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팠다고? 죽여도 죽지 않는다던 사람이 엄살은. 속내와 달리 아회는 눈을 잠시 동그랗게 떴다. 놀란 듯 침묵하다 "야, 약이라도 발라야 하는 게 아닐지요. 제게, 환부에 좋은 약이 있습니다." 따위의 말을 뱉었다.
다만 치료는 아무래도 좋다. 도발은 제대로 먹힌 듯싶으니. 미간이 좁혀지더니 보기 좋게 구겨졌을 때, 아회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됐다.
"……위험한 일이 가득한 작금의 사태에서, 조금이라도 더 안전하게 지내기 위한 어르신들의 배려이지 않겠습니까."
넌지시 이야기 흘리니 당신이 벌인 탓이노라 은연중에 얘기하는 것이나 다름 없다. 아회는 자신을 걱정하고 있다는 말에 비녀를 뽑아들려던 충동을 억눌렀다. 당신이 그런 말을 하기엔 늦었다. 눈을 앗아가고 떠난 자가 걱정이니 무어니 뱉는 꼴에 치가 떨린다. 가주의 목은 자신이 칠 것인데, 자신의 기회마저 뺏을까 절로 몸이 긴장되려는 것까지 막으려 하니 벌써부터 진이 빠지는 것 같다.
"……."
뺨을 쓸어줄 때, 아회는 흐릿한 눈으로 당신을 마주했다. 익숙한 손길이다. 한때 무엇보다 좋아했던 손길이다. 이 품도, 손길도, 웃음도. 모조리 괴로우니 돌이킬 수 없는 길을 걷게 되었음이 실감이 난다. 당장이라도 손을 뿌리치고 도망치고 싶다. 이대로 뺨을 쓸던 손길이 눈을 후벼팔까 두렵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보는 것이 당신의 웃는 얼굴이 되는 것만큼은 싫다.
"아, 최근에요. 잠시 다녀가려 했지요. 형님은 속일 수 없군요."
아회는 용뉴의 울음 섞인 이야기를 기억한다. 검은 호랑이. 당신. 그 이야기를 하는 것은 좋지 않을 테지. 어찌 되었든 당신의 계획에 쓸만했던 존재일 터이니.
"그렇지만…… 얼마 가지 못해 그냥 다시 돌아왔습니다. 가문에 갔다가 또 혼사 얘기가 나올까 하여."
표정이 그때를 생각하자 괴롭다는 듯 안타까이 일그러졌지만 속내는 다르다. 차마 용뉴의 울음이 지나치게 우렁차니, 혼사 얘기가 더 선녀같았다 말할 수 없으니까…….
아이고- 제 아무리 애들 울음소리 익숙하며 단련되어 있다고는 하나. 어른의 성량으로 들으니 고막이 남아나질 않것다. 고막 뿐이랴. 뇌수도 요동쳐 계속 듣다간 눈 뜨고 기절할 지도 모른다. 얼른 이 자리를 벗어나던가 저 울음을 그치게 하던가 해야겠는데. 저 저 얄미운 면상 하는 소리 좀 봐라. 거 곱게 말하면 무어가 덧나나?
"알면서 말하는 꼬라지 하시고는. 됐소. 동생 잡는 형한테 내 무얼 바라. 이잉."
댁한테 물은 제가 잘못이라며 대놓고 혀 차고 고개 절레절레 저었다. 그리고 안고 있던 학생 요리조리 움직여 등에 걸치고는 겨우 빈 손 들어 우는 이에게 내밀었다.
"저 못난 신수 냅두고 가세. 내 방에 가면 맛난 것 맛난 술에 보들보들한 귀염둥이도 있지. 자. 뚝 하고 갑시다."
제 말처럼 뚝 그쳐줄 지는 모르겠으나. 조금 성량만 줄여줘도 살만 하겠다. 제 내민 손 잡는다면 아프지 않게 꼭 잡고 적룡 기숙사로 데려가려 했을 것이다.
사내가 눈썹 구기든 말든 뻔뻔히도 굴었다. 곱게 도와주는 법 없으니 저도 좋은 감정 가질 이유 없었다. 헌데 천하의 신수라도 저 울음소리 못 당해내나 보다. 저는 슬슬 익숙해질 듯 했다. 음- 듣다보니 이것도 정감 가는 소리렷다. 우는 소리야 뭐 애가 동시에 대여섯 울어대는 거랑 비슷하다면 비슷했으니.
제 쪽으로 가까이 온 이를 보며 싱긋 웃었다. 뭐라 할까. 저 사내와는 분위기 다르니 정이 들 것도 같았다. 손을 잡아주려 하며 느긋하게 말했다.
"아이고. 술은 못 자시나. 그럼 꿀차는 어떤감? 청차에 백차도 있으니 술이 아니어도 마실 것은 많지."
무엇인들 좋지 않을까. 옳지. 우는 아이 달래듯 하며 적룡 기숙사로 데려간다. 무사히 다다르거든 잠시 기다리라 하고 얼른 사감의 방 앞으로 간다. 그 앞에 찾아온 학생 대충 내려놓고 또 후다닥 돌아가 다시 울기 전에 손 잡아주려 했다.
"자자. 이제 울지 말고 내 방 가서 귀여운 것 보세. 알겠소? 울면 귀여운 것 놀라 까무칠지 모르니 꾹 참는 거요. 응?"
행여나 퍼프스캔이 울음소리에 놀라면 안 되니 신신당부를 하고 방에 데려가려 했다. 가는 동안 운다면- 뭐. 알아서 귀 막으라지.
아회는 제 형님 안던 팔을 풀곤 넓은 두리소매를 뒤적였다. 다행이다. 이 끔찍한 일 계속하지 않아도 되니. 소매에서 꺼낸 것은 디터니 원액이고, 원액 보니 잠시 속 긁는 소리가 떠올랐더라지.
"사감님께서 주신 것입니다. 형님께서도 학당을 졸업하셨으니 영 사감님을 아시겠지요. 그분께서 주신 것이니 효험은 좋을 터입니다. 이리 좋은 약에 갖가지 신기한 것뿐이니, 하마터면 제안을 받아들일 뻔했습니다."
어떤 제안일지는 스스로 생각하였으면 한다. 스스로 바를지, 자신이 발라줄지도 정하라는 듯 병 쥔 채로 가만히 바라보다 미소 굳는 것을 바라본다. 장관이다. 이런 표정이 당신에게 어울린다. 끝내 나로 하여금 일그러지다 못해 감정을 채 이기지 못하고 울부짖었으면 한다. 내가 그러했듯이.
"너무 잡들이는 마시지요. 어르신들의 탓이지 어찌 가주님 탓이겠습니까. 휘둘리긴 하였지마는 어찌 되었든 지금은 제 아버지시니."
그래, 아버지를 살려둔 것은 감사한 일이다. 그 작자 없었더라면 가치 증명하기 전에 이미 날뛰거나 제압되었을 터니. 그러나, 남몰래 가문 휘두르는 실세 되었던 것은 자신의 성취다. 당신이 그것까지 했노라는 인정할 수 없으니 사근거리는 목소리로 속삭일 뿐이다.
"……그렇죠, 형님의 말씀을 믿어야겠지요."
이건 거래다. 자신이 누굴 만났는지 알아챘으니, 묵인하는 대가로 한 번 신뢰하는 것. 살짝 떨어지기가 무섭게 아회의 표정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아쉬운 기색 흘긋 보여주고는 살갑던 동생 어디로 갔는지 다시금 잿더미와 같은 모습으로 돌아갔다.
오호라. 녹빛 머리에 자색 눈이라. 흔치 않은 외모렷다. 저야 가문 도술에 의해 이렇다고는 하나 보통 나올 색조는 아니하지. 게다가 손 가릴 정도로 소매 늘어뜨린 것 또한 미심쩍다. 저리 우는데 눈물을- 아니. 잠시만. 저 여인네 여즉 눈물 닦는 것 보았던가? 저 소매가 눈물 닦을 용도라면 그리 쓰이는 것 보았던가? 어허. 참으로 모를 것 투성이다.
일단 웃는 얼굴이 어여쁘니 보드리 재롱이나 보여줘야겠다.
"그렇지? 땅신령만치 똑똑하진 않으나 못지 않게 귀엽다오. 이것 보시게. 요놈 좋아하는 것 이리 들고 요래요래 움직이면-"
저만치 있던 보드리 간식 하나 집어와 손에 들고. 보드리 앞에서 휙휙 흔들어 관심을 끈다. 털뭉탱이 녀석 간식 먹고 싶어 안달하면 일부러 줄듯 말듯 손을 이리 휙 저리 휙 움직여 폴짝폴짝 뛰게 만든다. 녀석 뛰어오를 때 간식 대신 손끝으로 코 툭 눌러 품으로 받아내었다가 다시 간식으로 재롱 떨게 하고. 별 건 아니지만 샛노란 퍼프스캔이 열심히 뛰어대는 모습 보여주며 저도 낄낄 웃었다.
"이 녀석 이름은 보드리요. 요 털이 보들보들 감촉이 좋거든. 그러고보니 아씨 이름을 아직 못 들었구려. 이름. 무어라 하시는가?"
이제 울음이 좀 그칠런지. 별 기대는 안 하며 여인네 이름 물었다. 다른 건 몰라도 이름 정도는 알아둬야 할 듯 했으니.
적룡 기숙사는 오늘도 싸움판이 벌어졌는지 복도에서부터 환호와 비명이 난무했다. 흔한 일이다. 이마부터 드리우는 검은 베일로 얼굴을 가리고, 그 베일에 붉게 맹猛 자 쓰여있는 큰 체구에 머리를 질끈 묶은 남성이 복도를 거닌다. 저런 녀석이 있었나? 의문을 갖는 사람들도 있지만 적룡 사람 맞노라 얘기하듯 열심히 단련한 흔적이 보이니 의심을 쉽게 거뒀다. 남성은 천천히 온화의 문을 두드렸다.
"늦은 시간에 죄송합니다. 아회 도련님의 호위인 무영이라 합니다."
아마 문이 열린다면 남성은 공손히 예를 갖추며 자신을 소개하고는 편지와 작은 보따리를 두 손으로 건네려 들었을 터다.
"그 당시 저를 흉내 내셨으나 불가피한 상황이었을 터이고, 저는 그에 대해 어떠한 감정도 없으니 편히 대해주십시오."
제 주군 똑 닮은 얄미운 녀석이다! 무영은 그림자 속으로 쑥 숨어버리려 시도했다. [즉견卽見 — 기체후 일향만강氣體候一向萬康 하였느냐. 적궁 한 발짝만 나가도 날이 쌀쌀하다 아우성이니 벽난로 태울 때가 되었겠구나 싶다.
불비不備 본디 말미에 쓰나 지금부터 너도 나도 예를 내려놓고자 이리 앞에 쓴다.
(이 부분은 먹이 조금 짙고 글씨가 떨리는 걸 보니 신세한탄으로 빠지지 않기 위해 무진 애쓰는 듯싶다…….) 불청객이 많지 않으냐. 무언가 중한 얘기를 하려 해도 바깥에서는 용뉴가 울고, 신수의 형제란 자가 지켜보고 있으며, 역린이 보고 듣고 있으니, 내 하 사감님과 다시금 1:1 면담하는 것은 피하고 싶구나…….
하여 너와 나의 물리적인 거리는 가까우나 당분간 내 다시금 칩거할 예정이요 서신으로 대화하는 것이 좋다 생각하여 이리 영이를 보낸다. 부디 이해하리라 믿는다.
마지막으로 본론. 말미에 본론 쓰는 자 어딨냐마는 여기 있구나. 내 네 이야기를 조금 듣고자 한다. 최근 있던 사소한 일부터 시작해서 신수들이 그토록 찾던 목은 찾았는지 같은 것 말이다. 나 또한 이야기할 것이 많단다.
그러니 화야, 부디 몸 보전하고 이곳에서 살아남기를 바란다.
이만 총총悤悤.
추신. 벽난로에 적당히 구워먹을 수 있는 간식과 종을 준비했다. 종을 세 번 딸랑이면 영이가 무얼 하든 그리로 답신을 받으러 가도록 주술을 걸어 두었다. 그 김에 놀려도 좋으니 맘껏 쓰거라. 한 번 생사를 넘나들더니 버르장머리가 없어졌거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