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네는 넙죽 인정했다. 그래, 그녀가 평소에도 이리 무례한 사람이던가. 아니다. 하지만 눈 앞의 설인과도 같은 사내는 분명 모네의 비틀린 부분만 골라 자극하는 무언가가 있었다. 달빛과도 같은 샛노란 눈동자도, 천천히 깜박거리는 저 눈도, 그리고 나서야 제 입을 떼는 그 느긋한 중압감도.
" 원체 연인들과 미친 사람들의 머리는 소용돌이치면서 들끓는 법이라."
연인은 미친이와 같고, 미친 이는 또 외로운 이와 같은가 보다. 모네는 그를 모로 응시했다. 가늘게 뜬 눈은 깊고 어둡게 빛났다.
어려운 질문을 던지는 그를 그녀는 여전히 올려다 보았다. 그 주변으로 하얗게 테두리가 인다. 달빛도 마음에 안 드는 법이 있군. 충성과 왕관이라. 둘 중 고르라면 콱 죽음을 골라보랴? 술을 너무 많이 마신 게 분명했다. 언제 꽂혀져 있던 것일지 모를 비올라 한송이가 제 귓가에서 툭 떨궈진다. 그의 질문은 과거를 가져왔다. 왕관을 욕심내기엔 빼앗길 운명이고, 충성을 하기엔 이미 많이 늦은 것만 같았다. 어질어질한 밤하늘은 정말 취해서가 아닌데 말이야.
" 취객이 대답하기엔 너무 어려운 질문입니다."
그녀는 자존심 상할 정도로 가볍게 일으켜세워졌다. 그것을 알고 있음에도 가볍다고 굳이 덧붙이는 것은 분명 제 심기를 건들기 위해서임으로 받는다.
" ...그런 건 좀 일찍 알려주지 그러셨습니까."
속이 뒤틀리는 패배. 그녀는 풀향이 싱그럽게 들어찬 모피를 부러 과격하게 털어냈다. 파스스, 흙먼지와 푸르른 풀자락이 디마크르의 멀끔히 차려입은 의복 쪽으로 털어내진다. 분명 자신만 누워있을 때 이곳은 변방이었는데 그가 다가오자 중앙이 된다. 사람들의 관심이 속절없이 쓸린다. 그녀가 소란을 제법 떤 탓도 있지만서도.
#디마르크 묘사 너무 좋다. 동화 읽듯이 읽게 돼... 모네가 예의없지만 모네주는 디마르크 좋아해. 무릎 꿇고 싶어(주접)
보아하니 당당하게 나온 것 같지는 않았다. 그랬다면 이렇게까지 당황할 필요는 없어보이니까. 아마 그녀가 즐겨하는 월담을 한 것이 아닐까, 하고 릭켈런은 추측했다. 기사단에서도 모네와의 인연은 다른 이들보다 더 오래 되었기에 그도 그녀가 어떤 일을 하는지 정도는 유추할 수 있게 되었다.
" 감찰을 할거면 이런 선술집에 있으면 안되지. "
당당하게 말하는 기개는 인정해주지만 이유가 잘못되지 않았는가. 누가 감찰을 선술집에서 술을 거나하게 마시면서 하는지. 전임 기사단장이었으면 진즉에 호통을 치면서 끌고 나왔을 것이다. 하지만 자신은 전임 단장과는 성격부터 다른 사람이었기에 금방 나온 술을 한모금 홀짝이고선 말했다.
" 이젠 상관을 모른척까지 하네. 사유서를 한장 더 쓰고싶다는 뜻으로 알아들어도 되겠지? "
걸리지 않으면 무죄지만 이미 자신에게 걸렸으니 걸고 넘어질 건수는 충분했다. 자신에게 멀어지려하는 모네를 보고선 그만큼 쫓아다가가 가까운 거리를 유지한 릭켈런은 그녀의 후드를 들춰 눈을 바라보면서 말했다.
" 그나저나 다른 사람들은 몰라도 그레이스 경은 알아야하지 않나? "
그의 눈빛은 어느새 장난끼 가득한 것으로 바뀌었고 어깨를 한번 으쓱해보이고선 자신의 술잔을 잡아서 조금 거리를 벌려주며 말했다.
" 옛날부터 이런건 대수롭지 않아했다는걸. "
뭐, 크게 잘못하는게 아니라면 그는 단원들에게 크게 터치하지 않고 있었다. 기사단의 규율과 체면이라는게 있지만 그것을 강요할 정도로 본인이 철저한 것도 아니었기에 자신의 선에서 해결할 수 있는 문제들은 눈감아주는 편이었다.
그는 가만히 그녀의 눈동자를 들여다보았다. 깊고, 어둡게 빛나는 회색의 눈동자는 설국의 늑대를 닮았다. 흐릿한 안개같은 저 눈의 너머에는 무슨 감정이 도사리고 있을까. 단순한 취기라기에는 사뭇 다른 분위기가 감돌았다. 어울리지 않는 라벤더 향과 쇠 냄새처럼.
"취기와 찬 바람은 머리를 뜨겁게 만들지."
"열로 머리가 들끓는다면 조금 쉬어라. 이곳은 황궁이고, 자네는 기사이며, 나는 변경백이네. 우리는 너무 많은 것에 묶여있어."
때와 장소가 맞지 않는다. 그렇지 않은가? 수수께끼같은 물음으로 되묻는 그는, 올려다 보는 그녀의 눈동자를 마주보며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꽃 한송이가 그녀의 귓가에서 툭, 하고 떨어진다. 이것 역시 무엇의 암시일까. 그것이어도 좋고, 그것이 아니어도 좋았다. 그래, 들끓는 머리로, 소용돌이치는 머리로, 몸을 감싸는 취기로 대답하기에는 어려운 일이었다. 허나 이미 활시위는 당겨졌다. 언제까지고 대답을 망설이기만 할 수는 없을 터.
"황궁의 기사가 적을 넘어트리는 방법도, 배워야 깨닫으리라고. 그리 생각하지 못한 내 불찰이네."
그의 입가에 처음으로 미소가 번졌다. 노골적인 적의는 익숙했다. 허나 그것이 살의가 아니기에, 그에게는 이것이 투정 정도로 보이는 것일까. 흙먼지와 푸르른 풀자락이 거세게 모피에서 흩뿌려져 제 의복쪽으로 닿는다. 하얀 눈 위로 발자국이 남았으니 자신이 넘어진 것과 다를 바 없다. 사람들의 관심을 뒤로 한 채, 그는 여전히 그녀를 바라보면서 미소지었다. 더이상 승패가 중요하지 않았다. 그걸로 되었다. 그는 작은 목소리와, 확실하게 움직이는 입모양으로 속삭인다.
"그대의 사명을 잊지 말게. 황궁을 지켜라. 그것이 그대의 것이든, 황제 폐하의 것이든... 주어진 사명을 완수해내거라."
본인을 나무라는 것 같은 태도에 그녀도 상당히 유치한 태도로 맞선다. 물론 그 서사 안에는 그 둘 사이의 신뢰와 친밀감이 있음을 알고 있다. 그 역시 모네를 호되게 야단칠 엄격한 상사는 아니었고, 모네 역시 이토록 유치하고 풀어진 모습을 쉬이 보이는 기사는 아니다.
" 사유서? 그게 뭡니까 나리."
모르쇠 공작을 이어가며 술을 여유롭게 마시는척을 하려던 찰나였다. 정말, 그 짧은 찰나에 붉은 눈동자가 후드 안으로 들어온다.
" ...콜록."
하머터면 그의 반질반질한 얼굴에 싸구려 맥주를 뱉을 뻔했다. 그랬다면 정말 꼼짝없이 사유서를 썼겠지. 머리를 싸매고 서재에 박힌채 상관의 얼굴에 맥주를 뱉은 사유에 대해 구구절절 쓰다가는 박박 종이를 찢는 제 미래가 섬뜩하게 스쳐지나간다.
" 그러는 릭 경도 그리 바짝 다가오면 제가 당황할 걸 아셨잖아요."
조금 거리가 생기자 그제서야 편안한 숨을 내뱉었다. 이왕지사 이렇게 된 거 그녀는 아까보다 훨 초췌해진 얼굴로 후드를 거칠게 벗었다. 부스스한 잔머리와 대충 올려묶은 머리가 눈에 띈다. 장난기 가득한 그 표정을 가만히 바라만 보고 있을 저는 또 아니었다. 대수롭지 않다느니 그런 말을 내뱉고 있는 참에 그녀는 얄궂은 것들을 계획했고, 한참 전부터 자신들을 흥미진진하게 관람하고 있는 주인장에게 가벼이 눈을 찡긋거렸다.
" 아아, 오해하지 말아요. 제 전 연인일 뿐이니까요. 하하."
턱을 괴고 다리를 꼬는 모네의 폼이 상당히 요사스러웠다. 그러나 그녀의 눈빛만은 단호하게 말하고 있었다. 제발요 단장님. 저는 제 단골 술집에 정체를 들켜서 출입금지 당하고 싶지 않거든요? 그리고 오늘은 제가 당한 것도 있으니 한 번씩 주고 받아야 하지 않겠어요?
모네에 말에 릭켈런은 다시 한번 말없이 어깨만 으쓱였다. 무언의 긍정인 셈이다. 사실 그는 단원들이랑 그렇게 스스럼 없이 지내는 사이는 아니었고 그냥저냥 필요할때만 찾는 상관 같은 존재가 되고 싶었다. 그럼에도 몇몇 단원들과는 가까운 사이가 될 수 있었고 그 중에선 모네가 가장 앞서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야 그가 기사단에 들어오기 전부터 알던 얼굴이었으니 말이다.
" 하하. "
그런데 갑작스럽게 전 연인이라니 그는 어이가 없는지 헛웃음을 짓고선 이 건방진(?) 부하를 어떻게 요리해야할까 진지하게 고민해보려했다. 하지만 마주친 눈에서 느껴지는 그녀의 진심에 이번만큼은 장단을 맞춰주기로 하고선 주인장에게 얘기했다.
" 제 아내가 이런 식으로 장난을 많이 치곤 합니다. "
장난에도 급이 있다는걸 보여주려는걸까 엄청난 얘기를 아무렇지도 않게 얘기해버리는 릭켈런은 모네쪽을 슬쩍 바라보고선 주인장이 보이지 않게 웃어주고선 다시 술잔을 들었다. 싸구려이긴 했지만 술은 싸구려의 맛 또한 즐길 수 있는 법이니까 말이다.
" 저 몰래 가는 곳이 어딘가 했더니만 이런 좋은 곳을 몰래 다니고 있었다니 참 섭섭한 일이 아닐 수가 없습니다. "
본래 급사라는 것은 정확히 하라는 일만 해서는 아니 된다. 쓸라는 명이 있으면 닦는 일 또한 수행하여야 하고, 비키라는 명이 있으면 눈에 띄지 않는 저만치까지 사라져야 한다. 무언가 씹을 것을 구태여 내어 온 데에는 그러한 까닭이 있었으나... 당신이 무얼 생각하는지는 알 턱이 없어 그저 따라 쿠키를 응시해 보았다. 흐음. 적어도 위생 상태만큼은 양호할 텐데.
혹시 모르지, 무어. 척 보기에도 깔끔하신 분 같으니. 렘프리는 다른 곳-다시 한 번 편지 뭉치-에 시선을 두는 체하며 손수건 너머 가려진 당신의 손을 흘끗 보았다.
"아하."
화상 연고라. 잠시 생각하다가 덧붙이기를,
"차루스 알에 룬나무 이파리를 섞는 레시피인가요?"
아는 화상 연고 레시피라고는 그 뿐이라 적당히 물어 본 것이다. 너무 캐묻는 것처럼 들리지 않도록 은근한 어조로 한 마디를 덧붙여 놓는다.
쿠키 맛있게 먹고 있어요. 쿠키를 먹는 내내 부러 입꼬리를 살포시 말아올리고 있는 까닭이다. 라리사는 오독오독 깨물어 먹던 쿠키가 한 입 크기로 줄어들면 입 안으로 감추었다. 코코아를 홀짝이며 하는 생각은, 성의에 대한 감사 표시로 먹어야하는 쿠키는 몇 개일까. 그러면서도 장갑을 벗어두지 않은 왼손은 편지뭉치로 향한다. 장갑 없이는 편지에 닿지 않을터라.
라리사는 편지를 읽다 말고 들려오는 친근한 레시피에 시선이 끌려갔다. 이야기 주제가 잠시 약이 되었다고 그에 대한 강의할 생각 없거니와, 질문 의도 또한 라리사가 이곳에 발을 디딜 수 있는 직을 찾는 듯 하니. 자기소개를 해야하는 때인 것 같아 잠시 편지를 내려둔다. 후작가의 은혜를 입었으니 번듯한 아가씨 흉내를 내어야지, 무릎 위에 두 손 가지런히 모으고.
“궁정의 조수, 브레 가의 라리사 폴이에요.”
생글생글 웃는 건 쉽지만, 말을 잇는 건 어려워 마냥 웃을 듯 하다가 느지막하게 덧붙는 소리.
“…작은 화상은 그 레시피로도 충분하지만 물집이 잡히면 절 찾아주세요.”
주방에서 일하는 듯 해보이니 화상 입을 일 잦을 지도 모른다. 의사 찾을 일 없는게 제일 평온한 나날이겠지만, 찾게 된다면 조수더라도 기꺼이 나서야지. 라리사가 이곳에서 베풀 수 있는 상냥함은 그런 종류라고.
>>520 늦은 인사를 받으러 아침에 온 라리사주 등장. 좋은 밤이었어요, 그리고 좋은 아침! >>521 회사에서 하는 것만큼 효율성 높은 딴짓은 없지! 모네주가 먼저 옮겨둔 틀 보고 따라하기만 했으니 고생 아니다! 열심히 복붙했을 뿐이에요 ;0 >>532 이 머리카락을 보아라. 우리 캡틴에게 랜선 쓰다듬 받은 머리카락이다…… 1억부터 경매를 시작합니다. (?)
쌓인 로그들 보았는데 너무 웃겨서 발박수 칠래 ㅠ 나도… 나도 있는 로그들에 다 잇고 싶어……… 언젠간 다 만나보리라………… >:0 아무튼! 다들 좋은 아침이야. 오늘 무려 오전 근무만 한다는 말에 신나서 월루하며 갱신합니다!
자기에는 때 이르다는 그의 말에 디아나는 어두운 허공을 응시할 뿐이었다. 날이 추워 가벼운 입김이 흩날렸다. 곧 스러질 것 같은 밤이었다. 땅에 떨어진 비올라는 이미 물기가 가셔 바싹 말라 있었다. 내일이 오면 후회하려나. 이런 첫만남이 아니었다면 분명 무례를 저지르지 않았겠지만, 그렇다면 이자와 대화를 나눌 일 또한 없었으리라. 몸을 가득 웅크리고 겨울잠이라도 자고 싶은 기분이었다. 그녀가 밟고 있는 이 땅 아래에도 어쩌면 겨울잠을 자는 미물이 있을터인데.
" 그래요, 그리하죠."
이제 취기 어린 투쟁은 그만할 때도 되지 않았느냐 부드럽게 이르는 듯한 말에 백기를 들었다. 그녀 주변엔 왜 이렇게 인내심 있는 자들이 없었는지. 눈 앞에 선 사내 반, 아니 그의 눈동자 만큼이라도 부드러웠다면, 인내했다면. 부드러운 실크 셔츠를 탁탁 털어내 잔주름을 떨치고 그녀는 방금까지 영주께 털던 모피를 어깨에 내둘렀다. 살아있는 것들은 따듯하고 죽어서나마도 따듯함을 선사하는구나. 망토를 걸치는 이번의 손길에는 한치의 악의도 없어서 그에겐 바람 한 점 닿지 않았다.
" ...당신을 적이라 생각하지 않습니다."
허리춤에 찬 한 쌍의 칼날이 절그럭 흔들린다. 사명, 황궁, 기사. 원해서 된 기사가 아닐지라도 의무는 함께였다. 지킨다라.
" 곧 도전할 날이 있기를 빌지요. 가신다면, 배웅하겠습니다."
예를 차릴 줄 몰라 차리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모네는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뒤로 넘기고 얌전히 바닥을 응시했다.
뭐야, 불안하게 왜 웃어. 얇고 곧은 그녀의 눈썹 앞머리가 꿈틀한다. 인상만 펴면 곧은 눈썹인데 그런 법이 잘 없다. 시원스레 웃는 모습이 역시 평소의 쾌활해보이는 얼굴과 잘 어울린다만, 항상 저런 인간이 아니란 것을 물론 알고 있다. 왁자지껄 떠들어주는 주변 테이블의 서민들이 오늘만큼은 고마웠다.
" 아내?"
Wife? ...missus? 기가 찰 노릇이고만. 모네는 두 손으로 찬 맥주잔을 감싼채 굳어버렸다. 손을 적시는 찬방울들이 모이고 고여 제 손바닥 아래로 뚝뚝 떨어져도 그렇게 정지해 있는다. 평소의 그녀라면 술 식는다고 절대 하지 않았을 행동이다. 사람이 정말 놀라면 되려 굳어버린다는 말이 실감났다.
" 제가, 당신이랑, 결..혼을 했어요? 우와."
멍하게 벌어진 입술 사이로 욕이 나오기 직전이다. 하, 하하.
" 이거 말고 좀 비싸고 센 술로 바꿔줘요. 발효된 거 말고, 걸러진 거. 탄산, 없는거."
그녀는 그 와중에도 지혜로웠다. 술 기운 없인 못 견디겠고, 탄산 마시면 딸꾹질 할 것 같아. 섭섭하다느니 어쩐다느니 주인장과 쿵짝이 아주 잘 맞아보이는 그에게 이제 할 말이 없어진다. 당황한 건 사실이지만 티가 훤히 나는 성질이 아니라 다행이었다. 주인장이 새 술을 내오러 뒤 돈 사이 모네는 입술을 비틀며 되려 자신이 릭켈런에게 고개를 숙인다.
" 해 보자는 거죠?"
물방울이 잔뜩 맺혀 젖은 제 손을 그의 얼굴에 한 순간 튕겨내고, 다시 새초롬하게 고개를 바로한 그녀가 절제된 동작으로 작은 잔에 담긴 미지근한 술을 받았다. 원샷하면 분명 목구멍에 불이 날 걸 알면서도 탈탈 털어넣자 용기가 샘솟는다. 느릿하게 미소짓는 그녀의 조금 어두운 피부결에 은은하게 윤이 난다. 그녀가 즐겨차는 허연 진주가 밤에 내는 윤과도 같이.
반응을 보아하니 당장 욕을 내뱉어도 이상하지 않을 분위기인데 아무래도 서로의 지위가 있다보니 그것은 간신히 참은 것 같았다. 사실 평소 같았으면 이런 장난은 시덥지않게 넘겼을텐데 정복을 입고 있지 않고 있다는것 하나만으로 기분이 꽤나 풀린듯 싶었다. 사실 그의 어릴적 성격을 생각해보면 정복을 입고서 점잖게 있는게 스트레스 받을 법도 하긴 하지만 말이다.
" 혹시나 얘기하지만 나한테 데려다달란 말은 하지 않도록. "
마시던 것보다 더 강한 술을 마시는 것을 보고 릭켈런은 손가락을 들어 주의를 주었다. 물론 정말 몸을 가누지 못할 정도가 된다면 어떻게든 자신이 끌고가겠지만 그렇게까지 마시지 않을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저 혹시나하는 마음에 주의를 주었을뿐. 하지만 이어진 모네의 말에 릭켈런은 흠칫했다. 한두번의 핑퐁으로 끝날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진심인것 같았기 때문이다.
" 하, 분명 처음엔 먼저 다가오길래 받아줬는데 이렇게 사람이 변하다니. "
먼저 다가왔고(기사단에 추천서를 써달라고 했고) 받아준 것(그래서 추천서를 써줬다!)은 맞으니 거짓말은 아니다, 거짓말은. 하지만 이 이상 갔다가는 정말 주인장이 사이를 오해할까 싶어서 헛기침을 두어번한 릭켈런은 은은하게 웃어보이는 모네와 주인장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왠지 상대방은 끝내줄 마음이 없어보였기에 어쩔까 고민하던 그는 같은 종류의 술로 달라고 얘기하고선 주인장이 자리를 비우자 말했다.
" 그레이스 경, 어쩌자고 이렇게까지 하는거지? "
역시 함부로 장난을 받아주는 것이 아니었다. 애시당초 기사단장의 권위로 해결했다면 ... 이라고 생각해봤자 당장은 넘어갈지라도 후일이 두려워지는 일이었다. 기사단장이란 단원들의 신임도 받아야하는 법이니 말이다. 이윽고 주인장이 술을 내오자 그는 잠시 그 술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이렇게 피로한 몸상태로 이걸 마셨다간 내일 몸상태가 어찌될지 모르니 말이다. 한숨을 작게 내쉰 그는 술을 입에 털어넣었다. 아까보다 강한 도수의 것이라 그런지 목부터 느껴지는 화끈함이 지금 술의 흐름이 어딜 지나고 있는지 적나라하게 알려주고 있었다.
" 사람 당황시키는 재주가 있다는걸 오늘 처음 알았네. "
제 2기사단이 아닐때에도 그녀의 상관이었고 지금도 그녀의 상관이었지만 이런 모습은 처음 보는 것인지라 좀 새로웠다. 근데 원체 타인에게 관심없이 사는 편이니 어쩔 수 없었다.
여기 술집은 밤새 열테니, 엎어져서 자고 일어나면 되지 않을까, 모네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윗층은 여관으로 되어 있는 전형적인 선술집이기에 더더욱 걱정은 덜했다. 삐걱이는 나무계단을 보니 옛생각이 흐른다.
" 그건 맞는 말이라 할 말이 없군요."
술기운이 올라 답답한 로브를 벗고 싶어도 안의 호사스러운 옷차림 때문에 벗을 수가 없음이 안타까웠다. 뜨겁고 좁은 나무로 된 선술집의 안은 더더욱 복작거렸고, 잠시간 마법처럼 정적이 흐를 때면 바깥의 바람소리와 풀벌레들의 바스락거림이 들려왔다.
" 재미없어요?"
디아나는 가지런히 난 제 손톱 끝을 둥글게 둥글게 나무에 갈아내듯 문대며 의자에 몸을 깊숙이 기대었다. 그레이스 경, 하고 불러대는 당신의 말이 경고음처럼 붉게 들린다.
" 아님, 화났어요?"
비죽이는 웃음이 그의 심기를 더욱 거스를지 모른다는 것을 훤히 알면서도 멈출 수가 없다. 왜요, 난 재밌는데.
" 이런 선술집에서 잠시 부부로 알려지는 것 쯤이 뭐 대수라고요." " Darling, 이제 제가 싫어요?"
주인장이 다시 바 테이블 근처로 되돌아오자 석고처럼 굳어서 입만 조목조목 움직이다가, 돌연 태도를 바꾸어 이제 자신이 싫은 거냐고 칭얼대기 시작한다. 까슬하던 손톱이 나무에 갈려 매끄러워지자 그것을 만족스럽다는 듯 손가락의 여린 면으로 훑어내고 석고 조각상 같던 표정을 연하게 풀어 울상을 짓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