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을 할지 기대가 되었기 때문이었던 탓인지, 그는 당신이 무슨 행동을 해도 얌전히 따라주었다. 당신의 행동은 늘 예상을 벗어났고, 오차에서 오는 만족감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당신은 오만불손한 그도 통제할 수 없는 유일한 인물이라는 소리다. 그 사실을 상기할 적이면 이따금 그동안 있던 일을 떠올리게 되지만, 이제 이전처럼 불쾌하거나 답답한 기색은 없었다. 그는 당신을 흥미로운 눈길로 쳐다보다 이내 천천히 담배 낀 손을 들어 미간을 짚었다.
"……하."
여전히 당신은 사람을 미치게 만드는 것엔 천재적인 재능을 가지고 있다. 손가락 끝을 깨물기가 무섭게 그의 능글맞던 미소에 금이 갔다. 덮어낸 미간 사이로 독한 연기가 새어 들어오는 느낌이다. 이어지는 단어 하나하나가 그의 인내심을 천천히 긁어 내리기 시작한다. 그저 심술 한 번 부려볼까 했던 것이 이렇게 돌아오니 이루 말할 수 없는 감각이 등골을 오싹하게 휘감는다. 그는 다시금 속으로 생각했다. 미치겠다. 오로지 당신만이 그를 이렇게 뒤집을 수 있다.
"아가."
그는 미간에서 손을 뗀다. 간만의 휴식이자 달콤한 위안이 지금은 손가락에 아무렇게나 자리를 비집고 차지한 불청객 같았다. 결국 그는 담배를 비벼 끄지도 못하고 바닥에 아무렇게나 굴리듯 던질 수밖에 없었다. 불이 날지도 모르지만 다행스럽게도 보호 마법 덕분에 재 그을린 자국만 남을 테지.
"저깟 담배 따위가 너를 이길 것 같은가?"
자유로운 손으로 당신의 뺨을 쓸어주려 하며 눈을 마주했다. 그의 두 눈이 당신의 눈물의 궤적을 따라 구르다가도, 이내 만족스럽다는 듯 호박빛 눈동자로 온전히 이동한다. 미치겠다 벌써 세 번째 생각이지만. 담배에 포함된 타르가 이젠 생각에 치덕치덕 발려선 끓는 것 같다.
" 늘 나를 놀라게 만들고, 감탄하게 만들어."
귀하게 아끼다 못해 꽁꽁 숨기고 싶을 만큼. 혀 밑으로 숨긴 말을 뒤로 그는 천천히 고개를 기울이며 입술을 달싹였다.
예정에 없던 반려동물이 생긴 이후. 늦잠 자는 날 없어졌다. 아침마다 보송보송한 털뭉치가 얼굴을 쓸어대니 더 자고 싶어도 잘 수가 없었다.
삐! 삐이!
"이잉... 이... 털뭉탱이가..."
퍼프스캔- 이라는 이 녀석. 늘 자기 전에 먹이며 물이며 그릇 가득 채워두건만. 그것들 남았음에도 꼭 아침에 저를 깨우려 난리친다. 일어나서 놀아달라 이거다. 얼굴 피하면 목과 어깨 사이를 파고들거나 옆구리 후비고 다니니 견딜 수가 없다. 결국 저 밤톨 만한 것 이기지 못 하고 비실비실 일어나 장난감으로 놀아주는 것이 근래 아침 일과였다.
"졸려 죽것는디... 이이이..."
눈도 제대로 못 뜨고 침대에 걸터앉아 일향에게 부탁하여 받은 장난감 여럿 중 하나 꺼내들었다. 유연하게 휘는 긴 막대 끝에 튼튼한 실을 적당히 잇고 그 끝엔 방울과 깃털 따위를 달아 마치 낚시대 같은 장난감 휘두르며 하품한다. 딸랑. 딸랑딸랑. 방울 장식 이리 뛰고 저리 뛸 때마다 삐! 삐! 하고 같이 뛰는 노란 녀석 졸린 눈으로 응시한다. 멍하니 장난감 흔들다가 한 번 손놀림을 바꿔 막대 끝으로 샛노란 털뭉치 통! 건드리니-
삐익!
자지러지며 둥글어져 바닥 구른다. 데구르르. 저어기 굴러간 노란 털뭉치 빤히 보고 있으면- 예고 없이 튀어올라 폴짝댄다. 그리 자지러져놓고 재밌나 보다. 헌데 그게 그렇게 재밌나. 저야 모른다. 저리 구니 놀아주는 거지. 일 각 정도 놀아주다 방울 넣은 대나무 공 굴려주고 일어섰다. 발치에서 딸랑대는 소리 피해 슬렁슬렁 씻으러 들어간다. 오늘은 간만에 본가. 아니. 공방에 갈 예정 있었다.
씻는 내내 욕실 문 밖에서 방울 소리 들려왔다. 간간히 어디 박았나 우는 소리도 들리고. 혼자 잘만 놀면서 제가 방에 있는 내내 놀아달라 치근대긴. 저렇게 놀다가도 다 씻고 나가면 발치 와서 굴러댈 것이다. 아니나다를까. 뜨끈한 습기와 함께 나가니 통통통 무슨 공 튀기듯 온다. 아직 물기 남은 다리에 붙을까 요리조리 피하며 몸 닦고 머리 올리며 발끝으로 대나무 공 굴려주니 또 그쪽으로 쪼르르. 변덕이 죽 끓듯 하는 건지. 그냥 이러는 것도 다 놀아준다 여기는 건지.
아무튼 저 장난감에 관심 쏠린 동안 옷 입었다. 늘 입는 것 입을려다 입은 적 없는 적홍빛 치마 한 벌 꺼내 슥슥 둘렀다. 썰렁한 어깨가 아쉬워 연홍 두루마기 걸치니 제법 봐줄 만 한가. 옷 다 입었으니 경대 앞에 앉아 머리 빗질 하고 있자 발치가 또 간질간질 하다. 나갈 채비 하는 것 눈치 챘는지 노란 털뭉탱이 털 부비며 애교 부려댄다. 평소라면 다른 장난감이나 꺼내 휙 던져주었겠지만. 오늘은 녀석도 데려갈 생각이었다. 하여 괜히 장난감도 안 주고 못 본 척 굴며 제 준비만 신경 쓰니. 바닥서 정신없이 뛰어다닌다. 또 두고 저만 나갈까봐 저러는 거다. 앙증맞은 녀석. 끝까지 모른 척 하다 나가기 전 마지막으로 노란 털뭉탱이 들어 푹신한 둥지에 데려다놓는 것까지 능청스럽게 굴었다. 둥지에 내려져 오늘도 두고 가느냐는 불만 있어보이는 눈을 빤히 보다가. 씨익 웃으며 말한다.
"그래. 너도 매일 방에만 있으면 심심하지. 어째. 오늘은 너도 나갈테여?"
삐!
알아들은 건지 어쩐 건지. 묻기 무섭게 폴짝대며 오는 녀석 받아 안아올렸다. 처음부터 데려갈 생각으로 미리 어깨에 두른 천 주머니에 쏙 넣자 명치깨에서 바르작거림 느껴진다. 툭툭. 얌전히 있으라 두드려주곤 방 나섰다. 굽 낮게 깔린 당혜가 영 어색했지만 학당 나설 쯤엔 본래 신던 것 마냥 익숙해졌더란다.
담배가 중요하느냐 묻는다면 휴식이고, 어지간하면 끊을 수 없는 유혹이다. 그는 지금껏 담배와 함께했고, 그만큼 담배에 대해서는 열린 생각을 가진 사람이었다. 담배 없는 삶이라니! 누가 상상할 수 있을까! 하지만 관대하던 그도 결국 당신에게는 한 수 접을 수밖에 없다. 다소 거친 방법이지만 감히 누가 말을 얹겠는가? 이 연구실 내부에서는 그가 왕인데.
"그래, 상. 담배도 저렇게 버렸잖니, 말 잘 듣는 교수에게도 합당한 보상이 필요하지."
궤변임은 안다. 그렇지만 당신이라면 주고도 남을 사람이라는 것을 알기에, 그리고 당신이기 때문에 더 바랄 수밖에 없다. 눈물을 닦아주듯 손가락이 다시금 움직인다. 엄지로 눈가를 훔치는 것이 익숙하다. 처음 만났을 때는 어색하기 짝이 없던 것이, 지금은 이리도 능숙하니 적응하는 동안 당신을 얼마나 세심하게 돌보고 어루만졌는지 알 수 있을 정도였다. 초콜릿과 사탕, 당신은 사탕을 먼저 말했지만 그가 반응을 보이는 것은 초콜릿이었다. 어쩌면 좋을까.
"사탕과 초콜릿이라."
두 개의 작은 포장지가 입술에 고이 물렸을 때, 그는 인내심의 한계를 느꼈다. 평소에도 인내심이라곤 일절 없었지만 지금은 조금 더 심한 것 같다. 당장이라도……. 목으로 고개를 파묻을 적 들리는 앓는 소리에 생각은 툭 끊겼다. 어쩌자고 이런 토끼와 여우가 공존하는 존재에게 온정을 주었을까, 아주 잘 한 일이다.
"초콜릿."
그는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귓가에 내려앉는 울림 좋은 목소리와 함께 팔을 느릿하게 뻗는다. 이리 와서 품 안에 깊이 파고들어도 좋다는 듯. 선고하듯 발음 하나하나가 선명하다. "좋아하는 거 알잖아." 중의적인 의미다. 당신도, 초콜릿도. 어느 하나 빠짐 없이 귀신처럼 붙을 자신이 있다. 이내 길쭉한 손가락이 옥빛 머리칼을 헤집듯 틈새를 파고든다.
"아가, 너도 좋아하지?"
그는 느릿하게 웃을 수밖에 없었다. 어떤 답을 들어도 지금은 모두 상으로 받아들일 테니. 어떡하겠는가? 당신이 눈이 부신 탓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