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XX를 담아、나로부터。 편지를 전할 수 있습니다. 직접 전해도 괜찮습니다. ※ 누가 내 편지를 옮겼을까? 신발장에 감춰도 좋습니다. 장난꾸러기가 건들겠지만요! ※ 수수께끼의 편지함 누구에게 갈지 모르는 랜덤박스에 넣어봅시다. 상대도 랜덤임을 알 수 있다는 점에서 안심!
이곳저곳을 뒤져 보아도 결국 쓸모 있는 물건은 찾지 못했다. 해봐야 입은 옷과 주렁주렁해서 거추장스러운 장신구에, 식사 준비를 하려 챙겨 온 젓가락 정도나 잡힌다. 그에겐 모두 필요 없는 물건이므로 무신은 그제서야 쥐 잡듯이 탈탈 뒤져 대던 손길을 거두어 주었다. …한데 이 녀석, 녹슨 것을 왜 걸고 다니는 거지? 쇠와 화약과 피의 일에 능통한 무신이니만큼 금속의 종류를 알아보고 관리하는 안목 정도는 있었던 것이다. 놓아준 것까진 좋았는데 덕분에 아오이를 바라보는 시선에 '별 이상한 녀석 본단 듯한 느낌'이 한층 더 강해지고 말았다…….
"그때? 네 녀석 나와 면안이 있었던가?"
왜 목을 쳤느냐라. 그 부분은 이야기가 길어지니 말하기 귀찮다. 하지만 꼭 그 현장을 안다는 투의 목소리에는 의구심이 든다. 웃는 낯에 침 못 뱉는다고들 하지만 상대는 웃는 얼굴을 못 알아보는 강적. 조심스러운 웃음마저도 지긋이 노려보는―사실 그저 관찰하는 것일 뿐인― 시선으로 맞받아치고는, 무신은 이내 고개 한 번 젓는다.
모처럼 요즘 인간들의 관심사를 접할 수 있는 기회라 생각했건만. 차를 마시러 오란 서간 이후로 무신은 편지를 더 받지 못했다. 무신을 특별히 지목한 편지는 본인도 기대 않고 있고, 신발장에 넣는 장난 편지나 무작위로 보내는 편지는 올 법도 한데도 기미가 없다. 편지를 기다리다 못해 지나가는 학생을 습격하기도 슬슬 질렸다. 이제는 기대를 접고 하교하려던 길 가벼운 마음으로 신발장을 열었는데.
본래 기대는 단념하는 순간 찾아오기에 더욱 바라게 된다 하던가? 신발장 안에는 편지가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왠지 모를 수기(水氣)와 함께. 펼쳐 보니 내용은 더 가관이다. 아야카에루란 자의 평안을 바라는 소원과 교묘하게 섞어서, 아야카미 신사에 가 그곳의 신이 아닌 다른 존재의 이름으로 기원하라고? 맹랑하고도 당돌한 도전이 아닐 수 없다. 무신이 요괴를 깔보는 교만한 신 같은 부류였다면 분연히 떨치고 일어났겠으나……, 뭐. 그 도전이 저를 향하지 않았으니 아무래도 상관 없다. 당연하게도 무신이 정체도 모를 존재를 위해 소원을 빌 생각 역시 일절도 없다. 무시하고 마저 하교나 하기로 마음먹을 즈음이었다.
금일도 카페 블랑은 방문해주시는 고객님들 덕분에 무탈하게 운영해나가고 있었습니다. 최근들어 단골손님도 생긴 것을 보고 있노라면, 메뉴 개발로 노트를 끄적이던 시간이 성과를 만든 것 같아 뿌듯하기도 합니다. ...이대로 괜찮은건가 사토 류지, 너의 장래희망은 카페 블랑 점주면 충분한 것 이냐..
아무튼 오늘은 하늘에서 봄비가 주륵주륵 흘러내리고 있기도 하였고, 슬슬 손님이 줄어들 시간이기도 하니, 조금 일찍 키미카게씨를 퇴근시키고, 조용한 카페의 시간을 만끽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최근 인연을 엮은 죠세 선배가 말씀하신 민속학을 더한 추리 소설에 대해 견문을 넓힌다면 예정된 대화가 조금 더 즐겁겠지요
하지만 오늘은 저의 건너편에 낡은 머그컵을 쥔 아버지가 자릴 잡고 앉으셨습니다. 사토 가문의 가주 어르신 께서는 오늘도 태평한 얼굴을 하시며, 저와 함께 잠깐 창문 밖을 보시다가 작게 이야기를 시작하셨습니다.
학교 생활은 충실히 보내고 있는가 ? 친구는 많이 사귀었는가 ? 조상님은 잘 보필해드리고 있는가 ?
응 딱히 노력하고 있어
그 나잇대의 아버지와 그 나잇대의 아들과 같이 다른 미사여구는 조금 도 찾아볼 수 없는 무미건조한 대화 형인 레이지 사후, 나와 아버지의 연결고리는 이런식이었지, 그나마 조상님..무카이씨가 오시고 나서 대화가 조금 풍부해졌을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어색하고 숨막힌 시간을 조금이라도 달래고싶기에 내가 무어라 이야기를 하려는 순간 아버지는 몇가지 다른 대화주제를 꺼내주셨다.
'아빠도 아야카미 고등학교를 졸업했거든, 그립구나'
뭐 이거야 평범한 대화, 아버지 시대의 아야카미 고등학교가 어떤 느낌인지 나는 전혀 모르기에 쓸만한 리액션을 해줄 수 없었다. 그러니까 다시 침묵 _
'레이지가 죽고 _ 다시 아야카미 쵸에 올 땐, 걱정이 이만저만 아니었단다. 요즘은 괜찮아졌지만, 어르신들은 사토라는 성을 싫어하시거든'
"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닐거야 설마아...설마내가수업시간도중에화장실을찾을정도로반푼이고심지어친구도없으면처음부터가지도못하는모지리라고그렇게오랫동안기억에남고있겠어???? 그,그그그그러니까아...다, 다, 다른 떠들썩한 일 몇 개만 지나가면..."
라고 말하는 것치고 양 소매로 입을 가리며 쭈글해져서 눈은 핑핑 돌고 몸은 달달달 떨고 있지만 아무거나 사라고 대답을 듣자마자 헤벌쭉 낯을 펴버리는 걸 보니 참으로 쉬운 신이 아닐 수 없었다. 아오이는 어느새 실실거리며 매점의 단것을 전부 쓸어담을 생각이나 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대충 세어 2천 년 간을 세상살이와 내외한 힉힉호무리는 이런 곳에서 적당히를 알지 못했고...
...호칭 문제도 크게 다를 것이라곤 없었다. 남의 선을 넘는 데는 거리낌이 없는 높은 신(이었던 것) 특유의 오만과 오랜 힉힉호무리 생활로 인한 사회력 거세가 환장의 시너지를 이루면 이런 황천에서 기어올라온 듯한 끔찍하고 무시무시한 요비스테가 탄생한다. 뭐가 문제인지 모르는 저 산뜻하고 순진한 얼굴이 가장 킹받는 포인트다!!!!!!
"어? 어... 어... 그, 그러니까아..."
그런 순진해빠진 얼굴이 무너졌을 때가 바로 전 학교를 질문 당했을 때였다. 어어... 그러니까 무슨 설정이더라... 타카마가하라나 헤이안쿄나 무슨무슨쿠니라고는 절대 못 말하고... 응응 절대 이상하지 이거, 안온한 학교 생활 따위 영원히 바이바이일지도 몰라. 함부로 응변했다가는 나중에 꼬이면 꽤 머리 아파지고... 그럼... 남은 방법은...?
"...기, 기... 기억... 안 나는 것 같아...??"
아...
"아, 아니 그런 게 아니고!!!!!!! 가끔씩 전학 오기 전 학교 다들 헷갈리기도 하잖아??? 흔히 있는... 일이잖아...? 아, 아니야...? 그, 그럼 내가, 내가 기억력이 이상한 것 같아...! 정신적인 충격으로 말이야, 가끔 출신지가 기억 안 나거든――― 그, 그러니까... 이름하야......... 치, 치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