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를 돌자 당신이 시야에 담긴다. 다시금 갈기갈기 찢겼던 목표와 패배의 순간과 무덤가에서 있던 고혈과도 같은 순간이 스친다. 세상은 현재에 머무르는데 자신의 시간이 점차 뒤로 가는 것 같다. 당신으로 인해 있었던 학당의 사건사고를 거슬러 마침내 틀어지게 된 계기를 제공한 사건까지 머리 속을 헤집고 스쳐간다. 과거를 선명하게 떠올리는 속도도, 현재에 돌아오는 속도도 짧았다. 이는 찰나였다. 당신의 미소 때문이었다.
"……."
그렇구나, 자신을 보았구나. 가지도 않을 것이었는데 언제까지 기다리고만 있으려고 그랬을까? 아회는 손을 다소곳이 모아 소매 사이로 떨림을 감추려 들었다. 누가 사라지기라도 했느냔 이야기가 들렸을 때, 아회는 결심했고, 떠올렸다. ……당신의 짓이다. 그리고 이젠 망설이지 않는다. 당신을 죽일 수 없다면, 그리고 나는 이제 회피의 수단으로 죽을 생각이 없으니.
"아……."
당신의 피를 말려서라도 그에 준하는 꼴을 보아야만 하겠다. 아회는 패배를 인정한 이후 많은 것을 체념한 사람처럼 굴기로 했다. 결국 질 수밖에 없는 운명임을 깨닫고, 끝내 한 번 무너져 가시가 꺾여버리기 직전인 사람처럼. 그렇기 때문인지 10년 전의 사건 이후 난생 처음 보이는 반응이었으리라. 당신을 보고 흠칫 놀라더니 한 걸음 뒤로 물러난 것이다. 그것도 잠시였다. 흐린 시야로 당신을 알아보려는 듯 두 눈을 온전히 뜨다, 이내 놀란 듯 반 푼도 안 되는 동공을 작게 좁히고는 당신이 있는 곳을 보며 한 걸음씩 옮겼다. 지팡이로 보조조차 할 수 없으니 휘청거리며 위태롭게 넘어질 뻔하다가도 도달한 것은.
"찾아오시기를 바라여 그리 방자하게 굴었습니다."
제지하지 아니하면 당신 품에 파고들려 하며 종알거렸을 테다. 다시금 눈을 감아버리곤 고개를 느릿하게 올린다. 가느다란 듯 부드러운 미소가 얼굴에 감돌다 사라졌다.
"그래도 용서해주실 것이죠, 형님. 가배집에서 이리 굴면 시선이 몰리지 않겠는지요…. 가장 최근에도 이것만을 바라였는데, 기회조차 없었으니 그러지 못하여 짓궂게 굴어보았습니다."
당장이라도 도망치고 싶으나 이것 또한 인내하리다. 아회는 가능하다면 품에서 고개를 기울이려 했다.
대충 손 넣어 이리저리 쑤셔보니 뭐가 있긴 있더라. 헌데 이게 하나가 아니다? 물컹한 것 하나에 단단한 것 하나인데. 이거 참.
"내가 뭘 만지고 있는가 싶구만."
낄낄. 아회가 들었다면 숭하다며 진저리 쳤을 소리 읊조리며 웃었다. 그럼 이제 이걸 꺼내야 하는데- 뭣을 꺼내나. 물컹한 것이냐. 단단한 것이냐. 그래도 몰랑몰랑하니 잡는 맛이 좋은게 좋지 않을까. 음. 아니지. 단단한게 그래도 낫지 않나. 왜 그- 크고 단단한 것 보고 아름답다 그러지 않나. 혼자 실없는 생각 하다 혼자 실실댔다. 그러면서 하나 콱 쥐었다.
용뉴: 절에 있는 종의 위에 만들어둔 종뉴가 용 형태일 경우 칭하는 말. 치미처럼, 각 용생구자를 상징하는 구조물을 일컫는 말이기도 해요.
그리고 포뢰라고, 용생구자 중 하나가 있는데 용뉴라고도 불려요.
포뢰는 전승에서 용과 비슷하되 그 크기가 좀 작고 울기를 좋아하며, 고래를 두려워 한대요.
이번에 용뉴가 나오고, 고래 문장을 가진 걸 보니 셋 중 하나인 것 같은데...🤔
1. 이전에(임시어장 발췌) 용을 모셨다는 제사장 가문이 있듯이 포뢰를 모시는 제사장 가문이 있고, 용뉴는 그 집안 일원이다(그 집안의 후계자거나 가주일 확률이 크지 않을까요...) 2. 용뉴가 포뢰고 그 떠받듬 받고 있다가 집 나왔다 < 무야옹 집착광공이 전부 인외인 것에 대하여 3. 용뉴를 억제하는 가문? 이다?
그 누가 악명이 자자한 궁기의 품에 겁도 없이 파고들까. 자신이라도 그의 심기가 나빴더라면 죽을 수도 있는 무모한 일이지만, 일전 가배집에서 있었던 대화로 하여금 묘한 확신이 있었다. 당신은 자신이 벌이는 행위의 대다수를 용인한다. 그리고 자신에게 무언가 기대를 걸고 있고, 여전히 아끼는 것 만큼은 진심이다. 언젠가 그 기대가 식어버려 아끼는 것도 내치겠다마는, 지금은 용인 가능한 선에서 당신의 피를 천천히 말려보고 싶다.
아회는 눈을 감은 채 품에 고개를 기댔다. 어렸을 적, 당신을 도련님이 아닌 형이라고 따를 수 있게 된 이후로 이리 안기곤 했었던 것 같다. 그때는 편안하고 좋았던 품이 어째서인지 익숙하지만 뱀이 옭아매는 것 같다. 더 안겨있다간 끝내 돌이킬 수 없을 것 같다.
"믿지 않는다면 어쩔 수 없지요……. 그렇지만 저는 형님을 뵙고자 사감들의 부탁도, 가문의 호출도 무시할 정도였는데."
사근사근한 목소리다. 잿더미 치고는 부드럽고 낭랑하니, 아회는 고개를 천천히 들어 감았던 눈을 떴다.
"아니면 형이라고 불러야 할까요, 예전처럼. 그래야 아우의 말을 믿어주실까……."
기쁜 것인가, 당신이? 그렇다면 어째서? 지금껏 반항하던 것을 그만 두게 꺾은 것이 효력이 있는 것 같아서? 온전히 휘두를 수 있는 말 잘듣는 패를 얻은 것 같아서? 마음껏 생각하라지. 나는 그걸 좀 이용해야겠다. 아회는 마주 안아달라는 듯 등허리를 감싼 팔에 가볍게 힘을 주었다.
"형, 이제 제게 남은 자유가 얼마 없어 이리 마주할 기회도 거의 없을 터인데 섭해요……."
'"그리고 남은 희망까지 모조리 짓밟으셨지요. 의존할 길을 하나로 만들어버리지 않으셨는지……."
나긋하게 읊조리고 당신을 마주한다. 잠깐이지만 평소의 아회의 모습이 드러난다. 미소 속에서 단숨에 공허함이 드러나다 숨겨진다. 그 순간을 떠올리니 그때의 무력했던 감정과 분노가 치밀었던 탓이다. 그렇지만 언제 그랬냐는 듯, 당신이 마주안기를 기다렸다. 그리고 미간이 구겨지는 꼴 보며 걱정어린 표정 지었다.
"어디 편찮으신지요?"
그때 막아세운 것 때문이라면 우스울 따름이다. 진짜 아픈 건 맞나? 이마저도 연기인가? 지금은 우애가 좋다못해 타인들 질겁할 모습으로 놀아나는 것이 좋겠지. 당신을 단 한 번, 휘두르기 위해서라면.
"그것이…… 얽어매는 건 아닙니다. 학당에서 아이들이 사라지는 등 평온하게 지내지 못하니, 가문 사람들이 강한 자와 엮어줘 안전히 보필하려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요."
첫째. 계획의 변경이 필요했다. 본디 엽 씨 가문의 여식을 자극한 뒤 분열을 주도하여 멸문지화를 보고, 남은 가문들을 자극해 무 씨 집안을 주동자로 몰아 모조리 불사르고자 했으나 이젠 제 손으로 멸문지화할 필요가 없다. 온건히 가자면 그들을 통해 같은 제사장 가문 출신인 무영의 새로운 길을 만들어주고 온전히 떠나보낸 뒤, 스스로 무 씨 집안을 삼켜내고자 한다. 과격히 가자면 무영을 멸문지화한 그곳을 집어삼키게 한 뒤 새로운 가주로 세워 무 씨 집안에 종속되게 할 것이다.
잔인한 계획이나 천공섬은 늘 누군가의 죽음으로 세상이 돌아가기 마련이다. 하여 아회는 머뭇거리다 천천히 눈을 내리 깔았다.
"하여 혼사가 잡혔습니다. 첩이긴 하지마는 어르신들께서 추진하신지라 안전함은 보장 되겠지요……. 그러니, 어머니와 같은 삶 살며 행복하게 지내보겠습니다."
그렇지만 혼자서는 할 수 없다. 아버지라는 자가 괜히 지금까지 무 씨 집안의 실권을 잡고 자신에게 혼사를 강요할 수 있는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그 밑의 늙은이들이 탄탄하게 지탱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길을 하나 무너뜨리고자 하나, 이는 스스로 할 수 없다. 입지와 명분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다만 당신이 개입한다면 상황이 달라지겠지.
이제 둘째. 더군다나 아주 잠깐이라도 시선을 다른 곳에 두게 만들면, 당신이 학당 아이들에 손을 잠깐이라도 떼게 만든다면.
"아, 실언을 하였습니다. 도움을 주실 일이기엔, 동생의 안온함과 행복은 형님도 바라는 일일 테니까……."
그렇게 아이들을 찾을 수 있거나, 구할 시간을 하루만 더 벌 수 있다면……. 물론 계획은 늘 보기 좋게 실패하기 마련이고, 지금 상황으로 인해 파국까지 갈 수 있다. 아이들을 내버리듯 죽일 수도 있다. 그렇지만 그것이 제 잘못은 아닐 것이다. 인내하지 못하며 주체하지 못하는 자에게 새 명분 주어질 것이다. 정당히 사냥할 명분. 그렇게 합리화 하며 속 긁어버리듯 사근사근 얘기하더니 눈을 감아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