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분이 가라앉은 이유라면, 내가 그에게 부담 주지 않겠다던 약속을 저버리고 연애를 빌미로 그를 옭아매려는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을까 하는 자격지심 때문이었다. 솔직히 마음 깊이 좋아하느냐 묻는다면 답하기 어렵다. 지금까지는 그만을 바라보는 적극적인 여자친구 행세를 하며 그에게 행복감을 주고, 그에게서 사랑받고 있다는 느낌을 받으면 그만이라 생각했다. 그뿐으로 마음이 꽉 찼으니까. 돌아보면 미친 생각이었다. 그러면 가게에서 하는 일이나 다름없잖아. 그에게 바짝 달라붙어 치대는 중에도 아무런 위화감을 느끼지 못했던 스스로가 참 밉고 한심스러웠다. 그럼에도 그의 마음을 다시 한번 확인하고 싶어서 야멸차게 도발했다. 그가 붙잡아주길 간절히 바라면서 느리게 뒷걸음했다. 손끝이 당겨지는 듯하더니 별안간에 손이 붙들렸다. 성큼성큼 다가오는 그의 모습에 겁이 났다. 그의 얼굴이 지나치게 가까워와 반사적으로 눈을 질끈 감으며 어깨를 움츠렸다.
"... 힉."
허리에서부터 시작해 정수리까지, 찌릿한 무언가가 타고 올라왔다. 뒷덜미가 채이듯 한 감각에 부끄러운 소리가 저도 모르게 새 나왔다. 평소와 달리 그의 손길이 무섭게 느껴졌다. 단단히 붙들려 빠져나갈 엄두조차 나지 않았다. 강압적인 그의 모습에 두렵도록 가슴이 떨렸다. 이미 그에게 소유된 듯한 말들에 부도덕한 기대감이 가득 차올랐다. 게타를 딛고 섰는 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허리를 감아오는 손길에 몸을 맡겼다. 그의 얼굴을 마주 볼 용기가 나지 않아서 고개를 숙였다. 가벼운 만남 이상으로 조금 더 깊게 들어오고 싶다는 말에 머릿속이 하얘졌다. 아직 준비가 안 됐는데.
"...!"
누군가를 좋아해 보고 싶다는 마음에서 시작된 어설픈 첫 연애. 처음엔 남자친구가 생겼다는 사실이 그저 좋았다. 다정하고 상냥한 그가 좋았다. 솔직하고 적극적인 그가 좋았다. 날 보고 두근거리는 그의 심장이, 내 손길에 발그레해지는 두 뺨이 좋았다. 누군가에게 사랑받고 있다는 느낌은 처음으로 살아있음을 느끼게 해주었다. 그는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적극적으로 움직이는 내가 좋다고 했다. 요조숙녀처럼 얌전하게 있는 것보다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을 확실하게 해주는 편이 좋다고 했다. 귀여운 면이 많아서 괜히 눈길이 가고 함께 있으면 편안해서 좋다고 했다. 나에 대해 모르는 것이 없을 정도로 나를 알고 싶다고 했다. 이것저것 많이 알려달라고 했다. 그런데 나는, 그에게 좋아한다는 말을 한 번이라도 했던 적이 있던가? 좋아하는 것이 이렇게도 많은데.
"그럼, 놓치지 말아요. 언제 도망갈지 모르니까."
좋아한다 말하면 내가 다 줘버릴 것 같아서, 부러 볼통하게 대꾸했다. 여지를 남겨두는 것은 얄궂은 심술이었다.
힉이라는 그녀의 작은 비명소리에 유우키는 순간 움찔했다. 너, 너무 강하게 나왔나.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여기서 말을 그만둘 순 없었다. 여기에서 와서 그만둘 것 같으면 애초에 이렇게 잡지도 않았을테니까. 그는 차분했지만 마냥 순둥순둥한 순둥이는 아니었다. 그 역시도 원하는 것은 쉽사리 놓아줄 생각이 없었으니까. 그녀가 그러는 것처럼 자신도 어느 정도는 그런 타입이었으니까. 그렇기에 유우키는 그녀의 허리에 완전히 팔을 감았다. 그녀가 고개를 아래로 숙이자 살짝 힘을 풀어야 할까 고민했지만, 역으로 힘을 조금 더 꽉 줘서 놓아주지 않겠다는 듯, 그는 지금 그 순간은 그녀를 품에 속박했다. 손가락이 떨어질 위기라면, 차라리 팔을 감아 떨어지지 않게 더욱 꽉 잡으면 되는 것 아니겠는가.
이것이 정답일지, 오답인진 알 수 없었다. 만약 자신이 연애를 좀 더 많이 했다고 한다면, 능숙하다고 한다면 그럼 지금 그녀의 마음을 한없이 사로잡아 이런 상황 자체가 나오지 않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허나 자신은 가사일이나 운동, 그리고 기품이나 예절은 능숙할지도 모르나 연애는 한없이 서툴렀다. 가이드책을 보거나 인터넷 동영상을 통해서 교육을 받아야 하지 않을까 할 정도로. 하지만 그렇게 핑계를 댈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그저, 자신은 자신의 진심을 다해 그녀에게 말할 뿐이었다. 숨길 필요가 뭐가 있겠는가.
자신은 가볍게 시작을 하더라도, 소홀하게 생각할 마음은 없었다. 집안 대대로 모셔온 카와자토 일가보다 더 높게는 생각하기 힘들더라도, 비슷하게는 생각할 수 있지 않겠는가. 카와자토 일가를 소홀하게 생각한 적이 없었던 것처럼, 그녀 역시 소홀하게 생각할 마음이 없었다. 시작이 어떻건 그녀는 자신의 여자친구였으니까.
"그렇다면 그때는 또 이렇게 품에 가둬야겠네요. 못 도망치게 말이에요."
부루퉁하게 대답하는 그녀의 목소리와 모습은 평소에 보여주던 모습과 진배 다를 바가 없었다. 그 모습이 또 워낙 귀엽다는 느낌이 들어 그는 작게 소리를 내어 피식 웃었다. 아. 역시 자신은... 그렇게 생각을 하며 많은 것을 속으로 인정했다. 오늘 데이트는 제 마음을 제대로 확인해보고 싶은 것이기도 했다. 가볍게 시작한 마음은 계속 가볍게 이어질 것인지, 아니면 그 깊이가 깊어져서 웅덩이를 만들 것인지. 그녀가 떨어지려고 하는 순간, 저도 모르게 이런 행동을 취한 시점에서 그는 순수하게 제 마음을 인정했다.
나는 이 후배가 좋다고. 특별한 이유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냥 그녀가 좋다고. 그녀의 성격도, 귀여운 모습도, 외모도, 향도, 그리고 지금 보이는 이런 자잘한 것들까지도. 계기가 어떻건 그런 것은 중요하지 않다. 그냥 이 후배가 좋았다.
'...특별한 계기도 이유도 없었기에 더 무섭네. 이거 참.'
허나 그 속마음을 굳이 그는 밖으로 끄집어내지 않았다. 이런 것까지 하나하나 설명하고 이유를 거론할 생각은 없었다. 지금은 그녀가 제 여자친구, 자신은 그녀의 남자친구. 이것으로 충분하지 않겠는가.
"시간이 애매해졌네요. 바로 불꽃놀이 보는 곳으로 갈까요? 노점을 둘러보고 구경하는 것은... 불꽃놀이가 끝난 후로도 괜찮을테니까요. 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