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그때도 두개골 골절은 없었잖아.라고 하고 싶었지만 그러면 '아까 산 거 다 내놔'라고 할 것 같아서 꾹 참았다. 그리고 그때나 이번이나 내가 잘못한 건 맞.....지만 그때나 지금이나 유우가가 먼저 빡치게 했던 것도 똑같은데! .......아니지. 입이 백 개라도 할 말이 없는 상황이니까 그냥 참자.
하지만 참은 게 무색하게도 아까 사온 거 내놓으라는 말이 들렸다. 아 왜.... 고분고분 사과도 하고 얼음도 사다 얼음주머니도 만들어주고 할만큼 다 했는데 왜! 게다가 지긋지긋하다는 듯한 말투도 은근히 열받아. .....아니 뭐, 불평할 처지가 아니긴 하다만.
"........."
딱히 할 말이 없지만, 그렇다고 넘기기도 싫었다. 홧김에 많이 사버리긴 했지만 그냥 적당히, 내일 일정 생각해서 너무 늦게 깨지 않도록 조절해서 먹을 생각이었는데. 전부 넘기면 아무것도 못하게 되니까. 그래서 그냥 '그건 싫은데'라고 눈으로 말하면서 뚱하게 있다가 슬그머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야키소바랑 맥주 사올게."
죽어도 아까 산 거 넘기겠단 말은 안 하고, 그대로 카드키랑 핸드폰만 챙겨서 쏙 밖으로 나가버렸다. 드럭스토어에서 산 약들은... 일단 정신이 없어서 내 침대위에 대충 던져둔 상태라 어차피 내가 말 안해도 뺏으려면 뺏을 수 있긴 하다. 단, 유우가가 지금 침대에서 내려와 가져갈 수 있다면 말이다. 아무리 비즈니스 호텔이 좁다고는 해도 침대랑 침대 사이, 그것도 거의 벽쪽에 붙이듯 던져놓은 봉투를 일어나지 않고 가져올 수 있을 정도로 좁진 않으니까. 그 정도로 좁으면 2인실로 쓰면 안된다 인간적으로....
그래서 뭐, 어차피 못 가져가겠지 싶어서 마음놓고 편의점으로 향했다. 가는 김에 나도 컵라면 살까~
부탁받은 컵라면과 맥주, 그리고 내 저녁까지 사서 들어오자 보인 것은 내 침대에 코를 박고 엎어져 있는 유우가였다. 뭐하는거야... 그새 기운차리고 다 나은 건가? 싶어서 보면 딱히 그런 것 같진 않고. .....약을 뺏으려다가 저렇게 엎어진건가. 하여간 진짜 대단하다 대단해. 그냥 한번 정도 넘어가지 그걸 그렇게까지....
"....뭐하는 거야..."
한-심하다는 눈으로 보다가 작게 한숨을 쉬고, 일단 전기포트에 물을 받아 끓인다. 좁은 곳이지만 의외로 있을 건 다 있네. 컵라면 포장도 뜯어서 바로 물을 부을 수 있게 준비해두고 나서야 천천히 내 침대로 향했다. 준비하는 사이에 죽어가는 소리를 내면서 일어난 걸 보니 그냥 저쪽 침대로 충분히 움직일 수 있는 거 아닌가 싶은데.. 뭐, 그냥 서비스라고 치자. 그렇게 침대에 바로 앉은 유우가를 그대로 번쩍 들었다.
"자. 옮겨다줄게."
그러면서 아마 내 침대까지 온 목적인 약봉투의 행방을 눈으로 슥 훑는다. .....안 보이지만 대충 이불 속이나 베개 아래나 어디 숨겨놨겠지. 일단 옮겨두고 찾으면 될 거고.
"읏차. ....원래도 그냥 끓여주려고 했어. 먹는 건 혼자서 먹을 수 있지?"
그렇게 유우가를 원래 침대로 돌려보내고 나면 물이 다 끓어서 포트가 꺼진다. 먼저 야키소바에 물을 붓고, 그 다음은 내 칠리토마토에도 붓는다. 내 거는 이대로 뚜껑만 덮고 3분이면 되지만 야키소바는 기다렸다가 물을 버리고 소스를 넣고 비비고... ......생각해보니까 드럽게 손 많이 가는 걸로 주문했잖아 이자식.
...뭐 됐어. 내가 한 짓도 있고 이 정도는.
그렇게 기다린 끝에 야키소바까지 제대로 완성해서 젓가락과 함께 건네려고 뒤돌아보면 놀라울 정도로 아까 편의점에서 돌아오자마자 봤던 그 광경이 재현돼있었다.
이렇게 온 몸이 말을 안 듣는 건 오랜만이다. 엄청나게 삐걱거린달까, 한 번 움직이려고만 해도 골반에서부터 근육통이 잔뜩 번져서 정말이지... 꼼짝도 하고 싶지 않았다. 메이사가 나를 공주님처럼 번쩍 들었을 때 저항하고 싶었지만 못한 건 그런 이유였다. 버둥거리면 나만 아프다.
그렇게 메이사가 다시 탁자쪽으로 돌아섰고, 나는 잠깐 고민했다. 나 솔직히 지금 장난 아니게 아프다. 아프다고 계속 말해서 그 임팩트가 전해지지 않는 것 같지만, 아까 걷어차였을 때부터 지금까지 크고 작은 고통의 연속이었다고.
이쪽은 급소까지 털렸는데, 그냥 좀 냅둬도 되지 않나? 메이사 어차피 이래놓고도 잘만 살았고. 가끔은 고생도 해봐야 하는 게 아닌가. 그런 약아빠진 생각을 했다. 하지만 이내 정리 됐다. 내 앞에서 보란 듯이 약을 먹는 메이사를 생각하면, 내가 두고두고 후회할 거 같았기 때문이다. 메이사의 무사와는 관계 없이.
그래서 다시 코박죽했다. 침대에서 담배냄새가 났다. 연초가 무진장 땡겼다, 의식하고 나니까.
그저 한숨만 나온다. ...그래. 어차피 이것저것하고 허둥지둥하다보니 또 잠시 잊을 수 있었으니까. 약은 당장 안 먹어도 되긴 하는데. 일단 엄청나게 담배가 땡기기 시작했다. 후딱 먹고 나갔다 와야겠네.
"니 방은 다른 선생님이 있잖아 그것도 남자가...!" ".....그래 거기서 자던가. 일단 이거나 먹어. 불겠다."
침대 옆에 구색만 갖춘 협탁 위에 야키소바와 맥주를 올려두고, 내 칠리토마토를 본다. 유우가 옮기랴 야키소바 물 버리랴 하면서 잠깐 방치했더니 엄청 양이 불어있다. 거 참 고맙네. 작게 한숨을 쉬고 그냥 먹는다. 맛은 뭐, 그냥저냥. ....어째 수학여행와서 밥보다 면을 더 많이 먹는 거 같네. 집에 돌아가면 반동으로 밥을 엄청 먹게 될지도 모른다. ....아니, 역시 별로 안 먹게 될지도.
그렇게 컵라면에 맥주까지 다 비우고 나서, 대충 쓰레기를 정리하고 담배를 챙겼다. 아차. 카드키도 잊으면 안 되지.
"......."
무어라 말하고 나갈까, 잠시 망설였지만 어쩐지 아까 휙 돌아누운 유우가의 모습이 눈에 밟혔다. ...그리고 째째하게 약 안 주고 저러고 있는 것도 좀 그렇고. 무엇보다 오늘 아침에 들었던 것도. 바쁜 게 끝나고 몰아치던 그 감정도. ....그래서 그냥 말없이 방을 나와 흡연구역으로 향했다.
라이터를 켜서 연초에 불을 붙인다. 매캐한 연기를 들이마셨다가 훅 내뱉는다. 아직은 서늘한 봄의 끝자락에 뿌연 연기가 섞여 흐려진다. 아침에 들었던 그 말이, 아까 길가에서 서로 대치한 상황에서 들었던 그 말이 귓가에 아직도 눌어붙어서, 한손으로 거칠게 긁어도 좀처럼 떨어지질 않아서. 귀를 움켜진 채로 한참을 그렇게 있었다.
".......바보같아."
밤이 깊어지고 새벽이 되어 어슴푸레하게 하늘이 밝아올 때까지 내내, 그렇게. 떨어지지 않는 말을 떼어내면서.
야키소바도 먹고, 대충 이도 닦고, 벽을 짚고 허리를 두들기며 다시 침대로 돌아왔다. 그럴 동안 메이사는 돌아오지 않았다. 불안하기도 하고 신경 쓰기도 지친 마음 속에서, 할 짓도 없어 베개 아래에 깔았던 약봉투를 뒤져봤다. 허리가 지끈거려 뭐라도 먹고 싶은 기분이었다. 그렇게 꺼내든 진통제를 입에까지 머금었다가, 같이 마실 게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아니, 있긴 하지. 메이사가 사온 맥주.
...알고 있다. 메이사 때문에 여러 번 찾아봤으니 모를 리가 없지. 진통제랑 술을 같이 먹으면 안 된다는 것 정도는. 근데 오늘따라 그냥 아무래도 좋았다. 그냥 마시고 모른 척 누워버리고 싶었다.
근데 그랬다가, 내가 만에 하나 잘못되면? 난 그렇다쳐도 메이사는 누가 돌보는데?
친구도 없고, 지인도 없고, 엄마도 아빠도 츠나지에 떼어놓고 온 녀석을 나 아니면 누가 챙겨주는가. 여기에서 저 녀석은 천애고아나 다름없는데.
그래서 미간을 꾹 찡그렸다가 라멘 그릇에 진통제를 뱉었다. 대신 물이 송글송글 맺힌 맥주캔을 한 번에 따다가 벌컥벌컥 마셨다. 좀 더 사올 걸, 아쉬운 기분과 함께.
그리고 지친 몸이 이끄는 대로 잤다가 눈을 떠보면... 메이사가 또 내 품에 있었다. 언제 돌아왔는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이번엔 교토의 친절한 아저씨들의 호의를 얻었을지도 모르지. 그런 불편한 기분이 있었지만 그냥 메이사의 정수리에 얼굴을 처박았다. 담배 냄새가 흐릿하게 올라와서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어제 말은 그렇게 했지만, 난 그런 메이사여도 좋다. 나한테 좋은 말일랑은 한 마디도 안 해주고 틱틱대기만 하는 밉살스러운 녀석으로 변해버린 메이사도. 덕분에 지금의 내가 있으니까.
마음을 다지고 나서, 자리에서 일어나 간단하게 씻고 내 방으로 돌아갔다. 옷을 갈아입고 있으려니 또 그 선생님이 능글맞은 질문을 던졌다.
- 건강하네 히다이 선생님은. "...아뇨, 어제는 사수랑 같이 있었어요. 애가 외지에 있어서 그런가 몸이 어제부터 많이 안 좋대가지고." "친한 사람도 많이 없는 게 걱정돼서."
그렇게 대답하고는, 내 짐을 챙기고 나왔다. 이렇게 대답하고 나니, 어제처럼 죄 지은 기분은 들지 않았다. 좀 성가셔질 수는 있겠지만.
"자, 메이사 일어나. 아침먹고 출발해야지. 오늘은 일찍 출발할 거야. 머리 좀 빗고 이도 닦고. 자, 투정부리지 말고."
바닷가에서 완전 수라장...🤭 그걸 미스미가 멀리서 바라보고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 미스미는 이때부터 반지를 좀 빼놓고 다니기 시작했겠죠... 이러고서 결속또레나들이 뭉쳐다니기 전까지는 꽤나 유우가의 여성편력에 대한 이야기가 나돌지도 모르겠단 유열회로가 돌아가요...🫠 이히히힉...
히히...근데 이번에 유우가가 한 말 너무 쓰남말이어서 양심이 콕콕 쑤셔요 이러니까 이반뇌제하는거라고~! 이래놓고 훌쩍훌쩍해도 말이야 전혀 안 먹힌다고 이 녀석~!!!
그리고 역시 유우가가 왕코쨩이 남자라는 거 알기 전까지 마중 같이 나가주려고 했던 건 🤔 자기가 잘못돼도 멧쨔가 혼자가 아니었으면 해서 그런 거라는 생각이 굳어졌어요 그녀석이 남자인데다 첫눈에 보자마자 '메이사 좋아하네 이 녀석' 하고 견적 나오자마자 그럴 생각은 접었겠지만 🫠
유우가가 멧쨔 생각하면서 🥺 그래도 멧쨔 돌봐야하니까 이러지 말구 힘내야지 할 때 한편, 메이사 : 유우가 OO... 평소랑 색깔이 달랏지... 역시 병원 데려가야하나... 근데 괜찮댓는대..아신경쓰여한번만더봐야지 이 갭이 저는 너무 좋아요 멧쨔... 이 순애아가씨... 못된 말 듣고도 유우가 추행할 생각뿐이고 그런 저질아가씨가 좋아...🥰
착잡한 마음과 별개로 일단 몸이 피곤하고 졸린 건 사실이니까. 다 태워버린 마지막 담배를 재떨이에 눌러 끈다. 그렇게 담배냄새에 흠뻑 젖어서 방으로 돌아오면, 내가 쓰던 침대에서 쿨쿨 자고 있는 유우가가 보였다. 옆으로 굴러간 얼음주머니도. 적당히 씻고 다시 돌아와 얼음주머니를 들어본다. 꽤 녹아있지만 아직 남은 얼음도 있고, 무엇보다 아직도 차갑다. ...계속 식혀두는게 좋겠지. 그런 생각에 들고 있던 얼음주머니를 가져다대려다.... ....잠깐 멈칫. 유우가는 아까 괜찮다고 했지만, 진짜 괜찮은 건가..... 터지진 않은 거겠지...? 아깐 봐도 터진지 아닌지는 모른다고 그랬지만 그.... ....예전에 봤을 때(일부러 본 건 아니고 사고 같은 걸로 어쩌다보니 봤었다)랑은 색이 좀 다르던데... 많이 부었고...
"........"
괜찮다고는 했지만 신경쓰인다. 귀를 기울이고 유우가가 진짜 잠이 들었는지, 푹 자고 있는지 확인하고 슬쩍. .......피멍 아닌가 저거.. 냉찜질만 해도 되나...? 멍들었을땐 냉찜질이었나? 다시 덮어놓고 얼음주머니를 놓으려다가... 역시 한번만 더. .....아니 나 뭐하는 짓이냐고. 아파서 자는 사람한테. 스스로에게 환멸을 느낀다. .....하지만 역시 신경쓰이니까... 마지막으로 한번만 더....... 마지막이니까 좀 더 오래....
그렇게 도합 세 번을 슬쩍슬쩍 보고나서야 얼음주머니를 대주고, 슬그머니 옆자리에 비집고 들어갔다. 지친 몸은 눕자마자 빠르게 잠의 늪으로 가라앉는다. 아, 결국 약은 하나도 못 먹었네. 잔뜩 흐려지는 머리로 그런 생각을 하면서 천천히 잠이 들었다.
얼마 잔 것 같지도 않은데 벌써 아침이라니. 유우가가 깨우는 목소리에 눈을 꽉 찡그렸다. 3분.. 아니 5분... ...아니다 10분....
"20분만...더.... 아침 안 먹어... 더 자....."
잔뜩 가라앉은 목소리로 그렇게 중얼거리고 베개에 얼굴을 파묻는다. 난 좀 더 자고 싶다고... 어제 너무 늦게 잤단 말이야. 아침 안 먹어도 되니까 좀 더 잘래....
메이사를 화장실로 데려가 얼굴도 씻기고(물고문 아님), 부시시한 머리도 빗어놓고, 샤워하라고 속옷들과 함께 집어넣고 나서야 숨을 돌린다. 평소라면 풀썩 앉았을 침대에 아이고 아이고 아이고 쌰쌰쌰 삭신이야 중얼거리며 조심스레 앉고는, 어제보다 확연히 붓기가 줄어든 걸 다시 체크. 그래도 꽤나 부어서 약간 눈물이 난다.
그러다 보면 메이사가 나와서 안 먹겠다는 밥도 사정사정을 해서 반 공기 먹이고, 메이사 몫의 짐도 싸서 버스에 싣고, 아마노하시다테로 출발. 북교토에 있는 일본 3대 절경이라니 조금 기대되는 마음이 없지 않은...데.
"아이고야..."
허리가 쑤셔서 도저히 돌아다니질 못하겠다. 우리 조는 치온지를 돌아다니기로 했는데, 나는 그냥 해변 벤치에 앉아 쓰라린 OO을 달래는 것뿐이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이러고 1시간 반쯤 지나면 이제 우리 반이랑 옆반이 전망을 보러 모노레일을 타야 한다. 그 이후로는 자유시간인데... 온천이 괜찮다던데 몸이나 담글까. OO에 좋은가 하고 검색이나 하려던 때.
- 너 생리한다며? "...누가 그러든?" - 애들이. "참나... 뭐 비슷하긴 한데." - 치질이야? 수술 잘하는 의사 소개시켜줄까? "아니거든!" - 아니면 아닌 거지 소리 지르지 마. 너 부사수한테도 그러니? "너라고 부르지 마. 그리고 뭔 상관이야 메이사랑." - ...상관은 없는데.
뒤에서 훅 들어오는 말에 흠칫 놀라며 폰을 덮었다. 놀려먹는 말에 츳코미 좀 걸었더니 또 금세 뾰로통해져선 가는데, 여자애들은 왜 다들 멋대로 말 걸었다가 저러고 기분이 바뀌는지 알다가도 모르겠다.
...제기랄, 도쿄도 괜히 온 거 같아. 메이사가 올 줄 알았으면 그냥 츠나지에 있었지... 생각하며 등받이에 몸을 기댔는데, 시야 끝에 메이사가 걸렸다. 어쩐지 침울한 얼굴을 한 채로.
"메이사, 주변은 좀 돌아봤어?"
메이사에게 말을 걸었지만 무시당했다. 벤치를 지나쳐 가길래 에고고 하며 일어서선 따라붙었다.
"배고파? 졸려? 피곤해? 커피 사줘? 아니면 버스에서 좀 쉴 거야?"
컨디션이 안 좋나 얘야말로 생리인가 싶어서 묻지만 또 무시당했다. 나한테서 벗어나려는 거처럼 빠르게 걸어가는 메이사. 이대로라면 놓치겠지 싶어서 어깨를 잡아당겼다.
결국 아침밥까지 먹게 된 다음 버스를 타고 아마노하시다테로 왔다. 3대 절경인가 뭔가 하더니 빈말은 아니었나보네. 탁 트인 곳을 보다보면 기분이 좀 풀리는 것 같기도 했다. 어제랑은 다르게 설렁설렁 일하면서 대충 애들 챙기고 혼자 돌아다니고 있었는데... 그때 저 멀리 벤치에 앉은 유우가가 보였다. 제대로 걷기 어려운가. 역시 오랜만에 메이사 택시를 꺼내야 하는 거 아닌가~ 그렇게 생각하며 다가가기도 전에.
".......아."
사람이 한 명 늘었다. 미스미 에리카. 유우가의 여자친구. 유우가랑 같은 반지를 끼고 있는 사람. 다가가려던 발걸음은 그 자리에 못박은 듯 우뚝 멈춰서선, 그냥 멀찍이 떨어진 곳에서 멍청하게 둘을 보고만 있었다. .....그치. 여자친구니까 챙기러 왔나보네. 아무 관계도 아닌 내가 괜히 참견하는 꼴이 될 뻔했잖아. 그렇게 자조하는 마음에 쐐기를 박듯, 웃고 있는 두 명의 얼굴이 보였다. 나와는 다르게.
"......"
얼마나 그러고 있었을까. 어느새 미스미는 다른 곳으로 갔고, 유우가는 이쪽을 보고 있었다. 뭐라고 말을 걸지만 대꾸할 마음도 들지 않았다. 그냥, 그냥.... .....모르겠다. 마음은 먹먹한데 머리는 새하얗게 돼서 뭘 어째야 하는 지도 모르겠고, 그냥 하염없이 걷다보면 좀 진정될 것 같기도 하고. 그래서 벤치에 앉은 유우가를 무시한 채 그대로 지나쳐갔다. 그랬더니 이젠 따라온다. 이럴 때 정도는 그냥 냅두라고. 내가 아니라 여자친구 쪽으로 가란 말이야. 하지만 정말로 가면, 용서하지 않을 거니까. ".....그냥 냅둬."
배고파? 졸려? 피곤해? 그렇게 물어오는 말에도 입을 꾹 닫고 그냥 걸었다. 그러다보면 어깨를 콱 붙잡힌다. 나는 그제서야 입을 열었다. 유우가를 쳐다보지도 않으면서.
어깨를 잡아당겼다. 메이사의 몸이 휙 돌며 마주봤다. 아니, 나는 메이사를 봤지만 메이사는 나를 보지 않는다. 내가 아닌 다른 곳을 보려 열심인 것 같은 착각까지 든다.
...깊은 한숨이 난다. 의도한 제스처는 아니었다. 그냥... 언제까지 애를 써야 내 마음을 알아줄지 모르겠어서 그렇다. 내가 메이사를 츠나지에 두고 도망친 건 맞다. 계속 함께 있자고 해놓고 그 약속을 깬 건 맞다. 근데, 그래도. 메이사가 도쿄까지 기어코 올라와서는... 난 메이사와 늘 함께 있었다. 내가 유기한 책임마저 지려고 온갖 미움을 받으면서도 내 집에 끼고 살았다. 좋아해달라고는 바라지도 않는다. 그냥......
모르겠다, 내가 뭘 바라는지. 메이사와의 관계가 너무 복잡다단해져서, 이젠 내가 뭘 바라고 이렇게 애를 쓰는지 한 단어로 말할 수가 없다. 그나마 비슷한 걸 하나 골라보자면, 그냥 웃어주면 좋겠다. 그 정도.
알아, 이렇게 메이사를 잡고 다그쳐봤자 역효과만 난다. 내가 이럴 때마다 메이사가 웃어준 적이라고는 없었으니까. 그런데도 난 멈출 수가 없다. 이렇게 잡지 않으면 메이사는 종종 어딘가로 사라져버릴 것만 같다. 바구니를 타고 황천으로 떠나버린 히코호아카리처럼.
"상관이 왜 없어." "난 네 담당이잖아, 신경 써야지."
자조를 담은 농담을 던진다. 웃어줄 거라곤 생각하지 않는다. 마음이 쓰라려서 독한 농담만 나왔다. 우리의 복잡한 관계마저 조롱하는 질 나쁜 어른의 농담이.
종종 우리는 지금하고 비슷한 상황에 놓이곤 했다. 서로가 삐걱거리는 상황에서 내가 무슨 상관이냐고 물으면, 유우가는 항상 똑같이 말했다. 난 네 담당이라고. ....시니어까진 그랬지. 클래식 때 임시라는 글자도 붙었다가 떼었다가 하면서, 그 뒤로 쭉 그런 사이였지. 하지만 유우가가 나를 두고 중앙에 가면서 그 관계는 깨졌다고 생각했다. 그야 당연하지. 버리고 갔으니까. 내가 싫어서. 지긋지긋해서. ....말도 없이 두고 갔으니까.
그 뒤로 프리지아는 담당 트레이너가 없는 1인 팀으로 활동하다, 마지막 레이스에서 대차 11착이라는, 어떻게 보면 굉장한 기록을 남기고 해체했으니까. 이제 나한테는 담당 트레이너도, 팀도 부실도 전부 없다. 네가 날 버리고 갔으니까, 더이상 내 담당도 아니야.
그런데도 끈질기게 담당이라고 말해오는게 짜증이 났다. 오히려 뒤에 이어지는 질나쁜 농담정도야 웃어넘길 수 있을 정도로.
"뭐가 담당이야. 버리고 간 주제에."
그래서 조금 강한 어조로, 짜증을 담아 말하면서 어깨에 얹힌 손을 팍 쳐냈다.
"....필요없어."
다시 몸을 돌리고 무시한채로 걸어가려고 했다. ...어디로 갈지는 모르겠다. 그냥 발 닿는 데까지 걷다가.. 어차피 1시간 뒤면 또 케이블카인지 뭔지 탄다고 가야하니까. 적당히 주변을 서성이고 말겠지. 어쩌면 조금 전의 일들을 지켜보던 말딸들에게 흥미진진한 눈으로 질문을 받으며 끌려갈지도 모르고. 그래, 지금 저기 옆에서 저렇게 보고있는 녀석들처럼 말이다. ...숨은 것 같지만 귀가 다 튀어나와 있다고 바보들아.
....떨어트린 물건은 수면유도제였다. 하필 저게 떨어져선. 어제 샀던 건 다 뺏겨서 오늘은 그냥 급한대로, 또 근처에서 하나만 샀는데. 그걸 또 어떻게 알아채고는 가까이 와서 대신 둘러대는 유우가를 보다가 슬그머니 시선을 돌렸다. 괜히 경치 구경이나 하는 척. 이쪽을 보는 유우가를 무시한 채로.
"......"
말딸이 들고 있던 수면유도제는 자연스럽게, 내 대신 나서서 대답한 유우가의 손에 들려있었다. 어쩔 수 없지. 저건 포기해야겠다. 순순히 줄 녀석도 아니고. 그냥 또 숙소 근처에서 하나 사면 되니까. 아깝긴 하지만 괜히 또 내놓으라고 실랑이하다 소리가 커지면 곤란할 뿐이다.
"...신경 꺼."
뭔 상관인데? 이제 담당도 뭣도 아니면서. 한껏 비아냥대고 싶은 말은 잘라서, 그냥 간단하게 신경 끄라는 걸로 바꿔서 내보낸다. 네 말마따나 외지에서 잠 못자고 뒤척이기 일쑤니까. 서너알 정도 집어삼키고 푹 자겠다는데 대체 뭔 상관인지. 시비조로 물어오는 건 또 뭐냐고. 어차피 상관도 없으면서. 맨날 그렇게 들쑤시고 괴롭게만 하면서, 도와주진 않고, 맨날, 맨날..... 짜증이 확 올라와서 머리를 거칠게 긁었다. 잔뜩 헝클어지는 머리카락이 손에 얽힌다. 귀까지 잡아뜯을 것처럼, 그렇게 당겼다가 놓고 고개를 푹 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