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모두는 누군가를 위한 이야기의 소품이자, 단역이자, 조연이기도 하고 동시에 자기 이야기의 주인공이기도 하다. 그 이야기는 비참할 수도, 행복할 수도 있고, 기승전결이 갖춰졌거나 이야기의 어떤 구성요소 하나도 제대로 된게 없을 수 있다. 하지만 아무리 엉망인 이야기가 되는 한이 있어도 우리는 선택하고, 때로는 강요당하면서 우리의 이야기를 써낸다. 이야기의 악마 이프가 이제 마침표를 찍으라 권할 때까지, 죽음이 우리를 찾아올 때까지. 왜냐면 우리는 살아있으니까. 그 이야기는 우리의 삶이니까.
엘리가 사람들을 일일이 꺼내려는 동안 이단심문관은 밧줄과 작살을 꺼내더니, 살덩이의 가장 윗부분에 작살을 꽂고 밧줄을 연결하고는, 엘리에게 밧줄을 던지고 함께 당기기 시작합니다. 끙차! 끙짜! 공 형태로 뭉쳤다해도, 표면이 잘 다듬어진 수정구 같은게 아니라 문자 그대로 살덩이라 바닥에 쓸릴 뿐 당겨지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이단심문관과 엘리가 겨우 계단까지 끌고 오자, 이 살덩어리는 계단을 따라 구르기 시작합니다.
"어? 어어어?!"
"피해."
이단심문관은 계단 난간을 타넘어 공마냥 구르는 사람 덩어리를 피하고, 엘리도 속도는 자신있었기에 쉽게 피합니다. 살덩어리는 바닥에 부딪치더니 짓뭉개지고, 1층은 경비병들이 물통을 들고 들어와 불을 끄고 있군요. 매캐한 연기와 기침 소리를 뚫고 들어온 경비대장이 이단심문관에게 묻습니다.
"심문관님? 이 살덩이... 아니, 사람들은 어쩝니까?"
"죽었으면 신전 영안실에 보내고, 살았으면 박수치고 격리소 들어가라고 해야지요."
"알겠습니다! 그런데 이 여자는...?"
"중요 참고인이요. 내 긴히 할 말이 있어서 데려가니 내버려두고, 여관은 계속 봉쇄해두쇼."
이단심문관은 엘리를 앞세웁니다. 뱀파이어를 잘 알고, 죽기 싫은 이들은 뱀파이어에게 등을 절대 보이지 않는다는 핑계좋은 이야기와 함께요. 엘리의 걸음은 조금씩 조금씩 느려지지만, 이단심문관은 그녀를 밀면서 신전 가까이 갑니다. 그리고...생각보다 별 것 없었습니다. 신전은 세스타우 성의 그 어느 곳보다도 빈민들이 많았고, 수사와 수녀들이 앓는 소리를 내는 빈민들을 돌보고 있었습니다. 아주 옛날에 일족이 경영하던 영지에 패혈병이 돌아 영지민들이 죽어나가고 산 자들의 피 맛이 똥오줌 수준으로 역해져서 한동안 일족 전체가 타지에서 농노들을 초청할 때까지 동물피로 연명했던 적이 있었는데, 엘리는 자신의 원대한 꿈이 진즉 이뤄졌다면 더 많은 이가 살았을 것이라 탄식하고 말았습니다.
"멈춰."
상념에 빠져 더러운 천막들 사이를 거닐 때 이단심문관이 엘리를 잡아세우더니, 손에다가 철십자 모양의 수호부를 와락 쥐여줍니다. 철십자 수호부를 반사적으로 던져버리려고 하자, 이단심문관은 주먹을 꽉 잡고 경고하는군요.
"이단 정보 수집 등의 목적으로, 신께 봉헌된 장소에 발을 디딘 불경한 놈들에게 배포해서 잠시 체류를 허락해주는 수호부다. 다시 말해, 이거 없이 맨몸으로 몇발짝 더 디디면 굳이 내가 싸울 수고도 없이 잿더미가 된단 말이지."
그리고는 다시 걸어가라고 요구합니다. 수호부... 뭔가, 달군 돌처럼 따뜻하지만 엘리를 공격하지는 않습니다. 그리고 신성한 기운이 온 몸을 흐르는데도... 간지럽기만 하지 별 위해는 없군요. 인생 첫 체험입니다.
목숨이 위험하진 않다지만 위축되는 건 자연스러운 반응입니다. 철십자 수호부가 없이 여기까지 들어왔다면 엘리는 잿더미가 되었을 테니까요. 어둑어둑한 밤의 신전 안으로 들어가니, 램프로 밝힌 스테인드 글라스의 좋으신 천사들과 선하신 성인들이 엘리를 내려다보는 것 같습니다.
예배당 복도를 지나 지하로 들어가니, 음... 무시무시한 광경이 나옵니다. 위에서 빈자들을 돕던 성직자들과는 다르게 인상이 험악한 이들이 각자의 방에서 무기를 갈고 닦거나, 그렘린 따위의 괴물과 희생자의 시신을 부검하거나, 유령을 심령통에 담아 고문하는 등 살벌한 광경이 나옵니다.
"걱정 마. 넌 어지간히 잘못하지 않는 이상 저 꼴 안나."
...것 참 안심되는 말을 하면서 엘리를 자신의 심문실까지 데려간 이단심문관은, 엘리를 위해 의자 하나를 끌어주더니 차를 끓이기 시작합니다.
"대답할 건 많지만 이것부터 시작하지. 넌 누구고, 어느 일족이지? 먼저 밝히자면 난 에레야, 사람 십자가에 매달아 불태우는 미친 광신도다."
"...엘리자베스 바토리 블라드 체페슈. 일족에서도 꽤 사는 가문 사람인가 보지? 바토리, 블라드, 체페슈... 하나만 있어도 대단할 이름들을 여럿 붙였군."
에레야는 서류에 엘리의 이름을 적더니, 엘리를 바라봅니다. 그리고는 와보고 싶어서 왔다는 말에 어깨를 으쓱입니다.
"정말 아무것도 모르고 온 것치곤 운이 좋았네. 세스타우 성이 속한 왕국은 뱀파이어를 존재한다는 이유만으로 공격하진 않기로 협약을 맺었거든. 그게 뭐 100% 안전하다는 뜻은 아니고. 아, 그리고 말 편하게 해라. 내가 나이 먹었어도, 뱀파이어한테 존댓말 들을 정도로 할매는 아니라서."
나름 분위기를 풀어보려고 농담했던 에레야는, 금방 농담같지도 않은 농담을 거두고 말합니다.
"그럼, 여기 왔을 때부터 아까 그 괴물이랑 겨뤘을 때까지 진술을 들어야겠는데. 이야기해주겠나?"
어떻게 하나요? 전부 이야기한다,고 하면 엘리는 세스타우 성에 들어온 뒤부터 지금까지의 일을 모두 자신의 관점에서 어느 정도 가감하더라도 어쨌든 다 털어놨다고 전개하며, 일부 또는 전부 내용을 거짓말로 대답하거나 의도적으로 누락하려면 직접 서술하시면 됩니다.
>>166 엘리는 세스타우 성에 들어와서 있었던 일들을 모두 고합니다. 대낮에 몸을 꽁꽁 둘러싸고 성에 들어온 일, 여관에서 방을 잡은 일, 여관 주인에게 축객령을 당한 일, 식인종을 세 명 죽이고 나머지 한 명을 제압한 일, 여관을 습격한 괴물을 죽인 일... 에레야는 흥미롭게 듣습니다. 엘리의 '죄'가 얼마나 참작될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지금은 엘리의 행동이 범죄냐 아니냐는 상관 없이 이야기 자체에 집중하는 것 같습니다. 특히, 식인종이 등이 굽고 손이 벌벌 떨렸다던지나, 여관의 괴물이 엘리와 동류로 추정된다던지 싶은 정보가 이목을 끈 것 같습니다. 에레야는 말없이 엘리를 쳐다보다가, 손가락을 딱딱 쳐서 험악한 인상의 부하 중 하나를 부릅니다.
"예, 심문관님."
"다른 부검 예정된거 전부 미루고, 여관 현장에서 주운 괴물 시체 지금 당장 배 갈라서 뭐 보이는지 보고해."
"...내가 이단심문을 20년 넘게 했는데 양동이로 묻어두고 제압이라 부르는 사람은 처음 본다."
에레야는 쯧, 혀를 차더니 일어납니다. 그리고 엘리에게 이야기하는군요. 그간 들었던 말 중에 가장 반가운 말이 나옵니다. 여기서 나가자는 겁니다. 심문관이 장비를 챙기러 개인실로 들어간 동안, 험악한 인상의 거한이 인상과 덩치에 걸맞지 않게 쭈글쭈글대며 다가옵니다. 그리고 엘리를 찾는군요.
"당신... 우리 심문관님이랑 협력하는 뱀파이어죠? 안 위험한 뱀파이어죠? 혹시 좀 도와줄 수 있나요?"
거한은 고문실에서 팔다리가 쭉쭉 늘어나는 고문을 받고 있는 죄수를 가리킵니다. 음. 이런 데 있을 법한 여자는 아닌 것 같은데 말입니다. 여튼 거한은 꿋꿋이 뒤틀리는 관절을 견디고 있는 저 여자를 가리키며 말합니다.
"심문관님께서 이 성에서 조사하는 사건 관련해서 사교도 조직죄로 체포한 년인데... 뭔 수를 써도 입을 안 열더라고요. 뭘 해야 말하겠냐고 하소연하니 뱀파이어를 데려와 흡혈을 체험시켜주면 뭐든 다 말하겠다는데... 어떻게 안 될까요?"
"피를! 내 피를 딱 한번만 바치게 해줘!"
...이런 부탁이니 이단심문관 부하가 엘리 같은 뱀파이어한테 저자세로 쭈굴대며 높여 부르죠. 상대는 음... 흔하진 않아도 종종 있다는 밤피로필리아, 뱀파이어에게 피를 빨리고 예속되는 걸 좋아하는 변태로 보이는데... 원한다면 부탁을 들어줘도 되고, 아무리 그래도 변태의 피는 좀 그렇다면 당장 나가야 하는 걸 핑계 삼아도 됩니다.
경비병은 상황을 설명합니다. 횡설수설하는 언어와 밑도끝도 없는 징징거림을 제하면, 대충 이 놈이 다짜고짜 달려와서 누가 사람을 죽였다니, 도와달라니 헛소리를 하길래 걷어찼더니 계속 달라붙고, 끝내는 사방에 구토를 하며 제 몸에도 토하길래 겁이 나서 떨어질 때까지 찔러 죽였다는 겁니다...
"...엘리, 생각 좀 해봐."
에레야는 침착하게 상황을 살펴보기 시작합니다. 엘리도 자신이 방어 차원에서 그랬다는 점을 인정받으려면 뭔가 더 그럴듯한 증거나 진술이 필요하겠군요! /오늘은 여기까지
"난 트롤한테 척추 부러졌다가 잘못 붙는 바람에 굽었는데 그럼 나도 밤마다 사람 먹겠네?"
경비들이 엘리의 말을 반박하고, 특히 대머리나 등이 굽은 사람이 감정적인 반응을 보이는군요. 뭐 당연한 일입니다. 아저씨는 마음씨가 대머리예요! 해도 우는 게 대머리인데, 대머리라고 식인종 취급 받으면 서러울 법도 하죠. 그런데 그 중 엘리에게 가까이 다가온 사람이 횃불을 비춰봅니다. 샛노란 횃불이 노란 색깔을 흰 피부에, 은색 머리칼에 입히지만, 그녀의 선혈 같은 진홍색 눈동자는 그대로 드러냅니다.
"뭐야 이년... 아니, 이건?"
"두발로 걷는 모기 아냐?"
경비병들이 창칼을 들고 엘리를 에워싸기 시작합니다. 당장이라도 죽일 것처럼 구는군요. 생존 본능이 엘리의 손톱과 송곳니를 불쑥, 뽑아내지만 그때 에레야가 엘리의 손을 주름진 제 손으로 가리고 앞에 섭니다.
"불경한 존재의 조사 및 처분은 현장 상황상 불가피할 때를 제외하고 이단심문관의 소관이다. 그리고, 이 '두 발로 걷는 모기'가 틀린 말을 한 것도 아니야. 굽은 등과 벗겨진 머리는 구울병을 의심할 수 있는 1차 증거지."
에레야는 식인종의 시신을 분석하기 시작합니다. 엘리가 봤던 대로 허여멀건 피부는 백반증이었습니다. 에레야가 식인종의 입을 벌리자 기이할 정도로 발달한 송곳니와 멧돼지 엄니처럼 변한 이빨, 그리고 열악한 위생 상태를 고려해도 기이할 정도로 뒤틀린 치열. '치아 이상발달'이라 부를 수 있겠군요. 그리고...
"엘리. 너 운 좋은데?"
에레야는 식인종의 이빨 사이에 낀 긴 금빛 머리칼을 떼냅니다. 그 머리칼에는... 두피로 추정되는 살덩이가 덜렁대고 있군요.
아니 땐 굴뚝에서 연기 안 나고, 아니 아픈 몸에서 눈물 안 나는 법입니다. 수호부처럼 고통스러운 신성력이라면 아파서라도 눈물이 날 테니 그 심산으로 만진 거지만... 에레야의 흉갑을 두들겨봐도 놀랍게도 별 반응은 없습니다. 에레야는 뚱한 표정으로 엘리를 내려보다가 나직이 흉갑의 효능을 설명해줍니다.
"뭘 기대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이건 그냥 흉갑이야."
.........왠지 모르게 부끄러워서 눈물이 나지만 괜찮습니다. 눈물은 눈물이니 엘리는 혼신의 눈물연기를 합니다. 여전히 반응은 적대적이지만 말입니다.
"...재수 없어."
"이단심문관님이 이 성에 없었으면 별 잘못 없는 사람들 피도 빨았을 거 아니냐?"
에레야의 비호 아래 있으니 체포한다던지 추방한다던지 하는 위력행사는 차마 못하지만 말은 막 하는군요. 에레야도 이단심문관의 입장상 뱀파이어를 옹호할 순 없는 노릇인지 엘리의 옆구리를 툭툭 찌르며 말합니다.
"일단 다른 데 가서 이야기하지. 곧 해가 뜰 거야."
그러면서 턱짓으로 동쪽을 가리키는데, 제기랄... 검보랏빛 일색의 하늘에 파란색, 전혀 반갑지 않은 여명의 전령이 보입니다.
네. 고문도구와 해부침대가 즐비하고, 엘리에게 강제로 예의를 주입하던 신전 지하의 심문소 이야기입니다. 에레야는 엘리의 반응을 살피다 농담이라 정정하고는 근처를 바라봅니다. 에레야는 엘리와 함께 뒷골목을 걷습니다. 스스슥, 스스슥. 둘을 지켜보던 시선이 느껴지지만 가까이 가면 이내 사라지고, 에레야는 엘리를 세스타우 성내의 지하 수로로 데려갑니다.
"우우..."
어둡습니다. 에레야는 벽을 손으로 짚은 채 앞서가고, 퀴퀴하고 습한 물내를 헤치고 엘리의 밝은 밤눈에 빈민들이 보입니다. 다들 상태가 신전의 빈민들보다도 심하군요. 누군가 에레야와 엘리의 발을 붙잡지만 에레야는 확 걷어차 쳐내고, 창살 걸친 나무문으로 보호되는 안전가옥에 다다릅니다. 문을 닫고 문에 난 쪽창도 닫은 에레야는, 방 안에 낀 발광버섯에 물을 뿌려 푸르고 차가운 불빛을 밝힌 후 한숨을 쉽니다.
>>189 "지금까지 내 모가지에 이빨을 안 꽂고, 듣자하니 피 빨리고 싶다는 미친년도 마다했다는 걸 보니... 꽤나 우릴 신용하고 있군. 그럼 나도 그 신용에 나름대로 보답해야지."
에레야는 먼저, 비록 함께한 시간이 매우 짧지만(체감상 길어보이는 거지 지금 만난지 12시간 겨우 다 되어갑니다.), 엘리를 신용하기로 했음을 먼저 밝히고 '사건'에 대한 이야기를 꺼냅니다. 엘리가 방금 추측한 바대로 에레야도 추측하고 있었군요.
"그래. 지금 당장은 다 별개로 보이지만 이상했어. 다수의 괴물 습격사건의 목격담을 종합해보면 그리펜이나 코카트리스 같은 자연의 맹수들이 아니라 네가 싸웠던 것들처럼 역겹게 엮인 것들이었어. 그리고 구울병에 걸릴 정도로 대량의 인육을 섭취한 식인종들이 발견됐다면 당연히 사람들이 끌려갔을테니 실종자 신고가 늘어야 하는데 전혀 그렇지 않았지... 그래서 뭔가, 더 큰 건 아래에서 이 일들이 일어나는 것 같은데..."
에레야는 수통을 꺼내 물을 마시더니 엘리에게 대뜸 묻습니다.
"그래서, 엘리자베스 바토리 블라드 체페슈. 고귀한 뱀파이어. 왜 여기에 왔지? 그냥 도망가는 게 합리적일 텐데 왜 여관에서 괴물놈과 죽어라 싸우고, 높으신 흡혈귀족님 입장에선 빨아도 닭만큼의 피도 안 나오는 하플링 여급을 구한 거지? 솔직히 대답해."
에레야는 복잡한 표정으로 엘리를 바라보더니 간신히 고개를 끄덕입니다. 엘리 같은 불경한 존재를 사냥하는 것을 업 삼은 사람에게 엘리의 존재는 너무 이해하기 어려운 것일까요? 아니면 개인적인 혐오가 너무 큰 걸까요? 누군가를 엘리에게 겹쳐보는 걸까요? 에레야는 작은 열쇠를 꺼내더니 엘리와 그녀 사이의 책상에 올려두고 말을 계속합니다.
"네 말을 얼마나 믿어야 할지는 모르겠지만, 행동으로 보여준게 많으니 더 많은 말은 않겠어. 그러니까, 엘리. 내가 선택지를 둘 주지."
에레야는 두 손가락을 펼치고 하나씩 접으며 선택지를 제시합니다.
"하나, 사냥당할 걱정 없이 세스타우 성과 인근 지방에서 멀리멀리 떨어진 곳으로 도망칠 권리. 왜냐면 지금 우리는 여기서 벌어지는 일만으로도 짜증나서 어디로 튈지 모르는 너 같은 변수를 일일이 챙길 힘이 없어서 그래."
그리고 나머지 하나를 접습니다.
"둘, 우리와 협력하기. 이단심문소와 협력하는 건 너희에게는 미친 짓으로 들릴 수도 있겠지만 그리 나쁘지 않을 거야. 여기 이 지하수로 안전가옥 열쇠도 빌려줄 거고. 참고로 여기는 세스타우 성 근처 강에서 흘러오는 강물을 받아와서 하수 구역으로 보내는 통로라서 똥냄새도 안 나. 네가 살던 귀족 저택에 대면 부족한 건 많지만... 여기서 이 정도면 난 뱀파이어 기준 중산층 집 정도는 된다 생각하는데. 어떻게 하겠나?"
에레야는 엘리의 손을 잡습니다. 이단심문관의 손, 이라는 생각에 근육이 잠시 꿈틀,하고 굳었다 풀어집니다. 엘리가 태어났을 적에는 빨리 안 자고 돌아다니는 아이는 이단심문관이 잡아가 해가 뜰 때까지 말뚝에 꽂아둔다는 무시무시한 자장가를 들으며 잠에 들었고, 조금 더 자라 아이가 되었을 적에는 이단심문관이 저지를 수 있는 끔찍한 일들을 들었고, 80의 젊은 나이에 이른 지금도 에레야의 직위는 반갑지 않습니다.
하지만... 에레야의 주름진 손은 따뜻합니다. 다른 모든 인간들이 그렇듯, 그녀의 손에서도 고동치는 맥박이 존재를 과시합니다. 무고한 이의 목을 째고 주머니를 채가는 도적, 그럭저럭 농사 짓고 사는 평범한 부부, 교회에서 예배를 보는 신부, 타의건 자의건 그녀가 속한 일족을 따르던 영지민들. 그들 모두처럼, 에레야는 인간입니다. 인간이라는 건 참 단순하면서도 많은 의미를 지니고 있죠. 다른 모든 인간들이 그렇듯 에레야는 당신과 좋은 친구가 될 수도 있고, 그저 이름과 얼굴만 알 뿐인 남남이 될 수도 있고, 최악의 경우는 목숨 걸고 싸울지도 모릅니다. 뭐, 그래도 시작은 좋군요?
"이제부터 넌 이단심문관의 임시 협조자고, 협조를 위해 이 안전가옥을 제공받은 거다. 여긴 안전가옥이니까, 수로에 깔린 거지들 불쌍하다고 여기에 들여서 동네방네 여기에 비밀기지 있다고 나발 불지 말고. 알았어?"
...쯥. 위에 구구절절 써둔거 감동 다 깨지게, 에레야는 참 팍팍하고 현실적인 이야기만 하는군요.
>>197 "대낮에 돌아다니고 싶어하는 뱀파이어라, 그것 역시 특이하군. 뭐... 자주 부를 거다. 하지만 지금 너한테 요청할 일은 바깥에 나가서 하는게 아니야."
에레야는 엘리에게 당장 해야 할 일을 설명해줍니다. 안전가옥을 지하수로에 하나 내주더니, '협조자'로서 맡기는 첫 임무도 지하 수로와 엮였군요.
"지하수로에서 자꾸 사람들이 실종되고 있다, 이상한 것들이 나오고 있다는 소문이 들리고 있어. 원래는 그냥 지하수로가 그런 소문이 붙는 곳이라 넘기겠지만, 아까 상황 설명 들었지? 그래서 여길 조사하긴 해야 하는데... 우리가 사람이 좀 없기도 하고, 밤눈 밝은 사람은 특히 더 없단 말이야. 하지만 넌 뱀파이어잖아? 지하수로로 들어가서 식인종, 괴물, 그 외 기타등등 이상한 게 있는지 살펴보고, 좀 중요하다 싶은 게 있으면 전부 기록해 둬. 괜히 싸웠다가 피 보면 다 피곤해지니까 피하되... 만약 싸우게 된다면..."
에레야는 제 입술에 검지손가락을 가져다대더니 쉿, 하는 제스처를 취합니다.
"기절할 정도로만 빨던지, 그것보다 더 빨았으면 시체를 조각내서 수로에 던져버려. 뱀파이어한테 당한 시체가 부검실에 올라가면 사건 보고서 쓰기가 진짜 머리 아파지니까."
...세상에, 엘리는 조건이 달려있긴 해도 "피 빨아도 된다"고 말하는 이단심문관을 만난 것 같습니다!
>>202 "그럼 지하수로 부분은 맡기지. 그리고 양동이에 묻어놨다고 체포했다고 얘기하지 마라."
그 부분이 워낙에 인상적이었던지 또 강조하고, 에레야는 안전가옥에서 먼저 나갑니다. 또각... 또각... 에레야의 발소리가 사라지면, 안전가옥은 유령의 울음소리처럼 스산한 바람소리와 간헐적으로 무언가 까각, 까가각 하고 벽을 긁는 소리, 어디선가 물이 솨아아 쏟아지는 소리만 들립니다... 낮을 좋아하는 인간들에게는 무시무시하고 불안한 소리지만... 피에 흐르는 저주를 극복하겠다는 일념을 품고 '엘리'라 불리기 전, 뱀파이어 귀족 엘리자베스로서 80년을 넘게 산 그녀에게는 왠지 모르게 그립고 평온한 소리입니다. (조건이 있지만) 흡혈 허가도 받았겠다, 엘리는 문을 닫고 바깥으로 나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