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하. 정답은 바로, 고양이었답니다. 저어기 황궁 담 너머 곧장 있는 시장가에서 자주 어슬렁거리는 녀석인데... 늘상 시장 상인들에게 우유며 물 같은 것을 얻어 먹고 있더랬지요. 그래서 '갈증'이라는 이름이 붙은 거예요. '그렇게도 목이 타더냐?', 그런 맥락 하에서요."
다른 종이를 한 장 더 집어 다시 슥슥 그려 보았다만... ...여전히 개발괴발인 것에는 다름 없다! 역시나 고양이라기보다도 괴수를 그린 것에 가까운. 아주 자세히 본다면 이리저리 잉크가 뭉친 자국으로 하여금 얼룩 고양이라는 사실만은 알 수 있을지도 몰랐다. 머지않아 렘프리는 스스로도 곤혹스러운 웃음을 흘리며 종이를 저만치 밀어 버렸다. 실제로는 훨씬 귀엽고 통통하다는 말-당연히 그러리라-을 덧붙이고선.
"그런가요? 아쉽군요, 틀림없을 줄 알았는데..."
여전히 웃음 띤 낯. 손 안에서는 채 넣어두지 아니한 펜이 빙글, 굴렀다. 직업이 직업인지라 막상 손으로 아무 것도 만지작거리지 않자면 심심한 것이다. 조곤한 설명이 뒤따른다.
"...그 왜, 아네모네라는 봄꽃이 있지 않던가요. 가을에 뿌리를 내려 사월이 되면 오색으로 꽃을 피우지요. 레이디의 성함은 그에게서 전해온 것이 아니실까, 감히 짐작해 보았던 까닭에."
급사의 굳은살 박인 손은 잠시 펜을 튕기다가, 다시 옆의 판촉을 한 장 더 집어든다. 목표를 정하지 않고선 대강 종이를 슥슥 접어 나가기 시작했다.
"으음, 가난뱅이 촌부의 집에서는 생일을 챙기는 법이 없었습니다. 자연히 그에 대한 것을 잊고 말았지요..."
반만 진실인 대답. 생일을 챙기지 않았다는 것은 진실이고, 가난뱅이 촌부의 집이라는 것은 거짓이었다. 빈민가 고아원은 돈이 궁하였던 것치고 원장이며 아이들의 마음까지 아주 박하지는 않았지만... 역시나 돈이다. 박하지는 않았더라도 궁하였던 까닭이다.
생각 없이 접어 내려가던 종이는 이제 흔해빠진 종이비행기의 형상을 했다.
"그래도 나이는 세어야 하니까, 기억하기 쉽도록 1월 1일에 나이를 올림하곤 했습니다. 그러니 겨울이 제 생일인 셈일까요."
말수가 적으시군, 속으로 생각했다. 급사에게 그다지 중요한 바는 못 되었다. 음료 한 잔 내어 드린 후에는 무슨 일을 하시는지 여쭈어나 볼까 생각했을 따름. 웃으며 고개를 꼬박 숙여보인 후 곧장 주방으로 향했다.
주방, 우유를 미지근히 데우면서는 옆에 놓인 편지-요리 담당에게까지 돌아갔던가-를 생각 없이 집어 읽어 보았고... [축하합니다! 12박 13일 바다 여행권에 당첨되셨습니다!] ...서두를 읽자마자 곧장 저 너머 벽난로에 던져 버렸다. 끓지 않을 정도로 데워진 우유가 코코아 분말을 녹였다. 음료가 단 편이니 담백한 호밀 쿠키를 임의로 내어 본다. 은쟁반 위로 쿠키와 핫 초콜릿이 정갈히 오르고, 그는 다시 부엌을 나섰다. 이 과정까지 몇 분이 채 걸리지 않았다.
렘프리는 다시 자리로 돌아와 편지와 꽃잎 한 장을 피해 쟁반을 내려 놓았다. 마른 꽃잎이면, 역시 정원사인가?
"음료가 단 편이라 쿠키는 달지 않은 것으로 준비하여 보았습니다만... 취향에 맞지 않으신다면, 언제든 말씀해 주세요."
맞아요! 본 개장때에는 또 어떻게 관계들이 쌓일지 기대되는걸요 😊 저도 느긋하게 찾아와주시는분들이랑 일상도 돌리고, 꼭 잡담도 하면서(플래그인지 이 말만 하면 일이 생기는...) 화력을 불태우는데 좀더 일조해보려구요 🤔 미니 진행을 조금 해볼까 싶기도 한데... 이래저래 고민이란 말이죠~ 그래도 괜찮아요, 말씀대로 연휴 지나서는 조금 쉴 수 있으니까요!
다행이네요, 설 동안에는 지하철도 고속도로도 그냥 일반 도로도 전부 꽉꽉 막혀서... 어딜 가나 사람들도 많기도 하구요. 즐거우셨다면 좋을텐데요. 연휴동안 친구들이랑 즐겁게 보내는것도 너무 좋죠~
그렇다. 디아나는 할 말을 잃고 넉살 좋게 웃어보이는 렘프리를 응시했다. 그녀는 잠시 상상의 나래를 펼쳐보았다. 만일 자신이 성의껏 그린 비올라(부엉이)를 누군가 보고 날아다니는 신종 마물인가요? 하고 진지하게 여쭤왔을 때 본인의 기분은... 그 표정이 여력히 디아나의 얼굴에 드러난다.
" 시장이라. 바람도 쐴 겸 나중에 가봐야겠군요. 본다면 저도 우유 한 그릇을 대접하겠어요."
'이 그림로 알아볼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모네는 씁쓸하게 뒷말을 삼키곤 다시 그림을 살핀다. 얼룩덜룩. 그래, 이 정도면 기억할 수 있겠지. 그나저나 얇은 혀로 끝없이 우유나 물 따위을 핥는 모습에 붙여졌을 Thirsty,라는 이름을 누가 지었는지는 몰라도 참 잘 지었단 생각이 든다.
" 아네모네. 그렇지요. 그 이름에서 따 온 이름이라면 좋겠어요."
불행하게도 그저 흔한 이름 하나를 붙였을 뿐일 거라고 모네는 생각했다. 어머니에게도 아버지에게도 불행이었을 자신이니.
" 저도 제 생일 같은 거 자세히 기억 안 나는 걸요."
보란듯 축하를 받아본 적도 없고, 축하를 받기에도 그녀는 제 생일이 가물가물했다. 나 역시 누구보다 가난하고 없이, 남의 것을 동경하며 자랐을 뿐인걸.
" 1월. 추울 때 태어나셨네요. 1월의 탄생석은 가넷이라죠. 까마귀처럼 반짝이는 것을 좋아한다 하셨으니, 생일을 미리 알았으면 붉은 가넷이라도 한 알 선물했을텐데 아쉽군요."
그녀는 정말 아쉬웠다. 이런 감정을 쉽게 느끼지 않는 그녀로서도 렘프리에게서는 무언가 비슷한 느낌이 들어 마음이 편안해지며 동질감이 들었다. 이제는 담소를 데우느라 차게 식은 밀크티를 가만 들이키며 그녀는 기분 좋은 편안함을 느낀다.
" 시간을 너무 많이 빼앗었네요. 이만 일어나보도록 할게요."
소리없이 의자를 밀고 일어남은 앞에 놓인 종이 비행기가 시간의 흐름을 난데없이 알려주었기 때문이다. 벌써 하늘이 저문다. 즐거웠다는 상투적인 말은 없었어도 아쉬웠단 본인의 말로 잘 돌려 들어주기를.
주방으로 향해 사라진 모습을 가만 바라보았다. 황궁, 메이드조차도 귀족가 영애들로 이루어졌으니 저 이도 어느 귀족가의 아가씨겠지. 원래대로라면 반대가 되어야 옳을텐데, 분수에 맞지도 않는 핫 초콜릿 타령이 너무 얼뜨기 같지 않았나. 다음에는 물음표가 아니라 마침표로 말을 마무리하도록 주의해야지, 라리사는 또 다시 새 편지를 집었고 펼쳐본다.
“….”
쿠키. 핫 초콜릿 외 다른 말을 하지는 않았던 것 같아 쿠키를 바라본다. 의문에 대한 답을 쿠키가 대신 답해줄 일도 없는데, 쿠키를 빤 쳐다보다다 고개를 젓는다. 취향이랄게 중요한 삶을 살아오진 않아 당신을 곤란하게 할 일은 만들지 않고 싶다. 준비된 작은 다과상에 대한 성의는 먹음이라, 라리사는 편지를 내려놓았다. 오른손에 낀 장갑을 벗어 내려두고, 손수건을 꺼내 손을 감추고 쿠키를 집는다. 한 입 정도, 오독오독.
“………약이에요.”
풀물도 들고, 꽃잎도 쫓아왔으니 당연한 추론. 생각과 감정이 들어가있지 않은 정제된 정의, 참과 거짓을 가를 필요 없는 명제. 그것은 지식이라, 라리사는 입을 열기 편하였다. “화상 연고 재료네요.” 그래보았자 한두마디 늘어났지만.
>>0 월담의 역사는 언제부터일까? 디아나는 트리스탄과 이졸데의 사랑 이야기를 떠올렸다. 그래도 그들은 가문 한 구석의 자리를 내주었고, 디아나는 가문의 도서관에서 책 한권을 훔쳐와 달빛을 등 삼고 다락방의 밤을 지새우곤 했다. 그때 어린 디아나에게 사랑이란 감정이 무엇인지 알려준 것이 트리스탄과 이졸데였다. 정체를 알고도 입을 맞춘 이졸데의 이야기. 사랑을 위해 용과의 싸움도 불사한 트리스탄의 이야기. 사랑이라는 건 무엇이길래 증오를 이기고 목숨을 버리게 하는지, 디아나는 이해할 수 없었지만 그날 밤 가슴이 뛰어 달빛마저 휘우듬하더라. 그렇게 기울어져가는 달이 얼마나 아름다웠던지. 그녀는 짐작할 뿐이었다. 사랑이란 달이 휘는 것처럼 아름답고, 어지러우며, 몽롱한 것이겠거니 하고.
" 그러니 달이 뜬 밤엔 담을 넘어줘야 제맛이란 거지."
빙빙 제 머리를 돌다간 사라진 비올라를 보며 디아나는 그렇게 중얼댔다. 모두가 감시하고 막아도, 트리스탄과 이졸데는 죽음의 담을 넘어 밀회를 즐겼었다. 그들을 떠올리며 담 넘어 연인들의 밀회를 구경하는 것이 모네의 오랜 취미였다. 그리하면 밤의 그들은 한폭의 그림이 되어 다시금 옛 동화를 읊어주었으니. 뭐 그런 의미로, 디아나는 굳이 황궁 담을 넘었다.
* 상당히 수상한 망토. 그 아래로는 은빛 갑옷과 도발적인 칼을 차고 디아나는 사뿐히 걸음을 내딛었다. 파견, 정찰. 뭐 그따위 것들을 명목으로 두었지만 그녀는 씁쓸한 정취에 감싸여 머리핀 하나를 반으로 쪼갤듯 나누는 연인들이나 은밀한 골목을 찾는 이들 따위를 흥미있게 지켜보았다. 밤빛이 스며들어 반짝이는 듯한 남색 로브로 제 몸을 감싸대며 선술집으로 들어선 디아나는 동전 하나를 댕그렁 내려놓고 싸구려 술 하나를 시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