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모두는 누군가를 위한 이야기의 소품이자, 단역이자, 조연이기도 하고 동시에 자기 이야기의 주인공이기도 하다. 그 이야기는 비참할 수도, 행복할 수도 있고, 기승전결이 갖춰졌거나 이야기의 어떤 구성요소 하나도 제대로 된게 없을 수 있다. 하지만 아무리 엉망인 이야기가 되는 한이 있어도 우리는 선택하고, 때로는 강요당하면서 우리의 이야기를 써낸다. 이야기의 악마 이프가 이제 마침표를 찍으라 권할 때까지, 죽음이 우리를 찾아올 때까지. 왜냐면 우리는 살아있으니까. 그 이야기는 우리의 삶이니까.
여관 주인은 여관 뒤로 엘리를 부르고 나서, 주변을 살피더니 살며시 문을 닫습니다. 하늘의 서쪽에서는 아직 붉게 물든 햇빛이 보였지만 이제는 어느 정도 괜찮으니, 엘리는 그냥 따라갔을 뿐입니다. 여관 주인은 골목길 문을 닫고 나서 한숨을 쉬더니, 쉬이이... 하면서 목소리를 낮추라 하고는 죽일 듯한 눈빛으로 엘리에게 말합니다. 어느 정도 감정을 다스린 것 같지만 목소리에서 공포인지, 분노인지, 하여튼 부정적인 감정을 숨길 수 없는 모양입니다. 그는 술을 건네더니 이야기합니다.
"지난번에 괴물이 들어와서 다 헤집고 나갔더만, 이번에는 뱀파이어야? 그것도 인간 사이에 뱀파이어가 나돌아다니면 뭐가 문젠지도 모르는 뱀파이어? 제기랄, 환장하겠군."
여관 주인은 대체 인생이 왜 이 모양인지, 왜 이런 것들만 손님으로 들어오는지 한참 동안 불평을 주절주절 늘어놓더니 엘리에게 아직 따지 않은 술을 건네고는 이야기합니다.
"내가 접객의 신 박툼을 믿는 걸 감사하게 여기셔. 아무튼 우리 가게에 돈 내고 들어왔으니 오늘 하룻밤은 자고 가게 해주겠지만 더 이상은 안 돼. 이 술 줄 테니까, 어디 가서 당신이 우리 여관에서 하룻밤 묵었다곤 얘기하지 말고."
아무튼, 엘리랑 얘기도 끝났겠다 여관주인은 엘리와 함께 들어갑니다. 엘리는 엘리자베스라 불리던 일족 생활 시절 배운 것을 떠올립니다. 기본적으로 인간은 뱀파이어에 대한 본능적 혐오, 종교적 악마화, 그리고... 솔직히 말해 뱀파이어들 잘못도 있는 인간-흡혈귀 전쟁 문제, 지금도 어디선가 어떤 뱀파이어가 저지르고 있을 인간목장 및 노예제 문제 때문에 큰 거부감을 가지고 있다고요. 이 거부감은 사람마다 달라서 잘하면 용인받는 문화권에 갈 수도 있다지만 여기는 조금 애매하군요. 뱀파이어라고 환영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이단심문관을 불러 이 미친 암모기를 당장 매달아 불태우라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지는 않으니 말입니다! 여관으로 들어가던 엘리는, 뉘엿뉘엿 지던 해가 완전히 지평선 너머로 푹 꺼지고, 어둠이 세상을 뒤덮은 것을 목격합니다.
엘리자베스 바토리 블라드 체페슈. 별난 뱀파이어도 뱀파이어이고, 그녀는 뱀파이어 일족 중에서도 꽤나 고귀한 혈통입니다. 인간들이 불을 켜놨지만 이것으로 태양의 권능을 대신할 수는 없고, 엘리는 온 몸의 족쇄가 풀린 것을 느낍니다. 느릿느릿하고 답답하던 몸놀림이 빨라져 앞서가던 여관 주인의 장화 뒷굽을 저도 모르게 몇번 밟고, 여관 안에 들어가니 소리도 잘 들리는군요.
>>114 머뭇거리던 엘리는 그걸 생각해봅니다. 생각해보면, 인간의 피를 빨아본 것도 너무 오래됐습니다. 일족이 경영하던 영지에서 농산물 대신 피 한모금 분량으로 세금을 대신할 때를 제외하면 인간의 피를 마셔본 적이 없었습니다. 해봤자 닭 피, 좀 사치부리면 소 피였을까요.
"야, 이년 쫄았어!"
"너무 겁주지 마. 긴장하면 강직 푸는데 오래 걸려."
말할 수 있고, 생각하고, 사랑하는 지성체의 피를 마시는 건... 배덕 그 자체입니다. 소유할 수 있다는 게, 언제든 먹어버릴 수 있다는 게, 얼마나 달콤한지, 얼마나 짜릿한지.
"잠깐, 어디 갔지?"
식인종들은 갑자기 사라진 인영에 당황해서 주위를 살펴봅니다. 그리고 자기들이 상대를 잘못 골라도 한참 잘못 골랐음을 깨닫는데 오래 걸리지 않습니다. 그녀 자신조차도 인지할 수 없는 속도로 달려든 엘리의 송곳니가 드러나고, 그대로 식인종 하나를 붙잡아 목을 깨뭅니다.
"끄, 으아아아아아!!!!"
...엘리가 송곳니를 꽂는 방식은, 많은 호사가들이 생각한 것처럼 야릇하고 관능적이지도 않고, 엘리가 영지민 소녀에게 그랬던 것처럼 부드럽고 정중하지도 않습니다. 세상에 사냥감 사정 신경쓰는 사냥꾼은 없고, 엘리도 그렇습니다.
"사, 살려줘! 나 죽는다아아!!!!"
송곳니에 뚫린 피부에서 피가 새어나오고, 역겹지만 중독될 것 같은 피비린내가 비강을 채우자 온 몸에 다행감이 퍼지며 웃습니다. 하지만 피비린내 속에서 달콤한 맛, 텁텁한 맛, 시큼한 맛이 자기주장을 하고 있습니다. 한두명을 식인한 게 아닌 모양이라 생각하니 혐오감이 들어 송곳니를 빼려는 찰나...
"뒤져라! 이년아!"
"야, 쑤셔!"
쌔액, 푹, 푸슉! 옆구리와 등에서 느껴지는 격통에 엘리의 눈이 뜨이고 저도 모르게 목을 깨문 입을 콱 악물어 버립니다. 사람을 먹는 놈들도 꼴에 동료애는 있는지 엘리를 죽이려고 녹슨 칼로 마구 난자하지만, 차라리 피를 좀 빨게 냅뒀으면 좋으련만. 격통에 무의식적으로 이빨을 악물자 송곳니가 식인종의 경동맥을 꿰뚫고, 식인종의 심장이 엘리의 입 안으로 신선한 동맥혈을 쏴버립니다.
"아오 이 미친년!"
"아 씨... 오랜만에 맛있을 것 같았는데."
...여러개의 칼에 쑤셔지는 상황은 누구한테나 목숨이 위험한 상황이고, 엘리가 인간이었다면 벌써 죽었을 겁니다. 세 명이 달라붙어 1분 동안 쑤셨으니 분명 얼마 못 갈 거라 생각해 식인종들이 몇 걸음 물러납니다. 하지만 뱀파이어의 생존 본능이, 엘리의 입을 잠시 지배해서 식인종을 포식했습니다. 식인종의 피에서 얻은 기이한 생명력이 벌어진 상처들을 꿰매고, 십년만에 마약 같은 인혈을 한 모금도 아니고 '성체 수컷' 1체만큼 포식하니 온 몸이 행복해집니다. 이성이 마비된 건 아니지만, 쾌락이 지금 이 순간만큼은 웃으라 하는군요.
"야 저거 뭐야?"
"이... 인간 아니었냐?"
그리고 그제서야, 식인종들은 기분 탓인지는 몰라도 더 선명해진 것 같은 핏빛 눈동자를 보며 깨닫습니다.
혹시 이거 때문에 불쾌감 느낄까 미리 설명하면 1. 나는 엘리 서사의 테마를 '위험하다고 배척받는 소수자가 이해와 상호부조를 통해 거부감을 희석하고 용인받는 과정'으로 생각하고, 이 과정에서 당장은 식인종의 시체 때문에 곤란을 겪을 순 있어도(엘리가 어떻게 수습하냐에 따라 안 겪을 수도 있음. 확정 아님) 결과적으로 엘리주의 궁극적 목표에 반하는 전개는 없을 예정이야
식인종들 중 가장 나이가 많아보이는 이가 이야기합니다. 이것 역시 맞는 판단이지만 문제가 있습니다. 제아무리 이놈들이 밤길을 아무리 나다닌다 해도, 엘리처럼 타고난 밤눈을 이길 순 없습니다. 마치 고양이가 사냥감을 굴리듯, 천천히 어둠 속으로 사라진 엘리는 그들을 노려봅니다. 칼을 든 손이 벌벌 떨리고, 가장 겁이 많은 이가 벌벌 떨리는 목소리로 도망치자고 제안합니다.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목소리인데, 이렇게 겁 많은 놈이 범죄는 뭔 생각으로 저질렀나 싶어질 정도입니다.
"야, 도, 도도도, 도망치자. 이러다 우리 다 죽는 거야!"
"닥쳐! 도망을 쳐도 어디로 갈 건데? 씨발..."
온갖 욕지거리를 나누던 와중에 엘리가 달려듭니다. 적은 총 셋, 세 명이서 각자의 시야각으로 120도 앞을 보고, 뒤와 옆은 동료들이 지키는 이상적인 방어 진형입니다. 정말로 좋은 능력입니다. 하지만 엘리라고 방법이 없는 건 아닙니다. 최근에는 굳이 쓸 일이 없었지만... 사실 엘리는 자신의 형체에 대해 큰 고정관념이 없는 사람입니다. 특히 밤에는요. 엘리가 눈을 감고...
끼리릭, 끼리리릭!
"이, 이게 무슨 소리야?"
"아가리 닥치고 앞이나 똑바로 봐! 한 명만 빵꾸나도 다 뒤지는...!"
...난생 처음 들어보는 쇳소리 같으면서도, 목소리를 턱밑까지 긁는 것 같은 소리에 기겁하는 반응을 들으며 눈을 뜹니다. 엘리의 몸은 수백마리 박쥐떼가 되고, 어둠 속에서 자연스레 셋 중 가장 연장자에게 수백마리의 눈으로, 수백개의 입으로, 수천개의 이빨로 달려듭니다.
"으으아아아악! 씨발! 씨바아아알!!!"
한 두 마리라면 떼어내겠지만 수십마리가 되고, 수십마리를 떨쳐내려다 수백마리가 붙습니다. 제아무리 엘리의 근력이 약하더라도, 엘리가 사람 몸 위에 올라탄다면 어찌 될까요? 엘리는 지금 그 대답을 어둠 속에서 보여주고 있었습니다. 수백개의 입들이 식인종을 물어뜯기 시작하고, 날카로운 이빨에 살점이 씹힙니다. 가장 용감하던 이는 어떻게든 떼어내려고 이리저리 달려들다가 어둠 속으로 도망쳐버리고, 두 식인종이 부르는 말에는 대답도 못 하고 비명만 지릅니다. 벌벌 떨기만 하던 놈 말고, 나머지 한 식인종이 램프를 꺼내 급하게 불을 켭니다. 겁쟁이가 말리려고 하지만 소용없습니다.
"이, 이봐! 바깥에선 안 켜기로 했잖아! 경비가 오면 어쩌려고...!"
"경비가 오면 죽을 수도 있지만, 여기서 저 새끼 못 제끼면 다 죽어 병신아!"
수백마리 박쥐떼가 참 욕심스러운 수백번의 '한입만'을 마칠 때쯤, 식인종들이 램프를 켰습니다. 이것 역시 좋은 판단입니다. 불빛 하나 없이 야밤중에 뱀파이어를 상대한다는 건 고통스러운 자살 방법에 불과하니까요. 하지만 그들은 눈 앞에 드러난 동료를 보고 굳습니다.
허여멀건하던 살가죽이 이리저리 벗겨지고 찢어져 보이는 속살도 엉망으로 헤집어졌습니다. 얼굴은 형체도 남지 않게 뜯어먹어서, 귀와 코는 깊은 양 구멍이 그대로 보이고, 최후의 양심으로 남겨준 두 안구는 깜빡이고 싶어도 깜빡일 눈꺼풀 없이 램프 불빛을, 아직 멀쩡한 두 동료를 바라봅니다. 머릿가죽도 벗겨져 드러난 두개골은, 박쥐가 아쉬움을 못 참고 남긴 수십개의 이빨자국이 선합니다. 거추장스러운 옷은 전부 벗었고, 속살도 거추장스러워 전부 벗은 그는 의학 학교의 인체모형마냥 내장과 갈비뼈를 생생히 보여주며 다가오더니 한 마디를 합니다.
"죽여줘..."
엘리는 식인종이 쓰던 녹슨 칼을 들고, 천천히 그 끔찍한 몰골의 식인종과 함께 걸어오더니 등을 찔러 심장을 꿰뚫습니다. 그제서야 식인종의 고통이 끝나 땅바닥에 쓰러지고, 엘리는 불빛 뒤에 숨은 식인종들을 바라보면서 충고합니다.
"도망쳐 봐."
"히, 히히이익...!"
"그럼, 한 명 쯤은 살아서 도망칠 수 있을 지. 누가 알아?"
그 말에 식인종들은 램프를 버리고 도망칩니다. 겁이 많은 놈은 제 발에 걸려 넘어질 것 같고, 고분고분히 고문에도 응할 것 같아 내버려둔 엘리는 램프를 켰던 놈을 쫓아가 단방에 녹슨 칼을 척추 옆에 빗겨 찌르고, 갈비뼈의 결을 따라 바깥쪽으로 그으며 폐, 간, 위장을 일자로 한 방에 그어버립니다. 알아서 제 피에 익사하게 내버려둔 엘리는 이제 겁쟁이를 쫓아갑니다... 아니, 쫓을 필요도 없었습니다. 어둠 속에서 쌓아둔 양동이를 넘어뜨려 그 안에 갇혔군요. 어떻게든 나오려고 허우적대고 있습니다. 그런데...
콰아아앙!!!!
엘리는 멀리서 폭발음이 들려서 그 쪽을 바라봅니다. 분명 엘리가 하루 묵기로 했던 여관이 있는 곳에서... 비명 소리가 참 거하게 들리고 있군요. (이제부터 반응해주면 돼!)
해봤자 양동이 몇 개 더 떨어진 것뿐이건만, 뱀파이어 보고 놀란 가슴 양동이 보고 놀란 나머지 식인종은 머리에 바윗돌이라도 떨어지는 양 비명을 지르다 안에 처박혔습니다. 엘리는 일단 그렇게 내버려두고 여관으로 돌아갑니다. 방금 전 식인종들과의 싸움에선 미끼를 자처한 덕분에 쉽게 일이 풀렸지만, 아무런 준비도 계획도 없이 일단 달려가는 발길에는 불안함이 감돕니다. 어쨌든, 엘리는 빠르게 달려 여관으로 왔습니다. 참 오랜만에, 뱀파이어의 육체에 땀이 흐르고 숨이 가빠집니다. 엘리는 여관을 바라봅니다. 여관은 불타고 있었습니다.
"아이고, 내 여관! 내 여관!"
"이봐, 저기 안에 사람은 어쩔 거야! 저 안에 열 명 넘게 남아있다고!"
누가 그런 건지는 몰라도 여관은 아주 제대로 박살났습니다! 지붕에 뚫린 큼지막한 구멍이 저 안으로 들이닥친 괴물의 무서움을 알려주고 있고, 경비병들도 쉽사리 들어가지 못해 벽 주변을 둘러싼 채 창과 활만 겨누고 있군요. 경비대장은 온갖 욕지거리를 하면서 땅을 구릅니다.
"이런 제기랄, 아무나 다 불러! 하다못해 이단심문관이라도 불러! 이단 혐의점이 없다고? 아무튼 있다고 하면 되잖아!"
엘리는 어안이 벙벙해진 경비대장을 뒤로 하고 박쥐의 형태로 바뀌어서 여관 안으로 들어갑니다. 어차피 이 안에서는 박쥐의 형태를 취해봤자 더 취약하니, 그녀는 창문 틈새로 들어오자마자 다시 원래의 몸으로 바꾸고, 여관 1층을 바라봅니다. 여관 안은 난장판이 되었습니다. 몇시간 전까지만 해도 부어라 마셔라 즐거웠을 여관 안에 사람들이 널브러져 있고, 다들 몰골은 다양하지만 어째 다 죽은 느낌입니다. 부러진 창칼들을 보아하니 여관 안에 있던 모험가나 용병들이 쉽게 죽어줄 생각은 없었던 것으로 보이지만 어쨌든 실패했는지 죄 죽어있고, 여관 입구는 무너져서 한 불운한 경비병의 머리를 투구째로 짓뭉개 버렸습니다. 아마 이 모양이니, 경비대도 쉽사리 들어가질 못하고 있겠죠.
화덕은 박살나서 불씨와 재만 보여주고 있고, 사방에 날카로운 발톱과 뭉개진 발자국이 보입니다. 얼마나 많은 이들이 살아남았는진 모르겠지만... 그리 많진 않을 겁니다. 엘리의 감각이 예민해지고, 두 가지를 잡아냅니다. 구르릉... 구르릉... 2층, 손님실에서 뭔가 큰 것이 조금씩 미동하는 소리가 들립니다. 그리고 시체 무더기들 사이에서, 뭔가 흐느끼는 소리가 들리는군요.
시체 무더기에서 산 사람을 구분하는 방법. 이라고 한다면... 살아있는 신선한 피를 감지하는 기관이 나에게는 있지 않은가.
비유하자면, 인간의 코로 차게 식은 식중독 위험군 음식과 갓 나온 따끈한 빵을 가려내는 시도와 같았다. 생존자가 피가 흐를 정도의 상처를 입지 않았다면 찾기 어렵겠지만... 긁힌 상처라도 있다면. ,조금의 피라도 나 있다면. 사냥감을 찾는 사냥꾼의 감각이 힘을 발휘할 수 있겠지.
'아, 사냥감이란 표현은 좀 그런가?'
그래도 구출 시도인데. 나는 눈을 감고 코를 쫑긋거리며, 있을지도 모르는 생존자의 피 냄새를 쫓기 시작했다.
>>134 엘리는 피냄새로 생존자를 찾으려다가 이내 관둡니다. 시신들이 다양한 부위에서 흘리는 피냄새가 엘리의 후각을 과포화해서, 정작 필요한 정보를 찾는 것을 전력으로 방해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눈을 감은 덕분에 청각이 민감해져서, 엘리는 금방 생존자의 죽을 것 같은 숨소리를 듣고 눈을 뜹니다. 눈을 뜨면, 엘리가 알고 있던 하플링 소녀와 눈이 마주칩니다. 제 발치까지 닿는 긴 머리칼을 이로 악문 채 소리를 죽이고 있었지만, 엘리를 보자마자 다 틀렸다고 생각하는지 발광하는군요.
"~~! ~~~~~!!!"
비냐는 손에 잡히는대로 다 던지고 있지만, 엘리가 그냥 맞아주면서 기다리자 한참을 발악했는데도 죽지 않은 상황에 이상함을 느껴 발광을 그만둡니다. 그리고 떨리는 목소리로 겨우 이야기하는군요.
비냐는 아직 당신을 못 믿는 것 같습니다. 뱀파이어에게 당하고만 산 사람이야 뭐 세상에 잘 찾아보면 있다는데, 재수없게도 비냐가 그런 존재였을까요? 확실치는 않겠지만 그랬다면 엘리와의 첫인상은 정말 최악일 겁니다. 인사를 너무 개판으로 해서 그랬나 하고 너무 상심할 필요는 없습니다! 엘리가 비냐를 귀족마냥 받들어모시건 뭘 하건 첫인상은 무조건 최악이었을 테니까요. 결국 안 되자, 엘리는 발치까지 닿는 그녀의 긴 머리칼을 붙잡고 마치 밧줄에 사람을 매단 것처럼 시체 사이에서 꺼내듭니다. 그러자 비냐가 깜짝 놀라 말하는군요.
"아, 안 돼요! 괴물이 있어요. 괴물이!!! 지하로 숨으세요!"
하지만, 엘리도 귀가 달려있고, 그 귀가 보통 좋은 귀가 아니라 다 들었습니다. 괴물이고 현물이고, 엘리는 어쨌든 비냐를 살려줘야 하니 적당한 창문을 찾습니다. 비냐는 창문으로 나가려다가 키가 안 닿아 바동댔지만, 보다 못한 엘리가 앞으로 밀어버려 내보냈습니다. 돌아선 엘리는 주변을 바라봅니다. 적어도 1층에는, 생존자의 숨소리가 들리지 않고, 2층에는 뭔가 거대한 존재가 미동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뭐, 비냐가 묻지도 않은 여관의 층수까지 다 이야기해준 덕분에 여기는 지하층, 1층, 2층으로 구분된 건 알았습니다.
>>139 또각, 또각, 또각... 한 계단 한 계단을 오릅니다. 위에 뭐가 있을지 모른다는 긴장에 엘리의 숨이 멎을 것 같군요. 그래도 엘리는 지금은 밤, 자신 같은 뱀파이어들의 무대임을 다시금 되새기면서 용기를 얻고 올라갑니다. 올라가자마자 괴물이 나타날 것 같았지만... 이상하게도, 2층으로 올라왔는데도 별 일은 없습니다. 엘리는 어둠 속에서, 소리만으로도 제 존재를 드러내던 괴물을 마주할 준비를 하고 소리가 들리는 쪽을 바라보았습니다. 하지만...
"으극, 으그윽..."
"죽여줘..."
엘리는 눈을 뜨고, 그 '괴물'이라 생각했던 것을 봅니다. 거대한 덩어리도, 사실 생각해보면 각각의 부분이 모여 만든 것입니다. 그리고 이 덩어리는 불운한 사람들이 한데 얼기설기 엮여서 만들어졌습니다. 그것들은 엘리를 보더니 수백개의 팔다리를 질질 끌어 그녀에게 다가오려 하는군요. 하지만 이들은 식욕으로 움직이지 않습니다. 절박함, 희망, 공포. 엘리가 누군가를 죽일 때 익숙하게 느꼈을 그 감정입니다. 아니, 그럼 괴물은? 이라고 생각할 때쯤 뒤에서 뭔가 느껴집니다.
"성가셔."
뒤를 돌아보자마자, 온 몸이 피와 살점으로 뒤덮인 사람... 형태의 무언가가 그녀를 걷어찹니다. 엘리는 그대로 날아가 사람들이 엮인 살덩이들에 부딪쳐 튕겼다가, 낙법을 취해 데굴데굴 굴러 다시 일어납니다. 그런데, 이거 사람은 맞나요? 사람도 아니고, 엘리가 아는 괴물도 아닌 것 같은 이상함이 그녀를 혼란스럽게 만듭니다. 하지만 그건 그거고, 전투는 전투입니다.
>>141 어릴 때부터, 엘리는 일족 내에서도 적어도 재빠른 것으로 남한테 뒤진 적은 없었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그렇습니다. 아까 전만 해도 식인종들을 사냥할 때, 솔직히 말해 느려서 문제가 된 건 없었으니까요. 피투성이가 된 상대의 몰골도 무섭지 않습니다. 그야 당연하죠. 엘리는 저 몰골을 수없이 본 게 아니라, 저 몰골을 만들어도 봤습니다. 엘리는 상대에게 달려들고, 상대는 거기에 맞춰 주먹을 들지만... 엘리의 입가가 씩 올라갑니다.
'느려'
상대가 엘리에게 주먹을 내질렀지만, 공기를 주먹으로 치려고 하는 것처럼 엘리에게는 아무 소용도 없습니다. 엘리는 팔 안쪽으로 파고들어, 상대의 목숨 따위는 신경쓰지 않고 입을 쩍 벌려 상대의 목을 한입에 담고 그대로 꽉 깨물어버립니다. 살점이 송곳니에 뚫려 파이는 느낌은 여전히 좋지만, 그 안에서 나오는 피는 그렇지 않습니다. 그녀의 입 안으로 들어오는 피는 그 어떤 것보다도 역겹습니다. 아니... 역겨운 '피'가 아닙니다. 인간의 미식 기준을 뱀파이어에 대자면...
고기는 맞는데, 마치 몇 달간 푹 썩힌 다음 온갖 이상한 연금술 약품에 절인 끔찍한 고기 같습니다.
퍼억!
그런 감상을 느낄 찰나도 없이, 상대는 엘리의 하복부에 주먹을 꽂습니다. 엘리는 눈을 부릅뜨고, 하나하나가 과도 수준으로 길고 날카로워진 손톱으로 그의 가슴팍을 마구 난자합니다. 비록 엘리가 근력은 약하지만 체력은 정말로 강했고, 여기에 남자 하나를 포식했으니 재생력도 엄청나서 이런 근성 싸움도 상대가 신성력을 쓰는 게 아닌 이상 버틸 만하겠죠. 하지만...
쾅!
엘리는 확실히 힘이 약했습니다. 수십번이나 찔린 상대는 엘리의 목을 붙잡더니 그대로 한 문간에 던져버리고, 엘리는 또다시 나동그라집니다. 지금 보니 엘리의 방이군요! 의도치 않게 친절을 베푼 상대는, 엘리를 끝장내는 대신 엘리의 손아귀에 헤집어져 갈비뼈와 그 아래 내장이 드러난 흉곽을 억지로 부여잡고... 살덩이 쪽으로 걸어갑니다. 비명이 들리는군요...
"오, 오지 마! 오지 마!!! 으아아아아아악!!!!!!!"
엘리가 슬쩍 기어서 살펴보니, 수많은 사람들이 엉긴 살덩이 속에서 한 운없는 이를 골라서 '잡아먹고' 있습니다. 제아무리 뱀파이어가 인간의 피도 빤다고 하지만... 그런 뱀파이어 입장에서도 참 역겹군요. 더 역겨운 건... 그랬더니, 엘리가 박살낸 상처가 무색하게 완전히 재생됐다는 겁니다! 상대는 엘리를 노려보더니 다가옵니다.
"...성가셔."
엘리는 침을 꿀꺽 삼키고, 상대를 바라봅니다. 인간을 제물로 사용하는 기이한 재생력, 인정하기는 싫지만... 엘리와 비슷한 부류입니다. 밤에만 살 수 있거나 밤을 더 좋아하고, 어둠 속에서 암약하며, 호시탐탐 먹잇감을 노리고... 신성력에는 갑자기 약해지는, 동족은 아니지만 꽤나 비슷한 부류.
상대의 재생력은 저 '살덩이'가 없다면 엘리에 비해 무조건 밀리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조심하십시오! 저 살덩이가 다 떨어질 때까지 상대는 뭔 일이 있었냐는 듯 재생할 수 있고, 시간을 끌면 끌수록 지는 건 엘리일 겁니다.
>>143 동족은 아니지만 동류라면... 그럼 엘리가 무서워하는 것도 똑같이 통하지 않을까요? 엘리는 그 생각을 바로 실천에 옮겨서, 술을 따서 불에다 붓습니다. 그러자, 순간 엘리의 손 끝을 불태울 뻔할 정도로 불이 높이 타올랐습니다. 어... 근데 잠깐만. 너무 타오르는데요? 엘리는 어릴 적을 떠올립니다. 누가 불장난을 했다가 저택을 통째로 태웠다길래 "뭘 어찌 해야 조그만한 성냥 하나로 집을 통째로 태우냐"고 멍청하다고 욕했는데... 지금 엘리가 그 사람을 욕할 계제가 아닌 것 같습니다. 살덩이에 엮인 사람들의 비명으로 알겠군요.
"으, 으아아! 불탄다!!"
"살려줘! 살려주세요!!!!"
상대는 잠시 굳어서, 엘리를 바라봅니다. 굳이 이 감정을 말로 설명하자면, 엘리가 대체 왜 그랬는지 이성적으로 잠시 고민했다 보면 되겠군요. 하지만 고민은 의미가 없고, 엘리 때문에 '살덩이'를 포식하지 못하게 된 게 마음에 걸리는지 이를 악물고 다시 다가오며 말합니다.
"너, 진짜 성가셔."
아마도... 엘리는 여기서 살아나갈 수 있을 겁니다! 하지만... 저 살덩이로 엮인 사람들까지 전부 구해서 나가려면... 빨리 저놈을 처리해야겠군요. //오늘은 여기까지! 수고 맣았어!
엘리의 발이 마루판을 파고들어 발판이 되고, 발톱이 땅을 박는 고통에 이가 악물리며 아드레날린이 분출됩니다. 동공이 수축하며 시야가 좁아지는 느낌이지만, 상관없습니다. 오히려 좋은 듯도 합니다. 엘리는 저 놈만 죽이면 그만이고, 저 놈만 시야에 담으면 그만입니다.
"성가..."
철퍽!
엘리의 주먹이 상대의 흉곽에 꽂혀, 깊이 들어갑니다. 엘리를 붙잡으려던 상대도 명치에 움푹 박힌 공격에 움찔하지만... 동시에, 엘리도 손목이 꺾이는 고통과 함께 한 손이 잘못된 방향으로 돌아갔음을 느끼고 비명을 지릅니다. 그래도 손을 내주고 가슴을 박살냈으니 다행이고,
죽이지 않으면, 죽는다.
인혈이 내어준 불경한 재생력과, 살려면 죽여야 한다는 피의 부름이 고통을 잊게 하고, 엘리는 용기를 내어 한쪽 주먹을 머리에 꽂아버립니다. 이번에는 상대의 머리가 돌아가버리고, 상대는 제 세상이 흔들리는 혼란스러운 상황에 머리를 싸맵니다.
끄으윽...
그리고 주먹을 마저 배에 꽂아넣자, 못 참고 망가진 폐에 쌓인 피를 뱉어냅니다. 얼굴까지 더러운 피가 잔뜩 튀지만 의외로 기분은 상쾌합니다. 엘리가 다시 아직 멀쩡한 한쪽 주먹을 들려는 순간
퍼억ㅡ
다시 한번, 날아갑니다. 날아가는 기분이 신기해 주먹에 맞은 격통은 잊어버릴 것 같습니다.
쾅!!!!
그리고 다시 자기 방에 처박힌 엘리는, 빠른 속도로 낮은 근력을 극복할 수 있다면 반대로 높은 근력으로 낮은 속도를 극복할 수도 있음을 깨닫습니다. 그래도 좋게 생각합시다. 엘리는 부서진 손목을 재생할 시간을 벌었고, 이번 건 아무리 인간이 아닌 동류라도 충분히 목숨이 위험할 치명상이었으니까요.
"으아아아악!!!"
이런, 또 살덩어리를 먹고 재생하려 드는군요. 바로 그 순간을 노릴 생각에 일어난 엘리는, 발을 디디자마자 마치 불 위를 걷는 것 같은 작열통에 황급히 발을 뗍니다. 지금 보니... 비냐가 건네줬던 수호부가 난리통 와중에 떨어진 모양입니다.
꼴에 수호부라고, 소매를 통해 잡아도 마치 녹기 직전까지 달궈진 쇠를 고작 장갑 하나 끼고 만진 것마냥 뜨겁습니다. 엘리는 딱히 신에게 악감이 없었지만, 신께서는 아주 많으신지 엘리의 손아귀에 화상을 입힙니다! 소매를 통해 어느 정도 덮었고, 그리 강한 신성력을 품지 않은 게 차라리 다행이군요. 그리고 엘리는 살덩이에 엮인 사람을 잡아먹던 녀석에게 수호부를 온 힘을 다해 던집니다!
툭
...참 힘없는 소리였지만, 그 다음에는 마치 비계가 잔뜩 낀 돼지고기를 굽는 듯 보글보글 기름 터지는 소리와 함께 살갗을 녹여버리더니 녹은 살갗과 함께 떨어집니다. 상대는 등에 신성한 가호... 엘리와 비슷한 부류에게는 끔찍할 고통을 느끼고 비명을 지릅니다.
"으아아아아아!!!!"
상대의 살갗을 봅시다! 찢기고 부서지고 잘린 다른 상처들은 모두 인간의 살점을 한 점씩 먹을 때마다 아물지만, 이런 단순한 화상은 전혀 재생하지 못해 녹고 익은 자국이 선합니다. 상대는 엘리를 돌아보더니 노기를 숨기지 않고 이를 악뭅니다.
"넌 특별히 고통스럽게 죽여줄게."
물론, 엘리 입장에선 자기가 할 말을 대신 해서 수고를 덜어준 것처럼 들립니다. 엘리는 좁은 복도에서 달려드는 적에게 맞서 달려들어 뛰어오르고, 그의 정수리를 뜀틀처럼 양손으로 짚어 상대를 넘습니다. 그리고 수호부를 망가진 손으로 집어 온 힘을 다해 상대의 옆구리에 쑤셔 쳐박습니다.
"아, 으아아아아아악!!!!"
이게 엘리의 비명인지 상대의 비명인지 모르겠습니다. 엘리는 안 그래도 손목이 부서진 골절통에 작열통까지 맛보고, 상대는 문자 그대로 뱃속에 숯덩이가 박힌 셈이니. 엘리는 상대의 뱃속을 헤집으며 빙빙 돌아간 손을 빼내고, 고통에 자지러져 엎어지더니 바닥에 흐르는 인혈을 핥으며 간신히 진통합니다. 그동안 상대는 수호부 때문에 발광하면서 사람들이 엮인 살덩이 쪽으로 기어가다가...
"끼익, 끅, 끄으윽...!"
"넌 그냥 닥쳐라."
꽈앙!!!
귓전을 울리는 폭음과, 이 혼란한 화재 현장에서도 분명히 느껴지는 매캐한 탄내. 지난 세기에 인간들이 드워프와 공동개발했다는 화약총입니다. 엘리가 간신히 일어나보니 아까 전까지만 해도 살벌하게 싸우던 괴물의 머리통이 터져 있고, 그 총을 쏜 사람은 가운데에 해골이 박힌 철십자, 이단심문소 인장을 새긴 흉갑을 입고 그 위에 검은 롱코트를 걸친 중년의 여성입니다. 그녀는 철봉을 꺼내 괴물의 몸통에 박고 끝을 구부려 못 빠져나가게 하고, 다 불타가는 화재현장 속에서 매캐한 연기를 헤치고 아직 쏘지 않은 화약총을 엘리에게 겨누고 말을 겁니다.
"싸우는 걸 보니 인간은 아니군."
하지만 금방 총구를 내리더니 협상을 제시하는군요.
"하지만 이러다가 우리 둘 다 이 사람들이랑 타죽게 생겼으니, 일단 나머지 얘기는 서로 도와서 이 사람들을 빼내고 하는게 어떨까? 원치 않는다면, 너죽고 나죽자 싸워도 괜찮지만... 당신, 진짜 죽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