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반 하나에 이어지는 작은 선율이 빗소리에 젖은 아릿함을 지워준다. 오늘 히데의 날씨는 맑음. 스튜디오에 닿은 그날보다 좀더 높은 텐션이다. 이런거, 직접 눈에 들인 적은 처음이라서. 모든게 신기해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오오오, 오오오오.......!!! 소지로 아자씨이-! 뭔데, 뭔데. 아재 와 여깄노."
무대 위에서 숨쉬듯 건반을 휘감는 손길에 반가움을 감추지 못하고 그만 소리를 질러버렸다.
그간 쭉 신세를 지고서도 자주 얼굴을 뵙지 못해 아쉬웠는데, 생각지도 못한 만남에 눈웃음을 주체 못한다.
그나저나. 무대란거 정말 멋지구나. 소지로 아저씨. 평소에도 멋진 분이라고 생각했지만 오늘은 왠지 달라보여서. 키보드를 가리는 손짓 하나하나에 집중하게 된다. 낯설면서도 두근거리는 이 공간 때문인지. 아니면 음악이라는 마법 때문인지는 몰라도.
좋은 밤이지?
한참 그곳에 시선이 뺏겨 우두커니 다가온 목소리에 저도 모르게 쭈뼛 머리털을 곤두세운다.
"우, 우우우... 조몬 슨배임이네.... 내 귀신인줄 알았다........"
가뜩이나 발도 축축해 싸늘한걸 소오름이, 무대를 비추는 조명이 너무 밝아서 선배의 모습이 흐릿했다.
맞나, 벚꽃이 피어오를때만 해도 사람과 사람 사이를 나눈 이 작은 벽이 엄청 높아 보였는데. 이제는 여유롭게 얼굴을 맞대고 대화를 나눌 수 있게 되었다.
소년은 어색한 기미 없이 그렇다고, 억수로 멋진 밤이 될거 같다고. 기대에 부푼 얼굴로 이야기를 건넨다. 지난 밤의 울적했던 찰나의 순간, 가슴 뛰는 일탈이나 고마움. 이런 감정에 대한 소감따윈 일절 없이. 다시금 레코드샵에서 처음 마주했던 성가신 꼬맹이가 되어 돌아왔다.
킁킁, 킁.
어느샌가 지그시 감긴 두 눈에 작은 코는 쫑긋대고, 꼬맹이의 이마는 카운터 바닥 위를 부담스레 침범해간다.
"아. 알았다, 슨배임 또 그거 마시고 왔지예- 으른들이 좋아하는 음료수."
무던한 표정 아래 어른의 향기가 은은히 피어 오르는걸. 놓치지 않고 열심히도 내뱉었다. 한번 기억한 냄새는 절대로 잊지 않으니. 주제 넘게 이런 곳에 그런 재주를 써먹는다.
고작 한철 갖고 놀다 버릴 꽃에 남모르게 깊은 갈망이라도 품었을까. 매번 염불하고 고뇌해봐도 여태 이 기분 정의하지 못하겠다. 나도 모르는 새 미련에 발목이라도 내어준 건지. 어느 땐 너 보고 싶어 죽을 것 같다가도 곧 죽이고 싶을 정도로 미웠고. 철이 지나면 버려야지 하루에도 수백 번 되뇌다가도, 이따끔은 저 너머의 계절까지 함께하고 싶었다. 나는 우미 스미레를 형용할 방법을 모른다. 되짚어보면 너는 관계의 전조에서부터 알아먹기 힘든 존재였다. 내 반경 안에서 살아간다 한들 근간이 달리질리 있겠나. 본질은 미지에 있으니 나로선 네 실태를 영영 깨닫지 못할 것이다. 지금까지 그래왔듯 앞으로도 영원히 그래야만 했다. 욕지거리를 수십 번 씹어대도 도통 분이 안 가신다. 좆같은 년, 썅년, 개년. 할 말은 많은데 정수리까지 성이 오른 탓에 성대 막힌 벙어리 꼴이다. 성음 없이 입만 뻐끔대며 무수한 욕설을 외웠다. "너 진짜.." 죽었으면 좋겠다. 순간 말문이 트인다. 목소리가 죽이 되기 전에 혀를 깨물었다. 다행히도 죽으로 변하지 못하고 멈췄다. 언제적인가 네가 알려준 적 있다. 언어에는 힘이 있다고 했다. 혀에 실리는 감정에 따라 효력을 달리한다고. 가벼운 만큼 옅어지며 무거울수록 강해진다고. 그렇게 들었다. 내가 읊다 말았던 저주는 온갖 지저분한 감정의 소실물이다. 미움, 원망, 미련, 사랑 등.... 모질고 드센 것만 간추려 조합했다. 뱉는 순간 눈 앞에 사람 하나 죽어도 이상하지 않다. 그러니 입을 다물었다.
열이 오른다. 빗물이 어깨에 닿은 찰나 불타올라 공기로 사라진다. 장마처럼 눅눅했던 몸에서도 물기가 말랐다. 너와 눈을 맞췄다. 나는 건조한데 너는 습하기만 하다. 우리는 같은 계절을 살면서도 이토록 다르다. 이 다음 봄에도, 그다음 여름에도, 그 너머 가을에도, 그 밖의 겨울에도 그럴 거다. 내 곁에선 한 철만 피어날 것을 알면서도 다음 계절을 상정하고 말았다.
이쯤 오면 시인해야 속이 편하다. 나는 여전히 우미 스미레를 형용할 방법을 모른다. 아니, 몰랐지만 지금은 안다. 너는 봄에 피었다가 여름 오기 전에 기우는, 그런 가벼운 존재가 아니었다. 한 때의 미련으로 치부했으나 실상은 평생 안고 갈 상실이었다. 여전히 죽이 싶을만큼 밉지만 결국엔 그랬다. 나는 우미 스미레를 사랑한다.
이래서 쉽게 입술을 맞대면 안 된다. 함부로 숨을 터주지 말아야 한다. 그 형태가 밉던 곱던 정이란 게 그렇게 호락호락한 놈이 아니다. 외면한다 해서 모두 버리거나 끊을 수도 없다. 잠깐 방심하면 치고 들어와 사람을 괴롭힌다. 열 받고 좆 같은 게 진짜 누구랑 똑같다.
네가 일러주었듯 말에는 역시나 힘이 있었다. 내가 원망과 사랑을 할짝였다면 너는 분노와 혐오를 입에 냈다. 하지만 정갈치 못한 저주가 효능을 가질 리가. 그러게 끝에 가서 씩씩거리지 말지 그랬어. 네가 차분히 말 마쳤다면 소원대로 나는 죽었을 것이다.
"그야 걔한테서 네 냄새가 났으니까."
"내가 사랑한다고 말해주면 화 풀릴래?"
우산이 한 보 남은 걸음을 막아서길래 밖으로 걷어찼다. 그 무엇도 내게서 널 지켜내지 못한다.
"사랑하거든. 그냥 그렇다 칠라고."
어깨를 더욱 단단히 붙잡았다. 네 몸에 붙어 바다 흉내내던 빗물이 폭염에 죽는다. 너나 나나 물기 없이 메말랐다. 비 내리는 하늘 아래에서도 온전하니 이제야 완전히 내 것 같다. 대답 돌아오기 전에 숨통을 겹쳤다. 언제나처럼 호흡을 가로챘다. 죽은 사람 소원도 들어준다는데 기어코 내가 죽기를 소원한다면 넌 오늘 저녁에 죽이나 먹어라.
//감정상 이때가 제격이다 싶어서 재고록 파왔어 ^^ 예상도 못 했지? 오늘도 내가 공주 이겨먹었다 ㅋㅋ 물론 나중에 재재고록 함 더 파긴 할 거야 ^^ 여튼 돌쇠 WIN
테루가 말한 불편한 점은 유우키로서는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인간은 아니라고 생각을 하긴 했으나 갑자기 피부색이 변하더니 의자도, 침대도, 바닥에서도 무너질 때가 많다는 그 말에 유우키는 식은 땀을 줄줄 흘렸다. 이건 자신이 어떻게 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지 않나. 그렇게 생각하며 그는 상당히 고민을 하면서 시선을 회피했다.
이걸 어떻게 해결하면 좋을까. 아니. 애초에 이걸 내가 해결 할 수 있는 문제이긴 한건가? 괜히 물어봤나?
그런 생각이 순식간에 휙휙휙 지나갔고 유우키는 뜸을 들이다가 나름대로 답을 고민하며 내놓았다.
"카와자토 당주님에게 말해보는 것은 어떠세요? 혹은 아야나님의 도움을 받아서 좀 더 튼튼한 전용 방을 얻어본다던가 말이에요. 제 힘으로는 어떻게 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네요. 그건."
자신의 집이 아니며, 애초에 자신에게는 그 정도의 재력 또한 없었으며, 재력이 있어도 어떻게 할 방도가 없었다. 애초에 상대가 어떤 신이나 요괴인지도 모르는만큼 자신이 함부로 어떻게 닿을 수 있는 경지가 아니라고 그는 판단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