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도회가 거의 끝날 무렵에는 반딧불이 몇 개가 날아다니며 취객들을 안내하고 있는 지경이 되었다. 신성한 기도회에 웬 취객이냐 하신다면야, 밤과 술, 그리고 사람이 있었는데 누굴 탓하겠냐고 대답하겠다. 그리고 그 구석탱이에 풀밭과 들꽃을 베개삼아 가지런히 들숨 날숨을 거듭하는 형체 하나 또한 이제는 아무도 신경쓰지 않았다.
" 으음.."
무거운 갑옷은 이미 벗은지 오래요 겨울의 찬바람을 막아주던 모피 망토는 바닥에 깔려 이불이 되어주었다. 가뜩이나 어두운 색을 좋아하는 그녀이기에 보라색 모피, 남색 실크 로브, 겹겹의 상의 아래로 갈색 가죽 바지 들은 훌륭한 그녀의 보호색이 되어버렸다. 밖은 춥고 황폐한데 황궁의 정원은 봄이 온 것처럼 풀향이 싱그러웠다. 디아나는 그녀가 좋아하는 마른 땅에 누워 바삭거리는 풀과 꽃향에 취해 반쯤 잠이 들어 있었다. 두 손을 곱게 모은 것이 마치 그곳에 묻히길 바라는 것도 같다.
" 밟지 마세요. 사람이거든요."
둥둥둥, 발소리가 울려오더니 거대한 그림자가 그녀를 덮어도 끈덕지게 누워 미동도 없이 숨을 쉬다가는 결국 나직히 내뱉은 말이다. 천천히 뜬 맑고 어두운 눈동자에 거대한 설인 같은 이가 담긴다. 그녀는 마치 모든 것을 내려놓은 사람처럼 제 자신을 땅에게 온전히 맡기고는 밟을테면 밟으라는 듯 딱 버티고 있다. 개미 한마리가 다리를 넘어가도, 반딧불이가 머리 위를 빙그르르 돌아도. 입 안에서는 상큼한 단내가 났고, 입을 연 목소리에서는 라벤더 향이 지긋했다.
먼 옛날의 추억이 그를 정원으로 향하게 했다. 아직 아이였을 무렵, 아버지와 함께 황제 폐하를 알현하며 이곳에 온 적이 있었다. 그때 나누었던 대화는 거의 기억이 나지 않지만, 꽃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었던건 기억난다. 새하얀 눈꽃, 설국에서 피는 여신의 눈물. 귀중한 설국의 꽃이기에 보는 것 조차 드문, 그런 꽃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황제 폐하께서는 언젠가 설국에도 싱그러운 봄이 찾아와 이곳을 닮은 푸른 초원이, 향기로운 꽃밭이 생겼으면 좋겠다고 말씀하셨다. 기상조차 마음대로 다룰 수 있는, 동화 속 영웅같은 마법사가 나타난다면 언젠가 설국을 푸른 땅으로, 그린랜드로 만들고 싶다고 말씀하셨다. 꿈같은 이야기였다. 허나 설국의 아름다운 풍경을, 생활과 문화를, 생태계를 망치는게 아닐까 내심 걱정하시기도 하셨다. 즐거운 이야기를 나누었지. 헌데, 언제부터 그 정원을 베개삼아 잠을 자는 이가 있었을까. 여전히 새하얀 셔츠, 거칠게 묶인 넥타이. 새하얀 코트위로, 마수의 털이 분명한 백색의 망토. 흰 바지 아래로는 크램폰이 달린 흰 부츠. 어느것 하나 티끌만큼의 얼룩도 없는, 눈이 쌓인 것이 아닐까 의심될법한 차림새. 그는 새하얀 머리카락 아래 샛노란 눈동자로, 모피 망토를 이불 삼아 바닥에서 잠을 자고 있는, 푸른 빛이 도는 머리카락의 여인을 내려다보았다.
"이곳의 정원이 언제부터 네 침소였느냐."
무심하게 물은 말은 툭 떨어지듯 정원 위로 가라앉았다. 낮은 목소리였으나 꾸짖을 의도는 아니라는것을 알아채기 쉬웠다. 당당하게 자신을 밟지 말라고 요구하는 여인에게서는 상큼한 단내와, 짙은 라벤더 향이 물씬 풍겼다. 아이러니하게도, 어울리지 않는 쇠의 향기와 함께. 기사인가. 느릿하게 제 눈 아래의 여인을 살펴보던 그는, 나지막히 물었다.
"취했느냐."
밟을테면 밟으라는듯, 왜 단잠을 자던 자신을 방해하냐는듯, 그 나른한 태도에 어쩐지 자신까지 피곤해지는 느낌이었기에. 일으켜 세워줄 요량으로 손을 뻗었다.
늦은 저녁, 이 시간에는 경비가 삼엄해지는 수도의 성문 앞에 웬 말 한마리가 천천히 다가와섰다. 규칙대로 경비대가 내려와 신분을 조회하고 몸수색을 해야 정상이겠지만 어째서인지 성문 옆의 쪽문이 열리고 그 안에선 경비대원 한명이 꼿꼿한 자세로 서서 경례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손짓으로 경례를 받아준 그는 천천히 말을 몰아 황궁이 있는 수도로 진입했다. 붉은 눈이 인상적인 이 사내의 이름은 릭켈런 나힐 클라렌스, 황궁을 지키는 제 2기사단의 단장이었다. 그는 영지에 다녀오는 중이었다. 무언가 급한 일이 생겼다는 전갈이 날아와 오늘 낮에 출발하여 일을 해결하자마자 돌아오니 이 시간이었다. 다행인 것은 기사단의 업무가 그렇게 많이 있진 않았다는 것 정도. 그리고 수도와 클라렌스 영지가 그렇게 멀지 않다는 것. 하지만 장시간 말을 타고 이동하는 것은 피곤한 법이고 내색은 하진 않았지만 그의 몸은 완전 녹초가 되기 직전이었다. 타고온 말을 마굿간에 맡기고 나서 황궁으로 돌아가기 위해 거리에 들어온 그의 눈엔 익숙한 보라색 로브가 눈에 띄었다.
" 호오? "
그냥 지나칠 수도 있겠지만 지금 황궁에 있어야할 사람이 여기에 있다는 것을 알게된 이상 그냥 지나칠 수는 없었다. 마침 선술집으로 들어가는 보라색 로브 자락을 뒤쫓아 다른 사람이 선술집에 들어갈때 뒤에 서서 살짝 진입한 그는 싸구려 술을 시키는 모네의 옆자리에 나란히 앉으며 마찬가지로 동전을 내려놓고선 말했다.
" 난 적당히 주게. "
영지에 다녀오느라 평상복 차림이었던 그는 옆에 앉은 모네를 바라보며 말했다.
" 흐음, 그래서 그레이스경? 지금 이곳에 앉아서 술을 시키고 있는 연유가 무엇인지 말해줄 수 있겠나? "
분명 붉은빛의 눈동자는 하나 밖에 보이지 않는데 그 시선은 별로 고운 시선은 아닌듯 했다.
겨울은 겨울이구나. 사내에게서 설원이 보였다. 드높은 험한 산맥과 설원을 연상케 하는 그는 설국의 영주리라. 그 단단함 앞에 무릎을 꿇고 싶은 동시에 꺾고 싶었다.
" 침소가 아니면 눕지 말란 법은 없습니다. 온화하신 영주시여."
그를 모를 수는 없었다. 차디찬 설원의 따스한 변경백. 설국의 주인. 그 위압감으로 차가움마저 다스리고 있는가. 백색의 위압을 디아나는 땅에 납작히 뉘인 채 어둠으로 받아내었다. 땅은 차가웠고, 모피는 따스했으며, 얌전히 모은 두 손은 차갑게 식어 있었다. 죽음을 체험하고 있는 자를 왜 그리 나무라십니까. 내뱉지 못한 말이 삐죽였다.
" 저를 일으키시렵니까? 같이 눕는 것도 한 방법일텐데."
겁 없는 보라빛 입술이 평소와는 다르게 부정확한 발음으로 상대를 농락하려 하였다. 그래 감히 그녀가 그리한다. 오랜시간 말을 하지 않았던 딱딱한 입술 때문이다. 취기는 이미 추위에 씻겨내려갔으니. 그 자의 설원은 자유로울까. 아니, 모든 것이 그의 아래에 깔려 있을 것만 같았다. 위에선 모든 것이 잘 보이는 법이죠? 땅 밑에 묻히면 숨을 수 있으려나. 모네는 제 앞으로 뻗어진 손을 바라보았다. 너무나 차가워 보이는, 너무나 사람 같은 손이었다. 더 혼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 북부의 이들은 좋겠습니다. 당신 앞에 무릎 꿇는 영광을 누리니. 제가 북부에 태어났다면 은방울 꽃이 되어 당신 앞에 종종이 머리 숙일 수 있었을텐데."
겨울철에 까맣게 변해 죽은 것 같다가도 다시 하얗게 피는 순결한 은방울 꽃을 그녀는 참 좋아했다. 그러나 그녀는 검기만 하지 않은가? 영 자격이 없었다. 디아나는 고이 모았던 손을 정중하게 뻗었다. 그 손이 잡히면, 그대로 일어나는 척 제 무게를 실어 어디 한 번 최선을 다해 거구의 사내를 넘어뜨려 보려 시도한다.
물론 '까마귀'인 이상 반짝이는 것을 거절하지는 않았겠지만. 이 말은 농으로 덧붙일까 하다가 속으로 삼켰다. 다시 한 번 창 밖을 내다 보려니 눈 너머로 해가 진다. 어머나. 급사는 외마디 탄성을 뱉으며 덩달아 자리에서 일어섰다. 결국 찾으려던 편지는 찾지 못하였지만, 무어. 2기사단 기사와 안면을 튼 것은 좋은 일이려니. 그리 생각하며 부드럽게 웃어 보였다.
"그럴 리가요, 덕분에 아주 즐거웠습니다. 그러나 저도 이만 주방 저녁 식사 준비를 도와야 하기에..."
실례하겠습니다, 하는 말은 간단한 목례로 대신하자. 렘프리는 저만치 밀어 두었던 제 몫의 편지 뭉치를 집어 들며 고개를 꾸벅 숙였다. 까마귀는 백조가 짐을 챙겨 식당을 나서기 전까지 배웅 삼아 자리에 가만 서 있다가. 그가 시야에서 멀어지자 발걸음을 돌려 주방으로 사라졌다.
옆자리에 누가 앉는 것에 모네는 아무 관심이 없었다. 그저 눈 앞의 싸구려 술잔에 마주한 제 얼굴을 보며 베시시, 풀어진 미소를 한 번 지었다간 신나게 술을 들이켤 뿐. 놀랍게도 싸구려 탄산이 둥둥 뜬 누런 맥주 한 잔을 그녀는 단번에 덩그라니 비워냈다.
" 크.. 시원...?"
제 바로 옆에 앉은 사내가 제게 말을 걸기 전까지 그날밤은 완벽했었는데.
" 릭... 릭켈런 단장님."
차라리 1기사단 단장이었으면 되도 않는 거짓을 내뱉거나 무시하겠다만, 왜 하필 본인의 직속 상관인가. 그녀는 한숨을 깊이 내쉬며 잔을 앞으로 쭉 밀어냈고, 인심 좋은 주인은 언제나 그렇듯 그 잔을 다시 가득 채워 내어주었다.
" 서민들에게 본격적으로 숨어들어야 진정한 감찰이 이루어지는 법이라서요."
당당하게 말하는 것에는 성공하였지만, 눈을 마주치는 것은 성공하지 못했다. 더욱이 눈이 새빨간데 어찌 마주치랴? 한쪽만 남은 눈동자라도 그녀는 당장 그 안광을 감내할 용기가 나지 않았다. 항상 기세 좋게 술을 즐기던 그녀가 절절매는 꼴을 보게 된 술집 주인장도 보기 드문 눈요깃거리를 얻었다. 그녀는 바짝 붙어 옆에 앉은 상관을 슬슬 피하며 의자를 끌어 거리를 넓혔다.
" ...누구세요."
그녀는 후드를 더욱 깊게 눌러쓰며 갑자기 모르쇠를 시전해 보였다. 누구십니까. 무섭게 생기긴 했는데 저는 정말 처음 보는데요. 저는 그저 술 마시는 서민입니다요. 억울하게 치켜 뜬 회색 눈이 데굴데굴 굴러간다.
자신을 알아봤음에도, 예법대로 일어나 인사를 하지 않는것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자신은 설국을 다스린다. 그래, 나는 이곳에서 이방인이니, 무례함을 문제삼을 이유도, 필요도 없다. 그러나 자신을 온화하다고 칭하는것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물끄러미 바라보던 샛노란 눈동자가 달빛을 머금고 빛난다. 천천히 눈을 깜빡이고, 그는 입을 떼었다.
"무례하구나."
"외로움을 한때의 취기에 담아 거짓됨으로 사랑이란 이름을 붙이지 마라. 생존처럼 천한 농담일 뿐이다."
얌전히 두 손을 모아, 보랏빛 입술과 라벤더 향으로 자신에게 말을 거는 그녀를 단호하게 내려다보았다. 낮은 목소리, 딱딱해진 말투는 쌓인 눈 위로 패인 발자국처럼 깊숙하게 그 흔적을 남긴다. 그는 제 아래에서 정중하게 손을 뻗는 그녀의 손을 맞잡았다. 무릎 꿇는 영광이라. 그런것은 바라지 않는다. 영광이란것은 언젠가 스러질 것이다. 영원이란것은 우리에게 주어지지 않았다. 신들의 영역이라. 우리가 죽어 그들에게서 영원한 안식을 선사받는것 뿐, 그것 외에 다른 영원이란 없다. 선제 폐하의 위업도 마찬가지리라. 우리는 망각이라는 축복을 부여받았다. 전란의 시대 이전에도 위대한 국가가 있었고 길이 남을 성군이 있었다. 그러나 그 끝은 피로 물든 강과 같았으니, 이제 그 이전의 역사를 정확히 기억하는 이들은 없다. 우리가 지금 이 순간 써내려가는 역사 또한 그러리라. 영원한 평화, 영원한 위업은 없으니, 내게 영광이란 중요하지 않았다. 무력으로 쟁취한 영광은 언젠가 자신의 등에 칼을 꽂히게 만드리라. 무릎 꿇는것보다 중요한것은, 설국의 백성들에게 장작을 한 묶음이라도 더, 따스한 스튜를 한 스푼이라도 더 주는것이었다. 우리는 온기가 필요하다. 사랑이란 이름의, 죽는 날 까지 가슴 속에 남아 따스함을 전해줄.
"머리를 숙인것은, 충성을 위해서인가."
"그대의 머리에 씌워질 왕관을 위해서인가."
그녀가 무게를 실었음에도, 그는 조금의 미동도 없이 그녀를 거칠게 일으켜 세우려 했다. 쥐는 손에는 힘을 주지 않은 채로.
모네는 넙죽 인정했다. 그래, 그녀가 평소에도 이리 무례한 사람이던가. 아니다. 하지만 눈 앞의 설인과도 같은 사내는 분명 모네의 비틀린 부분만 골라 자극하는 무언가가 있었다. 달빛과도 같은 샛노란 눈동자도, 천천히 깜박거리는 저 눈도, 그리고 나서야 제 입을 떼는 그 느긋한 중압감도.
" 원체 연인들과 미친 사람들의 머리는 소용돌이치면서 들끓는 법이라."
연인은 미친이와 같고, 미친 이는 또 외로운 이와 같은가 보다. 모네는 그를 모로 응시했다. 가늘게 뜬 눈은 깊고 어둡게 빛났다.
어려운 질문을 던지는 그를 그녀는 여전히 올려다 보았다. 그 주변으로 하얗게 테두리가 인다. 달빛도 마음에 안 드는 법이 있군. 충성과 왕관이라. 둘 중 고르라면 콱 죽음을 골라보랴? 술을 너무 많이 마신 게 분명했다. 언제 꽂혀져 있던 것일지 모를 비올라 한송이가 제 귓가에서 툭 떨궈진다. 그의 질문은 과거를 가져왔다. 왕관을 욕심내기엔 빼앗길 운명이고, 충성을 하기엔 이미 많이 늦은 것만 같았다. 어질어질한 밤하늘은 정말 취해서가 아닌데 말이야.
" 취객이 대답하기엔 너무 어려운 질문입니다."
그녀는 자존심 상할 정도로 가볍게 일으켜세워졌다. 그것을 알고 있음에도 가볍다고 굳이 덧붙이는 것은 분명 제 심기를 건들기 위해서임으로 받는다.
" ...그런 건 좀 일찍 알려주지 그러셨습니까."
속이 뒤틀리는 패배. 그녀는 풀향이 싱그럽게 들어찬 모피를 부러 과격하게 털어냈다. 파스스, 흙먼지와 푸르른 풀자락이 디마크르의 멀끔히 차려입은 의복 쪽으로 털어내진다. 분명 자신만 누워있을 때 이곳은 변방이었는데 그가 다가오자 중앙이 된다. 사람들의 관심이 속절없이 쓸린다. 그녀가 소란을 제법 떤 탓도 있지만서도.
#디마르크 묘사 너무 좋다. 동화 읽듯이 읽게 돼... 모네가 예의없지만 모네주는 디마르크 좋아해. 무릎 꿇고 싶어(주접)
보아하니 당당하게 나온 것 같지는 않았다. 그랬다면 이렇게까지 당황할 필요는 없어보이니까. 아마 그녀가 즐겨하는 월담을 한 것이 아닐까, 하고 릭켈런은 추측했다. 기사단에서도 모네와의 인연은 다른 이들보다 더 오래 되었기에 그도 그녀가 어떤 일을 하는지 정도는 유추할 수 있게 되었다.
" 감찰을 할거면 이런 선술집에 있으면 안되지. "
당당하게 말하는 기개는 인정해주지만 이유가 잘못되지 않았는가. 누가 감찰을 선술집에서 술을 거나하게 마시면서 하는지. 전임 기사단장이었으면 진즉에 호통을 치면서 끌고 나왔을 것이다. 하지만 자신은 전임 단장과는 성격부터 다른 사람이었기에 금방 나온 술을 한모금 홀짝이고선 말했다.
" 이젠 상관을 모른척까지 하네. 사유서를 한장 더 쓰고싶다는 뜻으로 알아들어도 되겠지? "
걸리지 않으면 무죄지만 이미 자신에게 걸렸으니 걸고 넘어질 건수는 충분했다. 자신에게 멀어지려하는 모네를 보고선 그만큼 쫓아다가가 가까운 거리를 유지한 릭켈런은 그녀의 후드를 들춰 눈을 바라보면서 말했다.
" 그나저나 다른 사람들은 몰라도 그레이스 경은 알아야하지 않나? "
그의 눈빛은 어느새 장난끼 가득한 것으로 바뀌었고 어깨를 한번 으쓱해보이고선 자신의 술잔을 잡아서 조금 거리를 벌려주며 말했다.
" 옛날부터 이런건 대수롭지 않아했다는걸. "
뭐, 크게 잘못하는게 아니라면 그는 단원들에게 크게 터치하지 않고 있었다. 기사단의 규율과 체면이라는게 있지만 그것을 강요할 정도로 본인이 철저한 것도 아니었기에 자신의 선에서 해결할 수 있는 문제들은 눈감아주는 편이었다.
그는 가만히 그녀의 눈동자를 들여다보았다. 깊고, 어둡게 빛나는 회색의 눈동자는 설국의 늑대를 닮았다. 흐릿한 안개같은 저 눈의 너머에는 무슨 감정이 도사리고 있을까. 단순한 취기라기에는 사뭇 다른 분위기가 감돌았다. 어울리지 않는 라벤더 향과 쇠 냄새처럼.
"취기와 찬 바람은 머리를 뜨겁게 만들지."
"열로 머리가 들끓는다면 조금 쉬어라. 이곳은 황궁이고, 자네는 기사이며, 나는 변경백이네. 우리는 너무 많은 것에 묶여있어."
때와 장소가 맞지 않는다. 그렇지 않은가? 수수께끼같은 물음으로 되묻는 그는, 올려다 보는 그녀의 눈동자를 마주보며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꽃 한송이가 그녀의 귓가에서 툭, 하고 떨어진다. 이것 역시 무엇의 암시일까. 그것이어도 좋고, 그것이 아니어도 좋았다. 그래, 들끓는 머리로, 소용돌이치는 머리로, 몸을 감싸는 취기로 대답하기에는 어려운 일이었다. 허나 이미 활시위는 당겨졌다. 언제까지고 대답을 망설이기만 할 수는 없을 터.
"황궁의 기사가 적을 넘어트리는 방법도, 배워야 깨닫으리라고. 그리 생각하지 못한 내 불찰이네."
그의 입가에 처음으로 미소가 번졌다. 노골적인 적의는 익숙했다. 허나 그것이 살의가 아니기에, 그에게는 이것이 투정 정도로 보이는 것일까. 흙먼지와 푸르른 풀자락이 거세게 모피에서 흩뿌려져 제 의복쪽으로 닿는다. 하얀 눈 위로 발자국이 남았으니 자신이 넘어진 것과 다를 바 없다. 사람들의 관심을 뒤로 한 채, 그는 여전히 그녀를 바라보면서 미소지었다. 더이상 승패가 중요하지 않았다. 그걸로 되었다. 그는 작은 목소리와, 확실하게 움직이는 입모양으로 속삭인다.
"그대의 사명을 잊지 말게. 황궁을 지켜라. 그것이 그대의 것이든, 황제 폐하의 것이든... 주어진 사명을 완수해내거라."
본인을 나무라는 것 같은 태도에 그녀도 상당히 유치한 태도로 맞선다. 물론 그 서사 안에는 그 둘 사이의 신뢰와 친밀감이 있음을 알고 있다. 그 역시 모네를 호되게 야단칠 엄격한 상사는 아니었고, 모네 역시 이토록 유치하고 풀어진 모습을 쉬이 보이는 기사는 아니다.
" 사유서? 그게 뭡니까 나리."
모르쇠 공작을 이어가며 술을 여유롭게 마시는척을 하려던 찰나였다. 정말, 그 짧은 찰나에 붉은 눈동자가 후드 안으로 들어온다.
" ...콜록."
하머터면 그의 반질반질한 얼굴에 싸구려 맥주를 뱉을 뻔했다. 그랬다면 정말 꼼짝없이 사유서를 썼겠지. 머리를 싸매고 서재에 박힌채 상관의 얼굴에 맥주를 뱉은 사유에 대해 구구절절 쓰다가는 박박 종이를 찢는 제 미래가 섬뜩하게 스쳐지나간다.
" 그러는 릭 경도 그리 바짝 다가오면 제가 당황할 걸 아셨잖아요."
조금 거리가 생기자 그제서야 편안한 숨을 내뱉었다. 이왕지사 이렇게 된 거 그녀는 아까보다 훨 초췌해진 얼굴로 후드를 거칠게 벗었다. 부스스한 잔머리와 대충 올려묶은 머리가 눈에 띈다. 장난기 가득한 그 표정을 가만히 바라만 보고 있을 저는 또 아니었다. 대수롭지 않다느니 그런 말을 내뱉고 있는 참에 그녀는 얄궂은 것들을 계획했고, 한참 전부터 자신들을 흥미진진하게 관람하고 있는 주인장에게 가벼이 눈을 찡긋거렸다.
" 아아, 오해하지 말아요. 제 전 연인일 뿐이니까요. 하하."
턱을 괴고 다리를 꼬는 모네의 폼이 상당히 요사스러웠다. 그러나 그녀의 눈빛만은 단호하게 말하고 있었다. 제발요 단장님. 저는 제 단골 술집에 정체를 들켜서 출입금지 당하고 싶지 않거든요? 그리고 오늘은 제가 당한 것도 있으니 한 번씩 주고 받아야 하지 않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