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공에서 하얀, 날개달린 말이 튀어나와 달려나간다. 쫙 펼친 날개는 어지간한 어른의 키보다 컸고 허공을 밟는 발굽에는 힘이 넘쳤다. 마력을 품은 하늘색 바람이 주변 일대를 날개짓과 함께 장렬히 휩쓸고 지나갔다.
오오- 하는 감탄사가 여기저기서 튀어나왔다. 괜히 내 어깨가 으쓱해졌다. 아니, 괜한 것은 아니지. 내가 만들어낸 나의 마법이니까 나는 충분히 자부심을 느껴도 좋았다. 저기 있는 인물 중 나보다 마력 랭크가 낮은 사람이 많지 않다는 건 일단 넘겨두고 적어도 오늘의 나는 엣헴! 하면서 가슴을 쭉 펴도 좋았다.
"만년 꼴등이 웬일이래" "...꼭 그렇게 말해야해?"
불편한 기색을 숨기지 않으니 그제야 미안하다며 네 머리를 헝클인다. 딱히 작은 편은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주변에서 유독 막내 취급을 받는 기분이 들어서 늘 묘했다. 세모꼴 눈을 하고 있자니 킬킬 거리며 물러서는 친구 놈의 정강이를 걷어차려다 실패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에잇!"
그리고는 그새 대기시간이 끝난 페가서스를 녀석한테 날려버렸다. 그러게 누가 놀리라고 했나요!
역시 스킬을 만드는 건 쉽지 않았다. 무엇이 부족한걸까? 잠시 고민하자니 조금 알 것 같았다. 이미지가, 부족했던 것 아닐까? 나는 활짝 피어난 물의 수국을 파하고, 잠시 정신을 집중하였다.
-어렸을 적 별명 중 하나는 '고양이'였다. 인상의 영향이 큰 별명이었는데, 싫어하지 않았다. 실제로 나는 고양이를 좋아하였고. 고양이들도 나를 잘 따랐던 것으로 기억한다. ..어쩌면 내가 자연에 가까운 존재여서 그랬던 것 아닐까? 잠시 옅은 웃음과 함께 옛 기억을 떠올린 나는 돌핀을 불렀다. 자연스럽게 주변을 헤엄치는 나의 돌고래. ....이미 전례가 있다. 내가 할 수 있다는 전례가. 그러니까..
물의 고양이를 부르자. 장난스럽고 변덕스러운 고양이는 내가 싫어하는 이들을 괴롭히는 걸 좋아한다. 그건, 나의 아군에게 힘을 주는 것이기도 하겠지. 돌핀 처럼 자유롭게 움직이는, 하지만 훨씬 공격적인, 고양이.
우성은 자신의 내면을 깊이 들여다보며 백화안을 통해 진룡의 본질을 직시했다. 그 본질은 매우 간단했다.
진룡은 특별한 존재가 아니었다. 그것은 단지 우성의 의지가 용의 형태로 사념체가 되어 탄생한 것에 불과했다. 형태가 용이었던 이유는 우성이 진룡파의 일원이기 때문이었다. 지금까지 진룡과 함께 싸우며 진룡이 살아있는 존재처럼 자신에게 깃든 것처럼 행동했던 것도, 결국 우성의 의지였다. 우성은 평범한 인간이다. 그의 몸 안에 진짜 용이 깃든다는 것은 애초에 불가능하다. 진룡이 혼돈을 머금어 진혼룡이 된 것도 결국 우성의 혼돈을 제어하고자 하는 '질서'의 의지가 진룡의 형태로 발현된 것이었지.
그러나 이러한 깨달음은 우성을 불쾌감하게 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이제까지 자신을 속박하던 족쇄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해주었다. 진룡이 자신의 의지임을 깨달은 것이다.
우성은 틀에서 벗어나 자신의 창 끝에 진혼룡의 기를 머금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제는 그것을 다르게 보아야 했다. 더 이상 '진혼룡' 기가 아닌 '우성'의 기였다. 우성은 창을 들고 초식을 연습하기 시작했다. 창끝에 자신의 기를 머금고, 베고, 휩쓸고, 찌르고, 연속으로 공격했다. 그의 모든 움직임은 더 이상 진룡의 것이 아닌, 우성의 것이었다.
'도서 회랑'에 가능한 많은 책들을 넣어두었지만 나는 여전히 도서관에 자주 발걸음을 옮긴다. 구매하지도 않은 책을 멋대로 회랑에 등록시키는 건 도둑질이나 마찬가지라는 생각이 첫번째고, 두번째는, 도서관의 분위기를 좋아하기 때문이다. 소음을 허락하지 않는 고요함 속에 퍼지는 책 넘기는 소리. 가끔 소곤소곤 귓속말을 하는 즐거운 목소리와, 책냄새. 베이지색 커튼 틈새로 흘러나오는 햇볕을 한움큼만 어깨에 올려두고 차분한 도서관 등불에 기대어 하나, 하나, 글자를 읽어가는 시간.
입가에 미소를 띄운 채, 이미 구입한 뒤 회랑에 넣어둔 책을 읽는 이유는 그것이다. 그러고보면, 이 회랑은 다소 신기했다. 단순히 책의 '사본'을 담아둘 수 있는 아공간인줄 알았으나, 얼마 전 '세상 모든 어린 아이들을 위한 실감 나고 즐거운 옛날이야기 모음집'에 나온 이야기 중 하나 '페가서스 구름'이 하나의 마법으로 구현된 것을 보고 무언가 다르다는 걸 알았다. 어떻게 된 구조일까? 단순히 도서를 담아두는 곳이 아니라, 어쩌면, 나와 아주 '연결된' 특수한 것이 아닐까?
잠시 고민하던 나는 의자에서 일어나 자리를 정리하고 도서관 밖으로 나왔다. 혹시 모르니 훈련실에서 고찰을 하는 편이 안전해보였다.
맨몸으로 전장에 나서는 무투가에게 있어 육체의 손상은 어느정도 필연적인 것이었다. 인간은 일반적으로 칼에 맞으면 죽고, 화살에 쏘여도 죽으며 망치에 머리가 깨져도 죽는다. 지금까지 내가 그나마 버틸 수 있었던 것은 부모님으로부터 물려받은 강건한 육체의 덕도 있겠으나 어느 순간부터 본능적으로 사용중이었던 마력의 사용법의 덕도 있을 것이다. 문제가 있다면 그것을 내 마음대로 발현하기 위해서는 상당한 집중이 필요하다는 점과 그렇게 회복되는 것에 수반되는 고통이 과도하다는 점 정도.
"이미지가 부족해."
치유의 이미지. 지금은 상처를 불로 지져서 강제로 봉합하는 이미지라 고통이 수반되는 것은 어느정도 당연하다면 당연할테지만 카르마나 다른 치유술사를 보더라도 그런 것은 없을 터. 그들과 나의 차이라고 한다면 마력의 성질이 대부분일것인데...
불꽃... 불꽃이 가지는 파괴적인 이미지 이외의 것이 잘 생각나지 않았다. 저 드넓은 천구의 중앙에서 우리를 비추는 태양역시 불꽃의 덩어리라는 말이 있던데 그렇게 치더라도 한여름의 살인적인 더위정도밖에 생각이 나지 않았으니.
"...곤란하군."
흔히들 생명의 불꽃이 타오른다고 표현을 하지만 그것을 납득하지는 못하는 점이 가장 큰 문제였다. 불꽃... 불꽃... 나는 왜 애초에 생명을 불꽃과 연관지으려 했지? 불꽃이란 대체 뭐지? 육체에 흐르는 미약한 불꽃의 마력을 느끼며 명상에 잠긴다. 답을 얻을 날은 요원한듯 싶다.
전장에서, 다소, 많은 일이 있었다. 어디 갔었냐고 묻는 친구들에게 애써, 그냥 길거리에서 여러 이야기를 들었다고 넘기고 돌아오는 길. 기숙사 방에 앉아 멍하니 창문 밖을 보았다. 약간, 아주 약간. 무언가 할 수 있었지만 결국 자신은 아슬아슬하게 방해만 안 된 수준에서 멈췄다. 느릿하게 숙인 고개로 이름 없는 나의 책과, 깃펜이 보였다. 나는 곧장 책상 앞에 앉았다. 책을 펼치고, 빈 페이지에 깃펜을 데었다.
"...남겨야지."
응, 남겨야해. 이야기를. 어른에게, 선생님에게, 아카데미에서 만난 친구들에게, 유려한 필체라 칭찬받은 글씨가 흘러간다. 오늘 직접 본 이야기, 귀동냥으로 들었던 내가 가지 못한 곳의 이야기. 내 마음 속의 이야기. 그것을 한데 적어내렸다. 그래, 이야기로 남기면, 좋은 일이 될 수도 있으니까. 그렇지 않다면.. 내가 그렇게 만들고 싶으니까.
"..역시 해피엔딩이 좋아."
오늘은 엔딩이 나지 않았다. 굳이 따지자면 1권의 마지막장이 끝난 느낌. 장기 연재가 기대되는 시리즈 물의 첫 권. 그 에필로그. 혹은 그 앞의 에피소드. 수천개의 마침표 중 겨우 하나다.
언젠가 오늘과 같은 일이 일어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무엇을 하고 싶은가. 그저 남기고만 싶은가?
그 전장에서 함께했던 사람들에게는 미안하지만, 사실 정말로 즐거웠다. 떨리고 긴장되고 약간은 두려웠지만. 그와 함께 마음 속에 두근거림이 있었다. 격동의 시대, 영웅들의 이야기. 그것을 직접 두 눈으로 본다는 점에서. 그리고, 그 이야기 안에 나 역시, 발자국을 남기게 되었다는 점에서. 그러니까.. 멈춰서고 싶지 않았다.
탁.
오늘 있었던 기록을 마무리 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번 일의 제목은- 역시, '시작되는 전란' 정도, 려나.
호수 위에 '누운' 채 하늘을 보았다. 뻥 뚫린 밤하늘의 별을 하나하나 세보려다 그만두고 오늘을 되새겼다. 정말로 위험한 일이 많았다. 진-짜로. 레오넬은 내가 갔음에도 많은 이들이 죽고 다쳤다. 인형사와의 전투에서 나름 역할은 하였지만, 카르마의 전 가주 '레이나스'씨의 도움이 없었다면 많이 힘들었겠지. 거대한 손 역시 마찬가지이다. 요정의 힘을 부를 시간도 부족해서- 꾸역꾸역 밀고나간 것이 최선이었다. 모비도 힘을 많이 썼지.
역시 아직 부족한 것일까? 나는 인간이다. 동시에 요정이기도 하다. 나 자신의 인식은 아직 인간..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요정의 삶은 현생보다는 전생이고, 나는 이 삶에서 아직 인간으로 산 세월이 길었다. 하지만 어떨까, 10년이 지나고 20년이 지나고, 100년이 지나 인간의 수명을 넘어선 뒤에는? 나는 여전히 나를 인간으로 여길까. 요정의 삶이 싫지 않다. 요정들 역시 좋아한다. 아직 나는 많-이 부족하지만, 무의식적으로 요정들을 지켜야한다는 마음을 가질 때가 있다.
어느 쪽이든 좋다고 생각한다. 인간이면서도 요정, 요정이면서도 인간. 그 어느것도 놓치지 않은 지금의 내 상태는 독특하고, 또 무척 마음에 든다. 선택은 최소한 100살 때 하는 게 맞지만. 힘겨운 하루를 보내고 나니 생각이 많아지는 것도 어쩔 수 없구나.
"..인간은, 요정의 격을 넘볼 수 없는걸까?"
내가 이상한 상태라 그런가. 이런 생각이 든다. 인간으로써의 격을, 나의 요정으로써의 격과 맞추고. 일생, 평생, 아득히 남은 시간동안 그 모든 것을 포기하지 않아도 될 수는 없을지.
"일단, 요술에 의존하지는 말자."
땅의 요정이 보상으로 준 '랜드렐라'는 땅에 대한 친화력을 높여주었다. 카셀라와의 계약은 얼음에 대한 친화력을 높여주었다. 이건 나의, '요정'으로써의 영역은 아니지만, '마법'으로 다룰 수는 있다. 언제까지나 요정에게만 의존하지 않도록, 인간의 기술인 마법에도 힘을 쏟아보자. 그런 생각이 들었다.
수련장이었다. 하우성은 저녁의 평온한 분위기 속에서 창을 손에 들고 서 있었다. 그가 사용하는 창, 블러디 쉐도우.. 신창합일의 경지를 이루기 전, 그러니깐 창의 공명이라는 경지를 넘었을 시기부터 이상하게 창의 의지가 느껴지는 듯했다. 하지만 우성은 이를 헛것이라고 생각하여,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하지만.. 수련이든 실전이든.. 이상하게 우성의 의지와 조금씩 엇나가기 시작하는 창술의 초식들.. 분명 자세와 호흡 그리고 타이밍까지 완벽했는데도.. 엇나가기 시작했다.
신창합일의 경지를 이루고나서는, 이상하게도 창의 의지가 더 선명하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왜 말을 안 걸어주냐는 듯이.. 우성은 혹시나 진짜로 창에게도 의지가 있는가 생각을 하여서, 창에게 말을 걸어보기로 했다.
하우성은 먼저 눈을 감고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그의 주변에는 아무도 없었다. 고요한 바람 소리만이 그의 귓가에 스쳐 지나갔다. 그는 자신의 심장의 박동에 귀를 기울이며 마음을 차분하게 가다듬었다.
천천히 눈을 뜨며, 하우성은 창을 쥐고 살살 쓰다듬기 시작했고, 마치 친구에게 말하듯 속삭이기 시작했다.
"혹시 화가 많이 났니?"
"미안해, 내가 몰라서 그랬던 거였어. 지금까지 나와 함께 싸워오느라 많이 참았을 텐데.. 많이 외로웠지? 고생했어."
이러니저러니해도 현재는 '요정'이 차지하는 부분이 더 많은 것 같단 말이지, 나. 자그마한 꽃을 피워 캐시(물고양이) 앞에서 살랑살랑 흔들며 고민하고 있자니, 일단 요정의 영역에 가까운 '물'이 아니라, 조금 더 다른 걸 다뤄볼까 고민이 들었다. 예를 들자면... 나는 내 손안에서 하늘거리는 꽃을 바라보았다. 이번에 만들어낸 스킬이나 권능도 꽃에 가까우니까..
"흐음."
꽃에 관련된 마법에 대해 좀 물어볼까..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걸음을 옮겼다. 누구에게? 레미 선생님에게!
책, 책이라. 벤치에 앉아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며 일전에 있었던 일에 대하여 생각했다. 어쩌다보니 진룡파의 어두운 과거에 대해 알게되었고, 먼 과거에 있는 실패한 광신에 대한 것도 알게 되었다. 같이 간 우성 선배가 진룡파의 대사형이니까 혹시 '우리 문파의 그림자를 알게 되다니 그대로 둘 수는 없겠군'이라 하는 전개도 상상해봤지만, 당시 화내신 걸 생각하면 그런 일은 없겠지? 품안에 있는 '네로'를 살살 쓰다듬으며, 그 이후를 다시 떠올렸다.
알 수 없는 공간, 누군지 모를 목소리. 황금빛의 문자들, 그리고 도서관에 대한 이야기. 나는 얌전한 네로를 들어올린 뒤 눈을 마주치듯, 표지를 보았다.
"..너는 뭔가 아나요?"
딱히 대답을 기대하지 않은 채 중얼거리고 일어섰다. 늘 주머니에 들어있는 열쇠를 꺼내 허공에 꽂아넣고 빙글 돌렸다. 곧, 문이 열리고 나는- 이제는 익숙한 세상에 발을 디뎠다. 가장 먼저 느껴지는 것은 책냄새. 그리고 시야를 가득 메우는, 끝 없는 책장의 숲. 사랑해 마지않는 환상의 도서관으로 한 걸음, 내딛었다.
"-엄밀히 말하면,"
손에서 놓은 네로는 어느새 내 옆을 둥실 따라오고 있다.
"모든 책은 일종의 역사서..의 성격도 띄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해당 이야기에서 보이는 시간, 공간적 배경. 인물들의 태도, 사고방식이나 보여지는 문화. 대사의 형식, 문체, 이야기를 이루는 형식 등등. 해당 이야기가 작성된 시기의 특징이 반영되는 건 어쩔 수 없으니까요." "그러니 소설만 모았다고 하여, 후세에 단순히 이야기만 보내는 것은 아니겠습니다만.."
..으음.
"...사실 저는 그냥 소설이 좋아서 모았을 것도 같습니다. 그, 제가 그럴 것 같거든요. ...네로는 어떻게 생각하나요?"
필리아는 훈련장의 정 중앙에서 숨을 거칠게 쉬고 있었다. 그녀의 주변은 이미 박살이 나버려 아슬아슬하게 형체만을 유지하고 있을 뿐 제 기능을 유지하는 것은 거의 한계에 이른 듯 보였다. 방금 있었던 자그마한 폭발의 여파인지 얼음 조각과 빨갛게 달아오른 돌덩이들이 주변에 이리저리 굴러다닌다. 나는 왜 이렇게 야무지지 못할까, 필리아는 그렇게 생각했다. 바닥에 땀이 섞인 눈물을 흘리며 그렇게 생각했다. 1년이 지났지만 크게 변한 것이 없는 것처럼 느껴졌다. 육체적으로는 확실히 성장했으며 스스로도 그것을 부정하는 것은 다른 이들에 대한 기만이라는 것을 알 수 있을 정도였으나 그렇다고 하여 바라는 수준에 이를 수 있었나 하고 생각을 다시 해본다면 그것은 절대 그렇지 않다고 할 수 있었다. 정말이지 야무지지 못하다. 가족들에게 폐를 끼치고 싶지 않다고 생각하는 주제에 배워온 것도 할 수 있는 것도 자해를 해야 겨우겨우 남들의 발끝을 따라가는 정도.
“선배님! 괜찮으십니까!!”
훈련장 바깥에서 대기하던 여학생과 남학생들. 신입생이라고 들었기에 큰 신경을 두고 있지는 않았으나 서로 훈련을 하는 시간이 겹쳐 만나는 일이 잦아지다 보니 자연스럽게 가끔이나마 훈련을 함께 하는 사이가 되었다. 얼마 되지 않는 시간, 돌아온 이후 얼마나 시간이 지났는지 생각해본다면 정말 짧은 시간 동안 함께한 사람이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들은 지금 나를 걱정해주고 있었다. 딱히 의미가 없다는 것을 잊었는지 평범한 모포를 들고 달려오는 여자도 있었다.
그들이 바라보는 태도는 어떤 의미를 지닌다. 내가 멈추어서는 안된다는 것.
“괜찮으신가요?”
괜찮다. 나는 괜찮아. 그저
“---아직 마력 조작이 익숙하지 않을 뿐이야.”
필리아는 고개를 들었다. 눈물을 닦고 가져다 준 모포를 들어 흘렀던 땀까지 닦아냈다. 모포를 가져온 여자가 피가 잔뜩 묻어나오는 것을 보고 으아, 소리를 지르자 훈련장 위에 웃음소리가 새어 나왔다.
필리아는 그제서야 생각이 났다. 이미 나아가기로 결정했다. 스승님과 나누었던 그 한마디를 마지막으로 나는 재해가 되기로 한 것이다. 그 이유를 묻는다면 분명히 그것은 이런 사소한 즐거움을 지키기 위해. 그래서일까. 아니면 상관없이 예전부터 그런 걸까. 다들 서스럼없이 다가오며 신경 써주고 있다. 내 그릇에는 이들의 마음이 담긴 것이다. 이들이 나를 받쳐준 덕분이다. 설령 극단적으로 짧은 인연이라고 하더라도 가감없이 이야기해주고, 말해주고, 나는.
“음, 충분하군. 다들 고맙네. 답례라고 하기에는 부족하지만 선배로서 훈련을 조금 도와주고 싶네만.”
필리아는 훈련장에서 두 가지 흐름을 보았다. 하나는 이미 나의 훈련을 경험해 슬금슬금 도망치고 있는 동기와 후배들. 그 앞을 차지한 선망하는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는 아직 무엇도 모르는 신입생들. 고작해야 훈련이거늘 그런 식으로 도망치는 것은 좋지 않지. 무엇보다도 스승님과의 훈련에 비한다면 내가 감독하는 근육트레이닝은 아주 상냥한 편이었다.
“자 우선은 다들 근육을 식히는 것부터 해보세나.”
문신의 마력을 돌린다. 자연적으로 흐르고 있는 화염의 마력을 침식하는 냉기로 몸을 식히고 가볍게 도약하여 문을 잠그었다. 잡기가 생기다보니 이런 점은 아주 즐거웠다.
그녀는 얼마 전에 있었던 일을 떠올립니다. 정체모를 문을 열고 공간의 틈새로 빠졌던 그 때의 일이요. 생전 처음 듣는 이야기 - 암월검이라거나, 하나밖에 남지 않은 무언가라거나, 네 개의 가문이 힘을 합친다거나(가능할 지는 모르겠지만요)- 도 있었고, 명백히 레오넬과 연관된 대화도 있었죠.
레오넬의 비기라는 말에 초대 가주인가 싶었지만 그녀가 알고 있던 초대 가주와는 목소리 - 정확히는 성별-이 달랐으니 초대 가주는 아닌 것 같은데, 가주 이전의.. 그러니까 가주랑 별개로 레오넬 가문 자체를 세운 사람일 수도 있지 않을까. 등을 생각하던 그녀의 머릿속에 한 가지 이름이 맴돕니다. 아그니. 라고 했었죠
뭐, 아그니라는 이름 자체가 아예 처음 듣는 이름은 아니였습니다. 당장 그녀가 가지고 있는 권능에도 언급되는 이름이였으니까요. 염신 아그니. 레오넬 가문에 대대로 내려지는 가호의 주인이자, 가문 종특인 급발ㅈ.. 아니아니, 불같은 성격의 근원인 레오넬 하트 또한 불의 신과의 계약의 부가효과로 추정된다고 했었으니까요.
이쯤 되면 네. 궁금증이 더 일 수밖에 없죠. 마음먹은건 행동으로 옮기라고 했던가요? 그녀는 가문의 고서 중에서도 오래된 것들을 찾아보고, 그것과 별개로 가주인 자신의 아버지에게도 찾아가 아그니에 대해 물어보려고 합니다. 혹시 모르잖아요? 고서랑 별개로 가주들만 알고 있는 무언가! 가 더 있을지.
저번 동굴에서 록시아는 신기에 대한 얘기를 들었다. 엘펜하임은 자신이 신기가 아니고 내가 사용하는 것들이 신기라고 하였다. 내가 사용할 수 있는 신기들은 카르마의 방패와 성창 브류나크. 그렇다면 다른 신기들도 있는 것일까? 창이 있다면 검도 있을 것이고 활도 있는 것일까?
" 아니면 신기란 그저 개념적인 것에 불과한 것인가? "
내가 신기라고 인식한다면 그것이 신기가 되는 것인가? 그렇다면 지금은 어째서 방패와 창만 있는 것일까? 계속 꼬리를 무는 의문에 나는 결국 답을 내는 것을 포기했다. 하지만 무언가 방향성은 정할 수 있었기에 결국 나는 신성력으로 검을 만들어 보았다.
" 검술을 모르니 휘두르는건 안되겠지만 ... 염력으로 여러 자루 날리는건 되지 않을까? "
조용히 중얼거리며 나는 신성력과 마성력으로 이루어진 검을 여러 자루 만들어 염력을 이용해 날리는 연습을 진행해보았다.
오늘은 실습이 있는 날이라고 했다. 각자 자유롭게 연습을 하고 그것을 보여주면 된다고 했기에 나는 가장 자신 있는 번개 마법을 연습하기로 했다. 번개 마법엔 여러가지 종류가 있지만 난 그중에서도 파괴력이 높은 번개를 한줄기 떨어뜨리는 라이트닝 마법을 좋아한다. 록시아님이 칭찬해준 것도 그거고!
뿅! 당신이 말을 걸었을때 묵묵부답이던 창이었지만, 갑자기 떨리는가 싶더니 창날에서 무언가가 튀어나왔습니다. 그것은 손가락 마디 두개 정도의 요정같은 무언가. 아마 이 경우에는 창의 정령이라거나 생령이라고 봐야할거 같습니다. 생긴것은 당신의 창과 닮은 검은 머리색을 시작으로 창의 배색을 그대로 따라간 옷을 입고 있습니다.
"맨날 내 말 무시하고!"
쒸익- 쒸익-. 생령은 허공에 발을 구르며 화를 냈습니다. 친해지려면 시간이 좀 걸릴거 같습니다.
『Bloody shadow』 - 공격 최대값 +200, 공격 적중때마다 출혈*
신창합일 +5 : 창, 장류 무기 사용시 공격 최소값 +300, 회피 최소값 +20 | [CP]
책은 말을 할 수 없다. 이것은 상식이다. 세상 어디에 말을 하고 소리를 내는 책이.. 있긴 하겠지. 세상은 무척이나 넓고, 마법은 글자의 수만큼 다양하다. 그러니 그런 책이 있을 순 있는데, 대부분은 아니다. 허나 그들이 침묵을 하는 것 역시 아니다. 몸에 새긴 단어, 잉크로 적힌 글씨로 그들은 자신을 나타낸다. 그러니까-
".."
나는 심연의 깃펜을 들었다. 여태껏 모아두었던 돈을 써서 고급 잉크까지 구비해두었다. 그리고 네로를 펼친 뒤, 조심스럽게 펜끝을 대었다. 무슨 말을 하는 게 좋을까? 깃펜을 든 것은 좋고, 네로를 펼친 것도 좋았다. 하지만, 무엇을 쓸지에 대해서는 머뭇거리게 되었다. 인삿말을 적을까? 대화를 하는 것처럼? 아니면 다른 방법이 있을까?
그 고민 끝에 나는-
그날은 유독 아침이 빨랐다. 새가 아침녘에 인사를 하기도 전에 일어났으니. 평소라면 조금 더 자자며 이불을 둘러썼을 시간에도 이상하게 정신이 맑았고 눈꺼풀이 끈적거리며 떨어지길 거부하지도 않았다. 이렇게 일찍 일어나는 것도 오랜만이라, 모처럼이니 산책이라도 할까 싶어 몸을 일으켰을 때 머리맡에서 뭔가 침대의 요동과 함께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났다. 그곳에 있던 건 한 장의 종이였다. 누가 둔 것인지도 모를 그건 펼쳐서 확인하니 지도였다. 어디서, 누가, 왜, 무엇 때문에, 언제, 어떻게 가져다 놓은 것인지 모를 수상쩍인 지도를 처음에는 무시하려고 하였다. 그러다가 그저 어디로 향하는 지도인지 확인했을 때- 나는 이게 함정이라도 어쩔 수 없겠구나 하는 확신을 얻었다.
'환상의 도서관' 그 여섯 글자를 보았을 때 나는 가장 먼저 한숨을 내쉬고 말았다. 내가 여행을 떠나게 되겠구나, 평생 책이나 읽을 줄 알았던 인생이 이리 흘러갈 줄은 몰랐다. 그리고는 짐을 챙겼다. 가진 재화와, 몇 권의 책. 옷 몇 벌, 필기구. 커다란 가방에 물건을 집어 넣으면서 나는 점차 가슴께가 두근거렸다. 이야기의 시작 같지 않은가?
천천히, 내가 네로를 만나기까지의 이야기를 적어내리기 시작했다. 조심조심, 한 글자 한 글자 정성스럽게.
나는 정갈하게 무릎을 꿇고 앉아, 두 손을 모으고, 그 위에 '물의 요정'을 올려다두었다. 내 양 손바닥 위에 올라갈 정도로 작고, 귀여운, 내 친구 물의 요정. 언어는 사용할 수 없으나 소리를 어느 정도 내는 것이 가능한 이 아이는 발랄하게 방긋방긋 웃으면서 나를 보고 있었다. 여행 길에 만나서 잠시 동행하다 자연스럽게 친해진 이 친구는, 아직 이름이 없었다.
"슬슬 이름을 정해주려고 해. 괜찮을까?"
아이는 어렴풋이라도 이해한듯 방방, 손바닥 위에서 뛰어올랐다. 손에 느껴지는 말랑한 촉감이 슬그머니 웃고선, 최근 고민했던 이름을 말했다.
"'플루'. '흐름'을 의미하는 오래된 말에서 따왔어."
네가 크게 자라서, 거대한 흐름이 되어 너 자신을, 또 많은 이들을 지킬 수 있기를. 또한 모든 자연은 결국 흐름 속에서 살아가게 되어있으니, 네가 대단해지길 바라. 플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