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막연하게 다가오는 단어에 잠시동안 숨을 쉬지 못했다. 너무 정신없이 달려와서 생각조차 못했다. 앞으로의 일은. 이제 나는 어떻게 하면 좋을까. 그런 거창한 문제를 하루이틀 안에 해결하긴 너무 촉박해서. 그냥 숨이 차오를 정도로 달려온 것 같다. 대화 중간, 짧은 정적 속에서 생각했다. 살아가야 하는 이유를 찾아야할 것 같은 강박감에 눈동자가 살짝 흔들렸다. 답을 찾기 위해 파낸 샘은 끝이 없어서 마치 물속에 잠긴듯한 착각을 들게 만드니까. 그냥, 지금 닿고 있는 모든 것에 만족하기로 했다.
"그렇잖아도, 얘기 있었다. 쫌 먼 사촌인데. 근처 와가 사는거 어떠겠냐고."
히데미에게 그나마 남은 혈연이라곤 한번도 만나지 못한 먼 사촌들이었다. 아직 이름조차 외우지 못해 성씨로만 불렀던 그들을. 그래도 같은 집안 식구들이라고 낯선 얼굴이 내민 충고에 잠시동안 혹했던 적이 있었다. 하지만 그러기엔 이 동네에 너무 정이 들어버려서. 떠나기 싫었다. 무엇보다 이곳에는.. 가족만큼 소중한 사람이 한명 있었으니까.
"좋지, 좋은데.. 그냥 내는 졸업까진 여기서 지낼라고. 귀찮다. 또 새로운데 가가 적응하고, 뭐하고, 요래요래 한다는게. 지겹다 이제는."
비밀 많던 소년은 이제 가을에 접어들어 꽤나 솔직해졌다. 아야카미에서 쭉 지낼 계획은 자명했지만 맨션을 떠나는 것은 더이상 소지로씨에게 신세를 지지 않기 위해서였으니까. 히데미는 야요이의 목소리를 들으면서 숨겨진 뜻을 어렴풋이 짐작하면서도 자신의 확고한 계획을 말했다. 정말, 지금 상태로는 연고 없는 곳으로 떠나버린다면 정말 외딴 섬에 홀로 갇혀버린 것만 같은 기분이 들것 같아서. 도저히 그런 용기는 내지 못하겠다고. 친구들과 이웃들이 있는 이곳 아야카미에서 시간을 보내고 싶다고.
"외곽에 잘 안나가는 맨션 있다카대? 건물이 쫌 오래되긴 했는데. 월세도 저렴하고, 등교 하기도 마 안나빠서. 거기로 갈라고."
소지로씨에겐 아직 말 안했지만. 너무 갑작스럽게 이런저런 얘길 해버려서 죄송스러웠다. 야요이 누나와 사귀는 사이라고, 그리고 이젠 더이상 신세지고 싶지 않다고. 왠지 모르게 눈치가 보여서 두 손을 꼭 모아 소파 아래를 꾹꾹 눌러대며 중얼거리듯이 말해버렸다.
"누나야 졸업 얼마 안남았네? 그간 고생 만아따~ 하기 싫은거 억지로 채우느라. 아, 도그 데이 말이다. 그거 아나? 누나네 뺀드, 요새 틱톡이랑 유튜브에서 억수로 조회수 많이 나온데이. 이런 촌구석에서 그래 뜰 정도라카믄 도시에선 얼마나 인기 있겠나? 이제 출세할 일만 남았네."
거리가 멀어지는 순간이 올거라는걸 이미 알고 있었다는듯 태연하게 말을 이어간다. 서툴렀지만 미묘하게 진심어린 감정을 나눌 수 있었다는 것. 그정도만으로도 만족한 터라, 이별에 익숙한 소년은 아무렇지 않은듯한 표정으로 눈앞의 얼굴에 시선을 마주했다.
어머니의 마지막을 함께하며 이제 현실을 직시할때라고 생각했다. 청춘과 낭만, 늘 입에 달고 살았던 단어들. 그런건 배부른 일탈일 뿐이라고. 성공해야해. 공부 열심히 해서 좋은 대학에 가고, 좋은 직장을 얻고, 안정적인 삶을 사는거야. 한순간을 화려하게 불태우고 사라져버리는 거. 낭만 있어 보일지도 모르지만 결국은 끝에 이르러 비참해지고 마니. 그냥 소소한 행복을 안고 평범하게 살고 싶었다. 그 '평범'이라는 단어를 거머쥐는 것도 상당히 어려운 일이겠다만.
"건강한 신체에 건강한 정신이 깃든다..! 이제 큰 무대 스면 체력도 있어야 할거 아이가? 아, 맞다. 내랑 약속 하나 하자. 여 나가모 이제부턴 진짜로 건강하게 사는기다. 병원 그까이꺼 쓰잘데기 없다칼 정도로."
내가 모를줄 알았지, 가까워지면 가까워질수록 말하지 않아도 아는 사실이 있다는걸. 아니면, 여름까지의 새카만 꼬맹이에게 동물적인 감각이 있던 걸지도. 단단할수록 유연하지 못하다고, 언제라도 망가져버릴것만 같은 분위기를 하고선. 불안하게 만들기나 하고 말이야. 이제 이 철부지도 이마에 도는 피가 약간은 말라버려서 알건 다 안다고. 건방진 생각으로 손가락이나 내밀고선 그렇게 말해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