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아는 거실 소파에 드러누워 천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뺨에는 대충 붙인 거즈뭉치가 떨어질락말락하는 상태였으나 슬쩍슬쩍 드러나는 상처는 멍이 살짝 들어있을뿐 큰 상처로는 보이지 않았다. 주변에는 먹다남긴 감자칩과 콜라가 흩어져있었고 그녀는 여전히 치울 생각은 없는 듯 보였다.
그런것보다도 그녀의 머리속을 채은 것은 하나뿐이었다. 그냥 심란하다. 몇일 사이에 상상 이상으로 정신이 나간 것 같은 계획에 참여한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교실로 가니 그녀보다 어린 녀석들에게 반말을 들으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만도 아니었다. 아니 솔직히 말한다면 그게 대부분일 것이다. 그녀는 한살이라도 어린녀석들이 그렇게 다가와서는 당장 그만두니 뭐니 말하는 것이 아니꼬왔다. 그야 페어가 공개되었을 때는 망했네 하는 생각은 들었지만 이 정도 일중이야. 무섭도다, 밴드오빠.
다행인 점은 이튿날에는 이상한 이야기는 완전히 들어갔다는 점뿐이었다. 다행스러운 점은 두가지로 첫번째는 대부분 그런 식으로 다가와 무언가를 해보려던 여학생들은 대부분 그때의 일을 기억하지 못했단 점이었고 두번째는 선빵이라는 아름다운 문화를 시범으로 보여준 덕분에 가장 먼저 덤벼든 아이 외에는 다친 사람이 없다는 것이었다. 쌍방 공평하게 한대씩. 그녀가 어떤 여자인지를 각인시켜주었기 때문에 괜시리 옛날 이야기까지 끌어와서 이런 인간이 참여해도 괜찮은가 하는 이야기가 돌았지만 운이 좋았던건지 이번에도 먼저 맞는 모습을 많은 사람이 본 덕에 큰 문제로 번지지는 않았다.
문제에 대한 건 끝이다. 다른 문제가 있다면 동거하는 사람에 대한 내적친밀감이 바닥을 찍어버렸다는 점이지. 그녀는 해인에 대해서 별다른 생각이 없으나 팬을 자칭하는 인간에게 한번 일을 겪고나니 괜히 껄끄러워서 먼저 말을 붙이지는 않은 것이다.
그렇게 해서 벌써 이사를 마치고 나흘째. 두 사람 사이에서는 놀라울 정도로 진전이 없었다. 연애는 고사하고 딱히 친하지않은 반친구보다도 가깝지않지만 일단은 동거를 하는 사이. 그런 미묘한 관계가 문제였고 당연하다면 당연하게도 시청자들은 그런 것을 바라지 않았다. 자극! 도파민! 더 빵빵터지는 맛으로!
그녀역시 그걸 이해못하는 것은 아니었다. 교사에게서부터 그런 식으로 나오면 봉사활동도 다시 해야할거라는 이야기를 들은 이후부터는 단 한가지 생각 뿐이었다.
'아씨 뭐하지'
솔직히 무언가를 해야한다는 생각은 있었으나 그녀는 애초에 SNS를 하지 않다보니 틱톡댄스가 뭔지도 모른다. 최근에 유튜브에 본 이상한 집사복을 입은 일본인들이 춤을 추는 영상같은거라도 찍어서 올려야하나 했지만 얼른 해치우고 치워버리기엔 서로서로 어색한게 문제였다.
그도 그럴것이 햇수로는 3년간 같은 학교에 다니면서 이런저런 이름을 들었으면서도 사실상 처음만난 사이가 아닌가. 그녀는 친구를 만들만한 성격은 아니었기에 누군가가 먼저 다가오지 않는 이상 어지간해서는 반응을 하는 일도 없었다. 건드리지 않으면 아무일없는 폭탄. 이 학교에서 진아는 그런 인상이었다. 그런 인간이 먼저 남에게 인사를 한다는 것 자체가 상당히 난이도가 높은 행위였다.
"어떻게 하면 좋지..."
머리를 감싸쥐고 생각에 잠겨있어도 답이 나오지 않았다. 진작 공부라도 좀 해놓을걸 그랬다는 생각이 들때쯤 문을 여는 소리가 들렸고 그녀는 급하게 자세를 고쳐앉았다. 누워있으면 좀 그뤃지 아무래도. 그래도 뭐 제대로 앉을 생각은 없는건지 여전히 소파 위에 늘어진 상태로 지금의 모습처럼 늘어지는 것 같은 목소리로 인사를 건냈다.
사랑의 방정식. 개교 20주년 기념으로 제작되는 일종의 기념비적인 프로젝트(사실 도파민 범벅인)인 이것은 엄선된(?) 참가자를 모집하여 그들간의 동거 생활을 촬영하는 그런 프로그램이다. 해인은 프로젝트가 시행된다는 사실 자체는 알고 있었지만 부원들이 자신 몰래 신청서를 작성하여 제출했다는 사실은 참가자가 발표되고 나서야 깨달았다. 물론 그가 보인 반응은,
" 어쩔 수 없지. "
이런 말하기는 뭐하지만 자신의 존재가 어느정도 파급력을 불러온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기에 이제 와서 번복을 하기엔 좋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물론 몰래 신청서를 작성한 사실 자체에는 주의를 주긴 했지만. 어쨌든 참가자가 결정 되고나서 얼마 지나지 않아 첫 파트너가 공개 되었을때 그의 주변은 상당히 술렁였다. 상대는 그 유명한 서진아였으니까. 파트너를 보자마자 식겁한 부원들은 그제야 위험할꺼다, 자신들이 몰래 넣은거니까 취소해달라고 해라하면서 해인을 만류했지만 해인은 그녀에 대해서 딱히 어떤 생각도 들지 않았기에 그냥 고개를 저으며 거부 의사를 밝히고선 사랑의 방정식에 참여했다.
" 안녕. "
첫만남의 인사는 두글자의 단어. 그리고 이어지는 침묵. 해인은 절대 말이 많다고 할 수는 없는 사람이었고 그것은 그의 파트너인 진아도 마찬가지인듯 했다. 물론 그녀는 그냥 낯을 가리는 것일수도 있지만 어쨌든 해인이 먼저 말을 거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는 것이다. 가끔 마주칠때 인사를 건네는 정도. 그렇기에 이를 보는 사람들 입장에서도 얼마나 복장이 터질 노릇인가. 두 사람의 조합에 대해서 계속해서 불만이 나오자 결국 운영진은 해인에게 어떻게든 어울리라는 특단의 조치를 명했다.
" 노력은 해보죠. "
그게 자기 맘대로 되는 일인가 싶은 일이지만 불만은 그도 어느정도 알고 있는 사실이었기에 이번에 방에 들어가면서 그는 평소처럼 인사를 건네고 방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진아의 앞으로 뚜벅뚜벅 걸어가서 그녀가 먹다 남긴 것들을 손으로 집어서 치우기 시작하며 말했다.
" 나가자, 데이트하러. "
어찌 들으면 폭탄과도 같은 말이었지만 해인은 쓰레기들을 모아서 쓰레기통으로 향하면서도 딱히 표정의 변화는 없었다. 그녀가 자신들의 팬을 자처하는 여학생들과 시비가 붙었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지만 그것 또한 그가 신경 쓰는 요소는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