후계자! 체통없이 땅을 뒹굴...지는 않았도다! 정말로! 짐은 은은히 배어나오는 기품을 갖추었으니 크게 하품을 하며 자리에서 일어서 떨어진 사과를 적당히 주웠느니라. .. 쩝 저녁으로는 할마마마께 애플파이를 해달라고 해야겠구나. 옷에 묻은 풀잎들이 신경쓰이기는 했으나 이 또한 귀인만이 가질 수 있는 야성의 멋이 아니겠느뇨? 킥킥거리며 웃고있다니 어느새 살이 찐 포치녀석이 느릿느릿 걸어와 곁에 자리를 잡고 누우려 하기에 감히 주인은 일어섰음에도 태평하게 누우려는 것이 괘씸하여 사과를 적당히 던져주자 입으로 문채 자리에서 일어나 어슬렁 어슬렁 언덕을 걸어내려갔도다.
이 마을은 실로 마음에 들었도다. 사시사철 아름다운 풍경을 자랑하며 주민들도 느긋하게 삶을 이어가는 실로 올바른 형태의 마을이기에 짐 역시 굉장히 마음에 들었도다. 그런 연유로 짐의 자비를 얻어 1년간 무려 평화적인 삶을 이어왔으니 언젠가 귀인국이 영토를 넓혀 서역끝자락까지 도달하게 된다면 이 주변에 거처를 마련하는 것도 좋을 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할 정도로! 뭐 아바마마께서는 그러한 정복에는 관심이 없으신 분이셨으니 한참 뒤의 일이 되겠지만!
"우선 집에 좀 가봐야겠구나."
어지간해선 나를 따라 오지도 않을 포치가 왔다는건 마음의 변화가 있거나 뭔가 시키실 일이 있어서가 아닐까 싶노라. 음, 역시 짐. 지능이 높군. 추론의 귀재로다.
>>359 히샤히메는 마을길을 따라 내려갑니다. 암탉들이 병아리를 이끌고 나와 줍지 않고 남은 이삭들을 주워먹고, 마을 아낙과 촌부들이 히샤히메를 보자 가볍게 목례합니다. 그녀가 (이 서역 무지렁이들은 모르겠지만) 이름에 써 있는대로 히메이기도 하지만, 가축을 보고 입맛을 다시던 늑대들을 침대보로 만들고, 바츨라우 마을 유일의 사냥꾼이 다리를 다쳐 요양할 동안 사슴부터 토끼까지 잡아와 마을 사람들 밥상에 고기반찬 올린 공로가 더 클 겁니다.
그렇게 촌부들의 인사를 받으며 위풍당당하게 나아간 히메는 브우니크 할머니가 지붕 위에 올라간 수탉을 보고 쩔쩔매는 걸 봅니다.
검은 숲. 온갖 신비들이 학문의 이름으로 체계라는 폭력적이면서도 엄밀한 발견에 발가벗겨지고, 싸구려 무당과 할머니의 옛날 이야기로 점점 밀려나 삭막해지는 세상 속에서, 많은 이들이 상상하고 동경했던 신비의 원천은 수천년 전부터, 누군가 과거를 남기고자 하여 역사가 시작된 때부터 이미 존재했습니다. 박해받던 이들, 조용함을 찾던 이들, 또는 심각한 길치들이 이곳에 모여들었고... 오늘은 지도를 보고 동서남북도 못 읽는 한 길치로부터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언제나처럼 시약 재료를 찾아 숲을 거닐던 아앨라나. 등푸른버섯은 갓이 상하지 않게, 너도맨들뿌리는 뿌리 하나도 세심하게 캐다가, 본인 주장으로 지옥의 수문장이자 666번 저주받은 자이자 13번 천벌받을 자이자 케르베로스의 주인인 가말라시엘이, 그녀에게 말을 겁니다.
에레야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주 짧은 순간, 엘리는 저게 터지면 죽음을 구걸하게 될 것 같은 끔찍한 예감에 폭음탄의 심지를 짧게 끊고는 폭탄에 달린 부싯돌을 당겨 불을 붙이고, 위로 던진 채 귀를 틀어막고 척탄병에게 달려듭니다.
그리고
삐이이ㅡㅡㅡㅡㅡㅡㅡ
소리가 너무 컸던 나머지, 엘리의 귀청이 격통과 함께 부서집니다. 분명 시끄럽고 처절해야 할 혈투의 한복판은, 소리만 들으면 마치 남의 일인것마냥 작고 멀게 느껴집니다. 하지만 엘리는 지금 여기서 멈출 수 없습니다. 척탄병을 몸으로 들이받은 엘리는 폭탄을 빼앗아, 불꽃이 폭탄 안으로 들어가기 직전 손으로 심지를 붙잡아 뽑아버립니다.
엘리는 고통스러워하는 척탄병을 간단하게 처리하고, 상황을 다시 살핍니다. 고블린들, 식인종들, 랫킨들. 모두 심각한 피해를 입었지만 아직 유의미한 전력이 살아있습니다. 고블린은 샤먼, 식인종들은 구울, 랫킨은 자폭쥐. 다 죽인다면 좋겠지만, 폭음탄이 터진 이상 에레야가 오기 전까지 다 죽이는 건 무리 같군요. 아마 하나만 골라야 할 겁니다.
>>369 "감각을 '오감' 따위로 나누려는 헛된 시도를 거부하고, 이 대악마 가말라시엘의 인도에 따라 진정한 세계를 바라보는 눈을 기르라!"
가말라시엘 님이 자기 세계에 빠져있도록 내버려두고, 아앨라나는 끙끙대는 소리가 나는 곳으로 가봅니다. 그리 멀리 갈 필요도 없이, 별 일 없으면 파릇파릇하게 서 있어야 할 클로버 풀밭이 부자연스럽게 누운 자국이 있어, 그걸 따라 그냥 걸어가기만 하면 끝입니다. 아앨라나는 별 수고 없이 부상자를 찾아냅니다. 한 여자인데 다리가 부러져서 이를 악물고 있군요. 골절통이 너무 심한 나머지 붕대로 뭘 한다던지, 저걸 한다던지, 그런 걸 할 여유가 없었던 모양입니다.
"윽... 으윽... 으..."
만약 아앨라나가 오지 않았다면, 그리고 지금 여기 있더라도 아앨라나가 돕지 않는다면, 아마 이 흑림은 24시간 이내로 또다른 인간 거름을 받아들이게 되겠군요.
>>370 판단을 마친 엘리는 자폭쥐 쪽으로 달려듭니다. 자폭쥐는 척 봐도 잘못 반응하는 순간 펑 터지게 생긴 화학물질이 가득 담긴 병들을 온몸에 주렁주렁 달고 있었습니다. 당연히 제정신으로 자폭할 리가 없으니 마약에 취한 상태지만, 마약에 취했어도 마약이 청각을 보호해주지는 않는지라 방금 전의 폭음에 정신을 잃은 상태입니다. 엘리는 자폭쥐가 정신을 차리고 기폭하기 전 하나씩, 그 목숨을 끊어버립니다. 아까 전이 엘리의 사냥이었다면, 지금의 엘리는 마치 작업장에서 기계적으로 맡은 일만 하는 목수마냥 암살쥐에게서 뺏은 녹색빛 단검으로 목을 그어 쓰러뜨립니다. 하나, 둘, 셋. 오랜 뱀파이어 생활의 영향으로 무의식중에 인간을 은근히 아래로 깔보게 되고, 랫킨처럼 뱀파이어와 외견조차 닮지 않은 종족들은 같은 사람으로 취급조차 않게 되는 느낌이 이럴 때는 낫군요. 죄책감이 없으니. 하지만...
"찍! 찌이익!"
자폭쥐 중 한마리가 엘리를 알아보더니, 지옥에 데려갈만한 적수가 눈 앞에 나타난 것을 기뻐하며 기폭용 밧줄을 당기려고 합니다. 하지만 엘리의 옆구리와 팔 사이를 아슬아슬하게 스친 볼트가 자폭쥐의 눈구멍을 꿰뚫는군요. 뒤를 돌아보면, 에레야가 다 쓴 석궁을 뒤에 있는 경비에게 던지듯 돌려주고는 엘리에게 손짓합니다. 이리 오라는 신호 같군요.
무엇보다도 마음에 드는 것은 이곳, 생각보다도 신민들의 예절교육이 잘 되어있다는 것이다. 처음에는 어쩐지 경계하는 모습이 보이기는 했으나 짐의 화려한 행적을 보고나서는 마치 이미 왕을 갈아치운듯 저리도 존경심을 내비치고 있지 않더냐! ...동네 꼬마들이 고기잡는 누나라고 불렀던 것은 잊지 않았노라! 그 이후로는 뭔가 사냥꾼 녀석이 짐을 후계자로 보는 것 같은 눈으로 본것도!!! 에이잇, 짐은 언젠가 귀인국의 왕이될 자이거늘!!! ...뭐 그래오 사냥을 하는 정도 이리도 자원이 풍부한 곳이서는 어렵지도 않은 일이었지! 귀인족으로 태어나 고작 그 정도도 하지 못할정도로 약하게 자라지는 않았느니라!!!
"그대여, 무슨 일이 있는 것이더냐?"
대충 주변을 훑어보니 음, 확실히 난제로고. 어째 이집의 닭은 지붕을 좋아하는구나. 저번에도 이랬던 적이 있는 것 같노라. 적당히 작은 돌을 주워 손에 두고 튕겨 닭의 머리를 맞춰보려 시도했느니라. 짐의 저격술은 그야말로 귀인국제일! 성내의 장수들과 물수제비를 뜨더라도 언제나 1위를 차지할 정도였으니!
그리고 400레스 향하는 만큼 내가 이 어장을 열면서 세운 이 어장의 목적을 여기다가 적어서 새기고자 해. 이 어장을 열면서 내가 지향한 목표는 '머리 크게 안 쓰고 도파민 얻는 텍스트 기반 게임'이야.
그를 위해서... 1. 캐릭터의 행동을 간략하게만 입력해도 대충 그 다음 결과를 써줍니다. 2. 설정은 뼈대조차도 없이 우리 모두가 알고 있는 판타지에 대한 공통 심상을 기반으로 필요할때 그때그때 상의를 통해 세분화 3. 스포가 되는 한이 있더라도 전개에 대해 사전 합의
그리고 제일 중요한거 캐릭터가 만약에 실패하거나, 틀리거나, 크게 다치더라도, 그건 캐릭터의 이야기에 변주를 주는 방향으로 가지 밑도끝도 없이 상황 개판났네요 하하 개판이네요 이런 건 자제하려고 해. 이건 내가 던전월드 TRPG를 하는데, 대실패가 떴을 때 이걸 단순히 "대실패 떴네요 피 깝니다 피가 0이네요 시트 찢으세요"로 끝난게 아니고 그거로 캐릭터가 곤경에 처하는 상황을 만들고, 그 상황에서 다른 재밌는 상황을 파생시키는 마스터링을 보고 감명을 받아서 최대한 따라해보려 하는거야.
그리고 히샤히메주는 본인이 생각하고 있는 귀인 설정 간략하게라도 풀어주고(오니 계통인건 아는데, 오니도 워낙에 작품마다 설정이 달라서...) 아앨라나주는 아앨라나 외모 좀 알려주고(내가 왜 시트에 외모를 안 적어놨을까...), 아앨라나를 거둬준 마녀 외형은 이런 마녀 할머니에 더 가까울까? 아니면 요즘 뜨는 클리셰인 마법에 통달해 외모가 어릴 적에서 고정된 아름다운 마녀일까? 이 부분 생각해둔거 있으면 말해줬으면 고맙겠어!
아 그리고 엘리주는 진행 때 처음에 캐릭터가 손톱으로 누구를 할퀴는데 이거 엄청 치명적으로 묘사되는 걸 보고 좀 혼란스러워 했던것 같아서... 엘리 같은 뱀파이어는 누구 죽이려고 본색 드러내면 (얼굴은 빼고) 손톱이 지금 이거의 절반 정도로 길어지고, 하나하나가 갓 갈아낸 칼 수준으로 날카로워진다고 생각하면 될 거 같아. 갑옷을 입은 사람이라면 모르겠지만, 맨몸이라면 충분히 찢어발길 만하겠지! https://static.wikia.nocookie.net/witcher/images/b/b5/Tw3_journal_dettlaff_vampire.png/revision/latest?cb=20160601042441
>>385 모티브로는 가면라이더 히비키(변신)과 동방프로젝트의 오니족에서 따왔어요! 다른 점이라면 동방의 설정을 잘 모르다보니 상상적으로 때워서 당대(15~17세기)에 맞게 대충 전국시대쯤을 생각하고 있어서 시대적으로는 도요토미와 도쿠가와가 열도를 절반씩 먹은 느낌으로 작성을 했네요. 외형이 평소에 인간과 차이가 거의 나지않는다는 점을 빼면 보편적인 오니의 이미지를 생각해주시면 좋을 것 같아요. 힘이 세고 생각이 그리 깊지 않고 술을 잘마시고... 여기에서 오니의 요술이 인술로 대체된 느낌!
골절도 종류가 다양합니다. 단순골절, 복합골절, 개방성 골절 등등... 그리고 이 여자는 상태가 정말 심각합니다. 다리가 부러져 종아리가 뒤틀리다 못해 뼈가 약간 살을 뚫고 나왔군요. 이 여자가 심하면 쇼크사, 적어도 기절하지 않은 채 의식을 유지하는 것마저도 장할 지경입니다. 이 사람을 구하려면 기절시키던지, 팔다리를 잘라가도 모를 정도의 강력한 마취를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아앨라나의 머리속에 두 목소리가 울려퍼집니다. 하나는 기억, 하나는 악마입니다.
'네 유치에 충치가 나서 뺄 때였단다. 워낙에 자지러지게 울길래, 영면버섯 빻은 가루를 물에 개어 먹였지. 보다시피 넌 잘 살아있단다. 적당히 쓰면 영면버섯도 쓸 수 있어. 물론 못 맞추면 영면이지."
"사도여! 다친 이는 죽고, 먹잇감이 되는 자연의 섭리를 거부하라! 나는 모든 불경한 의심과 사유의 후원자, 역심의 파종꾼이니! 나의 힘을 빌어 이 세상을 개변하고, 세상의 본질을 바꿀 혼돈을 파종하라! 이는 개인의 목숨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의 사변이니!"
음. 가말라시엘 님의 말씀을 일상언어에 맞게 다듬으면 내 힘을 빌려서 고쳐보되 좀 기이한 일이나 이상한 부작용이 일어날 수 있단 것 같습니다. // 지금 봉인상태의 가말라시엘을 말 엄청 많고 쓸데없이 무게감 잡는 컨셉으로 했는데 괜찮아?
히메가 던진 돌멩이는 수탉의 머리를 맞추...지는 못하고 지붕을 지탱하는 등골 끝자락을 때렸습니다. 그래도 수탉을 놀래키기는 충분해서, 늙은 수탉은 푸드덕거리며 허공으로 날아올랐다가 이내 떨어져 브우니크 할멈의 손에 모가지가 잡힙니다. 제아무리 할머니가 늙었더라도 수십년 일한 주부의 경륜은 이길 수 없어 푸드덕거리기만 합니다.
"그래. 이샤. 고맙구나. 오늘은 이놈 고아줄테니 늦지 말고 오그라."
그녀의 이름은 히사히메지만, 이 지역 사람들은 외국 정도가 아니라 세계 반대편에서 오다시피한 사람의 이름이 워낙 생소하고 발음도 어려운지 그녀의 이름을 이샤, 히메까지 붙이면 이샤힘, 으로 부르고 있군요. 아무튼 브우니크 할멈 가라사대 오늘 메뉴는 닭수프랍니다. 음, 포치는 옆에 앉아서 눈을 밝히고 있군요. 먹는거 얘기는 개의 몸에 갇힌 인간마냥 무섭도록 잘 알아듣습니다.
>>392 돌은 아쉽게도 닿지않았으나 이 또한 짐의 자비로움이 표현된 것이로다! 음, 내 오늘은 봐줄테니 다음번엔 할마마마를 곤란하게 하는 일은 없어야할 것이ㅇ... 음! 생각해보니 마지막 반란이라면 딱히 상관 없도다! 인생의 마지막에 죽음의 운명으로 부터 저항조차 하지 않는 것은 대장부의 그릇이 아니니!
"닭고기인게냐! 으흥흥~ 참으로 기대가 되는구나!!!"
한잔하거라! 비록 내 애플파이는 먹지 못하게 되었어도 닭고기는 도미다음으로 좋아하는 음식이니! 신선한 도미를 먹지 못하는 이곳에서는 그야말로 가장 좋아하는 부위였노라! 헌데 포치 네놈은 왜 그리 눈을 빛내더냐. 짐의 음식을 빼앗아먹는것은 아무리 저 머나먼 귀인국에서부터 함께한 충신이라고 하여도 반역의 대죄에 해당되나니, 볼을 주물러지는 형벌에 처하겠노라.
에레야는 혀를 차면서 군의를 부르고, 새부리 가면을 쓴 군의가 가까이 옵니다. 장갑을 쓴 양손을 싹싹 비비는 군의는 후욱후욱 방독면 너머로 거친 숨을 뱉으면서, 엘리의 온 몸에 가득한 상처를 탐욕스럽게 바라보면서 여러 의미로 참 무시무시한 말을 꺼냅니다.
"뱀파이어를 해부하는 게 아니라 치료하는 건 처음인데... 후욱후욱... 정말 기대되는군..."
뱀파이어를 치료해본 적 없는데다가, 밤피로필리아랑은 다른 의미로 변태인 놈 같은데... 다행히도 실력은 있는 놈입니다. 군의는 엘리의 찔린 상처를 좀먹어가는 녹색 발광도료를 보고, 이것이 랫킨의 마석임을 눈치챕니다. 군의는 환부 근처의 찢어진 옷감을 잘라내고 성수를 바를 뻔하다가 엘리의 종족을 뒤늦게 깨닫고 고농도 식초로 환부를 닦아낸 후, 주머니에서 작은 쇠막대기를 꺼내 녹색으로 발광하는 상처에 집어넣어 휘젓습니다. 치직... 치지직... 녹색 마석이 쇠와 반응해 고열을 내며 무해한 물질로 바뀌고, 덕분에 엘리의 환부는 고열에 삶아지며 저절로 소작됩니다. 유일하게 문제가 있다면, 이 모든 과정에 마취는 없었다는 걸까요.
>>393 "일? 으음. 생각해보면 서까래 썩은 것도 갈아야 하고, 울타리도 세워야 하고... 으음. 할 일이야 많지만, 우리 공주님은 일하기 싫어하는 거 아니었니? 귀족은 다 그렇던데."
히사히메의 자존심에 상처가 될 수도 있는 말이지만, 놀랍게도 이 마을은 귀족이 진짜로 아무것도 안 하고 놀고 먹는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늑대가 나타났을 때도 그걸 물리친건 히사히메였지 그 누구도 아니였으니까요. 그래서 고민하던 와중, 힘레먼 할아버지가 나타납니다.
"이샤야, 고트뢰 놈 마차가 도랑에 빠졌단다. 좀 도와주거라. 마을 젊은놈들, 다 밥만 쳐먹지 이샤 하나만 못해요."
>>395 엘리는 간신히 서서 전투를 지켜봅니다. 인간들의 전투는 고블린처럼 맹렬하지도, 식인종처럼 우직하지도, 랫킨처럼 교활하지도 않습니다. 정말로 단조롭고 지루하고 어찌 보면 유치하기까지 합니다. 하지만, 그 단조로운 대열은 달려드는 적들을 단 하나도 허용하지 않습니다. 방패에 막히고, 방패병 뒤에 서 있던 경비가 단창을 내리쳐 머리통을 쪼갭니다. 배후에 서 있던 식인종 궁수들은 이미 몸통이 과녁마냥 고슴도치가 되어 쓰러졌고, 고블린 샤먼이 주술을 쓰려고 하지만, 에레야가 수첩을 꺼내더니 샤먼을 정죄합니다.
"신께서 가라사되, 삿된 말로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
그러자 주술을 외우려던 샤먼의 입이 사라지고, 석궁을 든 경비들이 고블린 샤먼에게 화력을 집중합니다. 그리고 구울이 달려들어 방패병 위를 타넘지만 단창 여럿에 꿰여 경비들과 함께 넘어지고, 다른 경비들이 단창을 더 꽂아 움직임을 봉쇄하더니 도끼나 망치를 든 경비들이 두들겨패 짓뭉갭니다. 식인종들이 엘리에게 비슷한 짓을 할 뻔한걸 생각하니 소름이 돋지만 지금은 그걸 신경쓸때가 아닙니다.
"나팔총사수! 앞으로!"
그 말과 함께 나팔총을 든 경비들이 방패병 사이사이에 서서 방패 위로 나팔총을 올립니다. 에레야는 마지막으로 달려드는 적들을 보면서, 계속 정지, 정지, 정지... 를 외우다, 그들이 가까워진 순간 외칩니다.
"쏴!"
꽈아아아아앙!!!!!
폭음과 함께 앞을 가리는 연기가 수로를 채웠다가 이내 사라집니다. 앞을 보면 수천개의 쇠구슬에 걸레마냥 너덜너덜해진 고깃덩이들이 널부러져 있고, 운 좋게 살아남은 이들은 종족을 가리지 않고 도망치기 바쁩니다.
엘리는 문득 뱀파이어들 사이에서 악명이 높았던 이단사냥 시기를 생각합니다. 인간들과 친하게 지내자, 최소한 괴롭히진 말자는 주장에 동의하지 않았던 일원들이, 수천명이 하나의 생명체처럼 움직여 쫓아다니니 못 견디고 죽었지요.
에레야는 고개를 끄덕이며 엘리의 말에 동의했습니다. 보통의 사교도나 식인종 떼라면 이 정도로만 손을 봐줘도 다 끝난 거라 볼 수 있지만, 엘리가 본 게 있는 이상 여기서 끝났다고 돌아갈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에레야는 무기를 정비하고 탄약을 좀 갈아두라고 명령하고, 병사들은 전투 이후 고요해진 지하수로 거점에서 마른 목을 축이고, 에레야는 거점에서 식인종들이 만든 온갖 불길한 토템이나 상징 따위를 보면서 혀를 찹니다. 준비를 모두 마치자, 에레야는 일어나서 경비들에게 명령합니다.
"자, 이제 앞으로 전진한다!"
그리고, 에레야의 말은 듣자마자 그 불길함에 소스라치게 온몸이 떨리게 만드는 기이한 목소리에 끊깁니다.
"아니, 그럴 필요 없다."
에레야가 반사적으로 나팔총을 꺼내 겨누고, 엘리도 강자의 기운에 그 쪽으로 고개를 돌립니다. 붉은 로브를 입은 사제, 엘리를 뱀파이어라고 귀빈 대접했던 그놈입니다. 겉모습만 보면 그냥 로브를 뒤집어쓴 수상한 놈 같지만... 에레야는 이단심문관의 타협 없는 신앙에 맞부딪치는 끔찍한 악의를, 엘리는 뱀파이어가 느끼는 강자의 아우라에 저놈이 보이는 것 이상임을 깨닫습니다. 사제는 엘리 쪽으로 고개를 돌리더니 그녀를 비웃습니다.
"이단심문관과 함께 싸우는 뱀파이어? 멍청하군. 네 년의 모습을 동족이 보면 어떻게 생각할 지 생각이나 해보았나?"
그리고는 로브를 벗고, 에레야와 방패병 뒤에 서 있던 경비들은 그 무시무시한 모습에 기겁해서 순간 뒷걸음질칩니다. 입가와 턱은 흥건한 피로 물들어 있고, 아랫턱은 알 수 없는 괴물의 것을 붙여서 바늘로 꿰맨 흔적이 역력합니다. 얼굴에도 뭔가 했는지, 얼굴을 고정하려는 목적으로 온 얼굴에 대못이 박혀있고, 눈은 벌겋게 충혈되어 있습니다. 사제는 엘리를 가리키고는, 에레야에게 거래를 제안합니다.
"뭐, 됐다. 뱀파이어는 하등한 이들의 피를 먹고 살지만, 동족의 피를 마시고 강해지니까. 난 너희들에게 관심 없다. 지금 당장 이 년을 여기 두고 물러난다면, 난 세스타우 성에서 물러나지. 그러니까 꺼져."
에레야는 잠시 고민하는 척하고, 말을 조금 늘입니다.
"피차 바쁘니 빨리빨리 대답하지. 그러니까..."
그리고 험악한 표정으로 짧게 끊는군요.
"...아니, 그냥 죽어."
꽈아아아앙!!! 에레야의 나팔총이 불을 뿜고, 사제는 뒤로 넘어집니다. 하지만 에레야는 이거로 끝나지 않을 것임을 잘 알아서, 경비들에게 외칩니다.
"석궁!"
슉, 슈슉! 볼트가 바람을 가르고 날아가 쓰러진 사제의 다리와 발을 찌릅니다. 하지만 사제의 몸은 그러거나 말거나 부글부글 끓으며 이상 증식하더니, 다시 일어납니다... 팔다리가 비대해지고, 머리가 세 갈래로 분리된 괴물, 이제는 더 이상 인간의 흔적조차 보이지 않습니다.
'아아으, 부끄러워요~ 그런 과거는 적절한 처리를 해주세요~ 하지만, 그것도 경험이고 지식이에요. 바로 지금 그게 필요할 수도 있는 파편이 될 수 있겠어요'
그 영면이라는 의미를 저는 생각하고는 했어요. 때로는 죽음을 영원한 잠으로 비유하기도 해요. 수면과 죽음의 차이가 무엇인지 아시나요? 이 둘은 겉보기에 상당히 비슷하지만 좀 달라요. 하나는 다시 움직이고 지속하기 위해서 거쳐가는 것이고, 반대는 그대로 멈춰버리고 존재마져도 남겨지는 것을 멈추겠지요. 그리고 그 곰팡이의 효능은 두가지를 절반으로 나눈뒤 섞어 둔 것처럼 작동할 거에요. 약과 독의 차이는 투여량의 따라 결정되요. 특별한 예외가 없다면요
"그래요, 그래요. 자연을 거부한다기 보다는 우회한다고 하는게 맞을 것 같아요. 어쨌든 자연 그대로 두는 건 아니지요?"
"작은 무언가가 사실은 큰 것을 이루는 일부가 될 수도 있어요. 무언가를 바꾸기 위해선 차근차근, 하나부터 시도해가는 거에요. 퍼즐 조각을 하나씩 자리에 놓아서 그림을 완성해야 해요"
정말 자연의 법칙을 거부하려면 사령술로 가짜 생명이라도 부여하는 것이 좋을 것 같지요? 아무튼, 이 여성 분을 도와드려야 겠어요. 방식이 초래할 것들... 고려해야 하는 것. 하지만 어때요? 이론도 중요하지만 그 이론이라는 건축물의 구조를 지탱해줄 실습이라는 기둥과 지지대가 필요한 걸요. 이 여성분은 그것을 시도해보기에 알맞는 것 같아요. 이대로 두어도 좋은 결말을 맞이 하지는 못하실 것 같아 보여요, 그렇다면 할 수 있는 것을 하고, 더 좋은 변화에 이르는 것에 닿도록 해보는 것이 더 좋지 않겠어요?
원래부터 그럴 생각이었는지 아니면 동의했는지, 에레야는 병사들을 뒤로 물립니다. 병사들도 살고 싶은지 걸음이 빨라지고, 엘리와 에레야만 앞에 남습니다. 엘리가 앞길을 막자 에레야는 자연스레 뒤에 서고, 괴물은 엘리를 보더니 피식 웃습니다. 뭐... 목소리가 그렇다는 이야기입니다. 얼굴이 세 갈래로 쪼개져서 지옥에서 올라온 꽃봉오리마냥 벌어졌는데, 미소를 지을 수 있을 리가 없죠. 엘리의 판단은 옳습니다. 엘리가 자기보다 훨씬 격이 낮은 이들 상대로는 정확한 연계가 없는 이상 얼마나 달려들어 찔러도 피 한번 쭉 빨고 다시 싸울 수 있는 것처럼, 이 괴물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렇다면, 이 괴물 입장에선 어떻게든 저 병사들을 공격하는 게 답입니다.
콰직,
괴물이 발에 힘을 주자, 묵직한 바윗돌에 발길이 파입니다. 그리고 엘리에게 달려들고, 엘리도 동시에 달려듭니다. 괴물은 엘리를 공격할 것처럼 양 팔을 뻗고, 엘리가 당연히 반격하려고 몸을 비틀자... 엘리는 뒤늦게 이 괴물의 진정한 수를 파악하고 눈을 크게 뜹니다.
뻐억!!!!
엘리가 자신의 팔을 붙잡고 돌려고 하자, 그대로 밀쳐 엘리를 날려버리고 병사들에게 달라붙습니다. 이 녀석, 엘리만큼 빠른 주제에 엘리보다 힘도 강합니다.
"으아악! 끄아아아악!!!"
"이런 씨이바아알!!!"
병사들의 대열이 한도를 한참 넘어선 괴물의 돌진에 무너지고, 방패병을 짓밟고 들어간 괴물이 병사들을 난도질하려 들지만, 바로 직전에 정신을 차린 경비병들이 단창으로 괴물의 팔을 찌릅니다. 하지만, 그 괴물은 다섯 개가 넘는 단창이 박혔는데도, 경비들이 갑옷을 입은 자신의 몸무게까지 이용해 이를 악물고 지탱하는데도 그대로 나가고, 불발된 나팔총을 어떻게든 고치려던 경비에게 다가갑니다.
"오, 오지 마! 오지 마! 으아아아악!!!"
서걱
괴물이 나팔총병의 목을 그어버리고, 같이 싸우던 경비들의 얼굴에 동료의 따뜻한 피가 묻으며 공황 상태에 빠집니다. 에레야도 구경만 할 순 없기에 외칩니다.
"그에 도워단이 이르되, 하늘에 이르는 복락의 날에 가라지들은 땅에 떨어져 한 발짝도 움직이지 못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