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모두는 누군가를 위한 이야기의 소품이자, 단역이자, 조연이기도 하고 동시에 자기 이야기의 주인공이기도 하다. 그 이야기는 비참할 수도, 행복할 수도 있고, 기승전결이 갖춰졌거나 이야기의 어떤 구성요소 하나도 제대로 된게 없을 수 있다. 하지만 아무리 엉망인 이야기가 되는 한이 있어도 우리는 선택하고, 때로는 강요당하면서 우리의 이야기를 써낸다. 이야기의 악마 이프가 이제 마침표를 찍으라 권할 때까지, 죽음이 우리를 찾아올 때까지. 왜냐면 우리는 살아있으니까. 그 이야기는 우리의 삶이니까.
지하수로를 걸어가던 엘리는, 바람소리와 물소리 이외의 소리가 점점 섞이는 것을 발견합니다. 찌찍, 찌찌직... 쥐가 우는 소리와 함께 두두두두 하는 발소리가 들리는군요. 엘리는 어둠 속에 몸을 숨기고, 한 손을 벽에 댄 채 천천히 걷기 시작합니다. 엘리가 밤눈이 밝긴 하지만 이곳에서 살 생각을 하는 괴물들은 최소한 엘리만큼 밤눈이 밝거나, 눈이 안 좋은 걸 만회할 수 있는 무언가를 가지고 있을 겁니다. 찢어지게 가난한데다 신전에도 못 가는 진짜 빈민들을 제외하면 말입니다. 그리고 엘리가 발견한 것은...
"그르르르륵, 그릉..."
....초록색의 척 봐도 질겨보이는 가죽, 물 위에 둥둥 뜬 눈과 길쭉하고 거대한 아가리, 가끔씩 물살이 칠 때마다 드러나는 거대한 몸뚱아리... 엘리는 박물학 서적에서만 보았던 '악어'입니다. 사시사철이 한여름인 남부 지방에서는 전쟁보다도 사람을 더 많이 죽이는 원인이라고 하는 맹수들 중 하나인데... 이게 왜 여기 있는 걸까요? 아무튼, 악어가 수로를 막고 둥둥 떠 있습니다.
엘리는 기척을 죽인 채 천천히 다가갑니다. 엘리가 워낙에 동작이 빠른데다가, 오밤중이라 악어가 앞이 잘 보이지 않다보니 거의 뒤통수까지 왔는데도 악어는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습니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보면, 어지간한 동물들은 배가 약점이니 악어도 배가 약할 것 같지만... 엘리는 악어의 배를 물자고 잠수하는 자살 행위를 할 수도 없고, 설령 그런다 해도 악어가 순순히 배를 물리진 않을 것 같으니 등 쪽으로 접근합니다. 하지만 악어의 등판은 인간의 팔뚝이나 목과는 달리 워낙에 넓어서, 이빨을 댈 부위도 마땅치 않습니다. 엘리는 목만 빼고 악어의 등판을 물어보려 하지만, 턱이 빠질 것처럼 아픈 느낌이 듭니다.
"그르르르르..."
악어의 등가죽을 물어뜯으려고 했지만, 쩍 벌린 입에 느껴지는 건 피맛이 아닌 물비린내와 이끼의 쓴맛입니다. 그나마 다행인 건... 역설적으로 엘리가 이 공격으로 악어한테 전혀 피해를 주지 못했기에 악어는 등에 이상한 간지러움만 느끼고 몸을 잠깐 비틀기만 했고, 엘리가 입으로 냠냠할 수 있는 거리까지 접근했는데도 악어는 엘리를 전혀 인식하지 못한다, 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즉, 엘리가 일부러 악어한테 잡아먹히려고 몸을 던지지 않는 한, 이 악어는 (엘리에 한해) 없는 셈 쳐도 된다는 뜻이죠.
엘리는 다시금 나아갑니다. 악어를 지나치고 나가니, 이번에는 말소리가 들리는군요... 하지만 거리가 워낙에 멀고, 말소리가 지하수로의 벽에 이리저리 울려퍼지는 바람에 잘 들리지 않습니다. 그나마 일부라도 들을 수 있어서 다행입니다. 엘리는 귀를 바짝 댄 채, 어떻게든 조금이라도 들으려 노력합니다.
"....내려올 거야......때는...온갖...들겠지."
"우리가...있을까?"
"항상...우리가...정 안 되면...알지?"
뭔 말을 하는지 전혀 모르겠군요. 일단 지금 들을 수 있는 건 이 정도가 한계입니다. 그리고... 다시 침묵이 찾아오고 우우우 스산한 바람 소리만 들립니다. 아무래도 더 가봐야 할 것 같다고 생각하는데...
"도, 도망쳐...!!"
어둠 속에서 누군가 양 팔을 허우적거리며 달려오더니, 엘리와 부딪쳐 넘어집니다. 나동그라진 이를 바라보니, 한 사내인데 한쪽 팔이 잘려 있습니다. 그는 고통스럽게 구르다가, 엘리를 보더니 히익...! 하면서 어떻게든 뒤로 물러나려고 합니다.
남자는 엘리가 박수를 치자 정신을 차리고 엘리를 올려다봅니다. 어두워서 다른 건 보이지 않지만 백은색 머리칼은 이 어둠 속에서도 저 멀리서 반사된 침침한 빛을 받아 약하게나마 제 존재를 드러내며 인사하고... 뱀파이어임을 나타내는 핏빛 눈동자는, 분명 광원이 별로 없는 환경인데도 기이하게도 잘 보입니다. 남자는 벌벌 떨다가, 숨을 몇 번이나 몰아쉬고는 상황을 설명합니다.
"여, 여여여... 여기에 내 짐들을 숨겨놓은 걸 찾으려고 내려왔는데... 제, 제길... 고, 고고고블린이랑... 쥐새끼들이... 평소보다도 더 빨리 활개를 쳐서... 내 물품 창고를 덮쳤어요."
상황을 설명하자 제정신이 돌아왔는지, 사내는 주머니에서 붕대를 꺼내서 한쪽 끝을 입으로 물고, 성한 나머지 한쪽 손으로 더러운 절단면을 칭칭 감아서 지혈하는군요. 대충대충 응급처치를 마친 남자는 그제야 팔이 잘렸다는게 실감되는지 깊은 한숨을 내쉬고, 엘리에게 부탁합니다.
"이, 이봐요... 꽤 강해보이는데... 수로 따라서 쭉 가다보면 이끼가 전혀 끼지 않은 벽이 나올텐데, 거기에 달려있는 문고리를 밀고 오른쪽으로 돌려서 당기면 내 창고가 나와요. 거기에 노란색 액체가 담긴 유리병 하나가 있을건데 그걸 가져와주면 안될까요?"
물론, 온갖 괴물이 설치는 이곳에서 맨입으로 그런 일을 시키면 안된다는 건 잘 아는지, 보통의 용병이라면 꽤나 솔깃할만한 제안을 하는군요.
"그 창고 안에 든 게 많아요. 엄청 귀한 약도 있고, 동방에서 온 코끼리 가죽도 있고... 아무튼! 그 유리병 말고는 창고까지 포함해서 아가씨가 다 가져도 되니까, 어떻게 안 될까요?"
남자는 주저앉아서 수로의 벽에 기댄채 눈을 질끈 감습니다. 워낙 상황이 급해 잊고 있었던 절단통이 뒤늦게 찾아온 모양입니다. 하지만 엘리는 잘 싸우는 뱀파이어지 소문난 명의는 아닌고로 그의 고통에 특별히 해줄 수 있는 뭔가는 없습니다. 엘리는 남자를 내버려둔채 수로로 더 깊이 들어갑니다. 워낙에 어둡다보니, 엘리마저도 손으로 한쪽 벽을 짚은 채 점점 구려지는 냄새로 자기가 점점 하수로로 가고 있다는 것만 알고 가는데...
키야아아악!!
갑자기 괴성을 시작으로 깡! 쾅! 쿵! 무기가 부딪치는 소리, 벽을 긁는 소리, 고통에 찬 비명이 울려퍼집니다. 하지만 가까이 갈수록 소리가 커지는 일 없이 점점 작아지더니, 엘리가 무슨 상황인지 알 때쯤이 되면 소리가 잦아들어 간신히 살아남은 승자들의 가쁜 숨소리와 상처를 할짝이는 소리만 들립니다.
"찌찍... 끼이익..."
"데호를 카매나리비둠. 츠크빅 아눅..."
"킷스타바리메님 야불..."
뭐라 하는지 전혀 모르겠지만, 이 목을 쥐어짠듯한 쇳소리와 안절부절 못하고 킁킁대며 훌쩍이는 소리... 엘리의 신경이 곤두서고, 어둠 속에서 보이는 움직임만으로 상대의 정체를 눈치챕니다.
랫킨, 다른 말로 "사람만한 쥐새끼"들이, 고블린 무리와 싸워 이기고 격렬한 싸움 이후를 수습하고 있습니다...
엘리는 자신의 몸을 수많은 박쥐로 나눠서 그들 사이를 지나칩니다. 고블린들이 널부러져 있는데 대형견만한 거미도 딸려있는 것으로 보아 고블린 쪽도 꽤나 준비를 한 것 같습니다. 박쥐도 쥐라고 뭔가 찍찍대는 소리가 울려퍼지고, 그 소리에 화들짝 놀란 랫킨들이 무기를 치켜들지만 뭐가 지나간건지 겨우 감을 잡을때쯤, 엘리는 이미 그들을 넘어 백걸음이나 넘게 멀어진 뒤입니다. 그런데 잠깐... 그 자리에 선 엘리는 갑작스레 변한 냄새에 머리가 아파옵니다! 냄새가 역겨워서? 아닙니다. 뭔가 무서운 존재가 있어서? 아닙니다!
...이 하수구랑은 연이 없을 것 같은, 정말로 달콤한 냄새입니다. 엘리는 정신을 집중하고, 눈을 감아 이 냄새에서 정보를 추출하려 합니다.
생명, 달콤한 생명입니다. 다른 동물의 생명을 훔쳐야 살 수 있는 그녀 같은 뱀파이어가 갈구하는... 피와 살의 냄새. 그것도 아주 제대로 숙성된 냄새입니다... 이게, 지하수로의 더러운 공기를 덮어버릴 정도로 잔뜩 퍼집니다.
...지하수로가 에레야 말마따나 진짜 하수만 씻어 흘려보내는 거라면 피냄새가 이리 날 일이 있나요? 어디서 고기파티라도 하나?
피냄새는 피냄새고, 엘리는 엘리입니다. 저 피냄새의 근원은 찾을수도 안 찾을수도 있는거고, 지금 당장은 창고문을 여는 것에 집중해야지요. 그렇게 걸어가던 엘리는 창고를 금방 찾아냅니다. 이끼가 전혀 없고, 문고리도 있군요. 남자가 알려준대로 문고리를 조작한 엘리는 절꺽, 하고 걸쇠 같은 게 떨어지는 소리를 듣습니다. 시범삼아 조금 당기자...
구궁... 끼이이이이이...
당겨지긴 하는데, 뭔 문을 통짜 바윗덩이 그대로 만들었는지 무겁군요. 계속 당기려 들자, 바닥이 긁히며 기분나쁜 쇳소리를 만듭니다.
이 창고에 숨기던 남자놈은 제 명을 재촉한 셈 같습니다. 이렇게 시끄러운 창고에 뭘 숨겨두다뇨! 그나마 다행인건, 엘리도 아예 못 당길 건 없어보입니다.
귓전을 울리는 소리와 함께 문을 당깁니다. 쾅! 쾅! 쾅! 석문의 밑바닥이 어딘가에 닿을 때마다 채석장에서 기중기에 메단 추로 돌을 깨는 소리가 들립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습니다. 시작한 김에 끝내야겠다고 생각하면 엘리는 문을 잡아당기고...
콰콰콰캉!!!!!
...이거 창고 맞...겠지? 엘리는 저도 모르게 그런 생각을 합니다. 이쯤 되면 이 남정네가 어떤 괴물놈들이랑 한패라서 함정을 팠나 싶지만, 그런 생각들은 안에 들어가서 램프에 불을 당기자마자 보이는 온갖 금은보화 앞에서 사라집니다.
남자가 말했던 예의 그 노란 액체가 든 유리병, 속을 꽉 채운 은화 사이에 드문드문 보이는 금화가 매혹적인 돈자루, 마법 스크롤 더미, 황금으로 자아낸 것 같은 비단 원단 뭉치, 유니콘 뿔을 비롯한 고급 연금술 재료, 그리고... 탁자 위에 놓인 갈기갈기 찢긴 책? 아무튼 엘리는 이곳을 둘러보다가, 사방에서 들려오는 저벅저벅 발소리와 쇳덩이가 벽을 긁는 소리에, 자기가 지금 쇼핑할 때가 아님을 깨닫습니다.
지금 당장 챙길 것만 챙긴다 치면, 엘리는 위에 언급된 것들 중 유리병을 포함해 최대 4개를 들고 갈 수 있으며, 민첩 스테이터스 저하 없이 가져갈 수 있는 건 총 2개입니다.
아니면, 도망치는 대신 엘리의 싸움 실력을 시험해보거나, 목숨 걸고 문을 안에서 닫으려 시도하거나, 아예 존엄성을 좀 희생하고 하수가 되어버린 지하수로의 유류에 몸을 맡기거나, 다른 방법도 있겠죠?
치이이이익... 엘리의 손이 약간 뜨겁지만, 수호부와는 다르게 그냥 손난로처럼 따뜻하군요. 유니콘의 뿔이 엘리의 '불경한' 종족을 거부하는 것 같지만, 엘리가 나름 '깨끗한' 아가씨였던 덕분인지 유니콘의 뿔이 거부하려다가 만 것 같습니다. 엘리는 뿔을 살인 무기 삼아 들고 양쪽을 바라봅니다
"키키키키킷!"
...무언가 지나갈거라 생각도 못한 틈새에서 덩치가 작은 고블린들이 우르르 몰려나옵니다. 짱돌, 몽둥이, 쇳조각 등 변변찮은 무기에 영양 상태도 안 좋은지 수척하지만, 눈빛에는 신선한 고기를 향한 열망이 가득합니다. 그리고 제기랄, 바로 위와 연결된 수직 우수관을 통해 대형견만한 거미들이 고블린을 등에 짊어진 채 내려옵니다! 이놈들은 준비가 나름 철저한지, 불길한 문양이 새겨진 두개골을 뒤집어쓰고 조잡하게나마 의식용 지팡이를 든 샤먼도 있군요.
반대편을 봐도 상황이 영 좋지 않습니다.
"연장 챙겨라!"
"오늘 고기파티다!"
엘리가 지난 밤에 사냥했던 식인종들입니다. 하지만 이번에는 고블린만큼은 아니어도 수가 꽤 되고, '출처를 알기 힘든' 가죽으로 만든 방어구를 걸쳤고, 이런... 구울병 말기에 이르러 진짜 구울이 된 놈들, 식인의 부작용인지 뭔지 풍선마냥 부푼 돼지들도 있습니다. 그리고...
"키킥?"
"저년 뭐냐?"
식인종들이 밤눈을 밝히려 불을 켜자, 엘리는 뻘쭘하게 유니콘 뿔을 든 채 양쪽 사이에 끼인 형국이 됩니다.
엘리가 처음으로 노린 건 고블린 떼입니다. 마치 식인종 그룹의 선두라도 된 것마냥, 고블린들 사이로 파고들어갑니다. 처음으로 달려든 고블린은 옆으로 슬쩍 피하자 제 속도를 못 이기고 물 속에 풍덩하고, 두번째는 그냥 수로 쪽으로 밀어버립니다. 그렇게 고블린을 무기 하나 없이 두놈이나 제낀 그녀는 바로 뿔을 치켜들어, 시범 삼아 한놈을 찌릅니다.
"키야아아아악!!!!!"
고블린이 찔린 부위가 타오르는 끔찍한 고통을 느끼면서 드러눕고, 연이어 엘리는 뒤따르는 고블린들을 무릎, 쇄골, 팔뚝, 허벅지, 옆구리 등등 다양한 부위에 뿔침을 놓고, 상당수가 살점 타는 소리와 함께 주저앉지만...
"으아악! 죽어! 죽으라고!!!"
그새 끼어든 식인종과 고블린들이 공격을 주고받는 모습을 보면서 엘리는 새삼스레 깨닫습니다. 그냥, 칼은 맞으면 죽도록 아픈 겁니다. 엘리는 고블린들에게 칼침 한방씩만 놓으면서 밀어버리고, 고블린들이 아파서 발광하자 자연히 엘리 주변에 공간이 생깁니다. 하지만, 그 순간, 엘리는 끔찍한 구토감을 느낍니다! 뭔 일인가 보니, 손가락 말단부터 혈관이 점점 검어지면서 점점 근육이 굳고 있습니다. 제기랄, 샤먼이 저주를 걸었습니다!
엘리는 근육이 마저 굳기 전에 유니콘의 뿔을 던집니다. 빙빙 돌아가있긴 하지만, 유니콘의 뿔도 끝의 날카로움을 생각해보면 엘리는 고블린 샤먼에게 송곳을 던진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하지만 엘리가 던지기 직전 고블린 무리에게 밀린 식인종이 엘리의 뒤를 덮치고, 앞에서는 고블린이 용기를 내 엘리의 배에 뼈칼을 찌르며 파고들면서 자세가 흐트러졌습니다. 게다가 근육이 굳어가니, 유니콘의 뿔은 그 이름이 무색하게 참 힘없이 샤먼에게 날아갑니다. 샤먼은 그걸 보고 지팡이를 들어 괴상한 주술을 외웁니다. 그리고 엘리를 비롯한 그 자리에 있던 모두가, 잠시 실명할 것 같은 섬광에 시력을 잃습니다.
콰콰쾅!!!!!!
그리고, 이 자리에 있는 이들 중, 오직 엘리만이 인지할 수 있는 찰나가 지나고 폭발이 일어납니다. 폭음 뒤에는 삐이이ㅡ 하는 소리가 귀청이 찢어졌음을 알려주고, 축축해진 귀에서 흘러내리는 액체에서 쇠비린내가 납니다. 제아무리 엘리가 빨라도, 눈이 먼 상태에서 폭압에 휩쓸린 수십명의 식인종과 수백 고블린의 무게를 이길 수 없어 그대로 나동그라지고, 엘리는 축축하지만 딱딱한 바닥을 짚고 숨을 쉬면서 그나마 자기는 물에 빠지지는 않은 운 좋은 누군가임을 상기합니다. 엘리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눈으로 아무 팔다리나 잡아 끌어서 꽉 깨뭅니다. 그리고 부들대는 걸 무시하고 이빨을 더 깊게 박고 한참을 빨고 나서야, 시야와 청각이 돌아오고 상황 파악이 시작됩니다.
"으아아윽... 뭐야 이거..."
"야! 일어나 씨발!"
비명을 지르거나 비명 지를 힘도 없어 끙끙대는 이들 사이에서 홀로 일어난 엘리는 뭔 일이 일어난건지 생각해봅니다. 유니콘의 뿔은 부정한 것을 배제하는 성질이 있고, 고블린들은 야금술부터 주술까지 뭐든 할 수는 있지만 참 개판으로 하는 것으로 유명합니다. 뭔가 얼개가 맞는 것 같습니다. 샤먼이 유니콘의 뿔을 막으려고 주술을 썼다가, 위력은 형편없는 주제에 엄청 '부정한' 것들을 많이 끌어다쓴 덕분에... 안 그래도 고블린의 피를 머금은 유니콘 뿔이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폭발한 것 아닐까요? 아무튼 고블린 떼거리 한가운데에서 폭발한 유니콘 뿔은 전세를 단숨에 식인종 쪽으로 몰아세웠고, 그나마 피해를 덜 본 식인종들은 비명을 지릅니다.
"야, 밀어! 밀라고!"
식인종들은 꼬챙이로 널부러진 고블린들을 하나 둘 찍고, 아직 도망칠 여력이 남아있던 고블린들은 황급히 도망칩니다. 하지만 시력과 청력이 상한 나머지, 아무 곳으로나 막 뛰어가다가 식인종에게 제발로 뛰어들거나, 물 속에 쳐박히기를 반복합니다. 대부분의 식인종들은 고블린에 꽂힌 나머지 엘리의 어깨를 툭! 툭! 밀치면서 지나갔지만, 개중 누군가가 엘리에게 칼을 들이밀었습니다.
식인종 몇 명을 떨어뜨리자, 누군가 엘리의 머리채를 잡습니다. 하지만 엘리는 저항하는 대신, 그대로 양 손으로 그 손을 붙잡고 몸을 돌려 그 놈을 물 속으로 빠트리고, 자기도 휘말리기 전에 박쥐의 형태로 바꿉니다. 하지만 너무 많이 바뀐 나머지 벌써 피로 부른 배가 꺼졌다 싶을 때쯤, 누가 엘리의 얼굴을 손바닥으로 콱 붙잡자, 엘리는 오히려 잘 됐다며 그 손을 붙잡고 손가락이 절단되기 직전까지 갈 정도로 꽉 깨물어서 피를 빱니다. 비명이 들리지만 이 식인종도 사람 잡아먹을 때 그 사람 사정 신경 썼을까요? 엘리는 콱, 콱, 콱, 한번 열었다 다물면서 손목의 동맥에 송곳니를 박고 분수처럼 쏟아나오는 피를 마십니다.
"야 이 답답한 새끼들아! 고작 한 명을 못 죽여?!"
"다 붙어!!!!"
지난 밤보다 훨씬 많은 식인종들이 칼을 들고 엘리에게 달라붙습니다. 세 명이 아니라 여덟명이 넘는 놈들이 한번에 엘리를 포위하니 찔리는 부위도 다양하고, 피도 위험할 정도로 빠져나갑니다. 하지만 엘리는 문 사냥감을 놓치지 않고, 피를 너무 빨았는지 동맥에 이빨을 꽂았는데도 더 이상 나오지 않자 엘리의 목을 노린 칼을 턱을 빼서 피하고 손목을 또 깨뭅니다. 박쥐로 변할 수도 없을 정도로 너무 좁게 포위당했지만, 그렇게 한참을 빨고 찔린 결과...
"헉... 헉..."
"뭐야 이년...!"
그녀를 찔렀던 식인종들이 힘이 빠져 먼저 나동그라지고, 그를 보자 안 되겠다고 판단한 거구의 덩치들이 달려들고, 식인종들이 묶어놨던 구울들을 엘리를 보게 한 뒤 풀어버립니다.
달려드는 구울을 날렵한 몸짓으로 피하지만, 그 중 한 놈이 우연히 엘리의 갈비뼈에 손톱을 박아넣었다가 이내 빼버립니다. 그 사이로 피가 흐르는 것 같지만, 엘리는 그동안 빨아먹은 피로 빠르게 재생합니다. 엘리를 놓친 구울들이 손을 휘저으며 넘어진 동료 식인종들을 박살내다가, 뒤돌더니 다시 엘리에게 달려듭니다. 이번에도 요행으로 피했지만, 워낙에 공간이 좁은 나머지 피할 공간이 마땅치 않습니다! 그래서 박쥐로 다시 변하려는 순간에...
"아오, 이 모기 같은 년!"
수로에는 어떻게 들어왔는지 참 궁금한 식인종 덩치가 엘리의 종아리를 붙잡더니, 그녀를 거꾸로 듭니다. 고블린, 식인종, 구울, 지하수로. 이 모든 것이 순간 거꾸로 뒤집혔다가, 세상이 아주 빠르게 움직이며 머리가 멍멍해집니다! 쾅! 쾅! 쾅! 엘리를 좌우로 마구 패대기치더니 벽에 던져버리고, 고블린보다는 훨씬 나은 조직력을 가진 식인종들은 길쭉한 쇠막대기를 들고 오더니 엘리의 몸에 쇠막대기 여러개를 꽂아 밀어버립니다.
"야, 이 년 못 움직이게 막아! 한방울이라도 피 빨면 우리 다 좆되는거야!"
정확한 분석이고, 식인종들은 그 분석에 따른 당연한 대책을 실행하고 있습니다. 엘리가 얼마 남지 않은 피로 박쥐로 변해야 하나 고민할 때, 식인종들은 아마 희생자를 포획하는 데 썼을 그물도 가지고 오는군요. 이거 잘못하면 진짜 망하겠다 싶을 때쯤... 어디선가 목소리가 들려옵니다.
"거기까지! 내 직접 봐야겠다!"
그 목소리에 식인종들이 화들짝 놀라더니, 엘리를 감시하는 이들을 제외하고 나머지는 벌떡 일어섭니다. 그리고 그 목소리가 이어지는군요...
식인종들 사이에서 정말로 높아보이는 누군가가 나옵니다. 후드가 달린 붉은 사제복을 입고 있고, 그 후드 때문에 얼굴이 가려져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빙빙 도는 시야로 그 사내를 바라보는데, 그 사내는 엘리 쪽을 보는 듯하더니 한쪽 무릎을 꿇고 정중히 사과합니다. 아까 전에 식인종들이 엘리를 당장이라도 찢어죽이려 들던 것과는 완전히 정반대입니다.
"무례를 용서해주십시오. 밤의 귀족이시여. 이곳의 상황이 좋지 않아, 부득이하게 아가씨를 제압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아니, 정반대 정도가 아니라 아주 빙글넹글 돌아버렸는뎁쇼? 어안이 벙벙해진 엘리에게 그 사내가 말합니다.
"이 결박은 금방 풀어드리겠나이다. 저희 쪽으로 오셔서, 저희가 무엇을 하는지 보시면 바로 이해하실 수 있을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