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존재가 된 듯한 느낌에, 목숨을 끊는 것이 차라리 나을까도 생각했었으나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라. 어느새 기를 제대로 운용할 수 없는 자신의 상황에 익숙해져 가는 것을 느끼며 천은 자신의 손을 빤히 쳐다보았다. 기를 쓰지 못하는 대신 외공을 단련함에 따라 굳은살이 박힌 손. 예전이라면 상상도 못 했을 모양새다.
그러나 천은 그런 일에 한숨 쉬거나, 짜증을 심하게 내지는 않았다. 만약 절맥을 해결할 수 있는 가능성이 아예 없더라도 생을 스스로 마감하거나 하는 일은 없었을 것이나 지금 자신에게는 절맥이라는 길고 어두운 동굴을 빠져나올 불빛이 멀리나마 있었다.
" 헛소리를 늘어놓는 놈이 아니란 게 더 열이 뻗치는군... "
우란기아가 전달한 저주에 대한 정보. 독이라면 몰라도 저주에 대해서는 어찌 해야 할지 실마리조차 잡지 못했던 차에 나타난 놈이 전달한 정보는, 놀랍게도 전부 사실이었다. 그렇기에 자신뿐만 아니라 소예 역시 교차검증한 결과... 해주할 수 있었다. 이제 남은 것은 자신의 피와 함께 흐르는 산공독 뿐. 독을 전부 내보낼 때까지 피를 빼내는 것이 가장 기본적인 치료법이나 대체 얼마만큼의 산공독이 스며들었는지 알 수 없기에 위험천만한 일이다. 애초에 피와 분리할 수 있을지 없을지도 알 수 없다.
" 결국에는, 어떻게든 기를 운용하는 것이 최선...인가. "
어느 쪽이든, 죽음을 무릅써야 한다. 죽을 위기를 넘겨 간신히 살아남은 대신 얻은 절맥이라는 고통, 그에 준하는 고통과 죽음의 위기만이... 다시 자신에게 새로운 길을 열어줄 것이라고, 천은 생각했다.
" 그건 그거고, 이걸 또 그냥 넘길 수는 없지. "
천은 먼저 신체의 말단부터 차근차근, 기의 순환을 시도해 보면서 동시에 저주를 해결하기 위해 찾아둔 서적과, 우란기아의 정보를 바탕으로 저주에 대한 지식을 쌓으려 했다. 단순히 저주에 대해 아는 것만이 중요한 게 아니다. 놈들은 분명히 저주를 상대에게 '심어넣었다', 그렇다면 자신이 못할 게 무언가? 더군다나 자신에게는 아버지인 남운혁이 남긴 절기에 대한 앎이 있다.
조합할 수만 있다면, 반드시 저주와 길이 이어질 고통을 원할 때, 원하는 자에게 꽂아넣을 수 있을 터. 천은 서적에서 눈을 돌려, 탁자에 기대어 있는 창천검을 빤히 쳐다보다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잠시 산책이라도 하자. 몸이 이렇게 되기 전에는 자주 다녔던 외유도, 지금의 몸으로는 어려웠기에 세가 내의 후원을 산책하는 것으로 대체된 지 오래. 새삼스럽긴 했지만 세가의 모습은 퍽 보기에 좋았다.
아무도 보이지 않는, 후원의 연못 근처에 서서 천은 허리춤에 두었던 혈화선을 꺼내 펼쳐 들었다. 잠시 쉬고자 후원으로 나온 것이나 자신이 처한 상황에 대한 신경을 온전히 끌 수는 없었기에 결국 이 자리에서도 어떻게 하면 다시 있을 습격에 대비할 수 있을까를 고민하게 된다.
무인이라는 긍지도, 무사에 대한 존중도 없는 천이었으나, 기를 다루지 못하게 된 지금은 이렇게라도 몸을 움직이지 않으면.
" ...견딜 수가 없구나. "
검법이라는 이름을 지녔으나 검이 아닌 것으로도 자유로이 구사할 수 있는 남운의 비전. 선조로 인식한 자와의 짧은 대화와, 종천의 면담을 통해 깨달은 것이 있다면, 역시 남운의 비전은 검법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그렇기에 천은, 검도, 창도, 활도 아닌. 무기라고 하기에는 그저 아름다움을 추구한 듯한 부채를 펼치고 바람에 몸을 맡기듯, 춤을 추듯 부채를 휘둘렀다. 달 아래, 홀로 서서 추는 부채춤은 쉬이 끝날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다소 마음이 안 좋게 끝난 카셀라와의 대화 후, 돌아온 지 다소 시간이 지난 어느 즈음. 어느 정도 기력을 되찾은 소년은 이제야 제대로 된 훈련을 하고자 하였다. 그는 저번 수업에서 '클라나인'이 보여주었던 특수한 마법 사용법이 기억에 남아있었다. 연쇄적인 트리거로 작동하여 여러 버프 마법이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발동하는 형식. 소년의 버프는 대체로 미리 깔아두는 방식이 많다보니 그걸 응용하는 건 무척 도움이 될 성 싶었다. 특히 '레인 콜'과 '리커버리 레인'은 비슷하게 비를 내리는 부류의 마법이니 좀 더 유기적으로 연결이 가능하려나?
으그그극, 피곤하다! 책상에 엎어진 채 앓는 소리를 내던 나는 멍하니 벽을 바라보았다. 좀 많은 일이 있었지.. 아주 많은 일이 말이야. 어쩌다보니 재해와 정면으로 붙어버렸다. 중간까진 혼자였고, 이후에는 카르마의 다른 분들이 도와주셨다. 잡는가 하더니 도망쳐 버렸지. 나는 잠시 생각을 하다가 어떤 책을 펼쳤다.
<세상 모든 어린 아이들을 위한 실감 나고 즐거운 옛날이야기 모음집 – 작가 ‘펜타메로네>
내가 처음으로 만든 이야기(스킬) 이번에도 어느 정도 활약을 해준 아이다. 끄응, 나는 한참 앓는 소리를 내다가 깃펜을 들었다. 이건 '도서회랑'에 있는 복사본이니까- 조금 글을 더해도 괜찮겠지? 고대의 언어에는 독특한 힘이 있다는 걸을 알아내었다. 그러니.. 그걸로 스킬을 강화하는 것도 가능하지 않을까?
우성은 자신의 무공을 되돌아보기 시작했다. '혼연천휘' , '공화만개' , '환영척', '천뢰귀명' 등.. 어느 무공에 파생하지 않고, 우성의 혼돈과 그의 순수한 창술이 빚어낸 우성만의 순수한 무공이었다.
반면에 진룡파창은 기존의 진룡파창에 우성의 무반동이나 순수한 혼돈을 덧입힌 것이지, 진룡파창은 진룡파창이었다. 반면 진혼창용환파식은 혼돈을 머금은 진룡인 '진혼룡'의 힘을 입힌 우성만의 진룡파창이었다. 그 활용도는 우성의 순수한 무공에 비해 처참했지만.. 최근에 2초가 키메라의 힘을 머금고, 3초는 자연의 힘을 머금으면서 활용도가 제법 높아졌다.
하지만 전혀 쓰지 않는 기술이 있었으니.. 그것은 우성이 처음으로 익힌 환파식의 초식인 1초였다.
이 기술이 나쁘다는 것이 아니다. 특정속도를 유지시키면 추가타가 뜰 수도 있고 궤도도 예측이 불가능하다. 하지만 다른 기술에 비하면 활용도가 떨어진다. 이것보다 더 강력하고 유용한 기술들은 넘쳤으니깐.
그래서 1초의 활용도를 살려보기로 한다.
어떻게?
"......"
진혼룡에 '공의 기'를 머금게 하여 '공혼룡'으로 탄생시키는 것이었다. 진혼창용환파식 1초와 음양(空)을 믹서로 조합시켜서, 1초를 새로운 기술로 리뉴얼하는 것이었다. 2초와 3초처럼 말이지.
그녀는 어제의 일을 떠올립니다. 남운세가를 도우러 갔고, 인형사를 만났으며 (튀었지만), 문으로 들어가서 가면녀를 상대하고 봉인이 해제되는걸 막아냈죠.
' 그 불꽃.. '
마치 이게 진짜 레오넬의 불꽃이다. 라고 말하는 것만 같았죠. 무엇보다 붉었던 그 불꽃과, 심상 개진으로 저항할 새도 없이 타죽은 것을 떠올리며 입술을 잘근 깨문 제나였지만, 이윽고 생각을 바꿨을까요. 그 여자도 나도 같은 레오넬에, 계약이긴 하지만 악마의 불꽃 또한 쓸 수 있다. 그 말은 곧, 그 여자가 했던 걸 내가 못 할 것 없지.
제나는 눈을 감은 채 어제의 그 전투와, 불꽃과, 심상 개진까지, 모든 것을 떠올리며 천천히 마력을 끌어올리고, 훈련을 시작합니다.
우성에게는 사실 혼돈,진룡,자연,음양(空) 외에 다룰 수 있는 속성이 더 있었다. 바로 '영혼'이었다. 우성이 쓰는 백화안과 백령 역시 굳이 따지자면 영혼 속성의 기술들이었다. 우성은 이미 추상적인 네 가지의 속성을 단단히 구축했기에, 영혼 속성 역시 응용의 폭을 넓혀서 또 다른 경지에 오르려고 했다.
일단 영혼의 기본적인 개념에 대해 알아보자. 영혼이란, 생명체의 육체와 독립적으로 존재하고 정신의 근원이 되는 대상을 말하는 것이다. 육체에서 벗어나 독자적으로 존재할 수 있고 사후에도 존속하는 정신체로 생명체가 살아있는 동안에는 체내에서 생명과 정신의 원동력이 되어준다. 육체와 정신을 관장하는 실체이자 비물질적인 존재로... 감각으로 인식되는 세계를 초월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우성은 이러한 영혼을 다룰 수 있었다. 백령으로 죽은 타인의 영혼을 정화하거나 자신의 영혼을 정화해서 체력을 회복하거나... 백화안으로 상대의 본질을 읽는 식으로 말이다. 신성과는 다른 개념이라고 할 수 있을까?
그렇다면 이 영혼의 힘을 확장해서 어떻게 다룰까?
주변 영혼들의 힘을 사용하기? 우성은 신이 아니다. 영혼의 힘을 다루는 '인간'이지, '신'이 아니란 말이다. 그것이 가능하다고 해도, 죽은 영혼에 대한 결례이며 혼백저와 다를 바가 없다.
이미 죽은 영혼들의 힘을 사용한다는 생각은 접어둬야겠다.
"그렇다면 아직 살아있는 자들의 영혼은?"
아, 그걸 사용한다는 얘기가 아니다. 상대방의 영혼은 상대방의 소유다. 아무리 우성이 힘이 있어도, 상대방의 영혼을 사용한다는 것은 너무나도 초월적인 차원의 이야기다. 그럼 이렇게 영혼의 힘은 그저 분석하고 치유하는 정도로만 끝낼까?
상대의 영혼은 다루지 못 해도.. 영혼에 공격을 해서 피해를 입히는 건 가능하지 않을까?
영혼의 힘으로 상대방의 영혼을 직접 공격하는 것은 꽤나 힘들 것이다. 상대방의 정신력이 강하다면 빈틈만 제공해줄 뿐이이다. 더불어 상대의 영혼은 곧 상대방의 인격체이기에 순수한 영혼의 힘을 이용한 타격 자체로는 효과가 미미해. 애초에 우성이 현재 다루는 힘은 치유이기 때문에 도리어 상대방이 치유가 될 수도 있지. 현재의 힘으로는 공격 자체가 불가능.
"변형은 가능하지 않을까?"
물론 의도는 '공격' 이 맞다. 하지만 수단은 '공격'이 아닌 영혼의 '변형'이었다. 상대방을 창으로 찔러놓은 후에 영혼의 구조나 형태를 변형시키는 것이었다. 상대의 영혼의 구조는 어떻게 이해하냐고 묻는다면, 우성은 이미 그것을 분석하는 '백화안'이 있다고 대답할 수 있겠다.
그래. 상대의 영혼의 구조는 이해했다고 하자. 그렇다면 그 치유 뿐인 영혼의 힘으로 어떻게 영혼의 구조를 변형시킨다는 것이냐? 그것은 바로 영혼의 힘에 혼돈을 합치는 것이었다. 혼돈을 머금은 영혼의 힘이 상대의 영혼을 변형시키는 것. 이치를 비틀고 휩쓰는 혼돈의 특성이 상대의 영혼을 비틀고 변형하는 것이었다. 상대는 변형된 영혼에 혼란에 빠지거나 그 자체로도 데미지가 될 수 있겠지.
백화안을 이용한 영혼의 분석 그리고 백령과 혼돈이 결합된 힘으로 분석된 영혼의 구조를 변형.
최근 꽤 큰 일이 있었어. 전에 너와, 모비와 함께 갔던 동쪽의 땅 기억나니? 그 '남운'에서 아라크네드가 나타났거든. 다행스럽게도 크게 다치지는 않았으니 나에 대한 걱정은 하지 않아도 괜찮아. 네가 남겨준 신뢰와, 증표가 큰 힘이 되어주었다는 걸 또 전해주고 싶네.
일전에 말이지? 플루가 훌쩍 사라져서 깜짝 놀란 적이 있어. 어디로 갔나 했더니 요즘 키우고 있는 화단에 누워 자고 있더라. 그 모습이 정말 귀여웠는데. 무슨 꿈을 꾸고 있던지 헤실헤실 웃었어. 아, 플루는 늘 웃고 있지만.
화단에는 여러 꽃을 키우고 있어. 여행을 하다 봤던 여러가지 꽃들. 내가 마음에 들어했던 것, 모비가 앞에서 한 참 동안 보고 있느라 통행에 문제가 생겼던 것, 플루와 처음 만난 곳에서 피어 있던 것, 네가 이거 보라며 방방 뛰었던 것. 아직 제대로 꽃이 피어나진 않았지만, 아마 곧 예쁘게 피어날 거야. 그 때 한 번 너를 초대하고] "..플루, 방해하면 안 되지."
우응? 하면서 앞에서 둥실거리는 작은 물의 요정을 살살 쓰다듬은 소년이, 물의 요정 '플루'를 조심히 들어서 어깨 위에 올려놓고 펜을 다시 잡았다. [싶어. 괜찮은 찻잎도 있으니, 티타임을 가지는 것도 괜찮겠지.
오늘도 내 주변에는 비가 내려. 내가 있으니 당연한 일이겠지만. 네가 사는 곳은 지금 어떻니? 날씨는 좋니? 아프진 않고? 편지는 돌핀을 통해 보낼게. 답장을 기다리겠지만, 하지 않아도 괜찮아. 그럼 다음에 보자
가끔 네가 화를 내러 오는 상상을 하는 너의 친구, 렌지아가.
추신. 답장은 돌핀에게 말로 전해주면 돼.] 이후 소년은 돌돌 만 편지를 끈으로 길게 묶은 뒤, 물로 이루어진 돌고래 '돌핀'에게 걸어주었다. 흔들흔들 거리며 돌핀에게 부딪히기도 하였지만, 신기하게도 편지는 물에 젖지 않은 채였다.
"부탁할게, 돌핀." {삐이-}
고개를 끄덕인 돌핀은 곧 소년의 방에 있는 수조로 들어가고는 곧 사라졌다. 아마 카셀라가 있는 호수로 가서 편지를 전해주러 간 것이겠지. 카셀라가 글을 읽지 못해도 상관 없도록, 편지를 열면 내 목소리가 나오도록 처리를 하였으니 전달에도 문제가 없을 것이다. 아마 지금 만나러 가는 건 실례일 테니, 편지만 한 장, 이렇게 남겨두고 다음에 다시 만날 날을 기대해보자. 혹은 답장을 말이야.
최근- 뭔가 답답한 기분이다. 뭔가 살짝 길이 끊긴 느낌..아니면 가는 길에 이상하게 벽이 세워진 느낌? 혹시 제급으로 가는 벽-이라거나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곧 고개를 살레살레 저었다 에이, 벌써 그렇게 강해졌을 리가! ..라고 하면서도 묘하게 기대감이 들었다. 이전에 엄청난 경험을 했으니까 그만큼 강해지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지? ...그런데
"뭐가 그렇게 불만이신가요.."
나는 내 앞에서 턱을 괴고 앉은 '흡혈공 블라드'를 향해 조심스럽게 질문하였다. 서늘한 얼굴로 나를 보고 있는 게 참 압박감이 심하다. 분명 내 마력으로 이루어진 형상일텐데, 어째서 나는 이렇게 저자세로 나오게 되는 걸까? 스스로에게 질문을 해봐도, 원작도 그렇고 태도도 그렇고 너무 귀족적이어서 그렇다고밖에 생각이 안 들었다.
블라드 씨는 갑자기 책에서 나오더니 뭔가 불만이 있는 사람처럼 나를 보고 있었다. 대체 왜... ..아?
"..혹시 전에 전투에서 부르지 않아서 그런가요..?"
{..}
"그으.. 당시에는 운이 좋았거든요, 한 방도 맞지 않았달까.. 다른 분들도 도와주셨고..."
{...}
"게다가 저는 잘 못 맞으면 바로 치명상이었으니까요? 그... 타이밍이 안 나왔다고 할까.."
가만히 있던 블라드 씨는 곧 뭔가를 가리켰다. 그게 뭔가 했더니, 의외로 강화 효과가 잘 나온 '페가서스'의 책 '세상 모든 어린 아이들을 위한 실감 나고 즐거운 옛날이야기 모음집'이었다. 나는 어물거리다가 한숨을 내쉬고 깃펜을 들었다. ..'블라드'에 어울리는 고대어가 뭐가 있더라... 귀족적인 수사에.. 잔혹하면서도 냉철한 뉘앙스가 강한게...
어느 순간부터인지 모르겠지만, 그녀는 자신의 마력에 무언가 다른 힘이 깃들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자신이 다루는 힘들 중 악마의 힘과 많이 닮았으면서도 다른 힘이였지요. 어차피 자신의 마력에 깃든 것이니만큼 다루는 것에도 문제가 없을 뿐더러, 딱히 마력을 사용해 무언갈 할 때 지장이 있는 것도 아닌지라 여태까진 크게 신경을 안 쓰고 살았지만..
원래 호기심이라는 것은 갑작스럽게 찾아오는 법이니.. 어느 날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을까요. 이 재앙의 힘 자체를 빼내어, 마력과 별개로 다룰 수 있다면 어떻게 될까. 자신의 마력에 '깃든' 것이니만큼, 그리고 자신이 다룰 수 있는 힘이니만큼. 충분히 가능하지 않을까.
" 한번 해볼까.. "
작게 심호흡을 한 제나는 자신이 생각한 것을 아주 조금씩, 그리고 아주 조심스럽게 시도해 봅니다. 혹시 조금이라도 잘못되는 것을 느낀다면 바로 멈출 수 있게 말이에요. 호기심에 죽는 고양이 꼴이 나긴 싫으니까요!
록시아는 저번 전투 이후로 많이 성장한 느낌이 들었다. 여전히 가주의 일은 많고 특히나 이번엔 전후처리도 해야해서 더더욱 바빴지만 훈련은 빼먹을 수 없었다. 피곤한 몸을 이끌고 에리에게 잠시 훈련하려 다녀온다 말한 록시아는 텅 빈 가문의 훈련장을 보면서 멍하니 있다 한숨을 작게 내쉬고선 엘펜하임을 손에 낀 채 와이어를 뽑아냈다.
" 절삭, 속박, 제약 ... 할 수 있는건 다 하는 느낌인데. "
근중거리 전투라고 보면 딱 적당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이상의 응용이 힘들다는 느낌. 더 있을지도 모르지만 ... 아예 근접 전투로 가야하는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 일단 있는거라도 열심히 해둘까. "
최근 연이은 전투의 영향인지 신성과 마성의 융합에 성공했다. 물론 몸에 무리가 가는 편이라 하루에 한 번 정도만 사용할 수 있지만 그 동안 시도하던 것이 성공했다는 것은 기쁜 일이다. 그렇기에 좀 더 능숙해진 힘의 운용을 통해 와이어에 마력을 흘려넣는다.
" 용이 아니라, 절단해야하는건 신. "
마룡사는 용이라도 절단할 수 있다는 것이지만 아직 그것으로 부족했다. 그가 상대해야하는 것은 신격을 지닌 무언가.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연마 해야만 한다.
아침 하늘에 산이 걸려있었다. 구름보다는 낮은 곳에 위치한 산은 남북으로 길쭉하게 뻗어 험준한 산맥을 이루고 있었고 그 크기에 걸맞게 사람의 손이 닿지 않은 비경이 아직 많이 남아있어 수행자나 모험가들의 탐험심을 자극한다. 자연경관으로 명맥이 높은 산맥이었으나 그럼에도 두군데 남쪽과 북쪽 끝에는 인간의 손길이 닿은 곳이 가장 유명했는데 남쪽에 자리잡은 조용한 항구도시와 산맥의 북쪽끝에 위치한 북방민족의 마을이었다. 그녀는 한때 그들의 동료였다. 아주 짧은 기간이었으나, 북방의 삶을 몸에 새겼고 그런 그녀를 따라 마을을 나온 젊은이들이 양손으로 세어도 부족할 정도였으니 서부 기사단의 많은 인원들은 가혹한 북방의 환경을 이겨내온 자들이었다. 그들중 가장 마지막에 합류한 남자는 필리아에게 말했다.
"대장은 뭘 하고 싶어서 그렇게 싸움을 거는 거요?"
카르마 방어전이 끝난 이후 그들 역시 또 몇명의 가족들을 마음에 묻었고 새로운 피를 수혈했으니 북방 이민족의 젊은 전사들이 쓰러져간 가족을 대신하여 합류하였다. 북방 산의 한 기슭에 세운 묘라고도 부르기 힘든 검의 무덤에 목걸이를 걸어주며 침묵을 유지하던 필리아를 대신해 아마리아가 언성을 높히려하자 필리아는 한손으로 그녀를 막아세웠다.
"강해지고싶기 때문이라네."
고개조차 돌리지 않고 그녀는 그리 말했다. 어조에는 변화가 없었고 떨림조차 없었기에 질문을 했던 남자는 얼굴을 붉히며 쏘아붙혔다.
"고작 자기가 강해지고 싶어서 사지로 우리를 이끄는거요? 당신의 하잘것없는 욕망때문에?"
남자의 말에 동의를 표한다는듯 몇몇 단원들이 고개를 끄덕였으나 대부분은 침묵을 유지하고 있었다. 필리아는 자리에서 일어나 남자와 마주하였다. 남자는 평생을 단련해왔으나 키가 그리 크지는 않았고 이때문에 자연스레 필리아를 올려다보는 모양새가 되었으나 그럼에도 가슴을 펴고 당당하게 맞서는 모습은 거인에 맞서는 용사처럼 보이기도 했다. 필리아는 시선을 맞춘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심상을 펼치지도, 마력을 돌리지도 않은 채로 그저 내려다보는 모습은 위압감이 넘쳤으나 남자는 주눅들지 않고 쏘아붙였다.
"위험할 거라는 것은 알고 있었소. 허나 이리 무리를 짓고 우리가 얻은 것이 뭐요? 괴물에 맞서서 매번 목숨을 던지는 것 말고 무엇을 하고 있냐는 말이오."
"증명."
필리아의 입에서는 단 하나의 단어만이 뱉어졌다. 증명하라. 서부기사단의 창설 당시 그녀는 그리 말했다. 스스로의 존재를, 가치를 증명하기 위해 우리는 이곳에 모인 것이라고. 그렇기에 대부분의 기사단원들이 강함에 대한 집착을 가지고 있었으며 이는 남자역시 마찬가지였다. 새하얀 입김이 산속으로 흩어졌다. 남자는 얼이 빠진듯한 얼굴로 필리아를 그저 바라만 보고 있을뿐 아무 말을 하지 못했으나 곧 정신을 차리고는 눈을 부라리며 손을 들었다.
"대체 무얼 증명하란 말이오! 이곳에 묻힌것도 위령을 하는 것도 대장이 직접 모은 맹자들이지 않소! 강함은 충분히 증명했어!!!"
그 말에 일부는 움츠러들었고 일부는 또 이런다며 고개를 저었으나 필리아는 한숨을 쉴뿐 그 이상의 행동을 하지 않았다. 그리고 마침내 입을 열었으니
"자네의 삶의 답을 어찌 나에게서 찾는가."
그녀는 무덤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녀는 이미 이상이 무너진 자를 보았다. 이상에 매들려 살 수밖에 없는 이들역시 보았다. 모두가 강인하고 아름다웠으나, 삶의 의미를 잃은 이와 그렇지 않은이들은 역시 차이가 날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후회하고 있었다.
"답은 스스로 찾으시게. 만약 내가 죽고나면 답을 알려줄 스승이 죽었으니 자네도 따라죽을텐가? 나는 스스로를 세상에 납득시킬 인간을 모았다네. 고작해야 죽음이 두려워서 증명하지 못하겠다 하면... 그냥 그만두시게나."
남자의 어깨를 두들긴 필리아는 전원을 향해 소리치기 시작했다.
"이곳에 묻힌 것은 나약한 자인가?"
출신을 이유로 소외받은 전사들이 소리를 높였다.
"그들은 우리 중 가장 강한 전사들이었다!"
"그렇다면 이곳에 묻힌 자들은 비겁한 자로군."
설 곳을 잃은 귀족들이 소리를 높였다
"그들이야말로 가장 명예로운 기사들이었다!"
"그렇다면 이곳에 묻힌 자들은 누구인가?"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이가 함께 외치니
"우리의 형제이자 시대를 떨게한 맹자로다!"
남자는 미치광이들을 바라보는 듯한 눈치였으나, 도망치지는 않았다. 마치 그곳이 자기의 설 곳이라는 듯 어느새 전사들의 무리에 합류하여 소리를 높히고 있었으니 필리아는 그것을 보고 만족스러운 듯 미소를 지었다.
"그렇다면 증명하라! 그들이 수치스럽지 않도록! 온 세상에 그대들의 강함을 증명하면 된다!"
그들의 장례식은 함성과 함께 끝을 맞이했다.그날 밤, 필리아는 산맥의 가장 높은 봉우리에 올랐다. 아래로는 구름이 쌓여 제대로 볼수조차 없었으나 그녀는 개의치않다는 듯이 눈을 부라렸다.
무엇이 증명이냐. 무엇이 이상이냐.
그녀는 흔들리고 있었다.
슈고가 무너져내려가면서 보여준 아름다운 권은 마음을 흔들기에 충분했다. 신에게 닿지는 않았으나 역사에는 새겨질만한 아름다운 주먹이었다고 생각은 하였으나 그런 미권을 이긴것이 고작해야 인간의 영역에 있는 주먹이라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녀역시 알고있었다. 권극에는 이미 이르렀다. 인간의 영역에서는 자신의 권이 닿지 못할 곳이 없었으니 무쌍의 경지라고 부른다면 감히 그럴 수 있으리라. 허나 그걸로는 부족했다. 반응도 속도도 정밀함도 고작해야 인간의 영역. 어떻게 해야 자신이 바라는 신의 경지에 다다를 수 있는지는 여전히 알지 못하여 찝찝함만이 남아있는 상태였다.
그렇기에 명상에 빠졌다. 슈고와의 싸움 이후 기사단의 장례식을 치른 그녀는 몇일간 식음을 전폐하고 명상에 시달렸다. 무기는 물론 주먹을 휘두르는 일 조차 없어지고 하루의 대부분을 자연속에서 명상을 하며 지냈다.
신의 경지에 이르는 방법을 자연과 자신의 육체에 물어보기 위하여. 대자연을 굴복시키는 인간의 극점에 이른 그녀의 육신으로 대자연의 이치를, 진정한 의미의 무극을 향하기 위하여.
그 길로 향하기 위한 아주 자그마한 편린은 알고 있으며 동시에 그 문의 존재역시 알고 있으나 언제나 심상을 펼치는 순간에 문의 앞까지 도달할 뿐, 그 안으로 들어서는 것은 여전히 허락되지 않았다.
신에게 닿을 정도의 무를 원하는 오만함의 결정이 신을 찾으며 고뇌했다. 대자연의 이치를 몸에 담아 진정한 무극으로 향하기 위하여.
우성은 혼자서 싸우는 것이 아니었다. 바로 자신이 길들인 마수들과 같이 싸우기 시작했다. 로자가 지면에서 뿌리를 뽑아내서 적들을 묶으면 스피드와 치악력이 좋은 실비아가 하나하나 치명타를 주며 끝내고, 대인 전투력이 가장 강한 베히모스가 실비아를 저지하려는 적들을 역으로 저지하거나 보이는대로 팬다(?).
하지만 마수는 단순히 같이 많이 싸운다고 좋은 것이 아니다. 평소에 마수를 잘 케어해야 됨은 물론이요, 휴식을 해도 같이 휴식을 하고, 좋은 것도 먹이면서 따를 만한 주인이라는 것을 인식시키면서 성장을 시켜야 된다.
우성은 한 별장을 빌려서, 마수들과 함께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로자는 풀밭에 누워서 여유롭게 잠을 청하고, 실비아는 가만히 의자에 앉아서 쉬고 있던 베히모스에게 흙을 뿌려서, 베히모스와 추격전(?)을 벌이고 있었다.
쇼콜라는 우성의 어깨에 올라타서 무언가 신기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조금만 기다려, 쇼콜라. 맛있는 거 만드는 중이니깐."
우성은 능숙하지 않은 실력이었지만, 마수들이 먹을 요리를 하고 있었다. 불로 굽거나 기름으로 튀긴다거나.. 물로 끓이는 과정을 최소화 시키면서 요리를 하고 있었다. 얘네들은 소환수가 아니고 철저히 자연에서 온 마수들이니, 자연 그대로의 맛을 내려고 했었다.
로자에게는 풀의 즙을 뿌린 마수생선회, 실비아에게는 육즙을 뿌린 닭회, 베히모스와 쇼콜라에게는 의외로 용과를 곁들인 샐러드와 브라우니를 만들고 있었다.
"이제 여기에..."
우성은 마지막으로, 자신이 만든 음식들에 자연의 기를 향신료처럼 뿌렸다. 혼돈이나 다른 기를 섞지 않은 순수한 자연의 기 말이다. 우성은 마무리를 하고, 종을 울린다.
명상을 시작하고 나흘의 시간이 흘렀으나 그녀는 여전히 감조차 잡지 못하고 있었다. 육신의 강함은 극에 이르렀고 자연의 마력을 몸에서 순환시키며 실낱같이 희미한 자연의 심상을 몸에 받아들여 당장은 쇠하지 않는 상태에 이르렀음에도 그럼에도 그녀가 추구하는 무의 극치에는 여전히 이르지 못한채로 얕은 호흡을 이어나가고 있었다. 일전의 사투에서 느낀 아주 미약한 감각. 그것을 온전히 자신의 것으로만들기 위해서는 그 이외의 것을 머리 속에서 깎아내는 것이 필요했다. 방법은 안다. 감각 역시 알고 있어. 그렇다면 닿을 수 있을터인데도 닿지 않아. 그것이 그녀를 미치게 만들었다. 격전 속에서 달아올라야만 이루어지는 각성은 온전히 자신의 것이라고 할 수 없다. 일시적이나마 반응속도와 정밀함에서 인간의 한계를 넘었다 한들 그것은 고작해야 그 순간만의 것. 그 감각을 자유자재로 만들지 못한다면 진정한 의미의 신에는 닿지 않는다. 마음도 정신도 비워내고 무아에 자신을 맡기는 것 만이 그 방법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짐승이지 인간의 극이 아니기에.
권은 극한에 달했다. 인간의 권이라면 그리 말할 수 있었다. 허나 그녀가 추구하는 것은 그것이 아니다.
그녀는 천천히 눈을 떴다. 절벽 너머로는 구름이 바다를 이루고 군데군데에 솟은 산은 그 위세를 뽐내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은채 하늘에 닿아있었다. 그것들은 멀고도 동시에 가까웠으며 거대하기도 했으나 턱없이 작아보이기도 하였다. 그녀가 바라본 자연은 모순으로 가득했다. 타오르고 썩어들어 형체를 잃은 후에야 새로운 싹이 튼다.
그 싹이 어떤 방식으로 자라날지는 아무도 알지 못했으나 한가지 지혜만은 손에 쥘 수 있으니 그것이야말로 파각이었다.
그녀의 이상하리만치 높은 이상은 지금까지의 그녀를 부정했다. 용쓰지마라. 어떤 짓을 하더라도 '인간의 경지'로는 부족하다. 저 대자연의 이치를 몸에 새기지 않는다면 신에게는 절대 닿을 수 없어. 자신의 육체와 마음이 내는 소리. 그리고 이 세계가 내는 소리. 그것을 들을 수 있어야만 닿을 수 있다. 별에, 신에 닿기위해서는 자기자신을 부숴야만한다.
우성은 진룡파창에서 새로운 속성들을 완벽하게 적응하여 '극룡의 창'을 만들어냈다. 하지만 극룡의 창이 아직 더 성장할 길이 보였다. 그러나 이 극룡의 창을 성장시키려면 여러가지 힘을 신경써야 됐다.
일단 우성이 재해석한 극룡의 창은 여러 힘들과 권능들이 작용해서 , 최종적으로 창술로 구현하는 것이었다. 단순히 새로운 힘에 융화되는 창술이 아닌, 우성이 가진 모든 것을 표현하는 도구였다.
일단 첫 번째로 활성화 시키는 것은 '무혼공마신공'. 무혼공마신공의 음기는 적을 끌어들이는 힘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꼭 적만 끌어들여야 될까? 아니었다. 무한공마신공의 해석을 확장하여, 주변의 기운을 끌어들이기 시작했다.
두 번째로는 '동화' 와 '연비청공'이었다. 혼화공법으로 호흡을 순환하기 전, 마공으로 끌어들인 주변의 기운을 '자연'으로 받아들여서 다소 음기로 어두워진 기운을 동화시킨다. 우성과 기운은 동화가 되었고, 이는 곧 '연비청공'으로 동화된 힘을 신체에 담는다.
세 번째로는 연비청공으로 힘을 담았다면, 그 힘을 혼화공법으로 신체에 순환시키기 시작했다. '혼돈'을 메인으로 한 이 심법으로 자연스럽게 기운을 신체와 융화시키는 것.
여기까지가 혼화공법의 과정을 우성이 재해석한 것이었다. 자연으로부터 기를 무리없이 순환시키는 혼화공법의 메커니즘을 이해하게 된 것이었다.
지금부터는 혼화공법을 다음으로 창술을 구사하는 과정이다.
주변의 낯선 기운을 여러 권능들을 연계한 혼화공법으로 신체에 순환시켰고, 그 순환된 기운은 힘을 먹는 용의 기운인 '진혼성염룡'이 힘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면서 우성이 순환된 힘을 온전히 발휘할 수 있게 해석을 돕는다.
이 힘을 온전히 해석하면, 이 힘은 곧 공의 경지인 '음양(空)'으로 다른 힘들과 균형을 이루게 된다. 결국은 이 기운으로 '空'으로 이어지며 파괴의 힘을 담게 된다. 이 힘은 곧 '금강혼'으로 이어지게 된다. 무공이란 본디 기운을 이용해서 신체를 강화시키는 것이 기본 아니었던가.
그렇게 강화된 신체를 바탕으로 우성이 지금까지 갈고닦은 창의 기본이자 외공인 '신창합일'로 외부로 힘을 표출하면서 '극룡의 창'을 시전하는 것이었다.
극룡의 창을 시전하는 메커니즘을 해석하고, 자신이 가진 권능들을 효율적으로 사용하여서 가진 힘을 온전히 창술로 표현하는 것. 이것이 우성이 가고자 하는 새로운 경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