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원의 약품 냄새는 좋아하지 않았다.아릿한 향이 코를 찌르면 머리가 깨질 것 같았으니까. 어느 구역에 감도는 침울한 분위기는 더더욱 싫다. 준비할 틈도 주지 않고 이별을 마주해야만 했기에. 그저, 그런 기억들이 싫었다. 떠올리는 것만으로 눈물이 흘러 넘칠 것 같은데, 그것을 용납하지 않는 것 같은 분위기가. 시간이 흘러 상처가 아물면, 그 사이를 못 기다리고 새로운 상처를 새겨버리는데. 좋아해야 할 이유가 없었다. 이별, 그래 이별. 그냥 그렇다. 익숙해지기 보다는, 익숙해져야만 하는 것들이 싫었다.
“그,렇구나… 응, 잘됐네.”
조용하고 길게 늘어지던 호흡이 멈추었다. 조금 흘러나온 눈물을 억지로 삼키고, 허무하게 녹아버린 미래를 바닥에 깔고. 그냥 천천히 걸음을 옮겨서 침대 위에 앉았다. 오랫동안 서있을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아니었다. 그런가, 많이 좋아졌구나. 어른이 되어 버렸어. 이상하네, 분명 나이는 내가 더 많은데. 어쩐지 말하는 것에서 느껴지는 짊어진 것들의 무게가 괜히 더 크게만 느껴진다. 그의 얼굴이 편안해 보이지는 않았다. 편견이겠지만. 그렇다고 슬픈 것 같지도 않았다. 아마 이것도 편견이겠지.
목 끝까지 차오른 이야기는 많았다. 서로 이야기 하지 못한 여름의 끝자락에서부터, 지금까지 있었던 일이나… 하고싶은 이야기가 분명히 많았는데. 앉아서 바라본 눈동자 속에서 느껴지는 일종의 체념이 기분 나쁘게만 보여서. 웃을 수 밖에 없었다. 내가 이렇게 나약하다는 걸 알 게 되어버리니까.
“난… 음… 이번 문화제가 끝나면 도쿄로 갈거야.”
아마 자퇴하는게 되려나. 조금, 아니 너무 많이 늦은 것 같지만. 하고 헤픈 웃음을 흘렸다.
심장이 너무 아파와서. 당장에라도 터질 것 같이 아파서.
전해야 하는 말을 전하지 않고 거짓말을 내뱉는 내가 너무 한심해서. 이렇게까지 왔는데도 솔직함을 외면하는 내가 너무 미워서.
그냥 바보처럼 헤헤 웃고는 침대 위에 누웠다. 투명하게 보이는 천장 너머에는 무늬가 그려져 있었다. 저건 구름일까. 나는 지금 하늘에 있는 걸까? 그랬으면 좋겠다. 차라리 아무것도 보지 않고 아무것도 사랑하지 않을 수 있다면 좋을 것 같다고. 진심으로 생각했다. 사랑하는 사람이 내뱉는 걱정의 말이. 순수하게 내뱉는 칭찬의 말이.
머리 속에 울려대는 강렬한 음악이, 짜증나.
[Fine, oh no, everything's fine] 아니, 괜찮아요. 다 괜찮아요..
[I'm not sure why I booked today's appointment] 제가 오늘 왜 예약을 잡았는지 모르겠네요...
날씨가 좋았다. 어지럽다. 그냥. 그냥. 공장의 굴뚝에서 뿜어대는 먹구름이 하늘을 메우고. 비는 내렸다 말았다를 반복하면서 워커의 안쪽까지 빗물로 적시는데다. 오랜만에 입은 귀여운 옷은 흠뻑 젖어서 형체도 알아볼 수 없고.
시큰둥한 눈빛으로 창문 밖을 쳐다보았다. 잘 보이지 않았다.
떨어지면
아플까.
인간적인 감상이 어울리지 않는 주제에. 인간적인 상상을 하고는 했다.
어딘가 내 안에 있는 나약한 부분이 알 수 없는 사건으로 무너지게 되면 언제나 남는 것은 이미 넝마짝이 되어버린 이성 뿐. 건강하게 살아달라, 무슨 말인지는 안다. 나도 히데미나 밴드 멤버들에게는 오래 살아주었으면 하니까. 사장님은, 뭐 갈 때 되면 가던가. 그러면 된다.
히데미는 미소 짓는 걸 좋아했다. 아니, 좋아하게 되었다. 나누지 못한 슬픔이 배가 되기 전에 기쁨 속에 가라앉을 수 있도록. 하지만 어깨를 짓누르는 무게감이 사라진 후에는 더는 그럴 필요가 없었다. 이젠 거짓말 같은 거 하지 않아도 된다는 안도감에 온전한 자신을 드러낼 수 있었다. 감정에 솔직해진 이후로 히데미는 조금 더 차분해졌다. 아야카미에 갓 상경했던 과거의 소년은 지금과 같았으니까.
어떤 콧수염 아저씨가 이렇게 말했다. 인생은 가까이서 바라보면 비극이나 멀리서 바라보면 희극이라고. 언젠가 가벼이 지나쳤던 문구 한 줄, 그 안에 담긴 진짜 의미가 무엇인지 잘 모른다. 여름의 끝자락을 지날 무렵 눈물이 나지 않았던 건 어쩌면 꺼져가는 불빛을 더는 바라보지 않아도 된다는 안도감 때문이었을 테다.
기억 속 새겨진 흔적에 잠시 취해본다. 언젠가 엄마 아빠와 셋이서 들렀던 돗토리 사구. 한여름밤 해변에 은하수가 펼쳐진다. 홀로 뉘인 바닥은 차고 넓었다. 저 수많은 별무리 사이로 길고 먼 숨바꼭질이 시작될 무렵. 소년은 깨달았다. 지평선은 모래로 가득 채워졌지만, 그 순간이 아늑했던 것은 그보다 더 큰 존재감이 있었기 때문이었어. 밤하늘에 마음을 놓일 수 있는 건 닿을 수 없을 만큼 멀지만 매일 바라볼 수 있기 때문이다. 서로에게 별이 되어버린 거리에서. 은하수 아래 눈을 깜빡이던 소년은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나도 누군가의 별이 되어줄 수 있을까?
"으응, 가나?"
들려오는 목소리에 혼잣말을 중얼거리다 보면 침대로부터 끼익, 눌리는 소리가 귀를 긁는다. 고작 점심 메뉴 따위나 고민하듯 느긋한 어조다. 히데미는 소파에 더욱 깊숙이 몸을 기댄 채 대충 거리를 어림잡듯 손을 펼쳐본다. 불과 몇 달 전이었다면 갑자기 무슨 소리냐고, 정말 가버리는 거냐고, 와앙 서럽게 칭얼댔을 테지만. 지금은, 마음이 식어버린 건 아닐까 싶을 정도로 무던한 몸짓과 표정일 뿐이다.
백색 소음이 넓어진 대화의 간격 틈을 비집고 들어온다. 머리카락 끝이 오싹 인다. 수액이 한방울 한방울 떨어지는 진동이 느껴질 정도로. 같은 공간, 다른 시선. 감정에 솔직해질수록 가슴 속에 담긴 잡음은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짙어져서. 가슴 위에 손을 얹는다. 원래부터 말수가 적진 않았었잖아. 겁이 많고 낯설어서 그랬지. 그리고 지금은.. 뭔가 조금 서운한 마음이 들어서 그럴지도 모른다.
옷소매 끝에 달린 단추를 어색하게 어루만진다. 좀 바보 같네. 불꽃놀이가 있던 지난밤과 저녁이 다가오는 병실에서도. 답지 않게 단정한 교복차림이라. 우연인지 뭔지. 그런 마음에 실소를 흘렸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다음으로 이어지는 말 한마디에 금세 놀란 토끼 눈이 되어버렸다.
고개를 돌려보지만 보이는 건 병상에 누운 뒷모습뿐이라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알지 못했다. 이런 그림이 낯설진 않았다. 이렇게 가까이 있으면서도, 금방 닿을듯하면서도 다시 멀어지기를 반복하고 마는 게.
"내도 그러고 싶네."
가까워진만큼 언젠가는 다시 멀어지고 말겠지. 그래서 일말의 기대감 없이 막연하게 답했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누군가의 어깨에 기대는 게 습관이 되어버려서. 이대로 손을 잡고 따라간다면 정말 당신밖에 바라보지 않을까 봐. 그런 바보가 되어버린 채로. 언젠가 예고 없이 찾아올 이별에 무너져 내릴까 봐. 그게 두려워서 곧바로 '좋아.' 라고 답할 수가 없었다.
"와 내 멀쩡한 방 뺀다칸줄 아나? 여 첨머이 왔을 때 아저씨하고 약속한 게 있다. 울 어무이 다 나을 때까지만 신세 지겠다고. 가시는 길 방학 내내 잘 모시고 왔으니까네. 인자 마 받을 거 다 받았다 생각하고 내 알아 단디할라켔다. 그랬는데."
말은 끝까지 이어지지 않고 입술은 앙다물어졌다. 히데미는 소파가 들썩일 정도로 거칠게 자리에서 일어나 침상 앞에 몸을 기댄다. 마치 '얼굴 보고 얘기해.' 라고 말하듯이 고개를 깊이 숙이자 중력에 이끌린 머리칼이 눈앞을 가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