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1 지금껏 나온 선록들에, 가능하다면 한 번씩은 잇고 싶어요. 하지만 릭켈런의 경우는 선관이 간단하게라도 있어야 할 것 같고, 모네의 경우에는 어떻게 등장시킬까, 렘프리에게는 어떻게 이을까, 일상생활 중 틈틈이 고민중이네요. 이렇게 고민하다가 한 달 뒤에 로그를 이어버리면 어쩌나 싶어요..😅
>>552 고생하신 캡틴에게 쓰담담을 드릴게요.. 🥰 감사해요. 연휴가 지나고 빨리 월말이 찾아와서 일상도 돌릴 수 있으면 좋겠네요.
>>555 헤헤, 고맙습니다 🥰 저도 맞쓰담을 드려야만...(쓰담담) 그러게요~ 본개장 이후 이벤트들도 기대중이니까요. 3월에 할 첫 진행도 개인적으로 기대중이구요... 첫 투표부터 파벌이 완전히 나뉠지, 아니면 첫 투표에서는 약간 무난하게 흘러갈지... 그런 생각을 하다보면 시간이 훌쩍 지나가더라구요.
>>559 괜찮아요! 천천히 편하게 써주세요. 😊 그래도 관전은 느긋하게 계속 하고 있으니까요...(최후의 양심)
기도회가 거의 끝날 무렵에는 반딧불이 몇 개가 날아다니며 취객들을 안내하고 있는 지경이 되었다. 신성한 기도회에 웬 취객이냐 하신다면야, 밤과 술, 그리고 사람이 있었는데 누굴 탓하겠냐고 대답하겠다. 그리고 그 구석탱이에 풀밭과 들꽃을 베개삼아 가지런히 들숨 날숨을 거듭하는 형체 하나 또한 이제는 아무도 신경쓰지 않았다.
" 으음.."
무거운 갑옷은 이미 벗은지 오래요 겨울의 찬바람을 막아주던 모피 망토는 바닥에 깔려 이불이 되어주었다. 가뜩이나 어두운 색을 좋아하는 그녀이기에 보라색 모피, 남색 실크 로브, 겹겹의 상의 아래로 갈색 가죽 바지 들은 훌륭한 그녀의 보호색이 되어버렸다. 밖은 춥고 황폐한데 황궁의 정원은 봄이 온 것처럼 풀향이 싱그러웠다. 디아나는 그녀가 좋아하는 마른 땅에 누워 바삭거리는 풀과 꽃향에 취해 반쯤 잠이 들어 있었다. 두 손을 곱게 모은 것이 마치 그곳에 묻히길 바라는 것도 같다.
" 밟지 마세요. 사람이거든요."
둥둥둥, 발소리가 울려오더니 거대한 그림자가 그녀를 덮어도 끈덕지게 누워 미동도 없이 숨을 쉬다가는 결국 나직히 내뱉은 말이다. 천천히 뜬 맑고 어두운 눈동자에 거대한 설인 같은 이가 담긴다. 그녀는 마치 모든 것을 내려놓은 사람처럼 제 자신을 땅에게 온전히 맡기고는 밟을테면 밟으라는 듯 딱 버티고 있다. 개미 한마리가 다리를 넘어가도, 반딧불이가 머리 위를 빙그르르 돌아도. 입 안에서는 상큼한 단내가 났고, 입을 연 목소리에서는 라벤더 향이 지긋했다.
먼 옛날의 추억이 그를 정원으로 향하게 했다. 아직 아이였을 무렵, 아버지와 함께 황제 폐하를 알현하며 이곳에 온 적이 있었다. 그때 나누었던 대화는 거의 기억이 나지 않지만, 꽃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었던건 기억난다. 새하얀 눈꽃, 설국에서 피는 여신의 눈물. 귀중한 설국의 꽃이기에 보는 것 조차 드문, 그런 꽃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황제 폐하께서는 언젠가 설국에도 싱그러운 봄이 찾아와 이곳을 닮은 푸른 초원이, 향기로운 꽃밭이 생겼으면 좋겠다고 말씀하셨다. 기상조차 마음대로 다룰 수 있는, 동화 속 영웅같은 마법사가 나타난다면 언젠가 설국을 푸른 땅으로, 그린랜드로 만들고 싶다고 말씀하셨다. 꿈같은 이야기였다. 허나 설국의 아름다운 풍경을, 생활과 문화를, 생태계를 망치는게 아닐까 내심 걱정하시기도 하셨다. 즐거운 이야기를 나누었지. 헌데, 언제부터 그 정원을 베개삼아 잠을 자는 이가 있었을까. 여전히 새하얀 셔츠, 거칠게 묶인 넥타이. 새하얀 코트위로, 마수의 털이 분명한 백색의 망토. 흰 바지 아래로는 크램폰이 달린 흰 부츠. 어느것 하나 티끌만큼의 얼룩도 없는, 눈이 쌓인 것이 아닐까 의심될법한 차림새. 그는 새하얀 머리카락 아래 샛노란 눈동자로, 모피 망토를 이불 삼아 바닥에서 잠을 자고 있는, 푸른 빛이 도는 머리카락의 여인을 내려다보았다.
"이곳의 정원이 언제부터 네 침소였느냐."
무심하게 물은 말은 툭 떨어지듯 정원 위로 가라앉았다. 낮은 목소리였으나 꾸짖을 의도는 아니라는것을 알아채기 쉬웠다. 당당하게 자신을 밟지 말라고 요구하는 여인에게서는 상큼한 단내와, 짙은 라벤더 향이 물씬 풍겼다. 아이러니하게도, 어울리지 않는 쇠의 향기와 함께. 기사인가. 느릿하게 제 눈 아래의 여인을 살펴보던 그는, 나지막히 물었다.
"취했느냐."
밟을테면 밟으라는듯, 왜 단잠을 자던 자신을 방해하냐는듯, 그 나른한 태도에 어쩐지 자신까지 피곤해지는 느낌이었기에. 일으켜 세워줄 요량으로 손을 뻗었다.
늦은 저녁, 이 시간에는 경비가 삼엄해지는 수도의 성문 앞에 웬 말 한마리가 천천히 다가와섰다. 규칙대로 경비대가 내려와 신분을 조회하고 몸수색을 해야 정상이겠지만 어째서인지 성문 옆의 쪽문이 열리고 그 안에선 경비대원 한명이 꼿꼿한 자세로 서서 경례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손짓으로 경례를 받아준 그는 천천히 말을 몰아 황궁이 있는 수도로 진입했다. 붉은 눈이 인상적인 이 사내의 이름은 릭켈런 나힐 클라렌스, 황궁을 지키는 제 2기사단의 단장이었다. 그는 영지에 다녀오는 중이었다. 무언가 급한 일이 생겼다는 전갈이 날아와 오늘 낮에 출발하여 일을 해결하자마자 돌아오니 이 시간이었다. 다행인 것은 기사단의 업무가 그렇게 많이 있진 않았다는 것 정도. 그리고 수도와 클라렌스 영지가 그렇게 멀지 않다는 것. 하지만 장시간 말을 타고 이동하는 것은 피곤한 법이고 내색은 하진 않았지만 그의 몸은 완전 녹초가 되기 직전이었다. 타고온 말을 마굿간에 맡기고 나서 황궁으로 돌아가기 위해 거리에 들어온 그의 눈엔 익숙한 보라색 로브가 눈에 띄었다.
" 호오? "
그냥 지나칠 수도 있겠지만 지금 황궁에 있어야할 사람이 여기에 있다는 것을 알게된 이상 그냥 지나칠 수는 없었다. 마침 선술집으로 들어가는 보라색 로브 자락을 뒤쫓아 다른 사람이 선술집에 들어갈때 뒤에 서서 살짝 진입한 그는 싸구려 술을 시키는 모네의 옆자리에 나란히 앉으며 마찬가지로 동전을 내려놓고선 말했다.
" 난 적당히 주게. "
영지에 다녀오느라 평상복 차림이었던 그는 옆에 앉은 모네를 바라보며 말했다.
" 흐음, 그래서 그레이스경? 지금 이곳에 앉아서 술을 시키고 있는 연유가 무엇인지 말해줄 수 있겠나? "
분명 붉은빛의 눈동자는 하나 밖에 보이지 않는데 그 시선은 별로 고운 시선은 아닌듯 했다.
겨울은 겨울이구나. 사내에게서 설원이 보였다. 드높은 험한 산맥과 설원을 연상케 하는 그는 설국의 영주리라. 그 단단함 앞에 무릎을 꿇고 싶은 동시에 꺾고 싶었다.
" 침소가 아니면 눕지 말란 법은 없습니다. 온화하신 영주시여."
그를 모를 수는 없었다. 차디찬 설원의 따스한 변경백. 설국의 주인. 그 위압감으로 차가움마저 다스리고 있는가. 백색의 위압을 디아나는 땅에 납작히 뉘인 채 어둠으로 받아내었다. 땅은 차가웠고, 모피는 따스했으며, 얌전히 모은 두 손은 차갑게 식어 있었다. 죽음을 체험하고 있는 자를 왜 그리 나무라십니까. 내뱉지 못한 말이 삐죽였다.
" 저를 일으키시렵니까? 같이 눕는 것도 한 방법일텐데."
겁 없는 보라빛 입술이 평소와는 다르게 부정확한 발음으로 상대를 농락하려 하였다. 그래 감히 그녀가 그리한다. 오랜시간 말을 하지 않았던 딱딱한 입술 때문이다. 취기는 이미 추위에 씻겨내려갔으니. 그 자의 설원은 자유로울까. 아니, 모든 것이 그의 아래에 깔려 있을 것만 같았다. 위에선 모든 것이 잘 보이는 법이죠? 땅 밑에 묻히면 숨을 수 있으려나. 모네는 제 앞으로 뻗어진 손을 바라보았다. 너무나 차가워 보이는, 너무나 사람 같은 손이었다. 더 혼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 북부의 이들은 좋겠습니다. 당신 앞에 무릎 꿇는 영광을 누리니. 제가 북부에 태어났다면 은방울 꽃이 되어 당신 앞에 종종이 머리 숙일 수 있었을텐데."
겨울철에 까맣게 변해 죽은 것 같다가도 다시 하얗게 피는 순결한 은방울 꽃을 그녀는 참 좋아했다. 그러나 그녀는 검기만 하지 않은가? 영 자격이 없었다. 디아나는 고이 모았던 손을 정중하게 뻗었다. 그 손이 잡히면, 그대로 일어나는 척 제 무게를 실어 어디 한 번 최선을 다해 거구의 사내를 넘어뜨려 보려 시도한다.
물론 '까마귀'인 이상 반짝이는 것을 거절하지는 않았겠지만. 이 말은 농으로 덧붙일까 하다가 속으로 삼켰다. 다시 한 번 창 밖을 내다 보려니 눈 너머로 해가 진다. 어머나. 급사는 외마디 탄성을 뱉으며 덩달아 자리에서 일어섰다. 결국 찾으려던 편지는 찾지 못하였지만, 무어. 2기사단 기사와 안면을 튼 것은 좋은 일이려니. 그리 생각하며 부드럽게 웃어 보였다.
"그럴 리가요, 덕분에 아주 즐거웠습니다. 그러나 저도 이만 주방 저녁 식사 준비를 도와야 하기에..."
실례하겠습니다, 하는 말은 간단한 목례로 대신하자. 렘프리는 저만치 밀어 두었던 제 몫의 편지 뭉치를 집어 들며 고개를 꾸벅 숙였다. 까마귀는 백조가 짐을 챙겨 식당을 나서기 전까지 배웅 삼아 자리에 가만 서 있다가. 그가 시야에서 멀어지자 발걸음을 돌려 주방으로 사라졌다.
옆자리에 누가 앉는 것에 모네는 아무 관심이 없었다. 그저 눈 앞의 싸구려 술잔에 마주한 제 얼굴을 보며 베시시, 풀어진 미소를 한 번 지었다간 신나게 술을 들이켤 뿐. 놀랍게도 싸구려 탄산이 둥둥 뜬 누런 맥주 한 잔을 그녀는 단번에 덩그라니 비워냈다.
" 크.. 시원...?"
제 바로 옆에 앉은 사내가 제게 말을 걸기 전까지 그날밤은 완벽했었는데.
" 릭... 릭켈런 단장님."
차라리 1기사단 단장이었으면 되도 않는 거짓을 내뱉거나 무시하겠다만, 왜 하필 본인의 직속 상관인가. 그녀는 한숨을 깊이 내쉬며 잔을 앞으로 쭉 밀어냈고, 인심 좋은 주인은 언제나 그렇듯 그 잔을 다시 가득 채워 내어주었다.
" 서민들에게 본격적으로 숨어들어야 진정한 감찰이 이루어지는 법이라서요."
당당하게 말하는 것에는 성공하였지만, 눈을 마주치는 것은 성공하지 못했다. 더욱이 눈이 새빨간데 어찌 마주치랴? 한쪽만 남은 눈동자라도 그녀는 당장 그 안광을 감내할 용기가 나지 않았다. 항상 기세 좋게 술을 즐기던 그녀가 절절매는 꼴을 보게 된 술집 주인장도 보기 드문 눈요깃거리를 얻었다. 그녀는 바짝 붙어 옆에 앉은 상관을 슬슬 피하며 의자를 끌어 거리를 넓혔다.
" ...누구세요."
그녀는 후드를 더욱 깊게 눌러쓰며 갑자기 모르쇠를 시전해 보였다. 누구십니까. 무섭게 생기긴 했는데 저는 정말 처음 보는데요. 저는 그저 술 마시는 서민입니다요. 억울하게 치켜 뜬 회색 눈이 데굴데굴 굴러간다.
자신을 알아봤음에도, 예법대로 일어나 인사를 하지 않는것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자신은 설국을 다스린다. 그래, 나는 이곳에서 이방인이니, 무례함을 문제삼을 이유도, 필요도 없다. 그러나 자신을 온화하다고 칭하는것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물끄러미 바라보던 샛노란 눈동자가 달빛을 머금고 빛난다. 천천히 눈을 깜빡이고, 그는 입을 떼었다.
"무례하구나."
"외로움을 한때의 취기에 담아 거짓됨으로 사랑이란 이름을 붙이지 마라. 생존처럼 천한 농담일 뿐이다."
얌전히 두 손을 모아, 보랏빛 입술과 라벤더 향으로 자신에게 말을 거는 그녀를 단호하게 내려다보았다. 낮은 목소리, 딱딱해진 말투는 쌓인 눈 위로 패인 발자국처럼 깊숙하게 그 흔적을 남긴다. 그는 제 아래에서 정중하게 손을 뻗는 그녀의 손을 맞잡았다. 무릎 꿇는 영광이라. 그런것은 바라지 않는다. 영광이란것은 언젠가 스러질 것이다. 영원이란것은 우리에게 주어지지 않았다. 신들의 영역이라. 우리가 죽어 그들에게서 영원한 안식을 선사받는것 뿐, 그것 외에 다른 영원이란 없다. 선제 폐하의 위업도 마찬가지리라. 우리는 망각이라는 축복을 부여받았다. 전란의 시대 이전에도 위대한 국가가 있었고 길이 남을 성군이 있었다. 그러나 그 끝은 피로 물든 강과 같았으니, 이제 그 이전의 역사를 정확히 기억하는 이들은 없다. 우리가 지금 이 순간 써내려가는 역사 또한 그러리라. 영원한 평화, 영원한 위업은 없으니, 내게 영광이란 중요하지 않았다. 무력으로 쟁취한 영광은 언젠가 자신의 등에 칼을 꽂히게 만드리라. 무릎 꿇는것보다 중요한것은, 설국의 백성들에게 장작을 한 묶음이라도 더, 따스한 스튜를 한 스푼이라도 더 주는것이었다. 우리는 온기가 필요하다. 사랑이란 이름의, 죽는 날 까지 가슴 속에 남아 따스함을 전해줄.
"머리를 숙인것은, 충성을 위해서인가."
"그대의 머리에 씌워질 왕관을 위해서인가."
그녀가 무게를 실었음에도, 그는 조금의 미동도 없이 그녀를 거칠게 일으켜 세우려 했다. 쥐는 손에는 힘을 주지 않은 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