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모두는 누군가를 위한 이야기의 소품이자, 단역이자, 조연이기도 하고 동시에 자기 이야기의 주인공이기도 하다. 그 이야기는 비참할 수도, 행복할 수도 있고, 기승전결이 갖춰졌거나 이야기의 어떤 구성요소 하나도 제대로 된게 없을 수 있다. 하지만 아무리 엉망인 이야기가 되는 한이 있어도 우리는 선택하고, 때로는 강요당하면서 우리의 이야기를 써낸다. 이야기의 악마 이프가 이제 마침표를 찍으라 권할 때까지, 죽음이 우리를 찾아올 때까지. 왜냐면 우리는 살아있으니까. 그 이야기는 우리의 삶이니까.
사제가 손가락을 튕기자 죽기 싫어서 엘리의 몸에 쇠꼬챙이를 박아넣었던 식인종들이 벌벌 떨다가, 사제가 신경질적으로 손가락을 두번 튕기자 마지못해 눈을 질끈 감고 엘리의 몸에 박힌 꼬챙이를 뺍니다. 엘리가 움직일 수 있을 때까지 기다려준 사제는 가까이 가서, 이리저리 멍들고 다친 식인종들은 신경도 쓰지 않은채 엘리의 상처만 살핍니다.
"야만적인 족속들 같으니. 윗물이 높은지 아랫물이 높은지도 모르고..."
뒤에 서 있는 식인종들을 경멸한 사제는 붉은 액체가 담긴 병을 꺼내, 케밥마냥 이리저리 쑤셔져서는 뻥 뚫린 상처에 붓습니다. 엘리는 상처를 감싸안는 따뜻한 감촉을 느끼며 이게 인간의 피임을 깨닫습니다. 그리고 피를 머금은 상처가 새살이 돋아나며 닫히는 것을 보고 사제는 아이처럼 기뻐합니다.
"오오, 확실하군요. 그대는 분명 고귀한 혈통을 가진 터!"
사제는 엘리가 뱀파이어임을 확인하고, 그녀를 이끌고 지하수로 깊은 곳으로 들어갑니다. 가끔씩 고깃덩이를 짊어진 식인종들을 마주치지만 다들 엘리를 위해 길을 비켜주고, 엘리는 지나가던 도중 어딘가의 하수구와 연결되었을 배출구에서 대량의 피와 살덩이가 떨어지고, 식인종들이 달려들어 피를 받고 살덩이를 줍는 것을 봅니다. 사제는 익숙하다는 듯 지나치는군요.
사제는 엘리를 지하수로 깊숙이 데려갑니다. 어디서 산소를 가져오는지 의문이지만 푸른 횃불이 지하수로 벽을 밝히고, 엘리는 어릴적 개인적으로 교류했던 묘지기 덕분에 '초고온' 이외에 저런 색깔의 불꽃을 만드는 방법을 잘 알고 있습니다. 뼈를 곱게 빻아 불꽃에 섞던지 뼈를 장작 삼아 불을 때면 저런 색이 나오죠. 그리고 그 불꽃은 벽을 칠한 검붉은색의 물감을 비추고 있는데, 이 물감... 엘리는 알 수 있습니다. 공기에 노출된 지 오래되어 변색된 얇게 펴바른 선지, 즉 피입니다. 엘리 같은 뱀파이어들도, 심지어는 야생에 사는 일족도 이딴 짓은 안 하는데, 올려다보면 뱀파이어의 날카로운 치열과 그들에게 잡아먹히는 인간들이 어우러진 기이한 그림입니다. 그 와중, 사제는 엘리에게 말을 겁니다.
"아가씨는 축복받았다는 생각을 해보셨습니까? 바로 그 혈통, 뱀파이어 말입니다."
해 뜨면 다 죽는 혈통이 축복은 뭔 미친놈의 축복... 이라고 말할 틈도 없이, 사제는 계속해서 주절주절 늘어놓습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우리 모두는 지배하고 지배당합니다. 우린 가축을 지배하고 그들을 먹고, 뱀파이어도 인간을 지배하고 먹지 않습니까?"
역시 이번에도, 사제는 엘리의 긍정 따위 기다리지 않고 계속 이어갑니다.
"그리고, 뱀파이어는 지배하기 위해, 아니, 지배해야 하는 운명 아닙니까? 지배해서 피를 빨 권리가 있고 살기 위해 마땅히 그래야 하는 이들이죠. 그래서 우린 당신 같은 이들이 너무 부러웠습니다. 그래서..."
이야기하다보니, 지하수로의 광장? 같은 곳에 조성한 제단에 다다릅니다. 사제는 자랑스럽게 말합니다.
"그러니 우리의 산제물을 흠향하고, 우리들 중 선택받은 자가 당신과 동등해질 수 있도록 도와주겠습니까?" // 내 세계관에서 뱀파이어는 전염, 후천적으로 되기 어려운 설정!
사제는 엘리 쪽을 보더니, 의심스럽다는 듯 되묻습니다. 뱀파이어가 인간으로 돌아간 사례를 신화나 전설이 아닌 제대로 된 역사서에서 찾아보기 힘들듯, 인간이 상세불명의 초자연적 저주나 혼혈 등이 없이 인위적으로 뱀파이어화한 사례도 찾아보기 힘듭니다. 대부분의 경우는 구울, 인육에 대한 갈망에 사로잡힌 식욕의 노예로 전락하니까요. 하지만...
"그렇다면 알겠습니다! 하지만 지금 오신 곳으로 다시 가는 건 위험합니다. 거기는 이단심문소랑 마녀 사냥꾼부터, 하수구 경비들이 가끔씩 순찰을 오거든요. 지금 위에서 난리가 났으니, 눈에 불을 켜고 있겠죠. 따라오시길. 안전한 통로가 있습니다."
높은 계급이 좋습니다! 이렇게 조금 미심쩍어도 그런갑다 하고 넘어가니까요. 이 미친놈들 기준으로 안전한 게 과연 뭘지 의심스럽지만 말입니다.
사제는 잠깐 고민하더니 고개를 끄덕입니다. 사제가 손가락을 딱, 튕기자 식인종들이 제단에 누워있던 비냐를 들고 옵니다. 앞으로 끌려온 비냐는 엘리와 눈이 마주치자 발작이 의심될 정도로 몸부림치지만, 다행히도 입마개를 하고 있어서 여관이 어쩌고, 흡혈이 어쩌고 남들 다 보는 앞에서 나발 부는 일은 없을 것 같습니다!
"이 년보다 더 좋은 것도 충분히 구해드릴 수 있습니다. 천천히 오시길."
식인종이 엘리 앞에 비냐를 던지고, 비냐는 어떻게든 안 끌려가려고 별 발광을 다 하는군요. //혹시 여기서 틀어져서 싸우고 부딪치며 얼래벌래 기어나가는 전개? 아니면 무사히 나가는 전개 중 어떤게 좋을까?
엘리는 다른 쪽으로 몸을 돌립니다. 비냐도 이세는 울 기력조차 사라졌는지, 아니면 체념했는지 더 이상 저항하지 않는군요. 지하수로가 점점 좁아지다 다시 넓어지고, 엘리는 발에 채이는 금속 소리에 주변을 바라봅니다. 아까 전에... 엘리가 고블린과 식인종과 마구 싸웠던 창고 근처입니다. 그새 시체를 전부 수습했는지 피냄새만 느껴지는군요. 어떻게 수습했는지는... 괜히 정신 사나워지니 생각하지 맙시다.
드디어 비냐는 입을 다뭅니다. 최소한 엘리가 비냐를 잡아먹을 생각이 없다는건 받아들였기 때문이죠. 하지만 엘리가 말한 것과는 다르게, 팔이 잘린 남자가 악어보다 먼저 나옵니다. 남자는 돌바닥에 누워 붕대 감은 팔을 벽돌 위로 올린채 잠들었군요. 자기 싫어도, 상당한 출혈과 격렬한 상황 이후의 탈력감 때문에 잠에 들 수밖에 없었을 겁니다.
>>275 엘리는 유리병을 두고 나름대로 의사표현도 한 뒤 비냐와 함께 나아갑니다. 악어는... 아까 전의 대학살을 듣고 잔칫상 즐기러 갔는지 다행히도 없군요. 엘리는 비냐를 데리고 에레야가 내주었던 안전가옥 근처까지 오는데 성공합니다. 그리고 아까 전보다 훨씬 신선해진 냄새에 엘리는 저도 모르게 드디어 쨍쨍한 바깥을 볼 생각에 기쁘...지 않았습니다. 전혀요. 여기까지 오자, 엘리는 하수구 쇠창살에 반사된 희미한 햇빛을 보고 바깥은 아직 대낮임을 떠올립니다.
비냐는 한참동안이나 그 말을 곱씹고 되새깁니다. 비냐가 뱀파이에 대해 어찌 생각하건 간에, 그것만큼은 사실입니다. 뱀파이어는 태양을 두려워하건, 혐오하건, 엘리처럼 그 불빛 앞으로 나아가려 하지 않는게 일반적입니다. 하지만 엘리는 다릅니다. 엘리는 다른 뱀파이어들처럼 피를 빨고, 잽싸고, 동물로 변하고, 날카로운 송곳니가 있지만 그녀의 머리만큼은 다릅니다.
"그렇군요."
비냐가 엘리의 말에 담긴 본뜻을 완전히 이해했는지, 아니면 문자 그대로 이해했는지, '태양'으로 대표되는 인간 중심의 세계와 그 세계의 위협적인 종족을 배제하려는 압력으로 이해했는지는 모릅니다. 하지만 그렇게까지 구체적으로 이해할 필요는 없습니다. 엘리자베스 바토리 블라드 체페슈, 아니, 엘리는 비냐가 알던 뱀파이어와는 아주 다르다는 것만 알면 됐습니다.
비냐는 마침내 돌아서서, 엘리에게, 엘리가 인간 사회에 온 이후 들을 일이 없었던 말을 건넵니다.
"...구해줘서 정말 고맙습니다. 그리고..."
...들을 일이 없었던 엄마 잔소리도 추가해서요.
"...나오면 좀 씻으세요. 모르는 사람이 보면 산채로 가죽을 벗긴 줄 알겠어요."
확실히 그렇습니다. 엘리는 식인종과 고블린의 피, 살, 심하게는 가죽까지 뒤집어쓴 상태입니다. 다행히도 이곳 수로의 물은 엘리가 휘저었던 곳들보다는 훨씬 깨끗해서 목욕이 아니라 아예 마셔도 될 정도고, 안전가옥도 있으니 엘리가 목욕하다 말고 들이닥치는 빈민이나 경비병 때문에 존엄을 해칠 일도 없을 겁니다.
편하디 편한 일족의 저택 생활을 마다하고 비루한 인간들과 함께 구르는 삶을 선택했을 때부터 못 씻는 건 각오하긴 했지만, 이렇게 심한 꼴까지 각오한 적은 없었습니다. 엘리는 몇 양동이 가득 물을 떠오고, 안전가옥에 나 있는 샘물도 사용합니다. 먼저 얼굴을 씻는 것부터 시작했는데... 얼굴에 물을 뿌려서 슥슥 닦아내자... 비냐가 알아본 것이 참 기적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엄청나게 많은 핏덩어리가 손에 잡힙니다. 이제 보니 비냐가 기겁한게 엘리가 뱀파이어란 걸 알아서가 아니라, 진짜 괴물같이 생겨서 그랬던 것 아닐까... 싶어지는군요. 아무튼 엘리는 다 씻고 나서 피에 절은 옷을 벗습니다. 인간 세상은 위험천만하고 힘들다길래 나름대로 버려도 되는 옷을 입고 왔는데, 만약 이 동네가 나체에 대해 큰 거부감이 없다면 당장 이걸 버렸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엘리는 세스타우에서 오래 체류하게 된다면 이 안전가옥을 좀 더... '인간적'으로 꾸며야겠다고 다짐합니다. 예를 들어, 돈이 많으면 연금술사들이 최근에 팔고 있다는 '비누'를 좀 들여두던지, 최소한 밀짚 태운 잿가루라도 둬서 세탁도 좀 잘 되게 하고! 세탁에 쓸 수 있는 빨래판과 큰 양동이, 인력식 탈수기도 좀 들여놓고... 에레야가 이곳이 뱀파이어 기준으로는 중산층 살만한 집이라고 했는데 헛소리 같습니다. 아무튼 엘리는 몸을 씻고 자신의 옷도 세탁해서 (언제 마를진 모르겠지만) 어딘가에 널어둔 뒤, 행복하게 잠을 청합니다...
시간은 낮. 착한 뱀파이어는 잠들 시간입니다. 밤 즈음까지만 자면 피로도 적절히 풀리겠죠. 하지만...
네 시간은 잤을까요? 엘리가 깊은 꿈속에서 좋았던 옛날을 생각하던 도중 누군가 문을 쾅쾅쾅 두들깁니다. 인간의 기준으로 보면, 해가 뜬 것 같기도 하고 안 뜬 것 같기도 한 새벽 5시쯤에 갑자기 문을 박살낼 듯 두들기는 민폐입니다.
>>291 문을 열자마자, 엘리의 눈높이는 철십자 인장이 새겨진 흉갑과 마주합니다. 위를 올려다보면, 이제 와서 이야기하기도 참 새삼스럽게 에레야가 와 있군요. 자야 할 꼭두대낮에 갑자기 문을 쾅쾅 두들겼으니 엘리의 표정은 짜증이 가득할 법도 하지만, 오히려 에레야는 "그래도 노크라도 해준게 어디냐, 고마운 줄 알아라."는 듯 뻔뻔할 정도로 무덤덤합니다. 에레야는 엘리의 옷이 아직 마르지 않아 젖은 걸 봅니다. 바깥과 통하지 않는 지하에, 발광이끼가 낄 정도니 당연한 일이지요. 에레야는 후, 한숨을 쉬더니 뒤에 서 있던 누군가에게 명합니다.
"거기 경비, 그래 너. 위에 올라가서 옷가지 좀 가져와라."
그리고는 경비가 금방 옷을 가져오자, 엘리에게 그걸 떠넘기듯 건네고는 문을 다시 쾅 닫는군요.
"그거로 갈아입고, 말리고 있던 옷은 경비들한테 넘겨. 아마 뱀파이어들은 잘 모르겠지만, 햇빛이 뱀파이어만 바싹 말리는 게 아니고 옷도 잘 말리거든."
뒤에 저딴 목숨 가지고 농담하는 유머만 없었다면 참 스윗하다고 생각했을 텐데요. 하지만 상황이 바쁜지, 에레야는 문 너머로 이야기합니다.
"갈아입으면서 들어. 솔직히 말하면, 너가 내 어지간한 똘마니들보다도 더 쓸모 있었다. 지금 온 동네 경비들이 동원되어서 인간이 오갈 만한 지하수로로 연결되는 통로를 전부 봉쇄했고, 너가 보고했던 이 루트로 갈 거야. 그리고..."
"야, 놔! 놓으라고 이 새끼들아!"
"경비. 재갈."
...아까 전에 엘리가 도와줬던 그 남자, 왜인지는 모르겠는데 체포당했군요.
"...밤눈도 밝고, 이런 곳에서 날아다니는 네 도움이 아주 많이 필요할 거다. 인간 에레야로서 하는 말이 아니라, 이단심문관으로서의 입장도 똑같아. 그러니까 갈아입는 김에 다른 준비도 좀 하고 나와."
사실 유니콘 뿔도 있긴 했지만, 이건 엘리가 고블린 샤먼을 방해하기 위해 던졌다가 수십마리 고블린의 모가지를 잡고 장렬하게 저 세상으로 떠났으니, 이젠 없습니다. 정확히는 있었는데 없어진 거지만 뭐 어떻습니까. 없는 게 사실인데. 엘리는 금방 옷을 갈아입고 나옵니다. 경비들은 석궁과 창칼, 도끼, 횃불 따위를 들고 있고 몇명은 에레야처럼 살벌한 나팔총을 들고 있군요. 에레야는 들고 있는 무기들을 다시 한번 점검한 후, 엘리와 함께 경비병들 앞에 섭니다. 그리고 엘리에게 주의사항을 알려주는군요.
"우리 뒤에 서 있는 애들이 그나마 경비병들 중에서 가장 쓸만한 애들이야. 나머지는 들어가봤자 죽기밖에 더 못하니까, 그냥 입구만 봉쇄해놨어. 말인즉슨, 적을 발견하면 반 죽여놔서 못 도망치게 해야 한단 거야. 그리고 우리 목표는... 네가 그 하플링을 통해 보고했던 지하의 미친 식인쟁이 집단들이다. 나머지도 방해하면 쳐죽여야겠지만, 그걸 잊으면 안 돼. 알겠지?"
이단심문관 밑에서 일하던 거한들이 갑옷을 차려입고 길쭉한 방패와 철퇴를 든 채 에레야와 엘리 앞에 섭니다. 금방이라도 사람 하나 죽일 것마냥 험악해보이던 거한들이 투구까지 꾹 눌러쓰니, 이제는 마치 고성의 움직이는 갑옷병정처럼 보입니다. 이 정도로 방어력을 챙길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굳이 엘리가 몸빵할 일은 없겠군요. 에레야는 엘리에게 진짜 해야 할 것을 이야기해줍니다.
"너는 뒤에서 뭐가 보이면 벽을 세번, 그리고 두번 두들겨. 그러면 모두 멈출거야. 그리고 뭐가 보였던 건지 이야기해. 그리고 가다가 갈림길이 나오면 그 쪽으로 너 혼자 100m 정도 걸어들어가서 뭐가 있는지 보고 나와."
즉, 정찰을 하라는 소리입니다. 지금 상황에 믿을 건 엘리의 밤눈뿐이니까요. 에레야는 엘리에게 말합니다.
"그리고 깊숙이 들어가면, 본격적으로 전투가 시작하기 전까지 횃불도 다 끄고 램프도 가릴 거야. 그때까지는 우리들 중 네 눈이 거의 유일한 밤눈이다. 인간들이랑 함께 살고 싶어하는 것 같은데, 인간 사회는 같이 하는 일이 중요하거든? 첫 일부터 망치지 말고. 알았어?"
엘리를 둘러싼 병사들이 앞으로 나아가고, 갑옷들이 절걱거리느 소리를 냅니다. 발소리와 쩔걱거리는 소리가 사방에 울려퍼지자, 에레야는 한숨을 쉬더니 횃불을 켜라고 명령합니다. 어차피 귀 있는 놈들이면 이 소리를 듣고 위에서 수십명이 몰려오고 있다는 걸 모를 리가 없으니, 차라리 불이라도 켜서 앞이라도 밝히자는 겁니다. 그래도, 불을 켜도 눈 앞만 보이지 멀리는 보이지 않기에 여전히 엘리의 밤눈은 쓸만합니다. 그리고... 엘리는 벽을 세번 두드리고 다시 두번 두드립니다. 병사들이 전부 다 멈추고, 엘리는 자신이 본 형체, 자신이 맡은 냄새, 자신이 들은 소리를 바탕으로 에레야에게 보고합니다.
전방 30m에 랫킨 10체 이상. 갑옷과 방패 등으로 중무장. 최고 경계상태. 이쪽을 보고 있음.
"...모두 전투준비."
에레야는 폭탄을 하나 꺼내고, 나직이 병사들에게 속삭입니다. 앞에 방패를 들고 서 있던 병사들은 방패로 앞을 가리고, 뒤에서 경비들이 몰려와 위를 가립니다. 그리고 그 사이로, 석궁을 든 경비들이 나와 앞을 겨눕니다. 엘리가 밤눈이 밝은 거지 이들은 사실상 어둠 속을 겨누고 있는 상태지만, 좁은 지하수로에 놈들이 발 디디고 있을 곳이야 뻔하기에 아무래도 상관없는 모양입니다. 그리고 에레야는 엘리의 어깨에 손을 얹고 말합니다.
"엘리, 넌 좀 있어봐."
그리고 에레야가 쏴, 라고 말하자... 석궁을 든 경비들이 방아쇠를 당기고 바람 찢는 소리와 함께 볼트들이 날아갑니다. 몇 발은 빗나가고 나머지도 방패와 갑옷에 막히지만, 무언가 던지려던 랫킨에게 명중, 던지려던 것과 함께 그대로 그 자리에 고꾸라지고... 굳이 엘리가 말해줄 필요도 없는 비명소리가 들립니다.
"찌이이야아악!!!"
푸쉭ㅡ! 무언가 김 빠지는 듯한 소리가 들리지만, 랫킨들이 발광하는 소리는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꺽, 꺼억, 꺼어억, 엘리는 랫킨들이 꺽꺽대면서 쓰러지는 것을 확실히 볼 수 있습니다. 한 놈이 기적적으로 이 쪽으로 걸어오지만 전투 의지는 완전히 상실했습니다. 에레야는 석궁을 쏘려고 방패병 사이에 선 경비의 투구를 툭 치고, 그새 재장전한 경비가 불빛에 랫킨이 식별될 정도로 걸어오자 갑옷 틈새로 석궁을 쏴서 그 더러운 삶을 끝내줍니다. 에레야는 손에 침을 묻히더니 위로 쳐들어 지하수로의 풍향을 확인합니다. 지금 엘리와 에레야는 바람을 등지고 있습니다. 즉, 랫킨들 스스로를 죽여버린 저 치명적인 독바람 때문에 진격이 느려질 일은 없다는거죠. 일행은 계속 이동합니다. //오늘은 여기까지! 잘 자!
에레야는 짧게 끊습니다. 무슨 의미인지 정확히 이해하기엔 짧지만, 지금 상황이 상황이니 어쩔 수 없습니다. 한가하게 종교와 이단의 정의를 논하기엔 두 사람한테 걸린 목숨이 워낙 많은고로, 길게 얘기하기도 힘듭니다. 엘리는 계속 걸어가다가, 다시 벽을 두드려 일행을 멈춰세웁니다.
고블린. 셀 수 없이 많음. 최소 서른? 거미 기수 최소 다섯. 고블린 샤먼 최소 둘, 우리와 같은 방향으로 이동 중.
얼핏 봤는데도 이 정도입니다. 이 정도면 군대입니다. 엘리네 가문이 경영하던 영지에서도 이 정도면 마을이 해결할 수 없다고 간주하고 일족이 나섰을 일입니다. 보고 내용 중 그나마 다행인 건 이쪽으로 오고 있는게 아니란 겁니다. 묵묵히 듣던 에레야는 되묻습니다.
에레야는 엘리에게 진지한 목소리로 작전을 설명합니다. 말만 쉬운 작전이군요. 엘리는 고블린들 바로 뒤를 따라가, 고블린들이 식인종 본거지를 공격하는 순간 고블린을 도와서 식인종 중에 번거로운 놈들. 예를 들어 덩치 큰 놈이나 구울, 두개골 척탄병 등을 죽이고, 랫킨 등 다른 놈들이 오면 그놈들 중에서도 독바람 척탄병이나 다른 괴물들 위주로 썰어버리라는 겁니다. 에레야는 폭탄 하나를 건넵니다
"폭음탄이다. 어느 정도 정리되거나, 너가 죽을것 같으면 이걸 터뜨려."
그리고 경비들 눈치를 보다가 엘리의 가슴팍을 밀치듯 혈액이 담긴 유리병을 건네고 말합니다.
"살다보니 뱀파이어한테 피 한방울이라도 바치고 싶다는 미친년을 다 보고, 그 미친년 피를 뱀파이어한테 전달하는 일이 다 있군."
그럼, 신의 가호가 있기를. 엘리자베스 바토리 블라드 체페슈, 뱀파이어에게 하기에 참 좋은 말을 뒤로 한 채 엘리가 앞으로 나섭니다. 어둠 속에서, 엘리는 자연스럽게 한발씩 내딛어 고블린의 뒤를 밟습니다. 다행히도 감이 예민한 거미떼나 주술의 영향으로 미래와 과거가 뒤틀린 상태로나마 보이는 샤먼들도 엘리를 모르는것 같습니다. 잘 됐습니다. 어둠은 엘리의 친구니까요. 엘리는 고블린들에 가까이 다가가고, 고블린들 중에 제대로 된 무기로 무장한 이들이 꽤 많다는 걸 깨닫습니다. 가는 날이 장날, 진짜로 딱 좋은 때에 내려왔군요. 그리고...
"ܛܠܬܪܐ . ܵܠ ܲܲܨܫ"
나직이, 고블린 샤먼이 주술을 외웁니다. 무슨 뜻인지는 알 수 없지만, 나름의 규칙과 뜻을 가진 건 확실한 주술 언어가 고블린들 사이에 울려퍼지고, 고블린들은 그들답지 않게 잠자코 샤먼의 주술이 끝나기를 기다립니다. 그리고 엘리는... 신체에 알 수 없는 고양감을 느낍니다. 손톱이 가를 살점을 찾아 제멋대로 길어지고, 송곳니가 피에 헐떡여 드러납니다. 엘리는 눈을 부릅뜨고, 무언가 죽이고 싶다는 생각에 심장이 두근거립니다. 인간의 희고 검은 살점 아래의 붉은 속살은 얼마나 달콤할까요? 얼마나 참혹할까요?
아.
엘리는 고개를 젓습니다. 엘리는 가슴에 손을 얹어 진정시키고 주변을 둘러봅니다. 고블린들의 눈빛이 빨갛게 발광하고 있고, 키킥 키키킥 무섭게 울고 있습니다. 그리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