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사감이었으면 이런 유도리는 없었을 텐데. 전에도 든 생각이지만 영 사감은 학생에게 너무 무르다. 저번에도 굳이 기다렸다가 약을 주질 않나. 이번에도 그렇고. 그리고 또 뭔가 있었던 것 같은데... 아.
뭔가 생각나긴 했지만. 일단 영 사감이 왔으니 사진을 좀 더 보기로 한다. 제가 본 것을 입학하고 얼마 안 되었을 때라 하길래 새삼 놀란 눈으로 사진과 영 사감 번갈아본다. 그러니까 대충 열서넛 쯤이겠지? 우와- 이렇게 봐도 도저히 같은 사람 안 같다. 분명 닮았으니 같은 사람이구나 하고 이해는 되지만. 우와.
"요 쪼그만게 딱 내 취향인데. 아. 어. 아까 백호한테 늘 시달리는 사감이 리 사감이라 했잖소. 요 얼굴 퀭하니 그런갑다 했지. 거기 신수도 영 점잖지만은 않은가 보오."
킥킥 웃으며 사진 도로 내려놓는다. 가까이 온 영 사감이 사진첩 넘겨 다른 사진 보여주자 얼른 본다. 뭔가 수업인가? 약을 만드는 것 같았는데 아무리 봐도 연기 자욱해지는게 실패한 것 같다. 영 사감도 실수했다고 설명하길래 피식 웃었다.
"그렇구만- 뭐 누구나 배우는 과정에서 실수는 하지요. 마지막이라. 그래도 그 분은 사감이 계속 기억할 테니 그것으로 괜찮지 않나 싶으이."
잊을 수 없음이 괴로움 될 때도 있지만. 추억 속 인물이라면 두고 두고 기억하는게 좋지 않겠는가. 더 보겠느냐 묻길래 냉큼 고개 끄덕였다. 이번에는- 그래.
"여 다닐 적 벗은 없었소? 몰래 연심 품었던 이라던가- 한때 풋풋하게 놀았던 이라던가- 응?"
오. 다행히 대화의 흐름이 좋았는지 영 사감 웃으면서 서랍에서 무언가 꺼냈다. 다른 사집첩은 아니고. 기록장인가. 주술로 꽁꽁 닫아놓은 곳에서 꺼내는 것 보니 그만큼 소중하단 것이겠지. 괜히 호들갑 떨지 않고 얌전히 그 속에서 꺼낸 사진을 보았다. 조금 더 자란 영 사감과 한 여자아이. 더 가까이 오란 듯 팔을 당기는 모습에서 제가 하 사감 대할 때 생각이 나 살짝 모호한 표정을 지었다. 왠지 얼굴이 근질거린달까. 그런 기분이라.
사진을 보며 영 사감의 얘기 듣다가 다른 곳으로 가는 기척에 고개 돌려 시선으로 영 사감 쫓았다. 벽난로의 솥으로 간 영 사감이 마저 한 말은 그다지 좋지 못 한 첫사랑의 마무리였다. 허나 확인조차 못 해 본 감정이니 첫사랑인지는 모른다. 그래도 아마. 전쟁도 없고 형벌도 없었다면 이 둘은 다음 사진을 찍을 수 있었을 것이다. 친구로든. 연인으로든. 조용히 조심히 사진 내려놓으며 명랑하게 떠들었다.
"뵈는 것과 다르게 풋풋하셨구만. 그래. 이런 것 있으니 궁금하다 얘기해달라 조르지요. 음. 찔러보길 잘 했네."
가라앉은 목소리가 짤막하게 중얼거린 말은 구태여 사족 달지 않았다. 두 세상이 비슷하고 아니고를 생각할 수 있는 건 영 사감 뿐이니. 듣고 그런가 보다- 할 뿐이다. 결국 여기도 저기도 같은 창제신의 손바닥 위이니. 다른 것 같아도 어쩔 수 없이 비슷하겠지. 달리 말하자면 어딜 가나 다 사람 사는 세상이기도 하고.
솥을 휘젓던 영 사감은 그 안에 든 약을 병에 나눠 담았다. 그 중 하나를 제 앞에 두며 가져가라길래 군말 없이 집어들었다. 약효는 이미 써봐서 알고 있으니까. 그러다 혀 차는 소리에 키득. 웃어버렸지만.
"거 참.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고 고생도 많소. 리 사감마냥 퀭해지지 말고 몸 좀 잘 챙기시구려. 죽지 않는다고 아프지 않은 것 아니고 피로하지 않은 것도 아니잖소. 내 본의 아니게 그 고생에 한 술 얹는 기분이라. 눈밑 꺼먼 것 보면 괜히 죄송스러워진단 말이오."
주절주절. 그런 얘기 하며 약병 챙겨 주머니에 넣다가. 잠시 머뭇거렸다. 할 말 있는데 쉬이 하지 못 하고 말 고르듯. 제 뺨 긁적이기도 하며 흠- 작게 소리 내다가 별 것 아닌 듯 툭 하니 말한다.
"사감 덕을 이것저것 많이 받기만 하니 이리 말 하기 좀 민망하지만은. 내 부탁 하나 있는데 듣기라도 해주실 수 있소?"
"아이고. 그런 부탁은 내 혼날 것이 뻔한데 하겠소? 뭐- 그이한테도 그렇고 다른 사감들한테 못 할 부탁이긴 하지. 신수한테는."
능청스레 받아치며 흐흐. 웃긴 했지만 속으로는 조금 더 고민하고 있었다. 선뜻 말해보라 한 것은 고마우나 제가 이 부탁을 해도 되는 것인가 싶었다. 과한 참견이거나 혹은 괜한 짐을 지우는 것은 아닌가 싶었다. 그리 생각하면 이제라도 말을 무를까 싶다가도. 말이나 해보자는 생각 불쑥 솟아든다. 어차피 제가 할 수 있는 것은 한계 있으니 뭐라도 해서 나쁠게 있겠냐. 그래도 역시 쉽게 말 꺼낼 수 없어 서론만 슬그머니 더 늘어놓는다.
"그- 요전에 들었는데. 무 오라비. 그러니까 적룡에 무 아회라는 학생한테 뭔가 해주었다지요? 귀걸이를 만지면 학당에 곧장 돌아올 수 있게 된다 하던가. 사감하고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지만은. 무 오라비가 남이 주는 것을 선선히 받을 사람이 아니라는 건 내 잘 알기에. 그렇기에 영 사감께 하는 부탁인데."
으음. 서론 늘여도 본론 꺼내기 어려운 것은 매한가지라. 미간 잠시 찡그린다. 앓는 소리도 작게 내었다가 에휴. 한숨 짧게 내쉬었다. 그러고서야 말했다.
"사감께서 담당도 아니고 무 오라비가 직접 말 한 것도 아니나. 그럼에도 내 속에 걸려 부탁 한 가지 올립시다. 무 아회. 그 학생이 졸업할 적까지만 가까이 지내주실 수 있겠습니까. 굳이 찾아가고 그렇게까지는 바라지 않을 테니. 학당 내에 보이거든 말 붙여주고. 이전 날처럼 계기가 있거든 같이 있어주거나. 그런 정도면 되오. 그저 조금 눈여겨보다가 손이 필요하다 싶으면 영 사감께서 빌려주시고 그러기만 하면은."
생각이 덜 정리된 듯 자꾸 늘어지려는 말 스스로 멈춰 잘랐다. 설명이 필요하다면 하겠지만 일단 부탁할 것은 꺼냈으니. 잠시 입 꾹 다물었다가 조심스레 덧붙였다.
"이러한 부탁. 드려도 되올는지요. 영 사감님."
표정 관리하느라 대신 손에 힘 꾹 들어갔다. 저 모르게 자란 손톱이 살 파고들어 아릿했다.
담당인 황룡도 아닌 기숙사의 학생을 도와달라는 부탁. 솔직히 제 욕심이고 이기적인 마음이다. 영 사감은 흔쾌히 그러겠다고 해주었지만 아회는 어떨까. 괜한 참견이라며 혀 차는 것으로 끝나면 약과려나. 그렇지만 아무리 신경 안 쓰려 해도 그 날- 술김에 내비친 그 편린이 마음 쓰였다. 날카로운 검날보다 위험하고 무서운 그것. 언젠가 그것이 아회 끌고 갈까 봐 무섭다. 끌려가는 것에 아회가 저항하지 않을 것이 무서운 것이다. 그래보였으니까. 그 날 그 아회는.
"...나는. 나야 뭐 주변에 곧잘 기대니까는 괜찮으이. 내 신경 쓸 여력까지 무 오라비 주시게. 그래주시면야 내 감사하지."
저는 됐으니 남이나 신경 써 달라는 건 역시 어린애의 억지 같을까. 그래도 마음 만은 진심이니 부디 참고해 주었으면 한다. 그동안 마음 한 켠에 눌리던 것 가벼워져 편히 숨 내쉬곤. 신나게 돌아다니는 털뭉치를 저도 보았다. 키울거냐고 물으면 당연히-
"키워야지요! 요괴도 짐승도 아닌 것이 복슬복슬해뵈니 무 오라비네 털뭉치 같구만."
목화라 했던가. 고녀석처럼 지능이 있어보이진 않지만 그래도 귀여우니 좋다. 저 먹으라고 내어줬던 떡 한 조각 집어 손에 들고서 퍼프스캔 향해 이리온 우쭈쭈쭈- 를 시도해본다. 순순히 오면 폭 안아서 떡조각을 먹여주었겠지만. 곧장 오지 않는 잔망을 부렸다면 직접 잡으러 가는 소란을 살짝 피웠겠지.