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껏 말을 놓았는데 이런 상황에선 또 존댓말이 나와버린다. 그가 붙잡아준 덕에 꼴사납게 넘어지진 않았지만 발목이 욱신거려 드는 생각이, 이거 분명히 접질렸다였다. 괜히 혼자 들떠서 오버하는 바람에 첫 데이트를 망치게 생겼다. 아프고 창피한 것보다 속상해서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언덕길에서 반쯤 주저앉다시피 한 자세로 그에게 몸을 기대이고 있으면, 그가 팔 아래로 고개를 밀고 들어와 균형을 잡고 일어설 수 있도록 부축해 준다. 이런 자세로는 뒤로 넘어지는 것밖에 아무것도 할 수 없어서 그에게 의지해 땅을 디뎌 몸을 일으키려 했다.
"먀악!"
그에게 부축된 채 두 발을 조금씩 뒤로 물러 중심을 잡은 다음 일어나려 다리에 힘을 주는 순간, 오른발에서 극심한 통증이 느껴져 저도 모르게 날카로운 비명이 터져 나왔다. 아까 느꼈던 것과는 결이 다른 기분 나쁘고 고통스러운 찌릿함이었다. 그 탓에 다리에 힘이 풀려 힘없이 주저앉을 수밖에 없었다. 오른발이 달달 떨리는 것도 같았다.
그녀의 입에서 비명소리가 나오자 그는 즉각 움찔했다. 발을 딛는 순간, 저렇게 비명이 나온다는 것은 제대로 발목에 문제가 생겼다는 이야기가 아니겠는가. 힘없이 주저앉는 것도 모자라서 발이 달달 떨리는 것을 바라보며 유우키는 더욱 걱정스런 표정을 지었다. 일단 최대한 자극을 주지 않는 것이 좋겠지. 그렇게 생각하며 그는 가만히 시간을 확인했다. 슬슬 불꽃이 터질 시간이었다. 이대로 그녀를 마츠리의 보건 센터 쪽으로 데리고 가서 치료를 받게 하는 것이 제일 좋겠지만, 만약 그렇게 하면 그녀는 필시 엄청나게 미안해할테고 자신 탓을 할지도 모르겠다고 유우키는 판단했다. 아닐지도 모르지만.
"미안해하지 마. 아무튼 아프단 말이지? 알았어. 잠시만."
이어 유우키는 살며시 자신의 허리를 굽혔다. 그리고 그 상태에서 그녀의 몸통으로 제 몸을 바짝 붙였고, 그 상태에서 그녀를 덥썩 업어들려고 했다. 지금은 두 팔로 그녀의 다리쪽을 지탱하고 있기에 미끄러지거나 떨어지진 않겠지만, 이대로 걸을 수는 없는만큼, 그는 그녀에게 요청했다.
"이대로 언덕을 올라갈게. 불꽃놀이를 보고 바로 치료받으러 가자. 아마 자극을 가하지 않으면 더 아프진 않을거야. 그러니까 꽉 잡아줘. 알았지?"
완전히 발목이 부러졌다고 한다면 가만히 있어도 엄청나게 아프겠지만, 방금 전의 충격을 고려해봤을때 그 정도는 아니고 접질러진 정도였을 것이다. 그렇다면 굳이 자극을 가하지만 않으면 불꽃놀이를 함께 볼 정도의 시간은 날 거라고 그는 판단한 후, 이어 그녀에게 이야기했다.
"그리고 미안해하지 마. 네 탓이라고 생각하지도 말고. 누구에게나 있을 수 있는 일이잖아? 고작 이런 일로 네 탓을 할 것 같으면 처음부터 사랑을 하고 싶다던 너의 연애 제안은 받지도 않았어."
조금 진지하게 이야기를 하던 유우키는 이내 능청스러운 웃음소리를 내며 앞을 쭈욱 바라봤다. 그녀가 제 몸을 꼬옥 잡으면 천천히 앞으로 걸어갔을 것이다.
"그리고 남자친구로서, 여자친구에게 강한 모습을 보여줄 수 있으니까 나로서는 나쁘지 않은걸. ...여자친구가 찰싹 달라붙어주는 것도 꽤 좋고 말이야. 김에 나는 사심이나 채워볼까. 후훗."
장난스럽게 말을 하는 모습이 이 분위기를 괜히 심각하게 만들지 않으려는 것이 분명했다. 무슨 소릴 하는 거냐는 툴툴거리는 목소리가 나오지 않을까 살짝 기대도 하면서.
우리는 언제나 경쟁하고 있어. 늘 불안하고 초조한 채. 거울 속에 비친 스스로를 바라보며. 결국 이 모습도 나란걸. 깨부수는 건 의미 없는 일이라는걸. 알아버리면 더욱 비참해지네. 돌아보는 길도 나아가는 길도 모두 낭떠러지일 뿐이야. 불완전한 얼굴은 겁이 많았으니까. 아마 모두 마찬가지일거야. 품에 껴안은 것은 자신이 선택한 이정표가 아니라는걸.
아. 한번, 두번. 호흡이 뜨고 가라앉길 반복하고 있어.
이제 무엇을 해야 할까. 작은 몸을 타고 흐르는 연약한 핏줄기조차 깊이 느껴지는 이 적막 속에서.
언젠가 떠올랐어. 목적지가 정해지지 않은 지평선을 바라보면 문득 눈앞을 스쳐가는 것들. 흔들리는 경계 속 실타래를 따라 살아 있음을 느끼게 하는 작은 발버둥이. 어둠 속에 울려 퍼지는 노랫말은 우리가 이곳에 있다는 것을 증명하네. 그렇게 계속해서 이어지고, 또 이어지고...
음악은 누군가의 삶의 일부이자 그네의 그림자. 테잎 속 아빠의 목소리가 내게 가르쳐주었다.
현을 튕기고 이어지는 선율은 그날의 선배가 기울였던 손짓을 떠올리게 한다. 그때의 거리감, 세상과 고립된 공간 속에서 피어오른 진한 향기가 어렴풋이 코끝을 간질인다.
지금과 같은 저녁 한때, 닿을듯 말듯 달콤하게 다가왔던 짓궂은 장난에 고개를 돌렸지만. 가슴이 두근댔던 이유는 그게 전부가 아니었어. 새벽녘을 바라보지 못해 가라앉은 그늘은 알지 못할거야. 언제나 희망은 어둠 속에서 시작된다는 걸.
깊은 밤 얕은 잠을 헤매듯 몽롱한 시선이지만 정신은 그 어느 때보다 뚜렷해서. 귀를 기울였다. 네온사인처럼 빛나는 마츠리의 야경도. 살갗을 스치는 여름 저녁의 바람도. 시큰한 취기도 모두 잊은 채.
「 “슨배임은 참 신기하디. 어쩔때는 이래 잠잠한거 좋아하는거 같으면서도. 어쩔때는 가슴 터져라 소리를 질러대니까네.” 」
붉은 기둥을 앞두고 스쳐 지나간 한마디. 꼬맹이의 조잡한 표현으로는 이것이 전부라. 말하지 못했지만. 선배는 마치 밤하늘의 안개 같아서. 예쁜 별빛을 머금을 뿐, 흐릿해 잡히질 않았다.
강렬했던 한순간도 순식간에 먼지가 되어 사라지고, 매번 같은 표정도 순식간에 무너져 내릴 것 같아. 같은 공간에 있으면서도 아득히 멀리 떨어진듯해, 손에 닿았던 온기조차도 거짓말 같았다. 깨어나면 잊힐 꿈처럼.
이른 봄날. 아직 겨울의 여운이 가시지 않은 그때. 나는 처음으로 선배를 보았다. 이름도, 학년도, 아무것도 몰랐던 그때는. 옥상에서 고개를 기울이고 있는 모습에 감히 말조차 건네지 못했는데.
솔직히 말하자면 그때는. 선배의 모습은 스쳐 지나가는 수많은 그림자 중 하나였을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던거야. 지독히도 달려오느라. 가슴을 쥐어짜는 거친 호흡 속에 누군에겐들 진심으로 대하긴 했을까. 그랬었는데…
순간순간을 되짚듯 얼마 되지 않은 짧은 만남이 일련의 사진처럼 빠르게 돌아간다.
정말, 언제부터였을까. 망가진 CD플레이어를 들고 일탈을 배우고 싶다며 떼를 부렸을 때? 칼피스가 아닌 다른 음료에 입술을 적셨을 때? 그것도 아니라면 헤픈 눈물을 보였던 때인가.
가사를 따라 반쯤 뜬 눈으로 기억을 쫓다 보면 선배의 연주는 순식간에 끝나버려 옅은 미소와 마주한다.
지난날의 소년은 해맑은 눈웃음으로 답했다.
「 “으으응... 지는예, 요즘 매일이 억수로 즐거워가. 지금이 가장 행복함다.” 」
그렇네, 나 매번 이런 식으로 거짓말을 쳤던가. 그렇게 말해놓고, 눈물을 왈칵 쏟아냈었지. 곡이 멈추고. 나지막한 목소리가 다가오면 선배를 따라 어색한 미소를 짓는다.
소년은 선배의 또 다른 표정을 바라보고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지만 반대로 보이진 못했다. 그렇다고 해서, 직접 마주 보는 얼굴이 마냥 솔직했던 것도 아니라. 돌이켜보면 항상 웃고 떠들고. 충분했다고 생각했는데. 기분이 조금 이상해진다.
*
꼴깍, 꼴깍, 어두운 캔 너머 넘실대는 것이 순식간에 비워지고. 빈 캔은 가벼운 소리를 내며 소년의 곁에 내려앉는다.
부끄럽게 덧칠한 수많은 색깔에도, 결국 그 끝에 가려진 모습이 자기 자신이었다는걸. 알아버리는 순간. 흐릿했던 경계가 와르르 무너져 내린다. 그래서 말했다.
"아팠어예. 억수로 아팠어예."
여름밤 공기에 홀린 듯 떠나간 목소리에는 서글픈 흔적이라곤 하나 없이 덤덤히 흐른다. 항상 생글거리던 표정 탓인지 눈웃음이 사라진 자리에 남은 것은 전보다 더욱 깊게 잠겨 있었다. 그 날 눈물이 흐른 것은 슬퍼서가 아니라 감춘 흔적으로부터 달아나고 싶어서 그랬던 거야. 하지만 이제는 더이상 그러지 않았다. 술의 힘을 빌려서 그랬더라도.
히데미는 팔에 기대인 기타처럼 선배의 어깨에 뺨을 내려놓는다. 잠시 멀어졌던 사소한 거리는 다시 닿아 그날의 스튜디오에서 보다 그 어느 때보다 가까워졌다.
"선배님, 그런데 지금은…" "저, 어른이 되고 싶어예."
기댄 눈이 지그시 감긴다. 목소리를 따라 고르게 흐르는 숨소리는 저를 알아봐 달라는 듯 가빠서 취기 섞인 미성숙한 단내가 풍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