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누가 악명이 자자한 궁기의 품에 겁도 없이 파고들까. 자신이라도 그의 심기가 나빴더라면 죽을 수도 있는 무모한 일이지만, 일전 가배집에서 있었던 대화로 하여금 묘한 확신이 있었다. 당신은 자신이 벌이는 행위의 대다수를 용인한다. 그리고 자신에게 무언가 기대를 걸고 있고, 여전히 아끼는 것 만큼은 진심이다. 언젠가 그 기대가 식어버려 아끼는 것도 내치겠다마는, 지금은 용인 가능한 선에서 당신의 피를 천천히 말려보고 싶다.
아회는 눈을 감은 채 품에 고개를 기댔다. 어렸을 적, 당신을 도련님이 아닌 형이라고 따를 수 있게 된 이후로 이리 안기곤 했었던 것 같다. 그때는 편안하고 좋았던 품이 어째서인지 익숙하지만 뱀이 옭아매는 것 같다. 더 안겨있다간 끝내 돌이킬 수 없을 것 같다.
"믿지 않는다면 어쩔 수 없지요……. 그렇지만 저는 형님을 뵙고자 사감들의 부탁도, 가문의 호출도 무시할 정도였는데."
사근사근한 목소리다. 잿더미 치고는 부드럽고 낭랑하니, 아회는 고개를 천천히 들어 감았던 눈을 떴다.
"아니면 형이라고 불러야 할까요, 예전처럼. 그래야 아우의 말을 믿어주실까……."
기쁜 것인가, 당신이? 그렇다면 어째서? 지금껏 반항하던 것을 그만 두게 꺾은 것이 효력이 있는 것 같아서? 온전히 휘두를 수 있는 말 잘듣는 패를 얻은 것 같아서? 마음껏 생각하라지. 나는 그걸 좀 이용해야겠다. 아회는 마주 안아달라는 듯 등허리를 감싼 팔에 가볍게 힘을 주었다.
"형, 이제 제게 남은 자유가 얼마 없어 이리 마주할 기회도 거의 없을 터인데 섭해요……."
'"그리고 남은 희망까지 모조리 짓밟으셨지요. 의존할 길을 하나로 만들어버리지 않으셨는지……."
나긋하게 읊조리고 당신을 마주한다. 잠깐이지만 평소의 아회의 모습이 드러난다. 미소 속에서 단숨에 공허함이 드러나다 숨겨진다. 그 순간을 떠올리니 그때의 무력했던 감정과 분노가 치밀었던 탓이다. 그렇지만 언제 그랬냐는 듯, 당신이 마주안기를 기다렸다. 그리고 미간이 구겨지는 꼴 보며 걱정어린 표정 지었다.
"어디 편찮으신지요?"
그때 막아세운 것 때문이라면 우스울 따름이다. 진짜 아픈 건 맞나? 이마저도 연기인가? 지금은 우애가 좋다못해 타인들 질겁할 모습으로 놀아나는 것이 좋겠지. 당신을 단 한 번, 휘두르기 위해서라면.
"그것이…… 얽어매는 건 아닙니다. 학당에서 아이들이 사라지는 등 평온하게 지내지 못하니, 가문 사람들이 강한 자와 엮어줘 안전히 보필하려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요."
첫째. 계획의 변경이 필요했다. 본디 엽 씨 가문의 여식을 자극한 뒤 분열을 주도하여 멸문지화를 보고, 남은 가문들을 자극해 무 씨 집안을 주동자로 몰아 모조리 불사르고자 했으나 이젠 제 손으로 멸문지화할 필요가 없다. 온건히 가자면 그들을 통해 같은 제사장 가문 출신인 무영의 새로운 길을 만들어주고 온전히 떠나보낸 뒤, 스스로 무 씨 집안을 삼켜내고자 한다. 과격히 가자면 무영을 멸문지화한 그곳을 집어삼키게 한 뒤 새로운 가주로 세워 무 씨 집안에 종속되게 할 것이다.
잔인한 계획이나 천공섬은 늘 누군가의 죽음으로 세상이 돌아가기 마련이다. 하여 아회는 머뭇거리다 천천히 눈을 내리 깔았다.
"하여 혼사가 잡혔습니다. 첩이긴 하지마는 어르신들께서 추진하신지라 안전함은 보장 되겠지요……. 그러니, 어머니와 같은 삶 살며 행복하게 지내보겠습니다."
그렇지만 혼자서는 할 수 없다. 아버지라는 자가 괜히 지금까지 무 씨 집안의 실권을 잡고 자신에게 혼사를 강요할 수 있는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그 밑의 늙은이들이 탄탄하게 지탱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길을 하나 무너뜨리고자 하나, 이는 스스로 할 수 없다. 입지와 명분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다만 당신이 개입한다면 상황이 달라지겠지.
이제 둘째. 더군다나 아주 잠깐이라도 시선을 다른 곳에 두게 만들면, 당신이 학당 아이들에 손을 잠깐이라도 떼게 만든다면.
"아, 실언을 하였습니다. 도움을 주실 일이기엔, 동생의 안온함과 행복은 형님도 바라는 일일 테니까……."
그렇게 아이들을 찾을 수 있거나, 구할 시간을 하루만 더 벌 수 있다면……. 물론 계획은 늘 보기 좋게 실패하기 마련이고, 지금 상황으로 인해 파국까지 갈 수 있다. 아이들을 내버리듯 죽일 수도 있다. 그렇지만 그것이 제 잘못은 아닐 것이다. 인내하지 못하며 주체하지 못하는 자에게 새 명분 주어질 것이다. 정당히 사냥할 명분. 그렇게 합리화 하며 속 긁어버리듯 사근사근 얘기하더니 눈을 감아버렸다.
아팠다고? 죽여도 죽지 않는다던 사람이 엄살은. 속내와 달리 아회는 눈을 잠시 동그랗게 떴다. 놀란 듯 침묵하다 "야, 약이라도 발라야 하는 게 아닐지요. 제게, 환부에 좋은 약이 있습니다." 따위의 말을 뱉었다.
다만 치료는 아무래도 좋다. 도발은 제대로 먹힌 듯싶으니. 미간이 좁혀지더니 보기 좋게 구겨졌을 때, 아회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됐다.
"……위험한 일이 가득한 작금의 사태에서, 조금이라도 더 안전하게 지내기 위한 어르신들의 배려이지 않겠습니까."
넌지시 이야기 흘리니 당신이 벌인 탓이노라 은연중에 얘기하는 것이나 다름 없다. 아회는 자신을 걱정하고 있다는 말에 비녀를 뽑아들려던 충동을 억눌렀다. 당신이 그런 말을 하기엔 늦었다. 눈을 앗아가고 떠난 자가 걱정이니 무어니 뱉는 꼴에 치가 떨린다. 가주의 목은 자신이 칠 것인데, 자신의 기회마저 뺏을까 절로 몸이 긴장되려는 것까지 막으려 하니 벌써부터 진이 빠지는 것 같다.
"……."
뺨을 쓸어줄 때, 아회는 흐릿한 눈으로 당신을 마주했다. 익숙한 손길이다. 한때 무엇보다 좋아했던 손길이다. 이 품도, 손길도, 웃음도. 모조리 괴로우니 돌이킬 수 없는 길을 걷게 되었음이 실감이 난다. 당장이라도 손을 뿌리치고 도망치고 싶다. 이대로 뺨을 쓸던 손길이 눈을 후벼팔까 두렵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보는 것이 당신의 웃는 얼굴이 되는 것만큼은 싫다.
"아, 최근에요. 잠시 다녀가려 했지요. 형님은 속일 수 없군요."
아회는 용뉴의 울음 섞인 이야기를 기억한다. 검은 호랑이. 당신. 그 이야기를 하는 것은 좋지 않을 테지. 어찌 되었든 당신의 계획에 쓸만했던 존재일 터이니.
"그렇지만…… 얼마 가지 못해 그냥 다시 돌아왔습니다. 가문에 갔다가 또 혼사 얘기가 나올까 하여."
표정이 그때를 생각하자 괴롭다는 듯 안타까이 일그러졌지만 속내는 다르다. 차마 용뉴의 울음이 지나치게 우렁차니, 혼사 얘기가 더 선녀같았다 말할 수 없으니까…….
아이고- 제 아무리 애들 울음소리 익숙하며 단련되어 있다고는 하나. 어른의 성량으로 들으니 고막이 남아나질 않것다. 고막 뿐이랴. 뇌수도 요동쳐 계속 듣다간 눈 뜨고 기절할 지도 모른다. 얼른 이 자리를 벗어나던가 저 울음을 그치게 하던가 해야겠는데. 저 저 얄미운 면상 하는 소리 좀 봐라. 거 곱게 말하면 무어가 덧나나?
"알면서 말하는 꼬라지 하시고는. 됐소. 동생 잡는 형한테 내 무얼 바라. 이잉."
댁한테 물은 제가 잘못이라며 대놓고 혀 차고 고개 절레절레 저었다. 그리고 안고 있던 학생 요리조리 움직여 등에 걸치고는 겨우 빈 손 들어 우는 이에게 내밀었다.
"저 못난 신수 냅두고 가세. 내 방에 가면 맛난 것 맛난 술에 보들보들한 귀염둥이도 있지. 자. 뚝 하고 갑시다."
제 말처럼 뚝 그쳐줄 지는 모르겠으나. 조금 성량만 줄여줘도 살만 하겠다. 제 내민 손 잡는다면 아프지 않게 꼭 잡고 적룡 기숙사로 데려가려 했을 것이다.
사내가 눈썹 구기든 말든 뻔뻔히도 굴었다. 곱게 도와주는 법 없으니 저도 좋은 감정 가질 이유 없었다. 헌데 천하의 신수라도 저 울음소리 못 당해내나 보다. 저는 슬슬 익숙해질 듯 했다. 음- 듣다보니 이것도 정감 가는 소리렷다. 우는 소리야 뭐 애가 동시에 대여섯 울어대는 거랑 비슷하다면 비슷했으니.
제 쪽으로 가까이 온 이를 보며 싱긋 웃었다. 뭐라 할까. 저 사내와는 분위기 다르니 정이 들 것도 같았다. 손을 잡아주려 하며 느긋하게 말했다.
"아이고. 술은 못 자시나. 그럼 꿀차는 어떤감? 청차에 백차도 있으니 술이 아니어도 마실 것은 많지."
무엇인들 좋지 않을까. 옳지. 우는 아이 달래듯 하며 적룡 기숙사로 데려간다. 무사히 다다르거든 잠시 기다리라 하고 얼른 사감의 방 앞으로 간다. 그 앞에 찾아온 학생 대충 내려놓고 또 후다닥 돌아가 다시 울기 전에 손 잡아주려 했다.
"자자. 이제 울지 말고 내 방 가서 귀여운 것 보세. 알겠소? 울면 귀여운 것 놀라 까무칠지 모르니 꾹 참는 거요. 응?"
행여나 퍼프스캔이 울음소리에 놀라면 안 되니 신신당부를 하고 방에 데려가려 했다. 가는 동안 운다면- 뭐. 알아서 귀 막으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