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오늘도 별 진전 없이 커리큘럼이 끝났다.
반응 속도 자체는 점점 향상되고 있다고 하지만, 이대로면 금방 한계에 부딪힌다는 것쯤은 안다, 능력의 각성으로 얻어진 힘 같은 게 아니니까.
그래도 조바심 내지 않는다, 그동안 침묵했던 것에 비하면 이보다 가파른 성장은 바랄 수 없다.
아직 쓸만해지려면 멀었다.
단련해둔 몸이 없었다면 이런 커리큘럼 자체를 소화하기도 전에 나가떨어졌을 것이다, 이미 병원 신세를 몇 번이나 지고, 고통스러운 시술을 받았을 것이다. 긴 시간, 천천히, 조금씩 다가오는 고통으로 만들어 낸 결과를 따라잡기 위해서, 한번에 몰아 받아야만 했을 것이다.
그리고 높은 확률로 난 이 자리에 없겠지.
폐기.
길을 걷다 우연히 발견한 드럼통에 붉은 락카로 쓰인 두 글자.
드럼통은 검고 긴 승합차 주변에 놓여 있었다, 폐기물을 옮기는 데 승합차라니, 드럼통은 폐기물이 담긴 모양이지만 그건 아무래도 좋았다.
그저, 저 두 글자가 자꾸만 머리에서 맴돈다.
이번에도 실패네.
너무 많은 걸 바란 거 아냐? 생각이 좀 여문 애들을 데려다 놓고 해야 되나.
그게 되면 진즉에 했겠지, 지금은 이쪽이 뒤처리도 쉬우니까 그러려니 해.
아직 &% ^*있는 %&@은?
어차피 폐기야, 가져다 버려.뭔가 더 걷고 싶은 기분이 사라져, 근처에 있는 놀이터의 그네를 하나 차지했다, 주머니에서 꺼내든 사탕을 먹기 위해 포장을 까고 있자니, 어느새 옆에 꼬맹이 한 명이 와 있었다.
"...왜."
"그거 무슨 맛이에요?"
"모카."
"모카...? 그게 뭐지?"
모카향이 나는 사탕을 처음 보는지, 눈이 땡글땡글해져서 물어오길래, 그냥 줘버렸다.
얼떨떨한 표정을 짓던 꼬맹이였지만 준 뒤에 전혀 신경쓰지 않는 체 하니 경계를 거두고 입에 넣는다, 모카향에 눈이 휘둥그레져선 오물거리는 모습, 크기가 꽤 되는 알사탕이었기 때문에 부풀어오르는 볼을 보면 좀 다람쥐 같기도 하고.
요 며칠 계속해서 불안감을 자극하는 커리큘럼을 수행해서 그런가, 지금은 번아웃 직전이다.
이런 한적하고, 위험 요소도 없는 놀이터는 편히 쉬기 좋지, 바로 앞에 골목이 있는, 솔직히 말하면 좋은 위치는 아닌 놀이터지만 그렇기 때문에 아이도 지금 옆 그네에 앉아버린 꼬맹이 한 명 밖엔 없다.
"사탕 맛있다, 누나는 사탕 좋아해요?"
"어."
"나도 좋아하는데, 아저씨는 사탕을 잘 안 줘요."
"...많이 먹으면 이 썩는대냐."
"으응, 그것도 있는데... 사줄 돈이 없대요. 그래도 오늘은 괜찮아서 말만 잘 들으면 맛있는 거 많이 사준댔어요."
"......"
"누가 데리러 오는 거냐?"
"네, 여기서 모래로 연습하고 있으면 좀 있다가 데리러 온대요, 혹시 시계 있어요 누나?"
"있어."
"그럼 지금 몇 시에요?"
"7시 40분."
"그럼 10분 남았네, 얼른 연습해야겠다."
연습?
하고 묻기도 전에 그네에서 내린 꼬맹이는 모래에 손을 댔다, 그러자 천천히 모래가 한 곳으로 모이는가 싶더니, 자그마한 모래성을 만들어가고 있어서, 가만히 그 성이 지어지는 것을 봤다, 중간에 무너져 버리긴 했지만.
한동안 그렇게 모래성이 만들어지다 무너지는 걸 보다보니, 어느새 10분의 시간이 지나, 한 남자 한 명이 놀이터로 왔다.
"어, 아저씨다."
"잘 기다렸어? 응? 저 사람은 누구니?"
"아, 저 누나가 사탕 주고 내가 연습하는거 봐 줬어요! 저 열심히 했어요, 그쵸?"
말없이 고갤 끄덕인다.
그런 모습을 탐탁잖게 쳐다보던 남성은 꼬맹이를 보며 모르는 사람이 주는 사탕 같은 거 받지 말라고 하지 않았냐고 설교를 하고 있어서, 자리를 비켜주기 위해 그네에서 일어선다.
"응 알겠어요, 아, 누나! 잘 가요!"
"그러지 말라니까, 모르는 사람이잖니?"
사람의 생김새로 됨됨이를 판단하지 않는다.
그러니까 그 남자가 어떻게 생겼는지는 봤을 때 떠오를 정도로만, 그 이상은 담아두지 않은 채 말없이 자리를 떴다.
뒤에서는 남자가 얼마나 연습했는지 보자며 아이를 채촉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지나왔던 길을 다시 되밟아가며, 놀이터 근처에 있던 폐기물 드럼통을 지나친다.
모서리를 돌아 더 이상 드럼통도, 놀이터도 보이지 않게 되었을 때, 뇌리를 스치는 불길한 감각.
"......"
그러나 막연하던 이전과는 조금 다른, 그런 감각.
보다 선명히 떠오르는 상은, 분명히. 한 놀이터의 형태로 나타나고 있어서 그 자리에 멈춰섰다.
호기심이 동했지만 조금 지친 지금은, 원래라면 그냥 무시하고 지나갔을 것이다, 어차피 커리큘럼도 끝났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그 놀이터가 너무 낯이 익어서.
아니, 낯익은 수준이 아니라.
"...하아."
발이 내딛는 방향이 반대로 바뀐다, 일정하던 발걸음이 빨라지고, 두 발이 동시에 땅에 닿지 않는 시간도 생긴다.
모서리를 돌자마자 향한 시선은 머릿속에 떠올랐던 놀이터가 있는 자리, 거기엔 지어지다 만 모래성이 있었고.
아이를 돌보는 걸로 보였던 남자와, 양복을 입은 인영 둘. 검은 승합차 하나.
그리고, 차 안으로 눈치를 보며 오르는 아이.
XX
필터링을 거치지 않은 욕설이 입 밖으로 튀어나오는 걸 무시하고, 주변에 있던 드럼통을 있는 힘껏 발로 걷어찬다.
덜컹거리며 비탈을 타고 내려가는 드럼통들은 대화를 나누던 사람들의 시선을 끄는 데 충분했고, 둥근 드럼통이 덜컹거리며 지나친 자리를 따라 내딛다가 땅을 박찼다.
"이 XXX들아!!!"
승합차의 뒤에 부딪히거나 주변으로 굴러가 아무렇게나 널브러지는 드럼통을 피해 움직이던 양복쟁이 한 명을 향해, 두꺼운 밑창이 날아들었다. 동시에 드럼통을 꿰뚫고 날아든 열선에 귓볼이 뜯겨나갔지만, 멈추지 않는다.
둔탁한 소리와 함께 쓰러진 놈의 얼굴에는 방금 전의 타격으로 금이 간 가면이 씌워져 있었다. 나머지 한 명도 가면, 보호자라던 남자만이 맨얼굴을 드러내고 있었다.
"야, 나와."
"어? 누나?"
한 놈이 쓰러져 소란이 일어나는 동안 차 안에 올라탄 아이를 잡아끌자, 상황을 파악하기 시작한 나머지 한 명이 손을 뻗었다.
손 끝에서부터 뭉치는 검은 가루, 사철인가.
"이런 XX, 이게 뭐야!"
"다, 당신 뭐하는 거야!"
날카롭게 모인 사철은 몸통을 노려 내찔러졌지만, 머리에서 계속해서 울려대는 경보로 온통 신경이 날카로워져 있었기에 몸을 비틀어 옆구리를 찢기는 선으로 무마한 뒤, 그대로 놈의 양쪽 손을 붙잡았다.
"이 양 손으로 하는구나."
"무 무슨 힘이...! 으아악!"
우드득 하는 소리와 함께 손목의 관절이 끊어진 놈이 비명을 지르며 무릎을 꿇자, 그제야 상황을 파악한, 보호자를 자처하던 남자가 식은땀을 흘리며 물러섰다. 그러고 보니 운전자가 없었는데. 이 놈이구나.
그제야 처음 승합차를 지나치며 운전석에 누군가 앉아있었던 게 떠오른다.
"자 잠깐만... 어차피 그 애 부모도 없고, 데려가서 잘만 되면 풍족하게 살 수 있다고, 난 거짓말한 적 없어!"
"개소리 마."
이런 수법은 이미 질리도록 봐 왔다, 따라가면. 돌아올 수 없어.
어떤 변명도 듣지 않겠다는 듯, 한 걸음씩 다가가면, 어느새 차에서 내린 아이가 소매를 잡아끈다.
"누나, 괜찮아요."
"......아니야, 아니야."
"으깨버려야 해."
"태워버려야 해."
"가둬놔야 해."
"전부, 없애 버려야 돼."아이가 소매를 잡아끌지만 시선은 아이를 향하지 않고 옆에 이리저리 널부러진 텅 빈 드럼통들로 향한다.
비어 있었구나. 딱 좋아.
다리에 힘이 풀린 남자, 양 손목이 빠진 가면 한 놈, 발에 걷어차여 목이 꺾였을지도 모르는 가면 한 놈.
전부 다. 그렇게 중얼거리며 드럼통으로 걸어가려니 소매를 붙잡는 힘이 사라지고 발걸음 소리와 함께 앞에 작은 인영이 섰다.
"누나, 그만하고 나랑 다른 데 가요, 옷이 빨개요, 그러지 말고, 네?"
"......"
내려다본 옆구리에서 배어나온 피가 어느새 흰 와이셔츠를 흠뻑 적셨다. 뜯겨나간 귓볼은 열선으로 인해 상처가 지져져 핏방울이 떨어지지는 않았으니까, 옆구리의 상처가 원인이다.
퀭해져 가는 듯한 눈으로 아이를 보던 시선은 바닥에 마구잡이로 쓰러진 사람들로 옮겨가는가 싶더니, 드럼통을 쥐었던 손에서 힘이 빠진다.
"...그래."
그 대신 아이의 작은 손을 붙잡는다. 남은 손으로 옆구리를 쥐어뜯듯이 꽉 누른다. 혈관이 조여지는 것이 느껴진다.
그렇게 나는 그 자리를 떠났다. 놀이터에서 멀어졌다. 골목을 빠져나와 또 다른 골목으로 향했다.
점점 눈이 가물가물해지고, 졸려와서.
눈이 감기던 와중 아이에게 쪽지 한 장을 내밀었다. 거기엔 어떤 이름 하나와 번호 여러 개가 적혀 있었다.
아이는 아마 제대로 읽지 못했을 것이다, 자신도 누군가에게 읽는 법을 알 때까지는 읽지 못했으니까.
맨 위를 손가락으로 짚어 주고, 휴대 전화를 내민 뒤에 벽에 기댔다.
졸리다.
눈이 감기고 깜깜해지는 순간, 가면을 쓴 놈들의 옷에 붙어 있던 배지의 모양이 떠올랐다.
나무 같은 무언가, 나무와 함께 자라지만 분명히 나무는 아닌 것.
이름이 떠오르려고 할 때, 의식은 끊겼다.
-
아이는 영문도 모른 채, 숨죽여 눈을 감은 랑의 옆에 서서, 휴대전화의 통화 버튼을 눌렀다.
마지막에 랑이 짚어 준 맨 위의 번호, 그 위에 써 있는 건 읽을 수 없었지만... 지금은 아무래도 좋았다.
「
Gleipnir011-XXXX-XXXX
010-◇◇◇◇-◇◇◇◇
010-□□□□-□□□□
010-△△△△-△△△△
...」
번호를 누르면, 무색무취의 통화연결음이 잠시 들리는가 싶더니, 곧 누군가 전화를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