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데미는 미소 짓는 걸 좋아했다. 아니, 좋아하게 되었다. 나누지 못한 슬픔이 배가 되기 전에 기쁨 속에 가라앉을 수 있도록. 하지만 어깨를 짓누르는 무게감이 사라진 후에는 더는 그럴 필요가 없었다. 이젠 거짓말 같은 거 하지 않아도 된다는 안도감에 온전한 자신을 드러낼 수 있었다. 감정에 솔직해진 이후로 히데미는 조금 더 차분해졌다. 아야카미에 갓 상경했던 과거의 소년은 지금과 같았으니까.
어떤 콧수염 아저씨가 이렇게 말했다. 인생은 가까이서 바라보면 비극이나 멀리서 바라보면 희극이라고. 언젠가 가벼이 지나쳤던 문구 한 줄, 그 안에 담긴 진짜 의미가 무엇인지 잘 모른다. 여름의 끝자락을 지날 무렵 눈물이 나지 않았던 건 어쩌면 꺼져가는 불빛을 더는 바라보지 않아도 된다는 안도감 때문이었을 테다.
기억 속 새겨진 흔적에 잠시 취해본다. 언젠가 엄마 아빠와 셋이서 들렀던 돗토리 사구. 한여름밤 해변에 은하수가 펼쳐진다. 홀로 뉘인 바닥은 차고 넓었다. 저 수많은 별무리 사이로 길고 먼 숨바꼭질이 시작될 무렵. 소년은 깨달았다. 지평선은 모래로 가득 채워졌지만, 그 순간이 아늑했던 것은 그보다 더 큰 존재감이 있었기 때문이었어. 밤하늘에 마음을 놓일 수 있는 건 닿을 수 없을 만큼 멀지만 매일 바라볼 수 있기 때문이다. 서로에게 별이 되어버린 거리에서. 은하수 아래 눈을 깜빡이던 소년은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나도 누군가의 별이 되어줄 수 있을까?
"으응, 가나?"
들려오는 목소리에 혼잣말을 중얼거리다 보면 침대로부터 끼익, 눌리는 소리가 귀를 긁는다. 고작 점심 메뉴 따위나 고민하듯 느긋한 어조다. 히데미는 소파에 더욱 깊숙이 몸을 기댄 채 대충 거리를 어림잡듯 손을 펼쳐본다. 불과 몇 달 전이었다면 갑자기 무슨 소리냐고, 정말 가버리는 거냐고, 와앙 서럽게 칭얼댔을 테지만. 지금은, 마음이 식어버린 건 아닐까 싶을 정도로 무던한 몸짓과 표정일 뿐이다.
백색 소음이 넓어진 대화의 간격 틈을 비집고 들어온다. 머리카락 끝이 오싹 인다. 수액이 한방울 한방울 떨어지는 진동이 느껴질 정도로. 같은 공간, 다른 시선. 감정에 솔직해질수록 가슴 속에 담긴 잡음은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짙어져서. 가슴 위에 손을 얹는다. 원래부터 말수가 적진 않았었잖아. 겁이 많고 낯설어서 그랬지. 그리고 지금은.. 뭔가 조금 서운한 마음이 들어서 그럴지도 모른다.
옷소매 끝에 달린 단추를 어색하게 어루만진다. 좀 바보 같네. 불꽃놀이가 있던 지난밤과 저녁이 다가오는 병실에서도. 답지 않게 단정한 교복차림이라. 우연인지 뭔지. 그런 마음에 실소를 흘렸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다음으로 이어지는 말 한마디에 금세 놀란 토끼 눈이 되어버렸다.
고개를 돌려보지만 보이는 건 병상에 누운 뒷모습뿐이라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알지 못했다. 이런 그림이 낯설진 않았다. 이렇게 가까이 있으면서도, 금방 닿을듯하면서도 다시 멀어지기를 반복하고 마는 게.
"내도 그러고 싶네."
가까워진만큼 언젠가는 다시 멀어지고 말겠지. 그래서 일말의 기대감 없이 막연하게 답했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누군가의 어깨에 기대는 게 습관이 되어버려서. 이대로 손을 잡고 따라간다면 정말 당신밖에 바라보지 않을까 봐. 그런 바보가 되어버린 채로. 언젠가 예고 없이 찾아올 이별에 무너져 내릴까 봐. 그게 두려워서 곧바로 '좋아.' 라고 답할 수가 없었다.
"와 내 멀쩡한 방 뺀다칸줄 아나? 여 첨머이 왔을 때 아저씨하고 약속한 게 있다. 울 어무이 다 나을 때까지만 신세 지겠다고. 가시는 길 방학 내내 잘 모시고 왔으니까네. 인자 마 받을 거 다 받았다 생각하고 내 알아 단디할라켔다. 그랬는데."
말은 끝까지 이어지지 않고 입술은 앙다물어졌다. 히데미는 소파가 들썩일 정도로 거칠게 자리에서 일어나 침상 앞에 몸을 기댄다. 마치 '얼굴 보고 얘기해.' 라고 말하듯이 고개를 깊이 숙이자 중력에 이끌린 머리칼이 눈앞을 가린다.
재능이 뛰어난 사람일수록, 가르치는 일에는 뛰어나지 않다. 어떻게 보면 편견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쓸모 없이 길다란 삶을 살아오며 겪은 것들이, 그리고 지금의 내가 그것을 증명하고 있으니 반쯤은 편견이 아니라 자기고백에 가까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허전한 손가락을 채우기 위해 침상 옆에 있던 작은 수납장을 뒤졌다. 아마도 이쯤에 담배를 넣어두었을 것이다. 마키라면 내 마음을 아주 잘 알고 있을 테니까. 다만 문제가 있다면 나는 타인의 마음을 알아차리는 것에 대해서는 끔찍할 정도로 잼병이었고, 아무리 제 편한 것을 쫓는 마키라고 한들 믿음직스러운 환자가 홀로 있는 방 안에 그런걸 넣어 둘 가능성이 없다는 것이었다. 갈 곳을 잃은 손은 허공을 휘젓다 이내 가지런히 모여 가슴께로 올라왔다. 그냥, 그렇다고.
천천히 그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고막을 때린다. 안다. 이런 투정은 그냥 나 때문에 일어난 일과, 일어나게 될 일. 그 모모든 것 외면하고 도망치는 것뿐이라는 것을. 모를 수 없었다. 하지만, 나도 무섭다. 무서워. 빈말로도 아야카미와 도쿄는 가깝지 않았다. 그리고, 망각은 몸이 멀어지는 순간부터 찾아오는 법이다. 몇 년간 가까이 지낸 사람들마저 나의 말을 믿어주지 않고 이해하기 힘든 무언가를 바라보듯 공포에 떠는 모습을, 그리고 그들의 틈바구니에 섞여 어느새 ‘나’의 흉내를 내고 있는 ‘다른 것’을. 내가 해온 것과 완전히 동일할 수 밖에 없는 일임에도. 나는 그것을 이해하지 못한다.
매일 밤 꿈을 꾼다. 그 안에서는 누군지도 알 수 없을 정도로 난도질 당한 얼굴을 가진 불특정다수가, 눈꺼풀이 사라진 채 원망스럽다는 듯이 나를 내려다보고 있어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나는 그냥 눈물을 흘리며 저지른 적 없는 죄에 대한 사죄를 반복한다. 나는, 잘못하지 않았는데. 그 누구의 축복도 받지 못하고 태어난 나는, 그것을 받아들이는 것 이외에는 그 무엇도 생각할 수 없었다.
가까워진다면, 그것의 배는 되는 거리를 떨어지게 되는 것이 운명이라면. 나는, 이번에도 그저 놓아 주어야 하는 걸까. 사지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그저 침대에 누워 온 몸의 힘을 빼는 것 만으로 힘을 모두 써버린 것처럼. 그 끝을 알 수 없는 탈력감에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흘렀다. 이건, [야요이]의 감정이 아니구나. 응, 그렇겠지. 어쩌면 아직도 외면하고 있었던 걸까. 각성의 순간은 정말 예기치않게 찾아온다. 그냥, 흐르는 눈물에 겹쳐서 웃음이 나와서. 천천히 손을 들어 히데미의 뺨을 쓰다듬었다.
“고작해야 고1이 그런 거 생각하는 거 아니야.”
아무래도 내가 사랑하게 된 남자는, 아직 어린 모양이었다. 응, 그렇겠지. 이 아이는 그날 만났던 그 사람이 아니다. 영혼의 형태가 같더라도, 그것을 담아내는 그릇도 그 안에 담긴 것의 형태도 전혀 다른 사람. 죽은 사람은 돌아오지 않는다. 하물며 수백년도 더 전의 일. 같을 수는 없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이렇게 고민하고 있는 아이를 내버려둘 수도 없는 것이다. 어찌되건,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니까. 육체가 아닌 영혼의 형태. 이 아이는 잊어버리게 될지 모르겠지만, 나는 그것을 영원히 안고 가야만 하겠지.
“………서로에게 기대어 살아가면 돼. 모자란 사람들끼리는.”
나만을 바라보지 않게 되더라도, 좋다. 나의 이름을 더 이상 부르지 못해도, 좋다. 네가 이별을 고하기도 전에, 내가 먼저 다하는 일도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