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회는 제 형님 안던 팔을 풀곤 넓은 두리소매를 뒤적였다. 다행이다. 이 끔찍한 일 계속하지 않아도 되니. 소매에서 꺼낸 것은 디터니 원액이고, 원액 보니 잠시 속 긁는 소리가 떠올랐더라지.
"사감님께서 주신 것입니다. 형님께서도 학당을 졸업하셨으니 영 사감님을 아시겠지요. 그분께서 주신 것이니 효험은 좋을 터입니다. 이리 좋은 약에 갖가지 신기한 것뿐이니, 하마터면 제안을 받아들일 뻔했습니다."
어떤 제안일지는 스스로 생각하였으면 한다. 스스로 바를지, 자신이 발라줄지도 정하라는 듯 병 쥔 채로 가만히 바라보다 미소 굳는 것을 바라본다. 장관이다. 이런 표정이 당신에게 어울린다. 끝내 나로 하여금 일그러지다 못해 감정을 채 이기지 못하고 울부짖었으면 한다. 내가 그러했듯이.
"너무 잡들이는 마시지요. 어르신들의 탓이지 어찌 가주님 탓이겠습니까. 휘둘리긴 하였지마는 어찌 되었든 지금은 제 아버지시니."
그래, 아버지를 살려둔 것은 감사한 일이다. 그 작자 없었더라면 가치 증명하기 전에 이미 날뛰거나 제압되었을 터니. 그러나, 남몰래 가문 휘두르는 실세 되었던 것은 자신의 성취다. 당신이 그것까지 했노라는 인정할 수 없으니 사근거리는 목소리로 속삭일 뿐이다.
"……그렇죠, 형님의 말씀을 믿어야겠지요."
이건 거래다. 자신이 누굴 만났는지 알아챘으니, 묵인하는 대가로 한 번 신뢰하는 것. 살짝 떨어지기가 무섭게 아회의 표정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아쉬운 기색 흘긋 보여주고는 살갑던 동생 어디로 갔는지 다시금 잿더미와 같은 모습으로 돌아갔다.
오호라. 녹빛 머리에 자색 눈이라. 흔치 않은 외모렷다. 저야 가문 도술에 의해 이렇다고는 하나 보통 나올 색조는 아니하지. 게다가 손 가릴 정도로 소매 늘어뜨린 것 또한 미심쩍다. 저리 우는데 눈물을- 아니. 잠시만. 저 여인네 여즉 눈물 닦는 것 보았던가? 저 소매가 눈물 닦을 용도라면 그리 쓰이는 것 보았던가? 어허. 참으로 모를 것 투성이다.
일단 웃는 얼굴이 어여쁘니 보드리 재롱이나 보여줘야겠다.
"그렇지? 땅신령만치 똑똑하진 않으나 못지 않게 귀엽다오. 이것 보시게. 요놈 좋아하는 것 이리 들고 요래요래 움직이면-"
저만치 있던 보드리 간식 하나 집어와 손에 들고. 보드리 앞에서 휙휙 흔들어 관심을 끈다. 털뭉탱이 녀석 간식 먹고 싶어 안달하면 일부러 줄듯 말듯 손을 이리 휙 저리 휙 움직여 폴짝폴짝 뛰게 만든다. 녀석 뛰어오를 때 간식 대신 손끝으로 코 툭 눌러 품으로 받아내었다가 다시 간식으로 재롱 떨게 하고. 별 건 아니지만 샛노란 퍼프스캔이 열심히 뛰어대는 모습 보여주며 저도 낄낄 웃었다.
"이 녀석 이름은 보드리요. 요 털이 보들보들 감촉이 좋거든. 그러고보니 아씨 이름을 아직 못 들었구려. 이름. 무어라 하시는가?"
이제 울음이 좀 그칠런지. 별 기대는 안 하며 여인네 이름 물었다. 다른 건 몰라도 이름 정도는 알아둬야 할 듯 했으니.
적룡 기숙사는 오늘도 싸움판이 벌어졌는지 복도에서부터 환호와 비명이 난무했다. 흔한 일이다. 이마부터 드리우는 검은 베일로 얼굴을 가리고, 그 베일에 붉게 맹猛 자 쓰여있는 큰 체구에 머리를 질끈 묶은 남성이 복도를 거닌다. 저런 녀석이 있었나? 의문을 갖는 사람들도 있지만 적룡 사람 맞노라 얘기하듯 열심히 단련한 흔적이 보이니 의심을 쉽게 거뒀다. 남성은 천천히 온화의 문을 두드렸다.
"늦은 시간에 죄송합니다. 아회 도련님의 호위인 무영이라 합니다."
아마 문이 열린다면 남성은 공손히 예를 갖추며 자신을 소개하고는 편지와 작은 보따리를 두 손으로 건네려 들었을 터다.
"그 당시 저를 흉내 내셨으나 불가피한 상황이었을 터이고, 저는 그에 대해 어떠한 감정도 없으니 편히 대해주십시오."
제 주군 똑 닮은 얄미운 녀석이다! 무영은 그림자 속으로 쑥 숨어버리려 시도했다. [즉견卽見 — 기체후 일향만강氣體候一向萬康 하였느냐. 적궁 한 발짝만 나가도 날이 쌀쌀하다 아우성이니 벽난로 태울 때가 되었겠구나 싶다.
불비不備 본디 말미에 쓰나 지금부터 너도 나도 예를 내려놓고자 이리 앞에 쓴다.
(이 부분은 먹이 조금 짙고 글씨가 떨리는 걸 보니 신세한탄으로 빠지지 않기 위해 무진 애쓰는 듯싶다…….) 불청객이 많지 않으냐. 무언가 중한 얘기를 하려 해도 바깥에서는 용뉴가 울고, 신수의 형제란 자가 지켜보고 있으며, 역린이 보고 듣고 있으니, 내 하 사감님과 다시금 1:1 면담하는 것은 피하고 싶구나…….
하여 너와 나의 물리적인 거리는 가까우나 당분간 내 다시금 칩거할 예정이요 서신으로 대화하는 것이 좋다 생각하여 이리 영이를 보낸다. 부디 이해하리라 믿는다.
마지막으로 본론. 말미에 본론 쓰는 자 어딨냐마는 여기 있구나. 내 네 이야기를 조금 듣고자 한다. 최근 있던 사소한 일부터 시작해서 신수들이 그토록 찾던 목은 찾았는지 같은 것 말이다. 나 또한 이야기할 것이 많단다.
그러니 화야, 부디 몸 보전하고 이곳에서 살아남기를 바란다.
이만 총총悤悤.
추신. 벽난로에 적당히 구워먹을 수 있는 간식과 종을 준비했다. 종을 세 번 딸랑이면 영이가 무얼 하든 그리로 답신을 받으러 가도록 주술을 걸어 두었다. 그 김에 놀려도 좋으니 맘껏 쓰거라. 한 번 생사를 넘나들더니 버르장머리가 없어졌거든.]
물 흐르듯 넘어가려 들었다. 당신이 만일, 자신이 황룡 기숙사로 오라는 제안을 받았음을, 그것도 넘어오리는 제안을 받음을 알게 되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 길길이 날뛸까? 아니면 놓아줄까? 그것도 아니면 자신을 위함이라며 여전히 무언가를 부수고 망가뜨릴까? 그렇다면 그 끝은? 알 수 없다. 아회는 침묵했다.
"……물론이지요."
발라달라니, 어리광이라도 피우고 싶은 건가. 아회는 당신의 손등을 단안경 너머로 정확히 마주하며 흉한 상처가 안타깝다는 듯 애석한 표정을 지었다. 조금 더 세게 찔렀어야 했는데. 속내를 꾹 삼키곤 손을 가만히 바라보다 병의 마개를 열었다.
"형님, 바깥의 서역에서는 손등에 입 대는 것을 존경을 표한다고들 합디다."
그러니 이 아우, 표하는 것이 마땅하지요. 병을 기울여 제 입을 적시기가 무섭게 쓴 맛이 들어찬다. 역하다! 다만 표정 하나 바뀌지 못하는 것은 그만큼 제 삶이 잿더미처럼 불탔단 반증이요 지금 할 일보단 덜 괴로울 것이라 생각하기 때문일 터다. 아회는 제 손으로 당신의 손 조심스레 감싸듯 끌어오더니만 환부에 입 맞추려 하며 눈을 느릿하게 떠 시선을 올려 마주치려 들었다. 그리고 이내 입술을 천천히 떼었을 테지.
"산제물, 이라."
신이 아니라 요괴나 신수. 간 큰 짓을 못 한다니, 믿음이 가지 않으나 다른 생각도 함께 든다. 그렇다면 형님은 인간이 아닌 겁니까? 언제부터? 나를 언제부터 속인 겁니까? 다만 내뱉을 수 없다. 가능성을 떠올려 범인을 찾는 것이 더 중하다.
"……형님 덕분에, 한 발짝 더 가까워졌군요. 감사하기도 하지."
덕분에 내 목표를 바꾸겠단 다짐도 한 발짝 더 가까워졌구나. 아회는 살풋 미소를 지어 보였다.
적룡의 하루는 쌈박질로 시작해 쌈박질로 끝난다. 아니. 끝이 나긴 하나? 종종 오밤중에도 고성이 터지니 적룡에 과연 싸움 없는 날 있을까 싶다. 그런고로 변함없이 소란과 난리로 들썩이는 적룡 기숙사였다.
"간지럽다 이것아- 아이. 이 털뭉탱이가!"
그런 소란 뒤로 온화 제 방에서 퍼프스캔과 뒹굴고 있었다. 정확히는 침상에 기대 앉아 연초 태우며 무상한 시간 보내는 중에 퍼프스캔이 놀아달라며 달려드는 것이다. 이리 통 저리 통 튀어대며 사방 귀찮게 구니 아이고 성가시러라. 결국 태우던 연초 눌러 꺼버리고. 바닥 한 구석에 구르던 공 집어들었다. 안에 방울 들어서 던지면 딸랑딸랑 소리 나는 그것 던져주며 놀아주는데 누가 문 두드리더라. 하여 문 벌컥 여니 아니 이게 누구야.
"허어. 댁이 영이구만?"
그 영이란 사내 문 밖에 서 있더란다. 무영은 아회의 편지와 작은 보따리를 전하러 왔다 하며 그것들 내밀었다. 아회가 보냈다면 거절할 이유 없기에 냉큼 받아드는데. 허허. 이 사내 말하는 것 보게. 누가 그 주인에 그 종 아니랄까봐. 끝말 한 마디에 곱게 보내주려던 온화 씨익 웃었다. 동시에 덥석- 무영의 팔뚝 잡아 그 자리에 붙들려 했다.
"그리 말해주니 거 참 고마우이. 그래. 내 후닥 읽고 답신 써줄 터이니 들어오게나. 아 사양 말고."
이 때 무영 알았을 것이다. 온화 손아귀 힘이 까딱 하면 그의 손목 정도는 으스러뜨리겠구나. 이리 힘 쓸 줄 알면서 아회에겐 얼마나 힘조절이며 손대중을 해 대했는가. 하는 것들을.
실랑이가 있건 없건 어쨌거나 방 안에 무영 들였을 것이다. 들여놓고 무얼 했는가 하면-
"여. 내 이것 보고 쓰고 할 동안 그 녀석이랑 좀 놀아주게."
앉기 좋은 방석 하나 툭 내주더니 퍼프스캔- 보드리의 장난감 공과 버들 닮은 막대 주며 보드리와 놀아주고 있으라 한다. 댕청한 보드리는 제 장난감 오가는 것 보고 신이 나 무영 주변을 구르고 뛰고 난리 피웠겠지. 그 광경 보며 낄낄대곤 다시금 침상에 기대앉아 서신 펼쳤다. 느슨한 자세에 느슨히 풀어진 옷가지 따위 전혀 신경 쓰지 않고 말이다.
술 석 잔 호록 마시듯 서신 읽어내려간 후. 온화 잠자코 지필묵 준비했다. 여전히 자세 다소 불량했으나 붓 놀리는 손길 섬세했다. 그리고 한 치의 망설임도 없었다.
친애하는 오라비야. 내 이것 받을 적 무슨 유난인가 싶었으나 열어 읽어보니 그럴 만도 하다 싶더라. 어딜 가도 눈이며 귀며 하물며 신수이니 살얼음 같은 오라비 속내에 어찌 버티랴. 헌데 오라비 그건 생각 못 하셨나 보오. 내 다시 마주하면 어여쁜 귀와 꼬리 다시 보여달라 조르지 않을까? 오호통재라. 이것 본 오라비 칩거 생활 길어지리라 생각하니 내 심내가 몹시 아리구나.
각설하고. 내 할 이야기라 하면 한둘이 아니니 이 한 장에 다 담길까 싶소. 무수히 많은 일이 있었지. 개중에는 오라비 기함할 일도 있고, 일단 목은 찾지 못 했소. 내게는 찾을 수 있는 눈이 없을 뿐더러 어느 신수도 내게는 친절치 않아. 내 반려는 묻지 않았으나 아마 같겠지. 내가 찾을 수 있으리라 여기지 않으니. 그 외로는 요 근래 바깥일 다닌 것일까. 의뢰 여럿 있었지 않소. 개중에 곡옥이랑 악기점 다녀왔는데. 곡옥서 천선의 영약과 거기서 자라는 박하를 조금 얻어왔지. 박하 한 가지 보낼 터이니 잘 쓰시게. 듣자하니 여기 신수들에게는 쥐약이나 다름 없다더구만. 갖고 있으면 덜 귀찮게 굴지 않을까 싶어. 영약은 내 반쪽 먹고 남은 반쪽짜리요. 신수나 신선이 아니면 죽는다 하더이다. 나는 반만 먹어서 그런가 살았긴 한데. 이것 때문인지 역린이 뭐라 떠드는지 들려서 내 골치가 아프오. 용뉴 우는 소리가 차라리 낫어. 아무튼 영약은 필요하면 적어주시게. 내 드릴 테니. 남은 하나는 악기점인가. 그래. 이것이 오라비 기함할 일이기도 하지. 일단 악기점은 일전에도 의뢰 받으러 갔었다네. 거기서 난동 피우는 이 쫓아주고 악기 만들 요괴 하나 잡아다 주었다- 인데. 이 때 처음 그 사내를 마주쳤어. 검은 호랑이. 나를 보고도 태연하더니 부탁한답시고 내 잡을 요괴 대신 손을 대 내 짜증을 돋궜더랬지. 아무튼 이 때가 처음이었는데. 요전에 갔을 때 또 본 거야! 그 악기점에서! 내 아직도 그 때 생각하면 간담이 서늘해. 그리고 알 것도 같더만. 왜 오라비가 그리도 치를 떠는지. 그는 나를 보고 쓸모가 있으니 가치가 있느니 했네. 당장 손을 대진 않을 듯 했으니 안심해도 될까 싶은데. 그런데 내 짜증이 또 나더란 말이지. 제가 무언데 내 가치를 논하느냔 말이야. 그래서 그냥 하고픈 말 술술 다 풀었지. 네가 그러니 그 모양이지. 오라비가 나를 얼마나 아끼는지 아냐. 나랑 술도 마신다. 우리 하얀 오라비 얼굴만 고운게 아니라 귀랑 꼬리도 희고 곱다. 내 실컷 만져드리니 좋아하더라. ... 내 없는 소리 한 건 아니니까. 그렇지? 재쳐놓고 그는 그리 가버렸소. 하여 뭘 하려 했는가 악기점 들어가보니 거 주인장 죽였드만. 마침 또 근처에 잡요괴 하나 있어 물어보니 묵은 이무기 부르는 호드기 찾았다 하더이다. 헌데 그 주인장에게 없다 하여 그대로 죽이고 간 모양이더라고. 내 알아낸 것은 거기까지요.
당장 생각나는 것만 추려 적었으니 다른 것은 다음 서신에 쓰겠네. 그리고 오라비 허락하였으니 영이 좀 놀려주어 보내겠소.
방에 불 좀 잘 떼고 있소. 어째 적룡에서 한기가 돌어. 오라비 방 근처만 가믄. 어여쁜 누이 화야.
다 쓴 답신 고이 접어 봉투에 넣고 붉은 밀랍 떨구어 봉한다. 이제 이것 영이에게 주어 보내기만 하면 되지만. 놀려주겠다 했으니 말한 것은 지켜야지 않겠나.
편지 한 손에 들고 무영 향해 손짓한다. 그 보드리 장난감 내려놓으라는 손짓도 같이. 그 부름에 응해 순순히 온다면 편지 내미는 것 아닌 휙 밀어 바닥에 넘어뜨리고 대뜸 올라타 씨익 웃는 흰 얼굴 붉는 눈 있었겠지.
"오라비가 허한 것이니 얌전히 있게. 내 답신 곱게 받아가야 하지 않겠나. 네 알까 싶지만. 나 역시 사람 해하는데는 능하거든."
낄낄낄. 경박하게 웃는 소리 함께 온화 손끝이 무영의 베일 걷으려 한다. 동시에 가까워지는 얼굴 있고. 벌어진 입술 사이로 붉은 혀와 짐승의 것 마냥 삐죽한 송곳니 반짝였을 것이다.
붙잡힌 무영은 순간 흩어지던 몸을 다시금 인간의 형체로 돌렸고, 베일 너머로 시선을 보냈다. 학생이니만큼, 더군다나 자신이 모시는 자의 사람인 만큼 해를 가할 생각은 없으나 혹시 모르는 일이라는 듯. 다만 인간을 훌쩍 넘는 듯한 힘에 마지못해 들어갔을 뿐이다. 제 주군을 대할 때와는 다른 힘이니, 별 다른 해는 끼치지 않겠구나.
"……예."
그렇게 생각하며 얼떨결에 자리에 앉아 버들 닮은 막대 쥐어 이리 휙, 저리 휙휙 흔들던 영이었다. 사람이 무뚝뚝하긴 해도 목화 놀아주던 실력이 어디 가지 않는다는 듯 괜찮은 손길이다. 나는 누구, 여긴 어디, 세상 헐거운 옷차림에도 목석처럼 보드리 놀아주는 임무에 집중하니 호위로는 귀감이나 인간으로는 귀기 무 씨 사람들은 호위도 저렇게 삭막하나 싶을 정도다.
다만 그 삭막함도 오래 가지 못했으니, 당신이 편지를 모두 쓴 뒤 무영을 불렀을 때다. 보드리를 열심히 놀아주던 그는 자신이 바닥에 깔리기가 무섭게 몸을 다시금 그림자 속으로 숨기며 부적을 꺼내려다, 나지막한 협박에 베일 너머로 표정을 일그러뜨렸다. 아무리 그래도 제 주군께서 자신을 팔아넘길 줄이야!
"잠깐, 이것 만큼은─!"
베일을 걷으니 멀쩡한 얼굴이었다. 우뚝 선 콧대, 날카로운 눈꼬리, 얇고 긴 입술까지. 그는 얼굴을 가리려 들며 금빛이 감도는 눈을 질끈 감았다. "이건, 이건 명령이라 걷어서는 안 됩니다……. 안 되는데……." 모든 일이 끝났을 때, 우는 듯이 먹먹한 목소리를 뒤로 그는 편지를 덥석 집고는 몸이 흩어져 사라졌다. 수치스럽기라도 했는지 도망에 가까웠다. 아회는 훌쩍이는 목소리에 끌끌 웃었다. 무릎에 고개를 파묻고 우는 걸 보니 퍽이나 험한 꼴 당했겠구나. 먹을 갈아내고 제 무릎에 파묻힌 검은 머리카락 가벼이 쓰다듬더니 붓 들었다.
"복수라도 해주랴." "스스로에게 복수를 어찌 하십니까." "알면 참아야지." "흐으윽..." "장가는 못 가겠구나." "어차피 호위가 된 이상 죽은 사람이나 다름이 없어 못 갑니다……!!" "저런. 권위를 어서 찾아야 하는데." [즉견 다음 편지부터는 즉견할 것 아니 줄이도록 하마.
네 3년 내내 나를 놀리더니만 이젠 새로이 놀릴 거리 생겼다고 신이 났구나. 그렇지? 이젠 신수에 이어 류 씨 가문의 여식으로 인해 칩거하노라 써붙이고 다니겠어.
내 기함할 일이 무언가 싶어 읽(먹이 튄 자국)
그래, 어찌 신수가 인간에게 친절하겠느냐. 같은 인간도 서로에게 친절하지 못한데 지금은 네가 이방인이 되었겠구나. 다만 하나 묻고싶은 것이 있으니, 네 단순히 선의로 하여금 찾는 것이더냐? 아니먼 부가적인 목적이 있느냐? 내 비록 눈은 내어줄 수 없으나 네 부가적인 목적이 있다면 그 목적의 방법을 같이 모색해주마. 네 나의 동생 아니더냐. 다만 네게도 요청할 것이 있으니 이는 거래겠구나.
거래의 성사는 너의 선택이다. 부디 네 뜻대로 하려무나, 화야.
또한 박하는 잘 받았다. 그 신수가 내 찾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에 소중히 모셔놓기로 했다. 하물며 역린이 그리 시끄럽다니, 나 또한 그것 들을 수 있을까 싶어 걱정이 되니 영약은 작금으로서는 정중히 거절하마. 그것보다 곡옥을 들어갈 수 있다니, 한편으로는 신기하단 생각을 떨칠 수 없다. 나 또한 과거 천선을 돕고자 곡옥에 발 들이자마자 신의 시선 느껴지니 살기 드세었으니 말이다. 천선은 어떻더냐? 이제 와서 말하는 것이지만 그날 내가 싸움으로 학생 하나를 반 죽인 연유가 그걸 집어 궁기의 집안이니 죄 산제물로 바치니 뭐니 내 심기를 건드렸기 때문이다. 에잉, 조만간에 한 번 더 뒹굴 참이니 이번엔 못 본 척 해주거라...
그것보다 네 정녕 미치지 않고서야! 간이 부었구나 이 사고뭉ㅊ(먹이 튄 자국에 지워져있다.)
살아남은 것이 요행이로구나. 악기점에 무엇이 있었는진 몰라도 보통 것은 아닐 터이다. 형ㄴ그 새ㄲ 궁기가 같은 장소에 두 번 나타날 일은 없으니 말이다. 그의 언행이 옳지 못함은 나도 안다. 그렇다고 남에게도 원래 그런 사람이니 넘어가라 할 마음은 일절 없다지만 이번 것은 심했구나. 팔 하나 날아가지 않았으니 대체 어디에 감사 기도를 올려야 할지 모르겠다. 없는 소리는 아니지만 어쩐지 그 작자가 되도 않는 어리광을 피우더니만! 아직도 그 순간을 생각하면 온몸의 피가 식는다. 그 피해가 내게도 감을 알아주었으면 하지만 잘 하였다. 다음에는 확실히 생존할 수단을 가졌을 때 행하는 것이 좋겠구나. 영 사감님께서 학당 입구까지 순간이동할 수 있는 주술을 걸어주신 귀걸이가 있는데, 필요하다면 빌려주도록 할 터이니 말만 하거라.
그리고 이무기 부르는 호드기라면 나는 모르는 일이구나. 어떤 그림을 그리는지 알 수 없으니 이건 내 생각나는 추론이 있다면 머리를 맞대보도록 하자꾸나.
내 근황은 거의 없다시피 하나 곧 이야기해주마. 추려야 할 이야기가 많거니와, 내 준비하는 것이 꽤 있어서 말이다.
이만 줄이마.
추신. 영이가 반쯤 울면서 매달리던데 대체 무얼 한 것이더니? 덕분에 달래느라 서신이 늦었다. 귀에 자국 보아하니 할 말은 많지만 하나만 꺼내도록 하마. 역린 눈은 가렸느냐? 추신2. 다행스럽게도 요즘에는 목화가 춥다고 성화라 벽난로가 꺼질 틈이 없구나...] 서신을 전하러 온 무영은 아예 꽁꽁 싸맨 듯한 차림이니, 충격이 꽤나 컸던 모양이다…….
아하. 이제보니 알겠다. 저 소매로 닦는구나. 그런데 눈물 참 쉴 새 없이 흐르기도 한다. 보통 저리 쏟으면 곧 혼절하거나 할 터인데. 저보고 착하다며 울고. 검은 호랑이 하얀 호랑이 하며 또 울고. 하도 들었더니 이제 귀가 반쯤 소리 거른다. 무릎서 보드리 삑삑대는 소리 들리니 신기하기도 하다. 한 손으로 보드리 쓰다듬으며 말했다.
"아이고 그러셨소. 하얀 호랑이가 착하지 그럼. 검은 호랑이는 아주 못된 호랑이요. 이 다음에 마주치거든 큰 소리로 검은 호랑이 나빠- 하고 소리 질러버리소. 으음. 여기서는 하지 말고."
행여나 제 앞에서 그럴까 봐 꼭 검은 호랑이 앞에서 하라고 신신당부 한다. 그 와중에 옥춘당 먹으며 우는 것 보고 피식 웃었다. 애든 어른이든 인간이든 신수든 먹을 것 앞에서는 장사 없구나.
"그래 그래. 헌데 싸움에 휘말렸다니. 무슨 싸움이었길래 그러오?"
그리 묻고 옥춘당 다음엔 한과도 집어준다. 무릎에서 보드리 통통대며 저도 달라길래 곶감 하나 옛다 내어주었다. 먹보가 둘이니 이거 모자를 지도 모르겠구만. 정 그럴까 싶지만은. 아무튼 용뉴 무어라 할지 대답 기다려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