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이 편하게 대해주니 오히려 지나도 편했다. 자연스럽게 카메라 앞임에도 헤실헤실 웃음이 나왔고. 게다가 찬이 오히려 잘됐다며 춤은 쉬운 걸로 하자고 했다. 좋아좋아. 지나는 고개를 끄덕끄덕하며 듣다가 상황극 이야기에 물음표를 띄우며 얼빠진 표정을 잠시 지었다. 상황극? 아, 얘 배우였지. 헉, 나 연극도 해본 적 없는데. 하는 생각이 순식간에 지나갔으나 이내 양 손을 가슴 앞에서 주먹지며 마음을 다잡았다. 표정도 자연히 결연해졌다.
“좋아! 열심히 할게!”
춤도 못 추는데 연기까지 못하겠다고 뺄 순 없지 않은가. 찬도 열심히 하려고 하는데 선배인 자신이 뺄 수 없다고 생각했다. 이내 다짐 어린 표정은 어떻게든 되겠지 라는 생각으로 헤실헤실 풀어졌지만.
어쨌든 그러기 위해서 첫 단계는 시청자들을 향한 인사였다! 게다가 생방송은 아니라는 찬의 말에 조금은 안심했다. 찬의 어드바이스를 새겨들으며 고개를 끄덕이는데 찬이 심지어 카메라를 잡고 자신을 향했다. 지나는 순간적으로 뻣뻣하게 굳었다!
”아, 안녕하세요! 청명고 3학년 이지나입니다. 어, 바,방송은 처음인데 잘 부탁 드립니다. 취미는 독서이고요... 어, 아! 도서부이니까요! 도서실 자주 놀러 오세요. 음, 어.... 잘 부탁드립니다.“
지나는 꾸벅 머리를 숙였다. 그리고 숙인 채로 생각했다. 잘 부탁드린다는 말을 2번이나 했어...! 잠시 그대로 멈췄던 지나는 고개를 천천히 들었다. 얼굴이 울상이다.
"그렇다고 너무 힘줘서 하지는 말고. 금강산도 식후경이라잖아? 천천히 놀면서 합시다~ 우직하게 미션만 수행하면, 그 시청자들이 우리 거는 안 본다니까?"
찬은 지나에게 너무 열심히 할 필요 없다고 말하며, 혹시 모를 그녀의 부담을 덜어주려 했다. 그러면서도 찬은 카메라를 지나에게 향한 채, 장난기 어린 미소를 지으며 키득거렸다. 지나가 자기소개를 시작하자 그는 웃음을 참으려는 듯 "크흠-" 하고 작은 헛기침을 했다.
지나는 어색하게 굳은 채로 자기소개를 이어갔고, 다소 더듬거리며 말을 이어나갔다. 찬은 그런 지나의 모습이 웃겨서 속으로 '어떡해ㅋㅋㅋㅋ'라며 웃음을 참았다. 지나가 고개를 숙였을 때, 찬의 얼굴엔 이미 웃음을 참지 못하는 표정이 가득했다. 그러나 지나가 다시 고개를 들었을 때는, 찬은 이미 표정을 정리하고 진지한 얼굴로 돌아와 있었다.
"아니야~ 자연스러웠어. 괜찮아, 잘했어."
찬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지나를 칭찬하며, 자연스럽게 카메라를 다른 방향으로 돌렸다. 계속 카메라가 지나를 향해 있으면, 그녀가 울 것 같은 예감이 들었기 때문이다.
미션만 수행해서는 안 되는 거구나! 시청자들이, 이 방송을 보는 학생들을 즐겁게 해줘야 하는 거였어! 이게 바로 프로라는 걸까? 그냥 놀 생각만 가득해서 전혀 생각지도 못했어! 이런 진지한 사람ㅡ착각이다ㅡ 앞에서 폐를 끼치면 안 되지. 열심히 해야겠다. 지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그런 마음과 달리 자기소개부터 망한 느낌이었지만. 그래도 괜찮았다는 찬의 말에 울상이었던 얼굴은 다시 헤실헤실 펴졌다. 물론 카메라 렌즈가 다른 쪽으로 돌아간 것도 긴장이 풀리는데 일조했고. 물론 그 카메라를 제외한 다른 카메라가 많았지만 말이다.
“으음... 이런 프로그램이라고 하면 연애 프로그램을 말하는 거야? 놀거리... 커플 게임 같은 걸까? 아! 언젠가 있을지도 모르는 커플 게임 같은 걸 미리 연습해두면 나중에 1등 할 수 있을지도 몰라!”
고개를 갸웃거리던 지나는 아! 소리와 함께 박수까지 짝 쳤다. 방금까지 찬이 말한 놀면서 하자는 말은 어디로 들은 건지... “아... 이 프로그램에 1등 같은 게 있나?” 하고는 다시 고개를 갸웃했지만. 아무래도 프로 방송인 같은 찬의 태도ㅡ프로 방송인이 맞다ㅡ에 깊히 감명했는지 괜한 열의가 들은 모양이다.
“으음... 아, 일단 앉아서 이야기할까?”
하면서 지나는 소파에 앉았다. 그리고 조금 떨어진 옆에 앉으라는 듯 손바닥으로 팡팡 쳤다. 눈이 마주치면 헤헤 웃었을 것이었다.
"왜? 놀랐어? 나 여기 시청률 올리려고 온 사람이야~ 영화제작부거든. 아, 물론 내부 비리 같은 건 없습니다, 안심하세요. 사실 나도 첫 미션도 뭔지 제대로 모르고 있었어~ 방송을 제대로 안 들었거든."
찬은 히죽거리며 자신이 여기에 왜 왔는지 설명했다. 영화제작부 소속인 그는, 프로그램에 영화제작부에서 한 명쯤은 참여해야 하지 않겠냐는 생각에 자원해서 이곳에 오게 된 것이었다.
"커플게임?"
찬은 커플게임이라는 말을 듣고 살짝 당황한 듯, 그런 건 상상도 못 했다는 표정을 지었다. 사실 그는 이런 부류의 프로그램을 TV에서 챙겨서 본 적이 없었다. 방금 전까지는 그저 자신의 생각을 말했을 뿐이었다. 이 프로그램에서 커플게임으로도 점수를 매길 수 있다는 생각이 스치자, 찬은 손으로 입을 가리고는 장난스러운 눈빛으로 지나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어우~ 커플게임~ 이 선배님, 보기보다 진도가 엄청 빠르시네? 들어오고 10분도 안 됐는데- 우사인 볼트인 줄 알았잖아."
찬은 눈을 반짝이며, 지나를 놀리듯 말했다. 물론 이 모든 것이 장난이라는 걸 지나도 눈치챌 수 있었을 것이다.이 프로그램에 1등이 있는지 궁금해하는 지나의 질문에, 찬은 고개를 저으며 답했다.
"나도 몰라. 어... 잠시만, 시청자 여러분? 지금 제가 영화제작부라는 걸 알고 자연스럽게 정보를 빼내려는 걸 보셨나요? 와아- 정말 당할 뻔했네."
찬은 카메라를 향해 놀란 표정을 지으며, 지나를 가리키고는 장난스럽게 덧붙였다.
"보통 사람이 아니야, 이 선배님."
물론 이것도 장난이었다.
지나의 앉아서 이야기를 하자는 제안에 찬은 고개를 끄덕이고, 그는 소파에 앉아 테이블 위에 놓인 쿠키를 하나 집어 들었다. 그런 다음, 쿠키를 헤실헤실 웃고 있는 지나의 입 앞에 내밀며 물었다.
지나는 눈을 댕그랗게 뜨면서 말했다. 그런 찬이 대단하다는 듯 살짝 입을 벌리기도 했다. 그래도 첫 페어가 이렇게 열심히 하는 애라서 다행이다, 라고 생각하기도 했다.
지나는 찬이 되묻는 말에 고개를 갸웃했다. 보통 그런 것 아닌가? 사실 지나도 연애 프로그램을 챙겨본 적이 없어서 잘 모르겠다. 대략 친구한테 들었을 때는 그냥 합숙하면서 노는 거라고 생각했는데. 다른 사람 연애 구경하면서. 속은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런 생각은 찬의 장난에 화들짝 놀라 사라졌다.
“으응? 진도라니!”
지나는 찬의 말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물론 찬이 장난으로 그러는 것이라는 건 알겠는데 어찌되었든 지나는 그런 것에 면역이 없는 게 문제이다. 아니, 일반 장난이면 많이 당했지만 연애 관련 장난은 전혀 면역이 생길 만한 일들이 없었다! 게다가 정보를 빼낸다는 말엔 어떻게 항의할 말도 떠오르지 않아 어버버 하면서 고개만 저을 뿐이었다.
결국 보통사람이 아니라는 찬의 말에 이내 부루퉁한 표정을 지어보이는 것이 항의의 전부였을 뿐이었다.
게다가 그런 말을 했으면서 능청스럽게 과자를 입 앞에 내미는 것을 보라! 보통 사람이 아니라는 말은 찬을 보고 하는 말임에 틀림없다. 지나는 딱 얼어서 눈을 동그랗게 뜬 채로 과자와 찬을 번갈아가며 쳐다봤다. 이게 바로 시청률을 위한 밑작업 같은 것일까? 시청률을 높이기 위해 받아먹어줘야 하는 것인가? 아니면 그냥 놀리는 건가? 아니면 친근한 장난?
결국 지나는 고개를 도리도리 젓고는 찬으로부터 더 떨어져 앉았다. 그리고 급격하게 경계모드에 돌입했다. 착한 애인 줄 알았는데 아닐지도 몰라. 지나는 입을 꾹 닫고 경계어린 눈빛을 보냈다.
봄이 싫다. 겨울은 위기와 절정의 계절이고, 봄은 결말의 계절이다. 갖가지 사건들이 봄바람과 함께 실려와 마침표를 찍는다. 막 열넷이 됐을 땐 유년의 추억이 희푸릇한 잎새를 짓밟으며 달아났고, 열다섯에서 열여섯으로 넘어갈 즈음엔 분홍빛 송아리가 채 피지도 못한 채 물크러졌다. 화인 찍힌 부근이 극심한 통증으로 타오르면 기어이 앓는다. 목련이 봄잠에 취해 갈변하듯, 이 시기만 되면 시드는 식물처럼 고꾸라져 온몸 곳곳이 저릿저릿했다. 최악인 기분으로 콧잔등을 훌쩍이며 새 보금자리에 터를 잡았다. 겨울밤의 그림자가 여즉 남아있는 원룸의 바닥은 설경처럼 좁고 찼다. 천장 구석과 티브이 옆, 싱크대와 건조대에 어설프게 둔갑한 ‘눈’들이 지나치게 거슬려 그것이 닿지 않는 아주 사적인 공간을 살폈다. 희고 마른 손마디가 영역을 넓히듯 매대와 소파와 벽 등등을 훑다가, 일정 구역에서 멈췄다. 정말 갑작스레, 아무런 예고도 없이 고개를 들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정말 이상한 기분이었는데.
제 이름 석 자가 반듯이 음각된 명패, 그리고 바로 그 옆.
그 찰나.
삼 년 전, 힘겹게 버려두고 왔던 열다섯의 봄이 곧장 머리 위로 와르르 쏟아졌다. 제 안의 무언가도 쏟아질 것 같았다.
손아귀에 들어찬 캐리어의 손잡이가 나무 빛 활로 느껴졌다. 부정 못할 환각임이 확실했으나, 감각 또한 확연해서. 열다섯의 안다미가 부모의 뜻에 따라 억지로 바이올린 현을 튕겼다가, 흉곽을 옥죄는 갑갑함에 바이올린 교실에서 남몰래 빠져나왔던 그날이구나 싶었다. 수벽이 허전해졌다가 이내 쥔 것. 티켓 위에 쓰여진 글자가 국제 태권도 대회였나, 그랬다. 난데없이 웬 태권도인지, 열다섯의 스스로를 여전히 가늠하지 못하겠다. 그리고서는 한 뼘이나 더 큰 단단한 손이 마주 잡아왔고, 끝내는 아무것도 없었다. 캐리어 손잡이의 찬기가 다시금 삼 년 뒤로 건져올렸다. 발치에 색을 잃은 그날의 벚꽃 더미들이 연기처럼 피어오르는 듯한 감각이 들었다.
봄은 결말의 계절이다.
그는 봄과 함께 찾아왔다가 봄과 함께 떠나갔다.
봄은 결말의 계절임과 동시에
찰그락. 도어락 여는 소리 뒤 곧장 문 여는 소리가 따라붙는다. 시간이 얼어붙은 듯 느릿하게 시선을 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