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능이 뛰어난 사람일수록, 가르치는 일에는 뛰어나지 않다. 어떻게 보면 편견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쓸모 없이 길다란 삶을 살아오며 겪은 것들이, 그리고 지금의 내가 그것을 증명하고 있으니 반쯤은 편견이 아니라 자기고백에 가까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허전한 손가락을 채우기 위해 침상 옆에 있던 작은 수납장을 뒤졌다. 아마도 이쯤에 담배를 넣어두었을 것이다. 마키라면 내 마음을 아주 잘 알고 있을 테니까. 다만 문제가 있다면 나는 타인의 마음을 알아차리는 것에 대해서는 끔찍할 정도로 잼병이었고, 아무리 제 편한 것을 쫓는 마키라고 한들 믿음직스러운 환자가 홀로 있는 방 안에 그런걸 넣어 둘 가능성이 없다는 것이었다. 갈 곳을 잃은 손은 허공을 휘젓다 이내 가지런히 모여 가슴께로 올라왔다. 그냥, 그렇다고.
천천히 그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고막을 때린다. 안다. 이런 투정은 그냥 나 때문에 일어난 일과, 일어나게 될 일. 그 모모든 것 외면하고 도망치는 것뿐이라는 것을. 모를 수 없었다. 하지만, 나도 무섭다. 무서워. 빈말로도 아야카미와 도쿄는 가깝지 않았다. 그리고, 망각은 몸이 멀어지는 순간부터 찾아오는 법이다. 몇 년간 가까이 지낸 사람들마저 나의 말을 믿어주지 않고 이해하기 힘든 무언가를 바라보듯 공포에 떠는 모습을, 그리고 그들의 틈바구니에 섞여 어느새 ‘나’의 흉내를 내고 있는 ‘다른 것’을. 내가 해온 것과 완전히 동일할 수 밖에 없는 일임에도. 나는 그것을 이해하지 못한다.
매일 밤 꿈을 꾼다. 그 안에서는 누군지도 알 수 없을 정도로 난도질 당한 얼굴을 가진 불특정다수가, 눈꺼풀이 사라진 채 원망스럽다는 듯이 나를 내려다보고 있어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나는 그냥 눈물을 흘리며 저지른 적 없는 죄에 대한 사죄를 반복한다. 나는, 잘못하지 않았는데. 그 누구의 축복도 받지 못하고 태어난 나는, 그것을 받아들이는 것 이외에는 그 무엇도 생각할 수 없었다.
가까워진다면, 그것의 배는 되는 거리를 떨어지게 되는 것이 운명이라면. 나는, 이번에도 그저 놓아 주어야 하는 걸까. 사지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그저 침대에 누워 온 몸의 힘을 빼는 것 만으로 힘을 모두 써버린 것처럼. 그 끝을 알 수 없는 탈력감에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흘렀다. 이건, [야요이]의 감정이 아니구나. 응, 그렇겠지. 어쩌면 아직도 외면하고 있었던 걸까. 각성의 순간은 정말 예기치않게 찾아온다. 그냥, 흐르는 눈물에 겹쳐서 웃음이 나와서. 천천히 손을 들어 히데미의 뺨을 쓰다듬었다.
“고작해야 고1이 그런 거 생각하는 거 아니야.”
아무래도 내가 사랑하게 된 남자는, 아직 어린 모양이었다. 응, 그렇겠지. 이 아이는 그날 만났던 그 사람이 아니다. 영혼의 형태가 같더라도, 그것을 담아내는 그릇도 그 안에 담긴 것의 형태도 전혀 다른 사람. 죽은 사람은 돌아오지 않는다. 하물며 수백년도 더 전의 일. 같을 수는 없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이렇게 고민하고 있는 아이를 내버려둘 수도 없는 것이다. 어찌되건,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니까. 육체가 아닌 영혼의 형태. 이 아이는 잊어버리게 될지 모르겠지만, 나는 그것을 영원히 안고 가야만 하겠지.
“………서로에게 기대어 살아가면 돼. 모자란 사람들끼리는.”
나만을 바라보지 않게 되더라도, 좋다. 나의 이름을 더 이상 부르지 못해도, 좋다. 네가 이별을 고하기도 전에, 내가 먼저 다하는 일도 없다.
지금 이 순간, 이 장소, 이 시선과 이 숨결까지. 여기까지 닿기 위해 얼마나 많은 페이지를 달려왔는지, 소년은 알고 있을까? 누군가에게는 평생일 시간이 누군가에게는 찰나의 순간으로 기억되리라는 것도. 신에 비할 바 못 되는 짧은 생애는 막을 내리고 또다시 시작될 것이다. 이야기는 이미 끝을 향해 저물어가고 있었고, 돌고 돌던 소년의 길은 마지막에 접어들었다. 궤도 밖을 빙글빙글 맴돌던 두 별이 가까워진 건 우연이 아닐 테다.
아름다운 꽃은 일찍 시든다. 만개하기까지 숱한 나날을 보내다 마침내 짧은 꽃피움이 찾아올 때면. 눈 깜짝할 사이에 저물어버리고 만다. 고작 한 송이 작은 꽃이 감춘 잎을 펼치기 위해 얼마나 많은 추억이 양분이 되어야 했던가. 영원히 간직할 수 없기에 아름다울 수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소년은 어머니를 떠나보내고 더는 두 손을 모으지 않았다. 간절한 바람이 모든 것을 이루어주리라는 것은 동화 속의 이야기일 뿐이라는 걸 깨달아서. 지금 바로 눈앞에 두고서도. 그 존재를 믿지 못하게 되었다. 역설적이기 짝이 없다. 이 작은 도시에, 수백 명 고교생 사이에 평범한 사람과 다른 존재들이 얼마나 많이 숨어있던가.
히데미는 뺨에 닿은 온기에 저도 모르게 눈을 가볍게 감아버렸다. 피부에 스며드는 따스한 온기가 살아 있음을 느끼게 한다. 하지만 어쩐지 허전하다. 이렇게 가까이 있음에도 금방 사라져버릴 것만 같아서.
"왜, 만나고 싶나? 다른 사람."
장난스러운 말에 함께 웃어버렸다. 매번 바라보았던 얼굴이지만 이토록 아스라이 다가온 목소리가 있었던가. 기억을 더듬어봐도 이번이 처음이어서 마음 약한 소년은 고개를 끄덕이지 않을 수 없었지만. 이번에는 꽤 고집스러웠다. 도쿄가 아닌 저 먼 나라로 떠난다고 해도 그럴 사람이 아니라는걸 아니까. 여름이 막 시작될 무렵 앳된 소년의 표정을 흉내 내며 장단을 맞춘다.
"내 말이다. 여적 머 하나 제대로 끝마쳐본적이 없다. 그래가 이번에는 머라도 쫌 단디 해보고 싶다."
하고 싶은 일이 너무나도 많은 고교생이지만. 지금은 '하고 싶은 일'보다는 '해야만 하는 일'이 우선순위가 되어버렸다. 기대어 살아갈 수 있도록. 쓰러지지 않는 기둥이 되고 싶었다. 그러기 위해서 지금 소년이 할 수 있는 일은 학교생활에 충실히 하는 것이다.
"고작 2년이다, 길다모 길다케도. 라인도 있고, 방학도 있고, 아아, 신칸센 타면 코앞 아이가?"
고작 한 달여 만에 얼마나 많은 것이 바뀌었다고, 저보다 훨씬 의연한 선배조차 감정을 감추지 못하는데. 나긋하게 이어지던 목소리는 끝에 이르러 파르르 떨리기 시작해 쏟아지는 감정을 주체하지 못한다. 같이 가고 싶어. 같이 살고 싶어. 의지하고 싶어. 그런 진심이 심장 소리에 맞추어 매초 들끓지만 억지로 삼켜낸다. 감정에 솔직하지 못해서 그런 건 아니었다. 그저 더 나은 사람이 되고 싶었다. 무거운 어깨를 더욱 짓누르는 짐이 되긴 싫어서.
"근데 참 이상하다. 한참 어린건 난데. 우리 누나야 와이리 걱정되지? 객지에서 밥이나 제대로 챙겨 뭇겠나?"
먼저 덤벼들고선 눈물이 터질 것 같아 달아나듯이 병상에 기댄 몸을 떼었다. 등을 돌려 몽글 거리는 눈가를 손등으로 닦아낸다. 어리다고 해서 아무것도 모르는 건 아니니까. 갑작스러운 작별 소식에 들려온 이야기들이 떠올라 혹시라도 나쁜 일이 생기진 않을지 걱정이 되었다.
"안되겠다- 귀찮다케도 매일 라인으로 보고 받아야겠다. 아니모 누가 우리 슨배임 챙기겠나?"
서둘러 닦아낸 눈물 자국 그대로 고개만을 돌려 다시금 시선을 맞추었다. 잠시 자리를 비우기 전까진 매번 성가실 정도로 메시지를 보내곤 했었지. 거리가 멀어진다고 해서 예외는 아니다. 오히려 전보다 더 심해질지도 모르겠다고. 눈꼬리는 짓궂게 휘어 가벼이 미소를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